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서신

[스크랩] 에베소서 강해 2

공 상희 2009. 5. 6. 14:06

 

에베소서 강해 2

 

 

마틴 로이드 존스

 

 

 

 

 

 

성경: 엡2:8-10절

 

 

 

 

2장 8~10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에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1.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1~3절까지는 죄의 결과로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며, 행동과 행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모든 태도로도 그러한데, 사도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지배를 받고 있는 존재로서 죄와 허물로 죽은 육체의 원하는 것들과 마음의 원하는 것들을 체우며, 욕심껏 살아가는 존재였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그보다 더 악한 상태를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그리고 4~7절에서는 앞 절의 상태에 있는 사람의 조건은 절대로 하나님께로부터  오직 형벌 밖에는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조건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풍성한 은혜를 값없이 주시되 풍성히 부어 주신 사실을 증거함으로서 우리의 구원에 확신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자신의 의지나 어떤 구원의 조건에 부합하는 합당한 것이 있어서 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전에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기독교회를 혐오하며 기독교를 말살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여 살기 등등 하였던 다소 사람 사울이었던 때를 뒤돌아보며, 옛날의 자신의 모습을 살펴볼 때에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자신의 옛 모습을 살펴보면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말 외에는 다른 말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에 대하여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로 주어졌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또 어떤 구실로도 그것을 자랑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경건을 자랑하고, 자신의 출신을 자랑하고, 자신의 선한 삶을 자랑하며, 선한 행실을 자랑합니다. 바리새인이 “내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며”(눅 18:9)라고 한 것처럼 우리도 그런 실수들을 합니다. 그것이 무슨 구원의 조건인 것처럼 그것들을 자랑합니다. 사단은 우리를 가장 교활한 방식으로 시험하는데, 그 점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우리는 결코 행위를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리스도이며, 하나님입니다. 그 외에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구원을 받은 사실에 대하여 우리가 한 일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2. 그의 만드신 바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 것이고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므로 어떤 사람도 자랑하지 말라고 말하였습니다. 다른 생각은 불가능합니다. 본문의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라는 이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떠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바울의 정의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들로서 참되게 행동하게 되는 것은 이 말씀처럼 우리 자신에 대해서 생각할 때만 가능합니다. 우리는 흔히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을 착해지는 것이나, 착한 일을 하는 것쯤으로만 생각하는 우를 범하고 맙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게 되라고 하지도 않고 그것만을 말하지도 않습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인이 자기들 각자에게 주어질 지위와 특권을 깨닫고, 그 놀라운 장래의 일에 대하여 즐거워하라고 권면을 하며, 자기들이 누구이며, 어떠한 사람인가를 늘 생각하면서 살라고 권고 할 뿐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고 자신의 품격에 맞는 생활을 하게 됨으로서 나타나는 것이 착한 행실과 같은 것들이지 결코 그것을 목표로 삼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만드신바”라는 말씀에서 우리들 자신에 관해서 살펴보았듯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행하는 어떤 일의 결과나 그것에 대하여 자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는 사실 하나님의 솜씨로 만드신 작품입니다.

그 사실이 개인적으로 나의 가슴을 벅차게 합니다. 우리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를 위하여 행동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며, 사람이 범죄하였을 때 그를 찾아 가셔서, 그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부르신 분도, 왕들을 지으신 분도, 선지자들을 부르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율법을 주신 분도, 성전을 짓는 법을 가르쳐 주신 분도, 때가 찼을 때에 아들을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며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다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위대한 작가이시며, 위대한 공예가시며, 위대한 예술가 이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창조자시요, 위대한 토기장이시요, 위대한 공예가시요, 위대한 조각가이시며, 위대한 조물주이십니다. 그런데 그 위대하신 분이 나의 생명 속에 전에 없던 것을 있게 하셨는데 그것이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이 되게 한 것입니다. 어두운 가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동등한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치셨습니다.”(고후 4:6)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실 일을 우리에게 적용시키시고 전달하심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의 인격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서 그리스도를 이루어 가시는데,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생산 공장에 가서 견학해 볼 때에 깨닫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상점에 가면 팔기 위해서 내다 놓은 완성된 아름다운 작품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만드는 처음 과정부터 놀라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성된 작품인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생산하시는지, 그리고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 정확하게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계획하시고 아들을 보내셔서 그 일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런 다음에 성령을 보내셔서 그것을 적용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일하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만드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그 일을 성령님을 통하여 이루어가십니다. 우리가 그의 말씀에 따라 순복하지 않을 때에는 반드시 징계가 주어지고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성품을 바꾸시고 우리의 모든 잘못된 것들을 고쳐 나가십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징계를 주거나 환경을 통한 고통과 환난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여러 성도들이 그들 자신의 죄 때문에, 그리고 자신들을 판단해 보고, 시험해 보고, 바르게 하는 일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병들고, 약하여 있다고 매우 노골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질병을 통해서 그들을 다루고 계셨던 것입니다.

 

 

 


또 그는 어떤 자들은 자는 자들도 있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렇듯 성도들을 다룸에 있어서 죽음까지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순물이 없는 완전한 작품을 만드시기 위해서 여러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주목하시고 사랑하시고 그리스도인으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 속에서 일하시기 시작하시기 전에 이미 우리가 살아 나가야 할 일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되고 싶은 소원을 가지게 됩니다. 계속해서 죄를 제거하고 싶고, 적극적으로 거룩해 지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일하고 계시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더욱더 그리스도처럼 되고 싶어 하느냐는 것으로 판단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 엡2:11-13절

 

 

 

 

2장 11~13절: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때에 육체로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당이라 칭하는 자들에게 무할례당이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1. 유대인과 이방인


모든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커다란 장애가 있는데, 그 첫 번째 장애는 죄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을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기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사이에 있는 장애로서 하나님의 경륜 속에 있는 그들의 위치와 상태입니다.

 

 

 

 

이 두 번째 장애는 옛 시대에 있어서 세상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라는 두 주요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 둘 사이의 화목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어떠한 말이든지 불가능하게 보였습니다. 더구나 그들이 서로 함께 하나가 되어 무릎을 꿇고 같은 하나님과 같은 주님께 예배하고 경배한다는 일은 더욱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일로서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으로만 해낼 수 있는 일입니다.  바로 그것이 지금 전달되는 메시지입니다. 우리가 숙고하고 있는 11절을 살펴보면 바울은 그들이 전에 “육체 안에 있는 이방인들”이었다는 것을 상기시킴으로서 시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역사적이고, 문자 그대로 확실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로서 할례를 받지 못했으며 “육체로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육체로는 분명 이방인 이었고, 유대인이 가진 표적과 상징을 가지지 않았으며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오해함으로서 진정으로 문제가 되는 한 가지가 육체 안에 있는 표증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주장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할례 자체의 목적마저도 오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옛날의 이 큰 장애물과 거침돌을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육체의 차원에서만 말하는 이 사람들, 오직 사람의 행한 그 일만을 말하는 사람들은 그런 차원에서만 생각함으로서 자신들을 따로 떼어서 “우리는 할례당”이라고 말했던 것이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무 할례당”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율법적인 문제는 우리 주님에 의해서 해결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육체의 표징이 분쟁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이 고대세계가 우리에게 보여준 방식 그대로 동일한 문제들로 인한 분쟁과 쟁투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교회의 지도자들이 어떠한 제도나 방법들을 모색하며, 대화로, 혹은 글로서 수 없이 해결해 보고자 하지만 실패합니다. 그것을 해결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복음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복음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이방인이나 유대인, 또는 종이나 자주자나,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으로 하나가 되었듯이 오늘날에도 진리는 변치 않고 오직 복음으로만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같은 은혜와 같은 긍휼과 같은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그것들을 받고 함께 누리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우리는 같은 분을 경배하고 있으며 같은 구원을 즐거워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닫게 될 때 그 이후의 나의 충성은 내 자신에게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로 향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충성도 자기 자신에게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향함으로서 우리는 같은 지향 점을 가지고 서로 질투와 시기와 분쟁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며, 오히려 다함께 그에게 가고 그에게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 일을 해내는 그리스도의 방식입니다.

참된 평화에 대한 오직 유일한 소망은 평화의 왕이요, 의의 왕이신 그분의 발 앞에 함께 모이는 것이라는 점을 아시기 바랍니다.


 

 


2.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제 12절을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는 두 번째 국면 곧 어떻게 이방인들인 에베소 사람들이 할례를 받지 못하고서도 그리스도의 교회에 들어오는 것이 가능했으며 어떻게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새 몸인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루는데 동참했는가를 상세하게 살펴보게 됩니다.

 

 

 

 

사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구별과 할례의 표를 소개해 주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아브라함 자신과 그 후손들에게 영원토록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신 분이 하나님 자신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일을 너무 작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속에 분명히 해야 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유대인들이 바로 그 점에서 잘못 빗나가 외적인 표증만을 의미하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할례가 육체에 있는 것이며 외적인 것으로, 사람이 할례를 받으면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게 되어 모든 것이 잘 된 것이고, 할례를 받지 않았으면 모두 잘못되어 소망이 없다는 식으로 오해를 했습니다.

 

 

 

 

롬2:29의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 니라.”말씀에서 보듯이 유대인들은 이 할례의 전체 목적이 하나님 의중에 영적인 것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알거나 인식하는데 완전히 실패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나라와 약속의 언약들 또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주셨던 소망, 그 백성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와 같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처해 있던 조건과 지위들은 아주 특별했으며, 그 외의 모든 나라들은 이 축복에서 제외되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과 “그리스도 밖에” 있는 존재의 유무의 차원에서 그 모든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유대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행하신 모든 일 속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준비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구약에 있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에 있는 것들을 그 자체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된 믿음의 때까지 갇힌”(갈3:23)것입니다.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신의 형상에 따라 만드셨으며, 사람들은 하나님과 교통하면서 교제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범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후에 많은 자손을 낳았습니다. 땅은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기까지는 전 세계와 세계의 모든 사람들과 나라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하나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기 전까지 하나의 중요한 의미로 볼 때 구분이 없었지만, 이미 가인의 노선과 셋의 노선 사이에 일종의 구분이 존재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을 부르시기까지는 모두 같은 방식으로 다루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일을 하셨는데, 아브라함을 불러서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시초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구별하는 방식으로 할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한 편에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다른 한 편에는 이방인들로 구별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서 그 장벽을 허물어 버리고, 동일한 시민으로 하나님의 권속으로, 성도와 동일한 후사들이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서 해 놓으신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그리스도 밖에 있고”, 그리스도인 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살아있는 관계를 맺지 못한 자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으니 그 보다 더 악한 것은 없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만큼 더 놀라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입장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든지 밖에 있든지 오직 두 가지 입장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지을 문제입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은 세상에 속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있을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영원에 대한 소망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권속이며 그분의 자녀가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으며, 새롭게 주어지는 새 생명을 가지고 새로운 소망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코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런 자리에 있다면 즐겁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지상에 있는 천국이며 영원한 행복을 미리 맛보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가까워짐


사도가 쓰고 있는 서신의 주제는 “믿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너무 연약하고 작아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성령의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했던 것과 같이 “우리의 마음눈을 밝히사” 우리가 이것을 진실히 알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구원의 위대성을 이해하려면 첫 번째로 구원 밖에 있는 우리의 조건이 어떠한 것인가를 인식해야 하고, 두 번째는 구원의 결과로 인해서 되어진 우리의 조건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앞에서 우리는 12절에서 묘사된 구원을 떠나 있던 우리의 조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라 누가 되었든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 기이하고 놀라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상, 죄의 결과로 인해서 도저히 그리스도인이 될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한 위대성을 인식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더 예리한 질문을 한다면 당신은 구원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당신은 이 순간에 당신의 삶에 있어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그리스도인이라는 그 사실을 더 자랑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노라.” 만일 우리가 이것을 진정으로 안다면 그것이 전부가 됩니다. 그것에 비교할 어떠한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특권을 인식하고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지위의 영광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 13절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기독교 신앙의 가장 영광스럽고 감동적인 요약 가운데 하나를 대하게 됩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이것이 전체 복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이전에 내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선한 삶을 살았든지, 악한 삶을 살았든지, 그러한 조건들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어떠한 토양에서 자랐든지, 얼마나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랐든지 그러한 것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심지어 기독교 국가에서 기독교 가정에서 훌륭하게 양육을 받았든지 그렇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나라에서 우상을 섬기는 가정에서 아무렇게나 살아왔든지 그러한 것들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워졌는지, 내가 하나님의 지성소에 들어 왔는지, 그것이 문제일 뿐 다른 어떠한 조건들도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과 가까워졌는데,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존전에 나갈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이제 우리는 성도로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압니다. 이제 우리는 그러한 확신과 신뢰감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또한 하나님과 교제를 즐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언약의 모든 복락들을 체험하는 일입니다.

 

 

 

 

4. 그리스도의 피


우리는 구원의 위대성을 이해할 때에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도되어 찬송과 감사로, 그리고 흔들릴 수 없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확신과 신뢰로 인도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하나님과 가까워졌으며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된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된 것입니다. 우리의 어떤 됨됨이나 행위의 결과들로 인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우리의 선함과 우리의 도덕성을 의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복음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를 세우기 위해 공공에 기여하는 사람들, 삶에 있어서 존경을 받고 선행을 하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을 위해 큰 희생을 치루면서 자기의 큰 소유를 포기하고 가정의 안락을 희생하는 사람들, 이들은 확실히 선한 일을 하지만 그것들이 하나님께 열납되어지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열심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가까이 할 수 있는 오직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피로 말미암아서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언약마다 피로 인을 치셨고 그 피로 보증되어졌습니다.

 

 

 


구약을 읽어 보면 그것을 어디서나 발견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성전과 성구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성별되었고 하나님께 봉헌된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언약은 피를 뿌림으로서 인쳐 졌고 비준되었습니다. 새 언약도 같은 방식으로 비준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의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에 나아갈 때에 경외심과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들어간 것이니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고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 엡2:14-17절

 

 

 

 

2장14~17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사도 바울은 이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라는 말로 논증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이 말은 구약이나 신약에서, 구원의 문제 전체에 관련해서 빈번하게 사용되는 개념입니다. 히브리서 13:20에서는 그것에 대하여 아름답게 표현하였습니다. “양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을 지어다 아멘.”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성경의 메시지는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이시오, 그의 독생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또 그 안에서 화평과 평강을 이루시는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의의 왕”일 뿐 아니라, “평강의 왕”이시기도 하며, “그는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우리가 1~10절까지의 말씀에서 “죄가 사망을 낳는다.”는 것을 알았으며, 11~13절 사이에서는 “죄가 언제나 분열을 가져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나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분열 시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14절에서 우리는 죄가 사람을 분리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 더해 나가서 사람을 원수 관계에 놓는 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죄는 고통의 근원입니다.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적대감정을 가지고 사람들에 대해서도 적대감정을 갖게 합니다. 죄는 본질적으로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입니다.


 

 


창세기로 돌아가 보면 기독교 복음의 시작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하나님 앞에서 조차 자신을 자율적인 존재로 세우고자합니다. 사단은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에게 허용된 것과 허용되지 않은 것을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누군가?” “사람이 얼마나 크며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를 인식하지 못하여 하나님은 너를 노예처럼 계속 붙잡아 매어두고 종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을 어째서 그것을 모르고 너 자신을 세우지 않으며, 어째서 너 자신의 주장을 하지 않는가?” “엎드리지 말고 일어나라!”


 

 


그래서 인간은 일어났고, 일어났기 때문에 타락한 것입니다. 결코 일어서서 버티지 않아야 할 방식으로 버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설 수 없었던 방식으로 서려고 노력함으로서 타락으로 인도되어 그 결과로 타락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교만과 자기중심에 기인한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하나의 신으로 세웁니다. 그는 자기가 자율적인 존재요, 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자기들의 권리와 요구들에 의해서 말하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자기 관심, 자기 찬양, 자기 자랑, 자기주장에 대한 하나의 표증입니다. 그는 부단히 자기를 들여다보고 자기 주위에 쓸어 넣습니다. 자기 혼자 존재한다면 아무런 고통도 없었을 것이지만, 모든 다른 “”가 나와 똑같은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분쟁이 있고 투쟁과 질시가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한 목표를 놓고 동맹하기도 하지만 내분으로 가득 차 서로 대적합니다. 세상은 언제나 똑 같은 형태로 오늘날까지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그를 떠나서는 어떠한 화평도 없습니다.

이 세상은 악한 영의 지배에 따라 조종되어질 수밖에 없고 사람은 사회적이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지 않고 살 수가 없습니다. 그로 인해 사람은 죄의 영향을 받고 있고 또한 병든 상태에 있기 때문에 어떤 교육이나 환경을 통한 훈련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치료가 선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새로운 생명을 필요로 하며,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본문에서는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화평이라고 하십니다. 그는 화평을 만드실 뿐만 아니라 그분 자신이 화평이십니다. 또한 그는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평화의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누릴 수 있기 전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된다는 또 다른 방식의 논리입니다. 단순히 그리스도의 교훈을 받고 그리스도의 방식에 따른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화평의 복락을 누리려면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야하며, 그의 몸의 부분으로서 생명을 나누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부터 나가서 행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사이에 있는 중간의 담을 헐어버리셨습니다. 그로 인해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 사이에 막힌 첫 번째 분리가 없어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모두 하나로 받아들여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수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고 한 지체로서의 삶을 영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로부터 하나의 명령체계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시켜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그렇게 만드시고 사람들이 적대감정에서 해방되도록 중간에 막힌 담을 헐어 버림으로 그것에서부터 구출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된 것입니다.

 

 



2. 화평을 이루는 그리스도의 방식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십니다.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라는 말씀처럼 그는 자신이 화평이시며, 또 화평을 만드십니다.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심으로서 화평의 조건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화평을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화평은 실제적인 적대감정을 막는 일만 의미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는데 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화평을 이루시는 방식으로 교회를 생성하고 만드시고 또한 존재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화평을 이루시는 방식을 이해하려면 교회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를 떠나서는 이러한 일을 생각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롭게 창조되어 존재케 되었습니다. 교회의 유일한 기초는 머리되시는 예수님이시고 교회는 물과 말씀으로 창조되기 전에는 있지 않았던 전혀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우리는 막혔던 담이 헐어진 상태에서 교회에서 서로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예배하고 서로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는 이 모든 것의 결과로 인해서 “새로운 사람들” 이라고 불리게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창조된 것입니다. 그것이 “새로운 창조” 입니다.

 


 


옛 것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고, 우리의 몸에는 모두가 똑 같은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있어, 모두가 한 형제로 화평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관계로 동일한 사람들이 된 성도들은 “너와 나”라는 각자의 개념에서 떠나 그리스도와 같은 한 몸의 각 지체로 살게 되어 모두가 하나로 연합된 새로운 몸으로서 한 몸이 된 것입니다.

 


 


3. 유일한 중보자


만일 사람이 하나님께 대해서 모반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으로부터 타락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삶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을 것이며, 이런 일로 고심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평화가 깨어지고 우리는 이 모든 고통 가운데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화해하고 화목하게 지내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먼저 하나님께 대하여 함께 화해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이웃들과 다른 관계를 맺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않고는 화평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제일 되고 첫째 되는 계명으로 말씀하신 “네 마음과 목숨과 힘과 정성을 다해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지키기 전에는 두 번째 계명으로 주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결코 행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화목케 하다” 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합니다.


1. 적대감정에서 우정의 관계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원수의 상태에서 다시 합하여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합니다.

3. 적대감정이 철저히 없어진 완전한 친밀함을 의미합니다.

4. 원수의 상태에서 서로 합하기로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에서 더 나아가 서로 자발적으  로 완전히 일치되고 친밀한 위치로 인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5. 어떠한 것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듯 화목이라는 말에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러한 화목의 관계로 되돌아가게 되는 것을 “화목케 하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성도들은 죄의 문제도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는 다르게 적용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화목을 이룸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게 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고 어둠이 전혀 없는 분이신데, 나는 여전히 죄를 지으며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 어떻게 교제를 할 수가 있겠는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죄를 짓는 순간 나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손상시키고 있으며 그 죄의 행동은 나와 동반자이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그 행위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에서, 빛 되신 하나님에게 혐오스럽고 역겨운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한 무서운 점이 죄가 교제를 손상시키고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해 내는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화목”이란 말은 우리가 교제 밖에 있으며 그 교제를 회복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에 마주치게 해 줍니다. 그러나 화목은 우리의 어떤 조건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취되며 산출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떠나서는 어떠한 화목의 가능성도 없습니다.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신다는 말씀이 그 요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십니다. 그것이 없이는 우리는 죄를 용서받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화목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도 화목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이 위대한 축복의 길을 열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찬양과 영예와 영광을 돌려드려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과의 화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함께 교회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을 한 몸으로 만드시고 그들로 하여금 우리 주님의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에게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서 중간에 막힌 담을 허셨는데, 그것은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였습니다. 우리 주님의 가르침이나 이적을 통해서 행해지지 않고 그가 죽으심으로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이제 이미 되어진 그 모든 일이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되는지를 본문에서 말씀하십니다.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다른 말로 해서 그 길과 가능성을 만드신 다음에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셔서 그렇게 행하셨음을 말하였고, 그것을 선포하여 주셨고 우리에게 새로운 소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처럼 애절하게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화평이 가능케 되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주님이 지상사역에서 주님 자신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진 메시지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선포되고,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또한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열려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일은 가능하고 또한 이런 일은 일어났으며, 그리스도 자신이 그렇게 그것을 전파하셨고, 그들에게 그것을 제공하셨으며, 그들 앞에 그것을 세웠으며, 그들을 그곳으로 초대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먼데 있는 이방인이나 가까이에 있는 유대인 모두에게 똑같이 평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인간의 최고되고 제일차적인 요구는 하나님과의 평화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벗어나 죄에 빠진 사람은 안식이 없고 곤고하고 불행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이사야 57:19절의 “먼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 지어다 평강이 있을 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이렇게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악인은 능히 안정치 못하고 그 물이 진흙과 더러운 것을 늘 솟구쳐 내는 요동하는 바다와 같으니라.” 죄에 빠진 인간의 모습은 끊임없이 요동하는 바다의 모습과 같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사람은 바다와 같이 휴식이 없습니다. 

 

 

 


에덴에는 어떠한 요동도 없었으며 안식이 없는 것이란 도무지 전혀 없었습니다. 거기에는 오직 인간에게 작용하는 한 가지 세력만이 있었는데, 그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와 교제하며 서로 교통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누리고 있었고 그의 생명은 평안과 불안이 서로 뒤섞이지 않은 상태에서 불행이나 걱정, 고통과 같은 문제가 전혀 없었습니다. 사람은 무죄한 상태에서 완전히 평안하고 고요하고 자유로운 상태에 있었지만 다른 세력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에 복종하게 됨으로서 타락하여 마귀의 세력, 악의 세력, 지옥의 세력이 거기에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인간의 삶은 휴식이 없는 갈등의 삶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난 사람은 마치 바다와 같습니다. 마귀는 언제나 존재하며 우리를 괴롭히고 있습니다.

마귀가 이런 공격을 할 때가 있고 우리는 공격을 받아서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마치 폭풍이 바다를 때리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마귀와 그의 세력이 마치 고삐가 풀린 것처럼 보이고, 그래서 우리의 작은 생명들은 거대한 폭풍 속에 있는 바다의 물결처럼 이리저리 떠밀리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환경을 통해서 전쟁이 오고, 질병이 오고, 사랑하는 사람이 병에 걸려 죽거나 어떤 나쁜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전복당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처한 형편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기초가 흔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벗어난 사람입니다. 그것이 타락의 결과로서 주어진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 모든 것의 결과는 인간이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세상에 인간의 마음을 만족시킬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밑 빠진 독과 같이 채우고 채워도 도무지 채워지지 않는 것이 사람의 욕심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않고는 평화가 없습니다. 어떠한 학식이 있고 지성적이고 높은 도덕적인 소양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참 안식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또 그리스도만이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 평화를 제공하시고 또한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그분으로 채워질 때에라야 우리의 마음에 만족을 누릴 수 있으며 참 안식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성경: 엡2:18절

 

 

 

 

2장18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 아버지께 나아감


이 논증은 11절에서 시작되어 가장 높은 정상에 도달해 있는 가장 위대하고 가장 영광스러운 진술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한 단계, 한 단계 진보하여 가장 높은 정상에 도달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복 되신 성 삼위일체를 접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한 성령으로 성부 아버지께로 나아감을 얻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위대하신 성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식하고 드리는 예배는 경외로움과 경배로 그리고 외경스러운 느낌과 영광의 느낌으로 찬양과 참된 찬미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드릴 때마다, 또는 우리가 예배드리려 함께 모일 때마다 우리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경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영광을 감지하지 못하며 엄위와 위대하심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우리의 영을 그렇게 준비시켜야 하며, 묵상해야 하고 이 문제를 좋아해야 하며 성경을 탐구해야 합니다. 영광과 거룩과 전능하신 가운데 계신 영원하신 성 삼위 하나님께서 “”라는 개인에게 관심을 두고 계시고 또한 역사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한 나라의 대통령이 나에게 관심을 가져 준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일 텐데, 그보다 무한하신 권세와 영광 가운데 계신 분, 더군다나 성삼위의 전체로서의 하나님께서 “”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하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이보다 더 기이하고 놀라운 일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감당할 수 없는 그 사랑에 영광과 찬양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 영광과 놀라운 특권은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가장 감격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는다는 사실에서 “나아감”이란 말은 너무나 중요한 말로서 “접근하다”라는 말로 번역될 수도 있지만 “소개됨”이라는 말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듯 합니다. 그러면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소개함을 받게 하려 함이라.” 가 될 것인데, 그것은 관계가 회복되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호의를 베푸신다는 확신을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여기서 깨달아야 하는 중요한 점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이것에 대한 길을 예비하시고 준비하시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효력이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그것을 산출하여 우리를 아버지께 소개하시고, 손을 붙잡아 이끌고 그의 존전으로 데리고 나아가신 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에 대하여 말할 때에 그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고 이런 저런 것들을 해결해 주는 것에 머무는데, 그러나 구원의 장엄한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의 존전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이 땅의 삶에서만 머물지 않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존전에 데려다 놓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와 교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이제 “나아감”을 얻은 자들로서 하나님의 존전에 담대히 나아가 그분과 교제를 나눌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영원토록 하나님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2. 주여,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나아감”을 얻게 된 우리들이 이제 어떻게 나아감을 얻느냐 하는 것인데, 구원의 목적과 목표가 그러하다면 큰 문제는 어떻게 우리가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우리는 여기서 기도라고 하는 위대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는 기도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주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어 가까이 가는 길이 무엇인지를 제시하여 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 보아야 합니다.


