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사무엘하 강해 3
사무엘하 강해 3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59강) 사무엘하 17:21-23 아히도벨의 죽음
<본문>
저희가 간 후에 두 사람이 우물에서 올라와서 다윗 왕에게 이르러 고하여 가로되 당신들은 일어나 빨리 물을 건너가소서 아히도벨이 당신들을 해하려고 여차여차히 모략을 베풀었나이다 다윗이 일어나 모든 백성과 함께 요단을 건널새 새벽에 미쳐서 한 사람도 요단을 건너지 못한 자가 없었더라 아히도벨이 자기 모략이 시행되지 못함을 보고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그 아비 묘에 장사되니라(삼하 17:21-23)
<설교>
지난 시간에 거짓말에 대한 말씀을 드렸는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이에 두고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과 상식이 모두 무너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없이 살아갑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과 상관없이 생각하기에 그런 사고방식에서 구축된 상식과 지식은 하나님이 개입되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령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 세상을 보게 되면 세상이 하고 있는 모든 것이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게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심판을 거둬 버린 채 세상을 보기에 세상이 좋아하는 것이 내게도 동일하게 좋은 것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심판 아래 있는 세상을 보게 되면 참된 것은 진리며, 하나님과 상관이 없이 살아가는 모든 것이야 말로 거짓된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아가던 한 인생의 마지막을 볼 수 있습니다. 21절을 보면 여인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이 다윗에게 가서 후새의 말을 전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후새의 말대로 모든 백성과 함께 요단을 건너 도망을 칩니다. 결국 이것으로 압살롬은 다윗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고 아히도벨은 자신의 모략의 실패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28절의 내용대로 아히도벨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집에 이르러 집을 정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게 됩니다.
아히도벨이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요? 본문에는 아히도벨이 죽음을 택한 이유나, 그의 심적 상태 등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기에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모략이 받아들여지지 아니한 것으로 인한 자존심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16:23절에서 “아히도벨의 베푸는 모략은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일반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러한 아히도벨의 모략이 아예 시행되지도 않았다는 것은 분명 아히도벨에게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문제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모략이 시행되지 못하고 다윗은 이미 요단강을 건너 도망을 쳐 버린 상황에서 압살롬의 반역이 성공하지 못할 것을 내다보고, 결국 그렇게 되었을 때 자신은 다윗에 의해 죽임을 당할 것을 짐작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히도벨이 무슨 이유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느냐가 아니라 그가 자기 실패에서 하나님을 보지 않았던 것, 이것이 우리가 생각해야 할 중요한 문제인 것입니다.
아히도벨은 어쨌든 실패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물어 받은 말씀과 같은 권위가 있던 아히도벨의 모략이 압살롬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대신 후새의 모략을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채택하게 된 것은 아히도벨에게는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며 이것은 곧 아히도벨의 실패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일에는 하나님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17:14절에서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모략은 아히도벨의 모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파하기로 작정하셨음이라”는 말씀을 에서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사실 아히도벨의 모략이 더 좋은 것이었으나 아히도벨의 모략을 파하시기 위해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후새의 모략으로 기울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히도벨의 실패는 하나님이 개입하신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히도벨은 자신의 모략을 파하신 하나님을 보기 보다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때문에 자신의 모략이 받아들여지지 아니한 것을 사람들이 자신을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스스로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우린 이러한 아히도벨의 죽음을 보면서 과연 우리의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히도벨과 같은 실패는 이하도벨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교회에서 어떤 문제를 의논할 때 내가 말한 의견이 묵살되고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으로 자존심이 상하는 경우가 없습니까?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기에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없습니까? 이처럼 아히도벨의 문제는 우리에게서도 얼마든지 발생하는 것이기에 아히도벨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은 참된 신앙의 길을 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먼저 아히도벨은 세상의 모든 일이 자신의 계획과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 진다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는 것이기에 아히도벨이 하고자 하는 모략이 하나님의 뜻과 다른 것이라면 아히도벨의 모략은 시행될 수 없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히도벨은 하나님이 자신의 모략을 파하셨음을 생각하기보다는 사람들이 자신의 모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묵살되는 것에서 자존심이 상하게 된 것이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결과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그대로 성취해 가시는 분임을 믿는다면 세상의 모든 일은 나의 생각과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계획을 가지고 하나님을 부르며 이루어주시기를 기도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어리석음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신자라면 나의 계획과 생각은 실패되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계획과 생각이 실패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신의 실패에서 하나님을 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실패를 성공으로 바꾸어 달라고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를 실패하게 하셔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고 계심을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는 자신의 의견이 묵살되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이 상할 이유도 자존심이 구겨질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의견을 받지 않은 것은 함께 한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나의 생각을 파하시고 하나님의 생각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들이 자존심이라는 거대한 바위에 깔려 묻혀 버리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에게는 무엇이 중요합니까?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아니면 모든 일이 나의 모략대로 계획대로 성사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분명 나의 생각, 나의 계획이 성사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남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은 신자라 할 수 없습니다. 결국 자신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나의 일을 실패하게 하셨구나’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보기에 자존심 상하는 것만 염두에 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히도벨과 같은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 그분이 피조물인 인간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것으로 자존심 상해하시고 창피스러워 하셨던가요? 예수님은 자신의 일을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셨습니다.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이 세상이 볼 때는 예수님 자신에게는 실패와 같은 것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의 일의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알았기에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을 실패로 여기지 않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세상은 우리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일이 실패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대로 일하고 계신다는 흔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의식함으로 자신의 실패를 부끄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이 내 말을 들어줘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것을 교회로 국한 시켜 생각하면, 교회의 형제들이 내 말을 들어주고 내가 말한대로 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든 교회든 위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께서 스스로의 뜻을 따라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히도벨의 모략이 압살롬에게는 좋은 것이었지만 결국 후새의 모략을 듣게 하신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좋은 생각, 좋은 계획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보지 않고 자신을 보게 되면, 결국 남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것뿐입니다. 아히도벨이 자기의 모략이 시행되지 않는 것에서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내 말대로 되고 안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의지대로 되어 진다는 것을 아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실패가 실패가 아닌 것입니다.
(60강) 사무엘하 18:1-8 신자의 품성
<본문>
이에 다윗이 그 함께한 백성을 계수하고 천부장과 백부장을 그 위에 세우고 그 백성을 내어 보낼새 삼분지 일은 요압의 수하에, 삼분지 일은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 아비새의 수하에 붙이고 삼분지 일은 가드 사람 잇대의 수하에 붙이고 백성에게 이르되 나도 반드시 너희와 함께 나가리라 백성들이 가로되 왕은 나가지 마소서 우리가 도망할지라도 저희는 우리에게 주의하지 아니할 터이요 우리가 절반이나 죽을지라도 우리에게 주의하지 아니할 터이라 왕은 우리 만 명보다 중하시오니 왕은 성에 계시다가 우리를 도우심이 좋으니이다 왕이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가 선히 여기는 대로 내가 행하리라 하고 문 곁에 서매 모든 백성이 백 명씩 천 명씩 대를 지어 나가는지라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장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 이에 백성이 이스라엘을 치러 들로 나가서 에브라임 수풀에서 싸우더니 거기서 이스라엘 무리가 다윗의 심복들에게 패하매 그 날 그 곳에서 살륙이 커서 이만에 이르렀고 그 땅에서 사면으로 퍼져 싸웠으므로 그 날에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더라(삼하 18:1-8)
<설교>
항간에 보면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킴으로써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부인해 버리는 행태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변명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물의를 일으키는 행동을 했다 하여 마치 기독교 자체가 잘못되어 있는 것처럼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착하게 사는데 몇 몇 사람이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이 아니라 기독교 자체가 착한 인간을 만들어 내는데 그 목적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의미가 착한 사람을 양산하는데 있는 것이라면, 성경은 착한 사람이 될 것을 강조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착한 사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원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믿음이 있다는 것을 ‘착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래서 믿는다고 하면서도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볼 때마다 실천은 없고 말만 앞세우는 사람으로 치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상에 넘어 감으로써 세상을 의식하면서 ‘믿음의 실천자’, 즉 착한 사람이 되고자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고 인정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믿음에 온전히 거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어쩔 수 없이 멸망의 대상에 불과한 사람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이기에 신자라는 것은 인간의 착한 행실과는 무관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신자는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자라는 것이 죄에서 벗어나서 죄와 상관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그 속에는 죄의 본질이 도사리고 있고, 항상 드러나는 것은 죄의 흔적들뿐입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인간의 본질을 모르시지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인간에게 죄를 짓지 않는 착한 행실을 요구하겠습니까? 믿음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아는 신자라면 하나님 앞에 ‘죄 안짓겠다’는 다짐이나 말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요, 또한 신자의 본질도 아님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자신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잘 압니다. 내 힘으로 죄를 극복할 수 없음을 잘 알기에 죄를 이기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게 됩니다. 다만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죄를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하심을 구하게 될 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 피로 말미암아 산다는 말씀에 대해 깊은 감사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신자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것처럼, 기독교 안에서도 태반이 신자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즉 신자가 무엇인가를 모르면서 신자에 대한 얘기를 하고,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면서 믿음을 말하고,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관심도 없이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엉뚱한 길에서 하나님을 부르고 있는 어리석음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 절대로 동감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는 것입니다. 또한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회개하라’고 말하면, ‘내가 왜 회개를 해야 하느냐?’라며 반발하기 일쑤입니다. 이것은 죄가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이처럼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죄를 알고 죄를 고백하는 것만으로 그는 이미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 믿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교회에서 배운 성경의 교리적인 내용을 그대로 외워서 줄줄 얘기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있어야 합니까? 죄인임을 안다면, 구원에 대해서는 자신은 말 그대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임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에게서 그 어떤 의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될 때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에 마음이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의지한다면, 그에게서는 사랑과 긍휼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 신자에게서는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의나, 행함이나, 열심이 보이지 않습니다. 열심을 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열심이 일을 이룬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면서, 또 다시 우리의 힘이나 노력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다윗이 군사를 정비하여 압살롬을 공격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이에 다윗이 그 함께 한 백성을 계수하고 천부장과 백부장을 그 위에 세우고 그 백성을 내어 보낼새 삼분지 일은 요압의 수하에, 삼분지 일은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 아비새의 수하에 붙이고 삼분지 일은 가드 사람 잇대의 수하에 붙이고 백성에게 이르되 나도 반드시 너희와 함께 나가리라”는 말을 합니다.
다윗은 군사를 세 대로 나누어 압살롬과의 전쟁에 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6절을 보면 압살롬의 군사와 전쟁을 하게 되고, 결과는 다윗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전쟁이 항상 그렇듯이 군사력과 조직력으로 싸워 승리하는 전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 “그 땅에서 사면으로 퍼져 싸웠으므로 그날에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더라”고 말합니다.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다는 말은 칼로 인한 승리가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수풀에서 죽은 자가 많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칼로 인한 죽음이 아니었고 그것은 결국 칼이라고 하는 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승리, 즉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셨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다.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다’는 이것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인정하고 고백하는 신앙적 내용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셨다는 그 고백이 거짓이냐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셨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승리의 조건과 여건이 전혀 없음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비록 군사가 있고, 칼이 있고, 조직을 갖추었지만 그것들이 나를 승리로 이끌어 갈 수 없음을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군사가 있고 칼이 있고 조직이 있다 할지라도 믿는 것은 다만 하나님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에게 군사가 있고 없고 상관없이 이기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패배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신자란 이기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기게 하시는 분도 패배하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는 고백을 하는 사람입니다. 만일 승리했다면 나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자 해야 할 것이고, 패배했다면 패배하게 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고자 하는 것이 진정한 신자의 자세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다’는 말을 하면서도 승리를 위한 조건을 갖추기 위해 하나님을 찾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볼 때 그것을 두고 실제적 무신론자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란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보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아가는 사람이지 자신의 열심을 동원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일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다만 자기 열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일을 해 보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결국 자신의 군사와 칼 조직력으로 승리를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일 뿐이지 믿음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고자 하신다면 다윗이 군사도 없고 칼도 없이 무기력한 상태라 하리라도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러한대 누가 그 뜻을 방해할 수 있겠습니까? 반면에 패배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수많은 군사와 칼을 가지고 나선다 할지라도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전쟁의 법칙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믿어지십니까? 승리든 패배든 하나님께 달렸음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 아래서 우리는 어떤 마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승리든 패배든 결과는 하나님의 뜻에 달렸다면 내가 원하는 어떤 결과를 내 속에 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만 어떤 결과가 주어지는 그 결과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가고자 하는 것이 신자의 바른 품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현대 기독교는 신앙에서 많이 왜곡되어져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말하면서도, 마치 날 위해 살아계시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착각으로 인해 모든 일에서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정해 놓고 내가 원하는 결과를 이루어 달라고 하나님께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다고 말하면서도 그 말의 의미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입니다.
우리를 살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죽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살고 죽는 것이 우리의 뜻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살고자 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죽고자 해서 죽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살게 하고자 하신다면 어떤 고통과 어려움에서도, 또한 어떤 질병에서도 살게 될 것입니다. 또한 죽게 하고자 하신다면 어떤 노력을 다 기울인다고 해도 죽게 될 것입니다.
물론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께 달렸으니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병에 걸렸을 때 '내가 병을 치료하고 안하고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죽게 하신다면 죽을 것인데 병원에 갈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과 여건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여건과 환경에서 열심을 다해 살아가되 여건과 환경들을 세상에서 잘되기 위한 조건으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세상에서 잘되기 위한 조건과 환경을 더욱 갖추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결과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신자는 어떤 환경에서든 주어진 결과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가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결과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생각하는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애를 쓴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승리와 패배는 하나님께 달렸음을 생각지 않는 실제적 무신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편을 들어 승리하게 하셨지만, 사실 다윗이 이겨야 한다는 근거가 무엇이겠습니까? 다윗이 이겨야 한다는 근거를 다윗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까? 압살롬이 다윗에게 반역을 했으니 압살롬이 악하다. 때문에 압살롬은 패해야 하고 다윗은 승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나 다시 주지해야 할 일은 다윗은 결코 선한 자가 아니란 것입니다.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인 다윗을 어떻게 선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때문에 하나님이 다윗 편을 들어 주어야 할 근거는 다윗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하셨다는 것이 하나님이 다윗을 편을 드시는 근거이며 이유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누구든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시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셔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착한 사람이기 때문입니까? 열심히 교회를 다니기 때문입니까? 만약 그런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 입술에서 고백되는 죄인이라는 말은 한낱 위선일 뿐입니다. 죄인은 자신에게서 백사장의 모래 한 알만큼의 의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죽어야 할 자가 살아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이고 자비하심입니다. 따라서 승리했다 할지라도 승리에서 보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일 뿐입니다.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죽어야 할 자가 살아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다면 하나님의 자비하심이며, 죽는다면 당연한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것이 은혜요 자비였음을 고백하게 될 뿐입니다. 이것이 죄인의 자리에서 긍휼과 자비하심을 바라보는 신자의 품성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은 왕이십니다.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세상에 생존하게 하시고, 모든 여건을 마련해 주시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며, 시험과 위험에서 건져 보호하시고, 우리의 삶과 죽음의 주인이십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성경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실제 삶에서 그분만이 내 삶의 주인 되심을 체험하고 확신했기에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나와지는 고백인 것입니다. 신자에게 하나님은 이름 그대로 왕으로 존재하시는 것입니다.
신자의 신자다운 품성은 인격도 도덕도 아닙니다. 신자를 신자답게 하는 것은 인격이 아니고 도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하나님께 나올 수 없는 자신의 악함을 먼저 보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는 맞지 않는 넘치는 것들임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넘치는 것들에서 긍휼과 자비하심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신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품성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결과가 승리로 나타났다면 나의 악함을 보지 않으시고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보게 하시니 감사하게 될 것이고, 패배하게 하셨다면 그동안 살아온 것이 내 의로움도 내 노력도 아니었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를 신자답게 하는 품성입니다.
(61강) 사무엘하 18:9-15 압살롬의 죽음
<본문>
압살롬이 다윗의 신복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털이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저가 공중에 달리고 그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렸더이다 요압이 그 고한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뇨 내가 네게 은 열 개와 띠 하나를 주었으리라 그 사람이 요압에게 대답하되 내가 내 손에 은 천 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이르시기를 삼가 누구든지 소년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아무 일도 왕 앞에는 숨길 수 없나니 내가 만일 거역하여 그 생명을 해하였다면 당신도 나를 대적하였으리이다 요압이 가로되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 하고 손에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상수리나무 가운데서 아직 살아 있는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니 요압의 병기를 맡은 소년 열이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죽이니라(사무엘하 18:9-15)
<설교>
사람이 교회를 찾게 되면,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것이 예수가 구세주라는 교리적 내용일 것입니다. 교회는 또한 교회를 찾는 사람에게서 그러한 고백적 말을 이끌어 내는 것이 한 사람을 신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여기고 그러한 학습을 중요하게 여길 것입니다. 물론 예수가 누구시며, 인간이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에 대해, 그리고 성경의 중심 사상에 대해 지식적 차원에서의 학습이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학습에 의해 지식이 구축되고 그 지식으로 인한 고백을 그가 신자라는 근거로 삼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즉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그가 교회를 다니는 교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수준이고 소양일 수는 있으나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의미로서의 신자, 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수 있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 죽을 때, 교회를 다니는 가족이 있으면 그 사실을 매우 안타깝게 여깁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죽으면 지옥 간다는 것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부모 형제가 죽어서 지옥 간다는데 마음이 무겁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는 순간에라도 죽어가는 사람의 입에서 ‘예수님을 믿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를 듣기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죽기 전에 예수 믿는다’는 말 한마디만 하라고 다그치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지 않겠습니까?
물론 믿지 않던 가족이 죽어가는 순간에 한 말 한마디로 그도 천국 갔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심적 위안을 삼고자 하는 그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구원이 입술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큼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한 편 강도가 예수님을 향한 신앙고백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지만 그것은 결코 말 한마디 잘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자신이 예수 앞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알게 됨으로서 자신의 영혼을 예수님께 맡길 수밖에 없다는 믿음에 의해 구원을 얻은 것이지 그의 말이 구원을 얻기 위해 필요한 정답이었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성경에 맞게 말을 하고 신앙고백적인 말을 한다고 해서 쉽게 ‘나는 신자다’라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자신의 말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말은 얼마든지 자신의 마음조차 속이면서 선이든 신앙이든 가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바로 이점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압살롬과 전쟁을 하기 위해 군사를 조직 하고 다윗도 함께 나가 싸우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이구동성으로 “왕은 나가지 마소서 우리가 도망할지라도 저희는 우리에게 주의하지 아니할 터이요 우리가 절반이나 죽을지라도 우리에게 주의하지 아니할 터이라 왕은 우리 만 명보다 중하시오니 왕은 성에 계시다가 우리를 도우심이 좋으니이다”(18:3)라고 권합니다.
백성들의 말을 들어 보면 그들이 다윗을 참으로 중요하게 여기고, 또한 온 마음을 다해 다윗을 섬기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다윗의 마음을 알고 다윗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지 다윗 앞에서 어떤 말을 했느냐에 있는 것은 아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윗은 군사들을 전쟁에 보내면서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한 가지 당부를 합니다. 그것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는 것입니다(5절). 다윗의 당부는 자신들 만 명 보다 더 중하다고 여기는 소중한 사람의 당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당부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다윗의 그 말이 백성들의 마음에 기억되어 그대로 시행되었다면 아마 압살롬은 그 전쟁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압살롬이 죽었다는 것은 다윗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다윗의 마음과 뜻을 외면해 버린 거짓된 섬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을 요압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9절을 보면 노새를 탄 압살롬의 머리털이 상수리나무의 가지에 걸려 그가 공중에 매달리게 되고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 나갔다고 말합니다. 머리털이 나무 가지에 걸려 공중에 매달려 있는 이 상태는 누구에 대해서도 전혀 대항할 수 없는 그야말로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압살롬을 죽일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압살롬의 이러한 형편을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고합니다. 그러자 요압은 그 고한 사람에게 “네가 보고 어찌하여 당장에 쳐서 땅에 떨어뜨리지 아니하였느뇨 내가 네게 은 열 개와 떡 하나를 주었으리라”(11절)는 말로 책망을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요압에게 “내가 내 손에 은 천개를 받는다 할지라도 나는 왕의 아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우리가 들었거니와 왕이 당신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삼가 누구든지 소년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 하였나이다”(12절)는 말로서 압살롬을 죽이는 것이 부당함을 고하였으나 요압은 ‘나는 너와 같이 지체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작은 창 셋을 가지고 가서 압살롬의 심장을 찌르게 되고 요압의 병기를 맡은 소년들도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 죽임으로서 압살롬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은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상수리나무에 매달려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상태의 압살롬을 가운데 두고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 두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무 가지에 매달린 압살롬을 발견한 한 사람과 요압입니다. 압살롬을 발견한 그 사람은 자신이 힘이 없어 압살롬을 죽이지 않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무 가지에 머리털이 걸려서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대항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가 되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압살롬은 다윗을 반역한 자였기 때문에 만약 압살롬을 죽여 다윗에게 바친다면 그 공로가 인정되어 상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사람은 오직 한 가지, 다윗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하여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고 지시했던 사실만 기억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즉 압살롬이 죽지 않기를 바라는 다윗의 그 마음과 뜻을 헤아리고 오직 거기에 복종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압살롬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상황에 있던 상관없이 압살롬을 죽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요압은 다윗의 지시를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을 향한 다윗의 뜻과 마음이 어떠한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압살롬은 다윗을 대적한 반역자라는 생각과, 지금 그가 전혀 힘을 쓸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에 있다는 것만 염두에 둔 채 지금이 바로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라는 것만 생각할 뿐입니다. 이들 중 누가 진심으로 다윗을 섬기는 자일까요? 두말할 것 없이 압살롬을 발견한 한 사람이지 않겠습니까?
전쟁에 함께 나가겠다고 했을 때 왕은 ‘우리 만 명 보다 중하시오니’라는 말을 하면서 다윗의 출전을 만류했던 백성들 속에 요압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을 그처럼 높이 섬기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정작 요압은 다윗의 마음이나 뜻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윗이 무엇을 원하는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는 말에 담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무기력한 상태의 압살롬을 만나자 자기 성깔대로 행동을 해 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요압을 두고 진심으로 다윗을 높이고 다윗을 섬기는 자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가 비록 다윗 앞에서 어떤 듣기 좋은 말을 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겉만 번지르한 말에 불과했다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내 속에 굳게 세우고 그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으면서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외쳐봐야 그것을 신앙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맞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싸움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자신의 삶이 주님을 향한 나의 고백과 일치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의 말과 삶은 각기 독립되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죄인이라고 눈물 흘리며 고백하면서도 죄인의 죄인다움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마치 요압처럼 내 생명을 다해 예수님만 믿을 것을 다짐하면서도 막상 세상에서는 자신이 어떤 말을 했는지도 잊어버린 채 다만 자신의 뜻과 마음을 따라 행동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모습에서 요압과 다를 바 없는 신앙의 현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고 그러므로 누구든 믿음에 있어서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는 장담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본문의 상황에 처했다면 어떤 사람으로 행동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이름 없는 어떤 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요압입니까? 과연 여러분은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생각하며 행동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볼 때 본문의 내용은 우리는 지금껏 요압식으로 살아왔음을 고발하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는 의미의 말이 아닙니다.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내 속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이 신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따라 산다면 그 모습은 모든 삶에서 보이게 될 것입니다. 다만 문제는 하나님의 마음은 외면한 채 자기 마음을 앞세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뜻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의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더 낮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이 있다고 여겼던 내가 결국 신앙의 흉내만 내고 있었을 뿐임을 깊이 자각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에 예수님의 값없는 은혜가 홍수처럼 밀려들어 오게 될 것이고, 은혜를 담고 있는 마음에서 과연 어떤 열매가 맺어지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스스로의 말에 속지 말기 바랍니다. 아무리 복음에 맞는 말을 한다고 해도 복음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외면한다면 그의 말은 속임수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을 발견한 그 사람에게 있어서 다윗의 말은 은 천개를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러한 모습이 우리가 왜 믿음이 없는 사람인지 자인할 수밖에 없게 만듭니다. 은 천개가 아니라 은 열 개라 할지라도 얼마든지 말씀을 버리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더 예수님을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현실에서 의지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진정으로 크신 분으로 다가온다면 자연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무게로 여러분의 마음에 자리할 것입니다.
(62강) 사무엘하 18:16-18 압살롬의 기념비
<본문>
요압이 나팔을 불어 백성들로 그치게 하니 저희가 이스라엘을 따르지 아니하고 돌아오니라 무리가 압살롬을 옮겨다가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던지고 그 위에 심히 큰 돌무더기를 쌓으니라 온 이스라엘 무리가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니라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가져 세웠으니 이는 저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음을 한탄함이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으로 그 비석을 이름하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사무엘하 18:16-18)
<설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서 흘리신 그 피가 사람들의 죄를 씻고 용서하심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기독교의 정통적 중심사상이며 성경이 말하는 복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복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생각은, 자신의 죄는 자신이 책임을 지고 해결해야 맞는 것이지 죄는 내가 범했는데 죄에 대한 해결은 다른 존재가 와서 한다면 죄 지은 사람은 마음껏 죄만 지으면 되는가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도덕과 사상으로는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자신의 길은 자신이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이니 만큼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책임은 당연히 자신이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구원 역시 자신의 깨우침으로 얻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자신은 가만히 있는데 모든 것을 외부에서 타자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논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할 때 자신이 지은 죄의 해결을 스스로 책임지려고 하기보다는 타자에게 맡기는 것이야 말로 무책임한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아마 손대지 않고 코푸는 것처럼 날강도와 같은 짓거리로 여겨질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들에게는 십자가의 의미 또한 자기 스스로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아 자기 책임 아래 선택할 수 있는 구원의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일 뿐인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것을 지극히 양심적이고 선한 생각으로 여깁니다. 자신의 죄는 자기가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곧 선한 양심이고 도덕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선한 양심, 선한 도덕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함석헌 선생이나 유영모 씨가 바로 그런 사람들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분들이 예수를 말하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그분들이 머리가 나쁘거나 지성과 사상의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자신의 죄는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는 지극히 선한 양심적 생각이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자신의 죄를 책임지기 위해 따라야 할 분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예수님의 선한 삶과 가르침만 받아 실천할 뿐이고, 십자가에 죽으심도 예수님이 선한 삶을 직접 실천하여 보여준 것으로 여길 뿐이지 대속의 은총에 대해서는 그들의 선한 양심으로 거부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에 대해 포기하지 못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인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십자가는 인간에 대해 포기할 것을 외칩니다. 인간에 대해 포기하라는 것은, 이미 죄 가운데 있는 인간에게는 선을 향해 나아갈 그 어떤 힘도 가능성도 없음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죽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인간에 대해 포기할 때 자기 이름이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 것이 없는가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이름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은 이름을 통해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설사 그가 죽고 없다 할지라도 이름이 있음으로 인해 여전히 세상에 남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들의 욕망일 것입니다. 이름으로 인해 역사 안에 자신의 흔적이 남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름은 그 누구의 이름이라 할지라도 남길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선과 도덕을 바탕으로, 그리고 사회적 공헌과 업적을 바탕으로 많은 이름을 남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들의 세계입니다. 하나님 없이 홀로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인간의 세계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세계를 용납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압살롬이 살았을 때 한 일을 말합니다.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가져 세웠으니 이는 저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음을 한탄함이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으로 그 비석을 이름하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18절)고 말한 이것이 압살롬이 자신을 위해 한 일입니다.
압살롬이 자신을 위해 한 일은 자기를 위해 비석을 세운 것입니다. 자기 이름을 세상에 남기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압살롬이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음을 한탄하였다고 말하는데, 삼하 14:27절을 보면 압살롬이 아들 셋을 낳았음을 언급합니다. 이처럼 아들이 셋이 있었는데도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음을 한탄하였다는 것은, 아들 셋이 모두 죽었거나 아니면 압살롬의 이름을 높여줄만한 뛰어난 아들들이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높여주는 존재입니다. 반면 아들이 못났을 때는 아버지의 이름이 낮아지기에 사람들은 자식에게 모든 것을 투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즉 내 자식은 이 땅에서 뛰어난 인재로 키우고 또 그렇게 만들겠다는 열의를 가지고 자식을 양육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자식의 과외비를 위해 파출부를 한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닙니다. 자식의 유학을 위해 가족이 흩어져 아버지는 ‘기러기 아빠’라는 칭호까지 들으면서도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부모의 이름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자식이 뛰어날 때 덩달아 부모의 이름이 높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압살롬에게는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습니다. 압살롬은 이것을 한탄하였다고 합니다. 사실 이것은 압살롬에게만이 아니라 아들이 없는 사람들의 공통적 심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압살롬은 자기 이름을 위해 자기 스스로 비석을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비석은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컬음 받은 것입니다. 비석을 통해 후대의 사람들이 ‘압살롬’이라는 이름을 기억해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압살롬이 이름을 남기기 위해 손수 비석까지 세울 정도로 자신에게 집착을 하는 모습과 함께 성경은 압살롬의 비참한 최후에 대해 언급합니다.
16-17절의 “요압이 나팔을 불어 백성들로 그치게 하니 저희가 이스라엘을 따르지 아니하고 돌아오니라 무리가 압살롬을 옮겨다가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던지고 그 위에 심히 큰 돌무더기를 쌓으니라 온 이스라엘 무리가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니라”는 내용을 보면 압살롬의 최후가 어떠했는가를 말해줍니다. 다윗의 아들로 살았을 때는 왕자로서 높임을 받았고, 반역을 한 후 한때는 다윗의 궁을 차지하고 왕의 자리에 앉은 압살롬이었지만 그의 마지막은 수풀 가운데 큰 구멍에 던짐을 받고 그 위에 큰 돌무더기를 쌓은 무덤이었을 뿐입니다.
이처럼 압살롬의 비참한 최후와 무덤을 말하고 압살롬의 기념비를 함께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인간이 아무리 이름에 집착을 하고 자신의 이름을 높였다 할지라도 결국 죽음이라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뿐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설사 압살롬의 무덤이 호화로운 것이었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죄로 인한 비참한 최후일 뿐입니다. 이러한 비참에서 우리를 건져낼 분으로 예수님이 오셨고,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이 홀로 책임지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에겐 영생을 주시겠다는 것이 십자가의 진리며 복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속의 교리가 인간에 대해 포기를 하지 못하고, 인간의 선과 도덕을 믿는 것으로 인해 거부를 당하는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다고 말할지라도 그 고백이 진리로 인한 고백인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그것은 과연 내가 십자가 밑에서 나의 선함과 도덕을 믿지 않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선함과 도덕을 또한 의라고 생각하는 행위를 믿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의 착한 일을 염두에 두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착한 일을 했기에 신자답다’는 생각 역시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오직 나는 예수님의 은혜로만 산다’는 생각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생각입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은 죽음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라 죄 아래 있는 자의 최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죽음은 인간이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음을 외치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모두가 인간의 선함과 양심에 그리고 의지와 노력에 무한한 가능성을 두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저주 아래 있는 인간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선함과 의지로 말미암아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죽음에 도달했을 때 죽음은 지금껏 자신의 선함과 양심을, 그리고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살아왔던 인생이 모두 헛된 것이었음을 소리치는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듣는 자는 죽음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꼭 죽음에 이르렀을 때 그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마지막, 죽음에 자신을 세워둘 때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압살롬의 기념비에는 무엇이라고 기록되어야 하겠습니까? 압살롬 개인의 업적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에게 세워주신 메시야의 언약 아래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대적하였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음을 기록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라 죄의 삯으로 말미암아 사망에 처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귀한 하나님의 선물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생임을 기록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의 기념비에는 무엇이라고 기록하고 싶습니까? 온 세상이 높일 만한 일을 해서 후손 대대로 그 이름이 높여지기를 원합니까? 이게 너무 거창한 것이라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하다못해 교회에서 위대한 일을 함으로써 교인들에게 기억되어지기를 원하지는 않습니까?
