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달설교

자녀의 도리

공 상희 2009. 5. 6. 15:46

자녀의 도리

신명기 5:16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가정의 달 5월 둘째 주일은 어버이 주일로 교회가 지킵니다. 지난주일 어린이 주일로 지키면서 부모의 사명을 먼저 살폈습니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자녀의 도리를 살피려고 합니다. 부모는 자녀 키우는 것을 당연한 사명으로 받아들이는데 비해서 자녀는 왜 부모를 잘 섬겨야 하는지, 그 도리를 물어야 할 형편입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 5:16)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신구약은 공히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합니다. 신약 에베소서에는 공경순종이라는 단어를 첨가하고 있습니다. 이 두 단어는 비슷하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공경이란 마음의 태도를, 순종이란 행동을 좀 더 강조합니다. 만약 순종만 하고 공경이 없다면 그 순종은 위선입니다. 반대로 순종이 없는 공경은 공경일 수 없습니다. 부모를 잘 섬긴다는 것은 달리 말해 순종을 잘한다는 것과 공경을 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서 어떻게 부모님을 공경하고 순종해야 할까요?

 

1. 부모의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부모를 세우셨다는 사실을 참으로 잘 깨닫게 되면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누가 그 분들을 우리의 부모 되게 하셨습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 중에서 아무도 하늘에서 바로 떨어진 사람은 없습니다. 다 부모님을 통해서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부모의 권위를 인정해야 합니다. 부모가 좋은 인격을 가졌던지 혹 부족하던지 상관없습니다. 그분이 부모라는 사실로 인해서 우리는 공경해야 합니다.

 

아마 누구든 사춘기를 지나면서 부모님의 비합리적인 말씀이나 지시 때문에 순종해야 하는지를 고민했을 것입니다. 나의 존경을 받을만 하느냐 여부를 떠나서 그분들이 나의 부모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의 권위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분들을 우리의 부모가 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래서 오늘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면 하나님이 주신 부모의 권위는 인정되어야 합니다. 부모의 권위, 부모의 인격은 그 위치 때문에 소중한 것입니다.

 

2. 부모의 말씀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순종이란 단어는 부모의 위치를 인정하고 그 말씀을 잘 듣는다는 뜻입니다.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고 잘 들을 때 순종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으십시오.

 

부모님의 말씀을 내가 찬성하느냐 하지 않으냐는 차후의 문제이고 우선은 먼저 잘 들어야 합니다. 물론 그분들이 합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지나치게 까다로운 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잘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를 보십시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벧전 2:18) 종들을 향해 모든 일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들 중에서는 선하고 이해심이 많은 분들도 있지만 혹 까다로운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순복하라는 명령은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어찌 직장에서 까다로운 분만 순복하라는 말씀이겠습니까? 동일한 원리는 우리가 부모를 섬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하고 관용하는 부모가 아니라 까다롭고 비합리적인 말씀을 자주하는 분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자녀로써 순복해야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동일한 지침은 우리 부모뿐만 아니라 시부모, 장인, 장모에게도 적용해야할 것입니다.

 

3. 부모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다고 맹목적으로 복종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만약 부모에 대한 순종이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이 될 때는 더 높은 권위이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4장을 보면 사도들이 전도하다가 잡혔는데 관원들은 더 이상 전도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

 

도무지 자녀로서 할 수 없는 일을 시키는 부모라고 해도 그 요구 자체는 거절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 자세는 잃지 말아야 합니다.

 

부당한 말씀을 하시는 부모님께 공경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참된 순종은 언제나 공경의 자세가 동반되는 것 입니다. 항상 부모를 귀히 여겨야 합니다.

 

4. 부모님의 필요를 채워드리십시오.

