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열왕기하 강해 2
열왕기하 강해 2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32강) 열왕기하 13:1-9 개혁의 어려움
<본문>
유다 왕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의 이십삼년에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 칠년을 치리하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좇고 떠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노를 발하사 늘 아람 왕 하사엘의 손과 그 아들 벤하닷의 손에 붙이셨더니 아람 왕이 이스라엘을 학대하므로 여호아하스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셨으니 이는 저희의 학대 받음을 보셨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에 구원자를 이스라엘에게 주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아람 사람의 손에서 벗어나 전과 같이 자기 장막에 거하였으나 저희가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여로보암 집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좇아 행하며 또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을 그저 두었더라 아람 왕이 여호아하스의 백성을 진멸하여 타작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하고 마병 오십과 병거 십승과 보병 일만 외에는 여호아하스에게 남겨두지 아니하였더라 여호아하스의 남은 사적과 모든 행한 것과 그 권력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여호아하스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그 아들 요아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열왕기하 13:1-9)
<설교>
그런데 성경은 세상의 역사와는 전혀 다른 얘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열왕기서에도 많은 왕이 등장하고 있고, 그들의 치세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이스라엘의 왕에 대해 언급할 때는 앞서 말한 것처럼 어떤 정책을 펴서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고 백성들을 편하게 살게 하였는가를 말하지 않고 다만 여호와와 어떤 관계에 있었는가를 말하면서 그로 인해 이스라엘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다루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한 유다 왕 요아스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40년의 치세 기간에서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성전을 수리한 일입니다. 그리고 제사장 여호야다의 교훈을 받을 동안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오직 산당을 제하지 아니함으로써 백성으로 하여금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게 하였다는 말로써 40년의 치세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물론 요아스도 유다의 왕으로써 백성들을 위해 많은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왕으로서 역할을 기준으로 해서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즉 백성들을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도록 해야 하는 왕의 역할을 바르게 수행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는 이스라엘의 왕에 대해서도 동일합니다. 이스라엘의 왕 역시 백성들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도록 힘을 써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왕으로써 분명히 해야 했던 것은 우상은 철저하게 훼파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마음에 두지 않도록 우상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는 성전에 나와서 제사함으로써 하나님과의 만남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힘써야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왕 여호아하스는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이 왕 또한 역대왕의 잘못됨을 그대로 답습하였을 뿐입니다. 즉 역대 왕들의 잘못됨이 무엇인가를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유다 왕 요아스가 왕이 된지 23년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에서는 예후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었는데 그가 여로보암의 죄를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쫓음으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 여호와가 노하여 아람 군대를 보내서 이스라엘을 점령하게 합니다. 그리고 아람 왕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압제하고 학대하게 합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왕 여호아하스는 여호와를 찾을 수밖에 없고 하나님은 여호아하스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자를 보내서 이스라엘을 아람의 학대에서 건져 주십니다. 그런데 여호아하스는 또 다시 여로보암의 죄를 쫓고 사마리아에 아세라 목상까지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아람 왕을 보내서 여호아하스에게 마병 오십과 병거 십승과 보병 일만만 남겨두고 모두 진멸해 버리십니다.
결국 본문의 이야기는 죄의 길을 떠나지 않은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이 노하여 징계하시고, 하나님의 징계가 너무 힘들어 하나님께 부르짖으니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고 다시 구원하셨는데 또 다시 범죄의 길을 걸어가는 단순한 내용인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하게 보이는 본문의 내용에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었는데 여전히 여로보암의 죄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죄는 이스라엘 안에서 계속 이어져 오고 있는 악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이 왕이 된 후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서 제사하지 못하도록 금송아지를 만들고, 누구든 자원하면 제사장이 되도록 하면서 성전 제사를 무너뜨렸던 것입니다. 이처럼 여로보암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보다는 자신의 왕권을 지키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왕들이 하나같이 이러한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를 못한 것입니다.
만약 여호아하스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중요하게 여겼다면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은 예후의 길을 그대로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모든 금송아지를 무너뜨리고 백성들로 하여금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가서 제사하도록 하고, 여로보암으로 인해서 발생한 레위인이 아닌 제사장들도 모두 없애고 하나님의 규례대로 레위인 제사장을 세우면서 이스라엘을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게 하기 위해 힘을 썼을 것입니다. 이것을 통상 개혁이라고 말합니다. 즉 개혁의 참된 의미는 늘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돌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무슨 예배 절차를 바꾸고, 교회 제도를 바꾸고, 새로운 교회법을 만드는 것을 개혁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은 예배 절차도 아니고 교회 제도도 아니며 교회법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개혁이라는 말의 참된 의미는 인간의 욕망에 붙들려 끌려가는 길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말씀과의 관계를 새롭게 가지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은 인간의 힘과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매일 우리 속에서 개혁을 일으키고 계심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개혁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잘못됨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여호아하스처럼 여로보암의 죄를 버리지 못하는 악을 그대로 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만약 여호아하스가 개혁을 일으켜서 여로보암의 죄를 버리고 여호와 앞에 정직히 행하고자 하였고, 여러분이 그때의 이스라엘 백성이었다면 여호아하스의 개혁에 대해 환영을 하였을까요. 아니면 불만을 가졌을까요. 이것은 여러분이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물론 여로보암의 죄를 단순히 금송아지를 만든 우상을 섬긴 것으로만 바라본다면 주저하지 않고 개혁을 환영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여러 번 말씀드린 대로 여로보암의 죄는 단지 금송아지를 만들어 거기에 절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왕권을 위해 성전 제사를 무시한 것이 여로보암의 죄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신자로 세우신 이유와 목적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보다는 부자가 되고 성공하는 것에 더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여로보암의 죄를 쫓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여러분들에게 있어서의 개혁은 자신이 부자가 되고 성공하는 것보다는 낮아지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자리에서 피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더욱 크고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을 예수님과 이런 관계로 이끌어 가기 위해 늘 십자가의 피의 은혜를 외치고 여러분의 죄를 드러내는 말씀을 환영하시겠는가라는 것이 앞에서의 물음의 의미인 것입니다.
교회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이스라엘다움이 하나님께서 애굽의 종이었던 이스라엘을 구출하시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신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으로 증거되는 것처럼 교회의 교회다움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졌음을 망각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십자가에 흘리신 피의 은혜와 공로를 증거하는 것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나라가 부강해지고 먹을 것이 풍부해지는 것을 목표로 살아서는 안되었던 것처럼 교회 또한 교회가 발전하고 부흥되는 것을 목표로 모여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그리스도를 흥하게 하는 것보다는 교회의 흥함에 목표를 두고 있다면 그것이 곧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교회가 교회의 부흥을 목적해서는 안되며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십자가만 증거하는 교회로 존재해야 한다는 개혁에 대해 환영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 역시 앞에서의 물음의 의미인 것입니다.
이제 여로보암의 죄를 떠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아시겠습니까? 여호아하스가 여로보암의 죄를 그대로 행했다는 것이 곧 오늘 우리들의 얘기라는 것을 실감하시겠습니까?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아람의 압제를 받는 그 고생을 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서 겨우 구원을 받았으면서도 또 다시 여로보암의 길로 행할 정도로 여로보암의 죄는 인간을 강하게 붙들고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떨쳐 버릴 수 없을 정도의 강력한 힘으로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로보암의 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호아하스도 여로보암의 죄가 무엇인지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고민도 없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아람의 압제가 고통스러워서 하나님을 찾았을 뿐입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여로보암의 죄를 보는 것입니다. 무엇이 여로보암의 죄를 쫓는 것인가를 볼 수 있어야 그러한 죄에서 자신을 건져 달라는 기도라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오기를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죄가 무엇인가를 세밀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알아야 하는 것은 신자의 사명이 무엇이며 교회의 사명 또한 무엇인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신자로 세우신 그 뜻과, 교회를 세우신 그 뜻을 알지 못한다면 결국 우리는 우리의 욕망에 근거한 교회를 목표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여로보암의 죄를 행하는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아하스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세우신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왕의 역할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안에 전통이 되어 흘러오는 여로보암의 죄를 그대로 좇았던 것입니다.
개혁의 어려움은 무엇이 죄인가를 보지 못하는 것에 있습니다. 여로보암의 죄를 보지 못함으로써 여전히 여로보암의 죄를 좇아 행하면서도 단지 예배 절차를 바꾸고 제도를 바꾸는 것으로 개혁을 했다고 자부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교회를 생각하지 못하고 다만 기존의 교회와는 다른 제도와 다른 예배를 가지고 교회됨을 보여주고자 하는 발상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말씀은 지금도 계속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심령에 역사하고 우리의 잘못됨이 무엇이며 여로보암의 죄를 좇고 있는 실상을 세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의 거울로 우리 앞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 앞에서 여러분 자신의 모습을 보기를 싫어한다면 결국 죄가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한 채, 아니 아예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여호아하스처럼 여로보암의 죄를 좇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개혁과는 멀어진 길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고집으로 자신이 추구하는 길을 걸어갈 뿐입니다.
개혁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매일 같이 우리를 새롭게 만드시면서 행하시는 것이 개혁입니다. 중요한 것은 과연 여러분 자신이 그처럼 개혁되기를 원하느냐는 것입니다. 원하신다면 매일 말씀에 의해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소망할 수 있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멸망에 있던 나를 건지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여러분의 마음이 빠져 들 수 있기를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33강) 열왕기하 13:14-21 인간이 보지 못하는 것
<본문>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저에게로 내려가서 그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가로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매 엘리사가 저에게 이르되 활과 살들을 취하소서 활과 살들을 취하매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왕의 손으로 활을 잡으소서 곧 손으로 잡으매 엘리사가 자기 손으로 왕의 손을 안찰하고 가로되 동편 창을 여소서 곧 열매 엘리사가 가로되 쏘소서 곧 쏘매 엘리사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구원의 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진멸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 또 가로되 살들을 취하소서 곧 취하매 엘리사가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땅을 치소서 이에 세번 치고 그친지라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가로되 왕이 오륙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도록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번만 치리이다 하니라 엘리사가 죽으매 장사하였더니 해가 바뀌매 모압 적당이 지경을 범한지라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적당을 보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 섰더라 (열왕기하 13:14-21)
<설교>
이렇다보니 자연히 그 소망교회의 인맥의 덕을 보기 위해 소망교회를 찾는 사람도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자고로 돈과 권력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이 속성이니까요
성경을 보면 예수님에게로 사람들이 몰렸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오병이어 등의 기적을 베풀었을 때입니다. 그때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으로 인해서 예수님께로 몰려 왔고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이것을 두고 예수님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고 하시면서 그들이 예수님을 좇는 이유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책망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는 예수님을 좇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으며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쳤던 것 또한 기억하실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는 예수는 그들에게는 관심 밖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이 죽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그들이 영원히 산다는 말을 한다고 해도 영생에 대해 마음을 두지 않는 이상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관심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자신의 죽음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물론 육신의 죽음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죽음에서 멀어지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지 않습니까? 죽음을 피할 수는 없지만 될수록 죽음에서 멀어지고 싶고, 살아있는 동안에는 잘 살고 싶다는 욕망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살고자 하는 욕망이 때로는 돈과 권력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으면서도 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예수님에게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까? 그것은 육신이 죽고 사는 것은 현실이지만 영혼의 죽음이나, 영원한 멸망에 대한 이야기는 확인되지도 검증되지도 않은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간주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육신이 죽는다는 것이 영원한 죽음이 아닙니다. 육신의 죽음은 이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지만 대신 하나님 앞에 서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시작인 것입니다. 죄가 용서되지 않은 더러운 존재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지, 아니면 죄가 용서된 깨끗하고 거룩한 존재로 서게 될지의 중요한 문제가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 해결이 바로 예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영원한 죽음을 알지 못한 어리석음은 결국 인간으로 하여금 돈과 권력을 바라보게 하고, 무엇이 자신의 육신에게 도움이 되는가에만 관심을 두게 하고 결국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마음을 두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신비스러운 분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가 예수님을 가까이 하기만 하면 살아나는 기적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비한 기적을 본문에서도 보여주고 있습니다.
20-21절을 보면 “엘리사가 죽으매 장사하였더니 해가 바뀌매 모압 적당이 지경을 범한지라 마침 사람을 장사하는 자들이 그 적당을 보고 그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들이던지매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 섰더라”고 말합니다. 모압 도적이 침범을 하자 사람을 장사하던 자들이 혹 도적들이 시체를 훼손할까 염려해서 시체를 엘리사의 묘실에 던졌는데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놀랍고 신비스러운 일이 또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도 이러한 놀라운 기적과 신비스러운 일이 계속 발생하고 있는 것이 참된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적을 기적으로 여기지 않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일만 현실로 인정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본문의 이야기처럼 실제로 죽은 육신이 회생하는 일이 일어난다면 얼마나 놀랍겠습니까? 그러나 죽은 육신이 회생한다고 해도 또 다시 죽은 육신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육신의 회생이 아니라 영혼의 참된 생명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은 영혼이 죽고 사는 문제가 현실적인 이야기로 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영혼이 죽고 사는 문제가 과연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옵니까?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온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고 우선적인 문제로 여겨짐을 뜻합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다급하고 중요하고 우선적인 것이 육신이 살고 죽는 문제입니다. 요즘 공무원 감축설로 인해서 공무원 세계가 뒤숭숭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소망교회라도 출석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농담까지 오간다고 합니다. 사실 그런 얘기가 농담으로만 그치겠습니까? 속마음으로는 소망교회라도 출석을 해서 권력의 실세들에게 눈도장이라도 찍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사람들에게 육신이 살고 죽는 문제보다 더 다급하고 중요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이 죽고 사는 문제는 가볍게 여깁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그것이 당연하다고 해도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라면 달라야하지 않겠습니까?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가 바로 영혼이 죽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죽고 사는 문제로 인해서 그리스도를 찾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에게는 그리스도가 곧 나에게 구원자라는 확신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영원한 죽음에 갇힌 나를 구출하고 영생으로 들어가게 할 구원자가 그리스도라는 확신으로 살아간다면 신자에게는 그리스도가 곧 힘이며 권세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문제가 가장 현실적이며 중요하고 우선적인 문제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14절에 보면 “엘리사가 죽을 병이 들매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저에게로 내려가서 그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가로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 하매”라고 되어 있습니다. 엘리사가 죽을병이 들자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찾아가서 눈물을 흘리면서 애통해합니다. 왜냐하면 요아스는 선지자 엘리사를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엘리사가 죽을병이 들었다는 것은 앞으로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야 할지 막막한 일이 아닐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요아스에게 엘리사가 활과 살을 취하라고 하더니 활을 잡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자기 손으로 왕의 손을 안찰하고 동편 창을 열라고 한 뒤 활을 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는 여호와의 구원의 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진멸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17절)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또 다시 화살을 취하라고 하더니 이번에는 화살로 땅을 치라고 합니다. 요아스가 세 번을 치고 그치자 엘리사가 노하여 “왕이 오륙 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도록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치리이다 하니라”(19절)는 말로 요아스를 책망을 한 것입니다.
엘리사가 요아스의 손을 안찰하고 동편 창을 열고 아람 군대가 있는 곳을 향해 활을 쏘라고 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요아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라고 그 같은 지시를 한 것일까요? 이것은 17절의 내용을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엘리사는 요아스가 결국 죽어 사라지는 자신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살아계셔서 역사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고 의지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요아스의 손을 안찰한 것도 엘리사의 능력을 요아스에게 전달해 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아람을 물리칠 것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요아스가 죽을병이 든 엘리사로 인해 애통해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일에만 집착하고 있는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엘리사도 결국 죽어야 할 사람에 불과합니다. 엘리사가 선지자지만 영원히 살아있을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요아스는 엘리사도 언젠가는 자기 곁을 떠날 대상으로 여겼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진심으로 의지할 대상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실 참된 구원자에게 눈을 돌렸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엘리사가 죽을병이 들었다고 해서 앞으로 일로 인해 애통하는 일은 없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요아스는 활을 동편을 향해 쏘라고 하고, 이는 여호와의 구원의 살이라고 말하는 엘리사의 의도를 알지를 못했던 것 같습니다. 즉 엘리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자시고 힘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활로 땅을 치라고 할 때 세 번을 치고 그쳤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일은 조금 이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가 오륙 번을 치라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치라고 했을 뿐인데, 세 번을 치던 다섯 번을 치던 그것이 책망들을 일은 아닌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 때문에 사람들은 신앙에 있어서 횟수를 중요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즉 3일 기도한 것보다는 사십일 작정기도를 한 것이 더 신앙이 좋은 것이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효력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엘리사가 문제 삼은 것은 요아스가 땅을 친 횟수가 아니라 그 중심이었습니다. 왕이 활을 쏠 때는 성경은 “곧 손으로 잡으매” 또 “곧 쏘매”라고 그 동작이 아주 신속한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땅을 칠 때는 “곧”이라는 수식어가 사라졌습니다. “곧”이라는 말이 확신에 차서 진심으로 순종하기에 신속하게 행동했다는 뜻으로 생각해 본다면 “곧”이 없는 행동은 느릿느릿 마지못해 한 행동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확신 대신에 의심이나 불만에서 나오는 행동인 것입니다. 엘리사는 왕의 태도에서 그 중심을 읽은 것입니다. 땅을 세 번 친 것에서 여호와가 구원자라는 믿음에 머물지 못하는 요아스의 중심을 본 것입니다.
요아스는 화살로 땅을 치는 것을 불필요한 일로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엘리사가 죽는 마당에 이러한 행동들이 자신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의 말에 그저 마지못해 움직임으로써 세 번을 치고 그쳤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그러한 요아스의 중심을 보고 믿음과 확신에 거하지 못하는 요아스를 책망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치적으로 따져 본다면 화살로 땅을 치는 것이 아람 군대와 싸우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고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처럼 우리들은 나에게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고 유익이 되는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생각으로 인해서 자신에게 실제적인 도움과 유익이 되지 않는 일이라고 판단되는 것에 대해서는 마음이 시들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 실제적 도움은 우리의 어떤 행동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나의 행동이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자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도움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확신이 없이 마지못해 하나님을 믿는 수준에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치 요아스처럼 말입니다.
신자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근원적인 문제를 파악해야 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근원적인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시체라는 것입니다.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 근원적인 문제를 파악하고, 그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여겨져야만 비로소 인간에게는 육신이 살고 죽는 것보다 더 우선적이고 다급하고 중요한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럴 때 시체인 나를 살리는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께 마음이 향할 수 있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야 말로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임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은 시체가 그리스도께 던져질 때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산자가 됩니다. 이러한 신비한 능력과 기적에 마음을 둘 신자는 자신을 시체로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시체로 볼 수 있어야 자신을 살리시는 분에게 마음을 두는 것이고, 그 분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야 말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영원한 죽음의 문제를 떠나서 예수님을 생각한다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일들은 자기 인생에 별 도움이 안 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힘을 잃어버리고 그저 마지못해서 주께 나오는 태도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절대로 헤어날 수 없고 해결할 수도 없는 영원한 죽음의 문제에서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야 말로 구원자가 되시고,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삶이야말로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관심 두어야 할 문제로 남게 될 것입니다.
(34강) 열왕기하 14:1-7 다윗 같지 않는 것
<본문>
이스라엘 왕 여호아하스의 아들 요아스 이년에 유다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되니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 구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여호앗단이라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그 부친 요아스의 행한대로 다 행하였어도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나라가 그 손에 굳게 서매 그 부왕을 죽인 신복들을 죽였으나 왕을 죽인 자의 자녀들은 죽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대로 함이라 곧 여호와께서 명하여 이르시기를 자녀로 인하여 아비를 죽이지 말 것이요 아비로 인하여 자녀를 죽이지 말 것이라 오직 사람마다 자기의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니라 하셨더라 아마샤가 염곡에서 에돔 사람 일만을 죽이고 또 셀라를 쳐서 취하고 이름을 욕드엘이라 하였더니 오늘까지 그러하니라 (열왕기하 14:1-7)
<설교>
그런데 혹여 현대 기독교의 신앙이 이처럼 ‘묻지마’식이 되어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현대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궁금해 하지도 묻지도 않으려고 하고, 자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이 다만 색다름과 즐거움이 있는 신앙생활만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경향이 많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신앙생활에 있어서 무기력함과 권태를 느끼지는 않습니까? 매주일 똑같이 반복되는 교회에서의 생활들에 대해 권태를 느끼지는 않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그동안 신앙생활이 아니라 단지 교회 생활을 해왔다는 증거라고 봐야 합니다. 신앙생활에서는 무기력이나 권태로움이라는 것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매일같이 계속되는 새로움이 진정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새로움의 맛은 여러분이 ‘묻지마’ 식의 신앙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여러분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희생과 은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색다른 교회 생활이 여러분에게 새로움과 즐거움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여러분과 동행하시고 인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곧 새로움이며 즐거움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신자는 끊임없이 말씀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물어야 하고 내가 가는 이 길이 참된 생명의 길인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묻고 또 물으면서 자신의 길을 살피고 자신의 영혼의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야 말로 여러분에게 있어야 하는 신앙생활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열심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신앙생활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묻지마 신앙의 특징은 목사가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과연 그것이 성경의 참된 의미이며 성경이 말씀하는 바른 신앙입니까?’라는 물음이 없이 목사가 하라는 대로 하면서 자신은 다만 교회에서의 즐거움을 누리면 된다는 식입니다. 목사가 하라는 대로 신앙으로 여겨지는 몇 가지의 행동만 있으면 신앙으로 사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신앙이 참된 신앙에서 멀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자신의 신앙현실을 깨닫지 못한 채 여전히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길을 가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기에 참으로 문제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유다 왕 아마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3,4절을 보면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그 부친 요아스의 행한 대로 다 행하였어도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는 말로 아마샤에 대해 평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아마샤도 여느 왕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입니다. 자식은 부친의 영향을 받고 부친에게 보고 배우는 것처럼 아마샤도 요아스의 행한 대로 행하였지만 산당은 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3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는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않았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이 말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은 다윗 같은 왕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다윗 같이 행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여호와 앞에 정직히 행하는 것으로도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호와 앞에 정직히 행하는 것은, 하나님이 명하신 일들을 어기지 않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2장에 보면 요아스가 제사장 여호야다의 교훈을 받을 때는 여호와 앞에 정직히 행하였다고 말하는데, 여호야다의 교훈을 받았다는 것을 하나님의 명하신 말씀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그 말씀을 어기지 않았다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아마샤가 여호와 앞에 정직히 행한 일례가 6절에 나옵니다. 5절을 보면 아마샤는 나라가 굳건히 서게 되자 부친인 요아스를 죽인 신복들을 단죄합니다(5절). 그러나 신복들의 자녀는 죽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신명기 24:16절의 “아비는 그 자식들을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비를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라 각 사람은 자기 죄에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는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아마샤가 유다를 굳건히 세웠다는 것은 그만큼 아마샤의 권력이 막강해졌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아마샤가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부친을 죽인 신복들의 가족까지 모두 몰살시킬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부친을 죽인 신복들만 죽였다는 것은 뭔가에 의해서 아마샤의 마음이 다스림을 받았음을 뜻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규례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하나님의 규례대로 행하기에 힘썼던 아마샤가 왜 산당은 제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샤가 백성들이 기뻐하고 원하는 것을 제할 수가 없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산당에서 제사하는 것의 심각성을 몰랐기 때문으로도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입니까? 물론 신자에게는 그것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무작정 그러한 행위만 있으면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앞에서 말한 묻지마 식의 신앙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에 있어서 가중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는 회개에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신자가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야 말로 가장 중요한 신앙의 중심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 죄 없는 거룩한 제물이 피 흘리고 죽어야 함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가를 깨닫고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에 감사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과 가장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러한 관계에서 신자를 만나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아마샤가 하나님과의 이런 관계를 잊지 않았다면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사하는 것을 심각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산당 제사에는 회개가 없고 죄사함에 대한 감사가 없으며 오직 자신의 기쁨만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샤가 그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않았다는 말도 그런 의미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다윗은 그 행위로는 분명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었던 사람입니다. 다윗만이 아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그 누구도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다윗의 무엇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던 것입니까?
다윗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 분인가를 알았습니다. 시편 51:16,17절에서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고 말하는 것처럼 다윗은 하나님이 상한 심령을 참된 제사로 인정하시며 그 제사를 기뻐하신다는 알았던 것입니다.
상한 심령은 규례에 의한 제사가 아닙니다. 여호와의 신이 함께 함으로 인해서 자신의 죄를 보게 되고 자신의 죄로 인해서 피 흘리고 죽는 제물을 보면서 통회하고 자복하는 심령이야 말로 하나님의 규례에 의하지 않고 여호와의 신에 의한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규례를 어기지 않고 그대로 지킨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한 소경의 생각이라는 것을 눈치 채야 할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아마샤가 유다 백성들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백성들이 어떤 반발을 한다고 해도 산당 제사를 무너뜨렸어야 옳습니다. 그리고 성전의 제사를 통해서 자신의 죄를 보게 하고 제물이 흘리는 피로 인한 하나님의 용서 앞에 무릎 꿇고 감사하도록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마샤도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규례는 지키려고 힘을 썼지만 하나님의 규례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 못한 것입니다.
신앙을 내게 즐거움을 주는 것으로 여기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색다르고 자극적인 신앙생활을 찾으려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 십자가 신앙, 이러한 것에서는 색다르고 자극적인 것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꾸 새로운 무엇인가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신앙을 자기 즐거움을 위한 것으로 간주한 결과인 것입니다.
유다 백성이 산당에서 분향하며 제사한 것은, 성전에서의 제사를 가볍게 여겼음을 뜻합니다. 성전에서가 아니더라도 제사만 드리면 된다는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제사만 드리면 하나님의 규례를 지킨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신앙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 백성들처럼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전혀 묻지 않고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만 드리면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으로 간주해 버리는 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신앙하고자 하는 것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현대 교회의 큰 잘못은 신자들의 그러한 잘못됨을 지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신자들이 원하는 즐거움을 제공해주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도입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신앙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강조하는 신앙은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아니라 주일 성수나 기도 봉사 등의 행위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진리를 사모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신다면 끊임없이 생각하고 물으십니다. 여러분이 신앙으로 여기는 몇 가지 행동을 한다고 해서 신앙으로 산다고 간주하지 마시고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이 무엇이 기뻐하시는가를 말씀에서 답을 얻으시고 진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자로 굳게 서기를 힘써야 합니다. 신앙은 나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는 존재로 부름 받았음을 알고, 그러한 신자로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 그러한 마음이 있습니까?
(35강) 열왕기하 14:8-16 아마샤의 도전
<본문>
아마샤가 예후의 손자 여호아하스의 아들 이스라엘 왕 요아스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오라 우리가 서로 대면하자 한지라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유다 왕 아마샤에게 보내어 이르되 레바논 가시나무가 레바논 백향목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네 딸을 내 아들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라 하였더니 레바논 들짐승이 지나가다가 그 가시나무를 짓밟았느니라 네가 에돔을 쳐서 파하였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으니 스스로 영광을 삼아 궁에나 거하라 어찌하여 화를 자취하여 너와 유다가 함께 망하고자 하느냐 하나 아마샤가 듣지 아니하므로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올라와서 유다 왕 아마샤로 더불어 유다의 벧세메스에서 대면하였더니 유다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한지라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벧세메스에서 아하시야의 손자 요아스의 아들 유다 왕 아마샤를 사로잡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벽을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사백 규빗을 헐고 또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금은과 모든 기명을 취하고 또 사람을 볼모로 잡아가지고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 요아스의 남은 사적과 그 권력과 또 유다 왕 아마샤와 서로 싸운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요아스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이스라엘 왕들과 사마리아에 함께 장사되고 그 아들 여로보암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열왕기하 14:8-16)
<설교>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아마샤의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마샤는 자신의 부친을 죽인 신복들을 단죄하면서 그 자녀들은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신 24:16절의 하나님의 규례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사사로운 복수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규례를 따르고자 하는 아마샤의 행동이야말로 참으로 신앙적이며 여호와를 사랑하는 증표로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도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아마샤가 다윗 같지 않았음을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규례를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 같아지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처럼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의 용서로 감사하는 것이야 말로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나는 나의 죄를 안다. 그리고 회개한다’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또 하나의 증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물론 여러분이 자신이 죄인임을 모른다는 말이 아닙니다. 또한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죄와 회개의 말이 나올 때 ‘나는 죄인임을 안다. 나는 회개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아마샤가 이스라엘 왕 요아스에게 사자를 보내어 힘을 겨루어 보자고 도전을 합니다. 아마샤가 이처럼 요아스에게 도전을 하게 된 것은,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으로 인해서 이스라엘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 도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샤에게 있어서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은혜의 증거입니다. 따라서 아마샤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왕이었다면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아마샤는 에돔에서의 승리를 자신의 힘으로 바라보고 요아스에게 도전을 한 것입니다.
이 도전에 대해 요아스는 아마샤에게 레바논 가시나무의 우화를 전합니다. 우화의 내용은 “레바논 가시나무가 레바논 백향목에게 보내어 이르기를 네 딸을 내 아들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라 하였더니 레바논 들짐승이 지나가다가 그 가시나무를 짓밟았느니라”(9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에돔을 이겼다고 해서 까불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기고만장해 있는 아마샤는 요아스와 전쟁을 하게 되고 결국 크게 패하게 됩니다. 교만한 아마샤에 대해 하나님이 징계하신 것입니다.
