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경 자 료

요한복음강해

공 상희 2010. 8. 18. 07:01

<요1:1-4>

 

오늘 새벽시간 부터는 요한복음서를 강해하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바라기는 오늘 1:1부터 시작해서 마지막장 마지막 절을 마칠 때까지 한 시간도 빠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 시간에는 요한복음서의 서론 부분을 말씀드리려고 한다.

 

1. 요한복음서의 기록자 :- 요한복음서에는 기록자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어있지는 않고 다만 그를 가리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21:20, 23, 24)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한 그가 베드로와 친밀한 동료임을 암시하고 있다. 기록 연대와 동기, 성령의 영감 등을 고려할 때 21:2의 말씀을 들어서 요한으로 보고 있다.

 

2. 기록 연대와 장소 :- 전통에 따르면 사도 요한은 그의 노년을 에베소에서 보냈다고 한다. 그곳에서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며 교육과 저작활동을 수행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도미티안 황제의 통치하에서 사도 요한이 밧모 섬에 유배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음이 확실하다. 따라서 요한복음서의 기록 연대는 공관복음이 기록된 후부터 에베소에서 밧모섬으로 유배되기 전까지인 A.D 80년에서 90년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

 

3. 기록목적 :-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은 20:30-31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요한복음을 읽는 자들로 하여금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은 20:30-31, 21:25에서 기록하기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료들 중에서 일부를 선택하여 기록했다고 밝히고 있다. ** 그는 1) 예수님의 참된 인성(1:14)을 부인하던 가현설을 논박하고, 2) 약속된 메시아를 거절함으로써 또 다른 죄악을 저지른 유대교의 제도적인 모순을 밝히기 위한 목적도 가지고 있다.

 

4. 요한복음서는 4복음서 중에서 가장 간단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심오한 책이다.

요한복음을 읽으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독생자에 대한 심오한 것들을 묵상할 수 있도록, 마치 고요한 예배당 안에 들어선 것과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요한복음을 통하여 “나는 ...이다” 라는 선언이 반복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즉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요8:12, 9:5),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6:35), “나는 양의 문이라”(10:7),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11:25), “내사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14:6), “내가 참 포도나무”(15:1)라고 하셨다.

또한 요한복음서는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님의 강림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유일한 복음서이다. 다락방에서 이루어진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님이 오실 것을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모든 가르침 가운데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에 이러한 성령님의 사역이 시작될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신 영원한 로고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러한 의미에서 성령님의 복음인 것이다.

 

* 우리가 요한복음서를 통해 말씀을 받을 때 관심을 가져야할 것은 “나는....이다”라는 말씀, 즉 [나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누구이신가?]를 확실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요1:1-4>

 

본문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1-2절) 나아가서 요한은 말씀이신 하나님 안에 생명과 빛이 있었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것은 말씀이신 하나님의 본질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말씀이신 하나님은 피조물에게 있어서 본질적으로 생명이며 빛이시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에게 본질적으로 생명이시며 빛이 되신다는 말씀이다.

 

1. 예수님은 생명이시다.(4절“.. . . ”)

“그 안에 생명이 있으니” 그 안에 라는 것은 말씀이신 하나님 안에 라는 뜻이다. 즉 말씀이신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다는 것이다.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이란 말씀의 본질을 말하는데 생명은 말씀의 근원이며 원리이다. 말씀의 본질이 생명이기 때문에 그것은 영원한 것이며 또한 말씀의 원리가 생명이기 때문에 그것은 창조의 원인이자 통치의 능력인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있어야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있어야 하나님의 능력 있는 통치를 받으며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말씀이 우리의 입술에서 떠나지 않도록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며 살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말씀”안에 있는 생명은 모든 피조물 속에 주어졌다. 진리로 주어지고 사랑으로 주어지며 은혜로 주어졌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다. 롬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그러므로 피조물에게 주어진 생명은 생존의 활력으로 작용하고 생성과 성장과 결실의 활력으로 작용하는 동력이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이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시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 참 생명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의 생명이며 존재하는 원리인 것이다.

 

2.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의 빛이시다.

생명이 피조물의 본질이라면 빛은 그 사역을 말한다.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이신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생명을 부여하셨다. 그러므로 사람이 생명력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이 그 사람 안에 계셔야 한다.(그래서 “너희가 내 인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그 사람은 열매를 많이 맺나니..”라고 하심)

2) 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는 빛으로 나타나셨다. 인간이 범죄 함으로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4절“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하셨다. 그러므로 인생을 바로 살기 위해서는 그 사람 안에 예수님이 계셔야 하며 그분과 동행해야 한다. 그분이 안 계시고, 그분과 동행하지 않으면 인생은 어둠 속을 헤메일 수 밖에 없다.

 

 

 

 

 

 

 

 

<요1:6-13>

 

본문 말씀은 참 빛이신 생명, 즉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 참 빛을 증거하기 우하여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세례 요한이라는 말씀과 참 빛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은 영접하지 않는 자와 영접하는 자가 생기는데 영접하는 자, 곧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는 말씀이다.

 

1. 세례 요한은 빛을 증거 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다.(6-8“ . . . . ”)

여기서 말하는 요한은 세례 요한을 가리킨다. 사40:3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고 했는데 요한은 빛에 대하여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받았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은 자신을 가리켜 요1:23 가로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고 했다. 요한은 그 출생부터 천사를 통하여 예고된 자이며 모태로부터 성령님의 충만함을 입은 자로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지고 주의 길을 예비하러온 자였다.

* 세례 요한의 사명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요1:7-8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즉 세례 요한의 사명은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함으로써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는 일, 즉 생명의 빛을 소유하게 하는 일을 하는데 있다는 말씀이다.

한 마디로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명과 자기 사명의 목적을 분명히 알았으며 거기에 맞게 행한 사람이었다.

 

2. 참 빛으로 오신 예수님

1) 진리의 빛으로 오심(9-10절“ . . . . ”)

예수 그리스도의 빛은 주님이 증거 하신 빛으로 나타났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복음이라고 하셨으며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셨다.(눅4: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2) 화해의 빛으로 오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기 위한 중보자, 즉 대제사장으로 오셨다.(히9:11-12) 그것은 자신을 십자가 위에서 대속물로 자신을 드리심으로 온전히 이루셨다. 주님의 이러한 사역은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계속되고 있다.

3) 통치자의 빛으로 오심(10절...)

주님은 인간의 세계뿐만 아니라 우주 만물의 통치자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는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주관자시며 심판자시기 때문이다.

** 우리 주님을 영접하는 자에게 끼치는 영향

12-13“ . . . . ”

 

 

 

 

<요1:14-18>

 

본문은 기독교 교리상 가장 심오한 진리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라는 말씀인데 이 진리를 인간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진리이며 신비로운 사건이다. 그러기 때문에 본문에는 그 사건을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했고 거기에는 인간을 구원할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고 말씀하고 있다.

* “독생자”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사용하는 독특한 표현이다.

 

1. 독생자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사명은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고(14절), 아버지를 알리는 것(18절)이다.

예수님은 그 사명을 감당하시기 위해서 말씀자체이신 분이 인간의 육신이 되어 오시는 고난을 감수하셨다.(14절“ . . . . ”) 이 세상의 문화만 서로 달라도 그것을 수용하기가 힘들고 고통스러운데 더욱이 죄가 전혀 없으신 성스럽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문화를 포기하시고 정말 죄악으로 점철 된 이 세상 육신을 입으시고 오신다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정말 위대한 사랑은 나의 문화를 포기하는 것이요, 상대방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인간을 위한 사랑이며,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열정인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했다.

사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죄악으로 인하여 축복을 상실해 버린 인간을 구원하셔서 에덴의 축복을 회복하고자 하시는 영광스런 하나님을 나타내시고 그분의 소원하시는 바를 이루시기 위한 열정으로 채찍을 맞으시고, 십자가에 찔리시며, 그래서 우리 인간이 구원을 받아 평화를 우리게 하신 것이다.

 

2. 독생자이신 예수님.

그런데 요한복음서에서는 특별히 예수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며 그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12절“.........”)

이것은 예수님과 신자들의 신분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본래부터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요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고 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그분의 은혜와 은총을 받는 길도, 그분의 사랑에 깊이 들어갈 수 있는 방법도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하고, 우리 안에 예수님을 통치자, 주권자, 왕으로 모시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3, 모세와 예수님의 차이점.(율법과 복음의 차이점)(17절“ . . . . . ”)

즉 모세는 율법의 수여자이지만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의 수여자이시다. 즉 즉 율법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갈3:23-27)이지만 이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충만한 은혜와 진리 가운데 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예수님 안에서 은혜와 진리의충만한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고후6:2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요1:19-28>

 

오늘 본문에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22절) 라는 질문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던 요한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자신을 그 시대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나 혹은 위대한 선지자가 아니라고 부인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세례 요한은 자기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지를 분명히 아는, 즉 자기 인식이 확고한 사람이었다. 이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꼭 본받아야 할 부분이다.

이웃과 자기 양심이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고 하느냐?]는 질문에 성도로서의 자기 사명에 대한 인식이 확고해야 하겠다.

 

1. 그릇된 자기 확신은 가지지 말아야 한다.

1) 성도는 그릇된 자아의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요한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20절)고 예루살렘에서 파송되어 온 지도자들에게 자기를 분명하게 밝혔다. 긴 고난과 어두움의 역사에 찌들렸던 당시 군중들은 요한을 메시아로 기대했었다.(눅3:15) 그래서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막1:5) 다 요한 앞에 나아가 회개의 길을 자문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 20절 “ . . . . . ” “그러내어”라는 말의 뜻은 ‘반복되어진 완강한 자기 부인’을 뜻한다. 즉 요한은 주변의 기대와 유혹이 있었음에도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 깊이 잠재되어있는 자기가 높아지고자 하는 ‘자기중심적 우월감’에 빠지지 않고 그것을 버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2) 요한은 또한 그릇된 욕망의 유혹에 바지지 않았다.(21절“ . . . . . ”) 자기는 엘리야나 혹은 큰 선지자도 아니라고 자신을 부인했다. 말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했는데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불의한 세상을 심판하시기 전에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였던 엘리야나 에례미야와 같은 이들을 부활시켜 보내실 것을 믿었다. 또한 실재로 요한은 그의 성격과 하는 일도 엘리야처럼 박력있고 예레미야처럼 회개의 직무를 잘 이행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세례 요한은 그와 같은 영광된 칭호마저 거절하고 자신은 아니라고 확실하게 부인했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 그리스도인은 우리 자신에게 부여된 의무와 사명은 인정하고 수행하되 그에 따른 세상의 칭송과 영예의 소리에는 아니라고 확실하게 부정해야만 한다.

 

2.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삶의 위치와 능력을 고백해야 한다.(27절“ . . . . . ”)

요한은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를 늘 의식하면서 군중들에게 그분을 간증했다. 이렇게 우리는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려고 하면 진리 되신 예수님과 자기 자신을 연관시켜 조명해 보아야 한다. 고후10:12 우리가 어떤 자기를 칭찬하는 자로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저희가 자기로서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서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고 했는데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의 척도로 자신의 됨됨이를 가능하려고 하는 사람이다.

오직 인생은 세상의 참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 앞에서만이 자신의 본래적인 모습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거룩하심 앞에 “신들매도 감당치 못하는”존재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거칠은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 살아야 한다.

 

 

 

<요1:29-31>

 

옛날 선지자들은 장차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실 메시야, 즉 오실 메시야를 증거 하였다. 반면에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는 이미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메시야를 증거 해야 한다. 그런데 과거와 현재의 사역을 동시에 하나로 통합하여 감당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본문에 나오는 세례 요한이다. 그는 오실 메시야를 증언하였고, 동시에 오신 메시야를 증거 하였다. 특별히 본문 앞부분에 있는 62-27절의 말씀은 오실 메시야에 대한 증언이고 오늘 읽은 본문은 오신 메시야에 대한 요한의 직접적인 증언이다.

 

1. 예수님을 소개하는 요한.

요한은 먼저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고 소개한다. 즉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듯이 세상 죄를 지고 가며 무덤에서 돌을 옮겨 놓듯이 세상 죄를 옮겨가는 속죄의 제물이라는 의미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 죄 값으로 예수님을 지불하신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우리 편에서 볼 때는 값없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최고의 값인 하나님의 외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지불하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구원받은 가치를 바로 알아야 하며 또한 구원받은 성도로서의 삶을 바로 살아야 한다.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울은 과거에 자신이 그런 예수님을 얼마나 욕되게 하였는가를 깨닫게 되었을 때 자기 자신은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였고 이제 구원받은 후에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했다.

고전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다시 말씀 드려서

1) 구원받은 성도는 자신의 가치를 바로 알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또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2) 우리의 몸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로서의 삶이 되어야 한다.

롬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 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3)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선제성을 고백하였다.(30절“ . . . . ”)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신분이시기 때문이다. 1절“ . . . .”

성도는 항상 예수님을, 앞에, 언제든지 예수님 자신의 앞에 모시고 살아야 한다.

 

 

 

 

<요1:32-34>

 

마11:11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 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그 이유는 당시에 그만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정확하게 증거 하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메시야에 대한 세례 요한의 그런 정확한 증거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에게 계시하신데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33절)

 

1.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은 그가 성령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탄생 자체가 성령님으로 잉태되신 분이다. 그러므로 눅1:35에서 천사 가브리엘은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했던 것이다. 성령님의 의하여 잉태된 사람 즉 이것은 예수님께서 신과 인간의 양성을 겸비하심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서의 첫 출발인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고했는데 하늘로부터 그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음성이 들려 왔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가룩하신 하나님의 “성자”이심을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에게 입증해 주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신 것이다.

 

2. 예수님의 평생은 성령님이 함께하시는 생애였다.

때로는 권세 있는 말씀으로, 때로는 성령님의 권능으로 기사와 이적을 나타내심으로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을 담당하셨다. 행 8:에 보면 간다게 내시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돌아가다가 빌립을 만나 세례를 받기 위해 강에 내려갔는데 주의 영이 빌립을 데려갔다고 했다.

성령님은 곧 예수님의 영이시며 성령님의 사역은 예수님의 것인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이것은 성령님을 따르라는 것이다.

*성령님의 이끄심을 따르고 성령님의 권능을 따르라는 것이다..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받으라는 것이다.

 

 

 

 

 

 

 

 

 

 

 

 

 

 

<요1:35-42>

 

본문은 세례 요한의 소개로 복음서의 저자인 요한과 안드레가 예수님과 처음 만나는 모습이 기록되어있다. 그들은 주님과 대화를 나눈 후 곧 베드로를 주님께 데려왔던 것이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진리를 찾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과 그리고 진리와 만남을 위해서는 몇 가지 필수적인 조건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1. 참된 전도자가 필요하다.(35-36“ . . . . ”)

즉 자기의 위치를 지킬 줄 아는 전도자가 필요한 것이다. 세례 요한의 충실한 사역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가지고 메시야를 맞이할 준비를 하였고 특히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거부했다.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 수고하고 봉사하여 얻는 자기 제자들을 자기의 명예와 함께 참된 진리요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께 이양했던 것이다. 이렇게 교회는 세례 요한과 같은 참된 전도자들이 있어야 한다. 자기로 인해 모아지고 얻어진 사람들을 통해 자신이 득을 보고 이익을 누리려하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님께로 안내해 주는 것으로 자기의 임무를 완수하는 사람, 이 사람이 참된 전도자요 자신의 위치를 바로 아는 사람인 것이다.

전도는 이렇게 세례 d한처럼 믿지 않는 이웃을 먼저 나의 제자로 삼아야 한다. 이 일을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수고와 헌신이 필요하다. 그리고는 그렇게 해서 얻어진 사람들을 궁극적으로는 예수님께로 인도하고 기꺼이 그분의 제자가 되게 해야만 한다. 이것은 세례 요한과 같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할 수 없는 거룩한 일인 것이다. 우리는 비록 메아리처럼 사라진다고 할지라도 이웃의 마음속에 생명의 말씀인 예수님을 전해야 한다. 이렇게 자신의 위치를 지키는 사람이 참된 전도자인 것이다.

 

2. 하나님의 목적을 바로 아는 자가 있어야 한다.(36-37“ . . . .”)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다니심을 보고 경쟁의식을 품은 것이 아니라 출애굽 때 예표 된 구속 사건의 희생양, 즉 조인들을 위해 희생양으로 오신 메시야이신 것으로 보았다. 당시 유대 사회에는 세례 요한보다 탁월하고 현명한 성경학자와 종교지도자도 많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간파한 선견자들은 극소수였다. 요한은 하나님에 의해서 보내심을 받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을 바로 알았던 것이다.

 

3. 구도정신이 있어야

“너희가 무엇을 구하느냐”

 

 

 

 

 

 

 

 

 

<요1:35-42>

안드레와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까지의 상황이 설명되어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뵌 세례 요한은 “또 이튿날”에도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외쳤다. 즉 그는 자신이 알게 된 예수님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에 부지런한 것이다. 그 때에 세례 요한의 말을 들은 두 사람이 따라갔는데 그들이 오늘 본문에 나온 대로 안드레와 요한보음서의 저자 요한이다.(요한은 자기 이름을 특별히 밝히지 않았다.13:23, 20:3)

 

1.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 중요하다.

이렇게 두 사람이 예수님을 쫓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예수님에 대한 세례 요한의 증언을 들었기 때문이다.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고 했는데 내가 만난 예수님,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내 입을 열어 다른 사람들이 듣게 하고, 알게 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2.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께 집중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을 쫓는 두 사람을 돌이켜보시면서 물으셨다.(38-39절“ . . . . . ”)

이와 같은 예수님의 질문은 오늘날의 모든 성도들도 명백하게 대답해야 할 성질의 질문이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지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라고 지적하셨는데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들은 진정한 목적과 소명의식이 결여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오직 우리의 진정한 목적을 예수님께만 집중해야 하는 것이다.

 

3. 주님은 예수님께만 집중하는 자를 초청하신다.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신 예수님의 질문에 두 제자는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라고 겸손히 여쭈었다. 이것은 예수님을 보다 긴밀히 알고자하는 그들의 소원을 말씀드린 것이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와 보라”고 중요한 초청의 말씀을 하셨다. 즉 이 말씀은 [오너라] 라는 말과 [보라]는 말의 합성어인데 그 뜻은 초청과 초청에 대한 구원의 보장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주님께만 집중하고 오는 자들에 대해서 구원을 보장하시는 것이다.

 

4. 구원받은 감격을 전해야 한다.

그 후에 안드레는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억누르지 못해서 이렇게 했다.(40-41절“.....”) d안드레는 ①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았고 ②시몬에게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말한 후에 ③시몬을 예수님께로 인도했다.

이렇게 준미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결코 그 은혜를 독점하고 있으면 안 된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어라(마10:8)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대란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어야 한다. 나누어주지 않는 사람에게서는 [과연 구원받았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요1:43-51>

 

빌립과 나다나엘이 주님의 선택하심을 받는 내용이다. 갈릴리로 가시던 예수님께서 도중에 빌립을 만나시자 “나를 좇으라”고 명하셨는데 빌립은 예수님의 주권적인 명령에 의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1. 예수님은 주권적인 명령자시다.

“나를 좇으라” 하시는 예수님의 명령은 ① 나의 제자가 되어라 는 의미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도 “나를 좇으라” 고 말씀하셨다. 제자란 ‘가르침을 받고, 배우고 그것을 익히는 사람’이다. 이것은 제자의 기본이다. 또한 “나를 좇으라” 는 말씀은 나를 ②나를 본받는 자가 되어라 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요12:26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사도가 된 사도 바울은 고전4:16]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11:1]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 했다.

 

2. 주님의 제자가 된 빌립은 나다나엘을 찾아가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전하였다.(45절)

빌립으로부터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소개받은 나다나엘은 역시 당시의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빌립은 그에 굴하지 않고 “와보라”고 적극적으로 권유했다.

* 세상 사람들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들은 보다 적극적이어야 한다.

예수님은 자기를 찾아온 나다나엘에게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이 그에게 아첨하신 것이 아니라 실재로 나다나엘이 진실한 사람임을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을 들은 나다나엘은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라고 놀라움과 겸손함으로 여쭈었다. 그런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48절” . . . .“) 이렇게 주님은 우리를 아시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아는 것 보다 더욱 자세하게 아신다.

 

* 이에 고백과 함께 주님을 따르는 나다나엘....

 

 

 

 

 

 

 

 

 

 

 

<요2:1~5>

 

본문은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 석상에서 예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기 전에 어머니 마리아와 대화를 나눈 내용이다. 즉 잔치가 벌어진 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는 주님께 포도주를 요청하게 되었고 예수님은 아직 자신의 때가 이르지 못했다고 말씀하셨다.

 

1. 본문은 인생 최고의 기쁨이 무엇인가를 말씀해주고 있다.(1절“ . . . . ”)

결혼은 모든 사람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보배로운 날이다. 신랑과 신부는 혼인이 이루어지는 며칠 동안 마치 왕족처럼 대우를 받으며 기쁨의 시간을 누린다. 바로 그런 일이 이루어지고 있는 잔치 집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제자들이 참석하게 되었다.

“사흘 되던 날에” 라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공적 사역을 시작하신지 삼일 째를 말하는 것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성경에서 삼일이란 [생명과 축복의 날]이라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삼일 째 된 날은 육지가 생기고 황량하던 땅이 식물과 채소로 채워지던 날이다.(창1:9-11) 또한 삼일 째 날은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천년이 하루 같으신 하나님께서 이천년 동안 고난 받던 이스라엘 민족과 재혼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54:)이와 같이 갈릴리 혼인 잔치는 이 땅에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성도들이 장차 생명의 부활의 은총으로 천국 잔치의 즐거움을 향유하게 될 것임을 말씀해주는 내용이다.

* 아무리 대단한 인생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이 없는 인생은 슬픔과 곤고함과 수치뿐이다. 오직 그분을 영접하는 사람만이 승리와 즐거움을 맛보는 권세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2. 본문의 말씀은 참된 인생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해 주고 있다.(3절“.......”)

기독교는 인간의 허무와 위선을 치장된 ‘율법의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기독교는 ‘기쁨과 환희’의 진리이다. 참된 진리는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롬12:15) 할 줄 아는 멋이 있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 인생의 동안에 잔치가 벌어지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 그러나 잔치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빠져있다는 것을 모르면서도 그것을 원한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혼인잔치 집에는 술이 그 집의 즐거움의 요소인 줄로 알았으나 술은 진정한 즐거움의 요소가 되지 못함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술로 그 집의잔치 자리를 즐겁게 하려고 했으나 그것은 바닥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술은 잔치의 즐거움의 근원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술이 떨어진 잔치 집에 흥이 깨어질 수밖에 없는 것 처럼 예수님과 떨어진 인생은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그 바램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가를 어서 빨리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그 집의 처지를 주님께 신속하게 말한 것처럼 기쁨이 깨어져 버린 인생, 행복이 중단 된 인생은 자신의 처지를 신속하게 주님께 고백하고 도움을 요청할 때에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요2:1~5>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가나 혼인 잔치 집에 청함을 받아 가셨을 때 예수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신 것으로 보면 고향 나사렛과 가나가 그리 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집의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어머니가 알고 있는 것으로 봐서 어머니는 그 집의 초대받은 손님이 아니라 동네 여인으로서 그 집의 잔치를 돕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2절 말씀에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니 라고 했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즉 예수님은 그 당시의 사람들과 동일하게 종교적으로나 세상 풍습을 지키시면서 생활하신 것이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행하셨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셨던 것이다.

 

1.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며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펼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예수님과 함께 변화 산에 올랐던 제자들처럼, 세상과는 결별하고 오직 기적의 현장에만 머물고 싶은 생각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성숙은 늘 올라가야 하고, 우리의 삶은 현장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세상의 소금이요 빛으로 택하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의 태도인 것이다.

 

2. 또 하나의 잘못된 오해를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 이적을 행하신 것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도 술을 마음대로 먹어도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팔레스틴 지방의 생활 풍습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날 수질이 좋지 않은 독일에서 맥주가 중요한 음료수로 사용하고 있듯이 팔레스틴 지방은 지금도 수질이 너무나 좋지 않다.(석회질이 매우 많이 함유 됨) 그래서 그곳에는 포도주가 주요하게 사용되었다.

그러나 레10:8-9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영한 규례라

고 했고 잠31:4-5 르무엘아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왕에게 마땅치 아니하고 왕에게 마땅치 아니하며 독주를 찾는 것이 주권자에게 마땅치 않도다 술을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모든 간곤한 백성에게 공의를 굽게 할까 두려우니라 고 했다.

즉 제사장이나 나실인과 같이 특정한 직분과 관련된 사람들에게는 포도주의 사용이 금지되었고, 폭음은 항상 정죄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술에 취하므로 말씀에 위배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또한 술이 구원과 관계가 없다 할지라도 우리 몸이 성령의 전인 것을 알아 폭음과 폭주로 우리 몸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되며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한다.

 

 

 

 

 

<요2:6~11>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릴리 가나의 어느 혼인집의 초대를 받아 그 잔칫집에 참례하였다. 유대인들의 혼인 잔치는 7일 동안 계속되는 것이 그들의 관습이다. 그런데 잔치가다 끝나기도 전에 포도주가 떨어졌다. 그것은 혼인집에 큰 수치가 되는 것이다. 그런 혼인집에 예수님께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주심으로 수치를 면하게 하시고 하객들에게 기쁨을 더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에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는데 이 기적은 그 중에서 11절의 말씀처럼 가장 첫 번째 기적이었다.

본문의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교훈은

 

1. 세상의 모든 자연과 환경까지도 지배하시는 분이시라는 것.

 

8-9절에서 “ . . . . ”라고 하셨는데 주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하심으로써 자연을 지배하시는 능력을 가지고 계심을 나타내셨다. 이 사실은 창조주시며 모든 피조물을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단편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으로서 포도나무를 만드신 분이 포도주를 만드실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필요로 하실 때에는 언제나 자연에게 명령하셔서 주님의 뜻을 나타내도록 하셨다. 많은 병자를 고치셨을 뿐만 아니라 귀신까지도 쫓아내신 것은 주님이 물질계뿐만 아니라 영계까지도 다 지배하시고 계심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대중들이 모여 있는 혼인 잔치 집에서 기적을 나타내신 것은 만물의 지배자가 인간들 속에 함께 있다는 것을 계시하신 것으로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임마누엘이심을 증명하신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계시다는 것, 그것은 복음이다. 즉 예수님은 복음 그 자체인 것이다.

 

2. 예수님은 인간의 결핍을 충족시켜주시는 분이시다.(7-8절“ . . . . ”)

혼인집에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혼인의 기쁨이나 축하의 기쁨을 파국으로 몰고 가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혼인집의 큰 수치가 되고 하객들의 기쁨과 즐거움을 실망으로 몰고 가는 요인으로 작용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만들어 주심으로서 어찌 보면 매우 긴박한 상황에 빠져있던 집 주인과 하객들 모두에게 기쁨을 더하게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절망적이고 파국적인 상황을 기쁨과 행복으로 바꾸어주신 것이다.

 

3. 예수님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은혜를 주시는 분이시다.(9- 10“.......”)

예수님께서 만드신 포도주는 전에 있던 포도주보다 더 좋은 포도주였다. 그것은 주님께서 만드신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자연적인 것보다 초자연적인 것이 좋으며 물질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이 훨씬 더 우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다른 것과 비교해 볼 때 더 좋은 것이 아니라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으로 좋은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은 무엇이나 절대적인 은혜인 것이다.

 

** 예수님께서 이런 기적을 베푸신 이유(11절“ . . . . ”)-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셔서 사람들에게 믿음과 구원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물 항아리가 포도주 항아리로 변하게 하신 것은 기적이고 그 기적은 위대한 기적을 낳는 것이다.

<요2:12~17>

 

가나 혼인잔치 집에서 첫 이적을 베푸신 예수님께서는 가버나움에 내려오셨다가 마침 큰 절기인 유월절이 가까웠기에 유월절을 지키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그러나 성전에 당도한 순간 거룩하게 예배드리려던 예수님의 마음은 사라지고 진노를 발하셨다. 즉 성전의 상황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진노를 발하실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성전은 이미 거룩한 예배를 드릴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집이 아니라 장사하는 집이었으며 그곳에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채찍을 드셨다. 상을 뒤집어엎으시고 양과 염소를 내어 쫓으셨다. 순간 성전은 깨끗해졌다.

 

1. 예수님께서 그런 진노의 일을 행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유대인들이 성전 안에서 환전상을 차리고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팔았던 것은 디아스포라들과 멀리서 오는 이들을 위해서였다. 유월절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큰 절기였는데 이때에는 모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절기를 지켜야 했다. 이때 멀리서 소와 양과 염소를 직접 가지고 오기가 힘이 들었으므로 성전에서 제물로 사용할 짐승들을 팔았던 것이며 동시에 이때 반 세겔의 성전세를 내야했는데 성전에서는 반드시 거룩한 유대의 화폐로 내야했으므로 환전상을 차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선한 의도로 각종 제물을 파는 일과 환전상을 차렸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진노를 하셨을까요? 그것은 이와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일을 빙자하여 그들의 탐욕을 채웠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귀한 일을 순수하게 하나님을 위한 봉사의기회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탐심을 채울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돈을 바꿔줄 때에도 이익을 남겼으며 양과 염소를 팔 때에도 이익을 남겼다. 탐심은 무엇인가? 골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고 했다. 우리도 하나님을 위해 필요한 일을 하면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위해 순수하게 봉사할 기회로 삼지 않고 자신의 이익과 탐심을 채울 기회로 삼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의 진노를 살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2. 진노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세요.(15-16절“ . . . . . ”)

우리는 흔히 불의와 부정과 부패를 덮어주는 것만이 기독교가 주장하는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흔히 기독교는 불의, 부정, 부패를 무조건적으로 감싸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성경 그 어디를 보아도 예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불의, 부정, 부패를 감싸주신 적이 없다. 예수님은 죄를 죄로 여기는 사람들, 자기 죄를 슬퍼하는 자들만 용서하셨다. 알면서도 죄를 짓거나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을 위장하여 숨기려는 자들은 용서하지 않으셨다. 따라서 오늘의 기독교는 자기 죄를 회개하는 자들은 한없이 용서해주어야 하나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져 버린 사람들에 대해서는 질책해야한다. 그 일을 하는 것이 고난당하는 일이요 손해나는 일이기 때문에 공의를 실천하는 것을 꺼리는 비겁한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3. 예수님은 성전을 무엇으로 깨끗하게 하셨나요?(15-16절“ . . . . ”)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방법이 채찍이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더러운 것을 성령님의 거룩한 불로 제하실 수도 있으시고 말씀으로 정하게 하실 수도 있지만 채찍으로 깨끗하게 하실 수도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삼하7: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라고 하셨는데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의 말씀과 같이 당신의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실 때 하나님께서 많이 사용하시는 방법이다. 우리의 곁에는 항상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이 대기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채찍을 드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참 자녀이고 사랑의 대상임을 간접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생자요 참 d들이 아닌 자들에게는 죄를 범해도 징계가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히12:8) **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채찍을 드시기 전에 스스로를 정케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며 채찍을 드실 때에는 또한 그 자체로서 감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요2:18~22>

 

본문은 예수님께서 하신 성전 청결 사건에 대해 유대인들이 주님께 메시아적 표증을 유구한 것과 그에 대한 상징적인 답변과 그 말씀에 대한 해석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19절“ . . . ” 내용은 주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온 인류의 예배의 터전이 되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시대는 끝이 났다는 의미이다. 성전과 율법과 모든 제사의 형태는 궁극적으로 오실 메시아의 그림자였다. 히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하셨고 히8:6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하셨다. 그러므로 성전에서의 모든 예배는 결국 하나님과의 만남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제 모든 인류는 모든 세상의 창조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분이신(히12:2)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자유로운 교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태양이 뜨겁게 떠 올라 온 세상을 비추면 등불은 당연히 꺼야한 것처럼 바울은 예수님을 알고부터 옛 종교의 관념과 의식을 모두 헐어버렸다고 고백했다.(갈2:18-20) 마찬가지로 우리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난 후부터는 옛 생활에 대해서 청산해야 하며 모든 세상적인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

또한 19절 말씀의 뜻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아 죽이겠지만 예수님은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나셔서 영원한 예배와 터전이 되시리라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야 깨달았다고 했다. 그렇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은 모든 예배의 근거이다. 고전15:14-15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라고 했는데 부활이 없었다면 속죄의 의미도 승천의 가치도 신화적일 수밖에 없다. 예수님과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인간의 신앙의 중심이며 교회 생활의 중심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중심이 되어야 인간의 비밀이 풀리며 모든 이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불신앙으로 인해서 메시아를 앞에 모시고서도 생명을 찾지 못하였으며 죄악의 깊이만 더했던 것이다.

 

* 우리도 불신앙으로 인해 진리와 생명을 상실해 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되겠다.

 

* 또한 탐심으로 인한 영적인 무지가 예수님을 배신하게 하였다.(20절“ . . . . ”)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성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아를 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 이유는 성전 타락과 함께 그들의 의식마저 탐심으로 가려져서 신령한 눈이 어두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 제자들마저 부활하신 후에야 이 말씀을 깨달았다.

눅24:11 사도들은 저희 말이 허탄한 듯이 뵈어 믿지 아니하나

눅24:25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는 제자들에게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으나 주님이 재림하실 때는 깨달을 기회도 없으며 마지막 때임을 명심해야 한다.

 

<요2:23-25>

 

유월절을 지키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성전 청소 외에도 많은 기적을 행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표적을 통해서 많은 결신자들을 얻으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뢰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그들에게 예수님의 속마음도 내비치지 않으셨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불신의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들 속에는 불신할 수밖에 없는 요소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의 마음도 자기가 모르는 존재이다. 그러나 주님은 아신다.

 

1. 군중들은 표적을 보고 믿었다.

예수님께서는 막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고 하셨고 막16:17에서는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라고 하셨다. 표적은 믿음에 뒤따르는 하나의 현상인데도 군중들은 표적을 보고 믿었다. 표적은 믿음의 증거는 될 수 있어도 믿음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믿음의 근거는 오직 말씀 뿐인 것이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자들은 이적적인 현상을 믿음의 근거로 삼았던 것이다. 표적 때문에 믿는 믿음이 왜 잘못된 것일까? 표적을 근거로 하는 믿음이 위험한 것은 표적이 없어지면 믿음도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적을 보고 예수님을 따랐던 많은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예수님을 버렸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계속적으로 예수님에게 이적만을 요구했던 것이다. 마26:68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고 하였고, 마27:42 에서는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조롱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과 다를 바 없이 예수님을 버렸던 제자들은 3년간 예수님께 말씀을 배웠기에 말씀을 생각하면서 회개하고 돌아와 주님의 거룩한 사도들이 되었고 이 땅의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말씀의 반석위에 세워져야 하며 그런 믿음을 가진 성도는 음부의 권세로부터 승리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요3:1-3>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유대종교를 대표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는데 그런 니고데모와 예수님과의 만남은 율법과 복음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만남에서 중생의 문제가 논의 되었다고 하는 것은 주시는 교훈이 매우 크다.

 

1.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께 찾아와 중요한 고백을 하였다.(1-2“ . . . . ”)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니고데모도, 예수님도 바빴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니고데모의 경우에는 또한 동료 바리세인들과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눈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유대교의 지도급 인물이 예수님께 관심을 가지고 찾아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께 와서 고백한 말 중에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 할 수 있다.

요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즉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한다는 것은 인위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이해한 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 정도로밖에는 이해할 길이 없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냥 간과해서는 안 될 중요한 점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분으로 이해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와 예수님과의 만남은 구약과 신약, 율법과 복음을 접목시키는 신앙적 연결고리가 되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니고데모의 관심에서부터 가능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게 계시면서 당신의 종들을 보내셔서 일을 하게 하신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관심을 어디에, 무엇에 초점을 맞추는가? 하는 것이다. 금년 한 해에도 여러분들의 관심에 대한 초점이 하나님, 예수님의 복음에 맞춰지시기 바랍니다.

 

2. 율법 종교의 핵심.(2절“ . . . . ”)

율법종교의 핵심은 율법의 준행에 있고(롬2: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증거로는 표적을 이행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준행에 있어서는 자신하고 있었으므로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 오신 선생”으로 이해하는 데는 다만 ‘표적’에 대한 관심으로만 족했던 것이다. 그러나 표적 신앙은 매우 큰 위험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표적이 아니어도 예수님 자체를 구주로 고백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3. 복음 종교의 핵심.(3절“ . . . . ”)

니고데모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표적은 자연현상의 이변이나 병자를 고치는 것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으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표적은 사람이 “거듭나는 것”에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생활과 공인된 종교적 자격을 갖는 것으로 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고 있었으나 예수님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단언하셨다. 성경은 거듭나는 과정에 대해서 말씀하기를 행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금년에 회개와 죄 사함의 확신, 성령님의 충만함으로 거듭나는 영적 삶을 살자.

<요3:4-8>

 

예수님께 온 니고데모가 거듭남의 원리를 모태에 다시 들어갔다 나오는 것으로 이해하자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육신은 육신으로서의 생명만 잉태하지만 성령은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는 새로운 생명을 주신다고 말씀하신다.

 

1. 사람은 거듭나야 하는데 왜 거듭남이 필요한가?

사람의 거듭남이 얼마나 중요하신지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두 번씩이나 엄숙하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을 알 수도 없고 또한 들어갈 수도 없다고 말씀하셨다.(3,5절)그러면 사람이 왜 거듭나야하는 것인가? 한 마디로 예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이다.

영생의 조건은 니고데모처럼 영생에 대한 관심이나 열망만으로는 부족하다. 또한 니고데모처럼 종교적인 영향력을 가지고도 영생은 얻을 수가 없다. 더 중요한 것은 표적을 체험했다고 해서 영생을 얻을 수도 없는 것이다.(2“ . . . ”)

영생은 오직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생명이라 정의할 수 있다. 이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삶이 바로 영생이요, 반드시 끝이 있을 수밖에 없으며 불의한 인간의 삶을 탈피하는 것이 바로 구원인 것이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인간들은 사람의 지혜, 인간의 이성이나 양심, 또는 과학적인 사고로 영생을 찾으려고 한다. 고전1:22-23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라고 했고, 요3:13-15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했다. 즉 오직 영생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은 예수님의 인격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다. 그러므로 영생이신 예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 교제하기에 합당한 인격으로 변화, 즉 거듭나야하는 것이다.

 

2. 거듭남의 정의

거듭남의 필요성을 역설하신 예수님께 니고데모는 사람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지를 여쭈었다.(4절“.......”)즉 니고데모는 거듭남의 의미를 ‘육체적인 재생’으로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가르침은 육체적인 재출생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거듭”이라는 원어의 뜻은 <위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새롭게>라는 뜻이 들어있다. 그러므로 거듭난다는 뜻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의 인격이 새롭게 변화되어 하나님의 세계에 합당한 존재로 다시 지음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의 힘이나 수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의생명이 변화받는 것이며, 우리의 삶과 운명의 위치가 하늘나라로 전환되는 것이고 또한 우리의의식이 예수님의 의식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영생의 조건은 인간들의 종교적인 노력이나 전통과 영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 인격의 참된 변화에 있으며 그 변화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이고 거듭남과 변화의 목적은 예수님과의 순수한 인격적인 교제를 목표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3.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의 뜻(5절)

물과 성령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학설이 있으나 확실한 것은 물은 씻음의 상징이요, 성령은 하늘의 능력을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회개하면 모든 불의함을 씻음받고(요일1:9-10) 그 예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통하여 성령님께서 우리의 인격과 삶을 새롭고 강하게 변화시켜주시는 것이다. 이 체험은 우리의 이성과 논의로는 다 알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총인 것이다. 바람을 알 수 없으되 바람의 소리와 방향과 그 힘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8절) 예수님과 교제를 하는 성도는 자신의 영혼과 삶 속에서 성령님의 임재하심과 그 음성과 은총의 효능을 체험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영생을 얻는 것은 인간의 개혁이나 결단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 되어야 하며 오직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본질적인 재출생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거듭남이란 말이나 일시적인 감흥에 있지 않다. 그것은 생명 자체를 향한 근본적인 자세의 변화이며 그 양태는 반드시 실재적인 실천으로 드러나야 한다.

 

 

 

 

 

 

 

 

 

 

 

 

 

 

 

 

 

 

 

 

 

 

 

 

 

 

 

 

 

 

 

<요3:9-15>

 

본문에서 거듭남의 원리를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땅의 일을 말해도 깨닫지 못하는데 어떻게 하늘의 일을 말할 수 있겠느냐고 그의 영적인 무지에 대해서 지적하신다.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하여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지만, 이때까지 바리새식 종교에서 호흡하고 있었으므로 생명의 도리인 기독교의 거듭남의 도리를 깨닫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지도자로서의 자격 없음을 스스로 증거 함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점에 대하여 책망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하셨지만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학식도 있었고 세상의 신분도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그런 학식과 세상의 신분이 거듭남의 일을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영의 일은 영으로만 이해할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고전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고 했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여전히 육에 속해 있었고 육적으로 이해하려고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적인 진리를 수용할 수가 없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일을 알려고 한다면 세상의 상태를 벗어나야하는 것이다.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이 아무리 세상에서나 대단한 존재이고 공로가 대단하다고 하여도 거듭날 수가 없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언어가, 우리의 습관과 삶이 세상의 그것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그래서 거듭나는 성도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중생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옛사람이 죽어야 한다. 그 옛사람이란 육에 대한 죽음을 말한다. 육의 사람이 죽어야 영의사람이 산다.

롬8:13-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 그러면 우리가 중생할 수 있는 방편은 어떠한 것일까요?

14-15절 “ . . . . . ”

예수님은 믿음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가 거듭난다. 즉 예수님을 오전히 구주로 받아들이고 철저히 그분이 지배하시는 삶의 세계로 들어갈 때 우리는 새사람이 되는 것이다. 금욕적인 생활이라든지 윤리적인 생활을 잘한다고 거듭날 수 없다. 오히려 쓰라린 실패만을 맛볼 뿐이다. 진정으로 거듭나서 천국을 소유하려면 광야에서 뱀에 물려 죽게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대에 달린 놋 뱀을 바라보라할 때 순종하여 바라본 백성들이 죽게 되었던 처지에서 구원함을 받았던 것처럼 오직 예수님께 믿음과 순종함으로 나아갈 때 진정으로 육의 몸이 영의 몸으로, 영원히 죽게 되었던 인생이 영원히 살게 되는 인생으로 변화되는 줄로 믿습니다.

 

 

 

<요3:16>

 

기독교 복음이 가장 핵심적인 진리가 본문 속에 들어있다. 하나님이 죄악 세상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독생자를 주셨으며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다는 말씀이다. 하나님, 사랑, 독생자, 믿음, 영생 등 기독교 진리의 핵심과 진리의 골격을 총 망라하고 있다.

 

1. 하나님은 죄악에 빠져있는 사람을 사랑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여기서 “세상”이라함은 죄악에 빠져있는 우리 인생들을 뜻한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은 이런 죄악에 빠져있는 인류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신비하신 사랑의 본성이 있는 것이다. 인간은 그렇지를 못한데 하나님의 사랑은 죄가 발견되었을 때 발동이 된다. 그것은 마5:45의 말씀처럼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인한 것으로서 죄악에서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하여 발동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확실하게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그 사랑은 인간의 죄악 자체를 그냥 묵과하시는 사랑이 아니라 죄악을 회개하므로 다시 처음을 회복하게하시는 사랑인 것이다.

 

2. 하나님의 사랑은 관념적이 아니며 지극히 구체적이며 현실적이시다.

죄인인 인간을 얼마나 절대적으로 사랑하시는지 본문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다. 하나님의 그 사랑은 무한하시고, 불변하시며 영원하신 사랑이다.

딤전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무한하시며 영원히 불변하시고 구체적인 사랑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3. 그러면 인간은 하나님의 이 놀라우신 사랑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요?

* 하나님의 사랑에 죄인인 인간은 믿음으로 응답해야 한다.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라고 했다. 죄인인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에 의해 이 세상에 계시되었으며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자인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그 사랑을 만나게 된다. 즉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죄인인 인간의 믿음이 만나는 그곳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며 그리고 거기서 생명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고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인간을 만나신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곧 생명의 교통이며 그것이 곧 구원인 것이다.

 

* 하나님의 이 구원하심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는 것이다. 본문 “ . . . . . . . ”

하나님의 이 구원하심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믿음이 예수님 안에서 접촉되었을 때 비로소 영원한 생명이 인간에게 주어진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생명은 하나님과의 격리됨, 즉 인간의 무지와 불순종을 극복하며 지옥의 고통,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을 극복하는 것이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을 믿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죄인인 인간의 과거의 죄악을 용서하시며 현재와 미래의 삶을 보장하시는 것이다.

 

<요3:17-18>

 

본무에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목적과 그 결과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어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비록 죄를 범했을지라도 이 세상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셨다. 그 결과로 독생자를 믿는 자는 심판을 면할 수 있게 하셨다.

 

1.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현주소는 어떤 곳인가?

17절에는 “세상”이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반복되어 있듯이 본문을 이해하는 데는 이 단어를 이해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인간이 다스리며 정복하도록 “세상”은 본래 선하게 창조되었다. 하나님의 창조 의도 속에는 악이란 전혀 없으셨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와 함께 타락하였고 더러워졌으며 그 결과 절대적인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이게 되었다. 즉 사랑과 관심의 대상인 세상이 심판과 저주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 심판과 저주로 인해 인간은 개인적으로 죽음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고 인류 역사 전체적으로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인간이 본래 축복이 있는 에덴동산이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살도록 주어졌다. 그러나 그곳에는 반드시 사탄의 유혹이 있었는데 인간은 그 유혹을 하나님 말씀에 겸손히 순종함으로 물리치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신앙보다는 사탄의 구수한 유혹의 말을 더 가까이하므로 불행과 저주의 길에 빠져들게 된 것이다. * 신앙, 즉 믿음이 없는 그곳에는 행복이 깨어지며 오직 고통과 죽음과 슬픔이 끊이지 않는 세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불신앙의 세상은 바로 이러한 곳이다.

:- 여러분의 신앙의 현주소는 어떤 곳인가? 처음 에덴동산에 들어섰던 상태,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수한 순종으로 인한 풍요와 평안이 있는 곳입니까? 아니면 사탄의 소리에 깊이 빠져서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인해 풍요와 평안이 깨어진 곳입니까? 아무리 구수하고 그럴사하여도 하나님의 말씀과 순종하는 신앙이 아닌 것은 심판의 대상입니다. 얼른 점검하시고 다시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2. 이러한 세상에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오셨다.

창세기 19장 말씀에 불신앙과 죄악이 만연한 소돔과 고모라에 하나님의 천사가 임했다. 죄악의 무리들은 심판하고,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구원하시기 위해서였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도 하나님께서는 흑암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죄악 된 근본적으로 개혁하므로 바로잡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 먼저 보내심을 받았던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해서 말하기를 마3:12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고 했다.

* 여러분 저와 여러분 우리 자신들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습니까?

주님께서 키를 드시고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실 때 진정으로 복음의 지배를 받는 성도, 그래서 곡간에 들어갈 알곡신자입니까? 아니면 불신앙과 죄악의 지배를 받으므로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짐 받을 쭉정이 신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택하심을 받은 주님의 백성들이 심판을 받아 영원히 꺼지지 않는 멸망의 불에 던짐 받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만일 지금 여러분들의 생각의 주소와 지금 들어서서 걸어가고 있는 삶의 길이 불신앙의 길과 불순종의 길이라고 한다면 시간과 초를 다투어서 바른 길로 가시기 바랍니다.

<요3:19-21>

 

본문은 신자와 불신자를 빛과 어두움으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다. 즉 악을 행하는 자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두려워하여 빛을 가까이하지 않지만 진리를 좇는 자는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여 살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빛을 가까이하는 것이다.

 

1. 어두움 밖에 모르는 인생의 불행한 인생이다.(19-20“. . . . ”)

중국의 옛 격언에 ‘순나라 개는 해만 보면 짖는다’라는 말이 있다. 순나라는 높은 산에 둘려 쌓여 일 년 동안 산그늘에 가려 햇빛을 보기가 좀처럼 드물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쩌다 한 번 햇빛이 쬐이면 온 나라 안의 개들이 요란하게 짖어댔다고 한다. 사도 요한은 5절 말씀에서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했다. 불신자들은‘자기의 행위가 악한 것을 모르고 복음의 진실성을 의심하고, 경시한다. 인간의 불행은 마치 자폐증에 걸린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인 그리스도께 좀처럼 관심을 가지려하지 않는데 모든 불행의 원인이 있다.

 

복음, 즉 빛을 미워함이 인간의 슬픔이요 불행이다. 예수님께서는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20절)한다고 슬퍼하셨다. 요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고 하셨는데 사람들은 복음을 꺼려할 뿐만 아니라 복음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람들을 미워하는 경향이 있다. 그 이유는[세상의 가치관] 때문이다. 즉 20절 말씀처럼 “그 행위가 드러날까”염려하며 빛을 미워하는 것이다.

* 유대인들에게는 ‘율법과 자기 공로’라는 가치관이 있다. 헬라인은 ‘인간의 지혜’를 삶의 가치관으로 여겼으며 로마는 ‘로마의 영광과 황제의법’을, 오늘날 현대인은 ‘금력과 권력’을 가치관으로 여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주권과 영광을 위한 희생과 사랑’을 가치관을 삼고 살아간다. 그래서 어둡고 뒤틀린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녹이고 그들을 모든 불행과 파멸에서 구해내어 하나님의 가치관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진리를 좇을 때 승리가 있고, 빛 가운데서 행할 때 승리가 있다.(21절“ . . . . ”)

이 말씀은 진심으로 영생을 바라고 구하는 자들은 세상의 모든 가치관을 뒤로하고 오직 복음만을 희망의 빛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유대인의 자의적 구원관도, 헬라인의 지혜도 오직 십자가 앞에서는 무익하고 헛될 뿐인 것이다.

 

니고데모는 진리에 대해서는 무지했으나 주님에 의해 진리의 눈을 뜨게 되자 예수님을 만인에게 증거 했다. 진리가 무엇인지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실재 진리 안에 속하여 사는 것이 빛 가운데서 사는 사람들인 것이다.

 

 

 

 

 

 

 

<요3:22-30>

 

본문은 강퍅한 예루살렘을 또나 오신 주님께서는 유대의 지방으로 가사 세례를 베풓신 사실과 그 사실에 대해 불평하는 제자들에게 세례 요한이 겸허하게 오신 그리스도만을 높인 증언을 기록한 내용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지혜롭고 겸손하신 주님의 사역과 실로 아름다운 세례 요한의 사명의식을 볼 수 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0)고 개복한 요한의 사명관은 참 제자 의식의 모범을 삼을만한 것이다.

 

1. 예수님의 사역은 온유하시고 항상 지혜로우셨다.

22절에 이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처음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셨을 때 타락하고 강퍅한 예루살렘 사람들로부터 냉대를 당하셨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과 더 이상 다투지 않으시고 조용히 그곳을 떠나 지방사역을 시작하신 것이다. 사실 뒤틀리고 강퍅한 인심처럼 복음전도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없다. 그러나 주님은 무력과 억지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신 것이 아니라 온유한 방법으로 대립을 피하셨다. 요5:13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요7:1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요8:59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참으로 강하신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인생들에게 얼마든지 하늘의 강하신 능력으로 제압하실 수 있으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의 강하신 능력으로 세상 사람들을 대하시지 않으시고 온유하신 사랑으로 대하셨다.

* 실력으로 다른 사람의 단점을 제압하는 것은 어찌 보면 멋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능력을 자제하고 온유함으로 화평을 도모하는 일은 예수님의 제자 된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거룩한 일인 것이다.

 

2. 예수님은 지혜롭게 사역을 감당하셨다.(26절“ . . . . .”)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 지방사역을 행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회개의 요청에 순응했다고 했다. ‘예루살렘에 가까워 올수록 하나님과 멀다’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도시인들보다 지방인들이 그 의식에 있어서 순전한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점을 보시고 수도인 예루살렘보다는 지방부터 복음화 시키셨다.

이와 같이 성도들은 우리 앞에 닥친 난제들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풀어가야 한다. 우리 인생에는 ‘보상원리’라는 법칙을 하나님께서 주셨다. 즉 - 맹인에게는 청력을 발달하게 하셔서 시각을 보완하고, 가난하고 비천한 신의 사람에게는 남보다 뛰어난 생활력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지혜로울 수만 있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롭게 길을 열어갈 수 있을 것을 믿습니다.

 

3. 세례 요한의 겸허한 자세(27-28절)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면 천륜과 인륜마저 저버리는 요즘 세상사람들과는 전혀 다르다. ‘나는 절대자의 자리에 앉을 수 없는 존재다 다만 진리의순종자일 뿐이라’는 신앙의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요3:31-36>

 

본문은 계속해서 세례 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0절)는 말씀의 이유를 설명하고 이다. 왜 그리스도는 흥하여야 하겠고 요한은 쇠하여야 합니까? 그것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아들이시고, 요한은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의 마음을 안고 이 땅에 오신반면 요한은 단순히 이 땅에서 부름 받은 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본문에는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또한 “하늘로서 오시는 이는"이라고 말씀하면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보내시는 이로,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는 자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1. 예수님의 철저하신 겸손하심과 뜨거운 사랑하심을 알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겸손에 대해서 빌립보서에서 잘 설명하기를 빌2:6-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사실 헬라사상으로 이 말씀을 이해할 때 신이 인간이 되는 것은 곧 타락이다. 타락하지 않고서는 신이 인간이 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타락일 수 없다. 그것은 겸손인 것이다. 그것은 자기를 비운 행위이다. 권리와 능력이 함께 있을 때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일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어려운 포기를 하셨다. 그 이유는 죄인들인 세상의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다. 즉 예수님은 철저히 겸손하셨으며 죄인을 위해서는 뜨겁게 사랑하셨다.

사도 바울은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했는데 우리 성도들이 주님께 본받아야 할 마음이 곧 철저한 겸손, 즉 변함이 없는 겸손하심과 뜨거운 사랑의 마음을 본받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은 깊고도 지속적이시다.

요일4:8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고 했다. 성 어거스틴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사랑의 고리고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삼위의 사랑의 교제는 영원하다고 하였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성령님은 각각 사랑의 본질이며 속성상 사랑의 관계는 영원히 단절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가 단절된 때가 단 한 번 있는데 그것은 십자가 에서였다.

마27:46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그러나 이 단절은 인류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한 순간적인 것일 뿐 영원한 것은 아니었으며 그 단절은 사흘 후에 부활하심으로 곧 회복이 되셨다. 이 단절과 회복으로 인하여 성부와 성자 하나님과의 사랑의 심도가 얼마나 깊고 지속적인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요4:1-6>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를 주고 제자를 삼는 수가 세례요한과 그의 제자들이 세례를 주고 제자 삼는 수보다 더 많았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30)고 말한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질투하였다. 그래도 제사장 자손인 요한의 질책이나 국민적 인기 등은 받아들일 수 있었으나 천민 출신인 예수님의 인기를 그들은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예수님은 감당하셔야 할 사역이 계셨기 때문에 그들과의 충돌을 피하여 갈릴리로 가셨는데 가실 때 예수님은 요단강 건너 베뢰아의 길로 가시지 않으시고 유대인들이 꺼려하는 사마리아 길로 가셨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관심이 유대인에게서 사마리아인에게로 바뀌시는 것을 알 수 있다.

 

1.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면서도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해 서는 지나치게 무관심하였다.

오린 자녀에 대한 부모의 지나친 관심이 오히려 아이의 장래를 망쳐놓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된다. 부부간일지라도 지나친 관심은 상대방을 기쁘게 하고 평안하게하기 보다는 오히려 피곤하고 짜증나게 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지나치게 관심을 가졌는데 그들의 관심은 주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에 의한 관심이 아니라 미움과 질투에 기인한 관심이었던 것이다. 이런 관심은 건설적이지 못하고 파괴적이며 예수님의 복음 사역을 위축시키고 방해하는 무서운 악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우리들의 모든 관심은 예수님의 복음사역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한 존경과 사랑에 의한 관심이 되어야지 그렇지 못하고 미움과 질투에 의한 관심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데 오히려 방해가 되는 무서운 악이 되는 것이다.

