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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열왕기하 강해 1

공 상희 2009. 5. 6. 13:54

 

 

 

 

 

 

 

 

열왕기하 강해 1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1강) 열왕기하 1:1-4  주관자이신 하나님

 

<본문>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였더라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저희더러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서 저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찌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열왕기하 1:1-4)

 

 

 


<설교>


여러분은 살아가시면서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하십니까?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으로 믿고 있는데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이 세상을 다스리고 주관하고 계심을 어떻게 경험하시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경험하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을 살아계신 분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지 이론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론적인 사고는 자신의 삶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평소에 하나님을 믿고 있었고 많이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모든 것들이 조그마한 문제 하나로 인해서 모두 무너져 버리는 것을 경험하게 될 뿐입니다.

 

 

 


물론 구약에서와 같은 기적들이 우리의 삶에서 발생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느낄 수는 있을 것입니다. 또한 기도만 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병도 낫는 것을 체험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도해도 하나님은 그 어떤 반응도 하지 않으시고, 세상을 둘러 봐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으며, 나를 도우시고 함께 하신다는 그 어떤 흔적도 보이지 않을 때 우린 당황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 일이 없이 편안히 생활 할 때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기도 역시 하나님의 응답 여부에 관심을 둔 것이 아니었기에 하나님이 내 기도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그냥 그러려니 하면서 단지 막연하게 하나님은 살아계신다고 여겼던 모든 것들이 힘든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어도 막연하게나마 하나님은 살아계신다고 믿었는데,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두고 아무리 기도를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고 해결은 되지 않을 때 결국 하나님의 존재 여부에 대한 믿음이 흔들림을 경험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에 신뢰할 수 있는 것에 눈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와 같은 일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아하시야가 사마리아에 있는 그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들매 사자를 보내며 저희더러 이르되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아합이 죽고 아하시야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는데, 이 아하시야도 바알을 섬기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자였습니다. 이 아하시야가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이 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난간에게 떨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일 역시 하나님이 아하시야에게 간섭하신 결과임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무슨 천사를 보내서 아하시야를 난간에서 밀쳐 버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하시야의 실수로 인해서 떨어진 것이겠지만, 하나님은 아하시야가 떨어지도록 그냥 내 버려두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간섭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난간에서 떨어진 것 때문에 아하시야가 병이 들었고, 그 병이 가벼운 것이 아니었는지 아하시야는 병이 낫겠는지를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묻기 위해 사자를 보낸 것입니다. 그리고 3,4절의 “여호와의 사자가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올라가서 사마리아 왕의 사자를 만나서 저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찌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가 이에 가니라”는 내용을 보면, 자신의 병의 여부를 우상에게 묻는 아하시야가 반드시 죽을 것임을 엘리야를 보내서 선포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라고 진노하십니다. 이 말은 왜 나에게 묻지 않고 우상에게 물었느냐는 단순한 책망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에게 분명히 하나님이 계시는데 하나님께 묻지 않고 우상에게 묻는 아하시야의 사고방식 자체가 하나님이 없는 자로 살아가는 이방인의 방식과 다를 바 없음을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하시야는 자신의 병에 대해 왜 하나님께 묻지 않았을까요?

 

 

 


대개 점쟁이를 찾아가서 토정비결을 보면서 한 해의 운수를 묻는 사람들의 심리는 뭔가 좋은 말을 듣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가령 두 점쟁이가 있는데, 한쪽은 항상 운수가 좋은 쪽으로 말을 해주고 한쪽은 운수가 나쁜 쪽으로 말을 한다면 사람들은 어느 점쟁이를 찾아가겠습니까? 당연히 좋은 쪽의 말을 해주는 점쟁이를 찾아갑니다. 그 말이 맞든 틀리든 운수가 좋다는 기분 좋은 말을 듣고자 하는 것이 사람의 심리이기 때문입니다. 즉 아무리 맞는 말이라고 해도 자신에게 나쁜 말은 듣기를 거부하는 것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좋은 말도 많은데 왜 나쁜 말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아하시야도 하나님에 대해 이런 생각을 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 물어봐야 좋은 말 들을 수가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보다는 항상 좋은 말을 해주는 바알세붑에게 물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에게서 맞는 말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에게 좋은 말을 듣기를 원하십니까? 맞는 말이면서 듣기에 좋은 말이면 금상첨화가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 수 있겠지만, 맞는 말이면서 듣기에 좋은 하나님의 말씀이 과연 있을까 의심이 듭니다.

 

 

 


물론 신자의 생각과 소망의 방향이 달라졌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맞는 말이면서 듣기에 좋은 말로 얼마든지 다가올 수 있습니다. 즉 신자가 세상이 아니라 하늘에 모든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것을 바라는 것으로 생각과 방향이 달라졌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꿀송이처럼 단 말씀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맞는 말이면서도 신자를 감격하게 하고 말씀에 마음을 뺏기게 할 정도의 단 말씀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 생각과 소망이 여전히 세상을 향해 있다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거북하고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을 회피하고 심정적으로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진리라고 해도 내 마음을 거북하게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맞느냐 틀리느냐의 여부보다는 내 마음에 가볍고 듣기에 좋은 말을 듣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닌 바알세붑을 찾아가는 아하시야의 심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가지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떻다고 생각합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을 만나면 칭찬을 받고 축복의 말, 즉 기분 좋은 말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모든 규례들을 펼쳐 놓고 우리 자신을 비춰본다면 세상에 어떤 사람도 하나님께 우리가 원하는 좋은 말을 들을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규례를 순종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존재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항상 하나님을 분노케 하는 진노의 그릇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기분 좋은 말을 듣고자 한다면 그것은 모순일 수밖에 없습니다. 내 자신의 실체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어리석음인 것입니다. 아하시야는 자신의 악행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습니다. 바알을 섬겨 숭배하며 여호와의 노를 격동하는 존재였으면서도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생각지를 않습니다. 만약 아하시야가 자신의 불의함을 생각했다면, 난간에 떨어져 병이 들었을 때에 그것을 오히려 회개의 기회로 삼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하시야는 우상을 찾음으로써 끝까지 하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아하시야는 자신이 난간에서 떨어진 것도 병이 든 것도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일임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인간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병이 들었든 병이 낫든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일입니다. 우상은 우리의 그 어떤 것도 주관하지를 못합니다. 그런데도 우상을 찾아서 자신의 병을 묻는다는 것은 생명이 여호와께 있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생명이 여호와께 있음을 생각한다면,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서 여호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아하시야처럼 병이 들었다면 병이 들게 하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두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병에 초점을 둡니다. 그러므로 관심이 병이 들게 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병이 낫는 것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병이 낫기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생명이 여호와께 있음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단지 병 낫는 것이 목적이 될 것이고,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무슨 방법을 동원해도 병이 낫지 않게 되면 결국 하나님을 원망하는 길로 나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병이 낫게 되면 무슨 약, 또는 어떤 방법으로 인해 낫게 되었다는 것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심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겉은 하나님을 잘 믿고 사는 것처럼 여겨지는데 실제 삶에는 하나님이 계심을 철저하게 잊고 살아가는 것일 수 있음을 생각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욥을 보면 하루아침에 엄청난 재앙을 겪음으로 재산과 자식을 모두 잃어버립니다. 그리고 견딜 수 없는 질병을 겪게 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런 욥을 그냥 두고 보고 계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답답했던지 욥은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8,9)라고 말합니다.

 

 

 


사방을 둘러 봐도 하나님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욥은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욥 23:13,14)는 말로써 하나님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일하심을 고백합니다. 자신이 당하는 재앙도 하나님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은 숙명론의 태도가 아닙니다. 믿음과 숙명은 다릅니다. 믿음은 행복과 불행을 주관하는 분에게 초점을 둔 삶의 태도라고 한다면, 숙명은 자신의 행복과 불행 자체에 초점을 둔 삶의 태도입니다. 전자는 행복과 불행이 결국 합하여 선하게 인도된다는 입장이라면 후자는 행복과 불행이 그것자체로 끝나버립니다. 겉으로 본다면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다시 구분하면 이렇습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행복과 불행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두려워한다면 숙명주의자는 행복과 불행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날 신자가 자신의 행복과 불행에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병이 들었으면 낫는 것에만 관심을 둡니다. 좋은 일만 생겨야 한다는 기대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고 만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재앙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욥은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욥 23:15). 이것이 욥이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는 것은 무서워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서 굴복하는 것을 뜻합니다.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고 순종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자신에게 좋은 일이 있게 해주고, 좋은 말을 해주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에 붙들려서 생명으로 끌려가는 자기 인생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경험할 것은,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병이 낫는 것도 아니라 내 인생이 흑암에 묻히는 것 같은 두려움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나의 생명이 여호와께 있음을 믿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이 있을 때 신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내게 좋은 것을 얻고자 하지 않습니다. 내게 좋은 말을 듣고자 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우리의 생각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계획과 전능하심만을 믿을 뿐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에 이런 경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막연하게 생각에 머물러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강) 열왕기하 1:5-16  오십 부장의 죽음

 

<본문>

 

사자들이 왕에게 돌아오니 왕이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돌아왔느냐 저희가 고하되 한 사람이 올라와서 우리를 만나 이르되 너희는 너희를 보낸 왕에게로 돌아가서 저에게 고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네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고 보내느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찌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더이다 왕이 저희에게 이르되 올라와서 너희를 만나 이 말을 너희에게 고한 그 사람의 모양이 어떠하더냐 저희가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왕이 가로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이에 오십부장과 그 오십인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매 저가 엘리야에게로 올라가서 본즉 산 꼭대기에 앉았는지라 저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엘리야가 오십부장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너와 너의 오십인을 사를찌로다 하매 불이 곧 하늘에서 내려와서 저와 그 오십인을 살랐더라 왕이 다시 다른 오십부장과 그 오십인을 엘리야에게로 보내니 저가 엘리야에게 일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속히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엘리야가 저희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너와 너의 오십인을 사를찌로다 하매 하나님의 불이 곧 하늘에서 내려와서 저와 그 오십인을 살랐더라 왕이 세번째 오십부장과 그 오십인을 보낸지라 세째 오십부장이 올라가서 엘리야의 앞에 이르러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컨대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인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전번의 오십부장 둘과 그 오십인들을 살랐거니와 나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하매 여호와의 사자가 엘리야에게 이르되 너는 저를 두려워 말고 함께 내려가라 하신지라 엘리야가 곧 일어나 저와 함께 내려와서 왕에게 이르러 고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사자를 보내어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하니 이스라엘에 그 말을 물을만한 하나님이 없음이냐 그러므로 네가 그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찌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니라 (열왕기하 1:5-16)

 

 

 


<설교>


사람이 죽음에 대해 자유롭기란 쉽지 않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짊어진 무거운 짐을 감당하지 못해서 그 해결책으로 죽음을 선택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유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한 것일 뿐입니다. 무거운 짐은 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는 길은 짐을 벗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짐을 벗을 방도가 전혀 보이지 않을 때 택하는 것이 죽음입니다. 죽어 버리면 모든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이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살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것입니다. 결국 무거운 짐으로 인해서 자신이 죽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때문에 진심으로 죽음에 대해 자유로운 사람이라면 세상에서 어떤 짐이 지워지든 그 짐으로 인한 결과를 두려워하고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편에서라도 예수님으로 인해서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자유를 누리지를 못한다면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내가 사는 길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항상 내가 사는 것에 관심을 두기 때문에 세상에서 낮아지고, 초라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살기 위한 한 방편으로 하나님을 찾고 그 이름을 부르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곧 우상을 찾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난간에서 떨어져 병이든 아하시야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을 찾아가 병이 낫겠는지를 물어보고자 한 것도 오직 살고자 하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둔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이 얘기가 병이 들었을 때 병 낫기 위해서 힘쓰면 안되고 가만히 죽기를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단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죄를 안고 살아가는 인간의 본질이며 그것이 곧 하나님이 정하신 이치라는 사실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낫고자 하는 열망만을 가진 채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상은 인간을 죽이지 않습니다. 항상 인간이 꿈꾸는 행복한 삶을 이루어주고 성공을 도와주는 신으로 존재합니다. 즉 인간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능력자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되 나를 죽이시는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 살고자 하는 열망으로 하나님을 부른다면 그것은 바알세붑을 찾는 것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하시야는 에그론으로 가던 사자들이 돌아와서 엘리야의 말을 전합니다. 아하시야는 그 말을 전한 자가 엘리야인 것을 알고 오십 부장과 오십 인을 엘리야에게 보냅니다. 오십 부장과 군사 오십 인을 보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야를 정중히 모셔오기 위한 것은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 엘리야를 붙들어다가 옥에 가두거나 죽이려는 의도가 아니겠습니까?

 

 

 


이들이 엘리야를 찾아가서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 하셨나이다”(9절)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내가 만일 하나님의 사람이면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너와 너의 오십 인을 사를찌로다”는(10절)말을 하고 이 말대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오십 부장과 오십 인을 살라버립니다. 그리고 아하시야가 다시 두 번째로 오십 부장과 오십 인을 보냈지만 그들 역시 하늘에서 내려온 불에 의해서 같은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이런 내용을 보면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우린 성경을 보면서 나와 상관없는 아주 먼 옛날의 남의 얘기로만 간주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죽임을 당한 당사자가 여러분의 자식이나 가까운 친척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인데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이해할 수 없다고 아우성일 것입니다.

 

 

 


그러면 두 오십 부장과 백 명의 군사들은 왜 죽임을 당해야 합니까? 그들이 무슨 죄가 있기에 하늘에서 내려온 불에 의해서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물론 모든 사람은 죄인이라는 시각에서 본다면 그들이 죽는 것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로 갔던 오십 부장과 오십 인들의 군사는 살았지 않습니까? 똑같은 죄인인데 왜 누구는 살리고 누구는 죽이시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군사들의 죽음은 단순한 육신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의 불에 의해 죽었다는 것은, 이러한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하시야가 군사를 보내서 엘리야를 데려오도록 한 것은, 자신의 왕의 권세를 내세워서 자기 뜻대로 엘리야를 불러 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에 의해서 주관되고 있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아하시야의 모든 생각에는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고 뜻하는 대로 움직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십 부장도 역시 아하시야와 같은 생각을 보여줍니다. 오십 부장은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 하셨나이다”라는 말을 하는데, 엘리야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았다면 엘리야가 왕의 명령에 복종할 사람이 아님을 알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할 뿐이며, 또한 하나님이 주관하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세상의 어떤 권세로도 그를 붙들 수 없고 명령할 수 없음을 알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십 부장은 엘리야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르면서도 왕의 명령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십 부장이 하나님의 권세에 복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하시야의 권세에 복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첫 번째의 오십 부장과 오십 인이 하나님에 의해 죽었는데도 불구하고 아하시야는 계속해서 오십 부장과 오십 인을 보냅니다. 그리고 오십 부장 역시 엘리야에게 가서 처음의 오십 부장과 같은 말을 합니다. 이러한 모습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권세를 인정하지 않고 복종하지 않는 인간의 완악함을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오십 부장은 달랐습니다. 13,14절을 보면 “왕이 세 번째 오십 부장과 그 오십 인을 보낸지라 셋째 오십 부장이 올라가서 엘리야의 앞에 이르러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원컨대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 인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전번의 오십 부장 둘과 그 오십 인들을 살랐거니와 나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하매”라고 말합니다.

 

 

 


이 사람은 엘리야가 진심으로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생명이 여호와께 있음을 알았습니다. 아하시야가 엘리야의 생명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아하시야나 자신들의 생명 또한 자기들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과 오십 인의 생명을 귀히 여겨달라고 애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생명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권세를 알고 그 권세에 복종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17절에 보면 왕이 엘리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세상은 하나님의 권세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가 한순간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권세 아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흘러간다면, 세상의 마지막은 분명 심판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살기 위해서, 영원히 존재하기 위해서 모든 지식을 동원하고 의학과 과학을 발전시킨다고 해도 영원한 심판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이러한 현실을 모른다고 해도 신자는 알지 않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펴면 보게 되는 내용들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성취되어가는 말씀의 세계가 아닙니까?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세상은 하나님의 권세를 벗어난 적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이 어긋나거나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두려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복종해야 할 분 역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여호와께 있음을 알고 겸손한 가운데 우리의 생명을 여호와께 맡기고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세상의 힘과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살 길을 찾기 위해서 동분서주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모든 것을 여호와께 맡기고 선하신 여호와께서 내 인생을 사용하여 어떤 선을 이루시는가를 바라보는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오십 부장이 엘리야를 말로만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일컫는 것처럼, 신자 역시 말로만 하나님의 다스림과 권세를 얘기해서는 안됩니다. 진심으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로서의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내 생명까지도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세상처럼 오로지 사는 것에 마음 뺏기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선포된 우리의 실체를 바라보면서 여호와의 긍휼을 구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교회에서 많이 떠들고 있는 영적치유니, 내적 치유니 하는 것들은 살기위해서 바알세붑을 찾아가는 아하시야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자신들을 치유하시는 분으로만 바라볼 뿐, 죽이시는 분으로는 보지를 않습니다. 죽어야 하는 것이 자신의 본질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기 때문에 사망에 처한 영혼을 구출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육신을 이롭게 하시고 육신을 살리시고 마음만 편안하게 해주면 그것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만족을 채우려고 할 뿐입니다.

 

 

 


세 번째 오십 부장은 자신의 생명이 여호와께 있음을 알았고, 불쌍히 여겨달라는 고백을 함으로써 살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것이 자신의 보잘것없는 생명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에게 있어서 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자신의 생명의 실체를 보게 된 것입니다. 만약 이 사람에게 누군가가 영적 치유를 말하면서 유능한 강사를 소개해준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그 사람을 찾아가서 성령의 역사와 함께 치유를 받고자 하겠습니까?

 

 

 


생명이 여호와께 있고, 여호와의 긍휼만이 우리의 모든 것을 치료함으로써 사망에서 건짐 받고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가게 할 것인데 누구를 의지하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다만 여호와를 바라보며 자신의 생명을 부탁하면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할 것 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살아야 한다는 생각부터 접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권세를 믿으신다면 하루하루 살게 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살고자 하는 나의 노력에 의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세에 내 몸이 복종됨으로써 살고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따라서 살고자 하는 노력보다는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구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이 있는 가운데서도, 질병으로 고생을 하는 가운데서도, 실패한 가운데서도 신자가 구할 것은 하나님의 권세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즉 어떤 형편에서든 죽게도 하시고 살게도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백성입니다.

 

 

 

 

 

(3강) 열왕기하 2:1-11  갑절의 영감

 

<본문>

여호와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로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 벧엘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에게로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줄을 아나이까 가로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엘리야가 저에게 이르되 엘리사야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여리고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하니라 저희가 여리고에 이르매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엘리사에게 나아와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줄을 아나이까 엘리사가 가로되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 엘리야가 또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요단으로 보내시느니라 저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행하니라 선지자의 생도 오십인이 가서 멀리 서서 바라보매 그 두 사람이 요단가에 섰더니 엘리야가 겉옷을 취하여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육지 위로 건너더라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가로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고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열왕기하 2:1-11)

 

 

 


<설교>


본문은 엘리야의 승천과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갑절의 영감을 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특히 엘리사가 갑절의 영감을 구하는 내용은 ‘갑절의 능력을 받자’라는 표어가 되어 커다란 현수막에 적힌 채 수많은 교회의 강대상 옆면에 걸려보지 않은 적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고 또 많이 애용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의 어느 일부분만 끼고 있는 안경의 색깔에 따라 달리보이는 것이 아니라 세상 전체의 색깔이 달라지는 것처럼 인간의 욕망이라는 안경을 끼고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 전체의 내용은 인간의 욕망이 짙게 깔린 내용으로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모든 성경의 구절을 욕망이라는 틀에 맞춰서 해석해 낼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바른 방향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바른 방향의 해석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 앞에 선 하나님의 백성을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로 초대하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욕망에 갇혀 버릴 때, 무엇이 욕망인가를 간파하지 못하고 오히려 욕망을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명목으로 위장하기를 서슴치 않을 때 결국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욕망에 함께 어울려 춤추면서 멸망으로 끝나버리게 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성경은 절대로 인간의 욕망을 옹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에 응답하기 위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고 약속이 있고 말씀이 있는데, 악한 인간의 욕망이 그것보다 중요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앞세운 채 말씀을 보기 때문에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이 전파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만이 거룩으로 포장된 채 전파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욕망을 거두고 본문을 대한다면 과연 본문의 의미가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게 될까요? 과연 엘리사는 흔히들 생각하는 것처럼 엘리야가 갖고 있는 능력을 갑절이나 받기를 원했을까요? 엘리야의 승천에 대한 기록은 “여호와께서 회리바람으로 엘리야를 하늘에 올리고자 하실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로 더불어 길갈에서 나가더니”(1절)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뒤의 구절을 보면 엘리야가 하늘로 가기 전에 벧엘과 여리고로 가서 선지자의 생도들을 만나고 마지막에 요단으로 가서 하늘로 올리어 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엘리야를 하늘로 올리우시기 전에 벧엘로, 여리고로 요단으로 가게 하셨을까요? 이 길에 엘리사가 계속 동행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엘리사에게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는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엘리야가 하늘로 간 후에 세상에 남은 엘리사가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기 위한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는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 지역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분배받은 기업인 것입니다. 그리고 요단은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의 땅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엘리야는 엘리사를 데리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 지역을 돌아본 것이고, 마지막으로 요단으로 옴으로써 가나안을 빠져나온 것이 됩니다. 그리고 가나안을 빠져나온 요단에서 하늘로 올리움을 받은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왕이면 약속의 땅에서 하늘로 올라갔으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가나안의 지역을 돌아본 후 가나안에서 나오게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지금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가나안에 존재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원하셨던 참된 이스라엘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일은 가나안의 이스라엘이 아닌 참된 이스라엘을 세우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가나안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채 오직 자신들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은혜가 아니라 힘을 의지하면서 약자들의 피를 흘리는 이스라엘로 전락해 버린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자신들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 우상을 찾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세우고자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를 보내서 이스라엘을 책망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을 책망하고 심판하는 역할로 세워진 것이 엘리야이기 때문에 엘리야가 일할 때의 이스라엘의 분위기는 심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쫓겨 다니며 죽음의 위협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서도 엘리야는 자신의 사명에 게으르지 않고 감당했던 것입니다.

 

 

 


엘리야에게 있어서 능력이라면 바로 이것입니다. 고후 4:8-10절에서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자신을 위협하는 어떤 상황에서도 싸이지 아니하고, 어떤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고 핍박을 받는다고 해도 버린바되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능력인 것입니다.

 

 

 


엘리야의 뒤를 이을 엘리사가 갈 길도 엘리야와 다르지 않습니다. 엘리사의 할 일은 현재의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님을 선포하면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세우는 것입니다. 기존의 이스라엘을 부인하는데 이스라엘이 과연 그 말을 곱게 받겠습니까? 따라서 엘리사 역시 엘리야와 같은 고난과 핍박의 길을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갑절의 영감을 받아서 자신에게 닥칠 고난과 핍박을 피할 수 있기를 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야는 영감이 없어서, 능력이 없어서 고난과 핍박을 받았겠습니까? 오히려 반대로 영감과 능력은 어떤 고난의 상황과 형편에서도 말씀을 선포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영감을 갑절이나 받을 마음이 있습니까?

 

 

 


사실 갑절의 영감, 또는 능력이라는 말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못마땅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저것 골치 아프게 따질 것 없이 ‘엘리야의 능력을 갑절이나 받아서 우리도 능력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자’라고 말한다면, 그래도 속에서 뭔가 긍정적 반응도 있을 수 있고, 또 갑절의 능력을 구해야겠다는 다짐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갑절의 영감을 엘리야처럼 고난과 핍박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으로 해석해버린다면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욕망이 끊어진 해석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마음에서부터 반발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께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가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지 욕망으로 가득한 내 마음과 일치가 되느냐가 우선 되면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내 마음과 일치 되지 않는다면 거부하겠다는 마음이 있습니까? 그럴 마음이 아니라면 항상 기준은 내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이 뜻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현대교회에서는 갑절의 영감을 힘을 의미하는 능력으로 여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은 외면한 채 자신의 욕망으로만 성경을 보고 있는 증거입니다. 능력을 받아서 선지자처럼 사도들처럼 어떤 핍박과 고난의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말씀을 전하는 길로 가기를 소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능력으로 교회를 부흥시키고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킴으로써 자신을 나타낼 수 있기를 원하는 것이야 말로 욕망의 활동에 불과할 뿐입니다. 엘리사가 구한 갑절의 영감을 신비한 일을 행하는 능력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감은 ‘영적인 느낌’으로 표현될 수 있는데, 그것보다는 영에 의해 인도받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인도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갑절이나 구한다는 것은 엘리야보다 더 나은 순종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가 인도받았던 그 길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않기를 소원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벧엘과 여리고에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엘리사에게 “여호와께서 오늘날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취하실 줄을 아나이까”(3,5절)는 말을 합니다. 선지자의 생도들이 이런 말을 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들은 엘리야를 따라다닌다고 해도 엘리야가 하늘로 가버린다면 엘리야를 따라다니는 일들이 자기들에게 아무런 득이 없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결국 엘리사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엘리야가 하늘로 갈 것을 알고 엘리야를 따라다니느냐는 의미였습니다. 즉 엘리야가 하늘로 가버린다면 지금 당신이 엘리야를 따라다닌 일들이 다 별 볼일 없게 된다는 것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이들의 물음에 대해 엘리사는 “나도 아노니 너희는 잠잠하라”고 답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라다님으로써 무슨 득을 보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선지자의 생도들은 엘리야와 엘리사가 요단가에 섰을 때 멀리서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신앙은 머리로만 알고 있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만 바르게 알고 있으면 신자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가신 그 길로 뛰어들게 만듭니다. 즉 생각하는 것으로 멈추지 않게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할 것은 갑절의 영감이라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엘리아의 길을 가기 위해서 갑절의 영감이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의 길을 가기 위해서 사도들의 그 길을 가기 위해서 갑절의 영감이 필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은 우리의 힘으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와 능력으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한마디로 말해서 고난 받는 길을 가기 위해서 갑절의 영감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고난은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인데, 오히려 고난의 길을 가기 위해서 갑절의 영감을 구한다는 것이 세상의 상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참된 생명의 길인가를 알았다면 그 길을 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무슨 득을 보겠다는 생각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예수님에게는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갈 마음도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득이 되는 다른 예수를 예수로 인정하면서 따르는 것입니다. 그 예수는 다만 잘 믿을 것을 요구할 뿐입니다. 주일 성수 잘하고, 십일조 잘하고, 기도하고 성경 많이 보면 복주겠다는 말을 합니다. 이 예수가 인기가 많은 세상입니다. 고난을 말하며 고난의 길을 따라올 것을 외치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고개를 돌려버립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길갈에 있으라하고, 벧엘에 있으라 하고, 여리고에 있으라 했을 때 엘리야를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하면서 따라 다녔습니다. 그 이유가 갑절의 영감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겠습니까? 앞으로 엘리사의 길이 엘리야의 영감이 없이는 갈 수 없는 길임을 알았기에 오직 영감을 구하기 위해 엘리야를 떠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하늘로 가기 전에 영감을 받아야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엘리사가 갑절의 영감을 구했을 때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고 말합니다. 왜 어려운 일을 구한다고 말할까요? 갑절의 영감을 엘리야가 줄 수 없기 때문일까요? 그것보다는 엘리사가 가고자 하는 길이 참으로 어려운 길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가 믿음을 구하고 성령을 구해야 하는 것은, 신자가 가는 길이 참으로 어려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갈 수 없는 길이기 때문에 갑절의 영감, 즉 성령을 구하고 능력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께 구할 것이 무엇인가?’하는 것은 진심으로 신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고, 신자의 위치에 서서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며 돈이 있어야 살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올 것은 결국 돈을 구하고 성공을 구하고 육신을 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신자의 길을 가고자 하신다면 갑절의 영감을 구하십시오, 그리스도의 영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셔서 여러분의 삶을 그리스도의 뜻에 일치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구하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삶이 예수님의 이름만 증거되는 길로 나아갈 수 있기를 소원하시기 기도하시고, 부디 여러분의 마음이 세상을 향하고 땅의 것 때문에 분주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길에 순종하는 것으로 고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4강) 열왕기하 2:12-18  후계자 엘리사

 

<본문>

엘리사가 보고 소리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가지고 돌아와서 요단 언덕에 서서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가로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저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 맞은편 여리고에 있는 선지자의 생도들이 저를 보며 말하기를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사의 위에 머물렀다 하고 가서 저를 영접하여 그 앞에서 땅에 엎드리고 가로되 당신의 종들에게 용사 오십인이 있으니 청컨대 저희로 가서 당신의 주를 찾게 하소서 염려컨대 여호와의 신이 저를 들어가다가 어느 산에나 어느 골짜기에 던지셨을까 하나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보내지 말라 하나 무리가 저로 부끄러워하도록 강청하매 보내라 한지라 저희가 오십인을 보내었더니 사흘을 찾되 발견하지 못하고 엘리사가 여리고에 머무는 중에 무리가 저에게 돌아오니 엘리사가 저희에게 이르되 내가 가지 말라고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였느냐 하였더라 (열왕기하 2:12-18)

 

 

 


<설교>


지난 시간에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갑절의 영감을 구하는 내용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 내용에서 주의할 것은 엘리사가 구한 갑절의 영감이 양적으로 두 배의 영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즉 엘리사는 엘리야보다 두 배의 영감을 받았으니까 엘리야보다 두 배로 더 많은 일을 했다거나, 능력이 두 배로 더 많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규례에는 장자에게는 두 몫의 유산을 주라고 되어 있습니다. 장자는 그 가문을 이어갈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엘리사가 갑절의 영감을 구하는 것은, 엘리야의 장자의 위치에서 엘리야의 모든 일을 이어가겠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높이고 자랑할 만한 일을 하고 싶은 욕망에 치우친 사람들이 갑절의 욕망을 양적인 의미로 받아들여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능력을 구하지 않습니까?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능력을 구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능력을 아예 필요로 하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고자 하는 신자라면 분명 자신의 무능력과, 연약함을 절실히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들처럼 어떤 핍박과 고난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기고 그 길을 가고자 하는 신자라면 분명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는 갈 수 없는 길임을 깨닫게 되고 따라서 하나님께 능력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능력을 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힘이 필요 없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복음과 상관이 없고, 십자가가 서 있는 곳과는 다른 방향의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기 위한 힘과 도우심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혹 능력을 구한다면 그것은 결국 자신의 삶을 평탄하게 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자 엘리사는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12절)라고 소리 지릅니다. 아주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을 것입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내 아버지여’라고 부른 것은 엘리야가 자신을 제자로 삼았기 때문일 수 있고, 무엇보다도 엘리야를 의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사에게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지키는 병거와 마병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을 지키는 군대와 같은 존재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의지하던 엘리야가 자신이 보는 앞에서 회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해 버리는 데 다급한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엘리야가 자신에게서 사라지고 엘리사 홀로 남는다는 것은, 이제부터는 모든 일을 자신이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엘리사에게는 두려움과 걱정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갑자기 모두 죽어 버리고 세상에 자기 홀로 남겨져서 이제부터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일 수 있는 것입니다.

 

 

 


12절 하반절부터 보면 “이에 엘리사가 자기의 옷을 잡아 둘에 찢고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가지고 돌아와서 요단 언덕에 서서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며 가로되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 하고 저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엘리사가 건너니라”고 말합니다. 엘리사는 자기의 옷을 잡아 둘로 찢어 버리고 엘리야가 승천하면서 그 몸에서 떨어진 겉옷을 주워 가지고 돌아옵니다. 엘리사가 자신의 옷을 찢어 버리고 엘리야의 옷을 주워 가지고 온 것은 엘리야의 옷에 신비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자신의 인생은 없으며 이제부터는 엘리야의 길을 가겠다는 의미입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이 엘리야를 인도하셨던 그 길을 이제 자신이 가야 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의 하나님 여호와는 어디 계시니이까’라고 외친 것입니다. 즉 엘리야를 인도하신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편한 길로 인도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아합에게 쫓기도록 하셨고, 쫓길 때에도 편안한 피난길을 마련해 주신 것이 아니라 단지 시냇가에서 까마귀가 가져다주는 것으로 근근이 목숨을 연명하는 정도로만 인도하셨습니다.

 

 

 


엘리야만 이렇게 인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받았던 다른 선지자들도 결코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로 인도받은 적이 없습니다. 사도들도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사도들도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았지만 그들의 삶도 편안함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고난과 핍박의 길로만 인도받았던 것이 그들의 삶이 아니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인도를 구할 때 과연 어떤 인도를 기대합니까? 여러분이 원하는 삶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대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성경에서 선지자와 사도들을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선지자와 사도들의 삶으로만 국한시키지 말고, 과연 그들을 그렇게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헤아려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하나님을 부른 것은, 엘리야를 인도하신 하나님을 부른 것입니다. 엘리야에게 함께 하셔서 인도하셨던 하나님이 자신에게 함께 하셔서 인도해 주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즉 엘리야의 일이 이제 자신이 일이며, 엘리야가 가던 길이 자신이 가야 할 길이기에 엘리야의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엘리사를 엘리야의 후계자라고 일컫기도 하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후계자라는 것은, 엘리야의 직책을 이어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엘리야의 일이 곧 엘리사의 일이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큰 교회에서 후계자라는 말이 왕왕 등장합니다. 목사가 은퇴하게 되면 후계자로 누굴 세울 것인가를 두고 말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말하는 후계자란 은퇴하는 목사의 뒤를 이어서 교회를 맡을 사람을 뜻합니다. 따라서 은퇴하는 목사는 후계자로서 자신의 말을 잘 듣고,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고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이런 의미의 후계자는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목사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목사의 후계자는 복음을 전하는 목사의 일을 그대로 이어 받은 사람을 뜻할 뿐입니다. 한 개인의 업적과 직책을 이어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이어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목사의 후계자란 없습니다. 있다면 말씀을 맡은 자로서 말씀의 후계자만 있을 뿐입니다.

 

 

 


엘리사 역시 엘리야가 맡았던 일을 그대로 이어 받은 자로서의 후계자였습니다. 그 증거로 엘리사가 겉옷을 가지고 물을 치자 물이 이리저리 갈라져서 물을 건너게 된 것입니다.
겉옷으로 물을 치자 물이 갈라진 것은 8절에 있는 대로 엘리야가 행한 일이었습니다. 즉 엘리사는 엘리야가 행한 이적을 그대로 보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엘리야가 행한 이적보다 갑절의 능력이 있는 이적을 보인 것이 아니라 엘리야가 행한 것을 그대로 보였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엘리사는 엘리야의 길을 갈 자로 세움 받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제자로서 스승의 능력을 뛰어넘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이 하늘로 승천하신 후에 사도들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이적을 행한 것도 사도들이 신비한 능력을 가졌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신 길을 사도들이 가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행한 이적은 모두가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예수님의 후계자라 일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들을 보면 눈에 보이는 현상들에게 쉽게 매료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이 사도들을 인도하셨던 것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던 것처럼, 오늘날 신자에게 성령이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는 것 역시 사도의 길로 인도하고자 함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단지 능력을 부여받는 차원으로만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마음을 예수님께 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두고 있는 욕망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갈라진 물을 건너 엘리야와 함께 건넌 요단을 다시 건너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선지자의 생도들이었습니다.
선지자의 생도들은 요단을 건넌 엘리사를 “엘리야의 영감이 엘리사의 위에 머물렀다”고 하면서 영접을 합니다. 하나님이 엘리야 대신 엘리사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세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생도들은 “당신의 종들에게 용사 오십인이 있으니 청컨대 저희로 가서 당신의 주를 찾게 하소서 염려컨대 여호와의 신이 저를 들어가다가 어느 산에나 어느 골짜기에 던지셨을까 하나이다”(16절)라는 말을 합니다. 이들은 엘리야의 승천을 믿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보내지 말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엘리사가 부끄러울 정도로 강청하여 결국 오십 인을 보내어 엘리야의 시체를 찾게 하지만 사흘을 찾아도 찾지 못하고 돌아오게 됩니다. 이것이 생도들의 수준이었습니다.

