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의 장벽을 극복하라 (행 10:23-48)
율법의 장벽을 극복하라 (행 10:23-48)
이 시간에 “율법의 장벽을 극복하라”라는 제목입니다. 이 세상에 어던 것이 있다해도 하나님의 임재처럼 귀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84:10에서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왕궁의 천 날보다 낫다니 얼마나 하나님의 임재가 복된 것입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음이 확실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에 그리 부족함이 없는 것 같은데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는 나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에 막혔는지 발견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그것은 나의 잘못이지 하나님의 잘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호6:3)고 외쳤습니다. 꼭 그 시간이면 나타나는 새벽빛처럼 하나님의 임하심은 기계보다 시계보다 수학의 공식보다 더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막힌 부분을 깨닫고 풀기만 하면 정확하게 성령께서 우리에게 충만하게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 중에 중요한 막힘 하나가 바로 율법의 장애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고넬료가 베드로를 만나서 예수의 복음을 듣고 성령을 받기까지 얼마나 어려운 과정이 있었는가를 봅니다. 그토록 하나님을 사랑하며 경외하는 고넬료였건만 그가 베드로를 만나 은혜 받기까지는 큰 장벽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매인 베드로의 고정관념이 깨어지고 또 깨뜨려진 후에 비로소 고넬료를 만나게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큽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성령의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데 율법의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면 불가능하다는 교훈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함에 방해하는 율법의 장애란 무엇일까요?
1. 정죄의 장애입니다.
나는 죄인이라는 이 정죄의식이 얼마나 은혜 받는 것을 막는지 모릅니다. 죄의식이 있는 한 우리 심령은 콱콱 막히고 답답하고 죽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죄의식이 있는 한 받은 은혜마저 바삭 말라버립니다. 평안도 없고 기쁨도 없고 사막과 같이 죽음의 그늘만이 존재합니다.
이 정죄를 무엇이 합니까? 바로 율법이 합니다. “너는 죄인이다. 너를 죽을 수밖에 없는 자이다. 너는 심판 받을 수밖에 없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라고도 할 자격이 없다.”고 율법은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처럼 모두 죄인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좀 더 알아야 할 것은 예수를 믿는 성도는 죄인이었지만 그리고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공로로 속죄함 받아 의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롬5:1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그랬습니다. 그리고 롬8:1-2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서지 말고 복음에 서서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다는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정도가 아니라 이런 말씀까지 합니다. 롬5:2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즉 용서의 확신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사랑과 은혜를 받기에 합당한 자로 여기고 즐거워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율법을 탈피한 복음적인 믿음입니다.
자녀들 하는 걸 보세요. 자녀들이 뭘 달라는 것을 보면 꼭 맡겨놓은 것 달라는 것처럼 참 뻔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그럴 수 없다면 내 친 자식이 아닐 것입니다. 한 일 없어도 자녀라는 이유 한 가지로 당당하고 뻔뻔해야 건강한 자녀입니다. 잘못했어도 밖으로 배회하지 않고 웃으면서 들어와 “잘못했어요.” 하고 들어올 수 있다면 건강한 아이입니다. 아무리 아버지의 사랑이 커도 잘못했다는 시인하고 정죄 아닌 죄송한 마음은 있어야 하지요. 우리가 진실로 회개하고 죄송한 마음과 정죄와는 구분 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죄에 대한 의식 때문에 얼마나 자기 심령을 죽이고 하나님 앞에 나가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율법의 방해입니다. 율법적인 믿음이 되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없고 그 은혜를 받아 누릴 수 없습니다. 혹시 은혜를 받았다 해도 즉시 소멸하고 맙니다. 아직 죄에서 넘어지는 죄인의 모습일지라도 나를 예수님의 보혈로 용서 받고 의롭다 인정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복음에 서서 담대히 살아갈 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2. 형식의 장애입니다.
율법에는 많은 조항이 있고 의식과 형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만 지키면 된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바울도 율법을 다 지킨 사람입니다. 그러나 은혜 받지 못했기에 예수님도 모르고 성령님도 모르고 박해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와서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느냐고 하자 예수님께서 계명들을 다 지켰느냐 물으셨습니다. 다 지켰다고 했지만 그럼 영생을 얻겠구나 하지 않으셨습니다.
