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 사 서

[스크랩] 사무엘상 강해 3

공 상희 2009. 5. 6. 13:49

 

 

 

 

 

 

 

사무엘상 강해 3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55강) 삼상 20:35-42 사랑의 관계


<본문>

 

아침에 요나단이 작은 아이를 데리고 다윗과 정한 시간에 들로 나가서 아이에게 이르되 달려가서 나의 쏘는 살을 찾으라 하고 아이가 달려갈 때에 요나단이 살을 그의 위로 지나치게 쏘니라 아이가 요나단의 쏜 살 있는 곳에 이를 즈음에 요나단이 아이 뒤에서 외쳐 가로되 살이 네 앞편에 있지 아니하냐 하고 요나단이 아이 뒤에서 또 외치되 지체 말고 빨리 달음질하라 하매 요나단의 아이가 살을 주워 가지고 주인에게로 돌아왔으나 그 아이는 아무런지 알지 못하고 요나단과 다윗만 그 일을 알았더라 요나단이 그 병기를 아이에게 주며 이르되 이것을 가지고 성으로 가라 아이가 가매 다윗이 곧 바위 남편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피차 입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으로 들어오니라(사무엘상 20:35-42)

 

 

 

 

<설교>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할 때 대개는 사랑과 은혜를 받았다는 것으로 감사하는 말을 할 뿐 사랑을 받은 자로서의 존재성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사랑을 받았다는 것은 사랑을 소유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받았다는 것으로 좋아하고 감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은 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랑에 의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염두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말하는 대부분의 신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껏 사랑을 받았으니 사랑을 행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예수님의 사랑과는 전혀 다른 사랑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인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사랑은 사람에게 좋게 하는 것입니다. 소위 이웃에게 친절을 베풀고 어려운 자는 도와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에는 단지 인간과 인간의 관계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전혀 다릅니다. 예수님이 단지 사람을 좋게 하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까?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사람을 도와주기 위해 죽으신 것입니까?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이라면 우리도 당연히 사람을 좋게 해야 하고 친절을 베풀기 위해 애를 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얘기를 할 때 마다 꼭 마음 한구석에는 조그만 염려가 남습니다. 그것은 제 의도와는 전혀 어긋나는 다른 해석을 하는 분이 있지는 않을까에 대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친절을 베푸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고 말씀드릴 때 ‘그러면 친절을 베풀지 말라는 말이냐?’라는 의구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저는 친절을 베풀지 말라는 말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친절을 베푸는 것을 사랑을 베푸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라는 말씀을 드렸을 뿐입니다. 친절 자체가 곧 사랑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이웃을 도와주는 것이 사랑이라면, 무슨 행사장의 도우미들도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까? 행사장에 가면 도우미로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과연 그들이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일까요? 그들은 그들의 직업의식에서 몸에 배인 친절이 나오는 것일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친절을 베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친절 자체를 사랑으로 오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없는데 사랑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친절, 사람을 좋게 하는 것의 수준일 따름입니다. 즉 하나님이 없는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말하는 세상은 인간의 착함을 가지고 사람을 구분합니다. 친절을 베풀며 남을 돕는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되고, 이러한 사람들은 죽어서도 좋은 곳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착하게 산 것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천국은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만이 간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된 여러분들은 예수님에게 받은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신자라면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임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받은 십자가에서의 주님의 사랑이 나에게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전혀 엉뚱하고 다른 사랑을 보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의 신자들의 문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오늘은 주님의 사랑이 무엇이며 그 사랑을 받은 자로서 어떤 모습이 보여 질 때 사랑을 행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30절에 보면 월삭에 있는 식사 자리에 참석해야 할 다윗을 요나단이 빼돌린 것을 안 사울이 분노 하면서 요나단을 ‘패역부도의 계집의 소생’이라고까지 욕을 합니다. 그리고 다윗을 끌어 오라는 사울에게 “그가 죽을 일이 무엇이니이까 무엇을 행하였나이까”(32절)라고 하면서 다윗의 죽이려고 하는 것이 부당한 행위임을 항변 합니다. 이로 인해 사울이 창을 들어 요나단을 치려고까지 하는 것을 보고 부친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에 확신을 가지게 되고, 노하여 식사 자리에서 떠나고 부친이 다윗을 욕되게 하였으므로 다윗을 위하여 슬퍼하기까지 하는 것이 요나단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요나단은 사울과의 혈육이라는 관계까지 벗어나서 다윗을 사랑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위험이 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살리기 위해 애를 쓰는 것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는데는 전에 말씀드린 대로 장차 하나님이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끊어버리실 때 다윗이 베푸는 인자가 자신을 살게 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과 언약을 맺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에는 인간적인 요소는 들어 있지 않습니다. 단지 인간관계에서의 친분이 아니라 생명과 언약이 개입된 관계이며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신자의 관계 역시 생명과 언약이 개입되어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요나단이 다윗을 살리기 위해서 미리 계획한 대로 행동하는 얘기가 나옵니다. 18-22절의 말씀을 보면 요나단이 다윗을 위해 한가지 계획을 세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계획대로 화살을 찾기 위해서 아이를 보내고 요나단이 ‘살이 네 앞편에 있지 아니하냐?’라고 외칩니다. 이는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니까 돌아오지 말고 떠나라는 신호였습니다.

 

 

 

 

이처럼 요나단이 활을 쏜 것은 다윗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를 알지 못하고, 요나단의 생각을 모른 사람들은 요나단이 다만 활을 쏘며 즐기는 것으로만 보여질 것입니다. 이는 화살을 주우러 갔던 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38-39절에 “요나단이 아이 뒤에서 또 외치되 지체 말고 빨리 달음질하라 하매 요나단의 아이가 살을 주워가지고 주인에게로 돌아왔으나 그 아이는 아무런지 알지 못하고 요나단과 다윗만 그 일을 알았더라”고 말하는 것처럼 자신이 손에 쥐고 있는 화살이 요나단의 어떤 마음을 담고 있는지, 어떤 의미의 화살인지 전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에 대한 사랑이 담긴 화살을 쥐고 있으면서도 그 화살의 의미를 전혀 모른 채 다만 들고 달음질을 하는 아이처럼 오늘날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신자들의 현실이 이와 같지 않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장차 자신에게 주어질 현실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대적을 치실 때 함께 멸망당할 사울의 가문임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로서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든지 자신이 왕이 될 것을 바라보면서 살아갈 수 있는데 요나단은 자신의 가문이 하나님에 의해서 끊어짐을 당한다는 것을 지금의 현실로 여기고 그에 대해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멸망이라는 현실에서 다윗을 바라볼 때 하나님이 택한 다윗이 곧 자신의 생명임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윗의 존재 의미를 모릅니다. 요나단처럼 장차 주어질 멸망이라는 현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과의 생명과 언약의 관계를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생명과 언약의 관계에서 표출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생명이 되어주시고, 우리에게 언약을 맺어주시고 언약의 성취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화살을 들고 달리기만 하는 것처럼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에는 도외시 한 채 다만 십자가를 말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나는 예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신자와 예수님은 생명의 관계에 있습니다. 이것은 신자가 자신의 현실이 무엇인가를 알았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자신의 사망을 바라보고 있고, 자신의 멸망을 현실로 여길 때 비로소 예수님이 나의 생명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이나 베풀어 주고, 하는 일이나 잘되게 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은 멸망이라는 현실을 보지 않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한 사랑은 다만 서로에게 잘해주면 된다고만 생각할 뿐입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잘해주고(복주고, 일이 잘되게 해주시는 것) 나 역시 예수님에게 잘하면(주일성수하고, 십일조 잘하고, 열심히 봉사하는 것) 사랑이 성립되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도 교회로 모였습니다. 무슨 생각으로 모였습니까? 편함과 즐거움을 위해 살아가는 풍조 속에서 그나마 주일 하루 편히 쉬지 않고 교회로 모였다는 것도 잘한 일이지만, 그러나 왜 무엇 때문에 교회로 모이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칫 잘못하면 요나단의 사랑의 의미가 있는 화살을 아무것도 모른 채 들고 달리고 있는 아이의 모습에 머무를 수도 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는 자신의 죄를 아는 신자에게만 그 의미가 충족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죄를 알지 못한 사람에게 십자가는 다만 세상 죄를 위해 죽은 착한 예수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자신의 죄도 모른 채 막연하게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만 남발하는 것으로 그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41-42절을 보면 “아이가 가매 다윗이 곧 바위 남편에서 일어나서 땅에 엎드려 세 번 절한 후에 피차 입 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더니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으로 들어오니라”고 말합니다.

 

 

 

 

요나단과 다윗이 서로 헤어질 때 서로 울면서 맹세하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리라고 합니다. 친하던 친구와 헤어질 때 ‘잘가라’는 한마디면 될 것인데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에 계신다는 맹세는 왜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 맹세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단지 축복의 말로 여호와께서 함께 하실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이해를 하겠는데, 나와 너 사이에 여호와가 영원히 계신다는 것을 왜 맹세로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맹세까지 해야 할 문제이겠습니까?

 

 

 

 

이것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는 처음부터 인간의 우정과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요나단은 여호와의 멸망에서 다윗을 바라보았고, 다윗이 베푸는 인자가 자신을 살릴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다윗이 위대한 존재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한 자가 다윗이고 하나님이 다윗 편에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여호와의 인자를 다윗으로 베풀어진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에는 여호와의 심판과 인자하심이 함께 개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가 계실 것이라는 맹세를 하는 것은 자손대대로 여호와를 중심으로 한 관계가 되어 질 것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에서도 인간의 생각이나 감정으로 맺어지는 관계가 아니라 여호와가 계시는 관계가 되어질 것을 맹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신자의 관계가 바로 이렇지 않습니까? 예수님과 신자의 관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멸망당할 죄인에게 독생자를 보내셔서 독생자를 통해 여호와의 인자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에 신자가 있다면 신자 역시 여호와의 인자가 베풀어짐으로 생명을 얻었다는 자신의 존재에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사랑의 관계라고 말하고, 이 관계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신자라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세상의 복을 원하거나 편함을 위해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요구는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신자와 신자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자와 신자 사이에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십자가에 피흘리심으로 죄인된 우리를 살리신 예수님이 계시는 것이 진정한 신자의 관계이며 이것을 사랑의 관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을 제해 버린 채 만나는 관계라면 그것은 세상의 인간관계와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다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친목 모임으로 전락될 다름입니다. 아무리 친하게 함께 어울리고 밥먹고 웃고 노는 관계라 할지라도 그것은 사랑의 관계가 아닙니다. 친하게 잘 어울린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관계에는 예수님이 계셔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예수님이 계신 관계로 만날 것을 맹세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소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관계로 만나게 되면, 남을 비판하지 않게 됩니다. 낮은 자를 무시하지 않게 됩니다. 세상 것으로 자신을 과시하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곧 비판받아야 할 죄인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자는 자신의 죄를 알게 되기 때문에 신자의 관계에서도 그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랑을 여러분의 상식에서 생각하지 말기 바랍니다. 사랑은 하나님에게서 베풀어진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받은 자는 자신의 죄악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보게 됩니다. 이 믿음으로 신자를 만나는 것이 사랑의 관계입니다. 이러한 관계에서 보여지는 것은 서로가 낮아지는 모습일 것이고, 예수님을 높이고 자랑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화살을 들고 그저 뛰고 있는 아이가 아니라 화살에 담겨 있는 요나단의 마음을 알고 달려가는 아이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56강) 삼상 21:1-6 거룩한 떡과 다윗    

 

<본문>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며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바와 네게 명한 바 일의 아무것이라도 사람에게 알게 하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여차여차한 곳으로 약정하였나이다 이제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든지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 제사장이 다윗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항용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나니 그 소년들이 부녀를 가까이만 아니하였으면 주리라 다윗이 제사장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참으로 삼 일 동안이나 부녀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나이다 나의 떠난 길이 보통 여행이라도 소년들의 그릇이 성결하겠거든 하물며 오늘날 그들의 그릇이 성결치 아니하겠나이까 하매 제사장이 그 거룩한 떡을 주었으니 거기는 진설병 곧 여호와 앞에서 물려 낸 떡밖에 없음이라 이 떡은 더운 떡을 드리는 날에 물려 낸 것이더라(사무엘상 21:1-6)

 

 

 

 

<설교>

 

지난 시간에 요나단의 거짓말에 대해 말씀을 드리면서 거짓말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질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즉 성경에서 말하는 거짓말은 세상의 윤리와 도덕을 기준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말의 거짓말이나, 정탐꾼을 살리기 위해 거짓말을 한 라합의 행위에 대한 이해가 어려워지게 됩니다. 비록 요나단이 사울에게는 거짓말을 하였으나 요나단의 행위는 다윗을 생명처럼 사랑하는 것과 일치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다윗을 구하는 것에서 요나단의 진실함이 증거된 것입니다.

 

 

 

 

사실 신자가 세상 사람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에 대해서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라고 말하면서 정작 삶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것이야 말로 세상 사람을 속이는 것이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거짓말에 대해서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으면서 단지 사람에 대한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을 중요시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곧 양심에 기초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믿음에 대해 진실하게 살기를 힘쓰는 신자라면 어떤 일에서든 남을 속임으로서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불의한 자면서 의롭게 보이려고 하는 것, 이것이 곧 거짓입니다. 따라서 거짓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의한 자이기에 자신의 불의함을 인정하며 오직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음을 증거하는 것이야말로 진실되게 행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다윗도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나단과 헤어진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과 만납니다. 아히멜렉은 다윗을 보자 왜 함께 하는 자가 없이 혼자 왔는가 묻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왕이 내게 일을 명하고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는 바와 네게 명한바 일의 아무것이라도 사람에게 알게 하지 말라 하시기로 내가 나의 소년들을 여차 여차한 곳으로 약정하였나이다”(2절)는 말로서 아히멜렉의 의심을 풀게 됩니다.

 

 

 

 

다윗의 이러한 말 역시 없는 사실을 꾸민 것입니다. 즉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전히 다윗의 거짓말에 대해 언급하지 않습니다. 마치 거짓말에 대해 묵인하고 인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세상의 도덕과 윤리적인 시각을 가지고는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도덕과 윤리를 지키기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세우시기위해 일하실 뿐입니다. 세상의 도덕과 윤리는 인간끼리의 약속입니다. 서로에게 해를 입히지 말자는 약속이 곧 윤리와 도덕인 것입니다. 따라서 윤리와 도덕에는 인간으로서 하나님에 대해서 어떻게 하자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윤리와 도덕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성경을 이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윤리와 도덕이 있다면 그 모두는 하나님에 대한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거짓이 없는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곧 신자에게 있어야 할 윤리이며 도덕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도덕군자로 만드시기 위해서 다윗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을 통하여 메시아를 보내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다윗 편에 있습니다. 누구든 다윗을 해하고자 한다면 그가 곧 여호와의 대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단은 사울의 집안이 하나님에 의해 끊어질 것임을 미리 내다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다윗이 거짓말을 했는데 왜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느냐가 아니라 다윗이 제사장만 먹게 되어 있는 거룩한 떡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다윗은 아히멜렉에게 “이제 당신의 수중에 무엇이 있나이까 떡 다섯 덩이나 무엇이든지 있는 대로 내 손에 주소서”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요구에 대하 아히멜렉은 항용 떡은 내 수중에 없으나 거룩한 떡은 있다고 말합니다(4절). 항용 떡이란 음식용으로 만들어 먹는 일반적인 떡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거룩한 떡은 음식으로 먹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이전 안식일부터 돌아오는 안식일까지 여호와의 성소의 떡상에 진열해 놓는 진설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진설병은 안식일마다 새로운 떡으로 교체해야 했고 교체한 떡은 오직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었습니다(출 25:30; 35:13; 레 24:8, 9). 제사장은 만약 소년들이 부녀를 가까이만 안했다면 그 떡을 주겠다고 말합니다. 다윗은 자신들이 부정한 일을 행한 적이 없음을 말하고 제사장은 진설병을 다윗에게 주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에서 우리는 율법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떡은 제사장만 먹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율법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제사장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제사장은 그 떡을 다윗에게 주는 것이며 다윗은 그 떡을 받는 것입니까? 그리고 과연 이것이 율법을 범한 것으로 봐야 합니까?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 때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습니다. 이것을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님에게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은 안식일 규정을 어긴 것이라며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에 다윗이 행한 일에 대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이 자기와 함께한 자가 시장할 때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외에는 먹지 못하게 되어 있는 진설병을 먹은 일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것은 다윗의 행위가 결코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본문의 다윗의 행동이나 아히멜렉이 거룩한 떡을 다윗에게 준 것이 결코 율법에 위반된 것이 아님을 입증하는 말씀임을 생각해 보면 본문을 통해서 율법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필요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율법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기가 쉽습니다. 조금 보수적이라고 하는 교단에서는 주일에는 음식을 사먹으면 안된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음식을 사먹는 것이 옳으냐 사먹지 않은 것이 옳으냐라는 판단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진정한 정신은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문제로 시비를 건 바리새인들에게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안식일에 이삭을 잘라 먹었다고 해서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율법의 조항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율법의 조항 하나하나를 지키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며 그것을 어기면 율법을 어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은 한 개의 조항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율법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않는다는 말씀의 뜻을 알았더면 그리 행동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제사라는 의식을 행하는 것이 순종이 아니라 자비를 행하는 것이 순종이며 율법을 따라 사는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이 지향하는 것은 자비라는 사실입니다. 율법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받은 자로 살아가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성소에 진열된 진설병은 모두 열두 개로서 이스라엘이 열 두 지파를 의미합니다. 그 진설병이 성소에 배치되고 등불의 비침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로 존재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설병을 매안식일마다 교체하는 것은, 떡이 부패해서 상했기 때문에 바꾼다기보다는 이스라엘에 주어지는 안식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인해서 주어지는 것임을 안식일마나 새롭게 하라는 뜻으로 교체하는 것입니다.

 

 

 

 

이 떡을 거룩한 제사장만 먹을 수 있도록 한 것은 제사장에게만 어떤 특혜를 주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오직 거룩한 자만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참여할 수 있음을 가르치기 위함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진설병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제사장이 시장한 다윗을 위해 그 떡을 제공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에 순종하는 것이며 진설병이 내포하는 있는 의미를 따르는 것이지 율법을 범했다고 보지 않는 것이 성경입니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오늘 우리는 율법에 대한 바른 시각을 가질 수가 있을 것이고 결국 어떤 조항을 내세워서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잘못됨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법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자비하심으로 구원을 얻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만약 법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하셨다면 우리 중 누구도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멸망에 처하게 될 뿐입니다, 이것을 아는 신자라면 법이 적용되지 않음에 대해 참으로 다행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신자가 서로 법을 기준으로 하여 판단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스스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있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케 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이 지향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완벽히 드러내기 위해 오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자비를 베풀며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생명을 얻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신자의 모임인 교회에서 증거되고 드러나야 하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다같이 하나님의 용서하심으로 생명을 얻은 사람답게 비판과 판단보다는 용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잘난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잘나 보인다고 해도 그도 역시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신 덕분에 생명을 얻은 것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서로가 잘난 것 없이 모두가 못난 사람으로 보인다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용서며 자비하심일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법적인 관계가 아닌 것입니다.

 

 

 

 

만약 신자가 서로 법적인 관계에서 만난다면 분명 누가 무엇을 얼마나 행하느냐에 의해서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믿음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구분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그것으로 교회라는 관계는 깨어진 것입니다. 교회는 법적인 관계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자비라는 관계로 만나기 때문입니다. 용서와 용납이 있는 관계입니다. 과연 은석교회가 이러한 관계로 만나고 있는가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형제를 대할 때 무엇이 기준이 되어 있는가를 살피시기 바랍니다. 시장한 다윗에게 제사장만 먹도록 되어 있는 거룩한 떡을 제공하는 것에서 신자의 바른 관계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57강) 삼상 21:7-22:2 두 세계


<본문>

 

그 날에 사울의 신하 한 사람이 여호와 앞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는 도엑이라 이름하는 에돔 사람이요 사울의 목자장이었더라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여기 당신의 수중에 창이나 칼이 없나이까 왕의 일이 급하므로 내가 내 칼과 병기를 가지지 못하였나이다 제사장이 가로되 네가 엘라 골짜기에서 죽인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이 보자기에 싸여 에봇 뒤에 있으니 네가 그것을 가지려거든 가지라 여기는 그밖에 다른 것이 없느니라 다윗이 가로되 그 같은 것이 또 없나니 내게 주소서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고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다윗이 이 말을 그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그들의 앞에서 그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아기스가 그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삼상 21:7-22:2)

 

 

 

 

<설교>

 

겨울이 있기에 더운 여름날 겨울을 그리워 할 수 있고, 여름이 있기에 추운 겨울이 되면 여름을 그리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겨울이 없다면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전부로 알고 살아갈 것입니다. 신자에게 천국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천국이 있음을 알기에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의 악함을 엿볼 때 마다 천국을 그리워하고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을 분명히 알고 있기에 세상은 잠이 있다가 사라지는 시간임을 깨닫는 것이고, 세상의 악함과 어려움에서도 천국에 대한 소망 때문에 모든 것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천국을 모른다면 그 사람은 분명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가게 됩니다. 모든 목적이 세상에서 이기는 자가 되는 것이고, 세상에서 굳게 서기 위한 것으로 집중될 것이 뻔합니다.

 

 

 

 

그런데 천국을 안다고 하면서도 천국이 없는 자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이것은 신자로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는 천국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신자다운 삶으로 회복해야 합니다. 신자로서의 정당성을 찾고 그 길을 가야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 스스로 신자라 하기에는 너무 민망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의 정당한 길, 천국을 알고 믿는 자로서의 정당한 길, 그 길에 과연 내 자신이 서 있는 것인지 점검하면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제대로 찾아 가는 것이야 말로 신자된 우리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일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과연 그 길이 어떤 길인가를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0절을 보면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이번에는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도망을 갑니다. 그런데 가드 땅의 사람들은 다윗을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11절을 보면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그 땅의 왕이라고 일컬으면서, 이스라엘 여인들이 춤추며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고 노래한 것을 언급하며 다윗이 자기들에게 도망온 것에 대해 상당히 꺼려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배경을 살펴보면 이들의 반응은 당연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가드라는 곳을 혹시 기억하십니까? 17:4절에 보면 골리앗을 가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즉 다윗은 자신이 죽인 골리앗이 살던 곳으로 도망을 친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간 것이 아니라 8,9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히멜렉이 보관하고 있던 골리앗의 칼을 가지고 도망을 친 것입니다.

 

 

 

 

사실 무엇 때문에 다윗이 골리앗이 살던 가드라는 곳으로 도망을 쳤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이치적으로 생각하면 다윗이 가드로 도망을 친다는 것은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가는 격이 아니겠습니까? 가드 사람에게 있어서 다윗은 원수와 같은 존재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곳으로 도망을 쳤다는 것은 분명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골리앗의 칼로 부장을 하고 갔다는 것은 그들 앞에서 자신을 더욱 드러내는 것인데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자신이 골리앗을 죽인 사람인 것을 드러냄으로써 그들을 위협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을 수가 있고, 아니면 가드가 골리앗이 살던 곳임을 미처 알지 못한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다윗이 가드로 간 이유보다는 가드에서의 일과 다시 가드를 나와서의 일을 비교함으로써 신자로서 가야할 길이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것 때문에 가드 왕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에 대해 소동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들을 말을 마음에 두고 가드 왕 아기스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즉 신하들의 소동으로 인해서 아기스가 다윗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어떤 해를 입히지 않을까 두려워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지금의 상황을 위기라 단정하고 나름대로 위기를 피하기 위해 취한 방법이 스스로 미치광이로 행세하는 것이었습니다.

 

 

 

 

13절을 보면 “그들의 앞에서 그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 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윗을 진짜 미친 자로 여긴 아기스는 “그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이 자가 어찌 내 집에 들어오겠느냐”(14,15절)라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미친 자는 상대할 가치도 없는 자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옛날 조선시대에도 보면 그러한 예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대원군도 그러한 사람인데 그도 왕족들의 세력다툼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파락호, 술주정뱅이 등의 행위로 미치광이 행세를 했고 그것으로 다른 왕족들의 의심과 경계를 피함으로써 목숨을 부지하고 나중에 자기 아들을 왕으로 등극시킨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예들이 세상이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이 무엇을 기준으로 하고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기스 역시 미치광이로 변한 다윗을 보면서 다윗에 대해 무시하게 됩니다. 예전에 골리앗을 죽인 두려운 존재로서의 다윗이 아니라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대하기도 창피스러운 존재로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유는 단지 미친 자라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사람에 대한 세상의 시각입니다.

 

 

 

 

아기스는 사람을 외형으로 결정하고 판단하는 극히 통속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아기스를 두려워하여 고의로 미친척하는 다윗의 행위도 믿음에서 벗어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담대히 행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서 힘 앞에서 굴복하는 약한 자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저는 다윗의 약한 모습보다는 사람을 외형적으로 판단하고 대하는 세상의 통속적인 모습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시각으로 사람을 대하는가를 묻고 싶은 것입니다.

 

 

 

 

저의 말은 단순히 약자들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관계없이 윤리와 도덕도 얼마든지 그것을 말하고 있고, 또 그것이 윤리이고 도덕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윤리와 도덕은 강자와 약자라는 기준과 논리 속에서 사람을 대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장애인이 있다고 할 때, 윤리와 도덕은 분명 장애인을 무시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에 있습니다. 장애인을 위해 편의시설을 만들고 직장이나 학교에서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것이 윤리며 도덕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육신이 정상적인 입장에서, 즉 강자라는 입장에서 상대적으로 연약한 입장에 있는 자를 도와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서로 돕고 살자는 것입니다. 때문에 아무리 윤리와 도덕이라 할지라도 자신보다 못한 자 앞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신은 강자로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더 나으니까, 내가 더 강자니까 돕자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기독교에는 육신을 조건으로 해서 강자와 약자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기독교에서 육신은 썼어질 몸에 지나지 않습니다. 세상의 소유나 지위 역시 헛된 것들이 바울이 말한 것처럼 배설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조건을 가졌다 해도 결국 사망에 처하고 육은 흙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세상의 조건으로도 천국은 살 수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한 일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도우심이 간절한 죄인의 입장에 서서 보면 결국 모든 인간은 약자일 뿐입니다. 장애인이든 미친 자든 상관없이 모두가 다 약자입니다. 이처럼 약자와 약자로서 만나고 하나님이 서로 다르게 주신 환경과 조건 안에서 약자로서 서로 보충하고 나눔으로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살과 피를 나누신 것을 증거하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아기스는 미친 다윗의 모습을 보고 그를 자신 앞에 데려오는 것조차도 화를 냅니다. 자기 집에 들어올 자격도 없다고 합니다. 미친 자라는 것 때문에 다윗에 대해 철저히 무시하는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신이 이러한 통속적인 세상 기준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가졌다 못 가졌다는 것으로 사람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지는 않습니까? 가진 자 앞에서는 왠지 몸이 사려지고 잘보이고 싶어하는데 가지지 못한 자나 나보다 못난 자 앞에 서면 조심함이 사라지고 잘보이고 싶은 마음도 없다면 그것이 곧 사람을 외형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신자는 아기스의 이러한 기준을 부숴야 합니다. 만약 이 기준을 부수지 못한다면 우리는 세상의 힘과 조건에 지는 자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신자조차도 세상의 기준에 마음을 맞추어서 통속적인 행동을 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자의 길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다음에 다윗은 가드를 떠나서 아굴람 굴로 도망을 합니다. 그런데 2절에 보면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명 가량이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아둘람 굴에 있을 때 다윗에게 몰려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세상의 환난과 무시와 천대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윗에게로 온 것입니다.

 

 

 

 

당시 다윗은 쫒기는 입장입니다. 남에게 힘이 되어줄 만한 처지가 못되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환난을 당하고 빚지고 마음이 원통한 자들은 힘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다윗에게로 모여 봐야 자신들의 신상이 나아질 뾰족한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에게로 모였다는 것은, 다윗을 통해 힘을 얻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득을 보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다윗이 당하는 환난과 고난에 함께 하는 마음의 일치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다윗이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간 것과 그에게서 쫓겨나서 아굴람 굴로 간 것을 비교하면서 신자가 살아가야 할 길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가드와 아굴람 굴의 차이는 가드는 세상의 통속적인 시각과 기준이 존재하는 곳이고 아굴람 굴은 세상적인 기준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서 천대받고 무시 받는 사람들, 즉 세상의 기준이 다 무너진 사람들이 모였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 차이가 어떻게 다른가는 시편을 통해서 여실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편 56편을 보면 ‘다윗이 가드에서 블레셋인에게 잡힌 때에’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시는 고난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이 가드에서 고난과 마음에 힘든 고통을 겪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시편 34편을 보겠습니다. 34편을 보면 역시 설명하기를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체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미친 체 하다가 쫓겨난 것은 가드 왕 아기스의 경우가 전부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상에서는 가드 왕이 아기스로 되어 있는데, 시편 34편에서는 설명하기를 아비멜렉이라고 말하는 점에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동일인입니다. 다만 사무엘상에서는 아기스란 이름이 그의 본명이 아니라 애굽 왕을 바로라고 부르는 것처럼 블레셋 왕을 나타내는 칭호일 것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입니다. 어쨌든 시편에서의 아비멜렉과 본문의 아기스가 동일인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면 34편의 내용은 다윗이 아굴람 굴에 있을 때 지은 시인데 그 내용은 56편과는 상이하게 다릅니다. 56편은 고난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절박한 내용이었는데 반해 34편은 여호와로 인한 기쁨과 평강을 노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 34:8절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찌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노래합니다.

 

 

 

 

다윗은 가드에서 벗어나서 아굴람 굴에서 여호와께 피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노래합니다. 그러면 과연 아굴람 굴에서의 다윗의 상황이나 형편이 그러한 노래를 할 만큼 좋아졌습니까? 다만 굴에 거하는 처지이고, 여전히 쫒기는 입장에 있습니다. 무엇하나 나아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호와께 피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노래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조건과 형편을 모두 벗어 버린 자의 노래입니다. 바로 우리에게 이런 노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처음에는 고난을 피하기 위해 가드로 갔습니다. 가드는 세상의 통속적인 기준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그곳 가드는 다윗을 경계했습니다. 골리앗을 죽인 자라는 것 때문입니다. 저렇게 힘있는 자가 오면 그들에게 위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다윗은 스스로 미친 체 함으로써 목숨을 구하는 지경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은 바로 이렇다는 것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힘있는 자에게 굴복하는 것 같으면서도 힘있는 자를 경계합니다. 싫어하고 밀쳐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평강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하물며 교회가 세상의 이러한 통속적인 기준을 따라간다면 과연 어떤 교회로 전락하겠습니까? 서로 경계하고 경쟁하며, 세상 조건을 보면서 머리를 숙이고 때로는 무시하는 모습만 보이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가드입니다. 교회는 이 가드를 부숴야 합니다.

 

 

 

 

그리고 아굴람 굴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굴람 굴은 세상적인 기준으로는 형편없는 곳입니다. 사는 환경이 좋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평강을 노래합니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노래하며 아무것에도 부족함이 없음을 노래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아굴람 굴에서 부족함이 없다는 노래를 할 수 있는 다윗을 생각해야 합니다. 과연 다윗에게 무엇이 있기에 그러한 노래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린 그것은 아굴람 굴에 찾아든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 들을 통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다윗을 찾아온 것은 다윗에게서 세상의 것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다만 다윗의 환난과 고난에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평강이 함께하는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아굴람 굴의 모임은 세상의 기준이 부서진 모임이었습니다. 모든 자가 다같이 약자들이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살 수 없는 철저히 낮아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다윗에게서 본 것은 단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아니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서로 이러한 마음으로 모여야 합니다.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철저히 낮아진 마음으로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모여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은 다 무너지고 다만 함께 당하는 환난과 고난에서 서로 만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생하는 사람들끼리 위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환난이나 마음에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단순히 세상 일로 마음에 고통을 받고 어려움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환난과 고통 가운데 있는 자는 자신의 모든 힘을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다만 그리스도의 도움만을 바라게 됩니다. 이것이 환난당한 자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그리스도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절박한 심정으로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의지하고자 할 때 그것이 곧 환난 당한 자의 마음이고 마음에 고통이 있는 자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모이는 것이 아굴람 굴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아굴람 굴이기보다는 가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커지는 일에만 몰두합니다. 내 교회를 과시하고 남들에게 보이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가 모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잘난 사람으로 모이는 것입니다.

