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때의 생존전략 (벧전 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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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 “마지막 때의 생존전략”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생존전략이라고 하니 좀 으스스한 느낌이 듭니다만 말세에는 우리가 어떤 시험이 와도 사명을 감당하고 우리 믿음이 살아남아 하나님 앞에 서야 하기 때문에 생존전략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 순간까지는 우리가 해야 할 바를 다해야 합니다. 성경이 생존전략이라는 단어만 안 썼지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마지막 때의 생존전략은 무엇일까요?
1. 기도하는 것입니다.
벧전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왜 정신을 차리라고 했을까요? 그리고 왜 기도하라고 하셨을까요? 그 만큼 정신 차릴 수 없는 세상이 되고 그렇지 않고는 시험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지금 평안하다 안전하다 말하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참으로 무서운 일들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 예로 지금 중동의 이슬람교의 확산을 들 수 있습니다. 이슬람교는 기도가 아니고는 이길 수 없습니다. 이들이 국민의 5% 10%만 되면 국가를 절단내버리는 무서운 집단입니다. 그 아름다운 문화도 절단내버립니다. 여성을 학대하고 종교적 이유로 어떤 일을 해도 정당화하는 아주 미개한 문화로 바꾸어 버립니다. 소수의 이슬람인들 때문에 기독교국가인 미국도 기독교혐오국가로 바뀔 정도입니다. 요즘 한국에서 이슬람교가 자기 신의 이름을 알라라 하지 않고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쓰고 있으니 정신차려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다른 대책이 없습니다.
한 번 보세요. 요즘 어떤 종교인 한 사람 죽으니까 방송이나 언론들이 매일 같이 그 방송만하지요? 기독교인을 위해서 그렇게 한 번이라고 해 준 적이 있습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웃과 인류를 위해 재산과 목숨까지도 바친 사람들이 많은데 무소유 그게 뭐가 대단합니까? 사회봉사도 우리 기독교의 몇 분의 1도 안 되는 불교가 왜 그렇게 돌풍을 일으키고 있습니까? 이런 모든 것이 방송과 언론이 만들어낸 작품입니다. 온갖 비리가 쌓이고 쌓여도 다 감추고 오직 미화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 사회의 흐름에 편승해 믿는 사람들까지도 불교를 선호한다고 말할 정도니 정신 차려야 합니다.
말세가 다가올수록 더 무서운 일들이 벌어질 것입니다. 정말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길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교인들은 졸며 자고 경종을 울리는 선각자들은 무시 당하고 핍박을 당합니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세상 말에 세뇌된 교인들이 더 나서서 핍박합니다. 교회는 다 썩었다. 목사는 다 썩었다. 목사는 다 도둑이다. 요즘 교회가 어떤 교회인데 목사가 도둑질하고도 남아 있을 수 있는 교회가 과연 몇 교회나 있을까요? 우리 기독교는 한국 선교 초기부터 매월 혹은 분기별 제직회가 전통인데 이 투명한 교회가 왜 핍박을 당합니까?
그런데 세상 언론이 하도 떠들어 대니까 교인들마저 그런 줄 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썩었다 외치는 사람만 가득합니다. 모두 썩었다면서 모두 자기는 괜찮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리가 어디 있습니까? 뭔가 크게 속고 있습니다. 안개 속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내가 안 썩었으면 남도 안 썩었다고요. 내 교회가 안 썩었으면 다른 교회도 안 썩었고요. 담임목사가 안 썩었으면 다른 목사도 안 썩었다고요. 혼자 의인인줄 알고 난도질하면 안 됩니다. 소수의 잘못을 전부로 매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세에는 근신하여 깨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아야 하고 엎드려 기도해야 우리도 교회도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2. 사랑하는 것입니다.
8절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왜 사랑해야 합니까? 마24:12에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불법이 무엇입니까? 요일3:4에 “죄는 불법이라” 말세일수록 사랑의 눈을 가져야지 율법의 눈을 가지면 안 됩니다. 독수리의 시력이 대단하다고 합니다. 독수리의 눈을 가진 사람들이 많으면 불행합니다. 마귀와 이단에 대해서만 독수리 눈을 가지세요. 사랑 없이 비판하면 그 비판은 또 다른 비판을 낳습니다. 상처는 상처를 낳고 그 상처는 또 다른 상처를 재생산시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사랑으로 허다한 죄를 덮으라고 말씀합니다.
이번 부산에서 일어난 여중생 살인사건에 김길태가 피의자로 지목 받고 있습니다. 길태의 생활기록표를 보면 중 1학년까지는 아주 활달하고 우수한 아이로 기록되고 있지만 2학년 때부터 점점 문제 아이로 변하여 전과 18범이 되도록 나쁜 짓만 했다고 합니다. 자기의 정체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좀 더 자세한 원인을 그의 이름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저도 처음 듣는 이름 왜 길태입니까? 길태라는 이름은 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길태라고 지었다고 합니다. 길에 버려진 아이를 주워 길렀다는 것입니다. 주웠으니 감사하기도 하나 그렇게 잔인하고 절망적인 이름을 아이에게 붙여 평생 남들이 부르도록 해놓고 어찌 좋은 사람이 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너는 길에서 주웠다. 길에서 주웠다. 길태, 길태, 하루에도 수없이 듣고 자란 아이가 어찌 절망감 없이 정상으로 클 수 있겠습니까? 내 자녀라면 그럴 수 있겠습니까? 사랑으로 행했다면 이런 일이 있을까요?
