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탄한 사역을 위하여 (행 21:15-26)
순탄한 사역을 위하여 (행 21:15-26)
이 시간에 “순탄한 사역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주를 위해 복음 전하다가 핍박을 받으면 하늘의 상이 큽니다. 그러므로 핍박을 두려워 말고 열심히 복음을 전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잘해도 핍박은 있습니다. 딤후3:12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보면 우리의 일이 사단을 대적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사단의 발악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내 잘못으로 핍박을 받는다면 나는 물론 나를 핍박하는 사람에게도 죄를 짓는 일이 될 것입니다. 나 때문에 그가 죄를 짓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핍박은 없을 수 없으되 최대한 핍박을 줄이고 순탄하게 사역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너희를 보냄이 마치 이리 가운데 양을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 오늘 본문은 우리가 순탄하게 하나님의 일하는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최악의 상황에 처한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한 일을 통해 우리 함께 지혜 얻기를 원합니다.
순탄한 사역을 위한 지혜는 무엇일까요?
1. 보호를 주님께 구해야 합니다.
15-16절 “이 여러 날 후에 행장을 준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갈새 가이사랴의 몇 제자가 함께 가며” 예루살렘에 올라간 바울에게 가이사랴의 제자들이 함께 했고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의 집에 유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바울을 보호하는 일군들을 봅니다. 가이사랴의 몇 제자들입니다. 그들이 바울의 방패막이를 해줍니다.
이런 일군들이 많았습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야손과 몇 형제들이 바울 대신 잡히고 맞고 바울 석방을 위해 보석금을 냈습니다. 참으로 귀중한 일군들입니다. 롬16:1-2에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뵈뵈 역시 바울의 보호자였습니다. 사역자들을 위한 보호와 경호의 사명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지키시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경호원은 죽음을 무릅쓰고 육탄 저지하면서 경호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기만 보호하느라 보호해야 할 일을 보고도 침묵합니다. 참으로 쓸모 없는 비열한 일군입니다. 그런 이들은 자기 얼굴이 나타나는 일에는 앞장서지만 진정 필요로 하는 곳에서는 자취를 감춥니다.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은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인간의 무지도 불평과 불만도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완전한 것은 없습니다. 바울이라고 완전합니까?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이해시켜 주어야 하고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직분을 세울 때는 각자 플레이하라고 세운 것이 아닙니다. 교회 분위기도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야 합니다. 보호자가 있을 때 순탄한 사역이 가능한 것입니다.
2. 자유를 주님께 구해야 합니다.
16절 “한 오랜 제자 구브로 사람 나손을 데리고 가니 이는 우리가 그의 집에 유하려 함이라” 여기 나손을 오랜 제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학자들은 나손이 마가요한의 다락방에서 성령 받았던 제자들 중 하나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추측보다 오랜 제자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서로 불편 없는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잠시 거처할 집이 없어 나손의 집에 들어갔겠습니까? 그것이 그에게 편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일군들이 가장 편하게 생각하는 사랑의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도 가장 편하게 들르셨던 집이 바로 베다니 나사로의 집이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우리 친구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고 친구라 하셨습니다.
부흥회 다니는 강사가 일반 초신자 집에 머물 때는 조심하느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합니다. 그러나 집사님 집은 좀 더 낫고 장로님들 집은 보다 낫고 사택은 더 더욱 낫고 여관이 편하긴 하지만 시끄럽고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와서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일 좋은 부흥사의 거처는 목사의 사택입니다. 마음 놓고 책도 볼 수 있고 교분도 쌓을 수 있고 강사의 애로를 도울 수 있어 여러 면에서 좋습니다. 특히 기도 많이 한 집이기에 영적 에너지가 충만합니다. 그래서 목사의 도서실을 강사방 겸용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이처럼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왔을 때 오랜 제자 나손의 집에 머물렀던 것은 순탄한 사역을 위해 자유로움이 대단히 필요했던 것입니다. 정신적 자유, 육체적 자유, 물질적 자유, 신앙적 자유, 사역적 자유,, 이런 자유 없이는 일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손의 집이야 말로 가장 축복 받은 집입니다. 주의 종들이 일하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재량도 많이 주시고 힘을 실어 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맘껏 일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당이 언론개혁법을 국회에 제출해 마찰을 일고 있습니다. 기업들이 참여하는 방송의 다변화에 대한 내용인데 대통령이 강한 저항에 직면하면서도 방송에 매달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렇지 않고는 원하는 방향으로 국정을 끌고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대통령이어도 방송이 다른 나팔을 불면 아무 일도 못하고 내려와야 합니다. 그래서 악법이다 장악이다 뭐다 온갖 저항과 비난을 받아가면서도 그 일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 노대통령도 재임 기간 가장 많이 싸웠던 대상이 바로 언론이었습니다. 적당한 예화인지는 모르나 주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유로움이 순탄한 사역의 중요한 길입니다.
3. 모두 함께 일해야 합니다.
17-19절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고하니” 예루살렘 총회가 선교사 바울을 영접하고 선교의 보고를 듣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장면입니다.