 

 

 

 

은석교회는 아굴람 굴로 굳게 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모이는 교회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기준은 다 무너지고 오직 하늘의 기준만이 굳게 서서 그리스도를 향한 그 마음만을 귀하게 보는 교회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그것으로 교회는 얼마든지 부족함을 느끼지 않으며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는 천국을 마음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욕심입니다. 아굴람 굴의 모습이 초라하게 보이는 우리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58강) 삼상 22:3-10 도엑의 말


<본문>

 

다윗이 거기서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어떻게 하실 것을 내가 알기까지 나의 부모로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 하고 부모를 인도하여 모압 왕 앞에 나아갔더니 그들이 다윗의 요새에 있을 동안에 모압 왕과 함께 있었더라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사울이 다윗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함을 들으니라 때에 사울이 기브아 높은 곳에서 손에 단창을 들고 에셀나무 아래 앉았고 모든 신하들은 그 곁에 섰더니 사울이 곁에 선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들으라 이새의 아들이 너희에게 각기 밭과 포도원을 주며 너희로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때에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의 신하 중에 섰더니 대답하여 가로되 이새의 아들이 놉에 와서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에게 이른 것을 내가 보았었는데 아히멜렉이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묻고 그에게 식물도 주고 블레셋 사람 골리앗의 칼도 주더이다(사무엘상 22:3-10)

 

 

 

 

<설교>

 

여러분은 자신이 언어에 자유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하면서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겉으로 생각하면 언어의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북한처럼 말 한마디를 해도 주변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것보다는 얼마든지 자유를 누리며 말을 한다고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반대입니다. 모든 사람은 결코 언어의 자유를 누리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하고 싶은 말이라 할지라도 상황과 형편에 의해 하지 못하고 감추는 것이 있을 수 있고, 또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보다는 상대방이 듣기를 원하는 말을 할 때도 많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두고 아첨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요즘 회사원의 퇴직 연령이 평균 35세라고 합니다. 회사원은 날마다 퇴직의 위기를 느끼고 살아갑니다. 이런 상황에 직장에서 감히 상사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이처럼 우리는 주어진 상황과 형편에 따라 할말 못할 말을 가리게 되는 것이고, 때로는 해야 할 말, 하고 싶은 말을 하기보다는 상대방을 기준 좋게 해주는 말, 상대방이 듣기를 원하는 말을 하는 경우가 많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서로서로가 말에 있어서 타협을 하며 살아가는 셈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신자는 과연 말에 있어서 어떤 태도와 원칙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본문을 배경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을 보면 다윗이 아둘람 굴을 떠나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의 도움을 받으며 부모와 함께 지내게 됩니다. 그러던 중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있는 곳을 떠나서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지시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유다를 향해 길을 떠나게 되고 이 소식을 사울이 듣게 됩니다. 그리고 사울은 신하들에게 호통을 치게 됩니다.

 

 

 

 

7절을 보면 “사울이 곁에 선 신하들에게 이르되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들으라 이새의 아들이 너희에게 각기 밭과 포도원을 주며 너희로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합니다.

 

 

 

 

사울의 말은 한마디로 말해서 ‘너희가 누구에게 잘 보여야 하느냐?’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의 일행이 유다 가까이 오도록 자신에게 전혀 보고하지 않은 신하들에게 호통을 치면서 누구에게 복종하고 누구의 말을 듣는 것이 자신에게 득이 되는가를 잘 판단하라는 뜻으로 7,8절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의 말을 듣고 도엑이란 사람이 등장하여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왔을 때 아히멜렉이 다윗을 선대하고 골리앗의 칼을 준 사실을 발설하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 도엑은 다윗과도 아히멜렉과도 원한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에 대해 불리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아히멜렉에 대해서는 그가 다윗을 위해 하나님께 묻기까지 했다는 말을 더함으로써 아히멜렉에 대한 사울의 분노를 더욱 크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엑이 이러한 말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을 살핌으로써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떤 원칙에서 말을 하며 살아가는가를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도엑이 다윗과 아히멜렉에 대한 말을 사울에게 하는 것은, 사울이 말한 대로 밭과 포도원, 천부장과 백부장이라는 지위가 사울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왕이기 때문에 사울에게 잘 보이는 것이 곧 자신에게 득이 된다는 생각에서 그와 같은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당신 편이다’는 것을 상대방에게 보여줌으로써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힘과 권력의 덕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오고가는 말들이 바로 이러한 원칙 아래 행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은 하나님을 보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다만 힘을 바라볼 뿐이고, 누가 나에게 득이 되는가를 바라볼 뿐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 없는 말까지 가장하여 아첨을 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살아가는 것이 신자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 역시 아는 자입니다. 세상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면 모든 권력과 힘 위에 하나님이 존재함을 알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진심으로 하나님을 그렇게 알고 섬기는 가는 권력이 있고 힘이 있는 자 앞에서 어떤 말을 하는가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12:34-37절을 보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말로 인해서 심판을 받게 됨을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남을 욕하는 말을 하고, 시기하는 말을 하는 말 자체로 인해서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말은 속에 있는 것의 표현이고 드러남이기 때문에 말을 가지고 심판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도엑의 경우를 보면 도엑이 심판을 받는다면 그것은 다윗과 아히멜렉이 만난 것을 고자질 한 것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도엑의 말은 도엑의 속마음이 어떤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물이었습니다. 즉 도엑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왕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울을 보고 있고, 모든 것이 사울로부터 주어짐을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당신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러한 말을 한 것입니다. 때문에 도엑의 악함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의 권력을 믿고 의지하는 그 속마음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심판의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말은 속에 있는 것대로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말에서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겉만 번지르하고 부드럽고 듣기 좋은 말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선한 말로 여기면 곤란합니다. 말이 거칠고 화는 내는 말이라고 해서 악한 말로 여기는 것도 곤란합니다. 중요한 것은 저 사람의 말이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하는 말인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의 말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담고 있고, 하나님만을 높이며,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로서의 말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드러나지 않는 말은 악하고 헛된 말에 불과할 뿐입니다.

 

 

 

 

말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내 속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말이기 때문입니다. 내 속에 무엇을 담고 살아가는가가 이웃을 만나서 말하는 것에 고스란히 담겨서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사과나무에서는 사과 열매가 맺히는 것이 당연하듯이 내 속에 악이 감춰져 있었다면 내 말에 악이 담겨 나오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자비하심이 담겨 있다면 역시 말에서 그러한 것이 담겨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에서 내 자신의 악함을 발견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인인척 했던 위선에서 벗어나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 없는 실체를 발견하고 진심으로 벌거벗은 부끄러운 몸으로 주님을 찾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에 너무 많이 속고 있습니다. 위선되고 가식적인 행동으로 둘려 쌓여 있고, 도덕과 윤리로 포장된 행동으로 인해서 마치 자신은 하나님을 잘 믿는 신앙인인 것으로 오해를 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에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신앙인으로 오해를 해버릴 때 주님 앞에서의 부끄러움은 점차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의의 옷을 입고 자신을 부끄러움을 가리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도엑의 말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말을 하며 살아가는가를 살피고, 그리고 우리의 말에 담겨 있었던 악을 발견하여 주님 앞에 용서받을 수 없는 악한자의 모습으로 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은혜가 더욱 크게 다가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만 보고 산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입니다. 그야말로 세상 눈치 안보고 세상에서 어떤 대접과 취급을 받아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단호한 믿음이 아니고서는 하나님만 보고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신자의 흔적은 말에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갈 1:10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는 말을 합니다. 얼마나 단호한 말입니까? 이것을 보면 사도 바울에게는 말에 대한 분명한 원칙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을 좋게 하고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좋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하나님을 좋게 하는 말을 원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좋게 하는 말, 사람을 기쁘게 하는 말을 듣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말에서 저 사람은 하나님 편에 서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보지 않습니다. 오직 내 편인가를 볼 뿐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악함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을 좋게하는 말을 하며 산다는 것 자체가 고난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는 이것이 말의 원칙이 되어야 합니다.

 

 

 

 

신자에게 주인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공급하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힘을 두려워하여 세상을 좋게 하고 힘을 가진 자를 기쁘게 하기 위한 말을 한다는 것은 그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잘난척하고 싶은 악함이 있고, 이기고 싶은 악함이 있습니다. 이러한 악함들이 말에 고스란히 담겨 드러남을 알아야 합니다. 남의 말에서 악함을 찾으려고 하지 마시고 바로 나 자신의 말에서 악함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에서 내가 곧 도엑임을 발견하는 것이 오늘 말씀의 목표입니다. 말을 조심해서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내 속에 있는 것은 순식간에 내가 의식하지도 못한 채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도엑임을 발견하고 나의 악함을 그대로 가지고 주님을 찾는 것이 오늘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가 우리의 속마음에 자리하고 은혜로 인해서 나와지는 말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말은 한번 쏟아 놓으면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말에 있어서 지혜를 구해야 하고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자신의 말에서 여러분이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고 무엇을 의지하는가를 보셔야 합니다. 사람인지 하나님인지를 분명히 판단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나아갈 길을 다시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드리면서 다시금 제 자신을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나의 말이 무엇을 위해서 하는 말이 되어야 하며, 무엇을 바라보고 하는 말이 되어야 하는가를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저는 여러분 앞에서 도엑이 되기를 거부하겠습니다. 저를 살리시는 분은 여러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저는 사람을 좋게 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좋게 하는 말을 전하는 원칙을 여전히 고수하고자 합니다. 만약 제가 도엑이 된다면 여러분은 듣기에 좋은 말을 많이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함께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속마음에 하나님이 자리하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다함께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만을 높이기를 원합니다. 사람을 좋게 하는 말은 듣는 자나 말하는 자 모두 거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은석교회에서 전해지고 나눠지는 말에는 사람의 욕심보다는, 힘에 굴복하는 모습보다는,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이 담겨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힘입니다. 이 믿음의 모양이 여러분의 말에서 보여지기를 바랍니다.

 

 

 

 

 

(59강) 삼상 22:11-19 제사장의 죽음


<본문>

 

왕이 보내어 아히둡의 아들 제사장 아히멜렉과 그 아비의 온 집 곧 놉에 있는 제사장들을 부르매 그들이 다 왕께 이른지라 사울이 가로되 너 아히둡의 아들아 들으라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새의 아들과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여 그에게 떡과 칼을 주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서 그로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게 하려 하였느뇨 아히멜렉이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 그는 왕의 사위도 되고 왕의 모신도 되고 왕실에서 존귀한 자가 아니니이까 내가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은 것이 오늘이 처음이니이까 결단코 아니니이다 원컨대 왕은 종과 종의 아비의 온 집에 아무것도 돌리지 마옵소서 왕의 종은 이 모든 일의 대소간에 아는 것이 없나이다 왕이 가로되 아히멜렉아 네가 반드시 죽을 것이요 네 아비의 온 집도 그러하리라 하고 왕이 좌우의 시위자에게 이르되 돌이켜 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또 그들이 다윗의 도망한 것을 알고도 내게 고발치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 왕의 신하들이 손을 들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이기를 싫어한지라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이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이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오 인을 죽였고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사무엘상 22:11-19)

 

 

 

 

<설교>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뜻이나 인도하심은 우리의 생각으로는 참으로 알 수 없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각기 다른 세계에 있기 때문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세상의 상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의 원칙으로 일하십니다. 때문에 생각이 일치되지 않은 것은 극히 당연한 현상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끝까지 자기 생각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결국 자기 생각에 맞는 자기 하나님을 새롭게 만들어 섬기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모습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가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생각으로 자기에게 맞는 하나님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상을 섬기는 악한 행위일 뿐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 하나님을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일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은 성경 전반에 걸쳐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만 봐도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것들입니다.

 

 

 

 

당장 오늘 본문만 봐도 하나님이 왜 이렇게 일하시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본문의 내용은 다윗을 도와준 제사장 아히멜렉을 포함해서 85명의 제사장이 사울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들이 죽는 것을 그냥 두고 보고만 계십니다. 더군다나 제사장들의 죽음에는 다윗에게 유다 땅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하는 갓 선지자의 말도 개입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유다 가까이 가지 않았으면 사울이 다윗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도엑도 아히멜렉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일의 발단은 다윗이 유다 땅 가까이 간 것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사장들의 죽음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신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에 의해 제사장들이 죽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아히멜렉은 다윗의 대적자가 아니라 오히려 도와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다윗을 도와줬다면 위험에 빠진 제사장을 살려주시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상식이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제사장을 한명도 아니고 85명이란 수를 그냥 죽도록 방치해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 있고, 제사장을 죽게 하시는 하나님의 생각에 동조할 수 있다면 그가 바로 하나님을 아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을 만나지를 못합니다. 그것은 자기 원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기 원칙은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복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복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복의 의미가 세상 것을 채워주시는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결국 사람이 가지고 있는 원칙은 하나님은 자기를 믿는 자를 잘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 역시 자기 백성을 잘되는 쪽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으로 이해해 버립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일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원칙은 하나님을 믿어서 세상 것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칙은 나를 믿는다면 실패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실패하지 않고 성공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사람에게 이 말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말에 대해서는 귀도 마음도 다 닫아 버리고 성공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다른 하나님에게 마음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실패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있습니까? 세상에서의 실패란 곧 낮아짐이며 죽음과도 같은 것입니다. 때문에 세상은 실패하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며 노력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상식이며 누구도 이런 상식에 반대하지 않습니다. 종교도 이러한 상식을 바탕으로 구축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모든 종교는 인간의 행복을 말합니다. 행복한 삶 자체가 곧 성공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재물의 성공이 없다 할지라도 마음이 행복하면 된다고 말하면서 어떻게든 인간을 위한 종교로 남습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은 곧 행복과 연결됩니다. 성공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에게 실패란 불행일 뿐입니다. 때문에 불행한 인생을 피하기 위해 신을 찾는 것이 사람이며 이러한 기대를 기독교가 알기에 하나님을 말하고 예수님을 말하면서 행복을 함께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말하면서 행복을 끼워 파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과연 오늘 본문의 하나님과 맞다고 생각합니까?

 

 

 

 

분명 제사장들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다윗을 도운 것이 원인이 되었으니 하나님이 나서서라도 제사장들을 구해주고 제사장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을 심판해 버리는 것이 우리의 원칙과 상식에 맞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제사장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심으로써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고 계시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를 물으심을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아벨이 가인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합니다. 아벨은 잘못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 제사 드린 것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 때문에 아벨이 죽게 된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도 아벨을 지켜주셨으면 될 일을 왜 그냥 죽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리고 마태복음을 보면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아기와 마리아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런데 헤롯이 아기 예수를 붙들지 못한 것 때문에 심히 노하여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두 살 아래의 모든 사내아이를 죽이라는 지시를 합니다. 결국 이 사내아이들도 예수님으로 인해 억울한 죽임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 경우에도 역시 하나님은 가만히 계셨습니다. 아기 예수를 살리기 위해서는 사자를 보내어 현몽하면서 길을 지시하시는 하나님이 아기 예수 때문에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아이들에 대해서는 침묵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다윗 때문에 제사장들이 죽임을 당하고, 아벨은 하나님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사내아이들은 아기 예수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이런 일들이 말해주는 것은 세상에서 죽는 것 자체가 실패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잊어버리고 삽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뒤로 밀쳐 버리고 지금 급한 것은 세상에서 살아남고 잘되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기준으로 하지 않는 삶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절대로 신자의 삶이 아닙니다.

 

 

 

 

성공을 원하는 세상에서 실패해도 괜찮다는 말을 한다는 것이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원칙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공을 원하고 살아가는 여러분의 눈높이는 실패해도 괜찮은 눈높이로 낮추는 것이 저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이 과연 성공한 인생입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예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삶과 예수님을 구분하여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삶은 나의 것, 예수님의 삶은 예수님의 것으로 갈라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에서 우리의 삶을 생각한다면 성공을 원하고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십자가를 허무는 것임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의 성공을 보장하지도 약속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과 죽으심을 보여줄 뿐입니다. 이런 십자가에 우리에게 주는 소망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피흘리심으로 구원을 얻었다면 세상에서는 죽는 것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죽는 것이 곧 해방이며 완전한 자유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죽는 것 자체를 불행으로 여기며 싫어한다면 그 사람은 항상 억울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것입니다. 남들은 다 잘되는데 나는 왜 이것 밖에 안되는지 억울할 것이며 하나님을 믿지 않은 자들도 잘되는데 열심히 믿은 자신은 왜 안되는지 억울할 뿐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일을 자기중심적인 시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 존재하는 도구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나의 일을 위해 존재하고 계시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인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아히멜렉은 사울의 말에 대해 당당하게 답합니다. 13절을 보면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새의 아들과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여 그에게 떡과 칼을 주고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서 그로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게 하려 하였느뇨” 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대해 아히멜렉은 전혀 두려움이 없이 “가로되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 같이 충실한 자가 누구인지요 그는 왕의 사위도 되고 왕의 모신도 되고 왕실에서 존귀한 자가 아니니이까 내가 그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은 것이 오늘이 처음이니이까 결단코 아니니이다 원컨대 왕은 종과 종의 아비의 온 집에 아무것도 돌리지 마옵소서 왕의 종은 이 모든 일의 대소간에 아는것이 없나이다”(14,15절)고 말합니다. 아히멜렉은 다윗을 도와준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그러나 사울은 아히멜렉과 그의 제사장들을 죽임으로써 힘을 드러내며 세상을 지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제사장들의 죽음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사울의 악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이 어떤 정신으로 살아가는가가 드러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사장들은 애매하게 죽은 것이 아닙니다. 제사장의 죽음으로 세상의 악을 드러내신 하나님의 일의 성취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신자가 세상에서 당당하게 살려면 우리의 법칙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법칙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것이 없어도 하나님을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으로 성공자라는 법칙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신자는 당당해 질 수 없습니다. 세상 것을 기준으로 해서 많고 적음에 따라 성공과 실패를 구분하면서 자신을 불행하게 보게 될 뿐입니다.

 

 

 

 

신자란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세상은 그 사람이 권력이 있는가 재물이 있는가를 보고 판단하고 대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믿는가를 보지 않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믿음이 아무런 힘이 못된다는 것은 아주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세상의 악이 드러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심판의 근거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만 생각하십시오. 세상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마시고 세상의 원칙에 눈을 돌리지 마십시오. 세상이 여러분을 어떻게 대하든 여러분은 하늘에서 큰 자입니다. 세상이 안알아준다고 해서 억울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세상은 그리스도도 알아보지 못하고 죽인 악의 나라입니다. 그러한 세상이 신자를 알아볼 리가 만무하지 않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것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힘을 추구한 사람은 힘에 대해 두려워하게 됩니다. 때문에 다윗이 칭송을 받자 그것을 다윗의 힘으로 보게 된 것이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회는 힘의 체계에서 철저하게 벗어나야 합니다. 그 무엇으로도 자신의 힘으로 삼아서는 안되는 것이 교회입니다. 신자의 힘은 오직 그리스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사는 것이야 말로 가장 힘있는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예수님이 결코 힘이 되지 못함을 알게 되고 자연히 예수님보다는 세상을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들의 죽음은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애매한 죽음도 억울한 죽음도 아닙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어떤 법칙을 가지고 사십니까? 신자의 길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시고 어떤 일에서든 당당하시기 바랍니다.

 

 

 

 

 

(60강) 삼상 22:20-23 나의 연고로라


<본문>

 

아히둡의 아들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가 피하였으니 그 이름은 아비아달이라 그가 도망하여 다윗에게로 가서 사울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인 일을 다윗에게 고하매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그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고할 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비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연고로다 두려워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보전하리라 하니라(사무엘상 22:20-23)

 

 

 

 

<설교>

 

사람이 신을 찾고 신을 믿고자 하는 이유는 신으로부터 어떤 도움을 받기 위한 이유가 강합니다. 일단 신이라 하면 초월적인 존재로 인식을 합니다. 자신의 인생을 불행에서 행으로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신에게 있다고 여기고, 자신에게 닥칠 불행조차도 미리 막아줄 힘이 있는 능력자로 인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을 잘 믿으면 신이 자신을 도와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어려울 때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고 자신도 모르는 불행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신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통털어 종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러한 종교의 범주에 속하지 않음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고 나머지는 다 우상이니까 다른 종교와 함께 취급하지 말라는 차원의 얘기가 아닙니다. 추구하는 바가 아예다르며 신에 대한 생각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종교는 신 덕분에 자기 인생이 편해지고 불행이 변하여 행복이 되는 것을 꿈꾸지만 기독교는 예수님 때문에 오히려 고난을 받고 죽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신의 도움을 받아서 내 자존심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모든 자존심을 죽이는 길로 가는 것이 곧 기독교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이 가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즉 기독교는 내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날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생각하며 그분의 영광 앞에서 내 영광은 사라지고 없어져야 하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 덕분에, 하나님 덕분에 내가 잘되고 내가 영광을 얻고, 내가 하는 일들이 잘 풀리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단연코 기독교라 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기독교의 이러한 본질이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아히벨렉이 다윗을 도왔다고 사울에게 고발함으로써 아히멜렉의 집안 제사장 85명이 죽임을 당한 일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들의 죽음은 분명 애매한 죽음이고 억울한 죽음이었습니다. 다윗이 아히멜렉을 찾아오지만 않았어도 그들이 죽는 일은 없었지 않겠습니까? 결국 다윗이 아히멜렉을 찾아온 일이 그들 집안에 있어서는 멸망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다윗은 하나님이 택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다윗 때문에 애매하게 죽임을 당하는 아히멜렉의 집안을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것이 우리의 상식에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바로 기독교를 종교로 전락시키는 생각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당연한 그 생각이야 말로 모든 일을 하나님 중심에서 생각하지 않고 선악과를 먹음으로서 자기 중심이 되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인간의 악한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해주시는 것이 당연합니다’라는 생각이 있으면 과연 그 중심에 누가 있는가를 살펴보십시오. 하나님이십니까? 아니면 인간이며 나 자신입니까? 사실 죽기를 싫어하고 낮아지기를 싫어하는 나 자신이 살아있는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나에게 해가 되는 일은 절대로 있으면 안된다는 나의 고집이 ‘이렇게 해주시는 것이 당연합니다’라는 생각을 이끌어 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창조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피조물이 신의 자리를 점령한 모습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제사장 85명의 죽음은 우리의 상식과 당연함을 부숴 버립니다. 하나님은 부패한 인간의 상식대로 행동하지 않으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곧 부패한 인간의 상식을 벗어나서 하나님의 마음과 그 뜻에 동행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부패한 인간으로부터 나오는 잘못된 상식이 부숴지고 진심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것만이 참된 진리로 살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20절에 보면 85명의 제사장의 죽음에서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 한 사람이 구사일생하여 다윗에게로 도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사울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인 일을 고하게 됩니다. 그말을 듣고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말하기를 “그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고할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비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연고로다 두려워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보전하리라 하니라”(22-23절)고 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 다윗은 자신이 아히멜렉에게 있을 때 사울의 목자장인 도엑이 거기 있는 것을 발견했고, 또 도엑이 그 사실을 사울에게 고할 줄을 이미 알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엑이 사울에게 고하면 아히멜렉이 위험해 질 수 있음을 알았을 것인데 아히멜렉에게 피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됩니다. 도대체 다윗은 왜 그렇게 하였을까요?

 

 

 

 

다윗은 제사장들 죽은 것이 나의 연고라고 말합니다. 나 때문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 아니라 능히 예상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아히멜렉을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우리의 기존의 상식과 당연함이 살아있기 때문임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다시 말해서 죽는 것 자체를 불행으로 보고,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그런 일이 있으면 안된다는 생각에서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해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편에 있는 자로서 세상으로부터 죽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보고 성경을 생각하시면 본문 같은 내용도 능히 이해가 되어질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갈 것을 말씀하셨는지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냥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여 세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으로 인한 제사장들의 죽음은 사람을 잘못 사귄 결과라기보다는 하나님이 택한 자를 알았기 때문에 당한 고난이었던 것입니다. 즉 다윗의 고난에 함께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미워하여 죽이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울이 미워하는 다윗을 도와주고 다윗 편에 있다는 것 자체가 사울에게는 적으로 여겨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아히멜렉이 죄가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사울이 미워하는 다윗 편에 있다는 것으로 이미 죽어야 할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신자와 예수님의 관계를 그대로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8-19)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신자가 예수님을 알았다는 것은 곧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길로 들어섰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다윗을 미워한 사울이 다윗을 도운 아히멜렉도 미워하여 죽이는 일에서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이러한 관계에서 우리에게 있게 되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두려워 말고’라고 말합니다. 다윗으로 인해서 모든 가문이 죽임을 당하는 일에서 아비아달이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다윗은 아비아달에게 “두려워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보전하리라 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지금의 다윗의 처지는 자신의 앞길도 자신이 책임지지 못할 정도로 좋지 않은 상황입니다. 사울을 물리칠 힘이 없습니다. 그러한 다윗이 무엇을 믿고 아비아달에게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보전하리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고, 하나님이 자신을 택하였기 때문에 자신을 책임지실 것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비아달이 자신과 함께 하면 아비아달의 생명은 자기와 함께 보전될 것임을 말한 것입니다.

 

 

 

 

다윗의 생명을 찾는 자는 다윗의 대적입니다. 다윗을 대적하는 것은 하나님이 택하여 세운 자를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원수를 멸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비아달이 사는 길은 힘이 약한 다윗을 떠나 강자인 사울편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 편에 서는 것이 당장은 사는 것으로 여겨지겠지만 결국은 멸망을 받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보전은 다윗과 함께 함으로 지켜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삶의 방식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내가 사는 길을 쫓아갑니다. 세상의 힘이 나의 생명을 보전할 것으로 여기고, 힘에 굴복하고 힘을 얻기 위해서 애를 쓰며 삽니다. 그러나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물론 지금 당장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아무런 가치가 없이 보여지고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상식이 여전히 세상의 논리에 머물러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잠시 사는 길을 좇아가지 마시고 영원히 사는 길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생명을 보전하는 힘은 세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께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하는 길은 고난입니다. 내가 원한대로 살지 못하고 내 마음대로 살아가지를 못합니다. 때로는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받으면서 가야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세상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길을 멈추거나 돌아서거나 다른 길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운명입니다.

 

 

 

 

다윗의 연고로 제사장 85명이 죽은 일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일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행동하셨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책임지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에서 성공한 자로 보전하도록 책임지시는 것이 아니라 참된 생명으로 오신 그리스도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보전되도록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하는 말은 예수님이 여러분께 하시는 말씀과 같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의 여러 일에서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에게로 도망을 칩니다. 혹 예수님에게 도망을 치면 혹 예수님이 날 도와서 어려움에서 건져 주지 않으실까라는 생각이 우리에게 살아있을 수도 있지만 예수님은 ‘너의 그 일이 나의 연고로다’라는 말씀을 하시며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보전하리라’고 말씀하실 뿐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여러분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 하늘나라가 아니라 세상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원하는데 세상에서 잘되는 것을 말씀하지 않고 하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시고 하늘의 생명에 대해 말씀하시니 마음에 전혀 차지를 않는 것입니다.

 

 

 

 

사울에 의해서 모든 제사장이 죽는 것을 보면서 여러분이 아비아달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무 힘도 없는 연약한 다윗에게로 도망하겠습니까 아니면 힘을 가진 사울에게로 가서 용서해 달라고 굴복하겠습니까? 다윗에게 도망한다고 해서 별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에게 도망친 아비아달에게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보전하리라’는 말을 합니다. 그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다윗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택하여 세운 분이 누구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이 보전되는 길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고난을 받습니다. 고난에서 그리스도에게 가는 것만이 영원히 사는 길임을 다시 여러분의 속마음에 굳게 세우시기 바랍니다.

 

 

 

 

 

(61강) 삼상 23:1-14 나의 피난처는


<본문>

 

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블레셋 사람이 그일라를 쳐서 그 타작 마당을 탈취하더이다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다윗의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렵거든 하물며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치는 일이리이까 다윗이 여호와께 다시 묻자온대 여호와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일어나 그일라로 내려가라 내가 블레셋 사람을 네 손에 붙이리라 하신지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워 그들을 크게 도륙하고 그들의 가축을 끌어오니라 다윗이 이와 같이 그일라 거민을 구원하니라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그일라 다윗에게로 도망할 때에 손에 에봇을 가지고 내려왔었더라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로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도다 그가 문과 문빗장이 있는 성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 사울이 모든 백성을 군사로 불러 모으고 그일라로 내려가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려 하더니 다윗이 사울의 자기를 해하려 하는 계교를 알고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에봇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고 다윗이 가로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의 연고로 이 성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주의 종의 들은 대로 사울이 내려오겠나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주의 종에게 일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가 내려오리라 다윗이 가로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들이 너를 붙이리라 다윗과 그의 사람 육백 명 가량이 일어나 그일라를 떠나서 갈 수 있는 곳으로 갔더니 다윗이 그일라에서 피한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기를 그치니라 다윗이 황무지 요새에도 있었고 또 십 황무지 산골에도 유하였으므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시니라(삼상23:1-14)

 

 

 

 

<설교>

 

여러분은 ‘하늘이 나를 돕는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드라마를 보면(주로 사극의 경우에 많음) 어떤 일을 꾀하고 그 일을 추진할 때 자신들의 계획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상황이 전개되면 ‘하늘이 우리를 돕는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쫓아내고자 계획을 세우는데 그가 쫓겨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지면 ‘하늘이 우리를 돕는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경우에 하나님이 나를 돕는다, 또는 하나님은 내 편이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까? 사실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모두 자기 주관적이고 극히 자기중심적입니다. 자신의 일이 잘되면 그것으로 하나님이 내 편이고 나를 돕는다는 생각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누군가와 경쟁적 관계에 있을 때 그 사람보다 나에게 더욱 유리한 상황으로 형성될 때 어김없이 하나님은 저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돕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러한 생각에 큰 모순이 자리하고 있음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을 자기 주관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은 내게 있어서 내편이었다가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사람의 편이 되어버리는 극히 믿을 수 없는 신으로 전락되어 버린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평생토록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전개된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내게 유리한 상황이 되었다가도 불리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 인생임을 생각한다면 결국 하나님은 내편이었다가 내편이 아닌 그런 분이 되어버릴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나 일을 두고 하나님을 내 편으로 생각하거나 나를 도우신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상태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은 누구의 편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은석교회의 편도 아니고 다른 교회의 편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교회의 편이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도우시지만 그것 역시 여러분 편이기 때문에 여러분을 도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 세상에 든든한 피난처를 두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세상에 자기 피난처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세상에 든든한 피난처를 만들고 자신의 한 몸을 지키고 보호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세상 일이 잘될 때 하나님이 돕는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이 잘되다가 다시 잘못되는 경우에는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 보면 그러한 일이 등장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택한 사람인 다윗에게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블레셋이 그일라를 칩니다. 그일라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고 난 후에 여호수아에 의해 유다 지파에 할당된 지역입니다(수 15:44). 그리고 이곳은 당시 다윗이 몸을 피하고 있던 헤렛 수풀에서 약 9키로 정도 떨어져 있었던 지역으로 생각됩니다.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2절)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러자 다윗의 사람들이 우리가 유다에 있기도 두려운대 어떻게 그일라에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칠 수 있겠는가(3절)라며 반대의 의견을 제시합니다. 이에 다윗은 여호와께 다시 묻게 되고 여호와는 블레셋을 네 손에 붙일 것이라(4절)는 답을 하십니다. 그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을 쳐서 승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다윗의 일은 분명 잘 풀려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돕고 계시고 그 결과 사울에게 쫓기는 상황에 있는 다윗이 강대국인 블레셋을 쳐서 승리하는 결과를 얻은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들 하나님의 도우심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누가 봐도 하나님은 다윗 편에 계시고 다윗을 도우시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이 후에 등장합니다. 다윗이 그일라에 왔다는 것을 사울이 알게 됩니다. 그때 사울은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다’(7절)는 말을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내 편이시고 나를 돕는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지금 다윗이 자신의 손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는 것 때문입니다.

 

 

 

 

7절에 보면 사울은 “다윗이 그일라에 온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가로되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도다 그가 문과 문 빗장이 있는 성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라고 말합니다. 문과 문빗장이 있는 성이라는 것은 그일라가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임을 말해줍니다. 즉 그일라를 포위하면 다윗은 도망할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독 안에 갇힌 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이 이런 상황이 된 것을 보고 하나님이 다윗을 자신에게 붙이신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편이고 자기를 돕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한 무지한 인간의 자기 착각인 것입니다.

