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진목사
마음에 합한 사람
공 상희
2010. 9. 10. 12:46
마음에 합한 사람 행13:20-23 주요내용:주의 맘에 드는 비결 제가 가장 중요한 이 시간에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마음에 합한 사람만 되면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뿐 아니라 다윗과 같이 하나님께서 가장 크고 아름답게 복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본문 22절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여러분 성경 속에 놀라운 인생의 성공비결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증거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만 되어 보세요. 하나님께서 가만 놔두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합한 다윗을 성공의 최고의 상징인 왕 그것도 왕 중의 왕이 되게 하시고 또 영원한 성공의 상징인 메시야의 줄기가 되게 하셨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이력서는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다윗의 인간의 이력서는 정말 보잘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베들레헴 촌사람, 이새의 가장 못난 막내 아들, 양치는 천한 목동이었습니다. 그에게 형들이 일곱이 있었는데 외모도 형들보다 못했습니다. 사무엘이 왕을 세우려고 찾아왔을 때 그는 가족에게서도 열외되어 양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를 높이고 높여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했을까요? 혹시 어려운 일이라면 우리는 좀 곤란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염려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된 것은 다름 아니라 그에게는 좋은 습관이 한 가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하든지 매사에 여호와께 물었다는 사실입니다. 삼상23:1-14을 보면 다윗이 여호와께 묻는 기록이 나옵니다. 거기 14절밖에 안되지만 무려 다섯 번이나 묻고 있습니다. 다윗의 삶은 언제나 여호와께 묻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버림받은 사람 사울왕을 보십시오. 사울은 초기에는 여호와께 물었지만, 차츰 교만하여 여호와께 묻지 않았고, 주신 말씀마저 무시해 버렸으며, 나중에는 더 변질되어서 점장이에게까지 묻는 잘못을 범합니다. 그가 버림을 당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대상10:14에 분명히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 했습니다. 사무엘도 사울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버렸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렇게 여호와께 묻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이 묻느냐 안 묻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렇게 귀중한 것이라면 못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무엇이 어렵습니까? 만약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다면 그것은 큰 비극입니다. 엘리가 버림을 받은 것도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희귀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에게는 흔한 것이었어도 그에게는 희귀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여호와께 묻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들 사건을 보더라도 그는 여호와의 말씀을 존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이 희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가봇 즉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나는 비극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 하나님의 지도와 인도를 받고 사십니까? 아니면 희귀합니까? 물론 객관적인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지도하는 주관적인 말씀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훌륭한 다윗도 말년에 실수를 범합니다. 그가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인구조사를 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중대한 실수였습니다. 인구조사가 잘못이 아니라 묻지 않음이 실수였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민족적으로 고통을 받았습니까? 그럼, 여호와께 물음이 왜 그렇게 중요할까요? 1. 하나님을 가장 아름답게 공경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삼상15:22에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하나님 공경에 얼마나 중요한 것임을 알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어른을 모시고 사는 분들 어른 공경하는 방법을 가르쳐 드릴께요. 모든 것을 늘 여쭈십시오. 그리고 늘 되어진 일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것만큼 큰 공경과 효도는 없을 것입니다. 최고의 공경은 늘 물어서 하는 것입니다. 잘 알아도 물으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잘 들어주십시오. 노인들은 인생의 황혼기에 소외감에 젖어 늘 실망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물으면 자기를 인정해 주니까 살아있는 가치를 느낍니다. 아 나는 아직 죽지 않았구나 살아있구나 안심하며 기뻐합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알아서 해라 하면서도 속으로는 기뻐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중요한 원리가 언제나 하나님께 여쭙는 것입니다. 응답이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묻는 우리의 자세 자체가 중요합니다. 이 자세가 하나님을 우리의 주로 섬기는 자세요 공경하는 자세입니다. 2. 여호와께 물음으로 나의 자아가 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마26:39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뜻을 버리고 주의 뜻대로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뜻을 물음은 곧 자아를 부인함을 의미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일은 자아를 처리하는 일입니다. 내 뜻, 내 생각, 내 계획, 내 개성, 내 고집, 내 자존심, 내 성격, 내 의, 내 방법 이런 것이 자아입니다. 