 

 

 


이들은 엘리야의 승천을 멀리서 보았기 때문에 엘리야가 승천한 것을 확실하게 보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엘리야의 겉옷이 떨어진 것을 엘리야가 떨어진 것으로 착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들은 자신의 눈으로 확실하게 보지 못했기에 엘리사의 말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의 고집만 내세웁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엘리사는 이런 이스라엘을 상대로 엘리야의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그 길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래서 엘리야가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10절)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생도들의 수준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눈에 보인 대로 믿으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의 마음을 돌이키고 보지 못한 것을 본 것처럼 믿고 확신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야 말로 신비한 이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자신의 눈에 본 것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신 그리스도의 세계를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말씀의 후계자로 세상에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여러분은 선지자의 사명이 주어진 사람들이고 선지자의 길을 가야할 자로 부름 받았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도에게는 영감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영감이 여러분을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하게 할 것입니다. 말씀의 후계자로서 말씀을 증거하는 길을 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곧 말씀의 후계자임을 기억하시고 후계자로서의 삶에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5강) 열왕기하 2:19-25  고침과 저주

 

<본문>

 

그 성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우리 주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 좇아 다시는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찌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그 물이 엘리사의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날에 이르렀더라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길에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서 저를 조롱하여 가로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 이명을 찢었더라 엘리사가 거기서부터 갈멜산으로 가고 거기서 사마리아로 돌아왔더라(열왕기하 2:19-25)

 

 

 


<설교>


롬 8:9절을 보면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이 없이는 발생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여긴다면 분명 여러분께는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신자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함으로써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은 무엇일까요? 즉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에 두고 싶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신다면 우리 마음에 소중하고 귀한 것은 땅의 것이 아니라 사망에 처한 우리를 생명으로 옮기신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와 은혜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함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이며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멸망의 사람이고,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한다면 그는 분명 생명의 사람입니다. 육이 아니라 영입니다. 이것이 영이 있음과 없음의 차이입니다. 참으로 간단한 문제이면서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의 소원이 항상 그리스도를 향할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하고 그리스도의 영이 자신을 인도해 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엘리야에게 갑절의 영감을 구하는 엘리사의 마음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자신의 인생길이 아닌 그리스도의 말씀에 헌신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기를 소원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의 영이 있기에 필히 나타날 수밖에 없는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변화된 마음이고 이러한 마음은 항상 말씀을 사모하면서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배우려고 하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평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대하는 여러분께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시기를 구하면서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엿보시고 그 마음으로 세상을 평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사건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물을 고친 것이고, 또 하나는 엘리사를 조롱하는 아이들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먼저 엘리사가 물을 고친 사건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엘리사가 요단을 건너서 머물렀던 곳은 여리고입니다. 하늘로 승천하던 엘리야가 혹시 땅으로 떨어지지 않았는지 찾으러간 선지자의 생도들이 시체를 찾지 못하고 돌아올 때까지 엘리사는 여리고에 있었던 것입니다. 여리고 성의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한가지 문제를 가지고 옵니다. 그것은 여리고 성의 위치는 좋지만 물이 나빠서 토산, 즉 땅의 소산물들이 익지 못하고 떨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19절).

 

 

 


그런데 21절에서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고 말한 것을 보면 토산은 땅의 소산물만이 아니라 여인의 해산까지 지칭을 하는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즉 잉태한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유산해 버리는 것까지 포함해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진 것으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여리고 성의 고통은 참으로 심각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문제에 대해 엘리사는 어떻게 해결합니까? 20-22절을 보면 “엘리사가 이르되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내게로 가져오라 하매 곧 가져온지라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니 그 물이 엘리사가 한 말과 같이 고쳐져서 오늘에 이르렀더라”고 말합니다.

 

 

 


엘리사는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가져오게 해서 그것을 물 근원에 던짐으로써 물을 고칩니다.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져 버리는 저주의 성이 소금으로 고침 받아 저주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엘리사에게 있어서 첫 번째 이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도대체 소금이 무엇이기에 여리고의 물을 고칩니까? 물론 소금 자체에 물을 좋게 하는 효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소금의 짠 맛이 물에 들어가면 토양을 더 망쳐버린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래서 바다를 막아 땅을 만든 간척지는 당장에 곡식을 심지 못하고 소금기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리고와 소금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여리고는 여호수아로부터 누구든 여리고 성을 재건하려고 하면 망한다는 저주를 받은 곳입니다. 왕상 16:34절을 보면 아합 때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다가 터를 쌓을 때 맏아들을 잃었고, 문을 세울 때 말째 아들을 잃은 일이 나옵니다. 여호수아의 저주가 히엘에게 그대로 임한 것입니다. 이처럼 여리고는 저주 아래 있는 곳이었기에 토산이 떨어지는 현상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신 28:40절의 “네 모든 경내에 감람나무가 있을지라도 그 열매가 떨어지므로 그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토산이 익기도 전에 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저주의 현상임을 생각해 본다면 여리고 성의 문제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물이 고침을 받고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게 된 것을 여리고가 여호와의 저주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면 결국 소금이 저주아래 있는 여리고를 고친 것이며 소금과 저주는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레 2:13절을 보면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에 의해서 하나님의 언약을 흔히 소금 언약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소금을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예물에서 빼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소금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썩지 않고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물에 소금을 빼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은 결코 변하지 않고 포기되지 않고 반드시 성취될 것임을 믿으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이 고침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고치심으로써 저주와 심판에서 구출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며 이 언약은 반드시 성취될 것을 믿으라는 것이 소금언약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리고의 물 근원에 소금을 뿌리는 것은, 하나님의 변치 않는 언약이 저주의 힘에 붙들려 있는 여리고를 고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 즉 사랑과 자비의 힘에 의해 고침을 받아야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리고는 토산이 익기도 전에 떨어지는, 즉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 문제를 들고 엘리사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이 그들이 저주 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실상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실상은 우리의 힘으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열매는 우리의 행위에 의한 어떤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함으로써 맺어지는 열매, 즉 성령의 열매를 뜻합니다. 그 열매를 우리가 맺고 살아갑니까?

 

 

 


열매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베풀어주신 희생과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물 근원에 소금을 집어넣음으로 고침을 받은 것은 신자가 저주에 붙들려 있던 자신을 고치신 하나님의 희생과 사랑의 권능과 위대함을 깨닫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희생이 신자에게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열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음으로써 나타나는 모든 현상들을 뜻합니다. 은혜와 사랑을 알았기에 나의 죄인 됨을 보게 되는 것도 신앙의 열매이며, 자신의 죄인 됨을 알기에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지 않는 것도 신앙의 열매이며, 내게 주어진 모든 것에서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되는 것도 신앙의 열매이며,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이웃들에게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알게 하고 싶은 것도 신앙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열매가 없는데도 열매 없는 자신의 문제를 보지 못한다면 참으로 심각하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리고 성의 사람들이 엘리사를 찾아서 자신의 문제를 내어 놓는 모습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의 문제를 알지 못하기에 예수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번째 사건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두 번째 사건은 참으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엘리사가 벧엘로 올라갈 때 작은 아이들이 엘리사를 대머리라고 조롱을 했는데, 엘리사가 그 아이들을 저주한 결과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 42명을 죽였다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아이라는 것은 어린아이들을 뜻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 뭘 알겠습니까? 그냥 눈에 보인 대로 엘리사가 대머리였기 때문에 놀린 것뿐인데, 그냥 야단만 치면 될 것을 저주를 해서 42명이 죽게 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과 자비를 말하는 하나님과는 거리가 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윤리와 도덕에 젖어 있는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이 결코 용서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물을 고친 기적과 함께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사건인 것입니다.

 

 

 


대머리는 수치의 상징입니다. 따라서 아이들은 타인의 수치를 드러내며 조롱을 하는 것이고, 이러한 행위는 인간의 모든 수치를 가려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조롱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저주하고 42명을 죽임으로써 우리의 수치를 가려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조롱하는 것은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말하는 신자가 타인의 수치를 드러내고 조롱하는 것이야 말로 은혜와 사랑을 스스로 업신여기고 조롱하는 커다란 악행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엘리사를 저주한 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에서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교육을 받으며 자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이들이 엘리사가 선지자인 것을 알았든 몰랐든 엘리사를 조롱했다는 것은 그들이 부모로부터 바른 교육을 받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실상이 자녀들을 말씀으로 바르게 교육시키지 않을 정도로 신앙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바른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잊지 않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도 이러한 하나님을 가르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 이스라엘 다운 것이고 약속의 땅에서 대대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은혜와 사랑에 머물지 못하고 악을 행하며 살아갑니다. 즉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찾아가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이런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저주 아래 있는 우리를 고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심으로써 열매가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침 받은 신자에게서는 은혜와 사랑에 대해 감사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되고, 그 마음은 점차 땅의 것을 소원하는 것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땅의 문제로 인해 갈등하고 고민하는 자신의 실상이 보여질 때마다 그것을 자신의 문제로 여기게 되면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고침 받기를 원하면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고자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6강) 열왕기하 3:1-12  분별력 없는 여호사밧

 

<본문>

 

유다 왕 여호사밧의 십팔년에 아합의 아들 여호람이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 왕이 되어 십 이년을 치리하니라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 부모와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으니 이는 저가 그 아비의 만든 바알의 주상을 제하였음이라 그러나 저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를 따라 행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모압 왕 메사는 양을 치는 자라 새끼 양 십만의 털과 수양 십만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치더니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 왕이 이스라엘 왕을 배반한지라 그 때에 여호람왕이 사마리아에서 나가서 온 이스라엘을 점고하고 또 가서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보내어 이르되 모압 왕이 나를 배반하였으니 당신은 나와 함께 가서 모압을 치시겠느뇨 저가 가로되 내가 올라가리이다 나는 당신과 일반이요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일반이요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일반이니이다 여호람이 가로되 우리가 어느 길로 올라가리이까 저가 대답하되 에돔 광야 길로니이다 이스라엘 왕이 유다 왕과 에돔 왕으로 더불어 행하더니 길을 둘러 행한지 칠일에 군사와 따라가는 생축을 먹일 물이 없는지라 이스라엘 왕이 가로되 슬프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붙이려 하시는도다 여호사밧이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이스라엘 왕의 신복 중에 한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사밧이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있도다 이에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과 에돔 왕으로 더불어 그에게로 내려가니라 (열왕기하 3:1-12)

 

 

 


<설교>


열차를 타고 있다고 해서 서울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모든 열차가 서울을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열차를 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서울 방향의 열차를 제대로 분별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은 오직 진리뿐입니다. 진리의 옷을 입고 진리를 표방하는 수많은 거짓된 진리가 난무하고 있지만 진리를 흉내 낸다고 해서 생명의 능력까지 모방하고 흉내 낼 수는 없습니다. 결국 진리가 아닌 진리에 속은 결과는 비참한 멸망으로 주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진리를 분별하는 분별력은 말씀을 깨달음으로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근본이 되어 있지 않을 때 분별력이 없이 생명의 능력이 없는 거짓진리를 진리로 여기는 큰 실수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든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을 근본으로 삼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근본으로 삼는다고 하면서도 말씀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명확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말씀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말씀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그 의미와 내용이 달라집니다. 세상의 복을 원하는 사람의 눈에는 하나님의 말씀 모두가 복을 약속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병이 들어서 몸이 건강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에게는 병 고침 받는 성경의 내용에 관심을 두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같은 성경이라고 해도 그 사람이 원하고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향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고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정직한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내가 원하고 내가 관심 두는 것을 찾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시는가?’ 에 집중한 채 하나님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사심이 없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어 보려고 하는 마음, 다시 말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는 그런 의도가 없어야 말씀을 있는 그대로 읽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말씀은 우리에게 분별력이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여러분들이 잘 알고 계셔야 모방된 진리에 속지 않을 수 있고 또 잘못된 것을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심각하고도 신중한 마음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진리의 길 자체가 무너지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에도 분별력이 없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가 바로 여호사밧입니다. 이 여호사밧이 어떻게 분별력이 없는 행동을 하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을 보면 1-3절까지는 아하시야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여호람이 이스라엘을 12년간 어떻게 치리하였는가를 말합니다. 그리고 4절부터는 여호람이 여호사밧과 함께 모압을 정벌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2절에서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그 부모와 같이 하지는 아니하였으니 이는 저가 그 아비의 만든 바알의 주상을 제하였음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여호람이 아합이 만든 바알의 주상을 제함으로써 아합처럼 행하지 않았다고 평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여호람이 아합과는 달리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하나님만 섬긴 것으로 여길 수가 있지만 3절에서 “그러나 저가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를 따라 행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고 말한 것을 보면 그 마음을 하나님께 돌이킴으로써 바알의 주상을 무너뜨린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여호람이 바알의 주상을 무너뜨린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알 선지자와 엘리야 선지가의 갈멜산의 싸움으로 인해 더 이상 이스라엘이 의지할 신으로 여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람이 비록 바알의 주상은 철폐하였지만 여전히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죄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여호와로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여호와로 섬기게 한 이유는, 성전이 예루살렘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이 절기가 되면 자연히 제사를 드리기 위해 남쪽으로 왕래를 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성전이 있는 남쪽과 다시 합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고, 그것은 곧 북쪽 이스라엘의 무너짐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로보암은 자신의 왕권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으로 섬기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사람들이 남쪽으로 가지 못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왕들이 여로보암의 길로 갔다고 말하는 것은, 여로보암처럼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금송아지를 여호와로 섬기게 하는 정책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호람도 비록 바알이라는 우상을 무너뜨리기는 하였지만, 그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하나님만 섬기고자 하는 신앙에 의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여전히 자신의 왕권을 유지하고 지키기 위해 금송아지를 여호와로 섬기는 여로보암의 죄를 따랐던 것입니다.

 

 

 


따라서 여로보암의 죄를 따랐다는 것은, 죄의 용서를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와 이익을 위해 하나님이란 이름을 불러주는 것을 신앙의 전부로 여기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호람이 모압을 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왜냐하면 모압은 새끼 양 십만의 털과 수양 십만의 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조공으로 바쳐왔었는데 아합이 죽은 후에 모압 왕이 이스라엘 왕을 배반하고 조공을 바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호람은 이러한 자신의 전쟁에 유다왕 여호사밧을 끌어 들이고자 합니다. 그래서 사신을 보내어 “모압 왕이 나를 배반하였으니 당신은 나와 함께 가서 모압을 치시겠느뇨”(7절)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이 물음에 “내가 올라가리이다 나는 당신과 일반이요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일반이요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일반이니이다”(7절)고 답함으로써 여호사밧이 여호람의 전쟁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왕상 22장에 보면 아합 왕이 길르앗 라못을 칠 때 여호사밧에게 함께 싸울 것인가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여호사밧은 “나는 당신과 일반이요 내 백성은 당신의 백성과 일반이요 내 말들도 당신의 말들과 일반이니이다”고 말하면서 전쟁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그 전쟁에서 여호사밧은 아합의 잔꾀로 인해서 적군의 표적이 되었지만 하나님에 의해 구출되어 무사히 돌아오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여호람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전쟁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이 일로 하나님의 책망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역대하 19:1,2절을 보면 “유다 왕 여호사밧이 평안히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그 궁으로 들어가니라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가로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로서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라고 말하는데 이것이 아합의 전쟁에 참여하고 돌아온 여호사밧에게 하신 하나님의 책망이었습니다. 이러한 책망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호람의 악을 보지 못하고 그를 형제로 부르면서 전쟁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사밧이 분별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합도 여호람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왕이었습니다. 절기가 되어도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와서 제사 드리지 않고 여로보암이 만든 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것만으로도 용서 받을 수 없는 악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호사밧은 그들의 악을 보지 않고 전쟁에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즉 악을 악으로 보지 못하고 형제로 여기며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여호사밧의 분별력 없는 행동이 오늘 우리들에게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분별력이 없을 때 악을 악으로 보지를 못하게 됩니다.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좀 다를 뿐 같은 진리의 길을 가고 있고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간주해 버리는 것입니다. 특히 인간이 끊을 수 없는 혈족의 관계는 더욱 더 분별력을 가려버립니다. 여호사밧과 여호람은 사돈 관계입니다. 아합의 딸이 여호사밧의 며느리이기 때문에 여호람은 여호사밧에게 며느리의 오빠가 됩니다. 어쩌면 이러한 인간관계가 여호사밧으로 하여금 여호람의 악을 더욱 보지 못하도록 방해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라고 해서 다르지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진리의 길은 어떤 인간관계도 개입될 수 없습니다. 부모 형제라는 것 때문에 악을 악으로 분별하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함께 진리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재촉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자는 진리의 길,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생명의 그 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거기에 인정과 인간관계가 개입됨으로써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는 사람인가?’를 먼저 생각하게 되고 결국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일수록 악을 분별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옳은 것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는 세상의 그 어떤 관계보다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관계를 세상에 대한 도리와 의리, 인간관계를 지키기 위해서 허물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는 인간관계를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혈족으로 맺어진 인간관계 때문에 여호람의 악을 분별하지 못하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형제로 일컬으면서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물론 인간관계를 아예 무시하고 형제의 관계도 다 무너뜨리고 살아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로서 형제가 어려울 때 돕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한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무시하고 진리도 무시한 채 세상의 관계만을 앞세운다면 결국 악을 악으로 보지 못하고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고 살았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지 못하고 세상 관계를 앞세우게 됨으로써 여호람의 악을 보지 못하고 단지 도와주는 것이 도리라는 인간관계만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분별력이 없는 여호사밧의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잠언 1:10절을 보면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찌라도 좇지 말라”고 말합니다. 악한 자의 꾀임을 쫓지 않는다면 그것은 곧 악을 분별하는 분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있어서 근본은 성경이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성경에 마음을 둔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김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무작정 성경을 근본으로 삼겠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때문에 항상 말씀을 공부하고 살피면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알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것을 근본으로 삼고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악이 무엇이며 신자가 멀리해야 할 악이 무엇인가를 분별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있어야 할 영적 감각인 것입니다.

 

 

 

 

 

(7강) 열왕기하 3:8-12  여호람의 원망

 

<본문>

 

여호람이 가로되 우리가 어느 길로 올라가리이까 저가 대답하되 에돔 광야 길로니이다 이스라엘 왕이 유다 왕과 에돔 왕으로 더불어 행하더니 길을 둘러 행한지 칠일에 군사와 따라가는 생축을 먹일 물이 없는지라 이스라엘 왕이 가로되 슬프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붙이려 하시는도다 여호사밧이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물을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없느냐 이스라엘 왕의 신복 중에 한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사밧의 아들 엘리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사밧이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저에게 있도다 이에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과 에돔 왕으로 더불어 그에게로 내려가니라 (열왕기하 3:8-12)


<설교>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사전 중의 하나가 ‘대영백과사전’입니다. 온 우주와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사물에 관한 지식을 총 정리해 놓은 사전이라는 면에서 그 무엇도 따라올 수 없는 권위를 갖고 있지만, 과연 그러한 사전이 우주의 비밀을 과연 몇 %나 담고 있을까요?

 

 

 


고난의 이유라도 가르쳐 달라고 떼를 쓰는 욥에게 하나님은 38-41장까지 많은 질문을 던지면서 대답해보라고 했습니다. 그 믿음이 좋고 당시의 현자(賢者)라 할 수 있는 욥도,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찌니라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욥 38:4-5)라는 첫 질문부터 완전히 입이 봉해져버렸습니다. 오늘 날 세계적인 최고 석학들을 다 동원한들 여전히 이 첫 질문에 대답하지 못할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사전들을 총동원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광대하신 분이고 그 지혜는 너무나 오묘해서 인간의 지식과 이해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자신에게 이해가 안된다고 해서 하나님을 의심하거나 불평을 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이해력이 아무리 뛰어난들 자신을 초월하기가 힘듭니다. 즉 모든 사건과 현상들을 자신을 기준해서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 또한 자신을 기준해서 이해하려고 하다 보니 결국 하나님의 일에 대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기 십상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불평이 있게 되는 것은 결국 자신은 옳다는 의식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나는 이런 일을 겪어야 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는 의식이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 의식이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의심과 불평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욥이 겪은 고통은 욥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 쪽에 책임이 없는 고통이었습니다. 때문에 욥은 자신의 무죄함을 끝까지 주장하며 그 원인이라도 알기 원했던 것입니다. 그에 대해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 이면에는 숨겨진 죄악이 있다고 잘못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욥이 자만과 위선에 빠져 죄악을 숨기고 합리화 한다고 지레 판단하여 반드시 죄가 있기에 벌을 받는다고 반론을 퍼부었습니다.

 

 

 


하지만 비록 욥의 친구들이 욥의 상황을 그릇 판단하였고 또 모든 고통의 이면에는 반드시 죄가 따른다는 잘못된 신앙관을 갖고 있었지만, 반론 중에 하나님에 대해 상식적 원리로 말한 내용은 깊이 생각해야 할 진리였습니다. 특히 나아마 사람 소발이 말한 “지혜의 오묘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너는 알라 하나님의 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하니라”(욥 11:6)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진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욥은 이러한 말이 비록 맞는 말이라고 해도 받아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욥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욥 같이 순전하고 믿음에 자신이 있었던 자, 죄를 짓지 않았던 자, 혹시라도 자식이 죄를 지었을까 걱정이 되어 하나님께 제사 지냈던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개인적으로는 그 누구도 겪지 않았던 성경 최대의 징벌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에게는 오히려 벌이 죄보다 너무나 중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우리들의 착각입니다. 우리는 항상 죄를 자신의 행동에서 찾으려고 하지만 실상 죄는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판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의심과 불평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성경의 기록에는 욥이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원망하며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 없다며 불평을 늘어놓은 것으로 보아 평소에 생각으로 얼마든지 죄를 많이 지은 죄인이었을 것입니다. 만약 그런 잘못이 별반 없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자신의 고통에 대한 원인을 알고자 끝까지 따지고 든다는 것은 인간은 상상 할 수 없을 정도로 장대하신 하나님을 자신의 그 좁디좁은 이해력 안에 우겨넣으려한 커다란 죄인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일을 이해해야겠다고 덤비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각되는 죄라는 것을 욥이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상력과 지식을 초월하신 분입니다. 그런데도 자꾸 이해하려고 들면 그 자체가 잘못일 뿐이 아니라 정말 쥐꼬리 같은 자신의 지식과 이해력과 상상 속에 하나님을 집어넣는 죄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이런 내용을 길게 말씀드리는 것은, 신자가 죄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갖고 있지 못하면 십자가의 은혜에 깊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사도 바울의 말처럼 자신의 죄의 깊이를 깨달으며 자신의 무너짐을 경험할수록 그 자리에 십자가의 은혜는 더욱 깊이 박히고 높이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유다 왕 여호사밧, 에돔 왕과 함께 모압을 치기 위해 출전한 여호람이 여호사밧의 말대로 에돔 광야 길로 나아갔는데 칠일 째가 되어서 물이 떨어지게 됩니다. 길을 가는 도중에 전혀 물을 만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람이 “슬프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붙이려 하시는도다”(10절)고 원망을 합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께서 여호람에게 모압을 치라고 명령하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신하고 조공을 바치지 않는 것 때문에 화가 나서 여호와께 묻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여호사밧 역시 여호람이 악한 왕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관계만 앞세우고 분별없이 전쟁에 참여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일의 시작은 자신들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이 없는 상황을 하나님이 자신들을 모압에 붙이려고 하는 것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결국 여호람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일을 도우시는 신으로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 왕을 모압의 손에 붙이고자 하신 적이 없습니다. 여호람이 되어지는 상황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그 상황을 제 멋대로 해석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어지지 않는 상황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불평하고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여호람은 전쟁을 일으킨 것 자체가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신의 욕심이었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한 전쟁이 아니라 모압이 바칠 조공을 염두에 둔 전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좋은 길로 인도하지 않는다는 것에만 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런 일을 주시는지 모르겠습니다.’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병을 주셔도 왜 하필이면 이런 병을 주시고, 고통을 주셔도 왜 하필이면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욥의 경우처럼 인간의 좁디좁은 시각과 생각과 무지함을 가지고 참으로 광대하시고 세상의 끝날 까지 계획하시고 알고 계신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부터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지 못한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고 이해가 되면 받아들이고 인정하겠다는 것이야 말로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이해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하찮은가를 알지 못하기에 감히 하나님의 일을 두고 이해할 수 없다는 불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욥의 친구 소발이 욥에게 했던 “너는 알라 하나님의 벌하심이 네 죄보다 경하니라”는 말 한마디는 소홀히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란 존재에 대한 무너짐이 없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는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죄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의 일을 내 행위에 비해 무거운 것으로 간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일을 당해야 할 만큼 악한 사람이 아닌데’라는 생각이 하나님의 일을 무거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불평과 원망만 낳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든 상황을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이해하려고 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자신의 잘함과 선함과 의를 기준으로 해서 모든 상활을 바라볼 때 자연히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잘함과 선함, 의를 바탕으로 자기 나름대로 결과를 예상하고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혀 원하지 않는 결과가 주어질 때 그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며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 없다는 불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께 원망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무거운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의 깊이를 안다면 어떤 일에 대해서도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있게 합니까?’라는 원망보다는 ‘하나님 내 죄에 비하면 이 일도 가볍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물론 이런 심령으로 바뀐다는 것이야 말로 성령이 함께 하지 않으면 도무지 있을 수 없는 기적의 사건이지만 말입니다.

 

 

 


여호람은 자신의 뜻을 앞세워 전쟁을 일으켰으면서도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되어가는 것만 생각하며 하나님께 원망합니다. 자신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자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이 자기 뜻을 앞세워 행동하고 있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신자는 어떤 일에서도 하나님께 원망도 불평도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항상 나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뭘 하든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으로부터 ‘하라’는 답을 얻고 행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설사 ‘하나님 이 일을 할까요 말까요?’라고 물었다고 해도 하나님으로부터 구체적인 답을 듣고 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일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하나님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있게 합니까?’라고 항변하거나 원망하고 불평할 수 있습니까? 시작부터 내 마음대로 했으면서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 너무합니다’라는 원망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억지로 원망을 참아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여호람이 전쟁을 하는데 하나님이 그들의 길에 물이 있고 먹을 것이 풍부하게 해줘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을 항상 풍족함과 형통함으로 인도하셔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그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한번 말씀해 보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무엇도 요구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수도 없는 악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욥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욥은 자신이 죄를 행하지 않았다는 것만 생각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정당함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어버렸으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이 가져가신다고 해서 할 말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이 소유한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생각만 있었을 뿐이지 자신은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마땅한 존재라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실패해도 당연한 자신의 실상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서만 살아가는 인생길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부터가 뻔뻔한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럴때 어떤 일에서도 원망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쪽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8강) 열왕기하 3:13-20  관계의 은혜

 

<본문>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의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로 가소서 이스라엘 왕이 저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께서 이 세 왕을 불러 모아 모압의 손에 붙이려 하시나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만일 유다 왕 여호사밧의 낯을 봄이 아니면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이다 이제 내게로 거문고 탈 자를 불러 오소서 하니라 거문고 타는 자가 거문고를 탈 때에 여호와께서 엘리사를 감동하시니 저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이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라 하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너희가 바람도 보지 못하고 비도 보지 못하되 이 골짜기에 물이 가득하여 너희와 너희 육축과 짐승이 마시리라 하셨나이다 이것은 여호와 보시기에 오히려 작은 일이라 여호와께서 모압 사람도 당신의 손에 붙이시리니 당신들이 모든 견고한 성과 모든 아름다운 성을 치고 모든 좋은 나무를 베고 모든 샘을 메우고 돌로 모든 좋은 밭을 헐리이다 하더니 아침에 미쳐 소제 드릴 때에 물이 에돔 편에서부터 흘러와서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 (열왕기하 3:13-20)

 

 

 


<설교>


6월 3일 주보에 ‘잘 믿으려고 하지 말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쓴 적이 있는데, 그 글에 대해 어느 분이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질문의 내용은 ‘목사님의 글을 보면 어느 정도 공감이 되고 맞는 것 같은데 받아들이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감이 되고 맞는 것 같으면 그냥 받아들이면 되지 힘들 것은 무엇인가?’라고 반문했더니, 제 글의 내용을 받아들이면 앞으로 자신이 믿음을 위해 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아서 그것을 인정하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자기 믿음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하면서 이런 저런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사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닌 분이라면 ‘신자가 자기 믿음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순순히 인정한다는 것은 힘들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신자의 신앙생활이 자기 믿음의 향상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힘써온 것이었는데 자기 믿음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면 이상한 이단의 말처럼 들리지 않겠습니까?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믿음은 철저히 하나님의 일방적 약속으로 인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노력과 상관없이 주어진 은총이고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15:6)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자신이 하나님을 잘 믿어야 의인이 될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잘 믿어야 한다는 말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당연한 신앙의 덕목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신자는 자신의 노력으로 믿음을 쟁취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믿은 자입니다. 따로 더 잘 믿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순히 말장난이거나 역설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안에 들어온 신자가 없는 믿음을 노력해서 가지려고 한다거나 부족한 믿음을 더 보태서 좋은 믿음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자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미 완전하고도 충분한 믿음 안에 들어와 있음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의 모든 신자의 정확한 위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믿으려고 노력하는 신자들의 경우는 사실은 구원의 과정, 다른 말로 자신의 구원 체험을 잘못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후손을 하늘의 뭇별처럼 많게 해주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을 때에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그 약속 자체를 바로 믿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신반의 했습니다. 약속이란 반드시 두 당사자가 온전히 믿고 지키기로 해야 약속으로서의 의미와 효력이 생깁니다. 그래서 당사자들끼리의 사전 협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끼리의 경우일 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어떤 일을 협의해서 서로 약속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으로선 단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에, 더 정확하게는 그 결과에만 동참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약속을 만들거나 그분으로부터 약속을 이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이 열심히 믿으려 한다고 해서 없던 약속이 새로 생기거나 약했던 약속이 더 강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로 인간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하신 약속이 없어지거나 약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의로움이나, 믿음을 보고, 심지어 그가 후손이 없어서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서, 이삭을 주기로 약속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께서 일방적으로 약속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어떤 노력이 이삭이 있게 한 것이 아니라 실제 육신적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제로였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주기로 인간과 상의하여 약속하고 그에 따라 그 약속을 믿기를 노력하기로 상호 협의한 적이 없습니다. 또 인간에게서 구원을 얻을 어떤 자격, 조건, 공로, 심지어 믿음을 보고 은혜를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도저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오직 당신께서 선택하시고 먼저 찾아오셔서 일방적으로 영생이라는 선물을 주셨고 신자는 단지 그 선물을 받기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자로서 그 선물로 인한 기쁨과 감사를 누리는 것이지 잘 믿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모압을 치기 위해 에돔 광야를 통과하는 도중에 물이 떨어진 상황에서 여호람이 엘리사를 찾아가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때 엘리사는 여호람을 보고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의 부친의 선지자들과 당신의 모친의 선지자들에게로 가소서”(13절)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가 여호람과의 관계성을 부인한 것입니다. 즉 엘리사가 여호람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엘리사가 여호람과 어떤 개인적 감정이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따라서 엘리사가 부인하는 것은 인간적 관계가 아니라 여호람과 하나님과의 관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람이 하나님께 나올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여호람은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않고 행한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여호람은 그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 나올 수 없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자신들이 바로 그러한 존재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여러분은 이것부터 스스로 분명히 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나올 수도 없는 존재다’는 것에 분명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기쁨과 감사에 있어서 공허함만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람이 가장 인정하기 싫어하는 것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일 것입니다. 비록 입으로는 죄인이라고 해도 실상은 죄인이라는 말로서 자신의 겸손과 신앙을 가장하려는 위선일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 자신이 바로 그런 위선으로 가장되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죄인이라는 것은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항상 높아지려는 본성으로 무장되어 있는 인간이 자신의 죄인 됨을 순순히 인정하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니 입술은 죄인이라는 사실에 순종을 한다고 해도 그 마음은 항상 거부하고 반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자신의 말에 속지 마시고, 여러분의 마음이 죄인이라는 사실에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나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각양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롬7:7,8)는 말을 했습니다.

 

 

 


바울의 말처럼 죄의 본질은 탐심입니다. 탐심은 욕심이 많은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자기 뜻과 원하는 대로 하겠다는 고집입니다. 그래서 혹 주위의 분위기나 다수의 의견에 의해서 자신의 뜻을 포기해야 할 때는 섭섭함과 함께 분노도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종교적 우월성을 사람들 앞에 증명하고 싶어 하는 것도 역시 탐심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종교적인 노력들은 모두 탐심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이 믿음으로 여겼던 것의 실체가 탐심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탐심이 아니라 신앙으로 고집했던 바리새인들이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할 수 없어서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닙니까? 우리 역시 이러한 인간의 본질에서 예외일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예수님의 빛이 그의 내면의 철저히 부패한 심령에 비췰 때 비로소 죄가 얼마나 교묘한 거짓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열심히 따르는 자라도 그 영혼이 사단에게 속아 넘어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마저 자기 탐심의 제물로 삼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철저한 죄인임을 알게 될 때,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단절된 그 관계가 누군가로 인해서 회복되었다면 회복하게 하신 그분으로 인해 감사하고 회복된 관계로 인해서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고 한 엘리사가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만일 유다 왕 여호사밧의 낯을 봄이 아니면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이다”(14절)고 말합니다. 엘리사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여호람이지만 여호사밧의 낯을 봐서 그를 돕고자 합니다. 하지만 여호사밧 역시 분별력 없이 여호람의 전쟁에 참여한 사람입니다. 그런 여호사밧의 낯을 보겠다고 하는 것은, 여호사밧이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유다족속 자체가 하나님의 약속의 후사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해서 여호람을 도우신 것입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호람에게 골짜기에 개천을 많이 파게하고 모압도 이길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람이 이러한 복을 누리게 된 것은 분명 여호람 개인의 노력이나 신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여호람 개인을 본다면 복은커녕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옳지 않습니까?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쉽게 잊고 있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저 교회를 다니기 때문에 마치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있는 신자고, 때문에 하나님의 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을 뿐 여호람처럼 심판을 받아야 할 자신이 복을 누리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쉽게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충만히 누릴 수 있는 사랑과 자비하심의 기쁨을 전혀 얻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여호람은 지금 자신이 하나님께 나올 수도 도움을 구할 수도 없는 존재라는 것을 예상치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엘리사를 만나서 도움을 구하면 될 것으로 여길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여호람과 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너무 쉽게 당당하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습니까? 마치 하나님은 항상 날 도와주실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는 분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이 살아가시는 삶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진심으로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린 온통 날 위한 삶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다가 일이 생각대로 안되면 ‘하나님 왜 이렇게 합니까?’라고 원망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우리가 심판을 받지 않고 매일 같이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으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함께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 쉽게 이 은혜를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서 먼저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내 생활을 도와주기를 구할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사망에 처해야 할 존재가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고 무엇으로도 값을 수 없는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저 감사할 것 밖에 없습니다.

