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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열왕기상 강해 1

공 상희 2009. 5. 6. 13:53

 

 

 

 

 

 

 

 

열왕기상 강해 1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1강) 열왕기상 1:1-10  내가 왕이 되리라

 

<본문>


다윗 왕이 나이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 그 신복들이 왕께 고하되 우리 주 왕을 위하여 젊은 처녀 하나를 구하여 저로 왕을 모셔 봉양하고 왕의 품에 누워 우리 주 왕으로 따뜻하시게 하리이다 하고 이스라엘 사방 경내에 아리따운 동녀를 구하다가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왕께 데려왔으니 이 동녀는 심히 아리따운 자라 저가 왕을 봉양하며 수종하였으나 왕이 더불어 동침하지 아니하였더라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전배 오십 인을 예비하니 저는 압살롬의 다음에 난 자요 체용이 심히 준수한 자라 그 부친이 네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하는 말로 한번도 저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저희가 좇아 도우나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선지자 나단과 시므이와 레이와 다윗에게 속한 용사들은 아도니야와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아도니야가 에느로겔 근방 소헬렛 돌 곁에서 양과 소와 살진 송아지를 잡고 왕자 곧 자기의 모든 동생과 왕의 신복 유다 모든 사람을 다 청하였으나 선지자 나단과 브나야와 용사들과 자기 동생 솔로몬은 청하지 아니하였더라 (열왕기상 1:1-10)

 

 

 


<설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는 은혜를 받은 모습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나 받지 못한 자나 삶의 모습이 동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에 의해서 문둥병이 고침 받은 열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 아홉 사람은 모두 자기 갈 길로 가버리지만 한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와 발 앞에 엎드립니다. 아홉은 자신의 몸이 깨끗해 진 것만으로 기뻐하는 사람들이었고 예수님께 돌아온 그는 자신의 몸을 깨끗케 하신 분의 은혜로 기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은혜를 받은 자와 받지 않은 자의 차이인 것입니다.

 

 

 


즉 은혜를 받은 자는 은혜를 베푸신 분을 바라보게 되지만 은혜를 받지 못한 자는 은혜를 입은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은혜를 베푼 분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 받은 것으로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은혜를 받았다면 은혜 베푸신 분을 바라보며 그 앞에 엎드려 살아가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은혜 받은 자신만을 바라봅니다. 그러기에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죄에서 깨끗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이루어진 놀라운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은총을 베푸신 주님에게로 날마다 나아가는 사람이며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께 받은 은혜를 증거 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삶은 은혜를 받지 못한 자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를 받은 자는 이미 충족된 은혜 안에서 감사하며 살아가게 되지만 은혜를 받지 못한 자는 항상 자신을 채우려고 힘쓰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열왕기상은 노쇠해진 다윗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다윗왕이 나이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제 다윗은 나이 많아 늙어짐으로써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않을 정도로, 즉 항상 몸이 차가울 정도로 기력이 다한 상태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노쇠하여 힘이 없어졌을 때, 압살롬의 때처럼 아도니야의 반역이 발생하게 됩니다.

 

 

 


아도니야는 다윗의 후궁인 학깃의 아들이며 압살롬의 다음에 난 자입니다. 이 아도니야가 스스로를 높여서 ‘내가 왕이 되리라’하고 병거와 기병과 전배 오십 인을 예비합니다. 전배란 ‘앞서 달리는 자’ 즉 호위병과 같은 군사를 뜻합니다. 이처럼 아도니야는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 세밀한 준비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을 솔로몬으로 정해 놓은 상태입니다. 다윗도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밧세바를 범한 다윗의 범죄와 함께 등장한 아들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을 하고 아들을 낳았을 때 하나님은 그 아들을 치심으로 죽게 합니다. 범죄한 자는 다윗인데 다윗이 아닌 아들을 죽게 한 것은 그 아들처럼 다윗이 죽어야 할 존재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죽이지 않으신 것은,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한 일이 많았기에 봐주는 것이 아니라 다윗에게 하신 약속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다윗의 범죄를 기회로 삼아 하나님의 약속의 실체가 무엇이며 또한 어떻게 성취되는가를 보여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은 긍휼과 자비입니다. 이 약속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오심으로 성취되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왕으로 택하신 것도 솔로몬이 정치력이 있거나 지도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왕다움은 정치력이나 지도력에 있지 않습니다. 왕이 정치를 잘하고 이스라엘을 잘 지도하여 이스라엘이 유지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유지되는 것은 왕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책임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왕의 역할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택하신 것도 다윗의 범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솔로몬을 세워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증거하고자 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윗도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에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아들 중에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 반역을 하는 것입니다.

 

 

 


6절을 보면 아도니야는 압살롬의 다음에 난 자고, 아주 준수한 인물의 사람이었으며, 다윗으로부터 한번도 꾸중을 들은 일이 없을 정도로 다윗의 마음에 들게 행동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아도니야였기에 그는 아마 자신을 왕이 될 만한 사람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압살롬처럼 왕이 어떤 역할의 사람인가에 대해서 알지 못했습니다. 단지 한 나라를 다스리는 권력의 자리로만 바라본 것입니다. 때문에 솔로몬에게 왕이라는 권력을 빼앗기기 싫어서 반역을 한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자기중심으로만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기쁨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무관심 한 채 자신의 이득을 따라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자신의 이득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런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7-8절을 보면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저희가 좇아 도우나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선지자 나단과 시므이와 레이와 다윗에게 속한 용사들은 아도니야와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아도니야가 요압과 아비아달과 모의를 하자 그들이 아도니야를 돕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8절을 보면 아도니야와 같이 하지 않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아도이냐의 계략에 동조하지 않고 하나님이 세우신 뜻대로 순종하고자 한 사람들입니다.

 

 

 


아도니야는 이미 병거와 기병을 예비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군대장관인 요압마저 아도니야에게 동조를 한 입장에서 이미 대세는 아도니야에게 기울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 형편에서 유리한 것은 아도니야에게 동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도니야에게 동조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유리함을 바라보며 행동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들이 여호와께 속한 신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자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신자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여호와께 속한 자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유,불리를 따져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기쁨인가를 살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그 길이 불리하게 되는 길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뜻을 여호와께 두어야 합니다. 여호와께 속한 자라면 그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자신의 뜻이 살아있으면서 여호와의 뜻에 순종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여호와께 두었을 때 비로소 순종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도니야는 자신이 왕이 될 만한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럼 다윗은 어떨까요? 다윗도 하나님이 세운 왕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했을 때는 왕의 권력에 취해서 범죄합니다. 그러한 다윗이 자신의 죄를 깨닫자 하나님이 자신을 왕으로 세운 것은 죽어야 할 자를 죽이지 않으시고 살리시는 긍휼과 자비를 증거하기 위함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왕의 역할인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도니야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바라보면서 ‘내가 왕이 되리라’는 교만이 돌출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목사가 될 만한 사람이 없고, 장로가 될 만한 사람이 없고 집사가 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3장에서 말하고 있는 장로의 자격과 집사의 자격에 대해 읽어보시면 왜 제가 목사, 장로, 집사 될 만한 사람이 없다고 하는지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제가 목사로 있고 여러분이 장로 집사로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될 만한 사람을 세우신 것이 아니라 될 수 없는 사람을 세우셔서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긍휼과 자비를 증거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역할을 잘 아는 신자라면 ‘나같은 자가’라는 고백과 함께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긍휼과 자비가 증거 되는 것에 있음을 알기에 모든 일의 뜻을 여기에 두고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모였을 때에도, 한결같이 은석교회가 잘되고 유리하게 되는 것을 꿈꾸며 소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긍휼과 자비하심만을 마음껏 증거하고 나타내는 교회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우리로 하여금 교회에 집착하게 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집착하게 하지도 않고 나에게 집착하게 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하나님의 것을 세상에 증거하는 자로 살게 하실 뿐입니다.

 

 

 


내가 왕이 되리라’는 아도니야의 욕망에서 우리 역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신자라면 그러한 욕망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자신의 욕망에서 자신의 악함을 보는 것입니다. 즉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욕망에서 왕이 될 자격이 없는 자신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을 바라보기를 게을리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바라보지 않으면 자기 착각이라는 함정에 빠져서 긍휼과 자비로 살아가고 있는 현실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때문에 감사와 족함 대신에 불평과 원망과 부족함만 있는 삶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만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그리스도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바라보며 자신의 유리함을 따라 힘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나라만을 소망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이러한 삶을 날마다 배우셔야 합니다. 세상이 전부가 아니며 그리스도가 여러분의 전부라는 것을 힘써 배우며 살아가셔야 합니다. 세상이 힘이 아니며 그리스도가 힘이라는 것을 배우셔야 합니다. 세상이 소망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소망이라는 것을 배우셔야 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이 언제나 그리스도께 끌림을 받는 신자로서 왜 예수님이 기쁨이고 즐거움이라고 말하는지를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예수를 말하되 예수께 속한 자로 살아가는 자가 아닙니다.

 

 

 

 

 

(2강) 열왕기상 1:22-31  선지자 나단
 
<본문>


밧세바가 왕과 말씀할 때에 선지자 나단이 들어온지라 혹이 왕께 고하여 가로되 선지자 나단이 여기 있나이다 하니 저가 왕 앞에 들어와서 얼굴을 땅에 대어 왕께 절하고 가로되 내 주 왕께서 이르시기를 아도니야가 나를 이어 왕이 되어 내 위에 앉으리라 하셨나이까 저가 오늘 내려가서 수소와 살진 송아지와 양을 많이 잡고 왕의 모든 아들과 군대 장관들과 제사장 아비아달을 청하였는데 저희가 아도니야 앞에서 먹고 마시며 아도니야 왕 만세를 불렀나이다 그러나 왕의 종 나와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왕의 종 솔로몬은 청치 아니하였사오니 이것이 내 주 왕의 하신 일이니이까 그런데 왕께서 내 주 왕을 이어 그 위에 앉을 자를 종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나이다 다윗 왕이 명하여 가로되 밧세바를 내 앞으로 부르라 하매 저가 왕의 앞으로 들어와 그 앞에 서는지라 왕이 가로되 내 생명을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내가 이전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네게 맹세하여 이르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정녕 나를 이어 왕이 되고 나를 대신하여 내 위에 앉으리라 하였으니 내가 오늘날 그대로 행하리라 밧세바가 얼굴을 땅에 대어 절하며 내 주 다윗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니라(열왕기상 1:22-31)

 

 

 


<설교>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던 아도니야의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왕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왕의 자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누군가를 왕으로 세우신다면 그것은 그에게 왕의 역할을 맡기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인 것이지 단지 누군가를 왕이라는 자리에 앉히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도니야의 이러한 문제점이 문제점으로 보인다면 그는 자신 역시 아도니야와 같은 문제 있는 인간임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스스로 되고자 하는 욕망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욕망의 틀에 붙들려 살아가기 때문에 남들처럼 되지 못한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실망을 하는 것입니다. 옆 교회가 사람들이 늘어 가면 ‘저 교회는 저렇게 부흥되는데 왜 내 교회는 부흥되지 못하지’라는 생각에 파묻히면서 자신의 능력을 한탄하게 되고 ‘나는 왜 그런가? 기도를 안해서 그런가? 설교에 문제가 있는가? 기도원에 한번 다녀올까?’라는 온갖 잡생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강단에 서면서 ‘하나님이 지금 나를 이곳에 세우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교인들이 몇 명이나 나왔는가?’를 먼저 헤아리는 것들이 바로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목사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만 생각하고 살아가면 참으로 쉬운데 대부분은 ‘뛰어난 목사’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세우신 목사의 역할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목사가 되느냐?’라며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그러한 목사에게서 복음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일 것입니다.

 

 

 


목사의 예를 들었지만 여러분 모두가 다를 바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삶이 각기 다른 이유는, 하나님이 여러분께 맡기신 각기 다른 위치, 다른 인생을 살아가시면서 해야 할 역할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삶, 다양한 형편, 다양한 직업들을 통해서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세상에 증거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여러분께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스스로 되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으로 인해 짓밟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어떻게 성취되든 상관없이 다만 나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에 파묻혀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던 아도니야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인생은 되어진 일의 결과를 가지고 ‘잘됐다, 못됐다’라는 판단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이 잘된 일로 보든 잘못된 일로 보든 상관없이 지금 주어진 환경과 형편에서 그 위치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은혜에 감사하는 자로 살아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자라면 관심두어야 하는 것은,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자로 살아가느냐?’의 문제인 것이지 ‘내가 어떤 사람 되느냐?’는 아닌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되던, 그가 설사 왕이 되었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산 자는 결국 멸망의 자식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아도니야는 우리에게 이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도니야를 중심으로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뉘게 되는데, 한쪽은 힘을 따라 움직이는 자들이고 다른 한쪽은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움직이는 자들입니다. 힘을 따라 움직이는 자들은 왕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약속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단지 누가 더 힘이 있느냐를 생각하기에 그들은 아도니야의 편을 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힘이 아니라 약속을 바라보는 자들은 아도니야의 편을 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은 아도니야를 향한 것이 아니라 솔로몬을 향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지자 나단이 밧세바로 하여금 다윗에게 나아가 아도니야의 부당함에 대해 호소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단 역시 다윗에게 나아가 “가로되 내 주 왕께서 이르시기를 아도니야가 나를 이어 왕이 되어 내 위에 앉으리라 하셨나이까 저가 오늘 내려가서 수소와 살찐 송아지와 양을 많이 잡고 왕의 모든 아들과 군대 장관들과 제사장 아비아달을 청하였는데 저희가 아도니야 앞에서 먹고 마시며 아도니야왕 만세를 불렀나이다”(24,25절)고 말합니다.

 

 

 


선지자 나단이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 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도니야가 왕이 될 만한 자질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단은 왕의 자질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누구에게 주어져 있느냐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져 있는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진 자를 좇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솔로몬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나단이 이것을 알았기에 다윗을 찾아와 하나님의 약속을 훼방하는 아도니야의 부당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나단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사람과 약속이 없는 사람으로 구분하여 바라본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이 없는 자는 그가 아무리 힘이 있고, 또 그를 따름으로서 돌아올 유익이 아무리 많다고 할지라도 그의 결과는 멸망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대세가 아도니야로 기울어져 자칫 잘못하면 해를 입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약속 있는 자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나단이 밧세바에게 “이제 나로 당신의 생명과 당신의 아들 솔로몬의 생명 구원할 계교 베풀기를 허락하소서”라는 말을 합니다. 즉 아도니야가 왕이 되면 밧세바와 솔로몬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아도니야가 사람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면서도 나단과 브나야와 용사들과 자기 동생 솔로몬은 청하지 않는 것에서 드러난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단에게 유리한 것은 속히 아도니야 편에 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심지어 군대장관인 요압마저 아도니야 편을 드는 상황에서 솔로몬의 편에 선다는 것은 아주 불리한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 편에 서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솔로몬에게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힘이 자신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약속이 살린다는 것을 믿었기에 약속이 있는 자를 바라보며 그에게 속한 자로 남기를 원한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도 아니고 힘도 아니라 오직 약속을 바라본 것이 아도니야와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나단을 어리석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 눈에는 누가 어리석은 자로 보입니까? 아도니야 편을 들고 그를 따른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대세가 아도니야에게 기울었는지를 알면서도 아무런 힘도 없던 솔로몬 편에 선 나단과 브나야와 용사들입니까? 만약 약속이 있는 솔로몬이 아니라 아도니야 편에 선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여겨진다면, 그러한 답을 가지고 있는 나는 과연 어느 편에 서서 살아가는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약속으로 오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답은 분명해집니다. 예수님에게 속한 자로 사는 것만이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현실은 그렇게 보이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에게 속한 자로 산다는 것이 좋아보이지가 않습니다. 뚜렷한 희망도 없어 보입니다. 그냥 막연하게만 보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를 말하되 나단처럼 약속을 바라보며 약속이 있는 사람에게 속하려고 하기보다는 대세를 따라서 내게 유리한 길을 추구하며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나단이 눈에 보이는 현실을 따라 움직였다면 솔로몬 편에 서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다윗도 노쇠하여 아무런 기력이 없는 상황에서 실세라고 할 수 있는 요압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아도니야의 편을 드는 현실을 바라보았다면 솔로몬 편에 선다는 것은 희망이 없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하나님은 약속의 성취를 위해 일하심을 믿는다면 눈에 보이는 현실은 참된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은 약속이 성취되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나단이 알았기에 아도니야가 아닌 약속의 사람 솔로몬 편에 선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도 세상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흘러가고 있습니다. 약속의 성취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세상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현실이 전부가 아니란 것입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현실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무런 힘도 되지 못하고 다만 막연하게 죽어서 천국이나 갔으면 하는 기대만 가지고 살아가는 나약한 것처럼 보일 수가 있지만 실상은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에 의해 약속을 따라 왕성하게 흘러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세상에서의 힘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약속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을 두고 새언약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로 인해 멸망의 자식인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새언약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약속과 연결되어 세상에 오신 것이지 우리의 욕망과 연결되어 오신 분이 결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안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에서 예수를 바라보기에 예수를 나의 욕망을 채워주는 수단으로만 인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예수가 성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도 자신의 유익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합니다. 약속을 바라보지 않기에 자신에게 힘을 주는 예수에게 마음이 기울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잘되는 현실만을 추구하며 살아가기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약속을 바라보는 신자는 자신이 잘되는 현실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현실을 소망하게 됩니다. 때문에 현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전부로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비록 지금은 약속 없이도 잘 사는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약속 없는 자의 마지막이 어떻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의 삶을 부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자란 이런 사람입니다.

 

 

 


29-30절을 보면 “왕이 가로되 내 생명을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내가 이전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네게 맹세하여 이르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정녕 나를 이어 왕이 되고 나를 대신하여 내 위에 앉으리라 하였으니 내가 오늘날 그대로 행하리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내 생명을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한다’는 것은 지금 자신이 살아있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구원하신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즉 그동안 다윗에게 있었던 환난과 죽음의 위기라는 현실도 다윗을 어찌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약속이 주어진 다윗을 붙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에 의해서 살아온 다윗이기에 왕의 문제도 하나님의 약속대로 행할 것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보이는 현실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운 현실에서는 쉽게 근심하고 낙심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린 지금껏 눈에 보이는 현실에 붙들려 살아온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어려운 상황이 나를 어렵게 하고 힘들게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 의해 지금의 여러분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약속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소망하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전부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마시고 여러분 눈에 비춰진 현실에 의해 요동하지도 마시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세상이라는 현실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상을 참된 현실로 바라보며 오직 그 세상만을 소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여전히 세상이기에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소서’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선지자 나단이 솔로몬의 편에 선 것이 지혜로 여겨진다면 여러분 또한 그러한 지혜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예수 편에 서서 사는 것이 참 지혜입니다.

 

 

 

 

 

(3강) 열왕기상 1:32-39  왜 꼭 솔로몬인가?

 

<본문>


다윗 왕이 가로되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내 앞으로 부르라 하니 저희가 왕 앞에 이른지라 왕이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의 신복들을 데리고 내 아들 솔로몬을 나의 노새에 태우고 기혼으로 인도하여 내려가고 거기서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은 저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고 너희는 양각을 불며 솔로몬 왕 만세를 부르고 저를 따라 올라오라 저가 와서 내 위에 앉아 나를 대신하여 왕이 되리라 내가 저를 세워 이스라엘과 유다의 주권자가 되게 하기로 작정하였느니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왕께 대답하여 가로되 아멘 내 주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원하오며 또 여호와께서 내 주 왕과 함께 계심같이 솔로몬과 함께 계셔서 그 위를 내 주 다윗 왕의 위보다 더 크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이 내려가서 솔로몬을 다윗 왕의 노새에 태우고 인도하여 기혼으로 가서 제사장 사독이 성막 가운데서 기름 뿔을 가져다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으니 이에 양각을 불고 모든 백성이 솔로몬 왕 만세를 부르니라(열왕기상 1:32-39)

 

 

 


<설교>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는 그 무엇으로도 연결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단절’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말씀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이 점을 철저히 외면한 채 하나님을 찾습니다. 즉 단절된 관계가 아닌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단절되어 있지 않기에 인간 쪽에서 지극정성만 보여주면 하나님은 인간을 돕고 기도한 것을 들어준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인간에게 허용되었던 생명나무를 하나님께서 감춰 버리심으로서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에 이를 수 없도록 조치하신 것부터 이미 하나님과 인간은 단절된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성경에 있는 그런 모든 사건들을 무시해 버린 채,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만 내세우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얼마든지 하나님께 나가서 원하는 것, 필요한 것, 어려운 것, 모두 내어 놓고 정성으로 간구하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간구를 절대 외면하지 않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이 원하는 하나님은 바로 그런 분입니다. 비록 인간이 죄를 범했다고는 하지만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기를 원하고, 인간의 어려움과 고통을 돌아보시는 하나님이기를 원하고, 인간의 간구에 귀를 기울시시고 응답해주시고, 인간이 잘한 것만큼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대에 맞는 하나님에 대해서 듣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마치 그것이 진리이며 참된 하나님인 것처럼 듣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말씀하고 있고, 또 하나님이 우리에게 스스로를 어떻게 계시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말씀도 자신이 기대하는 하나님의 속성에 꿰맞추어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는 것을 다윗에게 고하는 선지자 나단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윗은 나단의 얘기를 듣고 “왕이 가로되 내 생명을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내가 이전에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가리켜 네게 맹세하여 이르기를 네 아들 솔로몬이 정녕 나를 이어 왕이 되고 나를 대신하여 내 위에 앉으리라 하였으니 내가 오늘날 그대로 행하리라”(29,30절)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이 나를 이어 왕이 될 것임을 맹세하셨으니 내가 그대로 행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이 맹세하신 대로 솔로몬을 왕의 자리에 앉게 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솔로몬이 왕으로 세워지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봐야 합니다. ‘왜 아도니야는 안되고 꼭 솔로몬이어야 하는가?’입니다. 사실 지금 여러분께는 ‘솔로몬이 왕이 되던, 아도니야가 왕이 되던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 아니냐?라는 생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솔로몬이든 아도니야든 이스라엘의 왕이고, 또 먼 옛날 얘기이니 지금의 내게 별 중요하지 않은 얘기라고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맹세하시면서 까지 솔로몬만을 고집하시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 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과 인간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이 다윗의 범죄에 대한 내용인데,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을 하고 아들을 하나 낳은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다윗의 아이가 정녕 죽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삼하 12:14)

 

 

 


결국 아이는 하나님에 의해서 죽어가게 되고, 다윗은 아이를 위해 금식을 하면서 눈물로 간구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눈물의 기도를 외면하시고 아이를 죽이십니다. 다윗의 죄로 인해 아이가 죽은 것이지요.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다윗의 눈물의 간절한 기도가 아이를 살리게 하는데 있어서 무용지물이었다는 것입니다. 눈물의 간구가 아니라 그 무엇을 한다고 해도 아이를 살릴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 다윗의 죄를 용서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왕 다윗의 죄를 용서하시려면 다윗의 기도를 들으셔서 아들도 살려주시면 안됩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더 크게 보여주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인 것입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무조건 인간에게 득이 되는 쪽으로 하나님을 구축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를 위해서 자기 마음에 드는 신을 하나 만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을 두고 우상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용서하고자 하시면서도 아이를 죽이시는 것은 죄 용서에 관한 한 하나님은 하나님이 세우신 원칙대로 행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용서하시면서도 죄의 대가를 다윗의 아들에게서 찾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은 다윗의 죄 용서의 증거물로 태어난 것입니다. 솔로몬이 태어날 때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는 말씀을 합니다. 여디디야, 즉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자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솔로몬이야 말로 다윗에게는 죄 용서의 증거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하나님께서 아이를 죽지 않게 하시고, 그 아이로 하여금 다윗의 후계자가 되게 하셨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죄 용서의 원칙이 모두 무너져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아이의 살아남에는 결국 다윗의 간절한 눈물의 기도가 들어가게 되고, 따라서 언약은 하나님의 긍휼이 아니라 다윗의 간절한 기도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만 하면 된다’는 말이 진리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현대 교회가 교인들에게 ‘기도만 하면 된다’라는 말을 하거나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기 백성의 눈물의 간구를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말을 하는 것은, 솔로몬이 아니라 다윗의 범죄로 인해 죽은 아이를 살려내서 다윗의 후계자로 세우는 것과 같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에는 인간의 어떤 공로도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두고 앞에서 말한 대로 ‘단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무엇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는 단절된 관계인 것입니다. 이 관계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가 누구인가도 알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구원 받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세상에 증거하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하나님의 약속으로 오신 주님이 하신 일에 대한 증인이라는 역할로 존재하고 있음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두지 않기에 자신을 위한 하나님으로만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속에 두게 되는 것입니다.

 

 

 


왜 아도니야는 안되고 솔로몬이어야만 하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의 선택으로만 일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솔로몬은 다윗의 육적인 혈통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다윗과는 다른 계통이라는 것입니다. 실제 다윗의 혈통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혈통이지만 다윗의 계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윗의 혈통이 아닌 것과 같은 것입니다.

 

 

 


솔로몬은 다윗의 죄가 담긴 혈통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이 담긴 자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육적인 혈통이 아니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죄의 혈육과 무관한 솔로몬을 등장시켜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는 것을 통해서 인간의 공로를 용납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원칙입니다. 인간의 공로는 절대로 개입될 수 없으며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약속을 세상에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의 선택으로만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택 앞에서 신자는 얼마든지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긍휼은 인간의 공로를 요구하지 않기에 나의 공로를 쌓기 위해서 노력하고 애써야 할 것이 없기에 자유롭고 가벼운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35절의 “저를 따라 올라오라 저가 와서 내 위에 앉아 나를 대신하여 왕이 되리라 내가 저를 세워 이스라엘과 유다의 주권자가 되게 하기로 작정하였느니라”는 내용을 보면 단순히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왕을 세우는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까지 말한 대로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는 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긍휼 위에 굳게 서는 하나님의 나라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방나라와는 본질적으로 다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38-39절을 보면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이 내려가서 솔로몬을 다윗왕의 노새에 태우고 인도하여 기혼으로 가서 제사장 사독이 성막 가운데서 기름 뿔을 가져다가 솔로몬에게 기름을 부으니 이에 양각을 불고 모든 백성이 솔로몬 왕 만세를 부르니라”고 말합니다. 모든 백성이 솔로몬 왕 만세를 부르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아도니야를 버리시고 솔로몬을 택하신 그 뜻을 알지를 못합니다. 때문에 다윗의 후계자로서의 솔로몬을 생각할 뿐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솔로몬 왕을 바라보는 시각은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도니야가 아닌 솔로몬을 왕으로 택하여 세우시는 일에서 하나님의 약속에 담긴 긍휼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본질은 ‘사망’입니다. 죄로 인해 영원한 사망에 처해진 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늘 의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본질을 아는 자로서 십자가를 바라볼 때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보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세상에서 영생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시겠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실현하시는 분으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주 먼 옛날 아도니야를 인정하지 않으시고 솔로몬을 다윗의 후계자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일에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솔로몬 왕 만세를 외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왕으로 세워지는 것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볼 수가 있는 것이고, 그 구원 계획이야 말로 우리를 영원한 나라에 있게 하는 약속이기에 솔로몬 왕 만세를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긍휼만을 바라보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디 그렇게 살아갑니까?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는 것은 반짝 스쳐 지나갈 뿐 항상 나를 과시할 수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긍휼은 바로 그런 우리라 할지라도 택한 자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를 회개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에게 선지자가 등장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에서 벗어나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바른 길을 가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책망하고 회개하게 하기 위해 선지자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일은 지금은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에게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일 앞에서 우리의 공로라는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으로 오신 주님이 하신 일만 높이고 감사하는 것이 신자입니다.

 

 

 

 

 

(4강) 열왕기상 1:40-49  다윗의 찬송

 

<본문>

모든 백성이 왕을 따라 올라와서 피리를 불며 크게 즐거워하므로 땅이 저희 소리로 인하여 갈라질 듯하니 아도니야와 저와 함께한 손들이 먹기를 마칠 때에 다 들은지라 요압이 양각 소리를 듣고 가로되 성중에서 소리가 어찌하여 요란하뇨 말할 때에 제사장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이 오는지라 아도니야가 가로되 들어오라 너는 용사라 아름다운 소식을 가져오는도다 요나단이 아도니야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과연 우리 주 다윗 왕이 솔로몬으로 왕을 삼으셨나이다 왕께서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을 솔로몬과 함께 보내셨는데 저희 무리가 왕의 노새에 솔로몬을 태워다가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이 기혼에서 기름을 부어 왕을 삼고 무리가 그 곳에서 올라오며 즐거워하므로 성중이 진동하였나니 당신들에게 들린 소리가 이것이라 솔로몬이 나라 위에 앉았고 또 왕의 신복들이 와서 우리 주 다윗 왕에게 축복하여 이르기를 왕의 하나님이 솔로몬의 이름을 왕의 이름보다 아름답게 하시고 그 위를 왕의 위보다 크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매 왕이 침상에서 몸을 굽히고 이르시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내 위에 앉을 자를 주사 나로 목도하게 하셨도다 하셨나이다 하니 아도니야와 함께한 손들이 다 놀라 일어나 각기 갈 길로 간지라(열왕기상 1:40-49)

 

 

 


<설교>


지난 시간에 하나님은 왜 꼭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시는가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왕위에 세워서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 왕국은 하나님의 긍휼로 지탱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솔로몬이어야 하나님의 긍휼이 나타나는 것입니까? 솔로몬은 범죄한 다윗을 용서하신 사랑의 증표로 하나님이 주신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만약 솔로몬이 아니라 다른 자가 왕위에 앉게 된다면 그것은 다윗 왕국은 하나님의 죄용서와 관계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되기에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도니야가 아닌 솔로몬을 왕으로 세운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발전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나라인 이스라엘을 소망한 것입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솔로몬이 왕이 된 것은 단순한 정권교체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계속되는 죄 용서 아래 있음을 선포하는 것임을 알 수 있고, 이것이 다윗에게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48절을 보면 다윗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내 위에 앉을 자를 주사 나로 목도하게 하셨도다 하셨나이다”라고 찬송을 합니다. 여러분은 찬송을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대개 찬송을 단순히 신을 대상으로 노래 부르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게 되면 기독교의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다른 종교와의 구분점이 사라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종교에서도 나름대로 자기들의 신을 찬송하는 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도 단지 신의 이름을 부르며 자신의 소원을 아뢰는 것으로 생각하기에 다른 종교에서 행하는 기도와 구분점이 없지 않습니까?

 

 

 


결국 찬송이라는 것도 찬송의 대상인 신이 다를 뿐 노래라는 본질적인 면에서는 동일하기에 기독교의 찬송과 다른 종교의 찬송이 다르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찬송가와 가요가 다르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과연 찬송가와 가요가 무엇이 다를까요? 찬송가를 부르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가요를 부르면 하나님께 영광이 안된다고 생각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찬송가에는 하나님, 예수님, 여호와라는 신의 이름이 들어가고,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지만 가요는 단지 인간의 희로애락을 노래하는 것이기에 다르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가요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지 가사가 기독교적이라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사에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가고 예수님의 이름이 들어가고 십자가의 은혜가 언급된다고 해도 복음을 알지 못한 채 기독교적 단어들을 언급하는 것이 전부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사에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가고 예수님의 은혜를 노래한다고 해서 거룩한 것으로 여기고 그렇지 않다고 해서 속된 것으로 여기는 이원론적 사고방식이야 말로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현대 교회가 찬송에 대한 이런 고민과 생각이 없이 무조건 열정적인 찬송, 뜨거운 분위기를 강조하고 조장하려고 하는 것은, 성령의 감동에 의해 하나님을 높이고 찬송하는 것을 훼손하는 것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찬송입니까? 이것은 제 마음대로 답을 내릴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서 그 해답을 찾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다윗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다윗의 찬송은 거짓이 아니고 인위적인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를 아는 자로서 여호와를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찬송이 어떤 것인가를 바르게 해석함으로써 찬송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고, 우리 역시 바른 찬송에 머물러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여호와를 찬송하는 이유는 다윗의 왕위에 앉을 자를 주셔서 다윗으로 하여금 목도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과연 하나님을 찬송할 만한 일이 될까요? 찬송은 곧 기쁨과 즐거움을 뜻합니다. 기쁨과 즐거움이 없는 찬송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왕위에 앉을 자로 솔로몬을 주셨고, 지금 솔로몬이 왕위에 앉은 것을 목도한 것이 다윗에게는 기쁨이고 즐거움이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쁨이며 즐거움이기에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솔로몬이 왕위에 앉은 것이 그토록 큰 기쁨이고 즐거움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송하게 한 기쁨과 즐거움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헤아려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기쁨과 즐거움을 알았을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받으시는 신자의 찬송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지금 노쇠하여 생존의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입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도달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인생의 마지막에 도달한 시점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즐거움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돈이 아무리 인간에게 기쁨과 힘을 준다고 해도 인생의 마지막에 도달한 시점에 돈이 과연 여호와를 찬송할만한 기쁨의 조건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생의 마지막에 도달해 있는 다윗으로 하여금 솔로몬이 왕위에 앉은 것을 목도하게 함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게 했다면, 솔로몬이 왕위에 앉은 것에 우리가 깨닫지 못한 다윗의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46-47절을 보면 “솔로몬이 나라 위에 앉았고 또 왕의 신복들이 와서 우리 주 다윗왕에게 축복하여 이르기를 왕의 하나님이 솔로몬의 이름을 왕의 이름보다 아름답게 하시고 그 위를 왕의 위보다 크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이 구절에서도 한가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왕의 신복들이 다윗을 축복을 하는데 그 내용이 ‘왕의 하나님이 솔로몬의 이름을 왕의 이름보다 아름답게 하시고 그 위를 왕의 위보다 크게 하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신복들이 다윗 왕을 축복한다면, 다윗을 높이는 말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이름을 다윗의 이름보다 더 아름답게 하시고, 솔로몬의 위를 다윗의 위보다 크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구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다윗을 축복하는 것입니까?