사람들은 업적을 남기기를 원합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위대하다고 여겨지는 일을 함으로써 그 일을 통해 자신의 이름이 기억되고 높임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내 힘으로 이룬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게 하셨음을 무시한 결과입니다. 그것이 자기 이름 높이기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의 이름 앞에서 우리의 이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이름은 사망을 담고 있을 뿐이지만 예수님의 이름은 생명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점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십자가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 있게 함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아무리 기억되고 높임 받는다 할지라도 그 마지막은 결국 비참한 최후임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라는 이름의 위대함을 가슴 깊이 채우시기 바랍니다.
비참한 최후를 앞에 둔 자로서 생각해 본다면, ‘사망에서 나를 건지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다’는 고백이 자신의 기념비에 새겨지기를 원할 것입니다. ‘나를 지금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살게 한 것은 나의 선함과 도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었다’ 는 고백으로 새기기를 원할 것입니다. 결국 내 이름이라는 것은 아무런 볼품도 없는 것임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높임 받을 일을 해서 뭇 사람들로부터 이름이 칭송받고 높임을 받는다고 해도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라는 그 이름 앞에서는 할 말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름을 뒤로하고 예수님의 이름 앞에 나오는 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21절을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사망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제아무리 양심적으로 바르게 산 도덕군자라고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사망입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이 오신 것입니다.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보다 기쁜 소식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자신의 선함과 양심과 의지로 말미암아 스스로 말씀을 실천하여 죄를 책임지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오심은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다만 모본으로 삼아 본을 받아야 할 성인으로 여길 뿐입니다. 성인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깨달아 잘 실천하여 따르는 것이 자신의 죄를 책임지는 길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믿음의 길이 아니라 자신 길을 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믿음의 길은 자신에게는 생명이 없음을 알고 생명 되신 분 앞에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 앞에서 우리의 이름의 가치가 어떠한가를 깨달으시고, 나의 이름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에 생명이 있기에 오직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높이는 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그 어떤 위대한 업적도 사망을 저지할 수 없음을 다시금 기억하시고 생명이신 예수님의 이름의 귀함을 깊이 깨달으며 여러분의 죽음에 오직 예수님의 이름만이 기억되어지기를 소원하시기 바랍니다.
(63강) 사무엘하 18:19-30 아히마아스의 오판
<본문>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가로되 청컨대 나로 빨리 왕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 갚아 주신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요압이 저에게 이르되 너는 오늘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고 다른 날에 전할 것이니라 왕의 아들이 죽었나니 네가 오늘날 소식을 전하지 못하리라 하고 구스 사람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본 것을 왕께 고하라 하매 구스 사람이 요압에게 절하고 달음질하여 가니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다시 요압에게 이르되 청컨대 아무쪼록 나로 또한 구스 사람의 뒤를 따라 달음질하게 하소서 요압이 가로되 내 아들아 왜 달음질하려 하느냐 이 소식으로 인하여는 상을 받지 못하리라 하되 저가 아무쪼록 달음질하겠노라 하는지라 요압이 가로되 그리하라 하니 아히마아스가 들길로 달음질하여 구스 사람보다 앞서니라 때에 다윗이 두 문 사이에 앉았더라 파수꾼이 성문루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보니 어떤 사람이 홀로 달음질하는지라 파수꾼이 외쳐 왕께 고하매 왕이 가로되 저가 만일 혼자면 그 입에 소식이 있으리라 할 때에 저가 차차 가까이 오니라 파수꾼이 본즉 한 사람이 또 달음질하는지라 문지기에게 외쳐 이르되 보라 한 사람이 또 혼자 달음질한다 하니 왕이 가로되 저도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파수꾼이 가로되 나 보기에는 앞선 사람의 달음질이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의 달음질과 같으니이다 왕이 가로되 저는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느니라 아히마아스가 외쳐 왕께 말씀하되 평강하옵소서 하고 왕의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여 가로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리로소이다 그 손을 들어 내 주 왕을 대적하는 자들을 붙여 주셨나이다 왕이 가로되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 아히마아스가 대답하되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왕이 가로되 물러나 곁에 서 있으라 하매 물러나서 섰더라(사무엘하 18:19-30)
<설교>
니체가 ‘신은 죽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니체가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인간이 ‘신은 죽었다’라고 외친다 할지라도 신은 죽지 않습니다. 신에 대해 인간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상관없이 절대적인 분으로 살아서 세상을 통치하시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안계신다면 하나님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든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든지 아니면 우상을 섬기든지 그 어느 것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분명 잘못된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이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면, 그리고 그 믿음이 거짓된 것이 아니고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에 대해 깊은 관심을 두고 말씀을 대하는 것이 지극히 정상적인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생각과 그 마음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에 불과할 뿐임을 아셔야 합니다.
현대 교회가 지극히 엉망이 되버린 모습만을 보여주게 된 것은, 인간이 찾아낸 상대적인 하나님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절대적으로 절대자이신 하나님을 만나지를 못한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을 말하되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상대적인 하나님으로부터 탈피하지를 못함으로써 결국 진리를 말하되 진리에서 멀어진 교회로 전락된 모습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과연 우린 어떤 신앙으로 서 있는가를 면밀히 살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압살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압살롬을 죽인 후에 그 소식을 다윗에게 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19절의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가로되 청컨대 나로 빨리 왕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 갚아 주신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라는 내용을 보면, 후새와 다윗과의 사이에서 연락병의 역할을 하고 있던 아히마아스가 전생에서 승리한 소식을 속히 전하기 위해 요압에게 청을 합니다.
그러나 요압은 아히마아스의 청을 거절합니다. 그 이유는 왕의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는 것 때문입니다(20절). 즉 요압은 비록 전쟁에서 승리하였지만 다윗이 너그럽게 대하라고 당부한 압살롬을 죽인 것으로 인해 승리가 다윗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닐 것임을 미리 짐작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대신 구스 사람을 소식을 전할 전령으로 다윗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히마아스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요압에게 청을 하고 요압은 거듭 이 소식을 인하여는 상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며 만류하지만 아히마아스는 기어코 요압의 허락을 얻어 다윗에게 달려간 것입니다. 아히마아스는 왜 이토록 승리의 소식을 다윗에게 전하고자 했을까요? 그것은 승리의 기쁜 소식을 자신의 입으로 전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겠습니까? 요압이 22절에서 말한 것처럼 다윗에게 기쁨이 될 소식을 전함으로 상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압이 아히마아스를 만류한 것은, 압살롬이 죽었기에 승리의 소식이 다윗에게 기쁨이 될 수 없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히마아스는 들길로 달음질 하여 구스 사람보다 먼저 다윗에게 도착하여 승리의 소식을 전합니다. 아히마아스는 다윗에게서 승리의 소식으로 인한 기쁨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승리의 기쁨보다는 압살롬의 안부를 묻습니다. “왕이 가로되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 아히마아스가 대답하되 요압이 왕의 종 나를 보낼 때에 크게 소동하는 것을 보았사오나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였나이다” (29절)
아히마아스는 압살롬의 죽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숨기고 다만 크게 소동이 있는 것을 보았으나 무슨 일이지 알지 못한다는 말을 합니다. 왜 압살롬의 죽음을 숨겼을까요? 아히마아스는 압살롬이 죽었다는 나쁜 소식을 자신의 입으로 전하기를 거부한 것입니다. 즉 아히마아스는 자신에게 유리한 말은 앞서서 하고 유리하지 않은 말은 감추는 지극히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히마아스에게는 다윗의 마음 따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압살롬을 잃은 다윗의 마음이 어떨 것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다만 승리의 소식을 전하여 다윗을 기쁘게 함으로 상이라도 받아볼까 하는 생각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슬픔이 되고, 분노가 될 압살롬의 죽음의 소식은 자신의 입으로 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히마아스가 생각지 못한 것은 다윗의 관심은 전쟁의 승리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관심은 압살롬의 안위에 있습니다. 압살롬이 죽었다면 전쟁에서 승리했든, 다시 왕위를 찾게 되었든 그것들은 기쁨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결국 아히마아스의 생각과 사고는 다윗과 철저히 단절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다윗의 신하라고 하면서, 다윗을 섬긴다고 하면서 다윗과 단절된 생각과 사고를 갖고 있다면 진정한 신하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처럼 오늘 우리가 예수님과 단절된 생각과 사고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고 섬긴다고 큰 소리 치면서도 우리에게서 보여지는 모든 것들은 예수님의 생각과 사고에서 단절되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 대한 주님의 생각이 어떤 것인지, 세상을 향한 주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아니 아예 알려고도 하지 않은 때 우리의 생각과 사고를 가지고 예수님을 기쁘게 해 보겠다고 달음질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가 부흥되면 예수님이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교회 부흥이 예수님께 기쁨이 된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자신의 생각을 앞세워 예수님과는 단절된 생각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대한 봉사가 예수님을 기쁘게 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것 역시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가 없습니다. 사도들 또한 그러한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십자가에 앞에 나오는 것이란 사실입니다.
시 40:3-7절을 보면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주께서 나의 귀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라는 말씀을 합니다.
여기서 말한 새 노래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성경과 하나님을 해석하여 부르는 노래를 의미합니다. 십자가로 인해서 기존의 나의 모든 생각과 사고가 무너지고 새롭게 알게 된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새 노래를 부르는 것에 실패 했습니다. 전지전능하시고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변함이 없었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자기 민족을 위한 신으로 해석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세상에 오셨음을 보지 못했고 하나님이 고난 받으신 십자가를 보지 못하였음으로 새 노래를 부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에만 관심을 쏟으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십자가로 세상을 새롭게 해석하지 못하고, 십자가로 교회를 해석하지 못하고, 십자가로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고 해서 결국 아히마아스가 승리를 전하는 수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윗의 마음은 생각하지도 않고 다만 자기 유익만 꾀하는 수준 말입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말하면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마음을 깊이 생각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십자가를 말하면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생각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우리 역시 아히마아스처럼 예수님을 향해 달려간다고 하면서도 나의 유익을 꾀하는 그런 사람들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함으로써 내게 돌아올 상에만 관심을 두는 그런 사람들일 뿐입니다. 이것을 인정할 때 예수님이 피흘리신 십자가가 제대로 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우리의 악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악을 바라보고 십자가에 앞에 나온 신자에게 새 노래는 무엇일까요? 새 노래는 우리 스스로 지어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내가 명상을 하며 성경을 읽다가 새로운 깨우침으로 자진해서 부르게 되는 것이 새 노래가 아닙니다. 다윗은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새 노래는 내 스스로 부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부르게 되는 노래인 것입니다. 즉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생각과 사고에 의해 부르게 되는 노래가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기존의 그 모든 것이 깨어져야 비로소 부르게 되는 것이 새 노래인 것입니다.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십자가에서 새롭게 해석할 때 새 노래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끝까지 번제와 속죄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께 기쁨이 될 새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럴 때 무엇이 예수님을 기쁘게 할 말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64강) 사무엘하 18:31-33 다윗의 슬픔
<본문>
구스 사람이 이르러 고하되 내 주 왕께 보할 소식이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대적하던 모든 원수를 갚으셨나이다 왕이 구스 사람에게 묻되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 구스 사람이 대답하되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소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사무엘하 18:31-33)
<설교>
믿음은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나오게 합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하고 피 흘리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어떠함을 점차 깨달아가게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는 것은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바라보는 자로 살아감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당연하다고 여기면서도 정작 그 삶은 십자가의 세계가 아니라 자신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또한 자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어떤 문제에 봉착해 있는가를 들여다보지 못하고 막연하게 ‘나는 예수 믿는다’라는 생각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우리의 실체일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믿음의 세계가 분명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하나님에 의해 살아가는 세계가 있습니다. 이 세계에 몸담고 살아가는 그들의 삶은 과연 어떨까요?
우린 지난주에 아히마아스의 오판에 대해 생각해 봤습니다. 아히마아스의 오판은 승리의 소식이 다윗에게도 기쁜 소식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압살롬이 죽은 것이 다윗에게 슬픔이 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반역자를 물리치고 승리하였으니 기쁨이 더 클 것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아히마아스는 ‘승리했다. 기쁘다’는 생각만으로 다윗에게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히마아스의 소식을 접한 다윗의 관심은 승리에 있던 것이 아니라 압살롬의 안부에 있었습니다. 결국 구스 사람으로부터 압살롬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다윗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33절에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고 말하는 이것이 다윗의 반응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다윗의 이같은 반응에서 무엇을 보십니까?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보십니까? 즉 아들이 죽은 것에 대한 단순한 슬픔을 나타내는 것일까요?
삼하 12:15절을 보면 다윗의 범죄에 대한 나단의 책망이 있은 후 우리아의 처가 다윗에게서 낳은 아이를 하나님이 치시매 그 아이가 심히 앓게 된 내용이 있습니다. 그때 다윗은 아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밤새도록 기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죽자 모든 신하들은 다윗이 더욱 심히 슬퍼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아이가 죽은 것을 다윗에게 알리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정작 아이가 죽은 것을 알게 된 다윗은 오히려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음식을 먹습니다. 이에 비해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한 다윗의 반응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한 다윗의 반응은 단순히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아버지의 슬픔이라고만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압살롬의 반역과 그의 죽음에는 다윗의 죄가 묻어 있습니다. 즉 다윗의 죄로 인한 결과라는 것입니다. 12장에서 나단이 다윗을 책망할 때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12:10-11)는 말을 합니다.
다윗이 나단의 책망을 기억한다면, 압살롬의 반역과 그의 죽음에는 자신의 죄가 들어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결국 압살롬의 죽음은 단순히 아들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로 인한 아들의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이라고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압살롬의 죽음에서 자신의 죄를 보게 되고 자신의 죽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한 다윗의 슬픔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같은 다윗의 슬픔에 대해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사람들은 단지 승리의 기쁨에만 도취되어 있습니다. 구스 사람까지도 압살롬의 안부를 묻는 다윗의 말에 대해 “내 주 왕의 원수와 일어나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소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32절)라는 말을 함으로써 다윗의 슬픔과 애통의 세계와는 전혀 무관한 모습만 보여주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같은 내용을 통해서 믿음의 세계와 믿음의 세계가 아닌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볼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믿음은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나아가게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기쁨의 현장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슬픔과 애통의 현장이라고 생각합니까? 십자가는 슬픔과 애통의 현장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있는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내 죄로 인해 예수님이 죽으신 그 현장이 곧 십자가인데 과연 십자가의 현장에서 승리로 인한 기쁨만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분명 십자가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있는 것에 불과할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에는 우리의 구원이 있고 승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과 승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근거로 한 것입니다. 나의 죽음을 대신하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구원과 승리가 주어진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보지 않고 예수님을 본다면 구원과 승리로 기뻐하기 보다는 나의 악으로 인해 애통해 하고 슬퍼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십자가의 세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기쁨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신을 바라봄으로써 ‘내가 구원받았다’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에 담긴 은혜의 분량을 조금이나마 알아감으로써 기뻐하게 되는 것이 참된 신자의 기쁨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십자가의 세계를 모름으로써 예수를 말하되 예수님으로 살아가기보다는 결국 자기 자신의 문제에 집착하여 자신의 문제로 기뻐하고 슬퍼하며 살아가는 모습만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히 서 보십시오. 그 말씀이 여러분의 치부를 드러내고, 여러분의 부끄러움을 가리고 있는 옷들을 하나씩 벗겨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벌거벗은 채로 서 있는 우리의 실상을 그대로 드러낼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세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후에 자신의 벌거벗음을 알고 부끄러움을 가리기위해 걸쳤던 것을 벗기신 것처럼 우리의 손으로 만들어 걸쳐 놓은 모든 것을 벗기시고 대신 하나님이 만드신 의의 옷을 입혀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십자가의 세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가 부각되고 우리의 부끄러움의 실상이 여지없이 발각되는 세계입니다. 이러한 세계에서 있을 것은 나의 수치로 인한 애통과 슬픔이 아니겠습니까? 요압이나 아히마아스, 구스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없습니다. 다윗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승리로 인해 기뻐할 뿐 자신들의 승리에 압살롬의 죽음이 있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복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가령 어떤 사람이 모든 사람이 원하는 대기업에 취직을 했을 때 사람들을 그것을 복이라고 말하며 기뻐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취업을 한 배경에는 누군가 다른 한 사람이 취업을 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의 복을 위해 복에서 밀려난 것입니까? 만약 그 두 사람이 동일하게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이처럼 내가 복이라고 여기는 일의 배경에는 다른 누군가의 아픔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만 기뻐하면서 은혜를 말하고 감사를 말한다면, 결국 자신의 유익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십자가를 벗어난 세계인 것입니다. 신자가 비록 편한 환경에 살게 되었다 해도 자신은 그러한 편함을 누릴 자격이 없는 자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지금 주어진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릴 수 있게 된 것도 결국 예수님의 죽으심의 은혜임을 잊지 않는 것이 신자입니다.
다윗이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뻐하지 않은 것은, 압살롬의 죽음 때문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죽음에서 자신의 죄를 다시금 생각하며 자신이 죽었어야 마땅함을 외치며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직 기쁨이 있는 인생만을 추구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음을 스스로 드러내는 것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 압살롬의 죽음에서 자신의 죽음을 보는 다윗과 같은 상한 심령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요압은 비록 압살롬을 물리치고 반역을 평정한 공신이었고, 다윗에게는 충성을 다 하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하나님의 원수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다윗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승리했다고 해서 기뻐하는 것은 자신들의 공로가 담긴 승리로 인해 기뻐하는 것이기에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상한 심령에서는 ‘승리는 나의 것’이라고 하면서 기뻐하는 것보다는 ‘나같은 자에게 이게 웬 승리입니까?’라는 반응으로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한 심령의 신자는 설사 고통과 어려움에 처한다고 해도 ‘나같은 자가 그동안 편히 살아온 것도 은혜입니다’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처럼 자신의 실체를 아는 자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야 말로 상한 심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말씀 앞에서도 쉽게 ‘나는 예수 믿는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십자가의 세계가 아닌 세상과 똑같은 자신의 세계를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나의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결국 내게 주어진 것으로 기뻐하고 또 슬퍼하기도 하는 것이 우리가 아닙니까?
나의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이 참된 믿음의 고백으로 나온 것이라면 내게 주어진 것, 내게 있게 된 환경과 일들을 가지고 기뻐하거나 슬퍼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로 인해 기뻐하고 슬퍼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곧 상한 심령으로 자신의 인생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의 죄에 대해 외면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죽인 자임을 까맣게 잊고 삽니다. 그러니 부끄러움이 없이 주님을 부르며 ‘달라’는 외침을 멈추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하나님은 압살롬을 치심으로써 다윗의 세계와 다윗의 세계가 아닌 것을 구분합니다. 승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로 인해 애통해 하고 슬퍼하는 세계와 자신의 죄를 보지 않음으로서 승리를 자기 것으로 여기고 기뻐하는 세계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 같습니까? 그리고 어떤 세계가 진심으로 진리를 따라가는 것으로 보이십니까?
교회가 커지면 아마 목사가 제일 기뻐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복음을 사랑하고 예수님께 충성하기 때문입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교회가 목사에게 기쁨이 되는 것은 교회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나의 것이니 내 것이 잘되는데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요압과 아히마아스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교회의 잘됨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날마다 ‘나는 불쌍히 여김 받아야 할 존재’라는 상한 심령이 유지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다윗의 슬픔은 오늘날 우리가 과연 무엇에서 기쁨을 찾으며 살아가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내용입니다. 부디 애통과 아픔을 아는 마음이 여러분께 있기를 바랍니다.
(65강) 사무엘하 19:1-8 요압의 불만
<본문>
혹이 요압에게 고하되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슬퍼하시나이다 하니 왕이 그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 함이 그 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그 날의 이김이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된지라 그 날에 백성들이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함 같이 가만히 성으로 들어가니라 왕이 얼굴을 가리우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니 요압이 집에 들어가서 왕께 말씀하되 왕께서 오늘 왕의 생명과 왕의 자녀의 생명과 처첩들의 생명을 구원한 모든 신복의 얼굴을 부끄럽게 하시니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장관들과 신복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이제 곧 일어나 나가서 왕의 신복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 왕이 일어나 성문에 앉으매 혹이 모든 백성에게 고하되 왕이 문에 앉아 계시다 하니 모든 백성이 왕의 앞으로 나아오니라 이스라엘은 이미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더라(사무엘하 19:1-8)
<설교>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말하면서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 마음에 대해서 도외시한다면 그는 진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마음에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마음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십자가를 말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쩌면 우린 십자가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기뻐하는 척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를 기뻐하는 척 함으로써 자신이 마치 예수님 편에 서 있는 것처럼 가장하기 위해서는 아닐까요?
솔직히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면 안되는 일도 될 것 같은 생각이 들고, 없던 돈도 있게 될 것 같은 생각이 들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원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기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뻐하는 척, 감사하는 척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항상 부모의 마음을 헤아릴 것입니다. 부모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무엇이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것인가에 마음을 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의 돈을 마음에 둔다면 그는 부모의 마음에 드는 자식이 되기 위해 효도를 가장할 뿐입니다. 많은 유산을 받기 위한 잠시 동안의 술수인 것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이 바로 이런 수준일 뿐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리기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왜 나 같은 자를 위해 피 흘리고 죽는 길을 가셨는가를 헤아릴 때 비로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고 그제야 신앙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고난과 아픔을 헤아리지 않을 때 우리의 관심은 주님에게서 멀어지며 대신 나 자신이 큰 관심거리로 자리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자가 아무리 십자가를 외치고 은혜를 말한다고 해도 그가 노리는 것은 이미 다른 것이기에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승리로 인해 기뻐하는 사람과 승리와 상관없이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해 슬퍼하는 다윗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윗의 슬픔은 단순한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아들의 죽음에서 보게 된 자신의 죄로 인한 슬픔이며 애통이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 자들은 승리로 인한 기쁨에만 도취되어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을 보면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슬퍼하시나이다” (1절)라고 고합니다. 그리고 2절을 보면 왕이 아들을 위하여 슬퍼한다 함이 그날에 백성들에게 들리매 그 날의 이김이 모든 백성에게 슬픔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승리한 자로서 당당하게 성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싸움에 쫓겨 부끄러워 도망한 것처럼 가만히 성으로 들어갔다고 말합니다(3절). 이처럼 다윗의 슬픔 앞에서 백성들은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지 못합니다. 자신들에게는 기쁨의 사건이지만 다윗에게는 슬픔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해서 요압이 불만을 갖게 됩니다. 6-7절의 “이는 왕께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시며 사랑하는 자는 미워하시고 오늘 장관들과 신복들을 멸시하심을 나타내심이라 오늘 내가 깨달으니 만일 압살롬이 살고 오늘 우리가 다 죽었더면 왕이 마땅히 여기실 뻔하였나이다 이제 곧 일어나 나가서 왕의 신복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옵나니 왕이 만일 나가지 아니하시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아니할지라 그리하면 그 화가 왕이 젊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당하신 모든 화보다 더욱 심하리이다”는 내용을 보면 요압은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압살롬이 살고 자신들이 다 죽기를 원했다는 것처럼 다윗을 몰아붙입니다.
요압의 불만은 압살롬의 죽음보다는 자신들의 수고와 승리를 높여주고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한 다윗의 심정보다는 자신들의 승리가 높여지고 칭찬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버리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나의 행위와 수고가 높여지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고 죽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마음 역시 헤아리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과거의 사건으로 역사 속에 묻혀 버린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의 현실로 날마다 발생하고 있는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하늘의 생명에 참여한 자로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과거 2000년 전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날마다 우리의 삶에서 우리의 죄로 인해 죽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어찌 예수님의 죽으심에 마음을 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의 죽으심을 마음에 둔다면 과연 죽음의 현장인 십자가에 나와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나의 공로, 나의 수고, 나의 기쁨이겠습니까? 아니면 죽어야 할 원수인 우리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서 우리의 공로와 수고는 가당치가 않습니다. 내가 담당해야 할 죽음을 대신 담당하신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로 인해 애통해 하는 것이 진심으로 십자가 앞에 나와 있는 신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요압에게는 다윗의 슬픔 따위는 관심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다윗의 슬픔은 자신들의 공로와 수고를 무시하는 것으로 여기고 불만을 보이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불만을 보입니다. 십자가만을 말할 때 십자가가 진리며 십자가만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 맞는다고 하면서도 왜 자신들의 공로와 수고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느냐는 불만을 토로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말하되 자신들의 수고와 공로에 대해서도 말해주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와 함께 자신들도 높여지기를 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자는 기도하고 말씀 보며 주님과 동행하며 교제할 때에 그 분께 받는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에 대한 체험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바라시는 내용이 얼마나 신령하고 의로우며 거룩한 참생명에 관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면 알수록 느끼는 기쁨과 재미와 감격이 무엇인지 모르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오직 현실의 형통과 안락을 위해 눈앞에 벌어진 문제의 해결에만 관심을 쏟아 붓습니다. 교회생활만 재미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 버립니다. 모든 신앙 행위와 현실의 삶을 그 목적을 달성하는 방향으로 초점을 맞추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됨을 고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리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요압이 승리를 했다 하더라도 다윗의 슬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요압은 자신이 얻어낸 승리의 기쁨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우린 요압의 불만을 보면서 우리 역시 이러한 불만에 쌓여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윗의 관심은 자신의 승리가 아니라 압살롬의 죽음의 여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마음을 생각지 않은 요압은 승리와 전공에 마음을 뺏겨 압살롬을 죽입니다. 다윗의 마음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자기 공로를 앞세운 것입니다. 이러한 요압이 오늘 우리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관심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여러분이 복 받고 잘사는 것입니까? 많은 일을 하여 하늘의 상을 받는 것입니까? 아니면 십자가에 달린 독생자 예수님이겠습니까? 예수님에게는 십자가가 전부입니다. 십자가를 위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로 세상을 마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관심 역시 당연히 십자가를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세워서 위대한 업적을 남기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란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신자의 수고와 열심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수고와 열심에 대해 칭찬하실 뜻도 없으십니다. 맥 빠지십니까? 봉사할 맛이 사라집니까? 요압과 같은 불만이 일어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분명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믿음 아닌 믿음에 머물러 있다고 봐야 합니다.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는 것이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심정을 헤아리지도 않습니다. 다만 여러분 자신만 관심거리고 여러분의 수고와 공로가 헛되이 되지 않고자 하는 욕심으로만 살아갑니다.
요압은 7절에서 “왕의 신복들의 마음을 위로하여 말씀하옵소서”라고 요구합니다. 다윗의 슬픔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으니 그 마음을 위로해 달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슬픔에 대해 생각지 않음으로 자신들이 받은 마음의 상처만 위로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요압은 만약 다윗이 신복들의 마음을 위로하지 않으면 오늘 밤에 한 사람도 왕과 함께 머물지 않을 것이라고 협박을 합니다.
이러한 요압이야 말로 현대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소위 신앙이라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예수님을 찾는 것은 예수님으로부터 위로받고자 하는 목적에서입니다. 하나같이 예수님이 나를 위로해 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었는데도 위로가 없고 평안이 없고 주어지는 것이 없다고 여겨지면 가차 없이 예수님으로부터 등을 돌릴 태세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처참하게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지 않는 증거입니다. 내가 위로 받기를 원하고 내가 평안하기를 원하고 내가 잘살기를 원하는 이 목적으로만 예수를 부릅니다. 그러면서 십자가를 말하니 이것이야 말로 예수님을 더욱 슬프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도 예수님을 찾으신 여러분, 무엇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까? 아무런 관심도 없이 습관처럼 나온 것입니까? 아니면 위로 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으신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수고와 공로가 높여지기를 원해서 예수님을 찾으신 것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분명 잘못 찾아오셨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모임은 십자가에 피 흘리신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아픔을 생각하며, 그로 인해 오늘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무한한 은혜와 사랑에 깊이 빠져 들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만이 아니라 이 은석교회가 존재할 때까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질 모임의 이유이며 목적이어야 할 것입니다.
(66강) 사무엘하 19:9-10 백성의 이기심
<본문>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 가로되 왕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고 또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나 이제 압살롬을 피하여 나라에서 나가셨고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 죽었거늘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에 잠잠하고 있느냐 하니라(사무엘하 19:9-10)
<설교>
요즘 노무현 대통령의 인기도가 점차 하락하고 있다고 합니다. 대통령의 인기도가 하락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뭐 복잡하게 대통령의 지도력이니 진보니 보수니 하는 얘기는 다 접어 버리고 가장 간략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현 사회의 형편이 개인의 선(善. 이익)을 추구하는 욕망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민들은 자기 이익에 맞으면 찬성이고 맞지 않으면 반대입니다. 국민들의 관심은 현 사회가 자신이 생활하는데 얼마나 편한가에 있는 것이지 개인의 선과 연관 없이 정치에 관심을 두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을 향한 마음도 항상 변덕입니다. 대통령이 내 놓는 정책이 당장 듣기에 좋을 때는 찬성하면서도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는 반대해 버립니다.