 

 

 

 

 

(9강) 열왕기하 3:21-27  도토리 키재기

 

<본문>

모압 모든 사람이 왕들이 올라와서 자기를 치려 한다 함을 듣고 갑옷 입을만한 자로부터 그 이상이 다 모여 그 경계에 섰더라 아침에 모압 사람이 일찌기 일어나서 해가 물에 비취므로 맞은편 물이 붉어 피와 같음을 보고 가로되 이는 피라 필연 저 왕들이 싸워 서로 죽인 것이로다 모압 사람들아 이제 노략하러 가자 하고 이스라엘 진에 이르니 이스라엘 사람이 일어나 모압 사람을 쳐서 그 앞에서 도망하게 하고 그 지경에 들어가며 모압 사람을 치고 그 성읍을 쳐서 헐고 각기 돌을 던져 모든 좋은 밭에 가득하게 하고 모든 샘을 메우고 모든 좋은 나무를 베고 길하레셋의 돌들은 남기고 물맷군이 두루 다니며 치니라 모압 왕이 전세가 극렬하여 당하기 어려움을 보고 칼 찬 군사 칠백을 거느리고 충돌하여 지나서 에돔 왕에게로 가고자 하되 능히 못하고 이에 자기 위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취하여 성 위에서 번제를 드린지라 이스라엘에게 크게 통분함이 임하매 저희가 떠나 각기 고국으로 돌아갔더라(열왕기하 3:21-27)

 

 

 


<설교>


사람은 자기 잘못에는 한 없이 관대하지만 남의 허물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엄격한 모습을 보입니다. 남이 간통하면 불륜이고 자기가 하면 로맨스라는 식으로 사람은 자기 멋에 살고 자기만 사랑하는 자기도취병 환자인 것입니다. 자기가 옳지 못하다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해 보는 적이 별로 없고 그렇게 할 마음도 전혀 없이 살아갑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하나님이 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징계의 이유를 성경은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기” 때문(칭3:22)이라고 말합니다.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실력이 하나님처럼 좋아져서 인간이 감히 하나님과 맞먹으려 하니 괘씸해서 벌을 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절대적 선이십니다. 그리고 선악이라는 판단의 모든 기준과 근거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 자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과 마음에 맞지 않으면 그것이 곧 악이 됩니다. 즉 악이라고 규정할 행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이신 하나님의 뜻과 마음에 맞지 아니한 모든 것이 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 하여 절대적 선이신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자신의 삶에서 배제해 버리자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하나님처럼 자기 자신의 뜻과 마음에 두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범죄한 이후 모든 사람은 판단의 기준을 자기에게 두고 타인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신의 잘못에는 관대해지고 남의 허물에는 엄격해진 것입니다.

 

 

 


그럼 신자는 반대로 내 잘못에는 한없이 엄격하고 상대의 허물에 대해선 끝없이 관대해야 합니까? 그래야 신자다운 것입니까? 예수님이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말씀하신 의미가 그러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내 잘못은 무조건 크게 보고 타인의 잘못은 적은 것으로 보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의 들보를 보지 못하도록 가리는 자기 기준에서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내 기준으로 보기 때문에 항상 자신의 허물은 보이지 않거나 보인다고 해도 작게 보이고 타인의 허물은 들보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을 바라보는 기준이 달라진 사람입니다. 즉 절대적 선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 되어 말씀에 의해 판단 받는 것입니다. 그럴때 자신의 눈으로 보지 못했던 들보가 보이게 되고, 그 들보로 인해서 죄인임을 고백하고 애통하는 심령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주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을 때 우리는 타인의 죄를 타인의 것으로만 바라보며 그에게 분노하는 것으로 그치고 말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에게서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세 왕이 하나님의 선지자인 엘리사를 찾아와 물이 없는 어려운 상황을 얘기했을 때 엘리사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하나님의 뜻을 응답받습니다. 하나님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던 악한 여호람에게 물을 주시고 모압과의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당연한 여호람에게 하나님이 이러한 호의를 베푸시는 것은 여호람 때문이 아니라 여호사밧 때문인 것을 지난 시간 말씀드렸습니다.

 

 

 


엘리사는 분명히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만일 유다 왕 여호사밧의 낯을 봄이 아니면 당신을 향하지도 아니하고 보지도 아니하였으리이다”(14절)라는 말을 했습니다. 따라서 여호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좀 더 심각하게 생각을 했었다면 물이 가득해지고 모압을 이긴다는 것으로 좋아할 것이 아니라 여호사밧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하나님의 사람을 만날 수도 없는 존재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에 대해 깊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이 자신의 악을 돌아보게 하고 여호사밧이 함께 하는 것이 진정한 복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여호람의 관심은 물과 전쟁에서의 승리에만 있었습니다. 마치 오늘날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시는 것이 복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다만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고 세상의 풍요를 누리는 것에만 모든 관심을 두고 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호람은 자기 울타리 안에 있기 때문에 자신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타인의 악은 보면서 자신의 악은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골짜기에 물이 가득하게 하셨는데, 아침에 해가 물에 비췄을 때 그 모습이 마치 골짜기에 피가 가득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것을 본 모압 사람은 필연 왕들이 싸워서 서로를 죽인 것 때문으로 여기고 마음 놓고 노략을 하러 갑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의해 패배하게 되고 상황이 어려워지게 되자 모압 왕은 자신의 아들을 번제로 드리는 행위를 합니다. 이 모습을 본 이스라엘이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27절을 보면 “이에 자기 위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취하여 성 위에서 번제를 드린지라 이스라엘에게 크게 통분함이 임하매 저희가 떠나 각기 고국으로 돌아갔더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모압 왕이 자신의 왕위를 이을 맏아들을 자신들의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것을 본 이스라엘이 크게 통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통분하였다는 것은 다른 말로 분노하였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압의 행위에 분노했다면 그들을 당장에 진멸했을 법도 한데 왜 그냥 돌아갔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행위가 너무나 악하여 자신들이 아니라도 하나님에 의해 분명 심판 받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얘기들이 우리에게 말해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당시 모압이 숭배하던 신은 그모스입니다. 즉 모압 왕은 자신이 숭배하던 그모스 신에게 맏아들을 제물로 바치면서 자신들을 도와줄 것을 기원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악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단지 아들을 제물로 바친 것 때문에 악하다고만 생각하면 안됩니다.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인간이 고안해 낸 신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한 최선이고 자신의 정성의 표시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악함은 어떻게든 신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자신의 모든 정성을 동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는 인간의 그 속성이 악한 것입니다. 모압에게는 참된 신이 누구냐? 와 같은 문제는 관심거리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자신들을 도와줄 신이면 충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겠다는 것이 곧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의 악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압의 악함이 모압에게만 있는 것입니까? 비록 아들을 제물로 바치지는 않았다고 해도 이스라엘 역시 모압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모압이 신을 생각하는 것이나 이스라엘이 신을 생각하는 것이 다르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여호람이 엘리사를 찾은 것은, 엘리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라는 문제보다는 자신의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왕상 11:6,7절을 보면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 부친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좇음 같이 좇지 아니하고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 사람들만의 행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으로부터 절대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에 우상은 불교나 점쟁이 무당과 같은 특정 사람들의 행위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갖고 있는 죄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소위 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우상을 섬기는 사람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나의 울타리가 되어서 자신을 정당한 자로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모압 왕의 행위에 대해 분노하며 떠나 버린 여호람과 이스라엘은 과연 하나님 앞에 정당했습니까? 여호람도 이스라엘도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금송아지를 섬기면서 자기들만의 하나님을 찾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모압이 그모스를 섬기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그래도 이스라엘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지는 않는다는 것 때문에 정당하다고 인정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우상을 섬겨도 모압 왕처럼 아들만 제물로 바치지 않으면 정당한 것입니까? 아들을 바치든 무엇을 바치든 그것으로 신의 마음을 움직여 보고자 하는 것 자체가 악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 자신의 정성을 담아 뭔가를 바치는 것이 곧 모압 왕의 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압 왕의 행위에 분노한 것은 모압 왕과 자신은 다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는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행위를 기준 삼아 타인의 악을 판단함으로써 자신의 들보는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행위를 기준 삼음으로써 타인의 악한 행위가 자신에게는 없을 때 자연히 악한 행위를 한 사람 앞에서 자신은 정당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들보를 보지 못하게 하고 타인을 비판하게 하는 것입니다. 모압을 향한 이스라엘의 분노는 자신을 향한 분노로 나아갔어야 했습니다. 모압 왕의 행위에서 자신들의 악함을 발견했어야 했으며 하나님이 모압에게 분노하시고 그들을 심판하신다면, 자신들도 다를 바 없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이것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모압을 향해 분노한 것은 사실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스라엘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악한 자였으며 하나님께 나올 수도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모압의 행위에 분노하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어이없는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신자는 다른 사람의 허물에서 자신의 허물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참된 신자입니다. 타인의 허물에 대해 분노한다면 그 분노는 결국 자신을 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분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을 보게 될 때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만으로 복이라는 고백이 있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말씀을 통해 자신을 실상을 보게 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나의 허물은 보지 못하는 무지함으로 도토리 키재기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10강) 열왕기하 4:1-7  하나님이 함께 하심

 

<본문>

선지자의 생도의 아내 중에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채주가 이르러 나의 두 아이를 취하여 그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엘리사가 저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 저가 가로되 계집종의 집에 한 병 기름 외에는 아무 것도 없나이다 가로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라 빈 그릇을 빌되 조금 빌지 말고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대로 옮겨 놓으라 여인이 물러가서 그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은 후에 저희는 그릇을 그에게로 가져 오고 그는 부었더니 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 오라 아들이 가로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 그 여인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고한대 저가 가로되 너는 가서 기름을 팔아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너와 네 두 아들이 생활하라 하였더라(열왕기하 4:1-7)

 

 

 


<설교>


사람들마다 인생의 목표가 다르겠지만 공통적인 것은 인생의 방향이 오직 자기 영광을 향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루고자 하는 것은 달라도 다만 자기 영광을 위해 이루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자의 인생의 목표는 자기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과의 다른 점입니다. 인생의 목표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라면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하든지 간에 신자는 자기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와 긍휼의 힘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은혜가 신자로 하여금 자기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신자로서의 목표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하니까요. 그런데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방식을 너무나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종교적 모습을 띈 일, 그것도 아주 큰일을 해야 하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예컨대 개인적으로는 성경 통독이나 헌금과 봉사를 많이 한 것을 필두로 교회적으로는 양적으로 크게 성장하고 예배당을 거창하게 짓거나, 선교를 많이 하고 봉사를 많이 하면 영광을 돌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대 교회를 보면 ‘누가 더 많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나’를 두고 경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선교사를 50명 보내면 나는 100명을 보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는 말을 공공연하게 하기도 합니다. 봉사도 될수록 거창한 것을 하려고 합니다. 요즘 아프가니스탄에 억류된 모 교회의 봉사단으로 인해 정부가 긴장하고 있지만, 사실 그들이 그곳으로 간 이유가 선교든 봉사든 상관없이 어려운 곳에 가서 봉사할수록 봉사가 더 빛이 나고 보람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만큼은 크게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봉사를 하려면 우리나라에도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많은데, 그들에게는 눈을 두지 않고 왜 굳이 위험한 곳으로까지 가야하는 것입니까? 우리나라에서 편안하게 봉사하는 것보다는, 위험한 지역으로 가서 봉사하는 것이 봉사의 가치를 더 높일 수 있다는 생각이 묻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신자로부터 영광을 받는 모습은 다릅니다. 간단한 예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 50:15)는 말씀만 봐도 신자가 환난 때에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이 그를 건짐으로써 하나님이 영화롭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신자의 거창한 업적을 통해서 영화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건지시는 사랑과 자비하심이 자기 백성을 통해 증거됨으로 영화롭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인간이 어떤 형편에 있든지 간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고, 그 일은 신자의 모든 환경과 형편에서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으로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로 그러한 점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왕하 4장에는 4가지의 놀라운 기적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 본문의 내용은 가난한 선지자의 유족을 엘리사가 도운 일입니다.
본문이 내용은 이렇습니다. 선지자의 생도가 있었는데 그가 빚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경외하면서 선지자의 생도로 있었기 때문에 경제활동을 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결국 빚을 얻어 생활을 했을 것이고 무슨 연유인지 그 생도가 죽어 버리자 채주가 빚 대신에 두 아들을 종으로 삼고자 했던 것입니다. 생도의 아내는 엘리사를 찾아와서 이러한 형편을 호소한 것입니다.

 

 

 


여인의 호소를 들은 엘리사는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라고 묻고는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고 말합니다. 여인이 한 병 기름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자, 엘리사는 여인에게 밖에 나가서 이웃에서 빈 그릇을 많이 빌려 와서 두 아들과 함께 문을 닫고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붓고 차는 대로 옮겨 놓아라고 말합니다. 여인이 엘리사의 말대로 했더니 기름은 빌려온 그릇을 모두 채울 때까지 끊어지지 않았고, 엘리사가 그 기름을 팔아서 빚을 갚고 남은 것으로 생활하라고 한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읽으면 아마 사람들마다 이런 기적이 자신에게 임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기고 할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의 집에 가루와 기름이 항상 그대로였던 것처럼 작은 한 병의 기름으로 이웃에게 빌려온 모든 그릇을 다 채울 수가 있었다는 내용이야 말로 사람들로 하여금 ‘아멘’하게 하는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사람들마다 그러한 기적을 꿈꾸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이 기적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가 무엇일까요? 오늘날에는 일어나지 않는 옛날의 기적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고 배울 수가 있을까요?

 

 

 

본문의 기적을 단지 여인의 빚을 하나님이 도와서 해결해 준 것으로만 보면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가 진 빚을 해결해주는 신 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기적의 의미를 생각하기 위해서 당시의 이스라엘의 상황을 생각해야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여호람 왕이 여로보암의 악의 길로 행하였고, 따라서 모든 백성들도 우상을 섬기면서 오직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은혜와 자비는 실종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하나님이라고 하며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실종되었기에 이스라엘은 자연히 돈을 사랑하고 세상의 편안함을 추구하면서 살아감으로 가난한자를 억압하면서 세상 것으로 자기를 만족시키려고 하는 정신으로만 가득차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형편에서 하나님만을 경외하면서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을 경외함으로써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도 아니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가난하다고 해서 이웃이 도우며 쓸 것을 나눠주는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죽은 선지자의 생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도였지만 당시 이스라엘의 분위기에서는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선지자의 생도란 관심 밖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빚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돈 있는 자들은 자신에게 빚진 자를 붙들어다가 종으로 삼아 버리는 악행이 비일비재했던 것입니다. 사실 가나안 땅은 이러한 세상의 속성을 따르면 안되는 땅입니다. 하나님이 그 땅의 주인으로 계시며 모든 인생들은 그 곳에서 나그네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사람도 돈으로 인해서 주인 노릇 할 수 없는 곳이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가나안 땅이 은혜와 자비의 정신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속성을 그대로 따름으로써 가난한 자들이 억압을 받게 되자 하나님은 그러한 인간의 압제에서 자기의 백성을 건지시며 보호하셨던 것입니다. 엘리사 시대에는 바로 선지 생도들과 같이 하나님만 경외하는 사람들이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에 힘으로 삼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하나님 경외하는 것밖에 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세상의 압제에서 보호하시며 건져주셨던 것입니다. 죽은 생도의 가족을 도와주시고 빚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신 것도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이 하신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빚을 지고 어려울 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면 해결해 주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하나님만을 경외하면서 살아가는 가난한 심령의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고 도우시고 지켜주시는 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경외하기를 잊어버리고 돈과 세상 것을 사랑하면서 그것으로 자신의 힘과 생명을 삼고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 것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기 백성에게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여인에게 기름을 주셔서 빚을 해결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 기적의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기적은 지금도 우리에게 계속되지 않겠습니까? 여인이 기름을 빈 그릇에 부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그리고 여인의 아들이 그릇이 없다고 했을 그 기름이 멎어진 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여인과 함께 계셨으며 여인의 손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능력의 손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셨던 사건이 아니겠습니까?

 

 

 


그릇이 없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름이 끊어진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면서 필요한대로 채워 주시며 모든 상황을 듣고 보고 함께 계신다는 것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신자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신자가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결과입니다. 여러분의 손으로 행하는 모든 것들도 여러분의 힘과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발휘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손으로 일해서 돈을 벌고 그것으로 먹고 살아가고 있는 삶의 모든 것이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써 일용할 양식이 끊어지지 않는 기적의 현장인 것입니다. 즉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여러분을 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도 이 사건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뜻을 증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옛날 여호람 때에 북쪽 이스라엘에 엘리사를 세워서 자신을 증거하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독생자 아들을 세워서 자신을 증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우리를 구원해 주고 보호해 주시는 참 하나님이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아들을 하늘로 데려가시고 성령을 보내심으로써 지금의 이 땅은 단순한 땅이 아니라 성령이 다스리는 세상, 곧 하늘나라라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이라는 가시적인 세상에서 살았지만 지금 우리는 성령이 다스리시는 하늘나라에서 살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호흡하면서 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실제로 하늘나라에 들어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영으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세상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하늘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죽은 선지 생도의 아내에게는 기름 한 병이 가진 것의 전부였습니다. 그것으로는 빚을 갚을 수도 없고 앞으로 생활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그 여인의 처지라면 유일하게 남은 기름 한 병만 바라보면서 신세 한탄이나 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여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자신이 가진 것, 자신이 처한 형편을 바라본다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소유나 형편을 바라보지 마시고 우리를 붙들어서 생명의 나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일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지 않고 지키시는 분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 자체가 기적임을 알게 될 것이고 그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자로 남을 것입니다.

 

 

 

 

 

(11강) 열왕기하 4:8-44  하나님이 함께 하심(2)

 

<본문>

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에 이르렀더니 거기 한 귀한 여인이 저를 간권하여 음식을 먹게 한고로 엘리사가 그곳을 지날 때마다 음식을 먹으러 그리로 들어갔더라 여인이 그 남편에게 이르되 항상 우리에게로 지나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줄을 내가 아노니 우리가 저를 위하여 작은 방을 담 위에 짓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진설하사이다 저가 우리에게 이르면 거기 유하리이다 하였더라 하루는 엘리사가 거기 이르러 그 방에 들어가서 누웠더니 자기 사환 게하시에게 이르되 이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곧 부르매 여인이 그 앞에 선지라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너는 저에게 이르라 네가 이같이 우리를 위하여 생각이 주밀하도다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왕에게나 군대장관에게 무슨 구할 것이 있느냐 여인이 가로되 나는 내 백성 중에 거하나이다 하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그러면 저를 위하여 무엇을 하여야 할꼬 게하시가 대답하되 참으로 이 여인은 아들이 없고 그 남편은 늙었나이다 가로되 다시 부르라 부르매 여인이 문에 서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돐이 되면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여인이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 하니라 여인이 과연 잉태하여 돐이 돌아오매 엘리사의 말한대로 아들을 낳았더라 그 아이가 저으기 자라매 하루는 곡식 베는 자에게 나가서 그 아비에게 이르렀더니 그 아비에게 이르되 내 머리야 내 머리야 하는지라 그 아비가 사환에게 명하여 그 어미에게로 데려가라 하매 곧 어미에게로 데려갔더니 낮까지 어미의 무릎에 앉았다가 죽은지라 그 어미가 올라가서 아들을 하나님의 사람의 침상 위에 두고 문을 닫고 나와서 그 남편을 불러 이르되 청컨대 한 사환과 한 나귀를 내게로 보내소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달려갔다가 돌아오리이다 그 남편이 가로되 초하루도 아니요 안식일도 아니어늘 그대가 오늘날 어찌하여 저에게 나아가고자 하느뇨 여인이 가로되 평안이니이다 이에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몰아 앞으로 나아가라 내가 말하지 아니하거든 나의 달려가기를 천천하게 하지 말라 하고 드디어 갈멜산으로 가서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멀리서 저를 보고 자기 사환 게하시에게 이르되 저기 수넴 여인이 있도다 너는 달려가서 저를 맞아 이르기를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하라 하였더니 여인이 대답하되 평안하다 하고 산에 이르러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서 그 발을 안은지라 게하시가 가까이 와서 저를 물리치고자 하매 하나님의 사람이 가로되 가만 두라 그 중심에 괴로움이 있다마는 여호와께서 내게 숨기시고 이르지 아니하셨도다 여인이 가로되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이르되 네 허리를 묶고 내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라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인사할찌라도 대답하지 말고 내 지팡이를 그 아이 얼굴에 놓으라 아이의 어미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리이다 엘리사가 이에 일어나 여인을 좇아가니라 게하시가 저희의 앞서 가서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았으나 소리도 없고 듣는 모양도 없는지라 돌아와서 엘리사를 맞아 가로되 아이가 깨지 아니하였나이다 엘리사가 집에 들어가 보니 아이가 죽었는데 자기의 침상에 눕혔는지라 들어가서는 문을 닫으니 두 사람 뿐이라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아이의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리니 아이의 살이 차차 따뜻하더라
엘리사가 내려서 집 안에서 한번 이리 저리 다니고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리니 아이가 일곱번 재채기 하고 눈을 뜨는지라 엘리사가 게하시를 불러서 저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 하니 곧 부르매 여인이 들어가니 엘리사가 가로되 네 아들을 취하라 여인이 들어가서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고 아들을 안고 나가니라 엘리사가 다시 길갈에 이르니 그 땅에 흉년이 들었는데 선지자의 생도가 엘리사의 앞에 앉은지라 엘리사가 자기 사환에게 이르되 큰 솥을 걸고 선지자의 생도들을 위하여 국을 끓이라 하매 한 사람이 채소를 캐러 들에 나가서 야등덩굴을 만나 그것에서 들 외를 따서 옷자락에 채워가지고 돌아와서 썰어 국 끓이는 솥에 넣되 저희는 무엇인지 알지 못한지라 이에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였더니 무리가 국을 먹다가 외쳐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솥에 사망의 독이 있나이다 하고 능히 먹지 못하는지라 엘리사가 가로되 그러면 가루를 가져오라 하여 솥에 던지고 가로되 퍼다가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하매 이에 솥 가운데 해독이 없어지니라
한 사람이 바알살리사에서부터 와서 처음 익은 식물 곧 보리떡 이십과 또 자루에 담은 채소를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린지라 저가 가로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그 사환이 가로되 어찜이니이까 이것을 일백명에게 베풀겠나이까 하나 엘리사는 또 가로되 무리에게 주어 먹게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 무리가 먹고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저가 드디어 무리 앞에 베풀었더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다 먹고 남았더라 
 
(열왕기하 4:8-44)

 

 

 


<설교>


신자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신자는 매일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와 기적으로 살고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와 기적 역시 체험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면 말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대개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도, 은혜도, 기적의 삶도 누리지를 못한 채 오히려 모든 것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으로만 살아갑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이 매일 넘치도록 주시는 은혜로도 채워질 수 없도록 구멍 난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일명 욕망의 그릇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이미 욕망으로 인해서 구멍이 난 상태입니다. 너무 크고 구멍이 난 상태이기에 하나님이 매일 부어주시는 은혜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갈증을 느끼며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해 목말라 한다면 감사할 일이겠지만, 내 욕심을 채울 세상 것에 대해 목말라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생도의 아내가 빌려 온 모든 그릇에 기름이 넘치도록 채워주셨습니다. 그것으로 빚은 갚고 생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아내가 그릇이 더 없는 것을 아쉬워했다면 어땠을까요? 분명 모든 그릇에 넘치는 기름에 대해 감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저 ‘그릇이 더 있었다면’라는 아쉬움만 남게 되겠지요? 이것이 인간의 욕망입니다. 이 욕망 때문에 매일 넘치는 은혜와 기적을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는 그릇에 매일 채워주시는데, 사람들은 더 많은 그릇을 가져오고 더 많이 받는 것에만 관심을 둠으로 인해서 채워주시는 은혜를 보지 못하고 기적의 삶도 실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와 든든함도 놓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대해 말해주는 기적입니다. 본문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하루는 갈멜산에 있던 엘리사가 수넴에 오게 됩니다. 수넴은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었고, 또 수넴의 한 여인이 엘리사를 간권하여 음식을 먹게 했기 때문에 그곳을 지날 때 마다 들러서 음식을 먹었던 것입니다. 귀한 여인이라는 말 때문에 귀부인, 즉 돈이 많은 여인을 연상할 수 있는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돈 많은 여인이라는 의미로 귀한 여인이라고 말한다기보다는 당시 이스라엘의 부패한 모습에 비춰볼 때 이 여인의 믿음이 너무 귀해서 귀한 여인이라고 일컫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실제 이 여인은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를 극진히 대접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그 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엘리사가 이스라엘로 갈 때마다 들러서 음식을 먹도록 했고, 9절을 보면 여인이 남편에게 엘리사를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엘리사가 올 때마다 유할 수 있도록 작은 방을 만들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진설하자고 간청한 것을 봐도 그 믿음이 어떤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인은 엘리사를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실 때 대리자로 세우신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여인이 엘리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여기면서 극진히 대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어떤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인은 엘리사를 잘 대접해서 뭔가 이득을 얻고자 하는 마음도 없었습니다. 13절에 보면 엘리사는 사환 게하시를 불러서 여인에게 “네가 이같이 우리를 위하여 생각이 주밀하도다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왕에게나 군대장관에게 무슨 구할 것이 있느냐”라고 묻게 합니다. 하지만 여인은 “나는 내 백성 중에 거하나이다”라고 답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거하는 것으로 아무 부족한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왕과 군대장관의 힘도 필요하지 않고 그들을 아는 것도 원하지 않고 다만 백성들과 함께 거하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그 마음이야 말로 참으로 귀한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여인을 귀한 여인으로 일컫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백성과 함께 거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하는 여인에게 엘리사가 해줄 것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엘리사는 여인을 위해 무엇인가 해주기를 원합니다. 그러자 게하시가 “이 여인은 아들이 없고 그 남편은 늙었나이다”는 말을 하고 엘리사는 여인을 불러서 “돐이 되면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여인은 “아니로소이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라고 반응합니다. 남편도 늙어서 자식을 낳을 가능성이 없는데 돐이 되면 아들을 안을 것이라는 말을 하니 여인의 귀에는 그냥 농담처럼 하는 거짓말로 들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엘리사의 말대로 아들을 낳게 됩니다. 여기까지는 여인에게는 참으로 행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예 포기하고 살았던 아들을 얻었으니 그 기쁨과 행복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들이 죽어 버린 불행이 오게 됩니다. 아이가 자라서 하루는 곡식 베는 아버지에게 나아갔다가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어미에게 보내게 되고, 아들은 낮까지 어미의 무릎에 앉았다가 죽어 버린 것입니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슬픔이 아니겠습니까? 아들이 죽어 버리자 여인은 남편에게 하나님의 사람에게 다녀 올 일이 있으니 사환 한 사람과 나귀 한 마리를 보내달라고 청해서 엘리사에게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갈멜산에서 엘리사를 만난 여인은 엘리사의 발을 안고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28절)라고 호소합니다. 즉 구하지도 않았던 아들을 내게 주셔서 이런 고통을 겪게 하느냐는 호소였던 것입니다. 사실 여인의 말대로 엘리사가 아들을 낳게 하지 않았다면 아들이 죽은 엄청난 슬픔과 고통도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들을 낳지 못한 고통은 있었지만 아예 자식에 대해서는 기대도 하지 않고 살았고 또 백성과 함께 거하는 것으로도 족한 줄 아는 마음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아들을 낳게 함으로써 생각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았던 기쁨과 행복을 맛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아들로 인해서 큰 슬픔과 고통과 불행을 맛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인은 차라리 아들을 주지 않았으면 이런 슬픔과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되지 않았느냐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이 이렇지 않습니까? 사람은 한 평생 살아가면서 기쁨과 슬픔을 겪게 됩니다. 그 기쁨과 슬픔들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평생 기쁨만 있기를 원하지만 내 마음대로 기쁨을 누리고 살 수 없습니다. 또한 슬픔은 없기를 원하지만 내 마음대로 슬픔을 피하며 살 수 없습니다. 때로는 여인처럼 말할 수 없는 큰 기쁨이었던 일이 엄청난 슬픔으로 변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여인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큰 기쁨이 되는 일이 있게 할 것인데, 장차 그 기쁜 일로 인해서 슬픔과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고 한다면 그래도 기쁨이 되는 일을 있기를 원하겠습니까? 사실 고민이 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슬픔이 싫어서 기쁜 일을 마다한다면 결국 평생토록 기쁨은 누려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쁜 일을 주시면서 미래에 있을 일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살다 보면 여인과 같은 일이 있습니다. 원하지도 않았던 뜻밖의 기쁨을 누리기도 하고, 기뻤던 일이 슬픔이 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해야 할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이 본문의 기적이 담고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적은 단지 기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를 담고 있기 때문에 단지 엘리사가 죽은 아들을 살렸다는 기적에만 관심을 두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기적에는 몇 가지 생각해 볼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이의 아버지가 초하루와 안식일도 아닌데 왜 선지자를 만나려고 하느냐고 물었을 때 평안이라고 답한 것입니다. 즉 무슨 일이 있어서 선지자를 만나려고 하느냐는 물음에 아무 일도 없다고 답한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아이가 죽었는데 아비에게 아무 일이 없다고 말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엘리사가 수넴 여인이 오는 것을 보고 게하시를 보내서 평안을 묻습니다. 그때도 여인은 게하시에게 평안이라고 답합니다. 이제 곧 엘리사를 만나면 아이가 죽었음을 얘기 할 것인데 왜 게하시에게는 평안이라고 답했을까요?

 

 

 


아마 여인은 아이가 죽은 일을 오직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에게 직접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 죽은 일에 대한 모든 답은 하나님께 있고, 오직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만이 그 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살린 일도 처음에는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지팡이를 주면서 아이의 얼굴에 놓으라고 합니다. 하지만 여인은 엘리사를 떠나지 않겠다고 합니다. 즉 엘리사가 직접 함께 해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게하시가 지팡이를 아이의 얼굴에 놓았으나 아이는 살아나지 않습니다. 오직 엘리사가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그 손에 대고 그 몸에 엎드렸을 때 아이의 살이 따뜻해지고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왜 지팡이로는 안되고 엘리사가 몸을 맞댔을 때 아이가 살아난 것일까요? 그것을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만약 지팡이를 얼굴에 얹어서 아이가 살아난다면 관심은 지팡이로 향할 수도 있고, 또한 단지 아이를 살린 능력으로만 향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이 몸을 맞대자 아이가 살아난 것은, 생명은 하나님께 있음을 엘리사를 통해서 보여주기 위함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여호와께 있는 이상 신자는 무슨 일에서도 평강이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 기적을 통해서 우상을 섬기고 부패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는 무엇으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려주고 계십니까? 그것은 곧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 대신 죽게 하시고 또한 부활하게 하셔서 하나님이 영원한 참된 생명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며 영원한 생명에 참여된 사람인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어떤 일에서도 평안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8절부터 나오는 들 외의 독을 해독한 사건이나 보리떡 이십과 채소로 일백 명이 먹고 남은 사건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앞의 사건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들 외를 넣고 끓인 솥은 전체가 사망의 독이 퍼진 상태였습니다. 이것은 온 저주로 인해 사망에 처한 세상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엘리사가 가루를 솥에 던져서 해독한 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이스라엘은 저주가 없고 따라서 사망에서도 벗어났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저주 아래 있던 우리를 사망에서 벗어나게 하신 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보리떡 이십과 채소로 일백 명이 먹고 남은 것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인해서 신자는 참된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가 누리는 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세상의 것으로 풍성해지는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4장에 등장하는 네 가지의 기적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기적이 사람을 세상에서 부요한 자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우리를 세상에서 부유한 자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는 생명이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신자에게 함께 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믿음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영원한 생명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린 그것을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봄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에는 오직 평안만이 있을 것입니다. 신자가 영원한 생명에 소망을 두지 않는다면 세상의 일로 인해서 이 평안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게 될 뿐입니다.

 

 

 

 

 

(12강) 열왕기하 5:1-14  나아만의 문둥병

 

<본문>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더라 전에 아람 사람이 떼를 지어 나가서 이스라엘 땅에서 작은 계집아이 하나를 사로잡으매 저가 나아만의 아내에게 수종들더니 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 나아만이 들어가서 그 주인에게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땅에서 온 계집아이의 말이 이러이러하더이다 아람 왕이 가로되 갈찌어다 이제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글을 보내리라 나아만이 곧 떠날쌔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개와 의복 열벌을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 왕에게 그 글을 전하니 일렀으되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 문둥병을 고쳐주소서 하였더라 이스라엘 왕이 그 글을 읽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이관대 능히 사람을 죽이며 살릴 수 있으랴 저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 보내어 그 문둥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로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이스라엘 왕이 자기 옷을 찢었다 함을 듣고 왕에게 보내어 가로되 왕이 어찌하여 옷을 찢었나이까 그 사람을 내게로 오게 하소서 저가 이스라엘 중에 선지자가 있는 줄을 알리이다 나아만이 이에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이르러 엘리사의 집 문에 서니 엘리사가 사자를 저에게 보내어 가로되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이켜 분한 모양으로 떠나니 그 종들이 나아와서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씀대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잠그니 그 살이 여전하여 어린아이의 살 같아서 깨끗하게 되었더라(열왕기하 5:1-14)

 

 

 


<설교>


기독교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피에 있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기독교의 중심이자 생명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망각하거나 가볍게 여긴다면 그것은 이미 기독교가 아닙니다. 다만 십자가라는 상징물을 걸치고 있는 ‘기독교’란 이름의 종교일 뿐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에 마음을 두며 감사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신앙의 순수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순수성에 대해 말할 때, 인간 자체가 순수하지 못한데 그런 인간에게서 순수한 신앙을 기대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인간은 순수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인간에게서 순수한 신앙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으로서는 안되는 일을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인간이 어느 정도로 순수하지 못하고 악한가를 깨닫게 하시고,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게 하시고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의 은혜만을 의지하게 하심으로써 순수한 신앙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 우리에게 신앙의 순수함이 남아 있습니까? 남아 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순수함을 잃어버린 이유를 생각해야 하고 다시금 순수한 신앙으로 돌아가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순수함을 잃어버렸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만을 바라보지 않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공로와 행위에 의미를 두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공로와 행위에 의미를 둔다는 것은 뭔가에 욕심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아무 욕심이 없이 다만 신자의 영원한 생명에만 관심을 둔다면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전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구원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피로서 완전히 충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교회에 둠으로써 그리스도의 피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피의 은혜가 교회를 부흥되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부흥에는 필히 인간의 행위와 공로가 있어야 합니다. 결국 교회를 향한 욕심이 순수한 신앙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향한 욕심이 버려지기 위해서는 교회 부흥보다 더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로써만 해결 될 수 있는 우리의 실상입니다. 신자의 관심이 그리스도의 피에 집중된다면 자연히 교회를 향한 욕망, 세상을 향한 욕망은 다스려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의 관심이 그리스도의 피에 집중되기 위해서는 앞서 말한 대로 피의 은혜가 아니면 안되는 인간의 실상을 깊이 자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나아만이라는 문둥병 환자가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아람의 군대장관입니다. 아람은 강한 국가입니다. 그러한 나라의 군대장관이라면 세상의 기준에서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그가 문둥병이라는 엄청난 저주를 안고 살아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비록 문둥병에 걸렸어도 군대장관으로 살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군대장관이 아니더라도 문둥병이 아닌 깨끗한 몸으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사실 사람들이 나아만 장군을 어떻게 대했겠습니까? 군대장관이라는 권력 때문에 나아만에게 머리는 숙일지언정 가까이 하려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시의 문둥병은 저주 받은 병이었는데 저주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가까이 하려고 하겠습니까? 따라서 비록 군대장관으로써 권력을 누렸다고 해도 나아만은 행복한 삶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런 나아만에게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잡아온 작은 계집종 하나가 “그 주모에게 이르되 우리 주인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 앞에 계셨으면 좋겠나이다 저가 그 문둥병을 고치리이다”(3절)는 말을 합니다. 나아만이 이 얘기를 왕에게 고하자 아람 왕은 “내가 내 신하 나아만을 당신에게 보내오니 이 글이 당신에게 이르거든 당신은 그 문둥병을 고쳐주소서”(6절)라고 쓴 편지와 함께 은 십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의복 열 벌을 가지고 가게 합니다.
그런데 아람 왕의 편지를 읽은 이스라엘 왕이 “내가 어찌 하나님이관대 능히 사람을 죽이며 살릴 수 있으랴 저가 어찌하여 사람을 내게 보내어 그 문둥병을 고치라 하느냐 너희는 깊이 생각하고 저 왕이 틈을 타서 나로 더불어 시비하려 함인줄 알라 하니라”(7절)는 반응을 보입니다.