 

 

 


신복들의 축복의 내용은 어찌 보면 노쇠한 다윗보다는 솔로몬에게 더 잘 보이려는 말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신복들이 축복하는 말을 듣고 하나님을 찬송을 한 것입니다. 결국 신복과 다윗 모두는 솔로몬이 욍 위에 앉은 것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권력을 쟁취하는 차원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한 것은 권력을 차지하고자 한 권력 다툼이었을 뿐이지만 솔로몬은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럼 솔로몬이 왕위에 앉은 것이 왜 축복이 되며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일이 되는 것일까요?

 

 

 


다윗의 왕위는 장차 메시야에게로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왕위를 이을 자로 택하신 것은 장차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진정한 왕으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실 메시야가 무엇을 위해 오시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즉 자기 백성을 세상에서 강한 자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인도하심으로 죄용서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것이 솔로몬이 왕위에 앉은 의미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솔로몬이 왕위에 앉은 것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았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언약을 성취하실 것임을 내다봄으로써 하나님을 찬송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2:30-31절의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라는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내용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시는 왕위에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내다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치 않는 부활의 소망을 바라본 것입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 부활의 언약을 하나님이 택한 자를 다윗의 위에 앉게 하시는 것에서 바라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메시야, 즉 그리스도를 다윗 왕국의 진정한 왕으로 세우시고 그로 말미암아 음부에 버린 자가 되지 않을 것이고 육신이 썩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언약을 솔로몬이 왕위에 앉은 것에서 바라보았기에 언약을 이루실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 것입니다.

 

 

 


즉 다윗은 단순히 솔로몬이 왕위에 앉은 것으로 축하하고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솔로몬에게서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바라본 것이고, 인생의 마지막에 도달한 시점에 죄인된 자신이 음부에 버린바가 되지 않고 육신이 썩지 않는다는 언약을 바라볼 때 언약을 성취하실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신복들이 다윗을 축복할 때도 솔로몬의 이름을 다윗을 이름보다 아름답게 하시고, 솔로몬의 위를 다윗의 위보다 크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한 것 역시, 단순히 솔로몬이라는 이름을 다윗보다 아름답고 크게 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왕위가 메시아로 이어질 것을 바라보고 한 축복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31-33절을 보면 마리아에게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고 예언하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윗의 위는 단순히 권력을 의미하는 왕위가 아니라 영원한 왕이 세상에 오실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신의 위가 솔로몬에게로 계승되는 것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며 찬송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다윗의 찬송에는 하나님의 구속의 언약이 담겨 있습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의 구속에 참여된 자로서 구속을 이루실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찬송이란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참여된 성도들이 구속의 일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노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찬송은 신자가 자신의 임의대로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참여 된다는 것이 우리가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령에 의해 하나님의 구속을 알게 되고 그리스도를 소망하게 됨으로써 가능한 것이 찬송인 것입니다.

 

 

 


따라서 찬송에는 인간의 열정이니 뜨거움이니 하는 것들이 사실상 무의미한 것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분위기가 뜨겁고 노래하는 목소리가 크고 열정적이라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송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말한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노래는 단지 성령에 의해 알게 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하심에 대한 감사와 기쁨을 담아서 나타내는 형식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노래를 열정적으로 부른다고 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다윗의 마음에는 메시야를 보내심으로 음부에 버린바 되지 않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가시는 구속을 향한 감사함으로 충만합니다. 그러므로 찬송은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긍휼과 자비에 대한 감사함과 기쁨이 충만한 신자의 심정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5강) 열왕기상 2:1-4  다윗의 유언

 

<본문>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 아들 솔로몬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이 그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열왕기상 2:1-4)

 

 

 


<설교>


지난 시간에 기독교는 현세적이 아니라 내세적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즉 죽음 이후의 세계를 소망하는 것이 기독교라는 것입니다. 시편 90:3절을 보면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씀처럼 인생이 티끌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에 순종됨으로써 인생은 결국 티끌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생이 티끌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는 명령은 우리가 피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은 그 명령을 거부하려고 해도 내 육신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되고 있기에 어쩔 수 없이 모든 인간은 티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갈수록 노쇠해지는 것 역시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닙니다. 세월이 흐르니까 몸이 늙는 것이라기보다는 티끌에서 난 내 몸이 주인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되고 있는 흔적들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주인은 절대로 내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호흡을 하며 살고 있는 것도, 내 의지가 아니라 내 몸이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장을 보면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1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노쇠하여 이제 곧 죽는다는 것을 다윗이 짐작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분명 남의 일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몸 역시 죽을 날을 향해서 쉬지 않고 달려가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시계를 시간을 알기 위해 보지만 사실 시계라는 것도 죽음이라는 시선에서 보게 되면 일초 일초의 흐름이 결국 티끌로 돌아갈 날에 점점 가깝게 다가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굳이 죽음이라는 것을 의식하며 살아갈 필요가 있는가라는 생각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죽음이라는 것을 세상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두운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기독교가 내세적이라는 것은 죽음을 떠나서는 기독교를 생각할 수 없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죽음을 거치지 않는 내세는 없기 때문입니다. 현세를 벗어나야 내세에 도달할 수 있는데 내세를 소망한다고 하면서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를 꺼려한다면 그것은 모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다윗은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라는 말로 인생의 원칙에 대해 말합니다. 이 길은 다윗 스스로 가는 길이 아니라 뭔가에 이끌려 가는 길입니다. 그것이 곧 ‘너희 인생들은 티끌로 돌아가라’고 하신 주 여호와의 명령인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입니다. 누구도 이 길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오늘 내게 성취될지 내일이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인생길을 지금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이 아무리 자신의 강함을 자랑한다고 해도 결국 티끌로 돌아갈 연약한 존재에 불과할 뿐입니다.

 

 

 


시편 90:5-10절을 보면 인생에 대해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간 자는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바 되어 마르나이다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을 대하면서 보잘것없는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살았다고 하나 살았다고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가 바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리석게도 아무것도 아닌 인생을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으로 자신을 치장하고자 하는 욕망에 붙들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임을 생각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잠시 잠간 동안 하나님에 의해 허락되어 있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잊고 사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 때문에 신자로서 가야할 길을 가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죽을 날이 임박하여 아들 솔로몬에게 유언을 합니다. 다윗의 유언의 첫 말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찌라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이 그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3,4절)는 것입니다.

 

 

 


다윗이 죽으면 남게 되는 것은 솔로몬입니다. 그 솔로몬에게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지키는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있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라는 뜻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명령과 율례와 법도에 간섭을 받으며 살아가는 인생이 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과 신자의 차이점은 자기 홀로 살아가느냐 아니면 누군가의 간섭을 받으며 살아가느냐에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순종해야 할 이유도 가치도 없는 다만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주장하는 교리일 뿐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은 말씀과 상관없이 자기 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서라도 순종해야 할 가치와 권세로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에 의해 움직이게 되는 것이 신자입니다. 이러한 신자를 가리켜서 ‘살았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해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이 곧 살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을 ‘죽은 자’로 규정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말씀에 대해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말씀에 대해 반응치 않는다는 것은 곧 ‘죽은 자’라는 증거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솔로몬에게 왜 이러한 유언을 남길까요? 다윗의 인생에서 가장 후회스런 일이 있다면 아마 밧세바와 동침하고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전쟁터로 보내어 죽게 한 일일 것입니다. 아마 그때 일을 생각할 때마다 후회하면서 ‘내가 왜 그랬을까?’ 땅을 치며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다윗이 죽음을 앞두고 인생을 돌아볼 때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라고 여기겠습니까? 그것이 곧 하나님의 명을 지켜 그 길을 행하고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지켜 살아가는 것, 즉 날마다 말씀의 간섭과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이 솔로몬에게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남기고자 하는 것이고, 그것이 말씀의 길로 지켜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죄를 책망합니다. 그때 다윗은 그 책망이 곧 자신을 향한 것임을 알게 되었고 애통해 하며 회개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를 통해 다윗에게 전달되었고, 말씀은 다윗의 마음을 흔들어 죄에 대해 애통하게 하고 회개하게 한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에게는 말씀이 함께 하였고 말씀이 다윗을 책망하며 이끌어 갔던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자신의 범죄에서 자신은 말씀을 떠났고 지키지 아니하고 범죄한 자에 불과했지만 말씀은 자신을 버리지 않고 다가와 마음을 흔들어 애통하는 자가 되게 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알게 하는 복의 자리로까지 이끌어 갔음을 생각할 때 말씀의 세계가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알게 된 것이고, 그처럼 복된 말씀의 세계가 솔로몬에게까지 이어지기를 소원하면서 본문과 같은 유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다윗의 유언은 솔로몬에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하고 있는 유언인 것입니다. 말씀의 세계에 관심이 없는 우리에게 말씀이 다스리는 세계를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를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범죄 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자를 ‘살았다’라고 말하는 것은 말씀에 대해 반응하면서 자신의 죄에 대해 애통해 하고 회개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자각하기에 ‘살았다’라는 선언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찌라”고 말하는 것은 말씀을 지키고 율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면 형통의 복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말씀에 다스림을 받으며 말씀의 세계를 살아간다면 그 인생은 말씀이 책임지고 붙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에 형통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욕망과 뜻을 성취시켜주는 의미에서 형통이 아니라 말씀이 우리를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길로 이끌어 가기 때문에 형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말씀이 무엇인가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말씀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나를 어떤 길로 이끌어 가고자 하시는가를 생각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운명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 하나님은 말씀의 세계와 말씀 밖의 세계를 구분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살아갑니다. 겨우 주일에 교회 나오고 헌금하는 것으로 마치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거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말씀의 세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살피고 점검하면서 말씀이 제시하는 길을 가기를 소원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내가 과연 말씀이 제시하는 길을 제대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다윗이 유언을 남긴 것입니다. 다윗이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 것처럼 우리도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인간은 죽는다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죽음 후의 세계에 대해서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럴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야 말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에 가장 중요한 문제를 말씀에 두게 되고, 믿음에 두게 될 때 자연히 인생의 모든 방향이 말씀을 향하게 되고 믿음을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세상의 것을 잃는다고 해도 말씀을 벗어날 수 없다는 단단한 각오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솔로몬에게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혹 말씀을 향한 관심에서 벗어났다면 그것은 인생의 중요함을 다른 것에 두고 있다는 증거고 흔적입니다. 말씀을 향한 관심에서 벗어나 있기에 자녀들에게도 말씀을 보여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유언 앞에서 다시금 인생을 돌아보시고,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새롭게 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자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6강) 열왕기상 2:5-12  말씀의 세계

 

<본문>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장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저가 저희를 죽여 태평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로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 백발로 평안히 음부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마땅히 길르앗 바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저희로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여하게 하라 내가 네 형 압살롬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저희가 내게 나아왔었느니라 바후림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너와 함께 있나니 저는 내가 마하나임으로 갈 때에 독한 말로 나를 저주하였느니라 그러나 저가 요단에 내려와서 나를 영접하기로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내가 칼로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였노라 그러나 저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지어다 너는 지혜 있는 사람인즉 저에게 행할 일을 알지니 그 백발의 피를 흘려 저로 음부에 내려가게 하라 다윗이 그 열조와 함께 누워 자서 다윗 성에 장사되니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십 년이라 헤브론에서 칠 년을 치리하였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을 치리하였더라 솔로몬이 그 아비 다윗의 위에 앉으니 그 나라가 심히 견고하니라(열왕기상 2:5-12)

 

 

 


<설교>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여 솔로몬에게 유언을 하는 첫 내용은 하나님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은 죽음을 향하여 달려갑니다. 죽음의 세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망의 나라가 이 세상입니다. 그러한 세상에서 다윗 역시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가게 되면서 솔로몬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영원한 생명의 약속이 있는 말씀의 세계를 살아갈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유언처럼 우리 역시도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향해 달려가고 있기에 생명의 약속이 담겨 있는 말씀의 세계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되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말씀의 세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입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죽음을 떠나 영원한 생명에 거하는 약속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세계를 살아가는 신자가 바라보고 소망할 것은 세상이 아니라 언제나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의 세계에는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다윗은 본문에서 솔로몬에 그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다윗은 요압에 대해서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장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저가 저희를 죽여 태평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로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 백발로 평안히 음부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5,6절)고 말합니다.

 

 

 


요압은 다윗의 군대장관으로서 다윗과 생사고락을 함께 다윗을 도왔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다윗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뜻대로 일을 처리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중에 다윗은 요압이 아브넬과 아마사를 죽인 일을 들어서 요압 같은 사고방식은 말씀의 세계에서는 제거되어야 할 것임을 당부하는 것입니다. 아브넬은 요압의 동생인 아사헬을 죽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윗과 전쟁을 하던 아브넬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다윗에게 항복을 하자 다윗은 아브넬은 환영을 하고 평안히 돌려보냅니다(삼하 3:20)

 

 

 


그런데 요압이 이 소식을 듣자 다윗에게 항의를 하고 아브넬을 쫓아가서 헤브론으로 데리고 와서 죽이게 됩니다. 즉 동생의 복수를 한 것입니다(삼하 3:30). 그리고 아마사는 다윗에게 반역을 한 압살롬 군대의 군장이었는데 (삼하 17:25) 다윗이 이 아마사를 요압 대신에 군장으로 세웁니다(삼하 19:13). 그러자 요압은 아마사를 제거함으로써 다윗의 군장으로서의 자기 지위를 지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요압의 사고방식은 말씀의 세계에서는 쫓겨나야 할 것임을 솔로몬에게 요압을 죽일 것을 유언함으로써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의 세계에서 쫓겨나야 할 요압적 사고방식이란 무엇입니까? 단순히 자기 복수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지위를 위해서 살인을 했다는 것일까요? 아브넬이나 아마사는 다윗에게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들을 환대하고 군장으로 세운 것은 다윗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입은 자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즉 다윗 자신이 범죄한 하나님의 원수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에게 긍휼과 자비로 다가오셨던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깨달은 다윗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알게 되고 범죄한 자신을 여전히 왕위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이스라엘에게 선포하고 증거하는 것에 있음을 알았기에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서 아브넬과 아마사를 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압은 다윗의 그러한 마음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인가도 깨닫지를 못했고 오직 개인적인 복수심과 자신의 지위에 연연함으로써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훼방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압과 같은 사고방식은 말씀의 세계에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즉 율례와 법도와 계명은 인간의 범죄를 낱낱이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범죄한 인간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하셨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지켜 행한다는 것은, 말씀을 지켜 실천하라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멸망의 자식을 긍휼과 자비로서 용서하신 하나님의 용서를 바라보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죽음을 향해 갈 수밖에 없는 것은 범죄의 결과입니다. 세상에 의인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모두가 죽음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에서 건짐 받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서 죄 용서를 입은 하나님이 택한 자들입니다. 따라서 용서함을 받고 죽음에서 건짐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외치며 증거하는 것은 긍휼과 자비이며 용서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세계이며 교회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말씀의 세계가 용납하지 않는 것은 복수이며 자신을 위해 타인의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즉 나에게 해를 입힌 자에게 복수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에 불과한 나를 용서하신 긍휼과 자비하심을 알지 못한 자의 악한 행위이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피를 흘리는 것 역시 원수를 위해 피 흘리신 하나님의 희생을 알지 못한 자의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압은 말씀의 세계에는 합당치 않기에 죽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즉 다윗은 요압 개인에 대한 징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세계를 굳게 지킬 것을 당부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므이는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을 칠 때 다윗을 저주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다시 돌아왔을 때 시므이는 “왕께 고하되 내 주여 원컨대 내게 죄 주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옵시며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삼하 19:19)라고 말하면서 용서를 구하고 다윗은 시므이가 저주한 일을 용서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이미 용서한 시므이를 왜 죽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당시 시므이가 다윗에게 용서를 구한 것은 자신의 안위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므이는 다윗의 용서를 받았으면서 용서의 은혜를 아는 자로 살아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말씀의 세계는 용서의 은혜를 아는 자들의 세계이기에 시므이 역시 말씀의 세계에서는 합당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말씀의 세계에 합당한 것입니까? 다윗은 7절에서 “마땅히 길르앗 바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저희로 네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예하게 하라 내가 네 형 압살롬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에 저희가 내게 나아왔었느니라”고 말함으로써 바실래와 같은 자가 말씀의 세계에 참예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실래는 다윗이 어려울 때 다윗을 도왔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다윗을 도왔다고 해서 바실래의 아들들에게 은총을 베풀어 솔로몬의 상에서 먹는 자 중에 참예하게 하라고 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도망을 쳤다가 다시 돌아올 때 바실래가 다윗을 영접합니다. 그때 다윗은 바실래에게 예루살렘으로 함께 갈 것을 말합니다. 바실래가 다윗을 도왔으니 바실래의 여생 동안 다윗이 공궤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실래는 “내 나이 이제 팔십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 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오히려 누를 끼치리이까 종은 왕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려는 것뿐이어늘 왕께서 어찌하여 이같은 상으로 내게 갚으려 하시나이까”(삼하19:35,36)는 말로 사양 합니다.

 

 

 


바실래는 다윗을 도운 자신의 공로를 이용하여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바실래의 이러한 사고방식이 말씀의 세계에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말씀의 세계를 살아간다고 할 수 있습니까? 말씀의 세계를 살고 계신다면 우리에게서는 요압과 같은 사고방식은 보여질 수 없습니다. 오직 바실래와 같은 사고방식만이 증거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말씀의 세계에 참예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일 것입니다.

 

 

 


말씀의 세계는 말 그대로 말씀으로 인해 살아가는 세계입니다. 말씀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면 말씀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대해 눈이 떠질 수밖에 없습니다. 원수된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망에 처한 악한 우리를 건지신 긍휼과 자비하심에 대해 마음이 열리는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이처럼 긍휼과 자비하심에 마음이 열린 하나님의 사람으로 산다면, 말씀의 세계에 참예된 신자로 산다면 그에게서 나타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베풀어진 긍휼과 자비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는 용서함이 있을 뿐, 원한 갚음과 비판과 판단은 없습니다. 우리를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의 공로만을 자랑할 뿐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며 자랑하는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것은 말씀의 세계가 용납하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세계는 내가 누구인가를 보게 되는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들이 나의 실체를 파헤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말씀 앞에서 우리는 죽어야 할 자에 불과합니다. 나의 원수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인 나의 모습만이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멈추지 아니하고 원수 된 나에게 복수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시고 모든 죄를 가리우신 긍휼과 자비에 대해 마음이 열리게 하는 것이 말씀의 세계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세계에 참예된 자로 살아가는 것이라면, 분명한 것은 여러분에게는 비판이나 판단이 아닌 긍휼과 자비만이 맺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예수를 말하고 은혜를 말하고 긍휼과 자비를 말할 뿐, 말씀의 세계에 참예한 자로 살아간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바실래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이끌어 갑니다. 자신이 한 일을 이용하여 자신을 내세우거나 득을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으로 인해 다윗에게 누가 될 것을 염려하는 것처럼, 항상 그리스도께 누가 되는 나를 바라보게 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세계에는 다툼이 없고 비판이 없고 판단이 없고 자기 자랑이 없고 경쟁이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말씀의 세계가 용납하지를 않습니다. 말씀의 세계는 오직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죽어야 할 자를 살리신 은혜와 사랑과 긍휼과 자비에 대한 감사함과 찬송과 기쁨이 있을 뿐입니다. 말씀은 나 자신을 책망하고 회개하게 하는 것이지 타인을 책망하고 공격하는 무기로 내 손에 쥐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신의 악함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하심에 마음이 열리고 기뻐하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면 말씀의 세계를 벗어나 있는 것일 뿐, 말씀의 세계에 참예한 모습은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말씀은 요압적인 사고방식, 시므이적인 사고방식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다만 바실래와 같은 사고방식만이 말씀의 세계에 참예한 자로 살아가는 것임을 늘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그럴 때 말씀이 우리를 붙들고 다스리고 간섭하며 이끌어 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내 힘과 내 뜻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이 말씀의 세계입니다. 혹시 여러분에게서 믿음의 모습이 보인다면 그것은 말씀이 여러분을 포기하지 않고 간섭하고 다스린 결과이기에 자기 믿음으로 간주하며 자기 자랑거리로 삼을 수도 없습니다. 말씀의 세계를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조용히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7강) 열왕기상 2:19-25  하나님의 기준

 

<본문>

밧세바가 이에 아도니야를 위하여 말하려고 솔로몬 왕에게 이르니 왕이 일어나 영접하여 절한 후에 다시 위에 앉고 그 모친을 위하여 자리를 베풀게 하고 그 우편에 앉게 하는지라 밧세바가 이르되 내가 한 가지 작은 일로 왕께 구하오니 내 얼굴을 괄시하지 마소서 왕이 대답하되 내 어머니여 구하시옵소서 내가 어머니의 얼굴을 괄시하지 아니하리이다 가로되 청컨대 수넴 여자 아비삭을 아도니야에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소서 솔로몬 왕이 그 모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하여 아도니야를 위하여 수넴 여자 아비삭을 구하시나이까 저는 나의 형이오니 저를 위하여 왕위도 구하옵소서 저뿐 아니라 제사장 아비아달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도 위하여 구하옵소서 하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 나를 세워 내 부친 다윗의 위에 오르게 하시고 허락하신 말씀대로 나를 위하여 집을 세우신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아도니야는 오늘날 죽임을 당하리라 하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매 저가 아도니야를 쳐서 죽였더라(열왕기상 2:19-25)

 

 

 


<설교>


여러분의 삶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아니 삶의 기준이 무엇인가를 묻기보다는 과연 삶의 기준이 세워져 있는가를 물어야 할 듯싶습니다. 현대인들의 문제는 삶의 기준이 될 무엇인가를 세워두지 않고 산다는 것입니다. 기준이 없습니다. 기준이 없기에 자신에게 유익되면 받아들이고 유익되지 못하면 거부하면서 살아갈 뿐입니다. 내 마음에 들면 옳은 것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옳지 않은 것으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이처럼 삶의 기준이 없기에 신자라고 하면서도 신자로서의 삶의 모습을 보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에 의해서 살 자를 살리시고 죽을 자를 죽이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가 하나님의 기준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결국 자기식대로 살아가는 것 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천국이 어떤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지를 알지 못한 채 신앙생활을 한다면 결국 천국이 거부하는 자로 살아가면서도 ‘나는 천국 간다’고 고집하는 것 밖에 더 되겠습니까?

 

 

 


천국은 내 고집으로 가는 곳이 아닙니다. ‘나 같은 사람이 천국 못가면 누가 가겠나?’라고 우긴다고 해서 천국이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천국은 천국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기에 그 기준에 합한 자들에게만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이 세우신 기준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고, 그 기준은 자신의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다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우신 기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솔로몬이 왕이 된 후에 죽인 자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살펴보면 답이 나올 것입니다.

 

 

 

솔로몬은 왕이 된 후에 아도니야와 요압과 시므이를 죽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이면서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을 때 그 편에 섰던 아비아달의 제사장 직분을 파면하고 쫓아 버립니다. 결국 이들 네 사람은 솔로몬에게 버림을 받는 사람으로 등장하지만, 실상은 하나님께 버림 받은 자들로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므로 이들 네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살펴본다면 이들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지 못하고 천국이 거부한다는 것을 분명한 기준을 세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천국은 적당히 교회 출입했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영생이라는 것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겠습니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영원한 사망에 처하게 되는데, 그 가운데서 구원 받는 것이 영생입니다. 세상 모두가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는데 그들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은총이 단지 교회에 출입했다고 해서 주어지는 가벼운 것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이 진심으로 영생을 소망하면서 하나님께 나오는 분들이라면 교회에 출입하는 자신을 보면서 ‘천국 갈 것이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자에게 천국을 허용하셨는가를 살핌으로써 그것을 기준 삼아 자신을 살펴야 할 것이고, 앞으로도 그 기준에 의해서 자신을 점검하면서 생명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자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솔로몬에 의해 죽임을 당한 세 사람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먼저 아도니야가 등장합니다. 아도니야는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다고 해서 죽인 것이 아닙니다. 즉 솔로몬이 정치적 보복을 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16,17절을 보면 “이제 내가 한가지 소원을 당신에게 구하오니 내 얼굴을 괄시하지 마옵소서 밧세바가 가로되 말하라 가로되 청컨대 솔로몬왕에게 말씀하여 저로 수넴 여자 아비삭을 내게 주어 아내를 삼게 하소서 왕이 당신의 얼굴을 괄시치 아니하리이다”고 말합니다.
즉 아도니야는 밧세바를 찾아와서 솔로몬 왕에게 수넴 여자 아비삭을 아내로 삼게 해달라는 청을 넣어달라는 로비를 합니다. 솔로몬 왕이 어머니인 밧세바의 청이라면 들어주지 않겠느냐는 계산을 한 것입니다.

 

 

 


밧세바는 아도니야의 청을 승낙하게 되고 솔로몬에게 가서 아도니야 얘기를 하지만 솔로몬은 “솔로몬왕이 그 모친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하여 아도니야를 위하여 수넴 여자 아비삭을 구하시나이까 저는 나의 형이오니 저를 위하여 왕위도 구하옵소서 저뿐 아니라 제사장 아비아달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도 위하여 구하옵소서 하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22-23절)고 말하고 아도니야를 죽인 것입니다. 아도니야는 스스로 왕이 되고자 한 것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라 수넴 여자 아비삭을 아내로 달라는 청을 한 것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 청이 죽임을 당해야 할 이유였을까요?

 

 

 


수넴 여자 아비삭은 다윗을 수종들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여인을 자신의 아내로 달라는 것은 어떻게든 다윗의 권세를 자신에게서 계속 이어보려는 욕망인 것입니다. 고대사회에서 왕의 첩을 차지한다는 것은 왕의 권력에 동참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아도니야는 다윗의 왕위를 이어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기준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선택하신 자만이 왕위를 이을 수 있음을 알지 못하고, 수넴 여자만 차지하면 다윗의 권세를 누릴 수 있을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즉 왕이란 하나님이 주셔야만 받을 수 있는 권세인데도 불구하고 아도니야는 자기 스스로 자신의 방법을 동원하여 왕의 권세를 얻고자 한 것이 죽임이 당해야 할 이유였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으로 갈 수 있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의 힘으로 들어가려고 한다면, 그런 자는 거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자격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즉 ‘나는 이런 사람이고 이런 일을 했으니 복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야 말로 하나님 나라에서 거부 받은 자일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아는 자에게 합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26,27절을 보면 솔로몬이 제사장 아비아달을 파면하고 쫓아 버립니다. 아도니야가 왕이 되고자 했을 때 아도니야 편에 섰던 것이 이유입니다. 아비아달은 제사장으로서 제물의 희생의 피로 말미암은 죄 용서, 즉 제물의 희생을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증거하면 되었습니다. 그것이 제사장의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이 갈 길은 오직 이 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비아달은 제사장으로서 가야 할 길보다는 아도니야라는 새로운 권력에 눈을 돌립니다. 즉 제사장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이 살 수 있고, 제사장이라는 직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비아달은 아도니야 편에 서는 것이 그 길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하나님만이 힘입니다. 하나님만을 힘으로 여기고 살아가면 되는 것이 신자입니다. 그런데 또 다른 힘을 바라보고 그 힘을 따르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힘이시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런 자도 거부하는 것입니다.
아비아달이 솔로몬에 의해 파면을 당하고 쫓겨났다는 소식을 들은 요압은 여호와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단 뿔을 잡습니다.(28절) 왜냐하면 요압 자신도 아비아달처럼 아도니야를 쫓았기에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눈치 챈 것입니다.

 

 

 


그런데 요압은 왜 여호와의 장막으로 도망쳐 단 뿔을 잡는 행동을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출애굽기에 있는 하나님의 규례를 요압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출 21:13-14절을 보면 “만일 사람이 계획함이 아니라 나 하나님이 사람을 그 손에 붙임이면 내가 위하여 한 곳을 정하리니 그 사람이 그리로 도망할 것이며 사람이 그 이웃을 짐짓 모살하였으면 너는 그를 내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찌니라”고 말합니다. 죽여야 할 자라도 하나님이 정하신 곳으로 도망을 하면 그를 죽이지 말라는 규례입니다. 여기서 말한 하나님이 정한 곳은 성소이고, 14절에서 ‘내 단에서라도 잡아내려’라고 말씀한 것을 보면, 제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요압은 하나님의 규례를 이용하여 목숨을 구하고자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고의로 이웃을 죽인 자는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제단 뿔은 제물의 희생의 피가 뿌려지는 곳이고, 용서가 있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제단 뿔에는 회개와 용서가 있어야 마땅한데 요압은 자신이 살 수 있는 방법으로 제단 뿔을 이용한 것입니다. 이처럼 회개 없이 다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이용하여 자신이 살 길을 구축하는 것이야 말로 악한 것이고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시므이는 다윗을 저주한 자였지만 처음부터 죽이지 않았습니다. 솔로몬은 시므이를 죽이지 않은 대신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정녕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36,37절)고 말합니다. 그런데 시므이는 도망간 종을 찾기 위해 솔로몬의 말을 어기고 예루살렘을 벗어나게 됩니다. 시므이가 살 수 있는 것은 예루살렘을 벗어나지 말라는 말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산다는 것이 솔로몬의 약속이었습니다.

 

 

 


결국 시므이의 죽음은 솔로몬의 약속보다는 종을 찾는 일을 더 크게 여긴 것 때문입니다. 즉 십자가의 언약의 피의 은혜 아래 거하며 살아가는 것보다 세상의 것을 챙기는 일을 더 크게 보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기준입니다. 우리는 이 기준으로 자신을 살피면서 십자가의 은혜를 벗어나지 않는 자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용서 아래 있음을 깨달으며 그 기쁨으로 세상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만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성품입니다.

 

 

 

 

 

(8강) 열왕기상 3:1-5  일천 번제

 

<본문>

솔로몬이 애굽 왕 바로로 더불어 인연을 맺어 그 딸을 취하고 데려다가 다윗 성에 두고 자기의 궁과 여호와의 전과 예루살렘 주위의 성이 필역되기를 기다리니라 그 때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아직 건축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사하며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부친 다윗의 법도를 행하되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열왕기상 3:1-5)

 

 

 


<설교>


본문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경상식을 가지고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본문 4절에는 여러분들이 많이 들어본 솔로몬의 일천 번제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5절에서는 일천 번제를 드린 솔로몬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이처럼 4절과 5절만을 두고 생각한다면 이해 못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 하나님이 그 정성을 보시고 무엇이든 구하면 주겠다는 응답을 하셨다고 이해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이 이렇게 이해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1-3절까지의 내용입니다. 1-3절까지의 내용은 솔로몬이 이방인과 인연을 맺어 혼인을 하고, 또 산당에서 제사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산당에서 제사하는 것은 이방 풍속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써 이방 여인과 혼인을 하고 이방 풍속을 따라 산당에서 제사를 했다는 것은 왕으로써 행할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솔로몬은 왕으로써 행해서는 안 될 일을 한 사람인데, 그 일에 대한 책망은 하지 않고 일천 번제를 드렸다는 이유만으로 솔로몬에게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죄를 행한다고 해도 솔로몬과 같은 정성만 하나님께 보이면 된다는 말도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솔로몬의 일천 번제는 산당에서 행한 것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행한 기브온의 산당에는 여호와의 법궤가 없습니다. 당시 여호와의 법궤는 다윗에 의해 다윗 성으로 이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법궤가 존재하는 다윗 성에서 제사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기브온의 산당에서 번제를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에게 ‘무엇을 줄까?’라고 물으시고 응답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만약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생각하시면서 ‘과연 그렇다. 솔로몬이 잘못한게 있는데도 왜 솔로몬의 일천 번제를 받으시고 기도를 들어주시는가?’라는 혼란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기도를 응답하신 것이 일천 번제를 드린 정성을 보셨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일천 번제를 드린 솔로몬의 정성을 받으신 것으로 생각하기에 ‘그러면 이방여인과 혼인하고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정성으로 여기시는가? ’라는 혼란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혼란의 이유는 인간의 종교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인간의 생각을 뛰어 넘은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내용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일천 번제’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일천 번의 제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일천 번제가 일천 번의 제사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솔로몬은 일천 일 동안 매일 제사에 매달렸다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솔로몬이 일천 일 동안 매일같이 제사 드렸다는 얘기가 없습니다.

