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사 서

신앙에는 중도가 없다 (왕상 18:19-24)

공 상희 2010. 3. 24. 06:22

신앙에는 중도가 없다 (왕상 18:19-24)

 


이 시간에 “신앙에는 중도가 없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중국에 중용이란 철학사상이 있는데 그 사상을 간단히 소개한다면 “극단을 피하여 지나치지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중도의 길”입니다. 이는 공자의 손자 자사의 저작이라고 하는데 어떤 면에서 적용이 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유일하신 하나님 앞에는 중도가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가 명백히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태양이 한 개라는 사람과 세 개라는 사람이 다투니까 두 개로 하자 한다 해서 두 개라고 말하면 옳은 것입니까? 진리란 정확한 것이어야지 적당히 편리하게 타협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신앙에는 중도가 없습니다.


1. 신앙의 대상에 중도가 없습니다.


본문 21절을 보면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했습니다.


아합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라던 때 이스라엘은 왕후 이세벨로 인해서 우상숭배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선지자들은 모두 처형되고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만 득세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여호와께서는 3년 6개월 동안 땅에 비도 이슬도 주지 않아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자기 잘못은 알지 못하고 엘리야만 잡으러 쫓아다닙니다.


어느 날 두 사람이 마주쳤을 때 엘리야가 대결을 요청합니다. 그래서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과 결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850대 1로 어느 신이든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편도 아니고 저 편도 아닌 중도파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와 바알의 중간에 서서 눈치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말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백성들은 바알신 쪽으로 더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 편에 선 하나님이 가장 귀하게 보시는 불의 사자였습니다. 그 결과 850:1의 대결에서 엘리야가 승리했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대상을 적당히 타협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해인 수녀의 글을 보면 과연 그녀에게 바른 신앙관이 있는지 아무리 봐도 그 마음에 예수가 보이지 않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도 “아무 종교를 믿어도 착하게만 살면 구원 받는다”식의 글을 썼는데 이 잘못 인도한 죄에 대한 심판을 어떻게 받을지 한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종교는 다 같은 것이니 전도가 필요 없다고 말하는 자도 있는데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어떻게 받을지 두렵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만 제일이고 예수만 구원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폅니다. 표면적으로는 관용 같으나 진리를 왜곡하는 자들입니다.

 

다른 신을 인정하는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들은 여기서는 이런 설교를 하고 저기 가서는 저런 설교를 하는 이중인격자요, 위선자입니다.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자들이며 두 얼굴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코에 악취를 풍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말고는 다른 신이 없다고 오직 예수로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영혼들을 실족시키는 그래서 연자맷돌을 목에 걸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더 나을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큰 죄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거나 우상숭배 하는 일입니다. 십계명에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고 하셨습니다.


신4:19절에는  “또 두렵건대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일월성신, 하늘 위의 군중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분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길까 하노라” 했고, 고전10:20에는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회개하라고 했고, 예수 복음이 나타난 것은 이제는 헛된 신 다 버리고 하나님 앞에 나오라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2. 신앙의 내용에도 중도가 없습니다.


갈1:7에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복음에 다른 중도가 있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즉 복음도 믿고 율법도 지켜야 구원 받는다는 것은 십자가의 복음을 변질시키는 일입니다. 기독교 초기 이단들 중에는 예수도 믿고 할례도 받아야 구원 받는다는 잘못된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예수+알파=구원이라는 공식은 대단히 위험한 공식입니다.


안식교는 예수+안식일을 주장합니다. 자기들은 아니라고 하지만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구원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틀림없습니다. 천주교는 예수+선행을 주장합니다. 이 역시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우리 교회를 주장합니다. 자기 교회에 나와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제로 실어갑니다.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면 충분합니다. 예수면 만족합니다. 예수님 말고 무슨 마리아가 필요합니까? 성경 어느 곳에도 마리아를 신앙의 대상이나 기도의 대상으로 삼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신앙이 확실해야 합니다.


행4:12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요5:24에도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2:16에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했습니다.


이 진리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고 다른 종교의 어떤 교리라도 이 복음에 희석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피 흘려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분은 예수님 밖에 없으므로 다른 데로 구원 받을 길이 있다는 사람은 이단입니다. 오직 예수이지 복음에는 중도가 없습니다.

 

3. 신앙의 대적 앞에도 중도가 없습니다.


세상 종교는 귀신을 달래려고 적당히 타협합니다. 그러나 성경 약4:11에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마귀는 대적해야 합니다. 마귀하고 적당히 타협하면 안 됩니다. 마귀는 오직 추방하는 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5:8-9) 했습니다.


이념적으로 공산주의는 마귀적인 집단입니다. 공산주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신론이며 수많은 교회를 파괴하고 목사와 신자들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살인자 마귀처럼 얼마나 사람을 죽였습니까?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킨 중국 모택동이 죽인 사람이 6천 4백만 명이고, 소련 스탈린이 죽인 사람은 4천 5백만 명, 김일성 부자가 죽인 사람은 7백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사탄의 영에 잡히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마귀는 거짓말쟁입니다. 공산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산주의는 실패한 이론입니다. 이번에 화폐개혁하여 장마당에서 부자 된 사람들의 돈을 빼앗아 나눠주면 나라가 안정되고 백성들에게 인기가 치솟을 줄 알았는데 정반대였습니다. 황금의 알을 낳는 닭을 잡아보니 닭도 죽고 황금도 없었습니다. 세상 나라가 100% 성경적일 수는 없지만 공산주의는 성경과 너무나도 다릅니다. 그러므로 한 순간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아야 합니다.


4. 신앙의 유혹 앞에도 중도는 없습니다.


눅16:13에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하셨어요. 우리 앞에 세상의 넓은 길이 아니라 진리의 좁은 길을 가야합니다. 그래서 고후7:1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 했습니다.


5. 신앙의 열심 앞에도 중도는 없습니다.


계3:15에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든지 뜨겁게 해드려야 합니다. 세상일에 열심하듯 하나님 일에도 그러해야 합니다. 이웃 간에도 열심히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가셨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우리 인생에게 더 이상 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예수님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세상의 길, 우상의 길, 사단의 길, 공산주의의 길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성경의 진리를 따라서 영원히 후회가 없는 참된 길을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