그동안 바울의 사역은 총회가 인정한 것이며 교회가 도운 것이었습니다. 난제가 있을 때는 총회에 의뢰하여 풀었고 그 지시를 따라 지혜롭게 감당했고 항상 총회에 보고하였습니다. 여기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주의 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개의 우주선을 쏘아 올리기까지 수만 명의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의 수고가 있었던 것처럼 주의 일은 함께 해야 합니다.
카톨릭이 영적으로 약한 이유는 교리적 문제도 있지만 보면 신부나 수녀들이 다 합니다. 찬송도 기도도 성찬식 때 포도즙도 신부만 대표로 마시고 교인들에게는 주지 않습니다. 헌금 내역도 비밀입니다. 주의 일에 교인들의 참여 부분이 작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조용한 것 같지만 영적으로 약합니다. 우리 개신교에서는 귀신 쫓아내는 것 정도는 일반 성도들도 다 하지만 그들에게서는 신유가 흔하지 않습니다.
총 들고 일선에 나간 군인들 보세요. 그들이 일선에 나가지만 국민들이 국방비 내서 대포도 사주어야 하고 비행기도 사 주어야 하고 밥도 먹여야 하고 옷도 해 입혀야 하고 기도도 해주어야 합니다. 전방에 사고가 왜 많이 납니까? 우리의 기도 부족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정치나 학자나 언론이나 정보기관이 나서서 적의 심리전술도 막아주어야 합니다. 앞에 어떤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간첩은 없다는 말 같지도 않는 그런 말은 대통령이 할 말이 아닙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도 함께 해야 순탄하게 됩니다. 교인들이 기도하고 이런 봉사도 저런 봉사도 함께 해줘야 순탄한 사역이 이루어집니다.
4. 세상에 좋은 이미지를 주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성도와 교회에 대한 인상이 좋게 보여야 합니다. 19-26절까지의 내용입니다. 20절에 “바울더러 이르되 형제여 ~” 하면서 사도와 장로들이 예루살렘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그러므로 이렇게 하라고 제안합니다. 그 내용은 유대인의 명절을 맞아 각국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많이 예루살렘에 왔는데 그들이 바울이 온 것을 알고 악평하여 문제 삼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 믿는다면서도 아직도 율법에 열심하며 바울의 행적과 얼굴을 아는 교인들도 수만 명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숨어 있을 곳은 어느 곳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바울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비록 원치는 않지만 네 사람을 데리고 서원의 결례를 행하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순탄한 사역을 위해서 죄가 안 되는 선에서 최대한 오해를 줄여야 합니다. 믿는 자임을 숨길 이유는 없습니다. 사람 앞에서 자기 신앙을 숨기면 주님도 우리를 모른다 하십니다. 그러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한국교회가 그 중에 도입한 것 하나가 추도예배입니다. 추도예배는 성경적 근거가 없습니다. 그러나 선교적 측면에서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카톨릭에서는 그 범위를 넓혀 제사까지 허용하지만 그래서 핍박은 사라졌지만 그것은 지나쳐 범죄한 것입니다. 조상에게 제사하는 것은 조상이 아니요 귀신에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마이뉴스 2008.12.30자 기사에 여론조사기관인 리얼미터가 흥미로운 결과를 발표했다면서 천주교인들의 주당이 가장 세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핍박은 면했을지 모르지만 불신자보다 더 과음한다면 그것은 세상보다 더 타락한 것입니다. 창녀들을 구원하려다 타락하여 되레 포주가 되는 꼴입니다. 그러나 선교를 위해서는 죄가 아닌 선에서 적절한 문화적 변신은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적극적인 이미지 갱신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하나님 영광을 가리지 말고 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정직해야 합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도와야 합니다. 함께 울고 웃어야 합니다. 지혜로워야 합니다. 우리의 이미지를 개선하지 않고는 세상을 복음화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축복도 좋지만 그 복을 나누어야 합니다.
혹자는 주님이 저주와 가난을 다 지셨는데 왜 우리가 가난해야 하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부요의 복을 받을 뿐 아니라 주님이 부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신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본받아 불쌍한 사람을 위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8장에 나오는 연보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많이 거둔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자도 부족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고후 8장의 연보의 정신을 내던지고 주님이 우리를 부하게 하셨다는 말만 보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소수의 고액 연봉자로 인해 한국교회가 휘청거릴 만큼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연보의 정신은 서로 나눔입니다. 혹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고 자신의 양심에 거리낌이 없을지라도 나로 인해 한국교회가 어려움을 당한다면 절제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저는 이런 면에서 스스로 가난하게 되신 한경직 목사를 존경합니다. 저 역시 30여년의 목회 속에서 아직도 적은 생활비지만 매년 제 생활비를 깍는 일을 해왔습니다. 방송이나 언론들이 교회의 하늘 닿을 만큼 좋은 면은 다 감추고 나쁜 점만 드러내고 있습니다. 정말 지혜로워야하겠습니다. 이미지의 실추는 바로 전도의 문이 닫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온갖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핍박은 있게 마련입니다. 핍박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우리의 잘못으로 핍박을 받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성경에서 배우십시다. 우리 모두 순탄한 사역을 위해 보호와 자유와 협력 그리고 좋은 이미지 관리로 하나님께 크게 영광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