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진목사

만물을 밝히 보라

공 상희 2010. 9. 10. 16:38

만물을 밝히 보라
막8:22-26
주요내용:신령한 눈

이 세상에서 육신적으로 가장 불쌍한 사람이 있다면 어떤 사람일까요? 저는 그 사람을 소경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지 못할 때 얼마나 불편하고 답답하겠습니까? 그러나 더 불쌍한 사람은 바로 영적인 소경입니다. 그것은 이 영적 소경은 진리를 깨닫지 못해 어둠 속에 방황하다 영원한 멸망에 빠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영적으로 얼마나 눈을 열리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읽은 말씀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벳세다에서 육신의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신 내용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영의 눈을 뜨는 귀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의 눈을 뜨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사항을 알아야 합니다.
1. 영의 눈이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23절에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그랬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예수님의 이해할 수 없는 몇 가지의 행동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이적들과는 달리 소경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셨는가 하면, 눈에 침을 뱉으시고, 또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는 등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이적을 통하여 무언가 귀한 진리를 보여 주시고자 하심입니다. 그 진리는 먼저 영적인 눈이란 무엇인가를 보여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즉 소경을 세속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것처럼 영의 눈은 인간이 표준이 되는 세속적인 관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며 수학적이고 미술적인 모든 것들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육신의 눈일 뿐입니다.

그러나 영의 눈은 다릅니다. 영의 눈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눈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 눈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55:8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셨습니다. 이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이해해야합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내가 현명하게 살아왔으니까 절반은 맞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한다면 중대한 착각입니다. 마치 부자와 나사로를 보는 사람과 하나님의 관점의 차이와 같습니다.

2. 자신의 잘못된 눈을 시인해야 합니다.

23절에 "눈에 침을 밷으시며"라고 했습니다.
계속적으로 이상한 주님의 행동입니다. 눈에다 침을 밷았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는 이렇게 신유를 행하라고 하신 적은 없습니다. 소경은 보지 못했지만 침 밷는 소리는 들었을 줄 믿습니다. 구약에 얼굴에 침을 밷는 일은 커다란 수치와 부정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얼굴에 침을 받는 자는 최소한 칠 일간 성밖으로 쫓아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에 침을 밷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눈은 바로 보지 못하는 잘못되고 부정한 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육신의 눈이 아무리 밝아도 또 지식의 눈이 밝아도 인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부정할 뿐입니다. 이 자기 눈에 침을 밷는 진정한 정죄가 있어야 신령한 눈을 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조 아담과 하와의 눈에 선악과가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웠습니다. 그 결과 먹으면 죽으리라는 계율을 어기고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눈입니다. 또 타락한 소돔성이 롯의 눈에는 에덴동산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불 심판의 위기를 당했습니다. 이것은 잘못 되도 크게 잘못된 눈입니다. 아주 큰일날 눈입니다.

역시 유대인들의 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요셉의 아들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가장 많이 배웠다는 바울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육신의 사람으로 밖에 알지 못했기에 한 동한 박해를 했습니다. 그 바울이 고전3:18에서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 한 이 말씀은 알고 보면 자기의 간증이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정탐군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고 자신들은 심히 작고 적들은 심히 크고 강대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결과 광야에서 방황하다 죽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런 잘못되고 부정한 눈인데 어찌 그 눈에 침 밷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까지 이 잘못된 눈 때문에 넘어졌고 실패했고 멸망할 뻔했었습니다.