 

2. 그러므로 지나치게 관심을 가져도 안 되지만 지나치게 무관심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관심을 가지면서도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무관심했던 것이다. 9절에서 예수님이 물을 청하셨을 때 사마리아 여자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하나이까”라고 대답할 정도로 당시의 사마리아 사람들에 대해서 유대인들은 무관심하였던 것이다.

 

이런 유대지방을 예수님께서는 떠나셨다. 유대지방이 어떤 곳인가? 그곳은 이스라엘의 종교 중심지다. 얼마 전까지도 예수님은 그곳에 관심을 가지셨고 구원의 표시로 제자들과 함께 세례를 베푸셨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의 뜻과 반대되는 뜻과 행동을 할 때에 즉 마땅히 관심을 가져야 할 대상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관심 가지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지나치게 관심을 가질 때 예수님께서는 그곳을 떠나신 것이다.

 

*오늘날 나는 진정 가져야 할 바른 관심을 가지는 사람인가? 아니면 오히려 예수님의뜻과는 정 반대 되는, 그래서 예수님이 나와 나의 삶의 영역에서 예수님이 떠나버리시는 전혀 엉뚱한데 관심을 가지는 사람인가?

 

4절“ . . .”

예수님의 관심의 대상은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데 있으셨다. 우리가 가져야 할 관심의 대상을 주님과 일치시켜야 한다.

 

<요4:6-10>

 

사마리아까지의 여정으로 피곤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물곁에 쉬고 계셨는데 대낮인데도 한 여인이 물을 길러 왔다. 예수님은 그 여인과 “물을 좀 달라”는 말씀을 시작으로 대화를 시작하셨고 드디어 생수, 즉 생명의 물까지 그에게 주셨다.

 

1.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서는 한 번도 기적을 사용하시지 않으셨다.

메시아이신 주님께서 평범한 여행자의 모습으로 한낮의 불볕더위가 쏟아지는 시간에도 땀을 흘리시고 애쓰시면서 유대인들은 관심조차도 가지지 않고 있던 사마리아 땅에까지 당도하신 것이다. 곤하신 몸으로 사마리아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는 물 길러 온 여인에게 명령하실 수도 있었지만 예수님은 명령하시지 않으시고 물을 달라고 요구하셨다. 즉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께서 피조물인 인간에게 자신을 낮추신 것이다.

 

2. 인간은 누구나 편협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본래 사마리아인은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서 북왕국이 패망한 후 팔래스틴에 이주해 온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 태어난 혼혈들이다. 요즘 같으면 문제가 될 수 없지만 당시 유대인들게는 매우 심각한 문제로 여겨졌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피가 섞여있다는 것과 그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예배드리지 않고 그리심 산에서 예배드린다는 이유 때문에 그들을 멸시하였다. 한 마디로 그들은 교만함이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상대방의 외형을 보고서 사람을 멸시하거나 천대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러한 것들은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을 대하는 것과 같은 교만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거만한 자들을 비웃으시고 겸손한 자를 품에 안으신다. 교만은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것이지만 겸손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다.(잠3:34)

 

또한 사람은 편협한 생각을 가지기 쉽다. 자신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예수님께 여인은 요4:9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라고 물음으로써 사마리아인의 유대인들에 대한 편협한 생각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자기의 신분이 낮다고, 자신의 형편이 어려움에 처해있다고 해서 자기 방어적인 편협한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인생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심.(10절“ . . . . . ”)

* 예수님은 인간의 무지를 깨우쳐 주심(네게 물을 달라고 하는이가 누구인 줄.. )

* 예수님은 인간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오심.

*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예수님께 있음.

요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세상의 물을 마시는 자는 육신의 해갈도 면할 수 없으나 예수님께 생수를 공급받은 인생은 영혼의 해갈까지 해결받게 되는 것이다.

 

 

 

 

 

<요4:11-14>

 

본문 말씀은 야곱의 우물가에서 삶에 지친 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님께서 영생을 선물하실 것을 제안하신 내용이다. 여인은 생수로 비유하신 주님의 영생의 제안을 깨닫지 못하고 의아해 했다. 이 말씀에서 우린ㄴ 영생의 길을 몰라 방황하는 인생들의 한계 상황과 그와 같은 문제는 오직 예수님 안에서 해결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깨닫게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도 죄악 세상의 옛 우물가에서 진정한 삶의 의미와 희망에 대해 끝없이 목말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14절) 마시라고 우리에게 요청하고 계신다.

 

1. 인간은 생가하고 말하고 깨닫는 것이 한계의 틀을 벗어나지를 못한다.

여인은 생수를 주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11절)라고 물었다. 우리는 여인의 이 물음에서 니고데모와 같이 영적인 진리에 대한 인간들의 한계적인 사고의 틀을 볼 수 있다.

여인은 예수님께 “물 길을 그릇”(11절)-두레박-이 어디 있느냐고 의아해 한다. 팔레스틴의 저수용 우물은 대개 3m이상의 깊이에다 물을 보관하는데 그 깊은 물을 아무런 도구도 없이 어떻게 물을 길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즉, 영생을 주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여인은 우선 수단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복음에서 강조하는 인간적인 폐단인 것이다.

이 여인의 이런 모습은 오늘날도 똑같이 재현되고 있다. 대개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행복과 소망을 바라고 있지만 진정한 그 가치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려고 하지를 않는다. 오직 수단만을, 그것도 물질적인 것과 명예와 육신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 행복의 수여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삶의 방법론만 귀히 여기는 것이 타락한 인생의 전반적인 사고인 것이다. 그래서 롬1:22-23에서 바울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고 했다.

영생과 진리마저도 인간의 수단으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유대인은 율법의 행위로, 이방인들은 철학적 명상으로 영생회득의 수단을 삼았던 것이다. 사12:3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고 했고, 계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 라고 했다. 인간의 영생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생의 선물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인간의 어떠한 수단도 업적도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2. 옛 삶의 틀을 벗어날 것을 말씀하심.(13절)

“이 물”은 야곱의 우물, 즉 세상의 물이요 육신적인 것을 뜻함. 우리는 지금까지의 세상적인 틀과 육신적인 틀을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아무리 대댄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진정한 만족을 누릴 수 없다.

 

3. 영생의 성격(14절)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끝 없는 진리와 생명을 공급 받는다.

 

<요4:15-19>

 

본문은 수가성 여인이 주님을 발견해 가는 과정에서 생수를 얻기 위해 변해가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우물물과 생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녀의 자각, 그런 것들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고 있는가를 말씀하고 있다.

 

1. 우물물과 생수의 차이를 알 수 있다.(15절)

이 말씀에서 “이런 물”이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생수”,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10절)가르킨다. 그리고 “우물물”은 조금 있으면 “다시목마를”(13절) 수 밖에 없는 물이다. 우물물은 이 세상의 물질적인 가치의 한계를 상징하고 있으며 그것으로는 인간을 결코 충족시킬 수가 없음을 교훈하고 있다. 우물물은 마치 ‘시장’과 같아서 인간의 욕구를 잠정적으로 충족시켜 주는 것일 뿐 결코 항구적이며 군원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은 바로 이 우물과 시장에 종속되어 있다. 아무도 이 굴레에서 떠날 수가 없다. 오직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수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10절에 “ . . . . ”라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주시겠다는 생수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영혼 속에서 끊ㄹ임 없이 활동하는 은혜의 사역을 의미한다. 이 은혜의 사역을 주관하시는 자는 성령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이 성령님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요7:38-39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이 생수는 성령님이시고 성령님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인간에게 찾아오시는 것이다.

 

2.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제시하신 생수를 얻는 조건(16-17절“ . . . . ”)

예수님께서 남편을 불러오라 하신 것은 그녀의 과거의 잘못된 삶을 청산해야 한다는 촉구였다. 그녀는 과거에 다섯 남자를 남편으로 했다 부정한 여인이었고 지금도 그녀는 다른 여자의 남편과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말로 화냥질, 즉 서방질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그것을 먼저 청산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영혼의 생수이신 성령님은 거룩하신 영이시기 때문에 회개하지 아니한 영혼 속에는 찾아오실 수가 없으시다. 잘못된 삶을 청산하는 일이야 말로 “생수”를 얻게 되는 첩경인 줄로 믿습니다.

 

3. 또 하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잘못된 삶을 청산한다는 것이 생수를 얻을 수 있는 전체 조건이긴 하지만 생수의 원천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이다. 이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해서 갖게 되는 믿음으로 얻는다. 하나님은 과거의 잘못된 삶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혹의 은혜를 믿는 자에게 생수의 은혜를 주시는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공로로 죄 사함을 받는 자의 영혼 속에 성령님께서 임재 해 계심으로써 얻는 신령한 기쁨과 평안이며 다함이 없는 감사와 감격인 것이다. 성령님은 인간을 영생으로 인도하시는 영원한 은총인 것이다.

 

 

 

 

<요4:20-23>

 

본문은 예배에 대한 예배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다. 성도에게 있어서 예배는 매우 중요한 특권이요 의무이다. 예배를 통하여 성도는 하나님을 만나고 영력을 공급받는다. 우물가의 여인은 예수님께서 선지자인 것을 깨닫는 순간 자연스럽게 예배 문제를 끄집어 내었다. 예수님은 이 질문을 받으시고 여인의 예배 장소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시정해 주시는 한편 보다 더 중요한 예배의 방법까지 말씀해 주셨다.

 

1. 이 여인은 매우 뛰어난 영적 탄력성을 가지고 있었다.(20절)

이 여인은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와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니고데모는 이름있는 유대인의 율법 선생인 반면 여인은 이름도 없는 사마리아 여자였다. 니고데모는 거룩한 바리새인인 반면 이 여인은 부도덕한 창녀였다. 니고데모는 자신이 먼저 알고 예수님을 찾아간 반면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먼저 찾아가셨다. 모든 면에서 비교가 안 되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예수님과 나눈 대화의 내용을 비교 분석해 보면 정말 놀라운 정도로 큰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과 대화를 하여도 조금도 진전이 없었다. 그는 답답한 정도로 주님의 가르치심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여인은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누는 동안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했다. 그리고 여인은 예수님께 근본적인 것을 알기 위해 예배에 관해서 질문을 드렸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 여인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을 합니다.(29)

무엇이 이 여인에게 놀라울 정도로 영적 탄력성, 즉 영적인 감각을 지니게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 여인의 솔직성이다. 예수님께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는 말씀에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여인은 자신의 뻔뻔스러움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솔직함을 드러내었다. 여인은 솔직하게 묻고, 솔직하게 대답하며 솔직하게 인정하는 정직성이 있었다. 이렇게 솔직함은 영적인 감지력을 높이는 것이다. 그러기에 니고데모는 주님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도 예수님께 “그리스도”라고고백하지 못한 반면 여인은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예배의 장소의 중요성 문제이다.(22절)

예수님께서는 예배 장소에 대해서 묻는 여인에게 장소의 중요성에 관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 말씀은 예수님이 유대인의 정통성을 인정하심과 동시에 사마리아인의 혼합주의 신앙을 질타하신 것이다. 나름대로 유대인들은 예배에 있어서 바른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들은 전해 내려온 율법을 통해서 예배의 대산을 바로 알고 있었다. 반면에 사마리아인들은 앗수르의 혼합 정책에 의해서 유대인의 정통과는 단절되어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여호와께 예배는 드렸지만 정확한 예배를 드리지 못했다. 그것은 막연한 예배였다. 예배의 대상이 막연했고 예배의 방법이 막연했다. 그러한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리가 없다.

오늘날 한국의 교회가 이러한 혼합주의에 빠져있지나 않는지 깊이 반성해 봐야 한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깨달아야 하는데 사람의 뜻에도 맞추고 사람에게도 영광을 돌리며 만족을 주는 예배와 말씀에 귀가 맞추어져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다시 오직 하나님께로만 다시 조정을 해야만 한다.

3. 하나님의 소원(23절)-소원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만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인간에 대한 소원을 갖고 계신다. 주님은 “나의 운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원은 철저히 묵살하고 우리 것만 고집할 때가 많다.

<요4:24-26>

 

본문은 주님과 대화로 인해 신앙의 눈을 뜬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님께서 예배의 본질적 요소를 가르쳐 주신 내용이다. 예배란 외적인 조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생하신 하나님과의 교제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교제를 가능하게 해 주신 분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심을 밝혀주셨다. 본문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1.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수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22절에서 사마리아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하고”(22절) 있다고 책망하셨다. “알지 못한다”는 뜻은 무지하다는 의미이다. 즉 예배의 본질적인 정신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섬긴다는 뜻이다. 그들은 모세의 오경만을 경전으로 삼고 예배를 드렸고 또한 그들은 이방 잡신들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풍습이 있었다. 이렇게 인간들이 선택한 가치관으로 단지 인간의 만족을 위해 예배를 드리는 사마리아적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없으며 미신에게 제사하는 의식과 별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그러므로 무지는 곧 죄악임)

당시 사마리아적 예배의식은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성경적 교회가 아닌 교파적 교회가 된다든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하나님 중심적 예배가 아닌 사람의 만족을 채우기 위한 교회생활이라든지, 편협 된 신앙관을 가진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대단히 잘못 된 것이며 그런 신앙관과 교회생활은 교회는 물론 본인 자신에게도 엄청난 잘못이며 그런 잘못된 사람들의 교회생활은 사회에도 매우 나쁜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하나님을 내 삶의 방편으로 삼으려는 잘못된 신앙관을 벗어나 우리가 하나님의 도구로 쓰여지기를 원할 때 비로소 온전한 예배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2. 예배는 마음으로부터 드려야 한다.

주님은 예배를 “신령”으로 드려야 한다고 하셨다. 이 말씀의 의미를 여러 가지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확실한 것은 인간적인 형식과 수단과는 반대되는 예배의 요소를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영이시니”(24절)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본질적 존재가 영이시므로 모든 물질세계를 초월하신 교통하려는 사람들도 어떤 의식이나 물질적 수단보다는 마음에 있는 영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고전2: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고 하셨다.

예배란 거룩한 영적 인격자이신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주일예배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물질적 봉헌, 그리고 봉사와 섬김의 생활 등 성도들의 모든 생활이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영이 마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3. 예배는 진리를 따라 드려야 한다. - 24절“ . . . . ”

“신령”함이 성도들의 내적 예배의 조건이라고 한다면 “진정”은 외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이라는 뜻은 “진리”라는 의미이다. 이 말씀은 사마리아인들의 무지한 성경 지식을 따라 드리는 예배를 빗대어 하신 말씀인데 예배는 인간의 열심과 정성에 앞서 성경에 계시된 진리의 뜻을 따라 드려져야 한다. 롬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고 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주님의 모형인 율법을 통해 예배를 드림으로 영생을 약속받았지만 이제는 진리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으므로 모든 예배는 율법의 원리인 짐승의 피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원리 따라 예배해야 하는 것이다.(25-26“....”) 우리 성도들은 예배를 드릴 때마다 “내가 그로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4:27-30>

 

음식을 사러갔던 제자들이 돌아옴으로써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는 중단된다. 돌아온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낯선 여인과 대화하시는 것을 보고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러나 자신에게 마실 물을 청하신분이 메시아임을 깨달은 여인은 지체하지 아니하고 자기 마을로 달려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그 소식을 전파하였다.

 

1. 본문에서제자들의 훌륭한 믿음을 볼 수 있다.(27절“ . . . . . ”)

당시 유대 랍비의 교훈에 의하면 [아무도 길에서는 여인과 말하지 말며 자기 아내와도 말하지 말지니라]고 해서 여자를 매우 멸시했다. 여자들은 율법을 배울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 아마 예수님이 대화를 나누고 계신 여인은 사마리아 여인이었기 때문에 더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예수님께서 왜 하필이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시는가? 라고 묻지는 않았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지방으로 가시는 것부터 시작해서 사마리아 여인과 얘기하시는 모든 행위는 당시로서는 유대의 모든 관습을 정면으로 무너뜨리는 행위였기에 제자들이 질문할 수 있었고 예수님과 부딪칠 수 있었으나 그러나 제자들은 질문하지 않았고 의아해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왜 저렇게 하지?”라는 의아심이 아닌 확고한 신뢰가 있는가?

우리도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의심을 가지고 캐묻기보다는 오히려 인내하면서 주님의 응답을 기다려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고,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이다.

 

2. 여인의 훌륭한 점.(28-29절“ . . . . ”)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에게 물을 다라고 청하신이가 메시아임을 알게 되자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가서 복음을 전하게 된다. 마4:19~ 베드로와 안드레도 바닷가에서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즉시 예수님을 좇았던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 즉 마태가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도 세관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신앙하려면 버려야할 것들이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가장 귀하게 여겼던 세상의 것들과 세상의 가치관을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지니고 있는 세상의 것과 세상적인 가치관은 무엇인가?

 

3. 시급히 전파한 내용과 그 결과.(29-30“ . . . . ”)

이 사마리아 여인은 그리스도를 발견하고서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열정에 사로잡히게 되자 지금까지 자기에게 있던 수치심도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지금 자신이 해야할 일은 지금 자기가 발견한 메시아를 증거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여인은 복잡하게 예수님을 설명하지 아니하고 그저 단순히 “와 보라”라고 전하였다. 즉 와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과 만나서 대화해 봄으로써 예수님을 믿으라는 권면이었던 것이다. 가장 정확하고, 가장 올바른 전도방법이었다. 우리는 전도가 자기가 경험한 주관적인 신앙체험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수준이어서는 안 된다.

그 결과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

 

<요4:31-38>

 

제자들은 음식을 구해왔으나 예수님과 여인의대화가 워낙 진지했으므로 끼어들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대화가 끝나고 여인이 그 자리를 떠났을 때야 비로소 음식 잡수시기를 청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요4:32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고 하셨다. 이로 보건대 예수님께서는 우리와는 다른,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으셨음을 깨달을 수 있다.

 

1.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양식이란?(34절“ . . . . ”)

“양식”이라는 원어의 뜻을 보면 “음식물”이라는 말이다. 인간은 음식물을 먹음으로써 피로를 회복하고 힘을 공급 받는다. 뿐만 아니라 음식물은 사람에게 즐거움을 제공한다. 만일 음식물이 사람에게 기쁨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인간들이 하루 세 번 먹는 식사 시간은 고역의 시간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먹는 시간이라 즐거운 시간이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하루 세 끼를 즐겁게 먹으며 그래서 식사 시간이 기다려지는 것이다. 또한 이 먹는 양식을 얻기 위하여 열심히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다. 이 양식이라는 것은 육체만을 만족시킬 뿐이지 인간의 영혼까지 만족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만족시킬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며 인간은 하나님을 섬김으로 영혼의 만족이 성취된다. 예수님께서는 이 명백한 진리를 본문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오랜 여행을 하셨고 따라서 갈증과 배고픔을 느끼셨다. 그러나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고 그녀를 회심시키시는 동안 그 기쁨으로 인해 예수님의 모든 갈증과 피곤은 다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녀의 회심은 곧 예수님의 양식이 되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예수님만이 느끼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의 모든 봉사자들이 느끼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순간적인 것이어서는 안 되다.

모든 봉사와 섬김의 일을 하는 이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진리인 것이다.

 

2. 제자들은 안타깝게도 영적으로 무지했다.(32절)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동기와 의도는 좋았고 순수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도 그것을 매우 기뻐하셨으리라 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동기와 목적의 순수함이 예수님의 가려운 곳을 긁어드리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하려는 동기와 목적은 순수했던 반면 주님의 뜻에는 무지했던 것이다. 이것이 답답한 문제였다. 그들은 단지 무엇을 드림으로써 예수님의 피로를 덜어 드리려 했고 만족시켜 드리려했지 제자들은 진정 그 근원적으로 예수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몰랐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예수님을 향한 순수한 동기와 목적을 갖는다면 그것 자체만으로는 두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는 있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순수한 동기와 목적 그 두에 정확한 영적인 지식을 가져야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아는 분별력을 가져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분멸할 수 있으며 그것을 알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그 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아는 일에 부지런하고 힘써야 하는 것이다.

3. 제자들의 육적 시각과 예수님의 영적 시각의 차이가 있었다.(35절“....”)예수님은 지금...

4. 일하는 자에게는 보상이 따른다.(36절) -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시는 원리.(갈6:8)

 

<요4:39-42>

 

본문은 사마리아의 수가성 동네의 복음화에 관한 말씀이다. 수가성 동네가 복음화 된 것은 예수님을 만나 변화를 받은 한 여인의 열성이 있었다.

 

1. 복음의 열성은 연약함을 극복한다.

구세주를 만난 여인의 열정은 자신의 처지도 잊게 하여 그 여인을 수가성 동네로 나아가게 했고 또한 여인으로 하여금 메시아를 증거 하게 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였다. 여기서도 우리가 깨닫는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들어 쓰실 때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고전1:27)하신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전도의 방편으로 쓰신 것을 보세요. 유랑자 아브라함, 노예 민족의 히브리인들, 광야에 목동 모세, 소년 다윗, 포로로 잡혀갔던 다니엘, 등등 그 시대와 역사에서 가장 취약했던 부류의 사람들을 들어서 사용하신 것이다.

예수님도 왕녀의 몸을 빌어 태어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시골의 무명 처녀인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태어나게 하셨고, 사마리아의 첫 선교사도 그 동네에서 가장 불행하고 연약한 여인을 택하신 것이다. 왜 그러셨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의 부귀영화와 명예를 손에 가득 쥐게 되면 복음에 감격할 만한 열정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적으로 가진 것이 빈약하다고 하여도 실망하지 마십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대한 감격은 우리에게 있는 부족함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약한 것 때문에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었으니 자기의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후12:9-10)고 하면서 이런 고백을 하였다.

빌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2. 복음에 대한 열정은 부끄러움을 가려준다.(39절“ . . . . ”)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는 것은 이 여인의 불행하고 부끄러웠던 과거사의 한을 주님RP서 자신보다 더 깊게 할고 계신 것을 간증하는 말이다.(4:16-18) 솔직히 이 여인은 원래가 동네에서 멸시받던 사마리아인들 사이에서도 천대받던 부정한 여인이었다. 그래서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우물가에서 사람들이 나다니지 않는 한적한 시간을 틈타 남몰래 물을 길러 다녀야 할 정도였다. 그런데 이 여인은 그러한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만난 감격과 기쁨을 전파하려면 필수적으로 자신의 지난날의 부끄러운 그것을 동네 사람들에게 밝혀야만 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인은 그것을 이기고 극복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사도 바울이었다.

그는 회심 전에는 무수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고난 받게 하고 피를 흘리게 하였던 자신의 과거사를 함께 말해야 했다.(딤전1:12-15) 우리도 세상에 나가 전도를 하자면 자신의 지난날 약점과 수치스러움을 믿지 않는 이웃에게 밝혀야만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을 곤혹스러워할 필요가 없다. 과거가 어떠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발걸음은 세상 중에 가장 귀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인정하시기 때문이다.

롬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요4:43-54>

 

본문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던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신 두 번째 기적에 대한 말씀이다.

죽어가는 자신의아들을 갈리고자 주님께로 나아온 가버나움의 한 고관의 믿음과 그 가정을 구원,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기록하고 있다.

 

1. 이 사람은 예수님의 신유의 능력을 믿었다.(47-47절)

여기에 나오는 왕의 신하는 당시 갈릴리의 분봉왕이었던 헤롯 안디바의 신하였는데 그의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자 그는 주님에게 찾아왔다. 아마도 이 사람은 가버나움과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예수님의 기사와 이적에 대한 소식을 듣고 주님이라면 그의 아들을 고쳐주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34km나 되는 먼 거리를 달려서 주님께로 온 것이다. 47절“. . . . . . ”

이렇게 질병과 실패와 절망과 죽음에 대한 위협은 인간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게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 그러므로 나에게 약해지고, 불가능하며, 절망과 낙심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주어지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능력을 간구할 때임을 알고 신속히 간구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 이 사람은 믿음이 성숙하지 못했다.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주소서”(47절)

마8:8에는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라고 했다. 백부장은 주님께서 말씀으로만 하셔도 병이 나을 것을 믿었으나 이 왕의 신하는 주님이 자신의 집에까지 가셔야 병이 나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사람을 일률적으로 보시지는 않으셨다. 주님은 그가 하룻길을 달려온 것과 자기 아들의 병을 주님께서 고치실 수 있다고 믿는 그 믿음을 어여삐 여기신 것이다. 주님에게 인간의 ‘큰 믿음’과 ‘작은 믿음’같은 것은 그렇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 겨자씨만한 믿음만이라고 가지고 있다는 것을 더 중요하게 보시는 것이다.

 

2. 주님은 인간의 부족한 믿음에 대해서 배려해 주셨다.48, 50절“ . . . . ”)

48절의 이 말씀은 자기 집에 오셔서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는 왕의 신하를 보시고 하신 말씀인데 이것은 표적과 기사를 구하는 유대인들의 잘못된 믿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주님은 요20:29에서 어떤 표적을 보지 않고도 믿은 신앙이 복되다고 하셨다. 표적과 기사는 믿음에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믿음의 절대적인 근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믿음의 근원은 오직 [말씀]에 있는 것이다. 말씀이 알맹이라고 한다면 표적과 기사는 그 껍질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내려오셔서 .. 고쳐”달라는 왕의 신하에게 그의 아들이 살았다고 단언해 보이셨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주님의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나을 수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은 아이를 고쳐주시는 것과 함께 완의 신하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것에도 배려를 하셨던 것이다. 주님께서 의도하신 대로 왕의 신하는 주님의 그 말씀을 믿고 돌아갔던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아도, 우리 손에 만진바 아니어도 주님의 말씀만 있어도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셔서 역사하시는 주로 믿습니다.

 

 

 

<요4:43-54>②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성에서 이틀을 유하신 다음에 다시 갈릴리로 향하여 가셨다. 갈릴리 가나에 이르러서 마침 왕의 신하의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된 것을 고쳐주신다. 그당시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자신의 병든 아들을 고쳐달라고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들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는 사회적인 지위나 체면을 무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는 아들을 죽음에서 건져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학식이나 세상에서의 소유와 지위 등이 주님과의 관계에 끼어든다고 한다면 신앙의 연조에 상관이 없이 주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할 수 없는 것이다. 혹시 지금 나는 예수님과 나 사이에 온전한 신앙 말고 다른 것이 끼어들어있지는 않는지 점검하고 만일 다른 불순물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제거해야만 주님의 은혜, 그로인한 기쁨과 감격을 다시 회복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오늘 본문에 보면 병든 아들을 둔 왕의 신하인 이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예수님 앞에 나왔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하였다.(50절“ . . . . ”) 세상과 자신을 극복한 것이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

 

1. 병든 아들이 살아났다.

요4:51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왕의 신하가 주님의 말씀을 믿고 가버나움으로 향하여 가다가 자신에게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허겁지겁 오는 종들로부터 아들이 나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놀아운 사실은 병들어 죽게 되었던 아들이 고침 받은 시간이 어제 주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고 말씀하신 그 시각에 이루어진 것을 알았다.(52, 53절)

보세요. 세상과 자신의 욕망을 제거한 사람의 순수한 믿음의 결과를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른 믿음, 온전한 믿음의 사람에게 언제나 최선의 처방을 내려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2. 온 가족이 구원을 받았다.(53절“ . . . . ”)

주님께 나아가기가 어려웠던 세상의 것들을 극복하여 벗어버리고 아이의 질병으로 인하여 예수님께 나아가 주님의 말씀을 순수히 믿었던 이 사람의 온 집안에 주님의 구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아이의 질병을 통해서 이 신하는 주님 앞에 나아가게 되었고 예수님을 만난 이 신하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순수히 믿었고, 그 결과 자기의 가족 전체를 구원받게 한 것이다.

어쩌면 아이의 죽음 직전까지 갔던 질병이라는 것을 통해서 이 사람은 예수님께 나아가게 되었고, 예수님의 말씀을 순수히 받아들이게 하였다. 보세요, 온전한 믿음, 순수한 믿음은 모든 것이 선한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선한 결실은 구원인 것입니다.

 

 

 

 

 

<요5:1-9>

 

유대인의 명절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예루살렘 양문 곁에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38년 된 환자를 보시고 고쳐주신 내용이 기록된 말씀이다.

 

1. 양문과 베데스다.

양문은 예루살렘 성전 북동쪽에 위치한 문으로서 바벨론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중건할 때 건축한 문이다.(느3:1) 하나님께 드릴 제물로 쓰일 양들은 바로 이 문을 통하여 성전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베데스다는 바로 그 곁에 있는 연못인데 그 뜻은 ‘은혜의 집’, ‘자비의 집’이라는 뜻이다. 이 연못은 간헐천(시간을 두고 물을 뿜어내는)인데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할 때 그 시간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환자의 병이 고침을 받았다. 말 그대로 자비의 집이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로 이곳에 찾아오신 것이다. 무엇으로 오셨는가? 어린양으로 오셨고, 그리고 자비의 주인으로 오셨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 그곳은 ‘자비의 집’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가끔 물이동할 때만 자비를 베풀었던 ‘자비의집’을 이름 그대로 사실적 ‘자비의집’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이것이 양문과 베데스다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목적이다.

** 우리는 사실 이름에 걸맞지 않게 인생을 살아갈 때가 많다. 그래서 가끔 좋은 일도 하고, 또한 엉뚱한 일도 행할 때가 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항상 나에게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 내 마음에, 예수님 나의 인생에 함께하실 때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2. 38년 된 환자.

38년 된 병자는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림받고 잊혀진 존재이다. 심지어 그는 부모와 형제들로부터 잊혀져 버렸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로부터 버려진 그 사람을 관심을 가지고 남보다 앞서서 물이 동할 때 연못에 넣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 자리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죄를 범하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도 모르는 무디어진 채로 회개할 줄도 모르는 인생이 하나님 은총 밖에서 꼼짝없이 죽어가는 인생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또한 그 환자는 자기가 아픈 줄은 알았으나 자신이 아픔을 당해야 하는 원인은 몰랐다. 그 원인은 죄 때문이었다.(14절) 모든 현대인들이 많은 아픔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고침 받지 못하는 것은 38년 된 환자와 같이 원인을 모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사망과 고통의 원인은 바로 죄에 있는 것이다.

 

* 또한 그 병자는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 병자는 자신의 병을 근원적으로 치유해 주실 ‘온 인류의 의사’가 자신의 바로 앞에 있음에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현대인들의 두 번째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치유책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있음에도 알아보지 못하는데 문제의 원인이 있는 것이다.

오랜 고통의 문제의 원인은 인간의 죄에 있고, 그것을 해결해 주시고 고쳐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이시다. 그 예수님을 바로 아는 것이 문제의 완전한 해결의 길인 것이다.

* 예수님이 물으신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자신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말을 걸줄도 모르는 이 사람에게 예수님을 먼저 찾아오셔서 말씀해 주셨고, 그를 근본적으로 치윻 주신 지극하고 무한하신 사람의예수님이신 것이다.

<요5:1-9>

 

38년간 주변 사람들로부터 버려진 존재요, 잊혀진 존재로 살아온 환자, 그러나 그는 육체적인 고통만이 그를 안타깝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그렇게 고통스럽도록 아프게 하는 원인이 무엇인지조차도 모르는 것이 그에게는 더욱 큰 아픔이었다. 그토록 안타까운 그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6절 - “네가 낫고자 하느냐?”

몇 가지 이유를 말하는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명령하신다.

 

1. 일어나라.

이 명령은 병상을 박차고 일어나라는 명령이지만 동시에 범죄의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명령이시다. 불신앙과, 불순종의 죄의 자리에 더 이상 머물지 말고 신속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사람이 범죄에 빠져들고 그 맛을 보게 되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박차고 일어서지 못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나 그러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일어서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38년 된 이 환자와 같이 거기에 오래 앉아있으면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고통이요, 손해이며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다. 지금 거기, 불신앙과 불순종의 죄의 자리에 전혀 미련을 두지 말고 시간을 다투어 툴툴 털고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2. 네 자리를 들라고 명령하신다.

이 말씀은 과거의 청산을 의미한다. 과거을 깨끗하게 잊어버리라는 것이다. 과거와의 완전한 단절이 없으면 우리는 언제인간 반드시 그 과거에 의해 다시 유혹을 받게 되며 그 과거가 그 사람을 종으로 부리며 괴롭게 한다. 열 두 샘물과 70주의 종려나무가 있는 엘림을 떠나 신광야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출16:3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

에굽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을 완전히 청산하지 못함으로써 40년간을 광야에서 유랑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가나안에도 들어가지 모산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또 다시 그 사실을 느끼는 것으로만 그치겠는가?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 과거의 모든 것을 완전히 벗어버리시기 바랍니다.

 

3. 걸어가라고 명령하신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오직 예수님만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라는 말씀이다. 진실로 참된 그리스도인은 두는 물론 옆도 돌아보지 아니하고 오직 앞으로만 나아간다. 사도 바울은 고백합니다.

빌3: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요5:10-15>

 

본문은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신 것에 대해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반발을 설명한 내용이다. 그들은 변 나은 사람과 더불어 예수님까지도 안식일을 범했다고 하여 정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예수님은 병 고침 받은 사람을 다시 찾아가셔서 권면하시고 돌보아 주셨다. 우리는 본문에서 거짓된 종교인들의 실상에 대해서 알 수 있다.

 

1. 거짓 종교인들은 편협한 지식세계를 소유하고 있다.

당시 유대 종교인들은 38년간이나 지긋지긋한 병마에 시달리다가 회복된 그 사람을 향해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 하니라”(10절)고 책망 했다. 어쩌면 그들은 이 사람이 조금 전까지도 38년간이나 중환자였다는 사실을 몰랐을 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비판은 너무나 잘못된 것이다. 안식일에 고의로 일을 하는 것을 금지하신 하나님의 계명에는 그 배경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의 일만 쉬셨지 구속적 섭리의 사역, 즉 사랑, 자비, 심판은 계속하시는 것이다. 또한 주님께서는 안식일의 의의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막2:27) 제정하신 것이라고 하셨다.

다시 말씀을 드리자면 성도들이 예수님의 구속의 은총으로 인해 누릴 영혼의 안식과 장래 천국에서 향유할 영언한 안식의 모형으로 선민들에게 안식일 계명을 주신 것이다. 그런데도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와 같은 성경적 배경과 계명의 정신을 상실하고 문자적인 의미에만 집착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뜻과 정신을 외면하고 단편적인 교리나 법에만 연연하는 것은 우상숭배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어느 교파의 특정한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한다든지 그리고 나의 신앙의 체험과 공로를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고 자랑하고 있지는 않는지 깊이 반성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는 영적으로 너무나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2. 한 마디로 잘못된 종교인들은 어리석은 자들이었다.

긴 세월동안 질병의 고통에서 고치심을 받은 이 사람은 기쁨에 들떠 있다고 계명을 범하여 이제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음을 알고 아마 얼굴이 사색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설명했다. 11절 “ . . . .” 이 사람의 해명으로 인해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그가 38년간이나 폐인이었다는 것과 하나님의 은총으로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1) 그와 같은 일에 감사와 찬양은커녕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12절)고 하면서 오히려 송사하고 정죄할 일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들에게서 진정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연민을 조금도 발견할 수가 없다. 2) 또한 똑 같은 환자를 놓고도 주님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시면서 동정을 보여주신 반면 그들은 “누가 너더러 자리를 들고 가라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찾되 경배하려고 찾은 것이 아니라 정죄할 목적으로 찾은 것이다. 마치 아담과 하와처럼 모든 잘못을 이웃과 하나님께 전가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모든 사물과 세계를 오직 “그리스도의생명과 사랑의 법과 원리”를 따르는 눈을 가져야하는 것이다. 편협 된 인격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모든 세계를 경색시키고 분열시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해서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서 철저히 겸손하셨다. 13절“ . . . . ”

또한 불의 앞에서는 담대하셨다.(14절) 그리고 사명에대해서는 변함이 없으셨다.

겸손과 진리는 성도가 지녀야 할 생명이다.

<요5:16-18>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에 올라오신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시고 그에게 자리를 들고 가라고 명하셨다. 그런데 마침 그날이 안식일이었음으로 이 일에 대하여 반감을 드러냈다. 철저한 형식주의에 젖어있는 유대인들에게는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가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1. 유대인들의 안식일 개념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자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병자를 고치셨다는 이유로 트집을 잡아 주님을 핍박하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는 사람들이라서 그들에게는 일상 행활 하나하나에까지 적용해야 하는 세칙이 있었는데 이것은 랍비들에 의한 것이었다. 그 세칙에 있는 안식일에 관한 규례에 의하면 안식일에는 1km이상 걸어서는 안 되며, 환자가 누워있지 않은 침상을 옮겨서는 안 되도록 정해져 있다. 그런고로 안식일 날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후 그로 하여금 자리를 들고 가도록 명하신 것은 명백한 안식일 규례에 위반한다는 것이었다.

보세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 다.(막2;27)비록 그날이 안식일이었을지라도 죽어가는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행위는 지극히 정당한 행위인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 정신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정신인 것이다.

 

2.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안식일 개념

잘못된 안식일 개념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하여 비판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마12:1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고 하시면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 제도에 얽매인 존재가 아님을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셨다.(눅6:5)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다만 낡은 율법 조문만을 문제 삼았던 것이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눅6:9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안식일은 유대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무엇을 “하지마라”는 금지의 날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날인 것이다. 즉 안식일은 생명을 구하는 일과 선을 행하는 날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안식일 날 무엇을 안 할 것인가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 예배드리는 일과 선한 일, 즉 영혼 구하는 일에 열심히 참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3. 불신앙이 죄며 불순종이 죄악이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권위를 증거 하시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이라 하여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사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것을 보고서 예수님의 능력을 믿어야 했고, 예수님이 친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순종하여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일을 계기로 해서 그들은 예수님을 더욱 핍박하고 죽이고자 음모를 꾸몄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전통을 예수님의 권위보다, 말씀의 권위보다 더 우위에 두었기 때문에 메시아를 몰라보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도 이러한 죄악에 빠질 수 있다. 우리의 경험보다, 울의 이성이나 전통보다도 언제나 예수님, 예수님의 복음을 앞세우는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요5:19-23>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신성모독’이라는 명목으로 핍박하는 유대인들에게 더욱더 분명한 어조로 자신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이신지를 선언하셨다. 성자이신 예수님은 모든 면에서 하나님과 동등하시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것은 그의 겸손하심 때문이시지 결코 성부보다 한 차원 낮아서가 아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주님의 이러한 겸손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인간과 같은 존재로 어떻게 하든지 낮추려고 하였다.

오늘날도 유대인들과 같이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다. 결국 그러한 모든 것들은 사탄의 사주이다. 사탄은 처음부터(창3:5) 이간을 사주하여 하나님을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려고 하였다. 우리는 그런 사탄의 전략에 결코 속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어떠한 면에서 동일한가?

 

1. 의지 면에서 동일하심

19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여기서는 <보다>라는 단어가 이 말씀을 푸는 핵심이라 할 수 있는데 원어의 뜻은 ‘알다, 깨닫다, 이해하다, 관망하다.’의 뜻이다. 즉 아버지와 아들의 의지가 일치함을 나타내 주는 단어이다. 창세전부터 아버지와 아들의 견해는 상반되거나 차이를 드러낸 적이 없으시다. 창조사역과 구속사역을 비롯해서 극히 작은 일까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은 완전히 일치하신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조금도 그릇된 것이 없으시다. 19절“ . . . . ” 예수님께서는 완벽하게 자율적으로 말씀하시고 행동하셨으나 거기에는 조금도 하나님의 의지에 어긋나는 일이 없으셨다.

훗날 제자들이 성령님의 충만함을 입은 후 복음의 진리를 완전히 깨닫고 성경을 연구했을 때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모든 사역이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복종 그것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2. 지식 면에서 동일하심 (20절“ . . . ”)

“보이사, 보이시고”라는 단어를 잘못 이해하면 자칫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대하여 잘못된 해석으로 빠져들기 쉽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능동적이고 아들은 수동적이기 때문이며 이것은 간접적이나마 아버지와 아들의 위치가 차이가 있음을 입증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위치가 차이남을 드러내기 위한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님의 겸손하심을 드러내신 것뿐이다. 우리가 조금만 더 성경 말씀을 깊이 보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이셨다는 곧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비밀이 없으시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표현임을 알 수 있는데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라는 말씀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 사이에비밀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3, 주권 면에서 동일하심. (21절“ . . . . ”)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자유로운 주권에 대한 말씀이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요6:38-39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고 하셨다. 물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만 사역을 하셨다고 해서 주권 면에서도 수동적이신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아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 수동적 위치까지 내려가신 것 자체가 아버지의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주권적이시다.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요5:24-25>

 

본문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를 말씀하시던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말씀하시고 있다. 예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궁극적인 문제는 바로 영생에 대한 것이다. 본문말씀은 영생이란 어떤 것이며 영생을 얻으려면 인간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씀하고 있다.

 

1. 영생이란 무엇인가?

요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라고 말씀했다. “영생” 즉 영원한 생명이란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을 말한다. 이 생명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주어진다. 또한 이 생명은 영이신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으로서 영적인 생명이며 죽음이 없는 영원하며 끝이 없는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은 죽음과 심판으로부터 분리된 것이기 때문에 다시는 단절이 없는 지속적이며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2, 영생을 어떻게 얻는가?

1)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과 그 의도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마음과 그 의도는 곧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인간의 구원을 선포하시는 것 즉 그것이 곧 복음이다. 롬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고 했다. 인간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음을 들을 때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24절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동시에 그를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뜻이다. 그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얻게 하고 그것은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게 한다. 골3:3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고 했다.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3) 영생을 얻는 시기는 바로 지금이다.

요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시기는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그것을 믿는 때이다. 영생은 사후에 얻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있는 동안에 얻는 것이며, 이 영원한 생명은 거듭날 때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은 나중에 잘하려고 해서는 안 되며 지금 잘해야 하고, 오늘 잘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영적인 생명이 물질적인 세계에서는 완성될 수 없는 것이므로 이 생명은 우리 주님이 재림하실 때 비로소 부활과 함께 완성되는 것이다.

 

3. 영생의 결과 -24절

심판을 면제 받으며, 죽음에서 격리 됩니다. 심판에 이르지 않는 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죽음과 함께 하나님께 심판을 받되 영생을 얻는 사람은 예수님의 보혈로 영생의 권리를 확보하였으므로 영생을 보장받았으므로 심판과 정죄를 받지 않는 것이다.

<요5:26-29>

 

본문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자기 변증적 의미를 담고 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말에는 하나님의 권세가 있으므로 인생들이 이 ‘음성’에 대한 태도 여하에 따라서 현세와 내세의 운명을 이 땅에서 결정 받게 된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오실 수 있다는 사실은 유대의 유일신 사상과 헬라의 극단적 이원론적 사고로는 수용하기 어려운 일이며 합리주의적 사고에 젖은 현대인들에게는 더욱더 그것이 신화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믿는 자”만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강조한 것이다.(요20:29-31)

 

1.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권위가 있으심을 변증하셨다.(26절“ . . . . ”)

즉 예수님은 하나님과 그 질과 양적으로 동등한 생명을 소유하셨다고 증언하신 것이다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고 하셨다. 다시 말하자면 철학적인 사고를 가진 이방인들의 행복과 세계 질서의 원천이 생명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너희들이 꿈과 희망을 가지고 철학적 세계에서 찾고자 하는 그 “생명”이 바로 나요, 너희가 보고 만질 수 있도록 나타난 영원한 생명이 바로 자신]이라고 증언하신 것이다. 예수님 안에는 우리 인생들이 희구하고 필요로 하는 삶의 모든 꿈과 능력과 지혜가 집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제 다른 곳에서 ‘행복의 파랑새’를 찾고자 노력할 필요가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나의 삶의 생명의 음성으로 여겨야 할 줄로 믿습니다.(25절)

 

2. 예수님께는 심판의 권세가 있으심.(27절“ . . . . ”)

이 말씀에서 “인자”와 “심판”이라는 개념은 유대인을 위한 변증이다. 우리 한국인이 단군신화를 알고 있듯이 유대인들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 즉 “인자”를 고대하고 있었다.(단7:1-7) 한 마디로 [하나님의 권세를 지닌 인간적으로 오실 신적 중재자]라는 개념이다. 유대인들은 악하고 슬픈 역사의 연속으로 인해 오직 하나님만이 불의한 강대국을 ‘인자’를 보내 심판하시고 자신ㄷ의 이스라엘을 높여주실 분이라고 믿었다. 이 사상이 바로 구약에서 결론을 내린 “종말론적 역사 철학”이다. 그러므로 선민인 자신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은 바로 희망이요 생명과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상고하시면서 예수님은 [내가 바로 너희가 그토록 기다리던 희망의 인자 곧 구세주이니 내 말을 들으라]고 변증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RP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으며 조금도 죄 될 것이 없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것이 하나님의 품격을 격하시키거나 모독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것이다.

 

3. 주님의 음성을 듣는 자에게는 운명을 바꾸어 주심(28-29절“ . . . . ”)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들에게는 심판의 부활로

 

 

 

 

<요5:30-39>

 

예수님은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과 하나이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심을 분명히 밝히셨다. 이것은 거짓이 없는 사실이었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입증해줄 증거자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분문에서 자신의 증거자들을 소개하시고 있다. 유대 율법으로는 두 사람의 증인만 세우면 되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이상의 증인을 세우심으로써 자신에 대한 증거를 완벽히 하신다.

 

1. 예수님은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무능자임을 말씀하셨다.

요5:30 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고 하신다. 예수님은 어느 누구보다도 위대한 능력자이시다. 예수님이 가지신 능력은 절대적이며 감히 어느 누구와도 비교될 수가 없으시다. 그런데도 본문에서 주님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은 절대 무능력자이심을 고백한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자면 자신의 모든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시라는 겁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성도들은 자신의 공로나 업적을 자랑해서는 안 되고 오직 겸손해야 할 것을 예수님께서 친히 겸손의 본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러한 교훈을 받은 베드로는 우리에게 재차 이렇게 말씀했다.

벧전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우리는 철저하게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야 중단되지 않는 축복을 주십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더욱 크게 사용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에 대한 증거자들은 누구인가?

1) 첫 번째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자신의 증거자로 소개하신다.(33절“ . . . . . ”)

이미 알려진 대로 세례 요한은 그리스도 앞에 보내심을 받은 엘리야로 왔다.(눅1:17) 세례 요한 자신을 겸손해서 이것을 부인했지만 이것은 예수님께서도 인정하신 사실이다. 마11:13-14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2) 또한 예수님의 사역이 증거 한다.

마7:20에서 예수님은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 36절 " . . . . "

사실 오늘날 세례 요한의 증거가 없더라도 예수님의 행적만 보아도 예수님이 메시아시라는 것은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완벽한 삶을 살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는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들을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하셨으며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향기(고호2:15)요 복음의 편지(고후3:3)라고 하였다.

 

3) 또한 하나님이 증거 하시고 성경 말씀이 증거 하였다. (37절, 39절 “ . . . . ”)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 경우에라도 흔들리거나 약해져서는 안 된다. 이 복음의 말씀위에 굳게 설 때 세상의 악한 권세가 이기지 못하며 능히 승리하는 것이다.

<요5:40-47>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 앞에서 작 변론의 증거로서 하나님 아버지와 세례 요한 그리고 자신의 이적과 구약 성경을 예로 설명하셨다. 그리고 유대인의 현재 신앙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가르쳐주셨다.

 

1.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40절“ . . . . . ”)

이 말씀은 유대인들은 성경을 열심히 읽고 있으나 정작 성경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바르게 신앙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는 것은 어떤 훌륭한 교육적 한경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은 인간의 노력 이전에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엡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아무도 자랑치 못하게 하려함이라 고 하였다.

유대인들의 예수님께 대한 무관심은 지식이 모자라서거나 이해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한 마디로 의도적인 것이었다.

 

2. 그들은 율법을 많이 알고 열심히 읽으면서도 정작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요5: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그들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결핍되어 있었다. 그들은 전해오는 전통과 율법은 사랑하였으나 그 율법의 제공자 되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말로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였을지는 몰라도 진정 마음과 생활로는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오늘날도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종교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예수님께 대해서는 태만하며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결핍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면서도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은 영접하지 않으면서도 각각 자기 이름을 내세우면서 나타나는 거짓 그리스도의 말은 경청했다. 43절“ . . . . . ” 오늘날도 우리 주변에는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거짓 고사들과 이단들이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미혹되어 신앙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대개 성경 말씀을 경시하고 주관적인 경험과 환상이나 또는 신비한 능력을 좇다가 잘못되는 경우가 많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 말씀 듣고서 말씀대로 준행하며 그 말씀의 반석 위에 신앙의 기초를 세울 때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3. 유대인들은 스스로 영광을 취함.(44절“ . . . . ”)

유대인들은 자화자찬에 빠져서 스스로를 과대평가함으로써 그리스도를 과소평가하였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세상의 영광을 얻고자하는데 있었다. 유대인들의 그러한 행위는 예수님의 행위와 반대되는 행위인 것이다. * 41절 “ . . . . ” 예수님은 한 번도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취하시지 않으셨다.

오늘날 우리들은 사람들로부터 칭찬 받기를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볼 때 하나님은 우리의모든 것을 책임지시고 축복해 주시는 것이다.

<요6:1-7>

디베랴 광야에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일은 너무나 유명한 사건이다. 본문은 이 기적이 있기 전 주님과 빌립이 대화를 하신 내용이다. 많은 군중들은 먹을 것을 준비하지도 않은 채 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을 보려고 모여들었다. 마침 식사를 해야 할 시간이 되어서 예수님은 빌립에게 “우리가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고 물으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빌립을 시험해 보시기 위한 질문이었다. 주님은 본문에서 이런 어려운 상황을 만났을 때 제자들이 어떻게 봉사할 수 있는가를 교훈하시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봉사할 대상은 누구인가?

1.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군중들이다. (1-2절“ . . . . ”)

여기에 모인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래셨다가 그들이 돌아올 때에 많은 무리의 사람들이 주님이 계신 곳을 알고 찾아온 사람들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목자 없는 양”(막6:34)처럼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 중에서 병자들을 고쳐주시며 또 여러 가지로 그들을 가르쳐 주셨는데 이 군중들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있는 모든 인간, 즉 영육 간에 예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아야 인생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님 앞에 모인 군중들은 영적으로 병든 사람은 “말씀”으로 치유를 받았고, 육체의 병은 신유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았다. 예수님은 그들의 영육간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셨다.

요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그냥 돌려보내시지 않으신다. 비로 그 수가 오천 명이 넘는다 할지라도 주님은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으셨다.

 

2. 제자들이 봉사할 장소와 시간은

1) 광야(막6:35)

주님과 제자들과 군중들이 모여 있는 장소는 광야였다. 광야는 모든 여건이 부족하고 어려운 곳, 그래서 인간이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많은 이 세상을 상징한다. 거기서 인간은 생육하고 번식하며, 정복하고 다스릴 임무, 다시 말하자면 창조적이며 생산적인 임무를 수행해야 할 책임이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성도는 봉사와 섬김의 명령을 받은 존재인 것이다. 무엇으로? 주님의 이름과 권능으로.....

 

2) 봉사할 시간은 저문 때이다.

디베랴 바다에 밤이 오고 있었다. 날이 저물고 있었던 것이다. 밤은 죽음을 상징한다.

인간이 봉사해야 할 때, 그 영적인인 시각은 언제나 죽음 직전의 시간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 직전의 시각에 살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죽음이 오기 전에 우리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무엇으로?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주님의 이름과 권능으로..

 

 

 

 

<요6:8-13>

 

본문의 예수님께서 한 어린아이가 내어놓은 떡 다섯 개와 불고기 두 마리로 오천의 무리를 먹게 하신 이적 기사이다.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기적가운데 유일하게 4복음서 전부에 기록된 사건이다. 그만큼 이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주목을 끌었던 기적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인간의 능력과 예수님의 초자연적 능력에 대해서 깨달을 수가 있다.

 

1.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8-9절“ . . . . ”)

안드레가 궁중들 속에서 한 어린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주님에게 말씀드리면서 이것으로는 이 많은 군중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될 수가 없음을 아뢰었다. 5천여 명의 군중들에게 어병이어 그것이 어찌 양식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이것은 인간적인 것,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의 한계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들의 모든 노력과 업적을 다 합쳐도 인간들에게 구원을 줄 수가 없다.

 

2.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신 능력(10-11“ . . . . . ”)

눅9:14에는 그 5천명의 무리들을 예수님은 먼저 잔디 위에 50명씩 앉게 하신 다음에 떡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에 무리들에게 나누어주셨다. 또 고기도 그렇게 나누어 주셨다. 그래서 5천 명이 넘는 군중들이 다 먹게 하셨다. 예수님의 이 능력은 창조주로서의 능력, 즉 자연을 완전히 지배하신 기적을 증거 하신 것이다. 계산적으로 어림도 없는 보잘 것 없는 오병이어를 가지고 많은 무리들의 현실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이다.

 

3. 예수님이 주신 것은 풍성하시다.(12절“. . . ”)

예수님께서 나누어주신 떡과 고기는 무리들이 원하는 대로(11절) 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배부를 수가 있었다. 이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광야에서 만나를 먹은 사건과 같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능력이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실 때에는 질적으로는 최고의 것으로, 양적으로는 무제한 적으로 나타나시는 것이다.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있었던 가루와 기름이 그릇이 다할 때까지 끊어지지 사건(왕상17:15-)과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하심을 증거 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는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무제한적으로 충족시켜주시는 풍성하심이 잇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4. 그것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먹고도 남을 수 있게 주신 것이다.(12-13절“ . . . ”)

우리는 늘 인간적인 계산과 숫자적인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많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언제나 부족함이 없으신 것이다.

마19:26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고 하셨다.

인간의 한계적인 능력, 늘 부족하고 모자라기만 한 인간의 그것들로는 할 수 없는 그것들을 예수님께서는 하고도 남을 수 있도록 풍성한 은혜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요6:14-21>

 

본문은 두 가지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이적 때문에 주님을 따르려는 군중들을 주님께서 피하신 일과 폭풍우의 위기 속에 있는 제자들에게 바다 위를 걸어 오사 안심시키신 사건이다. 언뜻 보기에는 별개의 내용 같지만 사실은 두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첫째는 인간의 신앙 행로요, 둘째는 그리스도의 반응이다. 즉 떡을 보고 주님께 오려는 군중들의 세속 신앙과 주님의 말씀을 따라 가버나움으로 가는 제자들을 보게 된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첫째 무리들에게서는 떠나시고 제자들에게는 반대로 찾아가신 사건을 볼 수 있다.

 

1. 신앙인의 길에는 장애물이 있다.

1) 탐심이다.(14-15절“ . . . . ”)

15절에서 주님은 아신다고 했다. 예수님을 쫓는 군중들 중에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진리와 생명을 보고 주님을 좇는 것이 아니라 떡 때문에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먹고 거둘 만큼의 떡을 주시는 것으로 인하여 영혼의 배고픔을 잊을까 하는 배려 때문이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계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고 하셨는데 군중들은 이제 육체의 만족을 얻었으면 영혼의 배고픔도 발견할 수 있어야 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물질적인 은혜를 신앙을 유익하게 하는 방편으로 여기지 못하고 오히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교인’들도 있다. 혹시 우리에게 그러한 면이 있다고 한다면 신속하게 그것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신앙의 행로는 주님을 좇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자신의 탐심을 좇는 것이기 때문이다. [골3:5]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고 했다. 예수님은 인간의 탐심을 채워주시는 우상의 자리에 앉으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2) 다음으로 신앙의 장애물은 두려움 - 주변 상황에 대한 - 이다.

18절에 보면 제자들 또한 주님의 명을 받고 가버나움으로 건너가 어둠속에서 폭풍우를 만나 두려움에 빠졌다고 했다. 제자들이 주님마저 알아보지 못한 것은 환경에 대한 공포때문이었다. 요한복음에는 밤과 어두움에 대한 표현이 자주 나온다.(1:5,3:2,9:4,11:10...) 거기서 나오는 밤과 어두움은 주님을 떠난 이 세상 사람들의 영혼의 처지를 묘사하는 것인데 그것은 곧 죄악과 무지와 공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환경에 대한 공포감을 느끼는 것은 예수님을 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어려운 환경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려운 환경에서 예수님을 잊어버리는 일을 두려워해야 한다.