아마샤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였다면 에돔의 승리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뿐 승리한 자신을 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쓸데없는 자신감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고 요아스에게 도전을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마샤의 도전과 패배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인간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고 살아갈 때 어떤 모습들이 나타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마샤가 요아스에게 도전을 하는 것에서 인간에게 있는 승부욕을 볼 수 있습니다. 패배를 싫어하고 항상 승리한 자로 존재하기를 원하는 승부욕이 하나님께 힘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그 내면에는 ‘하나님 나는 지기 싫습니다. 이기게 해 주십시오’라는 승부욕이 깔려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수시로 토해 놓는 것이 바로 승부근성이 아닙니까? 모든 일에 있어서 ‘너보다는 내가 더 낫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하고, 또 보여줘야 직성이 풀리고 그것으로 쾌감을 느끼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요즘 청년들이 소위 바른 교회라는 것을 많이 찾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하는 바른 교회의 기준은 대개 헌금 강조 하지 않고, 목사가 권위를 주장하지 않고, 교회를 교인들이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것 등으로 여깁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이러한 교회를 찾는 이유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듣기를 원해서일까요? 아니면 단지 자신의 마음에 맞는 교회를 원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더 낫다고 여겨지는 교회를 다님으로써 스스로의 만족을 누리고자 하는 것일까요? 우린 이런 물음에 진지하게 접근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상관없이 교회를 바라보는 것이 태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착각을 하기 때문에 정작 자신을 보지 못하고 바른 신앙의 길을 가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샤도 요아스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관계에서는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똑같은 모습만 보입니다. 아마샤가 기고만장해서 도전하자 요아스는 까불지 말라고 하면서 무시합니다. 서로가 자신의 힘을 바라보면서 맞붙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사람은 누군가가 자신을 무시하면 가만있지를 못합니다. 근본적으로 낮아지는 것을 극도로 거부하는 인간의 악한 속성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악한 속성을 심판하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영광의 주가 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죄인이며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의 손에 의해서 무시 받으면서 죽임을 당한 현장으로써 지기 싫어하고 낮아지는 자리를 거부하는 인간의 악함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인간은 죄인이다’라고 말할 때 ‘나는 내가 죄인임을 압니다’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바로 낮아지고 무시 받는 것을 거부하는 속성에서 나오는 생각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안다고 여김으로써 자신은 ‘인간은 죄인이다’는 말을 들을 필요가 없음을 은연중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샤가 에돔을 이겼다고 해도 그것은 아마샤의 힘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한 결과임을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에게서 어떤 선한 것이 보인다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여러분의 의의 결과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선한 행위가 있다고 해도 그것을 자신의 의로움으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신앙하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에 대해 ‘나는 나를 의롭게 여기지 않습니다’라는 반응을 보이기 쉽습니다. 어떻게든 ‘나는 아니다’는 것을 내세우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의를 고집부리고 있는 것임을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신자는 십자가 앞에 나올 때마다 이러한 모습들이 발각되어야 하고 이런 모든 악함을 용서하시고 깨끗케 하시기 위해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에 그 마음이 굴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와의 관계에서도 서로가 이기려고 하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여러분이 모여서 얘기를 나눌 때에도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것은 서로 이기고 지는 관계로 모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말에 대해 화가 난다면 왜 화가 나는지를 생각 하십시오, 그 내면에는 지기 싫어하고 무시 받기 싫어하고 낮아지기 싫어하는 자신의 악함이 깔려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악함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증거들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에게서 쉬지 않고 생산되는 것은 악함입니다. 이러한 악함들을 ‘내가 죄인임을 안다’는 말로 무마할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죄인의 심령으로 우리를 한없는 사랑으로 용서하시는 십자가 앞에 나와야 합니다. 이러한 심령에는 이기고 지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사랑하고 용서할 뿐입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소원해야 하는 것도 바로 그러한 심령의 소유자로 굳게 서는 것이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아마샤의 잘못은 여러분도 쉽게 간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샤와 똑같은 잘못을 범하며 살아가는 자신의 잘못을 간파하지 못한다면 결국 나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타인의 티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충분히 그런 식으로 살아갈 소질이 다분한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앞에 나와야 합니다. 인정하는 것이 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십자가 앞에 나와서 예수님의 한없는 은혜에 심령이 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심령으로만이 타인을 이기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악한 속성임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그 무엇도 힘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도 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한다고 해서 성경을 이해하지 못한 누군가를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기를 원하시고, 십자가의 용서를 감사하는 것처럼 용서하는 자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이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것은 ‘나는 이웃을 사랑하는가?’ ‘나는 이웃을 용서하는가?’입니다. 이 물음 앞에 우리는 또 다시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36강) 열왕기하 14:23-24 여호와 보시기에
<본문>
유다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십 오년에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사십 일년을 위에 있으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열왕기하 14:23-24)
<설교>
우린 오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는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고 말할 때 중요한 것은 여호와가 악으로 보시는 것을 나 또한 악으로 보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보기에는 선한 것인데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다면 나와 여호와의 사이에는 심각한 충돌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런 경우 대개는 여호와가 악하다고 하시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선으로 여기는 것을 고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 스스로는 선을 행한다고 하지만 정작 여호와 보시기에는 악을 행하는 길을 가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심각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여호와가 나를 보시는 것처럼 나를 보는 것을 뜻합 니다. 사람이 자신을 바라볼 때는 아주 관대하다는 것을 여러분도 인정하실 것입니다. 타인의 허물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똑같은 허물이 자신에게 있을 때는 그럴 수밖에 없는 입장이나 형편 등을 내세우면서 자신을 합리화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여호와가 보시는 것처럼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증거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핍박을 받은 것으로 드러납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을 향해서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어떻게 보시는가?’를 전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책망을 받고 심판을 받아야 할 존재에 지나지 않음이 폭로가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를 바라볼 때는 선하고 정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고 제사도 열심히 지내고 제물도 잘 바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선지자들의 말에 대해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외친 말씀은 역시 하나님이 세상을 바라보시는 세상의 형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믿음이 없는 유대인들이었고, 율법을 지킨다고 하지만 오히려 율법을 무너뜨리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늘의 시각을 그대로 전했을 때 유대인들의 반응은 ‘예수를 죽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 역시 같은 길을 갔었던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보시는가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는 믿음으로 살고 선을 행한다고 자부하지만 여호와 보시기에는 악을 행하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선이라고 여기는 것은 여호와도 선한 것으로 여기실 것이고, 내가 믿음으로 여기는 것은 여호와도 믿음으로 여기실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전에 얘기한 것처럼 여호와를 자신의 생각에 가두는 것이 됩니다. 여호와는 인간이 알 수 있는 분이 아니고, 인간의 상식에 맞게 행하시는 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상식과 기준에 맞는 신을 만들어 내어 하나님으로 여기는 것이 곧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들을 많이 합니다. 여러분도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고 싶은 생각들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생각하는 선하고 아름다운 삶은 무엇입니까? TV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처럼, 서로 사랑하고 이웃을 도우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노숙자들을 위해 점심을 제공하고, 신장을 기증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들을 선하고 아름다운 삶이라고 여기실 것입니다. 하지만 빼놓지 말아야 하는 것은 ‘여호와 보시기에 선하고 아름다운 삶은 어떤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자신의 생각의 차이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의 대부분을 ‘여호와 보시기에’라는 말씀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삽니다. 오직 내가 편하고, 내 생각에 좋으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여호와 보시기에 어떤가?’라는 시각으로 자신의 삶을 살피기보다는 ‘어떻게 하는 것이 내게 편하고 좋은 것인가?’를 살피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 삶은 결국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라는 판단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 9:12절에 보면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경우 자신이 병들었음을 알지 못하고 건강하다고 여긴다면 실제로는 의원이 필요하지만 스스로는 ‘나는 건강하다’고 하면서 의원을 필요로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이 의인인 줄로 착각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비록 죄인이라는 말은 하지만 자신의 악함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스스로를 건강하다고 여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러한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여호와 보시기에’라는 말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여호와가 선으로 보시는 것과 악으로 보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항상 자신의 상식과 자신의 의의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를 판단하고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간다면, 본문의 여로보암처럼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선포된 것처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라는 판단을 들을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보시는 관점은 우리와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들의 눈에는 항상 평화롭고 경제적으로 풍족한 세상이야 말로 살기 좋은 곳으로 비춰지겠지만 하나님이 세상을 보실 때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가?’ ‘하나님께 감사하는가?’를 보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가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고 감사치도 않으면서 온통 자신의 즐거움과 편함을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동일한 관점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따라서 불신앙은 하나님이 세상을 어떤 시각으로 보시고 판단하시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세상을 어떻게 보시든, 나를 어떻게 보시든 무시하면서 오로지 자신의 기쁨만을 좇아가는 것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것이고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죄는 온 이스라엘을 붙들고 있습니다. 어떤 왕도 여로보암의 죄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로보암의 죄가 단순히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기쁨과 자신의 유익을 위한 삶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이러한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우리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 를 제대로 파악을 해야 여러분 자신이 건강한 자가 아니라 병든 자임을 알게 됩니다. 나야 말로 의원이 필요한 병든 자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음으로써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사람의 관점으로 사람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는지 하나님의 관점은 교회가 가려버리고 사람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말을 하기 때문에 죄인은 사라지고 온통 의인으로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까이 하셨던 세리와 창기, 병든 자들은 사라지고 의인으로 행세했던 바리새인으로 가득한 것이 지금의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의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무조건 열심이 있으면 신앙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부지런히 뭔가 하는 사람이 더 신앙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자연스런 시각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교회도 열심을 낼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이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거듭 말씀드리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관점입니다. 하나님이 신앙으로 보시는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로 보시는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선으로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야 신앙의 길을 바르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앙으로 보시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보시는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앙에서 보게 되는 것은, 세상은 멸망할 수밖에 없다는 본질입니다. 그리고 나 역시 멸망의 존재임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세상을 바르게 보게 되었을 때 죄인으로써 예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간절함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게 됩니다. 이것이 여호와 보시기에 선한 것이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관점과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때문에 신자는 말씀을 대할 때마다 자신의 관점을 버리면서 하나님의 관점을 배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폐단은 하나님이 세상을 보시는 관점이 어떤 것인가를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어떠한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오직 사람의 관점과 욕망과 입장에 맞춰서 제멋대로 하나님을 적당히 수정해서 전합니다. 이것이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은 것입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진리를 원하고 생명의 길을 가기를 소원한다면 여호와가 세상을 보시는 시각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선으로 여기고 의로 여기는 것들을 고집부리지 말고 하나님이 선으로 여기시고 의로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시각에서 세상과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고, 우리가 신앙을 외쳐왔지만 사실은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으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왔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참된 본질을 파악한 신자가 뼛속 깊이까지 병든 자신의 실체를 안고 나를 고치러 오신 구원자 예수님을 찾지 않겠습니까?
의원을 찾은 병자는 자신이 아픈 곳을 말합니다. 정말 간절하게 제발 좀 낫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자신의 병을 고쳐주실 의원으로 바라보고 찾는 것이라면 자신의 병든 상태를 말하면서 간절하게 낫게 해달라고 애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진심으로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여호와가 나를 보시는 시각으로 자신을 보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는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못하고 악을 행하는 존재인데 내가 나를 볼 때는 별 문제 없이 여기기 때문에 나를 고쳐 달라는 간절함이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바로 이 간절함을 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여호와의 관점으로 세상과 자신을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37강) 열왕기하 14:23-29 악인을 통한 구원
<본문>
유다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샤 십 오년에 이스라엘 왕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사십 일년을 위에 있으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로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도말하여 천하에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더라 여로보암의 남은 사적과 모든 행한 일과 그 권력으로 싸운 일과 다메섹을 회복한 일과 이전에 유다에 속하였던 하맛을 이스라엘에 돌린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여로보암이 그 열조 이스라엘 왕들과 함께 자고 그 아들 스가랴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열왕기하 14:23-29)
<설교>
인간이 자기의 선악개념으로 살아가게 되면 스스로에게 속기 십상입니다. 즉 자신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이 자신에게서 보일 때 스스로를 선한 자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선에 대한 대가를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선에 대한 대가가 주어지지 않으면 실망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선의 개념으로 자신을 판단할 것이 아니라 ‘여호와 보시기에 어떠한가?’에 대한 물음을 쉬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선악개념이 옳은 것이라면 ‘여호와 보시기에’라는 구절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옳으면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옳을 것이고, 내가 보기에 그른 것이면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그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보시기에’라는 구절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은 여호와가 보시는 것과 인간이 보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세상을 보시는 그 심정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자신의 상식과 거리가 멀다고 해도 혼란스러워 하지 않고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앙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한 예를 오늘 본문에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24절에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고 말한 대로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왕, 즉 여로보암 2세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자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여로보암2세의 업적은 실로 굉장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여호와께서 요나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된 것이었습니다. 25절에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로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여로보암을 세워서 이스라엘의 지경을 회복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 예언대로 여로보암은 다메섹으로부터 훨씬 북쪽에 있는 하맛 어귀까지 정복을 하고 또 아라바 바다라고 하는 사해를 정복하여 국토를 확장하였던 것입니다. 28절을 보면 하맛은 솔로몬 왕국 때에는 유다에 속했던 땅입니다. 그 땅까지 여로보암 2세가 정복을 했고, 또한 다메섹까지 회복을 했다는 것은 여로보암2세가 대단히 넓은 땅을 차지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여로보암 2세를 세우셔서 이스라엘의 영토를 확장하게 하신 이유는 26,27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 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기 때문이고,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도말하여 천하에 없이 하겠다고도 아니하셨기 때문에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구원자가 여로보암 2세입니까? 왜 하필이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함으로써 평생을 여로보암의 모든 죄에서 떠나지 않은 여로보암 2세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이왕이면 신앙이 아주 좋은 왕을 세워서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이 더 구색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여로보암 2세가 비록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가 왕으로 치세하던 이스라엘은 솔로몬 시대보다 더 강국이 되었습니다. 넒은 영토를 확장하면서 강한 이스라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인 것입니다. 여로보암 2세 전에도 수많은 악한 왕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서 죽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여로보암 2세는 똑같이 악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넒은 영토를 회복하여 강한 힘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까? 이것이 어리석은 우리의 눈에는 일관성이 없는 하나님의 일로 비춰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일관성 있게 일하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사실 세상의 되어지는 일들을 보면 일관성이 없이 보이기도 합니다. 착한 자가 잘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큰 재앙을 만나기도 합니다. 악한 자가 그 악함으로 인해서 큰 재앙에 빠지기도 하지만 역시 반대로 평생토록 평안을 누리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선과 악에 대한 일관성이 없는 것으로 비춰지지 않습니까? 어찌 보면 세상을 주관하는 분이 없이 모든 것이 우연히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눈에 일관성이 없는 듯 한 일들이 비춰질 때 스스로 어떤 답을 내리십니까?
하박국 선지자는 의인이 고난을 받는 현실에서 하나님께 강한 불만을 보였습니다. 어떻게 악인이 의인을 삼키는 일이 있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불만에 대한 하나님의 답은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현실 속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의인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답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앙하지 않는 자가 평안을 누리고, 신앙으로 살기를 힘쓰는 신자는 오히려 고난과 어려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현실이라고 해도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앙하는 것이 참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가 신앙으로 사는 결과에 대해 스스로 계산하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신앙에 대해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신앙에 대한 결과를 스스로 계산하여 답을 내리고, 하나님은 자신이 내린 답을 성취해 주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일이 자신이 내린 답과는 전혀 다르고 엉뚱한 결과로 나타날 때 결국 신앙에 대해 혼란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의인과 악인에 대해서 우리는 나름대로 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인은 복을 주시고 악인은 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힘써 봉사하고 신앙생활 하면서도 ‘하나님은 이렇게 열심 있는 나를 지켜주실 것이다’는 계산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주변에 불신자들은 형통한 반면, 열심히 신앙생활 했다고 생각하는 자신은 큰 고난과 어려움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한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가 신앙에 혼란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문제를 자기 마음대로 계산하고 답을 내리면서 자기 생각으로 하나님을 신앙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그렇게 일하시는 것일까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여로보암 2세를 세워서 이스라엘의 영토를 확장하게 하시고, 결국 여로보암 개인적으로는 큰 부와 영화를 누리게 하시는 것일까요? 악을 행했으면 그에 따른 징계를 하시는 것이 마땅한데, 어떤 왕은 징계를 하셨으면서 왜 여로보암에게는 눈에 보이는 징계가 있기 보다는 오히려 형통을 주시는 것입니까?
합 2: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이것이 하박국의 불평에 대한 하나님의 답이었습니다. 하박국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종말의 때가 이를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말의 때가 이르면 비로소 의와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기에 그 때가 이르기 전까지 눈에 보이는 일들로 인해서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어떤 일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 참되다는 것입니다.
결국 여로보암이 개인적으로 누렸던 모든 것들은 결코 복이 아닙니다. 세상에서의 80년이라는 짧은 인생 동안 누렸던 것으로 그의 영생을 판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부귀영화가 인간의 영원을 결정하고 보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우리들이 영원을 잊고 살아가고, 또한 영원이라는 것을 멀리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눈에 보이는 현실에 집착하기 때문에 현실에서 누리는 것들로 인해서 신앙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계산대로 흘러가지 않는 세상을 통해서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계신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심으로 하나님만 신앙하는가?’ 를 묻기 위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우리 앞에서 벌이시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의 일들을 보면 도무지 우리의 상식과 생각과 계산에 맞지 않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분명 사이비고 이단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러한 자들이 잘되고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뭘 하고 계시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게도 하시고, 도무지 목사라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버젓이 활동하는 것을 보면서 그러한 생각을 하게도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것은 ‘세상이 이처럼 네 마음에 들지 않게 돌아감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믿고 신앙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에 담겨 있는 뜻입니다.
세상 일이 잘되고 못되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세상 일이 잘되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이고, 못되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는 기준을 갖고 있다면 세상에 되어지는 일들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저 혼란 속에서 ‘나 잘되면 됐다’는 식으로 넘어갈 위험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악인이 하는 세상 일이 잘된다고 해서 그에게 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잘됨으로 인해서 더욱 교만해지고 자신의 힘과 실력을 믿게 되고,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부인하면서 감사하지도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세상의 그 어떤 일에 의해서도 흔들릴 수 없습니다. 형통한 일로 다가오든 고난과 어려운 일로 다가오든 신자는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앙하며 하나님으로 인해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신앙으로 살아가는가?를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수많은 일을 벌이시면서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항상 물어야 합니다. ‘나에게 이런 일이 있어도 나는 하나님만을 변함없이 신앙할 수 있는가?’를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는 항상 하나님을 거부하고자 하는 불신앙이 존재하고 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에서도 하나님을 신앙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신앙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러한 신앙인가를 점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8강) 열왕기하 15:1-7 웃시야의 문둥병
<본문>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이십 칠년에 유다 왕 아마샤의 아들 아사랴가 왕이 되니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십 륙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 이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여골리야라 예루살렘 사람이더라 아사랴가 그 부친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오직 산당은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고 여호와께서 왕을 치셨으므로 그 죽는 날까지 문둥이가 되어 별궁에 거하고 왕자 요담이 궁중 일을 다스리며 국민을 치리하였더라 아사랴의 남은 사적과 모든 행한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아사랴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다윗성에 그 열조와 함께 장사되고 그 아들 요담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열왕기하 15:1-7)
<설교>
인간은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서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알려주신 것만큼만 알게 될 뿐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해서는 성경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누구라도 성경을 넘어서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면 그것은 모두 가짜에 불과합니다. 즉 인간이 평소 신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욕망과 상식에 의해서 만들어진 우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보면 모두가 인간의 욕망과 상식이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우상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구원의 길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가면서 나의 욕망과 상식에 의해 만들어진 가짜 하나님이 무너지는 작업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성경을 진지한 마음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는 일에 치우치다보니 성경에 대한 목마름과 진지함이 사라짐으로써 성경의 말씀들이 그 마음에 남지를 않습니다. 이로 인한 결과는 자신이 알고 있던 하나님이 여전히 하나님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종교성, 즉 신을 향한 인간의 열망과 욕망과 상식에 의해서 구축되어진 가짜 신이 여전히 믿음의 대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남는 것은 혼란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을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라는 의문과 혼란이 사라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자신의 욕망과 상식을 기준으로 해서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나의 상식이 무너지고 대신 인간의 뜻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어야 하는데, 앞서 말한 대로 성경에 대한 진지함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성경을 보고 들어도 여전히 인간을 위한 하나님으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 인간의 상식에 부합되는 신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 오히려 해를 받고 고통을 받게 되면 자신의 상식과 충돌이 일어나기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는지에 대해서도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여로보암 왕을 세워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고, 그로인해서 여로보암은 솔로몬 시대와 다를 바 없는 넓은 영토를 차지하면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 이런 일들이 인간의 상식과 충돌되는 일들입니다. 인간의 상식에 의하면 악을 행한 왕은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의 경우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세상의 일도 역시 혼란스럽지 않습니까? 재앙은 착한 자 나쁜 자, 신자 불신자를 가리지 않고 주어지고 있고, 악한 자도 편안하게 잘 살아가는 것이 세상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혼란스러움은 오직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감으로써 조금씩 해소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성경에 대한 진지함이 먼저 요구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한가지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유다 왕인 아사랴를 치심으로 그가 문둥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아사랴 왕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웃시야 왕과 동일 인물입니다. 이 웃시야 왕은 선한 왕으로 이름이 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그가 한 일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지 않지만 역대하 26장에는 웃시야 왕이 행한 일들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웃시야 왕이 아마샤가 하나님 앞에서 행했던 대로 정직하게 행했다는 것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 동안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여호와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웃시야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고 행했던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웃시야는 블레셋을 포함해서 주변의 많은 나라들을 정복했고, 나라도 잘 다스려서 평안을 누리고 강한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웃시야 역시 산당만은 제하지 않음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산당에서 제사하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웃시야를 치심으로써 그가 문둥병에 들어 죽는 날까지 별궁에 거했다는 것입니다. 산당은 백성들이 자기 마음대로 신을 섬기는 곳입니다. 비록 여호와라는 이름은 부르지만 제사장도 제단도 없이 자기 마음에 드는 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산당에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고자 하는 진심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있다면 신에게 제사해서 신으로부터 복을 받고 싶어 하는 욕심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떤 제사를 원하시는가?’보다는 ‘내가 열심히 제사했다’는 것만 있으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열심과 정성을 보시고 복을 주시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산당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것을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이 어떤 뜻과 마음으로 세상을 다스리시고 우리를 백성으로 삼으셨는지, 이러한 것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알고 싶은 마음도 없이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만으로 만족해 버리고 믿음의 결과로서 복과 천국을 확보하는 것이 전부인 이것이 바로 산당인 것입니다. 사람은 이러한 산당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자신을 사랑하고 자기를 위해 살아가는 욕망을 안고 태어나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웃시야가 산당을 제하지 못했다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인간적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기보다는 승승장구하고 형통함 속에서 자신을 돕는 하나님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산당에서 제사하는 것이 하나님께 악이라는 것을 깨닫지를 못한 것입니다. 대하 26장에 보면 웃시야가 강성하여짐으로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는 것이 나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자신이 향단에 분향하려고 한 것입니다.
향단에 분향하는 것은 제사장에게만 일임된 일입니다. 그런데 웃시야가 직접 분향하려고 하는 것은, 제사장을 무시하는 것이고 제사장을 무시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제사장이 아닌 다른 사람이 나아갈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는 누구도 나아갈 수 없고, 향단에 분향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웃시야는 자신의 강성함을 자신이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이 도우시고 형통케 하시는 것으로 착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겁 없이 향단에 분향할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웃시야의 행동을 제사장인 아사랴가 막으면서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이 왕의 할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의 할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대하 26:18)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웃시야가 분향을 하려고 하자, 제사장 아사랴가 노하게 되고 하나님은 웃시야의 이마에 문둥병이 들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러한 내용들이 생략이 되어 있지만 웃시야 왕이 산당을 제하지 않았다고 하는 말에는 제사장을 무시하는 웃시야의 악함도 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왜 하나님이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 제사장을 두시는가를 알지 못하는 무지함이 산당을 제하지 않고 백성으로 하여금 산당에서 제사하게 하는 악을 행하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이 여러분과 하나님 사이에 예수님을 두셨습니까? 그 이유를 모르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하나님께 나올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참된 제사장으로 세상에 보내셔서 자신을 제물로 삼으시고 흘리신 피를 들고 하나님께 나오시는 예수님의 제사만을 받으심으로써 예수 안에 있는 모든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직접 하나님께 분향하고자 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웃시야처럼 하나님께 직접 분향을 하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이것은 자신을 과연 의로운 자로 여기는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은 현재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라는 것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세상을 편안하게 살고 있고 어떤 재앙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자신을 정당한 자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웃시야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잊고 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4절에 보면 “오직 산당은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고”라고 말합니다. 즉 백성들도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을 하는 악을 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백성들은 멀쩡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산당을 제하지 않은 웃시야를 문둥이가 되게 하셨다면, 산당에서 제하가고 분향한 백성들도 문둥이가 되게 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악을 행한 백성들은 가만히 둔 채 웃시야만 치는 것입니까? 이 역시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하나님의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왜 이렇게 일하시는지 그 이유를 앎으로써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조금씩 헤아릴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로 인해서 우리의 상식과 욕망으로 구축되어 있던 하나님이 점차 무너져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진지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진지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하면 복을 받지만 지켜 행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유다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사하고 분향합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제사장이 해야 할 분향을 일반 백성들이 마음대로 하고 있고, 또 하나님이 정하신 장소에서만 제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제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 백성들은 분명 하나님의 저주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왜 그들 가운데 제사장이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자신들이 저주 받아야 할 악한 자라는 것을 잊고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을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주 받아야 할 악함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백성들을 치지 않고 웃시야만 문둥이 걸리게 합니다. 문둥병이란 하나님의 저주를 뜻합니다. 즉 웃시야의 문둥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죄를 따져서 그들을 심판해 버리시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다면 유다도 이스라엘도 일찍이 사라졌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을 하나님의 백성답게 고쳐 가시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대한 찬양을 받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웃시야를 치심으로써 백성들에게 그들 역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야 할 자라는 것을 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백성에게 돌아가야 할 저주가 왕 한 사람에게 돌아가게 하심으로써 백성으로 하여금 자신들이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백성입니다.
백성들은 문둥병이 걸린 왕을 보면서 하나님의 율법과 심판은 분명히 살아있음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심판이 자신들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십자가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담당해야 할 저주와 심판을 홀로 짊어지시고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말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신자는 자신을 절대로 의로운 자로 여길 수가 없게 됩니다. 지금의 삶이 아무리 형통하고 복의 길로 가고 있다고 해도 자신이 잘나서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 즉 지금 내가 편안하게 사는가 힘들게 사는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담당해야 할 저주와 심판을 주님이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있음을 생각할 뿐입니다. 그리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산당은 결국 자기 사랑입니다.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분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저주와 심판 아래 있다는 것은 관심이 없고 무시해 버린 채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원하는 복을 얻을 수 있을까?에만 골몰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짜 신앙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말씀을 진지하게 대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어떤 말씀을 들어도 결국 여러분이 갖고 있는 상식만 남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상식에 맞는 신앙을 고수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진지하게 대한다면 저주와 심판 아래 있어야 할 우리의 악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악을 모두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와 섬김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와 살에 감사하게 되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높이고 찬양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이며 하나님은 이러한 신앙의 사람을 원하시고 자기 백성으로 이러한 신자로 만들어 가십니다.
(39강) 열왕기하 15:8-26 자신을 어떻게 보십니까?
<본문>
유다 왕 아사랴의 삼십 팔년에 여로보암의 아들 스가랴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여섯달을 치리하며 그 열조의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 야베스의 아들 살룸이 저를 모반하여 백성 앞에서 쳐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스가랴의 남은 사적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기를 네 자손이 이스라엘 위를 이어 사대까지 이르리라 하신 그 말씀대로 과연 그렇게 되니라 유다 왕 웃시야 삼십 구년에 야베스의 아들 살룸이 사마리아에서 왕이 되어 한달을 치리하니라 가디의 아들 므나헴이 디르사에서부터 사마리아로 올라가서 야베스의 아들 살룸을 거기서 쳐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살룸의 남은 사적과 그 모반한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그 때에 므나헴이 디르사에서 와서 딥사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과 그 사방을 쳤으니 이는 저희가 성문을 열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치고 그 가운데 아이 밴 부녀를 갈랐더라 유다 왕 아사랴 삼십 구년에 가디의 아들 므나헴이 이스라엘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십년을 치리하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평생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앗수르 왕 불이 와서 그 땅을 치려 하매 므나헴이 은 일천 달란트를 불에게 주어서 저로 자기를 도와주게 함으로 나라를 자기 손에 굳게 세우고자 하여 그 은을 이스라엘 모든 큰 부자에게서 토색하여 각 사람에게 은 오십 세겔씩 내게 하여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니 이에 앗수르 왕이 돌이키고 그 땅에 머물지 아니하였더라 므나헴의 남은 사적과 그 모든 행한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므나헴이 그 열조와 함께 자고 그 아들 브가히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유다 왕 아사랴 오십년에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년을 치리하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한지라 그 장관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반역하여 사마리아 왕궁 호위소에서 왕과 아르곱과 아리에를 죽이되 길르앗 사람 오십명으로 더불어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었더라 브가히야의 남은 사적과 그 모든 행한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열왕기하 15:8-26)
<설교>
이러한 삶에서 여러분이 잊기 쉬운 것이 하나있습니다. 그것은 내 한 몸 살기 위해 바쁘게 살아가는 내 모습이나 내가 TV를 보면서 욕한 누군가나 똑같은 본성의 소유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동일하게 악한 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쉽게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잔인하고 악한 일을 저지른 사람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행동의 차이로 죄의 질을 따지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접하는 여러 사건들은 다양한 죄의 모습들을 보여주는 것일 뿐, 행동이 다르다고 해서 죄가 다르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따라서 ‘저 사람은 저런 나쁜 행동을 했지만 나는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마치 자신은 옳은 사람인 것처럼 정당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스라엘 왕들의 여러 가지 악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이 곧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죄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네 왕이 등장합니다. 스가랴와 살룸과 므나헴과 브가히야입니다. 이들 네 왕 가운데 살룸과 므나헴은 모반을 하여 왕이 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이 네 왕 중에서 누가 특별히 더 악하다고 여겨집니까? 먼저 스가랴에 대한 기록을 보면, 스가랴는 6개월을 왕위에 있었는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것 외에는 다른 악행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살룸이라는 사람이 모반을 하여 스가랴를 죽이고 왕이 되었지만 이 사람은 겨우 한 달을 왕위에 있었을 뿐입니다. 살룸은 모반을 했다는 것 외에 다른 악행은 말하지 않습니다. 살룸을 죽이고 왕이 된 사람은 므나헴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므나헴의 잔인한 행적이 하나 기록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16절에서 “그 때에 므나헴이 디르사에서 와서 딥사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사람과 그 사방을 쳤으니 이는 저희가 성문을 열지 아니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치고 그 가운데 아이 밴 부녀를 갈랐더라”고 말한 내용입니다. 므나헴이 딥사라는 성을 점령하려고 했는데 성의 사람들이 성문을 닫고 열어주지를 않습니다. 므나헴에 대해 대항을 한 것입니다. 그러자 므나헴은 성을 쳐서 점령을 하고 아이 밴 여인들의 배를 가르는 잔인무도한 짓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처럼 약자에 대해서는 잔인한 므나헴이 강자에 대해서는 한없이 나약한 모습을 보입니다. 19-20절에서 “앗수르 왕 불이 와서 그 땅을 치려 하매 므나헴이 은 일천 달란트를 불에게 주어서 저로 자기를 도와주게 함으로 나라를 자기 손에 굳게 세우고자 하여 그 은을 이스라엘 모든 큰 부자에게서 토색하여 각 사람에게 은 오십 세겔씩 내게 하여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니 이에 앗수르 왕이 돌이키고 그 땅에 머물지 아니하였더라”고 말한 것처럼 앗수르 왕이 침공 했을 때 은 일천 달란트를 부자들로부터 토색하여 앗수르 왕에게 주어서 자기편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므나헴 역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로보암의 죄에서 평생 떠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므나헴의 아들 브가히야가 왕이 되었지만 브가히야 역시 다른 기록은 없고 단지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더라는 기록만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볼 때 이 네 왕 중에서 가장 악한 왕은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별 다른 악행이 없는 스가랴, 살룸, 브가히야에 비해서 잔인한 악행을 저지른 므나헴이 더 악한 왕으로 여겨지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네 왕에 비해서 여러분은 어떻다고 생각합니까? 또한 므나헴이라는 왕에 비해 여러분은 어떻다고 생각합니까? ‘므나헴은 참으로 잔인하고 악한 왕이지만 나는 하나님 앞에서 죄인일지언정 므나헴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까?’ 하지만 만약 므나헴과 여러분이 다르게 여겨진다면 또 그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보시는 시각이라면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에는 차별이 있어야 하고 지옥 역시 여러 종류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악한 사람이 있고 덜 악한 사람이 있다면 죄에 대한 심판 역시 동일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심판에는 분명히 차별이 없습니다. 죄의 경중을 따지는 심판이 아니라 죄와 의를 구별하는 것이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인과 의인으로 구별되어 영원한 사망과 생명으로 나눠지는 것이지 사망에 처한 사람 가운데 또 다시 행위를 따져서 사망의 고통에 차등을 두고, 천국에서도 역시 선한 행위를 따져서 상에 차등을 두는 그런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인에 대한 심판이 동일한 것이라면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를 동일하게 보신다는 의미가 됩니다. 즉 본문에 등장하는 네 왕이 동일하게 악하다는 것입니다. 아이를 가진 여인의 배를 가른 므나헴이나 모반을 하여 왕이 되었지만 겨우 한 달을 왕위에 있으면서 별다른 악행이 없는 살룸이나 모반이 아니라 부친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으나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은 스가랴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동일하게 악하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이들 네 왕 이후로 세월이 몇 천 년이 흘렀다고 해도 그 세월 속에서 태어나고 죽은 모든 사람들 역시 이들 네 왕과 동일하게 악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나아가서 아담 이후로 모든 인간이 동일하게 악하다는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얘기는 여러분이 수없이 들은 내용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악에 차별을 두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나보다 더 악한 자가 눈에 보이고 그래도 나는 착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그래도 나는 므나헴보다는 낫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진심으로 ‘나는 므나헴과 똑같이 악한 존재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그러한 심령이야 말로 참으로 겸손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이를 가진 여인의 배를 가른 무자비한 므나헴과 자신을 같은 존재로 여긴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에 아무런 가치와 의미도 두지 않은 채 자신의 속의 실체를 들여다 볼 때 가능한 것입니다. 악으로 가득한 속의 실체를 보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동안 의롭고 선한 것으로 여겨왔던 모든 행동들이 무너지게 되는 것이고, 나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님만이 소망이라는 그 말이 기쁨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은, 이들이나 나나 똑같이 악한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단지 그렇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본문에 등장하는 왕들의 악행이 지금 내 속에 고스란히 들어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시대와 상황과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똑같은 악한 행동은 없지만 그들의 죄의 속성은 지금도 나에게서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반이라는 것, 굳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무력으로 대통령이 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닙니다. 물론 실제 이런 일을 벌이지 않은 사람에게는 ‘모반을 했다’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시각이지만, 모반이라는 것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또한 인간입니다. 왜냐하면 모반이 권력을 향한 욕망이라면 결국 모든 사람이 힘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힘을 갖고 싶으나 힘이 없고 능력이 없어서 그냥 포기한 채 현실에 묻혀 살아갈 뿐이지 힘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욕망인 것입니다. 결국 모든 사람이 모반의 자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이를 밴 여인의 배를 가른 행위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므나헴은 권력을 가진 왕으로서 자신에게 대항한 자에 대해 본때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약자를 잔인할 정도로 철저하게 짓밟음으로서 승리감을 얻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여러분을 반대하고 대항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 대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보복을 하겠죠? 기회가 되는 대로 헐뜯고 비판할 것이고 어떻게든 상대방을 짓밟으려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 대해 욕하고 비판할 때 그러한 말로 인해 속이 상하고 상처를 입을 사람의 입장을 생각합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속 좀 상하라고 욕하는 경우도 많지 않습니까? 이처럼 인간에게는 타인을 짓밟고 싶은 본성이 있습니다. 누구나 잔인하다는 것입니다. 므나헴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지요.
앗수르 왕에게 돈을 주어 그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것도 강한 자에게는 머리를 굽히며 그의 환심을 사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결국 본문의 왕들을 보면서, 특히 므나헴이라는 왕을 보면서 ‘참 악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생각은 곧 자신을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잊고 살았던 자신의 악함을 므나헴이라는 왕을 보면서, 또한 모반을 하고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은 왕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악한가를 절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진심으로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을 애통하는 심령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이러한 심령을 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악한 가를 본문과 같은 내용을 통해서 확인하면서 예수님에게만 소망을 두는 애통한 심령으로 모일 때 그것이 곧 교회이기 때문에, 또한 교회의 부흥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오늘 본문의 내용을 통해서 ‘여러분 자신을 어떻게 보십니까?’라는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 51편의 다윗의 고백을 통해서 분명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상한 심령은 자신이 얼마나 악한 인간인가를 보지 못한다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악하다는 것은 성경에 등장하는 악한 자들의 악행의 모습 안에서 나의 모습을 보게 될 때 가능한 고백이 됩니다. 그래서 본문에 등장하는 네 왕은 오늘 우리 자신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과 모습을 그대로 비춰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착하게 살아오셨을 것입니다. 별로 나쁜 짓을 하지 않고 착하게 살아오셨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여러분을 죄인이라고 하십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여러분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자기 사랑으로 똘똘 뭉쳐있는 우리의 본성에서 온갖 악한 행위가 발산된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시고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구제받을 수 없고 용서 받을 수 없는 악한 우리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 죄인에게 이 같은 은혜가 얼마나 소중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용서라는 은혜만으로도 얼마든지 기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이러한 은혜를 망각한 채 또 다시 멈추지 않는 내 욕망이 원하는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단 1%의 가능성도 없는 존재입니다. 깨끗이 씻겨 놓으면 또 다시 더러움을 향해 뛰어드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여전히 함께 하십니다. 1%의 가능성도 없는 우리를 마지막 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세워 놓기 위해 하나님은 쉬지 않고 일하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러한 은혜를 마음에 간직하고 모인다면 그것이 곧 천국이 아니겠습니까? 모두가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서로에게 증거하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또한 신자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신자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새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용서와 은혜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 새 마음은 우리의 악함을 보게 하심으로써 우리 안에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의 왕들을 보면서 자신의 악함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는 나를 어떻게 보는가?’라는 물음을 던지시고 하나님이 인간을 보시는 시각에서 자신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하나님의 한없는 용서와 십자가의 은혜가 새겨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40강) 열왕기하 15:27-38 세상 속의 신자
<본문>
유다 왕 아사랴 오십 이년에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이십년을 치리하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취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 웃시야의 아들 요담 이십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반역하여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쳐서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베가의 남은 사적과 그 모든 행한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니라 이스라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 이년에 유다 왕 웃시야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되니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십 륙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여루사라 사독의 딸이더라 요담이 그 부친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오직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요담이 여호와의 전의 윗문을 건축하니라 요담의 남은 사적과 그 모든 행한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그 때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아람 왕 르신과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셨더라 요담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조상 다윗성에 열조와 함께 장사되고 그 아들 아하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열왕기하 15:27-38)
<설교>
그런데 우리는 세상에서의 형편과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그리고 형편과 환경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삶의 형편과 환경이 좋은 사람은 여유가 있는 반면 형편과 환경이 좋지 못한 사람은 불안과 근심이 가득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각기 다른 형편과 환경에서 과연 동일한 믿음이 가능할까요? 가능합니다. 믿음은 하나이기에 하나 된 믿음 안에서라면 형편과 환경을 초월하여 동일한 믿음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러한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은 “유다 왕 아사랴 오십 이년에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사마리아에서 이십년을 치리하며”(27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왕 브가히야 다음에 베가라는 왕이 등장을 하는데 베가 역시 역모를 일으켜서 왕이 된 사람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네 명의 왕 가운데 살룸과 므나헴도 역모로 왕이 되었음을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은 역모가 빈번했던 나라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은 약 200년의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이 200년의 역사에서 역모의 사건이 8번이나 있었습니다. 이것은 북쪽 이스라엘이 사회적으로도 매우 혼란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줍니다. 이처럼 매우 혼란한 사회적 분위기와 형편에서 과연 신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것이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러한 사회적인 혼란과 어려움은 하나님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즉 우연히 일어난 사건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간섭 아래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29절에 보면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취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앗수르를 이스라엘로 보내어 이스라엘로 하여금 큰 고통에 빠지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이러한 고통을 안기신 것은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은 베가에 대한 징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고통스럽게 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다른 의도가 있음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단지 고통스럽게 해서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은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것이라면,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은 모든 이스라엘 왕들이 동일한 징계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은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회복하시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신 여로보암2세 왕도 있습니다. 이 사람은 그로 인해서 많은 영토를 차지하는 부와 힘을 누렸지 않습니까?
