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절 설교

추수감사 종합자료함”

공 상희 2009. 11. 9. 13:24

추수감사 종합자료함”

추수감사주일은 구약성경에서 기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년에 큰 3대 절기를 지키고 있는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추수감사절은 미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370년 전 영국에서 신앙의 박해를 피하여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 플라워 호를 타고 신대륙 미국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이 그 모진 고난과 역경을 이기고 이 땅에 정착하게 되면서 부터였습니다. 추수감사절 뿐 아니라 범사에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고, 감사하는 말을 하게 될 때 우리의 자녀들과 이웃들이 우리의 감사하는 말을 듣고 좋은 영향력을 받아 함께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축복된 절기가 될 줄로 믿습니다.

 

 

“추수감사절을 지켜라”

성경: 신명기 16:13-17

 

본문 신명기 16장은 구약의 3대 절기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1-8절은 유월절에 관한 규례이며, 9-12절은 칠칠절에 관한 규례입니다. 그리고 13-17절에서는 초막절에 관한 규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미 출애굽기나 레위기에서 3대 절기에 대해 언급한 바 있는데, 모세는 본 장에서 이에 관해 다시 한 번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신명기서 자체의 목적이 그러하듯이, 백성들로 하여금 그 절기를 지킬 때마다 그 속에 담겨 있는 깊은 의미와 교훈을 보다 분명히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추수감사절의 뜻을 깊이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1. 3대 절기

 

(신 16:12)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구약에는 하나님께서 백성들이 지켜야 될 3대 절기를 명하셨는데(출 23:14-17; 34:18-24; 레 23:4-8, 15-21, 34-43), 유월절(무교절), 칠칠절(오순절, 맥추절), 초막절(장막절, 수장절)이 그것입니다.

또한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 중 20세 이상의 모든 어른은 1년에 세 차례씩 반드시 중앙 성소에 올라가 절기를 지켜야 할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민(選民)으로서 지녀야 할 참된 신앙과 행위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신 16:16)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 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무교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날을 기념하는 것이며, 칠칠절(七七節)은 맥추절로서 봄 농사를 통해서 얻은 수확과 풍작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초막절(草幕節)은 모든 가을 농작물의 수확과 과일의 수확을 끝마치고 드리는 절기입니다.

사람들도 일반적으로 각종 일들을 기념하기 위해 공휴일을 정하거나 날을 정하여 축하하고 축제를 베품으로 그 의미를 가슴속에 되새기도록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절기를 하나님께서 강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며, 또한 이스라엘이라는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과 결속을 다지고, 영적 각성의 계기를 삼고자 함입니다.

특별히 본문은 절기를 지킴에 있어서 명심해야 할 사항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절기에 연락하라'(14절)고 했습니다.

 

(신 16:14)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宴樂)하되 이것은 절기에 기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도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해야 한다면, 우리 신약의 성도들은 이 절기를 보내면서 기뻐할 뿐 아니라 '영원히 주안에서 언제나 즐거워하는 것'을 의무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한 집에 잔치가 있을 때, 온 동네 사람들이 와서 식사를 하고 즐거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곳에는 어떤 사람이나, 심지어는 초청 받지 않은 거지라도 와서 식사를 하게 하고 함께 즐거워하며 기쁨을 나눕니다.

우리 자신이 즐거워 할 때 우리는 자녀와 노비와 객과 고아와 과부들 즉 애통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궁핍한 자들에게 쓸 것을 공급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분의 귀천이나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또한 빈부의 차이도 물론하고 이 절기를 지키고 즐거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최고의 기쁜 절기로 지키라고 명하십니다.

 

둘째로, '온전히 즐거워하라'(15절)고 했습니다. 이것은 '마음껏 즐거워하라', '충분히 즐거워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무엇을 받았기 때문에 감사해야 하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 주실 것'을 인하여 감사하라는 것이고, 그 때에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이 됩니다.

(신 16: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모든 일에 더 많은 복을 주실 것을 인하여 온전히 즐거워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감사는 믿음으로 주실 복을 바라보고 확신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믿음의 태도인 것입니다. 감사는 즐거워하는 마음이고 서로를 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상대적 빈곤감을 가질 뿐더러, 끊임없는 탐심을 갖고 만족치 못하고 불평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어느 TV 프로그램에서는 일평생을 병마와 싸워가면서 근근히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소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한 그들을 위해 ARS(자동응답시스템)로 모금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의 삶 가운데 하는 불평이 얼마나 사치스런 것인가를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감사는 복 주실 것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해야 합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화란의 아덴에서 미국 메사추세츠 주의 플리머스란 곳에 도착한 청교도 105명은 한 해의 추수를 마치고 하나님 앞에 감사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감사는 참으로 악조건 속에서였습니다. 그들 중의 거의 반이 험한 환경과 질병으로 인해 희생되었고, 추수물도 그리 풍족치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 앞에 감사의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이것이 오늘날 추수감사주일의 기원이 된 것입니다.

2. 구약 절기의 의미

 

그러면 오늘날의 성도들이 구약의 절기를 같은 방법으로 철저히 준수할 필요가 있는가 아니면 모든 것이 폐지되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물론 이렇게 구약에 나타난 규례들은 모두 폐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까지도 폐지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의미와 정신은 신약 성경에 분명히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화하는 시대 상황에 맞춰서 이것을 새롭게 조명하고 그 의미를 확인, 발전시킬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그 성격에 따라 크게 도덕법(Moral law), 시민법(Civil law), 의식법(Ceremonial law)으로 구분됩니다.

도덕법은 신․구약시대를 막론하고 영구히 지켜야 하는 법인데 십계명이 이에 속합니다. 그리고 시민법은 대부분 그 시대와 상황에 국한하여 주어진 것으로 결혼 제도나 이혼, 금기된 음식 및 생활 습관 그리고 종에 관한 규례 등이 이에 속합니다.

 

마지막으로 의식법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예표론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들로 각종 제사 제도나 절기에 관한 규례가 이에 속합니다. 그런데 구약의 의식법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과 부활, 승천 사건으로 말미암아 대부분 성취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날 그 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들에게는 더 이상 정결법(레 11:1-15:33)이나 이스라엘의 3대 절기와 같은 의식법을 여자적(如字的)으로 지킬 필요는 없으나, 그 안에 있는 속뜻은 신약에 예수님의 정신과 의미로 이어지고 있으며, 그것을 사도 바울은 보다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골 2:16,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月朔)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貶論)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그와 같은 의식법을 통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성결된 삶'의 원리와 정신을 오늘날의 성도들도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이나 십일조 절기 등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날과 절기에 관한 규례는 주의 영광을 위해서 지켜야 함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롬 14:5)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들은 의문(儀文)의 율법이 오늘 우리에게 가르치는 의식법(Ceremonial law)으로서 참된 의미가 무엇인가를 깊이 깨달으며 그 근본 정신을 준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

'폐한다'는 것은 없애 버리는 것으로 '완전케 하는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완전케 하다'는 말은 원래 '가득 채우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깊은 뜻을 드러낸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희미한 그림자적 내용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할 때 그 깊은 뜻이 무엇인지 바로 깨닫게 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목적은 율법이 목적하는 그 온전한 뜻과 속 깊은 내용을 완전히 드러내 보이시기 위해서 입니다.

 

3. 추수 감사절

 

초막절은 40년 광야 생활을 감사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새롭게 하며 가을에 농작물과 과일의 수확을 끝마치고 이를 창고에 저장한 후 7일 동안 지킵니다(출23:16; 34:22). 이 때는 히브리 민간력으로 1월인데, 오늘날의 태양력으로는 9,10월경에 해당됩니다.

'초막절'이라는 단어는 소출을 위하여 포도밭에 초막을 지은 것에서 유래되었고, 또 이 절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였던 사실을 되새기기 위하여 가나안 땅에 새로운 장막을 짓고 그 곳에서 7일 동안 거처하며 지키므로 '장막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또 이 때 모든 곡식이 창고에 수장되어 있으므로, 일명 '수장절'이라고도 불렀습니다(출 23:16; 34:22).

이 때에는 본래 3가지 일을 했습니다. 첫째, 곡식을 거두어들인 다음에 제일 좋은 곡식으로 추수(소득)의 1/10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1/10은 '온전한 십일조'라고 하였습니다(말 3:10). 이것은 자신의 원천적인 소득 중 1/10을 모두 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과된 의무(신 14:22)로서, 충성과 순종의 표시로 신약에서도 폐지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주일과 절기 및 헌물은 우리의 삶과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청지기적인 사고와 함께 구원의 감격과 감사와 기쁨을 동반한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부채가 있는 사람은 추수감사절이 오기 전에 모든 것을 갚고 깨끗한 마음으로 절기를 지켰습니다.

셋째, 가난한 사람과 더불어 곡식을 나누면서 추수 감사절을 보냈습니다.

(신 16:16,17) 너희 중 모든 남자는 일년 삼차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께 보이되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물건을 드릴지니라

"공수로 여호와께 보이지 말라"고 한 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 올 때 하나님을 형식적으로만 섬기지 말고, 진정한 마음으로 섬기라는 뜻입니다. 또 이 말의 의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 년에 3번 절기를 지키는 것에 그치지 말고, 하나님께 진정 감사하는 증거를 보이라는 뜻입니다.

고대 팔레스틴의 풍습에 백성이 왕 앞에 나아갈 때 예물 없이는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뿐 아니라 만왕의 왕이신 것입니다(딤전 6:15). 그러므로 우리가 그 분 앞에 나아갈 때 빈손으로 나아가지 말라는 권면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예물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중심한 신본주의적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출 23:14; 34:23).

(골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결론

 

오늘 우리는 추수감사절을 지키면서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해야 할 지를 상고해 보았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정해진 장소와 시간에 기쁨과 감사로 나아와야 합니다. 또한 주신 복과 은혜를 인하여, 또 앞으로 주실 하나님의 약속의 축복을 바라보며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배에 참석할 때에는 신령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나올 뿐만 아니라, 정성스런 예물을 준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절기를 통해 성도들은 자신이 과거 죄의 장막에 거하며 죄의 종노릇하던 자였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전 가운데 온전히 거하게 된 자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적으로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신 16: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감사하는 생활”

성경: 데살로니가전서 5:16-18

 

오늘은 1년에 한 번씩 지키는 추수감사주일이다. 우리의 삶에서 잃어버린 감사를 다시 찾는 기회이기도 하다. 현대인은 일상생활에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을 많이 잊어버렸다. 감사하다는 말보다는 서로 원망하고 불편하며 비판하고 상처 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하고 살아간다. 그러기에 문명은 더 발달되고 살기는 더 편리해지고 물질적으로는 더 풍요해졌지만 그 내면적인 삶은 더 깡마르고 행복하지는 못하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우리의 가슴을 깊숙이 파고드는 심금을 울려주는 말씀인가?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비결은 항상 삶을 즐겁게 살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감사하며 사는데 있다.

이 세 가지, 항상 기뻐하는 것과 쉬지 않고 기도하는 생활,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은 서로 분리된 별개의 것 같지만 사실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이것은 셋이 아니고 하나이다. 항상 기뻐하는 삶은 항상 감사하는 삶과 일맥상통한다. 우리의 삶에서 기쁨이 사라질 때 감사도 메마르게 된다. 우리의 삶 속에 참된 감사가 없으면 기쁨도 있을 수 없다. 이처럼 기쁨과 감사는 행복한 삶의 양면이요 안과 밖이다. 우리 마음 깊숙이 에서 억제할 수 없는 기쁨이 용솟음 칠 때 우리는 자연히 우리의 삶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쁨과 감사는 결국 기도하는 삶에서 싹튼다. 우리의 기도만이 폭풍 속에서도 고요하고 평화로운 삶을 가능케 하는 기쁨의 유일한 샘터요 감사의 물줄기이다. 우리가 어떻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가? 아니 역경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살아가며, 모든 사건을 기도하는 정성으로 처리하는 사람에게는 손실과 실패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삶의 지혜와 용기가 솟아나는 것이다.

 

유명한 성경주석가 메튜 헨리는 그가 도적을 만났을 때 이런 간증을 하였다.

첫째, 전에는 도적을 만난 일이 없는데 처음으로 도적을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하고, 둘째는, 그들이 내 지갑만 훔쳐가고 내 생명을 빼앗아 가지 않은 것을 감사하며, 셋째, 그들이 비록 내 물건을 가지고 갔지만 별로 많은 것을 잃지 않은 것을 감사하고, 넷째, 내가 도적질을 하지 아니하고 도적을 만난 것을 감사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그는 도적을 만난 손실에서도 감사할 수 있었다. 우리도 좀더 깊이 생각해 보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실패와 손실 속에서도 여러 가지로 감사할 수 있게 된다.

스위스의 격언에는 '항상 노래하기를 원하는 사람만이 노래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감사의 노래를 부르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보다 더 풍성한 감사의 삶이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8세 때 소경이 되었지만 유명한 찬송가 작사자가 된 Fanny Crosby는 이렇게 자신의 신앙을 노래로 읊었다.

'비록 내가 보지 못하지만 아, 나는 얼마나 행복한 영혼인가! 이 세상에서 나는 만족하기를 배웠노니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하는 얼마나 많은 축복을 내가 누리는가! 소경이기에 나는 많은 사람들이 눈물 흘리고 탄식하는 일을 나는 하지 않노라'고 감사했다.

이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감사의 삶을 터득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고백할 수 없는 삶의 간증이다. 사실 그렇다. 눈으로 보기 때문에 갖고 싶어하고 욕심을 부리고 시기질투 하며 범죄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어떠한 환경과 삶의 조건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세상에는 세 종류의 감사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첫째는 물질적인 감사이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인 축복이라든가 이익을 얻었을 때 기뻐하고 감사한다. 어린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사 주면 온 세상을 얻은 듯 기뻐하고 고마워한다. 그러나 그 장난감을 빼앗길 때 온 세상을 잃은 듯이 슬퍼한다. 이것은 어른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종류의 감사를 우리는 물질적 감사 또는 경제적 감사라고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감사를 항상 물질적인 측면에서 측정해 보는 감사이다.

 

둘째는 철학적 감사이다.

철학적 감사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넘어져 다리를 다쳤다. 그러나 일어나 목이 부러지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생각하고 감사했다. 이런 종류의 감사를 철학적 감사 또는 사변적 감사라고 말할 수 있다. 더 큰 손실을 생각하므로 적은 손실에 대해 위로 받으려는 소극적인 감사이다.

 

셋째는 크리스천의 감사이다.

물론 크리스천의 감사에도 위에서 말한 물질적인 감사와 철학적 감사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감사도 포함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감사는 보다 더 깊은 곳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통한 사죄의 은총과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삶 그 자체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삶이기에 그리스도인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바울은 옥중에서도 찬송할 수 있었고 굶주림과 매맞음과 역경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다. 심지어 그는 자기의 연약함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었다. 그는 풍부에서뿐만 아니라 가난과 궁핍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 어떻게 그러한 삶이 가능하였는가? 그것은 그가 삶 자체에 대해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물질적인 것에 감사의 근거를 두면 범사에 감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감사의 근거를 영원한 생명이시오 진리이신 그리스도에게 둘 때 우리는 역경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고 실패와 손실에서도 감사할 수 있다.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감사지수는 높을수록 좋다.”

성경: 에베소서 5:20-21

 

오늘은 일년에 한번씩 지키는 추수감사 주일입니다. 추수감사 주일은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감사하고 사는 사람인가를 한번 점검해 본다는 의미에서 굉장히 뜻이 있는 절기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감사지수가 얼마나 높은 사람인가 하는 것을 한번 살펴보는 것입니다. 감사지수는 높을수록 좋습니다. 감사지수가 낮은 사람일수록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고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매우 강한 어조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여러분이나 저나 이 말씀을 읽으면 제일 먼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범사에'라는 말과 '항상'이라는 말입니다. 감사하라고 하는 말에 '범사'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으면 우리는 왠지 모르게 부담을 느낍니다. 감사하라는 말 앞에 '항상'이라는 수식어가 있으면 기가 죽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범사'라는 말은 어떤 형편에 있든지, 어떤 일을 당하든지 무조건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항상'이라는 말은 시종일관, 어떤 상황을 만나도 변함 없이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강도 높은 의미를 가진 말씀을 읽으면서 가책 받지 아니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아마 그 가운데는 목사인 저 자신이 가장 많은 가책을 받을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를 못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항상 감사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때가 자주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려고 무척 노력을 하고 또 감사도 많이 하지만 이 본문 말씀이 요구하는 선에는 아직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저 자신이 숨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담을 느낍니다. 저같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잘못하면 이런 말씀도 그저 쉽게 이야기하고 넘어갈 수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남의 말 할 때는 쉬운 겁니다. 자신이 지키지 못해도 가르칠 때는 쉬운 겁니다. 그래서 가르치는 사람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1988년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가 한창 전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을 때 중요한 이슈가 사형 폐지론이었다고 합니다. 민주당 후보였던 마이클 듀카키스라는 후보는 사형 폐지론을 주장했습니다. 사형제도는 없애야 된다며 전국을 누비면서 유세를 했습니다. 어느 날 CNN의 토크쇼에 그가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 쇼에는 유명한 버나드 쇼라는 앵커가 담당을 하고 있었습니다. 듀카키스를 앞에 놓고 이 버나드 쇼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사형제도를 폐지하라고 주장 하신다죠?" "네, 그렇습니다." "참 훌륭한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 묻겠습니다. 선생님, 만약에 선생님의 아름다운 그 부인이 괴한에게 끌려가서 강간을 당한 후 살해당했다고 합시다. 나중에 그 범인이 잡혔을 때 선생님은 여전히 사형 제도를 폐지해야 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고서 이 사람은 당황했습니다. 머뭇머뭇하고 말을 더듬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수천 만 명의 시청자들이 보고 있었는데 이 장면에서 그들이 받은 인상이 어떤 것이었겠습니까? 자기와 상관이 없으니까 사형 제도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이지 진짜 자기 일이 되면 그런 소리를 할 사람 아니라는 인상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토크쇼 때문에 그가 대선에서 패배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남의 이야기는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내 이야기를 할 때에는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하고 설교하기는 쉽습니다. "항상 감사하십시오." 하고 얼마든지 큰 소리로 외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좀더 진지하게 이 말씀을 나의 말씀으로 받아들일 때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젊은 나이에 암으로 죽어 가는 아내를 쳐다보는 남편이 과연 감사할 수 있을까요? 오랜 지병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아무리 기도하고 부르짖어도 고쳐주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병은 점점 더 깊어 가는 자신을 보면서 과연 그 입에서 감사가 나올까요? 평생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살아야 될 어린 장애아인 자녀를 갖고 씨름하는 부모가 그 입에서 정말 감사가 나올까요?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이력서를 수십 통 써 가지고 다니면서 취직을 해보려고 하지만 회사에서 면접 한 번 하지 못하고 연거푸 퇴짜를 맞는 젊은이의 입에서 과연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말이 나올까요? 내가 그런 경우를 당했다면 정말 감사할 수 있을까요? 저나 여러분이나 이런 입장에서 이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이 말씀은 현실성이 없습니다. 비현실적인 말씀입니다. 이상론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은 적당히 보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태도로 이 말씀을 넘겨도 괜찮을까요?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자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을 놓고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꼭 깨달아야 됩니다. 왜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지, 왜 항상 감사하라고 하시는지 이 두 가지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첫째로,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왜 범사에 감사해야 합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이름으로'라는 말을 '때문에'로 바꾸어도 전혀 잘못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감사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지금 말씀하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우리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범사에 항상 감사하라고 명령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이것은 너무 비현실적인 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변명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감사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을 한번 여러분 마음에 되새겨 보십시오. 그분이 누굽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나의 죄를 짊어지고 저 무지하고 잔인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흘만에 그를 죽음에서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그의 옷자락을 믿음으로 붙드는 사람은 어떤 죄를 범했든지 어떤 과거를 가졌든지 하나님께서 그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세례 받으시는 형제 자매 여러분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공로 때문에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어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이 말은 "내가 너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노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과 더불어 살 수 있는 영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라는 기가 막힌 신분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이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그 예수님을 우리는 마음에 모시고 삽니다. 예수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 예수님 한 분 때문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이 가지고 즐기는 것이 나에게 없다 할 지라도 나에게 예수님이 계신다는 그 이유 하나 만으로도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감사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설혹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다고 할 지라도 예수님 한 분만 소유하고 그분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진정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행복을 찾았다면 그 사람은 언제든지 감사할 수 있고 어떤 조건에서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찬송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런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이 말씀이 나와 별로 관계가 없다고 밀치면 안됩니다. 만약 지금까지 예수님 때문에 범사에 항상 감사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면 옥 목사가 가슴에 가책을 받고 여러분에게 고백하듯이 여러분들도 하나님 앞에 고백하고 이것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시고 고쳐야 됩니다.

 

우리나라에 영감 있는 시인이 있습니다. 송명희 여사를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뇌성마비로 한번도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로 온 몸이 비비 꼬여서, 말 한마디를 하려고 하면 죽다 살아나는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 해야 할 정도로 일급 장애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얼마나 많은 시를 썼는지 모릅니다. 그 시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가슴에 저미어 오는 감동이 있지 않습니까? 그가 쓴 시 가운데 '나'라는 시가 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못하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보는 것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가만히 음미를 해 보십시오. 무엇을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감격하고 있는 것입니까? 뇌성마비로서 남이 가진 것의 90%를 못 가진 자매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마음을 가득히 채웠습니다. 그러자 무엇이라고 감사합니까? 남이 갖지 못한 것 내게 있고 내가 가진 것 남이 없는 것을 비교하면서 오히려 '주님, 나는 세상 사람이 가지고 즐기는 것 없어도 예수님 한 분 그분의 사랑을 받고 그분을 눈으로 보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 나는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항상 감사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아름다운 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런 수준에 저 자신이 도달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저만이 아닙니다. 제가 사랑하는 여러분들 모두가 이런 수준에까지 올라가기를 원합니다.

많이 가졌다고 감사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건강한 사람 중에 감사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자기 뜻대로 다 소원성취 하는 사람 입에서 감사가 나오는 것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저는 수만 명을 상대하고 삽니다. 없습니다. 진정한 감사를 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습니다.

진짜 감사는 누구에게서 나오는지 아십니까? 예수님을 아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모시면 진정한 감사가 나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때문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감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명령하시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명령하실 때에는 그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뒤따라 보내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하나님 저는 못합니다." "잔소리하지 말고 범사에 감사해. 내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도록 은혜를 줄게." 순종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항상 감사하라." "어떻게 항상 감사합니까?" "할 수 있어. 내가 네게 능력을 준다."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변명을 하면 안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결론을 하나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것만큼 믿습니다. 누구를 믿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앞길이 막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옵니까? "하나님, 제 앞길 캄캄하지만 주님이 제 앞에 있는 구름을 걷어내고 어둠을 쫓아 주실 날이 올 줄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시니 이런 고난을 주시는 줄로 압니다.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감사하는 사람의 믿음은 알아줘야 합니다. 감사하는 것만큼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어느 정도 믿고 계십니까? 감사하는 것만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하는 것만큼 행복할 수 있습니다. 100평 짜리 아파트에 살아도 감사가 없으면 절대로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스무평 짜리 아파트에 살아도 눈만 뜨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그 입에서 찬송이 나올 정도로 주님 앞에 감사하는 심령을 가지면 그 사람은 행복한 것입니다. 그 사람의 행복을 누가 빼앗아갈 수 있습니까?

우리는 감사하는 것만큼 다릅니다. 누구하고 다릅니까? 세상 사람하고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입만 열면 불평이 심합니다. 불평은 하지 않을 지 모르지만 감사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입에서 계속 감사가 나옴으로써 내가 그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감사가 없습니까? 그러면 그들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감사하는 것만큼 강합니다. 우리 교회 안에 천성적인 장애를 안고 나온 자녀를 가진 부모들이 여러 명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어떤 자매의 말을 들으면서 저 자신이 자주 도전을 받습니다.

"목사님 우리 애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많은 복을 받고 있는지 아십니까?" 사실 말이 아닐 것입니다. '복은 무슨 복인가?' 우리는 당장 그렇게 느낍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우리 애 때문에 가정이 얼마나 화목한지 모릅니다. 우리 애 때문에 우리 아빠가 예수 믿고 돌아왔습니다. 아마 애가 저러지 않았으면 아빠는 예수 안 믿었을 것입니다. 우리 애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잘 살아도 교만하지 않을 수 있게 됐습니다. 우리 애 때문에 세상에서 천대받고 인정받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 고통 당하는 사람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이 애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주신 복이 보통 많은 게 아닙니다."

여러분 이 사람만큼 강한 사람이 천하에 어디 있습니까? 누가 이 사람을 꺾을 수 있습니까? 아무도 꺾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감사지수는 높을수록 좋습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의 믿음은 더 좋아집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더 행복해 집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세상 사람 앞에 매력적인 존재가 됩니다. 감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더 강해집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오늘부터 돌아가셔서 의도적으로 감사하십시오. '나는 예수님 믿는 사람이다. 예수님 때문에 나는 무조건 감사할 수 있어.' 하면서 감사하면, 지금까지 불평하던 것을 감사하면, 지금까지 남을 원망하던 것을 거꾸로 뒤집어서 감사하면, 지금까지 만족하지 못하던 것을 감사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날보고 범사에 항상 감사하라고 하셨어. 그러니까 나는 감사해야 돼. 아버지에게 순종해야 돼.' 하면서 어떤 형편에서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감사할 것들을 찾아 하나님 앞에 감사하도록 노력하십시오. 그럴 때 우리의 믿음이 좋아집니다. 우리가 행복해집니다. 우리가 강해집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에게 매력을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가 이런 멋있는 자녀가 되기를 소원하고 계십니다.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라." 아멘.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시편 136:1-4

 

오늘 이 시간에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이러한 제목으로 같이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한 번 따라하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다시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자."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주일은 잔치 날입니다. 더 많이 감사하는 날입니다. 잃어버린 감사를 회복하는 날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20세기 마지막 추수감사절입니다. 또 2천년대의 첫 번째 추수감사절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바쁜 일상으로 인해서 감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감사할 일이 수없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바쁜 일에 좇기다 보면 감사를 잊어먹고 있습니다. 성도가 감사를 잊어먹는 것은 하나님을 잊어먹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가 감사를 잊어먹은 것은 하나님을 잊어먹은 것이요, 예수님을 놓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해마다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해서 잃어버린 감사가 회복되고, 잃어버린 신앙을 다시 회복하는 아주 좋은 기회를 우리가 만들어야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감사는 우리가 누구에게, 무엇을, 왜 감사해야 하는지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이 "감사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은 두 번 나옵니다. 첫 번째 감사는 고라신과 벳새다 고을에서였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0절로 26절 말씀에 그 말씀의 내용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가장 많은 권능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에게 더 많은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실패한 것입니다. 속상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었기에 감사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장 25절, 26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환경이 어려워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감사할 일이다, 그 말씀인 것입니다.

 

또 두 번째 감사는 나사로가 죽어서 무덤에 있을 때입니다(요 11:41). 깊은 슬픔과 절망이 사람들을 감싸고 있을 때 예수님은 감사했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1장 40절로 41절에서 이렇게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요, 구원받은 성도는 구원받지 않은 세상 사람들과 감사하는 조건이 달라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좋을 때, 감사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할 때, 언제 감사했느냐고 하면서 불평해버리고 맙니다. 원망해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는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좋을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뜻이 이루어질 때만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시니까, 나는 하나님 아들이 되었으니까, 예수님이 구세주이시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나에게 있으니까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 다윗은 시편 37편 4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 우리가 생각할 때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성령과 말씀으로 우리를 돌보심에 우리는 또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고 순종할 말씀을 주신 것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을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또 받을 말씀이 있습니다.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 우리가 들을 수 있다는 것, 우리가 손으로 잡을 수 있다는 것, 이것만 가지고도 얼마나 얼마나 감사한 지 모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하는데,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일까,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산 예배, 산 제물 되는 것

 

첫째로, 산 예배드리고, 산 제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에 감사한다는 것은 산 예배, 역동적인 예배, 성령 충만한 예배, 말씀 충만한 예배. 예배를 산 예배로 드릴 때,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한다, 그 말인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한다면,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산 제사로 드려져야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예배를 드리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라"(요 4:24) 그랬습니다. 그렇게 드릴 때, 주님이 찾아오신다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드려 "예배의 제사"를 드리고, 우리의 시간과 물질을 드려 "봉사의 제사"를 드려야 된다, 그 말인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몸과 마음을 드려 "산 제사, 산 예배"로 드리고, 시간과 물질을 드려서 "봉사의 산제사"를 드려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 그 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감사로 드려지는 예배와 봉사의 산 제사는 기적을 산출할 수 있습니다. 사복음서에 보면, 오병이어의 사건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4복음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예수님의 감사 기도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한 소년의 정성어린 "감사의 헌신"이 그 기적을 낳게 했습니다. 거기 모인 사람 중 남자만 오천명입니다. 부녀자까지 수만 명이 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 빌립에게 "저들에게 먹을 것을 갖다가 주라"고 했습니다. 그 때, 빌립은 계산했습니다. "예수님, 이 많은 사람들을 먹이려면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필요합니다." 그랬습니다. "장정 하루 품삯을 1데나리온으로 본다면, 이백 명이 일한 것을 가져야 떡을 먹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광야에서, 또 황혼 저녁에 그런 돈도 없고,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요 6:7).

그러나 그 제자 안드레는 먹을 것을 찾으러 갔습니다. 어린 소년이 가져온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를 발견했습니다. 어린 소년에게 말을 합니다. "소년아, 우리 예수님이 이 많은 사람들을 다 먹이라고 말씀하신다. 너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를 나에게 주어서 이것을 예수님께 갖다드리면, 이 많은 사람들이 다 먹을 수 있단다." 그 소년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마 고민했을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나 점심 먹으라고 싸 주신 도시락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인데, 예수님 말씀을 듣다가 먹을 시간이 없어서 먹지 못했는데, 그런데 이것을 먹어야 허기를 면하고 배를 채울 수 있고 힘을 찾을 수 있고, 그래서 우리 집까지, 먼 집까지 갈 수가 있는데..." 하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컸어요.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컸어요. 예수님의 기적을 그는 똑똑하게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때 그 소년이 헌신하는 겁니다. "그래요. 내가 이것을 먹어야 허기를 채울 수 있어요. 이것을 먹어야 내가 기운을 차릴 수 있어요. 이것을 먹어야 내가 집에 갈 수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께 드리는 일이라면, 예수님의 사역을 위해서 드리는 일이라면, 내가 내놓을게요. 아저씨 가져가세요. 가져가세요." 어린 소년은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를 내놓는 헌신의 제사, 헌신의 감사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받으신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먹여야 하는 사람들이 남자만 오천명, 부녀자까지 수만명. 어떻게 생각하면 "야! 제자 안드레야, 가져오려면 많이 가져오고 적게 가져오려면 가져오지 말지, 나만 왜 괴롭게 하느냐?"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먹여야 할 사람이 수만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습니다. 보리떡 다섯 덩어리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우러러, "하늘을 우러러 축사했다" 그랬습니다. 그 축사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감사"의 의미가 있습니다(요 6:11의 '축사'란 헬라어 '유카리스테오'로 '감사하다'는 말). 먹어야 할 사람은 남자만 오천명, 부녀자까지 수만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고작 물고기 두 마리, 보리떡 다섯 덩어리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가지고 불평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책망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습니다. 감사하셨습니다. 떼어 주었더니 남자만 오천명, 부녀자까지 수만명이 배불리, 원대로 먹게 하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고 했습니다. 이 기적을 믿으시면 "아멘"하겠습니다. 이 기적이 여러분의 삶 속에도 그대로 일어나기를 원하시면 "아멘"하겠습니다.

 

둘째,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것

 

두 번째,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 구원받은 성도가, 은혜

받은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야 됩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바울이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 말씀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며 살아가야 합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자녀들은 그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현대인의 성경).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3장 20절입니다. {자녀들은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또 그 뿐이 아닙니다. 구약성경 레위기 19장 32절에 보면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센 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부모와 어른들을 통해 생명을 탄생하게 합니다. 출생하게 합니다. 또 그 뿐이 아닙니다. 태어난 생명을 유지하고, 자라게 하고, 보존합니다. 하나님이 아담 한 사람만은 직접 흙을 가지고 빚으셨습니다. 그 코에 생기를 '후~' 불어넣어서 사람되게 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하와를 만들 때는 그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고,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인인 하와를 만들어 아담에게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하나님은 단 한사람도 직접 사람을 만들지 아니하셨습니다. 자기 아버지와 자기 어머니를 통해서 사람을 이 땅에 태어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자 그러면,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를 낳게 하셨습니다. 그럼 우리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을 낳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 혼자 일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하나님이 함께 일하셔서 우리를 태어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럼으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저나 여러분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실 때, 여러분의 아버지가 없었다면 여러분의 어머니가 없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이 땅에 낳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일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지 않는 것은 생명창조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가인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분명 가인과 아벨에게 예배에 대해서 가르쳤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라고 가르쳐 주셨을 것입니다. 아벨은 그 아버지, 어머니가 가르쳐 준 그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아버지 아담, 어머니 하와의 말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불순종과 불공경은 하나님 앞에 잘못된 예배를 드리고, 형제를 살인하는 살인자의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며 사는 길이기도 한 것입니다.

 

한국은 오천년 역사를 이어온 나라입니다. 작은 나라입니다. 지하자원도 없는 나라입니다. 외침도 많았던 나라입니다. 내란도 많았던 나라입니다. 그럼에도 오천년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이 땅에 종교가 들어오기 전에, 유교가 들어오기 전에, 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기독교도 들어오기 전에 한국, 우리 민족은 효 정신이 있었습니다. 가족제도가 있었습니다. 이 효 정신과 가족제도가 이 작은 나라, 힘없는 나라, 이 선한 나라, 외침도 많이 받은 나라, 오천년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그런데 서구문화가 들어오면서 안타깝게도 효 정신이 죽었습니다. 가족제도가 파괴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기독교 신앙으로 착각했습니다. 서구문화가 몽땅 다 성경문화는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효 정신도 버리고, 가족제도도 버렸습니다. 그것이 "현대인"인 것처럼 알았습니다. 그것이 "지식인"인 것처럼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다시 보고, 다시 보니까 성경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를 섬기는 우리가 할 일이 뭐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로 우리가 추수감사 주일을 맞아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한다면, 그 감사하는 것 중에 우리가 감사할 것이 뭐냐? 그 감사의 조건이 무엇이냐? 감사하는 행위가 무엇이냐?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하나님 주신 은혜, 하나님 주신 사랑, 하나님 주신 복을 빼앗기지 말고, 누리고 살아가는 여러분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같이 사는 이웃에게 감사하며 사는 것

그 다음에 세 번째입니다. 같이 사는 이웃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같이 사는 이웃에게 감사하며 사는 것, 같이 사는 이웃에게 감사하며 사는 것.

그렇습니다. 이웃을 향한 감사는 그 이웃을 통해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웃을 주셔서 영혼구원의 열매와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불신 이웃이 있다면, 아직 예수 믿지 않는 이웃이 있다면, 이는 전도의 상급을 위해 하나님이 붙이신 것이다. 그렇게 알아야 됩니다. 만약 주위에 나를 괴롭히는 이웃이 있다면, 그는 나의 인격과 삶을 연단 시키는 "가시"(고후 12:7)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시편을 많이 기록한 다윗, 목동이 이스라엘 왕이 된 다윗,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다윗, 많은 시편을 기록한 다윗, 그 많은 시편은 그가 왕이 되어서 호위호식 하면서 왕궁에 있을 때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가 광야에서 연단 받을 때, 고통 당할 때, 아픔을 당할 때, 시험을 당할 때, 괴로움을 당할 때 지은 시편이 다 그 은혜로운 시편들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웃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이웃을 향한 원망은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웃이 나에게 아픔을 준다면, 고통을 준다면, 모난 나의 삶을 부드러운 삶으로, 둥근 삶으로, 원만한 사람으로, 은혜로운 사람으로, 성령의 사람으로, 말씀의 사람으로, 예수 사람으로 바꾸어주는 것으로 아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이 말합니다. 출애굽기 16장 8절입니다. {모세가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의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니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우리가 사람에게 원망하는 것은, 그것은 곧 하나님께 원망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다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다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사람을 사랑해야 됩니다. 그럼으로 우리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마 22:39) 그랬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은 무엇이냐? 같이 사는 이웃에게 감사하며 살아가는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이다, 그 말인 것입니다.