 

** 그러므로 이러한 장애물을 제거하지 않으면 15절의 말씀처럼 주님이 오히려 그런 성도를 피하시며 또한 우리는 그 장애물 때문에 주님을 배신하게 되는 것이다.

 

승리의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17절 말씀처럼 주님을 순종해야 하며 20절 말씀처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6:22-27>

 

예수님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뒤를 좇았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영생의 말씀을 믿고 따른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도 교회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으나 모든 교인들이 다 진실 되게 예수님을 생명의 구주로 믿고 따르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을 좇는 무리들 중에는

 

1. 맹목적인 열심히 좇는 사람도 있다.

24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몰라 당황하면서 예수님이 계신 곳을 찾아 헤매었다. 그들은 디베랴 일대를 다 찾아다녔으나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는 곳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배를 타고서 가버나움에까지 이르게 되었고 거기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물론 열심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신앙은 열정만가지고 되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 열정은 주님께 인정받을 수 있으나 바른 신앙에 기초하지 않고 그저 단순한 열심과 열정, 그것은 단지 자기만족에 불과한 것이지 신앙은 아니며 오히려 책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늘 점검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나를 위한 이기적인 만족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구원의 은총에 감사해서인지를 돌이켜 보아야 한다. 참다운 신앙은 나 자신의 만족을 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리는 데 있는 것이다.

2. 어떤 사람들 중에는 육신을 위해서 좇는 사람도 있다.(26절“ . . . . ”)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주님을 따르는 동기가 잘못되었다고 책망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떡 때문에 따르는 것이지 예수님이 메시아이시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루 전날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을 그들의 메시아로 믿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단지 눈에 나타난 현상과 또한 자기들에게 주ㅇ어진 떡에만 관심이 집중되어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얽매어서는 안 된다. 그러한 것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매사에 우선권을 하나님께 둘 때 자연적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인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정과 욕심을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을 박은 사람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딤후2: - 하나님의 법대로 경기하면 면류관이 주어지며 수고하는 농부에게는 곡식이 먼저 주어짐이 당연하다고 하였다.) 육신의 법칙을 버립시다. 그리고 오직 믿음의 법칙대로 살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예수님은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말씀하십니다.(27절“ . . . . . ”)

인간의 생명 속에는 물질적인 힘과 조직체의 운동, 그리고 정신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인간은 짐승과 같이 먹을 것이나 마실 것만 가지고 만족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그리스도인이 떡에만 관심이 집중 될 때 그의 삶은 인간다운 삶이 아니요 짐승의 삶이라는 것은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있어서 육적인 일보다 영적인 일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 썩을 육신의 것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세상의 일인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구할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주님께 늘 엎드려 이 양식을 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요6:28-33>

 

예수님을 찾은 무리들이 준미께 묻는 질문이나 대화의 내용은 매우 어리석고 천박했다. 그것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찾은 동기 자체가 신앙적 동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26절)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무리들의 질문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답변해 주셨다. 때로는 질책하는 어조로, 때로는 그들의 잘못된 것을 시정하시는 말씀으로, 그리고 미래에 대한 확실한 비전으로 가르쳐 주셨다.

 

1. 군중들의 질문은 무책임하고 불신앙적인 질문이었다.(28, 30절“ . . . . ”)

28절의 군중들의 이 말은 아직까지도 자신들에게 무언가 할 수 있는 능력이 남아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서 나오는 질문이었다. 이런 종류의 질문은 성경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행위로서는 하나님을 위해서는 물론 자기 자신을 위해서도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판명이 되었다. 십자가 고난을 앞에 놓고 밤을 새워 기도하시는 예수님 곁에서 잠에 빠져있던 제자들처럼 인간은 마음은 원이로되 그것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이 인간이다. 그리고 30절의 질문도 저들이 믿음의 근거를 얻기 위해서 하는 질문이 아니었다. 만일 표적이 믿음의 근거가 된다면 저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어야 했다. 왜냐하면 저들은 하루 전에 “어병이어”의 엄청난 기적을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질문은 참으로 무책임하고도 불신앙적인 질문임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군중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가지 자신들의 호기심만을 충족시키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도 본문에 나오는 군중들과 같은 사람들이 있다.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호기심과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한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은 기독교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가질 수 있을지라도 영생을 소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2. 군중들은 탐욕에 사로잡혀 있었다.(31절)

한 마디로 군중들은 처음부터 탐욕에 사로잡혀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신앙을 빙자하여 예수님으로부터 물질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군중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더 이상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다고 판단했을 때 단호하게 예수님을 버렸던 것이다.

 

3. 예수님께서는 그런 무리들의 질문에 대해서 답변해 주셨다.(29절“ . . . . . ”)

이 말씀은 진리를 선언하시는 대답이셨고 연약한 인간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하시는 말씀이셨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자기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 얻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무리들에게 예수님은 잘못된 그들의 지식을 수정해 주셨고 그리고 확실한 비전을 제시해 주셨다. 32-33절“ . . . . ”

더 이상 그들의 시선은 모세의 율법에 머무르지 않고 율법 너머에 있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는 말씀이셨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장처 생명 되신 예수님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주님만이 인간의 참 소망이요 생명이다.

 

 

 

<요6:34-37>

 

본문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생명의 떡이신 것과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히 버림을 받지 아니할 것을 말씀하신 내용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자신을 “생명의 양식”으로 비유하신 말씀에서 [성육신하신 생명]의 의미와 그 생명을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인 것과 이 진리를 무시하고 땅의 것만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34절)라고 원하는 것은 인간의 무지임을 을 알 수 있다.

 

1. 생명의 영식의 상징적인 의미

1) 삶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생명의 떡”이란 우리 개념으로는 ‘밥’이라는 뜻이다. 밥과 인생의 관계를 알면 이 비유의 말씀의 원 뜻을 알 수 있다. 사람에게 있어서 밥은 생명적 관계이다. 흔히 사람이 생활하는데 필수적인 것을 말할 때 의, 식, 주라고 한다. 의(옷)를 먼저 말하는 것은 동양의 체면 문화에서 온 것이고, 진정한 의미로 본다면 식, 주, 의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생명이 먼저요, 그 다음이 환경의 안전이요, 그 다음이 옷에 해당되는 문화적인 향유일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양식인 것처럼 예수님과 인간의 관계가 바로 이와 같다는 것이다. 인간에게 예수님이 어떤 조건적이거나 상대적이 아니라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절대적이요 무조건적이며 생명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신 분이라는 것이다.

 

2) 예수님은 모든 인간에게 꼭 필요하신 분이시다.

밥이 인간에게 계층과 인종과 취향과 사상을 초월해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같이 인생은 누구나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아야 할 존재들이다. 사람이 살려고 하면 자신의 입맛과 상황을 초월해서 밥을 먹어야 하듯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자신의 상황이나 형편 때문에 믿지 않아도 될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반드시 믿어야 한다

그리고 불신자는 돈으로 산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오직 믿음으로 살고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야 생명력 있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이생명의 양식이 되시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므로 우리가 생명의 양식을 먹으므로 구원 얻게 되었다.)

 

3. 생명의 양식을 먹을 수 있는 조건과 자격(36절)

예수님은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라고 개탄하셨다. 그러므로 영원하신 참 생명의 양식을 먹을 수 있는 자는 무조건적이요 절대적으로 “내게 오는 자” 즉 예수님께로 가야 한다. 밥상 앞에 가면 밥을 먹는 것처럼 무슨 절차나 조건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선 먼저 예수님 앞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있다고 한다면 *합당한 자격이 필요한데 생명의 양식 앞에서 [배고픈 자]가 되어야 한다. 즉 ‘의에 주리고 목 마른자’가 되어야 한다. 자가 지신의 의로 가득 채워져 있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으며 나사로 처럼 천국은 영혼의 거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 예수님께로 나가면 참 된 만족이 있다.(35절“ . . . ”) 만나를 먹는 자는 죽었으나 참된 양식을 먹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요6:38-40>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나름대로 존재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사람도 태어날 때 자기의 할 일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분명한 목적이 있으셨다. 본문은 예수님RP서 왜 이 땅에 오셨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1. 하늘의 보좌에서 내려오신 예수님.(38절)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본문의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정말 천하고 낮으신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이다. 행2:33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다고 했다. 천상의 영광을 버리시고 지상의 멸시와 수모를 감당하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능력의 오른 손으로 높여 주셨다. 하나님은 최고의 겸손을 보이신 예수님을 최고의 권좌로 끌어올리신 것이다. 우리 성도들도 겸손히 하나님나라와 교회를 섬길 때 우리도 지극히 높여주실 것이다.

 

2. 하나님의 뜻을 행하신 예수님

38절b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시면서 하번도 자신의뜻대로 행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시며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기도하심으로 순종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것이 이루어질 때 기뻐하고 감사하기보다는 인간의 뜻과 소원을 추구할 때가 많으며 사람의 뜻과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시험에 들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른다.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은 복 받기를 원하고 성공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수단으로서 라기 보다는 육신의 안일과 명예심에 근거할 때가 얼마나 자주 있는지 모른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순종의 본을 받아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좋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3. 예수님은 인간의 구원을 완전하게 하시는 분이시다.(39“ . . . . . ”)

이 말씀은 구원의 절대 완전성을 강조하시는 것으로서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는 자는 결코 버림 받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의 주도권은 인간에게 있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있기 때문에 더욱이 안전하고 확실한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 시부터 지금까지 택하신 자들을 보호하시므로 안전하게 인도하셨으며 지금도 성령님의 사역을 통해서 이 사역을 감당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을 목자로 비유하여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다.(시23:1-6)

시7:1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하여 건지소서 하였다. 우리가 하나님께 피할 때 비로소 영원한 보호하심과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으며 모든 위험으로부터 안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실 것을 믿습니다.

 

<요6:38-40>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목적을 말씀하셨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주님께로 오는 자를 보존하시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며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은 자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다.

 

1. 예수님은 영생을 주시려고 오셨다.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이것이 바로 진정한 목음이요, 기쁜 소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담처럼 하나님을 거역하지만 않는다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이 영원한 생명은 모든 사람에게 보장된 것으로서 오직 예수님으로서만 가능한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의 확실한 보장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세상의 유혹이나 요구에 미혹되어서는 안 되며, 영원하신 하나님나라에 기대를 가지고 사모하며 살아야 한다.

고후4:16-18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하였다.

구원하심을 받아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보장 받은 성도들은 이제 옛날과는 다른 가치관과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2. 예수님은 살리시는 분이시다.

마지막 날에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말씀하시는 마지막 날이란 최후 심판의 날을 의미한다. 계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라고 하셨다. 이 세상의 마지막 날 주님께서 심판의주로 오실 때 악인이든, 의인이든 모든 사람이 다 육체의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때 악인이 최후의 심판을 받아 지옥에 가게 되는 것과는 달리 어린양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은총으로 구원하심을 받은 성도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유업으로 받게 되는 것이다. 계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고 하셨다.

그리스도인은 부활의 확실성을 가지고 담대하게 신앙의 경주를 하여야 한다.

 

3.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베푸신다.

요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사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구원이 거의 유대인에게 한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신 후 구원은 유대인에게뿐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확산된 것이다. 이제 구원은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게 된 것이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신분과 형편에 관계없이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시2:8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고 하셨는데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열방을 유업으로 주셨다. 모든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고 이제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전 우주의 하나님으로서 찬양을 받으시게 된 것이다. 여기에 우리 성도들은 겸손과 감사함으로 오직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려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요6:41-45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것을 본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랐다. 이 때 예수님께서 새로운 기적을 일으키셨는데 그것이 곧 오병이어의 기적이다. 이 기적 이후에도 무리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의 뒤를 좇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믿음을 가지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표적을 보고 배부른 까닭에 따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때 예수님은 중요한 말씀을 하셨는데 [참된 기적은 오병이어의 기적이아니라 성육신의 기적]인 것을 가르치셨다. 다시 말하면 [진실로 백성들이 먹어야 할 떡은 육신의 만족시킬 떡이 아니라 사람의 영을 만족시킬 하늘로서 내려온 떡]임을 가르치셨다.

 

1. 하늘로서 내려온 떡은 우리가 먹어야 할 매일의 양식이다.

하늘로서 내려온 떡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무런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구약을 배경으로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매일의 만나였다는 사실이다.(출16:13-20) 마찬가지로 생명의 양식이 되시는 예수님을 우리들은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만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는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일의 만나를 먹어야 힘을 얻고 살 수 있었듯이 우리들도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힘을 얻고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2. 예수님은 겸손의 떡이시다.

인간의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은 하늘로서 내려오셨다. 하늘의 영광스런 보좌를 버리시고 내려오셨고, 유대인들의 말 그대로 ‘요셉의 아들’이 되셨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천하디 천한 목수의 아들이 되신 것이다. 한 마디로 겸손의 떡이신 것이다. 만일 예수님의 이 낮아지심이 없으셨다고 한다면 이 세상의 인간들의 구원은 있을 수가 없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높아지려고 하지 말고 철저히 낮아질 것을 요구하셨다. 왜냐하면 높아지려는 것은 세상의 법칙이고, 하늘의 법칙, 즉 하나님의 법칙은 영광을 버리고 낮아지는 자를 높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예수님의 뒤를 따라 자기를 비하시킬 사람들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3. 예수님은 희생의 떡이시다.

하늘로서 내려온 떡은 희생의 떡이다. 떡이 떡으로만 남아있으면 그것은 더 이상 떡이 아니다. 자신을 주어 먹게 할 때 비로소 진정한 떡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말씀하셨다.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마26:26) 자신의 일부를 주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 전체를 주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전체를 주셨는데 우리는 일부만을, 그것도 아까워하는 마음으로 드리고 희생할 때에도 그것이 너무나 억울하고 속이 상할 때가 너무나 많은 것이 사실이다.

 

 

 

 

 

 

 

<요6:46-51

 

본문은 육신적인 사고에 젖어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의심하고 불신하는 유대인들에게 주님께서 재차 신앙의 필요성을 강조하신 내용이다.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요한복음 특유의 변증적 논리를 이해하게 된다. 요한은 [생명의 떡은 무엇인가]를 다룬 것이 아니라 [왜 생명의 떡 되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가? 또 믿음의 분깃은 무엇이며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를 강조하고 있다.

 

1. 신앙의 본질을 말씀하셨다.(47절“ . . . . ”)

즉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영생을 누리는 삶을 살아간다는 의미이다. 당시 유대인들의 세계관은 한 마디로 극단적 세계관이었다. 외세로부터 자주 침략을 받은 그들의 세계관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인간의 역사는 악한 것뿐이다.] [인간 세계에는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이었다. 그 세계관은 그들의 신앙과 결합하여 [이 세계는 인간을 손으로 회복할 가능성은 없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뒤 엎으셔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꾸실 수 있다]는 극단적인 종말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한 종말론적 세계관을 가진 유대인들이 하늘 세계를 버리시고 이 세상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악만 존재하는 이 세상 속에서 진리와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더욱 납득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의 그러한 사상들은 오늘날 모든 불신앙인들의 보편적인 인생관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들은 허무와 비애, 모순투성이의 세계가 바로 이 세상이라고 여기며 그런 세상 그 어디, 누구에게서도 참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들을 한다. 어쩌면 그들의 이론과 주장이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고 하셨고,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라고 하셨다.

이제라도 그러한 이론과 주장을 버리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악과 불신만이 존재하는 이 땅에서도 진정한 기쁨과 희열을 맞보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만이 불신의 문제가 해결되고 참된 기쁨과 희열을 맞보며 살게 되는 줄 믿습니다.

 

2. 신앙의 필연성, 즉 예수님을 반드시 믿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하셨다.(49-50“. . . . ”)

[조상, 광야, 만, 죽음]이라는 단어는 모두 [인생의 내용]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의 모든 조상들은 죽었다. 세상에서 누리는 행복, 각종 문화적인 혜택과 사랑을 먹고도 그들은 죽었다. 왜 죽어야만 했을까? 그것은 인생 자체의 불의함 때문이다. 즉 만나는 광야에서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떡이지만 조상들이 그 거룩한 은총을 입고도 깨닫지 못하고 반역의 길로 가다가 멸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못 받은 것이 아니다.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고 하셨다. 그러므로 육체의 죽음은 불신앙의 열매라는 것이 성경의 진리이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결정체로 이 땅에 오신 생명의 떡 예수 그리스도를 반드시 믿어야 사람은 영생을 누리는 것이다.

 

3. 신앙의 의미를 말씀하셨다.(51절)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신앙을 먹는 것으로 묘사하셨다. 즉 영접의 의미한다. 신앙은 만지고, 생각하고, 아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 배고픈 자는 불평하지 않고 먹을 뿐이다. 신앙은 영접이고, 순종이며, 충성이다.(계2:10)

<요6:52-59

 

[육신의 떡]을 바라보고 따르는 군중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 “참된 양식”, “참된 음료”라고 말씀하시면서 믿음으로 먹을 것을 말씀하신 주님께서는 그 떡과 양식과 음료의 성질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47-51절에서 믿음이란 생명의 떡(예수님)을 먹는 것이라는 주님의 설명에 대해서 육신적인 사고에만 젖어있는 유대인들은 대부분 그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반발하였다.(52절)

 

1. 인자의 살(53절)

이 인자의 살에 대해서 다양한 하석이 있는데 그 당시 유대 종교와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 주변 배경의 상황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단7: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라고 했다. 유대인들은 구약에 예언된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실 하나님의 사자인 “인자”를 대망하면서도 정작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믿으려고 하지를 않았다. 그래서 이방 세계의 가장 초창기 기독교회 내에서도 육체로 오신 예수님을 부인하고 [주님의 육체는 환상일 뿐]이라는 이단들이 성행하기도 했던 것이다.

사도 요한은 요일4:2-3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고 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내 살을 먹어야 영생을 얻는다”고 하신 말씀은 [나를 육체로 오신 하나님으로 믿어야 영생을 얻는다]는 신앙의 본질을 강조하신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윤리적인 대상이나 어떤 모범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 오늘 내 삶속에 들어오신 절대자 하나님의 요구에 생명을 걸고 응답하면서 섬기고 헌신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인 것이다.

 

2. 인자의 피

불의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하신 것이 신앙이라면 그 교제에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피 흘림의 제사”로 죄를 속죄함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속죄의 개념을 유대인들은 동물을 잡아서 제사를 드림으로 이행해 왔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예수님의 피가 바로 인간의 죄를 용서받게 하는 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성만찬에 참여했다고 해서 만족할 수는 없다. 신앙이란 나의 유일한 속죄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대속의 피의 은혜에 매일 참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나의 불의한 옛사람은 주님의 죽으심과 함께 죽어버렸고 의와 영광을 얻는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실을 기억해야하는 것이다. 이 신앙이 있을 때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게 하는 참된 양식이요 능력인 것이다.

 

3. 그리스도와 연합(57절“ . . . . ”)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자신을 성육신하신 절대자와 속죄자로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생명과 사명으로 “살리라”고 하셨다. 살과 피로 맺은 관계는 어버이와 자녀의 관계요, 신랑과 신부의 관계, 즉 십자가 보혈을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맺은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는 바로 생명적인 관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의 생명을 다하는 그날까지 충성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요6:60-65>

 

예수님께서 주시는 모든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요 생명의 말씀이었다. 그것은 모든 인생들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반드시 필요한 말씀이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이 말씀이 주님을 따르는 많은 제자들에게 걸림돌이 되었다. 그들에게 이 말씀은 너무나 어려웠다. 그래서 이 가르침은 하늘의 백성과 땅의 백성, 참된 신자와 허울뿐인 신자, 영적인 인간과 육적인 인간을 갈라놓는 말씀이 되었다. 즉 가르침 자체가 하나의 연단이었던 것이다.

 

1. 시련은 참 신앙의 사람을 낳게 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이렇게 말했다. 60절“ . . . . ” 그러면서 제자들끼리 서로 이해되지 않는다고 수군거렸다고 했다. 아마 예수님께서 상당히 기분이 나쁘셨던 것 같다. 신앙에는 반드시 어떤 계기가 있다. 처음에는 누구나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 구원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며 그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도 결코 어렵지 않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믿음으로 구원의 문을 들어간다. 구원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지만 구원 얻는 것으로 믿음의 끝은 아닌 것이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구원 얻은 이후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대학교에 합격 한 것이 전부가 아니요, 대통령에 당선 된 것만이 다가 아니다. 문제는 그 후가 더욱 중요한 것이다.)

믿음은 구원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 이후에도 관계되는 것이다. 구원받은 이후와 관계되는 믿음은 곧 행동하는 믿음, 즉 예수님과 함께 살고, 예수님을 따라 살며,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며, 예수님의 명령 따라 살면서 예수님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 이것이 제 2차적인 믿음, 성숙된 믿음인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보면 많은 제자들이 성숙된 믿음으로 도약하기 위해서 말씀 안에서 주어지는 연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불신앙의 자리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믿기 위해 따라나서는 것으로만 그쳐버렸기 때문이다. 밭에 심는 것만으로 농사를 다 지은 것이 아니다. 잘 가꾸어야 한다. 많은 돈을 들여서 공부해서 학교에 합격하고 입학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학교생활을 잘 해야 한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오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 백성의 생활, 예수님 제자로서의 생활, 천국 시민이 알고 지키며 살아야 할 천국 생활을 잘하게 해야 하고, 또 그렇게 사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그래야 멸망당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상 받는 자리까지 이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잘 가꾸고, 예수님의 좋은 제자로서 훈련을 받으며, 천국 시민에 맞게 잘 살아서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상을 받으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우리는 모두 다 구원받은 성도이지만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 있고, 손해를 주는 것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며 말들을 하자 아마 예수님께서도 기분이 좀 언짢으셨던 것 같다.(교회에서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조용히 목사를 만나서 묻는다든지 해야 하지 뒤에서 자기 생각대로 그저 대충 짐작이 가는 것을 가지고 수군거리면 오해를 낳고 대부분 기분이 나쁘고 시험에 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로 그러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모르실리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63절“ . . . ” 잘못하면 이 말씀에 대해서 오해하기 쉽다. 인간은 영과 육이 서로 조화를 잘 이룰 때 온전한 인격체가 된다. 영이 없는 육의 인간은 있을 수 없으며 육이 없는 영의 인간도 있을 수 없다. 단 육적인 인간이라할 때 영혼을 무시하고 육신의 요구만을 만족시키는 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영적인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육신을 무시하는 인간이 아니라 육적인 욕구를 철저히 제어하고 육신을 영혼의 명령에 귀속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신앙의 사람은 바로 이러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 다함께 롬8:12-14절“ . . . . ”

<요6:66-71>

 

예수님의 영적인 교리에 대하여 많은 무리들이 불쾌감을 나타내며 떠나갔다. 한편 열 두 제자들은 예수님을 영생하는 말씀으로, 그리고 거룩한 자로 고백하고 남아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중에서 자신을 팔 자(가룟 유다)가 있음을 말씀하셨다.

보세요,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어도 어떤 사람은 아무런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 말씀에 큰 은혜를 받고 더욱 열심히 주님을 따르는 사람도 보게 된다. 본문 말씀에서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여 떠나갔으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말씀에 순종하여 계속 예수님의 뒤를 따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1. 예수님을 떠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떠나 물러갔다고 했다.(66절“. . . . . ”)그런 사람들은 요6:27 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요6: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여 예수님을 떠나게 되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자신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메시아가 아니라 자신의 살과 피를 희생하심으로 인류를 구원하시는 메시아임을 밝히시는 메시지였던 것이다. 인격적 수양을 위한 메시아,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리는 그들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지셔야 하는 메시아, 속죄의 죽음을 죽어야 하는 메시아를 따를 용기가 없어 모두 예수님 곁을 떠나간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경제적인 문제, 질병의 문제, 자기 운세의 문제 등 현세적인 욕구를 품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언제인가는 예수님을 떠나게 될 수도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이기적인 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의 은혜에 너무나 감사하여 세상에 속한 우리를 부인하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을 좇는 제자들은

1) 영생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곁을 떠나갔지만 예수님께서는 실망하지 않으셨다. 어차피 그들은 예수님의 곁을 떠날 인생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 옛후님께서 제자들에게 준엄하게 물으셨다.(67절“ . . ”)이때 제자들의 대표격인 베드로가 고백하였다. 68절 “........” 세상에는 많은 종교들이 있다. 그러나 그 종교 안에는 윤리나 도덕이 존재할 수는 있으나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생수인 영생의 말씀은 없는 것이다. 영생의 말씀은 오직 예수님께만 있는 것이다. 죄악으로 인한 공포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인생들은 오직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수를 마시고 영생의 축복을 맛보아야 하는 것이다.

2) 예수님을 주로 믿는 사람들이다.(69절)

그들이 믿었던 가르침은 예순ㅁ이 조상들에게 약속된 그 메시아이시며 메시아가 단지 사람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었다. 재자들의 신앙고백은 참으로 위대한 고백이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의구주로 믿는 신앙은 참으로 위대한 신앙인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가 될 때 우리는 그분의 종이 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분의 뜻에 따라 철저히 복종하며 죽을 때까지 충성해야 하는 것이다.

<요7:1-5>

 

디베랴 광야에서 5천명을 먹이신 후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돌아오셨다. 그리고 주님은 약 6개월 동안 지방의 사역을 중단하시고 갈릴리 지역에서만 활동하셨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유대인들, 즉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교권을 장악하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서기관과 장로들, 그리고 제사장들이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 중에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주는 일들로 인하여 주님을 죽이려했기 때문이다.(요5:16-18)

 

1. 자신들의 교권에 도전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 성장하신 나사렛, 공생애 기간 동안에 선교 본부였던 가버나움 등이 모두 갈릴리에 있었다. 뿐만 아니라 12제자 중 가룟 유다 말고는 11제자들이 모두 갈릴리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갈릴리 지방에는 유대인들 말고도 이방인들과 로마 군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들로 인하여 갈릴리 지역에는 예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선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는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에 대해서 무관심할지언정 죽이려고 핍박까지는 하지 않았다. 반면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인들, 특별히 교권을 장악하고 있는 계층의 사람들만 예수님과 제자들을 [율법을 알지 못하는 무리들](요7:49)로 저주했으며 결렬한 적개심을 가졌던 것이다.

 

2. 예수님은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보다는 복음을 필요로 하는 자들에게 가셔서

전파하셨다.

눅4:43-4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생명이 모두에게 필요하듯이 복음이 필요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복음은 받아들일 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는 복을 주심(계3:20)

 

 

 

 

 

 

 

 

 

 

 

 

 

 

 

 

 

<요7:6-9>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피해 갈릴리에서만 사역하고 계시는 예수님께 유대 명절인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주님이 행하신 기적들을 보여주실 것을 말씀하셨지만 주님은 “내 때가 아지 이르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즉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시간을 잘 아고 계셨다.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사는 우리들은 때를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1. 제자들의 때(6절)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이 말씀은 제자들은 언제든지, 어느 곳이든지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예수님처럼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이 세상을 살 수 있는 인생이라는 시간들을 주셨다. 우리는 그 인생이라는 시간을 사는 동안에 선을 행하며 살 수도 있고, 악을 행하며 살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주셨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인생의 시간에 악을 행하며 살아서는 안 되며 주신 인생의 시간을 선용하는 지혜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엡5:16-17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고 하셨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세월을 아껴 각자에게 주신 사명들을 성실하게 감당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때라는 말은 두 개의 단어로 사용된다. 하나는 [호라]라는 말로서 예정된 하나님의 시간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말씀은 그렇게 될 수도 있고,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가변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계획에 따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시간을 말한다. 또 다른 “때”라는 말은 [카이로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씀은 특별한 기회란 뜻이다. 이 시간은 어떤 일을 하기에 최선의 시간, 가장 적절한 기회라는 말이다. 이 시간은 기회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르는, 그래서 지금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의 시간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그냥 보내지 말고 지금이 가장 적절한 기회임을 알고 주신 기회를 최선을 다해 선용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의 때(8절)

요7: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말씀은 너희는 언제든지 명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갈 수 있지만 내게는 명절에 올라갈 적절한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십자가를 감당하셔야 할 수난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의 정하신 때를 기다리시며 거기에 맞추어 살아가셨으며 그 때가 되면 언제든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시며 살아가셨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때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때를 아는 지혜는 참으로 중요하다.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루어질 때가 있다.(전3:1) 예수님과는 달리 인간은 자기 운명의 때를 알 수는 없다하더라도 우주의 모든 사건이 자비로우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계획되시고 진행된다는 사실을 거기에 맞게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때로는 간혹 자신의 행복과 출세를 위해 하나님의 뜻이나 말씀과는 거리가 먼 성급한 결정과 섣부른 판단을 할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참다운 신앙의 사람은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시기를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 살아가는 사람이다.

<요7:10-16> 찬송 213장

 

형제들이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뒤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에 가셔서 명절의 절반 정도가 되어서야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고,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그 교훈에 놀라워했다.

 

1.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항상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맞추어 사셨다.(10절)

언뜻 보기에 예수님의 이 행위는 죽음을 피하기 위해 비겁한 행동을 하신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옳지 않다. 세상에는 죽음을 당당히 맞는 것이 최고의 용기일 때가 있는가하면 비겁하게 보일지라도 죽음을 피하는 것이 참된 용기일 때가 있다. 예수님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신 경우였다. 즉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당시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할 때의 죽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며 주님께서 우선 감당하셔야 할 더 큰 사명이 남으셨기 때문이었다. 만일 주님께서 그 사명을 감당하시기도 전에 죽음을 택하셨다고 한다면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만용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6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정하신 인류구원의 사명을 감당하시기 위해서 극구 자신을 숨기셨던 것이다.

 

* 또한 예수님은 참된 겸손의 본을 보이셨으며 참된 권위를 가지신 분이시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모든 사람들이 놀랐을 때 예수님을 말씀하셨다.(16절)예수님은 자신이 감당하시고 계시는 사역에 의해 당연히 영광을 받으셔야 함에도 극구 자기 부인을 하신 것이다. 자신이 증거 하시는 말씀은 자기 것이 아니고 자기를 보내신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참된 권위가 어디서부터 오는가를 분명하게 가르쳐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히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으로써 자신의 권위를 하나님께서 세우시게 하셨다.

오늘날 교회에는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드러내고 싶어서 안달인 사람들이 있다. 혹시 조금이라도 자기들의 업적이 감추어지면 상처가 되고 아픔이 되어서 교회를 시험 들게 하는 불쌍하기 짝이 없는 영혼들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이렇게 철저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는 겸손한 사람은 자기 업적과 영광을 스스로 세우지 않더라도, 그리고 누가 세우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곳이고, 예수님을 드러내는 곳이지 사람을 드러내고 사람을 높이는 곳이 아니다. 사람은 감추고 사람의 공로는 숨기는 곳이 교회이다. 저는 솔직히 목회현장에서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몸부림치는 큰 고민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를 드러내지 못해서 오히려 몸부림치는 사람들 때문이다. 저는 이것이 십자가이고, 저의 신앙이며 평생 풀어가야 고민이요 숙제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해 주시고 도와주세요.

이것이 저의 신앙정신이고 십자가이며 풀어야 할 숙제인 것은 성경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그렇게 지키라고 기록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을 성도들에게 가르치지 않을 수 없다. 만일에 저는 성도들이 그렇게만 한다면 온 세상을 다니며 자랑하고 하늘처럼 떠받들 것입니다.

 

[고전1:29]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했고

[고전3:21]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했으며

[고전13: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으며 그리고 야고보 선생은 [약3:14]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먹보다도 더 검은 사람을 드러내야 하겠는가? 아니면 그러한 사람을 흰 눈보다 더 희게 하신 예수님을 자랑해야하겠는가? 그리스도이은 가치관이 바뀐 사람들이다. 그리슫인의 참 된 가치는 오직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말고 감추십시다. 자기 업적과 영광을 스스로 세우지 말고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 세웁시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세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요7:17-21> 찬송 356장

 

예수님께서는 군중들 중에 주님이 가르치시는 말씀을 듣고 감동과 감화를 받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못하고 수군거리면서 의심하는 사람도 있는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하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그렇지 않은지를 구분할 수 있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자는 참되며 그 속에 불의가 없다고 하셨다.

 

1.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순수하여야 하며 바른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17절)

유대인들은 당시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핍박을 하였는데 그들이 동기가 선하고 순수하며 바른 분별력을 가졌다면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하기는커녕 예수님에게서 배우고 경배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동기가 선하고 순수해야 은혜를 받는다. * 세례요한은 많은 사람들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는데 군중들이 자신을 메시아로 생각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군중들에게 그는 말하기를 요1:26-27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고 하였다. 그는 오직 예수님이었다. 요한은 예수님께 대해서 너무나 순수하였고 바른 분별력을 가졌던 것이다. 제자 마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고 물으시는 예수님께 마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고 했다. 이 외에도 빌립과 나다나엘, 니고데모나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 등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본 사람들은 한결 같이 동기가 순수하였고 바른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의인은 의인을 알아보고, 현자는 현자를 알아보는 법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만나고서도 그를 메시아요 구세주로 알아보지 못했던 당시의 유대인들이 얼마나 죄에 젖어있는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또한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받을 때 과연 동기가 순수하고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있는가? 사탄 마귀는 우리에게서 순수함과 바른 분별력을 빼앗으려고 얼마나 많은 방해를 하는지 모른다. 그래야 예수님을 못 알아보며, 따라서 은혜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위선의 탈을 쓰고 예수님을 만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조금나중에라도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 순수한 동기와 바른 분별력을 잃지 않도록 바르게 깨어있으시기를 바랍니다.

 

2. 바른 신앙의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합니다.(18절“ . . . . . ”)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궁극적으로 성도는 두 부류로 나뉨을 알 수 있다. 한 부류의 성도는 하나님을 위해 일한다고 하면서도 악착같이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자기도 더불어 유익을 보며 손해나게 하지 않는 성도이다. 그런 사람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마저도 중간에서 자신이 가로챈다. 그들은 자기가 가장 하나님을 위하는척하면서도 사실은 * 또 한 부류의 성도는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성도이다. 그런 성도는 자신이 열심히 봉사하고 희생하며 섬기면서도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며 자기 공로는 인정하지 않으며 끝까지 자기에게는 무익한 종으로 남는다. 전자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리새인과 서기관이면 후자는 바로 예수님이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누구처럼 살겠는가? 벧전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고 하면서 자신의 영광과 유익이 손해나는 것 같으면 상처받고 시험에 들어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시험 들게 하여 결국 하나님과 교회를 손해나게 하다 나중에 천국에 가서 하나님께 책망을 받으시겠는가? 아니면 나의 영광에 손해가 난다고 하여도 하나님과 교회의 유익을 위한 삶을 살 것인가?

<요7:22-24> 찬송 356장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것을 가지고 유대인들은 주님을 정죄하고 죽이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지키기 위해 안식일에도 하례를 행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안식일에 할례를 행하는 것이 정당하다면 온 몸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 사람을 치료하는 것도 올바른 행위라고 반박하시면서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로 판단하라고 말씀하셨다.

 

1. 말씀은 나의 삶에 연결되고 적용시킬 때 능력이 나타난다.(22절)

유대인들은 아기가 태어난 지 팔일 째가되면 할례를 행함으로써 하나님께 헌신예식을 행했다. 그런데 그들은 그 팔일 되는 날과 안식일이 겹치는 날에도 하례의 ‘일’을 수행했다. 비록 안식일에 일하는 것을 금하였지만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율법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유대인들에게 ‘법정신의 적용’자세를 주지시키신 것이다. 법은 올바른 적용이 수반되어야 법의 생명력이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도 나의 삶에 적용시킬 때 비로소 말씀의 진가를 맛볼 수 있는 것이다. * 사도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그 삶에 적용시켜 사랑과 믿음과 인내의 열매를 맺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다음과 같이 칭찬하였다. 살전2:13]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말씀의 적용이 빠져버린 신앙생활은 형식주의와 문자주의에 빠지게 된다. 하나님의 뜻인 말씀이 내 삶에 적용이 될 때 영생의 기쁨과 삶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그것을 수용할 때 진가가 발휘된다.

예수님은 이어서 유대인들이 어릴 e 배운 ‘모세의 율법을 폐하지 아니하려고’ 안식일에도 하례식을 한다면 삼십 팔면 동안이나 폐인이 되었던 사람의 온 몸을 건강하게 하는 것(23절“ . . . .”)이 왜 죄가 되느냐고 논증을 하셨다. 이 말씀은 그들의 자만과 강퍅한 심성을 지적하신 것이다. 어릴 때 배웠던 모세의 법정신을 지키려고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하는 일을 죄로 여기지 않는다고 한다면 마땅히 주님께서 병자를 고치시는 것을 발전된 신앙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그것을 배워야 하는데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렇지 못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 조상들의 종교적 전통과 율법의 지식에 잔뜩 자만해 있었다.(롬2:17-20) 우리의 신앙생활이 예전의 뜨거웠던 열정과, 그리고 지식과 체험에만 안주하고 자만한다면 자고로 그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영생의 진리는 말 그대로 영원무궁하다. 바울은 빌3:13-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고 했다.

우리의 신앙은 안주하는 신앙이어서는 안 된다. 혹시라도 나의 편견과 아집이 생기지 않도록 끈임 없이 새로워져야 하고 새로운 진리에 대해서 수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면 다 해결 된다. 구경하고 판단하며 평가나 하는 성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을 만나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3. 노여워해서는 안 되며 선한 목적을 가져야 한다. 23절“너희가 나를 노여워하느냐”

진리에 대해 노여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반역한 인생들의 타락한 모습이다. 아벨의 의의 제사에 대해 가인이 노여워했고, 다윗의 순정한 신앙심에 사울 왕이 노여워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의 거룩한 생활을 가이사가 노여워 했으며 교회의 진리성에 대해 사탄은 늘 분노 한다.(계12:17) 성경은 성도의 노여움이 하나님의 의를 방해하고 사탄에게 틈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 나의 영성과 삶의 목적을 늘 선한데 두시기 바랍니다.

 

<요7:25-30 찬송 427 장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자신이 오신 출처를 밝히신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기 때문에 그가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하나님)에게서 났기 때문에 그분을 아신다고 하셨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사람의 심령을 새롭게 하시고 생명력을 넣어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받고서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예수님의 지혜와 능력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불신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이 없었기 때문이다.

 

1. 그들은 계속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요7:27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자라나셨으며, 그의 부모는 요셉과 마리아이며,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본질적인 앎은 아니었으며 진정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은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그러나 그들의 편협한 판단과 편견은 예수님을 바로 알 수 없게 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았던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에 가장 나를 알아주고 격려해 줄 사람들이 오히려 멸시하고 조롱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낙심하고 실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여도 하나님께서는 인정해주시기 때문이다.

 

2. 그들은 예수님이 핍박을 받도록 관료들의 화를 돋우면서 예수님과 이간시켰다.

25-26절“ . . . . ” 유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당국자들의 화를 돋구기 위해서 당국자들을 경멸하는 발언을 하였다.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 고발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 예수가 군중들이 저렇게 감동을 받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혹시 당국자들이 이 예수를 진짜 그리스도로 아는 것 아닌가?] 라고 집권자들로 하여금 예수님께 대해서 원한을 가지도록 하는 충동적인 말을 하였던 것이다.

우리 시대에도 가장 악랄하고 비열하며 교묘한 범죄는 어느 정도 힘을 가진 자들의 마음을 충동질해서 진리를 외곡 시키며 미움과 원한을 가지도록 악을 유발시키는 행위인 것이다. 확실한 것은 그 악이 비록 성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도 그것은 겨우 삼일간인 것이다. 악을 유발하고 충동질하여 예수님을 드디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서 그들이 승리한 것처럼 보였으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3일 만에 부활하게 하셔서 오직 예수님이 영원히 승리하게 하신 것이다.

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 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 뒤를 따라가시는 성도님 여러분! 흔들리지 말고 더욱 굳건한 믿음, 확신 있는 신앙으로 주님이 주신 사명의 십자가를 잘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3. 우리의 참된 앎은 육적인 앎이 아니다.

28절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불완전하나마 자신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하신다. 그러나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참된 신앙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신앙해야 참된 신앙인이 되는 것이다. 요3:6-7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그리스도인의 모든 가치관과 분별력은 영적인 데까지 이르러야 한다. 육의 지배를 받는 교인이 아니라 영이 여러분의 육을 지배하는 성도가 되시기...

<요7:30-34 찬송 427 장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잡으려는 자들에게 아직은 자신의 때가 도지 않아G지만 때가 되면 자신은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이며, 그 때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이해하는 이들은 한 사람도 없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 성전에서 변론하실 때 주님 스스로를 하나님의 본체시라고 하였다.(29절“ . . . . ”)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한 마디로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도대체 시골 나사렛 출신의 약관의 젊은이가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께로서 난자, 곧 메시아라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참람 죄’를 적용시켜 잡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어찌된 영문인지 예수님께 손가락 하나 대지를 못하였다. 예수님께는 그들이 접근할 수 없는 위엄, 즉 예수님께는 신령한 능력이 있으셨는데 그 능력이 유대인들에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의 이 신령한 능력은 (1) 사탄의 세력을 무력케 하신다.

사탄은 언제나 악한 역사를 한다. 인간을 미혹하여 자기의 심부름꾼, 자기의 노예로 삼는다. 그러므로 인생의 각종 불의한 것들과 부정한 것들은 모두 사탄에 의해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사탄의 역사를 주님께서는 절대적인 능력으로 사탄의 능력들을 굴복시키시는 것이다. 고전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람은 시험에 들지 않도록 말씀과 기도로 늘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하며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2) 예수님의 신령한 능력은 진리를 통해 나타난다.

요8:32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주님의 그 신령한 능력은 진리에서 나온다. 또한 진리는 주님의 신령한 능력의 원천으로서 주님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셨다. 예수님은 진리를 선포하심으로써 사망의 권세아래 있던 수많은 인생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셨다. 진리는 생명을 얻게 하신다. 멸망 얻을 인생이 구원을 얻도록 이끌어주신다. 그러므로 인간의 참된 능력은 그리스도의 진리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지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때를 몰랐다.(30절)

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으나 잡지 못한 것은 주님께서 아직 십자가를 지셔야 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3:1-2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를 질서 가운데 이루어 가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지혜로운 삶은 하나님의 지혜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다.

 

 

 

 

 

 

 

<요7:30-34②> 찬송 427 장

 

7장에는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불신앙적인 태도와 그런 불신앙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30절에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고 하셨고 33절에서는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구속사역은 하나님의 계획대로 잘 진행되어져가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는 교만함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유대인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1.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이 말씀은 상당히 완곡하게 드리지만 사실은 매우 강력한 경고의 말씀인 것이다. 만일 약간이라도 귀담아서 이 말씀을 들었더라면 예수님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은 이 말씀이 얼마나 강력한 촉구의 말씀인가를 깨달았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표현을 부드럽게 하면서도 강렬한 경고의 말씀을 많이 하셨다. 그리고 이러한 말씀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지혜가 있는 성도들은 요란하고 구수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주님의 고요하면서도 강렬한 음성에 기를 기울인다. 하나님이 주시는 때는 무한하지 만은 않다.

마25:11-13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고 하셨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회를 그냥 놓치지 맙시다. 주님께서는 기다려주시는 은총도 주시지만 그 기다리심이 무한하지는 않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지금의 이 기회가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며, 그리고 나의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주님께서 선택하신 것임을 말씀하셨다.

33절에서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이 주님이 무력하시므로 불가항력적, 즉 예수님께서 무능하시므로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지셔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예수님이 주권적 선택에 의한 것임을 밝히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를 구레네 시몬과 같이 억지로 져서는 안 되고 예수님과 같이 주권적 선택에 의해서 감당해야함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벧전2: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고 했다. 억지로, 어쩔 수 없어서 겨우 일하는 성도가 아닌 능동적으로 자원해서 사명을 감당하시면 하나님께서 더욱 기뻐하실 줄로 믿습니다.

 

3.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말씀하셨다.(34절“ . . . . ”)

주님은 이제 자신이 가셔야 할 곳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그곳은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저하시던 곳으로서 영광스런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시는 곳이다.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를 앞에 두고 계신다. 십자가의 고통을 지나야 주님의 구원사역은 완수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심으로 이 땅에 속해 있는 백성들에게 하늘의 소망을 심어주시며 점사 후면 끝나버릴 육신의 목숨에만 집착하며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무한한 하늘의 생명에 대한 꿈을 불어넣어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되는 꿈이야 말로 인간의 가장 자랑스러운 꿈인 줄로 믿습니다.

<요7:35-37> 찬송 장

 

유대인들의 명절이 끝나갈 무렵이 되어서 많은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제사장 중 한 명이 지난 광야 40년을 지나오면서 반석에서 샘물이 터져 나와 갈증을 모면했던 역사를 호상하는 행사를 하였다. 그러한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고 하셨다. 과거 모세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주어진 물은 단지 육신의 갈증만을 해갈시키는 물이지만 자신이 주어 마시게 하는 물은 영혼의 갈증까지도 시원하게 해준다고 말씀하셨다. 인간의 영혼의 갈증까지 시원하게 해 주는 물이란 주님께서 인간을 구원케 하시는 복음을 말씀하는 것이다.

 

1. 복음의 문은 누구에게든지 열려 있다.

“누구든지” - 모든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이기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이기적인 성향에 의해서 사람을 판단한다. 그래서 만일 어떤 사람이 객관적으로 볼 때 선하고 똑똑한 사람일지라도 자기에게 해가 되거나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할 때는 그를 낫게 평가하며 그를 배척한다. 반대로 비록 객관관적으로 선하지 못하고 똑똑하지 못한 사람이라도 자신에게 유익이 있을 것 같으면 높게 평가하고 관용을 베푼다. 다소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개의 인간은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그런 잣대로 평가하지 않으시며 모든 사람에게 차별이 없이 대하신다.

[롬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하나님은 구원의 문을 누구에게든지 열어놓으신 것이다.

 

2. 그러나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세계 모든 사람이 구원에 초대되었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제한하시지는 않으시지만 인간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구원이 제한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사람이 무엇을 얻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은 그것을 얻는다. 그러나 구하고 찾지 않는 사람은 그것이 자신에게 아무리 필요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절대로 저절로 주어지지는 않는다. 구원도 마찬가지이다. 간구하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 물은 목마른 자에게나 귀한 것이요 생명과도 같은 것이지 목이 마르지 않는 자에게도 귀한 것, 생명과도 같은 것이 아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우리는 목마른 사람의 심령으로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구하고 찾으며 또한 그러한 심령에게 주셨을 때 갈급한 자에게 주어지는 생수를 마시는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야하는 것이다.

 

3. 구원의 유일한 무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 고 하신다.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그 문은 세계에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 문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행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고 했음. 이 보배로운 이름은 온 세상의 것을 다 가져도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갖지 못한 자는 가난한 자요, 세상 모든 것을 잃어도 예수님 이름을 가진 자는 부요한자인 것이다. 여러분은 세상의 어떤 부자보다도 부요한 자인 줄 믿습니다.

<요7:37-39>

 

본문은 예수님을 믿는 자가 장차 받게 될 성령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즉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는 것처럼 성령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신다.

 

1. 이 말씀은 우리에게 믿음생활을 촉구하신 것이다.

장막절, 수장절이라고도 불리는 초막절은 그들이 출애굽을 한 후 광야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반석에서 물을 내어 목마르지 않게 하신 은혜를 기념하는 명절인데 유대인의 3대 명절 중 가장 축제적인 명절이었다. 또한 ‘추수감사절’적인 의미가 있는데 유랑민족이던 그들이 가나안 정착 후에 난생처음으로 곡식을 거둔 그들이 하나님께 감격하며 추수의 즐거움을 누리는 절기이다. 8일간 지키는 명절 끝 날은 ‘큰 날’이라 하여 제사장이 실로암 연못물을 금주전자에 떠와 제단에 바치며 사12:3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는 구원의 언약을 낭송하고 찬송을 부르면 “물의 축제”는 끝나게 되어있었다. 바로 그 때 그리스도께서 “내게로 와서 마시라”(37)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너희 조상이 광야에서 목말라 위기에 처할 때 물을 주시던 분,

또한 가나안 정착 후에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단비를 주시던 하나님이 바로 나다]라는 의미인 것이다. 즉 이 장막절 명절의 주인이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이다.

 

2. 예수님이 주신 이 말씀의 의미.

“누구든지 목마르거든”(37절)이라고 하신 이 말씀은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지금은 그 말씀을 명절 축제의 날 유대인들에게도 하셨다는데 교훈의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즉 사마리아 여인이나, 또 화려한 축제 속의 거룩한 종교인들에게나 모두 다 예수님이 필요한 ‘목마른’자들이라는 것이다.

인생의 행복이라는 것은 마치 혼인 잔치집의 술 항아리처럼 쉽게 바닥이 드러나는 것이다. 인생의 권세는 성전에서 비둘기와 돈을 바꾸어주던 유대인들처럼 오염되었다. 또한 당시 의미를 잃어가는 유대 율법은 바닷물처럼 갈증만 더해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생 자체를 만족함이 결여된 “물을 저축하지 못할 웅덩이”(렘2:13)라고묘사하신 것이다. 본문에서 “누구든지”라는 예수님의 이 요청의 말씀은 이 세상의 모든 인생들을 향하신 촉구의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과 그 영원하신 진리를 외면한 방랑자들의 생활구조와 내용 속에는 속 시원한 생명수가 있을리 만무합니다. 오직 요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 안에서만이 목말라하는 인생들이 참된 구원의 생수를 마실 수 있는 것이다.

 

3. 예수님만을 따라가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나를 따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단순이 예수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라는 말씀이 아니다. 먼저 그것은 세상을 포기하라는 말씀이다. 먼저 세상을 포기하는 일이 선행되지 않고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 제자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세리라는 직책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한 마디로 말해서 세상과 육신을 향한 욕망을 포기하지 목하는 자에게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 또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자신을 위한 십자가가 아니었다. 온 인류를 위한 십자가였다.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가족과 이웃의 구원을 위한 전도의 십자가를 져야하는 것이다.

 

<요7:40-44>

 

“목마른 자는 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예수님의 초청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나름대로의 소견들을 피력했다. 오늘날도 “주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는 구원의 소식을 듣는 세상 사람들도 각각 자기 소신을 갖고 구원에 대해서 여러 가지 반응들을 보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러한 모든 평가들은 신앙적이기보다는 편견과 무지에서 비롯되는 악한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1. 예수님에 대한 고백은 확고한 신앙고백이어야 한다.(40-41“ . . . . ”)

어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선지자 중의 한 분이라고 보았는데 이런 고백은 수가성의 여인도 하였다.(4:19“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그런가하면 예수님에 대해서 메시아로 생각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확고하지를 못했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으로 확실하게 고백하는 신앙이어야 하는 것이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가실 때 제자들에게 예수님에 대한 세상의 평가를 물으셨다. 이때 제자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엘리야, 예레미야, 세례 요한 또는 다른 선지자라고 한다고 말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런 대답에 만족해하지 않으시고 이번에는 제자들 자신의 평가를 물으셨다. 이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고백을 하자 예수님은 흡족해 허시면서 베드로를 축복해 주셨던 것이다. * 예수님을 우리에게 기쁨이나 교훈을 주시는 분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을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고 만족을 주시는 분 정도로 고백해서는 안 된다. 세상에도 그런 부분이 어느 정도는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우리의 구주로 확고하게 고백할 때 비로소 칭찬과 축복을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2. 불신앙의 편견을 버리자.(42절“ . . . . ”)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위대한 진리가 선포되자 여기에 심한 반대와 박해를 받았다.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 알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 가난하고 천한 갈릴리 나사렛출신이라는 것과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라는 것뿐이었다.(요6:42) 즉 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 된 지식 때문에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믿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몰랐던 것이다. 무지와 편견은 참된 지리에 이르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 편견과 무지에 빠지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해서 바로 알게 하신 하나님의 은총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라고 했고, [신10:16]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고 하셨으며 [마28: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편견과 무지에서 건져주시고 구원받은 생명의 길을 가게 하셨으니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며 이 감격을 다른 사람에게 증거 하는 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예수님은 승리자시다.(43-44“ . . . . ”)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은혜의 말씀이었으나 그들은 분을 내었고, 예수님을 잡고자 하였다. 예수님을 대적하려는 궤계와 방해는 언제나 계속되었지만 한 번도 성공한 예는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염두에 두고 확고하고 담대한 신앙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님은 분명한 승리자시다. 그를 믿는 우리에게 확고한 승리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요7:37-44>

사람은 자세가 매우 중요하다. 자세에 따라서 그 결과가 많은 차이가 난다.

생수를 얻기 위한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

 

1. 목마른 것을 자각해야 한다.

“목마르거든”이라고 하셨다. 장막절 축제는 결국 육신적인 물에 대한 감사의 축제였지만 진정 영혼의 갈증, 진리의 갈증을 느껴야만 한다는 교훈이다. ‘나’와 ‘세상’에 대한 갈증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세계’p에 대한 갈증을 느끼는 자만이 예수님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2. 예수님께로 가야한다.

진리의 갈증을 해소하지 못한 세례 요한은 ‘자기’로부터 예수님께로 나아갔다.(요1:15)

안드레는 종교적 갈등을 채우지 못한고로 요한으로부터 예수님께로 갔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우리의 영혼에 대한 생수를 마시려면 세상에서 등을 돌리고 오직 그리스도께로 삶의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 또한 그렇게 했는데도 갈증이 나거든 ---> 방법과 자세를 바꿔야 한다.

 

3. 생수를 마신 결과

 

1) 풍성한 희열을 누림 (38절“ . . . . . . ”)

요한의 그 생수가 ‘생명’이라고 했다(39절) 거룩하신 성령님께서 인생의 육체속에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이다. 그 성령님은 세상 끝까지 성도를 진리와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다.

 

2) 자신이 샘터가 됨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하신 것은 성도의 생명력을 의미한다. 성도 자신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물을 쏟는 반석이 되며 베데스다 연못과 같은 존재가 된ㄴ 것이다.

 

 

 

 

 

 

 

 

 

 

 

 

 

 

<요7:37-44>

 

사람들은 무언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존재이다. 따라서 무엇에 사로잡혀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주님을 잡으러 간 산헤드린의 하속들이 빈손으로 돌아오자 바리새인들은 ‘너희들도 예수의 꼬임에 넘어갔느냐’고 꾸중을 하였다. 그 때 곁에 있던 니고데모가 사람을 벌하려면 먼저 그 사람의 말을 직접 들어보는 것이 순서가 아니냐고 말을 하였다. 참 빛이신 예수님과 어두움에 속한 인생들의 만남이 요한복음 7 장의 주제이다. 사도 요한은 7장을 마치면서 끝내 불신앙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생명의 빛을 발견하고 그 능력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 우리는 사랑과 진리에 사로잡혀 살아가야 한다.

하속들이 그냥 돌아오는 것을 보고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45절)고 다그쳤다. 우리는 주님의 위기와 수난이 십자가 사건을 전후로 갑자기 닥쳤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본문은 주님의 위기가 주님의 사역 초기부터 수시로 왔음을 말씀해 주고 있다. 요5: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요7:1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라고 했다. 그만큼 세상이 진리이신 예수님을 맹렬히 미워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이와 같은 미움은 하나님의 백성 된 우리들의 의식 속에도 잔재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간혹 참된 일을 하는 형제들을 용납하지 못하고 나보다 더 선하고 열심히 헌신하는 교우들을 인정하기를 꺼려할 때가 많으며 오히려 깎아내리려 할 때가 많다. 요일2:10-11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고 하였다.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 그러므로 우리는 수시로 우리에게 남아있는 작은 어두움의 찌꺼기마저도 어떻게 하든지 씻어버리고 오직 사랑과 진리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 주님의 향기가 되고 복음의 편지의 사명을 감당해야할 줄로 믿습니다.