유다왕 요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32절을 보면 유다 왕 웃시야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되어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지만 산당은 제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37절을 보면 그에 대한 징계로 하나님은 아람 왕 르신과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유다 역시 산당을 제하지 않은 것은, 이스라엘의 모든 왕이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은 것처럼 유다 왕들의 공통된 죄였습니다. 하지만 유다의 모든 왕들이 요담과 같은 징계를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징계가 단지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의 차원에서 주어지는 것이라면 분명 일관적인 징계라고 할 수 없는 것이고 공평한 처사로 여길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징계를 단지 죄에 대한 보응으로 여기는 것은 세상의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잘못을 범하게 할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왜 모반이 계속되게 하시고 그로 인해 백성들이 고통과 어려움을 겪게 하는 것입니까? 또한 이방 나라를 세워서 이스라엘을 더욱 더 깊은 혼란과 고통으로 집어넣으시는 것입니까? 만약 여러분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이라면 어땠을 것 같습니까? 굳이 당시 이스라엘의 형편을 생각하지 않고 지금 우리가 처한 형편과 현실을 생각해도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형편은 그다지 좋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유가로 인해서 물가가 치솟는 등 경제가 불안하고 자녀의 교육 문제 또한 혼란스러운 상황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러한 불안감에서 벗어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소위 살기 좋은 나라를 찾아 떠나기도 합니다. 그러한 형편도 되지 못한 사람들은 세상 탓만 하면서 제발 새로운 대통령이 세상을 살기 좋게 바꿔줬으면 하는 기대를 갖지만 그 또한 막연한 기대일 뿐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결국 한숨만 내쉬고 ‘이 놈의 세상’하면서 불평만 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 속의 신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자신을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불신자와 다른 존재임을 생각하신다면 세상 속의 신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살기 좋든 살기가 힘들든 상관없이 신자로서의 존재의미를 잃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자는 세상에서 어떤 사람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떠나지 않은 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혼란과 어려움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떠나지 않은 모습은 무엇입니까? 혼란과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까?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에 불과할 뿐이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점을 생각하려면 이스라엘이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은 죄와 유다가 산당을 제하지 않은 죄를 생각해야 합니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은 것이나 산당을 제하지 않은 것은 모두가 성전 제사를 가벼이 여긴 것에서 동일합니다. 제사장과 제단이 없이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찾고 제사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은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하나님께 나올 수 없는 존재임을 안다면 여로보암의 금송아지나 산당이 아니라 성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전의 제단에서 흘리는 제물의 피가 자신을 하나님께 나오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성전의 사고방식으로 존재한다면 어떤 형편과 상황에서도 제물의 피가 자신들을 거룩하게 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으로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굳게 지켜야 할 이스라엘 됨인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면 하나님으로 인해 베풀어진 은총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증거입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러주신 은혜를 감사하게 됩니다. 이 감사는 세상이 혼란스럽든 조용하든 상관없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머물러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세상이 불안하든 평화롭든 어떤 형편에서도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의미를 하나님 앞에서 분명히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평화롭고 안정된 삶을 사는 사람만이 하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께 감사하며 천국을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세상 환경에서 산다고 해도, 설사 전쟁이 나서 고통스러운 삶이 된다고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자로서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을 바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비록 고통과 어려움의 형편이지만 그러한 형편에서도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야 하고 그로 인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가 힘들고 어려운 형편에서도 변함없이 주일이면 하나님을 찾아 나오게 하는 것이고 말씀을 들음으로 새로운 은혜를 깨닫고자 하는 소망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계속되는 혼란과 어지러운 사회 속에서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못한 죄를 생각하게 되고, 죄의 용서를 구하며 제물의 거룩한 피로써 자신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을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사회 속에서 불평과 불만이 있을 뿐입니다. 막연하게 살기 좋은 세상만을 생각하면서 현실에 대해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어려움과 고통의 상황에서 불평과 불만이 있을 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지 못하고 죄에서 떠나지 않은 자신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을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축복의 사건인가를 생각하며 자신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감사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을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머물러 있는 신자인 것입니다.
이처럼 비록 하나님이 신자를 징계하신다고 해도 신자는 하나님의 징계 안에서 자신의 악함과 함께 십자가에서 베풀어진 은혜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주어진 한없는 사랑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을 찬송하고 높일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없는 것이 내게 있다는 것이 감사와 찬송으로 맺어지는 것이고 이 감사와 찬송은 세상의 형편과 상관없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하시고 감사하신다면 그것만으로도 세상에 없는 복을 받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누가 내가 처한 형편과 환경을 초월하여 예수님의 은혜를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붙들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살게 하신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이러한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형편에서 불평하고 원망하며 살아가는 것은 누구나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평과 원망이 곧 죄라는 것을 깨달으며 이같이 불의한 나에게는 지금의 형편도 넘치는 은혜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에 의해 새롭게 된 사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한없는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도록 인도하십니다. 그것을 위해 어지러움의 세상 속으로 집어넣으시면서 나를 살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41강) 열왕기하 16:1-9 아하스의 악함
<본문>
르말랴의 아들 베가 십 칠년에 유다 왕 요담의 아들 아하스가 왕이 되니 아하스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세라 예루살렘에서 십 륙년을 치리하였으나 그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치 아니하고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이 때에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가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싸우려 하여 아하스를 에워쌌으나 이기지 못하니라 당시에 아람 왕 르신이 엘랏을 회복하여 아람에 돌리고 유다 사람을 엘랏에서 쫓아내었고 아람 사람이 엘랏에 이르러 거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더라 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르되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컨대 올라와서 나를 그 손에서 구원하소서 하고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취하여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내었더니 앗수르 왕이 그 청을 듣고 곧 올라와서 다메섹을 쳐서 취하여 그 백성을 사로잡아 길로 옮기고 또 르신을 죽였더라 (열왕기하 16:1-9)
<설교>
세상의 시각으로 본다면, 비록 서로의 신이 다르고 종교 의식이 다르다고 해도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같다면 서로를 배척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서로를 인정하면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종교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만을 신으로 간주하는 독선과 고집으로 여기며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신을 찾는 것은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뛰어 넘을 수 없는 한계상황에 부딪혔을 때의 불안함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이 자신을 도와줄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위안을 삼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들의 환상으로 빚어진 신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상입니다. 이처럼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신은 결국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도덕과 윤리와 양심과 사랑과 정의의 테두리 안에서 구축되어지기 때문에 인간에게 선을 요구하고, 양심을 요구하며, 정의와 사랑을 실천할 것을 요구하면서 얼마든지 인간의 이성과 상식에 부합된 신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신에 비해서 하나님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분으로 존재하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은 배척하게 되고 대신 자신의 이성과 생각에 부합되고 이해되는 하나님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세상이 만들어 내는 신과 다르지 않은 우상일 뿐인데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는 것 때문에 성경의 하나님과 동일한 신으로 간주하는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 또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초월자가 되시고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을 우상으로 취급하는 악을 행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악행을 보여준 사람이 본문에 등장하는 아하스입니다. 아하스는 우리나라의 역사에 등장하는 광해군이나 연산군과 같은 폭군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한 왕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보시는 악은 인간의 행동의 여부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따지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면 모두가 악한 자로 취급되는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아하스가 어떤 왕이었는가는 2-4절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하스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세라 예루살렘에서 십 륙년을 치리하였으나 그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치 아니하고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아하스의 행적을 보면서 여러분은 무엇을 가지고 아하스를 악하다고 말하시겠습니까? 다른 것은 놔두고서라도 이방 사람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아서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한 것입니까? 이것은 분명 악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는 행위만을 따져서 악하다고 규정한다면, 그런 행위가 없는 사람은 아하스보다는 나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아하스가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한 것은 아들을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비록 아들은 죽었지만 아하스는 나름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정성과 열심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었고,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정성의 마음을 귀한 아들을 바치는 것으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아하스의 악함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인간의 열성과 정성을 앞세워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마련하신 인자와 자비하심과 용서의 길을 거부하고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한 것은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이었습니다. 신에게 나아가는 방법이 가증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열성과 정성을 신에게 나아가는 근거로 삼는 사고방식이 가증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 편에서 마련한 길을 거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제사라는 특별한 장치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나올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악하고 더러운 존재에 불과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길은 제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더러운 인간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제사가 유일했기 때문입니다.
제사에는 이스라엘의 열성과 정성은 불필요했습니다. 악하고 더러운 이스라엘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의 열성과 정성이 아니라 아무 죄 없이 희생당하는 제물의 피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단지 자신을 대신해서 죽어가는 제물을 바라보면서 제물의 피를 죄 값으로 대신 받으시고 자신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사랑에 감사하면 그것으로 충분했고, 그것만으로 하나님께 기쁨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하나님이 마련하신 이러한 길이 아니라 이방인들처럼 인간의 정성을 앞세워서 하나님께 나가고자 한 것입니다.
이방인이 자기 정성을 앞세우며 신을 찾아가는 것은 신의 도움이 필요할 때입니다. 신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신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고, 신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자신의 정성을 나타내야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필요에 의해 찾아가는 것이 우상인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정성을 앞세워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방인의 가증한 방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간절한 마음으로 찾는다면 그것은 인간의 실상을 깨달았을 때입니다. 멸망에 처한 인간에게 희망은 오직 하나님의 용서 밖에 없음을 알았다면 용서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용서는 죄 없는 독생자 아들의 죽으심으로 인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온 신자는 독생자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를 바라보며 자신의 죄를 애통하게 되는 것이고, 예수님의 희생과 섬김으로 인해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제사며 예배입니다.
이러한 예배에는 인간의 정성과 공로는 결단코 개입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공로만 살아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부르고 예수님을 부르면서 자신의 정성을 보이고자 한다면 그것이 곧 아하스가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한 이방인의 가증한 악행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악하다고 간주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마련하신 길이 아닌 다른 길, 즉 인간의 이성과 상식에 부합되고 이해되는 길에서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악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이 마련하신 십자가의 은혜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정성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고난은 그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하나의 교리일 뿐, 일생을 다해서 감사하고 높여야 할 은혜가 아니기 때문에 악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사고방식으로 신을 찾는 아하스의 악함은 아람과 이스라엘의 공격에 대한 해결방법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5절을 보면 아람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유다를 공격합니다. 그러자 아하스는 앗수르에 사자를 보내어서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컨대 올라와서 나를 그 손에서 구원하소서”라고 사정하면서 앗수르 왕에게 많은 예물을 보냅니다. 결국 앗수르 왕이 그 청을 듣고 아하스를 도움으로써 아람과 이스라엘의 공격에서 무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아하스는 제물의 피로써 거룩하게 하는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이방인의 사고방식으로 살았기에 그 사고방식대로 은금으로 세상의 힘을 샀고 그 힘의 도움으로 나라를 경영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악함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악함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을 안다면 나같은 존재가 하나님께 나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복으로 여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나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어떤 정성과 힘으로도 불가능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슨 일을 베풀고 계시는가를 진심으로 아는 신자라면 십자가에서 베풀어진 은혜만으로도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낮아진 마음입니다.
나같은 자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죽으신 예수님이 계시고 그분이 하늘에서 나를 위해 간구하고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은혜를 누리고 있음을 알기에 다른 부족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십자가 앞에서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삶에 대해 불만이 있고 아쉬움이 있고 좀 더 나아지기를 원하는 욕망이 멈추지를 않는다면,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성경을 근거해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큰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해도 음부의 영원한 고통에 처해져야 하는 것이 나에게 마땅한 것임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형편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깨달음과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억지로 생각한다고 되겠습니까? 진심으로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실체를 깨달아야 가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고난에서 신자가 생각하고 얻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십자가를 안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간절함이 있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인의 괴수인 나에게 하나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분으로 오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42강) 열왕기하 16:10-20 모방한 제사
<본문>
아하스왕이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단을 보고 드디어 그 구조와 제도의 식양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내었더니 아하스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왕이 다메섹에서 보낸 모든 것대로 단을 만든지라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와서 단을 보고 단 앞에 나아가 그 위에 제사를 드리되 자기의 번제와 소제를 불사르고 또 전제를 붓고 수은제 짐승의 피를 단에 뿌리고 또 여호와의 앞 곧 전 앞에 있던 놋단을 옮기되 새 단과 여호와의 전 사이에서 옮겨다가 그 단 북편에 두니라 아하스왕이 제사장 우리야에게 명하여 가로되 아침 번제와 저녁 소제와 왕의 번제와 그 소제와 모든 국민의 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를 다 이 큰 단 위에 불사르고 또 번제물의 피와 다른 제물의 피를 다 그 위에 뿌리고 오직 놋단은 나의 물을 일에 쓰게 하라 하매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왕의 모든 명대로 행하였더라 아하스왕이 물두멍 받침의 옆판을 떼어내고 물두멍을 그 자리에서 옮기고 또 놋바다를 놋소 위에서 내려다가 돌판 위에 두며 또 안식일에 쓰기 위하여 성전에 건축한 낭실과 왕이 밖에서 들어가는 낭실을 앗수르 왕을 인하여 여호와의 전에 옮겨 세웠더라 아하스의 그 남은 사적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아하스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다윗성에 그 열조와 함께 장사되고 그 아들 히스기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열왕기하 16:10-20)
<설교>
가령 장사를 하는 사람에게는 장사를 잘해서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모방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보험 설계사에게는 실적을 많이 올려서 연봉이 높은 사람의 보험 판매 방법에 관심을 두고 모방 대상으로 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유행도 인간에게 있는 모방이라는 본능이 자극되면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많이 하는 것을 하면 적어도 뒤쳐지지는 않는다는 경쟁심이 다른 사람을 따라하는 심리로 작용함으로써 유행이라는 것이 유발되는 것입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도 있듯이 좋은 방법이나 마음에 드는 것을 모방함으로써 얻어지는 이득이 있을 것입니다. 또한 좋은 방법이라면 모방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의 모방은 과연 어떻게 생각을 해야 할까요? 모방과 유행은 교회 내에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오래전 모 교회에서 행한 ‘제자훈련’이라는 것이 좋은(?) 결과를 보여주면서 여기저기서 ‘제자 훈련’을 모방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한국교회 전역으로 유행처럼 번진 때가 있었습니다. 당시 ‘제자훈련만이 교회가 사는 길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또 몇 년 전에는 기존의 보수적인 예배의식에서 탈피해서 역동적이고 생명력 있는 새로운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하면서 만들어 낸 ‘열린 예배’라는 것이 유행을 했습니다. ‘열린 예배’라는 예배 방법이 청년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면서 인기를 끌자 많은 교회가 청년들을 붙들기 위해서 열린 예배라는 방법을 도입했던 것입니다. 요즘에는 멀티미디어 예배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영상예배라고도 말하는데 소위 시각적 효과를 동원해서 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들은 남들이 많이 하고 있는 것을 자신이 하지 않으면 뭔가 뒤쳐지는 것 같은 경쟁 심리로 인해서 다만 뒤쳐지지 않으려는 목적 때문에 유행에 동참하게 되는 경우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교회 역시 모방의 목적은 모방의 대상과 같은 결과를 갖는 것입니다. 단순히 좋아보여서 모방한다기보다는 좋은 결과를 위해서 모방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원하는 결과가 없으면 자연히 시들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을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믿음 없음’ 입니다. 그 중심에 믿음이 없기 때문에 소위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 좋아 보이는 방법을 모방하는 것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믿음이 없는 것인가를 본문의 내용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에도 강대국의 제사의식을 모방하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10,11절을 보면 “아하스왕이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단을 보고 드디어 그 구조와 제도의 식양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내었더니 아하스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왕이 다메섹에서 보낸 모든 것대로 단을 만든지라”고 말합니다.
아하스 왕이 앗수르 왕을 만나러 갔을 때 앗수르 왕이 신을 섬기는 제단을 보고 그 구조와 모양을 그대로 그려서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내고 우리야는 아하스 왕이 보내온 대로 단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아하스 왕이 왜 앗수르 왕이 신을 섬기는 단을 그려서 우리야에게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말하지 않고 있지만, 짐작하건대 강대국으로 번성한 앗수르 왕이 섬기는 신과 그 단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15절에서 아하스가 새로 만든 단을 ‘큰 단’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앗수르 왕이 신을 섬기던 단이 아하스가 하나님께 제사하던 단보다는 더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점을 생각해 본다면 아하스는 앗수르 왕이 신을 섬기던 단이 예루살렘 성전에 있는 단보다 더 크고 좋은 것을 보고 자신의 단은 초라하게 여겨졌을 것이고, 앗수르의 단이 크기 때문에 그 신으로부터 복을 받아서 강대국이 된 것으로 여겼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하스는 앗수르와 똑같은 단을 만들어서 앗수르의 신을 섬기면 앗수르처럼 복을 받아서 유다도 발전하고 강대국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에 앗수르의 단의 구조와 모양을 그대로 그려서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낸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하스는 새 단을 만들어서 기존의 단과 교체합니다. 14절의 “또 여호와의 앞 곧 전 앞에 있던 놋단을 옮기되 새 단과 여호와의 전 사이에서 옮겨다가 그 단 북편에 두니라”고 말한 대로 아하스는 새로 만든 단을 성전 앞에 두고 기존의 단은 “오직 놋단은 나의 물을 일에 쓰게 하라”(15절)고 말하면서 한쪽으로 치워 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아하스가 앗수르 왕의 단을 모방한 이유는 앗수르 왕이 누리고 있는 부귀영화라는 결과를 목적한 것입니다. 앗수르가 강한 대국으로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 것을 예루살렘성전보다 큰 단을 세워 신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으로 여겼기에 앗수르의 단을 모방한 것입니다. 아하스는 성전의 단과 앗수르의 단을 비교하면서 아수르의 부강과 유다의 약함을 비교하게 되고 결국 그 원인을 단의 차이에서 찾게 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규례와 제사라는 것을 무시한 채 앗수르의 제사를 모방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러한 아하스가 보여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신자의 중심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굳게 자리하지 않고 있다면 항상 눈에 보이는 결과에 주목하면서 그 결과를 만들어 낼 방법을 따라 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하나님이 세상을 어떻게 다루시며 자기 백성을 구분하여 세상에 세우신 이유가 무엇이며, 하나님의 사랑 또한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에 자기 보기에 좋은 대로 방법을 취하면서 신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안에 성전을 세우시고 제사 규례를 세우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전과 제사라는 제도와 형식과 의식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하신 것입니까? 만약 눈에 보이는 제도와 형식과 의식이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고 복을 받게 할 수 있다면, 누구든 이스라엘의 그 모든 것을 모방한다면 이스라엘처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구분하여 세우신 거룩한 백성이라는 의미가 사라지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하셨습니다. 즉 언약이라는 관계로 이스라엘에게 함께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우신 성전과 제사 규례는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에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성취하실 언약을 소망하면서 제사를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 제도와 성전, 그리고 제단보다 더 멋있고 크고 훌륭한 다른 성전과 제사와 제단을 동원한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은 헛된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은 외형적인 것으로 이스라엘을 평가하지도 않으시고 자기 백성으로 간주하는 기준으로 삼지도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제사를 통해서 거룩한 제물의 희생의 피를 바라보면서 죄에 대해 회개하고 애통해 하며 하나님을 찾는 그를 참된 백성으로 간주하실 뿐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눈에 보기에 좋은 다른 외형적인 것으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믿게 되었다면 그것은 말씀의 능력의 결과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신다면 그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중심에 역사하신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믿으신다면 신자가 신뢰할 것은 오직 능력의 말씀일 뿐이지 외형적인 것을 신뢰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교회를 향한 탐욕이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에서 벗어나게 만듭니다. 교회에 대한 탐욕은 말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합니다. 아무리 말씀을 신뢰한다고 해도 그 말씀으로는 자신의 탐욕이 충족될 수 없음을 본인 스스로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하스가 앗수르의 단을 모방하여 도입하는 것처럼 소위 부흥한 교회의 방법론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어느 교회에서 어떤 방법으로 교회가 부흥되었다는 소문이 들리면 그 방법을 도입하며 모방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방법이 진리를 알아 가는데 도움이 되는가를 살피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이 오직 교회 부흥과 성장을 목적으로 삼을 뿐입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어떤 방법도 모방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공부하는데 있어서 좀 더 도움이 되는 방법이 있다면 그 방법을 모방할 수도 있습니다. 신자로 하여금 진리를 알아 가는데 있어서 유익한 것이라면 얼마든지 모방하여 따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부흥되는데 도움이 되는 방법이기 때문이라거나, 이런 방법으로 하면 교회가 좀 더 교회답게 보일 수 있을 것이라는 의도에서라면 그것은 분명 그 중심에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 제도를 그럴듯하게 만들면 교회가 교회답게 된다거나, 예배 순서를 바꾸고 형식을 바꾸면 하나님께 좀 더 영광 되는 예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눈에 보이는 제도와 형식과 의식을 수정하고 개조함으로써 신의 마음에 들 수 있고 신에게 좀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고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하스와 다를 바 없는 부질없는 생각에 불과한 것입니다.
신자는 눈에 보이는 종교 현상과 형식과 제도 등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직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으로만 극복되어짐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이 역사하여 매일 같이 우리를 새롭게 하고 있으며 말씀의 성취자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음을 믿는 믿음이 눈에 보이는 것들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입니다. 말씀의 능력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말씀의 능력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의 능력으로 인한 결과와 현상을 내 자신에게서 발견하고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 같은 자가 나의 죄를 알게 되고 애통해 하면서 세상보다는 하늘에 소망을 두게 되고, 세상의 것보다는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힘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말씀이 왕성한 능력으로 활동하고 역사하고 계시는 증거인 것입니다.
신자가 거룩해질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어떤 형식이 아니라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의 은혜에 감사하면 그가 곧 거룩한 신자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새언약, 즉 피의 언약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는 신자라면 단언하건데 눈에 보이는 그 어떤 형식과 제도와 의식이 그럴듯하게 보인다고 해도 그것을 모방함으로써 외적인 성과를 거두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히 11:6절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그럴듯한 외형과 형식과 제도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남처럼 해서 나도 힘있는 교회를 만들어 보겠다는 경쟁심과 탐심이 하나님을 기쁘게 할리 만무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하스는 앗수르의 단을 만들고 보니 기존의 성전 단이 볼품없이 보였던지 기존의 단을 치워 버리라고 합니다. 이처럼 타인의 것이 좋아 보이면서 기존에 행하던 것들이 초라하게 여겨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교회가 교회 되는 것은 교인수에 달린 것도 아니고, 예배 의식과 제도와 형식에 달린 것도 아닙니다. 교회가 교회되는 것은 주의 거룩이 현실화 되는 것입니다. 주의 거룩 앞에서 죄인인 우리는 ‘주님 내가 죄인의 괴수입니다’라는 고백으로 나오게 되고, 주의 거룩한 피가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한 은혜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 거룩이 현실화 되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는 말씀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43강) 열왕기하 17:1-6 신앙과 현실
<본문>
유다 왕 아하스 십 이년에 엘라의 아들 호세아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구년을 치리하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전 이스라엘 여러 왕들과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더라 앗수르 왕 살만에셀이 올라와서 호세아를 친고로 호세아가 신복하여 조공을 드리더니 저가 애굽 왕 소에게 사자들을 보내고 해마다 하던대로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드리지 아니하매 앗수르 왕이 호세아의 배반함을 보고 저를 옥에 금고하여 두고 올라와서 그 온 땅에 두루 다니고 사마리아로 올라와서 삼년을 에워쌌더라 호세아 구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취하고 이스라엘 사람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어다가 할라와 고산 하볼 하숫가와 메대 사람의 여러 고을에 두었더라 (열왕기하 17:1-6)
<설교>
그런데도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부터 마음이 자유롭지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보이는 것이 구원의 능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잘 알지만 육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필요할 수밖에 없고, 또한 육신의 문제에 있어서도 힘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을 포기하지 않지만, 육신의 삶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보이는 것을 힘으로 삼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리입니다. 영원한 생명이라는 문제만을 두고 생각한다면 신자는 그리스도만이 진리가 되시고 그리스도만으로 부족함이 없는 복된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의 문제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수많은 문제도 함께 생각을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의지하게 되고 힘으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영원한 생명의 문제만을 생각하고, 그래서 진리이신 그리스도만을 말하고 의지하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눈에 보이는 교회를 바라보고 교회를 자랑스럽게 만들려는 함정에 빠짐으로써 진리이신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함을 잊어버리고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을 도입하여 그럴듯한 교회로 만들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아하스의 모방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아하스의 눈에는 앗수르 왕에게 있는 세상의 강력한 힘만 보였습니다. 그리고 앗수르 왕이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된 것을 예루살렘의 성전의 단보다 더 크고 화려한 앗수르 왕의 단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크고 화려한 단에서 신에게 제사하였기 때문에 신으로부터 복을 받아서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된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하스가 앗수르 왕의 단을 모방하게 된 것입니다. 자신도 앗수르 왕의 단과 같은 단을 만들어서 신을 섬기면 신으로부터 큰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러한 모방은 현대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교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모방은 수없이 많습니다. 타 교회가 행한 어떤 행사나 방법이 효과가 있어서 교인이 많이 늘었다는 소문이 들리면 어김없이 관심을 두고 모방을 하려고 합니다. 또한 개인적으로도 간증이라는 것을 통해서 ‘이렇게 이렇게 했더니 복이 주어지고 신앙에 아주 유익이 되더라’는 말을 들으면 자신도 그것을 모방하여 소위 좋은 신앙을 갖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이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듭 말하지만 ‘남의 것을 절대로 모방하지 않아야 신앙이다’는 말이 아니라, 보기에 좋은 것을 모방하여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어 보겠다는 발상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 발상이 곧 그리스도를 진리라고 말하면서도 그리스도만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고,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의 능력이라는 것도 믿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가 영원한 생명이라는 믿음위에 있지 않을 때 우리는 현실이라는 강한 풍랑에 휩싸여 바람이 부는 대로 날아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에 의한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힘에 붙들린 채 현실이 이끌어 가는대로 끌려가는 삶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호세아에게서 그러한 모습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입니다. 호세아를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을 받게 되는데 이 호세아는 과연 어떤 식으로 살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2절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전 이스라엘 여러 왕들과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더라”는 내용을 보면 호세아가 이스라엘의 다른 왕들 보다는 그래도 나았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해도 결국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한 왕입니다. 비록 호세아가 이스라엘의 다른 왕들처럼 악한 일을 행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호세아가 하나님만을 신앙하고 의지하는 왕은 아니었습니다. 다른 왕과 마찬가지로 호세아도 현실의 문제를 신앙으로 대처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결국 앗수르의 공격을 받고 이스라엘이 망하게 된 것입니다.
3-5절을 보면 “앗수르 왕 살만에셀이 올라와서 호세아를 친고로 호세아가 신복하여 조공을 드리더니 저가 애굽 왕 소에게 사자들을 보내고 해마다 하던대로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드리지 아니하매 앗수르 왕이 호세아의 배반함을 보고 저를 옥에 금고하여 두고 올라와서 그 온 땅에 두루 다니고 사마리아로 올라와서 삼년을 에워쌌더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호세아는 앗수르 왕에게 조공을 바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가 앗수르 왕에게 바치던 조공을 중단하고 애굽과 화친을 맺은 것입니다. 그래서 앗수르 왕이 호세아를 괘씸하게 여겨서 이스라엘을 공격을 하여 사마리아를 삼년을 에워싸게 되고 결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 한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현실은 앗수르와 애굽이라는 강대국에 둘려 싸여 있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습니까? 호세아의 대처방법은 강대국에게 조공을 바침으로써 안위를 보장받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강대국이 앗수르 하나일 때는 앗수르에게만 조공을 바치면 되지만, 애굽이라는 강대국이 추가로 존재할 때는 앗수르와 애굽을 두고 저울질을 하게 됩니다.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내게 유리한가를 따지는 것입니다. 물론 강대국 모두에게 조공을 바치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약한 이스라엘에게는 큰 부담이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호세아는 앗수르보다는 애굽을 선택을 하게 된 것이고 그것이 앗수르의 분노를 사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현실은 앗수르와 애굽이라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두 나라의 눈치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호세아는 지극히 현실적인 방법으로 대처를 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유리하고 득이 될 한 나라를 선택하여 그 나라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이스라엘을 멸망으로 이끌어 가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여러분이 이스라엘의 왕이라면 그와 같은 현실에서 어떻게 대처를 하겠습니까? 굳이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고 지금 여러분이 놓여 있는 현실 속에서도 얼마든지 이와 같은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집집마다 아이들 사교육비로 고민들이 많습니다. 아이들 과외를 하고 싶어서 하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무리해서 과외를 하는 이유에는 현실이라는 문제가 들어 있습니다. 하기는 싫지만 다른 부모들이 모두 하니까 어쩔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과외라는 현실에서 대다수의 사람이 선택하는 것은 무리를 해서라도 남들처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취하는 현실에 대한 대처방법입니다. 그러면서 과외를 하지 않아도 되는 교육환경을 만들어 달라고만 외칠 뿐입니다.
과외를 한 예로 들었지만 사실 우리가 처한 현실의 문제 속에서 과연 신앙으로 대처하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런 물음 앞에서 부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부끄러움을 인정하지 않기 위한 반발이 여러분의 속에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상을 어떻게 사느냐?’고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신앙은 양다리 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양다리를 하나님과 세상 모두에게 걸쳐 놓고, 세상과 영원 모두를 차지하겠다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세상에 걸친 다리를 빼버리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문제를 현실적인 방법으로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 대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 속에서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의 힘과 의지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인생의 전부가 됨으로써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의 전부가 되지 않고는 현실의 삶을 신앙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어쨌든 호세아는 하나님보다는 강대국이라는 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연약한 상태에 있고, 양쪽에 강대국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힘이시다’는 말은 호세아에게는 그렇게 감동적이거나 힘이 되는 말로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힘이 되신다고 하지만 호세아가 처한 현실적인 상황은 하나님의 힘을 느끼고 확신할 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앗수르와 애굽 둘 중에 어느 하나를 택하여 의지하는 방법으로 현실적인 상황을 대처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현재의 삶에서, 여러분이 처한 지금의 현실에서 ‘여호와가 힘이시다’ ‘여호와가 반석이고 바위시다’는 말들이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힘이 되고 은혜가 되고 감동이 되는 말씀으로 다가옵니까? 사실 이런 말씀들은 듣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거의 모든 사람에게는 공허한 말로 들리는 것이 현실일 것입니다. 그리고 단지 막연한 기대감을 갖게 하는 것으로 그칠 뿐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눈에 보이는 현실의 문제를 시급한 것으로 여길 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다면 자연히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가 되시고, 진리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생수가 되신다는 것에도 관심이 없고 앞서 말한 것처럼 모두가 공허한 말로 여겨질 뿐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신앙 현실이라면 우리는 신앙 문제를 다시 새롭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금 무엇을 가장 시급한 문제로 여기고 있으며, 우리가 처한 현실과 상황에서 믿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점검하면서 참된 진리의 길이 회복되기를 소원하고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시급한 현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자녀 교육 문제입니까? 아니면 돈 버는 것입니까? 그러한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신앙하는 것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로 자리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아무리 급한 문제가 있다고 해도 예수님이 오늘 오신다면 예수님을 신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급한 문제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이 오늘 오시지 않는다는 자신의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현실의 문제에 매이게 되고, 신앙보다는 내게 유리한 현실적인 방법을 찾으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생명이 되시고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아는 것을 힘으로 삼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합니다. 이처럼 신앙의 힘은 우리를 영생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믿을 것은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는 신자에게는 그리스도만이 힘이 됩니다. 우리가 어떤 현실에 처한다고 해도 이 믿음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 믿음이 비록 현실의 문제 해결에 아무런 힘이 되지 않는다고 해도 이 믿음을 포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바로 이것을 묻고 계십니다. ‘지금 네가 처한 현실에서도 변함없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그리스도를 믿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처한 현실이 많이 힘드십니까? ‘이 현실에서 어떻게 벗어날까?’를 먼저 생각하기 전에 ‘이 현실에서도 나는 변함없이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리스도가 힘이 되는 신자로 살아가는가?’를 생각하십시오. 문제 해결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사도들처럼 옥에 갇히고 매 맞는 현실에서도 찬송하게 하고 기뻐하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이러한 신자로 굳게 서기를 소망하지 않으시겠습니까?