 

넷째, 어려움 당하는 이들을 돕는 것

 

그 다음 네 번째입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을 돕는 겁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을 돕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축제의 특징은 모든 이들이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다 그랬습니다. 특히 추수감사 절기에, 특히 감사절기 때는 어려움 당하는 이들과 함께 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너만 먹지말고, 네 가정만 먹지말고,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과 함께 먹어라. 함께 즐겨라. 함께 잔치를 하라"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16장 11절입니다.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약한 자들을 위로하고 돕도록 하셨습니다. 왜 하나님이 나에게 건강을 주셨습니까? 건강하지 못한 사람을 도와주라고. 왜 나에게 물질을 주셨습니까? 물질이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라고. 왜 나에게 은사와 영적인 능력을 주셨습니까? 전도하고, 그들을 신앙인으로 잘 돌보아주고, 보살펴 주라고. 지금 이 땅에 수많은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업하다가 부도나서 어려움을 당하는, 직장에서 일하다가 직장을 잃어버린 실업자. 그 뿐이 아닙니다. 아버지, 어머니 없이 가족을 이끌고 나가는 소년 소녀 가장이 있습니다. 고아가 있습니다. 과부가 있습니다. 그리고 생활보호 대상자, 자녀 없는 독거 노인. 자녀가 있어도 부모를 돌보지 못해 생긴 독거 노인이 있습니다. 또 그 뿐이 아닙니다. 외국에서 한국에 가면, 돈 좀 벌어보겠다고 왔다가 직장을 잃어버렸거나 직장에서 노동을 착취당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외국 근로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다 우리의 도움을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의 도움의 손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도움은 내가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필요할 때 주는 것이 도움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는 것이 도움입니다. 외로운 사람을 위로해 주는 것이 도움입니다. 배부른 사람에게 내 밥이 남으니까 좀 먹을래? 아닙니다. 돈이 많은 사람에게 돈 자랑하기 위해서 내가 좀 사줄게 먹을래? 그것이 아닙니다. 도와준다는 것은 뭐냐? 내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상대가 필요해서 주는 것. 이것이 도와주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처럼 어려운 중에서도 자원하여 돕는 것이 참된 사랑이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 2절로 3절입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힘들어 할 뿐만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또 구약에서 잠언서 11장 24절로 25절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그것이 뭐냐구요? 어려움을 당하는 이들을 돕는 겁니다.

 

다섯째, 자연을 잘 돌보는 것

 

다섯 번째입니다. 자연을 잘 돌보는 것, 자연을 잘 돌보는 것. 그렇습니다. 자연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또 그 은혜의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뭐냐구요? 에덴동산을 지어서 아담에게 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증거가 뭐냐구요? 이 삼라만상을 다 지으셔서 인간이 생활할 수 있도록, 마음대로 공기를 마시며, 햇빛을 받으며, 물을 먹으면서, 꺼지지 않는 땅에서, 땅에서 나오는 생물로 말미암아 먹고살게 만들어 주신 것이,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대한 사랑의 증거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우리 예수님으로 십자가에 피 흘려 죽게 하신 것만이 아닙니다. 이 자연을 통해서 우리 하나님은 수도 없이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어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난 일년간도 자연을 통해서 우리를 먹이셨습니다. 또 입히셨습니다. 또 돌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연을 파괴한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거부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는 자연을 보존합니다. 자연을 아낍니다. 자연을 돌봅니다. 또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도록 돌보아 주는 이런 삶. 이것이 뭐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연을 지으신 분은 하나님. 자연의 주인은 하나님. 자연을 섭리하시는 분도 하나님. 자연을 통해서 우리에게 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분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서 12장 1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의인이 누구냐구요? 하나님이 지으신 생명이 있는 것. 나무나 풀이나 새들이나 짐승이나 어족이나, 이런 것들을 돌아보는 것이 의인이다, 그랬습니다. 악인은 누구냐구요? 그런 것에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고, 잔인하게 사는 삶, 이것이 악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 하더라도 우리가 자연을 보호해야 의인답게 살아가는 겁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 하더라도 자연을 보호하지 아니하고, 자연을 훼손하고, 그것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잔인하게 죽여버린다면, 꺾어버린다면, 못살게 만든다면, 그것에 대해 성경은 말을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악인이다.

 

오늘은 20세기 마지막 추수감사주일입니다. 21세기를 맞이하는 문턱에서 맞는 2000년에 첫 번째로 맞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감사는 은혜를 받는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감사는 은혜를 받는 그릇."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으려면, 우리는 감사로 그릇을 만들 수 있습니다. 감사가 없으면, 받은 은혜가 다 쏟아집니다. 엎어집니다. 빼앗깁니다. 잃어버립니다. 우리 모두 선하시고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존귀와 찬양을 돌려드리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시편기자가 말을 합니다. 시편 136편 1절입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 모두 다 20세기 마지막 추수감사 주일을 맞이해서 마음껏, 힘껏, 재능껏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합시다. 사람들에게도 감사합시다. 자연에게도 감사합시다.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사랑과 축복을 마음껏 누리면서 행복하고, 즐겁게, 복되게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날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은혜 베풀어주시는 주님, 고맙습니다. 진실로 오늘 20세기 마지막 추수감사 주일, 2000년대 맞아서 첫 번째 맞는 추수감사 주일,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이 귀한 음성을 듣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감사함으로 은혜를 담는 그릇들을 다 준비하게 하여 주옵소서. 받은 은혜를 누리며, 베풀며, 주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어지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이 사람의 감사”

누가복음 19:1-10

 

이번 달의 가이드 포스트에 보면 Pay a Pilgrim's Thank 라고 하는 제목으로 간단한 Article이 실려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의 질문이 있습니다. "신대륙에 도착한 첫 해에 미국의 청교도들은 어떻게 살아남았는가?" 라고 제목을 걸고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그토록 감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가. 평안해서가 아닙니다. 성공해서도 아닙니다.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감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가? 여러분, 감사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진정한 감사, 감격하고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그런 감격은 사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번영과 자유와 무슨 형통함과 성공과 영광, 거기에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병든 곳에 오히려 가난한 곳에 아주 절박한 곳에 그 고통 중에 진정한 감사가 있습니다.

 

저는 종종 식탁에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제가 음식을 먹을 때마다 내 일생 제일 음식으로 감사했던 때, 제일 큰 감사를 드렸을 때가 언제인가, 그 때 생각을 늘 합니다. 그래 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밥투정은 안 합니다. 왜요? 그때의 사정이 있기 때문이에요. 제가 혼자서 피난을 나왔을 때, 1951년 정월입니다. 너무 어렵고 춥고 배고프고 괴로운데 혼자서 지나가다가 거기에 고구마 굽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고구마 냄새가 코에 싹 들어오니까요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더라구요. 도저히. 그래서 가지고 있던 시계, 이 팔목시계를 풀어서 주었습니다. 그래 돈은 뭐 통하지 않는 때니까. 이거를 주고 고구마를 달라고 했더니 고구마 네 개를 주었어요. 요새 팔목 시계는 흔하지만 그 때는요 온 동리에 나밖에 없었어요. 팔목시계 가진 사람이. 그런데 이 귀중한 시계를 풀어주고 고구마 네 개를 손에 들었는데 서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릴 때 눈물이 똑똑똑똑 떨어지는데요 그 때에 감사했던 그 마음은 일생동안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아무리 좋은 음식 아무리 좋은 여건에 있어도 그 때의 그 감사에 비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이 뜻을 알 것 같습니다. 저들은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그토록 감사하지 않고 견디지 못했던가. 그들은 먼저 건강을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1620년 12월, 추운 때입니다. 긴 긴 항해 중에 백열명으로 출발한 사람이 배 안에서 다 죽었습니다. 괴혈병과 각종 바이러스 병으로 죽고 48명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절반이 살아남았습니다. 살아남은 데 대한 감사. 그리고 이만큼 건강을 지킨 데 대한 감사. 이것이 첫째 감사였습니다. 또한 의복과 거처가 문제입니다. 낯선 곳에 도착했는데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여기서 그들은 나무를 찍어서 오두막, 통나무집 오두막을 일곱 채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통나무집에 들어가서 저들은 불을 피워 놓고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이것이 감사절입니다. 또한 음식으로 말하면 Plymouth 라고 하는 곳에 도착은 했지만 낯선 땅에 아무 것도 없는데 저들이 가지고 온 종자 몇 가지, 그 중에 보리와 밀을 심어보았지만은 토양이 달라서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서 그들의 덕으로, 덕분으로 옥수수를 얼마 추수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 옥수수를 갖다 놓고 그리고 들에 뛰어 다니는 칠면조를 잡아서 그걸 구워놓고 감사절을 드렸습니다. 이 음식을 놓고, 그래서 지금도 미국에 가서 지내면 Thanksgiving 이 때쯤 되면은요 어느 식당 어느 가정이든지 온통 칠면조입니다. 아무리 먹어봐도 칠면조는 별 맛 없더라구요. 그래 나도 나만 그런가 해서 물어봤어요. 미국 학생들한테 "너희들 칠면조 맛있냐?" 그러니까 맛없데요. "닭하고 칠면조, 어느 쪽이 맛있냐?" 내가 여러 사람한테 물어 봤어요. "아 거 닭이 맛있지." 그럼 왜 칠면조를 먹느냐. 우리조상들이 이것을 놓고 하나님께 감사했기 때문이다. 그 전통을 따라서 그렇게 먹는 거라 그래요. 여러분, 참된 감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가장 어렵고 절박한 바로 거기에서 눈물로 고난 중에 진실한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Courage to Be 라고 하는 그 유명한 책에서 이렇게 역사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고대인의 불행은 숙명과 죽음의 문제에서 왔다. 모든 것을 숙명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어떤 고난도 팔자요, 숙명이요, 운명이라고 받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운명에 저항할 생각을 못했어요. 그대로 그 많은 고생을 치르며 수 천년을 살아오게 됩니다. 중세기 사람들의 불행은 죄와 벌에 있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은 저주다. 죄에 내리시는 신의 저주다. 죄와 벌! 그 무서운 심판 앞에서 벌벌 떨면서 흑사병이 돌아도 저주다. 전염병이 돌아도 저주다. 홍수가 나도 저주다. 이렇게 몰아치는 무서운 저주 속에서 저들은 헤어나지 못하고 고생을 했습니다. 현대인은 그 불행의 원인이 생이 무의미에서 비롯된다고 신학자는 말합니다. 무의미함.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배고픈 것도 아니에요. 집이 없는 것도 아니에요. 왜 그렇게 걱정이 많습니까? 왜 그렇게 고독해 하는 것입니까? 왜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겁니까? 왜 감사가 없고 왜 감격이 없습니까? 그만하면 감사 감격할 만도 한데. 뭐 때문이냐구요? 끝없는 욕심 때문이요. 더 가지려는 마음이 저 앞에 가 있기 때문에 요것 가지고는 못 살아요. 또 교만하기 때문이요 하나님을 부인하는 불신앙 때문입니다. 어느 사이에 인간의 생각과 철학이 세속화되면서 사람은 불행으로 치닫기 시작을 했습니다. 목적과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그런고로 고마운 마음도 감사한 마음도 그 고마움에 따르는 행복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 나타난 이 사람 삭개오는 특별한 감사를 드렸다고 생각됩니다. 그는 현대인의 이미지를 가진 독특한 성격의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삭개오라는 사람. 우리가 잘 아는 얘기입니다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 그 당시로 돌아가 생각해 보십시다. 그는 세리장입니다. 로마 사람이 유대나라만 아니라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을 때입니다. 로마를 떠나서 살 수 없구요. 로마를 피해서 살수가 없어요. 로마 권력이 온 세계를 지배하는 때에 유대나라 역시 로마 권력 하에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때에 정치적 상황에서 대세를 잘 이용한 사람이요. 세상을 잘 요리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성공한 사람입니다. 세속적으로는 그는 세리의 장이요 권력자요 요새 말로 실세입니다. 실세올시다. 그리고 부자입니다. 로마를 대표한 총독 이하 군인들은 이 세리장 같은 사람을 가장 귀중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도움을 얻지 못하면 정치도 못합니다. 로마 세력도 소용없습니다. 이 세리장이라는 이 사람은 부자요. 누구든지 어느 군인이든지 마을에 들어서면 세리장 앞에 무릎을 꿇게 되어있어요. 왜요? 그는 실세요 그는 부자이기 때문이에요. 그는 자기보다 더 높은 권력자하고 친하기 때문이에요. 이게 세리입니다. 세상적으로는 성공한 사람이에요. 권력 있죠. 부귀하죠. 돈 있지요. 자 그런데 이 사람들의 고민이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적 고민입니다.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등진 것 같은, 죄를 짓고 사는 것 같은 그런 고민이 있구요. 또 하나는 많은 사람들이 반 민족주의자라고 저를 부르고 있습니다. 로마 사람을 위해 일하고 있으니까. 또 그리고 로마 사람의 힘을 빌어서 자기 권력과 자기 부를 취하고 있으니까 그 마음속에 갈등이 있습니다. 민족을 배반한 고통이 있습니다. 적어도 이만한 고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나름의 독특한 의식입니다.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왜요? 이대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현실대로는 안 된다는 거야. 이대로 세상이 오래갈 수는 없다. 어서 속히 메시아가 와서 새로운 질서, 새로운 평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주기를 바라는 그런 Messianic Expectation, 메시아 대망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그는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습니다. 더 큰 부자가 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더 큰 세력을 얻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더 잘 살기 위해서 예수를 만나러 갔나겠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 누구처럼 병 고치려고 예수를 만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가 예수를 만나려하는 생각은 독특합니다. 왜요? 그는 소문에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좋지 못한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는 별명을 가진 분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 열둘밖에 없는데 그 중에 하나가 마태입니다. 세관에 앉은 현장에서 불러서 제자를 삼았어요. 도대체 어떻게 어떤 분이면 저렇게 온 세계 사람들이 다 천대하고 온 이스라엘이 미워하는 죄인의 대명사로 부르고 있는 세리를 불러서 제자를 삼았단 말인가? 세리를 제자 삼은 그 사람이 누구냐? 세리의 친구라고 하는 말을 들으면서까지 세리를 사랑한 그분이 누구냐고. 그런 분이 누구냐고 그 분을 보고 싶었던 겁니다. 자기도 세리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는 키가 작았어요. 많은 사람이 옹위해 가지고 밀어닥치는데 도저히 예수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 그는 뭐 체면이고 뭐고 불구하고 뽕나무로 기어올라갔어요. 그리고 지나가는 일행 속에 있는 예수님을 내려다보게 됩니다. 그는 이 은총적 기회를 놓칠 수가 없어요. 이 한 번 있는 일생에 딱 한 번 있는 이 중요한 시간을 놓칠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가 기대한 것이 무엇입니까? 뽕나무에서 예수님을 멀리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타난 상황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그를 어떻게 대하셨나 보세요. "우러러보시고" 그랬어요. 쳐다보았어요. 오히려 이상하게 됐지요. 삭개오가 예수님을 우러러 본 게 아니라 예수님이 삭개오를 보게 됐지요. 보셨다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Personally, 개별적으로 개인적으로 보아주신 거예요. 얼굴과 얼굴, 눈과 눈이 마주치는 시간입니다. 이게 아주 소중한 시간입니다. 많은 사람을 보듯이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에요. 지명하여 한 사람을 집중적으로 보신거예요. 삭개오를 보신 거예요. 즉 나를 보셨단 말입니다.

또 하나는 삭개오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여기에 주고받는 말이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충분히 알았습니다. 왜 저 사람이 뽕나무에 올라갔는지, 왜 나를 보려고 하는지, 왜 저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지 그 마음을 예수님은 읽으셨습니다. 그의 고민, 그의 깊은 관심, 그의 궁극적 관심을 예수님은 읽으셨습니다. 다 아셨어요. 무슨 긴말이 필요합니까? 이만하면 알지. 충분히 알았죠. 예수님은 삭개오의 마음을 다 알아주셨습니다. 그의 말을 통하지 않고 그의 행동을 통해서 그의 깊은 고민을 다 알아주셨습니다. 여기에 감격하고 있는 거예요.

 

또 한 가지는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예수님께서 하신 첫 번째 말씀입니다. 여기에 긴긴 설명이 없습니다. 다만,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할 것이라. 세리의 집입니다. 온 유대 사람이 상종하지도 않고 인사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거지도 세리의 돈은 받지 않았답니다. 받았다가도 도로 던져 버렸답니다. 이렇게 더럽게 취급하는 세리의 집에 예수님은 오늘 밤 너희 집에서 자겠다. 원 세상에 이런 고마움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가장 큰사랑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게 물질을 주시는 분입니까? 내게 지식을 주는 분입니까? 가장 소중한 것은 내 의를 주시는 것입니다. 의. 의인이 죄인의 집에 오시고 메시아가 죄인의 집에 오심으로써 그의 신분을 바꾸어 놓는 시간입니다. 이것이 너무 감사한 것이요.

이조 시대에 있었던 이런 일화가 전해집니다. 난리가 나서 왕이 피난을 가게 됩니다. 변장을 하고 신하들과 같이 몰래 도망을 해서 어느 시골로 숨어들었습니다. 그 촌부의 집에서 누군지는 모르지만 점잖은 어른들이 몇일 유하시겠다고 해서 그대로 묻지도 않고 정성껏 참 잘 대접을 했더랍니다. 대접을 받고 왕은 상황이 바뀌어서 환궁을 하게 되었습니다. 환궁한 다음에 생각하니 그 촌부가 너무 고마워요. 이 난리를 피하게 해 주었느니 말이요. 그래서 그를 불러들였습니다. 아 불러들이고 보니까 아이고, 이서방이라고 알았는데 이제 보니 지체 높은 왕이에요. 그 왕은 그에게 말하기를 "자네가 나를 이렇게 도와주었으니 무슨 소원이든지 말하게. 딱 하나의 소원을 들어주마." 뭐 땅이든 벼슬이든 뭐든지. 그럴 때 이 천부는 "아니에요. 저는 바랄 것이 아무 것도 없어요. 며칠 후에 제 환갑날이 되는데 애들과 함께 환갑 잔치를 하게 되는데 환갑잔치에 한 번 저희 집에 와 주시지요." 이제 왕이 거절하게 됐습니까? "그러지." 왕이 천부의 환갑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 요새나 옛날이나 마찬가지요, 얼마나 많은 뇌물이 들어왔는지 그냥 그냥 부자가 됐답니다. 왕이 우리 집에 한 번 오신다. 한 번 모신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 것이냐? 내 신분이 달라지는 것이에요. 내 의가 달라지는 것, 사람이 달라지는 시간이에요 이 시간은. 예수님이 우리 집에 오셨다, 굉장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하였느니라." 임마누엘입니다.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완전한 의롭다함을 얻는 엄청난 복을 내리십니다.

 

이제 보십시다. 이 사람의 감사가 무엇입니까? 삭개오는 바로 이 시간, 이 은혜 가운데서 첫째가 "즐거워했다" 그랬어요. 기뻐해야 됩니다. 감사는 기뻐하는데 있는 거예요. 기쁨이 없는 감사란 감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기쁜 얼굴로 고맙다고 해야지요. 고맙다는 말도 억지로 하는 건 고맙다는 말이 아니겠죠. 감사, 기쁨. 그 기쁨 자체가 은혜에 대한 가장 정확한 응답이거든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물질을 얻었다는 것도 아니고 권세를 얻었다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집에 오신다는 것 때문에 그는 기뻐하고 있습니다. 임마누엘 때문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만족한 기쁨입니다. 그리고 그를 영접했습니다. 정성을 다하여 영접하고.

또 하나는 마음이 열렸습니다. 당장 입이 터졌어요. 마음이 열리면서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삭게오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삭개오는 지금 예수님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돕는 분이다.'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내 재산 절반을 내서 가난한 사람을 돕겠습니다, 라고 마음이 열립니다. "토색한 것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습니다." 이 말은 율법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그렇게 명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율법을 지키는 자로 살겠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참된 감사가 어디 있습니까? 원래 참된 감사는 생각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Think, Thank 라는 말은 어원이 같은 말이라고 합니다. 생각이 없으면 감사하지 못합니다. 어느 방향으로 생각하느냐,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감사하게 됩니다.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감사 못합니다. 얻은 것을 생각하고 내가 받은 것을 생각하고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고 은혜를 생각할 때 감사할 수 있는 것이에요.

어떤 식물인간 된 남편을 위해서 수고하는 부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십년 동안을 시중을 해도 아무 보답이 없습니다. 말 한마디가 없어요. 너무 답답하고 괴로워서 이렇게 말하더만요. 눈을 한 번 뜨고 "여보 고맙소" 딱 한마디만 하는 것을 들어도 한이 없겠다 그래요. 아무리 수고해도 소용이 없어요. 반응이 없어요. 말이 없어요. 느낌이 없어요. 깨달음이 없어요. 이게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것이지요. 감사하는 마음, 이 얼마나 귀중한 것입니까? 그 깨달음 속에 있어요.

인간이 무상하다, 하는 것을 알면 불교인입니다. 인간의 삶에 도리를 알면 유교인입니다. 은혜를 알면 기독교인입니다. 오직 은혜를, 모든 것이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면 그가 바로 그리스도 인이요, 신앙인 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입에 감사가 없으면 그리스도 인이 아닙니다. 범사에 감사할 것입니다. 특별히 감격하는 것입니다. 감격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고 또한 감격이 간증으로 나타나고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습니다, 하는 실천상황이 여기서 나오고 있습니다. 베푸는 마음, 이것이 감사입니다. 기뻐하는 마음이 감사입니다.

여러분, 깊이깊이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깨닫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감격하고 이 감격한 마음을 행동에 옮겨 보세요. 이제부터 새로운 삭개오의 생이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 405장에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고마워.' 이것은 죤 뉴우톤(John Newton)이라고 하는 분이 본래 노예상인이었습니다. 극악한 사람이었는데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은혜! 감격 감격합니다. 그 감격으로 주를 찬양하며 피곤 없이 한 평생 복음을 전하면서 살았습니다. 여러분 성공이 뭐겠습니까? 감사하는 것이 성공이요 기뻐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종은 울려 소리가 나야 종입니다. 그 마음에 벅찬 감격이 있고 감사가 있으면 바로 그가 행복한 자요 성공한 사람인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넉넉히 감사할 만큼 주께서는 은혜를 베풀어주었건만 우리는 이루지 못한 것, 못다 한 것, 얻지 못한 것만 생각하며 원망과 불평에서 헤어나지 못함을 주여 용서하시고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간절히 바라옵는 것은 주의 은혜를 깊이깊이 깨닫고 저 삭개오와 같이 즐거워하며 감격하며 주를 영접하며 그리고 감사한 마음을 베푸는 마음으로 바꿀 수 있는 그러한 주님의 사람들 되고 감사로 원망을 이기고 기쁨으로 모든 어두움을 물리칠 수 있는 주님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경의 추수감사절(초막절) ”

 

곡물을 거두어들이는 것. 게셀의 달력은 고대 이스라엘의 추수기들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감람열매는 연초(9월 중순부터 11월 중순까지)에 수확되었는데, 사람들은 긴 나무막대로 감람나무 가지를 쳐서 그 열매를 거두어 들였다(신 24:20, 사 17:6). 또한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3, 4월에 아마를 베어 말림으로써 아마를 거두어 들였다(수 2:6). 한편 보리는 4월이나 5월 초에 수확하였던 반면에 밀은 5-6월에 수확하였다. 그리고 8-9월에는 여름 과일들(무화과, 포도, 석류)을 수확하였다.

 

 

이스라엘이 큰 기쁨을 갖고 지키던 세 절기 가운데 하나로, 농사력이 끝나는 가을에 지켰으며, 40년간의 광야에서의 유랑을 상기하면서 계약을 갱신하는 절기는 초막절이다. 보통 장막절로 알려져 있다(참조 대하 8:13). 초막절의 다른 이름으로 성서에서 나오는 것들로는 「수장절」(출 23:16), 「여호와의 절기」(레 23:39, 삿 21:19), 「절기」(왕상 8:2, 65, 대하 7:8, 느 8:14, 사 30:29, 겔 45:23,25) 등이 있다.

 

 

비록 신 16:16은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는 일년에 세 번 스스로를 「여호와께 보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초막절이 본래의 순례절기였던 것 같다.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는 매년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실로로 여행을 하였다(삼상 1:3, 21). 그가 순례를 한 때는 아마도 「매년」실로에서 벌어졌다. 「여호와의 절기」때였을 것이다(삿 21:19). 이 여호와의 절기는 포도원 무도회가 특색이었는데(삿 21:16 이하), 이러한 사실은 본 절기가 가나안 인들의 농경의례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절기는, 초막절의 초기 형태를 이해하기에 가장 좋은 이스라엘의 절기였다. 초막은 후에 이스라엘이 그 유랑생활을 기억하기 위해 사용하였으나, 본래는 농경생활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올리브 과수원 주인들은 수확의 달(9월)이 되면, 밤마다 가지와 덩굴로 만든 오두막에 서서 올리브 밭을 감시했다.

 

 

초막절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의 유대교에서 지극히 인기 있는 절기가 되었다. 본 절기는 특히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는 기회로 이용되었다. 순례자들은 바빌로니아나 그 밖의 먼 지역에서, 성전과 예루살렘 성을 위해 모은 봉헌물들을 가지고 왔다. 한편 노상강도들이 순례자들을 약탈하였기 때문에 그들을 보호하는 문제가 때때로 언급되기도 한다. 초막절은 일곱 번째 달(티쉬리)의 열 다섯 번째 날에 시작되었다. 이달의 첫 번째 날은 특별히 거룩한 날(레 23:23-25)이었으며 열번째 날은 속죄 일이었다. 이 세 가지 행사들은 본래 하나의 의식이었던 것이 세분화된 듯하다. 일곱 번째 달의 첫째 날이 거룩한 날이었다는 점은 아마도 예전에 이스라엘의 1년이 가을에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징표일 것이다. 그러나 본래 초막절은 1년의 마지막에 지켜졌다(출 23:16, 34:22).

 

 

초막절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몇 가지 의무가 주어졌다. 즉 그들은 7일 동안 먹고 자고 해야할 초막을 스스로 준비해야만 하였다. 더욱이 모든 순례자는 예루살렘의 주위에서 도금양, 버드나무, 종려나무 등의 잔가지들을 모아야만 하였다. 본래 가지들은 천막을 세우기 위해 사용하였다(느 8:13-18). 후에 그 가지들 중의 일부는 함께 묶어, 룰라브(lulab)라고 불리는 일종의 축제 장식물로도 사용하였다.

 

 

헌수 의식은 절기 동안에 매일 아침마다 가장 먼저 드리는 공통의식이었다. 초막절의 첫날 아침, 제사장의 행렬은 실로암 못에 가서 일주일 동안 사용하기에 충분할 물을 그릇에 채웠다.

 

 

두번째로 중요한 공통의식은 밤에 거행되었다. 이 의식은 축제의 즐거움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제사장들의 낡은 의복으로 만든 심지가 끼워진 4개의 커다란 「일곱 가지의 촛대」가 성전의 전지역을 밝게 비추었다.

 

 

그 촛불 밑에서, 의식에 참석한 자들은 피리에 맞추어서 횃불 춤을 추었고, 레위인들은 「성전으로 올라가는 노래」(시 120-134편)을 불렀는데 「이스라엘의 뜰」 에서 「여인의 뜰」로 걸어 내려가면서 열 다섯 계단의 한 계단에서 마다 노래 하나씩을 불렀다. 사 30:29에서 언급된 밤의 「거룩한 절기」는 바로 이 의식일 것이다. 이 의식은 7일 동안 매일 밤마다 거의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매일 새벽에는 제사장들이 장엄한 의식을 거행하였다. 닭이 울 때 그들은 성전의 동쪽 문으로 가서, 해가 뜨는 순간 서쪽을 향해 서서 성전을 마주 보면서 다음과 같이 암송했다. "우리의 조상들은 이곳에 있을 때 얼굴을 동쪽으로 돌려 동쪽 태양에 경배하였으나 우리의 눈은 주께로 향했다. "(겔 8:16)

 

 

이러한 세 가지 공통 의식을 7일간의 축제기간 동안에 매일 행했다. 할렐 시편은 여덟째 날에 개최되었던 장엄한 의식에서도 불려졌다. 아홉째 날은 심하트 토라라고 불리는데 절기의 초첨이 자연에서 율법으로 옮겨짐을 나타내는 징표였다. 율법 낭독기간이 이때 시작되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며, 아마도 초막절과 신년축제와의 관계와도 연관되어 있는 듯하다.

 

 

초막절은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밭에서부터 거두어 드릴 때", 즉 추수기와 연관지어 있다. 출애굽기에는 초막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으며, 초막의 기념적 역할도 명시되어 있지 않고 초막절의 기간이나 규례도 밝혀져 있지 않다. 순례시의 요건을 언급한 구절로 간令풔?출 23:17은 14-16절에 나중에 첨가된 것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견해이다. 삼상 1:21을 고려해 볼 때 계약법전에서 수장절은 초기 이스라엘의 유일한 순례절기이다. 엘가나가 제사를 드렸던 실로에서의 의식은 삿 21:19 이하에 언급되어 있는 실로에서의 「여호와의 절기」와 동일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수장절은 어느 정도 자유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환회의 의식이었던 것 같다. 수장절은 제사를 드리기에 가장 알맞은 시였고(민 29장에서 초막절에 드린 제물의 양은 어떤 다른 절기보다도 많다), 이러한 사실은 이 절기에는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삼상 1:3-9).

 

 

또한 한나가 술에 취했을 것이라고 엘리가 짐작을 하는 것(삼상 1:14)은 이 축제의 성격을 나타내 준다고 할 수 있으며, 명백히 유혹을 목적으로 한 포도원에서의 처녀들의 춤은 포도수확기에 먹고 마시고 놀던 가나안 사람들의 전통적 경향을 강하게 암시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축제는 「여호와의 절기」였으며 출 23:16에서의 규정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문화에 동화되어 가던 과정의 초기단계에서 생겨난 것이다.

 

 

신 16:13-15에서 수장절은(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에서 거행되어야 함) 초막절로 되어 있다. 하지만 초막의 의미나 기능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다. 초막절은 7일 동안 계속되었고,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에 대해 감사를 드렸다. 이 신명기에서는 「너의 절기」를 즐기는 데 있어서의 특별한 훈계(14절)가 "하나님이 농사를 축복하사 온전히 즐거워하게 되리라 "는 말과 함께 나온다.

 

 

“추수감사절의 기원 ”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가 너희의 소산을 먹을 때 너희에게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라. " 고 명하였으며, 그 후로(혹은 그 전에도) 인간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땅의 소산을 허락해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려왔다.

 

추수감사절을 따로 정한 것은 미국 이주자들에 의하여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즉 이 관습은 이미 오래 전부터 유럽에서 행해졌던 것이다. 매사추세츠의 청교도들은 크리스마스 절기를 가톨릭의 절기로 간주하여 이를 지키지 않았다. 이처럼 크리스마스를 로드섬을 제외한 영국의 식민지에서 절기로 지키지 않게 되자 추수감사절을 크리스마스 절기 대신에 정통과 청교도들의 절기로 지키게 되었다.

 

 

미국에서의 최초의 추수감사절은 미국에서의 첫 번째 수확기였던 1621년 가을에 플리머드 정착지에서 미국이 주자들에 의하여 지켜졌다. 미국 이주자들과 그들의 인디언 손님들은 야외에서 여러 가지 음식을 차려놓고 일주일간 이 추수감사절을 지켰다.

 

 

17세기 말 이전에 이 추수감사절은 코네티컷주와 매사추세츠주의 연례적인 성일이 되었으며, 이 관습은 서서히 다른 지역들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이 추수감사절은 특별한 종교적 절기(비록 나중에는 종교적 색채를 지니게 되었지만)가 아니었으며 단순히 영구의 율타이드(Yuletide)절기와 같은 것이었다. 추수감사절은 일반적으로 목요일 날 지켜졌는데, 그 이유는 목요일이 강연 일로서 매우 인기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관습이 보다 확고한 기반을 갖고 남부지방으로 퍼져 나가게 되자 각 주의 정치가들은 이 추수감사절을 각 주의 연례 행사로 정하는 문제를 정식으로 토외하게 되었다. 한편 1840년대에《Godey's Lady's Book》 의 편저자였던 사라 요세파 헤일 여사는 추수감사절(11월 마지막 목요일)을 미국 전역의 연례적인 절기로 지킬 것에 대한 캠페인을 벌였으며, 1863년 9월 28일에 추수감사절을 미국 전역의 연례적인 축일로 선포할 것을 촉구하는 서신을 그 당시 미국의 대통령인 링컨에게 보냈다. 그로부터 4일 후 링컨은 추수감사절을 미국 전역의 연례적인 절기로 공포하였다. 그 전 까지만 해도 감사일이나 기도 일에 대한 대통령의 선포는 연례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또한 추수기와 아무런 관계도 없었다.

 

 

그러나 1863년 이후로 모든 대통령들은 링컨의 전례를 따랐으며 행정부도 이를 뒷받침해 주었다. 따라서 1941년까지 추수감사절의 날짜는 대통령의 연례적인 선포에 따라 각기 달랐으나 1941년에 미국 의회는 대통령과의 합의 아래 11월 네번째 토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정하고 이날을 휴일로 공포하였다. 비록 의회는 이 추수감사절로 정하고 이날을 휴일로 공포하였다. 비록 의회는 이 추수감사절 날짜를 확정지어 놓고 있으나 대통령은 계속하여 링컨이 1863년에 시작한 전례에 따라 매년 추수감사절 날짜를 선포해 오고 있다.

 

 

“한국의 추수감사절 ”

 

한국 교회에서 감사절을 지키기는 1904년부터이다. 제 4회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에서 서경조 장로의 제의로 한국교회에서도 감사일을 정해 지키기로 하였다.

 

 

우선 다른 교파 선교부와 협의하여 그 날짜를 정하기로 하고 우선은 11월 10일을 추수감사절로 선정하여 장로교 단독으로라도 지키기로 하였다.

 

 

그후 1914년 각 교파선교부의 회의를 거쳐 미국인 선교사가 처음으로 조선에 입국한 날을 기념한 매년 11월 제 3주일 후 3일(수요일)을 감사일로 정하여 예배를 드리고 감사헌금을 모아 총회 전도국에 보내 전도사업에 쓰기로 하였다.

 

 

그후 수요일을 일요일로 변경하여 매년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켜 오늘에 이른다.

 

 

그러나 현재 한국교계 일각에서는 한국농촌의 실정에 맞는 시기인 중추절(추석)을 전후해서 한국교회다운 추수감사절을 새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고 이를 시행하는 몇몇 교회와 교파도 있다.

 

“바람직한 추수감사절을 위한 제안”

 

1621년 시작된 미국의 추수감사절, 추수감사절이 다가오면 미국은 민족 대이동이 벌어진다. 그리운 가족을 찾아 고향으로 떠나는 인구는 1억 명 수준이다. 한국의 추석과 마찬가지로 거의 모든 도로는 자동차로 인해 심각한 정체 현상을 일으킨다. 한국에서의 추수감사절은 1904년부터 지켜왔다. 1차 산업 사회에서의 추수감사절은 성탄절, 부활절, 오순절과 함께 교회력에서 가장 큰 행사 중에서 하나였고, 성도들도 한해 동안의 수확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임했다. 그러나, 2차, 3차 산업 중심의 사회로 문화와 구조가 바뀌었고, 이른바 ‘월급쟁이’들로 가득 찬 현실에서 추수감사절은 의미를 조금씩 잃어갔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추수감사절을 과일로 강대상 주위를 장식하는 것과 추수감사헌금을 드리는 것 외에는 별다른 준비 없이 보내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교회는 추수감사절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해야 한다. 목회자의 추수감사절에 대한 분명한 철학도 세워야 한다. 이 글에서는 추수감사절의 기원에 대해 살펴보면서 추수감사절의 정신을 확인하고, 나아가 한국교회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서 나누어보고자 한다.

 

기독교의 추수감사절은 ‘필그림’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된다. ‘필그림’는 1620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낯선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들여놓은 102명의 영국청교도를 칭하는 말이다. 그들은 ‘메이플라워’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해 63일 만에 신대륙에 착륙하게 되었다. 그들의 씨앗과 영농법은 새로운 대륙에 적합하지 않았고, 지식층이 대부분이었기에 그들은 농사도 잘 몰랐고, 집을 지을 줄도 몰랐다. 이국 땅에서 첫 겨울, 추위와 굶주림으로 47명이 죽었다. 봄이 되자 우호적인 인근의 인디언들로부터 농사를 배울 수 있었다. 그들이 제공한 밀, 보리, 옥수수 씨앗을 심었고 가을이 되자 상상 밖의 큰 수확을 거두게 되었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고, 교회와 가정에서 감사예배를 드렸으며, 인디언들을 초대하여 축제를 베풀었다.

 

청교도의 이야기로 볼 때, 추수감사절에는 세 가지 정신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신앙의 중요성이다. 그들은 실로 죽음을 각오하고 신앙을 택했다. 그들의 선택은 아브라함이 ‘갈바를 알지 못하고’ 본토를 떠나 가나안으로 향한 것과 유사하다. 둘째는 감사하는 마음이다. 낯선 대륙에서의 첫 겨울에 절반 가까운 사람이 죽어나갔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자는 목소리도 높았다. 이런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큰 수확을 하게 된 그들은 진심어린 감사를 하나님께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세 번째는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들의 수확은 하나님의 축복이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따뜻한 손길을 베풀었던 인디언의 사랑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축제에 인디언들을 초대했다. 그들은 언어와 종교, 문화를 떠나서 함께 어울러졌다. 이제 추수감사절의 세 가지 정신을 어떻게 교회의 현장에 적용해야 하는가를 연구해보자.

