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의 교훈 (창 6:14) (방주론)
간의 교훈 (창 6:14)
오늘 읽은 말씀에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그랬습니다. 여기 "간"(히브리어 "켄")은 '둥지 방 거처 작은방'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노아의 방주는 상중하 3층으로 짓되 방을 아파트와 같이 많이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봅니다.
1. 노아 가족을 위한 배려입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들을 위해서 방을 만들었습니다. 자식이 결혼하기 전에는 부모와 같이 살아도 일단 결혼을 하게 되면 부모와 같이 살아도 따로 방을 마련해 줍니다. 이처럼 노아의 자녀들은 다 결혼했습니다. 한 방에서 같이 잘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짐승을 아무리 사랑한다 할지라도 한 방에서 짐승들과 같이 먹고 자고 할 수는 없지요. 아무리 씻어주고 닦아주고 챙겨줘도 짐승은 짐승입니다. 짐승과 같이 지내는 것은 건강상으로도 좋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간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부모는 부모이고 자식은 자식입니다. 함부로 할 수는 없습니다. 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고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부부일체라고 하지만 거기에도 간이 있습니다. 네 아내를 사랑하라. 네 남편을 순복하라. 이것이 간격입니다. 인간 삶에 율례와 법도가 있어야 합니다.
방주를 교회로 본다면 노아와 그 가족은 지도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짐승과 함께 놔두지 않으시고 간을 막아서 그 위치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지도자는 교인을 사랑하고 교인도 지도자를 사랑하지만 거기에도 간격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목자와 양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런 사랑과 존경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도력이 약해지고 교인들도 사적으로 대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겨나고 은혜 받지 못합니다.
2. 짐승들을 위한 배려입니다.
만약 간이 없이 짐승이 뒤섞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혼란도 그런 혼란이 없을 것입니다. 짝을 잃어버린 짐승들, 사나운 짐승들의 위험, 쫓고 쫓기고 날개 단 짐승들은 날아다니고, 구분해서 먹이를 줄 수 있나 전혀 관리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노아에게 간을 만들라 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간격이 필요합니다. 세상과의 간격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아야 합니다.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5:6) 하셨습니다. 사상과 간격 같지 못하면 영적으로 죽은 자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을지 몰라도 능력은 없습니다. 세상에 간격 두지 않으면 영적으로 대혼란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교회에도 여러 방이 필요합니다. 넓게는 여러 교파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오순절,,, 등. 기독교의 기본교리만 같다면 이단은 아닙니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같은 성경을 보면서도 지엽적인 견해 차이로 이단은 아니지만 함께 할 수 없어 교단이 생겼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면 진리는 명확하겠지만 지상에 살면서는 견해 차이를 보입니다. 이 경우 함께 있어 다투고 싸우는 것보다는 갈라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방주의 간은 좁게는 지교회에 여러 부서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당회, 제직회, 남전도회, 여전도회, 청년회, 학생회, 주일학교, 성가대, 선교부, 새신자반, 제자훈련 등 구분이 필요합니다. 수효가 많으면 세대 차이 나지 않도록 부서를 더 세분하기도 합니다. 각 부서마다 하는 일이 다릅니다. 이런 방이 있고 각각 그 역할을 다할 때 교회는 더욱 활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더 좁게 보면 방은 성도를 의미합니다. 방주 안의 방마다 어떤 여러 짐승들이 있었던 것처럼 교회 안에도 다양한 교인들이 있습니다. 잘 생긴 사람, 못 생긴 사람, 돈 많은 사람, 돈 없는 사람, 고관백작, 막노동하는 사람, 건강한 사람, 아픈 사람, 성급한 사람, 느린 사람, 호의적인 사람, 율법적인 사람, 후한 사람, 인색한 사람, 믿음 좋은 사람, 믿음 나쁜 사람, 충성하는 사람, 말만하는 사람 등 여러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맘대로 고칠 수 없습니다. 그들을 위해 안내로서 가르치고 기도해야 하지만 우선은 그대로 인정해 주고 그들에게 맞게 대해주면 됩니다. 나와 다르다고 다투고 싸울 필요 없습니다.
3. 양식 저장을 위한 지혜입니다.
370일간 먹을 양식을 종류대로 구분하여 비축하려면 방들이 많이 필요할 것입니다. 양식은 양식대로, 채소는 채소대로, 풀은 풀대로, 물기 있는 것은 물기 있게, 건조한 것은 건조하게 기타 여러 기구나 물품들을 보관하려면 방이 필요합니다. 장소가 좋으면 오래 보관이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도 방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여러 방향에서 이해하기 좋게 간추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도 교의신학 실천신학 성서신학 역사신학 등이 있습니다. 그 중 실천신학 한 분야에도 설교학, 전도학, 목회학, 교회행정학, 기독교교육학 등이 있습니다. 교의신학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서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내세론 등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주제별로 잘 간추려 놓으면 누가 보든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생명의 말씀이고 우리를 인도하는 말씀이라고 사랑해도 간을 내어 간추려 놓지 않으면 누가 알겠습니까? 성경 66권 구분도 그래서 필요합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사도행전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본래 성경은 장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보는 이로 하여금 쉽게 볼 수 있도록 학자들이 장절을 붙였습니다. 찬송가도 몇 장 몇 장 구분해놓으니 얼마나 찾기 쉽습니까? 이것이 모두 간을 막는 일입니다.
정통과 이단의 구분도 간을 막았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모든 정통교회는 사도신경을 신앙고백으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주일 낮 예배시간에는 어느 교회를 막론하고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단들은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지 않습니다.
혹은 이단을 예수님을 구주로 믿느냐? 믿지 않느냐? 를 보고도 알 수 있습니다. 이단들은 그들의 교주를 신격화해서 그들의 교주를 구원자로 믿거나 예수님과 대등하거나 그 다음 가는 자로 믿고 있습니다. 혹은 신구약 성경 66권을 정경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느냐? 를 보고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교리적인 간을 해놓았기 때문에 우리가 구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합니다.
방주에서는 크게 두 종류로 구분했습니다. 창7:2에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 그랬습니다. 방주에는 많은 방이 있고 많은 종류의 짐승들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짐승들을 정결하냐? 아니면 부정하냐? 이 두 가지로만 구분하셨습니다.
여기에 깊은 진리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많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성도들을 구분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정결하냐? 아니면 부정하냐? 믿음으로 변화 받았느냐? 받지 못했느냐? 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변화받아 정결한 성도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관심 갖길 바랍니다.
잘생겼느냐? 못 생겼느냐? 돈이 있느냐? 없느냐? 공부 많이 했냐? 적게 했냐? 남자냐? 여자냐? 나이가 많으냐? 적으냐? 하는 것으로 평가하거나 판단하거나 차별하지 않습니다. 많이 배우고 돈 많다고 특별 대우하는 것 아닙니다. 얼마나 더 영적으로 성장하고 변화 됐느냐 하나님의 원하신 대로 사느냐가 하나님의 관심거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간격은 너무 커도 안 되지만 너무 없어도 안 됩니다. 적당한 간격은 비로 진리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십시다. 그것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입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들을 사랑합시다. 이웃을 사랑합시다. 부모를 공경합시다. 세상에 물들지 맙시다. 이단에 미혹되지 맙시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노아의 방주처럼 모든 것이 정리되고 경쾌한 복된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