(44강) 열왕기하 17:7-23 인간의 고집
<본문>
이 일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또 다른 신들을 경외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규례와 이스라엘 여러 왕의 세운 율례를 행하였음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가만히 불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를 배역하여 모든 성읍에 망대로부터 견고한 성에 이르도록 산당을 세우고 모든 산 위에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 목상과 아세라상을 세우고 또 여호와께서 저희 앞에서 물리치신 이방 사람 같이 그곳 모든 산당에서 분향하며 또 악을 행하여 여호와를 격노케 하였으며 또 우상을 섬겼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치 말라 명하신 일이라 여호와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로 이스라엘과 유다를 경계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열조에게 명하고 또 나의 종 선지자들로 너희에게 전한 모든 율법대로 행하라 하셨으나 저희가 듣지 아니하고 그 목을 굳게 하기를 그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던 저희 열조의 목 같이 하여 여호와의 율례와 여호와께서 그 열조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과 경계하신 말씀을 버리고 허무한 것을 좇아 허망하며 또 여호와께서 명하사 본받지 말라 하신 사면 이방 사람을 본받아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 자기를 위하여 두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고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 성신을 숭배하며 또 바알을 섬기고 또 자기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복술과 사술을 행하고 스스로 팔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그 노를 격발케 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심히 노하사 그 앞에서 제하시니 유다 지파 외에는 남은 자가 없으니라 유다도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사람의 세운 율례를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온 족속을 버리사 괴롭게 하시며 노략군의 손에 붙이시고 심지어 그 앞에서 쫓아내시니라 이스라엘을 다윗의 집에서 찢어 나누시매 저희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으로 왕을 삼았더니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을 몰아 여호와를 떠나고 큰 죄를 범하게 하매 이스라엘 자손이 여로보암의 행한 모든 죄를 따라 행하여 떠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 종 모든 선지자로 하신 말씀대로 심지어 이스라엘을 그 앞에서 제하신지라 이스라엘이 고향에서 앗수르에 사로잡혀 가서 오늘까지 미쳤더라 (열왕기하 17:7-23)
<설교>
방언을 하고, 안수했을 때 뒤로 넘어가고 하는 현상들을 확실한 성령의 역사로 간주하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자신이 경험했기에 누가 뭐래도 확실하다는 믿음을 버릴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성령의 진정한 역사인가? 에 대해서 살피려고 하기 보다는 흔히 볼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났고 체험했다는 것으로 성령의 확실한 역사로 간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인간에게는 보이는 하나님에 대한 열망이 있습니다. 자신의 감각으로 체험되는 확실한 신앙에 대한 열망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조차도 자신의 감각에 들어와주기를 열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열망이 결국 우상이라는 것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내용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인 호세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호세아 왕을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던 호세아가 애굽과 손을 잡은 것으로 인해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침공함으로써 몰락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호세아 한 사람의 죄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그동안 쌓아온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쌓아온 죄는 여러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즉 죄가 한 두 개라면 용서할 수 있는데, 수백 수천가지어서 용서하지 않고 심판하신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죄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는 하나의 죄보다는 열의 죄가 더 무겁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을 보면 그러한 생각이 틀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7,8절을 보면 “이 일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또 다른 신들을 경외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규례와 이스라엘 여러 왕의 세운 율례를 행하였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여 멸망하게 하신 이유에 대한 설명인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고 이방인의 규례와 율례를 행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열거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행악도 우상 외에 다른 범죄들이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를 세우고 이방인의 풍습을 따라 행한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은 우상 섬김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우상만 세우지 않으면 되는 것일까요? 이스라엘이 세운 바알과 아세라처럼 눈에 보이는 어떤 신상을 세우고 섬기지 않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요? 가령 불교처럼 부처라는 신상을 세우지도 섬기지도 않고, 천주교처럼 마리아 상을 세우지 않고 그 앞에서 기도하지 않으며, 그 외 어떤 사물에 대해서도 신으로 간주하지 않고 절하지 않으면 우상의 문제로부터 해방되고 자유로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상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가 눈에 보이는 어떤 사물도 신적인 효험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없고 절하는 것이 없다고 해서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이 된 우상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단언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신앙으로 간주하는 것이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기던 수준과 다를 바 없을 수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우상 문제는 7절에서 “이 일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신 그 하나님 여호와께 죄를 범하고 또 다른 신들을 경외하며”라고 말한 것처럼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며 섬긴 일부터 풀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의 사고방식이 버린바 되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었던 증거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중단되지 않고 등장하는 우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산으로 올라간 후 40일이 되어도 내려오지 않자 금송아지를 만들어 여호와로 섬겼습니다. 이스라엘이 비록 금송아지는 만들었지만 그 마음은 어쨌든 여호와를 좀 더 확실하게 의지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 진노하셨던 것입니다. 과연 무엇이 잘못된 것이었을까요? 금송아지가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요? 출 32:9절을 보면 하나님은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에 대해 모세에게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고 말씀합니다. 목이 곧다는 것은 인간의 고집을 뜻합니다. 즉 인간의 고집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무엇에 대해 그토록 고집을 부렸을까요? 그것은 8절에서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신을 자기를 위한 신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에 대한 이스라엘의 고집이었고, 오늘 우리들의 고집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자기를 위한 신으로 간주하는 고집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이스라엘 내에서 계속 등장하는 우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나님을 자기를 위한 신으로 간주하는 인간의 고집은 왜 꼭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만들어 세우는 결과를 가져오느냐는 것입니다. 아하스 왕이 이방 나라의 앗수르 왕이 신을 섬기던 단을 모방해 드리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아하스 역시 하나님을 자신을 위한 신으로 간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이 단을 모방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위한 신이라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뜻을 이루어주고 도와주는 신을 말합니다. 즉 항상 내 편이 되어주는 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사고방식은 신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신을 도와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신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신을 기쁘게 해야 하고 정성을 다해 신을 섬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이라는 존재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이기 때문에 어떻게 신을 섬겨야 할지, 무엇으로 신을 기쁘게 해야 할지 애매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에게 모세가 함께 했을 때는 이러한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모세만 바라보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세가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직접 섬겨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이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 금송아지를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제사한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신앙의 확실성을 열망하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왜 자기 신앙에 대해 확실한 증거를 갖고 싶어 할까요?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함으로써 하나님도 자신을 도와주시고 복 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금송아지를 만든 인간의 고집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만들었고, 일월성신을 섬기며, 산당을 세우고 분향하며,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고 복술과 사술을 행하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을 자기를 위한 신으로 간주하는 고집에 의한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자신을 위해 일해주기를 원하는 인간의 욕망에 의한 고집이 신을 보이는 형상으로 만들어 그 앞에 자신의 정성을 쏟아 놓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처럼 열심을 다하는 자신에게 복을 내리신다는 착각에 빠져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가 신자들로 하여금 금송아지를 만들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봉사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봉사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유도하고, 목사를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면서 사람이 감각할 수 있는 거짓된 신앙으로 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의 확실성을 열망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함정에 빠져서 자신의 확실한 신앙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함으로써 소위 복을 얻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을 자기를 위한 신으로 간주하는 이스라엘의 고집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인 것이고 이것이 곧 우상을 섬기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1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심히 노하사 그 앞에서 제하시니 유다 지파 외에는 남은 자가 없으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처럼 하나님은 인간이 자기의 고집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유다 지파외에는 남은 자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19절에 보면 유다도 그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사람의 세운 율례를 행하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김으로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심판하셨고, 유다만 남았다면 유다는 우상을 섬기지 않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유다도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고 이스라엘 사람이 세운 율례를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처럼 행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유다는 남기신 것입니까? 그것은 남은 자는 인간의 행위와는 무관하게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신실하게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는 우리의 모든 것이 부인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람들은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자기를 위하는 고집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위해 예수님을 부르고, 헌금을 하고 기도를 해도 자기를 위해서 합니다. 이것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제사하며 춤추는 것과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알을 섬기고 아세라 목상을 세우는 것과 다르지가 않습니다. 그들처럼 자기 고집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롬 14:8절의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주의 것으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믿는다함은 ‘나는 주의 것입니다’라는 고백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주의 것이라면 주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자신을 위해 주를 부르고 주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고집에 불과하며 우상을 섬기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함은 이미 십자가로 드러났습니다. 신자는 그 십자가에서 예수의 이름이 나의 생명임을 발견하고 그 이름이 나와 함께 하는 것으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에게는 자신이 경험하고 감각해야 할 신앙의 확실성은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믿음의 근거고 확실한 증거이며, 그리스도가 나의 주가 되심을 고백하게 되는 믿음이 곧 성령이 역하시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다른 이의 신앙 행위를 부러워하지도 모방하려고 하지도 않게 됩니다. 다만 자신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살필 뿐입니다.
세상은 자기를 위한 신을 두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세상은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남은 자를 두십니다. 이 남은 자들은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이 존재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며 살아갑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이 남은 자의 흔적이 있는가를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45강) 열왕기하 17:24-33 신의 법의 세계
<본문>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저희가 사마리아를 차지하여 그 여러 성읍에 거하니라 저희가 처음으로 거기 거할 때에 여호와를 경외치 아니한고로 여호와께서 사자들을 그 가운데 보내시매 몇 사람을 죽인지라 그러므로 혹이 앗수르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왕께서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옮겨 거하게 하신 열방 사람이 그 땅 신의 법을 알지 못하므로 그 신이 사자들을 저희 가운데 보내매 저희를 죽였사오니 이는 저희가 그 땅 신의 법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앗수르 왕이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그곳에서 사로잡아 온 제사장 하나를 그곳으로 데려가되 저로 그곳에 가서 거하며 그 땅 신의 법으로 무리에게 가르치게 하라 이에 사마리아에서 사로잡혀간 제사장 중 하나가 와서 벧엘에 거하며 백성에게 어떻게 여호와 경외할 것을 가르쳤더라 그러나 각 민족이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의 지은 여러 산당에 두되 각 민족이 자기의 거한 성읍에서 그렇게 하여 바벨론 사람들은 숙곳브놋을 만들었고 굿 사람들은 네르갈을 만들었고 하맛 사람들은 아시마를 만들었고 아와 사람들은 닙하스와 다르닥을 만들었고 스발와임 사람들은 그 자녀를 불살라 그 신 아드람멜렉과 아남멜렉에게 드렸으며 저희가 또 여호와를 경외하여 자기 중에서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택하여 그 산당에서 자기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게 하니라 이와 같이 저희가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왕하 17:24-33)
<설교>
하나님의 나라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은, 무슨 숨바꼭질 하는 것처럼 남들이 알 수 없는 어떤 곳에 숨겨져 있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속성과는 전혀 다른 속성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오심부터가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모두 알 수 있도록 하늘에서 천군천사가 나팔을 불고, 영광되고 화려한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하늘은 조용한 가운데 아무도 모르는 날에 말구유에 초라한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감춰짐이라는 속성인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 나라가 감추어져 있는 속성이 아니라 드러남이라는 속성으로 존재한다면 세상 모두가 알 수 있는 방식으로 활동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자기를 과시하고 높이는 방식으로 존재할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봐도 세상은 조용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고 하지만 이 세상 어디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를 정도로 하나님의 나라는 조용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신자조차도 하나님의 나라를 망각한 채 살아갑니다. 자신이 어떤 나라의 백성인지 잊어버린 채 세상의 삶에 익숙해져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상 아무도 알지 못하는 예수님의 오심을 동방박사들은 알게 하시고 예수님을 찾아오게 하신 것처럼, 지금도 자기 백성들은 세상이 보지 못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하시고 그 나라를 향해 나아가도록 인도하십니다. 이것을 위해 우리를 말씀 앞으로 나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말해줍니다. 또한 신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말해줍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받는 일이 일어난 것은 이스라엘이 우상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 후에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산을 올라간 후 내려오지 않자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이라고 하며 섬겼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자기를 위한 신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찾게 되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일하심과 인도하심이 자기를 위하는 인간의 욕망에 충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은 모든 것이 충족된 상태였습니다.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된다’는 사단의 말에 의해 자기에게 관심을 두는 순간 하나님 같이 되지 못한 자신에 대해 부족함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선악과를 먹게 된 것이고, 그처럼 자기를 바라보고 자신에게 관심을 둔 인간이 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는 자기를 위해 살아가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둔 인간으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성이 우상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 애굽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그것으로 족하지 않았습니다.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에게는 앞으로의 미래가 걱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의 보장을 위해 신을 찾았을 것이고, 보이지 않는 신을 섬길 수는 없었기에 형상을 만들어 신을 섬기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 그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악함과 불의함을 덮으시고 약속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며 은혜 입니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이며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이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높이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 은혜를 잊는다면 약속의 땅은 그들을 토해 낼 것이라는 경고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우상을 섬깁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과 은혜로도 부족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방인들이 누리고 있는 세상의 것들이, 이스라엘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사랑과 은혜보다 더 크게 보이기에 이방인의 우상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서 쫓아내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땅에는 하나님의 법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누구든 이 법에 순종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 점을 기억한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그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24절에서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아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저희가 사마리아를 차지하여 그 여러 성읍에 거하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바벨론과 다른 지역의 백성들을 사마리아로 이주시켜 사마리아를 차지하여 살도록 한 것입니다. 나중에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으로 취급하면서 천대했던 이유도 앗수르의 이런 정책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의 혈통이 이방인과 혼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로 이주한 사람들이 거기서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어 몇 사람을 죽입니다. 이 일에 대해 어떤 사람이 앗수르 왕에게 “왕께서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옮겨 거하게 하신 열방 사람이 그 땅 신의 법을 알지 못하므로 그 신이 사자들을 저희 가운데 보내매 저희를 죽였사오니 이는 저희가 그 땅 신의 법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조언을 하게 되고, 앗수르 왕은 그 말을 듣고 포로로 잡아온 제사장 하나를 보내어서 신의 법을 가르치도록 조치합니다.
이로 인해 제사장이 사마리아에 이주한 이방인들에게 여호와를 어떻게 경외할 것인가에 대해 가르치게 되지만 이방인들은 자기들의 신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와 같이 저희가 여호와도 경외하고 또한 어디서부터 옮겨왔든지 그 민족의 풍속대로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33절)는 결과만 있게 된 것입니다. 일단 이 본문에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여호와의 땅은 신의 법, 즉 여호와의 법에 의해 다스려지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 그 법에 순종치 않을 때는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사자를 보내서 몇 사람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앗수르 왕이 할 수 없이 제사장을 보내서 신의 법을 배우게 하고 이스라엘의 신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게 하지만 이방인들은 자기들의 신을 버리지를 못한 것입니다. 즉 그들은 신의 법을 배우기는 하였지만 신의 법을 사랑하거나 순종할 마음은 없었던 것입니다. 다만 신의 법을 배우지 않으면 또 다시 사자에게 죽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자신들을 위해 신을 법을 배운 것뿐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신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신의 법을 마음에 두거나 사랑함이 없이 단지 자신을 위해 법을 배우며 자신을 위해 신을 섬기려고 하는 현대의 신앙인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땅, 즉 약속의 땅에 세워진 신의 법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지 않는 증거는 불의한 자신들을 인도하여 약속의 땅에 거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가장 귀하게 여김으로써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 자체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방인들이 누리는 것들이 자신에게 없다고 해도 개의치 않고 약속의 땅에 거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귀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것으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방인들이 비록 신의 법을 배우긴 하였지만 그들에게는 애굽에서 인도 받은 은혜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법을 배우긴 하였으나 그 법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배울 수가 없었던 것이고, 따라서 여전히 자기를 위한 자기의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도 역시 우상을 섬기는 방식 그대로 자기를 위해 섬기는 것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죄에서 건짐 받은 사람입니다. 이것을 사실로 믿는 것이고, 예수님의 흘리신 피가 자신을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게 했음을 믿고 감사하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사망에서 벗어나게 하신 주님의 은혜를 잊은 채 교회를 찾는다면 과연 어떤 관심을 드러내게 될까요? 결국 자기에게 위안이 되고 만족이 되는 것에만 관심을 드러낼 뿐입니다. 하나님의 땅은 신의 법이 작용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땅에 들어 왔으면서도 신의 법에 관심이 없다면 하나님의 땅은 그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땅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의 땅은 인간의 정성과 열심이 복의 근원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를 복에 거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땅에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감사할 뿐입니다. 사랑과 은혜로 그 마음이 충족되었기에 이방인의 손에 있는 것들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이미 이방인의 손에 있는 것보다 더 귀하고 크신 사랑을 받았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땅은 이들만 용납할 뿐입니다. 이것이 신의 법입니다.
세상에 십자가를 말하는 사람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서 놀라우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보면서 그 사랑과 은혜로 감사하고 그 마음이 채워진 자로 살아가는 사람은 참으로 적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마음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나 같은 자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채워지기를 간구하고 소원하면서 교회를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에 대해서는 감추어져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드러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를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심으로 십자가로 확증된 은혜와 사랑으로 그 마음이 충족되지 못하고 자신을 위한 또 다른 사랑과 은혜를 바라보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회가 내게 위안이 되고 내 마음을 달래주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면 포기해야 합니다. 그것은 교회가 내 편이 돼 주기를 바라는 욕망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위안을 얻는 것은 누군가가 자기편을 들어줄 때입니다. 결국 현대 교회가 신자들에게 위안을 주기 위해 존재하다보니 사람들의 편을 드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참된 진리가 상실돼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자기를 위하는 자기 신을 포기하지 않은 모습들입니다. 앗수르 왕이 제사장을 사마리아로 보냈지만 그 목적은 신의 법을 통해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배우게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신의 법을 배워서 그 법대로 하나님을 섬김으로 재앙을 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목사가 이러한 목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앗수르 왕이 제사장을 사마리아에 보낸 것처럼, 하나님은 영원한 제사장 되시는 분을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하지만 앗수르 왕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가르쳐서 그 법대로 하나님을 섬김으로 재앙을 면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 신의 법의 내용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가르치고 그 은혜와 사랑을 사모하고 감사하는 자기 백성을 찾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보면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놀라우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심으로써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신의 법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신의 법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교회를 찾는 것이 신자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이러한 마음의 신자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이 마음인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46강) 열왕기하 17:34-41 언약
<본문>
저희가 오늘까지 이전 풍속대로 행하여 여호와를 경외치 아니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라 이름을 주신 야곱의 자손에게 명하신 율례와 법도와 율법과 계명을 준행치 아니하는도다 옛적에 여호와께서 야곱의 자손에게 언약을 세우시고 저희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다른 신을 경외하지 말며 그를 숭배하지 말며 그를 섬기지 말며 그에게 제사하지 말고 오직 큰 능력과 편 팔로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만 너희가 경외하여 그를 숭배하며 그에게 제사를 드릴 것이며 또 여호와가 너희를 위하여 기록한 율례와 법도와 율법과 계명을 너희가 지켜 영원히 행하고 다른 신들을 경외치 말며 또 내가 너희와 세운 언약을 잊지 말며 다른 신들을 경외치 말고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가 너희를 모든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리라 하셨으나 그러나 저희가 듣지 아니하고 오히려 이전 풍속대로 행하였느니라 그 여러 민족이 여호와를 경외하고 또 그 아로새긴 우상을 섬기더니 그 자자 손손이 그 열조의 행한 것을 좇아 오늘까지 그대로 하니라 (열왕기하 17:34-41)
<설교>
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를 그렇게 단순하고 간단하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기적의 사건을 단 한번만이라도 경험하면 평생 여호와를 경외하고 여호와만 신앙할 수 있을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베드로가 자신은 절대로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는 것처럼 그저 순간의 자신감이고 생각일 뿐, 현실을 이기고 극복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홍해를 건넌 기적의 사건을 경험한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넌 후에 여호와의 구원을 소리 높여 찬양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찬양도, 홍해를 건넌 기적의 경험도 목마름과 배고픔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이것을 이스라엘만의 어리석음으로 본다면 그것이야 말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전혀 보지 못한 어리석은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이 오늘의 배부름으로 내일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오늘의 배부름으로 감사와 기쁨이 있다고해도, 내일에 배고픔이 몰려온다면 어제의 배부름으로 인한 감사와 기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단지 지금 배고프다는 것으로 인해 원망이 나오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설사 오늘 이스라엘과 같은 홍해사건을 경험했다고 해도 내일 고난이 있고 고통이 주어지면 어제의 기쁨은 잊어버리고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홍해의 기적의 사건이 매일 같이 펼쳐진다고 해도 역시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홍해의 기적의 사건이 우리의 배를 부르게 하지 못하고 욕망을 충족시켜주지 못한 이상 결국 관심을 두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간이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자신의 배를 부르게 하고,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는 그 어떤 기적의 사건이라고 해도 단지 신기한 현상에 대한 호기심에 머무를 뿐, 그 기적이 배부름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우상을 자기 곁에 두려고 하는 이유입니다.
수많은 기적을 체험하면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된 이스라엘이 우상을 받아들이고 이방인의 풍속을 따라 신을 섬기게 되는 이유도 자기 배부름에 있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내게 배부름이 될 수 있는 길을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우상을 포기하지 못한 이유고, 결국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34절에 보면 “저희가 오늘까지 이전 풍속대로 행하여 여호와를 경외치 아니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이라 이름을 주신 야곱의 자손에게 명하신 율례와 법도와 율법과 계명을 준행치 아니하는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왜 하나님이 명하신 율례와 법도와 율법과 계명을 준행하지 않고, 이방인의 풍속을 받아들인 것입니까? 더군다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면 복을 주겠노라고 약속까지 하셨는데도 말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여호와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면 복을 주겠다는 여호와의 약속이 있습니다. 신 30:9절을 봐도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여 이 율법 책에 기록된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과연 여러분은 이 말씀을 믿습니까? 아마 이 말씀처럼 된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실이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다르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어도 고통을 겪기도 하고 사업이 실패하기도 하고, 불치병이 걸려 죽기도 합니다. 이처럼 한편으로는 계명을 잘 지키면 복을 받는다는 말씀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다른 이 세상의 현실이 있습니다. 이런 딜레마 앞에서 어떤 사람들은 신자가 복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믿음이 없거나 말씀을 바르게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말씀을 바르게 지켜서 복을 받으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의 복에 신앙의 무게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은 신앙생활을 잘 하라는 충고일 뿐이지 실제로 세상살이와 직결되는 게 아니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세상의 풍속을 따라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계명은 유명무실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일반적으로 십계명을 비롯해서 모세오경에 기록된 모든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그걸 율법, 명령, 계명 등으로 부릅니다. 우리는 그 계명을 지키면 복을 주신다는 말씀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곧 이스라엘이 잘 되는 것이 곧 여호와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잘되게 하기 위해서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계명과 명령대로 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참으로 잘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과 안식과 기쁨에 거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이보다 더 잘된 일이 있을 수 없습니다. 3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야곱의 자손에게 언약을 세우셨다고 말합니다. 여호와가 세우신 언약은 “너희는 다른 신을 경외하지 말며 그를 숭배하지 말며 그를 섬기지 말며 그에게 제사하지 말고 오직 큰 능력과 편 팔로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만 너희가 경외하여 그를 숭배하며 그에게 제사를 드릴 것이며” (35,36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이 언약을 잊지 않고 다른 신들을 경외치 않고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만을 경외한다면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모든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모든 원수의 손에서 건져내시는 것이야 말로 이스라엘이 영원히 잘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여호와의 언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방인의 신을 끌어 들이고 그들의 풍속대로 신을 섬기는 것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섬겨도 자신들이 원하는 ‘잘됨’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것처럼 세상에서의 번성을 원했습니다. 보이지도 않고 배부름이 되지도 못하는 은혜는 은혜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보다 풍요롭고 배부름을 누리고 있는 이방인들의 풍속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그들처럼 신을 섬기면 자신들도 배부름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존이 아니라 생명을 위해 존재하십니다. 생존 문제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육신이 배부른 상태의 생존을 위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생존의 모든 문제까지도 생명의 가치와 귀함을 깨달아가는 것에 목적을 두시고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단지 배만 부르면 그것으로 만족해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내 배를 부르게 해주는 여호와를 부르고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언약을 잊어버리고 이방인의 풍속을 따라 행한 이스라엘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자손에게 언약을 세우셨고, 지금도 그 언약 안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지금의 세상은 하나님의 언약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교회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하나님이 일하심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자신이 목적한 것을 두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목적하는 것을 이뤄주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기뻐하고 그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이 아니라 자신이 계획하고 목적하는 것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집값이 오르고 내리는 것에 민감하고, 자식이 공부를 잘하고 못하는 것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어떤 하나님이 인기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내 자식 공부 잘하게 해주는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내 영혼의 잘됨이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은 이미 관심 밖으로 밀려 나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본질은 생명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생명을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하늘로 다시 돌아가신 그 모든 일이야 말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의 잘됨, 즉 생명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시는 확고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엉뚱한 것을 증거로 삼으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특이한 사건들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증거를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보내셨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증거물이라는 것을 생각지 않습니다. 따라서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 또한 하나님이 살아서 일하시는 증거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됨과 번성이라는 복을 통해서 어떤 증거를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항상 배고픔의 상태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기적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매일 같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기적의 사건이 부여하는 부요함과 배부름을 잃어버린 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배부름을 얻기 위해 자신이 목적하고 계획한 바를 성취해 주는 하나님을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쉬지 않고 개입하시고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눈에 펼쳐지는 현실들은 아예 하나님이 안 계신 것과 같은 현상들만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에는 우리가 꿈꾸는 세상의 모습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늘의 영원한 생명만 담겨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 안에서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에 거하는 신자에게는 더 이상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이 필요치 않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뜨는 기적이 필요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가 곧 모든 기적의 증거물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눈을 뜬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알게 되고, 세상의 실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눈을 뜬 사람입니다.
또한 신자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꼼짝 못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가 아니라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일어나 그리스도를 향해 걸어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또 다른 기적을 경험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최고의 기적으로, 표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리스도로 부요하고 배부를 수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신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거한다면 그것보다 잘된 일은 없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복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언약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또 내가 너희와 세운 언약을 잊지 말며 다른 신들을 경외치 말고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38,3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전 풍속대로 행할 뿐이었습니다. 자신의 계획과 목적에 맞는 신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심으로써 이스라엘과 같은 신앙은 신앙이 아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언약을 향해서 자기 모든 삶을 집중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은 비록 그 미래가 불확실하고 결과적으로 실패한다고 해도 그것에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실패가 곧 언약의 파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따라서 비록 세상에서의 일은 실패한다고 해도 자기 백성의 영혼을 잘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은 실패하지 않을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길을 갈 수 있기를 소원하시고, 세상에서 번성하고 성공하는 것보다도 이런 믿음의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신자 되기를 바랍니다.
(47강) 열왕기하 18:1-8 종교를 넘어서
<본문>
이스라엘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 삼년에 유다 왕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되니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이십 구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아비라 스가리야의 딸이더라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저가 앗수르 왕을 배척하고 섬기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사람을 쳐서 가사와 그 사방에 이르고 망대에서부터 견고한 성까지 이르렀더라 (열왕기하 18:1-8)
<설교>
하지만 비록 기독교라는 명칭을 인간이 붙이긴 하였지만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종교는 분명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의 시작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본질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다른 종교의 본질도 믿음이지 않는가? 라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도 믿는 것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의 본질도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동일한 믿음일 수는 없습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믿는데 다른 종교는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신을 믿기 때문에 동일한 믿음이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설사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도 동일한 믿음이 아닐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기독교 안에도 종교적 수준에서의 믿음인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종교적 수준에서의 믿음은 어떤 것일까요? 고전 1:22-24절을 보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는 말을 합니다.
유대인이 표적(기적)을 구한다는 것은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경험한 것을 믿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헬라인이 지혜를 찾는다는 것은 그들의 지식을 충족시켜 줄 것을 찾는다는 뜻입니다. 즉 이들 모두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관심이 없이 다만 나름대로의 자기만족을 위해 신과의 관계에 있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종교는 자기만족을 위해 신을 찾습니다. 믿음 또한 자기만족을 위한 수단이고 도구일 뿐입니다. 이것이 종교의 본질입니다. 신을 믿으면서 ‘내게 어떤 좋은 일이 있을까?’에 염두를 두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나의 만족, 나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자들의 모임입니다.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라는 엄청난 복을 받았기에 그 복이 기쁨이 되어 큰 만족으로 자리하고 있다면, 달리 자기만족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 자로서 하나님께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무슨 행동을 한다고 해도 그 중심에는 자기만족과 자기 기쁨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때는 분명히 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만족이라는 종교적 수준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자기만족을 구하는 믿음은 보이는 것과 자기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자기 경험을 중시하게 됩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종교적 수준에 머물렀다는 것은, 우상을 섬기고 산당을 제하지 못한 것에서 드러납니다. 보이는 것을 근거로 한 자신들의 정성과 열심을 동원하여 하나님과 깊은 관계에 있음으로 복을 얻겠다는 발상이 이스라엘의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이러한 종교를 넘어서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가 바로 유다 왕 히스기야입니다. 3절에 보면 히스기야는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고 말합니다.
히스기야의 정직한 행함은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4절)는 말씀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여러 왕들이 제하지 못했던 산당을 제거합니다. 그리고 주상과 아세라 목상 등 모든 우상을 깨뜨리고 무너뜨립니다. 여기까지는 ‘그것쯤이야’라는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그 정도쯤은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쉬운 일을 그동안 유다 왕들은 왜 하지 못했을까요? 이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오랜 전통과 신앙으로 자리하고 있는 산당을 없앤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백성들의 반발을 살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왕의 입장에서는 섣불리 행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왕이 자기 안위와 입장을 생각한다면 산당을 없앤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나의 안위에 해가 되는 일은 피하지 않습니까? 항상 내 입장을 고려하면서 불리한 쪽으로는 가지 않는 것이 우리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산당을 없애는 것을 단편적으로만 생각하면서 쉬운 일로 여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간에 우리가 주목할 것은 산당과 우상을 없앤 일이 아닙니다. 더 대단한 것은 히스기야가 모세가 만든 놋뱀까지 부숴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놋뱀을 향하여 분향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놋뱀은 다른 사람이 아닌 모세가 만든 것입니다. 모세가 만든 놋뱀이라면 이스라엘에게는 굉장한 물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놋뱀을 거룩한 것으로 여기면서 놋뱀을 향하여 분향을 하였던 것입니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게 된 이유는 이러합니다. 민 21:4-5절을 보면 “백성이 호르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라고 말합니다.
힘든 광야생활로 인해 지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불뱀들을 보내서 백성들을 물어 죽게 합니다. 이로 인해 백성들이 모세에게 죄를 자복하면서 여호와께 기도하여 뱀들을 떠나가게 해달라고 간청을 하고,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자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어 죽게 한 불뱀을 사라지게 한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신 것이 아니라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게 하시고, 불뱀에 물린 자마다 장대에 달린 뱀을 보면 살게 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그때 모세가 만든 것이 놋뱀이었습니다.
