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메신저 (행 21:37-40)
위대한 메신저 (행 21:37-40)
[본문] 37 바울을 데리고 영문으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더러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뇨 가로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38 그러면 네가 이전에 난을 일으켜 사천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39 바울이 가로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성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40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크게 종용히 한 후에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여 가로되
이 시간에 “위대한 메신저”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메신저(messenger)란 말씀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잘 전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귀한 양약이라도 그 영양분이 체내에 흡수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는 것처럼 우리가 진리를 가졌다 해도 영혼들에게 바로 전달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귀한 만큼 전달 역시 그만큼 좋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의 전도가 허공을 치는 일밖에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을 잡아 죽이려는 성난 무리들이 나옵니다. 35절에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포행을 인하여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 하자고 외치며 따라감 이러라” 얼마나 악감을 품었으면 영문까지 따라가며 소리질렀을까요? 어떤 좋은 말도 통할 수 없는 대상입니다. 준비된 대상에게 전도하기도 쉽지 않는데 극도의 악감을 가진 대중에게 쇠사슬에 매인 최악의 조건에서 바울이 전도했다는 것은 우리 전도자에게 주는 메시지가 큽니다.
그럼, 바울은 어떻게 전도했나요?
1. 기회를 만들어서 했습니다.
37절 “바울을 데리고 영문으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이 때가 언제입니까? 바울을 죽이려는 무리를 피해 군대에 둘러싸여 피하는 순간입니다. 그 긴박한 순간인데 바울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전도의 기회로 사용했습니다. 서 있는 시간도 아닙니다. 끌려가는 시간입니다. 가장 불리한 시간입니다. 분위기조차도 없습니다. 불과 몇 십초 지나면 상황은 끝나고 지나가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기회를 만들어 낸다고 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바울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그래서 그 믿음이 위대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고 교훈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6)고 교훈했습니다. 원문에는 기회를 사라는 의미입니다. 전도할 기회를 만들라는 말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얼마나 바쁩니까? 가난했을 때는 가난해서 바빴다지만 지금은 살만하면서도 더 바쁘게 삽니다. 애들과 대화할 시간도 없고 밥먹을 시간도 없고 예배드릴 시간도 없고 기도할 시간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건 비극이지 축복이 아닙니다. 정신 차려야 합니다. 김만준이 부른 '모모'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현대인들은 뭔가에 홀려 잘못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우리도 전도할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어떻게 만듭니까? 바울이 어떻게 했는가를 보세요. 아주 자연스럽게 했습니다.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을 전도의 기회로 보았습니다. 자기를 죽이려는 악인을 만나더라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범사에 만남을 하나님이 뜻이 계셔서 만나게 하신 것으로 보셔야 합니다. 그래서 사소한 만남이라도 소홀하지 말고 소중한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날마다 기도해 주세요. 그저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소한 일로 오는 사람도 씽긋 웃어주시고 차라도 한 잔 빼 대접하세요. 왜 하나님이 붙여주신 영혼들을 소중히 여기지 못한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학교에서는 교사들이 아이들을 매일 위해서 기도했더니 전 교생이 예수 앞으로 돌아오고 많은 학생들이 사역자로 헌신했다고 합니다. 교사는 아이들을 하나님이 맡기신 양으로 보세요. 내 가게에 온 손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장부에 기록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맡겨진 부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관계된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맡겨주신 소중한 영혼들입니다. 아주 귀하게 여기세요. 밖에서 만나면 깜짝 놀랠만큼 귀히 여기세요. 내가 소속된 직장이나 단체도 이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매일 매일 부딪히며 만나는 사람들이 다 소중한 대상들입니다. 예수님처럼 소중히 여기면서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저기서 그물에 가득 가득한 풍어의 기쁨을 보게 될 것입니다.
2. 권세를 받아서 했습니다.
37-39절 “바울을 데리고 영문으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더러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뇨 가로되 네가 헬라 말을 아느냐 그러면 네가 이전에 난을 일으켜 사천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바울이 가로되 나는 유대인이라 소읍이 아닌 길리기아 다소 성의 시민이니 청컨대 백성에게 말하기를 허락하라 하니” 바울이 그냥 외치지 않고 천부장에게 말할 권세를 받아서 했습니다.
