♣한성진목사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요10:11-16)

공 상희 2010. 9. 10. 17:06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요10:11-16)

(설교 요약)

선한 목자에 쓰인 ‘칼로스’라는 용어는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선한 것을 뜻한다.
이 용어에서 우리 영육 간을 돌보시는 주님을 느끼게 한다.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이신 것은 삯꾼과는 다른 목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책임감에서 삯꾼과 크게 다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양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주셨기 때문이다.
실재로 목자의 직업은 추위와 더위 맹수 등
목숨 걸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는 직업이다.
그리고 양을 알고 양들도 그를 알기 때문이다.
그만큼 주님은 우리 개개인을 하나씩 깊이 사랑하신다.


(강해)

이 시간에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라는 제목입니다. 우리는 목자 그러면 목자가 무엇인지 피부에 잘 와 닿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목자는 가장 친숙한 직업입니다. 그들은 목자가 어떤 일을 하며 목자가 얼마나 양들에게 필요하고 은혜로운 존재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모세와 다윗 등 많은 사람이 목자였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왕을 목자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특별히 구약에서는 하나님과 자기 백성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목자와 양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후기에는 메시야에게 목자라는 칭호를 적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목자 중에서도 선한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선한 목자”의 헬라어 원문의 뜻은 “그 목자, 그 선한 자”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쓰인 헬라어 ‘칼로스’(kalos)는 외형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아름다운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외형적으로나 내면적으로나 착한목자 즉 우리의 영육 간에 돌보시는 좋은목자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과연 무엇을 보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선한 목자이실까요?

1. 예수님은 삯꾼과는 다른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12-13절에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 한다”고 하셨습니다.

요즘에도 호주나 뉴질랜드 등의 나라는 양들을 많이 기릅니다. 목장의 양을 보면 한가롭고 그 모습은 목가적입니다. 그러나 목자에게는 한가롭고 낭만적인 놀이가 아닙니다. 목자들은 양이 길을 잃지 않게 몰고 다녀야 합니다. 양의 시력은 퇴화하여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길을 잃기 쉽기 때문에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양은 힘이나 지혜나 아무런 무기도 없는 동물이 양입니다. 그러므로 밤낮으로 비와 바람에서 보호하고 목숨을 바쳐 사자와 이리에게서 지켜야 합니다. 성경에도 나와 있듯이 목자가 한번 집을 떠나면 여러 날, 여러 달 동안 음식을 준비하여 양과 함께 생활합니다. 이런 모든 일이 양을 위한 선한 목자의 자세입니다.

그러나 삯군은 그런 목자가 아닙니다. 삯군은 잠시 고용된 자이기 때문에 위험한 일을 만나면 양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양의 안위나 평안, 배부름 등은 관심이 없습니다. 양이 먹든 말든, 양이 자든 말든, 양이 목마르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자신의 평안만 생각하는 것이 삯군입니다. 그러니까 선한 목자와 삯꾼의 차이는 관심의 차이요 사랑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삯꾼은 많으냐 적으냐 물량만 따지지 한 마리에 관심이 없습니다. 삯꾼은 자기가 받을 삯만이 가장 큰 관심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런 삯꾼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선한 목자로서 양을 위해 최선을 다 합니다. 시편 23편에 기록된 대로 주님은 양을 잘 먹이고 쉬게 하고 늘 좋은 곳으로 옮겨주며 모든 위험에서 보호하고 구출하십니다. 요한복음 10장의 선한 목자의 모습도 그렇습니다. 친밀하게 양을 알며 양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냅니다. 풍성한 꼴을 준비하여 양이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게 합니다. 그리고 온갖 맹수의 위험 앞에 자기 살이 찢기고 피가 흐르도록 양들을 보호합니다. 이것을 못하면 양들은 모두 맹수의 밥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이 선한목자이심은 양들을 위해 목숨도 주셨기 때문입니다.

11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5절에도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선한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다는 것 이것이 가장 큰 차이입니다. 여기 ‘버리다’라는 말의 헬라어 ‘티데미’는 고전어에서는 지불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자기 생명을 버려 인류의 죄의 값을 지불하신 그리스도의 속죄의 죽음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서 목숨까지 버리신 주님이시기에 선한목자이십니다. 반면에 삯군은 위험이 오면 양을 지키기는커녕 도망치고 심지어 자기의 영화를 위하여 양의 것을 도적질하고 목숨을 빼앗기도 합니다.

