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달설교

근본을 생각하는 믿음

공 상희 2009. 5. 6. 15:39

근본을 생각하는 믿음

잠언 23:22~26

어머니, 아버지 속에 조명된 하나님의 사랑을 새롭게 하자는 의미로 이렇게 5월 둘째 주일을 어버이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 동안 자녀들로부터 감사와 좋은 선물들을 받으셨습니까? 저는 어버이날이 되면 잊어버리지 않고 떠오르는 게 기억 하나가 있습니다. 옛날에 안이섭 씨가 그린 ‘두꺼비’라는 만화가 있었는데 한 초등학생이 어버이날 자기 방에 누워서 곰곰이 생각하는 겁니다. ‘아! 오늘이 어버이 날이구나! 하늘같은 부모님의 은혜를 오늘 내가 무엇으로 표현을 하고 갚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슈퍼에 가서 아이스크림 2개를 사가지고 왔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에게 하나씩 주면서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이거 하나씩 잡수세요.” 아버지, 어머니가 “와! 고맙다.” 그런데 돌아서면서 아들이 혼잣말을 하고 나갑니다. 뭐라고 말을 하느냐? “에이! 어린이날 빚 갚았다. 더러워서!”

성경에는 공자의 효 사상보다 훨씬 더 강력한 효 사상이 율법으로 주워져 있음을 발견합니다. 얼마큼 강력한 효 사상이 있는가? 불효자라고 판명된 사람은 이유를 묻지 않고 끌어다가 죽였습니다. 신명기 27장 16절에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라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관계에 대한 계명이 1~4번까지 나와 있습니다. 5~10번까지가 인간관계의 계명인데 첫 번째가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효 사상이 굉장히 강력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기독교가 지향하는 부모 공경에 대해 오해를 많이 했습니다. “기독교는 부모 공경을 거부한다.” 왜 그런 오해가 나왔느냐 하면 제사 지내는 문제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제사 지내는 것을 우상 숭배로 해석했기 때문에 이런 여론이 생긴 것입니다. 돌아가신 김정준 박사의 논문에는 “한국 교회가 부모제사를 우상숭배로 지적한 것은 잘못이다.” 그래서 이것을 놓고 찬반 토론이 많이 생기는 일이 있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기독교는 효도의 개념에 있어서는 세계 어떤 종교보다도 강한 율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찍이 역사가 토인비 박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족 제도는 한국에 있다고 극찬의 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온 세계가 아름답게 보는 한국의가족제도도 이제는 옛말이 되었습니다. 요즘에 가끔 뉴스에 노부모를 버리는 자식들이 나올 정도입니다.