 

 

 

 

사울이 군사를 거느리고 그일라를 포위하려고 하자 다윗이 그것을 알고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에봇을 가져오라 하여 하나님께 묻기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사울이 나의 연고로 이 성을 멸하려고 그일라로 내려오기를 꾀한다 함을 주의 종이 분명히 들었나이다 그일라 사람들이 나를 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 주의 종의 들은대로 사울이 내려 오겠나이까”(10,11절)라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울이 내려 올 것이고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을 사울에게 붙일 것이라는 답을 하십니다. 그래서 결국 다윗은 사울을 피해서 그일라에서 빠져나와 도망을 치게 된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기까지 보면 하나님은 다윗을 돕고 계시고 분명 다윗 편에 계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이번 일로 인해 다윗에게 주어진 유익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분명 그일라로 가서 블레셋과 싸우라고 하셨는데, 결국 다시 그일라에서 도망을 치는 상황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다윗에게 남은 유익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그일라까지 가서 괜히 블레셋과 싸운 수고만 있을 뿐입니다, 이왕 다윗으로 하여금 그일라를 구원하게 하셨으면 하나님이 다윗을 도와서 사울이 그일라를 치지 못하도록 하심으로써 다윗을 편히 지내도록 하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일라에서 도망치는 상황이 되게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유익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렇게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고 있는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그일라에 침공한 블레셋을 치려고 하나님께 물은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일라를 돕기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저는 나중에 다윗이 하나님께 ‘그일라 사람들이 나와 내 사람들을 사울의 손에 붙이겠나이까’라고 물은 것에서 다윗은 그일라를 자신의 피난처로 삼고자 했다는 것으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그일라를 구해주면 그일라 사람들이 자신을 환영하고 자신의 편이 될 것이고 그렇다면 그일라에서 편히 지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으로 생각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이 그일라를 포위한다고 할 때 그일라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를 하나님께 물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이 다윗을 붙들어서 사울에게 내줄 것임을 말씀하자 그곳에서 도망을 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의 얘기는 그일라를 자기 피난처로 삼고자 했던 다윗에게 세상에는 피난처가 없음을 가르치기 위해서 그일라에서 일이 잘되게 하셨다가 결국 도망치게 하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여호와가 나의 피난처라는 말을 무수히 하고 있음을 아실 것입니다. 다윗은 “너희가 가난한 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  (시 14:6)라고 말하기도 하고 “나는 주의 힘을 노래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높이 부르오리니 주는 나의 산성이시며 나의 환난 날에 피난처심이니이다”(시59:16)라고 하고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62:6.7)고 말합니다.

 

 

 

 

하지만 다윗이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에 자신이 피할 곳을 만들어 주시는 분이라는 의미에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을 보면 오히려 하나님은 세상에 자기 피난처를 만들고자 하는 다윗에게 오히려 피난처를 없게 해버리시는 분이 아닙니까? 결국 다윗이 여호와를 피난처라고 고백하는 것은 세상에는 자신이 피할 곳이 없으며 또 피할 곳도 아님을 알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오로지 하나님만이 자신의 피난처가 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주어지는 모든 상황을 떠나서 하는 고백입니다. 즉 육신은 고달프고 쫓기고 쉴만한 곳이 없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가 되심으로 그 영혼이 쉼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세상에 우리의 피난처를 만들어 주기 위해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세상에 든든한 피난처를 만들어 주시는 분으로 이해를 해버립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내 편이고 나를 도우신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내 일을 잘되게 해주는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피난처로 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 대한 분명한 불신앙인 것입니다.

 

 

 

 

우리는 내 일이 잘되는 것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다윗의 일이 잘되었습니까? 그렇다면 다윗에게 하나님은 함께 하지 않으셨던 것입니까? 분명히 함께 하셨음에도 다윗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전개되지 않은 것은 다윗을 하나님만을 피난처로 삼고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하나님의 사람답게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고 함께 하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도우심과 함께 하심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소망을 여전히 세상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내 피난처를 마련하고자 하는 탐욕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내 영혼을 도우신다는 말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만 말하지 말고 영육 간에 도우시는 하나님을 말해줄 것을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영육 간에 도우시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하나님은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우상일 뿐입니다.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성경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성경이 중심이 아니라 내가 중심이 되어서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옳은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때문에 내 육신을 잘되게 도우시는 하나님이 진짜라는 생각에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야 말로 다른 하나님을 좇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일라가 다윗을 사울에게 붙일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도 세상의 속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윗으로 인해서 블레셋에서 구출 받은 그일라가 자신을 구원한 것이 다윗이 아니라 다윗을 세워 일하시는 하나님이었음을 바라보았다면 사울의 침공에도 다윗을 내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다윗에 대한 고마움만 있었기에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되자 다윗을 배반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세상이 어떻게 우리의 피난처가 되겠습니까?

 

 

 

 

모든 소망을 하늘에 두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세상에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 방식을 얼마든지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세상에 머물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일하십니다. 자기 백성을 세상에서 출애굽 시키기 위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마음이 하늘을 향하고 하늘만을 소망하는 것으로 기뻐하실 것입니다. 거듭 말합니다. 세상을 피난처로 삼지 마시고 하나님만을 피난처로 삼으십시오. 그 믿음이 여러분의 삶을 든든하게 할 것입니다.

 

 

 

 

 

(62강) 삼상 23:15-18 참된 교제


<본문>

 

다윗이 사울의 자기 생명을 찾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십 황무지 수풀에 있었더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로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 하니라 두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언약하고 다윗은 수풀에 거하고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삼상23:15-18)

 

 

 

 

<설교>

 

현대 교회는 친교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친교에 의해서 교회의 분위기가 판이하게 달라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친교가 활발하게 잘 이루어지는 교회는 뭔가 교회다운 분위기를 풍기고 그렇지 못한 교회는 소위 냉랭한 교회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친교에 큰 비중을 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친교의 명목으로 교회는 많은 행사들을 벌이기도 합니다. 체육대회나 야외 예배, 또는 여행 등이 교인들 간에 좋은 관계가 이루어지는 친교를 목적으로 하는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친교는 신자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 즉 그리스도안에서 형제된 신자가 서로 교제하는 친교는 교회에서 매우 중요한 것임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교제가 없는 교회는 사실 교회로서의 온전한 모습을 보일 수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현대 교회에서 말하는 친교에는 많은 오해들이 있습니다. 즉 신자들이 서로 한 자리에서 담소를 나누고 식사를 하는 것을 친교의 전부로 여기는 것이 오해인 것입니다. 흔히 ‘친교 식사’ ‘친교 시간’이라는 말을 하지만 이 말의 대부분은 단순한 사교적인 우정으로 전락한 말에 지나지 않음을 생각해 본다면, 현대 교회는 교회의 친교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은석교회도 예배를 마친 후 식사하는 시간을 가지고, 또 함께 어울리고 여기저기 다니는 경우가 많지만 그것을 가지고 은석교회는 친교가 잘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해입니다. 이러한 친교는 교회가 아니라도 세상의 모임에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관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서로 마음에 맞으면 어울리고 친해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서의 친교로 말하기에는 심히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신자가 서로를 알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서 서로 일체감을 갖기 위해서는 그런 시간도 필요하고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성별이나 연령과는 상관없이 누구나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사교적인 모임에서 신자들은 행복과 즐거움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즐거움을 고의로 단절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만 그러한 사교적인 모임으로 인한 즐거움과 행복을 교회로서의 친교의 전부로 여기는 것만큼은 잘못임을 알았으면 합니다. 사교적인 모임은 친교에 있어서 극히 작은 한가지 표현이고 모습일 뿐, 그것 자체가 친교는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의 친교는 좀 더 깊고 다른 차원에서 경험되어야 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참된 교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은혜와 믿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의 삶에서 겪는 기쁨과 슬픔을 서로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다른 형제에게 위로가 되어지고 힘이 되어질 때, 그것이야 말로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오직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만 존재하는 교제, 즉 친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참된 친교의 모습을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다윗이 그일라를 침략한 블레셋을 물리치고 그곳에 거하고 있을 때 그 사실을 알게 된 사울이 그일라로 내려오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안 다윗이 하나님께 그일라 사람들이 자신과 자신의 사람을 사울에게 붙일 것인가와 사울이 내려오겠는가에 대해 묻습니다. 하나님은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과 다윗의 사람을 사울에게 붙인다고 하시고 또 사울이 내려올 것이라고 답합니다. 할 수 없이 다윗은 그일라를 떠나 십 황무지 산골에 유하게 되고 사울은 매일 다윗을 찾아 다녔지만 찾지를 못하고 있을 때, 요나단이 십 황무지로 다윗을 찾아온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16절을 보면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로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계속 쫓기는 형편에 있습니다. 계속 되는 쫓기는 삶으로 인해 다윗은 피곤했을 것이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 역시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 다윗에게 요나단이 찾아와서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친교입니다. 그리고 현대 교회는 이러한 다윗과 요나단의 친교를 깊이 묵상하고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은석교회 역시 이들의 친교를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요나단은 어떻게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도록 도왔을까요? 17절에 보면 그 해답이 나와 있습니다.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 말라 내 부친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부친 사울도 안다 하니라”는 말이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한 것입니다.

 

 

 

 

요나단의 말은 단지 좋은 말로 위로해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비록 사울이 부친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이 택한 다윗을 핍박하는 것으로 이미 하나님의 대적이 되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대적인 사울을 분명 심판하시고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요나단은 바로 그 사실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을 위로하기 위해 꾸며댄 말도 아니고 속에도 없는 위선적인 말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네 다음이 된다’는 말 역시 다윗을 위로하기 위해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요나단은 하나님이 다윗을 택하셨기에 다윗을 왕으로 세울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사실 요나단의 입장에서는 다윗만 아니면 자신이 왕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같으면 얼마든지 그러한 쪽으로 생각이 되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생각에서 나오는 것은 미움과 분노와 시기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이미 상대방을 죽인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의 생각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만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설사 다윗이 없었다할지라도 하나님이 자신을 택하여 일하셨을 것이 아님을 안다면 ‘다윗만 없었다면’이라는 생각은 전혀 불필요했을 것입니다.

 

 

 

 

다윗이 요나단의 말에 의해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요나단의 말이 있기 전에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계속되는 쫓김과 열약한 상황, 그리고 죽음의 위기에서 낙심이 되고 마음이 흔들릴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요나단의 말이 다윗으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도록 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나단과 다윗이 보여주는 신자의 교제인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이들은 다시 언약하고 다윗은 계속 수풀에 거하고 요나단은 집으로 돌아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후에 이들은 서로 만나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것으로 그들의 교제는 끊어진 것입니까? 신자의 교제를 만남과 사교적인 모임, 사귐에 그 의미를 둔다면 요나단과 다윗의 교제는 끊어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신자의 교제를 그리스도안에서의 교통으로 본다면 이들의 교제는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단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 다윗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서로 일치되어 있고 같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믿고 의지하고 살아간다면 몸은 만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교제는 계속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추구해야 할 교제는 바로 이들, 요나단과 다윗의 교제인 것입니다.

 

 

 

 

이들의 교제는 돈을 나누는 것도 아니고, 음식을 나누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함께 나누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교제입니다. 음식을 나누고 돈을 나눈다고 해서 그것으로 형제로 하여금 힘있게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지를 못합니다. 사람은 돈을 나누면서 마음이 상할 수 있고, 음식을 나누다가 다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참된 친교는 그리스도에 대한 귀한 믿음을 서로 나누는 것입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교제는 18장에서 시작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와 사울에게 섰을 때,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요나단은 왕의 아들이고, 다윗은 작은 마을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일 뿐입니다. 즉 신분상으로 본다면 다윗을 친구로 삼아도 요나단에게는 전혀 득이 될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다윗과 어떻게 마음이 연락될 수 있습니까? 마음이 연락된다는 것은 마음이 서로 통했다는 뜻입니다. 과연 무엇이 이들을 마음을 서로 통하게 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것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봤습니다. 그러기에 다윗과 마음이 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요나단의 중심에도 역시 하나님이 존재하셨음을 뜻합니다. 다윗이 아무리 믿음이 있다 해도, 만약 요나단이 하나님께 관심이 없었다면 이들의 교제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들의 교제와 사귐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서로의 마음이 일치되었기에 마음의 교통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은혜를 벗어나서 인간의 친목도모와 사귐은 모두 참된 교제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즉 교회는 인간의 친목을 목적으로 하는 모임의 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 교회가 교인들끼리의 친목을 도모하고 사귐을 통해서 교회를 굳건히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단지 자신의 교회를 인간의 단합과 일치를 통해 굳게 하려는 불신앙에 지나지 않음을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현대교회는 친목과 사귐을 통해 교인들에게 교회의 즐거움과 행복을 제공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 교회에 오면 다른 교회에서는 맛볼 수 없는 즐거움이 있다’는 것을 제시함으로써 사람을 끌어당기고 붙들려는 것이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나누기 위한 목적은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친목도모와 사귐을 통해 교회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할 때 ‘우리 교회는 사랑이 넘친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사랑은 요나단과 다윗의 관계에서 찾아야 합니다. 참된 사랑과 교제는 지체로 하여금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하도록 돕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굳건히 서 있지 않으면 이뤄질 수 없는 관계임을 알아야 합니다.

 

 

 

 

참된 교제는 그리스도안에서 서로의 믿음을 나누는 것입니다. 즉 동일한 본질의 믿음에 함께 거하고 같은 거룩함을 추구하며 같은 소망으로 서로 짐을 나눠지고 그리스도로 함께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교제의 관계에 있는가를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참된 교제를 방해하는 것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으로 지체를 대하지 않는 내가 곧 교제를 방해하는 훼방꾼이며 교회를 허무는 악한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상대방은 그리스도가 중심이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에만 마음을 두고자 하는데, 정작 나는 그리스보다는 세상에 마음에 둘 때 마음의 연락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결국 세상을 탐하는 내가 성도의 교제를 방해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도의 교제와 친목은 다릅니다. 물론 친목을 도모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중심으로 하여 마음이 서로 연락하는 것에 대한 관심보다는 친목에 열중하고 그것으로 즐거움과 기쁨을 삼는다면 결코 교제가 이루어지는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신자는 서로에게 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형제로 하여금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도록 돕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도움은 내가 믿고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형편과 고통을 받는 형제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말해줄 때 그 형제는 자신의 힘든 형편에서 다시금 하나님을 굳게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서로가 한 분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바라보며 한 소망으로 살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의 관계에 있음이 확인되는 것입니다. 교제가 없는 교회는 교회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교제는 참된 교제여야 합니다. 세상에서 볼 수 없는 교제가 교회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제는 참된 교회의 본질에서만 나타나는 신자의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은석교회는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이 일치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모아져야 합니다. 모든 소망이 하나님 나라를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직 믿음에 굳건히 서 있는 여러분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향한 일치된 마음으로 모일 때 우리는 이미 서로 마음이 교통하는 관계에 있으며 참된 교제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함께 식사하지 않고, 함께 담소하지 않고, 함께 어울리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미 교제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함께 하는 자리를 소홀히 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가 함께 할 때 서로 얘기할 수 있고, 서로 얘기하면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것이며, 낙심하고 나약한 지체는 하나님을 힘있게 의지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제부터 은석교회는 이 일을 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함께 어울리고 친목을 도모하는 것에서의 기쁨과 즐거움만을 생각하지 마시고, 함께 한분 그리스도를 믿고 한 소망과 한 마음으로 모이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관계는 여러분 한분 한분이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두고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며 살아갈 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하시고 만나시면, 누군가를 시기할 이유도 미워할 것도 없습니다. 지금의 나로 존재하는 것도 은혜임을 안다면 누군가가 나보다 낫다고 해서 그를 시기하지는 않을 것이 아닙니까?

 

 

 

 

요나단이 다윗에게 나는 네 다음이 된다고 말하는 것을 다시 깊이 생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분명 단순한 우정이 아닙니다. 상대방이 나보다 훨씬 뛰어나게 되어질 때는 우정도 깨어지는 것이 인간관계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모든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하나님이 정하신 일임을 굳게 믿는다면 요나단과 같은 모습이 보여질 것입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교제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한 소망으로 살아감으로써 우리들의 모임인 은석교회에서 그 흔적이 보여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63강) 삼상 23:19-29 셀라 하마느곳


<본문>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가로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편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하온즉 왕은 내려오시기를 원하시는 대로 내려오소서 그를 왕의 손에 붙일 것이 우리의 의무니이다 사울이 가로되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혹이 내게 말하기를 그가 심히 공교히 행동한다 하나니 너희는 가서 더 자세히 살펴서 그가 어디 은적하였으며 누가 거기서 그를 보았는지 알아보고 그가 숨어 있는 모든 곳을 탐지하고 실상을 내게 회보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리니 그가 이 땅에 있으면 유다 천천인 중에서 그를 찾아내리라 그들이 일어나 사울보다 먼저 십으로 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광야 남편 마온 황무지 아라바에 있더니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찾으러 온 것을 혹이 다윗에게 고하매 이에 다윗이 바위로 내려 마온 황무지에 있더니 사울이 듣고 마온 황무지로 다윗을 따라가서는 사울이 산 이편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편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 사자가 사울에게 와서 가로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이에 사울이 다윗 쫓기를 그치고 돌아와서 블레셋 사람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거하니라(삼상 23:19-29)

 

 

 

 

<본문>

 

믿음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이며 현실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자 하는 것은 이론을 축적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인생의 확실한 길을 발견하고 그 길을 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지식으로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증거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배운 말씀 그대로 산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필요하고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도와주시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말씀에 대해서는 너무 무능한 자임을 능히 자각할 수 있기에, 그리고 신자로서 걸어가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기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되는 것은 신자에게서만 볼 수 있는 당연한 모습입니다.

 

 

 

 

말씀이 지시하시는 신앙의 길을 걸어가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능력을 구하는 것은 이미 그 마음이 말씀에 붙들려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할 무능력한 자들입니다. 육신의 문제를 도와달라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이 아니라 신자로서 당연한 본문인 신앙의 길을 위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느 한순간도 우리의 힘으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삶의 중심이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에 있게 되면 구하는 것부터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육신의 어려운 문제들, 나의 편안함, 장래 문제, 이처럼 세상에서 안주하기 위해 하나님의 힘을 요구하는 기도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자입니다. 신자란 말 그대로 하나님을 신앙하고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다른 말로는 하나님의 사람이며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신자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고 있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나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위해 되어짐을 아는 사람이 신자입니다. 그래서 신자는 감히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부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자신의 존재성을 알기에 자기 유익을 위해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임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님은 무조건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일하신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천만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누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질서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까? 창세기의 천지창조는 이것을 명확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셨기에 사람을 피조물이라 부르고, 피조물이기에 나를 만드신 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세상의 질서이며 원칙인 것입니다. 이 질서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믿음이며, 순종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어떻게 일하시고 무엇을 위해 일하시는가를 알게 되면 자신의 삶에서 얼마든지 하나님을 보게 되고, 또한 어떤 삶과 상황에서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다윗에게 다시 위기가 닥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일라 사람들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해준 다윗은 사울이 그일라로 내려올 때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을 배신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피신하여 십 황무지로 갑니다.

 

 

 

 

저는 이 본문에서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시는 일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윗이 그일라 사람을 도와줬으니 다윗이 위기에 처할 때 그일라 사람들이 다윗을 도와주는 것이 마땅한대 오히려 자신들의 은인이라 할 수 있는 다윗을 배신할 것으로 말씀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다윗을 그 무엇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피난처로 삼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에게 또 다시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다윗이 그일라에서 십 황무지에 피신해 있을 때 십 사람들이 사울에게 다윗에 대해 알려주는 것입니다. 19-20절의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가로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편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하온즉 왕은 내려오시기를 원하시는 대로 내려오소서 그를 왕의 손에 붙일 것이 우리의 의무니이다”는 말씀을 보면 십 사람들이 사울에게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능히 알 수 있습니다.

 

 

 

 

십 사람들이 다윗을 미워한 것은 아닙니다. 다윗과 아무런 관계도 없었지만 사울이 쫓는 다윗이 자기들 땅에 거한다는 것이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다윗을 사울에게 넘김으로써 사울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자기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으로 판단한 것입니다. 이들이 다윗을 왕의 손에 붙이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라고까지 말하는 것을 보면 이들의 아부의 정도를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힘과 권력에 대한 세상의 자세인 것입니다.

 

 

 

 

당시 다윗에게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택했다고 하지만 택함 받음으로서 주어진 혜택은 눈을 씻고 봐도 없습니다. 오히려 수차례 죽음의 위기에 처하는 고난의 삶만 계속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다윗을 가까이 한들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차라리 권력을 가진 사울에게 가까이 하는 것이 유익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은 이러한 자세로 살아갑니다.

 

 

 

 

여러분, 혹시 신앙에 대한 시각도 이와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택하여 신자 되게 하셨다고 하지만 택함 받고 신자된 유익이 무엇입니까? 물론 말로는 천국을 가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혹 세상의 유익을 더 원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세상에서 별 쓸모도 없는 신앙에 대해 우리조차도 무관심해지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은 예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대통령이나 장관 등 권력을 가진 사람들을 알게 되고 그들과 매우 잘 아는 관계가 되는 것을 원합니까? 세상을 살아가는데 쓸모 있는 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딱 하나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하늘나라는 오직 그리스도로만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다윗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하였는데 왜 계속 고난 속에 있게 하시는 것입니까? 단순히 사울에게 쫓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배신도 당하게 하면서 세상의 쓴맛을 다 보여주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다윗을 철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세상에는 의지할 것이 전혀 없음을 스스로 겪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에게 배신을 당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친했던 사람이 자신에게 등을 돌린 경험이 있습니까? 그런 일이 있을 때 대개 ‘사람은 믿을 것이 못된다’는 말을 합니다. 이 말에는 결국 믿을 것은 자신밖에 없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가까운 사람으로 인한 고통에서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임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어떤 모습에도 하나님은 등을 돌리지 않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임을 배우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사람으로 인해 고통을 받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십 사람과 사울은 다윗을 잡기 위해 철저한 계획을 세웁니다. 사울은 십 사람들에게 다윗이 숨어 있는 곳을 자세히 탐지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숨어 있는 곳을 에워싸고 잡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서 극적인 반전을 일으킵니다.

 

 

 

 

27절을 보면 “사자가 사울에게 와서 가로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이 땅을 침노하나이다”고 말합니다. 사울이 다윗을 거의 잡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사자가 사울에게 블레셋 사람이 쳐들어 온 것을 고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다윗을 쫓는 것을 그치고 서둘러 블레셋을 치기 위해 돌아갑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을 잡고자 했던 인간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이처럼 사울은 다윗을 잡고자 했으나 그 뜻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일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 주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사울은 하나님에 의해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에 의해 건짐을 받을 자로, 사울은 하나님에 의해 멸망을 받은 자로 구분되어 있는 것입니다.

 

 

 

 

28절에 보면 “이에 사울이 다윗 쫓기를 그치고 돌아와서 블레셋 사람을 치러갔으므로 그곳을 셀라 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고 말합니다. 셀라 하마느곳은 ‘분리하는 바위’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을 분리했다는 것입니까? 바로 다윗과 사울을 분리한 하나님의 일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건짐 받을 자와 하나님이 치시는 자로 명확히 분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할지라도 다윗을 자기 손에 넣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하나님만을 피난처로 삼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아가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하나님은 사울을 도우시고 다윗을 버리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됨과 못됨의 기준을 환경과 소유라고 하는 세상의 시각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시각으로 볼 때 아무리 잘된 자라 할지라도 그가 멸망 받을 자에 지나지 않는다면 결코 잘됐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잘된 자는 오직 하나님께 붙들린 신자일 뿐입니다. 이것은 결코 환경과 소유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이 어떻게 끝나는지 그 끝을 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하나님을 믿는 신자를 현재의 환경과 소유와 형편을 떠나서 성공자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택하시고 붙드셔서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보면 고난 밖에 없습니다. 애매하게 쫓김을 당하며 죽음의 위기를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만이 피난처시고 의지할 분임을 배우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을 더욱 더 고난으로 밀어 넣으면서도 위기의 순간에 벗어날 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뜻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인과 악인은 뚜렷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건짐 받을 것이고 악인은 던져 버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보잘 것 없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존재한다 할지라도 승리의 눈길로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다움입니다.

 

 

 

 

믿음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이며 현실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학원에 모여서 하나님께 신앙에 대한 강의를 듣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도구 삼아서 가르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에 밀어 넣으시고 하나님만이 피난처임을 배우게 하십니다. 때로는 사람으로 인해 상처를 입고 배신을 당하는 일을 겪게 하시면서 의지할 분은 하나님뿐임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어떤 고난과 어려움에서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붙드시고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과 어려움들은 결국 나 자신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이 됨을 믿기에 낙심보다는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의 손에서 다윗을 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자는 이미 세상에서 건짐 받은 자입니다.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승리의 눈길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분하셨기 때문입니다.

 

 

 

 

 

(64강) 삼상 24:1-7 사울을 살려줌


<본문>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따르다가 돌아오매 혹이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더이다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길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그 발을 가리우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다윗의 사람들이 가로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삼상 24:1-7)

 

 

 

 

<설교>

 

지난 시간에는 ‘셀라하마느곳’(분리하는 바위)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비록 사울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노력을 하지만 다윗은 이미 하나님이 붙드시고 책임지고 계셨기 때문에 사울도 다윗의 생명만큼은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다윗은 택함 받은 자로 사울은 버림 받은 자로 구별되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이 사울에 의해 해를 입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이 쫓김을 받고 수많은 위기를 겪게 되는 것도 결국 다윗의 신앙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블레셋을 치기 위해 발길을 돌렸던 사울이 다시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1절에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따르다가 돌아오매 혹이 그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더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사울이 블레셋을 치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다윗을 잡기 위해 돌아왔다는 것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블레셋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돌아온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다시 돌아왔을 때 누군가가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음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사울은 삼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을 잡기 위해 갑니다. 그리고 3절을 보면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르렀을 때 굴이 있는데 사울은 그 발을 가리우러 들어갔다고 말합니다. 발을 가리우러 들어갔다는 것은, 어떤 사람은 사울이 휴식을 취하기 위해 즉 잠을 자기 위해 들어갔다고 해석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용변을 보기 위해 들어간 것을 표현하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용변을 보기 위해 쭈그려 앉을 때 긴 옷이 그 발을 가리기 때문에 그러한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들어간 굴의 깊숙한 곳에는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거하고 있었습니다. 사울은 그것을 미처 알지 못하고 단지 굴이 있기에 용변을 보기 위해 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천재일우의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다윗 입장이라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쫓아다니는 다윗의 원수입니다. 그러한 사람이 지금 자기 앞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생리현상을 해결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울을 뒤에서 가만히 공격하면 사울을 죽이기는 쉬울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만 죽으면 자신의 고난도 끝날 것이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서 편안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분명 하나님이 준 기회로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의 사람들도 말하기를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4절)라고 합니다. 다윗이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은 누구에게나 동일할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과 연계하여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면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이 주신 기회 등등으로 이해를 하고, 불리한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으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아마 다윗의 사람들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두의 공통적인 좁은 소견일 수밖에 없습니다. 항상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사는 사람들에게서 다른 이해와 생각이 나온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은 내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편으로 여기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에서 찾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편을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위해 일하시는 분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다윗은 같은 상황에서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4절 마지막 부분을 보면 다윗이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벱니다. 사울을 잠을 자고 있는 것도 아닌데 겉옷자락을 몰래 벨 수 있었다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상황이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아니합니다. 오히려 사울의 옷자락 벤 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찔렸습니다(5절).

 

 

 

 

알다시피 사울은 다윗의 원수입니다. 사울만 죽으면 편안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지금 다윗의 수중에 있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그러한 사울을 죽이기는커녕 옷자락을 벤 것을 가지고도 마음이 찔린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마음은 과연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입니까? 오늘은 다윗에게서 이것을 배우고자 합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않고 옷자락을 벤 것으로 인해서조차 마음이 찔려 하는 이유는 6절의 “자기 사람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습니다. 즉 사울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종이라는 이것이 사울을 죽일 수 없게 하는 이유였던 것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신약의 입장에서 살펴본다면 메시야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울에게서는 그러한 의미보다는 다른 의미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기름 부음은 메시아란 의미와 함께 구별된 자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구별하여 세웠다는 의미로 기름을 붓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다윗이 사울을 기름 부음 받은 자로 보고 죽이지 않은 것은, 사울을 하나님이 쓰시기 위해 구별하여 세운 자로 봤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이 쓰시는 자를 자신이 해할 수 없다는 것이 다윗의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결코 사울이 뛰어난 신분이거나 귀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미 사울은 하나님에 의해 버림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존재성을 의미하는 것이지 사울을 다윗에게 붙이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좋은 기회’ ‘유리한 상황’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증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좋은 기회니까 분명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은 자기중심과 자기 입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물일 뿐입니다. 그 어떤 상황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원리를 대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상황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로 남겨지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유리한 상황이든 불리한 상황이든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발생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배우게 하는 수단이며 도구일 뿐이지 유리한 상황 자체를 하나님의 뜻으로 베푸시지는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현재의 상황이 나에게 불리한 것이든 유리한 것이든 우리는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합니까? 중요한 것은 다윗의 시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다윗의 개인적인 입장에서 사울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라는 입장에서 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별하여 쓰시는 사람이라는 것이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을 해할 수 없는 행동으로 나아가게 한 것입니다.

 

 

 

 

4절의 다윗의 사람들이 한 말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말씀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사울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한 말씀이 있었다면 누구나 사울이 다윗이 숨어 있는 굴에 들어온 것을 하나님이 사울을 다윗에게 붙이신 것으로 여기지 않겠습니까?

 

 

 

 

물론 사울을 다윗이 숨어 있는 굴로 들어가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따라서 사울을 다윗에게 붙였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울을 다윗에게 붙였다고 해서 다윗이 죽여도 된다는 것은 없었습니다. 4절의 말대로 한다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선한 대로 행하라고 하셨을 뿐입니다. 즉 다윗이 생각하기에 옳은 대로 행하라는 다윗에 대한 시험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험에서 다윗이 보기에 선한 것은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를 죽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이 세우신 자이기 때문에 자기 멋대로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이 다윗에게는 선한 것이었습니다.

 

 

 

 

신자의 행동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결정되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행동을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나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를 생각하기 전에 하나님 중심인가 내 중심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록 나에게 불리한 길이라 할지라도 말씀이 지시하는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다윗이 무엇 때문에 사울을 살려 줬는가를 깊이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시각이 오늘 우리의 시각이 되어야 함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현재를 어떤 시각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를 돌아보십시오. 분명 다윗의 사람들이 다윗에게 한 말 그대로의 입장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나에게 유리한 상황을 하나님의 인도라 여기며 내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 기대는 것에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누군가에 대해 보복하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해를 입히고 불리하게 했다면 그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음을 먼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에 그러한 생각으로 나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가르치고 시험하시기 위해 세우신 하나님의 도구이기에 내가 그에게 보복할 수 없음을 생각하고 그것을 선한 것으로 여긴다면 그런 생각에 머무는 그 분이야 말로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신자라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19절에 보면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합니다.

 

 

 

 

친히 원수를 갚지 말라는 것은 원수 갚는 권세는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해야 할 일은 다만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는 길에 행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원수라 할지라도 신자가 행해야 할 바는 정해져 있습니다. 대상은 내가 스스로 구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악에게 악으로 대항하는 것이 악에게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선한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고 다만 그 길로만 가는 것입니다.

 

 

 

 

 

(65강) 삼상 24:8-22 다윗과 사울의 다른점


<본문>

 

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가로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사울에게 이르되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붙이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혹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치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였나이다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판결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신원하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가로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내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붙이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사람이 그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날 내게 행한 일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비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라 다윗이 사울에게 맹세하매 사울은 집으로 돌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요새로 올라가니라(사무엘상 24:8-22)

 

 

 

 

<설교>

 

오늘 설교의 주제는 ‘다윗과 사울의 다른 점’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은 본문을 읽고 이 주제를 생각하면서 주제에 대한 답을 이미 나름대로 짐작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다윗과 사울의 다른 점은 본문에 명확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나 명확히 드러나 있는 사실 조차도 바라보는 시각여하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이해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저는 이 주제를 중심으로 말씀드리면서 신자가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신자에게 있을 수 있는 잘못된 이해와 사울식의 생각, 또한 우리에게 있는 허점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다윗과 사울의 다른 점은 인간의 상식선에서 생각하면 제가 다른 말씀을 드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이미 답은 내려져 있습니다. 알다시피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 다녔지만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놓아줍니다. 이러한 것에서 사울은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으로, 다윗은 원수를 은혜로 갚는 사람으로 보여지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과 사울의 다른 점은 뻔하지 않습니까? 결국 이 뻔한 답을 가지고 설교를 한다면 다윗처럼 ‘악을 선으로 갚는 사람이 되자’라든가, ‘원수도 사랑하자’라든가, ‘은혜를 베풀며 살자’라는 말을 하게 되지 않겠습니다. 물론 그 말 자체는 잘못된 것이 없지만 결국 주체가 인간으로 등장하게 되는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도덕과 윤리가 성경과 맞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도덕과 윤리의 주체는 인간입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변화하고 개혁하고 악한 것을 하나하나 극복함으로써 좀더 나은 인간이 되어가는 것이 도덕과 윤리의 주된 목표가 아니겠습니까?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에 대해 오해하는 것도 바로 이부분입니다. 본문처럼 성경이 위대한 인간의 선한 행위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그 사람을 본받아 선한 행위를 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질 것을 요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선한 행위를 하는 것 자체를 신자됨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기독교와 타종교의 구분과 차별이 사라지게 됩니다. 오늘날 ‘모든 종교는 추구하는 바가 같다’고 하면서 종교 일치를 주장하는 기독교인들도 주체를 인간에게 두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주장을 펼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것은 지극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며, 이처럼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신자다워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주체를 하나님께 두게 되면 전혀 다른 이해가 제기됩니다. 즉 전혀 다른 차원에서 다윗과 사울의 다른 점이 돌출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상식을 뒤 엎으면서 인생을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주체로 하는 것과 인간을 주체로 하는 것의 차이가 너무나 첨예하게 드러남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숨어 있는 굴에 들어온 사울을 죽임으로서 자신의 안위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포기하고 사울을 살려준 다윗은 사울이 굴에서 나가자 그 뒤에 서서 굴에서 벤 사울의 옷자락을 보여주며 왕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죽이지 않았음을 외칩니다. 자신은 이처럼 왕을 죽일 의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다윗이 왕을 해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12절)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과 사울의 사이에 여호와를 개입시킵니다. 의로우시고 천지를 주장하시고 다스리시는 여호와를 개입시킴으로서 자연스럽게 ‘판단은 여호와가 하신다’는 결론이 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다윗 스스로 사울을 악하다고 판단하고 그에게 보복을 했다면, 그것은 인생의 주체는 자기 자신임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인생에, 그리고 사울과의 관계에 여호와를 개입시킵니다. 그러자 자신은 뒤로 물러 나 있을 존재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보복도 판단도 자신의 몫이 아니고 자신의 할 일도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왕에게 보복하신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왕에게 보복하실 것이니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주체로 살아가는 인생이며 여호와가 개입되어 있는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굴에 들어온 사울을 보고 다윗의 사람들이 다윗에게 말했던 내용은 하나님이 사울을 다윗에게 붙이신 것이니 사울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곧 인간을 주체로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인간이 주체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을 이롭게 하고 일이 잘 풀리는 쪽으로 되어지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인생의 중심에 자신을 두고 있으며 하나님은 자신을 돕는 분으로 내 옆에 자리하시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주체로 하는 인생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즉 하나님이 주체자시기 때문에 인생에서 자신을 뒤로 물러 날 수밖에 없음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여호와께 맡기게 됩니다. 이것이야 말로 신자다운 모습이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살려준 것은 다윗의 인품이 훌륭해서도 아니고 성격이 좋아서도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울과의 일에 개입시켰습니다. 그러자 내려지는 결론은 ‘하나님이 판단하시고 보복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다윗은 판단자의 위치에 자신을 두지 않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선함이었습니다.