 

 

 

 

아람 왕은 단지 자신의 군대장관의 문둥병을 고쳐달라는 부탁이었을 뿐인데, 이스라엘 왕은 아람이 자신들을 공격하기 위해 시비를 거는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은 아람의 왕의 편지를 받고 하나님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요구한 것은 자신에게 시비하기 위함이라고 단정 지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의 이런 모습만 봐도 당시 이스라엘의 신앙이 어떠했는가를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람 왕은 이스라엘 왕더러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있는 선지자에게 부탁해서 고쳐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도 선지자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일을 내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에만 몰두하고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으로 고민한 것입니다.

 

 

 


어린 계집종은 사마리아에 선지자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왕에게 갈 필요가 없이 곧 바로 사마리아에 있는 엘리사를 찾아가도 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굳이 이스라엘의 왕에게 찾아가게 하셔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하여금 고민과 번민에 빠지게 한 것은 이스라엘이 신앙적으로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드러내시는 것이고, 이스라엘이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자 하신 하나님의 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엘리사가 나아만에게 제시한 방법은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것이었습니다.(10절) 이러한 엘리사의 지시에 대해 나아만은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11,12절)고 화를 냅니다.

 

 

 


나아만은 엘리사가 직접 자신을 영접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쳐줄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즉 문둥병을 고치는 방법도 자신의 지위에 걸맞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종들의 “내 아버지여 선지자가 당신을 명하여 큰 일을 행하라 하였더면 행치 아니하였으리이까 하물며 당신에게 이르기를 씻어 깨끗하게 하라 함이리이까”(13절)는 권고를 듣고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음으로써 문둥병이 나은 것입니다.

 

 

 


이처럼 나아만 장군의 문둥병이 고침 받은 이야기는 나아만 장군 한 사람의 구원 얘기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며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의지하는 순수한 신앙의 자리로 되돌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아만에게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요단강 건너에는 이스라엘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게 된 것은 그들의 능력이 아니라 희생의 피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널 때 앞세운 것은 법궤였습니다. 법궤를 앞세웠을 때 요단강 물이 말라서 건널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법궤에는 제물의 피가 뿌려져 있습니다.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은 제물의 피의 은혜를 입은 자만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단강 건너 약속의 땅에 거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제물의 피의 은혜와 공로로 인해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를 잊고 산다면 그것이야 말로 이스라엘다움을 잊어버린 것이 됩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의 신앙은 이스라엘다움을 잊어버린 채 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형편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어떤 존재였으며 자신들을 살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잊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단강에 문둥병자인 나아만을 보내서 일곱 번 몸을 씻게 하여 낫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들의 본질을 돌아보도록 하신 것입니다. 즉 나아만의 문둥병은 이스라엘이 곧 문둥병이 걸린 상태와 같음을 말하는 것이고, 일곱 번 씻어서 낫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이스라엘을 저주에서 구출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일곱 번 씻게 하시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임을 의미합니다. 일곱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안식하신 날로써 하나님이 모든 일을 이루셨음을 뜻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일곱은 인간의 도움이나 힘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요단강에 몸을 씻는 나아만을 보면서 자신들이 바로 문둥병이 걸린 것과 같은 형편에 있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희생의 피가 자신들을 깨끗케 한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애를 쓰고 금송아지를 섬기면서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이방인과 전혀 다를 바가 없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이처럼 자신들의 형편을 제대로 바라보게 될 때, 요단강에서 몸을 씻고 깨끗함을 입은 나아만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을 깨끗케 하고 살리는 것은 자신들의 힘과 공로가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은혜이며 제물의 희생의 피에 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신자된 것입니다. 나아만은 종들의 충고로 인해서 자신이 군대장관이라는 것보다는 문둥병자라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럴 때 관심은 군대장관의 대우를 해주지 않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둥병이 낫는 것에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신자에게 있어야 할 순수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교회에서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문둥병자라는 자기 실상입니다. 세상에서 내가 누구라는 것은 다 잊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자신이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되면 교회에서도 자신의 위치에 걸 맞는 대접을 받고자 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대한 대접을 받지 못하게 되면 결국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의 지위와 가진 것에 걸맞는 대접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문둥병자에 걸맞는 대접을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긍휼과 사랑으로 만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실상을 바로 보고 살아가는 신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마다 은혜로 인한 감사와 찬송만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순수한 신앙입니다.

 

 

 


문둥병자가 모였을 때 있어야 하는 관심은 무엇이 우리를 깨끗케 하느냐? 입니다. 이것이 진짜 문둥병자들의 모임입니다. 문둥병자가 모여서 ‘나는 목사다’ ‘나는 장로다’ ‘나는 군대장관이다’라고 하고 있다면, 그것은 자기 실상을 보지 않고 있는 것이고, 따라서 희생의 피로써 깨끗케 하신 은혜에 대한 감사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깨끗한 존재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속은 더러움으로 가득합니다. 이런 실상을 깨닫고 ‘나는 문둥병자입니다’라는 고백으로 예수님께 나오는 것이야 말로 피의 은혜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순수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3강) 열왕기하 5:15-27  게하시의 문둥병

 

<본문>

나아만이 모든 종자와 함께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도로 와서 그 앞에 서서 가로되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줄을 아나이다 청컨대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가로되 나의 섬기는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받지 아니하리라 나아만이 받으라 강권하되 저가 고사한지라 나아만이 가로되 그러면 청컨대 노새 두 바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든지 다른 제든지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오직 한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거기서 숭배하며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너는 평안히 가라 저가 엘리사를 떠나 조금 진행하니라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 가지고 온 것을 그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저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취하리라 하고 나아만의 뒤를 쫓아가니 나아만이 자기 뒤에 달려옴을 보고 수레에 내려서 맞아 가로되 평안이냐 저가 가로되 평안이니이다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생도 중에 두 소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 왔으니 청컨대 당신은 저희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 나아만이 가로되 바라건대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고 저를 억제하여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벌을 아울러 두 사환에게 지우매 저희가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 언덕에 이르러는 게하시가 그 물건을 두 사환의 손에서 취하여 집에 감추고 저희를 보내어 가게 한후 들어가서 그 주인 앞에 서니 엘리사가 이르되 게하시야 네가 어디서 오느냐 대답하되 종이 아무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 엘리사가 이르되 그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을 때에 내 심령이 감각되지 아니하였느냐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 그러므로 나아만의 문둥병이 네게 들어 네 자손에게 미쳐 영원토록 이르리라 게하시가 그 앞에서 물러나오매 문둥병이 발하여 눈 같이 되었더라(열왕기하 5:15-27)

 

 

 


<설교>


지난 시간에 나아만이 문둥병을 고침 받는 것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문둥병은 저주의 병이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 고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고 몸이 깨끗하게 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입은 결과였습니다. 나아만은 자신의 병이 낫자 “내가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15절)라고 하면서 엘리사에게 가져온 예물을 바치고자 합니다.

 

 

 


지금 나아만의 입장으로는 엘리사에게 무엇을 준다고 해도 아까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비록 군대장관이라는 지위와 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음으로써 권력을 누리고 있다고 해도 문둥병은 그의 생활 전부를 무너뜨리는 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육신의 고통은 두말할 것 없지만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받아야 하는 고통도 클 것입니다. 즉 그 인생 자체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는 저주의 병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아만이 그동안 병을 고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고, 자기 나라의 신을 찾아서 기도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고침 받지 못한 상황에서 이스라엘의 신을 섬기는 엘리사를 찾아와서 병을 고침 받았으니 오직 이스라엘의 신이 최고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고 나아만에게는 무엇을 바친들 아까울 것이 없었던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나아만의 예물을 받기를 거절합니다. 나아만이 거듭 받기를 강권해도 엘리사는 받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나아만은 노새 두 바리에 실을 흙을 주면 이제부터는 번제든지 다른 제사든지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않고 오직 여호와께만 드리겠다는 말을 합니다(17절). 나아만이 흙을 달라고 하는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오직 여호와께만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라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이스라엘의 흙을 가져가서 그것으로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겠다는 것일 수 있고, 아니면 아람에서 여호와께 제사드릴 곳에 이스라엘의 흙을 뿌림으로써 그곳을 거룩한 땅으로 삼겠다는 의도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제부터는 여호와께만 제사하겠다는 것은 여호와부터 입은 은총을 계속해서 잊지 않겠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비록 아람 땅에서 산다고 해도 여호와만을 섬기는 이스라엘 사람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아만은 오직 한가지 일만은 용서해 달라고 합니다. 그것은 18절에서 “오직 한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거기서 숭배하며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사유하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람 왕이 림몬의 당에 들어가서 신에게 경배할 때는 자신이 왕과 동행할 수밖에 없어서 할 수 없이 림몬의 당에서 몸을 굽혀야 하는데 그 일만큼은 용서해달라는 것입니다. 나아만의 이 말을 듣고 엘리사는 ‘그것은 우상 숭배다 그러면 안된다’는 말을 하지 않고 그냥 평안히 가라고만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림몬의 당에 절하는 것을 허락했다는 것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림몬의 당에 절을 하지 않게 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절을 하던 하지 않던 그것은 앞으로 하나님을 향한 나아만의 믿음에 의해서 결정할 문제이지 엘리사가 ‘해라 하지 말라’고 지시할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가령 교회를 처음 출석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조상에게 제사를 드립니다. 그런 경우 대개 ‘제사는 우상 숭배니까 하면 안됩니다’라는 말을 하기 일쑤인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가 할 일은 신자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전하고 하나님만이 참된 신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제사의 여부는 신자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됨으로써 그에 따라 스스로 결정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본문에서 중요한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엘리사는 왜 예물을 받지 않았을까요? 나아만이 가져온 예물은 상당한 액수였습니다. 그것을 받아서 이스라엘의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엘리사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강제로 달라는 것도 아니고 자청해서 바치겠다는 것인데 그냥 받아서 좋은 일에 쓰면 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저 같아도 그랬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나아만이 받으라고 강권을 해도 끝까지 거절하고 받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나아만의 예물을 받으면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하심의 의미가 훼방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이 나음을 입은 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나아만에게 함께 한 결과입니다. 단순히 병이 나은 것이 아니라 저주에서 해방된 은총과 자비하심을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나아만의 예물을 엘리사가 받는다면 나아만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입은 은총에 대해 어느 정도 보답했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나아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함이 반감되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누군가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고 합시다. 그리고 무엇으로든 은혜에 대한 보답을 치렀다고 합시다. 그럴 때 과연 큰 은혜를 베푼 사람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보답을 치르기 전과 치룬 후가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전혀 보답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계속해서 은혜 베푼 자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지만, 보답을 했다고 생각하게 되면 ‘나 대가를 치렀잖아’라는 생각으로 고마움과 미안함 마음이 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엘리사가 예물을 받으면 나아만은 보답을 했다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은 나아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하심에 대한 감사를 잊게 하면서 떳떳한 마음을 갖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이 오직 자신을 깨끗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함을 알고 돌아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엘리사는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만 마음을 두고 있습니다. 나아만의 예물로 인해서 자신이 풍족해 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것을 외면하는 것이야 말로 엘리사에게는 예물보다도 하나님의 은총을 아는 것이 더 소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 있어야 하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신자가 교회에 바치는 예물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알고 살아가는 그 마음을 소중히 여겨주는 것이야 말로 교회의 참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없음으로 인해서 결국 엘리사의 사환인 게하시와 같은 탐욕의 마음만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는 것일 뿐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엘리사가 나아만의 예물을 거절하자 그것을 아까워하는 사람이 게하시입니다. 20절의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 가지고 온 것을 그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저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취하리라 하고”라는 내용을 보면 게하시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게하시는 엄청 낸 액수의 예물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많은 예물이 게하시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게하시는 나아만을 쫓아갑니다. 그리고 나아만에게 “우리 주인께서 나를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지금 선지자의 생도 중에 두 소년이 에브라임 산지에서부터 내게 왔으니 청컨대 당신은 저희에게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을 주라 하시더이다”(22절)는 말을 합니다. 무작정 예물을 달라고는 할 수 없어서 적당한 구실을 만든 것입니다.

 

 

 


마치 교회가 성경의 내용들을 이용해서 적당한 구실을 만들어 교인들로 하여금 예물을 바치도록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게하시가 없는 일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교회 역시 성경에 없는 말을 만들어 내어서 예물을 바치도록 하지 않습니까? 나아만은 게하시에게 은 두 달란트와 옷 두벌을 주고 게하시는 그것을 받아 돌아와서 집에 감추어 두었지만 결국 그 모든 일을 알고 있는 엘리사에게 저주를 받아서 문둥병에 걸리고 맙니다.

 

 

 


다시 우리가 게하시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이 게하시였다면 엘리사가 예물을 받지 않는 것을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분명 ‘왜 받지 않는가? 강제로 달라는 것도 아니고 감사의 마음으로 바치겠다는 것인데 받아서 좋은 일에 쓰면 되지 않는가?’라는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예물에 마음을 두는 게하시는 엘리사와 다른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이 찾아온 것이나 나아만이 요단강에서 몸이 나은 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물을 받지 않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알고 돌아가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사와 함께 있는 게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마음보다는 자기의 생존이 중요했습니다. 그래서 자연히 생존에 아주 중요한 재물에 마음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게하시의 마음이라면 이런 마음을 오늘 우리에게서 발견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게하시의 마음이 곧 우리의 마음인 것을 발견해야 할 것이고, 이런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여겼던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목사가 엘리사의 마음이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서 예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아는 마음이 되기만을 원해야 합니다. 그것이 엘리사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목사가 교회를 자기 생존위한 터전으로 바라보게 되면 게하시의 마음으로 신자를 바라보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아는 마음이 되기보다는 목사의 사정을 알아주기를 원하면서 많은 예물을 들고 나오기를 기대하게 될 뿐입니다. 그런데 진심으로 엘리사의 마음으로 설교하는 목사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저 역시 제 속에서 게하시의 마음을 발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부끄럽고 악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이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목사가 선포할 수 있는 것은 다만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자비하심과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이 낳은 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보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이 고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와 자비하심을 나아만에게 베푼 것으로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예물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반면에 게하시는 자기 스승인 엘리사의 능력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든지 예물을 받아도 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처럼 같은 사건, 같은 일을 바라보면서도 시각이 다릅니다. 그 마음이 애초에 다르기 때문이겠죠?

 

 

 


이것은 게하시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으로 새로운 피조물 되었다는 믿음이 없음을 의미합니다. 게하시 자신이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함이 없기 때문에 엘리사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것이고, 엘리사처럼 나아만이 고침 받은 일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자신이 새로운 피조물 되었음을 아는 것입니다. 저주 아래 있던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으로 인해서 살았고 새롭게 되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와 자비하심에 대한 감사로 그 마음에 채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게하시의 마음이 아니라 엘리사의 마음으로 우리의 모든 삶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았다는 기쁨의 그 마음이 신자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증거 하는 길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알지 못한 마음이라면 게하시처럼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만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주로 끝날 뿐입니다.

 

 

 

 

 

(14강) 열왕기하 6:1-7  떠오른 도끼

 

<본문>

선지자의 생도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한 곳이 우리에게는 좁으니 우리가 요단으로 가서 거기서 각각 한 재목을 취하여 그곳에 우리의 거할 처소를 세우사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가라 그 하나가 가로되 청컨대 당신도 종들과 함께하소서 엘리사가 가로되 내가 가리라 하고 드디어 저희와 함께 가니라 무리가 요단에 이르러 나무를 베더니 한 사람이 나무를 벨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물에 떨어진지라 이에 외쳐 가로되 아아, 내 주여 이는 빌어온 것이니이다 하나님의 사람이 가로되 어디 빠졌느냐 하매 그곳을 보이는지라 엘리사가 나무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서 도끼로 떠오르게 하고 가로되 너는 취하라 그 사람이 손을 내밀어 취하니라(열왕기하 6:1-7)

 

 

 


<설교>


신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이 자신에게 함께 해주시기를 구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하나님 우리 교회와 함께 해주시고’ ‘하나님 우리 가정에 함께 해주시고’ ‘하나님 우리 자녀에게 함께 해주시고’라는 내용들이 아닙니까? 그러면 왜 이토록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기를 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실패가 성공으로 변하고, 불행이 행복으로 변할 것이라는 환상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해 갖고 있는 환상은 끝이 없습니다. 온통 자기 육신을 중심으로 한 욕망이 새어나오고 있는 환상 속에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이 갖고 있는 그 환상을 깨뜨리심으로써 하나님이 벌이시고 계시는 현실을 보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써 벌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현실을 본문에서 보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선지자의 생도가 엘리사에게 지금 현재 거하는 곳이 좁으니 요단으로 가서 처소를 세우겠다고 말하자 엘리사가 그리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생도 중에 하나가 엘리사에게 자신들과 함께 가주기를 청하자 엘리사가 그들과 함께 요단으로 가게 됩니다.
무리가 요단에 도착해서 처소를 지을 재목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는데 한 사람이 나무를 벨 때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물에 빠져 버립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아아, 내 주여 이는 빌어온 것이니이다”(5절)라며 깊은 탄식을 하면서 절망에 빠집니다.

 

 

 


이미 앞에 등장했던 여러 기적들을 보면 당시 선지자의 생도들의 형편이 아무 어려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도가 죽자 빚만 남은 형편에서 자식을 종으로 뺏길 뻔한 생도의 아내 얘기가 그렇고, 생도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들 외를 따서 죽을 끓여 먹다가 독으로 인해 죽을 뻔한 일이 생도들의 사정이 어떠했던가를 보여줍니다. 본문에서도 집을 짓기 위해 필요한 나무를 베기 위해 도끼를 빌어 와야 할 정도로 생도들의 형편이 어려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물에 빠져 버렸으니 얼마나 낙담하였겠습니까? 이것을 보면 도끼가 빠진 그 물이 깊어서 도무지 도끼를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도끼는 다시 찾을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지요. 더군다나 도끼를 변상할 힘도 없으니 앞으로의 일이 막막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아, 내 주여 이는 빌어온 것이니이다” 는 탄식은 깊음 절망과 함께 커다란 낙심을 담고 있는 탄식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먼저 주지해야 하는 것은, 엘리사가 함께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시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즉 하나님이 생도들과 함께 하고 있는데 도끼가 물에 빠져 버리는 절망적 상황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점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앞서 말한 대로 사람들이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기를 구하는 것은 본문과 같은 절망적 상황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하는데도 불구하고 탄식과 절망의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해서 탄식과 절망의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을 잊게 되면 신앙생활은 그야말로 인간의 공상세계로 끝나버릴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공상 세계는 한마디로 욕망의 세계입니다. 인간의 욕망이 온갖 공상을 만들어 내고 있고, 그 안에 신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망에 의해 만들어 진 신이 인간이 꿈꾸는 공상세계에 함께 하면서 인간을 돕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면 탄식과 절망의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그러한 공상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생도들이 엘리사에게 요단으로 함께 가기를 요청한 것이 무슨 이유겠습니까? 일할 사람이 부족해서일까요? 설사 일할 사람이 부족하다고 해도 선지자의 생도가 자신들의 스승인 선지자 엘리사가 함께 일해주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함께 가기를 원했겠습니까?
엘리사는 지금까지 생도들 앞에서 많은 이적을 행했습니다. 그 이적을 본 생도들이 엘리사를 의지할 것은 당연합니다. 이점을 생각해 본다면 생도들은 능력의 선지자인 엘리사가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했을 것이고, 모든 일이 형통하게 잘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엘리사가 함께 했음에도 불구하고 탄식과 절망의 상황은 발생한다는 것은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인 것은 사실입니다.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절망과 탄식의 상황은 얼마든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왜 자기 백성을 그러한 탄식과 절망의 상황으로 이끌어 가시느냐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알 수가 있다면 신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6,7절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이 가로되 어디 빠졌느냐 하매 그곳을 보이는지라 엘리사가 나무가지를 베어 물에 던져서 도끼로 떠오르게 하고 가로되 너는 취하라 그 사람이 손을 내밀어 취하니라”고 말합니다. 이 내용이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갖게 합니다. 역시 하나님의 사람이 함께 했기 때문에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오직 자기 육신의 문제에 치우친 채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내용을 육신에 유리한 쪽으로 이해하고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내용이 어떤 탄식과 절망의 상황이 닥친다고 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다 해결해 주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는 것일까요? 성경이 그런 수준이라면 너무 빈약하고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면 본문의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말한 대로 도끼가 물에 빠진 것은 생도에게는 절망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도끼를 물어 줘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처소를 짓고자 하는 것도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지자 쇳덩어리인 도끼가 물 위에 떠오릅니다. 탄식과 절망이 희망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런 경우의 일을 두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랑과 자비로 도우셔서 물에 빠진 도끼를 떠오르게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도끼가 물에 떠오른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의 결과인 것은 맞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면 쇳덩어리가 물 위로 떠오르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단순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문제가 해결 됐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을 믿고 살자’라는 말로 본문을 끝내기는 너무 미흡합니다. 자, 도끼를 물에 빠뜨린 생도는 도끼 하나로 인해서 탄식과 절망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도우심을 경험했습니다. 탄식과 절망이 클수록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더욱 크게 다가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도끼가 물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무 일이 없이 평탄하게 나무를 베서 처소를 만드는 일은 진행이 되었겠지만 탄식과 절망은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도우심이 얼마나 큰가에 대해서도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탄식과 절망의 상황이 없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도우심을 알기는커녕 아예 잊고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평소의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느끼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감사하십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 일이 없이 평온하게 살아갈 때 우리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함께 하신 도우심의 결과라는 것을 잊고 삽니다. 평온함이 하나님의 사랑, 도우심으로 인해서 누리고 있는 것임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도끼를 물에 빠뜨리기 전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얼마나 큰가를 실감하지 못하는 생도처럼 말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탄식과 절망의 상황을 주시고, 그 상황에서 건져 주심으로써 하나님이 도와주심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일이 잘되는 것만 바라지 도우심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이 얼마나 큰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서 잘 살면 된다.’는 자기 위주의 생각만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사랑과 자바하심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가 가져다준 결과만으로 좋아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신앙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선지자의 생도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한 곳이 우리에게는 좁으니 우리가 요단으로 가서 거기서 각각 한 재목을 취하여 그곳에 우리의 거할 처소를 세우사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가라”고 말합니다.

 

 

 


생도들은 좁은 환경, 즉 생활에 불편한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요단으로 가서 처소를 짓고자 한 것입니다. 생도들이 추구하는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들은 항상 좋은 환경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도우심도 그런 자기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으로 맺어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간의 욕구는 스스로를 탄식과 낭패의 상황으로 집어넣을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엘리사가 가라고 한 것은, 생도들의 의견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그들의 욕구대로 행동하도록 허용함으로써 탄식과 낭패의 상황을 맛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잊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도우심을 맛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좁은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처소를 짓고자 했던 생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과 도우심으로 살아간다는 감사가 없습니다. 이러한 생도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알게 하기 위해 그들의 욕구대로 가라고 한 엘리사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오늘 우리를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실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집 짓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라는 이것은 그냥 종교에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하심을 알게 해주십시오.’라는 이것이 신앙입니다. 여러분께 지금 있는 모든 것을 당연히 있는 것으로 보지 마시고 잊어버린 것을 다시 찾은 것으로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자비하심과 도우심으로 늘 살아가고 있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15강) 열왕기하 6:8-19  눈을 열어 보게 하소서

 

<본문>

때에 아람 왕이 이스라엘로 더불어 싸우며 그 신복들과 의논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아무데 아무데 진을 치리라 하였더니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왕은 삼가 아무 곳으로 지나가지 마소서 아람 사람이 그곳으로 나오나이다 이스라엘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자기에게 고하여 경계한 곳으로 사람을 보내어 방비하기가 한 두번이 아닌지라 이러므로 아람 왕의 마음이 번뇌하여 그 신복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이스라엘 왕의 내응이 된 것을 내게 고하지 아니하느냐 그 신복 중에 하나가 가로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이라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나이다 왕이 가로되 너희는 가서 엘리사가 어디 있나 보라 내가 보내어 잡으리라 혹이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엘리사가 도단에 있나이다 왕이 이에 말과 병거와 많은 군사를 보내매 저희가 밤에 가서 그 성을 에워쌌더라 하나님의 사람의 수종드는 자가 일찌기 일어나서 나가보니 군사와 말과 병거가 성을 에워쌌는지라 그 사환이 엘리사에게 고하되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 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원컨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 엘리사가 저희에게 이르되 이는 그 길이 아니요 이는 그 성도 아니니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의 찾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리라 하고 저희를 인도하여 사마리아에 이르니라 (열왕기하 6:8-19)

 

 

 


<설교>


지난 시간에 선지자의 생도가 물에 빠뜨린 도끼가 다시 물에 떠오른 기적의 이야기는 신자가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고 살 것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내용이었습니다. 생도가 도끼를 물에 빠뜨린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고, 떠오른 도끼를 다시 취함으로써 도끼가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것 하나까지도 하나님의 도우심의 결과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내용은 오늘 우리들의 현실 또한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해주었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나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간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기적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도끼를 물에 빠뜨린 것처럼 내 손에 있는 모든 것들도 얼마든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잃어버릴 수 있는 것들인데 지금 내게 주어져 있다는 것은 물에 떠 오른 도끼처럼 하나님의 기적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현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우리의 현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보이는 사물 밖에 보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서 눈으로 볼 수 없는 현실을 보게 하는 영적인 눈을 갖게 하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에 의해 살아가는 새로운 현실을 볼 수만 있다면 어떤 어려운 현실에서도 낙심하기보다는 하나님이 계심을 바라보면서 든든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람 왕이 이스라엘과 싸우면서 신복들과 함께 진칠 곳을 정하는 등 작전계획을 세우는데 엘리사가 그 계획을 미리 알고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줌으로써 이스라엘이 미리 대비를 하게 되고, 결국 아람 왕의 모든 작전이 실패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라 여러번 발생하게 되자 아람 왕은 자기들 중에 이스라엘의 첩자가 있는 것으로 의심을 합니다.

 

 

 


그러자 신복 중의 하나가 아람 왕에게 자기들 중에 첩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가 있는데 그가 왕이 침실에서 한 말이라도 다 알고 이스라엘 왕에게 미리 알려주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작전 계획을 세운다고 해도 다 허사입니다. 전쟁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람 왕은 엘리사를 잡기 위해서 엘리사가 있는 도단에 많은 말과 병거와 군사를 보내서 성을 포위해 버립니다.

 

 

 


먼저 이 내용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아람 왕이 신복들과 함께 진칠 곳을 정하고 작전 계획을 세울 때 자신들의 하는 말을 엘리사가 모두 알고 이스라엘에게 알려줌으로써 아람의 모든 계획이 허사가 되는 것은 세상의 일은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계획을 세우고 준비한다고 해도 결국 일의 성사는 여호와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 눈이 감긴 것입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아람 왕은 나아만이 문둥병이 나아서 돌아오는 것으로 이미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사가 자신의 모든 계획을 미리 알고 이스라엘로 하여금 방비토록 한다면 결국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치는 자신의 계획을 막고 있음을 눈치 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람 왕은 엘리사를 붙들어서라도 이스라엘을 치는 자신의 계획을 성사시키려고 합니다. 이것이 자기의 뜻과 계획을 고집하는 것이고 눈이 감긴 자에게서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가지고 일하심을 믿는다면 신자가 취할 태도는 자기의 뜻과 계획대로 되기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진행해 가시는 모든 일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해 눈이 열린 신자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뜻과 계획을 고집부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으로 우리는 인도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미처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말하면서도 사랑과 자비에 대해 눈이 감겨 있기 때문에 그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인도 받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세상만 바라보고, 세상의 것만 좋은 것인 줄로 여기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에 있게 하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게 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엄청난 사랑과 자비하심이 우리를 인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 현실을 보는 눈이 없기 때문에 보이는 세상에서의 일이 잘되는 것만 추구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람 왕의 어리석음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자신들의 계획을 다 안다는 것은, 자신들의 모든 일이 하나님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람 왕이 그러한 현실을 보지 못하는 것이나,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심을 보지 못하는 것과 다르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말하면서도 그 다스림에 자신을 맡기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이나 인도하심이 몸에 와 닿지 않는다는 것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에 나타나는 현상들이 없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다스림과 인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허전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조용하게 일해가시는 것을 믿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아람 군대가 성을 에워싸자 엘리사의 사환이 그것을 보고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15절)라고 하면서 크게 절망합니다. 아람 군대로 인해서 절망한 사환에게 엘리사는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한 자가 저와 함께한 자보다 많으니라”(16절)고 말하고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17절)라고 기도하자 하나님이 사환의 눈을 열어서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 서 있는 장면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눈이 감긴 상태에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아람 군대만 보이는데, 하나님이 눈을 열어서 참된 현실을 보게 하시자 엘리사를 둘러 서 있는 불 말과 불 병거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하나님이 여러분의 눈을 열어서 그러한 장면을 보게 해주시기를 원할 것입니다. 얼마나 가슴이 뛰는 장면입니까? 불 말과 불 병거가 나를 둘러 서 있는 장면만 목격할 수 있다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고 여겨질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런 것을 전혀 목격한 적이 없기 때문에 본문의 얘기는 그냥 신화처럼 여기고 관심을 두지 않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지금 여러분에게는 불 말과 불 병거가 둘러서 있습니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 말을 믿겠습니까? 안 믿을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불 말과 불 병거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믿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환의 눈을 열어서 불 말과 불 병거를 보게 하신 것이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이해가 되어야 할까요? 불 말과 불 병거가 엘리사를 둘러 서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보호하고 지키시고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즉 신자가 믿을 것은 불 말과 불 병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즉 엘리사의 사환은 아람 군대가 성을 둘러싼 현실만 보았을 뿐,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들을 붙들고 있는 진짜 현실은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이 눈이 감긴 상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눈을 열어서 보게 하자 비로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고 있는 현실을 보게 된 것입니다. 신자가 눈이 열려서 봐야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백성을 붙들고 있는 현실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사환처럼 아람 군대가 둘러싼 눈에 보이는 현실에 의해서 항상 절망하고 불안해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8:35절을 보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고 말합니다. 이것이 신자의 현실입니다.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고, 고통에 빠뜨리는 어떤 일들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자는 어떤 상황에 있다고 해도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이 현실을 볼 수 있는 눈에 열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금 당장 죽어도 천국가지 않겠습니까?

 

 

 


하늘나라를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하늘나라에 누가 있겠습니까? 아브라함도 있을 것이고 모세도 있을 것이고 다윗도 있을 것이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들 중에 누가 신나고 재미있는 신앙생활을 했습니까? 사람들의 환대를 받고 존경을 받으면서 신앙생활 했습니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고난과 고통의 길을 가면서도 하나님 때문에 기뻐했고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는 길을 갔던 분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하늘나라에 들어간 것입니다.

 

 

 


그분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고난을 겪었다고 해도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을 떠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았고 또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고난에서도 감사하고 기뻐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앙생활이 재미있고 신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기쁨이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세상에서와 같은 재미는 없습니다. 오히려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가는 외로운 길이 신앙의 길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현실은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여러분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불 말과 불 병거가 여러분을 둘러 서 있는 것이 참된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그것이 곧 눈이 열린 증거입니다. 신자는 오늘 밤에 죽어도 천국 가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붙들고 있다는 현실이 저와 여러분을 천국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눈이 열려서 참된 현실을 바라보시면서 어떤 일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면서 굳건히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6강) 열왕기하 6:18-23  이상한 전쟁

 

<본문>

아람 사람이 엘리사에게 내려오매 엘리사가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원컨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하매 엘리사의 말대로 그 눈을 어둡게 하신지라 엘리사가 저희에게 이르되 이는 그 길이 아니요 이는 그 성도 아니니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의 찾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리라 하고 저희를 인도하여 사마리아에 이르니라 사마리아에 들어갈 때에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여 이 무리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저희의 눈을 여시매 저희가 보니 자기가 사마리아 가운데 있더라 이스라엘 왕이 저희를 보고 엘리사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 대답하되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 주인에게로 돌려 보내소서 왕이 위하여 식물을 많이 베풀고 저희가 먹고 마시매 놓아보내니 저희가 그 주인에게로 돌아가니라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 (열왕기하 6:18-23)

 

 

 


<설교>


전쟁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은 총 칼로 무장한 수많은 군대가 서로 대치한 채 어느 한쪽이 항복을 하거나 패배하여 도망을 치거나 아예 전멸할 때까지 피 흘리며 싸우는 것입니다. 지금도 중동 지역에서는 전쟁이 계속되면서 많은 사람이 죽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이상한 전쟁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려 점령한 것처럼 아람 군대를 상대하여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승리한 것입니다. 이것이 엘리사의 전쟁이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대로 이스라엘을 치려고 한 아람 왕은 자신들의 하는 말을 엘리사가 미리 알게 됨으로써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엘리사가 있던 도단에 군대를 보내서 엘리사를 붙잡으려고 합니다. 자신을 붙들려고 아람 군대가 몰려오자 엘리사는 하나님께 “원컨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18절)라고 기도합니다. 엘리사의 기도대로 하나님께서 아람 군대의 눈을 어둡게 하시자, 엘리사가 그들에게 다가가서 “이는 그 길이 아니요 이는 그 성도 아니니 나를 따라 오라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의 찾는 사람에게로 나아가리라”(19절)고 말하고, 그들을 사마리아로 데리고 갑니다. 눈이 어두워져서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아람 군대는 결국 엘리사의 말을 믿고 따랐다가 사마리아에 갇힌 꼴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엘리사의 전쟁이었고 승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엘리사는 눈이 어두운 아람 군대를 이끌어서 사마리아로 갔을까요? 또한 이스라엘 왕이 아람 군대를 치려고 하는 것을 만류하고 오히려 떡과 물로 잘 대접을 하게 해서 그들 나라로 돌려보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지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행한 일일까요?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행한 일이라면 죽이지 않고 포로로 잡아 두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어쨌든 이스라엘을 치려고 하는 아람 왕의 항복을 받아 내려면 아람 군대를 돌려보내서는 안 되지 않습니까? 그것이 전쟁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이지 않습니까?

 

 

 


아람 군대를 그냥 돌려보내면 아람 왕은 또 다시 이스라엘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실재로 본문 다음의 내용을 보면 아람 왕이 또 다시 군대를 모아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엘리사는 아람 왕이 또 다시 공격할 것이라는 것을 몰랐을까요? 이스라엘을 위해서였다면 아람 군대를 사마리아로 인도할 것이 아니라 차라리 깊은 강으로 인도해서 모두 빠져 죽도록 하는 것이 나았을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왕이 사마리아로 들어온 아람 군대로 치려고 했을 때 치도록 한 것이 나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을 기준으로 하여 생각해 본다면 분명 아람 군대에 대한 엘리사의 행동은 이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엘리사의 이상한 행동, 즉 이상한 전쟁은 당시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과연 엘리사의 이상한 전쟁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의 전쟁의 의미를 생각하기 전에 지금껏 살펴봤던 기적 몇 가지를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누누이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기적의 결과에는 사람들이 기대하고 꿈꾸는 부가 담겨 있지 않습니다. 사르밧 과부의 집에 있었던 기적도 과부를 부자로 만들지 않았고, 죽은 생도의 아내에게 베풀어졌던 기적에도 부는 없었습니다. 선지자를 극진히 대했던 수넴 여인에게 베풀어진 것도 아들 하나였고, 또한 죽은 아들이 살아난 것이 전부였습니다. 들 외를 끓이던 솥에 들어있던 독을 없앤 기적에도 부는 없습니다. 물에 빠진 도끼가 떠오른 기적에도 역시 부는 없습니다.