성경에 말하는 부모 공경의 이유는 몇 가지 정리할 수 있습니다. 부모라는 위치는 생명 창조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역자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가장 가까운 두 가지 일 가운데 하나는 아기 낳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농사짓는 일입니다. 씨를 뿌리면 열매를 거두게 되어 있는데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자연 법칙 안에서 인간이 곡식을 생산합니다. 수고해서 농사를 지었지만 우리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내려주신 곡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협조해야 하는 사역입니다. 아기 낳는 것도 똑같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이 흙으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 후로는 인간이 인간을 생산하도록 우리가 결혼해서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주셨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인간과 하나님이 함께하는 창조적 사역이 농사짓는 일이요 아기를 생산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평생을 살면서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부모님입니다. 또, 내가 가장 사랑한 사람이 누굽니까? 자녀들입니다. 누구든지 다 똑같습니다. 제일 슬픈 일이 뭔가? 자녀의 고난입니다. 가장 기쁜 일이 뭔가? 자녀들의 훌륭한 모습입니다. 간혹 우리 주변에 나쁜 부모가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살 때 재혼의 걸림돌이 된다고 두 어린아이를 강물에 던져 죽인 여인이 재판받는 것을 보았고, 아들을 방에 가두고 불에 질러서 태워 죽이려 하다가 아들이 살아난 일도 있었습니다. 마귀가 뒤집어씌운 것입니다. 마귀가 시켜서 한 것입니다. 절대 다수의 부모들은 자녀들을 위해 하나님의 그림자 역할을 하며 세상을 살아갑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생명 창조의 동역자 역할을 하기 때문에 부모는 어느 시대나 어디에서나 공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어머니는 자기 생명을 내어놓는 듯 한 출산의 위험과 고통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공경해야 됩니다. 또, 우리 사회는 이런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가 낳은 자녀가 아닌데도 기르는 부모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 부모들은 낳아서 기르는 부모보다 더욱 공경해야 합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여인이 사생아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여인도 어머니로써 똑같이 존경받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부모의 위치라는 것은 절대적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세계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한국남자로 태어난 것이 참 감사하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중국이나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아서 참 다행입니다. 중국이나 미국은 여자 위주의 가정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남자들이 절대로 여자의 거부하지 못하는 문화에서 살고 있습니다. 제가 중국 선교를 하기 위해서 중국 종교 국장을 미국으로 초대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 관광을 시켜주고 선물도 사드렸습니다. 함께 쇼핑센터를 갔는데 앞치마가 너무 예쁘다고 다섯 개를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야! 아내 주려고 그러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제가 말했습니다. “아내 드리면 참 좋아하시겠네요.” “오우! NO! 제가 쓸 겁니다.” 중국에서 그렇게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도 부엌일을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합니다. 70~80퍼센트 정도는 다 남자들이 밥하고 요리합니다. 여러분, 중국 요리사 중에 여자 보셨습니까? 다 남자들이 합니다. 그러니 우리 한국 남자들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미국 남자들은 부인에게 멀쩡하게 따귀 얻어맞습니다. 절대로 맞때렸다가는 원시인 같은 취급을 받기 때문에 멀쩡하게 맞아야 합니다. 요즘에 일본 남자 노인들은 이혼 당할까봐 벌벌 떱니다. 그러니 한국 남자들은 얼마나 행복합니까?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으셨으니 오늘 감사헌금을 많이 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한국 여자들은 어떤가? 여러분, 한국 여자 된 거 감사하세요. 선진국들 다 잘 살지만 65세까지는 다 사회에 나가서 일해야 삽니다. 수십 명씩 대낮에 이리 저리 몰려다니면서 사우나 하고 먹으러 다니고 골프 치는 풍경은 한국 밖에 없습니다. 다녀보세요. 부모는 하나님의 생명 창조 사역에 동참자로서 마땅히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아예 “율법에서 이 문화는 영원한 것이다. 만약 이 법을 깨뜨리는 자가 있으면 죽여서 없애버려라.”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부모 공경은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있습니다. 에베소서 6장 1~3절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왜 첫 계명입니까? 십계명의 다섯 번째가 인간관계의 첫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약속을 주셨는가?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히브리 민족의 교육 철학은 전승 교육입니다. 전해 내려오는 것을 그대로 하는 전승하는 것인데, 이러한 교육의 특징이 무엇인가? 근본을 생각하는 겁니다. 나의 근본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의 근본은 할아버지입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께로 가는 아버지, 어머니! 그래서 하나님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가톨릭교회에서 신부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아니, 신부님은 아기를 낳은 적도 없는데 왜 아버지라고 부릅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연결하는 영적인 의미로 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겁니다. 나이 많은 젊은 신부를 보고도 아버지라고 합니다. 저는 앞으로 중국이 세계 최강국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하나님의 역사의 손길이 지금 아시아로 오고 있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한국인들보다 훨씬 예수 잘 믿고 잘 될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유는 중국인들은 부모 공경의 교육이 문화적으로 오래 전에 완전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부모 공경 잘하는 사람이 하나님도 잘 믿을 수 있고 가정의 아버지가 있는 것처럼 우주의 아버지가 계시니 그가 곧 하나님 아버지시라고 하는 근본적인 연결이 중국인들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그러면 왜 안했는가? 공산당 때문에 못했습니다. 예수 믿으면 죽으니까 못했습니다. 이제 열려지기 시작하는 기하급수적 선교가 지금 중국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늙은 아버지, 어머니를 즐겁게 하는 가정은 평화가 있고 장래가 약속됩니다. 하나님이 약속 하셨습니다. 