옛날 왕정시대 때도 이 점은 동일합니다. 비록 백성이 선택하여 세운 왕은 아니라 할지라도 왕을 향한 마음은 동일하지 않겠습니까? 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고 좋은 정책을 펼쳐서 백성들을 잘 살게 해주면 성군이라고 하면서 높였던 것입니다. 결국 왕이든 대통령이든 지도자를 향한 개인의 마음은 개인의 선(善. 이익)을 따라 항상 변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인간의 속성이 신앙의 세계 속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백성이 백성의 이기심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신자가 신자의 이기심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복음에서는 멀어진 채 오직 개인의 선(善. 이익)을 추구하는 종교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그러한 현실을 전혀 간파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심각하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백성의 이기심을 잘 보여주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하여 애통해 하고 슬퍼하는 다윗의 울음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요압은 왕으로 인해 마음이 상한 신복들의 마음을 위로해 달라고 말합니다. 왕의 생명과 왕의 자식의 생명과 처첩들의 생명을 구해 줬더니 수고한 신복들을 위로하고 칭찬해줄 생각은 하지 않고 반역자인 압살롬의 죽음으로 울며 슬퍼하는 다윗을 향해 못마땅한 심기를 드러낸 것입니다. 자신이 압살롬을 죽임으로써 다윗이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수고와 공로를 외면하고 있는 다윗을 향한 섭섭한 심기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요압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9-10절의 “이스라엘 모든 지파 백성들이 변론하여 가로되 왕이 우리를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여 내셨고 또 우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나 이제 압살롬을 피하여 나라에서 나가셨고 우리가 기름을 부어 우리를 다스리게 한 압살롬은 싸움에 죽었거늘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올 일에 잠잠하고 있느냐 하니라”는 구절을 보면 압살롬 편에 있었던 백성들이 이제 다윗을 다시 왕으로 모셔오자는 의견을 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애초에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 다윗에게 등을 돌리고 압살롬을 왕으로 세웠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5장을 보면 압살롬은 백성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하고 백성들은 압살롬의 술수로 인해 다윗보다는 압살롬이 왕으로서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등을 돌리고 압살롬을 왕으로 세운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택하여 세운 왕이라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오직 누가 더 자신들을 이롭게 할 수 있는가에만 관심을 둘 뿐입니다. 그들이 왕을 택하는 기준은 자기 이익이었으며 결국 자신을 이롭게 해줄 것으로 여겼던 압살롬이 다윗의 군사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다시 다윗의 편에 서기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만약 백성들의 마음이 다윗 한 사람을 향해 확고하게 세워져 있었다면 압살롬은 감히 반역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압살롬을 잃고 애통해 하는 다윗의 울음에는 백성들의 반역도 한 몫 한 것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압살롬의 죽음이 마치 자신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또한 압살롬의 죽음으로 인해 다윗이 고통 받는 것이 자신들로 인한 것임에 대해서도 외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압살롬이 반역하고 다시 압살롬이 죽고 그로 인해 다윗이 애통해 하며 고통을 겪는 모든 일에 자신들이 있음을 전혀 자각하지 않습니다. 즉 그 모든 것이 자신들로 인한 것임을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압살롬은 다윗을 반역 했으니 죽어 마땅한 것으로만 여기고, 백성들이 왕으로 세운 왕이 없으니 다시 다윗을 왕으로 모셔 오는 것이 아주 당연한 것인 줄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백성들은 다윗의 울음에서 자신들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깨달았어야 합니다. 자신들이 다윗을 고통으로 밀어 넣었음을 자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윗을 울게 만들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그것이 진심으로 다윗 앞에 나오는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저 ‘우리가 세운 압살롬이 죽었으니 다시 다윗을 왕으로 모셔오자’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다윗을 이용하는 수준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백성들을 우리가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이상하게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사건들을 보면 아무리 파렴치하고 못된 짓을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우리가 비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판하지 말라고 해서 비판을 참고 누르는 것이 아니라 아예 비판 자체가 나오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판할 자격이 나에게는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께 끌고 와서 그의 처분을 묻는 무리들에게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그 결과 거기에 몰려있던 모든 사람들이 슬금슬금 꽁무니를 뺐다는 것을 우린 잘 알고 있습니다. 죄 없다고 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꽁무니를 뺄 사람들이 왜 그토록 분기가 등등하여 여인을 끌고 온 것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죄를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간음한 여인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비판은 자기 자신을 보지 않는 자들의 몫일뿐입니다.
성경은 파렴치하고 참으로 악한 사람들을 등장시켜서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책망할 수 없게 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의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파렴치하고 악한 자인가를 보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예수님의 십자가 현장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말씀에 머물러 있을 때는 필히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자의 교제입니다.
백성들이 다윗의 울음이 자신들의 탓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에게 유리한 것만 추구합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다윗을 이용하는 것뿐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 세우신 다윗은 변함없이 나의 왕이고 나는 그의 백성이라는 굳건한 마음이 없습니다. 다만 누가 우리를 살게 좋게 해줄만한 왕인가에게만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 바로 백성들의 이와 같은 이기심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말하고 예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찾는 모든 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나의 유익을 구하기 위해서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통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의 고통을 안다는 사람은 많은데 예수님의 고통이 바로 자기 자신 때문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이 나로 인한 것임을 깊이 자각한다면 고통의 현장인 십자가 앞에 나왔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예수님의 고통 앞에서 내가 당하는 고통을 말하면서 나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무작정 요구하는 것이 진심으로 십자가 앞에 나온 것일까요? 진심으로 십자가 앞에 나온 것이라면 나로 인해 예수님이 고통을 당하셨음을 생각지 않을 수 없고, 그리고 내가 예수님을 고통으로 밀어 넣었음을 생각하며 나에 대해 애통해 하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을 섬기는 믿음인 것입니다.
만약 이런 믿음으로 모이는 교회라면 그 교회는 자연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기보다는 이웃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이익으로 인해서 이웃이 겪을 수 있는 피해와 아픔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내게 좋은 것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웃에게는 짐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머리되신 교회이며 이러한 교회가 증거하는 것이 천국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제도를 바꾸고 개혁이라는 것을 꾀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교회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믿음으로 인해 자연히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으로 인해 이웃이 피해를 입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 최대의 피해자가 바로 예수님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별로 관심도 없는 죄라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으로 하여금 죄인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시도록 했고 모든 고난과 고통 속에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으심의 현장에 버젓이 서 있는 나의 모습은 보지 않고 여전히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 나의 유익을 꾀하고자 하는 것이야 말로 지독한 이기심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죽으심 때문에 영생이라는 귀한 선물을 받은 자로서 여러분의 이기적인 입장에 서지 마시고 애매하게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셔야 했던 예수님의 입장에서 ‘신앙이 과연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마음이 ‘나의 죄로 인해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라는 애통의 마음이 아니라 ‘예수님 나 좀 위로해 주세요’ ‘나 좀 도와주세요’라는 마음을 앞세운 것이라면 그것은 분명 이기적인 자기 입장에서만 예수님을 찾는 것일 뿐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은 진심으로 십자가를 아는 것도 예수님을 아는 것도 아님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사람이 이기적인 자기 입장에서 예수님을 찾게 되면, 결국 나를 위로해주고 나에게 도움이 될 듯하고 믿으면 유익이 생길 것 같은 예수를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이기적인 마음으로는 복음에 대해 기쁜 마음이 있을 수 없으며,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애통의 마음도 있을 수 없습니다. 신자로서 복음으로 인한 기쁨과, 죄로 인한 애통이 없다면 분명 그것을 신자로 일컬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중요성을 무엇에 두고 있습니까? 편히 먹고 사는 것입니까? 요즘 ‘웰빙’이라는 말이 유행입니다. 어딜 가도 웰빙 문화, 웰빙 음식 등등 웰빙이라는 말이 빠지지 않습니다. ‘웰빙’이라는 것은 육체적 정신적 건강의 조화를 통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삶의 유형이나 문화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삶을 누린다고 해도 유효기간은 분명 있습니다. 목숨이 끝나는 날, 아니 몸이 늙어가고 건강을 잃을 때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은 종지부를 찍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동행은 유효기간이 없습니다. 영원토록 계속되어질 일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오늘 비록 남보다 못 먹고 힘들게 산다고 해도, 남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지 못했다 해도 나같은 죄인을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아는 것이야 말로 영원한 행복과 아름다운 세계로 들어가는 길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이기적인 입장에서 벗어나서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피 흘림이 누구로 인한 것인가를 조용히 묵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여러분의 왕이십니다. 비록 예수님 때문에 세상에서 얻는 유익이 없다고 여겨진다고 해도 예수님이 여러분의 왕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왕이신 예수님은 나의 죄를 위해 오셨다는 것만 생각하십시오. 그래서 예수님 때문에 죄에서 건짐 받고 해방된 자로서 영원한 자유인이 되었음을 생각하십시오. 이 마음이 넘치는 그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아는 신자입니다.
(67강) 사무엘하 19:11-15 다윗의 마음
<본문>
다윗 왕이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너희는 유다 장로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왕의 말씀이 온 이스라엘이 왕을 궁으로 도로 모셔 오자 하는 말이 왕께 들렸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느냐 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어늘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오는 일에 나중이 되리요 하셨다 하고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대신하여 항상 내 앞에서 군장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 하여 모든 유다 사람들로 마음을 일제히 돌리게 하매 저희가 왕께 보내어 가로되 왕은 모든 신복으로 더불어 돌아오소서 한지라 왕이 돌아와 요단에 이르매 유다 족속이 왕을 맞아 요단을 건네려 하여 길갈로 오니라(사무엘하 19:11-15)
<설교>
세상은 왕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권력이 탐이 날 때는 얼마든지 쿠데타를 일으켜서 왕을 밀어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누가 왕이 되든 정치를 잘해서 자신들을 편히 살게 해주면 그것으로 만족해 버립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안에서 반역이 일어나 왕을 밀어내고 백성들도 이에 동조하여 반역자인 압살롬을 지지하게 됩니다. 다윗보다는 압살롬이 더 신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전쟁에서 압살롬은 죽고 반역도 실패합니다. 그리고 압살롬을 지지했던 백성들은 다시 다윗을 왕으로 모셔오자는 말을 합니다. 이들이 모르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에서 왕이라는 존재성입니다. 사람들이 추대해서 세운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여 세운 왕이 어떤 위치에 있고 어떤 역할을 하고 있으며 왕 앞에서 백성은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 가에 대해 무지한 것입니다.
그들은 왕을 자기들 마음대로, 자신의 유익을 따라 교체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압살롬이 마음에 들 때는 압살롬이 좋다고 하고, 압살롬이 죽고 반역이 실패하자 역시 다윗 밖에 없다며 다시 다윗을 왕으로 모셔오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에 대한 이들의 모습이야 말로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의 왕으로 세우신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을 왕이라고 말하나 사실 왕께 대한 복종은 생각지도 않고 살아갑니다. 왕 앞에서 내 유익만을 구할 뿐 왕께 복종하는 것이 백성의 본분이라는 것은 까맣게 잊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시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예수 나의 왕’을 외쳐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사는 것은 자기 멋대로 입니다. 왕의 뜻이 무엇인가를 살피면서 왕께 복종하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즉 왕이라는 것을 외칠 뿐 왕을 섬기는 백성다움은 모두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진정한 백성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는 이유도 대부분이 자기 유익이 목적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단지 밖에 걸어놓은 간판일 뿐 속에 담고 있는 내용물은 예수와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자신들의 유익에 의해 마음이 왔다 갔다 하는 이스라엘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다윗이 어떻게 대하는가가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우린 이 내용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깨달음으로 여러분의 내면에 다시금 하나님의 사랑이 샘물처럼 솟아나기를 소원해야 할 것입니다.
11-12절을 보면 “다윗 왕이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너희는 유다 장로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왕의 말씀이 온 이스라엘이 왕을 궁으로 모셔 오자 하는 말이 왕께 들렸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느냐 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어늘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오는 일에 나중이 되리요 하셨다 하고”라는 말을 합니다.
압살롬을 좇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을 다시 왕으로 모셔 오려고 한다는 말을 듣게 되자 다윗이 두 제사장을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서 ‘온 이스라엘이 왕을 궁으로 모셔 오려고 하는데 너희는 왜 이 일에 나중에 되느냐’는 말을 합니다. 다윗은 유다 지파에게 왜 이런 말을 한 것일까요? 유다 지파는 압살롬의 반역의 중심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유다 지파 사람입니다. 결국 같은 형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다윗을 배신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유다 지파는 다윗에게는 아주 괘씸한 존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의 행위를 본다면 속히 왕이 되어서 그들을 징계해도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유다 지파로 하여금 다윗을 왕으로 모시는 일에 다른 지파보다 나중이 되지 말라는 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유다지파가 자신의 출신 지파라서 특별히 배려하는 것이겠습니까? 하지만 단지 자신과 같은 지파이기에 특별히 배려하는 차원으로만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13절에서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대신하여 항상 내 앞에서 군장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 하여”라는 말을 하는데, 아마사는 압살롬이 자신의 군장으로 삼은 사람이었습니다(17:25). 그런 아마사를 전쟁에서 공을 세운 요압을 대신하여 군장을 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군장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원한다는 말까지 하는 것을 보면 단지 같은 지파이기에 배려하는 차원은 넘어선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요압 역시 유다지파 사람임을 생각해 보면 아마사가 같은 지파이기에 배려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면 다윗은 자신을 배신하고 압살롬의 편을 든 유다 사람들에게 왜 이러한 호의를 베푸는 것일까요?
사실 다윗의 이러한 처사는 처음부터 다윗의 편에 서서 고생을 하고 전쟁을 하여 승리한 사람들에게 불만이 되는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전쟁의 승리자인 요압을 대신하여 반역자와 함께한 아마사를 군장으로 세우는 것은 그 결과가 어떠할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실제로 20:10절에 요압이 아마사를 살해하게 되는 것을 보면 결국 지금의 다윗의 처사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왕을 모셔오는 일에 유다 지파를 앞세우고 아마사를 군장으로 세운 다윗의 처사는 또 다시 정치력의 부족이라는 말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까?
만약 다윗의 처사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우린 다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다윗이 왜 그렇게 했는가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교회가 무엇인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결국 교회로 모였을 때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만 발산될 뿐인 것입니다. 아마사를 죽이는 요압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으로서의 특이성은 자취를 감춰 버리고 하나님에게서 독립된 개체로 살고자 발버둥치는 어둠에 속한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사람으로 모이면서도 교회라 이름 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인간이 세운 공로를 따라 상이 주어지는 보편적인 국가가 아닙니다. 인간의 공로는 아예 배제되고 대신 하나님의 은혜만 부각되어져야 하는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공로가 있는데도 무시하고 은혜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인간의 공로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세상이 하나님을 거부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섭리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하나님의 섭리로만 움직이는 자연에 대해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인간이 자연을 벗어나 생존할 수 없다면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나 산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생존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라면 그가 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신자와 신자 아닌 자의 차이점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로마서 1:21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는 그것이 곧 신자 아닌 자의 특징인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말한다고 해서 다 신자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심으로 은혜를 아는 자에게서만 발산되는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아는 신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공로를 부인하고 은혜만을 높이는 자로서 다윗이 유다 지파에게 한 말을 생각한다면 과연 불평이 있게 될까요? 다윗은 하나님이 택하여 세운 왕입니다. 그러한 다윗이 왕의 권력을 이용하여 여인을 범하고 그 남편을 죽게 합니다. 하나님이 만약 행한 대로 갚으시는 방식으로 일하셨다면 다윗은 당장 왕위에서 쫓겨나는 것이 마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택한 자를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이끌어 가시는 긍휼과 자비하심이 다윗을 존재하게 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만약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보지 않았다면 반역자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했을까요? 아마 반역에 대한 징계를 가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이 자신은 왕 자격이 없음을 알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왕의 자리에 앉게 됨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유다지파에 대한 다윗의 조치는 당연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유다 지파에 대한 다윗의 조치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유다 지파가 다시 다윗을 왕으로 모시기 위해 돌아온다면 예전과는 다른 생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예전에는 단지 왕으로 여겨주는 차원이었다면, 지금은 반역자에게 베풀어진 긍휼과 사랑에 감사하는 자로서 다윗을 왕으로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이스라엘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모든 이스라엘 지파 사람들이 다윗을 도로 왕으로 모시려는 일에 그대로 따랐다면 비록 다윗이 다시 왕이 된다고 해도 한 가지 부족한 점이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알아야 할 긍휼과 자비입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 편한 대로 왕을 바꾼 것뿐이고, 비록 여전히 다윗을 왕으로 섬긴다고 해도 왕으로부터 베풀어진 은혜와 긍휼과 자비하심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채 명목상의 왕으로만 일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백성을 원하신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 본문의 내용인 것입니다.
반역의 중심에 있었던 유다로서는 다윗에게 돌아올 염치도 명분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다윗이 먼저 제사장을 보내서 다윗을 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에 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압살롬의 군장이 되었던 아마사를 요압 대신 군장을 삼음으로서 다윗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보여준 것입니다. 즉 그들의 반역을 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14절의 “모든 유다 사람들로 마음을 일제히 돌리게 하매 저희가 왕께 보내어 가로되 왕은 모든 신복으로 더불어 돌아오소서 한지라 왕이 돌아와 요단에 이르매 유다 족속이 왕을 맞아 요단을 건네려 하여 길갈로 오니라”는 내용처럼 다윗의 말은 유다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게 하였고, 다시 다윗을 왕으로 맞게 한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한 대로 압살롬을 반역하고 다시 다윗을 왕으로 모시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반역의 중심에 서 있다가 감히 다윗에게 나올 수 없는 입장이 된 유다 족속이나 지금의 우리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도 나에게 유익이 된다면 우상조차도 구세주로 여기고 왕으로 섬길 마음으로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우리를 예수님은 심판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시 나를 도로 왕으로 모셔 들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용서와 긍휼과 사랑으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19-20절을 보면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거부하며 믿지 않는 자를 향한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을 향해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문을 두드리니 열어달라는 말씀이 아니라 신자라면 예수님의 두드림에 문을 여는 반응을 보이지 않을 수 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왜 예수님의 두드림에 문을 열 수 밖에 없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신자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하시고 회개하는 열심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죄를 알고 애통해 하며 회개하는 열심이 있다는 것은 곧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돌아오라고 부르시는 은혜와 긍휼과 사랑을 알았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죄의 자리에서 예수님이 베푸시는 은혜와 긍휼을 맛본 신자라면 예수님이 문을 두드리실 때 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이고 이러한 신자만이 예수님을 왕으로 섬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일에나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는 일이나 영접하는 모든 일에 우리의 의지라는 것은 개입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우리의 의지는 자신의 이익을 따라 왕을 교체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그러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용서와 긍휼과 사랑을 알게 하심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섬기는 자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택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을 다윗을 통해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한 것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힘과 의지로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끌어가는 것이지요. 이것을 아는 신자라면 하나님 앞에서 결코 자신의 공로나 자기 이익을 주장할 수 없게 됩니다.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한 요압을 대신하여 반역자의 군장이 된 아마사를 군장으로 세운다고 해도 요압으로서는 할 말이 없어야 하는 것처럼 신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두고 부당하다는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야 말로 하나님의 지혜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좋은 것은 항상 내 차지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만 살아갑니다. 그리고 나쁜 것은 내게 오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남이 잘되고 내가 잘못될 때는 불평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일 자체를 거부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아직까지 넓고 깊은 사랑에 빠져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긍휼 앞에서는 ‘내가 잘돼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용납이 안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미 나를 잘되게 하기 위해 고난의 길을 가셨기 때문입니다. 신자란 사랑을 맛본 사람입니다. 수시로 왕을 거역하고 반역하며 마음에 들 때는 왕이라고 하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등을 돌리는 강퍅한 자에 불과한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부르신 사랑을 맛본 자가 곧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에서 마음에 멀어진 채 예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결국 자신의 이익이 목적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교회는 ‘누가 더 잘되느냐?’ ‘누가 더 복을 받느냐?’를 비교하는 경쟁 터가 아닙니다. 남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부러워 할 필요도 없는 곳이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란 동일한 긍휼과 사랑으로 부름 받은 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자랑할 것은 원수된 우리를 용서하시고 부르신 긍휼이며 사랑이고 자비인 것이지 우리의 공로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십자가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깊이 헤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68강) 사무엘하 19:16-23 다윗과 시므이
<본문>
바후림에 있는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급히 유다 사람과 함께 다윗 왕을 맞으려 내려올 때에 베냐민 사람 일천 명이 저와 함께 하고 사울의 사환 시바도 그 아들 열다섯과 종 스무 명으로 더불어 저와 함께 하여 요단 강을 밟고 건너 왕의 앞으로 나아오니라 왕의 가족을 건네려 하며 왕의 선히 여기는 대로 쓰게 하려 하여 나룻배가 건너가니 왕이 요단을 건너려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의 앞에 엎드려 왕께 고하되 내 주여 원컨대 내게 죄 주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옵시며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왕의 종 내가 범죄한 줄 아옵는 고로 오늘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하나이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대답하여 가로되 시므이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그로 인하여 죽어야 마땅치 아니하니이까 다윗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기로 너희가 오늘 나의 대적이 되느냐 오늘 어찌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람을 죽이겠느냐 내가 오늘날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리요 하고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고 저에게 맹세하니라(사무엘하 19:16-23)
<설교>
고린도후서 7:10절을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근심도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이루는 근심이 있는가 하면 사망을 이루는 근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쓴 것은 그들의 잘못됨을 책망하고 경고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서신은 고린도 교인들을 근심하게 했고 그들의 근심은 자신들의 잘못됨을 돌아보고 회개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근심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근심은 오직 세상을 살아가는 문제에만 마음을 쓰는 것을 말합니다. 즉 죄에 대해 책망하고 경고해도 그 말씀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살피는 것이 없기에 회개 역시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마음이 주 예수님을 향하지 않음을 말하기에 결국 사망에 이르는 것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죄를 책망하고 경고하는 것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말씀을 듣기 위해 나오는 것은, 흔히 말하는 것처럼 복 받는 비결이나 기도 응답받는 비결, 또는 도덕적인 인간으로 사는 법 등을 가르침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왜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이 없으면 안되는지 그 실체를 들여다보기 위함인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예수님의 은혜가 어떠함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그 마음이 말씀 앞에서 열린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자신의 악을 돌아보게 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즉 말씀에 의해서 자신의 악을 깊이 깨달으며 자신에게서 일어난 악을 바라보며 근심하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악을 책망하는 말씀이 있으나 말씀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악을 보지 않는다면 그는 자기 죄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마음을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에 대해서도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의 마지막은 성경이 선포한 그대로 멸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악과 멸망의 이야기는 참으로 심각한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처럼 심각한 내용이 정작 당사자인 우리에게는 전혀 심각한 내용으로 들려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문제가 아니라 나와 전혀 상관이 없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 또는 지금의 얘기가 아니라 먼 훗날의 이야기, 또는 분명히 있을 현실의 사건이 아니라 없을 수도 있는 가정적인 이야기로만 여기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어떤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는지 저로서는 그것이 궁금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향한 책망이요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책망을 받고 경고를 받은 이스라엘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우리에게 내리시는 경고며 책망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고, 진리에 마음을 두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외면해 버린 결과가 어떠한가를 이스라엘을 세워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자기만의 하나님을 머리에 담아 둔 채 성경의 하나님에게서 떠나있는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통해 그러한 착각들이 무너져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는 자기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마지막이 무엇인가를 바라보면서 회개하고 믿음 없는 영혼을 주께 맡기지 아니하면 멸망은 결국 나의 몫으로 주어질 것임을 자각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근심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저로서는 여러분의 마음이 이러한 근심이 있기를 간절히 소원할 뿐입니다.
본문에는 시므이란 사람이 등장합니다. 시므이란 사람이 보여주는 것은 주님을 향한 확고한 믿음으로 살아가지 아니하고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만 흘러가고 있는 우리의 실체입니다. 이러한 나를 살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나를 살리고 있는 그 힘을 믿는 자로 새롭게 되는 것이 본문이 가지고 있는 의미인 것입니다.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하자 다윗에게서 마음이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다윗을 왕으로 모시려고 하였고, 유다 사람들이 앞장서서 다윗을 돌아오게 합니다. 이처럼 다시 왕으로 돌아오는 다윗을 맞이하는 사람들 중에 시므이에 대한 이야기가 본문의 내용입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시므이는 좋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삼하 16:7절을 보면 시므이는 망명길에 오른 다윗을 향해서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라고 외치며 다윗을 저주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윗이 왕위를 빼앗기고 힘없는 자로 쫓겨 갈 때 그를 저주했던 시므이가 다윗이 다시 왕으로 세움 받고 돌아오자 다윗을 맞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 앞에 엎드려 “왕께 고하되 내 주여 원컨대 내게 죄 주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옵시며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왕의 종 내가 범죄한줄 아옵는고로 오늘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하나이다”(19,20절)라는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다윗을 저주했던 시므이가 왜 돌아오는 다윗을 맞이하며 엎드려 이런 말을 하는지 그 이유를 아실 것입니다. 시므이는 다윗을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으로 다윗을 환영하는 척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다윗을 저주했던 죄를 뉘우치는 척 연극을 하는 것입니다. 시므이의 이런 모습은 참으로 괘씸하고 치사하고 약아빠진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가 이처럼 괘씸하고 치사하고 약아빠진 자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시므이는 힘에 의해 태도가 달라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약한 자에 대해서는 저주가 나오면서도 강한 자에 대해서는 굽실거리는 것입니다.
시므이의 악한 모습이 무엇이겠습니까? 다윗을 저주한 것입니까? 다윗을 저주한 행위가 악이 아니라 다윗을 저주하게 한 그의 속성이 악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즉 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도망을 치고 있는 다윗은 힘없는 자고, 때문에 그러한 다윗을 아무리 저주해도 자신을 해할 힘이 없다고 여기는 것이 악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그러한 속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힘을 기준으로 하여 타인을 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자신의 현실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나를 살리고 있는 자신의 현실을 보지 못하기에 힘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힘이 나를 살린다는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그래서 악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살리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돈이 힘이 되어 여러분을 살리는 것입니까? 이것은 세상의 시각입니다. 세상은 자신의 악을 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악의 결과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다만 돈이 있으면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사고방식에 파묻혀 돈 버는 것에 모든 마음이 집중되어 있을 뿐입니다. 멸망에 파묻혀 있는 자신의 현실을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어리석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는 다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악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아는 자가 신자고, 자신이 곧 악의 덩어리이기에 악의 결과에서 헤어날 수 없음을 아는 자가 신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상에 존재함은 악을 이기는 다른 힘이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고 있기 때문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돈이 힘이 되지 못하고 세상이 결코 자신을 살릴 수 없음을 아는 자로 살아갑니다.
이러한 신자에게 근심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을 살리는 그 힘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을 살리는 힘을 바라보지 않고 여전히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자신의 속성을 발견할 때 그것은 큰 근심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이 신자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근심이 없이 산다는 것은 나를 살리고 있는 진정한 힘에 대해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6,17절을 보면 “바후림에 있는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급히 유다 사람과 함께 다윗왕을 맞으려 내려올 때에 베냐민 사람 일천명이 저와 함께하고 사울의 사환 시바도 그 아들 열다섯과 종 스무 명으로 더불어 저와 함께하여 요단강을 밟고 건너 왕의 앞으로 나아오니라”고 말합니다. 시므이는 홀로 다윗을 맞아 엎드린 것이 아니라 일천 명의 베냐민 사람과 함께 다윗을 맞이합니다.
왜 일천 명의 사람과 함께 다윗을 맞이할까요? 다윗이 자신을 용서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즉 다윗이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자신과 함께한 일천 명의 사람들을 거부하는 것과 같음을 다윗에게 보여주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시므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힘을 내세워 자신을 지키고자 한 사람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시므이에 대한 다윗의 반응입니다. 다윗도 시므이의 속셈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시므이에 대해 시므이가 예전에 했던 일에 대한 복수를 하지 않습니다.
21절을 보면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대답하여 가로되 시므이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그로 인하여 죽어야 마땅치 아니하니이까”라는 말을 합니다. 아비새란 사람은 시므이에 대해 사형 판결을 내립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 아비새의 생각이었습니다.
아비새란 사람의 사고방식은 죄있는 자는 무조건 징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삼상 26장을 보면 다윗과 아비새가 사울의 진중에 몰래 들어갔을 때 사울은 진 가운데 누워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비새는 다윗에게 하나님이 준 기회이니 사울을 죽여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이처럼 잘못이라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정죄하는 것이 아비새의 속성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비새가 한가지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아비새는 시므이가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저주했으니 죽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럼 아비새는 어떻습니까?
삼하 3장을 보면 아비새는 형 요압과 함께 아브넬이란 사람이 자신의 동생 아사헬을 죽였다고 하여 복수를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당시 아브넬은 다윗과 적대 관계에 있었지만 다윗에게 이스라엘을 바치기로 했고, 그리고 다윗은 아브넬은 후히 대접하여 돌려보내었습니다. 그러한 아브넬을 아비새가 요압과 함께 죽인 것은 다윗의 뜻보다는 자신들의 복수를 더 염두에 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아비새가 다윗을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종으로 일컬으며 그를 저주한 것을 죽어 마땅한 죄로 말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종의 뜻에 반하여 행동했던 것에 대해서는 전혀 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비새 역시 오늘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타인의 잘못을 보는 데는 귀신같습니다. 타인의 조그만 실수, 잘못은 가차 없이 지적하고 트집을 잡으며 분을 내며 고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실수,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전혀 보지를 못합니다. 마치 자신은 떳떳한 것처럼, 잘못이 없는 것처럼 행세합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잊지 말 것은, 누군가가 나에게 실수를 했고 잘못을 했다면 나는 예수님에게 죄를 범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형제가 나에게 실수한 것을 보지 말고 내가 주님에게 범죄한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그럴 때 그는 자신이 무엇으로 인해 살고 있는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는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잊고 있는 나에 대한 것을 생각하게 하고 깨닫게 하기 위해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이 존재하고 있음에 대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이 없다면 내가 누구인가를 보지 못할 것이고, 결국 악에 파묻혀서 악의 자식으로 그대로 끝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살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다윗은 아비새의 말에 대해 이렇게 반응합니다. “다윗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기로 너희가 오늘 나의 대적이 되느냐 오늘 어찌하여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람을 죽이겠느냐 내가 오늘날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을 내가 알지 못하리요 하고 시므이에게 이르되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고 저에게 맹세하니라”(22,23절)
다윗은 시므이를 죽여야 한다고 외치는 아비새를 오히려 자신의 대적이라고 말합니다. 아비새가 다윗을 대적한 적이 있습니까? 오히려 다윗을 떠나지 않고 다윗을 지켰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를 대적이라고 하는 것은 아비새의 말이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 됨을 방해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왕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을 알게 하는 역할자였습니다. 그런데 아비새의 말은 다윗에게 잘못하면 모두 죽는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왕 됨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시므이를 살리는 것은 자비와 긍휼입니다. 은혜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을 살리고 있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며 긍휼과 자비하심입니다. 아비새의 말대로 죽어야 할 자가 죽지 않고 살고 있는 것은 은혜가 여러분을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나를 살리는 은혜를 자랑하고 증거할 뿐, 자신에게 있는 것을 힘으로 삼고 그것을 자랑하거나 힘으로 타인을 대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형제란 나를 살리는 은혜를 증거하고 함께 나눌 관계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의 관계 안에서는 서로의 실수를 드러내고 트집 잡지 않게 됩니다. 무엇보다 형제의 실수를 말할 자격이 없는 자신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실수와 허물을 두고 트집을 잡는다면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대적자라는 판단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마음을 두고 살아갑니까? 여러분의 관심은 무엇을 향해 있습니까? 성경은 멸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멸망의 모습인가에 마음을 두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리고 날마다 자신을 두고 근심하며 회개할 때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69강) 사무엘하 19:24-30 다윗과 므비보셋
<본문>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서 왕을 맞으니 저는 왕의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 예루살렘에서 와서 왕을 맞을 때에 왕이 저에게 물어 가로되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뇨 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 나는 절뚝발이이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나의 종이 나를 속이고 종 나를 내 주 왕께 참소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내 아비의 온 집이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었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 두셨사오니 내게 오히려 무슨 옳음이 있어서 다시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이까 왕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 내가 이르노니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므비보셋이 왕께 고하되 내 주 왕께서 평안히 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저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하니라(사무엘하 19:24-30)
<설교>
사람이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고 사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자신의 현실이 어떠한지를 보지 못함으로써 항상 타인의 결점만을 크게 보며 문제 삼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를 다윗을 맞는 시므이와 아비새를 예로 들어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시 왕으로 세움 받고 돌아오는 다윗을 시므이가 영접을 했을 때 아비새는 예전에 다윗을 저주한 일을 두고 그를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아비새 역시 다윗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복수를 위해 아브넬을 죽였던 사람입니다. 즉 아비새는 자신의 현실은 보지 않고 타인의 결점만을 크게 보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할 때 타인의 결점만 크게 보이게 됨을 기억하시고 우리의 현실을 낱낱이 파헤쳐 우리 앞에 펼쳐 놓으시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세우시고 자기 현실이 어떠한가를 파악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현실을 파악하지 못할 때 타인의 결점만 크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해서도 불만과 원망이 있기 십상입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 앞에 펼쳐 놓으시는 인생에 대해 인상을 찌푸리거나 불만 가득한 마음으로 억지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여러분 앞에 펼쳐져 있는 인생, 그리고 앞으로 여러분 앞에 펼쳐질 인생은 모두가 하나님의 다스림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앞에 펼쳐지고 있는 인생이 사람을 황홀하게 하는 아름다운 그림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즉 여러분이 기대하는 환상과는 전혀 다른 인생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이러한 인생에 대해 뭔가 억울하다는 마음은 들지 않습니까? ‘왜 나만 이런 일을 겪는가? 나보다 훨씬 더 악하게 사는 사람도 저렇게 잘 사는데 나는 왜 날마다 이 모양으로 살아야 하는가?’라는 생각에 억울하다는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지난 시간에 시므이를 살게 하는 것은 다윗의 자비라고 했습니다. 사실 아비새의 말대로 다윗을 저주한 시므이는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왕을 저주했으니 죽어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한 그가 다윗으로부터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다윗의 자비가 죽어야 할 시므이를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시므이의 현실입니다. 시므이가 이런 자기 현실을 잊지 않고 산다면, 자신이 어떤 일을 겪든 살아있는 것으로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신자란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자기 현실이 어떠한가를 깨닫고 인생을 바라보며 억울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형편에서도 감사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므비보셋에 대해 생각해 보며 신자의 현실은 무엇이고 또한 신자로서 현재의 삶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에 대해 함께 생각하고자 합니다. 24절을 보면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서 왕을 맞으니 저는 왕의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는 말을 합니다.