 

 

 

 

자기 인생에 하나님을 개입시켰을 때 내려지는 결론은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면 하나님이 알아서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설사 결과가 나에게 불리하게 되어진다 할지라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기에 모든 것이 나에게 선으로 남게 되어질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맡기며 살아가는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러한 믿음의 사람에 의해서 하나님이 세상에 증거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강한 모습이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갑니까? 인생에 하나님을 개입시키되 여전히 내가 주체가 되어 있고, 따라서 내 일을 유리하게 만들어 주고 도와주는 분이라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것이 다윗과의 다른 점입니다.

 

 

 

 

이처럼 사울을 죽이지 않는 다윗의 행위는 인격이나 윤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 믿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니 자신이 판단자로 보복자로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여기에는 자기 인생에 대한 또 다른 이해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내 인생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는 시각입니다. 이것은 신자에게는 매우 중요한 시각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일이 잘 되지 않고 실패할 때 분노하게 되고 원망하게 될 것입니다. 왜 분노하고 원망합니까? 그것은 내 것이 사라졌다는 것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생에 하나님을 개입시킨다면 그것은 내 것은 존재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나의 주인도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의 주인으로 행세했다면 그것은 내 스스로 하나님을 배척하는 자로 살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오신다면 주인 행세를 한 우리는 뒤로 물러나는 것이 옳습니다. 따라서 인생에 하나님을 개입시키는 것은 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하는 것이며 내 것은 없기에 잘되든 못되든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인생이 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믿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신자다운 모습에 존재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본분인 것입니다.

 

 

 

 

14절에 보면 다윗은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는 말을 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왕은 사울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사울은 누구를 따라 나온 것입니까? 사울이 따라 나온 자는 다윗입니다. 이렇게 볼 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는 말은 자기 자신을 죽은 개와 벼룩으로 비유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전혀 가치 없고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말하는면서 그러한 자신을 왕이 왜 쫓느냐는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을 죽은 개나 벼룩으로 보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가 아무것도 아님을 알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다윗이 사울에게 하는 말은 아무것도 아닌 자신을 쫓기보다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모든 주체를 하나님께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재판장이 되셔서 판단하시고 보복하실 것임을 알기에 자신이 복수자로 나서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하나님께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울은 어떻습니까? 다윗의 말을 들은 사울은 울면서 말하기를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17절)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을 보면 사울이 자신의 잘못에 대해 뉘우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울면서 말할 정도라면 그렇게 보여지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사울은 다윗의 말에 의해서 일시적으로 감정의 변화를 보임으로써 운 것일 뿐이지 자신의 악에 대해 깨달은 울음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울면서 다윗을 자기보다 의롭다고 말한 사울은 나중에 또 다시 다윗을 죽이려고 달려들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울음이 일시적인 감정의 변화라는 것은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는 말에서 드러납니다. 사울은 너는 의롭고 나는 악하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의롭다는 말을 합니다. 이 두 말은 그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나보다 의롭다는 말은 다윗이 자신보다 조금 낫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데 다윗은 자신을 살려준 것에서 다윗이 자기보다 더 관대한 성품을 가진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을 주체로 하여 인간을 서로 비교하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을 비교할 때는, 서로의 행동이나 성품 등을 비교함으로써 누가 좀 더 나은 사람인가로 판별합니다. 행동이 좀 더 선하고, 성품이 좀 더 부드럽고 관대할 때 더 나은 인간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보다 낫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끝까지 자신의 죄인 됨을 보지 못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주체자로 했을 때 그 앞에서 인간은 죄인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은 성품이나 행동으로 구분되기 보다는 하나님을 아는가 모르는가로 구분되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19절에 보면 “사람이 그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날 내게 행한 일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합니다. 이 말 역시 다윗의 선한 행위에 대해 하나님이 갚으실 것이라는 말이지만, 사울은 여전히 자신을 보지 않고 있습니다. 다윗으로 인해서 드러나는 자신의 죄악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단지 자기보다 조금 착하게 보인 사람을 칭찬하는 정도에 불과할 뿐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칭찬하는 것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에게서 믿음을 봤다면 상대적으로 믿음이 없는 자신을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는 나보다 낫다’ 는 말을 하기 보다는 ‘너는 의롭고 나는 악하다’는 말을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사울은 자신에게 잘해준 다윗을 칭찬하는 것이 전부일 뿐입니다. 이것이 곧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있고 중심이 되어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 자신에게 잘해주면 고마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를 칭찬합니다. 의롭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칭찬하시고 의롭다 하시는 것은 사람에게 잘 대해주는 것이 기준이 아니라 인생의 주체를 하나님께 두고 살아가느냐가 기준이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울은 다윗이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나라가 다윗의 손에 견고히 설 것도 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비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라”(21절)고 말합니다. 이 말 역시 끝까지 자기 집안을 보존하고자 하는 욕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은 전혀 보지 않고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집착만을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다윗과 사울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습니까? 이들의 다른 점은 성품 차이가 아닙니다. 사울은 성품적인 면에서 다윗이 자신보다 낫다는 말을 했지만, 이들의 다른 점은 하나님을 주체자로 하는 것과 인간을 주체자로 하는 것의 차이였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은 뒤로 물러나는 것과 끝까지 자기 것을 지키고자 하는 집착의 다른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보는 것과 하나님보다는 인간을 보고 있는 차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주인이시고 왕이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분이 책임지고 계십니다. 때문에 우리가 책임져야 할 부분은 없습니다. 우린 다만 어떤 일에서든 주인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나의 주인 되시는 분을 세상에 알리고 증거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자는 바로 그러한 역할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역할에 충실한 자가 곧 하나님의 백성이고 쓸모 있는 신자인 것입니다.

 

 

 

 

 

(66강) 삼상 25:2-13 다윗과 나발


<본문>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이요 염소가 일천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 양털을 깎고 있었으니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 그는 갈멜 족속이었더라 다윗이 광야에 있어서 나발이 자기 양털을 깎는다 함을 들은지라 다윗이 이에 열 소년을 보내며 그 소년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갈멜로 올라가 나발에게 이르러 내 이름으로 그에게 문안하고 이같이 그 부하게 사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평강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네게 양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상치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 네 소년들에게 물으면 그들이 네게 고하리라 그런즉 내 소년들로 네게 은혜를 얻게 하라 우리가 좋은 날에 왔은즉 네 손에 있는 대로 네 종들과 네 아들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하더라 하라 다윗의 소년들이 가서 다윗의 이름으로 이 모든 말을 나발에게 고하기를 마치매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이에 다윗의 소년들이 돌이켜 자기 길로 행하여 돌아와서 이 모든 말로 그에게 고하매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 각기 칼을 차매 다윗도 자기 칼을 차고 사백 명 가량은 데리고 올라가고 이백 명은 소유물 곁에 있게 하니라(사무엘상 25:2-13)

 

 

 


<설교>

 

제가 ‘교회가 신앙생활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몇 번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하시는지 모르겠는데 이 말은 교회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인해서 신앙생활 자체가 엉뚱한 쪽으로 나아가게 될 수 있음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교회는 신앙생활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가 신앙생활의 기준이 되어버리면 결국 예수님은 소외되어버리고 예수님 자리에 교회가 위치하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에 대해 어떻게 하느냐로 신앙의 정도를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신앙은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며 주님의 마음과 일치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신자란 교회를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동의하면서도 교회와 주님을 일직선상에서 생각함으로써 교회에 하는 것이 곧 주님께 하는 것이라는 해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이 무엇인가부터 새롭게 정립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존 상식에서 신앙을 이해할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신앙의 본질을 찾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다윗과 나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간단한 내용 같으면서도 생각하기에 따라 이해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본문의 이야기를 간단히 살펴보면, 마온에 나발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양 삼천 마리에 염소 이천 마리를 소유하고 있는 매우 부자였습니다. 이 사람이 양털을 깎을 때 다윗이 열 소년을 그에게 보내어 나발의 소유 중에 얼마를 나눠 받아 오라고 지시합니다. 물론 무작정 받아 오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7절에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상치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발의 목자들이 다윗과 함께 있음으로 인해서 하나도 잃은 것이 없이 보호를 받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즉 우리로 인해서 보호를 받았으니까 나발에게 있는 것 중에 얼마를 나눠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의 이러한 요구가 어떻게 생각하면 아주 무리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일단 나발이 다윗에게 보호를 요청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우리 때문에 너희가 보호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다윗의 일방적인 주장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나발의 목자들이 다윗의 사람들과 함께 있었지만 우리가 그들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그야말로 억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불량배가 근처 작은 가게를 찾아가서 ‘여기는 우리 구역인데 우리가 당신에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았으니까 그 보답으로 돈을 내놔라’고 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요구에 대해 나발은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10,11절)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나발의 반응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다윗을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다윗도 모르고 나발도 모르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나발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와서 ‘내가 당신에게 해코지를 안했으니까 그 보답으로 돈을 얼마 나눠달라’고 말한다면 ‘예 내가 당신 보호 때문에 살았습니다’라고 하면서 순순히 돈을 내놓겠습니까? 상대방의 협박이 두려워서 억지로 내어 놓는 것이 아닌 바에야 감사함으로 소유를 나눠주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나발의 반응을 극히 정당하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발의 반응에 대해 다윗은 어떻게 합니다. 13절에 보면 “다윗이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칼을 차라 각기 칼을 차매 다윗도 자기 칼을 차고 사백 명 가량은 데리고 올라가고 이백 명은 소유물 곁에 있게 하니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칼을 찬 사백 명의 사람을 데리고 나발에게 쳐들어가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행동을 과연 정당하다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깡패와 같은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의 것을 갈취 하는 행동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초점을 다윗의 잘못에 두고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은 살려주면서 소유를 나눠주지 않았다고 해서 나발을 쳐들어가는 것은 긍휼을 잃어버린 처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실 다윗의 입장에서 나발과 사울을 비교하면 나발보다는 사울이 더 큰 원수일 것입니다. 나발은 단지 소유를 조금 나눠 달라고 한 부탁을 거절했을 뿐이지만 사울은 다윗의 목숨을 노린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니 미워도 나발보다는 사울이 더 미운 것이 당연하고 분노를 해도 나발보다는 사울에 대한 것이 더 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울에 대해서는 죽을 기회가 있었음에도 살려주기까지 하면서 나발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공격을 하는 분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나발을 치는 다윗의 행위는 순간적으로 긍휼을 잃어버린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해석도 일리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저는 그것보다는 다른 의미에서 본문을 이해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7절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7절의 다윗의 말은 분명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억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나발의 목자들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구실 삼아서 재물을 요구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발에게는 터무니없는 말로 들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누구냐?’ 라는 말로 다윗을 철저히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바꾸어 생각하면 다윗의 사람들이 나발의 목자들을 해롭게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다윗의 사람들의 형편은 결코 좋은 편이 되지 못합니다. 쫓겨 다니는 입장이기 때문에 생계를 유지하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 형편에서 나발의 목자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은 것은 사실 감사할 일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나발이 지금 양털을 깎게 된 것은 다윗이 힘든 형편에서도 자기들의 목자에게 해를 입히지 않은 까닭이라는 말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현재 상황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는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만약 나발의 목자들에게 외부인이 침입을 해서 많은 해를 입히려고 할 때 다윗의 사람들이 나타나서 그들을 구해주고 재산을 보호해 줬다면 나발도 달리 반응 했을지도 모릅니다. 다윗의 도움을 받았다는 분명하고도 뚜렷한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사람들은 그냥 그들과 함께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부분입니다.

 

 

 

 

15-16절을 보면 “우리가 들에 있어 그들과 상종할 동안에 그 사람들이 우리를 매우 선대하였으므로 우리가 상하거나 잃은 것이 없었으니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한 소년이 나발의 아내인 아비가일에게 다윗이 나발을 치는 것에 대해 고하는 것인데 여기 이 소년은 아마 나발의 목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목자로 있을 때 다윗의 사람들이 어떻게 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년은 다윗이 자신들을 해하지 않은 것에 대해 선대했다고 말합니다. 그 덕분에 상하거나 잃은 것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마치 다윗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해하는 것이 당연한데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서 우리가 괜찮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또한 나발의 목자들이 양을 지키는 동안에 다윗의 사람이 함께 함으로써 우리에게 담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다윗의 사람들이 자신들과 함께 해준 것만으로도 자신들이 보호를 받은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나발의 목자들을 위해서 눈에 드러난 큰 도움을 준 것이 없다 할지라도 다윗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해하지 않고 함께 해준 것 자체가 크나큰 도우이며 보호하심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발은 이것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나발은 다윗이 실질적으로 눈에 뜨인 도움을 준 일이 없음을 상기했는지도 모릅니다. 즉 자신의 소유를 나눠줄 만한 가치 있는 일을 하지 않았음을 생각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이 함께 했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도 철저히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예수님에 대해 우리들의 생각과 연결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도우심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분명 많은 사람들은 주님의 도우심을 나발식으로 이해할 것입니다. 즉 실질적인 도움을 원하는 것입니다. 눈에 띄고, 사실적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도움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을 합니다. 하지만 그 말에 대해 실감하지를 못할 것입니다. 이유는 주님이 함께 하신다고 해도 그 표가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면 지금보다 더 나아져야 하고, 없던 돈도 생기면서 갈수록 풍족해지고 윤택해져야 되지 않느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어려움에서 당장 빠져 나오게 하는 실질적 도움을 원하고, 그러한 함께 하심을 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과연 우리가 주님에게 어떤 도움을 받아야 할 자격이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이 실질적인 도움을 주시기를 원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주님이 우리에게 해를 입히고 우리의 것을 빼앗는다고 해도 할말이 없는 입장에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해를 입히지 않으시고 함께 해주신다면 그것만으로도 주님이 우리를 선대하고 계셨음을 알아야 합니다. 더군다나 주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는 든든한 담으로 존재하셨던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간과한다면 우리는 나발식으로 주님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내가 받은 것이 없는데 뭐 내 놓겠는가라는 생각에 잠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이 2003년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곰곰이 한해를 돌아보십시오. 한 해 동안 주님에게 받은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도움으로 살았음을 몸으로 느끼십니까? 혹시 변함없이 그저 그렇게 살아온 한해였기에 주님이 함께 하셨음을 특별히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신자된 우리에게는 주님이 함께 하심 자체가 은혜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 순간도 그리스도를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함께 하신 덕분입니다. 일년 동안 살아온 모든 것이 주님이 함께 하신 덕분입니다. 일년 동안 아무 일 없이 살았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고마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발은 다윗이 함께 하지 않았어도 별 문제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선대하지 않은 것입니다.

 

 

 

 

아무 일 없이 평범하게 살았다고 해서 주님이 함께 하지 않았어도 이렇게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나마 그렇게 살아올 수 있었음을 생각하십시오. 오늘 당장 죽는다고 해도 할말이 없는 우리인데 지금 이처럼 살아있는 것만도 크신 은혜임을 생각하십시오, 그럴 때 내게 있는 것이 내 것이 아니며, 지금 나에게 소유된 것도 주님이 함께 하신 덕분이며 나를 선대하신 때문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이웃을 향해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향해 나누게 되는 것은 주님의 은혜를 아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지금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님을 절실히 깨달을 때 자연스럽게 나누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알고 주님과 동행하는 신앙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앙을 떠나서 단지 교회 일에 열심인 것을 내세워서 신앙으로 높이는 것이라면 잘못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나발은 완고하고 행사가 악한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나발이 마치 불량배 같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악함과 완고는 다른 차원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인간에 대한 도리와 규칙을 기준으로 해서 악함을 평가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을 기준해서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욱 의지하는 것을 완고함으로 말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을 악함으로 말합니다. 나발이 이런 사람이었기에 다윗의 함께 함을 무시해 버리는 것입니다. 다윗이 함께해주지 않았어도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함과 완고함이 우리에게도 있을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는 복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해하지 않으신다는 것 자체로 우린 이미 큰 은혜를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이 우리를 해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버립니다. 주에 대한 인식을 마치 성인군자라는 차원에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같이 사랑이 있으신 분이 어떻게 우리를 해하실 수 있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우리의 행사를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 하나 신앙에서 살아가는 것이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이 우리를 해하셔도 아무 할 말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주님이 해하기는커녕 우리의 담으로 반석으로 계십니다. 그 덕분에 지금의 내가 존재함을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 심지어 숨쉬는 것 하나까지 주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었습니까? 더 큰 어려움이 있어도 할 말이 없는 사람임을 생각하십시오. 감사함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함께 하신다는 그것만으로 신자는 든든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67강) 삼상 25:14:22 다윗의 분노


<본문>

 

소년 중 하나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고하여 가로되 다윗이 우리 주인에게 문안하러 광야에서 사자들을 보내었거늘 주인이 그들을 수욕하였나이다 우리가 들에 있어 그들과 상종할 동안에 그 사람들이 우리를 매우 선대하였으므로 우리가 상하거나 잃은 것이 없었으니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 그런즉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을 알아 생각하실지니 이는 다윗이 우리 주인과 주인의 온 집을 해하기로 결정하였음이니이다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 아비가일이 급히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 준비한 양 다섯과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이백을 취하여 나귀들에게 싣고 소년들에게 이르되 내 앞서 가라 나는 너희 뒤에 가리라 하고 그 남편 나발에게는 고하지 아니하니라 아비가일이 나귀를 타고 산 유벽한 곳으로 좇아 내려가더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자기에게로 마주 내려오는 것을 만나니라 다윗이 이미 말하기를 내가 이 자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도다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것 중 한 남자라도 아침까지 남겨 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사무엘상 25:14-22)

 

 

 

 

<설교>

 

의사가 병을 고치는 것은 그 사람의 재능이며 기술입니다. 때문에 스스로 고쳐본 경험이 있는 질병에 대해서는 자신있게 고칠 수 있다고 나설 수가 있습니다. 의사뿐만이 아니라 자동차 정비사, 건축가 등등 기술과 재능을 요하는 모든 분야에서는 인간이 경험하고 습득한 재능과 기술이 발휘되어서 모든 일을 성취하게 됩니다. 재능과 기술은 날마다 반복된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실수가 아닌 이상 어제는 할 수 있었던 일을 오늘은 하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어제 있었던 기술과 재능이 갑자기 사라져 버리면 모르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기술과 재능은 인간의 몸에 축척되는 것이기에 몸이 고장 나지 않는 이상 갑자기 사라진다거나 기술력을 잃어버리는 경우는 없을 것입니다. 만약 기술력이 사라졌다가 다시 생기는 성질의 것이라면 사회적으로는 큰 혼란이 발생하게 될 것이고 인간의 경험과 경력이라는 것도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기술과 재능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분명 경험이며 경력입니다. 1년간 환자를 돌본 의사와 10년간 환자를 돌본 의사의 기술력이 같을 수 없는 것처럼 기술은 경험 속에 쌓아져가는 것이고 따라서 세월이 흐르고 많은 경험을 할수록 실력 있는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술과 재능 경험과 경력 등등이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무의미한 분야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애당초 믿음은 우리의 실력이 아닙니다. 경험도 아니고 재능으로 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의 경험이 많다고 해서 실력 있는 신앙인이 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가령 누군가를 용서한 경험이 있다고 할 때, 그 경험이 실력이 되어서 다음에는 용서를 더 잘하는 사람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은 용서를 했는데 내일은 용서한 자신의 일을 잊어버리고 분노하고 미움만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인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신앙 경력과 경험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를 몇 년을 다녔다느냐는 것은 아무짝에도 필요 없는 질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를 들여다보면 믿음을 실력과 경험으로 오해한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출석한 사람보다는 십년 이십년 교회를 출석한 사람이 신앙에 있어서는 더 우위에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해 보면 신앙은 경험과 년 수로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의 경험과 출석 년 수로서 다른 사람과 차별을 두려고 하는 것을 지극히 삼가야 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도 이러한 점을 생각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다윗은 나발이 양털 깎는 날에 소년을 보내서 나발의 소유 중에 얼마를 줄 것을 요구합니다. 이 요구에 대해 나발은 철저히 무시해 버리고 결국 다윗은 분노하여 칼을 찬 사람 400명을 데리고 나발을 칠 계획을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계획을 나발의 소년 중 하나가 나발의 아내인 아비가일에게 고하게 되고 아비가일은 먹고 마실 것을 많이 준비하여(18절) 다윗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은 아비가일을 만났을 때 “내가 이 자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도다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것 중 한 남자라도 아침까지 남겨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은 나발과 나발에게 속한 모든 남자까지 한 사람도 남겨두지 않고 죽이겠다고 맹세까지 할 정도로 나발에 대해 분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나발에 대한 다윗의 분노를 대하면서 한가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나발보다 더 원수라고 할 수 있는 사울은 죽일 기회가 있었음에도 죽이지 않고 놓아주면서 나발에 대해서는 왜 이토록 분노하고 죽이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24:12절에서 다윗이 말한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라는 구절을 보면 다윗은 분명 판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보복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이 악하다면 그의 악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보복하실 것이기에 자신은 보복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이 왜 나발에 대해서는 친히 보복하기 위해 나서는 것입니까? 원수인 사울을 그냥 놓아준 다윗이라면 나발에 대해서도 판단하시고 보복하실 분은 여호와임을 알고 그분께 맡기는 것이 옳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나발에 대해서는 사울의 경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발을 치는 다윗의 행위가 정당한 것은 아닙니다. 25:33절의 “또 네 지혜를 칭찬할찌며 또 네게 복이 있을찌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는 구절을 보면 다윗은 자신의 행위가 정당치 못한 것임을 아비가일로 인해서 깨닫게 됩니다. 자신이 친히 복수할 뻔한 것을 아비가일이 막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친히 판단하시고 보수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다윗이 나발에게는 왜 친히 보수하려고 했을까요? 하나님이 친히 보수하신다고 하면서 사울을 놓아준 다윗의 믿음은 어떻게 된 것일까요? 이 점을 생각함으로써 믿음은 무엇이고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일단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믿음은 실력도 재능도 기술도 경험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쌓아가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어제 잘한 사람이라면 오늘도 잘할 것이고 어제 못한 사람은 오늘도 못할 것이라는 선입견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믿음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은혜입니다. 단 한번 주어진 것으로 충족되는 은혜가 아니라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라는 것입니다.

 

 

 

 

대개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믿음과 은혜의 관계입니다. 믿음을 은혜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을 보이지 않지만 은혜로 믿음이 주어졌다는 것에서 많은 오해가 발생합니다. 즉 은혜로 믿음이 주어졌기 때문에 믿음이 나에게 존재한다고 여김으로써 믿음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처음에는 은혜이지만 다음부터는 자신의 실력으로 등장해 버리는 것이 현대 교인들의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은혜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은혜가 아니면 한순간도 믿음에 머물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연약함이고 악함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조차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써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그가 나발에 대해서는 극도의 분노를 보이며, 나발에 속한 모든 남자들을 죽이기로 맹세까지 하는 악함을 보입니다. 단 한 번 모욕당한 것으로 인해 땅을 온통 피로 물들일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 생각은 분명 정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을 대했던 다윗의 성품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은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믿음에 거할 수 없음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사울을 죽이지 않고 놓아준 다윗의 믿음이 실력이었다면 나발에 대해서도 같은 실력이 나와야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실력이 아니었기 때문에 사울과 나발의 경우가 각기 다르게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다윗을 그토록 분노하게 했습니까? 사울과 나발을 두고 비교하자면 사울이 훨씬 더 다윗에게 악행을 저지른 사람입니다. 나발은 한번 다윗을 모욕한 것으로 그치지만 사울은 계속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녔습니다. 한 사람은 자신을 죽이려 하는 원수고 다른 한 사람은 단순히 자신을 무시하여 자존심을 상하게 한 사람일 뿐입니다. 누가 봐도 나발보다는 사울에게 더 분노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수하신다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분노하는 이유는 다윗이 나발에게는 뭔가를 기대했다는 것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자신을 잘 대해주기를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적대감을 가지고 자기를 죽이기 위해 쫓아다니는 사울에게 익숙해져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울에 대해서 어떤 선도 기대하지 않은 이상 사울이 어떻게 대하든 분노가 일어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의 적대감에서도 하나님이 보수하심을 생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나발의 경우는 다릅니다. 21절의 “다윗이 이미 말하기를 내가 이 자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도다”는 말을 보면 다윗은 나발이 자신을 우호적으로 대할 것을 기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덕분에 나발의 소유가 온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발이 자신의 은혜를 알고 자기 요구에 우호적으로 대할 것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기대가 무너지고 오히려 무시함을 당했을 때의 분노는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러한 경우가 없습니까? 평소 자신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고 험담을 자주 하는 사람이 자신을 욕하는 경우 자기 마음을 조금만 추스르면 얼마든지 너그러움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 사람에 대한 기대가 없었기 때문에 쉬운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절친한 사람이거나 평소 도움을 많이 주었던 사람이 자신에 대해 험담을 하거나 욕을 하고 다니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분명 사이가 나쁜 사람에 대해서보다 더 큰 분노가 일어날 것입니다. 저 사람은 나에게 좋게 대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더 큰 상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줬다 할지라도 ‘내가 저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잘 대해줬으니까 저 사람도 나를 선하게 대할 것이다’라는 기대는 갖지 않는 것이 지혜인 것입니다. 때문에 누군가를 도왔다 할지라도 ‘주님의 은혜가 나를 행하게 한 것뿐이다’라는 생각에 머물 뿐, ‘내가 저 사람을 도왔다’는 생각에까지 나아가지 않도록 자신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저 사람을 도왔다’라는 생각이 ‘저 사람은 나에게 우호적으로 대해야 한다’라는 기대를 갖게 하고 그러한 기대가 결국 어느 순간에 배신감과 분노를 가져오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배신감과 분노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이나 말씀에 따라 행동하는 것에 걸림돌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를 짓지 말라는 뜻으로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신자는 반복되는 믿음의 실패에서 자신을 지켜주실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함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날마다 경험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아니면 존재할 수 없음을 자신의 죄악으로부터 발견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자신의 실력으로는 한발자국도 믿음을 행해 나아갈 수 없음을 발견하는 것이 은혜이며 믿음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발에 대한 다윗의 분노에 대해 의아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울을 놓아준 다윗이 왜 나발에게 분노할까?’라는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애당초 사울을 놓아준 것은 다윗의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믿음은 실력이 아님을 알아야 하고, 과거의 성공이 미래의 실패를 막아주지 못하며, 과거에 잘했다고 해서 미래에도 잘한다는 보장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를 말한 사람이 곧 이어 죄악에 머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때 나타나는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원수보다는 친구에게서 더 많은 것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이 기대가 서로를 미워하는 관계가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서로 뭔가를 기대하고 만나는 관계가 아니라 은혜를 나누기 위해 만날 뿐입니다. 뭔가 베풀었다면 그 심령에 손길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한 결과임을 먼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행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십시오. 나 역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존재임을 날마다 되새기며 살아가십시오. 사실 조그만 일에서도 마음이 토라지고 분노하고 다투는 우리의 실체를 생각하면 부끄러울 수밖에 없지 않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의 은혜가 참으로 크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2004년 한해가 시작됩니다. 올 한해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날마다 그리스도안에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머무는 것입니다.

 

 

 

 

 

(68강) 삼상 25:23-31 아비가일의 신앙


<본문>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의 앞에 엎드려 그 얼굴을 땅에 대니라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가로되 내 주여 청컨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으로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의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여종이 내 주에게 가져온 이 예물로 내 주를 좇는 이 소년들에게 주게 하시고 주의 여종의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때에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수하셨다든지 함을 인하여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신 때에 원컨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사무엘상 25:23-31)

 

 

 

 

<설교>

 

지난 시간에 원수인 사울은 살려준 다윗이 요구한 것을 주지 않고 다윗을 무시하는 나발에 대해서는 복수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서 신앙은 실력이 아님을 말씀드렸습니다. 사울을 살려준 것이 다윗의 실력이었다면 나발에 대해서도 같은 행동이 나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제의 신앙이 오늘 여러분에게 승리하게 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과거의 신앙을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항상 현재를 돌아보면서 과거에 나를 다스리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다스리심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안다고 해도 그것은 여러분의 실력이 될 수 없습니다. 다만 알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한 덕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알고 그리스도를 알아갈수록 자신은 철저히 부인되어져 갈 뿐입니다. 신자란 자신을 드러내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고 내속에서 나를 다스리시는 그리스도를 드러내 보여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그리스도를 드러낼 그릇이며 도구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수시로 잊어버리고 삽니다. 설교를 듣고 배운 바대로 살아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고, 몰라서도 아닙니다. 설교를 들을 때는 ‘맞다’고 하면서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아야지’하면서 단단히 결심을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막상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히면 내 이익을 추구하는 본성이 앞서게 되고 손해보지 않으려는 탐욕만이 앞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에게 본문에 등장하는 아비가일은 귀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바칠 많은 것을 준비하여 다윗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다윗을 만나자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의 앞에 엎드려 그 얼굴을 땅에 대는 태도를 취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낮추는 반면 상대를 높이는 태도입니다. 아비가일이 다윗 앞에서 이러한 태도를 취한 것은 단순히 남편인 나발을 살리기 위해서, 즉 다윗의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취한 가식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을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의 왕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에 대한 태도가 나발과 아비가일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발은 다윗을 하나님이 택한 이스라엘의 왕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왕인 사울을 배반하고 도망쳐 다니는 반역자로 여겼습니다. 때문에 다윗의 요구를 묵살해 버린 것이고, 그런 다윗이 자신의 담이 되어서 소유가 지켜졌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윗을 힘있는 자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비가일은 다윗의 현재의 모습을 보고 그를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모습이 어떻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다윗을 택하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하나님은 다윗에게 함께 하고 계심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을 무시하고 분노케 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것은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하는 말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25절에서 아비가일은 남편 나발을 불량한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어리석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나발이라는 이름에 맞게 행동할 뿐이라고 하면서 나발을 무시하고 있는 듯한 말을 합니다. 이 역시 나발을 낮추고 욕함으로서 상대적으로 다윗의 분노를 풀어 보겠다는 의도로 하는 말로 이해하기 보다는 진심으로 나발을 어리석은 자로 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아비가일이 나발을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것은 아비가일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함께하고 계시는 다윗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나발이 다윗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보지 못한 것 자체를 어리석고 미련한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불량하다는 것 또한 행실이 나쁘다는 표현이기보다는 하나님이 택한 자를 무시하는 행위 자체를 불량한 것으로 여기는 말입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다윗에 대한 아비가일의 견해가 어떤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26절을 보면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구절 역시도 아비가일이 철저히 다윗을 기준으로 하여 모든 판단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그래도 그렇지 아비가일이 나발의 아내인데 어떻게 나발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마치 부부의 정이라고는 전혀 없는 듯한 모습을 아비가일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비가일이 나발을 사랑하였다면 나발에 대해 변명을 해주면서 어쨌든 나발을 용서해달라는 말을 하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 맞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비가일은 나발을 무시하고, 나발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것을 보면서 아비가일에 대한 의문이 들게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아비가일이 나발을 욕하고 결점을 드러내는 말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다윗은 아비가일을 칭찬합니다. 다윗이 아비가일을 칭찬했다는 것은 하나님 역시 아비가일의 행동을 기쁘게 여기셨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볼 때 아비가일이 과연 칭찬을 들을 만한 말과 행동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만약 아비가일의 말과 행동을 칭찬 받을만한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면, 결국 아내들이 여기저기서 남편의 결점을 드러내고 험담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까?

