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은사와 활용하는 법 (행 21:1-14)
예언은사와 활용하는 법 (행 21:1-14)
이 시간에 “예언은사와 활용하는 법”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예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동안 한국교회가 예언에 대한 유익도 많았지만 피해도 많아 상당수의 사람들이 기피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예언은사입니다. 그래서 믿음 말씀 지혜 지식의 은사는 인정해도 방언과 예언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상한 고백자들도 생겨났습니다. 고전 12장에 나오는 아홉 가지 은사 중 일부만 믿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동안 잘못된 예언이 빚어낸 대단히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언에는 기록된 성경과 같은 틀림없는 절대적 예언도 있고 고전 12장이나 14장에 나오는 은사적 예언도 있으며 혹은 심령 따라 하는 거짓예언 혹은 악령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예언 아닌 예언도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아 행하는 자들이라 할지라도 100% 틀림없다고 장담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늘 전쟁터라 각인의 영적 상태는 시시각각으로 다를 수 있어 착각할 수 있고 잘못 해석하여 그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언의 은사는 존재하며 바로만 한다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에도 예언에 관한 갈등이 나타나 있습니다.
예언은사에 대한 성경의 말씀은 무엇일까요?
1. 성령의 은사 중 하나입니다.
4절에 “제자들을 찾아 거기서 이레를 머물더니 그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 하더라”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말했는데 이것이 예언입니다. 예언은 바로 했으나 해석을 잘못해서 문제가 됐을 뿐 바울이 너희들의 은사가 잘못 되었다거나 인정할 수 없는 은사라면서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고전12:10에도 “어떤 이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이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이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이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 그랬습니다. 성경은 지혜와 지식의 말씀 말고도 따로 예언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2. 초대교회 예배 순서 중의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고전14:26에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꼬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여기서 계시나 통역은 예언의 성격입니다. 혹자는 설교를 예언이라고 하면서 부정하는데 여기 말씀에 가르치는 말씀과 방언과 통역 등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와 같이 다양한 순서가 진행될 수 있도록 여러 면에서 구비되고 성숙한 신앙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3. 잘 활용하면 유익이 됩니다.
고전14:1-5에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했습니다.
고전14:24-25에는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이러한 현상은 은사적 예언이 선포될 때만 가능한 현상입니다.
예언사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때 신자는 자기를 돌아보며 회개하거나 어려운 상황에서도 위로를 받게 되며 불신자들도 너희 중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소리치며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 여쭈어야지 귀신 들린 점쟁이에게 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답답한 것이 풀리는 것이 아니라 헛소리 들어 시험만 듭니다. 참된 예언은사는 개인과 모두에게 큰 유익을 줍니다.
4. 멸시하지 말고 참고해야 합니다.
살전5:20에 “예언을 멸시치 말”라 했습니다. 예언은 기록된 성경 말씀과 동급일 수는 없으나 무시하지 말고 참고할 사항입니다. 예언은 틀리지 않는 것이 생명입니다. 그러나 예언이 반드시 성취되어야만 참 예언은 아닙니다. 예언은 바뀌기도 하며 그것이 은혜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언의 목적은 우리 믿음을 온전케 하는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니느웨 성 사람들도 요나의 외침을 듣고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40일 후에 멸망하리라는 말씀을 철회하셨습니다. 또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처치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왕하20:1) 하지만, 그러나 히스기야가 통곡하며 기도하자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 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을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왕하20:5-6)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사신들에게 왕궁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을 때 예언은 또 다시 부정으로 바뀝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무릇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을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왕하20:17-18) 그러므로 예언은 성취되지 않고 틀리는 것도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참고해야 할 것입니다.
5. 주신 뜻을 곡해해서는 안 됩니다.
10-13절의 내용입니다. 선지자 아가보가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할 때 거기 모인 사람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했습니다. 이 때 바울은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다고 말하며 그들을 물리쳤습니다.
이 부분을 자세히 설명하면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 하거늘” 이 부분은 예언의 은사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그 말을 듣고 그 곳 사람들로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 권하니” 이 부분은 예언을 잘못 해석하고 적용한 예가 됩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예언을 바로 적용한 모습입니다. 그러자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우리가 잘 모를 때는 이렇게 하여야 합니다.
