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사 서

[스크랩] 역대기 강해

공 상희 2009. 5. 6. 14:03

 

 

 

 

 

 

 

역대기 강해

 

 

우리교회 이근호 목사

 

 

 

 

 

 

 

 

 

 

2009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역대기 <제1강>

 

역대상 1장 봅시다. 역대상 1장부터 아담, 셋, 에노스, 게난 사람 이름이 나와 있지요. 사람 이름이 1장, 2장, 3장, 4장, 5장, 6장 계속 나갑니다. 편집증을 갖고 있는, 정신적 환자가 아닌 이상 이걸 하나하나 볼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별 내용이 없거든요. 사람 이름만 쭉 돼있지. 나가다가 무슨 이야기 거리 없는가?


저는 역대상 앞부분을 보면서 아나운서들이 발음 연습할 때 ‘이것 보면 적당하겠다’ 생각이 들었어요. 이름들이 간단한듯 상당히 난해한데 이래 쭉 나가다가 역대상 드디어 12장에 들어가서 흥미를 끄는 사건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1장부터 11장까지 이야기가 왜 있느냐? 왜 있어야 되느냐? ‘이것 빼고 이야기만 하면 될 텐데 이게 왜 있느냐’ 하는 그런 의문점이 들 거예요. 그래서 이걸 성경이 문자로 돼있으니까 상당히 수평적으로 보이는데 이걸 제가 그림으로 수직적으로 그려보겠습니다.


다윗이란 사람이 여기 있다면, 다윗 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다윗 사이에 [다윗 언약]이라는 게 수립이 됩니다. 이 역대상 1장 1절부터, 아담부터 나오는 이야기는 아담부터 해서 족보들이 어디로 치고 올라가느냐 하면, 하나의 거대한 산을 이루는데 이게 수평적이 아니라 수직적으로 점점점 차고 올라옵니다.


처음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대상 족보를 쭉 하다보면 길이 오직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돼요. 뭐냐 하면, 유다 족속을 통해서 이 다윗이 될 때에 아담부터 시작해서 나오다가 유다지파로 해서 뭔가 합세를 하면서 유다지파에서 나온 다윗을 설명하면서 안 떨어지지요. 단절되지 않았지요.


아담에서 유다지파로, 거기 중간에 여러 가지 이스라엘 있습니다만 이스라엘은 여러분 알다시피 열두 갈래 아닙니까. 열두 지파잖아요. 열두 지파 가운데 유다 지파로 모이면서 유다 지파를 통해서 하다보면 어떤 인물을 남기는데, 다윗이란 인물이 나온다 이 말이죠. 다윗과 다윗 사이에 어디 가느냐? 솔로몬은 이쪽으로 더 올라가는 게 아닙니다. 솔로몬은 내리막길이에요. 다윗 위에서 안 보이니까 점선으로 하나님과의 유일한 관계가 성립됩니다. 이것을 [다윗 언약]이라 한다 이 말이죠.


다윗 언약이 나올 때 지금 여기 아담부터 나오는 사람이 전부다 ‘죽은 사람’이에요. 사람은 살다가 구십도 못 돼서 죽으니까 다 죽은 사람입니다. 죽은 사람이 만약에 이런 노선으로 뽑아내려면 만약 이 사람들이 안 죽고 살아있다면, 베냐민 지파, 스블론 지파, 여러 지파가 있으면 만약에 유다지파로 몰아오면 이 사람들이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굉장히 기분 나쁘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 십자가마을로 모였는데 다 같은 자존심도 있고, 금지도 있고, ‘너만 복음 아나? 나도 안다.’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김대식 이라는 사람을 통해서 이렇게 몰아넣을 때 우리는 뭐가 됩니까? 다 같은 인간이고, 다 같은 복음 안다는데 왜 한쪽으로 김 씨 집안으로 몰아넣는다 말이에요. 집안이 무슨 김 씨입니까? 김해 김씨. 김대식 나오기 전에 김해 김씨로 몰아넣는다. 그러면 이 씨는 뭐고, 최 씨는 뭐냐? 죽은 사람이에요. 다윗 빼놓고 다 죽었다는 거예요.


다윗 빼놓고 다 죽었다는 말을 달리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언약이 없거든 산 사람 취급 받을 생각하지 마라. 그러면 죽을 인간을 왜 태어나게 했는가? 바로 그걸 설명한 거예요. 다윗만 인간이고 나머지는 인간이 아니라면, 그럼 아담부터 이건 왜 있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단절되지 않은 인류 전체가 뭐가 있느냐 하면, [중심점]이 있다는 겁니다. 중심점을 모르면 그거는 구원은 안 되지요. 구원이 중심점으로 구원되니까.


구원될 때만 중심점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구원되기 이전부터 우리가 그냥 사업한다든지, 농사짓는다든지, 편하게 교사로 일한다든지 우리가 일상적인 나만의 일, 우리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매진할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중심점은 따로 노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한 사십 살다 교통사고 나서 죽었다. 우리 보통은 어떤 사람이 태어나서 사십이니까 몇 년생이에요? 1969년 태어나서 어느 학교 나왔는데 회사에 잘 다니다가 출근길에 그만 차에 치어 죽었다. 그게 우리 역사잖아요. 그게 우리 역사라면, 역대기는 그걸 뭐로 보느냐 하면, ‘야 이 인간 죽은 것이 다윗하고는 무슨 관계있지’ 하고 죽은 인간 뽑아내서 재배치하는 것, 이게 역대상하입니다. 강의 끝냅시다. 끝났습니다.


만약에 그 사십 넘은 사람이 차에 치어 죽었기 망정이지 살아있을 때 그런 소리하면 기분 되게 나쁩니다. 이래 모여 있는데 하나님께서 김대식 성도님 중심으로 몰아가버리고 다른 사람은 존재가치가 뭐냐 하면, ‘그 사람이 농사지었다’ 이건 가치 없어요. ‘너는 김대식 성도한테 어떤 족보가 되느냐?’ 그걸 따지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목사님, 집사님 소용없어요. 하나님이 지적한 사람과 어떤 관계가 있느냐를 따지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만약에 살아있을 때 이런 이야기를 툭 던져버리면 우리는 대번에 입에서 자존심 섞인 말이 나오지요. ‘하나님, 저는 왜 중심이 안 됩니까?’ 분명히 이래 나올 거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이야기도 하나님께서 담아놨어요. 쉽게 예를 들어서 자꾸 이야기하는 걸 용납해주시기 바랍니다.


‘왜 김해 김 씨, 김대식이냐’라는 것에 대해서 반발하게 될 때 그 반발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잊지 않고 기록해놨습니다. ‘그들은 악의 길을 갔습니다.’ 이렇게요. 전혀 본인은 악의 길을 간 게 아니고, ‘왜 하나님께서는 한쪽만 편애하고 나는 그쪽에 엮여져야 구원되느냐’라고    따지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는 여로보암의 길을 갔다. 그는 악한 길을 갔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악한 인간을 숲을 헤치고 기어이 김해 김 씨를 통해서 김대식 언약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나오더라 이 말이죠. 죽고 난 뒤에. 아담은 이미 죽었어요. 죽고 난 뒤에 마음대로 주무르지요.


회 먹으러 가보세요. 오징어 회 처먹고 그 다음에 마음대로 골라 먹잖아요. 살아있는 오징어 건드리면 화냅니다. 한데 다 죽여 버리고 산산조각 내놓고 먹으니까 아무 소리 못하잖아요. 문제는 뭐냐? 중심점. 따라 해보세요. 중심점. 중심점을 찾아내면 그만이에요. 모든 인류의 존재에 대한 중심점. 중심점인데 특징은 뭐냐? 다윗 빼놓고는 중심점이라고 껍죽대며 나서지 마라 이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부르는 게 있어요. ‘다윗은 중심점 돼서 좋겠다’ 하는데 여러분 아시다시피 다윗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죽은 자입니다. 그러니까 중심점 되는 다윗이 죽은 자고, 제가 아까 다윗 빼놓고 다 죽은 자라 했습니다. 그 말 이어보면 모든 사람이 다윗처럼 다 죽은 자라는 그런 간단한 논리가 됩니다. 머리 나쁜 사람 이해 못하지요, 지금.


다시 이야기할게요. 다윗은 죽은 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죽은 자에요. 부활이 안 돼요. 이건 사도행전 2장에 나옵니다. 다윗이 죽어서 무덤 그대로 있어요. 다윗은 죽은 자인데 제가 아까 이야기하기를 역대기에서는 모든 사람은 다윗 중심으로 모아진다 했습니다. 다윗은 죽은 자고, 다른 인간은 다윗에게 모아지고,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다 죽은 자가 되지요.


그것을 가지고 뭐냐? 이 밑에 내려가면서 ‘다윗의 묘실’ 하나의 개인 선영의 무덤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역대기뿐입니다. 또는 열왕기.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역사는 산 자의 역사가 아닙니다. 소위 살았다고 우기는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어떤 조치가 가해졌기에 죽으면서도 다윗과 연관을 맺으면서 하나둘씩 죽어 가느냐? 그들이 연관과 맺어질 때 죽은 다윗을 언약으로 살려낸다면 다윗과 함께 관련된 모든 사람은 다윗의 언약과 더불어서 함께 폭발하듯이 이 사람들은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역대기는 뭐냐? 구약에 있어서 미리 당겨본 신약 성경이에요. 구약에 있는 신약성경. 제가 방금 설명한 이걸 문자적으로 수평적으로 깔아버리니까 역대상 보면서 앞에 열왕기상하 나오거든요. 열왕기상하 의미나 역대상하 의미나 뭐 좀 틀린 것 같이 보이는데 읽어보니 앞에는 시시한 사람 명단 나오고, 리스트 나오고, 리스트 쭉 빼다보니까 그 이야기나 열왕기 이야기나 되풀이 한 것뿐이다. 넘어가자.


그래서 성경을 하루에 정해서 차근차근 읽는 사람은 역대상 만나면 반갑습니다. 후다닥 읽어버리고 하루 숙제 끝났다. 그 후다닥 읽어버리는 역대상, 역대하를 이제 십자가마을 삼일 동안, 열 시간 강의를 통해서 낱낱이 그 담긴 의미를 우리가 해부해봅시다.


그렇다면 방금 제가 그림을 그려놨는데 이 그림이 과연, 그림 하나 그려버리면 오르막길이고, 내리막길로 보면, 교재를 봅시다. 교재 제일 마지막에 도표가 나와 있죠. 사울, 다윗, 솔로몬부터 해서 이거는 머리 부분이고, 솔로몬 이후 밑에는 가슴팍 부분, 팔, 다리가 있는 사람 모양 같죠. 두 개가 남북으로 갈라진 그런 이야기가 쭉 나옵니다.


이렇게 그림을 그려줘야 르호보암 시대는 여로보암 하고 같은 동네고, 아비야는 누구 같으며, 아사는 바아사, 이렇게 두 나라가 깨어지고 깨어지면서도 떨어질 수 없이 뭔가 몸체에 붙어있는 사람 모양 같아요. 계속해서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이라는 한 몸통 안에서 팔, 다리 양쪽에는 오른 편, 왼 편처럼 갈라져서 나갑니다. 마지막 다음 페이지에 보면 드디어 북쪽 나라부터 망하고, 남쪽 나라 길지요. 한쪽 팔은 짧고, 한쪽 팔은 긴 팔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 발판이 나오지요. 발판이 회복기인데.


결국 그림을 처음 보고 끝을 보니까 여러분 뭘 느껴집니까? 이스라엘은 멸망하기 위해서 있는 나라구나. 이스라엘은 어떤 나라냐? 멸망하기 위해서 있는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은 선택받았거든요. 선택받은 사람들, 선택받은 나라가 이 지상에서 마음껏 다른 우주에 보여줄 수 있는 그 특별한 임무가 뭐냐? ‘나, 멸망한데이.’ 이겁니다. 이것은 바로 오늘날 성도의 정신은 뭐냐? 성도가 평생토록 다른 사람에게 증거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없어요. ‘나, 죽는다.’


세상에 어느 인간이 ‘자기 죽는다’는 그걸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할 사람 누가 있습니까? 만약에 자기 죽는다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면, 죽음을 아주 순하게 현실로 받아들일 거예요. ‘나 죽는다’가 아침에 일어날 때 무슨 비타민 한 알 먹습니까? 먹듯이 죽는다는 약을 늘 먹어보면, 비타민 씨를 아침에 먹으면 활기가 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처럼 이렇게 나 죽는다는 것, 이것을 늘 약 먹듯이 털어먹고 하루 사는 사람은 오직 성도들밖에 없습니다.


교인들은 아니냐? 교인들은 아니죠. 교인들은 살려고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불신자니까. 조심해야 됩니다. 교인들이 아니고 성도들. 목사가 설교할 때 약을 털어먹어야 돼요. ‘나 설교하다가 죽습니다’라고 먹어줘야 죽음의 설교가 나와요. ‘이 설교 듣고 난 밥 먹고 삽니다.’ 그거는 쥐약 먹은 거예요. 이상하게 딴 소리가 나와요. 그 사람은 구약을 모르는 사람이에요. 방금 봤던 사람 형체 같은 도표를 모르는 사람이에요.


이스라엘, 그들은 뭐였습니까? 하나님 백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아들이라고 칭했던 사람입니다. 출애굽기 4장에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백성? ‘오냐, 훌륭하다. 오냐, 대단하다. 네 할 일 하라.’ ‘옛 썰.’ 할 일 뭡니까? 멸망당하는 거예요.


‘그럼 목사님, 다 멸망당합니까?’ 다 멸망당합니다. 예레미야는?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이사야도 다 멸망당합니다. 그러면 성도는 없습니까? 멸망당하는 자가 성도라니까요. 성도의 기쁨은 뭐냐? 즐거이 멸망당해야 되기 때문에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즐거이 외칠 수 있는 사람은 선지자밖에 없어요. 눈에 뵈는 게 없어요.


히브리서 11장 보세요. 톱으로 켜는 것과 광야에 유리하는 사람이 누구에요? 바로의 공주의 아들 되는 것을 거부하고 고난 받기를 즐겨했던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그게 바로 모세나 선지자였잖아요. 선지자는 뭐냐 하면, 자기 처지를 생각한 것이 아니고, 선지자는 다윗을 통한 언약과 내가 출생한 그 의미와 어떤 연관성이 있느냐를 확실하게 알기 때문에 자신만만하게 자기는 죽는다는 것을 기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언약의 나라는 바로 다윗을 통해서 새로운 나라가 이미 만반의 준비돼있음을 지상에서 나그네 삶을 살면서 증거하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지요. 쫓겨나고 난 뒤에 두 번 다시 근처에도 오지 말라고 아예 파수꾼을 세웠는데 그 사람들은 에덴동산을 지키기보다는 거기 성경에 보면 생명나무 가는 길을 지킨다. 그래서 생명나무의 가치가 타락한 인간에 의해서 피해 받지 않도록 그 가치를 영원토록 유지하기 위한 조치가 바로 생명나무 가는 길을 차단하는 하나님의 천사의 역할입니다. 생명나무에 오지 말라 했거든요. 왜냐하면 너희는 처음 만든 그때 그 인간이 아니다. 아니니까 이젠 오지 말고 바로 생명나무에 대해서는 관계없는 겁니다.


그래 놓고 하나님께선 계속해서사람을 이 땅에 번성하게 했지요. 그러면 그 번성한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은 뭐냐 하면, 한 사람, 한 사람에 뒤에다 붙이는 게 있지요. 생명나무 근처도 오지 마라. 이렇게 뿌리는 것과 똑같아요. 아담보고 그런 이야기했다는 말은 나머지 모든 사람은 아담의 후손이거든요. 아담에게 주어진 운명은 동일하게 주어지게 돼있습니다. 못 온다. 오지 마라. 못 온다. 오지 마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을 거기서 만들어냈어요. 그리고 그들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들으라 이스라엘이여.’ 하면서 하나님이 이런 소식을 전해버렸어요. 이것이 무슨 의미냐 하면, ‘들으라’ 하는 게 어떤 사람은 명령으로 보는데 성경에는 명령이란 게 없습니다. 성경은 명령이라 하지 않고 뭐냐? ‘규범’이라 하는 겁니다. 이거 어제 오후 설교했는데 그 설교 들은 사람은 알겠지요.


‘명령’이라 하는 것은 상대를 중립 위치에 놓고, 아직까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를 확정짓지 않는 미확정 상태라 간주해서 ‘네가 명령대로 순종하면 복 받고,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 받는다’ 이렇게 할 경우에 명령이고, ‘규범’이라 하는 것은 이미 어떤 말을 줄 때 ‘너는 이런 인간이야’라는 것을 확정지은 채 알려주는 방식의 말을 할 때 그게 규범이라 하는 겁니다. 하나의 서울대학생 같으면 서울대학교 배지 같은 거예요.


이거 뭐예요? ‘네 신분이야.’ 배지인데 그 배지가 뭐냐? ‘들으라 이스라엘이여’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는 ‘들으라’ 했으니까 오직 처음도 그렇고 마지막 요한계시록까지 ‘들을 귀 있는 자’를 골라내는 하나님의 능력의 살아있는 말씀이 성경책입니다.


만약에 같은 문자로 활자화되어도 이것이 명령으로 듣는 사람은 애초부터 이스라엘 아닌 사람이고, 이걸 규범적으로 듣는 사람은 처음부터 그 사람은 택한 백성, 성도가 되는 겁니다. ‘아하, 나구나’라고 알아듣는 것과 ‘내가 새삼스럽게 어쩌란 말입니까’ 쪽으로 해버리면 이건 하나의 명령이죠. 이거는 자기 주제파악이 안 된 사람.


그래서 불교라든지 이슬람교에서는 많은 오해를 해요. 심지어 중세 신학자도 오해를 하는데요. 불교는 말할 것도 없지요. 불교 중들은 자기가 인간인 줄 알고 있습니다. 아까 사우나 가니까 중을 만났어요. 머리 깎은 사람. ‘목사님은 왜 중을 만납니까?’ 이렇게 하는데 여러분도 사실은 저보다 자주 만나지만 여러분은 관심이 없기 때문에 그냥 뭐가 스쳐지나갔다고 알지만, 저는 항상 믿음이 좋아서 그런지 몰라도 구별됩니다. ‘저 인간이 이스라엘 사람일까?’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일까’ 하는 것은 ‘들으라 이스라엘이여’ 말 전해보면 듣는 사람이 ‘뭐야? 뭔데? 어쩌라고?’ 우리는 ‘들으라 단군 자손이여’ 이 이야기해달라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왜 등장하는데. 엉뚱한 소리하고 있네.’ 경제가 어려운데 ‘들으라 이스라엘’하고 경제하고 무슨 관계가 있는데 이래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들으라 이스라엘이여’ 할 때 이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냐 하면, 이스라엘이 없는 나라에요. 없는 나라에서 새로 생긴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여’ 할 때 이스라엘 나라, 이 세상에 없어요. ‘아니, 야곱의 후손 열두 지파가 이스라엘이지 않습니까?’ 눈 보기에 이스라엘이죠. 그걸 만약에 이스라엘이라면, 열두 지파 이스라엘 만들고 난 뒤에 역사 끝입니다. 예수님이고 세례 요한이고 올 필요 없어요. ‘어이, 가져가. 천당으로’ 가면 되는 겁니다.


여기에서 열두 지파에서 이스라엘 형성되는데 아담에서 열두 지파 될 때 이게 수평적 족보라 하고, 그 앞에 나오는 단편 족보, 수평 족보 같은 이야기에요. 여기서 유다로 올라가는 걸 수직적, 라이너니까 직선적 ‘깊이 족보’라 하고. 깊이 족보고 넓이 족보에요. 족보 보면 그리 돼있어요. 


삼각주 있지요. 쭉 모아서 하나로 모아진다. 처음에는 모든 인간은 연관성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넓게 보여주다가 갑자기 속도를 내면서 하수구에 물이 빠지는 것처럼 획 하고 중간에 다윗 쪽으로 몰아가버려요. 족보에 증거가 나온다고요. 미리 한번 볼까요? 미리 보면 안 된다. 중요한 건 나중에 봅시다.


어쨌든 지금 이스라엘 나라가 여기서 성립되었으면, ‘들으라 이스라엘이여’에서 이 사람들은 그냥 ‘어이, 가자 천당으로’ 가면 돼요. 이 이스라엘이, 이 이스라엘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유다? 아니지, 아니지. 그러면 다윗? 아니지. 그럼 이스라엘? 이스라엘이 이 세상에 없어요. 이스라엘은 위에서 내려가야 됩니다. 이스라엘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거든요. 그런데 이 아들은 무슨 아들이냐 하면, 이 땅에서 어떤 아들? 이스라엘 운명이 뭐라 했습니까? 이스라엘은 뭘 할 것이다? 멸망. 야, 다 잊어버렸다. 큰 일 났다. 이번 강의 힘들게 됐다.


이스라엘은 멸망이죠. 마태복음 3장에서 세례 하면서 뭐라고 합니까?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아들이 따로 나온다고. 아들이 따로 나오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어떤 이스라엘이냐 하면, 이거는 집단이면서도 집단이 아니고, 하나님은 아들로 본다니까. ‘아들들’이 아니고 ‘아들’로 봐요.


이것도 모르고 어떤 유명 신학자는 왜 하나님은 자꾸 아들이라 하느냐? 딸은 인간이 아니냐 하는데. 지금 이스라엘에 여자가 있더라도 남자가 있더라도 남녀를 묻는 게 아니고, 통째로 장차오실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죽는 역할을 함으로써 우리는 애초부터 죽어야 되고, 진짜 산 아들은 하늘에서 내려와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자 역할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역사가 있는 겁니다.


이 말대로 이스라엘 같으면 예수님 십자가 필요 없어요. 신학교 교수한테 물어보세요. 이렇게 질문해보세요. ‘교수님 질문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때 아브라함이 예수 아닙니까?’ 물어보세요. ‘아브라함이 오고 난 뒤에 바로 오면 되는데 아브라함 아니다. 이삭도 아니다. 왜 자꾸 질질 끕니까? 한꺼번에 해치워버리고 택한 백성 끌고 가면 되는데 왜 예수님께서 하는 겁니까?’ 만약에 아브라함에게 의미를 두고 아브라함의 선행, 이삭의 공로, 야곱의 충성 거기에 의미를 두는 사람 같으면 답변 못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역할이 있어요. ‘사람은 원래 죽어야 마땅하다.’ 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죽음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최초의 인간이 죽었던 아담과 하와의 죽음의 정보가 섞여서 내려와요. 섞여서 내려오기 때문에 성도는 뭐냐? 죽는 이유를 아는 사람이 성도고, 불신자는 뭐냐? 지가 죽어가면서도 왜 죽는지를 모르는 사람이에요.


성도는 죽으면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을 내 뱉으면서 죽어가요. 성도는 똥 덩어리인데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포함된 똥 덩어리에요. 죄에요. 지휘자는 뭐냐? 예수님이 지휘자에요. 첼로건 바이올린 전부다 개다. 짖으면 돼. 강마에가 그런 소리 안 했습니까?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써 머리를 증거하는 거예요. 머리 없는 지체는 소용없어요. 지체만 덜렁, 지체 누가 안 알아줍니다. ‘나는 머리 있다’라는 말하기 위해서 지체 있지, ‘나 지체 있다’ 이야기하기 위해서 지체 있는 게 아닙니다.


교회라 하는 건 간단합니다. ‘우리는 죽어도 괜찮데이.’ 그 이야기하려는 게 교회에요. 살려는 사람이 아니고, ‘우리는 구태여 살 필요 없어’라는 이야기하는 곳이 교회지요. 스데반 집사 같은 경우야 대표적인 인물이죠. 설교해놓고 강사비 어디 있어요. 돌멩이, 짱돌 날아왔는데. 그리고 하는 말이 ‘주여, 저들이 하는 짓을 모릅니다. 용서해달라’고 했습니다.


참 이스라엘은 바로 신약에 와서 신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앞 당겨서 신약의 역할을 모델케이스로써 다윗이 예수님 역할을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아담부터 다윗이 정상이라면 이 뒷부분, 정상에서 내려오는 하산하는 것까지 다 알아야 역대기가 쉬워질 것 아니겠습니까?’라고 물으신다면 ‘딩동댕’ 맞는 이야기에요. 그래서 역대기는 뭐냐 하면, 역대기 제일 마지막에 보면 뭐라고 돼 있느냐? 첫 시간부터 다 떼어버립시다. 그래야 마음 든든하게 있지. 약 오르잖아요. 감질나잖아요.


역대상 1장 1절 했습니다. 이젠 마지막 봅니다. 역대하 36장 21절.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22절에 보면,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이래 돼있지요.


방금 읽었던 36장 22절 그걸 기억하면서 에스라 1장 1절 보세요. 제가 읽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이래 돼있지요.


그러니까 역대하가 역대하로 끝난 줄 알았더니만 역대하가 에스라까지 계속 이어져간다. 말 하나, 문자 하나 안 틀려요. 똑같아요. 에스라 했으니까 에스라 1장 끝나면 2장 계속 나오잖아요. 에스라 끝나니까 뒤에 느헤미야까지 나오는데. 결국은 뭐냐 하면, 에스라, 느헤미야가 끝난 입장에서 처음부터 아담을 다시 한번 생각한 책이 역대기가 되는 거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역사를 다 지켜보고 멸망할 건 다 멸망하고 그리고 에스라, 느헤미야에 나오는 에스라 부흥운동, 느헤미야 성전신축운동 많이 신앙적으로 부흥했는데, 제가 물어보겠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됐습니까? 안 망했습니까? 그래도 망하죠. 그러니까 이건 뭐냐 하면, 역시 망하는 거구나. 그런데 이것이 망하면 망할수록 다윗이란 존재가치가 뚜렷하게 더욱더 부각이 된다는 점이 즐거운 점입니다.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건강할 때 주의를 하는 것 같지요. 그 사람은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에 해당돼요. 왜? 여러분, 아플 때 주의되든가요? 우리 권사님 만날 아프신데. 아플 때 봉사하고 싶어도 몸이 안 움직여지지요. 겨울 되면 얼마나 괴롭습니까?


그러면 아플 때 주의를 못할 때 구원은 누가 시킵니까? 주님이 하시잖아요. 자기 솜씨께나 안 부릴 때, 교회 하는 것도 없을 때 그때 공짜가 더욱더 공짜로써 기분 좋게 와 닿는 거예요. 이게 교회에 도움 되는 이야기인지 아닌지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사람들이 건강할 때 일한다고 자꾸 오해를 하는데 건강한 사람도 결국 늙습니다. 늙는다는 게 아프다는 뜻이에요. 결국 아플 때 옛날처럼 주의 일을 못하면 그 사람 지옥 가야 됩니까? 이스라엘 사람이 역대기를 쓰는 사람과 보는 사람 모두가 그들은 지금 자기가 주의 일 하고 싶어도 나라도 없고, 성전도 깨지고 뭐 될만한 게 없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구원받는다면 도대체 왜 우리가 구원받느냐 이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는 게 없는데. 그 사람이 능력도 없는데.


헌금을 하나, 전도를 하나, 예배를 참석하나. 그냥 쭈그려 앉아서 경제 어려운 것만 탄식하는 이 마당에. 그런 마당에서 하고 싶어도 몸이 아파서 못하고, 돈이 없어서 못하고, 직장에 매여서 못하고, 주일날 됐는데 사람들 없어서 못하고, 아무것도 못할 때 아무것도 못하는 그것이 우리의 본 모습이에요.


몸이 아프니까 우선 찡그리고, 이웃 사랑이요? 컨디션 좋을 때 기침 안 날 때 지금 용각산 먹는데. 이웃 사랑도 미소께나 띠울 때 이웃 사랑이지,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 컨디션 좋을 때 이야기입니다. 팔십 넘어 구십 가까이 된 치매 걸린 권사님들 옛날에 시골에 있을 때 가봤어요. 손자들이 마지막 보내신다고 찬송가 불러주니까 대번에 ‘찬송가 듣기 싫다. 내 앞에서 예수 소리하지 마라.’ 권사님으로 오십 년, 사십 년 이상 보낸 사람의 고백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때는 두뇌가 썩었잖아요. 치매니까. 시냅스와 시냅스가 연결이 안 되잖아요. 남는 건 머리가 안 도니까 육체가 갖고 있던 흔적, 육체적인 어떤 관성의 버릇, 이것이 이성이 날아가 버린 상태에서 머리가 날아가니까 본성에서 그대로 유감없이 발휘되는데 그게 뭐냐? 역시 난 나훈아의 ‘청춘을 돌려다오’ 그게 좋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집에선 찬송가 대신 유행가 틀어요.

   

그걸 보고 여러분, 안타깝게 여기지 말고 ‘아하, 내가 빨리 저 모습 돼야 위선이 그때나 벗겨지는데’라고 아주 축하 인사를 해주셔야 됩니다.


몸이 아프니까 그 정도 수준 되면 뭐까지 모르느냐 하면, 내가 아프다는 것까지 몰라요. 지난 주일날 아침인가 그런 예를 들었지요. 수요일인가 요새 치매가 있어서 기억이 안 나는데. 새벽에 운동하는 중에 할머니가 치매 걸려서 전부다 물어봐요. ‘육서깐 문 열었습니까?’ 육서깐이 지금 전라도 사람, 서울 사람 무슨 말인지 몰라요. 정육점을 육서깐이라 합니다. 옛날 말로. 새벽 네 시인데. ‘육서깐 문 열었습니까?’


그걸 보고 제가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야 저게 본성이다.’ ‘육서깐 문 열었습니까’ 할 때 내가 이런 소리하면 남한테 얼마나 욕하겠느냐 그런 자아가 하나도 없거든요. 자아가 없는 상태, 저게 우리 도달해야 될 성도의 목표입니다. 성화가 뭐냐? 저렇게 치매가 와서 완전히 돌아버렸어요.


왜 진작 우리는 안 돌아버리느냐 이 말입니다. 자꾸 신앙 있는 척하고, 좋은 척하고, 괜찮은 척하고 있느냐? 몸만 아파 보세요. 뭔가 똑똑해져 보세요. 진짜 그야말로 ‘나 같은 인간 왜 구원했습니까?’ 이게 바로 ‘너 같은 인간이니까 구원했지’라는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의 말씀이, 우리가 말씀을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우리 속에 침투해서 구원받는 거예요.


다윗의 묘실에 이쪽의 이스라엘, 어디 쪽이 오른 쪽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헷갈립니다만, 이스라엘 왕들이 다윗의 묘실에 못 들어가요. 그 사람이 얼마나 착하냐 중요한 게 아니고, 당신이 죽는 자리에 어디에 합류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다윗의 묘실에 못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쪽에 유다 나라는 왕들이 개판 오 분전이에요. 이쪽 이스라엘이나 저쪽의 유다나 똑같은 인간들이에요.


하지만 다윗의 등불이 계속이 유지되는 한 다윗의 묘실에 들어간다 했어요. 다윗의 등불이 꺼지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다윗의 묘실에 들어간다. 단 못 들어가는 사람 있어요. 너무 못 되서 아하스란 왕은 못 들어갔어요. 다른 왕은 다 들어갔어요. 등불이란 말은, 결국은 이 땅은 어둡다는 뜻이에요. 이미 빛의 세계가 여기 있다면, 다윗의 기도에서 나옵니다. 역대기는 기도가 그거에요.


광주에 차타고 가니까 지붕 열리는 나이트클럽이 있어요. 한국나이트클럽. 역대기에서 지붕 열리는 것은 기도밖에 없어요. 그래서 역대기 족보에서 중요한 것은, 야베스 기도가 나옵니다. 야베스 기도를 통해서 앞의 족보와 뒤에 족보가 내용이 달라집니다. 기록 방법이 달라집니다. 다음 시간에 저녁 먹고 ‘야베스 기도’ 하겠는데, 기도를 통해서 비로소 뚜껑이 열려버립니다. 나이트클럽의 지붕이 확 열리면서 별이 보이고 하늘하고 내통하는 게 기도에요. 히스기야의 기도. 기도가 중요해요.


그런데 다윗의 묘실이라 하니 결국 뭐냐 하면, 그들이 어떻게 살았느냐가 아니라 죽을 때 어디서 죽느냐? 누구 품에 안겨서 죽느냐 이 말이죠. 나사로가 낙원에 갔는데 누구 품에 안긴다 했습니까? 아브라함 품에 안겼다. 그 사람이 죽을 때 누가 그 사람의 죽음을 건사하느냐, 이걸 받아 챙기느냐? 받아 챙기는 사람에 의해서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영역에 합류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역대기는 뭐냐? 구약의 신약성경이죠. 구약은 뭐냐 하면, 구약은 얼른 보면 전부다 명령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규범적이죠. 신약성경의 핵심은 ‘육이냐, 영이냐’에요 구약에는 아브라함이 이렇게 하나님의 제단을 쌓더니만 복을 받아서 소떼가 늘어나고 양떼가 늘어나고, 이삭도 소떼가 늘어나고 양떼가 많아서 브엘세바에서 우물 하나 가지고 싸우다가 나중에 계약 맺었고 어떻고, 야곱도 복이 많아서 축복, 축복이 나온다고요.


잠언서에 보면 오른 편에는 부귀요. 왼 편에는 장수요. 욥도 욥이 고난 받기 전보다 고난 후에는 곱빼기 복을 받아서 재산이 늘어났다. 딸도 얼마나 예쁜 딸이 세 명 낳는데, 이래 나온다고. 구약은 전부다 땅과 그 땅이 어떻게 풍성해지느냐? 번성 문제, 얼마나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고 단절, 끊지 않고 이어지느냐 하는 그런 문제지만


신약에 보면 육과 영이란 말이에요. 신약에 보면 네가 재산 얼마나 묻지 않고, 네 자신이 육에 속하느냐, 영에 속하느냐 이거 묻거든요. 영에 속한 특징이 뭐냐?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 거예요. 이미 경험적으로 살아다는 거예요. 영은 죽어도 죽었고, 살아도 죽었고. 그러니까 신약성경에는 ‘너 죽은 자야, 산 자야’ 그걸 따지는 거고, 구약에서는 ‘너 얼마나 소유했느냐’ 그걸 따지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역대기에서는 이미 그런 역사가 다 끝났고, 에스라, 느헤미야까지 다 끝장내고 다 마감되어서 다시 마감 쪽으로 가서 총 정리를 해보는 거예요. ‘역시 우리가 절망 가운데 있어도 멸망당해도 우리는 멸망당했지만 이 멸망케 하시는 그 작업, 그 손길은 하나님의 다윗에서 나온 착실한 빈틈없는 약속 때문에 즐겁게 멸망당하고, 즐겁게 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기쁨의 우리는 역사를 가졌다’는 것이 역대기입니다.



오십 분 됐습니다. 

 

 

 

 

 

2009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역대기 <제2강>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역대상 1장 5절부터 23절에 흐름이 이렇게 돼있습니다. 야벳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함이 나오고 그 다음에 셈이 나옵니다. 노아의 세 아들 가운데 이렇게 나오는데 순서 배치를 야벳 먼저 하고 함하고 셈을 배치해놓고 셈에다 악센트를 치지요. 여기에 주목하라 이 말이죠.


족보에 있어서 마지막에 스톱되는 그 지점을 위하여 다른 것이 모아져 있는 겁니다. 단면 또는 단편 족보에서 넓이 족보에서는 마지막에 악센트를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이스마엘과 그리고 이삭에 관해서는 1장 19절에서 34절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서 이스마엘 족보를 먼저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끝에 이삭을 여기다 해서 이삭에다 강조점을 두고 있어요.


35절에서 에서와 야곱 가운데서도 에서가 먼저 출발하면서 야곱과 마지막에 거론된 것과 관련이 있으면서 야곱이 출중하게 연결돼있습니다. 그래놓고 계속해서 2장 3절에 보면 여기에 뭐가 나오느냐? 야곱 이름이 바뀌었죠. 이스라엘로. 그렇다면 순서가 ‘노아에서 셈에서 이삭에서 이스라엘로’ 이런 라이너, 선형을 갖추면서 곁가지들을 몰고 다니며 이렇게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이 이스라엘이 앞으로 가는 곳마다 단독적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되게 했던 주변에 배치된 그러한 족보들, 이스라엘 되기 위해서 에서가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이스마엘 있었고, 함, 야벳이 있었던 이런 족보들이 앞으로 이스라엘이 처해있는 장소, 그 공간에서 계속해서 이들이 뭔가 관련성을 가지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주면서 다른 주변의 곁가지들, 넓은 족보에 참여했던 자들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돋보이는데 사용한다 이 말입니다.


여기 그림4에 보면 이 지도가 아주 좋은 지도입니다. 이것도 [피]라는 책에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상세한 것이 좋은 지도가 아니죠. 필요한 것만 기록된 게 좋은 지도에요. 성경이 그래요. 성경이 세계 역사 기록한 게 아닙니다. 필요한 것만 돋보이게 하는 그런 것이 성경이고,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고. 진짜 정작 필요한 건 따로 한다고.   


그래서 그걸 모르고 만날 ‘가인은 누구하고 결혼했습니까?’ 여자하고 결혼했지. ‘그 여자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아담의 자식은 가인과 아벨밖에 없는데 왜 여자가 툭 튀어나왔습니까?’ 하는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생명나무에 가는 필요한 것만 골라서 하는 겁니다.


여기 4페이지에 보면 암몬, 다메섹, 모압, 에돔 나와 있지요. 위치가. 그림이 여기에 동그라미 두 개가 보이는데 길쭉한 동그라미를 사해, 소돔과 고모라 이 지점에 있고, 작은 동그라미가 갈릴리 바다. 이 사이를 흐르는 강을 요단강이라 합니다. 요단 강 이쪽 편에서 더 나가 있는 암몬, 모압, 에돔 있고 저 위에 북쪽에 아람, 수도 이름이 다메섹인데.


이 역대기나 열왕기를 보면서 이 안에 이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갈라지기 전에 북쪽은 이스라엘, 남쪽은 유다라 하는데 어쨌든 처음에는 이스라엘인데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기 위해서 아람, 암몬, 모압, 에돔 이런 나라가 있어줘야 이스라엘이라는 가치가 왜 하나님께서는 다른 나라 말고, 앗수르, 바벨론 나오지만 그런 나라가 위주가 아니라 왜 이스라엘을 주목해야 되고, 이스라엘 도처에 전 세계에 많은 민족들이 있지만 왜 하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느냐 말이죠. 이 안에 구원의 비밀이 들어있거든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는 단군의 자손 같으면 단군의 자손 된 줄 알지 남의 나라, 수입품 이스라엘을 왜 자꾸 따지느냐 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사람 되셔서 오신 그분이 이스라엘로 왔거든요. 그분이 다윗의 자손 계통으로 왔다고. 로마서 1장 3절에 보면.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내에 이미 잠재돼있던 비밀이 있었고, 그것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히브리서 1장 1절에 나오지요. 마지막 때는 하나님의 아들로 이야기하는데 그 아들이 석가모니도 아니고, 공자, 맹자도 아니에요. 그 아들은 나사렛 예수란 분이 아들입니다. 못 믿겠다고요? 그거는 사울이라는 사람이 다메섹 내려가다가 얻어맞았어요. 뭔가 천둥이 치는데 누구십니까? 하는데 ‘난 나사렛 예수다’ 했어요.


그때부터 사울은 중심점, 제가 첫째 시간에 뭐라 했습니까? 중심점. 중심점은 하나님이 만들어줘야 되지 인간들끼리 투기해서 ‘어이 중심점 미국 할까, 필리핀 할까’ 이래서 중심점이 아니에요. 중심점은 하나님이 지정해주는 겁니다. 오래된 팥죽 딱딱할 때 젓가락으로 하게 되면 굳어진 젤 상태가 하면서 중심점이 생기지요. 하나의 무늬가 생기잖아요. 이렇게 젓가락 쑤셔서 흔들어 소용돌이 만드는 것은 우리 소관이 아니고, 바로 하나님이 중심점을 심어준다 이 말이죠.


그럼 예수님이 오실 때 ‘나는 이방인들 위해서 온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왔다’ 이래 돼있어요. 여전히 이스라엘이에요. 로마서 11장 26절에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에 구원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그럼 우리는 뭔데? 이방인들은 개지 뭐. 개인데 왜 필요하냐? 중심점을 위해서. 이스라엘의 중심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겁니다.


여기에 보면 여기서 강이 하나 있고 여기에 뭐 있느냐 하면, 성경에서는 가사라 했고, 현대에서는 가자라 했거든요. 가자 이 지역이 블레셋이죠. 현대말로 하면 팔레스틴입니다. 이거 지금 조지고 있어요. 가자 지구. 이스라엘은 여기 있고 블레셋은 여기 있거든요. 블레셋 하면 기분 나빠하니까 팔레스틴이라 해요. 난민들.


여기 주변에 있는 국가들이 계속 하나님께서 번성케 하거나 임의대로 조절하시고 하나의 야구방망이, 몽둥이 앗수르죠. 그땐 야구가 없기 때문에 몽둥이인데 요샌 야구방망이 같은 앗수르를 사용해서 이스라엘을 진짜 이스라엘답게 강조점을 두는 것입니다.


[친구]라는 영화를 보면 아주 인상 깊은 장면이 나오지요. 선생님이 시계를 풀면서 ‘너거 아버지 뭐 하시노?’ 그때 ‘건달인데요.’ ‘이게 장난치나.’ 그때 가만있던 친구가 ‘선생님. 실수했습니더.’ ‘실수했어? 뭘 실수했는데?’ 애들은 알아요. 장동건 아버지가 진짜 건달인 것을. 그런데 선생님들은 모르지요.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걸. 이스라엘을 함부로 건들면 안 된다는 걸. 선생님 실수했다는 걔가 더 많이 맞았다고.


그래서 여기 이스라엘 사람들이 친구 대목이라면 만약에 여러분 같으면 어떤 사람이 와서, ‘권사님 아버진 뭐 하시노?’ 물으면, ‘하나님인데요.’ ‘이게 장난치나.’ 이건 ‘건달인데요’와 똑같은 짓이에요. 이스라엘은 본인들이 하나님이 아버지 됨을 원치 않아요. 왜? 너무 튀니까.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 대신 남들처럼 눈에 보이는 왕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거 실수한 겁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와 뭔가 달라야 되는데, 다른 나라 보면 건장 하니까 ‘아하 탁월한 지도자 있기 때문에 있구나’해서 우리도 멋있는 아버지를 해보겠다는 겁니다. 사람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말고. 다른 사람에게 ‘너거 아버지 뭐 하시노?’ 하니까 ‘우리 아버지 하나님인데’ 하니까 ‘이게 장난치나’ 하면서 얻어맞았거든요. 울면서 ‘하나님 안 해.’ 이제 하나님 아버지 안 하고 눈에 보이는 것 해. 그게 오늘날 교회 목사 아닙니까. 와 조용합니까?


교인들이 하나님, 예수님을 안 믿어요. 예수 하나님 믿는 것 가지고 뭔가 손이 심심해서. 눈에 보이는 어떤 지도자 있어서 일을 시켜줘야 하겠다는 겁니다. 그게 무슨 교회입니까? 왜 교회가 아니냐 하면, 진짜 아버지는 피를 흘렸지만 목사는 피를 흘리는 게 아니고 침을 튕겨 설교시간에. 고함만 칠뿐이죠. 그게 무슨 교회에요. 진짜 성경은 설교시간에 피가 묻어야 돼. 피가 탁탁 튀어야지 목사 침이 나오지 말고. 왜냐하면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피로 값 주었다. 목사는 피만 튕기고 지는 빠져야지.


그걸 저는 그런 교회를 새로운 용어로 [허무 교회]라 합니다. 어디서 나온 용어냐 하면, 허무 개그에서 나온 용어입니다. 아무 의미도 없이 친목계. 이번에 강남에 많이 깨졌잖아요. 요새 교회에서 계모임 많이 합니다. 암웨이 들어와 버리면 교회 완전히 암웨이 교회 돼버려요. 허무 개그에서 나온 허무 교회에요. 교회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지도자, 요한일서에 나오죠. 누가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있느냐? 너희 속에 성령이 계시니 성령이 가르치시리라. 누가 감히 진짜 십자가 피도 흘리지 않은 인간이 누가 함부로 가르쳐요. 다만 목사라 하는 것은, ‘나 이렇게 삽니다’라는 것을 그냥 보여주기만 하면 교인들은 참고로 할뿐이죠. ‘아, 저런 식으로 밥 먹고 사는구나.’


이 이스라엘 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단선, 단면, 단편 족보로 들어가요. 넓이를 이야기했다가 갑자기 “이스라엘의 아들은 이러하니라” 해놓고, 그 다음에 2장 3절에 보면, “유다의 아들은” 하고 유다가 톡 튀어나와요. 유다 족보가 나온다고.


2장 3절에서 17절까지 유다의 선형 족보, 직선으로 돼있는 깊이 족보가 나와요. 그 다음에 여기 유다에서 다윗까지 이어지는 선형 족보가 나와요. 그렇게 나오고 난 뒤에 이거 어려우니까 설명 들어보세요. 라이너, 선형 족보인데 그 다음에 2장 18절부터 2장 55절까지는 유다의 넓이 족보가 나와요.


