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부활 (본문 : 고린도전서 15:12-19)
영원한 부활 (본문 : 고린도전서 15:12-19)
이 세상에서 제일 싫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일만큼 사람에게 아픔을 주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그 이별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면 그 이별은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날 희망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이별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에 의한 이별입니다. 이별하는 일도 싫은 일이지만 죽음으로 이별하는 일은 정말로 싫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있어야 합니다. 죽음의 사건으로 인해 큰 고통을 겪은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죽음은 꼭 있어야 합니다. 사실 죽음이라는 사실이 없이는 삶이라는 사실도 없기 때문입니다. 천년, 만년 그대로 존재하는 바위를 보십시오. 바위는 죽음이 없기에 삶도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죽음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라도 죽음은 싫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바로 "죽음의 해결"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종교는 참 종교라고 볼 수 없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부활의 종교만이 참 종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가 참 종교이겠습니까?
불교에는 부활이 없습니다. 석가모니는 버섯나물을 먹고 복통이 나서 병들어 죽었습니다. 어느 날 80세의 석가모니가 숲 속에 있는 대장장이 춘다의 집에 갔는데 그가 공양한 버섯나물을 먹고 식중독을 일으켜 죽었습니다. 그리고 석가모니는 두 그루의 사라나무 사이에서 죽으면서 말했습니다. "가죽끈이 끊어지고 수레바퀴가 무너지는도다. 모든 인생들이 가는 길을 나도 이제 마침내 가는구나."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유교에도 부활이 없습니다. 어느 날 제자인 계로가 공자에게 귀신을 섬기는 일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대답했습니다.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 이 말을 들고 계로는 다시 공자에게 물었습니다. "감히 묻겠습니다. 죽음이란 무엇입니까?" 공자가 대답했습니다. "살아 생전의 일도 아직 잘 모르거늘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느냐?" 그리고 공자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위대한 철학에도 부활이 없습니다. 위대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철학에 대해 정의를 내리길 "철학은 죽는 연습이다"라고 말하며 죽음의 문제에 통달한 것처럼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웃집에서 닭 한 마리 꾼 것 갚아달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부활하지 못했습니다.
이슬람교에도 부활이 없습니다.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에 가면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멧의 무덤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기독교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류 최고의 기쁜 소식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던 빈 무덤에서 흘러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죽으면 다시 살지 못한다는 인생의 당연한 계명 속에서도 다시 살 수 있는 희망을 가진 자는 오직 기독교인 뿐인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것은 윤리 도덕을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가듯이 그저 나온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오면서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과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부활이 현재 우리들의 삶을 부활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미래에도 그 부활의 역사가 우리들에게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 영원한 부활의 삶이 우리들의 삶이 되도록 우리들이 교회를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일년 365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성탄절도 부활절의 영광에 비교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탄절은 예수님께서 사단 마귀와 싸우러 오신 날이지만 부활절은 예수님께서 사단 마귀와 싸워 승리의 깃발을 올린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부활절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실만은 꼭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첫째, 과거에 부활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확실히 다시 살아 나셨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났다는 기록은 예수님의 영이 나타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몸을 입은 채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수많은 목격자가 있었고 수많은 기록이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수많은 설교가 있습니다. 여러 상황에서 여러 설교를 예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장례식 설교는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장례식에 가실 때마다 그 장소를 영광스러운 부활의 장소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장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또한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의 장례식에 가서 그 장소를 환희의 장소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는 부활의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현재의 부활을 경험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오늘날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나의 삶에 예수님의 부활의 삶이 역동적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활 사건은 참으로 위대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부활의 사건이 현재의 나의 삶 속에서 역사하지 않으면 그 부활은 죽어버린 것이 됩니다.
