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선지서

예배를 점검하라 (말 1:6-14)

공 상희 2009. 7. 30. 13:07

예배를 점검하라 (말 1:6-14)

 

이 시간 “예배를 점검하라”는 제목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최고의 행위는 예배입니다.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가? 인생의 성공과 실패가 예배 하나에 달려 있습니다. 신앙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부흥 세계복음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를 얼마나 잘 드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배를 잘 드리면 우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뿐 아니라 우리 영혼이 살고 하나님의 복이 임하고 또 많은 영혼들이 그 축복을 사모하게 됩니다.

 

바른 예배를 위해 점검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1. 예배의 대상을 점검해야 합니다.

 

6절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스라엘의 제사가 여호와 하나님께 열납 되지 못한 것은 그 첫째가 예배의 대상에 대한 인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말로는 하나님께 제사한다고 하지만 경외심이 없었습니다. 경외심이 없다란 예배의 대상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레위인들은 제사를 신앙이 아닌 의무로만 이해했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제사를 드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려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야 합니다.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크시고 영원하시고 나를 위해 독생자까지 아끼지 않으신 사랑 많으시고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아버지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위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낮추며 하나님을 우러러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이 경외심이 예배의 기초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에 경외심이 존재해야 합니다.

 

2. 예배의 목적을 점검해야 합니다.

 

7절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여기 더러운 떡이란 8절에 나오는 병든 제물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율법에서는 흠 있는 제물을 금했습니다. 레22:20에 “무릇 흠 있는 것을 너희는 드리지 말 것은 그것이 열납 되지 못할 것임이니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도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느냐고 반문했습니다. 당시 제사장들이 눈멀고 절고 병든 짐승을 제물로 드린 이유가 있었습니다. 백성들의 경제사정이 어려워 온전치 못한 제물을 금지시킨다면 제물이 줄어들어 제사장들의 생계의 수단이 끊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상에 무엇이 올라가든 어떻든 우선 우리가 살고 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적이 잘못되었습니다.

 

이처럼 예배가 누구를 위해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있는지 나를 위해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은혜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람이 은혜 받기 위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위해 있습니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은혜 받으러 오기 때문에 은혜가 없어요. 축복 받으려고 오기 때문에 복이 없어요.

 

예배의 목적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드리는 제물이 온전할 리가 없지요. 모든 것이 사람들 좋을 대로 나갑니다. 이것이 예배의 인본주의입니다. 예배의 목적이 오로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리려는 마음으로 가득해 보세요. 그 마음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오면 예배드리기 전부터 은혜가 임하기 시작합니다. 예배의 목적이 잘못되면 예배가 아닙니다. 나를 위한 예배가 아닙니다.

 

3. 내용을 점검해야 합니다.

 

8-9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지금은 신약시대로서 이런 희생은 드리지 않습니다. 여기 예표하는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사 친히 제물이 되시므로 온전히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그렇다고 드릴 것이 없는 것 아닙니다. 구약의 제사는 신약에서 예배의 그림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찬미의 제사라는 말도 나오고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도 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의 내용도 중요합니다. 전하는 말씀이 어떤 것입니까? 부르는 찬송이 어떤 것입니까? 드리는 기도가 어떤 것입니까? 세상 윤리나 도덕을 전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아닙니다. 감사와 간구를 구별하지 못하며 중언부언하는 기도라면 기도가 아닙니다. 혹은 드리는 물질에 기쁘고 즐거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4. 상태를 점검해야 합니다.

 

10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이스라엘 제사장들이 드리는 제사가 얼마나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역겨우셨으면 이렇게 말씀하셨을까요? 이런 예배는 열납되지 못합니다. 

 

예배자가 다른데 예배가 같을 수 없습니다. 어찌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가 같겠습니까?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합니다. 열납되게 드려야 합니다. 응답이 있어야 예배입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고 하신 것처럼 바로 된 예배에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임합니다. 위로가 임합니다. 확신을 주십니다. 능력을 주십니다. 희망을 주시고 소망을 주십니다. 성령의 불이 임합니다. 그러나 받지 않으시는 예배는 우리의 소리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 영적 감각으로도 그낄 수 있어요(요일5:15).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불경스런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이 촛대를 옮기십니다. 11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촛대를 옮기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이 중심이 이스라엘에서 이방으로 옮겨질 것을 예언합니다. 교회 부흥의 원리는 같습니다. 영광 돌리는 예배를 드리다 보면 하나님께서 예배자를 채워 주실 줄 믿습니다.

 

5. 마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12-13절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상은 더러웠고 그 위에 있는 실과 곧 식물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제사장들은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을 번폐스럽게 여겼습니다. 여기 “번폐”는 ‘피로, 고통’이라는 뜻으로 어렵고 괴로운 일 또는 지칠 대로 지쳐 있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일이 많아서 지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섬기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 번도 아니고 날마다 반복하는 희생의 제사에 지쳤습니다. 절기가 되면 수만 마리의 양을 잡아야 합니다.

 

오늘 날로 치면 누가 새벽기도회를 만들어놓고 이 고생시키느냐는 식입니다.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은 다른 나라에 비해 설교 횟수가 많습니다. 똑 같은 말씀을 전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도 기쁜 마음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예배가 많아도 기쁜 마음이어야 합니다. 예배가 없다면 무슨 세상 낙이 있을까? 사모해야 합니다.

 

이처럼 예배를 마지못해서 드리면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드리고 또 다음 예배를 기다려야 합니다. 한 시간이 짧아 예배가 끝나고도 예배당을 떠나기가 싫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의 예배라야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예배 준비를 잘해야 합니다.

 

6. 결과를 점검해야 합니다.

 

14절에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당시 백성들은 흠 없는 수컷이 있으면서도 하나님께 좋은 것보다는 못한 것에 손이 갔습니다. 그래서 마치 흠 없는 짐승이 없는 것처럼  속여 나쁜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속이지 못합니다. 흠 없는 수컷 즉 속죄물이 확실하지 않으면 제사가 아닙니다. 속죄물이 확실하지 못하면 저주가 임합니다. 제사 잘못 드리면 저주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예배가 다 같지 않습니다. 드리는 자의 상태가 다른데 어찌 같겠습니까? 은혜가 넘치는 예배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는 예배가 있습니다. 예배드린 후 심령이 소생할 수도 있지만 어떤 때는 도리어 답답하고 시험이 옵니다. 속죄물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속죄의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적인 믿음으로 예배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보혈의 확신 가지고 예배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와 교회와 한국교회의 미래도 예배에 달렸습니다. 예배를 잘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성령이 역사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보혈의 확신과 말씀과 성령으로 씻은 깨끗한 심령으로 예배하세요. 가정예배를 부활시켜야 합니다. 가정예배 자체가 기독교 교육입니다. 가정예배가 살 때 신앙이 대대로 흘러갑니다. 나아가 교회가 살고 모두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미래의 희망이 넘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귀한 예배자로 불러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예배하는 곳이 천국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하는 소리가 드높을 때 천국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예배를 위해 기도 준비를 많이 하십시다. 우리 모두 우리의 예배를 점검하여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 돌리고 이 땅에 천국이 임하는 예배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