이게 지금 제가 말하면 여러분들이 강사가 무슨 뜻으로 이야기하는지 잘 모를 건데. 갈렙이라는 사람이 나오거든요. 이 갈렙이라는 사람은 직접 다윗과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족보상. 이 갈렙이라는 사람은 유다의 아들 가운데 하나 베레스의 아들 헤스론 그 계열에 속하는데 그게 다윗과는 실제 연관이 없어요. 하지만 나중에 이 갈렙이 누구보다도 다윗과 끈끈한 인연을 맺게 됩니다.


유다에서 다윗까지 일직선으로 앞뒤 안 보고 한 선으로만 족보가 나오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넓게 펑퍼짐한 다른 족보 중에서 중요한 족보들을 뛰어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에 대한 선형 족보와 유다에 대한 단면 족보가 나오고, 그 다음에 3장 1절에서 24절까지는 또 다윗의 계보가 나옵니다. 그 다음에 4장 1절에서 23절까지는 다시 유다의 단면 족보, 넓은 족보가 또 튀어나와요. 이 두 개는 선형 족보, 이 두 개는 단면 족보가 나오는데


이렇게 해서 이건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왜 이렇게 갑자기 유다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두느냐 하면, 앞으로 그 뒤에 나오는 다른 이스라엘의 펑퍼짐한 족보들이 뭔가 유다 족보, 다윗 족보들을 ‘당신이 바로 중심점입니다’라는 그러한 암시를 주면서 ‘당신에게 기대를 겁니다’ 하는 그런 암시를 주면서 옹위하듯이 같이 포함돼있어요.


신명기 마지막에 모세가 죽으면서 열두 지파 축복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유독 톡 튀는 두 개의 기둥 같은 지파가 나오지요. 바로 유다 지파와 요셉 지파가 진짜 광채가 나는 지도자 같은 느낌이 드는 두 지파가 나옵니다. 그것이 나중에 과연 십자가에 성취되었는가를 보여주는데

이 점을 지금까지 여러분이 잘 이해 안 될 것이니까 확실하기 위해서 뒤에 보면 아는 겁니다. 2장 3절에서 15절까지는 유다A라 하고, 3장 1절에서 24절까지는 다윗, 그 다음에 4장 1절에서 23절까지는 유다B, 4장 24절부터 43절까지는 시므온, 이렇게 돼있습니다.


이걸 4페이지의 지도를 봐주세요. 길쭉한 바다가 사해, 위에 있는 동그란 게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신 갈릴리 바다고, 그 중간에 흐르는 강이 요단강이죠. 이쪽에 므낫세, 동쪽이라고 해서 요단 저편, 요단 동편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시므온과 유다는 어디에 속합니까? 남쪽에 속하죠. 그래서 이건 남쪽 지파에요.


왜 이렇게 역대기에서 족보를 남쪽 지파로 하는지를 여러분들이 설명이 끝나면 이해될 겁니다. 제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니까 저보고 따지지 마세요. 저보고 복잡하게 한다고 따지지 마세요.


그 다음에 5장 10절부터 르우벤 계보가 나와요. 르우벤이 어느 쪽이냐 하면 지도에 보면, 이게 바로 동쪽에 나와요. 그 다음에 5장 11절부터 17절까지 이건 갓이 나옵니다. 갓이 어디 있느냐 하면, 르우벤 바로 위에 있어요. 그 다음에 5장 18절부터 23절까지 요단 저편, 요단강 동쪽이란 뜻이고, 그 다음에 5장 23절부터 26절까지는 그냥 동쪽. 이건 합쳐서 동쪽 지파가 되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있는 건 여러분 다 아시죠.


그 다음에 6장 1절부터 15절까지는 대제사장 계보가 나오고, 6장 16절에서 30절까지는 레위 지파가 나옵니다. ‘목사님, 너무 재미없습니다’ 하는데 저보고 탓하지 마세요. 역대상 자체가 보게 되면 재미 되게 없어요, 하여튼. 그 다음에 6장 31절부터 55절까지는 레위 지파와 대제사장. 그 다음에 6장 56절부터 81절까지는 레위의 성읍이 나옵니다. 어떤 마을, 빌리지.


그리고 난 뒤에 7장 1절에서 5절에 보면, 잇사갈. 4페이지에 보면 잇사갈이 바로 북쪽에 있어요. 그 다음에 7장 6절에서 12절, 이건 베냐민A. 7장 13절은 납달리. 그 다음 7장 14절에서 19절까지는 동쪽과 서쪽에 있는 므낫세. 그 다음에 7장 20절에서 29절은 에브라임. 에브라임이 어디 있느냐 하면, 바로 므낫세 밑에 에브라임이 있어요. 그 다음에 7장 30절에서 40절까지는 아셀. 아셀이 어디 있느냐? 그림 보면 이 위에 있지요. 그 다음에 8장 1절에서 40절까지는 베냐민B. 이렇게 되면 바로 북쪽 지파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역대기를 쓰실 때 왜 이렇게 방향별로 지파를 묶어서 했느냐 하면, 그 도중에 남쪽, 동쪽, 그 다음에 북쪽 그 사이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레위 지파는 원래 자기 땅이 없어요. 땅이 없는 레위 지파가 이 중간에 들어갑니다. 나중에 이스라엘이 멸망되기 전에 처음에 통일됐는데 남북으로 갈라지고, 사해, 갈릴리 바다, 북을 이스라엘, 남쪽을 이름을 유다라 지었다 이 말이죠.


할 때에 이쪽은 전부다 누구한테 먹히느냐 하면, 아까 암몬, 모압, 에돔, 아람 다 먹혀요. 이 동쪽 이거는 의미가 없어져버리고, 남쪽과 북쪽이 마치 가마 태우듯이 중앙에 누굴 모시느냐 하면, 바로 레위 지파를 옹위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 되어야 된다는 것이 그들이 나중에 멸망되고 난 뒤에 포로 잡히고 오고 난 뒤에 취지가 바로 이 취지였던 겁니다. 이 취지에 부합해서 지나간 역사를 다시 한번 전부다 재배치를 한 거에요.


이 동쪽은 레위 지파를 모실 자격도 없어요. 그리고 온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얘들 빼고 나머지 남쪽이 온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면서도 여기서 대표적인 것은 뭐냐? 바로 남쪽의 유다와 베냐민과 북쪽의 요셉지파. 요셉 지파는 둘로 나눠지지요. 에브라임과 므낫세. 역대상 9장 3절 누가 읽어보세요.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과 에브라임과 므낫세 자손 중에서 예루살렘에 거한 자는”


그게 점점 더 계보가 장소가 가면 갈수록 왜 유다 지파와 요셉 지파가 하나가 되면서도 유다 지파가 돋보여야 되는 이유가 뭐냐? 우리가 그 동안 지킬 것을 못 지켰다는 거예요. 뭘 못 지켰는가? 중요시해야 될 땅 없는 레위 지파, 땅이 없으면서도 그들은 뭘 하느냐 하면, 제사 업무에 종사하지 않습니까? 이 제사 업무에 종사하는 이 중차대한 그것을 우리가 소홀히 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망해버렸다.


하지만 포로에서 다시 돌아와서는 바로 유다 지파가 주동이 되어서 온 이스라엘이 하나가 되어서 레위 지파를 사수하세. 그래야만 그것 하라고 하나님께선 유다 지파와 더불어서 레위 지파, 그렇게 해서 그들은 칠십 년 포로 잡히고 다시 본향에 돌아왔고, 거기에 곁가지로써 온 것이 바로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돌아온 거예요. 그게 어디서 확인되는가? 에스라, 느헤미야에 족보가 나와요. 에스라, 느헤미야의 족보에 보면 항상 중심점이 뭐냐? 레위 지파 제사장들의 족보가 중앙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한번 볼까요? 자칫하면 속아 넘어가는 수가 있으니까 조심해야 됩니다. 에스라 7장, 10장에 보면 하여튼 찾기 버겁더라도 이렇게 이번 기회에 찾아봐야. 에스라, 느헤미야는 진짜 보기도 싫어요. 재미 하나도 없어서. 거기에 10장에 보면 복잡하게 나오지요. 제사장 족보 나오지요. 그리고 7장에도 보세요. 아, 골치 아프잖아요. 읽을 때 보면. 7장 1절에 “이 일 후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위에 있을 때 에스라라 하는 자가” 쭉 나오지요. “제사장 아론의 십육 대 손이요”


요새도 문중에 가면 젊은 사람들 제일 싫어하는 게 문중 사람들 족보 이야기할 때 젊은이들 그것 때문에 문중 근처도 안 가려 합니다. 안동 하회탈 근처도 안 가려 합니다. ‘이리 오너라.’ 시대가 어느 시댄데 ‘이리 오너라’입니까? 그런데 에스라, 느헤미야는 아직까지 ‘이리 오너라’에요.


레위 지파가 중심이에요. 에스라, 느헤미야에서도 족보 이야기하는 것은 두 번밖에 없어요. 유다 지파 하고 레위 지파만의 족보를 이야기해요. 이거야말로 순전 하나님께서 우리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는 마지막 흔적으로써 남겨준 거다 이 말이죠. 그리고 에스라, 느헤미야 끝난 시점에 등장하는 마지막 선지자가 있습니다. 말라기에요.


말라기 선지자가 이야기하는 핵심이 뭐냐? 말라기 보면 되죠. 말라기 2장 8절 누가 읽어보세요. “너희는 정도에서 떠나 많은 사람으로 율법에 거치게 하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에 마지막 4장에 보면 저주가 임하죠.


자, 그렇다면 여기까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를 준 것은 첫째 시간에 무슨 그림 그렸습니까? 말씀을 재미없다 할 수 있느냐 하는데 재미없는 건 재미없는 거예요. 말씀이 필요 없단 소린 아니잖아요.


제가 아까 그림 다시 그려보겠습니다. 아담부터 해서 보통 족보가 수평적으로 나간다고 생각하는데 역대상은 그게 아니라 했습니다. 뭔가 점점 더 경사면을 가지고 수직선으로 올라간다 했지요. 올라가는데 다윗에 와서 스톱이 돼버려요. 다윗과 그 위에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 사이에 점선으로 돼있다 했지요. 그리고 다윗 이후에는 다시 미끄러지듯이 자꾸 내려간다 해서 마지막에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돼버려요? 멸망해버리죠.


그런데 올라갔는데 왜 다시 청룡열차 타는 것도 아니고 내려갔느냐? 뭘 놓친 거예요. 뭘 놓쳤는가? 받들어 모신 것을 놓친 겁니다. 이 점선 부분에 뭐냐 하면, 땅이 없어요. 땅이 없는 지파가 들어갑니다. 그 지파가 바로 레위 지파입니다. 땅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땅 있는 지파들이 땅 없는 지파를 가마 태우듯이 모셔야 되는 이유는 뭐냐? 영원한 땅은 바로 땅 없는 지파의 어떤 자격, 업무 거기에 따라서 결정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다윗 지파는 레위 지파가 하는 것을 받들어 모실, 점선으로 표현한 것이 사실 구체화되면 뭐냐 하면, 이게 레위 지파가 되는 겁니다. 레위 지파가 하는 업무 지키기 위해서 다른 지파는 전쟁을 해야 되고, 그 전쟁에 앞장서서 그 전쟁을 완료시킨 자가 다윗 장군입니다.


그런데 다윗 장군은 피를 많이 흘렸어요. 전쟁한다고. 그렇다면 레위 지파를 영원히 안착시키기 위해서는 피가 없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다윗의 자손이면서도 피가 없는 사람, 누구겠습니까? 솔로몬이죠. 그런데 솔로몬이 지은 건 아니에요. 누가 지었느냐? 다윗이 지었어요. 역대기에 보면 다윗이 준비 다 해놨습니다. 솔로몬은 차린 밥상에 숟가락으로 퍼먹으면 됐어요. 성전 짓겠다는 그 대화도 다윗이지 솔로몬이 한 게 아닙니다. 솔로몬은 다윗의 꼬리에 지나지 않아요. 다윗이란 몸통에 포함된 하나의 일부라 보면 돼요.


다윗의 언약에 완성은 결국은 모든 피 전쟁이 마감되고 완료된 상태에서 다윗이 흘렸던 피의 효력이 바로 성전이 되고, 그 성전 안에서는 레위 지파가 이루어야 될 모든 작업이 순조로이 이루어지는 그 상태가 바로 성전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제가 아까 처음에 했던 에스라, 느헤미야가 왜 돌아와야 되는가? 그것은 바로 성전을 다시 짓기 위해서 와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성전을 왜 지어야 하느냐 하면, 성전에는 다윗의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거죠.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곳인데 그 하나님의 이름이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다윗의 이름으로 오신다 이 말입니다.


이걸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름으로 오실 분은 이미 하는 작업이 확정돼있어요. 예수님이 하신 일이 남자를 여자로 바꾸고, 가난한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게 일이 아닙니다. 성전환 수술하면 돼요. 하나님이 하는 일이, 우리나라 100미터 기록이 30년인가 안 깨지고 있어요. 10초 3인가 그럴 거예요. 다른 나라는 9초 9 뛰잖아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교회 다니면서 청년이 열심히 기도해서 ‘주여, 지금 저는 100미터 10초 7인데 9초 9 되게 하옵소서’ 기도하면 되게 해주십니까? 해주죠. 마귀가 해줘요.


하나님이 하신 전능하심은 그게 아니고, 이미 전능해야 될 그 일 폭이 범위가 확정돼있습니다. 뭐라고? 다윗의 언약으로 오기 때문에 다윗에게 약속된 것만 전능하게 다 이루어줘요. 이걸 간편하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이 성도의 일에 도와줄 어떤 경우냐 하면, 십자가 복음에 관한 일만 도와줘요. 그 외는 안 도와주십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죄송할 건 없지만.


하나님께서 기적을 느끼게 하고 ‘야, 이건 기적이다’하는 순간은 어떤 순간이냐 하면, 십자가 복음의 효과가 나타난 그 현장만 노리고 주께서 도와주고, 나머지는 절대로 주의 뜻이 있기에 우리의 뜻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실 때 이렇게 기도하면 백발백중 기도응답 됩니다. 속에 하고 싶은 것 다 이야기하고 ‘주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하면 백 퍼센트 다 이뤄집니다.


새해가 되었는데 ‘주여 오늘도 잘 되게 해달라’고 해 뜰 때 빌고 이러잖아요. 좋아요. 비세요. 해 뜨는데서 비는 것이나, 교회 안에서 비는 것이나 비는 건 마찬가지죠. 같은 수준이기 때문에. 창문 열고 해 뜨는 것이나 창문 닫고 해 뜨나 알아서 뜨거든요. 해는 물어보고 안 뜹니다. 십자가마을한테 해 뜨길 기도합니까? 이래서 뜨는 게 아니거든요. 비는 건 지 자유인데 ‘절대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라’ 하면 그 기도는 백 퍼센트 이뤄집니다.


그 아버지 뜻이 무엇이냐? 다윗에게 약속한 그것만 이뤄주십니다. 이걸 가지고 복음이라 합니다. 로마서 1장 3절에.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분이 다윗에게 약속한 것만 이뤄주십니다. 그 다윗의 혈통으로 다윗에게 이룬 게 뭐냐? 다윗이 했던 일이 레위 지파가 해야 될 업무를 보좌하고 받들어 모신 일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포로 잡혔던 망했다고 여기는 사람이 희망을 갖고 칠십 년 만에 다시 돌아와서 ‘우리도 성전 짓는다, 우리도 성전 짓는다’ 그렇게 한 겁니다. 예수아라는 사람 그리고 스룹바벨이란 사람이 와서 제일 먼저 한 것이 성전 짓는 거예요. 거기에 도와준 사람이 학개, 스가랴 이런 사람들이 도와줬습니다. 그 다음에 에스라 와서 부흥 운동했고, 그 다음에 왕에게 술 따르고 시중들던 느헤미야란 사람이 총독으로 와서 에스라는 부총독 되서 둘이 합심해서 성전 지었는데 산발랏, 도비야란 그 당시에 노는 껄렁이들이 있어요. 원래 텃세 있잖아요.


바사란 큰 나라가 통치할 때 밑에 떼 주고 통치한다고. 먼저 통치한 사람이 자기 땅인 것처럼 행세하는 거예요. 나중 온 사람들이 성전 짓겠다하니까 ‘바사 형님들이여, 자들 성전 왜 짓는지 압니까? 세금 안 바치려고 짓습니다.’ ‘그래. 그러면 중단시켜야지.’ 이런 모함을 해서 성전 못 짓게 했어요. 그래서 다시 또 조서 꾸며서 도장 찍어서 ‘그게 아니고 옛날 선배 임금님이 약조한 게 있습니다. 찾아보이소.’ 찾아보니 나와. 성전 지을 때 모든 자재 다 동원하고 모든 인력 다 보장해줘라. 그래서 성전 지은 거예요.


그들이 성전 짓게 된 자체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완전히 잊어버리고, 느헤미야 총독이 본국으로 소환되어서 총독도 없어요. 총독도 없고 백성도 비실비실 하더라도 항상 성전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모든 선지자의 말씀을 이룬다. 그래서 ‘성전 사수하자’라는 의미에서 했고, 그 성전이 성전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성전을 와해, 불지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아낸 거예요. 그 이유가 뭐냐? 이방인과 결혼했고, 그 다음에 아주 중요한 거 나오지요. 십일조.


십일조 하면 교인들 닭살 돋아요. 무서워라. 다음 중 교인들에게 제일 무서운 것은? ①귀신. ②김정일. ③흡혈귀. ④십일조. 십일조가 제일 무서워요. 왜? 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래서 교회가 계급이 있습니다. 인도에 가면 네 가지 계급이 있잖아요. 카스트 제도해서. 교회도 카스트 제도 있어요. 제일 높은 자리는 십일조. 그 다음에 하는 사람이 이십일조, 이십분의 일. 삼십분의 일, 제일 밑에 천한 사람. 자본주의사회에서 돈이 최곤데, 뭐. 그래서 목사들도 교인들 십일조로 계산해서 신앙 측정한다고 리스트 작성하고 혼자서. 어떤 목사는 리스트 작성해서 커튼 쳐놨는데 어떤 장로님 와서 들춰보니까 리스트 다 나왔어요.


이방인하고 결혼하고 십일조. 그 다음에 에스라가 바로 율법을 우리가 잊어버렸기 때문에 율법이 없으니까 욕망대로 살아요. ‘사람이 법이 없으니까 욕망대로 산다.’ 그렇게 생각해서 우리가 왜 남의 나라 지배를 받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운동을 벌였는데 그 중심은 뭐냐? 레위 지파가 하는 일에 적극 십일조를 모아서 레위 지파로 하여금 두 번 다시 월급 없어서 일반 기업체에 취직하거나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말씀 증거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해주자 하는 운동이 에스라, 느헤미야 운동입니다.


성전 유지하려 하면 그냥 건물만 지으면 안 돼요. 성전이 가만있으면 관광 그게 하잖아요. 성전은 활동, 돌아가야 되지 않습니까? 성전이 그냥 성전으로 있으면 안 되고, 성전답게 돌아가려면 제사가 이뤄져야 되고. 그리고 그 제사에 전념하는 전문가들이 있어야 돼요. 전문가들이 제사장과 레위 지파고. 그들을 먹여 살리려 하면 돈이 필요하고. 그리고 그 사람들이 돈을 받아서 바로 이웃 사랑,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함으로 말미암아 옛날 포로되기 전에 그 시절로 돌아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성전을 지은 취지를 우리가 지탱해야 한다는 것이 에스라, 느헤미야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망했잖아요. 그래도 망한 이유가 히브리서 7장에 나옵니다. 거기에 십일조 이야기가 나와요. 참 오늘 성경 별거 다 나온다. 이것이 알고 싶다. 그것을 알려주마. 히브리서 7장 11절, 다같이 읽어야 돼요. 너무 중요해요. 359페이지. 시작.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진짜 유대인들이 보면 이 성경책 잡아 죽이려고 할 거예요.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처음도 율법인 동시에 레위 지파, 다윗도 레위 지파를 위하여 성전 지었고, 그 성전 회복하기 위해서 레위 지파가 주동이 되어서 지었고, 에스겔도 레위 지파고, 제사장 계열이고, 이제 말라기도 이 세상의 믿을 자는 누구밖에 없다? ‘성전에서 일하는 바로 레위 지파 제사장밖에 없다’라고 철떡 같이 알았는데 그 모든 것이 근거가 뭐냐 하면, 바로 남북의 모든 지파는 가마 타듯이 땅 없는 지파를 모셔야 돼요. 모셔야 될 지파가 레위 지파에요. 족보상 구조가 레위 지파가 중간에 들어가야 된다 이 말이에요.


아까 참 지루하고 재미없었지만 이 이야기 보니까 중요하죠. 남쪽의 지파 있고. 그 다음에 북쪽 지파 있는데 그 사이에 뭐가 낍니까? 레위 지파가 들어있고, 이 구조가 에스라, 느헤미야가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단 말이죠. 그것도 유다 지파가 와서 레위 지파를 모시는 그런 구조로 에스라, 느헤미야. 그러니까 포로 잡혀 온 칠십 년 돌아온 사람들이 치밀하고 이상적인 모델이다, 참된 이스라엘이라고 한 게 뭐냐? 레위 지파만은 살려야 된다. 십일조 내고 하여튼 레위 지파만은 살려야 된다. 피의 제사죠.


‘피의 제사에서 살려야 된다’라고 했는데 이게 히브리서 1장에 보면, 마지막 때에 누가 이야기한다?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아닙니다. 마지막 때는 다윗이 이야기한다? 아닙니다. 마지막 때는 하나님의 아들로 모든 실체를 비밀을 알고 싶다. 그 비밀을 다 들춰보니까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 이전에 십일조를 받은 분이 있어요. 레위 지파 이전에 십일조를 받기도 하고 드린 분이 있어요. 누구냐 하면, 아브라함이었어요.


그러면 아브라함이 끝이냐? 아니에요. 아브라함이 드린 분이 있어요? 이건 점선입니다. 왜? 여기는 아브라함이 십일조 바친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멜기세덱이에요. 이 멜기세덱을 히브리서 7장에 보면 이렇게 설명했어요. 그는 애비, 어미도 없다는 거예요. 호로 자식입니까? 그렇습니다. 호로 자식이에요. 애비, 어미도 없어요. 이거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가 수요일 날 그런 설교했는가 생각이 안 나는데. ‘육서깐 문 열어놨습니까’ 하는 식으로. 세례 요한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란 분을 만났어요. 그러면 자기가 그 앞에 세례 받으면 자기는 구원받습니다. 메시아가 오면 세례 받으면, 그걸 에스겔은 영적 세례, 성령의 세례라 하는데 메시아가 주는 세례가 영적 성령의 세례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는 성령이 각 사람에게 부어지면 요엘서에 나오지요. 그러면 자기는 구원받는다 해서 받으려 하는데


이거는 역전이 되어서 네가 나한테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너한테 세례를 받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 되면 예수님은 세례 요한 속에 흡수됨으로 말미암아 그 다음에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요. 뭐냐 하면, 이 세상에 메시아가 없습니다. 무서워 사라져버렸어요. 사람들이 원하는 메시아는 가라입니다. 가라요 구라요. 사람들이 원하는 메시아를 보낸 적이 없어요. 아담의 족속들이 원하는 메시아를 보낸 적이 없어요.


그러면 메시아가 어디 있느냐? 인간의 죄성에 숨어 있어요. 자기 죄를 알 때만 본인만 알아요. ‘내가 이렇게 내 죄로 말미암아 내 안에서 주님이 죽는구나’ 하는 것을 두 사람만 알아요. 메시아는 내 죄 때문에 피 흘렸다는 걸 알고. 사람들이 찾는 ‘주여, 저 건강합니다. 저 잘났습니다. 저 훌륭합니다. 훌륭한 내가 천당 가는데 메시아 어디 있습니까?’ 그 메시아는 어디가도 없습니다. 메시아가 사라져버렸습니다.


사랑스러운 메시아가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한테는 숨으시고 어린아이한테는 나타나죠. 옳소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라 했어요. 이건 아버지와 아들 계시 외에는 숨어있는 메시아를 찾을 길이 없다 했습니다. 지금은 메시아가 없어요. 사기고 구라쳐버려요. 전부다.


그 당시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바리새인들 에스라, 느헤미야 정신으로 완전무장한 사람이에요. 딴 걸 손대라. 예수님이 죽게 된 이유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죽을 일 있어 죽은 게 아니에요. 예수님이 마지막 손댄 게 있어요. 손대면 다치게 된 걸 건드렸습니다. 뭘 건드렸습니까? 성전을 건드렸잖아요. 그거 예수님이 실수한 거예요.


‘너거 아버지 뭐 하시노?’ ‘우리 아버지 하늘에 있는데요.’ 그거 실수한 거죠.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하늘에 있는 아버지께서 하늘에 있는 정도가 아니고, 성전을 통해서 이미 주셨기 때문에 성전이 있는 마당에 하늘이라 하면 안 되지요. ‘성전 주셔서 성전 지키고 있는 사두개인, 바리새인 덕분에 우린 삽니다.’ 이래 나와야지.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이래 나와야지. ‘할례하고 십일조하고 안식일 지켜서 구원받습니다.’ 이렇게 해야죠.


에스겔에 보면 율법은 다 폐해져도 안식일은 영원하리라. 그래서 그들은 안식일 지켰잖아요. 지금도 제칠일안식교에서는 그 구절 대서 세상 모든 법은 없어져도 안식일은 유지한다고 이야기하잖아요. 유대인들이 그렇게 한 거예요.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성전이다’ 이래 나왔습니다. 감히 성전을 엎어버렸습니다. 치워라. 성전을 도둑놈 아지트를 만들었다고 치워버렸습니다.


제 [피]라는 책에 이 대목 나와요. 유대인들은 침착하고 나무를 보는 게 아니라 숲을 보며,  합리적이며 인내성을 갖고 참을성 있는 사람들이며, 이성적이고 함부로 화내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고, 왜냐하면 이 세상 인간들이 의롭다, 의롭다 하지만 바리새인보다 더 의로운 사람 없습니다.


그랬던 사람이 예수를 죽였다는 말은 죽인 바리새인 탓하지 말고 주님이 얼마나 떠버렸는가 생각해 보세요. 그 점잖으신 소 같은 양반한테. 사울이란 사람은 율법에 의해서는 자기는 아예 흠이 없는 거예요. 뭐, 주기철, 손양원 바둑 몇 점이라도 깔아야 돼. 게임이 안 돼요. 사울한테 게임이 안 돼요. 주기철, 손양원 비교 안 됩니다. 어데 사울이 흠이 없다 했는데요. 어데 거기서 붙어요.



10분 쉽시다.

 

 

 

2009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역대기 <제3강>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다윗에게 하나님이 약속해서 ‘너를 영원히 축복하겠다.’ 근데 지금 다윗에게 전쟁을 많이 해서 레위 지파를 지키기 위한 전쟁,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점선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에 레위 지파가 들어가요. 땅 이야기를 좀 있다 하겠습니다. 야베스 기도


사실 솔로몬이 지었는데 다윗이 지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을 솔로몬 언약이라 하지 않고, 성경에선 솔로몬이 지어도 그걸 [다윗 언약]이라 한다 이 말이죠. 다윗에서 솔로몬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솔로몬이 다윗에 모아지죠. 이 방향은 바로 밑에 있는 르호보함도 다윗에 모아지고, 아비야도 모아지고, 그 다음에 아사도 모아지고, 여호사밧도 모아져요. 여호람, 여호아하스, 그 다음 아달랴 밑에 요아스, 그 다음에 므낫세, 그 밑에 히스기야 쭉 나오는데


모든 이 사람들이 역사는 이렇게 흘러가지만 방향은 거꾸로 다윗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향의 역순을 지시하는 자를 ‘선지자’라 하지요. 그런데 이 다윗에 올라갈 때에 레위 지파가 여기 있단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를 보존하기 위해서 다른 지파가 수종드는 식으로 사실은 유다 지파뿐만 아니고 모든 지파가 레위 지파를 지키기 위해, 레위 지파는 영원하니까.


레위 지파의 영원함은 결국 뭐냐 하면, 모세 언약이에요. 모세 언약의 완성을 내다보겠다 이 말입니다. 한데 히브리서 7장에서는 어떻게 되느냐 하면, 레위 지파 말고 다윗 지파를 하나님께서 주었는데 다윗 지파는 밑에서 올라와서 아담부터 연결된 이런 지파가 유다 지파가 아니고, 여기 히브리서 7장에 보면, 유다 지파는 바로 하늘에 있는 멜기세덱과 연결돼있는데


멜기세덱이 어떤 분이냐 하면,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다니까 이 지상과 끈이 닿은 그렇게 계신 분은 아니다. 지상의 인간 세계, 육의 세계와 관련된 분은 아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육의 세계와 관련 없으면 그거는 사람이 안 된다고 보는 거예요. 왜냐하면 아담이 누굴 낳고, 누굴 낳고 이렇게 돼야 되는데 아담이 없는 상태에서 누가 등장하면 그건 귀신이지 인간이 아니잖아요.


만약에 마리아가 낳은 예수님 보고 누가 ‘실례지만 아버지 뭐 하십니까?’ ‘아버지 하늘에 있는데요.’ 이러면 곤란하다. 그리고 요셉은 아버지가 아니에요.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밖에 없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어야만 유일하게 아들이 있다 이래 보는 거예요. 다른 것은 인간의 아들이죠. 육의 아들이고. 하늘의 아들, 약속의 아들은 하나님이 아버지가 돼야 된다. 이래 본 겁니다.


그러면 이 멜기세덱이라는 독특한 분이 있어서 이분은 멜기세덱의 반열을 따라서 유다 지파, 다윗이 태어났다 이래 보는 거예요. 보통 유다 지파는 아까 본 것처럼 노아부터 셈과 이렇게 보통 봤는데 그렇게 보지 않고 유다 지파는 멜기세덱에 반열에 들어가서 독특하게 등장했다 이 말이죠.


만약에 지상 같으면 지금까지 역사에서 뭐냐 하면, 유다 지파는 레위 지파, 모세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그걸 수용하기 위해서 전쟁도 해야 되고 선봉장이 되어서 지켰다 해서 유다에서 하나님이 가운데 레위 지파가 있는 반면에 방향이 다윗에서 레위에서 이렇게 가는데 이게 하늘의 멜기세덱이 돼버리면 방향이 뭐냐? 레위 지파를 통해서 다윗이 이렇게 돼버린 겁니다. 그러면 여기 멜기세덱에 의해 등장한 다윗은 이미 안에 뭐가 포함돼있어요? 레위 지파가 이루어야 될 모든 피의 제사를 완성된 채 이 땅에 태어난 게 돼버립니다. 그게 히브리서에요.


실제로 방향이 땅에서부터 인간 쪽에서 하늘에 올라가려면 뭔가 십일조도 받아 챙겨야 되고, 뭔가 재물을 받아야 되는데 그게 안산홍집단 아닙니까. 유월절 지켜야 된다는 집단이잖아요. 뭔가 있어야 된다는 건데


만약에 예수님께서 레위 지파를 완성하고, 그러니까 율법 폐지된 거예요. 완성된 채로 예수가 등장해버리면 예수님 쪼개보면 그 안에 뭐가 들어있어요? 피가 들어있고, 이 피는 무슨 피 입니까? 그냥 알에이취 플러스 에이 형입니까? 이 피 안에는 모든 구약의 이스라엘이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모든 인간의 부족한 것, 모자란 것, 못한 것을 다 이루는 피거든요.


이 피는 역대하에선 [소금 언약]이라 합니다. 소금 언약이 피를 보호하고 지켜내는 겁니다. 소금 언약을 다른 말로 하면 ‘영원성’. 영원성이니까 오래간다는 말이 아니고, 그 출처가 어디 있다? 하늘에 있다. 하늘의 영원함이 포함돼있는 거예요. 그 소금 언약의 내막을 다음에 이야기할 건데 지금 이야기하겠습니다. 다음에 이야기하는 건 싫어요. 찝찝해서 듣는 사람이 딴 것 있는데 안 되잖아요. 진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레위기 찾아보겠습니다. 그래서 ‘율법이 폐기됐느냐, 아니면 아직도 존속하느냐’ 그 문제를 성경신학자들이나 조직신학자들은 만날 따지니까 인간이 아직 율법을 지켜야 되느냐 안 그러면 안 지켜도 되느냐? 안 지키면 폐기론자인가? 논쟁 하는데 이걸 수직적으로 봐버리면 아무 문제 일어나지 않지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율법은 완성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거기서 행해서 의를 이룰 수 있는 율법은 없어요. 그리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임으로써 죄인인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는 것, 이것을 로마서에서는 두 자로 뭐라고 합니까? [복음]이라 하죠. 드디어 다윗 언약에서 약속대로 오셨으니, 그분이 바로 복음이다.


그 복음이 뭐냐 들어보니까 ‘하나님의 의’다. 그 의가 왜 기쁜 소식이 되느냐? 그거는 행함이 아니고,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에 의해서 ‘어, 나타났네.’ 그게 구원받는 거예요. 열심히 행한 자가 아니라 ‘어! 나타났네. 멜기세덱이 하늘에 속한 족보로써 나타나버렸네.’ 그걸 인정하는 그것이 바로 의인되는 겁니다. 그래서 개 같은 이방인들도 구원받지요. 유대인들은 그 소리 듣고 환장합니다. 그동안 그들이 쏟아 부은 십일조와 안식일과 법 지키기에 얼마나 많은 수고했습니까?


그 수고 중에 제일 큰 수고한 사람이 사울이란 사람이잖아요. 사울이란 사람이 다메섹에서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그런걸 뭐로 봤습니까? 네 자로 이야기했어요. 똥∙덩∙어∙리. 나를 쓰레기로 배설물로 여겼다. 배설물이 거기 처음 나와요. 강마에보다 사울이 처음에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그런 의미를 똥덩어리, 배설물로 여긴다 했어요. 똥, 오줌으로 여긴다 했습니다. ‘뭐 자랑할 게 없어서 그걸 자랑하나’ 이래 이야기한다고. ‘그래 너거들 그거 자랑해라. 난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할게.’


고린도전서 2장에 나오지요. 세상에 우리들 봐라. 잘난 사람 누가 있나. 하지만 우리 가운데 자랑거리가 있다. 그건 뭐냐? 자기의 행함이 아니고, 돈 많은 걸 자랑하는 게 아니고, 우리의 자랑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한다.


레위기 2장 13절에 보면,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이래 돼있어요. ①방부제 역할 한다. ②짠 맛을 내기 위해서. 주님께서 짭쪼름한 걸 좋아하시나. 잡은 제물을 무슨 방부제를 칩니까? 오래 묵혀서 홍어 묵힌 것 하려 합니까? 냄새 얼마나 지독한데. 영원함을 삽입시키는 하나의 마크지요. 이것은 하나님께 바칠 거다. 그리고 이 제물은 하늘에서 와야 된다. 소금을 침으로 말미암아 영원성 속성을 소금이란 것을 표시를 하는 겁니다. 그 소금을 침으로 말미암아 영원함이 담기신 것은 하나님의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냥 인간의 음식물이 아니고. 그 소금 언약을 역대하에서 아비야란 사람이 여로보함하고 전쟁하면서 그 이야기를 합니다.


역대하 봅시다. 역대하 초반에 나오죠. 역대하 13장 5절 누가 읽어보세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이 아니냐” 아비야란 사람이 남쪽 나라 두 번째 왕인데 도대체 뭣에 근거해서 이렇게 소금 언약 영원함을 하느냐 하면


민수기 18절 19절, 다같이 읽어볼까요? 역대상은 족보기 때문에 보기도 곤란하잖아요. 재미없어요. 이런 건 괜찮아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모든 성물은 내가 영영한 응식으로 너와 네 자녀에게 주노니 이는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변하지 않는 소금 언약이니라” 영원히 보여기 위해서 걸어놓는 제사, 영원한 거제에다 소금 언약이다. 하나님에 대한 응식. ‘응식’이란 음식이란 뜻이에요. 하나님이 주신 음식이다. 이게 소금 언약이란 거죠.


그래서 소금 언약이라는 그것을 구약 사람들은 자기 지파 중에 레위 지파가 있으니까 이 레위 지파가 그들이 제사를 드림으로 말미암아 자기들 속에 있는 레위 지파가 제사 드리는 그것으로 인하여 자기 나라는 영원한 나라로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갈 수 있다. 그게 ‘하나님의 약속이다’라고 영적으로 해석 못하고 문자적으로 해석한 겁니다.


근데 신약에 와서 진짜 아들이 나타났어요. 요단강 세례 받으면서 예수님 나타나서 해석의 모든 방향이 밑에서부터 위로 가야할 위에서부터 아래로 모든 방향을 완전히 바뀌어놓고 말았어요. 거기서 뭣이 튀어나와야 되느냐 하면, 왜 인간은 밑에서부터 위로 할 수밖에 없는, 어떤 명령과 어떤 규범을 줘도, 구약성경을 줘도 항상 밑에서부터 위로 할 수밖에 없는 왜 그런 속성이 들어있는가가 비로소 밝혀지는 거예요.


단순히 너희는 해석을 잘못했다가 아니라 그런 잘못된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는 원천까지 그 메커니즘, 그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 되는 겁니다. ‘너희들 속에 악마 있다’ 이 말이에요. 단순히 너희들이 지식이 모자라고 지혜가 모자라서 성경을 영적으로 해석 못하고 뭔가 영적인 해석을 가로막고 있는 악신의 지배를 받고 있다 이 말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 나오지요. 너희들은 지금까지 어두운 권세 속에 공중 권세에 속했으니. 그러니까 그 특징이 뭐냐? 항상 자기 의를 위한 자기 행위, 자기 정당성을 위한 자기 행위.


어제 제가 설교한 것 그거잖아요. 유대인들이 바리새인에게 묻잖아요. ‘남자가 자기 아내를 버리는 게 옳으니이까?’ 뒤에 뭐가 붙느냐 하면, ‘옳으니이까’. 아내를 버리려고 작정한 것 같아. 항상 바리새인은 솔직하게 ‘옳으니이까’ 했지만 사실 우리는 말은 안 했지요. 뭔가 해놓고 뒤에 ‘옳으니이까’ 붙여요. ‘주여, 십일조 안 해도 옳으니이까?’ ‘회사 바빠서 교회 안 나와도 옳으니이까?’ 바빠서 교회 안 나오면 안 나오는 것이지 인간의 본성이 뒤에 붙여요. ‘옳으니이까’


자기 행동하면 되는데 누가 뭐라 했어요. 그 말만 붙이면 되는 거라고. ‘옳으니이까’ 일요일 날 손님 때문에 가게 문 열었습니다. ‘열으세요.’ 그러면 되는데 ‘열어도 됩니까?’ 왜 묻느냐 말이죠. 연다고 잘한 것도 아니고, 안 연다고 못한 것도 아니고, 문 닫아도 잘한 것도 아니고. 잘한 것 없어요.


어떤 분이 상담하기를 ‘아이고, 목사님. 제 남편 오늘 산에 안 가고 꼬셔서 교회 왔습니다.’ 어쩌라고? 옳으니이까. 교회 온 게 옳은 거 아니에요. 진짜 옳은 게 뭐냐 하면, ‘주께서 허락하셔서 왔습니다, 주께서 오게 했습니다’ 이게 옳은 거지, 항상 출발을 주님이 아니고, 항상 내가 꼬셔서 왔다는 거예요. 꼭 자기를 집어넣고 플러스 한 세트처럼 ‘옳으니이까’ 이거 붙이는 것.


창기가 너희들보다 먼저 천당 간다. 이 말을 제대로 들으면 ‘아, 주의 의로 구원받는구나’ 이래 알면 되는데 그걸 어떤 창녀가 듣고 ‘창녀도 옳으니이까’ 하면 곤란한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모든 성령이 없는 사람은 출발을 하나님이 하는 게 아니고, 항상 자기 정당성을 밑에 깔고 이야기해요.


구약에 있는 이 구조, 역대상 모든 족보의 구조가 에스라, 느헤미야의 열심과 그게 하나님 뜻 맞아요. 맞는데 그들은 뭘 오해했느냐 하면, 학개 이야기하고 스가랴 이야기한 것처럼 하나님의 성전은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고 스가랴에 보면 뭐로 짓는다? ‘하나님의 신’으로 짓는다 했습니다. 근데 하나님의 신은 그냥 오는 게 아니에요.


성령이 오시려면 성령을 보내줄 분이 먼저 와야 돼요. 이게 사마리아 여인이 알고 있었던 겁니다. 메시아가 먼저 와야 그 다음에 메시아가 성령을 줘야 그 다음에 영적 예배가 되어야 이게 바로 다윗 언약의 성전 중심의 예배가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메시아다’라는 이야기부터 먼저 하신 게 아니고, ‘내가 목마르지 않은 물을 줄게’라고 한 거죠.


이 여자가 ‘물을 줄게’ 하니까 이게 H2O인 줄 알았어요. 수소 둘, 산소 하나 뭡니까? 물이죠. ‘야, 그분 있으면 두 번 다시 안 뜨러 와도 되겠습니다’ 하고 ‘물동이를 가득 채울 수 있는다’ 이렇게 했어요. 그 여자가 주님께서 메시아에서 성령을 줄 때 인간의 문자적 사고방식 속에 그냥 주는 게 아닙니다. 확 파내고 줘요. 지금 다섯 명 사귀는데 지금 사귀는 남자, 여섯 번째지요? 오케이. 기술도 좋다. 다른 사람은 한 사람은 없어서 장가도 못가고, 시집도 못가고 있는데. 완전히 엘리자베스 테일러쯤 되는 모양이죠. 일곱 번 결혼한 사람인데.


확 파내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메시아로 성령 주니까 이 여자가 물동이를 채울 생각 안 하고 뭘 버렸습니까? 물동이 갖다 버려버렸어요. 물 뜨러 왔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미쳤어. 보통 이야기가 이래 되면 ‘야, 물동이가 채워져도 물이고, 채워져도 물이다’ 이렇게 돼야 되지 않습니까? 이게 한국교회 원하는 게 아닙니까. 통장에 빼나가도 또 채워지고 빼나가도. 사렙다 과부인데 봐주소. 기름병마다 채우고, 채우고 하잖아요. 주께서 채우는 대신 망치 들고 참 기름병 다 부셔버려요. 다시는 자기한테 그런 소리 하기만 해보라. 다 부셔버립니다.


구약의 축복은 소와 양떼가 늘어나는 거죠. 신약의 축복은 뭐냐? 이미 우리는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게 축복이에요. 에베소서 3장에 나왔습니다.


레위 지파를 옹호하는 것, 이 모든 관계성 속에서 이 자체가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셨느냐? 부셔지게 하는 성전을 왜 만드셨는가? 그것은 이미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입장에 있습니다. 그런데 쫓겨난 입장이 안 쫓겨났다 하니까 벌써 문제가 시작이 된 거예요. ‘이만큼 살만하다.’ 이렇게 나온 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돌아갈 본향을 그리워하는 게 아니고, ‘뭐, 쫓아낸 채로 살지’ 이래 된 게 가인의 후예들입니다.


아벨을 죽어도 천국에 가는데 가인의 족속은 만날 이 땅에 살려고 하는 거예요. ‘너, 몇 년 살았노?’ ‘구십.’ ‘좋겠다. 우리 엄마 팔십 돼 죽었다.’ 이것 가지고 기 죽고, 기 살고 한다 이 말이죠. 중요한 건 생명나무죠. 생명나무 주는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선악과를 따먹고    ‘너는 얼마나 착하노?’ ‘스무 개.’ ‘나는 서른 개.’ ‘어매 기 살아.’ ‘얼마나 훌륭하냐?’ 그것 가지고 싸움한다고. 창기와 세리가 너희들보다 천당 먼저 간다.  


거지 나사로가 착한 일 할 수도 없고, 하지도 못한 사람이에요. 거지 나사로가 노동한 것을 뭐냐 하면, 기껏 자기 다리 긁은 것밖에 없어요. 그것도 훌륭한 노동이지요. 그건 노동한 게 아니고 자기 편하느라 긁었어요. 아프니까 긁었고. 긁으니까 옆에 있는 개들이 와서 핥았다고. 같은 팔자라. 개 없었으면 얼마나 섭섭했겠어요. 지가 구원받을 짓을 한 게 없어요.


제가 아까 했지요. 몸이 아파서 치매 걸렸다면 그 사람 어떻게 구원받겠습니까? 간단해요. 그 사람이 건강할 때나 아플 때나 상관없이 항상 동일하게 뭐냐?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우리에게 나온 능력이 아니라 성령이 주신 능력이 선물로 주어집니다. 이것은 ‘우리의 행함이 아니요’라는 고백을 반드시 팔아먹게 돼있고, 그 믿음은 ‘주께서 주셔서 박혀서 구원받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레위 지파가 우대가 되고 왜 다른 지파는 레위 지파를 옹위해야 되는가? 그게 바로 유명한 야베스 기도에 나옵니다. 역대상 4장 10절에 나옵니다. 야베스는 유다 지파에 속하는데 야베스 이전에 누굴 낳고, 누굴 낳고, 누굴 낳고 쭉 나오다가 뒤에도 마찬가지에요. 이 4장 1절에 “유다의 아들들은 베레스와 헤스론과 갈미와 ....” 쭉 나온다 이 말이죠.