어떤 부활을 의심하던 신학자가 마가복음 16장을 읽으면서 "예수스 에겔데헤"라는 말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게 되었다. "예수스 에겔데헤"란 말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말에서 현재의 부활을 체험한 것이다. 낙심과 좌절에 빠진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가 어떻게 다시 기쁨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까? 그들은 현재의 예수님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부활하셨던 예수님을 우리는 현재 만나 우리의 삶에 부활을 일으켜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부활시켜야 합니다. 신앙의 부활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된다면 이것이 신앙의 부활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더라도 형식적으로 교회에 나오던 사람이 예수님께서 오늘 이 시간에 살아 계신 예수님으로 믿어지게 된다면 이것이 신앙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축복된 사실입니까? 믿는다는 사실과 믿지 않는다는 사실은 별 차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엄청난 차이를 나타내게 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네 개의 방향밖에 없습니다. 즉 동서남북뿐입니다. 그래서 일이 전후좌우에서 밀려올 때는 참으로 엄청난 고난에 싸이게 됩니다. 그래서 질그릇처럼 부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그릇과 같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동서남북 이외의 제 5방향을 가지게 됩니다. 그 방향이란 위로 향하는 방향입니다. 능력은 바로 위로부터 내려옵니다.
주의 성령이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는 해변에 좌초한 배와 같습니다. 그리고 마치 멀리 북극해에 동결되어 있는 얼어붙은 배와 같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우리 심장에 깊은 감격으로 부딪치기 전까지 우리는 그저 무능하게 누워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치 얼어붙은 배의 선원처럼 오직 부활의 훈훈한 바람을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부활시킵시다. 교회를 오래 다닌 분도 오늘 이 순간에 부활의 신앙을 다시 한번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때때로 "나는 모태신앙으로 교회에서 자라났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분들 중 많은 분들이 교회에 다니는 교인이지 예수님을 믿는 크리스챤은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비극적인 사실은 그러한 분들이 머리와 가슴의 거리인 약 30센치 차이로 부활의 삶을 이루지 못하는 사실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녀서 머리로 많이 아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현재 나의 삶에 부활의 신앙이 펼쳐지느냐 아니냐 하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부활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생활도 부활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부활하여 우리의 인격이 변화하지 않으면 우리의 생활도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즉 속이 변하지 않으면 겉이 변할 수 없다는 말인 것입니다.
어떤 술주정뱅이가 대단한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처자식을 다 불러모은 뒤 평생 처음 근엄한 얼굴로 말하였습니다. "내가 이때까지는 너희들에게 부끄러운 아버지였다. 그러나 오늘부터는 새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 결심을 보이기 위해 나는 오늘 이 술 먹는 손가락을 자르겠다." 그리고 그는 자기 결심을 보이기 위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기 손가락을 내리쳤습니다.
그 후 그는 몰라보게 달라져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술친구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얼마 안 가서 다시 술꾼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왜 이와 같은 좋은 결심이 오래 가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사람의 근본 마음이 부패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크리스챤들 가운데 좋은 열매를 맺는 데에는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좋은 나무가 되는 데에는 무관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기 이전에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나무가 되고 나면 그 속에서 우러나오는 생명의 진액으로 말미암아 사랑하게 되고 인내하게 되고 절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행위가 변화되기 이전에 본질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부활의 신앙으로 사람이 본질적으로 변화되지 않으면 부활의 생활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신앙으로 우리의 가슴에 불을 붙여야 합니다. 우리의 차가운 가슴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불을 붙여야 합니다. 늙은 신앙이 아니라 청춘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사도행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해 죽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러한 분들의 신앙이 우리들의 가슴속에 용솟음쳐야 합니다. 불이 타고 물이 끓고 홍수가 터지듯 그러한 열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열정 없이 위대한 일이 이루어진 역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심을 부활시켜 보십시오. 목적 없이 살아가던 인생이 부활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가정에 부활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사업에 부활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인간관계에 부활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도 놀라운 부활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셋째, 미래의 부활을 소망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이 있는 곳에 반드시 나중도 있습니다. 알파가 있는 곳에 반드시 오메가가 있습니다. 