 

 

 

 

이러한 의문은 성경이 기록된 목적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이해할 때 해소될 수 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아내가 남편의 허물을 감싸주고 그냥 넘어가는 부부의 정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나타내는 것에 있습니다. 즉 나발과 아비가일을 통해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인가를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편에 대한 아비가일의 태도에 대해 의아심을 가지기 보다는 하나님이 결국 나발을 치시고 아비가일이 칭찬을 받고 다윗의 아내가 되는 일을 통해서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인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나발이 다윗의 분노를 사고 결국 하나님이 치심으로 죽게 되는 것은, 다윗이 함께 함으로써 자신의 소유가 보존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은 것에 있습니다. 나발은 자신의 힘을 믿었고 다윗 없이도 자신의 힘으로 얼마든지 스스로를 유지하고 지킬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함께 해준 것을 이유 삼아 뭔가를 요구하는 것을 무시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아비가일은 다윗을 인정합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았기에 다윗이 함께 한다는 것 자체가 힘이며 하나님의 지키심 아래 거하는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나발을 이름 그대로 어리석은 자로 말하는 것이고, 다윗을 무시하는 것을 하나님에게 함께 하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불량한 행위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비가일이 비록 나발을 불량하고 어리석은 사람으로 말하였지만, 나발을 철저히 무시하면서 그의 결점만 드러내고 죽어도 싸다는 식으로 대한 것이 아닙니다. 28절을 보면 “주의 여종의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말을 합니다.

 

 

 

 

사실 아비가일에게는 다윗에 대한 허물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비가일은 다윗이 소년들을 나발에게 보내었을 때 그것을 보지 못하고 나발이 다윗을 무시하게 된 것을 자신의 허물로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나발에게 충고하여 그런 일이 없게 하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발의 불량한 행위와 어리석음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아비가일의 모습입니다.

 

 

 

 

우린 이러한 아비가일의 모습에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여 사는 것이 어떤 것임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결점과 허물을 드러내는 일에는 부지런 하지만 다른 사람의 어리석음과 신앙 없음이 내 탓이라는 생각으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고 복음을 안다고 할 때,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 다른 사람의 허물을 지적하고 잘못됨을 드러내는 것은 하면서도 그 사람의 잘못됨이 바르게 알고 있는 내가 그에게 가르치지 못하고 전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는 생각에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 하나님의 긍휼을 제대로 아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결점과 허물을 드러내고 책망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형제의 미련함과 어리석음이 나 때문으로 여기면서 내게 허물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까? 진심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나발과 아비가일은 운명은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38절에 보면 하나님은 나발을 쳐서 죽게 합니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나발이 죽은 뒤에 다윗의 아내가 됩니다. 윤리적으로 본다면 남편이 죽은 뒤에 곧 바로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될 수 있는가라는 말이 나올 법도 하지만, 성경은 윤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닌 이상 세상의 윤리적 시각은 버리는 것이 옳습니다. 아비가일이 다윗의 아내가 되는 것은 과연 어떤 사람이 다윗과 함께 할 수 있는가를 가르치는 것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윗은 남편이 죽은 여인을 자기 아내로 삼아 버리는 모습으로만 비춰질 것입니다. 나발은 다윗을 다윗의 현재 처지만을 바라보면서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함께 하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다윗을 평가했습니다. 그 결과 다윗에 대해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게 된 것입니다.

 

 

 

 

29절에 보면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는 말을 합니다. 싸개라는 것은 값진 물건이나 금은보화를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싸개에 잘 싸서 묶어 두었던 고대의 풍습에 따른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다윗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안전하게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뜻의 말입니다. 반면에 다윗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던져 버리신다는 말로서 다윗의 생명과 원수들의 생명을 대조함으로써 다윗은 하나님에 의해 승리하게 될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다윗에게 함께 하심을 알았고 다윗이 하나님에 의해 그 생명이 보존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다윗을 선대하는 것이 곧 다윗과 함께 하는 것이고 다윗과 함께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복에 거하는 것임을 아비가일이 알았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비가일이 볼 때 다윗의 가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나발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생각하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다윗의 초라한 처지만을 봤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나발을 쳐서 죽이시고 아비가일은 칭찬을 듣고 다윗의 아내가 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나발이 아니라 아비가일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택하시고 예수님과 함께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 예수 그리스도를 선대하는 그가 곧 하나님으로부터 기뻐함을 입을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누구든 ‘나는 예수님을 선대하고 높인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예수님의 초라한 모습과 세상에서의 약자로서의 삶까지 선대하고 높이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니면 예수님 덕분에 내가 잘 될 것을 바라보고 예수를 찾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나발에 지나지 않습니다. 또한 신자는 약자를 바라보는 시각 역시 달라져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초라한 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극히 현실적인 판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신자를 대할 때는 그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시각을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자신을 절대로 강자로 여기지 마십시오. 물론 스스로 생각할 때 자신을 강자로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판단은 항상 상대적입니다. 나보다 덜 가지고 부족하게 보인 사람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강자 행세를 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여호와께서 주신 것임을 인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약자가 내 앞에 있을 때, 하나님이 그를 세워서 나를 가르치시고 책망하신다는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바른 신앙의 길을 갈 수 있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되어질 것입니다.

 

 

 

 

 

(69강) 삼상 25:32-35 다윗의 찬송


<본문>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나를 막아 너를 해하지 않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네가 급히 와서 나를 영접지 아니하였더면 밝는 아침에는 과연 나발에게 한 남자도 남겨 두지 아니하였으리라 다윗이 그가 가져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고 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평안히 올라가라 내가 네 말을 듣고 네 청을 허락하노라(사무엘상 25:32-35)

 

 

 

 

<설교>

 

우리는 신앙을 말하면서도 신앙의 참된 본질을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는 항상 이점에 대해 애타하면서 아쉬운 마음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놓치고 있으면서도 마치 신앙의 중심에 있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야 말로 스스로에게 속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사실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내 자신에 대해 속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눈치 챈다는 것이 무척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항상 자기편에 서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자신에 대해 무지하기 마련이고 자기의 오류와 잘못됨을 발견하기가 매우 힘든 것입니다. 이것을 돕기 위해 내 곁에 누군가를 보내시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을 오래 하셨거나 교회의 직분자들에게 더욱 크게 요구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년 수나 교회에서의 위치로 인해 자신에 대한 큰 착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1절에 보면 다윗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찬송은 곡조와 가사가 있는 노래를 부르는 식의 찬송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하신 일에 대한 기쁨과 감사를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찬송가를 불렀다고 해서 여호와를 찬송했다고 여기는 것은 잘못입니다. 찬송의 중심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 기뻐하고 감사하고 있는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무슨 일로 인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까? 먼저 지난 주일의 설교 내용은 나발을 치려는 다윗을 찾아가는 아비가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불량한 나발을 개의치 말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으로 다윗이 나발에게 친히 복수하는 일을 막으셨다는 말을 합니다(26절). 이러한 아비가일의 말로 인해서 다윗은 나발에게 친히 복수하는 것의 잘못됨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아비가일을 보내셔서 자신의 잘못됨을 막으시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우리는 다윗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해 주는 것과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 자로 살아가는 것의 차이가 명백함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께 ‘여러분의 배후에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고 여러분의 삶을 인도하고 계심을 믿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모두 다 ‘’라고 답할 것입니다. 적어도 여러분 스스로에 대해서는 그렇게 인정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살아계신 자로 살아가십니까?’라고 묻는다면 답하기를 주저할지도 모릅니다. 이것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는 자신이 있어 하면서도 삶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삶에 대해 자신만만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언제나 내가 믿는 말씀과는 전혀 다르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서 ‘인간은 연약하니까?’ ‘인간은 죄인이니까?’라는 말로서 현재의 잘못된 모습을 정당화 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말 한마디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처럼 여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죄인이라는 신자의 고백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죄인이라 하면서 죄인의 모습이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용어로 자신을 치장하는 것만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죄인이 아닙니다. 진정한 죄인의 모습은 삶에서 분명히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인간관계에서 죄인의 모습은 두드러집니다. 사람을 대하는 것에서 그가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지 아니면 단지 입술의 죄인일 뿐인지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수준 높은 윤리적인 삶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믿음으로 인하여 뭔가 달라지는 모습이 보여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믿음의 자연적 결과로 보여지는 열매인 것이지 신자가 목표로 삼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신자의 삶의 목표는 하나도 둘도 셋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인간은 연약하다는 것으로 현재의 잘못을 정당화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말로서 자기의 잘못된 것에 대해 지적 받기를 회피하려고 하지 마시고 방패로 삼지도 마십시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 앞에 죄인된 자로 나오기를 거부하는 몸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죄인이라는 고백을 하면서도 죄인이기를 거부하는 양면성을 보일 뿐입니다.

 

 

 

 

자신의 삶에 대해 자신이 없다면 그 사람은 누구의 삶에 대해서도 판단할 권한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일부 조금 나은 것을 가지고 그를 판단할 수도 정죄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는 것처럼 저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가 살게 하심을 생각하게 될 뿐입니다. 다윗은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실제 살아계신 자로 살았습니다. 그 모습을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찌로다”(32절)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비록 사울에게 쫓기는 처지이긴 하지만 하나님께 택함을 받고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반면에 아비가일은 선지자도 무엇도 아니고 단지 다윗이 치고자 하는 나발의 아내, 여인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비가일의 말은 그렇게 비중 있는 자의 말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아비가일의 말에서 자신이 나발을 치고자 하는 것의 잘못됨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을 다윗의 인격으로 봐야 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으로 봐야 합니까? 분명 믿음입니다.

 

 

 

 

다윗은 아비가일을 하나님이 보내신 것으로 여겼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잘못된 행위를 막으시기 위해 아비가일을 보내신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럴 때 아비가일의 말은 누구의 말이 되겠습니까? 아비가일을 세워서 다윗에게 전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아비가일을 아비가일로만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아비가일로 본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다윗의 찬송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에게 육신의 좋은 것을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잘못을 알게 해주고 잘못된 행위를 막은 아비가일로 인해서 찬송하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에게 이러한 찬송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군가로 인해서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신앙을 깨닫게 된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 사람을 보내주신 하나님을 감사하며 찬송한 적이 있습니까? 분명 이것은 참되고 귀한 신앙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신앙에는 그다지 마음을 두지 않고 사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신앙이래야 교회 일에 열심이고 전도하고 성경보고 기도하는 것 등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시각이 다윗의 찬송을 이해함으로써 고쳐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살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자연히 하나님에 대한 불평과 원망이 자리하게 됩니다. 마치 다른 사람은 모두 행복하게 잘사는데 나만 열악한 환경과 조건에서 고생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 불평하게 됩니다.

그런데 TV에서나 주변에서 자신보다 더 열악하고 고통스러운 환경과 형편에서 사는 분들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것을 보면서 저들에 비하면 자신은 큰 복을 누리고 있고 은혜를 받은 것인데 감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원망하려고 했던 잘못됨에 대해 발견했다면 결국 그들로 인해서 하나님을 원망할 뻔한 잘못됨이 막아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럴 때 하나님께서 저들을 내게 보내시어 나의 원망을 막으셨다는 고백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신앙이 이처럼 우리의 삶의 깊숙한 곳까지 바라보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겉만 보고 판단하는 신앙이기 때문에 겨우 종교적 행위 몇 가지를 가지고 신앙인 행세를 하는 사이비 신자와 같은 모습에서 맴돌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결코 여러분을 폄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의 깊은 곳 중심에 머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것을 말로 때우는 것에서 벗어나서 이제는 삶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배울 수 있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바를 들을 수 있는 신앙인으로 되어지기 위해 더욱 더 깊이 하나님을 바라보자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만난 사람을 누구로 바라보십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만난 사람은 모두 우연일 뿐입니다. 그리고 나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구분되어질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일하고 계심을 생각한다면 내가 누구를 만나든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자입니다. 나보다 못한 자를 보내셔서 나의 교만을 드러내기도 하시고, 나보다 잘난 자를 보내셔서 평소 믿음을 말했지만 역시 세상 것을 기준으로 하여 사람을 평가하는 습성을 고발하기도 하십니다. 그리고 때로는 나의 악함과 잘못됨을 막으시기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불신자든 신자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으며, 나를 고치시고 깨닫게 하시기 위해 그들을 내 앞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 누군가로 인해서 자신의 잘못됨을 깨닫게 되었다면 그 사람을 보내주신 하나님을 찬송하십시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나를 믿음에 있게 하기 위해 그를 보내셨음을 생각하시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십시오. 다윗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설교를 듣는 자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자신의 잘못과 허물과 믿음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면, 그리고 그것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을 깊이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다면 목사를 세우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자의 참된 자세입니다. 그러나 만약 자신의 잘못됨을 드러내는 말이라고 해서 그에게 오히려 분노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지 않는 것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사람은 자신을 칭찬하는 말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6:26절에 보면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잠 27:21절에는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하느니라”는 말씀을 하기도 합니다. 칭찬은 분명 기분 좋은 말임에도 불구하고 칭찬하면 화가 있다 하기도 하고 칭찬으로 사람을 시련한다는 알 수 없는 말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칭찬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칭찬에는 사랑과 진심이 결여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사람을 좋게 하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나를 해롭게 하는 것임을 알아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자신의 유익을 생각한다면 칭찬의 말을 듣기보다는 자신의 잘못과 허물에 대해 언급해 줄 수 있는 진정한 형제를 원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앞에 어떤 사람이 있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을 칭찬해주는 사람입니까? 잘못된게 있어도 그냥 눈감아주고 모른 척 넘어가는 것이 여러분을 사랑하는 것으로 여기십니까? 과연 그런 역할을 위해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서로 만나게 하셨을까요? 물론 잘못에 대해 지적하고 책망하고 판단하는 분위기를 만들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허물을 자신에게 돌리는 아비가일의 자세로 형제에게 다가가고 아비가일을 보내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다윗의 믿음으로 형제를 바라보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형제의 관계이며 사랑의 관계가 아니겠습니까? 이것이야 말로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 신자의 겸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신자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해 아는 것은 지식일 뿐이지만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삶 자체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예수님에 대해 멋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이 없는 삶이라면 그는 예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들을 깊이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아비가일을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다윗의 그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묵상하시고 우리 다같이 다윗의 마음에 서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만나는 형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형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내 마음에 드는 형제이기 때문에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나로 하여금 나의 잘못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형제로 인해 찬송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70강) 삼상 25:36-42 아비가일의 재혼


<본문>

 

아비가일이 나발에게로 돌아오니 그가 왕의 잔치 같은 잔치를 그 집에 배설하고 대취하여 마음에 기뻐하므로 아비가일이 밝는 아침까지는 다소간 말하지 아니하다가 아침에 나발이 포도주가 깬 후에 그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고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다윗이 나발의 죽었다 함을 듣고 가로되 나발에게 당한 나의 욕을 신설하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 머리에 돌리셨도다 하니라 다윗이 아비가일로 자기 아내를 삼으려고 보내어 그에게 말하게 하매 다윗의 사환들이 갈멜에 가서 아비가일에게 이르러 그에게 일러 가로되 다윗이 당신을 아내로 삼고자 하여 우리를 당신께 보내더이다 그가 일어나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가로되 내 주의 여종은 내 주의 사환들의 발 씻길 종이니이다 하고 급히 일어나서 나귀를 타고 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사자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사무엘상 25:36-42)

 

 

 

 

<설교>

 

본문은 아비가일의 남편 나발이 하나님에 의해 죽자 다윗이 아비가일을 아내로 삼는 내용입니다. 이런 내용을 대할 때 이해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우리에게 구축되어 있는 윤리와 도덕입니다. 윤리와 도덕은 다윗이나 아비가일과 같은 행위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예전부터 남녀 문제에 대해서는 무척 엄격했던 문화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이성의 문제에 대해 개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청년들은 제외한다 할지라도 소위 장년 계층의 사람들은 본문의 내용에 대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라는 의문만 남을 것입니다.

 

 

 

 

물론 남편이 죽은 여자가 다른 남자와 재혼하는 것에 대해서는 현대의 윤리와 도덕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아비가일이 남편 나발이 죽자마자 다윗과 재혼을 한 것에 대해서는 분명 부도덕하다는 비판을 가할 것입니다. 또한 39절에 보면 다윗이 나발의 죽었다 함을 듣고 여호와를 찬송한 뒤 아비가일을 자기 아내로 삼으려고 사환을 보냅니다. 이 역시 남편이 죽자마자 그 부인을 아내로 삼기 위해 사환을 보내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비난을 받아 마땅한 행동으로 여깁니다.

 

 

 

 

그러면서도 섣불리 다윗을 비난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이나 아비가일의 행동에 대해 하나님이 가만히 계신다는 것 때문이고, 어쨌든 다윗은 성경에서 위대한 인물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윤리와 도덕으로는 용납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냥 묵과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만약 악한 사람이 그러한 일을 행했다면 주저 없이 그 행위에 대해 비판을 가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행위라는 것 때문에 ‘무슨 이유가 있겠지?’하고 지나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차마 다윗의 행위를 옳은 것으로 말하지는 못합니다. 아비가일의 행위 역시 옳다는 말을 못합니다. 이처럼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으면서 동시에 옳다는 말도 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이것이 윤리와 도덕을 벗지 못하고 성경을 대하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모습인 것입니다.

 

 

 

 

본문만이 아니라 성경은 윤리와 도덕의 옷을 벗지 못한 채 접근한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쌓아 놓은 윤리와 도덕의 옷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윤리와 도덕이 없이 자기 멋대로 행동하고 악을 행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의 윤리와 도덕 말고 새로운 하늘의 윤리와 도덕으로 살아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의 내용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먼저 남자에 대한 아비가일의 시각부터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단 생각할 것은 다윗과 나발에 대한 아비가일의 태도입니다.

 

 

 

 

먼저 아비가일은 다윗을 만났을 때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림으로써 경외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고 28-31절에서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한 말을 보면 다윗을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사람으로 보고 있으며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28절)라고 말할 만큼 다윗에 대해 신앙적인 신뢰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나발에 대해서는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25절)라고 말할 만큼 불신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윗과 남편인 나발에 대해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비가일이 남자를 바라보는 기준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아비가일은 남편인 나발의 편을 드는 것이 옳습니다. 설사 나발을 불량한 사람으로 욕한다 할지라도 이는 나발을 살리기 위해 다윗의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가식이어야 옳습니다. 그것이 남편에 대한 아내의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아비가일이 나발을 불량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것은 다윗의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가식적인 말이 아니었습니다. 실제 나발을 불량하고 미련한 자로 봤던 것입니다. 반면에 다윗에 대해서는 철저한 신뢰를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아비가일은 나발보다 다윗을 더 사랑하게 되어서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아비가일이나 다윗은 비난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러한 내용이 아닙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용모나 외적인 조건 때문에 신뢰한 것이 아니라 다윗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으로 인해서 다윗을 신뢰하였던 것입니다. 반면에 나발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다윗을 알아보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의 재산을 믿고 다윗을 조롱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것이 아비가일에게는 불량하고 미련한 것으로 보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불량한 것이었고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아비가일이 남자를 바라보는 시각이며 기준이었습니다.

 

 

 

 

즉 아비가일은 세상적인 조건과 권력이나 힘을 기준으로 남자를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준으로 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바른 신앙의 남자가 누구인가를 보고 평가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의지하고 함께 할 남자는 돈이 있고 힘이 있는 남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고 하나님이 인정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비가일의 입장에서 본문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비가일이라면 과연 누구를 택하겠습니까? 누가 과연 의지할 만한 남자이겠습니까? 여자는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여인은 약자로 불리는 것입니다. 남자에게 소속되어서 남자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의 인생에서 남자를 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비가일은 나발이 죽자 다윗을 택하게 됩니다. 당시 다윗은 왕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에게 쫓기고 있었기에 그 앞날이 어찌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여정이었습니다. 그런 남자를 택한다는 것은 아비가일의 앞날에 대한 불안함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다윗과 결혼하여 다윗을 따르게 됩니다. 결국 아비가일은 다윗에게서 외적인 조건은 전혀 보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이 다윗에게 함께 하신다는 것만 봤던 것입니다. 그것만이 자신을 다윗에게 맡길 조건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발을 죽이십니다. 나발이 죽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단순히 다윗이 요구하는 것을 주지 않고 조롱한 행위 때문일까요? 그것보다 더 악한 것은 자신의 소유가 보존되고 지켜지는 것이 자신의 힘 때문인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자신의 것은 자기 스스로 지킬 수가 있다는 생각 때문에 25:7절에서 “네게 양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상치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라고 전하라는 다윗의 말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다윗이 아니라 할지라도 자신의 힘으로도 충분히 지킬 수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발이 보여주는 것은 인간의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없어도 내 소유는 내 스스로 지킬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야 말로 완악하고 불량한 소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나발을 죽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비가일은 하나님이 나발을 죽이심으로써 다윗과 결혼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불량하고 완악한 나발로부터 아비가일을 벗어나게 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다윗과 함께 살도록 조치하신 것이 본문의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아비가일의 남자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기준이 나발처럼 세상적이었다면 나발이 죽은 것에 대해 낙심하였을 것입니다. 의지하였던 남편이 죽었으니 낙심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애당초 아비가일은 나발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나발과 함께하고는 있었지만 나발을 의지할 남편으로 여기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합니다. 때문에 나발이 죽자 다윗에게 자신을 맡기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앞서 말한 대로 아비가일이 세상적인 시각으로 다윗을 바라보았다면 결코 다윗과 결혼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시 다윗의 조건은 고생을 암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비가일이 다윗과 결혼한 것은 자신이 의지할 남자를 무엇을 기준하여 바라보았는가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리기를 아비가일의 입장에서 본문을 대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볼 때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는 우리 자신들이 연약한 여자와 같은 자들로서 어떠한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우리가 의지할 대상을 찾아야 할지에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떠한 시각으로 세상을 보십니까? 돈있고 권력만 있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으로 보이십니까? 그것은 나발의 시각일 뿐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과연 예수님이 여러분이 의지할 분이십니까? 여러분의 모든 인생을 맡겨도 좋을 만큼 든든한 분으로 여기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아비가일이 다윗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만을 본 것처럼 예수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만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그가 바로 예수님과 결혼한 신부가 아니겠습니까? 신자는 세상을 이런 시각에서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힘을 믿고 사는 세상이 불량하게 보이십니까? 하나님의 힘과 능력을 보지 못하는 세상이 미련하게만 보이십니까? 그것이 신자에게 있어야 할 지혜입니다. 세상을 바로 보는 지혜가 있을 때 그리스도가 내게 어떤 분인가가 보여지는 것입니다. 이들이 진정으로 눈을 뜨고 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39절에 보면 다윗은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 머리에 돌리셨도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처럼 여호와께서는 세상의 악행을 그 머리에 돌리실 것입니다. 결국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사라질 대상이 불과할 뿐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거대한 골리앗과 같습니다. 그러나 골리앗은 연약하게만 보이는 믿음에 의해 무너집니다. 이 이치를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악행을 결국 그 머리에 돌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함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심판에서 자기 백성을 건지시기 위해 그리스도의 신부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아비가일을 다윗과 결혼하게 한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의 진정한 남편은 누구십니까?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의지할 대상으로 여기고 살아가십니까? 오직 그리스도이심을 다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린 세상과 함께 멸망할 대상에 지나지 않음을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을 진심으로 원하는지 여러분의 속마음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믿음을 조롱합니다. ‘믿어서 잘된 일이 무엇이냐?’고 하면서 믿음의 무가치함을 주장합니다. 그러한 말에 화낼 필요가 없습니다. 얼마든지 조롱하라 하십시오. 그러나 신자는 나 잘되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십시오. 그럴 때 세상의 조롱은 더 이상 조롱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미련함을 보이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결국 이김은 내가 믿지 않는 자보다 더 잘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믿음 안에 거함으로 이기고자 하는 마음보다 세상과 똑같이 힘으로 이기고자 하는 불량함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신랑으로 여기고 예수님을 따라가기를 원하기 보다는 세상을 향한 눈을 거두지를 못하는 미련함이 있습니다. 이런 우리이기에 아비가일을 세워서 우리를 교훈하시는 본문의 가르침은 참으로 의미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돈으로 사는 것에 비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초라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악행을 그 머리에 돌리실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때가 되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에 우리는 아비가일이 하나님이 함께 하신 다윗과 결혼하듯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랑으로 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만이 사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71강) 삼상 26:1-12 누구의 생각으로 살 것인가?


<본문>

 

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이르러 가로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사울이 일어나 십 황무지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과 함께 십 황무지로 내려가서 광야 앞 하길라 산 길가에 진치니라 다윗이 황무지에 있더니 사울이 자기를 따라 황무지로 들어옴을 깨닫고 이에 탐정을 보내어 사울이 과연 이른 줄 알고 일어나 사울의 진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대 장관 아브넬의 유하는 곳을 본즉 사울이 진 가운데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 진쳤더라 이에 다윗이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물어 가로되 누가 나로 더불어 진에 내려가서 사울에게 이르겠느냐 아비새가 가로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혔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깨든지 이를 보든지 알든지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이었더라(사무엘상 26:1-12)

 

 

 

 

<설교>

 

여러분은 자신을 생각할 때 ‘나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라고 여겨지십니까? 어쩌면 쉽게 답을 할 수 없는 물음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주변을 돌아볼 때 ‘나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듣고 ‘과연 저 사람이 예수를 따르는가 따르지 않는가?’를 분별하고자 한다면 대개 무엇을 기준하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무엇을 보고 예수님을 따르는지의 여부를 판단하겠습니까? 어찌 생각하면 이 문제는 아주 애매하다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시대처럼 예수님이 실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셔서 활동하셨던 공생에 시기에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분명 12제자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분명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생활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만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이것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따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따른 것이라면, 예수님의 생각과 같은 생각으로 함께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동행이며 따름입니다. 아무리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고 했다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생각이 다르고 예수님의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함께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진심으로 예수님과 동행했던 시기는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고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뜻과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생각과 일치된 생각으로 살아갈 때 그것을 동행이라고 말하며, 제자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그리스도인은 항상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을 배우고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에 자신을 일치시키며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나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고 여겨지십니까?’라는 질문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과 같은 마음, 같은 생각으로 살아가십니까?’를 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예수님을 따르는가에 대한 질문에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개는 ‘예수님을 따르는가?’의 여부를 교회에 대한 충성도나 착한 행동을 보고 판단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예수님을 따르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생각과는 전혀 동떨어진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교회에서 봉사하고 충성할 수 있으며 착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이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신자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할 때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각으로 살아가는가?’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어떤 마음과 어떤 생각으로 사셨는가를 살피고 배워서 같은 마음과 생각으로 살아갈 때 그를 가리켜서 예수님의 제자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다니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을만한 일을 수없이 한다 할지라도 예수님과 다른 마음, 다른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면 그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결국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죽으심을 만류하고, 결정적 순간에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예수를 부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서로 생각이 다른 두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다윗이고 한 사람은 아비새입니다. 1절에 보면 사울은 십 사람으로부터 다윗이 하길라 산에 숨었다는 보고를 받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다시 다윗을 잡기 위해 삼천을 군사를 거느리고 십 황무지로 내려가서 하길라 산 길가에 진을 칩니다.

 

 

 

 

이처럼 예전에 다윗이 굴에서 자신을 죽일 수도 있었는데 살려준 은혜를 잊어버리고 다시 또 다윗을 죽이려고 애를 쓰는 사울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도 수시로 잊어버리는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사실 사울이 지금 살아있는 것은 다윗이 베푼 은혜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숨을 쉬면서도 그것이 다윗 덕분임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다윗을 치려고만 할 뿐입니다. 이것이 사울의 배은망덕이며 하나님에 대한 우리 자신들의 배은망덕한 모습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살려준 것은 다윗의 인품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사울을 죽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자신은 사울을 죽일 권리가 없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생각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다윗에 의해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다윗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야 하고, 다윗을 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원수 되는 것임을 깊이 생각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에게는 이러한 생각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살려준 다윗을 향해 울면서 ‘너는 나보다 의롭다’는 말까지 하였으나 그때 다윗에 대한 그 마음에 머물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지금 또 다시 다윗을 치기 위해 군사를 끌고 온 것입니다.

 

 

 

 

6절에 “이에 다윗이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물어 가로되 누가 나로 더불어 진에 내려가서 사울에게 이르겠느냐 아비새가 가로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는 구절을 보면 무슨 이유인지 다윗이 사울의 진으로 가서 사울을 만나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누가 자신과 동행할 것인가를 아비새에게 묻고 결국 아비새가 동행할 것을 자원함으로 아비새와 함께 사울의 진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아비새와 함께 사울의 진으로 갔을 때 사울과 그의 군사들은 누워 자고 있었습니다. 엔게디 굴에서처럼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비새는 다윗에게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8절)라는 말을 합니다. 24장에서 굴에 사울이 들어 왔을 때 다윗의 사람들이 다윗에게 하나님이 원수를 다윗의 손에 붙이셨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에 대해 예전과 같은 태도를 보입니다. 누구든지 사울을 죽인다면 그것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살아계신 이상 여호와께서 사울을 치실 것이니 사울이 죽을 날이 이르러 죽거나 아니면 전장에 들어가서 망할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9,10절). 그리고 사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을 가지고 그 자리를 떠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의 생각이 옳습니까? 두말할 것 없이 다윗의 생각이 옳지 않습니까?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비록 사울을 죽이고 싶었다 할지라도 다윗은 자기 생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비새는 달랐습니다. 아비새는 다윗과 함께 동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윗과는 다른 생각을 가졌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고 현재의 상황을 판단하였지만 아비새는 현재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한 것입니다. 즉 다윗이 사울을 찾아왔을 때 하필이면 사울과 그의 군사가 잠들어 있다는 것은 분명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다윗 편을 들고 계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사울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사울과 그의 군사들이 잠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이는 12절에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깨든지 이를 보든지 알든지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이었더라”는 구절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울과 그의 군사들이 모두 잠이 들고 그러한 상황에 다윗과 아비새가 사울에게 오게 된 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상황임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과연 하나님은 왜 이러한 일을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까? 아비새의 말대로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을 죽이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그렇다면 다윗이 사울을 살려준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한 것입니까? 우리는 어떤 일의 상황이 나에게 유리하게 되어지면 하나님이 내 편을 들고 있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불리하게 되어지면 내 편이 아니라는 의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아비새의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본문의 아비새의 모습에게서 우리의 잘못됨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사울의 입장에서 하나님에 대해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배워야 합니다. 아비새의 모습에서 생각할 수 있는 잘못됨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생각에 자신의 생각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에 하나님을 끌어 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러한 잘못을 행하는 경우가 많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새벽예배 본문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 곧 사람으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며 우리를 교육하시기를 땅의 짐승에게 하심보다 더하게 하시며 우리에게 지혜 주시기를 공중의 새에게 주심보다 더하시는 이가 어디 계신가 말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구나”(욥 35:10-11).

 

 

 

 

이 구절은 욥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엘리후의 말입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에 대해 의문을 가졌습니다. 자신은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세 친구가 죄가 있기 때문에 그런 재앙을 받는 것이라고 몰아붙이긴 하였으나 욥은 자신의 고통이 죄의 결과라고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욥에 대해 엘리후가 말했던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대해 이해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은 우리를 교육하시고 지혜 주시기 위해 일하시는 분임을 말합니다. 그런데 누구도 그런 하나님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욥과 그의 친구들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을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지혜를 얻어야 하는 존재임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자신의 고난이 자신을 교육하고 지혜를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에 대해 무지함을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단지 주어진 상황에서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에만 마음을 두었던 것입니다. 결국 잘못된 행동을 한 것도 없는데 엄청난 재앙을 주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어진 상황의 좋고 나쁨을 따라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의심하게 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비새의 눈에 다윗이 어떻게 비춰졌겠습니까? 아비새의 생각이 다윗처럼 바뀌지 않는다면 다윗의 행위는 참으로 어리석은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좋은 기회를 놓치는 바보 같은 행위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아비새가 생각하는 지혜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지 말고 사울을 죽임으로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고난의 삶을 그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분명 아비새나 우리의 생각에는 이것이 가장 유리한 길로 보일 것입니다.

 

 

 

 

아비새가 다윗과 함께 하긴 했지만 다윗의 생각과 같은 생각을 갖지 못한 것처럼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예수님과 다른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을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아비새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서만 하나님을 생각하는 좁은 소견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예수님이 어떤 생각으로 사셨는가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을 배우고 그 생각으로 살려고 하기 보다는 내 생각에 예수님을 맞추려는 시도를 멈추지를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바른 신앙을 기대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이제 사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창과 물병만을 가지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다윗이 가지고 간 창과 물병은 사울의 목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창과 물병이 귀하다는 것이 아니라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을 가져갔다는 것은 다윗이 얼마든지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창과 물병은 사울에게 목숨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아비새의 의견대로 사울을 죽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엔게디 굴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울은 다윗이 가져간 창과 물병을 볼 때 자신은 죽은 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임을 알고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들에게서 목숨을 가져가실 수도 있는데 다만 창과 물병만을 취함으로써 지금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임을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게 되고 결국 하나님께 감사하는 신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사울과 그의 군사들이 잠들게 함으로써 다윗의 생각과 아비새의 생각의 서로 다름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이 옳은가를 묻습니다. 여러분, 어떤 생각으로 사는 것이 옳습니까? 우리에게는 오직 그리스도의 생각만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사셨던 그 생각으로 이 땅을 사는 것이 신자입니다. 자비와 사랑을 드러내는 다윗의 생각이 곧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생각으로 살아갑시다.