① 우리가 하나님을 아느냐?

②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느냐?

③ 우리의 기도가 진실 한가?

④ 우리는 기도를 할 때 자유롭게 하고 있는가?

⑤ 우리는 기도를 할 때 확신을 가지고 하는가?

 

 

 

 

안타깝게도 우리는 체험을 통해서 볼 때 그렇지 못하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어떠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또 어떤 위기를 만났을 때, 기도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기진해 있을 때 기도가 어떠한 것인가를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또 그들에게 가서 상의를 하며 성경을 읽고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지만 실마리를 찾지 못하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는 수밖에 다른 것이 없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있음을 느낍니다. 물론 그러한 기도들은 확신이 없기 때문에 참된 기도가 아닙니다. 바로 이 구절이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었다.” 이 말씀은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면 우리의 나아감이 효력적이고 효과가 있다고 믿게 된다면 우리는 기도를 할 때에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믿고 문제 거리를 맡기고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과 의식으로 행복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도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해결 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어린 아이가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보다 더 친밀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는 조건이 주어졌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반드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에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의 의를 받았고 그의 생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다시 태어났고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있고 그의 완벽한 사역을 의지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는 반드시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해야 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해 놓으신 일에 감사하며, 또한 그를 보내사 그 일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아뢰기를 내가 전적으로 주님에게 달려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아뢰고, 그것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실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분은 그리스도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 성령으로 기도함


어느 의미에서 기도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를 인식하는 어려움도 많은 어려움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으십니다. 그 사실 자체가 우리에게 어려움을 안겨줍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보아왔고 그들의 말하는 소리를 들어왔으며, 그들과 교제하고 서로 친교를 나눌 때에 얼굴을 마주대하고 대화를 나누며 어떤 때는 슬픔으로 또 어떤 때는 기쁨으로 교제를 해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보이지 않으시며, 더군다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어떤 때에는 우리에게 들려오는 음성이나, 어떤 느낌, 아니면 황홀지경에 빠지거나 전신으로 느껴지는 격렬한 감동으로 주어질 때도 있는 반면에 사단에 의해서 사단이 보내는 암시들과 환상들도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단순히 어떤 심리적인 경로를 겪고 나가는 것 밖에 되지 않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을 설득하고 기만하고 사실상 우리 자신에게 우리 자신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처럼 흔하게 불평하는 비 실제성의 보편적인 의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집중성의 문제입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사람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에나, 책을 읽고 있다면 그 집중한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며, 그런 문제가 전혀 야기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하기 시작할 때에 우리 마음이 이리저리 방황하고 우리의 생각들이 온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는 것을 발견하고, 비록 우리가 하나님께 말씀드리려는 의도로 무릎을 꿇고 있기는 하지만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 생각하기 쉽고 또 어제 일어났던 일, 또 내일 일어날 일에 대해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무가치함의 느낌이 드는데, 아직도 우리의 죄악이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접근해 나갈 권리가 없다는 느낌이 들어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하며, 또 다시 의심이 들어오고 또한 의심들이 마음속에 침투하여 여러 가지 의문과 갈등들이 일어나게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일들과 친숙해 있고 이러한 일들은 기도가 인간의 영혼에 있어서 최고의 가치 있는 행동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마음과 생각을 모으고 진정으로 집중시켜서 우리의 기도로 하여금 살아있고 진실하고 생명감이 넘치는 행위가 되게 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에 모든 지역의 세력들이 우리에게 방해 공작을 하고 있으며 그들이 있는 힘을 다하여 우리의 노력을 흩어버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실로 두려워해야 할 일은 기도가 너무 안일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정확히 무엇임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영혼의 큰 원수에 특별한 표적이 된다는 것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이유들로 볼 때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가를 배우는 것은 매우 필요하게 되는 것이고, 우리가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 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기도를 하는 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인식하지 않고 여러 가지 간구들로 하나님 아버지께 나가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는 먼저 멈춰 서서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을 묵상하고 스스로 상기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고 있는 영혼입니다.

 

 

 


그것은 가볍게 생각할 수 없는 일이며 그저 급하게 돌진해 나갈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나가 “한 성령”으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성령이 없이는 진정으로 기도할 수 없으며 참된 기도는 언제나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으로 기도하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의 사역과 활동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이 없이는 기도가 기계적이고 생명이 없고 어려운 것이고 또 기도라는 것이 고역이 되지만 성령과 함께 하게 되면 모든 것은 변하여 기도가 자유롭고 영광스럽고 영원히 누릴 최고의 누림이 됩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께서 기도의 문제에 있어서 정확히 어떠한 일을 행하시는지에 대하여 다루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는 “어째서 내가 기도해야 하는가?”, “어째서 내가 언제나 기도해야 하는가?”, “어째서 내가 기도하고 싶어지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그 답은 내 속에 신령한 마음을 창조하는 이가 성령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소생시키시고, 살리시고, 다시 우리를 깨우쳐 주시고, 움직이시고, 자극시키시고, 우리 육신적인 마음을 영적으로 작동시키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적인 영역을 의식하게 되고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안에 성령께서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상기하여 기도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도록 하셔서 사람을 기도로 인도하시는데, 사람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과 부족하다는 것을 아는 것만큼 더 좋은 것은 없으며,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특별한 역사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 그저 단순히 구할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돌진해 나가는 것과 진정으로 교제와 진정으로 하나님과 누리고 있는 차이에 대해서 스스로 잘 아실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보게 하시고, 부족함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속에 경건한 슬픔과 참된 회개를 창조하십니다. 그것은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촉진제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기도하도록 준비하고 계십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필요하시다는 것을 보여주며, 또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축복을 우리가 필요로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령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특별한 은사와 정신과 혼을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수십억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의 구별되고 독특하고 독립적인 존재로서 인격적이신 하나님과 교제를 누리고 있는 것이며, 그를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를 알고 싶어 하는 소원을 느끼게 되고 그와 접촉하고 싶어지는데, 그 일을 성령께서 행하십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아직도 무언가 확실하게 와 닿지 않지만, 하나님이 자기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할 때는 매우 중요한 단계에 접어든 상태인 것입니다. 하나님에 굶주려 있으며 자기들의 영혼 속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갈망하고 있는 사람에게 성령께서는 모세에게 그러셨듯이, 또한 여호수아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영광과 엄위 속에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성령님께서는 그것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인도하여 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을 이해하도록 하시며 우리가 당하는 시련과 환난과 난제들에 의해서 둘러 싸여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또한 “내가 너를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 있더라도 약속들에 대한 소망을 주셔서 기쁨과 행복의 감정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누리게 될 것인데, 그 일을 행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전적으로 무력하고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를 몰라 절망적일 때, 우리가 신음하고 있는 처지에 있게 될 때 또한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을 때마저도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십니다.

 

 

 


그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친히 우리를 위해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 말로 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시면서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요구가 없이도 성령께서 그렇게 행하신다면 우리가 그에게 요구하고 그에게 도움을 청한다면 그가 확실히 우리의 도움에 응하실 것이라는 것이 얼마나 확실합니까! 성령으로 기도를 시작하면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감을 얻게 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뿐 아니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 엡2:19절

 

 

 

 

2장19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1.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나라의 시민으로서 그들은 한 가족이며 “하나님 집”의 권속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성도들이 지체를 이룬 교회를 하나님 자신이 거하시는 집으로 생각하십니다. 외인들은 자기들의 나라 백성들이 아닌 사람들 속에 있기 때문에 소외감을 느낍니다. 그들은 외국인으로서 나그네이며 시민권이 없고 영주권도 없어서 오랫동안 머물 수 없는 사람들이며, 법적인 보장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한 가정에 수년 동안 살아서 거의 그 가정의 일원이 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그 가정의 권속은 아닙니다. 한 나라에 있어서도 똑 같이 적용이 되는데, 만일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그 나라를 방문하여서 살고 있음으로서 그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아침에 출근하고 밤이면 같은 차를 타고 귀가하고 그 다음에도 계속해서 틀에 박힌 일을 하며, 심지어 그 나라에 속한 사람과 결혼하여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실상 그 나라에 속해 있지 않으며, 그 나라의 시민이 아니고 단지 여권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평상시에는 그 나라의 시민들과 별반 차이가 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어떤 급박한 일, 전쟁이나 법적인 소송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 그들은 전혀 보호 받을 수 없고, 오히려 그 나라에서 추방당하거나 감금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 나라의 시민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로 부당한 취급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 나라의 시민이든지 아니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시민도 되고 시민이 아닌 사람도 될 수는 없습니다. 이중 국적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위기의 순간이 왔을 때는 어느 한 국적을 포기해야 할 것인데, 그것은 자신의 결정에 의해서보다 국가의 필요에 의해서 결정되어 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유의 일은 하나님의 교회에서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교회에 오면 평안하고, 자기 집에 온 것과 같이 느껴지며, 수시로 들어왔다 나갔다 하며 자유로우며, 언제나 마음이 교회로 향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들에게 더 필요한 것은 천국의 시민권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인쳐 주심을 통해서 알게 되며,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남으로서 그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천국의 시민권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교회에 어떠한 시련이나 큰 위기가 왔을 때에도 알 수가 있습니다. 자기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교회를 대적하는 자리에 서든지 아니면 떠나가는 것을 볼 때 그 나라에 속한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는 한 나라의 국민이며, 한 아버지를 둔 가족들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서로가 사랑하며 서로의 아픔을 돌보아 줍니다.

 

 

 


또 아버지의 말씀에 순복하여 모든 일들을 질서대로 처리해 나갑니다. 그들은 이미 새로운 생명으로 하나가 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교회의 어떠한 난관도 끝까지 남아서 해결하고자 노력하며, 더욱 생기 넘치는 가정으로서의 교회를 세우고 싶어 하는 소망을 가집니다.

교회 안의 성도들은 외인이 아니며 손도 아니고 오직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한 가족입니다.

 

 

 

 

2. 하늘의 시민권


교회는 성령의 조명을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기구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그것을 하나의 제도상의 기구로 생각하기를 좋아하고, 그 특별한 제도들을 자랑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이해의 눈이 열려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알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엡1:18~19) 사도 바울은 교회에 대하여 설명할 때에 하나의 몸으로 비유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위대한 국가로서의 나라인 교회로, 또는 하나의 가정으로서의 교회로 비유하는데, 그것 또한 하나의 성전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교회를 하나의 도성 , 하나의 국가 , 하나의 나라 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에게 갑자기 떠오른 새로운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관통하여 흐르는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교회를 나라나 국가, 어떤 성읍에 비유했다는 것은 우리가 모든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사람들이며 분리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고대 도성들은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방벽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성벽의 목적은 시민들을 구별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성벽은 시민들을 그 안에 넣고 성 밖의 다른 사람들을 몰아내고 문을 닫은 것입니다.

성을 들어가기 위한 여러 대문들이 있었지만 주어진 시간에 닫혔고 다음 날 아침에도 어떤 주어진 시간에 열렸습니다. 그 도성에 대한 전체 개념이 구별을 의미하고 따로 떼어 놓는 것을 의미하며, 또 어떤 둘러싸는 것을 의미하며 그릇에 넣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구별되어 더 이상 다른 사람들과 같은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 도성에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서로서로 결속을 맺고 있는 한 시민입니다. 그 나라는 그리스도의 왕 노릇과 통치와 권위가 있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영원토록 존재하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그 나라의 시민으로서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나라의 시민권을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며 다스릴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이미 그 안에 있고 그 나라의 시민들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외인과 손이 아니요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인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3. 특권들과 의무들


교회는 하나의 국가요 나라요 도성과 같다고 합니다. 이제 이 위대한 나라 시민들에게 속한 특별한 특권들 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이것은 이 특별한 나라의 모든 복락을 요약한 것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는 모든 신령한 복이 우리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그 나라와 그 도성은 이러한 모든 복락들이 값없이 주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성도들에게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시고 특별하고 유별난 관심을 보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마련하신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는 말씀처럼 온 우주와 만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서 모든 일을 펼치시고 계시다는 진술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기이하고 말로 할 수 없는 부요함과 모든 축복들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 로 우리가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왕께 나아갈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에서 머물지 않고 그 왕께서 개인적으로 “”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시고 살펴 주신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로 우리가 동일한 성도로서 하늘나라의 자원들이 우리 가운데 나누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가진 시민권의 요구들과 책임 들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첫 번째 그 나라에 대한 우리의 긍지입니다. 우리가 그 나라의 시민임을 영광스러워하고 그 나라를 자랑해야 합니다. 부끄러워하고 감추고자 하는 것은 그 나라에 대한 모욕입니다. 우리는 그 나라에 속해 있음을 드러내놓고 자랑해야합니다.

두 번째 로 자신보다 나라를 더 생각해야 합니다. “왕과 나라를 위하여!”라는 구호가 있듯이, 나 자신의 특별한 유익이나 관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왕과 나라를 위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2:4)고 했습니다.

 

 

 

 

세 번째 로는 그 나라의 백성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나라 시민으로서 명예를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 네 번째 로 우리는 언제나 나라를 선양하는데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 나라의 법을 지키고 또한 그 나라가 행하고 있는 모든 일을 지켜야 합니다. 물론 세금도 내야하며, 외부로부터 오는 많은 공격들을 막아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공격을 받고 있고 조롱을 받고 있을 때 우리는 아무리 작은 봉사라 할지라도 나라의 방호를 위해서 분연히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는 가장 최대의 소원과 최고의 야망은 나라의 영토가 넓혀지는 것을 보는 것이고, 그 나라가 더욱더 강해지고 더 영광스러워지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권속


그리스도인은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들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권속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분명히 진전된 하나의 요점이 있습니다. 국가의 한 시민 보다 더 가까운 것이 민족이라 할 수 있고 그보다 더 가까운 것이 한 가정에 속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정에 속한 권속이라는 개념은 아주 특별하고 깊고 가까운 관계입니다.

 

 

 


사도는 이 연합에 관한 그의 가르침에서 정말 한 단계를 더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지체들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는 참으로 밀접하고 친밀하게 결합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국가가 법률적인 관계라고 한다면 가정은 생명적이고 살아있는 피의 관계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권속으로서 하나님의 가정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벌하지 않기로만 작정하시고 또한 우리를 지옥에 보내시지 않기로만 했다 할지라도 매우 놀라운 일이었을 것인데, 우리는 마땅히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자신의 나라의 시민권과 영주권을 주셔서 시민으로 받아들이시고 더군다나 양자로 받아 주셔서 한 가정의 형제들로서 존재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모시고 영원토록 살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종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높여진 하나님의 권속들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1:12) 라는 말씀은 놀라울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인들인 우리에게 관한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요일3:2) 고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들”(벧후1:4) 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가 우리 아버지인 하나님과 가진 관계에 있어서 우리에게 해당되는 특권들을 누리며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모든 것을 만드신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러니 그분에게는 모든 별들과 혹성들이 어린아이가 가지고 노는 공기 돌에 지나지 않고, 세계의 열방들은 먼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크신 분이 우리의 미미한 작은 일들까지도 관심을 가지시고 그들의 간구에 귀를 기울이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털 까지도 세신바 되신다고 하시며, 우리의 상세한 부분까지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고 합니다.[참 고 : 마6:32] 우리는 우리 자신에 관해서 무엇을 걱정하고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집의 권속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엡2:20-22절

 

 

 

 

2장20~22절: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아멘

 

 

 


1.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


사도 바울은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집”, 이제는 “그가 거하실 처소”로 묘사함으로서 점진적으로 우리의 처한 환경에 더 가까워지게 의도적으로 유도 합니다.

권속! 그 다음은 집! 이제는 건물을 말합니다. 여기서 그는 우리를 더 큰 클라이맥스로 이끌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국가로 비유한 것보다 가정으로 비유한 것이 더 우선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가정에 있는 식구들이 국가에 있는 동일한 시민들보다 더 밀접하게 매어져 있으면서, 또 어떤 국면에서는 여전히 그 가정의 식구들은 자유롭고 밀접한 연합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정은 결국 개인들의 집합입니다.

 

 

 

 

그러나 건물을 생각하게 될 때에 건물에는 각 구분들끼리 더욱더 긴밀하게 결속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전체 건물을 생각해 보면 참으로 이해하는데 좋은 열쇠가 됩니다. 가정과 별도로 생각할 때에 그 한 건물 안에 있는 벽돌들과 개개 돌들 사이의 연합은 가정과는 다릅니다. 가정의 식구들은 분리되어 있으며 별개의 개인들이지만 건물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가정의 식구들은 동일하지 않으며 가정의 식구들이 되기 위해서 자기들이 지닌 특성들을 멸절시키지도 않으며 여전히 개성이 존중되고 때때로 그것은 매우 두드러지고 또 그것이 너무 두드러진 나머지 가정의 식구가 전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대하기보다 더 어려울 정도로 서로 닮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정의 식구들입니다.

결국 가정의 식구들은 서로 분리 될 수 있지만 여전히 식구들이며, 서로 나누어 질 수 있지만, 그리고 서로 다툴 수도 있고, 심지어 상대방을 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가정을 와해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건물은 그런 일이란 생각조차 할 수 없으니, 건물에서 큰 돌 몇 개를 빼내면 건물은 붕괴하여 없어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연합의 원리를 생각할 때에 가정 보다는 건물이 더 긴밀하고 가깝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도가 말하는 것은 교회의 개념은 주님의 거룩한 전이라는 것이며 교회는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된다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우리 안에 거처를 삼으신 하나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옛 성전에 주님께서 지성소에 임재 하여 계셨듯이, 지금도 주께서는 그의 백성들 사이에 있는 교회에 거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교회의 지체로서 그 일부이기 때문에 성도들 개개인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란 말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9~17에서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등등으로 나뉘어져 있었을 때에 너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인 줄 깨닫지 못하느냐고 책망을 합니다. 그 말은 너희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전을 멸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나뉠 수 없는 한 연합체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교회는 건축의 과정에 있는 하나의 건물로서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타락한 직후부터 이 세상에서 행해 오셨던 일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역을 이루시고 하늘로 돌아가신 이후에 행하고 계셨던 일이 하나의 건물을 세우시는 것인데, 그 건물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이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터 위에 지어져 가느니라.”라는 말씀이 그것을 정확하게 지적해 줍니다. 건물이 점점 올라가고 확장되어 갑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의 위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그분은 자기의 설계도와 청사진을 작성하신 영원한 건축가이십니다. 그는 집을 짓고 계신 것입니다. 모든 세대마다 어떠한 돌들을 캐내서 다듬고 건물에 붙이는 그런 작업들을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대 건축물의 일부이며 이 장엄한 성전의 일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돌들을 세상에서 빼내어 새로운 건물을 세우고 계시며 이 놀라운 건물과 이 영광스러운 전을 건설하고 계십니다.

 

 

 


이 건물은 물질적이고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자라나고 있는 유기적이며 생명이 있는 건물입니다. 베드로 전서 2:5에서는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돌이 살아 있으며 돌에 생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도 여기 22절에서 같은 개념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생명이 있는 건물이요 살아있는 집이라는 것입니다.

 

 

 

 

2. 오직 유일한 터


하나님께서는 이제 새로운 성전을 만드시고 그 성전에 거하시는데, 이 성전은 이전의 유대인의 성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 구별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이러한 새로운 성전이 존재하게 되어 하나님께서는 지금 거하시는 전은 그의 백성으로서 곧 교회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연합으로 이루어집니다. 둘로 한 새사람”을 만드셨으니 이것은 새로운 교회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살아 있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계속 자라나는 생명적인 것입니다. 성도 하나 하나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교회가 자라나고 확산되어갑니다. 성도는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어 연합을 이루고 하나님의 건물을 이루는데 쓰이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는 여기에서 우리에게 이 모든 것에 관한 분명한 교훈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는 터 위에 이것을 세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른 터가 없이는 참된 건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언제나 기초부터 출발해야 된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참된 연합에 대한 오직 유일한 기초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입니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건설됩니다. 사도는 부활하신 주님을 본 사람들로서 부활의 증인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특별히 부름 받아 부활하신 주님에 의해서 복음의 전도자로 보냄을 받은자들입니다.

 

 

 

 

그들은 이적들을 행하고 교회들을 설립할 능력을 받았습니다. 이제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오실 것을 예언하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예언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기초를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중요한 골격은 그들 위에 세워진 것으로, 그것은 이 큰 건물 안에 있는 주춧돌로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먼저 놓여졌다고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터 위에 다른 터를 닦아 둔 자가 없나니”라는 말씀만이 진리입니다. 다른 터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3. 영적 화해


교회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으며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또한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서 짓고 계신 이 큰 성전의 건설 과정에 세워지고 있는 여러 벽들의 지체들입니다. 하나님이 짓고 계신 이 위대한 성전은 주 안에 있는 거룩한 전입니다. 하나님의 이 신기한 집을 짓는 데 있어서 우리가 어떤 위치와 부분을 감당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에베소 사람들이 그 거룩한 전으로 함께 지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즐거워합니다. 그들이 들어오기 전에 그 일은 시작이 되었고 그들이 그 일에 동참하게 되었으며 다른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인들로서 이곳에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일은 이 하나님의 위대한 전에 있어서 개개 부분들이 되는 우리는 기초들과 상호 연락이 되어야 하며 참되고 바르게 그 기초와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집을 짓는 재료로는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지어지는데, 짚이나 나무나 풀로 집을 짓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터가 보배롭고 또한 모퉁이 돌도 그러하기 때문에 금이나 은이나 보배로운 것들밖에는 적당치 않아, 짚이나 나무나 풀로 집을 짓는 것은 무가치하여 공력을 밝히는 날이 오게 되면 불로서 시험을 받게 될 것입니다. 불이 와서 나무나 짚이나 풀을 순식간에 태워 버릴 것이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집을 지은 사람은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자기가 이 터 위에 어떻게 집을 지을지에 대하여 조심하고 신중해야 합니다.

 

 

 


집을 짓는 사람의 일은 단순히 벽을 빨리 세우는 것이 아니고 벽에 들어갈 모든 것이 그 터와 서로 잘 상합이 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터 위에 진정으로 확고히 세워진 것들을 통해서 교회를 지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이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 것을 알고 또한 전적으로 무능하며 무력한 존재임을 알며 오로지 자기들의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존해야 하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들만이 그러한 데에 참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희생적이고 대속적인 속죄의 은혜에만 의지하는 사람들이며, 성령의 능력에만 의지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집을 짓기 위하여 특별하게 선별하여 택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 있는 돌들로 각자가 다 다른 모습으로 조화를 이루며 결합되어 큰 건물의 담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 돌들은 건축가에 의해서 그 쓰임새에 꼭 맞도록 다듬어 질 것입니다.

 

 

 

 

4. 교회의 성장


이 본문 말씀에서 교회가 일종의 건물이요 큰 전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전에 계시고 여전히 더 크고 더 충만한 방식으로 거하시려고 하십니다.

이 건물을 짓는 데 있어서 돌들처럼 우리는 기초와 모두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진리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함께 지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완성 될 때 하나님께서 거하시게 될 그 “거처”를 위해서 지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이제 우리는 이러한 돌들이 얼마나 정확하게 그 건물에 놓여지게 되는가 하는 큰 문제에 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에베소 사람들은 이 건물로 들어왔고 지금 이 건축의 부분들이다. 너희는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해서 주 안에서 지어져 가고 있는 이 큰 전의 부분들이다. 그럼 언제 그런 다듬는 준비가 일어나는가가 관건이 될 것인데, 일차적으로 이 준비는 우리가 교회 안에 있기 전부터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준비를 받고 있지 않았으면 결코 이 건축의 부분들이 될 수가 없고 이 벽의 돌들일 수 없습니다. 열왕기상 6:7에서 “이 전은 건축할 때에 돌을 뜨는 곳에서 치석하고 가져다가 건축하였으므로 건축하는 동안에 전 속에서는 방망이나 도기나 모든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으며.” 그것은 솔로몬의 성전을 짓는 기사의 일부분으로 매우 중요한 역사적인 자료입니다.