창조가 있는 곳에 반드시 종말이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 반드시 사망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곧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게 됩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야 할 필연의 사실입니다. 죽음이란 말을 꺼낸다고 재수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죽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죽음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을 보십시오. 신문이나 방송은 우리가 죽음이 지배하는 세계에 살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죽음에는 특별대우가 없습니다. 앤드류 카네기가 죽음의 손을 멈추게 해서 자기에게 떨어지지 못하게 하는 자에게는 100만불을 주겠다고 광고를 했으나 결국 이것은 죽음을 피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 줄 따름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나 사랑조차도 죽음을 막거나 연기시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사랑이 아무리 크고 열렬해도 죽음의 차가운 손길이 사랑하는 자의 심장 위에 놓이면 그는 우리를 떠나갑니다. 갈 때가 오면 우리는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죽음에는 특별대우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은 언젠가 나에게도 찾아올 것입니다. 이 얼마나 허무한 사실입니까? 그래서 신의 존재를 부인한 실존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생은 허무와 죽음의 한 가운데에 내어진 존재다"라고 슬프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성경 히브리서 2장 15절에서도 인생들을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라고 묘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분명 우리들은 일생을 통해서 죽기 전에 죽어가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기억할 사실이 있습니다. 크리스챤들에게는 죽음 너머에 아름다운 세계가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별이란 없는 영원한 세계입니다. 죽음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뛰어 넘어 사망권세를 정복하고 영원한 천국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미래에 우리는 부활한 몸을 가지고 영원히 천국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에게 죽음이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죽음이란 믿는 자에게 이삿날에 불과한 것입니다. 죽음은 지상에서 우리를 해방시키는 복된 순간이 되며 그렇기에 우리는 죽음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빼앗았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런 사실입니까? 그런데 오늘날 이 감격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파스칼은 "인생은 우주의 영광이 되든지 우주의 쓰레기가 되든지 둘 중의 하나밖에는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부활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진 사람은 우주의 영광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죄송한 말씀이지만 쓰레기가 되어 쓰레기 소각장과 같은 지옥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지위, 지식, 권세를 자랑해도 죽으면 다 허무로 돌아가는 법입니다. 모든 사람은 우주의 영광으로 나아가느냐, 혹은 우주의 쓰레기로 나아가느냐의 갈림길에 서있습니다. 미래에 있을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과거의 부활에 뿌리를 박고 현재 부활의 삶을 살며 미래의 부활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어떠한 일을 만나도 분노하거나 불평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느냐 하는 것은 주로 우리가 무엇을 찾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영원을 향해 가는 사람은 순간적인 것에 분노하거나 불평하지 않는 법입니다. 영원의 미소를 잊지 않는 사람이 순간적인 아픔에 동조하여 좌절과 분노에 빠지겠습니까?
그러므로 미래의 부활을 바라보며 구체적인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부활의 영광 이전에 십자가가 먼저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도 부활의 영광을 이루시기 전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과거의 부활, 현재의 부활, 미래의 부활도 기억해야 할 사실이지만 땀흘림의 십자가, 수고의 십자가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는 멀리하고 횡재만 바라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땀을 흘려 봅시다. 하나님을 위해 수고를 합시다. 십자가를 거절하는 것은 사단 마귀의 고문도구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감사히 받는 것은 위대한 승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주신 고상한 멍에가 됩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눈물 뒤에야 비로소 영광스러운 부활의 아침이 다가왔음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난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잠깐 동안은 더 심한 고난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핍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고난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고난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남으로 고난의 의미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 고난이 변해서 감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고 가시밭길을 걸어가면서 감격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는 피하고 부활의 아침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두운 밤을 거쳐서 부활의 새벽이 오는 법인데 밤은 피하고 새벽만 쳐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때때로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믿음의 절개를 꺽지 맙시다. 교회에 다니는 이 고상한 일을 져버리지 맙시다. 십자가 뒤에 연이어 나타날 부활의 영광을 소망하며 위로를 얻읍시다!