므비보셋은 다윗이 궁을 떠날 때 다윗과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므비보셋은 사울의 손자로서 사울의 집이 망했을 때 함께 망했어야 할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를 왕자처럼 대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다윗과 함께 하는 것이 옳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뇨”(25절)라고 묻게 됩니다.
그러자 므비보셋은 “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 나는 절뚝발이이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나의 종이 나를 속이고 종 나를 내 주 왕께 참소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내 아비의 온 집이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었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 두셨사오니 내게 오히려 무슨 옳음이 있어서 다시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이까”(26-28절)라고 답합니다. 즉 므비보셋은 자신이 고의로 다윗을 따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자신은 왕과 함께 가려 하였으나 종 시바가 자신을 속여 어쩔 수 없이 함께 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16장을 보면 시바가 나귀에 양식을 싣고 도망을 치는 다윗을 맞은 내용이 나옵니다. 그때 다윗이 시바에게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뇨”(삼하 16:3)라고 물었을 때 시바는 “시바가 왕께 고하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저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비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16:4)라는 거짓말을 합니다. 마치 므비보셋이 왕이 될 마음을 갖고 있는 것처럼 거짓 참소를 한 것입니다.
시바가 나귀에 양식을 싣고 다윗을 맞은 것을 보면 므비보셋을 속이고 나귀를 끌고 온 것으로 짐작할 수 있고 결국 므비보셋은 시바의 속임수로 인해서 다윗과 함께 못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므비보셋은 다윗이 돌아올 때까지 발을 맵시 내지 않고 수염을 깍지 않고 옷을 빨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므비보셋의 다윗을 향한 마음이 어떠했는가는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므비보셋의 말을 들은 다윗은 “왕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 내가 이르노니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29절)고 말합니다. 시바가 다윗을 영접하고 므비보셋에 대해 거짓말을 했을 때 다윗이 므비보셋의 재산을 모두 시바에게 줘버립니다. 그것을 다시 나누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결정에 대해 므비보셋은 “므비보셋이 왕께 고하되 내 주 왕께서 평안히 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저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하니라”(30절)는 말을 합니다.
저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라는 것은 시바에게 모든 재산을 주라는 것입니다. 과연 므비보셋은 어떤 마음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보면 다윗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고 시바와 밭을 나누라고 한 다윗에 말에 대한 불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시바에게 있는 것은 모두 자신의 재산인데도 불구하고 반을 나누라는 것에 대한 불만, 또는 억울한 마음에 대한 반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26-28절에서의 므비보셋의 말을 생각해 보면, 다윗의 결정에 대한 불만이라기보다는 재산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이 다만 다윗이 돌아온 것으로 족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사실 다윗에 대한 마음을 제외하고 생각해 본다면 시바와 밭을 반 나누라고 한 것은 므비보셋의 입장에서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므비보셋이 다윗과 함께 하지 못한 것은 시바의 속임수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시바는 그로 인해서 므비보셋의 모든 재산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시바의 속임수와 거짓된 말을 다윗이 알았다면 당연히 시바를 벌주고 다시 시바의 모든 재산을 빼앗아 므비보셋에게 돌려주는 것이 타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시바를 벌주지도 않고 그 밭을 반 나누라고 하는 것은 분명 억울함으로 비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므비보셋이 재산에 연연하지 않고 억울한 마음도 없이 오히려 모든 재산을 시바에게 주라고 말하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깊은 생각을 하게 하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살아오시면서 억울한 일을 겪으신 적이 없습니까? 아무 이유 없이 오해를 받고, 오해로 인해서 불이익을 당한 경우가 없습니까? 사람은 살면서 애매한 오해를 받기도 하고 잘못이 없는데도 손해를 입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러한 길로 밀어붙이시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분은 억울한 일을 겪을 때 어떻게 반응합니까? 하나님께 나와서 대성통곡하면서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애원하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에게는 어떤 일이든 억울한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자신의 현실과 처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지 않으면, 또한 그 현실과 처지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므비보셋은 자신의 현실과 처지를 명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므비보셋은 시바가 자신을 속인 일을 말한 후에 시바를 벌해 달라고 요구하기보다는 다윗에게 모든 처분을 맡깁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다윗 앞에서 자기의 억울함을 말할 처지도, 또한 시바를 벌해 달라고 부르짖을 처지도 되지 못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7,28절을 보면 므비보셋은 자기 아비의 온 집에 다윗 앞에서 죽을 사람이었음을 말합니다. 즉 자신은 죽었어야 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신을 왕의 상에서 함께 음식을 먹는 왕자처럼 대했는데 자신이 무슨 옳음이 있어서 왕께 날 위해 부르짖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살아 있는 것도 모두 다윗의 은혜인데 자신이 또 무엇을 두고 왕께 부르짖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자신의 현실과 처지를 제대로 파악한 므비보셋의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므비보셋은 모든 재산을 시바에게 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므비보셋에게 중요한 것은 재산이 아니라 다윗과 함께하는 관계였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함께하는 관계에 있는 것이야 말로 므비보셋의 모든 필요를 채우는 것이었기에 시바의 속임수에 대해서도, 다윗이 밭을 시바와 반으로 나누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도 억울하다는 것이나 불만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신자가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관계에 있을 때 부요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아 모든 필요가 채워지는 것과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신자에게 억울한 일은 없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우린 이미 하나님 앞에 죽었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삶은 그저 베풀어진 은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도 나의 노력과 힘으로 모아들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입니다. 애당초 나의 것이 아니기에 내 손에 있는 것이 아무리 부당한 방법에 의해 타인에게 빼앗겼다 할지라도 억울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해도 예수님보다 억울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 우리의 죄 때문에 이 땅에 오시고, 예수님이 살리려고 하신 사람들에 의해 죽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이 부르시고 가르쳤던 제자들마저 마지막 순간에 도망을 쳤습니다. 예수님보다 억울한 자가 누구겠습니까?
따라서 신자라면 억울하다고 여겨지는 자신의 인생에서 예수님의 억울함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로 인해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의 억울함이 나의 마음에 생생하게 조각되어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는 억울한 일, 불만스러운 일들도 결국 예수님을 생각하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신의 일을 두고 억울하다고 여겼던 모든 것들이 예수님이 아닌 자기중심적인 삶에 머물러 있는 증거로 보여지기 마련이고 그런 자신을 위해 죽으신 예수님께 다시금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사람이 자기 육신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을게 있다는 것은 자신의 현실을 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멸망의 자식으로 나서 멸망에 파묻혀야 할 내가 예수님이 피 흘리신 덕분으로 살고 있음을 보지 않기 때문에 ‘왜 나는 이것 밖에 안주는가?’라며 부르짖는 것입니다.
부디 지금 자신의 현실과 처지를 명확히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스스로의 힘으로 숨을 쉬며 세상에 발을 붙이고 있다고 여기지 말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힘과 재주와 능력으로 양식을 얻으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지 말기 바랍니다. 인간은 자기 몸 하나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나의 선택으로 세상을 살아가지를 못합니다. 우리 모두는 만물의 주관자의 다스림 아래 있으며 은총 아래 있습니다. 은총이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은 은혜를 떠나서는 해석도 이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여러분의 속에 살아 움직일 때 재물은 보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육신의 편함도 중요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끝까지 하나님의 자녀라는 관계에 머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관계 안에서 억울함도 불만도 없이 모든 필요가 채워진 넉넉함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70강) 사무엘하 19:31-39 다윗과 바르실래
<본문>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왕을 보내어 요단을 건네려고 로글림에서 내려와서 함께 요단에 이르니 바르실래는 매우 늙어 나이 팔십 세라 저는 거부인 고로 왕이 마하나임에 유할 때에 왕을 공궤하였더라 왕이 바르실래에게 이르되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 바르실래가 왕께 고하되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삽관대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 내 나이 이제 팔십 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 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오히려 누를 끼치리이까 종은 왕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려는 것뿐이어늘 왕께서 어찌하여 이같은 상으로 내게 갚으려 하시나이까 청컨대 종을 돌려 보내옵소서 내가 내 본성 부모의 묘 곁에서 죽으려 하나이다 그러나 왕의 종 김함이 여기 있사오니 청컨대 저로 내 주 왕과 함께 건너가게 하옵시고 왕의 처분대로 저에게 베푸소서 왕이 대답하되 김함이 나와 함께 건너가리니 내가 너의 좋아하는 대로 저에게 베풀겠고 또 네가 내게 구하는 것은 다 너를 위하여 시행하리라 하니라 백성이 다 요단을 건너매 왕도 건너가서 바르실래의 입을 맞추고 위하여 복을 비니 저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사무엘하 19:31-39)
<설교>
성경은 인간에게 자신에 대해 솔직해 질 것을 요구합니다. 자신에게 솔직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모든 말씀들은 공허한 것으로 흩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이 흩어져 있는 여러분의 마음을 한곳으로 모아간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흐트러진 마음은 흐트러진 채 존재하고 말씀은 하늘의 구름처럼 잠시 있다가 사라져 버리는 공허함을 경험하지는 않습니까? 말씀이 들려질 때 정상적인 반응은 말씀에 의해 마음이 한 곳으로 집중되는 것입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마음들이 갈 곳을 발견함으로써 한 곳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한 곳으로 집중된 마음은 강한 힘으로 존재하게 되고 오직 하나만을 바라보는 자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서 여러분의 마음에 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현재의 실상을 면밀히 검토해야 할 필요성이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신에 대해 솔직하지 못한 자로 살아가는 자신의 실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에 대해 솔직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감추는 거짓을 안고 살아갑니다. 거짓된 것으로 자신을 평가하기에 자기 실상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실상을 드러내는 말씀에 대해서는 외면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상을 감추는 거짓된 것에는 종교 생활이라는 것이 자리합니다. 종교 생활을 동원하여 자신을 포장함으로써 악한 것을 감추고 대신 거짓으로 위장하여 나 아닌 다른 나를 보여주고자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죄를 담당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은 관심 밖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예수’ 떠들고 ‘십자가’를 말하고 눈물을 흘리는 거짓된 자신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을 위장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위장되고 단단히 포장된 껍데기를 하나하나 벗겨 내는 것이 말씀의 기능입니다. 하나하나 벗겨지며 속살이 드러나게 해서 수치스러운 자신을 보게 함으로서 자신의 수치를 가려줄 분을 찾게 하는 것이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생각, 다른 의도를 가지고 말씀을 대한다면 결국 말씀은 공허한 외침으로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신에 대해 솔직해 진다면 과연 자신을 ‘신자’로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신자로 인정할 수 없다면 무엇이 여러분 자신을 신자로 인정할 수 없게 합니까? 반대로 신자로 인정한다면 무엇이 여러분 자신을 신자로 인정하도록 합니까? 골치 아픈 생각일지 모르지만 이러한 문제를 간과하고 지나쳐 버린다면 여러분은 신자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신자’운운하는 종교인으로 머물게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본문은 신자란 어떤 사람인가를 보게 함으로써 거짓된 것으로 신자인척하며 위장을 하고 살아왔던 우리의 수치를 드러내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다윗은 자신을 저주한 시므이를 만나고, 자신을 속였던 시바를 만나고, 자신이 은혜를 베풀었던 므비보셋을 만납니다. 시므이와 시바는 자신들이 다윗에게 한 일을 생각하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으로 다윗을 환영하는 척 합니다. 마치 하나님으로부터 올 수 있는 재앙을 막아 보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척 거짓으로 자신을 위장한 거짓된 신자와 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만약 그들이 자신에 대해 솔직했다면 다윗을 저주하고 속인 일을 고백하며 ‘왕의 처분에 맡기겠습니다’라는 모습을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을 환영함으로써 다윗의 환심을 얻고 그래서 과거의 잘못을 덮으려고 하는 것이야 말로 거짓으로 위장된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이 위장된 거짓일 수도 있음을 자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부르며 찬양하고 하나님이 유일한 신이시며 전지전능하신 분이라고 떠들고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이 모든 것들이 위장된 거짓에 불과할 수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아는 사람이라면 내가 잘못을 범한 분의 처분에 나를 맡기는 것이 진정한 솔직함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진심으로 안다면 하나님의 처분에 나를 맡기고 사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고백하고 회개했으니 용서해주세요’라고 하는 것은 용서 받기 위해서, 그리고 징계를 피하기 위해서 동원하는 고백이기에 위장된 거짓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를 했으니 신자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커다란 착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처분에 자신을 맡기고 산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나 같은 죄인에게는 이것도 과분하다는 생각 아래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이것이야 말로 자신에 대해 솔직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을 두고 신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므비보셋은 다윗이 돌아온 것으로 부족함이 없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밭을 시바와 반으로 나누라는 다윗의 결정에 대해서도 억울하다거나 불만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부를 시바에게 주라는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므비보셋은 다윗이 돌아왔다는 것으로 더 이상 다른 것이 필요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다윗에게 베풀어지는 은혜로 말미암았음을 알기에 다윗이 함께 한다는 것으로 모든 것이 채워진 사람인 것입니다. 다윗이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를 앎으로서 나오게 되는 반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에 보면 다윗은 바르실래라는 또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31,32절을 보면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왕을 보내어 요단을 건네려고 로글림에서 내려와서 함께 요단에 이르니 바르실래는 매우 늙어 나이 팔십세라 저는 거부인고로 왕이 마하나임에 유할 때에 왕을 공궤하였더라”고 말합니다.
바르실래는 거부였으며 다윗이 마하나임에 피신해 있는 동안에 다윗과 그의 일행을 보살피고 도와줬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바르실래에게 “너는 나와 함께 건너가자 예루살렘에서 내가 너를 공궤하리라”(33절)는 말을 합니다. 바르실래가 다윗을 도와준 일에 대해 보답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다시 왕이 되어 돌아가는 상황에서 바르실래가 다윗과 함께 간다면 그의 남은 인생은 말 그대로 평안이 보장될 것입니다. 왕을 도와준 사람이니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것은 자명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르실래는 다윗의 요청을 거부합니다.
34-37절을 보면 바르실래는 이런 말을 합니다. “바르실래가 왕께 고하되 내 생명의 날이 얼마나 있삽관대 어찌 왕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리이까 내 나이 이제 팔십세라 어떻게 좋고 흉한 것을 분간할 수 있사오며 음식의 맛을 알 수 있사오리이까 어떻게 다시 노래하는 남자나 여인의 소리를 알아 들을 수 있사오리이까 어찌하여 종이 내 주 왕께 오히려 누를 끼치리이까 종은 왕을 모시고 요단을 건너려는 것뿐이어늘 왕께서 어찌하여 이같은 상으로 내게 갚으려 하시나이까 청컨대 종을 돌려 보내옵소서 내가 내 본성 부모의 묘 곁에서 죽으려 하나이다 그러나 왕의 종 김함이 여기 있사오니 청컨대 저로 내 주 왕과 함께 건너가게 하옵시고 왕의 처분대로 저에게 베푸소서”
바르실래는 자신이 늙어서 좋고 나쁜 것을 분간할 수 없으며 음식의 맛도 알 수 없고 노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음으로 자신이 다윗과 함께 한다면 오히려 누가 될 뿐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왕과 함께 요단을 건넌 것은 단지 왕을 배웅하려는 것뿐인데 어찌하여 상으로 내게 갚으려 하는가 하면서 사양합니다. 이러한 바르실래를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사양의 미덕을 보이는 겸손입니까?
사람들이 신을 찾아 종교적 행위를 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 정성에 대해 대가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신이 자신의 행위에 대해 반응해주기를 원합니다. 물론 신의 반응은 자신을 도와주고 지켜주는 것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신에 대한 이러한 기대가 교회 안에도 난무합니다.
교회에서 사람들에게 외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말하면서 봉사하라고 하고 충성하라고 하고 열심을 내라고 말합니까? 모두가 상급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한 사람을 절대 외면하지 않으신다고 하면서 상으로 복으로 갚으실 것임을 말합니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에게 돌아올 상을 기대하고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 자신을 위한 열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위장된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르실래는 다윗을 도왔으면서도 다윗이 함께 가자는 것을 거부합니다. 다윗을 따라가면 남은 인생이 편안해 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다윗을 따라가면 오히려 다윗에게 누를 끼칠 뿐이라는 것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다윗에게 베푼 행위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와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는 항상 나의 유익만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도 나와 함께 해주시기를 구할 뿐입니다. 그러나 바르실래는 자신이 다윗과 함께 하면 누가 될 뿐임을 말합니다. 즉 ‘나는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나 같은 자가 예수님과 함께 해봐야 예수님에게 누만 될 뿐입니다’라는 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신자가 자신의 실체를 정확히 볼 때, 그리고 자신에 대해 솔직할 때 할 수 있는 고백일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12절을 보면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오실 때 받을 상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래서 상을 받기 위해 열심히 신앙생활 할 것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한 현실을 제대로 파악을 하고 말씀을 대한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나는 상을 받을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합니다.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현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 상을 기대하지 않게 됩니다. 또한 무엇을 하든 그 대가로 상을 기대하지도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상을 받을 자격도 없으며 상을 받을 일을 한 것도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심판에 처할 자를 예수님을 보내셔서 의인이라 일컬으시고 자녀 되게 하신 것으로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신에게 솔직한 자로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여러분이 과연 하나님께 한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한 일이라고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하나님의 뜻을 좇기보다는 나의 입장에 파묻힌 채 날 위해 살아왔고, 교회를 다닌 것 역시 내 만족을 꾀하는 수준이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는 나를 보면서 교회를 보면서 오직 내 중심으로 살아왔음을 과연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한 일은 없습니다.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무슨 상을 기대한단 말입니까? 기도를 해도 날 위해 했을 뿐이고, 성경을 읽어도 날 위해 읽었고, 헌금을 해도 날 위해 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신자는 무엇을 하든 자신의 행위를 근거로 해서 상을 기대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닌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이 하신 일로 인해 한없이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교인들에게 상급을 말하면서 열심히 충성할 것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그 속에 하나님이 아닌 오직 자기 자신이 살아있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은 날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백성 되게 하신 그 자리에서 무엇이 나를 백성 되게 했는가에 집중하며 하나님이 베푸신 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범사에, 즉 어떤 일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르실래를 보면서 조그마한 일을 가지고도 공로 운운하는 우리에 대해 부끄러움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것도 잘한 것이 없으면서도 서로 자신의 잘한 것을 내어 놓고, 반대로 타인의 잘못함은 부풀리는 우리에 대해 부끄러움을 가져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거룩의 자리에 붙들어 놓으시는 은혜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
(71강) 사무엘하 19:40-43 유다와 이스라엘의 다툼
<본문>
왕이 길갈로 건너오고 김함도 함께 건너오니 온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나 왕을 호행하니라 온 이스라엘 사람이 왕께 나아와서 고하되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이 어찌 왕을 도적하여 왕과 왕의 권속과 왕을 좇는 모든 사람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네었나이까 하매 유다 모든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대답하되 왕은 우리의 지친인 까닭이라 너희가 어찌 이 일에 대하여 분내느냐 우리가 왕의 물건을 조금이라도 먹었느냐 왕께서 우리에게 선물 주신 것이 있느냐 이스라엘 사람이 유다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는 왕에 대하여 십분을 가졌으니 다윗에게 대하여 너희보다 더욱 관계가 있거늘 너희가 어찌 우리를 멸시하여 우리 왕을 모셔 오는 일에 먼저 우리와 의논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더라(사무엘하 19:40-43)
<설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신 후 선악과를 세우셔서 그 열매를 먹지 말라고 지시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으면 인간은 영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열매를 먹으면 인간은 죽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과연 하나님은 무엇을 위해 이러한 장치를 에덴동산에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이러한 장치가 인간을 위한 것입니까? 만약 인간을 위한 것이라면 아예 처음부터 그러한 장치는 만들어 놓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선악과를 안먹으면 영생을 준다가 아니라, 무조건 영생을 얻게 해주겠다는 것이 진심으로 인간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보면 선악과라는 장치를 만드신 것은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서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입니다. 알다시피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매 날마다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기쁨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창조되어진 세상의 경치가 좋아서가 아니라 세상이 곧 말씀의 세계였기 때문에 그것이 보시기에 좋으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기쁨은 말씀의 세계가 그대로 유지될 때 가능합니다. 그래서 인간을 만드시고 선악과라는 장치를 만들어 놓으심으로 말씀의 세계를 보호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즉 인간이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야 말로 말씀 아래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말씀의 세계였기에 그것으로 하나님의 기쁨은 계속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실패하게 되고, 결국 영생에서 멀어진 채 이제는 죽음 아래 있는 인간의 처지가 되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이 처해 있는 현실입니다. 세상은 인간을 그의 인격이나 업적 등으로 인간의 존귀성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말씀 아래 있는 인간만이 오직 인간다운 인간으로 평가되어질 뿐입니다. 세상이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엉뚱한 것을 치장하여 자신의 존귀성을 드러내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도 말씀에 순종한자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말씀은 말씀을 위해 존재하는 인간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해 존재해 주기를 원합니다. 심지어 신조차도 자신을 위한 신으로 존재하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인간의 욕망이 말씀을 거부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오직 말씀을 위해 오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말씀을 위해 사심으로 말미암아 유일하게 말씀을 위해 존재하는 참된 인간의 모습을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씀의 세계가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면 죽는다는 원칙이 그대로 시행되고 있는 세상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말씀의 세계에 내가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말씀에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로를 믿는 것, 그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의 세계의 백성으로 존재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영생에 참여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는 누구든 말씀에 순종하지 못함으로 죽음에 붙들려 있던 존재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무엇을 하고 안하고 상관없이 모두가 동일한 처지에서 만난다는 것입니다. 이점을 망각하기에 교회에서 끊임없이 세력다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툼을 오늘 본문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40절을 보면 “왕이 길갈로 건너오고 김함도 함께 건너오니 온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나 왕을 호행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이 요단을 건너 길갈로 오게 되었을 때 왕을 호위하여 함께 건넌 사람들은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의 절반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백성이라는 용어는 개개인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지도자 위치에 있는 백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유다 백성은 전부가 다윗과 함께한 반면 이스라엘은 절반만이 다윗과 함께 합니다. 그 이유는 유다 백성이 다윗 왕의 귀환을 이스라엘에게 알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귀환하는 모든 행사를 유다 지파가 이스라엘에게 알리지 않은 채 주관함으로 인해서 단지 다윗 주변에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다윗과 함께 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것으로 인해서 유다와 이스라엘 사이에 다툼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41절의 “온 이스라엘 사람이 왕께 나아와서 고하되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이 어찌 왕을 도적하여 왕과 왕의 권속과 왕을 좇는 모든 사람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네었나이까”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에게 나아와 유다 지파의 독단적인 행위에 대한 부당함을 고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에 대해 유다 사람들은 “유다 모든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에게 대답하되 왕은 우리의 지친인 까닭이라 너희가 어찌 이 일에 대하여 분내느냐 우리가 왕의 물건을 조금이라도 먹었느냐 왕께서 우리에게 선물 주신 것이 있느냐”(42절)라고 말함으로써 오히려 이스라엘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즉 유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다윗 왕을 모신 것은 다윗 왕이 자신들과 지친인 까닭이며 다윗으로부터 그 어떤 특혜를 받은 일도 없기에 이스라엘이 분노하는 것은 자신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임을 강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들의 대립과 다툼은 “이스라엘 사람이 유다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는 왕에 대하여 십분을 가졌으니 다윗에게 대하여 너희보다 더욱 관계가 있거늘 너희가 어찌 우리를 멸시하여 우리 왕을 모셔오는 일에 먼저 우리와 의논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나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더라”는 말을 보면, 서로가 양보하지 않은 채 다윗 왕에 대한 기득권을 주장하는 것으로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왕에 대하여 십분을 가졌으니’라는 말은, 다윗 왕과의 혈통적 관계를 앞세우는 유다 사람들에 대한 반박으로 하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지파의 숫적인 우월성을 강조함으로써 자신들이 유다 사람들보다 더 다윗에게 힘이 되고 도움이 될 위치에 있기에 다윗에 대해서는 유다보다 더 관계가 있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과 유다는 서로에게 유리한 것을 내세우면서 누가 다윗과 더 가까운가를 따지며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자신들의 실체가 무엇인가는 보지 않은 채 서로 다윗에게 더 가깝다는 것을 주장하는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이들 모두가 다윗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더 가깝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처지입니까? 그들이 누구입니까? 압살롬이 잘해준 것 때문에 압살롬이 좋다하며 다윗에게 마음을 돌렸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것 때문에 압살롬이 반역을 하게 되고 다윗은 피신을 하는 고생을 하게 된 것인데, 이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누가 더 다윗과 가까운가로 다툰다는 것이야 말로 똥 묻은 두 마리의 개가 서로 냄새난다며 다투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유다든 이스라엘이든 다윗에게서 마음이 돌아섰던 사람들입니다. 다윗 편에서 볼 때는 반역자일 뿐입니다. 그런 그들이 마치 전혀 다윗을 반역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다윗을 왕으로 섬겼던 사람들인 것처럼 다윗에 대한 서로의 위치를 두고 다투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 편에서 볼 때는 그들 모두는 다윗을 배신한 자들일 뿐입니다.
눅 9장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변론이 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눅 9:48)는 말씀을 하십니다.
제자들이 따지는 것은 ‘누가 더 공이 많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공이 많은 자가 천국에서도 크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사고방식이 바로 사단의 사고방식입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에게는 ‘공로’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도 동일합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께 내어 놓을 공로라는 것이 없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한 어린아이는 자신의 공로가 없는 존재를 뜻합니다.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자라는 것도 자기 공로를 내세우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공로가 전혀 없는 자로 존재하는 것이 가장 작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이 바로 이런 사람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나의 공로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공로로 들어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이 그들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이 택하신 결과였습니다. 이것을 그들이 알았다면 ‘누가 크냐’라는 다툼은 아예 있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의 현실은 ‘누가 크냐’라는 싸움에 휘말려 있습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처럼 주도권 싸움에서 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며 살아갑니다. 자신의 공로를 내세움으로서 높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경쟁적으로 행하며 살아갑니다. 기도도 경쟁적으로 하고, 성경을 읽는 것도 경쟁적으로 하며, 심지어 목사를 섬기는 것에도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야 말로 천국과 상관없는 지옥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란 경쟁과 다툼이 있을 이유가 없는 곳입니다. 주도권 싸움이라는 것도 해당이 전혀 안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이유는 우리의 공로가 전혀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여러분의 공로로 되어진 것입니까? 여러분의 공로로 신자 되었고 예수님을 믿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까? 은석교회가 세워지고 지금까지 유지된 것이 여러분의 공로입니까? 그렇게 여겨진다면 서로의 주도권을 위해 싸우십시오. 그러나 그것은 지옥일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나라, 즉 말씀의 나라에 들어와 있습니다. 내가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공짜로 생명나무에 참여하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순종이 아니었다면 우리 모두는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존재로서 사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일 뿐입니다. 다같이 죽고 썩어질 사람들이 예수님의 공로로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런 우리가 모여서 누구의 공로를 내 놓는 것이 옳겠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을 환영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속에는 지금도 예수님이 가신 길을 외면한 채 나에게 유리한 길을 가고자 하는 욕망이 들끓습니다. 그런 우리의 죄악을 예수님의 피가 가려주셔서 주님의 나라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세상에서 성공하고 큰 자가 된다’는 말은 지옥의 소리에 불과합니다. 그 소리에 귀 기울이고 마음을 뺏긴다면 그 마지막은 결국 지옥의 사람으로 끝나게 될 뿐입니다. 자기 공로가 없는 그가 작은 자로 여김 받으며 그가 곧 천국의 사람임을 명심하시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 자랑하기 바랍니다.
