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만나지 못하면 (행 26:1-23)
예수를 만나지 못하면 (행 26:1-23)
이 시간 “예수를 만나지 못하면”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본문은 바울이 아그립바왕 앞에서 변론하는 장면인데 이 변론은 예루살렘에서 붙잡힌 후 무려 다섯 번째 변론입니다. 이렇게 논쟁하는 그들의 진정한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예수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극적인 만남은 없었을지라도 어떻게든 만나야 하는데 그 만남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예수 만나기 전에 얼마나 율법에서 방황하고 교회를 핍박했습니까? 이처럼 바울을 박해하던 유대인들도 그들이 그토록 소망하던 메시아였음에도 예수를 알지 못하니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부활을 전하는 사람들을 핍박한 것입니다. 예수 만남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예수를 내 심령 깊이 만나지 못하면 정통신학을 가진 자라고 자부해도 종교의 껍데기만 가졌을 뿐인 것입니다. 본문을 달리 말하면 예수를 만났느냐 만나지 못했느냐 그 논쟁입니다.
그럼 예수를 만나지 못하면 어떤 자일까요?
1. 자리만 차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1절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너를 위하여 말하기를 네게 허락하노라 하니” 여기 허락하노라 한 말에서 권세를 느낍니다. 이 자리에는 총독과 왕과 제사장과 천부장 등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모두 유대와 관계된 관직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예수를 알지 못하니 자리만 차지하고 봉급만 축낼 뿐이었습니다.
2. 생명 없는 지식만 있을 뿐입니다.
2-3절 “아그립바 왕이여 유대인이 모든 송사하는 일을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 특히 당신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및 문제를 아심이니이다” 여기 아그립바는 신임 총독 베스도와는 달리 유대의 모든 관습에 대해서 익히 알고 있었고 종교적 상황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아그립바 앞에서 변론하게 됨을 다행스럽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식만 있으면 뭐합니까? 예수님의 메시아적 표적을 알고도 믿지 않으면 뭐합니까? 믿지 않는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을 알면 뭐하느냐는 말입니다. 성경을 외우고 교회헌법에 능통하고 정치적으로 존경 받는 인물일지라도 예수를 만나지 못했다면 생명 없는 지식일 뿐인 것입니다.
3. 생명 없는 열심만 있을 뿐입니다.
4-5절에서 바울은 지난 날 자신의 생명 없는 율법적 삶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
바울은 율법에 엄격한 종파인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거의 세속화되었지만 바울만은 그 규범대로 살려고 했습니다. 빌3:5-6에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율법으로는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생명이 없었고 도리어 해를 주었던 것입니다.
계란이라고 다 같은 것은 아니죠. 유정란이냐? 무정란이냐?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면 생명이 있고 없으면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일5:12에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했습니다. 종교적 모양으로 만족하지 마세요. 진정 예수를 구하시고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4. 예수 만남이 없으면 복을 알지 못합니다.
6-7절 “이제도 여기 서서 심문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 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당신들은 하나님이 죽은 사람 다시 살리심을 어찌하여 못 믿을 것으로 여기나이까”
유대인들의 어리석음이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을 통해서 그토록 약속하신 그 메시아이신데 자신들이 소망하던 메시아를 배척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당신들이 그토록 소망하던 메시아를 전한 것이 무슨 잘못이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잘못된 메시아관 때문에 메시아를 잘못 구한 것이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시는 왕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고야 그것을 알았습니다. 이처럼 예수를 만난 사람만이 성경이 진리라는 것을 압니다.
5. 육신으로만 행할 뿐입니다.
9-12절에서 바울은 자기가 얼마나 예수 이름을 핍박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여기 나사렛 예수라고 했는데 나사렛은 비천한 동네입니다. 예수가 거기서 났다고 하니까 본능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의 감동을 받지 못하면 큰 오해를 불러옵니다. 나는 바로 한다고 하지만 반대가 됩니다. 내 머리로 옳은데 옳은 것 아닙니다. 영은 영이고 육은 육입니다. 육신으로 성령의 일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노아가 산 위에 방주 만들 때 사람들은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고전2:14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했습니다. 설교하다가도 성령께서 본문과 상관이 없는 방향으로 이끄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은혜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알 것입니까? 로마인은 히브리인들을 이해할 수 없음 같습니다.
6. 예수를 깊이 만나지 않으면 체험해도 깨닫지 못합니다.
13-15절에 다메섹 도상의 예수 만난 체험을 말씀합니다. “왕이여 때가 정오나 되어 길에서 보니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동행들을 둘러 비추는지라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내가 대답하되 주여 뉘시니이까 주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사도행전에 이 간증이 세 번 나오는데 약간씩 다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말하고자 하는 강조점의 차이이지 상반된 기사가 아닙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무슨 소리도 들었고 무슨 영문 모를 빛에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바울만은 정확한 음성을 들었고 그 빛에 눈이 상했습니다.
그런 예가 요한복음 12장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 하늘에서 아버지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러나 곁에 섰던 무리들은 우뢰가 울었다 어떤 이는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 했습니다. 이 차이는 영적 수준의 차이인 것입니다. 말씀을 들어도 수준에 따라 달리 들립니다. 성경을 보아도 깨닫는 것이 다릅니다.
7. 예수를 알면 사명도 알게 됩니다.
16-18절에 바울이 사명 받는 장면입니다.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고야 자기 사명을 제대로 알았습니다. 전에는 기독교인을 박멸하는 것이 사명인 줄 알았습니다. 예수를 만나야 내 영혼 속에서 자기 사명이 끓어오르는 것입니다.
8. 예수를 알면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9-20절 “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진짜 알면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9. 예수를 알면 핍박도 기쁘게 받습니다.
21-23절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진정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하나님을 위해 산다는 착각에 빠진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그랬듯이 우리가 진정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모든 것이 소꿉장난과 같은 것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2-23)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주님이 함께 하시고 주님의 생명으로 사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모셨다면서 주님과 따로 행한다면 진실로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바울처럼 살아계신 예수님을 깊이 만나 온전히 변화 받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