겨울 추위가 심한 해는 봄의 잎이 더욱 푸르른 것입니다. 땀흘린 수고 후의 수확이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나태하게 살면서 풍요하기를 기도하는 신앙은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멀리하면서 축복 받기를 바라는 신앙도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기도는 나태한 사람의 도피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매사에 성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던지 "주께 하듯"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근면을 심고, 용서를 심고, 정직을 심읍시다! 교회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구체적인 땀흘림의 수고를 합시다! 그런 사람만이 이생과 내생에서 거둘 것이 있을 것입니다.
머지 않아 우리의 머리에도 살구나무에 꽃이 피듯이 하얀 백발의 신호가 찾아올 것입니다. 또한 바이얼린의 마지막 현이 끊어지듯 최후의 숨결이 끊어지는 그 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생명을 주셨기에 이 생명을 다시 불러 가시는 그 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 순간이 오기 전에 하나님을 기억합시다! 그 순간이 오기 전에 하나님을 위해 위대한 일을 도모합시다. 그 순간이 오기 전에 주님과 함께 어우러져 성숙한 내일을 해산하는 수고를 감수합시다. 밝아오는 새벽녘에 부끄럼 없이 다시 주님의 시선을 대하기 위해 노력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아 여러분들에게 이와 같은 전인격적인 부활의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부활절 새벽의 막달라 마리아 (본문 : 요한복음 20:1-18)
오늘은 주님이 사망권세를 정복하고 부활하신 날입니다.
희망이 없던 인류에게 희망이 생긴 날입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이하여 여러분의 신앙을 부활시키고, 여러분의 삶과 일의 부활을 위해 다시 한 번 희망과 새로운 다짐을 가지고 출발해 보십시오.
부활절을 매년 치루는 기독교의 연례 행사로 보지 말고, 자신의 삶에서 새로운 부활의 역사를 다짐하는 날로 삼아야 합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부활 주일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을 통해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받습니다.
첫째, 주님을 가장 사모하는 자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다는 교훈입니다.
저는 어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복된 일 중의 하나는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생각하는 것만도 좋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만나게 되면 얼마나 좋습니까?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하물며 주님을 믿는 사람이 주님을 만나는 것은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그런데 누가 주님을 만나게 됩니까?
주님을 정말로 사모하는 자가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사실은 오늘 본문은 가르쳐 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누가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만났습니까?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제일 먼저 만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녀가 주님을 가장 만나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에는 무덤에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지나자마자 이른 새벽 아직 어두웠을 때에 막달라 마리아는 무서운 줄도 모르고 주님의 무덤을 가장 먼저 찾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부활하신 주님을 가장 먼저 만나게 되었습니다.
가끔 어떤 사람은 주님 만나는 체험을 하고 싶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자기를 만나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능력 있는 영매가 없어서 그렇습니까?
그래서 능력 있다는 사람을 찾아 이곳 저곳을 다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찾아야지 능력 있는 사람을 찾으면 되겠습니까?
주님이 "나"를 만나주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혹시 주님이 "나"를 만나주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 내가 주님을 간절히 찾지 않고,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문제는 자기 자신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참으로 사랑하면 우리의 마음이 항상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 있게 됩니다.
더 나아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주님이 계신 곳에 가야 합니다.