 

1. 개인적인 믿음을 충전하는 시간으로

추수감사절은 필그림들이 목숨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했던 ‘신앙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현대의 크리스찬들이 넘쳐나는 신앙의 자유 속에서 잃어버렸던 자유의 의미를 다시 새롭게 하는 시기가 되어야 한다. 이에 따라, 교회는 담임목회자의 인도에 따라 영적으로 재충만 받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 부흥회를 개최하되 외부강사를 초빙하는 것보다는 자체부흥회를 가지거나 정규예배시간의 성격을 달리해서 부흥회 성격으로 드리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세례식을 실시하는 것도 좋다. 그 동안 결신한 성도들에게 세례를 베풀면서 교회전체가 새롭게 되는 계기를 삼는다. 다만 세례식을 위해서는 추수감사절 이전부터 좀더 세밀한 준비가 필요하다. 그 외에 교회 자체적으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실시하는 것도 좋다. (특별새벽기도회, 성경통독 등) 추수감사절을 영적회복의 계기로 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영성회복을 무시한 축제분위기만의 추수감사절을 보내는 것은 첫 단추를 잘못 꿴 처사이다.

 

2. 공동체적 사랑과 감사를 회복하는 시간으로

교회의 크기를 떠나서 교제가 적은 것이 현대교회의 특성이다. 교회 안의 지체들끼리 서로 사랑으로 하나되고 서로를 축복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가족찬양대회를 개최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이다. 온 가족이 다 함께 출석하는 교회는 건강한 교회다. 가족 단위의 팀들이 나와서 찬양경연대회를 가진다면 교회 전 성도들에게 가족공동체와 같은 교회의 모습을 도전 받게 할 수 있으며, 교회에 나오지 않은 가족들을 전도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분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 기관별 성경퀴즈대회도 같은 맥락으로 실시하면 좋다. 교회의 크기와 상황에 따라 준비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다만 이 때 가족단위의 공동체도 존중되어야 하지만 전체 성도들의 결속력도 다지는 프로그램을 동시에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년부와 청년부, 학생부, 주일학교가 동시에 공유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어야 한다. 교회학교에서는 시(詩)를 게시하거나 디지털 카메라 사진전 등을 갖는 것도 좋다.

 

3. 이웃과 함께 나누는 시간으로

이웃을 배제하고 교회 자체적인 행사로 추수감사절을 보낸다면 마무리에 실패한 셈이다. 교회는 지역사회에서 감당해야할 중요한 역할과 소명이 있다. 청교도의 축제에는 주변의 인디언 친구들이 동참했다. 교회는 남녀노소, 빈부귀천, 종교를 떠나서 지역주민들과 축제를 나누어야 한다. 교회에서 이웃주민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준비했지만, 주민들의 참여가 적어 실망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이며, 이웃 주민들의 입장을 100% 고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전도의 목적을 진하게 깔지 말 것을 당부한다. 전도만을 염두에 둔 행사는 주민들이 거부감을 갖는다. 교회의 형편에 맞는 프로그램을 준비해 보라. 개척교회라면 떡을 쪄서 주민들에게 나누는 것이라도 하라. 명사를 초청하여 건강·교양·자녀교육에 관련된 세미나를 가지거나, 열린음악회, CCM콘서트, 윷놀이, 일일찻집, 바자회, 먹거리장터 등도 좋은 행사가 될 것이다. 교회에서 벌어지는 재미있고 행복해 보이는 행사에 길을 가던 어른들과 아이들이 참석하게 해 보라. 자연스러운 전도의 문이 열릴 것이다.

 

추수감사절을 준비할 때 한가지 생각해야 할 사항이 있다. 바로 추수감사절의 기간이다. 주일 오전예배시간에 강단에 추수감사주일이라는 글씨를 새기고, 예쁜 장식과 과일로 꾸며, 예배를 드리면서 감사헌금을 하는 것으로만 끝내지 말았으면 한다. 교회에 따라 추수감사주일 하루 전체나, 금요일에서 주일까지 사흘로 설정하거나, 프로그램을 준비할 수 있다면 한 주간 정도 추수감사절을 위한 축제로 보내는 것도 좋다는 것이다. 교회별로 프로그램을 구상하여 이에 맞도록 실시해야 할 것이다.

 

◇ 금요일 : 금요기회시간을 특별부흥회 시간으로 갖는다.

◇ 토요일 : 실내에서는 CCM콘서트나 열린음악회, 일일찻집 등을 실시하고 실외에서는 먹거리 장터, 바자회, 윷놀이 등을 한다.

◇ 주 일 : 오전예배를 추수감사예배로 드린다. 오후예배는 가족찬양경연대회를 하거나 성경퀴즈대회를 실시한다. 오후 시간에는 탁구대회, 볼링대회를 가진다.

 

◆ 타교회의 추수감사절 살펴보기

<명성교회의 추수감사절>

명성교회(김삼환 목사)의 추수감사절은 전 교인을 비롯해 인근 주민까지 모든 참가자에게 축제의 장이다. 전 교인이 어우러져서 우리 고유의 음악과 춤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교제를 나눈다. 교회본당과 로비를 장식하고 예배에는 특별순서를 진행하고 교회학교별로 행사를 갖는다. 음악회를 열기도 하고 기독시인들이나 CCM가수들을 초청하여 찬양행사를 하거나 성극을 공연하는 등 문화행사가 펼쳐진다. 교회마당에서는 사물놀이, 팽이치기, 도리깨질, 먹거리 장터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운영되고 있다.

 

<배톤루지 한인침례교회의 추수감사절>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 주 배톤루지 한인침례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소재훈 목사의 추수감사절 목회철학은 ‘감사하는 생활의 회복’이다. 먼저, 성도들에게 침례를 베푼다. 이것은 교회 전체가 감사하는 분위기가 되도록 하며, 영적 추수에 참여하도록 도전하는 기회를 갖게 한다. 지역에 살고 있는 믿지 않는 한인들을 초청하여 기념음악예배를 열어서 감사하며 사는 삶, 믿음 안에서 사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교회학교에서는 소속한 자녀들로 하여금 감사의 편지를 써보도록 한다. 고국을 떠나 사는 이민자, 유학생들을 위해 특별 오찬을 베풀고 감사절 당일에는 한인 거주민인 성도들이 미국식으로 터키를 굽고 음식을 마련해서 고향을 멀리한 학생들이나 싱글들을 초청해서 잔치를 베풀고 위로해 주도록 한다. 또, 주위 사람들을 초청해 낚시대회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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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달 특별활동”

 

 

1. 감사노래 부르기

 

어린이들에게 있어서 노래가 주는 영향은 매우 크다고 하겠다. 따라서 오래를 부르면서 어린이들이 순간 순간 감사를 생각하도록 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어린이 찬송가에 있는 감사절 찬송 중 알려지지 않은 곡들을 선정하여 다양한 감사찬송을 부르면서 어린이들은 여러 가지의 감사 내용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어린이 찬송가 외에도 구원 찬송가 중에서 선정해 놓은 감사찬송들을 어린이들이 배우면서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그들의 입에서 감사노래가 계속 흘러 나왔으면 한다.

 

 

2. 너의 복을 세어보아라

 

교회 벽에 흰색 전지를 붙여놓고 1년동안, 아니면 요즈음에 일너난 일 중 감사한 것들을 생각나는 대로 모두 적게 한다. 얼니이들이 정식으로 깨끗한 종이에 감사 내용을 적으라고 하면 잘 기억을 못하지만 비형식적으로 낙서처럼 자유롭게 적을 때는 그들 속에 있는 것들이 더 많이 생각나고 다른 친구들이 적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감사해야 할 부분들을 생각하게 된다.

감사할 것이 생각나지 않는 어린이들에게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모두 적개해 본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우리가 태어날 때 우리가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알게 하고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지도한다.

 

 

3. 감사 시화전

 

지금까지 감사에 대해 생각한 것으로 어린이들은 자신이 감사할 것이 무엇인가를 정리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감사를 글, 그림으로 자신의 감사한 마은을 표현하게 할 수 있는 활동이다.

준비물 : 유치,유년부- 색 우드락(짙은 파랑색),칼 ,색종이 , 고체 풀, 부풀어마카

초등부- 우드락, 칼, 포스터 칼라, 붓

방 법 : 색 우드락을 원하는 크기로 자른다. 저학년들은 아직 붓을 다루는 일에 익숙치 못하므로 색종이를 이용하여 부풀어 마카로 그림을 정리하고 감사의 성구, 또는 감사의 시를 쓴느 방법으로 하는 것이 좋겠고, 고학년들은 우드락에 포스터 칼라로 원하는 그림과 감사 성구, 또는 감사의 시를 그려 작품을 만들면 되겠다.

(교사의 준비 : 액자틀만을 준비하여 전시회를 갖는 것도 좋겠다.)

 

 

 

4. 과일(야채) 모양 장식 만들기

 

준비물 : 석고, 물감, 투명락카, 자석, 본드

방 법 : 석고를 가지고 원하는 과일이나 야채 모양을 만든 다음 물감으로 물믈 드린 후 마르면 투명 락카로 윤이 나도록 뿌려 준다. 락카가 마르면 뒷면에 본드를 이용하여 자석을 붙여준다. 예쁜 모양의 장식품이 될 것이다.

 

 

5. 감사 카드 보내기

 

통신 문화가 발달한 요즈음에는 대부분의 일을 전화로 끝내는 경우가 많다. 어린이들로 하여금 감사한 사람들에게 편지를 통해 마음을 전달하게 하는데, 상대방은 이 편지를 받아 보는 것은 한 통화의 전화를 받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감격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어린이들로 자신의 마음을 글로 적어 봄으로써 그들에게 정서적인 면에 좋은 효과를 가져올 수 있

다. 경우에 따라서 우편엽서에 색종이를 이용하여 조금만 장식하여 보내는 것도 좋겠다.

 

 

6. 감사 메모꽂이

 

준비물 : 색 우드락, 스치로풀 본드, 칼, 포스터 칼라,붓

방 법 : * 색 우드락을 원하는 과일 또는 야채 등 다양한 실물 모양과 밑판, 실물 모양을

붙여줄 중간 판을 자른다.

* 자른 우드락에 포스터 칼라로 우너하는 글씨와 그림을 그린다.

* 스치로풀 본드를 이용하여 밑판과 중간 판을 먼저 붙인다.

 

 

7. 감사절 달력 만들기

 

감사절을 시작하는 첫주 또는 그 전달 마지막 주에 감사절 달력을 나누어 준다. 초등부 이상의 어린이들은 스스로 성경 구절을 찾아 읽으면서 여러 면에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치부나 유년부의 어린이들은 부모님과 함께 감사절 달력을 만들어 가도록 제안하고 싶다. 부모와 어린이가 매일 제안된 성경을 읽은 후 그날 있었던 감사한 일들을 한 가지씩 나누고 감사하게 하신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시간을 가질 때 예사롭게 지나게 되는 것들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게 됨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더욱 가까이 계신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8. 감사나무 만들기

 

감사절을 앞두고 예배실을 감사의 분위기로 장식할 수 있는 활동으로 교실벽에 큰 나무 그림으로 장식하고 어린이들에게 각종 색지를 나우어 주어 자신이 좋아하는 과일 모양으로 오리고 그 안에 1년동안 가장 감사했던 내용을 쓰게 한다.

완성한 감사과일을 과일 나무에 장식하므로 환경을 구성할 수 있다. 이 활동을 한후 어린이들은 다른 사람은 어떤 것을 감사했는지 다 볼 수 있는데, 그 내용들을 통해 자신이 감사하게 생각하지 못했던 여러 분야의 감사를 생각하게 할 수 있다.

 

 

9. 감사축제

 

추수감사주일에 할 수 있는 활동으로 어린이들과 교사들이 힘을 모아 축제를 벌이는 것으로 미국의 청도교들이 첫 추수를 맞이 했을 때의 감사절 행사를 맛보게 해 줄 수 있다.

교사와 학생들이 가장 좋고 예쁘고 큰 과일, 야채, 곡물들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한다. 강대상 앞에 큰 장식상을 준비해 두어 가져온 식물들을 장식한다. 예배를 드린후 가장 예쁜 식물, 가장 큰 것, 가장 독특한 것 등의 콘테스트를 하며 이 식물들이 자라도록 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다음 이행사가 마친 후에 이 식물들은 추수감사절 헌금과 함께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사용한다. 예를 들면 교회에 어려운 성도 가정, 사회 복지시설 등을 반문하여 전달해 줌으로 주님이 주신 축복들을 나눈다면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주님의 사랑이 전달될 것이다.

 

 

“추수감사절 유래”

곡물 추수와 관련되어 성경에 나타난 최초의 감사 제사는 가인고 아벨의 제사(창 4:3,4)이며 유대인의 칠칠절, 수장절 등과 같이 고대로부터 추수 감사에 관련된 의식은 어느 나라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각 나라의 민속적인 풍습으로 행해졌던 추수 감사제가 교회의 한 절기로서 지켜지게 된 것은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청교도들에 의해 거행되었던 1621년의 추수 감사절의 영향 때문이다.

 

성경 말씀대로 경건하게 생활하려는 청교도들과 이미 형식주의적 신앙 생활에 젖은 영국의 국교도들 간에는 많은 신앙의 갈등이 있었다. 그런데 영국의 국왕은 영국의 국교도와는 다른 신앙 견해를 가진 청교도들을 용납하지 않았으며, 신앙적 자유를 허락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네덜란드로 건너갔다. 그러나 11년간의 네덜란드에서의 생활은 무척 고된 것이었으며, 올바른 신앙인으로 자녀를 교육하기란 더더욱 힘이 들었다. 이에 청교도들은 신대륙으로 가기 위해 7년 동안 힘들여 일해서 번 돈으로 배를 샀다. 그러나 스피드웰이란 이름을 가진 그 배는 장기간 항해에 적합하지 않았으므로 다시 다른 배를 구입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메이플라워이다. 그러나 이 배 역시 180톤의 작은 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신앙의 열정에 불타는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인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먹을 물과 양식이 부족한 가운데 행해진 65일간의 항해가 험난했을 뿐 아니라 그들을 꿈에 부풀게 했던 신대륙에서의 생활도 생각처럼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청교도들이 신대륙에 도착한 때는 겨울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심한 식량난과 추위, 기후차와 영양 실조들의 원인으로 인해 첫 겨울에 102명 가운데 44명이나 죽었으며 그 나머지도 질병에 시달렸으므로 항상 일손 부족으로 인한 격무에 시달려야 했다. 그때 심한 고통 속에 있던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것은 마음 좋은 인디언들이었다. 이 대륙의 원주민인 인디언들은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는 청교도들에게 옥수수 등의 곡물을 가져다 주었고, 농사짓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 이들의 도움으로 다음해인 1621년 청교도들은 풍성한 곡식을 추수할 수 있었다. 이에 청교도들은 친절한 인디언들을 초대해 추수한 곡식과 칠면조 고기 등을 함께 ㅁ거으며 신대륙에서의 기쁜 첫 추수 감사절을 가졌다.

 

그후 1623년 매사추세츠 주에서는 추수 감사절을 공식 절기로 선포하였으며, 1789년에는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톤이 이를 전국적으로 지킬 것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3대 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은 추수 감사절이 왕의 관습이라는 이유로 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중단하였다. 그 뒤로 추수 감사절은 일부 주에서만 비 공식적으로 지켜지게 되었고, 그 기념일도 주마다 달랐다.

 

이렇게 폐지되었던 추수 감사절이 다시 지켜지기 시작한 것은 1863년 링컨 대통령이 추수 감사절을 미국의 연례적인 축일로 선포하면서부터 였다. 이는 Godey's Lady's Book의 편저자였던 사라 요세파 헤일 여사의 '추수 감사절은 미국의 건립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졌음을 기념하는 연례적인 절기로 지켜져야 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진 결과였다. 이 당시 미국에서는 남북 전쟁이 진해되고 있었는데, 추수 감사절 하루 동안은 전쟁이 중지되기도 했다.

 

한편 미국의 카톨릭에는 추수 감사절 주일이 따로 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개신교와 똑같이 추수 감사절을 지키고 있으며, 성공회 역시 감사 주일을 따로 정하지는 않았지만 기도서에는 이날 행사에 대한 기도가 들어 있다.

 

우리나라의 교회가 추수 감사절을 교회의 절기로 지키게 된 것은 1904년부터이다. 처음에는 장로교 단독으로 11월 10일을 추수 감사절로 기념하던 것이 1914년 교파 선교부의 회의 결과에 따라 미국 선교사가 조선에 입국한 것을 기념하는 뜻에서 11월 셋째주 수요일로 변경되어 지켜지게 되었다. 그 후에 추수 감사절은 그 요일이 수요일에서 일요일로 바뀌어 11월 셋째주 일요일을 추수 감사절로 지키게 되었다. 한편 오늘날 우리 나라의 교계에서는 추수 감사절을 우리의 실정에 맞게 추석(중추절)으로 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고, 일부 교회와 교파에서는 이미 이를 시행하고 있다.

 

 

“추수감사절 관련성경자료 ”

 

(1) 감사에 대한 권고

 

감사하며 그 이름을 송축하라(시 100:4)

감사하며 그 행사를 만민에게 선포하라(시 107:22)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 5:4)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8)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가 넘치게 하라(골 2:6,7)

감사함으로 구할 것을 아뢰라(빌 4:6)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2) 감사의 시기

 

핍박을 받을 때(마 5:11,12)

음식을 먹을 때(마 14:19)

성찬에 참여할 때(막 14:23)

주님을 뵈올 때(눅 2:23-32)

일을 시작할 때(요 11:41)

일을 마쳤을 때(느 12:42-43)

직분을 맡았을 때(딤전 1:12)

중보 기도할 때(딤전 2:12)

항상(엡 5:20)

 

 

(3) 감사의 방법

 

찬송으로(삼하 22:50)

새 노래로(시 98:1)

악기를 사용한 찬양으로(시 33:2)

전심으로(시 9:1)

자발적으로(빌 1:3)

예배를 드림으로(고후 9:11)

헌금을 드림으로(시 50:14)

재물과 소산물을 드림으로(잠 3:9,10)

토지 소산의 처음 것으로(출 34:26)

주를 위한 헌신의 생활로(롬 14:6,8)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엡 5:20)

공의와 인자와 겸손의 생활로(미 6:8)

기도를 드림으로(빌 4:6)

 

 

(4) 감사의 실례

 

득남함을 감사한 사라(창 21:6,7)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에 감사한 다윗(대상 29:13)

지혜와 능력주심을 인해 감사한 다니엘(단 2:23)

구원을 감사한 요나(욘 2:9)

주를 잉태함을 감사한 마리아(눅 1:46)

주님을 보고 찬양하는 시므온과 안나(눅 2:25,38)

눈뜸을 인해 감사한 소경 바디매오(눅 18:43)

옥중에서도 감사한 바울과 실라(행 16:25)

 

 

(5) 감사의 생활을 하지 못하는 원인

 

물질적으로 부요함(신 6:10-12)

욕심이 많음(삼상 25:4-11)

교만함이 있음(신 8:12-18)

하나님의 은혜를 잊음(느 9:26)

미련함(롬 1:21)

세상 풍속을 좇음(롬 12:2)

자족함이 없음(딤전 6:6)

세상 염려가 많음(전 1:13)

 

 

(6) 첫 열매에 대한 말씀들

 

하나님께 바침(레 23:9-11)

첫 열매 및 첫 소출이 제사장의 음식으로 주어짐(민 18:12,13)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가루는 거룩함(롬 11:16)

레위 자손 땅에서 난 첫 열매는 거룩함(겔 48:14)

 

 

(7) 첫 열매의 상징

 

부활하신 그리스도(고전 15:20)

이스라엘(롬 11:16)

구원받은 성도(약 1:18)

그리스도를 처음 믿은 자(롬 16:5)

 

 

(8) 성도가 맺어야 할 열매들

 

거룩(롬 6:22)

의(고후 9:10)

성령의 열매(갈 5:22,23)

착함, 의로움, 진실함(엡 5:9)

선한 일(골 1:10)

평강(히 12:11)

찬양(히 13:15)

말씀 증거(막 16:15,16)

구제(갈 2:10)

상급(고후 5:9,10)

 

 

(9) 성도가 축복을 받는 방법

 

축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믿음(창 1:22)

하나님 뜻대로 행함(신 28:1-14)

하나님을 섬김(레 26:14)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함(마 6:30-33)

안식일을 지켜 행함(사 56:2)

부모를 공경함(출 20:12)

온전한 십일조를 바침(말 3:10)

구제에 힘씀(행 20:35)

성실하게 생활함(잠 28:10)

 

 

(10) 성경에 나타난 축복의 실례

 

하나님의 구원(시 3:8)

영생(시 133:3)

죄사함 받음(사 32:1,2)

하나님과의 교제(시 73:27,28)

생명의 보존(신 34:12)

현명한 아내(잠 18:22)

자손의 번성(창 26:24)

평강한 마음(잠 10:22)

육적 건강(출 23:25,26)

물질적 풍족(욥 42:12)

 

 

(11) 성도가 기뻐할 것들

 

구속의 은혜(에 8:17)

주의 인자하심(시 31:17)

하나님의 보호(시 63:7)

하나님의 축복(시 106:5)

하나님의 말씀(렘 15:16)

주의 인도(마 2:9,10)

하나님 나라(마 13:44)

예수의 부활(마 28:7,8)

진리(고전 13:6)

말씀 순종(욥 6:10)

 

 

(12) 예물을 드리는 자세

 

헌신하는 마음으로(행 4:32)

즐거운 마음으로(느 12:27,43)

자발적인 마음으로(고후 5:7)

감사하는 마음으로(시 50:23)

거룩한 마음으로(시 23:18)

정직한 마음으로(대상 29:17)

정성된 마음으로(대상 29:2,3)

순종하는 마음으로(출 25:2)

 

 

(13) 하나님의 평강

 

하나님의 약속임(레 26:6)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짐(요 7:38)

하나님의 평강은 풍성함(렘 33:6)

의인에게만 보장됨(잠 16:7)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음(사 48:32)

하나님과 화친해야 함(사 27:5)

그리스도는 성도의 화평임(엡 2:14-17)

평강의 복을 주심(대하 14:6)

성도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심(빌 4:7)

하나님의 평안은 영원함(사 32:17)

 

 

(14) 성도의 영적 기업

 

여호와 하나님(애 3:24)

영광(잠 3:35)

영생(마 19:29)

하늘 나라(마 25:34)

하나님의 약속(히 6:12)

하늘의 간직된 것(벧전 1:4)

새 만물(계 21:5,7)

 

 

“주요 행사 프로그램 ”

 

 

(1) 추수 감사절 예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청교도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역사하시며 언제나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추수 감사절 예배를 통해 한해 동안의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은혜를 베푸셨는지 깨닫고 그것에 대해 감사하는 시간을 갖도록 한다. 특히 가정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는 어린이에게 우리가 먹는 음식, 특히 밥이 우리가 먹는 음식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해 주어 그 속에 담긴 농부의 정성과 하나님의 돌보심을 깨닫도록 한다. 또한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와 방법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어 어려서부터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2)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드리는 감사 예배

 

 

 

원주민인 인디언들의 도움으로 길고 긴 겨울을 이겨내고 신대륙에서의 첫 번째 곡물 수확을 마친 청교도들은 가장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며, 수확한 곡물을 그들의 이웃인 인디언들과 함께 나누어 먹으며 즐거워 하였다. 추수 감사절 예배는 이처럼 전 교인이 함께 기쁨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도록 한다. 예배 순서에 유년부의 성경 교독, 중,고등부의 대화극, 어른 성가대와 어린이 성가대의 합창, 노년부의 특벌 찬송 등의 프로그램을 넣어 진행하면 교회의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감사 예배가 될 것이다.

 

 

 

또한 이날 드리는 특별 헌금에는 어른들 뿐 아니라 어린이들도 참여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게 한다. 이때 특별헌금을 위한 헌금 봉투를 미리 준비하되, 어린이 헌금 봉투는 어린이들이 색종이와 풀을 이용해 직접 만들어 준비할 수도 있다. 어린이의 헌금 봉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두게 하신 사과, 배, 가지, 밤 등의 과일과 채소 모양으로 만들면 좀 색다른 느낌으로 헌금을 할 수 있을 것이다.

 

 

 

(3) 감사 헌물 드리기

 

 

 

감사 헌물 드리기는 주일 예배 때 모든 성도들이 직접 감사의 예물을 드리는 것으로 추수 감사 주일에 하나님께 드릴 곡식과 과일을 준비해 오도록 그 전주에 미리 광고한다. 추수 감사 주일에 각자 정성껏 준비해 온 곡식과 과일을 강단에 준비된 커다란 바구니 앞으로 가지고 나와 하나님께 직접 드린다는 마음으로 올려 놓는다. 이를 통해 과실을 결실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추수하는 농부의 고마움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갖는다. 모아진 곡식과 과일은 예배가 끝난뒤 전 교인이 친교의 시간에 함께 먹는다. 감사 헌물로 드려진 이러한 음식은 불우 이웃을 돕는데 사용할 수도 있다.

 

 

 

(4) 불우한 이웃 돕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세심한 부분까지도 늘 기억하시어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그분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불우한 이웃을 찾아 주님의 사랑을 베풀기 위해 먼저 우리 주위에 불우한 사람은 없는지 미리 살펴본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작은 정성이나마 우리가 할 수 있는 물질적인 도움을 베풀어 줄 뿐 아니라, 혹 불신자인 이웃이라면 주님에 대해서도 알려주는 영적인 도움을 베풀도록 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평소에도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돕는 자세임을 기억하자.

 

 

 

(5) 감사의 밤

 

 

 

추수 감사절 오후 프로그램으로 감사의 밤 행사를 갖는다. 이때 청교도들이 그들의 이웃인 인디언들을 초대해 함께 추수한 곡식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던 것처럼 전 교인은 물론 이웃과 친구, 잘나오지 않는 성도들을 초청해 준비한 떡과 음식 등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갖도록 한다. 또한 감사를 주제로 한 촌극, 시낭송, 찬양 등을 통해 진정한 감사의 의미를 생각하는 시간이 되도록 한다.

 

 

 

(6) 기타

 

 

 

이밖에도 추수 감사절 행사로 행해질 수 있는 것으로는 각종 과일과 채소로 추수나무 만들기, 감사를 주제로 한 성경 암송, 간증, 찬양 대회 등이 있다. 감사의 편지쓰기, 기도문 짓기 등도 이때에 행해질 수 있는 것들이다.

 

“감사의 은혜적 차원 ”

본문 : 고전-01-04-9

아주 특별한 상이 있습니다. Master of Influence라고 하는 상입니다. 그것이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귀한 영향을 끼친 그분에게 드리는 그런 특별한 상입니다. 전 미국 강연가 협회가 유명한 대중연설가로 인정해서 주는 상입니다. 그 내용은 최고의 동기부여가, 또 자기개발과 성공학의 대가에게 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도 성공적으로 살았고,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생의 의미를 부여해주고 삶의 동기를 격려해준 그런 사람에게 주는 특별한 상입니다. Master of Influence. 여기 상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매우 알려진 인물입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정상에서 만납시다'라고 하는 책을 쓴 저자입니다. 이름이 좀 특별합니다. 지그 지글러(Zig Zigler)입니다. 그가 75세에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면서 자서전을 썼습니다. 그 자서전의 마지막 결론 부분만 말씀드립니다. 그 결론에서 그는 딱 한마디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은 감사뿐이었다. 감사 외에 다른 할 말이 없는 그러한 일생이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자신은 혼자서 살아가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천사가 나를 늘 지켜주셨다' 하는 것을 거듭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한 가족들에게 특별히 감사했습니다. 그 딸과 그 부인과 자녀들에 대해서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었다. 나를 참으로 행복하게 해준 귀한 동반자였다'고 그렇게 기도하고 있고 그 다음에는 그 이웃들,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은 참으로 좋은 사람들이었다. 참으로 내게 고마운 분들이다. 감사하고, 감사외에 다른 말이 없다' 그렇게 그의 인생을 결론짓고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성공이 어디에 있습니까? 많이 가졌다고 많이 배웠다고? 권세를 누렸다고? 다 부질없는 짓입니다. 문제는 얼마나 감사할 수 있느냐, 어디까지 감사할 수 있느냐, 얼마나 충만한 감사 속에 살고 있느냐, 또 감사로 생을 마감할 수 있느냐,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성공을 가늠할 수 있는 바로메타라고 생각합니다. John J. English라고 하는 분이 Spiritual Freedom 이라고 하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사랑의 경험이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공부를 많이한다고 사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환경이 좋아진다고 사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좀 잘살게 되었다고 사람이 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까? 사람으로 사람되게 하는 것은 오직 사랑의 경험입니다. 아주 뜨거운 사랑, 아주 확실한 사랑, 아주 절대적인 사랑을 경험하게 될 때에 '이대로 죽어도 좋다. 이런 사랑을 한 번 해보고 한 번 받아보았으면 이대로 죽어도 좋다.' 그만큼 화끈한 경험을 해야 사람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람되게 하는 것, 그것은 사랑의 경험 뿐입니다. 그 속에 감사가 있습니다. 그 속에 행복이 있고 삶의 의미와 보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문화, 우리의 사회생활 속에서 우리 민족들이 좀 무언가 잘못된 문화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감사하다고 하든지 고맙다고 하면 내가 낮아지는 줄로 생각하는 잘못된 생활 철학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것에 인색합니다. 안하려고 듭니다. 더욱이 자기 식구들에게 자신의 부인에게 고맙다고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말 안해도 안다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애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내가 다 벌어서 먹여 살리는데 고마울게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럴까요? 문제는 이것입니다. 상대방에게 고맙다고 하는 순간, 그는 높아지고 나는 낮아진다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아무래도 DNA가 문제입니다. 이것은 유전적입니다. 공자로부터 온 것입니다. 유교사상에서 온 것입니다. 문화적으로 말하면 이것이 바로 식민지 문화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체질이 감사를 모르는 체질이 되었습니다. 아주 문제입니다. 그 고맙다는 말을 안하는 것이 아니라 못합니다. 생전 해봤어야 알죠. 어느 순간이라도 고맙다고 하는 순간, 내가 없어지는 것처럼 내가 비하되는 것처럼 내가 망가지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자그마한 일에도 고맙다고 하면 그 순간 자신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나의 인격이 높이 높이 올라가는데 그것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감사를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아주 뿌리깊은 병통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사랑의 경험이 감사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인간이 성숙되면서 그 순간 감사 앞에 내가 겸손하게 됩니다. 감사로 인해서 내가 자유해집니다. 감사로 인해서 미래가 보입니다. 감사해 보십시오. 행복할 뿐더러 앞이 환하게 보입니다.

어떤 유대 어머니가 별로 배운 바가 없는 무식한 어머니었습니다만은 자식은 훌륭하게 키웠습니다. 그 비결이 어디 있었느냐 하면 어머니는 늘 딱 세가지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하나는 모든 일에서 감사하라. 작은 일이나 큰 일이나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라. 그저 감사하라. 항상 감사하라. 두 번째는 원망하는 사람하고 놀지 말아라. 여러분, 주변에 친구든 누구든 딱 만났을 때에 뭐 어쩌고 어쩌고 원망하거든 다시는 만나지 마십시오. 그것은 전이됩니다. 원망하는 사람과 사귀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가 감사하는 사람과 친하라. 그리고 감사하는 사람과 함께하라. 이 세마디로 훌륭한 유명한 자녀들을 양육했다는 이야기이 있습니다. 일본에 우찌무라 간죠라고 하는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글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저주가 있다면 그것은 질병도 실패도 배신당하는 것도 아니다. 만일에 저주가 있다면 세가지이다. 하나는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것, 아무리 믿어보려해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버림받은 심령입니다. 두 번째는 성경을 읽어도 요절을 외워도 성경은 많이 안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에 지식적인 책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와야 됩니다. 설교말씀을 듣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이 내 귀에 들려와야 합니다. 이것이 안들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생각하면 원망과 불평뿐입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 1장 4절에서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기도할때마다 기쁨으로 간구한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는 로마 감옥에 있습니다. 감옥 밖에 있는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감사합니다. 저는 이 구절을 반대로 뒤집어 봅니다. 우리는 어떠냐? 생각할 때마다 분하고 기도할 때마다 눈물이고, 이것이 망조입니다. 이것이 예수믿는 사람입니다. 자, 보십시오. 생각할 때마다. 이런 일을 생각하고 저런 일을 생각하고 이 분을 생각하고 저 분을 생각하고 다 고맙습니다. 다 고마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심령이고 생각하면 원망하고 분하고 한이 맺히는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우찌무라 간죠는 말하고 있습니다. "감사는 은혜에 대한 마땅한 응답입니다." Right Response, 마땅한 응답이 감사입니다.

감사는 차원적인 문제입니다. 첫째 차원이 무엇인가 하면 받은 바를 아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받았다. '모든 것은 받은 것이다' 할 때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신 은혜를 안다고 하였습니다. 받았다. 여러분, 내가 준 것과 받은 것, 어느 쪽이 많습니다. 감사라는 것은 받을 때 감사합니다. 받은 바에 대한 감사입니다. 냉수 한 그릇이라도 받았을 때에 감사한 것입니다. 받은 바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감사로 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쟁취한 것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가끔 파업도 하고 대모도 하면서 빨간 띠를 두르고 '결사반대! 쟁취!' 이런다는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할 때마다 저렇게 해서 얼마를 얻어내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마음이 서글픕니다. 그로 인해서 마음이 황폐해집니다. 그 심정이 망가집니다. 이렇게 소리지르다보니까 그 다음에 얻은 데 대해서 고마움이 없습니다. 쟁취한 것에 대해서는 감사가 없습니다. 공산주의가 망한 이유가 어디있습니까? 자본이 없는 것도 아니고 기술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감사가 없습니다. 왜? 쟁취한 것이니까. 혁명, 쟁취. 그래서 북쪽에 가서 다니며 보면 모내기 할 때에 다니면서 보면 '모내기 혁명'이라고 했습니다. 모내기가 왜 혁명입니까? 그것도 싸움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싸워서 이기고 이렇게 살다보면 감사가 없습니다. 여러분, 빼앗은 것에 대해서 어떻게 감사가 있겠습니까? 쟁취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행복이 없습니다. 그것은 미래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 뿐입니까. 자기 의를 내세울 때에도 감사가 없습니다. 자신이 잘났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율법적 관계로 사는 사람에게도 감사가 없습니다. 소유란 소유하는 순간 약간의 기쁨이 있는 것 같아도 소유하자마자 또 다른 욕심에 사로잡힙니다. 걱정이 많습니다. 성취감이라는 기쁨이 있습니다만은 성취되는 순간 불안합니다. 지속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로지 감사만이 그 사람의 마음을 자유하게 합니다. 참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운명으로 생각하는 자에게도 감사가 없습니다. 팔자요 운명인데 누구에게 감사를 하겠습니까? 이래서 감사가 없는 생활이 그 민족이든 그 문화든 그 나라든 다 망가지고 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차원은 깨달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많이 은혜 받았다고 많이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깨닫는 부분 만큼만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의식이요 의식과 감성이 합쳐지는, 그래서 지성과 감성이 통합적으로 역사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있습니다. 얼마나 깨닫느냐 하는 것입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지만 아주 옛날 젊었을 때 보니까 헬라사람들 가운데 감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비가 오는 날 비를 맞으면서 가다가 손을 들고 "오 신이여" 그러며 감사를 하더랍니다. 왜 감사하냐고 물어보니까 이 눈썹이 있어서 비가 이렇게 밑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또 감사합니다." 무엇이 감사하냐 하니 콧구멍이 밑으로 뚫린 것을 감사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위로 뚫렸으면 내가 어떻게 되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까지 생각을 하지 못했지요? 생각해보면 감사할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엄청난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의 깊이에서 감사하는 것은 사실인데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어느 때에 깊이 생각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 남이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까지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지각을 가질 수 있느냐? 그것이 바로 역경입니다. 사람은 평안하게 되면 둔해집니다. 배부른 사람은 코가 둔해집니다. 배고픈 사람이 코가 예민합니다. 환난과 핍박과 고난, 남다른 어려움을 치를 때에 그는 은혜에 대해서 민감해집니다.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 옛날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빌립보 1장 12절에서 말합니다.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그는 로마 감옥에 있습니다. 또한 그는 감옥에서 2년동안 재판도 없이 처박혀서 고생을 했습니다. 로마로 가는 동안 배가 파손이 되었습니다. 죽을 고생을 3년 동안 했지만 이 로마 감옥에 갇혀서 생각해보니 이 모든 과정이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을 통해 큰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을 알고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바란다.' 알았습니다. 그는 깨달았습니다. 남다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고난과 핍박과 환난과 어려움과 같은 것은 웃음으로 감사하기보다 눈물로 감사할 때에, 다른 사람이 미처 상상도 못하는 세계를 생각하게 될 때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1년동안 한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은혜를 오늘 이시간에 생각하면서 감사할 수 있는 그런 감사절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에 너희에게 주신 은혜를 감사하고 은사에게 부족함이 없는 것을 감사하고 우리의 신앙을 지켜갈수 있도록 은사를 공급해 주었어요. 계속적으로 은사에 부족함이 없는 이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믿음으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좋은 여건에서도 미래가 없는 일에는 감사할 수가 없어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있으면 감사할 수가 없어요. 미래에 대한 불확실, 그 속에는 감사가 없어요. 그런데 이상한 것은 감사하는 순간, 미래가 열립니다. 믿음이 생깁니다. 현재로부터 미래로 향하는 그것이 바로 감사에서 열린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우리의 믿음을, 우리의 이 감사 생활을, 우리의 신앙생활을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주님이 견고케 해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 그런 고로 감사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으로 향할때에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 많은 능력 가운데 살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마침내 저주를 받아 광야에 엎드러져 죽은 사람이 많았습니다. 왜 원망했겠습니까? 아니 성경대로 보세요. 물이 없습니까? 농사를 지으랍니까? 하늘에서 주는 떡가루를 가지고 밥 먹고 편안히 지내는데 왜 원망하는거요. 왜 원망하다 죽었습니까?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미래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대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확실한 소망이 없었기 때문에 오늘 조그마한 어려움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미래를 향한 믿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야 감사하게 되고 놀라운 것은 감사하는 순간 믿음을 가지게 되고 믿음을 가지게 되면 소망이 보입니다. 그런 고로 또 다시 감사하게 되는 것이요 또 나아가서는 사랑하게 되는 것이 올시다. 여러분 감사하면 사랑을 알게 되고 사랑 받는 자가 됩니다. 여러분 언제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해보세요. 모든 주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깊이 깨닫게 됩니다.