다시 제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유다의 B에 선형 지파가 나오더라 이 말이죠. 여기에 나오다가 8절에 보면, “고스는 아눕과 소베바와 하룸의 아들 아하헬 족속들을 낳았으며” 신학생들 가운데는 시건이 없는 사람들이 많아요. 뭐냐 하면,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 근데 성도가 말씀을 먹고 살아야 된다. 이 말은 곧 성경을 다 외워야 한다’라고 할 때 그러면 그 사람은 역대상 외워보라 하죠. 죽기 살기로 하면 한 시간 외울 수 있을 거예요. 한 시간 뒤면 다 잊어버립니다. 치매 걸리면 다 잊어버려요. ‘예수님이 누구시더라?’


세상에 성경을 외워서 지키는 것은 유대적 사고방식이에요. 그러면 성경 안 읽어도 됩니까? 이 말은 아까 했지요. ‘안 잃어도’ 뒤에 ‘옳으니이까?’ 주께서 성경을 알게 하십니다. 평소에 성경 못하다가 실직하고 난 뒤에 성경 본다든지, 기도에 응답한 거예요. 기도가 무슨 기도라 했습니까?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내 뜻은 뭐냐 하면, 직장 생활 오래는 거고, 아버지 뜻은 직장생활 그만하고 성경 보라 하는 거고. 그러니 모든 것이 범사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잖아요.


가장 선한 모습이 거지 나사로입니다. 아주 멋지게 선을 이뤄요. 왜냐하면 봐라 거지라도 천당 가잖아. 그처럼 양극화 된 모습을 통해서 복음의 위력이 생생하게 드러난 것이 별로 없지요. 거지 나사로 이야기 앞에 예수님 언급 하신 말씀이 있죠. “너희들은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좋아한다.” 재물을 더 좋아하는 인간에게 복음을 전한다? 그거는 참 웃기는 이야기죠.


그렇다면 재물을 좋아하는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는 전하는데 전하는 방법이 뭐냐? 재물 하나도 없는 인간이 천당 간다. 이것보다 재물 있는 사람에게 복음 전하는 더 좋은 방법 없어요. 건강한 사람이 하나님 어떻게 합니까? 간단하죠. 아파서 아무것도 못하는데 천당 갔다. 이게 최고의 방법이에요. 교인수가 늘지 않아서 고민하십니까?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자기 마누라마저 마지막 교인이 떠나고 난 뒤에 그 사람 굶어 죽어 천당 갔다. 그것처럼 기막힌 복음도 없다.


저의 어느 글에 있었지만 인간은 항상 속에 뭐가? 이거에요.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솟아 올라옵니다. 두려움의 실체는 몰라요. 이유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꼭 멜기세덱 같아. 뭔가 아무것도 잡히지도 않은 두려움, 표현되지 않은 공포, 알 수 없는 공포. 여기와도 십자가마을 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에 혹시 가스 안 끄고 왔는가? 알 수 없는 두려움, 이거 육으로 해결하면 이거 성화론입니다. 두려움을 착함으로 메우려 하는 것은 선악적 사고방식이죠.


복음적 사고방식은 두려움을 하는 그 인간, 죽었단다. 십자가로써 그걸 두려워 벌벌 떠는 진동이죠. 못 박아 놓고 떨고 있죠. 우리는 구경하면 되죠. 쟤는 못 박아 놓고 떠는구나. 성도의 삶은 뭐냐? 평생 동안 못 박혀서 떠는 거예요. 구원받는 것은 떠는 걸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십자가 때문에 구원받고. 혼자 계속 떨고 있어요.


우리 어머니도 그런 이야기해요. ‘내 죽으면 너희들 모르면 우에겠노?’ 진짜 자기가 죽고 난 뒤에 일주일 내에 발견 못할까봐 두려워하고 있어. 우리 어머니가 열다섯 살 때 그런 생각 안 했을 겁니다. 열다섯 살 땐 ‘얼굴 예쁘냐’ 그것 생각했지, 나 죽고 난 뒤에 발견 될까, 안 될까 그것 걱정하지 않는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수시로 전화해요. 나 살아있다고. 어쩌라고요. 빨리 발견하라고. 쓸데없는 걱정하고 있어요.


야베스는 땅에 관한 기도했어요. 야베스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잘못 더해버리면 복불복 돼버립니다. 복수에요.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이 야베스의 기도는 무슨 기도냐 하면, 바로 ‘없다’는 현재 내게는 ‘아무것도 없다’는 고백이에요. 이걸 만약에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강남의 부동산중새사들의 기도에요. 땅값 오르게 하옵소서. 내 부동산 그래서 야베스의 기도가 한동안 한국교회에서 크게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교육관 지어야 되고, 주차장 넓히는데 다같이 야베스 기도하자고 통성기도했어요.


제가 아까 했지요. 하나님께서 성령을 줄 때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줄 때는 어떻게 할까요? 그 사람 있는 상태에서 물 주게 되면 그 사람은 그 상태를 못 벗어납니다. 후벼 파서 ‘더 이상 내가 메시아를 만날 자격도 못 되고, 나 같은 여자가 메시아 만나서 구원받으면 횡재다’라는 인식을 갖는 그러한 작업, 그게 다윗 언약이거든요. 그 작업만을 위한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에요. 모든 게 감사할 거리지, 내가 불평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0.5초라도 깨닫게 하는 그 일만 주의 일이고 나머지는 주의 일이 아니에요.


야고보서 4장에 보면, “내가 아무 도시에나 가서 이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그게 악한 일이에요. 어떤 도시에 일년을 유하며 이익을 보리라 한다. 참된 흐름은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이것도 저것도 하리니. 완전히 자기를 뭐로 봅니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전혀 없습니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피]라는 책에 보면 나와요. 기도에 대해서 뭐라고 하느냐? 기도는 어떤 상태에서 한다? 하나님이 기도를 시킬 때 성령께서 할 때는 반드시 우리로 무능과 무소유로, 아무것도 가진 것도 없고, 전혀 아무것도 못하니까, 쉽게 말해서 치매라. ‘아무것도 못하니까 주께서 거절하든지 뭘 하든지 간에 마음껏 사용해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게 주기도문이에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내 이름 말고 주의 영광을


그 주기도문이 우리는 못하는데 성령이 오게 되면 안 해도 하게끔 만들어요. 마태복음 6장의 말씀이 이뤄지게 하는 거예요. 성령이 말씀을 가지고 이뤄지게 해요. 우리의 가짜 기도 다 퍼내요. 물론 몇 초나 가는지, 2초 가는 사람 있는데 대단한 사람이죠.


그래서 역대상하를 앞으로 쭉 보게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도를 안 해요. 왕들 기도 안 합니다. 언제 왕들이 기도하느냐 하면, 꼭 아람, 암몬, 모압, 에돔, 앗수르 이런 주변의 나라들이 쳐들어올 때에 그때는 그들이 기도를 해요. 므낫세 같은 사람은 그렇게 까불다가 앗수르한테 쫓겨서 호되게 혼나고 난 뒤에는 겸손해져서 그 다음부터는 자기 손으로 부셨던 성전을 다시 수축하고 이렇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빼꼼이 야베스 기도를 이뤄줬어요. 그 기도를 다시 한번 읽어볼게요.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이 말은 곧 지금 나에게 뭐가 있다? 반드시 근심이 없게 하기 위해서 근심이 있어야 되고, 근심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근심은 누가 유발해요? 남의 백성 같으면 근심 안 합니다. 근심 하면 안 되지요. 주의 백성이기 때문에 본인은 근심 안 할 줄 알았더니만 막상 모압, 암몬, 앗수르 쳐들어오니까 갑자기 생존의 위협을 느끼면서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성도의 삶이라 하는 것은 이만하면 걱정, 근심 없다 돌아서는 순간에 걱정, 근심이 또 오고, 이만하면 이 일 해결했으면 걱정 없다 하면, 애 셋이 있으면 첫째 문제없으면 둘째가 생기고, 둘째가 없으면 셋째가 생기고, 셋째가 없으면 첫째, 둘째 생기고. 그러니까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이 그 말입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 항상 흔들리게 돼있다. 자식 많을 경우에는.


‘자식 적게 낳으면 게 옳으니이까’ 하면 곤란합니다. 옳은 게 아니고 그런 자식 줘도 하나님 은혜인 줄 감사히 받으면 그만이다 이 말이죠. 받는 방법에 인위적이 있어서 문제지만. 인위적이든 뭐든 간에 백성은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게 없어. 인위적도 주께서 허락하셔서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제가 첫째 시간에 사람 골격 모습으로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 오른쪽에 유다, 왼쪽에 이스라엘 족보 했지요. 제가 뭐라 했습니까? ‘중심점’을 찾으라 했지요. 이 중심점 역할을 하는 게 선지자입니다. 여기에 역대상, 역대하, 열왕기상하를 보면서 일반 교인들이 뭘 오해하느냐 하면, 목사도 마찬가지지만. 현대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역대상, 역대하를 많이 봐요. 현대적 사고방식이라 하는 것은 어렵게 말해서 ‘주체의식’이거든요.


주체의식이란 것은 내가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에 내 가족, 동심원 그려가면서 점점 중요하죠. 국가가 중요하지만 국가가 세금 너무 때리거든요. 미국 이민가는 수가 있죠. 내가 제일 중요한 거예요. 남편이 사랑스럽지만 남편이 애를 먹이면 도망가잖아요.   


‘내가 제일 중요해’ 이런 의식 가지고 바라보면 만약에 왜 역대기, 열왕기에는 백성들은 가만있다가 얻어맞아요. 아하스 같은 경우에 베가라는 북쪽 이스라엘과 르신이라는 아람 왕이 와서 무려 십이만 명을 죽이고 이십만 명을 포로로 잡아가요. 엄청난 것 아닙니까. 그걸 보면서 현대 의식 가지고 아하스란 왕이 잘못했지 죄도 없는 백성들이 죽느냐 이 말입니다.


이건 멀리 갈 것도 없어요. 마태복음 2장에 보면 뭐가 나옵니까? 마태복음 2장에 보면 억울하게 죽은 애들 있지요. 저는 강호동의 [스타킹]에 나오는 애들 보면 그 생각나요. ‘아이고, 참, 스타킹 때문에 애들 많이 버려놨다.’ 스타킹이란 프로 여러분 거의 안 보잖아요. 저도 거의 안 보는데 가끔 보면 나와요. 애들 나와서 트로트 부르고 하잖아요.


마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을 천사들이 빼돌리고 2년 밑에 태어난 것 뒤늦게 헤롯 군대 와서 두 살 밑에 애들 다 죽였습니다. 그 엄마 입장 생각해 보세요. 거기 오대 독자, 육대 독자 있을 건데 그것 생각 안 하잖아요. 그런데 도대체 현대적 사고에서 성경을 보고 싶은 마음이 안 들지요. 나한테 어떤 이득이 와야 될 텐데 하나님이 하는 일이, 하나님이 자비의 하나님이고 사랑의 하나님이라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은 오직 폭력에서 폭력밖에 없어요.


왜 폭력이냐? 매 맞을 만 하거든. 지옥 보세요. 지옥만큼 폭력적인 있습니까? 하나님이 폭력이라고 외치는 그들도 폭력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겁니다. 너무나 폭력적이에요. 그래서 아까 이야기한 메시아는 사라지고 폭력이 없는 메시아를 크리스마스에만 오시는 분이 있어요. 울지 않는 애들 선물 주는 누굽니까? 산타클로스.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가운데서 폭력적인 사람 나와 보라고 그래. 없습니다. 무슨 조폭이 이것 덮어쓰고 선물 줍니까? 없지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는 항상 어떤 경우에도 인자하시고 웃습니다. 울면 안 주지만 울어도 줘요.


진짜 메시아는 폭력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거절할 수밖에 없는, ‘난 너하고 안 놀아’란 말이 서슴없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그런 메시아에요.


폭력 중에 폭력은 뭐냐 하면, 모압이란 나라를 다윗이 점령할 때 어떻게 했느냐? 두 줄 사람은 죽이고 한 줄 사람은 살려줬어요. 줄 그어놓고 2/3는 죽이고 1/3은 살려줬어요. 사람들이 다윗 앞에 붙이는 게 있죠. 두 자로 무슨 다윗? ‘성군 다윗’ 무슨 성군이 그런 성군이 다 있습니까? 사람 죽이면 그냥 죽이지 사람 죽일 때 개미 죽이듯이 어떻게 그렇게 죽입니까? 성군이라고 이름 붙이려면 ‘성군 세종대왕’ 이렇게 하지 그걸 다윗에게 붙여요?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입니까? 저나 여러분들이 다행스럽게 여겨야 돼요. 그 무서운 분한테 사랑을 받은 줄 아시기 바랍니다. 귀싸대기를 때려도 괜찮을 우리가 오히려 피라는 이름으로 그분의 생명을 얻어먹었습니다. 이래도 주님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랑이 얼마나 귀한지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아주 극도의 폭력을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폭력이 어떻게 사랑으로 변했는가? 그 놀라운 기적을 성령을 통해서 직접 체험하라는 거예요.


오늘 여러분의 꿈은 폭력적인 하나님이기를 바랍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바로 ‘하나님이여, 땅을 넓히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 땅 넓히는 게 복이 되게 하옵시고, 우리로 근심과 모든 환란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이것이 바로 유다 지파 속에 포함돼있는 야베스의 기도입니다. 한숨 쉬어가면서 뭐가 낳고, 뭐가 낳고 하다가 후~ ‘주여’ 야베스의 기도가 나오고 난 뒤에 그러자마자 또 뭡니까? “수하의 형 글룹이” 뭘 낳고, 낳고 한다.


뒤에 ‘낳고’가 나오는데 그때부터 나오다가 그 뒤에는 23절에 보면, “이 모든 사람은 옹기장이가 되어 수풀과 산울 가운데 거하는 자로서 거기서 왕과 함께 거하여 왕의 일을 하였더라” 이렇게 나온다고. 그렇다면 역대기를 하신 그 취지가 나오지요.


야베스가 기도함으로 말미암아 야베스 기도 이전에 이 사람들은 뭐가 있느냐 하면, 사람만 있지요. 야베스 기도의 응답이 되면 뭐가 주어진다? 지경, 땅이 주어지죠. 그런데 그냥 주는 게 아니고, 이 사람들로 환란과 근심에 잠기게 하죠. ‘환란과 근심이 잠긴다’는 말은 자기가 할 도리를 다 해봤는데 백날 소용없다는 말 아닙니까.


그때 그들은 야베스의 기도에 하나님께 참여하겠지요. 그러면 야베스의 기도는 어디에 포함되느냐 하면, 다윗의 언약 속에 포함된 기도가 된다 이 말이죠. 앞으로 어떤 다윗 언약도 무슨 언약대로 된다? 야베스의 기도대로 될 것이다 이 말이죠. 그걸 사람들이 미리 참여하는 거예요.


미리 참여해서 그때 땅이 주어지게 되면 이 땅은 누가 주어진 거예요? 자기가 얻어서 한 겁니까? 아니죠. 하나님 거저 주시는 땅에 자기는 살아감으로 말미암아 사실은 거저 주시는 땅이기 때문에 자신은 어떤 결과가 됩니까?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사명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진짜 이스라엘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 교회 누가 이뤘느냐, 이 교회 누가 세웠느냐? 만날 자랑하죠. 사실은 그래 하면 안 되고, 야베스의 기도에 들어가 보면 뭡니까? 이 교회도 주님 주신 것이고, 자식이 세 명 있으면 세 명 다 하나님 주신 것이고. 그 중에 하나 잃으면 하나님께서 욥기처럼 데려간 거고, 또 주시면 주시는 거고.


항상 우리에게 모든 게 거저 주시는 거라는 생각을 가질 때 그 거저 주시는 거저 주심이 그 바탕이 뭐냐? 그 뒤에 나오죠. 바로 6장에 보면, 무슨 족보 나옵니까? 아까 봤지요. 레위 지파 또는 누구? 아론의 제사장. 그 제사장은 뭐가 없다? 딴 사람은 땅을 주는데 그 사람들은 땅 주시는 대신 땅이 나올 수 있도록 하는 피 제사를 드리는 그 작업을 그들은 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이거는 죽으나 사나 레위 지파를 우리가 지켜야 되고, 레위 지파의 하는 일을 우리가 무시하면 안 되고, 마지막까지 모세 언약이니까 하나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가 다윗 같은 그런 분이 오셔서 이 레위 지파가 영원히 안정되게 보장할 수 있는 우리는 하나님께 섬기는 생활을 해야 된다’라는 그런 흐름으로 이 족보가 이어진 겁니다. 동서남북 봤지요.


역대상 1장부터 처음으로 돌아가서 흩어보면 흩어볼 때 넘기면 돼요. 사람 이름이니까 못 본 척하고 흩어보면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아까 다 했잖아요. 드디어 9장에 들어갑니다. 9장에 넘어가게 되면 진도가 갑자기 빨라지지요.


9장 17절 뭐가 나오지요? 레위 지파 나오잖아요.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느냐 하면, 여기에 무슨 이야기가 나오느냐 하면, 포로 잡히고 난 뒤까지 족보가 하여튼 나와요. 9장 넘어가고 레위 지파 쭉 나오고, 그 다음에 10장에 들어가면 드디어 본격적으로 사울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족보 전체가 레위 지파로 끝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 언약을 이루는 그 목적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재배치를 해서 이어지는데 그 레위 지파를 이루는 작업이 성전에서 이뤄지고, 그 성전이 현재 유지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떠나지 않고 있다는 증거가 확보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10장부터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그 성전 짓기 위해서 어떻게 다윗이란 인물이 등장할 수밖에 없는가? 어떻게 유다 지파에서 다윗 한 사람밖에 없는가? 그 이야기가 쭉 이어지면서 그 다음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 다윗이 왕이 되고 난 뒤에 레위 지파를 지키기 위해서 어떠한 행정체제를 바꾸었느냐? 그 이야기가 족보 이야기보다 분량이 더 많아요. 솔로몬하고 다윗 이야기가 거의 역대기 전부 차지합니다.


그건 뭐냐?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소소한 이야기다 말이죠. 이것은 하나의 정상 문제고. 저 눈 덮인 산 정상의 문제는 다윗이 있고 그 밑에 솔로몬, 솔로몬-다윗, 다윗-솔로몬 이 둘만 주인공이 돼요. 그러다가 성전을 통해서 레위 지파 하는 일을 돕게 하기 위해서 둘만 우뚝 솟아나 있는 이 형국이 바로 역대기의 전체 내막이 됩니다.


역대하에 들어가면 뭐냐? 내리막길로 치닫는데 이게 뭐냐? 어떻게 해서 왕들이 내려갔느냐? 제가 하고 싶었던 건 그거에요. 아까 남쪽, 북쪽 나라 중간에 누가 있다 했습니까? 선지자가 중심점이라 했지요.


현대의 사고방식에서는 백성들이 억울하게 죽잖아요. 특히 앗수르의 산헤립이라는 사람, 이 사람이 히스기야에게 쳐들어와서 하루에 십팔만 오천 명이 전사했습니다. 그걸 보면서 느낀 점이 뭐냐 하면, 그놈 잘 죽었다가 아니라, 그 십팔만 오천 명 죽은 가운데서 그 젊은애들 군대 보냈다고 위문편지 보내고 있던 누이동생들, 엄마, 아빠 얼마나 가슴 아팠겠느냐 이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십팔만 오천 명을 한꺼번에 죽여 버렸다고.


결국은 역대기나 구약은 뭐냐 하면, 백성들은 뭘 보여주기 위해서? 다윗 언약을 보여주기 위해서 왕이 제대로 다윗처럼 왕답냐는 겁니다. 그래서 드디어 누구하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왕하고 이야기해요. 백성들은 도와주기만 하고.


그래서 내일 아침부터는 뭘 하느냐? 왕과 선지자의 대결을 어떻게 선지자 방향성이 다윗 쪽으로 왕은 이 나라는 내 것이라는 왕의 자기 이기주의적 사고방식, 그걸 조사해보는 겁니다. 하기 전에 사울이 있는 것은 바로 왜 사울이 아니고 다윗이냐? 사울 같은 사고방식이 솔로몬 이후에 르호보암, 아비야, 아사, 역대기는 전부다 남쪽만 이야기해요. 그쪽 왕들에게 사울적인 정신이 어떻게 퍼졌는가? 그것이 쭉 내일 이어질 겁니다, 그걸 조사해 봐야죠.



마칩시다.

 

 

 

 

2009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역대기 <제4강>

 

역대기상・하를 그림으로 그려보면, 이것을 하나의 산이라고 할 때 다윗가문, 다윗과 솔로몬을 산봉우리에 해당된다고 보고 그 산봉우리를 아담으로부터 타고 올라가서 그 봉우리를 관통한 뒤에 다시 내리막길로 하산하는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역대상하 전체를 제대로 다 읽어본 사람이라면 역대기의 중심점은 이 산 정상에 있는 다윗, 그리고 그 다윗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는 솔로몬, 그 다윗가문에 중점이 있는 책이고, 나머지는 그것을 겨냥해서 다루어지는 내용으로서 야베스의 기도(대상 4:10)까지는 오르막길인데 그 이후에는 거기서 빠져 나왔기에 내리막길을 치달으면서 멸망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처음 출애굽해서 생겨난 이스라엘의 거주지(땅)은 개인의 땅이 없고 지파의 땅입니다. 총 13지파인데 그중에 한 지파인 레위지파만큼은 땅이 없습니다. 각 지파는 총 48개의 성읍, 그 가운데는 6개의 도피성이 있었고, 그 성읍들을 배당받고 임시적으로 거주했습니다. 땅이 없는 레위지파에게 각 지파가 십일조를 내주지 않으면 그들은 떠돌아다니면서 개인 산당, 요즘 한국식으로 하면 명당자리인데 그 명당자리에 가서 점집 차려 놓고 점치는 일을 했습니다.

 

그 당시 성직자들은 종교시세가 안 좋으면 그들의 인생도 따라서 망가지는 겁니다. 떠돌아다니다가 돈 많고 유력한 부잣집에 가서 사적으로 복을 빌어주는 개인적인 점쟁이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일이 이스라엘과 유다에 가득 찼었습니다. 그것을 요시아 왕 때에 총괄적으로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지방에서 레위인들이 점쳐주고 재판까지도 했는데 그 기능들을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한 곳에 집결시키고 그 외에는 다 철폐했습니다.

 

여기에서 반발이 일어납니다. 소위 서울(중앙)에서 노는 제사장들과 지방에 거주하는 하급제사장들 사이에 빈부의 격차가 발생하고 지방의 제사장들은 생활의 궁핍을 면치 못하게 됩니다. 쉽게 하면 요시아는 레위지파에 대한 구조조정을 단행한 것입니다. 구조조정의 명분은 ‘오직 하나님이 인정한 제사 장소는 예루살렘 한 곳 뿐이고 그 외에는 사기다.’ 라는 것입니다.

 

모든 제사장들은 일 년에 세 차례씩 중앙본부에 다녀가야 합니다. 유월절, 수장절, 맥추절 세 절기 때는 모든 제사장들이 예루살렘성소에서 다 모여서 절기를 지켜야 된다는 종교개혁을 단행했을 때 일반 민중들이 좋아했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지방제사장들은 율법과 상관없이 민중들이 원하는 것, 민중들에게 희망을 팔아먹는 대가로서 커미션을 챙기는 일을 해 왔는데 그게 대중들에게는 더 편하고 좋았습니다.

 

일반 민중들에게 율법이라는 것은 골치 아픈 거예요. 먹고 살기도 힘든데 자기 생존이 우선인 마당에 거기다가 법까지 지키려고 들면 그 시어머니 잔소리 같은 것이 그게 뭐가 듣기 좋겠습니까? 사람은 법은 멀고 자기 희망이 우선입니다. ‘새해 복 받으세요.’ 라는 말은 ‘새해 희망을 받으세요.’ 라는 말과 똑같은 말입니다.

 

각 지방마다 산당, 즉 명당자리들이 다 있습니다. 옛날 계시가 임했던 베델, 세겜, 실로같은 장소들이 다 명당자리인데 계시가 임하고 언약궤가 한 번씩 거쳐 갔던 곳입니다. 그 명당자리에서 제사장들이 대중들에게 희망을 팔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당신에게 축복이 있을 겁니다. 올 한 해 내내 평안할 것입니다. 작년에는 집안에 재앙이 있어서 하는 일마다 잘 안 풀렸지만 올 해는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당신의 하루하루가 다 복될 겁니다.’

 

오늘 아침에 해 뜨는 것을 보셨습니까? 오늘 해 뜬 시각이 7시 40분이었습니다. 그 태양이 오르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자신의 희망도 함께 뜨는 것을 느낀다 이 말이죠. 그게 마음에 다가서고 편하지 율법이 어쩌고 단면족보가 어쩌고 선형족보가 어쩌고, 그런 것은 어렵다는 말이죠. 어려운 것이 나오면 제가 미안해 할 일은 아닌데 좀 미안스러워져요. 성경에 이렇게 딱딱한 내용이 나오면 이 어려운 내용을 쉽게 못해주는 약간의 죄스러움? 미안스러움이 있습니다.

 

다윗을 중심으로 내리막길로 치닫는 왕들의 이야기는 주된 것이 아닙니다. 중심은 다윗가문을 구축하기 위해서 군대가 얼마나 동원되었으며 찬양대는 어떠하며 제사장들은 어떻게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중앙에 있는 제사장들만으로는 모자라기에 지방 제사장들이 순번제로 파견근무를 했습니다.

 

처음 출애굽 할 때 12지파(땅이 없는 레위지파 제외한)가 레위지파를 중심으로 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제사를 지킨다는 조건하에 하나님의 주시는 약속의 땅을 받아서 살 때 여기에는 어느 누구도 개인 소유의 땅은 없습니다. 이런 것이 어려운데, 만일에 백성들이 왕을 구해서 왕이 있게 되면 왕은 개인 소유의 땅을 가지게 됩니다. 나봇의 포도원이야기에 그게 나옵니다.

 

아합왕이 보니 나봇의 포도원이 농사도 잘되고 그 땅이 탐이 났습니다. ‘어이, 그 땅 나에게 팔아라. 그 땅보다 더 넓은 땅을 가지게 해 줄게.’ 그 때 나봇의 하는 말이 ‘제가 그 땅을 사고팔고 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주신 땅은 개인 용도로 팔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 신약이나 구약이나 이것을 기업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처음 보는 사람은 기업이라고 하니까 사업이라고 여기는데, 성경에서 기업이란 상속이라는 뜻입니다. 상속에서 중요한 것은 상속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구누구가 주시더라’ 라는 그 ‘누구’에 해당되는 그 분이 중요합니다. 누구누구로부터 분배, 분양받은 상속분이기 때문에 그 상속분을 가지고 있는 한 누구로부터 관계는 끊어지지 않는다는 그 관계성이 더 중요한 겁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들의 기업을 받았다’ 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옷으로 덧입혀진 사람은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가 관계없이 예수로 옷 입은 사람은 주님의 아들이 되고 그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종의 기업이 아니고 아들의 기업, 아들의 상속분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3:26-4:7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자니라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 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그래서 땅(기업)을 좋아서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땅을 어떤 분이 주셨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과 나의 사이가 돈독하다는 것을 그 땅을 보고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 상속권의 신학이 어려운 겁니다. 그 상속권을 구약에서는 야베스의 기도에 나오듯이 땅으로 봤습니다.

 

역대상 4:10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그런데 하나님께서 땅을 줄때 그냥 주는 것이 아니고 전쟁을 통해서 주기 때문에 야베스의 기도이후에는 ‘군대가 몇 명이고, 군대가 몇 명이고’ 라는 기도가 족보에 따라 붙는 거예요. 구약에서는 상속이 약속의 땅인데 신약에서는 갈라디아서에서 그것을 성령이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갈 3: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신약성경의 시대에 살면서 기도해서 부동산을 가지고 장사하려고 하는 사람은 신약성경을 모독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오셨냐?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인데?’ 그런 식이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 안 상홍 집단 같은 경우인데 그들은 ‘당신이 저주받는 것은 유월절을 안 지켜서 그렇고 유월절을 지키려면 돈을 내야 합니다.’ 라고 주장합니다. ‘유월절 지키면 복 받으니까 돈 내놔라’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을 인정 못 하겠다’ 하는 주의입니다.

 

대순진리회를 비롯해서 어느 이단치고 돈과 결부 안 되는 설교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학생들이 그것 듣고 공납금 다 바칩니다. 심지어 달라이라마까지 마찬가지이고 심지어 수녀원까지도 그렇습니다. 수녀원에 들어갈 때 시험만 쳐서 들어가는 줄 압니까? 수녀원에 들어갈 때는 여자가 시집갈 때 혼수 챙기는 것 보다 더 많이 가지고 들어가야 합니다. 일종의 공동체인데 빈손들고 오는 공동체는 안받아줍니다.

 

한밑천 가지고 들어가서 저임금의 노동을 해서 단가를 내린 상품들, 참기름이나 된장 같은 것을 팔아서 공동체들이 운동을 벌이는 겁니다. 된장 참기름 같은 것 만들어서 파는 일은 박 태선집단만 하는 일이 아니라 수녀원에서도 다 하고 있는 일입니다. 서양의 자본주의가 5세기, 6세기 즈음에 수도원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상식적으로 자본주의가 뭐냐, 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어떤 분이 ‘자본주의는 멸망합니까?’ 라고 하는데 자본주의는 멸망하지 않습니다. 보통 경제는 사물과 생산품이 있어서 그것을 주고받는 것인데 자본주의는 초사물적인데 그 말은 ‘잉여’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잉여, 남아도는 것을 만들어 내는 거예요. 전에도 이야기 한 적이 있지만 자꾸 들어야 이해가 갑니다.

 

폴리네시아, 파푸아 뉴기니의 원주민들이 고기를 잡을 때, 하루 두 마리분량의 양식만 필요하면 하루에 두 마리만 잡으면 하루 일과 끝입니다. 그런데 호주에 있는 어선의 선원들이 그 주변의 고등어를 다 잡아갑니다. 원주민들이 보기에 그 선원들은 불쌍하다는 거예요. 호주의 원양어선 선원들이 하루에 고기 몇 마리나 먹습니까? 세 네 마리 먹으면 끝입니다. 그런데 왜 수만 마리를 잡느냐는 말이죠. 대체 이유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어느 것이 정상입니까? 하루 두 마리만 필요하면 두 마리만 잡으면 되고 내일되면 또 두 마리를 잡으면 되고 그렇게 살다가 늙어죽으면 되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natural) 아닙니까? 왜 두 마리만 잡으면 될 것을 가지고 수만 마리를 잡느냐 이 말이죠. 원주민들이 보기에는 이 점이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왜 사람들이 전쟁을 합니까? 그게 잉여 아닙니까?

 

이것이 『피』라는 책에도 나옵니다만 잉여가 어디서 생겼는가를 조사해 보니까, 어떤 돌발적인 사태가 벌어질 때 일상에서 벗어난 어떤 파격적인 일이 돌출될 때 사람은 거기서 존재가치를 느낍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신사가 바나나껍질을 밟아서 철퍼덕, 하고 넘어질 때 사람들이 마구 웃습니다. 술에 쩔어 사는 노숙자가 넘어지는 것은 늘 상 일어나는 일이니까 사람들이 웃지 않는데 말끔한 신사가 넘어질 때는 웃어요.

 

“…… 자본주의에서 가치의 증식은 표상의 트릭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 필요한 교환가치는 그때그때의 물가나 경기에 맞추어 정할 수가 있다. 그에 비해서 노동력의 사용가치는 정체파악이 어려운 변화를 지니고 있다. 교환의 가치를 전혀 어기지 않고서도 노동의 과정으로부터 가치의 증식이 그야말로 합법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 이루어지는 가치증식은 ‘웃음’의 생리작용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신사가 혼자서 흠잡을 데 없는 말쑥한 차림으로 거리를 걷고 있는데, 땅바닥에 버려져 있는 바나나 껍질을 보지 못해 엉덩방아를 찧게 되었고, 그러자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사람들은 박장대소를 한다. 이러한 한가로운 장면을 생각해 보자. 즉 웃음이란 처음 상태와 마지막 상태에서 일어나는 잉여에너지로 인해 발생되는 것이다. 이 잉여에너지가 떠나니는상태인 것이다. 자본 증식의 과정에서도 이와 매우 유사한 상황이 발생한다. 잉여가치는 사용가치가 교환가치에 의해 대신 발생하는 것다. 교환의 사이클로부터 넘쳐흐르는 여분의 가치가 창출된다.…….”(이 근호, 피, 대장간, 2008, 61쪽)

 

이게 뭐냐? 거기서 파격적인 잉여를 생산한 겁니다. 잉여란 욕망에서 나옵니다. 욕망은 창조성을 가지고 있어서 계속해서 욕망을 불 질러서 잉여를 나타낼 때 자본주의는 돌아갑니다. 결국 자본주의는 단순히 그냥 돈 때문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여분의 돈 때문에 돌아갑니다. 왜 그런지 몰라도 여분의 돈을 그냥 갖고 싶은 거예요. 왜? 내 욕망이 그것을 원합니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살다가 자연적으로 사는 것이 권태로운 거예요. 권태를 벗으려면 자기 내부에 들어가 봐야 되는데 그 내부에 들어가 보니까 끝없는 마그마같이 분출하는 욕망이 있어요. 그 욕망을 경제구조로 바깥으로 끄집어내니까 이유도 없이 무조건 많아야 된다는 식으로 되는 거예요. 자본주의가 아닌 시대의 동양사상, 불교, 유교는 사람이 자기 욕망을 스스로 잠재울 수 있다고 봤습니다.

 

특히 불교의 중들과 토론을 벌이고 싶은 주제가 있는데 ‘사람이 죽으면 이것이 없어지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고깃집에서 고기를 칼로 다지고 쪼개듯이 다 산산조각 내면 결국에는 산산이 흩어져서 없어진다고 보는 것이 불교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이 오온(五蘊)이라는 기로 되어 있기에 그 모든 것이 흩어지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그걸 반박하는 것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흩어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몸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자기 몸, 자아때문에 힘드니까 생각해 낸 것이 ‘이 자아만 날라 가버리면 이 모든 것도 함께 날라 가버린다’는 것이 불교사상, 동양철학, 노자사상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만만치 않아요. 사람이 현상학적으로 보면 죽으면 사라진 것으로 보이죠.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안타까운 것은 그동안 함께 옆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것이 상당히 괴로워요. 하지만 그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잊혀져요. ‘사라짐 - 잊혀짐’입니다.

 

그런데 남들이 볼때는 ‘사라졌구나. 안타깝다. 그만 잊자.’ 이렇게 되는데 문제는 죽는 것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보고, 사라지고 싶어서 죽는데, 문제는 안 사라지는 거예요. 안 사라지고 비로소 죽을때 타인이 없고 자기혼자만 있는 순수한 현실로 돌아오지요. 예를 들어서 친구가 죽었습니다. 죽으니까 땅에 묻었습니다.

 

무덤 파보면 흙이 되어 있겠지요. ‘아까운 친구가 죽었구나’ 하고 본인도 사라지고 흩어지기를 원했고 불교식으로 하면 흩어지고 사라지면 그만입니다. 다시 모아지면 환생하지만 어쨌든 흩어지면 그만이거든요. 그런데 성경에서 보면 죽은 부자 나사로가 대표적인 경우인데 막상 죽어 보니까, (안 상태 기자! 안 상태 기자!) ‘난 지옥에 왔을 뿐이고, 난 불덩이 속에 있고, 목말라 죽을 지경일 뿐이고….’

 

죽음이 제일 괴로운 것은, 죽으면 죽을 지경이라는 것, 이것이 문제입니다. 잊기 위해서 죽는데 예수님의 부활에 의하면 사람이 한 번 죽고 난 뒤에는 그 몸이 악한 부활로 그 몸이 다시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사람의 실수가 뭐냐?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 번 사람의 몸이 되면 그게 지옥 갈 몸이든 천당 갈 몸이든 그 몸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빼도 박도 못합니다.

 

운명적으로 새로운 몸인 영원한 장막을 입어야 합니다. 옷은 문화고 문화는 이 지상에서 만들어낸 껍데기입니다. 껍데기는 벗겨지고 알몸으로 가는데 그 알몸은 있어야 합니다. 그 알몸이 바로 ‘나는 …!’ 하는 바로 그겁니다.

 

지금 구약의 기업, 땅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잉여로 돌아가는 것이 자본주의인데 그 자본주의에 물든 사고방식으로 구약의 상속물인 땅(야베스의 기도)을 이해해서 부동산이나 재산의 확장을 노리는 것은 당치도 않습니다. 땅 없는 레위지파를 중심으로 그 나머지 열두지파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땅 없는 레위지파가 하는 일이 제사입니다.

 

땅 없는 열두지파 전부가 하나가 되어서 제사, 그 업무를 보호하고 지켜 냄으로 말미암아 이 지상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땅을 추구하게 된 겁니다. 신명기 12장에 나오죠. ‘내가 지시하는 그 땅에 내 이름을 두겠다’고 합니다.

 

신명기 12:1-7, 18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셔서 얻게 하신 땅에서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와 법도는 이러하니라 너희가 쫒아낼 민족들이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 무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그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서 그 이름을 그곳에서 멸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에게는 너희가 그처럼 행하지 말고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거기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찌니라 …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너는 네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함께 그것을 먹고 또 네 손으로 수고한 모든 일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되 너는 삼가서 네 땅에 거하는 동안에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찌니라.”

 

그런데 신약에 오면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되고 성령 안에서 너희가 나와 하나가 된다.’고 합니다. 새로운 기업, 상속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나봇의 이야기에서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기에 절대로 줄 수 없다’고 하니까 아합의 왕비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왕비의 이름이 이세벨인데 그 이름이 얼마나 예쁩니까? 앞모습이 중요하지만 그 모습은 배제하고 뒷모습만 보고 이세벨, 하면 남자들은 다 끌립니다.

 

뒤에서 ‘저, 앞에 계신 분 누구십니까?’ ‘김 이세벨입니다.’ ‘어머나!’ 이렇게 되는 겁니다. 누가 함부로 이름을 짓습니까? 이것을 음파로 조정해서 장사 해먹는 수가 참 많습니다. 이세벨이 하는 소리가 ‘우리나라에서는 왕이 가지겠다면 그냥 갖는 것이고 그게 법입니다. 여보, 당신은 왕이잖아요. 뭐 그런 것을 가지고 고민을 하고 주저하고 그럽니까?’ 라고 했습니다. ‘아, 그렇구나. 내가 왕이었지.’

 

하나님의 왕 되심이라는 것은 레위지파와 모세율법에 의해서 기업이 이미 확정된 상태에 있는데 거기에다가 사람이 왕이 되어 버리면 사람은 자기 개인적인 소유를 갖기 위해서 자기가 나서게 됩니다. 그러면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아무도 손 못댄다. 네 농사는 네 지파에서 알아서 지어 먹어라. 남의 것을 빼앗지 말고 네 먹을 것은 네가 알아서 지어 먹어라.’ 이것이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의 법입니다.

 

이것이 법인데 이 법이 다윗에 와서 깨져 버립니다. 다윗 대에 와서는 예루살렘이 다윗 개인소유의 부동산이 되어 버립니다. 예루살렘을 다윗성이라고 하는 거예요. 다윗위에 누가 계십니까? 하나님이 계시죠. 하나님이 다윗을 왕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왕이 되는 그 체제를 보이기 위해서 다윗이라는 왕을 세워놓고 거기에 구멍을 뚫어서 다윗은 왕임에도 불구하고 뭘 해야 되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될 왕으로서 등극하는 겁니다.

 

그러면 다윗은 뭐냐? 그냥 들러리죠. 그것을 누가 아느냐? 다윗이 알아요. 물론 다윗도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 저도 명색이 왕입니다. 왕이기에 왕답게 절대적 권력을 행사해보겠습니다.’ 라고 했는데 그러다가 갓이나 나단선지자에게 호되게 당합니다. 다윗이 혼자 다윗성에 있을 때에 우리야의 아내를 탐합니다. 그것은 왕으로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겁니다.

 

하지만 나중에 시편 51편에서 다윗이 뭐라고 합니까? ‘내가 있는 자리가 왕자리가 맞기는 맞는데 그 자리는 하나님의 왕 됨이 나의 왕 됨을 후비고 파는 입장에 놓인 왕이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열왕기나 역대기에 나오듯이 다윗이 이스라엘백성의 숫자를 셉니다.(대상 21장) ‘야, 내가 목회를 잘해서 우리 교인들이 얼마나 늘어났나?’ 하는 식으로 숫자를 셌는데, 성경에 보면 그것은 악마(사탄)의 역사로 인해서 숫자를 세었다고 했습니다.

 

그 일로 하나님이 재앙을 내려서 칠만이 죽었고 ‘다윗이 큰 죄를 범했다’고 할 그 때에 다윗이 제사를 드리는데 그 장소가 나중에 성전이 세워지는 장소입니다. 결론이 뭐냐? ‘다윗은 너의 죄를 알고 그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라는 구심점으로서의 왕이고 용서하고 말고는 다윗을 사랑하는 하나님, 진짜 왕이 다윗을 용서하면 그 다음에 일어나는 현상은 (지금까지 강의한 것 중에서 이것이 제일 중요한 것인데) 왕의 수하에 있는 왕의 사랑받는 모든 백성이 더불어 용서를 받는 혜택이 주어집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은 개개인을 보지 않고 이스라엘 전체 집합체를 하나의 인간으로 봐서 그 인간의 대표자로서 왕을 세워서 그 왕이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하고 그 나머지는 그냥 운명이 결정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편리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편리하죠. 만약에 왕이 정치를 잘못해 버리면 12만명이 죽고 20만씩이나 포로 잡혀가고 포로잡혀 갔던 곳에서 오뎃이라는 선지자가 ‘돌려보내라’ 하는 일이 아하스 시대에 있었습니다.

 

역대하 28:1-11

“아하스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세라 예루살렘에서 십륙년을 치리하였으나 그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치 아니하고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여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또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 자녀를 불사르고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한지라 그러므로 그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람 왕의 손에 붙이시매 저희가 쳐서 심히 많은 무리를 사로잡아 가지고 다메섹으로 갔으며 또 이스라엘왕의 손에 붙이시매 저가 쳐서 크게 살육하였으니 이는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유다에서 하루 동안에 용사 십이만 명을 죽였으며 에브라임의 용사 시그리는 왕의 아들 마아세야와 궁내대신 아스리감과 총리 대신 엘가나를 죽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 형제 중에서 그 아내와 자녀 합하여 이십만 명을 사로잡고 그 재물을 많이 노략하여 사마리아로 가져가니 그곳에 여호와의 선지자가 있는데 이름은 오뎃이라 저가 사마리아로 돌아오는 군대를 영접하고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유다를 진노하신 고로 너희 손에 붙이셨거늘 너희 노기가 충천하여 살육하고 이제 너희가 또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을 압제하여 노예를 삼고자 생각하는도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함이 없느냐 그런즉 너희는 내 말을 듣고 너희가 형제 중에서 사로잡아 온 포로를 놓아 돌아가게 하라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임박하였느니라 한지라.”

 

그러니까 백성들은 자기 운명을 자기가 결정할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특징입니다. 그것을 즐겨하고 그것을 고마워하는 사람이 오늘날의 성도입니다. 내 인생의 운명을 내가 쥐고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분이 쥐고 있다는 것을 감지덕지 고마워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 쥐고 있는 분을 ‘주여!’라고 합니다. 구체화 한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여!’ 라는 말은 ‘내 운명은 내 행함과 관계없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말로만 주여, 라고 해놓고 ‘아이고, 오늘도 성경을 못 읽었네. 오늘도 교회를 못나갔네.’ 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자기가 자기에게 ‘주여!’ 하고 있는 겁니다. 역대기에서 내리막길로 가는 왕들의 잘못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이나 유다라는 나라는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이고 자기들은 백성들을 위하여 용서를 구하는 일만 하면 되는 것이 다윗언약인데 그 나라가 자기의 나라인양 오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특히 르호보암, 발음도 어려운데 북쪽에는 여로보암, 남쪽에는 르호보암, 먹음직 보암직한 두 사람이 있는데, 이 르호보함의 경우에 바짝 3년 동안 신앙생활 잘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대로 신앙생활 잘하니까 땅도 넓혀지고 나라가 부강해졌습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부터는 나라를 자기에게 돌리려는 심산으로 ‘정치를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하고 정치자문을 구했습니다.

 

신하들이 현명한 대답을 해 줬습니다. ‘당신이 왕이라고 해서 백성들 위에 군림하려 들지 말고 설치시지 마시고 백성들의 쫄따구가 되시기 바랍니다.’ 쉽게 말해서 백성들의 존경은 강요로 되지 않고 우러나게 되어 있다는 말이거든요. 백성들은 왕을 다윗을 모델로 해서 다윗과 비교합니다. ‘다윗처럼 하는가 어디 한번 보자. 솔로몬처럼 하는가 보자.’ 한다는 겁니다.

 

‘이미 다윗과 솔로몬이 있기 때문에 당신은 아무리 왕이라도 다윗과 솔로몬처럼 하지 않으면 당신을 왕으로서 취급 안하니 당신은 그냥 백성들의 쫄따구 노릇만 하면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왕이 자기 친구에게 물어보니까 ‘솔로몬은 회초리로 때렸지만 너는 아예 전갈로 내리쳐라.’ 합니다. 그 말이 얼마나 잔인합니까? 아파트 각 호마다 택배로 전갈 하나씩 택배로 보내보세요. 애들 무서워서 못살죠.