주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물론 주님은 어디에나 다 계시지만 특별히 주님의 몸된 전으로 이 땅에 교회를 남겨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만나고 싶다면 가장 기본적인 일이 교회를 자주 찾는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것은 교회를 자주 찾는 것과 상당히 비례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하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실질적으로는 교회를 자주 찾는 것에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잘 나타납니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가 가장 먼저 무덤을 찾았다는 사실만큼 주님을 먼저 만나는 데 기여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녀가 주님을 먼저 찾았을 뿐만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주님을 찾고 사모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 사실을 잘 보여 줍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보니 처음 어떤 장면이 눈에 들어왔습니까?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1절).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바로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즉시 돌아가서 베드로와 사도 요한을 불렀습니다. 결국 부리나케 달려온 베드로가 무덤 안에 들어갔는데 세마포가 놓여 있었고(5절), 예수님 머리를 싼 수건은 딴 곳에 개켜 있었습니다(7절)
그런데 무덤 안을 살핀 다음에 베드로와 사도 요한은 어떻게 했습니까?
"주님께서 없네. 혹시 부활하셨나?"라고 생각한 것처럼 별 커다란 감동도 없이 그냥 집으로 돌아갔습니다(10절). 아무리 남자라지만 정말 눈물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명색이 한명으로 수제자요, 한명은 가장 사랑하는 제자였는데 그렇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을 도저히 떠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울면서 몸을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 보았습니다(11절). 이 장면을 통해서 그녀가 주님을 얼마나 사모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처음 만난 이유를 이 장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주님에 대해서 끝없는 관심을 표했습니다. 그녀는 제자들과는 확실히 달랐습니다.
여러분! 제자, 사도, 목사라는 타이틀이 주님의 손길을 체험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는 추구하는 자가 결국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손길을 체험하게 됩니다.
교회를 자주 찾으시고, 예배 드릴 때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림으로 주님의 크신 은총을 체험하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둘째,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는다는 교훈입니다.
안식 후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의 무덤을 찾는 장면을 보십시오. 조금 늦게, 해가 조금이라도 뜬 다음에 찾으면 안 됩니까?
얼마나 주님이 보고 싶었으면 어두울 때에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혼자 무덤을 찾습니까?
이 장면을 보면서 사랑 앞에서는 정말 무서운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요새 새벽에 겁이 나서 교회에 오지 못한다는 분이 있습니다.
정말 새벽 시간이 위험해서 못 나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새벽 시간이 위험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을 참으로 간절히 사모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가 몸을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녀는 무엇을 발견했습니까?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흰옷 입은 두 천사가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가지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지금 한적한 아무도 없이 혼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 속을 살피다가 갑자기 두 천사가 앉아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조금 전에 제자들이 있었을 때만 해도 없었던 천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놀라지 않겠습니까?
아마 웬만한 담력 있는 남자도 소름이 오싹 끼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놀란 기색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천사와 대화를 합니다.
천사가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고 말하니까 막달라 마리아가 "내 주를 찾습니다."라고 말합니다(13절).
이 장면을 보면서 다시 한번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는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요일 4:18요일 4:18).
여러분! 진짜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해 보십시오.
삶의 모든 두려움이 한순간에 정말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셋째, 부활의 삶을 세상에 전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천사와 얘기를 마치고 난 후 막달라 마리아는 어떻게 했습니까?
얘기를 마치고 갑자기 막달라 마리아는 뒤에서 인기척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몸을 돌이켜 보니 예수님이 서 있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처음에는 예수님인 줄 모르고 그저 동산지기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곧 예수님의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습니다. "마리아야!"
평소에 자주 들었던 주님의 부드러운 음성이었습니다. 그 음성을 듣고 막달라 마리아는 즉시 주님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반가워서 소리쳤습니다. "랍오니여(선생님이여)"(16절)
그렇게 소리치면서 막달라 마리아가 어떤 행동을 취했습니까?
너무 반가운 나머지 예수님 품에 안기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성경에는 그런 말이 나와 있지 않지만 17절 말씀으로 그렇게 추정됩니다.
그때 주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만지지 말라고 하신 뒤 주님께서 어떤 명령을 막달라 마리아에게 주십니까?
17절 말씀 하반부를 계속해서 보십시오.