이것을 깨뜨리지 않은 한 성장하지 못하고,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고, 은혜받지 못하며, 하나님의 연단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입으로만 주여 주여지 삶으로는 나여 나여 하고 있습니다. 이래서는 현실천국에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아를 죽이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이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요, 마음의 천국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길입니다. 다른 길이 있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렇게 중요한 것이 자아 처리입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정복하지 않고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처럼 자아는 반드시 정복되어야 할 최대의 신앙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자아를 정복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려면 자아의 상징인 여리고성 정복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여호와가 중심이 된 이스라엘의 군대들이 날마다 빙빙 돌며 시위하고 포위하고 지배하고 쳐부술 때 무너졌지 않습니까? 이 때 인간의 소리는 들레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즉 자아 정복은 인간의 생각은 버리고 우리에게 하나님 중심신앙이 완전히 지배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보고 언제나 하나님께 여쭈어야 합니다. 여쭙는 것 자체가 하나님 중심신앙을 형성시킵니다. 그래서 묻는 것이 자아 파괴의 최고의 지름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대개의 삶이 하나님 중심이 되지 못합니다. 그리고 매사에 주님 중심으로 산다는 것이나 주님께 묻는 습관은 아주 익숙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인데 내 것인줄 알고 살고, 모든 결정은 결정은 다 내가 하고 문제가 생기면 주님을 원망합니다. 그런데 언제나 매사에 주님께 여쭙는 습관을 가지게 되면 좋은 것은 그 골치 거리인 자아가 파괴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주님 중심으로 되어집니다. 이것은 놀라운 체험입니다. 여러분도 모두 이 체험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 여호와께 묻는 자세 그 자체가 중요합니다. 3. 묻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심이 가장 현명하기 때문입니다. 고전1:25에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한 수 가르쳐 주시면 사람이 가르친 백 수보다 더 유익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베드로의 그물에 고기가 가득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 묻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께 묻지 않는 이유가 많습니다. 몰라서 묻지 않았다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물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할 것 같아서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은 묻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사람들이 묻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사소한 것을 물어야 되겠느냐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거대한 제목은 생각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거대한 일보다 오히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와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 이럴 때는 어떻게 하지요? 자녀교육은 어떻게 하지요? 몸이 아픈데 제가 무엇을 잘못했나요? 등등 생활 속의 주제이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친 아버지이신데 묻는 것이 뭐가 우습고 뭐가 어색하고 뭐가 쑥스럽습니까? 그 동안 잘못한 것 회개합시다. 우리가 너무 하나님을 무시하지는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무엇이든지 '하나님 어떻게 하지요?' 하고 늘 여쭈십시오. 그러면 이상하게 알아지는 현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서 뇌성 벽력 같은 소리는 없으나 이상하게 알아집니다. 참 신기합니다. 저도 그래서 늘 묻습니다. 그러면 신기하게 알아집니다. 왜 알아지겠습니까? 그리고 대단히 유익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묻는 것이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늘 물으면 우리가 얻는 유익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감동으로 다가오지만 나중에는 우리의 영혼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옴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잠3:6에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지 않는다면 왜 이런 약속을 하셨을까요? 그래서 모세도 아브라함도 베드로도 바울도 대화했습니다. 기도란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기도가 무엇인지부터 아십시다. 일방적으로 내 말만 하고 끝내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신년 첫 시간 이 말씀과 아울러 여러분께 한 가지만 실습을 드립니다. 이 시간부터 일년 동안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 월정헌금과 주정헌금입니다. 올해도 주정헌금을 작정하시는데 올해는 반드시 하나님께 여쭈어서 작정하십시오. 먼저 하나님께 얼마나 드릴까요 물으시고 마음에 감동이 되는대로 작정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며칠 동안 여러 번 기도하고 먼저 하나님의 감동을 받으십시오. 이 감동하심은 초보자들도 받을 수 있습니다. 반드시 감동되는 대로하십시오. 주님께서 반드시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동대로만 순종한다면 올 한 해 그것으로 인해 크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신 여러분! 하나님께 묻는 것이 이렇게 엄청난 성공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면 못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올해는 묻는 한 해로 만드십시다. 그래서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사랑 받고 복 받는 아름다운 한 해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