 

 

 


그 모든 기적이 베풀어준 것은 단지 하루하루 먹고 살게 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우리들의 형편에서 생각하면 기적의 결과들은 이미 우리가 풍족하게 누리고 있는 것보다 더 적은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기적을 기대하면서 지금보다 더 크고 많은 것을 누리게 되기를 원하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이것이 곧 우리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눈이 가려져 있는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에 비하면, 성경에 기적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은 너무 쩨쩨합니다. 이왕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을 일으키시려면 기름이 날마다 수배, 수십 배로 늘어나는 기적을 주시면 안 됩니까? 이왕 물에 빠진 도끼를 찾아 주실 바에야 한 개가 아니라 열 개, 백 개를 떠오르게 하시면 안 됩니까? 아니면 쇠도끼가 아니라 금도끼로 변하게 하셔서 주셔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겨우 하루 먹을 양식을 주시고, 겨우 빚 갚고 며칠 더 살 정도의 양의 기름을 주시고, 들 외로 만든 죽을 그대로 먹게 하시고, 쇠도끼 그대로 달랑 한 개만 떠오르게 하시는 하나님이 너무 쩨쩨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분이 바로 성경에 계시하고 있는 참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기를 원하면서 어떤 기적을 꿈꿉니까? 말한 대로 지금보다 몇 배 몇 십 배 더 크고 많은 것이 주어지는 기적을 원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성경에 없는 가짜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기적을 베풀지를 않으시는데도 불구하고 나에게만은 성경과는 다르게 해주실 것을 원한다면 그것은 분명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처럼 성경과는 다른 기적의 결과를 원하는 것은, 참된 기적의 맛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눈이 가려져 있는 현상입니다. 눈이 가려져서 보지 못하는 것은 자기 백성을 붙드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드시고 있다는 것이야 말로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기적임에도 불구하고 이 기적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흔적들이고, 무엇보다도 죄에서 나를 건져 주시고 그리스도의 피를 믿게 하셔서 멸망의 자리에서 생명의 자리로 옮겨주신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긍휼과 자비하심의 증거물인데도 불구하고 그 놀라운 사랑의 기적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성을 둘러싼 아람 군대를 보고 두려워하는 엘리사의 사환의 눈을 열어서 아람 군대보다 더 많은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한 장면을 보게 한 것도,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하고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엘리사가 눈이 어두워진 아람 군대를 사마리아로 유인한 것도 이스라엘 왕 여호람에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눈이 어두워진 채 엘리사에게 이끌려서 사마리아로 온 아람 군대를 보면서 여호람으로 하여금 5:15절의 말씀대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알게”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성을 포위할 정도로 많은 군대가 힘도 써보지 못하고 엘리사에 의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 사마리아로 끌려오는 장면을 보면 이스라엘의 왕이 무엇을 생각했어야 합니까? 여러분이 그러한 장면을 본다면 무엇을 먼저 생각했겠습니까? 앞서 말한 대로 이스라엘에게 함께 하시는 신만이 참된 신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대한 굳은 믿음으로 그 어떤 세력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 곧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눈이 열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왕의 반응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보고 감격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21절을 보면 “이스라엘 왕이 저희를 보고 엘리사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내가 치리이까”라고 말합니다. 지금 아람 군대는 엘리사에게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은 자신이 나서서 아람 군대를 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람 군대를 사로잡아 오는 엘리사를 보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참된 신이십니다라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 그들의 할 일인데 꼼짝도 할 수 없는 아람 군대를 자신들이 치겠다는 것입니다.

 

 

 


만약 아람 군대가 사로잡혀 온 상태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자신 있게 아람을 치겠다고 나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스라엘 왕은 아람의 힘만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힘이 있을 때는 피하고 나서지를 못하다가, 그들이 사로잡혀 꼼짝하지 못하자 자신감이 생겨서 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군대가 눈이 어두워진 채 엘리사에게 사로잡혀 오는 것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지금까지 이 지구상에 수없는 전쟁이 있었지만 이런 기적 같은 전쟁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이 기적의 전쟁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아람군대가 엘리사에게 사로잡힌 것은 곧 하나님께 사로잡힌 것을 뜻합니다. 즉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는 모든 존재는 이미 하나님께 사로잡힌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라보는 이스라엘이라면 하나님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이 옳겠습니까? 이미 하나님께 사로잡힌 대적을 ‘하나님 제가 치겠습니다.’라면서 자신의 힘으로 승리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승리하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그들의 본분인 것입니다.

 

 

 


22절을 보면 “대답하되 치지 마소서 칼과 활로 사로잡은 자인들 어찌 치리이까 떡과 물을 그 앞에 두어 먹고 마시게 하고 그 주인에게로 돌려 보내소서”라고 말합니다. 비록 아람 군대를 돌려보낸다고 해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께 사로잡힌 존재들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피조물은 그 무엇도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현실입니다. 신자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의 현실을 제대로 보는 눈이 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현실에는 우리 자신들의 현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현실과 여러분 자신의 현실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세상은 잘 사는데 나는 왜 이렇게 사는가? 라는 생각이 듭니까? 그것이 불만입니까?

 

 

 


하지만 세상이 하나님께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자신들의 힘과 재주로 잘 돌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로잡은 아람 군대를 놓아준 것과 같습니다. 잠시 하나님이 놓아주고 있는 것일 뿐이지 세상은 절대로 세상의 힘으로 존재하거나 살아가지 않습니다. 즉 지금의 현실이 언제까지나 계속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자의 현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에 대한 눈이 열리지 않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보지 못한다면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눈이 열린다면 여러분께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고 사랑입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을 붙들어서 생명으로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야 말로 날마다 베풀어지는 기적의 현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는 참된 현실이고, 이 현실을 보는 눈이 열리는 것이 곧 신앙인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세상을 사로잡고 다스리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만으로도 두려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는 존재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으로 붙드시고 인도하신다지 않습니까? 무엇으로도 그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지 않습니까?
세상이 하나님의 권세에서 독립되어 있다면 세상은 두려움의 대상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조차 통제할 수 없는 세상이라면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은 하나님의 다스림에 있고 하나님께 사로잡혀 있기에 세상의 어떤 세력도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못한다는 자심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신자가 세상에서 어떤 형편에 있든지 그것은 문제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떤 형편에 살든 분명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담대하지 못하고, 자기 형편으로 인해서 기가 죽거나 낙심하거나 세상사는 재미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베풀고 계시는 사랑과 자비하심의 기적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눈이 열려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볼 수가 있고, 그 기적의 삶의 현실을 볼 수만 있다면 그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세상에서 기를 펴고 남보란 듯이 번듯하게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항상 우리를 흔들겠지만 그럴 때마다 신자는 성경을 배경으로 세상 현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때의 세상 현실을 본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붙들려 있는 기적의 고마움을 알게 될 것입니다.

 

 

 

 

 

(17강) 열왕기하 6:24-33  눈이 어두운 자의 불신앙

 

<본문>

이 후에 아람 왕 벤하닷이 그 온 군대를 모아 올라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니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합분태 사분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 이스라엘 왕이 성 위로 통과할 때에 한 여인이 외쳐 가로되 나의 주 왕이여 도우소서 왕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타작마당으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포도주 틀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또 가로되 무슨 일이냐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오늘날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이르되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저가 그 아들을 숨겼나이다 왕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자기 옷을 찢으니라 저가 성 위로 지나갈 때에 백성이 본즉 그 속살에 굵은 베를 입었더라 왕이 가로되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날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찌로다 하니라 그 때에 엘리사가 그 집에 앉았고 장로들이 저와 함께 앉았는데 왕이 자기 처소에서 사람을 보내었더니 그 사자가 이르기 전에 엘리사가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이 살인한 자의 자식이 내 머리를 취하려고 사람을 보내는 것을 보느냐 너희는 보다가 사자가 오거든 문을 닫고 문 안에 들이지 말라 그 주인의 발소리가 그 뒤에서 나지 아니하느냐 하고 무리와 말씀할 때에 그 사자가 이르니라 왕이 가로되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 (열왕기하 6:24-33)

 

 

 


<설교>


오늘 본문은 아람 왕 벤하닷이 온 군대를 모아 올라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사마리아가 큰 고통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여러분은 이러한 내용을 보면서 과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하나님은 분명 이스라엘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고르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존재하기 오래 전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셨고 그 약속대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세상에 세우신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사랑과 자비로써 인도하시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에게 왜 본문과 같은 비참한 상황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계신다고 믿으신다면 그 믿음은 여러분의 삶에도 그대로 나타나야 합니다. 어떻게 나타나야 합니까? 이스라엘처럼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하든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나를 사랑과 자비로 지키고 보호하시며 인도하고 계심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신자로 하여금 원망과 불평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처럼 비참한 상황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변함없이 믿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려면 진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눈이 열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과연 무엇이며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로써 우리와 함께 하면서 우리에게 무엇을 이루고자 하시는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사랑을 하나님께 요구하게 될 것이고, 결국 원하는 사랑이 보이지 않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흔들리는 길로 가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람 군대가 엘리사를 잡기 위해서 사마리아 성을 포위했을 때, 그 장면을 보고 두려워하는 사환의 눈을 열어서 산에 가득한 불말과 불병거를 보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불말과 불병거를 보여주셨을 뿐, 그것으로 아람 군대를 쳐부수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환의 눈을 열어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불말과 불병거로 지키고 보호하고 계시는 사랑과 자비를 보여주고 하신 것이지 아람 군대를 물리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람 군대는 오히려 이스라엘의 어리석음을 일깨우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불신앙을 책망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인 것입니다. 불신앙의 이스라엘을 신앙의 이스라엘로 고치고자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인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동일하게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토록 외치고 구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로 우리의 세상 형편을 낫게 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불말과 불병거를 보게 하실 뿐, 불말과 불병거를 보내서 아람 군대를 쳐서 물리치시는 방법으로 일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는 전혀 엉뚱한 방향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만나지 못하고 보지 못하면서 결국 어렵고 힘들면 원망하고 불평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면서 말입니다. 도무지 자기 자신을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과 자비하심을 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본문의 이스라엘 왕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 모습이 곧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허물과 불신앙의 모습을 발견해야 할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길로 인도하시면서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시고 가르치고자 하시며 또한 하나님의 백성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자 하시는가를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람 왕이 모든 군대를 모아 사마리아의 성을 포위해 버립니다. 성을 포위 해 버리면 먹을 것을 밖으로부터 들여올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사마리아 성은 심한 기근에 처하게 됩니다.

 

 

 


먹을 것이 줄어들면 자연히 물가가 폭등하게 됩니다. 전에는 먹지도 않고 거들떠보지도 않고 버렸던 것들도 높은 가격에 거래가 됩니다. 그래서 부정한 동물이어서 먹지도 않았던 나귀가, 그것도 머리 하나에 팔십 세겔을 하고 합분태(비둘기 똥)사분의 일갑에 은 다섯 세겔을 할 정도가 된 것입니다. 비둘기 똥을 어떻게 먹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평소에는 비둘기 똥은 더러운 것으로 취급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도 돈을 주고 사야 할 정도로 식량이 귀해진 것입니다.

 

 

 


기근이 극도로 심해졌다는 것은 여인들 간에 있었던 한 사건으로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두 여인이 있는데 이들이 너무나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한 여인이 “네 아들을 내라 우리가 오늘날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28절)고 제안을 합니다. 그래서 한 여인이 자기가 낳은 아들을 삶아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튿날은 다른 여인이 아들을 내어서 잡아먹을 차례인데 이 여인은 자기 아들을 숨기고는 내어놓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먼저 아들을 내놓았던 여인은 이것을 문제로 삼아 왕에게 하소연을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들이 이스라엘을 책임지고 있는 왕으로서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자기 옷을 찢을 정도로 애통해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의 왕이 이 모든 상황의 원인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데 있습니다. 31절을 보면 “왕이 가로되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날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찌로다 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왕은 이 모든 일의 책임을 엘리사에게 돌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사가 아람 군대로 사로잡아 사마리아로 왔을 때 자신이 그들을 치고자 하는 것을 막고 살려줘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왕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이치적으로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아람 군대를 살려 보내지 말고 모두 죽였다면 그 일은 아람 왕에게 큰 타격이 되었을 것이고, 따라서 군대를 모아 사마리아를 칠 생각도 못했을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분명 엘리사는 큰 실수를 한 것이고 그 실수로 인해서 지금과 같은 상황을 초래했다고 해도 할 말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과 상관없이 돌아가고 있다는 전제 아래 가능할 뿐입니다. 즉 인간의 상식과 경험과 생각에 의해 계산된 대로 되어지는 것이 세상일이라면 분명 엘리사는 사마리아가 처한 상황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일은 인간의 계산대로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관자가 존재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람 군대가 이스라엘을 치든 치지 못하든 그것은 하나님에 의한 일입니다. 아무리 아람 나라가 군대가 강하다고 해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이스라엘을 칠 수가 없습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의 왕은 엘리사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일이 발생하게 된 이유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야 했던 것입니다.

 

 

 


신 28:15절을 보면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53절에서는 “네가 대적에게 에워싸이고 맹렬히 쳐서 곤란케 함을 당하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자녀 곧 네 몸의 소생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이스라엘의 지금의 형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지키지 않은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왕이 눈이 열린 사람이었다면 지금과 같은 형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이고, 그 말씀 앞에서 우상을 섬기고 말씀에 순종치 않은 자신의 허물을 발견하고 회개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눈이 열린 자의 신앙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으로 하여금 허물을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심으로써 죄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의의 길로 가게 하시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은 고통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음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책임을 다른데 두는 것입니다.

 

 

 


아람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했을 때 엘리사의 아람 왕이 한 모든 말을 듣고 이스라엘 왕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세상에 모르는 일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생각할 때는 은밀한 것도 하나님은 모두 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왕은 엘리사가 알려준 대로 방비를 하면서도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도 아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33절을 보면 “무리와 말씀할 때에 그 사자가 이르니라 왕이 가로되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재앙을 주셨으니 더 이상 하나님께 기대 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왜 이런 재앙으로 이끌어 가시는지 그 이유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고 눈이 가려져 있는 사람의 불신앙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얘기를 남의 이야기로 들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기아로 죽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그 일은 남의 이야기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잘 먹고 잘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라고 해서 그러한 기근과 상관없이 살 수 있다는 장담을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본문이 이스라엘 상황이나 지금 기아로 인해 죽는 사람들의 일을 남의 일로 여기면 안 됩니다. 바로 우리들이 처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본문과 같은 상황에 빠졌을 때 어떤 반응을 보였겠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마 이스라엘 왕과 같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겠습니까? 나의 허물과 죄를 돌아보기보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극한 상황이 되면 그 책임을 다른 곳에 돌리는 본성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죄악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보면서 이스라엘 왕의 행동이 오늘 우리들의 행동과 다를 바가 없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스라엘 왕처럼 행동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좋아하다가, 나쁜 일이 있으면 쉽게 ‘하나님 왜 이렇게 하십니까?’라고 원망하지 않습니까?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처럼 행동하면서 자신이 이스라엘 왕처럼 산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곧 눈이 감긴 상태일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이 이스라엘 왕처럼 살아가고 있음을 보게 되고 다시금 자신의 허물을 통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된다면 그것이 눈이 열린 신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본질과 악함과 허물을 보게 하시는 길로 인도해 가십니다. 그래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모든 소망을 두게 하십니다. 그것만이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자기를 볼 수 있는 길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서 자기를 보기를 힘쓰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8강) 열왕기하 7:1-9  아름다운 소식

 

<본문>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하셨느니라 그 때에 한 장관 곧 왕이 그 손에 의지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엘리사가 가로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성문 어귀에 문둥이 네 사람이 있더니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우리가 성에 들어가자고 할찌라도 성중은 주리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여기 앉아 있어도 죽을찌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저희가 우리를 살려두면 살려니와 우리를 죽이면 죽을 따름이라 하고 아람 진으로 가려 하여 황혼에 일어나서 아람 진 가에 이르러 본즉 그곳에 한 사람도 없으니 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하여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저희로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황혼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 그 문둥이들이 진 가에 이르자 한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거기서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다시 와서 다른 장막에 들어가서 거기서도 가지고 가서 감추니라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찌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 하고 (열왕기하 7:1-9)

 

 

 


<설교>


신자가 예수님께 나올 때는 오직 한 가지 마음이면 됩니다, 그것은 죄악의 자리에 있던 자를 피 흘려 죽으심으로 건져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자의 그 마음 하나로 기뻐하시고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 하나로 예수님께 나온다는 것이 간단치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이 끊임없이 예수님께 무엇인가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피의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위선이며 거짓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현대 교회에서 외치는 십자가는 온통 거짓과 위선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 증거는 앞서 말한 대로 참으로 귀하신 몸과 피를 내어 놓으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신 예수님의 은혜 앞에서 ‘나는 주님의 보혈의 은혜 하나면 됩니다’라고 하지 못하고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온다는데 있습니다.

 

 

 


이처럼 거짓과 위선으로 뭉쳐져 있는 사람이 바로 오늘 우리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처럼 냄새나는 인간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신답니다. 그래서 우리를 의의 길로 돌이키기 위해서 때때로 고난도 주시고 우리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환난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고난과 환난을 통해서 평소 예수님의 고난에 관심이 없이 살았던 자신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참된 가치를 발견한 사람이고, 참된 가치가 세상이 보는 것처럼 떡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있음을 알게 된 사람인 것입니다.

 

 

 


참된 가치를 떡이 아니라 말씀에 두고 사는 사람은 본래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탄생된 기적의 사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증거물인 것이고, 또한 신자는 하나님의 전능을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전능을 무시한다면 그것이 곧 멸망의 자식이라는 증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한 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에 이스라엘에게 말할 수 없는 환난을 겪게 하십니다. 아람 군대로 하여금 사마리아를 포위하게 하시고, 먹을 것을 떨어져서 물가가 올라가고 결국 자식을 삶아 먹는 비참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하십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엘리사가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하셨느니라”(1절)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누가 들어도 허무맹랑한 말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부정한 것으로 취급되어 먹지도 않던 나귀 머리가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을 하고, 더러운 것으로 여겼던 비둘기 똥 사분의 일 갑, 즉 0.3리터가 은 다섯 세겔을 할 정도로 물가가 폭등한 상태였는데 하루아침에 고운가루가 한 스아(7.3리터)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는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물가가 하루아침에 곤두박질치려면 엄청난 양의 곡물이 성으로 유입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밖에는 여전히 아람 군대가 포위한 상태에서 그런 놀라운 일이 발생할 것이라는 기대를 누가 가지겠습니까? 그런 기대를 가지는 것이야 말로 정신 나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 말을 들은 한 장관이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2절)라고 대답합니다. 즉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여신다고 해도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경험과 상식으로 생각해 본다면 엘리사가 말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엘리사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전달하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엘리사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결국 이 장관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경험과 상식으로 부인해 버린 것입니다. 이에 대해 엘리사는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2절)는 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자는 말씀의 능력의 복을 누릴 수 없음을 경고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은 성 밖의 네 문둥이에 의해서 성 안의 사람들에게 전달되게 됩니다.

 

 

 


성문 어귀에 문둥이 네 사람이 있었는데, 문둥이는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성에서 가져다주는 음식으로 연명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에 먹을 것이 없으니 문둥이에게 줄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문둥이들은 성으로 들어가든 성 밖에 있든 굶어 죽는 것은 마찬가지니 이왕 죽을 바에야 아람 군대에게 항복을 하자고 합니다. 아람 군대가 죽이면 할 수 없는 것이고, 혹시 살려주면 살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문둥이들이 아람 진영으로 가보니 그곳에 군사들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람 군대로 하여금 병거 소리와 말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셔서 아람 사람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이 헷 사람의 왕들과 애굽 사람의 왕들을 값을 주고 사서 자신들을 공격하는 것으로 착각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에 의해서 아람 군대는 진에 있었던 모든 것을 내어 버리고 도망을 치게 되고 결국 문둥이들은 진에 있는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리게 된 것입니다. 문둥이들은 죽으면 죽고 살면 산다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아람 군대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거기서 하나님이 해 놓으신 일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문둥이들은 하나님이 해 놓으신 일로 인해서 아람 진영에서 마음껏 먹고 마시면서 심지어 은과 금과 의복을 감추어 놓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9절에서 “문둥이가 서로 말하되 우리의 소위가 선치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찌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 하고” 라고 말하는 것처럼 문둥이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선하지 못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문둥이들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잠잠하고 있는 것을 선하지 않은 것으로 봤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아람 진영의 소식은 말 그대로 아름다운 소식입니다. 사마리아 성의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문둥이들은 사마리아 성의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소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배만 채우는데 급급했던 것을 선하지 못한 것으로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문둥이들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 것이라고 하면서 지금 곧 왕궁에 가서 이 소식을 전하자고 한 것입니다. 아침까지 기다려도 될 것인데 왜 굳이 지금 곧 가지 않으면 벌이 미칠 것이라고 할까요? 그것은 사마리아 성 내의 형편이 먹을 것이 없어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만약 문둥이들이 아침까지 기다리자고 했다면 그것은 사마리아 성의 사람들이 처한 형편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죽기를 작정하고 아람 진영으로 간 문둥이들이 본 것은 아람 군대는 모두 도망하고 그들이 두고 간 많은 음식들과 금은보석들이었습니다. 그 장면이 그들의 눈에 어떻게 보였겠습니까?
사막에서 물이 없어서 목이 말라 곧 죽게 된 사람에게 오아시스가 보인다면 그 기쁨이 어떻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오늘의 이야기는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일이 과연 누구에게 기쁜 소식이 되겠으며, 또한 그 소식을 접한 사람들이 세상을 향해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눅 2:10절에 보면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세상을 향한 최고의 기쁜 소식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 소식을 무시한 채 살아갑니다. 왜 그럴까요? 인간의 절망적 상황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배가 부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아름다운 일이 아니라 세상의 것으로 배가 부르기 때문에 기쁜 소식을 기쁜 소식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은 온통 떡으로 살아갑니다. 참되 가치가 무엇에 있는가를 모릅니다. 다만 세상의 것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자기 배를 불리고자 하는 더러운 세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내신 생명의 기쁨을 무시해버립니다.

 

 

 


이러한 세상에 신자는 문둥이로 존재해야 합니다. 문둥이가 곧 신자인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배가 주리고 절망적인 심정으로 아람 군대를 찾아가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보게 된 것처럼 세상에 기댈 것도 없고, 나 자신도 믿을 것이 없다는 절망적인 상황으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영혼을 넉넉히 채우시는 분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기쁜 소식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소식을 죽어가고 있는 세상을 향해 전하고 증거하고자 하게 될 것입니다.

 

 

 


고전 9:16절을 보면 바울은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니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는 것은 전도 하지 않으면 벌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소식이 필요한 죽어가는 사람들을 외면한 것에 대한 화를 말합니다. 즉 죽어가는 세상을 바라보면서도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하늘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본인 스스로 복음의 가치를 외면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화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네 문둥병자들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들었고, 하나님이 하신 아름다운 일을 보셨다면 이 소식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미칠 것이라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의 소식을 전하지 않는 것은 세상을 멸망의 곳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비록 입술로는 복음을 말하나 실제로는 복음의 참된 가치를 깨닫지를 못했다고 봐야 합니다. 신자는 예수님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절망적 상태의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이웃에게 전할 수 있는 최고의 소식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으로 인해 배부르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입니다.

 

 

 

 

 

(19강) 열왕기하 7:10-20  하나님의 말씀대로

 

<본문>

드디어 가서 성 문지기를 불러 고하여 가로되 우리가 아람 진에 이르러 보니 거기 한 사람도 없고 사람의 소리도 없고 오직 말과 나귀만 매여 있고 장막들이 그대로 있더이다 저가 문지기들을 부르매 저희가 왕궁에 있는 자에게 고하니 왕이 밤에 일어나 그 신복들에게 이르되 아람 사람이 우리에게 행한 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저희가 우리의 주린 것을 아는고로 그 진을 떠나서 들에 매복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저희들이 성에서 나오거든 우리가 사로잡고 성에 들어가겠다 한 것이니라 그 신복중 하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청컨대 아직 성중에 남아 있는 말 다섯 필을 취하고 사람을 보내어 정탐하게 하소서 이 말들이 성중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온 무리 곧 멸망한 이스라엘 온 무리와 같으니이다 하고 저희가 병거 둘과 그 말을 취한지라 왕이 아람 군대 뒤로 보내며 가서 정탐하라 하였더니 저희가 그 뒤를 따라 요단에 이른즉 아람 사람이 급히 도망하느라고 버린 의복과 군물이 길에 가득하였더라 사자가 돌아와서 왕에게 고하매 백성들이 나가서 아람 사람의 진을 노략한지라 이에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이 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고 왕이 그 손에 의지하였던 그 장관을 세워 성문을 지키게 하였더니 백성이 성문에서 저를 밟으매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죽었으니 곧 왕이 내려왔을 때에 그의 한 말대로라 일찌기 하나님의 사람이 왕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 한즉 그 때에 이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 일이 있으랴 하매 대답하기를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였더니 그 장관에게 그대로 이루었으되 곧 백성이 성문에서 저를 밟으매 죽었더라 (열왕기하 7:10-20)

 

 

 


<설교>


이사야 40:8절을 보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마르고 시드는 것은 풀만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마르고 시들어 갑니다. 심지어 가전제품까지도 세월이 가면서 그 수명을 다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만약 세상에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없었다면 세상의 모든 것은 일찍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세월이라는 한계에 갇혀 있습니다. 그 무엇도 영원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유한의 세상에 무한한 것이 존재함을 말씀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마르고 시들지만 하나님의 말씀만은 영영히 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중심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장악되어 있습니다. 말씀이 세상을 강력한 힘으로 통치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현실은 말씀이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자신의 이성과 상식으로 계산하고 이해하려고만 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이성과 상식에 가두고 스스로 평가하고 판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을 평가하고 판단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자신을 던져 넣지를 못합니다. 말씀 하나만을 믿고 무작정 말씀에 자신을 던져 넣는 것은 너무 맹목적이고 무모하다고 여깁니다. 이리저리 따져보고 계산해서 자신이 손해 보지 않는 범위 안에서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생각들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말씀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선지자나 사도들을 보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자신을 통째로 던져 버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말씀을 신뢰하고 믿었기 때문에 말씀이 곧 그들의 현실이었고, 그래서 말씀 안에 자신의 삶 전체를 던져 버린 길을 갔던 것입니다.

 

 

 


선지자나 사도들의 이런 삶에 비해서 우리는 너무 계산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씀을 믿는다고 하지만 믿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믿으며 자신이 중심이 된 삶을 살려고 애를 쓸 뿐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세상은 말씀대로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말씀 앞에 서서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말씀을 신뢰하고 믿는 신자의 길을 가는 것인지 아니면 말씀이 다스리는 세상을 무시하면서 자기중심의 길을 가는 것인지를 점검하면서 신자의 길을 가기를 소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보면 사마리아 성에 먹을 것이 없어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을 하고, 합분태 사분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을 받을 정도로 물가가 올라있을 때 엘리사가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하리라”(7:1절)는 말을 합니다. 엘리사가 전한 말은 여호와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도무지 실현 가능성이 없는 말입니다.

 

 

 


만약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후보가 10억짜리 아파트를 100만원으로 내리겠다고 공약을 한다면 믿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당장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를 따지면서 국민들을 우롱하는 공약이라고 하면서 비난이 빗발치듯 쏟아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먹지도 않던 나귀 머리 하나가 은 팔십 세겔을 할 정도인데 하루 만에 고운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을 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을 할 정도로 물가가 떨어질 것이라는 말을 두가 믿겠습니까?
그래서 장관 하나가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2절)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면으로 부인하고 무시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 같아도 장관과 같은 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설사 정면으로 그러한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속으로는 부인하고 무시하지 않았겠습니까?

 

 

 


인간의 이성과 상식으로 생각해 보면 엘리사의 말은 분명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허풍으로 들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는가? 라는 반응을 보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한 장관에게 엘리사는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2절)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사실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람 군대로 하여금 모든 것을 버려둔 채 도망하게 만들고 그 사실을 문둥이들을 통해서 성으로 전달하게 하신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드디어 가서 성 문지기를 불러 고하여 가로되 우리가 아람 진에 이르러 보니 거기 한 사람도 없고 사람의 소리도 없고 오직 말과 나귀만 매여 있고 장막들이 그대로 있더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아람 군대가 진을 비운 척 하고 들에 매복하여 있다가 이스라엘이 성에서 나오면 공격을 하고자 하는 작전이라고 말합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문둥이들의 말만 믿고 아람 진영으로 달려가는 것보다는 더 지혜로운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왕으로서는 당연한 생각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하루아침에 아람 군대가 모두 도망쳤다는 말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그 모든 일을 이뤄 놓으셨던 것입니다. 단지 자신의 상식과 이성과 경험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믿지를 못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결국 신하의 말에 따라 아람 진영을 정탐한 후에야 문둥이들의 말이 사실인 것을 알게 되었고 백성들이 아람 진영을 노략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대로 고운 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되고 보리 두 스아에 한 세겔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엘리사의 말을 부인했던 장관은 왕의 명령에 의해 성문을 지키다가 백성들에 의해 밟혀 죽게 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7장을 보면 1절에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로 시작을 해서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고”(16절)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죽었으니”(17절) “그 장관에게 그대로 이루었으되”(20절)라는 말씀들을 보면 초점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짐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은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며 살아가지만 하나님께서는 다만 말씀을 이루고자 하실 뿐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내가 사는 길을 찾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말씀이 사는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진심으로 말씀에 온 마음을 빼앗기고, 말씀에 미친 자가 되지 않고는 바른 신자의 길을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오늘 우리들이 말하는 신앙이라는 것은 사실 신앙도 아닙니다. 신앙의 흉내를 조금 내고 있을 뿐이지 모든 정신은 내가 사는 것에 집중되어 있지 않습니까? 말씀이 이뤄지는 것보다는 나의 꿈과 계획이 이뤄지기를 더 갈구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지 않습니까?

 

 

 


이사야 40:9절을 보면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고 말합니다. 높은 산에 오르라는 것은 그만큼 힘든 길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에 관심이 없는 세상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이야 말로 외면을 받고 배척을 받을 수밖에 없는 길임을 말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에게 아름다운 소식으로 다가온 사람이라면 어떤 어려움과 힘든 일이 기다린다고 해도 내게 아름답고 귀한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치를 받으면서 인도받고 살아가는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던 장관이 엘리사의 말대로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목격은 했으되 그 복은 누리지를 못하고 죽었다는 사실은 말씀을 신뢰하지 않은 자의 마지막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장관이 엘리사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 것은 그렇게 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람군대가 성을 포위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해 본다면 도무지 하루 만에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어떤 조건과 현실에 매이지 않은 채 역사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전지전능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멸망의 이유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분명한 것은 말씀은 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말씀으로는 떡을 구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말씀은 육체를 배부르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으로 사는 삶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떡이 나를 살리는 세계가 아니라 말씀이 나를 살리는 세계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떡으로 살아가는 인생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라면 말씀으로 산다는 말씀에 대해 거부감이 들게 됩니다. ‘말씀만 믿으면 돈이 생깁니까?’ ‘말씀만 붙들고 있으면 쌀이 생깁니까?’라는 반발과 함께 말씀으로 사는 세계를 거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떡에 집착해 있는 이상 말씀의 세계는 보이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말씀을 이루어가며 말씀 안의 세계가 곧 영원한 세계라는 사실에 대해서도 시큰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천국과 상관이 없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떡이 있어야 산다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말씀의 세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말씀이 나를 살리는 세계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것을 깊이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어떠한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나 같은 자를 붙들어서 생명의 길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야 말로 산을 바다에 던지는 것보다 더 위대한 능력이며 전지전능하심이라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중심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곧 우리에게 구원을 이룬 것입니다. 저주 받은 자를 저주에서 건지시고 구원하신 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지 않습니까? 이 능력을 믿고 신뢰하는 자가 신자입니다.

 

 

 

 

 

(20강) 열왕기하 8:1-6  증거자

 

<본문>

엘리사가 이전에 아들을 다시 살려준 여인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서 네 권속과 함께 거할만한 곳으로 가서 거하라 여호와께서 기근을 명하셨으니 그대로 이 땅에 칠년 동안 임하리라 여인이 일어나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행하여 그 권속과 함께 가서 블레셋 사람의 땅에 칠년을 우거하다가 칠년이 다하매 여인이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돌아와서 자기 집과 전토를 위하여 호소하려 하여 왕에게 나아갔더라 때에 왕이 하나님의 사람의 사환 게하시와 서로 말씀하며 가로되 너는 엘리사의 행한 모든 큰 일을 내게 고하라 하니 게하시가 곧 엘리사가 죽은 자를 다시 살린 일을 왕에게 이야기할 때에 그 다시 살린 아이의 어미가 자기 집과 전토를 위하여 왕에게 호소하는지라 게하시가 가로되 내 주 왕이여 이는 그 여인이요 저는 그 아들이니 곧 엘리사가 다시 살린 자니이다 왕이 그 여인에게 물으매 여인이 고한지라 왕이 저를 위하여 한 관리를 임명하여 가로되 무릇 이 여인에게 속한 것과 이 땅에서 떠날 때부터 이제까지 그 밭의 소출을 다 돌려주라 하였더라(열왕기하 8:1-6)

 

 

 


<설교>


신자가 평생을 두고 해야 할 일을 말하라면 날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과 그래서 하나님이 기이한 행사로 주신 모든 은혜를 주위에 전파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받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이한 행사를 전파하기 위해 사는 것이 신자의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 73:28절을 보면 “하나님께 가까이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리이다”는 말을 합니다. 참으로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피난처로 삼았더니 복을 받았고 그 받은 복을 전파하는 것이 신자의 일이 아니라 주의 모든 행사를 전파하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만약 받은 복만 전파한다면 내어 놓는 것은 좋은 일들뿐일 것입니다. 흔히 간증 집회에서 듣듯이 병에서 나은 것, 사업이 성공한 것, 가정이 새롭게 된 것들만 전파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자에게 환난이나 징계를 주시기도 합니다. 모든 행사를 전파하려면 그런 것도 전파해야 하는 것입니다. 받은 복만 전파하는 것은 신자의 궁극적인 관심이 복에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피난처로 삼아 모든 행사를 전파하겠다는 것은 전파, 즉 그분을 증거 하는 것에 우선적 초점을 두는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기이한 일을 행하신 것은, 그 한 사람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기이한 일을 세상에 전파하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이한 일에 머리 숙이는 자들을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기이한 일이 전파되고 증거될 수 있는 길로 인도하십니다. 다만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신의 고통에만 마음을 둠으로 인해서 신자로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엘리사에 의해서 아들을 얻고, 그 아들이 죽었을 때 다시 엘리사에 의해서 살아나는 기적을 겪은 수넴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절의 “엘리사가 이전에 아들을 다시 살려준 여인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서 네 권속과 함께 거할만한 곳으로 가서 거하라 여호와께서 기근을 명하셨으니 그대로 이 땅에 칠년 동안 임하리라”는 구절을 보면 마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편안히 살도록 그냥 놔두시는 분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아들을 얻을 수 없는 상황에서 아들을 얻었고, 다시 그 귀한 아들이 죽어 버린 엄청난 슬픔의 상황에서 아들이 살아나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경험한 여인으로 하여금 여생을 편안히 살아가도록 하시면 좋을 것인데, 왜 기근이 있게 하셔서 살던 정든 땅을 버리고 이방인의 땅으로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도대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편히 사는 것을 못 보시는 분이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땅에 7년 동안의 기근을 명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대한 심판입니다. 그렇다면 기근이 있을 것을 알려 주심으로써 이스라엘 땅에서 피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수넴 여인에게 이스라엘 땅을 떠나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기근으로부터 보호하고자 하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보호하시는 것이 목적이라면 굳이 이방 땅으로 가라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스라엘 땅에 그대로 머물게 하셔서 수넴 여인에게 멈추지 않는 기름과 가루와 같은 기적을 베푸시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의 땅에 가서 고생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수넴 여인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벗어나게 하시고 기근이 끝났을 때 다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은 뭔가 수넴 여인을 내세워서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스라엘 땅에 기근이 끝나고 수넴 여인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7년간 집을 떠나 있는 동안 누군가가 여인의 집과 전토를 차지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왕에게 호소하기 위해 왕을 찾아갔을 때 왕은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를 불러서 엘리사가 행한 일에 대해 묻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엘리사가 행한 일을 묻고 있었던 것은 아마 7년 기근으로 인해서 아주 어려워진 이스라엘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엘리사에게 있지 않을까 알아보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엘리사가 행한 일을 들어보고 그 일이 아주 기이하고 놀라운 일들이었다면 엘리사를 불러서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던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게하시가 왕에게 엘리사가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린 일을 얘기하고 있을 때 수넴 여인이 들어와 왕에게 자기 집과 전토에 대해 호소를 합니다. 그때 게하시가 그 여인과 아들이 엘리사가 다시 살린 아들이고 그 어미라는 사실을 얘기하자 왕은 관리를 임명하여 여인의 집과 전토와 이스라엘을 떠났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밭의 소출까지 모두 돌려주도록 명한 것이 본문의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왕 앞에 등장한 여인은 하나님이 행하신 기이한 일의 증거물로 등장한 것입니다. 죽은 아들을 살린 것은 하나님이 행하신 기이한 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7년의 기근에서 여인과 아들을 보호하심으로써 죄악의 길을 가고 있던 이스라엘 앞에 하나님이 행하신 기이한 일의 증거물로 세우신 것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의 왕이 엘리사가 행한 기이한 일의 증거자로 등장한 여인을 보고 하나님을 깨닫고 신앙의 바른 길을 가게 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아합의 길을 갔던 것입니다(18절).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 앞에 수넴 여인과 그 아들을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기이한 일의 증거물을 보고서도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악함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이한 일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신자의 일인 것입니다.

