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나 된 것은 (고전 15:9-10)
나의 나 된 것은 (고전 15:9-10)
이 시간 “나의 나 된 것은”이라는 제목입니다. 바울이 본문에서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 사도 바울이 자기가 새 생명을 얻고 변화 받고 하나님의 귀한 일군이 된 것에 대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나”라는 말이 둘입니다. 앞의 나는 누구이고 나중에 나는 누구일까요? 앞에 나는 예수 믿기 전에 나요, 뒤에 나는 예수 믿고 변화된 나입니다.
바울이 예수 믿기 전에 그는 바리새인이요, 교만하였습니다. 믿는 자를 핍박했습니다. 죄에서 방황했습니다.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의 사울은 변화되었습니다. 이름을 바울이라고 바꾸었습니다. 바울이란 가장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가장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는 가장 크게 쓰임을 받았고 겸손했습니다. 그가 사용하던 손수건만 대어도 병이 나았습니다. 최고의 영적 체험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위대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것은 바울의 고백대로 100%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나 은혜가 은혜 되기 위해서는 바울에게서 배워야 할 몇 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1. 자기의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롬 7장을 보면 그가 예수를 알기 전에 방황을 소개합니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처럼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었지만 율법 아래서 그렇지 못한 죄인 된 자기 본질을 바라보며 탄식했습니다. 자신을 바라보고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참된 복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랬기에 바울은 바로 그 다음 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7:25)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대체로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하는데 자기의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몰랐기에 시내산에서 그들은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부터 이스라엘은 범죄함으로 광야에서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 율법 아래서 방황의 뺑뺑이를 돌아본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를 압니다. 소스라치게 놀랄 만큼 죄인이고 대책이 없는 자임을 알아야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울이 예수 만나지 못했을 때 일입니다. 그가 유대교에 열심이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예루살렘에서도 모자라 다메섹에까지 군대를 이끌고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가다가 어떻게 됩니까? 행9:3-5을 보면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예수의 부활은 거짓이라고 믿었는데 그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만나도 보통 강하게 만난 것이 아닙니다. 광채로 눈이 멀고 두려움에 떨도록 큰 소리로 예수를 만났습니다. 거짓이라던 예수를 만났으니 그 앞에 꼬꾸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놓는 사건이었습니다. 행9:20에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 했다는 말로 보아 다메섹 도상의 사건은 바울이 예수를 구주로 믿게 하시는 사건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꼭 이런 요란스런 체험이 필요한 걸까요? 바울처럼 예수를 만나야 한다고들 하는데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필요할 수도 있고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사울에게는 그런 일이 없으면 믿지 않을테니까 그런 요란스런 체험을 주신 것입니다. 체험해도 예수를 나의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냐는 것입니다. 체험 없이도 예수를 진실로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받아들이면 우리 인생은 근본적인 변화가 오기 시작합니다.
3. 복음을 배우고 적용해야 합니다.
예수를 만난 바울은 그 다음 어떻게 했을까요? 더욱 예수 그리스도와 그 복음을 알고 적용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아라비아로 가서 날마다 말씀을 공부하며 예수님에게서 배웠습니다. 이 말씀이 갈라디아서에 있지요.
갈1:16-18에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 년 만에” 3년간 아라비아에서 복음을 배웠습니다.
이것 역시 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고전9:1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고 말합니다. 12제자들이 3년 반 동안 배운 것처럼 바울도 아라비아에서 3년을 배웠습니다. 그는 예수의 보혈로서 죄에서 자유함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의 사건이 자기를 위한 사건임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자기도 그 때 죽었고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그 때 자기도 살았으며 사십 일 후에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자기도 그 안에서 함께 높이 되었다는 영광의 복음을 배웠습니다. 해결할 수 없는 마음의 악함도 주님이 담당하셨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엡2:4-7에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바울이 어느날 나타나 나도 예수를 만났다. 예수께 배운 제자다. 사도다 하는데 당시 교인들이 듣기에는 기가 찰 일입니다. 예수님 계실 때 핍박자였던 그가 그런 소리하니 말입니다. 개종했다고 다 사도입니까? 그래서 아무도 그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제출한 복음을 보고는 모두 깜짝놀랐습니다. 예수께 배우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온전한 진리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쩜 베드로보다 요한보다 누구보다 더 탁월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극적 사건이 필요할까요? 꼭 필요한 한 건 아닙니다. 이미 성경을 통해 주신 말씀을 잘 배우면 됩니다. 복음을 잘 배우시면 됩니다. 바울은 배울 뿐 아니라 자기에게 적용하기를 힘썼습니다(빌3:10-11).