또 감사하면 고독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혹 여러분 고독한 사람 있습니까? 그 사람은 감사할 줄 몰라서 그럽니다. 내가 "감사합니다" 하는 순간에 마음이 열리면서 고독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하게 됩니다. 감사하게 될 때에 약속의 땅 미래가 환하게 보입니다. 감사하게 될 때에 자신감을 가지게 되고 나아가서는 창의력을 가지게 됩니다. 밝은 지혜가 생깁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원망과 불평하게 되면 생각이 둔해집니다. 점점 고집에 빠집니다. 아주 영영 절망에 빠지고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이제 감사로 모든 원망을 물리치는 순간 가슴이 열리게 됩니다. 교만해서 받은 바를 모르는 사람은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오로지 겸손한 사람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감사는 베푸는 자의 것입니다. 감사를 행동으로 옮기십시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베풀게 될 때에 내가 받는 은혜에 대한 더 깊은 깨달음을 가지게 되고 더 감사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감사하게 될 때에 믿음이 새로워지게 됩니다. 그리고 막막하고 답답하고 절망적인 것 같으나 미래가 환하게 보입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허물없이 견고케 하시리라. 이 놀라운 믿음을 가지고 모든 환란 어려움을 다 넘어설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감사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입니다. 이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많은 은혜 가운데 살면서도 은혜를 모르고 당연히 한평생 감사를 해도 끝이 없을 것이건만 원망과 불평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참으로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믿음도 주시고 또한 그 거룩한 사랑에 감격할 수 있는 그런 확실한 겸손도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감사로 원망을 물리치고 빛으로 어두움을 몰아내고 사랑으로 미움을 이기면서 감사로 충만한 그런 승리의 생활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하나님, 감사합니다 ”

본문 : 고후-9-6-15

 

우리가 언제 하나님 아버지 앞에 감사를 드리지 아니하겠습니까만 이 처럼 1년에 한번 한 주일을 정해서 일년동안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은 퍽 의미가 깊다고 생각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 개인에게 주신 은 혜가 얼마나 큽니까? 우리 가정에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더구나 우리 교회에 베푸신 은혜는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 기 관과 단체가 평안한 가운데 각자의 책임을 잘 감당하게 된 것을 감사드 립니다. 본 교회에서 후원하는 여러 나라 선교사들과 농어촌 교회에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여 주신 것을 감 사드립니다. 더구나 우리 교회의 새 성전건축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잘 진행되고 있는 것을 감사드립니 다. 지금 공정이 약 80퍼센트 진전 이 되었고 이제 내부공사와 조경공 사만 되면 정말 아름다운 예배당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내년 2000년 봄에 입당하게 될 것인데 생각만 해 도 감격스럽습니다. 그 동안 10여 년 동안 불편한 장소에서 고생 많이 하셨는데 이제 서너 달만 더 고생하 면 되겠습니다.

사실 우리 나라가 한국동란 이래 처음으로 IMF라는 국난을 겪게 되 어 우리 국민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 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이제 IMF 2년의 터널을 지나면서 고생도 많았지만 배우고 깨달은 바도 많습 니다. 아직도 여러 가지 문제가 많 이 남아있지만 그래도 어려운 경제 가 다소 회복되는 단계에 이르게 된 데 대하여 감사드릴 수밖에 없습니 다. 또한 일년동안 하나님께서 온 세계교회와 온 세계 나라 위에 축복 을 더하여 주신 것에 대해서도 감사 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감사 의 예배를 드리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 야 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또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 그리스 도인은 평소의 생활이 감사의 생활 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의 생활과 일생이 하나님의 은 혜를 감사하는 생활이 되어야 합니 다.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어보면 그 는 언제든지 제일 먼저 성도들을 향 해 문안을 한 다음에는 하나님께 감 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편지 를 읽어보면 하나님께 감사하는 권 면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범사에 감사하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 라."

이와 같은 글을 쓴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만 감사하라고 한 것 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생활을 보면 그의 생활 자체가 감사의 생활 이었습니다. 바울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께 대한 감격이 사무쳐 있었 고 따라서 그의 하루 하루의 생활, 한 달 한 달의 생활, 아니 일생의 생활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생활이었습니다.

어떻게 이처럼 사도 바울은 감사 의 생활을 할 수가 있었습니까? 그 의 감사 생활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 습니까? 우리는 보통 '모든 것이 다 평안하고, 환경이 좋아야 감사한 생 활을 할 수 있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경우는 좋은 환 경이나 평안한 생활 때문에 감사한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11장 하반부를 보세 요. 거기에 보면 사도 바울의 일생 을 기록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매를 몇 번 맞고, 감옥에 몇 번 들어 갔 고, 몇 번 파선을 당하고, 길의 위험 과 산의 위험과 도적의 위험과 도시 의 위험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도 핍박을 받았고, 이방 사람에게도 핍박을 받았습니다. 다 메섹에서도, 에베소에서도, 고린도에 서도 예루살렘에서도 핍박을 받았습 니다. 로마에 가서도 대부분 감옥에 있었습니다. 바울의 일생은 거의 핍 박과 환난과 곤고의 생활로 점철되 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가운데서도 감 사의 생활을 했습니다. 어떻게 그가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의 생활 을 할 수가 있었습니까? 그 비결이 어디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우리의 몸이 건강하 면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지 않 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병들고 몸이 괴로운데 무슨 감사를 할 수 있습니 까?"라고 말합니다.

"사업이 잘 되 어서 많은 이익을 남기게 되었으면 하나님 앞에 감사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업이 어려워 많은 손해를 보았는데 무슨 감사를 할 수 있습니 까?"

일반적으로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몸이 건강해 서 혹은 사업이 잘 되어서 감사한 생활을 한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후 서 12장에 보면 자세히는 알 수 없 지만 그의 육체 가운데 찌르는 가시 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가 분명히 심한 고통을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육신의 가시를 없애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 히 기도했지만 그냥 두었다고 했습 니다. 그러니까 찌르는 가시를 그냥 가슴에 안고 지냈습니다.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 한 내용 중에도 그가 병이 나서 다 른 곳에 가지 못하고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전도했다는 말이 있습니 다. 사도 바울은 몸이 건강한 사람 은 아니었습니다. 건강하기 때문에 그가 감사와 기쁨의 생활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우리 몸이 건강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그러나 사도 바울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습 니다.

또한 우리 가정이 다 평안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 이 가정에 베푸신 축복입니다. 우리 가정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 나님의 은혜가 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의 경우 는 이 가정에서 오는 기쁨도 없었습 니다. 바울은 일생을 독신으로 지냈 습니다. 종일 일하고도 평안히 들어 와 쉴만한 집 일정한 가정이 없이 평생을 살았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인자는 머 리 둘 곳이 없다"

고 주님께서 말씀 하신 대로 바울은 일생동안 나그네 로서 이곳 저곳을 방랑하며 육신적 으로도 평안히 쉴 곳이 없는 생활을 했습니다. 제가 가끔 전도집회 때문 에 지방이나 외국에 가면 평안한 숙 소를 마련해 주고 좋은 것으로 대접 을 해 줍니다. 그러나 내 집, 내 가 정만큼 평안하지는 못합니다. 여행 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그렇게 평 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일평생을 가정이 없이 살았으니 그 불편함을 무엇으로 다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이 사도 바울의 감사한 생각과 생활이 어디서 생겼습니까? 그것은 밖이 아니라 그 속에 있었습 니다. 그의 처한 환경이나, 그의 건 강이나, 그의 가정이나, 그의 재산이 나, 그의 명예나, 그의 지위나, 그의 성공이나 그런 데 있었던 것이 아닙 니다. 그의 감사생활은 그 속 깊은 심령 속에서 우러나왔습니다. 여기 서 말씀하는 대로 말할 수 없는 그 의 은사로 인하여

"하나님, 감사합 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는 말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사를 받았습 니다.

아까 우리가 부른 찬송대로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합니다. 이구난설(以口難說)입니 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이필난기 (以筆難記)입니다. 얼마나 크고 귀한 지 말로다 할 수 없는 큰 은사를 마 음속에 받았습니다.

그 은사가 무슨 은사였을까요?

그 은사는 아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되고 믿게 되었습니 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신앙은 말하자면 그의 삶의 뿌리요, 그의 감사는 거기서 자란 나무에 맺는 열 매였습니다.

로마서 7장을 읽어보면 사도 바 울의 그야말로 세기적인 고민이 기 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 다. 그는 심각한 도덕적인 고민을 느꼈습니다. 그는 양심적인 인물이 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구약 을 배운 사람입니다. 그는 옳은 사 람이 되기를 힘썼습니다. 사람 앞에 서뿐만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도 부 끄러울 것이 없이 살아 꼭 옳은 사 람 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 의를 얻기 위해서 힘썼습니다. 구약은 우리에게

"네가 하나님 앞에 서 의인이 되려고 하면 계명을 지켜 라. 율법 따라 살아라"고 가르칩니 다. 그래서 그는 양심대로 계명을 지키려고 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사 도 바울이 이와 같이 양심적으로 계 명을 지키기를 힘써도 자기 육체 속 에 다른 힘이 있어서 그대로 살 수 없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속에는 또한 죄의 세력이 있 었습니다. 육신을 기초로 하는 죄의 세력이 있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습니 다. 그래서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 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 에서 나를 구원하랴"고 긴 탄식을 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고 그리스도 의 십자가를 보게 된 것입니다. 십 자가의 뜻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 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새 생명의 복을 깨닫게 되고, 성령의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망극하신 은혜를 받은 다음에 바울은 외쳤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내가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다시 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를 인해서 하나님께 감사했 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죄에서 해방을 받았기 때문입 니다. 죄에서 구속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 습니다. 이 구속과 해방의 기쁨은 언제든지 그로 하여금 이 은혜를 감 사하여 보답하려는 감사의 생활로 변하게 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 은 그리스도를 만난 때부터 예수 그 리스도는 옛날 승천하신 그리스도만 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언제 나 자기 자신과 함께 계신 것을 깨 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사는 것이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육에 속한 자기는 죽었습니다. 그 대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속에 살 아 계신 것을 항상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4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나를 위해 서 변명할 때 내 친구들은 다 나를 떠났습니다. 한 사람도 나를 도와주 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께 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강한 힘을 주고 주께서 언제든지 나와 같이 계 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전도하러 갔습니다. 그곳에 죄가 너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전도할 기회가 너무 컸습니다. 그러나 반대하는 유 대 사람들은 벌떼와 같이 일어납니 다. 그때 주님께서 특별히 사도 바 울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다고 했습 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이 도시에 내 백성이 많으니 입을 닫지 말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파하라."

살아 계신 주님께서는 언제든지 사도 바 울과 함께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중해에서 큰 풍랑 을 만났었습니다. 사실 그 배에는 바울뿐만이 아니라 로마 군인들과 뱃사람 그리고 로마로 호송되어 가 는 많은 죄수들이 있었습니다. 이 배에 타고 있었던 사람은 276명이나 되었었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은 그 대로 있어서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 진 절망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이 풍랑의 와 중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절망 중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 했습니다.

"여러분,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 밤에 내 곁에 서서 말씀하셨습니 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말 씀하고 있는 한, 내 삶에 대한 하나 님의 인도가 계속되고 있는 한 풍랑 은 두려워 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 다.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 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 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 게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풍랑 속에서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 지 발견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모 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삶 의 이유와 자기들에게 주어진 사명 이 무엇임을 각성하고 있던 사람들 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사 명을 알고 있습니까? 왜 우리가 이 런 세상에 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유가 무엇 입니까? 우리의 존재 이유를 아는 한 절망은 없습니다. 풍랑 속에서도 노래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풍랑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 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풍랑 에도 불구하고 함께하시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음성 을 듣자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풍랑 만나 절망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 게 소망을 주었습니다.

"여러분, 안 심하십시오. 우리는 마침내 이 풍랑 을 극복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의 그리스도인의 사명도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 다. IMF의 거센 풍랑 때문에 절망 에 빠진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부통계에 의하면 IMF체제 2년 동 안에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극심해 졌다고 합니다. 20퍼센트는 전보다 오히려 나아졌는데 나머지 80퍼센트 는 말할 수 없는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고 합니다. 국민 한 사람의 최 저 수입이 월 23만원인데 이것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갈수록 늘어 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고난의 상황에서 하나 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편에 서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하셨 기 때문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 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 리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풍랑 만나 어쩔 줄 몰라하며 두려워하는 제자 들에게 주님이 다가오십니다. 그리 고 겁에 질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 습니다.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 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심하지 못하고 당황하며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서 주님은 이렇 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

그들이 조금 만 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면, 그 리고 조금만 더 주님을 신뢰할 수 있었다면, 풍랑 속에서도 찬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풍랑 속에서 배의 갑판에 사람을 모으고 축사를 했습니다.

"음식 먹으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 터럭 하나라도 잃을 자가 없느니라 하고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 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먹기를 시작하매"(행 27:34∼35).

상상해 보세요. 지금 큰 풍랑이 일고 있습니다. 배는 미친 듯이 흔 들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절망의 벼랑 끝에서, 생사의 갈림길에서 아 우성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 들을 잠잠하게 한 자리에 모아놓고 떡을 떼며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 를 올리고 있는 바울의 모습을 생각 해 보세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풍랑 속에서 어떻게 살고 있 습니까? 하늘을 바라보시겠습니까? 찬양을 하시겠습니까? 그리고 바울 처럼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고 백할 수 있습니까?

"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 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 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 라."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 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주님께 감사 하는 사람들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4장 13절 에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 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 씀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적 그리스도만이 아 니었습니다. 현재에 자기와 같이 계 셔서 간단없이 능력을 주시는 그리 스도였습니다. 그러므로 풍랑을 만 날 때도, 핍박을 받을 때도, 돌에 맞 을 때도, 파선을 당할 때도, 조금도 두려워 할 것이 없었습니다. 언제든 지 주님의 능력이 함께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일을 당할 때 사 도 바울은,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 는 말밖에는 할 것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다 이와 같 은 믿음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십 자가로 죄에서 구속을 받으셨습니 까? 우리가 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 께서 우리와 같이 하시는 것을 아는 이 새로운 믿음, 참 믿음, 산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도 순 경이나, 역경이나, 괴로울 때나 평안 할 때나, 초막이나 궁궐이나, 밤이나 낮이나, 언제나 감사로 충만한 생활 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생활을 하게 되니까 자연히 그의 생활에는 많은 열매가 맺혔습니다. 우선 마음 속에 성령의 열매가 맺혔습니다. 사 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 성, 온유, 절제의 열매가 맺혔습니 다. 가는 곳마다 죽은 심령을 구원 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도와주었습 니다. 가는 곳마다 주님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렇게 열매를 맺게 되 니 자연히 마음속에서부터 감사함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주를 위해서 무슨 열매를 맺든지 열매를 맺는 사람일수록 감사한 마음이 더 많이 있습니다. 주를 위해서 한 사 람에게라도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 다면 그 사람은 감사한 마음이 더 많습니다. 주를 위해서 다른 사람에 게 옷 한 벌이라도 줄 수 있고, 목 마른 사람에게 냉수 한 잔이라도 줄 수 있었다면 그 사람에게는 감사한 마음이 더 많아질 것입니다.

주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많 지는 않지만 선교비를 매달 꼭 내 고, 착한 사마리아인 주일에 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돕는 일에 손을 펼 수 있었다면 그 사람에게는 더 기쁨이 있을 것이고 감사한 마음이 있을 것 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사도바울은 항상 빛나는 소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우리를 위하여 지극히 크고 영 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는 것을 분명히 알고 살았습니다. 이 세상에 서 내가 조금 환난을 당하지만, 이 세상에서 내가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지만, 이 모든 것은 하늘나라의 큰 영광을 더하게 하는 것이니 얼마 나 감사합니까?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 갈 길을 다 달리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나를 위해서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는 것을 언제나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그 러니 감사한 마음이 자연히 북받쳐 올랐습니다.

 

사실 감사는 믿음의 척도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 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마는 하나님의 은혜인 줄을 모 릅니다. 그러므로 하박국의 말처럼 고기가 많이 잡히면 그물에 감사의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다가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점점 감사할 줄 알게 됩니다. 평안하면 감사합니 다. 그러나 괴로우면 감사를 드리지 못합니다. 건강할 때는 감사해도 병 이 나면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이 나 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점점 자 라나면 평안할 때도 괴로울 때도, 건강할 때도 병들었을 때도, 성공해 도 실패해도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는 우리

"믿음의 척도"입니 다.

우리가 온전히 그리스도의 신앙 에 들어가게 될 때는 문자 그대로 성경말씀처럼 모든 일에, 범사에 감 사하게 됩니다. 사실 하나님의 나라 는 믿음으로 구원 얻은 사람만 모였 기 때문에 불평이라고는 없습니다. 불만도 없습니다. 하늘나라에는 기 도도 없습니다. 하늘 나라에는 목사 의 설교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도 찬송과 감사만 있습니다.

이 세상 교회에서는 기도가 필요 합니다. 왜요? 기도를 통해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 상 교회에서는 예배 드릴 때 목사의 설교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늘 나 라에서는 예배할 때 찬송과 감사밖 에는 없습니다. 이 시간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령이 오직 찬송과 감사로 충만하다면 이 자리가 곧 하 늘나라의 그림자가 될 것입니다. 하 늘 나라의 축복을 미리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와 같은 은혜를 받아서 이 세상에 살면서 어떤 환경 과 처지에서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감사드릴 수 있습니까?”

본문 : 골3:5-17

 

이미 봉독하신 말씀 가운데서 15절 말씀을 다시 읽습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 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 라.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믿음의 자녀들을 향하여 간절하게 권면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여러 가 지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감사해야 할 일이 있을 때 감사하 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 아닌가? 라고 말씀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한 번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실 때 갈릴리와 사마 리아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어떤 한 촌에 들어 가셨습니다. 거기서 문둥병자 열 명을 만나게 되었 습니다. 유대인이 대부분이었지만 그 가운데는 사마리아 사람도 한 사람 끼어 있었습니다. 여러 분이 잘 아시는 대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감정이 좋지 않아서 서로 접촉하기를 꺼려했 습니다. 그러나 문둥병 환자들은 다같이 불행한 병에 걸려있기 때문에 불행한 가운데 서로 동정 하면서 한 집안이 되어서 여기저기 쫓겨다니며 유대 사람이나 사마리아이나 사람 할 것 없이 같 이 지냈던 모양입니다. 그 당시 문둥병은 죽음과 같은 불치의 병이었습니다. 사실 이 사람들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이 병은 전염성이 있어서 이 병에 걸리면 격리시켰습니다. 사회에서 추방되 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병에 걸린 사람들끼리 모여 지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친구를 가질 수가 없었고 단순히 같은 병에 걸린 것 때문에 함께 지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이 사람들이 있는 곳 가까이로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 사람들은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예수 선생님,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들은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을 직접 뵙게 되니 너무 감격해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주님을 향하여 절실하게 소리 질렀습니다. 예수님은 열 명의 문둥병 환자를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이 사람들은 서로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저희는 예수님이 말씀을 들으 면서 아무런 느낌도 변화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병에서 깨끗해져라 고 하시면 온몸이 불덩어리 같이 뜨거워지든지, 감당할 수 없는 경련을 일으키든지,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짜릿하든지, 어떤 체험이 있기를 기대했는데 그런 체험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의 말씀을 들은 이 사람들은 기대하는 바와는 달랐지만 실망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했 습니다. 믿음에는 반드시 순종이 따릅니다. 순종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저희가 제사 장에게로 가다가 다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많은 문제와 요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는 하는데 응답받지 못하는 일이 많 아 실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다음 단계를 위하여 충분한 힘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리 고 주님은 언제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열 사람의 문둥병 환자는 함께 고통을 받았습니다. 함께 울었습니다. 함께 한숨쉬었습니다. 함 께 절망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말씀 듣고, 함께 순종했더니, 함께 병이 나았습니다. 그들은 함께 기쁨이 충만하여 제사장들에게 가서 그들의 몸이 깨끗이 나은 것 을 보이고 다 나았다는 증명서를 받았습니다. 이제는 일반 사회 사람들과 같이 지낼 수 있었고 그립던 가족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뻐 뛰며 세상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오직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깨닫 고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 돌리는 감사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열 사 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그 아홉은 어디있느냐? 이 사마리아 사람 한 사람밖에는 하나 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없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열 사람의 문둥병자들이 병고침을 위하여 다 함께 예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다함께 완전히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이 돌아와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열 사람이 간구했는데 한 사람만이 돌아와서 주님께 찬양했습니다. 그러면 다른 아홉 사람은 왜 주님께 감사드리지 못했습니까?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 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성의 일면입니다. 이 사람들처럼 우리도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했 을 때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고 간절히 간구합니다. 그 후에 우리가 그 어려움에서 건짐을 받았습 니다.그런데 그 어려움에서 건짐 받고 나서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지키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영국의 트렌치 감독은 예수님의 행하신 이적에 대해서 주석을 써 내려가다가 자기가 믿는 바로 는 모든 은혜 가운데 감사할 줄 아는 은혜는 제일 드문 은혜라 고 말했습니다. 우리 동양에 내려 오는 말 중에도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 라고 한 것이 의미있는 말이라고 생각합 니다. 은혜를 구하는 이는 많지만 은혜를 받은 다음에 그것을 기억하는 이는 적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특별히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도 그 아홉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옛 날 다윗도 스스로 자기 영혼을 깨우면서 하는 말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송하여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라고 했습니다. 이 열 사람 가운데 아홉 사람이 은혜를 잊어 버렸는데 이상하게도 전부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을 비교해 보면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 유대인이요, 또 은혜 를 깨달아 알 만한 사람이 어떤 면으로 보든지 유대인이 아닙니까? 이 유대인들은 말하자면 아브 라함의 자손입니다.모세의 율법을 배운 사람들입니다. 여러 선지자의 교훈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매 안식일이면 회당에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유대인 아홉은 전 부가 은혜를 잊어 버렸습니다. 은혜는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은혜를 받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으례히 받을 것으로 생각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은혜가 너무 크면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작은 은혜는 기억하지만 큰 은혜일수록 오히려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열심히 간절히 하는 사람도 은혜를 잊어버리기가 쉽습니다.더구나 예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의 결과로 은혜를 받았는데도 그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믿음있는 사람도 은혜를 잊어버리 기 쉽습니다. 왜 우리가 감사하지 못합니까? 축복 대신에 고민거리에 정신을 쏟고 있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 합니다. 아홉 사람의 문둥병 환자는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친구도 잃고 재 정적으로도 궁핍했습니다. 지난날의 고통이 오늘의 기쁨을 소멸시키는 일이 많습니다. 벤허 라는 작품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현재의 축복에 감사하는 것만이 지난 날의 고통을 잊을 수 있다 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 혼자 돌아와 감사하는 것을 보시고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고 말씀하셨습니다. 열 사람의 문둥병자가 다 나음을 받았지 만 그 은혜를 깨닫고 돌아와서 감사드린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나머지 아 홉 사람은 예수님의 은혜를 잊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감사드릴 수 있습니까?

 

첫째로,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은혜 가운데 감사할 줄 아는 은혜는 보기 드문 은혜 입니다. 세계적인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r)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세 가지 큰 덕을 가르친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 이라고 했 는데 자기로서는 꼭하나 더 넣을 것이 있다고 하면서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 가운데도 은혜를 구하는 이는 많지만 받은바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사 람은 심히 적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문자 그대로 조금 전에 말씀드린 문둥병자와 같이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 이었는데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함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십자가의 은혜를 늘 잊어버리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감사드립니까? 우리가 깊이 생각지 아니하고 늘 힘 쓰지 아니하면 이 큰 은혜를 잊어 버려서 감사생활을 하지 못하기가 쉽습니다. 여러분,우리가 세상에 처음 올 때 무엇을 가지고 왔습니까? 벗은 몸으로 왔습니다. 빈 손으로, 그저 핏덩이로 왔습니다. 이 세상에 난 다음에 그냥 내버려두었다면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목욕시키고, 젖먹이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눕히고, 말도 하나하나 가르쳐주고, 학교에 보내주고 다 커서 한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키움을 받았는데 어머니의 은혜, 아버지의 은혜도 모르고, 모든 축복의 근본이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지 못하고 혼자 된 것 처럼 생각하는 분은 없습니까? 성경에 보면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내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짐승은 오히려 그 주인을 아는데 사람은 부모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그 임자가 되는 하나님을 모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 까?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그 당시 불신세계에 대해서 말할 때 두 가지로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한다 고 했습니다. 믿지 않은 세상 사람들의 생활을 보면 하나님이 계신 것을 어느 정도 압니다. 그러면 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줄 모릅니다. 세계의 어느 문헌을 보아도 우리 성경처럼 감사하라 는 말과 찬양하라 는 말이 많이 나온 책은 없습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는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그러면 성경에는 왜 이렇게 감사하라 는 말이 많이 나옵니까? 본래 성경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 님을 믿는 경건한 사람들의 손을 통해서 쓰여진 까닭입니다.우리가 오늘을 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첫 번째 감사주일은 1620년 102명의 청교도가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영국을 떠 나 늦가을 이맘 때 미대륙에 도착했던 때입니다. 오늘의 미국은 부강한 나라이지만 그때는 그렇 지 못했었습니다. 그저 황막한 광야와 산과 들뿐이었습니다. 그 해 겨울 먹을 것이라고는 배에 싣고 오며 먹다 남은 거 얼마밖에 없었습니다. 그 해 겨울은 대단히 추웠습니다. 날씨는 찬데 먹을 것은 없고, 입을 것도 변변치 않고, 시설 도 엉망이어서 그 해 겨울을 지내는 동안에 반 이상이 굶어 죽고, 병나서 죽고, 얼어죽었습니다. 마지막에는 먹을 것이 점점 없어져서 옥수수 몇 알씩을 배급 준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첫해 농사를 짓고,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감사한 것을 깨닫고, 특별히 하루 를 정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풍속이 생긴 것입니다. 그들이 만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고 하면 그런 감사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평안할 때에만 감 사하는 것이 아니라 괴로운 때에도 감사 드립니다. 순경에만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역경에도 감 사드립니다. 셋째로, 은혜를 보답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 116편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고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성도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후 대해 주신 것을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와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사무엘에 의해서 베들 레헴 목동의 지팡이를 이스라엘 나라의 왕의 홀로 변하게 하여 주신 그 확증을 믿었습니다. 그에 게는 이와 같은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견뎌 냈습니다. 비록 사울왕이 자기에게 진노하고 그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다윗은 그의 희망 이 무엇인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고 그의 희망의 근거를 밝혔습니다. 시편 116편을 쓴 시인도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라고 말했습니 다. 성도의 생활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감사 감격하여 내가 어떻게 하면 이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답할까 하는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시인을 환난 가운데서 건져 주셨습니다. 넘어짐에서 건져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이 놀 라운 은혜를 깊이 생각합시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서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감사와 감 격이 없는 신앙생활은 옳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이 시인은 여기서 그의 결의를 표현합니다. 내가 구원의 잔을 들겠나이다, 내게 주시는 어떤 잔이라도 거절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는 고백과 열의입니다. 그리고 내가 감사의 희생을 주께 드리겠나이다 했습니다. 마음속에 진정으로 감사한 심정을 표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려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 다음부터 어떻게 평생 동안 늘 감사와 감격의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까? 디모데전서 1장 12절 이하의 말씀을 보세요. 여기 그의 간증이 있습니다. 나를 능하 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 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 도록 풍성하였도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 그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얼마나 감사한지 말로 다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자기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해 보겠다고 하는 보답의 심정을 가 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주님 때문에 그렇게 심한 어려움을 당해도 오히려 영광으로 생각 하고 그렇게 수고를 많이 하면서도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역사하는 주님의 은혜 라고 했습니다.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에 보답하려는 마음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 러므로 바울은 그처럼 많은 주의 일을 하면서도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이런 선언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 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라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아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벅찬 심정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은 깊은 감격의 믿음은 그로 하여금 주님의 교회를 위해 봉사하며, 만민을 위해 봉사하는 봉사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끌림을 받아서 안할래야 안할 수 없는 감격이 늘 그에게 넘쳤습니다. 이와 같은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감격스러운 믿음은 바울로 하여금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승리의 생활을 하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참된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격스러운 마음 가운데서 그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려고 하는 노력에 불과 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고. 우리 믿는 사람에게 근심이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하면 보 답할 수 있을까? 하는 근심밖에는 없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신앙이 있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감 사의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겐 감사할 일이 점점 많아집니다. 감사하지 아니 하는 사람에겐 감사할 일이 점점 적어집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 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고 말씀했습니다. 여기 모든 것 이란 말은 역경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역경까지도 선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떻 게 역경이 선으로 바꿔집니까? 그 하나는 역경을 순경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다른 하 나는 역경 속에서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그 역경을 변화시키는 이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옥중에 있으면서도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고 말씀했습니다. 이것 은 현재 당하는 처지에 만족해서 환경이 좋아서 감사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은 고통이요, 어 려움은 어려움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와 사랑을 믿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 다. 지금은 쓰라린 사정이나 감당하기 어려운 여건 속에 있더라도 하나님이 보다 나은 데로 이끌 어 주실 것을 믿을 때 그 사람은 하나님께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감사는 역경 속에서 의 감사요, 소망 중에 즐거워하는 감사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처지는 어렵습니다. 이런 형편 에서 어떻게 감사할 수 있습니까? 구약 성경 하박국 3장 16절 이하의 말씀을 읽을 때 알 수 있습 니다. 하박국 선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 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 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 도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 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라고 했습니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되었을 때 감사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러나 환난의 자리, 역경의 처지, 실패의 형편에서 감사할 수 있는 것은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왜 이 땅에서 착하 고 바르게 살려고 힘쓰는 사람들이 고생을 해야 합니까? 지금은 이해할 수 없어도 감사하는 생활 을 하면 이해할 수 있고 대답을 얻을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시간적으로는 항상 감사하고, 내용적으로는 범사에 감사하고, 방 법으로는 주의 이름으로 감사하고, 대상으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 으로 축원합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는가?”

본문 : 눅-17-11-

몇 년전에 브라질에 있는 유명한 아마존 숲을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40m나 되는 아주 큰 나무, 꼭대기 나뭇가지 사이에다가 꼭 까치집처럼 지은 방이 있습니다. 그 호텔에서 그 방이 제일 비싼 방입니다. 어쨌든 사다리를 타고 한참 올라가야 되는 그런 방에 또 역사적인 일이었기에 그 방에 들어가서 며칠을 유숙한 일이 있었습니다. 밤에 자는 동안에 지붕 위에 원숭이들이 모여가지고 얼마나 시끄럽게 하는지 정신이 없고요, 아침에 문을 열고 나오면 문 앞에 원숭이들이 있다가 막 달려듭니다, 뭐, 먹을 것을 좀 달라고. 뭐, 그런 아주 짐승들 속에서 며칠을 지내는 좋은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호텔에 사장님 되시는 분하고 제가 좀 사귀었는데 이 분하고 같이 숲을 지나갈 때 그 사장님이 누군가를 다 아니까, 이 짐승들이, 그래서 바나나를 한바구니 이렇게 들고 가면서 특별히 어린 원숭이들이 올 때 하나씩 주는 거예요, 이렇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것을 받아갈 때 탁 잡아가지고 가로채가지고 도망을 가요. 빼앗듯이. 매일같이 그렇게 준다는데도 그렇게 좀 공손하게 받지를 않고 받고 탁 잡아채고는 막 도망을 가요. '저것이 왜 저럴까?' 그래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했더니 그 사장님은 전문가거든요. "이것이 동물과 사람이 다른 겁니다." 아주 인생 철학을 말씀하시더라고요. 동물은 내가 한평생 바나나를 이렇게 주어도 고마운 줄 모릅니다. 이게 특징입니다. 저 '왜 저렇게 도망가느냐?' 그것은 불신 때문입니다. 내가 이것을 주고 자기를 붙잡을까봐 그저 이것만 받아가지고는 도망을 가요. 참 귀중한 진리를 들었습니다.

