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령한 말씀을 전할 때 (행 19:8-22)
신령한 말씀을 전할 때 (행 19:8-22)
[요약] 신령한 말씀을 전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신령한 말씀을 전할 때 달갑지 않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 것을 추구하는 육신적인 사람은 흥미가 없고 힘겹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신령한 말씀을 전하면 들을 사람들을 붙여주신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모여 듣게 하신다. 신령한 말씀을 전하면 기사와 이적을 따르게 하신다. 그래서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더욱 확실하게 전하게 하신다. 그리고 신령한 말씀을 전하면 영적 부흥을 일으켜 주신다. 누구를 통해서 어떤 일을 통해서든지 이루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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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 “신령한 말씀을 전할 때”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은 바울의 에베소에서의 사역입니다. 사도행전 18장 20을 보면 에베소 사람들이 바울이 더 머물기를 심히 원했습니다. 그 때 바울은 떠나면서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했는데 이 약속대로 다시 와서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게 된 이야기가 본문입니다. 에베소서에 나타나듯이 에베소의 사역은 영적으로 심히 깊었습니다. 본문은 바울이 신령한 말씀을 전할 때 일어난 현상을 잘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신령한 말씀을 전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1. 신령한 말씀을 전할 때 달갑지 않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8-9절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을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하나님 나라를 전했다고 했습니다. 이 하나님 나라는 구원을 중심으로 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 말씀을 싫어하고 공개적으로 비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복음 전하실 때도 그랬습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6:53) 하시니까 따르던 제자들이 물러가고 열두 제자들만 남았습니다. 이것이 영적 수준 차이입니다. 돌아간 제자들과 남은 제자의 차이는 백지장 한 장의 차이지만 결과는 크게 달랐던 것입니다.
어떤 말씀이든지 자기 수준에 맞으면 보물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수준에 맞지 않으면 아무리 귀한 것도 쓸데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 육신에 속한 사람은 세상 나라 이야기를 좋아하지 하나님 나라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축복 받고 고침 받는 것에 관심이 큽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살고 거룩함과 사명에 충성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사는 것처럼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이 육신으로도 잘 되는 길입니다. 그러나 육신적이거나 수준이 낮으면 신령한 말씀에 관심도 흥미도 없고 곤혹스러울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장소를 옮겨 두란노 서원에서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목회사역도 메시지의 구별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수준이 다르고 교인들의 수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신령한 말씀은 전할 수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2. 신령한 말씀을 전하면 하나님께서 들을 사람들을 붙여주십니다.
9-10절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이같이 두 해 동안을 하매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회당에서 더 이상 가르칠 수 없었던 바울은 말씀을 이해하는 제자들만 뽑아 두란노 서원에서 강론하였습니다. 그러기를 두 해 동안 했습니다. 어떤 문헌에는 바울이 두란노서원에서 하루 5시간씩 가르쳤다고 나와 있습니다. 매일 부흥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두란노 서원은 복음을 전하기 좋은 곳이었습니다. “서원”이란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러 지역에서 모여드는 장소였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각 지역의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말씀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람들을 붙여주세요. 그리고 가르치는 시간이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였다고 합니다. 이 시간은 에베소 사람들이 낮잠을 자는 시간입니다. 육신의 일을 하지 않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영의 일에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신령한 말씀을 전하면 육신에 속한 사람들은 싫어하지만 영적으로 사모하는 사람들은 좋아합니다. 그 더운 때지만 꼼짝하지 않고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많이 붙여주셨든지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두란노 서원은 어디 일까요? 교회이기도 하고 혹은 사이버 상의 가상공간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입니다. 그리고 말씀 가지고 있으면 전파에 고민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만 확실히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들을 자를 어떻게 붙여주시든지 붙여주십니다. 말씀만 확실히 갖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쓰시더라도 쓰십니다.
3. 신령한 말씀을 전하면 기사와 이적으로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11-12절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 놀라운 이적들이 일어났습니다. 병든 자가 고침 받고 귀신이 쫓겨나갔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영적 능력이 많이 나타났든지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기만 해도 병이 떠나고 악귀도 떠나갔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니까 일으키신 이적입니다. 그래야 말씀을 믿을 것 같으니까요. 간혹 선교하는 목사님들이 모여서 간증하는데 신기한 것은 똑 같은 목사인데 한국에서 목회할 때는 별로 이적이 없는데 선교지에 가면 기도 받는 사람마다 병이 낫더라는 간증을 합니다. 기적은 하나님께서 필요하셔서 나타내주시는 것이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하다면 하나님께서 이적을 나타내주실 것입니다.
막16:20에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기도 많이 하고 참된 복음만 전하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든 그 말씀이 열매 맺도록 책임져 주십니다. 이처럼 진실로 신령한 말씀을 받아 날마다 영적으로 성장하고 변화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놀라운 이적과 복을 주실지 모릅니다.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을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4. 신령한 말씀을 전하면 놀라운 영적 부흥을 일으켜 주십니다.
13-20절의 내용입니다. 마술사들이 바울을 모방하여 시험적으로 예수 이름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내려다가 봉변을 당하는 장면입니다. 당시 마술사들은 사람들을 속여 존경 받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술법을 만나면 그것을 모방하려고 했습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들은 예수 이름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이름까지 빌려서 주문을 외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 이름으로 아무리 마술을 해도 바울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그 때 그들은 자기들은 가짜이지만 바울은 진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들이 깨졌습니다. 진짜 앞에서 가짜가 깨졌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사건이 터졌습니다.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그렇게 하다가 악귀에게 호되게 당했습니다.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면서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본 에베소에 거하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도 많이 와서 바로 살지 못한 것을 자복하고 뉘우치고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모아 모든 사람 앞에서 공개 화형식을 하니 그 책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회개의 대 부흥이었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부흥은 회개하는 것이고 그 회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옵니다. 바울이 전하는 말씀은 육신에 속한 자들에게는 인기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3년이나 매일같이 신령한 말씀을 부르짖자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놀라운 부흥을 이루어주셨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육이냐 영이냐 말씀의 과도기에 처해있습니다. 그동안 육신을 충족시키는 말씀을 통해서 양적인 발전을 거듭했지만 이제는 영적으로 성장하고 변화되어야 할 때입니다. 잠시 동안은 듣는 자도 흥미 없고 전하는 자도 암담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생명 길은 좁은 길입니다. 이 길을 걸어가노라면 밝고 광활한 천국 문이 우리 앞에 다가올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신령한 말씀을 전하실 때 사람들의 무관심과 배척을 경험하셨습니다. 신령한 말씀을 잘 전하도록 말씀 사역자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세상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하여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예수님의 참 제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