이처럼 말씀을 전달하려면 말할 권세를 받아야 합니다. 그 권세는 여러 방향에서 얻어집니다. 먼저 지혜로 얻어집니다. 어느 곳이든 조직이 있고 그 조직을 관장하는 자가 있습니다. 바울의 경우 권세 있는 천부장이 허용했으니 누가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행22:30에 총독을 대신해 산헤드린 공회까지도 소집할 정도였으니 당시 로마의 식민 치하에서 예루살렘을 담당한 천부장의 권세는 막강했습니다.
또 말할 권세는 사랑으로 얻어집니다. 온유한 자가 정복한다 했듯 말할 권세가 주어집니다. 사랑할 때 전도의 기회는 많아지고 전도의 힘은 더 강해집니다. 사랑하면 우스갯소리도 통합니다. 실수해도 청중이 다 알아서 좋게 해석합니다. 더구나 설교자를 위해서 생명 걸고 기도까지 해줍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능력으로 말할 권세가 생겨납니다. 말씀 전달에 능력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요? 고전2:3-5에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에서 두려워 떤 이유는 사람 무서워서가 아니라 인간이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만 나타나기 원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설교자가 가장 힘든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역사해 주시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부르짖고 또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이 능력 주시면 어떤 사람들도 그 말씀 앞에서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특별히 주일학교 교사들은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면 구제불능의 아이들이 양같이 변합니다. 어른들은 체면이라도 있지만 아이들은 그런 것도 없고 영적 분위기 그대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아이들 때문에 스트레스 받고 피곤해서 견딜 수 없습니다. 달래도 안 되고 회초리를 들어도 안 됩니다. 통제가 안 됩니다. 기도부족입니다. 그래서 떠들면 누구 탓도 아니요 내 탓입니다.
바울처럼 성령의 권세와 능력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순절에 베드로 얼마나 놀라웠습니까? 수천 명이 가슴을 치며 회개했습니다. 바울이 천부장에게 길리기아 다소성 시민으로 그 권리를 요구한 것처럼 우리는 천국의 시민이니 하나님께 그 권세를 요구할 자격이 있습니다. 천부장의 권세도 그러했거늘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 권세를 받아서 한다면 그 파워란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3. 높은 위치에서 했습니다.
40절 “천부장이 허락하거늘 바울이 층대 위에 서서” 당시 로마군의 진영은 예루살렘 성전 서북쪽 언덕에 있는 안토니아 요새였습니다. 성전도 높은 곳이지만 그곳은 더 높습니다. 진영으로 올라가는 돌계단이 잘 만들어져 있으니 그 위에 서면 모든 무리들이 보이고 무리들도 바울이 잘 보이니 말씀 전달로는 최적의 환경입니다.
우리 주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눅5:3에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셨다고 했습니다. 요즘 교회들을 보면 예배당 바닥을 수평이 아니고 경사지게 설계합니다. 이처럼 해변이니 모래밭이 경사지고 배에 올라 증거하시니 말씀이 잘 전달 되는 구조입니다. 바다는 멀리서도 소리가 잘 전달 되는 곳입니다. 특별한 음향시설이 없던 그 시대지만 이렇게 지형지물을 잘 이용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연단이나 지형지물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 수준이 더 중요합니다. 진정 높은 곳에서 외쳐야 합니다. 죄악에 마음을 두고서 아무리 외쳐야 목만 아픕니다. 은혜가 없으니 듣는 사람들도 힘듭니다. 높이 되신 예수께서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이 보고 듣는 이것을(성령) 부어주신 것처럼 저 높은 곳을 향해 날마다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신앙 수준은 저 높은 곳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40:9에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했습니다. 여기 높은 산에 오르라는 말씀은 꼭 문자적인 의미 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천국에도 높은 산이 있습니다. 요한이 천국에서 천사를 따라 높은 산에 올라갔습니다. 계21:10의 말씀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높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의 수준이 높습니다. 이 높은 곳에서 외쳐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을 듣고 마음을 엽니다. 그래야 말씀을 듣고 흐느껴 웁니다. 그래야 말씀을 듣고 순종합니다. 그래야 말씀을 듣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갑니다.