이런 저런 복잡한 생각을 하지 말고 신앙생활을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그냥 하십시오. 그러면 약속이 그냥 주어집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고집을 부리니까 그렇게 되지 성경에 시키는 대로 해보세요. 한 교인 가정에서 아들이 속을 무척 썩였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너무 골치가 아픕니다. 늘 경찰서에 잡혀가서 “부모 오시오!” 목사한테 “뭐 써오시오!” 1년에 수십 번씩 왔다 갔다 했습니다. 너무나 말썽꾸러기입니다. 어머니, 아버지는 이 아들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한 가지 새로운 시도를 했습니다. 부부가 새벽기도를 다니면서 “이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해 주셔야지 우리가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새벽기도를 했더니 아들이 하는 말이 “어머니, 아버지! 내가 얼마나 효자입니까? 엄마, 아빠를 새벽기도 교인 만드는 것이 접니다.”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 어머니들에게 이런 날 한 가지 주의가 필요합니다. 제가 휴스턴 텍사스에서 살았는데 거기서 일어난 일을 하나 소개하려고 합니다. 휴스턴에 엘리스 존슨 중학교라고 있습니다. 완다라고 하는 여인의 딸이 그곳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웃 학부형에게 늘 열등감을 느끼고 살았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남자들은 라이벌 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자기 분야에서만 느낍니다. 정치인은 정치인끼리, 사업가는 사업가끼리, 또 예술가는 예술가끼리, 저 같은 목사는 목사들끼리 그렇게 자기 분야에서만 라이벌 의식을 갖지 정치하는 사람이 사업하는 사람에게 돈 많이 벌기 위해 라이벌 의식을 갖는다든가 그렇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여인들은 다릅니다. 여인들은 온 세상 여인들에게 다 라이벌 의식을 느낍니다. 이런 것이 남자, 여자의 차이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다른 사람에게 열등의식이 많았습니다. 학벌도 좋지 않고 재정 능력도 없고 미모성에 있어서 남을 따라갈 수가 없고, 모든 면에 자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람들은 남자나 여자나 모욕감을 느낄 때는 그것이 분노의 에너지로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심하게 나타나면 행동의 통제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죄짓는 겁니다. 그래서 범죄하는 겁니다. 성경에도 말합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미남 청년 요셉을 좋아해서 유혹하지 않았습니까? 될 줄 알고 했습니다. 자기 집 종이니 자기 같은 귀부인이 유혹하면 어쩔 수 없이 말을 들을 줄 알았는데 요셉이 뿌리쳤습니다. 이 여인은 말할 수 없는 모욕감을 느낀 겁니다. ‘네가 감히 내 요구를 뿌리쳐?’ 그때 그 모욕감의 에너지가 분노로 발전하지 않았습니까? 자기가 그렇게 좋아하고 욕심을 내던 사람을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자리로 내몰아서 ‘죽이던가 아니면 평생 감옥에서 고통을 받아라!’ 그래서 거짓말해서 일을 꾸밉니다. 미국 문화에서는 학교의 학생 중에서 치어리더를 뽑는데 농구, 배구 등의 운동 경기를 한다고 하면 몇 명의 치어리더들이 춤을 추면서 경기를 잘하도록 용기를 주고 흥을 돋우어줍니다. 그런데 치어리더 출신들이 다 예쁘기 때문에 TV 같은 매스컴에 계속 나가므로 영화배우가 되기도 하고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자기 딸이 다니는 이 학교에서도 치어리더를 뽑는데 옆집의 딸과 경쟁이 붙어서 누구 하나가 떨어져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어머니는 심각한 질시 감정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남의 딸에게 지는 것은 참을 수 없다.’ 그래서 자기 딸과 라이벌이 된 옆집의 여학생을 청부 살인해서 죽여 버렸습니다. 사랑이 미움으로 변하는 것을 질투라고 말하고, 부러움이 미움으로 변하는 것을 질시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소유할 수 없는 허탈감의 에너지를 미움의 탈출구로 바꿀 때 아주 사소한 일인데도 죽음의 문제로까지 비화시키는 죄를 짓게 됩니다. 이것이 인간의 감정입니다. 남보다 못하다는 열등감의 불안정이 이렇게 만듭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의 대한 관점을 두 가지로 볼 때가 있습니다. 하나는 상대적 불행이 생깁니다. 보십시오.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서 우리도 좀 차를 사야지!’ 그래서 소나타라고 하는 차를 샀습니다. 그것이 처음 생기는 날 얼마나 좋고 기쁜지 “야! 우리도 차가 있으니 놀러가자!” 베토벤의 ‘운명’을 틀면서 콧노래를 부르면서 신나게 청평 유원지에가 가서 딱 섰는데 바로 옆에 누가 번쩍번쩍 하는 벤츠를 갔다 세운단 말입니다. 그 순간 상대적 불행이 ‘아니, 나는 왜 저런 차를 못타고 이런 차를 타야 돼?’ 이것이 나를 불행하게 합니다.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평생 열등감과 분노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마귀가 주는 마음입니다. 저는 재벌가인 사람을 심방 한 적이 있습니다. 저에게 뭐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카스텔라와 콜라 한 병만 먹고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식도암으로 먹는 것을 넘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내가 얼마나 행복한 겁니까? 우리 하나님의 사람은 상대적 감사를 가지고 사람을 봐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건강이 없는데 나는 이렇게 건강하고 나는 비록 가난하지만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는 훨씬 더 좋은 것을 많이 가지고 있다.’라고 감사하며 영적 권위를 가져야 하는데, 상대적 불행을 자꾸만 승화시켜 나가니까 사람이 못 견디게 되는 것입니다. 범죄인이 되던가 아니면 자살해서 죽든가 날마다 불행하게 되든가 이렇습니다.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것은 마귀가 주는 마음입니다. 특별히 엄마들이 이렇게 생각됩니다. 저는 장애인 목회를 했었습니다. “우리 애가 이번에 일등을 해야 하는데, 좋은 학교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번에 시험을 잘 봐야 하는데….” 보통 엄마들이 이런 걱정을 합니다. 제가 있었던 교회가 장애인들이 많았는데 주일날 교회에 교인들이 나옵니다. 어떤 엄마들은 예배드리기 위해 자기 자녀들을 휠체어에 태워서 오는데 환하게 웃으면서 오거든요? 아이들이 다 지체장애인, 정신지체인 입니다. 그 아이들과 엄마들을 보는 순간 ‘저 엄마도 저렇게 웃으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래서 저는 장애인 목회를 열심히 하는 것은 약자의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만히 있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교육을 시켜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기독교 초기에 한국에 와서 쓴 한 외국 선교사의 논문에 보면 “조선의 아버지는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다.”우리 아버지들을 보세요. ‘나 때문에 가족들이 행복해질 수 있다면….’ 우리 갈보리교회에도 젊은 기러기 아빠들이 수십 명이 있습니다. 자녀들이 외국에 가서 공부하는데 ‘내가 좀 외롭게 살아도….’ 그리고 돈이 얼마나 많이 들어갑니까? 뼈 빠지게 일해서 학비를 다 보내면서 외로움을 참고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나는 어떤 희생도 할 수 있다. 이것이 조선의 아버지다.’, ‘조선의 어머니는 남편의 출세와 자식의 영광을 위한 일이라면 자신의 몸을 불태운다. 이 나라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환경에서 오천년이나 이렇게 꿋꿋하게 살아남은 것은 조선의 아버지, 어머니의 헌신적 삶의 철학 때문이다. 위대하다.’ 사실 그렇습니다.