당시 놋뱀을 바라본 백성들이 살게 된 것은 놋뱀의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놋뱀을 만들어 바라보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지 못하고 원망한 죄를 자복하며 용서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의지하는 자만이 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을 살린 것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이었던 것이지 놋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놋뱀이 이스라엘 안에 그대로 존재하면서 성스러운 능력이 있는 거룩한 것으로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린 능력의 놋뱀이고, 더군다나 모세가 만들었기에 놋뱀을 거룩한 것으로 여기고 놋뱀을 향하여 분향을 한 것입니다. 우리라고 해서 달랐을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 놋뱀을 성스러운 물건으로 여기고 그 앞에서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에게 있는 종교성이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의 대단함은 이처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무너뜨리고 부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히스기야를 두고 6절에서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고 말합니다. 즉 히스기야가 여호와께 연합했다는 사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무너뜨린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과 연합의 관계에 있다는 것은 보이는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도 신뢰하지도 않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내가 경험하고 내가 목격한 그 어떤 현상도 의지하지 않고 다만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피를 바라보는 것이 내가 사는 길임을 의지하는 것이 여호와께 연합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그런데도 ‘십자가만을 바라보라’고 말하면 ‘도대체 보이지 않는 십자가를 어떻게 바라보라는 것인가?’라며 짜증을 냅니다. 보이지 않는 십자가를 바라본다고 하느니 차라리 내가 경험하고 내 눈에 보인 것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더 확실하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 우리와 동행하시는 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증거는 오늘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나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며 주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이 보여주신 요나의 표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기적을 원하고 체험을 원하면서 보이는 것에 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종교의 수준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가 만든 놋뱀은 큰 보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놋뱀이 이스라엘을 살린 것이 아니고, 놋뱀이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살린 것이고 그분이 이스라엘과 동행을 하신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체험한 그 어떤 기적도 그들을 살리는 능력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다만 여호와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에게는 능력이 되시고 피난처가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분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이것을 알았기에 모세가 만든 놋뱀까지 부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를 넘어선 히스기야의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은 신자로 하여금 십자가만을 바라보게 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이 생명이 되시고 구원자가 되심을 알기 때문에 십자가의 예수님만 바라보며 그분이 나와 동행하심을 믿게 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자기 체험과 내가 목격한 그 어떤 것도 신뢰하지 않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것도 구원의 능력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어떤 체험을 했다면 그 체험에서 배울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는데 그것을 믿지 못하고 염려하며 살아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알게 하기 위해 어떤 체험을 동원하여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만큼 나의 믿음이 초보적인 위치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랑할 문제가 아니라 부끄러워해야 할 문제일 뿐입니다. 신자는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참된 기적이고 표적인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놋뱀을 부순 것이 곧 종교를 넘어서는 것이고 여호와께 연합한 자의 모습의 보여준 것입니다. 놋뱀은 우리들 모두에게 세워져 있을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어떤 체험이나 눈에 보인 것을 하나님이 함께 하신 현상으로 여기고 그것을 하나님을 경험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것이 곧 놋뱀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기적을 요구하고 보이는 것을 신뢰합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을 위해 신을 찾습니다. 자기가 중심이고 자기만족을 목적으로 신을 부릅니다. 만약 현대 기독교가 이러한 풍조에 함께 하고 있다면 기독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단지 종교일 뿐입니다. 기독교는 자기만족이 아닌 하나님이 기쁨을 구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내 만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의 은혜로 내 심령의 넘치는 만족을 경험하였기에 달리 자기만족을 위해 하나님을 찾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야 할 귀한 경험은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써 나의 죄를 알게 되고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의 은혜와 귀함을 알게 되고 주님만으로도 넉넉한 것이 신자의 인생임을 깨닫고 그러한 인생을 구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종교를 넘어서 이러한 신앙의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48강) 열왕기하 18:9-16 비굴해진 히스기야
<본문>
히스기야왕 사년 곧 이스라엘 왕 엘라의 아들 호세아 칠년에 앗수르 왕 살만에셀이 사마리아로 올라와서 에워쌌더라 삼년 후에 그 성이 함락되니 곧 히스기야의 육년이요 이스라엘 왕 호세아의 구년이라 사마리아가 함락되매 앗수르 왕이 이스라엘을 사로잡아 앗수르에 이르러 할라와 고산 하볼 하숫가와 메대 사람의 여러 성읍에 두었으니 이는 저희가 그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준행치 아니하고 그 언약을 배반하고 여호와의 종 모세의 모든 명한 것을 거스려 듣지도 아니하며 행치도 아니하였음이더라 히스기야왕 십 사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들을 쳐서 취하매 유다 왕 히스기야가 라기스로 보내어 앗수르 왕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시는 것을 내가 당하리이다 하였더니 앗수르 왕이 곧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정하여 유다 왕 히스기야로 내게 한지라 히스기야가 이에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 주었고 또 그 때에 유다 왕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전 문의 금과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 모두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라 (열왕기하 18:9-16)
<설교>
그런데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칠년쯤 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유다의 여러 성을 공격하는 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앗수르의 공격으로 인해 유다의 견고한 성읍들이 무너지게 되자 히스기야가 앗수르 왕 산헤립에게 무릎을 꿇는 이야기가 본문의 내용인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히스기야는 유다의 왕들 중에서 가장 선한 왕으로 칭송받은 왕이기도 합니다. 아세라 목상은 물론 역대의 왕들이 제하지를 못했던 산당까지 철거했고 심지어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신물로 여김 받는 모세의 놋뱀까지 백성들이 그것을 향하여 분향한다는 이유로 부숴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히스기야의 신앙은 다른 왕에 비해서 남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앗수르의 공격에 대한 히스기야의 반응을 보면 그러한 생각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4절을 보면 “유다 왕 히스기야가 라기스로 보내어 앗수르 왕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시는 것을 내가 당하리이다 하였더니 앗수르 왕이 곧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정하여 유다 왕 히스기야로 내게 한지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앗수르의 침략에 대한 히스기야의 반응입니다. 앗수르 왕에게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하면서 왕이 무엇을 바치라고 해도 다 바치겠다고 한 것입니다. 앗수르 왕은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요구를 했고,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 내어주고 그것도 부족하여 여호와의 전 문의 금과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 내어 모두 앗수르 왕에게 주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앗수르 왕에게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오히려 잘못은 다른 나라를 공격하여 고통에 빠뜨리게 한 앗수르에게 있지 않습니까? 히스기야가 앗수르에게 바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앗수르가 유다의 성을 공격하여 입힌 피해를 보상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히스기야는 앗수르에게 ‘내가 범죄하였습니다’라고 하면서 ‘왕이 내게 지우는 것을 내가 당하리이다’라는 말로 비굴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산당과 우상과 모세의 놋뱀까지 부숴버릴 정도로 신앙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고자 했던 히스기야가 어떻게 이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까? 아마 여러분이 생각하는 신앙은 분명 이런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앗수르의 어떤 힘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당당하게 대처하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신앙이 아닙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신앙을 보시고 히스기야를 도우셔서 앗수르를 이기게 하시는 것이 신앙에 대한 우리들의 계산일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인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힘에 대해 비굴이라는 전혀 상상 밖의 반응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히스기야의 이런 비굴한 반응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히스기야가 그럴 수가 있다고 이해가 되십니까? 아니면 히스기야의 신앙에 대해 실망이 되십니까? 만약 히스기야가 이해가 되신다면 그것은 자신의 현실에서 히스기야를 바라봤기 때문일 것이고, 실망이 되신다면 그것은 자신이 어떤 현실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 전혀 감감하다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앗수르 왕에 대한 히스기야의 반응은 우리 자신에게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즉 우리가 세상 속에서 얼마나 나약한 자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히스기야가 거울이 되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내가 범죄하였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실제로 앗수르에 대해 잘못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앗수르라는 힘 앞에 굴복하는 말이라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다만 앗수르 왕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지금의 위기를 모면해 보기 위해서 하는 말일 뿐입니다. 자칫하면 나라가 망할 판인데 살기 위해서 무슨 말인들 못하고 무엇을 달라고 한들 주지 못하겠습니까? 일단은 살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요구로 인해서 여호와의 거룩한 전의 기둥의 금까지 벗겨서 바칠 정도로 하나님보다는 앗수르의 힘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히스기야의 이런 모습에 대해 할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실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히스기야의 이런 모습을 보여주십니까? ‘너희들은 하나님만 신뢰함으로써 어떤 힘에 대해서도 비굴해지지 않고 두려워하지 말아라’는 말씀을 하기 위해서일까요? 하지만 힘 앞에서 비굴해지지 않고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임을 잘 아실 것입니다.
사람이 힘 앞에서 비굴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상대방의 힘에 의해서 자신이 불리해지고 손해를 보게 될 수 있음을 감지했을 때입니다. 그래서 힘이란 굳이 돈이나 권력에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아파트에 물건을 팔기 위해서 오는 사람에게는 대통령보다는 지금 자기 앞에 있는 아파트 관리인이 더 힘 있는 사람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식을 학교에 보내는 부모는 교사 앞에서는 뭔가 모르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습니다. 교사가 내 자식에게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이라는 것은 삼각형의 구조로 되어 있다기 보다는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둥근 원의 구조로 되어 있다고 봐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돈이 제일 많은 사람이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있고 그 밑으로 점차 돈의 액수에 의해서 힘이 낮아진다거나, 대통령이 권력의 꼭대기에 있고 그 밑으로 지위의 순서에 따라 권력이 낮아지는 그런 삼각형의 구조로 힘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회사 사장도 자기 자식을 맡고 있는 교사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 있는 것이고, 그 교사는 또 다른 힘 앞에 고개를 숙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힘의 구조이고 우리는 그러한 힘의 구조 속에서 비굴한 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앗수르가 유다를 멸망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눈앞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앗수르 왕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무엇이든 달라는 대로 주는 것이 자신이 살고 유다가 사는 길로 여겼을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해도 유다의 성읍이 무너지는 대도 가만히 계시는 하나님을 신뢰할 수는 없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은 성읍이 무너지는 위기의 상황뿐이니 만큼 보이는 힘에게 비굴해지고 고개를 숙이는 것만이 사는 길로 여겨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면 히스기야의 이런 비굴한 모습에서 볼 수 있는 히스기야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히스기야는 유다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즉 유다를 책임지고 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 앗수르도 히스기야도 아니라는 것을 몰랐던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유다를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위기 상황에서 유다를 구하는 것은 앗수르 왕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유다를 무너뜨리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위기에서 건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의 현실이었고 오늘 우리들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 32:39절을 보면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줄 알라 나와 함께 하는 신이 없도다 내가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자 없도다”라는 말을 합니다. 신이라는 것은 인간들에게 초월적인 힘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 하기도 하고 낫게도 할 수 있는 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살아가는 신자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고 하며 상하게 하기도 하고 낫게도 할 수 있는 진정한 힘은 이 세상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 앞에 있는 힘이 나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두려움과 함께 비굴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마 10:28절의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는 말씀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께 나오게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내 인생에서 별 영향을 주지 못하는 분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물론 때때로 신자가 하나님께 나와서 ‘내가 범죄했습니다’고 하기도 하지만 그 말이 마치 히스기야가 앗수르 왕 앞에서 하는 말과 그 의미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가령 주일 예배에 빠지면 많은 사람들이 은연중에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됩니다. 주일 예배에 빠진 것 때문에 하나님께 벌 받는 것이 아닌가? 라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때문에 혹시 하나님께 벌 받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내가 범죄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고개를 숙임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달래고자 하는 것과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이 힘이 될 수 없는 것은, 그 어떤 힘도 우리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들의 눈에 비취는 현실은 세상의 힘이 나를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진짜 현실은 그 모든 힘들이 여호와의 손에 붙들려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의 그 어떤 힘도 우리의 몸과 영혼을 지옥에 떨어지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몸과 영혼을 지옥에 떨어지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진정한 두려움의 대상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나의 몸과 영혼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보다,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하고 피해를 입고 낮아지고 고통을 겪게 되는 것을 더 두려워합니다.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고 나약함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 나약함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이 있다고 떠들어봐도 결국 우리는 힘에 대해서는 비굴해질 수밖에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절감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힘에 대해서도 당당해질 수 있습니까? 여러분에게 월급을 주는 사장 앞에서 당당할 수 있습니까? 어떤 비리가 보일 때 그것을 가차 없이 지적하고 고발할 수 있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내 인생은 여호와의 손에 있음을 신뢰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러지를 못합니다. 힘 앞에서는 한 없이 나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신자는 세상의 힘을 이기는 자가 아니라 세상을 이길 수 없는 나약한 존재가 바로 나 자신임을 절감하면서 ‘하나님 나는 매일 세상에 고개를 숙이며 비굴하게 살아가는 사람 밖에 안됩니다’는 가슴 깊은 고백을 하게 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슴 깊은 고백이 바로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그 피가 바로 내가 찌른 창에 의해서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믿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여러분의 지금의 마음을 믿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지금 여러분이 하나님에 대해 어떤 마음과 생각을 갖고 있든 그것은 절대로 믿을 것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에 대해 어떤 결심과 굳은 마음을 가진다고 해도 그것은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하고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한 베드로의 장담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매일 세상의 힘에 눌려서 비굴하게 살아가는 자신의 현실에서 내가 믿고 의지하고 신뢰할 것은 나의 믿음이 아니라 십자가의 능력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로 하여금 지금까지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한 것도 십자가의 능력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여러분의 신앙이 새롭게 시작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9강) 열왕기하 18:17-35 랍사게의 조롱
<본문>
앗수르 왕이 다르단과 랍사리스와 랍사게로 대군을 거느리고 라기스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가서 히스기야왕을 치게 하매 저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니라 저희가 올라가서 윗못 수도 곁 곧 세탁자의 밭에 있는 큰 길에 이르러 서니라 저희가 왕을 부르매 힐기야의 아들 궁내대신 엘리야김과 서기관 셉나와 아삽의 아들 사관 요아가 저에게 나가니 랍사게가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고하라 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이 너의 의뢰하는 이 의뢰가 무엇이냐 네가 싸울만한 계교와 용력이 있다고 한다마는 이는 입에 붙은 말 뿐이라 네가 이제 누구를 의뢰하고 나를 반역하였느냐 이제 네가 저 상한 갈대 지팡이 애굽을 의뢰하도다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그 손에 찔려 들어갈찌라 애굽 왕 바로는 무릇 의뢰하는 자에게 이와 같으니라 너희가 혹시 내게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의뢰하노라 하리라마는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산당과 제단을 제하고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명하기를 예루살렘 이 단 앞에서만 숭배하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셨나니 이제 너는 내 주 앗수르 왕과 내기하라 네가 만일 그 말 탈 사람을 낼 수 있다면 나는 네게 말 이천필을 주리라 네가 어찌 내 주의 신복 중 지극히 작은 장관 하나인들 물리치며 애굽을 의뢰하고 그 병거와 기병을 얻을듯하냐 내가 어찌 여호와의 뜻이 아니고야 이제 이곳을 멸하러 올라왔겠느냐 여호와께서 전에 내게 이르시기를 이 땅으로 올라와서 쳐서 멸하라 하셨느니라 힐기야의 아들 엘리야김과 셉나와 요아가 랍사게에게 이르되 우리가 알아듣겠사오니 청컨대 아람 방언으로 당신의 종들에게 말씀하시고 성 위에 있는 백성의 듣는데 유다 방언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지 마옵소서 랍사게가 저에게 이르되 내 주께서 네 주와 네게만 이 말을 하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냐 성 위에 앉은 사람들로도 너희와 함께 자기의 대변을 먹게 하고 자기의 소변을 마시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하고 랍사게가 드디어 일어 서서 유다 방언으로 크게 소리질러 불러 가로되 너희는 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을 들으라 왕의 말씀이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 저가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내지 못하리라 또한 히스기야가 너희로 여호와를 의뢰하라 함을 듣지 말라 저가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정녕 우리를 건지실찌라 이 성이 앗수르 왕의 손에 함락되지 않게 하시리라 할찌라도 너희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의 말씀이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고 너희는 각각 그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또한 각각 자기의 우물의 물을 마시라 내가 장차 와서 너희를 한 지방으로 옮기리니 그곳은 너희 본토와 같은 지방 곧 곡식과 포도주가 있는 지방이요 떡과 포도원이 있는 지방이요 기름 나는 감람과 꿀이 있는 지방이라 너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히스기야가 너희를 면려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건지시리라 하여도 듣지 말라 열국의 신들 중에 그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하맛과 아르밧의 신들이 어디 있으며 스발와임과 헤나와 아와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건졌느냐 열국의 모든 신 중에 누가 그 땅을 내 손에서 건졌기에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능히 건지겠느냐 하셨느니라 (열왕기하 18:17-35)
<설교>
이 책 이전에는 브루스 윌킨스의 ‘야베스의 기도’가 한국교회의 무한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책의 내용도 결국 기도를 통해서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바꿀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에서 설교되어지고 있는 거의 모든 내용들이 이런 방식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과는 전혀 상관없이 오히려 출세와 성공에 집착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이며,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기에 대한 관심의 표출일 뿐입니다. 하지만 현대 교회는 이러한 오류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채 신앙과 상관이 없는 내용들을 마치 진리인 것처럼 포장하여 남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신자가 믿음으로 하는 기도가 불가능한 것도 가능케 하는 능력이 된다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신자일 것입니다. 신자의 기도가 진심으로 세상을 바꿔 버릴 능력이 있는 것이라면 분명 세상은 신자를 두려워해야 하고, 신자의 기도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지금의 세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신자가, 교회가 무엇을 기도하든 세상은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아무리 기도해도 세상은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무관심을 뛰어 넘어서 조롱을 합니다. ‘예수 믿는데도 왜 그 모양이냐?’라든가 ‘기도했는데 왜 망하느냐?’라는 식의 조롱을 일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상의 반응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대항하시겠습니까? 무엇으로, 무슨 말로 세상에 대해 반박하면서 믿음을 증거하시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신자로 굳건히 살아가시겠습니까? 어쩌면 세상의 조롱에 대해 반박하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의 조롱이 타당하다고 여겨지면서 하나님을 향해 불평의 마음을 갖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현재 형편을 보면 세상의 조롱이 지극히 타당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형편도 그러했습니다. 지난주에 히스기야 왕이 유다를 침공한 앗수르 왕에게 ‘내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비굴한 모습을 보이고, 또한 거룩한 성전의 문과 기둥의 금까지 벗겨내서 앗수르 왕이 요구한 것을 줌으로써 겨우 위기에서 벗어날 정도로 유다는 위태로운 형편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유다를 돕고 계신다는 증표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본문에 보면 앗수르가 다시 유다를 침공하여 괴롭힙니다. 앗수르 왕이 대군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왕을 부릅니다. 그러자 히스기야 왕은 세 명의 사신을 앗수르 왕에게 보냅니다. 여전히 앗수르 왕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급급한 히스기야의 비굴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은 이들 사신에 대해 랍사게라는 앗수르 왕의 신하가 조롱을 하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에서 우리는 세상이 신자를 이렇게 조롱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고, 이러한 조롱에서 신자는 어떤 생각과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중심 내용입니다. 먼저 참고로 17절에 등장하는 앗수르 왕이 보낸 ‘다르단’ ‘랍사리스’ ‘랍사게’라는 것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당시 앗수르의 고위 관리에 대한 칭호였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이 랍사게가 히스기야 왕이 보낸 사신들 앞에서 조롱하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너희가 애굽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19,20절의 “랍사게가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고하라 대왕 앗수르 왕의 말씀이 너의 의뢰하는 이 의뢰가 무엇이냐 네가 싸울만한 계교와 용력이 있다고 한다마는 이는 입에 붙은 말 뿐이라 네가 이제 누구를 의뢰하고 나를 반역하였느냐”는 말이 바로 그러한 조롱을 담고 있는 말입니다. 앗수르의 랍사게가 말하는 것은 유다가 애굽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해도 앗수르의 강한 힘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짓거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곧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증명하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애굽은 그만두고서라도 무엇보다도 유다가 하나님을 의지한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능력의 신이라면 어떻게 자신을 믿는 유다가 이런 위기의 상황에 처해있는데도 불구하고 가만히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 랍사게의 조롱이지만 사실 신자 역시 그러한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 스스로도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능력이 있으신 분이라면 어떻게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신자가 어렵고 고통스러운 위기의 상황에 처해도 가만히 계시는가? 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조롱에 대해서도 할 말을 찾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조롱은 교회 밖에서만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들을 수가 있습니다. 평소 자신보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더 힘들고 어려움을 당할 때 ‘열심히 믿어도 별 수 없네’라는 조롱의 마음을 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바로 하나님을 바로 믿고 신앙생활을 잘하면 복을 받는다는 생각이 바탕이 되어서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자가 성경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참된 믿음위에 있지 않기에 나타나는 현상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랍사게의 조롱은 유다가 처한 현실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즉 신은 현실적인 삶에 도움이 되어주는 존재인데 유다가 처한 현실을 보면 그들은 전혀 신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유다가 의지하는 하나님이라는 신은 능력이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조롱인 것입니다.
이처럼 랍사게는 하나님의 존재성에 대해 철저히 무시하고 있습니다. 유다가 처한 상황을 보니 하나님이란 신은 존재하지 않거나 있다고 해도 앗수르의 신보다 더 무능하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랍사게는 “이제 너는 내 주 앗수르 왕과 내기하라 네가 만일 그 말 탈 사람을 낼 수 있다면 나는 네게 말 이천필을 주리라 네가 어찌 내 주의 신복 중 지극히 작은 장관 하나인들 물리치며 애굽을 의뢰하고 그 병거와 기병을 얻을듯하냐”(23,24절)는 조롱까지 합니다.
랍사게는 기병조차 변변치 못한 유다를 조롱을 하면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너희가 만약 말을 탈 수 있는 기병을 만들 수 있다면 말 2천 필을 주겠다는 내기까지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도 애굽을 의지하는 것도 현실의 어려움에서 벗어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랍사게의 조롱에 대해 히스기야의 사신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다만 유다 백성들이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도록 아람 방언으로 해달라고 사정할 뿐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들은 랍사게의 말이 지극히 타당하다고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랍사게의 말을 듣는 것을 두려워한 것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랍사게는 사신들의 부탁을 무시하고 유다 백성들을 향해서 여호와를 의뢰하라고 하는 히스기야의 말에 속지 말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차라리 앗수르 왕에게 항복하는 것이 포도와 무화과를 먹으면서 편히 살 수 있는 길이 될 것임을 외칩니다.
오늘 우리는 유다 백성들의 입장이 되어서 랍사게가 외치는 말 앞에 서서 우리의 믿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랍사게의 말은 ‘믿음 만능론’을 외치는 교회를 향해서 ‘믿음 무용론’으로 반박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즉 너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잘된 것이 뭔가? 라는 말로서 하나님을 믿어도 별 수 없는 현실을 두고 조롱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이 아닙니까? 저는 세상이 현대 교회를 향해 이러한 조롱을 할 때 어떻게 반박할지가 참으로 궁금합니다. 믿음만 있으면 다 된다는 말을 하고, 믿음으로 잘살면 하나님이 도우시고 문제도 다 해결해 주신다는 말을 하는 현대 교회가 ‘하나님을 믿어서 잘된 것이 뭔가?’라는 조롱을 대할 때 평소의 외침에 대해 어떤 말로 반박하고 변호할지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어떻게 반박하시겠습니까?
사실 어떤 반박으로도 세상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는 현실을 기준으로 하고 증거로 제시하면서 ‘믿음으로 사는데 왜 이러냐?’라고 조롱을 합니다. 그러한 그들이 신자의 참된 복을 알기나 하겠습니까? 신자의 참된 기쁨이 무엇인지 알기나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이 복이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은 실용주의에 매어 있다고 했습니다. 현실에서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면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세상의 실용주의입니다. 그러한 세상이 이해하는 믿음 또한 현실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것 자체가 복이라고 말할 때,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말을 이해한다는 것이 놀라운 기적의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하나님을 믿어서 인생이 잘됐다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은 ‘나는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너보다 잘됐다’는 말로서 여러분을 조롱합니다. 그러한 조롱의 말을 들어도 변함없이 ‘내 인생은 하나님으로 인해 잘되고 성공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세상이 말하는 잘됨에 대해 전혀 부러워 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신자입니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눈에 보이는 현실에서 확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보이는 것만을 믿는 것이 세상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이러한 속성 그대로 보이는 것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우시고 사랑하시는 증거물로 삼는다면, 그래서 현실이 어렵고 힘들 때 ‘하나님을 열심히 믿었는데 하나님이 해준 것이 뭔가? 왜 날 도와주지 않는가?’라는 불만이 있다면 그것은 신자가 아니라 불신자의 모습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랍사게의 조롱에 전혀 반박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랍사게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유다보다 낫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 놓고 유다를 조롱하는 것입니다. 랍사게의 이러한 조롱이 오늘날 신자를 향한 사단의 조롱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세상에 대해 신자가 이기는 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뿐입니다. 요일 5:4-7절에서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피를 하나님 사랑의 증거물로 삼고 현재의 형편이 어떻든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에 거하는 것으로 영원히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 산다는 것을 믿는 그 믿음만으로 충분한 것이 신자입니다. 왜냐하면 그 믿음이 성공자라는 증거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현실적인 문제에 도움을 주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를 영원한 성공자로 세워주기 위해 은총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곧 십자가에 피 흘리신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여러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입니다. 하지만 형편을 바꾸는 식의 해결이 아니라 믿음 후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는 형편을 바라보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 해결하시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형편은 분명 좋지 못했습니다. 복음을 전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비방과 돌과 미움과 고난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데 왜 이런 대우를 받게 합니까?’라는 불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복음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현실적인 도움을 위해서, 즉 복을 받기 위해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신들에게 기쁨이 되시고 생명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어떤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감옥에서도 기뻐하고 찬양을 한 것입니다. 그 상황이 죽을 지경이라고 해도 그 속에서 기뻐하고 감사한다면 그것이 곧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위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알게 하고 하늘의 생명을 소망하게 하는 것이 믿음인 것을 깨닫고 그 믿음이 있다는 것으로 자신을 성공자로 여길 수 있다면 그 신자야 말로 세상의 어떤 조롱에서도 이기는 승리자입니다.
(50강) 열왕기하 19:1-7 살아계신 하나님
<본문>
히스기야왕이 듣고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궁내대신 엘리야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장로들에게 굵은 베를 입혀서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내매 저희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히스기야의 말씀이 오늘은 곤란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가 임산하였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 랍사게가 그 주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와서 사신 하나님을 훼방하였으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저의 말을 들으셨을지라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들으신 말을 인하여 꾸짖으실듯하니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소서 하더이다 이와 같이 히스기야왕의 신복이 이사야에게 나아가니 이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고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바 나를 능욕하는 말을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한 영을 저의 속에 두어 저로 풍문을 듣고 그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 본국에서 저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열왕기하 19:1-7)
<설교>
왕의 책임은 국가를 지키고 번성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강대국으로 인해서 위기가 닥쳐왔을 때 힘도 없으면서 자존심을 내세우며 버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머리를 숙여서라도 나라를 지켜야 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왕이 스스로의 지혜와 힘으로 자신의 나라를 책임져야 하는 경우에만 해당할 것입니다.
유다는 왕이 책임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분명히 살아계신 하나님이 책임지고 계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유다 왕이 취할 태도이고 최선인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망각하고 믿지 않는다면 누구든 히스기야와 같은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책임은 유다를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앗수르 왕 산헤립에게 머리를 숙이는 비굴함을 보였고, 앗수르가 요구하는 것을 조달하기 위해 거룩한 성전의 문과 기둥의 금까지 벗겨내는 불신앙의 모습을 보이긴 하였지만 어쨌든 그렇게 해서 유다를 위기에서 벗어나게 했지 않느냐는 결과론으로 히스기야가 취한 행동을 정당화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씀드린 대로 히스기야 왕의 책임은 유다를 지키고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신앙의 모습을 백성들 앞에 보여줌으로써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간혹 이 문제에 대해 히스기야와 같은 착각들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가령 ‘교회는 목사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교회가 부흥되는 것이나 교인들의 신앙 문제는 모두 목사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을 쉽게 들을 수가 있는데, 바로 그런 생각 때문에 목사가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교회를 부흥시키려고 하고, 교인들의 신앙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기도하고 성경보고 봉사해라는 등의 말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교회를 책임지는 것이 목사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뭘 하시는 것입니까? 목사가 교회를 잘 책임질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일을 하십니까? 목사로서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라 목사의 책임 또는 사명 자체가 다르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랍사게의 조롱의 말을 들은 히스기야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궁내대신 엘리야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장로들에게 굵은 베를 입혀서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내어 “오늘은 곤란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가 임산하였으나 해산할 힘이 없도다 랍사게가 그 주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와서 사신 하나님을 훼방하였으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저의 말을 들으셨을지라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들으신 말을 인하여 꾸짖으실듯하니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소서“(3,4절)라는 히스기야의 말을 전하게 합니다.
히스기야의 말 가운데 4절을 보면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란 말은 여러분께는 전혀 이상하거나 생소한 말로 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평소에 늘 사용하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믿고 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말씀드리면 아마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말은 여러분께 참으로 생소하고 거북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말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우리들의 삶은 비록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간주하긴 하였으나 결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온 삶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껏 우리가 살아온 방식은 앗수르 왕에게 머리를 숙여서라도 유다를 스스로 책임지려고 하는 히스기야와 다를 바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문제 앞에서 우리가 생각한 것이 어떤 것인가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살아계신 하나님이 책임지시겠지’라는 생각으로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해결의 수단과 방법을 찾기 위해 고민하고 그러다가 안되면 낙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신앙형편이었던 까닭에 자기 일, 자기 가정, 자기 식구를 위해 노심초사 하면서 자기가 일할만큼 잘되고 성공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교회를 향한 목사의 생각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많은 목사들 역시 자기가 하는 것만큼 교회가 성공한다는 방식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열심히 일하는 자신을 바라보시면서 흐뭇해하실 것으로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그들의 땅은 여호와 하나님의 땅이요 그들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식으로 유다를 바라봤어야 합니다. 자신이 책임져야 할 땅도 백성도 아니라 하나님이 책임지고 계시는 땅이고 백성이라는 것을 잊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고 있었던 히스기야는 비로소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을 생각한듯합니다. 그래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저의 말을 들으셨을지라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들으신 말을 인하여 꾸짖으실듯하니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소서”라는 말을 이사야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은 신자가 의지하고 바라볼 대상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사도 교회도 바라보지 말고 다만 살아계신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계시니 어떤 일에서도 염려하기보다는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현대 교회를 보면 ‘하나님은 살아계시다’고 말은 하되 그것은 다만 기독교라는 종교가 가지고 있는 교리의 수준이고, 믿음의 시각이며 입장일 뿐 현실은 아니라는 진단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 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모습들 하나하나가 도무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교회가 아닌 것입니까? 다시 말해서 많은 행사를 만들어 내고 그 행사에 부지런히 참여하는 교인들이 있어야 그것이 교회고, 교회의 힘이며, 교회가 살아있는 증거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교회가 무엇인가를 전혀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며, 결국 인간의 종교적인 열의와 아이디어를 가지고 인간이 생각하는 교회를 만들고자 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마음은 철저히 무시한 채 인간의 뜻과 욕망을 위해 살아가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러한 말들이 거북스럽게 들리지 않습니까? 조금은 생소한 말로 들리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말과 전혀 관계없는 억지적인 말로 들리십니까?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말의 의미를 말입니다. 하나님이 전혀 힘이 없고 능력이 없는 분이라면 인간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인간이 잘해주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서 힘을 잃은 채 뒷방에서 세월이나 보내는 노인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전지전능하신 분이고, 창조주시고, 아들의 피로 교회를 세우시고 하나님의 뜻으로 세상을 주관하시고 다스리고 계시는 분입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신자인 것이지 ‘우리의 열의와 아이디어를 동원해서 잘해볼 테니 우리에게 맡겨 달라’는 식으로 나서는 것을 신자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교회가 부흥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왜 세상의 모든 교회가 부흥되지 못하는 것입니까? 부흥되지 못하는 교회는 목사가 문제가 있거나 열심이 없거나 기도를 하지 않아서일까요? 과연 시골의 교회가 열악하고, 또한 도시교회라도 해도 적은 수의 신자로 근근이 운영해가는 것이 목사나 신자가 열의가 없거나 기도하지 않아서일까요? 아마 그렇다고 쉽게 인정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교회를 보면 나름대로 열의를 가지고 기도하면서 교회 부흥을 위해 애쓰는 곳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교회가 크게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이 교회가 부흥되는 것이라면 이러한 현상은 납득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교회부흥을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도 아니고 열심을 내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교회가 진심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고 그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인간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하고 인간의 종교적인 열의를 무조건 신앙으로 간주하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 보시라는 뜻입니다.
목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게 되면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 앞에서의 목사의 책임과 임무를 생각하며 행동하기보다는 교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인 또한 살아계신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교회에 와서 목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자기 것을 자신의 열심과 힘의 결과물로 여기고 그것을 자랑하고 자기 자존심을 세우는 도구로 이용하는 것 밖에 보일 것이 없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진작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생각했다면 앗수르의 침략에서 하나님을 신뢰했을 것입니다. 앗수르의 행동을 하나님이 다 보셨을 것이고, 유다의 위기 또한 하나님이 아실 것이니 하나님이 지켜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었을 것입니다. 유다는 하나님이 주신 땅에 거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주신 땅에 거한 자기 백성들이 땅을 빼앗기고 쫓겨 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 않으실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굴한 모습을 보인 것은 보이는 강력한 힘 앞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잊었기 때문이고 결국 자신의 수단과 방법으로 유다를 지키기 위한 방법을 취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히스기야로 하여금 앗수르의 조롱의 말을 듣게 함으로써 히스기야의 생각을 다시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신 것입니다. 랍사게로부터 감당할 수 없는 조롱의 말을 들으면서도 자신의 힘으로는 도무지 어떻게 해볼 수가 없는 상황에 처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 나오도록 하신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의 문제나 삶의 문제 모든 것 어느 하나도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절감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무능을 절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인도하시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생각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위기에 처했고 랍사게로부터 하나님을 조롱하는 말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항 한번 하지를 못합니다. 이런 상황을 두고 대개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왜 유다를 이러한 어려움에 처하게 하십니까?’라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하나님만을 신뢰하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뻐하며 감사하며 영광 돌리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이러한 백성으로 만들어 가시기 위해서 자신의 가능성과 힘을 포기하고 무능함을 절감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찾아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주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러한 어려움이 없는 인생을 원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항상 보이는 것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잘됨보다는 육신의 잘됨에 매어 있기 때문에 어려움이 없이 잘사는 것을 행복으로 여기고 그 행복을 구하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사도들이 과연 그러한 것을 인생의 행복으로 인정할까요? 사도들은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진정한 기쁨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역시 사도들과 동일한 기쁨으로 몰아가고자 하십니다.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그리스도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염려 없이 든든하게 살아가는 신자로 만들고자 하십니다.
히스기야의 말에 대해 이사야 선지자는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고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바 나를 능욕하는 말을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한 영을 저의 속에 두어 저로 풍문을 듣고 그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 본국에서 저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6.7절)고 말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그래서 신자는 두려워할 것도 염려할 것도 없는 존재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고 이것이 참된 신앙인입니다.
(51강) 열왕기하 19:8-19 산헤립의 조롱
<본문>
랍사게가 돌아 가다가 앗수르 왕이 이미 라기스에서 떠났다 함을 듣고 립나로 가서 왕을 만났으니 왕이 거기서 싸우는 중이더라 앗수르 왕이 구스 왕 디르하가가 나와서 더불어 싸우고자 한다 함을 듣고 다시 히스기야에게 사자를 보내며 가로되 너희는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이같이 말하여 이르기를 너의 의뢰하는 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앗수르 왕의 손에 붙이지 않겠다 하는 말에 속지 말라 앗수르의 열왕이 열방에 행한바 진멸한 일을 네가 들었나니 네가 어찌 구원을 얻겠느냐 내 열조가 멸하신 열방 곧 고산과 하란과 레셉과 들라살에 있는 에덴 족속을 그 나라의 신들이 건졌느냐 하맛 왕과 아르밧 왕과 스발와임성의 왕과 헤나와 아와의 왕들이 다 어디 있느냐 하라 하니라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고 그 앞에서 기도하여 가로되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조성하셨나이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신 하나님을 훼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앗수르 열왕이 과연 열방과 그 땅을 황폐케 하고 또 그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니 이는 저희가 신이 아니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 곧 나무와 돌 뿐이므로 멸하였나이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우리를 그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는 홀로 하나님이신줄 알리이다 하니라 (열왕기하 19:8-19)
<설교>
물론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세상을 통치하시고 일하고 계시는 증거와 흔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하나님은 우리의 시각을 뛰어 넘어 존재하시고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은 절대로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증거와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하심은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다는 말은 단지 감각적이지 않다는 뜻만이 아니라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하신다는 뜻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누구에게나 보이시는 분이고 인간의 눈이나 감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분이라면 모든 것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시각을 뛰어 넘어 초월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세상이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불신하고 무시하는 것으로 유한한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고, 하나님을 볼 수 없는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에 있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 밖에 안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해 철저히 무시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히스기야를 조롱하고 훼방하는 산헤립이라는 앗수르 왕이 등장합니다. 산헤립은 히스기야에게 “너희는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이같이 말하여 이르기를 너의 의뢰하는 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앗수르 왕의 손에 붙이지 않겠다 하는 말에 속지 말라”(10절)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편지를 보냅니다. 산헤립의 편지 내용은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신에게 속는 것이며 헛수고에 불과한 것임을 선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산헤립은 히스기야의 믿음이 헛수고라는 것을 역사적인 사실을 근거물로 제시합니다.
산헤립이 제시한 역사적인 근거는 이러합니다. “앗수르의 열왕이 열방에 행한바 진멸한 일을 네가 들었나니 네가 어찌 구원을 얻겠느냐 내 열조가 멸하신 열방 곧 고산과 하란과 레셉과 들라살에 있는 에덴 족속을 그 나라의 신들이 건졌느냐 하맛 왕과 아르밧 왕과 스발와임성의 왕과 헤나와 아와의 왕들이 다 어디 있느냐 하라 하니라”(11-13절) 즉 산헤립은 각기 신을 섬겼던 여러 성읍들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것을 근거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성읍들도 신을 섬겼지만 그 신들이 그들을 앗수르로부터 건져 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히스기야가 섬기는 하나님이라는 신도 유다를 앗수르의 손으로부터 건져낼 수 없으니까 앗수르 왕의 손에 붙이지 않겠다는 신의 말에 속지 말고 항복하라는 내용인 것입니다.