 

 

 


대하 1:6절을 보면 “여호와 앞 곧 회막 앞에 있는 놋단에 이르러 그 위에 일천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고 말합니다. 즉 일천 번의 번제가 아니라 일천 마리의 희생 제물로 드린 번제였다는 것입니다. 본문 4절에서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솔로몬이 기브온으로 가서 제사한 이유는 그곳의 산당이 매우 컸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산당이 커야했던 이유가 일천 마리의 제물로 드리는 제사였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교회에서는 마치 솔로몬이 일천 번의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이 그 정성을 보시고 기도를 응답하신 것처럼 얘기합니다. 그리고 일천번제 헌금이라는 것을 만들어 하나님께 정성을 보이라는 것은 신앙과 전혀 상관없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무엇을 줄까’라고 물으시고 솔로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은 솔로몬의 신앙이나 일천 번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들리십니까? 그러면 솔로몬이 바른 신앙으로 살아가지도 않고 일천 번제 역시 신앙이라고 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것입니까? 답은 ‘그렇습니다’ 입니다. 바로 이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기도 응답에 조건을 달으시고, 인간의 정성을 요구하고, 신앙생활이 제대로 되었을 때 기도에 응답하는 그런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평생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엉뚱한 길에서 헤맬 뿐입니다. 그러면 솔로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다윗이 죽음을 앞두고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을 기억하십니까? 그 유언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찌라 여호와께서 내 일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만일 네 자손이 그 길을 삼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진실히 내 앞에서 행하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을 확실히 이루게 하시리라”(2:3-4)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의 유언은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과연 지금 솔로몬이 다윗의 유언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까?

 

 

 


1절을 보면 솔로몬은 애굽 왕 바로와 인연을 맺어 그 딸과 혼인을 하였습니다. 어쩌면 애굽과 동맹을 맺기 위한 정략결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2,3절을 보면 백성들도 솔로몬도 산당에서 제사하였습니다. 물론 2절을 보면 산당에서 제사하게 된 이유를 여호와의 전을 아직 건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앞서 말한 대로 여호와의 전이 없다면 법궤가 있는 다윗 성으로 가서 제사하는 것이 옳은데도 불구하고 산당에서 제사한다는 것 역시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솔로몬은 다윗의 왕위는 이어 받았지만 그 신앙은 잇지를 못했다고 봐야 합니다. 결국 솔로몬은 다윗의 유언을 기억하며 그 유언을 따라 산 것이 아니라 솔로몬 자신의 인생을 살아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에게는 다윗의 유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인생을 살아간 것처럼,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대로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즉 말씀에 순종하여 말씀이 지시하는 인생이 무엇인가를 살피면서 그 인생을 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내가 원하고 내게 즐거운 나의 인생을 살기를 힘쓰며 살아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앞에서 본문의 내용에 대한 이해하지 못할 부분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며 산 것도 아닌데 왜 솔로몬의 기도를 응답하셨을까?’ ‘일천 번제가 산당에서 제사한 것이었는데 왜 그 제사를 받으셨을까?’ 여러분은 왜 이런 혼란이 발생한다고 생각합니까? 그것은 솔로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솔로몬의 행적과 연관하여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만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그러한 혼란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가령 여러분이 보실 때 신앙생활에 철저하고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는 사람의 기도와 신앙생활이 엉터리라고 여겨지는 사람이 기도할 때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이 옳다고 여기십니까? 아무리 하나님은 인간의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는 구절을 머리에 담고 있다고 해도 신앙생활이 바른 사람보다 엉터리인 사람의 기도를 응답하신다면 과연 그런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해하신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기도에 매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어떤 사람의 행실을 가지고 신앙을 운운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보시지 않는 것을 우리가 본다면 그것이야 말로 신의 자리에 있고자 하는 악행이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면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부친 다윗의 법도를 행하되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더라”는 말을 하기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사랑하였고 다윗의 법도를 행하였으니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이 이방 여인과 혼인하고 산당에서 제사하였다고 해서 다윗의 모든 말을 어겼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린 것은 솔로몬이 가지고 있는 여호와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사랑과 온전한 순종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문에서 솔로몬의 일천 번제와 하나님의 응답을 연관 지어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일천 번제에 담긴 정성을 보시고 나타나시고 기도에 응답하신 것이 아니라 솔로몬과 상관없이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것뿐입니다. 결국 기도응답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인정하신다는 증표도 아니고 신앙의 증거물도 아니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필요하다면 누구의 기도라도 응답하실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설사 그가 악행자라고 해도 말입니다. 이 말이 이해가 안된다면,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해 주실 사람은 따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든가,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라든가, 정성을 보이는 사람 등등 응답의 조건이 인간에게 있음을 생각하기에 제 말이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기도 응답이라고 말하기보다는 단지 인간의 요구를 들어주신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응답이라는 말이 하나님이 그와 교통하신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어떤 인간과도 교통하지 않으심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인간의 기도에 응답하는 분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솔로몬의 기도에는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솔로몬을 보시고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윗 언약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아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이스라엘의 등불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이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 것입니까?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로 모든 것이 이해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교통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도 다윗 언약의 성취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보시고 그리스도로 인해 응답하시는 것이지 결코 우리의 행실을 보시고 그것을 조건 삼아 응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이 다윗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고 자기 인생을 살아간 것처럼 우리 역시 매일 같이 내 인생을 살아갑니다. 보이는 것은 세상이고 얻고 싶은 것도 세상에 있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말씀하시고 응답하시고 복된 길로 인도하시는 것은 우리의 빛이시고 등불이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매일 같이 세상을 향하고자 하는 내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기를 소망하면서 그리스도만을 사모하는 믿음을 주시기를 구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9강) 열왕기상 3:6-15  솔로몬의 기도

 

<본문>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솔로몬이 깨어 보니 꿈이더라 이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서서 번제와 수은제를 드리고 모든 신복을 위하여 잔치하였더라(열왕기상 3:6-15)

 

 

 


<설교>


사람이 자기 문제 해결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서는 보지 못하게 됩니다. 즉 진리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듣지 못하게 되고, 진리가 보여주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되고, 진리가 깨닫게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자기 문제 해결을 대한 관심, 다시 말해서 ‘자기 관심’ ‘자기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 무지합니다. 이런 말을 들어도 전혀 마음이 동요되거나 자신을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앞서 말한 대로 이미 지독한 자기 사랑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있기에 그 마음이 진리 쪽으로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 사랑에 붙들려 있는 사람들에게는 속담 그대로 ‘소귀에 경 읽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천국 가고 싶어 하는 것은 자기 사랑입니다. 때문에 자기 사랑에 의해 천국 가고 싶은 욕망에 얽매이게 되면 천국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즉 천국가고 싶다는 욕망만 있을 뿐,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이 어떤 나라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병든 자가 병 낫는 것에만 관심을 두게 되면, 질병을 통해서 증거 되고 있는 죄와 형벌,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는 관심이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자기 문제 해결에 대한 관심, 자기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고 진리를 대하기에 진리가 계시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 수 없게 되는 것이고, 진리가 이끌어 가는 진리의 세계 역시 알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하나님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수없이 말씀드렸습니다. 혹 이 말로 인하여 여러분이 교회에 나와야 할 이유가 흔들린다거나, 아니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조금이라도 든다면 그것은 ‘자기 사랑’에 얽매인 결과라고 봐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가운데서 선택받은 인간이 그 속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지 인간 문제 해결을 위해 일하시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구원의 문제를 두고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 나라의 충만을 위해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택함과 부름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 곧 구원을 의미하는 것이지 사람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을 만드시고 사람을 구원시키기 위해 일하시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자기에게 관심을 두게 되면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의 목적을 볼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기를 향한 관심이 하나님께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사람의 모습입니다. ‘날 위해서 하나님은 무엇을 어떻게 해주시는 분인가?’ 에 대한 관심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해 어떻게 일하시며 나는 하나님의 일에서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관심으로 바뀐 것이 신앙이며 성령이 임한 거듭난 사람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모든 관심이 하나님께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일천 번제를 드린 솔로몬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자기 사랑에 매인 자들에게는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는 방법 또는 비결을 알려주는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솔로몬도 역시 죄인에 불과할 뿐인데 그런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구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는 말씀은 구하는 것을 들어봐서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면 들어주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들어주지 않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솔로몬이 무엇이든 구하면 들어주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솔로몬이 자기 사랑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처럼 자기 문제, 즉 부와 명예와 영광과 권력과 힘을 구하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혹 하나님은 솔로몬이 그런 것을 구하지 않을 것을 알고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봐야 할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은 솔로몬을 믿고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으로 봐야 합니까?

 

 

 


요한복음 15:7절을 보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구하라고 하십니다. ‘무엇이든’이라는 이 말씀은 구하는 모든 것이라는 의미임이 분명합니다. 즉 들어봐서 합당하지 않는 것은 예외라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인간이 자기 욕심으로 구하는 모든 것도 구하기만 하면 다 들어준다는 것입니까? 자기 사랑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이러한 기도와 응답을 꿈꾸며 예수님을 부르고 하나님을 찾기도 하지만 사실 예수님의 말씀에 그런 뜻은 전혀 들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이라는 말씀을 먼저 하십니다. 즉 ‘무엇이든’이라는 말은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그 속에 거하는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지, 자기 욕망에 사로잡힌 모든 인간을 포함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의 말씀이 내 속에 거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음을 뜻합니다. 결국 예수님은 예수님의 다스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무엇이든 구하면’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다스림에 있는 신자들은 절대 자기 욕심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다스림을 믿으시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에 매인 인간을 다스리고 고치시면서 진리 안에 붙들어 놓으시는 예수님 자신의 다스림을 믿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이것을 이해하신다면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말씀하신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솔로몬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것을 구할 것을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시 말해서 솔로몬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솔로몬을 택하시고 다스리시고 붙들고 계심을 믿으신다는 것입니다.

 

 

 


7-10절을 보면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고 말합니다.

 

 

 


솔로몬은 자신이 다윗을 대신 해서 왕의 자리에 있게 된 것을 생각합니다. 즉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왕이 어떤 일을 해야 할 사람인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왕이 된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왕이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를 생각하고 자신을 바라보기에 ‘종은 작은 아이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 구하게 되는 내용인 것입니다.

 

 

 

 

솔로몬이 믿음이 좋아서 자기를 위해 구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어떤 인간으로 고쳐가고 새롭게 하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선악을 분별하게 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다윗의 왕위가 이스라엘 안에서 어떤 역할을 위해 있는 것인가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다스림에 있는 자와 다스림에 있지 않은 자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항상 자신만을 바라보는 인간을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는 인간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느냐? 를 보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자로 살아가는가를 알 수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오늘날 신자의 기도는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을 생각하고 자신의 일을 바라본다면 그에게서 나오는 기도는 모든 것이 자신의 문제 해결로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일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자신의 일만 잘되면 최고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것을 기도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중언부언하는 이방인의 기도로 여길 뿐입니다.

 

 

 


11-13절을 보면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 말씀을 바른 기도를 하면 하나님은 부와 영광도 주신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부와 영광을 얻기 위해 바른 기도를 해야 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에게 부와 영광도 주시는 것은, 인간의 부와 영광이라는 것은 인간의 기도와 상관없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부와 영광을 복이라고 여기면서, 인간의 행위나 기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봉사하고 풍성하면, 그리고 정성을 다해 기도하면 하나님은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입은 모든 부와 영광이라는 것도 결국 들의 백합화 하나만 같지 못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이 구하지도 아니한 부와 영광을 주신 것은 바른 기도를 한 것에 대한 상이 아니고, 부와 영광이 좋은 것이기 때문도 아니라 부와 영광이라는 것이 하나님께 기도해서 얻어야 할 만큼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솔로몬의 기도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하나님을 생각합니까? 또한 여러분은 여러분의 기도에서 어떤 여러분의 모습을 보십니까?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이 기도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기도를 통해서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 사랑에 매인 나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다스림이 나를 고쳐 가시고 새롭게 하시는 흔적이 있는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기도의 내용에 날 위한 것이 없다고 해서, 소위 말하는 바른 기도를 했다고 해서 ‘나는 바른 신자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 역시 자신에게 매어 있는 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른 기도를 했으니까 나는 바른 신자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은 끝까지 나 자신을 보지 않게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자는 솔로몬이 왕이 된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다윗 왕의 자리, 이스라엘에서의 왕의 역할을 생각하므로 지혜를 구하게 된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신자가 무엇을 구해야 하는가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나를 택하시고 부르셔서 이 세상에 복음을 맡기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 세우신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자의 역할을 위해서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10강) 열왕기상 3:16-28  솔로몬의 재판

 

<본문>

때에 창기 두 계집이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서며 한 계집은 말하되 내 주여 나와 이 계집이 한 집에서 사는데 내가 저와 함께 집에 있으며 아이를 낳았더니 나의 해산한 지 삼 일에 이 계집도 해산하고 우리가 함께 있었고 우리 둘 외에는 집에 다른 사람이 없었나이다 그런데 밤에 저 계집이 그 아들 위에 누우므로 그 아들이 죽으니 저가 밤중에 일어나서 계집종 나의 잠든 사이에 내 아들을 내 곁에서 가져다가 자기의 품에 누이고 자기의 죽은 아들을 내 품에 뉘었나이다 미명에 내가 내 아들을 젖 먹이려고 일어나 본즉 죽었기로 내가 아침에 자세히 보니 내가 낳은 아들이 아니더이다 하매 다른 계집은 이르되 아니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이 계집은 이르되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며 왕 앞에서 그와 같이 쟁론하는지라 왕이 가로되 이는 말하기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저는 말하기를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는도다 하고 또 가로되 칼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칼을 왕의 앞으로 가져온지라 왕이 이르되 산 아들을 둘에 나눠 반은 이에게 주고 반은 저에게 주라 그 산 아들의 어미 되는 계집이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가로되 청컨대 내 주여 산 아들을 저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한 계집은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 왕이 대답하여 가로되 산 아들을 저 계집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 어미니라 하매 온 이스라엘이 왕의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저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열왕기상 3:16-28)

 

 

 


<설교>


본문의 내용은 솔로몬의 이야기에서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고 있는 솔로몬의 재판입니다.
재판의 내용은 한 집에 사는 창기인 두 여인이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두 여인은 각기 3일의 간격을 두고 아들을 낳습니다. 그런데 밤에 한 여인이 자면서 아들을 눌러 죽이게 됩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죽은 자신의 아이와 다른 여인의 아이를 바꿔치기 합니다. 그리고 서로가 죽은 아들은 내 아들이 아니고 살아있는 아들이 내 아들이라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두 여인의 쟁론에 대해 솔로몬은 칼을 가져오라 하여 살아있는 아들을 둘로 나눠서 두 여인에게 주라고 합니다. 그러자 살아있는 아들의 진짜 어미 되는 여인은 아들을 죽이지 말고 저 여인에게 주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을 죽였으면서도 그것을 감추고 바꿔치기한 여인은 내 아들도 저 여인의 아들도 되지 못하도록 나눠 달라고 합니다. 두 여인의 각기 다른 반응을 보고 솔로몬은 아들을 죽이지 말라고 한 여인이 진짜 어미라는 판결을 내립니다.

 

 

 


솔로몬의 재판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가 어떠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솔로몬의 재판과 하나님의 지혜를 연결하여 이해함에 있어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물론 솔로몬의 재판은 어렵고 곤란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한 아이를 두고 두 여인이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곤란한 사건을 지혜롭게 해결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곤란한 사건을 해결하는 능력의 수준이라면 솔로몬이 기도하여 받은 지혜의 가치는 과연 무엇일까요? 문제 해결의 능력이 지혜의 가치이겠습니까?

 

 

 


솔로몬이 기도하여 받은 것이라면, 세상에는 없는 것이고 인간의 능력으로도 얻을 수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솔로몬처럼 어렵고 곤란한 재판을 해결하는 지혜가 세상에는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주셔야만 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런 지혜를 세상에서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나름대로 지혜를 발휘하여 해결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재판이 증거하고 있는 지혜의 가치를 문제 해결의 능력에 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솔로몬의 재판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 세상에서는 얻을 수도 배울 수도 없고 하나님이 주셔야만 받을 수 있는 지혜는 과연 무엇이겠습니까?

 

 

 


두 여인이 한 아들을 서로 자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건에 대해 솔로몬의 해결 방법은 칼로 아들을 나누어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두 여인 중 진짜 어미는 아들의 죽음을 목격해야 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진짜 어미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아들을 포기합니다. 이것이 아들을 향한 어미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진짜 어미가 아닌 여인은 자신의 아들이 아니기에 아들을 죽여 나눠준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여서 나눠 달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아들은 죽고 상대방 여인의 아들만 살아있는 것에 대한 분풀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솔로몬은 아들을 향한 어미의 마음이 어떻다는 것을 알았기에 칼로 나누라는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들을 향한 어미의 마음을 드러냄으로써 가짜가 누구인가를 증명한 것입니다. 아들이 죽을 것을 불쌍히 여기는 어미의 마음, 그것은 곧 긍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란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9절의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지혜로운 마음에 의해 선악을 분별할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에게 있어서 재판은 옳고 그름을 가리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선악을 분별하는 것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선악을 분별하는 것은 본래 인간의 소관이 아닙니다. 선악은 하나님만이 분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심으로써 인간이 선악을 분별하고자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악은 오직 하나님의 마음으로만 분별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선악의 분별은 단지 착하고 나쁜 것을 가려내는 수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문의 재판에서 단순히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느냐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말하는 여인을 가려내는 것을 지혜로 여기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지혜가 없을 때는 거짓말하는 여인을 가려내는 것만 보이지만 하나님의 지혜의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면 아들을 불쌍히 여기는 어미의 긍휼의 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의 재판이 보여주는 선은 긍휼이며, 악은 긍휼을 무시한 채 자신의 욕망만을 내어 놓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솔로몬의 재판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을 불쌍히 여기신 긍휼이 이스라엘을 살렸음을 보여주는 재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에 순종하며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선이라고 일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을 무시하며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능력을 갖고자 하고 세상의 힘에 기대는 것이야 말로 악이라고 규정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답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긍휼에 감사할 때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신자에게도 그대로 주어진 원칙입니다. 신자답다는 것은 그가 행하는 행위로 인해서 증거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다스림 받고 살아가는 것으로 증거됩니다. 긍휼의 다스림을 받고 있기에 그에게서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마음인 긍휼이 생산되는 것입니다. 교회 역시 이러한 원칙 아래서 교회다움을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지혜, 즉 긍휼의 마음에 의해 다스림을 받고 있다면 교회에서 생산되어야 하는 것은 마땅히 긍휼입니다.

 

 

 


그런데 긍휼은 자신의 것을 지키고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같이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 받음으로 사망에서 건짐 받은 존재들이기에 그런 관계에서 맺어져야 하는 것은 불쌍히 여김인 것입니다. 이것이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 받음으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지키기 위해 타인을 해롭게 하는 것이야 말로 긍휼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기에 악으로 규정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언약 아래 존재합니다. 다윗언약에는 하나님의 긍휼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다윗언약에 담긴 하나님의 긍휼의 원칙으로 다스림을 받아야 했던 것이고, 이것을 위해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것입니다. 28절을 보면 “온 이스라엘이 왕의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저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고 말합니다.

 

 

 


온 이스라엘이 왕의 판결을 듣고 왕을 두려워합니다. 그 이유는 솔로몬의 판결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그 속에 있음을 발견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솔로몬에게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함께 하심을 뜻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솔로몬이 아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계심을 뜻하는 것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두려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10-11절의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라는 내용을 보면, 솔로몬이 지혜를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았다고 말합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한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은 것은,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자신의 나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을 자신의 나라로 여겼다면 부와 수를 구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부강과 강함은 곧 솔로몬의 부귀영화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로 다스려지는 이스라엘이 되기를 원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혜를 구한 솔로몬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의 마음을 간절히 구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교회를 바라본다면, 교회는 목사나 장로 인간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다스려지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긍휼의 원칙 아래 존재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기준 되어서 선과 악을 분별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큰소리친다고 해도 하나님의 긍휼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믿음 밖에 있는 것이고 교회로 여겨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긍휼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곧 지혜입니다. 때문에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는 세상에서 배울 수도 얻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사망에서 건지신 하나님의 긍휼이 담겨 있는 십자가에서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긍휼에 의해서 드러나는 악은 인간이 인간의 것을 고집한다는 것입니다. 잃지 않기 위해서 기를 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 부흥을 고집하는 것도 결국은 긍휼의 다스림을 받지 않고 있는 증거입니다. 긍휼 앞에서는 교회의 부흥이라는 것도 헛된 것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의 마음을 아는 지혜를 구하십시오. 그 지혜로 세상과 교회와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어떻게 사는 것이 선한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나를 살리는 것이 세상의 것이 아니고 내 능력도 내 열심도 내 희생도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임을 알게 될 때 긍휼에 대한 감사함이 여러분의 마음을 채울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로 사는 것입니다.

 

 

 

 

 

(11강) 열왕기상 4:1-6  솔로몬 왕국

 

<본문>

솔로몬 왕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그의 신하들은 이러하니라 사독의 아들 아사리아는 제사장이요 시사의 아들 엘리호렙과 아히야는 서기관이요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사관이요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군대 장관이요 사독과 아비아달은 제사장이요 나단의 아들 아사리아는 관리장이요 나단의 아들 사붓은 대신이니 왕의 벗이요 아히살은 궁내대신이요 압다의 아들 아도니람은 감역관이더라(열왕기상 4:1-6)

 

 

 


<설교>


하나님은 하나님 나름대로 천국에 대한 규정과 원칙을 세워 놓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규정과 원칙대로 천국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음을 전제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들어갈 수 있는 천국이라면,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규정과 원칙이라는 것은 유명무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규정과 원칙에 의한 천국과 인간이 구상하는, 즉 종교 활동의 결과로 얻어지는 천국은 전혀 다릅니다. 결국 하나님의 규정과 원칙에 의한 천국이 세상이 드러남으로써 평소 인간이 생각했던 천국이 천국이 아니었음이 드러나는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무엇을 꾀하였는지도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이 어떤 나라인가를 알게 되면, 자연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알게 됩니다. 교회가 무엇인가를 알게 됨으로써 하나님이 세우신 참된 교회와 천국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구상하고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세워진 교회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 참된 것이고 무엇이 거짓된 것인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다 천국 갈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주를 믿는 자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가 어떤 주를 믿으며 어떤 주를 부르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없다면 ‘주여 주여’하고 있는 내 자신이 주님께로부터 부인 받을 수밖에 없는 길을 가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이 어떤 규정과 원칙으로 일하시는가를 알아야 하고, 천국이 어떤 규정과 원칙에 의해 세워진 나라이며 그 천국을 소망하고 살아가는 신자는 어떤 사람이며, 그러한 신자가 모인 교회는 또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솔로몬 왕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라는 말을 합니다.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언급한 내용입니다. 그런데도 새삼스럽게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음을 언급하는 것은, 솔로몬이 다스리는 솔로몬 왕국이 어떤 나라인가를 언급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솔로몬은 두 여인이 한 아들을 두고 각기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건을 해결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지혜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줬습니다. 즉 하나님의 지혜는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였던 것입니다. 아들이 죽는 것을 불쌍히 여기는 여인의 마음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여인을 구분하는 그것이야 말로 솔로몬의 지혜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지혜에 의해 다스림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솔로몬의 지혜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솔로몬의 왕국이 어떤 나라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본문의 내용인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솔로몬의 신하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아사리아라는 제사장으로 시작해서 서기관(엘리호렙과 아히야), 사관(여호사밧), 군대장관(브나야), 제사장(사독과 아비아달), 관리장(나단의 아들 아사리아), 대신(사붓), 궁내대신(아히살), 감역관(아도니람) 등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서기관은 나라의 공문서를 작성하고 보관하며 재정을 맡아 일했습니다. 사관이란 지금으로 말하면 비서와 같은 사람을 뜻합니다. 관리장은 열 두 관장을 관리하는 사람이었으며, 궁내 대신은 왕궁의 살림을 맡은 관리이고, 감역관은 세금과 부역을 담당한 직책이었습니다.

 

 

 


여러분께 조금 생소한 직책에 대해 설명을 해 드린 것은, 본문에서 언급된 여러 직책의 신하들 모두 솔로몬 왕국에서는 매우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음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왕국이 유지되고 굳건한 질서 위에서 번성하기 위해서는 위의 직책의 신하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2절의 “그의 신하들은 이러하니라 사독의 아들 아사리아는 제사장이요”라는 구절을 보면 솔로몬의 신하들 중 가장 먼저 제사장이 언급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신하들의 다른 직책을 보면 왕국의 유지와 번성을 위해 필요한 사람들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왕국의 유지와 번성에 어떤 역할을 하는 것입니까? 솔로몬 왕국의 번성을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 기원을 하는 역할로 제사장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까? 제사장은 신에게 드리는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입니다. 이방 나라도 각기 섬기는 신에게 제사를 드렸고 제사를 담당한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이방 나라가 신에게 제사 드리는 것은 국가의 발전과 평안을 기원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하지만 솔로몬 왕국의 제사장은 그런 역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오늘날 목사를 제사장이라고 하면서, 목사들이 모여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도를 한다고 하는 것들은 참된 기독교와 전혀 상관이 없는 이방 종교의 행위에 불과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국가와 민족의 발전을 위해 하나님께 기원하는 역할이 아니었으며, 목사 역시 그런 역할로 세워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왕국의 발전과 전혀 상관이 없는 제사장이 왜 솔로몬의 다른 신하들과 함께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까? 제사장이 없이도 왕국의 존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서기관이나 사관 등 다른 신하들이 없으면 왕국을 유지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발생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시는 왕국과는 상관없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제사장은 죄와 연관이 있는 직책입니다. 죄와 용서, 이것 때문에 제사장이라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이 필요 없다는 것은 죄의 문제에 전혀 관심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나아가 용서라는 것 역시 필요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출 19:6절을 보면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시는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사장 나라는 제사장이 중심된 나라를 뜻합니다. 그러나 제사장이 중심된 나라가 되려면 이스라엘이 자신의 죄를 바라보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자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자신들을 상대하지 않고 제사장을 세워서 제사장으로만 만나신다는 것을 알 것이기에 자연히 제사장이 중심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스라엘 안에서 제사장이 푸대접을 받는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이 죄에 대해 무관심하며 용서에 대한 것 역시 무관심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 왕국이 아무리 뛰어난 신하들로 말미암아 번성하고 강대하게 된다고 해도 제사장이 없다면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이방 나라와 다를 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죄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단지 윤리와 도덕에 어긋나지 않게만 살아가면 착하게 사는 것으로 인식할 뿐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는 항상 떳떳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것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것이 없기에 하나님이 제사장으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역시 필요한 존재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주여 주여’하는 것은 대부분 자신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는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그들을 모른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현장에 오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현장에서만 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만 하나님의 용서의 은총을 받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피로 세우시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로 세워진 교회라면 교회의 번성과 발전에 눈독을 들이지 않습니다. 지금도 피 흘리시며 우리의 죄를 덮으시고 용서하시는 주님의 공로와 은총에 감사하고 기뻐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모아 하나님의 왕국, 즉 천국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인간의 선행이나 윤리 도덕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에게는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다스림에 종속되고 복종하는 것이 제사장으로 인한 용서의 은총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왕과 제사장으로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희생 제물 되셔서 모든 죄를 덮으신 분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긍휼로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랑과 긍휼과 은혜에 복종하는 그들만이 진정한 예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과연 누구입니까? 자신의 죄를 알고 죄로 인해 애통해 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번성하고 성공한다고 해도 결국 심판을 받아야 할 죄인일 수밖에 없음을 아는 그들이야 말로 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오는 은혜와 사랑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바로 이런 원칙과 규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나는 죄인임을 알고 있다’라는 것으로, 자신이 마치 천국 백성 된 것으로 착각하지 마시고 예수에게서 샘솟듯 흘러나오는 용서의 은총에 무릎 꿇으며 감사하면서 제사장이신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고 왕이신 예수님께 복종하는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자신의 번성과 발전에 목메어 살아가지만 그 모든 것들은 죄로 인한 심판 속에 무가치하고 헛된 것으로 묻혀 버린다는 것을 잊지 아니하면서 비록 번성하지 못하고 남들보다 못한 존재로 살아간다고 해도 예수님의 용서의 은총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는 삶을 소원하는가로 자신을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죄인이다’는 말로 죄를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죄인이라고 하면서 죄로 인해 애통하지 않고 회개가 없다면 그는 자신의 죄인 됨을 모르는 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죄인이라고 하면서도 용서의 은총으로 인한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용서의 은총의 기쁨은 세상 것으로 허전한 마음을 채우고도 남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용서의 은총을 말하면서도 여전히 세상 것으로 허전한 마음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없는 인생은 영원한 심판으로 종결된다는 것을 생각하시고 다시금 죄의 자리에서 용서의 은총을 깊이 생각할 수 있기 바랍니다.

 

 

 

 

 

(12강) 열왕기상 4:20-28  솔로몬 왕국(2)

 

<본문>

 

유다와 이스라엘의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게 되매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으며 솔로몬이 하수에서부터 블레셋 사람의 땅에 이르기까지와 애굽 지경에 미치기까지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므로 그 나라들이 공을 바쳐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섬겼더라 솔로몬의 일 일분 식물은 가는 밀가루가 삼십 석이요 굵은 밀가루가 육십 석이요 살진 소가 열이요 초장의 소가 스물이요 양이 일백이며 그 외에 수사슴과 노루와 암사슴과 살진 새들이었더라 솔로몬이 하수 이편을 딥사에서부터 가사까지 모두 다스리므로 하수 이편의 모든 왕이 다 관할한 바 되매 저가 사방에 둘린 민족과 평화가 있었으니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 솔로몬의 병거의 말의 외양간이 사만이요 마병이 일만 이천이며 그 관장들은 각각 자기 달에 솔로몬 왕과 왕의 상에 참여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여 부족함이 없게 하였으며 또 저희가 각기 직무를 따라 말과 준마에게 먹일 보리와 꼴을 그 말의 있는 곳으로 가져왔더라(열왕기상 4:20-28)

 

 

 


<설교>


본문은 솔로몬 왕국의 영화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솔로몬 왕국의 영화는 그 어떤 이방국가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뛰어난 것이었습니다. 21절의 “솔로몬이 하수에서부터 블레셋 사람의 땅에 이르기까지와 애굽 지경에 미치기까지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므로 그 나라들이 공을 바쳐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섬겼더라”는 내용을 보면, 솔로몬의 통치가 이스라엘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강대국인 블레셋과 애굽까지 포함될 정도로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방 강대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을 정도로 솔로몬의 왕국은 강한 힘을 갖게 된 것입니다.

 

 

 


22-23절의 “솔로몬의 일일분 식물은 가는 밀가루가 삼십 석이요 굵은 밀가루가 육십 석이요 살찐 소가 열이요 초장의 소가 스물이요 양이 일백이며 그 외에 수사슴과 노루와 암사슴과 살찐 새들이었더라”는 말을 보면, 솔로몬 왕국은 물자에서도 아주 풍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식량이 필요할 정도로 수가 많았으며, 그 많은 수가 먹고 살기에 전혀 걱정이 없을 정도로 물자가 풍부했던 것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24-25절에서는 솔로몬이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 국가까지 모두 관할함으로써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는 전쟁이 없이 평화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26-28절까지를 보면 솔로몬 왕국의 관장들은 각기 자신이 맡은 직무를 따라 성실하게 일했음을 보여줌으로써 솔로몬 왕국은 경제적, 군사력, 경제력, 모든 면에 있어서 부족함이 없이 안정과 평화를 누렸음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누린 이런 부와 영화가 솔로몬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왕이었던 솔로몬만 부귀영화를 누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힘들고 어렵게 살았던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20절을 보면 “유다와 이스라엘의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많게 되매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으며”라고 말합니다. 바닷가의 모래처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수많은 백성들이 동일하게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삶을 누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태평성대를 누린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원하고 꿈꾸는 축복의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하나님께 원하는 것이 이러한 복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솔로몬의 왕국은 인간이 원하는 바가 완벽히 갖춰진 축복의 왕국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이런 축복을 원합니다. 그리고 축복을 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부르며 축복을 내려달라고 기도하며 복된 날을 꿈꾸며 살아가지만 축복이라는 것이 인간이 소망한다고 해서, 인간이 원한다고 해서, 인간이 힘쓴다고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솔로몬 왕국의 축복이 이스라엘의 백성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여서 열심히 기도했기 때문도 아니고, 하나님을 잘 섬기고 봉사했기 때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솔로몬조차도 하나님께 부귀영화를 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3:13절의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는 내용을 보면 부와 영광은 솔로몬이 구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솔로몬에게 베푼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자신을 위해 오래 사는 것도, 부자 되는 것도, 원수에 대한 보복도 구하지 않고 지혜를 구한 것을 두고 하나님 마음에 맞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구하지 않은 부와 영광을 주실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따라서 솔로몬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를 하였기 때문에 부와 영광을 얻은 것으로 여기고, 부와 영광을 얻기 위해 하나님 마음에 맞는 기도를 하자고 한다면 그 역시 잘못된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애당초 솔로몬은 부와 영광을 목적으로 하고 하나님 마음에 맞는 기도를 하기 위해 지혜를 구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한 것은, 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선악을 분별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자기 백성이 아니라 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선악을 분별하여 항상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사는 백성으로 잘 다스리기 위해 지혜를 구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마음에 맞은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위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솔로몬의 기도로 증거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것이고, 솔로몬이 구하지 않은 것까지 하나님은 주셨는데, 그 혜택을 이스라엘 백성들까지 받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잘 본 것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잘 보인 것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평안을 누린 것이 있다면 그것은 왕 덕분이지 백성 자신들의 공로는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처럼 희한한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을 상대하지 않으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을 보시고 그에 따라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왕과 상대하여 이스라엘에게 벌을 주기도 하시고 복을 주기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왕입니다. 왕이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서있기만 하면 이스라엘은 자연히 복을 누렸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이스라엘의 축복도 같은 시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풍요의 복을 누린 것은 솔로몬이 하나님 마음에 맞은 결과였던 것이지 백성들 자신들의 공로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 받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거나, 십일조를 철저하게 해야 한다거나, 봉사를 해야 한다거나, 착한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과 전혀 상관없는 종교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성경을 곡해하게 되고,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다른 교훈을 끄집어내게 되며 무당의 말과 다를 바 없는 말만 내 뱉게 되는 것은 소위 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솔로몬과 이스라엘이 부와 영광을 누리는 복을 받았지 않았는가? 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면 아직 솔로몬 왕국의 본질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왕국의 본질은 왕이 다스리는 나라이며, 솔로몬 왕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음으로 이스라엘과 유다 모두가 혜택을 입은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 왕국은 ‘내가 잘해야 한다’는 것이 없습니다. 왕 한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맞으면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다만 왕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면 되었던 것입니다. 솔로몬 왕국의 이러한 본질을 이해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즉 그리스도의 다스림 안에 있으면서 ‘내가 잘해야 복 받는다’는 생각을 갖고 산다면 그것이야 말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무지일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마음에 맞는 솔로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평안과 부를 누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맞고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왕이 되심으로 오늘 우리가 하늘의 무한한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는 ‘내가 잘해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나의 모든 복이 왕이신 예수님 덕분에 누리고 있는 것들임을 잊지 않고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백성인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가 뭔가를 갖고 누리는 환경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솔로몬 왕국의 부귀영화가 여러분 보시기에는 천국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솔로몬 왕국의 부귀영화가 눈에 아른거린다면 그것은 진정한 천국의 보물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 솔로몬의 모든 영화가 들에 핀 백합화보다 못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왕이 하나님 마음에 맞음으로 이스라엘이 부귀영화를 누리지만, 솔로몬도 결국 실패한 인간입니다. 그리고 실패한 인간 뒤에 오신 분이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가 무한한 하늘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부귀영화를 누리는 환경이 아니라 영원한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세상의 부와 영화는 헛된 것임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하늘 것에 비해서 땅의 모든 것은 썩어질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소원이 달라지게 됩니다. 땅의 것으로 채워지기를 원했던 소원이, 그리스도를 만난 후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오는 하늘의 것으로 채워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되었을 때 예수님이 나의 왕이시고 나를 다스리신다는 것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기에 주님이 나를 찾아오시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이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로, 감사함으로 그 마음을 가득 채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진심으로 주님을 만났다면 그것은 복권에 당첨된 것에 비할 수 없는 횡재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만난 것이 놀라운 횡재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예수를 믿고 예수님이 나의 왕이라고 해도 왜 솔로몬과 같은 부와 영화가 주어지지 않는가? 라는 의문만 들게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누린 부와 영화보다 더 뛰어난 하늘의 복을 예수님을 만남으로 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복이 세상의 모든 부와 영화보다 더 뛰어난 것임을 알게 되기를 소원하십시오. 하늘의 복을 바라볼 수 없는 어두운 여러분의 눈이 밝아져서 복을 복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소원하십시오. 그럴 때 여러분은 천국을 보게 될 것입니다.

