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전-계시록

하나님의 일은 어떻게 하나? (행 15:36-41)

공 상희 2009. 6. 9. 15:09

하나님의 일은 어떻게 하나? (행 15:36-41)

이 시간에 “하나님의 일은 어떻게 하나?”라는 제목입니다. 우리는 넓은 의미에서 다 하나님의 일군입니다. 세상에 살 때 하나님의 일 잘 감당하면 내세에서는 물론 금세에서도 백 배로 복을 주십니다(막10:30). 보너스를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엄청난 보너스가 있다는 말이지요. 본문은 바울과 바나바가 전에 전도했던 각성에 다시 가서 형제들을 돌아보자고 하며 제 2차 전도여행을 계획하지만 결국은 함께 가지 못하고 따로 가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잠16:9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본문에서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하는가 그 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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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일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1. 마음의 소원으로 합니다.

36절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안디옥에서 이단들의 활동으로 신앙의 위기를 경험한 바울은 다른 지역의 교회들에 대해서 염려가 생겼습니다. 그들도 믿음 위에 굳게 서 있는지 살펴보고 굳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제 1차 전도여행 때 핍박과 고난 얼마나 어려웠습니까? 그 어려운 일을 또 다시 계획한 것입니다. 이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은 바울이나 바나바나 동일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은 마음의 소원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빌2:13-14에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에 소원을 주세요.

하나님의 일은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 지는 그 일을 시켜서 어떻게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좋아서 한 일이기에 고통도 핍박도 배고픔도 기븜으로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모세가 자기 백성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돌아볼 마음이 생겼듯이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셔야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절대 자기 마음을 거슬려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할 때 온전히 하나님의 소원을 가지고 일할 수 있습니다.

2. 은사 따라 해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하나님의 소원을 가지고 일했지만 세부적인 부분에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37-39절에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의견충돌이 생긴 것은 외부적으로는 마가 요한 때문입니다. 마가가 1차전도 여행 시 첫 장소인 구브로 밖에는 따라오지 못하고 밤빌리아에서 낙오되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것을 참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사역에 지장을 주고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성격의 차이였습니다. 즉 바나바는 마음이 너그러워 관용하는 마음이 컸지만 바울은 냉철하여 사람의 연약과 실수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이제 마가가 더 성장했고 반성했을 것이니 괜찮을 것이라면서 마가를 데리고 가자 하는 반면 바울은 낙오자를 또 다시 데리고 가다 무슨 일이 생길지 아느냐면서 데려갈 수 없다고 해서 서로 다투고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주의 일에 있어서도 성격 차이로 갈등이 옵니다. 원리 원칙대로만 하자는 사람도 있고, 뭐 그러냐 좀 감싸주면서 하자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의 원리, 하나는 사랑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이편에서 보면 너무 원칙이 없어 보이고 저편에서 보면 너무 냉정하게 보입니다. 모두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하는 것이지만 각인의 차이 때문에 이런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은사적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말씀의 은사라면 바나바는 사랑의 은사입니다. 두 사람의 은사가 서로 달랐습니다. 우리는 남의 은사를 존중하면서 내게 주신 은사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내게 주신 은사입니다. 자기 은사 따라 일해야 성공합니다. 고기는 물에서 성공하는 법을 배우고, 호랑이는 땅에서 성공하는 법을 배우고, 독수리는 하늘에서 성공하는 법을 배워야지 달리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남이 받은 은사 부러워 말고 내게 임한 은사를 개발해야 합니다.

3. 협력하며 일해야 합니다.

39-40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바나바에게는 마가라는 동역자가, 바울에게는 실라라는 동역자가 필요했습니다. 험하고 힘든 여행에 혼자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함께 하면 가능합니다. 지금 인류가 서로 자기 전문 직업을 가지고 분업을 하니까 이만큼 발달한 것이지 만일 혼자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다 만들어야 한다면 그동안 인류가 발전시킨 모든 문명은 물거품 되고 원시생활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신32:30을 보면 한 사람이 천을 쫓고 두 사람이 만을 쫓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한 사람이 천을 쫓아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면 만을 쫓습니다. 두 사람이면 이 천이어야 하는데 성경은 만이라 했습니다. 이 말씀이 맞는다는 것을 제 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제 2차 대전 전에는 편대비행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비행기들이 그냥 우루루 몰려다니다가 적을 발견하면 한 대가 한 대씩 맡고서 되는 대로 싸우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나 각각 다른 고도에서 편대 비행을 해보니 결과가 확연히 달랐습니다.