결국 산헤립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믿는 것을 헛수고로 간주하는 것은 유다가 앗수르의 손에 의해 멸망당하기 직전의 상황에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산헤립은 하나님이라는 신이 유다를 자신의 손으로부터 건져낼 수 없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산헤립의 눈에는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유다를 도우신다는 그 어떤 증거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산헤립이 보기에 히스기야는 헛된 믿음의 길을 가는 어리석은 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방인이 유다를 괴롭히고 공격할 때마다 그들에게 재앙을 일으키시면서 징계하시고 보호하셨다면 산헤립이 감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히스기야를 조롱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앗수르가 유다의 성읍을 공격하고 무너뜨리면서 많은 금은을 가져가는 일을 자행함에도 불구하고 유다의 신은 잠잠했습니다. 그러니 산헤립에게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 가짜 신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는 현재의 상황과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산헤립이 하나님을 무시하며 히스기야를 조롱하는 것처럼 세상도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신자를 조롱합니다. ‘하나님을 믿느니 차라리 나를 믿으라’고 하면서 신앙을 헛된 것으로 조롱합니다. 하나님은 해 주지 않는 것을 나는 해 줄 수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을 아예 없는 존재로 여기는 것이 세상입니다. 말한 대로 세상은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감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상입니다. 세상이 볼 수 있고 감각할 수 있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이시고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자가 하나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확실하게 말할 게 하나도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명시적으로 인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됨으로써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고 그러므로 막연하게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일하심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종말이 되어야만 끝나는 현실입니다. 그 종말이 오기 전까지 신자가 해야 할 일은, 또는 신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신비하게 존재하시며 또한 우리가 미처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다가오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뭐라고 하든, 무슨 말로 조롱을 하고 우리의 믿음을 헛된 것으로 간주하든 상관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에 대해 조롱하는 것처럼 현실은 믿는 자라고 해서 나아지는 것이 없고 특별히 달라지는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믿지 않는 자는 날로 강성 하는데 믿는 자는 쇠약해질 수 있습니다. 분명히 보이는 현실에서는 하나님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이러한 현실에서도, 아니 그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형편이 된다고 해도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고 지키시고 인도하고 계심을 믿으며 감사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물론 심적으로는 안되는데 억지로 믿는 척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참된 믿음이라면 분명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산헤립의 조롱의 편지를 받은 히스기야가 그러한 믿음으로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산헤립의 편지를 받은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편지를 전 앞에 펴 놓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기도를 합니다.
히스기야는 기도하면서 앗수르의 열왕이 열방과 그 땅을 황폐케 한 것은 그 땅의 신이 신이 아니고 사람의 손으로 만든 나무와 돌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우리를 그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는 홀로 하나님이신줄 알리이다 하니라”(19절)고 기도합니다. 즉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손으로부터 유다를 구원하심으로써 주 여호와만이 홀로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천하만국이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0절부터 보면 하나님은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앗수르를 치시고 유다를 구원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이 또한 한편으로는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히스기야 당시에는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유다를 앗수르로부터 구원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분명한 증거를 보이셨는데 지금은 그러한 증거도 보이지 않으시고 응답도 하지 않으신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과연 우리도 히스기야처럼 기도하면 응답해 주신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기 위함일까요? 우리도 세상을 두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세상을 치시겠다는 것을 약속하시는 내용일까요? 우리는 본문의 내용을 통해서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말한 천하만국에는 오늘 우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심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본문의 내용을 통해서 앗수르를 징계하시고 산헤립을 죽이신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셔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참되신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 현실이 되어진다면 신자는 어떤 조롱과 형편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산헤립처럼 세상은 신자가 처해 있는 형편을 보면서 신과 신에 대한 신앙을 평가합니다. 그래서 어려움에 처하거나 세상보다 못한 처지에 처하게 되면 신앙을 무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조롱을 받을 때 우리는 ‘하나님은 대체 뭐하시는가?’라는 불신의 마음을 갖기가 쉽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곧 세상처럼 보이는 것과 감각적인 것으로 하나님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욕망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조상이 도와주신다거나 신이 돕는다는 것을 자신이 잘되는 것을 근거로 말합니다. 즉 죽은 조상귀신이든 보이지 않는 신이든 나를 도와줄 때 나에게 의미 있는 초월적인 존재로 간주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이는 세상을 뛰어 넘을 수 없는 인간의 한계며 이러한 한계적 인간이 신을 인식한다면 그것은 눈에 보이고 감각되는 것으로 국한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고 소망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신자를 보이지 않는 세계를 위해 도우시는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우리의 눈으로 확인되고 감각되는 것으로 나타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신자에게만 참된 하나님으로 나타나십니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세계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는 것이고, 자신을 지키시고 도우시며 함께 하심을 분명히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어떤 조롱을 던지고 또한 신자의 믿음을 헛된 것으로 간주한다고 해도 전혀 흔들림이 없이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없다면 그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아니라 여전히 보이는 세계에 가치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보이는 세계는 멸망의 대상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보이는 세계에 가치를 두고 있다면 하나님이 날마다 베풀고 계시는 보이지 않는 세계와 관계된 참된 은혜와 복을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무한한 은혜와 복을 알지 못하기에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성장이 최고의 가치로 되어 있는 한국교회가 하나님을 볼 수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말하되 하나님을 살아계시고 교회를 통치하시는 분으로 간주할리도 만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말하되 하나님의 뜻도 영광도 무시한 채 오직 인간의 뜻과 욕망을 앞세우면서 인간을 위한 교회로 전락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눈으로 본 것이 있고 감각적으로 체험한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비록 내게 감각적으로 체험되고 눈으로 본 것은 없지만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일을 믿기 때문에 지금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보이지 않는 세계에 최고의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을 붙드시고 지키시고 생명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52강) 열왕기하 19:20-37 하나님의 열심
<본문>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앗수르 왕 산헤립 까닭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너를 비웃었으며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네가 누구를 꾸짖었으며 훼방하였느냐 누구를 향하여 소리를 높였으며 눈을 높이 떴느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그리하였도다 네가 사자로 주를 훼방하여 이르기를 내가 많은 병거를 거느리고 여러 산꼭대기에 올라가며 레바논 깊은 곳에 이르러 높은 백향목과 아름다운 잣나무를 베고 내가 그 지경 끝에 들어가며 그 동산의 무성한 수풀에 이르리라 내가 땅을 파서 이방의 물을 마셨고 나의 발바닥으로 애굽의 모든 하수를 말렸노라 하였도다 네가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은 내가 태초부터 행하였고 상고부터 정한바라 이제 내가 이루어 너로 견고한 성들을 멸하여 돌무더기가 되게 함이니라 그러므로 그 거한 백성의 힘이 약하여 두려워하며 놀랐나니 저희는 마치 들의 풀 같고 나물 같고 지붕의 풀 같고 자라기 전에 마른 곡초 같으니라 네 거처와 네 출입과 네가 내게 향한 분노를 내가 다 아노니 네가 내게 향한 분노와 네 교만한 말이 내 귀에 들렸도다 그러므로 내가 갈고리로 네 코에 꿰고 자갈을 네 입에 먹여 너를 오던 길로 끌어 돌이키리라 하셨나이다 또 네게 보일 징조가 이러하니 너희가 금년에는 스스로 자라난 것을 먹고 명년에는 그것에서 난 것을 먹되 제 삼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원을 심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유다 족속의 피하고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가 서리고 위로 열매를 맺을찌라 남은 자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피하는 자는 시온산에서부터 나오리니 여호와의 열심이 이 일을 이루리라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을 가리켜 이르시기를 저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이리로 살을 쏘지 못하며 방패를 성을 향하여 세우지 못하며 치려고 토성을 쌓지도 못하고 오던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하셨으니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시라 내가 나와 나의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여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하였더라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에서 군사 십 팔만 오천을 친지라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하더니 그 신 니스록의 묘에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저를 칼로 쳐 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열왕기하 19:20-37)
<설교>
본문의 내용이 왜 신자에게 생생한 은혜로 전달되지 못할까요? 그 이유를 한가지로 딱 부러지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본문의 내용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지를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동일한 뜻과 동일한 계획을 가지고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무엇인가를 깨닫는다면, 오늘 나에게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생생하게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또한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말입니다.
성경의 말씀이 신자에게 생생한 현실로 다가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새로운 삶에 대한 참된 간절함입니다. 새로운 삶이란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붙들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삶이고, 또한 세상 그 누구도 이러한 삶은 원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세상을 사는 일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자마저 신자로서의 새로움 삶에 대한 간절함이 없다면 성경의 그 어떤 말씀도 생생한 현실로 다가올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말씀을 듣는 여러분이 자신에 대해 살펴야 할 것은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는 방식이 아닌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에 붙들린 자로서의 새로운 삶에 대한 간절함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간절함이 없다면 단언하건데 오늘의 말씀 또한 여러분의 귓가에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과 같은 것으로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이런 상태에 놓여있다면 더욱 간절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가 생생하게 부각되지 않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에 붙들려 살아가는 새로운 관계에 대한 간절함이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신자인 나에게 필요한 것이 없음을 알 때, 즉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없음을 알았다면 자연히 구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있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하나님이 외면할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으로 살아가는 것이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에 그 기도에 응답하시며 그 기도를 이루시기 위해 열심히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자의 기도에 응답하신 결과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언약 성취에 충실하시고 신실하신 여호와로 설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의 일하심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을 갖고 있는 신자에게 현실로 다가옵니다. 그렇지 않다면 본문과 같은 내용은 우리에게 아무런 흥미도 끌지 못하는 다만 옛날 이스라엘이란 나라에서 일어났던 역사적인 사건으로만 다가올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성경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유다를 앗수르로부터 구원하심으로써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심을 알게 해달라는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이 응답하신 것입니다. 이 내용만으로는 아마 여러분께 생생한 현실적인 느낌으로 전달되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현재의 여러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내용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만약 본문의 내용에서 여러분과 연관된 현실을 찾는다면 그것은 아마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일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면 왕하 20장에 등장하는 히스기야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내용이 훨씬 효과적일 것입니다. 거기에는 병든 히스기야가 기도함으로써 생명이 연장되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내용도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본문의 내용이 우리에게 과연 어떤 의미에서 생생한 현실로 다가오는 내용인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이 내용이 생생한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겠습니다.
히스기야는 산헤립의 편지를 받고 예전처럼 기가 죽어서 굴복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로 나아가 기도를 합니다. 이런 히스기야에게서 우리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신뢰하는 신앙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전에는 산헤립이라는 강한 인간을 바라보면서 그에 따른 처세를 했었지만 지금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산헤립을 바라보고 산헤립의 강함에 굴복했던 것은 산헤립의 힘이나 그가 한 모든 일들이 하나님이 행하신 것임을 생각하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되었을 때 히스기야는 산헤립의 힘보다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더 신뢰하게 된 것입니다.
23,24절을 보면 “네가 사자로 주를 훼방하여 이르기를 내가 많은 병거를 거느리고 여러 산꼭대기에 올라가며 레바논 깊은 곳에 이르러 높은 백향목과 아름다운 잣나무를 베고 내가 그 지경 끝에 들어가며 그 동산의 무성한 수풀에 이르리라 내가 땅을 파서 이방의 물을 마셨고 나의 발바닥으로 애굽의 모든 하수를 말렸노라 하였도다”라고 말하면서 산헤립의 교만이 무엇인가를 지적합니다. 산헤립의 교만은 군대를 거느리고 여러 성읍을 정복한 일들을 자신이 행한 업적으로 높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들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25절에서 “네가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은 내가 태초부터 행하였고 상고부터 정한바라 이제 내가 이루어 너로 견고한 성들을 멸하여 돌무더기가 되게 함이니라”고 말한 것처럼 산헤립이 행한 모든 일은 하나님이 행한 것이었음을 말합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인간은 자신의 힘을 높이고 자랑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을 조롱함으로써 결국 하나님에 대해 대적하는 결과를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애당초 세상은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 놓고 신자를 조롱하고 신앙을 멸시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에게는 그러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결과는 오직 죽음 밖에는 없습니다. 이것을 신자가 잊지 않는다면 세상의 어떤 힘 앞에서도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증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36,37절을 보면 “앗수르 왕 산헤립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하더니 그 신 니스록의 묘에 경배할 때에 아드람멜렉과 사레셀이 저를 칼로 쳐 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도망하매 그 아들 에살핫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산헤립의 운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산헤립은 자신이 이렇게 죽을 것을 알지를 못했습니다. 앗수르의 힘 있는 왕으로써 오랫동안 부귀영화를 누릴 것으로만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운명은 여호와께 붙들려 있습니다. 이것을 세상이 알지 못하고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면서 조그만 힘이 있어도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세상의 속성입니다.
6,7절의 “이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고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앗수르 왕의 신복에게 들은바 나를 능욕하는 말을 인하여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한 영을 저의 속에 두어 저로 풍문을 듣고 그 본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 본국에서 저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이미 이사야를 통해서 앗수르 왕이 장차 어떤 운명에 처할 것인가를 말씀하셨습니다. 히스기야는 이같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앗수르의 왕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고 산헤립의 편지에서 기가 죽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세상은 자신이 소유한 것으로 자신을 평가합니다. 그렇지만 세상이 알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소유한 그 어떤 것도 죽음에 처한 운명에서 자신을 건져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세상을 영원한 멸망이라는 운명으로 정해 놓으시고 몰아가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남은자 된 백성이 아닌 자는 모두가 멸망이라는 운명에서 헤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라면 참으로 중요하게 여길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믿는 것이지 세상의 것을 얻고 강한 자가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산헤립이 풍문을 듣고 본국으로 돌아가게 되고 거기서 죽게 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이사야와 히스기야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산헤립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무도 자신의 장래를 두고 장담할 수도 예측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운명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단지 눈에 보이는 이익만 좇아 살아가는 것이고, 세상의 힘만 있으면 다 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오늘 저녁, 내일 아침 어떤 일이 있을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지진으로 수만 명이 죽을지 누가 예측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주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겪는 모든 일도 단지 우연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예상치도 못하는 일이 벌어지는 인생에서 하나님이 주관하는 인생임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인생은 내 힘으로 살아간다는 교만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인생임을 아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 받는 인생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이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이 없는 인생의 비참함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힘을 가진 자가 부럽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증거입니다. 사람을 바라볼 뿐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믿음을 세상과 똑같이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의 어떤 말씀도 생생한 현실로 다가올 수 없는 것입니다.
29-31절을 보면 지금은 유다가 고난을 당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실 것임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 다윗을 위하여(34절)라고 말씀합니다. 즉 다윗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구원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이 언약을 근거로 자기 백성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일하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열심이라고 말합니다. 이 열심으로 말미암아 나 같은 자가 하나님의 생명의 관계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의 간절함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 간절함은 세상의 현실을 알고 그 운명을 앎으로서 있게 될 것입니다. 인간에게 진심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모른다면 이 간절함은 없습니다.
(53강) 열왕기하 20:1-21 연장받은 삶
<본문>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저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처치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더라 이사야가 성읍 가운데까지도 이르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일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겠고 내가 네 날을 십 오년을 더할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 이사야가 가로되 무화과 반죽을 가져오라 하매 무리가 가져다가 그 종처에 놓으니 나으니라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낫게 하시고 삼일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게 하실 무슨 징조가 있나이까 이사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실 일에 대하여 여호와께로서 왕에게 한 징조가 임하리이다 해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갈 것이니이까 혹 십도를 물러갈 것이니이까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가기는 쉬우니 그리할 것이 아니라 십도가 물러갈 것이니이다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아하스의 일영표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로 십도를 물러가게 하셨더라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 들었다 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저에게 보낸지라 히스기야가 사자의 말을 듣고 자기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 군기고와 내탕고의 모든 것을 다 사자에게 보였는데 무릇 왕궁과 그 나라 안에 있는 것을 저에게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으니라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왕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이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부터 왕에게 왔나이까 히스기야가 가로되 먼 지방 바벨론에서 왔나이다 이사야가 가로되 저희가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내 궁에 있는 것을 저희가 다 보았나니 나의 내탕고에서 하나도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나이다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무릇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을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의 전한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 하고 또 가로되 만일 나의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찐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 하니라 히스기야의 남은 사적과 그 모든 권력과 못과 수도를 만들어 물을 성중으로 인도하여 들인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히스기야가 그 열조와 함께 자고 그 아들 므낫세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열왕기하 20:1-21)
<설교>
히스기야가 비록 기도하여 15년의 생명이 연장되긴 했지만 그가 영원히 죽지 않은 불사의 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즉 21절에서 “히스기야가 그 열조와 함께 자고 그 아들 므낫세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고 말한 것처럼 생명이 연장된 히스기야도 결국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상하게 히스기야가 기도하여 15년의 생명을 연장 받은 본문과 같은 내용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히스기야와 같은 응답을 받기를 원하기도 합니다. 사실 생각하면 기도해서 생명을 연장 받는다는 것이 신기한 일이기도 하고 믿음의 증거물로 삼기에도 적절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의미는 전혀 담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따져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하나님께 연장 받은 삶이 아닙니까?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나님 내일도 살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다음날 일어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해서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까? 아마 이렇게 말하면 너무 억지로 갖다 붙인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내일도 당연하게 살아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즉 기도하지 않아도 내일도 살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앞서 말한 그러한 기도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고, 설사 그러한 기도를 하고 다음날 일어났다고 해도 그것을 하나님의 기도응답으로 믿으면서 하루를 더 살게 된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은 히스기야 같은 경험을 기대할지도 모릅니다. 히스기야처럼 병이 들어서 하나님께 죽는다는 경고를 받고, 히스기야처럼 통곡의 기도를 한 후에 병이 낫고 15년, 20년 생명이 연장될 것이라는 응답을 받는 기적과 같은 체험을 원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들이 여러분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곧 생명이 연장되고 있는 것임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놓치게 되는 것이고 얼마든지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는 신자의 삶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말한 대로 본문의 내용은 히스기야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이 중점이 아닙니다. 물론 히스기야가 기도하고 하나님이 응답하셔서 15년의 생명이 연장되기는 했지만 본문은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히스기야의 생명이 15년 연장된 것에 관심이 있다면 그것은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마는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생명을 15년 연장 받은 히스기야는 연장 받은 15년의 생명을 어떻게 활용했을까요? 여러분이 만약 히스기야와 같은 경험을 하신다면 연장 받은 생명을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분명 병이 들어서 죽는다는 경고를 받았을 때는 살게만 해주시면 남은 생명은 오직 주를 위해 헌신하겠노라고 굳게 다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과연 다짐대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죽음을 앞에 두었을 때 하나님께 어떤 다짐을 했는가?’를 생각하면서, 하루하루를 하나님이 연장해준 삶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자신의 육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고자 온 힘을 다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인간을 알지 못한 어리석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12절을 보면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 들었다 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저에게 보낸지라”고 말합니다. 바벨론 왕이 히스기야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보냈는데 사신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히스기야의 병이 낫고 생명이 연장된 응답을 받은 후였습니다.
그런데 생명이 연장된 히스기야가 바벨론의 사신들에게 무엇을 보여줍니까? 13절에서 “히스기야가 사자의 말을 듣고 자기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 군기고와 내탕고의 모든 것을 다 사자에게 보였는데 무릇 왕궁과 그 나라 안에 있는 것을 저에게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으니라”고 말한 것처럼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온갖 진귀한 것을 모두 보여준 것입니다. 그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힘과 부강함을 자랑하고자 함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생명을 연장시켜준 하나님을 위한 헌신입니까? 이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인간을 살려주고 그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다고 해도 결국 인간은 자신을 자랑하는 자신의 삶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히스기야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기도해서 생명이 연장되는 응답을 받았다고 해도 그 남은 인생을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아 갈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은 단지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당장 내일 죽는다고 해도 오늘을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이것을 놓치게 되면 신자로서의 우리들의 삶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과 전혀 다를 바가 없게 될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죽는다는 경고를 받았을 때 죽지 않고 사는 것에 급급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낯을 벽으로 행하고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의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라고 통곡을 한 것입니다. 자신이 주 앞에서 행한 선한 행위를 보시고 살려달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은 죽을 이유가 없다는 호소를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는 것에 급급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나님이 이러한 기도에 응답을 하시고 15년이나 그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것입니다. 생명을 연장시켜 준다고 해도 결국 자신을 자랑하고 높이는 모습만 보일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지금 여러분 자신을 향한 물음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살아있는 것은 분명 여러분 스스로의 의지와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게 하신 덕분입니다. 여러분이 믿든 말든 실감을 하든 말든 하나님에 의해서 연장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연장된 삶을 우리 멋대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위한 헌신은 커녕 오직 내 자신을 위해 모든 인생을 허비하면서 바쁘게 살아갑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것을 뻔히 아시는 하나님은 왜 우리 생명을 보존해 놓고 계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인간은 살아봐야 결국 죄밖에 드러낼 것이 없음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 인생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 그 은혜를 높이는 자로 고쳐가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는 것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살면 살수록 악행만을 보이는 자신의 실상을 알아가는 것에 몰두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 심령에 자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살수록 죄만 행하는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인생을 헛되게 보내는 것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하면서 십자가의 은혜를 말한들 그것은 거짓이고 외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만약 살수록 죄만 행하는 자신의 실상을 보게 된다면 그는 자연히 하나님 앞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자신의 공로와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절감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수중에 있는 것으로 자신을 나타내거나 자랑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19절을 보면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당신의 전한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 하고 또 가로되 만일 나의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찐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는 말을 합니다.
바벨론의 사자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준 히스기야에게 이사야 선지자가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무릇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을 바벨론으로 옮긴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 그에 대한 반응입니다. 즉 자신이 자랑한 모든 것이 바벨론의 것이 되게 하시고 아들도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하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이러한 반응을 보이게 된 것은, 여호와 앞에서 자신이 잘못 행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결과입니다.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할 위기에 처한 유다를 구하시고 많은 금은보화를 갖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자신의 힘을 자랑하고자 했던 모든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알았기에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바벨론의 것이 되게 하고 아들까지 환관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도 선하다고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병이 들어서 죽는다는 경고를 받았을 때 히스기야는 자신을 죽이시는 하나님의 일을 선한 것으로 바라보지를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선하게 살았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 히스기야는 자신의 잘못됨을 철저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일을 행하신다고 해도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히스기야의 생명을 15년 연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처럼 본문의 내용의 중점은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15년 생명을 연장하신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선하십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인간으로 만드시기 위해 히스기야를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뜻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는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여러분은 자신의 생명이 연장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히스기야처럼 죽음의 시점에 대해 경고를 받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마 여러분은 자기 인생을 80세, 90세까지 생각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지금의 건강이라면 그때까지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런 생각이라면 오늘의 생명을 생명의 연장으로 보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당연한 생존으로 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생명이 80세, 90세까지 간다는 것을 누구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오늘 끝날지 내일 끝날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죽어야만 그때가 하나님이 정하신 생존의 기간이었음을 알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생존은 결코 당연한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건강이 생존을 보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수많은 사건 사고가 존재하고 사람이 어떻게 죽을지 알 수 없는 인생이 아닙니까? 그래서 신자는 하루하루가 하나님이 살게 하신 덤으로 주어진 인생임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 마땅한 우리를 생존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히스기야의 생명을 연장하신 하나님의 일에서 읽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살아봐야 자기 자랑으로밖에 나아가지 않는 악함을 깨닫고 진심으로 죽어 마땅한 나를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내게 행하신 하나님의 모든 일들이 선하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신자로 만들어 가시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람은 생존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자랑할 수 있을 정도로 성공한 생존이라고 해도 결국 인간은 죽습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나를 자랑할 수 있는 수많은 것들도 그저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이고 피었다가 지는 꽃 같은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어떤 인간이 되었느냐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나라는 우리가 소유한 것을 보지 않습니다. 세상 전체가 모두 자기 것이라고 해도 그것으로 생명의 나라를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내용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세상의 것을 소유하고 소유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무척 민감합니다.
다시금 우리가 바라봐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살게 하신 삶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으로 고쳐져 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연장되는 삶에서 하나님이 고치시고 만드시고자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 그것을 배웠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어떤 일에서도 ‘하나님은 선하십니다’라는 고백이 마음에서 나와질 수 있는 사람으로 고침받기를 소원하시고 그런 사람으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54강) 열왕기하 21:1-9 므낫세의 악행
<본문>
므낫세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십 이세라 예루살렘에서 오십 오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헵시바더라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서 그 부친 히스기야의 헐어 버린 산당을 다시 세우며 이스라엘 왕 아합의 소위를 본받아 바알을 위하여 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 성신을 숭배하여 섬기며 여호와께서 전에 이르시기를 내가 내 이름을 예루살렘에 두리라 하신 여호와의 전의 단들을 쌓고 또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단들을 쌓고 또 그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그 진노를 격발하였으며 또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아세라 목상을 전에 세웠더라 옛적에 여호와께서 이 전에 대하여 다윗과 그 아들 솔로몬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이 전과 예루살렘에 내 이름을 영원히 둘찌라 만일 이스라엘이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종 모세의 명한 모든 율법을 지켜 행하면 내가 그들의 발로 다시는 그 열조에게 준 땅에서 떠나 유리하지 않게 하리라 하셨으나 이 백성이 듣지 아니하였고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열방보다 더욱 심하였더라 (열왕기하 21:1-9)
<설교>
므낫세의 악행은 본문에 기록된 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능한 일을 본받아 산당을 다시 세웠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악한 왕이었던 아합을 본받아 바알을 위해 단을 쌓고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하여 섬긴 것입니다. 일월성신을 숭배하는 것은 앗수르 종교인데 므낫세가 어쩌면 앗수르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일월성신을 숭배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므낫세의 악행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4절에서 언급한 대로 여호와의 이름을 둔 거룩한 성전에 우상의 단을 쌓았으며, 여호와의 전 두 마당에도 일월성신을 섬기는 단을 만들어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암몬이나 모압이 행하던 악을 행하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자기의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함으로써 신에게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점을 치고 사술을 행했으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그들을 말을 듣고 따랐으며 자신이 손수 만든 아세라 목상을 전에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므낫세의 악행은 11절에서 “유다 왕 므낫세가 이 가증한 일과 악을 행함이 그 전에 있던 아모리 사람의 행위보다 더욱 심하였고 또 그 우상으로 유다를 범죄케 하였도다”라고 말할 만큼 아주 심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므낫세의 행위를 참으로 악한 행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0절부터 보면 하나님은 이러한 악행에 대해 진노하시면서 심판하실 것을 엄중히 경고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악행을 대하면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또한 므낫세가 행한 모든 일들을 악행으로 규정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실만하고 나아가서 유다를 멸망시켜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커다란 악행으로 바라보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므낫세의 행위를 악행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가 행한 것은 다만 우상을 세우고 섬긴 것뿐입니다. 그리고 므낫세가 행한 것은 거의 모두 지금 이 시대에도 계속되고 있는 것들입니다.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한 것도 비록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에서는 행해지지 않는 것이라고 해도 지구상 어느 곳에서는 지금도 행해지고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아들을 바치는 것을 제외하고는 므낫세가 행한 모든 것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까? 여기저기 세워진 우상들도 흔히 볼 수 있고, 하늘의 일월성신을 숭배하는 것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점치는 자와 무당을 찾아가는 사람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보면서 악행을 저지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지 않고 미신을 따르는 것을 답답하게 여길 정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 무엇보다 므낫세가 행한 것이 참으로 악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는 세상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인데 하나님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악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헌법에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법에 의해서 본다면 므낫세가 행한 것은 개인의 종교일 뿐이기 때문에 그가 어떤 신을 어떻게 섬기든 악이라고 규정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인간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적인 존재를 만들고 그 신을 섬기는 것을 악행으로 규정하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야 말로 자신만을 섬길 것을 강요하는 이기적인 신으로 비췰 수도 있을 것입니다. 즉 세상이 볼 때 므낫세의 행위는 개인의 종교에 불과할 뿐이며 따라서 악행이라고 규정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므낫세의 행위를 어떻게 보십니까? 하나님께서 진노하실 정도로 큰 악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십니까? 아니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십니까? 물론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서 점쟁이를 찾거나 무당을 찾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뭔가 형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상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한가지를 놓치면 안됩니다. 그것은 우상이 가지고 있는 의미입니다. 지금까지 열왕기서를 살펴보면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여러 왕들이 행했던 악행은 우상을 섬기는 것이었음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동안 우상에 대해 많은 말씀을 드렸는데,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또 다시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상의 심각함은 단지 형상을 만들어 절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점쟁이를 찾아가고 무당을 찾아가서 굿을 하는 것 자체가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행위들을 가볍게 보라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우상에 대해 말씀을 드릴 때 강조했던 것은 형상을 만들고 절하는 행위가 없고, 점쟁이나 무당을 찾아가지 않고 교회만 다닌다고 해서 자신이 우상과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우상은 단지 형상에게 절하는 행위의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형상을 신적인 존재로 만들어 놓고 거기에 절하는 것보다 내적인 문제가 더 크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사람이 우상을 섬기는 목적은 오직 자신을 위해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상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우상을 찾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우상의 심각함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이유가 자신을 위해서라면 그것이 곧 우상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상이며 하나님 앞에 악행이 된다는 것을 알지를 못합니다.
7-9절을 보면 “또 자기가 만든 아로새긴 아세라 목상을 전에 세웠더라 옛적에 여호와께서 이 전에 대하여 다윗과 그 아들 솔로몬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한 이 전과 예루살렘에 내 이름을 영원히 둘찌라 만일 이스라엘이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종 모세의 명한 모든 율법을 지켜 행하면 내가 그들의 발로 다시는 그 열조에게 준 땅에서 떠나 유리하지 않게 하리라 하셨으나 이 백성이 듣지 아니하였고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열방보다 더욱 심하였더라”고 말합니다.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을 여호와의 전과 예루살렘에 영원히 두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를 지켜 행하면 다시는 유리하지 않게 하시겠다는 약속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여호와의 그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므낫세의 꾀임을 받아 함께 악을 행하는 길로 간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왜 므낫세와 함께 우상을 섬김으로 악을 행하는 길로 갔을까요? 이것을 두고 므낫세의 꾀임에 빠졌다고 말하는데 므낫세의 꾀임은 무엇일까요? 므낫세가 우상을 섬긴 것은 단지 하나님이 싫어서 다른 신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주변에 많은 강대국들 사이에서 지지 않으려면 힘이 필요했고 그 힘을 이방인들처럼 우상을 통하여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므낫세는 하나님을 히스기야처럼 살아계신 분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음을 알지 못했기에 므낫세는 자신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능력에 붙들려 있음을 생각하지 못했고 때문에 므낫세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앗수르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었고, 따라서 앗수르의 신을 자기의 신으로 삼으며 앗수르가 섬기는 신을 섬김으로 자신도 힘을 얻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바라볼 때 므낫세의 이러한 처신이 자신들을 위해 옳게 여겨진 것입니다. 이것이 므낫세의 꾀임에 빠진 것입니다.