 

 

 

 

 

(13강) 열왕기상 4:29-34  솔로몬 왕국(3)

 

<본문>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같이 하시니 솔로몬의 지혜가 동양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저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와서 예스라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보다 나으므로 그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 저가 잠언 삼천을 말하였고 그 노래는 일천 다섯이며 저가 또 초목을 논하되 레바논 백향목으로부터 담에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저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 다니는 것과 물고기를 논한지라 모든 민족 중에서 솔로몬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 중에서 그 지혜를 들으러 왔더라(열왕기상 4:29-34)

 

 

 


<설교>


지난 시간에 부와 영화를 누리는 솔로몬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솔로몬 왕국은 하나님이 주신 부와 영화로 인해서 주변의 이방국가까지 솔로몬의 통치를 받아야 하는 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솔로몬 왕국이 모든 국가의 중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세상은 이것을 가지고 복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러한 부와 영화를 누리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솔로몬과 같은 부를 누려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복이 자신에게 주어질 것을 아예 기대하지 않고 있을 뿐이지 부와 영화를 싫어할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부와 영화에서 인생의 즐거움을 꿈꿉니다. 부와 영화가 인생의 즐거움을 보장해준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가난은 인생의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만 안겨준다고 생각하기에 가난을 불행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에서 솔로몬의 부와 영화를 바라보게 되면, 솔로몬이 누린 그 모든 것들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은 솔로몬이 누린 부와 영화에 관심을 두지 않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의 내용으로도 드러납니다. 29-30절을 보면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 솔로몬의 지혜가 동양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31절을 보면 솔로몬의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는 말을 합니다. 이처럼 솔로몬의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린 것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심히 많이 주신 지혜와 총명 때문이지 부와 영화 때문이 아니었음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34절에서도 “모든 민족 중에서 솔로몬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 중에서 그 지혜를 들으러 왔더라”는 말을 하는데, 이 구절이 보여주는 것은, 세상이 솔로몬에게로 모여들었다는 것입니다. 자연히 솔로몬이 세상의 중심에 있게 된 것인데, 그 모든 것이 솔로몬의 부와 영화로 인한 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심히 많이 주신 지혜와 총명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솔로몬에게로 모여든 모든 사람들은 솔로몬의 힘에 굴복해서 솔로몬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솔로몬이 누린 부와 영화를 조금 얻기 위해서 솔로몬을 찾아왔다면 이해가 되지만, 기껏 지혜의 말을 듣기 위해 솔로몬을 찾았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십니까? 솔로몬을 찾은 사람들은 솔로몬에게서 그가 누린 부와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지혜의 말을 듣기를 원할 뿐이었습니다. 결국 솔로몬 왕국은 지혜의 나라인 것이지 부와 영화의 나라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점을 생각하며 교회가 무엇인가? 신자가 무엇인가? 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머릿속에서는 항상 부와 영화에 대한 미련이 떠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자신이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아닙니다. 부와 영화를 이용해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자신에게 나오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솔로몬은 단지 하나님이 주신 지혜의 말을 할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지혜의 말을 듣기 위해 솔로몬을 찾는 것입니다. 즉 지혜가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지 사람이 사람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저 이점을 염두에 두고 생각할 것은, 교회는 사람이 사람을 끌어 모으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대 교회의 오류는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가 무엇인가를 모르는 것이고, 지금 자신들을 교회로 모이게 한 힘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를 교회로 모이게 하신 힘에 대해서 무지하기에 스스로 교회를 찾은 것으로 여기게 되고, 결국 나를 부르신 분의 힘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의 모든 것을 인간의 힘으로 이루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힘으로 사람을 끌어 모아 교회를 교회되게 하려고 발상만이 난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교회로 모이십니까? 무엇을 바라보고 오셨습니까? 만약 지혜의 말을 듣기 위해서라면 여러분은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지혜에 이끌려 교회로 모이게 된 것입니다. 목사가 여러분께 주일날 11시에 모이라고 지시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러 사람이 모여서 지혜의 말씀을 듣고자 한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지혜 아래 모여 있는 것이고 지혜가 우리를 붙들어 이 자리에 나오게 한 것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교회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자들이 사람의 힘과 기술과 방법으로 사람을 끌어 모아 자신이 원하는 교회를 구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솔로몬의 지혜의 말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솔로몬의 지혜에 대해서는 이미 솔로몬의 재판 사건을 통해 말씀을 드린 바가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아이 하나를 두고 두 여인이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사건을 솔로몬이 해결하는 것을 통해서 지혜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었는데, 그때 솔로몬은 아이를 둘로 갈라 두 여인에게 각기 나눠주라는 판결을 합니다. 그러나 진짜 어미는 자신이 낳은 아이가 죽는 것을 볼 수 없어 ‘저 여인에게 아이를 주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가짜 어미는 솔로몬의 판결대로 아이를 둘로 갈라서 나눠주라고 합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드러난 것은 아이에 대한 긍휼이며 사랑이었습니다. 긍휼과 사랑은 이론이 아니고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그 결과로서 어떤 행동을 유발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진짜 어미에게 있었던 긍휼과 사랑은 ‘저 여인에게 주라’는 행동을 유발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자식을 향한 긍휼과 사랑을 증거한 것이 솔로몬의 지혜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는 하나님의 긍휼이며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잠 1:7절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는 말을 합니다. 지혜로 말미암아 유발되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여호와를 경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모든 일상생활에서 고스란히 담겨서 표출되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솔로몬의 지혜서인 잠언인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의 모든 행동은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긍휼과 사랑에 의해서 실천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때문에 긍휼과 사랑이 곧 질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솔로몬 왕국은 솔로몬이라는 사람의 통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지혜의 통치를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솔로몬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솔로몬의 부와 그의 힘에 굴복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지혜 아래 모이고 지혜의 통치를 받는 것이 곧 교회인 것입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중심으로 하나로 모이고 있는 것처럼, 교회는 지혜, 즉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 아래 하나로 모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어 우리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분명한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로 불러 모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인간결속을 위해서 ‘단합대회’를 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교회는 인간이 결속된 관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모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관계인 것이지 인간의 결속으로 하나 됨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교회가 이러한 하나 됨의 관계에서 벗어나 있다면, 그것은 인간관계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끼리 단합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서로가 그리스도만을 바라봄으로 하나의 관계는 자연히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고집스럽게, 그야말로 고집스럽게 그리스도만을 증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그리고 긍휼과 사랑이 죄인 된 우리에게 어떤 복을 안겨 주었는가를 그리스도를 증거함으로써 나타낼 때, 그 긍휼과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 때문에 모여드는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솔로몬 왕국이었고, 지금 교회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화평이 아니라 검을 주려고 오셨다고 말씀한 것도 인간이 꿈꾸는 화평, 즉 인간의 결속과 친분관계를 이루어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관계를 해체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새로운 관계를 이루시기 위해 오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관계는 설교자가 복음만을 전했을 때, 그리스도만을 증거 했을 때 거기에 동의하며 그리스도를 향한 같은 마음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하나 된 관계 안에서는 서로가 죄인임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것만이 있을 뿐입니다. 자연히 예수님의 십자가만 높이게 되기 때문에 자기 자랑이 없고 서로가 죄인임을 알기에 높고 낮음이 없게 되고, 분쟁과 다툼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로 이루어지는 질서인 것입니다. 세상은 부와 영화를 꿈꾸며 살아갑니다. 부와 영화에서 인생의 즐거움을 맛보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지혜가 무엇인가를 알지 못한 세상의 실체입니다.

 

 

 


하지만 신자가 원하는 것은 지혜입니다. 부와 영화가 인생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알고 긍휼과 사랑의 실체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참된 지혜가 나를 즐겁게 함을 믿으며 지혜를 구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릴 것은, 지혜를 소망하는 마음 하나만 가지고 모이자는 것입니다. 지혜의 소문을 듣고 지혜를 듣기 위해 솔로몬을 찾아온 사람들처럼 오직 그리스도를 듣기 위해 모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자연히 실천적으로 표출되어질 것입니다.

 

 

 

 

 

(14강) 왕상 5:1-6  성전 건축

 

<본문>

솔로몬이 기름 부음을 받고 그 부친을 이어 왕이 되었다 함을 두로 왕 히람이 듣고 그 신복을 솔로몬에게 보내었으니 이는 히람이 평일에 다윗을 사랑하였음이라 이에 솔로몬이 히람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당신도 알거니와 내 부친 다윗이 사방의 전쟁으로 인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 원수들을 그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기다렸나이다 이제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사방의 태평을 주시매 대적도 없고 재앙도 없도다 여호와께서 내 부친 다윗에게 하신 말씀에 내가 너를 이어 네 위에 오르게 할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리라 하신 대로 내가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려 하오니 당신은 영을 내려 나를 위하여 레바논에서 백향목을 베어 내게 하소서 나의 종과 당신의 종이 함께할 것이요 또 내가 당신의 모든 말씀대로 당신의 종의 삯을 당신에게 붙이리이다 당신도 알거니와 우리 중에는 시돈 사람처럼 벌목을 잘하는 자가 없나이다(열왕기상 5:1-6)

 

 

 


<설교>


본문은 솔로몬의 성전건축에 대한 내용입니다. 성전건축에 대한 내용이 나올 때마다 먼저 말씀드리게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에 등장하는 성전건축이 오늘날의 예배당 건축에 대한 그 어떤 당위성도 제공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니, 복음사업이니, 복 받는 길이니 하면서 예배당 건축을 정당화하며 교인들로 하여금 예배당 건축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복음을 빌미로 하여 개인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거짓교사의 외침에 불과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 세상을 심판하실 때 최후로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 세워진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이지 예배당이 아닌 것입니다. 예배당은 단지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이는 장소, 건물일 뿐입니다. 예배드리는 곳이라고 하여 거룩의 의미를 부여하고, 거룩한 하나님의 집이니만큼 내가 사는 집보다 더 잘 지어야한다고 하면서 온갖 장식과 재료로 호화롭게 치장을 한다고 해도 건물은 건물일 뿐 다른 무엇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예배당을 건축하든 구입을 하든 그것은 그 교회의 형편과 결정을 따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일컬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일인 양 선전한다면 그것은 복음을 벗어난 자들의 악한 행태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건물을 건물로만 바라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곳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말씀에 대한 무지함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여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000억을 들여 지은 예배당에서 드리는 예배와 임대하여 얻은 건물에서 드리는 예배가 다르겠습니까? 그냥 똑같은 기독교 의식으로서의 예배일뿐입니다. 다르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그냥 기분상의 문제일 뿐이지 하나님께서 예배당에 따라 예배를 달리 구별하시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기억하시고 본문의 내용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찾아간다면 분명 1000억짜리 예배당을 건축한 것으로 인한 감격과 감사에 비할 바가 없는 놀라운 감격과 감사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먼저 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내 부친 다윗에게 하신 말씀에 내가 너를 이어 네 위에 오르게 할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리라 하신대로 내가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려 하오니”라고 말하는 것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신 일인 것처럼 오해합니다. 성전 건축은 다윗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짓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삼하 7장을 보면 다윗은 나단 선지자에게 자신은 궁에 거하는데 하나님의 법궤는 휘장, 즉 초라한 곳에 있음을 말합니다.

 

 

 


다윗의 의도를 아신 하나님은 다윗에게 지금까지 집이 없었어도 장막과 회막에 거하면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며 이스라엘을 인도하셨음을 말합니다. 분명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짓고자 하는 다윗의 의도가 잘못되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끝까지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도를 거부하시지 않고 솔로몬이 건축하도록 허락을 하시는 것입니까?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쁘게 여기시고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 거하시며 이스라엘을 복 주셨던 것이 아닙니다.

 

 

 


행 7:47-50절을 보면 스데반 집사가 공회로 붙들려 와서 대제사장 앞에서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는 말을 합니다. 스데반 집사의 말은 비록 솔로몬이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지었다고는 하지만 정작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손으로 지은 집에는 계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건축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복 주신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왕상 9:3-5절을 보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는 말씀을 합니다.

 

 

 


솔로몬의 성전 건축이 마쳐졌을 때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건축하느라고 수고했으니 복을 주겠다는 말씀을 하지 않습니다. 성전과 상관없이 솔로몬이 다윗의 행함같이 행하고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솔로몬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합니다.

 

 

 


반면에 법도와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거룩하게 구별한 전이라 할지라도 던져 버리겠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성전은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는 집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법도와 계명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물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 법도와 계명을 지켜 행하면 성전은 무사히 존재하는 것이고, 법도와 계명을 지키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면 성전이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솔로몬에게 성전을 지으라고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솔로몬이 손으로 지은 성전은 결국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솔로몬의 성전은 이스라엘의 복의 도구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전을 무너뜨림으로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존재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도구로 세워진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예배당을 지으면 하나님께 복 받는다는 말을 하는 것이야 말로 예배당을 자신의 자존심과 이름을 드러내는 용도로만 여기는 자들의 거짓된 말이라는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성전을 건축할 것을 허락하심으로써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은 무너질 수밖에 없지만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하나님의 손으로 지으신 성전이 있음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삼하 7:11절을 보면 다윗이 집을 짓고자 하는 것을 거부하신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겠다는 말씀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손으로 지어진 성전이 이스라엘에게 복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집이 이스라엘에게 복으로 함께 할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집을 바라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지으시는 집은 무엇입니까? 성전은 인간이 하나님께 나오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성전에서는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은 아무리 크고 화려하다고 해도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로 인해 더러워진 인간이 거룩하신 분 앞에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옛날 구약의 사람들은 이것을 성막에서 실감을 해야 했습니다. 제사장이 자기 멋대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죽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사람들은 이것을 실감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어떻게 나가든 죽어 나가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부른다고 해도 벙어리가 되거나 병에 걸려 죽는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멋대로 부르고 제멋대로 생각하고 제멋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스라엘을 내세워서 우리에게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은, 창세 이후로 여전히 하나님의 생명에서 멀어진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즉 죽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죄로 인한 것입니다.

 

 

 


따라서 죄가 걷어지면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능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죽음에 처한 자를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영영한 복입니다. 그런데 이 영영한 복이 우리의 죄 값을 주님이 대신 치르심으로써 가능해졌다는 것입니다. 옛날 성막에서 정결한 제물의 피가 이스라엘의 죄 값을 치름으로 이스라엘의 죄가 용서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으신 집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흘린 피가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신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누구든 그리스도 안에서 죄가 걷혀지는 것이고 사망과 어둠에서 해방이 되고 생명과 빛의 자녀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영영한 복으로 오실 참된 성전이신 그리스도를 보여주고자 하는 모형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에 매이고 성전을 바라보는 것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고전 3:16절을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는 말을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성전은 집이 아닙니다. 성령이 거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지체로 존재하는 모든 신자를 성전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어야 할 성전은 건물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2:21-22절을 보면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죽은 우리를 살리시고 택하시고 부르신 것은 성전으로 지어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시고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과 사랑에 감사하며 모이면 됩니다. 이들이 성령 받은 자들이고 하나님은 이들 곧 택한 자를 부르셔서 성전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영영한 복에 거하게 된 사람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은 그 어떤 것도 복의 통로가 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만 소망하는 그들이 곧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15강) 열왕기상 5:7-18  성전의 의미

 

<본문>

히람이 솔로몬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가로되 오늘날 여호와를 찬양할지로다 저가 다윗에게 지혜로운 아들을 주사 그 많은 백성을 다스리게 하셨도다 하고 이에 솔로몬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당신의 기별하신 말씀을 내가 듣고 내 백향목 재목과 잣나무 재목에 대하여는 당신의 바라시는 대로 할지라 내 종이 레바논에서 바다로 수운하겠고 내가 그것을 바다에서 떼로 엮어 당신이 지정하는 곳으로 보내고 거기서 그것을 풀리니 당신은 받으시고 나의 원을 이루어서 나의 궁정을 위하여 식물을 주소서 하고 솔로몬의 모든 원대로 백향목 재목과 잣나무 재목을 주매 솔로몬이 히람에게 그 궁정의 식물로 밀 이만 석과 맑은 기름 이십 석을 주고 해마다 그와 같이 주었더라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신 고로 히람과 솔로몬이 친목하여 두 사람이 함께 약조를 맺었더라 이에 솔로몬 왕이 온 이스라엘에서 역꾼을 불러 일으키니 그 역꾼의 수가 삼만이라 솔로몬이 저희들을 한 달에 일만 인씩 번갈아 레바논으로 보내매 저희들이 한 달은 레바논에 있고 두 달은 집에 있으며 아도니람은 감독이 되었고 솔로몬에게 또 담꾼이 칠만 인이요 산에서 돌을 뜨는 자가 팔만 인이며 이 외에 그 역사를 동독하는 관리가 삼천삼백 인이라 저희가 일하는 백성을 거느렸더라 이에 왕이 영을 내려 크고 귀한 돌을 떠다가 다듬어서 전의 기초석으로 놓게 하매 솔로몬의 건축자와 히람의 건축자와 그발 사람이 그 돌을 다듬고 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재목과 돌들을 갖추니라(열왕기상 5:7-18)

 

 

 


<설교>


세상은 자기 일에만 모든 관심을 두고 살아갈 뿐,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고 알 필요성도 느끼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에서도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이나 그 뜻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다만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신다는 것만 생각할 뿐입니다. 하나님께는 달리 하나님의 일이라고 할 것이 없고, 굳이 있다면 택하신 자기 백성을 위해서 일하시는 것이 있을 뿐이라고만 생각합니다.

 

 

 


이로 인해서 현대 교인들의 입에서 들어보기 어려운 말은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피가 지금도 우리의 모든 죄를 덮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고백의 말을 들어보기 힘들게 된 것은 결국 관심이 다른 것에 있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에서의 자신의 문제에만 관심을 둠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오셔야만 했던 이유인 죄 문제에 대해서는 희미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예수님의 죄 용서에 대한 말보다는 남북통일이나 국가의 경제적 발전 그리고 교회 부흥 등과 같은 말을 더 즐겨 듣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문제가 더욱 현실적으로 와 닿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하시면서 ‘나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때 과연 여러분의 죄가 무엇인가를 선명하게 바라보시면서 그러한 말을 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냥 입에 발린 말을 습관적으로 내뱉는 것입니까? 죄인이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자신을 괜찮은 존재로 생각하고 또한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죄인에게서 나와야 할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심령 깊숙한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고백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기도할 때 자신의 죄를 선명하게 볼 수 있기를 구해야 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불의하고 연약한 존재인가를 깨닫고 자신을 부인할 수 있기를 구해야 합니다. 항상 죄 속에서 불의한 자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니만큼 그러한 기도야 말로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현실을 제대로 깨달은 자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을 현실로 인정하는 사람들의 기도는 십자가가 보여주는 인간의 참된 현실이 아닌 눈에 보이는 세상의 현실을 위해 기도할 뿐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자기 자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합니다. 언제나 철저히 자기편이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십자가에 대해 원수로 서 있는 자신을 보지 못하는 것이고 따라서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죄인의 고백도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태의 인간이 말하는 예수님이 진짜일까요? 이러한 인간이 고백하는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것이 자신의 죄를 들여다보는 가운데서 나오는 진실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가 말하는 믿음이 과연 주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일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 안에 성전을 세우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성전에서 하나님을 잘 섬기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라는 취지로 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인간의 손으로 지은 것 자체를 받으시지 않을 정도로 인간은 불의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성전의 무너짐으로 자각하고 발견하라고 성전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지금의 교인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취지에 대해 무지하기에 성전을 예배당이라고 하면서 예배당 건축에 열을 올리고, 예배당을 하나 짓고 나면 마치 하나님 앞에서 큰일을 한 것처럼 우쭐거리고 헌당식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의 공적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과연 하나님이 이러한 일에 대해 기뻐하실 것인지, 그러한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한 것인지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도통 생각지도 않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인간은 자기편이기에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옳은 것으로 여기는 고질적 병폐라고 봐야 합니다.

 

 

 


요즘 많이 부르는 복음 성가 중에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 가사를 보면 인간은 사랑 받는 권리를 가지고 태어난 것으로 말하지만 이것이 자기편에 서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결과입니다. 자기편에 서서 하나님을 바라보기에 하나님을 자신을 사랑하는 분으로만 여길 뿐, 자신을 무너뜨리고 나에게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도 하나님의 진노는 보지 못하고 다만 나를 구원하시기 위한 사랑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십자가 앞에 선들 죄가 보이겠습니까? 그래서 솔로몬의 성전건축에 대한 내용을 대하면서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속에 성전을 두셨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성전 건축에 이방인인 히람이 적극 참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6절을 보면 솔로몬이 히람에게 벌목하는 일을 부탁합니다. 이스라엘에는 그만한 기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부탁에 대해 히람은 “당신의 기별하신 말씀을 내가 듣고 내 백향목 재목과 잣나무 재목에 대하여는 당신의 바라시는대로 할찌라 내 종이 레바논에서 바다로 수운하겠고 내가 그것을 바다에서 떼로 엮어 당신이 지정하는 곳으로 보내고 거기서 그것을 풀리니 당신은 받으시고 나의 원을 이루어서 나의 궁정을 위하여 식물을 주소서”(8,9절)라고 답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방인이 성전 건축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성전 건축에 이방인이 참여하도록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성전을 세우심으로써 장차 하나님이 세워주실 참된 성전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지난 시간 본문인 2-4절의 “이에 솔로몬이 히람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당신도 알거니와 내 부친 다윗이 사방의 전쟁으로 인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 원수들을 그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기다렸나이다 이제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사방의 태평을 주시매 대적도 없고 재앙도 없도다”는 내용을 보면, 성전이 솔로몬 때에 지어진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전쟁으로 인해 성전을 건축하지 못했다는 것은, 전쟁 때문에 바빴기 때문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 건축은 여호와의 이름을 위한 것이었는데, 여호와의 이름이란 온 세상을 그 이름 앞에 굴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아직 전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에 굴복하지 않은 원수가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그 원수들을 그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기다렸나이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사방의 태평을 주시고 대적도 없고 재앙도 없다는 것은, 원수가 여호와의 이름 앞에 굴복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7절의 “히람이 솔로몬의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가로되 오늘날 여호와를 찬양할찌로다 저가 다윗에게 지혜로운 아들을 주사 그 많은 백성을 다스리게 하셨도다”는 히람의 말은 여호와의 이름에 굴복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고, 따라서 히람을 성전건축에 참여하게 하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 앞에 모든 원수가 굴복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전의 의미입니다.

 

 

 


성전은 단순히 제사를 드리고 의식을 행하는 장소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성전은 단지 의식을 행하는 장소적이고 공간적인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에 성전을 현대의 예배당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성전이 세워진 것은 여호와의 이름 앞에 모든 자의 굴복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건축된 성전이 무너진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호와의 이름에 굴복하지 아니한 이스라엘의 죄악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여호와께서 성전 건축을 마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 이 전이 높을찌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 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신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한다는 것은 여호와께 굴복하지 아니함을 뜻합니다. 그럴 때 거룩히 구별한 성전이라도 던져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성전이 무너졌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원수로 행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성전의 의미인 것입니다. 성전을 무너뜨림으로써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원수임을 증명하시는 것입니다. 성전은 솔로몬과 히람이 연합하여 위대한 일을 이루었음을 증거하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온 세상이 굴복해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 앞에 굴복한 자로 나오는 그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성전은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기능으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여호와께 복종하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계명과 율례를 지키지 않고 우상을 섬겼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에게는 스스로 여호와께 복종할 의가 없으며, 있다면 자기편에 서서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하나님의 원수된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원수의 세계에 인간의 손이 아닌 하나님의 손으로 참된 성전을 세우셨는데 세상은 참된 성전을 거부해 버립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손으로 지은 것을 참된 성전으로 고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참된 성전은 예수님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으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에게 선포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손으로 지은 것, 우리 손으로 행한 것을 바라보고 그것을 들고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원수된 것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예수님이 친히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심으로 의를 이루셨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선포 앞에서 인간은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고백이 있을 따름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이름 앞에 굴복하는 것이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누구든 여호와께서 세우신 참된 성전 앞에 굴복하는 그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가 참 이스라엘이며 굴복하지 아니한 모든 사람이 이방인으로 일컬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이 무너지고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일 뿐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참된 성전에서 그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고, 내가 곧 원수임을 자각한다면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고백이 있게 되는 것이고,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된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 가지고 있는 의미입니다.

 

 

 

 

 

(16강) 열왕기상  6:1-10  하나님이 없는 성전

 

<본문>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사백팔십 년이요 솔로몬이 이스라엘 왕이 된 지 사 년 시브월 곧 이월에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더라 솔로몬 왕이 여호와를 위하여 건축한 전은 장이 육십 규빗이요 광이 이십 규빗이요 고가 삼십 규빗이며 전의 성소 앞 낭실의 장은 전의 광과 같이 이십 규빗이요 그 광은 전 앞에서부터 십 규빗이며 전을 위하여 붙박이 교창을 내고 또 전의 벽 곧 성소와 지성소의 벽에 연접하여 돌아가며 다락들을 건축하되 다락마다 돌아가며 골방들을 만들었으니 하층 다락의 광은 다섯 규빗이요 중층 다락의 광은 여섯 규빗이요 제 삼층 다락의 광은 일곱 규빗이라 전의 벽 바깥으로 돌아가며 턱을 내어 골방 들보들로 전의 벽에 박히지 않게 하였으며 이 전은 건축할 때에 돌을 뜨는 곳에서 치석하고 가져다가 건축하였으므로 건축하는 동안에 전 속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모든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으며 중층 골방의 문은 전 오른편에 있는데 나사모양 사닥다리로 말미암아 하층에서 중층에 오르고 중층에서 제 삼층에 오르게 하였더라 전의 건축이 마치니라 그 전은 백향목 서까래와 널판으로 덮었고 또 온 전으로 돌아가며 고가 다섯 규빗 되는 다락방을 건축하되 백향목 들보로 전에 연접하게 하였더라(열왕기상 6:1-10)

 

 

 


<설교>


여러분들은 교회에서 무엇인가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까? 교회를 나옴으로써 어떤 재미있는 일이 주어지기를 원하십니까? 교회가 여러분의 기분을 좋게 해주기를 원하십니까? 하지만 교회를 바라보면서 뭔가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교회와 자신을 따로 분리하여 생각한다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즉 교회 따로, 나 따로라는 시각으로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어떤 식당에 가면 ‘따로 국밥’이라는 메뉴가 있습니다. 처음에 저는 따로 국밥이 어떤 것인가 호기심으로 먹어봤는데 별것 아니었습니다. 그냥 국과 밥을 따로 내어 놓는 것이 따로 국밥이었습니다. 원래 국밥은 국과 밥을 함께 말아서 내어 놓는데 국과 밥을 따로 분리하여 ‘따로 국밥’이라고 이름 붙인 것입니다.

 

 

 


교회는 나와 교회가 따로 분리된 관계가 아닙니다. 국과 밥이라는 각기 다른 것이 하나 되어 국밥인 것처럼 각기 다른 몸이 모여서 교회라는 관계가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체가 교회이기에 교회가 나에게 재미를 제공해주기를 원한다는 것은, 곧 내가 나에게 재미를 제공해주기를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과 교회를 따로 분리하여 생각함으로써 교회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것을 기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서 항상 심판이 선포되어진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원하는 재미있는 일은 없고 듣기 거북한 심판만 선포됨으로 인상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출석하는 교회에 대해 불만이 쌓여가게 되겠지요.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이 종교생활의 현장이라는 것을 눈치 채야 할 것입니다.

 

 

 


시편 84:1-4절을 보면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고 찬송합니다.

 

 

 


여기 보면 영혼이 쇠약할 정도로 주의 궁정을 사모하는 마음을 고백하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의 궁정을 사모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기에 영혼이 쇠약하였다는 말을 할까요?
또한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주의 제단에서 참새와 제비가 둥지를 틀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집이라는 것은 안식처입니다. 집을 새끼 둘 보금자리로 표현하는 것이 바로 그것을 말해줍니다. 새끼를 둘 보금자리는 안전한 안식처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말은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비도 안식처를 얻는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 84편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궁정이나, 주의 제단, 주의 집이라는 것은 모두 지금의 교회와 연관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즉 여러분과 연관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84편의 저자와 같은 여호와의 궁정을 향한 사모하는 마음이 없고, 주의 제단에서 안식처를 얻지도 못한 채, 교회를 그저 종교단체로만 인식을 하면서 재미만 누리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이 없이 교회를 찾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교회됨은 예수 그리스도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흘림이 변할 수 없는 교회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없기에 다른 것에 관심을 두게 되고 그 관심이 충족되지 않기에 불만을 가지는 것입니다.

