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소요와 진정 (행 19:23-41)
마음의 소요와 진정 (행 19:23-41)
이 시간에 “마음의 소요와 진정”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본문은 바울의 에베소 사역이 거의 끝나갈 무렵 에베소에서 일어난 큰 소요사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에베소 복음화로 인해 위기감을 느낀 데메드리오를 위시한 아데미 모형신전조각품 제조업자들의 선동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숨어서 돕는 천사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지혜로운 에베소 서기장에 의해 소요사태는 진정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좀 색다르게 이 에베소의 사건을 우리 마음으로 비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된 성도의 마음에도 간혹 죄악의 소요사태가 발생할 수 있지만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진정시킬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10:36) 하셨는데 밖의 원수도 원수려니와 내 안의 나를 넘어뜨리려는 원수가 더 무서운 것입니다. 성도에게는 욕망과 세상이라는 안팎의 원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의 사건에서 마음의 소요와 진정의 법칙을 발견합니다.
먼저 마음의 소요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1. 욕심 때문입니다.
세상의 소요도 자기 이익에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24절 “즉 데메드리오라 하는 어떤 은장색이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들어 직공들로 적지 않은 벌이를 하게 하더니” 아데미 우상은 제우스 신의 딸입니다. 에베소인들이 이 아데미신을 섬겼고 그 전각의 크기도 엄청났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음식이나 상품을 판다든가 하여 이익을 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 은감실이라는 은으로 아데미 신전 모형을 만들어 파는 사람이 가장 수입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 믿어 수입이 줄자 우두머리인 데메드리오가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마치 바울이 빌립보에서 귀신들린 여종을 고쳐주자 수입원이 끊어졌다고 바울을 고소하여 매 때리고 옥에 가두었던 것과 같습니다.
마음의 소요도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이 없다면 갈등도 방황도 소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1:14) 그랬고 바울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6:10)했습니다. 돈 만이 아닙니다. 다른 모든 시험이 각종 욕심에서 옵니다.
2. 선동 때문입니다.
25절 “그가 그 직공들과 이러한 영업하는 자들을 모아 이르되” 데메드리오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선동하는 장면입니다. 데모나 집회가 일어나는 것도 선동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무슨 집회에 수십 만 명이 모였다고 하면 이것은 거대한 조직이나 대형 방송사와 언론이 개입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나라가 산업화 될 때 농촌에서 올라온 순박한 인력들은 데모도 시위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의식이 깨어나기 시작했고 드디어 거대한 노동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잘못이라기보다 동기부여와 선동이 얼마나 위력적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송 언론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방송 언론이 잘못되면 백성들은 거기에 세뇌되어 중대한 실수를 저지릅니다. 방송 언론이 정치적 도구나 세속화의 도구나 모 방송사처럼 우상과 미신을 선전하거나 언론인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전락되어 공익에 반하게 될 때 온 세상은 그것에 세뇌되고 미혹되어 함께 춤추다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데메드리오의 선동에 의해 사람들은 위기감과 분노가 극에 달해 아데미신의 이름을 여러 시간 부르며 여호와 하나님을 증오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돕던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잡아가지고 일제히 연극장으로 달려 들어갔습니다. 이 연극장은 25,0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대형건축물입니다. 악이 극도에 달한 그들이 거기서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선동에 의해 모였기 때문에 대부분 어찌하여 모였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잠자는 욕망을 선동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세상의 정욕입니다. 돈 쾌락 권력 명예 등 세상의 온갖 정욕이 인간의 욕망을 선동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정과 욕심을 못 박았지만 조금만 방심하면 세상의 미혹에 선동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세상을 멀리해야 합니다. 악한 환경과 타락한 잡지나 잘못된 영상매체를 멀리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세상의 선동에 빠져 그 마음에 하나님께서 원치 아니하시는 커다란 소동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 세상이 얼마나 욕망을 부추기는지 가능하기만 하다면 눈을 감고 살고 귀를 막고 살면 좋겠습니다.