 

 

 

 

성전을 짓는 모든 과정과 재료들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성막을 짓는 것에 대해서도 내역을 세세하게 일러 주셨습니다. 이 전은 건축할 때에 돌을 뜨는 곳에서 치석하고 가져다가 건축하였으므로 건축하는 동안에 전 속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모든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으며” 그 진술은 교회의 본질에 관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에 대해 큰 빛을 던져 주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이 돌들을 준비하는 과정은 은밀히 진행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지체들이 될 수 있기 전에 성령에 의해서 능력 있는 준비의 사역이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행해집니다. 이것은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일이며, 세상은 그것에 관해서 알지 못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백성들이 그 돌들이 준비되는 것에 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였듯이 세상은 이것에 관하여 어떠한 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교회의 지체가 될 때에는 반드시 중생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준비된 돌들로 건물을 짓는 동안에는 어떠한 시끄러운 소리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는 생명에 관계되는 진리에 관해서 어떠한 논쟁이나 불일치도 있어서는 안 되며, 방망이나 망치 소리나 철 연장 소리가 나서도 안 됩니다. 인간의 어떠한 지위와 조건에 관해서도 논쟁의 소리나 다툼의 소리가 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 엡3:1절

 

 

 

 

3장1절: 이러하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3장의 처음에 나와 있는 “이러하므로”라는 단어는 이 장의 앞부분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시사해 줍니다. 그것은 앞에서 이야기 한 내용,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밝혀진 놀라운 진리는 복음을 믿는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인들과 한 몸이 되었다는 메시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하므로”라는 말로 시작을 하지만, 여기서 논술을 중단하면서 주제에서 벗어난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학자들이나 문장가들은 바울의 서신에 오점으로 지적하면서 아주 좋지 못한 문체라고 비평합니다. 그러나 바울로 하여금 주제를 떠난 이야기를 하게 했던 원인을 찾아보면 1~2절과 13절에서 해답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라고 말하며 1절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라고 자신의 처지를 묘사한 말과 연결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바울은 어떤 신학적 논문이나 문학적 걸작을 쓰기 위해 곁길로 빠져 나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자신에 대하여 건강과 장래에 대해 걱정하고 그가 죄수로서 환난을 당하는 것이 그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목회자적 심정으로 그들에게 권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껏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영광스러운 면을 강조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머리털 까지도 다 헤아리신바 되었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을 해 왔기 때문에, 하나님을 참으로 잘 섬기는 사람은 언제나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바울이 현제 처한 상황이 걸림돌이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이 그의 서신을 읽을 성도들을 돕고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면 그가 단순히 일반적인 말로 편지하거나 일반적은 위로의 말을 한 것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이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지만, 나는 계획을 가지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이 모든 일이 결국에 가서는 잘 해결 될 것” 이라는 식의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여러 사건들에 대한 자기 자신의 태도와 반응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나서 그들도 자기와 같은 방법으로 문제를 보아야 한다고 권고합니다. 우리가 까다롭고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될 때, 언제나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여야 할 영원한 원리를 여기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시련과 환난을 당하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메시지이며, 또한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허락하시는가에 대하여 번민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혹은 그것은 우리에게 소중한 어떤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경우에 해당하는 말씀일 수도 있고, 여러분의 믿음을 흔들리게 하는 교회 안의 어떤 일에 대한 말씀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박해를 당하고 있든지, 혹은 어떤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든지, 혹은 낙심하고 있든지, 그 어떤 일이든 간에 그것에 대처할 수 있는 위대한 말씀이 여기에 있습니다.

 

 

 

 

첫 번째 로 바울은 한 순간이라도 마음속에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속한 일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으며, 또한 자신의 공로를 내세워 불평이나 불만을 한마디도 토로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로 바울은 불요불굴의 극기 정신으로 그 고통을 대처해 나가라고 하지 않으며, 지금 처해진 환경에 대하여 슬퍼하지 말고, 불평이나 불만을 품지 말라고 말하거나 침착하게 참고 견디라고 하거나, 장부처럼 견디라거나 용기를 내라는 식으로 가르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고 하며 자기가 “이기고도 남은 것”처럼 에베소 교인들도 이기고도 남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단순히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을 견뎌 내고만 있지 아니하며 그것을 초월하여 고난 중에서도 즐거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승리감에 도취하여 환희에 넘쳐 있습니다.

 

 

 

 

사도는 빌립보서 1:12에서도 똑같은 교훈을 말씀하고 있는데 거기에서도 그는 죄수로서 다음과 같은 편지를 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나나 나의 상태에 대하여 필요 없는 눈물을 흘리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나는 여러분들이 이 모든 사태에 대하여 내가 깨닫고 있는 바와 같이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즉 지금까지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은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디모데 후서 2:3에서는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라고 하며 12절에서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그리고 3:12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고 말합니다. 그는 모든 일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깨닫고 그 일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도달할 장성한 분량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었으며, 발에는 착고와 쇠사슬로 매여 있으면서 자신에 대해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스스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갇히게 되었으니” 로마의 법률 때문에 갇힌 일반 죄수들과 다르며, 그는 로마의 죄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그리스도의 죄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옛날에 바리새인으로서 그리스도를 훼방하는 자로, 유대인들의 율법교사로, 서기관들과 권위자들의 모든 해석을 가르치는 자라면 감옥에 있지 않고 자유의 몸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그로 인해 로마에 가게 되고 이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감옥에 있음으로 해서 그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뵙던 그의 생애의 놀라운 사건을 상기하고, 자신이 회심한 일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훼방하고 성도들을 박해하던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사랑하사 그의 죄를 없애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회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이 생애 중 최고의 영예로 생각하므로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자로 인정을 받은 것에 대하여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이 있음으로 해서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에게 찢겨 죽을 때조차도 감사하고, 최고의 영예, 곧 최종적인 영광의 면류관으로서 주어지는 순교를 감사함으로 찬양하며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높은 차원의 단계가 남아있습니다.

 

 

 


바울이 당한 여러 환난은 그에게 있어서 그의 소명과 그리스도의 제자 된 신분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형태로든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예수님의 제자라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딤후 3:12) 빌 3:10에서 그는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라고 표현하고 “이 고난들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채운다.” 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이 자신의 생애 가운데 지극히 큰 특권이라고 하면서 오히려 박해를 즐거워하고, 우리 자신에게나 교회에 일어나고 있는 힘겨운 일로 인하여 낙심은커녕 그것을 즐거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이 극심할 때에, 그 영광의 기회와 특권들이 크다는 것을 생각하며 즐거움과 기쁨으로 이러한 일을 맞이하는 것이 근본적인 원리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 엡3:2-7절

 

 

 

 

3장2~7절: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터이니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신 것은 내가 이미 대강 기록함과 같으니 이것을 읽으면 그리스도의 비밀을 내가 깨달은 것을 너희가 알수 있으리라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되고 함께 지체가 되고 함게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됨이라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


 

 

1. 그리스도의 비밀


이 내용은 본 주제에서 벗어난 내용의 시작부분으로서, 사도는 자기의 갇힘을 인하여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기를 바라고, 왜 기뻐해야 하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방을 위하여 갇힌 자 된 나 바울은.......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그 말씀은 “너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 또는 “내가 이 특별한 자리에 놓이게 된 사실에 대하여 너희가 아는 것은 당연하다.” 고 번역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하여 모두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일이 막상 실천해 보려고 하면 그 일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어떤 일을 이론적으로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곤경에 처했을 경우에 그 지식을 적용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의도하고 스스로 행했던 일에 대해 다시 한 번 상기하는 일이 필요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의 소명을 받았기 때문이며, 그 이후에 하나님의 성령을 충만히 받은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도바울의 소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 비밀을 전파하고 관리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으며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부여 하셔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그를 파송하셨으며, 그에게 전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으며 이적을 행함으로써 진리를 증거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에베소인 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파하였고 그들은 믿고 교회에 등록을 하게 되었으며, 그런 일로 인하여 자기가 갇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은 아마도 대부분이 보통 노예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에베소인 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포함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사 성도가 되게 하시고 그 결과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면전에서 영원토록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당하신 고통을 우리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나의 환난 때문에 낙심하지 말며 내가 갇히게 된 것을 너무 염려하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이 놀라운 일을 생각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하나님의 이 위대한 계획을 깨닫고 “나에게 필요 없는 동정을 베풀지 말고” 내가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고난 받고 있는 것이 영광스럽게 되기를 바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어떤 일이 자기에게 맡겨졌다고 하는데 그것을 “비밀”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그 일은 청지기들을 임명하는 것입니다.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해낼 수가 없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는 이 일을, 저 사람에게는 저 일을 맡기는 일들을 관리하는 임무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 비밀은 밝혀졌고, 하나님의 성령의 계시로 바울은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지혜는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감추어졌던 것”이며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자연인으로서는 도저히 그것을 알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신 것입니다. 바울은 “곧 계시로 내게 비밀을 알게 하셨다.”는 말로서 이 사실을 우리에게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사도로 부름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을 받았으며, 나는 그것을 여러분에게 전달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받았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입니다. 나는 지금 그것을 위하여 고난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고난에 대해서는 잊어버리십시오. 그 대신에 하나님께서 그의 무한하신 사랑과 친절로 여러분을 위하여 준비해 두신 것의 영광과 놀라움과 경이에 대하여 생각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결과로서 여러분이 어떤 신분이 되었는가를 생각하기 바랍니다.”

 

 

 

 

2. 두 가지 비밀


우리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인내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믿음이 흔들리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러한 경우에 우리가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3,4절에 그에게 계시된 비밀의 본질에 대하여 알아보아야 하는데, 사실 비밀은 성령의 조명과 계시가 없이는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는 두 가지 의미에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4절의 삽입구에서 말하고 있는 “비밀”이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는데, 이것은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이방인들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후사가 됨이라.” 는 특별한 비밀입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이라는 말은 복음의 모든 메시지,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관한 모든 진리를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리스도가 복음이기 때문이며,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있는 모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는 자기에게 위임된 메시지, 즉 자기가 이미 사람들에게 입으로 전한 바 있는 그 메시지는 그리스도의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엡2:3) 그것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 밖에는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위대한 일반적 비밀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특별한 비밀로 바로 건너 뛸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일은 역사의 모든 사건 중 지극히 장렬하고 감격스러운 일이며, 지극히 크고 감격적인 일이어서 바울은 이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구원을 베푸신 놀라운 방법이 바로 그 비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행하신 방법이 “비밀”입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하여 일어난 모든 일이며 참으로 놀라운 비밀입니다. 성령만이 주실 수 있는 조명과 계시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비밀은 하나님의 목적이 이제 교회 안에 나타났고 역사하고 있다는 특별한 비밀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하나님의 목적이 완성될 때까지 그 목적의 최종적인 형태인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그리스도 안에 함께 있으며, 지금 똑같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고 장차 영원한 영광의 축복을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아무런 소망이 없던 이방인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에 참예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몸의 영광스러운 부활을 기대할 수 있다는 뜻이며 우리는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사는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 안에 영광의 소망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며, 우리는 함께 약속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가능케 하시고 우리에게 가져다주셔서 우리와 유대인을 함께 후사가 되게 하고, 함께 지체가 되게 하여, 그 거룩한 소망에 함께 참예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영원토록 감탄과 경이를 금치 못할 것입니다.

 

 

 

 

 

성경: 엡3:7-8절

 

 

 

 

3장 7~8절: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군이 되었노라 모든 성도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계시하시고 전하라고 위임하여 주신 말씀의 본질에 대하여 설명하고 난 후 사도 바울은 한층 더 심오하고 감동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계속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본문에서 자기가 복음의 일꾼이 되었다고 합니다. 일꾼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봉사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고 있는 내용은 그가 이방인들을 가르치고 이 큰 은혜를 그들에게 전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그 “비밀”을 계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며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이 큰 축복을 전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를 받게 되었고, 나아가 그들에게 전파한 것입니다. 그는 그 일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고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받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에 의해서 전파 된 복음으로 말미암아 이제 유대인들과 함께 후사가 되어 누리게 된 모든 축복과 자기가 그 일의 일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이며, 그리고 거기에서 그는 하나님의 소명으로서의 기독교 사역자에 대한 놀라운 설명을 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것은 현대의 교회가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는 첫 번째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현 시대에는 성직의 권위가 상실되고 무시당하고 있으며, 성직에 대한 참된 개념이 격하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인간과의 유일한 화해의 방법과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계시를 가르치기 위하여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스스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이라고 한 것은 이런 사실에 대하여 비꼬는 말도 아니고, 겸손을 가장한 것도, 위선도 아닙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주장했던 자신의 주장에 대한 부정도 아닙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그가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에 그리스도를 모독하고 훼방하였던 다소의 사울이었는데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도가 되었으니 이 사실에 대하여 항상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사실 자신이 처해있었던 위치를 뒤돌아보고, 그것을 기억하여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의 이러한 고백은 그가 주님과 항상 가까이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결점과 부족을 잘 알고 있었고, 꾸준히 일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한 일은 거의 없으며 얼마나 더 많이 일을 해야 할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예와 존엄성을 알고 있지만, 그리고 복음을 전파할 특권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는 언제나 자신의 부족함과 부적당함에 대하여 깨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과 친절하심에 대하여,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할 때 직면하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증오하던 사람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것”에 대한 의문입니다.

하나님의 일들을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하던 사람들이 그것들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그것들을 위하여 살고, 그리고 그의 가장 큰 소원이 그 하나님의 일들을 더욱더 아는 것이 되게끔 변화시킬 수 있는 것에 대한 의문입니다.

 

 

 


그 대답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효과적인 역사” 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체험적으로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 중에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효과적인 역사” 가 아니었다면 사도 바울은 결코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 후라 할지라도 바로 이 능력을 떠나서는 무력한 존재에 불과할 것인데, 그의 전 인생관을 변화시키고 그를 일꾼으로 부르시고 그 임무에 필요한 은사를 주셔서 진리를 깨닫고, 설교하고, 글을 쓰고, 가르칠 수 있는 은사를 주신 것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입니다. 목사님들을 교회에 주셨으며,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은사와 봉사의 직책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 자신만으로는 무기력한 존재이며, 실로 아무도 자기 자신의 힘과 능력만으로 복음을 증거할 수 없습니다. 유창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는지는 모르지만 이야기하는 것이 전파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런 결과도 가져오지 못할 것입니다.

 

 

 


효과적인 목회사역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이 “활력적인 사역”이 있습니다. 인간의 어떠한 재능이나 방법이나 재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연마시키고 적응시켜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모두 하나님의 “능력의 활동적인 사역”의 결과로서 주어진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가 알아보아야 할 것은 바울은 도대체 무엇을 전파하고 있었던 것이며, 또한 우리는 무엇을 전파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가장 우선적인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요”로서,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복음의 정수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측량할 수 없는 풍요를 주시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친히 측량할 수 없는 풍요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풍요”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비밀” 이었지만 이제 “계시”됨으로서 우리가 알게 되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계시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것에 대하여 아무것도 알 수 없었을 것이며, 또한 그 누구도 혼자 힘으로는 그 풍요를 발견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발견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기독교를 철학적으로 접근하려고 하였으며, 밖에서부터 기독교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그런 식으로는 도저히 그 풍요를 찾아낼 수 없으며 측량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의 힘만으로는 그 풍요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계속해 가면서 이 풍요에 대해서 더욱 놀라고 있으며, 그는 때때로 이 보물 창고 안에 있는 모든 방을 둘러보았다고 생각했는데도 그때마다 또 다른 방을 발견하게 되곤 하였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요의 새로운 면을 발견해 나가게 될 것이며 측량할 수도 없고 끝을 찾아낼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그리스도의 풍요란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비록 그것들이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일 지라도 단 몇 가지라도 설명해 보려고 노력은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모두를 위하시는 그리스도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는 가난뱅이며 빈털터리로서 존재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큰 세계 속에서 세계의 여러 가지 문제와 가능성들 속에서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데, 해결해야 할 첫 번째 문제는 언제나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가 되십니다. 우리가 어떠한 죄 가운데 있었을 지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바로 그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써 옷을 입고 하나님의 면전에 설 수 있게 됩니다. 의는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의 한 부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의만 되실 뿐 아니라 우리의 거룩함도 되시며, 우리의 모든 것이 되셔서 우리를 흠과 티가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하십니다.

또한 우리를 빈곤 가운데서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 가운데 있게 하시며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되십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큰 필요는 생명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존재하고 있을 뿐, 생명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생명은 그리스도에게서만 찾을 수 있으며, 그 생명은 하나님과의 관계 되어 있어서, 하나님과 교제를 이루며 기뻐하는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충만함 속에 그 생명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우리는 영원히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고 배고프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어 버린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이 생명은 우리 속에서 영원토록 솟아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소유하게 될 때 그의 풍요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큰 보화이며,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아주 귀중한 재산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제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주께서 그의 평안을 주실 것이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어떠한 일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하십니다.(빌4:6~7)

 

 

 


이 모든 것이 그 풍요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아는 사람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미소를 지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보물 창고에 있는 것들의 일부일 뿐입니다.

우리가 이 풍요, 즉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즐길 때에 행복할 수 있습니다. 값없이 주시는 이 모든 보화로 인하여 우리는 조금도 궁핍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궁핍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모욕 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자신을 향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문 밖에 서서 두드리고 있다는 말씀은 회심하지 않은 자를 위한 말씀이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의 회심한 자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분이 들어오셔서 우리에게 평화와 기쁨과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채워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으로 하여금 들어오게 하시고 그 풍요를 기대해야하며, 그 풍요에 의하여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중 그 누구도 가난뱅이로 살아가는 것을 금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중 그 누구도 가난과 궁핍과 고통과 걱정과 불안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금하십니다.

 

 

 

 

오늘날 세상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파산상태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과연 그리스도 안에 해답이 있는가 하고 의심하고 있을 때, 우리에게서 보이는 것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알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전에 폭풍 속에서도 고요하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 그들의 눈이 열려 회개하게 되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측량할 수 없는 풍성”에로 나아오게 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 엡3:9-13절

 

 

 

 

3장 9~13절: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1. 하나님의 각종 지혜


기독교의 메시지와 구원의 복음은 항상 개인적인 면에서 출발하지만, 그 개별적인 것을 초월 하여 훨씬 더 크고 넓게 계속해서 확장되어 갑니다. 복음이 개인의 구원 방법으로 우리에게 준 것 이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더 커다란 범위와 보다 더 넓은 영역을 가지고 있습니다. 복음은 항상 고난과 시련과 전쟁과 살육과 그리고 당황하고 의문에 싸여 있는 그런 세계 속에 계속하여 전파되어집니다.

 

 

 

 

사람들은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 기독교는 어떤 희망을 제시하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며, 우리 자신이 처해 있는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복음은 어떤 빛을 주고 소망을 주는가에 대하여 질문을 합니다. 그것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첫째로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그 받은 소명 중의 하나가 이 문제와 관련된 인간의 마음을 깨우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속에 커다란 어둠이 있는데 그들이 정직하다면 자기들의 무지를 고백할 것입니다.

 

 

 

 

아놀드 토인비 교수는 역사의 전 과정은 어느 의미에서 순환의 문제 라고 합니다.

하나의 거대한 힘이 일어난다는 것은 억눌리고 압제당하는 사람들을 자극해서 그것에 반대하여 일어나게 되는데, 부패하고 게을러져서 하나의 힘이 쇠퇴하면 또 다른 여러 가지 힘이 일어나고, 그들은 또 다른 힘들을 자극하고, 그 힘에 대항하여 일어나게 해주며, 이렇게 하여 전 과정은 또 다시 순환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토인비가 말하는 역사의 흥망에 대한 설명입니다. 즉 참 된 발전도 없이 사람들은 단지 계속 원을 그리며 순환 할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피상적으로 본다고 할지라도 많은 거대한 제국과 국가와 왕국이 융성해서 힘이 증대되다가 다음은 쇠퇴해 가는데, 그런데도 세상은 전처럼 아주 대단한 것처럼 보입니다.

 

 

 

 

또 다른 사학자인 휘셔는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 역사를 연구한 후 아주 정직하고 솔직하게 역사에는 어떤 목적이나 어떤 목표가 없는 것 같다 고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과 역사에 대하여 그와 같이 뿌리 깊은 염세주의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있으며 사건들은 일어날 뿐, “왜” 또는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실 인류는 전 세계의 상황에 대해 참으로 어두우며 , 가장 훌륭한 사상가들이 생각하는 모든 것, 역사를 발전시키려는 계획을 완성하기 위한 모든 시도, 미래를 위해서 어떤 희망을 지속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어둠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하여 전도서 저자는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했으며 바울은 “소망이 없는” 이방인들의 상황에 비교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복음의 가장 좋은 소식은 이런 어둠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 빛이 보이듯 유용하다고 말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부”를 전파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밝히 깨닫게 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았던 것입니다.

 

 

 


성경 전체, 특히 복음이 주장하는 바는 빛이 있다는 것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는 스스로 “나는 세상의 빛이니라.” 고 증거하셨으며, “나 혼자만 세상의 빛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정치가나 철학자나 사회학자나 인도주의자나 쾌락주의자들에게서 결코 빛을 얻을 수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느 곳에도 빛은 없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처럼 중요하고 독특한 위치로 이시기에 존재하는 이유가 됩니다. 교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빛을 줄 수 있는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유일한 지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위한 계획과 목적을 갖고 계십니다. 그것은 “비밀의 계획”, “비밀의 경영”, “비밀의 보조”, “비밀의 성취”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모든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며 목적으로 “그가 영원부터 예정하신 뜻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생기기 시작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한 부분이며, 근본적인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이 세상에 있는 전 생명을 위해 위대한 계획과 목적을 갖고 계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위대한 계시입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영원부터 또는 태초부터 하나님 속에 감추어있던 비밀의 경륜 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 비밀을 나타내기 시작했던 그 시기까지 모든 시대에 그것을 하나님의 마음속에 감추어 놓으셨습니다.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지, 없었던 것이 다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 전부터 거기에 있었지만 나타나 보이지 않은 것일 뿐입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손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예속되시지 않으시며 모든 것을 초월해 계시며 영원 속에서 살고 계십니다. 그는 시간 세상을 내려다보시고 계시며, 태초가 시작하기 전에 그리고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에 하나님의 계획이 완전하게 만들어졌다는 것은 확실히 이와 같은 시기에 볼 수 있는 가장 위안이 되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에 상관없이 거기에 확실히 존재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계획에는 우연한 것이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어떤 사람이 이미 이루어 놓은 것 때문에 당신의 방법을 고치거나 수정하시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그 영원한 목적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복귀시키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하기 위해서 다시 오실 것이며, 그리스도를 거절한 모든 사람들을 멸망시킬 것이며, 모든 악과 부정과 죄의 모든 형태는 불과 파멸의 구덩이로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온 우주는 깨끗하게 되고 정하게 될 것이며, 우리 주님께서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그 날에 하나님의 목적의 최후의 목표가 이루어지는 것 입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오묘한 계획


이제 사도 바울은 정사와 권세들에 관하여 말씀을 계속 진전시키고 있습니다. 복음의 메시지를 통해 그가 전파한 결과인 에베소 교인들이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교회의 총체, 곧 그 깜짝 놀랄 만한 이 진리는 하늘에 있는 정사와 권세자들조차 알기를 원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 반드시 알아야 할 문제는 어떤 일이 이같이 존귀하고 능력 있는 것들에 대하여 그 이해를 넓혀가고 있는 교회의 성도들을 통해서 일어나고 있는 중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하늘에 있는 정사와 권세는 하나님의 면전에 있는 지극히 영광스럽고 광명한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렇듯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너무나 거대하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전 생애를 하나님의 면전에서 보내고 있는 광명한 천사들조차도 자기들이 교회를 통해, 그리고 교회 안에서 깨닫게 된 것에 대하여 깜짝 놀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천사들은 항상 바로 하나님의 면전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 의하면,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생각하거나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그들의 지식과 이해와 상상조차 초월합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관계된 지식을 천사들이 알아야만 한다는 것, 다시 말하면 그 말씀은 천사들이 “교회를 통해서” 즉 우리를 통해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독교와 구원은 하나님의 지혜의 최고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목적과 계획을 세우시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을 실현 시킬 수단을 결정하셨다고 말함으로서 하나님의 지혜를 정의해 볼 수 있습니다.

 

 

 

 

지혜라는 것은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예견하여 결정할 수 있는 특별한 재능입니다. 지혜와 지식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은 지식은 있지만 지혜는 없습니다. 지혜의 일면에는 지식을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과 능력이 있으며, 지식은 사람이 배울 수는 있지만 지혜가 없다면 사회에서는 별로 쓸모가 없습니다. 이것은 모든 직업과 모든 실제 생활에 적용되며 지혜는 위대한 예술가나 훌륭한 과학자나 또는 실제 생활에 적용됩니다. 지혜는 위대한 예술가나 훌륭한 과학자나 또는 어떤 직업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자를 구분해 주는 여러 가지 사실에 대한 지식 위에 그가 계획한 결과를 가져오게 하기 위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이용할 수 있은 차원 높은 자질 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지혜는 하나님의 존재와 인격 안에 있는 특질 가운데 하나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도는 교회 안에서, 또 교회를 통해서 이러한 하나님의 특질이 이전보다 더 훌륭한 방법으로 하늘에 있는 정사와 권세자들에게 알려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 지혜가 나타나게 하는 매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개념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교회가 없이도 천사들은 빛을 볼 수가 있고, 그리고 일반적인 지혜를 알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변화는 볼 수가 없으며, 하나님의 지혜의 초월적인 영광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바로 교회라는 매체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속한 그리스도의 교회가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나타난 가장 놀라운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자연에서 보인 어느 것보다 더 훌륭한 것입니다. 우리가 배워온 교회의 결합과 성도들의 연합이 얼마나 놀라운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것은 우주 안에서 가장 훌륭한 현상이며 하나님이 지금까지 하신 모든 일들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입니다.

 

 

 

 

3. 담대함, 나아감, 당당함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면, 우리의 현재 위치에서 생각해 볼 때 이런 일이 왜 일어나고, 이런 일이 왜 허락되는가에 대한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런 질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쉽게 받는 유혹입니다. 자신의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하여 낙심하거나 괴로워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는 자기는 상심하지도 않으며 동정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히려 영원한 하나님과 접촉하고 있고 하나님께로 기쁘게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참으로 행복한 상태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에베소 교인들이 이러한 체험이 그들에게도 열려져있고 그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공격을 받고 슬픔을 느끼고 당황하게 될 때에 그 사건의 원인을 밝히느라고 시간을 보낼 것이 아니라 곧장 하나님께 나아가, 여러 가지 시련과 환난과 시험의 목적을 깨달아, 그 결과로 인해 하나님께 찬양하고, 그의 거룩한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리는 항상 하나님께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항상 그것을 적용하여 우리의 생활에 반드시 반영되어야만 할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우리를 그리로 인도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구원을 통해서 얻게 된 모든 축복 중에서 우리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또 담대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배운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정결케 하시는 피를 힘입어서 나갈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가 있는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도 그리스도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면전으로 담대하고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는 특전을 우리는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로와 힘, 그리고 능력뿐만 아니라 그의 사랑과 친절과 연민으로 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는 말씀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 엡 3:14-16절

 

 

 

 

3장 14~16절: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1. 아버지께 기도함


본문의 “이러하므로”라는 표현은 사도가 2장 끝에서 말했던 것을 다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문을 2장 끝부분과 관련이 연관하여 말씀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너희는 외인도 아니고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는 말씀에서 기독교에 대한 고상한 개념을 설명하고 우리에게 확신시켜 준바가 있습니다.