공산권을 방문해 보면, 하나같이 못삽니다. 그 못사는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 간단합니다. 공산세계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공산세계에서 많이 듣는 말이 혁명입니다. 혁명, 투쟁, 쟁취. 지금 북한에 식량이 모자라서 요새 남새 채취 작전을 합니다. 혁명입니다. 그것도 혁명이라고 불러요. 그래서 들판이고, 산이고 먹을만한 풀은 다 뜯어오라 이거야. 온 시민이 다 나서서 지금 풀뜯기 작전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비참한 얘기지요. 여러분, 혁명, 파업, 쟁취 이런 말을 듣는데 쟁취를 통해 얻은 것은 감사가 없습니다. 그건 빼앗은 거니까요. 그래서 이 붉은 띠를 두르고 뭐 '결사투쟁' 이런 것을 볼 때마다 참 마음이 서글픕니다. 저렇게 얻는 것도 없지만은 얻어도 불행합니다. 왜요? 감사가 없잖아요. 이건 빼앗은 것이지 얻은 게 아니거든요. 그 세계에는 감사가 없어요. 감사하지 않는다고 벌하는 형법은 이 세상 어디도 없습니다. 그러나 탈무드에 아주 명언이 있습니다. '감사를 모르는 자를 벌하는 법을 하나님께서 만들지 아니한 것은 감사할 줄 모르는 자를 이미 불행으로 벌하셨기 때문이다.' 감사할 줄 모를 때 벌써 그는 불행이라는 벌을 받고 있는 거예요. 다시 벌할 것도 없어요. 감사하지 않는다고 감옥에 보내는 법은 없어요. 그러나 그는 벌써 불행이라고 하는 심판을 받고 있더라 그 말이에요.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열 문둥병자를 만났다'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문둥병이라는 것이 언제 걸리는 지도 모르게 걸려가지고 서서히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 아닙니까? 참 비참한 병입니다. 손발이 떨어지고, 코가 떨어지고, 눈알이 빠지고 이러면서 마지막에 비참하게 죽어가는 문둥병인데, 이 당시 이것은 난치병이요, 전염병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이 병에 걸렸다 하면 가정에서 격리됩니다. 사회에서도 버림받습니다. 심지어는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어느 동굴같은데서 모여 살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얼마의 식량을 보내주면 그걸 먹고 살고요, 만일에 식량이 부족해지면 때를 지어 동리 돌아다니면서 소리를 질렀지요. 그래서 얻어먹는 그런 집단입니다. 여기 오늘 열명이라는 말이 그런 뜻이에요. 이렇게 불쌍한 사람들이 떼를 지어다니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단 말이지요. 그런데 이 저주받은 인간들을, 저주받았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불쌍한 사람을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주 중요한 말씀이 나와요. "제사장에게 가서 보여라" 그랬습니다. 제사장은 당시에 의사입니다. 그런고로 문둥병이 나았는지 문둥병이 아직 있는지는 제사장이 판단을 합니다. 그리고 "너는 나았다" 라고 인정을 하면 그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데, 아직 낫지도 않았는데, 뭐 안수한 것도 아니고 안찰한 것도 아니고 깨끗케한 것도 아니에요. 그저 "제사장에게 보여라." 이 말을 듣고 가야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그러나 이 사람들이 이 만큼의 믿음이 있었고 이 만큼의 순종이 있었어요. 그 제사장에게 보이려고 가는 길에 보니 나았어요. 얼마나 희한합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바로 그 순간 사마리아 사람 하나는 길을 돌려서 예수님께로 와서 발 앞에 꿇어 엎드리고 사례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아홉은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감사가 조건은 아닙니다. 감사가 그들의 준 강한 의무가 아니더란 말이에요.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가만히 들어보면 이렇게 와서 감사하는 자를 기쁘게 여기고 예수님 돌아오라고 말씀한 바 없어요. 돌아와서 감사해야 된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 아홉은 어디있느냐?" 무슨 말입니까? 섭섭해하시는 겁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감사는 의무가 아니더라고요. 감사가 조건도 아니에요. 그러나 자발적으로 자원적으로 와서 감사하는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래야 마땅하지 않느냐? 그것이 오늘 성경에 나타난 핵심적인 진리입니다. 뭐 그 사람들 감사 안했다고 해서 병이 다시 재발했다고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너 감사하지 않았으니 영원히 너는 문둥병에서 벗어나지 못하리" 라고 그렇게 말씀하실 예수님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 이렇게 슬픈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아홉에 대한 이야기가 늘 궁금해요. '그 아홉의 변명' 이라고 하는 작자 미상의 글이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볼만합니다. 한 사람은 '의사와 제사장에게 가서 정밀검사를 해야겠다' 해서 갔다는 겁니다. '이게 나은 것 같은데 정말 나았는지.' 아주 의심이 많은 사람이에요. '가서 정밀검사를 해야지' 그래서 가버렸어요. 두 번째 사람은 혹, '재발 가능성이 있는지도 몰라. 그런고로 며칠 두고 봐야겠다.' 이거, 신중론이요. 이거 나았다고 하는데 꿈같은 얘기라서 정말 나았는지 좀 기다려 봐야겠다는 거예요. 세 번째 사람은 '내 병은 본래 문둥병이 아닌 좀 특이한 피부병 정도였던가보다.' 이건 회의론자올시다. 또 그 다음 사람은 '내 병은 나을 때가 돼서 나았을 거야.' 이건 자연현상으로 보려고 합니다. 가만히 보면 그런 일들이 많잖아요. 어떤 병 걸렸다가 나았을 때, "어떻게 나았어?" "그저 뭐, 약도 좀 쓰고 병원에도 가긴 했지만 나을 때가 되어서 나았나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또 하나는 병 걸리기 전에 가졌던 밭과 재산이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이게 궁금해요, 이제 먹고 살아야겠으니까. 그래서 그걸 빨리 알아보기 위해서 가버렸어요. 또 한사람은 병 걸리기 전에 같이 있었던 가정과 식구들, 특별히 아내가 수절하고 있는지 그게 궁금해요. 그래서 가버렸다. 또 한사람은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해준 것이 없잖아.' 안수를 해준 것도 아니고, 어루만져준 것도 아니고, 안찰을 한 것도 아니고, 약을 준 것도 아니고 말이에요. '아, 그저 "가서 보여라" 한 말씀 밖에 안했는데 아, 뭐 예수님이 별로 해준것도 없는데'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었을 거란 말이죠. 또 다른 사람은 '다른 유명한 랍비들도 이런 것은 아마 가능할는지 몰라.' 예수님의 능력을 상대화 해버렸단 말이죠. 또 한사람은 '이 모습대로 갈 수는 없잖아. 가서 목욕을 하고 새 옷을 입고 예물을 가지고 그리고 예수님께 가야지.' 그래서 가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 사람은 어떻습니까? 이 한사람은 이 모습 이대로. 이게 중요한 거예요. 문둥병자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어요. 그 더러워진 거, 그 붕대감고 있는 거, 이 모습 이대로, 그거라면 어떠냐? '예수님이 벌써 우리를 환영해주시고 사랑해 주셨는데 이 모습 이 추한 모습이면 어떠냐?' 이거예요. 이 모습 이대로 예수님 앞에 나왔어요. 그래서 예수님께 사례하게 되었다 이 말입니다.

여러분 그 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 한사람은 우선 감사했어요. 최우선적으로 감사했어요. 예수님이 감사를 조건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아요. 그러나 이것이 조건이 될 때는 율법이요. 오직 은혜로 쓰시고, 은혜로 받고, 은혜로 말씀하시고, 은혜로 순종하고, 오직 은혜로 받아들이면서 감사하고 있어요. 의무적인 것은 감사가 아닙니다. 자발적으로 자원적으로 이렇게 참 그 추한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나와서 감사의 사례를 해서 주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R. A. Toray 라고 하는 목사님께서 쓰신 책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미시간 주에 풍랑이 일어나서 배 한 척이 파손이 되었어요. 그때 한 수영선수가 목숨을 걸고 뛰어들어가서 무려 스물세명이나 구조를 했어요. 그것이 신문에 나고 그런 일이 있었어요. 몇 년 후에, 아주 오랜 후에 토레이 목사님이 설교하시면서 '미시간호에 오래 전에 있었던 이야기, 청년 하나가 23명의 목숨을 건진 일이 있었습니다' 하는 그런 설교를 했더니 설교가 끝났을 때쯤 해서 한 노인이 하는 말이 "제가 바로 그 청년입니다" 그랬어요. 예배 후에 내 사무실에 들어오라고, 그래서 들어와서 차를 나누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중에 "당신이 그때 겪었던 일 중에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했더니 이 노인이 하는 말이 "한사람도 고맙다는 말을 한 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크리스마스 카드 한 장도 온 일이 없습니다." 그것이 인상받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왜 이렇게 어려워지는 것입니까? 직선적이고 바로 그 시간 감사하지 않으면 감사 못하게 됩니다. 하루만 지나도 몇시간만 지나도 생각이 바뀝니다. 오늘 이 아홉사람의 변명처럼 말이에요. 감사 못할 이야기들이 자꾸만 생각이 나요. 못하게 되어버리고 말아요. 바로 이 시간 감사하지 않으면 영영 못합니다.

여러분, 슬픈 얘기입니다만은 1980년 아웅산 묘역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한국의 유명한 정치인들, 무려 방문단 17명이 살해되는 테러사건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참가했던 분이 마침 그쪽으로 가는 중이었지만은 길이 막혀서 조금 늦게 간 것 때문에 그 끔찍한 사건에서 면하고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부랴부랴 대통령과 같이 비상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습니다. 너무나도 어려운 시간이라서 비행장에 새벽 4시에 내렸는데 다 그냥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뭐 서로 인사도 안하고 흩어졌는데, 이 분도 내리긴 했는데 깜깜한 밤에 이거 어떡하나? 그래서 우선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기사가 물어봅니다. "어디로 갈까요?" 그때 그는 생각을 했답니다. '내가 어디로 가야하나? 꼭 죽어야 할 사람이 지금 살았는데 내가 어디로 가야하나?' "소망교회로 갑시다." 도저히 집으로 먼저 갈 수가 없었더라는 거예요. 그는 새벽기도회에 한번도 안나온 사람입니다. "우선 교회로 갑시다." 교회 마당에 왔는데 글쎄 대통령 따라간 분이라서 돈을 한푼도 안가지고 갔어요. 택시비를 줄 돈이 없어요. 그래서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이제 새벽기도 나오는 분이 있을테니까 아무나 붙들고 부탁을 해서 돈을 꾸어가지고 택시비를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잠깐 기다리니까 아니나 다를까 교인이 오더래요. 그래서 부탁해서 돈을 꾸어서 택시비를 주었대요. 그리고 들어와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노라고. 여러분, 가끔 제가 길에 나가면 대낮에, weekday에 교회에 나오시는 분들을 만나요. 서로 인사하면서 "어떻게 이시간에 교회에 나오십니까?" 여러 번 같은 얘기를 듣습니다. "제가 지금 중한 수술을 받고 병원에서 퇴원하는 시간입니다. 내가 생명을 다시 찾았는데 내가 집으로 바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교회에 나왔습니다. 기도하고 가려고 오는 길입니다." 그런 분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잘한 일이올시다. 바로 이 시간, 바로 직설적으로 즉각적으로 감사하지 않으면 감사할 수 없게 되고 맙니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런 전화 받아보셨어요? "가스가 나왔습니다" 그러대요. 저도 한번 맹장 수술을 급히 받아본 적이 있는데 이런 수술을 받은 다음에 의사와 환자가 같이 기다리는 것이 가스가 나오는 겁니다. 이게 만일 안나오면은 재수술을 받아야 됩니다. 그래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가스가 나오면 아, 살았다고, 서로 고맙다고 전화를 겁니다. 가스가 뭡니까? 방귀예요, 방귀. 여러분 허구헛날 방귀뀌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한지 몰랐죠? 이 시간에는 이게 기쁜 소식입니다, 이게요. 여러분 환난과 고통, 역경, 그것이 사람의 생각을 깊게 만들고 깨달음을 만듭니다. 깨달음이 있을 때 비로소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가 있을 때, 행복이 따라오는 것이올시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형통할 때, 평안할 때 감사할 줄 모릅니다. 오히려 원망하고요 가장 절박한 어려움에 있을 때 감사할 뿐 아니라 미처 감사하지 못한 것까지 감사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도 한번 방문에서 많은 사람에게 감명을 준 세계가 갈채를 보내는 감동적인 인간승리의 다큐멘터리가 있습니다. '발로 쓴 내 인생의 악보'라고 하는 책입니다. 이것은 천상의 목소리로 가스펠 송을 부르시고 있는 그런 가스펠 싱어의 수기입니다. 레나 마리아 라고 하는 분의 수기입니다. 그는 날 때부터 장애자로 두 발이 없습니다. 다리도 한 다리가 짧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천사의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장애를 오늘이 있게 한 본질적 요소였지 이것은 장애가 아닙니다' 라고 말합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신앙적으로 받을 때 우리는 언제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자체가 레나 마리아의 삶을 태양보다도 더 밝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여러분, 잘되고 평안한데서 감사가 우러나오는 줄 알지만은 실제적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장 어려운 형편에서 우리는 감사하게 됩니다. 깨달음이 없이는 감사가 없습니다. 고통이 없이는 깨달음이 없습니다. 깨달음의 깊은 세계에서 감사하고 감사할 때 행복으로 이어집니다. 여러분, 절대적인 관계에 감사가 있고요 직선적 이해에 감사가 있고요 절대적 관계, 하나님과 나와의 신앙적 이해 속에서만이 진정한 감사를 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사건의 결과가 아닙니다. 감사는 생의 동기입니다. 행복이 어디 있느냐고요? 행복해서 감사하는 게 아닙니다. 감사함으로 행복이 되는 것이올시다. 감사함으로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종은 울려서 소리가 나야 종입니다. 감사가 없는 곳은 행복이 없는 것입니다. 감사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십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네 믿는 대로 되리라. 너를 내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평안히 가라.' 이 축복이 이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감사하는 은혜, 그리하여 은혜로 은혜되게 하는 은혜, 그리고 범사에 형통한 은혜, 그것은 바로 감사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올시다. 기도하십시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당연히 감사할 일이 있건만, 우리는 감사할 줄 모르고 사는 것을 용서하옵소서. 이제서 뉘우치며 감사드립니다. 주여 깊은 세계에서 감사하게 하시고 감사로 우리의 생의 의미를 바꾸어 행복하게 하시고, 감사함으로 기도응답을 받게 하시고, 감사함으로 늘 승리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

성경: 다니엘 6 : 1 - 10

 

하나님의 사람 다니엘은 바벨론에 끌려간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총명했고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느브갓네살 왕의 꿈과 벨사살 왕 앞에 나타난 글자를 풀어 당시 바벨론의 셋째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시기한 이들로 인해 결국 사자굴에 던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그런 일이 생긴 것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합니다.(10절) 그는 환난과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감사한 것입니다. 어떻게 다니엘은 이런 감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을까요?

 

Ⅰ. 그는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30일동안 누구든지 왕 외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넣겠다는 왕의 조서가 내려진 사실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집에 돌아와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어놓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감사했습니다. 게다가 어떤 조건이 이루어져서 감사한 것이 아닌 절대적으로 감사하였습니다. 우리는, 현재 나의 처지가 얼마나 감사한 자리인지 깨닫고 그에 대한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빈손으로 세상에 왔으며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의 대상으로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이러한 은혜를 알 수가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감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기도를 통해 과거에 받은 은혜를 깨닫고 현재를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미래를 완전히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의로운 고통을 영광으로 바꾼 사람입니다. 그는 환난이 왔을 때 죄와 타협하지 않았고,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출세는 못해도 정직하게 살고, 가진 것은 적으나 진실하게 살며, 성결을 장수보다 큰복으로 여기고 부귀영화보다 의로운 고난과 죽음을 더 복된 것으로 여길 때 감사가 올 것입니다.

 

Ⅱ.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감사했다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지고 밤잠을 설친 다리오 왕이 그를 찾아 굴에 왔을 때, 다니엘은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음으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하지 못하였다(22절)'고 했습니다. 다리오 왕이 그를 음해하던 이들과 그들의 처자들을 함께 굴에 던졌을 때는 그들이 굴바닥에 닿기도 전에 사자들이 그들을 움켜서 뼈까지 부셨습니다. 그 후 다리오 왕은 다른 조서를 내려 다니엘의 하나님을 믿고 섬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은 다니엘은 사자의 입도 봉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권능을 믿고 두려워하는 대신 감사했던 것입니다.

 

Ⅲ. 그는 감사 생활이 체질화 되었다

다니엘은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는 기도를 하루에 시번씩 하며 항상 감사하는 버릇을 갖고 있었습니다. 단지 기도만 한 것이 아닌 항상 감사하는 삶이 체질화되어 있던 사람인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결론을 말씀드립니다

"비록 무화가 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는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하박국3 : 17) 아무것도 없음에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겠다는 이 놀라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항상 기도하고 감사하며 그것을 체질화할 수 있는 모두가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감사의 차원”

성경 : 대상-16-34-36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 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금년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일년의 삶을 지켜 주셨고 한 해의 농사를 축복해 주셔서 올해도 풍년을 맞이했습니다. 한 해 동안 사건과 사고도 많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이 시간까 지 우리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추수에 대한 감사뿐이 아니고 일 년의 삶을 생각해 보면서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감사"라는 말을 참 많이 사용합니다. 참 좋은 말입니다. 이 단어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언어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감사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 마음은 하늘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결코 쉬운 마음이 아닙니다.

일본의 내촌감삼은 "하나님께서 만일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질병이나 실패 그리고 배신이나 죽음으로 저주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 못 하는 불신앙으로, 그리고 성경을 읽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막힌 귀로, 또한 감사하는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도록 메마른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분명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셔야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 감사하는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몇 가지 교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감사하는 마음은 "믿음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화되면 불만과 원망과 불평의 마음부터 우러나옵니다. 이것들은 감사의 싹을 자르는 요소들입니다. 오늘 신앙인들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이 원망과 불만과 불평을 안고 살아갑니다. 기뻐하고 감사하고 만족할 줄 아는 신앙인들보다는 매사에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이 약화되어서 그렇습니다.

믿음과 신앙과 영적 풍성함을 유지하고 살아갈 때 그 마음에 소망이 있고 넉 넉함이 있고 감사함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한 시인은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 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라고 노래했습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그 풍성한 축복을 경험해 본 사 람만이 할 수 있는 감사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거친 들도 초막도 천국이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들만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믿음의 열매로 그의 신앙을 증거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또 하나는, 감사하는 마음은 "축복 받은 마음"입니다.

감사는 분명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아무나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산다면 그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야 그런 마음을 가질 수가 있고 그것을 표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속에 원망과 불평과 불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입만 열면 불평 불만이 튀어나옵니다.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감사나 만족함을 표현하는 사람 이 적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축복 받은 마음입니다.

미국의 어느 청년이 청년답지 않게 늘 감사하면서 살아갔습니다. 대개의 청년들은 꿈도 크고 야망도 누구 못지 않게 대단하기 때문에 현재의 삶이 늘 미흡 하다고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젊은이가 그렇게 감사하면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이 청년이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 하나를 절단해야 했습니 다. 그리고 절망의 삶을 살았습니다. 할 일도 많고 결혼도 해야 할 나이인데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늘상 없는 다리 한 쪽만 생각하며 살자니 앞날이 캄캄 했을 것입니다. 이 지점이 인간의 한계점입니다. 사람은 없어진 다리에 집착합 니다. 그러는 사이에 또 다른 다리는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인가 눈이 뜨이면서 다리 하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이 없어진 다리 대신 남아 있는 그 다리를 발견하게 된 것입 니다. 그래서 그 젊은이는 다리가 하나 남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고무다리를 했습니다. 그때부터 이 청년은 이 남은 다리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이 청년은 마침내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 훈련 을 마치고 마침내 그 다리를 가지고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식인종들이 덤벼들 었습니다. 그는 고무다리를 던져 주었습니다. 식인종들은 그 다리를 씹어보았지 만 씹히지 않자 마침내 그 선교사를 신적 존재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때서야 그는 비로소 하나님이 자신의 다리를 절단하게 하신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그 때 그가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오늘 현대인들은 한편 참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전에 없 던 풍요를 누리고 문화를 누리며 편리함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또 한편 으로 생각해 보면 오늘 현대인들은 참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대개는 만족함과 행복함이 없이 살아갑니다. 늘 부족을 느끼고 불만하며 갈증 을 느끼고 살아갑니다. 인간의 행복이나 만족함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님에도 말입니다. 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래서 하늘이 주 시는 축복인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은 "더 큰 감사를 불러들이는 마음"입니다.

확실히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일이 더 많이 생깁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은 더 큰 감사를 불러들입니다. 감사하는 곳에는 또 기적이 일어납니다. 불 평하는 사람들에게는 늘 불평의 조건만 늘어납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들에 게는 언제나 감사의 조건들이 더 많이 만들어지는 것을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스펄전은 "별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 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해와 달이 필요 없는 영원한 빛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월등 한 감사의 조건을 점점 더 부여하신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사람에게는 근본적인 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감사하지 않는 죄"라고 했습니다. 마땅히 감사해야 함에도 불구 하고 감사하지 않는 것은 무지해서 감사를 깨닫지 못하거나 교만한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무지하거나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 는 불신앙이므로 근본적인 죄가 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다윗이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해서 드린 감사의 기도문입니다. 이스라 엘에는 언약궤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법궤라고도 불렀습니다. 그 속에는 아론의 지팡이와 십계명 돌비와 만나가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적 권위 가 거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왕 때에는 이 언약궤가 70여년 동안 변방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왕이 되면서 가장 먼저 한 작업이 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놓는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감격했고 안도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너무나 감격해서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는 모습입니다.

그때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 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 원하여 만국 가운데서 건져내시고 모으시사 우리로 주의 성호를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할지어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 까지 송축할지로다".

다윗은 참 기막힌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목동으로 초라하게 살았습 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습니다. 골리앗과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사울로부터도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습 니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참 기적과 같은 인생을 살아왔다고 생각되었을 것입 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안치시켜 놓고 나서 이 감격 의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은 아무나 갖는 것이 아 닙니다. 진정한 감사는 다음과 같은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첫째는 "과거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과거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초라했든지 화려했든지 누구나 과거를 가지고 있 습니다. 그리고 과거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지난날 가운데 뼈아팠던 일, 억울했던 일, 서운했던 일, 그리고 배은 망덕했던 사람을 생각합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지적했듯이 사람은 지난날 속에서 행복했던 일, 기뻤던 일들이 더 많이 있었음에도 사람들은 각자 뼈아픈 일들만 생각하고 원망과 불행했 던 일들만 기억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런 습성 때문에 과거를 잊지 못하고 매여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16:9-17에서 하나님은 "맥추절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당부가 아니고 명령입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애굽에서 430년을 종살이를 하 면서 압박과 고난의 삶을 살다가 우여곡절 끝에 애굽을 탈출했습니다. 광야에 서 40년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평화의 땅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첫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결실입니까. 과거를 생각하면 꿈같은 생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첫 수확을 거두고 감사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과거를 잊지 말라"는 말입니다. 즉 "과거의 쓰라림을 잊지말고 그 고난 가운데서 인도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미국인들의 가장 큰 명절은 추수감사절입니다. 그것은 미국인들 의 조상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난 당했던 지난 세월의 그 아픔을 잊을 수 없 기 때문입니다. 그 조상들이 지켰던 추수감사절의 그 기막힌 의미를 어떻게 잊 을 수가 있겠습니까. 다윗은 과거를 생각하면 뼈가 저렸을 것입니다. 지나온 생애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과거를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똑같은 감회에 젖을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지난날을 생각하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축복의 마음입니다.

둘째는 "현재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현재 우리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입 니다. 즉 "구원의 삶"입니다. 오늘 내가 "주 안에서 살고 있다"는 이것이 축복 입니다. 생각하면 감격할 일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밀턴은 말년에 소경으로 살았습니다. 에디슨은 귀머거리가 되어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한결같이 감사하면서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받고 보니 귀머거리, 소경인 것이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에디슨에게 하나님은 발명왕으로, 밀턴에게는『실낙원』으로 보상해 주셨습니 다. 이것이 감사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이고 상급입니다.

빌리 그래함이라고 하는 분이 전도집회를 하면 언제나 따라다니며 찬양도 하 고 간증도 하는 한국출신 맹인 성악가가 있습니다. 그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 다. "사람들은 맹인인 나를 인도해 줄 때 100m 앞 전방에 뭐가 있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눈앞에 물이 있으니 건너 뛰라든가, 층계가 있으니 올라가 라고만 말합니다. 나는 그 인도자의 말만 듣고 따라가면 안전하게 목적지에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나를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10년 앞을 모릅니다. 20년 앞도 모릅니다. 또 알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만을 믿고 순종하며 살아가면 우리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옛날 태어났던 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 감사의 기 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지금은 한 나라의 임금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적같 은 일입니다.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말하기를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현재를 생 각할 수 있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시골에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태어났을 때 그 환 경, 그 삶이 어떠했습니까. 가난, 무지, 초라함이 그 때의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오늘의 삶을 상상이나 했습니까. 그때는 모두 무작정 상경한 분들 많았을 것입니다. 대책 없이 고향을 떠난 분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까지 내 뜻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생각하면 기적 같은 일입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더 생각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의 지난날이 이렇게 왔듯이 장 차 우리의 미래도 하나님은 그렇게 인도하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분명히 우리 의 앞날도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길로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 실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소망이 있고 기쁨이 있고 만족함이 있 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내일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장차 주어질 하 나님의 영광과 은총과 그 나라를 생각하는 생활입니다. 그것도 없이 살면 그것 은 신앙도 아닙니다.

그래서 칼빈은 임종시 고통 속에서도 "오늘의 고난은 장차 주어질 영광과 족 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는 구절을 암송하며 죽어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신앙의 세계는 위대한 것입니다. 사람은 미래가 중요합니다. 미래가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래는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어느 추장이 임종을 맞았습니다. 한겨울이었습니다. 후계자감 세 명을 불러서 말하기를, "산너머에 가서 선물을 한 가지씩 가져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젊은이들은 눈 덮인 산을 넘어가서 한 사람은 양지바른 곳에 핀 꽃 한 송이를, 또 한 사람은 청초 한 포기를 가져 왔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한 사람은 그냥 빈 손으로 내려 왔습니다. 저마다 가져온 선물을 드렸지만 빈손으로 온 청년은 선물대신 의미있는 보고 를 했습니다. "저는 산너머에서 꽃도 보았고 풀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 보 다 더 좋은 것을 보았습니다. 산 너머에서는 넓은 들을 보았고 넓은 강을 보고 왔습니다, 그 곳이 장차 우리 부족이 살아갈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서 속히 쾌유하셔서 우리를 이끌고 그 넓은 곳으로 가서 살게 해 주십시요" 하고 말했 습니다. 그 때 그 추장은 이 세 번째 젊은이에게서 소망에 찬 부족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추장은 마침내 그 젊은이에게 추장 자리를 물려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저 앞에 놓인 즐거움, 꿈, 소망, 그것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 는 사람들입니다. 감사는 믿음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같은 축복이 함께 하 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의 차원”

본문 : 대상-16-34-36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 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금년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일년의 삶을 지켜 주셨고 한 해의 농사를 축복해 주셔서 올해도 풍년을 맞이했습니다. 한 해 동안 사건과 사고도 많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이 시간까 지 우리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추수에 대한 감사뿐이 아니고 일 년의 삶을 생각해 보면서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감사"라는 말을 참 많이 사용합니다. 참 좋은 말입니다. 이 단어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언어입니다. 그런데 아무나 감사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 마음은 하늘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결코 쉬운 마음이 아닙니다.

일본의 내촌감삼은 "하나님께서 만일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질병이나 실패 그리고 배신이나 죽음으로 저주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지 못 하는 불신앙으로, 그리고 성경을 읽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막힌 귀로, 또한 감사하는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도록 메마른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분명 그럴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주셔야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 감사하는 마음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몇 가지 교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감사하는 마음은 "믿음의 열매"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화되면 불만과 원망과 불평의 마음부터 우러나옵니다. 이것들은 감사의 싹을 자르는 요소들입니다. 오늘 신앙인들이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이 원망과 불만과 불평을 안고 살아갑니다. 기뻐하고 감사하고 만족할 줄 아는 신앙인들보다는 매사에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이 약화되어서 그렇습니다.

믿음과 신앙과 영적 풍성함을 유지하고 살아갈 때 그 마음에 소망이 있고 넉 넉함이 있고 감사함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한 시인은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 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라고 노래했습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그 풍성한 축복을 경험해 본 사 람만이 할 수 있는 감사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거친 들도 초막도 천국이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들만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믿음의 열매로 그의 신앙을 증거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또 하나는, 감사하는 마음은 "축복 받은 마음"입니다.

감사는 분명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아무나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산다면 그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야 그런 마음을 가질 수가 있고 그것을 표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속에 원망과 불평과 불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입만 열면 불평 불만이 튀어나옵니다.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감사나 만족함을 표현하는 사람 이 적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축복 받은 마음입니다.

미국의 어느 청년이 청년답지 않게 늘 감사하면서 살아갔습니다. 대개의 청년들은 꿈도 크고 야망도 누구 못지 않게 대단하기 때문에 현재의 삶이 늘 미흡 하다고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젊은이가 그렇게 감사하면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이 청년이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 하나를 절단해야 했습니 다. 그리고 절망의 삶을 살았습니다. 할 일도 많고 결혼도 해야 할 나이인데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늘상 없는 다리 한 쪽만 생각하며 살자니 앞날이 캄캄 했을 것입니다. 이 지점이 인간의 한계점입니다. 사람은 없어진 다리에 집착합 니다. 그러는 사이에 또 다른 다리는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인가 눈이 뜨이면서 다리 하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청년이 없어진 다리 대신 남아 있는 그 다리를 발견하게 된 것입 니다. 그래서 그 젊은이는 다리가 하나 남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고무다리를 했습니다. 그때부터 이 청년은 이 남은 다리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이 청년은 마침내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래서 선교사 훈련 을 마치고 마침내 그 다리를 가지고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식인종들이 덤벼들 었습니다. 그는 고무다리를 던져 주었습니다. 식인종들은 그 다리를 씹어보았지 만 씹히지 않자 마침내 그 선교사를 신적 존재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그때서야 그는 비로소 하나님이 자신의 다리를 절단하게 하신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그 때 그가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오늘 현대인들은 한편 참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전에 없 던 풍요를 누리고 문화를 누리며 편리함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또 한편 으로 생각해 보면 오늘 현대인들은 참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대개는 만족함과 행복함이 없이 살아갑니다. 늘 부족을 느끼고 불만하며 갈증 을 느끼고 살아갑니다. 인간의 행복이나 만족함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님에도 말입니다. 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은 그래서 하늘이 주 시는 축복인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은 "더 큰 감사를 불러들이는 마음"입니다.

확실히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감사할 일이 더 많이 생깁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은 더 큰 감사를 불러들입니다. 감사하는 곳에는 또 기적이 일어납니다. 불 평하는 사람들에게는 늘 불평의 조건만 늘어납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사람들에 게는 언제나 감사의 조건들이 더 많이 만들어지는 것을 우리는 주변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스펄전은 "별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달빛을 주시고 달빛을 보고 감사 하는 사람에게는 햇빛을 주시고 햇빛을 보고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해와 달이 필요 없는 영원한 빛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그보다 월등 한 감사의 조건을 점점 더 부여하신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사람에게는 근본적인 죄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감사하지 않는 죄"라고 했습니다. 마땅히 감사해야 함에도 불구 하고 감사하지 않는 것은 무지해서 감사를 깨닫지 못하거나 교만한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무지하거나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 는 불신앙이므로 근본적인 죄가 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다윗이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해서 드린 감사의 기도문입니다. 이스라 엘에는 언약궤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법궤라고도 불렀습니다. 그 속에는 아론의 지팡이와 십계명 돌비와 만나가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적 권위 가 거기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왕 때에는 이 언약궤가 70여년 동안 변방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왕이 되면서 가장 먼저 한 작업이 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놓는 일이었습니다. 다윗은 감격했고 안도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너무나 감격해서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는 모습입니다.

그때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 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 원하여 만국 가운데서 건져내시고 모으시사 우리로 주의 성호를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 할지어다,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 까지 송축할지로다".

다윗은 참 기막힌 인생을 살았습니다. 어렸을 때는 목동으로 초라하게 살았습 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습니다. 골리앗과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사울로부터도 구원받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습 니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참 기적과 같은 인생을 살아왔다고 생각되었을 것입 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안치시켜 놓고 나서 이 감격 의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은 아무나 갖는 것이 아 닙니다. 진정한 감사는 다음과 같은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첫째는 "과거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과거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초라했든지 화려했든지 누구나 과거를 가지고 있 습니다. 그리고 과거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지난날 가운데 뼈아팠던 일, 억울했던 일, 서운했던 일, 그리고 배은 망덕했던 사람을 생각합니다.

어느 심리학자가 지적했듯이 사람은 지난날 속에서 행복했던 일, 기뻤던 일들이 더 많이 있었음에도 사람들은 각자 뼈아픈 일들만 생각하고 원망과 불행했 던 일들만 기억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런 습성 때문에 과거를 잊지 못하고 매여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신명기 16:9-17에서 하나님은 "맥추절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당부가 아니고 명령입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애굽에서 430년을 종살이를 하 면서 압박과 고난의 삶을 살다가 우여곡절 끝에 애굽을 탈출했습니다. 광야에 서 40년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평화의 땅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첫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결실입니까. 과거를 생각하면 꿈같은 생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첫 수확을 거두고 감사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과거를 잊지 말라"는 말입니다. 즉 "과거의 쓰라림을 잊지말고 그 고난 가운데서 인도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미국인들의 가장 큰 명절은 추수감사절입니다. 그것은 미국인들 의 조상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고난 당했던 지난 세월의 그 아픔을 잊을 수 없 기 때문입니다. 그 조상들이 지켰던 추수감사절의 그 기막힌 의미를 어떻게 잊 을 수가 있겠습니까. 다윗은 과거를 생각하면 뼈가 저렸을 것입니다. 지나온 생애 순간 순간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과거를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똑같은 감회에 젖을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지난날을 생각하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축복의 마음입니다.

둘째는 "현재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현재 우리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의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입 니다. 즉 "구원의 삶"입니다. 오늘 내가 "주 안에서 살고 있다"는 이것이 축복 입니다. 생각하면 감격할 일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밀턴은 말년에 소경으로 살았습니다. 에디슨은 귀머거리가 되어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한결같이 감사하면서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받고 보니 귀머거리, 소경인 것이 문제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에디슨에게 하나님은 발명왕으로, 밀턴에게는『실낙원』으로 보상해 주셨습니 다. 이것이 감사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이고 상급입니다.

빌리 그래함이라고 하는 분이 전도집회를 하면 언제나 따라다니며 찬양도 하 고 간증도 하는 한국출신 맹인 성악가가 있습니다. 그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 다. "사람들은 맹인인 나를 인도해 줄 때 100m 앞 전방에 뭐가 있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다만 눈앞에 물이 있으니 건너 뛰라든가, 층계가 있으니 올라가 라고만 말합니다. 나는 그 인도자의 말만 듣고 따라가면 안전하게 목적지에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도 나를 그렇게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10년 앞을 모릅니다. 20년 앞도 모릅니다. 또 알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만을 믿고 순종하며 살아가면 우리는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옛날 태어났던 때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다윗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이 감사의 기 도를 드렸을 것입니다. 지금은 한 나라의 임금입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기적같 은 일입니다.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말하기를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송축할지로다"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현재를 생 각할 수 있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미래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시골에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태어났을 때 그 환 경, 그 삶이 어떠했습니까. 가난, 무지, 초라함이 그 때의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오늘의 삶을 상상이나 했습니까. 그때는 모두 무작정 상경한 분들 많았을 것입니다. 대책 없이 고향을 떠난 분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까지 내 뜻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생각하면 기적 같은 일입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여기서 한가지 더 생각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의 지난날이 이렇게 왔듯이 장 차 우리의 미래도 하나님은 그렇게 인도하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분명히 우리 의 앞날도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길로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 실 것입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소망이 있고 기쁨이 있고 만족함이 있 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내일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장차 주어질 하 나님의 영광과 은총과 그 나라를 생각하는 생활입니다. 그것도 없이 살면 그것 은 신앙도 아닙니다.

그래서 칼빈은 임종시 고통 속에서도 "오늘의 고난은 장차 주어질 영광과 족 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는 구절을 암송하며 죽어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신앙의 세계는 위대한 것입니다. 사람은 미래가 중요합니다. 미래가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래는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어느 추장이 임종을 맞았습니다. 한겨울이었습니다. 후계자감 세 명을 불러서 말하기를, "산너머에 가서 선물을 한 가지씩 가져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젊은이들은 눈 덮인 산을 넘어가서 한 사람은 양지바른 곳에 핀 꽃 한 송이를, 또 한 사람은 청초 한 포기를 가져 왔습니다. 그런데 나머지 한 사람은 그냥 빈 손으로 내려 왔습니다. 저마다 가져온 선물을 드렸지만 빈손으로 온 청년은 선물대신 의미있는 보고 를 했습니다. "저는 산너머에서 꽃도 보았고 풀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 보 다 더 좋은 것을 보았습니다. 산 너머에서는 넓은 들을 보았고 넓은 강을 보고 왔습니다, 그 곳이 장차 우리 부족이 살아갈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서 속히 쾌유하셔서 우리를 이끌고 그 넓은 곳으로 가서 살게 해 주십시요" 하고 말했 습니다. 그 때 그 추장은 이 세 번째 젊은이에게서 소망에 찬 부족의 미래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추장은 마침내 그 젊은이에게 추장 자리를 물려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세계입니다. 저 앞에 놓인 즐거움, 꿈, 소망, 그것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신앙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 는 사람들입니다. 감사는 믿음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같은 축복이 함께 하 시기를 기원합니다.

 

“주님,감사합니다.”

본문 : 시-103-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시편 103:1-3)"

 

신구약 성경 가운데 「감사」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구절이 약 178개가 됩니다. 그것은 성경은 우리에게 감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강조점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왜 해야 하며,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도처에서 밝혀 주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플라톤은 28세에 스승의 죽음을 목격한 후 절망과 실의에 빠져 12년 동안 이집트, 시실리, 이탈리아를 돌며 방황했습니다. 그의 나이 40이 되어서야 아테네로 돌아와 철학강의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입버릇처럼 네 가지를 감사했다고 합니다. 첫째는 헬라인으로 태어난 것, 둘째는 자유인으로 태어난 것, 셋째는 남자로 태어난 것, 넷째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에 태어난 것.

감사와 불평은 똑같이 땅속에 묻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감사를 캐내고, 어떤 사람들은 불평을 캐냅니다. 그것은 마치 금광에서 하루 종일 금을 캐는 사람이 있고, 쓸모없는 돌멩이를 캐는 사람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감사」라는 보화를 캐어 담읍시다. 그리하여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부자가 됩시다.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헬렌켈러는 말했습니다. "나는 앞을 못 보는 사람이다. 눈이 멀지 않은 사람들에게 주고픈 말이 있다. 내일 갑자기 장님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당신의 눈을 사랑하라. 귀가 먹고 벙어리가 된다고 생각하고 듣고 보고 접촉할 수 있음을 감사하라"고.

시편 103편은 다윗이 읊었던 시중에 한편입니다. 그의 시는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 은혜를 잊지 말라"로 시작됩니다. 송축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하며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감사하며 찬양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사하시며 고치신 은혜

 

3절을 보면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가장 큰 은혜는 죄를 용서하시는 은혜입니다. 죄 값은 사망이라고 했기 때문에 죄를 사함 받지 못하면 멸망하게 됩니다.

「사한다」는 말을 「사라흐」라고 합니다. 그 뜻은 능동분사형으로 끊임없이 계속하여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시편을 86:5을 보면 "주는 선하사 사유하기를 즐기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하심이 후하심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죄가 있고 잘못이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허물이나 잘못을 쉽게 용서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하시고 용서하시기를 즐기십니다.