현재 한국이나 세계의 성도들이 가장 좋아하는 찬송이 405장이랍니다. 이 찬송은 교회에서뿐 아니라 대중음악 차트 순위에 오를 만큼 불신자들까지 좋아하는 찬송입니다. 특히 911테러 이후 미국인들이 가장 잘 부르는 찬송이기도 합니다. 이 찬송에는 곡조도 좋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우리를 향한 목숨을 버린 사랑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저 유명한 남아프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 대통령을 아시죠? 그는 백인 정권의 희생물이 되어 27년간 감옥 생활을 한 사람입니다. 그는 대통령 취임식에 자신을 감옥에서 지키던 간수를 연단에 초청하였습니다. 그리고 취임하자 데스몬드 투투 주교를 ‘진리와 화해 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이 위원회는 복수의 악순환을 방지하려는 것으로 이 위원회는 2년간 청문회를 열고 백인 경찰이나 군인이 자발적으로 고소자들 앞에서 자신의 범행을 털어놓고 자기 범죄를 인정하면 재판도 처벌도 받지 않게 하였습니다.

그 때 청문회에 반 드 브렉이란 백인 전직 경찰관이 나와서 자기 죄를 시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18살의 소년을 총으로 쏘고 증거를 없애기 위하여 시체를 불태웠고 그는 그것도 모자라 그 소년의 아버지를 체포하여 그 아내가 보는 앞에서 남편을 산체로 장작더미 위에 묶어 놓고 불을 질렀다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자백이 나오자 이제는 죽은 아이와 남편 되는 부인에게 말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반 드 브렉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그러자 노부인은 “반 드 브렉씨는 제 가족을 모두 데려 갔습니다. 그러나 제겐 아직도 그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달에 두 번 그가 우리 집에 와서 하루 동안 시간을 보냈으면 합니다. 제가 엄마 노릇을 할 수 있도록 말이죠.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와 나도 그를 용서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나는 내가 정말 용서했다는 걸 그가 알 수 있도록 그를 안아 주고 싶습니다.” 이 말을 마친 노부인이 증인석으로 걸어가는 동안 법정 안의 누군가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노부인의 이 사랑은 다름 아닌 우리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신 우리의 선한목자이신 예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위해 자기 생명을 다 바치셨기에 예수님은 참으로 선하신 목자이십니다.

3. 그가 선한 목자이신 것은 양을 알고 양도 그를 알기 때문입니다.

14-15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했습니다.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낸다고 합니다. 얼마나 그 이름을 불러주고 사랑하면 동물인 양들이 자기 이름을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목자가 양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양의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을 뜻합니다(출33:12, 17). 양의 개성도 알고 약한 부분도 알고 필요도 압니다. 시139:1-4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오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사람은 함께 부부로서 오래 살아도 다 늙도록 서로 모르니까 다툽니다. 요즘은 성형수술을 많이 해서 누가 누군 줄 잘 모른답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당에서 하나님께서 천당의 명부를 다시 작성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성형수술을 많이 해서 하나님도 혼돈이 되서 누가 누군지 구분이 안돼서 그렇대요. 물론 성형이 많다는 것을 빗대어 하는 유머이지 우리 하나님이 사람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잘 아셔서 어떤 때는 생각만 해도 그것을 이루어 주셔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표현하십니다. 생각만 해도 그 생각을 아시고 이루어 주시는 목자가 우리 주님 말고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진젠돌프는 “더 만족스럽고 오래 가는 것은 지식적 앎이 아니라 관계적 앎이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관계적 삶으로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예수 믿다가 다른 이리가 내가 예수다 하면 그 말에 홀짝 반해서 거기 따라가 버립니다. 최근에 살인교사 혐의로 실형을 받고 옥살이하던 영생교 조희성 교주가 옥중에서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조 교주는 자기가 예수님보다 더 높은 사람이고 예수는 배척 받아 마땅하다고 예수님을 원수 보듯 욕했습니다. 아니 우리를 사랑하시고 위해서 죽으신 예수님이 왜 원수입니까? 또 그 말에 왜들 따라갑니까? 요즘에는 이단들이 다 그렇듯 2008년에 조희성 교주가 다시 올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악한 이리에게 더 이상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님만이 참되시고 선하신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삯군이 아니십니다. 예수님만이 목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양들을 진실로 아십니다. 지금도 우리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품을 멀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더욱 잘 자라 하나님의 기쁨이요 가장 행복한 양떼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