신앙이 좋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을 주님은 지적하셨습니다. 그들은 길거리에 나아가면 신앙이 좋은 사람처럼 처신을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는 위선을 폭로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부모의 생활비를 드리지 않았고 부모님을 잘 모시지 않으면서 오히려 부모에게 드려야할 재산을 떼어서 “이것은 부모님께 드려야할 부분이지만 이것을 하나님께 드립니다.”하고 내어놓습니다. 히브리인들은 부모에게 드릴 부분을 하나님께 바치면 부모에게는 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렸다는 뜻의 “고르반” 제도를 통해서 부모 섬김의 의무에서 빠져나갔던 것입니다. 얼마나 가증스러운 위선인지 모릅니다. 그런 일들을 2천 년 전 이스라엘 사람들만 했다고 생각을 하면 착각입니다. 지금도 잘 살펴보면 우리의 주변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요즈음은 어떨까요? 십일조는 잘 하면서 부모님 용돈을 드리지 않는다면 현대판 고르반은 아닐까요? 그러면 십일조를 내는 대신 부모님 용돈을 드리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주님은 무어라고 하실까요? 분명히 이것도 잘 지키면서 저것도 잘 지켜야 한다고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부모의 경제적 필요에 대해 자녀로서 책임을 다할 것을 성경은 매우 강조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오죽하면 이렇게 강한 어조로 교훈할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설교를 듣고 나면 여러분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합니까? 부모님께 드리는 용돈이나 생활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직 부모님이 생활능력이 있으시다면 용돈을 드리십시오. 생활능력이 없다면 생활비를 드리는 것이 자녀된 도리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시부모나 친정부모 모두를 향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십시오. 돈뿐만 아니라 부모들이 기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녀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최근에 결혼하는 젊은 부부가 자신들이 부부로서 지켜야할 십계명을 써서 가지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일주일에 몇 차례 부모님께 전화 드리기’ 였습니다.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릅니다. 한 달에 한 번 찾아뵙는 일도 새로 시작해 볼만합니다. 아니면 분기에 한 번 정도는 찾아가 뵙는 정도가 아니라 함께 보낼 시간도 잡을 수 있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고 섬기는 일은 살아계실 동안 한시적으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돌아가시고 나면 더 이상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살아계셔서 모실 수 있다면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5. 마지막으로 부모님을 향해서도 주께 하듯 해보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골 3:23) 골로새서의 이 말씀은 종들이 주인을 섬길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하는 구절이기는 하지만 동일한 원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다 적용할 수 있습니다. 부모를 섬길 때도 마음을 다해서 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의 믿음의 시작자이고 완성자이신 예수님께서 좋은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소년시절부터 청년시절에 이르기까지를 한마디로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 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눅 2:51)

 

이 기록 바로 앞에 일어난 사건을 아십니까? 12세 때에 예수님은 부모를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올라갈 때도 그랬을 것이고 가서도 마찬가지겠지만 한 동네에서 다 올라가면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어울릴 것입니다. 출발해서 모두 내려오는데 아이가 안 보여도 부모들은 생각했습니다. ‘친구들과 같이 오겠지...’ 그런데 해가 뉘엿뉘엿 져도 아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허겁지겁 예루살렘으로 다시 올라가서 사흘 만에 아이를 다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부모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왜 저를 찾습니까? 제가 저의 아버지 집에 있을 것을 모르셨습니까?” 주님은 성전이 당신의 아버지 집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당신이 특별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아셨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곤 했지만 내 아버지라고는 좀처럼 부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특별한 아들인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셔서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당신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고 모든 인생의 주인이신 것을 아셨지만 주어진 마리아와 요셉의 권위 아래에서 순종하여 받드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부모에게 그렇게 순종하셨다고 하면 우리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마지막 순간 십자가에서도 예수께서는 어머니를 챙기고 있습니다. 12세까지는 아버지 요셉이 살아있었지만 이제 공사역을 시작했을 때는 요셉은 세상을 떠나고 마리아는 남아 있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 가장 가까운 곳에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리아와 요한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를 바라보시며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요 19:2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번역이 우리 귀에는 불손한 것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여자여”하는 단어는 여성을 향한 최고의 부름말입니다. 로마의 황제 안토니우스가 유명한 애굽의 클레오파트라를 만났을 때 한 첫 마디가 바로 이 말입니다. 결코 한국 사람들이 사용하듯이 “여자여”하고 말했겠습니까? 아닙니다. 어쩌면 “부인이여”라고 하는 말과 통할지 모릅니다.

 

최고의 존칭으로 불렀을 뿐만 아니라 그 고통스런 마지막 순간 십자가 위에서도 부모의 구체적인 필요를 공급하셨습니다. 남게 되는 어머니를 걱정해서 가장 사랑했던 제자 요한에게 부탁합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7)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마리아를 모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년 쯤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해보고 싶습니다만 성지다운 성지라고 하는 터키를 두 차례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은 곳은 갑바도기아와 에베소 교외에 위치한 산중의 한 집, 성모 마리아의 집이라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마리아를 잘 모신 사도요한은 제자들 가운데 가장 장수하는 축복을 받아 90세가 넘도록 살았다고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요한이 60세에 에베소에 가서 마리아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잘 모셨다고 합니다. 성모 마리아의 집 옆에는 사도 요한의 기념 교회가 서 있었습니다.