 

 

 


교회의 변할 수 없는 본질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림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서 피의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난 자들이 곧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나를 살리신 그리스도만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모이게 되는 것이기에 다른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가 그리스도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을 둔다면 그것은 스스로 교회 아님을 인정하는 것일 뿐입니다. 비록 예수를 위해서 한다고 스스로의 당위성을 주장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1절에서도 보면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였다고 말합니다. 성전 건축이라는 거대한 공사를 시작하는 솔로몬의 입장에서는 분명 여호와를 위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여호와를 모시기 위한 의도로 짓는 성전이기에 그런 생각을 갖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이미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다윗 왕 때부터 인간의 손으로 지은 집을 거부하셨습니다. 인간의 손으로 지은 집에 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성전은 초라하다거나 화려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외형이 성전의 본질이 아니란 것입니다. 본문에는 성전의 규모에 대해 언급하고 14절부터는 성전 내부 장식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규모는 그다지 큰 건물은 아니었다고 해도 예전의 성막보다는 큰 것이었고 내부 역시 백향목과 잣나무 보석 등으로 장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자신이 정성을 들여서 7년간 건축한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것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솔로몬이 자신이 지은 성전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했다면 과연 7년의 세월을 허비하면서 성전을 지었을까요? 솔로몬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집은 자신의 손으로 지을 수 없고, 그 어떤 인간의 손으로도 지어질 수 없는 것임을 몰랐던 것입니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붕어빵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외형이 붕어를 닮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하면 성전이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그 외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만을 성전이라고 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상 세계에는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궁정, 즉 성전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손으로 지은 성전을 허락하시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라고 했습니까? 그것은 ‘나는 너희들의 손으로 지은 곳에는 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증거로 솔로몬이 지은 성전을 무너뜨려 버리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거룩한 성전으로 여기는 집이 그들과 함께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자신의 불의함과 악의 결과로 인해 패망을 당하게 되고 성전도 무너지게 됩니다. 거룩한 성전이 그 어떤 기능도 하지를 못한 것입니다. 말 그대로 건물이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손으로 지은 것은 자신들의 죄와 심판에 대해 그 어떤 역할도 할 수 없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성전이 이와 같은데 하물며 예배당이라고 해서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다고 해서 하나님께 칭찬을 받고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11-13절을 보면 열심히 성전을 짓고 있는 솔로몬에게 찾아오셔서 “네가 이제 이 전을 건축하니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나의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한 말을 네게 확실히 이룰 것이요 내가 또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거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더라”는 말씀을 합니다. 성전 건축한다고 수고 한다’라는 칭찬을 하신 것이 아니라 성전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하나님의 법도를 따르고 율례를 행하며 계명을 지키면 다윗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고 이스라엘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이 성전을 짓지 않아도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법도를 따르고 율례를 행하고 계명을 지키면 이스라엘을 지키십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성전을 건축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는 인간의 성전 사상일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성전 사상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마 26:61절을 보면 “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을 죽일 죄를 찾던 사람들이 한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거룩한 성전을 모독한 참람한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잘못된 성전사상으로 인해 성전의 모퉁이 돌로 오신 예수님이 버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성전의 본질은 인간의 죄로 인해 희생하는 거룩한 제물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 받는 것에 있습니다. 성전의 크기나 화려함이 죄사함의 기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제물의 희생이 곧 죄사함의 기능을 가지고 인간들 세계에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실체로 다가온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인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생겨난 무리를 교회라고 하며,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리고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은 인간의 손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피로써만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전, 즉 교회는 그리스도를 사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피 흘림이 자신의 존재의 본질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자각하지 못한 자는 그리스도의 피 흘림에 대해 마음이 전혀 동요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피 은혜라는 말은 하지만 은혜와 자신을 하나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따로 국밥’처럼 별개의 문제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역시 자신과 분리되어 있는 다른 조직체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집을 지으면서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구조로 만들어 넣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만약 에덴동산을 만든다면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만들어 놓겠습니까? 아마 빼 버릴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불리한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에덴동산에 인간이 원하지 않은 선악과가 세워졌습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에덴동산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은 우리의 손으로 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것이기에 교회에 대해 내가 원하는 것을 요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스도의 피로서 선포되어진 용서의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즉 신자는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것을 누리기 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교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누리는 것이 없이 받고자 하는 것만 있을 때 인간은 종교적 인물로 전락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것이 없이 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죄인 됨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은, 죄인된 인간에게 주어진 용서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은혜 입은 자의 내용은 용서인 것입니다. 앞서 시편 84편에서 말씀드린 여호와의 궁정, 주의 제단, 주의 집이 의미하는 것은 죄사함입니다. 그러므로 죄인 됨을 아는 자에게 여호와의 궁정, 주의 제단, 주의 집은 안식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서 신앙생활에서 제일 기쁜 때는 자신이 죄인임을 온 마음으로 자각할 때여야 합니다. 사업이 잘되고, 돈 벌고, 자식이 잘된 때가 아닙니다. 내가 죄인임을 자각하고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그 순간이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의 순간임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누가 뭐래도 그리스도만을 고집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기쁨과 즐거움이 그리스도께 있으니 내가 어디로 가겠는가? 라는 고백이 나올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은 성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에 마음을 두지 마시고, 진심으로 거룩한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성전은 나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 피 흘려 죽으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송하는 무리들입니다. 이러한 성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죄 사함의 은혜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의 궁정을 영혼이 쇠약할 정도로 사모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17강) 열왕기상 6:11-13  하나님의 마음

 

<본문>

여호와의 말씀이 솔로몬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네가 이제 이 전을 건축하니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나의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한 말을 네게 확실히 이룰 것이요 내가 또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거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더라(열왕기상 6:11-13)

 

 

 


<설교>


사람이 하나님께 자신의 성의를 보이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자신에게로 붙들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의 정성과 성의를 하나님께서 외면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사랑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에 의한 행동으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지 못한 무지로 인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나아오실 때는 인간이 보이고 있는 정성이나 성의와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을 가지고 오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값없이 베풀어 주십니다. 그것을 성경은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시는 사랑 앞에서 인간이 나름대로 보이고 있는 정성이나 성의라는 것은 부끄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이 너무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만난 사람이라면 자신의 성의라며 뭔가를 들고 나온 자신의 두 손이 부끄러워 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값없이 베푸신 사랑에 감사하고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들 세계 속에서 환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천대를 받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의 사랑이 인간들에게 천대를 받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이 나타내 보이는 모든 정성과 성의를 무가치한 것으로,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되 인간이 보이는 정성과 성의를 보시고 그에 따라 차별적으로 하신다면 자기 입맛에 맞는 하나님일 것입니다. 그런데 애초부터 하나님은 인간의 그 어떤 정성과 성의 자체를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버리시니 이에 대해 사람들의 안색이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인이 하나님 앞에서 안색이 변하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지 않습니다. 가인이 하나님께 바친 제물은 자기 나름대로 준비한 정성이고 성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의 성의를 거부해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복수로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결국 아벨이 흘린 피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들이 어떤 악한 마음을 가지고 행동하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되었습니다. 인간들이 하나님께 정성과 성의를 다할 때는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무시할 수 없고, 무시해서도 안된다는 사고방식이 인간의 악한 마음인 것입니다. 이 악함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시되고 거부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거절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하고, 열심히 정성과 성의를 다해 성전을 짓고 있는 솔로몬에게 찾아오셔서 “네가 이제 이 전을 건축하니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나의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한 말을 네게 확실히 이룰 것이요 내가 또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거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더라”(12,13절)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 것은, 인간 나름대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하나님께 보여드리는 정성이며 열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정성과 열심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정성을 받아들이신다면 ‘네가 이런 정성을 내게 보이니 너의 정성을 봐서 네 아비 다윗에게 한 말을 확실히 이루어 주겠다’ 뭐 이런 식의 말씀을 하시는 것이 인간의 입맛에 맞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네가 이제 이 전을 건축하니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나의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네가 이 전을 건축한 것과 상관없이 내가 보는 것은 네가 내 법도를 따르고 율례를 행하고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로 살아가느냐는 것이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성전을 건축하는 솔로몬의 정성을 보시고 그 정성이 귀해서 다윗에게 한 말을 이루시겠다고 하신다면, 중요한 것은 솔로몬의 정성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전을 건축하는 솔로몬의 마음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면 그 마음이 전혀 변함없이 지속되어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한 말을 이루실 수 있다는 조건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위하는 솔로몬의 마음이 지속되었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마음이 변하지 않고 지속될 수 있는 것입니까?

 

 

 


왕상 11:9절을 보면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저에게 진노하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잘 알고 계십니다. 인간이 어떻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시기에 전을 건축하는 솔로몬의 정성이 아무리 하나님을 위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도 그 정성을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지으면서 하나님을 위한 자신의 마음에 스스로 도취되어 있을 수도 있는 솔로몬에게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언약은 전을 건축하는 정성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계명과 율례를 그대로 지켜 행할 때 이루어짐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솔로몬에게 하신 이 말씀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솔로몬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의 언약과 법도를 지키지 않을 것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솔로몬에게 계명과 율례를 지켜 행하라는 것도 하나마나한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솔로몬이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않을 것을 알고 계셨으면서 계명과 법도를 지키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뭔가 하는 것입니다.

 

 

 


왕상 11:33절을 보겠습니다. “이는 저희가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숭배하며 그 아비 다윗의 행함 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치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나의 법도와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함이니라
여기까지 보면 이미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행하지 않고 다윗의 행함같이 하지 아니한 솔로몬에게 남은 것은 여호와의 진노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34-35절을 보면 “그러나 내가 뺀 내 종 다윗이 내 명령과 내 법도를 지켰으므로 내가 저를 위하여 솔로몬의 생전에는 온 나라를 그 손에서 빼앗지 아니하고 주관하게 하려니와 내가 그 아들의 손에서 나라를 빼앗아 그 열 지파를 네게 줄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진노 아래 멸망을 받아야 할 솔로몬의 나라를 그 생전에는 빼앗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러한 은혜를 주시는 것은, 솔로몬 때문이 아니라 다윗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를 지켰기 때문에 다윗을 보시고 솔로몬의 생전에는 그 나라를 보존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솔로몬이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것을 3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솔로몬의 아들에게는 한 지파를 주어서 다윗의 등불이 끊어지지 않게 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내실 다윗 자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끊어짐을 면할 것임을 암시하는 내용입니다.

 

 

 


결국 솔로몬은 성전을 짓는 자신의 정성이나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다윗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끊어짐을 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자신을 살리는가를 전혀 알지 못하고 다만 성전을 지음으로써 자신의 정성과 마음을 보이고자 하는 솔로몬에게 찾아오셔서 솔로몬이 지키지도 아니할 계명과 율례를 지킬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솔로몬을 살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바라보게 하기 위한 것이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본문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으셨습니까? 오늘날도 사람들도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 것처럼, 이런저런 모습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정성과 열심을 보이려고 애를 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에 전혀 눈길조차 주지도 않으시는데,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위하겠다고 난리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이 무참히 짓밟히고 무시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다윗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의 정성과 열심을 동원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겠다는 것인데 하나님은 오직 율례와 법도를 지킬 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율례와 법도를 지켜 행한 자가 없기 때문에 율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신 다윗 자손을 보내시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끊어짐을 면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솔로몬처럼 전을 짓는 것으로 하나님을 위한 인간의 정성과 열심을 보이겠다고 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마음을 외며하고 그리스도의 오심을 의지하지 않는 것에 불과할 뿐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흘리신 피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약속에 거했던 자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입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하나님께 뭔가를 보여야 한다고 우기는 것은 하나님이 가지고 오신 사랑의 귀함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사랑의 맛을 본 사람이라면 사랑 앞에 인간이 보이고자 하는 그 어떤 것도 무가치하고 부끄러운 것일 수밖에 없음을 자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했습니까? 아들을 죽이시는 사랑 앞에서 우리가 보일 수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인간은 수시로 변합니다. 그런 우리가 믿을 것은 우리의 정성과 열심이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지지 않도록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뭔가 들고 나오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께 두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18강) 열왕기상 7:1-12  왕궁 건축

 

<본문>

솔로몬이 자기의 궁을 십삼 년 동안 건축하여 그 전부를 준공하니라 저가 레바논 나무로 궁을 지었으니 장이 일백 규빗이요 광이 오십 규빗이요 고가 삼십 규빗이라 백향목 기둥이 네 줄이요 기둥 위에 백향목 들보가 있으며 기둥 위에 있는 사십오 개 들보를 백향목으로 덮었는데 들보는 한 줄에 열다섯이요 또 창틀이 세 줄로 있는데 창과 창이 세 층으로 서로 대하였고 모든 문과 문설주를 다 큰 나무로 네모지게 만들었는데 창과 창이 세 층으로 서로 대하였으며 또 기둥을 세워 낭실을 지었으니 장이 오십 규빗이요 광이 삼십 규빗이며 또 기둥 앞에 한 낭실이 있고 또 그 앞에 기둥과 섬돌이 있으며 또 심판하기 위하여 보좌의 낭실 곧 재판하는 낭실을 짓고 온 마루를 백향목으로 덮었고 솔로몬의 거처할 궁은 그 낭실 뒤 다른 뜰에 있으니 그 공작이 일반이며 솔로몬이 또 그 장가든 바로의 딸을 위하여 집을 지었는데 이 낭실과 같더라 이 집들은 안팎을 모두 귀하고 다듬은 돌로 지었으니 척수대로 톱으로 켠 것이라 그 기초석에서 처마까지와 외면에서 큰 뜰에 이르기까지 다 그러하니 그 기초석은 귀하고 큰 돌 곧 십 규빗 되는 돌과 여덟 규빗 되는 돌이라 그 위에는 척수대로 다듬은 귀한 돌도 있고 백향목도 있으며 또 큰 뜰 주위에는 다듬은 돌 세 켜와 백향목 두꺼운 판자 한 켜를 놓았으니 마치 여호와의 전 안뜰과 낭실에 놓은 것 같더라(열왕기상 7:1-12)

 

 

 


<설교>


본문은 솔로몬이 자신이 기거하는 왕궁을 건축한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1절에서 “솔로몬이 자기의 궁을 십삼 년 동안 건축하여 그 전부를 준공하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솔로몬은 자신의 궁을 13년이라는 기간 동안 건축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여러 생각을 이끌어 내기도 합니다. 먼저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다음에 자신을 위한 왕궁을 지었다고 하면서 교회 건물을 마련한 후에 자기 집을 마련한 것이 옳다는 식으로 적용하기도 하고, 성전은 7년 동안 건축했는데 왕궁은 13년 동안 건축한 것을 두고 성전보다 자신의 집을 더 크게 짓는 솔로몬의 잘못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러한 말들은 성경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사람을 이용하여 자기 배를 불리려는 속셈에서 나오는 악한 말에 불과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솔로몬이 왕궁을 건축한 기사가 기록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6장에서는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 뒤에 13절부터도 성전에서 사용하는 여러 기구들을 제작하는 내용입니다. 즉 성전건축을 준비하는 5장까지 포함하면 5장부터 7장까지는 성전건축과 연관된 내용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갑자기 솔로몬의 왕궁 건축에 대한 이야기가 삽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단지 솔로몬이 왕궁을 건축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면 성전 건축에 대한 이야기가 다 끝난 후에 왕궁 건축 이야기를 하는 것이 순서적으로 맞을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는 도중에 왕궁이 건축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순서적으로 따진다면 8장에 등장하는 성전 낙성식에 대한 이야기 다음에 왕궁 건축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야 순서적으로 옳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역대하에서도 솔로몬이 성전과 궁을 건축한 것에 대해 언급을 하는데, 열왕기와는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역대하에서는 2:1절에서 “솔로몬이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고 자기 권영을 위하여 궁궐 건축하기를 결심하니라”고 말한 후에 성전 건축과 연관된 말을 하다가 8:1절에서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자기의 궁궐을 이십년 동안에 건축하기를 마치고”라는 말을 함으로써 성전과 궁의 건축과 연관된 말을 마칩니다.

 

 

 


그러니까 역대하에서는 성전을 건축하는 이야기 중간에 왕궁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으며, 왕궁 건축에 대한 것 역시 열왕기서처럼 자세하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과 함께 묶어서 간단하게 언급하는 것으로 그칠 뿐입니다. 그런데 왜 열왕기서에서는 성전 건축 이야기 중간에 왕궁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나열하고 있을까요? 이것을 이해하려면 열왕기서와 역대기의 차이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열왕기와 역대기가 각기 어떤 관점에서 기록되었는가를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간략하게 말씀드린다면 열왕기서는 인간으로서는 어떤 왕도 다윗 언약을 성취할 수 없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써 이스라엘이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열왕기서는 선지자적인 관점에서 기록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안된다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선지자적인 관점이기 때문에 죄를 드러내고 책망하고 심판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열왕기서에는 솔로몬이 이방여인과 결혼하고 다른 신을 섬긴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역대기에서는 솔로몬의 그러한 행적에 대해서는 가려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역대기서는 인간으로서는 안되고 오직 하나님이 택하여 세우신 영원한 왕, 즉 메시아로 말미암아 언약이 성취되어짐을 말합니다. 그래서 다윗의 여러 죄들에 대해서는 가려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열왕기서와 역대기서의 서로 다른 관점을 생각해 본다면 역대기에서는 간략하게 언급만 하고 지나가는 솔로몬의 왕궁 건축에 대해 그 기간과 구조까지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으며, 그것도 성전 건축에 대한 내용 사이에 삽입되어 있는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9-11절의 “이 집들은 안팎을 모두 귀하고 다듬은 돌로 지었으니 척수대로 톱으로 켠 것이라 그 기초석에서 처마까지와 외면에서 큰 뜰에 이르기까지 다 그러하니 그 기초석은 귀하고 큰 돌 곧 십 규빗 되는 돌과 여덟 규빗 되는 돌이라 그 위에는 척수대로 다듬은 귀한 돌도 있고 백향목도 있으며”라는 구절을 보면 귀하다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면서 솔로몬의 왕궁이 귀한 재료로 화려하게 건축되었음을 강조함을 볼 수 있습니다.

 

 

 


또 2-6절에서 “저가 레바논 나무로 궁을 지었으니 장이 일백 규빗이요 광이 오십 규빗이요 고가 삼십 규빗이라 백향목 기둥이 네 줄이요 기둥 위에 백향목 들보가 있으며 기둥 위에 있는 사십 오개 들보를 백향목으로 덮었는데 들보는 한 줄에 열다섯이요 또 창틀이 세 줄로 있는데 창과 창이 세 층으로 서로 대하였고 모든 문과 문설주를 다 큰 나무로 네모지게 만들었는데 창과 창이 세 층으로 서로 대하였으며 또 기둥을 세워 낭실을 지었으니 장이 오십 규빗이요 광이 삼십 규빗이며 또 기둥 앞에 한 낭실이 있고 또 그 앞에 기둥과 섬돌이 있으며”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 규모면에서도 아주 대단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이토록 왕궁의 규모와 그 화려함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을 하는 것일까요? 단지 솔로몬이 자기 왕궁을 얼마나 크고 화려하게 지었는가를 말하기 위해서일까요? 그래서 성전보다 더 크고 좋은 왕궁을 건축한 솔로몬의 불충에 대해 책망하기 위한 것일까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겨우 건물을 가지고 솔로몬과 경쟁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내 집보다 네 집이 더 크고 좋다는 것으로 심기가 상하신 하나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미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 거하지 아니하심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건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으신 것입니다. 인간 편에서 아무리 ‘이것은 하나님이 거하실 성전입니다’라고 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거하실 집은 따로 있기에 인간이 지은 건물은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께서 왕궁을 성전보다 더 크고 좋게 지었다고 해서 그것으로 트집을 잡으시겠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당이 내가 사는 집보다 크냐 적냐는 것은 신앙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입니다. 예배당 건물을 마련하고 내 집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도 억지일 뿐 신앙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배당이라는 건물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집은 그리스도시고, 그리스도의 몸인 신자, 즉 여러분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몸은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왕궁 건축에 대한 내용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솔로몬이 이렇게 크고 화려한 왕궁을 건축한 이유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8절을 보면 “솔로몬의 거처할 궁은 그 낭실 뒤 다른 뜰에 있으니 그 공작이 일반이며 솔로몬이 또 그 장가 든 바로의 딸을 위하여 집을 지었는데 이 낭실과 같더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솔로몬의 왕궁 건축은 여인과 연관이 있음을 눈치 챌 수 있습니다.

 

 

 


왕상 11:1절을 보면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는 말을 하고 3절에서는 “왕은 후비가 칠백 인이요 빈장이 삼백 인이라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솔로몬에게는 사랑하는 많은 여인들이 있었고, 이미 솔로몬의 마음은 여인들에게 붙들려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여인들을 위해 크고 화려한 왕궁을 건축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이러한 실상을 염두에 둔다면 6:12절에서 성전을 건축하고 있는 솔로몬에게 “네가 이제 이 전을 건축하니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나의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한 말을 네게 확실히 이룰 것이요”라는 말씀을 하시는 의도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그 마음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데 빼앗긴 상태에서 성전을 짓는다고 해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손으로 지은 성전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실 성전을 바라봐야 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여인들을 위해 왕궁을 건축하는 솔로몬과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도 솔로몬과 똑같이 살아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행동하는 것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를 바라보십시오. 그 중심에는 여러분이 사랑하는 것을 위해 살아가는 자신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무엇을 한들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자가 바라볼 것은 자신의 손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그 일을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제 성전 건축에 대한 내용 사이에 여인에게 마음을 뺏긴 솔로몬이 여인들을 위해 왕궁을 건축하는 내용을 삽입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한마디로 ‘너는 이런 인간 밖에 안되는데 그런 네가 날 위해 집을 건축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무엇이냐?’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 건축과 상관없이 ‘법도를 따르고 율례를 행하며 계명을 그대로 지켜 행하면’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법도와 율례에서 벗어나 있는 솔로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는 것은, 결국 솔로몬으로서는 안된다는 것을 선언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다른데 빼앗기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습니까?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현실과 솔로몬이 결코 다르지가 않습니다. 그런 우리가 종교적 행위를 갖춘다고 해서 그것을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인간의 현실에서 견해가 다르기 때문에 결국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열왕기서는 인간의 현실과 한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의 한계는 어떤 식으로 해결이 되는 것입니까? 해결 방책은 바로 여호와께 있습니다. 그것은 자비를 주시는 여호와께 자비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긍휼을 베푸시는 여호와께 긍휼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자비를 구하고 긍휼을 구한다는 것은 인간의 현실과 한계에 대해 직시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인간의 손으로 안되는가를 알았기에 자신의 손으로 행한 그 어떤 일도 바라보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긍휼과 자비를 구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를 자기 백성으로 여기시고 긍휼을 베푸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한계를 절감하고 긍휼을 구하고 자비를 구하는 것까지 여호와로 말미암은 것임을 생각한다면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있을 것은 오직 감사밖에 없음을 다시금 절감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 용서는 하나님의 긍휼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의 손으로 행한 무엇으로도 죄 용서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긍휼을 받았으니 그에 대한 보답으로 뭔가를 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은 진정한 긍휼을 맛보지 못한 것입니다.

 

 

 


긍휼로서 죄 용서를 받았다고 하지만 죄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다른데 빼앗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긍휼이 아니면 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긍휼에 대한 보답을 하겠다는 교만한 생각은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시고, 인간의 현실과 한계가 무엇으로 해결되었는가를 바라보십시오. 만약 하나님의 긍휼이 보인다면 자연히 감사하게 되어질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19강) 열왕기상 7:13-22  성전의 두 기둥

 

<본문>


솔로몬 왕이 보내어 히람을 두로에서 데려오니 저는 납달리 지파 과부의 아들이요 그 아비는 두로 사람이니 놋점쟁이라 이 히람은 모든 놋 일에 지혜와 총명과 재능이 구비한 자더니 솔로몬 왕에게 와서 그 모든 공작을 하니라 저가 놋기둥 둘을 만들었으니 그 고는 각각 십팔 규빗이라 각각 십이 규빗 되는 줄을 두를 만하며 또 놋을 녹여 부어서 기둥 머리를 만들어 기둥 꼭대기에 두었으니 이 머리의 고도 다섯 규빗이요 저 머리의 고도 다섯 규빗이며 기둥 꼭대기에 있는 머리를 위하여 바둑판 모양으로 얽은 그물과 사슬 모양의 땋은 것을 만들었으니 이 머리에 일곱이요 저 머리에 일곱이라 기둥을 이렇게 만들었고 또 두 줄 석류를 한 그물 위에 둘러 만들어서 기둥 꼭대기에 있는 머리에 두르게 하였고 다른 기둥 머리에도 그렇게 하였으며 낭실 기둥 꼭대기에 있는 머리의 네 규빗은 백합화 모양으로 만들었으며 이 두 기둥 머리에 있는 그물 곁 곧 그 머리의 공같이 둥근 곳으로 돌아가며 각기 석류 이백이 줄을 지었더라 이 두 기둥을 전의 낭실 앞에 세우되 우편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좌편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으며 그 두 기둥 꼭대기에 백합화 형상이 있더라 두 기둥의 공역이 마치니라(열왕기상 7:13-22)

 

 

 


<설교>


지난 시간에 성전건축에 대한 얘기를 하는 도중에 솔로몬이 왕궁을 건축한 것에 대해 언급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씀드렸습니까? 솔로몬이 왕궁을 건축한 것은, 단순히 자신이 거할 집을 지은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방 여인을 위해서였습니다. 이렇듯 이방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김으로써 여인들의 신까지 섬기고 있는 상태에서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다고 해서 그것을 과연 진심으로 여호와를 향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는가를 언급하기 위해 왕궁 건축에 대해 말한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성전을 건축하라고 하심으로써 성전건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에게 나타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성전을 건축하게 하시고 ‘너희의 손으로 지은 집에 거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성전으로도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인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두 기둥도 하나님의 이러한 의도를 담고 세워져 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21절을 보면 “이 두 기둥을 전의 낭실 앞에 세우되 우편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좌편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으며”라고 말합니다. 솔로몬의 성전에 두 기둥이 있으며, 그 기둥의 이름은 우편의 것이 야긴, 좌편의 것이 보아스라고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 두 기둥의 이름은 각기 뜻이 담겨 있는데 야긴은 ‘저가 세우리라’는 것이고 보아스는 ‘그에게 능력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두 기둥의 존재와 그 이름의 뜻을 교회에 초점을 두고 이해함으로써 결국 교인들에게 교회의 성장을 위해 큰 힘이 되는 존재를 하나님이 세우신 기둥이라는 식으로 강조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도 많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셨는데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의 부흥을 위해 성전에 세워진 두 기둥처럼 능력이 있는 자를 교회의 기둥으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도 ‘우리 교회에 야긴과 보아스처럼 기둥과 같은 일군을 세워주십시오’라고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솔로몬이 두 기둥을 세우고 야긴과 보아스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과연 성전의 부흥과 발전을 염두에 두고 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두 기둥에 대한 내용을 교회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기둥과 같은 일군으로 연결하여 해석하는 것이야 말로 성경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과 마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솔로몬은 자기 멋대로 성전을 건축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허락과 지시 아래 성전을 건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전의 구조와 크기 모두가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것입니다.

 

 

 


성전이 비록 이방인인 히람 왕에 의해 건축되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전을 히람이 건축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건축하셨다고 말하는 것도 히람 왕도 결국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전의 두 기둥은 건축물을 지탱하기 위한 용도가 아닙니다. 21절을 보면 두 기둥은 성전의 낭실 앞에 세웠다고 말합니다. 즉 성전의 입구에 세워짐으로써 성전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두 기둥을 통과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두 기둥은 성전이라는 건축물과 연관된 것이 아니라 성전에 들어오는 자들과 연관되어 건축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특이한 것은 기둥은 어쨌든 건축물인데 건축물에 이름을 지어 붙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둥에 이름을 지어 붙임으로써 이름에 하나님의 속성을 담아 성전에 들어오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 기둥의 이름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다. 야긴은 ‘저가 세우리라’는 것이고 보아스는 ‘그에게 능력이 있다’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저가 세우리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시는 일까요? ‘저가 세우리라’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솔로몬의 손으로 세워진 성전 앞에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기둥을 세워둔 것은 결국 사람의 손으로 세워진 것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에게 능력이 있다’라는 뜻의 기둥을 같이 세워둔 것입니다.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세워지고 유지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두 기둥이 보여주는 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세워질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유지된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하 7: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11절에서는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라는 말씀을 하시고, 16절에서는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다윗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임을 생각해 보면, 솔로몬 성전에 세워진 두 기둥의 이름에는 하나님이 하신 다윗언약이 하나님에 의해서 성취되어질 것임을 의미하는 내용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성전에 들어오면서 자신들의 손으로 세운 성전을 바라보지 말고, 자신들의 능력도 생각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볼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왕상 6:7절을 보면 “이 전은 건축할 때에 돌을 뜨는 곳에서 치석하고 가져다가 건축하였으므로 건축하는 동안에 전 속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모든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였으며”라는 말을 합니다. 당시 성전을 건축할 때 사용되는 돌을 성전에 가져와서 다듬은 것이 아니라 채석장에서 다듬어 가져옴으로써 성전에서는 돌과 돌을 끼워 맞추기만 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전 건축에 도끼나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것을 예배당을 건축할 때는 교인이 서로 충돌하고 다투는 일 없이 은혜롭게 마쳐야 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사실 이것은 인간의 행위와 공로와 노력을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왕궁건축도 바로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솔로몬이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건축한다고 하지만 이미 마음을 이방여인에게 뺏긴 상태에서 성전을 건축한다는 것은 결국 형식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속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행하는 형식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마치 하나님을 위하고 섬기는 것으로 착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형식에 잘 속아 넘어갑니다. 형식에 잘 속아 넘어간다는 것은 자신의 손으로 행하는 형식에 어떤 의미를 두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 큰 소리로 찬송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거나, 헌금할 때 낡은 헌 지폐보다는 은행에 가서 새 지폐로 바꾸어 헌금하는 것을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성으로 여긴다거나, 기도할 때 큰 소리로 두 손을 들고 하는 것을 하나님이 더 빨리 응답하신다고 생각하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손으로 행하는 형식에 속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럴듯한 형식을 동원한다고 해도 우리의 속은 이미 내가 사랑하는 다른 것에 빼앗긴 상태일 뿐입니다. 때문에 형식이 아무리 좋아 보인다고 해도 형식을 앞세워 거룩의 자리에 나아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오직 예수님의 피 흘림만 바라보고 의지할 뿐,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 낸 것은 그 어떤 것도 바라보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그 어떤 형식도, 우리의 손으로 행한 그 무엇도 예수님의 피 흘림 앞에서는 거부의 대상일 뿐입니다.

 

 

 


두 기둥은 성전을 바라보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들이 진심으로 바라보고 의지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화려한 건물인 성전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전의 두 기둥의 존재 의미입니다.
야긴과 보아스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언약의 증표로 세워진 것입니다. 즉 야긴과 보아스를 세움으로써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성전에 들어오면서 자신들의 손으로 세우고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 참된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시는 성전만이 참되다는 것을 생각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야긴과 보아스는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결국 하나님의 손으로 세우신 참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의 시선을 오직 예수님께만 두고자 합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님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자로 나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성전을 지으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나타내기 위함이었고 성전에 두 기둥을 세우게 하시고 야긴과 보아스라고 하게 하신 것도 이스라엘 안에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안다면, 그는 여호와 외에 다른 것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사람이 손으로 행한 그 어떤 것도 자신을 신자 되게 할 수 없음을 분명히 인식하게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이 세우심으로써 하나님의 성전으로 존재하게 됨을 믿는 자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이 손으로 행한 모든 것에 가치를 두지 않는 것입니다. 참으로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은 예수님이 행하신 십자가의 피 흘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에 야긴과 보아스라는 두 기둥이 굳게 서서 ‘이스라엘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야긴과 보아스라는 두 기둥처럼 굳게 서서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세워지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신자는 그 어떤 행위에도 형식에도 매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자신의 손으로 행한 것에 의미를 두고 가치 있는 것으로 높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손으로 행한 것을 바라본다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않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라면 자신의 행함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악 밖에 나올 것이 없는 나 같은 자에게서 믿음의 모습이 맺어진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능력이고 성령이 함께 하시고 다스리신 흔적임을 알기에 결국 예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변했다는 것으로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나같이 완악한 자를 바꾸시고 고치시는 예수님의 크신 능력을 찬송하고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긴과 보아스가 세워져 있지 않을 때 우리는 내 손으로 행한 것을 볼 뿐입니다. 거기에 의미를 두고 가치를 두면서 자신의 손으로 행한 것을 앞세워 하나님을 찾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두 기둥이 세워진 의미에서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믿는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가를 깊이 생각할 수 있기 바랍니다.

 

 

 

 

 

(20강) 열왕기상 8:1-11  여호와의 영광

 

<본문>

이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 성 곧 시온에서 메어 올리고자 하여 이스라엘 장로와 모든 지파의 두목 곧 이스라엘 자손의 족장들을 예루살렘 자기에게로 소집하니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다 에다님월 곧 칠월 절기에 솔로몬 왕에게 모이고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이르매 제사장들이 궤를 메니라 여호와의 궤와 회막과 성막 안의 모든 거룩한 기구들을 메고 올라가되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그것들을 메고 올라가매 솔로몬 왕과 그 앞에 모인 이스라엘 회중이 저와 함께 궤 앞에 있어 양과 소로 제사를 드렸으니 그 수가 많아 기록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었더라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로 메어 들였으니 곧 내전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라 그룹들이 궤 처소 위에서 날개를 펴서 궤와 그 채를 덮었는데 채가 긴 고로 채 끝이 내전 앞 성소에서 보이나 밖에서는 보이지 아니하며 그 채는 오늘까지 그 곳에 있으며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열왕기상 8:1-11)

 

 

 


<설교>


교회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는 말을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이 하나님께 영광을 인간의 행위 또는 세상에서의 성공과 결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즉 신자가 착한 행동으로 칭찬을 받으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거나, 성공함으로써 뛰어난 인물이 되면 그것으로 영광이 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가 부흥되고 크고 좋은 건물을 건축하는 것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으로 이해해 버립니다.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하는 것, 세상에서 이름을 내지 못하는 것, 교회가 부흥하지 못하는 것 모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일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많은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 일하실까요? 물론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나님은 죄인을 통해 일하십니다. 인간을 통해 일하신다는 말과 죄인을 통해 일하신다는 말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인간을 통해 일하신다는 말에는 인간의 분발을 촉구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선한 문화 사업을 해야 하고 착하게 살아야 하고 교회를 확장시켜야 합니다.’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에게 가치를 두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인을 통해 일하신다는 말에는 인간의 행위로 인한 영광을 처음부터 배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이라는 말 자체가 인간에게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행위가 나올 수 없음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방해만 될 뿐입니다. 이것을 아는 자가 곧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 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방해만 될 뿐이라는 것을 아는 죄인이라면 어떤 일에 있어서도 ‘내가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십자가에 흘리신 피의 은혜가 아니면 안되는 죄인일 뿐입니다’라는 고백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이름만을 높이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10-11절에서도 여호와의 영광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고 다윗성에 있던 여호와의 언약궤를 성전으로 옮기고자 합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성소에 두고 나올 때 구름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름은 여호와의 거룩한 장소라는 것을 증거하는 역할을 합니다. 즉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여호와의 세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름이 가득한 여호와의 전에 영광이 가득했다는 것을 통해서 여호와의 영광은 여호와의 세계가 나타남과 연관된 것임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과 연관된 것이 아닙니다. 즉 솔로몬이 크고 좋은 성전을 건축해서 여호와께 영광이 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이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성 곧 시온에서 메어 올리고자 하여 이스라엘 장로와 모든 지파의 두목 곧 이스라엘 자손의 족장들을 예루살렘 자기에게로 소집하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언약궤를 성소에 주었을 때, 영광이 전에 가득하였다고 말합니다. 즉 여호와의 영광은 언약궤와 연관된 것이지 인간의 행위와 연관된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면 언약궤와 연관된 여호와의 영광이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안에 있는 언약궤가 이스라엘에게 선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이름만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만이 하신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9절에 보면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 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고 말합니다.