 

2. 주님의 복음에 감동하며 살아야 한다.(46절“ . . . . ”)

산헤드린의 하속들이 감히 주님께 손을 대지 못하고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주님의 가르치시는 말씀 때문이었다. 바리새인들은 ‘너희도 미혹되었느냐?’고 질책하였다. 그런 바리새인들의 의식 속에서 살아가는 하속들이었기에 당연히 그들도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동일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말씀을 저하고 보니 그들의 생각이 달라졌다. 지금까지 들어본 교훈 중에 주님의 말씀과 같은 교훈이 전혀 없었다.

보세요.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지 못한 바리새인들은 하속들이 들었던 주님의 말씀을 [미혹]이라는 단어로 매도해 버리지만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하속들은 ‘이때까지 없었’던 진리의 교훈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복음을 접한 사람과 복음을 접하지 못한 사람과의 차이가 이렇게 큰 것이다. 복음을 접하지 못한 사람은 모든 사물을 자기 홀로 소유하고 자기에게 예속시키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살아가지만 복음에 감동하여 가치관이 바뀐 사람은 본문의 하속들처럼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우선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 주님께 사로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복음에 감동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8:1-8>

 

본문에서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율법대로 돌로 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예수님의 의향을 물었다. 이때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고 하셨다.

 

1. 사탄은 아무리 논리를 정당화 시켜도 거기에는 결코 소망이 없다.(3-4절)

그들의 이러한 행동은 어찌 보면 매우 율법에 충ㅎ실하고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사는 것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의도 속에는 너무나 비열한 음모가 숨어있었다. 유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명절인 초막절 기간에 적당한 구실만 있으면 예수님을 잡아서 처형하기 위한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7:45-52) 그러다가 마침 간음한 여인을 현장에서 붙잡은 사건이 발생하여 그들은 이 사건으로 예수님을 시험하여 체포할 구실을 마련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로 삼기 위해서 그 여인을 예수님 앞에 끌고 온 것이다.

* 보세요, 그들의 이러한 행동은 아무리 범죄 한 여인일지라도 죄인을 시험의 도구로 악용하는 잔인성과 감히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과 연계시킴으로써 예수님의 이미지를 추하게 만들어 파멸시키고자 하는 계교가 들어있었던 것이다. 잔인성과 간교함은 사탄의 특성이다. 사탄에게는 결단코 희망이 없다. 아무리 정당한 논리라고 해도 복음은 아니다. 그들에게 미련을 두면 안 된다. 예수님의 말씀은 논리를 벗어나며 그것을 초월한다.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이 생명의 복음이요 진리인 줄 믿습니다.

 

2. 시험하려고 하는 것은 반드시 함정이 있다.(6절“ . . . . ”)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시험 속에는 함정이 들어있다. 예수님께서 만일 그 여인을 율법에 따라 처형하라고 하셨다면 (1)그동안 세리와 창녀들을 용납해 오셨던 예수님의 언행을 실추시켰을 것이다. (2) 따라서 온유하신 구원자 예수님의 이미지에도 모순되게 했을 것이며 (3) 만일 예수님이 그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하셨다면 사형집행권이 없는 유대인이 로마의 권위에 도전했다는 누명을 씌워 고소할 조건을 삼았을 것이다.

또한 반대로 그 여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무죄를 선언하셨거나 변호하는 입장에 서셨다면 (1) 그것은 모세의 율법에 명백한 도전으로 신성한 율법의 적으로 정죄 하였을 것이며 또한 메시아라는 자가 (2) 간음을 장려하고 범법자를 보호한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을 시험하는 무리들은 너무나 치밀하고 계산 된 함정과 간악한 음모를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기도하셨으며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다. 말씀과 기도로 언제나 깨어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시험하는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조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절)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죄 없는 자만이 죄인을 정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간음할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자가 있거든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은 인간의 양심을 향한 화살이었다. * 또한 예수님은 “나도 너희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1절)고 하셨다. 율법은 정죄하는 것이지만 복음은 용서하는데 그 특징이 있다. 인간에게는 과거보다는 미래가 더 중요하고 어떤 죄인에게라도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이 더 중요한 것이다. 기독교의 본질은 정죄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유하고 새롭게 하는데 있는 것이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요8:9-11>

 

서기간과 바리새인들이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온 것은 사실 여인을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판단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무리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에서부터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그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곳에는 여인만이 혼자 남게 되었다. 여인은 예수님께로부터 중요한 사유의 말씀을 받았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1.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께로 더욱 가까이 나와야 참된 자유를 얻는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을 보면 :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라고 했는데 주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고 어른으로 시작하여 하나씩 둘씩 사라져버렸다. 마치 오순절에 사도들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처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얌심의 찔림을 받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도 예수님 앞에 나올 때 물론 마음에 찔림을 받은 것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들은 군중들은 하나씩 둘씩 예수님 앞을 떠나버렸지만 이유야 어떻든 이 여인은 예수님 곁에 남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여인은 온전한 용서를 받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많은 사람들은 얌심에 찔림 받았던 죄에 대해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해 버린 것이다. 왜? 주님 곁에 없었기 때문에...

사55: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55: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사55: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 주님을 가까이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가까이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좋은 것을 먹게 되고, 즐거움을 얻으며 영혼이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2. 끌려온 자에게라도 주님의 축복이 임한다.

9절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어찌하든지 예수님 곁에 있게 된 이 여인은 복된 여인이다. 이 여인이 처음에 비록 예수님 앞에 올 때는 차마 부끄러운 죄인이 되어 억지로 끌려서 왔지만 끌려올 때부터 여인은 절망의 구덩이에서 건짐을 받도록 되어있었다. 만일 그 여인이 예수님 앞에 끌려오지 않고 군중들에 의해 돌에 맞았다면 그녀는 죄 용서를 받을 기회마저도 없이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치욕스런 모습으로라도 예수님 앞에 나왔기 때문에 주님께로부터 사유의 은총을 받을 수 있었고, 또 많은 사람들 가운데 구원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억지로 끌려서라도 사람들을 주님 앞에 오게 할 수 있어야 하겠다.

 

3. 예수님은 장죄를 원치 않으신다.(11절 “ . . . . . . ”)

여인을 정죄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은 다 떠났고, 진정 여인을 정죄할 자격이 있으신 주님만이 여인과 함께 계셨다. 그러나 주님은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셨다. 그러므로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는 주님의 책망의 대상이 아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을 죄인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의인으로 여기셨다. 우리는 의인이 아니고 죄인이라고 고백하자. 주님은 우리를 강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요8:12-14>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4)고 하시면서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고 하셨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빛의 속성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사셨고 사람들에게 가르치셨으며 또한 사역을 감당하셨다는 말씀이다.

 

1. 빛 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인도하신다.

“빛”하면 동시에 떠오르는 것이 ‘어둠’이다. 그런데 세상은 곧 어두움에 비유되곤 한다. 그만큼 세상은 부패하고 복잡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도들은 살아가기가 어렵다. 이러한 암흑의 세상에 주님께서는 빛으로 오셨다. 또 요146 에서는 예수님이 자신을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였다. 즉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바른 길을 제공해 주시는 분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도자시다. 출13:22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는데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고 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불순종으로 늦어지긴 했지만 40년 후에는 가나안에 무사히 안착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이 불기둥과 같은 존재이다. 모든 인간은 예수님에게 인도하심을 받기만 하면 험난한 이 세상에서 어려움 없이 세상을 바로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2. 빛은 거짓이 없고 순수하다.

빛에는 어둠이 깃들거나 숨길 수가 없다. 빛은 모든 것을 밝히 드러내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을 숨기지도 않는다. 곧 예수님의 성품이 그러하신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사시면서 자신의 삶 전체를 그대로 드러내셨다. 당시 유대인들로부터 존경받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치부를 숨기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자신들의 삶과 신앙을 더욱 아름답게 꾸몄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면이 없었다. 예수님은 모든 면을 노출시키며 사셨고 사람들에게 위엄 있게, 거룩하게 보이시려는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런 순수하심이 오히려 예수님의 능력이었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고 하셨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따르면 거짓과 어두움이 없는 순수한 생명 그 자체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3.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 자체이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아가지고 돌아올 때 모세의 얼굴에는 광채가 났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의 얼굴에 가득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모세는 얼굴에 수건을 쓰고서 백성들과 대면하였다.(출34:29-35) 또한 초대교회 당시 다메석 도상에서 바울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났다. 그는 예수님의 얼굴을 쳐다보았을 때 예수님을 보기는커녕 눈이 멀었다.(행9:1-9) 빛은 바로 쳐다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존재이시다. 예수님은 죄인들인 인간이 함부로 마주 대할 수 없는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친구가 되시고자 이 세상에 오셨다. 이것이 복음이며 은혜인 것이다.

 

 

 

<요8:15-20>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증거 하심과 판단이 참되지 않다고 반박을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신적인 권위로써 판단하심으로 그 판단이 참되다고 가르치신다. 예수님의 판단은 육체를 따라 판단하는 바리새인들의 판단과 다르다. 요8: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고 하시면서 자신의 판단은 하나님 스스로가 하시는 참되신 판단이라고 하셨다.

 

1. 바리새인들은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예수님은 육체를 따라 판단하지 않으신다.(15절..)

판단 방법이 그릇되어 있으면 정당한 판단을 할 수가 없다. 그들은 겉모양, 외모만을 가지고 판단하였으므로 편파적이고 불공정 할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복음을 수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삼상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예수님은 아무도 육체를 따라 판단하시지 않으신다. 만일 예수님께서 육체를 따라 판단하셔서 구원하신다면 구원을 받을 자가 하나도 없을 것이며,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을 자도 없을 것이다. 우리들이 죄와 허물 가운데서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외모로 우리를 판단하시자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대해주셨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2. 바리새인들은 판단력이 없기 때문에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나 예수님은 진실하게 판단하신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참되심을 아버지 하나님을 들어 설명하시자 유대인들은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을 한다. 예수님의 제자 중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부활을 증언하는 다른 제자들의 증언을 일언지하에 묵살하고서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요20:25)고 하였다. 신앙인이라면 주님의 말씀과 하시는 일에 대한 의심과 불신을 버려야 한다. 주님은 본문에서 말씀하신다.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심이라”

세상 재판관은 혹시 권력으로 인하여, 혹은 상황에 따라 잘못 판단하는 경우가 있으나 예수님의 판단은 예수님의 판단은 진실에 근거하기 때문에 전혀 오류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 마지막 심판의 날에도 예수님은 엄정하심과 공의로우심으로 심판하실 것이다. 예수님의 판단이 진실하신 이유는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일하시기 때문이다.

 

3. 예수님은 참된 판단자, 우리들의 참된 증거자이시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어떤 주장이 인정을 받으려면 두 명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율법의 규정을 들어 자신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있으니 주님께서 하신 증거는 어느 누구로부터라도 인정받을 수 있는 증거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이러한 증거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증거 해 주실 것이다. 아울러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이 참된 증거를 받기 위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의 참된 증거자 되시는 예수님을 증거 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요8:21-24>

 

본문에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승천에 관한 예고와 불신자들의 종말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즉 예수님은 하늘에서부터 났기 때문에 이제 하늘로 가시게 되지만 땅에서 태어나 죄 가운데 있으면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죄 가운데서 죽게 된다는 것이다

 

1. 예수님의 본질

요8: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본질에 대한 말씀이다. (1) 예수님은 “위”에 계신 거룩하신 분, 즉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존재의 근원도, 그 성품도 인생들 위에 좌정하신 창조주요 섭리주이심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유대교의 율법적 형식 종교로도 알 수 없으며, 헬라의 철학적인 지혜로도 온전히 알 수 없는 분이심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오직 신앙의 사람에게만 알려지는 분이신 것이다. (2) 예수님은 영적인 존재이시다. 예수님은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고 하셨는데 이 세상의 본질은 ‘육’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유한하며 물질적이며 인간 본위적이다. 그래서 신마저도 그런 분으로 제한해 버리려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시다. 예수님은 참으로 무한하시고 모든 물질의 세계를 뛰어 넘으시는 분이시며 어떤 시간이나 공간에도 제약을 받지 않으신다. 따라서 (3)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계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유대교는 일신론 사상 때문에, 그리고 헬라 철학은 이원론 사상 때문에 하나님인 인간으로 오신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 현대인들은 합리적 사고 때문에 한 분이신 하나님 안에 세 인격자가 계신다는 것을 매우 난해하게 생각을 한다.

그러나 만일 삼위일체 하나님을 불신한다면 예수님도 한낱 ‘현자’에 불과할 뿐이며 인간의 구원자는 될 수 없으며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도 어떤 하나의 정신이지 능력의 주로는 역사하실 수 없는 것이다. 딤전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고 하셨다. 신앙은 논리로 믿는 것이 아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전능성과 성경의 증언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2. 예수님의 섭리

21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가리니”라고 하셨다. 사도 바울은 “엡4:9-10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래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라고 예수님이 인간 세계로 오신 하나님이시며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영이시지만 그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며 그 사랑을 고백하기 위해 우리 인간 세계까지 친히 오신 분이신 것이다.

인간사의 모든 오류와 불행과 죄악과 두려움은 바로 하나님과 그 사랑의 섭리를 알지 못하는데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요한은 믿음이라는 개념을 ‘안다’라는 개념으로 묘사한 것이다. 인생이 하나님을 알면 모든 것을 알게 된다. 예수님은 인간이 모르고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알려주시고자 오신 분이시다. 또한 24절에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 죽으리라”하셨는데 즉 예수님은 죄로 인하여 죽어야 할 인간에게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인간에게 보여주신 모델인 것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다. 이렇게 나타난 진리를 믿지못한다고 한다면 어떤 도덕 군자라도 이상적인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요8:25-30>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질문은 인생이 필이 한 번씩은 풀어야 할 질문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물론 세상의 학자, 혁명가, 정치가, 신학자 등 모든 사람들이 이 질문을 던진다. 지금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공생애를 사시는 동안에도 유대인들은 이러한 질문을 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치심과 기사와 이적을 보았음에도 그런 질문을 예수님께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대해 직답을 하지 않으셨다. 대답하실 말씀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에 대한 대답이 어느 면으로도 유익하지 못 되기 때문이었으며 그리고 그 질문은 대답하실 성질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삶, 가르치심과 행적은 이미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너무나도 분명하게 드러내 주셨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의 질문에 주님은 대답하실 말씀이 많았으나 대답을 하지 않으셨다.

 

1. 진리는 반드시 판명 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진리라는 확고한 자의식이 있으셨다. 그러므로 주님은 유대인들이 도전적인 질문에도 전혀 동요하시거나 당황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다소 독선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그들의 질문을 무시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 알”리라고 하셨다. 자신이 진리라는 확신을 가지셨던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존재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자연스럽게 모든 사람들에게 입증될 때가 있으리라고 확신하셨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마음에 선과 진리를 품은 자들은 외부적인 공격이나 상황의 변동에 흔들리지 않는다. 극구 자신을 변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진리는 세월에 의해 그 진리가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요8:32]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고 하셨는데 예수님이 주신 말씀 그대로 진리는 모든 오해와 불행으로부터 사람을 자유하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2. 하나님 아버지께서 밝혀주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을 끝없이 신뢰하셨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일임하셨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에만 열중하셨다. 이것이 사명자의 전형적인 삶이다. 사명 자는 먼저 자기의 삶을 하나님께 의탁해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의 삶에 관하여 지나치게 염려하고 걱정한다면 그는 진실한 사명 자가 될 수 없다. 그의 사명은 자칫 자기 삶을 위한 방편으로 전락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에만 전념한다면, 그리고 모든 이에 하나님의 일을 우선하여 산다고 한다면 그 사람의 삶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딤후2:6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3. 사명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실 때 함께 하신다.(29절“ . . . . ”)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의 입장에서 일하셨다. 항상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셨으며, 모든 일의 최우선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예수님과 함께 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함께하실 줄로 믿습니다.

 

<요8:31-32>

 

본문 말씀은 주님을 일시적으로 따르는 유대인들에게 제자의 삶을 말씀하신 내용이다. 우리는 흔히 본문을 이해하기를 자유에 대한 주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본문 말씀은 ‘자유란 무엇인가’를 말씀하기 보다는 [제자의 삶이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역설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1. 참된 제자의 조건은 무엇인가?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요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말씀하셨다. 진리를 알려면 진리 되신 주님의 말씀에 거해야 한다. 고전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 했다. 주님 말씀 안에 거해야만 진리를 아는 이유는 하나님의 진리는 인간의 ‘자율적 사색’으로는 온전히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리가 인격적으로 나타나신 분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을 통해서 기록하게 하신 요한복음 메시지 전체 주제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진리에 이르는 조건인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예수님의 말씀을 수용해야 한다.

요한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을 1:12에서 “영접”이라고 표현했다. 영접이라는 뜻은 먼데서 오신 귀한 분을 극진히 맞아들이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사람의 일시적인 필요에 의해서 예수님을 삶의 방편으로 삼는 것을 신앙이라고 할 수 없다. 영접하는 믿음이란 예수님의 나의 절대자로 내 영혼 깊은 곳에 모시는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을 필요에 의해서 나를 주장하도록 허용하기도 하고, 또한 내 삶에 때를 따라 적당히 적용하기도 하는 차원을 넘어서 주님의 말씀을 나의 절대적인 가치로 여기는 것이 신앙이며 진리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필요에 따라서 이렇게도 되었다 저렇게도 되었다 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절대적인 가치요, 절대적인 명령이 되어야 나의 삶속에서 주님이 인격적으로 역사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참된 능력과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시는 것이다.

 

2)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한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는 조건은 주님을 나의 삶의 절대자로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주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자를 ‘제자’라는 말씀으로 표현하시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①제자는 끝없이 배우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빌3:13-14에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했다. 하나님은 자만하고 노력하지 않는 천재보다는 겸허하고 늘 진리의 음성에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있는 둔재를 기뻐하시는 것이다. ② 제자는 스승의 말씀에 항상 착념해야 한다. 딤전6:3-4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난다고 했다.

상황과 시대의 변화에 따라 흔들려서 유다처럼 배반하고 데마처럼 변절하여 세상으로 나가버리고, 군중들처럼 야합해버리면 안 된다. 오직 주님의 말씀과 언약을 시대와 상황의 모든 영향력을 초월한 절대적 가치로 여기고 그 안에 살아야 하는 것이다.(요15:7)

<요8:31-32>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치심대로 살면 참 제자가 디고 진리로 인하여 자유 함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계속해서 예수님은 참된 제자의 삶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31절)“내 말에 거하면” 32절) “진리를 알지니”라고 하셨다. 즉 주님과 그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수용하고 그 안에 거하는 생활을 하면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그리스도인의 참된 위상과 삶의 성격이란 ‘진리를 아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중히 여겨야 할 것은 사도 요한이 “진리를” [안다]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 그것을 [지식]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체험과 교제’의 개념으로 묘사한 것에 대해 유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진리를 안다는 것은 공부하고 배우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의 끝없는 교제와 실천의 삶이 병행되어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다. 참된 제자의 삶의 성격은 유대인처럼 율법적 형식으로 만족해서도 안 되며 인본 세계의 철학적 사유의 차원에서 그쳐서도 안 되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요한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인 것이다. * 저는 지금까지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깨달으면 최고의 기쁨과 만족으로 생각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것을 실천하였을 때 오는 감격을 온전히 누리지 못했다. 하나님과 여러분 앞에서 회개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요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고 하셨다.

복음의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내 주변의 온갖 세계에 적용시키는 생활, 이것이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아는 참된 제자의 삶인 줄로 믿습니다.

 

2. 참된 제자로서의 삶의 특권

1)자신에 대한 자유함.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32절)고 하셨는데 그 자유의 대상은 “너희”이다. 사실 사람은 자기 자신이 자기의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진리를 실천할 수 있게 된 사람은 무엇보다도 영생의 큰 장애가 되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이다.

 

2) 세상살이의 온갖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하게 된다.

요8:10에서예수님은 현장에서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에게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고 하셨다. 성경에는 진리와 분리된 불신 세계를 두려움과 공포의 사계로 표현했다. 종교적 정죄감, 불의의 세력들에 대한 두려움, 괴상한 환경, 죽음 저 건너편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성도들에게는 이제 그 흔적만 남과 영원히 사라져버리게 되는 것이다.

 

 

 

 

 

<요8:33-36>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자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아는 사람이 되며 그가 바로 참된 자유인이라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남의 종이 적이 없기 때문에 자유함을 얻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 되어 영원히 아들의 집에 거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1.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혈통적으로만 생각하였다. (33절“ . . . ”)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자신들이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면서도 실재로는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는 못하였다. 유대인들은 형식은 갖추었으나 삶의 실재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훌륭한 가문인 것을 자랑했고 지금까지 거기에 따르는 교육도 받아왔으니 어쩌면 당연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1:12-13에서 말씀하기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고 했다. 혈통이 사람을 구원받게 하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 즉 구원받는 것이다. 교만은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임을 깨닫고 항상 겸손함으로 무장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그들은 영적으로 속박된 사람들이었다.

요8:33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사람은 자유케 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자기들은 지금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었다. 그들은 지금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는 피지배국의 무기력한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금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지배하에 있을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는 불신앙의 지배를 받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들의 영적 상태는 지금 어떠한가? 계3: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하셨다. 영적으로 묶여 있고 가리어져 있으면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 영적인 속박을 발견하고 예수님 앞에 오는 자만이 참된 자유를 받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3. 예수님은 사람을 참으로 자유하게 하시는 분이시다.(36절“ . . . . . ”)

유대교에서는 율법이 곧 진리라고 한다. 따라서 율법 연구가 인간을 자유케한다고 믿었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천지만물을 지배하는 원리인 자연법, 즉 로고스를 따라 살 때 인간은 자유를 얻는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유란 정치적, 사상적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사람을 죄의 노예에서, 욕정의 노예와 교만과 사상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자유하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 복음 안에서 주시는 자유야 말로 사람을 참으로 자유케 하시는 진정한 자유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자유는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인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요8:37-43>

 

본문에는 예수님과 예수님을 대적하는 유대인들과의 격렬한 논쟁이 기록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행동을 보니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반박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영적 두 계통의 자녀들이 하는 일이 각각 다르다고 말씀하신다.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녀들은 혈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도덕심과 신앙심과 충성심을 통하여 탄생한다는 말씀이다.

 

1. 영적 두 계통의 아버지와 그 아들

38절“ . . . . ”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내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를 말씀하시는 것이고, “너희의 아비”는 [마귀]를 가리키신다.(44절) 즉 영적인 세계에 두 주관자가 있다는 것이고, 따라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아들과 마귀의 자식들이 있다는 것이다.

 

1)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38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는 말씀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로 탄생하셨으며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고 하나님께 들으신 진리를 증거 하신다는 것이다.(40절) 여기서 우리는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깨달을 수 있으며 진리의 선포 자이신 메시아의 모습을 깨달을 수가 있다.

 

2) 마귀와 그 자식들

8절)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41절)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44절)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 특히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마귀의 자식들이며 마귀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과, 진리를 말하는 자를 죽이려 한다고 질책하고 계신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순수한 민족적 혈통을 지켜왔기 때문에 이방인들과 같이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41절)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아버지로 섬겨온 ‘선민’임을 자긍했으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모두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단언하셨다.(44절) 그 이유는 그렇게 말하는 그들이 실재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지도 아니하고(45절), 사랑하지도 아니하며(42절) 마귀의 욕심을 따라 행하기 때문이었으며 그들은 마귀의 속성인 증오와 거짓으로 가득 차 있어서 진리에 대한 이해도 없고(40, 43절) 오히려 철저히 진리를 왜곡하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율법주의자라고 하면서도 율법을 왜곡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지적하신대로였다.(39-40절“ . . . . . ”)

 

**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들과 그들이 하는 일은 무엇이어야 하는가?(42절 “ . . . . . ”)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하나님의 자녀들은 육체적으로 혈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과 행동,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 대한 태도가 어떠한가를 볼 때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요8:44-45>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처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하시면서 마귀는 그 속에 진리가 없고 거짓을 말하기 때문에 자신이 아무리 가르쳐도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시고 있다. 44절에는 “마귀에게서 난 자들”이라고 하셨는데 그들은 사탄의 자녀들이라는 말씀이다.

 

1. 그런 사람들은 생명을 죽이는 자들이다.

천사로 창조되어진 사탄(유1: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도 처음부터 살인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의 지위와 처소를 떠나 하나님께 반역한 이후 그들의 본성은 잔인하고 흉폭 하게 바뀌어 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본성을 유전받은 사탄의 자녀들은 지금도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며 짓밟고 있다.

 

1) 영적인 생명을 죽인다.

사탄의 원래 이름은 ‘증오’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사탄은 [증오자]이다. 그러므로 사탄이 역사하는 곳에는 반드시 증오가 불일 듯 일어난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증오로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 즉 영적인 생명을 죽이려고 한다. 그리고 증오의 첫째 대상은 하나님이요 그 다음으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이 새겨진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원래 모습인 영적 생명이 사탄에 짓밟혀서 그의 종노릇하지 않도록 항상 깨어있어 기도해야 하고 부지런히 대처해야하는 것이다.

 

2) 육적인 생명을 죽인다.

사탄의 증오는 우리의 육신의 생명까지도 잔인하게 짓밟는다. 그 처음의 예로 가인과 아벨에서 찾을 수 있다. 롬1:28~에는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상실한 마음이 되어 합당치 못한 일들을 하는데 롬1: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고 하였다. 만일 가인에게 이 사탄의 증오가 역사하지 않았다고 하면 형제의 생명을 그토록 무자비하게 짓밟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오늘날까지 인류의 역사는 악인에 의해 의인이 흘린 피로 점철된 역사가 되어왔다. 지금도 세계 도처에서는 형제를 증오하고 이웃을 증오하는 사탄의 역사가 형제의 생명을 위협하고 이웃의 생명을 유린하고 짓밟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땅의 빛과 소금을 택하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방패와 말씀의 검으로 무장하고 항상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진리가 없는 자들이다.

사탄의 자녀들은 본문에 나오는 대로 “진리가 그 속에 없는” 자들이다. 그들은 겉으로는 그럴싸하게 보여도 내면을 들여다보면 보잘 것이 없는 자들이다.

1)거짓을 일삼는다. - 하나님께 속한 성도들은 진리의 영을 받아서 살지만 사탄에게 속한 자들은 거짓의 영을 받으며 산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진리의 영을 자랑하듯이 사탄의 자녀들은 거짓을 진리처럼 자랑한다.

2) 가장하기를 좋아한다. - 내면에 진리가 없는 그들은 겉을 ‘참’인 것처럼 꾸미고 가장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명예, 재물 등으로 꾸면서 사람들을 미혹한다.

3)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 그들은 진리를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눈으로 보아도 보지를 못하며 느끼지를 못하기 때문이다.(성도- 말씀이 꿀송이 처럼 달게 느낀다.)

<요8:46-47>

 

본문에서 예수님은 두 가지 말씀을 하신다. ① 나의 인격과 모든 교훈이 무흠한 것이라면 왜 나의 말을 진리의 말씀으로 믿지 못하느냐(46절)라는 질문이시고, ② 나의 말이 진리임을 지식과 논리로 알면서도 믿지 않는 것은 인생들이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사탄에게 속해있기 때문이라는 말씀이다.(47절)

두더지는 햇빛을 싫어하는데 그 이유는 햇빛의 본체인 태양이라는 ‘밝음’자체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생들이 진리의 현현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을 꺼려하는 이유는 진리의 본체이신 하나님을 미워하기 때문인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참과 거짓을 가르는 시금석이요, 우리 인생의 갈림길인 것이다.

 

1. 예수님의 말씀은 무흠하다.(46절)

여기서 말씀하신 죄의 의미는 영적인 면과 인격적인 면, 그리고 생활 윤리적인 면을 모두 포함한 것이다. 주님께서 유대인들 앞에서 행하신 모든 사역과 교훈과 생활 중에 정죄하고 비판할만한 것을 너희가 발견했느냐는 뜻이다. 오히려 새롭고 개혁된 하나님의 진리라는 것만이 입증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의 완전성’은 주님께서 신적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서고금의 위대한 성인 및 선지자들도 진리는 말하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늘 ‘불완전한 존재’로 인식했었다. 모세도, 다윗도, 이사야와 사도바울도, 부처도 공자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무엇이 도지 못하고 이루지 못하며 잡지 못한 존재로 자인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한 인간이셨다면 온전한 이성을 가지고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말씀을 감히 공언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그 완전한 ‘신적 자아’를 파헤치고자 근 이천년 동안 수많은 석학과 지혜 자들이 노력했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반박한 근거를 아직 찾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예수님을 연구하는 중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사역에 나타난 신적인 능력에 감화를 받아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이 허다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완전 무오하신 분이심을 확신하게 되는 분별력과 통찰력이 있는 것이다.

 

2.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만을 진리로 믿는다.

46절에서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고 하신다. 즉 완고한 유대인들에게 ‘내 언행 심사가 온전한 것임을 너희가 무언으로 인정했다. 그렇다면 나의 모든 가르침이 온전한 진리라는 것도 인정할 것이다. 그런데 왜 믿으려고 하지 않느냐’는 논증인 것이다. 진리에 대해서 지식으로 아는 것과 그 진리 자체를 신앙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불신자들은 흔히 ‘교회에 다니면 다 조흔 소리를 듣지요. 교회에서 하는 말 중에 나쁜 말이 있나요?’라고 하면서도 정작 신앙의 사람이 도려고 하지는 않는다. 믿음일한 진리를 아는 것만이 아니라 진리에 스스로 뛰어들어 그 안에 속한 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상태의 사람입니까?

 

3.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다.(47절“ . . . . ”)

여기서 “듣는다”는 뜻은 믿고 수용 한다는 의미가 있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고 하셨다. 영원한 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는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사람인 것이다.

 

<요8:48-51>

 

자신들은 육적으로 아브라함의 혈통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자긍심을 가진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영적으로 우매함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못하는 말이 없었다. 48절에 나타난 것처럼 그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비난하였고 급기야는 ‘귀신이 들렸다’고 매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이렇게 한 것은 자신들의 거짓과 위선으로 인해 진리를 분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인이라고 하였다.

사마리아인은 혼혈인으로서 정통 유대인들에게는 언제나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었는데 그러한 조롱과 비난이 예수님에게 쏟아진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그렇게 말을 하는 의도는 예수님이 이단자라는 것이다. - 예수님은 분명히 유대인들에게는 모순된 분이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유대사람들이 그동안 지녀왔던 관습과 질서를 거부하셨기 때문이다. 그러한 예수님의 혁신적인 언행은 오랫동안 내려오는 관습에 물들어 있는 그들에게는 이단자로 부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앙은 관습화가 되어버리면 안 된다.

[엡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히10:25]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고 하였다.

지금까지의 습관이 좋은 것이면 더욱 더 개발해 더 좋고 더 유익하게 해야 하겠지만 만일 그렇지 못하다고 한다면 나에게 배어있는 좋지 않는 습관을 시간을 다투어 벗어버려서 천국시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악한 자라는 것이다. :본래 사마리아인에게는 ‘천한 자’ 또는 ‘형벌 받은 자’, ‘타락한 자’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유대인들은 이처럼 예수님을 율법적으로나 관행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악한 자로 규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악한 시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눈을 가졌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매사에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눈을 모든 것을 바라본다. 그러나 성도는 언제나 믿음의 눈으로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며 소망의 길을 가야 한다.

[시19:8]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우리의 눈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초롱초롱 빛나야 한다.

[시119:37]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

[잠22:9]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을 정복한 여호수아와 갈렙은 오직 신앙의 눈으로 가나안의 여리고성을 바라보았다. 예수님은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고쳐주시기도 하셨다.

불가능할 것만 같은 지금의 현실 속에서도 열 사람의 정탐꾼과 같이 주변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절망감을 안겨주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의 눈을 가지고 축복을 바라보는 소망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유대인들은 심지어 예수님을 귀신들렸다고 하였다.

귀신이란 사탄의 졸개들로서 항상 악행만 하고 다니는 영적인 존재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정의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은 모든 기적은 귀신의 왕 ‘바알세블’한테서 나오는 것으로 알았고 따라서 예수님을 비정상적인 존재로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예수님은 그들에게 구원을 선포하셨다.(51절“ . . . . ”)

<요8:52-55>

 

유대인들은 아브라함과 선지자들을 예수님과 비교하면서 도대체 예수님은 어떤 존재이지, 또 예수님이 이들 조상들보다 더 위대한지를 물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또 유대인들도 그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하시면서 만약 자신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한다면 자신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1. 유대인들은 분별력이 없었다.

1)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보지 못한 것이다.(요8:52 유대인들이 가로되 지금 네가 귀신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라고 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육적인 일에 얼마나 치우쳐 있었는가를 들내 주는 말이다. 사람이 육적인 일에 치우치면 영적인 일에 무지하게 되고, 영적인 일에 치우치면 육적인 일에 무지하게 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하면서도 인간에게는 오직 현세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았지 인간이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과 영혼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하늘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의 귀에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2)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신적인 존재로 보지 못했다.(요8:53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은 한 완전한 인간이셨지만 예수님의 신성은 어디에든지 배어있었다. 빌립과 나다나엘은 이적적인 체험이 없이도 그의 진실함에서 신성을 발견하였고, 사마리아 여인은 진솔한 대화에서 신성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미 많은 기사와 이적을 보았고 많은 대화를 나누었음에도 예수님의 신성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통하여 무언가를 배우려는 마음이 없었고, 예수님을 그저 자신들과 동일한 인간으로만 보려는 시각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그리스도인은 그야말로 복된 존재이다. 그러므로 복된 자로 살아야 한다. 복된 성도는

*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도마처럼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에 창 자국을 보지 않고서도 믿는 사람이 복되고, 빌립과 나다나엘처럼 기사와 이적의 체험이 없이도 예수님의 신성을 알고 더욱 더 신실하게 믿는 성도가 복 된 것이다.

 

*** 예수님은 유대인들에 대해서 지적하신다.(요8:55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율법이 있었고, 그래서 율법을 연구하므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습득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무지하다고 지적하신다. 곧 그들의 교만함을 지적하신 것이다.

사람은 지식이 많을수록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고 많은 것을 알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에 관해서 많은 것을 안가도 하면서도 그러한 모습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 오늘날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사람 - 겸손한 사람, 더 노력하고 더 힘쓰는 사람.

 

<요8:56-59>

 

아브라함은 많은 면에서 울에게 모범이 되는 인물이다. 부르심을 입고 고향을 과감히 떠나는 용기 있는 믿음이 그러하고 특히 예측 불허의 미래를 내다보는 그의 믿음의 눈이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그의 믿음은 훗날 만복의 근원이 된ㄴ 축복을 얻게 하였으며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는 조상이 되었던 것이다.

 

1. 예수님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분이 아니시다.

요1:1-2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 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예수님은 태초부터 스스로 존재하신 분이시다. 그런가 하면 만물이 만들어지기 전에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함께 일하셨다. 이 세상 어디에도 아무런 원인이 없이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즉 그것이 있을 수밖에 없는 원인이 있는 것인데 그 원인은 창조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다.(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처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으로 이 창조의 사역에 참여하셨다.

오늘도 주님은 말씀으로 사망가운데 빠지려는 우리의 생명을 영생으로 창조하고 계시는 것이다.

 

2. 만물 위에 계신다.

주님은 만물 위에 계셔서 모든 만물, 즉 열물까지라도 다스리시고 통치하신다. 아무리 간악한 마귀라도 주님의 다스리심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마10: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볼 수 있는 이 세상을 포함한 온 우주의 모든 원인과 진행과 결과는 바로 주님의 뜻이요 선한 섭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섭리 중에 살아야...

 

 

 

 

 

 

 

 

 

 

 

 

 

 

 

<요8:56-59>

 

예수님은 구약시대 때 많은 선지자들은 믿음의 눈으로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보았으며 그 본 바를 예언으로 후세에 남겼다. 그리고 후세에 전해진 그 예언들은 그 선지자들이 믿음의 눈으로 본대로 성취되었고 이루어졌다.

 

1. 성육신의 예언을 성취하셨다.

‘성육신’이라함은 쉽게 ‘하나님이 육신의 옷을 입으셨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선지자 이사야(사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와 미가(미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고 예언되었는데 요셉의 약혼녀 마리아에 의해 성치되었고 동방박사와 목자들에 의해 역사적으로 확인되었다. 이렇게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우해 화목의 제물로 바쳐졌으며 그 역사로 인해 지금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열납 되어 진 것이다.

 

2. 부활의 예언이 성취되었다.

예수님의 부활역시 다윗과 이사야 선지자 등에 의해 예언된 것으로 예수님 자신에 의해 선포되었다.

시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사53:9 그는 강포를 행치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그런데 그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고전15:6]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다고 사도 바울은 증거 하였다. 즉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히 눈으로 확인되므로 이 믿음의 근거야 말로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흔들림이 없는 소망이 되는 것이다.

 

3.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

비록 아브라함이 믿음의 눈으로 보고 기쁨으로 대망하였던 주님이 이천년 전에 오신 분이시지만 그분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신다.

1) 말씀으로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신 주님께서는 때로는 천사를 통해서나 또는 자연이나 꿈과 환상 등을 통해서 말씀하시는가 하면 직접 육성으로 말씀하시기 하시고 특별한 계시인 ‘말씀’, 즉 성경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이 성경이 바로 살아있는 말씀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것이다.

2) 성령님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주님께서 다시 사시고 하늘에 오르실 때 주님 대신 우리에게 오신 ‘보혜사’는 또 하나의 분리될 수 없는 주님이시며,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이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좌정하셔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증하시고, 그로 말미암아 새로 태어난 속사람의 성품을 강건하게 하시며 지금도 진리 가운데 인도하심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요9:1-3>

 

욥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의롭게 살려고 몸부림치는 성도들은 이해할 수 없이 다가오는 고난 앞에 때때로 실망도 한다.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 소경을 만나셨다. 이 사람이 소경이 딘 것, 즉 불행의 원인이 누구로 인해 생겼느냐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에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답변하신다.

 

1. 제자들은 고난에는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 원인을 죄로 생각했다.

본문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라고 기록했는데 이 사람은 그저 단순한 장애자를 말하기보다는 그는 불행을 타고난 인생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는 고난 속에서 태어나 고난 속에서 죽어가는 모든 인간의 처절한 모습을 대표하고 있다. 그리고 고난은 재앙과 함께 인간이 결코 반길 수 없는 하나님의 징계나 저주라는 비극적인 견해를 암시하기도 한다. 때문에 “날 때부터 소경”이 되었다면 거기에는 필시 어떤 이유와 원인이 있을 것이 아니냐는 것이 제자들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2절에서 예수님께 여쭙기를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라고 질문을 한 것은 고난의 원인을 죄에서 찾고, 자기 자신이나, 혹은 그 부모 둘 중 하나에 원인이 있다는 대답을 기대하고 있었다. 제자들의 생각처럼 고난의 원인이 어디에 있든, 죄로 인해서 고난이 온다는 것은 불행이요 아픔이다.

 

2. 예수님은 고난의 권인이 죄의 결과만이 아니라고 말씀하심.

주님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불행, 곧 인간의 고난이 제자들이 당연하듯이 생각하고 있는 죄 때문에만은 아니라는 놀라운 사실을 가르쳐 주셨다. 본문 3절을 보면 “이 사람이나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고 확고하게 말씀하셨다. 이제 우리는 고난의 문제 앞에서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할 때가 왔다. 물론 고난이 되의 원인으로 기인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이다. 고난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시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알 수 없는 고난의 시련 때문에 몸부림치며 절망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놀라운 가르치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가 슬픔과 절망에 얽매인 사람들을 자유케 하실 줄로 믿습니다.

 

3.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고난을 다스리신다.

본문 3절에서 예수님은 명백하게 말씀하신다. 요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이 얼마나 놀라운 진리인지 모른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에게 일찍이 하나님의 섭리가 계셨다는 것이다. 바로 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무엇을 해주시는 분인지를 나타내 주시려 하셨다는 것이다. 구약성경에는 소경이 고침 받은 내용이 없다. 다만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만 예언되어 있을 뿐이다. 메시아가 오시면 눈을 뜹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이제 예수님의 손길에 의해서 눈이 떠진다면 이는 메시아가 오셨다는 증거이다. 그의 불행, 그의 고난은 죄 때문이 아니라 바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 그의 독생자를 보내셨다는 증거를 위해 소경의 고난은 필요했던 것이다. 이처럼 성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성도의 고난을 통해 지금도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지금 내가 당하는 고난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면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요9:4-7>

 

예수님은 본문에서 친히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눈먼 소경을 진흙으로 고치시는 기적과 소경의 순종하는 겸손한 모습을 볼 수 있다

 

1. 시간을 아낄 것을 교훈하신다.

“때가 아직 낮이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항상 기회가 돌아오는 것이 아니므로 시간을 아끼라는 말씀이다. 모든 성도는 일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을 아껴야 한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6)고 했다. 허송 세월해서는 안 되며 시간을 아껴가며 일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일을 하되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한다. 무의미한 일을 하는 것도 허송세월하는 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의미 있는 일이란 - 영혼을 만족하게 하는 일이며 무의미한 일이란 육신을 만족하게 하는 일이다. 우리가 영혼을 구원하며 그 일을 위해 선행을 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비록 육신은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연혼은 기쁨이 있으며 더욱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또한 그 일을 통해서 이웃에게 즐거움을 주게 되는 것이며 기쁨 또한 오래가는 것이 다. 그러나 육신의 기쁨은 이웃에게 피해를 주면 주었지 기쁨이나 이득이 되지 않는다. 또한 거기에는 쾌락 이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2. 빛을 비춰야 한다.

“내가 세상에 있을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세상이 어두움 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의 세상에 빛으로 오셨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용납되지 않듯이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어두움을 내어 쫓으셨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신 33년의 기간은 너무나도 짧으셨으며 그나마 공생애 기간은 3년에 불과하셨다. 그러므로 주님은 시간을 아끼고 기회를 아껴 빛의 일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 빛의 일을 우리들에게 위임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빛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 또한 우리의 삶 전체가 ‘착한 행실’이어야 한다. 세상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부끄러워해야 하고,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3. 휴식의 때가 있다.

“qa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왜 열심히 시간을 아껴 일해야 하는가? 일할 수 있는 시간이란 제한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통을 느끼면서 일을 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안식할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하는 시간은 70년, 길어야 80년이지만 그에 비하여 쉬는 시간은 영원하다. 만일 이 안식의 시간이 없다면 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아껴가며 일하지 않아도 좋다. 적당히 쉬어가면서, 즐겨가면서 일해도 무방할 것이다. 살후1:7 환난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라고 했다.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동안에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이후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받아 누리게 될 하늘의 신령한 재산과 상급을 쌓는 일인 것이다.

 

 

 

<요9:8-12>

 

날 때부터 소경이 된 사람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셨다. 주님의 이러한 선행에 대해서 까지 예수님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은 공격의 자료로 삼았다. 공격의 내용은 안식일 날 병을 고쳐주었다는 것이었으며, 그래서 안식을 범하는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1. 주님의 진리를 대적하는 무리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완전히 불신하였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사역들을 보면 소외되고, 삶의 현장이 어려운 사람들, 즉 어두움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위한 사역이셨다. 그런데 당시 많은 율법사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행위를 옳지 않게 보았다. 그런 면으로 볼 때 그들은 매우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 진리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의 주관대로만 모든 상황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폭이 넓은 인격을 가지고 살아간다. 또한 진리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 보다는 남을 더 존중하고 사랑하며 신뢰한다.

* 그러나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1)쓸데없는 변론을 즐긴다. 그들은 소경되었던 사람이 눈을 뜨게 된 사실에 대해서 함께 기뻐해 주지 못하고 오히려 그의 과거를 들추며 불필요한 논쟁을 시도하였다. 2) 또한 진리를 거부하는 무리들은 쓸데없는 호기심을 가졌다. 그들에게는 애당초 신앙심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주님을 통하여 기적을 보았으면 예수님께서 메시아심을 믿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신앙에는 관심이 없고 인간적인 호기심만을 가지고 있었다. *** 확실한 것은 신앙은 호기심이 아니다. 요6:29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이라고 하셨으며 막9:23]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는 권세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거기에는 관심이 없고 전혀 이상한데만 호기심을 보였던 것이다.

3) 그들은 오히려 소경을 추궁하였다. 예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은 소경이 눈 뜬 사실을 축하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오로지 그를 추궁하여 예수님의 허점만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있었다. 이러한 일들은 오늘날도 일어나고 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허점을 찾아서 공격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그래서는 안 된다. 4) 그들은 한 마디로 군중심리에 이끌리는 사람들이었다. - 군중심리란 언제나 불안하고 우발적이다. 예수님을 바라바와 바꾼 유대 군중들의 범죄는 바로 군중심리에 의한 것이었다. 군중심리에 흔들리거나 끌려서는 안 되며 진리, 곤 확고한 신앙 고백 위에 굳게 서야 한다. 그래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 5) 그들은 겉만 보고 속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주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고 취하지 않으시며 내면을 보시고 취하시는 분이시다. 신앙의 겉옷만 취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참 사랑과 은혜를 알 수 없고 그 안에 솟아나는 영생의 기쁨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요9:8-12>

 

본문은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실로암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돌아와서 그가 어떻게 고침을 받게 되었는지를 묻는 유대인들을 향해 소상하게 설명하는 장면이다.

 

1. 눈을 뜨게 해 주신 분의 이름을 명확하게 밝혔다.

11절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이 사람의 답변 속에는 일면 유대인을 비웃는 한편 또 다른 일면에는 예수님의 영광을 한껏 드높이는 대답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그렇게 욕하고 핍박하면서 죽이려는 ‘예수님’이 나를 이렇게 밝은 눈으로 고쳐주셨다는 말이다. 또한 그렇게도 율법을 자랑하는 너희들은 그간 나에게 기껏 몇 푼의 돈을 던져주는 것으로 끝났었지만 예수님은 내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 주셔서 나를 이렇게 자유의 몸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 말고 세상과 세상의 그 누구도 사람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내지 못한다. 사람의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셔서 문제에 얽매여 살아가는 사람을 자유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신 것이다. - 질병의 얽매임에서의 자유, 고난과 슬픔의 얽매임에서의 자유, 실패와 가난의 얽매임에서의 자유, 죄와 사망의 얽매임에서의 자유 등 . . 진리이신 예수님은 사람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셔서 우리를 참으로 자유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2. 명령하셨다고 밝혔다.

“씻으라 하기에”. 이 말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대답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율법을 내세우고 자랑하는 유대인 당신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해석할 뿐이지만, 예수님 그분은 직접 명령을 내리시는 권위가 있으시다는 변론이었다. 즉 유대인 당신들은 결코 권위와 능력에 있어서 예수님과 비교를 할 수 없는 존재라는 대답인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세상 어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으신 분이시며, 예수님은 말씀으로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우리에게 참된 권위자시다. 주님의 말씀이 임하시면 문제는 해결 됨 그러므로 늘, 항상 주님의 명령의 말씀이 내게 임하시게 할 것.

 

3. 순종하였다고 대답하였다.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즉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축복의 비결이라는 말이다. 날 때부터 소경이었던 이 사람은 예수님에 대하여 단 한 차례의 경험이었지만 개인적으로 너무나 큰 체험이 그로 하여금 많은 것을 깨닫게 하셨다. 우리는 말씀에 순종하기 전에 너무나도 순수하지 못할 때가 많다. 따져보고, 분석해 보고, 계산해보고 그리고 거기에 합당할 때 순종이라는 명목으로 합리화시키려고 한다. 신앙은 따지고 분석해서 합당하면 따르는 것이 아님. 합리적이지 않아도 믿고 순종하는 것이 신앙이다.

 

4. 예수님의 거처를 알려주지 않았다.

물론 예수님의 거처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알지 못하노라”고 했지만 단 일언지하에 “알지 못하노라”고 대답을 한 것은 예수님을 핍박 하려는 유대인들의 의도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그 사람은 마땅히 대답해야 할 바를 대답하고, 피해야 할 바를 피하는 지혜를 보였던 것이다.

이러한 지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필요한 분별의지혜인 것이다. 예수님의 영광을 위한 것과 영광을 오히려 가리게 되는 것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요9:13-17>

 

본문은 안식일을 중요시하는 유대 바리새인들과 안식일에 병 고침을 행하신 예수님의 행위에 대해서 안식일 날에 눈을 고침 받은 소경과 피차 논쟁을 하는 내용이다.

 

1. 예수님은 육신의 눈을 뜨게 하셨다.

본문의 소경은 날 때부터 빛을 보지 못하는 소경이었다. 그래서 그의 삶은 구걸해서 연명하는 비참한 삶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만남은 그의 눈이 열리고, 빛을 보게 하는 등 그의 삶이 완전히 바뀌게 하였다.

 

1) 고통을 벗겨 주신 것이다.

물론 육신의 일부 장애가 있다고 해서 인격이나 정신에 까지 장애가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장래를 가진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애로 인해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고통을 겪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소경이 눈을 떴다는 것은 그 사람이 육신과 정신의 고통에서 놓임을 받았다는 것이요, 그를 따라다니던 명에를 벗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를 지긋지긋하게 붙어 다니던 육신의 각종 고통의 멍에를 벗겨주시는 분, 문제의 근본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신 것이다.

 

2) 사물을 바로 보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 소경이 눈을 뜬 이후로 사물을 보았고 관원을 관원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별 의미가 없는 못하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눈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주님인지 우상인지를 구별하지 고, 자기 아내인지 남의 아내인지를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요즈음의 세태에서 본다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행동인 것이다.

예수님은 마6:22-23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라고 하셨다. 이렇게 사람의 육신의 눈은 사물을 바로 보고 구별하라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눈을 뜨고도 사물을 바로 보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는 소경이요 장님인 것이다.

 

2. 예수님은 영혼의 눈을 뜨게 하셨다.

소경은 어둠의 상징이요 어둠은 선에 비해서 죄악의 상징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것은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다는 것을 영적인 의미로 본다면 영혼의 눈을 떴다는 것이 된다.

 

1) 죄악을 벗어버렸다.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

 

마귀가 지배하는 육신의 눈으로는 죄를 죄로 볼 수도 없고 죄로 인식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아무리 사악한 사람일지라도 그의 영혼의 눈이 예수님께 뜨임을 받게 되면 자신의 죄 된 모습을 바로 보지 않을 수고 없는 것이다. 그래서 죄의 더러움과 추함을 느끼게 되고 결국은 그 더러움의 조악을 벗어버리기로 결단하게 되는 것이다.

<요9:13-17>

 

주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는 공생애 기간 동안에 참으로 놀라운 이적을 많이 행하셨다. 본문에 나오는 이적역시 당시 행하신 이적들 가운데 하나이다. 다른 기적들이 그러하듯이 이 기적 또한 나름대로의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본문에 나오는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사람이 눈을 떴다는 단순한 사실 이상의 깊은 뜻이 있는 것이다.

 

1. 영생을 보게 되었다.

요일2:24-25에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고 하셨다. 영생을 얻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 전에 약속하신 그 약속을 깨달았다는 것이 그 기억을 되찾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생에 한 번 눈을 뜬 사람은 다시는 후회하는 삶을 반복하지 않는다. 그것은 세상적인 삶이 모든 면에서 아무리 윤택하다고 하여도 영생에 비하면 결국은 찰라 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에 의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영생은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된 가치요 소망인 것이다.

 

2. 육신의 눈과 영생의 눈을 뜬 이 사람은 참 선지자를 보게 되었다.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대표하고 대신하는 직분이라고 한다면 선지자는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대신하는 직분이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은 감히 하나님을 대신하는 선지자를 율법으로 정죄하며 그를 부인하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눈이 진리에 아직 어두워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 새롭게 참과 진리에 눈을 뜬 소경되었던 사람은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음에도 그가 뜬 진리의 눈으로 주님이 하나님을 대신한 선지자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살기등등한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용기 있게 예수님이 참 선지자임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이다.(17절) 누가 이 사람에게 이 용기 있는 고백을 하게 하였는가?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다. 이처럼 예수님에 의하여 진리의 눈을 뜬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에 대하여 참된 고백을 하는 위대한 용기가 주어지는 것이다.

 

3. 진실하게 하셨다.

본문에 나오는 이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말을 잘못하면 이제 자기는 세상 살아가기가 참으로 어려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예수님에 대하여 모든 것을 숨김없이 말을 했다. * 17절 “ . . . . ” 진리에 눈을 뜨게 되면 거짓으로 이익을 얻기 보다는 차라리 진실로 인해 잃는 쪽을 택하게 된다. 그것은 결국에 가서는 거짓으로 얻는 것 보다는 진실 때문에 잃는 것이 더욱 값지다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이번 믿음의 기업 이렌드가 까르푸를 인수했는데 까르푸가 국내 굴지의 유통회사들 가운데 이렌드를 택한 이유는 이렌드 회사가 가장 투명하기 때문, 즉 가장 진실하기 때문이었다는 것.

그러므로 예수님에 의해 진리의 눈을 뜨게 된 사람은 거짓과 술수로 자신을 위장하지 않아도 오히려 아름다워 보이고 훌륭해 보이는 것이다.

 

 

 

<요9:13-23>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의 만남, 하나님의 은혜체험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소원하며 사모해야 한다. 본문에서는 유대인들이 자기들 눈앞에 고침을 받고 나타난 소경의 치유함을 믿지 아니하고 소경의 부모를 불러서 확인하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완고함을 볼 수가 있다. 그들은 예수님을 구경했으나 직접 만나거나 체험하지 못했다. 그저 완고하기만 한 유대인들 앞에서 고침을 받은 소경은

 

1. 예수님께 고침 받은 사실을 증언하였다.(15절“ . . . . ”)

백성들에 의해 붙들려온 이 눈뜬 소경은 자기가 어떻게 해서 눈을 뜨게 되었는지를 바리새인들 앞에서 사실 그대로 증언하였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죄인이 어떻게 이런 기적을 행할 수 있느냐는 것과 그리고 또한 소경이었던 사람의 증언이 거짓이 아니냐는 의혹이 그들을 혼란하게 만들었다.(16, 18절) 그러나 거듭 물어보는 그들 앞에서 이 사람은 단호하게 증거 하였다.(25절“ . . . ”)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 손길을 체험한 사람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증거 할 수 있다.

 

2. 예수님을 선지자로 증언하였다.(17절)

소경이었던 이 사람은 자신이 눈을 뜨게 된 사실뿐 아니라 자신에게 눈을 뜨게 하신 예수님을 “선지자”라고 증언 하였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선지자는 당시 왕이나 제사장 보다도 우위에 있었다. 여러분 예수님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어떤 설명이나 정교한 신학적인 이론보다도 이 사람을 통해서 받는 체험적 사실이 더욱 중요하고도 확실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은혜 받은 성도의 책임과 의무는 그것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한다.

 

*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 내가 만난 예수님은 우리도 확실하게 증언할 수 있으며 또한 증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3.소경의 부모들의 태도(22절“ . . . . . ”)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환란을 수습하기 위해 소경이었던 사람의 부모를 불러 사실을 신문했다. 그 부모들은 눈을 뜨게 된 자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과 날 때부터 소경이었다는 사실까지는 증언했으나 그가 어떻게 하여 눈을 뜨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부모들이 그렇게 대답을 한 이유는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유대교에서 출교하기로 결의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22절)

 

* 보세요. 눈을 뜬 사람은 예수님을 담대하게 증거 했지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분명한 사실을 자기들 눈으로 확인까지 하면서도 증거 할 수가 없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신령한 능력과 은혜를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고 하셨다. 예수님의 증거는 체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체험이다.

 

 

 

<요9:24-27>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예기치 못하는 재난을 당한 사람이 아니라 행복을 곁에 두고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행복의 요소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을 대할 때 그는 분명히 불행한 사람이다.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경우가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다. 그들 곁에는 예수님이 함께 계셨다. 예수님으로부터 확실한 진리의 가르치심도 받았다. 또한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기사와 이적을 체험하였고 심지어 예수님께서 그들의 모든 간구를 들어주시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행복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요?