 

 

 


바울이 지금 에베소 교인들에게 말한, 그들의 위치가 이스라엘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들이요, 하나님의 권속이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가족에 속해 있으며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자기의 거주지를 삼고 있는 주 안에서 거룩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안다면,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하여 기도한 것과 같이 “내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라고 우리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기도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은 로마의 감옥이라는 것과, 악한 원수들에 의해 붙들려 있고 속박당하고 있어서 에베소 교인들을 방문하여 설교하는 것이나 또는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설교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였을 지라도 원수 마귀는 바울이 기도 하는 것만을 막을 수 없습니다. 원수는 그를 감옥에 가둬 놓을 수 있고 문에 빗장을 질러 잠글 수 있으며, 병사들을 시켜 그를 쇠사슬로 묶어 놓게 할 수 있으며, 창문에 창살을 질러 잠글 수 있고, 그를 에워싸서 육체적으로 가둬 놓을 수 있지만, 그 상황에서도 바울은 여전히 기도할 수 있었으며, 원수는 그것을 막을 수가 전혀 없습니다.

 

 

 


지극히 어린 성도의 마음이라도 영원한 하나님께로 향하는 그 길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 기도의 영은 여전히 자유로우며 사람들은 우리로 하여금 말을 못하게 하고 입을 다물게 할지라도 우리는 영으로서 하나님께 계속해서 기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그것을 방해 할 수는 없습니다. 때때로 이것을 잊어버리는 것을 우리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시간적 여유가 있으며, 감옥에 갇혀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필수적인 것도 아니고 유익하지도 않은 많은 것들을 하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으며, 혹은 개인의 일들과 사무가 너무 바빠서 하나님께 기도를 할 수가 없다든지, 심지어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바빠서 기도를 못한다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기도보다 더 중요한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과 같은 현 세계를 위해, 그리고 고통을 당하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정말로 많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가 교육만큼 항상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바울 사도에 의해서 여기에서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믿습니다. 성경을 읽고, 그것들에 대해 숙고하며 성경에 관한 책들을 읽고 주석을 읽으며 교회사에 관한 책들을 읽고 교리에 대한 책들을 읽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은 당연하고 필수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알아도 지나치지 않고, 우리는 교육을 계속해서 필요로 하지만, 그러나 지식을 전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기도하는 것은 모든 것들보다 더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훈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활용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며 그것이 단지 우리의 지성에만 머무르지 아니하고 우리의 감정과 의지에 까지 나타나서 전 인격에 영향을 나타낼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식과 교훈 그리고 어떠한 것을 한다고 할지라도 기도는 항상 병행되어야 합니다.

 

 

 


이것들은 결코 분리되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다른 중요한 문제는 사도 바울의 기도하는 방식입니다. 그는 아무렇게나 기도하지 않고 신중히 기도했습니다.

그는 먼저 자신의 기도의 태도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매우 신중히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기도에 있어서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되는가를 직접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너무 극단적인 형식주의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기도를 할 때에는 무조건 무릎을 꿇어야 한다든지 서서 해야 한다든지, 아니면 엎드려서 해야 한다고 극단적으로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자세는 성경에서 모두 다루고 있지만, 그것은 어떤 상황에 대한 묘사로 사람의 중심 자세, 즉 태도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바울이 “무릎을 꿇고 비노니”라고 하는 표현은 마음 중심을 하나님께 두고, 진정으로 그분을 경외하는 마음과 경건한 두려움으로 그분의 존전에 나가기 위해 취해진 자연스럽고 반사적인 반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영으로 겸손하게 그리고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께 나아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즉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족속에게”라고 말한 것은 10절에서 “이제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려고 하신” 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1장 끝에서 그는 그리스도는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그리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시는 분”이시라고 훨씬 더 자세하게 쓰고 있습니다.

 

 

 


하늘에는 여러 집단들이 있습니다. 천사들은 일반 천사들과 천사장과 그 밖의 여러 가지 구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바울 사도는 이 세상의 모든 부권과 국가, 그리고 구역이 결국 하나님의 부권에서 유래된 것일 뿐만 아니라 하늘에 있는 바로 그 집단이 이 우주적 부권 아래 모두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구속받은 족속의 아버지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족속”이라고 하는 족속 안에 속해 있습니다.

 

 

 


그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우리가 기도와 예배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가족과 “가족의 이름”을 자랑으로 여겨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나라와 계급 또는 집단이나 학교, 즉 그 이름을 자랑으로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에게 책임지어진 그 이름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그 족속의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족속을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 아버지를 대표하는 자로서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에게 책임지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코 그것을 손상시키지 않아야 하며, 우리의 행동이 하나님과 그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위에 두신 그 이름을 통하여 우리 것이 된 그 특권과 그 높음과 여러 면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는 그 두려운 책임에 우리가 눈을 뜰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2. 속사람


14절에서 시작하여 21절까지 계속되고 있는 이 말씀은 성경의 진리와 하나님의 계시의 모든 영광스러운 영역에서 최고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바울 사도가 에베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실제로 기도하고 있는 내용 가운데서 생각해 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바울의 몇몇 기도들은 모두 우리에게 중요한 가치가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이 기도가 가장 귀중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여기에서 우리를 곧바로 하늘나라로 인도하고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었던 내용인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한다.” 라고 간구함으로서 우리를 클라이맥스에 이르게 합니다.

 

 

 


그는 개종한 이교도들로 전에 노예였던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그들을 위하여 이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내용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할 수 있는 최상의 풍요함과 최고의 수준에 이르는 것, 그리고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에게 가능한 한 최고의 것을 주시라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활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열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에 자신의 어떤 환경을 개선해 줄 것을 요구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의 곤경과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았으며 자신이나 그들을 위하여 환경을 변화시켜달라고 간구하지도 않았습니다. 물론 그러한 기도들도 참으로 해 볼만한 것이었을 것이지만 그것은 큰 일이 아니었으며 그는 그것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를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첫 번째 간구는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입니다. 그의 기도는 오직 영적인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서 관심과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인생에 대해서 언제나 영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또한 영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울의 기도의 두 번째 특징 은 매우 구체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어떤 문제들 가운데 하나를 끄집어내고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들추어내서 에베소 교인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하나씩, 하나씩 아뢰었습니다. 우리가 개인적인 기도와 헌신에 있어서 주된 관심을 가지며 가장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우리에게 맨 먼저 우리의 영적인 성장과 발전에 대한 모든 문제,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사귐에 관한 이런 모든 문제에 대하여 주된 관심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기도는 근본적으로 영적인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이었으며, 에베소 교인들의 영적 축복에 대한 것들에 대하여 하나씩, 하나씩 언급하였습니다. 우리의 문제 해결 방식도 이러해야 합니다.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육적인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육체는 쇠하여 지고 영혼은 영원히 남아 있으니 우리는 이 쇠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영적인 일을 우선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달라고 중보기도 하고 있습니다. 사람 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데, 육체 안에는 그를 끌어내리는 하나의 법이 있고, 또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합니다. 속사람은 겉사람과 상반됨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은 겉사람과 속사람과의 차이점을 전혀 알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합니다. 속사람은 육체의 모든 재능과 기능과 상반되며 그것들과 별도로 존재하고 있는 우리의 가장 깊은 부분, 곧 영적인 부분입니다. 중생되지 못한 자의 문제는 이 속사람의 결여인데, 그들은 속사람에 대하여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고, 오직 겉사람으로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는 단지 육체로만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육체의 생명 곧 우리가 인간의 육체적 부분이라고 부르는 그 생명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영적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의 모든 인생은 자신의 깨달음, 즉 자신 안에 존재하는 감각과 세상의 사물들에 대응하여 보고, 듣고, 느끼고, 만질 수 있는 것에 의하여 한정됩니다.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삶이고 그들의 전적인 삶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은 하나의 이성을 가진 동물에 불과하며, 짐승들보다 더욱더 크게 발전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동물에 불과합니다. 그들의 비극은 모든 시련의 은신처인 속사람을 가지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래 전부터 참고 견디었던 전도와 여행과 박해와 곤경 때문에 몸이 쇠약해져 가고, 침침한 눈으로 인해 여전히 괴롭힘을 당했으며 그의 몸은 병들어 있었을 때에 “겉사람은 후패한다.” 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퉁이에 앉아서 “이제 종말이 왔구나. 나는 활동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졌었고 이제 다른 사람에게 그 자리를 양보해야 하며 나의 시대는 가버렸구나! 나는 이제 벽을 향해 돌아서서 종말이라는 사실을 대면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고 오히려 “속사람은 날로, 날로 새로워진다.” 고 말합니다. 겉사람은 후패해져 가는 반면에 속사람은 강건하여져 가고 있습니다.

 

 

 


세상이 외적인 생명을 가져가 버릴 때 겉사람은 불가피하게 죽어가지만 속사람은 하늘과 영광으로부터 오는 힘을 받게 됩니다. 그는 속사람에로 퇴각하여 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이 모든 것을 알지 못하므로 참으로 가엾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주위 환경에 의지하고 그것들에 의하여 완전히 지배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될 때 새로 태어나게 되고, 새 생명을 선물로 받게 되고, 새사람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므로 인생에 새로운 삶의 질서를 시작하게 되어 우리는 새로운 영역, 즉 보이지 않는 영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세상적이고 육체적이고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고 신의 생명의 씨앗이 속에 심어진 결과로서 그 생명은 성장되고 발전되어지며 때때로 고난과 시련이 그 생명을 매우 영광스럽게 성장하게 하려고 자극합니다.

 

 

 

 

3. 능력으로 강건해짐


이제 바울 사도는 속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능력으로 강건해지도록 기도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1장과 2장에서와 같이 에베소 사람들을 위해서 여전히 계속해서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비록 자신은 감옥에 있어 그들과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있었고, 또한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살피었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음을 그들에게 알게 했습니다.

 

 

 


용서와 구원의 체험은 단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첫 단계에 불과한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 지점에서 멈추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자신의 안전과 무사만을 마음에 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더 나아가서 자신의 관심을 오로지 하나님의 왕국에 쏟아야만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의 죄를 용서받고 또한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천국에 가게 될 소망이 있는가를 알고자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장하지 못하여 50년 후에 본다 할지라도 그들에게서 어떠한 차이도 없이 여전히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크고 영광스러운 가능성이 있으며, 그것들 중의 하나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충만해져야 ” 합니다. 바울은 그들이 이러한 축복들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채워지는 최고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가능할 뿐만 아니라 이 위치에 있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모두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높은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처음에는 나이와 상관없이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약하고 무지하며 주위에 있는 많은 세상일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는 그에게 덤벼들기 쉬운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항하도록 면역되어 있지 않아 부모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들은 충분히 자라고 강건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속사람이 강건해져야 할 필요가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원수 마귀, 곧 형제를 참소하는 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힘은 강력할 뿐만 아니라 음흉하고 교활하기 때문에 그를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속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능력으로 강건해지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능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먼저 지성이 강건해져야 하는데, 그것은 우리는 늘 마음속으로 의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각이 강건해져야 합니다. 또한 지성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감성도 강건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두려움과 상상이 우리를 엄습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실망하거나 자칫하면 불길한 예감에 빠지기 쉬우며, 만사가 잘 되어 갈 때에 조차도, 마음속으로 “지금은 모든 게 좋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라고 생각하고 이내 풀이 죽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속사람을 살펴보고 분석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 우리는 자신이 너무나도 연약한 것을 알고 강건해질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자신을 위해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드렸던 그 기도와 같은 기도를 드릴 수 없다면 약해져서 비틀거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성으로, 혹은 감성으로, 혹은 의지로 얼마나 자주 그렇게 해왔는지, 우리가 방임한다면 우리를 위한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강건해질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이 순간에 우리가 아무리 약하다고 느낄지라도, 우리가 아무리 많이 실패했을지라도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 사도의 기도입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께서 속사람을 강하게 하실 수 있다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로서 오는 힘이 있는데, 그분은 모든 것을 충족시켜 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 안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어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려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을 강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우리에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들을 바라고 성령께서 우리 속사람을 강건케 해 주시기를 위하여 하나님께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해 주시며 그리스도께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내주하실 것입니다.

 

 

 

 

 

성경: 엡3:17절

 

 

 

 

3잘 17절 :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 마음에 계시는 그리스도


이 구절은 참으로 난해한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에베소의 성도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 교회의 몸이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으며, 그들은 이제 주님 안에 그리고 주님은 그들 안에 계십니다. 다시 말한다면, 사도 바울은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비록 주님께서 이미 그들 속에 오셨을 지라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마음에 계신 것을 믿도록 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지 않다면 그는 결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바울의 진술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지만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인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마음속에 계시기를 원한다고 한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과 모든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인 상태와는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계신다.”는 말씀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집으로 삼고 그 안에 산다.”는 복합어로서 “아래로”라는 의미를 가진 접두사를 붙인다면 그 단어는 “정착하여 집안에 산다.” 는 뜻이 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거처를 차지한다는 관념을 강조하기 위하여 일부러 이 말을 선택하여 사용했습니다.

 

 

 


계3:20은 라오디게아교회에 보내는 편지로서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닫힌 문을 두드린다는 그 말씀은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며, 특별히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로서 영적인 생명을 소유했지만 매우 가난하고 아직 미숙한 상태에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그에게 지배를 받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주님과 관계있는 위치에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의 삶의 중심에 계시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은 실제로 그들의 마음에 “계시지” 않으며, 그들의 마음속에 “거하시지” 않으며, 그곳에다 “주님의 거처를 삼지” 않으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보내는 이 편지는 에베소 교인들을 위한 사도 바울의 기도를 깨닫는 열쇠를 우리에게 제공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일어난 모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더욱 가능한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으며, 또한 그들이 특별히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과 더욱 친밀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그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강건해지기 전에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위대하고 특별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이 집으로서 준비되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미 그들에게 말씀한 바와 같이 그 교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처” 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는 그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거처가 된 마음 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마음이 아직 에베소 교인들에게 준비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바울은 그들이 그것을 준비하기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진술 속에는 이것을 더욱더 확실하게 설명하는 차원 높은 요소가 있는데, “거한다.”는 말의 시제를 부정과거형을 사용했다는 것이며, 그것은 단번에 일어났지만 영원토록 효과를 미치는 어떤 의미를 수반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는 에베소 교인들에게 단순히 일반적인 축복이 아니라 특별한 축복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것이며, 이 축복은 지금까지는 내가 실제로 그리스도를 개인적으로 몰랐지만 이제는 주님이 자신을 나에게 나타내셔서 나는 그분을 알고 주님은 참되시며 나에게 살아계시며, 그것은 내 인생의 최고의 순간이라고 말 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축복입니다. 그 다음에 이것은 주님과 의식적인 교제를 할 수 있게 하며 주님을 기뻐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의식적인 교제를 즐기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과 의식적인 교제를 즐기는 것이 없이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고, 우리가 주님과 의식적인 교제와 주님의 임재에 대한 인식, 그리고 주님과의 의식적인 즐거움을 갖지 못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주님을 의지하고 그가 하신 일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주님께 기도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모든 것을 지배하신다는 것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성령께서 우리의 몸 안에 거하시는 것과 같이 똑같은 방법으로 들어오신다는 것입니다.

 

 

 


만일 네가 문을 열기만 하면 내가 친히 네 속에 들어갈 것이며 네게 나 자신을 나타내겠다. 네가 그때 이제까지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친교로서 나를 알 것이다. 나는 네 속에 들어가 네 안에 거하리라.”고 하시는데, 이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진리의 서광


우리가 이 구절을 대하면서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은 이 기도는 이미 성도가 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며, 기초가 튼튼한 성도들과 여기서 지적한 가능성들과 견주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의 신앙이 어느 지점에 도달한 그 위치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경지까지 계속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며, 이전의 것은 버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귀한 소명과 상급과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거하신다는 것과 성령의 인침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인 쳤다는 것은 우선 구원의 확신의 문제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후사이며 그 기업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것이 되기로 되어 있다는 직접적이며 즉각적인 확신을 우리에게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거하신다는 것은 주로 주님과의 교제의 문제입니다. 성령의 인침은 우리가 주님과 관계되어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증하는 것이라면 이 체험은 우리를 주님과 더욱 깊고 위대한 교제로 인도합니다.

 

 

 


분명히 두 가지 체험은 아주 위대한 것이지만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거하신다는 체험은 인친다고 하는 그것보다 더욱 영구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성령의 인침이란 종종 반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에게는 훨씬 영구적인 어떤 것이 있습니다. 거한다.”라는 말은 바로 “거주한다.”, “거처로 삼다.”라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거하신다는 것을 너무 강조하여 구분해서도 안 되지만 실제로는 구분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침에서 사람이 의식하는 것은 긴급성과 광명인데, 이는 모든 것이 갑자기 분명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거하신다는 체험은 더욱 깊은 수준이며 더욱 영구적인 것이어서 오히려 더 감미롭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남녀 간의 문제에 비유로 들 수가 있는데, 처음에 연애 할 때의 감정과 부부가 된 상태에서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의 상태를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연애 할 때에는 열렬한 사랑의 표현들을 합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부부의 사랑의 표현은 감소됩니다. 그렇다고 사랑이 없어지거나 적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사랑은 원숙하여 지고 더욱 발전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의 인치심과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거하신다는 것 사이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거하시는 것은 더욱 위대한 사랑과 지식이며 더욱 절친한 친밀성이며 더욱 깊은 교제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의 처음 체험인 짜릿한 요소가 항상 수반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를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이해를 초월하는 신비적 진술이며 체험입니다. 우리가 들은 바와 같이 우리의 몸은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의 전이며, 성령은 하늘에 계십니다. 그러나 내 안에도 계신데, 이것은 신비적 관계라고밖에 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지적인 이해의 영역보다 아주 더 고상한 다른 영역이 있고 우리는 진리의 광명과 광채에 대하여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거하시고 정착하실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거처로 삼으시고 그리스도께서 안에 거하신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생활을 지배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그리스도께 도취 되어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준비 된 마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확실히 계시는지를 아는 것과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최상의 특권과 이 지극히 큰 기쁨의 원천을 즐길 수 있는가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것을 향한 우리의 욕망을 돋우고 우리의 소원을 일으키기 위해서 이것이 무슨 뜻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위대한 경험 중에 찰스 웨슬리의 찬송가중 하나를 예를 들겠습니다.

 

 

 


당신의 풍요롭고 신성한 사랑으로 고요한 평안의 원천에 숨기시네.

나의 원수로부터 나의 도움이 되고 피난처 되시니

당신께서 나와 같이 할 때 나는 안전하네.

보라! 죄와 슬픔과 부끄러움에서 예수님, 당신의 이름으로 나를 숨기옵니다.

당신의 능력 있는 구원의 이름은 나의 행복한 영혼을 지키네.

그것은 안락과 능력과 평화와 기쁨과 끝없는 사랑을 가져오네.

당신의 사랑스러운 이름으로 나에게 용서와 신성함과 천국을 주시네.

피곤할 때에 나의 휴식이 되시며, 고통 중에 나의 안락 되시니

예수님, 당신은 나의 모든 것 중의 모든 것 되시옵니다.

 


나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전쟁 중에 평화와 잃은 중에 얻게 하시네.

고통 중에 나의 미소가 되시며 부끄러움 중에 나의 영광과 나의 왕관되시네.

내가 궁핍할 때에 풍부하게 채워 주시고

약할 때에 나의 능력 있는 힘이 되시네.

속박 중에 나의 완전한 자유되시며

사단의 어두움 속에서 나의 빛이 되시네.

내가 부를 때마다 나의 도움 되시며, 내게 머무르시고

죽음 중에 나의 생명 되시며, 나의 천국이며, 나의 모든 것이니 이다.

 

 

 


우리가 이것을 경험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말할 수 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러한 의미가 될 수 있으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마음속에 계실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사귐과 그로 인한 충만한 만족을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찰스 웨슬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완전한 만족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주께서 만일 누구든지 그에게 오는 자는 “결코 배고프지 아니하고”, 만일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결코 목마르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들을 진리라는 것을 증명했으며, “영원한 생명의 샘물이 솟아오르는 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속박당한 심령의 완전한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육신을 믿으며, 성령의 능력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삶에 아무런 효력을 발생시키지 못한다면, 그 삶은 그리스도의 참 평안과 자유, 그리고 그로부터 오는 많은 영적인 복들을 누릴 수가 없으므로 참으로 가여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경험은 우리 중 모든 사람들에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서 구원을 얻었고, 같은 생명을 선물로 받았으며, 같은 체험을 할 수 있고, 같은 삶을 살 수 있으며, 같은 부활에 대한 지식을 알고, 같은 천국에 간다는 것을 기뻐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경험을 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평범한 개개인의 축복된 경험을 하고 그것에 대해서 증거할 수 있는 것은 완전한 역사적인 사실로서 에베소 성도들에게서 증명됩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고, 또 그것을 알고, 그것에 대해 깨닫고,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고 그것을 구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며, 성령께서 우리를 강건케 하시고, 우리 안에 역사하시며, 우리를 감동케 하사 우리가 원하고 할 수 있게 되며, 우리의 마음속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분은 그분 자신의 약속을 실현하실 것인데, 그 약속은 “나는 너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며, 내가 와서 네 속에 나의 거처를 정할 것이고, 아버지와 나는 네 속에서 살리라.”는 것입니다.

 

 

 

 

4.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짐


우리는 이제 17절의 마지막 말씀인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혀져 왔고 터가 굳어져 왔다고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축복이나 거룩함보다 우선적으로 주님 자신을 구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안에 있는 모든 거룩함과 축복과 모든 상태는 우리와 인격적으로 교제하시는 주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의 결과로서 주어집니다.

 

 

 


우리의 첫째 소망은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거나 더 나아가서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교나 불교의 안에는 “거룩한 사람들”을 지향하는 정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 관한 특별한 진리는 우리의 거룩함이 주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의 결과이며 주님과의 관계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지 그것을 지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대한 우리의 지식과 우리의 사랑이 깊게 될 때에 우리의 영적 생활도 당연히 깊어집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거하신다면 그 결과로 “우리는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진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보다 오히려 하나님께 향한 우리의 사랑에 관하여 매우 특별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그 주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믿음 안에서의 형제에 대한 우리의 사랑, 그리고 그리스도 안의 일과 활동에 대한 우리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주된 특징이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진다.”는 두 가지 표현을 한 것입니다.

 

 

 

 

  1) 사랑 안에서 뿌리가 박힘


첫 번째 표현은 우리로 하여금 한 그루의 나무를 생각하게 하고, 두 번째 표현은 한 건물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 두 표현의 유사점은 커다란 나무와 커다란 건물 모두 깊고도 확고한 관념, 즉 변함이 없는 영구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지만, 차이가 있는 것은 나무에는 생명과 생기와 힘과 앞으로 계속 성장한다는 비전까지 포함 되지만 건물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건물은 압박과 충격과 그것에 가해지는 다른 모든 영향들을 견딜 수 있는 강함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살펴 볼 것은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혀져 있는” 것입니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 있는 사랑에 대한 사도 바울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사랑이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심겨지고, 또한 성장하는 흙이라고 하는 관념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세우려고 도우며, 우리를 강한 그리스도인으로 되게 하려는 모든 영양분은 바로 사랑이라고 하는 흙으로부터 나옵니다.

 

 

 


우리는 그 속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 나무는 그런 방법으로 아주 많은 영양분을 흡수합니다. 그 나무는 흙과 그 수분, 그리고 여러 가지 것들로부터 갖가지 영양분을 얻습니다. 그 필요한 것들은 그물과 같은 이 뿌리를 통하여 공급되어 그 줄기와 가지와 잎사귀에 전달됩니다. 이런 방법으로 나무의 생명은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참된 힘은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흔히 어떤 약하고 무기력하며 감상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러나 사랑은 강하며 사랑은 죽음같이 강합니다. 그리고 주님 자신이 사랑이시며 하나님도 사랑이십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의 교훈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우리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 가운데 뿌리박힌 자”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같이 그의 모든 동기가 사랑으로부터 일어나고 있으며 사랑으로 힘을 얻고 사랑으로 강권합니다. 그는 억제할 수 없으며 그 사랑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믿음으로 그 마음에 거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그의 믿음은 사랑이라는 토양에 뿌리가 박힌 것이며, 그 뿌리는 그 근원으로부터 극히 귀중한 생명의 영양분을 공급받습니다. 이렇게 하여 사랑은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다시 나타낼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2) 사랑 안에서 터가 굳어짐


이제 두 번째 표현인 “터가 굳어져서”라는 표현을 살펴보기 전에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의 전 생활이 사랑 가운데 확고한 기초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의 근본 원리인 이 사랑의 원리로부터 우리의 전 생활을 끌어내야 하며, 또한 그 생활의 힘과 능력과 활력소, 그리고 모든 것을 끌어내야만 하며, 그리고 우리는 사랑의 뿌리가 박혀 있어야 함은 물론이고, 사랑의 “터가 굳어져” 있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마치 커다란 빌딩이 깊고 단단한 토대를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가르치고 있는 원리도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행동은 언제나 사랑 위에 건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혜로운 건축자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기초가 훌륭하고 충실하게 놓여졌는가를 확인한다는 것입니다. 일생동안 거주 할 수 있고 다음 세대까지도 기거할 수 있는 튼튼한 건물을 지으려고 한다면, 기초에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것이고 또 충분한 시간을 들일 것이며 기초를 세우는 데 공력을 들일 것입니다. 건물이 크고 높을수록 기초는 더욱더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기초는 사랑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구별 되는 것도 사랑인데, 그들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하고 자기의 원수들은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원수들이 증오하는 만큼 같이 그들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원수를 미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주초 위에 서 있기도 전에 보다 차원 높은 체험을 추구하는데 시간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주초 위에 서게 될 때가지 단지 지식만으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전혀 알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간구한 기도의 요지입니다.