 

에베소의 원형 경기장보다 더 오랫동안 기억에 자리한 곳이 성모 마리아의 집입니다. 단순한 전설이 아닌 실제 그 집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자기 어머니의 노후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심으로 어머니의 필요를 채워드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얼마나 신실하게 우리 부모의 필요를 채워드리는지 돌아볼 차례입니다.

 

의식주의 필요만 아닙니다. 정서적인 필요도 채워드려야 합니다. 연세가 들면 소외감도 느끼기 마련이고 외로움을 타기도 합니다. 그런 분들에게 자주 전화를 드리는 것은 우리가 힘들이지 않고 마음만 먹으면, 좋은 습관만 가지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저는 가끔 아들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저보다 낫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들은 회사에서 퇴근하며 집에 들어가는 길에 짬을 내어 전화를 합니다. 그렇게 무엇을 할 때 짬을 내어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는 것도 좋은 방법인 듯합니다.

 

부모님이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그 부모를 버려두고 우리만 구원의 영광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믿는 않는 부모님을 모시고 있으면 지극 정성을 다해 부모님이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하시고 그분들이 천국 소망을 가지도록 하는 것이 믿는 자녀의 가장 큰 사명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왜 우리는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까?

 

1. 인간으로서 자연의 질서에 따르는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옳으니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것은 자연의 법칙에 따른 것입니다. 창조의 질서에 따라서 내가 있는 것은 부모 때문임으로 순종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부모 없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존경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자식의 도리입니다. 부모를 존경하는 것은 자녀의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언행에서 존경심이 나타나야 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의 논리는 세상 누구라도 수긍할 수 있는 일반적인 사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누구라도 수긍할 수 있는 근거를 가지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먼저 맺는 인간관계가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는 사랑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은 어느 문화권에서나 존중되는 윤리입니다. 부모를 존경하는 것은 기독교 이전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기독교 윤리 밖에서도 준수됩니다.

 

그리고 부모가 사랑으로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어쩌면 윤리 이전의 본능이기도 합니다. 이 본능적인 사랑을 받은 자녀라면 누구나 부모를 존경해야 옳습니다. 이 관계를 옳게 가져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옳게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에 대한 존경은 모든 사회 도덕의 기초입니다.

 

요즈음 세상에는 존경할만한 사람이 없다고들 말합니다. 그리고 윗사람을 공경할 줄도 모릅니다. 이것은 모든 도덕의 근간이 되는 부모 공경의 의식이 희박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공경할 때 학교에서 선생님을 존경할 수 있고 사회에서도 윗사람을 섬길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모 순종은 모든 사회 도덕과 사회 질서의 기본입니다.

 

2. 부모 순종은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에베소서 1절에서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말씀은 “네가 주님 안에 있다면”, “네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면”, “네 삶이 예수 믿고 변했다면” 더욱 부모에게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라면 자신의 부모를 섬길 줄 알아야 하고 신앙인이라면 더 말할 나위 없이 부모를 섬겨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20절은 에베소서 6장 1절의 내용을 조금 다른 표현으로 말합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 3:20)고 합니다.

 

흔히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쌍둥이 서신이라고 말합니다. 서로 대조해서 살펴보면 또 다른 측면을 배울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신앙 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새로운 소원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소원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부모를 순종하는 삶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기에 신앙인은 부모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미성년자로서 부모님의 보호 아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어른이 되어도 순종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왜 부모를 존경해야 합니까?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사도 바울은 자연적인 이유, 신앙적인 도리에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합니다. 이것이 첫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3. 이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첫 계명이라는 사실을 먼저 살펴봅시다.

아시다시피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지키기를 바라시는 삶의 기준입니다. 처음 네 계명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 지켜야 할 계명들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여섯 계명은 사람들 사이에 지켜야 할 계명입니다. 그 가운데 첫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입니다.

 

인간 사이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입니다. 계명은 하나님의 명령이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동시에 계명은 납득이나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일단 순종하고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믿고 순종해아 합니다. 그러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은 선택의 여지없이 우리가 믿고 따라야 하는 도리입니다.