 

1. 예수님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고 모든 고통과 슬픔이 추방되었다.(.....)그래서 주님이 계신 곳에는 모든 사람들이 되살아났고 잃었던 생기와 기쁨을 되찾았다. 창녀가 성결케 되고, 세리가 의롭게 되었다. 그들이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돈 때문도 아니고, 자신들의 선한 의지나 노력 때문도 아니었다. 오직 예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곁에만 두지 않고 주님으로 영접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똑 같이 예수님을 곁에 두고도 불행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본문에 나타나는 바리새인이다. 그들은 세리나 창녀들이 갖지 못했던 돈을 가졌고 명예를 가졌으며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었으나 그들에게는 행복이 없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곁에만 두고 있었지 모셔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손님으로만 생각했고,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을 줄 몰랐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할 때 우리는 권세 있는 삶을 살게 되고,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모셔 들일 때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축복이 있는 것이다.

 

2. 내 일과 남의 일을 철저히 구분했기 때문이다.

“이에 저희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로 시작되는 본문은 바리새인들이 자기 일과 남의 일을 얼마나 철저히 구분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행복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다. 남이 가지지 못한 것을 내가 가질 때, 혹은 남이 당한 불행을 나는 당하지 않았을 때 느껴지는 것이 행복은 아니다. 그것은 단지 타락한 인간 본성을 만족케 하는 사악한 쾌감일 뿐이다. 세상이 흉흉해 지고 싸움과 전쟁이 그치지 않는 것은 이처럼 타락한 인간 본성을 만족케 하는 쾌락을 행복이라고 오해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진정한 행복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너와 나를 구분하지 않는데서 오는 것이다. 이웃과의 거리가 좁혀질 때 인간은 행복하다. 이웃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될 때 그 기쁨은 배가 되고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여길 때 그 아픔은 줄어드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 나타나는 바리새인들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눈을 떴음에도 함께 기뻐할 줄 몰랐고, 그 기쁨을 함께 나눌 줄을 몰랐다. 그들은 그 기쁨을 철저히 객관적으로만 바라보았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행복이 찾아들 수가 없는 것이다. 전 우주와 세상사를 오직 자기중심으로만 보는 사람은 이웃과 화합하고 나누는 기쁨을 영원히 가질 수가 없으며 오직 그들의 기쁨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강탈할 때만 가능하다.

 

3.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저 사람이 조인인줄 아노라’ 사람이 스스로 행복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이웃의 허물을 덮어주고 잘한 일을 칭찬해 줄 때 사람은 바로 보람감과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와는 반대였다. 예수님은 약점이 전혀 없으심에도 약점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황폐한 영혼에는 행복이 깃들 수 없다.

<요9:28-34>

 

본문은 예수님의 자비로 인해 눈을 뜬 사람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벌어진 열띤 논쟁에 대한 기록이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소경이었다가 눈을 뜬 확신어린 간증과 신앙 고백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정지할 말문이 막혀버리자 심한 욕설과 모욕적인 언사로 그 사람을 유대 사회에서 추방해 버리고 말았다.

 

1. 불신자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1) 자신들의 위치를 모른다.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 자신들을 ‘모세의 제자’들이라고 여겼다. 예수님을 옹호하는 서경이었던 사람은 이단이며 자신들이야 말로 정통 종교의 수호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모세의 사상과 신앙관을 이어받은 자라면 마땅히 그리스도를 대망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해야 옳았던 것이다. 히3:5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라고 했다. 즉 모세도 세례 요하처럼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를 믿고 그 메시아를 유대 민족에게 늘 상기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러한 모세의 정신을 본받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소경이었던 사람이 주님의 제자가 된 것을 오히려 욕하여 조롱하였다.(28절)

이렇게 불신앙의 사람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람들을 하찮게 여길 때가 많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의 영광스러운 위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참된 신앙의 사람이란 자신의 위치와 본분을 바로 알아 잘 지킬 줄 아는 사람이다.

 

2.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은

1)세상이 악하다는 것이다.

눈을 뜬 사람은 “이상하다”(30절)고 말하면서 종교 지도자들의 불신앙을 의아해 했다. 우리 성도들도 때로는 세상의 완악한 불신앙과 타락한 사회상을 의아해 할 때가 많다. 더욱 슬프고 기막힌 것은 성도들의 타락과 죄악 때문에 곤혹스러울 때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때마다 우리는 세상의 사람들의 심성이 불의하며 또, 불의한 세력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음을 인식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2)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며 또한 우리의 기도가 꼭 응답될 줄을 알게 된다.

눈뜬 사람은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아니시면 결코 자기 자신에게 그런 일을 행하실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중요한 고백을 한다. 31절 “ . . . . ”

 

 

 

 

 

 

 

 

 

 

<요9:35-38>

 

본문은 교만한 유대인들로부터 쫓겨난 소경을 예수님께서 찾아 만나주시는 사랑의 모습과 구세주를 만난 소경이었던 사람이 주님을 경외하는 겸손한 모습을 볼 수 있다.

 

1. 예수님은 유대인들로부터 성전에서 쫓겨난 소경이었던 청년을 찾아가셨다.(35절“.....”)

눈을 뜨게 된 청년은 예수님에 의해서 눈을 뜨게 되었다고 신앙적 고백을 하자 유대인들로부터 쫓겨났지만 예수님에 의해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어진 것이다. 그는 영육간의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생활이 시작되어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은 예수님을 만났다는 이유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을 수도 있고, 심지어는 버림을 받을 수도 있지만 슬퍼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된다. 세상일에 환영을 받는 사람, 즉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가 어렵다. 세상의 친구가 많은 사람이 그들로부터 이탈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는 더욱 어렵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이웃과 동료들로부터 소외당하면 그 사람은 이전보다 더욱 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택하신 백성들을 그냥 홀로 버려두시지 않으신다. 주님은 눈을 뜬 청년이 유대인들로부터 쫓겨났다는 말을 들으시고 그를 찾아 가셨다. 그리고 그에게 “네가 인자를 믿느냐”고 물으셨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 힘들고 외로움을 당하고 계시는 분이 계십니까? 지금이 바로 주님을 가까이 할 때요, 주님의 위로를 받게 되는 기회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소경되었던 그 사람은 메시아를 보았다.(37절“ . . . . . ”)

소경되었던 이 사람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는 소경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몰랐다. 예수님은 눈을 뜨게 된 이 사람을 만나셔서 “네가 인자를 믿느냐”고 물으시고 ‘그가 누구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청년에게 “네가 그를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믿고 바랐던 메시아, 많은 선지자와 의인들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보고 싶어 했던 메시아를 이제 겨우 눈을 뜨게 된 청년이 보게 되었는데 실로 엄청난 은혜요 축복이었던 것이다. 그는 예수님의 물으심에 대해서 ‘그가 누구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라고 했는데 그만큼 그는 갈급하고도 긴급한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과 같이 열망과 진지한 구도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주님은 반드시 만나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3. 그는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38절“ . . . . ”)

이 말은 사도신경의 도입 부분이다. 메시아를 만난 후 그의 인격이변하고 그의 사상이 변하고 그의 인생관이 바뀌므로 “내가 믿나이다”라는 고백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즉각적으로 응답한 신앙고백인 것이다.

 

* 내가 주님을 만났을 때, 주님의 말씀을 접하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도 그러한 신앙과 고백이 필요한 것이다.

 

 

 

<요9:39-41>

 

본문은 예수님의 소명과 또한 세상의 심판자이심을 알게 하시고 영혼의 소경인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책망의 말씀을 하시는 모습이다.

 

1.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됨

“보지 못하는 자들은”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 스스로 소경인 것을 알고 죄 된 자신을 슬퍼하여 자비하신 주님의 은총을 구하는 자들이다. 예수님은 눅18:13에서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고 말씀하시면서 이런 심정을가진 자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하셨다. 사람은 아담의 타락 이후 죄인의 후손으로 태어난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서 자신의 죄악 된 모습을 인정하고 주님께 고백함으로 불쌍히 여김을 받지 않고서는 치유 받은 소경과 같은 회복의 기쁨을 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으로 사유함을 받은 자는 주님을 뵙게 되며 진리가 그 사람의 것이 될 뿐만 아니라 구원의 기쁨을 얻게 되는 것이다.

 

2.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들이다.

예수님은 눅18:17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고 하셨다. 어린아이는 아직 미숙한 단계의 영혼이다. 곧 지식과 깨달음이 미미한 자이다. 그래서 율법을 잘 알지도 못하고 지키기도 어렵다. 그러나 이런 어린아이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무지를 자각하고 하나님 앞에 깨우침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며 예수님께로 가까이 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을 내세우거나 자랑할 것이 없는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 만나 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마음이 열려 있기에 진리가 임하실 때 그것을 보고 기뻐하며 받아들이는 축복을 받는 것이다.

 

3. 영적 어두움 속에 있던 자들이 빛을 보게 된다.

오랫동안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받지 못했던 이방인들이 있다. 영적 삶에 있어서는 지극히 어두움 속에서 살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빛을 보게 된다. 사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고 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영적 어두움 속에서 살던 이방인들에게 크나큰 소망이 되었다. 이제까지 진리의 빛을 보지 못하던 자들이 이제는 보게 된 것이다. 예수님의 오심은 이방인들에게 진리의 빛을 보게 하는 축복의 기회가 되었다. 영적인 눈을 뜨는 은총의 기회가 된 것이다. 어둠의 인간은 빛 되신 주님 앞에 나아갈 때 눈뜨는 복을 받는다.

사55: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고 했고

사55:7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 고 했다. 빛 되신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치료와 힘을 얻으며 죄 용서와 구원의 기쁨을 얻는 것이다.

 

 

 

<요9:39-41>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나타난 결과, 즉 구주이신 예수님을 배척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말씀이다.

 

1. 그들은 소경이 아니며 진리를 아는 자들이라고 하지만 실은 그렇지 못한 자들이었다.

“보는 자들”이란 율법에 대한 자신들의 지식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이며 스스로 진리에 대해 올바른 해석자들이며 진리의 안내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지식은 참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진리의 참된 의미를 깊이 상고하지 않고 자신들의 허영과 민족적인 우월감을 만족시키는 도구로 삼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리가 그들 앞에 나타나셨으나 무지한 소경은 오히려 진리이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보고 있는데 스스로 본다고 하는 그들은 볼 수가 없었다.

주님은 계3:18에서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고 하셨다.

스스로 안다는 교만은 진리의 참된 면을 보지 못하게 한다. 우리의 힘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의 은혜가 함께하실 때 진리이신 예수님을 볼 수 있고 바르게 만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2. 그들은 눈이 먼 사람들이었다.(40절“ . . . . ”)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이 왜 소경이냐고 질문하였다. 바리새인들은 왜 눈먼 소경들일까요? 그들은 오랫동안 전통에 젖어 마치 캄캄한 굴속에 갇혀 시력을 상실한 자들같이 참된 영적 진리에 어두운 소경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마23:17, 19에서 그들을 소경이라고 심하게 꾸짖으셨다. 그러므로 그들은 시력을 상실해 버린 장애자들처럼 전통에 굳어져서 눈이 먼 지도자들이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그들은 자신들의 교만한 생각 속에 스스로 만족해하며 진리에 대한 신선한 갈망을 잃어버린 것이다.

* 은혜 받을 줄 아는 성도는 마음이 가난할 줄 아는 겸손한 신앙심이 있는 성도이다.

맹목적인 율법주의 신앙은 자기 앞에 계시는 예수님도 보지 못합니다. 바로 코앞에 있는 생명의 양식도 먹지 못하고 놓쳐버립니다.

 

3. 그들은 안이 깨끗하지 못한 자들이었다.(41절“ . . . . . ”)

그들은 차라리 무지했었더라면 예수님으로부터 책망 받을 죄가 없었을 것이다. 본다고 하면서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은 그 마음에 죄악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23:26에서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고 말씀하시면서 진실이 결여된 가증 된 신앙을 책망하셨다.

 

* 우리의 심령이 어둡고 더러우면 주님을 뵙는 데는 합당하지 못합니다. 비록 우리가 세상 적으로 조금 부족하고 모자랄지라도 우리의 심령을 어둡게 하지 말고 항상 환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의 마음을 소유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입술에서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 오늘도 예수님의 마음이 여러분의 마음에 가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여러분의 입술에서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10:1-6>

 

본문에서 예수님은 예수님과 성도와의 관계를 비유하여 말씀하시기 위하여 양떼들과 그 양을 인도하는 목자의 이야기를 예로 말씀하신다.

 

1. 하나님은 목자이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자이시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부터였다.(창12:2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이때부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목자가 항상 양과 함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항상 이스라엘 과 함께 계셨고, 그들이 어디로 가든지 지키셨으며 푸른 초장과 시냇물가로 인도하셨다.(창28:15) 이것은 목자와 양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상징하는 예이다.

본문에서 “양의 우리”라는 말씀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양의 우리” 즉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을 통과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 양의 문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우리들의 목자이신 하나님은 자기 양들이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반드시 통과 하게 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에게 “절도며 강도”라고 하신 이유는 그들이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 좋은 목자, 좋은 성도란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반드시 통하게 하는 목자, 반드시 예수님을 통해서 사는 성도인 것이다.

 

2. 그것은 예수님은 양의 문이시기 때문이다.(7절“ . . . . . ”)

문을 통하지 않고는 양의 우리인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

 

3.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시다.(11절)

예수님이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탐욕과 위선에 빠져 있었으나 예수님은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희생하셨기 때문이다. 만약 오늘날도 자신의 탐욕과 위선에 빠진 종교지도자와 성도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선한 목자도 아니요, 양도 올바른 양이 아닐 것이다.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이 규정한 이상의 권위를 스스로 확보하고 있었고, 도적이나 강도와 같은 폭력으로 백성들에게 군림했으나 예수님께서는 겸손하심과 진실하심으로 신령한 가르치심으로 백성들을 인도하셨던 것이다.

 

 

 

 

 

 

 

 

 

 

<요10:7-10>

 

요10:9에서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고 하셨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에 대한 말씀을 하셨으나 당시의 유대인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 선한 목자이심을 공공연히 말씀하시면서 예수님 외에 구원의 복음을 가져 왔다고 하는 자들은 모두 다 “절도며 강도”라고 하셨다.

 

1. 절도와 강도는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다.(10절)

오늘날의 사회는 날이 갈수록 절도와 강도가 극성을 부리며 주인 몰래 담을 넘고 창을 넘나든다. 절도와 강도가 남의 담을 넘고 창을 넘는 이유는 목적이 분명하다. 사람이 가진 것을 빼앗고, 사람의 목숨을 헤치기 위해서이다.

에덴동산에도 절도며 강도가 있었다. 하나님 말씀에는 먹지 말라는 것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문으로 들어오지 않은 사탄이가 몰래 들어와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는 거짓 생사관을 말했던 것이다. 이렇게 생명의 문을 통과하지 않고 몰래 거짓 복음을 가지고 들어온 사탄의 꼬임에 빠짐으로 인류는 생명의 길을 잃고 말았다.

 

2. 예수님 외에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없다.(10절“ . . . . ”)

예수님 보다 앞서 온 많은 지도자들도 있었다. 그들이 모두 인류에게 참 구원의 길을 보여 준다고 별의별 종교적 의식과 철학을 가르쳐 왔으나 그런 것들이 인류를 구원하지 못했다. 본래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참 메시아는 오직 예수님 한 분 뿐이신 것이다.

* 우리는 오직 예수님을 통할 때 구원을 받고 사람을 살리고, 사람을 살찌고 건강하게 하는 생명의 꼴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요10:10-11>

 

본문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선한 목자로 비유하심으로 당시 유대 종교가 상실한 생명력을 풍자하신 말씀이다.

 

1. 선한 목자 비유의 의미

당시 유대 사회는 농업과 함께 목축업이 산업의 주류를 이루었다. 또한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의 에베소, 서머나, 라오디게아(계1:11)등 소아시아들도 가은 구조였다. 이들 지역에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은 흩어진 나그네-디아스포라 (벧전1: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가 되어서 로마 제국과 유대교로부터 극심한 고난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고난을 미리 아시는 주님께서 스스로 선한목자임을 자처하시고 히13:5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고 말씀하시므로 위로와 확신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계3:11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고 권고하신다. 우리가 때로는 의의 빛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칠흑같이 어두움 속에 잇다할지라도 덩달아 좌절하여 신앙을 포기하지 않도록 주님의 사랑을 굳게 의지해야 하겠다.

 

2. 선한 목자의 은혜

요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고 하셨다. 양을 위해 목숨을 걸겠다는 것이 목자들의 인생관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이러한 의지는 우리들을 향하신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총인 것이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내어주셨으며 아울러 모든 은사”도 주시는 것이다.(롬8:32)

우리가 때로는 세상의 불의의 압력과 죄악의 유혹, 그리고 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신앙의 길에서 실족할 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끝났다,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말자. 비록 제자들은 주님을 배반하였을지라도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러한 제자들을 다시 찾으셨다.(요21:1-4, 15-17) 선하신 목자 예수님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시고 함께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요10:11-12>

 

예수님은 본문에서 참 목자와 돈을 받고 공용된 삯꾼 목자와의 차이를 들어서 예수님은 양을 위해 목숨까지도 버리시는 참 목자이심을 말씀하신다. 자신의 목숨을 버리시면서 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참 목자에 대해서는 어제 아침에 말씀을 드렸고, 오늘 아침은 삯꾼 목자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한다.

 

1. 삯꾼들의 의식과 폐단

1)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12절) 물론 이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과 사명이 결여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의식을 묘사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악한 목자]라고 아니하시고 ‘삯꾼’

이라고 하신 것을 유의해야 한다. 당시에는 목자를 천직으로 아는 사람들과 [임시 고용직]이 있었다고 한다. 임시 고용직이 악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은 전래적 사명의식이 없다는 것뿐이다. 참 목자들처럼 양떼들과 ‘생명적 관계’가 아니라 물질적이며 상대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차이이다.

2) 평소에는 이 간계들이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절박한 위기가 닥치면 상대적 삯꾼들은 상대적으로 삯꾼들은 자신의 안녕과 유익을 구한다. 오늘날 이 시대에 중요한 것은 진정 주님께로부터 목자의 사명을 받은 목자인가? 하는 것이다. 우선 목자 자신들이 그런 목자가 되어야 하고, 성도들 또한 그런 목자를 만나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오늘날 삯꾼은 목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삯꾼 신자들도 있다.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신앙인이어서는 안 된다.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 몸에 부어드린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예수님 중심일 때 참 목자를 만날 수 있고 자신의 삶에도 참 기쁨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2. 양들의 자세와 응답

1) 양들의 자세

“이리가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12절)고 하신 것은 양의 자세를 강조하신 말씀이다. ‘늑탈’은 이단 사상의 위협을 의미하고 ‘헤침’은 외부의 박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양떼들인 성도들은 오직 참 목자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언약에 ‘순종과 믿음’으로 뒤좇아야 하는 것이다. 상황과 형편에 따라 의심하고 인내하지 못하여 복음을 벗어나면 이단과 불신앙의 세계로 다시 빠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양들의 의무

양들은 개처럼 파수하고 소처럼 밭을 갈 힘이 없는 동물이다. 다만 자기 자신을 목자와 이웃에게 제공함으로써 그 의무를 다하는 동물이다. 즉 양은 젖과 살코기와 털을 제공한다. 털깎기를 거부하는 양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것을 거부하여 털을 깎지 않으면 양은 컬이 엉키고 벌레가 생겨 자신의 목숨까지 위협을 받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성도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제공하며 살아야 한다.

 

 

 

 

 

<요10:13-16>

 

삯꾼 목자들은 양떼가 위험에 처했을 때 돌아보지 아니하고 도망가지만 선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하나님이 주님을 아시듯 주님이 양떼를 아시므로 기꺼이 목숨을 버리기까지 양떼를 보호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1. 주님은 우리의 약함을 아신다.

양은 자기 방어능력이 역하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전도 사역의 현장에 내보내실 때 마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라고 염려하셨다.

양으로 비유되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사실 연약하기 그지없으며 그래서 범죄 하기 쉽다. 고후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 했는데 성도는 보배를 가진 존재이지만 질그릇처럼 약하디 약하다. 그래서 목자를 배반할 수도 있고. 기진하여 길에서 쓰러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선하신 목자이신 주님의 보호하심 없이는 한 순간도 혼자 살 수가 없다. 선한 목자이시 우리 주님은 그렇게 약한 양들의 완벽한 보호자가 되어주신다.

 

2. 주님은 우리 각자를 아신다.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을 구체적으로 안다. 그 실례로 주님은 목자가 양떼를 우리 안에서 불러낼 때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고 하셨다. 선한 목자이신 우리 예수님은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과 성격과 그의 장단점을 아신다. 그가 괴로워하는 일도 아신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다. 시139:2-4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님이 우리를 이렇게 아시는 이유는 우리를 지으시되 모태에서 우리를 조직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기에 우리를 가장 잘 아시며 심지어 우리의 체질까지 아셔서 도와주시는 선하신 목자이신 것이다.

 

3. 양들을 위해 자기의 목숨을 버리신다.

선한 목자 되신 주님은 이미 양떼를 위해 그 목숨을 버리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 여기에는 너무나 지난 사랑이 깔려있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노라”고 하셨다. 주님은 자기 양떼를 위해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셔서 새 생명을 그의 모든 양떼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비록 우리가 약한 부분이 있지만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고 그분의 품에 안길 때 장래 우리에게는 시들이 않는 면류관과 기업이 주어질 줄로 믿습니다.

 

 

 

 

 

 

 

 

 

<요10:17-21>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은 다시 목숨을 얻기 우한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유대인들 중에는 예수님을 지지하는 무리와 반대하는 무리로 나누어져 그들 가운데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능력이 있었으나 그 능력을 추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선택하셨다. 이는 실로 강자만이 취할 수 있는 태도라 아니할 수 없다.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을가요?

 

1. 다시 살기 위해서이다.(17절 “ . . . . . ”)

예수님께서는 세상사는 일이 자신이 없고 고통과 두려움 때문에 죽음의 길로 들어선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사시기 위해서, 즉 진정한 생명,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시기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 것이다. 예수님 자신은 다시 태어나실 이유가 없으실 만큼 인격과 성품과 모든 삶 자체가 온전하시지만 오직 죄악 중에 태어나서 죄악 중에 살아가는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한 죽으심이었다. 결국 예수님의 죽으심은 인간이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함을 모범적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죄에게 자기의 육체를 불의의 병기로 드리며 살아가는 죄의 자녀들이다. 엡4:22-23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라고 했다. 그러므로 사람이 새롭게 태어나려면 육적인 자아가 먼저 죽어야 한다. 죽음이 없이는 새 생명의 탄생은 없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고 그리스더께서 자기 안에 사시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은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다. 그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라면서도 실패하는 이유는 바로 육적인 자아를 죽이는 일이 없이 그저 새롭게 태어나려고만 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죽음이 잇는 곳에 완전한 탄생이 있는 것이다.

 

2.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을 택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기 위해서이다.

:18b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십자가의 죽으심이 예수님의 소원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입으셨고 똑같은 고통의 감각이 있으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될 수만 있으면 십자가의 고난의 잔이 지나가기를 위해서 간구하셨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죽음의 잔을 거부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마26:39,42) 예수님은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일이요, 기뻐하시는 일이시라면 자기의 육체를 버리는 일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가장 이상적인 성도들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도로 택하신 것은 죄악의 구덩이에서 성도들을 건져내시려는 목적을 성도들을 통하여 이루시려는 것이다. [마16: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때로는 희생과 고난이 따르더라도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이라면 우리를 먼저 부인하는 일과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잘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요10:22-32>

 

예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궁금증은 날로 더해갔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능력을 보아서는 범상하신 분이 아닌데 예수님의 사상은 자신들이 기다리는 메시아와는 다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그들은 노골적으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지 아닌지를 말해달라고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1. 유대인들의 질문.(23-24“ . . . . . ”)

여기서 유대인들이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그들의 추종자들을 가리킨다.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질문에는 역시 함정이 들어 있었다. 만일 예수님이 ‘그렇다’고 직설적인 답을 하시면 그들은 그것을 왜곡하여 하나님에 대한 모독죄로 산헤드린 공회에 재소하거나, 반란지를 씌워 로마총독에게 넘기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간계를 아시는 주님께서는 이 때에도 간접적인 표현으로 그것을 시인하는 말씀을 하셨다.(25절)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분노했다.(31절) 예수님에 대한 마음이 열려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진리의 빛이 비춰지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여 당신은 그리스도인가?’라는 질문은 모든 인간들이 한 번씩은 하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죄인인 인간은 누구나 구원을 갈망하고 있기 때문이며 인간이 죄인인 이상 이 질문은 계속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문밖에서 두드리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고 그분을 영접해 들여야 한다.

 

2. 구원받을 자가 받을 은혜.(27-28“ . . . . . ”)

예수님을 메시아, 즉 그리스도로 아는 자들은 양들이 목자의 음성을 알듯이 그리스도의 진리를 아는 자들이며, 양들이 목자를 따르듯이 그리스도를 따라 행하는 자들이라는 말씀이다. 구원받을 사람들은 항상 진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며 진리에 대한 말씀을 받을 때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은혜를 받는다. 그러나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처럼 진리를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기적을 보아도 믿지를 않는다. 롬11:8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고 했는데 구원받지 못할 사람들의 심령은 혼미하여 진리를 들을 수 있는 귀와 영적인 것을 볼 수 있는 눈도 닫혀있는 것이다.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은 예수님을 아는 일에 힘쓰고, 늘 진리의 말씀을 사모하며, 받은 말씀을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

영생이란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가 받는 생명이다. 이 영원한 생명은 죽음과는 상관없는 생명이며 또한 영원히 보장되어있는 생명인 것이다. 어떤 방해물이 와도 이 영원한 생명을 빼앗을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은혜이기 때문이다. 이 영원한 생명은 원근법적 원리가 적용된다. 그 생명은 하나님과 가까이 있을수록 더 강렬해지며, 떨어질 수록 약해지기 때문이다.

 

 

 

 

 

<요10:31-36>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그리스도이거든 밝히 말하라고 신분을 확실히 밝힐 것을 요구하였다. 그런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 한다”고 하시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시자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듣고자 하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돌로 예수님을 쳐 죽이려고 하였다.

 

1.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30절)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하나님 자신이셨다. 즉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께서 보이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신 것이다. 성경은 이 사실을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다 빌2:6-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골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요14:9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예수님은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며 보게 하신 분이시다.

 

2.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시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이유는 그렇지 않고는 인류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간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죄를 위해 피 흘리시기 위해서 말씀이 인간의 육신이 되어 오신 것이다. 요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말씀 그대로 계셨더라고 한다면 인간은 영원히 죄 가운데 머무르게 되어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고 인류의 죄 값으로 십자가의 희생 제물이 되심으로써 인간은 하나님과 화해하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다.

 

*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온유하심을 알 수 있으며 예수님을 통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덧입을 수 있다.

 

 

 

 

 

 

 

 

 

 

 

 

<요10:37-42>

 

본문에 이르러 그간의 예수님과 유대인들 간의 변론은 마무리 된다. 변론이 계속되는 동안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진실하게 듣지 않았다. 그들은 어떻게 하든지 책을 잡으려고 했고, 심지어 예수님을 귀신들린 자로 매도하려고 했으며 기회만 있으면 돌로 쳐 죽이려 하거나 체포하여 공회에 넘기려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를 피하셔서 요한이 세례를 주던 베뢰아 지방으로 오신다.

 

1. 우리들의 믿음은 입증이 되어야 하는데 하나님께는 동기로 입증되어야 하고, 믿지 않는 형제에게는 결과로 입증되어야 한다.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주여 나를 떠나소서’라고 했으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떠나지 않으셨고 오히려 그런 베드로를 제자로 삼으셨다. 왜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떠나 달라는 베드로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제자를 삼으셨을까요? 즉 베드로가 ‘나를 떠나소서’라고 말한 동기를 보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동기의순수함은 하인의 병을 고쳐주시기를 간청했던 이방인 백부장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는 예수님께서 직접 내방하셔서 고쳐 주시겠다는 것을 극구 사양했다.

마8:8 백부장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진노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로 인해 기뻐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방문을 사양하는 그의 동기가 베드로에게서와 같이 순수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신앙의 동기가 순수해야 한다. 순수한 동기는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께는 동기의 순수함을 보실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인간에게는 없다는데 있다. 특별히 그것이 불신앙의 사람일 때는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신앙의 사람들에게는 우리의 신앙을 결과로 보여주어야 한다. 마5:15-16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고 하셨다. 즉 예수님을 믿고 거룩하게 변화된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나무는 그 열매를 통해서 좋은 나무인지 나쁜 나무인지를 안다. 우리의 열매가 좋을 때 하나님께 영광이며 다른 사람을 구원얻게 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신앙의 동기는 순수하게, 세상 사람들 앞에서는 우리의 신앙의 좋은 열매를 통하여 영광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예수님은 불신앙의 사람들의 손에서는 벗어나셨다.(39절“ . . . . ”)

예수님의 말씀이 끝나자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길을 무시하고 그 자리를 피하셨다. 주님은 그들에게 37-38“.....” 즉 예수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행적을 살펴보고 극히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극히 작은 일이라도 있다면 그 때 가서 정죄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기회를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손길을 거절하신 것이다. 또한 그들의 손길은 죄악의 손길이었다. 그들은 어떻게 하든지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길을 거절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죄를 범할 그들이 불쌍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길을 거절하심 속에서도 예수님의 자비하심을 알 수 있는 것이다. * 동기의 순수함과 좋은 열매의 신앙이 있는 그곳에 주님이 함께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요11:1-4>

 

베다니 마을에서 삼 남매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한 가정에 위기가 닥쳐왔다. 그 이유는 가장격인 나사로가 죽을병이 든 것이다.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환란은 어느 가정이나 예고 없이 닥치는 것인데 바로 이 삼 남매의 가정에 그런 위기가 들이닥친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이 가정처럼 우리에게도 예고 없이 위기를 당할 수도 있다. 만일에 그런 일이 우리에게 닥친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1. 위기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

본문에 나오는 나사로의 가정은 미록 삼 남매가 가난하게 살아가는 형편이었지만 평소에 서로가 극진한 사랑을 가지고 살았으며 또한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해 평화와 경건함이 있는 가정이었다. 그런데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죽음을 재촉하는 중병에 결렸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요 대단한 위기가 닥친 것이었다. 더욱이 나사로가 걸린 질병은 인간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대단히 중한 병이었던 것 같다. 막5:25-26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라고 했는데 인간이 위대하고 대단한 것 같으나 실상은 아무 것도 아니며 참으로 무능한 존재가 인간이다.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인간이란 여러 약한 것들 말고는 자랑할 것이 없다.

질병은 꼭 육적인 질병만이 아니라 영적인 질병도 질병이다. 가족 중에 영적인 질병으로 앓는이가 있다고 한다면 역시 가정에 위기가 올 수 있다. 가정에 병든 자가 없어야 한다. 우리 가정에 영적인 건강에 이상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 더욱이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병든 것을 보고도 고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면 사람은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 혹시 우리 가정에 이런 일이 있다고 한다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2. 예수님께 아뢰어야 한다.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즉시 아뢰어야 한다. 본문에 나오는 나사로의 가정의 위기는 가족들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본문 3절에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라고 했다. 오라비가 중병에 걸려 위기가 닥친 것을 깨달은 누이들은 즉시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그 사실을 아뢰었다. 그렇다. 위기를 만난 가정은 누구든지 곧바로 옛님게 나아가 사정을 아뢰어야 한다.

시18:6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라고 했다. 다윗은 환란 날에 지체하지 않고 하나님께 아뢰었다.

사람이 위기를 당하면 원망과 불신에 사로잡히기 쉽다. 옛 이스라엘 백성들도 광야에서 바로의 군대의 뒤쫓음을 당하는 위기를 만났을 때 그러했다.(출14:10-12) 그러나 원망과 불신앙에 흔들리면 망하는 징조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우리들이 당한 위기를 아뢰는 일은 가장 빠른 해결방법인 것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 걸려 위기를 만난 두 자매는 조금도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도움을 요청한 것을 볼 수 있다. 위기를 만난 자신들의 가정과 나사로를 지금도 지극히 주님께서 사랑하시고 있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3절에서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라고 아뢸 수 있었다. 위험할 때일수록 주님께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 택한 자들이 당한 위기는 죽너나 망할 일이 아니요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4절“ . . . ” 성도의 고난에는 반드시 주님의 계획이 계신다. 응답을 기대하고 아뢰자.

<요11:5-11>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이틀 뒤에 유대로 출발하시려 하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하였는데 거기를 가시려 하느냐고 만류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그를 깨우러 가야한다고 말씀하셨다.

 

1. 예수님은 진리 안에서의 우정과 사랑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세상 친구처럼, 맹목적이고 비도덕적이며 일시적인 유익을 위한 우정이나 사랑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항상 진리 안에서 사랑하신다. 예수님은 당연히 말씀 한 마디로 나사로의 병과 죽음을 물리치실 수 있으셨지만 그렇지 않으시고 나사로가 죽기까지 기다리셨다. 그렇게 지체하신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죽음과 병고와 삶의 불행도 맛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후에 그들로 하여금 병마에서의 회복보다 은총, 즉‘부활의 은총’을 체험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을 더욱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오늘날도 성도들의 고난과 불행에 대하여 무심한 듯하실 때가 있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서 모순을 품게 하실 때가 있다. 택하신 성도들을 영광의 자리가 아닌 오히려 불행의 골짜기에 방치하실 때가 있다. 모세처럼 미디안 광야로 내몰고 다윗처럼 타국의 망명객으로, 요셉처럼 애굽의 감옥으로 던져버리실 때가 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주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 그 과정이야말로 우리를 보다 더 지혜롭고 성숙하며 강건한 주님의 제자로 삼으시기 위한 기간이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잠5:3-4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같이 날카로우며 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과 우정은 한 순간의 쾌락을 주는 그런 ‘창녀의 사랑이나 우정’과는 분명히 다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진리를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 선물하시는 사랑과 우정인 것이다.

 

2. 예수님은 우리에게 참된 사랑과 우정, 즉 희생적이고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사랑을 베푸신다.

유대로 가자고 하시는 예수님에게 제자들은 유대인들이 주님을 죽이려고 하는데 또 그곳으로 가시려느냐고 질문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간’과 ‘빛’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우정의 정신’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9절“ . . . . ” 이 말씀은 ‘밤이 두려운 것이지 낮은 괜찮다’라는 말씀이다. 즉 사랑을 하려는 사람은 결코 난관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맞다. 우리가 주님의 은총으로 구원받은 성도요, 주님의 사랑받는 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려면 희생적 자세와 아울러 ‘소망적인 보다 확고한 신념’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리빙스턴]은 이런 말을 했다. ‘사명 자는 결코 그 일을 끝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강한 믿음과 확고하고 담대한 소망적 사명감을 가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에게 가시면서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셨다. 주님은 우리의 신앙이 잠들었을 때에도 우리가 죽는 것 같은 상황 속에 있을 지라도 변치 않으시는 사랑과 우정으로 깨우러 오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11:12-16>

 

나사로가 잠들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제자들은 그러면 나사로의 병이 곧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오히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그 때 그것에 가지 않은 것은 제자들이 믿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말씀하신다.

 

1.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대해서 오해하였다. (12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사로가 잠들었으니 깨우러 가자고 말씀하신다. 이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를 잘 못하여 잠들었으니 조금 있으면 깨어날 것이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제자들은 나사로가 잠들었다는 말씀을 듣는 순간 d제 나사로가 죽음의위기를 넘기고 건강은 회복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친구인 나사로의 건강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관심과 이해가 부족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수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고 약속하셨으며 행17:11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

였다고 했다.

우리는 간혹 주변의 환경이나 개인적인 경험이나 지식 때문에 가려져서 예수님께서 하신의 말씀을 그 본래의 뜻대로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이러한 오류를 없애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모든 것 보다고 우위에 놓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들을 평탄하게 하시고 형통하게하실 줄로 믿습니다.

 

2. 예수님은 제자들의 오해를 바로 잡아 주셨다.(13절“ . . . . ”)

나사로의 죽음을 잠으로 오해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다고 단정적으로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실수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신31: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라고 하셨는데 구약성경에서는 죽음이 자주 잠으로 묘사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시각에서 본다면 인간의 육체적인 죽음은 일순간의 잠인 것이다. 이러한 간점에서 나사로의 죽음을 잠으로 표현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제자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빌2:5]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라고 하셨는데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시각을 가질 때 바른 이해가 되며 세상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시각은 영원하고 무한한 것이다.

 

 

 

 

 

 

 

 

 

 

<요11:12-16>

 

죽은 나사로에 대하여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오해한 제자들은 ‘잠들었으면 다시 깨어나리라’고 대답하였다. 이러한 제자들의 의식은 모든 인생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이다. 우리는 너무 자주 예수님의 말씀을 본질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해할 때가 많다. 이러한 오해와 편견을 버려야 우리는 진리의 말씀에 더욱 가가이 갈 수 있으며, 진리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제자들의 오해아도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 이유는 ..

 

1. 인간은 가시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고 했는데 이 죄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된 이 사실은 어떤 사람도 예외일가 없는 모든 인생에게 적용된다. 그런데 간혹 이 세상을 사는 인생들 중에는 자기의생명이 영원할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대단한 오해이며 착각인 것이다. 간혹 성도들 중에서도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는, 그래서 세상의 것을 사랑하며 거기에 심한 집착을 하므로 신앙을 잃는 자들도 있는데 그것은 실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들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고후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후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삶은 분명히 유한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땅에서의 삶은 장차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날을 준비하는 기회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2. 예수님께서 지체하신 이유

요11: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는 왜 나사로가 앓아누워 있을 때 즉시 고쳐주시지 않고 나사로가 죽은 후에야 그를 찾아오셨는지에 대해서 설명하신 말씀이다. 제자들은 아마 예수님이 왜 베다니에 가지 않으셔서 나사로를 죽게 하셨을까? 라고 마음속에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의심에 대해서 예수님은 명쾌한 답을 주셨다. 예수님께서 지체하신 이유는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시려는데 있었다. 이제 예수님은 베다니에 가셔서 죽음 가운데 있는 나사로를 일으키심으로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그들에게 확증시켜 부셔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간혹 우리가 기도하고 소원하는 일이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할 때도 있으나 주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문제를 빨리 해결해 주시지 않으시고 지연시키시는 것은 그 일로 인하여 우리의 신앙을 연단하시려는데 있음을 알아야 한다.

 

3. 도마의 고백(16절)

도마는 이제 자신들이 어떠한 역경도 감수하고 고난의 십자가를 지겠다는 용감한 신앙 고백인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신앙의 고백이 필요하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은 어떤 고난도 능히 감수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대부분 영광의 십자가는 구하면서도 고난의 십자가는 회피하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모습이다. 제자들의 신앙은 순교자적 신앙이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 신앙의 본래 뿌리인 것이다. 롬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오늘날 울들에게 바로 이러한 신앙적 삶이 강력히 요청되는 때인 것이다.

<요11:17-24>

 

본문은 한 가정의 가장의 갑작스런 죽음을 당한 상가 집의 비통한 모습과 바로 그 때 그 집에 도착하신 예수님과 마르다의 대화를 다룬 내용이다.

 

1. 예수님은 슬픔과 절망이 가득 찬 곳에 오셨다.

요11:17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유대지방은 기후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신속하게 처리하고 매장을 한다. 18절에 많은 유대인이 위문하러 온 것을 보면 생전에 나사로가 덕이 있는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장례식에 참여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은 ‘인생은 참으로 허무한 것이구나’라는 것이다. 초상집의 분위기란 생명과 단절된 비통과 슬픔 바로 그것이다.

무덤에 있은지 나흘이나 되는 오라비로 인해 기쁨을 잃어버린 슬픔으로 가득한 집에 참된 생명도, 희망도, 능력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어두움으로만 가득찬 집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신 것이다. * 17절에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와서 본다’라는 뜻은 ‘참여 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머리 위의 푸른 하늘 저 너머에 팔짱만 끼고 방관하시며 앉아 계시는 분이 아니라 아수라장과 같은 삶의 현장에 직접 찾아오셨다는 것이다. 바로 이 사실이 우리 인생의 희망이며 행복인 것이다.

 

예수님은 이미 죽어 부패해버린 나사로의 육체와 삶을 부활시키신 것처럼 소망을 잃어버린 우리 삶의 현장에 영생의 소망을 부활시키셔서 다시 생명을 불어넣으시려고 세상에 오신 것이다. 우리는 나 자신의 꿈도, 이웃의 사랑도 믿을 수 없는 절망적인 시대 속에서 살지만 오직 “부활이요 생명”(25절)이신 예수님이 계시면 생명력이 넘치고, 꿈과 희망이 다시 넘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2. 예수님은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 중에 함께 하신다.

21절에 보면 주님을 만난 마르다는 주님께서 급히 내왕 해 주시지 않은 것을 원망했다. 그리고 자신의 소원과 감정으로 오라비를 살려 주실 것을 소원했다. 한 마디로 어디까지나 그것은 자기중심적인 신앙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6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무시하고 자신의 욕망에서 나온 믿음은 헛된 바램임 을 유의해야 한다. 23절에도 마리아는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이번에는 장차 미래의 사건으로 곡해를 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예수님이 바로 자기 곁에 계심에도 불구하고 어디까지나 자기식대로 생각하고 판단을 한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탐심과 곡해’로 가득 찬 인생들을 진리로 거듭나게 하시고 오직 그 진리에 의한 참된 신앙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요11:25-26>

 

하나님의 계시는 구약 시대로부터 신약시대로 흐르면서 점진적으로 드러났다. 바로 그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부활과 영생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약시대에 와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인간의 부활과 영생은 사실로 확정이 되었다.

본문의 말씀은 나사로가 마지막 날에는 반드시 부활할 것으로 믿는다는 마르다의 고백에 대해서 예수님은 주님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에 누구든지 자신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며, 또 살아서 믿는 자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1. 구약 성경의 희미한 부활사상.

복에 대한 견해가 구약성경과 신약 성경에는 큰 차이가 있다. 신약 성경에는 거의 현세적인 복의 개념이 없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팔복에도 현세적인 복의 개념은 없으며 거의 현실 초월적이요 내세적이다. 반면에 구약의 복의 개념은 내세적이지 않으며 대부분 현세적이다. 구약의 축복의 장이라고 할 수 있는 신명기 28장을 보면 내세적이거나 현실 추월적인, 혹은 영적인 복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구약에 부활과 영생의 사상이 아예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에녹과 엘리야는 죽지 않고 승천하였으며(창5:22-24, 히11:5, 왕하2:11-12) 삼상2: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라고 노래한 한나, 다윗이 노래한 시16:9-10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말씀과 예언자들의 예언에서(사26:19, 겔37:1-10) 우리는 부활 사상을 찾아볼 수 있는데 매우 희미하다는 사실이다. 이런 희미한 구약의 부활과 영생의 사상을 확실하게 드러내 주신 것이 주님의 부활인 것이다.

 

2. 부활은 현세로 다시 복귀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의 이 말씀은 부활이 현세에로 다시 복귀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현세로 다시 복귀하는 자는 죽는다. 나인성 과부의아들도 죽었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도 죽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말고 일반 다른 사람들 중에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나 본문의 나사로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지만 그도 다시 죽었다. 당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은 엄밀히 말해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이 아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은 영원히 사는 것이다. 부활은 곧 영생으로 직결된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주님께서도 나는 부활이요 생명 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뜻에서 이 세상에서 부활한 사람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전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했다. 부활과 영생은 오직 예수님께만 있는 것이다.

 

3. 부활과 영생은 믿음으로 참여할 수 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요11: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말씀에서 “부활과 영생”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중요하게 언급되는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믿음이다. 믿음이라는 단어가 본문에서 세 번이나 강조되고 있는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ㄱ은 부활과 영생은 오직 예수님께만 있는데 그 부활과 영생에 참여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님에 의한 부활의 풍성한 열매들이 되는 것이다.

<요11:27-35>

 

마르다에게 부활과 생명에 관해 말씀하신 예수님은 이제 사라들과 더불어 나사로의 무덤으로 향하셨다. 무덤에 도착하신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향해 나사로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뒤 사람들이 나사로의 무덤을 가리키자 주님께서는 무덤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1. 주님은 인생들의 무지로 인하여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님은 33절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 셨다고 했다. ‘통분’이라는 뜻은 다른 복음서(마9:30. 막1:43)에는 ‘험하게 경계한다.’ ‘책망하다.’라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인간적인 동정심에 앞서 거룩하신 노여움으로 슬퍼하는 군중들을 책망하신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군중들 또한 예수님의 전능성을 불신하고 원망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군중들 또한 주님의 많은 이적을 목격하고 그 기적의 포도주와 떡을 먹기까지 했던 유대 군중들이었는데 ‘생명의 예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사망의 권세만을 두려워하고 슬퍼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불신앙을 노여워하신다.

그 옛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으로 인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노여워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불신앙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실망시켜드리는 죄악은 없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은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요, 질병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길이며 음부의 권세를 물리치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인생들의 한계를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다.(34절“ . . . . ”)

주님의 이 질문은 나사로가 죽었거나 나사로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를 알 수 없으셔서 하신 것이 아니다. 옛날 타락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창3:9)고 물으신 것처럼 오히려 인생들에게 나사로가 지금 왜 무덤에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질문이시다.

사람은 지혜가 있는 자나, 우매 자나 모두 다 동일하게 죽음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생들의 한계인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 사실을 주변 사람들에게 깨닫게 하신 것이다. 진리 되신 하나님을 외면한 인생들의 운명과 분깃이 바로 무덤 안에서 부패되어가고 있는 나사로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수 없는 욕망과 명예와 고뇌 속에서 살던 우리의 수많은 조상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지금 영원한 길을 바로 가고 있는가? 사람은 반드시 육체의 모든 것을 벗을 날이 오고야 만다. 이것이 절대 불변의 인생의 진리다. 그러나 이 죽음에 대한 염려와 공포는 오직 인생의 세계로 오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할 때 해결 할수 있고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요11:36-42>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나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신 예수님은 무덤 입구의 돌을 치우도록 명령하시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항상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뒤 자신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임을 믿게 하려하오니 필요한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시고 나사로를 살아나게 하시는 기적을 보여주셨다.

 

1. 예수님의 이런 모습을 본 유대인들의 시각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1) 나사로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과 연민의 관계로 보는 긍정적 시각(36절“ . . . ”)

유대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 이르러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보고 한 말이다. 성경에 예수님께서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어도 울으셨다는 기록은 있다. 친구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와 예루살렘성 앞에서 그 패망을 생각하시고 우셨다.(눅19:41-42)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무덤 앞에서 우신 뜻이 어디에 있을까요? 예수님의 그 눈물 속에는 인간의 모든 슬픔과 고통을 대신 짊어지신 대속주로서의 모습과 인간적인 연민이 들어있는 것이다.

 

2) 또 하나의 시각은 인간적인 무능함과 일관성이 없다고 보는 부정적 시각이다.(37절)

어떤 사물에 대한 이해는 각각 모는 시각에 따라 달라진다. 일부 유대인들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을 무능하다고 보았다. 전에 소경을 보게 했는데(9:6-) 왜 지금은 사랑하는 친구가 죽었는데도 그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느냐는 것이었다. 그것은 예수의 신적 능력에 대한 일관성이 없고 더 나아가서 나사로를 죽지 않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업t는 자라면 소경을 보게 한 것도 일종의 속임수가 아니냐는 것, 즉 예수님의 교훈과 행동을 불신앙적인 시각으로 본 것이다.

고전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 했다. 긍정적인 시각은 그 사람을 구원 얻게 하지만 부정적인 시각은 멸망을 당하게 하는 것이다.

 

2.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신 후 기도하셨다.(39, 41절)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옮겨놓으라고 하신 것은 무덤의 내부가 모든 사람들이 눈에 잘 보이도록 함으로 주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자들에게 다시 한 번 기적의 현장을 확인시켜 주시기 위해서였다. 주님은 인간의 불신앙에 대해서는 통분히 여기시는 것이다.

41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예수님의 이 기도는 앞으로 이루어질 일에 대한 기도가 아니라 이미 응답 받은 기도에 대한 감사였다. 주님은 나사로의 집에 도착하시기 전부터 모든 것을 알고 계셨고 그의 죽음이 잠에서 깨어나듯이 다시 살아날 것을 알고 계셨다. 주님이 행하신 기적은 하나님의 능력이었으며 예수님의 기적은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다.

 

3.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신 목적은 (40절, 42절)

주변 무리들의 믿음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였다. 예수님의 기적의 능력은 사람들을 믿음의 사람 되게 하셔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함이셨다.

 

 

<요11:43-44>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린 예수님은 나사로를 향해 무덤에서 나오라고 명령하셨고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는 수족이 배로 싸인 채로 나왔는데 그 얼굴에는 여전히 수건이 덮여 있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죽음에서 건져 내셨으며 그로 하여금 자유롭게 다니게 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은 참된 해방 자 이심을 알 수 있다.

 

1. 육적인 질병과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하신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눈에 띤 병자들은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고침을 받았다.

요20: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다고 했는데 요한의 증언을 참고해 보면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더라도 예수님의 눈에 띤 병자들은 다 고침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즉 예수님은 비정상적인 사람이 세상을 정상적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주시고 살펴주신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복음 중의 위대한 복음이며 만일 이것이 없이 전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 복음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이름만 욕되게 할 것이다.

예수님은 큰 소리로 말씀하신다. “나사로야 나오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 위에 계신 분임을 분명하게 보여주시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죽음에 갇혀 있는 나사로를 살려주시기 전에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셨다. 우리는 오늘 아침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확실히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해서 하신 말씀과 그 사실이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예수님에 대해서 확실한 믿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의 사람만을 해방하시는 것이다. 흔들림 없는 분명하고 확실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은 활동을 명령하신다.

예수님은 “풀어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죽은 자는 결코 움직일 수 없다. 반대로 산 자는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움직이지 않는 성도는 죽은 성도인 것이다. 생명이 있는 성도는 반드시 움직이는 것이다.

1) 복음 전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움직인다.

이것은 주님께서 모든 성도에게 공통적으로 위임하신 명령이기 때문이다.(마28:19-20) 또한 복음 전하는 일은 예수님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구원 얻은 사실이 너무 감격스러워 이웃에게 이 귀한 사실을 알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하는 일에 대해서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고 하면서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9:16)고 하였다. 이것이 살아있는 성도의 마음이며 자세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자신을 냉정하게 평가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죄와 질병으로부터 해방을 받은 사람들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생각과 말로만 살아있는 성도가 아니라 우리는 실재가 살아있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그것은 나에게서 복음이 다른 사람에게 증거되고 전파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요11:45-53>

 

본문은 죽은 나사로를 예수님께서 다시 살리신 큰 표적에 대한 유대인들의 불신앙적인 반응을 기록한 내용이다. 예수님의 표적을 본 군중들은

 

1. 믿음으로 수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45절에는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먼저 생각해 봐야할 것이 있다. 왜 마리아에게 온 사람들이라고 했을까? 이 말의 의미는 ‘마리아가 당한 슬픔을 위로하러 온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마리아의 불행과 슬픔을 동정하고 위로하러 왔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표적을 목격할 수 있는 은총과 영생을 얻는 기회를 기호가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라고 하셨다. 인생의 도덕적 선행이 구원의 조건은 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림자가 있는 곳에는 항상 그림자의 본체가 있는 것처럼 모든 착함과 선함 곁에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의 문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기생 라합이, 로마의 백부장, 그리고 고넬료 등 이 모든 사람들은 이웃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다가 구원의 문을 발견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성도의 선행에 그만큼 큰 관심을 갖고 계시는 것이다.

 

2.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도 불신앙의 길로 가는 사람들도 있다.(46절“ . . . ”)

많은 사람들이 큰 표적을 목격한 후에도 끝내 불신의 길로 가고 말았다. 그들은 유대 지도자들에게 큰일이나 난 듯 예수님의 이적을 고하였다. 우리는 간혹 하나님께서는 왜 온 인류가 다 하나님을 믿을 수 있도록 큰 이적을 베푸시지 않으실까? 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은 기적만으로도 인생들의 영혼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말해 주고 있다. 기적과 표적은 인생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존재를 알게 해 주어 일시적으로 맹종하고 굴종하게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게 하고 그 진리의 말씀을 사랑하게 할 수는 없다.

요3:19-20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라고 했고

롬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라고 했다.

 

인생들이 예수님을 외면하는 이유는 그 거룩한 ‘진리성’ 때문이다. 하나님을 몰라서 안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다움’ 때문에 우리 속에 모시기를 꺼려하는 것이다.

진리를 몰라서 해매는 것이 아니라 진리 보다 악을 더 좋아하는 보편적 타락성 때문에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이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예수님께서 가신 길, 진리의 길이요 생명 구원의 길인 것이다.

 

 

 

 

 

<요11:54-57>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아시게 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더불어 에브라임 동네로 가셔서 머무시기로 하셨다. 한편 유대인들은 그들의 명절인 유월절을 준비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왔고 그들 중에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의 명에 의해 예수님의 행방을 추적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런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세상으로부터 잠시 떠나 계시므로 조용한 시간을 보내시게 된 것이다.

 

** 때를 기다리시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의 박해가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예루살렘의 거리를 다니시거나 그 근방에 계실 수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광야지대로 후퇴하신 것이다. 전진은 멋있는 것이다. 그러나 때를 분별하지 못하는 무모한 전진은 일을 그르칠 수 있다. 주님은 은 공생애를 하나님의 뜻대로 마치시기 위하여 지금 때를 기다리시는 은둔의 생활로 들어가신 이다. 성도가 기다릴 때는 어떤 자세로 기다려야 할까요?

 

1.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주님은 적절한 때가 올 때까지 기도로 기다리시면서 본을 보여 주셨다. 공생애 복음 전파의 “때”에 앞서서 사십일을 밤낮으로 기도로 준비하셨다.(마4:1-2)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시기 전에 예수님은 한적한 곳에 나아가셔서 기도로 준비하셨다.(마26:36-46)

때를 기다리는 사람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기다려야 한다.

 

2. 인내하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아셀 지파 비누에의 딸인 안나 여선지자는 과부 된지 84년이나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로 금식하고 기도하며 메시아를 기다려 왔다. 그 기나긴 인내의 세월은 결국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나 뵙는 축복을 받게 하셨다.(눅2:36-37)

히10:36-37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 믿는 마음으로 기다려야 한다.

우리 모든 성도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다. 과연 믿음이 없이 주님이 다시 오실 때를 기다릴 수 있을까?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을 향하여 고향을 등지고 떠난 것도, 자식을 얻기 위해 육신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나이임에도 아브라함이 때를 기다린 것은 모두 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이었다.

[히10:22]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나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요11:54-57>

 

오랜 세월에 걸친 박해로 인하여 남의눈을 피하고 몸을 숨기는 은둔의 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이 유대인들이라고 한다. 그런데 유대인으로서 세상에 오신 주님이 그 유대인들로 인하여 박해를 받고야 맙니다. 때문에 광야 가까운 에브라임 동리에서 세상으로부터 잠시 떠나 조용한 시간을 보내시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시간을 가지게 것이다.

* 우리가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쉬지 않고 계속해야 할 일이 있다.

 

1. 가르치는 일이다.

54절에 보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피하여 은둔 생활 가운데서도 제자들과 함께 계신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공생애 마지막 순간이 가까워 올수록 더욱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일에 몰두 하셨다.

우리는 때때로 시대의 혼란을 말하고 탄식할 때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시대가 어떠하든지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전파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것이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하신 주님의 명령이요 시대와 환경을 초월하여 지속되어야 할 중요한 일인 것이다.

 

2. 배우는 일이다.

은둔하고 계시는 스승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는 제자들은 오히려 진지하게 배우는 기회가 되었다. 제자의 길은 스승을 닮기 위해 배워야 하는 길이다. *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스승이신 예수님을 닮기 위해 배우는 시간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배우지 않고는 예수님의 참 된 제자가 될 수 없다. 토대 교회가 부흥되고 은혜가 넘쳤던 중요한 이유도 성령 충만한 성도들이 계속하여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가는 초대교회 생활을 소개할 때 맨 먼저 “저희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행2:42)라고 증거하고 있다.

