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나눔을 실천하는 삶
제목 : 나눔을 실천하는 삶
성경 : (딤전6:18)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제가 군산에 오기 전 남양주에서 살았습니다, 남양주에서 버스를 타고 30분쯤 가면 청량리역이 나오고 청량리역 뒤쪽으로 돌아가면 588번 버스종점 주위에 시장이 있고 거기에는 날마다 거리의 부량자, 또는 빈민 자 들에게 음식을 제공 하는 곳이 있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밥퍼 목사로 잘 알려져 있는 최일도 목사님은 청량리 주변 거리의 빈민들에게 20년 가까이 무료로 밥을 퍼주고 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오나 끊임없이 계속되는 나눔의 실천 현장입니다.
밥 때가 되면 200미터가 넘는 줄을 서서 기다려야 먹을 수 있는데 어떻게 저렇게 많은 사람을 하루 이틀도 아니고 20여년을 한결같이 먹일 수 있는지 사람의 계산으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일이고 오직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감명만 받을 뿐입니다.
최일도 목사님 한사람의 나누고자 하는 생각이 이처럼 큰일을 이룬 것입니다. 최 일도 목사님도 처음부터 빈민구제나 사회정의구현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독일로 유학을 가서 학위를 마쳐 큰 교회의 목사가 되거나 교수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던 젊은 신학생이었습니다.
그러나 1988년 초겨울 그의 인생행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청량리역 광장을 지나다 한 할아버지가 자신의 앞에서 쓰러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도와드리지 못하고 일정대로 춘천행 기차를 탔습니다. 그러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자신의 앞에서 쓰러진 그 할아버지가 한밤이 될 때까지 그대로 누워있었던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멍하니 그 할아버지 앞에 멈추어 섰는데 마음속 깊은 곳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들리는 듯 했습니다.
“일도야, 언제까지 차가운 길바닥에 나를 눕혀 놓을 테냐”
이 낯선 목소리는 최 일도 목사님의 소명이 이 곳에 있음을 깨닫게 했습니다. 그는 등산 베낭을 내려놓고 버너와 코펠을 들고 광장에 앉아 라면을 끓이자 먹기 위해 40여 명의 걸인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후로 시작된 밥퍼 식당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 21년간 계속된 밥퍼 식당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은 작년 한해에만 무려 1만 7천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또 매월 1만원씩 후원하는 5800여 명의 손길로 2002년 병원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주말에만 실시하던 무료진료소가 이제는 개신교 첫 무료 병원인 ‘다일천사병원’으로 이어졌습니다.
최 일도 목사님은 말합니다. “민간의 후원은 언제나 환영하지만 정부에 손을 벌리고 싶지 않습니다. 하고 동사무소나 구청의 도움을 거절하고 미화원 아저씨들이 꼬깃꼬깃 모은 돈, 시장에서 노점상을 하는 분들의 작은 정성, 그런 분들의 정성이 하나씩 모여서 공동체를 이뤄가고 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생각하는 다일공동체는 ‘지금부터, 여기부터, 작은 것부터, 할 수 있는 것부터, 나부터’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대다수 한국 교회들이 교회를 확장하기위하여 땅을 사고 예배당을 크게 짓는데 몰두하고 교회 살림을 먼저 하고 남은 돈으로 선교하고 구제 하려고 하지만 항상 구호에 그치고 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마음은 원이로되 돈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른 것입니다”
밥퍼 목사님은 우리가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일을 실천하신 분이므로 더 존경스럽고 본받아야 할 모범이라 생각합니다.
그럼 우리는 왜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청년이 빵가게에 들어와서 이빵 저빵을 계속 뒤적거리며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종일토록 그러고 있는 모습을 본 주인이 참다못해 무엇을 찾고 있느냐고 묻자
청년이 하는 말이
"유통기한을 봤어요. 혹시 유통기한이 지난 빵을 진열하지 않았나 해서..."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고 있는 청년은 언뜻 보기에도 지저분했습니다. 오랫동안 씻지 않았는지 몸에선 이상한 냄새가 났지만 주인은 그런 청년을 내쫓지 않았습니다. 자정 무렵이 되자 청년은 조심스레 빵 하나를 집어 진열대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곤 시계가 열두 시를 막 넘어서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그 빵을 들고 계산대로 가져가더니 갑자기 밖으로 뛰어나갑니다.
힘이 없는지 얼마 못 가 털썩 주저앉는 청년의 어깨 위로 잠시 후 누군가의 손이 얹어졌습니다. 돌아보니 놀랍게도 편의점 주인이었습니다. 당황한 청년은 들고 있던 빵을 서둘러 내밀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며칠째 아무 것도 먹지 못해 훔쳤습니다. 이 빵은 자정이 넘었기 때문에 유통기한이 지난 거예요."
그러자 편의점 주인은 주머니에서 우유를 꺼내 건네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젊은이, 사랑에는 유통기한이 없으니 이것과 함께 천천히 들게나."