워털루 전쟁이 치열해지자 겁을 먹은 한 병사가 탈영하려다가 붙잡혔습니다. 전쟁 중 탈영병은 사형에 처했습니다. 당시 사령관이었던 웰링턴 장군이 사형을 선고하려고 하자 부관이 다음과 같이 말을 했습니다. "각하, 마지막으로 이 병사를 용서해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용서는 사형보다 위대한 힘을 발휘하리라 믿습니다." 이 말에 감동한 웰링턴 장군이 그 병사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 병사는 변했습니다. 그는 군인으로서 최선을 다했고, 한 평생 장군의 은혜를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죄사함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은혜를 잊지 말라는 것이 본문의 교훈인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네 모든 병을 고치신 은혜를 잊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병은 육체의 질병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고통을 포함합니다. 육체의 질병, 상한 마음, 실패, 절망, 포기, 고독 등을 통틀어 모든 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친다는 말은 `라파`라는 단어인데 그 뜻 역시 단순한 육체의 병만을 고치는 의료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완전한 상태로 고쳐서 회복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출애굽기 15:26을 보면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즉 `야웨 라파`라는 것입니다. 싸매시고 꿰매어 완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 출애굽기 15:26의 뜻입니다.

누가 사함 받고 누가 고침 받습니까? 하나님이 사하시고 고치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사함 받고 고침 받습니다.

1998년 한해동안 미국 듀크 대학 병원의 해롤드 쾨니히와 데이비드 라슨 두 의사가 실험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매 주일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은 병원에 입원 할 확률이 적고 입원하더라도 빨리 치료되어 입원기간이 짧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 주일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평균 7년을 더 오래 산다는 사실을 밝혀 냈습니다.

1999년 듀크 대학에서 약 4천명을 대상으로 조사한바 의하면 예배에 참석하여 찬송과 기도를 드리고 말씀을 듣는 것이 우울증을 줄이는데 효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규칙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의 경우 고혈압도 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도 밝혀 냈습니다.

암과 싸워 이긴 미국 하워드대학의 존스교수는 사람에겐 네 단계의 계층구조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육체적인 단계, 정신적인 단계, 지적인 단계, 그리고 영적인 단계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 네 단계를 다 치유하는 것이 전인치료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의 질병을 치료하고 계십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체질을 아시는 것입니다. 흙으로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진토임을 아시는 것입니다.

원인을 몰라서 고치지 못하는 병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체질, 나의 생각, 나의 마음, 나의 과거 현재, 그리고 내일일을 아시기 때문에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2. 소원을 만족케 하신 은혜

 

5절을 보면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 도다"라고 했습니다.

욕구불만을 표출하는 태도가 여러 가지입니다. 손가락을 빨거나 깨무는 것, 손톱을 물어뜯어 망가지게 하는 것, 다방이나 음식점에 앉으면 죄도 없는 성냥개비를 다 부러뜨리는 것, 종이만 보면 찢고 찢어 꽃가루처럼 만드는 것, 강아지만 보면 발길로 걷어차는 것 등 다양합니다. 그 누구도 원하는 사람에게 만족한 대답이나 소원을 들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마다 각각 다른 욕구 불만을 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 다윗이 믿는 하나님은 소원을 만족케 해주실 뿐만 아리나 청춘이 되게 하셔서 독수리처럼 하늘을 날고 비상하는 힘을 주신다는 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전라남도 해남에서 한 소년이 태어났습니다. 본래 집이 가난해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하며 가난한 살림을 도와야 했습니다. 동네에 교회가 있어서 주일학교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소년의 꿈은 중학교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집은 가난해 갈 수는 없고 꿈은 차 오르고, 견디다 못해 고민하던 소년은 어떤 날 방바닥에 엎드려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전상서 하나님, 저는 중학교에 가고 싶습니다. 저는 집이 가난해 갈 수가 없습니다. 저를 중학교에 보내주십시요"라는 내용의 편지를 쓰고 흰 봉투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봉투 위에 `하나님 전상서`라고 쓰고, 뒷면에 자기 이름을 썼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길가에 있는 우체통에 넣었습니다. 배달부 아저씨가 편지를 꺼내다가 주소도 없는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난감해 하다가 하나님하고 제일 가까운 사람한테 배달하는게 좋겠다 싶어 그 당시 해남읍 교회 이준묵 목사님께 갖다 드렸습니다.

그 편지를 읽고 난 목사님은 무한감동을 받았습니다. 다음주일 그 소년을 불러 교회가 운영하는 고아원에서 먹고 자게 하고, 중학교를 보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여 한신 대학에 진학하고, 외국 유학까지 다녀와 대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가 현재 한신 대학교 총장이신 오명석 박사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만족케 해주십니다.

불임증으로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아이도 없고 할 일도 없다는 핑계로 하루 7시간씩 텔레비전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KBS, MBC, SBS 세 개 채널만 있을 때는 방송시간이 제한돼 있었습니다만 케이블 방송이 시작되면서 다채널 시대에다 24시간방송이 계속되기 때문에 24시간 TV앞에 앉아 있어도 볼거리가 많아졌습니다.

어느 날 그 부인이 기도생활을 많이 하는 평범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이 그 부인에게 앞으로 3개월만 텔레비전이 없는 나라에 갔다고 생각하고 TV를 보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변화와 은혜가 임할 것이라고. 그의 말대로 TV를 커버로 덮었습니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참고 견뎠습니다. 시간이 남아돕니다. 그 시간에 성경 읽고 기도하고 성경공부하고 영성이 되살아나고 정신이 맑아졌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7개월만에 임신을 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녀가 임신하게 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봅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님 텔레비전에서 발사되는 인체에 유해한 전자파로부터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신기한 방법으로 우리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며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그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시다

감사하는 태도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일상성 속에서 감사합시다. 큰일 큰 은혜 큰 축복만을 감사의 조건으로 삼지 말고 지극히 작고 평범한 사건들 속에서 감사의 조건을 찾읍시다. 듣고 보고 말하고 먹고 마시고 걷고 앉고 일어서는 것, 눈감고 잠드는 것 깨어나는 것을 감사합시다.

둘째, 감사하다고 말합시다. 하나님께 이웃에게 가족에게 서로에게 감사하다고 말합시다. 말 한마디로 천냥빚 갚는다는 옛말은 의미 있는 말입니다.

셋째, 감사를 키웁시다. 감사하다보면 감사는 자랍니다. 소리도 커지고 분량도 커지고 조건도 많아집니다.

넷째, 넉넉하게 감사합니다. 마음도, 말도, 물질도 넉넉하게 감사합시다. 그릇이 커야 물이 많이 고이듯 감사가 넉넉해야 축복도 넉넉해집니다.

다섯째, 쉬지 말고 감사합시다. 하다말다 하면 맥이 끊어집니다. 운동도 계속하면 운동이 되고 안 하다 하면 중노동이 되는 것처럼 감사도 계속해야 합니다.

여섯째, 하나님께 감사 드립시다. 하나님은 영원히 감사와 존귀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실 분입니다. 모든 영광과 감사를 하나님께 드립시다.

주님, 감사합니다. 아멘

“그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성경: 시편 116:1~14

 

오늘 감사주일을 맞이하여 온 가족이 한 자리에서 이렇게 예배드리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시편 116편의 말씀은 지은이가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칼빈은 여러 가지 내용의 분석으로 미루어 볼 때 다윗이 쓴 시가 아닌가 라고 추측했습니다. 다윗이 이 시편을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기록했는지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내용으로 보아서 이 시인은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로부터 구원받는 놀라운 사실을 회고하면서 이 시편을 쓴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 시인은 큰 환난을 만나 사람 편에서 보면 거의 소망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기도가 응답되어 문자 그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건짐을 받은 체험을 했습니다. 그는 너무 감격한 가운데 이 시를 쓴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 2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 도다.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이 시인은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시편 50편 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인은 이 말씀을 그대로 믿고 하나님을 부르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모든 환난에서 건짐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응답을 체험한 이 시인은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고 그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것은 이 시인의 신앙고백일 뿐만 아니라 이 시편 전체의 내용이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이 시인은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얼마나 큰가를 그의 기도가 응답되는 것을 통해 실제로 경험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셨도다" 이 시인은 환난 중에서 겸손하면서도 진지하게 하나님의 자비를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간구를 들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은혜롭게 받아들이셨고 그의 처지를 감찰하실 뿐더러 그에게 평안의 응답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자녀인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기다리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하면 응답의 선물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인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기 위해서 기도하는 입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어린애가 말을 잘해서 그 말에 감동되어 아버지가 아이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어린아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도 아이의 아버지는 아이가 무엇을 소원하는지를 알고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논리적이고, 조직적이고, 신학적이고, 성경적이고, 감동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줄로 생각하면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소원을 아십니다.

예레미야 8장 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귀를 기울여 듣는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고마운 말씀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 우리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굽어살피십니까?"하는 말씀이 저절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 시인은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차고 넘치는 사랑의 고백으로 이 시를 시작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러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시인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부부도 같이 살면서 이런 고백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저는 가정을 이룬지가 40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저도, 제 아내도 서로 사랑을 고백합니다. "나는 당신 밖에 없어" 얼마나 좋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 좋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만을 사랑합니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 것도 사랑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고백을 우리 모두가 이 시인처럼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하는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더구나 우리는 더욱 더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이 시인은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기도하리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게 될 때 우리로 하여금 계속 기도할 수 있도록 격려가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까?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것을 체험하게 되면 기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가 말한 것처럼 "내가 평생 기도하리로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은 내 생명의 끝날 까지 매일 매일 기도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생명 끝나는 그 날까지 살아있는 동안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시고 기억하고 계십니다. 이사야서 49장 15, 16절을 보면,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 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겠다."고 말씀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정말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십니다.

오늘 주신 말씀 5절에 시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자비하시도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환난 중에 있을 때에 은혜로 대해 주셨습니다. 언제나 우리를 친절하게 대해 주셨고 우리를 도와주셨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시인의 경험을 보세요. 오늘 주신 말씀 3절에 보면 그가 당했던 경험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음부의 고통이 내게 미쳤었다"고 했습니다. 육신적으로 말하면 사망의 줄 이상 무서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음부의 고통 그러니까 지옥의 고통 이상의 고통이 어디 있습니까? 인간으로는 육신면으로나 심령면에서 그 이상의 고통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 하나님이 기억하는 사람도 사망의 줄이 두를 때가 있습니다.

요셉을 보세요. 이유를 알 수 없는 사망의 줄이 그를 무려 13년 동안이나 두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순간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느브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에게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느브갓네살 왕의 노를 사게 되었고 평소보다 일곱배나 뜨겁게 한 풀무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문자 그대로 꺼지지 아니하는 음부의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그 뜨거운 불이 그들을 태우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사자굴에 던짐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굶주렸던 사자들이 사람을 공중분해해 버리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했기 때문에 다니엘이 상처 하나 나지 않았습니다. 다리오 왕이 간신들의 모략을 알고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끌어오게 하고 그들을 그 처자들과 함께 사자 굴에 던져 넣었더니 그들이 굴 밑에 닿기도 전에 사자가 그들을 움켜서 그 뼈까지 부숴뜨렸다고 했습니다.

우리 개인들도 이런 경험을 간증하려면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4절 말씀을 보세요.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셨도다" 이 얼마나 겸손하고 간절한 기도입니까? 이런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 받은 후에 너무 감격해서 이런 말로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오, 주님 나는 너무 늦게야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사랑하여 말하기를 "주님, 내일 하루 주님의 얼굴을 본다면 이 세상에서 무슨 고통이라도 받겠습니다" 이 얼마나 의미 심장한 기도입니까? 우리는 늘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만 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영생 얻는 길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면 이것은 성숙한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서 환난 중에서 구원받는 것도 귀하지만 그보다 더 귀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옛날 성 카타린은 주님께 기도하는 중에 "내가 너를 위해 얼마나 고난 당한 줄을 아느냐? 너는 나를 위해 고난받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때부터 그는 그의 일생을 주님께 바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염병 환자도 헌신적으로 돌보고, 나병환자를 간호하는 봉사생활을 했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어도 어렵게 생각지 아니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당했습니다.

중국 내지 선교를 처음 시작한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를 여러분은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는 중국 내지에 선교를 하면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지 우리의 필설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가 아무리 선교에 힘을 썼지만 전혀 성과가 나지 않았습니다. 본래 중국 사람은 대국인이기 때문에 빨리 반응이 없지 않습니까? 선교본부에서는 중국 선교는 별로 소망이 없어 보이니까 철수하라고 지시가 왔습니다.

그러나 허드슨 테일러는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이 불쌍한 심령들을 위해서 나를 보내셨고 성경에도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하셨는데 하면서 본국으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계속 열심히 일했습니다. 여러 해가 되어도 예수 믿기로 작정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선교본부에서는 본부의 지시를 따르지 아니하니까 몇번 편지를 보내고 나서 선교비 지원을 중단했습니다.

그 때 허드슨 테일러가 당한 어려움을 우리가 어떻게 짐작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간절히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그의 사무실에는 두가지 기도제목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는 '여호와 이레' (여호와께서 준비하셨다)이고 다른 하나는 '에벤에셀'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이었다고 합니다. 나는 모르나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시고, 지금까지 도와주신 하나님이 앞으로도 도와주시리라 믿고 계속 그는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중국에는 7천만명의 그리스도인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의 기도를 들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시인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오늘 주신 말씀 7, 8절을 보세요.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찌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먼저, 하나님은 그를 환난 가운데서 도와주셨습니다.

6절 하반에 보면 '내가 낮게 될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고 했는데 이 말씀은 깊은 불행 속에 빠졌을 때 도와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최악의 상태에서도 인내하며 소망을 잃지 않게 도와주셨으며 믿음이 약해지지 않도록 북돋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우리가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오늘 이 자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영원한 주님으로부터 건짐을 받고 날마다 거룩해 지는 자리로 나아가 장차 하나님 앞에 영광스럽게 서게 될 것을 생각할 때 감격스럽지 않습니까?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눈물에서 건져내셨습니다. 말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 건져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십니다. 통곡하는 자의 베옷을 풀어 주십니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실 때는 우리의 눈을 눈물에서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은 '우리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를 죄에 빠지는 데서 건져 주셨고, 불행으로 떨어지는 것에서 건져내 주셨습니다. 우리의 발이 넘어지려 할 때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붙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하나님은 낮에도 밤에도 우리를 지켜주시며 실족지 않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영혼이 평안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찌어다" 인간이 그렇게도 갈망하는 참 평안이 어디에 있습니까? 돈에 있습니까? 권력에 있습니까? 명예에 있습니까? 지식에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불안해 하고 있는 제자들을 향하여 일찍이 말씀하셨습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렇습니다. 참된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찌어다" 주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이 여러분의 영혼과 가정 위에 차고 넘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이와 같이 영혼의 축복을 받은 사람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감사와 헌신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9절을 보세요. "내가 생존 세계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리로다" 이 얼마나 신실하고 귀한 결단입니까? 이 말은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살겠습니다"하는 다짐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다짐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자비와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 감격하여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기를 작정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이 다른 것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마지못해서 두려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한 가운데서 감격하여 그렇게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오늘 주신 말씀 10절 이하에서 우리는 이 시인의 경건한 결의를 볼 수가 있습니다. "내가 믿는 고로 말하리라" 사도 바울도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3절에 "내가 믿는 고로 말하셨다함과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다윗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와 약속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사무엘에 의해서 그의 목동의 지팡이를 왕의 홀로 변케해 주신 확증을 특별히 믿었습니다. 다윗은 이와 같은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신념을 가지고 견뎌냈습니다. 비록 사울 왕의 시기심 때문에 큰 곤란을 겪었지만 다윗은 그의 소망이 무엇인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그 소망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말했습니다.

이 시인이 얼마나 어려움을 겪었습니까? '내가 큰 곤란을 당하였도다. 내가 경겁 중에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놀랐을 때에 내가 겁이 나서 소스라쳤을 때'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울 왕이 나를 추적할 때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이라 하셨도다" 사실 다윗과 관계를 맺었던 모든 사람, 사울 왕과 그 신하들 모두가 거짓말쟁이였습니다. 자기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다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성도라고 하지만 완전한 신앙의 소유자는 없습니다. 분명히 믿고 말했지만 정말 어려운 자리에 이르렀을 때 이 시인은 두려움이 생기고, 그 믿음이 흔들릴 수가 있습니다. 이 어려움이 오래 걸리면 지치고 낙심하고 좌절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변에 어려움 당하는 사람이 있으면 멸시의 눈으로 보지마시고 오히려 '내가 저와 같은 처지에 이르렀으면 어떻게 하나'하고 민망히 여기는 마음이 꼭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입니다.

이 시인은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했습니까?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까?" 하나님은 이 시인을 곤란 속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놀라운 은혜를 깊이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놀라운 은혜에 대하여 어떻게 하면 보답할 수 있을까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사실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감사와 감격이 없는 신앙생활은 옳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이 시인은 여기서 그의 결의를 표현합니다. "내가 구원의 장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몇 해전에 캐나다 에드몬튼에 갔다가 어느 권사님 한 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한국에서 캐나다 대사관에서 일했었는데 나이가 차도록 아기가 없어서 양녀를 두었습니다. 캐나다로 이민 가서 딸아이가 고등학교 갈 때까지 양녀된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가 말했더니 큰 충격을 받고 반항해서 고생을 많이 했고 거의 집에도 안 오고 벤쿠버에 있는 학교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권사님이 차 사고가 나서 의식을 잃게 되고 거의 사경을 헤매게 되었는데 의사는 아무래도 소생할 가능성이 없으니 공연히 환자만 더 오래 고생시키지 말고 산소호흡기를 뽑아 편히 보내드리는 것이 났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남편 되는 분도 동의했는데 벤쿠버에서 어머니 사고 소식을 듣고 쫓아온 딸이 극구 반대하고 자기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24시간 간호하고 목사님이 오셔서 기도하는 것 외에는 누구도 출입하지 않게 하고 간호했는데 이 어머니가 열흘만에 의식이 회복되기 시작해서 한달 만에 퇴원하게 되었습니다.

담당의사선생님 말씀이 이것은 따님의 정성과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권사님은 "내가 산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그래서 내 여생은 캐나디안 인디언 전도를 위해서 바치려 합니다."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께 받은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하시겠습니까?

 

“주께 감사하리이다.”

성경: 시-118-28-

 

 

나의 하나님, 내가’ ‘나의 하나님, 내가’로 연결되어 있는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구원을 체험하고,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아는 신앙인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을 높이겠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첫째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이는 믿음의 사람 시편 기자가 하나님과 자기와의 내밀한 관계성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그에게 있어 하나님은 피상적 존재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과 번영, 미래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인 우리에게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his God)’이 아니라 ‘나의 하나님(my God)’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게 객관적인 분이 아니라 주관적이신 분이시요, 남의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내,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어머니, 나의 어머니’ ‘우리 교회, 내 교회’ ‘우리 나라, 내 조국’이라고 일컫는 것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하나님이심으로 우리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시며, 이렇게 될 때만이 하나님과 나와의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믿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목사의 설교를 듣고, 어떤 성도의 간증을 듣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설교나 간증이 신앙을 갖거나 믿음을 성장케 하는 데 도움은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 믿음 그 자체는 될 수가 없습니다.

신문에 실린 어떤 기독교 대학 교수의 글입니다. “학교에서 수많은 학생들을 만나며 그들로부터 많은 인사를 받는다. 그러나 거의 의례적인 인사이다. 허나 때로는 의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진정한 감사가 담긴, 나를 가르쳐 주시는 나의 고마우신 선생님으로 알고 진심으로 인사하는 학생도 있다. 그러면 교수도 그 학생 신상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고 기억 속에 입력을 시키며 깊은 마음을 주게 된다.”

추수감사예배는 매년 연례 행사로 드리는 형식적인 예배가 아닙니다. 과거에도 은혜를 주셨고, 지금도 은혜를 주시며, 미래에도 은혜를 주실 나의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리는 특별하고도 뜻깊은 예배입니다.

특히 오늘, 1999년 11월 21일의 추수감사예배는 단순히 1999년의 추수감사예배가 아니라 20세기에 마지막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내 죄를 사해 주시고, 크고 작은 고난, 삶의 구석구석, 순간순간에 은혜를 베풀어 주신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과 감사로 관계되어야만 합니다.

가장 완전한 기도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요, 감사의 봉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행동하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내 삶을 만들어 주신 내 하나님을, 내 주님을 잊지 않아야 됩니다. 하나의 작은 축복에 감사함이 또 다른 큰 축복을 받는 통로입니다.

 

둘째 : 내가 감사하리이다

감사란 타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나의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20세기 마지막 추수감사예배를 드리며 잃어버렸던 감사를 찾으시고 쏟았던 감사를 회복하십시오. 기독교인들의 최대 치욕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정신의 결핍입니다.

우리가 감사의 마음을 찾고 회복하여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만 있다면 21세기라는 내일에는 복되고 건강한 나, 가정, 교회, 그리고 나라가 될 것입니다. 여기저기에 분쟁이 있고 미움이 있으며, 문제가 생김은 감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겐 매사가 감사로 귀결되나 불평하는 자에겐 모든 일이 불만으로 끝납니다. 기독교인들의 생은 불만 속에서 피폐한 삶으로 종지부를 찍어서는 안 됩니다.

감사는 은혜의 산물이요 신앙의 표현이며, 축복의 열매요, 천국 생활의 상징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최고의 제사입니다.

내 속에 감사한 마음을 두지 않으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들리지 아니하며, 먹어도 맛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만족도 기쁨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감사란 기독교인을 나타내는 표시이며 감사가 나타나는 곳에 참 신앙이 있습니다.

독일 재무장관을 지낸 마르티 바덴 이야기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말할 수없이 궁핍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지방 여행을 갔다가 싸구려 여관에 투숙,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의 신발이 없어졌습니다. 그는 화가 나서 “어떤 죽일 놈이 내 신발을 훔쳐갔냐.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나같이 가난한 사람의 신발을 도둑질해가게 그냥 놔두시다니…”라고 하나님을 원망했답니다.

그러자 여관 주인이 창고에서 헌 구두를 꺼내주며 그에게 “오늘은 주일인데 나와 같이 교회에 가지 않겠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는 마지 못해 여관 주인을 따라 교회에 갔습니다.

헌데 그의 옆 자리에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이 앉아 눈물을 흘리며 찬송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더랍니다. “저 사람은 신발을 잃어버린 정도가 아니라 아예 두 다리를 잃었구나. 신발이 있다고 해도 신을 수 없구나. 저 사람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복된가? 신발이야 또 사서 신으면 되는 것을….” 마르티 바덴의 삶에 변화가 왔습니다. 그는 삶의 상황에 따라 감사하는 자가 아니라 삶 그 자체로서 감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명 재무장관이 되어 국가와 국민에게 크게 봉사하였고 국민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감사하며 사는 생활이 올바른 삶이며 축복 받는 인생입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다. 우리가 올바로 살 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다.” 어거스틴(Augustine)의 말입니다.

왜 없는 것만을 가지고 불평불만을 하십니까? 지금 내게 있는 것으로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이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세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이기는 능력에 의하여 증명됩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뇌는 대략 140억 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헌데 기억을 관리하는 것은 대뇌의 후두부이며, 여기에 저장된 기억은 되새기지 않은 상태에서 얼마를 지나면 잊혀지고 그 자리에는 새로운 것으로 저장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저장된 기억은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으로 분리되며, 전자는 의지를 사용해서 노력해야만 기억되는 것이고, 후자는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절로 떠오르는 기억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는 조건을 조사하고, 찾아 내어 어거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생활 속에서, 그냥, 나도 모르게, 당연히, 저절로 내 속에서 살아나야만 합니다.

폭풍우로 인하여 미국의 에반 스톤 해안에서 배가 난파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노스웨스턴대학생들이 인명 구조에 나섰는데 그 가운데 에드워드 스펜서(E. Spen- cer)라는 학생이 17명을 구조했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 토레이(Torray) 박사가 LA의 한 모임에서 그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그 스펜서 씨가 지금 여기에 참석해 계십니다.”라고 외쳤습니다.

토레이 박사가 그를 강당 위로 초대하자 백발의 노인이 우레 같은 박수 속에서 올라왔습니다. 토레이 박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그 때의 일들 가운데 특별히 인상에 남는 것이 있으신지요? 스펜서의 대답입니다. “단 한 가지 있습니다. 제가 구했던 17명 중 그 누구도 내게 감사하다고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감사할 줄 몰랐던 17명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감사를 잃어버리고 사는 현대인들입니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눅 17장).” 열 명의 문둥병자를 고쳐주었건만 한 사람만이 감사했을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십니다. 주님께선 지금도 아홉을 찾고 계십니다.

 

셋째 : 내가 높이리이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림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하는 자가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와 감격이 없이는 하나님을 높일 수가 없습니다.

영국의 어떤 학교에서 무신론자 과학 선생이 무신론을 주장하고자 칠판에 ‘No where is God(하나님은 어디에도 없다)’이라고 썼습니다. 그러자 한 학생이 벌떡 일어나 나가 칠판에다가 ‘Now here is God(하나님께선 지금 여기에 계시다)’라고 고쳐쓰더랍니다.

하나님을 알고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높임에 있어 언제, 어디서, 누구 앞에서도 당당하고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주저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선 우리가 높이는 만큼 높아지십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의 수가 늘지 아니하고 있음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땅에 떨어뜨리는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은 내가 보잘 것 없는 낮은 존재임을 시인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아니시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높이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겸손이란 나를 낮추는 것이요 자기를 감추는 것이며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면 나를 낮추고 내가 숨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높이려 하지 아니하고 자기를 내세우며 나를 포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포기하려고 합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누릴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원인이 있습니다.

성 프란체스코(St. Francesco)의 제자 중에 마태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겸손의 덕을 영원한 생명으로 알고 겸손의 은혜를 얻기 위해 불붙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늘 기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에게 “마태오야, 마태오야, 네가 간구하는 은혜를 내가 주면 너는 그 대신 나에게 무엇을 바치려느냐?”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주여 저는 저의 가장 귀한 눈을 빼어드리겠나이다.” “나는 네가 원하는 은혜도 주고 네 눈도 보존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바로 여호와 이레의 축복이라고 하는 것이랍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10절).”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하나님을 높이고자 하는 결정을 하십시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결단을 내리십시오. 그리고 실천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내 것이 될 것이요, 은혜 위에 은혜를 더해 주실 것입니다. 에머슨(R. W. Emerson)은 말합니다. “마음에 결정된 것을 주의하라 그것이 네 것이 되는 까닭이니라.”고…

하나님을 높이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애인이 될 것이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자 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좋은 신부가 될 것입니다. 새로운 마음은 새로운 삶을 창조하고, 새로운 삶은 내 생활을 복되게 할 것입니다.

내가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고 나의 하나님을 내가 높인다면 허락하신 모든 은혜와 축복이 나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게 객관적인 분이 아니시라 주관적이신 분으로, 그의 하나님(his God)이 아닌 나의 하나님(my God)이십니다.

·가장 완전한 기도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요, 감사의 봉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행동하는 신앙입니다.

·하나의 작은 축복에 감사함이 또 다른 큰 축복을 받는 통로입니다.

·분쟁이 있고 미움이 있으며 문제가 생김은 감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은혜의 선물이요 신앙의 표현이며, 축복의 열매요 천국 생활의 상징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최고의 제사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감사란 기독교인임을 나타내는 표시이며, 감사가 나타나는 곳에 참 신앙이 있습니다.

·감사란 삶의 상황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삶 그 자체로서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림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요, 하나님을 높인다는 것은 내가 보잘 것 없는 낮은 존재임을 시인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아니시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나를 낮추는 것이요 자기를 감추는 것이며 나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면 나를 낮추고 내가 숨어야 합니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라.”

본문 : 시-121-1-8

 

 

오늘은 우리 교회가 지키는 추수 감사절입니다. 우리가 농사를 지은 것이 없는데 무슨 추수 감사절이냐고 물으실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농사꾼이든 도시의 소시민이든 근원적으로 인간의 삶은 심고 가꾸고 거두는 농사의 원리를 따라 이루어지기에 오늘 추수 감사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일년 동안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고 하겠습니다. 부지런히 아침부터 저녁까지 나가 씨를 뿌리고 가꾼 결과 추수 때를 맞이한 것입니다. 추수는 하나님의 은총과 우리의 땀의 결과입니다.

 

농사를 짓지 않은 우리도 농사 풍년이 들었다고 하면 안심이 되고 함께 기뻐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활이 농사의 결과에 따라 영향을 받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풍년의 소식은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의 모든 삶에 함께 하셨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에 감사하게 되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시에 살면서도 이렇게 추수 감사절을 지키는 것은 매듭 없는 우리의 삶에 매듭을 주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금년에 우리가 무엇을 추수했는지 점검해보고 감사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다함께 모여 감사의 예배를 드리지만 우리 모두가 똑같은 추수를 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은 정말로 많은 추수를 하였는가 하면, 어떤 분은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많은 것을 얻었든지 혹은 잃었든지 간에 그 모든 것에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총 안에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삶의 감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추수했느냐에 따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과 위기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의 추수 감사절은 우리가 거둔 추수와 상관없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절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지키는 하나님

오늘 읽어드린 시편 121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시며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면서 우리를 지키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낮과 밤에 지키시며 나갈 때나 들어올 때나 이제부터 영원까지 지키신다고 하였습니다. 이 시인은 다른 시편들처럼 어떤 큰 고난 가운데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또 큰 고난 가운데서 구원함을 받아서 기쁨으로 감사의 찬송을 드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마도 이 시인은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순례의 길을 떠나 험한 산길을 걸으면서 조용히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며 이 시편을 읊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의식하든 안하든 언제나 나와 동행하시며, 나의 삶이 기쁨을 맛볼 때에도 나를 돌보셨으며, 내가 고통가운데 있을 때에도 나를 떠나지 아니하셨다는 사실을 이 시인은 깨달은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는 길은 험한 산길로서, 낮에는 뜨거운 태양이 내리쪼여 걷기 힘들며, 밤에는 추워 떨게 만드는 길입니다. 우리가 요즈음 성지 여행을 할 때는 시원하게 냉방이 된 편안한 차를 타고 하기 때문에 잘 느끼지 못합니다. 만약에 여리고에서 예루살렘까지 걸어서 가라고 한다면 대부분 지쳐 넘어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없는 광야의 험한 길을 걸어 올라간다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여행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아마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을 것입니다.

 

 

"주님은 너를 지키는 분, 주님은 네 오른쪽에서 서서, 너를 보호하는 그늘이 되어 주시니, 낮의 해도 너를 해치지 못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시 12:5-6

유다의 광야길 같이 험한 우리 인생의 길을 생각하면서 그 길에 항상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 시인은 지금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 성전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의 삶에 언제나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깊은 감사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금년에 농사는 풍년이 들었다고 하지만, 우리의 경제적 여건들은 그렇게 썩 좋은 편은 아니었습니다. 대기업들조차 부도 위기에 몰리고, 취업은 점점 더 어려워져서 실업률은 자꾸 높아지고 있어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있습니다. 대외 무역은 계속 적자를 기록하고 있고, 통상 압력은 점점 더 거세어져서 우리 상품의 수출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요즈음 우리의 삶은 계속 구름이 잔뜩 낀 날과 같이 찌푸려 있습니다. 사람들이 스포츠 소식에 이상적으로 열광하는 것은 그나마 그것이 우리의 숨통을 터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국 프로야구 선수인 박찬호의 승리에 열광하고, 우리 축구선수들이 일본전에 역전승을 거둔데 이어 아랍 에미레이트전에서도 대승을 거둔 일에 대하여 온 나라가 열광적으로 기뻐 날뛰고 있습니다. 이렇게 온 국민이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를 덮고 있는 모든 검은 구름을 거두어 내고 싶은 열망이 축구의 승리를 통해 분출되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우리 사회를 덮고 있는 검은 구름이 우리에게 그늘을 드리운다 할지라도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은 그 검은 구름 너머로 태양이 빛나고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편 121편 기자의 신앙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루시는 역사의 깊은 속은 보지 못한 채 겉에 나타난 현상에만 집착하여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표면에는 때로 파도가 일기도하고 폭풍우가 몰아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 깊은 곳에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의 돌보심과 은총이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작은 것에 감사하라

우리가 이렇게 우리의 모든 삶에 아니 이 땅에서의 삶만이 아닌 영원한 세계에서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모든 일에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체험하는 아주 작은 일에서도 늘 감사함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가진 것 아무것도 없다 할지라도 아침에 뜨는 해를 보며 즐겁게 지저귀는 새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처럼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한 平生을 심한 육체의 장애로 산 핼렌 켈러가 그의 저서 <The Story of Life>라고 하는 책에서 점자로 써서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런 것입니다.

 

 

"내가 단 한번만 저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 볼 수 있었으면

내가 단 한번만 떨어지는 저 낙엽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 볼 수 있었으면

내가 단 한번만 저 깊은 산 속에서 졸졸 흘러내리는 시냇물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면

내가 단 한번만 저 아름다운 가르침과 자상한 친절을 베풀어주시는 우리 선생님 셀리반 선생의 아름다운 그 미소를 바라볼 수만 있었으면

내가 한번만 저 오케스트라의 연주하는 장엄한 그 음악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면

내가 단 한번만 나에게 그 귀한 감동을 주시는 필립스 목사님의 설교를 들을 수만 있었으면....

내가 한 번만 그 말씀으로 내 삶을 바꾸어 놓았던 그 감동스런 성경말씀의 내용을 직접 내 눈으로 보고 읽을 수 있었으면

내가 한번만 지는 해의 그 아름다운 석양의 노을을 직접 내 눈으로 바라 볼 수만 있었으면 .. 더 이상 소원이 없겠다. 그럴 수만 있으면 지금 당장 죽어도 한이 없겠다."

얼마나 소박한 소원입니까?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그녀의 간절한 소원은 소박하지만 이룰 수 없는 소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볼 수도 들을 수도 있는 우리는 본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들을 수 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유명한 부흥목사 스펄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별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하나님은 달빛을 주실 것이다. 달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햇빛을 주실 것이다. 햇빛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마음의 빛, 영혼의 빛을 주실 것이다."

마음의 빛, 영혼의 빛을 얻는 길은 아주 가물가물한 작은 별빛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매일매일의 작은 일에서 늘 감사할 때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밝아지는 것입니다.

 

어떤 일란성 쌍둥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한 아이는 언제나 희망을 잃지 않고 낙천적이었는데 반해, 다른 아이는 극히 비관적이어서 항상 불만과 불평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근심에 쌓인 부모가 그 아이들을 심리학자에게 데려갔습니다. 심리학자는 그 아이들의 성격을 균형 잡히게 만들 계획을 부모에게 일러주었습니다.

"이번에 돌아오는 아이들의 생일에는 그들을 각자 다른 방에서 생일선물을 끌러보게 하십시오. 비관적인 아이에게는 당신들의 능력이 닿는 대로 가장 좋은 선물을 주도록 하시고 낙천적인 아이에게는 말똥을 한 상자 주도록 하십시오."

아이들의 부모는 이러한 제안을 따랐고 그 결과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습니다. 부모가 비관적인 아이의 방을 가만히 엿보니 이런 불평소리가 새어나왔습니다.

"이 컴퓨터는 색깔이 맘에 안 들어… 이 계산기는 쉽게 깨질 것 같아… 이 전자오락 게임은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니야… 어떤 애는 이 장난감 자동차보다 더 큰 차를 가졌는데…."

 

그들은 조용히 복도를 건너가 낙천적인 아이가 있는 방을 엿보았습니다. 그 아이는 기쁨에 넘쳐서 말똥을 공중으로 던져 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킥킥 웃어대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엄마 아빠가 나를 놀리신 거야. 이렇게 많은 말똥을 어디서 구하셨겠어? 내 생일 선물로 준비하신 조랑말이 있는 데서 가져오신 것이 아니겠어?"

 

우리 마음에 빛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선물도 별로 달갑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에 빛이 깃들면,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선물이라 할지라도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밤이나 낮이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가물거리는 별빛에도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 삶 깊은 곳에 늘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서로 화답하며, 여러분의 마음으로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십시오. 모든 일에,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엡 5:19-20

모든 일에 항상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생활은 여러분의 신앙을 자라게 할 것이며, 여러분의 영혼을 맑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을 뵈올 것이며, 그가 보여주시는 풍성한 세계를 바라보며, 거기로부터 오는 지혜와 능력을 얻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큰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감사의 넘친 삶을 통해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이룩해 가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청교도와 감사절 ”

시편 136:1, 25~26

 

 

 

19세기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였던 다니엘 웹스터는 “청교도들은 구라파 대륙의 풍요로운 유산, 즉 도덕, 철학, 과학, 예술, 문화의 유산을 가지고 신대륙에 건너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은 성경책을 가지고 신대륙에 왔다. 성경은 청교도들의 믿음의 토대가 되고, 미국을 만들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멋있는 정치가의 초기 미국관입니다. 사실상 미국과 미국의 역사, 미국의 축복은 청교도 종교개혁의 산물이었습니다. 미국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영국의 신교 자유(信敎 自由)의 박해를 떠나 아메리카 대륙으로 신앙의 순례를 감행한 위대한 사람들이 이룩한 축복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순례자들이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타고 영국 해안의 땅끝(Land's End)인 플리머스를 떠나면서 ‘프랜시스 행긴손’(Francis is Hangginson)은, “…우리들은 영국 교회에 대한 분리주의자로서 뉴잉글랜드를 떠나는 것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는 교회개혁에 대한 적극적인 분야를 실천하고 미국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가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미국을 찾아갔던 청교도들은 성경에 기초한바 ‘언덕 위의 도시’를 건설하고, 새로 거듭날 수 있는 기독교 나라를 꿈꾸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최소화폐단위인 1센트짜리 동전에 조차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In God we trust.)라고 새겨놓을 정도였습니다.