영적인 세계는 흐름이 있습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끼치려면 높은 곳에 서야 하고 은혜를 받으려면 내가 낮아져야 은혜를 받습니다. 아브라함도 멜기세덱 앞에 엎드려 절하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히7:7에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그러므로 기도해 줄 때 마음의 무릎을 꿇어야 기적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세우셨다면 나이나 학문에 상관 없이 주의 종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에게 복이 흘러옵니다. 참된 메신저가 되려면 높은 곳에 오르시기 바랍니다.
4. 보조적인 방법을 활용했습니다.
40절 “백성에게 손짓하여 크게 종용히 한 후에” 손짓은 제스처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제스처를 썼습니다. 바울이 제스처를 썼다면 우리도 써도 괜찮겠지요? 입으로만 하는 것보다 적당한 표정과 손짓 몸짓을 활용하면 더 전달이 잘 됩니다. 당시 사람들은 공용어인 헬라어는 물론 모국어를 읽거나 쓸 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천부장에게 헬라어로 말을 걸어온 것 자체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대단히 유식한 사람으로 느낀 것이죠. 이런 무식 대중을 향한 메시지 전달에는 보조적 방법이야 말로 대단히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귀한 보조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각종 은사입니다. 막16:20에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했습니다. 성령의 은사가 나타날 때 복음을 더 확실히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 완악한 이슬람 지역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면서 신유은사를 활용하니까 회개하더랍니다.
은사가 구원의 방법은 아닙니다. 그러나 은사가 복음전도를 돕는 방법이 됩니다. 성경을 기록하는 은사는 종결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도우시는 은사는 계속 되고 있습니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세계에 개혁주의 교단이 더 컸는데 지금은 개혁교단은 성장을 멈추고 은사를 강조하는 그 조그맣던 오순절 교단은 수억을 헤아릴 만큼 몇 십배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인구는 갑절 또 갑절로 증가했지만 개혁주의교단은 정체상태입니다.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은사를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선교지에서는 놀라운 기적이 계속하여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들에게 효과적인 사역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은사 외에도 활용 가능한 모든 은사를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5. 그들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40절 “백성에게 손짓하여 크게 종용히 한 후에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여 가로되” 당시 통용되던 언어는 여러 가지였습니다. 과연 어떤 말로 할 것이냐 잘 선택해야 했습니다. 바울은 당시 통용되던 코이네 헬라어로 말 할 수 있었지만 대상이 히브리인이기 때문에 히브리 방언으로 말했습니다. 당시 사용하던 유대 말은 아람화 된 히브리어였습니다. 즉 그들의 언어를 사용할 때 그 떠들던 무리들은 조용하면서 귀를 기울였습니다.
언어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고전14:9에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했어요. 내용이 좋아도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수준에 맞게 해야 합니다. 어른에게는 어른에 맞게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에게 맞게 지식인에게는 지식인에 맞게 배움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또 그들에게 맞게 해야 합니다. 진리는 변할 수 없지만 전달하는 법은 달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더 다가가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책상머리에서 독서도 필요하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청중의 삶의 현장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처한 형편이 무엇이며 무엇을 고민하고 있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습관, 그들의 언어, 그들의 사고, 그들의 상처, 그들의 역사,,, 그래야 그들의 심부에 닿는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현장을 모르면 어떤 말씀도 상관 없는 메시지로 들릴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 구주이실 뿐 아니라 위대한 전도자이셨습니다. 우리 주님에게서 배우십시다. 그리고 쇠사슬에 매인 최악의 환경에서 자기를 증오하는 최악의 대중을 상대로 가장 슬기롭게 복음을 전한 바울에게서 배웁시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능력과 권세를 받아서 신앙의 높은 수준에서 보조적 방법을 무시하지 말고 그들의 언어를 사용하여 전한 복음이 온전히 아름답게 열매 맺는 위대한 메신저가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