(딤전6:18)에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고 명령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명령대로 나누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초등학교를 어렵게 졸업한 뒤 농사꾼으로 남길 바라는 아버지께 혼자 일하면서 공부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일주일이 지나도록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채 무일푼으로 이곳 저곳 골목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때 작고 허름한 인쇄소 앞에서 만난 아저씨가 사정 이야기를 듣고는 "우리 인쇄소에서 일하거라. 나중에 돈이 모아지면 야간 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해주마" 라고 하셨습니다.
그 날부터 젊은이는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찬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고 자면서 아저씨의 인쇄소에서 일했습니다. 한 달이 지나 월급을 받았을 때 젊은이는 라면 한 상자를 사다놓고 나머지는 몽땅 저금했습니다. 신이 나서 일하는 동안 또 한 달이 지났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라면상자에 손을 넣어보니 라면이 두 개밖에 없었습니다. 그 중에서 한 개를 꺼냈는데 다음날 신기하게도 라면 두 개가 그대로 있었습니다. " 분명히 어제 하나를 끓여 먹었는데...." 생각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또 하나를 꺼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도 여전히 라면은 두 개였습니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라면 한 상자를 한 달이 넘게 먹은 것이었습니다. 다음날 젊은이는 일부러 하루 종일 라면 상자가 있는 쪽에서 일했습니다.
퇴근 무렵 아저씨가 젊은이를 불러 가게에 갔다오라고 심부름을 시키시기에 인쇄소밖에 나와 유리창 너머로 슬쩍 라면 상자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러자 슬금슬금 눈치를 보던 아저씨가 라면상자 쪽으로 걸어가더니 품속에서 라면 한 개를 꺼내 상자 속에 집어넣고는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실은 이 아저씨도 어린 사 남매와 병든 아내와 함께 월세 단칸방에 살고 있는 처지였지만 그 젊은이를 작게나마 돕고 있었습니다, .젊은이는 그 날 아저씨의 심부름도 잊은 채 인쇄소 옆 골목에 쭈구리고 앉아, 한참을 울었습니다.
성경 :(히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고 말씀 하십니다. 작은 것이지만 나누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주는 이도 받는 이도 기뻐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나눔의 삶이 행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좋은 생각'이라는 책에 실린 글을 옮깁니다, 집 근처에는 허름한 옷차림에 늘 아이를 업고서 붕어빵을 파는 아주머니가 있습니다. 다른데 보다 굽는 속도도 느리고 맛도 좀 떨어지지만 동네에서 늦게까지 하는 곳은 그곳 뿐이라 가끔 그곳에 들러 야참거리를 사곤 합니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어머니 친구 분들이 놀러와 말씀 나누시는 도중에 우연히 그 붕어빵 아주머니의 사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그 아주머니는 결혼해 행복하게 잘살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남편이 심장병으로 죽으면서 남편의 부하 직원에게 교묘한 방법으로 모든 재산을 가로채였다는 것입니다.
그 사연을 알게 된 다음부터는 다른 붕어빵 장사가 보여도 먹고 싶은 걸 꾹 참았다가 일부러 집 근처 그 붕어빵 아주머니께 들르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열한시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행색이 남루해 꼭 거지처럼 보이는 아이들 여럿이 그 붕어빵 아주머니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고 아주머니는 그 애들과 정답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슬쩍 다가갔더니 아주머니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네가 너희에게 줄 수 있는 건 팔다 남은 붕어빵밖에 없지만. 가슴만은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구나. 비록 지금은 너희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고 있지만. 그렇다고 사회에 악을 끼치면 안 된단다. 너희들도 가슴 따뜻한 사람이 되거라."
그러자 마냥 맛있게 붕어빵을 먹던 꼬마들이 갑자기 꼬깃꼬깃하게 접힌 천 원짜리와 십 원, 백 원짜리 동전을 꺼내놓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때까지 아주머니가 주신 붕어빵과 사랑에 대한 보답이에요." 순간 코끝이 시큰해지면서 차마 그 앞으로 나서서 붕어빵을 살수가 없었답니다. 작은 사랑의 실천이 서로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보듬어 주는 감동적인 내용 입니다.
성경말씀(눅3:11)에 보면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가난한 자에게 옷과 먹을 것을 나누어 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넷째, 나눔을 실천할 때 교회가 부흥하고 성도가 기쁨과 부요를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서로 ‘나눠주는’ 일을 잘했습니다. 필요한 물건을 서로 나누었고 겉옷과 속옷을 나누었으며 슬픔과 기쁨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도르가의 구제와 고넬료의 구제는 하나님을 감동시킬 정도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장 사랑하고 자랑했던 빌립보 교회의 특징 중의 하나도 나눔과 참여였습니다. “너희가 내 고난에 참여하였으니 잘 하였도다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빌 4:14∼6, 고후 8:4).초대교회의 나눔의 실천은 교회에 부흥과 확장을 가져왔고 모든 성도가 기쁨이 충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섯째, 나누어 줄 때 더욱 풍요로워지기 때문입니다.
나눔이라는 것은 참 역설적인 것입니다. 남에게 많이 나눠줄수록 자신도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사실 뭐든 있는 것을 이웃과 나누다 보면 내 몫이 없어지는 것 같지만 이상하게 나눠주다 보면 생기는 게 또 풍요로움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돈 얘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무슨 일에서나 느낄 수 있는 일입니다. 나누면 줄지 않고 더 많아집니다. 바닥이 나지 않고 더 채워집니다. 그것이 나눔의 역설이며 나눔의 신비입니다.