 

 

 


주님은 영광의 자리를 내버리시고 죄인의 모습으로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은 스스로 종이 되시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 보시기에 선하고 사랑스러웠기 때문이 아니며, 또 우리가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도 아니었으며, 오히려 정 반대로 그를 반역하고 증오로 가득 차서 서로 미워하고 주님을 미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셨습니다.

 

 

 


자신을 십자가에서 죽이기까지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이 가지셨던 이 마음이 바로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할 그 “마음”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이러한 자세를 성장시켜야 하며 우리가 그것을 소유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나는 나를 저주하며 내게 거짓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원수들을 사랑하며 축복하고 있는지를 주의 깊게 생각해야만 합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진실로 이 거대한 건물을 세우려고 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요구와 명령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사랑의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사랑이 변덕스러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사랑은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 튼튼한 기초위에 세워지고 변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 엡3:18-19절(1)

 

 

 

 

3장 18~19절: 능히 모든 성도와 함게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 모든 성도가 알아야 할 것


본문의 이 두 구절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데에 있어 사도의 참된 목적이 무엇이었는가를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전의 모든 기도는 이 간구를 위한 준비 단계로서 이 거대한 목표를 도달하기 위해 계획된 것입니다. 그는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라는 구절 속에서 하나님과 동료에 대한 우리의 사랑과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다루어 왔습니다.

 

 

 


에베소 교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미 그 복음을 믿었고 또한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위한 바울 사도의 기도는 모든 성도와 함께 이 사랑을 계속해서 알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다는 것은 확실히 단계의 문제로 보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야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결코 알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깊고도 심오한 사랑을 발견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념적인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사랑으로서의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서, 결국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를 갈망하며,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더욱더 우리를 향하신 그의 사랑을 알 수 있을 것인데, 이런 일들은 따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첫 번째 사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것이 바로 우리들 모두가 그것을 위해 노력해야 할 목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또 알 수 있는 사실은 이 체험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을 받아들일 수 없고 성령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이 사랑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것을 받아 누릴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는 “우리가 능히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일부러 강조하는 단어를 선택해 사용하였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강건해 짐으로서 능히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 사랑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사랑을 알아보고, 사랑만이 사랑을 이해하며, 사랑만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사랑을 알고 체험하고자 한다면 먼저 우리의 마음속에 사랑을 지녀야만 합니다. 성경은 읽지만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사랑을 음미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도는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라고” 말하는데 언뜻 보기에 여기에서 다소의 혼란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미 “사랑 가운데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 있다면 무엇을 더 필요로 하겠습니까? 위대한 성경의 원리가 바로 이 점에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한번은 주님께서 진리를 받아들이는 문제를 다루시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13:12) 여기서 우리는 성경적인 역설의 전형적인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즉 “무릇 가진 자에게 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미 사랑을 가지지 않고서는 이 위대하고 궁극적인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갑자기 그분의 사랑을 아는 지식의 정상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정상에 도달하여 “지식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자”한다면 바로 지금 당장에 올라가기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당장에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버리고 일반적인 수준에서 등을 돌리고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기 시작해야 합니다.

 

 

 

 

2.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


사도 바울은 여기서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함에 있어서 치수를 재는데 사용하는 네 가지 방법으로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와 장차 올 세상에서 모든 성도들이 주목해야 될 매우 영광스럽고 무한한 어떤 것에 대하여 고찰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주시하고 놀라워하며 그것에 관해 경이를 느끼면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지금 이 현세에 이것을 시작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며 그것은 가장 위대한 성도들의 특징 중 하나가 되어 왔습니다.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을 주는 것은 없으며 참으로 이것은 모든 사랑의 특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서 생각할 때뿐 아니라 그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도 기쁩니다. 그러므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묵상하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은 없다고 할 것입니다.

 

 

 

 

  1) 사랑의 넓이


여러분은 이 사랑의 넓이 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이 사랑을 묵상하고 그것을 숙고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는 그의 피로 인하여 하나님께 드려지는 성도들의 수입니다. 시대를 지나오며 성도라는 이름으로 살아왔던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성도들만큼 그분의 사랑의 넓이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온 세계 각처에 분포되어 있는 성도들의 수와 이제까지 살다간 모든 성도들의 충만한 수가 그분의 사랑의 넓이이며 우리는 어느 날 영광 가운데 이 장면을 완전하게 보게 될 것입니다.

 

 

 

 

  2) 사랑의 길이


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끝없는 사랑의 인격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사랑은 창세전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갑자기 온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름이 창세 이후로부터 “어린양의 생명책”(계13;18, 17:8)에 기록 되었다는 것을 읽어 볼 수 있습니다.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께서 나를 알고 계셨다는 이 사실은 지극히 놀라운 일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알고 계셨으며 우리의 이름은 그분의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과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존재에 그것을 더하는 것과 그분이 그분의 마음을 우리를 위해 주시고 그분의 애정이 영원 전부터 우리에게 있었다는 것을 아는 일은 참으로 존귀한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사랑의 길이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변함이 없이 영원토록 계속될 것인데, 중도에 포기하거나 저버리는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이 그분의 사랑의 길이입니다.

 

 

 

 

3) 사랑의 깊이


우리 주님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본체”이셨으며, 그분은 영원 전부터 아버지의 품속에 계셨던 성자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가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라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등됨을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얻어 내야 할 상급으로서 생각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그분은 오히려 “자신을 낮추시고” 그의 영혼은 영광의 형적을 포기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모습으로 죄와 수치로 가득 찬 이 세상으로 오셨습니다.

 

 

 


그는 스스로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고서, 오히려 자기 자신을 낮추사 동정녀의 몸에 들어가셔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인간처럼 살았습니다. 그분이 태어났던 가난하고 비천한 가정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이 이 세상에 계실 동안 그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회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비천한 일을 하셨습니까? 본래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하셨고,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다음에 그분께서 인간의 손에 의해 고난을 당하시고, 오해를 받으시고, 증오와 적대와 악의를 받으신 일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피곤과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인하여 당하신 고난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을 체포하고, 그분을 시험하여, 조롱하고, 야유하고, 그분의 지극히 거룩한 얼굴에 침을 뱉었던 잔인한 인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채찍질하며, 그분을 비난했던 잔인한 사람들과 골고다로 가는 도중에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비틀거리는 그분을 생각해 보십시오.

 

 

 


또 나무에 못 박히신 그분을 보시고, 갈증을 참아 내면서 고통을 견디어 내면서 고민하며 부르짖는 그 음성을 들어 보십시오. 우리의 죄가 그분에게 담당되어질 때의 그 무서운 순간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또한 한 번 그의 아버지께서 얼굴을 외면하시기조차 하시는 일을 당하셨으며, 그리고 그의 영혼이 떠나 죽으시고, 매장 되었으며 무덤 속에 눕혀졌습니다. 생명의 창조자요, 만물의 창조자이신 그분이 무덤 속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분께서 왜 이 모든 일을 해야만 했습니까? 놀랍게도 그 대답은 여러분과 저를 위한 그분의 사랑 때문입니다. 즉 그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분의 사랑의 깊이입니다.

 

 

 

 

  4) 사랑의 높이


사랑의 높이라는 말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목적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어올리시기 위해서 목적하신 그 높이를 그가 서술한 방법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뿐 아니라 우리에게 선을 이루시기 위해서도 돌아가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없앨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기 위하여 죽으셨으며, 우리를 형벌에서 구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하나님의 후사,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가 되게 하시려고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위한 그분의 목적이며 그가 하신 모든 것은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에게 이 생명, 즉 생명의 새로운 원리를 주셨기 때문에 그분은 자신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우리에게 거하시게 하십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이 사랑과 이 사랑의 지식으로 충만하게 채워진다면 우리는 완전히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를 강건하게 만드는 것은 지식입니다. 그것이 바울 사도가 이 에베소 교인들이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닫도록” 끊임없이 기도한 이유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그것 안에서 자라가며, 그것 안에서 기뻐해야 합니다.

 

 

 

 

3.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일


우리가 사랑에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 강해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공부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이 지식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엇인가를 공부하면서, 사랑을 마음과 지성으로만 이해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로 사랑은 사랑만으로 이해 할 수가 있기 때문이라고 언급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이 같은 지식의 정신적인 면을 설명하는 한 단어를 일부러 선택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외견상으로 보이는 모순은 사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하고, 정신적으로 깨닫는 것은 전적으로 지적인 과정만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하는데 지적인 이해가 언제나 필수적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지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사랑에 대한 개념을 순전히 감정적으로만 생각하고 감상적인 태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데 있습니다. 사랑이 이성과 전혀 무관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랑 속에는 우리가 무시해서는 안 될 지적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깊이 생각 할 때에 우리의 지성으로 이런 치수 들을 논해야 하고 자신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며 묵상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사랑이 더욱 풍성해짐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용한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한다고 하는 말에서 “알다”라는 말은 “깨닫다”라는 말보다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의미가 더 강한 말입니다.

 

 

 


그 말은 지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적 경험에서 얻어진 지식과 경험 안에서 터가 굳어진 지식을 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개념상의 지식을 넘어서 실험과 경험을 통해서 얻은 명백한 지식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 속에서 발생하는 어떤 것들에 대한 자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뜻합니다. 안다”라는 말은 적극적인 면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고, 사랑 속에 잠겨 보고, 싸여 보며, 사랑에 매혹되고, 충만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고, 측량할 수 없는 자신의 사랑을 확증 적으로 알게 해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지식에 넘치다.”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면, 그 말은 실제로 “탁월한 지식”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관한 탁월한 지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된다 할지라도 일부분만을 알게 될 것이며 그것은 결코 마르지 않는 바다이이며, 다함이 없는, 찾아내려야 찾아낼 수 없는 무한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점점 더 많이 알게 될 것이지만 여전히 처음 시작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그 사랑에 대하여 다 알지는 못하지만, 아는 만큼 그 사랑을 누릴 수 있기에 좀더 많이 알고 좀더 많은 사랑을 누리며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4. 최심원(最深圓)


우리가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이해하고,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있다면, 그리스도를 우리들 공통적인 중심으로 하여 여러 가지 동심원 안에 배열되어 있다고 가정해 볼 때, 어떤 사람들은 구세주의 임재를 너무도 중요시함으로 인해 그분에게서 결코 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일 할 때조차도 주님의 도움으로서 그 일을 수행할 것이며, 일을 하면서도 혹시 주님의 영광의 빛을 단 한 줄기라도 놓쳐 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계속해서 그분을 응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주님께 몰두하지 못하고 약간 멀리 떨어져서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일들에 바쁜 나머지 자기 자신의 일에만 눈을 돌리고 이따금씩만 자신이 사랑하는 빛을 응시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세속적인 계획에 너무나 몰두한 나머지 그리스도의 옆에 서서 대개 다른 길을 바라보고 있으며 이따금씩만 그 빛을 응시하고, 자신에게 희미하게 비추이는 빛이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인지 의심을 하면서 자신의 바쁜 일과와 다른 동류의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며, 자신의 여러 가지 일들로 마음을 졸이고 고심하는 데에만 시간을 보내고 구주를 위해서는 시간을 할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제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체험이나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사랑에 대하여 알 수도 있고 이야기도 할 수 있는 상태에 까지 도달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이 땅을 떠나서는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지만, 이 땅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누리며 살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으니 그것을 신비주의로 몰아붙여 성령을 소멸하는 자가 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교제를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 없이는 우리가 행복해 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최상의 축복을 누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하여 먹고, 마시며, 그의 사랑으로 인하여 일하고, 그의 사랑으로 인하여 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활동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 것을 금하십니다. 동기가 먼저 와야 하며 그 동기가 항상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어떤 일을 하거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랑으로 인하여 어떤 일들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님에 대한 지식을 찾고 계속해서 그것에 대해 알게 될 때에 우리는 가장 내부에 있는 원 안에 속하여 주님의 거룩하신 얼굴을 바라보면서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 엡3:18-19절(2)

 

 

 

 

3장 18~19절: 능히 모든 성도와 함게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5.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지식


우리에게 이제 남아 있는 가장 실제적이고 직접적인 문제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지식”에 도달 할 수 있을는지에 관한 건입니다. 우리가 하늘과 그 영광에 이를 때 우리가 놀라게 될 것이라는 것은 확실한데, 이는 우리가 알고 깨닫게 될 것에 관하여 놀랄 뿐 아니라 우리가 이곳 지상에 있는 동안 무지했다는 것에 관하여 더욱 놀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는 우리에게 처했던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분명하게 알게 될 것이며, 우리가 즐거워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시간을 얼마나 낭비했는가를 알게 될 것이며, 다른 것들이 이 세상의 어떤 사람이라도 체험할 수 있는 놀랍고도 축복된 경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도록 얼마나 방치했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이점에 대하여 권고하기를 “그의 강림하실 때에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기 위하여” 전진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질 상급에 대하여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용서를 받았으며, 구원을 받았으니, 반드시 천국에 갈 것이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도착하게 되면 우리에게 상급이 주어질 텐데, 영원하도록 보존될 그 상급에 대하여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아버지라고 설명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마치 지상의 아버지가 자기의 자녀들을 자랑하고, 사랑하며, 누구든지 그 자녀들에 대하여 좋게 생각하기를 원하는 것과 같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기뻐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의 모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를 우리를 통하여 또한 우리를 사용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모든 이유 때문에 모든 성도들과 함께 지식이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는 방법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기계적이지 않아야 합니다. 자동판매기와 같은 기계는 영적 생활과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어떤 위대한 성도들의 경험이나 체험, 혹은 어떤 깨달음에 의해 그리스도의 사랑에 이르는 지식을 얻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러 가지 방법 중의 하나일 텐데,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만을 고집하여 반복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효력이 없을 것입니다. 그가 기계적인 견해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성도가 축복을 받은 경로와 똑 같은 방법을 사용한다고 해도 그와 똑같은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물론 어쩌다가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한 것은 우리가 개인적인 관계를 다룰 뿐만 아니라 또한 개인적인 교제의 영역에서는 기계적인 방법이 가치가 없고 오히려 큰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특정한 것이나 그와 같은 경험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수중에 있는 어떤 것, 즉 하나님께서 뜻하신 때와 장소, 그리고 하나님 자신의 방법으로 그의 축복을 분배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의 생각으로 “이런 일”을 하면 “저런” 결과가 올 것이라고 하는 그런 생각에는 어떤 보장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와 같은 사고방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축복을 명령하거나 “요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주권적인 의지와 은혜로서 축복을 분배하여 주시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구할 수는 있어도 “요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지식을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사단의 시험도 함께 따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의 사랑에 대한 지식을 더욱더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 가까이 하면 할수록 더욱더 큰 시련과 시험을 받을 것입니다.

 

 

 


처음에 마귀는 최선을 다하여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방해하고,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에게는 온갖 힘을 다하여 어린아이로 머물러 그리스도와 가장 멀찍이 떨어져 있는 집단 속에서 만족하도록 하는 데에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해 합니다. 우리가 성장하고 발전할 때 마귀는 그 일을 굉장히 염려하는데,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더욱 좋은 칭찬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성장하게 되면 마귀의 나라는 위협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마귀는 최선을 다하여 우리를 억누르고 자기 하수인들을 훈련시켜 우리를 맹렬하게 공격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마귀를 대항한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패배할 것이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도가 에베소서 마지막 장에서 표현했듯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가까이 있기를 구한다면 마귀는 그의 부하를 풀어 우리를 대적할 것이며, 이제까지 전혀 생각조차 못했던 마귀의 음흉한 궤계에 대해서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가 강조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는 우리는 주님 자신을 추구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보고 전하는 즐거움의 체험과 기도회에서 찾아오는 체험, 찬송을 부르면서 느끼는 체험과 그리스도인의 교제에서 알게 되는 체험, 그리고 그 밖에 다른 여러 가지 체험을 하게 됨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그런 체험들이 위험하게 될 수 있다는 것까지 깨달아야 하며, 이것이 우리를 실망시키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일상이 유년시절과 청년시절이 다르듯, 청년시절의 문제들은 중년시절의 문제와 다르며, 중년시절의 문제들은 노년시절의 문제와 다릅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성장함에 따라 우리는 다른 영역에 있게 되며 다른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초기 단계에서 할 필요가 없었던 것처럼 보였던 일을 그 다음 단계에서 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도 아주 똑같은 일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를 의지하여 살아가야 합니다. 어떤 집회나, 책과 같은 것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의존하여 어떤 좋은 감정이나 작은 행복감을 체험하는 것에 만족하여, 주님 자신을 구하는 일을 계속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불행합니다.

 

 

 

 

6. 손님맞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반적인 영역에서 특별한 영역으로 성큼 올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지식 없이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고 있음이 더욱 분명합니다.

물론 일반적인 것들로부터 시작을 해야 하지만 그것이 특수한 것에까지 도달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바디매오가 행한 것처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가장 시급하고도 명백한 규칙이라고 할 수 있는 첫 번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규칙적으로 읽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해 주시기 위해서 주신 것이며, 어떤 점에서 성경의 주요 목적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서나 주님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마다 읽는 방법을 알게 되면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어도 아무런 소득이 없이 전혀 유익을 얻지 못할 경우도 있는데 그것은 성경을 기계적으로 읽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하고, 또는 그렇게 하라고 배웠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읽는다면 아마 조금도 유익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하루에 일정량을 읽었기 때문에 자기만족과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감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모든 기능이나 소질들을 사용하여 읽어야 하되, 성령의 조명과 감동을 위해 기도해야만 합니다.

 

 

 


성경을 대할 때에는 언제나 읽기 전에 자신에게 훈계를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성경 읽기는 유익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수한 말씀을 통해서 갑작스레 그들을 만나 주시는데,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성경책에서 나오셔서 친히 성경을 읽는 자에게 말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경 읽기에 있어서는 사색과 명상, “마음의 준비”, 무엇보다도 기다리는 마음과 갈망하는 기대, 그리고 어느 곳에서라도 주님을 찾고자 하는 각오가 있어야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에서 다음으로 중요한 원리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기도하지 않으면서 기도하는 것 같은 태도로 많은 시간을 헛되이 보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 할 때는 어떤 면에서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성령의 자유로움을 좀더 풍부하게 체험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 전에 무엇을 아뢸 것인가 미리 묵상하고 깊이 생각해 보는 것도 무척 중요한데, 이것을 회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하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생생한 응답을 기대해야 합니다.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감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어떤 새롭고 더 받고 싶은 축복과 은혜를 원한다면 간구하기 전에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이미 받은 것에 대하여 감사드리는 것을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고 노력하는 일도 마땅히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미워하시고 몹시 싫어하시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것들을 붙잡고 늘어진다면, 그리고 그것들로 만족하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할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할 때에는 전심을 다하여 해야 합니다. 예레미야서에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29:13)고 하셨고 잠언 8:17에서는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또 시편에서는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시86:11)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마지막 원리로 주님의 임재하심에 대하여, 그것을 찾고, 기다리고, 기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성경을 읽느라, 기도하느라고, 지금까지 살펴보았던 모든 것을 행하기에 너무 바빠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 것인데 문제는 우리가 너무 무디고 반응이 느리며 분주해서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처음에 매우 조용하고 고요하게 오십니다. 성령은 모든 새 중에 가장 온화한 비둘기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또한 거룩하신 우리 주님의 모습입니다. 그는 항상 사랑의 충만하심만을 표현하시는 것은 아니며, 오직 사랑에 대한 세미한 암시만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들을 찾아내야 합니다.

 

 

 


항상 주님이 주시는 사랑의 가장 세미한 표현에 대비해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사랑은 한 가지 판에 박힌 방법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방법으로 표현해 주십니다.

사소한 날이라고 해서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사랑의 지극히 작은 그림자나 암시를 느끼자마자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 온다 하더라도 즉시 그것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예를 든다면, 어떤 특별한 문제에 대하여 별로 생각하지 않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충동이나 혹은 기도의 요청을 깨닫게 될 수도 있습니다. 세미한 사랑의 감동이나 암시를 느끼자마자 즉시 반응을 나타내고 행동하며 그에게 복종하며, 그분이 무엇을 요구하시든지 즉시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그분은 자주 오실 것이며, 나타내 주심은 더욱 분명하고 뚜렷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드러운 접근 중 하나라도 거절하거나 깨닫지 못해서 주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듣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보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합시다.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우리 마음속에 다른 소음이 있게 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금하시며, 주님을 밖에 세워 두는 것을 하나님께서 금하셨습니다. 주님의 음성에 민감해져야 합니다. 항상 준비하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갈망하고 대기합시다.

그렇게 할 때, 주님은 가장 확실하게 찾아오시며 손수 자신을 나타내 주십니다.

 

 

 

 

7.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


이제 우리는 기도와 간구의 영역에서나 또는 체험의 영역에서 최고의 정점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으로 충만해 질 때에만 완전해집니다. 사도 바울도 여기에서 그 완전을 위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충만하심 전부를 소유한다는 것은 확실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은 아주 불가능한 일인데, 그것이 가능하다고 하는 마귀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이 인간의 원죄였습니다.

 

 

 


누구에게도 전가 될 수 없는 하나님의 속성들 중에 영원성이 있고, 불변성과 편재성이 있으며, 전지성과 전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적인 신성함이 있으니, 하나님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고후 11:31) 이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며, 그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어떤 것이며, 모든 다른 사람들로 말미암아 빛나는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위엄과 권능에 있어서 영광스러우신 분입니다.

 

 

 


성경은 “영화로우신 하나님”, 즉 “하나님의 영광”에 대하여 계속해서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완전하심, 즉 하나님의 위엄과 광채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요1:18), 그리고 “하나님을 보고 살 자가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광채와 위엄과 영광 때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보기를 원했을 때조차도 그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다고 들었으며, 단지 하나님의 “”만을 보도록 허락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환영을 보았던 사람들은 모두 압도되어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영광과 위엄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모든 속성들은 그분의 필수불가결한 속성이며 모두 다 분명히 전가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가될 수 있는 속성은 사람에게 부여 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부여됩니다. 그것은 거룩함이며, 또한 의, 정의, 공의도 해당됩니다. 그리고 또 다른 특성은 사랑,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로서 사람에게 나타납니다. 이것들은 단지 하나님의 축복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 자신의 충만하신 어떤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것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느냐”는 것이 관건입니다. 사도가 에베소 교인들과 모든 교인들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에 대하여 충만해질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든 것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남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우리가 그분의 사랑에 대하여 앎으로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충만하심으로 충만해지는 것은 아주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한 순서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속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은 노력으로 강건해져야 하고, 그 다음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마음에 계시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그의 충만하심으로 우리 안에 계실 수 있게 해 달라고 단계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에서도 이와 똑같은 순서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동안, 우리가 그러한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진리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나의 마음에 계신다면 그 다음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신성의 충만하심이 내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적인 표현은 참으로 빈약하며, 우리의 지성과 이해는 참으로 좁습니다. 그러나 나사렛 예수를 바라볼 때에 참으로 진리는 존재한 다는 것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그는 진실로 우리와 같은 사람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전부가 그분 안에 계십니다.

 

 

 


그러니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계신다면 우리 또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해 질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신성의 모든 충만”이 내 안에 질적인 생명으로 내재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여러 형태로 나타날 수 있지만 우리 모두는 충만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8. 충만의 체험


바울은 에베소의 교인들의 일상생활을 돕기 위하여 이 편지를 썼습니다. 본질적으로 실제적이며, 확고한 실체로서 우리에 제시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상이나 막연하고, 추상적이며, 신비적인 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이 기도는 오늘날의 교회에 가장 시급한 실제적인 문제라고 생각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충만한 것과 능력으로 충만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의 능력 있는 활동이 증거합니다. 어떤 점에서 1738년 5월 이전의 존 웨슬리보다 더 바쁘고 더 많은 활동을 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는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 졌을 때 그의 전체 봉사가 변화되었고 그는 능력 있는, 그리고 위대한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체험이야 말로 가장 실제적인 체험이라고 주장합니다. 참으로 실제적인 사람은 항상 분주하고 흥분하여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쓰임 받는 사람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교회가 필요로 하는 부흥입니다. 교회가 능력 있게 되는 것은 바로 성령으로 부흥될 때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종교를 그들의 삶의 앞면에 두려고 하지 않고, 그들의 중심에 두려고 하지도 않고, 오히려 삶의 뒷면에 두려고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신이 위급할 때에나 찾는 것으로 생각하여, 자신이나 혹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몹시 아프거나, 재산에 손해를 보게 되었거나, 어떤 재해가 일어나거나, 우리가 죽게 되었을 때에 기독교의 진리가 우리의 필요를 충당시킬 것으로만 여깁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신앙은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예금과 같은 것이 아니며,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하여 활용 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것으로 충만케 된다는 것은 첫째로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능력을 지배하시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고와 감정과 외적인 모든 행동을 지배하시며, 우리의 전 생애를 지배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는 언제나 선으로 결말이 날 것 또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중생을 하고 이 새 생명의 원리를 우리에게 주입하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순간 새로운 본능과 소망, 새로운 목적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것들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기 시작하고, 우리는 그것들의 성취를 보기를 갈망하게 되며, 점차적으로 성취되어 만족하게 됩니다. 우리는 결코 결핍과 공허와 부족의 감정이 없으며, 이러한 감정들은 모두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참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 보좌를 떠나 지상에 오셔서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이 모든 것들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에 관하여 대화하고 논쟁하기 위해 추상적으로, 그리고 이론적으로 하나님에 관하여 알 것이 아니라 친밀하고 정확하게 그리고 참되게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 엡3장20-21절

 

 

 

 

3장 20~21절: 우리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해 질 수” 있기를 원하는 간구에 대한 응답이야 말로 가장 위대합니다. 그것을 요청해 왔고 기도해 왔으므로 그것이 더 넘치도록 하여 주실 것을 믿고 이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 이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으므로 사도는 이 송영으로 끝을 맺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간구를 드려왔던 것에 대한 응답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러한 축복을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데, 그 축복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준비하신 구원의 길을 통하여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매우 깊이 인식하고 그것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깊이 감동되어 그러한 일을 사람들에게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기 위한 소망으로 그의 영혼과 마음이 벅차 오른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위대한 찬송을 드릴 수 있는 영광을 이 에베소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도록 그들을 위해 기도해 오고 있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구원의 창시자요, 부여자이신 하나님, 즉 영광과 존귀와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을 돌리기를 원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도 바울과 같이 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느끼는가? 우리는 바울과 같은 감정과 사상으로 활기를 되찾고 있는가?