 

그만큼 공포정치를 감행한다는 겁니다. 그 말은 뭐냐? 잊어라, 하는 겁니다. 다윗도 잊고 솔로몬도 잊고 다 잊으라는 겁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너의 시대는 없어. 이 나라는 여호와가 왕이지 너희 시대, 너의 것은 없다.’ 그 말입니다. 그게 바로 과거완료라는 겁니다. 여기서 하나 배웁시다. 과거와 과거완료와의 차이입니다. 어렵더라도 배워야 합니다.

 

과거-현재-미래가 있을 때, 여기서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갈 때는 시간이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움직입니다. 내가 현재에 와 있으면 과거는 과거가 되고 내가 다시 미래에 와 있으면 현재도 과거가 되어 버려요. 여기서 주인공이 내가 되어서 내가 과거 현재 미래를 내가 판단하는 겁니다. 칸트는 이것을 폭력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하는 행동을 가지고 강제로 시간을 자르는 행위를 가지고 폭력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시간을 자르는 폭력적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이고, 내일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자기가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잘라서 정해놓는 폭력을 행사해 놓고 걱정은 혼자 하고 있는 거예요. 늦게 오신 분들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사람은 죽을 때까지 속에서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생긴다고 했는데 그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진동(vibration)이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채로도 진동, 벌벌 떨면서 70, 80평생 사는데 구원은 어떻게 받습니까? 십자가 못 자국 때문에 구원받지 자기 하는 일로는 구원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두려움을 없애겠다.’ 하는 그것도 그냥 하지 마세요. 두려움으로 진동하면 운동도 되고 안 좋습니까? 그냥 벌벌 떠세요. 걱정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삽니까? 사람이 걱정 없으면 뭐가 걱정되는 줄 압니까? 걱정 없는 그것이 걱정이 됩니다. ‘분명히 이 시간에 걱정이 있어야 되는데 ….’

 

걱정은 맘껏 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여유만만하게 걱정하고, 말이 좀 이상합니다만 기분 좋게 근심하고. 이렇게 자신이 과거, 현재,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그 몸이 움직여서 되는 거예요. 그런데 성경은 우리 몸 말고 멜기세덱의 반차라고 하는 하늘에 속한 몸이 따로 있기 때문에 우리를 과거 완료에다 집어넣어 버립니다. 과거완료의 결정은 우리한테 있지 않고 예수님한테 있기 때문에 30을 살든, 40을 살든, 80을 살든 이미 이루어진 상황, 이미 결정된 상황 속에서 우리가 그 입장과 은혜와 혜택을 입고 사는 거예요.

 

그것이 에베소서 2장에 보면 ‘하늘에 앉히시니’(6절) 라고 과거완료로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30절) 합니다. 이미 과거완료라는 체육관 안에 놓여져 있으면서 우리는 그 몸이 따라가면서 이미 주님이 이루신 것을 확인하는 차원에서 살아갈 뿐입니다.

 

‘아, 이래서 내가 천국 가는구나.’ 라는 확인차원에서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그 과거완료를 성경에서 표현하는 방법이 부정사, 영어로 하면 to-부정사입니다. to-부정사는 동사를 명사나 형용사로 바꾸는 거예요. 시간과 공간을 묵시적으로 이미 그렇게 되었음으로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do-한다.’가 ‘to do-했음’ 이 됩니다. 이미 확정된 상황 속에서 그 상황은 변하지 않고 우리는 만 날 변하죠. 걱정하면서 만 날 변해도 그것은 상관없는 겁니다.

 

칸트가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과거완료는 발견 못하고 인간이 왜 고민하는가를 철학적으로 따져 보니까 인간이 자기 맘대로 시간을 조정하기 때문임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사람마다 다 달라요. ‘어제 강의시간이 짧더냐?’ 어떤 사람은 ‘난 짧더라.’ 어떤 사람은 ‘나는 길던데.’ 이것이 왜 그러냐 하면 전부다 각자 각자 폭력적으로 행사하는 시간관 때문입니다. 몸이 아플 때는 길게 느껴지고 몸이 건강할 때는 짧게 느껴지는 식으로 다 달라요.

 

그렇더라도 과거완료 속에서 그분의 입장은 변하지 않는 겁니다. 그처럼 르호보함시대부터 ‘내가 왕이다. 그러니 과거를 잊어버려라.’ 하고 백성들은 ‘너는 다윗언약에 의해서 왕이 되었을 뿐이야.’ 라고 합니다.

 

(르호보암) “아니야, 내가 잘났어”

(백성들) “당신이 잘난 것이 아니고 이미 죽은 다윗이 잘나서 그런 혜택을 입고 있는 거야.”

 

이게 다윗언약이거든요. 선지자들이 계속 지적하고 있는 것은 뭐냐?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왜 이탈하느냐?’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왕(아마샤)은 ‘너 맞을래? 너 죽는다.’ 라고 나옵니다. 심지어 요아스라는 왕은 여호야다라는 제사장이 쿠테타를 일으켜서 일곱 살 밖에 먹지 않았을때 세워진 왕입니다. 아달랴라는 이세벨의 딸로 인해 온 나라가 엉망진창이 되었을때 다시 원상복구를 시킨 쿠데타입니다.

 

그런데 그 요아스가 성인이 되고 난 뒤에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제 어미의 유전자를 받은 탓인지 하나님을 버리고 마구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 때 여호야다의 아들인 스가랴 선지자가 있어서 요아스를 말렸습니다. ‘임금님, 이러시면 안 됩니다. 과거를 생각하셔야죠.’ 하니까 ‘이게 어딜 왕에게 대들고 까부는가!’ 하면서 죽이고 말았어요. 죽으면서 스가랴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억울함을 갚아 주옵소서.’ 그 기도대로 일 년 만에 갚아줍니다.

 

아람군대가 쳐들어가게 하는 식으로 징벌하니까 그 전쟁 통에 요아스는 부상을 당하고 침상에서 부하에게 죽임을 당합니다(대하 22-24장). 그 다음 왕 아마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뒤에 나오는 웃시야, 요람, 아하스, 왕들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역대기에서는 그게 안 중요하다는 겁니다. 왜 자꾸 여기서 이탈하느냐, 하는 겁니다. 그 이유를 보기 위해서 역대상 9장을 보면 그 족보의 명단은 이미 포로에서 예루살렘에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돌아올 때 꼭 유다지파와 제사장이 짝짝꿍이 되어서 돌아옵니다. 유다지파가 바벨론에 포로 잡혀 간 뒤에 바벨론 시대가 지나고 메대, 바사의 시대가 되어서 고레스의 특명에 의해서 성전 짓기 위해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돌아온 사람들은 유다지파와 레위지파가 짝을 이루어서 돌아오고 유다는 어찌되었든 간에 레위지파가 하는 일이 중단되지 않도록 성전 짓는 일에 애를 씁니다.

 

그 명단이 9장에 죽 나옵니다. 역대기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뭐냐 하면 역대상 9장에 나오는 바로 이것, 이것이 표준이다, 라고 이야기 하면서 역대기를 기록한 거예요. 역대상 9장 3절 이하에 보면 유다를 대표하는 네 지파가 레위지파 하나를 모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왔다는 겁니다. 맞지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온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니까 그것이 문제가 되는데 그리고 나서 10장에 보면 지긋지긋하게 보이는 족보의 숲에서 벗어나서 이제부터 사건위주로 기록됩니다.

 

왜? 모든 족보는 다윗과 레위지파를 위해서, 레위지파가 하는 제사와 다윗이 그 기능을 보좌해야 된다는 것을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그 뒤로부터는 사건을 배열할 때 ‘왜 다윗이어야 하느냐, 왜 유다지파이어야 하느냐를 증거 하는 쪽으로 죽 이어져 가는 겁니다. 어제 강의한 히브리서 7장이 좀 어려웠기 때문에 다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히브리서 7장에 보면 레위지파(율법) 중심으로 모세언약이 왔다가 신약시대에 아들을 통해서 말씀하는 것은 율법(레위지파)말고 다른 지파, 유다지파를 세워서 이제는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 수고했으니 이제 그만!’ 하고 정지를 시켜놓았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레위지파는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속했지만 유다지파는 남들 보기에는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나온 지파인것 같지만 그것이 아니고,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는, 이 땅에는 족보가 없는, 육적인 족보가 아니고 영적인 족보인 멜기세덱의 족보를 따라서 툭, 하고 돌발적으로 나타난 것이 유다지파였다는 겁니다.

 

그것을 다시 그림으로 그리면 다윗이 유다지파인 자기 고유의 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장소는 모압, 암몬, 에돔 등 아무리 침입을 당해도 관계가 없습니다. 다윗의 땅만 다시 확장되면 새로 이스라엘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장소는 다윗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그냥 땅은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내 땅이다’ 할 수 있지만 다윗의 땅을 분배받아 버리면 ‘이제는 내 땅이다.’ 라는 것이 없어요.

 

전부 다 다윗의 땅이 됩니다. 이 다윗의 땅을 가지고 신약에서는 그냥 다윗이 아니고 ‘다윗의 자손의 땅’이라는 것이 붙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땅입니다. 그래서 천국은 아들의 나라이고 아들, 개인 소유의 나라입니다. 개인 소유의 나라에 이방인이 들어가서 사는 것, 그것이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는 아들, 어린양의 공로만 높이는 곳입니다. 개인적인 부동산 거래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끝까지 개인적인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면류관은 반납해야 됩니다. 한번 쓰는 것은 괜찮습니다. 한번 쓰고는 반납하는 반납용입니다. 반납 늦게 하면 벌금 뭅니다. 제 때 쓰고 쓰면서 바로 벗겨서 바로 반납해야 됩니다. 그냥 벗어 던지면 삐지는 것이 되기 때문에 반납할 때 멘트를 해야 합니다. ‘주님, 이 면류관은 제가 쓰기에 합당치 않고 주님만이 쓰시기에 합당합니다.’ 라고 던지면서 고백할 때 그것이 바로 천국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천국이라는 것은 천국이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땅에서 그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인간이 지금 이 세상에서 과거완료 속에서 바뀔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인간 안 바뀌면 천국 못갑니다. 인간이 인간을 바꾼다는 것은 있을 수 없거든요. 인간은 자기 고통을 피하기 바쁘지 스스로 자기를 바꿀 생각은 안하는데 고맙게도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으로 만들어서 바꿉니다.

 

죄인이 의인되는 것은 우리 소관이 아니기에 그냥 죄인으로 죽 가면 됩니다. 성도로 살기 참 편합니다. 왜 성도가 신앙생활 하기 힘 드느냐 하면 죄인으로 죽 나가주면 참 편한데 죄인에서 의인인척 하려 드니까 이게 힘들어요. 마일리지 쌓으려고 하니까 힘 드는 거예요. 항공사 마일리지, 항공사 파업해 버리면 그것 다 소용없습니다. 마일리지 쌓지 말고 그냥 죄인으로 사시면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냥 의인되게 해 주십니다.

 

왜냐? 우리가 주가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 따로 계셔서 그분이 언약대로 우리를 용서해주는 겁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예수님이 우리의 기도는 안 받아도 주님의 기도는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의 기도의 효력을 톡톡히 봅니다. 그 관계를 뭐로 보느냐?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봅니다.

 

신부보고 돈 벌어 오라고 하는 것은 요즘 남편들이나 그렇지, 주님은 자기아내 보고 돈 벌어오라, 그런 소리 안합니다. ‘너는 내 사랑만 받아라.’ 그겁니다. 그런 이상적인 남편이 이 세상에 있는가? 그런 남편은 없습니다. 우리는 아담에게 속했기 때문에 아예 기대하지 마세요.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틈만 나면 돈 벌어 오라고 하고 좀 놀면 구박주고. ‘전에는 좀 벌더니 요새는 왜 안 버나?’ 이런 식으로요.

 

그냥 죄인으로 살면 얼마나 편합니까? 배운 재주가 죄기 때문에 그냥 죄 지으면 누가 죄지었다고 해서 지옥 보냅니까? 어차피 지옥이고 어차피 진동(vibration)인데요. 죄 지으면서 가시면 군데군데 이것이 바로 죄라는 것을 알게 하게 되면 용서해 달라고 쳐다보는 그 대상자가 자기보다 더 크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돈이 영생주지 않고 예수님이 영생 주는 것을 아는 겁니다.

 

부자청년이 마일리지를 쌓아놓고 어렸을 때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다고 까불고 있으니까, 주님이 ‘네가 가진 것을 다 버리고 빈털터리 되어서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때부터 그 부자청년이 근심이 되어서 두 번 다시 안 왔잖아요. 복음을 이야기하는데 뭔가 삐진다는 것은 분명히 말로는 십자가 십자가 하지만 분명히 뭔가가 있어요. 십자가복음보다 더 중요한 뭔가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 중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신학생이 신학교에 다닐 때는 예수를 믿어요. 신학교 졸업한 뒤부터는 예수를 안 믿고 교회를 믿습니다. 졸업하고 난 뒤에는 교회를 소유합니다.’ 이것이 바로 내리막길이고 그 근성이 르호보암 - 아비얌 - 아사 - 여호사밧 - 여호람 - 아하시야 - 아달랴 …, 계속 나옵니다.

 

북쪽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로보암 - 나답 - 바아사 - 엘라 - 시므리 - 디브니 - 아합…, 이런 사람들이 죽 나오는데 이런 사람들이 죄짓는 것은 우리하고 똑같은데 고마워해야 될 것은 그 사람들의 중심점, 그것을 누가 갖고 있다고 했습니까? 선지자들이 있어서 자꾸 중심점을 맞춰 주는 거예요. 고층건물을 지을 때 한가운데가 비어있고 그 한가운데에 무거운 추를 달아요.

 

무거운 추를 달아서 지진이 있어도 같이 흔들려 주기 때문에 중심점이 붕괴하지 않습니다. 제가 고층건물을 지어보지 않았지만 그렇게 들었습니다. 그 중심, 심지가 뭐냐? ‘다윗의 등불’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등불이 있어야 된다는 말은 그만큼 이 세상이 어둡다는 겁니다. 집에 초가 많다는 말은 그 집이 자주 정전된다는 뜻이 되잖아요.

 

다윗언약, 그 등불 때문에 그들은 꺼지지 않는데 역대기에서 희망은 뭐냐? 그 등불 때문에 포로생활 70년 만에 돌아왔기 때문에 그 등불 지키세. 어떻게? 에스라, 느헤미야는 세 가지를 담고 있습니다. 1) 성전 짓는 것과 십일조 2) 안식일 지키는 것 3) 신앙 없는 이방여인들과 결혼한 경우 강제이혼 시키는 것. 그때 울고불고 난리가 났을 것이고 위자료 문제로 가정법원이 아주 바빴을 것 같습니다.

 

강제로 이혼시켜서 신앙 있는 사람만 오게 했다고 했는데 사실은 신앙 있는 사람만 오게 한 것이 아니고 율법적으로 살 사람만 모았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이들은 신앙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그냥 율법적으로 살 사람들만 온 거예요. 사람들이 결혼할 때 신앙 따지고 인물 따지고 다 따지는데 그런 것은 다 용서가 돼요.

 

하지만 돈 없는 것은 용서가 안돼요. 신앙을 따지는데 그것은 깊숙하게 감추어 놓은 비장의 카드는 내어놓지 않고 자꾸 엉뚱한 것을 가지고 그러는데 사람이 돈이 없으면 모든 여자가 다 좋아 보이고 돈 좀 있으면 여자를 골라서 가려고 합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좀 있으면 미쳤다고 결혼합니까? 그런데 돈이 없으면 살아 보려고 남자 찾고 신앙 찾고 그렇게 하는데 그만큼 지금 생활이 어렵다는 뜻입니다. 아닙니까?

역대상 10장을 봅시다. 왜 다윗인가?

역대상 10:14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

하나님께서 사울을 죽이신 이유가 ‘여호와께 묻지 아니했다.’ 하는 겁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물었는가? 13절에 보면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그러니까 점치는 여자에게 간 이유가 뭐를 거부했다? 그게 ‘나 여호와의 말씀은 부담됩니다.’ 라는 뜻입니다. ‘나 여호와 별로입니다.’ 라는 여호와에 대한 존재감 상실입니다.

 

‘여호와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조차 내 머리에 두고 싶지도 않습니다. 내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고 한 것이 답답할 때 점치는 여자에게 간 거예요. 하나님께서 남의 나라 같으면 그냥 봐줍니다. 하지만 그 나라가 누구 나라입니까? 하나님 자기 나라이기 때문에 그 사울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죽이고 이미 준비된 사람 다윗을 그 자리에 대치하는데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할 때 명령으로 하지 않고 규범적으로 한다고 했지요. 그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명령으로 했다면 다윗도 죽어야 합니다. 하지만 규범적으로 해버리면 다윗은 잘못해도 백성이기 때문에 봐주는 것이 있고 사울은 잘못했다는 것을 빌미로 해서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립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전략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지요. 알 수 없을때는 10분 쉬면서 생각해 봅시다.

 

 


 

 

2009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역대기 <제5강>


역대상 10장 14절에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느냐 하면,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므로 저를 죽이시고 다윗에게 나라를 돌리셨’기 때문에 그 말속에 다윗은 늘 여호와께 물었다는 거예요. 죄를 안 지었다가 아니고 다윗은 완벽했다가 아닙니다.

‘나는 주가 아닙니다. 내가 나의 구원주가 아니고 예수님이 나의 구원주입니다. 예수 믿는 내가 구원주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 자아가 내 자아를 건지는 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말이 좀 복잡하지만 복잡하게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예수 믿을 때는 예수 믿는 척 하기 위해서 예수를 잠시 이용하다가, ‘예수 믿었다’는 소리를 듣고서 부터는 예수는 차버리고 예수 믿은 자아가 예수를 대신해서 모든 절대자의 자리에 올라가요.

그게 지난시간에 말한 ‘옳으니이까?’ 라고 나서는 것이잖아요. 하나님께서 옳고 그름을 이제는 우리 차원에서 따지지 않겠다는 겁니다. ‘네가 뭔가를 옳게 해도 그것이 옳은 것이 아니고 나쁜 짓을 했다 해도 그것은 원래부터 옳은 것이 아니었고 옳고 그름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겠다.’ 하는 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신 의미입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다.’ 했잖아요.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그 말 아닙니까?

마태복음 9:10-13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는데 ‘내가 옳게 행동을 했습니까? 그르게 행동을 했습니까?’ 라고 신경을 쓰는 것 자체가 여호와께 묻지 아니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앞으로 여호와께 묻지 아니함으로 사울이 멸망했다면 앞으로 다윗과 사울의 차이점을 보라는 말입니다.

사울은 여호와께 묻지 않았는데, 즉 그 나라를 자기 것으로 여겼는데, 그 나라를 인계받은 다윗은 ‘잘했다’가 아니라 항상 여호와께 나아가게 되고 여호와쪽에서 누군가 오게 되고, 그런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누군가가 온다는 그 누군가는 선지자입니다. 선지자가 끊임없이 찾아오는 겁니다. 선지자의 특징은 뭐냐?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입니다. 이게 구약의 특징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한 사람이 올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되는 것이 구약의 특징인데 신약은 성령이 찾아와서 ‘누가 너희를 가르칠 필요도 없고, 성령이 그 사람 속에 계셔서, 네가 그래서야 되겠느냐’(요일 2:27) 하고 말씀 가지고 따지시고 물으시잖아요. 지옥 보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기백성이기 때문에 그것은 잘못되었다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뭐냐? 말씀에 관심이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자꾸 이점에 대해서 오해하는데, 말씀대로 산다는 말이 아닙니다.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관심이 있다는 겁니다. 에베소서는 뭐고… 이런 식으로 말씀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에 관심이 없으면 아예 사울처럼 ‘나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지 마세요.’ 라고 하나님을 밀치는 것이 된다 이 말입니다.

자기 쪽에서 밀치더라도 밀리면서 말씀으로 또 와요. 아까 본 그 그림(다윗을 정상으로 보고 아담에서 다윗까지, 그리고 다시 다윗과 솔로몬을 경유해서 내리막길로 북쪽과 남쪽의 왕들과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과정을 산의 모양으로 그린 것)에서 역대기가 분량이 많은데 ‘아담에서 다윗까지’ 할애되는 장수가 불과 열장입니다. 11장부터는 곧바로 다윗으로 넘어가서 계속됩니다.

저는 강의진행을 10장에서 잠시 멈추어서, 다윗에서부터 내리막길(멸망)을 가는 부정적인 사람들을 살펴서 그것을 대체하는 이 거대한 산봉우리,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부정적(벌받는것)인 것을 통해서 알아보자는 겁니다. 내리막길은 또 짧고 아주 급하게 내려가는데 마지막 왕 세명에 대한 기록은 몇 줄 되지도 않습니다.

역대하 9장 끝부분 31절에 보면 “솔로몬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부친 다윗의 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르호보암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여기 보면 “그 부친 다윗의 성에 장사되고.” 역대기가 참 재미있는 것이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죽어서 어느 묘실에 묻혔느냐, 그것이 자기 운명을 확정짓는다는 말입니다.

죽음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살아서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그 사람이 어떤 죽음 속에 편입되느냐, 어떤 죽음 속에 합류되느냐, 그것이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십자가에 합류되면 예수님과 함께 부활에 참여하게 되고, 그 사람이 아무리 잘 살았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합류된적이 없는 사람은 그냥 겉돌듯이 산 사람, 톱니가 맞물리지 않아서 그냥 헛돌듯이 살아간 셈이 된다는 겁니다.

역대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역대기는 이미 열왕기서를 다 아는 상태에서 재편집을 하거나 가필했다’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자유주의 신학 쪽에서 그런 소리들을 많이 하고 그들은 성경을 아예 역사책으로 바꾸려고 드는데 그 점을 잠시 언급해 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은 ‘역대기나 열왕기는 역사책이다.’ 라는 주장을 하거든요. 저는 ‘아니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역대기나 열왕기가 역사책이 아닌 이유는, 역대기 열왕기가 하나님의 언약인데, 언약이 어려우면 약속이라고 하고, 새끼손가락 걸고 하듯이 약속인데, 그 약속은 일반 민중들, 백성들은 빠지고 그 백성들의 대표가 된 왕이라는 자와 진짜 왕이신 하나님과 체결된 이것이 바로 언약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언약을 체결할 때 죄인의 자격으로 체결하기 때문에 죄인 같으면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데 저주받아 마땅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서 언약을 맺었다는 말은 결국은 죄인된 것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진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드러낼 수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긍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 다 같은 말인데 이런 것을 드러내는 데는 죄인만큼 적절한 것이 없어요. 아버지가 가락지를 끼워줄 적합한 아들은 집에서 함께 늘 농사짓고 말 잘 듣던 큰아들이 아닙니다. 가락지의 가치가 계속 남아 있으려면 다 털어먹고 집에 들어온 둘째아들 탕자입니다. 그가 집에 들어온 모습은 이렇게(고개 빳빳이 세우고)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고개를 푹 숙이고) 들어왔습니다.

아버지가 와락 껴안지요. 그런데 아들이 하는 말이 ‘저는 아들이 아닙니다. 그냥 종으로나 써주세요.’ 이렇게 나옵니다. 그때 가락지 끼우고 새 옷 입히고 한우, 순수 국내산 한우 잡아서 잔치 벌이고 동네방네 알리는 거예요. 그것보다 더 자비와 용서가 드러날 수는 또 없잖아요. 그렇게 되려면 평소에 말 잘 듣고 농사 잘 짓던 큰아들보다 집나갔다가 들어온 탕자가 아주 적절한 거예요.

그 말 듣고는 이제부터 탕자 하겠다고 교회 안다니고 나이트클럽에 간다든지 그런 식으로 하지는 마세요. 왜냐하면 집에 그냥 가만히 있어도 죄인입니다. 집에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을 부담스러워하는데 그것보다 더 탕자가 어디 있어요? 꼭 재산 날려야 탕자입니까? 가만있어도 주님 돈 아니고 자기 돈이라고 우기면서 살고 있는데 이미 탕자로서 살고 있잖아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명령이 아니고 규범적, 신분적이라고 했습니다. ‘네가 명령을 지킬 때 구원하겠다.’ 가 아니라 ‘이미 구원되기로 작정되었기에 이런 명령들이 사후적으로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들으라 이스라엘아.’ 이 말은 아무에게나 해주는 말이 아니고 이미 남의 자식이 아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만 하는 소리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백성들, 민중들은 배제된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백성들은 이미 왕을 구했기 때문에 결국 이들의 운명은 왕에게 다 맡겨져 있고 왕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혜택만 입을 뿐입니다. 그러면 왕은 죄인으로서 하나님께 혜택을 입기 때문에 왕이 만약에 제대로 약속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랑을 받으면 야베스의 기도대로 복을 받습니다.


복을 복(복의 제곱, 곱빼기 복)을 받게 되는데 그 복은 고스란히 왕의 백성들에게 전달되겠지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다윗과 맺은 다윗언약입니다. 다윗언약에서 중요한 것은 다윗처럼 온전한 죄인이 될 죄인이 인간 속에 없다는 거예요. 인간은 분명히 죄인인데 그 죄인을 대표해서 제대로 죄를 보여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가서 제대로 저주가 무엇이며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오히려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그 세례를 받은 불세례에 의해서 아버지께 버림받죠.


보통 일반인들이 십자가를 지게 되면 십자가를 지면서 투덜투덜 할 것이라는 말이죠. ‘WHY ME? 왜 하필 나입니까? 내가 저 사람보다 못한 것이 뭐가 있는데 내가 그 고생을 해야 합니까?’ 어렵게 목회하는 분들 참 ‘WHY ME?’ 많이 합니다. 크리스 크리스토퍼슨이라는 가수가 목소리 저음으로 깔아서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하필이면 왜?’ 그것은 부잣집 아낙네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화장발이 안 받습니까?’ 이런 식으로.


예수님 빼놓고 모든 사람은 아무리 ‘제가 순교를 하겠습니다.’ 해도 항상 ‘왜 하필이면 접니까? 왜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하필이면 내가 고난을 받아야 됩니까? 억울합니다.’ 베들레헴에서 예수님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다는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쏙 빠지고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을 다 죽이는 사태가 일어났는데 그게 바로 크리스마스입니다.


잔혹한 크리스마스입니다. 메리크리스마스, 흥겨운 크리스마스가 아닙니다. 위험한 크리스마스입니다. 폭력이 난무합니다. 술 먹고 난장판 벌이는 폭력이 아니고 예수 이름으로 말미암아 핍박받는 크리스마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주여, 이 잔을 제가 마시겠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그냥 지나가면 좋겠는데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제가 이 쓴잔을 마시겠습니다.’


유일하게 그 쓴잔을 마신 분이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윗이 있던 그 자리에 죄인의 입장에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죄의 결과는 저주이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는 묻는 것이 아니고 다윗언약 안에 들어 있는 절규, 시편 22편에 있는 그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거죠. 여러분은 다윗이 왕되었다고 좋아하지만 시편 22편에 보면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그렇게 기도하죠.


시편 22:1-3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이스라엘의 찬송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 열조가 주께 의뢰하였고 의뢰하였으므로 저희를 건지셨나이다 저희가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치 아니하였나이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나를 멀리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 자 없나이다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나는 물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촛밀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내가 내 모든 뼈를 셀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찌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찌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찌어다 그는 곤고한 자의 곤고를 멸시하거나 싫어하지 아니하시며 그 얼굴을 저에게서 숨기지 아니하시고 부르짖을때에 들으셨도다 대회 중에 나의 찬송은 주께로서 온것이니 주를 경외하는자 앞에서 나의 서원을 갚으리이다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 여호와를 찾는 다는 그를 찬송할 것이라 너희 마음은 영원히 살찌어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후손이 그를 봉사할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와서 그 공의를 장차 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그 만큼 다윗은 영문도 모르고 이유도 모르고 자꾸 사울에게 쫒기는 거예요. 분명히 자기는 그냥 바른 말을 했고 옳은 일을 했을 뿐인데 마구 창이 날아듭니다. 안 피했으면 그냥 꽂혀 죽었습니다. 더 약을 올리는 것은 사울의 말이 ‘차라리 네가 밉다. 그래서 죽이고 싶다.’ 그러면 차라리 괜찮은데 ‘다윗아, 다윗아, 네가 장차 이 나라를 이룰 것이다. 내가 잘못했다. 너같이 훌륭한 임금이 되어야 하는데 내가 잘못했다.’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악신이 들려서 그럽니다. 악신이 들리면 자기 몸도 자기 맘대로 못합니다. 악신이 들리면 순간적으로 창을 들고 눈에 보이는 대로 그냥 찍어야 됩니다. 부부생활에 있어서 20년, 30년 잘 지내다가 한순간 말 한마디 삐딱해 버리면 ‘그것이 바로 너의 본심이지.’ 이렇게 나옵니다. ‘너, 나 갖고 놀았지. 네가 나를 이용했지.’ ‘그것은 오해야. 오해.’ 그렇게 해봐야 소용없어요. 한순간에 삐지는데 그 순간 악신이 들려서 그렇습니다.


십수년간 잘 살다가도 한 순간에 오해가 들어와 버리면 그간 살아온 것이 다 무효가 되어버립니다. 따라서 아무리 인간이 ‘나는 하나님 뜻대로 살았습니다.’ 해도 막상 십자가에 올라가서 주님 앞에 항변해버리면 끝나는 겁니다. 그래서 <다빈치코드>라는 소설(영화)을 보면 그 내용이 이래요.


막상 예수님이 십자가에 올라가 보니까 겁나는 거예요. 그래서 살려달라고 해서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마리아를 데리고 프랑스 리용지방으로 가서 잘 먹고 잘 살았는데 그 자식들 속에 예수의 DNA가 들어 있는데 그 피가 바로 예수님의 성배이고 그 성배를 찾는다는 것이 다빈치코드의 이야기입니다. 그 코드이야기가 사람들이 언약을 역사로 바꾸는 것과 같은 겁니다. 역대기(성경)가 언약인데 언약을 역사로 바꾸는 이유가 있습니다.


만약에 역대기를 언약으로 봐버리면 민중들이 소외됩니다. 왕과 하나님, 혹은 선지자와 하나님하고 이야기를 하지 백성들의 권리 같은 것은 다 소외된다는 말이죠. 민중들의 소원과 권리를 다 빼버리니까 근대주체사상에 의해서 개개인의 가치를 존중하고 우선시하는 이시대에 성경이 설득력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현대성경신학자들의 고민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언약책을 해체시켜서 역사책으로 봐버리면 ‘옛날에 하나님의 신이 임한 선지자들이 민중들의 애환과 고통을 위하여 희생적으로 봉사한 것처럼 오늘날 하나님의 성령 받은 우리 성도들이 오늘날 자본주의 시대에 눌린자들, 억울한자, 고아, 과부등 이런 자들을 위해서 분투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방식이다’ 라고 보게 됩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기억이 나지요? 그래서 ‘성경을 하나님의 책에서 해체시켜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인 재해석을 가해야 된다.’ 고 주장하고 그렇게 주장하게 되니까 여기에서 정복설, 침략설, 쿠데타설등 온갖 이론들이 나오고 난리를 피웁니다.


“땅에 있는 민중들이 홍해를 건너오는 합비루 사람들의 기를 받아서 도시민에게 억눌렸던 노예들이 ‘야, 여호와가 그런 사람들이구나. 억눌린자 약한자를 돕는 하나님이구나. 저기에 붙자. 저기 붙어서 도시의 귀족들을 쳐부수고 이제는 우리에게는 왕도 필요 없는 이상적인 공동사회(공동체)를 만들자’라고 해서 생겨난 것이 이스라엘의 열두지파다.” 라고 그렇게 가르쳤고 그 가르침이 신학교에 있는 모든 교수들이 한결같은 주장입니다.


이런 식으로 학문을 하지 않으면 박사학위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는 두가지 역사 인식이 나오는데 하는 신명기 역사인식이 나오고 또 하나는 역대기 역사인식이 나온다. 이게 서로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신명기역사란 신명기로부터 시작해서 여호수아, 사사기 …, 이렇게 죽 나오는데 이것은 민중들을 위한 것이고 역대기란 것은 다윗(유다가문)의 정체성을 위해서 새로 편집한 것이다.’ 라고 설명하니 신학생들이 혹합니다.


‘야, 이것은 교회에서 부흥회 할 때 못 듣던 이야기이고, 기도원에서 기도원원장조차 몰랐던 이야기인데 이런 것도 몰랐으면 큰일 날 뻔 했다.’고 합니다. 이런 것은 다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완전히 특수한 단체가 되어서 대중들, 민중들 개인의 주체의식 필요 없어요. 그들이 기껏 구한 것이 왕이었고 왕은 죄인으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있을 경우에 한해서만 그들이 용서받은 것을 감사할 때, 그 나라가 자기들의 나라가 아니라 언약의 나라, 다윗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천국으로 이어지지요.


만약에 역대기를 역사책으로 봐버리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민중의 나라가 되어 버리고 여기는 하나님도 필요 없는 자기들의 나라가 되는 겁니다. 역사라는 것은 그 역사를 바라보는 주체가 인간개인입니다. 인간이 인간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러한 관점이 르호보암 시대부터 죽 나온다는 말이죠. 언약, 곧 죄인됨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역사만들기를 시도하는 겁니다.


사람이 혼자 있을때는 상상으로라도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이 다 되는 것 같을 느낌이 들어요. 그런데 둘만 생겨 버리면 여기서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이 생겨나지 않고 타인의 욕망인데, 타인을 통해서 자기를 다시 발견하게 됩니다.


타인이 없고 혼자만 있을 때는 자기가 상상한 이미지, 자아이미지를 가지고 ‘나는 아마 이런 인간일 것이다’ 했는데 타인이 하나 등장해 버리면 ‘나는 저와 같지 아니한 것을 감사합니다’가 되어 버립니다. 여기서 방향이 하나 더 나오면서 ‘나는 저 사람처럼 되지 않은 것을 천만 다행으로 여깁니다.’ 라고 하든지 아니면 ‘왜 나는 저 사람처럼 그런 인생이 못됩니까? 왜 나는 어린 시절부터 조실부모하고 왜 내 인생 이 모양입니까?


지난 중고등부 잠언설교를 할 때 이런 본문이 나왔습니다. 잠언에 부자와 가난한자 양쪽다 지으신 분이 누구라고 했습니까?(잠 22:2) 하나님이죠. 그러면 부자가 뭐라고 기도하냐면 ‘하나님, 제가 이렇게 부자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 맞지요? 이게 성경말씀이고 그래서 제가 부자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 맞고 참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데 절대로 가난한 사람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지요.


‘하나님, 제가 가난하게 된 것이 주님의 뜻이 맞지요? 그래서 제가 빌어먹게 되었으니 참 감사합니다.’ 이런 기도는 하지 않는다는 말이죠. 왜 그러냐 하면 가난한 그 사람이 부자를 한 단계 거쳐서 하나님 앞에 따지는 식으로 가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 성경대로 제가 가난하게 된 것이 하나님의 뜻이 맞습니다. 씩! 씩!(분통터져서).’ 이러고 있는 거예요.


(씩씩거리면서) ‘내가 지금 인간성이 좋아서 성경말씀 믿어주지 다른 사람 같으면 안 믿어줍니다. 내가 너무 믿음이 좋기에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계속 씩씩거린다).’ 이미 한 단계를 더 거쳤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고 억지로 감사하는 척 할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부자가 기도하는것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주여, 제가 저 가난한자와 같이 되지 않고 부자 된것이 주님의 뜻 맞지요?’라고 기도한다는 말이죠.


그 부자에게는 어떤 두려움이 있는가 하면, 만약에 이 부자가 졸지에 가난한자가 된다면 ‘저는 제가 가난하게 된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난 지금 가난할 뿐이고!’ 그렇게 나올 거라는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잠언서를 지킬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부자 되게 하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한다기 보다는 가난하게 되면 안 된다는 그 두려움이 수시로 올라오는 거예요.


목사님들이 교인들이 하나 와도 걱정이고 안와도 걱정입니다. 교인들이 하나도 없으면 가난하게 되니까 감사가 안 되고 막상 오면 그 교인은 두 번쯤 나오고 그 뒤로 안 올까봐서 걱정이 됩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역대하 10장부터 할텐데 여기에 나오는 여로보암을 비롯한 많은 왕들 욕하지 마시고 ‘반갑다. 친구야!’ 하고 악수나 하세요. 그들이 하는 일들이 어쩌면 우리보기에 더 솔직하고 순수 할 수도 있습니다.


교재 제일 마지막에 사람 몸통같은 도표(열왕과 선지자들)가 나오지요. 열왕기서는 ‘르호보암시대에 어떻게 여로보암시대에는 어떠했다’는 식으로 유다와 이스라엘을 계속 왔다 갔다 하면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짜증나게 합니다. 그런데 열왕기의 주제가 선지자가 양쪽의 왕들을 어떻게 양발차기 하고 있느냐, 거기에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왕들이 그 나라를 자기들의 나라라고 하지만 자기들의 나라는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애초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일방적으로 자기의 나라라고 우기는 말도 안되는 짓들을 하고 있는 겁니다. 르호보암은 여호와의 존재감을 삼 년 만에 상실했습니다. 그때부터 자기세력을 더 넓히기 위해서 ‘하나님이여, 이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졌기 때문에 제가 무력으로 저 북쪽을 치겠습니다’ 할때 스마야 선지자가 말렸습니다(역대하 11:1-4, 왕상 12:21-24).


여로보암왕은 북쪽의 왕입니다. 북쪽이라고 하니까 잘 감이 안오시니까 (그림 4)의 지도를 보시고 도표(열왕과 선지자들)도 함께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림 4)에서 유다, 베냐민으로 표시된 지역만 남쪽으로 보고 나머지는 다 북쪽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렇게 10지파 : 두 지파로 나라가 갈라졌습니다. 8:2니까 게임자체가 되지 않고, 우리나라 같으면 유다가 야당이 되는 겁니다.


이런 판국에 유다가 본토를 주장하니까 북쪽에서 보기에는 웃기는 일입니다. 여로보암은 단(북이스라엘의 북쪽경계)과 벧엘(북이스라엘의 남쪽경계)에 단을 쌓아서 자기백성들을 단속했습니다. 제사장 자격도 없는, 레위인 아닌 일반인들을 제사장 세워서 민중들의 종교적 욕망을 해소시키는 식의 일들을 많이 했습니다.


여로보암이 르호보암하고 전쟁을 못하고 그 아들인 아비야하고 전쟁을 했는데 그 아비야의 군대 40만과 여로보암의 80만군대가 붙었습니다.(대하 13장) 누가 이겼겠습니까? 아비야의 40만 군대가 여로보암의 80만 군대를 이겼는데 무려 전사자만 50만입니다.(대하 13:17) 요새 이스라엘과 하마스가 전쟁하는데 이스라엘병사 한명이 전사했다고 보도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병사는 첨단장비로 보호되어 있기 때문에 잘 안죽고 하마스 병사는 맨몸으로 전쟁하니까 잘 죽습니다. 한 명 두 명 죽어도 난리가 나는데 여기는 무려 50만이 죽었습니다. 창원시 인구가 얼마입니까? 53만! 창원시 인구가 몇 명(이장우 목사님 내외분 하고 더하기 몇 명) 배놓고는 다 죽었어요. 싹쓸이 할정도로 아비야가 승리한 겁니다.


아비야 다음 왕이 아사인데 58만대 구스의 100만대군과 전쟁을 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성경이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많은 군사를 그 당시에 모을수 있었겠느냐, 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어쨌든 아사왕이 그 싸움에서 어떻게 이겼느냐 하면, 주의 이름만 의지하는 기도를 해서 58만으로 100만을 이겼습니다.


역대하 14:11,12

“그 하나님께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려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구스 사람을 아사와 유다 사람앞에서 쳐서 패하게 하시니 구스 사람이 도망하는지라.”


이 전쟁은 주의 이름이 개입하는 전쟁이었다는 말입니다. 그 때 선지자 아사랴의 예언이 “그런즉 너희는 강하게 하라 손이 약하지 않게 하라 너희 행위에는 상급이 있음이니라.”(대하 15:7) 고 합니다. 그래서 왕이란 항상 전쟁할 때 무엇을 생각해야 하느냐 하면, ‘이 전쟁은 절대로 우리한테 속한 전쟁이 아니다.’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아사 다음왕인 여호사밧대에 나옵니다. 모압과 암몬 연합군이 쳐들어 왔을때에 그때 선지자가 야하시엘인데 그가 하는 말이 ‘이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전쟁입니다. 여호와께서 구원하는 것을 보세요.’ 라고 했단 말이죠.


역대하 20:15-17

“야하시엘이 가로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마주 내려가라 저희가 시스 고개로 말미암아 올라오리니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들 앞에서 만나려니와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그러니까 선지자가 하는 일이 뭡니까? ‘왕이여, 제발 나대지 마세요. 이 나라는 당신의 나라가 아닙니다.’ 이렇게 선지자가 중심점(중심추)을 잡아 줍니다. 그러면 여러분, 한번 생각해 봅시다. 현대인들의 사고방식대로 생각해 봅시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나라이고 하나님께서 지켜 주신다면 아예 적들이 쳐들어오지 않아야 되는 게 맞지 않습니까?


병 주고 약주고 하느니 차라리 병이 아예 안 생기는 것이 낫지 않은가, 그 말입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어려움이 닥치지 아니하면 자기 스스로 자기 힘으로 다윗의 자리에 갈 수 없어요. 다시 말해서 죄인의 자리를 모르고 ‘주여, 이만하면 되었습니다.’ 라고 자꾸 자기를 자기 편한 쪽으로 생각하지 ‘내 몸은 주의 몸입니다. 주께서 알아서 하세요.’라는 이런 고백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항상 죄짓는 것 밖에 모르고 자기 편한 것밖에 모르기에 뭔가 사건, 사태가 있어야 거기서 자기본색이 나와서 설치다가 그 순간에 말씀이 부닥쳐 와서 ‘아하, 이 전쟁은, 이 내 인생이라고 여긴 이 전쟁은 내게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주어졌구나.’ 하고 깨닫게 되는 거예요. 계속해서 중심잡기를 계속해서 해나가는 겁니다.


이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 곧 다윗의 나라인데 다윗이 죽었다고 시시하게 여기지만 다윗은 무덤 속에서도 살아 있습니다. 무덤속에서도 죽은채로 살아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가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가를 똑똑히 보라는 말입니다. 여로보암 왕 다음대에 나답왕이 있는데 나답은 2년만에 바아사에 의해서 쿠데타로 살해당하고(왕상 15:25) 바아사 - 엘라 - 시므리(7일동안 재위) - 오므리/디브니 … 로 이어집니다.


시므리는 엘라왕을 죽이고 왕을 세웠는데 오므리가 쳐들어와서 왕궁을 포위하자 왕궁을 불질러서 자살한 사람입니다.(왕상 16:15-20) 오므리와 디브니는 그 당시에 야전사령관격인데 그 두사람이 서로 정권잡겠다고 다투었던 인물들입니다. 그 뒤에 오므리가 디브니를 이기고 정권을 잡아서 왕이 됩니다.(왕상 16:21-23)


어쨌든 이쪽에서는 힘이 있는자가 최고입니다. 여호와 의지하지도 않습니다. 선지자가 잘 나타나지도 않고 그냥 힘만 있으면 무조건 되는 거예요. 그 말은 ‘나’라는 것이 뭐냐? ‘나’라는 것은 타인이 있을 때 그 타인을 통해서 내가 어느 정도 되는 사람이냐, 그걸 봅니다. 만일에 나보다 타인의 힘이 월등하면 힘을 키워서 점령하면 저 사람보다 내가 더 위대해지겠지, 그리고 나보다 더 힘이 모자라는 사람이라면 종으로 부리게 됩니다.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이 누구냐, 그것을 남이 내 앞에 얼쩡거리는 것을 통해서 관계를 맺으면서 자아이미지를 형성한다는 거예요. 비트켄슈타인이라는 철학자는 이것을 가지고 ‘게임’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은 게임이다.’ 『피』라는 책에도 나오지요? ‘예정인가 게임인가.’ 비트켄슈타인은 ‘인생은 게임이다. 모든 것이 게임 아닌 것이 어디 있느냐?’고 합니다. 적과 동지, 잘해주면 동지요, 못해주면 적입니다.


이제까지 적이었다가도 잘해주면 다시 동지고, 이제까지 동지였다가도 못해주면 다시 적이 되어버립니다. 모든 것이 자기를 절대화시키기 위해서 타인을 측정하고 점검하는 그것이 바로 인생인데 그것을 북쪽 나라를 통해서 다 보여주는 겁니다. 남쪽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마찬가지인데 북쪽 나라가 있는 이유는 육적(비언약적)인 나라가 이 남쪽 나라를 얼쩡거릴 때 이 남쪽 왕들도 인간 아닙니까?


