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충만 받으려면 (행 1:12-14)
성령 충만 받으려면 (행 1:12-14)
우리가 하나님께 항상 갈급한 마음으로 가장 사모해야 할 것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우리 인생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은 한 마디로 비참합니다. 우주의 고아와 같이 어떤 누구의 보장도 없이 어둠과 혼란과 공허 가운데 헤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성령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갈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이 메시야를 기다린다고 하면서 실제 다가오신 예수님은 배척했다 버림받았듯이 오늘날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령님께 무관심한다면 그와 똑 같은 결과가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럼 성령 충만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성령님이 임하기 전에는 무엇을 해도 아직 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미가 아니라 아직입니다. 12절을 보세요. 아직 아직입니다. 12절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우리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신약시대의 제자들이 무슨 안식일을 들먹거리는가 하는 의아심을 갖게 됩니다. 왜 시대는 신약인데 아직도 유대인의 전통이냐는 말입니다.
안식일의 여행 거리 제도는 유대인들이 만들어놓은 전통입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위해서 여러 가지 규칙을 정해놓았습니다. 그 중에서 몇 가지만 소개하면 곡식을 타작하거나 까불지 말라. 매듭을 짓거나 풀지 말라. 바늘로 두 번 깁지 말라. 글자를 두 자 이상 쓰거나 지우지 말라. 불을 끄거나 켜지 말라. 빗질하지 말라는 등의 규칙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장하여 안식일에 밀 이삭을 비벼 먹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유대인들은 왜 안식일에 타작하느냐? 핍박했습니다. 손으로 비빈 것은 타작이요, 입으로 분 것은 키질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인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인지 분간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병이 들어도 꼼짝없이 죽어야했습니다. 전날 빵을 만들어 놓지 못했으면 종일 굶어야 했습니다. 배고프고 병들어 안식이 없는데 겉 안식일만 지킨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하루 여행 거리를 2,000규빗으로 정해놓았습니다. 그러니까 약 1km의 거리입니다. 그 이상은 갈 수 없습니다. 이는 율법에도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들어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마15:8-9) 책망하셨습니다. 그런 유대인의 전통인데 왜 주님이 십자가 보혈로 이루신 신약시대에 그것을 언급하느냐는 것입니다.
박해 때문일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주는 또 귀한 의미가 있어요. 그것은 바로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아직이라는 말입니다. 아직 변화가 없었던 거예요. 이처럼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아직 옛것일 뿐입니다. 시대는 새 시대인데 사람은 새 것이 아니에요. 주님이 내 죄를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아직 옛사람입니다. 주님이 문제를 담당하셨어도, 주님이 부활하셨어도, 주님이 승천하셨어도, 주님이 재림하신다 해도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는 아직이란 말입니다. 이 중요한 이치를 알아야 합니다.
좀 더 말씀하면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성경 많이 알아도 아직입니다. 교회 많이 다녔어도 생명이 없어요, 변화가 없어요.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아직도 죄에 있고, 아직도 두렵고, 아직도 절망이고, 아직도 실패하고, 아직도 저주 아래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는 종교의 껍데기만 있지 생명은 없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성령시대이기 때문에 내 안에 하나님의 뜻이 충만한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제비뽑기가 필요 없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지금 어떤 시대인데 제비를 뽑느냐? 하는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입니다. 시대는 신약이지만 신앙 수준은 구약보다 더 못한 것은 왜 보지 못합니까? 부패하고 부패한 사람들의 영적상태는 왜 보지 못하느냐는 말입니다. 제비뽑기하지 않으면 더 부패하여 영광 가리우고 다투다 피차 멸망할 일만 남았다는 말입니다. 성령 없으면 여전히 옛것일 뿐입니다. 성령이 아주 없는 심령이라면 천국도 못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없이는 안 되겠구나 이 사실을 진실로 깨달을 때 성령 충만 받을 마음의 준비가 갖추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2. 성령 충만 받으려면 우리의 몸을 드려야 합니다.
13절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그랬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다락에 올라가 보니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모친과 여인들과 예수님의 아우들이 있었습니다.
왜 누가는 거기 올라가 기도하는 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며 “다 거기 있어”라고 강조할까요? 그 일차적 의미는 성령을 기다리라 하신 주님의 분부에 모두 순종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또 다른 이차적 의미가 있습니다. 성령 받기 위해서 모두 몸을 드려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중요한 성령 충만의 원리입니다. 몸 드려 섬겼어요. 어느 누구도 “어디서 기도한들 하나님이 안 들으시겠느냐” 하며 교회 출석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몸을 드려 교회에 나왔습니다. 몸을 드려 기도했습니다. 몸을 드려 힘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꼭 아셔야 합니다. 몸을 드리지 않으면 성령 충만 받을 수 없습니다. 몸 드리지 않으면 죽은 신앙입니다. 지금 아무리 정보산업이 발달하여 집에서 스위치만 켜면 예배가 흘러나온다고 해도, 그것이 또 신앙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해도, 몸이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는 그런 예배나 신앙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나 연약하고 피곤해도 몸을 드려 기도하고 몸 드려 찬송하고 몸 드려 예배하고 봉사하고 전도할 때 성령이 임합니다. 그래서 교회에나 집에서나 어디서나 몸 드려 하나님을 섬기세요. 할 수 있으면 무릎으로 기도하세요.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발성으로도 기도하세요. 나무뿌리라도 뽑는 심정으로 힘들여 기도하세요. 몸 드려야 은혜가 임해요. 몸이 그렇게 중요해요. 몸은 물질에 불과하지만 이 몸을 하나님께 드리면 신령한 은혜로 바꾸어 주십니다.
3. 성령 충만 받으려면 마음을 드려 기도해야 합니다.
14절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했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마음을 온전히 드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혼자의 마음을 드려도 귀중한데 모인 모든 성도들이 모두 마음을 같이하여 드렸습니다.
그래서 선견자 하나니가 아사에게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대하16:9)신다고 말씀했습니다. “주셔도 좋고 안 주셔도 좋고”가 되면 안 됩니다. 진실로 사모해야 합니다. 마음이 세상에 가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만 드려져야 합니다.
교회의 영적 부흥도 교인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귀찮다고 팔짱만 끼고 있으면 안 됩니다. 지금 신앙생활 너무 편하게 해요. 옛날이야기는 여러분이 더 잘 아시잖아요. 부인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살 수 없다고 할 만큼 도로 사정이 나빴지만 예배하기 위해서 수십 리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 때를 생각해 보세요. 지금 편리한 시대가 되었지만 마음만큼은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저에게 옛날 목사님들 수십 분의 설교를 모아 놓은 것이 있는데 한국에서 이름이 있는 분들의 한 편씩의 설교 모음입니다. 제가 평가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한 편씩 모았으니 그래도 잘한 설교를 모았을 텐데 지금 와서 보니까 너무나도 내용이 없어요. 제가 그렇게 존경했던 그 분들 그런데 지금 와서 원고를 살펴보니 너무나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저는 깨달았습니다. “그 분들은 그 시대에 필요한 분들이었다. 그리고 비록 원고는 초라했지만 그 분들은 누구보다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섬겼고 하나님께서 온전히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같이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들 사모했고 그렇게들 은혜를 받았고 한국에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랬기에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들과 같이 주님의 분부 받들어 성령 충만 받으십시다. 성령님이 임하기 전에는 어떤 경우에도 아직 임을 아십시다. 그리고 몸과 마음을 드려야 성령 충만 주신다는 것을 깊이 명심하고 온전히 성령님을 사모하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