 

3. 영적으로 준비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56-57절에 보면 지방에서 올라온 유대인들과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예수님을 찾고 있다. 지방에서 올라온 무리는 예수님을 지지하고 따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조용히 은둔하는 생활은 준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갈급한 영혼들을 위해서 영적인 준비를 하는 시간이다. 예수님은 반드시 준비하는 시간을 가지셨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 나가셔서 금식하시며 기도로 준비하셨고,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세워 기도하시며 준비하셨다. 예수님의 그러한 하나님 앞에서의 준비는 세상을 구원하는 능력으로 연결이 되셨다. 성도들에게도 준비하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세상과는 좀 거리를 두고 오직 하나님과만 깊이 만나는 이러한 은둔의 시간을 통해서 성도의 믿음은 성숙되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할 능력도 얻게 되는 것이다.

 

 

 

 

 

 

<요12:1-8>

 

마리아가 삼백 데나리온 이라는 매우 값이 비싼 향유를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몸에 부어드린 이유는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너무나 소중하고 한없이 감사한 분이시기 때문이었다. 주님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다만 하나의 물질로 표현했을 뿐이다. 때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표현을 우리는 말로 다 없을 때가 있다. 그래서 때로는 눈물로, 때로는 물질로 표현하기도 한다.

 

1. 마리아의 헌신을 비난하는 유다

마리아의 순수한 헌신이 제자 중 가룟 유다가 비난을 한 것이다. 요12: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고 하면서 맹 아쉬운듯 마리아의 선행을 비난하였다. 이렇게 때로는 주님을 위한 참된 헌신이 악의에 찬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될 때도 있다. 영적인 헌신을 세상이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적’이니 ‘맹목적’이니 하면서 비난을 하기도 한다. 유다가 가난한 사람을 위하는 것처럼 하면서 마리아의 헌신을 비난한 것은 거짓되고 악한 비난이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오히려 도적 같은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주님께 대한 참된 헌신이 비난받을 때가 있으나 조금도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가롯 유다와는 달리 참된 가치를 오직 예수님께 두는 성도만이 주님을 위한 참된 섬김과 헌신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2. 칭찬 받는 헌신

마리아의 헌신이 무지하고 악한 제자에 의해서 신랄하게 비판을 받자 드디어 주님께서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이 마리아의 헌신에 대해서 평가를 내리신 것이다. 과연 예수님은 어떠한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7-8절“ . . . ”유다의 비난에 대해 변명 한 마디 하지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을 마리아를 위해 “저를 가만 두어라”고 위로하셨다. 마리아가 한 일은 제자들도, 아마 마리아 자신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헌신, 즉 주님의 죽으심을 위한 준비였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가난한 자들을 위한 봉사는 언제든지 마음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에 비해 이 일의 중대함을 인하여 마리아의 행동은 결코 비난받을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마리아의 행동은 주님께 칭찬을 받은 것이 되었다..

 

우리도 때로는 가만있으면 오해가 되고, 그래서 더욱 억울하며, 그렇다고 변명하고 설명하자니 구차해지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해결해 주신다.

중요한 것은 마리아와 같이 예수님을 위해 (1)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2) 우리 자신을 겸손히 낮추어서 드리며, (3) 참된 가치를 오직 예수님께 두는 성도가 되자.

 

 

 

 

 

<요12:9-11>

 

마리아가 값이 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몸에 부어드림으로 온 집안에 가득하게 된 진한 향기와 함께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이적 소문을 들은 수많은 유대인들이 베다니 동네로 모여들었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왔으나 그 중에 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보기 위해서왔다. 이렇게 되자 대제사장들은 다시 살아난 나사로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예수님에게로 향하는 것을 보게 되자 예수님뿐만 아니라 나사로까지 죽일 궁리를 하였다.

 

1. 예수님은 참으로 대단한 매력이 있으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선하신 목자의 사역적인 매력이 있으시다. 요2장에는 목자가 양이 부족함을 채워주듯 한계에 빠진 인생들의 잔치 집을 풍요롭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사역은 율법 종교의 목자들과는 확실히 다른 것이었다. 즉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은 위험에 빠진 양을 살리는 사역을 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사역이시며 양들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치유하는 사역이 바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사역의 내용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계신 곳이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드는 것이었다.

또한 예수님의 매력은 인격적인 매력이다. 예수님의 인격은 모든 사람들에게 잊혀져 영원한 고향마을의 향기와도 같은 매력이 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의 향기를 맡을 수 있으며 말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에게서 진정한 겸손의 진리를 배울 수 있는 것이다. 사마리아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과 대화하시는 예수님, 그리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에게 베푸신 예수님의 선하신 모습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위한 기도 속에서 하나님의 관용하심과 용서의 매력에 우리는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향기는 세상 어느 누구에게서도 맛볼 수 없는 온 인류의 따스한 고향의 향기인 것이다.

 

2. 또한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깨닫게 된다.

군중들은 나사로를 보러왔다고 했다.(11절“ . . . . .”) 이와 같이 예수님과 깊은 만남을 가지는 성도들도 인생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삶에서 풍기는 매력을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고후2:14)라고 말씀 했다. 예수님의 매력은 그분의 인격과 사역의 매력이 목자로서의 매력이라고 한다면 성도들의 삶의 매력은 마땅히 “양”으로서의 매력인 것이며 양의 매력은 목자에 대한 순종과 따름의 매력인 것이다.

 

* 본문에 나사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쏠리기 때문에 나사로를 죽이려 했다고 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향기는 나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게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왜 나사로의 일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예수님께로 향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g야기가 되었을까? 그가 완전히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이다. 도저히 사람과 세상의 방법으로는 살아날 수 없었고 오직 예수님에 의해서만 다시 살아난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완전히 죽어야 한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에 의해서 다시 살아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요12:16-19>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떤 일을 처음 당할 때는 잘 모르다가도 시간이 지나간 다음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처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승천하신 뒤에야 비로소 예루살렘의 입성과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한영이 성경의 예언을 이루는 행위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한편 예루살렘 입성 광경을 목격한 바리새인들은 세상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좇자 이제 모든 것이 다 틀렸다고 생각을 한다.

 

1. 제자들은 처음에는 우둔하였다.(16절 a “ . . . . ”)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이유를 잘 몰랐다. 제자들의 우둔함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과 무리들의 찬송과 영접은 그 자체로서 미래에 대한 예언이요 계시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장차 만왕의 왕으로서 이 땅에 강림하신 것을 계시한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계시를 직접 보았으면서도 몰랐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계시에 대한 인간의 우둔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보려고만 한다면 하나님의 뜻과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를 어디서든지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영의 눈이 닫혀있을 때가 너무나 많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무언가를 보여 달라고 기도하기 보다는 우리 자신의 영안을 뜨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우리의 신령한눈이 떠질 때 비로소 신령한 일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2. 영광을 얻으신 예수님을 살펴볼 수 있다.(16절b " . . . . ")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심 뒤에 부활의 영광을, 부활의 영광 뒤에 승리의 영광을 얻으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영광의 특징이다. 예수님은 물리적인 수단을 통해서, 곧 대다수 사람들의 안정과 행복을 탈취함으로써 영광을 얻은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을 묵묵히 극복함으로써 영광을 얻으신 것이다. 즉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가 예수님께 영광을 가져다 준 것이다. 만일 십자가가 없이 예수님이 영광을 얻으셨다고 한다면 그 영광은 전능한 신의 영광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광은 십자가라는 고난의 과정을 통하여 얻은 영광이므로 참으로 값진 것이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늘의 영광은 힘으로, 혹은 불로소득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며 오직 철저한 자기희생과 고난을 통하여 얻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고후4:10]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4:17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으라고 하심.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잘 감당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나사로는 예수님에 의해 다시 살리심을 받은 후 주님과 함께 있었다.(9절)

그것이 증거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11절)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새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 곁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한다. 그의 뒤를 따라야 한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예수님을 통하여 나음을 받았던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예수님을 통하여 다시 살리심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은혜 받은 나로 인하여 또 다른 사람들이 구원 얻게 하는 서도가 되자.

<요12:20-24>

 

몇 명의 헬라 사람이 빌립에게 와서 예수님과의 면담을 요청하였고 이에 빌립도 안드레와 더불어 예수님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려 드렸다. 이때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딸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의 밀이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고 말씀하셨다. 즉 존경과 영예를 얻는 높은 인물이 되고자 하는 생각이 지배적인 이 세상에서 한 알의 밀이 되라는 가르치심은 실로 놀라운 가르치심이 아닐 수 없다.

 

1. 예수님 자신이 한 알의 밀이 되셨다.

1) 모든 사람을 위한 종이 되셨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이 세상에 오셔서 철저히 자기를 부정하고 종으로 사신 예수님을 너무나 깊이 이해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을 낮추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빌2:6-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 다고 하였다. 예수님의 생애 가운데 가장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하나님으로서의 위엄이나 능력을 행하심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위한 사랑과 자기희생의 태도인 것이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종이 되셨다. 즉 겸손과 복종과 헌신의 길을 가셨다.

모두가 지배하는 자, 그리고 앞에서 지휘하는 자가 되려는 세상에서 지배하는 자가 되시기를 원치 않으셨고 오직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시고 자신의 모든 영광을 버려 많은 사람의 행복을 찾아 주시고자 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막10: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고 말씀 하셨다. 마치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게 되듯이 예수님의 종 된 희생하심이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길이 되셨다.

 

2) 예수님은 섬기는 자가 되셨다.

땅에 떨어져 죽어야 하는 한 알의 밀의 교훈은 겸손의 깊은 진리를 포함하고 있다. 한 알의 밀처럼 희생의 길을 기꺼이 가신 주님은 막10:43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하셨다. 모든 사람이 큰 자가 되려고 한다면 이 세상은 싸움뿐이고 피차 멸망하고 말 것이다. 많은 사람을 구원하러 오신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인자가 온 것은 검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막10:45)함이라고 말씀하셨다.

 

3년간이나 예수님과 함께 생활을 한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서 직접 그러한 모습을 목격했으면서도 기적이나 이적을 행하심을 보고는 놀라면서도 섬김의 본을 보이신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서는 별로 감동을 받지 못했었다. 그리고 서로 크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웠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예수님이 약속하신 성령님의 충만하신 은총을 체험한 후에야 비로소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이야말로 참된 섬김의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섬기는 것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과 같이 자기를 희생하지 않고는 행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섬김의 길을 사는 사람은 결코 편하고 좋은 것이 아니다. 섬기는 사람 자신은 비록 엄청 고되고 힘들지는 몰라도 많은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 섬김의 길이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소망의 넘치는 구원의 길이 되는 것이다. 이 섬김의 길은 곧 예수님이 가신 길이었으며 그 길은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은 오늘 우리가 가야할 길인 줄로 믿습니다.

<요12:20-24>

 

계속해서 한 알의 밀알이 주는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도록 한다. 한 알의 밀알은 바로 예수님 자신을 의미한다. 밀알 자체가 예수님이라는 말이 아니고 예수님의 삶이 한 알의 밀알로 사셨다는 뜻이다.

 

1.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이 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한 알의 밀알의 말씀의 깊은 뜻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야 하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온 인류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많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받게 하신 것이다.

막10:45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고 하셨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죄 문제의 해결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2) 인간의 연약함의 문제가 예수님 안에서 해결이 된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약함의 문제가 있다.(육신도 약한 자가 있으며 지혜, 능력, 방법 등..)

[마8: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9:35]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3) 모든 사람들을 구원 얻게 하신다.

행2: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2.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한 알의 밀알이 되라고 하셨다.

1) 많은 사람을 위한 종이 될 것을 당부하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요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고 하심.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낮은 자의 위치에서 남을 섬기는 자의 삶을 살 것을 당부하신 말씀이다. 발을 씻기는 일은 가장 낮은 자가 가장 낮은 자리에서 하는 일이다. 스승이 그렇게 사셨고 제자들에게 그렇게 살 것을 당부하셨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들인 우리 모두는 당연히 그렇게 사는 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2) 자기희생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 아의 밀알의 말씀이 의미하는 교훈은 자기 희생, 자기 부인을 강조하는 말씀이다. 물론 우리는 죽는다고 하여도 주님처럼 대속의 제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즉 우리의 죽음이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받게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서 주님의 진리와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성도의 길은 인간적으로는 고난의 길이고 손해 보는 길이며 눈물의 길이지만 바로 그 길을 통해 복음이 전파되며 다른 사람들을 구원 얻도록 할 수 있는 것이다.

 

 

 

<요12:25>

(생명보존의 대 원칙)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가르치신 예수님께서 본문에서는 그 내용을 풀어서 설명해 주시고 있다. 즉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리게 되지만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그 생명을 영원히 보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세상적인 기대감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앙적 삶의 역설적인 대원칙을 선포하신 말씀이다.

 

1. 모든 사람은 모태로부터 태어날 때 자기에게 주어진 육체적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 육체적 생명은 자신의 수명이 끝날 때 함께 단절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숨졌다’는 말은 이 육체적 생명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 육체적 생명의 참된 의미는 육체적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기회라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전3:19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고 하였다. 인생이 호흡이 있는 동안에 영원하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육체적 생명의 가치는 동물보다 나을 바가 없는 것이다.

[신31:13]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 거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로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

[삿2:7]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솔로몬은 [전3:12]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육체적 생명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을 잘 섬기며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가장 정상적이고, 가장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것임을 알고 이미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은 더욱 더 성장되고 성숙한 신앙인의 삶을 살고 안타깝게도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섬기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사람이 어떻게 하면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참예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신 발자취를 따르며 또한 예수님의 삶의 방식을 수용하고 적용하며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삶을 사는 것이 사람이 참 생명을 얻는 길인 것이다. 인간의 현세적인 생명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죄 성으로 인해 주어진 죽음 때문에 그렇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명 보존 법칙 제 1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와 대하시는 중에 요3:3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고 하셨는데 그에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거듭나는 방법을 “믿음”이라고 하셨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바로 나의 죄 때문이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나는 절대적으로 연약하므로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믿음이다. 이 믿음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끊어진 밀접한 관계의 줄을 이어서 우리의 영적 사망을 살리는 것이다. 신앙이란 나의 영역을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세계까지 넓혀가는 것을 의미하며 그런 삶이 바로 하늘 세계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요12:26>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과의 만남이 단순한 만남, 즉 그냥 스쳐 지나가는 만남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을 그저 단순한 스승으로 여기고 그냥 스쳐지나가는 만남으로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실망과 좌절을 안고 돌아갔던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예수님과의 만남은 예수님을 따르는 만남이어야 하고, 예수님께 헌신하는 만남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 외의 모든 만남은 무의미한 만남이요 가치가 없는 만남인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나는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고 하신다.

 

1.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은 예수님께 예수님을 ‘배우라’는 말씀이다.

마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는데 “따르라”는 말은 배우라는 말씀과 같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많은 가르치심을 베푸셨다.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받은 많은 사람들은 그 가르치심이 서기관과 같지 않고 권세가 있음에 놀랐다. 더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은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예수님의 인격과 행위에 있었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참으로 온전한 인격자였으며 예수님의 행위는 가르치심과 일치했다. 확실한 것은 사람들은 말로서보다도 행위를 통하여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영향을 받는다.

만일 우리의 신앙생활이 예수님의 삶과 인격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아무것도 아니며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도 예수님에게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따라와서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우리가 과연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예수님께 배우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의 삶과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예수님을 따라 함께 사는 것이요, 또한 그것을 항상 배우는 삶인 것이다.

 

2.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은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라는 말씀이다.

딤후4: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고 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공생기간동안의 삶을 보면 고난의 연속이셨다. 예수님께서는 선한 일을 하고도 환영을 받으시고 대접을 받으시기보다 는 거부당하고 배척을 당하셨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었으나 예수님은 머리 둘 곳이 없으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은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위해 그러한 고난도 함께 받으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영광도 함께 있는 것이다.

고후4:8-10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주님을 위한 십자가를 감당하는 삶은 곧 참되고 영원한 승리가 보장 된 삶이다. 고난에 동참이 없는 신앙을 참된 신앙, 참된 성도라고 할 수 없다. 훗날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십자가에서 당하셨던 못자국과 창 자국을 보이시면서 우리에게도 그러한 고난의 흔적을 보여 달라고 하실 것이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의 짐은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승리하는 그날까지 잘 감당하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12:26>

 

예수님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섬김의 삶을 살라’는 것이다.

 

1. 봉사하라

“섬기라”는 말씀은 곧 봉사하라는 말씀이다. 삶의 모든 동기와 목적이 예수님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믿기 전까지 모든 사람의 삶의 동기와 목적은 자기에게 있다. 사람은 자기를 위해 살고 자기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러한 삶의 중심을 자신에게서 예수님에게 옮기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삶을 자기중심으로 이끌어가는 사람은 참된 성도라 할 수 없으며 자기 자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 모르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주님의 제자로 여기시지 않습니다.

과거에 핍박 자였던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고백하기를 빌3:7-8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으며 [롬14: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고 했다. 그의 삶은 오직 예수님을 위한 삶이 전부였다. 자연인은 ① 세상이 부르는 소리에 끌려서 사는 자와 ②하늘에서 부르시는 소망에 의해 사는 자로 나뉜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시는 소망에 따라 위엣 것을 찾으며 하나님 앞에서 상 받을 푯대를 향해 사는 자이다.

 

2. 명령에 순종하라

“섬기라”는 말씀은 또한 명령에 순종하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이성적으로 납득이 가고, 그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순종하라는 것이다. 종이 주인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따르는 것은 결코 주인의 명령이 합리적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주인의 명령이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다.

 

3. 귀히 여기시리라

이 말씀은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과 예수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리라는 말씀이다. 구원은 아무에게나 임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마24:11-13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고 하셨고 계2: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고 하셨다.

구원과 영광은 아무나 거저 누리는 것이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은 자들의 것이다.

 

 

<요12:27-30>

 

본문에는 십자가 죽으심을 앞에 두신 예수님의 고뇌가 나타나 있다. 예수님은 죽으심에 대한 고뇌를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서도 예수님 자신이 이 일을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셨고, 또한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1.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 앞에서 고뇌하셨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27절)주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앞에 두시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번민하시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서른 세 살의 젊은 나이, 건강한 때에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를 우리는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죽음을 앞에 둔 고뇌는 육체를 가진 인간이 숙명적으로 겪어야 하는 최대의 고통으로 영적인 혼란을 가져온다. 주님의 이러한 깊은 고뇌는 하나님이시면서도 참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이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겪으셔야 하는 필연적인 과정이시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러한 고뇌는 단순히 죽음을 두려워하는 데서 오는 것만은 아니다. 예수님의 고뇌는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23절)가 점점 가까워 올수록 고뇌의 깊이도 더해가고 있었다. 즉 주님의영광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바꾸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는데서 고뇌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받으시는 메시아로서의 영광, 부활 승리의 영광, 그리고 우리 성도들의 승리의 영광은 오직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과 번뇌의 십자가의 열매인 것이다.

 

2. 죽음에서의 회피를 구함, 즉 자기 극복의 기도를 하신 것이다.(27절“.....”)

이것은 메시아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시기 위한 가장 큰 유혹이요 번뇌이셨다. 예수님은 공생애의 시작을 앞에 두고 광야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마귀로부터 왕으로 추대하겠다는 유혹을 받으셨고,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반대자들을 진멸하자는 제자들의 유혹을 받으셨다.(눅9:53-55)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까지의 어떤 유혹보다도 가장 집요한 유혹인 십자가 죽음으로부터의 회피를 놓고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 유혹의 승리는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는 극복할 수 없으셨기 때문이다.

유혹으로부터 승리하실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메시아로서의 사명에 대한 자각하심과 하나님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는 길이 무엇인가를 가장 잘 규명하셨기 때문이다.

 

3. 바로 이 때 하늘에서 응답이 들리셨다.(28절“ . . . . ”)

 

 

 

 

 

 

 

 

 

<요12:31-33>

 

본문은 세속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유대인들에 의해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실 것을 예고하시는 말씀이다.

 

1. 예수님의 죽으심은 인간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한 것임을 예고하신 것이다.

요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이라고 하신 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것을 예고하신 것이다. 십자가는 분명 죄에 대한 형벌이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실 초기에도 말씀하시기를 요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가나안을 향하여 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돔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불 뱀에 물려 신음하였다. 이들은 바로 사탄의 독사에 물려 죄악 속에서 신음하는 인류의 표상이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중보자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리 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아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은 용서하심을 받아 불뱀의 독에서 구원받게 하셨던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들의 죄와 심판과 파멸을 대신하신 분이시다. 이제 그 사실을 인정하고 믿는 사람은 죄악의 사탄의 왕국에서 해방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의 권세아래 보호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것은 옛날 광야에서나,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에서나, 그리고 오늘날 아파트 숲속에서나 사람들은 그 놀라운 은혜를 받아들이기를 거절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죽음을 당한 것은 뱀의 독소 때문이 아니라 결국은 ‘불신’때문이었다는 것이 사실로 증명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장차 인간이 하나님께 심판을 당하는 이유도 인간의 도덕적인 죄악 때문이 아니라 그 죄악을 해결해 주시겠다는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불신의 죄’때문인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요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그러므로 인간의 가장 무서운 불행은 불신앙의 죄악인 것이며 따라서 인간이 해결해야 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죄악의 문제 또한 불신안의 죄악인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는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예수님의 죽으심은 승리를 위한 죽으심임을 예고하셨다.

요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 말씀은 승리를 확신하는 왕의 모습을 보여 주신다. 십자가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바로 완전한 승리의 보좌로 가는 개선문이라는 의미다. 정의와 진리가 쓸쓸히 차가운 묘지 속에서 매장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부활 승리하셔서 모든 사물과 인류의 문명에 온전히 영향력을 행사하시게 될 것이라는 확신인 것이다.

보세요. 예수님처럼 죽음 저 너머에 있는 자신의 위치를 예고한 사람이 있나요? 그리고 그 예고가 진정 이루어진 일이 있나요? 예수님처럼 온 인류의 역사와 문화와 삶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시는 분이 있나요?

빌2:10-11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요12:34-36>

 

본문은 예루살렘에 임성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희생과 죽으심을 암시하시자(24-32절) 유대 군중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죽으실 거라는 말씀에 그들이 바라던 메시아상과 배치됨을 깨닫고 실망하면서 “이 인자는 누구냐”고 묻는 내용이다. 군중들의 물음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직접적인 대답 대신에 사람들이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걸어 다녀서 어두움에 사로잡히지 않게 주의하라고 하셨다. 즉 예수님과 교제할 기회가 별로 없음을 강조하시고 믿음을 촉구하셨다.

 

1. 예수님은 낮아지신 하나님이시다.

불신앙의 군중들은 “이 인자는 누구냐”고 주님께 물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내가 들려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유대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임금으로서 영원히 통치하실 것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군중들이 “이 인자는 누구냐”고 묻는 질문 속에는 실망과 경멸과 조롱이 담겨있는 것이다. 즉 ‘우리가 바라는 구세주는 너와 같지 않다. 너는 자칭 인자라고 하는데 네가 말하는 그 인자는 도대체 어떤 종류의 인자인가?’라는 뜻이다. 이와 같이 군중들의 물음은 신앙을 위한 간절함에서 오는 질문이 아니라 더 이상의 교제를 중단하겠다는 불신앙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되 그분을 지상 왕국의 백마를 타고 오셔서 이 땅의 권력과 행복을 사람들에게 주실 분으로 알고 있다가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곧 실망하고 불평하고 기독교에 회의를 느끼는 불쌍한 영혼들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은 이 땅의 세계와 가치관에 속하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거룩하신 뜻과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심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높은 것으로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의 대단한 지식과 세상의 학문의 차원을 뛰어넘어 오직 믿음으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자”(요1:12)가 되어야 예수님을 온전히 알 수 있고 영적 권세가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2. 예수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다.

군중들은 이어서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34절)고 물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읽되 오직 한 가지 교리에만 집착했다. 즉 메시아의 영원성에만 관심을 두었지 인자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사53:7)이 되셔서 이 땅에서 고난 받으실 사명이 있다는 사명이

있다는 구역의 예언은 외면했던 것이다. 이러한 편견과 무지는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딤전6:5)저들의 탐심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리를 인간의 욕구충족의 방편으로만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들림 받아야 할 참 인간’임을 인정해야 한다. 즉 불의한 인간들을 대신해서 십자가에 높이 달려 속죄하실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오직 높이 경외하며 구주로 인정하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깊은 진리를 알 수 있는 것이다.

 

3. 절대 기회가 주어진다(36절)

 

 

<요12:37-43>

 

오늘 본문 말씀에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믿으나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는 안타까움에서 우리들을 깨우쳐 주는 교훈이 있다. 과연 우리 주님께서 보실 때 우리는 이 안타까운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다.

 

1.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들.

37절 말씀에는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라고 안타까이 기록하고 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가운데 일곱 가지를 선별하여 기록하고 있다. ① 무로 포도주를 만드심(요2:11) ②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심(요4:46-54) ③혈기 마른 병자를 고치심(5:2-9) ④오천 명을 먹이심(6:4-13) ⑤ 물 위를 걸어가심(6:16-21) ⑥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심(9:1-7) ⑦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11:1-44) 이 모든 표적은 오직 한 가지의 초점,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신 것을 스스로 증명하시기 위함이며 제자들에게는 “믿음”을 주시기 위함이었다. 물론 유대 민족들 중에 개인적으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생겼으며 유대민족 전체가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눈앞의 표적이나 메시아로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의 은총 적 선물인 것이다.

 

2. 믿지 못하는 이유.

본문 40절에는 유대인들이 안타깝게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못하는 이유가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은 마13:13-15에서 예수님 자신도 인용하셨으며 사도 바울도 행28:26-27에서 인용한 이사야 선지자의예언이다.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고 한 이 말씀의 의미는 어떻게 보면 유대인의 구원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히려 막으시는 듯한 느낌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렇지 않다.

1)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외쳐도 듣지도, 믿지도 않으려하며 점점 강퍅해져 가기만 하는 백성들을 보고 이사야 선지자가 탄식한 말씀이라는 의미다. ‘백성들이 저토록 강퍅해져 믿지 않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우리의 마음이 강퍅해 지지 말자. 그러기 위해서 말씀으로 우리 심령을 갈아엎어야 하며, 주님이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실 때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한다.

2) 역설적인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께서 모든 일의 배후에 계시다는 믿음의 측면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시고(출7:13) 세상 만민을 구원하기기 위해서 독생자를 희생시키시고, 이제는 이방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유대인을 완고하게 하셨다(롬11:11)는 생각인 것이다. 이런 역설의 진리는 깊은 신앙으로서만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유대인들이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다는 안타까운 사실이다.

* 인간들의 강퍅해진 마음으로 인한 불신앙과 그런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끈질긴 은총 적 사랑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엡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라도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며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자.

<요12:37-43>

 

안타깝게도 당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믿음의 내용과 고백을 드러내지를 못했다.

 

1. 핍박당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42절 말씀에는 " ~ ~ ~ "라고 했다. 유대 관원 중 믿는 자가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 놓고 말하면 유대 사회에서 버림을 받을까 하는 두려움이 가득했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인간적으로 잃은 것이 많은 까닭에 자신의 신앙을 사장시켜 버리는 불신앙의 안타까움인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요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고 하셨다. 또한 우리는 사도 바울이 롬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고 가르친 말씀을 그냥 간과해서는 안 된다.

 

2.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분명한 믿음의 사람들이 아닌, 오히려 불신앙적인 애매한 태도를 취한 것을 생생하게 지적을 하였다.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43절) 즉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보다는 오히려 인간과 함께 사는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겠는가? 하는 것 보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를 더욱 중시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지혜롭게 행동한 것 같으나 어리석은 처사이고 불신앙적인 태도인 것이다.

[수24:14]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고 했으며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하다고 하면서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하였고 땅엣 것을 버리고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였다.

 

 

 

 

 

 

 

 

 

 

 

 

 

 

<요12:44-47>

 

본문은 믿음의 원리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왜냐하면 구원을 받느냐 심판을 받느냐가 그 믿음을 통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을 보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원리이다.

 

1.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의 의미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육신, 즉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다. 요12:44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여기서 말씀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성육신을 뜻하는 것이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고 하셨는데 성육신의 본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다르게 말씀을 드린다면 영원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말씀’이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이 세상에 고신 것과 그 독생자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하는 것, 그것이 곧 믿음이다.

요일4: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2. 예수님을 본다는 것은 진리의 빛과 생명의 빛을 보는 것이다.

요12:45-46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을 본다는 것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보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육신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었다. 본다는 것은 “빛”을 보다는 것을 뜻한다. 말씀이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 진리의 빛으로 오셨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진리의 자체이시다. 고전12:3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 하셨는데 성령님이 함께하시지 않고서는 진리의 빛이신 예수님을 볼 수도, 믿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성령님의 함께하시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의 선물을 받은 자인 것이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생명의 빛을 보는 것이다. 요1:4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셨다. 말씀이 생명의 빛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본다는 것은 성령님에 의해 중생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3.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47절“ . . . . ”)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기 몸을 희생함으로써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가는 것은 곧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요12:48-50>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역의 관계,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과 인간과의 관계를 설명하셨다.

 

1.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

49절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라고 하셨다. 즉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임을 강조해서 말씀하셨다. 이러한 사상은 일찍이 유대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으며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대교의 하나님은 절대적인 위엄을 갖추신 전지전능하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긍휼이 풍성하시고 언제나 인간의 곁에 가까이 계시는 ‘아버지’로 표현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처음이다. 뿐만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자의로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은 아들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아들이신 예수님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대로 일하셨고,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일하셧으며,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만을 위해서 사역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과 순종의 가장 표본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 예수님과 성도와의 관계로 연계되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마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주신 말씀이다.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뜻과 말씀대로 사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 뜻, 명령대로 살 때 능력과 권세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2.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역의 관계.

예수님은 요12: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 다고 하셨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에 말씀과 기적을 통하여 일하셨는데 그것은 모두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명령과 영광이란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50절)는 명령, 즉 인간들에게 영생을 주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을 밝히신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뜻, 인간의 구속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등 모든 사역의 목적은 인간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3. 예수님의 사역과 인간과의 관계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오직 한 가지 목표인 영생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고 믿지 않는 자는 스스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48절“....”)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47절의 말씀과 같이 인간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주실 영생의 권세를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위임하셨고 그 영생의 권세는 예수님이 전파하시는 복음을 통해서 인간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중립이란 있을 수 없다. 영생 아니면 심판이 있을 뿐이며 그 영생은 주님을 영접하므로 그 이름을 믿는 것이다.

신앙에는 중립이 있을 수 없다. 신앙과 불신앙, 천국과 지옥이 있을 뿐이다. 애매모호한 신앙을 가지면 안 되며 확고한 신앙을 가져야 된다

 

<요13:1-3>

 

분문에는 자신의 십자가 죽으심을 준비하시는 예수님의 인간을 향하신 사랑과 가룟 유다의 배신에 관한 서언이 가록되어있다.

 

1. 예수님은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1절)

자격 없는 자들을 사람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선택하실 때 “미래의 삶”을 보시고 선택하셨다. 눅5:10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모두다 무자격자들을 택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격이 구비된 자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다. 죄를 짓고 뉘우치고, 뉘우치고 또 죄를 짓는 인간들이기 때문에 사랑해야 할 이유가 성립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이 은총의 사랑인 것은 무자격자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2. 완벽하게 사랑하심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은 그 사랑의 완벽성을 뜻한다. 예수님의 사랑은 완전하신 사랑이기 때문에 지속적이고 그 사랑 안에 자유와 안전과 충족이 있다. 롬13: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고 하셨는데 그것은 모든 것의 완성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는 이난의 모든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이다.

 

3. 유다의 배신

열한 제자가 북쪽 사람인데 비해 유다 혼자만 남쪽 가룟 사람이었다. 그는 제자 공동체 안에서 언제나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자였으므로(마26:25, 49) 그의 목적은 예수님을 통하여 얻을 것으로 기대했던 것으로는 권력이나 재화였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그 공동체의 주변 정황을 살펴볼 때 뭔가 예사롭지 못하는 것으로 알게 되자 그렇다면 ‘재화만이라도’ 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을 때 마귀가 그러한 유다를 삼켜버린 것이다.

그는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인생을 살았다.

 

 

 

 

 

 

 

 

 

 

 

 

 

<요13:8-11>

 

발을 씻어주시려는 예수님께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라고 만류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발 씻음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시고 있다. 즉, 예수님으로부터 발 씻음 당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는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또한 이미 목욕을 한 자는 발만 씻으면 되는 것이지 온 몸을 다시 씻을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다.

 

1. 베드로의 거부(8절“ . . . ”)

베드로가 강력하게 거부한 것은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기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주인이 종의 발을 씻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그렇게 하심은 평범한 상식을 뛰어넘는 특별한 의미가 있으셨다. 베드로는 이점을 간과하였던 것이다. 즉 베드로는 항상 인간적은 눈으로 주님의 행동을 평가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장차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말씀하실 때에도 베드로는 말하기를 마16: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고 하였던 것이다.

인간적인 판단은 예수님의 행하시는 사역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성급한 판단과 결론을 피해야 한다. 따라서 설혹 우리의 이성과 경험과는 상반된다고 할지라도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 그리스도인이란 믿음과 순종함으로 햄하고 육신의 방법대로 하지 않는 자를 말함.

 

2. 왜 예수님께 발 씻음이 필요한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느니라”고 하심. 그런데 베드로의 거절은 마치 병든 환자가 의사의 치료를 거부하는 것과도 같은 어리석은 처사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의 발 씻기심은 죄인의 구속사역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보혈의 피로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자는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만일 베드로가 계속해서 주님의 이러한 사역을 거절했더라면 그는 주님의 구원사역의 훼방자로 자신에게 임할 구원마저 박탈당하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우리는 영적 씻김의 중요성을 깨달아 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3. 주님이 베드로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몸소 모범을 보이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몸소 이 땅에 종으로 오셔서 끝내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순종의 모범이 되셨다.(빌2:6-8) 주님은 순종이 무엇인지를 제자들에게 몸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본을 보이신 것은 그대로 우리에게 따라서 하라는 것이며, 본을 본 사람 역시도 그대로 따라서 행해야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말씀을 직접 씻기신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은 우리도 나보다 가난하고 무지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자들을 돌아보고, 관심을 갖고, 사랑으로 보살필 줄 아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요13:12-15>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온전히 배우고 순종하며 스승이 하는 일을 조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는 스승의 학문과 사상을 배우고 계승해 가는 것이다. 본문 말씀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행동을 본받으라고 교훈하시고 계신다.

 

1. 주님이 행하신 것은 겸손한 종의 모습을 보이셨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식사 전에 발을 씻는 법이 있었고, 그것은 종이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종이 하는 일을 직접 하신 것이다.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만유의 주님께서 종이 되신 것이다.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위해서 앉으셨던 식탁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으시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다. 이것은 주님께서 철저한 종의 모습을 보이신 것이며 꼭 상전을 섬기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신 것이다.

눅2:27을 보면 제자들은 삼 년간이나 훈련을 받고서도 주님은 이제 곧 십자가에 달리실터인데 그 때 제자들 사이에는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나님나라의 법칙은 이 세상나라의 법칙과는 매우 다르다. 천국에서는 자기를 낮추는 자가 큰 자이고,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이며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다.(막10:42-44)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로 그러한 하늘의 뜻과 질서를 보여주신 것이다.

 

2. 예수님이 바라시는 것.

낮아지기를 바라심.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제자들의 발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높아지고, 위대해 지고 싶은 욕망까지 씻기신 것이다. 또한 제자들을 분열시키고 다툼을 일으키는 허영 된 마음을 씻기신 것이다.

 

 

 

 

 

 

 

 

 

 

 

 

 

 

 

 

 

<요13:16-20>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는 자의 축복과 가룟 유다와 같이 배신의 행위가 성경의 내용을 이루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다. 즉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행동의 참 의미를 깨닫고 그대로 행하는 자는 복이 있지만 제자들 모두가 그렇게 행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1. 택하심을 받았으나 버림받은 자도 있음을 말씀하심.

1) 택하심 받은 자 - 믿음으로 응답하는 자

요13:18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부르셔서 3년 동안을 가르치시고 훈련시키셨으나 그 모두가 선택된 것은 아니라는 말씀이다. 부르심을 받은 자와 택함을 받은 자는 다르다는 뜻이다. 예수님에 의하여 온 인류가 하나님의 구속에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믿음으로 이 부르심에 응하는 자만이 선택을 받는다. 이 부르심 속에 가룟 유다도 들어있었으나 그는 믿음으로 응답하지 않음으로써 선택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주님은 그것을 심히 민망해 하셨다.(2절)

 

2) 버림받은 자. ==> 끝내 돌이키지 않는 자, 유다가 버림받은 자가 되기까지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주어졌으나 그는 그것을 결코 자기 기회로 삼지 않았다.

18절b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예수님께 대한 유다의 배신 의도는 최후의 만찬이 시작될 때부터 시종 나타나있었다. 예수님은 만찬석상에 앉으실 때부터 이미 유다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셨다.(2절)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10절)고 말씀하심으로서 가룟 유다의 마음을 찔러주셨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후에 또다시 18절)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고 하셨다. 이것은 가룟 유다에게 주어진 두 번째의 회개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래도 유다가 회개하지 않자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21절)고 선언 하셨다. 그것은 세 번 째 회개의 기회였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그게 누구인가?’하고 동요했지만 그룟 유다는 끝내 회개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떡을 그에게 주셨을 때 사탄이 완전히 그를 장악해 버렸다.(26-27절) 이에 비로소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27절)고 하심으로 그를 버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리심을 받는 것은 회개하지 않음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긍휼의 기회를 놓치지 말자.

 

3. 제자들에 대한 배려(20절“ . . . . ”)

“나의 보낸 자들” -제자들을, “나를 보내신 이” - 하나님을 가리킴. 이것은 제자들, 예수님, 하나님은 모두 “영접”하는 믿음 안에서 모두 하나라는 것이다. 그것은 제자들이 가는 곳에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실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마28:20“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주님은 제자들을 이렇게 배려하신다.

 

 

 

<요13:21-30>

 

지금까지 자신을 배신할 자가 누구인지를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않으셨던 예수님께서는 떡 한 조각을 찍어주는 자가 바로 그자라고 말씀하신 뒤 가룟 유다에게 떡을 줌으로써 예수님을 팔자를 구체적으로 언급을 하셨다. 예수님이 주시는 떡을 받아먹은 유다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버리고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즉 제 갈 길로 간 것이다. 영생을 버려두고, 사명을 버려두고 간 것이다.

 

1. 유다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예수님의 책망을 은혜로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범죄자, 혹은 신앙이 연약한 자를 한없이 감싸주시기만 하는 분이 아니시다. 성경 여러 곳에서도 나오지만 예수님은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꾸짖으시며 범죄자들을 질타하셨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같은 수제자도 여러 차례 꾸짖으셨다. 물 위를 걷다가 부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가는 베드로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고 하심.(마14:31, 16:23)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그들을 실족케 하시려는 의도에서가 아니었으며 그러한 꾸짖음으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강하여지고 잘못된 신앙을 가진 자들이 바른 신앙을 가지게 하시기 위한 사랑의 표현이셨던 것이다.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의 그러한 질책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예수님의 질책을 강하게 반발했다. 그래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던 것이다. 결코 어둠 속으로 가면 안 됨. 거기는 죄와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 성도는 빛 가운데, 말씀과 생명 가운데로 가야함.

 

2. 사명에서 떠나버린 유다.

어둠속으로 사라져 간 유다는 은혜의 기회를 차버리고 간 것일 뿐만 아니라 그날 밤 발을 씻겨주시면서 당부하셨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15절)고 하셨다. 3년 동안의 공생애 기간과 그날 밤 세족식을 통해 예수님께서 부여하신 귀중한 사명마저 내던져버린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와 희생을 아끼지 않으셨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다는 자기의 사상과 의도가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리고 단돈 몇 푼 때문에 예수님과 제자들을 버리고 간 것이다. 겨f국 그동안 유다는 예수님을 섬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섬긴 것이다.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유다 자기 뜻에 따라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참으로 위험하고 무서운 것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 속에도 이러한 불신앙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3. 영원한 사망 속으로 사라져간 유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고 했다. 예수님을 버리고 사라진 순간 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에는 그의 최후가 어떠하리라는 것을 예시하고 있다. 예수님을 버리는 자는 그 사람 스스로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곧 어두움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빛이 있을 수 없고, 생명이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이 곧 빛이시오,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다와 뚜렷하게 비교되는 사람을 볼 수 있는데 그는 사도 바울이다. 그가 옛날에 예수님과 멀리 떨어져 지낼 때 그가 의식했든 못했든 그는 불의와 사망 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유다는 빛과 생명 가운데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었다. 그런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떠났으며,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로 왔다. 유다는 영우너한 어둠 속으로, 사도 바울은 영원한 생명 가운데로 온 것이다.

 

<요13:31-33>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장차 받으실 영광과 그로 인하여 받게 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잠시 후면 제자들이 그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부언하여 언급하신다.

 

1. 예수님이 받으실 영광의 근거

가룟 유다는 주님의 말씀에 대해 유감스런 마음을 가지고 어둠속으로 사라져서 그날 밤 예수님을 팔아먹을 것을 계획하고 있는데, 즉 죽음이 임박해 있었는데 주님은 그것을 “영광을 얻었다”고 표현하고 계신다. 죽음이 어떻게 영광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주님의 죽으심이 하나님의 계시의 완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요17: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라고 하셨다. 즉 주님은 자신은 비록 육체적으로 고난을 당하시나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완성하게 된다면 그 일이 바로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 그리스도인의 영광 역시도 비록 나에게는 고난이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그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게 된다면 그것을 영광으로 삼아야 하는데 까지 도달해야 한다.

 

2.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별에 대한 고별사를 말씀하신다.(33절“ . . . . ”)

예수님의 고별사 속에는 슬픔이 없으나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주님과의 이별로 인하여 슬픔이 없을 수 없다. 베드로는 이때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갈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목숨까지 버릴 수 있다고 했다.(36-37절) 그러나 그것은 베드로가 이별에 대한 의미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별에는 ‘성숙’과 ‘권능’이라는 두 가지의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아이들이 부모를 떠나야 성숙하듯이 제자들도 주님이 계시지 않는 세상에서 성숙한 삶을 살아야 했다. 주님의 비호 아래 살아온 제자들은 이제 주님이 계시지 않는 세상에서 그들 스스로의 힘을 성숙시켜야 했다.

주님과의 잠시 이별은 불안과 동요와 방황을 가져올 것이지만 그것은 그들이 성숙해 가는데 필요한 과정이었다. 요16:7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님의 이별의 궁극적인 목적은 제자들이 권능을 얻게 하는데 있으며 그것은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다.(행1:8)

 

 

 

 

 

 

 

 

 

 

 

<요13:34-35>

 

제자들과의 작별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예수님께서는 새 계명에 대한 교훈을 주신다. 즉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 같이 제자들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제자들이 서로 사랑할 때만이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치신다.

 

* 인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을 통해 온전하게 완성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편협 적이거나 제한적이지 않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은 전 인류이다. 어는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제한 없이 모든 이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다. 또한 성경 전체의 축약이 사랑이다. 성경 66권의 내용은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참 제자의 기본 조건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1.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예수님은 일찍이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고 하셨다. 그런데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먼저 필요한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일이다. 그것은 오전한 사랑을 이루는데 필수적인 것이다. 자기부인은 자신의 판단과 생각과 고집을 버리고 자기를 감추고, 자기 소리 내지 않고 오직 예수님이 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2. 주님의 제자의 참된 자격은 주님을 닮아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을 말한다. 자녀가 부모의 외모와 성품을 닮아가듯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 속에서 우리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그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 우리 육신대로가 아닌 그리스도의 남은 과업을 이루며 삶아가는 삶을 말한다. 빌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함.

*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주님의 참 제자가 되는 여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실상이 있다.

사랑하며 사는 자의 나중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보장이다. 우리도 우리를 대적하는 대적 자에게 멸시와 핍박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고통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가 없다.(롬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고 함.

예수님의 제자로 기억된 자는 반드시 하나님께도 기억되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권세가 주어진다.

 

 

 

 

<요13:36-38>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는지를 묻는 베드로에게 지금은 따라올 없지만 나중에 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다고 버릴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베드로를 향해 “닭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신다. 결국 베드로는 말은 자신감이 있었으나 그러한 그가 실패한 이유는 베드로는 인간이란 무지한 존재임을 알지 못했다.

 

1.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과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길에 대해서는 무지하였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시는 길이 결코 섬김을 받거나 영광을 얻는 길이 아니라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이라고 누누이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십자가를 질 것을 당부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잘 감당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육체에 체우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야하는 길이요, 성도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런데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당해야 할 사명의 몫은 생각하지 않고 받은 몫과 누릴 몫을 챙기는 일에는 너무나 민감하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가신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은 바로 영광의 길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제자들은 알지 못했다. 주님의 고난은 곧 영광의 길에 이르는 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제자 된 자들의 삶의 길도 예수님을 인도하시는 방법으로 인도하심을 기억해야 한다.

롬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2. 사람은 자신의 길에도 무지하다.

베드로는 호언장담을 했지만 곧 얼마 가지 못해서 세 번이나 부인함.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께 충ㅎ성을 하되 자랑하고 과신할 존재가 되지 못하다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께 용서와 사랑을 받고 사는 존재이지 결코 하나님께 무엇을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고전9: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요14:1-4>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떠나시고 없더라도 근심하지 말라고 위로하신다. 즉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기 때문에 처소가 마련되는 대로 다시 와서 제자들을 영접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1, 근심이 생기는 원인.

1) 자신의 의지나 능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나 문제 등을 만났을 때.

사람은 한 평생 살아가면서 많은 일을 해야 하고, 많은 문제들도 만나게 된다. 또한 우리의 능력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일,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그것에 대한 부담감과 근심이 생기게 된다. 이것은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자연 현상인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그것으로 인하여 근심하거나 낙심에 빠져서는 안 된다.

 

2) 또한 근심은 예측할 수 없는 미래, 불확실한 미래를 생각할 때 생긴다.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내일 일은 고사하고 바로 몇 시간 후의 일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신속하게 변해버리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현대를 일컬어 “불확실성의 시대” 라고 말한다. 이러한 예측 불허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근심이 생기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3)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할 때 근심이 생긴다.

삶의 현장은 선택의 연속이다. 선택이란 한 쪽을 포기하고 한 쪽을 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선택을 바로 하지 못하면 근심이 생기는 것이다. 마19:20에 보면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 청년은 재물이냐 영생이냐의 선택에서 재물을 선택하므로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했다.

 

*** 근심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1) 하나님을 믿을 때 없어진다.(1절“ .. . . . . \”)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인간이 하나님을 믿을 때 근심이 없어진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평안과 안식의 본체시다. 시37:5-6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의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할 때 근심이 없어진다.

 

 

 

 

 

 

 

 

 

 

<요14:5-6>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로 가는 길을 제시해 주신다. 즉 주님의 가시는 길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고 묻는 도마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기 때문에 예수님 자신을 통해서만 하나님 아버지께로 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사람들은 도마를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쉽게 단정해 버리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사실 알고 보면 도마가 질문을 한 것은 언제나 진리를 분명히 알고자 하는 정직한 의문 때문이었다. 그는 진리를 듣고 확신만 하게 되면 전심으로 따르는 실천력이 대단한 사람이었다. 요11:16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1. 사람은 자신의 길을 알 수 없다.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고, 석가모니는 도를 터득하기 위해 출가하여 10여년의 세월을 방황했다고 한다. 모든 성현들은 길(도를)을 찾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길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그들 역시 인간이기에 찬 길을 알 수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누군가에게 길을 깨우침 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도마가 예수님께 요14:5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라고 여쭙는 것은 비록 주님의 제자라고 할지라도 인생의 길을 모름을 솔직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삼년 동안 도마는 제자로서 주님과 동거하며 훈련을 받았지만 그는 주님께서 가시는 길에 대해 무지했다. 그래서 그는 솔직하게 주님 가시는 길을 모른다고 고백하였다. 그래서 도마가 우리들을 대표해서 정직하게 길을 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진리 앞에 솔직해야 한다. 수 십 년 신앙생활을 해왔지만 우리는 솔직히 포장만 그럴싸하게 하고 있는 크리스챤인지 모른다. 영적으로 얼마나 무지하고 한 마디의 말씀이라도 마음에 깊이 상고하며 다시 되짚어 보며 감동을 받거나 눈물을 흘리며 회개를 하는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거의태반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본문에서 도마의 정직한 질문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주님의 제자로서 아직도 자신이 모르고 있는 점이 있다는 것을 솔직히 시인한 그의 정직성을 우리는 본받아야 한다. 신앙생활의 경력만 자랑한다거나, 직분만 자랑하다가는 우리는 무지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말 것이다. 참으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인 것이다.

 

2. 예수님 자신이 길이라고 하셨다.(6절)

도마는 길 되신 주님을 앞에 모시고 길을 물었던 것이다. 일찍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가야할 길을 가르쳐 주었다. 신5:32-33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고 했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명하신 도를 행하는 것이 참된 길이라고 가르쳤다. 주님은 놀랍게도 “내가 곧 길이라”고 하셨다. 과거에 세상을 향해 살았던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을 향하여 똑바로 가기만 하면 되는 줄로 믿습니다.

 

3. 예수님 자신이 진리요 생명이시다.

인간의 행복은 생명의 길을 택하는데 있다. 그래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신30:19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 라고 했다. 생명을 주기 위해서는 생명 자체가 죽어야 한다.(한 알의 밀)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셨다.

<요14:7-11>

 

예수님께서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하시자 제자 중 빌립이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간구한다. 이때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으로 “나를 본 자는 이미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예수님도 하나님도 모르는 것이다.

 

1. 제자들의 무지함.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고 있었으나 그들은 알고 있어야 할 만큼 충분히 알지는 못했다. 제자들은 마땅히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으로 인식했어야 했는데 그들의 신앙은 거기까지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3년간이나 예수님과 동고동락을 했으나 아직도 영적인 지식에는 무지했던 것이다.

오늘 우리들도 그럴 수 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다고는 하지만 예수님에 대해서, 성경 말씀에 대해서, 믿음 생활에 대해서 영적으로 부족한 것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요14:8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라고 말한 것은 합리주의 신앙의 표본이다. 성경은 수차에 걸쳐서 하나님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존재이시며, 하나님을 보는 자는 죽을 수밖에 없다고 가르치고 있다.(출33:20) 그러므로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이와 같은 질문은 그 믿음의 연약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찾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안 계시다거나 예수님의 메사야성을 믿을 수 없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통해서 참다운 만족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 관해서 알려고 하기 보다는 성경 말씀 자체를 알아야 하며, 예수님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 자신을 알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2. 하나님과 동일하신 예수님.

요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고 예수님은 빌립에게 말씀하셨다. 요1: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고 했는데 빌립은 처음부터 주님을 만나던 날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깨닫고 고백을 하였으나 이때까지도 주님 안에 계신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하셨다. 이 말은 아버지와 아들은 본성과 행위에서 완전히 일치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을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으로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의 신앙은 완전해 지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앎으로써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봄으로써 하나님을 보게 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3.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 믿음을 요구하신다.(11절“ . . . . )

구약 성경 시대는 여러 가지 일반적인 계시와, 때로는 환상을 통해서, 그리고 예언을 통해서, 또한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믿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한 희미한 통로가 아닌 살아계시고 부활하셔서 성령님으로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의심 없이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요14:12-14>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장차 보다 더 큰 일을 맡기실 것이며 그들이 간구하는 모든 소원을 응답해주시겠다고 말씀 하신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간구를 들어주시는 이유는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받으시게 하기 위함이다.

 

1. 성도가 하는 일은 곧 주님이 하신 일이다.(12절)

 

 

 

 

 

 

 

 

 

 

 

 

 

 

 

 

 

 

 

 

 

 

 

 

 

 

 

 

 

 

 

 

 

<요14:15-17>

 

본문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필요한 전제 조건을 제시해 주시고 있다. 즉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이라는 조건을 전제로 하나님께서는 위 인간에게 꼭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실 것을 약속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조건적인 사랑, 즉 아가페의 사랑이라고는 하지만 여기에는 당연히 인간의 응답이 뒤따라야 한다. 이것이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조물주이신 하나님을 대하는 마땅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제 땅에서의 사역이 끝나가시자 주님을 대신해서 우리를 위로해주고 진리가운데로 이끄실 분이 필요했다. 그분이 바로 성령님이시다. 성령님께서 이 땅에 오셔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인간이 해야 할 일과 주님께서 도와주실 일이 있다.

 

1. 계명을 지켜야 한다.

우리에게 오실 성령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우리가 먼저 계명을 지켜야 한다.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동시에 가장 적극적인 방법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진리를 가르쳐 주시는데 있기 때문이다.

 

2. 회개가 필요하다.

성령님은 성도들을 거룩하게 하는 세례를 베푸신다. 또한 흠 없는 생활을 하도록 요구하시고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에게 성령님이 임하시기까지, 내 맘속에 보혜사 성령님을 맞아들이기 전까지 우리는 전심으로 회개함으로 마음을 비워야 한다. 세상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에서 벗어난 깨끗한 마음이야말로 성령님께서 임하실 수 있는 경건한 자리가 되기 때문이다.

 

3. 예수님의 중보가 필요하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시기를 요17:9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하셨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위해서 하나님께 계속하여 기도하고 계신다. 따라서 우리 인간의 힘만으로는 성령님의 임하심이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계셔서 보하시는 예수님의 간구하심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성령님의 임재는 기대할 수도 없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기 때문에 진리 되시는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들에게만 임하시는 것이다.

 

4. 성령님이 하시는 일.

성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계획하시고 섭리하셨다면 성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섭리하신 구원사역을 수행하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성부와 성자께서 계획하시고 수행하신 구원사역을 크고 넓게 확대시켜 나가시는 일을 하시는 분이시다. 또한 성령님은 성도들의 삶 속에 계셔서 구체적으로 주관하신다. 즉 거룩하고 흠이 없으며 구원받은 성도로서 모범적인 삶을 살게 하신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따라 살 수 있도록 하시며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도록 역사하신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님을 우리 가운데 온전히 역사하시도록 받아들여야 한다.

 

<요14:18-21>

 

예수님은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이 재자들과 영원한 이별, 즉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고 주님은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다시 오실 것이며 그때가 되면 제자들도 예수님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그 말씀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40일 동안 제자들과 함께 교제하셨다. 마치 어린아이들을 물가에 둔 어머니처럼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차마 제자들의 곁을 떠날 수가 없으셨던 것이다. 예수님은 그만큼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이다.

 

1. 예수님 안에는 영원한 생명과 사랑이 있다.

요14: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제로 하시는 말씀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인간의 생명관에 신기원을 이루셨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인간의 생명을 위하여 봉사하시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생명 앞에 죽음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부활을 통하여 증명하신 것이다. 예수님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솔직히 말해서 제자들에게도 대단한 위협과 두려움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고 하셨다. 그 말씀은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생명적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예수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그 순간 예수님 안에서의 생명적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생명은 옛날 예수님 밖에 있을 때와 같이 한 순간의 생명이 아닌 영원한 생명이 되는 것이다.

 

2. 예수님 안에는 영원한 생명과 사랑을 어떻게 누릴 수 있는가?

21절 “ . . . ”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주시 새로운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것은 바로 서로 사랑하는 삶이다. 예수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감으로써 이 세상에 d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요 세상 사람들이 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만의 특권이다.

 

 

 

 

 

 

 

 

 

 

 

 

<요14:22-24>

 

가룟인 유다가 아닌 다른 유다가 예수님에게 어찌하여 제자들에게는 예수님 자신을 나타내시면서 세상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않느냐고 질문을 하였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킬 것이라고 답변하셨다. 즉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요, 그의 비밀을 알 자격이 있다는 말씀이다.

 

1.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지킨다.

여기서 우리는 누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인가를 생각해 보아야한다. 왜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의 뒤를 따라다녔는데 이 중요한 계시의 시간에 그들이 제외되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 해답으로 제시하시는 것이 “예수님 사랑”이다. 그리고 그 “예수님 사랑”의 증거가 예수님의 가르치심의 실천이다.

예수님 곁을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었다. 한 종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요, 다른 한 종류는 군중들이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제자들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요, 예수님께서 자기들 곁을 떠나신 후에도 변치 않고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지킬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예수님 곁을 따라다니는 또 다른 한 종류의 사람들인 군중들은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따라다닌 것이 아니다. 그들은 표적을 본 까닭에 예수님을 따라다녔으며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남과 동시에 예수님의 곁을 떠날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계시의 자리에서 그들을 제외시킨 것이다.