‘저것들! 우리가 정통인데 저 이단들 맛을 한번 보여줘?’ 하면서 치려고 할 때 선지자를 통해서 ‘저 사람들 칠 생각하지 말고 네 죄가 뭔가를 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적들이 적이 아니라 실제 적은 어디 있습니까? 항상 자기 내부에 적이 있는 거예요. 항상 자기가 죄인이면서도 ‘주여, 옳으니이까…’ 하면서 ‘내가 이정도 했는데 내 인생이 겨우 이게 뭡니까?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한 달 수입이 이게 뭡니까?’


만날 자기분수를 모르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줄 모르고, 뭔가 남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욕망에 미흡하다면서 화를 내는 그 상태, 그런 상태를 왕들이 내 보이지만 그때마다 선지자를 통해서 중심을 잡도록 말씀을 전합니다. 처음에는 선지자가 많이 말리고 또 왕이 말도 잘 듣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선지자가 말려도 말을 안 듣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사라는 왕이 58만 군대를 가지고 100만 대군을 이겼습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그 후에 북쪽 바아사왕이 남쪽 아사왕을 치려고 할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면 될 텐데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고 아람군대에게 도움을 청합니다(대하 16:1-6). 아람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그림 4) 이스라엘 지도에 보면 제일 위에 다메섹이라고 있는데 그것이 아람의 수도입니다.


아람에게 군대를 요청해서 북쪽을 대신 쳐달라고 해서 아람군대가 개입해서 이스라엘의 성읍들 몇 개를 치니까 북쪽나라가 군대를 철수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점에 대해서 선지자하나니가 말합니다. ‘아사왕이시여, 하나님을 의지하면 될텐데 왜 아람군대에게 도움을 청합니까?’ 다윗때는 아람군대와 싸워서 이겼습니다.


다윗이 모델이고 다윗때의 영토를 유지해야 하나님이 복에 복을 더하시는 야베스의 기도가 응답되는데 아람군대를 요청하게 되니까 그 때부터는 아람이 유다의 밑에 있는 나라가 아니고 같이 맞먹는 나라가 되었지요. 그렇게 되니까 이것은 원래 모델, 다윗언약에서 이탈한 것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될 때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하나니를 보내서 ‘임금이여, 당신은 다윗의 노선에서 벗어났는데 당신이 이 사태를 책임질거요?’ 이렇게 나왔어요.


그 때 아사왕이 ‘내가 잘못했다. 내가 잠시 생각을 잘못했구나.’ 이럴 줄 알았지롱? ‘여봐라, 저 놈을 당장 하옥하라.’ 이렇게 되었습니다(대하 16:7-10). 그래서 아사왕이 발병이 심하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왕 발병 난 것, 그래도 하나님을 찾지 않고 피부과 전문의를 찾아간 겁니다. 사람들이 이 역대기, 열왕기를 사람들이 봐도 문제이고 안보면 더 문제인 것이 있습니다.


병이 나서 병원에 갔을 경우에, 치료받기 전에, 간호사가 의료보험증 달라고 하기 전에 기도먼저 해서 ‘하나님, 제가 먼저 찾은 것이 병원이 아니고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는 절차를 밟아서 병원에 가야 할 것인지, 그렇게 안하고 곧바로 병원을 찾으면 병이 더 도지는가, 이런 것 때문에 근심하면서 난리를 떨고 있습니다. 이것을 몇 번씩 이야기 해줘도 사람들이 이해를 잘 못합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신약에서는 성도라도, 예수님 안에서 의인이라도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병이 나을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기 때문에 병에 걸려도 무조건 감사하면 될 문제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자기 지킨다고 ‘하나님 제가 병원에 오기 전에 기도했습니다. 역대기에 나오는 선지자 하나니가 하는 말처럼 제가 기도하고 병원에는 아예 안 오려고 했는데 병이 이렇게 도졌는데 목사님도 병원에 가보라고 해서 이렇게 병원에 온 겁니다.’ 하는 식으로 자꾸 핑계대지 마시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여, 가까운데 병원이 있으니 감사합니다.’ 그러면 됩니다.


병원이 20km 거리에 있거든 ‘이런 가까운 곳에 병원이 있다니 감사합니다.’ 그러면 됩니다. 병원이 50km 거리에 있거든 ‘이런 가까운 곳에 병원이 있다니 감사합니다.’ 이러면 됩니다. 그러니까 신약에서는 사람이 뭘 해도 죄인이니까 죄인입장에서 추가적으로 주어지는 모든 것은 다 감사, 감사, 감사로 이어지면 되는 겁니다.


아사왕은 자기 어머니가 우상을 섬긴다는 이유로 태후자리에서 쫒아내 버렸습니다.(대하 15:16) 처음에는 이렇게 개혁적으로 잘 나갔습니다. 아사랴선지자의 말도 고분고분 잘 들었습니다.(대하 15:1-9) 소 칠백과 양 칠천으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기도 했습니다.(대하 15:11) 구스군대에게도 승리하고 바아사왕에게도 승리했지만 마지막에는 제 맘대로 막나가고 말았습니다.


아사 다음왕인 여호사밧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사왕처럼 개혁운동을 했습니다. 그런데 모압, 암몬, 에돔 연합군이 쳐들어옵니다.(대하 20:1) (그림 4. 지파경계) 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동쪽에서 위로부터 암몬이 있고 그 아래쪽으로 죽 내려오면 모압, 그 밑에 에돔이 있습니다. 역대기공부하고 나면 이 그림이라도 여러분 머릿속에 남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자꾸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압, 암몬, 에돔, 이 나라들이 연합해서 유다를 쳐들어옵니다. 그 때 유명한 선지자 야하시엘이 ‘이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전쟁입니다.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지켜보세요.’ 라고 했습니다.


역대하 20:15-17

“야하시엘이 가로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마주 내려가라 저희가 시스 고개로 말미암아 올라오리니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들 앞에서 만나려니와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항오를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며 놀라지 말고 내일 저희를 마주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여기가 중요합니다. 이 때 여호사밧이 그 소리를 듣고는 찬양대를 동원해서 여호와를 찬송하니까 그래서 승리하게 된 거예요.(20:18,19) 우리가 지금 역대상의 다윗과 솔로몬을 뺐잖아요. 다윗과 솔로몬을 보게 되면 다윗이 왕 밑에 배치한 레위인들 가운데 전문적으로 찬양하는 사람들의 족보가 배열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원형이고 모델입니다.


레위인들의 찬양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데 한 몫 할 수 있다는 그 정신을 이어받아서 여호사밧이 다윗이 했던대로 찬양을 했더니만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스라엘이 자꾸 치근대니까 이스라엘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 한 일이 이스라엘이 추천하는 여인을 며느리로 맞이한 일입니다.(대하 18:1)


그 며느리가 아달랴입니다.(대하 21:6, 22:2,3) 그 며느리로 말미암아 전쟁 없이도 이스라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이 정책에 대해서 선지자가 충고를 합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사람을 왜 도와줍니까? 하나님이 원수취급하는 사람을 왜 사랑합니까? 그것은 안됩니다’(대하 19:2,3)라고 했습니다. 남쪽 유다의 여호사밧왕의 시대가 북쪽의 아합왕 시대입니다.


아합의 부인이 이방여인 이세벨인데 그 이세벨은 뵈니게(페니키아)여인을 며느리로 들였는데 그 여자가 들어올 때 몸만 들어온 것이 아니라 뵈니게의 신, 바알신이 함께 수입됩니다. 옛날에는 신(神) 수입될 때는 신만 수입되는 것이 아니고 캘린더(calendar)가 같이 들어옵니다. 요새같이 그냥 날짜와 요일을 알기 위한 용도가 아니고, 농사를 지을 때 필요한 캘린더, 달과 해의 운행, 적기에 밭 갈고, 파종하고, 추수할 수 있게 알려주는 달력입니다.


그러니까 바알신은 농사꾼들이 농사를 지을 때 적기에 필요한 일을 하도록 도움을 주는 하늘의 신(폭풍의 신이라고도 함)인데 서열상 엘 바로 밑에 있는 신이 바알신입니다. 바알신은 남자신인데 그 바알신 들어올 때 여자신도 같이 들어오는데 그게 아세라입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부부사이고 이 부부신이 같이 들어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이미 유목생활이 아니고 전문적인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농사를 지으려면 농사전문가가 필요한데 농사전문가란 절기에 따라서 적기에 밭 갈고 파종하고 추수할 수 있는 경우에 전문가라고 합니다. 그런 전문가가 되려면 이미 선진농업문화에 익숙해져야 되고 그래야 농사짓는 전문테크닉을 한수 배울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농촌마을의 할머니들이 교회에 나가면서도 옛날 전해지는 풍습이나 문화를 그대로 유지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것을 혼합주의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너희들이 사귀는 것은 좋지만 궁합은 봐야 된다.’ 이런 소리를 합니다. 옛날 노동력 확보를 위해서 며느리를 볼 때의 풍습, 사주팔자 보던 습관들이 다 함께 들어온 겁니다.


따라서 농사짓는 사람들에게는 유목민의 신은 별 쓸모가 없습니다. 농사짓는 전문기술이 필요한데 그 기술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섬기는 신도 함께 다 수입됩니다. 그 당시 이방신당의 제사장들은 단지 신만 섬기는 역할이 아니라 농사짓는 전문기술까지 전수하는 일종의 당대의 엘리트들이었습니다. ‘농사 잘 되니까 돈잘벌고 배부르게 되고, 그 신이 제대로 된 신이다. 여호와가 해준게 뭐가 있느냐? 아무것도 없다’ 라고 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이 작물은 이 작물과 함께 심으면 안 된다. 이 시기에는 이런 작물을 심어야 좋다. 왜냐하면 다 농사를 주관하는 바알 신께서 일러주신 것이다.’ 라고 어떤 기술이든 바알 신께서 일러준 것이라고 연관 짓는데 막상 해보면 그게 잘 되거든요. 그렇게 되니 대중들은 막상 겉으로는 이름 짓는 것은 여호와 쪽으로 이름을 짓지만 실제로 행동하는 것은 다 바알종교의 테크닉으로 넘어가는 겁니다.


교회 다녀도 영화 만들 때는 고사지내면서 돼지 코에다 만 원짜리 팍, 꽂아 버리고, 술도 따라서 붓기도 하고, 교회 건물 지을 때 석가래 올릴 때 예배드리는데 그게 고사지내는 것이나 다를 바가 뭐가 있습니까? 막걸리 안 뿌리는 것 뿐 입니다. 그러면 막걸리 대신 예수님의 피라고 포도주를 뿌릴까요?


어느 사회든 그 사회에서 왕따 되지 않고 적응해서 살아가려면 그 사람의 문화를 존중해 줄때 그 문화 속에서 소통이 성사됩니다. 그렇게 소통될 때 인간의 욕망 중에서 소속의 욕망, 소속함으로서 안정감을 느끼는 욕망을 이룰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역사? 민중? 그런 것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마세요.


그들은 돈만 주면 다 따라올 사람이고 중요한 것은 뭐냐? 선지자가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여호와를 찾아라! 왜? 용서하기로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2009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역대기 <제6강>


칠판에 그려진 그림을 보면서 잘 안 보이신다고 불평하실지 모르겠는데 이것은 교재에 있는 도표(열왕과 선지자들)를 그대로 그려놓은 것입니다. 다만 칠판에 그려진 그림에는 색깔로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왜 빨강(선지자들)과 파랑(왕들)으로 색깔을 칠해 놓았느냐? 현재 북한의 정치를 유혼정치라고 하는데, 유혼정치란 죽은 귀신이 정치하는 것을 말 합니다.

솔로몬도 다윗도 이미 죽은 상태입니다. 지난시간에 열왕들의 이야기를 하나씩 끄집어내니까 여러분이 어렵게 들으실 것 같았습니다. 그림에서 이 전체를 로봇태권-V 라고 할 때, 아달랴(남)와 요람(북)정까지를 어깨부분으로 잡고, 그 다음에 요아스(남)와 예후(북)부터 웃시야(남)와 여로보암 2세(북)까지를 잡습니다. 여기까지를 배꼽부위로 잡습니다.

남쪽에서는 웃시야가 북쪽에서는 여로보암 2세때가 가장 번창했던 시기입니다. 여로보암2세라고 하는 것은 이미 앞선 시대에 여로보암이미 있기 때문입니다. 여로보암 1세라는 것은 따로 없고 그냥 여로보암인데 후대의 사람들이 헷갈리니까 이렇게 구분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북쪽의 경우에는 그 아래가 그냥 사라져버리는 느낌입니다만 남쪽의 경우에는 그나마 죽 다리같이 이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어깨부분은 뭐고, 배 부분은 뭐고 다리부분은 뭐냐, 그것을 아시면 다 아는 것이 됩니다. 어깨, 배, 다리, 이런 식으로 있는데 여기서 심장, 허파, 신장 이런 것은 어디에 있는가? 이 중요한 중심부는 다 선지자들이 차지하는 거예요.

유혼정치라고 해서 아무리 왕들이 그 나라를 자기들의 나라라고 우기면서 ‘너만 왕이냐?나도 왕이다.’ 라고 하면서 북쪽 남쪽 번갈아 가면서 왕이라고 우겨도 실제로 하나님께서 다윗언약을 성취하는 것은 이런 왕들이 아니라 실제로 빨강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선지자에 의해서 ‘포로 잡혀가는데도 불구하고 예례미아의 예언대로 70년만에 다시 돌아와서 옛날 성전을 회복하는 일에 성공했잖아!’ 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소위 왕이라고 하는 인간들은 전부 다 껍데기에 불과한 거예요. 김정일이 있어도 그것은 폼이고 북한 주민들은 여전히 죽은 김일성이가 최고다 이 말이죠. 제가 아까 강의하면서 자유주의자들이 하는 말이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고 그 민중이 주체가 될 때 하나님은 함께 한다.’ 고 하는데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역사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역사의 주체이신 하나님은 죽은 귀신, 여기서 죽은 귀신이란 다윗을 말하니까 죽은 귀신이라고 하면 안되겠고, 정확히 하면 다윗언약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그것을 어떻게 증명하느냐? 선지자들이 반드시 이런 소리를 해요. ‘…’ 이라고 해 놓고 그 다음에 ‘… 말씀대로 응하였느니라.’

예례미야도 그렇고 이사야도 그렇고, 이 도표에서 빨간색으로 표시되어 있는 선지자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왕들이 아무리 패역하고 타락해도 그런 것은 껍데기, 혹은 갑옷에 불과하고, 진짜 알맹이에 해당되는 다윗언약은 묵묵히 선지자, 그냥 선지자가 아니고 고난받고 수난받는 선지자에 의해서 강물처럼 기어이 흘러왔다는 겁니다.

이것을 역대기, 열왕기 그리고 성경전체가 증명하는 거예요. 아모스 7장에 보면 아모스가 예언을 하니까 거짓선지자(제사장 아마샤)와 왕(여로보암 2세)은 ‘웃기네’ 하는 식으로 놀리기나 하는 겁니다.(아모스 7:10-17) 여러분은 이 그림을 보니까 뭐가 생각납니까? ‘머리는 그리스도의 너희는 몸의 지체….’(엡 4:15,16) 이런 성경말씀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문제는 이 빨간색과 파란색이 섞여 있다는 것입니다. 빨간 알맹이들은 따로 있는데 파란 껍데기들이 자꾸 설쳐대니까 누가 고난 받습니까? 진짜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교회에서 핍박을 받는 형국이 그대로 재현되는 겁니다. 역대기, 열왕기의 다윗언약이 역사속에서 파란색의 왕들은 가해자가 되고 빨간색의 선지자들은 피해자가 되는데 놀라운 사실은 이 가해자속에 거짓선지자들도 한몫을 담당하고 있다는 겁니다.

왕이 거짓선지자과 제사장들을 양성해서 자기편 만드는 것은, 옛날 다윗이 제사장과 선지자들을 두었던 그 외형적인 형식만 그대로 가져오고 다윗이 안고 있던 그 정신은 쏙 빼놓고 말았습니다. ‘아하, 이렇게 하니까 정치가 한정치 먹어주는구나. 나의 수하에 제사장과 선지자를 양성해서 나라를 세워가면 되겠다’는 식으로 합니다.

그리고서 주장하는 바란 ‘바로 우리가 정통적인 다윗언약의 계보를 잇기 때문에 다윗을 섬긴 것처럼 나를 좀 섬겨다오.’ 라는 식으로 그 나라를 자기나라 화 시킨 겁니다. 남쪽도 북쪽도 양쪽 다 마찬가지입니다. 아합 때는 이세벨이라는 이방여자가 왕비로 들어와서 심지어 제사장들을 자기 왕궁에서 숙식까지 제공하면서 양성했습니다.

그게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인데 850명이나 됩니다. 거짓선지자들 850명인데 엘리야는몇 명입니까? 달랑 한 명입니다. 갈멜산에서 850:1로 맞짱 떴습니다. 처음에는 바알아세라 선지자들이 정석대로 갔습니다. 그러다가 안 되니까 자기 몸을 찔러서 피를 흘려가면서 ‘이래도 기적을 내리지 않습니까?’ 라고 소리 질러서 부르짖었습니다.

그 때 엘리야가 조롱했습니다. ‘너희 신은 지금 주무신다. 흔들어 깨워야지 그렇게 해서 일어나겠나?’ 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빨간색 계통, 진짜 하나님의 다윗언약 계통을 입었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 고 고발했습니다. 그래서 아합이 엘리야를 만날 때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왕상 18:16-19) ‘엘리야야, 네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다.’

그 말에 엘리야가 대꾸하기를 ‘당신이 이스라엘을 괴롭힙니다.’ 둘 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두고 소통이 안 되고 있어요. 아합이 보기에는 아합이라는 왕 수하에 있는 나라 이스라엘인데 ‘그 나라는 원래 다윗언약에서 본 그 나라가 아니올시다. 당신 지금 착각하고 있소.’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도 나중에 온 이스라엘로 만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이 엉망이지만 그 나라도 유지해야 되지요. 그 유지하는 방법이 무엇인가? 엘리야가 기도하니까 3년 6개월 만에 비가 내렸잖아요. 엘리야의 기도에 의해서 비가 왔다는 것은 엉터리고 껍데기같은 왕에 의해서 훼손되고 훼방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은 그 약속의 땅을 지켜 내야 되는 겁니다.


언제까지? 선지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땅에서 추방될 때까지. 그래서 북쪽은 BC 722년에 망하고 남쪽은 BC 586년에 망하는데 그러면 이스라엘이 떠나고 난 그 나머지 땅은 왜 있느냐? 우리가 묵고 있는 이 호텔의 청소시간이 보통 12-2시 사이였습니다. 여름철에 보니까 그 시간에는 투숙객들을 밖으로 나가게 하고 청소를 했습니다.


이 땅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다윗언약에 의한 하나님 개인의 땅이기 때문에 청소를 해야 되지 않습니까? 청소하는 기간이 몇 년이다? 70년 동안 청소를 하는 거예요. 호텔 청소하는 분들이 방마다 다니면서 죽 청소하듯이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수난 받고 고통 받는 선지자 입장에서는 사적인 입장에서 ‘아, 하나님, 분하고 원통합니다. 왜 나입니까? 왜 내가 이렇게 수난 받아야 합니까?’ 라고 할 수 있겠지만 주님입장에서 볼 때는 눈 하나 깜짝도 안합니다. 왜냐하면 소모품이니까요.


(하나님) “어이, 선지자! 네가 한 번 들어가 봐라.”

(선지자) “왜요?”

(하나님) “욕 얻어먹어야지.”

(선지자) “저 욕 얻어먹었습니다. 억울합니다.”

(하나님) “알았다. 알았어.”

(선지자) “억울합니다.”

(하나님) “알았다니까!”

(선지자) “너무 너무 억울합니다.”

(하나님) “어허이, 알았어.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그만 끝났고 다음에는 누구를 보내서 욕을 얻어먹게 할까? 어, 저 스데반을 보내야 되겠구나.”

(스데반) “저는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하나님) “알았다. 알았어.”


아무리 선지자가 고난 받고 수난 받는다 할 찌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일이 수난 받고 취소되는 법이 없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응하게 하려 함이라.’ 해서 주께서 북쪽도 내보내고 남쪽도 내보내고 다 보내서 이곳을 청소하고 난 뒤에 다시 들어오게 하는 겁니다. 이 얼마나 낙관적입니까? 복음을 믿는 사람처럼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사람은 또 없어야 합니다. 문제는 자기를 안 넣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남쪽에 요시아라는 왕(대하 34-35장)이 있습니다. 요시야 왕만큼 훌륭하게 개혁하고 요시아만큼 유월절을 성대하게 지킨 왕도 또 없습니다. 요시아는 어느 정도냐 하면 이미 잘려서 다리도 없는 북쪽의 지파들까지 초청해서 전 이스라엘이 여기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35:18)


이미 아사시대때부터 에브라임, 므낫세, 시므온 지파에서 ‘나는 신앙없는 곳에서 못살겠다.’ 고 하면서 많이 건너왔었습니다.(대하 15:9) 그만큼 하나님의 정신이 살아 있는 쪽으로 많이 움직인 겁니다. 그 당시 스마야, 아사랴, 하나니 같은 선지자들이 말을 할때 왕들이 말을 곧 잘 들었습니다. ‘이번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니 당신은 끼어들지 말고 찬양대로 하여금 찬송을 부르게 하라.’ ‘알겠습니다.’


그런 식으로 곧 잘 말을 들었는데 북쪽 아합 같은 사람들은 선지자에 대해서 아주 반발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그쪽 선지자들이 수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남쪽 선지자들의 경우에는 그에 비해서 피해를 덜 받았습니다. 문제는 여호사밧이 혼인정책을 통해서 싸움하는 것을 중지함으로 말미암아 인위적인 조작을 가해서 마치 다윗의 평화, 솔로몬의 평화를 이루겠다고 할 때에 예후, 하나니, 엘리에셀 같은 선지자들이 강력하게 저지하고 반발했습니다.


처음에는 말을 좀 듣더니만 갈수록 점점 말을 안 들어요. 여호사밧 다음왕인 여호람왕은 아예 대놓고 아합이 자기네로 끌어들인 모든 문화를 다 수입해 버렸습니다. 그 왕은 아마도 그의 부인 아달랴(아합과 이세벨사이의 딸)가 시켜서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설이 많습니다.(왕하 8:16-18) 여호람 다음 왕인 아하시야는 괜히 남의 전쟁 구경하다가 맞아 죽은 인간입니다.(대하 22:5-9)


북쪽이 아합왕은 나봇의 포도원사건으로 유명하고 그 뒤로 아하시야 - 요람으로 이어지는데 이쪽은 정말 개판입니다. 아하시야 왕(왕상 22:51-왕하 1:16)은 난간에서 떨어져서 병이 들자 그것을 여호와께 묻지 않고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갔습니다. 그 때 엘리야가 ‘너는 반드시 죽는다.’ 고 했습니다.


그 말 했다고 엘리야를 잡아 죽이기 위해서 무려 50명의 군사를 보냈습니다. 언론노조 집회 한다고 전투경찰 2천명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50명을 불살라 버렸습니다. 약이 오르니까 50명 또 보냅니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또 불살라 버렸습니다. 제가 열왕기하 1장의 그 대목을 보면서 무엇을 느꼈느냐 하면, 왕이 객기 부리느라고 보내는 그 군사들이 군에 입대하기 전까지는 다 귀한 집 자식들 아닙니까?


나중에 제대하고 나면 모두 국가의 훌륭한 일군이 될 사람들인데 그 왕이 객기를 부려서 무려 100명이나 죽었습니다. 아하시야왕이 독이 올라서 50명 또 보냈습니다. 그 때 마지막 50명의 오십부장이 처음부터 빌면서 들어갔습니다. ‘선지자님 살려주십시오.’ 그런 객기로 사건을 일으킨 왕이 아하시야입니다. 그 뒤 요람이라는 왕은 앞의 왕들과 좀 달랐습니다.


이 요람(혹은 여호람)왕은 엘리사를 먼저 찾았던 사람입니다. 북쪽 이스라엘에서는 수도를 변경하곤 했습니다. 여로보암왕은 세겜에서 시작해서 부느엘로 옮기고(왕상 12:25) 또 오므리왕은 수도를 사마리아로 바꾼다든지(왕상 16:24) 하는 식으로 자기정권의 정통성을 지키면서 자기역사를 새로 쓰는 시도를 했던 겁니다.


그런데 요람왕때에 북쪽 변방의 아람군대(벤하닷왕)가 사마리아성을 포위하고 심하게 압박을 가하고 있었는데 그 포위로 인해서 얼마나 백성들 사는 형편이 심각했던지 지나가는 임금에게 백성들이 즉석재판을 요청했습니다.(왕하 6:24-33) 재판의 내용인즉 백성중에서 ‘오늘은 내 아이를 삶아서 나눠먹으면 내일은 네 애를 삶아먹자.’고 약속을 했던 겁니다.


그래서 약속대로 자기 집 아이를 삶아먹고 그 다음날 저쪽 집 아이를 삶아먹으려고 하는데 그 아들을 숨기고 안내놓는 거예요. 그래서 재판을 요청한 겁니다. 백성들의 그런 청원을 요람왕이 듣고는 너무나 화가 나서 그런 사태를 야기 시킨 엘리사를 죽이기로 작심합니다. 또 요람왕 때의 유명한 사건이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 낫는 사건입니다.


아람나라에 포로로 잡혀 있던 이스라엘의 소녀의 말을 듣고 나아만이 이스라엘의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담그고서 병이 나았다는 그 사건(왕하 5:14)의 시대도 요람왕의 시대입니다. 이런 사건들을 보면 이스라엘을 지키는 것은 왕들의 객기가 아니라 엘리야, 엘리사같이 수난 받고 욕 얻어먹는 선지자에 의해서 다윗언약대로 이스라엘 나라가 계획대로 차질 없이 일이 잘 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교회가 목사, 집사, 장로 문제가 많이 있다 할 찌라도 성도 같으면 뭘 알아야 되느냐? 교회에 별별 문제가 다 있고, ‘우리가 누군가에게 당했다, 혹은 욕을 얻어먹었다’ 하더라도 세상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응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하등 중요하지도 않고 웃기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누구누구 때문에 교회 안 나온다.’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보면 제가 봐도 웃기는데 하나님보시기에 얼마나 웃기겠습니까? 말씀이 그대로 응하고 이루어지는데 있어서 객기부리는 왕이나 피해보는 선지자들이나 양쪽 다 일종의 소모품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본은 따로 있고 그 대본의 연기 한 부분을 담당하는 연기자에 불과한 거예요.


이스라엘이 자기들 주변에 진치고 있는 소소한 나라들, 암몬, 모압, 에돔등의 나라들을 보면서 자기들 딴에는 ‘이 정도쯤이야 물리칠 수 있겠지.’ 하면서 선지자 말도 곧잘 듣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떤 결과를 가지고 계시는가 하면, 아예 감당도 못할 아주 엄청난 몽둥이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아람보다 더 북쪽에서부터 내려오는 앗수르라는 나라는, 그 어떤 왕도, 심지어 요시아라는 왕조차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림 1) ‘아브라함경로’ 를 봅시다. 아브라함의 이동경로가 나와 있습니다. 갈대아 우르(현 이라크) - 바벨론(현 이라크) - 마리 - 하란(터키의 남쪽) - 다메섹(현 레바논) - 세겜(이스라엘) - 브엘세바(이스라엘) - 소안(이집트)까지 갔다가 다시 브엘세바로 돌아오는 여정을 겪는데 앗수르는 지도에서 보이는 우르 바벨론 이런 지역일대를 다 점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적들을 동원시킬 때 넓은 범위에서 동원시키는데, 이스라엘과 유다는 넓은 범위의 적들은 모르고 자기들 코앞에 있는 아람, 암몬, 모암, 에돔, 블레셋, 뵈니게 등만 상대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예상한 것 이상의 엄청난 폭풍을 동원시켜서 아예 잿더미를 다 만들고 맙니다.


예례미야, 이사야같은 선지자들은 이미 큰 폭풍이 온다는 것을 예언했습니다.(사 10:5,6) 이사야 같은 경우에는 ‘고레스라는 사람이 다시 회복할 것이다. 그가 메시야다.’(사 45:1-4) 할 정도로 수백 년 앞을 다 내다보고 있습니다. 여로보암 시대의 어떤 선지자는 ‘당신이 세운 이 산당의 모든 제사장은 300년 후의 요시아왕 때에 다 뭉개질 것이다.’(왕상 13:2) 라고 다 예언했습니다.


그걸 보고 ‘와, 세다.’ 할 수도 있는데, 하나님이 주신 것은 300년이나 30년이나 천년이나 아무 차이가 없는 게 그게 뭐가 어려운 겁니까? 알려주는데 알릴 도리밖에는 없죠. 그만큼 선지자의 시야는 넓은 겁니다. 그런데 선지자가 그런 소리를 해도 아하스나 히스기야나 이런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저 자기 사는 것, 자기 나라 보존하는 것, 그 것 밖에는 모릅니다.


소위 신앙이 있다는 이 작자들도 세상을 넓게 볼지 모르고 좁게 봐요. 큰 것이 몰려 오는 지는 모르고 작은 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얼마전에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당신 죄인입니다.’ 하니까 ‘예, 죄인 맞지요.’ ‘어째서 죄인입니까?’ 물으니까 ‘방귀 끼고 코 흘리고 ….’


그런 것은 죄 축에도 못 들어갑니다. 영영한 지옥불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 죄지 살면서 실수하고 실패하는 것은 죄 축에도 안 들어가요. 큰 덩어리가 온다는 것을 몰라요. 선지자의 시선에 근처도 못가는 거예요. 요시아가 믿음 좋고 훌륭한 것 압니다. 애굽군대가 바벨론과 싸우기 위해서 유브라데강가로 올라오니까 요시아가 애굽군대를 막겠다고 하나님이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다가 전사하고 맙니다(대하 35:20-24, 렘 46:12).


그렇게 훌륭한 요시아, 그렇게 훌륭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더니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보수주의 학자들은 ‘요시아가 잘 죽은 것이 아니냐? 그 뒤에 다가올 험난한 꼴을 안 보게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잘 죽었다.’고 요시아의 죽음을 이해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우리 개인적인 입장에서 변명하는 것에 불과한데 그렇게 변명하지 말고 어차피 유혼정치, 귀신정치 아닙니까?


다윗언약이 살아 있는 한 선지자가 있으면 그것으로 된 겁니다. 앗수르 다음에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등장하는데 북쪽은 앗수르에 의해서 망하고(왕하 17:1-6) 남쪽은 바벨론이 칩니다(왕상 25:1-7, 대하 36:5-16). 이것을 이사야가 예언했고 예례미야가 수차례 예언했습니다.(렘 21:1-7) 그런데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자기 입장만 생각해서 ‘망했다. 망했다. 이제 우리는 망했다.’ 합니다.


망한 것 아닙니다. 가짜가 제거되는 것이지 망한 것이 아닙니다. 가짜란 자아이미지입니다. 그 가짜인 자기이미지가 자꾸 눈앞에 보이니까 내가 사는 시대에 내가 원하는 국가 이미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자신의 소박한 포부인지는 모르겠습니더만 그 소박한 포부란 자아와 합쳐져서 생겨난 엉뚱하고도 일방적인 자아의 세계 아닙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대조를 해 봐야지요. ‘하나님, 저는 소박하게 이것만 되면 족합니다.’ 라고 할 때에 말씀과 한 번 대조를 해 봐야 된다는 말입니다. 신학교 다닐때에 신학자나 그밖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큰 교회가 복음적으로 문제점이 많고 큰 교회에 있다 보면 물든다.’ 하는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하는 소리가 ‘하나님, 저는 큰 교회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100명 정도만….’


그것은 자기딴에는 소박할지 모르겠습니다. 자기딴에는 낮춘다고 낮춘겁니다. ‘남들은 3000명을 구한답니다. (세상에 그런 이단들이 다 있나? 3000명씩이나 구하는 그 욕심이 다 뭔가? 교회가 무슨 장터인가?)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딱 50명만 구합니다.’ 그렇게 합니다. 50명을 원하는 그것은 이단이 아닙니까? 자기 딴에는 그것이 소박한데 그런 마음을 성경전체와 대조해 보았습니까?


사도바울이 어떻게 살았으며, 스데반 집사는 어떻게 살았으며, 베드로는 어떻게 죽었으며 야고보 사도는 어떻게 살았는지, 실제 성령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그것과 자기가 소박하다고 여기는 그 정신 상태와 대조를 해 봤는가, 하는 겁니다.


성경 속에 성령 받은 분들과 대조하는 것이 아니고 기껏 대조하는 것들이 만날 홍 정길, 옥 한음, 하 용조, 이 동원, 박 영선, 성경에 나오지도 않는 이 근호, 그런 사람들과 왜 대조합니까? 그런 인간들은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도 아닌데요. ‘말씀이 응하게 하려 함이라.’ 그 소리를 지금 장난처럼 여기고 있는 겁니다.


마태복음에 보세요. 예수님이 일 한번 벌일 때마다 그 뒤에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말씀이 응하게 하려 함이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사람들이 농담으로 들어요. ‘내가 원하는 소박한 그것을 성경에서 보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안보여줍니다. ‘차리리 네가 성경을 아예 대신 쓰고 새로 써라.’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을 보세요.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도 ‘희망의 2009년도!’ 그렇게들 이야기하고 외치는데 사도행전 28장 마지막에 뭡니까? 그게 희망입니까?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라고 끝나버립니다. 그런데도 사도바울은 절망이 없습니다. 왜? 그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구약에서는 땅을 청소하는 거지요. 마지막 때는 새 하늘과 새 땅만 남기기 위해서 헌 하늘과 헌 땅을 불에 전부 태웁니다. 불에 탈 때 그 모습을 보면서도 새하늘과 새땅을 위해서 탈것은 타야 된다고 믿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하는 말이죠.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그것을 안다는 말입니다. ‘목사님, 나중에 불에 탈 때 그때 알겠습니다.’ 불에 탈 때 알지 말고 지금 알아야 됩니다. 지금!


지금 멀쩡하게 푸른 하늘, 맑은 공기 마시면서 산과 들이 멀쩡하게 그냥 있을 때 ‘이것들 다 불에 타서 없어진다. 왜? 말씀에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라고 그렇게 믿어져야 된다는 말입니다. ‘구름타고 오리라.’ 그러면 구름의 밀도가 얼마이며 예수님의 몸무게는 얼마인지, 그런 것을 따진다고요. 그러면 성경에서 당나귀가 말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해보라고 하지요.


지난 크리스마스 연극할 때 제가 대본을 쓰면서 다섯 번을 바꾸었습니다. 대본 중에 ‘달인을 만나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16년 동안 기적만 행해왔던 김 달인 씨를 모셨습니다.’ 그 때 사회자가 묻습니다. ‘어떤 기적을 행하셨습니까?’ 그 기적의 달인이 ‘… 기적을 행했습니다.’ 라고 하겠지요. 그런데 당나귀가 말을 하는 기적 앞에서 기적을 자랑할 수 있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집에 가서 개 한 마리 사놓고 말을 한번 시켜 보라니까요? 안됩니다. 당나귀가 말을 하는것이 안되거든요. 인간이 알고 있는 과학이라는 것은 수동적이라서 자기 편리한 대로 실용성만 따지지 전체를 부수고 달려드는 그 말씀의 선지자의 안목은 아무리 과학적으로 규명을 한다 해도 과학으로 접근이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구약학의 구약해석은 해석이 아니고 고고학입니다. 처음에는 추춤추춤하면서 역시 성경이 최고이고 고고학은 나중이다, 그런 식으로 했는데 나중에는 강아지를 안방에서 키우면 결국에는 안방 차지한다는 이야기처럼, 성경말씀은 뒷전이고 고고학이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현재 구약학은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고고학을 공부하면서 ‘성경은 이래서 틀렸고 성경은 이래서 틀렸고…,’ 이런 식으로 합니다.


‘홍해 바다는 실제 바다가 아니고 갈대바다’라는 겁니다. 그것을 보고 창조과학회는 방어한다고 난리를 피우고 있습니다. ‘때리는 시어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 고 창조과학회가 더 미워요. 왜냐하면 뭘 안 받겠다? 고난을 안 받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에 보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어리석다’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에게 어리석게 보이는 그것이 우리에게는 구원의 능력이고 지혜가 된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존심이나 챙겨서 어리석지 않게 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인물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작용하면 구원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 말씀과 더불어서 우리는 고난 받아야 되는 겁니다.


여호야김왕은 예례미야를 죽이려고 한 사람입니다. 요시야 왕에게 세 아들이 있습니다. 엘리야김(여호야김), 여호아하스, 시드기야입니다. 요시야의 둘째아들인 여호아하스가 먼저 왕이 되고(석달재위) 여호아하스는 애굽왕 느고에게 폐위당한 뒤에 애굽으로 볼모잡혀가고 그 애굽왕의 손에 의해서 그 형인 여호야김이 왕위에 앉게 됩니다(대하 36:1-4, 왕하 23:31-33).


여호야김 뒤에 그 아들 여호야긴이 왕위를 잇는데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바벨론 왕에 의해서 요시아의 막내아들 시드기야가 유다의 마지막 왕이 되는데 시드기야를 끝으로 유다왕조는 멸망하게 됩니다.(BC 587년, 왕하 25;1-7) 쉽게 하면 요시아의 두 아들인 여호아하스와 여호야김은 애굽의 똘마니들이었고,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망해버렸습니다.


아무리 요시야왕이 믿음좋다, 믿음좋다, 해도 앗수르 몰려오고 바벨론 몰려오면 잘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 보면서 ‘요시야왕은 참 아깝다. 이 사람이 먼저 태어나서 진즉부터 통치했으면 이스라엘이 크게 부흥되었을 것이 아닌가?’ 그게 성경해석을 잘못한 겁니다. 이스라엘은 망하도록 되어 있는 거예요.


이스라엘은 귀신정치, 유혼정치, 보이지 않는 언약이 정치를 해야 됩니다. 이것이 중요한 대목입니다. 언약, 사람들이 보기에 어리석게 보이는 그 지혜, 말씀이 응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것을 흉내 내고 그것을 모방해서 교회라는 이름으로 껍데기 인간적인 지도자 행세하면서 설치는 것들, 이 사람들이 주의 일을 한다고요? 천만의 말씀, 그들은 개 오줌 누듯이 자기영역만 넓히는 겁니다.


우리교회 근처에 교회 세우지 말라, 하는 식으로 개들이 오줌 찍찍 갈기면서 자기영역 표시하듯이 자기영역만 넓히고 있는 거예요. 그 사람들이 예수님 십자가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닙니다. 교인들이 자기교회에 나왔다가 옆에 교회로 가는 그것 때문에 울어요. 제가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교회에도 카스트제도(계급)가 있어서 교회에도 귀족층과 서민층이 있다고 했습니다.


교회 귀족층은 십일조 하는 사람이고 그 뒤로 5퍼센트 하는 사람, 보통 때는 5천원, 만원 내다가 어쩌다가 감사헌금 십 만원도 내는 사람, 제일 마지막에 천원 내는 점심값도 안 나오는 사람이 죽 서열화 되어 있습니다. 진짜 복음을 위하는 설교자라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교회는 절대로 여러분들의 눈에 보이고 소망하는 그런 교회가 아니올시다.’라고 외치는 설교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기교회를 부술 수 있어야 그게 설교자입니다. ‘그러다가 진짜 부서지면 어떻게 합니까?’ 그런다고 부서질 것 같으면 그것은 진짜 교회도 아니죠. 어줍잖은 인간목사가 깬다고 깨질 교회 같으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아마스왕 같은 경우에는 개인적으로 에돔나라에 한이 맺혀서 군대를 모으고 이스라엘에서 용병까지 모았습니다. 그때 어떤 이름도 없는 선지자가 와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고 말렸습니다.(대하 25:5-8) 그러니까 아마샤가 생각하기를 ‘아하, 사적인 보복으로 에돔을 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말은 에돔을 치는 일에 실패한다는 뜻이렸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내 뜻을 이룰 것이다.’


이런 계산을 해서 용병을 원래대로 돌려보냈습니다. 돌려보내니까 기껏 취직하러 왔던 북쪽의 용병들이 비정규직이라 회사 갑자기 잘리면 촛불집회 하듯이 돌아가면서 분한 김에 유다 성읍들을 초토화시켰습니다(대하 25:13). 그런 일이 있고난 뒤에 이스라엘왕 요아스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러자 요아스왕이 비웃으면서 ‘레바논의 가시나무가 백향나무한테 딸을 며느리로 달라 하느냐?’ 했습니다.


그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붙이시매 어설픈 북쪽이 정통 남쪽의 아마샤 군대를 대패시켜서 아마샤는 포로로 잡혔다가 겨우 살아났습니다.(대하 25:22-24) 결국 백성들에게 비난을 받았습니다. 요람(남)이라는 왕은 에돔도 이겼던 괜찮았던 왕이고 아하스는 아예 막가는 인간이었습니다.


아하스 시대에 유명한 예언이 나왔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으리라.’(사 7:14) 웃시야(남)나 여로보암 2세(북)때는 먹고 사는 것이 괜찮았을 때입니다. 여로보암 2세때 활동했던 선지자가 요나, 아모스 선지자들입니다. 그들이 빈부의 격차에 대해서 아주 심하게 고발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무역항과 무역업이 발달하면서 나라살림이 윤택해졌습니다.


그 동안 이스라엘의 경제는 농사를 바탕으로 한 자급자족경제가 대세였는데 갑자기 수출을 위한 집약산업으로 정책이 바뀌게 됩니다. 아합의 시대에는 사마리아와 아람의 다메섹이 경제특구를 조성하기도 했습니다. 유다나 이스라엘이, 농사만 지어서는 나라가 부강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이방나라에게 배운 겁니다. 그래서 수출추진정책을 쓴 겁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국가라는 개념이 원래 없습니다. 같은 동족끼리 자기 먹을 것 자기가 생산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잉여를 노릴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자급자족의 농경제가 유지되려면 가족이 흩어지면 안 되기에 사촌끼리도 결혼을 해서 한 가족을 이루어서 한 부족을 이루고, 그 부족이 모여서 지파를 이루었던 겁니다.


사울 같은 경우에는 베냐민 지파이기에 자기지파에서 농사를 짓는 겁니다. 왕이 필요 없습니다. 위급한 전쟁의 경우에는 지파마다 인원을 차출해서 모였다가 전쟁이 끝나면 다시 흩어지는 식이었는데 그래서는 전문적인 군대(킬러)가 양성이 되지 않습니다. 농사만 짓는 사람이 갑자기 태권도가 됩니까? 전문적인 군대를 키우려면 군사고문관이 있어야 되고, 국가가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여유자금이 많이 있어야 됩니다.


여러 사람이 한사람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전투 병력이 되려면 집체훈련, 집중훈련이 필요합니다. 거기에 지도자가 필요하고 그 최종 우두머리가 왕이 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한 비용은 어디서 대는가? 무역을 통해서 이윤을 얻어야 되는 겁니다. 과거 프랑크왕국을 비롯한 중세 때의 모든 유럽 국가들은 왕이 없었습니다.


전쟁이 터져서 위급할 때 같은 경우에 왕을 세워서 군사를 동원할 수 있는 권한과 치안을 담당하는 권한을 줘서 전쟁을 치르고 전쟁이 끝나면 원래대로 각기 영주의 권한 밑으로 들어가는 봉건제도하에 있었습니다. 왕이 없지만 전쟁 때에는 왕이 필요하고 그 왕은 절대군주가 되어야 했습니다.


나중에는 그것이 뒤집어져서 ‘너만 좋은 것을 먹나? 우리도 먹어야겠다.’ 하는 식으로 부르조아라고 불리우는 시민상공업체가 세력화해서 의회를 만들고 이제는 국가가 신분이 아닌 법에 의해서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의 대우를 받는 민주주의가 시작된 겁니다. 그 민주주의 바이러스가 현재 콜라 마시는 아프리카 부시맨들에게까지 다 전파되어서 물든 겁니다.


부시맨들이 달랑 팬티 같은 거 입고 사냥이나 하던 사람들에게 자본주의가 전염되니까 TV를 통해서 드라마 같은 것 다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름 값 오르고 원자재 값 오르니까 다 굶어죽게 생겼습니다. 그전에는 서로 도와주면서 살았던 그 시대가 이제는 기름 값 올랐다 하면 전에는 밥이라도 먹고 살던 아프리카는 오지까지 다 굶어죽게 생겼습니다.


그 소박한 소말리아 사람들이 총 들고 해적노릇 하고 있습니다. 종교? 정치? 그런 것은 안중요합니다. 자본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입니다. 소떼 몰고 가는 <오스트레일리아>라는 영화에서 보듯이 소를 키우는 것이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일이 더 이상 아닙니다. 기업이고 기업은 게임입니다. 저쪽 기업과의 경쟁에서 내가 이겨야 군대에 납품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됩니다.


외부에서 보면 소농장이 아름답고 목가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기업을 한번 맡아보세요. 그게 아름다운가. 컴퓨터 화면 들여다보면서 국제 소 가격변동 살펴야 되고, 사료 값 얼마나 뛰나, 그것 쳐다보고 있어야 됩니다. 도대체 사는 것이 사는 것인지 죽는 것인지 모릅니다. 그렇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 유황불속에 와 있을 뿐이고….’