 

이 계명은 인간관계의 가장 기초가 되기에 이 계명을 소홀히 하면 모든 사회가 붕괴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이 지켜지지 아니하면 다른 어떤 윤리도 지켜질 수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육신의 아버지를 존경하는 것을 통해서 하늘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을 배웁니다. 보이는 아버지를 존경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늘 아버지를 공경하는 첫 걸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육신의 아버지는 하늘 아버지의 복사판이 되어야 합니다. 좋은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4.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복을 누리는 지름길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마지막 격려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시금 본문을 읽어봅시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부모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께서 친히 명령하신 것입니다.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할 첫 번째 명령인 동시에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4.1 먼저 형통의 축복을 약속합니다.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오래 사는 것이 복이 아니라 먼저는 형통의 축복 가운데 오래 사는 것이라야 복이 됩니다. 어떤 분은 오래 사시긴 하나 너무 어려운 처지에서 불효하는 자식들 사이에서 사는 것을 보면 오래 사는 것만이 축복인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진정으로 장수가 축복이 되기 위해서는 건강하게 자녀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오래 사는 것이 복입니다. 그러므로 장수의 축복을 약속하기 전에 먼저 형통의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명령과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는 자에게 범사에 형통케 되는 복을 내려 주십니다.

 

형통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축복을 총괄해서 주시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여호수아 1장 8절을 보십시오.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언제나 형통한 복을 약속합니다.

 

가장 고전적인 약속으로 우리는 시편 1편을 떠올릴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4.2 장수의 축복을 약속합니다.

부모에 대한 순종이 주는 또 하나의 뚜렷하고 특징적인 축복은 이 땅에서의 장수입니다. 장수의 축복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계명을 준수하는 자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실제로 어떤 분들이 이 부분에 대해서 연구를 했습니다. 효도하는 가정이 장수하는 가정이라고 밝힌바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성도들에게 이 땅에서의 장수의 복과 아울러 영생의 축복까지 허락하십니다. 형통한 가운데 오래 사는 축복을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잘 살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 있습니까? 잘 되고 건강하고 오래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잘 살기 위해 재테크를 한다고 머리 굴리지 말고 아주 쉬운 길인 부모를 공경하면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 일에 부딪히면 우리는 자신의 생각으로 살려고 합니다. 부모를 잘 공경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떻게 복주시는지... 하나님은 형통과 장수의 더블 보너스의 축복을 부모 순종하는 자들에게 약속합니다.

 

부모를 순종하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이중으로 약속하고 계십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부모를 잘 섬기면 어떤 생명보험이나 종합보장보험보다 확실한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떻게 부모님을 섬겨야 합니까? 먼저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고 부모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님의 필요를 채워드리고 부모님을 하나님처럼 섬기며 하나님을 소개하는 일이 가장 소중한 섬김입니다.

 

왜 부모님을 섬겨야 합니까? 그것은 자연의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첫 계명이요 약속을 첨가한 첫 계명입니다. 장수와 번영의 축복을 가지고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부모 섬김은 기계적으로, 마지 못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 부모가 우리를 끔찍이 키웠듯이 우리도 이제 사랑으로 부모님을 섬겨야 합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 5:16)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사랑하는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전도를 해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은 부모도 안 섬긴다”고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죽은 부모는 섬길 수 없습니다. 위패를 모시는 것은 죽은 부모의 영혼을 신격화 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길 수 없기 때문에 그 일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부모를 섬기는 것은 우리가 잘 해야 하고 세상이 칭송받을 만큼 해야 합니다. 그래서 노인정에 가면 “이 사람들아 나이가 들어서 부모로써 대접받으려면 자식들이 예수를 믿어야 해. 우리 예수 믿는 아들 며느리가 얼마나 잘 하는지 몰라.”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도록 되어야 복음이 증거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죽은 부모의 제사는 모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부모는 하나님처럼 섬겨야 합니다. 그렇게 섬기면 광역시의 모든 사람들이 기독교는 효도하는 종교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복음은 증거될 것입니다.

 

우리 한 해 동안 무엇을 고치더라도 하나씩만 고쳐나가길 바랍니다. 저는 교회로 내려오면서 어머니께 전화 드리는 것을 시도해 보겠습니다. 여러분도 하나씩 시도해 보시길 바랍니다. 몇 년씩 어버이 주일에 말씀을 듣고도 말씀에 반응하지 않고 한치도 바뀌지 않으면 왜 예배당에 나옵니까? 예배당에 나오는 것은 들은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입니다. 나오는 것이 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할 때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조금만 변하면 엄청난 영향을 사회에 끼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 울산교회에 나오는 2,500여 명의 출석 교인들이 조금만 부모 순종하는 일에 마음을 쓰면 나비효과가 되어 울산광역시 전체가 효도하는 도시로 가는 첫 날갯짓이 울산교회 성도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