주님께서 침을 밷으셨다면 우리는 자신의 눈에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침을 밷어야 합니다. 그 동안 내가 옳았고 현명하다고 판단하며 살았던 모든 기준들이 잘못되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영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여름밤에 날벌레들이 불가로 날아와서 타져 죽습니다. 그들은 불이 뜨겁다는 것은 알지 못하고 그 불이 아름답다고 달려들다가 죽습니다. 우리 소경된 인생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 눈을 뜨지 못하면 멸망의 구덩이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3. 영의 소경이 눈을 뜨려면 두 단계가 있습니다.
먼저,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소경을 안수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두 번 안수하셨는데 왜 두 번 하셨을까요? 그것은 능력이 부족하여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영의 눈을 위해서는 두 단계가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먼저는 성경을 통해서 지식의 눈이 열립니다. 시18:8에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닫힌 눈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지식이 바꾸어지면 세상의 만사와 만물이 다르게 보여지기 시작합니다. 성경으로 보면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로, 인간이 죄인으로, 예수님이 구세주로 보이며, 만물이 창조물로, 성도들이 영의 형제들로 보이고, 내세가 아직 희미하긴 하지만 아름답게 보여지며, 사람들이 절대적인 가치로 여기던 것들이 상대적임을 발견하게 되며, 내가 옳다고 행했던 것도 그렇지 않았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보아야 영안이 열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혼적인 지식만을 바꾸는 것이기에 온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온전해지려면 성령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여기 주님께서 또 다시 안수하신 이유가 그것입니다. 안수의 의미 중에는 하나되는 연합의 의미가 있습니다. 굳이 해석하자면 처음은 그리스도이신 말씀과의 연합이라면, 이번에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과의 연합입니다. 성경 지식의 눈만으로는 사람이 나무처럼 보이듯 성경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렇게 보는 그런 식으로 아직 희미합니다. 이제는 내 영안으로 그렇게 보여야 합니다. 요16:13에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하셨습니다. 이는 성령 받아 이제는 혼의 지식이 아닌 영의 실재로 보는 눈을 의미합니다.

마치 욥이 전에는 내가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내가 주를 눈으로 뵈옵나이다 했던 고백과 같습니다. 또 구약과 신약의 계시의 차이점과 같습니다. 구약의 계시는 지식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계시는 직접 체험합니다. 이 두 계시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요일1:1-2의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나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와 같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과 유기적인 동일체가 되어 주님이 귀하게 여기시는 것을 우리도 귀히 여기고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우리도 싫어하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우리도 원하고 주님과 우리와 모든 의견이 같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심장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은혜를 받을 때만이 가능합니다.

우리 주님 얼마나 신령하신 분이셨습니까? 요2:24에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 했습니다. 이 주님과 하나 되시기를 바랍니다.
엘리사가 아람군대의 포위를 받았을 때 신령한 눈이 없는 사환은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의 눈이 열렸을 때 도단성은 여호와의 군대로 가득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눈을 열어 주시면 남이 보지 못하던 것들이 보입니다. 이번 동부시찰 제직부흥회에 오신 강사께서는 주님께서 신령한 눈을 열어 주셔서 수 십 억원의 선교기금을 만들고 선교를 위해서 삼 사 만평의 땅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눈이 열려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봐야 성공하는 것입니다. 신령한 눈이 열리면 성경도 보입니다. 그래서 시119:18와 같이 "내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신령한 눈이 열리면 성경 속의 이야기가 평범한 이야기가 아니라 귀한 복음임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성경에서 신령한 사람을 들라하면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백부장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았고 예수님을 알았고 성경을 알았고 인간을 알았고 사회를 알았고 문화를 알았고 역사를 알았습니다. 눈이 열린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이 눈이 감겼기에 예수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인지, 내가 설자리가 어디인지,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뛰어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적으로 장성하기 위해서 꼭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이 죄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장성하기까지 얼마나 버려야 할 것들이 많은지 첩첩 산중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성경과 성령의 은사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광야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듣거나 보아야 하고 날마다 성령의 은사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마지막, 눈이 열린 이 사람은 말씀을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26절에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가라사대 마을에도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 평범한 내용이지만 눈을 뜬 소경인지라 이제는 혼자서 찾아다닐 수 있었고 정확하게 자기의 집을 찾을 수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눈이 열려야 이렇게 바로 행할 수 있습니다. 눈이 열려야 하늘 집 주의 보좌 앞에 정확히 이를 수 있습니다. 잠16:25에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는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했고, 시43:3에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했습니다. 여기 빛은 성령의 조명이요 진리는 성경입니다. 눈이 보배입니다. 신령한 삶은 신령한 눈의 척도에 따라 결정됩니다.

<결론>
여러분, 신령한 눈이 열려지기를 바랍니다. 신령한 눈이 열려져야 삽니다. 이 눈이 열려져야 바로 믿을 수 있습니다. 이 눈이 열려져야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 눈이 열려져야 속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리 따라가지 않고 주님만 따라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어두운 눈을 고쳐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무엇보다 내가 소경임을 시인합시다. 그리고 잘못된 눈 때문에 실패의 삶을 살았다고 자기 눈에 침을 뱉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십시다. 그럴 때 주께서 우리의 영안을 밝히 열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