"너는 네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주님의 부활하셨음을 형제들에게 전하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주님 만나게 되면 항상 주님 품에 있고 싶을 것이다. 항상 주님의 손길을 체험하고 주님과 대면하면 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더 차원 높은 자세를 원하십니다. 주님을 만났거든 그 주님을 세상에 나가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하려는 자세는 없고 만지려는 자세만 있으면 주님은 결코 기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것을 찬송가 499장이 얼마나 잘 표현하고 있습니까?
"밤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결국 막달라 마리아는 신비주의적 삶을 포기하고 가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전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천국가면 영원히 하나님 품에 안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두신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 살면서, 부활의 복음을 전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땅에 두신 목적입니다.
여러분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는 증인이 되어서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활이 주는 교훈
고린도전서 15:12-19
오늘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신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은 보통 성탄절보다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성탄절은 주님께서 이 땅에 승리하러 오신 날이고, 부활절은 주님께서 승리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이해서 부활절이 주는 교훈을 살펴봅시다.
부활절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첫째, 부담을 지고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란 무엇일까요? 십자가란 거룩한 부담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어느 정도의 부담을 감수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오늘날 부담이 되기 때문에 큰 교회 간다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말인지를 알고나 그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은 십자가 없이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연약한지라 이해가 되긴 합니다. 그렇게 신앙생활 하겠다는 것은 자유입니다. 자기 마음입니다.
그러나 부담 없는 부분만 생각하지 말고 그 다음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도 없고, 승리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초를 닦지 않으면 집을 지을 수 없고, 씨를 뿌리지 않으면 열매를 맺게 할 수 없습니다.
부담이 되지만 기초를 닦고, 씨를 뿌려야 합니다.
특히 "부담 없이!"라는 말은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정말 믿는다면 해서는 안될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정말 믿는다면 "부담 없이!"라는 말을 꺼내서는 안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믿을 때 부담을 가지고 믿어야 합니다.
사교단체나 라이온스 클럽 같은 곳에는 부담 없이 다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거기에서도 부담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어느 단체에 가든지 그곳의 책임 있는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부담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일대 일 친구관계도 그렇습니다. 일대 일 친구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부담을 가져야 합니다. 항상 전화만 받을 생각만 하고 전화할 생각은 안 하면 점차 그 친구관계는 멀어지게 됩니다. 개인적인 인간관계에서도 부담을 가져야 그 관계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절한 부담을 지려고 해야 우리의 신앙은 열매맺는 신앙이 됩니다. 이 세상의 어느 것이든지 부담을 지지 않고 열매를 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적절한 부담은 우리의 영혼을 튼튼하고 견고하게 만들어 줍니다.
오뚜기가 시험에 들어 넘어져도 왜 쉽게 다시 일어섭니까?
오뚜기 밑바닥에 바닥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트가 거센 풍랑을 만나 전복되어도 왜 쉽게 다시 원상으로 회복됩니까?
요트 밑에 무거운 바닥짐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도 이러한 바닥짐이 있어야 합니다. 적절한 부담을 가지면 어려움이 닥쳐도 금방 일어섭니다. 친구관계에 무슨 일이 생겨, 예를 들어, 친구가 결혼을 해서 멀리 지방에 가서 살게 되었어도 그 동안 쌓았던 서로간의 헌신의 정 때문에 그 관계가 유지됩니다.
우리는 가끔 어떤 사람이 부담이 없어서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서로 간에 부담이 없는 친구가 되면 좋을 것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친구관계는 깊은 관계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환경이 바뀌면 언제든지 그 관계는 깨어져 버립니다. 그 사이에 무슨 변함없는 우정이 생기겠습니까?
그렇다고 서로 부담을 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서로 부담을 지라는 말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헌신의 부담을 지어야 우정과 사랑을 얻듯이 영적인 원리에서도 똑같습니다. 십자가의 부담을 지어야 하나님의 은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믿으면서 좋은 열매를 얻으려는 관심은 많습니다. 그러나 씨를 뿌리고, 가꾸고, 좋은 나무가 되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씨를 뿌리고, 좋은 나무가 되어야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사실입니다. 부활의 영광의 있기 전에 십자가의 부담이 먼저 있음을 항상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죽음은 절대 끝이 아니라는 교훈입니다.