바울의 기도에서 여러 가지 간구를 읽은 후에 그리고 그 정상에 이른 후에 우리는 그 송영의 불가피성을 인식하는가? 사도가 그랬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의 은혜를 찬미하고자 하는 이 억제할 수 없는 소원을 느끼고 있는가? 사도가 그랬듯이 굉장한 가능성들이 이 현세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열려 있음을 깨달음으로 우리도 감동되고 전율을 느끼는가?

 

 

 

 

우리는 복음을 믿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계시고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한 이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해 지는 것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혹시 그가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자신의 말에 도취되었다고 의심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이 일들이 매우 예외적인 사람들, 가령 사도 자신 또는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되고 수도원으로 들어간 “성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고 느끼지는 않습니까? 송영에 내포된 바울의 권고는 우리를 돕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신앙 수준까지 내려와서 연약하고 무지하고 불신 가운데 빠져 있는 우리를 돕고자 하며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초월하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모든 것에 더 넘치는 것입니다. 담대하게 간구하되 가장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까지도 요청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외에 다른 것들도 간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온 교회가 무엇이든지 뜨겁게 간구를 해야 할 것입니다. 한계를 넘어서게 될 위험은 전혀 없습니다. 무한한 능력과 사랑으로서 넘치는 은혜를 베풀어 주실”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의 능력은 우리가 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그 이상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제한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의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하는 간구를 제한 한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께 대한 불신의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죄에 너무 깊이 빠져 있어서 아무도 그를 구원할 수 없다고 우리는 말할는지도 모릅니다. 또한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그분의 이름을 모독하는 어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하여 걱정하여 수년 동안 그의 회심을 위해 기도해 왔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다가 그렇게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불가능하다고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대답은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능히 하실 수 있으며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 엡4:1-3절

 

 

 

 

4장 1~3절: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라

 

 

 


1.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은 새 장의 시작일 뿐만 아니라 에베소서의 새로운 후반부의 시작입니다.

처음 세 장의 전반부는 기독교 신앙의 필수적인 구원의 방법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핵심적인 사항을 독특한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4장부터는 우리의 실생활에 어떻게 적용 될 수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그러므로”라는 단어로서 시작하는 이 말에서 신앙과 실천을 분명하게 서로 연관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어떤 부분에 대한 연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껏 공부해온 1~3장까지의 모든 말씀에 대한 연결고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공부해 온 말씀을 표준으로 하여 살아가야 할 생활을 안내해주는 접속사로서 기독교인은 어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그것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실천적인 삶을 영위할 것을 지적하는 권고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의 말씀을 순종하고 실천하며 행해야 합니다.

 

 

 

 

2.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


우리는 앞서 기독교의 교리와 체험이 거룩한 생활을 하고자 하는 소원을 어떻게 일으켜 주는가에 대하여 공부하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살아가야 할 생활의 성격에 대하여 고찰해 볼 차례입니다. 사도는 먼저 “우리가 부르심을 받음에 합당하게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16절까지 하나씩 계속해서 말한 후에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한 것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고 보다 더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지침을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언제나 일반적인 해설을 하고 난 후에 구체적인 설명을 합니다. 이 원리는 생활에 들어가서도 적용이 될 수 있는데 많은 사람들은 곧바로 구체적인 일로 뛰어들기 때문에 생활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대할 때에 먼저 일반적인 원리들을 찾아내고 그리고 난 뒤에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일로 나가야 합니다. 전체는 부분들보다 더 중요하며, 그 부분적인 사례들을 하나씩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 가운데서 일어나는 하나하나의 구체적 사건들은 결코 그것을 고립시켜서 따로 떼어놓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실제에 있어서 잘못을 저지르게 되고 잘못된 길로 빠질 우려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언제나 보편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일반적인 원칙들을 분명히 하고 난 후에야 구체적인 것에 대한 설명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말씀에 대하여 일반적인 사실에서부터 파악해 보며, 여기에 있는 모든 단어가 각각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 단어를 하나씩 살펴보아야 합니다. 먼저 “합당”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 두 가지의 근본적이고 중요한 사실이 있는데 이 단어는 “조화의 사상” 을 말하며, “어울리는” 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실생활에서 교리나 실천의 어느 한 쪽에 전적으로 치우치지 말고 조화를 유지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인에 합당한 즉 그리스도인답고, 그리스도인에게 어울리는 삶을 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 부름에 합당하게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부름을 받은” 그것입니다. 참된 소명은 어떤 사람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불려짐을 당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부름을 받은자들은 모두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며, 그것은 모든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별된 자요, 신분이 새롭게 된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궁극적으로는 “영화롭게” 하십니다. 이것은 구원이 우리의 영혼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 있는 사역의 결과로 주어지며, 성령께서는 생명의 새로운 원리를 알게 해 주시고 믿을 수 있도록 역사하시는데, 결국 이 말은 우리를 믿게 하시려고 부르셨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은 6:44에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느니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도 그 부르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부르심이 없이는 우리가 그에게 나아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마음을 열어 주시지 않는다면 그 말씀이 역사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늘의 부르심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을 깨닫는 자로서 살아가야하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 가운데 항상 우리의 행동과 처신을 주관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위대하고 경이롭고 고귀한 부르심을 입었으므로 우리의 생활은 그 부르심에 맞고 그 부르심에 어울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부르심에 합당한 행실의 첫 번째 일은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도다.” 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복이니 우리는 언제나 이 사실을 기억하고 그 말씀이 지시하는 방법에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계속해서 그 다음 구절의 말씀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라는 말씀인데, 단지 우리를 지옥에 가지 않게 하거나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그런 생활을 하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사도는 하나님께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 라는 말씀을 상기토록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가족과 우리 아버지의 명예와 영광을 나타내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께 연결된 몸의 지체로서, 참으로 지금 이 순간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거주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에 하늘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끝으로 사도 바울은 사실상 “여러분은 내가 살아가려고 애쓰는 것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나는 지금 실제로 갇혀 있는데, 그것은 내가 할 일을 내가 결정하지 않기 때문이고,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갇혀 있는 것은 내가 주님께 충성을 다하고 주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때문이지만, 내가 전혀 염려하지 않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책임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대로 선택하여 살아갈 권리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를 부르신 그 참 뜻을 완전히 깨달아 알기만 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데 문제가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상 모든 성도들이 증거하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을 최고의 기쁨으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3. 영적 연합의 길


사도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전반부의 세 장에서 다뤄온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신” 이라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 가운데서 제일 되는 목적으로 주어진 말씀이 통일의 문제로 계속해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의 모든 행위와 처신보다 선행 되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 되는 문제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우정이나, 형제애, 동지애의 정신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리, 그리스도의 진리라고 할 수 있는 신학적이며 교리적인 진리에 토대를 둔 진리로 통일 되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서 “” 이란 말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씀은 어떤 인간적 우정의 정신이나, 운동 경기에서 한 팀이 단합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우리가 결코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성령으로부터 창출된 연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님께서 창출해 내셔서 이미 존재하고 있는 연합된 그 통일을 깨뜨리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은 성령님의 고유 사역으로서,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서 하신 일인데, 우리는 그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이 연합은 세상에서 말하는 연합이나 합동과 전혀 다른 참된 통일로서 살아있고 생명력이 있는 유기적인 연합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연합이나 합동은 어떤 주어진 목적을 위해서 이질적인 분자들이 함께 모이는 외적인 것이지만,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은 안에서 시작하여 밖으로 활동하는 내적인 연합입니다.

 

 

 


그것은 꽃이나 나무나 동물의 육체에서 볼 수 있는 통일성에 견주어 볼 수 있으며, 또 본질적으로 유기적이며 생명력 있는 것으로서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이 아닙니다. 이 연합에 대해서는 이미 2장에서 다뤄 왔으므로 잘 알고 있을 것인데, 이 연합의 정신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모든 생명의 현상에는 내적인 원리가 먼저 있고, 그런 후에 외적인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완전한 육체로부터 나온 생명을 가진 두개의 매우 작은 세포가 성장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데, 육체는 각 지체가 하나씩 모여서 우연히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 중심 되는 생명으로부터 자라는 것입니다.

 

 

 

 

영적 연합의 문제에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 할 수 있는데,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은 근본적으로 무형의 것이면서 참으로 무어라고 정의하기가 어렵지만 그것이 나타날 때에 우리는 그것을 인식할 수 있으며, 성령이 내주하시는 다른 사람과 만나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영혼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합니다.

 

 

 


여기에서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육체를 통하여 영혼과 정신이 나타나는 것은 연합의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서 “힘쓰다” 라는 단어의 원래의 뜻을 살펴보면 “근면하다” 입니다. 이 말은 속력을 암시하는 말에서 유래된 단어로서 우리는 어떤 일을 하기를 서둘러야 하며 그 일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야 하며, 열심을 표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부르심을 입은 이 부름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일에 대하여 서둘러야 하고, 부지런해야 하며, 결코 그것을 잊지 말고, 이 일이 우리 생활의 가장 주된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엡4:4-6절(1)

 

 

 

 

4장4~6절: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 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1. 그리스도의 몸


본문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왜 우리가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만 하는가에 대하여 충분하고도 저항할 수 없는 근거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제시하듯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의 지체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개인적인데만 자기의 시간을 다 허비해 버립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교회의 놀라운 모습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으며 우리가 이 위대하고 신비로운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라는 것을 일깨워 줌으로서 우리들을 바로 잡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의 독립된 개체라고만 생각하여 몇 사람씩 작은 파당을 조성하고 나누어지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헤치는 행동들입니다. 만일 우리가 교회를 전반적으로 이해하고 교회가 하나의 연합된 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더라면, 이런 일은 상상조차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본문의 세 절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에 대한 교리를 설명하면서 “하나”라는 낱말을 7번이나 사용하고 있는데, 7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수로서, 완전의 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통일성은 하나님의 신성의 완전함이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그리고 세 개씩 짝지어져 있는 각각의 모임들은 거룩하신 삼위일체 안에 있는 각 위를 따라 배열되어 있는데, 처음 세 개는 성령께 대한 것이며, 그 다음 세 개는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것입니다. 이것의 의미를 아는 것은 우리가 이 통일의 교리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며, 우리들의 매일의 실생활에서 그것의 중요성을 알 수 있는 길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는 6절에 나와 있는데 마지막 말씀을 잘 관찰해 보면 그 말씀 속에는 통일의 모든 것이 종합적으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에 우리는 소심하고 병적인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먼저 우리의 신분은 무엇이며, 우리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느 곳에 위치하도록 하셨는지를 먼저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우리가 이 해석의 문제에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순서입니다. 먼저 성령을 말하고 그 다음에 성자, 그리고 맨 나중에 성부 하나님을 말함으로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단체요 공동체인데, 그는 우리가 어디에 위치해 있으며 전에는 우리가 어떤 위치였는가 하는 바로 거기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좀더 차원 높은 단계, 즉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신 몸으로서의 교회를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부 하나님을 설명하는데, 이것은 성령이 우리 속에 내주하시며, 우리가 유일하신 중보자를 통하여 성부 하나님께 나간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성자께로 인도하시고, 우리의 중보자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성자는 우리를 성부 하나님께로 인도하십니다. 이제 4절의 주제가 되는 성령의 사역으로 말미암는 통일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도는 여기서 교회를 “한 몸”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본질적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스러운 교회인, 그리스도의 신비스러운 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다수로 존재할 수 없으며, 사람은 많은 몸을 가질 수 없고, 오직 하나 밖에는 없습니다.

 

 

 

 

이같이 교회는 오직 하나의 완전하고 신비롭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교회가 있을 뿐입니다. 이 교회는 여러 대륙과 여러 지방 출신의 모든 종족과 여러 인종의 사람들로 구성 되어 있고, 이러한 다양성이 있을 지라도 보이지 않는 신비스러운 교회에는 아무런 변화도 주지 않습니다. 이 교회 안에는 하늘 아래 있는 모든 나라와 전 지상의 모든 종족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간이 흐른다고 해도 이 사실은 변함이 없이 전 세대를 통한 교회로 존재합니다. 신분이 어떻든지, 얼마나 탁월하고, 얼마나 뛰어나다고 할지라도,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가난하든, 부자이든, 그런 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모든 조건들은 하나님 백성들의 충만함으로 이 몸 하나에 다 들어있습니다.

 

 

 

 

몸의 각 부분들은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매우 다르게 보입니다. 외관상으로도 다르고 기능이 다르지만 그것들이 모두 함께 소속되어 있으며 모두 다 몸의 필수적인 부분들이라는 이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는 모두 같은 것입니다. 한 몸 안에는 여러 다양성들이 있지만 서로 이질감이 없이 조화롭게 통일을 이루고 있어야 하는데, 만일 몸의 한 부분이라도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다면, 그 몸은 완전하지 않은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어딘가 병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서 떨어질 수 없고 나누어질 수 없는 지체의 각 부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2. 한 성령


우리는 이제 사도가 사용하고 있는 두 번째 단어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많은 문제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만일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만일 교회가 몸과 같다면 그 몸은 어디서 온 것이며, 어째서 그 몸이 형성되었으며 생기게 되었는가? 그 몸의 생명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그 몸을 살아있고 생명력 있는 유기적인 조직체가 되도록 하는 것은 무엇인가?

 

 

 


사도는 이 문제에 대하여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다.”라는 말로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령 자신의 활동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데, 성령님께서는 교회를 만드시고, 유지하시고, 부흥케 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일로 교회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성령께서는 그 몸의 한 중심에 계셔서 전 유기체에 생명과 삶을 부여 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교회의 통일에 대한 이 교리가 참으로 필연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사력을 다해, 그리고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는 “성령은 하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오직 한 분이시며 그는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악령들은 수도 없이 많지만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제 삼위이시며 거룩한 인격으로 교회의 통일을 이루시는 분은 성령으로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성령의 능력이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교회의 통일 또한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님을 3인칭의 “그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인격이시며, 성자 하나님과도 동등한 인격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데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본질은 같습니다. 그런데도 기계적이지 않은 것은 생명의 사역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베소서 2:21~22에서 성전 건물의 건축에 쓰일 돌들이 모아져서 건물로 지어지기 전에 미리 준비 되어졌다는 것을 읽어서 알고 있는데, 우리가 채석장에 있는 돌들과 같아서 그것을 실제 건물을 지을 때에 사용하기 위해서는 자연석 그대로의 돌은 사용할 수가 없어서, 사용처에 적당하게 다듬어진 후에 건물의 한 부분이 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의 한 부분들이 될 수 있기 전에 준비하는 일이 필수 불가결한 것처럼, 인간은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가 될 수 있기 전에, 혹은 하나님의 성전의 이 영광스러운 건물의 한 부분이 될 수 있기 전에, 자연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일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성령의 사역을 생각해 보면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될 수 있기 전에 우리 속에서 역사하신 필수적인 이 예비적 사역을 확인해 보기 위해 우리 자신을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① 성령님은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한 책망과 동시에 자신을 반성하도록 합니다.

② 살리심과 중생을 통해 우리에게 삶의 새로운 원리를 제공해 줍니다. 로 인해 주님의 생명을 갖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될 수 있습니다.

③ 성령의 특별한 사역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 같이 빈천한 자리에 있다가 이 동일한 새 생명을 얻은 것이니 서로 를 비교하거나 대조해 보아서는 안 되며 우리는 주 안에서 연합되어 한 소원을 가진 자로서 우리 주님을 바라보고 온전히 하나가 되어 그를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④ 우리를 준비시키시고 이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연합시키는 일을 하시니 우리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고전12:13)

⑤ 성령께서는 친히 온 몸에 생기를 불어 넣으십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며(고전 3:16~17), 또 “성령의 전”(고전6장)입니다. 성령께서는 몸의 유기적인 통일을 유지하는 수단이 되시는 동시에 그 통일을 유지하시는 행위자이십니다. 그렇게 볼 때 성령은 우리 육체의 생명이나, 육체의 혈액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는 모든 지체를 함께 연결시키며 하나로 만드는 연합하는 영이십니다.

⑥ 성령이 우리 안에서 우리 모두에게서 같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우리를 지배하심으로서 성령은 우리 속에서 그 자신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 성령의 열매들을 살펴보면 사랑은 언제나 연합을 하고, 희락 역시 즐거움으로 연합합니다. 또 화평은 싸움과 분열의 반대로 작용하여, 그것으로부터 오래참게 합니다. 그리고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는 그 하나하나가 통일을 증진시킵니다. 성령께서 이 열매를 맺게 하실 때에 분열과 불화가 일어날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이렇게 연합하게 하여 통일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3. 신앙의 부흥


지금까지 우리는 성령의 일반적인 사역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이제 모든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 일반사역 위에 특별한 은사를 더하시는 성령의 특별 사역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고린도 전서 12장에서 가르치는 능력의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믿음을, 그리고 다른 이에게는 또 다른 은사를 성령께서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은사들이 다 성령으로부터 온 선물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을 때만 진정한 통일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순절 날에 임했던 성령의 강림 사건은 이 교리의 축제일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성령의 특별한 사역은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성령의 일반 사역 안에서 나타납니다. 성령은 사람을 회개시키고, 자기의 부족함과 무가치함을 깨닫게 하고, 기도하게 하시며, 또한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성화의 사역을 계속하십니다. 그러나 때때로 성령의 특별 사역이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역사를 통하여서나, 체험을 통해서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특별사역을 보편적인 것과 특수한 것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성령의 보편적인 특별 사역은 일반적인 교회생활 가운데서 볼 수 있으며, 특수한 예는 교회 안에 있는 개인들에게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의 보편적인 특별 사역은 신앙의 부흥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데,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를 생각해 볼 때 이 신앙부흥의 주제보다도 더 중요하고 긴급한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대의 조류를 파악하고 있고 교회의 본질과 성령의 사역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있다면, 오늘날의 교회를 위하여 유일한 소망은 신앙부흥에 달려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인데, 그것은 인간이 계획하고 어떤 운동이나 기구나 노력에는 전혀 소망이 없고, 그것은 오직 그리고 절대적으로 성령님께 달려 있습니다.

 

 

 

 

신앙의 부흥에는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오순절 날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을 조금이라도 재현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부어주시는 것으로서 때로는 한 교회에, 때로는 한 지역이나 그 인근지역까지, 때로는 온 나라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 보편적인 성령의 특별사역의 효과는 교회에 나오지 않는 많은 사람들과 교회에 이름만 등록되어 있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회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지식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데, 오늘날 이 신앙 부흥의 문제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성령이 교회에 임하시고 충만하심이 오순절 날에만 있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령의 충만하심은 오순절 날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계속해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4:31의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는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은 분명히 오순절 날에 일어난 사건의 재현이라는 것입니다.

 

 

 


이곳에는 사도들과 다른 제자들과 세례를 받고 믿는 자들과 오순절 날에 성령을 받은자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이와 비슷한 일이 사마리아에서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리고 가이사랴에 있는 고넬료의 집에서도 일어났습니다. 그 밖에 신약성경에 기록된 외에도 교회사를 보면 놀라운 사실들이 있으며, 오늘날에도 그러한 일들은 비일비재합니다.

 

 

 


우리는 신앙부흥만큼 교회의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성격을 그토록 분명하게 입증하고, 성령의 사역을 그토록 명확하게 나타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성령의 능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력한 영적 부흥과 각성만큼 교회 내의 통일을 증진시키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앙부흥의 형태와 특성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대체로 사도행전 2장의 서두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사건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신앙부흥은 갑자기, 예기치 않은 때에 나타납니다. 우리는 그 후 계속되는 교회사에서도 “홀연히” 또는 “예기치 않은 때에”라는 말을 덧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언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그의 일을 부흥시키실지 알 수 없습니다. 신앙부흥은 인간이 이룩한 어떤 일의 결과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 가운데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어떤 부흥의 시기에 다른 여러 사람들보다도 어떤 특정한 인물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택하여 쓰시는 사람은 인간이 선택하는 기준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위대하고 은사가 있고 특별한 어떤 사람만을 쓰시는 것은 아닙니다. 때때로 매우 겸손하고 별로 눈에도 띄지 않는 사람을 쓰시기도 하는데, 그들의 재능에 의해서나 어떤 개인들이 하는 일이라고 볼 수 없는 조건에서 사용하셔서, 누가 보아도 그것이 성령의 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하심으로 명예와 영광을 받으십니다.


 

 

 

신앙의 부흥은 예기치 않은 때에 갑자기 일어납니다.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은 그 그리스도인들이 홀연히 성령의 임재와 능력과 영광을 깨닫게 되고 기이한 기분에 휩싸이게 됩니다. 여러 해 동안 복음을 믿어온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엄위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갑자기 새롭게 직통으로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셔서 그 온 집에 충만하시다는 것을 느끼고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 할 것도 없이 상상을 초월한 일이며,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며, 필설로 형언하기조차 어려운 일입니다. 교회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세상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신앙부흥의 큰 특징을 구분지어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① 사람들이 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방법으로 교리와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이 전에 체험해 보지 못한 기쁨을 누리기 시작하고 하나님과 그들과의 관계에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너무나 기쁨이 충만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새 술에 취하였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성령의 기쁨”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게 되어서, 그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모두 성령이 자기들을 감동시키고 다스린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완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④ 그들의 성령의 충만함은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다른 사람들이 몰려와서 “이것이 어찌된 일이냐?”고 묻게 되었으며, 그 때 베드로가 설교를 하자 그들은 울며 통회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자들이었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결코 회개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성령이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아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하며 갑자기 회개하고 회심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이 열흘 동안 열심히 기도하였던 것처럼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하여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사를 보면 모든 시대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도하여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무력함과 무능함을 깨닫고서 우리의 구주이시며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했으며 성령 충만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한마음으로 기도하고, 오순절의 사건이 재현될 것을 기도하며, 성령의 부흥과 하나님께서 또다시 권위와 능력과 권세로서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임재하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지금도 모든 능력으로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성령을 보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도 놀라고, 교회 밖에서 비웃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이 깜짝 놀란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성경: 엡4:4-6절(2)

 

 

 

 

4장4~6절: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 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4. 한 소망


이제 우리는 사도가 성령의 사역에 대하여 강조한 세 번째 면인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고 한 부분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먼저 “몸이 하나이요 성령은 하나이다.”라는 말에서 “몸이 하나이다.” 그리고 그 몸을 살아 있게 하고 활동하게 하는 몸의 생명은 “한 성령”이라는 것이 분명하다고 한 그 이치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도는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데는 필연적인 두 가지 이유 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성령께서 왜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역사하시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모든 일에 대한 준비의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 자체가 최후의 목표가 아니며, 교회는 몸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고 성령에 의하여 인류를 새로운 사람으로, 하나님을 위한 새로운 백성으로 불러내셔서 완전하게 하시고 모든 죄악으로부터 떠난 회복된 영광스러운 세계에서 살게 하려고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모든 것은 그 최후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최종적 임재와 그의 영원한 왕국을 건설 하는 일에 도달하도록 계획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몸, 한 성령, 부르심의 한 소망”의 그 몸은 아직 도래하지 않은 큰 날을 위한 준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성령께서 우리를 그 몸에 결합시키는 일, 즉 우리를 소생시키는 일 외에 개별적으로 또 다른 특별한 사역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1장에서 이미 다루어진 성령의 인치심과 보증에 대한 성령의 사역을 말합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시고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시키신 후에, 성령은 우리를 인치시고 우리에게 보증해 주십니다. 또한 인치시고 보증하시는 그 모든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께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앞으로 다가올 큰 기업의 상속자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우리에게 도장을 찍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과거의 신분과 상관없이 새로운 신분이 주어지는 “부르심의 소망”을 바라보아야 하며, 현재의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서도 안 되며, 다른 것들을 바라보거나 분열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뒤돌아보지도 말고 우리는 모두 한 가지 “부르심의 소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소망은 하나이며 언제나 동일하여 우리 모두를 위한 소망입니다.

 

 

 

 

5. 한 분 주님


이제 우리는 “주도 하나이요” 라는 말씀을 대하게 되었는데, 그 말씀에는 주님의 위격에는 유일성이 있다는 것으로, “주님”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주님과 같은 분은 전에도 없었고 앞으로 주님이 다시 오시기 전까지는 그와 같으신 분은 전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의 절대적 유일성의 모든 영광 가운데서 오직 혼자이실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고, 그분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영광의 주님”이며 “하나님의 본질적인 영광의 현상”이며, “충만한 광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인성과 신성의 두 본질을 동시에 가지신 오직 한 분, 곧 “한분 주님”으로 우리의 이성을 초월한 신비로운 진리로서 존재하십니다. 이것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는 진리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렇게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곧 이 한분 주님이신 그리스도입니다. 주께서 기독교를 만드시며, 그리스도가 없이는 기독교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본질로서 주님이 전부입니다. 기독교는 놀랍고도 유일한 성육신과 주께서 행하신 일의 결과입니다.