(72강) 사무엘하 20:1-2 세바의 반란
<본문>
마침 거기 난류 하나가 있으니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하는 자라 저가 나팔을 불며 가로되 우리는 다윗과 함께할 분의가 없으며 이새의 아들과 함께할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좇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좇으나 유다 사람들은 왕에게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좇으니라(사무엘하 20:1-2)
<설교>
시편 59:1-2절을 보면 “나의 하나님이여 내 원수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일어나 치려는 자에게서 나를 높이 드소서 사악을 행하는 자에게서 나를 건지시고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말을 합니다. 여러분은 이 구절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습니까? 문자적인 이해를 묻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삶이 이 구절을 받아들이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께 원수라는 대상이 존재한다면 마음 깊이 이해되는 내용이겠지만 원수가 없다면 여러분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구절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 말씀이라는 것 때문에 읽고 끝나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이런 부분들이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읽기는 읽으나 나의 삶과 너무 동떨어진 내용들이어서 나의 마음을 움직이지도 못하고 다만 내 머리 속을 스쳐지나 가는 것이 전부인 것들 말입니다. 물론 말씀의 의미를 해석을 하지 못한 이유도 있겠지만, 말씀의 의미를 해석하여 들려줘도 이해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원수가 누구인가를 말해줘도 시편 59편과 같은 내용들이 자신과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저는 그 이유를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다는데서 찾고 싶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지라도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야한다는 생각도 없고, 아무리 예수가 좋다고 하더라도 예수 때문에 손해를 볼 수 없다는 생각으로 세상과 적당히 타협을 하며 살았기에 원수라는 것이 존재할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결국 다윗처럼 고난 받는 입장에 있지 않기에 원수에 대한 이야기가 이해가 안되는 것이고, 예수님처럼 주리고 고난 받는 약자의 길을 원하지 않기에 십자가가 이해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경은 관심 밖이 되는 것은 자명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교회의 문제는 원수와의 싸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원수에 대한 관심도 없고 원수가 누구인가를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지키기에 급급하여 내 교회에 해를 끼치는 존재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할 뿐 우리에게 생명이 되는 십자가를 무너뜨리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십자가도 내 교회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장식품으로만 존재할 뿐이지 예수님이 피 흘리신 십자가가 굳게 세워지고 증거 되기 위해서라면 내 교회는 망해도 좋다는 생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내 교회가 부흥되는 것이 십자가가 증거 되는 것이라는 원수의 생각에 합류하여 살아갈 뿐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모든 것이 아니기에 그 마음은 자연 자기 유익이 있는 곳을 향할 수밖에 없고 자기 유익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유익이 되는 곳으로 마음이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말씀드린 유다와 이스라엘이 그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압살롬의 반역과 죽음, 다윗의 귀환을 통해서 드러난 것은 자기 유익을 따라 마음이 흘러가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사고방식입니다.
이들의 마음에는 다윗이 없습니다. 유익이 안된다 싶으면 다윗에게서 멀어지고, 다윗을 가까이 하는 것이 유리하다 싶으면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권세에 가까이 하여 득을 보려는 노림수만 있을 뿐, 자신들이 다윗에게서 멀어졌을 때의 결국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거룩의 관계가 유지되어집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이 담겨 있고,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만 거룩의 관계가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다윗을 대적하고 멀리 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원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다윗에게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다만 무엇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인가만 따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본문에 세바의 반란을 있게 한 것이고 결국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윗 좇기를 그치고 세바를 좇은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마침 거기 난류 하나가 있으니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하는 자라 저가 나팔을 불며 가로되 우리는 다윗과 함께할 분의가 없으며 이새의 아들과 함께 할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라고 말합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다윗을 다시 왕으로 모시는 일에 있어서 주도권 다툼을 합니다. 유다는 다윗의 지친이라는 것을 내세워서, 그리고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세력이 더 강하다는 것을 내세워서 서로 다윗에게 가까운 위치에 있으려고 다투는 것입니다. 그리고 19:43절에서 “유다 사람의 말이 이스라엘 사람의 말보다 더 강경하였더라”고 말하는 것처럼 유다 사람들은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고 자신들에게 주도권이 있음을 주장합니다.
이러한 다툼을 보면서 양쪽 모두의 관심은 다윗 안에서 얻어지는 하나님과의 거룩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윗의 권세에 가까이 하여 얻어지는 자신들의 유익에 더 관심이 있었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느 한쪽도 자기 유익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함으로써 결국 세바의 반란이 있게 된 것입니다.
세바라는 사람이 ‘우리는 다윗과 함께할 분의가 없으며 이새의 아들과 함께 할 업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는 말로 이스라엘을 선동합니다. 세바의 말은 유다 지파가 다윗과 가까운 관계에 있다면 자신들은 결국 다윗으로부터 멀어져 불이익을 당할 수밖에 없으며 얻을 유익도 없을 것이니 다윗을 따를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세바의 선동에 마음이 움직인 이스라엘은 결국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좇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좇으나 유다 사람들은 왕에게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좇으니라”(2절)는 내용처럼 다윗을 좇지 아니하고 오히려 세바를 좇게 된 것입니다. 다윗보다는 자신들 앞에 서서 외치는 세바를 좇는 것이 더 자신들에게 유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물론 다윗보다 세바를 좇는 것이 더 유리할 수 있습니다. 세바를 중심으로 뭉친다면 오히려 강한 나라를 건설하여 크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까맣게 잊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을 좇음으로 자신들에게 돌아올 이득을 생각할 뿐, 다윗 안에서의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좇지 않아도 얼마든지 자신들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다윗에게서 돌아선 것입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다윗에게 세우신 하나님의 메시야 언약을 무시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수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어서 여러분께 돌아올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과연 무엇을 기대하고 예수를 좇고자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과의 거룩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불의와 더러움의 자식인 우리가 하나님과의 거룩의 관계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놀라운 복입니다. 하나님과의 거룩의 관계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십니까? 이 거룩의 관계에서 멀어지는 것은 곧 영원한 멸망이며 사망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이것을 안다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자신의 이득을 꾀하기보다는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대접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이라는 관계에 머물게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에게 가나안 여인 하나가 나아와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라고 외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은 이방인이었는데 이 여인에 대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 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24절)는 것입니다. 즉 자기 딸이 귀신 들렸다며 예수님을 찾아와 사정을 하는데 예수님은 자신은 오직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외에는 다른 데로 보냄을 받지 않았다고 하면서 물리치시는 것입니다.
결국 여인이 이방인이기에 도와주지 않겠다는 의미의 말씀으로 들려질 수 있을 것이고, 이 말을 들은 여인은 예수님을 비난하고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인은 거듭 자신을 도와달라고 하고 다시 예수님으로부터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민망한 말을 듣게 됩니다. 이방 여인을 개로 취급을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이 한 말은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27절)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으로 부릅니다. 그리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불쌍한 처지에서 해방될 수 없는 자기 처지를 바라보고 예수님께 나오는 것입니다.
여인에게는 예수님의 힘을 빌려 득을 보겠다는 것보다는 예수님이 자신을 물리치지 않기만을 원합니다.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알기에 개로 취급을 받아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개의 위치에라도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를 먹고 살아가는 것이라면 어떤 위치에서 살아간다 하더라도 개의치 않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라면 불쌍한 존재일 수밖에 없기에, 예수 밖에서는 높은 자리에서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아간다고 해도 불쌍한 존재에 불과할 뿐임을 알기에 예수 안이라는 관계를 소원하게 될 뿐입니다. 이것을 큰 믿음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잘못됨은 다윗과의 관계에서 누릴 자신들의 위치와 이득만을 노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을 환영하고 좇는 이유가 오직 자기 유익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 지파에 비해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고 여겼는데 세바가 선동을 하자 가차 없이 다윗을 좇는 것을 중지하고 세바를 향한 것입니다. 무엇이든 나에게 유리한 것만 선이고 진리라는 사고방식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난 시간 말씀드린 대로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라는 다툼을 했었지만 그들 역시 예수 안에서 자신들이 차지할 자기 위치만 생각했을 뿐,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어떤 높은 위치에 있어도 불쌍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는 무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세상의 모든 것 위에 위치하는 것임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다시 에베소서 2:1·2-13절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우리는 분명 그리스도 밖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을 뿐입니다. 우리의 결국을 놓고 본다면 참으로 불쌍하기 짝이 없는 처지에 불과한 존재들이었을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멀리 있던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님께 가까운 거룩의 관계에 있게 된 것입니다. 이점을 잊지 않는다면 그리스도 안이라는 관계에 있는 것이야 말로 그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소원할 것은 예수님이 아니면 개보다 못한 존재이기에 예수님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개의 위치에 있는다 할지라도 예수님으로부터 얻어먹는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산다면 원수가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편 59편과 같은 내용의 말씀들도 얼마든지 자신의 신앙생활로 말미암아 이해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자기 유익을 구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으로 인한 신자의 유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이미 넘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불쌍한 처지에서 구출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이해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습게 여기고,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 역시 자기 유익을 위한 계산이 앞서기 때문에 항상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마음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말이 나에게 유리하다 싶으면 가차 없이 예수께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진심으로 구원 받은 자라면 인생이 자신에게 불리한 길로 흘러가고 남들보다 못한 위치에서 살아가게 된다고 해도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가까운 관계에 있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얼마든지 감사할 것입니다.
(73강) 사무엘하 20:3-13 요압의 살인
<본문>
다윗이 예루살렘 본궁에 이르러 전에 머물러 궁을 지키게 한 후궁 열 명을 잡아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고 더불어 동침치 아니하니 저희가 죽는 날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내니라 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위하여 삼 일 내로 유다 사람을 소집하고 너도 여기 있으라 아마사가 유다 사람을 소집하러 가더니 왕의 정한 기한에 지체된지라 다윗이 이에 아비새에게 이르되 이제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압살롬보다 우리를 더 해하리니 너는 네 주의 신복들을 거느리고 쫓아가라 저가 견고한 성에 들어가서 우리들을 피할까 염려하노라 하매 요압을 좇는 자들과 그렛 사람들과 블렛 사람들과 모든 용사들이 다 아비새를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쫓으려고 예루살렘에서 나와서 기브온 큰 바위 곁에 이르매 아마사가 맞으러 오니 때에 요압이 군복을 입고 띠를 띠고 집에 꽂은 칼을 허리에 매었는데 저가 행할 때에 칼이 빠져 떨어졌더라 요압이 아마사에게 이르되 형은 평안하뇨 하며 오른손으로 아마사의 수염을 잡고 그 입을 맞추려는 체하매 아마사가 요압의 손에 있는 칼은 주의치 아니한지라 요압이 칼로 그 배를 찌르매 그 창자가 땅에 흐르니 다시 치지 아니하여도 죽으니라 요압과 그 동생 아비새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쫓을새 요압의 소년 중 하나가 아마사의 곁에 서서 가로되 요압을 좋아하는 자와 다윗을 위하는 자는 요압을 따르라 할 때에 아마사가 길 가운데 피 속에 굴어졌는지라 그 소년이 모든 백성의 섰는 것을 보고 아마사를 큰 길에서부터 밭으로 옮겼으나 거기 이르는 자도 다 멈추어 서는 것을 보고 옷을 그 위에 덮으니라 아마사를 큰 길에서 옮겨 가매 사람들이 다 요압을 따라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쫓아가니라(사무엘하 20:3-13)
<설교>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세바의 반란은 오늘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바처럼 우리 역시 예수님에게 반란을 일으키며 살아가는 존재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이 좋아서 다윗을 따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압살롬의 반역이 실패한 마당에 다윗에게 등을 돌리면 자신들에게 해가 될 것을 염려하여 다윗을 환영하는 척할 뿐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그들의 관심이 아니었기 때문에 유다 사람과 주도권을 두고 다툼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다윗에게 있는 하나님의 언약을 보지를 않습니다. 다윗과 함께 한다는 것이 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모른 채 다만 자신들에게 유리한 주도권을 얻기 위해 다툼을 벌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과 함께 할 분의가 없으며 이새의 아들과 함께 할 업이 없도다”(1절)는 말로 선동하는 세바의 말에 쉽게 동조하여 다윗 좇기를 그치고 세바를 좇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자신에게 득이 되는 길을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것은 다윗이 반역자인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다윗의 불쌍히 여김으로 다윗 언약에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다윗의 불쌍히 여김을 전혀 바라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들 마음대로 다윗을 선택할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다는 식으로 행동할 뿐입니다. 자신들은 숫자가 많음으로 자신들이 떠나면 다윗이 아쉽지 자기들은 아쉬울 것이 없다는 식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에는 관심이 없이 자신들의 힘과 세력만을 믿고 행동하는 하나님의 원수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자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자란 언약의 완성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충족된 사람을 뜻합니다. 모든 것이 충족되었다는 것은 부족함이 없음을 뜻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주도권을 뺏겨도 괜찮은 것이고, 욕을 먹어도 괜찮은 것이고,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떠나는 것이라 할지라도 내가 다른 사람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 욕을 먹고, 무시 받는 것은 참을 수 없다는 식으로 행동해 버리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보다 나의 자존심을 지키고,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지 않게 하는 것을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바의 반란과 같은 것입니다.
세바의 반란과 함께 다윗은 유다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돌아온 다윗이 가장 먼저 한 일이 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예루살렘 본궁에 이르러 전에 머물러 궁을 지키게 한 후궁 열 명을 잡아 별실에 가두고 먹을 것만 주고 더불어 동침치 아니하니 저희가 죽는 날까지 갇혀서 생과부로 지내니라” 다윗은 압살롬에 의해 더렵혀진 열 명의 후궁을 별실에 가둬 버리고 동침하지 않음으로서 죽는 날까지 생과부로 지내게 한 것입니다.
사실 열 명의 후궁이 압살롬과 동침하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그들을 궁에 남겼기 때문이고, 압살롬의 힘을 이길 수 없는 연약한 존재들이었기에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을 생과부로 지내게 한 것은, 후궁들의 죄에 대한 처벌이라기보다는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있는 다윗 스스로를 수치스럽게 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다윗이 후궁들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명목으로 받아들인다면 결국 죄에 대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구실을 정당화하는 것이 됩니다. 그것은 다윗의 죄에 대해서도 어떤 구실을 동원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후궁들을 생과부로 지내게 함으로써,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죄로 말미암은 것임을 생각하며 자신의 수치를 끝까지 상기시키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을 빌미로 자신의 죄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죄의 자리에 있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 하셨으면서도 그 죄가 우리의 삶에 남아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허용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부끄러운 자리에 있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그 어떤 공로도 끄집어 내지 않게 하시기 위함이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만을 바라고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결국 평생 생과부로 지내게 된 다윗의 후궁들은 다윗에게 그의 죄와 하나님의 영원하신 자비를 증거 해주는 증인들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마음을 안다면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 역시 다윗의 마음으로 교통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것이 진심으로 다윗과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압은 또 다시 다윗의 마음은 외면하고 자기중심적인 판단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4절을 보면 다윗이 아마사를 불러 삼일 내로 유다 사람을 소집하라고 합니다. 세바의 반란에 대비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런데 아마사가 약속한 기일이 되도 돌아오지를 않습니다(5절). 결국 다윗은 아비새에게 “이제 비그리의 아들 세바가 압살롬보다 우리를 더 해하리니 너는 네 주의 신복들을 거느리고 쫓아가라 저가 견고한 성에 들어가서 우리들을 피할까 염려하노라”고 명합니다.
아비새가 출동을 하자 요압도 함께 따라 나서게 되고 기브온 큰 바위 곁에서 유다 사람을 소집하러 갔던 아마사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요압이 ‘형은 평안하뇨’라고 인사하는 척 하면서 칼로 찔러 죽이게 됩니다(7-10절). 그리고 시체를 들판에 버려둔 채 그 위에 옷을 덮어 놓은 요압은 군사를 이끌고 세바를 좇으러 간 것입니다(11-13절).
요압이 아마사를 죽이는 이유는 아마 다윗이 압살롬의 군장이었던 아마사를 벌하기보다 오히려 군장으로 삼은 것에 대한 반발로 볼 수 있습니다. 그때 다윗의 군장이 요압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요압은 아마사에게 밀려난 것이었던 것만큼 다윗에게 반발이 없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아마사는 압살롬의 군장으로 다윗에게 반역을 했던 사람이고, 자신은 다윗과 함께 하여 다윗을 위해 싸웠던 것을 생각한다면 더욱 거센 반발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요압의 경력만을 살펴본다면 요압은 분명 다윗의 충성스런 신하였습니다. 요압 스스로도 자신을 그렇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아마사를 군장으로 삼은 것을 부당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관점에서의 판단일 뿐입니다. 하지만 다윗이 볼 때 요압은 다윗의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제 멋대로 행동한 사람에 불과할 뿐입니다. 요압이 아브넬과 압살롬과 아마사를 죽였지만, 그 모두는 다윗의 마음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들 중 누구도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를 않았습니다. 특히 압살롬은 살려주라는 당부까지 했습니다. 이런 다윗의 말을 모두 묵살하고 자신의 판단대로 행동해 버린 요압이 다윗의 마음에 합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행동에 대해 저마다 정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죄가 되는 행동이라 할지라도 ‘네가 그러니 나도 그럴 수밖에 없지 않느냐?’라는 말로서 자기 정당성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자기 정당성을 고집하는 이유는, 누구에게라도 지기 싫어하는 본성 때문에 그러합니다. 잘못했다는 것은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이기에 그것을 용납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요압의 살인은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자로 존재하는 것보다 자기 존재성에 빠져 살아가는 우리의 악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구든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자기 존재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십자가 앞에 서 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떤 사람이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피 흘려 죽으신 현장인 십자가 앞에서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고집할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는 누구도 정당한 인간이 되지를 못하며 누구도 세상에 존재할 가치는 없음을 선포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 섰을 때 모든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경험이 없는 자들이 모여 서로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옳은데 네가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혹 예수님 앞에서는 죄인이지만 남들 앞에서는 죄인이 아니라는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 역시 크게 잘못된 생각임을 아셔야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다윗이 열 명의 후궁을 평생 생과부로 지내게 한 것은 그들의 죄를 처리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을 자신의 죄에 대한 증인으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생과부로 지내야만 하는 그들을 보면서 자신의 죄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자는 서로에게 나의 죄를 보게 하는 증인의 관계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즉 예수님 앞에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증언하게 하기 위해 형제를 만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로가 ‘네가 잘못했다’는 것으로 따지고 있다면, 그것은 요압처럼 예수님의 마음은 외면한 채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자신의 존재를 곧게 세우고자 하는 것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요압은 비록 자신이 ‘나는 다윗의 충성스런 신하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몰라도 그는 분명 다윗에게 충성하지를 않았습니다. 그 증인들이 바로 요압에게 죽은 아브넬, 압살롬, 아마사였습니다. 요압은 비록 그 몸은 다윗과 함께 했지만 그 마음은 다윗에게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본문처럼 살인이 있게 된 것입니다. 다윗의 마음이 아닌 자신의 마음으로 그들을 대한 결과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사람이며, 예수님을 아는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스스로를 그렇게 판단한다면 어쩌면 그것은 요압과 같은 착각일 수 있음을 주지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자신이 교회를 다니고 기도하고 성경 보며 헌금하는 것 등을 가지고 스스로를 판단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함께 하게 하신 신자의 관계에서 자신을 판단해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열심히 고백하는 내가 과연 죄인의 자리에서 죄인된 자로 형제를 만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요압은 자신이 볼 때는 반역도 하지 않고 다윗과 함께 한 정당한 자였기 때문에 죽어야 할 자를 살려준 다윗의 은혜의 맛을 알지 못합니다. 은혜를 알지 못하기에 요압에게서는 은혜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 중 누구도 옳은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실수를 했다 하더라도 그는 틀렸고 나는 옳다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신자는 서로의 행동을 바라보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예수님을 바라보며 만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피 흘리신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생각하십시오. 악한 자로 규정될 수밖에 없는 나에게 부어진 은혜를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그 마음 그대로 서로를 대하십시오. 예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셨는지 그 마음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74강) 사무엘하 20:14-26 여인의 지혜
<본문>
요압이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행하여 아벨과 벧마아가와 베림 온 땅에 이르니 그 무리도 다 모여 저를 따르더라 이에 저희가 벧마아가 아벨로 가서 세바를 에우고 그 성읍을 향하여 해자 언덕 위에 토성을 쌓고 요압과 함께한 모든 백성이 성벽을 쳐서 헐고자 하더니 그 성에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가 외쳐 가로되 들을지어다 들을지어다 청컨대 너희는 요압에게 이르기를 이리로 가까이 오라 내가 네게 말하려 하노라 한다 하라 요압이 그 여인에게 가까이 가니 여인이 가로되 당신이 요압이니이까 대답하되 그러하다 여인이 저에게 이르되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대답하되 내가 들으리라 여인이 말하여 가로되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어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미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 요압이 대답하여 가로되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삼키거나 멸하거나 하려 함이 아니니 그 일이 그러한 것이 아니니라 에브라임 산지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하는 자가 손을 들어 왕 다윗을 대적하였나니 너희가 저만 내어 주면 내가 이 성읍에서 떠나가리라 여인이 요압에게 이르되 저의 머리를 성벽에서 당신에게 내어 던지리이다 하고 이에 여인이 그 지혜로 모든 백성에게 말하매 저희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진지라 이에 요압이 나팔을 불매 무리가 흩어져 성읍에서 물러나서 각기 장막으로 돌아가고 요압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왕에게 나아가니라 요압은 이스라엘 온 군대의 장관이 되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그렛 사람과 블렛 사람의 장관이 되고 아도니람은 감역관이 되고 아힐룻의 아들 여호사밧은 사관이 되고 스와는 서기관이 되고 사독과 아비아달은 제사장이 되고 야일 사람 이라는 다윗의 대신이 되니라(사무엘하 20:14-26)
<설교>
압살롬의 반역이나 세바의 반란, 그리고 요압이 아마사를 죽이는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은 권력을 스스로 쟁취하고자 하는 욕망에 의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입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자신이 하는 일이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생각으로 자신을 위해 행동할 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도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말하나 실상은 하나님에 대해 도전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아마사를 죽인 요압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요압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다윗의 정책에 도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나타내는 왕으로서 정책을 펼쳤지만, 요압은 다윗의 긍휼과 사랑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긍휼과 사랑이 자신에게는 불리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대신 군장으로 세운 아마사를 살해한 것입니다.
그리고 15절의 “이에 저희가 벧마아가 아벨로 가서 세바를 에우고 그 성읍을 향하여 해자 언덕 위에 토성을 쌓고 요압과 함께한 모든 백성이 성벽을 쳐서 헐고자 하더니”라는 말씀을 보면, 요압은 자기 멋대로 군사를 이끌고 세바가 도망한 아벨 성으로 가서 세바를 잡기 위해 그 성을 치고자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자 그 성에서 지혜로운 여인 하나가 나와서 요압에게 “여인이 말하여 가로되 옛 사람들이 흔히 말하기를 아벨에 가서 물을 것이라 하고 그 일을 끝내었나이다 나는 이스라엘의 화평하고 충성된 자 중 하나이어늘 당신이 이스라엘 가운데 어미 같은 성을 멸하고자 하시는도다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18,19절)라는 말을 합니다.
이 여인은 아벨 성을 이스라엘 가운데 어미 같은 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기업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기업이기에 누구도 손 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압은 반란자인 세바를 잡기 위해 여호와의 기업인 아벨 성을 쳐서 허물어뜨리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요압의 목적은 아벨 성을 허무는 것이 아니라 세바를 잡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세바를 잡기 위해 아벨 성을 무너뜨리는 것이 결국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는 것이 된다는 것을 미처 생각지를 못한 것입니다. 이는 요압이 오직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것에 모든 마음을 두고 살았음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해서는 마음을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압은 여인의 말을 듣고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다 삼키거나 멸하거나 하려함이 아니니 그 일이 그러한 것이 아니니라 에브라임 산지 사람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하는 자가 손을 들어 왕 다윗을 대적하였나니 너희가 저만 내어 주면 내가 이 성읍에서 떠나가리라”(20,21절)는 말을 하고, 여인은 성읍 사람들에게 요압의 말을 전하고 결국 세바의 목을 베어 요압에게 던짐으로서 요압이 물러가게 되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 내용에서 대조되는 것은 연약한 여인의 지혜와 요압의 어리석음입니다. 요압의 어리석음은 자신이 행하는 것이 여호와가 보실 때 어떠한가에 대해 도외시 한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요압과 같은 어리석음에 치우쳐 살아갈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요압에게는 아벨 성이 여호와의 기업이라는 것보다는 세바를 잡아 죽임으로서 자신의 위상을 되찾고 군장이라는 위치를 다시 확보하는 것만이 관심이었습니다.
아마사로 인해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고 다윗에게도 자신의 힘을 보여주고자 하는 속셈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오직 세바를 잡는 것만이 목적이었기에 자신의 행위가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는 것이 된다는 것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서도 얼마든지 보여집니다.
여러분께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자존심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세워진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입니까? 만약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라는 것이 우습게 여겨진다면, 중요한 것은 여러분의 자존심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수시로 나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를 짓밟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천국의 원칙은 용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천국은 이 원칙에 도전하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용서가 그 속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천국의 이 원칙에 순응하는 자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어떤 행위가 천국의 원칙에 도전하는 것이 되는가를 면밀히 살펴야 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원칙에 도전하는 자는 바로 여러분 자신들이기 때문입니다.
요압처럼, 아마사로 인해 무너진 자신의 위치와 위상을 되찾고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다윗의 정책에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자신의 힘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처럼 우리가 용서와 긍휼로 다가오신 예수님의 그 마음에 합류하여 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굳게 세우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써 이루어진 지체라는 관계 위에 우리가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자존심이나 위상 위치 등 모든 것은 지체라는 관계 속에서 무너져야 마땅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피로써 이루어진 지체의 관계를 소중이 여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지체라는 관계는 덮어 버리고 나의 자존심과 위상을 앞세우며 타인을 공격하기도 하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마치 요압처럼 말입니다. 세바를 잡아 자신의 자존심을 세우기 위해 여호와의 기업인 아벨 성을 쳐서 허물고자 하는 것처럼 나를 세우기 위해 예수님의 몸을 공격하고 비난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지혜로운 연약한 여인 하나를 세워서 “어찌하여 당신이 여호와의 기업을 삼키고자 하시나이까”라는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에게 여인이 이 말을 했다면 요압처럼 부인할 것입니다. ‘아니다. 나는 예수님의 몸을 치려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에게 도전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이 내게 잘못한 것이 있어서 그를 비난 한 것일 뿐이다’라고 할 것입니다. 분명 요압의 의도도 아벨 성이 아니라 세바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의도가 결국 아벨 성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나의 의도가 어떠했는가는 상관없이 우리의 말이나 행동들이 예수님의 피로써 이루어진 몸의 관계를 치는 것이 되어 질 수 있음을 깊이 자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나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써 나의 모든 죄가 용서를 받고 의의 사람으로 천국 백성이 되었다는 이 사실이 놀라운 기쁨으로 내 속에 자리한다면, 분명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면 나라는 존재는 있을 수 없음을 알기에 내가 아닌 예수님의 은혜가 굳게 세워지는 것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그가 바로 신자가 아니겠습니까?
천국은 나의 위상이나 자존심으로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나를 고집하고 나를 세우려고 하는 길의 마지막은 멸망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아는 것이 신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은 무너진다고 해도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으로 기뻐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생각에 머물러 있지 못함으로써 결국 나를 세우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을 방해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말하는 내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훼방하는 대적임에도 불구하고 나의 그러한 실상을 보지 못하고, ‘나는 꽤 괜찮은 신앙인이다’라는 자기 착각과 환상에 빠져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말이나 행동을 보십시오. 천국의 원칙인 용서와 긍휼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옛 본성만이 보일 것입니다. 그러한 여러분의 현실을 읽으시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있고 기도를 하고 있는 나의 현실, 나의 실상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대적이었음을 보게 될 때 자신에게 한없이 절망하면서 그러한 나를 악에서 건지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예수님의 피의 귀함을 마음에 두게 될 것이고, 자연히 피로써 이루어진 지체라는 관계 역시 내가 허물 수 없는 소중한 것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용서와 긍휼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지혜란 나를 이롭게 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높이는 길로 나아가는 모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자는 모든 일을 지혜롭게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지혜롭게 처리한다는 것은 무엇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높이는 것이 되는가를 집중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지혜가 여러분께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가르쳐 줄 것입니다.
전도서 9:13-15절을 보면 “내가 또 해 아래서 지혜를 보고 크게 여긴 것이 이러하니 곧 어떤 작고 인구가 많지 않은 성읍에 큰 임금이 와서 에워싸고 큰 흉벽을 쌓고 치고자 할 때에 그 성읍 가운데 가난한 지혜자가 있어서 그 지혜로 그 성읍을 건진 것이라 그러나 이 가난한 자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었도다”라는 말을 합니다. 여인의 지혜가 성을 건졌는데 그 여인을 기억하는 자가 없었다는 것은 지혜를 멸시하고 대신 힘을 높이는 것이 세상임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높여 할 것은 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혜입니다. 그리스도만을 높이고자 힘쓰는 지혜 있는 신자를 기억해야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전도서 9:16-17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낫다마는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 말이 신청되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종용히 들리는 지혜자의 말이 우매자의 어른의 호령보다 나으니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지혜가 힘보다 낫습니다. 지혜자의 말이 우매자의 어른의 호령보다 낫다는 이 말에 우리 모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나이 들고 힘있는 자가 어른 행세를 하려고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자랑하는 지혜 있는 자가 어른입니다. 왜냐하면 힘이 아니라 지혜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곧 지혜자를 의미합니다.
(75강) 사무엘하 21:1-9 사울적인 요소
<본문>
다윗의 시대에 연부년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저희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저희 죽이기를 꾀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물으니라 다윗이 저희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기브온 사람이 대답하되 사울과 그 집과 우리 사이의 일은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나 이스라엘 가운데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왕이 가로되 너희의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 저희가 왕께 고하되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경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의 자손 일곱을 내어 주소서 여호와의 빼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저희를 여호와 앞에서 목매어 달겠나이다 왕이 가로되 내가 내어 주리라 하니라 그러나 다윗과 사울의 아들 요나단 사이에 서로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한 것이 있으므로 왕이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아끼고 이에 아야의 딸 리스바에게서 난 자 곧 사울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과 사울의 딸 메랍에게서 난 자 곧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의 다섯 아들을 잡고 저희를 기브온 사람의 손에 붙이니 기브온 사람이 저희를 산 위에서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매 저희 일곱 사람이 함께 죽으니 죽은 때는 곡식 베는 처음 날 곧 보리 베기 시작하는 때더라(사무엘하 21:1-9)
<설교>
성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은,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대한민국’과 같은 국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안에 남겨두고자 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임을 보여주는 것이 될 것이고 반대로 이스라엘 안에서 끊어 버리고자 하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백성은 어떤 속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인가에 관심을 두는 것이 옳은 것이지 어떻게 하면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는가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성경을 보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러한 관심거리를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은 ‘너는 말해라 나는 내 생각대로 살아가겠다’는 식으로 성경을 펼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고 나는 나대로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성경을 대하기 때문에 성경이 말씀하는 것들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말하되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무관심한 채 그냥 내 식대로 살아가는데 열심인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이해를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파 묻혀 있는 사울적인 요소들을 파헤쳐 드러내며 고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다운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 내고자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사울적인 요소가 무엇인가를 발견해야 할 것이고, 하나님은 결코 사울적인 요소를 용납하지 않으심을 깨닫고 우리에게 있는 모든 사울적인 요소가 무너지고 그리스도인이라는 새로운 인간으로 고침받기를 소원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1절을 보면 “다윗의 시대에 년부년 삼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어느 시기에 기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에게 삼년 기근을 있게 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떤 문제가 있음을 경고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문제가 뭔가 하면 이스라엘이 해결하지 않은 사울적인 요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울적인 요소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울이 기브온 사람을 죽인 일입니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을 죽인 일에 대해 다윗이 어떤 해결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근을 내리심으로서 이스라엘이 사울이 기브온을 죽인 일을 해결하지 않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다고 할 수 없음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울이 기브온 사람을 죽인 일에서 드러난 사울적인 요소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예수를 말하고 교회로 모인다고 하면서 여전히 우리가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사울적인 요소란 또 무엇일까요?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사울적인 요소를 그대로 간직한 채, 아무리 하나님을 찾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거부하시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면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저희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저희 죽이기를 꾀하였더라 이에 왕이 기브온 사람을 불러 물으니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말한 대로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고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입니다. 즉 이방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이 죽인 것은 이방인들인데, 왜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여호수아 9:15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언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는 말을 합니다. 기브온 족속은 여호수아 당시에 아모리 족속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할 때 이미 이스라엘이 여리고와 아이 성을 무너뜨렸다는 소식을 듣고서 먼 지방에서 온 것으로 위장을 하여 여호수아와 화친의 언약을 맺은 사람들입니다.