가장 나라가 융성할 때 선지자의 말을 듣지를 않았어요. 그래서 호세아, 아모스가 빈부의 차이를 격하게 꾸짖게 된 경위는 소위 특화사업 때문에 자기의 직업을 다 버리고 수출드라이브정책에 매진했던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제때에 상품을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추가적인 상품을 만들어내지 못하면서 벌금을 물면서 차압당하고 급기야 노예로 전락하게 되는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호세아, 아모스는 ‘옛날 출애굽 때 하나님이 주신 그 상태로 돌아가라. 이방나라 본받지 말라.’ 고 그렇게 외쳤지만 왕들과 거짓선지자들이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아하스라는 왕은 신이란 신은 뷔페식으로 다 섬긴 왕입니다. 자기자녀를 불살라서 제사하는 짓까지 서슴치 않고 다 했습니다(대하 28:1-4).


이사야 선지자가 하는 말이 ‘아하스 왕이여, 하나님의 징조가 떨어질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징조 같은 것, 안 구한다. 내가 하나님을 괴롭게 할 것이 뭐가 있느냐?’ ‘그게 아니고 너는 잘렸다는 말이다. 당신은 잘렸다.’ ‘그럼 남은 자는 누구인가?’ ‘여기 있다. 임마누엘’ ‘그것은 누구집인데?’ ‘누구집이 아니고 처녀가 애를 낳는다.’


보통 아이를 낳으면 누구의 아버지, 이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처녀가 애를 낳으니 아버지가 없어요. ‘아버지 없는 애를 낳아서 하나님의 열심으로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일으킬 것이다.’ 이사야가 고레스를 지나서 신약성경 마태복음 1장까지를 다 내다 본 거예요. ‘이름도 있다.’ ‘뭔데?’ ‘비로소 그때에야 하나님이 함께 있을 것이다. 비로소, 임마누엘!’


신약과 구약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그것은 유혼정치, 선지자들이 다윗언약을 고수하면서, ‘모든 인간들은 알아듣지도 못한 채 엉망진창인 가운데 선지자들은 순교당하더라도 그러한 수풀과 가시덤불속에서도 유유하게 70년 만에 돌아올 것이다.’ 합니다. 그런데 다니엘에 들어가면 70년이 아닙니다.


다니엘에서는 70이 아니고 70×7 해서 여기에 창조의 의미가 붙여집니다. 70이레가 나옵니다. 시간상으로 일주, 또 일주 하다가 70이레가 되어버리면 비행기가 부웅, 날아가 버리듯이 지상의 인간적인 시간개념과 결별을 선언하면서 묵시적세계가 됩니다. 천년이 하루같이 하루가 천년같이 된다는 겁니다.


다니엘 10:23-27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고하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이상을 깨달을 찌니라 네 백성과 네 걸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찌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이레와 육십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며 거리와 해자가 이룰 것이며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으니라 그는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며 미운 물건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예례미야같은 경우에는 70년 만에 돌아온다고 해서 BC 605-70=535년, 이것이 다니엘이 예언한 때부터 학개 성전을 다시 지을 때까지의 그 기간이 70년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적인 70년이고 다니엘은 70이레라고 함으로써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초시간적인 70이레를 말했고 마지막 제일 끄트머리의 한이레는 십자가부터 마지막 재림까지의 전체를 포괄적으로 뜻한 겁니다.


그 이레는 뭐냐? 새로운 시간이 등장할 때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죠. 그 인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처녀가 낳은 아기, 그 인물이 새로운 시간개념으로서 모든 자기 백성을 새로운 시간 속으로 끌어 올린다는 약속을 다니엘을 통해서 한 겁니다.


히스기야왕 때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쳐들어왔다가 천사가 그들의 군대 18만 5천명을 하루 아침에 송장을 만들었다.’(왕하 19:20-35)고 했지요. 그런데 히스기야가 얼마나 철이 없는지 바벨론에서 사신이 왔을 때 그 바벨론이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몽둥이라는 생각은 안하, 또 구원될 생각은 안하고 자기 입장만 생각해서 ‘바벨론의 사신들이여, 보세요. 제가 금과 은을 이만큼 모았습니다.’(왕하 20:12,13) 라고 자랑하고 있더란 말이죠.


이사야가 예언합니다. ‘다 빼앗길 것이다.’(왕하 20:16-18) 라고. 히스기야가 병들었을 때에는 이사야가 ‘당신이 죽을 것이다.’ 라고 하니까 죽으면 그냥 죽으면 되는데 죽는다고 또 난리를 피웁니다. 그 때 이사야가 기적을 베푸는데 ‘15년 동안 연장될 것이며 그 징조는 해그림자가 10도를 물러갈 것이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해시계가 여기 세워져 있다고 합시다. 해시계의 기적이 재미있는 것은, 보통 기적은 자신이 관찰자고 그 기적의 현장에서만 기적이 보이는데, 해시계의 해 그림자의 경우는 들여다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그림자도 다 같이 10도가 물러갑니다.


해시계의 그림자가 비춰버리면 해시계의 그림자만 물러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쳐다보고 있는 우리 모두가 그 기적 속에 이미 합류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함께 휩쓸려 간다는 것을, 히스기야의 철딱서니 없는 기적요구에 맞추어서 다 같이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 전부 다 한꺼번에 앗수르, 바벨론에 의해서 양동이의 물로 확 부어서 ‘에라, 다 사라져라. 껍데기들아!’ 하고 다 날라 갈 사람들인데 고맙게도 그 날려간 그 자리가 어디냐? 바로 다니엘이 끌려갔던 바벨론입니다. 그 바벨론에 포로잡혀 갔던 어떤 사촌남매는 거기서 미스선발대회에서 진으로 뽑혀서 나중에 아하수에로왕의 왕후가 되어서 아름다움이 힘보다 세다는 것을 보여주게 됩니다.(에 2:17,18)


바로 에스더입니다. 어떤 사람은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는 그것이 장렬하다고 보겠지만 모든 힘은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움보다 못한 거예요. 튕겨져서 날아온 돌이 말씀이 따라오니까, ‘죽으면 죽으리이다.’ 말씀에 순종하니까 이방나라도 말씀 앞에서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번시간 마치면서 당부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어떤 직장, 혹은 어떤 가정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것은 다 자기 욕망에 의한 핑계일 뿐입니다.


어떤 자리이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시면 오늘 밤에 낙원에 있습니다. 다 죽으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10분 쉽시다.

 

 

 

 

2009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역대기 <제7강>


역대하 36장 21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70년을 지내었으니”


70년이면 BC 605~ 536년까지 입니다. 다니엘이 약속한 그 시간이 이르러서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아예 하나님이 인간의 약을 빠짝 올립니다. 자기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는데, 철사 줄로 꽁꽁 묶여 끌려가면서 뒤돌아보고 뒤돌아보며 울면서 가는 것은 생각 안하고, 속 시원해 하십니다. 그게 에스겔에 나옵니다. ‘너희들 벌 받으니까 내가 속이 시원하다.’ 이런 구절이 예레미아 등 여러 곳에 나와요.




70년을 안식하게 해서 ‘아, 이제 내 땅이 조용하구나.’ 이렇게 하신단 말이지요. 그 하는 일에 동원된 훌륭한(착하지는 않습니다만) 자가 누구냐 하면, 그 잔인한 앗수르와 베벨론이 주님의 청소 용역회사 직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선지자들은 알아요. 이것을 아니까, 어떤 시점에게 이것을 아는 순간 그 사람의 시선은 갑자기 더 멀리 붕~ 뛰게 되지요. 사람이 자기 일에 몰두하다가 ‘하나님, 이것만은 반드시 이뤄주세요.’ 라고 철야기도를 했는데, 막상 그 시기에 이르러 모든 것이 깨어졌을 때 비로소 그동안 하나님이 주신 그 복이 나의 야망으로 인하여 가려졌다는, 허물이 벗겨지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지요.




로또복권 살 때마다 기도 안 하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복권을 사면서 ‘제가 욕심은 내지 않겠습니다. 1등 당첨되기를 바란다면 제가 나쁜 놈이죠. 그저 10억 정도만 당첨된다면, 교회 헌금으로 일부 내고 나머지는 아이 학비도 좀 내고 하겠습니다.’ 일종의 갈라먹기죠. ‘하나님이 좀 먹고, 나도 좀 먹고 이러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다 안 좋습니까.’




그렇게 기도했는데 로또가 꽝이 되면 그나마 다행인데, 1등에 당첨되었는데 로또회사가 망해서 한 푼도 못 받을 경우 정말 황당합니다. 하나님은 ‘아이고, 고소하다. 참기름보다 더 고소하다. 내가 왜 이렇게 속이 시원하지’




그러한 망가짐의 혜택을 입은 사람이라면 천만다행입니다. 자아 이미지의 노선을 계속 가다가 비로소 주님의 노선으로 합류하는 계기가 됩니다. 자아 이미지는 뭐냐 하면, ‘내 인생은 나의 것’인데, 주님의 노선에 합류하게 되면 ‘내 인생은 주님의 것’이 됩니다.




자아 이미지 노선으로 가게 되면 “인생은 미완성 ~”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나 주님의 노선은 “다 이루었다.”고 합니다. 인생은 미완성이 아니라 이미 완성 되었어요. 완성되고 새로운 창조가 주어져서 교체작업이 이뤄지고.




그 계기가 뭐냐 하면,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것에서, 성령이 임하면 ‘주신 주님의 것’으로 이전하게 되지요. 이전하면서 그동안 복음 전한 목사에게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을 많이 느끼게 되지요.




우리교회 나오시는 분들의 특징이 뭔가? 돈 잘 벌고 행세깨나 할 때는 다른 교회에서 다 퍼주고 하다가, 사업 망해 돈 잃고 빈 털털이가 된 후에 우리교회로 옵니다. 처음에는 그것을 원망했지만 그나마 오시니까 얼마나 감사한지. 바로 그 심정이 에스라, 느헤미야입니다. 왕도 없지요, 지도자도 없지요, 성전도 보수공사를 안 해서 엉망진창이고.




에스라 1장 1절에 보면,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응하게 하시려고’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을 볼 때 이것을 하나의 추임새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성경 중간 중간에 이런 말씀이 있으니까. 추임새 알지요? 가락이 흘러갈 때 ‘얼씨구나’ 하고 흥을 돋우는 것.


그러나 ‘응하게 하셨다.’는 말씀은 추임새가 아니고 ‘진짜로 말씀대로 이뤄지는구나. 야, 말씀이 장난이 아니네.’라는, 진짜로 말씀대로 이뤄진다는 사실을 확실히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얼마 전에 그런 설교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무서운 사람의 특징은 사람이 안 무서운 사람입니다.” 사람이 무섭다는 말은 자기 인생이 원하는 대로 안 될까 두렵다는 말이고,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전혀 안 무섭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자아 이미지가 망가졌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평소에 자아 이미지를 가지고 설쳤지요.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게임에서 승자가 되었다고 으스대고 자랑하기 위한, 남을 위한 자아 이미지를 형성하다가 남에게 보여줄 것이 없게 되니까 얼마나 당황스럽겠어요.




이런 사람에게는 나와 너 뿐입니다. ‘당신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그런 것은 묻지 마’ 이런 자에게, 이런 이방인에게 “말씀이 응하게 하려 함이라.”는 것이 선포됩니다. 요엘 같은 경우여호와의 이름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게 되면, 여호와를 모르던 사람들이 여호와의 노선, 이 말씀의 노선에 합류되면서 이방인들이 여호와를 찾고, 이방인들이 예수를 구세주라고 외치는 그런 놀라운 현상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사도행전이지요.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모습인데, 이 초대교회의 특징이 뭔가 하면 ‘예수님은 주시다.’ 라는 것을 예수님 살아 계실 때는 이야기 안 하다가 예수님이 보이지 않을 때 아주 열렬하게 외쳤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실 때 이야기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구름타고 올라가셔서 보이지 않을 때, 그 때 ‘예수님은 주시다.’라고 비로소 외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눈에 보이면 교회는 없어요. 교회 와서 사람만 보이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저 인간들이 미쳤구나.’ ‘왜 미쳤지.’ ‘주님의 사랑에 미쳤네.’ 이렇게 될 때 그것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보이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보이는 것을 매개로 사용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안 됩니다. 그냥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서 희생하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 이야기를 듣고 오해를 해요. 앞의 부분 ‘모든 법적인 것은 다 치워라.’ 이 말은 굉장히 좋아하는데, 진짜 제가 강조하는 부분은 귀마개를 하고 안 들으려 해요. ‘자진해서 희생하고, 자진해서 헌금하고, 자진해서 봉사하세요.’ 이 부분은 못 들은 척합니다.




초대교회는 환란 중에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이런 것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구약 선지자들의 말씀이 응한다는 그 맥락이 이방인까지 다 포섭해서 온 이스라엘이 함께 구원 받는, 로마서 11장 21절에 나오는 그 말씀을 이루는 거예요.




그래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보면 구약의 말씀이 많이 인용되어 있어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그런데 그 선지자의 말씀 가운데 뭐냐? ‘이스라엘 너희들은 나가 놀아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니라. 여호와를 모르는 자들에게 내가 손을 내 밀었고 --’ 이렇게 나옵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한 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역사는 곧 시간의 연결이다.’ 시간의 연결이 역사라고 아는 사람은 잘못된 거지요. 시간은 면적이 없습니다. 그냥 선으로만 있습니다. 이렇게 A지점, B지점, C지점이 있다면, A에서 B지점으로 가면 A는 없어지고 B는 A가 되고, C는 B가 됩니다. 이렇게 항상 선으로만 언급되는 것이 역사인데, 이것을 면적으로 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런데 역대기는 이것을 면적화 시켜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이 전체가 언약 구조가 되면서 거의 대부분은 다윗과 솔로몬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여섯 시간 강의를 했는데 그 내용이 뭔가 하면, 다윗과 솔로몬 이야기는 거의 안 했고 앞에 있는 것과 뒷부분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다윗과 여기(하나님 쪽)에서 나오는 것이 어떻게 여기(이 땅)에 파급되어서 부정적으로 역사했는가?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역대기 11장부터는 뭔가 하면, 바로 이 안에 들어가는 겁니다. 들어간다는 말은 역사에서 떠나서, 역사는 흐름이고 흐름은 항상 미완료입니다. 그런데 다윗과 솔로몬 언약 속으로 들어와 버리면 미완료가 완료로 바뀝니다. 여기서는 흐름이 아니라 정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안식입니다.




정지(stop)가 되면 세월이 지나고 흘러도 여전히 동일한 과거 완료로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이 시간이 지배하는 것은 바로 이 언약에 의해서 규정되었어요. 아무리 2010년, 2020년이 되어도 그것은 언약에 의해서 고정화되어 버렸습니다. 이미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래서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가는 겁니다.




다윗을 보기 전에 먼저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서 모든 시간과 공간을 정지화 시키는 작업을 어떤 식으로 배치했고 만들어 내는가?’ 그것을 눈여겨보시면 됩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전쟁입니다.




안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제가 야베스의 기도를 설명하면서 말씀 드렸지요. 땅을 주시는데 그 땅을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고 전쟁을 통해서 땅을 차지하게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하면, 전쟁을 통해서 이 묵시적 땅, 완성의 땅은 지상의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전쟁 개념으로서는 이무도 들어갈 수가 없어요. 그래서 기존의 인간들이 벌이는 전쟁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이 개입되면 기존의 전쟁과는 판이하게 다른, 아무 무기도 없고 전략도 없는데 승리가 연속되는, 하늘에서 동원된 무기로써 아래 있는 사람을 건져 올리는 전쟁을 하는데, 건짐 받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다윗 혼자뿐이란 말입니다.




다윗은 어린 소년시절에 그런 경험을 했어요.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 싸우는. 소년이면 소년답게 집에서 컴퓨터 게임이나 하고 놀면 되는데 어른들 전쟁하는데 나가서 어른들도 이기지 못하는 적장 골리앗을 물맷돌로 이겼습니다. 소년이 골리앗을 이긴다는 것은 모든 기성세대들이 하는 전쟁 방식은 하나님의 이름이 개입된 것이 아니고 인간의 이름이 개입된 극히 이방적인, 비 언약적인 방법이란 것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셈이 되었습니다.




그럴 때 백성들은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완전히 열배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상황에서 다윗은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쓸쓸한 사울의 입장을 한 번 감안해 보세요. 예를 들어, ‘이근호는 100인데 이장우는 10이다.’ 듣는 이장우 목사님은 얼마나 기분 나쁘겠습니까? 우리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그러려니 하고 그냥 넘어가는데, 실제로 성경이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되면 오늘 밤에 이근호 목 졸라 죽일 겁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여야 가인 값을 하거든요. 스데반이 돌이 맞아 죽듯이.




그래서 사울은 다윗에게 킬러들을 보내서 죽이려 했습니다. 그 때 다윗이 하는 말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런 고백이 있어야 성도입니다. ‘내가 이렇게 수모를 당하는 것은 다 하나님 당신 때문입니다. 내가 언제 골리앗을 이기고 싶었습니까? 그냥 놀러 갔다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물리쳤는데, 다른 사람들이 환영할 줄 알았는데 모두가 나를 피하고, 정말 억울합니다.’




다윗이 당하는 그 억울함이 그대로 ‘대속물’이라는 개념으로 예수님의 인생에 덮어 씌워집니다. 그래서 민중들이 원하는 엘리트, 스타 메시아와는 달리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살수록 점점 주위의 적들을 더 많이 양산하는, 원수들을 더 많이 배출하는 그런 셈이 되어서 결국은 그들에게 죽임 당하지요. 결국은 십자가에 달려 죽잖아요.




그렇다면 성도가 말씀의 노선에 합류하려면 그 길이 무슨 길이냐 하면, 바로 예수님 말씀처럼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너의 노선에서 말씀 노선으로 옮기려면 중간에 무엇이 있는가 하면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데, 이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인가 하면, 나쁜 짓해서 벌 받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의롭기 짝이 없는, 하나님 때문에 사는데 그것마저 이 세상에서 서러움 당하는, 정말 하소연 할 데가 없는, 하나님 외에는 위로할 자가 없는 시편에 나오는 그런 경험을 하면서 합류될 때 그 사람은 자기가 만든 인생이 아니고 하나님이 친히 만들어낸 인생입니다. 그렇게 될 때 주님이 ‘내가 또 한 생명 건졌다.’고 하십니다.




목사가 서러울 때가 어떤 경우인가 하면, 자기가 생각해도 설교가 엉망진창이라 힘이 쭉 빠져있는데, 교인들이 몰려와서 ‘목사님, 오늘 설교말씀 너무 은혜로웠습니다.’ 라고 할 때, 정말 미안하지요. 그런데 그것은 서럽지는 않고 고마워요. 그런데 정말 설교를 잘해서 흐뭇한 마음을 가지고 목사로서 자부심도 느끼는데 그 설교 듣고 여러 교인들이 교회를 떠났을 때 도무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릅니다. ‘그러면 설교 준비 하지 말까? 어쩌란 말인가?’




이렇게 ‘어쩌란 말인가?’ 하는 순간에 자기의 무능함을 느끼죠. 그 무능함을 느끼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영이, 성령이 머리 위에 있는 순간입니다. 자기로서는 어쩔 수 없을 때, 나는 할 도리를 했는데 그것마저 벽에 부딪칠 때, 출입구가 보이지 않을 때, 물이 없는 반석 앞에 나를 세우셨는데, 그런데 반석에서 물이 나와서 그 물을 뒤집어썼고, 물을 마셨고 그렇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일할 때는 꼭 예상치 못한 일을 하세요. 이런 경험을 여러 번 하고는 미리 예상하지 못할 일을 뽑아 봐요. 그 뽑아놓은 것 하나도 안 일어납니다. 이것 외에 다른 식으로 또 일하세요. 반드시 그렇습니다. TV가 고장이 나서 아무리 고쳐도 나오지 않았는데, 이제 새것을 구입하려고 생각했는데, 어린 조카가 집에 놀러 와서 장난치다가 TV를 건드려서 TV가 나왔는데, 다음날 또 안 나와서 조카를 불러서 장난쳐서 TV 켜보려고 하다가 TV가 다 망가졌을 때.




분명히 이 감기는 병원에 가야 돼. 라고 생각해서 병원에 가다가 급하게 심방할 일이 생겨서 병원을 못 갔는데 병이 나았을 때 감사하지요. 그다음부터 앞으로 감기 걸려도 병원에 안 가야지. 했는데 병이 더 심하게 되었어요. 왜냐하면 그것은 ‘병원에 안 가도 열심히 심방하면 병이 나을 것이다.’라는 그 예상을 하나님이 피해 버리죠. 이렇게 되면 환장합니다.




성도의 생활을 바이브레이션(vibration)입니다. 그 재미가 스릴이 있어요. 사람이 뭔가를 예상을 한다는 것은 자기의 계시입니다. 이 자기 계시와 선지자의 말씀 계시가 자꾸 충돌이 일어나니까 한쪽은 깨집니다. 자기 계시 때문에 참된 주님의 계시가 가려지니까 참된 계시를 알려주기 위해서 나의 계시는 깨어지게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성도들을 보면, 방주 만들 때 노아가 미리 알았던 것도 아니에요. 노아가 방주 만들 때 동네 사람들은 다 비웃었습니다. 배를 만드는데 이상하게 지붕이 있고 통통하게 너구리처럼 이상하잖아요. 주님이 시키는 일은 항상 우리를 바보로 만들고, 절대로 우리의 현란한 솜씨, 종교적인 테크닉, 노하우, 신학 지식 이런 것들이 일체 섞이지 않는 방법으로 우리를 사용하셔서 남들에게 복음 전하는 방식을 주님께서 고수합니다.




이렇게 주님은 일체 우리의 것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한 후, 공부 안하고 설교 했더니만 그것도 사용 안 합니다. 이미 자기 예상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이 말은 항상 미완료를 내다보고 있어요.







역대상 11장 10절을 봅시다. “다윗에게 있는 용사의 두목은 이러하니라. 이 사람들이 온 이스라엘로 더불어 다윗의 힘을 도와 나라를 얻게 하고 세워 왕을 삼았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신 말씀대로 함이었더라.”




이 대목에서 장신대에 있는 강00이라는 사람의 ‘여호와의 전쟁’이라는 논문을 보면, 여호와 전쟁의 변천사를 썼는데 이 사람이 제일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어요. 그것이 뭔가 하면, 옛날에는 여호와 전쟁을 이렇게 했고, 이렇게 했고, 등을 기술했는데, 지금 사람들이 궁금한 것이 뭐냐 하면 옛날 홍해 갈라질 때 사람들이 그냥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지요.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물을 첨벙 때린 게 아니에요. 그냥 지팡이를 뻗었더니만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이것이 여호와 전쟁의 방식이라면 왜 그 다음에는 똑같은 방식을 사용해서는 안 되는가를 성경적으로 설명을 해야 됩니다. 출애굽기 14장 14절에서 모세가 하는 말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했어요. 이 말씀대로 가만히 있으면 얼마나 편합니까? 그러면 그 뒤에도 가만히 있어야 돼요.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보니까 다윗이 군대를 조직해요. 이게 어떻게 가만히 있는 겁니까? 이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논문을 쓰는 학자라면 이전에 말씀하신 ‘가만히 있음’ 그 안에 어떤 핵심적인 내용이 있어서 그 다음에 아무리 군대를 조직하고 열심을 내고 하더라도 그것도 같이 ‘가만히 있음’에 해당되는, 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논리를 펴야 돼요.




신약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 성경에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정말 우리는 가만히 있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우리의 행함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 그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 받는 것을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설명할 때 뭘 반드시 밝혀야 하는가?




‘행함이라는 행함’과 ‘믿음이라는 행함’과의 차이를, 같은 행함 속에서 어떤 차이가 나는가를 설명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믿음이라는 행함이 비록 행함이 보이더라도 이것은 구약의 ‘가만히 있을지어다.’와 같은 맥락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설명을 해야 됩니다.




그 설명은 간단합니다. ‘믿음이란 것은 가만히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아니죠. 그렇다면 구약의 다윗이 군대를 조직하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행함은 움직이는 것이 행함이다.’ 이것도 아니죠.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믿음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하면 선물로 받은 것인데, 이 선물의 출처가 중요합니다. 이미 완성된 십자가의 문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십자가 지신 분이 누구입니까? 결국은 예수님에게서 나온 거예요. 그렇다면 여기에서의 행함은 뭐냐? 어떤 것이 믿음의 행함이냐 하면 “예수님이 하셨습니다.”가 고백되는 행위는 열심히 해도 믿음에서 나온 행함이고, “내가 열심히 했습니다.” 라는 것은 전도를 하고 구제를 하고 성경을 읽고 뭘 해도 이것은 믿음이 아니고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행함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설명할 때 반드시 이 양쪽을 다 설명해야 돼요. 그냥 “십자가를 믿으세요.” 라고 하면, 사람들이 뭘 생각하는가 하면, 십자가를 믿어야겠다는 자신의 행함을 총동원해서 십자가를 붙들려고 한단 말이죠. 이렇게 붙들려고 하다보니까 어떤 의문점이 생기는가 하면 “목사님, 아침에는 십자가를 믿었는데 저녁때는 안 믿어져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런 사람은 아침에도 안 믿은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완성된 것에서 나오는 믿음 같으면 내 속에서 없어지지 않는데, 이것이 나의 행함에서 나오면, 스스로 ‘정신 차리자. 정신 차려야 해.’ 이런 식으로 자신에게 최면을 걸고, 이것도 안 되면 군중심리로 통성기도를 하고 할렐루야를 외치고 이런 것은, 컨디션 좋으면 믿어지고 나이 늙고 치매가 오면 “정육점 문 열었습니까?” 이런 엉뚱한 소리가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선물로 온 믿음 같으면 오후 2시도 믿습니다. 오후 3시도 믿습니다. 늘 이래야 되겠네요?’ 이렇게 되면 연속성이 있는 것인가? 그건 아니고, 십자가에서 나온 선물이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행함과 행함으로 점철되는 것이 아니고 행함과 행함을 깨면서 거기에서 튀어나오는 고백으로 나타납니다.




어렵습니까? 다시 해 볼게요. 오후 2시에 “나는 십자가를 믿습니다.” 라고 했어요. 그리고 오후 3시에 “나는 역시 십자가의 복음을 믿습니다.” 라고 했다면, 이것은 뒤에 ‘믿습니다.’ 는 앞의 ‘믿습니다.’를 의식하기 때문에 복음적인 선물이 아니고 자기의 행함을 의식해서 나온 행함이기에 둘 다 행함에 속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오후 3시쯤에 “아이고, 나 이제 십자가 안 믿을래.”라고 했는데, ‘아, 내가 십자가 안 믿어도 말씀은 이뤄지잖아.’ 라는 생각이 들고 내 행함을 포기할 때, 그 무렵에 나의 의지가 아닌 뭔가 톡 튀어나오는 것이 있어야 돼요. ‘주여, 내가 죄인이군요. 나는 내 믿음도 간수 못하는 죄인이군요.’ 라는 이런 자신만이 아는, 우발적이고 일시적인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지만 이런 것이 튀어나올 때,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미리 예상치 못한 것이 톡 튀어나왔단 말이죠. ‘나는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마음대로 믿었다, 말았다 하는데 그런 나를 가만 두지 않고 주께서 지금도 말씀으로 쿡쿡 쑤시고 있구나. 나는 죄인이다.’ 여기서 하나 더 붙이면 “주여 나를 떠나소서.”




이런 말 한다고 해서 떠날 분이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내가 지옥에 간다 할지라도 너희들이 구원 받는다면 나는 지옥에라도 가겠다.’고 했는데, 그런 말 했다고 해서 바울이 지옥에 간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자신만만하면 그런 말을 했겠어요? 주께서 나를 말씀으로 쿡쿡 쑤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사람이라는 것은 아무리 신자고 선물을 받아도 표면으로 나오는 것은 자아 이미지를, 자기가 과거에 했던 것을 수집하고 기억을 모아서 항상 지금의 자아 이미지를 만들기 때문에 그것은 항상 나의 내면에 있는 성령이 하시는 일과 마찰을 일으키면서 죽을 때까지 “벌벌 떨면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하면서 그렇게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뭐가 성도냐 하면, 내가 예상도 못하고 의도하지 않은 고백이 정말 온 몸으로 전율을 일으키면서 튀어나올 때 ‘야, 이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구나.’ 라고 하게 됩니다. 이것이 0.5초, 또는 2초 정도 간다고 했습니다. 왜? 곧 사라지기 때문에. ‘야, 나는 신자 맞구나.’ 라고 기뻐하다가 그 이후 그것을 자아 이미지로 굳히려고 하기 때문에 그때부터는 선물이 아니라 행함이 또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주님이 또 쿡쿡 쑤시니까. 그런데 그 쑤시는 무기를 우리는 모릅니다. 말씀에서 나온다는 것은 알지만 그 방법은 몰라요.




어쨌든 다윗이 군대를 조직합니다.

역대상 11장을 보면 여러 사람이 모여듭니다. 다윗이 군대를 모집을 해도 이것은 주께서 불러 모아 주신 사람입니다. 목사님들이 늘 생각할 것은 누가 왔던 간에 주께서 오게 하셔서 오늘 교회에 나왔고, 그 사람을 붙잡는다고 해서 다음 주일에 또 온다는 보장은 없어요. 예배에 여러 사람이 빠졌다는 것은 섭섭한 것이 아니라 오늘도 2명이 나왔다는 것이 기적처럼 느껴져야 됩니다. 왜냐하면 2명 나온 것도 예배에 빠질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서 그나마 2명이라도 붙여주신 거예요. 복음 전하라고. 어쨌든 이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붙여주시는 겁니다.




이제 11장, 12장 막 넘어갑니다. 알아서 넘기는 것이 아니고 넘겨도 괜찮을 것 같아서 넘어갑니다. 12장 18절을 보겠습니다. “때에 성신이 38인의 두목 아마새에게 감동하시니” 보세요. 다윗은 한 것도 없어요. 그런데 그들이 감동하고 다윗을 따라 나섭니다.




이 역대상, 역대하에는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와 간음하는 이야기는 안 나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미완료에 관한 부분, 다윗의 개인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역대기는 다윗의 자리에서, 다윗언약을 어떻게 완성시키는가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군대를 붙여 주시지요. 하나님에 의해 모인 군대가 바로 모세가 들었던 지팡이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이 홍해 앞에서 모세가 지팡이를 드니까 여러분은 지팡이만 보이십니까? 그 안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붙여주실 수많은 군대가 들어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 때 아말렉 군대가 물러갔잖아요. 그 지팡이를 국립수사연구소에서 조사해 보세요. 그 지팡이 안에 엄청나가 많은 천사가 들어 있는지. 엘리사가 있는 지경을 아람 군대가 완전 포위했어요. 그러니까 사환(종)이 놀라서 “우리가 어찌하리이까?(왕하6:15)” 라고 했습니다. 이 때 엘리사가 기도했지요.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라고. 그랬더니만 아람의 군대보다 더 많은 여호와의 군대가 엘리사를 지키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방법은 이렇습니다.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된 그 사환이 얼마나 우쭐거리겠습니까?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 또 나올 것 아닙니까. 그래서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되다고 합니다. 보지 않고도 말씀 그 자체가 믿어지는 것이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입니다.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기적을 행하기를 원하는 것은 엉터리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다고 그것을 흉내 내면 물에 빠집니다. 기적을 체험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믿습니까? 이것은 반칙입니다.




모세의 지팡이 안에 이미 하나님의 군대가 들어 있어요. 이것은 바로 마하나임(창32:2). 야곱이 얍복강으로 갈 때 천사가 사닥다리를 오르내리면서 야곱을 지켰습니다. 야곱은 홀몸이 아닙니다. 천사가 몰려다니며 지킵니다. 중심점이 야곱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중심점이 되니까 사람들이 감동해서 다윗에게로 와르르 (군대가)모입니다. 이게 바로 그냥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겁니다.




우리 십자가마을 목사님들은 가만히 있어서 교인 수가 5명쯤 되고, 다윗은 수만 명이 된다는 그 차이점뿐이지 질은 같은 질입니다. 다섯 명이냐 수만 명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동일하게 붙여주신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교인 5명이어도 구원받는데 전혀 지장 없습니다. 단, 생활에는 지장이 있어요. 하하하 ~




역대상 12장 22절 다 같이 읽어봅시다. “그 때에 사람이 날마다 다윗에게로 돌아와서 돕고자 하매 큰 군대를 이루어 하나님의 군대와 같았더라.”




이것을 보고 ‘다윗님, 어떻게 해서 이 많은 군대를 모았습니까?’ 이렇게 나오면 잘못입니다. 다윗이 모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붙이셨죠. 그러나 다윗도 나중에는 이런 잘못에 빠져 매 맞습니다. 그래서 이 역대상 21장에 뭐가 있습니까?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하다 7만 명이 죽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네가 대신 백성들을 위해서 제사 드려라. 너의 할 일은, 백성들이 너의 부하직원이 아니라 백성들의 죄를 위해서 네가 대신 대속물로 제사 드려야 할 죄인의 입장에서 봉사하는 것이다.’ 이것이 다윗의 마지막 대목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교인 수가 많은 것도 귀찮아요. 아무리 많아도 내 교인 아니거든요. 주님의 교인인데, 자기 아이 돌이라고 불러내고, 입원해서 가봐야 하고 등등 일이 생기면 설교 준비를 할 시간이 있습니까? 교인이 한 두 명이면 대충 설교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녹음기로 녹음하고 카메라로 찍고 하니까 대충 설교를 할 수가 있습니까? 심지어는 외국에서도 본다는데.




그 다음 12장 23절에, “싸움을 예비한 군대 장관들이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로 나아와서 여호와의 말씀대로 사울의 나라를 저에게 돌리고자 하였으니 그 수효가 이러하였더라.” 라고 나오거든요. 진도 잘 나가지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붙어주셨다는 것만 알면 됩니다.




붙여준 것이 많다고 해서 그만큼 다윗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그렇게 많을 때가 있었지만 홀로 있을 때도 있었는데 그 때도 여전히 하나님이 함께 계셨고 많을 때도 함께 있었어요. 이 점이 중요합니다.




다윗이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했는데, 이것이 언제의 신앙고백입니까? 이렇게 사람들이 많을 때입니까? 아무도 자기편이 없을 때 이런 고백이 나왔습니다. ‘아무도 없어도 여호와가 목자로 계시면 저는 얼마든지 감사하겠나이다.’ 이런 신앙고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시편 23편을 보면서, 우리 주위에 여러 사람이 있더라도 혼자 있다고 생각하고, 외롭다고 생각하고 목자만 바라봐야지요. 그래서 시편 23편 액자를 이사 갈 때만 선물하지 말고 교도소 갈 때, 교회 불났을 때, 교인들 아무도 없이 다 떠나갔을 때 갔다 줘야 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 구절은 헌금 한 푼도 안 들어올 때 이런 구절이 적합합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제 넘어갑시다. 진도 잘 나갑니다. 13장 봅시다.

다윗이 자기 군대를 모았는데 그 군대는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나는 이만큼 훌륭한 장군이란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여호와의 궤를 옮겨야 되는데 여호와의 궤는 왜 옮기는가? 여호와의 궤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기에 있어요. 그래서 여호와의 궤를 옮기는데 왜 그동안 여호와의 궤가 기럇여아림에서 올라와서 오벳에돔의 집에 머물러 있었느냐 하면, 궤를 옮기는 사람이 특수 지파에 해당되는 사람이 옮겨야 돼요. 그 지파가 어느 지파입니까? 레위 지파입니다. 이 궤를 다른 사람이 들다가 죽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레위지파를 상대한단 말이지요.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과 다윗 사이에 멀리서 보면 가까운 것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약간 떨어져 있어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오는 것 같지만 인간에게 직접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들라고 지시한 법궤에 오고, 사람들이 그 법궤에 다가가려 하면 접근 금지. 여기에 누가 막습니까? 레위지파가 둘러싸서 접근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웃시야라는 왕이 있었는데 좀 잘나가니까 건방지게 행하다가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왜요? 청결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성전에 자기가 함부로 들어갔습니다. 제사장이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다윗언약이 살아 있는 법궤는 레위지파가 듭니다. 멀리서 보면 레위지파가 안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다윗이 바로 이런 배려를 해서 하나님과 다윗 사이에 하나님의 모세 언약에 의해서만 연결이 가능하다. 그래서 성전에서 기도하면 주께서 모든 죄를 사해 주시고. 왜? 여기에서 피가 흐르니까 하나님의 피가 있는 곳에는 피를 내는 작업을 해야 되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의 피 내는 작업으로 우리가 가진 땅과 모든 것을 가질 수가 있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 이뤄질 때 그 효과로서 이런 완성된 나라가 이루어 졌습니다. 하는 것이 다윗언약에서의 법궤가 있는 취지가 된다는 말입니다.


제가 힘이 없어서 더 못하겠습니다. 저녁 먹고 계속 합시다.

 

 

 

 

2009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역대기 <제8강>


역대상 17장에서 선지자가 다윗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죠.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서가 역대상 17장에 나오는데, 다른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 들으면 상당히 불쾌한 그런 발언들이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나단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됩니다. 특히 어느 대목에서 다른 지파가 들으면 섭섭한 이야기냐 하면, 10절에 “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또 네 모든 대적으로 네게 복종하게 하리라.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울지라.” 이렇게 이야기를 해 버립니다. 이것은 특별대우를 하는 거죠.




시편 89편 3절을 봅시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다윗이 속한 지파 아닌 다른 지파에서 들으면 기분 더러운 이야기를 주께서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선택’이라고 하셨습니다. 시편 78편 67-68절에 보면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를 선택했다.’고 하십니다.




이것의 의미는 제가 히브리서 7장을 언급하면서 이미 이야기했습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숨어있는 지파(유다지파)가 레위지파를 제치고 점령해서 영원히 이어진다. 이것을 하나님이 나단을 통해서 약속하셨습니다.




제가 지난 시간부터 계속 로마서 1장 3절을 이야기했는데 그 대목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 아들을 보내 주시는데 그 아들이 등장할 때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겠습니다. 말로 이해하라고 하는 것은 너무 무리한 요구인 것 같아서 제가 그림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하늘나라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점선으로 표시하겠습니다. 이것을 조직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성자’라고 해요. 성경에 없는 용어이지만 그렇게 표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즉 ‘성부’와 다른 차이나는 어떤 분이 숨어 있는데 이 지상에 12지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12지파를 이스라엘로 만들어 놓았는데, 이 이스라엘 전체를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렇게 칭했습니다.




그런데 12지파가 뭔가 위에서 내려오는 강한 힘에 의해서 쭉 빨려 올라가요. 올라가면서 ‘어, 우리가 어디로 빨려 올라가지?’ 하면서 올라가서 만나는 지점. 여기는 누구냐? ‘많은 사람 가운데서 오직 다윗을 선택했다.’ 이 말은, 지상에서 하나 선택했다는 말도 되고,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이 선택하신 분을 다윗의 집을 통해서 출생케 하겠다는 말도 됩니다.




자, 이제부터 어렵습니다. 설명하는데 에로사항이 많은데 하는데 까지 해 보겠습니다. 12지파 가운데 ‘다윗의 집’이라고 하면 이것은 이해하기 쉬워요. ‘르우벤 지파, 갓 지파 아니고 (다윗이 속한)유다 지파구나.’ 이렇게 이해하면 되는데, 그런 식으로 아무리 이해해도 거기에는 하나님이 임하지 않아요. 그것은 우리의 생각이니까.




‘하나님이 널 부르신다. 하나님이 너를 선택했어.’ 그러면 제가 금방지게 ‘하나님, 절 부르셨습니까? 그렇다면 저에게 성자가 임하게 하소서.’ 안 임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존의 신학자들이 오해한 대목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선택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윗의 집에 임할 것이다.’ 죄송합니다. 그것은 짧은 견해입니다. 인간의 다윗 집에 안 옵니다.




여기에서 ‘다윗의 집’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자께서 준비한 다윗의 집을 묘사하는데 다윗의 집이 필요한 거예요. 제가 말을 했습니다만 참 앞뒤 문맥도 안 맞고 그렇습니다. 달리 표현할 길이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산을 그려놓고 다윗과 솔로몬이 전부라고 이야기 했는데, 그 ‘다윗의 집’에 하나님이 자동적으로 임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슨 뜻이냐? 이 ‘다윗의 집’은 하나님이 만드신 영원한 어떤 집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진짜 집은 따로 있고, 이 집은 진짜 집이 이렇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동안 그림자로서 작용했던 그런 것입니다.




그림자라는 것은, 위에 구름이 있으면 아래 구름의 그림자가 지나가지요. 지나가는 이것이 바로 ‘다윗의 집’이고 ‘성전’이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실체는 하늘에 ‘다윗의 집’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언약은 어디서 이루어졌느냐 하면, 지상의 다윗 시대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다윗의 집을 향하여 모든 말씀이 꽂히게 되어 있어요.




다윗의 집에 다윗의 혈통이라고 하지만 진짜 다윗의 혈통은, 육적인 다윗의 혈통으로는 모르고 예수님이 임하시면 본격적인 다윗의 다윗 됨은, 다윗의 이름으로 왔지만 다윗의 이름은 다윗의 이름이 아니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오는 겁니다.




‘주 예수의 이름이면 주 예수의 집이네. 그러면 다윗 집 아니잖아.’ 라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옛날부터 하나님이 원하신 다윗 집은 바로 하늘에서 만들어지는 집을 이야기하는 것이지 지상의 다윗 집은 아닙니다. 로켓을 발사하면 로켓을 감싸며 지지하고 있던 옆의 지지대는 다 떨어져 나가지요. 이처럼 지상의 다윗 집을 떨어져 나가야 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은, 영원히 맹세하는 것은 이 ‘다윗의 집’이라고 따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준비된 것이 있고, 그것의 그림자로써 다윗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면 시편 89편 4절에서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는 말씀은, 그림자 다윗의 집을 붙들고 있으면 곤란하고, 다윗의 집을 통째로 삽입시켜 주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다윗에 속한 유대인들도 (죄송하지만) 구원 받을 수가 있습니다. 제 말의 의미를 하시겠습니까?




만약 이것을 이야기 안하면 ‘다윗에 속한 유대인들은 전부 자동적으로 구원 됩니다.’ 라고 우길 수 있어요. ‘시편을 봐라. 다윗의 집에 언약했잖아.’ 라고 하면서. ‘기본적으로 유대인들은 다 구원 받고, 추가해서 이방인들 중에 덤으로 구원 받을 사람이 있다.’ 이런 식이 됩니다.




아닙니다. 제 할 도리 다 했으면 ‘다윗의 집’은 사라져야 됩니다. 이런 비유를 해 보겠습니다. 포장지는 작은데 내용물은 커요. 그래서 억지로 내용물을 포장지에 다 담으려고 하면 포장지가 찢어지지요. 바로 그 원리입니다. 포장지는 찢어지고 그 물건은 조금도 손상이 안 가지요. 왜? 포장지는 종이니까.




어설픈 종이 같은 ‘다윗의 집’을 역대상에서는 지금 쌓아 올리고 있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에 의해 진짜 ‘다윗의 집’이 임하게 되면, “그동안 수고했어!” 하고 작별을 고하게 되고 어설픈 종이는 철거되고 맙니다.




이러한 차이가 어디에서 들통 나는가? 그게 바로 역대상 17장에 나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지어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은 백향목 궁에 거하는데 여호와의 언약궤는 텐트(장막)에 있었어요. 그래서 다윗이 미안했던지 자신을 찾아온 선지자 나단에게 성전을 지어 드리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동안 하나님이 하신 말씀 ‘내가 다윗의 집을 세우리라.’는 것을 다윗은 본인인줄 알았어요. 다윗이 가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셔서 정말 다윗 자신을 하나님이 세우는 줄 알았단 말이지요. 그래서 다윗은 그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성전을 짓겠다고 했는데 하나님은 거절하고 말았지요. 4절에 나옵니다.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




하나님은 ‘내가 거할 집은 내가 짓는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나’와 ‘다윗’이 균열이 일어납니다. ‘나’라고 하는 하나님과 ‘다윗’이라는 인간 사이에 틈이 벌어지죠. ‘내가 거할 집은 내가 짓는다. 너는 집을 짓지 마라.’ 이렇게 나오시는 겁니다.




이런 말씀을 듣고 다윗은 생각했겠지요. ‘하나님이 짓는다고 하니까 나는 재료만 준비하면 아마 내 자식이 지을 것이다.’ 라고. 다윗은 아직도 집이라는 건축물에 대해서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건축 자재를 모으느라고 난리를 칩니다. 다윗은 충분히 그렇게 오해할 수 있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지을 집이라는 개념은 건축 구조물이 아니라 다윗의 가문 자체를 집으로 보는 겁니다. 여기에서 구약성경의 아주 어려운 부분에 봉착합니다. 김해 김씨를 다시 예로 들겠습니다. 김해 김씨라는 집을 지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우리 김대식 성도님께서 김해 김씨 집을 다 지었습니까? 지금 이 시간도 김해 김씨에 속한 사람이 산부인과에서 태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미완료지요. 지금 김해 김씨 집이 완료되지 않았지요. ‘지금 이후로 김해 김씨 자식 낳기만 해라. 다 죽인다.’ 이런 것이 없잖아요.