그럼 이런 죄악의 소동을 어떻게 진정시킬까요?
1. 율법으로는 불가능합니다.
30-31절 “바울이 백성 가운데로 들어가고자 하나 제자들이 말리고 또 아시아 관원 중에 바울의 친구된 어떤 이들이 그에게 통지하여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바울이 해명하려고 연극장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무모하지만 그렇게 하려한 것은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세상은 로마의 시민권자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친분이 있는 관리들이 말렸습니다. 고위직에 있는 숨은 천사들이었습니다. 왜 관리들이 말렸을까요? 소요사태란 법을 초월하여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사자 바울의 등장으로 더욱 문제가 커질 수 있습니다. 원수가 앞에 있는데 그들이 순진무구하게 법을 지켜 줄 것 같습니까?
이처럼 마음의 소요는 율법으로 되지 않습니다. 율법이 아무리 바르고 엄할지라도 죄악의 소요는 율법을 초월하고 맙니다. 세상에 선동된 욕망이 양심의 경계선을 넘는 일이란 어렵지 않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통해서 무엇이 의고 무엇이 죄인지 아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이 가입하면 인간은 더 죄 되게 되고 더 넘어지고 더 사망의 열매를 맺고 시도 때도 없는 죄책으로 더욱 심각한 상황에 봉착합니다.
2. 자기 의로도 불가능합니다.
33절 “유대인들이 무리 가운데서 알렉산더를 권하여 앞으로 밀어내니 알렉산더가 손짓하며 백성에게 발명하려 하나” 유대인들이 말쟁이 알렉산더를 사람들 앞에 세우려 한 것은 바울로 인한 적개심이 자기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은 죄가 없고 기독교인들이 아니라는 것을 변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인들의 생각에는 유대인이나 기독교인이나 한 동류였습니다. 왜냐하면 구약과 신약의 차이일 뿐 유대인이 섬기는 하나님 역시 우상을 인정하지 않는 동일한 유일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변명하고 피하려 해도 에베소인들의 소요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도리어 알렉산더의 등장으로 에베소인들은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를 외치며 두 시간 동안이나 계속했습니다. 사태만 더욱 악화시켰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합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인간의 의는 죄나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죄가 처리 받아야 하듯 인간의 의도 처리 받아야 합니다. 나는 죄가 없다 혹은 죄 짓지 않겠다고 자기의 의를 주장해도 마음의 소동은 이길 수 없습니다. 자기 의로는 결코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 그럴수록 몇 갑절로 넘어지게 될 뿐입니다. 더욱 저주 아래 놓일 뿐입니다. 죄는 은혜로 이기는 것이지 스스로 이기려고 하면 더 넘어집니다.
3. 복음으로 다독거려 주어야 합니다.
35절 “서기장이 무리를 안돈시키고 이르되 에베소 사람들아 에베소 성이 큰 아데미와 및 쓰스에게서 내려온 우상의 전각지기가 된 줄을 누가 알지 못하겠느냐” 여기 서기장은 에베소 시의회에서 선출된 최고 행정관입니다. 그리고 에베소 사람들은 아데미의 전각지기가 된 것에 대해서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서기장은 당신들이 전각지기임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니 진정하라고 자존심을 다독거리며 높여주었습니다. 그러자 성난 소요는 잠잠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소요자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 높여주고 존경해야 합니다. 세상의 악한 사람도 그들이 자존감을 느낄 수 있도록 사랑하고 돕고 높여주면 잠잠해집니다. 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반대하지 않고 도와주려고 합니다. 그들을 정면으로 대항해서 얻을 것은 없습니다. 악인에게는 선과 사랑이 최고의 약인 것입니다.
사사시대에 에브라임 지파가 기드온에게 전쟁에 자기들을 부르지 않았다고 대항할 때 겸손한 기드온은 교만한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고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의 이제 행한 일이 너희의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삿8:2) 하면서 높여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완고한 에브라임 지파이건만 잠잠해졌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다독거려 주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복음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셨다는 복음입니다. 우리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복음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다는 복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높이 되신 예수 안에서 영광스럽게 되었다는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이 없다는 복음입니다. 우리 안에 욕심이 여전하고 세상이 우리를 소동하고 마귀가 시험한다 할지라도 복음으로 나를 다독거리며 나는 예수 안에서 구원 받았다는 믿음에 서야 합니다.