 

 

 


또 하나 우리가 꼭 유의해야 할 사실은 그리스도를 부분적으로 믿을 수 없다는 것과, 분리하여 나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도 유일하며, 그리스도의 죽음도 유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단번에 이루셨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대체한다든지 다른 어떠한 것도 첨가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너무 편협하다고 말할 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고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복음은 있을 수 없으며, 그와 비슷한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면에서 적극적으로 편협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또 한 가지는 주께서 값을 주고 우리를 사셨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소유물이라는 것이며, 그것이 주님과 우리의 관계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주인이 아니며, 또 다른 어떤 사람이 우리를 소유 할 수도 없습니다.

한분 주님만 있을 뿐입니다. 그 주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던 때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든지 내가 주인이고 너희는 종일뿐이다. 그런데 내가 주인으로서 이 일을 행하였으니 너희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가 한 주인을 모시고 살아가는 한 형제로서 서로를 섬기며 살아야 하는 것이 의무입니다. 우리는 주인을 섬기는 자로서, 또 형제를 섬기는 자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합니다. 오직 주님과 주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6. 믿음도 하나


사도의 두 번째 표현인 “한 믿음”은 “한 주”와 연관이 있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라고 특별하게 분류한 어구 속에 같이 들어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한 믿음”이 가리키는 뜻은 구원을 얻게 하는 복음의 위대한 말씀으로서 믿음으로서만 의롭게 된다는 유일한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에 있어서 이 외에 다른 믿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칭의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 돌리시고, 그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구원의 필수 요건으로서 “한 믿음”에서 벗어나서는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한 믿음”을 가지고 그 안에서 안식하며, 그 안에서 즐거워하고, 성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한 주 예수 그리스도와 거룩하신 성령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7. 한 세례


우리 주님을 중심으로 첫 번째 설명의 말씀 중 세 번째 단어인 “한 세례”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사도는 이 요점들을 설명하는 가운데 아무런 생각이 없이 우연하게 이런 식으로 단어의 배열을 하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이렇게 반복적으로 설명하는 일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라, 말씀을 부연해서 설명하면서 그 의미를 밝히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주도 하나이요”에서는 주님의 위격을 강조하고 있으며, “믿음도 하나이요”에서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방법인 칭의와 관련된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례도 하나이요”라는 부분에서는 그것이 어떻게 하나 되게 하는 일을 촉진시킬 수 있는가 하고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세례에 관한 전반적인 문제로 인해서 자주 토론과 분열과 분리가 일어났던 것이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세례가 중생의 수단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나, 세례의 형식에 관한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리고 세례의식에 관한 말씀이라고만 해석하는 사람들의 말을 우리는 배격해야 합니다. 초대 교회에서 믿는 자들은 당연히 세례를 받아야 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이에 대한 예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오순절 날에 일어난 사건을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라고 질문하였을 때, 베드로의 대답은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이것이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행하여진 일이었습니다. 뒤에 가보면 빌립보 간수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믿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더라.” 세례와 성찬은 우리가 마땅히 지켜야할 일이며, 우리가 지키는 성례는 그 두 가지밖에 없는데, 그것은 성경에서 두 가지만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이 성례란 내적으로 보이지 않는 영적 은혜를 외적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합니다.

 

 

 


세례의 형식은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한 것은 그 의미입니다. 세례를 받는 것이 곧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유아 세례를 받았거나 성인이 된 후에 세례를 받았거나, 침례를 받았거나, 물 뿌림의 세례를 받았거나 간에 이 통일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세례 행위의 자체가 무엇을 이룬다든지, 세례를 받음으로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세례는 어떤 의미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 의미가 통일의 요소가 됩니다. 우리가 강조해야 할 첫 번째 사항은 세례는 한 이름,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과 아버지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① 내가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나의 죄를 용서받고, 죄 씻음을 받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② 세상에서 건짐을 받아 하나님의 왕국, 곧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들어가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영역에 속해 있으며 전혀 새로운 영향권 하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③ 그뿐 아니라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를 나의 주로 고백합니다. 즉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께 복종시키고 그리스도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 되신다고 발표하는 것입니다.

④ 아담 안에서 아담과 연합하여 있던 내가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죄를 벌하시고, 그의 의를 전가시키셔서 나의 모든 죄악을 용서하셨다는 것을 확증하는 칭의의 믿음을 가지고 있고 또한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성령의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안에 속하게 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⑥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 장사되고,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죄의 영역에 대하여 죄의 권세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남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된 새로운 족속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이 각기 살아계시고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고, 우리 실체 속에 스며들어 그 능력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고 우리에게 큰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사도가 말한 “한 세례”의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도는 의식이나 어떤 마술적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한 이름과 한 주님이 있을 뿐이며, 오직 한 생명, 곧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있음을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셨고, 하늘에 오르신 분이며, 그 안에서 우리는 결합되어 있고 그의 생명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옛 사람은 사라지게 될 것이고 우리는 살아계시고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것입니다.

 

 

 

 

8. 한 하나님


이제 사도는 최고 절정의 말을 합니다.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사도는 성령과 성자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언제나 성부 하나님까지 계속해서 설명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의 회원으로서 당연히 성령의 사역을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하지만 성령께서는 우리를 성자에게로 인도하십니다. 그것은 성령이 아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들의 주된 목적과 소원은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이 진리를 경험적 순서에 입각하여 배열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해야만 합니다. 이제 우리는 “만유의 아버지”이신 한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진리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분 하나님만 존재하실 뿐입니다. 그러나 신성 안에는 삼위가 있지만 하나님이 세 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영원하신 한 신성 안에 삼위가 계신 것입니다.그것은 통일된 삼위일체입니다. 여기에서 몇 가지 실제적인 결론을 추론해 볼 수 있습니다.

 

 

 


구원의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시려고”, 다시 말하면 성부 하나님께 인도하시려고 모든 일을 이루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보다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옵니다. 즉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 중심입니다. 짐승들과 장로들과 모든 거룩한 천사들이 영원하신 성부 하나님을 중심하여 경배하며 절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천사들은 그들의 얼굴을 가립니다.

 

 

 


하늘에는 완전한 조화가 있습니다. 참으로 이것이 하늘나라이며 거기에는 불화와 분열이 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고 일치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시며, 모든 존재들은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 앞에서 절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 중심입니다. 그로 인하여 모든 것은 행복하고 기쁘고 완전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땅 위에서도 우리가 이 한 하나님을 경배하고 우리가 모두 하나님의 면전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모든 차별과 분열은 즉시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기타 모든 것은 빛을 잃게 되며 무의미하게 됩니다. 우리는 오직 경이와 사랑과 찬양에 몰두하게 됩니다. 우리는 다 함께 오직 한 분 하나님만을 경배합니다.

통일에 대하여 이야기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하나님의 면전에 있다는 인식만으로도 통일을 이루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만유” 가운데 계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만유는 “한 몸”에 속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모든 만물들의 아버지이시며 믿는 이들만의 아버지에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되어 그의 신비스러운 몸의 지체가 된 사람들에게 관심을 쏟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의 아버지는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어떤 사람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창조자로서 일반적 부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부성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 곧 교회 안에 있는 자들에게 국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주의 아버지라고 생각하지는 않고 인간의 우주적 형제성을 믿지 않는 반면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의 아버지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유 가운데” 계신다는 말씀은 이미 배웠던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질 성전과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그 성전에 거하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그는 교회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알기를 바랍니다. 사도 베드로는 천사들도 이것을 알기를 열망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그 진리를 진정으로 알고자 하십니까?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 엡4:7-10절

 

 

 

 

4장7~10절: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1. 그리스도의 선물


사도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지키라” 는 권유로 교회의 통일에 대한 주제를 계속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약간 다른 방법으로 권유합니다. 우리가 “통일”을 “일률적”으로 같은 의미에서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렇게 활기가 없는 일률적인 것은 참된 통일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여기서 통일은 그보다 훨씬 더 크고 장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4~6절을 공부하면서 우리는 사도가 “하나”라는 단어를 7회나 사용하였는데, 그것은 그 말씀들을 통하여 통일의 위대한 원리를 정립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7절에 와서 “우리 각 사람에게” 라고 표현을 다르게 합니다. 사도가 갑자기 하고 있는 이 말이 통일을 와해시켜 버릴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지만, 그것은 통일을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다. 통일이 우리 자신의 위치를 상실해 버리는 것이나, 구별할 수 없는 단단한 덩어리의 일부로서 되는 것이 아니라, 통일을 통해서 하나됨의 위치에 있는 우리지만 여전히 개인적인 자아가 존재하면서 동시에 전체의 한 단위가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며,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나 하나님의 자녀로서는 모두 하나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여러 지체들로서는 모두 하나이며, 모든 개개인의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구원을 받는데, 사도 바울이 받은 구원도 다른 어떤 그리스도인이 받은 구원과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모든 회심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며, 특별하고 독특한 환경이나 특수한 구원은 결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어떠한 차이도 없이 똑같이 동일하며, 하나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지금부터 이야기 하려는 것은 우리의 통일은 모든 사소한 점에서까지 우리가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혀 같을 수가 없는 우리 모두는 각각 개인적인 사람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이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다릅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개인적인 특성이 통일을 깨트릴 수 없고, 또한 통일도 개인들의 특성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구속의 은혜의 특별한 영광이며, 구속의 기적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상에 나타내고 시사하는 특별한 현상이며 그 무엇도 흉내 낼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우리가 하나 됨에 있어서 언제나 이 두 가지 원리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7절) 라고 함으로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전체의 교회와 각각의 지체들이 향유하는 여러 가지 다양한 은사의 제공자가 되신다는 것을 말하며, 또 이것은 다양성 속에서 통일을 보증하는 원리입니다.

 

 

 


그리고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라는 말씀은 오랫동안 인류를 대적하여 왔고, 인류를 속박하여 왔던 큰 원수들, 곧 마귀와 지옥과 죄악의 죽음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시고 그들을 포로로 잡아오는 광경으로 묘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포로들을 통치하던 왕들이 이제는 자신들이 포로가 되어서 끌려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원수들을 정복하려고 세상에 오셔서 원수들을 패배시키고 전쟁을 마치신 후, 이 모든 포로들을 이끌고 하늘로 돌아오셔서 그의 환호하는 백성들인 우리들에게 선물들을 부어 주시는 광경을 묘사한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그의 선물들을 나누어 주시는데, 이 모든 선물들은 언제나 그리고 영원토록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2. 구속의 드라마


에베소 4:9~10의 말씀은 시편 68:18의 말씀을 인용 한 것으로 그것은 거룩하신 우리 구주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 시편은 다윗에게 놀라운 승리를 안겨주신 여호와를 찬양하는 위대한 찬송입니다. 거기에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옛날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와 그의 군대로부터 건져 내셔서 홍해를 건너게 하셨던 그런 놀라운 승리를 안겨 주셨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호와께서 “올라 가셨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시고 영원토록 존재하시는 분이시며, 시작도 끝도 없으신 여호와께서 어떻게 올라 갈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길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올라갔다는 말은 그 전에 내려왔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나사렛 예수에 관한 말씀으로밖에는 풀이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려오셨던 것은 바로 나사렛 예수 안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해석상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생각되는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다.”는 구절을 대할 때에 여러 가지 의문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땅 아래 어느 곳을 지적하는 말이 아니며, 지옥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 주님께서 지상으로 오신 방법을 사실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3:13에서 이와 유사한 표현을 쓰고 있는데,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라는 이 말씀과 여기에서 올라간 자와 내려온 자에 대한 이 말씀은 지옥에 내려갔다는 말씀이 아니고 땅에서 살기 위해 내려오셨다는 뜻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땅 위에서 계셨으며, 바로 이 땅 위에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던 것이며 그의 가르침에는 독특한 권위가 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8:23에 보면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하늘에서 났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땅 아래 구덩이 속에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땅 위에 있었습니다. 단지 주님은 “위에서” 났고, 그들은 “아래서” 났다는 것을 비교하여 말씀하신 것뿐입니다. 우리가 “아래”나 “아랫 곳”이라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 말은 분명히 위에 있는 하늘과 아래 있는 땅을 비교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사도는 이 여호와에서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 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 “모든 하늘 위에” 라고 하는 사실적인 표현은 가장 높은 하늘이라는 뜻이며 지극히 높은 장소라는 의미입니다. 사도는 “지극히 높은 장소”라고 말하지 않고 “모든 하늘 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 뿐으로서, 하늘이 높은 곳인 것과 같이 땅은 낮은 곳이라는 비교 개념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하늘 위”라는 곳은 없는데, 그것은 하늘은 하늘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어째서 우리 주님께서 교회에게 이 모든 선물들을 주는 자의 위에 계시며, 그가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모든 교회의 주가 되시며, 주께서 이 땅 위에 계실 때 행하신 그 사역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인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올라가셨고 선물들을 나누어 주는 위치에 계시는데, 그 이유는 그가 먼저 땅 위에서 거주하시기 위하여 내려오셨고, 이 땅 위에서 어떤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의 전체적 내용에 대한 서술로서 위대한 구원의 드라마에 대하여 좀더 강력한 표현을 사용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가 시편 68편의 말씀을 인용한 참된 뜻은 주께서 어떻게 그 놀라운 승리를 쟁취하셔서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셨으며, 지금은 교회 안에 있는 그의 백성들에게 어떻게 선물을 나누어 주고 계시는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수이면서 인간들에게 친구처럼 행세해 온 마귀는 사실상 인간의 가장 큰 원수입니다. 마귀는 사람을 정복해 버렸고, 그때 이후로 사람을 죄의 굴레 속에서 속박의 상태로 붙잡아 놓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죽음의 공포 아래로 떨어져, 그것을 피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은 노예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정죄를 받아야 할 위치에 있으며, 그곳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이러한 조건들을 이용하여 우리를 속박하는 우리를 정복한 원수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원수들을 정복하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교회를 구속하시고, 그의 백성들을 이 속박에서, 이 사로잡힘에서, 이 포악에서 구속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는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내려오셔서 그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주님은 모든 원수들을 그의 발아래 꿇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영광 가운데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땅 아랫 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에 대한 말씀을 대면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지금 하늘에 계시지만 전에는 땅에 계셨으며, 그 땅에서 살았습니다. 주님은 하늘 보좌를 내버려 두고 오신 것은 자신을 철저하게 낮추신 기적적인 사건입니다. 주께서 먼저 세상에 내려오셔서 원수들을 정복하시기 전에는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주님이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의 일을 잘 알고 있었지만, 육신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에게도 순종하셨으며, 그 순종은 전쟁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는 죄가 없었고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지만 세례도 받으셨습니다. 그는 마귀에게 시험도 받으셨으며, 40주야를 광야에서 혼자 원수의 우두머리와 치열한 싸움도 벌이셨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 그리고 율법사들의 적대 행위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모든 것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투쟁이었고 구속의 드라마를 이루고 있는 모든 내용입니다. 그는 한 번도 실패하시지 않았으며 아버지의 뜻에 철저하게 복종하셨습니다. 그는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던 일입니다. 그는 완전한 승리를 이루기 위하여 십자가에까지 가셨던 것입니다. 갈보리에서는 사단의 최후의 수단이 총동원 되었습니다. 마귀는 그를 죽임으로서 제거해 버린다고 생각했으나 그를 패배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이 파멸하는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마귀와 그의 모든 군대를 결정적으로 패배시키신 것은 바로 그가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그 사건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동시에 주님은 율법도 처리하셨습니다. 이 모든 일을 하시느라고 주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매장되셨으며, 마침내 부활로서 승리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 마지막 원수를 정복하셨습니다. 주께서 우리의 인간적 본질을 그와 함께 영광 가운데 이끄십니다. 보좌에 앉으신 그 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 분입니다. 그는 그의 인간적 본성, 그리고 우리의 인간적 본성을 그와 함께 영광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 그곳에 주님과 함께 있으며, 그와 함께 하늘 보좌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몸이며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 되는 교회” 안에 있는 백성들에게 은혜와 선물들을 나누어 주고 계십니다.

 

 

 

 

3. 여러 가지 은사


사도는 7절에서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라고 기록하고 나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슨 선물을 나누어 주셨는가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그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선물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가를 설명하였습니다. 사도는 이 두 구절에서 우리가 교회의 생활과 활동 속에서 우리가 그 원리를 알 수 있도록 자세하게 풀이해서 설명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주제는 두 가지의 원리로 나누어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①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므로 그 외에 어떤 것도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머리이시며, 우리는 그 몸의 지체들입니다.

② 교회는 머리 아래에서 각각 다른 기능을 가진 지체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7절에서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 라고 한 내용입니다. 사도가 “주어진 은혜”라고 말하는 것은 구원의 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앞에서 다루었습니다. 사도가 지금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의 기능에 관한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 모두는 이미 구원의 은혜를 받아서 교회에 소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혹은 사도로” 라고 표현한 것은 개개의 모든 회원에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이 어떤 특별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하고자 하는 그 주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어떤 특별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시는데 몸의 모든 지체는 각각 수행해야 할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그 비유가 아주 적절하게 설명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의 여러 지체들인 우리 모두에게 교회 안에서 은혜를 주심으로 우리는 각각의 특별한 기능을 발휘하여 온 지체가 각각 충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우리의 기능이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닫게 될 때, 교회의 지체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인가를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형성해 가고 있는 이 몸 안에서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한 부분 한 부분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지위입니다.

 

 

 


우리들 각자는 교회 안에서 점유하고 일하도록 부름 받은 어떤 특별한 위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 그리고 교회에 속한 자로서, 이 가공할 현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메시지의 관리자요 수호자라는 것을 믿는 우리가 해야 할 의무는 그 기능을 발견해 내는 일입니다.

 

 

 


③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 각 사람에게 이 특별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7,11절에서 강조하듯이 은혜는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가 친히” 라고 함으로서 이 모든 여러 가지 선물들을 주신 자는 바로 주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기억하게 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부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행해지고 있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 이것을 해야겠다, 혹은 저것을 해야겠다고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부르신 분은 바로 그리스도시며, 우리가 교회 안에서 어떤 재능을 발휘하고 있든지, 우리가 스스로 결정하면 안 되는 것은, 주께서 친히 전 영역을 총찰하고 계시며, 그가 친히 온 몸의 머리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주께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이 부분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단순히 어떤 곳에 어떤 필요를 보았다고 해서 그것은 내가 완수해야 할 책임이라고 즉석에서 결정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고 해도 주님의 뜻이 아닐 수 있으며 주님께서는 나에게 다른 책임을 맡겨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책임을 떠맡으려고 어리석게 달려들던 그 일을 어떤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도 있습니다.

 

 

 


④ 주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은혜는 다양합니다. 주님께서는 교회 안에 특별한 직책들을 두셨는데, 이것은 인간이 고안해 낸 것이 아니며, 모두 주님께서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도들을 통하여 내려주신 것입니다. 주께서는 여러 직책과 기능들을 지시하셨을 뿐 아니라 그것들의 성격과 다양성까지도 확정하셨습니다.(고린도전서 12장) 어떤 직책들은 다른 직책들에 비하여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직책들도 각각 필요한 곳에 있어야 합니다. 육체적인 몸에서처럼 어떤 부분들은 다른 부분들만큼 아름답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으나, 이 아름답지 못한 부분들이 필요하며, 우리는 그것들을 더욱 귀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기능들이 각기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모두 전체로서 조화를 이루며 작용하는데 필수적인 것들입니다. 더욱이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들을 이 직책들 위에 임명하셨습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주셨습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과 그 밖의 다른 직책에 종사할 자들을 선택하신 분은 주님 자신입니다. 주께서 이 여러 가지 다른 직책들을 세우시고 그 직책을 위하여 사람들을 부르시고 여러 가지 기능들을 행사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그들이 그 특별한 직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십니다.

 

 

 


여기에 분명한 불평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여러 가지 직책들은 분명히 등급이 정해져 있어 구분이 됩니다. 그러나 그 직책들은 모두 필수적이며, 주님께서 친히 임명하셨다는 이 두 가지 사실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세상의 계급제도와는 다른 것은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는 말씀에 따라 그들과 같은 지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낮은 자가 높은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존경해야 하지만, 그들을 주인이나 임금처럼 군주적인 권위를 가진 자처럼 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거나 뽐낼 것이 없고 낮은 위치에 있다고 해서 시기하거나 질투할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주께서 주신 것으로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4. 사도, 선지자, 전도자, 목사와 교사


사도가 말하고 있는 교회 안에 존재하는 이 직책들에는 일시적이고 임시적인 직책에 속하는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가 있고, 영구히 존속하는 집단에 속하는 직책으로 목사와 교사가 있습니다. 이렇게 분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우리는 지금 이 상이한 직책들에 대하여 검토해 보아야합니다.

 

 

 


  1) 사도


① 사람에게 부름을 받거나 임명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명 하신 일입니다.(갈 1:1, 고전 9:1)

② 교회나 교회의 대표자에게서가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고 사도직에 임명받은 자라야 합니다.

③ 진리에 대한 초자연적 계시를 받은 자였습니다.

④ 사도는 권위뿐만 아니라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 받은 자로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대사들이며, 그들에게는 특별한 권위가 부여 되었습니다.

⑤ 또한 기적을 행할 수 있는 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계승자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한 증거로 가룟 유다를 계승할 자로 맛디아를 임명하였지만, 그러나 그 후 사도 바울이 어떻게 사도의 직을 얻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헤롯 왕에게 죽임을 당하는 기사가 나오는데, 그의 계승자를 임명하지 않았다는 것에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2) 선지자


선지자 직에 대해서 분명한 가르침이 없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이야기 할 수는 없지만 성령께서 진리를 알려준 사람이었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실로 그는 진리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었고, 또한 이 진리를 얼마간 무아의 경지에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복음전하는 자


복음 전하는 자라는 그 당시의 용어는 현대적인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 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복음 전하는 자에 대한 기록이 그리 많지 않지만 사도행전 8장과 21장에 나오는 빌립이 복음 전하는 자였으며, 디모데와 디도도 복음 전하는 자였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 전하는 자의 일을 하라고 일깨워 줍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복음 전하는 자는 분명히 사도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매우 특별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복음 전하는 자는 복음의 여러 가지 사실들을 깨닫고 설명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과 힘을 받았던 자들로서 일반적으로 사도들이 직접 임명한 자이고 일종의 사도들의 대역을 했으며, 어떤 임무를 주어서 파송한 자였습니다. 어떤 때는 빌립이 사마리아로 보냄을 받은 것처럼, 사도들 앞에 보냄을 받기도 했지만 보통은 사도들을 따라 다녔습니다.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는 순회하며, 두루 여행하면서 교회들을 설립하였고 교회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설립된 기초 위에 교회를 세우고, 진리를 보다 더 충분하게 설명하고 해석하게 하려고 사도가 전도자를 남겨 놓았던 경우를 자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설립되고 자리를 잡게 되면 이 직책도 사라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18세기 복음적 각성의 시대에는 이들을 “권위 하는 자”라고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4) 목사와 교사


우리는 지금까지 특별하면서도 일시적인 세 가지 직책에 대하여 고찰하였습니다. 이제 영구적인 직책으로 분류할 수 있는 “목사와 교사”의 직책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이 두 가지 직책은 같은 사람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직책들은 교회가 보다 더 안정된 상태가 되었을 때 시작하여 그 후 지금까지 계속되어지고 있습니다. 목사직은 일반적으로 다스리며 가르치고 지도하는 직책입니다. 그것은 양치는 목자에서 연유된 직책입니다. 목자는 그의 양떼를 치며 보살펴 주고, 어디로 갈 것인가 어디에서 꼴을 먹을 것인가를 지시하며, 다시 양 우리로 인도해 오며, 그들의 안전을 보살피며 이리들의 공격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주는 일을 합니다. 그것은 참으로 큰 직책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불행하게도 그 품격이 저하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목사는 영혼들을 책임 맡은 자입니다. 그는 단순히 사람들을 방문하여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 주는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만이 아니라, 그는 양떼의 보호자, 관리자, 조직하는 자, 지도자, 다스리는 일을 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교사는 실제로 교리를 가르치는 자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두 직책은 병행되는 것이며 또한 기나긴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실제로 그렇게 되어 왔지만, 때로는 어떤 사람에게는 가르치는 은사보다는 목양의 은사가 더 많이 있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목양의 은사보다는 가르치는 은사가 더 많은 경우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성령의 은사를 따라 개인마다 다양합니다.