하나님이 지을 가문을 내가 짓겠다고 하면 이것은 얼마동안 짓고 중단되어야 될 텐데, 집을 짓는 것은 건축 재료로 설계에 따라 지어 완성하면 끝나는 것이잖아요. 어렵습니까? 쉽게 해 봅시다. 내가 십자가마을을 위해서 집을 짓겠다고 한다면, 십자가마을 회원이 10명이면 끝입니까? 100명이면 끝이에요? 집 지어놓고 회원모집을 계속 합니까?




아니면 십자가마을 회관을 하나 만들까요? 매번 모일 때마다 회비를 내는 것이 현실적으로 부담이 되니까 땅을 구입해서 십자가마을 회관을 하나 지을까요? 이게 바로 다윗의 아이디어입니다. ‘하나님이여, 십자가 복음을 위해서 한 곳에 집을 짓겠습니다.’ 할 때, 하나님이 ‘집 짓지 마라. 내가 지을게.’ 하니까, 다윗은 ‘아, 십자가마을을 주께서 친히 인도하시는 구나.’ 생각했지요. 죄송하지만 주께서 친히 인도하는 십자가마을은 없습니다.




주께서 친히 인도하는 십자가마을도 없고, 그런 다윗의 집(가문)도 없어요. 주께서 친히 지을 때는 미완료로 남아 있는 경우가 없습니다. 집을 짓는 그 순간 이미 완료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이 부분에서 학자들은 해결책을 찾지 못해요. 집을 짓지 말라고 해놓고,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나니까 하나님이 거기 계셔서 축복해 주시고, 왜 이렇게 앞뒤가 안 맞게 일하시냔 말이지요. 집을 짓지 말라고 하면 성전 지을 때 짓지 못하도록 하셔야 할 텐데, 성전을 지어 놓으니까 좋아서 ‘내가 축복하겠다.’ 이것은 주님께서 일관성이 없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학자들이 갈팡질팡합니다.




이 문제가 풀려야 합니다. 이것 해결하지 못하면 가야산 못 내려갑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지은 집에 뭐냔 말이지요. 하나님이 지은 집이라는 것이 다윗이 생각하는 다윗의 가문, ‘아마 내 아들이 지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에요. 부동산 건축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을 집은 자재가 있어야 돼요. 그것이 뭐냐? 포기한 다윗의 가문입니다. 다윗의 가문을 유지하려고 그렇게 애쓰다가 망했잖아요. 망한 그것 주워 모아서 다윗의 가문을 만들어요. 그 가문 만드는 설계자가 누구냐?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하늘의 자재로 자기 집을 짓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하다, 하다 ‘도저히 안 되겠다. 유대나라 이스라엘 우리 힘으로 못하겠다. 망쳤다.’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그 메시아를 못 알아보고 죽이는 것까지.




인간들이 얼마나 메시아를 싫어하는가 하는 것들까지 한 개 두 개 모아서 그것을 건축 자재로, 버린 돌. ‘버렸지?’ ‘버렸습니다.’ ‘필요 없지?’ ‘필요 없습니다.’ 예수를 버린 자를 끌어 모아서 하나님이 친히 그 안에 거하시면서 그것이 하나님이 원했던 다윗의 집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 믿으려면 예수를 죽도록 싫어하는 체험을 해야 됩니다. 이것을 체험 학습이라고 하지요. 우리는 이번 수련회 기간 동안 체험 학습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 예수 같으면 나는 예수를 버리겠다.’ 맞습니다. 그런 것을 가져오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러하기 때문에 예수님께 항의할 거야.’ 맞습니다. 이때가 바로 주께서 친히 거저 건져주셔서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천당 가기 위한 하나의 자재들입니다.




이것을 학자들이 못 밝혀내요. 왜냐하면 신학교 교수들이 이것을 이야기하면 ‘우리 총신(총회 신학교) 망해야 총신 된다.’는 말과 똑같은 말이거든요.




여러분에 교회에 실망해야 됩니다. 교회는 실망하기 위해서 오는 거예요. 실망해서 교회 버리면 그것은 예초부터 교인 아니고, 교회에 기대를 가지고 왔다가 그 기대가 무너질 때 비로소 그 사람은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거예요. ‘나는 우리교회 이근호 목사님이 복음 전한다고 해서 가봤더니 다른 교회랑 똑같더라.’ 잘 보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주께서 세우려는 준비된 자재들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다윗은 뭘 했는가 하면, 건축 자재를 끌어 모았어요. 이것은 이사야, 예레미야에 의하면 완전히 재(다 타고 남은 가루) 됩니다. 언약궤도 완전히 타버렸습니다. 놋 뱀도 히스기야 시대에 완전히 부서졌습니다.




에스라, 느헤미야가 그걸 알았어요. 남는 것은 뭐 밖에 없다? 성전이 중요하지만 성전을 유지하고 안 하고 하는 그것보다는, 성전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마음이 ‘과연 하나님의 언약에 가 있는가?’ 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울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다윗이 지은 집이 있다고 해서 우리는 자동적으로 구원 받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얼마나 큰 오해인가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70년 동안 남의 나라에 가서 살도록 하셨는데, 남의 나라에서 율법 지킬 수도 없고, 성전도 없고 그 때 그들은 바벨론 강가에서 울었습니다. 시편 137편에 나오지요.




‘우리가 버림받아 마땅하구나.’ 하는 것을 알 때까지 철저히 낮추시고, ‘우리가 버림받아 마땅하구나.’를 아는 순간, 여호와를 안 믿는다고 욕했던 고레스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진짜 메시아 같아요. 불신자가 우리를 도와줍니다. 우리는 다 같은 불신자일 수밖에 없는데 왜 은혜를 받아서 신자가 되었느냔 말이지요. 그럴 때 그것이 바로 자기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한 다윗의 집은 주께서 따로 준비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그 성전이 바로 그 성전입니다. 예수님 몸이 성전이고 우리는 그의 지체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성전에서 내려오는 물, 성령을 받아서 알게 됩니다. 에스겔은 알았어요. 기존의 성전은 부서지고 부서진 잿더미 위에 다시 세워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예언했습니다. 장차 올 성전은 누가 어떻게 만드는가? 하나님의 성신으로 되는데, 이 성신을 어떻게 만드느냐?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언약궤에서 나오는 물 때문에 살아요. 이 새로운 성전은 계속 물이 나와서 새 하늘과 새 땅 전부를 적시는데 마치 창세기에 나오는 에덴동산에서 네 강이 발원하는 것과 똑같이 생명수가 흐르는데,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생명들이 다 살아나는 그것을 에스겔이 이야기했습니다.




이 바보 같은 유대인들, 다윗의 가문들, ‘하나님께서 다윗의 가문을 지키신다.’고 우긴 유대 지파들. 이 유대인. 그래서 유대인이 된 사람들은 에스겔의 예언을 이룬다고 양동이에 물을 퍼서 맥추절에 언약궤에다 물을 부었어요. 이 물이 생명수 강가에서 흐르는 물인 줄 알았어요. 아닙니다. 마지막 때에 메시야에게서 성령이 나오는 그 물이 에스겔이 예언한 물입니다.




왜 성전은 부동산이 아니고 움직이고 있는 나, 내가 바로 성전인 거예요. 그래서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세워진 그 전체를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있으려면 자재가 있어야지요. 어떤 분이 ‘목사님, 저도 성령 있어요.’ 그래서 성전이라고 하는데, 진짜 성령 같으면 그 자재가 내 힘으로 구원될 수 없음을 항상 느끼는 사람, 그것을 확실하게 아는 사람(그것도 지극히 짧은 순간만 그렇지만), 어느 순간인가 ‘야, 내 힘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잖아.’ 하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주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약속은 주의 손에서 이루어졌지 다윗이나 나나 어떤 사람의 능력으로도 주의 성전은 절대로 이룰 수 없었습니다.’ 라고 고백한단 말이지요.




교회마다 예배당 짓는 것 정도는 용납할 수 있어요. 정락원 목사님 써신 글에 보면 나오지요. ‘초대교회에 무슨 예배당이 있었느냐?’ 예수 믿는다고 하면 잡아 죽이는 시대에 지하 동굴에 숨기 바빴지 언제 헌금 거두어서 구청에서 건축 허가 얻어서 예배당 지었습니까? 만약 그렇게 했다면 로마 군사들이 와서 잡아갔을 거예요. 그 때는 ‘가이오의 집’ 등 개인 가정에 숨어서 그렇게 모였고, 그게 바로 교회였습니다. 그냥 유대인 회당 빌려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면 회당이 성전입니까? 아니에요. 지하 동굴이 성전입니까? 아닙니다. 성령이 있는 곳, 우리들이 있는 곳이 바로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교회고 성전입니다.




모델이 큰 순복음교회가 모델이 아닙니다. 모델은 성경에 있습니다. 제가 자주 이야기하지요. ‘교회가 교회를 망친다.’고. 기존의 큰 건물이 있으니까 ‘아하, 저것이 교회구나.’ 라고 선입관이 박혀 있으니까 가이오의 집에서, 혹은 우인숙 집사님의 집에서 모이니까, ‘이게 무슨 교회야?’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지요. 거기에서 나오는 말씀은 생각 안하고, ‘이것은 교회가 아니고 개인 아파트네.’ 이런다고요.




저는 우인숙 집사님의 집을 교회라고 말하고 싶지 않아요. 거기에 모인 사람이 교회입니다. 그 아파트 건물을 교회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교회라는 것은 어떤 공간적, 시간적으로도 이동할 필요가 없는 조건을 갖출 때 교회라고 할 수 있어요. ‘이번에 우리 교회 옮겼습니다.’ 이게 말이 안 됩니다. 주님의 손에 있는 일곱 교회는 옮겨지지 않습니다. 다만 일곱 교회가 밑에서 교체되고 있을 뿐이지요.




예수님께서 시편 89편에 있는 다윗의 집을 완성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드디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해서 진짜 하나님이 손수 지으시고, 스가랴의 말씀대로 하면 하나님의 신에 의해 지어진 집을 완성시켰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다윗은 ‘제가 집을 지어 드리겠습니다.’ 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부수느냐? 나중에 부숩니다. 여기에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하나 빠졌어요.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위하여,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짓는다.’ 재미있지요? 내가 친히 집을 짓는데 이것이 다윗의 가문이 된단 말이지요. 그런데 신학자들이 뭘 모르는가 하면, 이 가문 끝에 다윗의 자손이죠. 복음서에 나오지요.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할 때 주님이 임하셨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집 지을 때 ‘다윗의 자손’까지가 집이냐, 아니면 다윗의 자손만 집이냐, 이것을 포함한 것이냐? 그러면 예수님 죽고 난 뒤 사도행전에서 계속 예수 믿는 사람이 생기면 여전히 다윗 집은 미완료 아닙니까. 아직 다윗 집은 완성되지 않았잖아요? 이것은 아니란 말이지요.




그래서 학자들이 이 문제를 풀려고 애를 썼는데 이 점이 어떻게 해서 ‘다윗의 자손’ 이것이 예전에 있던 다윗의 가문과 후에 나올 하나님의 백성을 어떻게 아우를 수 있는가? 이것을 정지 상태로 만들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바로 역대상 12장부터 쭉 나오는 다윗 가문의 확고성을 가지고 설명해 주는 겁니다. ‘또 하나님이 다윗을 가지고 놀랐구나.’ 다윗은 지금 좋다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좋다고 하는 그것이 장차 올 확고한 하나님의 성전에서 몰리게 된다는 점에서는 좋지만 ‘예야, 그건 아니야.’ 라는 뜻입니다.




찬양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찬양 신학교를 만들었는데, 대구 동인 네거리에 보면 ‘율동 신학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율동 신학원이 무엇을 하는가 하면, 율동을 전문적으로 가르쳐서 주일학교 율동 교사를 배출하는데, 저는 이 단체를 보면서 ‘참 오래 가네. 저것이 망하면 구원 받는데 아직도 망하지 않고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 곳에서 가르치는 내용이 뭔가 하면, 시편대로 찬양해야 올바른 찬양이고 시편대로 찬양 안하면 잘못 된 것이라는 겁니다. 찬송가도 뒷부분에 있는 가락은 다 엉터리고 시편의 가락대로 해야 한다. 실례지만 그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은 역대상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보좌하기 위해서 문지기와 성가대원들을 차출해서 성전에 포진하게 합니다. 바깥은 군대가 둘러 사고 --




지난 시간에 했는데 다시 해 봅시다. 멀리서 보면 하나님과 다윗이 맞닿아 있어요. 그러나 가까이서 보면 다윗은 언약궤 가까이 가지 못해요. 언약궤는 누가 담당합니까? 이것은 레위지파 담당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노는가? 아니지요. 하나님이 주신 군대를 가지고 이 제사 직분이 계속 유지되도록 주변의 위협으로부터 모든 것을 지키지요. 블레셋, 암몬, 모압 등 소위 이스라엘 주변에 있는 깡패들을 전부 잠재워 놓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가는 곳마다 승리케 하셨기 때문에. 역대상 18장 13절에 나오지요.




다윗의 승리는 다윗의 승리가 아니고 다윗이 지켜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승리는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승리에요.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이름은 분명히 다윗 언약이지만 실제 내용은 모세 율법을 유지하기 위한 다윗 언약입니다.




거룩을 지키는데 거룩에는 피가 있어요. 피의 제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승리케 하지요. 피의 복음 가지고 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다윗처럼 어디를 가든지 승리케 해 주십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에 그 근거가 나와 있습니다.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이기는데 어떻게 이기는가? 자기 생명을 포기하면서 까지 이겼다. 뭘 지키는데? 십자가 피 지키는데.




다윗이 승리하게 된 이유는 그 분화구에 활화산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언약궤라고, 하나님과 인간이 유일하게 접촉할 수 있는 것이 뭐냐? 하나님이 만든 언약궤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고, 그곳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그 언약궤가 완성되고 뚜껑을 열고 나온 사람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입니다.




[피]라는 책에 나오지요. 예수님의 십자가는 옛날에는 압축되어서 언약궤라는 좁은 곳에 있었는데 그것을 열고 나오면 온 우주가 예수님의 피로 넘치게 되는데, 이것을 에베소서에서는 ‘충만’이라고 했지요. 이 충만은 어떤 충만인가 하면, 개인 소유가 안 되는 충만. 자기 것으로 소유할 수 없는 충만. 우리가 수영장에서 수영을 할 때, ‘아저씨 이쪽으로는 오지 마세요. 이곳은 나의 물입니다.’ 라고 할 수 있습니까? 충만은 뭐냐? 둘이 있어도 충만이고, 네 명이 들어와도 충만이고. 복음, 십자가 피는 아무리 믿어도 나에게 모자람이 없어요. 그래서 충만이라고 하는 거예요. 천명이 예수 믿어도 ‘야, 그만 믿으라. 지금 피가 모자란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충만입니다.




이것을 자꾸 개인 소유화 하니까 “목사님, 지난주에는 충만했는데 이번 주는 충만하지 않습니다.” 개인 소유화해서 그런 오해가 일어납니다. 주께서는 수영장에서 기다리지 개인이 소지한 주머니에 넣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건 너의 피’ 이런 것은 없습니다. 세상에 너의 피가 어디 있습니까. 주님의 피 밖에 없어요.




레위 지파에 있는 그 모세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군대가 포진을 해요. 멀리서 보면 맞닿은 것 같지만 가까이 가보면 거리가 띄워져 있습니다. 그러면 그 거리를 누가 메우는가? 그것이 역대상 15장에 나옵니다. 1절부터 보면 “다윗이 다윗성에서 자기를 위하여 왕궁을 세우고 또 하나님의 궤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고 위하여 장막을 치고” 처소, 장막이 나오는데,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집은 다윗 가문이 아니고 다윗 자손이다. 그러면 어떻게 다윗 자손이 다윗 가문을 흡수 통합할 수 있느냐? 이것은 바로 다윗이 하나님의 집이라고 확정화 시킬 때 그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에 의해서 확정된 것을 미리 보여주는 그러한 그림자로써 다윗은 스톱이 되고 그 다음부터는 내리막길로 가는 거예요.




마태복음 1장 족보에 나오지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이렇게 해 놓고, 다윗을 중심으로 후지산처럼 되어 있습니다. 올라갈 때 14대. 14대가 넘는데 왜 14대냐? 올라갈 때 14대니까 내려올 때도 14대로 쳐주고, 14대 넘는 것은 다 빼버립니다. 왜? 그 다음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예수님까지 가는데 또 14대를 맞춰야 하기 때문에. 그래서 42대로 한 것은 14대, 14대, 14대로 보지 말고 그것은 3으로 나누란 말이지요. 주께서 다윗같이 되었지만 그것을 인간들이 망쳤단 말이지요. 인간들이 망친 그것을 주께서 오셔서 어떻게 회복하는가를 보여주는 14대가 있단 말이지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인간이 실패한 자리, 인간이 절망한 자리, ‘이제는 우리 힘으로 도저히 안 됩니다.’ 하는 그 자리가 구원이 성사되는 개시점이 되지요.




그 좁아 보이는 언약궤에 누가 총 집합을 하느냐? 레위지파와 아론 자손이 다 들어가요. 그래서 역대기 15장에 보면 쭉 나옵니다. 그들이 언약궤를 메고 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물건을 수송하는데 레위 지파가 동원되어 수송을 합니다.




16장에 보면 드디어 언약궤를 옮겨놓고 난 뒤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 그 기도 내용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한 대로 그 땅에 우리가 도착했습니다.’ 임무 끝. ‘드디어 마지막 종착점에 왔습니다.’ 라고 본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은 세계를 정복할 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그렇잖아요. 아브라함에게 세계를 정복하도록 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은 가나안을 주시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대로 도달했단 말이지요. 그러면 더 이상 추가적인 언약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없으니까 짐 내려놓고 거기에서 기쁨의 잔치를 벌이는 거예요. ‘이제 다 왔습니다. 여기가 바로 그곳입니다. 하나님이 지정하신 그 장소에 드디어 우리가 도착했습니다.’ 라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내려놓았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장소에서 절대로 하나님의 언약궤는 이동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라질 뿐입니다. 왜? 그림자니까. 마치 성전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후에 사라져 버린 것처럼 사라져 버려요. 사라져버리면 우리는 뭘 믿는가? 우리가 믿는 것은 사라진 그분이 숨어서 각 개인에서 성령을 주게 되면 이제는 그 장소가 어떤 땅이든 상관없이 전부 약속의 땅이 되는 그런 신약시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10분 쉽시다.

 

 

 

 


 

2009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역대기 <제9강>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앞에 그림이 하나 있지요. 이 앞에 그림이 하나 있는데, 지금까지 유대인들이 아담부터 해서, 아담, 노아, 그 다음에 이삭, 이스마엘, 그다음에 유다, 갑자기 그림 또 잊어버려서 다시 그립니다. 분명히 같은 인간끼리 ... 신을 향하는데, 갑자기 뭔가 땡기는 힘이 쫙 땡겨 올라가니까. 여기에 다윗이 선두 주자가 되어가지고 다른 사람은 여기에 복속되는, 예속이 되는 식으로 딸려 올라가는 거에요.




쫙 딸려 올라가면서 똑같이 고생하고, 애굽에서 같이 고생하고 홍해 때 같이 왔고, 전부다 광야 생활을 같이 했는데, 유독 다윗만 쫙 땡겨 올라온 것은 이미 이 전에 여기 하나님, 숨어 있는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 다윗의 자손으로 오기로 내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 중에 다윗이 뽑혀 올라 온 거예요. 만나는 거예요. 만나지만 이용당하지요.




자기가 최고인줄 알았는데, 그것은 아니단 말이죠. 유다인 하는 것은 유다인입니다. 유다인, 열두 지파 가운데 유다지파에 속하는 것이죠. 유다인이 다윗이니까 다윗 바로 밑에 유다인이 있겠죠. 유다인. 유다인이 레위 지파와 더불어서 레위 지파를 보호하면서 나머지는 과연 친유다냐? 그 다음에 친하냐? 반유다냐? 그로인해서 반유다쪽은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 언약에서는 이게 다 합체가 되죠. 예수님 팔아먹은 사람 이름이 뭐죠? 가룟 유다죠. 가룟 유다. 이름 좋다고 그냥 턱턱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세벨 보세요. 얼마나 예뻤습니까? 관능적이고. 백날 해봐야 소용없습니다. 아달랴, 그것도 남자 이름 같아. 아달랴. 면접 볼 때 이름을 아달라. 이름 좀 바꿔야겠어요.




여기 다윗 자손의 가문 쪽으로 성사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1번이라면, 역대기 나머지 이것이 내려가요. 내려가서 이 유대인들이 자칭 잘났던 유대인들이 쫙 올라가서 다시 내려와 버려요. 이것이 구약성경입니다. 이것을 아셔야 돼요.




‘야~ 다왔다 다왔다’하는데 못 잡고, 슬쩍 내려가는 거예요. 전봇대에 풍선 걸려 있는데 자기 아들이 ‘아빠 저 풍선 떼줘’ 하잖아요. 아빠가 간만에 아빠 노릇한다고 올라가지고 짧은 손 해가지고 하는데, 그 때 팔랑 바람이 불어가지고 풍선이 날아가면 쥐도 못하고, 턱 내려지죠. 그 식이라. 아빠는 안 된단다. ...... ‘야~ 내 힘으로 구원 안 되네’ 정말 간단합니다. 이것도 모르면 곤란합니다. 복음을 모르면 곤란합니다.




열심히 교회 다니고, 집사, 장로, 목사, 신학교까지 다 했는데, 역시 내 힘으로 안 됩니다. 목사 시키는 대로 헌금 다하고, 전도하고, 전도 상 받고 했는데, 역시 안 됩니다. 하고 땅에 툭 떨어지죠. 떨어지는데, 누구 약을 올리나?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이단 놈들이 우리 먼저 간데 하면서 가죠. 이게 3번입니다. 이게 신학자들입니다.




2번은 어떤 것인가하면, 3번이 간단 이말이죠. 우리는 안 됐는데, 제들은 무슨 힘으로 됩니까? 하니까 그들이 말하기를 바로 다윗의 자손의 힘으로 구원 받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행함으로 구원 받으려 하다가 그들은 십자가에서, 거친들에서 깨어지고 부서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믿음을, 믿음으로 구원받아야 하는데, 자꾸 그 사람은 자기 행함을 가지고 구원받으려고 하니까 결국 그들은 십자가가 미련한 것이고 십자가를 우습게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수많은 성경책, 이 두꺼운 성경책 역사가 다 있는데, 우리가 역사의 주체가 되어가지고 뭔가 해 보겠다는데, 이것 다 재껴두고 십자가? 네 대신 내가 죽는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하니까 진짜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은 이것을 믿고 똑똑하다 여기는 사람들은 그것을 삐져서 안 믿고.




교회에서요, 먼저 된 자가 나중된다는 말은 이것은 늘 적용되어야 해요. 먼저 된 자가 나중된다. 재밌는 것은 먼저 된 자가 나중되었잖아요. 나중 된 자가 먼저 되잖아요. 그 사람 또 나중 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봐야 할 것은 다윗 약속 가운데서, 어떤 대목에서 이방인들이, 회개한 유대인들. 이방인들과 더하기 회개한 유대인들이 아무 근거 없이, 그냥 어려움 없이 있는 그 근거가 다윗 언약 속에서 어떻게 이것을 뽑아 낼 수 있는가를 봅시다. 어떻게 이것을 뽑아 낼 수 있는가. 역대상, 그 다음에 좀 뒷부분에 가야죠.




예, 21장. 21장 1절을 다함께 읽어봅시다.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여기에 사단이 나옵니다. 사단. 악마. 이것 좀 설명이 필요합니다. 사탄은 우리를 개인적으로, 개인적으로 상대하지 않아요. 사탄은 우리를 개인적으로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탄 말고 그 하수인들이 하는 짓이고.




사탄이 할 때는, 이것만 아시면 되는데, 어렵게 이야기 안 하고, 간단하게 이야기하겠는데, 결론부터 말해서 사탄은 어떤 것만을 건드리는가하면, 이미 완료된 것만 건드려요. 완료된 것. 사탄이 맛 드리고 노리는 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 받기로 확정이 된 그 명단, 그 리스트에 해당되는 사람을 혹 하려고, 빼 내기 위해서 도전하는 겁니다.




시사한 것은 손 대지도 않아요. 원래 자기 편이니까. 그 누가복음에 보면, 그 사탄이 누구를 노리는가 하면, 베드로를 다시 믿음에서 좌절시키기 위해서 사탄이 노리죠. 사탄이 왜 이 것을 노리는가하면, 사탄이 그걸 알아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료된 것은 이미 성립되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악마, 사탄이 직접 여기서 시비 걸고 나오는 겁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유도했죠.




만약에 사탄이 노릴 것 같으면 이미 그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이미 구원이 완료된 사람이라고 보시면 돼요. 베드로를 노린다는 이 말은 베드로가 보통 사람이 아니고,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구원 받기로 확정된 사람이기 때문에 확정되었다는 것 때문에 사탄이 비로소 자기 정체를 드러냅니다.




이것을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뭐냐하면, 물건을 이렇게 구입하고 흥정할 때 진짜 비싼 물건을 흥정할 때는 자기 집 애들이나 밑에 말단 직원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 큰 사람끼리 크게, 사장 대 사장으로 우리 거래 성사시킵시다.’하고 크게... 졸개들 보내지 않아요. 사탄이 나선다 이 말은 이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에서 구원되기로 확정되어 있음을 증거하는, 증거용으로 사탄이 활개치는 거예요.




마태복음에 나오죠. 사탄이 마지막 때에 택한 자를 가지고 미혹하기 위해서 설친다 이 말이죠. 그럴 때 우리에게 어떤 이익이, 유익이 있느냐 하면은 사탄이 주는 그 무기가 시시한 ‘너 ... 했어? 너 전도 몇 명 했어? 너 교회 헌금했어?’ 이것을 묻는 것이 아니고 완성된 그 핵심, 핵심추. ‘너 아직도 십자가 그것을 복음으로 믿냐?’ 이렇게 나와요.




무엇이 구원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구원받게 하는 그것을 직접 따고 들어오는 거예요. 예전에 이렇습니다. 사람이라는 하는 것은 예수 믿는 것으로, 십자가 복음으로 안 되고, 선한 일을 해야 착한 일을 해야, 구원받는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탄이 노리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다가 그리스도를 보고 이미 확정된 것을 뭔가 섞으려하고 그것을 해제시키려하고, 무사시켜서, 고의로 무사시켜 버리면 나머지 더 이상 확정될 것이, 믿을 것이 없게 만들어 버려요.




그래서 십자가 안다고, 십자가 알다가도 십자가 복음을 버려버리면 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손에 쥐어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확정된 것이 없어요. 나도 몰라, 그냥 해 보는 거예요. 그냥 할 때까지 가 보는 거예요. 갈 때까지 가 보는 것. 확정된 것은 없고, 그냥 무조건 신앙 생활 해 보는 거야. 갈 때까지 가 보는 것. 이것을 네 자로, 사자성어로 하면 뭐가 되게요. 갈 때까지 가 보는 것. 이것을 사자로. 여러분 잘 아는 겁니다. 개혁신학입니다.




그냥 갈 때까지 가 보는 것. 확정된 것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해 보는 거예요. 어떻게? 개혁하고, 또 개혁하고, 또 개혁하고, 또 개혁하고 계속 개혁하는 것이 개혁교회 본질이라는 거예요. 아무것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개혁교회 신학을 하는 사람들의 문제점이 뭔가하면, 초신자는 아무리 해도 구원 못 받아요. 왜? 예수 이름으로 하려면 너무 멀었어. 예수 이름에다가 개혁신학까지 알아야 돼요. 그러니까 세리와 창기는 구원 못 받아요. 왜? 개혁신학을 전문적으로 연구를 안 했기 때문에.




그런데 십자가 복음은 뭐냐? 십자가 복음은 개혁신학을 했든, 어떻게 했든, 박사가 됐든 관계없이 십자가를 알아버리면 자기 자신은 그냥 아무리 해도 개혁신학해도 안 되고, 뭐 해도 안 되고, 안 되고, 안 되는 자기만 십자가 앞에 보인다 이 말이죠.




도마처럼, 주의 창 자국과 못 자국을 만져보고 하는 말이, 그것으로 끝났어요. 창 자국, 못 자국이 있어도 그것 ...가 없어요. 주께서 십자가 지셨네요. 그러면 주는 나의 하나님이고, 나의 그리스도입니다. 끝나버리는 거예요. 그것 몇 초도 안 걸렸어요.




예수 믿기 쉽습니다. 오늘 밤에 죽어도 낙원에 가기 쉬워요. 십자가 앞에서 자기가 안 보이고, 십자가가 보이면, 그것이 1초라도, 2초 사이라도 ... 자기가 보이든 상관없이 그 사람 오늘밤에라도 구원 받습니다. 왜냐하면 그 복음의 요소가 그 사람 속에 잠시 틈을 내서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균열시켜버리기 때문에 그래요.




그렇게 해서 십자가를 믿게 된 것을 성경에서 뭐라고 하냐면, 그것을 가지고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 교회라고 합니다. 모든 성경 이야기는 교회가 되었든 뭐가 되었든 전부 다 십자가 안에서, 다른 말로 해서 예수 안에서 개념이 나와야지, 십자가 말고, 더 나가서 십자가 떠나버리면 그 모든 개념은 악마가 아주 ‘반갑다 친구야’하고 악수할 그런 이야기입니다.




‘봐라 십자가가 좀 모자리지? 그것으로 안 되는 것을 이제 알았지? 나도 옛날에는 십자가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그것 가지고는 모자린다(부족하다)’라고 이야기 하는 거예요.




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하면, 마귀가, 귀신이, 귀신 들린 자가 왔을 때, 예수님께 이렇게 말 했어요. ‘예수야, 우리가 아직 멸망 당하기 전에 일찍 왔습니까?’한 것은 이미 마귀가 압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완성시켜 놓아버리면 빼도 박도 못한다는 것을 이미 알아요.




그런데 누가 모릅니까? 제자들과 사람들은 모르잖아요. ‘예수님께서 내가 하는 일을 제발 방해하지 마시고, 나를 힘들게 하지 마시고, 제발, 예수님 하시는 일을 하시고, 나는 내 할 길을 하겠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리고 사탄이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이 언젠가 하면, 가룟 유다 속에 들어갔잖아요.




가룟 유다 속에 들어가서 하는 말이, 가룟 유다 속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했습니까? 팔아 먹었습니다. 이 말은 뭔가하면, 예수님은 전혀 필요 없다는 말이에요. 필요 없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전혀 필요치 않다. 예수님은 헛소리고, 예수 믿어서 구원 받는다는 것은 그것은 거짓말이고, 그건 안들은 걸로 여기라’라는 식으로 팔아 먹는 걸로 과거에 예수 따라가는 모든 보상을, 마음의 보상을, 보상 받으려고 그렇게 시도한 겁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예요. ‘나 당신 몰라요.’하고 3번씩 부인하죠. 그런데 베드로는 왜 구원받고, 가룟 유다는 왜 탈락되었습니까? 그것은 오야 마음대로 아닙니까? 그것, 오야 마음대로를 두 자로 하면 그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뭐냐? 오야 마음대로.




주께서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죠. 그래서 베드로에게 찾아가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 이야기 한다고. ‘네 전에 소녀에게, 닭 울 때’, ‘아~ 그건 그건, 그건 실수였습니다.’ ‘그 때 내 앞에서...’, ‘아~ 그만하세요. 그 때 미안하다 했잖아요.’, ‘네 내 모른다고...’, ‘아~ 그만하세요. 내 잘못한 것 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다시 ... 내는 것이 아니고, ‘지금 너 나 사랑하냐?’ ‘예 사랑합니다.’ 안 믿죠. ‘나를 사랑하냐?’ ‘죽도록 사랑합니다.’ 안 믿죠. ‘날 사랑하냐?’ ‘죽도록 사랑합니다. 내가 사랑하는지 주께서 아시잖아요.’ ‘난 모르는데... 내가 너를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 이것이 일관된 주님의 사랑이기 때문에 베드로는 천국 가는, 면류관을 누구에게 반납해야 하는가하면 주님에게 반납해야 합니다.




그래서 마귀는 택한 자를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삼키려고 이미 완성된 것을 뭐로 바꾸냐하면 미완성으로 바꿔버려요. ‘그것 가지고는 멀었어. 예수 십자가로 다 되는 것이 아니야. 딴 것 해야 돼. 딴 것. 교회 봉사 해야 되고, 십자가 마을 수련회 참석 해야 되고 딴 것 해야 돼.’ 자꾸 딴 것을 더 이야기 하죠.




그래서 안 믿는다 싶으면 간증집회 해 가지고, 증인들 내 세워 가지고 바람잡아야 해요. 바람 잡이 내 세워가지고, 양아치 내 세워가지고, 헌금 봉투 다 돌리고, 그것도 목요일 날 저녁에, 나중에 부흥사 앉아 가지고 갈라 먹기 하고.




다윗 가문 가운데서 어떻게 완료된 것, 그러니까 복음이라는 말을 다른 말로 번역하면, 다윗이 알고 있던 이 다윗 언약 자체, 그러니까 말을 좀 더 쉽게 합시다. 다윗 언약 만으로써 더 이상 빼고 자시고 할 것 없이 그것으로써 구원됨이라는 것이 나오는 것. 그 나오는 것이 뭐냐? 다윗은 그것을 뭐라고 하는가하면, 지금까지 했던 것, 뭡니까? 예? 성전.




그래서 역대상에 보면, 역대상입니까? 하입니까? 솔로몬이 성전에서 하는 기도가 나와요. 그 기도를 보면, ‘하나님, 제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이곳에 와서 기도하면 주께서 용서하실거죠?’ 주께서 ‘그래’ ....... ‘주여 멀리 가서 차비가 없어서 이 곳에 못 오더라도 그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향하여 기도하면 용서해 주실거죠’ ‘그럼 그럼’




‘주여 노하지 마옵소서. 또 있습니다.’, ‘빨리 이야기해봐’ ‘만약에 비가 안 와서 가뭄 들 때에 여기 와서 기도하면, 뿌려 주실거죠?’ ‘그럼 그럼’ ‘또 있습니다.’ ‘뭐, 또 이야기해봐’, ‘전쟁에서 패배해서 돌아왔을 때 기죽어 왔을 때, 여기에서 기도하면 이기게 해 줄거죠?’, ‘그럼 그럼’




그 그럼 그럼을 보여주는 것이 아까 했던 인간의 모통의 어깨들이죠. 그죠? 어깨들이란 말이죠. 전부다. 여로보암, 앗싸. 여호사밧, 미가야. 그들이 진짜 말 안 듣고, 오직 믿음만 의지했다? 하나님을 의지했더니만 갑자기 십팔만 오천 명이 ... 작살났다, 십팔만 오천명이.




야~ 하나님의 약속, 다윗 언약은 변함이 없구나. 그것을 확인해 주는 이 내리막길, 그냥 내리막길이 아니라, 확인해 주면서 ... 하면서도 그런 지적들을 받으면서도 역시 뭡니까? 결국은 ........ ㅠㅜ 바벨론 앗수르 물 바구니로 ‘에라 다 치워버리자 확 치워버리니까 속이 다 시원하다.’ 마치 텅 빈 축구장 만들어서 텅 비어 있는거죠. 이젠 좀 땅이 쉬겠네. 안식년 동안, 70년 동안 안식하라.




또 여기에 비밀이 있죠. 70년이죠. 70년을 ... 뭐로 바꾸었습니까? 70 이레로 바뀌었어요. 70 전과 후가 뭐냐? 70 전에는 성전이 불타 버렸구요. 70년 후에 성전 재건 되었죠. 70이레라는 것은 다윗이 지었던 성전의 시대는 끝나고, 70 이레가 끝나면 누가 짓느냐? 진짜 다윗 언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성전을 짓는 그 시대가 70 이레 마지막에 있다는 것을 다니엘이 알고 다니엘은 성전을 지어도 고향으로 안 돌아 갑니다. 너희만 가라. 나는 안 갈란다. 가서 많이 지어봐라. 벽돌로 많이 지어 봐라. 이렇게 해 버렸죠.




예수님도 지상에 있는 헤롯 성전을 뭉게 버리고, 부숴 버립니다. 지금 성전은 예루살렘에 있는데 지금 예루살렘은 이스라엘도 있지만 요르단도 있고, 있죠. 지금 지도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자 그러면 지금부터 다윗 언약에 가운데서 다윗 언약이 완료된다는 것을 성전인데, 이 성전을 어떻게 뽑아내는지 봅시다.




21장. 사단이 일어났죠. 사단이 일어났다는 것은 드디어 모델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완성되었으니까 원수의 쫄따구가 아니라 주의 원수, 창세기 3장에 뱀의 후손이 아니라 뱀 그 자체. 뱀 그 자체.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죠.




그래서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단 정도는 오지 않도록 막을... 없으리...상당히 섭섭해 할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들이 사탄을 경험하려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다 이루었다. 내가 어떤 행동, 어떤 일을 해도 십자가 피로 용서 받았다하는 그 순간, 슬슬 사탄이 와 가지고, ‘그러면 네가 이것 안 해도 되나?’ 성경 말씀 인용해 가지고 자꾸 이것을 쑤실 때, 그것은 완성을 흔들기 위한, 미완으로 만들기 위한, 그게 전략입니다. 그게 안 넘어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했기 때문에 안 넘어가는 것이죠. 자기들은 넘어 갈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은 제게 전화 해 가지고, ‘목사님 아직도 십자가 뿐입니까?’ ‘무슨 말을 하시기를, 듣기를 원하십니까?’ 옛날에는 십자가 뿐이였는데, 지금은 생각해 보니까 그것은 아니고, 생각이 짧았습니다. 십자가 말고, 성화까지 해야 구원 받습니다. 이런 소리하고 ......




다윗이 격동하고, 그 다음에, 다윗은 여기에 완성된 상태로써 규범입니다. 명령이 아니고. 그러나 계수합니다. 여기서 요압이 말리죠. 요압이 가로되 3절에 보세요. ‘여호와께서 이 백성을 지금보다 백배나 더 하실 수 있기를 원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이 백성이 다 내 주의 종이 아니니이까 내 주께서 어찌하여 이 일을 명령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이스라엘이 범죄하게 하시나이까’하고 급구 말립니다.




마귀에게 이렇게 쓸리면 이것은 가만 놔 두어야 하지요. 말린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내버려 둬야 합니다. 한 번 네 성질대로 한 번 해봐라. 돌아오게 하실 것은 주께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네 성질도 원없이 한 번 해봐라.




하지만 그 분들을 위해서 기도는 해야죠. ‘하나님이여 복음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라고 해여죠. 다윗이 말 안 듣습니다. 인간의 본성, 욕망은 인간의 이성보다 우선한다는 거예요. 이것을 포스트모던이즘에서 밝혀냈죠. 무의식이 의식보다 힘이 더 세다는 거예요.




의식적으로는 뭐가 옳고 나쁘다는 것을 알지만 무의식에서 오는 이 욕망, 이 욕망을 프로이드는 두 가지가 있다고 봤는데, 하나는 죽고자 하는 욕망과 계속 살아서 벼슬 하겠다는 욕망, 이것은 선택적 욕망이지만 죽고 난 다음에 뭐가 있을까... 하는 죽고자 하는 욕망, 땅에서는 다 아는데 죽고 난 다음에는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사태가 뭐냐하면 뭔가 금지를 해 놓으면 나는 금지된 그 바깥을 금지된 것을 인하여 나에게 욕망이 자각이 되요. 나는 금지 된 것을 소망한다. 소설 책 이름 아닙니까?




금지를 안 했으면 전혀 안 궁금할텐데,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했으면 선악과 따 먹을 이유가 없습니다. 보도 안 해요.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고 하니까 갑자기 귀에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 따 먹지 마라. 마라. 마라’ 이렇게 됩니다. 나중에 보면 선악과 그것 꼭 따 먹고 싶다. 따 먹고 싶다. 예잇 따 먹어버리자. 이판사판 따 먹어버리자.




결국 이 말은 뭔가하면 인간은 스스로 자기를 조절할 수 있는 .... 처음부터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만든 적이 없어요. 육하면 육이 땡기게 되어 있고, 물욕하게 되어 있는 그런 인간을 아주 선하게 창조했습니다. 아주 선하게.




유혹에 넘어가는 인간을 아주 선하게 창조했어요. 유혹에 안 넘어가는 그런 독한 인간 말고,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아주 선한 인간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고 계셨다...




이 말은 인간의 운명은 너의 결심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너는 언제든지 너의 결심을 마귀가 들쑤셔 버리면 그것은 하루 아침에 다 깨어진다는 것을.




그런데 또 주께서 인도하시면 아무리 악마가 설쳐도 주님의 공로로 그걸 다 막아서 결국 주님의 공로로 내가 구원 받았습니다. 라는 고백이 평소에 나올 수 있도록 그렇게 새로운 창조를 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죽고자 하는 이것을 인간의 제한된 한계 말고 무한함까지 들여다보는 욕망인 반면

살아서 벼슬하겠다는 것은 모든 생물의 충동, 이것을 충동이라 하죠. 충동. 십자가 마을에 하나님의 형상을 두 가지로 보죠. 하나는 죽음과 또 다른 하나는 번식으로 보죠. 생식. 번식과 생식은 같은 겁니다.




남자와 여자가 왜 있느냐? 이 번식을 위해. 그런데 번식된 그 형상이 결국은 백날 번식해도 자기는 죽죠. 놓은 자식도 언젠가 죽고. 그러니까 죽음과 번식을 통해서 아담의 형상이 아닌, 아니 하나님의 형상이 아닌 인간의 형상을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그걸 기초로 해서 하나님의 형상이 뭐냐? 영원히 죽지 않고, 주님께서 영원히 우리의 시간이 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뭐가 하나님의 형상은 거룩하고... 이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우리가 평소에 어떻게 행동을 하는가?를 실질적으로 보여줘야 그게 형상의 정답이라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




21장, 사탄. 다윗이 참을 수가 없어요. 유혹하는데, 유혹할 때는 넘어가 주는 것이 예의입니다. 안 넘어가주면 잊어버리는 것이 아니고, 나는 안 넘어갔다. 안 넘어갔다. 라고 자기가 자기 의를 자랑해요. 또 참으면 그것이 다른 쪽으로 폭발을 해요. ......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냥 하나님 믿으시고, 그냥 팽겨치면, 하나님께서 이걸 이용해서 뭘 하는가하면, 21장 끝에 보면, 17절에 보면(16절후) “다윗이 장로들과 더불어 굵은 베를 입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하나님께 아뢰되”




여러분 지금 사람들이 ‘굵은 베를 입고 다윗이 자녀들과 함께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여기까지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뭐가 안 되냐하면, ‘하나님께 아뢰여’ 이것은 안 되요. 이것은 무슨 말인가하면, 굵은 베를 입고 엎드리면서 '봐라 내 믿음 좋제'라고 할 수 있지만, 정말 하나님께 보이지 않는 분에게 아뢴다는 것은 넘어갈 수 없는 간격을 뛰어 넘은 거예요. 그 때 하늘에서는 솔직하게 그 기도를 받아주죠.




.........




그 말이, 악을 행한 자는 누구입니까? 납니다. 이게 사람에게 자기 신앙 좋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 얼마든지 이런 식으로 합니다. 부흥사들이 성경책 옆에 끼고 뭐라고 합니까? ‘연약합니다’라고 하잖아요. 이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예요. 나도 한다 이거예요. ‘연약합니다. 할렐루야’ 이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어요. 목소리만 깔면 돼요. 감기도 걸렸겠다. 얼마나 찬스가 좋습니까? ‘부족합니다. 할렐루야. 믿습니까?’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그럴 때는 그런 멘트를 날리면서 나는 하나의 의로운 공의를 획득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 다윗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실제로, 진짜로 나는 악합니다. 이것은 악마가 말릴 수가 없어요. 악마는 다윗으로 하여금 마음껏 죄를 짓게는 할 수 있는데, 악마가 뭘 못하는가하면, 내가 죄인 맞습니다. 하고 정말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아는 순간, 그 사람들처럼 죄인이기 때문에 주께서 시키는대로 그대로 다 행해야 돼죠. 그러면은 마귀는 지가 해야 할 일 다 끝이 났어요. 여기까지, 손 빼고 가 버립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 다음부터는 뭐냐. 제사 지내라. 네 죄는 제사를 지내야 된다. 그래서 오르난의 마당을 사가지고, 그것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24절에 보면 값없이 하지 않고, 값을 주고 그것을 취해서 제단을 쌓을 때에 그 다음에 26절 끝에 27절에 보면, 누가 내려옵니까? 아, 26절, 하늘에서 뭐가 내려와요? 불이 내려 오죠. 불이 내려 오고, 사자를 명하여 저가 칼을 집에 꽂아라, 이렇게 되어있죠.




21세기에 과학적 인식, 합리적인 사고 방식, 인식을 가지고 사회학적 관점을 가지고 이 대목을 바라보면 여기서 등장 인물에서 빠져야 할 것이 빠져요. 뭐냐하면, 천사, 존재하지 않죠. 구름, 후레시가 대신하죠.




전혀 이것을 손대지 못하고 있어요. 합리적인 사고방식에서는 천사가 .... 이런 것이 동화에서 나오는 전설이나 동화에서 나오는,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 포터에서 나오는 이야기이지. 어떻게 이게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에 눈에 보이는 이것을 믿으란 말입니까? 하지만 이것이 언제 믿어지느냐? 내가 악한 일을 할 때는 안 봐도 성경 전체가 한꺼번에 다 달려들어서 다 믿어져요.