 

** 오늘 나는 누구인가?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인가? 그리고 앞으로 변치 않고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지킬 제자인가? 아니면 예수님을 통하여 나타나는 표적과 이적 때문에 따르는 군중들과 같은 자, 예수님이 곁에 보이지 않으면 예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군중들과 같은 사란인가? 여러분은 누구인가? 예수님은 [요13:1]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하셨다.

 

2.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

우리는 기독교의 사랑의 원리를 잘 알아야 한다. ① 하나님을 사랑하기 원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면 된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라고 말하는 빌립에게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10절)계신다고 하였다. 즉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것이다. ② 예수님을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세상의 소외받는 자를 사랑하면 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40)고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또 다른 기독교의 사랑의 원리를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쏟는 그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깊은 사랑과 뜨거운 관심을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3.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영생을 보장 받는다

예수님은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고 하셨다. 즉 예수님 사랑을 굳게 결단하고 삶 속에서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보장된다는 것이다. 요14:23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요14:25-26>

 

본문은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님은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고, 또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이별을 앞두고, 고별사를 하시는데 그 주 내용은 제자들의 불안을 없애주고 확고한 믿음을 갖게 하는데 있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예수님, 그리고 제자들은 하나라는 것을 강조하시고, 그 생명적 유대감을 이어가게 하시는 일을 예수님께서 떠나신 후에 오실 성령님께서 제자들에게 진리에 대해서 가르치시고,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1. 성령님은 예수님의 대리자이시다.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이라고 하셨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요청에 의해(16절)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예수님의 이름으로(26절) 이 세상에 오신다고 하셨다. 예수님의 요청에 의해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신 것은 예수님의 사역이 이제는 성령님께 위임되었다는 뜻이며,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오신다는 것은 성령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나타내시며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을 계속적으로 이어가시기 위해서이다.

한 마디로 성령님은 예수님의 대리자이시다. 실재로 성령님이 강림하신 것은 예수님 부활 후 50일 만에 오셨으며, 승천하신 후 10일 만에 오셔서 예수님의 몸 된 교회위에 임재 해 계시면서 교회와 함께 사역을 하시기 시작하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계시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서 일하신 것처럼, 성령님은 예수님을 나타내시기 위해서 일하신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활동하시는 곳에는 곧 예수님의 일이 성취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하심은 인간의 구원의 원리를 정해놓으셨다고 한다면 성령님은 예수님이 이루어놓으신 구원의 원리를 사람들에게 적용시키기 위해서 일하고 계시는 것이다. 고전12:3 그러므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예수님의 대리자이시고, 대표자이시다.

 

2.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

①진리를 교육하시는 일을 하신다. -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하셨다. 성령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시는 일은예수님에 대해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라는 말씀이다. 즉, 예수님의 출생과 공적인 사역, 그리고 십자가에서의 죽으심과 부활에 이르는 예수님의 생애 전반과 모든 교훈을 인간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성령님은 인간에게 그것을 사실로 증거 하시고(요15:26), 그래서 인간을 예수님의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는 것이다.(요16:13-14)

인간이 예수님의 복음을 전파하지만 그 진리를 이해시키고 깨닫게 하는 것은 성령님이 하신다. 교회의 전도와 교육의 효과는 오직 성령님이 일하신 결과인 것이다.

② 성령님이 하시는 일 중의 또 하나는 진리를 보존하시는 일이다. 26절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는 말씀은 [모든 진리를 보존하신다]는 뜻이다. 인간의 기억력은 한계가 있고 불완전하다. 3년간의 예수님 하신 일 모두를 제자들에게 가르치시고 행하신 모든 것을 다 기록한다고 하여도 이 세상이 모두 기록 보존할 수 없다. 오직-

<요14:27>

 

예수님께서 당하실 십자가 수난을 앞두고 불안함과 두려운 상황에 빠져있는 제자들에게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서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제자들에게 평안을 기원하신다. 즉 예수님은 자신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에 두려워하지도 말고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라고 하신다.

 

1. 제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주님과의 단절 때문이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라 고 하셨다. 제자들이 근심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자신들이 따라올 수 없는 곳으로 홀로 떠나시겠다는 것을 알고 난 후 부터였다.(요13:36, 14:1)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단절 하나 만을 가지고 근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당하실 십자가의 수난으로 인하여 예수님하고만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세상의 영욕과의 단절 때문에 더욱 더 근심하는 것이다.

제자들은 순수한 의미에서 예수님과의 단절로 인한 신앙적인 단절을 슬퍼하고 근심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되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군중들처럼 예수님을 통하여 얻게 될지도 모르는 세상의 권세와 영예와 그리고 물질적 행복에 대한 기대감으로 따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주님과의 단절 자체를 염려하고 불안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단절로 인해 무산되어버릴 자신들의 꿈과 행복에 대해 근심하는 것이라고 봐야 적절할 것이다. 근심은 욕심의 또 다른 얼굴인 것이다.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요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다.

 

2. 제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환경 때문이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 홀로 자신들이 따라갈 수 없는 어디론가 떠나가신다는 말씀에 두려워하고 있다. 거기다가 수제자인 베드로마저 예수님을 배신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거기다가 설상가상으로 제자 중 누군가는 예수님을 팔 것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제자들의 공동체는 일시에 평안이 깨어져 버리게 될 형편이 되었다. 거기다가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공의회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음모를 점점 현실화 하고 있어 두려움이 엄습해 오고 있었다.

그러므로 성도의 두려움의 원인은 하나님 보다 세상의 권세를, 진리 보다는 불의를, 주님의 언약 보다는 세상의 행복을 더 신뢰하거나 가치 있게 여길 때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칠흑같이 어두운 감옥에서도 평안의 찬송을 부르며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3. 성도의 참된 평안은 하나님과 교통하는데 있다.

예수님은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고 하셨다. 요일2: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고 했다.

성도의 신앙은 하나님을 알고 교제하는데 있다. 또한 그 열매는 참 평안인 것이다.

 

<요14:28-31>

 

본문은 14장의 종결부분으로 예수님의 죽으심을 포함한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 강림과 예수님의 재림까지 종합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1. 예수님의 재림은 완벽한 부활체로서 재림하신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시자 제자들 중에 무서워하고 놀라워하며 어떤 영체를 보는 것처럼 하자 못 박히셨던 손과 발을 보여주시면서 제자들에게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고 하시자 눅24:42-43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고 하였다.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은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영체의 부활이 아닌 육체까지의 완벽한 부활이셨다. 예수님은 영생을 얻는 성도들의 부활의 첫 열매로서 부활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실 때에도 완벽한 부활체로서 당당하게 재림하실 것이다. 그 때에는 심판주로 오셔서 영생을 얻을 자와 영원한 벌을 받을 자로 구분하실 것이며, 예수님을 영접한 성도들에게는 주님의 부활에 참여하는 영광을 얻게 하실 것이며 불신자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에 참여하는 수치가 있을 것이다.

[요16:33]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은 성도에게 있어서는 가장 감격스러운 기쁨의 날이 된다. 그날은 예수님께서 친히 성도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한숨을 우로해 주시는 날이 될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질서와 체계는 무너지고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와 통치하심이 임하는 새로운 왕국이 도래하는 날이요 예수님께서 이 땅의 통치자요 만왕의 왕으로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당하는 슬픔과 고난은 장차 영광으로 변화될 것이다.

 

2. 미래를 준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설교를 여러 차례에 걸쳐 하셨다.

* 열 처녀의 비유(마25:1-13), 종의 비유(눅12:35-48) - 눅12: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 달란트와 므나의 비유(눅19:12-27) - 마25:28-29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의 말씀을 주신 이유는 나태하고 안일하게 살고자 하는 우리 자신과 죄악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 세상을 향해 각성하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먼저 각성하고 새로워지며 아울러 t상을 향해 각성의 소리를 외쳐야 한다. 게으르고 나태한 자에게는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이, 그리고 불의한 종과 같이 최대의 시련이 닥칠 것이지만 늘 준비하며 부지런한 자에게는 최고로 기쁘고 행복한 날들이 될 것이다.

미래에 대한 준비는 충성된 자가 행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이다. 어떤 자세로 현실을 살아갈 것인가에 따라서 우리의 미래는 결정될 것이다.

 

 

<요15:1-2>

 

요15장은 16장과 함께 참 포도나무 비유를 필두로 하여 주님께서 이 땅에 남아있을 제자들과 신앙적 삶의 성격과 내용을 교훈하신 말씀이다.

 

1. 참 포도나무 비유의 의미

1) 예언적 의미가 있다.

사5: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라고 하셨는데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계획안에 유대민족을 극상품 포도나무로 인간 세계 속에 심어놓으셨다고 했다. 그래서 그 유대민족의 신앙과 연합된 이방인들도 구원의 반열에 포함시키셨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먼저 택하심을 받은 유대인들은 갈수록 신앙이 타락하여 참 포도에서 ‘들포도’로 변질되고 말았다.(사5: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

보세요, 가장 신앙적이어야 할 민족이 하나님과의 신앙 관계에서 실패했다고 한다면, 이 지구상에 거하는 인생들 안에는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있는 가능성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롬3:10-12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고 했다. 이 우리는 예수님께서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1절)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기 전에 살았던 에덴동산의 “생명나무”(창2:9)이시며 또한 장차 신앙으로 승리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맛볼 “생명나무”(계2:7)이신 것이다. 이제 들 포도 나무였던 우리가 참 모도나무요, 생명나무이신 예수님께 접붙이신바 되었으니 결코 떨어져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서 참 포도의 열매, 생명의 열매를 수확할 수 있어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붙어 있기만 하면 된다.

 

2. 참 포도나무 비유의 요점

예수님의 생명력과 그리스도인의 열매를 강조하신 것이다. 포도나무는 생명력이 끈질기고 왕성하다고 한다. 그루터기만 남아도 언젠가는 가지가 돋으며 한 그루의 나무에서 난 가지들이 온 마당을 다 그늘지게 할 정도로 왕성해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 사도 바울은

롬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라고 했다.

예수님은 우리를 왕성하게 하시고, 뜨거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시원하게 하시며 따라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내 안에 거하라”-4절-고 하신다. 인간은 예수님 안에서 살아야 생명력이 넘친다.

* 또한 우리는 열매 맺는 삶, 즉 사명적 삶을 살아야 한다.

 

 

 

 

 

 

<요15:3-4>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미 깨끗하여 졌다. 포도나무의 원 줄기에 붙어있지 않는 가지는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아니하는 제자들은 아무런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예수님 자신과 성도와의 관계에 대해서 설명하신다.

 

1. 가지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

포도나무의 용도는 가구 만드는데 사용하지 못하며 땔감으로도 사용할 수 없으며, 장식품의 재료로도 이용할 수 없다. 포도나무는 단지 열매를 얻기 위해 필요한 나무이다. 마찬가지로 성도들도 하나님께 때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면 성도로서의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열매, 신앙의 열매를 맺음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다.

 

2. 가지는 줄기에서 자란다.

포도 열매는 항상 줄기에 붙어있는 가지에 맺힌다. 성도도 그리스도의 줄기에 붙어있어야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다. 성도들이 예수님과 연합되어 있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이다.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과 성도가 온전히 하나가 되는 유기체적 관계를 가질 때 영적인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는 것이다. ==> 성장에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 받으며, 아울러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한다.

 

* 이 비유의 말씀이 주시는 교훈은 진정한 생명은 오직 예수님과 연합할 때 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

* 예수님 안에 사는 자의 축복은 (1) 죄로부터 깨끗하여 진다.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 졌으니” -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즉 예수님의 말씀을 지킬 때 거룩하여 지며 죄로부터 깨끗하여 진다. - 예수님 안에 살 때 모든 두려움을 이기고 주님만을 따라가는 성도가 되는 것이다.

 

(2) 또한 예수님 안에 사는 자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게 된다. 구원받은 자로서의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게 하시기 때문이다.

 

 

 

 

 

 

 

 

 

 

 

 

 

<요15:5-6>

 

예수님은 본문에서 어제 아침에 보았던 3, 4 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명백하게 강조하신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고 제자들은 가지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을 때 열매를 맺듯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제자들은 열매를 맺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들이 잘려나가 땔감이 되듯이 심판의 운명을 겪게 된다는 것이다.

 

1. 포도나무와 가지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예수님은 조금 전 만찬회석상에서 포도주 잔을 나누어 주시면서 막14:24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고 하셨다. 그리고 지금은 ‘나와 너희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라고 말씀하신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대속의 보혈로 맺어진 생명의 관계라는 것이다. 나무와 가지는 하나의 진액으로 생명이 소통되어있다.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예수님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은 바로 이 보혈이 통하여 한 생명으로 연합되어있는 것이다.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의 관계는 생명으로 연합된 관계를 뜻하는 것이다.

엡5: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고 하셨는데 예수님은 몸이고 교회는 그 지체이다.

 

2.스승과 제자(8절 “ . . . . . ”)

가지가 많은 열매를 맺으면 “제자”가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진리”가 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가 “생명”의 관계라면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진리”의 관계임을 뜻한다. 가지가 맺는 열매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결실한다는 말씀이다. 요13: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라고 하셨는데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는 주인과 종과의 관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두 관계는 “말씀”에 의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성도와의 관계는 진리, 즉 말씀의 복음에 충성스럽게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열매를 맺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3. 가지의 목적

1) 넝쿨이 무성해야 한다. - 가지의 목적은 열매를 맺는데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넝쿨이 무성하게 뻗어나가야 한다. 이것은 교회의 왕성한 활동, 왕성한 복음전파의 활동을 뜻하는 것이다.

2) 잎이 무성해야 한다. - 열매는 잎이 무성해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잎이 무성한 포도나무 밑은 그늘이 진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포도나무 그늘은 좋은 휴식처였다. 교회는 만인의 휴식처이다. (마11:28)

3)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한다. -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5절) 이 말씀은 교회의질적 성장을 의미한다.

 

 

 

 

 

 

<요15:7-8>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따를 때는 무엇이든지 구하여도 이루어진다. 제자들이 많은 열매를 맺을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며 그때에 비로소 제자들도 참 제자가 되는 것이다.

 

1. 풍성한 열매를 맺는 방법

1) 예수님을 닮는 것이다. -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닮는 생활을 말한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부활의 승리를 선포하신 예수님을 삶의 최우선 자리에 모시고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실제 생활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예수님 때문이며, 예수님 이름으로 시작하여 예수님 이름으로 하루를 끝맺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는 자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초대 교회 때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었다.(행11: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예수님의 모습과 예수님의 향기를 피웠기 때문에 안디옥 주민들은 그들을 향해 그리스도인이란 호칭을 붙여주었던 것이다. 즉 이방인들이 안디옥 교회 성도들에게서 예수님의 형상을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무화과나무에서 사과 열매를 맺을 수 없듯이 예수님 안에 거하는 성도들이 예수님과 다른 행동을 할 수 없는 것이다.

 

2) 다음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는 방법은 [말씀이 생활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는 것은 말씀 중심의 삶을 산다는 것을 뜻한다. 즉 예수님의 말씀이 내 인생의 척도가 된다는 것이다. 모든 일을 말씀에 비추어 시행하고, 말씀에 어긋나는 일은 설사 손해를 볼지라도 안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준행 자 치고 인생을 손해 본 자란 없다. 오히려 귀하고 복된 존재가 되었고 세계와 역사 속에 청청한 별과 같은 인물이 되었다. - 아브라함이 그랬고, 야곱이 그러했으며 요셉의 인생이 그랬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복 있는 사람을 정의하기를 시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라고 했다. 인생을 형통하게 하는 방법도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고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는 것”이라고 하였다.(수1:8) 이러한 말씀 중심적 삶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아니 그 사람 인생 자체가 바뀌어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감화를 받고 변화되었는가? 유명한 부흥사 무디도 말씀 중심적 삶으로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되었고 ‘루터’도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에 변화되었다. 이교도이며 탕아였던 어거스틴도 말씀 안에서 새로운 눈을 떴기 때문에 성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하다. 결코 거짓이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자는 “시냇가의 나무가 시절을 좇아 풍성한 열매를 맺으며 그 행사가 다 형통하”(시1:3)게 되는 것이다.

 

* 그 결과는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시며 참 제자가 되는 것이다.

 

<요15:9-12>

 

생명체에게 있어서 주변의 환경이란 매우중요하다. 생명체는 주변의 환경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좋은 환경에서 사는 생명체는 좋은 영향을 받지만 나쁜 환경에서 사는 생명체는 나쁜 영향을 받는다. 당연히 사람도 어디에 존재하는가? 에 따라서 그 사람의 생활 원리가 완전히 달라진다. 왜냐하면 그만큼 사람은 자기가 살고 있는 주변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사랑의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사셨고,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온 인류를 사랑하실 수 있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하신다. 제자들이 살아가야 할 위치와 환경은 예수님의 사랑 안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계명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사랑 안에 살 수 있는 중요한 삶의 원리를 말씀하신다. 요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예수님이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서 못을 박을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시며 지키셨기 때문이다. 즉 예수님에게 있어서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계명을 지키시는 것과는 동일한 것이다.

요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하여 계명을 지키신 것 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계명에 따라 행동할 것을 당부하고 계신다.

** 우리 성도들이 살아가야 할 위치는 예수님이시며, 우리 성도들이 살아가야 할 환경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우리의 생활터전이시고, 우리들의 생활 터전에는 예수님의 말씀, 즉 예수님의 복음이 항상 널려 있어야 한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좋은 영향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행복한 생활이 펼쳐지는 줄로 믿습니다.

 

2.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의 내용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렇다. 요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는 상대방에게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자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을 통해서이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요, 예수님 안에서 사는 것이다.

 

* 이렇게 살 때 우리에게 어떠한 결과가 주어질까?

요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 사랑 안에 살아가는 기쁨은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이다. 세상 쾌락이 주는 기쁨은 공허하고 곧 싫증이 나지만 예수님의 복음의 말씀을 지킴으로 얻는 기쁨은 영혼의 갈증을 풀어주는 참된 기쁨인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얻는 것은 충만한 기쁨인 것이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활터전이시고, 우리들의 생활 터전에는 예수님의 말씀, 즉 예수님의 복음이 항상 널려 있어야 한다.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좋은 영향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행복한 생활이 펼쳐지는 줄로 믿습니다.

<요15:13-15>

 

자신을 낮추어 이 땅에 종으로 오신 예수님은 이제 자신의 모든 사역을 마감하시는 시점에서 제자들의 지위를 격상시키신다. 요15:15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즉 제자들을 종의 지위에서 친구의 지위로 높여주신 것이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과 그 전후를 살펴보면 이 격상은 단순한 지위의 격상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1. 지위의 격상.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롬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본문에서도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라고 하셨다. 전에 모든 인간은 아담 안에 있었다. 만일 아담이 범죄 하지 않았다면 전 인류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께 범죄 하였다. 아담이 범죄 하므로 그 안에 있는 모든 인간은 멸망 받을 죄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로 모든 죄인을 품으심으로 예수님의 품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죄인의 자리에서 의인의 자리로 옮기게 된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죄인이 의인이 되되 단순히 과거 아담이 범죄 하기 이전의 상태로 환원된 것이 아니라 그 지위가 피조물의 지위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지위로, 즉 종의 위치에서 자녀의 위치로 격상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한 마디로 신분이 바뀐 사람들이다.

 

2. 지식이 달라진 사람들이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지식에 있어서 격상이 된 것을 설명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종과 자녀의 차이를 예로 설명하신다. 종은 주인의 뜻을 알지 못한다. 종이 그것을 알려고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주인도 종에게는 자기의 뜻을 가르쳐주지도 않는다. 따라서 종이 하는 일은 주인의 명령에 의할 뿐이다. 주인이 명령하는 것만 잘 이행하면 종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반면에 자녀는 그와는 완전히 다르다. 자녀는 종과 같이 기계적인 존재가 아니다. 세상에 자기의 자식이 기계적인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는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자식에게 충분히 자기의 뜻을 알려준다. 가치관, 사상, 장래의 꿈과 계획 등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자녀들은 명령에 의해 기계적으로 순종하지 않고 부모의 뜻을 헤아려 그 이상의 일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스도의 사람들,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들이 바로 그러한 존재들이다. [롬8:15]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갈4:6]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3. 능력과 사명이 달라진 사람들이다. - 지위가 달라졌는데 그에 따른 실권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그 지위는 있으나마나한 지위이다. 세상에는 그런 지위가 많다. 그러나 성도의 지위는 그렇지 않다. 요14:12)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막9:23)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또한 성도는 사명이 달라진 사람들이다. 14절“....” ** 예수님은 우리의 지위와, 지식(하나님의 뜻)과 능력과 사명을 격상시켜주셨다. 우리는 거기에 맞게 일하며 살아가야 한다.(너희는 이 세대를 ...)

<요15:16-17>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로 시작된 예수님의 고별설교는 이제 제자들을 선택하신 의도에 대해서까지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은 그들을 “제자”로 “친구”로 선택하셨다고 하시고 그 선택의 주체, 목적, 그리고 선택딘 자들에게 주어진 특권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1. 예수님은 선택의 주체와 조건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라고 하셨다. 제자들이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선택의 주권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은 선택이 하향적이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후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12명을 사도로 세우셨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을 부르실 때 인간은 이에 응답할 수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인간의 응답과 만나게 될 때 선택은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소명이 인간의 응답과 만나고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된 자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고전12:3]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은 것이요, 그것은 우리들의 기분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 성령님에 의한 역사인 줄로 믿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신 조건은 그들이 남달리 유능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대부분 무식자들이었으며 영적인 민감성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들을 선택하셨다. 그것은 겸손한 인성을 선택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드러나게 하시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씀을 드리자면 세상에서 미련하고 약한 자들과 천하고 멸시받은 자들을 선택하셔서 지혜로운 자들과 강하고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는 의도에서였다.(고전1:26-2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택하실 때에도 모든 민족 중에서 가장 작은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셨는데 그것은 다만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하셨다.(신7:6-8) 하나님의 선택하심의 기준은 그 주권적 사랑에 있는 것이지 인간적인 조건 때문이 아니다(요3:16). 하나님의 모든 선택의 결정은 오로지 사랑과 영광을 위해서인 줄로 믿습니다.

 

2.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택하여 세우신 목적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 열매란 성령님의 임재로 인한 내적인 결실, 즉 성령님의 열매(갈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와 그로 인한 능력의 사역, 즉 전도와 구원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3. 선택된 자의 특권 -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선택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과 교통할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되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제자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데 그것은 기도로 하나님께 청구할 수 있는 특권의 은총이 주어진 것이다. 그 특권적 은총은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님의 충만함 가운데서 기도해야하는 것이다.

<요15:18-19>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이 있는데 그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미움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미움을 받고, 핍박을 당하고 위험한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지 않으며 오히려 기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말씀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세상은 당연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미워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섬길수록 세상의 미움과 핍박도 더욱 강해진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1.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이유.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세상과 예수님은 정반대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은 선이시고 세상은 악이다. 예수님은 빛이시고 세상은 어두움이다. 예수님께서 축복하실 때 세상은 저주한다. 이렇게 세상과 예수님은 극과 극이다. 빛이 어두움에 섞일 수 없는 것처럼 세상은 예수님과 화해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란 세상이 미워하는 그리스도 편에 선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미워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속해있지 않기 때문이다.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세상은 사탄이 지배하는 악이 가득 찬 곳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쾌락과 죄악에 물들은 자들만을 원한다. 조금이라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자가 있으면 그에게 핍박을 가한다. 결국 세상은 자기의 편에 속하지 않으면 모두원수로 여기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필연적으로 세상과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려면 세상과는 손을 끊어야하기 때문이다. 자기 영혼의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택하겠다면 세상의 미움과 핍박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세상에 속한 자가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고 하여도 그것에 현혹되거나 그들의 권세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 악인의 번영과 세상의 영광은 잠시 동안의 헛된 꿈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

1) 자신은 예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임을 명심할 것.

:19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택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우리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말씀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자라면 세상에서 미움을 받더라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야 한다. 요16: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멸시하고 비웃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택하여 주신 은혜를 은총을 잊지 말고 세상의 모든 고난을 견디어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19절 “ . . . . ”우리가 예수님께 속하지 않고 세상에 속한자라면 세상은 우리를 환영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의 미움을 받는다면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증명되는 것이다. 마10:22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요15:20-23>

 

우리는 종종 세상에서 상처받고 당황스러워 하며 신앙에 회의를 느낄 때가 있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가 정해놓은 생각에 머물기 때문이다. 본문은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다”(20절)라는 속담을 인용하여 세상이 진리이신 예수님께 적대감을 가진 것처럼 주님의 제자 된 성도들에게도 핍박을 자행 것을 늘 기억하고 있으라는 말씀이다. 성도들이 세상에 대해 늘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환대받을 기대감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마10:24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사도요한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에는 ‘영적 중간 계층’이 없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과 어두움 및 사탄에게 속한 사람들뿐이다.(요일5:19-20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그러므로 성도들은 신앙 안에서의 바른 세계관을 가질 때 세상을 이기는 믿음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1. 핍박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요15:20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세상이란 하나님 없는 인간의 의식과 그 조직’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의 가치관은 그 제자들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다. 기독교의 역사는 한 마디로 피와 수난의 역사이다. 고후4:8-9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라고 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기독교가 들어간 나라치고 박해를 받지 않는 곳이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이방인 취급을 받았고 쓰레기처럼 대우를 받았다. 오늘날과 같이 기독교가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이 시대에도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진실한 마음으로 기독교에 호의를 가진 사람들은 드물고 다만 자기들의 유리한대로 이용하려고만 할 뿐이다. 벧전4:12-13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세상의 우정과 사랑과 행복이 멀어지는 경우를 당하더라도 의아해 할 필요가 없다. 다만 내 안에 그리스도알고 용기를 매라의 향기가 있음을 감사히 알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면 될 것이다.

 

2.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이들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20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전도를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음을 알고 용기를 내라’는 뜻이다. 사도 바울이 전도여행 중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유대인들의 훼방과 핍박이 너무나 극렬하여 주춤해 있을 때 예수님께서 환상 중에 말씀하시기를 행18: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고 하셨다. 아무리 세상이 핍박해도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승리를 확신할 것.

 

 

 

<요15:24-27>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에서 미움과 고난을 당하셨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사역을 감당할 때 때로는 엄청난 시련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사역을 감당하는데 필요한 능력을 공급해 주신다면 그 모든 어려움도 넉넉히 극복해 갈 수 있을 것이다.

 

1.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만 7번이나 이적을 행하셨다.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신 것은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함이었다. 그런 기적들은 모두 선한 일들이었으며 자비로운 일들이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심은 사람들의 간절한 요구를 들어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사랑의 표현이기도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러한 기적들을 통하여 예수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알리시기 위함이었다. ***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하겠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의지할 때에 우리가 당하는 삶의 여러 가지 어려운 순간순간마다 주님께서 능력으로 인도하셔서 우리의가는 길을 평탄하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2. 보혜사 성령님의 특성

:26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 보혜사란 말은 ‘도움을 주기 위해 겉으로 부름받은 자’란 뜻이다. 즉 성령님께서는 성도들의 곁에서 위로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사는 것은 나의지혜나, 내가 타고난 복이 있어서가 아니라 순간순간 성령님께서 나의발걸음을 인도하시기 때문임을 인정하고 감사해야 한다.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라고 하셨다. 보혜사 성령님께서는 단순이 곁에 계시는 분이 아니시고, 영원히 우리 곁에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진정한 감사도, 진정한 회개도 성령님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성령님은 어떠한 오류나 불순한 것이 혼합되지 아니한 진리 그 자체이시다.

:26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라고 하셨다. 바로 이 진리의 성령님께서 감격을 잃어버린 인간의 무지한 눈을 뜨게 하시며 속박당한 자의쇠사슬을 끊어주시며, 더러운 마음을 깨끗케 하여 주시며 양심을 죄의식에서 해방시켜 주시는 것이다.

요16:13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하셨다.

 

3. 성도는 바로 이j한 사실을 증거한 사명을 가진 자들이다.

:27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당부하시고 촉구하신 것은 증인이 되라는 것이다.(행1:8“....”) 성령님의 역사는 단독적인 역사가 아니라 인간과 함께 동참하셔서 역사하시는 것이다. 성령님께서 증거의 사역을 감당하실 때는 반드시 사람을 통하여 하시므로 성도들은 이 증거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나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고 세상을 향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므로 이 땅의 모든 거민들이 주님 앞에 나오도록 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남기신 마지막 유언은 막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것이었다.(주님은 구원과 함께 사명도 주심.) 이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사명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점점 확장되어 가는 줄로 믿습니다.

<요16:1- 6>

 

유월절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말씀을 계속하셨다. 예수님은 장차 다가올 세상의 유혹과 시험에 대한 경고의 말씀과, 제자들이 당하게 될 환난에 대해 위로의 말씀도 해주셨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제자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다가올 박해에 대해 미리 말씀을 해주셨다. 제자들은 자신들은 장차 박해를 당할 것인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곁을 떠나신다는 말씀을 듣고 근심이 가득한 상태가 되었다.

 

1. 제자들이 박해를 받는 이유

세상에는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다. 같은 성질을 가진 물체들은 서로 통하지만 서로 다른 것들은 서로를 물리치고 배척을 한다. 세상과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다. 예수님은 ‘의’이시고 세상은 ‘불의’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후6:14-16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라고 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과 세상은 본질상 하나가 될 수없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하나가 될 수 없듯이 그리스도인과 세상은 한 부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것이다. 그 박해는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는 뚜렷한 이유요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15: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고 말씀하신 것이다.

 

2.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박해를 받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성도의 신앙을 더욱 성숙시키시기 위해서 박해라는 방법을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때로는 고난이 우리의 신앙에 유익이 될 때가 많이 있다. 그래서 기독교만이 고난을 축복으로 여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롬8:28)이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때로는 고난의 강을 건너기도 하고, 핍박의 산을 넘기도 하며, 박해의 채찍을 당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은 가까이는 인근 마을로 삶의 터전을 옮기기도 하였고 멀리는 타관객지로 뿔뿔이 흩어져 가기도 하였다. 그들을 소위 ‘디아스포라’ - 흩어진 유대 기독교인들 -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렇게 흩어질 때 마치 불씨가 흩어져 간 곳마다 불이 일어나는 것 같이 성도들이 흩어져 살아가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의 불이 예루살렘을 떠나 전 세계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 흩어져 살아가는 성도들의 신앙은 대단하였다. 예루살렘에만 모여 살 때는 고난과 핍박을 두려워하는 신앙이었다. 그러나 고난의 채찍을 맞은 후에는 그들의 신앙은 강해졌다. 그래서 아무 연고도 없이 살아가는 자기 주변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박해는 우리의 신앙에 유익이 되게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종종 사용하시는 교육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요16:7-11> )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 하늘나라로 가신다는 것을 제자들이 근심하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근심할 일이 아니며 오히려 유익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7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님이 떠나셔야 성령님이 오시기 때문이었다.

 

1. 성령님의 강림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로 가시면 성령님을 약속대로 보내신다는 말씀인데 이 말씀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에는 성령님의 안 계셨다거나 활동을 하시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구약 성경 시대에도 특별한 사역을 위해 필요할 때는 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님께서 영원히 성도들과 모든 믿는 자들에게 충만히 임하시기 위해서 임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육신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실 때에는 장소에 국한되기 때문에 한 장소에서만 활동하실 수밖에 없으시지만 예수님이 성령님으로 계시면 예수님 이름으로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지 임재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임재는 이 땅에서 예수님의 복음사역을 수행함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2. 성령님께서 오신 목적은

요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는 말씀의 뜻은 호통을 친다는 뜻이 아니라 ‘정죄한다. 확신 시킨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므로 구원에 대한 소망을 확실하게 해 주신다는 뜻이다.

 

1) 죄에 대해서 책망하신다. - 악에 오염된 세상은 죄에 대한 자각 능력이 없다. 죄는 무서운 것이다. 왜냐하면 죄의 결과는 영원한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생들은 죄에 대한 실상과, 심각성을 모른 체 살다가 죽어간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는 인생들이 범한 죄를 깨닫게 하여 예수님 앞으로 나오게 하려고 오신 것이다. 불신앙은 모든 죄악의 뿌리가 되며 따라서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시51:3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죄악의 극악무도함을 깨닫고 참회하는 것은 신앙의 첫 걸음이며, 성령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증거인 것이다.

 

2) 의에 대하여 책망하심.(10절“ . . . ”)- 여기서 “의”는 예수님의 의를 말하는 것이다. 주님의 의는 모든 말씀 가운데 나타나 있으며 주님의 행동 속에 잘 표출되고 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인간은 절대로 의로운 존재가 아니며 인간의 죄악을 구속하신 예수님의 의를 힘입을 때만이 죄인인 인간이 의로운 존재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하기 위해서 성령님께서 오신 것이다. 엡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고 함. 우리에게는 의가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인 것이다. 이 사실을 고백할 때 진정한 신앙인이 되는 것.

3)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심.(11절“......”)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사탄을 이기셨다는 것이다. 재난의 원인이 되는 사탄의 권세가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굴복됨으로 우리는 사망의 권세에서 놓임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의의 길을 거거나, 십자가을 지고 가다가 낙심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된다. 갈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요16:12-15>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알려주실 것이 너무나 많으셨다. 그러나 당시 제자들은 그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비록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항상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처지에 있기는 하였지만 그들의 인간적인 한계로 인해 영적으로 완전히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했던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1. 성령님은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13절“ . . . ”)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다. 그러므로 성령님은 거짓을 나타낼 수 없으며 오직 진리만을 나타내신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았듯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성도들은 어둠속에서 빛 가운데로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우리는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음 그 사명을 끝가지 완수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에는 영적인 미숙으로 사명을 감당할 수 없었으나 성령님의 충만하심을 받고 세상에 나가 복음을 증거 했던 것처럼 진리의 성령님은 우리에게 크나큰 용기와 능력을 주시는 것이다. 진리의 성령님이 충만할 때 비로소 예수님의 진리를 깨닫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2.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하신다.(:13b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우리가 하늘나라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의해서이다. 우리의 지혜로는 영적 진리를 분별하거나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성령님의 도우심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성령님의 인도하심은 순전히 성령 자신의 의지는 아닌 것이며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 의해서 계시된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의해 깊이 합의된 사항을 계시 받는 영광스러운 일이며 무지의 세계에서 진리의 광명세계로 인도되었을 때의 그 기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3. 성령님은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다.(14절“ . . . . .”)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성령님은 그리스도의 진리의 능력을 가지고 우리에게 진리를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진리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이 되는 것이다.

 

 

 

 

 

 

 

 

 

<요16:16-20>

 

십자가 죽으심의 시각이 가까워지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로하시기에 최선을 다하신다. 아직 믿음이 약하고 영적 진리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한 제자들은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조금 있으면 다시 나를 보게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 일” 즉 십자가 죽으심의 일로 인해 세상은 기뻐하고 제자들은 애통할 것이나 필경 그 애통이 기쁨이 되리라고 말씀하신다.

 

1.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16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가리키는 말씀이었다. 이 말씀을 하고 계신 밤은 유월절 만찬을 잡수신 밤이므로 목요일 밤이었다. 주님은 금요일 새벽에 붙잡혀 유례없이 신속한 재판절차를 통해 당일에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고 토요일 하루를 무덤 속에서 쉬신 다음 주일 새벽 미명에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주님과 제자들과의 이별은 금요일 새벽부터 주일 아침까지의 짧은 이별이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짧은 이별을 말씀하고 있었지만 제자들은 그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신대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주일에 부활하실 것이며 그러면 다시 제자들과 만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부활 후의 주님과 제자들과의 만남은 십자가 이전의 만남과 같은 만남이 아니다. 십자가 이 전의 만남은 하루 전체의 생활을 함께하신다 할지라도 제자들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의 만남이었으나 부활 이후의 만남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만남으로 변한 것이다.

 

2.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제자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미칠 영향이 달랐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세상은 기뻐하리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는 유대교의 부패한 교권과 로마의 비겁한 정권이 야합한 결과였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부패한 유대교의 교권주의자들은 말썽 많은 예수를 제거하는 기쁨이 될 것이며 부패한 로마의 정치가들에게는 정치적 불안 요소인 위험인물을 제거하고 민심의 안정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기쁨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진리의 죽음은 비진리의 기쁨이 되고, 정의의 죽음은 불의함이 안도할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거기에는 ‘일시적’이라는 단서가 붙는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한편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주님의 죽으심의 의미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주님께서 그들을 떠나 어딘가로 가신다는 ‘이별’만을 감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주님과의 이별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단순이 스승과 제자로서의 이별의 문제를 넘어서는 문제였다. 예수님과의 이별은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에 대한 기대의 좌절이며 그것은 그들의 인생이 붕괴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제자들이 영원한 기쁨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한 번은 겪어야 할 과정으로 주님은 이해하고 계셨다. 그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제자들의 근심을 기쁨으로 변하게 하는 길은 주님과 영원히 공존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것은 주님께서 성령님으로 제자들 속에 임재하시는 것이었다. 이런 주님의 기대는 승천 후 열흘 만인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함”(행2:4)으로 이루어졌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은 제자들의 사역에 언제 어디서나 항상 동참하시게 되었다.(마28:20)

<요16:21-24>

본문은 예수님의 속죄와 부활로 인해서 앞으로 얻게 될 제자들의 큰 기쁨에 관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다. 제자들의 근심이 기쁨으로 바꾸게 될 것이고, 그날부터는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묻지 않게 될 것이며, 구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이든지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1. 예수님의 부활과 영원히 함께하심은 성도들의 기쁨의 원천이 된다.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이 말씀은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제자들을 다시 찾으시겠다는 약속이다. 실제로 주님은 부활하신 후에 근심하던 도마와 타락한 베드로를 다시 찾아가셔서 위로와 용서와 확신을 주셨다.(20:26-29, 21:1-18) 이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은 성도의 말할 수 없는 기쁨의 원천이 된다. 또한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라는 말씀의 의미는 험악하고 외로운 성도의 삶의 현장에 주님께서 언제나 친히 동참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요한이 복음서를 기록한 때는 예수님께서 이 언약을 하신 후 적어도 육십년은 지났을 때이다. 그 험란한 세월속에서 요한은 그 불 같은 성미로 인한 고통과 인격적인 결함과(눅9: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극심한 박해로 인해 수 없이 신앙의 실족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치 않는 주님의 도우심의 은혜를 뼈저리게 체험했기 때문에 ‘사랑의 사도’라는 성인이 되었고 신앙의 승리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요한은 13:1 예수께서...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는 의미 깊은 간증의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앙이란 내가 어떤 처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주님께서 변치 않으시고 나를 찾아 주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 성도들의 현세적인 기쁨의 원천인 줄로 믿습니다.

 

2. 예수님의 재림의 약속은 성도들이 기쁨의 원천이다.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재림의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겠다는 뜻이다.(계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계22:20-21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이 험악한 현세를 기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재림에 대한 소망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인은 ‘두 채의 인생집’을 가진 존재들이다. 고후5:1-2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한다고 하였다. 비록 현재의 삶의 현장이 힘들고 답답할 지라도 불원간 하나님 나라에서 왕 노릇 할 것은 보장받았기에 그 소망이 항상 우리 영혼 속에서 기쁨으로 역사하는 것이다.

3. 성도들의 기쁨은 믿음 안에서 기도와 봉사함으로 얻을 수 있다.(:24....)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예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 안에서 기도함으로 얻을 수 있다.이 말씀은 우리가 기도하되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자세로, 근심과 걱정을 믿음으로 맡기는 자세로,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유익을 위하여 구하는 자세를 가지라는 것.

<요16:25-32>

 

13장에서 시작된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의 말씀의 마지막 부분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제까지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않으셨는데 그 비유들은 쉬운 것도 있었지만 난해한 것도 있었다. 듣는 사람들은 물론 제자들까지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예수님RP서는 이 비유들이 곧 밝혀지리라고 말씀하신다.

 

1. 그 비사는 십자가와 부활로 밝혀졌다.(:25“ . . . . . ”)

결국 모든 난해한 비사를 푸는 실마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제자들은 3년을 예수님과 함께 다녔지만 십자가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 그리고 당시에 마련된 정치적 메시아관 등이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상도 못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당연히 예수님의 비사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비사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은 모든 비사에 눈이 떠지게 되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간 함께 계시면서 가르쳐 주실 때 제자들의 이해는 확고해 졌다.

* 성도들의 모든 신앙의 문제,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 등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중심을 둘 때 풀리고 이해가 되는 것이다. - 육신의 사람이 죽고 영의 사람이 다시 태어날 때, 불신앙의 사람이 죽고 오직 신앙의 사람으로 거듭날 때 .....

 

2. 예수님은 하늘 문을 여는 열쇠이다.(:26“ . . . ”)

이 말씀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직이 유대교에서 말하는 일반 대제사장직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다. 히10:12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라고 했다. 곧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대제사장의 중보의 역할을 하시지만 그 속죄는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단 한번으로서 만족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간구를 일일이 예수님께 아뢸 이유가 없다. 직접 하나님께 구하면 된다. 단 그 간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늘 문을 여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하늘의 보화를 소유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인 것이다.

[요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요16:33>

예수님은 앞으로 당하게 될 일을 제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시면서 그들에 대한 당부의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다. 즉 세상에서는 환란이 있을 것이지만 예수님을 믿고 담대 하라는 당부의 말씀이었다. 이 말씀은 오늘날과 같은 각박한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크나큰 위안이 되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신 분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도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이다.

 

1. 세상에서의 환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환란이란 세상에 있는 하늘나라 백성들로서는 당연히 겪게 되는 환란인 것이다. 하늘나라의 속성과 세상의 속성과는 서로 결합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나라 속성을 지닌 성도들은 세상에서 멸시와, 천대와 거부 등 여러 가지 환란을 당하는 것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늘나라의 백성들이 세상에서 환영을 받고 세상에서 쾌락을 누리며 세상과 함께 동화되는 성도가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사실이 이상한 것이다.

성도에게 환란이 닥쳤을 때 그 환란을 대처하는 자세에 따라서 승리의 기폭제가 될 수도 있고, 절망의 도화선이 될 수도 있다. 환란을 당했을 때 마치 열 사람의 정탐꾼들과 같이 절망의 눈으로 복고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그 환란을 도저히 이겨낼 수가 없는 사람이다. 성도는 환란에 직면했을 때 오직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지혜롭게 대처할 때 승리할 수 있는 저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의 환란을 괴로움으로만 받아들이고 절망하는 사람은 인생에 있어서 패배자일 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도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당하는 고통이란 하루 이틀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세상의 환란을 극복하시고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을 의지하면 담대하고 평안해 질 수 있는 것이다.

 

2. 그리스도인의 환란은 믿음으로 극복할 수 있는 환란이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하신다. 성도들이 세상에서 환란을 당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최후의 승리도 보장되어있으므로 환란 앞에서는 도리어 담대해야 한다. 환란이 우리의 믿음을 꺾고 영혼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도록 방치해 두어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은 가장 괴롭고 슬플 때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환란을 극복하고 승리를 쟁취한 사람이었다.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믿음을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세상으로부터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요일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고 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부여잡고 담대히 대처할 때 우리는 곧 승리의 기쁨을 누리게 되며 환란을 당할 때 흘리던 눈물은 기쁨과 감사의 눈물로 보상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3.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신 능력의 주님이시다.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은 세상의 핍박을 받아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다시 부활하심으로써 세상의 권세를 꺾으시고 승리하셨다. 십자가의 고통 없이 그 승리는 있을 수 없었다. 승리의 근원은 바로 십자가의 고통이었던 것이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부르짖던 예수님의 외침은 고통으로 인한 절망의 탄식이 아니라 세상에서 고통 받는 우리를 구원하는 승리의 노래였던 것이다. 세상을 이기신 예수님은 고통의 세상을 사는 우리의 능력인 것이다.

<요17:1-3>

 

17장은 예수님의 기도장이다. 여기에 나오는 주님의 기도에서 우리가 몇 가지를 발견해야 하는데 (1) 예수님의 소원이다. 성육신 전에도, 이 땅의 사역 중에도, 또한 하나님의 나라에 돌아가신 후 오늘날 까지 주님께서 무엇을 소원으로 삼고 사셨는지를 알 수 있다. (2) 현재 우리들이 어떤 삶의 방향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시는지를 알 수 있다. 예수님 사역초기에 가르쳐 주신 기도문(마6:9-13)에서는 성도가 하나님께 어떤 소망을 품고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셨다면, 본장 에서는 하나님이 성도에게 어떤 소원을 가지고 계신지를 보여주신다. 그러므로 본문은 주님 자신의 소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시는데 그것은 바로 십자가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수모를 “영화로운 때”로 고백하고 그 일을 온전히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신다. 왜 주님은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죽으심과 수모를 “영화로운 때”로 고백하시는가?

 

1. 가장 거룩한 죽음이기 때문이다.(2절“ . . . ”)

이때를 기다려 오셨음으로 고백하셨다. 사역 초기부터 예수님께서 바라보신 것은 골고다였다.(요2: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리고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해달라고 하시는 것이다. 십자가는 죽음의 상징이다. 인간사에서 죽음만큼 값있게 사용되는 것은 흔하지 않다. 위인들이 의를 위하고, 나라를 위하고, 이웃을 위한 죽음은 졸부들의 생명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존귀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도 하늘나라와 불의한 인간 세계를 연결시켜주는 일은 할 수 없다. 철학적이고 역사적인 각성과 교훈을 주었을 뿐 영생의 통로는 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은 바로 그것을 이루신 죽음이기에 영화로운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롬5:7-8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한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한 찬 인간으로서의댓ㄱ적 죽으심]이라는데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왜 주님은 고통스러운 십자가의 죽으심과 수모를 “영화로운 때”로 고백하시는가?

2. 가장 위대한 사역의 완성이기 때문이다.(3절“ . . . . ”)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을 기어코 맛보시려는 이유는 바로 우리에게 영생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영생은 “참 하나님을 아는데” 있다고 하셨다. 인류는 각 민족과 계층마다 하나님을 나름대로 안다고 자부해 왔다. 그래서 나무 조각에서부터 시작해서 각종 물질과 돈, 더 나아가서는 어떤 학문적 사상까지 다양한 신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신들은 인간에게 결정적인 순간이 닥치게 되면 잔인하거나 냉혹하며 무관심하거나 무능력하다. 섬길수록 조롱하고 어떤 것을 요구하며 두려움과 심한 갈증만을 더해줄 뿐이다. 왜 그런가? [롬1: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고 바울은 지적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자기가 섬기는 신이 우상인 것을 알 수 없었으며 참 하나님을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요17:4-8>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드림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으므로 이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영화롭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내용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 대한 예수님의 철저한 복종을 배워야한다.

 

1.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사역이었다.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예수님께서 감당하신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아들의 사역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십자가이다. 물론 아들의모든 삶과 사역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지만 궁극적으로 아들의모든 삶과 사역은 십자가에 그 초점이 맞추어졌던 것이다. 십자가는 조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가 집행되는 자리이다. 신21:23 ...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고 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다 받으심으로써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심과 동시에 사랑을 만족시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장 근원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신 것이다.

* 오늘날 우리들도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의 십자가를 잘 감당할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2. 성도는 예수님의 소유라는 것이다.

:6...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태초에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지으심을 받았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식하라 땅에 충만하라”(창1:28)고 명령하셨으므로 인간의 후손 또한 간접적일지라도 하나님의피조물인 것이다. 그런데 창조 때 인간의 타락과 함께 인간의 소속은 하나님에게서 사탄에게로 넘어갔다. 의의 자식에서 불의의 자식이 되었으며, 축복의 자식에서 진노의 자식으로, 생명의 자녀에서 사망의 자녀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팔아넘긴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죄로 인해 팔아넘긴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값을 지불하시고 성도들을 되사셨다. 이것이 십자가의 구속이다.

십자가는 법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죄인을 의인으로 선고한 자리이지만 경제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죄 값을 지불하신 자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예수님의 소유가 된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갈2:20...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하였고, 베드로는 벧전2:9 오직 너희는 ...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즉 우리가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와 축복을 받았다는 증거이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의무가 주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요17:9-12>

 

예수님은 세상에 남겨두고 잠시 떠나실 제자들을 하나님의 손에 부탁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제자들을 보살펴 주셔서 하나도 멸망하지 않기를 간구하신다. 오직 멸망자는 멸망의 자식뿐이며, 그거t은 성한 것이라는 겁니다.

 

1. 예수님의 기도는 선택받은 백성을 위한 기도이다.(9절“ . . . . ”)

이 기도에서 예수님의 기도가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에 모순이 있다고 todr가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이 세상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 죄에 머물며 계속 하나님의 백성에게 간악하게 행동하는 자에게는 이 중재의 기도가 해당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기도는 세상이 괴롭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우한 기도이기 때문이다.

본문의 기도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위한 기도라고 행각할 수 있으나 더 넓은 의미로 예수님의 기도는 오늘날 주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성도들을 위한 기도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선택된 백성들은 세상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뒤이어 행하게 되므로 예수님의 중재의 기도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교회를 섬기고 복음 사역을 감당하는 성도들을 위해 예수님은 보호하실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상에서 복음사역에 헌신하는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기도로 지원하고 계심을 명심하고 담대하게 증거 해야 하는 것이다.

 

2. 예수님의 기도는 주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기도이다.(10절“ . . . . ”)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소유이기도 하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한 분이시기 때문에 동등한 소유권을 갖고 계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기도하시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소유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소유이기도하기 때문이며 또한 제자들이 복음사역을 감당함으로써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소유이며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자들의 안전을 위해 기도할 책임을 느끼고 계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소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예수님께 영광 돌려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 영광 돌리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흔들리지 않게 기도로써 지원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3.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은 제자 된 자들을 세상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셨다.(11절“ . . . . . ”)

예수님께서 이 기도를 하신 이유는 세상이 얼마나 악하고 시험이 많은 곳인지를 직접 경험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자들을 그러한 세상에 두고 하늘나라로 올라가실 때가 되셨기 때문에 마음이 아프셨던 것이다. 더욱이 아직 믿음이 약하여 아직 스스로 자신을 보호할 능력이 없는 제자들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보셔서 지켜주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신 것이다.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예수님께 속해있는 성도들을 위해 예수님은 기도하고 계신다. 예수님의 자비는 그의 백성들이 세상에서 고통당하도록 내벼려 두시지 않으신다. 성도들을 보호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것이며 예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끊임없는 기도로 지원받고 있는 복음의 일꾼으로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맡은 사명을 완수해야만 될 줄로 믿습니다.

<요17:13-19>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신 내용의 일부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남아서 수난을 당하게 될 제자들을 위해 그들이 악에 빠지지 않고 진리로 거룩하게 되기를 기도하셨다. 또한 이 기도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 즉 성도들을 향한 소원을 알 수 있다.

 

1. 기쁨의 삶을 원하신다.(13절“ . . . ”)

요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고 했고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고 했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은혜와 기쁨으로 묘사하신 것이다. 율법종교는 경색된 분위기, 또 이방 철학의 난해하고 어두운 분위기인데 비하여 진리 되신 예수님은 풍성한 은혜와 기쁨의 근원이심을 묘사했다. 요한복음 2:에는 가나 혼인잔치 집 이야기가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영생은 기쁨과 즐거움이다. 그러므로 기쁨은 구원받은 증거인 것이다.

기쁨은 성도의 초상의 무기이다. 기쁨은 일반적으로도 최선의 삶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기쁨은 만복을 가져온다고 한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인”(행11:26) 이라는 대명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람들]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기뻐하며 순교하고, 기뻐하며 수모를 당하였기에 로마제국 시민들을 근본적으로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성도가 슬퍼하고 불평하고 두려워해야 함에도 기뻐할 때 사탄은 가장 혼란스러워한다는 것을 기억하십시다. 그러므로 성도의 기쁨은 사탄과 불의 앞에서 승리의 무기가 되는 것이다.

 

2. 예수님은 우리가 승리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15절“ . . . ”)

: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 한다고 하셨다. 성도들의 삶은 영적인 성격의 전쟁이다. 진리를 영접한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내적이며 주관적인 세상적인 것들이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그래서 자기와의 극심한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딤후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 했는데 선도는 세상의 보편적이며 개관적인 불신앙의 가치관과의 풍조와 끝없는 싸움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한 싸움과 거룩한 싸움의 요소가 자기 안에 없는 사람은 다시 한 번 자기 신앙의 진위를 의심해 봐야 한다.

 

3. 예수님은 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신다.(:17-19“ . . . ”)

성도가 거룩해야 될 이유는 선교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 거룩의 방법은 ‘말씀의 실천화’이다. 거룩은 신앙의 본질이다. :19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고 하셨다.

 

 

 

 

 

 

<요17:20-22>

 

예수님은 본문을 통하여 중보기도의 목적에 대해서 피력하고 계신다. 주님이 이 세상을 떠나심에 있어서 남아 있게 될 제자들, 그리고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 있어서 연합될 하나의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신다. 예수님의 피로 사신 교회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존재해 가며 어떻게 활동해 갈 것인가를 주님인 이 기도에서 밝히고 계신다.

 

1. 예수님은 교회를 위해 기도하셨다.

요17: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예수님의 중보의 시도는 열한 제자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복음을 믿게 될 모든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시간을 초월하여 오고 오는 미래의 모든 시대에 나타날 성도들, 그리고 모든 나라, 모든 민족, 모든 인종, 모든 신분을 초월하여 믿게 될 성도들을 그 대상으로 망라하고 있을 알게 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생각하고 계시는 교회관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데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형성될 하나의 거대한 영적인 유기체로서의 교회인 것이다. 예수님의 이 기도는 오늘날 실제로 이루어지고 있다. 예수님의 교회는 전 세계 모든 민족들 안에 있고 교회의 생명 활동은 계속해서 확산되어가도 있는 것이다.

 

2. 교회는 하나의 영적 유기체이다.(21절: . . . “)

하나의 진리, 하나의 신앙, 하나의 영을 통하여 연합된 이 영적 유기체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인한 연합을 가져오는 것이다. 인간과 예수님과의 연합은 그 대속적 죽음과 그 죽음에서의 그 죽음에서 부활을 통하여 부여주신 영원한 생명을 믿음으로 영접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이신 예수님이 하나 되신 이 연합은 교회가 하나를 이루는 연합의 모델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신 것도 예수님 안에 아버지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성도 개인이 어려움을 당하고, 더 나아가서 교회가 어려움을 당한다할지라도 온 성도와 교회가 오로지 하나가 될 때 능히 감당하며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3. 유기체적 교회의 목적.(22절)

온 세계 교회의 목적은 교회를 위하여 생명을 버리신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증거하는데 있다. 그 일을 하게하기 위해서 성령님은 교회와 더불어 역사하신다.

 

 

 

 

 

 

 

 

 

 

<요17:23-26>

 

구원받은 성도는 이 땅에서 예수님의 은총 안에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하나가 된다는 말은 서로 협력하고, 단합하며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성도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서로에 대해서 신뢰하고 사랑해야 한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성도들이 그렇게 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시며 성도들이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된다는 것이다.(23절“ . . . . . ”)

 

1. 하나님과 예수님의 하나 되심은 성도들이 하나 됨의 표본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성격과 본질에 있어서 하나이다. 그 사실은 예수님이 지상에서 행하신 모든 행적과 가르치심에서 증명되었다.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결합, 이보다 더 큰 은혜는 없을 것이다. 그 결합으로 성도들의 하나 됨과 온전함이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성도들도 진정 하나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신 것이다.(21절“ . . . . ”)

하나님과 예수님의 하나 되심은 성도들의 하나 됨과 그리고 예수님과 성도들이 하나 되는 모형이다.(23절“ . . . . . ”)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이듯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하나이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을 배반하여 세상에 속한 자가 되었으며 하늘의 영광과는 멀어져 있었으나 예수님으로 인하여 다시 하나님과 연결되는 은혜를 입었다. 즉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룬 성도들은 이제 옛 하늘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는 자리에 들게 된 것이다.

 

2. 그 영광을 되찾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능하게 된 것이다.(24절“.......”)