여호수아는 이들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을 알았으나 이미 여호와로 언약을 맺은 관계이기에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들을 죽이지 말 것을 명하고 여호와의 단을 위하여 나무를 패고 물 긷는 자로 삼았던 것입니다(수 9:27). 결국 기브온 사람들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언약을 맺은 것으로 인해 여호와의 기업에 참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기브온 사람들을 치고자 하였으나 족장들은 그들에게 맹세한 맹약을 인하여 오히려 진노가 임할까 하노라 하면서 기브온 사람들을 죽이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결국 기브온 사람들을 살린 것은 여호와로 인한 언약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약이 그들을 보호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기브온 사람들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한 사울의 열심이 무엇인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5절에서 사울을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경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으로 말한 것을 보면, 어쩌면 평소에 이스라엘이 이방인인 기브온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기에 사울이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한 죄였습니다. 그 이유는 기브온 사람들이 언약 아래 보호 받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은 하나님의 언약 자체를 무시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이 되었던 것입니다.
에스겔 17:18-19절의 “그가 이미 손을 내어 밀어 언약하였거늘 맹세를 업신여겨 언약을 배반하고 이 모든 일을 행하였으니 피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그가 내 맹세를 업신여기고 내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그 죄를 그 머리에 돌리되”라는 구절을 보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언약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이 하나님이 언약 안에 있는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멸시하고 배반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청산해야 할 사울적인 요소는 하나님의 언약을 멸시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을 멸시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먼저 이스라엘이 거하고 있는 가나안 땅의 속성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가나안 땅은 아시는 대로 약속의 땅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공로도 힘도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를 살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나안 땅의 속성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은 이 속성에서 어긋나는 자는 토해내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보호 받는 땅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는 피를 흘리면 안 됩니다. 민수기 35:33절의 “너희는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는 말씀처럼 누구든 피를 흘리면 그는 피로써 갚아야 하는 것이 가나안 땅의 원칙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3절)라고 묻자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의 자손 일곱을 요구하게 되고 다윗이 일곱을 내어주자 그들을 목매어 죽인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가나안 땅은 피를 흘리면 안 되는 땅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 아래 있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아래 보호 받는 것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누구든 피를 흘린다는 것을 언약을 멸시하는 것이기에 피 흘린 자의 피가 아니면 그 죄를 속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그대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법칙을 알았기 때문에 기브온 사람들의 요구대로 사울의 자손 일곱을 내어준 것입니다.
9절을 보면 “저희를 기브온 사람의 손에 붙이니 기브온 사람이 저희를 산 위에서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매 저희 일곱 사람이 함께 죽으니 죽은 때는 곡식 베는 처음 날 곧 보리 베기 시작하는 때더라”고 말합니다. 결국 피는 피로써 갚게 됨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내용이 오늘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울이 피를 흘린 자라면 우리 역시 피를 흘리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피는 피로써 갚는다는 법칙을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결국 우리가 죽어야 할 존재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매달려야 할 그 자리에 예수님이 대신 매달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은총과 용서가 적용되는 땅이 곧 예수 그리스도 안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납되지 않는 것은 사울적인 요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써 용서 받고 보호받으며 살아가는 땅에서 타인을 비판하고 판단하며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사울적인 요소를 가지고 예수를 찾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러한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본문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아래 보호 받는 존재들이라면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방인이었지만 기브온이 언약으로 인해 가나안에 머물게 된 것처럼 우리 역시 언약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그리스도 안에 머물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죄가 심판으로 끌어 갈 수 없습니다. 언약이 우리를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과 용서하심의 언약이 우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 언약입니다. 이 언약 안에 있는 관계를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고 지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체가 서로 다투고 피를 흘린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멸시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은 기브온 사람들은 자신의 뜻대로 죽일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자신은 왕이기 때문에 왕의 권력으로 마음대로 죽일 수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왕이라는 것이 결코 권력이 아니며, 설사 권력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아래 있음을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라는 것은 자신의 뜻대로 자기 마음대로 타인을 비난하고 판단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언약 아래 보호 받고 있으며, 예수님의 피가 우리 모두를 용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님이 용서하고 계시고 용납하고 계시는 지체를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때로는 지배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는 착각으로 사울적인 요소를 수시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이 명심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나라는 그러한 사울적인 요소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흘려야 할 피를 대신 흘리시고 죽으신 예수님의 용서의 은총을 깊이 묵상하시고 그 은총 아래 살고 있는 것이 성도라는 관계임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76강) 사무엘하 21:15-22 이스라엘의 등불
<본문>
블레셋 사람이 다시 이스라엘을 치거늘 다윗이 그 신복들과 함께 내려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더니 다윗이 피곤하매 장대한 자의 아들 중에 삼백 세겔 중 되는 놋창을 들고 새 칼을 찬 이스비브놉이 다윗을 죽이려 하므로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다윗을 도와 그 블레셋 사람을 쳐죽이니 다윗의 종자들이 다윗에게 맹세하여 가로되 왕은 다시 우리와 함께 전장에 나가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 하니라 그 후에 다시 블레셋 사람과 곱에서 전쟁할 때에 후사 사람 십브개가 장대한 자의 아들 중에 삽을 쳐죽였고 또 다시 블레셋 사람과 곱에서 전쟁할 때에 베들레헴 사람 야레오르김의 아들 엘하난이 가드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는데 그 자의 창 자루는 베틀채 같았더라 또 가드에서 전쟁할 때에 그 곳에 키 큰 자 하나는 매손과 매발에 가락이 여섯씩 모두 스물네 가락이 있는데 저도 장대한 자의 소생이라 저가 이스라엘 사람을 능욕하므로 다윗의 형 삼마의 아들 요나단이 저를 죽이니라 이 네 사람 가드의 장대한 자의 소생이 다윗의 손과 그 신복의 손에 다 죽었더라(사무엘하 21:15-22)
<설교>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알려면 옛날에 어떻게 일하셨는가를 보면 됩니다. 그것을 지금 우리는 이스라엘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다면 그분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기에 우리는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사건들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게 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일하신 하나님을 보지 않게 되면 결국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 기대를 걸게 되고 그것을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인간성을 오늘 본문에서 또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블레셋 사람이 다시 이스라엘을 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블레셋의 공격으로 인해 다윗이 그 신복들과 함께 내려가서 블레셋 사람과 전투를 하지만 그때 다윗은 이미 나이들어 노쇠한지라 쉽게 피곤한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다윗이 피곤한 틈을 타서 블레셋 사람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자 아비새가 그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다윗을 구합니다. 다윗이 이처럼 노쇠함으로써 전쟁을 수행할 힘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안 다윗의 종자들은 “왕은 다시 우리와 함께 전장에 나가지 마옵소서 이스라엘의 등불이 꺼지지 말게 하옵소서”(17절)라고 말하면서 다윗이 전쟁에 나가는 것을 만류합니다.
다윗을 이스라엘의 등불이라고까지 일컬으면서 다윗이 전쟁에 나가 위험에 처해질 것을 두려워하여 만류하는 이들의 심정을 이해하시겠습니까? 이들이 다윗을 만류하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다윗 왕 당신이 아니면 안됩니다’라는 것입니다. ‘당신이 있어야 우리 이스라엘이 존속될 수 있으니까 전쟁에 나가지 말고 옥체를 보존하소서’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존속되어 온 힘의 근거를 다윗에게 두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 왕이 이스라엘을 이만큼 지켜왔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다윗이 죽는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의 존속 자체에 큰 위기가 된다고 여기고 다윗을 지키기 위해 전쟁에 나가는 것을 만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두고 여러분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불신앙이라는 답을 내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러한 답을 여러분 자신에게 내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왜냐하면 다윗을 등불이라고 일컫는 이스라엘이야 말로 오늘 우리들의 믿음 없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존재할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끌어 오셨고 지키셨기 때문에 강대국들과의 수많은 전투에서도 승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 전면에는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사람, 즉 다윗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죽고 살고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만으로 이스라엘은 안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든 것을 다윗의 위대함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윗이 잘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우셨고 보존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비록 다윗이 늙었다 할지라도 다윗은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기 때문에 다윗이 살아있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힘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 역시도 하나님 앞에 죄인일 뿐입니다. 즉 다윗이 잘한게 있어서 하나님이 다윗을 봐서 이스라엘을 도우신 것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다윗과의 언약이었습니다. 다윗과의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해 다윗을 도우신 것이었고 이스라엘을 도우신 것이었지 다윗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다윗을 바라봅니다. 마치 우리가 인간을 바라보면서 인간에게 기대를 걸고 살아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무시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인간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인간에게 기대를 걸고 희망을 두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저 분이 있어야 된다’는 식의 생각이야 말로 다윗 때문에 이스라엘이 존속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처럼 교회가 유지되고 존속되는 것도 어느 특정한 사람의 힘으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기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지 않는 불신앙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창조 후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는 근거가 하나님께 있다면 세상에 속해 있는 여러분이 존재하고 있는 근거 또한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살게 하셨고 하나님이 은석교회를 세우시고 지금까지 유지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뜻으로 세상에 온 것도 아니고 우리의 힘으로 살아온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세상에 오게 된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우리를 살려 놓으신 것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려 놓으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지금의 환경과 형편에 있게 하신 것이지 어느 인간의 도움이나 세상의 도움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게 하시는 분은 생각하지 않고 ‘나는 살아야 한다’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의 생존에 힘이 되고 도움이 되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을 의지하게 되고 그것이 없으면 자신의 생존이 흔들릴 것이라고 여겨 염려와 걱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하나님은 살아계신다’고 말만 할뿐 살아계신 분으로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불신앙 가운데 있으면서도 자신의 불신앙을 보지를 않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지금의 기독교입니다. 인간을 하나님의 대리자로 내세워 인간을 바라보고 인간에게 모든 기대를 걸고 살아갑니다.
요즘 순복음 교회가 조용기 목사 은퇴를 반대하는 서명을 한다고 야단입니다. 조용기 목사가 없으면 기독교의 사역에 큰 지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조용기 목사가 은퇴하면 순복음 교회 자체가 흔들리고 무너질 것이라는 위기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이스라엘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그들은 조용기라는 한 인간을 순복음 교회를 이끌어 온 힘의 근원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22절을 보면 “이 네 사람 가드의 장대한 자의 소생이 다윗의 손과 그 신복의 손에 다 죽었더라”는 말을 합니다. 다윗이 가드 사람 골리앗을 죽인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일이 다윗의 위대함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이 22절의 구절로 증명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골리앗처럼 장대한 사람들을 다윗이 아닌 다른 신하들이 모두 죽였기 때문입니다. 18절을 보면 십브개란 사람이 장대한 자의 아들 중 삽을 죽였고, 19절에서는 엘하난이란 사람이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였는데 그도 역시 골리앗처럼 장대하여 창자루가 베틀채 같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20절에서는 열 두 손가락과 열 두 발가락을 가진 장대한 자의 소생을 다윗의 형 삼마의 아들 요나단이 죽였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얘기를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골리앗과 같은 장대한 자들을 죽인 사람들의 믿음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유명하지도 않은 사람들이고 장대한 자들을 상대할 만한 용사라고 언급하지도 않습니다. 즉 어린 소년의 몸으로 골리앗을 이긴 것과 다를 바 없는 전투였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힘의 싸움이 아니고 인간의 승리가 아니란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것이 다윗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인 것처럼 이스라엘의 전투는 하나님이 싸우시는 하나님의 승리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이처럼 하나님의 승리로 인해 존재해 온 것이지 다윗이나 어떤 특정한 인간 덕분이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으신다면, 지금 여러분이 존재하고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돈이 여러분을 살게 한 것도 아니고 어떤 사람의 도움 때문도 아니란 것입니다.
물론 생존에 필요한 것은 돈이 있어야 구입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이 살아오면서 타인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돈이 내 수중에 있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나를 도우시기 위해 누군가를 나에게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에서는 온통 사람이 한 일만 언급합니다. ‘누가 어떤 일을 했다’고 하면서 그 사람의 업적을 칭송할 뿐, 그 사람을 세워서 세상을 다스리고 도우시는 하나님은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자는 세상이 볼 수 없는 분을 보는 자로 살아가는 사람이고 세상이 믿지 않는 분을 믿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자신들의 힘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지만 신자는 하나님의 힘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신자다움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보이는 것을 의지하고 살아가기에 보이는 것이 없을 때 낙심하게 되고 염려에 빠지게 되지만, 신자가 의지하는 것은 보이는 세상의 것도 사람도 아니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시기에 보이는 것이 없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염려에 빠질 자가 아닌 것입니다. 우린 지금껏 하나님의 손을 벗어나 살아온 적이 없습니다. 사람의 도움을 받았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도 실상은 배후에서 하나님이 일하신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의지할 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편안히 살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지만, 설사 힘들게 된다고 해도 역시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이스라엘의 등불은 다윗이 아니라 언약의 성취로 오실 다윗의 자손이었습니다. 언약이 그들을 살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등불은 돈도 사람도 아니라 우리를 멸망에서 건지시는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이 지금도 살아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지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며 모이는 것입니다. 주만 바라보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힘이고 위로입니다.
(77강) 사무엘하 22:1-8 다윗의 노래
<본문>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이에 땅이 진동하고 떨며 하늘 기초가 요동하고 흔들렸으니 그의 진노를 인함이로다(사무엘하 22:1-8)
<설교>
22장은 1절의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여호와의 구원을 체험한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자’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높은 망대’ ‘나의 피란처’ ‘나의 구원자’로 노래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노래하는 이 표현들은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즐겨 사용하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 되어주기를 기대하면서 ‘나의 반석’이라고 외치고 나를 고통과 위험에서 건져 주기를 기대하면서 ‘나를 건지시는 자’라고 외칩니다. 다른 표현들도 모두 하나님이 나에게 그런 분이 되어주기를 기대하며 외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도와주시고, 위험에서 건져주시고, 힘이 되어주시기를 기대하면서 그러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자로서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3절의 마지막에 보면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라고 말하고, 1절에서도 하나님이 구원하신 그 날에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말하고 있음을 볼 때 다윗의 노래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경험한 자의 노래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노래는 다윗처럼 하나님을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의 하나님’ 등으로 표현한다고 해서 다윗과 같은 노래가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을 노래하는 찬양은 하나님께로부터 베풀어지는 구원을 경험한 자들만이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이 어떤 것인가를 아는 것이고, 여러분이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 아래 있음을 깊이 자각할 때 다윗과 같은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4절의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라는 내용을 보면 구원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구원하실 하나님으로 찬송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실 것을 기대하고 노래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4절의 내용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다윗이 자신의 남은 모든 일생이 하나님의 구원 아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구원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날마다 계속되어지는 것임을 의미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노래가 우리의 노래가 되기 위해서는 다윗이 경험한 구원이 우리에게도 동일한 경험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는 ‘구원’을 말할 때 ‘천국’을 연상하게 됩니다. 장차 천국에 가게 되는 것을 구원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계시는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구원인 것은 사실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이미 그 나라의 백성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것 역시 구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구원을 장차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만 생각하면서 마치 지금은 아직 구원 되지 못한 상태에서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도 다윗이 경험한 구원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는 때는 죽은 후에 천국을 경험하고 부르는 노래가 아닙니다. 1절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모든 대적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즉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은 다윗의 대적과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다윗을 죽이고자 했던 대적, 그리고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것이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의 모든 대적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것을 경험한다면 다윗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아마 조금은 이해하기 힘들어 질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자신을 생각할 때 나를 죽이고자 하는 대적도 사울과 같은 존재도 없다고 여겨진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전에도 누누이 말씀드린 것처럼 여러분께 대적이 없다고 여겨진다면, 또한 여러분을 대적하는 사울과 같은 존재가 누구인지 아리송하다면 여러분은 지금껏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마땅히 있어야 할 신앙의 전투가 없이 살아왔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의 전투가 없이 살아왔다면 그것은 하나님 편에 서서 살아오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대적이란 하나님 편에 서 있을 때 그 실체를 알 수 있게 되는데, 항상 내 편에 서서 날 위한 삶에 몰두 했기에 대적이 누구인지 조차 알지 못한 상태에서 단지 입술로만 하나님을 부르는 무늬만 신자인 삶에 머물렀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의 대적, 사울이 우리에게 밝혀주는 대적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먼저 다윗의 대적들을 보면 반역을 한 압살롬이나, 세바, 다윗을 저주한 시므이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표적으로 사울이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고자 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다윗을 백성들이 ‘다윗은 만만이요 사울은 천천이라’고 칭송하는 것에서 비롯되지 않았습니까? 백성들이 사울 자신보다 다윗을 더 칭송하는 것에서 사울은 위태로움을 느꼈던 것이고 다윗을 시기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제거함으로써 왕의 자리를 보존하고 다윗에 의해 상대적으로 추락하는 것 같은 자신의 위상을 지키고자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울의 이러한 모습에서 누구를 볼 수 있습니까? 바로 여러분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사울의 입장이 되면 사울과 같은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지 않습니까? 다윗을 향한 사울의 미움이 우리들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고, 사울의 시기 역시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것 역시 우리도 사울의 자리에 있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또한 다윗을 반역했던 압살롬은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압살롬 역시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세바나 시므이 이들 모두 역시 내 속에 있는 나의 실체가 나와서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론은 우리에게 있어서 대적이란 외부에서 나를 괴롭히는 어떤 존재를 의미하기보다는 내 속에 존재하며 나를 붙들어 사울의 길로, 압살롬의 길로, 다윗을 대적했던 자들의 길을 가게 하는 세력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은 무엇이겠습니까? 나를 붙들고 있는 악한 세력에 의해 끌려가고 있는 나를 구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구원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다윗의 구원의 경험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나를 나의 대적의 손으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을 노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라면 이러한 구원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마 1:21).
죄에서 구원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죄를 짓지 않는 자로 만드신다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신자는 모두 죄를 짓지 않는 자로 변해야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분명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예수님의 구원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 경험이 있느냐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막연하게 천국 가는 것만 생각하고 살았기에 대적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신앙 아닌 신앙에 머물러 살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세상의 죄는 살인, 강도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이 죄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죄로 인해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사람의 악함을 아시기에 다시는 사람으로 인해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창 8:21).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악함을 정결한 제물의 희생의 피로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누구든 희생의 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자신의 악함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언약으로 세우신 희생 제물의 피도 멸시합니다. 이것이 세상이 심판 받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의 희생을 멸시하는 것이야 말로 심판의 이유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세상의 죄는 세상이 자신의 악함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내셔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악함을 깨닫게 하시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사울과 압살롬처럼 다윗의 대적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나의 악함을 보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악함을 보게 되면 내 스스로의 힘으로 대적을 상대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내 속에 있는 시기와 미움, 권력을 추구하고 날 위해 살아가는 나의 본질을 내가 상대하여 제거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자’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높은 망대’ ‘나의 피란처’ ‘나의 구원자’로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구원의 경험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내 속에 있는 대적을 발견할 때마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는 노래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한번이 아니라 날마다 계속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5-7)는 노래를 들어보십시오. 이 노래가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돈 벌어서 자식 키우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닙니다. 그러한 현실은 하나님의 책임 아래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하늘의 참새까지도 하나님이 살게 하신 것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이라는 것은 우리의 노력과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의지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서 진정한 현실은,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른 것입니다. 과연 이런 현실은 보고 사십니까? 아니면 돈이 필요한 현실,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는 현실만 보이십니까?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진정한 현실은 대적이 나를 에워싸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내 힘과 내 열심과 나의 의지로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만약 내 의지로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세력의 강함과 현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날마다 구원이 필요한 자일 수밖에 없고, 때문에 날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악함을 알고, 나의 악함을 스스로 어찌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알기에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도 나를 구원하신 구원자에게 오늘도 구원해주기를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열심을 강조하고 인간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현실이 어떠한지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즉 소경이기에 바리새인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신앙을 지키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대적의 실체에 대해 무지하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반석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신의 반석으로 존재하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기특한 나를 도와주는 분으로만 여길 뿐입니다.
여러분 안에 존재하는 대적의 실체를 발견하시고, 그 대적을 대적할 수 없는 여러분의 연약함을 깊이 절감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자’ ‘나의 하나님’ ‘나의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높은 망대’ ‘나의 피란처’ ‘나의 구원자’라는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신자가 부르는 찬양입니다.
(78강) 사무엘하 22:21-28 상 주시는 하나님
<본문>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하여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 모든 규례를 내 앞에 두고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내가 또 그 앞에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그 목전에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이다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사무엘하 22: 21-28)
<설교>
21절에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으니”라고 노래하면서 여호와를 자신의 의를 따라 상을 주시는 분으로, 그리고 자신의 깨끗함에 대해 갚아 주시는 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노래한 것처럼 하나님은 상 주시는 분이고 갚아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의와 우리의 행위를 보시고 상을 주시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분명 다윗도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좇아 갚으셨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라며 수긍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22-25절에서도 “이는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하여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며 그 모든 규례를 내 앞에 두고 그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내가 또 그 앞에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그 목전에 내 깨끗한대로 내게 갚으셨도다”라는 말을 하면서 자신의 의와 깨끗함을 말하고 있기에 하나님은 분명 다윗의 의와 깨끗함을 보시고 상을 주신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다윗은 분명 자신의 여호와의 도를 지켰다고 말하고, 죄를 피하였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의로운 자로 깨끗한 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행위를 놓고 볼 때 다윗이 과연 자신을 이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까? 다윗이 자신을 의롭다, 깨끗하다, 죄를 피하였다고 말할 자격이 있습니까?
우리는 다윗의 범죄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밧세바를 범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죽인 자입니다. 그런 다윗이 어떻게 자신을 두고 의롭다느니 깨끗하다느니 죄를 피하였다느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다윗이 얼굴이 두꺼운 뻔뻔한 사람이어서 그렇습니까? 아니면, 다윗이 범죄 하기 전에 이러한 노래를 불렀기 때문입니까? 그렇다면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이기 전에는 의롭고 깨끗하고 죄를 피하는 완전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인간의 범죄는 돌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런 악의 요소도 없는 상태에서 어떤 상황에 의해 죄가 외부로부터 투입되어 범죄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범죄의 행위가 없을 때는 의롭다가 죄가 들어오면 비로소 범죄하게 된다는 논리가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은 없습니다. 다윗의 범죄는 다윗에게 있던 악의 요소, 즉 죄의 본질이 주어진 상황과 형편에 의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범죄하기 전에는 죄인이 아니었다가 범죄한 후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죄인으로 태어난 인간에게서 죄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나는 저 사람처럼 범죄를 행하지 않았으니까 죄가 없다’는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의 행위는 없을지 몰라도 죄는 그 속에 담아두고 사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범죄의 행위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죄인인 것이고, 또한 다윗의 노래는 다윗이 범죄하기 전에 부른 노래가 아닌 것입니다. 즉 다윗은 분명히 범죄한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를 말하고 깨끗함을 말하고 스스로 지켜 죄를 피하였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자신의 악을 돌아볼 줄 모르는 뻔뻔한 사람이 아니라면 다윗의 이러한 노래는 분명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다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의,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깨끗함,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상,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악에 대해 다윗이 노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다윗이 하나님을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의 하나님, 나의 피란처’등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표현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모든 삶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아간 사람입니다. 누구에게 들어서 머리에 담아둔 지식이 아니라 실제 대적과 원수가 다윗을 괴롭히고 또한 자신의 범죄함으로 인해 애통하게 되는 그 모든 삶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다윗은 바로 그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를 출입하면서 들었던 지식과 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구축된 신에 대한 상식을 가지고는 다윗의 노래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다윗의 노래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려주는 것이 되고, 따라서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수정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상 주신다고 할 때 대개 사람들은 자신이 잘한 일을 떠올리게 됩니다. 즉 자기 의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에 대한 일반인의 개념은 잘한 일에 대한 칭찬과 보상이고 못한 자와의 구별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상은 잘한 것에 대한 칭찬이고 보상입니다. 그렇다면 상을 언급할 때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잘한 일이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잘한 일이 있었습니까? 여러분은 잘한 일이 있습니까? 다윗이 의를 말하지만 과연 의를 말할 자격이 있습니까?
다윗이 의를 말할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내 의’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의를 자신의 행위에서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이해한 의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의롭다고 여기시는 그 의는 무엇일까요?
다윗이 범죄 했을 때, 그가 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며 긍휼과 자비였습니다. 시 51:1절의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라는 내용을 보면 다윗은 자신의 범죄에서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과 자비를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범죄한 자로서 모든 희망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과 자비에 있음을 내다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었다면, 긍휼과 자비로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이 아니었다면 죄 있는 모든 자는 멸망을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가 다스리는 세상이기에 의에 대해서도, 악에 대해서도, 심판에 대해서도 사랑을 기준으로 하여 새롭게 정립되어야 합니다. 롬 3:28절을 보면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처럼 그 누구도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을 사람이 없습니다. 의롭다 여김 받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되어 지는데, 그 믿음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랑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의는, 자신의 범죄에서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자신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줄 사랑을 바라보고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두고 다윗은 ‘내 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말하는 깨끗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 만약 자신의 행위를 바라본다면 감히 자신을 깨끗하다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다윗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이 같습니다. 누가 누구를 바라보면서 ‘내가 너보다 더 깨끗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살인강도 앞에서도 ‘나와 너는 똑같다’라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시 51:7절의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는 말을 보면 다윗은 다윗의 모든 죄를 씻어주시는 긍휼과 자비 안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즉 다윗이 말하는 깨끗함은 우리의 모든 악을 용서하시고 더러움을 모두 씻어주신 사랑과, 긍휼과 자비 안에서 있는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즉 앞서 말한 것처럼 행위가 아니란 것입니다.
22절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도를 지키고 악을 행하여 내 하나님을 떠나지 아니하였다”는 내용 역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기준으로 하여 이해를 하면 됩니다. 여호와의 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 여호와의 도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고 긍휼과 자비하심에 감사하는 것이야 말로 여호와의 도를 지키며 도를 따라 사는 것이고, 악을 행하는 것은 결국 사랑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앞에서 자신의 의와 행위를 나열하고 그것을 의로 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랑,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것으로 모든 것이 완전하고 또한 예수님의 정결하심과 의로우심 안에서 깨끗하다, 의롭다는 선언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상은 무엇입니까? 예수 안에서 깨끗함을 얻고 의롭다 여김 받음으로 의로운 자로 살아가는 신자에게 주어지는 상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예수 안에서 어떤 상을 받기를 원합니까? 25절을 보면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대로, 그 목전에 내 깨끗한대로 내게 갚으셨도다”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갚으신 것이 있는데 무엇으로 갚으셨을까요?
26-27절을 보겠습니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이다” 자비한 자에게 다른 상으로 갚으시는 것이 아니라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심으로 갚으시는 것입니다.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함으로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으로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과 긍휼로 살아가는 신자에게는 자비하심과 완전함과 깨끗함의 나라인 주의 나라로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대신 사특한 자에게는 거스리심을 보이시겠다고 함을 잊으면 안됩니다. 즉 사랑과 긍휼과 자비를 외면한 자에게는 긍휼과 사랑과 자비가 없는 하나님으로 대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심판을 뜻하는 말인 것입니다. 약 2:13절의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는 말과 뜻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에게 주어지는 상은 주께서 우리를 자비하심으로 대하시고 주의 완전함과 깨끗함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에게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이며 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의 악함에서 멸망의 존재에 불과한 자신의 실상을 본다면 이 상의 의미를 능히 알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아래서 인간은 자신의 그 어떤 것도 내놓을 수 없게 됩니다. 사랑으로 구원 받았음을 아는 신자가 사랑을 멸시하는 것에 불과한 자기 의를 내놓으려고 하겠습니까? 사랑을 알게 되고 사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게 된 모든 것도 하나님의 능력이고 사랑임을 알고 있는 신자가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고백하는 관계 안에서는 못난 자와 잘난 자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누구라 할지라도 자신의 잘남을 부각하고, 자신을 누군가와 비교하면서 ‘누가 더 낫다’라는 판단을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 있는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우리의 의는 쓰레기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불쌍하고 초라하고 쓸모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이러한 나를 알고 나니 하나님의 사랑이, 긍휼과 자비가 더욱 크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로운 것이고 깨끗한 것이고 도를 지키는 것이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79강) 사무엘하 22:29-35 주는 나의 등불
<본문>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에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넘나이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바위뇨 하나님은 나의 견고한 요새시며 나를 온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며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활을 당기도다(사무엘하 22:29-35)
<설교>
여러분은 이 세상이 마음에 드십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혹시 세상의 일들이 여러분께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아니면 세상을 사는 것이 힘들고 어려워서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어쨌든 무슨 이유로든 지금의 세상이 마음에 쏙 든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이 세상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과는 다른 이유겠지만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곳이 아닙니다. 지금의 세상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기뻐하셨던 그때의 세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시며 기뻐하셨던 것은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존재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의해 창조된 모습 그대로였기에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사단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말씀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욕망에 의해 살아가는 인간으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을 책임지는 인간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세상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에 들지 않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조치는 무엇이겠습니까? 깨뜨려 버리시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일은 심판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판하시겠다는 세상 속에서 잘 살아야 하고, 성공해야 한다는 것만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 자체를 무시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심판의 때가 되어 세상이 끝장난다면 세상의 모든 것은 사라지게 됩니다. 심판 앞에서는 교회 부흥도 의미가 없습니다. 부자라는 것도 의미가 없고 세상이 우러러 보는 성공이라는 것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살고 성공하는 것에 목메어 살아간다면 그것은 결국 심판 자체를 무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을 안다고 해서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심판이라는 환경에 있는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신자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9절을 보면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흑암을 밝히시리이다”고 말합니다. 등불은 어둠에 있는 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이 ‘주는 나의 등불’ 이라고 노래하는 것은 자신이 어둠에 있음을 아는 자만이 할 수 있는 노래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나의 흑암을 밝히시리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흑암에 있는 자신의 실상을 알기에 흑암에서 건져 주실 여호와를 등불로 노래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자신이 흑암에 있음을 보지 못한 자가 여호와를 ‘나의 등불’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지 말치장에 불과할 뿐입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빛’ ‘나의 등불’이라고 쉽게 말하지만 다윗처럼 흑암에 있는 자기 실상은 전혀 알지 못한 채 말하는 것이라면 다만 그럴듯한 말치장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세상의 끝은 심판입니다. 심판은 영원한 어둠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세상의 현실은 흑암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흑암에 저와 여러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실제 어둠에 갇혀 있다고 할 때 무엇을 가장 먼저 구하겠습니까? 어둠을 밝혀줄 빛을 찾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상태가 흑암이라는 것을 깨달은 자라면 흑암에서 건져줄 분을 보게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 분을 나의 빛으로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어려운 처지를 흑암, 어두움으로 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빛’으로 일컫는 것도 어려운 처지에 빠진 자신을 건져주는 분으로써 ‘빛’이라고 일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못된 신앙의 길을 가는 큰 오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그 속에 담아 두고 사는 것은 신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심판과 상관없이 바른 신앙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심판과 상관없는 예수는 이미 예수가 아닙니다. 심판이 없는 하나님 역시 다른 신에 불과할 뿐입니다. 설사 세상의 끝이 심판임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 심판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음을 보지 않는다면 역시 그 신앙은 말씀의 도를 따라 흘러가는 신앙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인데, 이것은 어둠에 있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활동은 어둠에 있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것인데, 정작 신자라고 이름 하는 사람들이 어둠에 있는 자신을 보지 않은 채 예수를 말한다면 그 예수는 결국 어둠에 있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이 아닌 다른 예수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의 땅에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십자가를 근거한 새 생명의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안다면 흑암에 있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흑암에서 건져줄 예수님을 ‘나의 등불’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심판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심판에서 건짐 받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자신의 형편과 처지에서 건짐 받고 좀 더 편안하고 잘사는 인생을 꿈꾸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31절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의 도를 왜 완전하다고 말합니까? 여호와의 말씀을 왜 정미하다고 말합니까? 조직신학에서는 성경의 무오설을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오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보는 성경에는 번역이 잘못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보는 성경은 무오한 것입니까? 무오하지 않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도가 완전하다는 말이나, 여호와의 말씀이 정미하다는, 즉 정교하고 세밀하다는 말을 우리가 보는 성경의 내용이 오류가 없이 완전하다는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에 번역이 잘못된 성경도 무오하다고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무오하다는 것은, 성경의 글자가 오류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도 결국 정경으로 인정한 사본을 여러나라 말로 번역한 것이기에 번역상 잘못된 부분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완전하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무오성은 글자에 오류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씀에 계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오류가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는 우리를 생명으로 이끌어 갑니다. 흑암에 있는 우리로 하여금 자신의 실상을 보게 하고 빛으로 오신 분으로 바라보고 의지하도록 이끌어 가는 하나님의 도는 그래서 한치의 오류도 없이 완전합니다. 자기 백성을 흑암에서 구원 하는데 있어서 부족함이 없이 세밀합니다.