오늘 본문 12-13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죽음은 끝이 아니고 반드시 부활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절망적인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음입니다. 죽으면 끝납니다.
훌륭한 일을 해서 이름이 남고 많은 사람이 그를 추모해도 죽은 당사자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는 영원히 죽었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죽고 끝나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재산을 많이 남기면 후손들이 좋아합니다. 그러나 후손들 좋아하는 것이 본인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제사상 더 잘 받기 위해서 남긴 것도 아닌데 좋아할 것도 없습니다. 죽고 완전히 끝나 버렸는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악한 일만 하고, 나쁜 이름 남긴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이름을 남기고, 좋은 영향력 남긴다고 해도 죽고 끝이라면 본인에게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면 악한 일 하고, 자기 멋대로 나쁜 일 한 사람이 더 수지맞는 것 같습니다.
죽고 영원히 끝나는 것이라면 많이 남긴 사람은 죽으면 끝이기 때문에 가진 것을 다 뺏긴 셈이 됩니다.
반대로 나쁜 일 하다가 사회에 빚만 남긴 사람은 죽으면 끝이기 때문에 그 빚은 다 탕감 받는 셈이 됩니다.
그러니까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은 가장 불의한 원리가 됩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처럼 나쁜 사상이 없고 그것처럼 불합리하고, 그것처럼 무질서한 원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죽으면 끝이라는 것을 믿는 선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고 끝이라면 악은 다 끝나서 좋겠지만 우리가 한 선한 일은 어디에서 보상받습니까?
죽고 끝이라면 선한 일, 착한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고 끝이 아니어야 당연한 것입니다.
여러분! 죽으면 끝이 아닙니다.
죽은 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심판이라고 하니까 너무 겁낼 필요 없습니다. 믿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무서운 날이겠지만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정말 기쁜 날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우리의 수고하고 고생한 것을 다 갚아 주십니다. 그때 우리의 눈물과 정성과 땀을 보상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꼭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믿는 자에게 죽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 우리에게는 무한한 희망이 있다는 교훈입니다.
그래서 죽고 끝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음까지 극복하고 희망을 얘기한다면 살아서 희망이 없을 수 없습니다.
희망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무한한 희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희망이 있으면 됩니다.
희망이 있으면 무엇이든지 우리는 참을 수 있습니다.
1998년 6월 30일 저의 누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신 후에 얼마나 누님과 더 가까워졌는지 모릅니다.
이 땅에서는 명절날 가끔 만나긴 하지만 평소에는 거의 누님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누님 돌아가신 후 얼마나 자주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다시 만날 생각을 하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희망이 있으면 어떤 어려움도 소화할 수 있고 참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죽어도 희망이 있는데, 살아서는 희망이 없겠습니까?
항상 희망을 가지고 힘차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주위 사람 눈치보고, 주위 사람 의식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희망을 가지면 됩니다.
희망을 가진 자가 현재를 가진 자보다 훨씬 부요한 자입니다.
현재 눈앞의 것을 가지고 판단한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현재의 부족함을 극복하고 충분히 부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넷째, 구원의 길은 오직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밖에 없다는 교훈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죽음을 정복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구원은 죽음을 정복한 분만이 그 길을 열어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종교에서는 다 창시자들이 죽었습니다. 창시자가 죽었는데 후계자가 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주보에 나와 있는 사랑의 칼럼을 보십시오.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모하멧, 다 나름대로 훌륭한 일을 했다고 생각은 합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분들이 우리에게 영생의 길, 구원의 길을 열어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기독교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부활에 관한 위대한 진리 몇가지를 말해줍니다.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12절).