 

Ⅰ. 메이플라워 계약서

 

1620년 9월 2일은 이른바 ‘오월의 꽃’이라고 불리는 배 메이플라워호가 영국 플리머스를 떠나, 신대륙 미국을 향하여 항해를 시작하던 역사적인 기록의 날입니다. 그 배안에는 청교도 분리주의자(English Separatist of Church) 35명, 그리고 영국의 종파주의자(English Sectarians) 60명, 메이플라워호 승무원 6명 등 총 101명(남자 72명, 여자 29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청교도 순례자들은 65일간의 모진 고난의 항해 끝에 1620년 미국 매사추세츠(Massachusettes)주의 케이프 가드만(Cape God Bay)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배의 선장은 크리스토퍼 존스(Christopher Jones)였습니다. 저들은 케이프 가드만 선상에서 역사적인 메이플라워 계약서를 작성하고 서명하였습니다. 그 내용 전문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멘하라.

하나님의 은총에 따라 대영제국, 프랑스, 아일랜드의 왕이 된 신앙의 옹호자 제임스 폐하의 충성된 국민인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기독교 신앙의 진흥, 우리의 왕과 조국의 명예를 위하여 버지니아의 북부 지방에서 최초의 식민지를 창설하고자 항해를 시도하였다. 여기 본 증서에 의하여 엄숙하게 상호 계약하므로 하나님과 각 개인 앞에서 계약에 의한 정치 단체를 만들어 이것으로서 공동의 질서와 안전을 촉진하고, 그 위에 상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법령의 제정과 제도 조직을 구성한다. 동등한 법률, 법령, 조례, 헌법과 행정부를 때때로 구성한다. 이 모두는 식민지의 일반적 안전을 위한 간편하고 적합한 생각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는 모두 여기에 대하여 당연한 복종을 바칠 것을 계약한다. 이에 우리의 이름으로 서명한다. 1620년 11월 11일 케이프 가드만에서 카이버, 브래드포드, 윈스로우, 부루우스터를 위시하여 41명이 서명한다. 이때까지 저들은 아직 육지에 내리지 않았습니다. 저들은 그해 12월 20일에 플리머스 땅에 첫발을 내리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도 한 달(30일)하고도 9일의 항해가 남아 있었습니다. 저들은 저들이 목적하는 육지에 내리기 전에 바다 배위에서, 적어도 저들이 미국에 온 목적과 의미를 함께 마음으로 새기고 하나님 앞에 이것을 서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들의 계약, 곧 메이플라워의 계약내용에는 청교도들의 분명한 신앙고백이 들어있음을 보게 됩니다. ① 하나님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God) ② 하나님의 은총에 의하여(by the grace of God) ③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for the glory of God) ④ 하나님의 존전에서(in the presence of God) 생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국가정치단체(for civil body politic)와 평등한 법률(equal laws)을 제정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들의 동맹서약은 사실상 위대하신 하나님 사상으로 꽉 차 있음을 보게 됩니다. 저들은 적어도 목적있고, 의미있고, 내용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철학을 가지고 미국의 새 땅을 밟기로 서약했던 것입니다.

 

Ⅱ. 첫 번 추수감사절

 

오늘 세계 교회가 지키는 추수감사절은 저 미국을 찾아갔던 청교도들의 감사축제에서 그 기원을 찾게 됩니다. 저들은 이미 미국을 향해 떠나기 전에, 영국의 종교박해 때문에 1609년 네덜란드로 제1차 순례의 길을 떠났던 순례자들(Pilgrim Father)이었습니다. 저들은 암스테르담(Amsterdam)과 레이던(Leyden)에서 12년간이나 살았습니다. 그 후 저들은 다시 영국으로 되돌아갔으나(1620. 7. 20)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은 수장령을 발표하고 저들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다시 미국을 향하는 새로운 순례 길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1620년 11월 9일 미국 매사추세츠의 케이프 가드만에 도착하고, 그로부터 이틀 후인 11월 11일 메이플라워호 선상에서 역사적인 메이플라워 계약서를 체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39일 후인 12월 20일에 플리머스 땅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101명의 사람들은 혹독한 대륙의 추위와 굶주림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디언의 습격의 공포 속에서 첫해 겨울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시간 속에서 거의 과반수가 괴혈병과 폐렴 등 질병에 걸려 죽어가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해인 1621년 2월 28일까지 무려 50여 명이 세상을 떠났고, 봄이 오기까지 하루에 2-3명이 숨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고난 속에서 남은 청교도들은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앙과 개척의 의지를 불태우면서 현명하고 강력한 윌리암 브레드포드(W. Bradford)의 지도 아래 정착의 꿈을 펼쳐 나갔습니다. 1621년 3월 이후 다가온 새봄과 함께 청교도들은 저들이 가지고 온 밀과 완두콩 등을 심었으나, 저들이 심은 밀과 완두콩밭을 인디언들이 짓밟아 절단을 내버리는 고통을 겪게 되었습니다. 저들이 쓰던 농사 도구마저 훔쳐가는 일들이 생겼습니다. 그럼에도 저들은 낙심치 아니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인디언들의 손에서 살아남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저들의 간절한 기도는 응답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뜻밖에 인디언 부족 왐 파노아그(Wam Panoag)족 추장인 마사소이드(Massasoid)와 통역을 맡았던 스쿠안토(Sguanto)가 찾아왔습니다. 상호협력, 불가침조약을 맺자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미국 최초의 대외조약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 후 저들은 인디언들과 우호적 공존관계를 맺고 밀과 옥수수 경작법 등을 많이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때 청교도들은 일주일에 3일씩 금식기도를 하면서 어렵게 지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인디언들이 짐승들을 잡아가지고 와서 식료를 도와주기도 하였습니다. 그해 청교도들이 25에이커에 해당되는 땅에 보리와 밀, 옥수수 등을 심었는데, 가을추수가 풍작이 되었습니다. 이때 청교도 지도자 브레드포드 주지사는 인디언을 초청하여 함께 추수감사절을 지키고, 함께 하나님께 감사하고, 축하하기로 하였습니다. 청교도들은 추장 마사소이드를 초청하였습니다. 추장은 90명의 용사들을 데리고 참석하였습니다. 이때 청교도들은 들새를 잡으러 나갔는데, 많은 칠면조(turkey)를 잡았습니다. 인디언들은 다섯 마리의 사슴을 잡아가지고 왔습니다. 저들은 함께 모여 음식을 요리하고,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며, 식사를 나누고, 노래하며 춤을 추면서 기쁨의 축제를 만끽하였습니다. 실로 청교도들이 바라던 신앙자유를 만끽하는 시간이 드디어 오고 만 것이었습니다. 그 추수감사의 예배가 그해 1621년 11월 마지막 주 목요일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저들이 받은 축복의 땅 미국에서 드린 최초의 청교도 추수감사예배가 되었습니다. 그 후 1789년 초대 미국 대통령이 된 조지 워싱턴은 독립전쟁 승리와 헌법제정을 축하해서, 11월 26일(목요일)을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로 선포하였습니다. 이날 전 미국인들은 교회에 모여 하나님이 베푸신 크신 은혜를 감사하며, 서로의 축복과 감사를 기원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감사절이 더 크게 보급된 해는 1863년 남북전쟁 중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전쟁의 조기종언과 국민단합을 위해, 11월 마지막 목요일을 감사절로 갱신하여 국가적 축제일로 선언한 이후의 일이었습니다. 그 다음 1939년 루스벨트 대통령은 11월 셋째 주간의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선포하였습니다. 추수하는 시기에 맞추기 위함이었습니다. 실로 미국의 경우 추수감사절은 개척 초기의 미국 청교도 이민 역사와 직결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날도 미국 매사추세츠 플리머스의 회관(Meeting House)과 제일교회(First Church)에서는 그 첫 번째 추수감사절을 매년마다 영화로 상영하고 있습니다. 초기 청교도들의 기묘한 옛 복장을 한 시민이 처음 겨울을 맞아 죽어갔던 희생자들이 잠들고 있는 언덕을 향해 행진하고, 거기에서 기념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현재 이 플리머스는 청교도 유적지로 많은 사람들에게 관광명소가 되어버렸습니다. 플리머스란 이름은 청교도들이 미국을 향해 출항하였던 저들의 고향 영국 웨일스 남쪽 지방 플리머스 항구의 이름을 따라 붙여진 것이고, 매사추세츠란 주 이름은 인디안 추장 마사소이드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현재 이곳에는 저들 조상들이 대서양을 가르고 타고 왔던 그때의 메이플라워호를 재건조하여 전시하고 있습니다. 플리머스의 부리알 언덕(Burial Hill)에 세워져 있는 현관에는 ‘너희 조상이 어려움 속에서 성취한 것들을 비겁하게 포기하지 말라.’는 글이 씌어 있는데, 이것이 오늘의 미국인들에게 좌우명이 되어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추수감사절은 사실상 그 역사적 기원이 미국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시작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러 류(類)의 감사축제를 계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그 후손들에게 약속의 땅을 예언하였습니다. 먼 훗날에 모세와 그를 따르던 백성들은 그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여 40년의 기나긴 순례행진을 하였습니다. 저들은 그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찾아가기 위하여 출애굽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마침내 약속의 땅에 도착한 저들은 그곳에서 농작하여 얻은 물질로 하나님께 맥추절, 추수절의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감사축제는 종된 애굽에서 하나님 경외의 신앙자유를 찾은 결과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역사 속에 다시 시작된 미국의 추수감사절도 하나님 경외의 신앙 자유의 소산이었습니다. 스위스에서는 기독교 개혁파를 중심으로 하여 매년 9월에 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11월 셋째 주일을 지킵니다.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로 말미암아 소개된 결과라고 생각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 136편에 나타난 영감의 기록은 여호와께 감사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사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여기 인자(헤쎄드)는 하나님이 베푸신 특별한 은혜를 의미합니다. 그 감사의 내용은 천지를 창조하고, 통치하고, 섭리하고 계시는 존재와 능력의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시 136:4~9). 그리고 구원의 하나님, 곧 종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살려주신(구원)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것입니다(시 136:10~24). 말하자면 제1창조(천지만물)와 제2창조(구원)를 감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는 지음받은 피조세계 중에서 인간만이 받은 영예로운 특권이요 축복입니다. 아니 하나님을 향한 감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인 그리스도인들만이 받은 삶의 요긴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금세와 내세에서 영원토록 계속되는 예배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감사는 꼭 해야 할 의무이다. 그러나 아무도 그 감사를 받을 권리를 가진 것은 아니다.’(Rousseau)라고 하였습니다. 실로 감사를 받을 권리가 확실한 자는 하나님뿐이십니다. ‘만약 우리가 감사절을 가지지 못했더라면 금으로도 갚을 수 없는 빚이 언제나 남아 있었을 것이다.’(Fred Beck)라고 하였습니다. 청교도들의 추수감사! 하나님을 향한 신앙자유의 영광과 은혜를 송축하는 감사가 아닌가! 새로운 땅 아메리카 대륙을 하나님 섬기는 수단으로 주신 자연은총에 대한 감사가 아니었던가! 바로 오늘 그 청교도의 후예들인 우리의 감사가 아닌가! - 아 멘 -

 

 

 

“여호와께 감사하라”

성경본문 : 시편 136편 1절 - 26절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신에 뛰어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주에 뛰어나신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홀로 큰 기사를 행하시는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땅을 물 위에 펴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애굽의 장자를 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을 저희 중에서 인도하여 내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강한 손과 펴신 팔로 인도하여 내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홍해를 가르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이스라엘로 그 가운데로 통과케 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엎드러뜨리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그 백성을 인도하여 광야로 통과케 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큰 왕들을 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유명한 신들을 죽이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아모리인의 왕 시혼을 죽이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바산왕 옥을 죽이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저희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곧 그 종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비천한데서 기념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건지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오늘 22주년 창립예배입니다. 22년 전에 대치동 작은 골목에서 시작한 교회가 스물 두 살이 되었습니다. 대학생으로 치면 아마 대학교 3학년 쯤 되었겠지요? 앞으로가 창창합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교회를 시작하신 분들 또 그 동안 수고하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오늘까지 인도하신 것,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더욱이 오늘은 감사주일인데 우리가 감사를 표시하기 위해서 과일들을 가져왔습니다. 이제 예배가 끝나면 다 모아서 이 동네의 독거노인들과 소년소녀 가장들에게 나누어 주려고 합니다. 1부 예배를 마치니까 어느 분이 제게 와서 “목사님, 그 쌀은 제가 가져온 것입니다.”라고 하시더군요. 그러시더니 “제가 매년 쌀을 가져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저 쌀알보다도 많습니다. 그래서 제가 저 쌀을 매년 가져옵니다.”라고 하십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헤아려 본 사람입니다. 안 해 본 사람은 가져올 것이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세어본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가 그 쌀알만큼 많습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고백을 제가 아침에 들으면서 마음에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우리들이 초등학교 때부터 산수를 배우고 수학을 배우는데 수학중에 제일 어려운 수학이 감사의 제목을 헤아려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 영어 찬송에도 있지요. 주께서 주신 복을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세어 보아라”라고 합니다. “Count your blessing one by one...", 하나씩 하나씩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세어보라고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뿌듯해지고 즐겁고 밝아지고 삶에 의욕이 생기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밝은 삶, 환한 삶, 즐거운 삶, 찬양하는 삶, 감사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감사를 세어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감사를 세어보면서 생각나는 것마다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틀 전에 20년만에 어떤 분을 만났습니다. 아내는 교회를 다니는데 본인은 아직도 교회를 안 나간다고 합니다. 그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계속해서 불만을 표시하시더라구요. 인생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차 있어요. 제가 다른 질문을 하다가 그 분의 입에서 감사가 나울 수 있도록 대화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그 분의 입에서 감사한 제목이 나오면 제가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러면 그 분이 “아 ,참 감사한 일이군요.”라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누구에게 감사하지요?” 인생을 돌이켜보면 불평뿐만이 아니라 감사할 제목들이 있는데 감사하다고 마음에 생각하면서도 감사할 대상이 없는 거에요.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바로 감사를 드리면서 그 감사가 승화되고 초월화 되는데 이 분은 혼자 중얼대면서 감사할 수밖에 없는 거지요. 감사할 대상이 있어야지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 많은 감사가 보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감사는 하나님의 명령이에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에도 그랬지요. “여호와께 감사하라”,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 감사를 명령하고 받는 것도 좀 그렇지요? 옆구리 찔러서 절 받는 것처럼. 그런데 하나님은 절을 받으시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려는 겁니다. 감사가 전혀 없던가 불평이 많던가 감사가 있던가 세 가지 중에 하나인데 만약에 여러분들의 입술에 인생에 대해 계속해서 불만만 있다면 여러분도 고생이고 고생하는 얼굴을 보는 옆의 사람은 또 얼마나 고생이겠어요. 내 삶이 어둡고 내 얼굴이 어둡고 내 목소리와 나의 태도가 어둡게 살면서 불행한 삶을 사는 불평으로 가득찬 사람, 그 사람과 같이 사는 가족들은 또 얼마나 불행입니까. 그러나 감사로 가득찬 사람들은 날마다 그 입술에 고마움이 있으니까, 고마움을 표시하는 남편과 함께 사는 아내의 모습, 얼마나 좋겠어요. 감사를 표현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사는 아내는 얼마나 감사하고 좋겠습니까? 감사가 가득찬 자식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 부모는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다 충만한 삶, 행복한 삶, 고마움을 알면서 인생에 대해서 하나님께, 부모님께 또 이웃에게, 나라에 감사를 표현할 줄 아는 사람으로 환하고 밝은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여호와께 감사하라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감사가 그렇게 쉽지가 않아요. 이건 하나의 이야기지만 하늘의 천사가 바구니 두 개를 들고서 하늘에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데 한 손에는 ‘간구의 기도’를 가지고 가고 또 한 손에는 ‘감사의 기도’를 가지고 간답니다. 근데 땅에서부터 두 바구니를 하나님 앞에 가져갈 때 ‘간구의 기도’는 그 바구니가 가득차서 철철 넘치는데 ‘감사의 기도’가 들어있는 바구니에는 거의 비어서 올라간다고 합니다. 이 증거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아이들이 산타클로스에게 좋은 선물을 하나 받으려고 기다리지 않습니까? 아이들이니까 순진하게 편지를 써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금년에는 컴퓨터를 하나 보내주세요,” 이런 내용들을 써서 보내 온답니다. 크리스마스 때만 되면 우체국에 수많은 편지가 옵니다. 그러면 우체국에서 또 그 편지를 분류하지요. 산더미같이 온답니다. 그리고는 크리스마스 이브가 지나갑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머리맡에 선물들이 와 있지요. 기뻐서 다 풀어봅니다. 연말이 지나고 나서 우체국에는 “Thank you!"의 편지가 단 한 통 왔답니다. 산타클로스에게 달라고 할 때는 엄청난 양의 편지가 왔는데 그 선물을 받고 감사를 표시한 편지는 단 한 통뿐이었습니다. 이 내용을 뉴욕 타임스지의 사설을 쓰는 분이 공개해 놓았습니다. 어째서 감사의 편지는 하나밖에 없을까? 감사를 헤아릴 줄 아는 것이 인간에게는 제일 어려운 산수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에 1년을 돌이켜 보면서 여러분들의 가슴속에는 감사가 보이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감사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하셔서 이 우주속에, 이 땅위에 백만 종류의 생물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바다에 백 오십만 종류의 생물을 만들어 놓으셨어요. 땅과 바다속에 있는 생물만 해도 이백 오십만 종류에요. 이백 오십만 종류인지 아닌지 제가 알겠습니까? 그렇게 발표했으니까 알지요. 과학자들이 말하기를 이백 오십만 종류의 생물이 땅과 바다속에 있다고 하지요. 여러분이 원하는대로 있어요. 여러분이 만약에 포도를 먹고 싶으면 포도가 있어요. 사과가 먹고 싶으면 사과가 있어요. 호박을 잡수시고 싶으면 호박이 있어요. 배추, 무, 귤 등등 이 땅위에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다 있어요. 이북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쩔쩔매는데 우리는 가게에 가면 산더미처럼 많습니다. 먹고싶은 대로 골라서 먹승 수 있어요. 단 물론 돈은 내야지요. 돈만 낸다면 먹고싶은 대로 먹을 수 있습니다. 갖고싶은 대로 얼마든지 이 땅에서 여러분이 즐기고 누리고 살 수 있습니다. 솔로몬이 말 한 것처럼 “사람이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느니라” 시시때때로 우리가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이 우주속에 가득차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창조자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감사합니다. 더욱이 우리 자신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셔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생명은 신비한 생명입니다. 우리 몸 속에 296개의 뼈가 있어서 우리를 걷게하고 앉게하고 눕게하고, 우리 몸 속에 혈관이 있어서 필요할 때마다 모든 것을 공급해 주지요. 우리가 맛있는 음식을 먹고나면 혈관은 알아서 신비하게도 기차 철로처럼 가다가 간에는 간에 맞는 영양분은 내려놓고 가고 심장에는 심장에 맞는 영양분을 내려놓고 가고 온 몸에 필요한 영양분을 다 공급해 주시면서 신비한 생명을 유지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무한하고 위대하고 좋으신 하나님이 아니면, 능력의 하나님이 아니고는 우리같은 인간을 어떻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나 여러분과 제가 시작할 때는 단세포였습니다. 눈에도 보이지 않는 작은 단세포였어요. 그러나 그 작은 정자와 난자가 합해 졌을 때 그 속에 우리의 오장육부와 우리의 성격과 우리 조상들의 모습 등 모든 것이 다 그 안에 들어있어서 신비스러운 인생, 하나님의 창조를 체험하며 우리들이 환히속에 살 수 있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5절부터 9절 사이에 보면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땅을 물 위에 펴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이에게 감사하라“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즐기게 하시고 누리게 하시고 이런 놀라운 축복을 주신 좋으신 하나님, 창조자 하나님께 이 시간에도 감사를 드립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자 되시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10절부터 22절 사이의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430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다가 그 노예생활을 끝내고 하나님께서 해방을 시키셔서 자유로운 민족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육신적인 자유를 누렸지만 영적인 자유, 죄로 인해서 악한 세력으로 인해서 마귀로 인하여 우리의 죄성 때문에 죄의 종으로 살아왔던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그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영원히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구원해 주신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고 살뿐만 아니라 저 하늘나라에 가서도 우리가 마지막 호흡을 하는 그 순간에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은혜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그 구원의 하나님께 갈 때에 우리는 그 분께 감사와 찬송을 올릴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 창조자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 이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감사합니다.

 

또 그뿐이 아니라 공급자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다. 23절부터26절에 보면 “우리를 비천한데서 기념하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우리를 우리 대적에게서 건지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모든 육체에게 식물을 주신이에게 감사하라” 라고 합니다. 이 땅에서 식물에 필요나 정신적으로, 문화적으로, 영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다 공급해 주셔서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있고 감사를 표현하고 천송을 올리고 미래에도 하나님께서 돌봐주실 것을 믿고 살 수 있게 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육적인, 물질적인 공급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필요한 것들도 우리에게 공급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셨고 죽음에서 승리하게 하셨고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복음을 듣고 이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고 살 수 있도록 불러주신 것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모든 것을 놓고 감사한 마음이 우러나서 감사를 표현하면서 사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길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위선적으로라도 감사하는 것이 전혀 감사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심지어 그것이 위선이라 할지라도, 겉으로 하는 이야기일지라도 오히려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전혀 감사를 표현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서로간에 집에서도 감사를 표현한다면 암 우리 가정을 훨씬 더 살기 좋은 가정이 될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도 말이 없어요. ‘맛있지요?’라고 물어보면 ‘그래.’ 그러고 끝입니다. 억지로 물어야 겨우 대답하고 나가버리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우리가 좋은 음식을 먹을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감사할 수 있다면 얼마나 더 아름다운 가정이 되겠습니까? 제가 미국에 가서 제일 좋은 인상을 받았던 것중에 하나가 미국 사람들은 무조건 ‘Thank you!' 그럽니다. 무엇을 하던지 'Thank you!'에요. 처음에는 ’참, 저 사람들 속 없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오래 살다보니까 ’아, 이 사람들은 감사가 습관이 되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부딪혀도 “Excuse me.', 'Thank you.' 그저 그렇게 고맙다고 표현하는 그 모습들이 ’기독교 문화인가보다‘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받은 많은 영적인, 육적인 은혜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쌀알만큼 많아지기 바랍니다.

 

또 그런가하면 형제들 때문에, 자매들 때문에 감사합니다. 성경에 보면 로마서 6장 17절(?)에 다른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그렇게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오늘 아침에도 제가 이야기를 들었는데 한 분이 제 아내에게 전화를 하셨습니다. “사모님, 너무 감사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하면서 말씀하기를 그 사돈 집안이 예수 믿기를 원해서 말을 하고 싶지만 사돈이라 참 조심스럽지요. 그러나 아주 조심스럽게 기도하면서 종종 테이프도 갖다 드리고 하셨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그 사돈이 그동안 들은 테이프를 통해서 이제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제 생애에 가장 기쁜 일입니다.’라고 하시더군요. 왜 그렇게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합니까? 한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서 영원한 세계를 알고 이 땅의 인생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 감사한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에도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보고 감사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보여준 믿음, 참 어려운 인생인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지금은 어렵지만 이것이 영원히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이러면서 신앙을 표현했을 때, 믿음이 나타날 때마다 옆에서 보는 사람들은 감사가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것이에요. 또 다른 사람들이 보여준 사랑과 은혜와 열정 때문에 감사합니다. 다윗을 보면 성전을 지으려고 하니까 모든 사람들이 힘을 합해서 자원해서 하나님께 드려서 그 성전을 준비하는 것을 보면서 다윗이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감사의 원인 제공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이 시간에 내 가족들에게 감사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고통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습니까? 나는 오늘 이 시간에 사람들의 감사의 제목인가, 아니면 불평의 제목이 되고 있는가. 우리 자신을 한 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반드시 감사의 원인 제공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때문에 가족들이 감사하고 여러분 때문에 직장의 동료들이 감사하고 여러분 때문에 교회의 성도들간에 감사해서 여러분을 생각하 때마다 ‘아, 참 그 분 너무 좋아. 너무 감사해.’ 이런 마음이 여러분을 볼 때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일어나도록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에게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가 필요해요. “하나님, 제 인생에 은혜를 주셔서 감사의 제목이 되게하여 주옵소서.‘ 여러분! 룻을 기억하시지요? 룻은 모압의 여자요 유대의 여인도 아닙니다. 이방의 여인이 유대땅에 왔을 때 보아스가 하는 말이 ”당신은 일곱 아들보다도 더 귀한 여자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다른 사람에게 축복을 일으키고 감사를 일으킬 수 있는 삶이 되도록 꼭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감사의 제목이 되지 못한다면 불평의 제목이 될 수 있어요. 인생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의 인생에 특히 가족들의 인생에 불평의 제목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은 반드시 복의 근원이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감사하나? 성경에 보니까 첫째로 “예수의 이름으로 감사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감사하라.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담대하게 하나님께로 갈 수 있으니까요. 또 “감사의 제물을 드리며 감사하라.” 그랬습니다. “찬양으로 감사하라.”, 어떤 때는 “시를 써서 하나님께 감사하라.”, “하나님을 드놀이면서 감사하라.”, 성전에 나갈 때마다, 그 궁전에 들어갈 때마다 맨 먼저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올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에 도착하자마자 조용히 자리에 앉으면 고개를 숙이고 지난 한 주를 생각하면서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올라십시오. 성경에 그렇게 하라고 되어 있어요. 또 과거의 신앙인들을 그렇게 하나님께 감사를 표시함으로 마음에 밝아지고 하나님의 좋으심이 느껴지고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는 것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언제 감사드려야 하는가? 성경에 보니까 여덟 가지가 있더군요. 공예배에서 감사드립니다. 즉 오늘같은 이런 시간이지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모여있을 때 거기에서 대표로 기도하는 분들이 우리 모두를 대표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요. 또 둘째는 개인예배에서 혼자 예배를 드리던지 가족들이 예배를 드리던지 그 예배시간에 감사의 기도들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어려서부터 집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늘 부모님들이 감사의 제목들을 하나님께 올리는 것을 본다면 그 감사를 배우면서 자라난 그 아이가 얼마나 축복이겠습니까? “하나님, 철수로 인해서 감사를 드립니다.” 이런 말을 아이가 듣고 자라났다면 ‘아, 우리 아버지는 내가 감사한가 보구나. 나 때문에 아버지가 기뻐하시는구나. 어머니께서 기뻐하시는구나.’이런 말을 듣고 자란다면 그 자녀들이 얼마나 힘이 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하시는구나.’, ‘우리 아버지가 나 때문에 감사하는구나.’ 개인예배에도 감사가 표현되어야 됩니다. 또 기도중에 감사를 하고 중보기도 할 때 감사를 해요. 중보기도는 남을 위해서 하는 기도지요. 남을 위해서 기도할때도 역시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서 감사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얼마나 마음이 풍성해지겠습니까. 또 큰 일을 마치고 감사를드립니다. 느헤미야 11장에 보니까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을 완공한 다음에 온 백성들과 함께 큰 감사의 축제를 드렸어요. 식사할 때 감사를 드립니다. 이건 내가 만든 거 아니요 농부들이 만들었고 하나님이 비를 주셨고 하나님께서 햇빛을 주셨고 하나님께서 물을 주셔서 내 앞에 내 밥상에 밥이 올라와 있다는 거 얼마나 감사합니까 또 감사하고 먹으면 맛있어요. 감사하고 먹으면 소화가 잘 됩니다. 성경에는 감사하면서 식사하라고 했습니다. 또 범사에 감사하라고 그랬어요. 즉, 다시말하면 무엇이든지 감사의 제목을 찾는거지요. 어떤 형편에 있어도 심지어 어려운 사정이 있어도 하나님 아버지 이번에 이 어려운 일을 통해서 나 자신을 새롭게 해주시고 내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걸로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이런 모습이 믿는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데살로니가 1장 1절에 보면 항상 감사했습니다. 신앙인들은 제가 성경에 찾아 보니까 언제나 감사를 표현했습니다. 예수님도 감사 드렸습니다. 천사들, 다윗, 레위인, 다니엘, 요나, 시몬, 안나, 바울, 수 많은 성도들, 성경에 보니까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인생을 살면서 늘 감사가 넘쳤습니다. 여러분의 입술에도, 여러분의 가슴에도 감사가 넘치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두 가지가 있어야 되요. 첫째, 감사하려고 하는 마음의 결정이 있어야 되요. 또 감사를 습관화해야 됩니다 시편 18편 49절에 보니까 ‘내가 하나님께 감사를 하리로다’. 이렇게 자기의 결의를 마음에 가졌어요. 난 앞으로 감사하며 살겠다 언제든지 감사를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을 올리며 나는 일생을 살겠다. 이렇게 언젠가는 여러분의 인생에서 인생을 감사하며 살겠다고 결정하는 날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오늘이길 원합니다. 여러분 감사할 때가 있어요. 언제요? ‘좋은일생길때만’ 그것은 누구는 못합니까 좋은일있는데 왜 감사를 못해요.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다 감사를 할 수 있는 거에요.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너희가 이방인들보다 더 나은 것이 뭐냐, 새리들보다 더 나은 것이 뭐냐, 다른 사람이 감사할 때 너희들이 그 때만 감사하면 무엇이 예수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느냐’ 언제나 감사를 찾아서 다른 사람이 안 보일때도 감사하며 살아 가겠다고 하는 결단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감사를 습관화해야 합니다. 다니엘도 6:10절에 보니까 습관대로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했다고 그랬습니다. 느부가네살 왕국에 총리로 있던 다니엘에게 감사가 습관이 되어 있어요. 결단하고 늘 감사를 드렸기 때문에 감사가 생활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도 감사가 습관이 되어 있고 생활화되어 있어서 언제나 감사를 찾을 줄 아는 눈이 밝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골로세서 2:7절에 보면 믿음이 풍성해진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삶이 풍요로워진다는 것입니다. 감사의 결단이 있고 감사의 습관이 있고 생활화가 되면 믿음이 왕성해진다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응답이 있고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응답하시니까 감사하고 기뻐하고. 여러분과 제가 감사가 넘치는 신앙생활을 해서 믿음이 풍성해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감사와 찬양”

본문 : 시편 138편 1-5절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양하리이다 02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높게 하셨음이라 03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을 장려하여 강하게 하셨나이다 04 여호와여 땅의 열왕이 주께 감사할 것은 저희가 주의 입의 말씀을 들음이오며 05 저희가 여호와의 도를 노래할 것은 여호와의 영광이 크심이니이다

 