그런데 심판을 생각하지 않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도는 귀찮기만 할 뿐입니다. 무엇을 두고 하나님의 도를 완전하다고 하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없게 됩니다. 모든 관심을 자신에게 두고 있기에, 그리고 새 생명의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흑암의 세계를 바라보고만 있기에 하나님의 도는 관심 밖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다윗의 노래와는 상관없는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피한다는 말을 하지만, 과연 누가 여호와를 피난처로 바라보겠습니까? 세상에 드리워진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무시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말하는 피난처는 현재의 어려움에서 벗어나 피할 곳으로 이해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심판 아래 존재하는 실상을 안다면 여호와는 영원한 생명을 공급받을 수 있는 분으로서의 피난처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서 신앙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하나님이 아니란 것입니다.
신자란 심판을 기다리는 마지막 때의 남은 자입니다. 이러한 신자가 이 시대에 보냄 받은 선지자로서 세상에 죄를 선포하고 그리스도의 용서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가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바위뇨 하나님은 나의 견고한 요새시며 나를 온전한 곳으로 인도하시며 나의 발로 암사슴 발 같게 하시며 나를 나의 높은 곳에 세우시며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활을 당기도다”(32-35절)라는 노래를 당당히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심판의 자리에 섰을 때 비로소 하나님이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만이 왜 나의 요새시고 바위이신지 깨닫게 됩니다. 심판에서 나의 방패가 될 존재는 세상에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자리에 서 보십시오. 우리의 실체는 흑암아래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 흑암 아래 있는 자신을 바라보시고, 과연 ‘구원이 어디에 있는가?’ 돌아보십시오. 땅의 것을 과연 힘이라고 할 수 있는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를 세상에서 잘되는 쪽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과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며 또한 그것을 복으로 일컬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신자는 심판을 생각하고 심판의 날을 기다려야 합니다. 두려워하며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날이 마지막 때에 남은 자에게는 승리의 날이고 무엇이 옳은 것이었는가가 확실히 드러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노래하는 그분 하나님만이 참되신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이 흑암 아래 있는 자신을 바라보며 주를 나의 등불이라고 노래하는 것처럼 흑암 아래 있는 자신을 바라본다면 다윗의 등불이었던 분이 곧 오늘 우리의 등불이 되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분의 인도하심 안에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로 굳게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우리를 온전케 하기 위함이지 절대 세상에서 편한 삶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어리석은 우리의 소원에 의해 행동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의해서 행동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러한 인도하심으로 인해 꺾여지고 무너지고 낮아지면서 마지막 때 생명의 나라의 남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굳게 믿으며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80강) 사무엘하 22:44-51 다윗과 그리스도
<본문>
주께서 또 나를 내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나를 보존하사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이방인들이 내게 굴복함이여 저희가 내 풍성을 듣고 곧 순복하리로다 이방인들이 쇠미하여 그 견고한 곳에서 떨며 나오리로다 여호와는 생존하시니 나의 바위를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바위이신 하나님을 높일지로다 이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보수하시고 민족들로 내게 복종케 하시며 나를 원수들에게서 나오게 하시며 나를 대적하는 자 위에 나를 드시고 나를 강포한 자에게서 건지시는도다 이러므로 여호와여 내가 열방 중에서 주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리이다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하였더라(사무엘하 22:44-51)
<설교>
어느 사람이든 자기 미래에 대해 궁금증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세상의 미래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어느덧 2005년 한 해도 두 주간 밖에 남지 않았는데 해마다 새로운 해가 가까워지면 토정비결을 보는 곳이 바빠지는 것도 미래를 알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마음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왜 이처럼 미래를 알고 싶어 할까요? 그것은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에 의한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면 미래에서라도 지금보다 좀 더 나아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미래를 미리 내다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세상의 누가 인생의 앞날에 대해 미리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인생의 앞날은 운수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인데, 누가 과연 하나님의 일하심을 미리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미래를 알고 싶어 하지만 알 수 없고 불확실하다고 느껴질 때 사람은 자연 자신의 미래를 위해 기도라는 것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미래를 두고 기도하는 것 역시 불확실한 미래가 자기를 중심으로 펼쳐지기를 꿈꾸는 욕망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간섭하시는 것이라면, 미래 즉 인생의 앞날을 알고자 하는 것은 불신앙의 산물일 수밖에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앞날에 대해 알 필요가 없고, 알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시는 인생이라는 것은 자기 인생에 대해 염려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자기 백성을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 가시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 가시는 인생이기에 분명 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생이 참된 미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은 내 인생이 멸망으로 끝나느냐 영생으로 계속되느냐에 대한 관심보다는 내일의 경제 문제나, 주식 동향에 더 관심을 가집니다. 내일은 사는 것이 좀 더 나아질 것인가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생의 앞날에 대한 관심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는 미래를 위해 기도하기보다는 과거를 되돌아보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이미 지난날을 돌아보며 무엇을 기도하란 말인가?’ 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 현재가 과거가 없이 갑자기 주어진 것이 아니기에, 즉 하나님께서 지난 인생을 이끌어 주셨기에 지금 현재에 이른 것이기에 때문에 현재를 바라보며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에 감사하지 않고 만족하지 않는다면 과거를 두고 기도하지도 감사하지도 않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미래만을 생각하며 미래를 위해 기도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래는 지금보다 좀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이끌고 계시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인생에 순종하고자 하는 의도는 전혀 없이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의 의도에 따라주기를 고집하는 것일 뿐입니다. 결국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중심적으로 흘러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흘러갑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즉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흘러가는 세상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내가 원하는 다른 현실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세계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을 소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는 신자는 자신이 잘되고 못되는 것으로 기뻐하고 우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울고, 기뻐하는 세상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세계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자기가 중심된 미래를 꿈꾸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미래를 소망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노래에서 바로 그러한 믿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44-45절에서 “주께서 또 나를 내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나를 보존하사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으니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 이방인들이 내게 굴복함이여 저희가 내 풍성을 듣고 곧 순복하리로다”고 노래합니다. 다윗의 노래는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는 것이지만 이 노래에서는 현재 주어진 구원을 감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미래에 주어질 구원을 미리 내다보며 감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44절에서 다윗이 ‘주께서 또 나를 내 백성의 다툼에서 건지시고 나를 보존하사 열방의 으뜸을 삼으셨으니’라고 말하는 것은, 아마 백성들이 자신을 반역한 일, 즉 압살롬이 반역한 때나 세바가 반역을 했을 때 백성들이 다윗에게 등을 돌리고 반역자의 편을 들었던 일을 두고 하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구원에 대한 다윗의 노래는 하나님이 이미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한 감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라는 말을 보면 다윗언약 안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원을 미리 내다보는 노래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란 이방인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이방인이 하나님이 열방의 으뜸으로 삼으신 다윗에게 나아와 다윗에게 굴복하고 다윗을 섬긴다는 뜻인데 이것은 다윗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바라보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일을 미리 내다보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언약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다윗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중심으로 흘러가는 세상이었습니다. 언약에 의해서 세상이 어떻게 되어질 것인가를 미리 내다보며 그 구원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내다보는 세상은 언약의 성취가 함께 한 세상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메시야가 세상에 오심으로 주어질 구원을 노래한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알지 못하는 백성이 나를 섬기리이다’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하여 왕으로 세우신 다윗에게 순종치 않고 오히려 자신들의 유익을 앞세워 배척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그런 이스라엘에게서 건지시고 열방의 으뜸으로 삼으십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다윗에게 나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이 다윗 앞에 나아와 다윗에게 굴복하고 섬기게 하는 것입니다. 즉 구원이 이스라엘에게서 이방인에게로 옮겨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누구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겠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즉 다윗의 노래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을 바라보는 자의 노래인 것입니다. 자신의 구원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성취되어질 구원을 바라보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사 55:4-5절을 보면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거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를 삼았었나니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 달려올 것은 나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는 말을 하는데, 이사야 선지자의 이 말과 다윗의 노래가 같은 맥락의 내용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이사야나 다윗이 모두가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성취될 메시야 구원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45절의 내용으로 더욱 분명해집니다. ‘풍성’이란 소문을 뜻하는 말인데, 곧 이방인들이 하나님이 세우신 메시아의 소문을 듣고 나아와 순복한다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구원의 노래는 다윗 개인을 바라보고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로 인한 구원을 바라보는 노래인 것입니다. 즉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메시아로 인한 구원을 바라보기에 47절에서 “여호와는 생존하시니 나의 바위를 찬송하며 내 구원의 바위이신 하나님을 높일찌로다”라고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메시아를 보내심으로 성취될 구원을 내다보고 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성취될 구원이기에 하나님을 ‘내 구원의 바위’라고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다윗의 노래를 대하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여러분과 아주 다른 노래를 부른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가 내다보는 것은 기껏해야 세상에 생존할 동안에 주어질 나의 미래일 뿐인데, 다윗은 세상 안에서의 자신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되어질 일을 내다보며 구원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 노래는 우리에게는 이미 성취되었습니다. 다윗은 메시아의 구원을 내다보고 있고, 메시아가 오심으로 되어 질 일을 바라보고 노래하는 것이지만, 오늘 우리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되어 진 일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래 구원과 상관이 없는 이방인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섬기겠다며 이렇게 나온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다윗은 메시아의 구원을 바라보고 노래하지만, 오늘날 신자는 메시아로 성취된 구원을 기뻐하며 노래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구원을 내다보며 기뻐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그 왕에게 큰 구원을 주시며 기름 부음 받은 자에게 인자를 베푸심이여 영원토록 다윗과 그 후손에게로다 하였더라”(51절)는 노래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다윗과 그 후손이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즉 하나님의 큰 구원과 인자하심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자가 큰 구원에 참여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복을 누리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얘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생이야 말로 참되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이 인자하심이 함께 하는 인생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잊는 것이야 말로 스스로 망하는 길로 달려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신자는 그리스도안의 세계를 내다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안의 세계를 내다볼 때 눈에 보이는 현실이 결국은 헛된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절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그 미래가 아무리 잘되고 풍족하면 뭐합니까? 그리스도안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고 그 세계만이 영원하며 그리스도 밖의 세상은 사라지는 것이 현실이라면 세상에서 아무리 잘돼봐야 결국 헛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현실을 내다보며 살아가십니까? 아무리 예수님을 말한다고 해도 바라보는 현실이 그리스도안의 세계가 아니라 이 세상이라면 그는 믿음으로 사는 신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사라질 현실과 함께 어둠에 영원히 묻힐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가 잘된다는 것, 아무런 의미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내 인생이 잘된다는 것, 역시 아무런 의미 없습니다. 그리스도안의 세계는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기뻐하며 감사하는 세계이지 교회가 잘되고 내 인생이 잘되는 것으로 기뻐하는 세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다윗의 노래를 통해서 ‘나는 무엇을 내다보며 살아가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내다보며 무엇으로 기뻐하고 무엇으로 울며 살아가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신자가 바라봐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십니다.
(81강) 사무엘하 23:1-7 다윗의 소망
<본문>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올리운 자, 야곱의 하나님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도다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바위가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저는 돋는 해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그러나 사악한 자는 다 내어 버리울 가시나무 같으니 이는 손으로 잡을 수 없음이로다 그것들을 만지는 자는 철과 창자루를 가져야 하리니 그것들이 당장에 불사르이리로다 하니라(사무엘하 23:1-7)
<설교>
지난 시간에 메시아가 오심으로 이루어질 세상을 바라보며 노래하는 다윗에 대해 말씀을 드렸는데, 다윗의 이러한 노래는 항상 현실에 파묻혀 살아가는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금 상기하게 해주는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2주일 전 설교에서 눈에 보이는 현실이 참된 현실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신자란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으로 삼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즉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상,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세계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악한 세력이 다스리는 세상의 멸망을 선포하는 권세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그리스도의 오심은 다른 세상이 열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다스림을 벗어나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는 새로운 세계의 백성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에게 그리스도의 오심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으며, 애굽에서 종으로 살았던 이스라엘이 종에서 벗어난 출애굽이라는 기적의 사건이 그대로 재현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역시 다윗이 메시아의 세계를 소망하며 노래하는 내용인데 다윗의 이 노래는 세상에 취해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이루실 참된 나라가 우리의 전부라는 사실을 새롭게 상기시켜 줄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마지막 말은 대개 유언을 의미합니다. 그처럼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는 것도 다윗의 유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과연 세상을 떠날 때 마지막 말로 무엇을 남길까요? 사람마다 다들 다르겠지만 어쨌든 남은 자손들을 위해서, 그리고 재산정리를 위해서 뭔가 남기는 말이 대부분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의 마지막 말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마지막 말을 살피면서 신자가 과연 세상을 떠나면서도 놓지 말아야 하고 소망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확인해야 하는 것입니다. 5절을 보면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 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신 영원한 언약이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언약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분명 자신에게 세우신 영원한 언약을 이루실 것임을 확신하며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세우신 영원한 언약이라는 것은,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단순히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것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루어질 새로운 세상을 바라본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그리스도로 이루어질 세상을 소망하는 것을 마지막 말로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5절의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 같지 아니하냐”라는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말하는 내 집이라는 것은, 다윗의 가문을 의미하는 말이기는 하지만 단지 혈통적으로 이어지는 가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으로 이루어지는 가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것은, 다윗 가문은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가문이 되어짐을 뜻합니다. 혈통으로 지탱되는 가문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지탱이 되고 유지되는 새로운 가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언약을 영원한 언약이라고 말함으로써 한시적이지 않고 영원히 계속되는 언약임을 언급합니다. 따라서 영원한 언약의 성취로서 오신 그리스도이기에 그리스도가 함께한 다윗 가문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하다는 것을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 자신 역시 비록 죽음을 앞에 두고 있지만,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하다는 것을 소망하며 이 마지막 말을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마지막 말이라는 것은 죽음을 앞에 둔 자가 하는 유언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본문은 죽음을 앞에 둔 다윗이 남기는 유언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처럼 죽음을 앞둔 자리에서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루어질 영원한 집을 소망하는 말을 남긴다는 것은 오늘 우리가 무엇을 소망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보게 해주는 내용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히 11:13-16절을 보면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는 말을 하는데, 결국 믿음이 믿음의 조상들로 하여금 하늘의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사는 자가 되게 한 것처럼 오늘 우리들도 세상에서는 나그네로 증거되게 하며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자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소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설사 언약의 성취를 보지 못하고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언약을 이루실 것이고, 그때가 되면 자신들은 언약 안에서 영원할 것임을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것이 세상이 바라볼 때 정상적인 것입니까? 한마디로 상식을 완전히 벗어난 정신 나간 사람들의 광신으로 보여지기 밖에 더하겠습니까? 그런데 믿음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세상의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믿음의 세계인 것입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리는 세상에 비해, 죽어도 끝나지 않고 언젠가는 이루어질 영원한 세계를 소망하는 것, 이것이 믿음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에게 있어서 죽음이라는 것은 끝이 아니라 계속되는 기다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존해 있을 때 소망하고 기다렸던 것이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것입니다.
2절을 보면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는 말을 합니다. 즉 다윗은 자신의 마지막 말이 자기 말이 아니라 여호와의 신인 성령이 자신에게 임하심으로써 증거하는 성령의 말씀이라는 것을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이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을 세우사 이 말씀을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무엇이 영원한 세계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영원한 세계는 다윗에게 언약하신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그리스도가 함께하는 그 세계를 뜻합니다.
다윗은 이 언약의 세계를 소망했던 것이고,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루어진 그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다윗은 언약의 성취로 오실 그리스도의 세계를 소망했고, 오늘 우리는 언약이 성취되어짐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로서 다윗과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3-4절을 보면 다윗이 어떤 분을 소망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바위가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저는 돋는 해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다윗이 소망했던 메시아는 이런 분입니다. 공의로 사람을 다스리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메시아가 오시기를 소망했던 것이고, 그분이 다스리는 세계를 소망했던 것입니다. 그 분은 돋는 해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후의 햇빛으로 땅에서 싹이 나는 새 풀과 같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분이 오심으로써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빛을 비취고 평강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다윗이 오시기를 그토록 소망했던 그 분을 동일한 마음으로 소망하며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무엇을 소망하고 무엇을 바라보고 살아가는가를 다윗의 소망을 생각하며 살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윗이 오실 그리스도를 소망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오실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 즉 재림이라는 약속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가 오심으로써 이루어질 영원한 세계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사는 신자에게 보이는 세상은 참된 현실이 될 수가 없습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참된 현실은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되어질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세계가 따로 존재하며 그 세계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자이기 때문에 신자에게 보이는 세상은 단지 스쳐 지나가는 허상일 뿐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오심을 축하하는 성탄절이라고 하지만, 예수님의 오심이 왜 우리가 축하해야 할 일인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두고 누가 누구를 축하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에게 축하해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실 예수님에게는 축하받을 일이 아닙니다. 고난과 낮아짐과 비참함과 죽음이 전부인 세상의 삶인데 그게 무슨 축하받을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오심은 믿음의 사람들이 서로에게 축하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어둠과 그늘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 빛으로 오셨으니 우리에게는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고 사망에서 해방되는 은총의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기쁨이 여러분께 있습니까? ‘기쁘다’는 말 한마디로 끝날 일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소망하는 자로서 그리스도의 오심이 기쁘고 반가움이 된다면, 그리고 그 분이 다스리는 세계를 살아간다면 하루하루의 삶은 그리스도 때문에 기쁨과 즐거움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세계를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무시하고 조롱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에게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함께하는 세계야 말로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그리스도만을 소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자는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고 그리스도에게 모든 소망을 두게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중심이 되어 있는 신자는 비록 살면서 세상의 것들로 인해 흔들림은 있으나 말씀에 의해 중심을 되찾으며 살아갑니다. 말씀에 의해서 자신을 살피며 자신의 길을 점검하면서 진리의 길, 의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에 다스림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말씀을 안다는 것은 말씀으로 다스림을 받는 것을 뜻하고,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도 그리스도로 다스림을 받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행동이나 말, 생각 등을 말씀으로 살피면서 잘못됨을 발견하며 그리스도만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소망하고 믿는 자로서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세계를 살아가고 있다는 흔적인 것입니다.
(82강) 사무엘하 23:8-12 다윗의 용사들
<본문>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이 이러하니라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이라고도 하고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하는 자는 군장의 두목이라 저가 한때에 팔백 인을 쳐죽였더라 그 다음은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이니 다윗과 함께한 세 용사 중에 하나이라 블레셋 사람이 싸우려고 모이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러간지라 세 용사가 싸움을 돋우고 저가 나가서 손이 피곤하여 칼에 붙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치니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 백성들은 돌아와서 저의 뒤를 따라가며 노략할 뿐이었더라 그 다음은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라 블레셋 사람이 떼를 지어 녹두나무가 가득한 밭에 모이매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되 저는 그 밭 가운데 서서 막아 블레셋 사람을 친지라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사무엘하 23:8-12)
<설교>
교회는 세상일을 잠시 잊어버리고 마음에 안위를 찾기 위해서 오는 곳이 아닙니다. 어떤 목사는 ‘교회는 세상일에 지치고 힘든 사람들이 잠시라도 마음의 쉼을 얻고 돌아가도록 해줘야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 또 그것이 교회가 교회를 찾는 사람들에게 해줘야 하는 서비스라는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면 교회는 마음의 여유를 찾기 위한 여가활동의 일환으로 전락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마음에 안위를 찾기 위해 찾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과 한통속이 되어서 세상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실체를 속 깊이 파악하기 위해 찾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찾아 나왔어도 십자가의 피를 보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여러분은 교회를 찾은 것이 아니라 단지 여가활동으로서의 한 장소를 찾은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그 실체를 똑똑히 파헤쳐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은 천국에는 근처도 갈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볼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이 인간의 공로나 의로움과 전혀 상관이 없이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부어진 은총임을 부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교회에서 목사를 보려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가 어떤 사람이냐에 관심이 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선포되고 십자가의 피가 사람들을 영접하는 교회인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관심을 그리스도의 피에 둔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 자체가 그리스도의 피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관심두지 않는 일에 관심을 둔다는 것은 배고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힘도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관심을 두는 일에 나도 관심을 두면서 세상이 살아가듯 그렇게 세상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 그러한 잘못된 우리의 모습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돌아간다면 세상과 함께 어울려 살다가 세상이 멸망할 때 함께 망하는 길을 가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잠시 세상일을 잊어버리고 마음의 안위를 누리고자 하는 것은 마약을 찾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르크스가 종교를 아편이라고 말한 것도 종교가 현실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하고 더 나은 삶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얻게 해주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의 실체를 아는 것입니다. 세상이 사단에게 지배를 받으면서 하나님과 극렬히 대립되어 있는 가운데 존재하고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세상 속에서 구별되지 못하고 세상의 일부가 되어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고 있는 자신에게서 무엇이 하나님과 대립하는 것인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자신에게서 풍기는 더러운 악취를 맡을 수가 있는 것이고, 냄새 풍기는 모습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그리스도의 피가 자신의 더러운 모든 것을 덮으며 나를 영접하고 계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8절을 보면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이 이러하니라”는 말로 시작하면서 다윗의 옆에 있었던 세 용사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 말씀한 대로 23장은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이제 인생을 마치려는 시점에서 왜 다윗의 용사에 대해 소개하고 있는 것일까요? 다윗에게는 용사들이 있어서 그 용사들의 도움으로 다윗이 많은 이방인과 전투를 하면서 승리를 얻었고 이스라엘을 강한 나라로 이룩할 수가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일까요?
본문에서도 다윗의 용사들이 전투에 나가서 수많은 이방인들을 무찌르고 승리한 전공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분명 다윗이 용사들의 도움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더군다나 다윗의 용사들은 다윗이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마시고 싶다고 할 때 목숨을 걸고 적이 점령하고 있는 베들레헴까지 가서 물을 떠오기까지 합니다. 이는 용사들이 다윗에 대해 어떤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에게 있어서 용사들은 든든한 힘이 되었을 만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10절의 “저가 나가서 손이 피곤하여 칼에 붙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치니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 백성들은 돌아와서 저의 뒤를 따라가며 노략할 뿐이었더라”는 내용을 보면 다윗의 승리는 용사들 때문이 아니라 여호와로 인한 승리임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다’는 것이 바로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11-12절의 “그 다음은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라 블레셋 사람이 떼를 지어 녹두나무가 가득한 밭에 모이매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되 저는 그 밭 가운데 서서 막아 블레셋 사람을 친지라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는 내용을 봐도 구원은 용사들로 인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로 인한 것임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결국 다윗의 모든 승리는 다윗과 함께 하고 다윗을 돕고 다윗에게 충성했던 용사들로 인한 것이지만, 정작 용사들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즉 용사들로 인한 승리가 아니라 여호와로 인한 승리더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왜 다윗이 인생을 마치는 시점에서 언급을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인생의 마지막에 서서 자신이 승리한 날들을 돌아보니 용사들이 자신의 곁에 있어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승리였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실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승리에는 용사가 있었지만 용사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사로 인한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한 승리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인생이었고 오늘 우리의 인생이기도 합니다.
자, 그렇다면 다윗이 바라보고 의지할 존재는 과연 누구겠습니까? 용사입니까? 용사의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입니까? 당연히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가 2006년을 시작하는 주일에 다 아는 문제를 두고 깊이 생각해야하는 것은,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다’ ‘우리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안다고 하고 또 믿는다고 하지만 과연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시고 배후에서 일하신다는 이 믿음이 우리의 삶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껏 저로부터 ‘하나님이 살아계신다’ ‘하나님이 우리의 배후에서 일하신다’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다’는 말에 대해 수없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저의 말에 동조하거나 옳다고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시고 우리의 배후에서 일하시고 우리를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여러분의 삶에서 만나시고 느끼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승리하게 하심을 두고 감사하며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만나고 느끼지 못하는 하나님은 다만 추상적인 하나님에 불과할 뿐입니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살아계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느냐는 것은 삶을 통해서 증거 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여러분이 살펴야 하는 것은 ‘삶’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활에 살아계신다면 우리에게 벌어지는 일들, 우리에게 주어진 형편과 환경들은 하나님에 의해 되어진 것들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과연 그 믿음은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겠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셨다는 것을 믿으며 살아가십니까? 만약 그러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면 ‘내가 이렇게 하면 손해가 될까? 이익이 될까?’라는 계산을 하지 않게 됩니다. 다만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인가? 틀린 것인가?’만 헤아릴 뿐입니다. 이 일이 나에게 손해로 돌아오든 이익으로 돌아오든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을 여러분의 삶에서 실제 몸으로 체험하시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용사들이 있었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전쟁에서 다윗을 위해 나가 싸운 자들은 용사들입니다. 이런 경우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바라보고 의지하겠습니까?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우리의 어리석은 시각은 항상 용사들을 바라보게 합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셨다고 하지만 실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용사들입니다. 나에게도 용사를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같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도 전혀 부인하지 않는 것 같지만 실상 우리의 삶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의지하지도 하고 살아계심도 부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은 악취로 가득 차 있는데도 불구하고 냄새가 드러나는 것을 싫어한 채 교회를 찾는다면 과연 교회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얻고 무엇을 만나겠다는 것입니까?
교회에 나와서 한 시간 예배에 참석하고 설교를 들었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냄새나는 나의 실체를 들여다보면서, 그러한 우리를 받아주시고 영접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나를 교회로 인도하시는 이유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모여야 하는 이유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모임의 중요성을 알게 될 때 ‘바쁘다’는 것이 핑계거리로 등장할 수 없다는 것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기 인생에 도움이 되고 힘이 되는 것을 얻고자 합니다. 다윗의 용사와 같은 것이 내게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존재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제아무리 힘이 될 만한 것을 소유했다 할지라도 승리는 여호와로 말미암습니다. 이 믿음이 없기에 삶이 힘든 것이고, 힘든 것을 어떻게 주체하지 못해서 하나님을 찾으며 평안을 달라고 외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믿음 없는 것은 생각지 않으면서 말입니다.
여러분이 2005년 한 해를 살아온 것이 여러분이 소유한 것 때문이었다고 여기십니까? 우리가 소유한 것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든 것은 여호와로 말미암았기 때문입니다. 왜 삶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십니까? 그것은 엉뚱한 것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원하는 승리를 꿈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유하는 것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냄새나는 우리의 실체를 드러내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악하고 더러운 것을 용서하시고 깨끗이 씻어주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고 만나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피가 나를 영접하는 것을 보게 하십니다. 그것이 신자에게는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로 하여금 소유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고 만나게 하는 것으로 바라본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모든 삶에서 간섭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분명 느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 믿음이 세상에서 담대한 자로 살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여러분을 살리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기 위해 일하심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이 일은 2006년 한 해에도 변함없이 계속되어질 것입니다. 용사가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힘이라는 믿음으로 한 해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83강) 사무엘하 23:13-17 다윗의 경솔함
<본문>
또 삼십 두목 중 세 사람이 곡식 벨 때에 아둘람 굴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때에 블레셋 사람의 떼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쳤더라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블레셋 사람의 영채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다윗이 사모하여 가로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하매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 하고 마시기를 즐겨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사무엘하 23:13-17)
<설교>
지난 시간 다윗의 용사들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전쟁에서 용사들이 있음으로 그들의 힘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셨고 큰 구원을 이루셨다는 말씀은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 자체가 하나님의 활동 아래 있으며 결국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들임을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한순간도 하나님의 손길을 벗어나 살아간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의미가 되기도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그러니 너희들의 힘으로 산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의미가 강하게 살아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사실, 우리에게 어떤 힘이 있다고 할지라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함께 하시고 우리의 모든 인생을 이끌어 가신다’는 말 앞에서는 물거품과 같은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뜻을 세우시고 그 뜻대로 인도하신다는데 그 앞에서 우리의 힘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힘이 하나님의 뜻을 꺾을 수가 없고, 또한 하나님을 우리의 뜻대로 움직이게 할 수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힘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조족지혈(鳥足之血)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보잘 것 없는 것일 뿐입니다. 세상은 힘이 있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으로 뭉쳐 있지만, 그런 사고방식이야 말로 세상이 사단의 세력에 붙들려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단의 사고방식이 버젓이 교회에 자리하고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실 교회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말을 쉽게 하지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겠다는 믿음에 의한 말일까요? 아니면 교회가 원하는 대로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를 기대하며 ‘모든 것을 맡긴다’는 말을 할까요? 대부분은 후자의 의미를 가지고 ‘맡긴다’는 말을 할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여 이득을 얻고자 하는 속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신다’는 말에 ‘예’하십니까? 혹 앞에서는 ‘예’하면서도 돌아서면 생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까? 아예 ‘예’하면서도 속에는 다른 것을 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즉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을 이로운 길로 인도해 주시기를 원하는 마음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살게 하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삶에 있어서 겸손해야 합니다. ‘건강하니까’ ‘돈이 있으니까’ ‘든든한 직장이 있으니까’ ‘아직 젊으니까’라는 생각들이야 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희생과 수고 덕분에 살아가고 있음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나의 이득만을 꾀한다는 것이 왜 악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다윗에게 있었던 한 일화가 우리로 하여금 그런 생각을 하게 합니다.