 

 

 

 

 

(72강) 삼상 26:17-25 신앙이란 무엇인가?


<본문>

 

사울이 다윗의 음성을 알아 듣고 가로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음성이냐 다윗이 가로되 내 주 왕이여 내 음성이니이다 또 가로되 내 주는 어찌하여 주의 종을 쫓으시나이까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손에 무슨 악이 있나이까 청컨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마는 만일 인자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고 오늘날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붙지 못하게 함이니이다 그런즉 청컨대 여호와 앞에서 먼 이 곳에서 이제 나의 피로 땅에 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이는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음이니이다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중히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 다윗이 대답하여 가로되 왕은 창을 보소서 한 소년을 보내어 가져가게 하소서 여호와께서 각 사람에게 그 의와 신실을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내 손에 붙이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오늘날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하니라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사무엘상 26:17-25)

 

 

 

 

<설교>

 

진리를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서로 다른 이야기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진리를 안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니고 참된 것을 안다고 해서 참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니란 얘기입니다. 이점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봐야 할 부분입니다. 내가 말하고 있고 고백하고 있고 알고 있는 그 길을 가기 위해 얼마나 힘쓰고 있는가를 스스로 돌아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진리의 길을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된 것임을 알았고 이 길을 가는 것이 생명이라는 것을 고백한다면 누가 뭐래도 그 길을 가기를 힘쓰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말은 맞고 참되는데 정작 자신의 삶은 그 길과는 어긋난 길에 머물러 있다면 결국 자기 스스로 자신의 말을 뒤엎는 것에 지나지 않지 않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볼 때 사울은 참으로 어리석은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 죽이기를 포기하지 않고 또 다시 군사 삼천을 거느리고 다윗이 숨어있는 곳을 찾아 내려가지만, 사실 사울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택하여 세웠고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음을 사울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것도 잘못임을 알고 있고, 더군다나 다윗이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살려준 은혜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자신이 아무리 애를 써도 다윗을 죽일 수 없음을 알았어야 했고 다윗 죽이기를 포기하고 자신의 잘못됨을 회개하는 것이 마땅하며 이것이 바로 지혜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사울은 다윗 죽이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울의 어리석음이라는 것입니다. 즉 사울의 어리석음은 ‘모른다’거나 ‘무지하다’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따르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그대로 순종했던 것입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자신이 치는 것은 옳지 않음을 알았고 그에 순종하여 사울을 죽이지 않고 살려주는 것이야 말로 다윗의 지혜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란 손해를 보지 않고 유익을 얻어낼 수 있는 어떤 방법을 생각해 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지혜로운 자로 사십니까? 아니면 어리석은 자로 사십니까? 자신을 두고 깊이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19절을 보면 다윗은 사울에게 “청컨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마는 만일 인자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고 오늘날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붙지 못하게 함이니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다윗의 말을 보면 사울을 격동시켜 자신을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 받으시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즉 하나님이 사울을 시켜서 자신을 해하려 하시는 것이라면 기꺼이 여호와께 바쳐지는 제물이 되어 죽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전적으로 순종하겠다고 나서는 다윗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진실함이 아니겠습니까?

 

 

 

 

다윗에게는 ‘왜 이렇게 하십니까?’라는 의심이나 원망이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만을 신앙하는데도 불구하고 괴로움과 어려움이 그치지 않는다면 ‘왜 이렇게 하시는가?’라는 의문과 의심이 발생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자신의 유익을 전혀 연결시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신앙입니다.

 

 

 

 

이러한 다윗을 중심으로 생각할 때 우리의 신앙의 잘못됨과 문제가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신앙과 개인의 유익을 연관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 신앙적인 행위를 하는 것 등의 결과가 개인의 유익으로 나타날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결국 기대가 무너지고 뜻하지 않는 어려움과 문제가 발생할 때 신앙까지 흔들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사울을 격동시켜 자신을 해하려 하시는 것이라면 여호와의 제물이 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자신이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전폭적으로 순종하는 것이야 말로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 또한 하나님에 대해 이러한 순종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기에 십자가에서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고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다윗도 알고 예수님도 압니다. 그분들이 하나님에 대한 어떤 신앙과 모습을 보이셨는가를 압니다. 그분들만이 아니라 선지자들 사도들의 일을 압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힘을 쓰고 그 일을 위해 자신의 한 몸 죽는 것을 개의치 않는 그분들의 삶을 보면서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위해 하나님을 찾고 있는가를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았던 다윗이나 예수님을 알았던 사도들 모두는 다만 순종하였을 뿐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생명이 요구되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순종한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이 순전한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우리의 신앙은 너무 계산적이라고 할 수 있고, 겉모습은 번지레 하지만 생명이 없는 상태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요? 혹시 신앙을 자신의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만 여기기 때문은 아닐까요? 아니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보다는 세상을 향한 욕심과 소망이 강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사실 신자라 하지만 세상을 향한 욕망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을 향한 욕망을 가득 안은 채 ‘하나님을 믿노라’고 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세상을 향한 욕망이 나를 망하는 길로 이끌어 가는 악의 세력임을 안다면 그러한 욕망이 있는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놓고 더욱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세상을 벗어나서 하나님 나라에 거하기를 소원하는 신자의 심정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뭡니까? 천국을 말하면서 마음은 세상을 향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마음 상태에 대해 전혀 염려하지도 않고 고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말은 있으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죽으라시면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을 사람입니다. 이러한 신앙이기에 자신에게 있는 어려움이나 고통을 두고 하나님을 원망치 않은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만 있을 뿐 자신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앙을 사모해야 합니다. 현재 우리의 잘못됨과 문제가 무엇인가를 깊이 파악하고 순전한 신앙의 길을 사모하고 그 길을 가기를 기도하고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로서 정당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사신 것처럼 살기를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진리라고 하면서 예수님처럼 순종하기를 꺼려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다윗에게는 자기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있다면 하나님일 뿐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신앙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않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신앙이 주어지기를 원하십니까?

 

 

 

 

다윗에 비해 사울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질 손해에 민감했던 것입니다. 다윗에 대한 경쟁의 마음에서 비롯된 시기와 미움에서 벗어나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기와 미움을 따라 행동한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이 다윗에 대해 잘못 행하고 있음을 모른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엔게디 굴에서 자신을 살려주었을 때도 자신보다 다윗이 더 의롭다는 고백을 한 사람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행위가 옳지 못하고 의롭지 못함을 알면서도 다윗을 죽이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시기와 미움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과는 달리 행하는 것입니다. 21절에 보면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중히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라는 말을 합니다.

 

 

 

 

사울은 다윗이 또 다시 자신을 살려주었음을 알고 다윗에게 잘못을 고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해하지 않을 테니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사울의 말에 대해 다윗은 “오늘날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24절)는 말을 하고 자기 길로 갑니다. 다윗은 왜 사울이 말한 대로 사울에게 돌아가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사울의 말을 믿지 못했기 때문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24절의 말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중요한 것은 다윗은 끝까지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해하려고 하지 않겠다고 고백하는 사울의 말은 분명 진심이었을 것입니다. 또 뒤에 보면 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누군가가 일러줘도 사울이 다시는 다윗을 수색하지 않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사울에게 돌아가면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자신을 구하여 내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자기 길을 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울이나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능력과 인도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다윗은 모든 문제를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여 풀어 나갔습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풀어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문제가 있을 때 문제의 답을 내가 미리 정하고 하나님께 나오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해주십시오’라는 내 뜻을 하나님께 내어 놓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다윗과 우리의 다른 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뜻이 팔팔하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뜻이 꺾이는 것에 대해 분노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는 참된 신앙에 있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우리에게 오시는데 우리는 우리의 뜻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겠다고 하니 결국 하나님과 나 사이에 충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치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을 하면서 지지 않으려고 기를 쓴 것처럼 지지 않기 위해 하나님께 매달리는 식의 신앙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잘못된 신앙이 고쳐지지 않으면 우리는 사울처럼 잘못된 길을 갈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신앙의 길을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만 바라보고 그리스도께서 가신 그 길을 가기를 힘쓰는 신앙의 길에 머물러 있습니다. 신앙의 길은 입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몸의 유익만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신앙의 길을 가지 못할 것입니다. 신앙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73강) 삼상 27:1-12 여호와를 잊었을 때


<본문>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일어나 함께 있는 육백 인으로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각기 가족을 거느리고 가드에서 아기스와 동거하였는데 다윗이 그 두 아내 이스르엘 여자 아히노암과 나발의 아내 되었던 갈멜 여자 아비가일과 함께 하였더니 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혹이 사울에게 고하매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아니하니라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께 은혜를 받았거든 지방 성읍 중 한 곳을 주어 나로 거하게 하소서 당신의 종이 어찌 당신과 함께 왕도에 거하리이까 아기스가 그 날에 시글락을 그에게 주었으므로 시글락이 오늘까지 유다 왕에게 속하니라 다윗이 블레셋 사람의 지방에 거한 날 수는 일 년 넉 달이었더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노하였으니 그들은 옛적부터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지방의 거민이라 다윗이 그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 두지 아니하고 양과 소와 나귀와 약대와 의복을 취하고 돌아와서 아기스에게 이르매 아기스가 가로되 너희가 오늘은 누구를 침노하였느냐 다윗이 가로되 유다 남방과 여라무엘 사람의 남방과 겐 사람의 남방이니이다 다윗이 그 남녀를 살려 가드로 데려가지 아니한 것은 그의 생각에 그들이 우리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다윗의 행사가 이러하여 블레셋 사람의 지방에 거하는 동안에 이같이 행하는 습관이 있다 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하였으니 그는 영영히 내 사역자가 되리라 하니라(사무엘상 27:1-12)

 

 

 

 

<설교>

 

신앙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귀신에게서도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2:19절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는 말씀처럼 단지 하나님이 누구시라는 것을 알고 믿는 것은 귀신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믿음은 신자의 신앙의 의미에서의 믿음과는 다를 것입니다. 단지 지식적인 차원에서 믿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고 있다고 해서 다된 것이 아니며 입술로 말하고 고백한다고 해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참으로 힘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자로 산다는 것은 어떤 환경과 형편에서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믿음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환경이나 형편과 타협하지를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힘들고 어려운 환경이고 형편이니까 다소 신앙을 벗어난다고 해도 이해해주겠다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신앙만을 요구합니다. 때문에 신자는 결코 자기 신앙에 대해 교만할 수 없습니다. 또한 타인의 신앙에 대해서도 섣불리 판단하고 비판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서 낙심하고 염려하며 하나님을 원망할 때 그런 모습을 보면서 ‘신앙이 없다’는 등의 말로서 판단하고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 또한 그 사람과 같은 처지와 형편이 되었을 때 어떻게 될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도 어려운 처지가 되면 저 사람처럼 낙심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임을 자각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이란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그 모습이 드러나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날마다 하나님을 도우심을 구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환경과 형편을 바라보기보다는 나와 함께 동행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다윗이 사울을 살려준 뒤의 일에 대해 기록한 내용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사울을 살려주었습니다. 사울이 잠들어 있는 좋은 기회에 사울을 죽여 버리면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다윗은 그것보다는 하나님을 생각함으로써 사울을 죽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 편에 서서 행동하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적어도 이런 수준의 다윗이라면 앞으로 어떤 일에서도 믿음을 드러낼 것이고 오직 신앙에 합당하게만 살아갈 것이라고 여겨질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고 말합니다. 즉 다윗이 생각하기를 이렇게 사울에게 계속 쫓기다가는 언젠가는 붙잡혀 죽을 것이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는 것이 살길이라 여겼다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면 사울도 더 이상 자신을 쫓아오지 못할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하나님을 생각하며 행동했던 다윗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블레셋 사람은 이방인입니다. 더군다나 수시로 이스라엘을 침략하며 괴롭혔던 나라가 아닙니까? 그런데 다윗이 그러한 나라에 자신의 의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합당한 행동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런 행동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과연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내용에 보면 다윗이 사울에게서 몰래 가져온 창과 물병을 보여주며 사울에게 외칩니다. 다윗의 말을 들은 사울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다윗에게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돌아가지 않고 자기 길을 갑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돌아가지 않는 것은 사울은 믿을만한 존재가 되지 못함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1절에서 다윗이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라’는 생각을 하는 것도 비록 사울이 잘못했다는 말을 하긴 하지만 다윗은 그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언젠가는 붙들리게 될 것이라는 불안함에 의해서 피난처로 블레셋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자신이 살길을 스스로 찾아 나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다윗이 지금까지 자신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의 처지와 형편에서 자기 앞일을 걱정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에 대해 승리한 후로 뭇 백성들로부터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는 칭송을 받았지만 그 일로 인해 사울의 미움과 시기를 사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위기를 넘기면서 사울의 손을 빠져 나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다윗이 살아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함께 하심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전히 쫓기는 상황이지만, 그리고 여건과 형편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도우시므로 이나마 지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지금까지 지내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임을 생각했다면 ‘후일에 사울의 손에 망할 것이다’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26:19절에서 다윗이 자신이 사울에게 쫓겨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라면 기꺼이 죽겠다고 말한 그 마음으로 자신의 처지를 돌아봤다면 사울의 손에 죽을 것이 두려워서 스스로 피할 길을 찾아가고 결국 힘이 있는 블레셋을 의존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결국 본문에서 보여주는 다윗의 모습은 평소 하나님에 대해 고백하는 신앙의 말 그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그대로 노출시켜주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많은 말을 하며 살아갑니다. 은혜, 사랑, 자비, 긍휼, 등등 많은 말을 하지만 그러한 말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참으로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부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에 대한 어떤 말을 했고 무엇을 기도했는가를 생각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고, 그리고 내가 세상을 어떻게 살았는가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다윗을 보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은 항상 여호와 앞에서 살아가야 할 삶이라는 것입니다. 시 16;8절에 보면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는 말을 합니다. 다윗의 이 고백은 편안한 시절에 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고민과 문제를 겪으면서, 그리고 자신의 죄와 잘못과 실수를 반복하면서 배우고 깨달은 고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어떤 처지와 형편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고 요동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길임을 고통과 자기 실수와 잘못에서 배운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미래를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했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생각하기보다는 지금의 어려운 처지와 형편에서 미래를 바라본 것입니다. 그리고 블레셋으로 가는 것이 상책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인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아예 그러한 문제는 잊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사울의 손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몰두했기 때문에 블레셋으로 가는 것이 최선이고 사는 길이라고 여겨진 이상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인가에 대한 생각조차 까맣게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살았던 다윗의 삶이 어떠했는가는 뒤의 구절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과 함께 한 육백인과 더불어 가드와 아기스에게로 갑니다. 그리고 아기스는 다윗을 받아 들여 시글락에 있는 자신의 영토를 맡깁니다.

 

 

 

 

그런데 다윗이 피한 가드의 아기스는 21장에서 다윗이 미친체하여 도망을 쳤던 아기스와 같은 사람입니다. 당시 아기스는 다윗이 미친 것으로 여기고 쫓아내었지만 지금은 육백 명이라는 사람을 이끌고 자신의 수하가 되겠다고 찾아온 것입니다. 아기스는 이러한 다윗에게 자신의 땅을 내어 주고 지키게 한 것입니다. 다윗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한 의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기 위해 손을 잡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 다윗이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칩니다. 그런데 아기스에게는 유다 남방과 여라무엘 사람의 남방과 겐 사람의 남방을 쳤다고 거짓말을 합니다(10절). 그리고 자신이 한 일을 아기스가 모르게 하기 위해 자신이 친 사람들의 남녀를 살려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윗이 침략한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은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공격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이스라엘을 돕는 행위입니다. 만약 이것을 아기스가 알게 된다면 다윗에 대해 의심할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아기스는 다윗이 사울에게 쫓긴 몸인 것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과 원수된 관계인 것으로 여기고 다윗을 받아준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스라엘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을 했음을 안다면 다윗이 자기에게 온 것이나 자신의 땅에 거하는 것에 대해 의심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자기 행위를 감추기 위해 공격한 땅의 남녀를 포로로 잡아오지 않고 모두 죽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기스에게는 유다 남방과 여라무엘 사람의 남방과 겐 사람의 남방을 쳤다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과 우호적인 입장에 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과 우호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쳤다고 함으로써 자신이 이스라엘에게 등을 돌리고 있음을 믿게 함으로써 아기스의 신임을 받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물론 다윗이 친 사람은 이방인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윗의 행동이 무조건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한 자신의 계략과 생각으로 행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거짓된 행동으로 인해서 아기스의 신임을 받게 되고 28장에서 아기스는 이스라엘과의 전투에 다윗이 함께 하도록 하게 됩니다. 하지만 블레셋 장관들은 다윗을 믿지 못하고 의심함으로써 결국 블레셋 땅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30장에 보면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다윗이 있던 곳을 침략하여 다윗의 아내와 자녀를 포함하여 여인들을 모두 사로잡아 간 일이 발생했고 백성들은 슬픈 마음에 다윗을 돌로 치려고 합니다. 그때 다윗은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묻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아말렉을 따라가 침으로써 빼앗겼던 모든 것을 다시 찾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다윗을 다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묻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삶의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사실 우리가 지금 아무리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살겠다고 결심하고 각오를 가진다고 해도 정작 나에게 주어진 그날의 삶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했다가도 수시로 나의 방식과 나의 계획을 앞세우고 살아가게 됩니다. 미래에 대한 염려와 불안감 때문에 내 스스로 나를 지키기 위해 나의 생각에 몰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을 생각한다거나 하나님께 묻지를 않을 것입니다. 아예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에서 수시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고 하나님께 묻는 자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때로는 나의 계획과 생각의 결과가 오히려 나에게 해가 되는 쪽으로 이끌어 가시기도 합니다. 내 계획의 잘못됨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하나님께 묻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앞서 말씀드린 시편 16:8절의 말씀대로 항상 여호와를 내 앞에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호와가 나와 함께 하심을 믿으며 요동치 않게 될 것입니다.

 

 

 

 

편안한 삶에서 주의할 것은 내 신앙에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삶이 편안할 때는 삶의 문제 때문에 고민할 것도 염려할 것도 없습니다. 단지 간혹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믿는다고 고백하며 살아가면 됩니다. 때문에 자신에게서 문제를 발견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으로 인해서 낙심하고 염려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의 신앙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별 문제 없다고 해서 자기 신앙을 과신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을 항상 연약한 자로 여겨야 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타인의 삶에서 발견하고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을 막는 길입니다. 편안할수록, 삶에 문제가 없을수록 더욱 더 힘써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시고 살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편안함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임을 생각하고 힘들고 어려운 삶에 있는 성도를 바라보면서 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들의 어려운 삶에 마음으로나마 함께 할 것이고 그들의 나약한 모습에 대해 판단하거나 업신여기지 않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의 처지가 힘들고 어렵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누구의 도움이었으며 힘이었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지금의 형편이 어렵다고 해도 그 자리까지 오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다윗이 쫓기는 처지이긴 하지만 위기 때마다 하나님이 다윗을 도우시고 구하셨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울 때 잊어서는 안될 것은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는 고백입니다. 지금의 자리가 고통이고 어려움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었다면 진작 망하고 죽었어야 할 존재이며 이보다 더 큰 고통에 빠져 헤어날 수 없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앞으로 살아갈 미래도 하나님께 맡기게 될 것입니다. 이 자리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이 남은 인생도 인도하실 것임을 믿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항상 여호와를 내 앞에 모시고 살아가는 삶이며 이것을 두고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결코 말로 멋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때로는 편안함에서 때로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절망가운데서 낙심도 하고 실망도 하면서 조금씩 하나님을 배우고 만나는 것입니다. 양복입고 자가용타고 아무런 장애물도 어려움도 없이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넘어지고 부서지고 깨어지면서 그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하나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다윗이 ‘내가 후일에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라고 생각한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때 우리 또한 이러한 어리석음에 빠져 들게 됨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이러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아멜렉을 보내서 다윗의 아내와 자녀들과 모든 여인을 빼앗아 가게 한 것처럼 하나님은 나의 계획과 생각에 몰두하여 살아가는 어리석은 우리들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기 위해 이런 저런 일이 있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다면 그것은 큰 은혜이며 복입니다. 이것을 알 때 내 뜻대로 안되고 넘어지는 결과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신자가 요동치 않는 것입니다. 항상 여호와를 여러분 앞에 모시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바쁜 세상의 삶에서 조심할 것은 여호와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우편에 함께 하십니다.

 

 

 

 

 

(74강) 삼상 28:1-2 다윗의 딜레마


<본문>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쳐서 싸우려고 군대를 모집한지라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밝히 알라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 한가지로 나가서 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그러면 당신이 종의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그러면 내가 너로 영영히 내 머리 지키는 자를 삼으리라 하니라(사무엘상 28:1-2)

 

 

 

 

<설교>

 

지난 시간에는 신자가 여호와를 잊었을 때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되는가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윗은 분명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으로 골리앗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나가 대결하여 승리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러한 그가 사울로 인하여 자신의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고 결국 망하게 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살길을 찾아 블레셋에 몸을 의탁하는 장면을 보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였습니까?

 

 

 

 

저는 지난주에 이 말씀을 설교하면서 우리에게 있는 신앙은 결코 내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깊이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내게 주어진 신앙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지 내 스스로 신앙을 만들어 내어 내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골리앗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까지 살려준 것이 다윗의 신앙이었다면 그러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사울로 인해 망할 것을 두려워하여 원수인 블레셋에 몸을 의탁하려 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행동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곧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붙드심이 아니면 한시도 신앙에 머물 수 없습니다. 이것을 알기에 신자는 항상 여호와를 앙망하며 여호와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행동은 신자가 무엇에 힘쓰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항상 여호와를 잊지 않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신자를 유혹합니다. 베드로전서 5:8절에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우리의 대적인 마귀는 세상을 이용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살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삼키기 위해 두루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산다면 우리는 깨어 있을 수 없고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신자로 하여금 여호와를 잊도록 만듭니다. 어려운 상황과 고통과 힘든 문제들이 있을 때 하나님보다 그것들을 바라보게 하고 그 문제와 어려움에 대해 깊이 빠져들게 만듭니다. 결국 고민하게 되고 염려와 근심에 빠지게 되고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지금까지 누가 나를 인도하셨고 살게 하셨는가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힘으로 살길을 마련하기 위해 힘쓰게 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삶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신자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신앙이 아닌 길을 가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과의 타협입니다. 그리고 타협을 하는 이유는 세상의 힘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고, 세상의 힘을 이용하고자 하는 것 때문입니다. 힘이 있어야 나의 일이 잘된다는 것 때문에 타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협은 타협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세상과 타협했을 때 결국 타협으로 인해 갈등과 곤란함에 빠지게 되고 신자의 존재성 자체에 큰 위기가 오게 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1절을 다시 보면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쳐서 싸우려고 군대를 모집한지라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밝히 알라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 한가지로 나가서 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군대를 모집합니다. 그런데 아기스가 다윗과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까지 군대에 참가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기스가 다윗을 자기편으로 여긴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아기스가 다윗을 자신의 편으로 여기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는 그술, 기르스, 아말렉 사람을 쳤으면서도 아기스에게는 반대로 이스라엘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유다 남방사람, 여라무엘 사람의 남방, 겐 사람의 남방을 쳤다고 거짓말을 한 이것이 아기스로 하여금 다윗을 자신의 편으로 인정하게 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아기스를 속여 그로 하여금 자기를 이스라엘에 대해 미련을 버린 아기스의 사람이 된 것으로 믿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이러한 계략은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전투를 하게 되고 아기스가 다윗에게 군사로 참가할 것을 말함으로써 오히려 큰 고민으로 다가오게 되었을 뿐입니다.

 

 

 

 

다윗이 전투에 참가할 경우 아기스와 블레셋 군대와 장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스라엘과 싸워야 합니다. 이것은 다윗에게 엄청난 고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다윗이 실제로 아기스 편에 서서 이스라엘과 전투를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게 죄를 범하는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함 받은 하나님 부르심 자체를 버리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했을 때 블레셋 편에 서서 블레셋의 군사로서 자신들과 싸운 사람을 왕으로 인정을 하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과 싸우기를 거부할 상황도 못됩니다. 만약 거부했을 때 아기스를 배신한 죄로 살아남기가 힘들게 되지 않겠습니까? 다윗은 이스라엘과 싸울 수도 없고 싸우지 않을 수도 없는 곤란함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 자신은 아기스 편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아기스를 이용하려고 했던 다윗의 계략은 오히려 자신을 더 큰 어려움으로 밀어 넣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계략과 수단으로 살고자 하는 일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러면 당신이 종의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2절)라는 모호한 대답을 합니다. 싸우겠다는 것도 아니고 싸우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라 나의 행할 바를 아기스 당신이 안다는 답을 한 것입니다. 이 역시 싸우겠다는 말을 함으로써 이스라엘을 반역하고 하나님께 죄를 짓는 행위를 하지 않고 싸우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위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의 다윗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전혀 드러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인데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과 싸울 수가 있는가?’라는 사실을 떳떳하고 당당하게 아기스에게 증언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함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의 이런 나약함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인도하심을 보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모든 상황의 앞날을 자기 스스로 미리 상상하기 때문에 당당함을 내 보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실용적인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 때로는 아무리 사소하게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 신자인 우리를 성경의 원칙에서 벗어나게 만들기 위해 항상 문 앞에 도사리고 기회를 엿보는 도구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타협은 타협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자에게 크나큰 신앙의 갈등을 안겨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에게 ‘현실적인 사람’이 될 것을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갈등은 바로 이것입니다. 신앙의 사람으로 머무느냐 아니면 신앙은 교회에서만 통용하고 세상에서는 현실적인 사람으로 머무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정하고 신앙하는 사람이지만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현실적인 사람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입니다.

 

 

 

 

다윗이 가드로 가고 아기스를 속이게 된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의 변화를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을 때 자신의 미래가 불투명해지고 불안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살길로서 블레셋을 택한 것이야 말로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의 대처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다윗의 현실적인 입장에 서서 다윗을 생각할 때 이러한 행동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현실과 타협하게 만들고 자신을 정당화 하며 나중에는 아예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으로 전락하게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때로 죄의 경중을 따져가며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이정도는 죄라 해도 가벼운 것이니까 괜찮을거야’라든가 ‘이 정도는 내 힘으로도 얼마든지 안할 수 있으니까 이번만 하고 다음에는 하지 말자’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스스로에게 속는 것입니다. 가벼운 죄 무거운 죄란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죄가 있고 이길 수 없는 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란 어떤 행동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에게도 힘이 있음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죄악 속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고 이길 수 있는 죄가 있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이미 사단의 유혹에 빠진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현실적인 입장에서 여러분의 문제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결과는 여러분의 힘으로 문제를 벗어나기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게 되고 때로는 문제를 벗어나기 위해 신앙을 포기하는 타협도 불사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현실적인 문제든 무엇이든 모든 것을 신앙의 위치에서 생각하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울이 변화가 되었든 되지 않았든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지금껏 다윗을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지금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의지이며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현실과 상관없이 다윗의 장래의 모든 일도 하나님의 뜻과 의지대로 되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고 의지하고 바라볼 뿐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분뿐입니다. 이것이 신앙적인 위치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시각으로 현실을 살아가야 함을 다윗을 통해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미래를 여호와께 맡긴다는 것을 믿지를 못합니다. 여호와께 맡기는 것보다는 현실이 나아지는 것만이 미래에 대한 보장이라고 여겨버립니다. 이것은 명백한 불신앙입니다. 여호와의 전능하심과 살아계심을 믿지 못하는 것이고,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하여 동행하시고 인도하시고 지키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삶에서 여호와를 만나고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배우지 못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삶에서 여호와를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했기에 믿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현실을 바라보고 미래를 전망합니다. 현실이 나쁘면 미래까지 나쁠 것이라고 생각하고 현실이 좋으면 미래 역시 그 전망이 밝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미래는 여호와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미래시며 미래의 전망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아무렇게나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에게 현실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책임과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순간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 84:5-7절에 보면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고 말합니다. 시온의 대로라는 것은 하늘나라를 향한 큰 길을 뜻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신약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에게 시온의 대로는 그리스도가 아니겠습니까? 즉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은 모든 힘을 주께로부터 얻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미래를 위한 길을 블레셋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이스라엘과 싸워야 하는 위기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날마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길은 세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신앙이 아닌 길은 가지를 마십시오. 그리고 이것을 위해 현실보다는 우리의 마음에 대로로 존재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주께 힘을 얻으십시오. 현실로 가는 길의 마지막과 주님으로 가는 길의 마지막을 생각하십시오. 현실은 잠깐이지만 주님은 영원하다는 것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여기에 붙들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주님이 누구신가를 열심히 항상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신자에게 사소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삶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스스로 미래를 상상하며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기 위해 현실적인 길을 걸어갈 때 어떤 곤란과 어려움에 빠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묻습니다. 여러분께 길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길을 가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길을 가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사람들입니다. 현실에 마음 뺏기지 마시고 현실에 속지 마시고 지금도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의존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미래는 대로이신 주님께 있는 것이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의 어떠한 문제이든 피할 길은 여호와께 있는 것이지 우리의 계획이나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에서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지혜이고 신자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75강) 삼상 28:3-7 사울의 불신앙


<본문>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애곡하며 그의 본성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었더라 블레셋 사람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쳤더니 사울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그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사무엘상 28:3-7)

 

 

 

 

<설교>

 

오늘 본문은 사울이 블레셋 군대로 인하여 크게 두려운 나머지 신접한 여인, 즉 무당을 찾아가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사울의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나는 사울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갖기가 쉽습니다. 이유는 ‘나는 무당을 찾아가지 않았다’는 것 때문입니다. 물론 여러분은 무당을 찾아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토정비결이나 사주를 보는 일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사울과는 다르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심사숙고해야 하는 것은 ‘사울 같은 행동이 있는가?’가 아니라 ‘사울 같은 사고방식이 있는가?’를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는 사울은 철저하게 불신앙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역시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의 모습과는 전혀 동떨어진 신앙이 없는 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울을 살피면서 과연 그가 어떤 사고방식에 머물렀기에 이러한 행동이 나오게 되는가에 관심을 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사울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애곡하며 그의 본성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 내었었더라”고 말합니다. 이 구절을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은 사무엘이 죽었다는 얘기는 이미 25:1절에서 언급한 바가 있는데 왜 또 다시 언급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3절에서 말하는 사무엘의 죽음은 현재의 일이 아니라 이미 예전에 있었던 일을 다시 언급하는 것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무엘이 죽었다는 얘기를 한 후에 4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이 수넴에 이르러 진을 친 것과 사울이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을 친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5절에 보면 사울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 마음이 크게 떨렸다는 말을 합니다. 사울은 블레셋 군대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여호와께 묻습니다. 아마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물음을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전혀 응답지를 않으신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도 답을 하지 않으시고 침묵을 하시니 사울은 매우 답답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신접한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목적은 11절을 보면 사무엘을 만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사무엘이 나타나 사울에게 말을 하기는 하지만 죽은 사무엘이 다시 나타난 것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말씀을 드리기로 하고 오늘은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사울의 사고방식에 대해 언급을 하고자 합니다.

 

 

 

 

사울의 사고방식이 어떠했느냐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3절에서 사무엘의 죽음을 반복해서 언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살피는 것으로 시작을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단순히 사무엘이 죽었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3절이 기록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무엘이 죽은 것을 밝히기 위해서라면 25:1절의 내용으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사무엘의 죽음에 대해 새삼스럽게 언급하는 것은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 사무엘을 불러올리라고 요구하는 것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이미 죽은 자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울의 사고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불신앙을 드러내고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생존했을 당시 이스라엘의 선지자였든 지도자였든 상관없이 이미 죽은 자입니다. 죽었다는 것은 단절을 의미합니다. 생존했을 때도 사무엘은 의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을 세우셨고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이미 죽은 사무엘을 만나고자 합니다. 이것이 철저하게 사무엘을 의지하고 있던 사울의 모습인 것입니다. 죽은 자의 영혼이라도 만나서 블레셋과의 위기 상황을 해결해 보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의 내용은 단순히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서 무당을 찾아가지 말라거나 점을 치지 말라는 교훈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미 죽은 사무엘을 만나려고 하는 사울의 사고방식을 살피고 행여 우리가 그와 같은 생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를 살피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울처럼 존재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자신하는 우리의 잘못됨이 있다면 그것을 깨닫고 정당한 신앙의 길을 찾아 가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사울이 아닌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사울과 같은 사고방식, 사울과 같은 기질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감추어져 있을뿐이고, 교묘하게 신앙으로 위장하여 존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는 행동을 보면서, 사울이 믿음이 없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사울은 믿음이 있는 자가 아닙니다. 철저한 불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울의 불신앙은 무엇입니까?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행동이 불신앙입니까?