외국에 나가보면, 은혜를 많이 받으신 집사님들 중에 주의 종들을 섬기기를 사모하여 자신의 집에서 가장 좋은 방 하나를 구별하여 준비해 놓고, 어느 때든지 목사님이나 선교사님이나 전도사님이 그 도시를 방문하게 되면, 며칠이고 내 집처럼 편안하게 머물다 가실 수 있도록 배려해놓고 계신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집을 다녀간 이후에 감사의 편지나 전화로 고마움을 표시한 사람은 이십 명 중에 한 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께서 문둥병자 열명을 고쳐주셨을 때에, 돌아와 엎드려 절하며 감사를 표시한 사람은 단 한사람뿐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사하는데 그다지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해서는 안되는 원망불평들은 아주 쉽게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읽다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다가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머문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축복을 베풀어주셨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리기보다는 늘 원망불평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일본의 [우찌모라 간죠]는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메마른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저주다.”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은혜를 많이 입었어도 도무지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다면 그 마음 자체가 메마른 마음으로 저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을 해도 감사하는 마음이 충만한 사람은 은혜가 충만한 사람으로, 은혜가 충만해지는 자체가 곧 축복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 더욱 행복해지나, 감사하는 마음이 없을 때 불평불만이 생기고 더욱 불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찐 감자를 드셔보셨는지요? 얼마나 맛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 감자를 몇 개나 드실 것 같습니까? 별로 많이 드시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적당히 소금을 쳐서 드셔보세요. 이런 감자는 몇개든지 드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게 되면 자기 자신도 행복해지고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하며 사는 가정은 감자에 소금을 쳐서 먹는 것과 같고, 감사없이 사는 가정은 소금을 치지 않고 먹는 감자와 같습니다. 부부사이에도 남편은 자기 아내를 향해 늘 고맙다고 말하고, 아내도 남편에게 늘 고마움을 표시한다면 그런 사람들이 사는 가정은 행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감사할 때 기쁨이 있고 더 큰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도시는 폐허되고 많은 아이들이 제대로 먹지 못하여 굶주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독일의 어느 마을에 사는 한 부유한 노인부부가 매일 빵을 만들어 거리에서 굶는 아이들을 먹였습니다. 이들 부부가 빵을 만들어 나오면 아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큰 것을 먹겠다고 덤벼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여자아이는 예외였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다 골라가지고 난 다음 맨 마지막으로 아주 못생기고 찌그러진 작은 빵 하나를 집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부부에게 다가와 “할머니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늘 감사의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껏 많은 아이들이 같이 빵을 먹으면서도 감사를 표시한 아이는 이 여자아이뿐이었습니다. 이를 눈여겨본 이들 부부는 참으로 기특한 이 여자아이를 위해 작고 아주 못생긴 빵속에 금화 한 닢과 메모지를 넣어 그 아이가 가져가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메모지에 “이것은 감사할 줄 아는 너를 위해 준비한 작은 선물이란다.”라고 썼습니다. 이처럼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헨리 포드가 자동차 왕으로 돈을 많이 벌어 한창 유명할 때의 일입니다. 어디서나 돈을 많이 벌었다는 소문이 나면 전국 어디에서나 도와달라는 요청이 쇄도하게 됩니다. 우리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헨리포드도 그런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일일이 다 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골 벽지의 한 여선생님이 학교에 피아노를 한 대 들여놓고 싶다며 피아노를 살수 있도록 일 천불의 돈을 보내줄 수 없는지 도와달라는 간곡한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이에 회사는 회사규정을 따라 헨리 포드의 이름으로 10센트를 보냈습니다. 그 당시 화폐로 10센트가 작은 돈이 아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 여선생님은 비록 그녀가 원한 천불은 아니었지만, 그 돈도 고맙게 생각하고 그 돈을 가지고 땅콩 씨를 사서 학생들과 함께 부지런히 농사를 지었습니다. 이 여선생님은 그해 땅콩을 수확하여 그 중에 한 봉지를 소포로 감사의 편지와 함께 헨리 포드에게 보냈습니다. 이 편지에 감동을 받은 헨리 포드는 이 학교가 요청한 일 천불이 아니라 그 열 배인 일만 불의 돈을 보냈다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도 마찬가지인줄 믿습니다. 작은 것을 받고도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을 보낼 때, 굶어죽은 사람도 없었고, 발이 부르튼 사람도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옷이 낡아서 못 입었다거나 신발이 해어진 사람도 없었습니다(신 29:5). 참으로 신기한 일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불리 먹이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해주셨습니다. 반석에서 생수가 나게 하셨고, 날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사랑해주시고 축복해 주셨으면, 날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며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려야 마땅하나 도리어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불평만 했습니다. 도무지 감사를 모르는 목이 곧은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선민의 도리가 아닙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이 적어도 일년에 세 번 이상은 하나님 앞에 정성껏 준비한 감사의 예물을 드리며 하나님의 성막에 나아와 감사의 절기를 보내도록 규례를 만드셨습니다. 이 세 절기가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입니다. 그중에 초막절이 우리의 추수감사절기와 같습니다. 따라서 이 세 절기가 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에 있든지 말든지 의무적으로 누구든지 예물을 드리면서 감사의 절기를 지키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습관이라고 해서 모든 습관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좋은 습관은 매우 좋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일어나면 교회에 나가 새벽기도를 드리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라든가, 날마다 온 가족이 모여 가정예배를 드리는 것은 좋은 습관입니다. 이런 좋은 습관이 들게 되면 하루라도 새벽기도를 하지 못한 날은 뭔가 이상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저는 어려서부터 하루에 세 번씩 교회에 나아가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매일 성전에 엎드린다고 해서 항상 기도가 잘 되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마음이 컬컬하고 몹시 답답하고 고민이 되고, 기도할 제목이 있을 때,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부르짖게 됩니다. 이렇게 저는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고 늘 교회에 가서 기도하다 보니 기도의 시간을 많이 갖게 되었고, 응답도 많이 받게 되었음은 물론, 은혜도 많이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습관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자주 교회에 나가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좀처럼 기도하기가 힘듭니다. 감사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밥을 먹고 나면 언제나 “잘 먹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하는 인사를 하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도 밥을 먹고 나서 주방에 계신 권사님, 집사님께 감사의 인사를 해보세요! 그분들이 얼마나 좋아하시겠습니까. 저는 가끔 다른 교회에 일이 있어서 갔을 경우 식사를 대접받게 되었을 때, 가만히 보면 그 교회 목사님 장로님들도 잘 먹었다고 감사하다고 주방에 들려 인사하는 것을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일부러 주방에 들려 잘 먹었다고, 수고하셨다고, 맛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직장에 가셔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 언제나 주방에서 수고하시는 분들께 인사해보세요! 그분들이 인사하는 여러분을 유심히 살펴 볼 것입니다. 잠자리에 누웠을 때 그리고 아침에 잠자리에서 눈을 떴을 때에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감사의 기도를 드려보세요! 또 예배를 드린 후 바깥으로 나아갈 때, 설교한 목사님에게 “목사님 감사합니다.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인사해보세요! 그런 인사 받을 때,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그 말 한마디가 피곤이 다 물러가는 보약이 됩니다. 또 병원에서 치료받을 때에도 의사 선생님께 감사하다고 말하고, 주사 놓는 간호사에게도 매번 감사하다고 말해보세요! 더 친절한 진료를 받게 될 것입니다. 또 장사하시는 분들, 비록 손님이 물건을 팔아주지 않고 돌아가더라도 또 다시 이 가게에 들릴 마음이 생기도록 감사하다고 말하고 또 오시라고 인사해보세요! 다시 들리고 싶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부산 사람들은 얼마나 퉁명스러운지, 안 사고 나오면 뒤통수에 대놓고 재수없다고 말하고, 혹시 욕먹을까봐 어떤 가게는 물건 사러 들어가기가 겁이 날 정도입니다. 그런데 요즘 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며칠 전에 부산의 어느 백화점에 들렸습니다. 한 매장에서 물건을 구경하고 나오는데, 아가씨들이 한결같이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물건을 팔아주지 않았는데도, 그런 말을 듣고나니 어찌나 고마운지 사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습니다. 참으로 고객감동을 만들어 내는 사원교육을 잘 시키는 기업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사는 신앙과 인격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실 감사하는 조건이 있을 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감사할만한 조건이 없을 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오히려 원망불평하는 마음을 가지기가 더 쉽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게 되는 것은 현재의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의 문제입니다. 현재의 상황이 어려워도 과거를 돌이켜보면 하나님 앞에 감사할 일이 많습니다. 아무리 어렵다 어렵다 해도 과거 이삼십년 전과 비교해보세요! 그때 그 시절에 비해 지금은 얼마나 잘 살고 있습니까? 과거 큰 어려움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서 극복하게 해주시고 해결해주신 일을 생각하면 더욱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고 전화위복이 되게 하셨던 과거를 생각하면 미래가 아무리 불확실하고 앞길이 막막해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줄 믿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은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감사하며 신들 앞에서 주께 찬양하리이다』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다윗의 시로, 시편 전체가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이유는? 1. 과거를 돌이켜 볼 때,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축복이 얼마나 컸는지 를 깨닫고 감사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으로 인하여 감사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간구할 때마다 주께서 응답하셨던 과거를 돌이켜보며 감사했습니다. 사실 다윗의 생애를 보면 얼마나 위기가 많았는지 모릅니다. 죽음의 고비도 수십 번 넘겼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위험한 고비 때 마다 자신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시고 위기에서 건져주셨던 과거를 돌아보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위태로울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응답을 해주셔서 오늘날 이렇게 살아있지 않습니까? 문제는 과거에 그러한 체험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잊어버리고 사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시 103;2).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을 잊지 않고 사는 방법은 다윗처럼 늘 간증하며 찬양하며 사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감사]한다는 단어는 [기억]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감사의 뜻은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恩惠)의 반대말은 배은망덕(背恩忘德)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원망불평이 많았던 것은 배은망덕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홍해 앞에 있을 때에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홍해를 갈라 육지같이 건너가게 하심으로 살려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흘뒤에 도착한 마라라는 곳에 이르러 물을 찾았을 때, 물이 써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불과 사흘 전에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먹고 원망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광야 1세대는 원망불평이 습관이 되어 망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살았습니다. 늘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큰 고통이 되는 것은?쥱 기도가 잘 되지 않고 기도해도 응답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기도응답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불행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쥲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벽이 생기면 기도를 해도 응답이 되지 않고, 말씀도 잘 들리지 않습니다. 이는 영적위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어느 순간 펀뜩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는 사람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깨달아지는 것은 더욱 더 큰 축복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장 행복한 때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감사가 넘칠 때입니다. [제 2차 세계대전], [가장 긴밤]등을 집필한 작가인 [코넬리어스 라이언]은 5년간 암으로 투병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그는 날마다 아침에 일어나게 되면 감격에 찬 목소리로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좋은 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그의 아내가 도대체 무엇이 그리 감사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사랑하는 당신을 또다시 볼 수 있게 된 것과 가족들의 음성을 듣게 된것, 그리고 병들어 눕기 전에 탈고한 것과 병마와 싸울 수 있는 힘을 주신 것과 무엇보다도 주님이 지금까지 나와 함께 계신 것을 감사하다고 고백했습니다.여러분들은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곰곰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 기쁨이 있고, 평강이 있으며 행복이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더 큰복을 받습니다.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감사의 영적 의미 ”

본문:시편 22편 3절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는 부모의 은혜에 감사하고 스승의 은혜에 감사하며 은혜를 베풀어주신 이웃에게 감

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감사는 객관적으로 볼 때 지극히 자기중심주의적이고 이

기주의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감사는 자기 개인의 이해관계에 직

접 간접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는 내게 유익이 되지않거나 손해가 오고 고통이 다가올 때는 감사하지 않습니다. 성

경에는 우리에게 유익될 뿐 아니라 손해와 고통이 될 때에도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을 하

고 있습니다.

 

1. 불평은 마귀가 우리의 마음을 여는 열쇠

 

아담과 하와가 왜 타락했습니까? 마귀가 성공적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불평을 심어주었

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하와에게 와서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들의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

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궤변을 토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산 모든 실과의 나무를 다

먹되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아는 실과는 먹지 말라. 너희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했는데 마귀는 그것을 엉뚱하게 해석해서 ‘모든 실과를 다 먹지 말라고 하더냐?’고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의 마음속에 불평을 심어주는 마귀의 궤계인 것입니다.

하와는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

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

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선악을 안다

는 것은 주권적인 행사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네가 선악

과를 먹는 날에는 너도 좋고 나쁜 것을 마음대로 판단할 수 있는 주권적인 하나님처럼 될

수 있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되는 것이 샘이 나서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게 했다’고 불평을

심어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불평이 결국 반역죄를 짓게 하고 타락하여 에덴에서 쫓겨나게 만든 것입니

다. 마귀는 온갖 궤계를 동원해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불만을 품게 하였던 것입니다. 원망

과 불평은 사람의 마음을 점령하는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는 동안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불뱀에 물려 죽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21장 4절로 6절에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

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

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

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

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

은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지나면서 길이 험하고 고달프고 괴로웠습니다. 충분한 음식과

물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망과 불평은 심판을 가져오게 한 것입니다.

광야에는 원래 불뱀이 많이 서식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은 하나님이 막아 주셨습니다. 그

렇지만 원망과 불평을 할 때 하나님은 그 막았던 손길을 떼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광

야에 사는 불뱀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어서 많이 죽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원망과 불평

은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마귀의 궤계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산 사건은 민수기 11장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악한말로 하나님을 원망하매 하나님이 불을 보내어서 그들의 진을 사른

적이 있습니다. 가나안 정탐 후 그들의 악행으로 10명의 정탐꾼은 재앙으로 죽었으며, 그들

의 말만 듣고 밤새 통곡하고 원망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로 회진해 멸함을 받게 된 것이

었습니다.

민수기 14장 27절로 30절에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

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

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이십세 이상으로 계수함을 받은

자 곧 나를 원망한 자의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

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심판이요 하나님의 진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원망

하고 불평할 수 있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해서 정탐

해 보니 아주 척박한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거하는 사람은 네피림의 후손 아낙자손

대장부였기에 그들과 비교해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뚜기와 같았습니다. 들어가 차지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불평할 이유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이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고 불평하고 원망하자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버림 받고 만 것입니

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의 분노와 진노와 심판을 재촉하는 길이 되

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감사와 찬양은 그렇게 하기로 결심을 하고 우리 스스

로를 훈련하지 않고는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 이후로 타락한 인간들은 불평

하고 원망하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마음에 변화를 받지 않고는 원망과 불평의 세계에서

떠날 수가 없고 떠나지 못하기 때문에 항상 마귀에게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고 하나님께 꾸중을 듣고 심판을 당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살 때가 많은 것입니다.

 

2. 감사의 영적 의미

 

시편 50편 23절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

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능력

과 구원과 은혜를 받는 열쇠입니다. 원망과 불평과 탄식이 마귀에게 마음문을 열어주는 열

쇠가 된다면 감사와 찬송은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문을 열어 드리는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유다의 여호사밧이 통치하던 시대에 모압과 암몬과 마온 연합군이 이스라엘을 침략하였

습니다. 갑자기 외세의 침략을 받은 여호사밧 왕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는 백성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서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역대하 20장 12절로 13절에 “우리 하나님이여 저희를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

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 유다 모든 사람은 그 아내와 자녀와 어린 자로 더불어 여호와 앞에 섰더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할 때 여호와의 신이 레위 사람 야

하시엘에게 임하여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마주 내려가라 저희가 시스 고개로 말미암아 올라오리니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

엘 들 앞에서 만나려니와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

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

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역대하 20장 15절-17절)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사밧은 역대 전쟁사에 없던 희한한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전쟁에 나가면서

성가대를 조직했습니다. 그리고 군사들 앞에 성가대들이 거룩한 옷을 입고 찬양을 부르면

서 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 기사는 역대하 20장 20절로 23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백

성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

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

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

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사람을 치

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 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산 거민을 쳐서 진멸하

고 세일 거민을 멸한 후에는 저희가 피차에 살륙하였더라”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인 것입니다. 그들이 노래를 시작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입니

다. 가만히 있을 때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시작할 때 하

나님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사와 찬송은 하나님이 역사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여호사밧은 여호와께 감사하고 찬미한 결과 대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증거하다가 잡혀서 빌립보 감옥에 갇힌 사건이 있습니다. 그들은

빌립보에서 점치는 여종을 구출해 주었습니다. 한 여종이 귀신에 들려 점을 치는데 매일 그

들을 따라 다니면서 괴롭혔기 때문에 바울이 ‘이 귀신아 예수 이름으로 명하니 나가라’고

말해 여종에게서 귀신을 몰아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종의 주인이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

게 되자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관원에 넘겼습니다. 그리고 관원들은 그들의 옷을 벗기고 매

를 때렸습니다. 그리고 쇠고랑을 채워서 빌립보 감옥 깊숙한 곳에 투옥시켜 버렸습니다. 그

러므로 바울과 실라는 원망하고 불평할 조건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6장 25절로 26절에 “밤

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

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고 기

록하고 있습니다. 한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자 하나님이 보내신 지

진이 일어난 것입니다.

찬송을 통해 자유와 해방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답답하고 고통스러울

때 찬송하면 그 묶임에서 해방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생활과 환경이 고통과 괴

로움으로 묶였을 때 찬송하면 하나님께서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 주십니다. 영적인 진동, 우

리의 생활에 진동을 일으켜서 흑암의 세력을 쫓아내고 자유와 해방을 갖다주는 능력이 바

로 찬송에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이 오셔서 함께 일할 수 있는 길

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간수가 와 보니 옥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죄수들이 다 도망친줄 안 간수

는 자살을 기도했습니다. 그때 바울이 “자살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다”고 말리자 간수

는 그들에게 나아와 “선생들이여 내가 어찌하여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사

도행전 16장 31절)고 답변했습니다. 그 말에 간수와 그 식구들이 다 회개하고 세례받고 구

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감사와 찬송은 자유와 해방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게 구원의 문도 열어준 것입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이 항상 원망, 불평, 탄식하는 것만 보면 불신자들이 어떻게 마음에 감동

을 받고 예수를 믿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고통과 괴로움 속에도 감사하고 찬송하며 눈물

을 흘리고 주께 영광을 돌리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마음에 변화를 얻을 수 있

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와 찬송은 우리의 원수를 물리치는 힘이 되고 감사와 찬송은 우

리를 속박에서 해방과 자유를 주는 놀라운 역사가 되며 복음 증거의 큰 원동력이 되는 것입

니다.

 

3. 감사하기 위하여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은 태어날 때부터 마음속에 원망과 불평과 탄식을 하도록 만들어졌

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 세상에는 원망과 불평과 탄식이 가득합니다. 두, 세사람만 모

이면 원망과 불평과 탄식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

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내어쫓고 하나님께서 우리속에 들어와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

암아 구원의 은총을 베풀기 위해서는 감사하는 것을 배우고 훈련하고 항상 관심을 가지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불평하는 말보다는 감사하는 말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됩니다.

시편 50편 14절로 15절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

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로 제사를 드리고 난 다음 환난날에 하나님께 부르

짖으면 하나님이 건지시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께 나갈 때는 먼저 감사 제

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1620년 9월 영국의 102명의 청교도들이 영국 제임스 1세의 국교정책으로 심한 박해를 받

자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을 향해 떠났습니다. 두 달이 넘게 대서

양을 항해하는 동안 질병과 굶주림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구사일생으로

신대륙에 도착하였으나 극심한 추위와 풍토병, 그리고 인디언들의 습격으로 태반의 사람

들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살아 남은 사람들은 시련에 굴하지 않고 교회를 세워 신앙생

활을 하였으며, 이듬해 봄에 농지를 개간하고 옥수수를 심어 가을에 대풍작을 이루게 되었

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눈물로 감사의 제단을 쌓고 또 농사법을 도와준 이웃 인디언들을

초청해 3일간 큰 잔치를 베푼 것이 오늘날 추수감사절기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들이 자녀 교육을 위해 세운 하버드나 프린스턴 대학교 등은 오늘날 세계 최고의 대학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불평할 것을 찾으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불평

할 사건 중에도 감사할 일들을 찾으면 풍성한 감사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

평할 것 가운데서도 감사할 보화를 찾아서 그것을 가지고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

면 우리의 삶은 원망과 불평이냐, 감사와 찬송이냐 하는 영적전쟁의 연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전쟁에서 지면 낭패를 당하고 전쟁에 이기면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잠언 4장 23절에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

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음에서 감사와 찬송을 하면 생명이 넘쳐나고 원망과 불평

만 하면 사망이 넘쳐 나옵니다.

우리는 이웃과의 대화중에서 감사보다 불평을 말하도록 심리적으로 타락해 있습니다. 사

람을 만나면 벌써 남의 흉을 보거나 원망하거나 불평하도록 심리적으로 타락해 있습니다.

시편 34편 13절로 14절에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악

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에베소서 5장 4절

에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편 141편 3절에도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

술의 문을 지키소서”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감사한 말이 나오고 원망과 불평

이 나오지 않도록 관심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입술로 먼저 감사를 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6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

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기

록하고 있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능력을 풀어놓는 길이 됩니다. 히브리서 13장 15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우

리 구원받은 성도의 입술의 열매입니다. 감사와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제물을 드려 하나님께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96편 8절로 9절에 “여호와

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아름

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찌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마태복음 6장 20절에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고 기록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4장 18절로 19절에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

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갈

때 입술로 감사의 제사를 드릴뿐 아니라 실제로 예물을 가지고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

사를 드리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

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물질로 감사하면 하나님

께서 물질로 우리에게 보답해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가장 크게 감격하신 것이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린 것입니다. 이스

라엘에서는 처녀가 시집을 갈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옥합에 향기로운 기름을 조금씩 모읍

니다. 그리고 그것을 팔아 시집을 가게 됩니다. 마리아도 자신의 결혼을 위해 오랫동안 기

름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마리아가 그 기름이 든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와 발에 부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주었습니다. 이 광경

을 본 제자들은 마리아의 행동을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이 나에게

참으로 좋은 일을 했다. 그리고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인의 선행도 함께 전파될 것

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앞둔 그 자리에서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은혜

와 구원에 너무 감사해서 그가 가지고 있는 가장 귀한 옥합을 깨뜨려 감사의 뜻을 전했습니

다. 그러자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겠다’고 하신 그 말씀대로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감사를 할 때 하나님의 손길이 나타납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손길을 초청해 오는 길이 됩

니다. 그러므로 병자가 의사를 찾는 것처럼, 배고픈 자가 음식을 찾는 것처럼, 어려움에 처

했을 때 하나님의 도움을 찾는 것이 바로 감사의 길인 것입니다. 감사가 하나님을 초청해

올 수 있는 길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과 마귀 사이에서 항상 영적 전쟁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 전쟁 중 마

귀가 가져다주는 것은 불평이요, 원망입니다. 그러나 감사는 확실하게 하나님을 모셔들이

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감사와 찬양이 있는 곳에 보좌를 배설하고 임재하시는 것

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 작은 일에서 큰일까지 영적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 감사의 문을 열면 성령이 오셔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원망과 불평을 하

면 하나님이 계실 수 없습니다. 결국 마귀를 받아 들여서 도적질 당하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으며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결과를 얻고 싶으면 감사를 하십시오. 그러나 도적질 당하

고 죽임을 당하고 멸망을 당하며 고통과 슬픔을 당하기를 원하면 원망과 불평을 하십시오.

선택은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이 일

을 힘껏 행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하셔서 큰 은총과 축복과 영광을 허락해 주시는 것입

니다.

 

 

 

“전천후 감사생활 ”

본문 : 욥-2-7-10

 

옛날에는 농사를 지을 때 비가 오면 농사를 짓고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를 못지었습니다. 그런데 후에 농사 기술이 개발되면서 저수지를 만들어서 날이 가물어도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만들었는데 최근에는 더 발전해서 겨울에도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겨울에도 딸기가 나오고, 수박이 나오고, 모든 과일 채소가 나와서 1년내내 과일과 채소를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후에 전혀 제한받지 아니하고, 일기에 제한받지 아니하고 1년내내 짓는 농사를 전천후 농사라고 말합니다.

 

저희는 어렸을 때 천수답이라는 것이 있어서 산등성이에 있는 논은 비가 오면 농사를 짓고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를 못지었습니다. 또 모를 심었어도 비가 오지 않으면 다 말라버렸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밭에까지 수리시설이 되어서 비가 오지 않아도 농사를 짓습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환경이나 우리에게 오는 시련이나 역경에 영향을 입지 아니하고 항상 감사하는 생활을 전천후 감사라고 말합니다.

 

비가 오면 감사하고, 날이 가물면 한탄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비가 와도 좋다, 가물어도 좋다, 겨울이 와도 좋다, 가을이 와도 좋다 계절에 관계없이 어느 때든지 좋다' 이렇게 감사하며 살 수 있는 축복,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축복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똑같은 예수를 믿지만 즐겁게 믿는 사람이 있고, 괴롭게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고 행복을 얻은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전혀 마음에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여전히 불행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대한 분명한 기대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 자신이 예수를 믿고 늘 감사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왜 감사하기를 원하느냐? 내가 감사하므로 나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첫째, 감사함으로 내 생이 행복해집니다. 두 번째로, 감사하므로 내 삶의 의미가 새로워집니다. 삶의 가치가 형성됩니다. 세 번째로, 감사하므로 내 인격이 높이 성숙합니다. 이 세 가지는 감사가 주는 최대의 축복입니다. 감사한 만큼 행복합니다. 감사한 만큼 우리 마음이 기쁩니다. 똑같은 부부가 살면서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행복합니다. 내가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살 맛이 납니다. 그러나 감사를 잊어버리면 그때부터 인생은 아무 살 맛이 없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받고 살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보나 땅을 보나 감사를 찾아내야 됩니다.

 

성경 가운데서 가장 위대한 고난의 승리자를 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욥은 부자였습니다. 양이 7천이요, 약대가 3천이요, 소가 5백 겨리요, 암 나귀가 5백 마리인 당시의 사회로 말하자면 대 재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존경과 추앙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정에서는 후덕한 아버지였습니다. 그는 악을 떠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아들들이 생일잔치를 할 때는 혹시나 먹고 마시면서 잘못됨이 없을까 해서 아들들을 성결케 하고 다음날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 감사를 했습니다.

 

욥은 늘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감사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잘될 때 교만하지 않고 감사했습니다. 우리가 잘될 때 교만하지 아니하고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이 복입니다. 부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만하지 아니하고 가난할 때 마음을 갖고 산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잘못될까 해서 모세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신명기 8장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두 번째로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이 힘으로 내가 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내게 재물을 얻을 능을 주셨음이니라"

 

안될 때도 감사해야 합니다. 욥에게 어려운 때가 왔습니다. 재산은 일시에 없어졌습니다. 자식이 태풍으로 일시에 다 죽었습니다. 몸에 병까지 왔습니다. 그래서 정수리로부터 발끝까지 질그릇 조각으로 긁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악창이 온몸에 덮쳤습니다. 아내까지도 "당신이 지금까지 하나님을 온전히 믿어봤자 뭐 나온 것이 있나 그래도 온전함을 끝까지 지킬 것이냐 하나님을 저주하고 욕하고 죽으라"고 하면서 욥의 심기를 건드립니다. 그때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어찌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같이 말할 수 있느냐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나님께서 주신 것 하나님께서 가져가셨는데 무슨 불평할 것이 있겠느냐"

 

이런 일이 생겼을 때 보통 사람 같으면 충격받아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욥은 자기를 비웠습니다. 속에 물질로 가득찬 사람은 물질을 잃어버리면 죽습니다. 권력으로 가득찬 사람은 권력을 잃어버리면 죽습니다. 자기 속에 가득찬 것을 빼앗기면 죽습니다. 그런데 욥은 마음을 비웠습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현재 내게 있는 것으로 족하다. 알몸으로 나왔은즉 알몸으로 돌아갈지라" 이것이 우리 마음에 차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죽어 넘어질 시간에 욥은 일어났습니다. 기절하지 않았습니다.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를 이미 비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욥에게서 한가지 놀라운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욥은 까닭없이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1:9-11)

 

사단이 하나님께 참소하기를 "욥이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것이 조건이 있으니까 감사하지 조건없이 감사하겠습니까 욥이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그의 집과, 사업과, 그의 모든 일들이 잘되니까 감사하지 그것을 한번 쳐 보소서. 당장 하나님을 원망할 것입니다."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욥은 까닭없이 하나님을 찬양했기 때문에 욥을 내리쳤어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1년 한해를 보내면서 가장 우리 생에 중요한 감사절을 맞았습니다. 감사라는 것은 우리 생의 중요한 운명을 결정합니다.

 

감사하는 자는 자기 존재가 영광스럽게 됩니다. 사람들이 불평하고, 원망하면 천해집니다. 그런데 감사하는 사람은 은혜를 기억했다는 인간됨 때문에 훌륭합니다. 공부를 많이 한 지성인이라 할지라도 불평하는 사람은 천해집니다. 우리가 자기 존재를 영광스럽고 위대하게 만드는 비밀은 감사하는 것입니다.

 

공부 많이 하고 출세한 자식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부를 못해서 출세는 못했지만 부모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그 부모는 자식에게 고마운 생각이 듭니다. 자식을 길러가면서 어렸을 때는 인물 좋은 자식이 마음에 듭니다. 자라면서는 공부 잘하는 자식이 괜찮습니다. 세월이 흘러서 자녀들이 결혼도 하고 형편에 따라서 출세도 하는데 마지막 늙어서 부모님 마음 속에는 그런 것이 다 의미가 없고 부모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효도하는 자식이 최고입니다. 그러니까 자식을 길러가면서 효자를 길러야지 공부 잘하는 자식 기르려고 신경쓰지 마십시오. 부모의 은혜를 감사하는 자식이 최고의 자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택했는데 하나님이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너 내 아들 되었으니 출세해라 공부 잘 해서 나에게 영광 돌려라 사업도 잘 해서 사회에서 잘 되면 좋지 그런데 내가 원하는 것은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효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최고로 영광을 받으시는 비밀입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을 알아 사는 것도 아니요, 지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IQ가 높아야 최고였지만 지금은 EQ가 높아야 합니다.

 

감사한 마음이 속에서 우러날 때 우리 존재가 영광스럽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됨입니다. 사람됨이 따로 있나요. 은혜를 기억하고 사는 것이 사람됨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사람 중의 사람은 은혜를 은혜로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은혜를 기억하면 내가 행복하게 됩니다. 감사할 때 행복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는데 모든 것을 가졌구나!' 그러면 감사한 마음 때문에 살았다는 것이 가슴에서 뭉클한 감격이 있습니다.

 

청년들에게 "그대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질문할 때 감격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메말라가는 이 세상에서 모두 다 말라버린 인정 속에서 감격하고 감동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복입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자에게는 언제나 그 마음속에 행복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나에게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을지라도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그 순간에 '아,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이 행복하다.' 하고 행복감이 솟아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삶 속에서 행복을 창조해 나가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인생을 살 용기가 생깁니다. 창조적인 존재가 됩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인생은 무한한 가능성을 부여해 줍니다. 과거를 불평한다든지 후회하는 자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과거의 모든 것들이 다 나에게 의미를 주고, 보람을 줄 때 미래에 대한 패달을 가속화할 수 있는 능력이 됩니다. 과거를 후회하고 과거를 탄식하면 미래가 없습니다. 과거의 어떤 것도 후회하지 마십시오. '아,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미래에 소망을 주려고 하는 예정된 코스였다.' 그렇게 생각하십시오.

 

저는 이번에 제 생애 책을 하나 만들어 가면서 하루 한가지 한가지 사건이 하나님의 예정된 코스였다는 것을 절감하면서 너무 감사하고 있습니다.

 

현재 내가 삶의 현장에서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그 삶 속에서 감사를 만들어 내십시오. 감사의 보약을 만들어 내십시오. 그때 우리의 골수가 윤택해질 것입니다. 밥을 먹을 때도 감사한 마음으로 먹을 때 소화가 됩니다. 부부가 살면서도 감사한 마음으로 살 때 거기에 사랑이 싹터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감사한 마음을 가질 때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한없는 영광을 돌리며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나의 것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한신교회 개척 이후에 최고의 헌금을 하는 여종이 있습니다. 시장에서 장사하면서 번 돈을 하나님 앞에 바칩니다. 매주 감사헌금을 드립니다.

 

제가 한번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한주간도 빠지지 않고 감사를 합니까?" 했더니 옛날 구역장이 매주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라고 가르치더랍니다. 이 분이 구역장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잘 믿습니까?" "감사를 해야지" "감사를 어떻게 합니까?" "매주 해야 됩니다." 이 분이 구역장 얘기를 듣고 매주 감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3개월이 되어도 별로 잘 되는 것도 없고 감사를 했다고 은혜가 쏟아지는 것도 아니고 해서 "3개월 해도 별 것 없네요." 했더니 "3개월 가지고 되나요 1년은 해야지" 해서 1년동안 계속했습니다. "1년 해도 별 것 없네요." 했더니 "1년 해가지고 되나요 10년은 해야지" 하더랍니다. 그런데 이 분이 매주 감사헌금을 드리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IMF가 와서 경기가 안좋을 때 제가 한번은 물었습니다. "요즘 사업이 잘 됩니까?" "사업 잘 됩니다." 제가 안된다는 얘기를 듣고 물었는데 잘 된다고 그래요. 그래서 "무슨 사업이 잘 됩니까?" 했더니 "예, 저는 한가지 사업은 불경기가 없습니다. 하나님 사업은 불경기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향하는 사업은 불경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 여종에게 절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여종이 매주 감사하는 것을 보고 저도 감사를 매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전천후 감사가 우리 속에 흘러서 하늘을 품에 안고 땅을 디딜 때 '모든 것이 은혜다, 모든 것이 감사다, 모든 것이 축복이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 감사 그리고 행복”

본문: 히브리서 13:10-16

 

2007년도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여 1년 동안 받은 은혜를 감사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복이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상하신 몸과 흘리신 피를 기념하여 떡을 떼고 잔을 드시는 여러분에게 구원의 확신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떻게 하면 생명을 부지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삶의 질을 생각할 여지가 없습니다. 소말리아나 북한에서 무엇을 먹을까? 그것을 생각하며 고픈 배를 움켜쥐고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행복하십니까? 하고 묻는 것은 그들을 너무 아프게 하는 가혹하고 잔인한 고문과도 같은 것입니다.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

지상에서 숨 쉬는 모든 사람은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행복한 삶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삶의 질을 생각하고, 행복추구권을 주장하며 웰빙을 말하는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돈 쓸 곳을 궁리하다가 좀 더 예뻐지고 싶어서 얼굴을 고치고 주름살을 제거하는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이 사람만 아니면 더욱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생각 끝에 쉽게 이혼해 버리는 그런 세상이기도 합니다. 몸이 망가진다하여 아이를 낳지 않는 그런 세상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런 일들이 행복으로 가는 길이고 조건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쯤에서 행복을 추구하며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난 그 분에게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 당신은 행복하십니까? <예, 나는 행복해서 죽을 지경입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장에서는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보다는 불행하다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행복의 길을 찾고 행복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으로 장사진을 이루고 있습니다.

과연 땅에서 사람은 행복할 수 있는가? 있다면 행복한 삶의 비결은 무엇일까? 감사절 아침에 주님의 성찬 상 앞에서 이것을 생각해보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핵심내용

히브리서는 구약성경을 잘 아는 히브리인 곧 유대인 가운데서 예수를 믿어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으나 여전히 의문에 빠져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전에 가지고 있던 유대교의 어두운 그림자가 그들의 심령을 점령하고 족쇄를 채우고 있기 때문에 율법의 정죄와 죽음의 공포에서 헤어나기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입장에 서있기 때문에 심령에 참 평안과 기쁨이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흔들림이 없는 분명한 믿음을 갖도록 도움을 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 목적을 가지고 기록한 책이 바로 히브리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히브리서는 구약을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구약 적입니다. 히브리서를 읽을 독자가 구약의 전통과 율법에 익숙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오랜 세월동안 율법으로 길들여졌기 때문에 복음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율법과 복음을 비교해서 보여줌으로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것을 스스로 알고 믿게 할 목적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히브리서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는 탁월하시다.>입니다. 왜 그렇게 썼는가하면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히브리 사람들에게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고 완전하시다. 그러니 더 이상은 두려워하거나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에 대하여 옛적부터 여러 모양, 여러 부분으로 말씀하셨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선지자와도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하신 선지자로 오셔서 볼 수 없으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나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천사들보다 월등하신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 탁월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어떤 제사장보다도 뛰어나신 분이십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강조하고 역설해서 확신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집의 일군으로서 일한 사람인데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집의 아들로서 집주인으로서 일하신 권위와 영광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아론의 반차를 좇아 태어나서 짐승의 피로 성소에서 제사했으며 그 제사는 죽을 때까지 반복해서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아론의 반차가 아닌 살렘 왕이요, 평강의 왕이신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은 영원한 대 제사장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드린 제사

예수 그리스도는 짐승의 피가 아니라 자신의 피로서 제사했으며 반복해서 드리는 불완전한 제사가 아니라 단 한 번으로 모든 제사를 완결하셨으며 성소가 아니라 영문 밖에서 십자가 위에서 짐승의 피를 뿌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피

흘려 제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기만 하면 다시는 제사할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제사는 과연 누구를 위한 제사였습니까? 나를 위한 제사였습니다. 여러분을 위한 제사였습니다. 우리 모두를 위한 속죄의 제사였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읽은 본문에 "우리에게 제단이 있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제단은 구약 성도들이 제사 드리던 그 제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제단과는 전혀 다른 제단이 우리들에게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예표 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구약 제사들의 실체입니다.

 

그의 몸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이라고 했습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영원한 속죄를 위하여 드려진 그 몸을 이르는 말입니다. 그 몸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직접 그리고 단 번에 드려졌으며 그 제사는 죄 값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하게 채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사실을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8:1에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제 하는 이 말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중요한 그 말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입니까? 믿는 우리들에게는 대제사장 한 분이 계시다는 그 말입니다. 이것을 알고 믿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제사장의 할 일이 없어졌기 때문에 제사장들이 없어졌는데 오히려 우리에게는 대제사장이 있다는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4:15-16에 "우리들에게 있는 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않으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 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신 분"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우편 보좌에 앉아 계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이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이 아직은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아직은 가야할 길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행복을 추구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때를 따라 주시는 은혜가 있어야합니다. 이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의 영원한 제사장으로 살아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먹과 같이 검고 주홍처럼 붉은 죄를 단 번에 용서하신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이 있었습니다. 이 피를 의지하여 은혜의 보좌요 제단을 향하여 나아가서 우리가 항상 드릴 세 가지 제사가 있습니다.

 

감사와 항상 드릴 세 가지 제사(10-16절)

10절에 “우리에게 제단이 있다.”고 했습니다. 제단이 있다는 말은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제단은 유대인들이 제사하는 그런 제단이 아니듯이 우리가 드릴 제사역시 유대인들이 드리는 염소나 황소의 피 제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제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그 제단에 전혀 새로운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양이나 소를 잡아 드리는 속죄의 제사보다도 더 온전하고 신령한 제사요 진정으로 드리는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첫째 헌신의 제사입니다.

13절에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고 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서 우리들의 헌신의 제사를 드리는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들의 몸으로 드리는 산제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피로써 우리들을 거룩하게 하려고 능욕의 십자가를 지시고, 성문 밖, 골고다에서 고난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들도 우리의 십자가를 달게 지고, 예수님의 십자가 있는 곳, 성문 밖으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아멘!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은 자로서 이제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 거룩한 제사, 산제사를 드려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속죄함을 받은 자로서 마땅한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제사는 우리의 몸으로 드리는 산제사입니다. 우리의 전 생애를 하나님께 드려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은혜를 아는 자로서 마땅히 드려야하는 제사입니다.

 

둘째 찬미의 제사입니다.

15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아 멘!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드리신 속죄제사가 있기 때문에 다시는 속죄의 제사를 드릴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지만 우리가 드릴 마땅한 제사가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갚을 길이 있습니까? 부모의 은혜도 깊고 크고 높아서 도무지 갚을 길이 없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우리 위해서 내어 놓으신 사랑,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 이루신 속죄의 은혜.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을 삼아 쓴다 해도 다 기록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늘 울어도 갚을 길이 없는 은혜입니다. 필설로는 형용할 수 없는 큰 은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이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입술과 마음과 뜻을 모아서 감사드리는 것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감사하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엡 5:19절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의무입니다. 그뿐 아니라 놀라운 은혜요 축복이며 특권입니다. 이 찬미의 제사는 단지 예배 시간에 한 순서로서 드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 삶이 찬미요 찬송이어야 합니다.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음에서 터져 나오는 찬양이요 감사일 때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 선행의 제사입니다.

16절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아 맨!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마음으로 감사하고 입술로 찬양하는 것을 매우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단지 마음으로만 감사하고 입술의 찬양으로 그친다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자 않습니다. 우리들이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면 그 복음에 합당한 행실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입니다.

 

오늘 믿는다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을 섬기고, 찬양과 기도를 하며, 예배를 드리지만, 나가서는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이것이 큰문제입니다. 불신자나 우리나 하나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생활에 전혀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다면 그런 사람의 찬미를 받으시며 그런 사람의 감사를 고마워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변화된 삶을 통해서 영광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헌신의 제사를 드리고, 또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찬양의 제사를 드렸다고 해서 이것으로 다 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온전한 제사가 있습니다. 그 제사를 요구하십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 중심의 선한 행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십니다. 모든 현실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선한 생각과 선한 행실을 가질 때 하나님은 그것을 제사처럼 기쁘게 받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전에는 사건을 만날 때 마다 자기를 먼저 생각하고 자기중심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 확 바뀌어서 모든 현실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나아가려는 그것이 선한 행실입니다. 이전에는 자신만을 생각하고, 살던 사람이 자기의 가진 것으로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여 나누어주고 베풀어서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선행의 제사입니다.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을 때 비로소 우리의 심령에는 기쁨이 넘쳐서 내 잔이 넘치나이다. 하고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최고로 행복한 삶이 아니겠습니까? 인생 최고의 행복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행복을 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제단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제사장이심을 믿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의심하지 말고 구원 받은 사실을 믿고 간증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하는 심령에 기쁨이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 또 다른 은혜와 복을 주십니다.

은혜를 받고 복을 받은 사람으로서 헌신의 제사와 찬미의 제사와 선행의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서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나의 잔이 넘친다고 나는 행복자라고 간증하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