우리가정식구들을 중심 헤서 매월500달러를 태국에 있는 선교사에게 후원금을 보냅니다, 환율이 달러당 1000원대였을 때 50만원을 보내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환율이1500원대가 되니까 걱정이 앞섰습니다, 75만원씩 보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하게 생각 되었지만 줄이지 않고 보내는데도 이전보다 더 많은 잔고가 쌓이는 것을 보고 역시 하나님께서는 나누고자 하는 일에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 주심을 실감 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나누는 삶에는 보너스까지 얻게 됩니다. 넘치는 감사와 기쁨, 마음의 행복과 평화, 풍요로움과 따뜻함, 주변과의 관계 회복 등등 이루 다 헤아릴 수는 은혜를 주십니다.
성경 (눅6:38)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하십니다. 나눌 때 더욱 풍요로움과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결론을 말씀 드립니다. 이스라엘에는 2개의 대표적인 바다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갈릴리 바다와 사해입니다. 헐몬 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모이는 갈릴리 바다는 이스라엘 전 국토를 비옥하게 만들고 또 그 물을 사해로 흘려보냅니다. 반면에 갈릴리 바다의 물이 모이는 사해는 물을 밖으로 전혀 내보내지 않습니다. 사방으로 물을 나누어주는 갈릴리 바다는 물고기가 풍성한 생명의 바다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물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 사해는 물고기 한 마리 살지 않는 죽음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나누는 곳에 생명이 있고 움켜쥐기만 하는 곳에 죽음이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주는 있습니다.
욕심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나누지 못하고 계속 받기만을 원합니다. 이런 사람의 소유에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사역과 불쌍한 이웃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나눕니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우리 이웃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고 자신도 풍요로움으로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행복을 느끼기 원한다면 지금 곧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자신의 기득권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가난하고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치라
본문: 신15: 10- 11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구두장이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이 구두장이 할아버지의 간절한 소원은 예수님을 단 한 번만이라도 만나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이 꿈속에 나타나 내일 너희 집을 방문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어찌나 기뻤던지 온갖 정성을 들여 음식을 가득 차려놓고 기다렸으나 어찌된 셈인지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예수님은 그 날 저녁 가게문을 닫을 때까지도 오시지 아니 하였습니다. 단지 거지가 한 번 오고, 또 한 번은 청소부 할아버지가 오고, 저녁때는 사과장수 아주머니가 왔을 뿐이었습니다. 이 구두장이 할아버지는 그만, 거지와 청소부 할아버지와 사과장수 아주머니에게 예수님을 대접하려고 정성스럽게 준비한 음식을 나누어 주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들 모두 너무나 불쌍하게 보였고 실제로 추위 때문에 또 배고픔 때문에 떨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날 밤 예수님께서 꿈 속에 다시 나타나시매 이 구두장이 할아버지는 왜 오시지 않으셨느냐고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뜻밖에도 "나는 오늘 너희 집에 세 번이나 갔었는데 세 번 다 대접을 잘 받았다. 참으로 너는 나를 사랑하는 줄을 알겠다. 네 이웃에 사는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대접하는 것이 곧 나를 대접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톨스토이의 작품 속에 나오는 것으로 마태복음25장에 언급된 최후의 심판광경을 생각나게 합니다. 최후의 심판시 의인으로 판결을 받은 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고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 의인들은 오히려 놀라서 언제 이런 일을 당한 주님을 도와 드린 적이 있느냐고 반문을 합니다. 이에 심판주되신 임금님은 "분명히 말하건대,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고 심판의 근거를 밝히고 있습니다.
위의 이야기는 우리 주위에 있는 지극히 작은 자를 대접하며 용기를 북돋우어 주는 것이 곧 주님을 대접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구제에 힘쓸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이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1:27)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게 하라”(마 6: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로마에 아주 신실한 그리스도인 군인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추운 겨울날, 길에서 구걸하는 거지를 만났습니다. 그 군인에게는 거지를 도울만한 돈이 한 푼도 없었습니다. 군인은 마음이 무척 아팠습니다. 그래서 입고 있던 군인 외투를 벗어 반으로 찢은 뒤 반쪽은 자기가 두르고 나머지 반쪽으로 거지의 몸을 감싸주었습니다. 그날 밤 꿈속에서 군인은 반 쪼가리 군인 외투를 두르고 웃고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난하고 궁핍한자를 도우라고 말씀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잠14:31)
“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잠21:13)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잠22:9)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 하려니와 못본체 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잠 28:27)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잠29:7)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갈2:10)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요일3:17)
우리 주위에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갖가지 이유를 붙여 구걸하는 손길을 외면합니다. 성경에는 구제할 것과 구제할 때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신15:10)
점점 이기주의 속에 빠져가는 오늘 우리는 이웃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특히 가난한 형제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돌보아야 합니다. 가난한 형제를 도울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어려운 이웃을 보고도 외면하는 자가 되지 말고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