4. 경건에 이르도록 훈련해야 합니다.
딤전4:7-8에 바울의 말이 있습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신앙이란 믿어야 할 부분이 있고 훈련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대속의 진리는 주님만이 하시는 것으로 그대로 믿으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열심히 훈련해야 합니다.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어도 기도하고 찬송하는 생활은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고전9:27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했다고 했습니다. 우리 육신 하고 싶은 대로 놔두면 안 됩니다. 늘 쳐서 복종시켜 하나님을 경외하는 도구로 만들어야 합니다.
5. 은사를 준비해야 합니다.
엡3:7에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했습니다. 바울을 그토록 위대한 사도로 만든 것은 하나님의 은사였습니다. 주신 은사 잘 활용할 때 큰일을 합니다. 말씀의 은사 받았다고 즉각 위대한 일군이 되는 것 아닙니다. 말씀의 은사자는 성령의 조명을 기도하면서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면 열리기 시작합니다. 여백이나 노트에 기록하면서 때를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들어쓰실 날이 옵니다.
다른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들어 쓰실 때까지는 남몰래 준비해야 합니다. 당장 밖으로 들어 쓰시지 않는다고 실망하여 은사 감당에 무관심하면 받지 않은 것처럼 되고 맙니다. 들어 쓰시지는 않아도 기도 속에서는 항상 쓰십니다. 대상을 찾아가지 않아도 누구를 도울 것인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기도 속에서 잘 담당하면 역사가 일어나고 자신도 은사적으로 성장합니다. 그렇게 준비하시란 말입니다.
그런데 조심해야 할 것이 있어요. 은사가 나타나면 쓰고 싶어서 견딜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시험을 이기셔야 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이지 내가 쓰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하나님 곁에 모셔 섰는 기름 충만한 구룹천사처럼 우리는 도구로서 하나님 곁에 엎드려 대기하고 있으면 됩니다. 남을 도울 많은 지혜와 지식과 기술을 가졌어도 때를 알지 못하고 나서다가는 열매 맺지 못하고 무안을 당하거나 부작용을 당합니다. 항상 때를 기다리며 남몰래 자기 은사를 준비해야 합니다. 위대하게 쓰실 날이 올 것입니다.
6. 가시의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또 바울을 바울 되게 한 은혜가 또 있었습니다. 고후12:7-9에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을 찌르는 가시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이 바울의 안질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바울을 괴롭히는 사람이라고도 말합니다. 제 생각은 두 가지 모두라고 생각합니다. 딤후서에 보면 구리장색 알렉산더가 나오는데 바울의 마음을 편치 않게 한 사람입니다. 좀 살 만하면 콕 찌르고 좀 평안할 만하면 콕 찌릅니다. 개인적으로 때리면 아플리가 어디 있습니까? 사람 앞에 대적하고 소문 내면서 하니까 고통스럽지요.
이런 일이 없게 해달라고 3번이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세 번이란 단순한 입술의 반복이 아니라 세 번의 사건을 뜻합니다. 기도했지만 또 당하고 기도했지만 또 당하고 또 기도했지만 또 당했습니다. 하나님 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울을 교만치 못하게 하는 은사였던 것입니다.
이 은사는 우리에게는 없을까요? 참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내 믿음이 떨어질 때 자꾸만 괴롭히는 그 무엇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고 원인을 깨닫고 회개하면 물러갑니다. 아주 물러가지는 않습니다. 잘못하면 다시 찾아옵니다. 감사한 것은 회개하면 물러간다는 것이지요.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주변 나라들처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바로 섬기면 물러가고 이스라엘이 잘못하면 또 나타나 괴롭힙니다. 이것이 가시인 것입니다.
그래서 민33:55에 "너희가 만일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 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며 부르짖으면 다시 평강을 주셨습니다. 이것 때문에 정신 차리고 정상을 달리는 믿음을 잃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세상에 오셔서 우리 구주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를 마음에 모셔 들이면 그 은혜로 영생 얻는 하나님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 모두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 했던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도록 자기 본질을 알고 예수를 구주로 믿고 복음을 배우고 믿음과 성령으로 적용하며 나를 복종시켜 하나님을 경건 되게 경외하고 근신하므로 하나님의 은혜 속에 온전히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