므낫세가 이방인의 신을 섬긴 것은 어쨌든 유다를 위협하는 이방인들에게는 그들과 가까운 관계에 있다는 모습을 보여줬을 것입니다. 이것은 외교적으로는 아주 효과 있는 정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강대국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한다면 유다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므낫세의 정책이 백성들에게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결국 백성들도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시고 인도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를 따라 순종하는 것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보이는 정책을 펼치는 므낫세에게 동조함으로써 함께 악을 행하는 길로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백성들이 만약 하나님을 믿었고 의지했다면 므낫세의 행위를 거부하면서 왕을 탄핵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백성들 또한 자신들에게 유리한 길을 좇음으로 인해서 므낫세의 길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것임을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행해야 하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하고 높이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전은 바로 그런 곳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시고,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하시고 그곳을 기업으로 허락하신 여호와의 사랑과 은혜를 높이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미래는 여호와께 있기 때문에 그들이 스스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길을 모색하지 않더라도 사랑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가장 선하고 좋은 길로 인도하심을 믿었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백성들의 눈에 므낫세의 행위는 악행으로 보여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백성들 또한 므낫세와 똑같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길을 스스로 모색하고 그 길을 선하고 좋은 길로 여김으로 인해서 악행이라는 것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 백성들의 어리석음이 오늘 우리에게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라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자기 자식을 해로운 길로 인도하시겠습니까? 신자가 믿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아버지니까 자식이 원하는 것을 주셔야 합니다’라는 것은 자식으로서 아버지의 사랑을 외면한 욕심에 불과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자식을 다스리고 있음을 간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가난하든 부하든, 평안하든 어려움에 처하든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풍성하신 은혜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에게 유리한 길을 모색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을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에게 가장 유리하고 선한 길로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다만 그러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높이고 감사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을 믿으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형통한 길로 갈 수 있다고 선전하는 것이야 말로 므낫세의 악행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기념해야 할 여호와의 거룩한 전에 아세라 목상을 세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교인들이 그러한 말에서 비신앙의 요소를 발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함께 악행의 길로, 비신앙의 길로 달려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은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한 유리한 길을 얻기 위해 신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어리석은 자임을 자각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유리한 길보다는 하나님이 뜻과 목적을 가지고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그 길이 내게 가장 유리하고 선한 길임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에 굳게 서 있다면 므낫세의 꾀임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이고, 그러한 꾀임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십시오. 눈에 보이는 현재의 형편이 여러분 인생의 전부가 아니고 여러분의 인생을 평가할 기준이 되지도 못합니다. 무엇이 성공한 인생이며, 무엇이 복된 인생인가는 이 세상의 끝에 서봐야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믿으시고,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사랑과 은혜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께 가장 유리한 길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것임을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55강) 열왕기하 21:10-18 하나님의 심판
<본문>
여호와께서 그 종 모든 선지자들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유다 왕 므낫세가 이 가증한 일과 악을 행함이 그 전에 있던 아모리 사람의 행위보다 더욱 심하였고 또 그 우상으로 유다를 범죄케 하였도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제 예루살렘과 유다에 재앙을 내리리니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내가 사마리아를 잰 줄과 아합의 집을 다림보던 추로 예루살렘에 베풀고 또 사람이 그릇을 씻어 엎음 같이 예루살렘을 씻어 버릴찌라 내가 나의 기업에서 남은 자를 버려 그 대적의 손에 붙인즉 저희가 모든 대적에게 노략과 겁탈이 되리니 이는 애굽에서 나온 그 열조 때부터 오늘까지 나의 보기에 악을 행하여 나의 노를 격발하였음이니라 하셨더라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유다로 범하게한 그 죄 외에 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가에서 저 가까지 가득하게 하였더라 므낫세의 남은 사적과 무릇 그 행한바와 범한 죄는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므낫세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궁궐 동산 곧 웃사의 동산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몬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열왕기하 21:10-18)
<설교>
그리고 이 악은 수천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도 소멸되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음을 상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본문의 하나님의 심판 이야기는 분명 오늘 우리도 해당되는 내용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 악행을 행하지 말자는 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악행을 행하지 말라는 의미로 예루살렘과 유다에 재앙을 내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성경이 심판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의도가 전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대개의 사람들은 재앙을 떠올립니다. 죄에 대한 보응으로 재앙을 내리는 것을 심판으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죄에 대한 보응이 심판의 목적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의 심판이 그러한 것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와 자비를 이야기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구약에서는 악행에 대해 재앙을 내리시면서 심판하셨던 하나님께서 신약의 시대에서는 조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오시기 전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것처럼 악에 대해 재앙을 내리시는 일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원망 한 번에 수만 명이 죽기도 하는 재앙을 받기도 하였고,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킴으로서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기도 하셨고, 끝내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멸망시킴으로서 죄에 대한 진노를 여실히 나타내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대에는 그러한 재앙과 진노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하나님의 심판은 이것을 중점으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말에는 하나님의 정의를 굳게 세우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즉 단순히 악에 대한 보응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세상에 나타내고 굳게 세우시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기서 말한 정의는 하나님의 정의지 세상이 생각하는 그런 정의는 아닙니다. 요즘 쇠고기 수입 반대를 위해 연일 촛불집회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불의와 맞서 싸우는 정의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이 일만이 아니라 정의를 내세우면서 수많은 데모가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것을 정의로 보시지 않습니다.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것과 같은 것은 개인의 신념에 따라 움직이는 것일 뿐 하나님의 정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는 그러한 집회에 참석하면 안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촛불집회에 참석을 하고 안하고는 개인이 선택하면 될 문제입니다. 다만 그러한 일들이 마치 교회가 해야 할 정의로운 일인 것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정의는 미국산 쇠고기가 불안하니까 수입을 금해야 한다는 것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세상의 악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정의를 굳게 세우신다는 것은, 세상이 외면하고 거부하고 배척하며 죽인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하나님이시며 구원자이심을 온 세상에 완벽히 드러내시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마지막 때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세상에 선포하시는 것은 세상이 외면한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심판에는 참된 복음을 외면하고 다른 복음을 따랐던 무리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심판을 분명히 행하실 것입니다. 신자는 심판에 대한 이러한 믿음으로 현실의 고통에서도 인내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의 심판의 흔적을 보십니까? 혹 자연적인 재앙이 있을 때 그것을 두고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자연적인 재앙은 이방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합니다. 신자도 자연적인 재앙에서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적 재앙을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물론 자연적 재앙을 말세의 징조로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악에 대해서 하나님의 의를 굳게 세우는 의미의 심판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흔적을 불신자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의 시각으로 생각하면 세상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볼 수가 없습니다. 불의가 성행하고 불의를 행한 자가 그 어떤 보응도 받지 않고 잘 사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심판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과연 왜 그럴까요? 왜 구약과 같은 심판이 없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엄청난 심판을 세상에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수만 명이 죽어나가고,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고 이스라엘과 유다가 멸망하는 것보다 더 큰 심판을 이미 세상에 보이셨습니다. 때문에 과거 구약과 같은 심판을 행하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큰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야 말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심판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정의를 굳게 세우셨습니다. 세상이 외면하고 버린 예수님을 죽음에서 건지시고 부활하게 하심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메시아이심을 세상에 증거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를 굳게 세우신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곧 하나님의 심판과 의를 세상에 증거하신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그리스도라면 불의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즉 앞으로의 세상의 운명은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 판단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는 현재의 삶이 아무리 형통하고 편안하며 겉보기에 복을 받아 잘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신자는 바로 이것을 믿으며 하나님의 심판에 모든 것을 맡기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담대하고 당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선지자의 역할은 항상 하나님의 심판과 책망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왕과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그리 좋은 말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국가의 번영과 발전을 위해 기도하기보다는 오히려 멸망과 재앙을 선포하는 선지자가 반가울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항상 배척을 받으면서 고난과 때로는 죽음의 길도 가야했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선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심판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즉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16절에 보면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유다로 범하게한 그 죄 외에 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가에서 저 가까지 가득하게 하였더라”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 말한 무죄한 자란 선지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므낫세는 하나님의 재앙을 선포하는 선지자들을 잡아 죽이는 악행까지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이러한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은 유다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믿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심판에 모든 것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신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다면 현재의 형편이 어떻든 상관없이 그리스도만을 바라볼 뿐입니다. 현재의 형편으로 인해서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결국 승리하는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승리하는 것임을 믿는다면 신자는 모든 관심을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인가에 두어야 합니다.
세상에 불의가 보이고 불의가 득세한다고 해도 신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고 오직 그리스도께 마음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정의를 굳게 세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만을 바르게 증거하는 일에 모든 힘을 쏟는 것입니다. 선지자처럼 어떤 힘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신자의 삶인 것입니다.
사실 힘 있고 돈 있는 자가 행세하고 약자들이 고통을 당하는 현실을 보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셨음을 믿는다면 결국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모든 것이 정리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러한 믿음이라면 힘 있고 돈 있는 자가 행세하는 현실을 보면서도 흔들림이 없이 그리스도를 믿는 일에 힘을 기울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세상의 뜻을 따라 주지 않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것은 예수님께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세상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했을 뿐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심으로써 무엇이 진리며 의로움인가를 세상에 드러내신 것입니다.
진리의 길을 가는 것은 세상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지자의 길이었고, 예수님의 길이었으며, 사도들의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의 길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뜻을 따르지 않음으로써 어떤 손해와 불이익이 온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만 고집해야 하는 것이 신자며 그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것입니다.
악의 세력은 예수님을 죽였지만 그 예수님을 하나님이 부활하게 하심으로써 악의 세력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보이셨습니다. 이것에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 어떤 불의함 앞에서도 두려움이 없이 믿음으로 존재하면 되는 것입니다. 주변의 사람이 어떤 길을 어떻게 걸어가든 신자는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의 정의라는 것을 믿고 그리스도를 믿는 길만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승리의 길임을 믿고 달려가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서 악이 보인다면 그 악보다 더 큰 악이 세상을 장악하고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에서의 악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고 자기를 위해 살도록 부추기는 자기 사랑과 자존심이라는 악이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악이 하나님조차도 자신을 위한 신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서의 승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56강) 열왕기하 21:19-26 신실하신 하나님
<본문>
아몬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이세라 예루살렘에서 이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므술레멧이라 욧바 하루스의 딸이더라 아몬이 그 부친 므낫세의 행함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부친의 행한 모든 길로 행하여 그 부친의 섬기던 우상을 섬겨 경배하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그 길로 행치 아니하더니 그 신복들이 반역하여 왕을 궁중에서 죽이매 그 국민이 아몬왕을 반역한 사람들을 다 죽이고 그 아들 요시야로 대신하여 왕을 삼았더라 아몬의 행한바 남은 사적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아몬이 웃시야의 동산 자기 묘실에 장사되고 그 아들 요시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열왕기하 21:19-26)
<설교>
사람에게는 마음이라는 것이 있고, 모든 행동은 그 마음에 의해서 통제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에 드는 일은 하게 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거부하는 것입니다. 만약 마음에 들지 않는데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외부적인 조건과 힘에 굴복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거부하면 자신에게 돌아올 불이익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아도 어쩔 수 없게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를 제외한다면 사람은 누구나 자기 마음에 따라 살아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에덴동산 이후 인간의 마음은 오직 자기만족이라는 욕망으로 뭉쳐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협력자가 될 수 있을까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물론 사람들은 선교를 하고 구제를 하는 자신의 행위를 하나님의 일에 협력하는 것으로 여기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구제나 선교 그 모든 것들도 철저하게 자신의 마음에 드는 쪽으로만 움직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가령 도와주어야 할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아주 친하고 다른 한 사람은 친하지가 않으며 자기 마음에도 들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 어떻게 합니까? 나와 친하고 친하지 않고, 마음에 들고 들지 않고를 떠나서 그들의 형편만을 돌아보며 형편에 따라 도와줍니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친한 자에게 더 마음이 가기 마련이고, 그래서 마음에 들지 않는 자보다 더 많은 액수를 도와주지 않습니까? 이러한 마음이 과연 하나님의 일을 도울 수 있는 마음일까요?
그러면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 더 나을까요?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협력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훼방자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행하시고 이루신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뜻을 세우시고 그 뜻 또한 하나님이 성취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신자며, 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 곧 하나님을 돕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만족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의 그런 마음까지 이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이러한 신실하심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또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것이 신자에게는 찬양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의 일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본문은 므낫세의 아들 아몬의 이야기입니다. 아몬이 므낫세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는데, 20-22절에서 “아몬이 그 부친 므낫세의 행함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부친의 행한 모든 길로 행하여 그 부친의 섬기던 우상을 섬겨 경배하고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그 길로 행치 아니하더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몬 또한 므낫세처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우상을 경배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몬을 그 신복들이 반역하여 죽여 버립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을 두고 악을 행한 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아몬이 죽은 것은 악을 행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생각하고 지나치기에는 다음의 일이 걸림돌이 됩니다. 24절을 보면 “그 국민이 아몬왕을 반역한 사람들을 다 죽이고 그 아들 요시야로 대신하여 왕을 삼았더라”고 말합니다. 아몬 왕을 반역한 신복들을 국민들이 다 죽여 버리고 아몬의 아들을 요시야를 왕으로 세운 것입니다.
그러면 아몬왕을 반역한 신복들은 왜 죽은 것입니까? 아몬을 반역해서 죽인 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라면 반역한 신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활용된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 신하들을 백성들의 손에 의해 죽게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신하들의 죽음 또한 아몬 왕을 죽인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하기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은 아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신하들을 죽인 백성들에 대한 심판이 연이어 행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하들이 아몬을 죽인 것을 단지 악을 행한 것에 대한 심판이라고만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하들이 아몬 왕을 반역한 이유에 대해서는 성경이 언급을 하지 않고 있지만 어쨌든 아몬 왕이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마음에 드는 자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서 반역을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북쪽 이스라엘에서는 반역이 빈번하게 일어났지만 남쪽 유다에서는 그렇게 빈번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빈번한 것은 아니었다고 해도 어쨌든 반역이 있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중요한 점이 있는데, 그것은 북쪽 이스라엘에서 발생한 반역과 유다에서 발생한 반역의 차이입니다.
유다에서는 아몬의 반역이 세 번째입니다. 첫 번째는 왕하 12:20절에 등장하는 요아스에 대한 반역이고(6년을 성전에서 숨어 지낸 요아스임), 두 번째는 14:19절에 등장하는 아마샤(유다왕 요아스의 아들)에 대한 반역입니다. 그런데 이들 반역이 이스라엘의 반역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반역이 있었다고 해도 다윗 왕조의 계통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비록 요아스를 반역하여 그를 죽였지만 그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되었고, 아마샤 역시 반역으로 죽었지만 백성들이 그 아들을 왕으로 세운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이스라엘은 다릅니다. 왕상 15:28정을 보면 이스라엘의 반역의 역사가 시작이 되는데, 바아사가 여로보암의 아들을 나답을 죽이고 대신하여 왕이 된 것입니다. 무엇이 다른지 아시겠습니까? 유다는 반역이 일어났다고 해도 그 왕위는 아들로 이어집니다. 즉 다윗 왕조의 계통이 훼손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반역은 반역을 일으킨 자가 왕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왕위의 계통 자체가 훼손되어 버린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근거해서 살펴본다면 백성들이 아몬 왕을 반역한 신복들을 죽인 것은 다윗 왕조의 계통을 지키기 위한 하나님의 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반역을 한 신하든, 신하들을 죽인 백성이든 자기들 마음에 따라 움직이고 있습니다. 신하는 왕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왕을 죽이고, 백성들은 그러한 신하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죽인 것입니다. 백성들이 다윗 왕조를 지키기 위해서 신하들을 죽이고 아몬의 아들 요아스를 왕으로 세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만약 백성들이 다윗 왕조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 수준의 사람들이었다면 므낫세가 악행을 행할 때 그 길로 동조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나라를 망하게 하는 망국의 길이라고 하면서 온 백성이 왕궁 앞에 모여 촛불 시위라도 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백성들도 므낫세의 악행에 동조했음을 생각해 본다면 그들이 다윗 왕조를 생각하고 신하들을 죽인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결국 생각할 수 있는 결론은 신하들의 반역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렇듯 신하들도 백성들도 자기 마음에 따라 행동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그 행동들을 다윗 왕조를 지키는 방향으로 이끄셨다는 것입니다. 유다는 신하들의 반역으로 인하여 위기에 빠진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만약 반역을 행한 신하가 왕이 된다면 다윗 왕조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다윗 왕조가 무너진다면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다는 하나님의 약속 역시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다윗 왕조를 지키기 위해서 백성들을 이용하신 것입니다. 즉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그 모든 것까지 하나님께는 하나님의 일을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으니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것도 선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인간의 악을 이용하시면서가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는 방해가 되는 것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실하심이 불의한 자에 불과한 우리를 생명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노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삼하 7:16절을 보면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을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며, 이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다윗의 씨를 어떻게 보존하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본문의 내용인 것입니다. 아몬이 신하들의 반역으로 죽임을 당하는 것을 허용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아합의 집을 다림 보던 추로 예루살렘을 다림 보시겠다는 말씀을 이루시는 것이고, 백성들이 신하를 죽이는 것 또한 다윗의 위를 보존하시고 폐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씀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또한 눅 1:32절에서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다윗의 위는 하나님의 언약대로 예수님에게로 이어지고, 계20:6절에서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고 말한 것처럼,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오직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해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신자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하심 앞에서 우리는 감히 우리의 공로를 말할 수가 없습니다. 말한 대로 우리가 스스로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의 일은 없습니다. 신자는 무엇보다 이 사실을 마음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한다고 했던 모든 것들도 실상은 나의 이기심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들이었으며 자기만족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음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선행을 한다고 여기신다면 그 선행의 내막을 조용히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구제를 하던 선교를 하던 헌금을 하든 그 내막을 들여다보시면 그 안에서 여러분의 이기심과 자기만족이라는 욕망이 담겨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니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이처럼 이기심과 자기만족이라는 한계에 붙들린 우리들까지 하나님의 일의 도구로 쓰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기심을 가지고 활동한 것들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도구로 활용을 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디를 봐도 천국갈만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가능성도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우리가 늘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자기 백성은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나 같은 자도 결국 생명의 나라에서 하늘의 영광을 누리고 주와 함께 왕노릇하는 자로 만들고야 말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선을 이루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삶을 이 뜻을 이루시기 위해 활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은 당장의 현실이 어떻든 상관없이 분명한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이 신자에게 얼마나 큰 든든함으로 다가오는지를 깊이 묵상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57강) 열왕기하 22:1-13 발견된 율법책
<본문>
요시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팔세라 예루살렘에서 삼십 일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여디다라 보스갓 아다야의 딸이더라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요시야왕 십 팔년에 왕이 므술람의 손자 아살리야의 아들 서기관 사반을 여호와의 전에 보내며 가로되 너는 대제사장 힐기야에게 올라가서 백성이 여호와의 전에 드린 은 곧 문 지킨 자가 수납한 은을 계수하여 여호와의 전 역사 감독자의 손에 붙여 저희로 여호와의 전에 있는 공장에게 주어 전의 퇴락한 것을 수리하게 하되 곧 목수와 건축자와 미장이에게 주게 하고 또 재목과 다듬은 돌을 사서 그 전을 수리하게 하라 하니라 그러나 저희 손에 붙인 은을 회계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 행하는 것이 진실함이었더라 대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그 책을 사반에게 주니 사반이 읽으니라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돌아가서 복명하여 가로되 왕의 신복들이 전에 있던 돈을 쏟아 여호와의 전 역사 감독자의 손에 붙였나이다 하고 또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왕의 앞에서 읽으매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 옷을 찢으니라 왕이 제사장 힐기야와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 미가야의 아들 악볼과 서기관 사반과 왕의 시신 아사야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가서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열조가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발하신 진노가 크도다 (열왕기하 22:1-13)
<설교>
본문에서는 요시야 왕이 26세가 되어서 성전을 수리하고 율법책을 발견한 것으로 그의 치세를 시작하고 있지만 대하 34:3절을 보면 요시야는 왕위에 오른지 8년, 즉 16세가 되었을 때 다윗의 하나님을 구하기 시작했고, 20세가 되어서는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결케 하여 그 산당과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무너뜨렸고, 그 우상들을 빻아 가루로 만들어 거기 제사하던 자들의 무덤에 뿌림으로써 왕상 13:2절에 예언된 대로 행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요시야의 치세가 본문에서는 생략되어 있는 이유는 열왕기서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구속의 역사를 어떻게 이루어 나오셨는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도 성전을 수리하는 요시야의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율법책을 통해서 요시야에게 준 것이 무엇인가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요시야가 우상과 우상의 단을 제거한 다음 26세가 되어서 성전을 수리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고 성전에 출입하는 백성들에게 연보를 내게 합니다. 그리고 연보한 돈을 꺼낼 때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책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제사장 힐기야가 서기관 사반에게 율법책을 전해주자 사반은 율법책을 요시야에게로 가져가서 힐기야가 주더라고 보고하고 요시야 앞에서 율법책을 읽습니다. 그리고 율법책의 말을 들은 요시야가 옷을 찢으면서 “왕이 제사장 힐기야와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 미가야의 아들 악볼과 서기관 사반과 왕의 시신 아사야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가서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열조가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발하신 진노가 크도다”(12,13절)라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택한 자기 백성을 어떻게 구원의 길로 인도해 가시는가를 알 수 있으며, 또한 자기 백성을 어떤 사람으로 세상에 존재하게 하고자 하시는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대개 보면 본문에서 중점을 두는 것은 요시야가 성전을 수리하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이 내용은 오늘날 교회가 예배당을 건축하고 수리하는 일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기에 알맞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본문의 내용을 요시야가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하는 복을 받은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요시야가 성전을 수리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기뻐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잊어버린 율법책을 발견하는 복을 받았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말함으로써 현대 교인들에게도 성전 수리, 즉 예배당이 낡았으면 수리하여서 항상 좋은 예배당의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하나님께 복 받는 길임을 주지시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이야기와 오늘날 예배당을 건축하거나 수리하는 것과는 전혀 연관성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의 성전이 오늘날의 예배당이라는 건물과 전혀 상관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또한 본문의 이야기가 성전을 수리함으로써 복을 받은 내용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요시야왕은 16세가 되어서 다윗의 하나님을 구하기 시작했고 20세가 되어서는 많은 우상과 우상의 단을 제거하였습니다. 그리고 26세가 되어서는 우상을 섬김으로 인해서 자연히 소홀했던 성전을 수리하게 됩니다. 이것만 본다면 요시야 왕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인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성전에서 율법책이 발견되고 서기관이 그 율법책을 읽었을 때 요시야는 옷을 찢었습니다. 옷을 찢었다는 것은 마음을 찢었다는 것으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통회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13절에서 말한 것처럼 크신 여호와의 진노를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만약 성전에서 율법책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결과는 어땠을까요? 당연히 요시야가 옷을 찢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크신 여호와의 진노를 깨닫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오히려 성전 수리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완성되었을 때 깨끗해진 성전을 바라보면서 보람을 느꼈을 수도 있고, 하나님이 자신의 일에 기뻐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행한 일을 바라보면서 자신이야 말로 여호와 앞에서 통회하고 자복해야 할 존재라는 것을 잊게 되는 것이고, 유다를 향한 여호와의 진노가 크다는 것도 잊었을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말씀 앞에 서기를 게을리 말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요시야는 율법책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산당과 아세라 목상 등 모든 우상을 제거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요시야가 그러한 자신의 일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물론 우상을 제거하는 일은 참으로 잘한 일이며 신앙인으로서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요시야가 우상을 제거하는 일에 온 힘을 쏟을 때 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책은 잃어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요시야에게 선포되는 말씀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요시야는 말씀 앞에 서는 것이 없이 다만 그가 신앙이라고 여기는 행위만 있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요시야는 자신의 죄악을 보지를 못했고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크신 진노 또한 보지를 못한 것입니다. 말한대로 우상을 제거하고 성전을 수리하는 요시야의 일들은 모두가 요시야가 참으로 신앙이 좋다는 것을 보여줄 뿐, 요시야 역시 하나님의 크신 진노 아래 있는 악한 자라는 것을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요시야에게 율법책이 없었다면 요시야는 자신의 악함은 보지 못한 채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한 보람을 마음에 둔 채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심령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심령이 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책을 발견하게 하심으로써 요시야로 하여금 하나님의 크신 진노를 보게 하고 자신의 악함을 보게 하심으로써 웃을 찢을 정도로 마음의 통회함으로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말씀 앞에 나오게 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동안 수없이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크신 진노 아래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하시고 우리의 악을 보게 하심으로써 통회하는 심령이 되게 하셔서 하나님 앞에 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짐 받은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어떤 신앙적인 일을 행했든 상관없이 내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클 뿐입니다’ 라는 고백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런 신자를 기뻐하시기에 우리를 그러한 신자로 굳게 세우기 위해서 오늘도 말씀 앞에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한 바를 생각하면서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침에 회사에 출근해서 큐티 하는 자신에게 만족해하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면서 빼놓지 않고 기도하는 자신에게 만족해하고, 하루에 일정한 양을 정해서 성경 보는 자신에게 만족해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행한 것을 선한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선에 대한 만족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통회하는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훼방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린 자로 사는 것이라는 것 또한 아셔야 합니다. 요시야를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2절)라고 평하는 것은 그가 우상을 제거하고 성전을 수리하였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다윗의 모든 길을 다윗의 행위를 기준으로 해서 생각한다면 그 길에는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인 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길을 인간의 행함을 기준으로 본다면 분명 선한 길은 아닙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2절에서 말한 다윗의 길이란 그가 행한 행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다고 여겨지는 다윗의 길은 시 51:16,17절에서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고 고백하는 것처럼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선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시야로 하여금 율법책을 듣게 함으로써 다윗의 이 길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이며, 오늘 우리 또한 분명 이 길로 인도하고 계심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롬 7:9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라는 말을 합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율법대로 산다고 하면서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을 때는 죄는 죽고 자신이 살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산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그러나 계명을 깨닫게 되자 죄는 살아나고 자신은 죽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행한 그 어떤 것도 선한 것이 아니었으며 오직 죄인 중에 괴수에 불과할 뿐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고백을 할 때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아니할 때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힘쓰는 자신을 바라보았다면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다’는 고백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위해 힘쓰는 자신의 행위가 선한 것으로 보일 것이고, 따라서 그 선함에 모든 죄는 가려지고 대신 선을 행하는 자신만이 보이지 않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이 계명은 우리가 행한 그 어떤 것도 선한 것으로 보지 않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진노 아래 있음을 보게 하는 것이고, 상한 심령이 되게 하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크신 진노에서 건지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놀라운 은총과 사랑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길로 인도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명이 그 심령에 발견되어진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갈 3:10절에 보면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는 말을 합니다. 또한 약 2:10절을 보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이 말씀 앞에 서면 여러분에게서 무엇이 살아납니까? 여러분의 선한 행위입니까? 아니면 죄입니까? 당연히 죄가 살아나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는 지식의 차원에서 아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여러분의 심령에 죄가 살아나서 요시야처럼 하나님 앞에서 옷을 찢는 통회하는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이 심령은 자신의 행함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 어떤 종교적인 선한 행위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기준으로 자신이 믿음이 있다거나 선을 행한 자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다만 진노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아야 할 자로만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지 않은 심령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린 상태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한국교회 특유의 종교적인 열심은 차고 넘치고 있고, 그것을 본다면 신앙의 길을 바르게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러한 자기 열심을 바라보고 그것을 선으로 여김으로써 죄가 살아나고 자신이 죽는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과는 멀어진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우리가 이처럼 말씀을 잃어버린 상태가 아닌가를 깊이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심령에 말씀이 발견되어서 말씀을 깨달음으로써 진심으로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되어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깨달은 자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를 소원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신자를 이러한 심령으로 만들기 위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 앞에 온전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치 못한 자신을 깨닫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이 되어서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 백성인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를 이러한 자로 만들기 위해 일하십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58강) 열왕기하 22:14-20 책의 모든 말대로
<본문>
이에 제사장 힐기야와 또 아히감과 악볼과 사반과 아사야가 여선지 훌다에게로 나아가니 저는 할하스의 손자 디과의 아들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라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하였더라 저희가 더불어 말하매 훌다가 저희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너희를 내게 보낸 사람에게 고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의 읽은 책의 모든 말대로 하리니 이는 이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 손의 모든 소위로 나의 노를 격발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나의 이곳을 향하여 발한 진노가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너희를 보내어 여호와께 묻게 한 유다 왕에게는 너희가 이렇게 고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들은 말을 의논컨대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 대하여 빈 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 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하여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사자들이 왕에게 복명하니라 (열왕기하 22;14-20)
<설교>
죄가 살아나게 되면 중요한 것은 죄의 처리 문제입니다. 그래서 요시야가 제사장 힐기야와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 미가야의 아들 악볼과 서기관 사반과 왕의 시신 아사야에게 명하여 “너희는 가서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열조가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발하신 진노가 크도다”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요시야가 사람을 선지자에게로 보내서 발견된 율법책의 말씀에 대해 물어야 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율법책의 내용이 어려워서 이해가 안되니 쉽게 설명해 달라는 의도였겠습니까?
요시야가 율법책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는 유다가 조상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준행치 않았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크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진노가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요시야가 물어야 했던 것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라는 것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요시야 왕이 보낸 자들이 여선지 훌다에게 나아가서 물었을 때 여선지 훌다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너희를 내게 보낸 사람에게 고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곳과 그 거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의 읽은 책의 모든 말대로 하리니 이는 이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 손의 모든 소위로 나의 노를 격발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나의 이곳을 향하여 발한 진노가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라 하셨느니라”(15-17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결국 요시야 왕이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말은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저주의 선포였을 뿐입니다. 만약 요시야 왕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라는 물음을 하였거나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범한 죄를 용서 받을 수 있습니까?’라는 물음을 한 것이라면 하나님으로부터 ‘해결책이 없다’는 답을 들은 것과 같습니다. 남은 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재앙 밖에 없다는 저주의 말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내용들이 마치 나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내용인 것처럼 대하게 되는 우리 자신들입니다.
여선지는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유다에게 재앙이 내려질 것에 대해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선지 개인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우리가 듣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마음은 왜 이토록 덤덤한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즉 우리 안에서 죄가 살아나고 나는 죽는 말씀의 체험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말씀으로도 애곡함이 없고, 또한 기뻐하는 것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요시야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들었을 때의 반응은 옷을 찢은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유다가 하나님의 크신 진노 아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러한 반응이 없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오늘의 이 시대는 하나님의 크신 진노도, 저주도 다 잊어버린 채 살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자신의 입맛에 맞는 것만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래서 죄에 대해 책망을 하고, 본문처럼 저주와 심판에 대해 선포하는 말씀은 싫어하고 다만 우리를 지켜주시고 복을 주신다는 말씀만 들으려고 합니다.
마 11:17절에서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의 이 세대 또한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세상의 현실에 대해 낱낱이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었을 때 가슴을 치면서 애통하는 것이 마땅하였지만 세상은 오히려 그러한 말을 하는 예수님께 시비를 걸고 배척하였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 않기에 예수님의 어떤 말씀에 대해서도 애통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 기쁨의 조건을 두고 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기쁨으로 다가오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당시의 현실이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이러한 현실에 파묻혀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애통의 자리로 이끌어 갑니다. 그러나 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도 얻을 수 없는 기쁨을 맛보게 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으면서도 애통과 기쁨이 없다면, 결국 우리는 전혀 다른 것을 마음에 두고 살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애통하게 하는 조건도 다른 것이고, 기쁨이 되는 조건도 다른 것에 있기에 말씀에 대해서는 전혀 반응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저주는 하나님의 법대로 행하시겠다는 선언이십니다. 유다가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였으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재앙을 내리고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 진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이것을 믿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있는 것이 옳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진다는 것을 믿는다면, 과연 이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은 어떤 말씀을 하셨는가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벧후 3:8-10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 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는 말씀을 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되어질 것을 믿는다면 11-13절에서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자로 살고자 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고 하고, 세상의 모든 것이 말씀대로 되어질 것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니라 이 세상을 바라보는 자로 산다면 그것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 질 것을 믿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세상과 다르지 않는 동일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 진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믿어진다면 신자는 얼마든지 말씀에 의해서 애통해 할 수 있어야 하고, 말씀에 의해서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말씀을 믿는 신자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반응인 것입니다.
벧후 2:9-10절을 보면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날까지 지키시며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신자가 세상이 이 말씀대로 되어질 것을 믿는다면 경건함과 불의함에 마음을 두게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둔다고 하시는데 하나님 앞에서 불의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알고자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살후 1;8-9절에서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는 말씀을 합니다. 역시 이 말씀대로 되어질 것을 믿는다면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며 사는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진심으로 말씀을 믿는 자의 반응인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이 말씀대로 된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린 성경을 통해서 영원한 형벌에 거할 자들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는데, 내 자신이 영원한 형벌에 거할 자의 이름에서 벗어날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의 저주가 선포된 자리에서 나를 구출하실 의의 그리스도를 소망하고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선포된 자리에서 나의 의라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이 나를 저주에서 구출하시는 위대한 능력이 된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에게는 그리스도가 곧 생명이 되시고 전부가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신자 됨을 소망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선포되고,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 아래 있는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 할 만한 복을 누리고 산다고 해서 그게 무슨 자랑거리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는 때가 이르게 되면 그 모든 것들은 전혀 쓸모없는 것이었음이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말씀을 믿는 신자는 세상의 것을 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는 것 외에 모든 것은 쓸모없는 시시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신자로 이 세상에 머물 수 있기를 소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소원으로 사는 신자라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땅의 것을 얻고자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경건한 자로 살기를 원할 것이고,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는 자로 살기를 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심판에서 구출되는 신자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구한다면 자신이 경건한 자로 살도록 해달라고 할 것이고, 예수님의 복음에 복종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진심으로 말씀을 믿는 자의 소원이 아니겠습니까? 말씀을 믿는다면 신자는 주 예수님 한분만으로도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59강) 열왕기하 23:1-3, 21-23 언약책과 유월절
<본문>
왕이 보내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자기에게로 모으고 이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거민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무론 노소하고 다 왕과 함께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 왕이 대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매 백성이 다 그 언약을 좇기로 하니라 (열왕기하 23:1-3)
왕이 뭇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 사사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시대부터 이스라엘 열왕의 시대에든지 유다 열왕의 시대에든지 이렇게 유월절을 지킨 일이 없었더니 요시야왕 십 팔년에 예루살렘에서 여호와 앞에 이 유월절을 지켰더라 (열왕기하 23:21-23)
<설교>
요시야는 성전을 수리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책을 발견하게 됩니다. 율법책의 말씀을 들은 요시야는 옷을 찢을 정도로 크게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들을 모으고, 제사장과 선지자와 모든 백성들을 성전에 불러 모아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듣게 합니다. 그리고 요시야가 대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3절)고 하자 백성들이 다 그 언약을 좇기로 합니다. 그리고 4절부터보면 요시야가 추진한 종교개혁의 구체적인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것은 왕하 23장에서는 요시야 왕이 율법책을 발견한 후에 모든 우상을 철폐하는 개혁을 단행한 것처럼 되어 있는데, 대하 34:3절을 보면 요시야는 왕위에 오른지 12년, 즉 20세부터 우상을 철폐하는 일을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왕하 22:3절을 보면 요시야 왕은 재위 18년, 즉 26세에 율법책을 발견합니다. 따라서 23장의 개혁이 율법책을 발견한 후에 이루어진 것이라면 요시야 왕은 26세에 개혁을 단행한 것이 됩니다. 따라서 대하 34장의 내용과는 6년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두고 어떤 사람은 요시야 왕이 우상을 철폐하는 개혁을 두 번 단행했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주장이 설득력이 있으려면 처음 개혁을 단행 한 후에 백성들이 또 다시 우상으로 되돌아갔다는 정황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정황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요시야가 단행한 개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 흘러오면서 이스라엘과 유다에 뿌리 깊이 파고들어 아예 신앙화 되어버린 전통과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왕이 명령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철폐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계속되어야 할 개혁이었던 것입니다.
대하 34:8절을 보면 “요시야가 위에 있은지 십 팔년에 그 땅과 전을 정결케 하기를 마치고 그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수리하려 하여 아살랴의 아들 사반과 부윤 마아세야와 서기관 요아하스의 아들 요아를 보낸지라”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요시야 왕은 재위 12년에 개혁을 시작하여 18년에 마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수리를 시작한 것입니다. 따라서 요시야가 율법책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우상을 철폐하는 개혁은 마쳤을 때입니다.
그런데 왕하 23장에서는 요시야 왕이 율법책을 발견한 후에 우상을 철폐하는 개혁을 시작한 것처럼 언급을 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참된 개혁은 단지 눈에 보이는 우상을 철폐하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언급하기 위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본문 3절을 보면 “왕이 대 위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이 언약의 말씀을 이루게 하리라 하매 백성이 다 그 언약을 좇기로 하니라”고 말합니다. 요시야 왕이 율법책을 발견한 후 백성들을 모아 율법책의 말씀을 듣게 한 후에 하나님의 언약을 좇아 살도록 강조합니다. 그리고 21절에서 “왕이 뭇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언약을 좇는 것은 곧 유월절을 지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하 34장에서도 요시야 왕이 율법책을 발견한 후에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고 언약을 좇아 살도록 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대하 35:1절을 보면 요시야가 예루살렘 여호와 앞에서 유월절을 지켜 정월 십사일에 유월절 어린 양을 잡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유다의 신앙의 참된 회복은 단지 우상을 철폐하는 것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좇아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유월절을 지키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요시야 왕이 율법책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우상은 모두 철폐했을지언정 여전히 유월절은 지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참된 이스라엘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발견한 책을 22장에서는 율법책이라고 말하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언약책이라고 바꾸어서 부르고 있습니다. 이 이유를 아는 것 또한 중요합니다. 그래야 유월절의 중요성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책과 언약책은 모두 같은 책이지만 그 의미는 다릅니다.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악한 존재임을 보게 합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아래 있게 된 것도 하나님의 율법에 의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을 진노와 저주에 가두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21절에서 “왕이 뭇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언약책에 기록된대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유월절을 지키라 하매”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율법에는 유월절이라는 언약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모든 인간을 저주와 심판 아래 가두었지만, 그 저주와 심판에서 건질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것이 거룩한 제물의 희생으로 말미암은 구속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유월절인 것입니다.