이처럼 예언이 바르지만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고 혹은 맞지만 해석이나 적용을 잘못할 수도 있습니다. 4절의 두로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결박당할 것에 대한 성령의 감동을 받았지만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자기 뜻대로 해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실 것에 대해 베드로가 막은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성령의 예언을 하고도 잘못된 사역을 하는 경우가 됩니다.
여러 예언자들과 바울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영적 깊이의 차이입니다. 바울은 전체를 알았지만 예언자들은 부분적으로만 알았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얼마나 사랑의 사람이며 영적으로 성숙하고 신령한 자인가를 알게 됩니다. 사랑하면 온전히 알리라 했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시스를 닮으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프란시스처럼 큰 은혜의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프란시스 만큼은 못했습니다. 무슨 차이일까요? 사랑의 차이였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사랑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온전히 신령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14:29에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분변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언으로 지적하실 때 내게 해당사항이 없는 말씀처럼 들리는 경우가 있어도 성령께서 하신 예언이라면 깊이 생각해 보면 중요한 지적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언을 듣고 틀렸다고 속단하지 말고 깊이 생각해 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6. 바른 예언을 위해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8-9절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그에게 딸 넷이 있으니 처녀로 예언하는 자라” 여기 말씀과 성령의 조화를 봅니다. 전도자 빌립이니 말씀의 상징입니다. 말씀 충만해야 예언도 잘 활용할 수 있고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또 딸들을 보세요. 그들은 그 유명한 전도자 빌립의 지도를 받아 신앙생활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시집가지 않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사는 처녀들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영이 맑겠습니까? 그 딸들은 세상 사랑도 염려도 없습니다. 바울이 말했듯 결혼하면 신경 써야 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남편이고 자식이고 친척이고 얼마나 분주하고 염려해야 할 것들이 많은지 예언자의 마음 판으로는 심히 부적합할 때가 많습니다. 내 생각의 소리가 더 크기 때문입니다. 독신 처녀라고 한결같이 영이 맑다 할 수는 없으나 예언자의 마음이 어떠해야 한다는 귀한 교훈을 줍니다.
그러므로 예언하는 자는 독신이든 그렇지 않든 중요한 것은 항상 마음을 깨끗이 하고 평안하고 안정된 가운데 하나님께 도구로 맡기는 자세여야 합니다. 아직 영적 수준이 낮은 상태에서는 경험 축적과 혼자만의 기도제목을 얻기 위한 수단 정도로 연습하고 있으면 준비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은 예언자의 상태에 따라 틀릴 가능성이 있기에 기도로 돕고 틀린다 해도 이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맹신하지 말고 그러나 멸시치 말고 깊이 생각하고 참고하며 기도제목으로 삼음이 적당할 것입니다.
예언사역이 길흉화복을 점치거나 육신을 위해 실용적으로 사용되는 등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면 나중에는 사탄에게 이용 당합니다. 과거 한국교회의 상당수의 예언이 이런 실용 예언이었습니다. 예수 점쟁이가 되면 안 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신앙을 바로 잡아주는 영적 터치가 되어야 합니다. 영적으로만 바로 잡아 주면 나머지 모든 것은 묻지 않아도 아버지께서 다 알아서 형통하게 해 주십니다.
예언은사가 회복 된다면 불신자들도 더 많이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당식이 아닌 영적지도의 참 예언이 회복 된다면 성도들도 각성하여 참 신앙에 신경을 쓰게 될 것입니다. 이 때 성도들은 자기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심정과 손길을 느끼며 현실감 있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회개하고 더욱 굳센 믿음에 서고 사명에 더욱 충성하게 되며 궁금증을 물으러 무당에게 달려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영적 본말을 파악하고 교만하거나 불필요한 일에 신경 쓰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예언이 잘못되거나 상당히 부정된 한국교회가 받는 고통은 바로 혼란입니다. 무당식 예언으로 혼란하고 혹은 예언의 부재로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 혼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위하여 예언의 선물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예언을 두고 갈등했던 분문의 혼란과 같은 혼란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길흉화복이나 심령을 따라 하거나 사단의 영을 받은 잘못된 예언은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바른 예언으로 성도들을 바로 세워 교회에 덕을 끼치는 참된 예언자가 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