14-15절을 보면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블레셋 사람의 영채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다윗이 사모하여 가로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하매”라는 말을 하는데. 블레셋 사람들이 베들레헴을 점령해 있는 상태에서 다윗이 고향인 베들레헴을 사모하면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다윗의 이 말은 목이 말라 물이 마시고 싶어서 한 말이 아니라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로 인한 말이었습니다. 단지 목이 말랐기 때문이라면 굳이 베들레헴의 물을 그리워 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다윗의 말을 들은 삼십 두목 중 세 용사가 블레셋 진영을 뚫고 들어가 다윗이 원하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길어 오게 됩니다. 자기의 목숨을 내건 충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다윗을 향한 세 용사의 충성을 높이기 위해 다윗의 이러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희생과 수고를 생각하지 않은 다윗의 이기적인 모습과 자신의 그러한 이기적인 모습을 깨달은 다윗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라는 말에서 생각할 수 있는 다윗의 이기적인 모습은 자신으로 인해 타인이 감당해야 할 희생과 수고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베들레헴이 블레셋에게 점령당한 것을 다윗이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한 곳으로 침투하여 물을 길러 온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포기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윗은 고향 땅의 물을 그리워하는 자신의 심정을 내 놓을 줄만 알았지 자신으로 인해 겪어야 할 용사들의 희생과 수고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를 않은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사실을 세 용사가 길러 온 물을 받고서야 알게 된 것입니다. 16-17절에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리며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 하고 마시기를 즐겨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는 내용을 보면 다윗은 세 용사가 길러온 물을 감히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물은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 피를 자신이 마실 수 없다고 여긴 다윗이 여호와께로 돌려드린 것입니다. 세 사람의 수고와 희생과 피를 받으실만한 분은 오직 여호와 한 분 뿐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경솔함이 우리의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 역시 다윗과 같은 경솔함을 그대로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경솔함은 타인의 희생과 수고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오직 자신의 생각과, 입장과, 자기에게 좋은 것만을 추구하는 이기심을 담고 있습니다.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라는 말은 누군가가 가서 고향의 물을 길러 오기를 원하는 마음을 간접적으로 내어 놓은 것입니다. 즉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에서 물을 마시고 싶은 자신의 심정만을 고려했을 뿐, 물을 길러 오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목숨을 거는 희생과 수고를 감당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윗이 용사들 앞에서 그런 자신의 마음을 내어 놓은 것은 어쩌면 다윗은 용사들을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용사들을 세워 승리하게 하신 것도 모두가 자신을 위한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용사들은 자신을 위해 희생하고 수고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실 다윗이 자신의 곁에 있는 용사들을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면 블레셋이 점령하고 있는 베들레헴의 우물 물을 그리워하며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라는 말은 섣불리 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앞서 말한 대로 그것은 목숨을 버려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기심을 담고 있는 다윗의 경솔함은 용사들을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의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다윗의 경솔함은 우리에게서도 고스란히 보여집니다. 가장 흔한 모습을 예로 들어 본다면 교회가 신자들의 희생과 수고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좀 더 세부적으로 언급한다면 목사가 교회를 빙자하여 교인들에게 충성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교회의 사람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의 사람이며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위해 세상에 존재하게 한 그리스도의 증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교회를 위해 일해야 할 아무런 의무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목사를 위해 일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만약 교회를 위하고 목사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라면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인 신자가 아니라 교회 인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생각한다면, 그리고 교회를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생각한다면 결국 교회라는 단체를 신자라는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에서 분리하여 놓고 교회를 위해 희생하고 충성할 것을 요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같은 사실을 망각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교회를 위한 희생과 충성을 강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도 이점에 대해서는 주의해야 합니다. 신자를 그리스도의 양이라고 부르고 목사의 위치에 있는 자신을 그 양을 치는 목자로 일컬으면서 신자의 위에 존재하고, 마치 다윗이 용사들을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여긴 것처럼 소위 목사의 목회를 위해 신자가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야 말로 목사의 이기심이여 엄청난 경솔함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교인이 목사의 말을 듣지 않는다’며 한숨을 쉬는 목사도 간혹 볼 수가 있는데, 그런 모습이 저를 답답하게 합니다. 신자란 목사의 말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을 듣고 사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목사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교회를 자신의 소유개념에서 생각하는 착각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신자라면 목사의 말을 듣지 마십시오. 그러나 목사의 말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목사의 말이 여러분을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라면 그 말을 들으셔야 합니다. 하지만 어떠한 목사의 말이라 할지라도 그 말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교회를 바라보게 하고, 세상을 향한 탐욕으로 채워가고, 잘살고 건강한 복 아닌 복으로 끌어가는 것이라면 온 힘을 다해 거부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의 할 일입니다
교회든 목사든 신자의 희생과 수고를 요구할 자격이 없는 것처럼 여러분 역시 타인의 희생과 수고를 요구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의 이로움을 위해서 타인의 희생과 수고를 기대하고 요구하는 이기심으로 살아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기심과 경솔함이 그리스도를 향해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고난으로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희생과 고난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은 날 위해 존재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면서 그리스도의 희생과 고난에 대해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하지만 당연한 것에 대한 의례적인 감사에 불과할 뿐인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의 죄로 인해 희생하시고 고난을 받으신 예수님께 ‘날 도와 달라’는 요구를 망설이지 않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희생이 우리에게 당연한 것이 아님을 생각하지 않는 결과인 것입니다.
다윗은 용사가 떠온 물을 바라보면서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라고 하며 물을 마실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는 다윗이 타인의 희생과 수고, 즉 피를 받을 자격이 없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희생과 수고와 피는 오직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용사가 길러 온 물을 마시지 않고 여호와께 부어 드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흘리신 피는 누구에게로 돌아가야 합니까? 당연히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예수님의 피를 이용하는 데만 급급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의 은혜에 감사하며 피를 높이고자 하는 것보다는 피로 인해서 내가 구원 받는 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일 뿐이지 우리가 구원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즉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이것을 안다면 ‘예수님의 피가 나를 구원 했다’며 자신의 구원으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예수님의 피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예수님의 피 흘림과 구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 악함을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신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타인의 희생과 수고를 당연하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살아가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고난이 나를 새로운 생명에 있게 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형제의 희생과 수고로 도움을 얻으며 살아가고 있음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남는 것은 감사입니다
(84강) 사무엘하 24:1-10 다윗의 인구조사
<본문>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왕이 이에 그 곁에 있는 군대 장관 요압에게 이르되 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그 도수를 내게 알게 하라 요압이 왕께 고하되 이 백성은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 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하되 왕의 명령이 요압과 군대 장관들을 재촉한지라 요압과 장관들이 이스라엘 인구를 조사하려고 왕의 앞에서 물러나서 요단을 건너 갓 골짜기 가운데 성읍 아로엘 우편 곧 야셀 맞은편에 이르러 장막을 치고 길르앗에 이르고 닷딤홋시 땅에 이르고 또 다냐안에 이르러서는 시돈으로 돌아서 두로 견고한 성에 이르고 히위 사람과 가나안 사람의 모든 성읍에 이르고 유다 남편으로 나와서 브엘세바에 이르니라 저희 무리가 국중을 두루 돌아 아홉 달 스무 날 만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요압이 인구 도수를 왕께 고하니 곧 이스라엘에서 칼을 빼는 담대한 자가 팔십 만이요 유다 사람이 오십 만이었더라 다윗이 인구 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사무엘하 24:1-10)
<설교>
인간에게 있어서 욕망은 마치 끝없이 물을 뿜어내는 분수와도 같은 것입니다. 중지됨도 없고 사그라짐도 없이 인간이 숨을 쉬며 육체로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발산되는 것입니다. 인간에 의해 통제되지도 않고 조절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욕망이 인간을 사로잡아 끌고 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욕망이란 인간으로 하여금 만족이라는 것을 모르게 합니다. 채워짐이 없이 항상 부족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욕망에 사로잡혀 신을 찾기 때문에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신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상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을 위해 신을 찾는 것, 그것이 곧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처럼 욕망으로 살아가는 인간에 대해 성경이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욕망 자체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 십계명에서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고 하심으로써 탐심이 있는 인간, 즉 욕망으로 살아가는 인간을 거부하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욕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담이후로 어느 누구도 욕망 없는 존재는 없습니다. 결론은 하나님은 세상 모든 인간을 거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자는 아무도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도무지 이러한 현실에 대해 관심이 없기에 자기 욕망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하나님이 자신의 정성을 보신다느니 내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말을 하면서 자기만의 종교 생활에 심취해 있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이 관심이 있어서 하나님을 찾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관심이 있어서 십자가를 언급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관심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이것을 두고 욕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앞서 말한 대로 세상의 모든 인간을 거부하신다는 것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만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욕망의 존재에 불과한 우리는 예수님이 없이는,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멸망의 자식으로 끝날 인생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에게 좋은 것을 얻는 것에만 관심을 둔다면 그것은 종교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신자는 인간의 욕망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욕망으로 살아가는 모습에서 인간의 의로움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를 회개하며 그리스도께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은 바로 이런 자입니다. 자신의 죄를 알고 독생자 예수님만이 생명 되심을 깨닫고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그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일컬으시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2절의 “왕이 이에 그 곁에 있는 군대 장관 요압에게 이르되 너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로 다니며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인구를 조사하여 그 도수를 내게 알게 하라”는 내용을 보면 다윗이 요압에게 이스라엘의 인구를 조사할 것을 명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1절의 내용이 조금 이상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셔서 그들을 치시려고 하시는데 그 일을 위해 다윗을 감동시켜서 인구를 조사하라고 하셨다는 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를 조사하는 범죄를 하게 했다는 의미로 들려지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을 치기 위한 구실을 만들기 위해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를 조사하게 했다는, 즉 하나님이 다윗에게 죄를 범하게 했다는 내용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대상 21:1절을 보면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즉 다윗이 이스라엘을 계수한 것은 사단이 다윗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본문에서 하나님이 다윗의 마음을 감동시킨 것으로 말하는 것은, 서로 상반된 내용이 아니라 사단이 다윗을 격동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막지 않고 허용하셨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결국 다윗이 범죄 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보신 것인데 그냥 두고 보셨으면서도 죄를 물어서 진노하시는 것은 또 무엇 때문입니까? 25절을 보면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고 재앙을 내리심으로써 재앙이 무엇으로 그치는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즉 번제와 화목제로 인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으시고 재앙이 그치는 것을 이스라엘로 하여금 경험하게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의 모든 마음을 번제와 화목제로 끌어가고자 하신 것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를 번제와 화목제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끌어가기 위해 우리의 범죄를 그냥 두고 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죄 속에 있는 우리의 현실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다윗의 인구조사인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인구를 조사한 것을 두고 과연 범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사실 인구조사 자체를 두고 죄라고 말하기는 곤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민 1:1-2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계수하라는 명령을 내리신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하나님이 인구를 계수하라는 명령을 하지도 않았는데 계수한 것이 죄일까요? 그렇다고 해도 역시 인구조사 자체를 죄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의 죄는 인구를 조사한 목적에서 찾아야 함이 분명합니다.
다윗이 인구를 조사한 목적이 무엇일까요? 3절을 보면 요압이 다윗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백성은 얼마든지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백배나 더하게 하사 내 주 왕의 눈으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그런데 내 주 왕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기뻐하시나이까” 이것을 보면 다윗이 인구를 조사하고자 한 것은 많은 수의 군사를 계수함으로써 자신이 힘있는 왕이라는 것을 확인하고 그것으로 만족을 얻고자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결국 많은 수를 힘으로 여기는 사고방식과 연결된 인구조사였던 것입니다.
세상은 숫자에 민감합니다. 우리도 많은 것이 낫다는 생각으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무엇을 기도해도 항상 많게 해달라는 것이 빠지지 않습니다. 교회를 찾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는 것을 원하고, 재정도 많아지는 것을 원하고, 예배당도 큰 것을 원하고, 이렇게 작은 것보다는 많은 것이 좋다는 사고방식에서 교인의 수를 헤아리고 돈을 헤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요압은 다윗에게 ‘이 백성은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백배나 더하게 하신다’는 말을 합니다. 백성이 많아지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다윗이 인구를 조사하여 수를 확인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수가 많든 적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신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의 승리는 용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린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시면 승리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전쟁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용사의 수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 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용사의 수가 아무리 많아도 하나님이 패배하게 하신다면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에게 중요한 것은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지 용사의 많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해마다 년 초가 되면 교회는 공동의회를 합니다. 그리고 지난해의 결산과 올해의 예산을 정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기에 목사들이 만나면 서로에게 올해 예산이 얼마인가를 묻습니다. 그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교회의 크기를 비교하고 많은 돈으로 자신을 과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으로 만족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인구조사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역대상 21장에서 사단이 다윗을 격동하였다고 한 것처럼 사단은 숫자의 많고 적음으로 인간을 격동합니다. 많은 수로 인해 자신의 힘을 과시하게 하고, 적은 수로 인해서는 자신을 약하다고 여기고 실망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단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힘을 가지고 인간을 격동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만이 힘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힘을 구하라는 방식으로 격동하는 것입니다. 이런 격동에 의해서 ‘하나님 힘을 주십시오’라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범죄라는 것도 모른 채 말입니다.
다윗의 범죄는 우리로 하여금 숫자를 바라보지 말도록 경고하는 것입니다. 수의 많고 적음으로 하나님의 복을 가름하는 것이야 말로 가장 어리석은 일이고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일일 뿐임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잘되는 것을 많아지는 것으로 평가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잘됨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깊이 빠져 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20절을 보면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여러분, 천 사람이 모였으나 예수님이 함께 하지 않은 것과, 두 사람이 모였으나 예수님이 함께 한 것 중 어느 것이 더 낫습니까? 아마 어느 한쪽을 두고 이것이 낫다는 말을 선뜻 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둘 다 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이 모이는 것과 예수님이 함께 한 것 말입니다.
그러면 천 사람의 모임에 예수님이 함께 한 것과 두 사람의 모임이 함께 하신 것에 차이가 있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에 있어서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성경은 동일하다고 말합니다. 동일하다면 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모임이냐?’에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수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의 범죄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항상 수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우리 속에서 욕망이 우리를 격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욕망이 격동하기에 무엇에 대해서도 만족함이 없고 감사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10절을 보면 “다윗이 인구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인구수를 조사한 것이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미련함을 고하면서 죄를 사해 달라고 간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죄는 다윗 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에게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미련한 것인가를 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범죄하면서도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고 마음에 자책하는 것도 없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어떻게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과 자비하심을 알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은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입니다. 그런데 욕망에 격동당하며 살아가는 자신의 미련함을 보지 못하고 죄를 보지 못하면서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인구조사를 통하여 우리에게 있는 욕망의 실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욕망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를 구출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묵상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깊이 빠져드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택한 백성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말씀에 대해서도 고개를 돌리고자 한다면 그것은 다윗을 나무라는 요압의 말을 듣지 않는 인간의 완악함일 수밖에 없습니다.
(85강) 사무엘하 24:11-17 하나님의 징계
<본문>
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의 선견자 된 선지자 갓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게 세 가지를 보이노니 너는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 하셨다 하라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여 가로되 왕의 땅에 칠 년 기근이 있을 것이니이까 혹시 왕이 왕의 대적에게 쫓겨 석 달을 그 앞에서 도망하실 것이니이까 혹시 왕의 땅에 삼 일 동안 온역이 있을 것이니이까 왕은 생각하여 보고 나를 보내신 이에게 대답하게 하소서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온역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인이라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 곁에 있는지라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삽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사무엘하 24:11-17)
<설교>
지난 시간에는 다윗이 인구를 조사한 것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나라도 얼마 전에 통계청에서 인구조사를 한 적이 있지만 인구를 조사하는 것은 국가 운영 차원에서 필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다윗이 인구를 조사한 일을 두고 범죄한 것으로 말합니다. 세상의 시각에서 볼 때는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고 왕으로써 당연히 해야 하는 일로 여겨지는 것이 하나님의 시각에서는 범죄한 것으로 규정된다는 것은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 위치에 있는 신자로서 주지할 내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의 인구조사가 범죄로 규정되는 것은 다윗이 이스라엘을 자신이 다스리는 자신의 나라로 바라보는 것에 있습니다. 내 나라이기에 인구를 계수함으로써 자신의 힘이 어느 정도인가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범죄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고 하나님이 책임지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 범죄였던 것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다윗에게 하나님이 징계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하나님의 징계의 내용을 다윗더러 선택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11-12절을 보면 “다윗이 아침에 일어날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다윗의 선견자 된 선지자 갓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가서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게 세가지를 보이노니 너는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 내가 그것을 네게 행하리라하셨다 하라”는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선지자 갓을 통하여 하신 말씀은 ‘세가지를 보이노니 그 중에 하나를 택하라’는 것입니다. 그 세 가지란 첫째가 이스라엘 땅에 칠년 기근이 있는 것, 둘째는 왕이 왕의 대적에게 쫓겨 석 달을 그 앞에서 도망하는 것, 세 번째는 이스라엘 땅에 삼일 동안 온역이 있을 것(13절)입니다. 여러분이 다윗이라면 무엇을 택하겠습니까?
세 가지의 징계를 보면 어느 것 하나도 가볍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세 가지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러면 다윗은 선지자 갓의 말에 대해 어떻게 답합니까? 14절을 보면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는 답을 합니다. 다윗의 답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세 개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셨는데, 어느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다윗은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말하겠습니까?
아마 다윗은 징계를 선택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의도를 깨달았을 것입니다. 때문에 셋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손에 빠지기를 원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단순히 범죄에 대한 벌이 아닙니다. 징계가 담고 있는 의미는 징계를 통해서 자신의 불의함을 깨닫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손길이 어떠한가를 알게 하는 데 있습니다. 즉 벌이 아니라 사랑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날마다 자기 백성을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징계에 담긴 하나님의 이러한 마음을 알았기에 여호와의 손에 빠지기를 원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 징계를 선택하라고 했을 때, 징계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한다면 ‘어떤 징계가 조금이라도 내게 유리하고 가벼운 것일까?’에 관심을 둘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셋을 주고 계산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가벼운 징계를 고르지 않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볼 때 다윗은 징계를 두고 어느 것이 자신에게 조금 이라도 더 유리한 것인가라는 계산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떤 의미로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한다는 말을 할까요?
먼저 다윗은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점을 생각해 보면 다윗이 말하는 여호와의 손에 빠진다는 것은 여호와의 긍휼에 빠지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의 징계가 어느 것으로 내려지든 징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긍휼에 빠지기를 원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손에 빠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것과 상관없이 사람의 손에 의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볼 때 다윗은 징계를 고통의 의미로 바라보기보다는 죄 가운데 있는 자신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알고 긍휼에 빠지게 하시는 은총의 시간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라는 말을 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기 쉬운 것은 ‘벌’의 개념입니다. 벌이라는 것은 아프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징계에서 고통과 아픔만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징계를 받지 않기 위해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야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는 말도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셋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면 ‘하나님 징계를 받지 않을 길은 없습니까? 회개하면 됩니까?’라는 식으로 반응했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다윗은 세 번째인 온역의 징계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15절의 “이에 여호와께서 그 아침부터 정하신 때까지 온역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니 단부터 브엘세바까지 백성의 죽은 자가 칠만 인이라”는 내용을 보면, 삼일동안의 온역으로 인해 백성이 칠만 명이 죽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징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 빠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손에 빠진다는 것은 곧 여호와의 긍휼에 빠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삼일 간 온역이 있는 이 징계가 다윗을 하나님의 긍휼로 끌어가는 징계였다는 의미가 됩니다. 어떻게 온역의 징계가 다윗을 여호와의 긍휼에 빠지게 하는 징계가 되겠습니까?
다윗의 범죄는 인구조사를 한 것이었습니다. 많은 수의 인구를 확인함으로써 자신의 힘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런데 삼일의 온역으로 인해 칠 만이라는 많은 수의 백성이 죽습니다. 만약 온역이 삼십일이었다면, 일 년이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윗이 힘으로 여긴 수십만의 백성이 하나님에 의해 죽지 않겠습니까? 결국 온역의 징계를 통해 하나님이 보여주신 것은, 다윗이 계수한 수많은 백성들도 여호와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존재 자체가 여호와께 달린 것이고, 여호와의 긍휼이 그들을 살리고 있는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징계 앞에서 다윗이 인구를 조사한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이 드러납니다. 아무리 이스라엘의 수가 많고 힘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수가 없습니다. 많은 수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도 아니고 심판을 넘어가게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온역의 징계를 통해서 수에 관심을 두었던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는가를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깨달음이 우늘 우리들의 속마음 깊이 담겨져야 할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교회를 바라보면서 원하는 것은 많은 교인입니다. 많은 교인을 교회의 힘으로 여기는 것이고, 교회가 크다는 것으로써 그 교회에 다니는 자신의 위상이 높여질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을 교회가 크다는 것으로 넘어갈 수 없습니다. 교인 수가 많다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넘어가게 하는 힘도 조건도 되지를 못합니다. 아무리 많은 수라 할지라도 한 순간에 하나님이 흩어버릴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결국 교회로 모이는 신자가 관심을 두어야 할 문제는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7절을 보면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삽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다윗은 칠만 명의 백성을 친 천사를 보고 자신이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모든 죄는 자신에게 있고 백성에게 있는 것이 아니니 자신과 자신의 아비 집을 치기를 원합니다. 결국 다윗은 백성의 죽음을 보면서 모든 죄가 자신에게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고, 자신은 여호와의 징계를 받음이 마땅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은 칠만 명의 백성은 죄도 없이 애매하게 죽은 것입니까?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이미 진노하셨음을 말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나 다윗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죄는 의지할 것이 세상에 있는 것으로 여기는 착각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징계로 말미암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와 내 집을 치소서’라는 고백을 합니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고백을 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일컫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크게 되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한 적이 없습니다. 교회 부흥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 낸 거짓된 말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베푸신 긍휼이 그 속에 있는가를 보시고 천국으로 이끌어 들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징계로 인해 결국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나와 내 집을 치소서라는 고백을 하게 됨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다윗을 그러한 고백을 하는 자로 만들어 가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람됨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 진 사람, 그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겠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끊임없이 징계하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죄지었으니 벌 받아라’가 아니라 죄를 알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할 자기 존재성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긍휼이 얼마나 보배로운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외면한 채 자신의 욕망에 빠져서 살아간다면 그것처럼 안타까운 일도 없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는 것인가도 모른 채 자기 멋대로 하나님의 뜻을 만들어 내면서 자신이 잘되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는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과 그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징계는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수단이고 도구인 것입니다.
(86강) 사무엘하 24:18-25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본문>
이 날에 갓이 다윗에게 이르러 고하되 올라가서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소서 하매 다윗이 여호와의 명하신 바 갓의 말대로 올라가니라 아라우나가 바라보다가 왕과 그 신복들이 자기를 향하여 옴을 보고 나가서 왕의 앞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가로되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 다윗이 가로되 네게서 타작 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로라 아라우나가 다윗에게 고하되 원컨대 내 주 왕은 좋게 여기시는 대로 취하여 드리소서 번제에 대하여는 소가 있고 땔 나무에 대하여는 마당질하는 제구와 소의 멍에가 있나이다 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하고 또 왕께 고하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 마당과 소를 사고 그 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사무엘하 24:18-25)
<설교>
하나님의 징계는 단지 벌을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이끄시기 위함인 것을 지난 시간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에서 살펴봤습니다. 하나님의 온역을 통하여 삼일 동안 칠만 명의 백성을 죽게 함으로써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를 계수한 것이 하나님께 왜 죄가 되는가를 깨닫게 하시고 결국 다윗으로 하여금 ‘나와 내 아비 집을 치소서’라는 고백을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으로부터 ‘나와 내 아비 집을 치소서’라는 고백을 이끌어 낸 하나님은 본문에서 선지자 갓을 통하여 다윗에게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으라는 지시를 하십니다.
단을 쌓으라는 것은 곧 제사를 말합니다. 그리고 제사에는 필히 제물의 희생이 있습니다. 즉 다윗이 단을 쌓는 의식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윗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담당하고 죽는 제물의 희생으로 인해서 심판에서 벗어나게 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무엘하서의 마지막 구절인 25절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는 말로 끝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을 멈추게 한 번제와 화목제가 말해주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내려지던 재앙이 어디론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번제와 화목제의 제물에게로 향했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의 재앙을 대신 담당한 제물로 인해 이스라엘의 재앙이 멈춘 것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재앙이 내려지던 이스라엘의 입장에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을 결코 피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고스란히 멸망을 받아야 할 처지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긍휼이 크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진노를 독생자 아들에게 대신 쏟으심으로써 우리에게는 진노와 재앙이 멈추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인간의 행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번제와 화목제물의 희생, 즉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바라보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인해서 맺어지는 것은 영원한 제사장으로서 친히 제물 되신 예수님의 의의 행위에 대한 감사함과 찬양만이 있을 뿐입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오직 나를 향한 진노를 멈추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을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단을 쌓기 위해 올라갑니다(19절). 아라우나는 다윗과 그 신복들이 자신에게로 오는 것을 보고 엎드려 절하며 “어찌하여 내 주 왕께서 종에게 임하시나이까”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네게서 타작마당을 사서 여호와께 단을 쌓아 백성에게 내리는 재앙을 그치게 하려 함이로라”고 말하고 아라우나는 자신에게는 제물로 쓸 소가 있고 땔나무까지 모두 있다고 하면서 그 모두를 다윗에게 바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24절)는 말로 아라우나의 호의를 거절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왜 다윗은 단을 쌓을 타작마당과 제물과 땔나무 모두 무상으로 제공하겠다는 아라우나의 호의를 거절하고 굳이 값을 지불하였느냐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굳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단을 쌓을 것을 지시한 이유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역대하 3:1절을 보면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모리아 산이었으며, 그 타작마당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건축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에서 모리아산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고자 할 때 하나님이 준비하신 수양을 대신 제물을 삼고 이삭을 살리신 일도 있습니다. 또한 16절의 “천사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그 손을 들어 멸하려 하더니 여호와께서 이 재앙 내림을 뉘우치사 백성을 멸하는 천사에게 이르시되 족하다 이제는 네 손을 거두라 하시니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곁에 있는지라”는 내용을 보면, 하나님께서 재앙을 멈추게 하실 때 백성을 멸하는 여호와의 사자가 아라우나의 타작마당 곁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아라우나의 타작마당과 연관된 이 모든 내용들이 의미하는 바가 과연 무엇일까요?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 제물을 대신하여 죽이시고 이삭을 살리신 사건이 있었고, 사무엘하서에서는 이스라엘에게 내려지는 재앙이 멈춘 곳임을 생각해 볼 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하나님께서 진노를 멈추시고 죽을 자를 살리신 긍휼과 자비의 사건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단을 쌓으라고 하시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이 멈추게 된 것이 과연 무엇 때문인가를 보여주시고자 한 것입니다. 그것이 솔로몬의 시대에는 성전으로 나타난 것이고, 드디어 예수님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예수님이 영원한 제사장이시고, 친히 제물 되신 분이고, 성전이시고, 우리의 모든 재앙을 온 몸으로 받으시고 우리를 건지신 분임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대상 22:1절을 보면 다윗은 “이는 여호와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이스라엘의 번제단이라 하였더라”는 말을 합니다.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전이며 이스라엘의 번제단은 사람의 손으로 세운 집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증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무상으로 제공하겠다는 아라우나의 호의를 거절하고 값을 치르고 산 것은 무슨 이유겠습니까?
창세기에 보면 아브라함이 사라를 장사할 때 매장지를 헷 족속에게서 구한 일이 있습니다(창23장) 그때 헷 사람은 호의를 베풀어서 묘실을 무상으로 주겠다고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들의 호의를 거절하고 값을 치르고 막벨라 굴을 자신의 소유로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장례는 단순히 죽은 자를 장례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와 다를 바 없는 사라의 몸에서 생명을 잉태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을 바라보는 것이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히 사는 길이라는 소망이 담겨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언약 안에 있는 아브라함의 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오직 언약으로만 맺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헷 사람의 호의를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헷 사람이 자신들의 호의를 내세우며 아브라함의 세계에 끼어들 그 어떤 여지도 남겨 놓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 본다면 다윗이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값을 치르고 산 이유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은 제물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멈춘 곳입니다. 따라서 누구든 희생 제물을 통하지 않고는 생명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타작마당에 아라우나의 호의가 끼어든다면 결국 생명에 이르는 길에 인간의 행위가 등장하지 않겠습니까? 다윗은 사전에 이것을 차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전의 세계는 제물의 의의 희생만이 있을 뿐, 인간의 어떤 행위도 끼어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사가 드려짐으로써 백성들에게 내려진 제앙이 그쳤다는 것은, 말 그대로 멸망했어야 할 이스라엘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제물의 희생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린양의 희생이 함께 하는 자의 복인 것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께 하나님의 재앙이 멈추어져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시는 가운데 있습니까? 분명 하나님의 재앙이 멈추어진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담당해야 할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을 예수님이 모두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예수님께 나올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과연 무엇일까요?
사람이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입었을 때, ‘이 은혜는 잊지 않겠다’ ‘꼭 보답을 하겠다’는 말을 주로 합니다. 이것은 받은 은혜를 나중에 되돌려 줄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그런 말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도무지 갚을 수 없는 도움을 받았을 때는 ‘나중에 갚겠다’는 말을 할 수 없게 됩니다. 나중에 갚겠다는 말 자체가 상대방이 베푼 은혜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 됨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그저 ‘감사합니다’라는 말 밖에 나올 것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크다고 말하니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여기는 것이 태반입니다. 왜 예수님의 은혜가 어느 정도인가를 알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부어지는 진노를 예수님이 홀로 담당하셨다는 것에 대해 시큰둥해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자신의 악에 대해 가볍게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악함을 가볍게 여기기 때문에 예수님의 희생과 죽으심 또한 가벼운 것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기 보다는 자신의 행위를 바라보는 것을 더욱 확실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히 9:15절을 보면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씀처럼 예수님은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선함도, 열심도 영원한 기업의 보증이 되지를 못합니다. 다만 예수님의 죽으심만이 우리의 보증이 되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자신의 행함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행함만을 바라본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열심히 하라’는 말조차도 불필요한 것으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열심이 부르신 자를 이끌어 가고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무엇을 하든 자기 행위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열심에 의한 것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고 따라서 ‘내가 했다’는 말은 도무지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의를 바라보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우리의 중보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25절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더니 이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매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재앙이 그쳤더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기도를 들으신 근거는 번제와 화목제에 있습니다.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행위를 보시고 기도를 들으신 것이 아니라 희생이 담긴 기도만을 들으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희생이 담긴 기도를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우리입니까? 예수님입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만을 들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빙자해서 자신의 뜻을 기도라는 형식에 담아서 관철시키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무엘하서가 오늘 우리가 말해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겨 있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입니다. 우리에게 쏟아져야 할 진노가 무엇 때문에 멈추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중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자신의 죄의 깊이에서 깨달으면서 그리스도만을 바라볼 것을 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