율법을 지킨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격식이 어느 순간까지는 도움이 되기도 합니다. 격식 때문에 교회에 나오고 격식 때문에 기도도 하고 격식 때문에 자기를 지키며 잘못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일정 수준을 지나면 그 격식이 나를 얽매는 족쇄가 됩니다. 믿음은 자라야 하는데 그 격식 때문에 멈춰 있기 때문입니다.
강아지 때 목에 매어준 끈이 강아지가 자람에 따라 나중에는 강아지 목을 옥죄는 무서운 도구가 됩니다. 처음에 강아지를 지켜준 그 끈이 나중에는 강아지를 죽이는 끈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껍데기를 벗는 생물처럼 형식의 껍데기를 늘 벗어야합니다. 지금 세계는 변급하고 있는데 국가의 법은 따라가지 못한다면 얼마나 손해입니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성령의 은혜는 율법의 그 의식과 격식으로는 담아낼 수 없습니다. 거룩 거룩한 그 모습 가지고는 생명적이고 역동적인 성령의 은혜를 담아낼 수 없습니다.
때로는 사울이 다메석 도상에서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강제로 은혜를 주실 때도 있지만 대체로는 우리가 가만있으면 하나님도 가만히 계십니다. 입을 넓게 열어야 채워주십니다. 그러므로 율법적 의식은 물론 우리의 전통이 은혜 받는데 방해될 때는 그 틀을 바꾸어야합니다. 여호와는 성전에 계시니 잠잠할지어다 하는 구약적 습관처럼 잠잠하다면 은혜는 임하지 않습니다. 구약에는 제사장이 제사를 집전하고 백성들은 아멘만 하면 됐습니다. 지금도 천주교에서는 신부들이 자신을 사제 즉 제사장이라고 하면서 대부분의 순서를 집전하고 교인들은 아멘만하고 있는데 냉랭하기 그지 없습니다. 미갈이 여호와의 법궤 앞에서 춤을 추는 다윗을 비방하다가 평생 자식을 낳지 못한 것처럼 생명적이고 역동인 신앙을 비방해서는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좋은 전통은 살려 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하루 세 번씩 기도하는 좋은 습관은 지켜나갔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덧붙여 늘 모여서 예배하며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시면 알지만 얼마나 자유롭고 힘 있게 하나님을 섬깁니까? 의식과 형식에 매여 거룩 거룩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구약 율법은 인간의 완악함을 인하여 느슨했습니다. 살인하지만 않으면 합격입니다. 이혼증서를 주면 이혼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율법의 중심은 사랑입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온전한 사랑을하기 위해 하나님의 치유가 필요합니다. 천성에 들어가기 전에 생명나무 아래서 그 잎파리로 준비되는 것처럼 치유 되어야 합니다. 온전한 치유를 받아 사랑을 소유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나의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삶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데 방해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3. 의무의 장애입니다.
율법은 의무를 강조합니다. 무엇을 해야 복을 주겠다는 것이 율법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들도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먼저 받고 그 은혜로 의무를 실천하는 것이지 의무의 공로로 하나님이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먼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은혜부터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은혜를 받는 데는 그 어떤 대가도 공로도 필요 없습니다.
복음이란 하나님께서 스스로 인간이 되셔서 죄인 된 인간에게 찾아오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육체를 입고 계셔서 우리가 다가가려고 해도 쉽게 다가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더 유익이라 하시며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이 성령님은 언제나 아무 대가 없이 우리와 함께 계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요14:16-18에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이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아무 대가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믿음으로 성령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가운데 성령께서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성령님이 오시는 줄 아는 율법적인 믿음 때문에 이미 와 계신 성령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눈에 성령님이 보이지 않아도 함께 계신다고 믿고 상상하시면서 생활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그 분을 의식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주님이 함께 계신다고 생각하고 행실을 조심하고 늘 주님께 말씀하고 묻고 감사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함께 생활해야 합니다. 아무 공로 없이 우리에게 주실 모든 은혜와 선물을 가득히 가지고 덩굴 채 다가오신 성령님을 믿고 여기에 준해서 생활할 때 주님은 자기를 믿는 성도에게 비로소 자기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는 항상 아버지와 성령께서 임해 계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하시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임재의 은혜를 경험함에 방해되는 율법적인 정죄와 형식과 의무의 여러 요소들을 다 깨뜨리고 복음적 믿음으로 성령님의 은혜를 더욱 풍성히 누리고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