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세 기

13년간의 침묵 (창 17:1-5)

공 상희 2009. 11. 9. 13:02

13년간의 침묵 (창 17:1-5)

 

 

이 시간에 “13년간의 침묵”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3년간의 침묵, 1달도 아니고 1년도 아니고 5년도 아니고 13년간, 제목이 무시무시하지 않습니까? 같이 살면서 13년간 말하지 않고 살았다면 사건도 보통사건이 아닐 것입니다. 학창시절 교목 목사님의 설교가 생각이 납니다. “두려운 침묵”이라는 제목인데 예수님께서 헤롯과 빌라도가 질문하지만 대답지 아니 하신 그 말씀입니다. 그들에 대한 주님의 침묵은 준엄한 심판의 예고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조심할 사항이 그것입니다. 아무 때나 침묵하는 습관입니다. 침묵할 때 침묵해야지 인간관계에서 대답하지 않고 않고 침묵하면 상대방이 오해하기 좋습니다. 대화 나눌 때 얼굴을 보면서 상대방을 존중하는 자세를 취해야 바른 예절입니다. 듣는 청력이 약하여 그렇다면 할 수 없지만 습관이 그렇다면 고쳐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이란 다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심히 두려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함께 하시지 않으며 우리 할대로 두고 보시는 하나님의 노로 가득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시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고 그것을 구원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신다면 그것은 절망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침묵하시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본문에 아브라함에게도 여호와 하나님의 침묵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려 13년간의 침묵이었습니다. 창16:6에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이었더라” 했는데 창17:1에 보면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기록함은 바로 하나님의 침묵을 암시하시기 위함입니다.


13년의 세월 참으로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지옥 같이 불행하고 힘든 시기였습니다. 살아도 도무지 사는 것 같지가 않았을 것입니다. 집에 들어와도 마음이 복잡하기만 합니다. 여러 가지 삶의 중압은 더욱 심해져만 갑니다. 조금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삶은 지옥입니다. 우리 중에 이런 가운데 있다면 오늘 말씀으로 자기를 진단하고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함께 하시고 동행하시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을 때입니다.


아브라함은 사람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동안 여러 차례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 사라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라의 여종 하갈로 첩을 얻어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아내 사라가 속히 자식을 낳지 못하자 급한 나머지 사람의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침묵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삼상15:23에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했습니다. 사람도 말을 존중래 주지 않으면 침묵하지요.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큰 사랑과 큰 복을 받은 자가 세상 말을 더 믿으면 기뻐하시겠습니까? 말씀 존중이 하나님 존중입니다. 그러므로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기도제목이라도 주시면 귀히 여기고 성실하게 임해야 합니다. 그러면 더 귀한 것을 주시고 더 귀한 것을 맡겨주십니다.


신28:1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2. 다른 것을 보다 애착할 때입니다.


13년간의 아브라함의 잘못은 여종의 아들 이스마엘의 재롱을 낙 삼은 것입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도 아니고 메시야 계대도 아닌데도 아브라함을 그가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희망하였습니다. 아이 사랑과 치다꺼리로 13년을 보내며 날마다 약속하신 아들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닌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에 애착을 가지면 하나님께서 멀리하십니다. 그런 기도는 하면 할수록 더 곤경에 처하고 힘이 빠집니다. 물질 명예 권세 쾌락 자식 형통이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세상 것에 애착을 갖는다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잘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산다고 행복이 오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을 붙들면 하나님도 얻고 세상의 행복도 얻지만 하나님을 멀리 하면 하나님도 잃고 세상의 행복도 떠나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 안에서 성장해 나가는 것을 가장 귀한 일로 여겨야합니다.


3.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할 때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서도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창세기 15장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쪼갠 짐승 사이를 지나며 생명을 거시고 약속하셨건만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무슨 빚졌다고 생명을 거시고 그런 맹약을 하셨을까요? 그건 순전히 은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창18:1에 “아브람의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셨는데 13년 만에 나타나신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일종의 야단이 들어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인간의 생각으로 행했느냐는 말씀입니다. 완전하라는 말은 딴마음 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맹세하고 한다는데 왜 너는 나를 믿고 기다리지 못했느냐는 말씀입니다.


갈4:28에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성령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았다면 더욱 충만히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성령의 사람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목적인데 그렇게 되려면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기다리는 방법은 먼저 예배하며 사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기도하고 찬송하며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렸습니다. 성령을 기다리는 법이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요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공적예배나 삶에서 항상 경외와 겸손으로 예배생활을 잘하면 성령이 충만히 임하십니다.

 

일단 그것이 잘 되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할수록 성령을 따라 살기가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술에 취할수록 술기운으로 살기 쉬운 것과 같습니다. 일단은 성령의 새술에 취해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경외하는 자에게 은혜가 크시다 했는데 이상한 방법으로 받으려고 하니 악신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성령께서 감동하시고 힘주시는 대로 우러나서 행해야 합니다. 성령의 흐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행해야 합니다. 그 때 침착하면서도 자연스런 신령한 삶이 이루어집니다. 영혼 내면의 흐름을 잘 따라야합니다. 여기에는 매사에 실습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어떤 일이나 시험에서 내 감정 내 생각이 앞서면 안 됩니다. 내 감정과 내 생각부터 안정시키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감정 내 생각이 바로 이스마엘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이 법궤를 따라갔던 것처럼 내 심령에 나타나시는 성령의 흐름을 따라가야 합니다. 늘 기도하고 성령 따라 사는 삶이야말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4. 믿고 감사하며 영광돌리지 못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개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름을 사전에 주시지 않았을지라도 그런 약속을 수없이 주셨으니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하신다고 하시니 근심 걱정 다 버리고 날마다 찬송하며 능히 이루실 줄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데 13년의 생애 속에서는 그것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이제까지 이스마엘의 아버지로 살았지 열국의 아버지로 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고쳐 주십니다. 그런 다음 불과 1년 만에 약속하신 이삭을 기적적으로 낳게 하셨습니다. “아브람”은 ‘고귀한 아버지’요, “아브라함”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이제 고귀한 한 사람의 아버지가 아니라 모든 나라 수많은 민족의 열방의 아버지인 것입니다. 소극적에서 적극적인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바꾼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개명해 주신 이름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아브라함으로 살았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영광 돌리는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계시며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하늘의 사람이고 예수 안에서 온갖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죄악을 용서 받았고 새사람이 되었고 권세가 있으며 예수님의 신부요 영생의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천사가 시종 들며 매사에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책임지십니다. 살아도 영광 죽어도 영광이 될 사람들이므로 매일 매일 하나님께 감사 감사 찬양 찬양하며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온전히 함께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현재의 영적 생활에 만족하십니까? 혹은 하나님의 침묵이 얼마나 계속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자신의 잘못입니다. 종교적 생활이나 율법적인 준수가 다가 아닙니다. 보다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하십시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 세상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만 사랑하며 항상 예배하며 성령으로 충만하여 생명의 흐름 따라 살고 일생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하나님께서 온전히 함께 하시는 신령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