 

 

 


여인이 이스라엘 왕에게 한 말은 다만 자신의 집과 전토에 대한 것뿐입니다. 왕에게 자신의 아들이 죽었다가 엘리사로 인해 다시 살아났으니 왕도 하나님만 신뢰하라는 식의 전도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인이 바로 하나님의 기이한 일의 증거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물을 보고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기이한 일이 주어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일이 없고서는 누구도 신자의 신분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돈으로도 살 수 없고 권력으로도 뺐을 수 없는 것이 신자라는 신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논리로 말하자면 대통령보다 더 귀한 것이 신자라는 신분입니다. 다만 신자인 우리 스스로 신자라는 신분 자체를 가볍게 보고 있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신자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기이한 일은,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님이 흘리신 그 피가 우리를 모든 죄와 심판에서 해방시켰다는 것입니다. 수천 년 전에 있었던 그 일이 지금도 동일하게 적용이 되고 사망에 처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옮겼다는 것이야 말로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인한 일을 안고 사는 신자야 말로 하나님의 증거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이 왜 심판을 피할 수 없으며, 왜 세상을 악하다고 말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자의 역할을 신자가 담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의 삶이 인도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지키고 보호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기이한 일을 증거하는 증거자로 남겨 놓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어떤 형편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세상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수넴 여인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에게 내려진 심판을 피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아마 사람들은 이러한 인도를 기대할 것입니다. 기근과 같은 어려움이 있을 때 그 어려움에서 피하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지금도 그렇게 인도하시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신자를 편안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증거자로 남겨 놓기 위함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신자는 하나님의 기이한 일의 증거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몸에 담고 살아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의 능력에 대해 얘기할 때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과연 무엇을 증거하는 자로 살아갑니까? 하나님의 기이한 일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증거하며 땅의 심판을 증거하고 하늘의 복을 증거하는 자로 살아갑니까? 신자는 자신의 삶이 세상의 복으로 가득하기만을 소원해서는 안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땅에 속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심판의 증거물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인생을 세상 사람과 같은 수준에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모든 마음을 세상, 즉 땅에 두고 살아갑니다. 하늘에는 도통 관심들이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만을 신뢰하면서 거기에 모든 소망을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한 모습들이 곧 심판에 속한 자의 증거물이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가 세상과 똑같이 보이는 땅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엇으로 하나님의 기이한 일을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세상과 함께 망하는 길로 가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일은 죽음에 처한 우리에게 생명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이 생명이 과연 여러분의 기쁨으로 자리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로 인한 생명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라면 분명 죽음의 자리에서 하늘의 생명이 소망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감사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증거자입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일을 증거 하는 것이 신자가 평생을 살면서 해야 할 일임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21강) 열왕기하 8:7-15  나의 신앙의 현실은

 

<본문>

엘리사가 다메섹에 갔을 때에 아람 왕 벤하닷이 병들었더니 혹이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 여기 이르렀나이다 왕이 하사엘에게 이르되 너는 손에 예물을 가지고 가서 하나님의 사람을 맞고 저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나의 이 병이 낫겠나 물으라 하사엘이 드디어 맞으러 갈쌔 다메섹 모든 아름다운 물품으로 예물을 삼아가지고 약대 사십에 싣고 나아가서 저의 앞에 서서 가로되 당신의 아들 아람 왕 벤하닷이 나를 당신에게 보내어 가로되 나의 이 병이 낫겠나이까 하더이다 엘리사가 가로되 너는 가서 저에게 고하기를 왕이 정녕 나으리라 하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저가 정녕 죽으리라고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 하고 하나님의 사람이 저가 부끄러워하기까지 쏘아보다가 우니 하사엘이 가로되 내 주여 어찌하여 우시나이까 대답하되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할 모든 악을 내가 앎이라 네가 저희 성에 불을 놓으며 장정을 칼로 죽이며 어린 아이를 메어치며 아이 밴 부녀를 가르리라 하사엘이 가로되 당신의 개 같은 종이 무엇이관대 이런 큰 일을 행하오리이까 엘리사가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네가 아람 왕이 될 것을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 저가 엘리사를 떠나가서 그 주인에게 나아가니 왕이 묻되 엘리사가 네게 무슨 말을 하더냐 대답하되 저가 내게 이르기를 왕이 정녕 나으시리라 하더이다 그 이튿날에 하사엘이 이불을 물에 적시어 왕의 얼굴에 덮으매 왕이 죽은지라 저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열왕기하 8:7-15)

 

 

 


<설교>


여러분은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하나님과 상관없는 우연이라고 생각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라는 말을 하지만 ‘과연 그런 믿음으로 살아가는가?’라는 물음에는 할 말이 없어지는 것 또한 우리들의 현실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라고 말하면서도 나 자신 조차도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정직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비행기가 사고가 나서 수백 명이 죽었다고 할 때, 참새 한 마리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 신자로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수백 명이 죽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라고 말하면서도 ‘왜 그렇게 하셨지’라는 물음에 가서는 자신도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셨다’라는 말은 하면서도 하나님이 하셨음을 믿는 믿음으로는 살아가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자기의 예상과 기대와 계획과 소망을 포기하지 않은 채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예상한 대로 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기대하고 생각한 대로 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주변에서 벌어지는 이런저런 일이나 상황에 영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일에서도 개의치 않고 변함없이 하나님만 의지하는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예상하고 기대한 결과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나의 예상과 기대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이 내 속에 머문 채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에 기대를 거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예상하면서 살아갑니까? 사업을 한다면 사업이 잘되기를 기대하고 예상할 것입니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는 자식이 공부를 잘해서 뛰어난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고 예상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와 예상이 무참히 깨어지는 것을 살아가면서 체험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예상과 기대를 깨뜨리면서 인생을 이끌어 가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할 때 원망이 나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여러분은 사업을 하고 자식을 키우면서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아는 열매로 맺어지기를 기대하고 예상해 본 적은 있습니까? 설사 사업이 실패하고 자식이 남보다 뒤 떨어진다고 해도 그 모든 일들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게 하는 열매로 맺어지기를 소원하고 기대한 적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우리는 그러한 기대와 예상을 버린 채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신자라고 하면서도 사실은 불신앙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우리의 예상과 생각을 벗어나 있습니다. 과연 그러한 하나님의 일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아야 하는 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7절을 보면 “엘리사가 다메섹에 갔을 때에 아람 왕 벤하닷이 병들었더니 혹이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사람이 여기 이르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 보면 아람 왕 벤하닷이 병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가 다메섹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왕이 하사엘에게 예물을 주어 보내서 자기의 병이 낫겠나? 물어 보라고 합니다.

 

 

 


엘리사가 행한 여러 가지 일로 인해서 아람 왕은 엘리사의 능력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라면 자신의 병의 여부를 알 것이라고 여겨서 하사엘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왕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두말할 것 없이 자기 병입니다. 사람이 병들었을 때 자기 병이 낫기를 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을 두고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의 일은 무엇입니까? 개인의 병이 낫겠는가 낫지 않겠는가를 알려주는 일이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의 일입니까? 분명히 그것은 아닙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세상에 나타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벤하닷은 오직 자기 병에만 관심을 두고 엘리사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기대와 예상과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벤하닷이 엘리사를 찾는 것이나 오늘날 신자들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과연 차이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 드리자면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께 관심이 없는 자가 신을 찾는 것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일컫는 신자가 하나님을 찾는 것에는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신자가 그런 차이를 갖고 하나님을 찾고 있는지가 문제입니다. 사실 사람이 병들었다 건강하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병이 들어 죽든 건강하다가 노쇠하여 죽든 어차피 죽는 길로 가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아는 자로 죽었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병이 들었다면 그 병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 수 있기를 기대해야 할 것이고, 건강하다면 건강으로 인해서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무릎 꿇은 자로 살 수 있기를 기대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이며 신자인 것입니다.

 

 

 


불신자란 교회를 나오느냐 나오지 않느냐와 상관없이 벤하닷과 같은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벤하닷과 같다면 그는 누구라도 불신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관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곧 불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병이든 자신의 몸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가를 알게 하시고 진심으로 중요한 것을 찾는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일입니다.

 

 

 


벤하닷이 하사엘을 보내어 자기 병에 대해 물었을 때 엘리사는 “너는 가서 저에게 고하기를 왕이 정녕 나으리라 하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저가 정녕 죽으리라고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10절)라는 말을 전합니다. 여러분은 엘리사를 통한 하나님의 답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나을 것이라고 하셨다가 죽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도 두 번 모두 ‘정녕’이라는 말을 함으로써 분명히 그렇게 되어질 것임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답을 보면 마치 하나님이 방금 한 말을 그 자리에서 바로 번복한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앞에 말한 “나으리라”는 벤하닷이 그 병에서 낫는 것이고 뒤에 말한 “죽으리라” 는 왕위를 노린 하사엘에 의해 살해당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왕이 나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이 엘리사를 만나고 돌아간 다음날 바로 하사엘이 왕을 죽였다고 말합니다. 또 하루 만에 어차피 죽을 운명이면 “나으리라”고 하지 말고 오히려 배반이 있을 것이라든지, 아예 “죽으리라”고 직설적으로 말해주는 것이 훨씬 더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왕 죽게 하실 것 왜 병에서 낫게 하시느냐는 생각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실까요?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관심은 벤하닷의 병을 낫게 해주는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벤하닷의 병을 낫게 하시고 다시 하사엘의 손에 의해 죽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가는가를 여실히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28-30절을 보면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고 말합니다.

 

 

 


벤하닷이나 하사엘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이처럼 마음에 하나님을 두기 싫어하는 자들이 꾀하고 행하는 일은 불의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보다는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만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불신자를 당장 망하게 하거나 죽게 해서 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들 마음대로 하도록 가만히 놓아두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세상에 낱낱이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거룩에 관해 무지하고 관심이 없는 이방인들이 자기의 의와 형통만을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추구하고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 드러나게 하심으로써 오늘날 신자라고 하는 우리의 삶은 과연 어떠한지를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이 저가 부끄러워하기까지 쏘아보다가 우니”라고 말합니다. 엘리사가 자신을 부끄러울 정도로 쏘아보다가 우는 것을 본 하사엘은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묻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행할 모든 악을 내가 앎이라 네가 저희 성에 불을 놓으며 장정을 칼로 죽이며 어린 아이를 메어치며 아이 밴 부녀를 가르리라”(12절)고 말하면서 앞으로 하사엘이 이스라엘에게 행할 일을 미리 예고합니다. 엘리사의 말을 들은 하사엘은 “당신의 개 같은 종이 무엇이관대 이런 큰 일을 행하오리이까”라고 하면서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펄쩍 뜁니다. 13절에서 “여호와께서 네가 아람 왕이 될 것을 내게 알게 하셨느니라”고 한 말을 보면, 하나님은 하사엘이 반역할 흉계를 꾸미고 있었던 것을 다 알고 계시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사가 하사엘이 부끄러워하기까지 쏘아보다가 우는 것은 하사엘이 앞으로 행할 일을 미리 알고 그 마음을 돌이키기를 원하는 사랑과 자비의 심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사엘은 엘리사의 그런 마음을 외면한 채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서 ‘개 같은 종이 무엇이관대 이런 큰 일을 행하겠습니까?’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에게 돌아가서는 왕이 나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고만 전하고 다음날 왕을 살해해 버립니다.

 

 

 

이것이 곧 죄와 의 양쪽 모두에 눈을 감아버린 것입니다. 삶의 기준과 목표가 거룩은 커녕 윤리 도덕과도 전혀 무관하고 오직 자신의 출세로만 향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나, 사랑과 은혜에 관심이 없이 또한 자신의 죄에도 마음을 두지 않고 살아가는 이방인의 전형적인 삶의 실체인 것입니다. 하사엘만이 이러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포함되어 있으며, 신자 역시 참된 신앙에 머무르지 않을 때 하사엘과 같은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사엘은 선지자가 정말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며 흘린 눈물은 아예 마음에 두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피에는 관심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피의 은혜라는 말을 귀찮고 불필요한 장애로 여깁니다. 대신에 자기가 왕이 될 것이라는 말에는 짐짓 고개 숙이는 척하는 하사엘처럼 자기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해주고 또 복을 주는 신은 인정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곧 불신자의 삶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참된 신앙은 사망에 처한 나를 건지고 모든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에 마음을 두게 합니다. 하나님께 나올 때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모든 마음을 두게 합니다. ‘내 병이 낫겠는가?’라는 것보다는 내게 있는 병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더욱 깊이 깨닫고 사모하는 자가 되게 해달라고 소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불신자와 다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사엘이 부끄러울 정도로 쏘아보다가 우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입니다. 즉 말씀은 우리가 부끄러울 정도로 쏘아보고 있는 엘리사의 눈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마음을 두고 있다면 말씀에 의해서 자신의 죄를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살아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아는 자로 살고자 하고, 죽어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자로 죽기를 소원하게 됩니다. 이러한 신자 되는 것에 모든 소원을 두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2강) 열왕기하 8:16-29  아합의 길로 행함

 

<본문>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 요람 제 오년에 유다 왕 여호사밧이 오히려 위에 있을 때에 그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니라 여호람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삼십 이세라 예루살렘에서 팔년을 치리하니라 저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 아내가 되었음이라 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그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저와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하셨음이더라 여호람 때에 에돔이 배반하여 유다의 수하에서 벗어나 자기 위에 왕을 세운고로 여호람이 모든 병거를 거느리고 사일로 갔더니 밤에 일어나 자기를 에워싼 에돔 사람과 그 병거의 장관들을 치니 이에 백성이 도망하여 각각 그 장막으로 돌아갔더라 이와 같이 에돔이 배반하여 유다의 수하에서 벗어났더니 오늘날까지 그러하였으며 그 때에 립나도 배반하였더라 여호람의 남은 사적과 그 행한 모든 일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여호람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열조들과 함께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하시야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 요람 제 십이년에 유다 왕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니 아하시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이세라 예루살렘에서 일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아달랴라 이스라엘 왕 오므리의 손녀더라 아하시야가 아합의 집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니 저는 아합의 집의 사위가 되었음이러라 저가 아합의 아들 요람과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아람 왕 하사엘로 더불어 싸우더니 아람 사람들이 요람을 상하게 한지라 요람왕이 아람 왕 하사엘과 싸울 때에 라마에서 아람 사람에게 맞아 상한 것을 치료하려 하여 이스르엘로 돌아왔더라 아합의 아들 요람이 병이 있으므로 유다 왕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이스르엘에 내려가서 방문하였더라 (열왕기하 8:16-29)

 

 

 


<설교>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때가 주로 언제입니까? 아마 특별히 어려운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일 것입니다. 평소에는 죄에 대해서 잊고 살다시피 하다가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여 그것이 자신에게 고통으로 다가올 때 ‘혹시 내가 하나님께 범죄한 것이 있어서 하나님이 나를 징계하시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은 무당의 생각과 다를 바 없습니다. 무당은 평범한 삶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무당은 그 어려운 일이 당사자의 어떤 잘못과 연관되어서 발생한 것으로 말을 합니다.

 

 

 


이처럼 신자가 평소에는 자신의 잘못된 점이나 죄에 대해서는 가볍게 여기다가 특별한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큰 고통에 처하게 될 때, 마치 그 일이 자신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인 것처럼 여기고 자신의 죄를 생각한다면 무당의 생각과 다를 바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세워 놓고 살아가는 신자라면 특별한 고통의 사건을 통해서 죄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볼 때마다 자신의 악한 본성을 살피면서 자신이 지금 그리스도를 떠나서 악한 생각과 세상의 사고방식을 따라 신앙 없는 자의 길로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살피면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한 죄의 길을 가고 죄 속에 살면서도 자신이 지금 어떤 상태에서 하나님과 어떤 관계로 살아가는지 전혀 깨닫지 못한 채 믿음의 착각 속에 빠져서 결국 ‘주여 주여’하다가 생명과 상관없는 인생으로 마감할 수 있음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의 본성이 본래부터 선을 추구하고, 의를 향하고, 믿음을 원하는 것이라면 전혀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본성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의 본성이 선을 추구하고 의를 향한다면 그러한 사람이 원하고 기뻐하는 것은 선이고 의입니다. 선과 의를 기뻐한다면 사람은 자연스럽게 선과 의를 행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할까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본성은 선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것을 기뻐하고 즐겨하고 소원하는 것이 사람이 태어나면서 가지고 나오는 본성입니다. 그래서 정신 차려서 자신을 살피지 않으면 악의 길을 가면서도 악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 요람 제 오년에 유다 왕 여호사밧이 오히려 위에 있을 때에 그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니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18절을 보면 이 여호람이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다고 말합니다. 즉 이스라엘과 똑같이 악한 길로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람이 그렇게 된 이유는 아합의 딸이 아내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아합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손꼽힙니다. 그런데 여호람의 아비인 여호사밧이 그러한 아합의 딸을 아들인 여호람과 결혼을 시킨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아합이 어떤 사람인가를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아합의 집과 혼인을 함으로써 유다에 미칠 결과를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그로 인해서 유다에는 아합의 악이 들어오게 되고 여호람만 아니라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까지 아합의 악을 행하는 길로 가게 된 것입니다.

 

 

 


지금 이 문제는 신앙이 없는 사람과 결혼을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사고방식 자체가 잘못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과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신앙이 있는 증거는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살아가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아합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한 여호사밧은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여 살아가지를 못했습니다. 그것이 아합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한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아합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했을 때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삶의 중심이 하나님께 있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살아가는 길, 그 방향은 과연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입니까 아니면 이 세상입니까? 그 여부는 여러분이 살아가시면 여러 가지 일을 결정할 때 무엇을 고려하면서 무엇에 중심을 두고 결정하는지를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여러분의 신앙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는지 아니면 여러분에게 주어질 육신의 유익을 고려하는지를 살피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모든 일의 결정을 자기에게 좋은 대로 합니다. 내게 좋으면 좋은 것으로 판단합니다. 하지만 신자는 그런 방식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내게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내 영혼에 유익이 되는 것을 좋은 것으로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경계할 것을 경계하면서 신앙의 길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은석교회가 좋은 예배당으로 장소를 옮겼습니다. 그것도 임대가 아니라 은석교회 명의의 건물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사실을 기뻐하면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기쁜 마음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단지 기뻐하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기쁨 속에서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살핍니다. 그것은 은석교회가 예배당도 구입하고 했으니까 이제 이 교회를 부흥시켜 보자는 욕망일 수 있고, 은석교회도 예배당을 구입했다는 것 때문에 예배당을 임대하여 모이는 교회보다 더 낫다는 교만일 수도 있고, 많은 분들이 헌금을 하면서 상대적으로 많은 액수를 헌금한 사람은 은연중 자신을 과시하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악한 속성들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신을 경계하지 않고 살피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의 길을 달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석교회가 지금껏 예배당 문제로 기도를 했다면 이제부터는 예배당 구입 후를 위해서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스스로 경계하면서 교만에 빠지지 않고 여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의 중심에 가득하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당으로 인한 기쁨보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기쁨이 더욱 크게 내 마음을 점령하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호람이나 아하시야처럼 악을 악으로 보지 못한 채 아합의 길로 행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합의 딸과 결혼한 것이 뭐 그리 큰 문제가 되겠습니까? 하지만 결과는 유다를 아합의 악으로 끌고 갔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러한 악은 대를 이어서 계속됩니다.

 

 

 


27절에서 “아하시야가 아합의 집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니 저는 아합의 집의 사위가 되었음이러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하시야 역시도 아합 집의 사위가 됨으로써 아합의 집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는 길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아하시야의 모친이며 아합의 딸인 아달랴가 있었던 것입니다. 애당초 여호사밧이 아합의 죄에 대해 경계를 했었다면 아합의 딸을 며느리로 맞이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에 대해 경계를 하지 않고, 또한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유다로 하여금 아합의 길로 행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여호람과 아하시야가 아합의 집과 같이 악을 행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자로 유다를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아합처럼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유다를 지키고 보존하고자 하는 인간의 방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것입니다. 결국 아합의 집과 결혼을 한 것은 아합 집의 그러한 사고방식에 대해 경계를 하지 않았다는 뜻이고, 경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은 가볍게 여겼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합 집의 사고방식으로 사는 것이 곧 여호와께 악을 행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아합의 딸에 의해서 아합의 길을 가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가 살피고 경계해야 하는 것은 세상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이 이상하고 희한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욕망과 일치되고, 인간의 생각과 상식과도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총에 서서 살피지 않으면 악이 왜 악인가를 구분하지 못한 채 세상의 길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9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저와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하셨음이더라”고 말합니다. 유다도 이스라엘과 똑같이 악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다윗과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약속으로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믿고 소망할 것도 하나님의 약속이지 인간의 힘도 노력도 아닌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힘을 믿고 그 힘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우리가 경계할 것은 바로 그러한 세상의 방식입니다. 힘을 가지고 힘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부럽게 보인다면 참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역시 하나님께 힘을 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아합의 길로 행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경계하지 못함으로써 나타나는 결과인 것입니다.

 

 

 


잠언 7:16-23절을 보면 “내 침상에는 화문 요와 애굽의 문채 있는 이불을 폈고 몰약과 침향과 계피를 뿌렸노라 오라 우리가 아침까지 흡족하게 서로 사랑하며 사랑함으로 희락하자 남편은 집을 떠나 먼 길을 갔는데 은 주머니를 가졌은즉 보름에나 집에 돌아오리라 하여 여러가지 고운 말로 혹하게 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 소년이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푸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일반이라 필경은 살이 그 간을 뚫기까지에 이를 것이라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되 그 생명을 잃어버릴줄을 알지 못함과 일반이니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온갖 좋은 것으로 신자의 마음을 붙듭니다. 그러나 세상의 길은 결국은 사망입니다. 이 점을 보지 못하면 신자가 자신을 경계할 마음을 갖지 않게 됩니다. 경계할 필요성을 느끼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입니까? 생명입니까? 세상도 생명도 모두 원한다는 것은 욕심일 뿐입니다. 생명을 향한 기쁨이 아니라 단지 사망이라는 것이 싫어서 생명을 택하는 욕심인 것입니다.

 

 

 


진심으로 우리를 멸하지 않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기쁘고 그 사랑에서 멀어지지 않는 자로 살고자 하신다면 항상 자신을 경계하십시오. 말씀에 서서 무엇이 악인가를 살피시고 어떠한 악이 우리를 붙들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나게 하는지를 살피시며 경계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신자의 구별됨이 증거되도록 하십시오. 이러한 삶에 마음이 가지 않는다면 참으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23강) 열왕기하 9:1-4  이상한 행동

 

<본문>

선지자 엘리사가 선지자의 생도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 너는 허리를 동이고 이 기름병을 손에 가지고 길르앗 라못으로 가라 거기 이르거든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를 찾아 들어가서 그 형제 중에서 일어나게 하고 데리고 골방으로 들어가서 기름병을 가지고 그 머리에 부으며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노라 하셨느니라 하고 곧 문을 열고 도망하되 지체치 말찌니라 그 소년 곧 소년 선지자가 드디어 길르앗 라못으로 가니라 (열왕기하 9:1-4)

 

 

 


<설교>


본문에 보면 선지자 엘리사가 선지자 생도 중 하나를 불러 예후에게로 가서 머리에 기름을 붓고 왕으로 삼고 지체치 말고 도망치라고 말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여러분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왕을 세울 때는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머리에 기름을 부어서 왕을 삼는 것은 다른 나라는 행하지 않는 의식이기에 우리에게는 아주 생소하게 보이는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한 것은 예후에게 기름을 붓고 지체치 말고 도망치라고 한 엘리사의 말입니다. 하지만 지체치 말고 도망치라는 것은 엘리사 개인의 뜻이 아닙니다. 엘리사는 지금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그 뜻대로 선지자 생도에게 지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후에게 기름을 부은 후에 즉시 도망치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도망치라고 했으니 도망을 치면 그만이지만 왜 기름을 부은 후에 즉시 지체하지 말고 도망을 쳐야 하는지 그 이유가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본문의 내용에서 우리의 문화와는 다른 기름을 부어서 왕을 삼는 내용과 우리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름을 붓고 즉시 도망치라는 말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대개 왕이라는 것은 누군가가 반역을 하지 않은 이상 왕의 장자로서 그 대를 이어갑니다. 즉 혈통적으로 이어지는 것이 왕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다릅니다. 혈통으로 이어가다가도 하나님이 누군가를 왕으로 지명하시고 기름을 부으시면 그가 왕이 되는 이상한 나라가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예후는 이스라엘 왕 요람의 군대장관입니다. 군대장관으로서 군대를 통솔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갖고는 있었지만 예후 스스로 반역을 해서 왕이 되고자 하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이 엘리사에게 뜻을 전하고 그 뜻을 받들어 엘리사가 생도를 보내서 머리에 기름을 붓고 왕으로 세워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군대장관들은 하나님이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다는 말 한마디에 예후를 왕으로 인정해 버립니다. 다른 나라 같으면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에게는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나타내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름부음의 행위가 과연 무슨 의미를 담고 있으며 또한 오늘 우리와는 어떤 연관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메시아’라는 말과 ‘그리스도’라는 말을 잘 아실 것입니다. 메시아나 그리스도 모두가 예수님을 지칭하는 것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면 메시아와 그리스도라는 말의 뜻은 아십니까? 그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메시아와 그리스도는 말이 다른데 뜻이 동일한 것은, 메시야는 히브리어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고, 그리스도는 헬라어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의 메시아와 그리스도로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영원한 우리의 왕으로 택하시고 구별하여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기름 부음에는 하나님이 구별하고 택하여 세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뜻이 있지 않으면 누구도 하나님의 아들로 구별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별하여 택하시지 않으면 누구도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름 부음은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만 되어집니다. 즉 하나님이 구별하여 택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되는 것일 뿐 인간의 희망사항이 하나님께 접수되어 된 일이 아니란 것입니다.

 

 

 


본문의 예후 역시 그가 왕이 되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왕으로 삼아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이고 뜻일 뿐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에 의해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는 삶입니다. 자신을 위한 자기의 삶이 없는 것이 기름 부음 받은 자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기름 부음과 오늘 우리와는 어떤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비록 기름 부음에 하나님의 구별과 선택의 의미가 있고,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요구되는 삶이 있다고 해도 문제는 오늘 우리에게는 기름을 붓는 의식 자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의 우리에게는 기름을 붓는 의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름 부음 받은 자는 존재합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이 택하여 세우신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요한일서 2:27절을 보면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말씀 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분명 신자를 향해서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거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지금의 신자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즉 지금의 신자 역시 주께 받은 기름 부음이 거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주께 받은 기름 부음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침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이 임한 것을 주께 받은 기름 부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하늘로 가시고 보혜사 성령을 보내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신 것은 기름 부음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뜻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하나님이 구별하시고 택한 하나님의 사람에게 성령을 보내셔서 그를 인친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의 뜻을 깨달으며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사람이 교회를 나오는 것은 자기 개인적인 의지와 뜻이 얼마든지 개입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고 선택되는 일에는 전혀 개입될 수 없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일입니다. 예후가 예후의 뜻과는 전혀 무관하게 기름 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 받은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의 뜻과는 무관하게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고 택함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기름 부음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일이기 때문에 그 어떤 경우도 선택과 구별을 두고 인간의 공로를 내세울 수 없고 인간이 높임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즉 내가 이처럼 신앙생활을 잘했더니 하나님이 나를 택하시고 구원하셨다는 것과 같은 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도에게 도망치라고 지시한 것에 담겨 있습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지체하지 말고 도망치라’는 것입니다. 예후에게 기름을 붓고 왕으로 세웠다고 해서 생도가 위험에 처해질 상황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자신에게 기름을 붓고 왕으로 세운 생도를 예후가 죽일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 군대 장관들도 하나님이 자신을 왕으로 세웠다는 예후의 말에 즉시로 복종하는 것을 보면 다른 군대장관들이 생도의 목숨을 위협할 상황이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생도가 예후에게 기름을 붓고 왕으로 세웠다고 해서 당장 위험에 처할 상황은 아니었으며 따라서 도망을 칠 이유도 없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왜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고 지체하지 말고 문을 열고 도망하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지체하지 말고 도망하라는 것은 한시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인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나름대로 많은 고민을 하면서 생각을 했지만 제가 생각한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돌아올 공로와 대접으로부터 도망치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생도가 예후에게 기름을 붓고 왕으로 세웠다면 왕이 되는 예후에게 생도는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비록 엘리사의 뜻에 의해서 보냄을 받고 왕으로 세우긴 했지만 예후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머리에 직접 기름을 부은 선지자이기 때문에 특별대우를 하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엘리사는 생도에게 돌아올 그러한 대접으로부터 도망치라고 한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인간의 어떤 공로도 개입될 수 없고 따라서 인간이 대접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에 참여된 자에게 있어야 할 자세인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는 하지만 정작 살펴보면 하나님의 일이라는 명목을 걸고 온통 자신의 보람과 공로를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한 자의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뜻에 의해서 하나님의 일에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서 우리를 인치시고 나의 욕망을 따라 살던 우리를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그 뜻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도록 만드셔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열심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하나님의 열심에 의해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 내용에 인간의 공로가 개입되는 것이 있습니까? 우리의 열심과 우리의 뜻이 개입되는 것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손과 발로 자신이 움직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열심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나의 손과 발도 하나님의 허락하에 움직이고 있음을 잊고 있는 것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신자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자신을 구별하여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마음에 두고 살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한 증거, 즉 주께 받은 기름 부음이 내 안에 거한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항상 내 개인에게 돌아올 공로와 대접을 기대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그러한 것으로부터는 지체하지 말고 도망쳐야 합니다. 내가 높아지고 공로가 인정되고 대접받고 싶은 욕망으로부터 도망치면서 하나님의 뜻만 고스란히 남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다운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구별된 신자가 가야할 길입니다. 예후는 기름 부음을 받고 왕이 됨으로써 아합의 집을 심판해야 하는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예후가 원한 길이 아니었지만 하나님이 예후를 그러한 길로 이끌어 가십니다. 이것이 선택 받은 자의 삶입니다.

 

 

 


여러분 역시 하나님에 의해 구별된 자의 길을 가야 할 사람으로 부름 받았습니다. 내 이름과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이름과 주님의 공로를 높이는 길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평생토록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도 그것으로 내가 높아지고 대접을 받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아야 하는 길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한 길조차도 그리스도의 사랑이 여러분을 강권해서 거부하지 않고 기쁨으로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4강) 열왕기하 9:5-10  예후의 사명

 

<본문>

저가 이르러 보니 군대 장관들이 앉았는지라 소년이 가로되 장관이여 내가 당신에게 할 말씀이 있나이다 예후가 가로되 우리 모든 사람 중에 뉘게 하려느냐 가로되 장관이여 당신에게니이다 예후가 일어나 집으로 들어가니 소년이 그 머리에 기름을 부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여호와의 백성 곧 이스라엘의 왕을 삼노니 너는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 내가 나의 종 곧 선지자들의 피와 여호와의 종들의 피를 이세벨에게 갚아주리라 아합의 온 집이 멸망하리니 이스라엘 중에 매인 자나 놓인 자나 아합에게 속한 모든 남자는 내가 다 멸절하되 아합의 집을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과 같게 하며 또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과 같게 할찌라 이스르엘 지방에서 개들이 이세벨을 먹으리니 저를 장사할 사람이 없으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곧 문을 열고 도망하니라(열왕기하 9:5-10)

 

 

 


<설교>


지난 시간에 기름 부음에는 하나님이 거룩히 구별하여 택하여 세웠다는 의미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기름 부음을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직책을 부여받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세워서 특별한 직책을 맡기기 위해 기름을 붓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이런 의미로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날처럼 목사라는 직책을 기름 부어 받은 특별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즉 목사를 특별한 사람으로 취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름 부음은 누군가에게 특별한 직책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맡아 행할 사람으로 구별하여 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 세상에서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특별대우를 받는 사람인 것도 아닌 것입니다. 세상에 특별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아니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동일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특별대우를 할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이 세상의 형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특별대우를 받을만한 사람이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했던 복음의 원수였습니다. 그런 그가 사도가 되고 복음의 증인이 되어서 세상의 많은 곳을 다니며 복음을 전파했던 것은 그가 특별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결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택하여 구별하시고 사도로 세우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로 인해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리스도를 인생의 전부로 여기며 그리스도를 위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되어진 것이지 바울이 특별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특별하다면 하나님의 일이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구별하여 세운 하나님의 사람이 할 일은 특별하신 하나님의 일을 증거하는 것이지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생도 선지자를 예후에게 보내서 기름을 붓게 하고 왕으로 세운 일도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예후가 특별한 존재였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왕으로서 능력이 있다거나 신앙이 특출했기 때문에 왕으로 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10장에 보면 예후 역시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예후도 다른 왕과 다를 바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택하심의 조건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애당초 사람의 능력이 하나님의 일에 도움이 되는 것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순수하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인간의 힘이 보탬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이 점을 어리석은 인간들이 착각하여 자신의 열심과 능력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뭔가 괜찮은 일을 했다고 여겨지면 그것으로 자신을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별, 선택과 같은 용어에서 신자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세워진 하나님의 도구라는 것입니다. 예후도 이러한 도구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생도 선지자는 예후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면서 하나님이 예후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너는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 내가 나의 종 곧 선지자들의 피와 여호와의 종들의 피를 이세벨에게 갚아주리라 아합의 온 집이 멸망하리니 이스라엘 중에 매인 자나 놓인 자나 아합에게 속한 모든 남자는 내가 다 멸절하되 아합의 집을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과 같게 하며 또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과 같게 할찌라”(7-9절) 하나님이 예후를 왕으로 세우신 이유는 아합의 집을 멸절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예후의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기름부음에는 하나님의 일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구별하여 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름 부음 받은 자가 관심을 둘 것은 하나님의 일이지 자신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둔다는 것이야 말로 성령이 그 속에 거하는, 즉 기름 부음 받은 신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후를 세워서 아합의 집을 멸망시킴으로써 아합과 함께 우상숭배의 길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바른 신앙의 길로 인도하고자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왕을 잘 만나면 왕으로 말미암아 바른 신앙의 길을 갈 수 있었고 왕을 잘 못 만나면 왕과 함께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후를 세워서 아합의 집을 멸망하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아합의 세력으로부터 구출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름부음 받은 예후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후 역시 죄인된 존재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참된 왕으로서의 사명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참된 왕의 사명을 온전히 이루신 기름부음 받은 왕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악의 세력에 붙들려 멸망으로 달려가는 자기 백성을 구출하신 것입니다. 즉 기름부음 받은 왕의 사명을 예수님이 완벽히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택한 백성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구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왕의 모습입니다. 자기 백성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왕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의 기름 부음 받은 신자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그 속에 성령이 거하는 자는 무엇을 위해 부름 받았고 택함 받은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참된 왕으로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왕의 사명을 성취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사명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명’이라는 말을 크게 오해합니다. 먼 외국으로 가서 선교를 하거나 전도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목사 되는 것을 사명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명은 특정의 사람들에게만 부여된 특정의 일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사명을 받은 사람은 목사나 선교사들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럼 나머지 신자들은 아무런 사명이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까?