요시야가 단행한 개혁은 참으로 철저했습니다. 성전에 있던 바알과 아세라와 하늘의 별을 섬기는 데 쓰던 모든 기구들을 내어다가 불살랐습니다. 또한 각 지역에서 활동하던 가짜 선지자들과 우상을 예배하던 사람들을 쫒아냈습니다. 그리고 전국에 흩어져 있던 산당들도 모조리 치워버리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요시야의 개혁은 어쩌면 여러분께 별 느낌을 주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어쨌든 우리들은 유다와 같지 않다는 것 때문입니다. 예배당에 우상을 끌어들지도 않았고, 우상에게 예배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진심으로 하나님만을 섬기고 있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진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좇는 자로 살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배당에 부처와 같은 우상이 없고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배하는 것도 없고, 개인적으로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만 섬기며 하나님의 언약을 좇고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진노와 심판 아래 있는 나를 구속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어린양의 피의 은혜를 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는 하나님께 제사하는 거룩한 성전에 아세라 상이 있고, 우상을 섬기기 위한 기구들이 있었다는 것이 이상하고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예배당에 부처상을 놓는 것과 같은 것인데, 아무리 유다의 신앙이 엉망이 되었다고 해도 그런 행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다가 그러한 일을 당연하게 생각했다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일이 오랜 세월을 흘러오면서 유다에 자연스런 것으로 자리 잡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자신들의 풍요를 위해 우상을 섬기는 것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한국교회에 만연한 기복신앙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라고 말하면서도 세상에서의 풍요의 복 또한 주시는 분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하나님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성경에서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하나님을 말하는데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마치 성전에서 우상을 섬기면서도 잘못된 것임을 전혀 알지 못하는 유다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한국교회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개혁을 외치기도 합니다. 기복신앙을 버려야 하고, 잘못된 제도도 고쳐야 하고, 교회가 돈을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교회가 교회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좇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하나님만을 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살면서 유월절의 은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그 속에 굳게 세워져 있다면 그는 자연히 기복신앙과는 상관없는 길을 가게 됩니다. 기복신앙을 버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만을 좇다보니 자연히 세상에서의 풍요를 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개혁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서 개혁은 신자 개인의 의지나 노력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내 속에서 이루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개혁하자고 하지 않아도 예수님이 날마다 내 안에서 이루시는 것을 진정한 개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문제는 유다 백성들이 오랜 세월 동안 우상을 섬겼으면서도 그것이 잘못된 것인 줄을 몰랐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를 모른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말씀에 대한 관심이 멀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기독교인들의 맹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또한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목사가 말하는 것을 무조건 추종하는 것에 있습니다. 목사가 자기 마음에 들면 그가 말하는 것은 자연히 진리가 되고, 목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떤 말도 듣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은 생각이 들어도 다른 사람들이 모두 옳다고 하니까 그게 옳은가 하고 따라가기도 합니다. 요시야가 개혁을 단행하기 전까지 많은 사람들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악이라는 것을 몰랐던 역사는 지금도 교회 안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오류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좇는 것입니다. 즉 유월절의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에 새롭게 새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신자는 요시야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발견하고 거기서 우리 자신들의 심각한 위기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나름대로 믿음으로 산다고 여겼는데 말씀을 발견하고나니 나는 악한 자에 불과하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는 충격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충격이 없이 맹목적인 신앙생활에만 매달려 산다면 우리는 문제없다고 여겨지는 현재의 신앙생활에 안주하고 말 것입니다. 아무리 자신이 기복신앙이 아니고, 물질의 풍요를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그것이 또한 함정이 되어 ‘나는 예수를 안다’는 착각에 빠진 채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절실히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마음을 쏟는 것입니다. 말씀만이 나의 심령을 깨울 수 있음을 알고 말씀 안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발견하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충격이 있어야 합니다. 입으로만 죄인이라고 고백했을 뿐, 내 스스로는 나를 죄인으로 여기지 않았던 현실에서 건짐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요시야의 옷을 찢는 심정이 이해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진노와 심판아래 갇힌 나에게 하나님의 언약인 유월절의 거룩한 피가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의 마음에 새롭게 선명하게 자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마음은 자연히 예수님만으로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60강) 열왕기하 23:26-37 기대할 수 없는 인간
<본문>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진노하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케한 그 모든 격노를 인함이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뺀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 두리라 한 이 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 요시야의 남은 사적과 모든 행한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요시야 당시에 애굽 왕 바로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하수로 올라가므로 요시야왕이 나가서 방비하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나본 후에 죽인지라 신복들이 그 시체를 병거에 싣고 므깃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그 묘실에 장사하니 국민이 요시야의 아들 여호아하스를 데려다가 저에게 기름을 붓고 그 부친을 대신하여 왕을 삼았더라 여호아하스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삼세라 예루살렘에서 석달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하무달이라 립나 예레미야의 딸이더라 여호아하스가 그 열조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니 바로느고가 저를 하맛 땅 립나에 가두어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지 못하게 하고 또 그 나라로 은 일백 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를 벌금으로 내게 하고 바로느고가 요시야의 아들 엘리아김으로 그 아비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을 삼고 그 이름을 고쳐 여호야김이라 하고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잡아갔더니 저가 거기서 죽으니라 여호야김이 은과 금을 바로에게 주니라 저가 바로느고의 명령대로 그에게 그 돈을 주기 위하여 나라에 부과하되 국민 각 사람의 힘대로 액수를 정하고 은금을 늑봉하였더라 여호야김이 왕이 될 때에 나이 이십 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십 일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스비다라 루마 브다야의 딸이더라 여호야김이 그 열조의 모든 행한 일을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열왕기하 23:26-37)
<설교>
하지만 저는 여러분이 그처럼 인간의 귀를 솔깃하게 하고, 인간의 욕구에 부응하는 말들은 성경과 상관이 없는 거짓된 말임을 판단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판단이 있어야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면서 귀를 기울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분별하면서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설교 제목은 ‘기대할 수 없는 인간’입니다. 아마 제목부터가 여러분의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부정적으로 보는 제목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저의 설교를 듣기 전에 먼저 본문을 면밀히 살펴보시고 과연 본문이 여러분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달콤한 말을 기대할 수 있는 내용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달콤한 말은 소위 긍정적인 말일 것입니다. ‘믿으면 모든 일이 잘된다’는 투의 말들이 사람의 귀를 솔깃하게 하고, 어쨌든 지금 당장은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말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존재입니까?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격이 있고,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습니까? 이러한 물음부터가 여러분의 마음을 탐탁지 않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짐작은 하지만 신자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은 하나님께 긍정적인 말을 들을 수 있는 존재가 못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엇 하나 잘 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잘한 것이 있어야 하나님께 칭찬을 받으면서 ‘상을 준다. 복을 준다’는 말을 기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잘한 것이 없이 그러한 말을 듣고자 한다면 그것은 너무 뻔뻔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또 이상한 것은 신자는 바로 그처럼 뻔뻔함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잘한 것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복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인간의 죄를 드러내고 책망하는 말씀들이 탐탁지 않게 들리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말씀으로 들릴 것이고, 나 같은 자를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더욱 깊은 감사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에 대한 참된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바로 그러한 반응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26,27절을 보면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진노하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케한 그 모든 격노를 인함이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스라엘을 물리친 것 같이 유다도 내 앞에서 물리치며 내가 뺀 이 성 예루살렘과 내 이름을 거기 두리라 한 이 전을 버리리라 하셨더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 내용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요시야가 성전과 예루살렘의 모든 우상을 부숴 버리고 성전을 수리하면서 그동안 지켜지지 않았던 유월절까지 다시 지키는 종교적 개혁을 단행하여 큰 성공을 이루어 내었는데 하나님은 여전히 유다를 향한 진노를 돌이키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기대하는 결과가 아닙니다.
요시야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오랜 세월 동안 뿌리 깊이 내려오던 우상과, 산당까지 모두 제거하는 철저한 개혁을 단행하여 유다를 바른 신앙위에 세우는 공로가 있다면 그 공로를 보셔서라도 설사 유다에게 진노를 선포하셨다고 해도 ‘요시야의 믿음을 봐서 진노를 거두겠다’라고 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에 쏙 드는 내용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야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의 마음도 바꿀 수가 있다는 말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기대를 묵살해 버리고 오히려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확고함을 선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요시야에게 개인적으로 복을 내려주시지도 않습니다. 복을 주시기는커녕 오히려 젊은 나이에 죽게 합니다. 요시야가 8살에 왕이 되고 31년을 치리했다고 했으니 39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시야의 개혁은 분명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신앙의 열매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처럼 신앙으로 행한 요시야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복으로 갚아주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신앙으로 살면 하나님이 복주셔서 편안함과 풍요로움을 누리게 하신다’는 말을 서슴없이 합니다. 그러한 말들이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전하면서 모진 고초를 겪고 죽임을 당했던 선지자와 사도들을 믿음 없는 자로 전락시킨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다만 인간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달콤한 말을 하려고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요시야를 39살이라는 나이에 죽게 하셨을까요? 성경이 그 이유에 대해 분명히 언급을 하지 않고 있고, 또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인간이 알 수는 없지만 본문의 한 내용을 통해서 짐작은 해 볼 수 있습니다. 29절에 보면 “요시야 당시에 애굽 왕 바로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하수로 올라가므로 요시야왕이 나가서 방비하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나본 후에 죽인지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요시야는 애굽과 앗수르의 전쟁에 끼어들었다가 죽임을 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애굽이 앗수르를 치기 위해서 올라갔는데 애굽을 요시야가 막아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죽은 것입니다. 도대체 요시야가 무엇 때문에 앗수르를 위해 애굽의 공격을 막는 것입니까? 그것은 앗수르의 압력에 의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대하 35:21절을 보면 “느고가 요시야에게 사자를 보내어 가로되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뇨 내가 오늘날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로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나를 명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리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는 말을 합니다.
이처럼 애굽왕은 요시야에게 앗수르의 싸움에 쓸데없이 끼어들지 말 것을 경고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도 요시야는 앗수르의 압력에 굴복하여 애굽을 막아서다가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요시야의 이런 행위는 분명 옳은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개혁을 단행했던 요시야에게서도 신앙에서 벗어난 모습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요시야 다음에 왕위에 오른 여호아하스나 여호야김은 모두 요시야의 아들이었으면서도 아버지의 신앙을 배우지 못하고 또 다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요시야의 아들들은 아버지가 이룬 개혁에 대해 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 앞에 정직히 행하는 신앙을 보면서 자랐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아스의 아들들은 모두 악을 행하는 길을 간 것입니다. 자식 교육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로서 자식을 신앙으로 교육시키는 것은 분명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교육이 자식을 믿음의 길로 가게 할 것이라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모도 자식도 그 믿음을 책임지고 인도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기대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답을 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 자식을 어떻게 구원하실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면서 부모 또한 믿음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모든 삶에 생생히 살아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어도 유다를 향한 진노가 거두어지지 않는 것은, 그 누구의 행함도 하나님의 진노를 거둘 수 있는 의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은 다 거짓되다’는 말을 합니다(롬 3:4).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실체입니다. 우린 모두 거짓된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참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항상 내 중심으로 나를 위해 살지 않습니까? 사람을 대할 때도 자신이 기준이 되어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싫어하고 멀리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타인이 왜 내 마음에 들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자기에게 매어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신자일까요? 예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자가 예수님의 생명의 은총에 붙들려 있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용서의 은총이 우리의 모든 허물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용서의 은총이 아니면 누구도 생명에 거하는 존재가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의 용서는 잊어버린 채 항상 내가 중심이 되어 모든 것을 판단하고 구분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유다도, 그리고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자들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도 유다도 멸망의 길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멸망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은 자임을 깨닫고 하나님이 언약하신 메시야를 소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도 유다도 그들이 유일하게 기대를 걸어야 했던 분이 바로 메시야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요시야의 신앙이 유다를 향한 진노를 거둘 수 있는 의가 되지 못한 것처럼, 우리가 아무리 뛰어난 신앙을 보여준다고 해도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게 하지를 못합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역대 왕들처럼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는 길을 간다고도 말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는 우리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바라보고 기대를 둘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독생자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이 시간 깊이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인은 자신을 내세울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총에 모든 기대를 둘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복을 받고 구원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들 만한 일을 하겠다고 나서지를 못합니다. 다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를 어떻게 구원하실지 기다리며 살아갈 뿐입니다. 어떻습니까? 지금까지의 말들이 여러분에게 탐탁지 않게 들렸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여러분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말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확인해야 하는 것은 제가 전하는 성경의 내용이 여러분의 마음에 들어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에게 ‘내 마음에 드는 말만 해주세요’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말씀 앞에서 여러분이 해야 하는 것은 ‘과연 그러한가’라는 마음으로 말씀을 살피고 또 살피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서 말씀에 대한 이러한 자세를 보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기대를 두고 있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말한 대로 인간은 기대할 수 없는 거짓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기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함께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어 오셨고, 또한 앞으로도 구원을 이루어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거짓되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기에 우리가 기대하고 바라보고 믿고 의지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심으로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바라보는 믿음의 사람으로 어떻게 만들어 가실지 기대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에 충만한 하나님의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61강) 열왕기하 24:1-20 길은 어디에
<본문>
여호야김 시대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오매 여호야김이 삼년을 섬기다가 돌이켜 저를 배반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 종 선지자들로 하신 말씀과 같이 갈대아의 부대와 아람의 부대와 모압의 부대와 암몬 자손의 부대를 여호야김에게로 보내어 유다를 쳐 멸하려 하시니 이 일이 유다에 임함은 곧 여호와의 명하신바로 저희를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심이니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로 인함이며 또 저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그 피로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 여호와께서 사하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시니라 여호야김의 남은 사적과 모든 행한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여호야김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아들 여호야긴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애굽 왕이 다시는 그 나라에서 나오지 못하였으니 이는 바벨론 왕이 애굽 하수에서부터 유브라데 하수까지 애굽 왕에게 속한 땅을 다 취하였음이더라 여호야긴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십 팔 세라 예루살렘에서 석 달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느후스다라 예루살렘 엘라단의 딸이더라 여호야긴이 그 부친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그 때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신복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그 성을 에워싸니라 그 신복들이 에워쌀 때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도 그 성에 이르니 유다 왕 여호야긴이 그 모친과 신복과 방백들과 내시들과 함께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왕이 잡으니 때는 바벨론 왕 팔년이라 저가 여호와의 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고 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전의 금 기명을 다 훼파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저가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방백과 모든 용사 합 일만명과 모든 공장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매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 저가 여호야긴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왕의 모친과 왕의 아내들과 내시와 나라에 권세 있는 자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또 용사 칠천과 공장과 대장장이 일천 곧 다 강장하여 싸움에 능한 자들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고 바벨론 왕이 또 여호야긴의 아자비 맛다니야로 대신하여 왕을 삼고 그 이름을 고쳐 시드기야라 하였더라 시드기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일세라 예루살렘에서 십 일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하무달이라 립나 예레먀의 딸이더라 시드기야가 여호야김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지라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를 진노하심이 저희를 그 앞에서 쫓아내실 때까지 이르렀더라.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을 배반하니라 (열왕기하 24:1-20)
<설교>
본문 24장에는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라는 세 왕이 등장을 하는데 시드기야가 바로 유다의 마지막 왕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내용은 멸망하기 직전의 유다의 상황이 어떠했던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가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을 믿는 유다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그들이 살 수 있는 최선의 길이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우상을 섬긴 죄를 회개하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만이 유다가 사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쉬운 일입니다.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유다의 희생이 요구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죄를 깨닫고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나오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정말 쉬운 이 길을 가지 않고 자기들 나름대로 사는 길을 찾아 가다가 결국 멸망이라는 마지막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다의 멸망이 갑작스런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많은 선지자를 보내서 유다의 멸망을 수없이 예고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채 자기들이 볼 때 옳다고 여겨지는 길을 고집하다가 멸망을 자초하게 된 것입니다. 유다의 이런 이야기들은 분명 오늘날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고 점검하게 해주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즉 유다처럼 하면 망한다는 것이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모두 멸망을 향해 달려갑니다. 즉 세상이 가는 길은 멸망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도 살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멸망의 길에서 벗어나서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가를 다시 확인하고 그 길이 우리에게 생명의 길로 굳게 세워져야 할 것입니다. 유다의 선한 왕이었던 요시야 이후로 약 22년 동안 네 명의 왕이 등장합니다. 이 네 왕의 이름은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인데 여호야긴은 요시야의 손자이고 나머지 세 명은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네 명의 왕들이 요시야 왕과는 다르게 악을 행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를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은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스바냐, 나훔, 하박국 등이 바로 이 기간에 보냄 받은 선지자들입니다. 선지자가 등장을 했다는 것은 신앙적인 큰 문제가 발생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한두 명도 아닌 많은 선지자가 등장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유다의 신앙적 형편이 엉망이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서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에게로 돌이키고자 하였으나 유다는 선지자들의 말을 전혀 듣지를 않았습니다.
렘 7:23절을 보면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유다가 사는 길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즉 선지자를 세워서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만이 사는 길입니다.
그러나 “네가 그들에게 이 모든 말을 할찌라도 그들이 너를 청종치 아니할 것이요 네가 그들을 불러도 그들이 네게 대답지 아니하리니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는 국민이라 진실이 없어져 너희 입에서 끊어졌다 할찌니라”(렘 7:27,28)고 말씀한 것처럼 유다는 선지자들의 말을 무시한 채 자기들 나름대로 자신들이 살기 위한 길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다가 생각했던 사는 길이라는 것은 기껏해야 주변 정세를 살피면서 좀 더 유리한 쪽으로 향하는 것이 전부였을 뿐입니다.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여호야김 시대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오매 여호야김이 삼년을 섬기다가 돌이켜 저를 배반하였더니”라고 말합니다. 여호야김이 삼년동안 섬기던 바벨론 왕을 배반함으로 인해서 바벨론 왕이 유다를 공격을 한 것입니다. 여호야김은 애굽 왕에 의해서 왕으로 세워진 사람입니다. 또 당시 유다는 애굽의 영향 아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여호야김이 애굽을 뒤로 하고 바벨론을 섬기게 된 것은, 애굽이 바벨론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모든 주도권을 바벨론이 쥐게 된 것 때문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바벨론을 섬기고 삼년 쯤 지난 후에 애굽이 다시 강성하게 되었는지 여호야김이 바벨론을 배반하고 애굽을 섬기게 됩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여호야김을 괘심하게 여겨서 주변의 여러 군대를 모아서 유다를 공격하고 여호야김은 포로로 잡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여호야긴이 왕이 되었지만 그 역시 악을 행하였으며 바벨론의 침공으로 인해서 “저가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방백과 모든 용사 합 일만 명과 모든 공장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매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14절)고 말한 것처럼 일만 명이 넘는 수많은 백성과 함께 포로로 잡혀가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바벨론이 시드기야를 왕으로 세웠는데 시드기야 역시 악을 행하는 왕에 불과했으며, 결국 시드기야를 마지막으로 유다는 멸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유다 역사를 보면서 답답한 것은, 이방나라의 침략을 받으면서 고통을 당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그것이 자신들의 악함으로 인한 것임을 깨닫지를 못했느냐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서 그들의 악함에 대해 책망하시고 경고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그 말을 청종하지 않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들의 관심이 유다를 지탱하는 것에만 있었을 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의 회복에 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회복되는 것이 곧 진심으로 사는 길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좀 더 희망적이고 유리한 길을 제시하는 말에 귀를 기울인 것입니다.
이것은 예레미야서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렘 27:8-9절을 보면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섬기지 아니하는 국민이나 그 목으로 바벨론 왕의 멍에를 메지 아니하는 백성은 내가 그의 손으로 진멸시키기까지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벌하리라 너희는 너희 선지자나 너희 복술이나 너희 꿈꾸는 자나 너희 술사나 너희 요술객이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바벨론 왕을 섬기지 아니하리라 하여도 듣지 말라”는 말을 합니다. 예레미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바벨론과 느부갓네살을 섬기지 않으면 진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은 유다 백성들에게는 절망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편을 들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벨론의 편을 들고 계시는 것 같은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반면에 렘 28:2-4절을 보면 거짓선지자 하나냐가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여 가라사대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었느니라 내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이곳에서 바벨론으로 옮겨간 여호와의 집 모든 기구를 두 해가 차기 전에 다시 이곳으로 가져 오게 하겠고 내가 또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니야와 바벨론으로 간 유다 모든 포로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니 이는 내가 바벨론 왕의 멍에를 꺾을 것임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는지라”는 말을 합니다. 소위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바로 이것을 기대하는 것은 아닐까요? 유다가 기대하는 것도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말씀일 것입니다. ‘너희가 바벨론 왕을 섬기지 않게 될 것이다’는 것과 같은 말씀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누가 그런 말을 하여도 듣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하지만 자기 사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이 과연 어떤 말에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절망적인 말보다는 희망을 주는 말에 더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않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을 향한 축복의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신자가 잘 되는 길로 인도하시고, 신자가 잘되도록 축복의 말씀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주는 그러한 축복의 하나님을 믿지 않을 때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러한 말이 맞을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 축복의 말씀입니다. 우리를 복으로 인도하는 말씀인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자기 백성을 잘되는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문제는 어떤 의미에서 축복이고 어떤 의미에서 잘되는 길이냐는 것입니다. 자신이 잘되고 세상에서 영광을 얻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생각하는 축복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는 것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은 ‘이렇게 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과 같은 말에 귀를 기울일 뿐 죄를 선포하고 저주를 선포하며 우리를 책망하는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말씀을 청종하지 않는 유다와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선호하는 말만 듣는다는 것입니다.
유다가 사는 길은 애굽도 바벨론도 아니라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애굽의 눈치를 살필 것도 아니고 바벨론의 눈치를 살필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그 말씀을 청종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거기에 순종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바로 이 일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에서 자기가 사는 길을 듣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사는 길이 아니라 육신이 사는 길을 원했던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어느 나라가 힘있는가를 살피면서 배반을 하기도 하고, 그런 방식으로 사는 길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이것이 유다가 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 세대도 멸망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경제가 어렵고 주식이 폭락한 현실에서 세상의 관심은 경제가 사는 것이고 주식이 올라가는 것입니다. 온통 자신이 사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서도 희망적인 말을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결국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청종치 않는 결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그것이 망하는 길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과연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까? 물론 세상에 전혀 기대를 두지 않고 하나님 나라만을 소망한다면 십자가는 유일한 희망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유일한 희망으로 바라본다면 그는 세상에서는 죽은 자입니다. 세상에서 살 수 있는 길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사는 길에만 관심을 두고 있기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보이는 것이고,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는 길이 돈입니까? 사람이 사는 길을 돈을 버는 것으로 여긴다면 그는 믿음을 돈과 연관지어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믿으면 복 받는다’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에 희망을 두면서 자기 열심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믿고자 할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않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 우리를 복주어서 잘살게 하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죄악을 책망하고 저주하시면서 우리의 죄와 저주를 대신 담당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 그 뜻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이 생명나무를 감춰버린 그때부터 이미 죽은 자입니다. 우리는 살아있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미 죽은 자입니다. 그러한 우리를 살리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즉 우리의 사는 길은 예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예수님이 전부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전부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이 소중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말씀의 가치는 세상의 그 무엇에도 뺏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산자로 여기기 때문에 예수님을 말씀을 죽은 나를 살리는 생명의 말씀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자신을 힘 있는 자로 만들어 줄 세상의 것에 끌려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를 향해서 ‘너희는 죽었다’고 선포하시는 말씀들이 달갑지 않게 들리는 것입니다.
요시야 왕이 율법책을 발견하고 율법의 말씀을 들은 후에 옷을 찢으며 애통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죽은 자일 수밖에 없는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말씀은 우리를 십자가로 이끌어 갑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죽은 나를 보게 합니다. 죽은 나를 보게 되면 비로소 생명이 주께만 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 사람에게는 자연히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의 전부일 수밖에 없습니다.
(62강) 열왕기하 25:1-21 유다의 멸망
<본문>
시드기야 구년 시월 십일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 모든 군대를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와서 진을 치고 사면으로 토성을 쌓으매 성이 시드기야왕 십 일년까지 에워싸였더니 그 사월 구일에 성중에 기근이 심하여 그 땅 백성의 양식이 진하였고 갈대아 사람이 그 성읍을 에워쌌으므로 성벽에 구멍을 뚫은지라 모든 군사가 밤중에 두 성벽 사이 왕의 동산 곁문 길로 도망하여 아라바 길로 가더니 갈대아 군사가 왕을 쫓아가서 여리고 평지에 미치매 왕의 모든 군사가 저를 떠나 흩어진지라 갈대아 군사가 왕을 잡아 립나 바벨론 왕에게로 끌고 가매 저에게 신문하고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저의 목전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갔더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십 구년 오월 칠일에 바벨론 왕의 신하 시위대 장관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전과 왕궁을 사르고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살랐으며 시위대 장관을 좇는 갈대아 온 군대가 예루살렘 사면 성벽을 헐었으며 성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와 무리의 남은 자는 시위대 장관 느부사라단이 다 사로잡아가고 빈천한 국민을 그 땅에 남겨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 갈대아 사람이 또 여호와의 전의 두 놋기둥과 받침들과 여호와의 전의 놋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또 가마들과 부삽들과 불집게들과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 갔으며 시위대 장관이 또 불 옮기는 그릇들과 주발들 곧 금물의 금과 은물의 은을 가져갔으며 또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받침들을 취하였는데 이 모든 기구의 놋 중수를 헤아릴 수 없었으니 그 한 기둥은 고가 십 팔 규빗이요 그 꼭대기에 놋머리가 있어 고가 삼 규빗이요 그 머리에 둘린 그물과 석류가 다 놋이라 다른 기둥의 장식과 그물도 이와 같았더라 시위대 장관이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전 문지기 세 사람을 잡고 또 성중에서 사람을 잡았으니 곧 군사를 거느린 내시 하나와 또 성중에서 만난바 왕의 시종 다섯 사람과 국민을 초모하는 장관의 서기관 하나와 성중에서 만난바 국민 육십명이라 시위대 장관 느부사라단이 저희를 잡아가지고 립나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바벨론 왕이 하맛 땅 립나에서 다 쳐 죽였더라 이와 같이 유다가 사로잡혀 본토에서 떠났더라 (열왕기하 25:1-21)
<설교>
그리고 12절에서 “빈천한 국민을 그 땅에 남겨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남겨두었던 것은 포도원을 경작할 수 있는 농부가 전부였습니다. 바벨론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용사나 그를 도울 수 있는 대장장이들은 모두 바벨론으로 끌고 갔던 것입니다. 또한 백성들을 선동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나 지식층의 사람들도 모두 포로로 끌고 가지 않았겠습니까?
본문을 보면 유다가 어느 정도로 처참한 지경에 처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시드기야는 두 눈을 잃고 아들들까지 죽임을 당하고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끌려가는 신세까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유다가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까지 차단해 버린 채 철저하게 무너뜨린 것입니다.
우리는 북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을 정치적인 시각이 아니라 성경적인 시각에서 보아야 합니다. 즉 왕들이 정치를 잘못해서 국가가 혼란스러워져 멸망했다는 식의 말은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의 멸망은 왕의 잘못된 정치가 문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은 채 자기 멋대로 살았던 신앙적인 문제가 그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즉 다윗 왕조의 멸망은 그의 후손들이 행한 죄 때문에 벌어진 결과입니다. 도대체 그들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이스라엘의 죄를 말하면 가장 먼저 우상 숭배를 떠올릴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상을 섬긴 그 이유 하나로 멸망을 받은 것입니까? 물론 우상을 섬긴 것이 멸망의 원인에 포함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도 우상을 섬기는 데 있어서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상은 자신을 위한 신을 섬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을 향한 관심으로 하나님께 나온다면 그에게는 하나님 또한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신으로 각인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싫어하신 것입니다.
유다의 왕들은 거의 모두가 하나님 앞에 악을 행했습니다. 다윗의 길로 행하면서 모든 우상을 무너뜨리며 유다의 신앙을 개혁했던 요시야 이후로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그리고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까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한 왕들이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말해주는 것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말씀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멸망의 이유입니다. 아마 여러분에게는 이러한 하나님이 상당히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진노하시고 심판하시고 멸망케 하시는 하나님보다는 복주시고, 사랑해주시고, 형통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더 편하고 친근하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유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멸망을 받은 것이라면, 우리는 유다처럼 멸망을 받지 않기 위해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를 쓰면서도 혹시 순종하지 못해서 심판을 받고 재앙이 있게 되면 어떻하나? 라는 염려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하나님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유다를 망하게 하신 하나님의 그 마음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삼하 7:12-13절을 보면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다윗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14절을 보면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라는 말씀도 하신 것입니다.
다윗이 나라를 견고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면서 죄를 범하면 징계하시겠다는 단서를 정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대로 지금 유다는 죄를 범함으로 멸망이라는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은 파기된 것입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파기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를 범하는 유다를 약속을 지키신다는 명목으로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징계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징계에는 죄를 범한 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즉 징계는 징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귀한 뜻과 사랑을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의 멸망도 그들을 멸망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또한 영원한 멸망으로 끝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삼하 7:15절에는 이런 말씀을 합니다.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처럼 유다가 비록 죄로 말미암아 멸망을 받긴 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에게서 은총까지 빼앗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따라서 유다의 멸망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말씀의 능력과 그 중요성을 잊고 살기 십상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힘을 의지하면서 다만 자신을 위한 삶에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나 유다가 자신을 위해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의 뜻에는 도무지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던 그 모습이 바로 우리들의 현재 실상과 흡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멸망을 우리 앞에 등장시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정신차리라는 하나님의 뜻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유다가 우상을 섬기며 다른 신을 찾는 것은, 자신들의 존재 근거가 하나님의 언약과 말씀에 있음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풍요롭게 해 줄 수 있는 이방 신을 섬긴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방신을 섬기는 것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삶을 살아갈 때 사람은 불만과 슬픔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원하는 것을 손에 쥐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고 남보다 적다는 것으로 슬퍼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있다면 그러한 불만과 슬픔으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곧 하나님의 뜻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멸망을 하고 모든 것을 빼앗긴 채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이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당할 고초가 어떤 것인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유다는 바벨론에서의 포로 생활로 말미암아 비록 가난하게 산다고 해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살았던 것이 참으로 큰 복이었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복을 미처 알지 못하고, 더 풍요롭게 살고 싶어서 이방신을 끌어 들였던 것을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유다의 멸망 이야기는 ‘너희도 죄를 범하면 멸망 받는다’는 엄포가 아니라 ‘지금 우리가 하나님께 받아 누리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확인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세상을 말씀으로 다스리고 있고,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전개되고 있음을 믿는다면 신자는 걱정하고 근심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잘돼야 한다’는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살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자신을 어려워지게 하고 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근심과 걱정이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심 걱정은 자기중심적인 존재로 태어난 인간에게는 팔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유다처럼 멸망이라는 징계를 받았다고 한다면, 과연 예전에 근심하고 걱정거리였던 것들이 멸망을 받고 이방 나라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살아가는 형편에서도 여전히 근심, 걱정거리로 남아 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예전에는 근심과 걱정거리였던 것들이 이방 나라에서 고초를 겪고 보니 은혜고 행복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유다의 멸망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뜻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유다의 멸망을 보면서 바로 이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항상 근심하고 걱정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까 조바심을 내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비신앙적인 것이고 악한 것임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지금보다 더 나쁜 형편으로 여러분을 몰아넣으신다면, 여러분이 걱정하고 근심하고 불만을 가지고 있는 지금의 형편으로 되돌아가기를 소원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사람은 더 나아지고자 하는 욕심으로 인해서 현재의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그로 인한 기쁨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배우게 하시기 위한 취지로 유다의 멸망처럼 실패의 길로도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당하는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일제시대와 육이오를 겪었던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지금의 형편이 아무리 나쁘고 힘들고 어렵다고 해도 그때 그 시절에 비할 바가 못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지금 당장 힘들고 어렵다는 것만 생각하면서 불만을 가지고 근심과 걱정에서 떠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살기를 원한다면 오늘 본문을 보면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동안 내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잊고 살았는데 오늘 유다의 멸망을 통해서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배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신앙인이라면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이 유다를 멸망시키지 않으셨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하신 은혜와 사랑에 대해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멸망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을 수 있는 귀한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의 멸망이라면 괜찮지 않습니까? 그래도 우리들 마음 한구석에는 어쨌든 멸망과 같은 실패는 싫다는 생각이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내가 날 지키고자 하는 욕망은 강합니다. 그러니 징계를 동원하지 않고는 우리를 진리의 길에 붙들어 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하나님 저를 징계하시고 더 징계하십시오’라는 외침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신앙인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이 편하고 즐겁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그 생각부터 버리십시오. 그러한 생각은 여러분을 근심과 걱정에 붙들어 놓을 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 여러분의 목자로서 모든 인생을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를 멸망하게 하시고, 이방나라로 붙들려 가게 하셔서 극심한 고초를 겪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징계가 결국 우리의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 간다는 것을 생각하시면서 징계 또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 이유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신자는 걱정과 근심보다는 하나님의 인도를 믿으면서 하나님을 아는 신자로 살다가 죽기를 소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가 멸망을 받는 이야기는 공포나 위협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귀한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유다의 멸망은 그들의 죄가 원인입니다. 그런데 우리도 죄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유다의 멸망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죄악 가운데 있는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은 과분한 것뿐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기에 기쁨이 없고 더 많은 것으로 채우기에 급급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것이 잘못된 것임을 배우게 하기 위해 유다처럼 우리를 실패의 길로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실패가 있을 때 어려움이 있고 고통이 있을 때, 그러한 실패와 고통을 안겨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