국어학자 이희승 선생의 수필집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초등학교 때 무엇을 잘못하면 어머니께 종아리를 많이 맞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때릴 때는 한 번도 도망가거나 울지 않았답니다. 20대 청년이 되어서도 계속 때리셨답니다. “너 20살이 된 청년이 이게 뭐하는 짓이야? 이리 와!” 그러면 그때도 변함없이 어머니께 종아리를 맞았는데 어린 시절에 매 맞을 때도 한 번도 울지 아니하던 아들이 20대 청년이 되었는데 막 눈물을 떨어뜨리면서 우는 겁니다. 어머니가 때리다가 이상해 진 겁니다. “야! 너는 초등학교 때 그렇게 아프게 때려도 울지 않던 얘가 매가 아파서 우는 거냐?” 아들의 대답은 “아닙니다. 너무 안 아파서 우는 겁니다. 전에는 어머니의 매가 따갑고 아팠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리 맞아도 아픈 느낌이 없는 것을 보니까 어머니가 늙어 팔에 힘이 다 빠진 것이 슬퍼서 웁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아버지같이, 어머니같이 사랑하고 계십니다. 이것보다 더 가까운 사랑이 있다면 그것을 오늘과 같이 주일로 지키라 했을 텐데 아버지, 어머니 사랑만큼 당할 것이 없기 때문에 ‘어버이주일’이라고 하나님의 사랑을 조명한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를 통한 사랑의 양육을 받은 것을 감사드리며 하나님을 공경하듯 우리 부모님을 공경하며 또한 우리도 훌륭한 부모가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과 같은 날 하나님과 자녀, 나 자신, 또 부모와 자녀, 하나님, 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왜 하나님께서 부모 공경에 대한 율법을 그렇게 강하게 인간들에게 명령하셨는가에 대한 영적 깨달음이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혹시 우리들 가정에 평화가 사라지고 불후한 역사가 있다면 성령님께서 모두의 가정에 평화를 약속해 주시고 새로움의 역사를 향할 수 있는 믿음의 영적 능력이 주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