 

 

 

 

신자의 사명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루신 일, 즉 예수님이 성취하신 예수님의 사명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자신이 그 증거물이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죄인에 불과한 나같은 자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피 흘리신 그 은혜에 감사하고, 그 은혜를 깨닫게 된 것을 삶의 기쁨으로 여기면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일의 최고의 증거물입니다. 그 증거물로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부름 받은 신자의 사명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외쳤습니다. ‘다 이루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모든 사명을 마쳤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사명으로 인해서 우리가 죄에서 건짐 받고 영원한 생명에 속한 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 우리가 예수님이 이루신 일을 증거하는 것 말고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일을 증거 하는 것과 교회가 부흥되는 것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증거는 말 그대로 증거로 끝납니다. 예수님을 증거해서 그 결과로 교회가 부흥되기를 바라는 것은 관심이 예수님께 있지 않음을 보여줄 뿐입니다. 예후에게 주어진 사명은 예후가 희망한 일도 아니고 미리 계획한 일도 아닙니다. 즉 예후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후는 단지 하나님의 일에 부름 받은 존재일 뿐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할 사람일 뿐입니다.

 

 

 


이처럼 사명은 애당초 인간의 일이나 인간의 뜻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명을 이용해서 인간의 일을 내세우거나 인간의 욕망이 담긴 인간의 뜻을 마치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여긴다면 그것은 사단의 일에 불과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만 바라본다는 것이 우리들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은 언제나 나를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 마음을 주님에게로 향하도록 하시고, 주님이 이루신 일이 우리에게 어떤 복으로 주어졌는가를 알게 하심으로써 내가 한 일이 아니라 주님이 한 일을 증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택하시고 구별하시고 신자의 사명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신자가 왜 세상에 존재하겠습니까?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처럼 한 평생 먹고 마시는 일에 매진하다가 인생을 마치는 것이라면 도대체 신자로 세상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또 왜 존재하는 것입니까? 큰 예배당 세우고, 세상 복이나 빌어주고, 세상이 칭찬할 선행을 많이 베풀고, 병든 사람들 불러다가 기도해서 낫게 해주라고 교회가 존재하는 것입니까?

 

 

 


신자로서 자신을 세상에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곧 신자로서의 사명 자체에 관심이 없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교회로 모이게 하신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없는 것 역시 다를 바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교회를 다니고 예배당이 있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왜 나를 부르시고 택하셔서 예수님을 알게 하셨는지 하나님의 뜻과 그 마음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기쁨에 마음을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남들처럼 잘 살다 죽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이 택하신 신자답게 살다가 죽는 인생을 소원해야 합니다. 사람답게 살다가 죽고 싶다는 열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답다는 것은 하나님이 새롭게 하신 새 사람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열망이 없다면, 지금 우리의 관심은 예수님도 아니고 새 하늘과 새 땅도 아니며 오직 눈에 보이는 세상과 나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신자의 사명은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열심히 뭔가를 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신자의 사명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완벽하게 성취하시고 이루신 그 일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일로 인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복을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신자의 사명은 사는 것인데, 무엇으로 어떻게 사는가가 다른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 행복을 위해서 세상의 것으로 기뻐하며 살아가지만 신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며, 예수님으로 인한 하늘의 복으로 기뻐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25강) 열왕기하 9:17-26  예언된 심판

 

<본문>

이스르엘 망대에 파숫군 하나가 섰더니 예후의 무리의 오는 것을 보고 가로되 내가 한 무리를 보나이다 요람이 가로되 한 사람을 말을 태워 보내어 맞아 평안이냐 묻게 하라 한 사람이 말을 타고 가서 만나 가로되 왕의 말씀이 평안이냐 하시더이다 하매 예후가 가로되 평안이 네게 상관이 있느냐 내 뒤로 돌이키라 하니라 파숫군이 고하여 가로되 사자가 저희에게 갔으나 돌아오지 아니하나이다 하는지라 다시 한 사람을 말을 태워 보내었더니 저희에게 가서 가로되 왕의 말씀이 평안이냐 하시더이다 하매 예후가 가로되 평안이 네게 상관이 있느냐 내 뒤로 돌이키라 하니라 파숫군이 또 고하여 가로되 저도 저희에게까지 갔으나 돌아오지 아니하고 그 병거 모는 것이 님시의 손자 예후의 모는 것 같이 미치게 모나이다 요람이 가로되 메우라 하매 그 병거를 메운지라 이스라엘 왕 요람과 유다 왕 아하시야가 각각 그 병거를 타고 가서 예후를 맞을쌔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토지에서 만나매 요람이 예후를 보고 가로되 예후야 평안이냐 대답하되 네 어미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요람이 곧 손을 돌이켜 도망하며 아하시야에게 이르되 아하시야여 반역이로다 예후가 힘을 다하여 활을 당기어 요람의 두 팔 사이를 쏘니 살이 그 염통을 꿰뚫고 나오매 저가 병거 가운데 엎드러진지라 예후가 그 장관 빗갈에게 이르되 그 시체를 취하여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밭에 던지라 네가 기억하려니와 이전에 너와 내가 함께 타고 그 아비 아합을 좇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이 아래 같이 저의 일을 예언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젯날에 나봇의 피와 그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노라 또 말씀하시기를 이 토지에서 네게 갚으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 시체를 취하여 이 밭에 던질찌니라 (열왕기하 9:17-26)

 

 

 


<설교>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로 시작된 성경은 심판과 함께 새하늘과 새땅의 창조로 끝납니다. 즉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은 하나님의 변개할 수 없는 뜻에 의해서 멸망을 받는 것으로 끝나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세상은 소망을 둘 수 없는 곳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상에 소망을 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래전에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사건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때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기 직전까지 수많은 사람들은 백화점에서 쇼핑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을 사로잡는 온갖 좋은 물품들에 마음을 빼앗긴 채 곧 다가올 운명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고 쇼핑을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백화점 안에서 ‘곧 이 백화점이 무너집니다’라고 외쳤다고 해도 아마 미친 사람의 말로 여긴 채 관심도 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백화점이 무너질 어떤 징조도 사람들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현실이 바로 그와 같습니다. 세상을 향한 심판이 이미 예고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을 아예 무시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여길만한 징조가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악이 심판 받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악을 행한 사람이 그에 상응한 대가를 치르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은 것이 지금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알지 못한 악행이 수없이 많지 않습니까?

 

 

 


이처럼 악을 행하면서도 심판을 받지 않고 잘 먹고 잘사는 것을 보면서 마치 하나님의 심판도 실제로 우리의 삶에 유효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아무리 하나님의 심판을 외친다고 해도 매우 추상적이거나 감상적인 말로만 그칠 뿐이지 심판의 실체에 대해서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분위기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판에 대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하나님이 군대장관 예후를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시고 아합의 집을 치게 하시는 내용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합의 집을 치고자 하시는 것은 이미 예언된 일입니다. 25절에 “예후가 그 장관 빗갈에게 이르되 그 시체를 취하여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밭에 던지라 네가 기억하려니와 이전에 너와 내가 함께 타고 그 아비 아합을 좇았을 때에 여호와께서 이 아래 같이 저의 일을 예언하셨느니라”는 내용이 말하는 것처럼 본문의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 21장을 보면 아합의 집을 심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아합이 나봇을 죽이고 그 포도원을 빼앗을 일로 인해 아합 집의 모든 남자를 멸하고 아합의 부인인 이세벨도 그 시체를 개들이 먹는 재앙을 받을 것임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모든 재앙을 아합의 때가 아니라 그 아들의 시대에 내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아합의 아들의 시대까지 심판은 미뤄진 것이지만 심판이 없어지거나 취소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설사 아합의 집이 평안한 세월을 지내고 있다고 해도 실상은 심판의 때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 아합 집의 정확한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들의 실상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우리 역시 심판을 예언하신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효력 안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이 말씀은 어떤 경우에도 수정되거나 취소되지 않고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에 보이는 현실이 참된 현실이 아닌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눈에는 평안과 행복이 보인다고 해도 실상은 심판의 말씀이 성취되는 그 때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 이 세상이 처한 참된 현실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지금 사는 것이 문제없고, 심판의 징조라고 할 수 있는 재앙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심판의 대한 말씀 자체를 무시하면서 마치 심판의 말씀이 우리에게 아무런 효력이 없는 것으로 간주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믿으려고 하는 어리석음인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예후가 병거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요람이 거기 누웠음이라 유다 왕 아하시야는 요람을 보러 내려왔더라”고 말합니다. 왕으로 세움 받은 예후가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아합의 아들인 요람을 향해 달려갑니다. 요람의 입장에서는 아합의 때에 예언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는 순간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람은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즉 예후가 자신에게 달려오는 것이 이미 예언된 심판의 말씀이 자신에게 돌진해 오고 있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요람의 그러한 반응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후가 병거를 타고 자신에게 오는 것이 하나님께서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하시는 일임을 요람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다만 예후가 군사를 이끌고 오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그런 상황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혹시 예후가 반역을 일으킨 것은 아닌가? 라는 것이 전부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요람은 한 사람을 예후에게 보내서 ‘평안이냐?’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관심사일 것입니다. ‘자기 평안’이야말로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관심사가 아니겠습니까? 어떤 일이 있다고 해도 내 한 몸 별일 없이 무사하고 평안하면 그것으로 됐다고 여기지 않습니까? 이처럼 자기 평안이라는 관심사에 묻혀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영혼의 문제는 관심 밖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영혼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무슨 고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육신이 죽는 것도 아니고, 돈 버는 일에 지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영혼의 문제에 대해서는 둔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어리석음은 바로 그것입니다. 자기 안위를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정작 자신을 무너뜨리고 망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요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한다고 해서 일주일 전이나 한 달 전에 예고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이 도적같이 임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요람이 예후를 바로 앞에 두고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처럼 우리도 그럴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대비하라는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수로 심판을 대비할 수가 있습니까? 심판을 바로 앞에 두고서도 심판을 잊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우리가 무엇으로 어떻게 심판을 대비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면 신자가 어떻게 사는 것이 심판을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합의 죄의 길로 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합의 집을 멸망하시고 아합의 아들인 요람을 죽이시고 이세벨을 죽이시는 것은 나봇의 피 때문입니다. 26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젯날에 나봇의 피와 그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노라 또 말씀하시기를 이 토지에서 네게 갚으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 시체를 취하여 이 밭에 던질찌니라”고 말씀합니다.

 

 

 


아합이 왕으로 있을 때 나봇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아합의 궁에서 가까운 거리에 포도원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포도원을 아합이 탐을 내고 나봇에게 더 좋은 포도원을 준다는 조건으로 포도원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나봇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유업을 팔 수 없다는 하나님의 규례를 내세워서 아합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면서 땅을 팔 수 없다는 규례를 세우신 것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면서도 자신들이 나그네라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그네로 하나님과 함께하고 동행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세상의 것을 자신들의 기업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기업을 소망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땅을 사고판다면 그것은 땅을 자기 소유로 여기는 것이고, 세상에 자기 소유를 두게 되면 결국 세상의 것을 자기 힘으로 삼게 될 것이고, 그것은 나그네의 정신에서 벗어난 것이 되기 때문에 땅을 팔지 말라는 규례를 세우신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나그네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만을 힘으로 삼고 신뢰하면서 하늘의 기업을 소망하는 참된 이스라엘로 존재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입니다.

 

 

 


나봇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써 포도원 팔기를 거절했는데도 불구하고 아합은 포도원을 자기 소유로 삼지 못해서 식음을 전폐하고 자리에 눕기까지 했고, 결국 이세벨이 아합을 위해서 나봇을 다른 사람을 이용하여 죽여 버리고 그 포도원을 아합이 차지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합의 집이 멸망을 받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아합의 길로 가지 않는 것이 심판을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요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고 있는 예후를 만난 장소도 나봇의 땅입니다. 이것은 아합이 범한 죄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합의 길로 가지 않는 것이야 말로 심판을 아는 자로 실아 가는 신자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소유의 땅이 없는 민족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땅이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소유이지 이스라엘의 소유가 아닙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거한 땅에서 얻은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이고, 그 땅에서 무엇을 먹고 마시든 하나님의 은혜로 먹고 마시는 것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이 은혜를 잊었을 때 나타나는 것은 자기 손에 있는 것을 자기 소유로 간주해 버리고, 그것을 힘으로 삼고 나아가서 더 큰 힘을 얻기 위해 경쟁하고 다투면서 자기보다 적은 소유를 가진 자는 무시하는 이방인의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이것이 아합의 길이고 아합의 죄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합의 이러한 정신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본문의 심판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매일같이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내 수중에 있다고 해서 내 소유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신자조차 이방인처럼 소유 증가를 위해 발버둥 치면서 많은 소유를 힘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에 머물러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심판에 무관심하게 되고 세상이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지도 알지 못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살인자나 강도, 인신매매범이나 성폭행범 등 악한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바로 그런 사람들을 찾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설픈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분명 심판 받을 자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는 아합의 길로 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코앞에 다가와도 볼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한계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합의 심판을 통해서 무엇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죄가 되는가를 알고 그 길을 가지 않는 것입니다. 그 죄가 곧 하나님의 은혜의 길을 가고 말씀을 증거하는 길에 있는 나봇을 힘으로 억압하고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보다도 세상의 힘을 더 의지하는 것이야 말로 아합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진리의 길을 가는 신자가 참으로 복되다는 것은 심판의 때가 되면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심판의 때가 이르기 전까지 현실의 것으로 복을 확인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세상이 볼 때는 신자로 사는 것이 시원찮게 보인다고 해도 심판주가 오시면 무엇이 지혜로운 것이고 복된 것이고 참된 것인가가 드러납니다. 그때를 생각하면서 현재의 삶으로 인해 실망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믿으며 인내할 수 있기 바랍니다.

 

 

 

 

 

(26강) 열왕기하 10:1-11  예후의 실체

 

<본문>

아합의 아들 칠십인이 사마리아에 있는지라 예후가 편지들을 써서 사마리아에 보내어 이스르엘 방백 곧 장로들과 아합의 여러 아들을 교육하는 자들에게 전하니 일렀으되 너희 주의 아들들이 너희와 함께 있고 또 병거와 말과 견고한 성과 병기가 너희에게 있으니 이 편지가 너희에게 이르거든 너희 주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어질고 정직한 자를 택하여 그 아비의 위에 두고 너희 주의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더라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 왕이 저를 당치 못하였거든 우리가 어찌 당하리요 하고 궁내 대신과 부윤과 장로들과 왕자를 교육하는 자들이 예후에게 말을 전하여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라 무릇 명하는 것을 우리가 행하고 아무 사람이든지 왕으로 세우지 아니하리니 당신의 소견에 좋은대로 행하라 한지라 예후가 다시 저희에게 편지를 부치니 일렀으되 만일 너희가 내 편이 되어 내 말을 들으려거든 너희 주의 아들된 사람들의 머리를 취하고 내일 이맘때에 이스르엘에 이르러 내게 나아오라 하였더라 왕자 칠십인이 성중에서 그 교육하는 존귀한 자들과 함께 있는 중에 편지가 이르매 저희가 왕자 칠십인을 잡아 몰수히 죽이고 그 머리를 광주리에 담아 이스르엘 예후에게로 보내니라 사자가 와서 예후에게 고하여 가로되 무리가 왕자들의 머리를 가지고 왔나이다 가로되 두 무더기로 쌓아 내일 아침까지 문 어귀에 두라 하고 이튿날 아침에 저가 나가 서서 뭇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의롭도다 나는 내 주를 배반하여 죽였거니와 이 여러 사람을 죽인 자는 누구냐 그런즉 너희는 알라 곧 여호와께서 아합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그 종 엘리야로 하신 말씀을 이제 이루셨도다 하니라 예후가 무릇 아합의 집에 속한 이스르엘에 남아 있는 자를 다 죽이고 또 그 존귀한 자와 가까운 친구와 제사장들을 죽이되 저에게 속한 자를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 (열왕기하 10:1-11)

 

 

 


<설교>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후는 아합의 집을 멸망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이 세운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예후는 요람을 죽이고 이세벨을 죽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후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며 행동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생각할 것은 바로 이점입니다. 예후를 과연 어떤 사람으로 봐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후가 아합의 아들 칠십 명을 죽이는 내용입니다. 항상 이런 내용을 접하게 되면 현대 사회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비현실적인 사건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자연히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고 단지 이스라엘 역사에 있었던 옛날이야기 정도로 치부해 버리는 경향이 많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렇게 생각하면 성경의 모든 내용이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과연 성경의 어떤 내용이 세상의 상식과 현실에 맞아떨어집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가장 첫 내용부터 비현실적이며 비상식적이지 않습니까? 신의 말 한마디에 온 우주 만물이 탄생되었다니요? 이런 말을 하나님을 신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자기 신의 위대성을 자랑하기 위해 믿는 것 말고 누가 과연 사실로 믿으려고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선악과를 만들었는데, 인간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그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되고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세상을 심판해 버리기로 작성하셨다는 말이 과연 세상의 상식과 현실성에 어느 정도 이해가 되겠습니까? 또한 신의 성품은 사랑이며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인데, 죄를 범했다고 하여 한 가문을 몰살시키기로 작정하시고, 한순간에 수만 명을 죽여 버리는 것이 무슨 사랑이고 자비하심이란 말입니까?

 

 

 

본문도 그렇지 않습니까? 아합의 아들 칠십 명이 예후에 의해서 머리가 잘려 죽는 것을 보면서 과연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증거하는 경건하고 거룩한 성경 말씀의 내용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이처럼 상식적이지 못하고 현실성이 없는 내용을 보면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배우고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까? 성경을 보면 바로 이러한 점들이 우리를 곤혹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며칠 전에 터키 여객기가 추락하여 탑승자 56명이 모두 사망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사건이 비상식적이고 비현실적인 내용으로 여겨집니까? 아닐 것입니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현실적인 사고로 생각할 것입니다. 56명이 아니라 560명이 죽었다고 해도 얼마든지 그런 사고가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본문에서처럼 하나님이 아합의 아들 70명을 죽이신 내용에 대해서는 비상식적이고 비현실적인 내용으로 생각하게 될까요? 그것은 비행기 사고와 같은 것을 하나님과 상관없이 우연히 발생한 사건 사고로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단지 우연한 사고로만 생각하면 죽은 사람들이 안됐다는 생각으로 그치는데, ‘하나님이 사고가 나게 해서 죽게 했습니다’라고 말하면 눈에 쌍심지를 키고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시는가?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인데 어떻게 그런 일을 하실 수 있는가?’라고 하면서 달려듭니다. 사람을 죽이는 그런 하나님은 싫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있는 속성입니다.

 

 

 


사람은 모든 것이 자기를 중심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과 조건으로 존재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도 역시 자신에게 유리한 일을 해주시는 분으로 존재하기를 원합니다. 때문에 자기에게 불리한 일이 있을 때는 그것을 하나님의 일로 간주하려고 하지 않고, 설사 하나님의 일로 간주한다고 해도 더 좋고 많은 복을 주기 위해서 하신 일로 생각함으로써 스스로 위안을 삼으려고 합니다. 이처럼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해석하는 습성이 인간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습성이 하나님의 뜻조차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요람과 이세벨을 죽인 예후가 아합의 아들 칠십 명을 죽이기 위해 사마리아의 이스르엘 방백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편지의 내용은 너희 주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어질고 정직한 자를 택하여 왕으로 세우고 아합의 집을 위해 나와 싸우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방백들은 예후가 이스라엘의 왕인 요람과 유다의 왕인 아하시야도 죽였으니 우리가 이길 수 없다고 여기고 “우리는 당신의 종이라 무릇 명하는 것을 우리가 행하고 아무 사람이든지 왕으로 세우지 아니하리니 당신의 소견에 좋은대로 행하라”(5절)고 합니다.

 

 

 

그러자 예후는 “만일 너희가 내 편이 되어 내 말을 들으려거든 너희 주의 아들된 사람들의 머리를 취하고 내일 이맘때에 이스르엘에 이르러 내게 나아오라”(6절)는 내용의 편지를 다시 써서 보내고, 편지를 받은 방백들은 예후의 말대로 왕자 칠십 명을 죽여서 그 목을 광주리에 담아 이스르엘에 있던 예후에게 보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향해서 “그런즉 너희는 알라 곧 여호와께서 아합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그 종 엘리야로 하신 말씀을 이제 이루셨도다 하니라”(10절)고 외칩니다.

 

 

 


이 내용대로 하면 예후는 자신을 왕으로 세운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는 하나님의 도구로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후는 진심으로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직 하나님의 뜻만 생각하면서 말씀을 이루는 도구로만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봐야할까요?

 

 

 


예후가 칠십 명의 왕자를 죽인 것을 두고 ‘심하다’ ‘자비심이 없다라는 말은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후가 한 일은 하나님이 지시한 내용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후가 한 일이 하나님이 말씀한 내용대로라고 해서 예후의 모든 행동을 옳다고 인정해야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대로만 행하면 옳은 것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여러분께 100억을 주시면서 그 돈으로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도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 돈으로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돕습니다. 이런 경우 순수하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뜻만 생각하면서 돕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대로 어려운 사람을 돕긴 돕되 사심이 개입된 경우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순수하게 하나님의 뜻만 생각하며 돕는다면 처음부터 100억이라는 돈을 자신의 것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다만 하나님의 뜻에 의해 어려운 자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일 뿐이기에 그 일을 행하는 자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사심이 개입된다면 아무리 하나님의 뜻대로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고 해도 그 일을 행하고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100억이 자신의 손에 있음으로 인해 힘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고 해도 그 일을 행하는 자신을 대견하고 위대한 존재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도와주는 사람들은 자기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으로 보게 되고, 자신에게서 도움을 받았으니 자신을 높이고 대접해야 할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비록 하나님의 뜻대로 행했다고 해도 그 뜻을 행하고 있는 당사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다고 간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후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인간의 습성입니다. 비록 예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후를 하나님의 뜻대로 살았다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후를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실 도구로 세웠을 뿐이지 예후를 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즉 예후에게 왕이라는 권력과 힘이 주어진 것은 말씀의 성취를 위함일 뿐이기에 예후의 것으로 여기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습성이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그냥 가만히 놔두겠습니까? 힘이 있는 자는 그 힘으로 타인을 지배하고 싶은 욕망을 이기지를 못합니다. 약자가 자신의 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으로 쾌감을 느끼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예후 역시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이 왕으로 세우신 것은 말씀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삼기 위함이었는데 왕이라는 권력에 취하게 된 것입니다. 더군다나 요람과 아하시야까지 죽인 상태에서 누구도 자신을 대적할 수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에 가득차있습니다. 그래서 왕자 칠십 명 중에 어질고 정직한 자를 왕으로 세워서 나와 싸워보자고 한 것입니다. 너희들의 힘을 다 합한다고 해도 나를 이길 수는 없다는 자신감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예후에게 5절의 말은 예후의 기분을 고조시키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온 세상이 자기 발아래 있는 것 같은 쾌감을 누리지 않겠습니까? 결국 예후가 비록 하나님의 뜻대로 아합의 가문을 멸망시키는 일을 하고는 있지만 예후는 이미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10절의 “그런즉 너희는 알라 곧 여호와께서 아합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그 종 엘리야로 하신 말씀을 이제 이루셨도다 하니라”는 말도 순수하게 하나님이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선포하는 의미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 말에는 자신이 행한 모든 일을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정당화하면서 결국 말씀의 중심에 자신이 있음을 암시하는 의미로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후의 이런 모습을 통해서 비록 하나님의 뜻을 외치고 있다고 해도 그 속에는 자신의 욕망이 개입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는 하지만, 복음을 전하는 인간이 순수하지를 못하기 때문에 복음 전하는 것을 빌미 삼아서 자신의 유익을 노리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핑계 삼아서 타인을 자신의 다스림 아래 두려고 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러한 인간의 악함에 대해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비록 복음을 외치고 있다고 해도 그것으로 자신을 정당하게 여기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인간을 만들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우리가 속기 쉽고 착각하기 쉬운 거짓된 의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아무리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 정당한 신자로 설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의 뜻을 외치는 것 속에 과연 우리의 사심이 담겨 있지는 않는지 물으면서 우리의 실체를 보게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앞에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신자는 자신이 하는 일을 바라봐서는 안됩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보게 되면, 그 일이 정당하다고 여겨질 때 자신 또한 하나님 앞에서 정당한 존재로 여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합당한 대우를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항상 자신을 경계하며 자신을 살피기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다고 해서 옳은 사람으로 여김받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27강) 열왕기하 10:18-31  구별

 

<본문>

예후가 뭇백성을 모으고 이르되 아합은 바알을 조금 섬겼으나 예후는 많이 섬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큰 제사를 바알에게 드리고자 하노니 바알의 모든 선지자와 모든 섬기는 자와 모든 제사장들을 한 사람도 빠치지 말고 불러 내게로 나오게 하라 무릇 오지 아니하는 자는 살리지 아니하리라 하니 이는 예후가 바알 섬기는 자를 멸하려 하여 궤계를 씀이라 예후가 바알을 위하는 대회를 거룩히 열라 하매 드디어 공포하였더라 예후가 온 이스라엘에 두루 보내었더니 무릇 바알을 섬기는 사람이 하나도 빠진 자가 없이 다 이르렀고 무리가 바알의 당에 들어가매 이편부터 저편까지 가득하였더라 예후가 예복 맡은 자에게 이르되 예복을 내어다가 무릇 바알 섬기는 자에게 주라 하매 저희에게로 예복을 가져온지라 예후가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으로 더불어 바알의 당에 들어가서 바알을 섬기는 자에게 이르되 너희는 살펴보아 바알을 섬기는 자만 여기 있게 하고 여호와의 종은 하나도 너희 중에 있지 못하게 하라 하고 무리가 번제와 다른 제사를 드리려고 들어간 때에 예후가 팔십인을 밖에 두며 이르되 내가 너희 손에 붙이는 사람을 한 사람이라도 도망하게 하는 자는 자기의 생명으로 그 사람의 생명을 대신하리라 하니라 번제 드리기를 다하매 예후가 호위병과 장관들에게 이르되 들어가서 한 사람도 나가지 못하게 하고 죽이라 하매 호위병과 장관들이 칼로 저희를 죽여 밖에 던지고 바알의 당 있는 성으로 가서 바알의 당에서 목상들을 가져다가 불사르고 바알의 목상을 헐며 바알의 당을 훼파하여 변소를 만들었더니 오늘날까지 이르니라 예후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하였으나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나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에 있는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은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사대를 지나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열왕기하 10:18-31)

 

 

 


<설교>


신자가 믿음의 힘을 잃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즉 신자가 어떻게 살아갈 때 믿음의 힘을 잃었다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대개는 신자가 믿음의 힘을 잃은 것을 교회를 향한 열심의 여부로 판단합니다. 열심이 많으면 힘이 있는 것이고 열심이 없으면 힘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또는 종교적 행위를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자가 믿음의 힘을 잃은 것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그 속마음에는 여전히 땅의 것으로 가득해 있는 것을 뜻합니다. 천국을 말하면서 여전히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믿음의 힘을 잃은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확신이 없이 예수님을 부르기 때문에 믿음의 힘은 상실한 채 다만 입술로 예수를 부르고 있을 뿐입니다.

 

 

 


믿음의 힘은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굳은 확신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에 그 무엇으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믿음이 설사 실패와 고난의 길로 이끌어 간다고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전혀 의심하지 않고 두려움 없이 순종하는 것이 믿음의 힘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현실은 이 믿음의 힘을 잃어버린 채 예수님을 부릅니다. 결국 교회를 현실의 문제만 해결 받는 곳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자기 문제와 고민거리를 해결받기 위해 점쟁이를 찾는 것과 다를 바 없이 된 것입니다.

 

 

 


교회가 영원을 사모하여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 채우며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일에 관심을 잃어갑니다. 교회 스스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멀리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간섭 또한 거부해 버립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교회와 신자는 힘을 잃어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현세대의 기독교를 둘러 볼 때에 십자가 복음의 빛이 차츰 바래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는 하되 신령과 진정이 실려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왜 교회가 예수만 증거 해야 하는지조차 잊거나 모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대 교회의 실상이기도 하고 오늘 우리 자신들의 믿음의 실상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힘을 잃어버린 채, 예수를 말하면서도 예수님을 내 인생의 전부로 여기지 아니하고 항상 다른 것을 찾으며 구하고 있는 우리 자신들의 믿음의 현실을 바라보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도 지난주에 이어서 아합 왕조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심판은 성경 기록 중에 가장 참혹한 모습이라고 할 정도로 철저했습니다. 모든 왕자와 모든 바알 제사장들을 단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다 죽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심판의 내용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인자하심에 대한 의문을 품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이나 인자하심은 죄를 그냥 묵과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심판의 초점은 죄와는 절대 공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의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은 죄와는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철저하게 진멸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후가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과 함께 바알을 위해 대회를 여는 척하면서 바알을 섬기는 선지자와 제사장들을 몰살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3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나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에 있는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은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사대를 지나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예후의 신앙을 인정하시고 높이고자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29절의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하였더라”는 말씀이나 31절의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는 말씀을 보면 예후 역시 죄에서 완전히 떠난 자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예후에게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은즉’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예후의 일이 하나님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었음을 말합니다. 즉 바알의 선지자와 제사장을 모두 몰살시키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이런 마음 앞에서 떳떳하게 서있을 수 있는 것입니까? 사실 아합 집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은 오늘 우리를 향한 심판이어야 한다고 말해도 할 말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들의 믿음의 실상이 아합 집과 다르다고 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의 실상이 어떠한지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과연 내 속 마음이 예수님만 향하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을 부릅니다. 히 11:36-38절에서는 “또 어떤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고 말하는데 과연 나는 이러한 믿음의 길도 순종하겠다는 마음과 열심이 있는지 생각하지 않고 십자가를 말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믿음의 실상입니다.

 

 

 


23절을 보면 “예후가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으로 더불어 바알의 당에 들어가서 바알을 섬기는 자에게 이르되 너희는 살펴보아 바알을 섬기는 자만 여기 있게 하고 여호와의 종은 하나도 너희 중에 있지 못하게 하라”는 말을 합니다. 예후가 바알을 섬기는 자와 여호와의 종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바알을 섬기는 자와 여호와의 종을 구분하여 바알을 섬기는 자들은 모두 죽이십니다. 다른 것은 보지도 묻지도 않습니다. 누가 바알을 섬기는 자고 누가 여호와만을 섬기는 자인가만 보시는 것입니다.
바알을 섬긴다고 해서 그들의 성품이 악하고 나쁜 짓만 저지르는 사람들이었겠습니까? 바알을 섬기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바알 신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착한 일도 하면서 살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바알을 섬긴다는 것 하나만으로 심판의 대상으로 구별해 버리는 것입니다. 착하게 살았고 양심껏 살았고 선한 일을 했다는 것이 심판을 벗어나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자신이 교회를 다닌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종으로 간주하여서 아예 처음부터 바알을 섬기는 자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도 금물입니다. 왜냐하면 예후에 의해 죽임을 당한 바알을 섬기는 자들도 이스라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교회를 다니는 신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우리의 속마음에 바알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속마음은 부처를 믿으면서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르고 교회를 다닌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알에게 구하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부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을 찾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예후에 의해서 바알을 섬기는 자와 여호와의 종이 구별되는 것처럼 예수님은 염소와 양을 구별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5:32). 그렇다면 여러분은 염소가 아닌 양의 편에 설 자신이 있습니까? 과연 예수님이 무엇을 보시고 염소와 양으로 구분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구별에는 인간의 선한 행위는 결코 포함되지 않습니다. 교회를 향한 열심 또한 구별의 기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공평한 기준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말하는 열심은 사실 주어진 조건에 따라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시간과 건강과 성격과 생활 형편 등등의 여건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각각 다르게 주신 것들입니다. 그런데 그 열심이 믿음의 조건이 되고 구별의 조건이 된다면 공평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구별의 기준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가 곧 여호와의 종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을 해야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믿음은 예수님만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하나님의 의로우심 앞에서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인간임을 깨달을 때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만이 유일한 소망이며 생명이 되심을 알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섣불리 자기 열심이나 종교적 행위를 믿음으로 간주해서는 안됩니다. 속에 바알을 두고서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열심이고 종교적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순수하게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이 나의 소망이 되시고 생명이 되심을 그 무엇에도 양보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은 내가 사는 길이 아니라 설사 죽는 길이고 매 맞고 고난을 받는 길이라고 해도 순종하게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힘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힘을 잃어버린 채 예수를 부르기 때문에 한낱 자기 문제 해결이나 복을 위해 예수를 찾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서 믿음에 일치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십니까? 아마 그런 생각을 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자기 겸손인지는 모르겠지만 믿음에 있어서는 항상 부족하고 부끄럽다는 생각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가에 마음을 두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여호와의 종으로 세상에 존재하기를 소망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습니까? 도대체 그 속마음에 무엇이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입니까? 아니면 바알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의 심판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구별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심판은 분명 구별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멸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은 믿음에 의해서 구별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믿음의 문제에 대해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자는 끝까지 믿음에 굳게 서서 살아갈 굳은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일에도 믿음의 길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연약한 자신을 맡기고 믿음의 길로만 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시급한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예수님만이 전부이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라는 확고한 믿음에 굳게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8강) 열왕기하 10:30-31  떠나지 않은 죄

 

<본문>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나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에 있는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은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사대를 지나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열왕기하 10:30-31)

 

 

 


<설교>


여러분은 자신에게서 끊임없이 죄가 나온다는 것을 자각하며 사십니까? 그리고 그 죄 때문에 괴로워하고 애통해하면서 사십니까? 대개 보면 자신에게서 끊임없이 죄가 나온다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죄를 날마다 자각하면서 괴로워하고 애통해하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그것은 자신에게서 끊임없이 죄가 나온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 죄를 가볍게 보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여러분에게서 끊임없이 나오는 죄를 ‘탐욕’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사람에게서 마치 끊어진 수도 파이프처럼 멈추지 않고 나오는 죄는 탐욕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자신에게서 탐욕이 쉴 새 없이 나오는 것으로 괴로워하고 애통하십니까? 아마 그런 마음을 갖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탐욕이 죄라는 것을 알고, 그 탐욕이 나에게서 쉴 새 없이 나온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왜 그 죄로 인해 괴로움이 없고 애통함이 없을까요? 그것은 탐욕이 있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지나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탐욕에 의해서 큰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탐욕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것 정도는 가벼운 것으로 여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탐욕을 마음에만 간직한 채 살아가지 않습니다. 탐욕은 사람의 마음에서 끊임없이 활동하면서 사람의 생각과 계획과 그 뜻과 활동 등의 모든 방향을 하나님의 말씀과는 전혀 다른 길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단순히 자신에게 탐욕이 있다는 것만으로 괴로워하고 애통해하는 것이 아니라 탐욕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신으로 인해서 괴로워하고 애통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이 살아있는 신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기뻐하신 길을 가고자 하는 소원이 없다면 결국 탐욕으로 인해 다른 길을 간다고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될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보면 열심히 교회 충성 봉사하면 되는 줄 알지 자기의 속마음에 대해서는 관심을 안둡니다.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으시는 것이 내 속에 있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속에서 쉴 새 없이 나오는 것이 하나님이 용납하지 않으시는 악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나 자신은 괴로움도 애통함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예후가 바알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을 색출하여 진멸하는 내용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예후의 일에 대해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나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은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사대를 지나리라 하시니라”(30절)고 말씀하시면서 칭찬을 하십니다.