 

 

 


언약궤 안에는 두 돌판과 아론의 지팡이와 만나를 넣은 항아리가 들어 있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나머지 지팡이와 항아리는 어떻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사실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겼을 때 사라진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원래 지팡이와 항아리는 궤 안에 있던 것이 아니라 궤 앞에 두었던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이 역시 신빙성이 있는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궤에 아론의 지팡이와 항아리가 없다고 해서 언약궤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언약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두 돌판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언약궤에 있는 돌판은 인간들이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하나님 관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도 하나님의 궤가 있는 곳으로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잘못된 하나님 관으로는 여호와의 세계에 들어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자체가 곧 죽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결국 여호와의 세계에 들어올 수 없는 인간은 무엇을 한다고 해도 죽음의 세계에 속한 자로서 죽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죽음의 세계에 속한 자가 선을 행하고 그 선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는 자체가 여전히 잘못된 하나님 관에 머물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언약궤에 제물의 피가 뿌려진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피로써만 구원 받는다’는 것임도 잘 알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물의 피가 뿌려지는 언약궤가 있는 성소에는 무엇이 가득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바로 여호와의 자비와 인자하심과 긍휼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언약궤의 돌판은 인간은 죽은 자임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궤위에 피가 뿌려짐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나올 수가 있다면 그것은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은 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즉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과 자비가 죽은 자를 살린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이름만이 죽은 자를 살린다는 것이 여호와의 세계이며 이 세계에 영광이 가득한 것입니다. 언약궤가 있는 성소가 이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 영광 돌린다는 것은, 우리의 이름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고백하며 오직 여호와의 이름으로 되어지는 일을 바라보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히 13:15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는 말을 합니다. 찬미의 제사란 찬미가 곧 하나님 앞에 제사가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나타난 여호와의 일, 즉 우리를 살리신 인자와 사랑과 긍휼과 자비하심을 바라보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곧 찬미의 제사이며 그것이 여호와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위해서 자기 백성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엡 1:11-14절에서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을 합니다. 찬송이란 입술의 노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과 자비가 입혀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사랑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신자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 6:29절에서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입고 있던 영광스럽게 보이는 모든 것들도 길가에 피어난 들풀보다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입혀진 그 상태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영광은 절대로 인간의 행함의 원리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착한 행실과 어떤 업적이나 성공을 통해서 영광 돌리겠다는 것은 인간의 잘못된 하나님 관에서 발산되는 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좋은 예배당을 건축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하나님 관에서 나오는 종교일 뿐인 것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은 인간의 열심과 의지로 돌려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자비를 자기 백성에게 입히심으로써 스스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은 영광의 찬송으로 존재하게 하심으로써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찬송을 부르지 않는다고 해도 이미 영광의 찬송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고, 우리에게 입혀진 인자하심과 자비하심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이 곧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고, 그것이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신자가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로 변한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입은 자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지 선을 행할 능력을 가진 자로 바뀐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죽는 순간까지 나를 살리신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과 자비를 바라보며 살아갈 뿐입니다. 이러한 얘기들이 세상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의 산물과 전혀 관계없는 얘기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새 생명에 대한 얘기는 평소 인간이 추구하던 욕망의 산물이 아닙니다. 전혀 관심도 없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새 생명에 대한 얘기가 남 얘기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의 얘기로 다가오게 되고 또한 거기에 소망을 두게 된다면 그는 분명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하심을 입고 있는 신자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감사하며 기뻐하게 됩니다. 이것이 여호와께 영광인 것입니다.

 

 

 

 

 

(21강) 열왕기상 8:12-21  여호와의 이름

 

<본문>

그 때에 솔로몬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캄캄한 데 계시겠다 말씀하셨사오나 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거하실 처소로소이다 하고 얼굴을 돌이켜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위하여 축복하니 때에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섰더라 왕이 가로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여호와께서 그 입으로 나의 부친 다윗에게 말씀하신 것을 이제 그 손으로 이루셨도다 이르시기를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내 이름을 둘 만한 집을 건축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서 아무 성읍도 택하지 아니하고 다만 다윗을 택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노라 하신지라 내 부친 다윗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었더니 여호와께서 내 부친 다윗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으니 이 마음이 네게 있는 것이 좋도다 그러나 너는 그 전을 건축하지 못할 것이요 네 몸에서 낳을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리라 하시더니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도다 내가 여호와의 허하신 대로 내 부친 다윗을 대신하여 일어나서 이스라엘 위에 앉고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전을 건축하고 내가 또 그 곳에 우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저희와 세우신 바 여호와의 언약 넣은 궤를 위하여 한 처소를 설치하였노라(열왕기상 8:12-21)

 

 

 


<설교>


구약성경에 보면 여호와의 이름이라는 말이 많이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름’이라는 말을 다섯 번이나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여호와의 이름’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름’은 무엇일까요? ‘여호와의 이름’이라면 여호와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엘로힘입니까?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칠 때 여호와의 이름이 여러 가지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즉 여호와, 야훼, 엘로힘, 주 등으로 사용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두고 여호와의 이름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창 4:25-26절을 보면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맨 처음 등장하는 여호와의 이름에 대한 내용입니다. 아벨이 가인에게 살해당한 후에 하나님은 아벨 대신에 다른 씨, 셋을 주십니다. 그리고 셋이 아들을 낳아 ‘에노스’라고 이름 짓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왜 셋이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고 하였을 때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입니까? 그전에는 여호와의 이름이 무엇인지 몰라서 부르지 못한 것입니까?
에노스’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셋이 아버지로서 아들의 이름을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으로 지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죽은 아벨 대신에 태어난 셋은 아벨의 죽음에서 하나님의 일이 어떤 것인가를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아벨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였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씨를 주시는 것보다는 사랑하는 아벨을 죽지 않게 하시는 것이 더 옳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의 죽음을 방치하시고 대신 다른 씨를 주신 것입니다.

 

 

 


아벨을 죽게 하시고 다른 씨를 주신 것은, 아벨의 죽음은 하나님이 주신 다른 씨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으로 이어짐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셋이 아들의 이름을 에노스(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한 것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게 됨을 바라보았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국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은, 죽음도 극복할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고 소망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단순히 여호와란 호칭을 불렀다는 것이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소망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는 고집으로 일하시고 성취하실 여호와의 일을 바라보고 소망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피조물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높이는 것이 마땅한 것이지 자신의 이름을 높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창 11:4절의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라는 내용을 보면, 인간이 자기 이름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세상은 자신의 이름을 위해 살아갑니다. 이러한 세상에 여호와의 이름이 등장한 것은 인간의 이름을 무너뜨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도록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 앞에서 자기 이름이 무너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 란 호칭 석자는 얼마든지 부를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의 이름 앞에서 자신의 무너짐이 없고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여호와의 이름을 둘만한 성전을 지으셨다는 것도 성전이 이스라엘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무너짐입니다. 자신의 무너짐이 있는 자만이 진심으로 성전 앞에 나온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내 이름을 둘만한 집을 건축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서 아무 성읍도 택하지 아니하고 다만 다윗을 택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노라 하신지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이 지으시고자 하시는 성전은 여호와의 이름을 둘 만한 집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둔다는 것은 명패에 여호와란 이름을 기록하여 성전에 보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담아서 그 이름을 나타내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성전은 건물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건물이 여호와가 누구시며, 여호와의 일이 무엇인가를 나타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성전은 예수님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모든 일을 담아서 세상에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여호와의 이름을 둘만한 성전인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으시는 열심으로 일하신 약속의 성취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고, 결국 자신의 이름의 무너짐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담고 있는 주의 이름만이 높아질 뿐, 주의 이름 앞에서 나의 이름은 무너져야 할 것에 불과할 뿐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전에 여호와의 이름을 둔다는 것은, 여호와의 이름 앞에서 인간의 이름은 ‘죽어야 할 존재’에 불과한 이름일 뿐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만이 죽은 자를 참된 생명으로 이끌어 감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이름에 소망을 두고 여호와의 이름만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이것이 성전의 역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에 나와서 자신의 죽음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언약궤에 피가 뿌려지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은 죽은 자임을 바라봐야 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이 있다면 자기 이름을 위해 살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에 처한 자신들에게 소망이 되고 생명이 될 여호와의 약속의 성취에 모든 소망을 두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러한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성전을 지으시고,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 손으로 지은 성전을 바라봅니다. 성전을 바라보면서 자신들의 이름을 높이는 것입니다.

 

 

 


행 2:21절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주여 주여’하고 입술로 주를 부르는 것을 말하겠습니까? 그런 것이라면 구원 받지 못할 자가 누구겠습니까?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자기 부인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주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이야 말로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자신의 이름을 위해 살아갑니다. 자기 이름을 높이기 위해 살아갑니다. 하지만 내 이름으로 구원 얻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구원의 능력은 오직 주의 이름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교회로 모여서 높여야 하는 것은 주의 이름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교회에서 아무리 열심히 봉사하고 많은 일을 했다고 해도 인간의 이름은 무너져야 할 이름에 불과할 뿐입니다. 죽음에 처한 자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죄를 지은 후에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없는 무능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낼 새로운 이름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 이름이 ‘’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인간의 이름은 부인되어야 하고 무너져야 할 대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무너져야 할 존재임을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깊이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오직 주만 높임 받아야 할 이름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교회가 교회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것 역시 주의 이름을 멸시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스스로 교회 아님을 보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두시기 위해 성전을 지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시고 높으신 이름 앞에 인간의 무능함을 깊이 깨달으십시오. 그리고 주의 이름만 부르십시오.

 

 

 

 

 

(22강) 열왕기상 8:27-32  성전을 향한 기도

 

<본문>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 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이웃에게 범죄함으로 맹세시킴을 받고 저가 와서 이 전에 있는 주의 단 앞에서 맹세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행하시되 주의 종들을 국문하사 악한 자의 죄를 정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돌리시고 의로운 자를 의롭다 하사 그 의로운 대로 갚으시옵소서(열왕기상 8:27-32)

 

 

 


<설교>


하나님께서 성전을 건축하신 것은 그 곳에 여호와의 이름을 두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성전에 여호와의 이름을 두시겠다는 것은, 이스라엘 안에 성전이 어떤 역할과 기능으로 존재할 것인가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긍휼과 자비와 사랑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나는 죽은 자로서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자비하심만을 의지할 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즉 구원 받은 자만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웅장한 성전을 바라보면 안되는 것입니다. 성전이 이스라엘을 살리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성전에 나오되 성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성전에 두신 여호와의 이름을 바라보고 의지한 자로 나와야 했습니다. 성소에 둔 언약궤에 거룩한 제물의 피가 뿌려지는 것을 보면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용서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 감사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이름을 둔 성전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들의 죽음을 경험하게 하고 죽은 자에 불과한 자신들을 무엇이 살리는가를 보게 하고 무엇이 불의한 자신들을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 역할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만남의 광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과의 만남을 위해 성전을 두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직접 인간을 만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습니다. 이미 죄로 인해 더러워진 존재이기에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다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전에 이름을 두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이름 앞에 나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은 솔로몬의 기도입니다. 솔로몬의 기도에서 생각할 것은 솔로몬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드리면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어 달라는 기도를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30절에 보면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솔로몬과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할 때 주는 하늘에서 들어달라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이러한 기도는 53절까지 기도가 계속되는 동안 일곱 번이나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27절에서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솔로몬은 자신이 건축한 성전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거하실 거처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그 거처가 될 수 없을 만큼 거룩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29절)하고 기도합니다. 즉 솔로몬은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시지 성전에 계시는 것이 아님을 알았으면서도 성전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어 달라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이상한 것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심을 알았으면 하늘을 향해서 기도하면 되는데 왜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전에서 기도를 들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들으신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이것을 보면 솔로몬은 인간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잊고 있고 또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을 부르면 달려와 응답해 주시고 내 기도를 들어 주시는 분으로만 여기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고, 하나님 또한 내 기도를 들으시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은 하늘에 계심을 알면서도 왜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향해 기도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하나님께 성전을 향해 기도할 때 하늘에서 들어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까? 결국 솔로몬과 하나님 사이에는 성전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성전이 없이는 하나님과의 교통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도에 대해 큰 오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이 기도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열심일 것입니다.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정성을 보여야 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성을 보이기 위해 열심과 온갖 행위를 동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 두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 기도의 등불이 꺼지지 않기 위해 매일 저녁 예배당에 나와서 교대로 기도하는 것, 이런 모든 것들이 기도를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자신의 뜻을 성사시켜 보고자 하는 기술적인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또한 솔로몬은 성전에서 비는 기도가 아니라 성전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말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성전을 향하여 비는 기도라는 것은 결국 성전이라는 특정한 장소를 초월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기도는 특정한 장소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당이든 무엇이든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는 특정한 장소가 존재할 것으로 여기는 것은 미신적인 행위에 불과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성전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하늘에서 들으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은 인간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기도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보자를 통해서만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 중보자의 역할을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이름을 둔 성전이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성전을 향하여 기도한다는 것은, 성전이라는 건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여호와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전을 향한 기도입니다.

 

 

 


즉 이스라엘 안에 있는 성전은 하나님의 용서의 현장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이스라엘은 용서의 현장에서 긍휼과 자비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생명은 자신들의 공로와는 전혀 무관하게 전적으로 거룩한 제물의 피 흘림에 의한 것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건물에 매일 것이 아니라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용서에 매임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바라볼 성전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실 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도, 우리 이름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상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상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이름은 죽은 자의 이름이기 때문에 무너져야 할 이름에 불과할 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를 응답받기 위해 사용하는 주문이 아니라 죽은 자에 불과한 내 이름을 포기한 자로서 생명이 되시고 구원이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한 채 하나님께 나아감을 고백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전을 향한 기도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버려야 하는 것은 우리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죄 용서와 기도 응답의 체계입니다. 즉 죄 용서를 받기 위해서, 또는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의해 나름대로 체계를 구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낸 종교적 틀에 갇히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가령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을 때 변함없이 하루 세 번 창문을 열고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는데, 이것을 기도 응답을 위한 체계로 구축해 버리는 것입니다. 즉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하루 세 번 창문을 열어 놓고 예배당을 향해 기도하자’라고 하게 되면 기도 응답을 위한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고 스스로 그 틀에 갇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는 자신이 구축한 틀을 지키기 위해서 예수님도 밀쳐내는 결과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틀을 옹호하는 예수님만을 참된 예수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그러한 종교적인 틀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용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바라보고 의지할 뿐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틀을 모두 없애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진 그 어떤 체계와 형식들도 우리의 죄를 용서할 수 없고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가게 할 수 없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무가치한 것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틀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우리의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일 뿐이라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보시고 우리를 받으시는 것이지 우리의 공로는 하나님 앞에서 무가치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신자에게 자기의 공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어 놓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무가치한 자로서 주님만 바라볼 뿐입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에 대해 내 마음이 더 넓게 열려지고 눈이 뜨이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공로를 생각하게 되고 바라보게 되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고 남들이 알아주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을 때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공로에 마음이 열리고 눈이 뜨임으로 내 공로는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참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로서의 기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은 하늘에서 그 기도를 들으시는 것입니다.

 

 

 


신자가 주님의 공로를 바라보지 않을 때, 즉 자신이 주님의 용서로 살아가고 있음을 잊어버릴 때 교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공로가 아닌 자신의 공로가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공로를 앞세워 자신의 이름이 높임 받기를 원하는 교만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의 기도는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을 갖다 붙인다고 해도 하나님이 들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주의하고 살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용서를 가로막고 방해하는 나의 교만입니다. 스스로 선하다고 여기는 자신의 행동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로보다 자신의 행위가 더 눈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의 용서를 팽개치고 있는 것이기에 우리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용서와 공로로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않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이것이 항상 그 마음을 참된 성전이신 예수님께 두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이러한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23강) 열왕기상 8:33-43  솔로몬의 기도

 

<본문>

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주께로 돌아와서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이 전에서 주께 빌며 간구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 열조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 만일 저희가 주께 범죄함을 인하여 하늘이 닫히고 비가 없어서 주의 벌을 받을 때에 이 곳을 향하여 빌며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그 죄에서 떠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사 주의 종들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 마땅히 행할 선한 길을 가르쳐 주옵시며 주의 백성에게 기업으로 주신 주의 땅에 비를 내리시옵소서 만일 이 땅에 기근이나 온역이 있거나 곡식이 시들거나 깜부기가 나거나 메뚜기나 황충이 나거나 적국이 와서 성읍을 에워싸거나 무슨 재앙이나 무슨 질병이 있든지 무론하고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이 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유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그리하시면 저희가 주께서 우리 열조에게 주신 땅에서 사는 동안에 항상 주를 경외하리이다 또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 속하지 아니한 자 곧 주의 이름을 위하여 먼 지방에서 온 이방인이라도 저희가 주의 광대한 이름과 주의 능한 손과 주의 펴신 팔의 소문을 듣고 와서 이 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무릇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 대로 이루사 땅의 만민으로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옵시며 또 내가 건축한 이 전을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줄을 알게 하옵소서(열왕기상 8:33-43)

 

 

 


<설교>


솔로몬의 기도는 ‘기도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면 자연적으로 기도에 대해 능수능란한 실력(?)을 갖추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기도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통이며 관계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본다면 능수능란한 언변의 실력을 갖춘 기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기도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 가장 먼저 요구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으로 건축한 성전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심을 알면서도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거든’라는 말을 합니다. 즉 하나님은 성전을 향한 기도를 들으시는 분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도는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의 소원을 아뢰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하나님이 아닌 성전을 향한 기도를 말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점을 소홀히 여기고 지나치기 쉽지만 사실 이러한 내용들 하나하나가 오늘 우리들에게 습성처럼 배어 있는 종교적인 모습들을 지적해주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인간의 종교적 행위와 연관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와 연관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즉 하나님과의 교통이 곧 영생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생을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영생을 인간의 종교적 행위와 연관하여 말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을 알지 못한 증거들이고, 이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종교적 행위일 뿐 신앙은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종교적 껍데기를 걸친 채 하나님을 상대하려고만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다른 것인데, 인간은 종교적 껍데기를 신앙으로 여기며 그것을 내 밀어서 신의 환심을 사기에 바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에 의한 기도와 참된 믿음에 의한 기도는 분명 구별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구별되는가를 솔로몬의 기도에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기도는 본능적 행동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능은 항상 자신이 사는 쪽으로 행동하기 마련이죠? 즉 살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능적 행동의 일부로 나타나는 기도는 결국 살고자 하는 기도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기도하는 것, 이것이 땅에 존재하는 인간들이 신을 찾아 기도하는 이유이고 이러한 기도는 종교일 뿐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솔로몬의 기도는 모두 인간의 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33-34절을 보면 “만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주께 범죄하여 적국 앞에 패하게 되므로 주께로 돌아와서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이 전에서 주께 빌며 간구하거든 주는 하늘에서 들으시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고 그 열조에게 주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하는데, 이 기도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범죄와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죄 사하심을 바라보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여기만이 아니라 53절까지의 솔로몬의 기도 전부가 이스라엘의 범죄와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대한 것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용서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를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범죄한 자로서 용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께로 돌아와 주의 이름을 인정한다는 것이 곧 주의 긍휼과 자비가 아니면 살 수 없는 것이 인간임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재앙에서 기도하는 것도 우리와 다릅니다. 37-38절에서 “만일 이 땅에 기근이나 온역이 있거나 곡식이 시들거나 깜부기가 나거나 메뚜기나 황충이 나거나 적국이 와서 성읍을 에워싸거나 무슨 재앙이나 무슨 질병이 있든지 무론하고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다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이 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나 무슨 간구를 하거든”라고 기도하는 것을 보면, 솔로몬은 하나님의 재앙이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기억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재앙을 깨닫고 이 전을 향하여 손을 펴고’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성전을 향하여 손을 펴는 자로 만들기 위해 재앙을 내리셨음을 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솔로몬의 기도에는 살고자 하는 것이 없습니다. 재앙이 있을 때 인간들이 하는 기도가 무엇입니까? 재앙에서 자신을 구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고자 하는 본능에 의한 기도입니다. 솔로몬의 기도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의지하기 위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계속 유지되기를 위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이러한 기도에 생소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평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직 살고자 하는 기도에 부지런했기 때문에 살고자 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 기도에 생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도가 마음에 들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틀린 것이라는 생각은 버리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이 틀린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틀렸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의 생존에 관심이 몰려 있는 마음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생존을 향한 욕구가 본능인 인간이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은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모든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는 구절이나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라는 구절을 인용하여 ‘기도해서 안되는 것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을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도대체 인간이 왜 이러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바라보며 누리는 자로 살아가면 되었던 인간이 자기 자신을 향한 소망과 목표를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 때문에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뭔가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계획과 목표를 세우고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하고 이루어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인간을 보내시고 하고자 하시는 일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죄라는 것을 보지를 못합니다.

 

 

 


죄를 보지 못하는 인간은 결국 자신의 종교적 행위를 근거 삼아 자기 의를 내세우게 되고, 자신의 의를 내세워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선한 일을 했으니 하나님도 나에게 보답을 해주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라며 하나님을 맞상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하심, 즉 하나님의 용서가 세상에 실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세상에 실현됨으로서 누구든 하나님의 용서를 의지하지 않는 자는 심판 받을 자임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자신의 죄를 보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용서의 성취자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의지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용서를 의지하는 그가 범사에 감사할 수 있고,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고, 항상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마 26:39절에서 “아버지여 만일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세계를 세상에 실현하시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드리면 많은 사람들이 ‘기도할 것이 없다’라는 말을 합니다. 평소에 요구만 늘어놓는 기도에 열심이었기 때문에 요구가 없는 기도에 할 말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요구가 없이 무슨 기도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46-50절까지의 기도를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살고자 하는 기도와 어떻게 다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소망하고 있는 기도인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46절의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라는 구절을 보면 솔로몬은 인간을 범죄한 자로 규정하고 시작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범죄한 자임을 잊어버리고 기도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범죄한 자이기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솔로몬의 기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는 이스라엘의 범죄를 깨닫게 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게 하기 위한 조치였음을 말합니다(47절). 즉 범죄한 자에게 진노가 임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왜 우리에게 진노하느냐?’는 원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고통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동안 성실하게 살았던 자신의 종교생활을 떠올리며 고통의 부당함을 항변하고자 할 뿐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것인가를 구할 뿐입니다. 솔로몬의 기도와 전혀 반대이지 않습니까? 신자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이미 주님의 이름 앞에 나의 이름을 위한 기도는 포기하였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주님의 기도가 연장된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만 나는 범죄함으로 죽은 자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의 희망은 주의 자비와 긍휼 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자리가 너무 존귀하기 때문에 용서의 자리에 나아가고자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참된 기도입니다.

 

 

 


미 3:11절을 보면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 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이 당시 거짓 선지자들의 행악이었습니다. 돈을 위해서 교훈하고 돈을 위해서 여호와가 함께 하심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즉 여호와가 함께 해서 자기 백성을 돕고 어려움에서도 벗어나게 해준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세상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참된 기도가 등장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가차 없이 참된 기도를 밀쳐 버릴 것입니다. 자기 요구가 없는 기도는 기도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요구할 자격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셔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사랑의 하나님이시니까 우리의 요구를 들어 주셔야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범죄한 자신의 실체도 보지 못하고 까부는 우리를 주저앉히기 위해 진노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자기의 범죄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용서를 의지하는 자로 주님께 나오도록 하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기도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서 벗어나지 않고 늘 용서라는 은혜에 매인 자로 살기를 소원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도 하늘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24강) 열왕기상 8:54-61  솔로몬의 축복

 

<본문>

솔로몬이 무릎을 꿇고 손을 펴서 하늘을 향하여 이 기도와 간구로 여호와께 아뢰기를 마치고 여호와의 단 앞에서 일어나 서서 큰 소리로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위하여 축복하며 가로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저가 무릇 허하신 대로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태평을 주셨으니 그 종 모세를 빙자하여 무릇 허하신 그 선한 말씀이 하나도 이루지 않음이 없도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와 함께 계시던 것같이 우리와 함께 계시옵고 우리를 떠나지 마옵시며 버리지 마옵시고 우리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향하여 그 모든 길로 행하게 하옵시며 우리 열조에게 명하신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키게 하시기를 원하오며 여호와의 앞에서 나의 간구한 이 말씀을 주야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있게 하옵시고 또 주의 종의 일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일을 날마다 당하는 대로 돌아보사 이에 세상 만민에게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는 줄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런즉 너희 마음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화합하여 완전케 하여 오늘날과 같이 그 법도를 행하며 그 계명을 지킬지어다(열왕기상 8:54-61)

 

 

 


<설교>


지난 시간 말씀드린 솔로몬 기도의 중심은 왕과 백성들의 죄 용서에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솔로몬은 여호와의 이름을 두신 성전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자리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 성전을 향해 기도하면 죄를 용서해 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죄인으로서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솔로몬에게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은 이스라엘의 죄를 사하시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이름을 둔 성전을 향하여 죄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심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자신의 죄를 깊이 인식하는 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죄를 인식하지 못했다면 어떤 기도가 나왔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죄를 사하시는 이름으로 보고 성전을 향하여 죄사함의 기도를 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죄를 보지 못한 자에게서 나올 것은 자기의 의 밖에 없기에 자기 손으로 건축한 성전에서 자기 의를 바라보며 자기 의를 근거한 기도를 하지 않았을까요?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하는 기도를 들어 보십시오. 자기 죄를 바라보는 자의 기도와 바라보지 않는 자의 기도는 분명 다른 내용을 담을 수밖에 없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바라보는 자는 자신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의 심판 밖에 없음을 자각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되는데, 그러한 신자가 육신을 위해서,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부르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들의 기도는 죄를 보는 자와 죄가 아닌 자기 의를 보는 자의 기도로 구별됩니다. 자기 죄를 보는 자에게서 나올 외침은 다만 ‘불쌍히 여겨주십시오’입니다. 이것이 신자로서 최고의 외침이며 고백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를 바라보는 자로서 기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면, 복에 대한 이해 역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이 점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54-55절을 보면 “솔로몬이 무릎을 꿇고 손을 펴서 하늘을 향하여 이 기도와 간구로 여호와께 아뢰기를 마치고 여호와의 단 앞에서 일어나 서서 큰 소리로 이스라엘의 온 회중을 위하여 축복하며 가로되”라고 말합니다. 기도를 마친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회중을 향해서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내용을 통해서 솔로몬이 가지고 있었던 축복관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이고, 오늘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축복관과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소위 기복신앙이라고 말하는, 즉 세상의 복을 구하지 않는다고 해서 복에 대해 바른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세상의 복을 구하지만 나는 하늘의 복을 구한다. 그러니 너희들은 잘못된 신앙이고 나는 바른 신앙이다’라는 생각을 섣불리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성경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고 바른 생각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옳다고 믿고 있고 알고 있는 진리의 내용으로 살아가는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타인을 살피기보다는 말씀 앞에 내 자신을 내어 놓는 겸손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56절을 보면 “여호와를 찬송할찌로다 저가 무릇 허하신대로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태평을 주셨으니 그 종 모세를 빙자하여 무릇 허하신 그 선한 말씀이 하나도 이루지 않음이 없도다”라고 말합니다.

 

 

 


솔로몬의 이 말은 쉽게 말해서 ‘이러한 여호와를 우리가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떤 여호와일까요? 여호와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이루시는 여호와인 것입니다. 신 4:30-31절을 보면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 말씀을 청종하리니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는 말을 합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법도와 규례를 벗어나 환난을 당하게 되지만 결국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돌이키시고 말씀을 청종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비하신 하나님이신 것이고, 이러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바로 이러한 여호와를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때문에 여호와를 찬송하게 되는 것이고, 여호와의 언약 안에서 이스라엘은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솔로몬의 축복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스라엘이 부강한 나라가 되는 것에 복의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가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와 함께 계시던것 같이 우리와 함께 계시옵고 우리를 떠나지 마옵시며 버리지 마옵시고 우리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향하여 그 모든 길로 행하게 하옵시며 우리 열조에게 명하신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키게 하시기를 원하오며 여호와의 앞에서 나의 간구한 이 말씀을 주야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있게 하옵시고 또 주의 종의 일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일을 날마다 당하는 대로 돌아보사”(57-59절)라고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구절을 읽으시면 느끼시겠지만 솔로몬의 축복은 생각보다는 아주 평범합니다. 사실 평범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자주 들어온 말이기에 평범하다고 느껴지는 것뿐입니다. 어쨌든 솔로몬의 축복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기대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솔로몬의 축복은 한마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로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솔로몬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복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이스라엘의 응답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으로 말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있기를 원하는 솔로몬의 축복의 말인 것입니다.

 

 

 


여호와의 앞에서 나의 간구한 이 말씀을 주야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있게 하옵시고’라는 말도 여호와의 함께 하심의 축복이 이스라엘에게 계속 유지되기를 윈하는 심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함께 하심의 축복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결국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용서하는 것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60절에서 “이에 세상 만민에게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고 그 외에는 없는 줄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는 말을 하는 것도, 여호와만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자비를 구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심으로서 죄를 용서하시고 그와 함께 하시는 것으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증거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호와를 거부하는 것이 곧 멸망을 받을 죄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솔로몬의 축복은 성전건축이라는 자기 일을 앞세워 하나님께 복을 구하는 거래가 아닙니다. 축복의 의미를 물질적인 것으로 바꾸어 버린 세상의 세태에서 생각해 본다면 솔로몬의 축복은 선악을 분별하는 하늘의 지혜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 즉 임마누엘이 복이고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 되는 것을 복으로 말하는 솔로몬의 축복관에서 복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이 새롭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잘 살고, 잘 먹고, 잘 되고, 많이 누리고, 많이 가지고, 많이 쌓고, 무병장수(無病長壽)하는 것이 축복이라 생각하고 또 생각해 버린 우리들의 얄팍하고 이기적인 축복에 대한 그릇된 생각과 얼마나 다른가를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복은 평범하게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즉 너희 마음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화합하여 완전케 하여 오늘날과 같이 그 법도를 행하며 그 계명을 지킬찌어다”(61절)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지금 이와 같은 오늘(61,66)이 이스라엘의 내일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여 이러한 내용의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기도이기도 했습니다(22-53).