독일 전투기들은 편대를 지어 개별 전투하는 프랑스와 영국 비행기들을 수없이 격추시켰습니다. 그러자 영국에서도 편대의 중요성을 알고 편대를 지어 대항한 결과 독일군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은 개별전투를 중시한 반면 미국은 2대의 비행기로 편대를 지어 싸운 결과 수많은 일본 비행기를 떨어뜨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2대 보다 4대로 편대를 만들어 보니 그 효과가 더 뛰어났습니다.


 

한 사람이 철사를 가지고 바늘을 만들면 하루 종일 25개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둘이 같이 만들면 625개를 만들 수 있습니다. 말 한 마리가 마차를 끌면 1톤을 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마리 말이 같이 끌면 5톤을 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10을 쫓으면 두 사람이 같이 쫓으면 20명을 아니라 1000명을 쫓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시너지 효과라고 합니다. 같이 한 마음으로 일하는 것은 큰 힘이 됩니다.


하나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면 큰 일을 이룹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은사 따라 연합하면 더 큰 일을 이룹니다. 말씀이 중요하나 그 하나로 교인들을 온전케 하려고 하니까 힘이 들었습니다. 각자 자기 전문에 충실하면서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예수님 말고는 혼자서 모든 부분의 전문가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어떤 면에는 협력이 필요했습니다. 제자들이 동역자였습니다. 여인들이 동역자였습니다. 바울이 아무리 말씀을 잘 전해도 물질 없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붙여 주시고 자주장사 루디아를 붙여 주셨습니다. 기도의 동지도 붙여주시고 누가와 같은 건강동지 문서동지도 붙여주셨습니다. 이렇게 협력하면 큰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4. 사랑으로 일해야 합니다.

39-41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바나바는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육로로 해서 수리아 길리기아로 갔습니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그들은 먼저 자기 고향으로 달려갔습니다. 바나바의 고향은 구브로이고, 바울의 고향은 길리기아입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 외에는 존경 받지 않음이 없다 하신 주님의 말씀을 참고하면 고향이 전도하기 더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고향으로 먼저 갔을까요? 뭔가 보여주고자 하는 교훈 때문이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생각하는 답은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는 바나바와 바울에게서 고향을 향한 가득한 사랑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롬9:3에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했던 바울의 고백을 기억하시고 계실 것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자기 동족을 위한 바울의 사랑입니다. 이처럼 길리기아 다소는 바울의 출생지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고향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바나바도 자기 고향 구브로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순교했다고 합니다. 저들을 구원해 주시지 않으시려면 내 생명을 불러달라고 부르짖는 그 뜨거운 사랑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런 예수의 심장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선교사로 유명한 슈바이처(1875∼1965)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여행 중에 우연히 흑인상을 보고서 남은 생애를 밀림의 불쌍한 원주민들을 위해 살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를 아끼는 사람들의 충고를 듣지 않고 선교사가 되기 위해 의과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의사가 된 그는 헬레네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슈바이처는 결국 아프리카냐 헬레네냐 두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헬레네가 자기를 따라 아프리카로 가주지 않을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헬레네를 버릴 수는 있어도 아프리카는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슈바이처의 마음을 안 헬레네는 슈바이처의 아내로서 그리고 간호사로서 일생 아프리카를 위해 헌신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영혼과 지역을 향한 뜨거운 심정 없이는 하나님의 일은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5. 배후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40절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이 말씀은 바울이 안디옥 교인들의 축복 속에 전송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그의 가는 길을 축복해주었습니다. 이 말씀 속에는 그를 위한 기도의 배경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혼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기도의 배경 속에서 해야 합니다.

가장 행복한 일군은 기도의 배경이 많은 사람입니다. 기도의 배경이 많으면 모든 일이 순탄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믿음이 없거나 기도해주는 사람이 적으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특히 주의 종을 배출한 가정에서는 불철주야 기도해야합니다. 형제들도 나 대신 주의 종이 되었음을 알고 도와야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 지고 해야 할 일을 타인이 대신하고 있음을 깨닫고 도와야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를 대신해서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는 레위지파를 십일조로서 도왔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주의 종이 받을 그 상을 여러분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 일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에게서 배우고 앞서간 성도들에게서 배웁시다. 그래서 우리 모두 성령의 소원 가지고 은사 따라 협력하여 사랑으로 기도로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여 하늘의 큰 상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