인생살이란 간단한 것이 아니어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입양아도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나 입양아라도 하나님의 귀한 자녀입니다. 우리 믿는 가정에서 자란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불신자 부모에게서 자라지 않고 하나님의 품 안에서 자라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하나님의 특별한 사람이라는 자존감을 심어주어야 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합니다. 사랑이 세상을 사는 지혜입니다. 어떤 일에도 누구와도 원수 만들지 마세요. 사랑하며 사는 것이 나를 보호하는 최고의 생존전략입니다.
3. 원망 없도록 하는 것입니다.
9절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예루살렘 교회에 원망이 있었습니다. 행6:1에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 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 파 사람을 원망”했다 했습니다. 사람은 많아지고 일군은 적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헬라 파 사람들은 멀리서 왔기에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암만해도 소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말세의 교훈으로 원망을 이야기할까요? 한 사람이라도 원망이 생기면 가룟 유다가 따로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잘못한 것은 생각지 않고 원망부터 합니다. 나쁜 습성입니다. 혹은 나서서 대접해야 할 사람들이 대접은 고사하고 대접 잘 하네 못 하네 불평합니다.
예배당이 추우면 두껍게 입고 오세요. 교회 반찬이 나쁘면 자기 잘하는 반찬 한 가지씩은 있지요? 반찬을 만들어 가지고 와서 나누어 드세요. 기쁨이 오는가 안 오는가? 교회가 지저분하면 원망하지 말고 청소하세요. 누구는 죽도록 일만 하고 섬기면서 평가 받아야 하고 누구는 앉아서 대접만 받아야 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 참 불공평합니다.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죽은 이유가 원망이었습니다. 그래서 약5:9에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 밖에 서 계시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큐가 떨어진 사람 어떻게 합니까? 먼저 지각이 깨어있는 사람이 조심하는 수밖에는요. 말세의 생존전략은 원망 받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하라는 교훈입니다. 왜 그럽니까? 문제 일으키지 못하게입니다. 잘 사는 자나 못 사는 자나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똑 같이 대접해야 합니다. 친구나 원수라도 공평해야 합니다. 이 흉악한 말세에 가룟 유다가 생겨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4. 받은 은사대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10절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왜 말세에 받은 은사를 강조할까요? 세상이 민주화되다 보니까 좋은 점도 있지만 너무나도 월권침해가 많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떠들어대는지 대통령하기도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누가 이 나라의 대통령인지 모를 혼란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선생하기도 어렵고 의사하기도 어렵고 판사하기도 어렵고 기관장하기도 어렵습니다. 통반장하기도 어렵습니다. 사장하기도 어렵습니다. 조금만 잘못하면 소송을 걸고 머리에 띠를 두르고 몽둥이 들고 달려듭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하기도 어렵고 장로하기도 어렵고 성도하기도 어렵습니다. 부흥사하기도 어렵답니다. 말 한마디 잘못해도 불러놓고 이 사람이 치고 저 사람이 치고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확실한 것은 참 어려운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받은 은사를 벗어나 모두가 주인노릇하고 어른밖에는 없습니다. 천사의 직분하라 세워 주었건만 수호하는 천사는 보이지 않고 심판자만 있습니다. 이것이 말세의 현상입니다. 철저히 제 위치로 가지 않으면 나도 너도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5. 모든 영광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11절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그리고 그 날이 가까울수록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봉사하라 했습니다. 내 힘으로 했다고도 말고 내 것으로 했다고도 말라고 말씀합니다. 마지막 때일수록 자기 도취에 빠져 일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칭찬 받으려는 생각은 천국의 상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이제 우리가 바랄 것은 천국 상 말고 무엇입니까? 세상의 것 들고 갈 수 없습니다.
마지막 때는 신앙으로 하려는 사람이 적습니다. 신앙으로 하지 않으니 일마다 섭섭함이 옵니다. 사람들이 알아 주지 않고 대접해주지 않는다고 교회를 갈라 개척해 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거기서도 대접 못 받으니 또 갈려나가고, 그 자녀들이 예수 믿을까요? 원망만 하다 그 인생 불행하게 끝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고 피할 곳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도 고개를 돌리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보아도 우리는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 오실 날이 가까웠습니다. 주님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오십니다. 겉으로는 평안이지만 영적으로는 상상치 못할 시험의 날입니다. 신앙 지킬 수 없습니다. 속습니다. 흉악합니다. 절망입니다. 타락합니다. 배도합니다. 치우칩니다. 졸며 잡니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일군들도 낙심합니다. 미워합니다. 주님이 오실 때 바로 믿는 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두렵습니다. 우리 모두 나와 내 가족이 살기 위해서라도 정신 차려 깨어 기도와 믿음과 지혜와 사랑과 겸손으로 신앙하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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