사실 사울은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기 전에 여호와께 물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신앙입니까 신앙이 아닙니까? 사울이 여호와께 물었지만 여호와께서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울의 심정이라면 이런 경우 어떤 마음이겠습니까? 평온한 상황이 아닙니다. 매우 긴박한 위기 상황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께 물었으나 여호와는 잠잠하시고 침묵하십니다. 아무런 답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울의 입장이라면 매우 답답하고 조바심이 나지 않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은 잠잠하시니 죽은 사무엘이라도 만나기 위해 영혼을 부른다고 하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할 때 내 스스로 정직히 물어야 할 것은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려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십니까? 혹시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이 권능으로 나를 도우시지 않겠는가하는 기대감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기대감으로 하나님을 의지했는데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움이 전혀 없고 고통만 거듭 가중되고 하나님께 기도해도 침묵하시고 잠잠해 버리신다면 믿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분명 신뢰의 방향이 다른 것으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사울의 심정이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이를 잃었을 때 하나님을 부르며 아이를 찾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아이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해달라고 밤새워 기도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잠잠하시고 조용하십니다. 그럴 때 누군가가 용한 점쟁이가 있다고 말할 때 과연 그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은 잠잠하시니 다른 것이라고 찾아서 아이를 찾아야겠다는 마음이 일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는 문제에서 잘못된 것은 자신의 일에 도움을 얻기 위한 목적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즉 날 위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날 위해 살아가는 사고방식은 결국 자신을 위한 길로 나아갈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고 유익이 되는 방법과 길을 찾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설령 신앙의 길이 아니라 할지라도 외면해 버리고 자신의 득을 찾을 뿐입니다. 이것이 사울의 사고방식이고 오늘 우리가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면 우리는 결국 사울과 같다는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득이 되느냐는 것과는 아무 상관없이 오직 여호와가 참된 신이기 때문에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참된 분은 하나님이시고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심지어는 하나님이 자신을 치는 것까지 신뢰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자신의 어려움과 고통의 문제에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다’라는 기대감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나의 고통과 문제에도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고, 설사 내가 망하고 실패한다고 해도 그 속에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담겨 있다. 다만 내가 그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흔들릴 뿐이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에 흔들림이 없는 것이고 이것이 진정한 신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뢰에는 무엇보다 의심이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신뢰한다면 상대방의 어떤 행동도 믿어야 합니다. 옆에서 누군가가 그 사람에 대해 험담을 하고 무슨 말을 한다 할지라도 의심도 흔들림도 없어야 합니다. 설사 나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그가 했다 할지라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어주는 것이 신뢰다운 신뢰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신뢰합니까? 어쩌면 우리는 조그만 바람에도 흔들려서 나무에 붙어있지 못하며 떨어지는 낙엽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지도 모릅니다. 바람이 불지 않을 때는 하나님께 붙어 있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처럼 보였는데 가벼운 바람만 불어도 이리저리 흔들리고 의심이 되고 불안감만 남는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향한 마음에 다른 힘 되는 것을 찾고 기대하는 유혹만 남게 될 뿐입니다.

 

 

 

 

3절을 보면 사울은 나라를 다스리던 시기에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낸 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무엘의 죽음과 함께 그 사실을 언급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이처럼 사울이 신앙이 있었다는 얘기가 아니라 신접한 자와 박수를 쫓아낸 행위가 결코 신앙이 아니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결국 사울은 자신이 쫓아낸 신접한 자를 찾아가는 것을 통해서 예전의 자신의 행위가 신앙과 상관이 없는 것이었음을 스스로 폭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2:20-22절에 보면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는 말을 합니다. 사울이 꼭 이런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손으로 쫓아낸 신접한 여인을 다시 찾아가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사울의 모습이야 말로 개가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 꼴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말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개가 토한 것이나 돼지가 씻은 것이 그 행동만은 옳은 것이라 할 수 있지만 못 먹을 것을 먹었기에 토한 것이 아니고 자신의 더러움을 알았기에 씻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못 먹을 것이고 더럽다는 것을 안 상태였다면 토한 것에 다시 돌아갈 수 없고 더러운 구덩이에 다시 누울 수가 없습니다. 결국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쫓아낸 것이 하나님만을 신뢰한 신앙에서 나타난 행위였다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 할지라도 다시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신접한 여인을 쫓아낸 것은 신앙에서의 행동이 아니라 단지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기도할 때 그 내용을 보면 세상의 악함을 말합니다. 신자는 세상과 어울려 살아서는 안됨을 말하고 돈을 의지해서도 안되고 욕심으로 살아서도 안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만을 들어보면 모두가 참된 신앙입니다. 먹을 수 없는 것을 먹었기에 토해 버리는 것과 같은 기도이고, 더럽기에 씻고자 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예배당을 벗어나서의 삶은 어떻다고 생각합니까? 과연 내가 토해 버린 것에 다시 가지 않으려고 힘을 쓰는 삶이라고 생각합니까? 씻어버린 더러움이 다시 묻을 것을 염려해서 더러움을 피하려고 애를 쓰는 삶이라고 생각합니까? 오히려 기도를 할 때는 토해 버리고 씻어버렸던 것들을 다시 찾아가고 눕고 먹는 모습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기도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냥 나의 신앙을 가장한 것뿐입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기도라고 여겨지기에 단지 그렇게 기도했을 뿐입니까? 나의 마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말입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말과 행동을 책망하고 나무라기 위해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나 자신의 현재 모습을 깊이 살피자는 것입니다. 신앙자리에 머물러 살아가는 것인지 아니면 사울과 같은 사고방식이면서도 나 스스로는 신앙에 별 문제 없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를 살피자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신뢰합니까? 그렇다면 무엇에 대해 신뢰하십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 자체를 신뢰하고 믿으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어려울 때 하나님이 도우실 것을 신뢰하시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믿음을 깊이 점검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울이 자신의 손으로 쫓아낸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서 그의 도움으로 이미 죽은 사무엘을 만나고 싶어하는 그것이야 말로 블레셋으로부터 자신과 자신의 나라를 지키려고 하는 최선의 노력입니다. 자신의 목숨과 국가를 보존하기위해 하나님께 물었으나 하나님은 잠잠하시니 사단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물었는데도 불구하고 잠잠하시고 침묵하실 때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합니까? 아니면 답답한 마음에 다른 힘이 되고 해결될 길을 찾으려고 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잠잠하시다는 것 때문에 답답하다면 그 이유는 자기의 것을 지키고 보존하기 위해 하나님께 물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것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하나님의 침묵에 대해 답답해하고 조바심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내 스스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내 일을 돕기 위해 나를 택하시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나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하나님을 찾는다면 우린 결국 사울일 뿐입니다. 신앙은 나를 지키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76강) 삼상 28:8-19 죽은 사무엘이 나타남


<본문>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는 사울이 가로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 올리라 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사울의 행한 일 곧 그가 신접한 자와 박수를 이 땅에서 멸절시켰음을 아나니 네가 어찌하여 내 생명에 올무를 놓아 나를 죽게 하려느냐 사울이 여호와로 그에게 맹세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네가 이 일로는 벌을 당치 아니하리라 여인이 가로되 내가 누구를 네게로 불러 올리랴 사울이 가로되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사울에게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 모양이 어떠하냐 그가 가로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로 분요케 하느냐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군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지 아니하시기로 나의 행할 일을 배우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여호와께서 나로 말씀하신 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라(사무엘상 28;8-19)

 

 

 

 

<설교>

 

사울은 자신을 위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갑니다. 이 경우 우리는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는 행위 자체를 비난하고 문제 삼는 것에 치중한 위험이 있음을 지난 시간에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신접한 여인을 찾는 행위 자체를 비난거리로 삼는다면 결국 사울과 같은 행위가 없는 사람들에게는 사울과 같은 행위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신앙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울의 행위를 문제 삼고 비난하기보다는 행위의 배경인 사울의 사고방식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사울의 행위의 배경에는 ‘자신을 위함’이 깔려 있습니다. 이는 사울이 신하에게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7절)고 지시한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무당이든 뭐든 뭔가 초월적인 능력이 있다고 여겨지는 것에 관심을 두고 찾아가는 모든 목적은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함에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의 문제, 자신의 일을 해결하기 위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는 사울의 이 사고방식이 비록 우리가 무당을 찾지 않고 점쟁이를 찾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을 찾는 목적과 이유에 내포되어 있다면 그러한 우리 자신을 사울과 다르다고 평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점을 심사숙고하여 나 자신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신을 찾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신을 자신의 영역에 끌어 들이기 위해 노력을 한다는 것입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하면서 자신의 정성을 보이고 헌물을 바치는 모든 이유도 신을 자신의 영역에 끌어들이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기독교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기독교의 다른 점은 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께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부르신 하나님, 나를 만드시고 나를 사랑하사 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성품과 자비와 긍휼하심에 감사하며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소원에 순종하기 위해 나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나에 대한 관심에서부터는 벗어나고 대신 하나님의 뜻에 대해 관심을 두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중점으로 사울을 살펴본다면 사울의 잘못됨은 신접한 여인을 찾았다는 행동보다는 자신을 위해 신을 찾는 것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쌔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는 사울이 가로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올리라”고 말합니다. 사울이 여인에게 부탁한 것은 신접한 술법으로 자신이 말하는 사람을 불러올리라는 것입니다. 즉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울은 신접한 술법으로 죽은 자의 영혼을 부를 수 있음을 믿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스올, 즉 음부라고 하는 지하세계로 들어간다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천사와 같은 존재는 하늘의 어느 공간에 거주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불러올리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죽은 자의 영혼을 음부로부터 불러올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죽은 사무엘이 다시 사울에게 나타납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가 힘든 내용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이 본문의 내용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진위여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즉 사람이 죽고 나면 영혼이 다른 세계로 들어가고, 그 영혼을 다시 불러 낼 수 있느냐라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죽은 사람의 귀신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당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자유롭게 부를 수 있느냐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일단 한가지 꼬집고 넘어갈 것은 인간의 부패성은 쓸데없는 일에 대한 관심에까지 그 범위가 확장된다는 것입니다. 신자로서 관심 둬야 할 것에 대해서는 오히려 무관심의 모습을 보이면서도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것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본문의 내용에 대한 부분입니다.

사실적으로 말해서 죽은 자의 귀신이 있느냐에 대한 것은 쓸데없는 관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무당이 귀신을 부를 수 있느냐라는 것도 역시 쓸데없고 무가치한 관심입니다. 만약 죽은 자의 귀신이 있고 무당이 그 귀신을 불러내서 귀신의 능력으로 앞일을 알아낼 수 있다고 한다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신통력이 있는 무당을 찾아가서 앞일에 대해 문의하고 싶다는 것입니까?

 

 

 

 

그런 의도가 아닐 바에는 귀신이 있든 없든 그런 문제들은 신자의 신앙생활에 하등에 연관이 없는 것들입니다. 설사 무당이 귀신을 불러내어 대화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할지라도 답은 같습니다. 그런 장면으로 인해서 믿음이 흔들리고 무당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진다면 그것은 아예 예전부터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다는 증명에 불과할 뿐입니다.

 

 

 

 

물론 호기심이라고 할 수 있고, 신기한 일이기 때문에 알고 싶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자의 호기심은 하늘을 향하는 것이 마땅하고, 신기한 일 역시 부패하고 사망에 처한 우리를 건지시고 아들의 피로 죄를 씻어주신 하나님의 일인 것이지 무당이 죽은 자를 만나는 것 따위를 가지고 신기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신자인 사람들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나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일들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고 무당이나 점쟁이의 진위 여부에 대해 관심을 두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설사 점쟁이가 우리의 앞 일을 알아맞히고 무당이 귀신을 불러내어 만난다고 해도 그들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능력을 그들이 행한다고 해도 그 능력으로 우리를 천국에 있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 어떤 능력이나 잡술을 가지고 하나님의 능력의 세계, 통치의 세계를 침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쓸데없는 호기심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바램은 버리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12-14절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사울에게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 모양이 어떠하냐 그가 가로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죽은 사무엘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사울은 그 사무엘에게 얼굴을 땅에 대고 절을 합니다. 앞서 말한대로 이러한 내용은 ‘죽은 자가 다시 나타날 수 있느냐?’라는 의문을 우리에게 가지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이미 죽은 자라 할지라도 다시 만나고 싶어 하는 그 정신상태가 어떤 것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할 수 있습니다. 사울과 같은 그러한 정신상태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물었으나 하나님이 대답치 않으시자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서 이미 죽은 사무엘을 만나고자 합니다. 죽은 사무엘을 다시 만나서라도 자신의 문제에 대한 도움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답하지 않으시고 잠잠하시니 자신에게 도움을 줄 신적인 대상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역시 이러한 사고방식이 숨겨져 있음을 깨닫고 우리 스스로를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죽은 사무엘이 다시 나타난 이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여기에 대한 신학자들의 의견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타당하게 여기는 것은 사단이 사무엘의 혼을 가장하여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사단이 가장하여 나타난 것으로 보는 것이 이해하기가 쉽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진짜 사무엘의 혼이라면 무당의 술수에 의해 나타날 수 있느냐는 의문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단이 가장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가장 편하게 이해하는 길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이 사무엘을 가장하여 나타났다면 15-19절까지의 사무엘의 말은 사단의 말이라는 결론이 됩니다. 그러나 사무엘이 한 말의 내용을 보면 도저히 사단의 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울의 잘못됨을 책망함과 동시에 하나님이 다윗을 택하여 세우시고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해 사울이 죽는다는 것에 대한 예고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무엘을 다시 세워서 사울을 책망하는 말씀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단이 사무엘을 가장하여 나타난 것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사무엘을 다시 사울에게 보내셨다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해도 걸림돌이 되는 것이 무당이 사무엘을 불러내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무당을 통해서 사무엘을 사울에게 나타나게 하신 것이냐? 라는 의문도 제기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본문을 보면 신접한 여인이 사무엘을 부르기 위해 뭔가 행했다는 것이 없습니다. 11절에 사울이 사무엘을 불러올리라고 하자 12절에서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쳤다고 되어 있을 뿐 사무엘을 부르기 위해 주문을 왼다거나 무녀 춤을 추는 등의 무속 행위를 했다는 기록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무엘은 신접한 여인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에 의해 나타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은 자가 다시 나타날 수는 있는 것입니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하고자 하신다면 못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민수기에 보면 발람이라는 선지가가 나귀를 타고 가다가 나귀로부터 책망을 받는 일이 있습니다. 나귀가 말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하나님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때문에 관심은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에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이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나귀가 말을 할 수 있느냐?’라는 의문이 아니라 ‘나귀를 말하게 하셔서 발람을 책망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에 관심을 두는 것이 옳은 것처럼 ‘죽은 사무엘이 다시 나타날 수 있느냐? 그러면 죽은 자의 영혼을 만날 수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과 호기심보다는 ‘하나님이 죽은 사무엘을 다시 사울에게 나타나게 하신 뜻이 무엇일까?’라는 관심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관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울이 죽은 사무엘을 만나고 싶어 한 것은 자신에게 필요한 말을 듣고 싶어서였습니다. 15절의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로 분요케 하느냐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군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지 아니하시기로 나의 행할 일을 배우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고 말한 내용을 보면 사울의 의도가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사울은 블레셋이라는 급한 문제를 자신의 급한 문제에 해결을 위해 사무엘을 만나고 싶어한 것입니다. 모든 관심이 자신의 문제 해결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사울에게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로 분요케 하느냐’라고 말한 것을 보면 마치 사울이 불러서 나타난 것처럼 얘기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결국 사울에 의해서 사무엘이 나타난 것처럼 이해되지 않겠습니까? 때문에 이 말은 사울의 불순종과 불신앙 때문에 하나님이 다시 사무엘을 사울에게 세우신 것을 두고 한 얘기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쨌든 사무엘은 사울 때문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사울에게는 아마 하나님은 자신의 물음에 답하지 않으셔도 사무엘이라면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필요한 말을 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울의 기대는 무참히 무너져 버립니다. 나타난 사무엘마저 자신이 원하는 말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사무엘이 살아있을 때 사무엘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확증하는 말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결말에 대해 말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사무엘을 다시 나타나게 하셔서 사울에게 필요한 말을 주신 것이지 사울이 듣고 싶어한 말을 주신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점을 오늘 우리는 깊이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무당을 찾고 점쟁이를 찾는 이유는 자기 자신의 문제와 앞일을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모든 관심에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갑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가장 큰 문제이고 관심거리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을 이유도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어떤 신통한 능력이 있든, 귀신이 존재하든 말든 그런 것은 신자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하나님 나라와는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관심거리가 아니겠습니까?

 

 

 

 

무당을 찾는 것이 왜 우상을 섬기는 것인 줄 아십니까? 단순히 무당을 찾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초월자를 찾는 그 사고방식이 바로 우상 섬김이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그 대상이 하나님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라면 하나님을 우상으로 섬기는 망령된 일을 행하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우리가 필요로 한 것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지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으로 주신 것을 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반대로 내가 필요로 한 것을 받고 싶어 할 뿐입니다. 이제 이러한 무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 일 때문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내 일은 모두 하나님께 맡기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기 위해 일하실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믿고 신뢰하면 됩니다. 설사 지금의 형편과 환경이 풍랑 한가운데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면 됩니다. 고난과 고통이라 할지라도 나에게 필요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믿는 것이 믿음이고 신자는 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77강) 삼상 29:1-11 도우시는 하나님


<본문>

 

블레셋 사람들은 그 모든 군대를 아벡에 모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르엘에 있는 샘 곁에 진쳤더라 블레셋 사람의 장관들은 수백씩 수천씩 영솔하여 나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아기스와 함께 그 뒤에서 나아가더니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가로되 이 히브리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느냐 아기스가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에게 이르되 이는 이스라엘 왕 사울의 신하 다윗이 아니냐 그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여러 날 여러 해로되 그가 망명하여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노라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에게 노한지라 블레셋 방백들이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을 돌려 보내어 왕이 그에게 정하신 그 처소로 가게 하소서 그는 우리와 함께 싸움에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가 전장에서 우리의 대적이 될까 하나이다 그가 무엇으로 그 주와 다시 화합하리이까 그들이 춤추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던 이 다윗이 아니니이까 아기스가 다윗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네가 정직하여 내게 온 날부터 오늘까지 네게 악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으니 나와 함께 군중에 출입하는 것이 나의 소견에는 좋으나 장관들이 너를 좋아하지 아니하니 너는 돌이켜 평안히 가서 블레셋 사람의 장관들에게 거슬려 보이게 말라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당신의 앞에 오늘까지 있는 동안에 당신이 종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나로 가서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시나이까 아기스가 다윗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내 목전에 하나님의 사자같이 선한 것을 내가 아나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은 말하기를 그가 우리와 함께 전장에 올라가지 못하리라 하니 그런즉 너는 너와 함께 온 네 주의 신하들로 더불어 새벽에 일어나라 너희는 새벽에 일어나서 밝거든 곧 떠나라 이에 다윗이 자기 사람들로 더불어 일찌기 아침에 일어나서 떠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가고 블레셋 사람은 이스르엘로 올라가니라(사무엘상 29:1-11)

 

 

 

 

<설교>

 

인간의 관계를 보면 손해와 이익의 여부를 따라 형성되고 수시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 뜻이 일치하여 친구가 되고 한 집단으로 형성되었다가도 그 관계 유지로 인해서 자신에게 불리한 결과가 주어질 것이 예상되면 가차 없이 뒤돌아서고 오히려 적이 되는 경우를 수없이 볼 수 있으며 또 우리 자신들도 그러한 모습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벗어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말이 있나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내 자신 또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결심이나 각오도 주변 여건과 상황에 의해서 얼마든지 포기해버리고 자신의 생계와 생존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자신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믿을 수 없는 인간을 불러다가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인간을 믿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택한 하나님의 백성만큼은 세상 사람과 다르게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살아갈 것을 믿으시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믿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를 믿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은 스스로의 신실하심을 따라 일하시는 것이지 인간을 의존해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주변 여건이나 상황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택하여 부른 인간이 설령 불의한 행동으로 나아간다 할지라도 그에 대한 손길을 포기하거나 거두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인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대해 방해물일 뿐입니다.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이 수시로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고 무너뜨리는 모습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은 쇠하거나 중지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시고 신실하심과 전지전능하심으로 날마다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신자가 의지하고 소망하고 바라볼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이지 어떤 사람의 도움이나 세상의 도움을 받고 사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다면 그를 세우신 분이 계심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결코 사람을 바라볼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만 바라봐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을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다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윗을 말하기 전에 먼저 사울에 대해 다시 살펴보면 사울은 무당의 도움을 받아서 죽은 사무엘을 만나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있는 지금의 난국을 해결할 수 있는 도움의 말을 듣고자 합니다. 사울의 이 모습이야 말로 철저하게 사람을 의존하고 있는 불신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손으로 내쳤던 무당에게까지 찾아가서 부탁의 말을 하는 이 모습이야 말로 하나님의 법도와 말씀이 살아있는 힘과 기준이 되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따라 행동하는 불신앙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결코 사울을 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에게서도 사울의 모습은 얼마든지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둔 위기상황에서 무당을 찾아가고, 죽은 사무엘을 다시 불려내고자 하는 사울의 행동은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최선의 행동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러한 최선으로 살아가기에 사울을 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실체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택함 받은 다윗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다윗 역시 스스로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사울로 인하여 망하게 될 것을 염려하여 블레셋에 거짓으로 투항합니다. 그리고 아기스의 충성한 신하로 행세합니다. 결국 사울이나 다윗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것은 이들은 모두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심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노력과 힘으로 스스로를 지키고 보호하려고 함으로써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지를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다윗은 블레셋 편이 되어서 이스라엘과 싸워야 하는 위기의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스스로를 지키고자 한 노력이 오히려 자신을 위기의 몰아넣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보여주는 29장의 내용입니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과연 다윗은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지금의 다윗의 모습을 본다면 다윗 역시 사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방인이며 이스라엘의 원수인 블레셋을 의지해서 자신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아기스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 이스라엘과 가까운 사람을 쳤다는 거짓말도 합니다(27:10). 분명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다윗을 돕고 계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때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를 보며 도울 만한 사람을 돕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신 자를 끝까지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도우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이용하여 방종으로 나아간다면 또 다른 불신앙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할 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블레셋 편이 되어 이스라엘과 싸워야 하는 위기에 처한 다윗에 대한 도우심은 블레셋 사람의 장관들이 다윗을 신임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3절을 보면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가로되 이 히브리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느냐 아기스가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에게 이르되 이는 이스라엘 왕 사울의 신하 다윗이 아니냐 그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여러 날 여러 해로되 그가 망명하여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노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아기스는 다윗에 대해 전폭적으로 신임을 하지만 그의 방백들은 다윗을 의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기스는 다윗에 대해 열심히 변호하였지만 방백들은 오히려 아기스에게 화를 내게 됩니다. 5절의 “그들이 춤추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던 이 다윗이 아니니이까”라는 말을 보면 뱅백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다윗이 혹 전투 중에 이스라엘과 다시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불안해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아기스가 다윗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네가 정직하여 내게 온 날부터 오늘까지 네게 악이 있음을 보지 못하였으니 나와 함께 군중에 출입하는 것이 나의 소견에는 좋으나 장관들이 너를 좋아하지 아니하니 너는 돌이켜 평안히 가서 블레셋 사람의 장관들에게 거슬려 보이게 말라”(6,7절)는 말로써 아기스는 다윗을 돌려보내게 됩니다. 이것으로 다윗은 이스라엘과 싸워야 하는 위기와 갈등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전히 하나님을 깨닫지를 못합니다. 돌아가라는 아기스의 말에 대해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당신의 앞에 오늘까지 있는 동안에 당신이 종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나로 가서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시나이까”(8절)라고 말하면서 아기스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보이는 척 행합니다. 이러한 다윗에게서 예전에 골리앗을 무너뜨린 믿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까? 사울에게 도망쳐 다니면서 하나님을 의지했던 모습을 볼 수 있습니까?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을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살려주는 다윗을 볼 수 있습니까? 그래서 믿음은 인간의 각오도 다짐도 아니고 인간이 생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인간의 소유물도 아닌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오직 불신앙의 속성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 인간을 다스리시고 고치시면서 믿음으로 행하게 하시는 분이 곧 여호와 하나님인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잊지 않으면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가는 신자에게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일하시고 행하신 결과임을 고백하는 말을 들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어떤 믿음의 행위도 결코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을 믿으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키시고 보호하신 결과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믿음을 지켜온 것이 아닙니다. 우린 다만 내 자신을 위해 힘쓰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왔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불신앙의 속성은 우리를 얼마든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자로 살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지키심으로 인해서 지금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신자는 이것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서 모든 일을 계획하고 힘쓰고 노력하지만 사실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지금껏 살아온 것도 하나님의 도우심 때문이지 우리의 힘과 노력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말고 살아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어떤 계획을 세우고 힘쓰고 노력한다고 해도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진다는 믿음에서 힘쓰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계획한 일이 잘되든 안되든 상관없이 신자는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의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단지 교회를 출석하고 있으니까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아닙니까? 하지만 그것은 단지 기독교라는 종교를 하나 가지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고 그것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말해주고 있으며 하나님의 무엇을 믿고 의지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행위를 보지 마시고 다윗을 지키시고 도우신 분이 누구신가를 생각하십시오. 다윗의 행함이 어떻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분임을 잊지 마십시오. 자신의 행위를 기준 삼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짐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잊어버린 모습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잊게 하고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간과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었다는 것만으로도 말할 수 없는 복의 자리에 거하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세력과 훼방에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지키심과 보호하심의 관계에 놓이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삶에서 두려워 할 것도 두려워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 뜻대로 자기 백성을 도우시며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다윗은 블레셋의 전투에 참여해야 하는 갈등에서 이 상황을 어떻게 빠져나갈까 열심히 궁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많이 고민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이 홀로 고민하고 방법을 모색하면서 빠져나갈 길을 찾고 있을 때 하나님은 이미 다윗을 지키시는 일을 실행에 옮기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키심과 도우심이 놀랍지 않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블레셋 방백들의 반발로 인해서 자신의 고민과 갈등이 해소되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보지를 못합니다. 더욱 더 강력히 아기스의 신실한 신하 행세를 합니다. ‘왜 돌려보내는가?’라고 거짓된 항의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철저하게 아기스 편임을 보이기를 힘쓸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어리석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키심 아래 거하면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보지 못합니다. 다만 어려움이 해소되었다는 것만으로 기뻐할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손길을 의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지함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런 무지함을 깨우치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윗의 이야기는 절대로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윗의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을 지키시는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을 지키시고 계십니다.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세워서 일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절대로 포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불신앙에도 하나님의 뜻은 방해받지 않고 하나하나 시행되어질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굳게 믿으십시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지키시고 도우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내 욕심을 이루기 위한 도우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우리를 도우시고 지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키심 아래 있는 그가 복있는 자입니다.

 

 

 

 

 

(78강) 삼상 30:1-10 다윗을 탄핵하는 사람들


<본문>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제 삼 일에 시글락에 이를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남방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거기 있는 대소 여인들을 하나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에 이르러 본즉 성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다윗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 되었던 아비가일도 사로잡혔더라)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다윗이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청컨대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비아달이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오매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이 군대를 쫓아가면 미치겠나이까 여호와께서 대답하시되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미치고 정녕 도로 찾으리라 이에 다윗과 그와 함께한 육백 명이 가서 브솔 시내에 이르러는 뒤떨어진 자를 거기 머물렀으되 곧 피곤하여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하는 이백 인을 머물렀고 다윗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쫓아가니라(사무엘상 30:1-10)

 

 

 

 

<설교>

 

국가는 지도자를 요구하며 지도자에게는 지도력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지도자의 지도력은 국가의 번영과 발전으로 평가되기 마련입니다. 제아무리 좋은 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한다 할지라도 그 결과가 좋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거나 차질이 생겼을 경우 지도자는 지도력에 대한 문제 제기와 함께 백성의 비난을 결코 피할 수가 없습니다. 경영이 무엇이며 경제 원칙이 무엇인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사람들도 국가의 정세가 불안하고 두려울 때는 마치 경제와 정치의 전문가라도 되는 양 저마다 제 목소리를 높입니다.

 

 

 

 

본래 여론은 정보와 정확한 사실에 근거한 판단에서 형성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정보가 부족하고 정확한 판단이 서지 않을 때는 목소리를 낮추고 정확한 사실을 먼저 찾아가는 것이 마땅하지만 현실은 자신의 느낌과 두려움과 분위기에 의해서 형성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결국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백성들이 지도자를 문제 삼고 비난을 하는 것은 자신들의 힘으로 눈앞에 닥친 상황을 타개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들의 대표로 세워 놓은 지도자를 비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백성과 지도자는 사실 타협적인 관계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백성은 지도자에게 합법적 권력을 부여하고 백성들로서는 누릴 수 없는 혜택을 제공합니다. 대신 지도자는 국가를 잘 경영하여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국가를 안정적으로 이끌어 주기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백성들에게 어떤 위기감이 느껴진다면 결국 화살은 지도자에게로 향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이러한 모습을 많이 봐왔습니다. 특히 지금 우리나라에 제기되어 있는 ‘대통령 탄핵’과 그것을 두고 백성들 사이에서 높여지는 비난의 목소리들이 바로 그러한 문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탄핵을 한 야당들은 대통령의 선거법 위반과 국가 경제 파탄 등의 이유를 내세웠습니다. 그동안도 백성들 사이에서 대통령의 지도력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분위기가 많았지만 야당은 아예 탄핵이라는 극단적 방법으로서 대통령의 지도력을 비난하고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잠깐 언급한 대로 저는 누가 옳고 그름을 말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또한 ‘누가 옳고 누가 그르냐’라는 문제로 성도들이 서로 토론하는 것도 원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옳은 인간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탄핵을 한 사람들이나 그것을 비난하는 사람이나 모두 그들 중심에는 자신의 유익만 존재할 뿐 하나님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보지 않고 오직 자신들만을 바라보고 사는 그 어떤 인간도 옳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옳은 것은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지금도 우리를 살피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만을 바라보고 사는 것뿐입니다.

 

 

 

 

제가 대통령의 탄핵문제를 언급한 이유는 탄핵이 잘못되었다는 말도 대통령이 옳다는 말도 하기 위함이 아니라 성경에 등장하는 인간과 현대인의 문제점을 비교함으로써 수천 년이라는 세월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단절되어 있는 관계 속에서 변하지 않고 흘러오고 있는 인간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그 문제점에서 우리의 잘못됨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기 위해서입니다.

 

 

 

 

현대인의 문제는 자신의 문제를 모른 채 살아가는 것에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과 단절된 관계에서 오직 자신을 위해 달려가는 현대인들이 자신의 문제를 모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자들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파악할 수 있는 지혜는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성경이 있는 것이고, 성경의 내용이 어떤 교훈적 가르침으로 일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차있는 이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성경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차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사람들을 등장시켜 그들이 살았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 주심으로써 그들 이야기 속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문제는 그들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서도 한 치의 달라짐이 없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이야기도 이런 측면에서 이해한다면 본문의 이스라엘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블레셋 편이 되어서 이스라엘과 전투를 할 수 밖에 없는 위기상황에 처한 다윗이 갑자기 블레셋 방백들이 아기스에게 다윗과 함께 할 수 없다고 반발함으로써 위기에서 벗어나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특히 계속되어 있는 다윗의 불신앙적 행동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도우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보시고 잘 한 사람만을 도우시는 분이 아님을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분명 우리의 상식에 갇혀 계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상식을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분임을 다시금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의 상식이라는 것은 삶에서 경험하고 학습하여 형성되어진 것임을 생각한다면 상식을 기초로 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판단은 크게 잘못된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지난 시간에 이어 블레셋 땅으로 돌아왔을 때의 상황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2절을 보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제 삼 일에 시글락에 이를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남방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거기 있는 대소 여인들을 하나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돌아가라’고 한 아기스의 말대로 자신이 살던 블레셋 땅으로 돌아왔을 때 그곳은 이미 아말렉 사람의 침략을 받은 후였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집을 비웠을 때를 아말렉 사람들이 노린 것 같습니다.

 

 

 

 

아말렉 사람들은 거기 있던 여인들을 하나도 죽이지 아니하고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여기에는 다윗의 아내와 자녀들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오늘 저는 이같은 상황에서 다윗의 주변 사람들이 다윗에게 행한 태도에 대해 살펴보고 이들의 이같은 모습이 오늘 우리들에게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6절에 보면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이 모두 포로로 끌려간 상황에서 모든 책임을 다윗에게 돌리고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일의 책임이 다윗에게 있는 것입니까?