 

 

 


사실 예후의 행동은 하나님의 칭찬을 들을만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한 대로 아합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을 진멸하고 바알을 섬긴 자들까지 완전히 진멸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향한 충성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예후를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2주 전에 ‘예후의 실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린 것처럼 예후가 그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충성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는 31절에서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고 말한 내용에 있습니다. 예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합의 가문과 바알에게 속한 자를 모두 진멸하였으면서도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않고 여로보암의 죄에서는 떠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이나 오순절이나 초막절에 유다의 예루살렘으로 가서 제사를 드리고 돌아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다와 화친하는 것을 예후 역시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후 역시 역대 이스라엘 왕들과 다를 바 없이 여호와의 말씀보다는 자기의 왕권 수립을 더 중요한 문제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아합 가문과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진멸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후의 행동들은 순수한 신앙이 아니라 이기적인 동기에 의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후에게만 있는 마음이 아니라 오늘 우리 역시 그러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금송아지를 만든 여로보암의 마음이나 예후의 마음이 동일하고, 또한 오늘 우리들의 마음도 예외는 아닌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예후와 같은 사명이 주어졌다면 우리도 아합의 가문과 바알의 사람들을 진멸하는 일에는 주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힘을 과시할 수 있는 일이고, 승리는 모든 사람에게 쾌감을 주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가는 것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는 것이 또한 사람입니다. 즉 탐심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후가 자신의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서 없으면 안되는 금송아지를 그대로 놓아둔 것입니다.

 

 

 


만약 금송아지가 예후에게 아무런 이득을 주지 않았다면 가차 없이 없애버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금송아지를 없애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유다로 가서 제사 드리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기 백성을 유다에 빼앗길 수 있다는 불안감이 있기에 금송아지를 없애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즉 예후는 여호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이 아니었으며, 자신이 왕으로 세워진 본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생각으로 행한 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후의 행동이 옳다고 해서 예후도 옳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문제이므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부패한 속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원칙으로 세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이익의 여부가 삶의 원칙이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무조건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심각한 오류가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진리인가 아닌가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유익되는 것이라면 받아들입니다. 영성 훈련이든 전도 훈련이든 기도 훈련이든 그러한 것들이 과연 말씀을 기준으로 했을 때 옳은 것인가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좋아하고, 또한 내 교인들을 변화시켜서 교회에 충성하는 일꾼으로 만들고 목사를 잘 섬기는 자로 만들 수 있는 것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무리 절에 가지 않고, 부처에게 절하지 않고, 마리아 상 앞에 엎드려 기도하지 않고, 단군 신상의 목을 부러뜨리면 뭐합니까? 그 속마음이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를 않는다면 결국 예후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예후는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은 자신을 보지 못합니다. 이러한 예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합의 가문과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진멸한 일을 두고 자신을 하나님께 충성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겠습니까? 즉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괴로워하고 애통해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후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합 가문을 진멸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후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모든 일을 행한 것이라면 여로보암의 금송아지를 없애지 못하는 자신의 속마음을 눈치 챘을 것입니다. 그리고 금송아지를 없애지 못하는 것이 결국 자신의 이득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임을 깨닫고 그러한 부패한 속마음을 두고 괴로워하고 애통해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분명 자신에 대해 그런 반응이 있어야 옳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가 진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빛을 소망하면서 빛으로 살아가는 신자들인가를 되돌아보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을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신자라면 내 속에서 발견되는 어둠의 모습으로 괴로워하고 애통해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 어둠의 실체는 어느 한순간도 포기하지 못하는 내 이익, 즉 탐심입니다.

 

 

 


그렇게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 같지만 사실은 믿지 않습니다. 이것이 곧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열심히 그리스도를 좇는 것으로 여깁니다. 열심히 하는 것으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열심’이라는 것 하나로 모든 것을 정당화 해버리는 것입니다.

 

 

 


열심은 예후에게도 있었습니다. 16절을 보면 “가로되 나와 함께 가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 하고 이에 자기 병거에 태우고”라는 말을 합니다. 예후가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과 손을 잡으면서 여호와를 위한 자기 열심을 보여주겠다고 한 내용입니다. 여기서 예후가 말한 열심은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색출하여 진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예후처럼 사람들은 여호와를 위한 열심을 눈에 드러나는 무엇인가로 여깁니다. 그러한 생각이 자신의 속에서 나오는 어둠의 실체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여호와를 위한 열심이 있는 신자로 간주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죄를 지적하는 말씀에 대해서는 반발하기 마련입니다. 자신을 신앙이 있는 자로 여기기 때문에 죄를 지적하는 말은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가 빛에 거하지 않고 그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현대 교회는 예후의 열심과 같은 열심만을 강조함으로써 중요한 것을 잊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무엇을 용납하지 않으신가?를 잊고 있는 것입니다. 아예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열심만 있으면 그 열심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열심이 면죄부가 되지를 못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있다고 해도 그 열심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마음에 의한 열매가 아니라면 결국 부인될 욕망의 부스러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살펴야 할 것은 자신의 속마음입니다. 예후처럼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은 자신의 부패한 마음을 자각하고 그 죄로 인해 괴로워하고 애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해 있다는 증거이며 빛 가운데 거하는 흔적입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 괴로워하고 애통해 하는 그가 진정으로 십자가를 아는 신자이며 그가 부르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바로 그분일 것입니다.

 

 

 

 

 

(29강) 열왕기하 11:1-21  아달랴의 반역

 

<본문>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그 아들의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왕의 씨를 진멸하였으나 요람왕의 딸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의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도적하여 내고 저와 그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여 죽임을 당치 않게 한지라 요아스가 저와 함께 여호와의 전에 육년을 숨어 있는 동안에 아달랴가 나라를 다스렸더라 제 칠년에 여호야다가 보내어 가리 사람의 백부장들과 호위병의 백부장들을 불러 데리고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고 저희로 여호와의 전에서 맹세케 한 후에 왕자를 보이고 명하여 가로되 너희의 행할 것이 이러하니 안식일에 입번한 너희 중 삼분 일은 왕궁을 주의하여 지키고 삼분 일은 수르문에 있고 삼분 일은 호위대 뒤에 있는 문에 있어서 이와 같이 왕궁을 주의하여 지켜 방어하고 안식일에 출번하는 너희 중 두 대는 여호와의 전을 주의하여 지켜 왕을 호위하되 너희는 각각 손에 병기를 잡고 왕을 호위하며 무릇 너희 반열을 침범하는 자는 죽이고 왕의 출입할 때에 시위할찌니라 백부장들이 이에 제사장 여호야다의 모든 명대로 행하여 각기 관할하는바 안식일에 입번할 자와 출번할 자를 거느리고 제사장 여호야다에게 나아오매 제사장이 여호와의 전에 있는 다윗왕의 창과 방패를 백부장들에게 주니 호위병이 각각 손에 병기를 잡고 왕을 호위하되 전 우편에서부터 전 좌편까지 단과 전 곁에 서고 여호야다가 왕자를 인도하여 내어 면류관을 씌우며 율법 책을 주고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매 무리가 박수하며 왕의 만세를 부르니라 아달랴가 호위병과 백성의 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백성에게 이르러 보매 왕이 규례대로 대 위에 섰고 장관들과 나팔수가 왕의 곁에 모셨으며 온 국민이 즐거워하여 나팔을 부는지라 아달랴가 옷을 찢으며 외치되 반역이로다 반역이로다 하매 제사장 여호야다가 군대를 거느린 백부장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반열 밖으로 몰아내라 무릇 저를 따르는 자는 칼로 죽이라 하니 제사장의 이 말은 여호와의 전에서는 저를 죽이지 말라 함이라 이에 저의 길을 열어주매 저가 왕궁 말 다니는 길로 통과하다가 거기서 죽임을 당하였더라 여호야다가 왕과 백성으로 여호와와 언약을 세워 여호와의 백성이 되게 하고 왕과 백성 사이에도 언약을 세우게 하매 온 국민이 바알의 당으로 가서 그 당을 훼파하고 그 단들과 우상들을 깨뜨리고 그 단 앞에서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이니라 제사장이 관리들을 세워 여호와의 전을 수직하게 하고 또 백부장들과 가리 사람과 호위병과 온 국민을 거느리고 왕을 인도하여 여호와의 전에서 내려와서 호위병의 문 길로 말미암아 왕궁에 이르매 저가 왕의 보좌에 앉으니 온 국민이 즐거워하고 성중이 평온하더라 아달랴를 무리가 왕궁에서 칼로 죽였었더라 요아스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칠세였더라 (열왕기하 11:1-21)

 

 

 


<설교>


성경의 내용들은 그리스도께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지루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죽하면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는 성경책을 본다는 말까지 있겠습니까? 성경은 인간의 관심사에 대해 얘기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관심사만 얘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평소 갖고 살아가던 관심사를 가지고 본문을 보게 되면, 본문은 단지 옛날 이스라엘에 일어났던 하나의 사건에 불과합니다. 즉 나와는 상관없는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건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굳이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관심을 두어야 할 내용이 전혀 아닌 것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사를 통해서 보게 되면, 미처 보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자에게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면 본문의 내용을 하나님의 관심사를 통해서 보게 될 때 어떤 내용으로 다가오게 되는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간단하게 말하면 아달랴라는 여인이 자신들의 손자들을 모두 죽이고 왕이 되는데, 그중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아이가 나중에 여호야다라고 하는 제사장이 혁명을 일으킴으로써 왕이 된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어떻습니까? 보통 나라와는 다른 새로운 역사적인 면이 있는 것 같습니까? 하나님의 관심사가 담겨진 내용처럼 보입니까? 아무리 봐도 여느 나라에서나 발생할 수 있고, 또 발생한 역사적 사건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본문과 같은 반역의 역사는 즐비합니다. 왕의 권좌 때문에 형제가 서로 죽이고, 부모 자식이 서로 싸우는 역사로 가득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유독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서 발생한 사건만 다른 시각으로 봐야 하고 하나님의 관심사라는 얘기를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아달랴가 손자들을 죽인 것이 단지 왕위를 탈취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면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그 아들의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왕의 씨를 진멸하였으나”라고 말합니다.

 

 

 


아하시야가 누구에게 죽었는지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군대 장관이었던 예후를 왕으로 세워서 아합의 집을 심판하시는데, 예후가 아합의 아들인 요람 왕을 죽일 때 요람을 문병하기 위해 왔던 아하시야도 같이 죽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하시야가 죽은 후에 그 모친 아달랴가 왕의 씨를 진멸하였다는 것입니다. 왕의 씨라면 아하시야 왕의 아들들로서 아달랴에게는 손자가 됩니다. 결국 아달랴는 자신의 손자를 모두 죽이고 왕위에 오르는 악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러한 아달랴의 악행이 단지 왕위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라면,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얘기하는 것이 전부겠지만 문제는 1절에서 아달랴가 죽인 아하시야의 아들들을 왕의 씨라고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아달랴는 씨를 진멸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 씨를 대하 22:10절에서는 “유다 집의 왕의 씨”로 말합니다. 유다 집의 왕의 씨는 그냥 왕의 자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유다 집의 다윗의 자손으로 그리스도를 보내시고자 하는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따라서 유다 집의 왕의 씨를 진멸한다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무너뜨리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아달랴의 악행이 우연찮게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방해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아달랴의 배후에는 사단이 있습니다. 사단이 아달랴를 내세워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파기될 수가 없습니다. 그 누구도 약속을 방해하고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는 것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친히 약속을 성취하시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면 “요람왕의 딸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의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도적하여 내고 저와 그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여 죽임을 당치 않게 한지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여호세바라는 여인을 통해서 요아스라는 아들 하나를 살려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이 곧 하나님의 관심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의 언약대로 약속의 씨를 통해서 세상에 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제가 지금 계속 하나님의 관심사라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이미 시작합니다. 따라서 세상이 창조된 것도, 인간이 창조되고 그 가운데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택하신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관심사에 의한 일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개 보면 하나님의 관심사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에게 내 관심사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요구합니다. 이로 인해서 인생에서 진심으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관심사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은, 우리 역시 하나님의 관심사에 관심을 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관심 두고 있는 모든 것들은 허망한 것에 불과하지만 하나님이 관심 두고 계시는 그 분, 즉 예수 그리스도께 관심을 두고 그 분을 믿는 것은 절대로 허망하게 끝나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때에는 왕의 씨를 진멸함으로써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는 것을 방해하고자 하는 것이 사단의 전력이었다면 지금은 무엇이 사단의 전력일까요? 지금은 이미 그리스도가 오셨고 십자가 사역을 성취하시고 하늘로 가셨기 때문에 더 이상 사단이 역사할 일은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이 택하신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시고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기 때문에 사단은 이제 그 일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자기에게 관심을 두고 살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관심을 둔다고 해도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가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나의 길을 순탄하게 가기 위해 예수를 찾도록 부추김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어있지 못하고 사단에게 미혹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이 죄에서 건짐 받아야 한다는 것조차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어렵고 힘든 문제에서만 건짐 받기를 원하면서 예수의 이름을 부를 뿐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활동입니다. 하나님은 왕의 씨가 진멸될 순간에 개입하시어 요아스라는 씨 하나를 건져내십니다. 그리고 결국 여호야다라는 제사장을 통해서 아달랴를 죽이시고 요시야를 왕으로 세우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에 의해서 왕의 씨가 지속이 되는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여호야다가 왕과 백성으로 여호와와 언약을 세워 여호와의 백성이 되게 하고 왕과 백성 사이에도 언약을 세우게 하매”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회복하시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백성과 언약을 세우시고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세우시고 언약을 이루시고자 하시고 사단은 하나님의 언약을 방해하기 위해 힘을 다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단의 싸움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사단의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신자는 이러한 세상의 내막을 알아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엄청난 영적인 일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단의 전쟁이 쉬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전쟁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단이 싸우든 말든 내 배부르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싸움인데 신경 쓸 필요가 뭔가? 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진심으로 여러분이 어떤 마음,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는가를 생각해야 봐야 할 것입니다.

 

 

 


아달랴는 자신이 왕의 씨를 모두 죽이고 왕이 되고자 하는 반역이 곧 하나님의 언약을 방해하는 것임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다윗에게 주어져 있고 다윗의 자손으로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언약에 대해 관심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언약을 방해하는 것임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왕위만 차지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심사에 마음을 두지 않는 인간의 삶의 모습입니다. 내 목적만 성취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혹여 아달랴처럼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내가 살아가고 행동하는 것들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은 아닌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다만 내 일이 성취되는 것에만 마음을 집중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요아스를 지키고 보호하신 것은 요아스라는 한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오심을 위한 조치인 것처럼 오늘날 신자를 지키고 보호하시는 것 역시 오신 주님을 높이고 증거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이러한 일에 관심이 없이 오직 나 한 개인의 삶에만 집중한 채 살아간다면 우리는 아달랴처럼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로 살아가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한 무지한 자로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뻐하는 성탄절을 앞두고 있는 우리로서는 오늘 본문의 아달랴에 대해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달랴의 반역이 곧 우리들이 모습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방해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다만 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는 아달랴처럼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오신 예수님을 높이고 자랑하고 예수님만을 증거하기를 기뻐하기보다는, 내 이름이 높임 받고 자랑되는 삶에 치우쳐 있는 자로서 주님의 오심을 기뻐한다고 하는 것은 모두 거짓임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오심은 사단의 모든 방해를 극복하고 이루어진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성탄절에 하나님의 승리를 엿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은 쉬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일은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를 높이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쉬지 않고 일하시는 것처럼 사단도 쉬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합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아닌 자신에게 관심을 두게 함으로써 주님의 영광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승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단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 마음을 두면서 그리스도만을 높이는 자로 살아가기를 소원하는 백성으로 기어코 만들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만을 신뢰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모든 것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자기 힘으로 살고자 하고 또 힘을 얻기 위해 사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훼방하는 사단의 일에 불과할 뿐입니다.

 

 

 

 

 

(30강) 열왕기하 12:1-8  성전과 산당

 

<본문>

예후의 칠년에 요아스가 위에 올라 예루살렘에서 사십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시비아라 브엘세바 사람이더라 요아스가 제사장 여호야다의 교훈을 받을 동안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되 오직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더라 요아스가 제사장들에게 이르되 무릇 여호와의 전에 거룩하게 하여 드리는 은 곧 사람의 통용하는 은이나 각 사람의 몸값으로 드리는 은이나 자원하여 여호와의 전에 드리는 모든 은을 제사장들이 각각 아는 자에게서 받아 들여서 전의 어느 곳이든지 퇴락한 것을 보거든 그것으로 수리하라 하였더니 요아스왕 이십 삼년에 이르도록 제사장들이 오히려 전의 퇴락한 데를 수리하지 아니하였는지라 요아스왕이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제사장들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전의 퇴락한 데를 수리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제부터는 너희 아는 사람에게서 은을 받지 말고 저희로 전 퇴락한 데를 위하여 드리게 하라 제사장들이 다시는 백성에게 은을 받지도 아니하고 전 퇴락한 것을 수리하지도 아니하기로 응락하니라 (열왕기하 12:1-8)

 

 

 


<설교>


신자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하나님과 충돌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라고 해도 하나님과의 충돌은 도무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자 역시 ‘자기 기쁨’이라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속을 들여다보시면 ‘자기 기쁨’으로 가득한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로지 내 기쁨을 위해 살아가는 자신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기쁨을 위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일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충돌의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는 신자가 자기 기쁨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만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할까요? 사람이 자신의 기쁨을 포기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워본다면 사실 명목상으로는 신자라고 하지만 문제투성이 일 수밖에 없으며, 도무지 신앙으로 살아간다고 말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실상을 아는 것은 신자에게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구제불능의 인간 실상을 알아야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에는 관심이 없이 다만 예수님이 오셔서 날 구원했다는 것만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에는 관심이 없이 자기 구원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곧 자기 기쁨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습성인 것입니다.

 

 

 

이러한 습성에 의해서 존재하게 된 것이 본문에 등장하는 산당인 것입니다. 2,3절을 보면 “요아스가 제사장 여호야다의 교훈을 받을 동안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되 오직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성전이 있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하며 분향하면 됩니다. 그런데 왜 이방신을 섬기는 산당에서 제사하고 분향을 한 것입니까? 그리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요아스가 산당은 제하지 않은 이유는 또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이 아닌 산당에서 제사하고 분향했다는 것은 한마디로 산당 중심으로 살았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성전 중심과 산당 중심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성전은 거룩한 희생 제물의 피가 그 중심에 있습니다. 성전의 기능이 곧 피에 있기 때문입니다. 희생 제물의 거룩한 피가 이스라엘의 죄를 씻기고 용서함으로써 이스라엘이 거룩한 나라로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전을 세우셔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거룩한 나라로 만드셔서 이스라엘에게 함께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성전 중심으로 살아간다면, 어떤 반응이 나타나야 할까요? 당연히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감사입니다. 성전을 볼 때마다 자신들의 죄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 죽어간 희생 제물의 피를 생각하면서 그 은혜가 마음 깊이 다가와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왜 산당에서 제사를 합니까? 그것은 자기 기쁨을 위해 신을 찾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에는 이스라엘이 원하는 기쁨이 없었습니다. 있다면 다만 제물의 피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피가 정작 이스라엘에게는 기쁨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성전은 인간을 향해서 ‘너희는 죽어야 할 죄인이다’라고 외칩니다. 죽어야 할 자가 거룩한 제물의 피로써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에서의 기쁨은 죽은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죽은 자임을 아는 신자만이 거룩한 제물이 흘린 피가 자신을 깨끗케 하고 생명의 나라에 있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거룩한 피가 곧 기쁨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아닙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죽은 자라는 것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을 위해 살아가고 있을 뿐이고. 살기 위해서 살고 있을 뿐이고, 세상에서 잘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십자가가 보일 리가 없습니다. 보인다면 인간을 복주고 성공하게 해주는 신일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인간을 위한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기쁨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구하는 사람들이고, 성전이 아닌 산당 중심으로 살아가는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모습인 것입니다.

 

 

 


신자가 십자가 앞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나는 죽어야 하는 존재라는 변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은혜는 자신이 죽어야 하는 존재임을 발견했을 때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나대신 저주 아래 죽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하는 것이고 죄가 되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기쁨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하고 분향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보면 교회를 찾으면서도 그 마음에는 성전이 아니라 산당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저는 여러분께 자기 기쁨을 위해 살지 말라는 말씀을 드리지 않습니다. 저 역시 내 기쁨을 포기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고 인간이 자기 기쁨을 포기할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다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아들을 저주 아래 있게 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신 하나님의 고통과 아픔 앞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내 기쁨을 바라보면서 인간의 죄가 얼마나 크고 깊은가를 절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전 중심은 하나님의 일이 내게 기쁨이 되는 것이고, 산당 중심은 나의 기쁨을 따로 두고 그 기쁨을 위해 신을 찾는 것입니다. 제물의 피로 나를 깨끗케 하신다는 하나님의 일보다는 내가 원하는 기쁨을 위해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는 십자가를 외치면서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증거 해야 하는 것이지 교회가 또 하나의 산당으로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교회가 산당이 돼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일이 왜 신자에게 기쁨이 되는지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기쁨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산당으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요아스가 제사장들을 불러서 성전을 수리 하도록 지시합니다. 이것을 두고 요아스의 성전 개혁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사실 산당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 성전 개혁이라는 것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요아스가 진심으로 이스라엘을 성전 중심의 신앙으로 인도하기 위해 성전을 수리한 것이라면, 무엇보다도 산당을 없애야 합니다. 자기 기쁨을 위해 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제물의 피로 인해서 이스라엘을 깨끗케 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일로 인해 감사하고 기뻐하는 백성이 되게 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산당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 성전을 수리하는 것은, 단지 성전을 겉을 깨끗하게 하는 수준에 불과할 뿐입니다. 요아스가 성전을 수리한 내용을 이용해서 예배당을 깨끗하게 수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아예 성경에 관심이 없는 무식한 자의 말에 불과할 뿐입니다.

 

 

 


요아스의 성전 수리는 신자가 아무리 행동을 고치고 변한다고 해도 그 마음이 고쳐지지 않는 이상 진정한 성전 수리라고 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신자가 도덕적으로 변화되고 그 행실이 착하게 변한다고 해도 여전히 자기 기쁨을 위해 살아간다면 산당은 사라지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의 행실의 변화를 바라보고 뿌듯해 하고 기뻐하는 것 역시 인간이 추구하는 자기 기쁨인 것입니다.

 

 

 


행실이 변화된 사람은 변화된 자신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변하다니’라고 하면서 변한 자신의 모습에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에 십자가의 피가 담겨 있습니까? 십자가의 피의 은혜가 사람을 도덕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입니까?
물론 십자가로 인해서 도덕적인 변화의 모습은 보일 수가 있지만, 그것은 십자가 앞에서 그 마음이 낮아짐으로써 나타나는 흔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부탁할 것은 자기 기쁨을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은 곧 산당을 찾아 제사하는 것임을 알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기쁨을 채워주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기뻐할 것을 요구하심을 알자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가 이것을 바로 세우지를 못하고 있어서 산당이 돼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그리고 간절히 구하기만 하면 인간이 원하는 기쁨을 채워주신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여러분 속에 자기 기쁨을 위해 살고자 하는 열망이 없습니까? 있을 것입니다. 눈만 뜨면 추구하는 것이 자기 기쁨이지 않습니까? 오직 자신을 위해 힘써 살아가지 않습니까?
이제 여러분께 필요한 것은 그처럼 자기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곧 악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처럼 내 기쁨만을 위해 살아가는 나를 하나님 백성 되게 하신 것이 십자가에 흘리신 거룩한 피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저주 아래 있게 하시고 나 같은 자를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의 일이 크신 사랑과 은혜로 내 마음에 채워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한 하늘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복을 아예 원하지 않습니다. 이미 자기에게 기쁨이 되는 다른 복을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하는 복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기쁨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산당을 찾아서 나에게 기쁜 일이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2007년 마지막 주일이고 다음주에는 2008년 새로운 해가 시작됩니다. 새로운 해를 맞이하면서 신자가 원할 것은 무엇입니까? 저는 은석교회가 2008년에도 예수님의 은혜만을 자랑하고 높이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든 신자들이 한 해에서 매일같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새록새록 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기쁨을 위해 교회를 찾는 것은 곧 산당 중심의 신앙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거룩한 피의 은혜에 마음을 두는 성전 중심의 신앙으로 새롭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은석교회의 모든 신자가 이러한 복을 누리면서 천국을 향해 달려가는 한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31강) 열왕기하 12:9-21  성전 수리

 

<본문>

제사장 여호야다가 한 궤를 취하여 그 뚜껑에 구멍을 뚫어 여호와의 전문 어귀 우편 곧 단 옆에 두매 무릇 여호와의 전에 가져 오는 은을 다 문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그 궤에 넣더라 이에 그 궤 가운데 은이 많은 것을 보면 왕의 서기와 대제사장이 올라와서 여호와의 전에 있는대로 그 은을 계수하여 봉하고 그 달아본 은을 일하는 자 곧 여호와의 전을 맡은 자의 손에 붙이면 저희는 또 여호와의 전을 수리하는 목수와 건축하는 자들에게 주고 또 미장이와 석수에게 주고 또 여호와의 전 퇴락한 데를 수리할 재목과 다듬은 돌을 사게 하며 그 전을 수리할 모든 물건을 위하여 쓰게 하였으되 여호와의 전에 드린 그 은으로 그 전의 은대접이나 불집게나 주발이나 나팔이나 아무 금그릇이나 은그릇을 만들지 아니하고 오직 그 은을 일하는 자에게 주어 그것으로 여호와의 전을 수리하게 하였으며 또 그 은을 받아 일군에게 주는 사람들과 회계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성실히 일을 하였음이라 속건제의 은과 속죄제의 은은 여호와의 전에 드리지 아니하고 제사장에게 돌렸더라 때에 아람 왕 하사엘이 올라와서 가드를 쳐서 취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오고자 한고로 유다 왕 요아스가 그 열조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여호람과 아하시야가 구별하여 드린 모든 성물과 자기가 구별하여 드린 성물과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에 있는 금을 다 취하여 아람 왕 하사엘에게 보내었더니 하사엘이 예루살렘에서 떠나갔더라 요아스의 남은 사적과 그 모든 행한 것은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요아스의 신복들이 일어나서 모반하여 실라로 내려가는 길 가의 밀로궁에서 저를 죽였고 저를 쳐서 죽인 신복은 시므앗의 아들 요사갈과 소멜의 아들 여호사바드이었더라 저는 다윗성에 그 열조와 함께 장사되고 그 아들 아마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열왕기하 12:9-21)

 

 

 


<설교>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고쳐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이런 물음 앞에서 대개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부분들입니다. 성격이나 어떤 버릇처럼 외적으로 드러나서 타인에게 좋지 않은 소리를 듣는 부분들을 고쳐야 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성격이나 버릇들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 있다면 고쳐야 할 필요성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과연 신자가 무엇을 고치기를 원하시느냐? 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신자가 좋지 않은 성격을 좋은 성격으로 고치고, 나쁜 버릇을 고치기를 원하실까요? 그러려면 먼저 좋은 성격과 좋지 않은 성격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사회적 통념이나 인간적 관계가 아니라 성경이어야 합니다. 즉 성경에서 무엇이 좋은 성격이고, 무엇이 좋지 않은 성격이며, 또한 무엇이 나쁜 버릇인가에 대한 말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좋고 나쁜 것을 구분하면서 좋은 쪽으로 고치려고 힘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잘못된 것이 무엇인가를 지적하고 책망합니다. 신자가 말씀을 듣는 이유도 자신의 잘못됨과 버리고 고쳐야 할 것 이 무엇인가를 깨닫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말씀을 듣고도 자신의 잘못됨을 볼 수 없다면 그는 소경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니라 다만 사람을 통해서 지루한 성경이야기를 들은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결국 생명과 상관없는 종교적인 시간을 때운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뜻과 기쁨에 일치한 길로 나아가기를 원하십니까? 진심으로 원하신다면 말씀을 들음으로써 자신의 잘못됨을 볼 수 있어야 하고 고쳐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통해서 드러나는 잘못됨이 성격이나 어떤 버릇 등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성격을 고치고 버릇을 고쳐야 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잘못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사람들은 그런 잘못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난 시간의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에게 있는 어떤 문제를 발견했습니까? 여러분이 고쳐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보셨습니까?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요아스가 산당을 없애지 않은 얘기는 오늘 우리들의 안고 있는 잘못됨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산당이 자신의 기쁨을 위해 신을 찾는 것처럼 지금도 자신의 기쁨을 위해 신을 찾는다면 비록 예배당에 나와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은 산당의 수준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고쳐야 할 것은 자기 기쁨을 위해 예배당을 찾고 신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명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마음에 드는 교회를 찾습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에 드는 교회의 기준이 복음이 아니라 자신의 기대와 성향에 맞는 분위기나 외적인 활동에 국한된 경우가 태반입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한 관심이 없고, 그 나라와 그의 의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에 단지 자신의 기분을 맞춰줄 수 있는 교회를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산당을 찾아 분향하고 제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산당을 찾아 분향하고 제사하는 사람들이 성전에 관심을 둘리가 없습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거룩한 제물의 희생의 피로 인한 죄 용서에 대해서는 관심이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죄 용서로 인한 기쁨보다는 다른 기쁨을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성전 제사는 마음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오늘날 우리 자신들의 문제임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은 요아스가 시작한 성전 수리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요아스의 성전 수리는 순탄하게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4,5절에서 말한 대로 요아스는 제사장들에게 백성들에게 은을 받아서 성전을 수리하라고 지시하였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성전의 퇴락한 곳을 수리하지 않은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왜 성전을 수리하지 않았을까요? 백성들이 은을 바치지 않은 것이 이유일까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본문에 보면 성전 수리를 시작했을 때 은은 넉넉히 채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유는 제사장들이 거둬들인 은을 자신들의 생계를 위해 사용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조차 성전수리보다는 자신의 생계문제에 더 관심을 둔 것입니다. 백성들이야 산당을 찾아서라도 분향을 하고 제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으로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지금의 교회의 현실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작금의 교회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을 신앙으로 간주해 버립니다. 예수를 부르고 교회 생활에 열심을 내면 신앙이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또한 그러한 신앙을 강조하고 부추깁니다.

 

 

 


무엇을 위해서,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지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오직 교회의 일에 열심이 있고 십일조 생활, 기도 생활 잘하면 신앙이 좋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인이 많을수록 교회는 발전할 것이고, 목사가 꿈꾸는 것은 교회의 발전이기 때문에 자연히 참된 성전의 퇴락은 눈에 보이지 않고, 성전을 수리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보는 현대 교회의 심각성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원하는 것은 이러한 문제점을 문제점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전의 퇴락에 눈을 돌리게 되고 성전 수리에 마음을 두게 되지 않겠습니까?

 

 

 


본문에 등장하는 성전 퇴락은 바알을 섬겼던 아달랴와 아달랴의 자식들이 성전을 파괴하고 거룩한 기물들을 바알에게 주었기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아달랴가 왕이 되었을 때 발생한 것이 아니라 아달랴의 남편인 여호람이 왕으로 있을 때부터 있었던 일입니다. 즉 약 30여 년 동안 성전이 방치되고 퇴락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수리하라는 요아스의 지시를 받고서도 성전을 수리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성전 제사에 관심이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거룩한 제물의 피가 자신을 깨끗케 함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감사하고 기뻐하는 신앙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전은 예배당이 아니라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한 몸의 관계에 있는 신자가 곧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이용해서 예배당 건축이나 수리의 명분으로 삼고자 한다면 그것은 성전 수리에 관심이 없이 자신의 생계만을 생각했던 제사장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본문의 성전 수리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전을 예수님과 한 몸의 관계로 부름 받은 여러분 자신으로 생각한다면 결국 성전 수리는 여러분 자신들의 수리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 스스로 자신의 문제점을 발견하면서 자신이 고침 받아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거나 관심두지 않는다면, 또한 고쳐야 한다는 생각은 하고 있으나 앞서 말한 대로 외적인 부분, 즉 성격이나 어떤 버릇 등으로만 생각한다면 성전 수리가 온전히 될 수 있겠습니까?

 

 

 


성전은 건물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습니다. 성전은 우리의 죄로 인해서 피 흘리고 죽으신 십자가 앞에서 감사하면서 오직 주님의 이름만 의지하며 살겠다고 다짐하는 그 마음입니다. 주님이 흘리신 피를 감사하면서 피 흘려 죽으신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정결하고 깨끗한 마음인 것이고, 하나님은 그 마음에 함께 하시기 때문에 성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전의 퇴락은 주님의 피를 바라보고 피로 인해서 감사하고 기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쁨을 가지고 주를 찾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전을 찾는 것이 아니라 산당을 찾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기쁨을 위해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자연히 주가 흘리신 피로 인한 감사와 기쁨은 퇴락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우리의 잘못을 끊임없이 지적하고 있으며 산당이 아니라 성전으로 나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당은 ‘오직 주님의 은혜’라는 믿음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신으로부터 복을 받고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그만큼 나의 정성과 열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산당이기 때문입니다. 산당에서는 십자가의 은혜를 말하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열심히 봉사하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복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산당의 사고방식으로 인해서 주의 피로 인한 감사와 기쁨은 퇴락하기 마련입니다.

 

 

 


여러분, 성전의 퇴락한 모습이 눈에 보입니까?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성전의 퇴락한 모습, 즉 여러분 자신의 퇴락한 마음이 보이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관심은 십자가로 향할 수가 없습니다. 여전히 자기 기쁨을 붙들고 자기에게 기쁨이 되는 길만을 가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산당을 찾아 분향하고 제사하면서도 그것을 신앙으로 착각하는 잘못된 길을 계속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산당을 찾으면서 ‘나는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고집부리지 말기 바랍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신앙 한다면 하나님이 행하신 구속 사역을 바라보는 것이 옳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멸망에서 건지시기 위해 독생자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신 그 사랑과 인자하심이 감사함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세상에 그 무엇보다도 나를 멸망에서 건지시고 생명의 나라에 들여보내시기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모든 일들이 감사함으로 살아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전 중심의 신앙이며 하나님을 진심으로 신앙하는 것입니다.

 

 

 


제가 답답하게 여기는 것은, 분명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찾고 세상에서의 복과 기쁨을 위해 예수님을 부르는 것은 예수님의 피에서 마음이 멀어져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완고함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인간을 위한 수호신으로 여기는 어리석음이 이런 완고함에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완고함이 자신의 퇴락한 상태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인해서 감사하고 기뻐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기쁨을 따로 마음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전의 퇴락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들의 상태이기도 합니다. 어떤 신자도 수리할 필요가 없는 완벽한 성전의 상태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욕망은 항상 나를 위한 하나님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이러한 우리 자신의 잘못됨을 발견하면서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만을 소망하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성전을 수리하는 것입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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