2) 그러므로 죽은 자의 부활은 틀림없이 있다는 것입니다(13절).
3) 만약 부활이 없다면 믿음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의 핵심은 부활이라는 것입니다(14절).
4)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었다는 것입니다(17절).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되었다는 말입니다.
5) 만약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가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18-19절).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기에 우리는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것은 윤리 도덕을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현재 부활의 삶을 체험하고, 장래에 영생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나오면서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이해서 다음 두 가지 삶이 여러분들에게 나타나길 바랍니다.
1) 현재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십시오.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이 살아 계신 예수님을 체험하는 것에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의 생명의 변화가 일어나고, 계속해서 인격의 변화가 일어나고, 생활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강단에서 아무리 말씀이 흘러나와도 그것이 생명의 변화를 일으키지 않습니다. 좋은 말씀이니까 생활의 변화는 일어납니다. 이것도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생활의 변화 이상으로 생명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살아 계신 예수님과 만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만납니까? 오늘 새벽에 두 가지 말씀을 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제일 처음 맞은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는데, 그녀가 주님을 처음 만난 큰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녀가 주님을 가장 먼저 찾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녀가 주님을 만나려고 끝까지 사모하며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오늘날의 삶에 적용해 보면 이런 말입니다.
우선 교회를 자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는 가장 위대한 비결은 여기에 있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나 생명의 변화를 이루어 가길 바랍니다.
2) 항상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사십시오.
주님 재림하시기 전까지는 이 땅에 살면서 모든 사람은 죽게 될 것입니다.
죽음에는 특별대우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은 언젠가 나에게도 찾아올 것입니다.
이 얼마나 허무한 사실입니까?
가끔 오랜만에 아는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옵니다.
무슨 전화일까. 상당히 많은 전화가 누군가 죽었다는 전화입니다.
우리는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연락이 너무 없어서 섭섭해! 그럴 수 있어! 그 사람이..."
여러분 생각을 바꾸십시오. 무소식이 희소식입니다.
우리도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는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부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당당하게 설 수 있게 하는 부활신앙이 얼마나 큰 능력입니까?
죽기를 무서워하면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가 됩니다(히 2:15히 2:15).
여유도 없고, 넉넉함도 없고, 용기도 없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육신이 죽기도 전에 마음이 죽어버린 사람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처럼 죽기 전에 죽어가고 있습니다.
죽음은 인간이 가장 최후로 두려워하는 대상입니다. 그 죽음을 초월한다면 그 사람은 정말 능력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다른 능력 찾지 말고, 이런 능력을 찾으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이런 능력이 주어졌음을 아십시오. 활용하기만 하면 됩니다.
미래에 있을 부활의 소망을 바라보고 어떤 일에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영원을 향해 가는 사람은 순간적인 것에 분노하거나 불평하지 않는 법입니다.
영원의 미소를 잊지 않는 사람은 순간적인 아픔에 좌절과 분노에 빠지지 않습니다.
영생의 삶을 든든한 보증으로 삼고 항상 여유를 가지고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 기도 >
거룩하신 하나님 아버지!
부족하고 연약한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 주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를 지게 하셔서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셨사오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오늘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부활절입니다.
오늘 주님의 부활의 삶이 저희들에게 나타나게 하시고,
부활의 능력을 힘입어서 희망과 여유를 가지고 살 수 있게 하소서!
그러나 부활의 영광만 취하려고 하지 말고,
먼저 십자가의 부담을 지기 위해 힘쓰고 애쓰는 마음을 주소서!
일대일 인간관계를 해도 헌신이 없으면 우정과 사랑이 형성되지 않는데,
주님과의 관계에서 헌신을 모르는 자가 되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 심판하시는 날에 저희들에게 인생 최대의 기쁨이 되도록
눈물과 정성과 땀을 흘리는 십자가의 대열의 최선봉에 서게 하시고,
주님의 갚아주심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열과 성을 다 바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