 

 

 


교회 안에는 교인들의 영혼을 돌보며 동시에 가르치는 일을 하는 직책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머리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혜가 있으며 그가 기초를 세우기 위하여 사도와 선지자를 세우셨습니다. 교회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것입니다.(엡2:20) 그들은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하여 주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부르신 자들입니다. 주님은 배움이 없는 어부들을 사도로 부르셨으며, 자신을 핍박하던 자를 부르셔서 교회의 기초를 세웠습니다. 교회의 머리 되신 우리 주님의 지혜는 참으로 놀랍습니다. 교회는 그것을 망각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 엡4:11-16절

 

 

 

 

4장11~16절: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히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과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니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1.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엇 때문에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직책들을 두시고 사람들을 그 직책에 임명하셨는가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교회를 모든 면에서 완전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한 목적 때문에 이 모든 직책들을 주셨고, 또 교회 안에서 여러가지 일로 분담되어 있는 것은 성도들을 온전케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온전하게 되어지는 길은 봉사의 은사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기능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면 그리스도인을 성도라고 묘사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모든 회원은 성도입니다. 성도란 세상과 분리된 사람들을 의미하며, 실제의 의미는 “거룩한 자”라는 뜻입니다. 거룩한 자”는 그가 전에 소속되어 있던 곳에서 선택되어 구분되어진 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려고 어떤 산을 거룩하게 하여 구별하셨던 것과, 성전의 성구들에 피를 뿌려 거룩하게 구별하신 것처럼 성도들을 세상과 거룩하게 구분하여 놓았습니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서 우리는 하나님 개인적 소유물입니다. “성도”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부르시고 구분하시고 분리시키는 모든 과정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도라는 사실을 기뻐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 부르신 것을 찬양해야 합니다. 이제 “온전케 한다.”라는 말에 대하여 생각해 보면 근본적으로 이 말은 우리가 지향하는 목적과 목표에 부합하여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용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직 온전하지 못하므로, 그것을 사용하고자 하는 목적에 부합되도록 하기 위해 어떤 일을 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즉 어떤 부족한 점들을 보완하고 잘못된 부분들을 고치고 조정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이 글의 원 뜻은 “합하여 한 몸이 된다.”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이 말은 위골된 뼈를 맞춘다고 할 때 사용된 용어입니다. 뼈가 위골될 때는 그 뼈가 붙어 있는 수족은 온전치 못합니다. 사도가 이 단어를 사용한 뜻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 올바르게 맞추어져야 하고 알맞게 조정되어 각 지체가 완전한 상태로서 발전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함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지체들이기 때문에 각각 완전하게 될 때 전체가 완전해 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해 지는 역사가 모두에게서 진행되고 있으며, 교회 안에서 우리가 차지하고 있는 특별한 위치에 부합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됨으로서 전체의 몸이 조화 있고 안전하게 기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두 번째 구절인 “봉사의 일”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운다.”는 단어는 “건축한다.”는 뜻입니다. 그는 건물을 건설하는 일과 몸의 성장을 서로 결부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봉사의 일은 신체를 건축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봉사의 일은 영적 성장과 발전을 시키는 것이라고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봉사의 목적과 기능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사를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전파되지 못하고 교회가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은 회중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용기 없는 목사가 그들에게 속박 당하게 될 때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회중들이 목사가 해야 할 일을 명령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주님께서 친히 결정하시고,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습니다. 교인들을 성장시키기 위하여 주께서 그들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이 두려움이나 편벽됨이 없이 전파되어야 합니다. 봉사는 자기 자신들을 세우는 일이 되어서는 결단코 안 됩니다. 봉사의 일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이며, 교회를 세우는 일이 목사들의 임무입니다.

 

 

 

 

2. 믿는 것과 아는 일


13절에서는 봉사의 여러 가지 직책과 그 봉사의 사역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가를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건축이 되어지기 위해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직책이 주어졌고 그 직책을 수행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는 자신이 좋아하는 비유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이 여러 가지 직책들과 교회의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은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는데 있습니다.

 

 

 


이것을 먼저 하나가 된다는 말로서 기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에 하나가 되어”,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에 하나가 되어” 이 일들을 통하여 우리는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온전한”이라는 말은 “순수한, 성숙한, 완전히 발전한, 완전한”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사람”이라는 말은 머리 되신 그리스도와 그 몸의 지체들로서 이루어진 교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사람”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완전한 상태에 있는 교회, 즉 머리의 온전하심에 부응하는 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몸인 교회가 온전하여지고 성숙하여지고 장성하게 될 날이 앞으로 반드시 오게 됩니다. 온전한 사람은 언제나 온전하신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와 그 몸의 손과 발과 지체를 이루고 있는 우리들로서 구성되어져 있으므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참 뜻은 온전한 몸은 몸의 지체가 되는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정하신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숙할 때에 이루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완전히 동일하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몸의 모습을 보아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발가락과 손가락이 다르고 손가락과 손이 다르며, 기능과 능력도 여러 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지체는 성장되어져야 할 크기와 발휘해야 할 기능에 장차 완전히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완전해 질 때 다시 말해 이 “온전한 사람”에 이르게 될 때 어떤 성도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며, 모든 성도가 안전하게 보이게 될 것입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와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수와 완성과 충만을 알고 계시지만, 우리는 아무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께서만 자기 백성들을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온전한 사람이 이루어지게 될 때에는 몸의 어떤 지체도 빠짐이 없을 것이며, 어떤 지체도 은혜가 부족 됨이 없이 몸 전체가 조화를 이루어 충만하고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교회 속에 포함되어 있는 특권과 영광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에 적당히 속해 있기만 해도 교회에 영예를 주는 것으로 잘못 생각합니다. 그들은 이따금씩 교회에 출석만 해도 교회가 영광스럽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기가 주님의 충만을 성취하기 위하여 노력하는데 소요 되는 시간을 낭비라고 생각하여, 자신을 죄악에서 깨끗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이 충만함에 도달 할 수 있도록 거룩해져야 한다는 것과 은혜 가운데서 성장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목표는 “믿는 일에 하나가 되는 것”으로서 달성할 수 있습니다.

 

 

 


이 하나 되는 일은 4장 5절에서 말한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라는 구절과 조화가 됩니다. 이것은 나누어 질 수 없는 최소 단위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믿는 일에 하나 되는 일”에 도달 하게 될 때에 모두 그것을 확실하고 올바르게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온전함을 향하여 나아가기를 서둘러야만 합니다.

 

 

 

 

3. 어린아이가 되지 말라


우리는 지금까지 봉사의 기능인 사도, 선지자, 복음전하는 자, 목사, 교사의 직책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주께서 정하신 것이며, 그것들은 그리스도의 몸의 모든 지체들을 “온전한 사람”에 이르게 하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아보았고, 또한 그 목표를 성취하는 방법은 우리 모두가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는 것, 즉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충만한 지식에 이르는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로서 우리의 장래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의 “이제부터”라는 단어는 현재의 우리와 미래의 우리와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최종적인 목표에 우리의 시선을 집중하고 있어야 하지만 또 한편으로 우리의 현재의 위치와 우리의 출발점이 어디인가를 깨닫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어린아이에서부터 시작하지만 그것을 잊고 있을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사도가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라고 말한 것도 우리가 모두 어린아이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새 생활이라는 사실을 다른 방법으로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속적인 존재에서 교회에 속한 존재로 거듭나 갓 태어난 어린 아이로부터 시작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성장과 발전의 모든 원리를 함축하고 있는데, 우리는 어린아이로 시작하여 거기서부터 성장하고 발전하여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요일 2:12~13에서 요한은 “자녀들아, 청년들아, 아비들아” 라고 하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단계들을 거쳐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항상 옛날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보다 더 비참한 상태는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모든 것을 소유한 것으로 생각하고 영적으로 자라지 못하게 되어 일생 동안 시작하였던 상태, 즉 어린아이의 상태에서 끝나 버리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에게는 여러 가지 성향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불안전성인데, 그것은 물결에 밀려 요동하는 것과 같이 이리 저리 끊임없이 움직이고, 흔들리는 것을 말합니다. 어린아이는 금방 웃다가 금방 우는 것처럼 참으로 변덕스러우며, 참을성이 없어서 자기의 반응을 억제하지 못하며,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너무 지나치고, 때로는 사납게 반응을 나타내는데, 대체로 격렬하고 지나치게 행동하며 어떤 것은 아주 좋아하고 다른 것은 아주 싫어합니다. 두 번째로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속기 쉽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어린아이는 무식하기도 하지만 천성적으로 가르침을 받고 훈련 받기를 싫어하는 것이 사실이며 특히 어린아이들은 천천히 배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참을성이 없으며 빨리 진보하기를 원합니다.

 

 

 

 

네 번째로 어린아이들은 신기하고 변화 있고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새것에 대한 호기심이 대단하여 본질적인 가치와는 상관없이 새것을 주면 이전의 것은 잊어버리고 손에서 팽개쳐 버립니다. 다섯 번째는 어린 아이는 오락과 흥분을 좋아하여 부모라고 할지라도 그에게 속박당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당장에 자기의 편이 되어주고 자기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는 친척들을 좋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모든 어린아이와 같은 성향이 너무나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는 오랫동안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계속하여 온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모든 교훈의 풍조에 빌려 요동하는” 어린아이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4. 마귀의 궤계


우리는 영적인 어린 아이들 앞에 놓여 있는 여러 가지 위험들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은 마귀의 궤술에 너무나도 쉽게 속아 넘어갑니다. 그들은 대응할 만한 힘과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7:15)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그 모습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요한 일서도 여기저기 일어나고 있는 “적그리스도”와 거짓 교사에 대하여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가운데서도 특히 이 문제에 대하여 교회에게 주는 하나의 큰 경고를 대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에는 이것에 대한 권면과 경고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성도들을 삼키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때로는 간사한 유혹으로 때로는 궤변과 술수로, 또는 세상의 풍습과 교훈으로, 그 외에도 수많은 방법으로 “뱀이 하와를 속인 것과 같이” 성도들을 미혹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거짓 교훈을 배격하고 반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의 교훈을 배우고 훈련함으로서 진리의 전신 갑주로 무장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며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않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셔서 우리에게 영적 이해와 분별력을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세대에 역사하는 마귀의 모든 궤계를 물리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몸 된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우리를 그의 지체가 되는 무한한 영예를 누리게 해 주신 우리의 거룩한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5.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라


이제 사도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는 이 말씀으로 우리를 권고합니다. 여기서 “말하여”라는 번역은 옳은 번역이기는 하지만, 그 번역 보다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붙잡으라.”는 번역이 더 적합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더 이상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며 요동하지 말아야 하고, 그 밖에 어린아이와 같은 일을 하지 말아야 하며 오히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붙잡고 모든 일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한다는 것이 사도 바울이 하고자 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항상 문맥 안에서 생각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라.”, 그리고 “사랑 안에서 진리를 붙잡으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단지 선하고 착한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붙잡으라고 하는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심지가 견고해야 하며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진리를 붙잡고 진리 안에서 행동하여야 합니다. 진리를 붙잡는다는 것은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그것을 붙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적 권위에 속한 것들이며 무엇보다도 구원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진리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사상이나 철학을 들여와서 그것들을 강론하고 그 사상을 따르거나 그것을 진리로 오인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이런 애매한 것들로 인해 미혹 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이 진리를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질적인 것 안에서 연합하고, 중립적인 것들, 즉 본질이 아닌 확실성이 없는 것들 속에서 자유하고, 범사에 사랑을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6. 자라나다


15~16절 말씀은 4:1에서부터 시작된 교회 안에 있는 통일성에 관한 사도의 말씀의 결론이며 최고의 정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 말씀들을 고찰 할 때 우리는 전체의 문맥에 유의하면서 주의 깊게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어린아이가 되지 않아야 하며 자라야 할뿐 아니라 교회 안에서 함께 자라야 합니다. 그리하여 전체의 몸이 더욱 성숙하여져서 결국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이르러야 할 것입니다. 사도는 우리가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조화의 중요성에 대해 계속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쪽만 성장하고 다른 쪽은 발달하지 못하면 균형을 이루지 못하여 추한 모습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범사에” 즉 모든 점에서 균형 있게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성과 이해력에서뿐만 아니라 감성과 느낌과 감수성도 성장하고 발전해야하며, 일년 전보다 진리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문제에서의 곤란과 어려움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야 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어떤 과목을 공부하기 시작한 학생이 강의를 열심히 듣는데, 처음에는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다소 혼란스럽기까지 하여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만 계속하라는 충고를 받고 그렇게 합니다. 그는 앉아서 강의를 듣지만 아직 그다지 많이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몇 개월 후 갑자기 그는 자기가 그 과목을 이해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느끼며, 그때로부터 그 과목을 점점 더 분명하게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그 과목에 숙달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의 영광스러운 진리가 전보다 더 많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감동을 시키게 되는데, 그렇지 않고 냉랭한 상태 그대로 라면 우리는 심각한 결핍의 상태에서 정지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면 알수록 더욱더 그를 사랑하게 될 것이며, 주님에 대한 진리를 알면 알수록 그것은 더욱 우리를 깊이 감동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과 처신의 문제에 있어서도 같은 식으로 발전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 함께 자라고 성장해야 합니다.

 

 

 


할 수 있는 대로 같은 비율로 같은 성숙도로 성장해야 몸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완전한 형태를 나타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특히 머리와 몸의 각 지체가 충돌이 없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몸의 모든 지체가 언제나 주님께 기꺼이 순응할 수 있도록 발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각 지체는 아무렇게나 묶여 있는 것이 아니고 관절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듯이 여러 지체들이 함께 연결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도는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상합한다.”라는 다른 용어를 추가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의 위치를 고정하기 위해 밀착시킨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결국 “결합한다.”는 뜻으로 흔히 정신적 통일, 이해의 공감, 일치 등을 나타낼 때 상징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는 “함께 연락한다.”라는 순전히 기계적인 용어에서 그의 강조점을 “일치한다.” 상합한다.” “밀착한다.”는 정신적 개념으로 약간 이동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진정한 유기적 통일에 그리고 알맞게 기능을 발휘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리스도는 머리이시고 그 몸의 지체로서 우리는 연락하고 상합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모든 일이 어떻게 해서 생겨나며 어떻게 유지 되어야 하는가가 문제인데, 그 대답은 사도의 기록 중 가장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인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마디”라는 말은 사람의 관절을 연상케 하고, “” 또는 “연결하는 고리”는 단지 우리를 결합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생명과 에너지의 공급이 몸의 모든 지체로 흘러가게 되는 연결의 통로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 몸이 각 끈을 통하여 전달되는 공급에 의하여 연락하고 상합한다.”

 

 

 


그 다음 “공급한다.”라고 하는 용어를 살펴보면 그 말은 “풍성한 공급”, “과잉”이라는 뜻을 전달해 줍니다. 그러니 그것은 “풍성한 공급‘을 의미합니다. 즉 모든 것은 공급의 통로의 끈을 통해서 몸의 여러 지체에 효과적인 힘으로 도달하게 됩니다. 큰 지체이든 작은 지체이든 모든 지체는 각각 완전하게 충족됩니다. 모든 필요가 충족되므로 더 이상 결핍이 없으나, 각 지체는 동일하지 않고 똑 같지 않아 그의 수용력에 따라 충족되어집니다. 우리 각 사람은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가 주어짐으로 공급받는 양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몸 전체가 고르게 자라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지체는 머리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만이 공급의 근원입니다. 그러나 어떤 지체에 결함이 있다면, 전체의 발전이 방해를 받으며 완전하게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발전은 놀라운 상호관계의 결과이며 몸이 여러 지체 사이에 있는 유기적 연합의 결과입니다. 지체들은 모두 머리에 소속되어 있고 그로부터 생명의 에너지를 공급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든지 머리되시는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의 에너지를 공급받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의 특권입니다.

 

 

 


그러나 또한 몸의 지체로서의 우리의 책임에 대해서도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병들거나 죄를 범하거나 무기력한 다른 지체로 인하여 고통을 당할 수도 있으며 이것들은 필연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문제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인위적인 어떠한 방법으로 유지하려고 한다든지 부흥시키려고 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들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으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생명이 없기 때문에 그 교회는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으니 인위적인 어떠한 것으로 무엇을 이루려고 하는 시도는 생각조차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 엡4:17-19절(1)

 

 

 

 

4장17~19절: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1. 교리에 뿌리박은 실제 생활


우리는 여기서 이 서신의 새로운 대목을 대하게 됩니다. 바울은 이 4:17에서 그가 앞에서 가르친 모든 것에 대한 실제적인 작업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그러므로”라는 말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를 다른 말로 하자면 “전에 말한 모든 것에 비추어 볼 때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에베소서 전반부에서 배워왔던 그 말씀들을 언제나 적용해야 합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이해한 것을 적용하라고 강권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영광의 말씀을 삶에 적용한다면 승리하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데, 만일 아는 것에 대하여 적용하지 못하여 실패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많이 가진 자에게 많이 찾으실 것이라고 하셨고, 많이 아는 자에게 많은 책임을 물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안다는 것은 엄청난 책임이 따르는 것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언제나 교회 안이나 밖에서 동일하게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드리는 사람은 교회 밖에서도 마찬가지로 경건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본질적으로 하나이어야 하며 언제나 상호 연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때와 장소에 따라 옷을 갈아입듯이 여러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다른 어떤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이며, 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교회와 구속의 계획과 구원의 전 체계와,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하여 하늘에 있는 정사들과 권세들을 놀라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에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의 행실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 행실 자체가 아니라 이 방대한 체계의 차원에서 행실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악의 효력들을 무색케 하고 계시며 악한 마귀의 하는 일들을 멸하고 계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통일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실패하는 것은 어디엔가 잘못된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진리를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온 결과일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들로서 가져야 하는 관심은 단순히 선해지고 싶다든지, 어떤 죄악들을 제거하고 그것으로만 만족하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해지고 싶고, 심지어 승리하고 싶어 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은 자기중심적입니다.

 

 

 


우리의 관심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온전하고 완벽하게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라야 합니다. 내게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실패한다든지, 내가 삶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향하여 실패하고 있으며, “교회”에 대하여 실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실패하고 있다는 것, 내가 하나님의 위대한 그리고 놀라운 목적을 실패하고 있다는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과 그의 영광스러운 목적을 끌어내리고 있고, 교회가 끌어 내려뜨림을 당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내리움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백성들을 온전하고 완전하고 전체적인 존재로 만드시고자 하여 “죽으셨는데”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실패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비추어서 생각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광을 이 세상에서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께서 계시지 않는 삶의 허망함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그가 전에 처하여 있던 상태보다 조금 더 도덕적인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든지, 교회에 참석하기로 결심한 사람이라든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이것저것을 행하기로 결심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은 그가 거듭났다는 것입니다. 그가 새로운 본성을 받았으며,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 구절에서 그것을 적용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라고 말하는 사도 바울은 개인적인 의견을 표현할 때에는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내가 이것에 대하여는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주안에서 증거”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개인적인 말이 아니라 사도적 권위, 즉 신적인 권위로서 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는 무엇을 증거하고 있으며, 그들에게 이렇게 엄숙한 방식으로 명령하는 것은 “다른 이방인들이 행하는 바와 같이 행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시민권이 하늘에 있기 때문에 그들의 삶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이라는 말과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거듭나 변화가 시작된 시점을 말합니다. 우리가 거듭나는 순간부터 옛 것들은 지나갔고 새것을 맞이하였으니, 이제부터 성도들은 이방인들과 전혀 다른 방식의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더 이상 행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마음의 허망함으로”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는데, 사도가 여기서 중생하지 못한 사람의 삶과 언제나 세상에 살고 있는 이교도들의 삶에 대한 무서운 묘사를 시작하는 어구입니다.

 

 

 

 

그들은 허물과 죄로 죽어 있고, 언제나 죽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세상의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자를 따르며 육체의 욕심에 따라 사는 진노의 자녀로 영원한 미래에 대한 목적이나 목표가 전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영혼은 텅 비어 있어서 마음이 굳어지고, 그 마음의 눈이 멀어 총명이 없고, 무지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자기의 노예들을 너무나도 바쁘게 하여 생각할 시간을 갖지 못하게 합니다. 그들이 멈추어 서서 생각할 때 사단은 그들이 올바르고 정직하게 생각하는 것을 방해하므로 인해 그들은 그런 삶이 옳은 삶 인줄 알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현대인들이 사는 것의 모습을 보십시오. 텔레비전 인생, 시네마 인생, 마시고 뒹굴고 하는 인생, 낮고 천한 모든 사람의 삶, 찬란하게 비치는 조명들, 놀랍고 기이한 모습들, 그러나 그 안에 무엇이 있습니까? 그것이 그들의 인생에 관해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거기에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무엇이 있습니까? 그들은 때가 차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면치 못하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그러한 유의 정신구조에 의하여 영향을 받아서도 안 되고, 그러한 사고방식의 영향을 받아서도 안 되며, 그와 같은 정신 구조의 감화를 받아서도 안 된다.” 너희는 거듭난 사람으로서 다시 그러한 데로 되돌아가서 그러한 유의 삶을 갈망하지 말고, 세상이 주는 흥미로운 것에 관심을 주지 마라. 그러한 것은 생각만 하여도 전적으로 텅 빈 것이고, 무모한 것이고, 목적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그 마음의 허망함으로 행하며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 있습니다.” 가련하고 어둡고 미련한 사람들이 아무리 명석한 척하나, 그들의 논리나 토론이나 그들의 논문이나 그들이 써내는 책들이 어떠하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얼마나 명석합니까? 그러나 그것은 물거품이 반짝거림과 같은 것입니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오셔서 그들의 어두움을 제거시키시고 그리하여 그들의 눈이 열려지기를 위해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것과 세상과 세상이 자랑하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우리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성경: 엡4:17-19절(2)

 

 

 

 

4장17~19절: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3.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이제 우리는 사도가 말하는 두 번째 요점인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라는 말씀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점이 “다른 이방인들”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 있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리 떠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된다면 이 말씀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진술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란 생물학적인 그런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선한 삶과 경건한 삶과 덕행 있는 삶으로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생명을 가리키는 다른 말 “조에”라는 고차원적인 말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 말은 진정으로 하나님 자신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한 원리로서의 신적인 생명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리 떠나 있도다.”라고 말할 때, 그가 가리키는 것은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생명, 즉 하나님께서 자기를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생명의 원리에서 멀리 떠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1:4) 라고 증거했습니다. 거기서 사도 베드로는 정확히 자기의 방식을 따라서 사도 바울이 여기서 “하나님의 생명”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과 똑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죄 가운데 있는 비 그리스도인들의 비극은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지 않고 하나님의 생명 밖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지 못합니다.

 

 

 


생명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의 상실로 인하여 광야와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하여 참된 생명에서 떠나, 그의 존재의 원천에서 떠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생물학적인 생명은 참 생명이 아니라 단순한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저 안에서 생명을 가지고 살아 갈 수가 없이 그저 동물들과 같이 존재하는 것입니다.(진화론을 주장하는 자들이 스스로 사람의 생명을 다른 동물로 전락시킨 것도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자들에게는 잘 어울린다.)

 

 

 


그들은 낙원에 있지 못하고 광야에서 쉼이 없고 고통만 있는 만족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그 안에 그가 무엇인가 더 큰 것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는 어렴풋한 기억을 가지고 있고, 그 기억을 제거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의 불편함을 의식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생명에서는 떠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상을 만들고 자신들의 신상을 만들고 허망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사람들에게 문제 되는 고통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만일 그들이 이러한 것들을 알 수 있다면, 그들은 다른 모든 것에서 돌아서서 자신들의 시간을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묵상하는데 온 시간을 드릴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욱더 알기 위하여 그들의 온전한 시간을 드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하니 그들은 무지합니다. 더 나아가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품을 모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속성들을 모릅니다. 그렇지만 거기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경륜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시간을 시작하게 하신 것 같이 끝나게 하신다는 것을 모릅니다. 더욱더 심각한 것은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원수들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자들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셨다는 사실을 모른다는데 있습니다. 세상은 완전하게 창조를 받았으나 마귀가 와서 그것을 어지럽히고 손괴시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마귀와 그 마귀에게 속한 모든 자들을 모두 불 못에 던져버리시기로 작정하셨고, 그 날이 오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시는 면전에서 완전하게 멸망을 받을 것이지만 여전히 그들은 그러한 것들을 모른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복음의 임무는 우리의 눈을 열어 주는 것이며, “깨어라!”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고의 소리를 발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를 알리고 하나님을 알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즐거워 누릴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겨진 임무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말해 주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이 복음 전도입니다.

 

 

 

 

4. 이교 세계의 죄


우리는 사도가 제시하고 있는 불경건한 삶의 묘사에 대하여 계속해서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 묘사는 어찌나 날카로운지 경고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의 관심은 그의 편지를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 에베소 사람들이 이교도적인 삶의 방식에서 해방되었으니 더 이상 그러한 유의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건 어떤 면에서 그들의 삶의 방식을 피하는, 즉 말이 무엇에 놀라면 펄쩍 뛰는 것과 같이 그러한 것을 보고는 펄쩍 뛰면서 놀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다루고 있는 큰 제목입니다.

 

 

 

 

성도들이 누리고 있는 영광스러운 구원은 하나님의 심판에 속해 있는 사람들을 건져내어서 전적으로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도록 하기 때문에, 바울 자신이 누리고 있는 이 구원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를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하고 싶어 합니다. 이제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속성들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가치하고 쓸모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지함은 사람이 타락함과 죄로 인하여 사람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지함이라고 말하는 그것을 단순한 지식적인 앎만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이지적인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정보를 제공하여 줌으로써 얻어질 수 있는 지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그러한 것을 문제 삼고 있지 않습니다. 이 무지함은 그들 “안에” 있는데 그것은 그러한 사람들을 사로잡고 그들의 전체적인 삶과 사고방식의 전 체계를 주름잡고 있는 정복할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사도는 그들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것은 그들 안에 있는 무지함과 마음의 굳어짐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발바닥의 굳은살처럼 마음이 그렇게 굳어져서 무감각해졌다는 뜻입니다. 처음의 사람 아담과 하와에게 문제 되었던 것은 그들의 머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들의 마음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마귀는 그 점을 매우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귀가 그들 앞에 가져다 놓은 것은 “하나님께서 너희더러 동산의 모든 나무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하는 것이었습니다.

 

 

 


마귀는 이지의 영역을 떠나서 감정의 영역으로 침투해 들어간 것입니다. 마귀는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귀는 이것이 인간이 타락하기 쉬운 요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방식들을 불순종하는 것은 언제나 마음의 굳어짐을 가져온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행하는 모습을 보고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일을 계속할 때마다 우리는 그 전보다 양심의 고통을 덜 느끼게 되며 감각이 무뎌져, 처음 죄를 지을 때의 그 고뇌가 다음에는 위기감으로, 그리고 그 다음에는 후회감과 반성하는 일로, 그리고 난 뒤에는 수치감으로, 그러나 같은 죄를 계속하여 범하게 되면 수치감은 점점 줄어들고 후회하는 것도 점점 옅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음이 굳어지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이러한 삶이 지속된다면 우리의 굳어진 생명은 무감각하게 되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러한 자리에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되며, 그러한 삶을 지향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리고 있는 구원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를 그들로 하여금 알게 해야 합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