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 생각의 특징 (행 24:10-21)
영의 생각의 특징 (행 24:10-21)
이 시간에 “영의 생각의 특징”이라는 제목입니다. 벨릭스 법정에 두 종류의 주장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 마음에 두 종류의 생각이 있습니다. 하나는 영의 생각이요 다른 하나는 육신의 생각입니다. 롬8:6에“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육신을 따르지 않고 영을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이 있고 평안이 있고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살려면 재판을 잘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 안에서 재판관입니다. 판단을 잘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서 뇌물이 재판을 굽게 했습니다. 이처럼 세상 것에 넘어가 판단을 잘못하면 잘못된 길로 가게 됩니다.
그럼 영의 생각은 어떤 것입니까?
1. 무시받기 일수입니다.
10절 “총독이 바울에게 머리로 표시하여 말하라 하니” 총독이 바울에게 변론할 기회를 주는 장면인데 오만하게도 고갯짓으로 지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오해를 덜기 위하여 그리고 총독 자기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행동입니다. 총독의 하찮은 주변 생각 때문에 존중 받고 보호받아야 할 바울이 무시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서 영의 생각이 늘 그런 취급을 받습니다. 삶의 우선순위에 있어서 늘 상 하찮은 육신적인 일이 먼저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까보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그런 것이 더 우선적이려고 합니다. 영의 생각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2. 항상 긍정적입니다.
“그가 대답하되 당신이 여러 해 전부터 이 민족의 재판장 된 것을 내가 알고 내 사건에 대하여 기쁘게 변명하나이다” 바울은 혐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보면 이 재판은 바울에게 불리한 재판입니다. 고소자가 유대 나라의 대표급들이요, 수효도 많고 더구나 재판관은 악해서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낙심치 않았습니다. 그는 벨릭스가 유대 총독으로 부임한지 6년이 지났다는 이 한 가지에다 소망을 걸었습니다. 6년이면 알만한 것은 다 알 때가 아닙니까? 유대인들이 어떤 자들이여 그들이 믿는 교리가 무엇이고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논지가 무엇인지 충분히 알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이처럼 영의 생각은 긍정적입니다. 믿음에 서 있고 진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다 안 된다고 해도 진리 안에서 되는 이유를 믿습니다.
3.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11절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 이틀 밖에 못되었고” 예루살렘에 선동하기 위해 올라간 것이 아니라 예배하러 간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온지 불과 열이틀 밖에 되지 못하였다는 것은 소동할 시간조차 없었음을 뜻합니다. 예루살렘 상경 목적이 종교적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구약의 제사를 드리려고 예루살렘에 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영의 생각의 단면을 보여줍니다. 거듭난 영혼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이기를 원합니다. 영의 생각대로만 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4. 잔잔하고 평안합니다.
12절 “저희는 내가 성전에서 아무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과 또는 성중에서 무리를 소동케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 말은 바울이 성전이나 회당 혹은 성중에서까지라도 소동한 적이 없고 거기에 대한 증인이나 고소자도 없다는 말입니다. 소동했다면 그들은 유대인들이었지 바울은 아니었습니다.
이처럼 영은 혼란스럽지 않고 언제나 화평하고 의롭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견고합니다. 지금 거듭난 영을 말하는 것입니다. 불신자의 영은 육체와 함께 타락한 것이며 신비를 접해도 그것은 악신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은 평탄합니다.
5. 아무도 정죄할 수 없습니다.
13절 “이제 나를 송사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저희가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혐의가 없으므로 정죄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고전 2장에 이런 말씀이 있지요.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15절)
예수 안에서 새 사람이 되었으니 누가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보다 100배나 좋은 사람을 누가 비난할 수 잇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도는 보혈로서도 의인이요, 성령을 딸서 사니 삶으로서도 의인입니다. 영에 속한 사람이 되면 누가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를 시인하는 믿음입니다.
14절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리킵니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는 바로 이것입니다. 유대교는 아직도 구약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를 만났으므로 신약입니다.
예수를 시인하는 것은 거듭난 영혼의 본능입니다. 그래서 거듭난 영혼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데 조금의 불편도 어색도 없어요.
7. 성경을 다 믿습니다.
14절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육신은 자기 생각에 따라 가려 믿으려 합니다. 그래서 성경의 기적을 부인합니다. 이건 이성에 기초한 신신학적 이론들입니다. 신신학자들은 홍해가 갈라진 사건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적도 믿지 않습니다. 지금도 놀라운 이적들이 무수히 나타나고 있는데도 그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식의 눈만 밝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을 따라 살면 성경이 믿어집니다. 구약을 믿을 뿐 아니라 구약이 의미하는 진정한 내용까지 믿어집니다. 성경을 마음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머리는 육이요 마음은 영입니다. 마음으로 믿으면 성경이 다 믿어집니다.
8. 부활을 믿습니다.
15-16절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바울이 부활을 다시 언급한 것은 유대인들의 고소가 교리적으로도 타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진 믿음을 바울도 가졌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힘쓰노라”는 의미는 늘 습관적으로 연습하고 훈련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영적인 사람은 미래의 부활을 믿을 뿐 아니라 현재의 부활을 경험하며 삽니다(요5:25). 빌립보서를 보면 바울이 이 부활을 경험하며 살기 위해서 얼마나 힘썼습니까? 믿을 정도가 아니라 습관적으로 매일 부활을 추구하며 부활 생명 가운데 사는데 바울이 교리적으로 고소당할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9. 사랑합니다.
17절 “여러 해 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이 물질은 예루살렘 교인을 위한 이방교회의 연보입니다. 자기를 위해 쓰려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의 사랑입니다.
이처럼 영의 사람은 사랑합니다. 육의 사람은 이해관계에 따라서 행동하지만 우리 속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가지고 행합니다. 그리고 성도는 예수 안에서 엄청난 복을 받은 사람들이며 금과 은이 있든지 없든지 예수의 이름으로 줄 것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의 생각은 나는 복 받은 사람이다. 나는 아버지 의 뜻이면 머든지 누릴 수 있고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10. 해할 자가 없습니다.
18-21절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여기 있는 유대인들은 증인도 고소자도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소동을 일으킨 당사자들인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 중에 한 사람도 바울이 종교적이든 정치적이든 소요를 일으킨 증거를 본 사람이 없습니다. 지난 번 그들에게 유리한 공회에서조차도 그런 증거를 내놓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성령으로 사는 자를 해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지키시매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속히 영에 속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모든 올무에서 벗어나는 길입니다.
11.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삽니다.
21절 “오직 내가 저희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하여 오늘 너희 앞에 심문을 받는다고 한 이 한 소리가 있을 따름이니이다” 부활을 전하는 것 외에 법적으로 아무 혐의가 없다는 바울의 증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만 전해야 합니다. 다른 것 때문에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교리도 교단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도 보는 관점에 따라 해석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기독교의 기본 교리에 위배되지 않고 바르게 예수를 전하고 있다면 서로의 다양성은 서로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외침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외침과 메아리만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앞에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가 놓여 있습니다. 어느 편을 택하시렵니까? 육신을 따르면 죽습니다. 영을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더욱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영의 사람이 되어 생명과 평안과 하나님의 기쁨과 천국의 사람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