 

 

 


66절을 보면 “제 팔일에 솔로몬이 백성을 돌려보내매 백성이 왕을 위하여 축복하고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는데 여호와께서 그 종 다윗과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인하여 기뻐하며 마음에 즐거워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여호와로 인해 행복을 맛보는 이스라엘을 엿볼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 그것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며 자비를 베푸시고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것으로 이스라엘은 기뻐하고 마음에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생각할 것은, 열왕기서가 기록된 당시의 이스라엘의 상황은 나라가 분열되고 포로로 잡혀가 고통을 당하는 때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해 본다면 열왕기서를 기록한 저자는 솔로몬의 축복을 기록하면서 그때 이스라엘이 누렸던 기쁨과 즐거움이 이스라엘 안에 계속 유지되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워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8장에 등장하는 복의 기쁨과 즐거움을 잃게 했는가를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오늘 우리도 바로 이점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솔로몬의 낙성식은 분명 은혜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마칩니다. 그 기쁨과 즐거움은 솔로몬이 성전을 하나님의 자비의 자리로 보고 있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하나님께서 성전 건축을 허락하신 것은 자비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실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이름과의 사귐 안에서 죄 용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출 20:24절에서는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는 말씀을 합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바라보면서 이 말씀이 성취됨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고 이름과의 사귐에 있는 이스라엘은 죄 용서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죽지 않는 거룩한 존재가 됩니다. 솔로몬에게는 이것이 복이었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기를 원하는 것으로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끝까지 마음을 두어야 하는 것은 거룩을 유지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만을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것에 모든 마음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 다른데 마음을 둔다면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기쁨과 즐거움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솔로몬의 축복의 말을 대하면서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 것을 복으로 구하지 않는 것이 신앙의 증거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신앙의 증거물은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곧 우리를 하나님과 함께 함에도 죽지 않는 거룩한 자가 되게 한 복에 대한 감사가 신앙의 증거물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러한 기쁨과 즐거움이 없다면, 그것은 죄 용서를 말하고 하늘의 복을 말하면서도 정작 우리의 마음은 다른 데를 향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복의 내용을 안다고 해서 다 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알고 있는 복의 내용을 진심으로 보배로운 것으로 여긴다면, 나의 모든 마음이 내가 알고 있는 복의 내용으로 향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내 마음이 주께로 항하여 그 모든 길로 행하게 되기를 소원하며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25강) 열왕기상 9:1-9  하나님의 응답

 

<본문>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치며 자기의 무릇 이루기를 원하던 일이 마친 때에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 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 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 이 전이 높을지라도 무릇 그리로 지나가는 자가 놀라며 비웃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대답하기를 저희가 자기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부종하여 그를 숭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저희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열왕기상 9:1-9)

 

 

 


<설교>


인간은 뭔가 하고 나면 그에 대한 대가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질 것을 기대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자신이 행한 일에 대해 가치를 두기 때문에 ‘이같은 가치 있는 일을 했으니 하나님이 상주시겠지’라는 기대를 갖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께서 ‘구제하라’고 말씀하셨다고 할 때, 구제를 하고 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구제 했으니 상주시겠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구제를 하라고 하심으로써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잊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구제하라고 하셨으니까 구제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고 말씀대로 행했으니 하나님께 순종한 것이고 순종했으니 복주지 않으시겠느냐는 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얄팍한 생각인 것입니다. 이런 방식의 신앙에서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으로 존재하겠습니까? 신앙이라고 말할 수도 없겠지만, 이런 방식의 신앙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한쪽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군중들이 ‘호산나 호산나’라고 외치면서 열렬히 환영하였으나 사실 그들은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을 원하고 환영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꿈과 소망을 이루어줄 존재로 환영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였으나 십자가는 밀쳐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원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단지 구원을 주시는 분으로 존재하는 것이 현실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원하나 구원을 주는 분으로 원할 뿐이고, 십자가 역시 구원을 주기 위해 예수님이 죽으신 현장으로만 바라볼 때 내가 따라가야 할 진리의 길로는 보지 않는 것입니다. 즉 내가져야 할 십자가는 밀쳐 버린 채 예수님에게서 받을 것에만 마음을 두고 살아간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안되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바로 그 일 때문에 바라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의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서 의를 보시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고자 하시는 의는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법도와 율례에서 실패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에서 실패한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실패한 의를 예수님이 이루신 것입니다. 즉 십자가는 인간의 실패로 말미암아 발생한 것입니다.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행함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면서 자기 행함에 도취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의만을 의지하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 대로 이러한 십자가는 한쪽으로 밀려난 채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십자가’를 외치면서도 ‘십자가’를 외치는 행위를 의롭게 여기고 싶어하고 그 의로 인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 자기 행위에 도취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에 도취되는 것이야 말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다 이루신’ 예수님의 의에서 눈을 돌리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의가 아니라 자신의 의를 앞세우고자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진리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는 증표인 것입니다. 문제는 믿음 이후에 필요한 것이 실천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믿는다면 실천해야 한다는 생각이 스스로 믿는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대다수의 생각일 것입니다.

 

 

 


물론 믿음에서 행함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행함이란 주님의 의를 높이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인간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지를 못한 것입니다. 따라서 믿었으니 행하자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행함에서 실패한 것이 인간이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는 것일 뿐이며 이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인간 실패와 상관없는 십자가에 불과할 뿐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우리에게 이러한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치며 자기의 무릇 이루기를 원하던 일이 마친 때에 여호와께서 전에 기브온에서 나타나심 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라고 말합니다.
솔로몬이 이루기를 원하던 일들이 다 마쳤을 때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셨다고 말합니다. 왜 나타나셨을까요? 성전과 왕궁을 건축한 솔로몬을 칭찬하기위해 나타나셨을까요?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하고 여호와께 기도를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성전을 향해하는 기도를 들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3절에서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앞에서 기도하며 간구함을 내가 들었은즉 내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솔로몬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편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기도 응답과는 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응답은 내가 기도한 것을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즉 솔로몬이 성전을 향해 죄용서에 대한 기도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그래 언제든 성전을 향해 죄 용서를 구하면 용서해주마’라는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너의 건축한 이 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의 이름을 영영히 그곳에 두며 나의 눈과 나의 마음이 항상 거기 있으리니”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나의 눈과 마음이 항상 성전에 있다는 것은, 성전이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 안에 계셔서 항상 그들을 살피시고 계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사람이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대로 너의 이스라엘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려니와 만일 너희나 너희 자손이 아주 돌이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숭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나의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 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될 것이며”(4-7절)라는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기도 내용과 상관없이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이 말씀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의지가 무엇인가가 천명된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은 성전에도 매이지 않으시고 솔로몬의 기도에도 매이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원칙대로만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을 거룩히 구별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영영히 그 곳에 두시겠지만, 그러한 성전도 이스라엘이 율례와 법도를 지키지 아니한다면 던져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이 무엇을 하든 하나님은 법도와 율례 안에서 살아가는가를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이 하는 그 어떤 행위에도 마음을 두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솔로몬의 성전은 그 존속 여부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에 순종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역할로 존재함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행함으로 판단하시지 않고 법도와 율례로 판단하신다는 것을 잊고 삽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건 하나님의 의지는 법도와 율례를 지키지 아니하면 끊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이루기를 원하던 일을 다 마친 후에 자신의 손으로 이룬 것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감격해했겠습니까? 자신이 이룬 일에 도취될 수 있었지 않겠습니까?

 

 

 


만약 은석 교회가 좋은 예배당을 건축했다면 그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예배당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이고, 도우셨기 때문이고, 은혜가 함께 하셨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곧 내 손으로 지어진 것을 바라보고 거기 도취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은 내 손으로 지은 것은 그 무엇이든 영원하지 않음을 쉽게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손으로 이룬 것을 앞세워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시도만 하게 됩니다. 건축한 예배당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이 예배당도 무너질 것에 불과함을 알게 하셔서 언제나 예수님의 의로움만 의지하게 하소서’라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가 예배당에 의해서 밀려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이스라엘이 말씀에 순종치 않음으로 인해 무너지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의 손으로 지은 것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 우리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는 참된 성전입니다. 이 성전이 우리와 함께 함으로써 비로소 실패한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자신을 실패한 자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제하고 선교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보면서 마치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고 말씀에 순종 잘 하는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그러니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부른다면 과연 무슨 마음일까요? 이러한 사람들이 십자가를 말한다면 그 십자가는 어떤 십자가일까요?

 

 

 


말씀에 실패한 자로서 예수님을 부르는 것이라면, 그가 간절히 소원하는 것은 ‘예수님의 의’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신 의에 감사하면서 주님의 은혜만 증거하게 됩니다. 자신의 행함으로 뭔가를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하심이 곧 의로움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의로우신 행함만을 부각시키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예수님의 의가 자신과 함께 한다는 것으로 만족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그 속에 있는 신자라면 이러한 신자의 모습을 소원하며 살아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들은 말씀에 순종치 아니한 자신을 잊고 있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이루신 예수님의 의보다는 기독교를 이름한 자기 행위에 도취되어 살아갈 뿐입니다. 인간의 행위를 가치 없는 것으로 말하면 이구동성으로 반발하는 것이 ‘그러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 ‘그런 말은 인간의 열심을 꺾는 것이 아닌가?’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야 말로 인간의 행위에도 가치있는 것이 있음을 인정하라는 고집에 불과할 뿐입니다. 인간의 행위 자체를 가치 없는 것으로 인정하게 되면, 구제할 이유도 없고 선교할 필요도 없고 기도할 필요도 없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그동안 구제한 것이 구제가 가치 있는 행위이기 때문에 한 것이고, 구제를 함으로써 자신이 높아지기를 원하는 마음이었는가요? 기도가 신자로서 가치 있는 행동이기 때문에 기도한 것이고, 선교를 하고자 한 것도 내 이름이 가치 있는 이름으로 높여지기 위함이었는가요?

 

 

 


무엇을 하든 자신의 행위에 가치를 둔 것이 아니었다면, 인간의 행위는 가치 없다는 말을 듣는다고 해도 그 마음은 고요할 뿐입니다. 당연한 말을 들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3:16절을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말씀합니다. 오늘날에는 신자가 곧 하나님의 공로에 의해서 세워진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나타나는 것은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여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공로와 의를 나태려고만 합니다. 이런 인간에게 성령이 오셔서 죄를 책망하시고 회개하게 하시며 그리스도의 의만 바라보게 합니다. 그렇게 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의 의로움만 선포하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의 의를 부인하고 주님의 의로우심만 바라보면서 감사하게 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승리이며 하나님은 이 승리를 성전 삼으신 자기 백성을 통해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26강) 열왕기상 9:10-28  솔로몬의 건축

 

<본문>

솔로몬이 두 집 곧 여호와의 전과 왕궁을 이십 년 만에 건축하기를 마치고 갈릴리 땅의 성읍 이십을 히람에게 주었으니 이는 두로 왕 히람이 솔로몬에게 그 온갖 소원대로 백향목과 잣나무와 금을 지공하였음이라 히람이 두로에서 와서 솔로몬이 자기에게 준 성읍들을 보고 눈에 들지 아니하여 이르기를 나의 형이여 내게 준 이 성읍들이 이러하뇨 하고 이름하여 가불 땅이라 하였더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있으니라 히람이 금 일백이십 달란트를 왕에게 보내었더라 솔로몬 왕이 역꾼을 일으킨 까닭은 여호와의 전과 자기 궁과 밀로와 예루살렘 성과 하솔과 므깃도와 게셀을 건축하려 하였음이라 전에 애굽 왕 바로가 올라와서 게셀을 탈취하여 불사르고 그 성에 사는 가나안 사람을 죽이고 그 성읍을 자기 딸 솔로몬의 아내에게 예물로 주었더니 솔로몬이 게셀과 아래 벧호론을 건축하고 또 바알랏과 그 땅의 들에 있는 다드몰과 자기에게 있는 모든 국고성과 병거성들과 마병의 성들을 건축하고 솔로몬이 또 예루살렘과 레바논과 그 다스리는 온 땅에 건축하고자 하던 것을 다 건축하였는데 무릇 이스라엘 자손이 아닌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남아 있는 자 곧 이스라엘 자손이 다 멸하지 못하므로 그 땅에 남아 있는 그 자손들을 솔로몬이 노예로 역꾼을 삼아 오늘까지 이르렀으되 오직 이스라엘 자손은 솔로몬이 노예를 삼지 아니하였으니 저희는 군사와 그 신복과 방백과 대장이며 병거와 마병의 장관이 됨이었더라 솔로몬에게 역사를 감독하는 두목 오백오십 인이 있어 역사하는 백성을 다스렸더라 바로의 딸이 다윗 성에서부터 올라와 솔로몬이 저를 위하여 건축한 궁에 이를 때에 솔로몬이 밀로를 건축하였더라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단 위에 해마다 세 번씩 번제와 감사제를 드리고 또 여호와 앞에 있는 단에 분향하니라 이에 전 역사가 마치니라 솔로몬 왕이 에돔 땅 홍해 물가 엘롯 근처 에시온게벨에서 배들을 지은지라 히람이 자기 종 곧 바다에 익숙한 사공들을 솔로몬의 종과 함께 그 배로 보내매 저희가 오빌에 이르러 거기서 금 사백이십 달란트를 얻고 솔로몬 왕에게로 가져왔더라(열왕기상 9:10-28)

 

 

 


<설교>


사람은 타인의 인생을 바라보면서 ‘나도 저렇게 살아봤으면’하고 부러움을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타인의 인생에 대해 부러움을 갖는 것은 자신이 평소 원하고 바라던 모든 요소를 타인이 누리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환경과 삶의 모든 것이 내게 주어진다면 자신도 즐겁고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부러움은 현재의 자신의 실상에 대해 실망과 불평만을 남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거둬 버린 채 미래에 대한 환상을 꿈꾸며 살아가는 어리석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마지막이 무엇인가를 잊어버린 채 육신이 추구하는 욕망만 갖추어지면 즐거운 인생이 될 것이라고 여기는 어리석음이라는 것입니다. 타인의 것을 아무리 부러워한다고 해도 내 것이 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부러움에서 자유롭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임을 생각하면서 신자가 다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세상의 마지막에 대한 것입니다. 신자의 마지막과 세상의 마지막은 분명 다르기에 마지막을 기억한다면 인생의 즐거움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의 것을 갖춤으로서 분출되는 것이 아님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지막을 기억하지 못하고 본문을 대한다면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솔로몬의 업적뿐일 것입니다. 솔로몬이 누렸던 모든 것들에 대한 부러움과 환상만 머리에서 빙빙 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마지막이라는 자리에 서서 바라본다면 솔로몬의 업적이라는 것도 모두 헛된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솔로몬의 왕성한 건축열을 볼 수 있습니다. 10절에서 “솔로몬이 두 집 곧 여호와의 전과 왕궁을 이십년 만에 건축하기를 마치고”라고 말한 대로 솔로몬은 20년의 세월 동안 성전과 왕궁을 건축하였습니다. 그리고 19절에서 “자기에게 있는 모든 국고성과 병거성들과 마병의 성들을 건축하고 솔로몬이 또 예루살렘과 레바논과 그 다스리는 온 땅에 건축하고자 하던 것을 다 건축하였는데”라고 말한 것처럼 건축에 대한 솔로몬의 욕망은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솔로몬이 건축에 취미가 있어서가 아닐 것입니다. 솔로몬은 건축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국력을 탄탄하게 하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솔로몬의 이러한 모든 일들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솔로몬이 다윗의 행함같이 행하는가만 보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솔로몬의 건축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이미 지난 주일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신 것은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 건축하기를 마쳤을 때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행함같이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지키지 않으면 여호와께서 거룩히 구별한 전이라도 던져 버릴 것이고 이스라엘도 여호와가 준 땅에서 끊어버릴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솔로몬이 여호와의 말씀을 마음에 두었다면 솔로몬에게 중요한 것은 다윗의 행함이었을 것이고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11:9-10절에서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저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찍이 두 번이나 저에게 나타나시고 이 일에 대하여 명하사 다른 신을 좇지 말라 하셨으나 저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라고 말씀한 것을 보면 결국 솔로몬의 마음은 여호와의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다윗의 행함같이 행하는가를 보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그렇지 아니할 때는 이스라엘을 끊어버리신다는 것도 경고를 했습니다. 결국 솔로몬이 다윗의 행함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가 어떤 업적을 이루었든 상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진다는 것이 예고된 마지막인 것입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마지막에 대한 이러한 경고도 생각하지 않은 채 건축에만 모든 힘을 쏟은 것입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의 국력은 주변의 나라가 조공을 바칠 정도로 강해졌습니다. 10장의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과 솔로몬의 명성이 얼마나 대단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이 꿈꾸고 원하는 모든 것을 솔로몬은 한 몸에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은 이러한 솔로몬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실까요?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이지 않습니까?

 

 

 

11:6절을 보면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 부친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좇음 같이 좇지 아니하고”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1절에서는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나의 언약과 내가 네게 명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결단코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복에게 주리라”고 말씀합니다.
솔로몬이 어떤 업적을 세웠든 상관없이 솔로몬은 하나님의 법도에서 벗어난 자일뿐입니다. 법도에서 벗어난 자들이 무엇을 하든 그들의 마지막은 심판일 뿐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마지막을 우리의 기억에서 지워버린 채 세상을 보며 살아갑니다. 때문에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십자가에서 벗어난 채 멸망의 자리에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소유하고 누리며 살아가는 부러움의 대상밖에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늘의 은혜를 말하면서도 남에게 줘도 괜찮은 값싼 것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11절을 보면 “갈릴리 땅의 성읍 이십을 히람에게 주었으니 이는 두로 왕 히람이 솔로몬에게 그 온갖 소원대로 백향목과 잣나무와 금을 지공하였음이라”는 말을 합니다. 아마 솔로몬이 건축하는 일에 두로 왕 히람이 도움을 준 대가로 갈릴리 땅의 성읍 이십을 히람에게 준 것 같습니다.

 

 

 


그런데 12-13절의 “히람이 두로에서 와서 솔로몬이 자기에게 준 성읍들을 보고 눈에 들지 아니하여 이르기를 나의 형이여 내게 준 이 성읍들이 이러하뇨 하고 이름하여 가불 땅이라 하였더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있으니라”는 내용을 보면 솔로몬이 준 성읍들이 히람의 눈에 들지 않았고, 그래서 그 가불 땅이라고 이름하였다고 합니다. ‘가불’이라는 말은 ‘별로 좋지 않다’ ‘무가치하다’라는 뜻입니다. 결국 솔로몬이 갈릴리 성읍 이십을 히람에게 준 것도 갈릴리 성읍이 솔로몬에 크게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히람도 그 성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탐탁지 않게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갈릴리 성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기업입니다. 그러한 기업을 이방인인 히람에게 건축에 대한 도움의 대가로 지불한다는 것은 곧 건축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기업까지 이방인에게 넘기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기업에 대한 의식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건축을 통해 이스라엘을 굳게 세우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이미 하나님의 언약과 법도에서 벗어나 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러한 그가 뭘 하든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앞서 말한 대로 세상을 향해서는 그 이름을 떨칠 수가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 이름은 무너져야 할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25절에 보면 “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단 위에 해마다 세번씩 번제와 감사제를 드리고 또 여호와 앞에 있는 단에 분향하니라 이에 전 역사가 마치니라”고 말합니다. 솔로몬이 건축으로 바쁜 가운데서도 여호와를 위하여 해마다 세 번씩 번제와 감사제를 드렸다는 것에서 사람들은 쉽게 어쨌든 솔로몬이 신앙이 있었고 하나님을 섬기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어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아서 망했던가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쫓겨났던가요?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것은 다윗의 행함같이 행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도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되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건축을 하는 것 자체를 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의 정신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곧 죄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솔로몬이 건축을 하여 이스라엘을 부강하게 하고 국력을 강하게 했다고 해도 그는 결국 죄 속에 있는 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살아있으나 살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언약의 정신에서 벗어난 인간은 인간 취급을 하지 않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가 무엇을 하든 결국 망할 자라는 선언에 붙들린 존재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놓치고 살아갑니다. 자신이 행한 일을 통해서 자신을 보여주고 증거 하기를 원할 뿐,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가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을뿐더러, 하나님을 제멋대로 계산하고 생각하니 그럴 수밖에 없지만 결국 모두가 심각한 착각과 오류 속에 살아간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도서 1:2절을 보면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말합니다. 솔로몬이 노년에 이르고 보니 세상의 모든 것이 허무하게 여겨져서 헛되다는 말을 할까요? 그런 것이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들도 노년에 이르게 되면 알게 되는 이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음에 이르게 되면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솔로몬이 헛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고 나니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모두가 의미 없는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의미 없는 것에 매달려 온 인생이었기 때문에 헛되다고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그토록 건축에 열심인 것은, 건축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더욱 굳건히 세울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굳건하게 되고 강하게 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복안에 존재하는 이스라엘을 과시할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건축 자체에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았다면 솔로몬이 자신의 거의 모든 인생을 건축에 쏟아 부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만난다면 솔로몬처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는 고백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을 받아 죽으신 십자가의 현장에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세상의 것이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대도 우리가 살아온 인생은 의미도 가치도 없는 것에 매인 것에 불과했기에 헛되다는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은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희생뿐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죽은 자를 살리는 희생이기에 말할 수 없는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자는 자신의 일을 돌아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건축은 이스라엘을 강하게 만들었을 수는 있지만,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하나님에 의해 쫓겨날 존재에 불과하다면 그들은 불쌍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불쌍함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강함 속에 내포되어 있는 인간의 불쌍함을 볼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안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지혜있다’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육신에 보탬이 되는 것만을 추구하는 그 욕망이 곧 헛되다는 것을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의 자리에 서서, 인생의 끝을 바라보면서 세상이 왜 헛된가를 알 수 있기 바랍니다. 솔로몬이 다윗의 행함에서 이탈해 있는 이상, 그가 무엇을 하든 그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귀한 것은 십자가라는 이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27강) 열왕기상 10:1-10  스바 여왕

 

<본문>

스바 여왕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은 솔로몬의 명예를 듣고 와서 어려운 문제로 저를 시험코자 하여 예루살렘에 이르니 수원이 심히 많고 향품과 심히 많은 금과 보석을 약대에 실었더라 저가 솔로몬에게 나아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말하매 솔로몬이 그 묻는 말을 다 대답하였으니 왕이 은미하여 대답지 못한 것이 없었더라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모든 지혜와 그 건축한 궁과 그 상의 식물과 그 신복들의 좌석과 그 신하들의 시립한 것과 그들의 공복과 술 관원들과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는 층계를 보고 정신이 현황하여 왕께 고하되 내가 내 나라에서 당신의 행위와 당신의 지혜에 대하여 들은 소문이 진실하도다 내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목도한즉 내게 말한 것은 절반도 못되니 당신의 지혜와 복이 나의 들은 소문에 지나도다 복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이 신복들이여 항상 당신의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기뻐하사 이스라엘 위에 올리셨고 여호와께서 영영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므로 당신을 세워 왕을 삼아 공과 의를 행하게 하셨도다 하고 이에 저가 금 일백이십 달란트와 심히 많은 향품과 보석을 왕께 드렸으니 스바 여왕이 솔로몬 왕께 드린 것처럼 많은 향품이 다시 오지 아니하였더라(열왕기상 10:1-10)

 

 

 


<설교>


여러분은 2억 원대를 호가하는 난이 있다면 믿어지겠습니까? 들은 풍월로 비싼 난은 몇 백만 원 혹은 몇 천만 원하는 것도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몇 천만 원을 호가하는 난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긴가민가했던 저로서는 실제 2억 원을 호가하는 난이 있음을 TV에서 확인했을 때 입이 벌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난은 한국 춘란이라고 하는데 잎의 색깔과 무늬에 따라서 가격이 작게는 몇 천원부터 크게는 수억 원까지 천차만별이라는 설명을 들으면서도 도대체 풀잎 몇 개에 불과한 것이(난 애호가들이 들으면 무식한 말이라고 하겠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풀잎으로만 보이니 어찌하겠는가) 2억 원이라는 것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TV에서 몇 만 원짜리 난과 비교하여 보여주면서 설명을 하였지만, 난을 좋아하지도 않고 취미도 없는 저의 눈에는 그저 똑같은 풀잎으로만 보였을 뿐입니다. 그런데 난 애호가인 그분들의 눈에는 더할 수 없는 보물이었고 2억 원의 가치가 있는 난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내세우는 보물은 제각기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보물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하찮은 풀과 다를 바 없이 보이는 것처럼, 내게 보물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보물로 여겨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결국 보물에 대한 시각은 사람들이 제각기 가지고 있는 취미와 사고방식과 가치관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2억 원짜리 난은 난 애호가들에게는 말 그대로 보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가능하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아서라도 한번은 소장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당시 저의 마음은 ‘만약 저 난이 내게 있다면 당장 팔아서 딴것 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난 애호가들에게는 2억 원짜리 난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행복을 느끼겠지만, 난에 관심이 없는 저에게는 2억이 아니라 10억짜리 난이라고 해도 그것이 행복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행복이 아닌 것을 팔아서 행복이 되는 것을 내게 두겠다는 생각이 발동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마다 보물은 다르지만, 보물을 추구하는 마음은 같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보물을 가지고 행복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보물인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공통적인 마음이며 또한 인간의 한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한계로 인해서 예수님이 가져오신 보물을 전혀 알 수 없고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져오신 보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피 흘림으로 인한 구원입니다.
십자가의 피 흘림으로 인한 구원은 우리를 우리의 행함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내 행함을 바라보면서 낙심하고 불안해하고 염려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게 함으로써 예수님의 공로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맛보게 합니다. 그래서 보물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것을 보물로 여기지 않습니다. 자신의 기쁨, 행복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가져오신 보물이 보물로 여겨집니까? 예수님의 공로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내 마음이 주님에 의해 변화되기를 소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명예를 듣고 어려운 문제로 저를 시험하기 위해 찾아옵니다(1절). 스바 여왕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모두 말하고 솔로몬은 그 말에 대해 대답하지 못한 것이 없었습니다(2,3절).

 

 

 


이로 인해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와 왕궁과 성전의 규모와 상의 식물과 신하들 등을 보고 놀라게 됩니다. 스바 여왕이 얼마나 놀랐는가는 6,7절의 “왕께 고하되 내가 내 나라에서 당신의 행위와 당신의 지혜에 대하여 들은 소문이 진실하도다 내가 그 말들을 믿지 아니하였더니 이제 와서 목도한즉 내게 말한 것은 절반도 못되니 당신의 지혜와 복이 나의 들은 소문에 지나도다”는 말에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을 보면 스바 여왕이 단지 솔로몬의 지혜와 그가 누리고 있는 부귀영화에 대해서만 감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8,9절의 내용을 보면, 이방 여인에게서는 생각할 수 없는 전혀 다른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스바 여왕은 “복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이 신복들이여 항상 당신의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찌로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기뻐하사 이스라엘 위에 올리셨고 여호와께서 영영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므로 당신을 세워 왕을 삼아 공과 의를 행하게 하셨도다”(8.9절)는 말을 합니다.

 

 

 


즉 스바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와 이스라엘을 부강하게 한 능력을 칭찬하고 높이는 것이 아니라 솔로몬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시고, 지혜를 주셔서 공과 의를 행하게 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것이 솔로몬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한 것임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송축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솔로몬과 같은 왕을 두어서 나라가 발전하게 된 것이 복이 아니라, 항상 솔로몬 앞에 서서 솔로몬으로부터 지혜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작 이스라엘이 항상 솔로몬 앞에서 지혜를 들을 수 있는 것을 복으로 여기는가? 이고 솔로몬 역시 자신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송축하는가? 에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스바 여왕의 입장이었다면 솔로몬이 누리고 있는 것을 바라보면서 복되다고 했을 것이고 그 모든 것을 누리고 있는 솔로몬을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선을 항상 세상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솔로몬과 같은 사람이 부럽게 보일 뿐입니다. 솔로몬이 누리고 있는 것을 누렸으면 하는 소망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스바 여왕은 솔로몬 앞에 서서 지혜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이스라엘이 부러웠을 뿐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서 공과 의를 행하게 하신 것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마 12:4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지혜의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솔로몬을 찾아온 스바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의 죄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솔로몬보다 크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지혜에 대해 무관심한 세상을 정죄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소유한다고 해도 사람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2억 짜리 난을 소유하고 그것으로 행복을 맛본다고 해도 사람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그 마지막은 멸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멸망이라는 말 자체를 우습게 여깁니다. 하지만 지옥의 고통을 견디다 못해 나사로를 자기 형제에게 보내서 지옥의 실상을 증거 하여 자신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부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멸망이라는 말에 마음이 떨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살았을 때 좋은 것만 받기를 원했던 것에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세상에서 좋은 것만 주어지기를 원합니다. 좋은 것이 주어짐으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 어떤 행복을 누린다고 해도 사람이 달라지지 않으면 결국 멸망으로 마치는 인생임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보다 크신 분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지혜를 구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죄 받을 이 세대의 실상입니다.

 

 

 


사람은 예수님을 거부할 수 없는 입장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을 거부하고서도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은혜와는 상관없는 자로 인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곧 인생의 비참함이라는 것을 안다면 예수님을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 되셔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영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죄와 사망의 법에 묶여 있는 자신을 보지 못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죄와 사망의 법에 묶여 있다고 해도, 전혀 고통스러운 것도 없고 세상일에 방해되는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에게서도 죄와 사망의 법에서 구출하신 은혜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다만 솔로몬이 누렸던 좋은 것들이 자신에게도 조금이나마 주어지기를 고대하면서 예수님을 부를 뿐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복됨을 알지 못하게 되고, 예수님이 나의 왕이 되셔서 나를 인도하시는 사랑에 대해서도 무지할 뿐입니다. 내가 달라지기를 원하기보다는 내 환경이 달라지기를 원할 뿐입니다. 환경만 달라지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대에 오직 지혜의 말을 듣기 위해 온 스바 여왕이 이 세대를 정죄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도 스바 여왕으로 말미암아 정죄를 받아야 하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의인이기에 달라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신이 달라져야 하고 고침 받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 무관심하고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신자로, 이미 고침 받은 사람으로, 예수님을 아는 자로, 복음을 아는 자로 여기고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자신이 고침 받고 달라지기를 원하는 것보다는 타인을 고치고 달라지게 하려고 달려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복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고침 받고 달라지기를 원하는 마음이 없기에 말씀을 듣는 자의 복을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 12:39-40절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는 말씀을 합니다. 요나는 니느웨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것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가지고 도망을 쳤습니다. 요나의 생각에 니느웨는 구원과는 거리가 먼 악한 이방민족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요나는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도 역시 고침을 받아야 할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요나에게 알게 하신 것은, 사흘 동안 물고기 뱃속에 갇힌 죽음의 경험이었습니다. 즉 자신도 죽어 마땅한 존재임을 알게 하신 것이 요나의 표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흘을 땅 속에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땅에 묻혀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출하시고 생명과 성령의 법에 있게 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야 말로 놀라운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지혜가 미련하게 보이기에 결국 예수님에게서 자기 행복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바 여왕이 정죄하는 이 세대의 실상입니다.

 

 

 

 

신자는 세상을 향해 정죄하는 자로 세워져 있습니다. 신자가 완벽하기에 정죄하는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죽어야 할 자라 바로 나라는 것을 알고 십자가를 증거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자라는 뜻입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매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자리로 내려가 보십시오. 우리를 구출하신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될 것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나는 복되다’는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28강) 열왕기상 10:14-29  솔로몬과 재물

 

<본문>

솔로몬의 세입금의 중수가 육백육십육 금 달란트요 그 외에 또 상고와 무역하는 객상과 아라비아 왕들과 나라의 방백들에게서도 가져온지라 솔로몬 왕이 쳐서 늘인 금으로 큰 방패 이백을 만들었으니 매방패에 든 금이 육백 세겔이며 또 쳐서 늘인 금으로 작은 방패 삼백을 만들었으니 매방패에 든 금이 삼 마네라 왕이 이것들을 레바논 나무 궁에 두었더라 왕이 또 상아로 큰 보좌를 만들고 정금으로 입혔으니 그 보좌에는 여섯 층계가 있고 보좌 뒤에 둥근 머리가 있고 앉는 자리 양편에는 팔걸이가 있고 팔걸이 곁에는 사자가 하나씩 섰으며 또 열두 사자가 있어 그 여섯 층계 좌우편에 섰으니 아무 나라에도 이같이 만든 것이 없었더라 솔로몬 왕의 마시는 그릇은 다 금이요 레바논 나무 궁의 그릇들도 다 정금이라 은 기물이 없으니 솔로몬의 시대에 은을 귀히 여기지 아니함은 왕이 바다에 다시스 배들을 두어 히람의 배와 함께 있게 하고 그 다시스 배로 삼 년에 일차씩 금과 은과 상아와 잔나비와 공작을 실어 왔음이더라 솔로몬 왕의 재산과 지혜가 천하 열왕보다 큰지라 천하가 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마음에 주신 지혜를 들으며 그 얼굴을 보기 원하여 각기 예물을 가지고 왔으니 곧 은그릇과 금그릇과 의복과 갑옷과 향품과 말과 노새라 해마다 정한 수가 있었더라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일천사백이요 마병이 일만 이천이라 병거성에도 두고 예루살렘 왕에게도 두었으며 왕이 예루살렘에서 은을 돌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같이 많게 하였더라 솔로몬의 말들은 애굽에서 내어 왔으니 왕의 상고들이 떼로 정가하여 산 것이며 애굽에서 내어 올린 병거는 하나에 은 육백 세겔이요 말은 일백오십 세겔이라 이와 같이 헷 사람의 모든 왕과 아람 왕들을 위하여도 그 손으로 내어 왔더라(열왕기상 10:14-29)

 

 

 


<설교>


예전에 어떤 광고에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부자 되라는 이 말은 누구도 싫어하지 않는 말일 것이고 또 세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슴에 품고 있는 희망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람들의 이러한 희망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합니다. 지난주일 오후에 말씀드린 것처럼 성경은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9)는 말을 하고, 또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도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십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부자 되는 것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결국 성경을 진리라고 하면서도 성경을 무시하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러한 말씀들이 매일 하늘에 글씨로 나타난다거나 음성으로 들린다면 아마 크게 놀라면서 부자 되고자 하는 자기 마음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들이 다만 활자로 인쇄되어 있는 것 때문에 쉽게 잊어버리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자 되는 것이 무엇이기에 성경은 그토록 강하게 경고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부자 되고 싶어 하는 마음과 천국을 소망하는 마음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두 마음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부자 되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산다면 결국 부자만 된다면 천국을 포기해도 좋다는 식이 될 수밖에 없고, 천국을 소망하는 마음이라면 부자가 아니어도 좋다는 마음일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천국은 부자 되고자 하는 마음은 절대 허락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은 부자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는 의미도 됩니다. ‘아니 부자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왜 예수를 믿을 수 없는가?’라고 항변하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끝까지 부자 되고 싶은 마음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자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을 수 없다면 부자 되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고 예수님을 믿는 자로 살고 싶다는 소원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는 신자의 자연스런 모습인데 그토록 우리는 ‘부자’라는 것에 미련을 버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왜 부자 되고자 하는 마음을 허용하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부자 되고 싶어 하는 것은, 하고 싶은 것을 원 없이 하면서 살아가는 즐거움의 세계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것, 더 좋은 것을 소유하고 싶어 하고, 세상이 알아주는 영광의 세계를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세계를 절대 좋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부자 되고자 하는 마음을 허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부자 되고자 하는 마음에는 부자들이 부러움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나도 저 사람들처럼 살아봤으면’하고 지금의 자신의 처지를 싫어하게 됩니다. 이런 마음으로 고난 받고 죽으신 예수님의 세계가 마음에 들어오겠습니까? 그 세계를 바라보려고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 역시 부자 되고자 하는 마음으로 본다면 단지 솔로몬이 누렸던 부와 영광이 마음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부가 부러움의 대상으로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할 것입니다.