그 때 뭐가 따라오느냐?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이 악한 나도 의인되는 것? 맞습니다. 왜? 약속이니까. 약속이니까. 그게 어떻게 믿어지냐? 몰라. 내가 악한 것을 인정하니까 그게 믿어지는 거예요. 약속이니까. 악한 자가 뭘 고발해요? 받아 챙기면 그만인데. 주시는대로. 하라하면 하고, 까라하면 까고. 무조건 하라하면 다 할 수밖에 없죠. 왜? 나는 악한 자이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죠. 그런데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은 자기가 악한 자가 아니고 뭐냐하면 최선을 다하고 있는, 악한 자가 아니라 선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도 나에게 결제 맡아서 나에게 은혜를 주려고 해도 허락 맡고 주라는 자기 중심적인 사고 방식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완전히 마귀가 홀딱 뒤집어 쒸었지요. 그 다음에 22장 1절 다윗이 가로되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그 다음에 뭡니까? 전이요 이는 여호와의 번제단이라.




그리고 난 다음에 2절 “다윗이 명령하여 이스라엘 땅에 거류하는 이방 사람을 모으고 석수를 시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돌을 다듬게 하고” 이것을 보면 성전을 건축했던 그 건축에 들어갈, 기초에 들어갈 인물이 다윗입니까? 솔로몬입니까?




다윗이죠. 그러면 성전 지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솔로몬입니까? 다윗입니까? 결국은 다윗이죠. 다윗이 시작했습니다. 다윗이 다 준비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




그런데 마귀가, 마귀는 하나님에게 또 농락 당했죠. 그죠? 마귀가. 마귀는 항상 자기가 항상 하나님께서 ‘그만 해라. 거기까지. 넘어서는 안 돼 거기까지 해라.’ ‘좀 더 하고요.’ ‘어허 거기까지.’, ‘알겠심더’ ...




마귀를 사용하여서 성도를 하여금 십자가 복음을 더 뚜렷하게 알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마귀까지 부리면서, 천사를 부리면서 이렇게 사용합니다. 이번 이 작전에 누가 동원되는가하면 사탄 동원됐지요. 그 다음에 칼 들고 있던 천사 동원 됐지요. 그 다음에 억울하게 죽었던 이스라엘의 7만 명 동원 됐지요. 그 다음에 같이 다윗과 함께 베옷 입고 엎드린 장로들 동원 됐지요.




그러니까 그게 바로 교회, 이스라엘이 해야 할 일이 뭐냐? ‘주여 나는 악합니다. 주께서 시키는대로 말씀하소서. 종이 듣게 나이다.’하는 주의 복음의 그 자체가 복음이 완료 된 것입니다.




결국 이 완료라는 것을 정리해 보면 ‘나는 항상 죄인이라는 사실에서 죄인임이 완료된 이 사실에 기초로 해서 ..... 요 자체가 완료되... 이것을 사탄이 깰려고 그렇게 진지하게 애를 씁니다.




자 그러면 앞으로 돌아가 봅시다. ... 이야기 하다가 말았는데요. 그 이야기를 왜 했는가하면, 찬양대, 찬양 신학, 율동 신학 이야기 하다가 그 이야기...




율동 신학이나 찬양 신학에서 뭐라고 이야기했는가하면 지금 찬양을 하려면 시편에 나오는 찬양 가사 대로 찬양을 해야 되고,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찬양에서 질이 떨어지고, 아주 천박한 찬양이다. 18,19세기 미국에서 부흥할 때 부른 노래, 대중 가요 가락에다가 가사만 이렇게 붙여서 사람들이 굉장히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그런 찬송가는 질 떨어지는 찬송가다,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면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라는 노래에다가 가사만 성경 가사를 갖다 붙이면 대중들이 얼마나 좋아하느냐 말이죠. 좋아하겠죠. ‘노바디 밧유’에다가 뭘 붙이느냐하면 찬송가사를 붙이는 거예요. 그건 노바디 밧유는 붙일 필요가 없어요. 영어 자체가 복음적입니다. 노바디 노바디 벗유.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 당신밖에 없습니다. 짝짝짝...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습니다. 립스틱 짓게 바르고 그것도 마찬가지예요. 화장을 지우고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부다 주님을 향하여 나는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갑자기 유행가 강의하네.




강수지가 불렀던 보랏빛 향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하기 나름이거든요. 가사를 어떤 인간적인 옛날 생각하지 말고, 주님에 대한 들끓는 하란 말이죠. 그 근거는 아가서. 참 아가서 쉽게 풀린다. 아가서, 연애시인 아가서를 동원해가지고 하면 될 것 아니냐.




여기에 다윗이 25장, 아론이 있고, 근데, 이 찬양이, 내가 찬양을 왜 시비 거느냐 하면 찬양에 가사가 없거든요. 가락이 어떤가가 아니라. 찬양대에 대원들의 신분이, 찬양대 대원들의 신분이, 그 돈텔파파에 있는 사람이 아니고, 이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레위인들이예요. 레위 지파 사람들이란 말이죠.




이 말은 뭐냐? 찬양을 하려면 기존의 모든 세상적인 자기 생존의 직업을 전부다 버린 자들만이 찬양하라. 그 원형이 천사입니다. 천사. 천사입니다.




아하스 죽던 해에, 문둥병 걸린 사람있죠. 아하스 죽던 해에 이사야가 늘 왔다갔다 하던 성전에 들어갈 때 갑자기 거기서 무슨 소리가 들렸습니까? 찬양 소리가 들렸어요. 이스라엘이 출애굽기 19장에서 시내산 올라갈 때 이스라엘은 멀찍이 산 위에서 무슨 나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게 뭡니까? 찬양이죠. 찬양이 성사하려면 작곡하고 가사 짓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돈가하면, 하나님과 가까이 들여 붙어 있어도 안 뒤 죽을 그 정도 거룩한 같은 동일한 거룩한 신분이 될 경우에만 찬양이 즐겨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죄인이 십자가를 알고 갑자기 ...에서 뭐가 됩니까? 의인됐죠. 오늘 밤 죽으면 의인의 자격으로 구원받잖아요. 그러면 안 죽더라도 지금 해야 할 것이 뭡니까? 내가 이런 인간이었나 기뻐서 찬양할 수밖에 없어요. 노바디 노바디 벗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아무도 노바디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당신밖에 없습니다.




다윗이 찬양대를 한 것은 고정관념, 신분고정. 또 신분고정... 이 쭉 나오는데, 그 다음에 문지기. 문지기는 시편 84편에 나오죠. 유명하게 나오는데, 여러분 잘 아시는 겁니다. 거기에 참새나오고, 제비도 나오고 다 나와요. 시편 84편 봅시다. 시편을 제가 좋아해요.




‘만군의 여호와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 여기 주의 장막이 어딘가하면 바로 다윗 언약입니다. 성전 말고, 다윗 언약에 있는 성전... ‘내 영혼이 주의 궁전을 사모하여 쇠약하며’ ‘야, 이건 좀 오바 같아, 얼마나 주의 궁전을 사모하면 쇠약하며?’ 이건 못 먹어서 쇠약한 것이 아니고 이건 정말 그리워서 쇠약함이며,




그 다음에 뭐냐하면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어나이다’ 이것은 어디서 따 오는가하면 다윗이 지었던 건축 구조물, 성전을 보니까 참새가, 제비가 집을 짓고 있거든요. 그 처럼 내가 저 제비와 가까웠으면, 내가 저 참새가 되었으면 얼마나 행복하겠느냐. 이것은 내가 악하니까 라는 것을 진정으로 알 때... 내가 진정 악하다는 것을 진정으로 알 때, 그 때 참새의 장막에 참새라면 얼마나 좋겠느냐 그 말이죠. 가정법 과거, If I am a bird,




내가 참새라면, 내가 참새라면, 내가 제비라면... 그 다음에 뭐냐. 문지기 나와요. 나는 세상에서 천 날 보다 10절에 내가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 천 날보다 나으니라.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내가 하나님, 주의 궁정에 한 날 있는 것이 다른 것보다 더 나으니. 우리 교회에서 이를 실천하는 사람이 김대식 성도님 밖에 없습니다. 아침 9시에 오거든요. 주일 날 아침 9시에 온다고. 다른 사람은 11시 15분에 오는데. 어떤 교인들은 사도신경 안 하지 오래 되었습니다.




내가 안 올 수 있는데, 내가 인간성이 좋아서 와 좋다. 아니겠지요. 그건 아니겠지요. 이해한다고요. 11시 반에 와도 주님께서 발로 차서 왔다고 저는 이렇게 믿습니다. 어떻게 오더라도. 교회 부수러 오더라도 주께서 보내주신 분. 거기에 대해서 목사가 주인도 아닌게 목사가 ... 할 것은 없고, 다만 어떤 마음으로 오는가하면, 시간이 없어서 늦게 오더라도 마음가짐은 나는 악한 이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보다는 교회에서 말씀 듣고 같이 교제하는 것이 세상에 천 날 백 날 노래방 노래 부르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어떤 찬송을 부르면 노바디 보다는 찬송가 405장이 훨씬 좋아보이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것이 훨씬 좋아 보이는 거예요. 그걸 일일이 자기 마음을 조정해가지고 노바디 부르고 싶은데, 입이 근질근질 환장하면서도 찬송가 할 때는 따라 부르는데, 박수 치는데, 이렇게 치면 되나? 따라 해가며, 박수치면서... 하니 이게 무슨 신분적으로 어떻게 확정된 신분입니까? 나는 성도라는 점에서 확정짓지 말고, 나는 악인이라는 점에서 확정지으시기 바랍니다. 그게 복음이예요.




‘나는 무슨 짓을 해도 목사가 되도 나는 악인 맞습니다.’라고 다윗처럼 엎드릴 수 있다면 그 사람 신분은 마귀가 와도 주께서 다 커버해 주실 수 있는 ... 하나님의... 나는 죄인 중에 뭐라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뭐라했습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다. 그 다음에 ... 가 있죠.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창세 전에 언약으로 된 것이다. 디모데전서 5장, 디모데 후서 1장. 나는 죄인 중에 괴수인데, 폭행자이고, 예수님의 방해자인데, 창세 전 은혜로 인하여 내가 은혜 때문에 창세 전 은혜 때문에, 내가 이렇게 ... 괴수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구원 받았다. 이 언약을 나는 너에게 소개하고 싶다.




그러면 본인은 뭐 해야 합니까? 본인은 죄인 중에 괴수가 되어 있는 경우에만 복음이 복음답게 전달될 수 있죠. 그것도 안 믿는 사람이 많지만. 그것은 주님의 뜻이고. 그래서 시편과 역대상에 나오는 다윗의 성전을 비교해보면 뭐냐하면 역대상에서는 항상 기존의 성전을, 다윗이 지었던, 솔로몬이 지었던 성전을 강조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딱 보게 되면, 다윗은 그것을 지으면서 뭘 알았는가하면, 아~ 이것은 아니잖아. 이것은 아니잖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시편에 보게 되면 뭐냐하면, 시온성 해 놓고는, 시온성 해서 자기 ..... 시온 성 해 놓고는 이미 올라갑니다. 하늘에 계신 시온 성. 시온 성이라고 해 놓고, 땅에 있는 시온 성 말고 따로 뭐가 있다? 하늘의 시온 성이 따로 있어서 거기는 주님이, 주께서 계시는 곳. 주님이, 주께서 활동하시는 곳. 이 다윗 말고, 다윗은 죄인이니까.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역대상, 역대하 보시고 시편을 보게 되면, 아~ 시편에서는 이미 세상에서 뭔가 겪은 것을 겪으면서도 이건 아니잖아. 이건 눈에 보이는 거잖아. 그러면서도 이걸 하는 과정에서 그게 눈에 보이... 영적인 것이 틈새가 피어 오르는 겁니다.




오늘 가시는 분이 많다고 해서 다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우리 성도님이 고생하셔서 동영상 뜨게 되니까, 또 녹취하는 사람은 죽으라고 녹취 할 수... 또 녹취하라고 강요하면 안 되니까. 심심하면 하시고, 할 수 있으니까. 내일 이 시간에는 솔로몬으로 넘어갑시다. 다윗은 나는 악한 이라고 하면서 일 끝났어요. 다 했어요. 그 앞에 찬양, 문지기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성실로써 붙여 줘 가지고 확정되어서 고정된 신분인 뭐 같이? 천사와 같이, 뭐 같이? 제비와 같이, 그리고 참새와 같이 누가 뭐래도 하나님의 언약에서 나온 그것은 우리가 행하지 않고 주신 그대로 주신 그것으로 .... 이미 확립된 겁니다. 더 이상 보태지도, 행할 필요도 없어요. 주신 그대로 다윗의 자손 주신 그대로, 예수님 십자가 주신 그대로 이미 하늘에 찬양할 수 있는 천사와 같은 신분으로 된 겁니다.




그래서 고린도서에 보면 우리는 천사도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고린도교회에다가 성도의 신분을 ... 시켜 놓은 것이죠. 그러면 내일은 솔로몬에서 어떤 일인가 그걸 마지막으로 하겠습니다.

 

 


 

2009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역대기 <제10강>


시작합시다.

역대 하 1:1절부터 합니다. “솔로몬이 독자적인가?” 솔로몬의 신앙이 독자적인가? 지난 시간에 유훈통치라고 하였습니다. 죽은 귀신이 통치하는 북한의 김일성처럼 유훈통치를 말하였습니다. 이미 다윗은 죽었습니다. 다윗이 죽고 이제 솔로몬 시대가 되었으면, 어제 이야기 한 것처럼 죽은 사람에 대하여서 아픔은 조금 있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면 죽은 사람은 잊혀지는 것입니다. 잊혀진다는 것은 그 사람은 신앙은 그 사람의 신앙이고 내 신앙은 나의 신앙이기에 내가 그 사람의 신앙을 따라갈 하등의 이유가 없지요!


무슨 말인가 하면 나는 여기에 있고 그 사람은 죽어버린 존재가 되었다면 이미 죽어버린 자의 신앙을 본받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위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사람위에 하나님이 계셨으니 각자의 하나님을 믿으면 그뿐이지 내가 죽은 자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립적 개별적 존재로서 이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솔로몬이 독자적이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안 보면 솔로몬을 우리와 똑같이 취급하여 아~ 솔로몬은 다윗에게 많이 배웠습니다. 참 훌륭합니다. 배울 것이 많군요! 이렇게 하고서는 결별입니다. 유훈통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은 귀신이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참 고맙습니다. 우리 아버지에게 참 많이 배웠습니다. 나도 아버지를 본받아서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편견이고 성경을 덮어버릴 때 우리가 흔히 하는 오류가 되는 것입니다. 독자적이지 않습니다. 놀랍게도! 독자적이지 않습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기도할 때에 엘리야의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갈멜산에서 엘리야의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무슨 하나님이었습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습니다.


우리 보통 종교성은 각자의 종교성이 따로따로 구분되어 있기에 그 사람을 존중은 해 주되 종속은 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과 교수들이 성경을 볼 때에 하나님이 각자에게 내려오는 것으로 보지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지하수처럼 흐르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독자적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하는데 이 지하수처럼 큰 흐름 속에서 다윗이 태어나고 솔로몬이 태어나는 이 지하수처럼 흐르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지하수처럼 흐르는 것이 무어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하니 들은 기억은 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하고 내 신앙의 독자적인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이렇게 따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이방인의 일반적인 종교성과 다른 점입니다.


약간 이야기 어렵게 되었는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어느 고시원에 들어올 사람이 사무장과 만났습니다. 방 있어요? 예 있습니다. 얼마입니까? 한 달에 오십 만원입니다. 여기 있습니다. 이제 방에 들어갑니다. 학생! 학생 이리와! 왜요? 이름 써! 아니 내가 직접 와서 내가 돈 내었는데 왜 그래요? 아니 이름 쓰라니까! 아 알았어요. 그 참 깐깐하네! 하고 이름 쓰고 들어갔습니다. 조금 있다가 어떤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혹시 이곳에 김영철이라는 사람이 왔습니까? 오늘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제가 들어가겠습니다. 아니 들어가지 말고 이름을 부르라는 것입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이름의 실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신은 만나지를 못합니다. 만나면 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실존하신다는 것을 이름을 통하여 알리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김영철! 하고 부르면 문을 열고 나와서 만나는 것입니다. 이름이 있다는 말은 이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름에 해당되는 어떤 살아있는 존재가 있으니 이름이 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의 이름이란 그것은 껍데기만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은 신이라는 것을 불러서 구원받는다고 하지만 유대인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하나님이 제공한 주의 이름을 불러서 하나님과 교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유명한 사도행전 2장 로마서 10장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신학자들은 이 주의 이름을 무엇으로 바꾸는가 하면 신의 이름으로 바꿉니다. 그것이 바로 사이비입니다.


주의 이름을 이야기 했는데 신의 이름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렵습니다. 신의 이름의 부른다는 것은 신의 이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과 나 당사자 이 둘의 이름이 합하여 신의 이름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민족마다 신의 이름의 다 다릅니다. 엘이고 바알이고 조물주고 하는 식으로 다 다르지만 이것은 항상 ‘나’라는 민족 ‘나’라는 동족 ‘나’라는 추장 파벌 등이 다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이름은 무엇이 빠지는가 하면 인간이 빠집니다. 이것이 참 어려운데, 신학적으로 신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면 중세신학 즉 스콜라신학인데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하면 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신이 만든 내가 있으매 신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어디서 나왔겠는가? 누군가 만들었겠지! 나를 만든 그를 무엇이라고 부를까? 아~ 신이다.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있으매 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실체를 밝힌 사람이 포이에르 바하입니다. 신이란 것을 자아의 투사라고 본 것입니다. 자아를 영사기에 투사시킨 것이 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마다 신이 다 다른 것입니다. 내가 어려울 때의 신과 내가 건강할 때의 신이 다 다릅니다. 왜냐하면 자아가 투영된 것이 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베트맨 영화를 보셨습니까? 그 영화를 보면 밤하늘에 박쥐 문양이 불빛에 떠오릅니다. 이 문양은 옥상의 조명등에 작은 박쥐 문양을 하늘에 비취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늘에 비춰진 이것이 신이고 이 신을 추적 해보면 그 안에 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있으므로 신도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생각 속에 신도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없으면 신도 내가 믿는 신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젊어서 교회 좀 다니다가 나이 많아 가지고는 내가 신도 찾아보고 했는데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의 존재증명이라고 안셀무스 같은 신학자들이 이야기 한 것입니다. 내가 합리적이니 신도 합리적일 것이고 내가 도덕적이니 신도 도덕적일 것이고 내가 합리적으로 따질 수 있고 원인과 결과를 알 수 있으니 는 신도 이 우주를 합리적이고 인과적으로 만들었을 것이고 내가 어떤 목적이 있으니 신도 이 우주를 만든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이런 식으로 해놓고 그 다음에 성경을 들고 와서는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하여 정당성을 부여하는 그런 식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 놓고 장사 해 먹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아가 확장된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은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시편 110편에 나오지요! “주께서 내 주에게” 주가 갑자기 둘이 되었습니다. “주께서 내 주에게” 그래서 조금 전에 말한 것은 사람들이 원한 신이지만 이 말씀은 사람들이 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자발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먼저 내밀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출애굽기 6장에 나오는데 이 중요한 것을 마지막 시간에 말해가지고 먼저 간 사람들한테 내가 약간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데, 출애굽기 6:2-3절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이게 무슨 말씀인가 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포착한다고 해도 포착될 수가 없는 이름이고 하나님을 포착하고 말고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다루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쉽게 말할까요?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는 것이 누구 의도입니까? 아브람 본인의 의사였습니까? 아닙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것이 누구의견입니까? 야곱 본인의 의견이 아니었습니다. 이삭이 태어나는 것은 아브라함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로 족한 줄 알았습니다. 이삭이 태어난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아브라함과 사라는 둘다 웃었습니다. 이 나이에 어떻게 아기를! 전계향 권사님이 아이를 임신했다고 해 보세요! 놀라 자빠질 일 아닙니까!


전계향 권사님이 임신하는 것이나 마리아가 잉태하는 것이나 같은 레벨입니다. 처녀 마리아가 잉태하고서는 얼마나 부끄럽고 황당했겠습니까? 그 사실이 동네방네 소문이 나면 어떻겠습니까? 묻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애 아버지 누구인데? 그것은 말씀이... 그래 마리아 너 신앙 좋은 것은 아는데 그것 말고 아이 아버지가 누군데? 누구하고 잤는데? 그게 아니고 성령께서... 그래 당신 믿음 좋은 것은 내가 인정하고 그것은 내가 챙기겠는데 그런데 누구 아이인데? 그 사회에서 못삽니다. 나이 90넘어 임신한 사라도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그들은 신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엘’ 말고 다른 신이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하나님인 ‘엘’을 알고 있으니 이 ‘엘’에다가 하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임하였으니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너와 나와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구체적인 이름이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김영철이라는 이름은 다른 사람이 부르지 못합니다. 김영철이라는 친구가 방안에 있는 것을 아는 친구가 부르는 것입니다. 김영철 나와라! 누군데? 아이고 반갑다 친구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어떻게 기도합니까? 우리는 신을 부를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름을 주실 때에 인간 빼놓고 주셨기에 우리가 기도할 때에 마지막에 누구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까?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신의 이름으로 기도해 버리면 기도의 내용에 무엇이 들어가는가 하면 자아의 요구사항인 자아의 꿈과 희망이 담긴 기도를 하게 됩니다. 마치 팔공산 갓 바위처럼.


그러므로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려면 이 주의 이름이 하시는 그 일과 내용에 종속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종속되려면 나의 희망과 꿈을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신입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인간이 창안해 낼 수 있는 그런 신입니다. 이것을 버리고 주님과 주님의 합의로 만들어낸 그 내용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면 언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출입구가 무엇이냐 하면 주의 이름입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미리 약속을 던져놓고 그 약속을 이루어 내시는 분이 바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사람들의 희망 포부 기대 새해가 되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는 그런 것은 일체 주의 이름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가 하면 마태복음 16장에 보시면 적어도 하나님이 만드신 교회 같으면 어느 정도 인가하면 죽음의 권세를 이겨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의 권세와 율법의 권세를 다 이길 정도가 되어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자기의 소원과 목표를 달성하여도 죽음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하고 나이 많은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이냐 하면 욕망의 문제입니다. 라캉이라는 사람이 말한 것인데 사람의 욕망이라는 것은 자기 욕망이 없고 전부다 타인의 욕망이라는 것입니다. 타인의 욕망이기에 비교를 느끼고 그 비교한 데서 상대를 꺾음으로 말미암아 상대방보다 우위에 섰다는 것으로 자아의 존재가치를 타인을 통하여 발견하는 것이 젊은이들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늙은 분들은 인생을 좀 살아왔기에 배려하는 것입니다. 아이고, 인간아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배려합니다. 그래서 잠언에서 머리가 흰 사람을 존경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젊은 애들은 아무리 좋은 관계라고 하여도 다 계산을 합니다. 저 사람하고 사귀면 나중에 얼마나 수입이 생길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집의 친구와 사귀더라고 공부 못하는 아이와 사귀지 말고 공부 잘하는 친구와 사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모순되는 것입니까? 그러면 공부 잘하는 아이는 누구와 사귀라는 말입니까!


그러니 젊은 사람들은 함께 웃고 떠들고 술 먹고 하는 것 같지만 전부다 경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삐에로처럼 웃고 있지만 언젠가는 내가 너를 앞서고 말거야! 이러한 경쟁과 게임을 통하여 나는 이 사회에서 나의 레벨이 어느 정도를 점유하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철저한 자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반면에 나이 많은 사람은 양보 배려 바다 같은 넓은 마음 용납 이런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젊은 사람들은 타인의 욕망이기에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에 대하여 항상 스트레스를 받는 것입니다. 남을 의식하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굉장히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구시 한 복판에서 육교로 안 건너고 횡단보도도 아닌 곳으로 마음대로 건너는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주로 연세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순경 만나면 봐주소! 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경쟁하지 않으니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학 하는 사람들 소설 쓰는 사람들이 자꾸만 거짓말을 하는데 무슨 말을 하는가 하면, 인간의 자유 인간의 해방을 외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유를 외치는 것은 그만큼 자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나는 이제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자유하겠다고 합니다. 아버지로부터의 자유 어머니로부터의 자유라는 것 자체가 앞에 무엇이 붙어 있습니까? 아버지 어머니라는 존재를 의식하고 거기에서 파생된 개념이 자유 아닙니까?


이게 무슨 자유입니까? 아버지! 두고 보세요! 아버지에게서 독립하여 살아보겠습니다. 그렇게 하고서는 나중에 아버지 죽고 나서 소주 한 병 들 오징어 굽어한 마리 구워 무덤에 가서는 아버지 제가 지금 이렇게 승진하였는데 이것도 못 보시고 돌아가시다니 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그러지요! 그것 남의 무덤인데요. 프로이드에 의하면 평생 인간은 자유, 자유를 부르짖지만 그 자유는 누구를 의식한 자유라는 것입니다. 나를 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 나 보세요! 이렇게 가치가 있잖아요!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인생, 이것이 무슨 자유입니까? 스트레스 받을 일이지요!


나이 한 80,90 되어 보세요! 횡단보도도 보지 않고 그냥 건너는 것입니다. 새벽이 일어나가지고 육수간(식육점)이 어디입니까? 치매 걸린 노인이 그렇게 묻듯이 감당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직장에 신입사원으로 취직을 하면 30대 초반의 대리가 굉장히 구박을 하지요! 그런데 70대 된 회장은 업무처리를 잘 못하면 젊어서 그럴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배려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신입사원은 나와 경쟁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경쟁 대상에 종속되지 않는 사람이 그야말로 자유입니다. 이 말을 의지하고 있어야 됩니다.


솔로몬이 아버지 참 많이 배웠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버지의 신앙이고 이제부터 나는 나의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독자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의 아버지 다윗의 언약을 통해서 그 출입구가 주의 이름이라는 것으로 나에게 오는데 진짜 하나님의 뜻은 내가 원하는 솔로몬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재 창조물로 되기 위해서는 주의 이름이라는 그 출입구를 뚫고 주여! 라고 부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출발점에서는 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러나 내 이름 속에 주의 언약이라는 이름이 덮치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왜 만들었습니까? 자기에게는 하나도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에게는 쓸 모가 없지만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쓸모가 있기에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의 피를 믿으라. 다른 복음은 저주 받는 것이기에 십자가만이 너를 구원하고 십자가 외에는 너를 의롭게 할 자가 없다! 라는 복음이 주어진 것은 지금은 모르지만 이것이 언약의 의해 꼭 필요하기에 천국과 지옥에 꼴 필요하기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이 믿어지기에 믿는 것입니다.


제가 강의를 하면서도 제가 약간 충격을 받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람이 죽으면 타인들은 사라지는 것에 대하여 좀 안타까워 하다가 나중에 잊어지지만 본인은 죽으면 유일한 현실 타인이 알 수 없는 자기 문제로 되 돌아오는 것입니다. 죽고 나서 ‘나는 지금 지옥 불 속에 있을 뿐이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습니다. 이것이 유일한 현실입니다.


전도서 7장에 보면 잔치 집에 가지 말고 초상집에 가라는 것입니다. 왜? 초상집에 가야 네가 가끔가끔 느껴지는 너의 본질이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전도서 끝에 그렇게 되어있습니다. 청년들아 때가 늦기 전에 창조주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속되어야 합니다. 심판의 기준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의 기준은 언약인데 언약은 한 마디로 이야기해서 무엇이냐 하면, 출애굽 할 때에 어린 양의 피를 발랐더니만 예를 들어 저 출입구에 피를 발랐더니 이 안에 직업과 귀천과 나이를 불문하고 저 출입구에 피를 발랐다는 것 때문에 죽음의 사자가 이곳을 그냥 넘어가 버린 것이 유월절입니다. 그것이 주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언약입니다.


그래서 언약의 핵심은 피 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하기를 나는 너희가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왜? 지금 당장에는 자기 욕망에는 다른 것들이 도움이 될까 싶겠지만 전체를 보시고 모든 것을 보시는 주님 앞에서는 예수님의 피가 유일한 언약이고 이 피는 남들이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구원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피란 주의 이름으로 그 내용물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절대로 독자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나는 아버지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 것처럼 나는 아버지의 그 언약이 내 신앙이 되기를 원해서 역대 하 1장6절에 보면 “여호와 앞 곧 회 막 앞에 있는 놋 단에 이르러 그 위에 일천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니” 여기에 일천번제가 솔로몬의 자기 아이디어이냐? 아닙니다.


다윗이 이미 일천번제를 드렸습니다. 한 장만 거꾸로 보시면 역대 상 29:21절입니다. 오늘 아침에 아주 컨디션이 좋습니다. 어제 화이투벤을 먹고 잤는데 목은 원래 이렇게 쉬는 것이지만 몸은 괜찮은데 화이투벤 덕분도 아니고 화이투벤을 주신 김을수 집사님 덕분도 아니고 김을수 집사님을 주신 하나님 덕분입니다. 복잡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언약 때문에 그렇습니다. 21절 다 같이 읽어봅시다. “이튿날 여호와께서 제사를 드리고 또 번제를 드리니 수송아지가 일천이요 숫양이 일천이요 어린 양이 일천 이요 또 그 전제물이라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풍성한 제물을 드리고” 이것을 솔로몬이 알고 그대로 따라 한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의 신앙을 벗어날 마음이 조금도 없습니다.


이것이 일천번제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교회에서는 일천번제를 일천 번으로 말하면서 교회에 올 때마다 돈 가져오라고 합니다. 하하하 그런데 올 때마다 천 원씩 한다고 해도 천원 곱하기 천원이면 얼마이며 또한 이자를 계산해보세요! 새마을금고에 넣으면 6%입니다. 엄청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사기를 치는지 몰라요! 아니 이것만 사기입니까? 다 사기인데!


교회가 정말 언약적인 교회라면 주의 이름이 건성으로 주의 이름이 아니고 자기 욕망의 주의 이름이 아니고 이런 것은 이방신의 이름이기에 정말 솔로몬처럼 독자적이지 않는 주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증거 하는 교회가 진짜 하나님이 함께 있는 교회입니다.


성전을 짓고 난 뒤에 역대 하 6장을 봅니다. 26절입니다. “만일 저희가 주께 범죄 함을 인하여 하늘이 닫히고 비가 없어서 주의 벌을 받을 때에 이곳을 향하여 빌며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그 죄에서 떠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사 주의 종들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이고 이 언약을 따라 용서 되는 것은 피에 있는 것입니다. 즉 제사에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36절입니다. 36절에 보면 아주 기분 좋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랜만에 강의 시작하고 제일 기분 좋은 말이 끝에야 나옵니다. 다 같이 봅니다.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하므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 저희를 적국에 붙이시매.... ”이러 할지라도 어디를 향하여 기도합니까? 38절에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범죄 하지 아니하는 인생이 없습니다. 범죄 하지 않는 인생이 있으면 나와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범죄가 무엇입니까? 이런 이방신을 찾는 것입니다. 자기의 욕망을 위해서 자기의 욕망은 타인에 의해서 타인의 기대에 의해서 형성되는 그런 욕망을 따라 나오는 나의 기대사항 희망 포부 떠오르는 달과 해를 보고 비는 이런 딴 동네에서 범하는 이런 죄에서 주여! 주의 이름 안으로 들어오게 하옵소서!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은 모르고 마귀가 원하는 인간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원하는 기도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주여! 돌이 떡이 되게 하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또 기도하는 것은 인기 있는 사람이 되게 하옵소서!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그 다음의 기도는 주여! 제가 주의 성도로서 이 땅에서 권력을 가지고 출세하게 하옵소서! 내 남편 내 아들 출세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세 가지 기도 누가 가르쳐 준 것입니까? 어디서 많이들은 기도 아닙니까? 바로 마귀가 예수님께 세상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기도하는데 너도 이렇게 기도하지? 그때 예수님이 사람이 말씀을 산다. 주께서 시키시는 대로 사는 것, 내 뜻대로 되지 말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는 것이 본래 인간을 만든 목적이다. 사탄아 물러가라!


요즈음 만약에 교인이 새벽에 이런 기도하는데 사탄아 물러가라 그러면 교인이 정말 물러가버리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교회 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절에 가는 대신으로 오는데 절은 산 중에 있고 멉니다. 일요일만 갈수 있습니다. 등산 겸 그런데 교회는 골목마다 있으니 멀리 있는 산당보다 가까운데 있는 산당에 오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 아닙니까?


제가 이런 강의를 하면 꼭 끝에 불만이 무엇이냐 하면 그러면 기도할 것이 없잖아요! 그런데 이 불만은 두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하나는 너무 기뻐서 기도할 것이 없네요! 하는 것과 다른 하나는 화를 내면서 기도할 것이 없네요! 하는 것입니다. 이 둘이 너무 다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가 우리 욕망대로 나오는 것을 그대로 두시면서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것은 그런 기도를 하나하나 지적하시면서 그런 것이 바로 죄이며 나쁜 것이라는 말씀의 기능이 들어올 때 우리는 하나하나 이런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하는 언약에 종속되는 기도 즉 솔로몬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는 그런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기도란 솔로몬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듯이 내가 십자가 앞에서 따로 나의 자아를 챙겼습니다. 하는 회개가 나오는데 그것 3초갑니다. 왜 3초인가 하면 어렵게 기도하고 돌아서면 우리가 사는 사회가 어떤 사회입니까? 타인의 욕망의 그물망입니다. 옛날 철학자들은 주체의식 때문에 다들 독자적입니다. 내가 사랑하면 사랑이 되는 것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크게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을 사랑할 때 C라는 사람이 무안가 나를 떠밀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전부다 울렁울렁하는 그물망입니다. 만원인 지하철에 내가 가만히 서 있고 싶어도 뒤에서 떠밀면 이것은 우발적으로 앞에 있는 아가씨의 등을 떠밀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뒤에서 떠밀린다는 사실을 모르는 아가씨라면 이게 웬 치한이냐고 소리칠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아니라고 합니다.


부도가 난다는 것 성경에 보면 열심히만 부도 안 난다고 합니다. 그러나 부도나게 되어있습니다. 이번 수련회에 부도나서 오셨잖아요! 회사가 문을 닫아가지고, 회사 돈을 다른데 유용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데 투자한 것이 아닙니다. 착실하게 거저 재투자하고 거저 열심히 욕심도 없이 아주 소박하게 살다가 부도가 난 것입니다.


교회마다 교인 수가 준다고 합니다. 그것은 국민소득 2만 불이 넘어가면 동일한 현상입니다. 모든 국가가 2만 불이 넘어가면 교회에 나올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왜? 맞벌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맞벌이해야 하기 때문에 청소도 좀 해야 하고 일반 직원이면 일요일 놀지만 회사에 간부급이 되면 노는 날도 없습니다. 일요일 회사 문 닫아도 회사 걱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또 일요일은 쉬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침 늦게까지 자다가 일어나서 아침을 먹고 이제 교회가야지 하다가 보면 벌써 12시 반이고 벌써 끝나버렸는데 오후예배에 갈까 뭐 다음에 가지하면서 안 가는 것입니다. 2만 불이 가만히 있어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고 양쪽이 밤낮으로 벌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옛날 농경시대 때는 365일 중에 일하는 날이 150일 뿐입니다. 나머지 200일은 놀았습니다. 노는데 그냥 노니 심심하니 윷놀이, 사물놀이, 짚불놀이 하고 그렇게 놀려고 하니 미안해서 별자리 보면서 견우직녀라고 하면서 또 노는 날 만들어 놀고 무슨 구실을 만들어 단합대회도 하고 하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지금은 동진데 촌에 내려오지 않느냐 팥죽 먹으러 와야지! 아버지 지금 회사에 잔업 해야 하는데 갈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티브이에서 예야 지금 아무 필요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2만 불 사회에서는 아버지도 가족도 돈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합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처나 자식을 돈보다 더 사랑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태된다는 것입니다. 처나 자식도 돈 앞에서는 다 필요 없는 것입니다. 자식이란 키울 때 귀여울 때 말이지 커 가지고 아버지 사업하는데 어떻게 보증 좀 서달라고 하면 이것은 벌써 자식이 아닙니다. 동업자이지 자식이 아닌 것입니다.


특히 아버지 죽고 나서 유산 다툼 일어날 때 형제도 없습니다. 컬 때 코 흘릴 때 형제이지 유산 앞에서 형제가 어디에 있습니까? 형제는 그나마 점잖아도 동서들이 난리가 납니다. 아버지 양로원에 계실 때 돈 얼마를 냈느냐? 그것은 장남이 당연히 하는 것이 아니냐? 웃기고 있네! 그것도 철저하게 계산해! 회계사 불러야 겠네! 이러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세상은 우리를 업 시켜 놓은 것입니다. 남들처럼 되지 않으면 안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남들처럼 2만 불이 안 되면 사람취급이 안 되는 것처럼 소속의 안정감을 가질 수 없기에 좋든 실든 그들의 구미에 맞추어서 따라 가 주어야 도태되지 않고 콩고물이라도 생긴다는 것입니다. 내가 일요일이라고 가 버리면 돈 누가 줍니까? 안 먹는 술도 먹고 취한 척 비틀거려야 하고 노래도 못 부르지만 노래방에서 개똥벌레라도 불러야 되고 그래야 무언가 교제가 되어가지고 저 사람은 우리 편이다. 중요한 정보가 있으면 그 사람에게 알려주어서 함께 살자는 식으로 한 통속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냥 한 통속으로 사세요! 우리가 죄 짓는 것이 우리 주특기입니다. 내 밖에 모르는 것 그것을 제일 잘 합니다. 목사가 시키지 않아도 잘 합니다. 이 전체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면 죄 인 것을 인정하면서, 주여 바로 이런 죄인이 오늘도 십자가 앞에 왔습니다. 묵고 살려고 하니 하는 수 없습니다. 이렇게 회개하고 돌아서도 또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아닌 척 하는 것은 아예 신앙도 없는 인간인 것입니다.


사회라는 곳이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남이 떠미는데 엎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떠밀리면 원수지간이 아닌데도 나도 떠밀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떠밀릴 때는 주여 보시옵소서! 내가 천사입니다. 그런데 내가 떠밀어야 할 때는 상당히 미안한 것입니다. 내가 떠밀 의도가 없는데도 떠밀리면 떠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사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열심히만 하면 산다고 했습니다. 열심히만 하면 산다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이고 지금은 서로 얽혀서 살아가기에 내가 밀치는 자리가 내 자리가 되고 내 자리가 되었지만 그 자리가 또 오래 못 갑니다. 그 자리가 인기가 떨어지면 또 다른 직업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노래방 하다가 털어먹고 치킨 집 하다가 털어먹고 베이커리 하다가 털어먹고 계속 옮겨 다녀야 하는 것입니다. 바다 이야기 하다가 법정에 걸리고 그렇게 털어먹고 경륜에 빠져서 털어먹고 그렇게 계속 돌아다녀야 하는 것입니다. 욕망의 유목민들!


회사에 승진을 해야 하는데 자리는 하나뿐일 때 저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면 라이벌에 대하여 인간 개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기가 들어갑니다. 이것은 신자고 불신자고 간에 이 사회자체가 남을 떠 밀 수밖에 없도록 강요하고 거기에 저항할 능력이 우리에게 없는 것입니다. 왜? 타고난 것이 나만 챙기는 것으로 타고 났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관성이고 우리 마음의 타성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다윗 사후에 하나의 조치를 취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역대 하 8장 11절 읽어보세요! “솔로몬이 바로의 딸을 데리고 다윗 성에서부터 저를 위하여 건축한 궁에 이르러 가로되 내 아내가 이스라엘 왕 다윗의 궁에 거하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궤가 이른 곳은 다 거룩함이니라 하였더라” 무슨 뜻인지 잘 모르시겠지요!


솔로몬의 나라가 커졌습니다. 예를 들면 200명을 목회 하는 자가 자신이 200명을 목회하는 자라고 생각이 들면 무엇이 괴로운가 하면 150명이 되면 미치는 것입니다. 100명짜리 목회자라고 생각했는데 150명이 되면 감사 할 텐데 200명이라고 생각했는데 150명이 되면 사람이 돌아버리는 것입니다. 왜?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버렸구나! 이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150명이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므로 덩치가 커지면 덩치를 관리하기 위해서 다른 쪽에 있는 나라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어냐 하면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좋게 지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남에게 대접하는 대로 자기가 대접받는 원리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 많은 이방 여자와 결혼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카사노바처럼 여자를 밝혀서 그런 것이 아니고 사회가 그러니 그럴 수밖에 없지만 하지만 아직도 신앙이 있다는 티를 내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이방인의 여자가 내 아내로 와도 이스라엘의 다윗의 궁에는 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기껏 이것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힘으로 밀리기 시작합니다. 자꾸만 밀리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압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부자가 되고 많은 백성을 다스리고 영토가 넓은 것은 야베스의 기도이고 또 다윗의 기도의 응답 때문에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통치하는 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그래서 남방의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의 소문을 듣고 그 소문이 정말인지 와보니 자기의 예상보다 더 뛰어난 지혜를 보고서 놀라서 자진해서 공물을 바치고 그 지혜에 종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압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잘해서 얻은 것이 아니고 이 모든 것이 다윗의 언약대로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 솔로몬의 잘못이 무엇이냐 하면, 이 큰 덩치를 어떻게 유지할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 다윗이 재산을 2천억 물려주었다면 무엇을 생각하는가 하면 아버지가 2천억을 물려주었으니 나도 2천억 정도는 되어야 해! 말로는 아버지가 2천억 전부를 주신 것이라고 말하지만 아버지가 주신 것을 내가 잘 유지해야지 하는 순간부터 그 2천억은 나에게 짐이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 2천억을 주기까지 어떻게 그것을 모았는지 그 원리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십니다. 솔로몬아 네가 다윗처럼 온 율법을 지키면 너도 다윗처럼 해 주겠다는 이런 원리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 원리를 생각하지 않고 그 큰 덩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덩치를 어떻게 유지 할 것인가를 생각하다 보니 그 다음부터 무리수를 두게 되고 인간적인 방법이 동원되고 그것을 유지하려다 보니 자기의 신앙이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나중에 다윗이 정복해 놓은 그런 나라들이 다 도망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솔로몬이 무엇을 알았는가 하면 진짜 원리는 다윗이 물려주었든 누가 물려주었든 간에 이 나라를 도로 하나님의 나라로 반납하는 그것이 지혜임을 알았습니다. 그 지혜가 전도서에 나옵니다. 전도서 잠언 아가, 내 몸이 더 이상 내 몸이 아니고 주의 몸이라는 것을 뽑아내는 평생이 성도의 가야할 한 평생입니다.


무얼 더 보태라는 것이 아닙니다. 돈 갖다 바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책임한 짓이고 그것이 아니고 살아가면서 100억이든 20억이든 이것은 주님이 주신 것이 맞습니다. 내 손가락 발가락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맞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살아온 일대기와 같은 맥락이라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습니다. 다윗이 한 일을 예수님이 인계인수 하였다고 할 수도 있고 다윗이 예수님이 미리 하실 일을 보여주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사시면서 느낀 것은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다 아버지의 뜻대로 살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함부로 기적행하지 않고 함부로 으스대지 않고 십자가에 죽을 때에도 아버지의 뜻이라면 제 몸을 아낌없이 바치겠나이다. 대속물로 바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기에 도로 반납하는 모습입니다.


이 솔로몬이 마지막에 알아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것이 내 뜻이라고 생각하니 그것은 바람 잡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 하듯이 내 것이라고 한 것이 바람처럼 잡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바람 잡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람 잡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바람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내 속에 많이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자식도 있었고 아내도 있었고 교인들도 있고 목사님도 있는 것입니다. 다 바람입니다. 교인들을 사랑하라고 하였는데 교인들을 보면서 김 바람, 최 바람, 다 하나님이 붙여주신 것입니다. 내 남편 원망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적합해서 붙여준 것입니다. 남편이 바람이 아니라 네가 바람임을 알게 하기 위하여 바람 같은 남편 부쳐준 것입니다. 오랜 만에 바른말 한번 하지요! 실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절대로 관리하려고 하지 마시고 주님께 종속된 그것을 예수님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진리에 예속 되는 것 그것을 가지고 예수님은 자유라고 하셨습니다.


네가 사람 의식하지 말고 주님의 이름을 의식하면 그것이 나이 많은 노인네처럼 이제는 사람들에게 스트레스 받을 것도 없고 네 마음대로 사세요! 네 마음대로 사시는데 그것이 예수님 안에서 사시면 내가 헛되며 모든 것이 바람임을 비로소 아는 그런 지혜가 천국의 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들어와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 것이라고 하는 순간부터 스트레스가 찾아오고

남에게 빼앗기지 않고 싶어 할 때 사건이 일어나 우리를 밀쳐 버리면

우리는 엎어지고 자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아예 자빠지고 아예 엎어진 사람들이게 하옵소서!

내 것이란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가운데서

주어진 모든 것 가족과 재산과 교회와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의 덩어리임을

하나님께서 주의 이름으로 주신 예수님의 피가 발린

선물인 것을 오늘도 잊지 않게 하옵소서!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같이 고백할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출처 : 심플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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