4. 성령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37절 “전각의 물건을 도적질하지도 아니하였고 우리 여신을 훼방하지도 아니한 이 사람들을 너희가 잡아왔으니” 당시 유대인들 중에는 이방 우상을 파괴하거나 신전의 물건을 훔쳐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기드온처럼 우상을 쳐부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우상을 철저히 금지시켰지만 우상에 대한 물리적인 훼손이나 비방을 교훈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생명의 예수를 전하는데 힘썼습니다. 그것은 선교적 지혜였습니다.
궁극적으로 보이는 우상은 사라져야 합니다. 그러나 보이는 우상을 허락 없이 훼손하면 분쟁과 이미지 실추와 선교적 문제가 생깁니다. 에베소에서 마술하는 사람들이 회개하여 마술책들을 불사름 같이 스스로 불사르도록 해야 합니다. 누가 보아도 바울은 국가의 법을 위법한 일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성도가 지켜야 할 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이 법만 지키면 어떤 악의 권세도 마음에 소요를 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롬8:1-2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했습니다.
갈5:16에도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했습니다. 성령의 법은 어떻게 지킵니까? 늘 성령 충만함으로 지킵니다. 늘 성령 충만하면 성령께서 지배해 주셔서 범죄하지 않게 살게 하십니다. 그런데 게으르거나 교만하여 성령을 소멸하면 그 순간부터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5. 말씀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38-39절 “만일 데메드리오와 및 그와 함께 있는 직공들이 누구에게 송사할 것이 있거든 재판 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피차 고소할 것이요 만일 그 외에 무엇을 원하거든 정식으로 민회에서 결단할지라” 이렇게 불법으로 소동할 것이 아니라 고소할 일이 있다면 재판날도 있고 총독들도 있으니 적법한 절차를 따라 고소하고 그 정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면 민회에 청원하여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당시 에베소의 민회는 시의원들로 구성된 자치기관으로 매월 세 번씩 모여서 그 도시의 행정 사무 일체를 논하였습니다. 그런데 불법 집회가 되면 서기장이 상부에 보고할 재료도 없고 에베소의 자치권도 박탈될 위험도 있을 뿐 아니라 서기장에게 문책이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서기장이 나서서 소요를 진정시킨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지혜롭고 책임감 있는 말입니까? 이런 말씀이 뇌리에 꽉차 있다면 섣부른 행동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국가나 사회나 단체나 가정이나 이런 지혜로운 사람이 있으면 문제가 없습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지혜로운 사람이 있어 합리적으로라도 이해시켜야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난동하는 사람의 마음에 지혜와 지식을 계속 충족시켜 주면 그 사람 역시 지혜로운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영적으로 비유해 본다면 말씀 충만입니다. 무지하고 완악한 인간의 마음에 늘 하나님 말씀으로 충만하게 하면 현명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을 장악하고 있으면 다른 어두움과 어리석음과 이단이 틈탈 수 없습니다. 기도만 많이 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말씀으로도 충만해야 합니다. 딤전4:5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했기 때문입니다. 늘 깨어 기도하고 성경을 읽거나 설교나 간증을 들으면서 눈물 흘려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하여 최후의 심판과 책임감도 느끼고 거룩한 두려움을 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에는 세상의 어떤 선동도 틈탈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화 된 에베소에 소요가 일어난 것과 같이 우리가 방심하면 믿는 심령에도 죄악의 소동이 일어납니다. 주님은 갈릴리 바다도 잔잔케 하신 전능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의 소요도 잔잔케 하실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 세상이 선동하고 마귀가 선동한다 할지라도 십자가 복음으로 기도로 말씀으로 사랑으로 지혜로 다스려서 온전한 평강을 받아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