 

 

 


솔로몬이 누렸던 부는 한마디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14절을 보면 “솔로몬의 세입금의 중수가 육백 륙십 륙 금 달란트요”라고 말하는데, 육백 륙십 륙 금 달란트가 대략 사천 오백 억 원에 해당되는 액수임을 생각한다면 솔로몬은 매년 엄청난 액수를 세금으로 거둬들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무역하는 상인들과 주변 나라들이 바치는 조공까지 계산한다면 솔로몬의 재물은 상상할 수도 없었을 정도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8절을 보면 보좌를 상아로 만들고 정금으로 입혔다고 합니다. 또한 마시는 그릇도 금으로 만들었으며 천하가 솔로몬에게 가져온 금과 은 등의 예물로 인해 은은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니 솔로몬의 재물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말 그대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재물을 소유한 것을 두고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16-17절을 보면 “솔로몬 왕이 쳐서 늘인 금으로 큰 방패 이백을 만들었으니 매 방패에 든 금이 육백 세겔이며 또 쳐서 늘인 금으로 작은 방패 삼백을 만들었으니 매 방패에 든 금이 삼 마네라 왕이 이것들을 레바논 나무 궁에 두었더라”고 말합니다. 방패는 전쟁을 위한 무기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방패를 금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전쟁을 대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전쟁 무기를 금으로 만들겠습니까? 따라서 솔로몬이 만든 금 방패는 과시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위대함과 강함과 부함을 금으로 만든 방패를 진열해 놓음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또한 26절에서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일천 사백이요 마병이 일만 이천이라 병거성에도 두고 예루살렘 왕에게도 두었으며”라고 말하는 것을 보더라도, 솔로몬은 병거와 마병으로 무장하여 이스라엘의 강력한 힘을 보여주고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 17:16-17절을 보면 “왕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게 말 것이며 은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솔로몬이 병거와 말들을 애굽에서 구입하였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28,29절) 솔로몬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은 잊어버린 상태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부자 되고 싶은 이유가 솔로몬처럼 살고 싶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초라한 삶이 아니라 남들이 누리지 못한 것을 누리면서 화려한 삶을 살고 싶은 욕망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마시는 그릇 조차도 금으로 만들어서 자신을 과시하고 보여주고 싶은 그 마음이 과연 십자가에 피 흘리고 죽으신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을 허락하겠습니까? 그러니 부해지고자 하는 그 마음을 천국이 어떻게 허용을 하겠습니까?

 

 

 


11:6절을 보면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 부친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좇음 같이 좇지 아니하고”라고 말하고, 9절에서는 마음을 돌이켜 여호와 하나님을 떠났다고 말합니다. 솔로몬이 악을 행한 것은 무엇이고, 다윗처럼 여호와를 온전히 좇지 않은 것은 무엇입니까?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완벽히 지켰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고 의지하였음을 뜻합니다.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온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온전함입니다.

 

 

 


돈은 사람에게 감추어져 있는 죄를 지적해 내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돈으로 천국갈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굳이 돈에 국한하여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부자라는 것은 남보다 많이 가진 것을 뜻합니다. 즉 돈에 부자가 아니라 지식에 있어서 부자도 있을 수 있고 외모에 있어서도 부자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부자들은 남보다 낫다는 자세를 취하기 십상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가짐으로는 자신의 죄를 볼 수 없게 되기 때문에 결국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가난하면 되는 것입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기 신세에 대해 불만을 가지면서 역시 더 나아질 것을 꿈꿉니다. 소유는 없다고 해도 그 마음은 모든 것을 갖고자 하는 소유욕이 강하게 자리하고 있기에 그런 마음으로는 자신의 죄를 볼 수가 없으며 따라서 천국과 상관없는 마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죄를 보게 되면, 자신은 천국 갈 자격이 없는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마음이라면 자신은 부자로 살아야 할 권리도 자격도 없음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남보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좋은 것을 누리며 살아갈 이유도 권리도 자격도 자신에게 없음을 알 때 부해지고자 하는 자신의 마음이 곧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생각지 않은 악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이 허용하는 마음입니다.

 

 

 


부자 되고 싶다는 것은, 자신은 부자로 살 자격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마음이라면 부자가 아닌 지금의 처지를 부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것은 뻔한 것이고, 그것은 죄인으로 태어난 자신의 실상을 보지 않는다는 뜻이고, 가난하든 부하든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도 외면해 버린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마음인 것입니다.

 

 

 


빌 4:11-1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말합니다. 사도의 이 말은 가난하든 부하든 그 마음은 변함없이 예수님을 향한다는 뜻입니다. 결국 우리의 문제는 부자 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예수님을 향하지 않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세상이 부러워 할 만한 부와 영광을 누렸고 지혜도 있었지만 정작 그 모든 것으로도 자신의 죄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상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긍휼과 자비를 보지 않으니 모든 신이 같게 보인 것입니다.

 

 

 


신자가 영생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날마다 자신의 죄에 대해 지적을 받고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심판의 대상인 자신의 실상을 보게 되는 것이고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이라고 해도 죄인인 나에게는 과분할 뿐이라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에서 ‘모든 것이 주의 은혜’라는 고백이 나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모든 재물로도 영광으로도 이러한 고백의 마음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오심으로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라면 부해지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모든 것을 주님의 은혜로 고백할 수 있는 마음으로 달라지는 것을 소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천국이 어떤 마음을 허용하는가를 안다면 말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간이 보지 못하고 있는 죽음의 실체를 드러내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인간에게 주어진 저주와 죽음의 실체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참된 생명에 소망을 두게 하기 위함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이 부자 되게 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부자 된 것으로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은 수많은 재물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잊었습니다. 재물로 자신의 강함을 과시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사도의 말처럼 풍부에 처할 줄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살아감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솔로몬의 악입니다. 생명은 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있습니다. 사람을 생명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돈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재물로 살아가는 인생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의로 살아가는 인생이 되기를 소망해야 합니다.

 

 

 

 

 

(29강) 열왕기상 11:1-13  다윗의 마음

 

<본문>

솔로몬 왕이 바로의 딸 외에 이방의 많은 여인을 사랑하였으니 곧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이라 여호와께서 일찌기 이 여러 국민에게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와 서로 통하지 말며 저희도 너희와 서로 통하게 말라 저희가 정녕코 너희의 마음을 돌이켜 저희의 신들을 좇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저희를 연애하였더라 왕은 후비가 칠백 인이요 빈장이 삼백 인이라 왕비들이 왕의 마음을 돌이켰더라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 부친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좇음같이 좇지 아니하고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저가 또 이족 후비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저희가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 솔로몬이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므로 여호와께서 저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일찌기 두 번이나 저에게 나타나시고 이 일에 대하여 명하사 다른 신을 좇지 말라 하셨으나 저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나의 언약과 내가 네게 명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결단코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복에게 주리라 그러나 네 아비 다윗을 위하여 네 세대에는 이 일을 행치 아니하고 네 아들의 손에서 빼앗으려니와 오직 내가 이 나라를 다 빼앗지 아니하고 나의 종 다윗과 나의 뺀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네 아들에게 주리라 하셨더라(열왕기상 11:1-13)

 

 

 


<설교>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반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독교가 타 종교와 다른 점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비록 불교가 아니고 유교가 아니라고 해도 불교나 유교에서 가르치는 내용에 대해서 반발은 하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좋은 말이다’라는 반응을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면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예수님을 세상에서 축출해 버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세상은 왜 그런 반응을 보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저마다 자기 기쁨을 위해 살아갑니다. 자기 발전과 이름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불교나 유교가 가르치는 내용들은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소위 인격과 윤리의 덕목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윤리와 인간의 덕목이라는 것에 대해 반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윤리적인 덕목을 갖춤으로써 자신의 인간성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불교나 유교의 가르침들은 그저 좋은 내용으로 여겨지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윤리적인 덕목을 갖춘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인간을 지옥 갈 존재로 선언해 버립니다. 인간에게서는 의가 있을 수 없고 선이 나올 수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말씀들이 스스로의 노력과 수양으로 얼마든지 선을 쌓고 의를 보일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분노하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에 대한 절망이 없기에 항상 자신에 대해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그 가능성을 가지고 하나님께 접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단지 죄를 용서해주는 기능을 가진 분으로만 여겨질 뿐입니다. 죄 용서는 예수님에게 맡기고 자신들은 자신의 의로 하나님께 나아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라는 종교적 형태를 갖추고 있을 뿐 그 마음은 전혀 기독교와 상관이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4절을 보면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라고 말합니다.

 

 

 


솔로몬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한 것을 두고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다고 말합니다. 반대로 하면 하나님 앞에 온전한 것은 다윗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즉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면 그 누구도 여호와를 좇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다윗과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과 같은 마음이 아니고서는 아무리 기독교적인 형태를 완벽히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솔로몬처럼 악을 행하고 그 마음이 여호와부터 떠났다는 선언을 들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악함이 단순히 많은 여인을 두고 우상을 섬긴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솔로몬보다는 나은 인간으로 여겨지게 될 것이고 솔로몬의 악으로부터 자유롭게 될 것입니다.

 

 

 


사실 다윗도 우리아의 아내와 동침했고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우리아를 죽였지 않습니까? 이러한 다윗과 솔로몬이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똑같이 악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윗을 온전한 자로 여깁니다. 그것은 다윗의 마음 때문입니다. 어떤 마음인가 하면 자신의 악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상한 심령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시 51:17절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은 어떤 의식이나 형태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상한 심령이라는 것입니다. 상한 심령을 멸시치 않으시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상한 심령을 기뻐하시고 멸시치 않으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상한 심령만이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분으로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상한 심령은 자기 자신에게 철저히 절망한 마음입니다. 자신에게서 나올 것은 오직 죄 밖에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일 때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다윗은 마음과 같지 않았습니다. 상한 심령이 아니었고 자신에 대해 절망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자기 기쁨을 위해 살아갈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여인들을 두었고, 그 여인들이 가지고 온 우상도 거절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4,5절을 보면 “솔로몬의 나이 늙을 때에 왕비들이 그 마음을 돌이켜 다른 신들을 좇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 부친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고 말하고 7절에서도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를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었고 또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을 위하여 그와 같이 하였으며 저가 또 이족 후비들을 위하여 다 그와 같이 한지라 저희가 자기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솔로몬이 왕비들이 가지고 온 다른 신을 좇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다윗의 마음 같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상한 심령이 아니었기 때문에 솔로몬은 죽음의 자리에 있는 자신을 일으킬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대해서도 무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긍휼과 자비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바라보는 신은 다 같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솔로몬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지 않은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마음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기쁨을 위해 살아가는 마음일 뿐입니다. 이것이 솔로몬의 악입니다.

 

 

 


반면에 다윗의 마음은 하나님에게 향했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자리에 있는 자신을 알게 되고, 자신에 대해 철저히 절망했을 때 다윗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이라는 것은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상한 심령의 마음에게 귀한 것은 무엇일까요? 두말할 것 없이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모든 죄를 가려주시고 용서하신 사랑과 긍휼보다 더 귀한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신자의 마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세상이 들을 때는 쓸데없는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들 속에도 상한심령 자체를 무시하고자 하는 세력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육신의 일에 도움이 되는 것만을 가치 있는 것으로 보게 하는 세력이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성령이 오심으로 그 마음이 바뀌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신에게 절망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믿음은 결국 자신을 기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길 뿐이기 때문입니다.

 

 

 


상한 심령이 아닐 때 사람은 자연히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희망으로 삼게 되고 세상의 것만 소유하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상한 심령으로 바라보는 세상은 모두가 헛된 것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그 무엇도 죽음의 자리에 있고 절망의 상태에 있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무엇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대신 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영광도 결국 풀의 꽃처럼 한순간 반짝하고 사그라질 것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오직 세상의 것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며 살고자 합니다. 그것을 행복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온전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의 것으로 풍족하면 족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도 인간은 부족하고 한계가 있음을 잘 압니다. 그러면서도 온전케 하시는 분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이대로 살다가 죽겠다는 심보입니다. 아무리 하늘의 것이 온전하고 좋다고 해도 지금 내 입에 들어오는 사탕 하나만도 못하다고 여겨버립니다.
이런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은 ‘너희는 죽어가는 죄인이다’는 것을 외치고 있습니다. 이 외침에 마음이 향하고, 죽어가는 자신을 실상을 발견하고 상함 심령이 되어 여호와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는 그 마음이야 말로 성령으로 인해 새롭게 된 온전한 마음이며 다윗과 같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이 마음을 멸시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행한 어떤 공로도 상한 심령을 뛰어 넘지 못합니다. 무엇으로도 하나님 앞에 온전하다고 여김 받을 수 없으나 오직 상한 심령만을 받으신다는 것을 마음에서 지우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말씀대로 살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말씀대로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씀대로 사는 것은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불쌍히 여겨주시는 은혜와 긍휼을 마음에 간직하고 사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신 은혜로 하루하루 살고 있음을 알고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 알고 감사하며 사는 마음이 곧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먹는 것 입는 것으로 만족할 마음이 없으면서 말씀대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곧 자신의 믿음을 한마디 말로 포장하는 위선에 불과할 뿐입니다. 상한 심령으로 행하지 않은 모든 것이 위선이고 거짓일 뿐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상한 심령으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다윗과 같은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이러한 자로 새롭게 하기 위해 성령을 보내셨으니 자기 기쁨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상한 심령이 사라진 자리에는 하나님의 긍휼도 사랑도 용서도 없습니다. 때문에 나타나는 것은 세상 것으로 살고자 하는 욕망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잘해서 그것으로 자기 기쁨을 삼고자 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자로 여김 받기를 원하신다면 날마다 죽어가는 인간의 실상을 깊이 알게 됨으로써 나에 대해 절망하고 상한 심령이 되어 여호와의 불쌍히 여기시는 은총을 구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십시오. 성령은 여러분을 이러한 자로 새롭게 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상한 심령, 즉 다윗의 마음은 성령이 오신 증거물인 것입니다.

 

 

 

 

 

(30강) 열왕기상 11:26-40  솔로몬의 대적

 

<본문>

솔로몬의 신복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또한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하였으니 저는 에브라임 족속인 스레다 사람이요 그 어미의 이름은 스루아니 과부더라 저가 손을 들어 왕을 대적하는 까닭은 이러하니라 솔로몬이 밀로를 건축하고 그 부친 다윗의 성의 무너진 것을 수축하였는데 이 사람 여로보암은 큰 용사라 솔로몬이 이 소년의 부지런함을 보고 세워 요셉 족속의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더니 그 즈음에 여로보암이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에 실로 사람 선지자 아히야가 길에서 저를 만나니 아히야가 새 의복을 입었고 그 두 사람만 들에 있었더라 아히야가 그 입은 새 옷을 잡아 열두 조각에 찢고 여로보암에게 이르되 너는 열 조각을 취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나라를 솔로몬의 손에서 찢어 빼앗아 열 지파를 네게 주고 오직 내 종 다윗을 위하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뺀 성 예루살렘을 위하여 한 지파를 솔로몬에게 주리니 이는 저희가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숭배하며 그 아비 다윗의 행함 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치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나의 법도와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함이니라 그러나 내가 뺀 내 종 다윗이 내 명령과 내 법도를 지켰으므로 내가 저를 위하여 솔로몬의 생전에는 온 나라를 그 손에서 빼앗지 아니하고 주관하게 하려니와 내가 그 아들의 손에서 나라를 빼앗아 그 열 지파를 네게 줄 것이요 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 내가 너를 취하리니 너는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다스려 이스라엘 위에 왕이 되되 네가 만일 내가 명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의 행함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 내가 이로 인하여 다윗의 자손을 괴롭게 할 터이나 영원히 하지는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한지라 이러므로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 하매 여로보암이 일어나 애굽으로 도망하여 애굽 왕 시삭에게 이르러 솔로몬의 죽기까지 애굽에 있으니라(열왕기상 11:26-40)

 

 

 


<설교>


지난 시간에 솔로몬이 누렸던 부와 영광에 대해 말씀을 드렸지만, 세상에서 제일가는 부를 누린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마음이 다윗과 같지 아니하면 그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온전치 못한 자로 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으로 남을 뿐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앞에서는 천하에 제일가는 재물도 권력도 모두가 무용지물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혜의 삶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내다보며 사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습니다. 세상이 볼 때는 신의 간섭 없이 인간이 스스로 움직이고 인간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것으로 여기지만 엄연한 현실은 하나님의 주관 아래 다스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바람 불고 비오는 것 하나까지도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주관하심의 흔적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에 대한 믿음이 없기에 하나님을 말하나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삶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과 똑같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해서도 우습게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일어났던 일들을 통해 여러분은 무엇을 배우고 깨닫습니까? 이스라엘에게 백성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 엄중히 외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은 살아계신다’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벗어난 자에 대해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면서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신자는 세상에서 잘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잘 산다는 것이 축복의 내용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자로 여김 받는 믿음의 길을 가는 것이 곧 축복임을 믿는 자로 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부를 누렸던 솔로몬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4절에서 언급한 대로 솔로몬이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 마음이 여호와를 떠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두 번이나 나타나셔서 여호와의 법도와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섬기면 이스라엘을 끊어버리신다는 경고를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솔로몬은 하나님의 경고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11:11절에서도 보면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시되 네게 이러한 일이 있었고 또 네가 나의 언약과 내가 네게 명한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결단코 이 나라를 네게서 빼앗아 네 신복에게 주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도 솔로몬은 변함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키라고 하신 언약이 무엇이고 법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관심을 두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솔로몬에게 주어진 것은 이스라엘을 솔로몬에게서 빼앗아 신복에게 주신다는 심판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시행되어지는 것이 본문의 내용인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솔로몬을 대적하는 자들이 일어납니다. 물론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을 대적하는 자들을 일으키심으로써 솔로몬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말씀하고자 합니다.

 

 

 


먼저 14절의 “여호와께서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시니 저는 왕의 자손으로서 에돔에 거하였더라”는 내용을 보면 에돔 사람 하닷이 솔로몬을 대적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닷은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이 에돔 사람을 모두 죽일 때 어린나이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서 애굽으로 도망친 사람입니다. 그러니 다윗에 대해 얼마나 원한이 깊겠습니까? 애굽에서 복수의 칼날을 갈았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윗과 요압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고국으로 돌아갔던 것입니다. 그러한 하닷으로 하여금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23절의 “하나님이 또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시니 저는 그 주인 소바 왕 하닷에셀에게서 도망한 자라”는 내용을 보면, 하닷만이 아니라 르손을 일으켜 역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십니다. 르손은 다윗이 소바 사람을 죽일 때에 르손이 사람들을 모아 다메섹으로 가서 거기서 왕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25절의 “솔로몬의 일평생에 하닷의 끼친 환난 외에 르손이 수리아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미워하였더라”는 말을 보면 솔로몬이 하나님이 일으키신 대적들로 많은 고통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고통 속에서 솔로몬은 어떤 생각을 해야 했습니까? 그 모두가 하나님이 일으키신 일임을 알고 자신의 잘못됨을 발견하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솔로몬은 전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26절을 보면 여로보암이 솔로몬을 대적하는 자로 등장합니다. 여로보암이 솔로몬을 대적하는 이유는, 솔로몬이 여로보암을 죽이려고 했었기 때문입니다. 여로보암은 당시 큰 용사였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밀로를 건축하고 다윗의 무너진 성을 건축할 때 솔로몬이 여로보암의 부지런함을 보고 요셉 족속의 역사를 감독하는 감독자로 세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즈음에 여로보암이 선지자 아히야를 만나게 됩니다. 그때 아히야는 자신이 입은 새 옷을 열 두 조각으로 찢고 그 중에 열 조각을 여로보암에게 주면서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어떻게 하실지에 대해 예언을 합니다. 아히야가 여로보암에게 말한 예언은 한마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찢어서 열 지파를 여로보암에게 주고 한 지파만을 솔로몬의 아들에게 남기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로 솔로몬은 여로보암을 죽이려고 했고 여로보암은 애굽으로 도망을 쳤던 것입니다.

 

 

 


솔로몬에게 아히야 선지자의 말은 자신의 잘못됨을 돌아보게 하는 말씀들이었습니다. 아히야 선지자는 “이는 저희가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숭배하며 그 아비 다윗의 행함 같지 아니하여 내 길로 행치 아니하며 나 보기에 정직한 일과 나의 법도와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함이니라”(33절)는 말을 했습니다.

 

 

 


솔로몬이 우상을 섬기고 다윗의 행함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의 길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찢어서 여로보암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자신의 악함을 돌아보고 다윗의 행함 같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길로 행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처럼 상한 심령이 되어 여호와께 나와야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셨던 다윗의 마음이고, 다윗의 행함이며 언약인 것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찢어지고 여로보암이 열을 차지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여로보암만 죽이면 된다는 생각인 것입니다. 결국 솔로몬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철저히 외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마음이 여호와부터 떠났기에 여호와의 살아계심에 대해서는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37,38절을 보면 아히야 선지자가 여로보암에게 “내가 너를 취하리니 너는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다스려 이스라엘 위에 왕이 되되 네가 만일 내가 명한 모든 일에 순종하고 내 길로 행하며 내 눈에 합당한 일을 하며 내 종 다윗의 행함 같이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여로보암이라 할지라도 다윗의 행함같이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를 지키면 이스라엘을 네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누구든 여호와의 복에 거할 자는 다윗의 행함같이 행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자신의 악을 깨닫고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왔던 그 행함만을 하나님이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행함만으로 여호와 앞에서 온전하다 여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상한 심령이란 죽어 마땅한 자가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용서 받았음을 아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나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임을 알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의 행함같이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의 용서 안에 있음을 알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들만이 하나님의 참된 백성으로 일컬음을 얻게 되는 것이고, 이것이 여호와의 법도와 규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36절을 보면 “그 아들에게는 내가 한 지파를 주어서 내가 내 이름을 두고자 하여 택한 성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에게 한 등불이 항상 내 앞에 있게 하리라”고 말합니다.
왜 한 지파는 솔로몬의 아들에게 주시겠다고 합니까? 만약 다 뺏어 버리면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가 무너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약의 성취를 위해 한 지파를 남기시고, 결국 남겨진 한 지파를 통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은 세상을 보내심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세우신 언약이 곧 ‘긍휼에 의한 죄용서’였음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밖에 있는 존재일 수밖에 없고 그것이 곧 심판의 이유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행함이 아니고 여호와의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죄 용서의 길을 긍휼에 두지 않습니다. 물론 신의 용서와 은혜를 말하기도 하지만, 신의 용서와 은혜를 받기 위해 덕을 쌓고 선을 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아무에게나 베풀어지는 긍휼과 용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신의 긍휼을 받기 위해 덕을 쌓고 선을 쌓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긍휼을 받고 죄 용서를 받는다는 것이 세상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긍휼만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물론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너도나도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본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진심으로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긍휼의 죄 용서만으로도 말할 수 없는 복을 받았음을 알기에 세상 것을 구하는 것은 악이며 긍휼의 죄 용서를 외면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 안에서는 족함이 없는 마음 자체가 악이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악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의 용서에 거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을 무한한 복으로 여기며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내 손에 쥐어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멸망의 자식인 나를 긍휼이 여기시고 용서하신 은혜가 클 뿐입니다.

 

 

 

 

 

(31강) 열왕기상 12:1-15  왕

 

<본문>

르호보암이 세겜으로 갔으니 이는 온 이스라엘이 저로 왕을 삼고자 하여 세겜에 이르렀음이더라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전에 솔로몬 왕의 얼굴을 피하여 애굽으로 도망하여 있었더니 이제 그 소문을 듣고 오히려 애굽에 있는 중에 무리가 보내어 저를 불렀더라 여로보암과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와서 르호보암에게 고하여 가로되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부친이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 르호보암이 대답하되 갔다가 삼 일 후에 다시 내게로 오라 하매 백성이 가니라 르호보암 왕이 그 부친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 모셨던 노인들과 의논하여 가로되 너희는 어떻게 교도하여 이 백성에게 대답하게 하겠느뇨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 만일 오늘날 이 백성의 종이 되어 저희를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저희가 영영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 하나 왕이 노인의 교도하는 것을 버리고 그 앞에 모셔 있는 자기와 함께 자라난 소년들과 의논하여 가로되 너희는 어떻게 교도하여 이 백성에게 대답하게 하겠느뇨 백성이 내게 말하기를 왕의 부친이 우리에게 메운 멍에를 가볍게 하라 하였느니라 함께 자라난 소년들이 왕께 고하여 가로되 이 백성들이 왕께 고하기를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우리를 위하여 가볍게 하라 하였은즉 왕은 대답하기를 나의 새끼손가락이 내 부친의 허리보다 굵으니 내 부친이 너희로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소서 삼 일 만에 여로보암과 모든 백성이 르호보암에게 나아왔으니 이는 왕이 명하여 이르기를 삼 일 만에 내게로 다시 오라 하였음이라 왕이 포악한 말로 백성에게 대답할새 노인의 교도를 버리고 소년의 가르침을 좇아 저희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 부친은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니라 왕이 이같이 백성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여호와께서 전에 실로 사람 아히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고한 말씀을 응하게 하심이더라(열왕기상 12:1-15)

 

 

 


<설교>


요한계시록 12:9절의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는 구절을 보면, 사단을 가리켜서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말합니다. 즉 거짓말로 온 천하를 속이는 것이 사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단이 속이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가장 처음 사단이 등장하여 인간을 꾀었던 사건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알다시피 에덴동산에서 사단이 하와에게 접근하여 하와를 꾀었던 것은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으면 정녕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이 선호했던 것은, 사단의 꾀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단이 꾀었던 말은 인간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감히 어떻게 하나님 같이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단은 하나님 같이 될 가능성이 선악과에 있다고 꾀인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속임수입니다. 인간의 한계를 가려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떤 위치에 있는 존재인가를 가려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하신 위치를 뛰어 넘어서 더욱 발전하고 높아질 것을 추구하라고 합니다. 성공하라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세상은 이러한 사단의 속임수에 빠져 살아갑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피조물인 자신의 위치를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것이 본래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에 대해 거부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도 그 대가를 요구할 뿐입니다. 자신이 높아지고 섬김을 받아야 하고 성공하는 것을 선으로 여기면서 오직 그 길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단에게 속고 있는 실상을 낱낱이 밝히십니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일 뿐입니다. 자신들은 전혀 사단에게 속고 있지 않다고 여깁니다. 진리를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재고할 가치도 없는 정신병자의 말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으면 정녕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상은 죽었습니다. 죽음의 상태로 태어나서 영원한 죽음에 처하게 된 것이 세상의 운명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세상의 실상을 선포하셨습니다. 죄로 인해 죽음에 처한 인간의 실상을 선포하셨으나 세상은 사단의 속임수의 말을 더 선호할 뿐입니다. 왜 세상은 사단의 속이는 말에 대해 무지할까요? 그것은 인간의 본능은 철저히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을 무너뜨리는 것인데 비해 사단의 말은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고자 하는 욕망을 옹호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분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왜 섬기는 분으로 오신 것입니까? 그것은 섬김 받기를 원하는 세상의 실상을 고발하고 세상이 사단의 무엇에 속고 있는지를 보여주면서 하늘로부터 오는 참된 왕이 어떤 분인가를 증거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참된 왕으로 오신 분의 섬김으로 감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당신을 섬겨 줄테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제공해 달라는 거래 조건만 내세울 뿐입니다. 왕이라고 하는 존재도, 백성이라고 하는 존재도 모두가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 사단의 꾀임에 빠져 살아가는 세상의 실상입니다. 이러한 실상을 제대로 봄으로써 사단의 속임수가 아닌 참된 진리로 살아가는 세상이 어떤 것인가를 교회가 증거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솔로몬이 죽고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1절의 “르호보암이 세겜으로 갔으니 이는 온 이스라엘이 저로 왕을 삼고자 하여 세겜에 이르렀음이더라”는 내용을 보면 르호보암 에 대해 백성들이 좋은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르호보암은 솔로몬이 죽은 후 이미 왕이 된 사람인데, 그러한 르호보암을 왕을 삼고자 하여 세겜으로 불렀다는 것은 아직 자신들의 왕으로 인정을 하지 않았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진심으로 르호보암을 왕으로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들이 당연히 예루살렘으로 왔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왕을 세겜으로 불러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르호보암에게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부친이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는 말을 합니다. 즉 솔로몬이 자신들에게 메운 고역과 멍에를 가볍게 해주면 왕으로 섬기겠다는 것입니다. 르호보암이 자신들의 왕이 될 수 있는 조건을 말한 것입니다. 그 조건은 자신들을 좋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결국 르호보암을 왕으로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라 인생을 편히 살고 싶은 욕망에서 나온 거래인 것입니다.

 

 

 


백성들은 솔로몬에 대해서 무거운 고역을 시키고 멍에를 무겁게 한 왕으로 말합니다. 즉 솔로몬이 자신들을 고생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부와 영화를 주심으로써 솔로몬과 함께 누렸던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솔로몬으로 인해서 그들이 누릴 수 있었던 은혜를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고생했던 것만 떠올리면서 르호보암에게 그 같은 조건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을 때 이들과 다를 바 없는 생각에 점령당하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은혜임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살았던 삶은 사라지고 다른 사람보다 더 고생하고 누리지 못한 것에 대한 원망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을 주면 더 잘 섬기겠노라는 거래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조건에 대해 르호보암이 어떤 조치를 취합니까? 6,7절의 “르호보암왕이 그 부친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 모셨던 노인들과 의논하여 가로되 너희는 어떻게 교도하여 이 백성에게 대답하게 하겠느뇨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 만일 오늘날 이 백성의 종이 되어 저희를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저희가 영영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는 내용을 보면, 르호보암은 먼저 솔로몬을 모셨던 노인들에게 조언을 구합니다. 노인들은 르호보암에게 왕이 백성의 종이 되면 그들이 영영히 왕의 종이 될 것이라고 조언합니다. 즉 백성의 종이 되어 그들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고로 백성의 종이 되어 백성을 섬긴 왕이 누가 있었습니까? 결국 노인들의 조언은 왕의 자리에 있는 르호보암에게는 불만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조언이었습니다. 그래서 르호보암은 노인들의 조언을 버리고 자신과 함께 자라난 소년들에게 의논합니다. 소년들의 말은 “함께 자라난 소년들이 왕께 고하여 가로되 이 백성들이 왕께 고하기를 왕의 부친이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우리를 위하여 가볍게 하라 하였은즉 왕은 대답하기를 나의 새끼손가락이 내 부친의 허리보다 굵으니 내 부친이 너희로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찌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소서”(10,11절)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강력한 힘으로 백성들을 통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말하는 왕의 통치력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왕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수단인 것입니다.

 

 

 


결국 르호보암은 노인들의 지혜로운 조언을 버리고 소년들의 조언을 선택합니다. 왕의 권력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소년들의 조언이 합당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꾀임에 빠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존재가 무엇인가에 관심이 없을 때 온통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어떤 존재인가에 관심을 두지 않음으로서 왕이라고 하는 자신의 지위를 굳건히 하는 것에만 관심이 집중되는 것입니다.

 

 

 


13,14절을 보면 “왕이 포학한 말로 백성에게 대답할쌔 노인의 교도를 버리고 소년의 가르침을 좇아 저희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 부친은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찌라 내 부친은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르호보암의 말을 포악하다고 말한 것을 보면, 왕의 권력으로 백성을 지배하고자 하는 것이 곧 포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이 세상이 곧 포악의 현장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서로가 자신에게 주어진 지위를 이용해서 자기 유익을 꾀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곧 포악인 것입니다.

 

 

 


교회라고 다를 바가 없습니다. 교회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목사가 목사의 지위를 지배의 자리로 여기는 것입니다. 목사가 교인들을 지배하고자 하는 것이 곧 포악이며 백성들이 목사를 섬기고자 하는 의도도 결국 자신의 복을 꾀하는 것임을 생각해 볼 때 서로가 자신의 유익을 노리고 있는 것에 불과할 뿐이고, 이 모든 것이 사단의 꾀임에 빠진 현실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참된 왕으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세상에 오셨으나 섬김을 받고자 함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오셨다고 말합니다(마 20:28) 예수님의 섬김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섬김을 베푼 왕이 누가 있습니까? 세상의 실상은 죽음에 처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실상을 깨닫는다면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대속의 섬김으로 말미암아 죽음에 처한 자에게 생명의 빛이 비취게 되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에 속임수에 빠짐으로 말미암아 죽음에 처한 자신의 실상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 복이라는 꾀임에 빠져 예수님에게 원하는 것도 자신의 성공으로 치우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신 예수님의 섬김은 감사로 자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왕, 예수님보다는 자기 인생을 좋은 쪽으로만 이끌어 주는 왕을 원할 뿐입니다.

 

 

 


왕도 백성도 오직 자기 밖에 모릅니다. 우리를 좋게 하지 않으면 왕으로 섬기지 않겠다는 백성이나, 멍에를 더 메워서 다스리겠다는 왕 모두가 마음이 높아져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낮아짐은 참된 왕이신 예수님의 섬김을 아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섬김에 감사하고 기뻐하게 될 때 비로소 주님의 섬김을 증거하는 신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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