하나님의 사랑 없이 성도의 영광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하늘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3.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 될 때 가능해 진다.(25-26절“ . . . . ”)

우리는 본래 죄인이었기에 하나님과 분리된 자들이었으나 예수님 안에 있음으로 다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란 예수님을 하나님의아들로 믿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부인하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죄악과 대적하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하늘의 영광이 예비 되어 있다. 이 축복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또한 성도들은 자신의 몸을 희생하신 예수님의 은총 가운데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길이요, 하늘 영광에 이르는 길인 것이다.

 

 

 

 

 

 

 

<요18:1-9>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동산으로 가셨는데 유다가 군대와 무리들을 데리고 그곳으로 예후님을 잡으러 왔다. 예순ㅁ은 자신이 그들이 찾는 자임을 분명히 밝히시고 동시에 그들에게 제자들은 손대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본문에서부터 예수님의 수난이 시작된다. 공관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겟세마네를 ‘기드론 시내 저편’(1절)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이 당하신 겟세마네의 수난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본격적인 길목이다. 오늘도 신앙의 행로에 어두운 난관을 만나서 괴로워 하는 성도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성도가 당하는 고난 역시도 영광에 이르는 행로인 것이다.

 

1. 영광에 이르는 행로

1)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가야함.(1절“ . . . . ”)

역사가들에 의하면 예수님당시 유월절에는 속죄양들만 보통 20-30만 마리가 성전 제단에 바쳐졌다고 한다. 그러니 성전 제단 뜰은 온통 속죄양의 피로 흥건히 젖어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제단에서 기드론 시내까지 하수구를 만들어 그 피를 처리했다고 한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건넌 ‘기드론 시내’는 양들의 흘린 피로 넘쳤을 것이다. 인생들이 하나님의 나라로 가기 위해서 건너야 할 강이 있는데 그 강의 이름은 바로 ‘예수님의 보혈의 강’이다. 그 강물에서 영혼을 목욕시켜 죄 사함을 얻어야 하며 그 강물을 건너 하나님의 나라 언덕 저편에 이르기 위해서는 세상 탐심을 벗어 던지고 대신에 하나님의 ‘언약의 법궤’를 짊어져야 하는 절대적 결단이 필요한 것이다.

 

빌1:29-30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고 했다.

본문에 “제자들과 함께”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 이유는 제자들은, 성도들은 주님으로부터 위로와 평안의 말씀만 듣는 존재가 아니라 능욕과 고난의 길도 함께 동참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2) 성도들이 영광에 이르기 우l해서는 겟세마네로 들어가야 한다.

겟세마네 동산은 ‘성화’의장소이다. 주님께서 인성을 이기시고 신성으로 삶의 결단과 소원을 삼으신 장소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처럼 그 동산 깊은 곳까지 들어가서 주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높은 이상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벧후1:10-11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3) 성도들이 영광에 이르기 우l해서는 골고다 언덕 위까지 가야한다.

기드론 시내 저편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은 골고다 해골 언덕으로 가는 길의 입구이다. 거기서 멈추면 곤란하다. s온전히 예루살렘성을 벗어나야 한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나의 행복과 공로와 목숨까지라도 분토처럼 버릴 수 있는 자리까지 도달해야 한다.

히13:12-13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서 성도들이 세상 성문에서 안주하려할 때 갈등과 회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모든 것들을 영문 밖에서 불사르자.

<요18:10-11>

 

본문은 베드로가 검을 빼어 말고라는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쳐서 상처를 입힌 내용이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그와 같은 행동을 만류하시고, 자신이 마셔야 할 잔을 마셔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력을 인정하시지 않으신다.

다른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을 잡으려고 오대사장의 무리들을 검과 몽치를 들고 온 것을 볼 수 있다.(막14:48) 또한 예수님과 함께 있던 베드로 역시도 칼을 소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겟세마네를 향하여 가시는 예수님의 안부가 불안해서 제자된 도리로서 예수님을 보호해 드리려는 마음으로 준비했을지 모른다. 아무튼 그 다이의 상황은 무기에 의한 대립 상태까지 가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불같은 베드로의 성격은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치게 되는 성급한 행동을 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계신다.

마26:52 에는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고 하셨다. 오늘날의 상황을 보더라도 세계 각국은 군사력으로 대결을 하고 있다. 강대국과 약소긍의 차이가 무기에 의한 군사력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검이나 몽치 따위의 무기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시33:16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커도 스스로 구하지 못하는도다 고 하셨고, 고후10:4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2. 본문 말씀의 귀결점은 바로 예수님께서 마셔야 할 ‘잔’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잔에 담긴 수난과 고통, 그리고 죽음을 이미 알고 계신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 모든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인간의 몸으로서 그 괴로움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고 겟세마네에서 자신을 비우는 결단의 시간이 필요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결단은 세상에서의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지를 확인시켜 주였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무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오직 ‘자기희생’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바로 예수님의 잔이 자기희생인 것이다.

예수님이 마셔야 할 잔인 십자가의 수난과 고통, 죽으심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문제를 해결하는 문인 것이다.

 

3. 성도들이 마셔야 할 잔.

하나님에 의해 예수님께 잔이 주어졌듯이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도 주어진 잔이 있다. 그 잔은 개인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그러하셨듯이 남을 위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신 잔을 인식하시고 그 잔을 마시기까지 그 결단은 매우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어진 잔 역시 결코 수월하고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잔을 기꺼이 마셨던 것 처럼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도 그러한 결단은 요구된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우리를 번민과 고통 속에만 두시지 않으시고 예기치 못했던 영광스러운 일들로 갚아주실 줄로 믿습니다.

 

 

 

<요18:12-18>

 

가롯 유다와 그의 패거리들은 예수님을 체포하여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에게로 끌고 갈 때 베드로와 한 제자가 끌려가는 예수님의 뒤를 따라 대제사장의집 뜰까지 좇아간다. 그곳에서 수제자인 베드로는 안타깝게도 예수님을 첫 번째로 부인하고 만다. 예수님은 제자가 제자이면서도 제자가 아니라고 부인하는 수난부터 당하신 것이다.

 

1. 예수님이 수난을 당하신 이유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시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은 원수들의 하속들에 의에서 결박을 당하셨다. 잠5:22 악인은 자기의 악에 걸리며 그 죄의 줄에 매이나니 라고 했는데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악의 사슬에서 자유케 하시려고 대신 죄를 뒤집어쓰시고 묵묵히 결박당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결박당하심으로 우리는 자유롭게 되었으며 예수님이 갇히심으로 우리는 죄에서 석방된 것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는 인생 본래적으로 누릴 수 있는 자유라고 착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 다고 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과 수난의 열매로써 우리가 참다운 자유와 평화를 누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2.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구약성경의 예언을 성취하셨다.

예수님께서 수난을 당하시고 대속의 죽음을 죽으셔야 하는 사실은 미리 구약을 통해서 수차 예언된 바 있었다. 예수님께서 갖은 수난을 다 겪으신 것은 바로 구약의 모든 예언을 성취하는 데 그 이유가 있었다. 그는 죄가 없으시나 우리를 대신해서 죄를 담당하시고 죄인처럼 온갖 고초를 감당하셨던 것이다. 사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고난을 참으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예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셨던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서, 또한 하나님이 신실하신 분이심을 세상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어떤 고난도 감수할 줄 아는 신앙인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3.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용기가 부족하였고, 원수들과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베드로가 문 밖에 섰는지라”고 하였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끌려가실 때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다. 비록 처음에는 베드로도 다른 제자들과 함께 도망쳤으나 자신이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주님을 놓치지 않으리라고 했던 약속을 상기하고서는 마음을 고쳐먹고 조금 떨어져서 예수님을 따라가기는 하였으나 예수님 곁에까지는 가지 못하고 문 밖에 서 있다가 결국 실패의 자리로 떨어져 버리고 만 것이다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참된 신앙은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또 하나 실패의 이유 - 원수들과 어울렸기 때문.

 

 

 

 

<요18:19-24>

 

본문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히신 예수님에 대해 대제사장이 심문하는 내용이다. 대제사장의질문에 예수님은 자신이 항상 공개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가르쳤으므로 그들에게 물어보라고 답변하신다.

 

1. 예수님은 질문하는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그의 불의함을 지적하셨다.(:19“........”)

안나스의 질문은 유대 산헤드린 공의회와 관계된 첫 질문이라는 의미가 있다. 즉 안나스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성격과 주님의 사상을 심문하여 이단적인 구실을 찾아내어 새벽에 있을 산헤드린 법정의 재판 자료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대제사장이 이 안나스야말로 ‘재판석’에서 심문받아야 할 ‘불의의 화신’이었다. 그는 로마 정부의 권세 아래서 아부하여 온 유대나라의 정치권과 경제권을 손아귀에 넣은 장본인이었다. 그는 자신뿐만 아니라 네 명이나 되는 아들들도 로마 정부에 막대한 재물을 바쳐 대제사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성전을 이용하여 돈 바꾸는 일과 희생제물을 판매하여 해마다 엄청난 폭리를 취하였다. 그의 악명은 유대 역사책에도 기록되어있고 유명한 탈무드에도 [화있을지어다 안나스의 집이여 그의 자식들은 금고지기 대제사장, 그의 사위들은 성전 창고 관리인, 그리고 그의 종들은 몽둥이로 백성들을 때린다]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런 안나스의 잘못을 지적하신 예수님을 가만 놔 둘리 없었으며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계획은 모두다 이 안나스가 조종했던 것이다. 오늘날도 자기 자신의 죄악을 지적당하는 일에는 무관심하고 두둔하는가 하면 남의잘못만을 찾아 헤치기 위해 민감한 제 2의 안나스들이 이 세상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남의 잘못을 판단하여 재판할만한 자격이 없는 존재들이다. 먼저 내 자신 안에 있는 들보가 들어있지 않는지 냉정하게 질문해 봐야한다.

 

2. 예수님은 그의 불법을 책망하셨다.(21절“ . . . . ”)

유대의 재판법에는 항상 두 사람 이상의 일치된 증언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와 같은 일이 없이 심문하여 얻어낸 죄상은 무효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교묘하게 질문하여 죄상을 만들려는 안나스의 의도를 “증인들에게 물어보라”는 의미로 책망하신 것이다.

우리는 국가의 법을 국민으로서 지키고 순응해야 한다. 그러나 기만하려는 법에 대해서는 예수님처럼 책망하고 선도해야 한다. 진리 밑의 법도 없고, 진리 위에 법도 있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항상 예수님의 이 정신으로 사회를 선도해야 할 소금이요 빛인 것이다.

 

3. 예수님은 법위 남용을 책망하셨다.(23절“. . . . ”)

예수님은 자신을 치는 안나스의 하속들에게 항변하셨다. 오늘날도 이 세상 권세를 이용해서 진리를 탄압하고 법을 악용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성도들은 이러한 세상의 악폐를 맑히고 항변해야 한다. 사랑 없는 의는 사나워지고 의가 없는 사랑은 기회주의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18:25-27>

 

본문에서 우리는 평소에 생각하던 베드로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일면을 보게 된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앙 고백하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것처럼 보인다. 열 두 제자 중에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고, 베드로 자신 또한 예수님을 가장 열심히 따르던 제자가 아니었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런 베드로를 책망하기 전에 우리 자신이 그러한 상황에 처했을 때 과연 어떻게 행동했을까를 생각해 보자.

 

1. 베드로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두려워했다.

(:25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는 주님을 잡아갔던 원수들 사이에 있었다. 그는 비록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따라왔지만 살기가 등등한 원수들 사이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그러한 불안한 마음 상태에서 베드로는 사람들로부터 그를 시험하는 질문을 세 번이나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두려움에 가슴 조이던 베드로의 입에서는 즉각적인 자신을 방어하는 배신의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자부하던 베드로가 이렇게 쉽사리 무너질 줄은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자만한 마음을 꺾으시기 위해 그로 하여금 시험 당하게 하신 것일 수도 있다. 이 사건 후에 베드로의 변화된 모습이 그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지나친 자신감은 교만으로 발전 할 수 있다. [잠16:18]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고 하였고 [고전10:12]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 하였다.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은 [빌3:16]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2.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이유는 그의 믿음이 불완전하였기 때문이다.

(:25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아니라 하니) 예수님을 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러버린 일은 믿음에 의한 행동으로 볼 수 없다. 그런 행동은 베드로의 급한 기질, 열정적인 성격에 의한 것이었다. 쉽게 뜨거워졌다가 쉽게 식어버리는 믿음은 오전한 믿음이 아니다. 순간적인 열정을 믿음으로 착각한 베드로를 원수들이 시험한 것이다. 그의 믿음은 그 시험을 이길 수 없었다. 예수님을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완강히 부인할 정도로 그의 믿음은 보잘 것이 없는 것이었다.

베드로는 적은 믿음을 갖고 스스로 시험을 자청한 것이다. 예수를 잡았다고 승리감에 들떠 있는 원수들의 분위기 속에서 순간적인 열정만을 믿고 뛰어든 베드로가 주눅이 들려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베드로와 같은 상황이 왔을 때 주님을 부인하지 않도록 우리 믿음의 상태를 다시 점검 할 수 있기를 바란다.

 

3. 베드로의 회개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째로 부인했을 때 닭이 울었다.(27절“ . . . ”) 베드로의 귀에 회개의 종소리가 들린 것이다. 이에 베드로는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이었는가를 깨닫고 심히 통곡했다.(마26:75, 막14:72) 이 사건의 그의 커다란 영적 전환점이 되었다. 즉 자기의 자만심을 꺾고 회개함으로 그는 올바른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었다.

 

<요18:28-32>

 

오늘 본문에 예수님 당시의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도 깊은 관련이 있는 두 인물이 등장하는데 곧 가야바와 빌라도이다. 가야바는 당시 유대 종교를 대표하는 대제사장이었고, 빌라도는 로마의 권력을 대표하는 총독이었다. 이 두 대표적인 사람들, 즉 사회적인 지위와 권력이 신앙생황에 미치는 영향을 볼 수 있다.

 

1. 지위와 권력이 그들에게는 걸림돌이 된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종교적으로 볼 때 그들을 구조악에 의한 또 하나의 희생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권력 구조에 의해 최고의 자리에 않았지만 그 권력 구조의 요구에 의해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다. 이렇게 볼 때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대가로 세상의 모든 것을 잃었다.

베드로는 마19:27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 다고 말했다. 재산도 잃고, 형제와 처자도 잃었다. 반명 이 두 사람은 세상에서 거의 모든 것을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출세한 사람들이다. 돈도 있었고, 명예와 권력도 있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그들은 무엇을 잃었는가? 바로 생명 되시는 예수님을 잃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예수가 싫든 좋든, 예수가 객관적으로 옳든 그르든 그들은 예수님을 부인해야 했다. 이런 사실을 놓고 볼 때 성도는 예수님을 위해 세상의 것을 잃는 자들이라고 하는 사실이다.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고백하였다.

빌3:7-9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2. 그들은 극도의 이기주의자들이었다.

이 두 사람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극도의 이기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가야바는 한 사람을 희생시켜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었다면 무죄한 자라도 죽여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합리적이며 유익한 일이라고 권고하던 사람이다.(14절)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전혀 죄를 발견하지 못하였음에도(38절) 자기의 권좌가 위태로울 것을 염려해서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게 한 사람이다.(요9:12) 결국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죄악을 범하게 되는 원인이 이기심을 만족시키려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러므로 욕심, 탐심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예수님의 마음으로 우리를 가득 채워야 한다.

[히13:9]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3. 그들은 예수님을 재판하였음에도 책임을 전가한 자들이었다.

가야바는 유대 종교재판을 담당했고, 빌라도는 로마의 정치적 재판을 담당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을 완벽한 죄인으로 둔갑한 장본인이었다. 그러면서도 가야바와 빌라도는 책임을 전가한 자들이었다. 가야바는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빌라도는 다시 유대인들에게

 

<요18:33-37>

 

오늘 본문의 빌라도와 예수님의 대화 속에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의문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질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질문을 자기 스스로에게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하게 된다. 그러나 명쾌한 답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의 방법으로는 진리를 알 수도, 거기에 도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그 질문의 해답이 너무나 명확하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진리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일컬어 진리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러한 진리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세상에는 진리를 몰라 빌라도처럼 문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다.

 

1.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사고의 기준이 세상 적이기 때문이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는 빌라도의 질문은 예수님의 왕건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무지 몽매한 질문 내용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예수님에게서 어찌하든지 죄목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예수님의 왕권은 가이사의 권력과는 전혀 무관한 영적인 세계의 통치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들은 이러한 사실은 깨닫지 못하고 지극히 세상적인 시각으로 통치권은 이 땅에서만 실현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영혼도 창조하셨기 때문에 영혼까지도 지배하시는 것이다.

또한 진리를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타산적이고 지나칠 정도로 이성적이다. 몇 차례에 걸친 빌라도의 심문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에게서 흠을 잡아내어 죄인취급을 할 의도를 가지고 있다. 빌라도의 질문 역시 자기가 심문하기 유리한 쪽으로 이끌며 예수님을 죄의 올무에 걸려들게 하려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빌라도의 타산적이고 이성적인 질문에 대하여 빌라도가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을 하심으로 결국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빌라도의 질문은 아직도 생명이신 예수님에 대한 질문은 아니었으며 진실로 진리를 알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에서 나온 것도 아니었다.

 

2.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하는 것이 진리에 이르는 첩경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구원 계획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시며 또한 그 구원 계획을 증거 하는 증거자시다. 예수님께서는 심문 받으시는 법정에서까지도 증거의 자세를 보여주고 계신다. 즉 인간의 잘못된 일을 통해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예수님은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 계신다. 거부하실 수도 있고, 묵비권을 행사하실 수도 있으셨으나 예수님은 진리의 증거자로서의 사명을 다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즉 인간의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장차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시다. 비록 우리 육신의 몸이 이 땅에 있어 장차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관심보다는 우선 육신의 삶에 대한 문제를 먼저 챙길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의 문제와 그에 따르는 것들 때문에 장차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된다.

우리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일을 다시 점검하자.

 

<요18:38-40>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목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유월절이면 죄인을 사면해 주는 관례에 따라 예수님을 풀어주기를 바라면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을 풀어주기를 원하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그들은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하였다.

1. 빌라도는 진실을 알았으면서도 그것을 외면해 버리고 말았다.(38절“ . . . . ”)

예수님의 재판과정에서 봉준 빌라도의 성격은 매우 우유부단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는 애당초 예수를 심문하는 것 조차 귀찮게 생각했다.(19:6)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의 문제를 회피하려고 애썼으며, 죄목을 찾지 못한 예수를 유대의 관례에 따라 석방하자고 제의까지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유대인들의 간계에 밀려 그러한 자신의 진실한 판단의 주관성을 지키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마침내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말았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유대인들의 협박에 굴복하고 만 것이다. 그는 로마의 법률에 입각하여 재판을 한 것이 아니라 다만 자신의 총독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판결을 내림으로 그의 이름을 영원히 더럽혔을 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의 명예까지 추락시켰으며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을 통해 항상 저주받을 자로 기억하는 인물이 되고 말았다.

수1: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 라고 하심.

진리는 진리를 아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것을 흔들림 없이 지킬 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진리를 위해 결코 흔들리지 않으셨으며 자신의 목숨은 물론 한 방울의 피와 물까지도 모두 쏟으셨다.

 

2. 유대인들 또한 진실을 거부한 부패한 무리들이었다.(39-40“ . . . . ”)

유대인들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던 것이 불과 5일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대신 강도인 바라바를 석방시키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들이 이렇게 변질되어버리고 만 이유가 무엇일가?

마27:20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자 하게 하였다고 했다. 즉 그들은 신앙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기사와 이적에 의존하였으며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의 선동에 휩쓸리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에 대한 재판은 한 마디로 부패한 유대종교 지도자들과 가시와 이적을 좋아하는 유대 군중들, 그리고 비겁하고 비열한 로마의 정권이 합세함으로 이루어졌다.

 

[골1: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골2: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살후2:15]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

 

 

 

<요19:1-13>

 

본문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한 내용이다. 모든 복음서는 빌라도가 예수님께서 무조임을 알고도 끝내 유대인들의 협박에 굴복함으로써 한 인간으로서의 양심도, 재판관으로서의 정의도, 또한 총독으로서의 통치 원칙도 철저히 외면한 사실을 고발하고 있다.

특별히 요한복음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진리의 수난]이다. 진리의 몸체가 되시는 예수님을 사이에 두고 마구 짓밟고, 조롱하고 악용하며, 도한 외면해 버리는 인본주의의 불신앙적 사조를 역력히 볼 수 있다.

 

1. 진리 되신 예수님께서도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고난과 수치를 당하심을 볼 수 있다.

본문에서도 빌라도의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지만 빌라도는 될 수 있으면 예수님을 십자가 형벌에 넘기는 것을 막고 대신에 혹독한 매질로 대신하려고 하였다. 로마의 태형은 너무나 끔찍해서 그 쇠 채찍질 중에도 죽는 이들이 허다하다고 한다. 그 태형의 목적은 죄수에게 육체적인 고통과 더불어 그 찢긴 몸에 평생토록 흉한 자극이 남아 수치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사도 바울은 그런 형벌을 다섯 번이나 당했기 때문에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다”(갈6:17)고 하였는지도 모른다.

로마의 병사들은 예수님의 머리에 왕관 대신에 가시면류관을 씌웠다. 그런데 보세요, 예수님은 그 때부터 실질적으로 만왕의 왕이 되신 것이다. 그렇게 대단하여 세상을 호령하던 로마의 창과 칼도, 호화스럽기만 하던 빌라도의 관자도, 대제사장 안나스의 아름다운 뜰도 ‘한여름 밤의 꿈’으로 끝나버리고 말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 왕관은 오늘도 영원하기만 하다. 아무리 그럴싸한 세상의 불의한 유혹은 감미롭기 그지없지만 그것은 찰나적일 수 밖에 없다.

[잠10:25]회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니라 하였고

[시125:1-2]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시온 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고 하였다. 진리를 따라 사는 우리 성도의 삶이 비록 고통스러울 때도 있지만 그러나 세상도 가고,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거하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본문에서 우리는 진리가 악용당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처참하게 만든 후 그 모습을 유대 군중들에게 보이면서 (4절)‘보라 이 사람이로다’라고 했다. 이 말은 두 가지의 의도가 있음을 유추할 수 있는데, 하나는 [보라 이 삼류 인생들아 너희들 왕의 모습이다.]라고 말하면서 빌라도가 자기는 위대한 로마 사람이라고 하는 민족적 우월감이고, 다른 하나는 [보라 이 나약한 인간을 너희가 죽일 필요가 있느냐?]라는 동정을 이끌어 내기 위한 술수라고 생각할 수 있다. 훌륭한 정치가는 종교를 선용한다. 그러나 악한 정치꾼들은 종교를 악용내지는 남용한다. 타락해 버린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일말의 동정은커녕 ‘십자가에 못 박게 하라’(6절)고 광란을 일으킨다.

우리는 진리와 교회를 혹시라도 개인의 영달과 야욕을 위해 악용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요19:14-16>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불법이 성행하는 불의한 재판 광경을 볼 수 있다. 이 재판은 역사상가장 불의한 재판인 동시에, 불의 앞에서 정의를 외치지 못하는 비겁한 배신자들과 불법을 행하는, 그리하여 자신들의 유익만을 구하는 고위층의 부정부패를 실감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정의라고는 찾아 볼 수도 없는 심판대 위에서 홀로 서 계신 고독한 예수님의 모습도 볼 수 있다.

 

1. 불의의 세력은 시간이 갈수록 확산되어진다.

선과 정의는 지극히 작은 것에서 시작하나 불의는 그 규모가 대단히 큰 것을 우리의 일상생활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불의는 또한 누룩과 같이 금방 넓게 퍼진다. 그것은 불의한 세력은 계획적이고 조직적이기 때문이다. 선이나 정의를 실천하는 것은 마음의 양심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자연스런 행위이다. 그러나 불의나 불법은 미리 치밀한 계획과 의도를 가지고 행해진다. 대제사장들의 무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기로 한 것은 이미 예수님 공생애 초기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로마의 정치세력과 결탁하여 서로의 유익을 위하여 조작된 계획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불의나 불법은 사전에 치밀하고도 의도적으로 계획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빌라도가 법정에서 선언한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본문 14-15절에서는 “.....”라고 했으나 막15:14-15)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고 했다. 즉 국가를 모독하는 죄를 지었거나, 하나님을 모독한 죄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예수님이시지만 부당한 판결을 받게 되신 것이다.

불의한 세력이 확산되는 이유는 그들은 민중을 선동하기 때문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예수님의 뒤를 따르며 복음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이적을 보며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로 인정했던 군중들이 하루아침에 태도가 돌변하여 오히려 예수님을 죄인 취급을 한다. 이것은 바로 불의를 행하는 자들의 세력이 민중의 힘을 역이용하였기 때문이다. 무력 앞에 무력으로 대항하지 못하는 확대 선전함으로 민중들이 이전에 가졌던 예수님에 대한 호감을 흐리게 하요 급기야는 민중들의 입에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소리치며 자신들의 왕은 가이사뿐이라고 시인하도록 유도한다. 불의와 불법은 이렇게 민중들을 선동시켜 판단력을 흐리게 하고 어리석게 하여 군중심리에 의하여 자신의 냉철한 의지와 이성과는 정반대의 행동을 하게 하는 것이다.

 

2. 성도들은 불의에 대하여 올바른 증인들이 되어야 한다.

바른 것을 보고 들을 줄 알아야 하며 바른 것을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요19:17-22>

 

본문의 말씀에는 어리석은 무리들에 의해 십자가의 굴욕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나 있다. 사실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석방하려고 했다. 그런데 어리석은 유대인들은 그들의 왕을 처형하기로 한 것이다.

 

1. 예수님은 자기 백성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대제사장들에 의해 조종된 많은 군중들의 외침은 예후님을 석방하려고 하는 빌라도의 의지를 꺾고 오히려 그들이 직접 처형하도록 내어주게끔 하였다.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시며 복음을 전파하실 때 뒤를 따르던 그 많은 무리들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이제는 온통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원수들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죽이려는 무리들에게 기꺼이 몸을 내어주시는 예수님은 사랑 그 자체인 것이다.

 

1)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까지 가셨다.(17절)

무거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조악을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지신 것은 그의 사명이었다. 이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는 그의 몸을 내리누르는 무거운 십자가의 고통을 묵묵히 형장까지 지고 가셨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악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십자가의 사명을 회피하지 않으시고 고통스럽고 수치스런 그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십자가만이라도 지고 주님의 두를 따라야 한다. 우리에게 부여된 십자가의 사명은 우리 자신이 홀로 끝까지 감당해야 한다.

 

2.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가 달렸다. (19절)

빌라도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그렇게 쓰게 한 것은 그가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역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 패에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뜻이 나타나 있다. 즉 예수님께서 진정한 우대인의 왕임을 그 패에새겨 두려 하신 것이다. 빌라도가 의도한 바와는 정반대로 그 명패에는 예수님이 모든 민족의 왕임을 알리는 증거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잠16:4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는 말씀과 같이 롬8: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 신 것이다.

 

3. 대제사장들은 그 명패로 인하여 망신을 당했다.(22-23절“ . . . . ”)

악의에 가득 찬 대제사장들의 요구는 빌라도에 의해 무참히 묵살되고 말았다. 자기들의 부당함을 합리화하려는 그들의 완악한 요구를 하나님은 허락하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의 이름까지 못박으려는 그들의 요구는 오히려 그들에게 모욕과 망신으로 되돌아 왔다. 우선으로 가장한 악한 의도는 결국 자신들에게 수치스러운 대가로 돌아온 것이다.

 

* 좋은 것을 심자. 악한 의도를 갖지 않도록 하자.

 

 

<요19:23-27>

 

본문은 군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후에 주님의 옷을 나누는 일과, 그 와중에서도 마지막까지 따라온 여인들 틈에 있는 어머니 마리아의 여생을 사도 요한에게 부탁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 예수님을 못박은 무리들은 예수님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 하는 무리들이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시는 분이 누구이며 왜 달리셔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알 필요도 없었고 그저 자신들에게는 귀찮은 일거리로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자신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누어가지려고 하는 그 일이 성경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이루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무관심했으며 그저 자신들은 예수님 보다는 예수님의 옷에만 관심을 두었다. 즉 십자가의 의미보다는 십자가를 목에 걸 장식물로서의 이용 가치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들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진리를 알고 그것을 위하는 것 보다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십자가와 우리가 따라야 할 진리에는 무관심하고 무지와 편견으로 대할 때 하나님의 마음을 훨씬 더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군졸들은 그들의 탐심 때문에 예수님의 옷을 나누었다. 오늘날도 인간들의 탐심 때문에 주님의 교호가 사분오열되고 있다. 이것은 주님의 영광을 훼손하고 성도들의 마음을 분열시키며, 교회의 권세와 능력을 격하시키는 행위인 것이다. 딤전6: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고 하였다. 우리의 모든 관심은 오직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주신 진리에만 관심을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진리와 경건을 자기 이익의 도구로 삼는 일은 결단코 우리가 버려야 한다.

 

2. 반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랑하는 이들은 겸허한 사람들이요, 받은 은혜를 절대적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다.

적어도 네 명의 여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까지 동행하였다. 그중에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25절)라고 기록된 여인인데 그 여인은 마리아의 친지이며, 바로 사도 요한과 야고보의 모친이었다. 이모라고 표현한 것은 사도 요한이 겸손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아무튼 살로메라는 그 여인은 전에 예수님께 세속적인 일로 부탁하러 왔다가 무안을 당한적이 있었다.(마20:20-28)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깨닫고, 예수님의 견책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현장까지 동행한 것이다.

여인들의 감정이 상하면 외면해 버리는데 그 여인은 그렇지 않았다. 주님과 십자가를 진정으로 사랑햇기 때문이다.

 

 

 

 

 

 

<요19:28-30>

 

본문은 예수님의 장렬한 최후의 모습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극한 고통 속에서 갈증을 호소하시고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고 했다.

 

1.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극한 갈증을 호소하셨다. (28절)

예수님께서는 전날 밤, 유월절 만찬 이후에 아무것도 잡수신 것이 없으셨다. 더욱이 도저히 참기 어려운 갈증이 십자가 사형의 특징이라고 한다. 손과 발에 쇠못을 박을 때에도 고통을 호소하시지 않으시던 예수님께서 목마름을 호소하신 것을 보면 그 갈증이 얼마나 심한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물을 가지고 포도주를 만드시고, 예수님 스스로가 생수의 근원이라고 하신 주님께서 갈증을 호소하신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온 인류의 구속사역의 여정을 골고다까지 달려오심으로써 느끼시는 인가 예수로서의 갈증으로 이해할 수가 있고, 또한 그것은 우리에게 역설적인 의미를 제시해 주고 있다. 즉 주님이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고(벧전2:24), 주님이 십자가에서 버림을 당하심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용납하심을 받고, 주님이 갈증을 느끼심으로써 우리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수를 얻게 된 것이다.

 

2.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셨다.

즉 선지자 직을 완성하셨다. 예수님은 말씀을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지혜와, 그리고 기사와 이적을 통하여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인간들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제사장직을 완성하셨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것은 죄인인 인간과 하나님과의 대속사역을 의미하는 것이다. 히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라고 했는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로 드리심으로써 인류의 죄를 속하시고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루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은 왕으로서의 사명을 완성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왕으로 세상에 오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요18:36) 예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것을 다스리시며 통제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영계와 자연계를 완전히 장악하시고 제어하시는 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죄악과 죽음과 사탄을 정복하셨다.

“다 이루었다”고 하신 예수님의 외치심은 온 인류의 승리의 개가요, 하나님의 승리이신 것이다.

 

 

 

 

 

 

 

<요19:31-37>

 

분문은 요한복음서에만 기록된 내용으로서, 예수님의 죽음의 실재성과 진실성에 관한 사도 요한의 세밀한 증거적 성격을 가진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부활신앙에 대해서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큰 논쟁의 대상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진위에 따라 부활의 의미도 달라지지만 더욱이 우리 성도들의 신앙의 가치도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사탄은 온갖 그럴싸한 이야기들을 유대인들과 이단들을 통해 왜곡시켜오고 있다.

 

1. 예수님은 확실하고도 완전하게 죽으셨다.

그 당시부터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혹시 너무나 고통스러워 혼절하신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서 정신을 차려서 다시 나오신 것을 제자들이 부활로 신화화 한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기절설’이다. 그러나 요한은 유월절과 안식일이 겹친 ‘큰 날’(31절)이 바로 시작되려 했기 때문에 ①유대인들의 요청으로 인해 관례를 깨고 로마 병정들은 검시관의 입회하에 십자가의 죄인들을 다시 한 번 다리를 꺾어 확실히 죽였다고 증언하고 있다.(다리를 꺾어 라는 뜻은 큰 망치로 숨이 끊어질 때까지 다리를 분쇄해 버린다는 뜻이다.)

그 와중에 검시관은 예수님께서 이미 숨진 것을 확인했다고 했다. 이것이 예수님의 완전한 죽음의 일차적 증거이다.(32~33절“ . . . . ”) 또한 검시관들의 확인도 부족하여 로마의 한 병정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의 심장을 찔러 재차 확인살인을 한 것이다. 이것이 둘 째 증거이다. 그 다음 ‘피와 물이’(34절) 쏟아졌다고 했는데 의학적으로 물이 쏟아지는 현상은 심장이 파열되었다는 증거이며 몸이 이미 시신이 되었다고 하는 증거라고 한다. 이것이 예수님의 완전한 죽음의 셋 째 증거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기절설은 분명한 거짓이며 주님은 당시에 확실하게 절명하신 것이다.

 

2. 예수님의 죽으심은 성경의 예언대로 이루어진 죽으심이었다.(36절“ . . . . . ”)

하나님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은 죽음의 심판에서 구원해 주셨다. 그후에 어린양의 뼈는 꺾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민9:12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 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 예수님은 유월절 명절이 시작되는 때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한 희생양으로 하나님의 제단에 바쳐졌다.

우리는 그 피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다.

 

 

 

 

 

 

 

 

 

 

<요19:38-42> (20060811새벽)

 

본문에는 온갖 고통과 치욕을 다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께서 장사되시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 아리마대 요셉이 있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이면서도 유대인들이 두려워 자신이 신분을 숨기고 살다가 예수님이 죽게 되자 더 이상 나약한 행동을 할 수 없다고 생각을 하고 스스로 빌라도에게 가서 주님의 시체를 냉줄 것을 요구하여 자신의 무덤에 안장을 하였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위해 귀하게 일한 사람들이 있다.

 

1. 아리마대 요셉(:38)

그는 그동안 겉으로 드러내지는 안았으나 매우 성실한 제자였으며 예수님의 제자 중에 제력까지 지닌 제자였다. 12제자 중에 아무도 예수님을 장사지내려는 일을 추진할 용기가 없었으나 요셉은 대담하게도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인도해 다라고 요구할 정도로 용기가 있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가 갖고 있는 물질을 예수님을 위해 봉사한다는데 큰 기쁨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의 재물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곳에 쓰이는 귀한 것이었다.

 

2. 니고데모(:39)

니고데모 역시 아리마대 요셉과 같이 예수님의 숨은 제자였다. 그 또한 역시 재력이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비싼 향품으로 주님을 위해 봉사할 수 있었다. 그 향품은 시신의 부패를 방지해주는 방부제와 같은 역할을 해주는 것이었다. 물론 그에게는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고 한다면 향품을 바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이 대단하였다. 그래서 아무도 돌보지 않는 예수님의 몸을 자청하여 장사지내려고 한 용기와 성의가 대단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한 가지 부족한 것들이 없지 않다. 그러나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와 같이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참된 믿음의 용기를 가진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3. 서둘러 장례를 치렀다.(42절)

슬픔 가운데서도 안식을, 주일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날 주일을 지키는 것 보다 세상 일에 정신 팔리는 고인들과는 상대적이다.

 

 

 

 

 

 

 

 

 

 

<요20:1-10>

 

본문은 예수님이 묻혀있던 빈무덤에 대한 기록이다. 비어있는 무덤, 그리고 그 상황 속에 나타나 있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많은 함축적인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1. 예수님의 부활과 교회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요20:1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 간 것을 보았다고 했다. 막달라 마리아와 몇몇 여인들은 어서 날이 밝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이 되자 여자들은 서둘러 주님의 무덤을 찾아 갔다. 그러나 거기에 시체로 누워계셔야 할 예수님께서는 계시지 않았다. 이 비어있는 무덤의 의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것은 인류 역사상 이때까지 단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는 초유의 사건, 즉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이날을 기점으로 하여 인간의 의미가 달라졌으며, 생명의 개념이 달라졌으며 삶의 길이 달라졌다. 구약의 율법과 예언은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안에서 완성되고, 구약의 안식일은 주님의 날로 흡수되게 된 것이다. 이날은 신약의 교회가 예배드리는 거룩한 날로 정해진 날이며 기독교 선교와 찬양의 원동력이 창조된 날이다.

2절에 “ . . . . . ”라고 했는데 무덤이 비어있는 사실을 발견한 막달라 마리아와 그 밖의 여인들은 이 놀라운 사실을 베드로에게 말하러 간 사이에 다른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하여 천사를 발견했으며(마28:5, 막16:5) 이윽고 베드로와 요한이 도착했고(3, 6절) 막달라 마리아가 다시 도착했는데 그 때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15-16절) 이들은 모두 부활의 새벽에 빈 무덤을 목격한 증인들이다. 이 빈 무덤의 증인들이야 말로 새로운 신약 교회의 초석들이 되었으며 부활의 증인들이 된 것이다.

 

2.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뵌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과 새로운 관계가 되었다.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과 시신을 쌌던 세마포가 놓인 것을 보고 그 때야 다른 제자들도 믿더라고 했다. 그런데 그 때까지만 해도 제자들은 거기서 예수님은 보지 못하고 그저 빈 무덤과 세마포만 보았다. 예수님께서 육체로 계실 때에 제자들과 주님과의 관계는 그저 보는 관계였다. 육신의 눈으로 보고 같이 식사하고, 같이 전도하고, 같이 기도하고 함께 잠을 자는 관계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로는 믿음의 관계로 변화가 된 것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자유의 몸이 되셨기 때문에 나타나셨다가 사라지시고, 곁에 계시다가도 없어져 버리시는 그런 분이셨다. 이제 그분과의 간계는 오직 믿음의 관계가 아니고서는 교제가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교회- 빈무덤(부활) 우에 세워진 교회, 믿음의 공동체

 

 

 

 

 

 

 

<요20:11-18>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어려차례 나타나셨다. 그 첫 번째가 본문에 나오는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찾아온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고 그 후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으며 그리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그리고 손에 못자국과 옆구리에 창자국을 확인하지 못하면 믿지 못하겠다고 한 도마에게 나타나셨으며 그리고 갈릴리로 돌아가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1. 마리아가 탄식하며 슬피 울고 있는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을 알지 못하였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13-14절“ . . . . . ”)

마리아도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온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요한은 그들의 그러한 상태를 이렇게 표현했다.(9절“......”)

:- 부활신앙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따라서 빈껍데기뿐인 공허한 믿음이다.

또한 부활에 대한 사실에 무지했으므로 설마 저분이 예수님일까? 하고 믿지를 못했다.

신앙의 무지는 이렇게 진리를 분별하지를 못하게 한다. 그래서 마리아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물었다. *15절“ . . . . . ”

부활하신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잘못 아는 이런 무지의 신앙은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2.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런 마리아와 다른 제자들을 위로해 주셨다.(16-17절“ . . . . ”)

주님의 부활을 알지 못하여 울고 서 있는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이름을 불러 주셨다. 동산지기인 줄로 오해하고 있는 무지한 마리아에게 주님은 그녀가 그렇게도 찾고 있는 예수님이신 것을 깨닫게 해 주셨다.

주님은 우리가 불신앙으로 인해 비몽사몽간에 헤멜 때, 우리가 무지의 늪에서 좌절할 때 주님은 고요히 다가오셔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깨닫게 해 주신다.

 

 

 

 

 

 

 

 

 

 

 

 

 

 

 

 

<요20:19-23>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몸으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부활을 증명하시고 그들에게 귀한 전도의 사명을 주심에 대한 기록이다.

 

1.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려움가운데 있는 제자들에게 오셨다.(19절“ . . . ”)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붙잡혀 가실 때부터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자기들도 스승처럼 끌려가 처형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 떨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면 그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었을 텐데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기 전까지 세상적인 두려움에서 사로잡혀 있었다. 얼마나 두렵고 공포에 떨었을까? 그들은 예수님과 3년을 함께 동고동락 하였으면서도 정작 자신들이 가졌어야 할 부활신앙을 소유하지 못한 것이 두려움과 공포에 떨게 된 원인이었다.

엡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두려움과 공포의 원인은 부활신앙을 가지지 못한 것 때문이었고, 신앙은 시간이 저절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요, 사람의 힘쓰고 애써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로 얻어지는 것이다.

 

2. 두려움의 문제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찾아오심으로 해결해 주셨다.(21절“ . . . . ”)

:19“가라사대 너희에게 평상이 있을지어다”, :21“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은 두려움에 심히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가장 적절한 위로와 축복의 말씀이었다.

세상의 근심과 두려움에 싸여있는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평강임을 예수님은 가장 잘 알고 계셨다.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실 때 제자들은 무정하게 주님을 버렸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찾아오셔서 평강의 말씀으로 위로해 주시고 확신을 주신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고 있었으므로 그들 가운데 나타나신 예수님을 보고 아마 귀신이 나닐까? 하고 당황했을 것이다. 이런 제자들의 마음을 꿰뚫어보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부활의 증거를 보여주셨다. 손과 옆구리에 남아있는 못자국과 창자국을 부여주심으로써 제자들을 안심시키셨다. 바로 얼마 전에 예수님의 스승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장면을 목격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몸에서 못자국과 창자국을 확인하고서야 두려움과 공포심은 사라지고 기쁨이 충만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미리부터 믿고 주님 부활에 참여했었더라면 더욱 더 기쁨과 감격이 충만했을 것이다. 인간의 두려움과 공포의 문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해결해 주시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주님은 제자들에게 선교의 사명을 주셨다.(:20~21“ . . . . ”)

이 세상에서의 예수님의 복음 사역은 끝이 나고 이제 제자들에게 그 사명을 위임하신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것을 직접 목격한 증인들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목격한 그 사실을 온 세상에 전파할 사명이 그들에게 부여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복음 전도자로 임명하셨다. 확신을 가지고 온 세상에 선포해야 한다. 그냥 보내시지 않으시고 성령님의 능력을 주셨다. 복음 전파자가 지녀야 할 필수 조건이다. 세상 고난을 허약한 육체만으로는 불가능하고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을 때 능히 감당할 수 있다.

<요20:24-29>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못 믿는 제자 한 명이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도마였다. 제자들이 모인 방 한가운데 나타나셨을 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본문을 근거로 하여 사람들은 흔히 도마를 ‘의심 많은 제자’라고 부른다. 도마의 의심에 대해서 예수님이 직접적인 책망이나 예수님 부활에 대해서 도마의 부인 등으로 볼 때 도마는 분명 의심 많은 제자였다. 그러나 그 의심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그의 평가도 새로워질 것이다.

 

1. 자기가 믿는 바를 확인하는 신앙인이었다.

본문을 살펴보면 도마는 어느모로 보나 의심이 많은 제자인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또한 다른 성경 말씀에 보면 하루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천국에 올라가실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요14:4)고 하셨다. 주님의 그 말씀에 그동안 가르치심을 받은 제자들이라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이었다. 그런데도 도마는 예수님께 되물었다.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니이까?

한 마디로 도마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고, 모르는 것에 너무나 솔직한 사람이었다. 이것이 도마가 다른 제자들과는 다른 점이었다. 도마는 보다 구체적으로 알아야 했고, 정확히 알기를 원하는 제자였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 하는 사람이었다. 검증에 검증을 통하여 그는 자기의 믿는 바를 확증했던 것이다. 이것이 도마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긍정적인 면이다. 믿음은 히11:1의 말씀처럼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지만 그렇다고 맹목적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도마와 같이 긍정적인 의심, 즉 부정하기 위한 의심이 아니라 거리끼는 것을 없애기 위한 의심을 가져야 한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도마가 까다롭게 질문하고 의심했을 때 우리 예수님은 확증해 주시고, 답변해 주셨다는 것이다.

 

2. 도마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제자였다.

도마가 예수님을 사랑했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말씀이 있다. 요11:16에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고 했다. 당시 유대인들과 오랜 논쟁이 끝났을 때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10:39)그 때 예수님께서는 요단강 저편으로 피하셨는데 마침 유대에 갈고 있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이 들여왔다.(11:3) 갈 수도 없고, 안 갈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가시기로 결정을 하셨다. 모든 제자들이 다 말렸지만 예수님은 가시겠다고 재천명을 하셨다. 바로 그때 도마의 선언이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라면 죽음의 자리라도 사양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도마의 의지를 찾아볼 수 있다. 주음과 고난의 잔 앞에서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버리더라도 자신만은 예수님을 버리지 않고 연약한 신앙의 다른 제자들에게 격려하고 신앙의 분발을 촉구하는 도마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도마의 훌륭한 점이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끝까지 동행하는 신앙. 다른 사람의 불신앙적인 언행에 대해서 부화뇌동하지 않고 오히려 믿음의 분발을 촉구하는 성도, 그래서 개인의 신앙과 공동체의 신앙을 굳건하게 할 줄 아는 좋은 성도가 되자. 또한 도마는 예수님의 일에 방관하는 자가 아니라 철저하게 동참하는 제자였다.

<요20:30-31>

 

본문의 두 절의 내용이야말로 요한복음 전체의 결론이라고 해도 아무런 이의가 없을 것이다. 즉 요한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이 믿고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의 서두에 로고스, 즉 ‘말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생각이 인간의 삶 속에 나타났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사상은 바로 요한복음서의 기록 목적인 동시에 모든 성경 말씀이 쓰여진 목적이기도 하다.

 

1. 성경은 생생한 역사의 실재 기록이다.

모든 성경은 그 당시 역사 속에서 현실을 체험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과 사상의 기록이다. 이러한 사실은 여러 사본들과 고대 근동의 문헌 등을 통해서도 밝혀진 사실이다. 본문에서도 본서를 기록한 사도 요한 자신이 기술한 말씀이 역사적인 사실임을 밝히고 있다.(30절) 바로 이 말씀은 결국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는 예수님의 행적과 이적들이 성경에 기록된 내용 말고 더 많다는 사실과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 줄 수 있는 증인들, 즉 제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만일 요한복음이 사도 요한에 의해 지어낸 이야기였다면 오늘날까지 살아 움직이는, 생명력이 있는 말씀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성경말씀은 실재적인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한 기록이기 때문에 운동력이 있는 것이고 사람의 심령과 골수를 쪼개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말씀은 역사적 체험에 의한 영적인 기록이다. 이 말씀에는 그 역사 속에 실재로 살았던 인물들의 목격담과 체험담이 또한 기록이 되어있다. 예수님의 성육신의 진리가 만일 체험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잘 이해가 되지 않았거나 성경으로 수용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이 말한 대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사실을 목격한 증인들에 의해 그 진실성이 지켜지고 전해진 것이다.

 

2. 말씀을 기록한 목적.

신앙의 확신을 주시기 위해서이다. 31절 말씀을 보면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 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말씀을 역으로 생각해 보면 당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았던 무리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바로 유대교 지도자들과 그 세력에 동조한 자들을 말한다. 요한은 바로 그러한 사람들에게 까지도 예수님에 대한 확신, 즉 부활하신 주님을 전파하기 위해 기록한 것이다.

 

3.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요21:1-14>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간을 숙식을 함께하면서 지내왔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자 뿔뿔이 흩어져서 다들 제 갈 길로 가버리고 말았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에는 그렇게도 믿음이 좋던 베드로마저도 예수님이 수난을 당하시자 주님을 부인하고 자신의 옛날 본업인 어부로 돌아가 버린 연약하고 부족한 인간들이었다.

 

1. 실의에 찬 제자들은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 버린 것이다.(3절)

십자가의 고난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은 자신이 다시 살아나실 것을 여러 차례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약속을 굳게 믿지 못하였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직접 체험한 제자들이 애 부활의 약속을 굳게 믿지 못하였는지 모르겠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고난’이 이루어 졌으면 ‘부활’또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어야 했음에도 그들은 믿지를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절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자들은 ‘내가 부활 하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할 때는 세상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때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이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어리석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2. 제자들은 t상 관심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다.(4절)

다시 어부로 돌아간 제자들은 열심히 그물을 치고 분주히 생활에 매달린다. 그들의 머리 속에는 예수님의 말씀은 물론 이제는 예수님의 형상까지도 사라져 버렸는지 모른다. 너무나 바쁜 그들의 생활이 그렇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기들 앞에 서 계셨으나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마치 실의에 빠져 엠마오로 돌아가는 두 제자들이 자기들 곁에 함께 가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3년 동안 함께 생활하신 예수님을 그들은 자신들의 세속적인 관심 때문에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공들였던 신앙의 수고가 세상 관심 때문에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3. 그런 제자들은 자신들의 삶의 현장에서 헛수고와 실패, 그리고 좌절만을 경험하게 되었다.(3-5절“ . . .”)

 

4. 그러나 다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에 환경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6절)

 

 

 

 

 

 

 

 

 

<요21:15-17>

 

베드로와 도마,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그 밖의 두 사람의 제자들이 디베랴 바다로 돌아가 고기를 잡고 있었다. 그들은 신앙적인 해이와 불신앙으로 인하여 옛날의 자리로 돌아가 있는 것이다. 바로 그 자리에 부호라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그 유명한 말씀을 하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1. 예수님의 이 물으심은 옛 직업으로부터(자리)의 복귀를 종용하신 것이다.(15절)

그들은 옛날의 자리로 돌아가 밤이 새도록 고기를 잡았으나 잡지 못하였다.(3절) 이 때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6절)고 말씀하시자 그대로 했더니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고기를 잡았다. 눅15:1-11에 보면 이러한 광경이 나오는데 그것은 3년 전에 예수님께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실 때 바로 그러한 경험을 하게 하신 것이다.

분문에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부르실 때 새삼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신다. 주님의 베드로에 대한 이 말씀은 지금 제자인 베드로를 만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옛날의 어부로 돌아가 버린 베드로의 이름을 이렇게 부르심으로써 그의 퇴보한 삶을 일깨우시고 계시는 것이다. 즉 선택받으신 제자에 대한 예수님의 변함없으신 사랑과 연약한 인간성에도 결코 실망하지 않으시고 긍휼을 다시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베드로에게 사명감을 불러일으키신다. “내 어린양을 먹이라”(15절“ . . . . ”)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옛날로 돌아가 있는 베드로로 하여금 자신이 예수님의 사도임을 확인하게 하시고 그로 본래 자리로 돌아올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주님의 강한 손에 한 번 붙잡힌 사람은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요21:18-22>

 

본문은 주님께서 베드로가 노년에 어떻게 순교할 것인지에 대해 예언하신 말씀이다. 또한 여기에는 사도 요한이 감당해야 할 암시적인 예언도 들어있다.

 

1. 사명을 감당하는 자는 사명의 주관자를 신뢰해야 한다.(18절“ . . . . . ”)

이 말씀은 베드로의 앞길의 운명과 그가 당할 고난의 성질과 때와 방법까지 주님께서 이미 알고 계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에게 가장 고통을 주는 요인 중 한 가지는 바로 [앞날에 대한 무지]일 것이다. 그 미래에 대한 무지는 곧 두려움으로 변하고 그 두려움은 인간들로 하여금 오늘만을 탐닉하는 허무주의, 기회주의자가 되게 한다.(고전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32-33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성도들은 미래에 대한 무지로부터 자유 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전지하심을 알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우리에게 난관이 닥치고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결코 낙망하거나 성도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지금 내가 가도 있는 길을 이미 계획하셨고, 또한 앞으로의 길을 이미 예비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연단을 받으면서도 그 입으로 범지하지 않고 인내하는 믿음으로 드디어 예년에 받았던 갑절의 복을 받은 욥은 이렇게 고백하였다.

[욥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주님이 우리의 앞길을 이미 아신다는 사실은 또한 우리의 삶의 속속들이 동참해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은 베드로가 혈기 왕성했던 젊은 시절만 동행해 주신 것이 아니라 늙어서 기진해 있을 때에도 동행해 주실 것을 암시하신 것이다. 베드로가 사도적인 사명감과 생명감이 넘칠 때뿐만 아니라 죽음과 고통 중에도 함께 하실 것을 표명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의 어떤 위치에 있다하여도 ‘나는 실패한 제자’라고 낙망하지 맙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소망으로 사는 그 자체가 바로 훌륭하게 복음 사명을 감당하는 것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2. 그리스도인의 사명의 본질을 유념해야 한다.(19절“ . . . . ”)

여기서 우리는 사도 요한의 신앙과 그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즉 베드로의 삶도, 죽음도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 사도요한의 사명철학이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가 왜 울고, 웃으며, 기뻐하고 고뇌하는가? 우리는 언제 행복을 느끼고 또 불행감에 빠지는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관심이 오직 내 개인적인 삶에만 집중되어있다면 우리는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사명적인 삶의 의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롬14: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그러므로 본문에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주님의 음성만이 우리의 가장 큰 가치관이요, 관심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 이것만이 우리 성도들의 삶의 본질인 줄로 믿습니다.

 

<요21:23-25>

 

본문 말씀은 요한복음을 종결짓는 말씀으로써 두 가지 내용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는 지금까지의 기록이 참된 것이라는 것과 두 번째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칺은 기적과 표적이 많다는 것이다.

 

1. 베드로와 요한의 삶과 죽음을 말씀하고 있다.(23절)

23절에서 ‘그 제자’는 사도 요한을 말하고, ‘내가’는 예수님, 그리고 ‘네게’는 베드로를 가리킨다. 요한복음서 마지막 부분에서 사도 베드로와 사도 요한의 죽음에 대한 문제를 언급한다는 덧은 그 의미가 깊다. 그것은 이 두 사도들이 평소에 예수님께서 가장 사랑하신 제자였다는 것과 앞으로 이들 두 사도가 신약의 교회의 초석이 될 것이라는 암시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가 같은 날에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로나 두 사람은 아주 대조적인 인품을 지닌 사람들이다.

베드로가 단순하고 솔직하여 생각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를 많이 하는 반면에 요한은 초기에 ‘우뢰의 아들’(막3:17)이라고 할 만큼 성질이 과격하였으나 주님으로 받은 감화로 관찰력과 이해력과 사고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베드로가 능력 있는 전도자요 목회자라고 한다면 요한은 심오한 사상가요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서로 대조적인 이 두 사람은 그들의 죽음까지도 달리할 것이라는 것을 본문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각기 하나님이 주신 성격과 재능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간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 나의 성격과 재능을 좋은 면에 최선을 다해 사용할 때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2. 사도 요한은 참된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했다.(24절“ . . . . ”)

사도 요한은 열두 제자 중에서 가장 주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주님의 품에 안길만큼 주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였다.(20절)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참된 증인으로서의 가장 합당한 자격일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하지 아니하면 참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기록한 요한복음과 다른 말씀 속에서 요한은 ‘사랑의 하나님’을 증거 했다. 사도 요한의 메시지 핵심은 ‘사랑’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이해한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한 증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에게 있어서 사랑은 곧 진리였다. 사랑은 말씀이었고 생명이었으며 빛이었다. 요일4: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이것이 사도 요한의 믿음이요 참된 증언의 핵심이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그 사랑을 알았으며 또한 사랑하고, 사랑받고, 자신이 깨달은 하나님의 사랑을 열심히, 그리고 바로 증언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바른 증거자가 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 또한 예수님의 사람을 몸소 체험하고 깨달아야 한다. 그럴 때 예수님의 바른 증거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3, 인간은 예수님을 증언하기에는 한계가 있다.(25절“ . . . . ”)

예수님이 세상에서 행하신 모든 일의 양은 무한대라는 것이다. 우리는 무한대의 사랑과 은총을 받는 사람들이다. 그런 예수님을 짧고도 좁기만 한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뜨거운 가슴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열정적인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