 

 

 

 

백성들이 생각할 때는 블레셋의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집을 비우지만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거슬러 올라가서 애당초 다윗이 블레셋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집을 비웠을 때 이런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지도자로서의 실수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백성들은 다윗을 탄핵의 대상으로 여긴 것입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은 다만 지도자인 다윗의 명령에만 따랐을 뿐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결국 명령에 따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지도가가 져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 동일한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저는 현 사회는 원칙 없이 행동하고 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분명한 원칙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단지 느낌과 두려움과 감정에 의해서 행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그때의 상황과 분위기, 그리고 여건 등을 고려해서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규범은 단지 그때그때 필요한 대로 사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필요에 따라 규범을 내세우기도 하고 묵과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고 탄핵을 주도한 사람들에게서도 예외 없이 이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백성들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다윗을 돌로 치자고 했던 백성들이 나중에 어떻게 변하는가 보십시오. 20절에 보면 “또 양떼와 소떼를 다 탈취하였더니 무리가 그 가축 앞에 몰고 가며 가로되 이는 다윗의 탈취한 것이라 하였더라” 고 말합니다.

 

 

 

 

8절에 보면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아멜렉을 치라고 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말렉을 쫓아가서 치게 되고 결국 승리하여 아말렉에게 빼앗겼던 모든 것을 다시 찾고 오히려 아말렉의 양떼와 소떼를 모두 탈취하는 전과를 올리게 됩니다. 이러한 결과를 두고 백성들이 다윗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다윗을 돌로 치려고 했던 사람들의 변함을 보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이것이 바로 원칙이 없이 다만 느낌과 감정과 분위기에 의해 행동하는 모습입니다.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주어진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살피는 것이 아니라 좋으면 웃고 나쁘면 분노하는 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우리는 현 사회에서 이런 모습을 발견합니다. 탄핵을 두고 사람들은 다만 자신의 느낌과 불안감등으로 나쁘다고 비난하고 여론은 그렇게 형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대통령에 대한 문제 제기 역시 다윗을 돌로 치고자 한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이유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대통령을 비난 하다가도 만약 대통령의 정책들이 국가에 유익이 되고 백성들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면 대통령을 높이는 분위기로 당장 돌아서지 않겠습니까? 그런 경우에는 대통령이 어떤 말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실수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인간미가 풍기는 것으로 변모되어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좋을 때는 좋게 느껴지고 나쁠 때는 좋은 것도 나쁘게 느끼는 것이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도 지도자라고 일컫는 목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목사를 바라보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관계에서 목사의 지도력은 무엇으로 증거 되겠습니까? 분명 교회의 발전과 부흥으로 증거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부흥되면 목사의 모든 것이 좋게 되고 교회가 부흥되지 못하면 목사에게는 비난의 눈초리만 남을 뿐입니다. 모든 일의 책임은 지도자인 목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를 따지기 위해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의 문제는 다윗을 비난하고 돌로 치려고 했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신자로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단지 다윗만을 바라볼 뿐입니다. 다윗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많은 것을 탈취하였을 때도 ‘다윗의 탈취한 것’이라고 하면서 다윗을 높이고 있을 뿐이지 다윗과 함께 하시고 다윗을 도우신 하나님은 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말렉의 침략이 과연 다윗의 책임입니까? 다윗이 블레셋으로 가지만 않았으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여기는 것이 과연 옳을까요? 이 말은 우리가 바르게만 행동하고 살아가면 재난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과 같습니다. 과연 이것이 옳은 말입니까? ‘그럼 다윗의 책임이 아니라면 백성의 책임입니까? 아니면 하나님 책임입니까?’라고 묻고 싶습니까? 하지만 이러한 물음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책임을 묻는다는 것 자체가 일어나지 않을 일이 너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국 항상 좋은 일만 있기를 선호하는 우리의 욕심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육신에 좋은 것만을 바라볼 뿐 현재는 나쁘게 보이는 일이 결국에는 큰 유익으로 남을 수 있음을 간과하는 것입니다.

 

 

 

 

오늘 좋았던 일이 내일에는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인생에서 무엇을 좋고 무엇을 나쁘다고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신자가 끝까지 바라보며 의지할 분은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를 살피시고 보호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유익한 길로 인도하고 계심을 믿으며 사는 것이 가장 좋은 신앙의 삶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라면 지금 당장 나에게 나쁘다는 느낌이 있다고 해서 누구의 책임을 묻거나 비난을 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삶에서 하나님이 남겨 놓으신 유익을 찾기 위해 힘쓸 것입니다.

 

 

 

 

이것을 기준으로 현대 사회를 바라보십시오. 분명 하나님이 없이 사는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일이 일어났다는 인식’을 가지고 사는 것에 있습니다. 자신들이 잘만하면 나쁜 일은 얼마든지 피하며 살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에서 이것은 크나큰 교만입니다. 신자는 이러한 분위기에 휘말려서는 안됩니다. 신자는 하나님 편에 서서 세상을 바라봐야 합니다. 이것은 여러분의 삶에서 참으로 중요한 기준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채 나를 바라보게 되면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일들이 참으로 많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라는 생각과 함께 후회할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하여 신자로서 정당한 길을 가신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에 서 있다면 어떤 결과에 대해서도 후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엇 때문이다’라는 생각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맡겨 놓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신자로서 최선의 삶입니다. 아말렉에 의해서 아내와 자녀를 빼앗긴 당시의 상황에서는 슬픔과 낙심과 다윗에 대한 분노 밖에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 상황을 회복할 능력이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지도자인 다윗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시키고 그에게 분노를 행하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회복할 수 없었던 상황은 하나님에 의해서 거뜬히 회복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돌로 칠 생각을 했던 자들이 탈취물을 나누면서 ‘이는 다윗의 탈취한 것이라’며 환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울다가 웃는 자신들의 모습에서 하나님을 생각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발견하고 자신들의 문제점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좋으면 웃고 나쁘면 슬퍼하는 전형적인 불신앙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자의 생각은 항상 하나님으로 굳건히 세워져 있어야 합니다. 상황에 따라서 말이 변하고 행동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과 원칙으로 하여 일관성이 있는 진리의 길만을 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것 말하는 것 모두가 나의 느낌과 판단과 감정을 의존하여 형성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하여 형성된 것이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장래 일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오직 자기 백성의 유익을 위해 일하시고 도우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편이 되어서 이스라엘과 싸우지 않으면 안될 위기에 빠졌을 때 다윗이 고민하고 갈등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다윗을 도우셨습니다. 다윗이 이것을 알았다면 갈등할 필요가 없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는 주변 상황과 형편을 보면서 안전을 느끼고 인지하지만 신자에게 있어서 실제적인 안전은 우리의 감각적 기능으로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근심하고 불안해하고 있는 그때 하나님이 천사를 동원하여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신자에게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다만 안전함을 주변 여건과 상황을 통해서 확인하였을 때 안심하는 우리가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데 무엇이 불안하십니까? 되어진 일을 보니까 낙심이 되고 불안합니까? 그렇다면 지금의 일이 장래에 어떤 결과 어떤 열매를 맺을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모르신다면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을 신자답게 살아가도록 도울 것입니다. 본문에서 다윗을 탄핵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의 문제에서 오늘 우리의 문제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다윗을 탄핵하던 사람들이 다시 다윗을 환호하는 사람으로 변하는 것을 보면서 생각 없이 사는 사람의 모습을 보시고 그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닌가 살피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참으로 재미있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수천 년 전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지금 나의 이야기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할 뿐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죄가 우리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롬 8:28절 말씀을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79강) 삼상 30:21-30 공평의 정신


<본문>

 

다윗이 이왕에 피곤하여 능히 자기를 따르지 못하므로 브솔 시내에 머물게 한 이백 인에게 오매 그들이 다윗과 그와 함께한 백성을 영접하러 나온지라 다윗이 그 백성에게 이르러 문안하매 다윗과 함께 갔던 자 중에 악한 자와 비류들이 다 가로되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 사람의 처자만 주어서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 하는지라 다윗이 가로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붙이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이 일에 누가 너희를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일반일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그 날부터 다윗이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다윗이 시글락에 이르러 탈취물을 그 친구 유다 장로들에게 보내어 가로되 보라 여호와의 원수에게서 탈취한 것을 너희에게 선사하노라 하고 벧엘에 있는 자와 남방 라못에 있는 자와 얏딜에 있는 자와 아로엘에 있는 자와 십못에 있는 자와 에스드모아에 있는 자와 라갈에 있는 자와 여라므엘 사람의 성읍들에 있는 자와 겐 사람의 성읍들에 있는 자와 홀마에 있는 자와 고라 산에 있는 자와 아닥에 있는 자와 헤브론에 있는 자에게와 다윗과 그의 사람들의 왕래하던 모든 곳에 보내었더라(사무엘상 30:21-30)

 

 

 

 

<설교>

 

세상을 향해서 ‘하나님은 공평하시다’는 말을 하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물론 기독교인들은 ‘그렇다’는 반응을 대다수 보이겠지만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현실을 보면 너무 차이나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태어나는 환경이나 살아가는 과정에서도 사람들마다 큰 차이를 보입니다.

 

 

 

 

서울에 가면 부호들이 밀집해 사는 아파트 뒤쪽에 판자촌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보면서 ‘공평하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부자 집에서 태어나 일하지 않아도 평생을 호의호식하면서 지내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뼈 빠지게 일하면서도 고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말하면서 ‘공평치 않다’고 말합니다. 또는 어떤 사람은 평생을 건강하게 사는 반면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질병으로 고생을 하는 것을 말하면서 ‘공평치 않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차이를 말하면서 ‘신은 공평치 않다’라고 반발하거나 아니면 ‘신은 존재치 않는다’는 식으로 신을 부정하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주장들의 한결같은 이유는 사람의 의지와는 무관한 채 주어진 환경과 조건들의 차별에 있습니다. 가령 태어날 때의 환경과 조건들은 사람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런 부분을 신의 영역으로 본다면 어떻게 사랑의 신이 이처럼 불공평하게 대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신이 존재하고 또한 공평하신 분이라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조건과 환경에서 태어나게 해서 그 사람의 노력과 성실 여부에 의해 열심히 한 사람은 잘 살게 되고 게으르고 성실하지 못한 사람은 못살게 되어야 그것이 신의 공평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세상은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어진 열악하고 고통스러운 환경과 조건에 대해 분노하고 반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노가 신의 존재 자체까지 부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공평이란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공정함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다’라고 말할 때 과연 여러분은 하나님의 공평에 대해 아무런 의문이나 불만이 없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즉 여러분에게 주어진 환경과 조건들에 대해, 또는 하나님이 여러분께 하신 일들에 대해 아무런 불만이나 부당하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인조차도 하나님의 공평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하고 적잖은 의문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믿는 하나님을 정당한 분으로 변호하고 또 옹호하기 위해 하나님의 공평을 주장하는지도 모릅니다. 그 근거는 기독교안에 팽배한 사상이 ‘상급의 차등’이기 때문입니다.

 

 

 

 

상급의 차등은 예수 믿은 사람들은 동일하게 천국을 가지만 천국 내에서 대우 받는 것은 다르다는 주장입니다. 세상에 존재할 때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느냐에 의해 각기 차등이 있는 상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가 아닙니다. 성경은 오히려 상급에는 차등이 없음을 말합니다. 상의 차등을 말하는 것은 상을 미끼로 하여 교인들의 열심을 이끌어 내려는 사단적 사고방식일 뿐입니다. 천국은 말 그대로 공평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천국에서 각자의 행위에 따라 각기 다른 상을 받는다는 주장이야 말로 천국의 천국다움을 허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들의 여자와 자녀들을 포로로 끌고 간 아말렉을 치기 위해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쫓아가라고 하시자 군사들을 데리고 아말렉을 치게 됩니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의 허락을 받는 과정이 아니라 전쟁 자체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묻는 것은 전쟁의 승리는 여호와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단순히 하나님의 결재를 받는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소홀히 하거나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의 군사력과 전투력에 상관없이 승리는 여호와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가 싸우라’고 하신 것은 이미 군사의 수나 힘에 상관없이 승리했음을 뜻함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9,10절에 “이에 다윗과 그와 함께한 육백 명이 가서 브솔 시내에 이르러는 뒤떨어진 자를 거기 머물렀으되 곧 피곤하여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하는 이백인을 머물렀고 다윗은 사백인을 거느리고 쫓아가니라”는 구절을 보면 육백 명의 군사 중 이백 명이 피곤하여 기력이 없어 행군에서 뒤쳐지자 그들은 쉬게 하고 나머지 사백 명을 데리고 아말렉과의 전투에 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인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22절에 “다윗과 함께 갔던 자 중에 악한 자와 비류들이 다 가로되 그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은즉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 사람의 처자만 주어서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 하는지라”는 내용을 보면 전투에 참가한 사람들 중 악한 자와 비류들이 나서서 전쟁에 참가하지 않고 쉬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싸워서 얻은 전리품을 분배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싸우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처자만 데리고 가게 하라는 것입니다. 즉 전리품은 싸움에 참가한 우리들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악한 자들과 비류들의 생각과 사고방식이 곧 우리들의 사고방식 그대로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상급의 차등 역시 여기 등장하는 악한 자들과 비류들의 주장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잘하면 잘한 것만큼, 못하면 못한 것만큼 다르게 보상을 받는 것이 당연하지 잘하나 못하나 행한 사람이나 행하지 않은 사람이나 똑같은 것을 받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공평하지 못한 하나님이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왜 이러한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의 승리를 자기들의 힘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내가 힘써 싸워서 이 전리품들을 얻었으니 힘써 싸운 사람들이 서로 나누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피곤하다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잃어버린 처자를 찾아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처자만 주어서 데리고 떠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의 주장에 대해 다윗은 어떤 말을 합니까? 23-25절을 보면 “다윗이 가로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붙이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이 일에 누가 너희를 듣겠느냐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일반일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하고 그 날부터 다윗이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이것이 다윗의 말입니다.

 

 

 

 

다윗은 승리 자체를 자신들의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손에 붙이셨기 때문에 승리한 것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전리품은 우리의 힘으로 뺏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마치 내 힘으로 얻은 것처럼 싸움에 참여한 사람과 참여하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여 나눈다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같이 동일하게 분배하는 이것을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로 삼았다고 말합니다. 즉 대대로 이어지는 이스라엘의 정신이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은 탈취물을 유다 장로들에게도 선사합니다(26절). 결국 유다 장로들은 싸움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서도 탈취물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아닙니까? 구원은 우리가 싸워서 얻은 전리품이 아닙니다. 싸움은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전리품을 선사 받은 것뿐입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었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동일하게 분배하는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여기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여겼기에 동일하게 분배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이어져야 하는 것은 동일하게 분배하는 행위 자체만이 아니라 무엇이든 여호와께서 주셨다는 그 정신이어야 했습니다. 이 정신이 살아있을 때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답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상급의 차등을 말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공로를 주장하는 것이 될 뿐이며 이것은 교회의 본질 자체를 훼손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행위 자체를 잘 한 것과 잘못한 것으로 구분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항상 말씀드리듯이 이것은 인간의 선악 지식에 의한 것일 뿐입니다.

 

 

 

 

신자는 성령이 임한 사람입니다.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성령의 다스림과 보살핌을 도우심을 받고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이 간섭하시고 기도하시고 도우심으로 우리의 심령이 주님을 향하게 되고 주님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만약 우리에게서 성령이 떠나신다면 그 순간 주님을 배반하고 주님에게서 떠날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절대 자랑할 수 없습니다. 자랑하려거든 못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도우시고 지키시며 살피시는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 옳습니다.

 

 

 

 

신자에게서 뭔가 잘한 것처럼 보여지는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맺어지는 열매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나의 행위가 아니라 내 안에 함께 하시는 성령의 행위며 열매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행위에 의해 상급이 차등이 있다는 것은 내 안에 거주하시는 성령님까지 무시하는 주장이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성경을 보고 어떤 사람은 성경을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지 않는다고 해서 천국에 못가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신자로서 성경을 보는 것이 유익이 되고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때문에 신자로서 주님의 은혜를 깨달아가고 더욱 더 풍성한 은혜를 누리기 위해 부지런히 말씀을 대하고 묵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의로 여기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봤다는 것 때문에 천국에서 뭔가 다른 대우를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성경을 보면서 악을 행하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을 부지런히 보고 계신다면 그렇지 못한 다른 사람과 비교할 것이 아니라 성경을 볼 수 있는 마음을 주시고, 또 그만한 환경과 형편과 조건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면 됩니다. 이런 마음이라면 성경을 많이 보는 성도와 보지 못하는 성도가 만났을지라도 그러한 문제로 벽이 생기는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본문에서 다윗이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은 정신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보면 포도원 품꾼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1절을 보면 “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천국을 어떤 장소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사람을 가리켜 천국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품군을 구하러 간 주인의 그 마음이 곧 천국이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보면 주인에 의해 포도원에서 일하게 된 품군은 각기 일한 시간으로 구분되어집니다. 이른 아침에 가서 일한 사람과 맨 나중에는 십일시(현재 시각으로 오후 5시)에 부름 받은 사람으로 구분됩니다. 그런데 주인은 일한 시간과는 상관없이 동일하게 품삯을 줍니다. 이에 대해 일찍 와서 더 많이 일한 사람들이 주인을 원망을 하게 됩니다. 사실 품군들에게는 한 데나리온 씩의 품삯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손해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늦게 와서 자기들과 똑같이 품삯을 받는 것으로 인해 마치 자신들이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의 입장에서는 늦게 와서 일한 사람에게 동일하게 품삯을 주는 것은 주인의 뜻일 뿐입니다. 이처럼 천국은 우리가 일한 시간과 양을 보고 그에 따라 차별하는 것이 아님을 이 비유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입니다. 다만 세상 것을 중요하게 여기기에 하나님이 공평하지 않으신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천국을 소원하는 마음이라면 하나님의 공평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건강한 사람이든 건강치 못한 사람이든 상관없이 오직 믿음으로 가는 나라가 천국이며, 이 믿음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선물이기에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입니다.

 

 

 

 

물론 ‘그럼 믿음을 선물로 받지 못한 사람은 억울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은 공평치 못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차라리 모든 사람에게 믿음의 선택권을 주셔서 잘 믿은 사람을 골라서 천국에 보내시는 것이 공평으로 보여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 스스로 믿음을 지킬 수 없기에 그렇게 되면 천국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탈락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주시고 믿음을 지켜주시고 도와주시는 하나님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우리의 일한 것으로 가지 못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평입니다. 신자는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총으로만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받아야 할 만큼 잘한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일한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이와 다르게 대우 받아야 하고 더 받아야 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공평입니다.

 

 

 

 

교회는 서로 짐을 지는 곳입니다. 다윗은 피곤한 사람들은 쉬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리품은 동일하게 분배합니다. 만약 전투에 군사력이 필요했다면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비록 피곤하다 할지라도 억지로라도 싸우게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힘으로 싸우는 전투가 아니었기에 피곤한 자는 쉬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람의 힘으로 싸우는 아멜렉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13절에 보면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뉘게 속하였으며 어디로서냐 가로되 나는 애굽 소년이요 아말렉 사람의 종이더니 사흘 전에 병이 들매 주인이 나를 버렸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아말렉을 쫓던 다윗이 들에서 애굽 사람 하나를 만났는데 그는 병이 들어 아말렉 사람인 주인에게 버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즉 병이든 사람은 쓸모가 없기에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방식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사는 세상은 쓸모있는 사람과 쓸모없는 사람으로 구분됩니다. 그리고 행한 일에 대해 가치를 따지고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부여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힘으로 존재합니다. 인간의 힘이 아니기에 인간의 행위와 조건을 보며 쓸모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으로 구분할 수 없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공평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연히 인간의 행위에 따른 차등 또한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공평의 정신이 은석교회에 그대로 시행되어짐으로서 하나님의 공평이 무엇인가를 증거하고 나타내는 교회로 존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참된 교회입니다.

 

 

 

 

 

(80강) 삼상 31:1-13 사울의 죽음


<본문>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 아들들을 쫓아 미쳐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 미치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를 인하여 중상한지라 그가 병기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할례 없는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병기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즐겨 행치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매 병기 든 자가 사울의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사울과 그 세 아들과 병기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 골짜기 저편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요단 건너편에 있는 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도망한 것과 사울과 그 아들들의 죽었음을 보고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하매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러 거기 거하니라 그 이튿날 블레셋 사람들이 죽은 자를 벗기러 왔다가 사울과 그 세 아들이 길보아 산에서 죽은 것을 보고 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 갑옷을 벗기고 자기들의 신당과 백성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그것을 블레셋 사람의 땅 사방에 보내고 그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그 시체는 벧산 성벽에 못 박으매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의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모든 장사가 일어나 밤새도록 가서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취하여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와서 거기서 불사르고 그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나무 아래 장사하고 칠 일을 금식하였더라(사무엘상 31:1-13)

 

 

 

 

<설교>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다윗의 공평의 정신은 교회의 중심 사상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문제가 아니고 윤리적인 문제도 아니며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신자들에게서는 자연스럽게 발산되고 증거 되어져야 할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은 참으로 공평합니다. 비록 모든 사람을 같은 상황과 형편과 환경에서 살게 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세상에 주어진 조건에 따라 은혜와 사랑을 달리 베푸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선택의 법칙에 따라 사랑할 자와 미워할 자를 구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영원한 생명을 기준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기준으로 바라보는 습관을 버리지를 못합니다. 때문에 타인에게 주어진 것과 그것을 누리며 사는 그들의 삶의 풍요를 바라보면서 은연중 하나님의 불공평을 느끼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십자가에 죽으시면서까지 우리에게 베푸신 영원한 생명에 대해 감사하고 그 생명을 귀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세상에 취해있고 세상을 삶의 전부로 인식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평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공평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야 말로 신자의 본분임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 공평의 정신이 사라지고 훼손된 교회라면 교회라 말할 수 없음을 잊지 마시고 하나님의 공평이 여러분을 통해서 증거 되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공평의 정신이 살아있는 교회라면 비교, 경쟁, 자랑, 이러한 모습은 결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만 공평으로 베풀어진 사랑과 자비에 대한 자랑과 감사와 나눔만이 있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울이 전쟁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이처럼 사울의 죽음으로 사무엘상이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사무엘하에서는 하나님이 선택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하나님께 구해서 있게 된 왕입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구한 것은 이방 나라의 통치 체제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막연하게 지내는 것보다는 능력 있는 인간이 자신들을 위해 일해 주는 것이 더 믿음이 갔던 것입니다. 결국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역할은 능력이 있는 사람을 하나 골라서 왕으로 세워주는 것에 불과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왕이 아니라 왕을 세워주는 역할로 여겨버린 것입니다.

 

 

 

 

예전에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는 내용을 말씀드리면서 언급한 바가 있지만 현대 교회가 취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형태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하나님이시듯 교회의 왕도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하나님이시듯 교회의 지도자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현대 교회가 과연 ‘우리의 지도자는 하나님이시다’는 인식을 가지고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현대 교회는 갈수록 이러한 믿음에서 멀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대다수가 하나님이 지도자가 아니라 목사가 교회의 지도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하나님을 지도자라고 부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를 위해 능력이 있는 목사를 세워주는 역할로서의 지도자일 뿐이고 실제 교회를 책임지고 이끌어 나가는 지도자는 목사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 왕정 시대 때의 ‘상왕’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왕’이란 임금이 생존해 있으면서 왕위를 다음 임금에게 물려주었을 때 물러난 임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때 실권은 모두 물려받은 왕에게 있습니다. 물론 명분상으로는 상왕이 왕보다 한 수 위입니다. 그러나 단지 이름 상으로만 왕보다 위에 있는 존재로 높임 받을 뿐 모든 실권은 왕에게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지도자라고 일컫는 것이 마치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름상으로만 지도자로 여길 뿐 실제 의지하고 바라보는 것은 목사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교회 역시 그것을 인정하고 그리스도를 머리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행하는 것을 보면 몸이 머리로부터 분리되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머리 대신 자신들의 마음에 드는 다른 머리를 세워서 그 머리의 지시를 받으며 자신들을 발전시키고 지키려고 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사람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목사라고 해서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단지 교회를 위해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라고 세워진 존재일 뿐입니다. 절대로 교회를 책임질 사람으로 세운 것이 아니고, 교인들이 의지하고 따르고 복종해야 할 존재로 세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현대교회는 목사 한 사람만 잘 세우면 마치 교회가 성공될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큰 문제점은 교회의 외적인 팽창을 성공으로 인식하는데 있습니다. 때문에 성공을 위해 능력 있는 목사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왕을 구한 이스라엘의 심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발전과 번영을 위해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자기들을 다스려야겠다는 것입니다. 이방 나라가 그렇게 해서 잘살고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분을 믿으며 막연하게 바라보면서 이끄시는 대로 따라가는 것보다는 누군가의 명령과 지시를 받으면서 움직이는 것이 더 사는 것 같고 뭔가 되어져 가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이것저것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고 해서 교회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두고 교회가 게으르다거나 죽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게으르다면 그것은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죽었다면 그것은 주님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에 대한 마음이 건재 한다면 그것은 분명 교회인 것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모두가 원하고 환영했던 왕입니다. 이들은 사울이 왕으로 세워질 당시만 해도 소망에 부풀어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마음에 쏙 드는 왕 같은 왕이 세워졌으니까 이제 자신들도 잘 살 수 있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사울의 죽음으로 끝납니다. 인간이 세운 왕은 결국 하나님에 의해 죽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울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죽었다고 말합니다. 비록 본문을 보면 사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을 알 수 있지만 성경에서는 사울이 하나님께 범죄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역대상 10:13-14절의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는 내용을 보면 분명 사울의 범죄함으로 하나님이 죽이신 것으로 말합니다. 즉 사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그것은 결국 하나님이 죽이신 결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사울의 자살을 부추겼다는 뜻도 아니고 자살할 마음을 집어넣었다는 뜻도 아니라 자살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밀어 넣으신 것이고 자살하는 사울을 내어버려 두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사울의 죽음은 그가 여호와께 범죄한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살아있다고 해서 여호와께 범죄하지 않은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즉 사울의 죽음이 범죄의 결과라면 생존은 범죄하지 않은 결과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죽음과 생존을 가지고 그러한 구분을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어차피 죽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없는 인간은 없습니다. 비록 지금은 생존하여 있다 할지라도 그 역시 죽음 안에 들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죽음 안에서 그 죽음이 잠시 유예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생존의 의미입니다. 이처럼 영원히 이어지는 생존은 없기 때문에 생존의 시간적 차이가 있을 뿐 죽음 안에서 모든 인간은 동일한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사울의 죽음을 범죄의 결과로 보는 시각으로 인해서 현재 생존하여 있는 여러분은 사울의 범죄와 상관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여기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죽음이 범죄로 인한 것이라고 해서 여러분의 생존을 범죄에서 벗어나 있는 근거로 삼지를 말라는 것입니다.

 

 

 

 

분명 사울의 죽음은 범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하지만 거듭 말하지만 우리 역시 모두 죽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나이 들어 늙어 죽었다고 해서 범죄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앞서 말씀드린 대로 모든 인간의 죽음 안에 있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인간은 범죄 안에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울의 죽음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봐야 합니까? 사울의 죽음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시고 용납하지 않으신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울의 범죄가 무엇인가를 봄으로서 하나님이 무엇에 대해 용납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시는가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누군가에게 복을 주셨다면 ‘우리도 복을 받기 위해 그 사람처럼 행하자’라고 말하기보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용납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움으로써 신자된 우리 역시 그러한 삶의 길을 감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이야 말로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는 신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사울은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나선 사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사울을 만날 것이니 그를 왕으로 세우라고 지시하신 결과로 왕의 자리에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사울은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사울에게 주어진 역할이었습니다. 왕을 구하는 이스라엘 앞에 하나님은 사울을 세워서 왕을 중심으로 하는 인간의 나라는 결코 존속될 수 없음을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이 왕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죽지 않을 사람은 아닙니다. 때문에 사울이 왕이 되었기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보기 보다는 단지 그에게는 죽어야 할 역할이 주어진 것 뿐이라고 여기는 것이 타당합니다.

 

 

 

 

범죄하지 않을 자가 왕이 되어서 범죄하게 된 것도 아닙니다. 사울이 여호와께 범죄한 것은 악한 인간의 본성을 왕의 자리에서 그대로 드러낸 것뿐입니다. 만약 왕으로 세움 받지 않았다면 사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생존의 여건에서 하나님께 범죄한 자로 살았을 것입니다. 범죄는 모든 인간의 주특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이런 일만 없었다면 범죄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무지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생각할 것은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여건과 상황에서 끊임없이 범죄하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타인의 실수와 범죄함에 대해 비판을 하고 심판하는 것은 삼가야 합니다. 본인에게 다른 사람과 같은 실수가 없다고 해서 마치 자신은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 사람으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도 그 사람과 같은 여건과 상황이 주어지면 나 역시 그와 같은 범죄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타인의 실수에 대해 비판하는 입장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신앙의 길을 가기 위해 권면하고 인도해주는 입장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애당초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왕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이신데 굳이 왕을 약속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만드시기 위해 이스라엘 안에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고 전달할 자로 왕을 세우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시는 왕은 인간의 기준으로 평가하고 판단할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사울을 보고 왕으로 환영한 것은 사울의 용모가 준수하고 그의 체격이 다른 사람보다 좋았기 때문입니다. 즉 외모적으로 자신들보다 뛰어난 것이 영웅과 같은 기상으로 보여진 것입니다. 이미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계시나 하나님의 뜻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번영과 발전만 관심거리일 뿐입니다.

 

 

 

 

사울 역시 이러한 백성들의 뜻에 부응해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고 전달하는 역할로서의 왕이 아니라 단지 국가의 발전을 위한 왕으로 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신 전투에서 보기에 좋은 것들을 남겨 놓은 것입니다. 명목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해서라지만 속마음은 좋은 것들을 없앤다는 것이 아깝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유익과 번영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왕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을 죽이심으로써 하나님이 인정치 않으시고 철저히 거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4절을 보면 “그가 병기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할례 없는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병기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즐겨 행치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매”라고 말합니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투에 중상을 입게 됩니다. 이제 곧 블레셋에 포로로 잡힐 위기에 처한 사울은 할례 없는 자들의 손에 죽을 수 없다면서 병기든 자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병기 든 자가 사울의 말대로 하지를 못하자 스스로 자신을 찔러 죽은 것입니다.

 

 

 

 

사울의 이같은 행위는 어찌 보면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의 손에 죽을 수 없다는 신앙적 자존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할례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존심을 세우겠다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울이 끝까지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입장에서 자신을 생각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자의 신앙적 자존심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대로 살아가며 천국을 소망하는 것이 신앙인의 자존심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믿고 있는 내용을 당당하고 떳떳하게 드러내는 것이야 말로 신앙인의 자존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 명분, 내 이름, 내 체면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은 쓰레기와 같은 것일 뿐입니다.

 

 

 

 

사실 사울 역시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의 뜻과 포부를 앞세우며 살아가지 않습니까? 이것이 이방인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그러면서 ‘나는 할례 받은 사람이기에 너희들과는 다르다’고 말한다면 오히려 이방인의 조롱거리로 전락될 뿐입니다. 오늘 우리의 처지가 이러한 존재로 전락된 것은 아닌지 깊이 살펴봐야 할 문제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의 실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울을 보면서 우리를 실패로 이끌어 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이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시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자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역할로서의 왕이 아니라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이스라엘을 지키는 자로 존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사울의 실패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책임지신다는 것을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실패의 길을 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떤 경우에도 여러분의 왕이시고 여러분을 지키고 인도하시는 지도자는 하나님이신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인생을 여러분 스스로 책임지려고 하지 마시고, 능력 있다 여겨지는 사람을 의존하려고 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그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이 세운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보이지도 않는 분이 내 인생을 책임지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이 막연한 것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차라리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것을 믿는 것이 더 안심이 되고 일도 다 잘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곧 여러분을 실패로 끌어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항상 여러분의 생각을 지키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확실히 하시고 그 무엇에도 여러분의 생각을 양보하거나 포기하지 마십시오. 비록 지금의 길이 어려움과 고통이 동반된 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이 여러분의 지도자 되심에 의심을 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역할은 고통과 어려움에서도 하나님을 나타내고 말씀을 보여주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지도자이시고 왕이십니다. 이런 면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보여주는 특별한 진열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일에 실패한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지를 못하면 우리는 사울의 죽음의 본질과 그의 실패, 그리고 하나님이 사울을 거부하신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울은 약간 실수를 했거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모자랐거나 왕으로서 체통이 없다거나 친인척들이 부패와 비리에 연루되었기에 왕의 자리에서 잘린 것이 아닙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의 사명과 역할을 따라 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울이 자기 마음대로 번제를 드리는 것으로(13:9),아말렉의 왕 아각을 살려주는 것으로(15;9) 하나님의 뜻을 부인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이러한 사울에게 하나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는 말씀으로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합니다. 여러분이 부름 받고 지금의 그 자리에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나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나를 세우신 그 뜻에 따라 사는 것인가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내 중심이 되면 안됩니다. 그것은 곧 실패의 길을 가는 결과가 될 뿐입니다. 나에게 좋은 것 내가 원하는 것을 생각하기 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지도자시라는 것을 잊지 마시고 하나님만을 신뢰하십시오. 이렇게 사는 것이 성공의 인생입니다. 사울의 죽음은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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