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사무엘상 강해 1
사무엘상 강해 1
은석교회 신윤식 목사
(1강) 삼상 1:1-8 한나와 브닌나
현대의 모든 나라와 민족은 권력에 의해 통치되고 있습니다. 세상은 권력 구조로 형성되어 있으며 필히 압제자와 피압제자가 존재하게 되고 피압제자는 압제자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권력에 의해 통치되는 세상과 하나님 나라는 어떤 차이를 보이겠습니까? 세상은 권력이 통치하는 나라이지만 하나님 나라에는 권력이라는 것이 없는 것입니까? 물론 하나님 나라에는 압제자와 피압제자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즉 세상의 권력 구조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권세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 권세는 서로 자발적으로 사랑과 봉사와 섬김을 보임으로써 규정되어 질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마가복음 10:42-44절에서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는 말씀으로 표현합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권세에 대해서 전혀 다른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하나는 지배하는 권세, 다른 하나는 지배가 아닌 섬김과 봉사로 나타나는 권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권세자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세는 지배와 통치를 위한 권세가 아니라 봉사와 섬김을 위한 권세였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권세는 섬김을 받기 위한 권세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권세 앞에서 굽실거리는 권세가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섬기는 권세입니다. 봉사와 섬김을 권세, 즉 힘으로 표현하는 것은 봉사와 섬김은 자신의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엄청난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에 의해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과연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자인가에 대한 것은 권세에 대해서 어떤 이해로 살아가며 또한 권세가 주어질 때 그 권세가 어떤 형태로 드러나는가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의 내용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에브라임 산지 라마다임소빔에 에브라임 사람 엘가나라 하는 자가 있으니 그는 여로함의 아들이요 엘리후의 손자요 도후의 증손이요 숩의 현손이더라 그에게 두 아내가 있으니 하나의 이름은 한나요 하나의 이름은 브닌나라 브닌나는 자식이 있고 한나는 무자하더라”고 말합니다. 엘가나란 사람의 두 아내가 등장을 하는데 한나와 브닌나입니다. 그런데 한나에게는 자식이 없는데 브닌나에게는 자식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서 두 여인 사이에 싸움이 등장하는 것이 본문입니다.
4-5절을 보면 “엘가나가 제사를 드리는 날에는 제물의 분깃을 그 아내 브닌나와 그 모든 자녀에게 주고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한나가 자식이 없었던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브닌나에게는 자식을 주셨는데 한나에게는 자식을 주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죄의 문제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자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복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현대에서는 그러한 생각이 조금 줄어들었다 해도 부모에게 있어서 자식은 여전히 힘이며 복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은 내것이라는 개념에서 나옵니다. 자기 소유로 주어진 것이 있을 때 그것을 복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 것보다 상대적으로 적을 때 자연히 복이라는 개념도 사라지고 대신 불평이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상대방보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을 때 더 많은 복을 받았다고 하면서 우월감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본다면 브닌나는 복받은 자이고 한나는 복을 받지 못한 자입니다. 브닌나는 받은 것이 있고 한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이 한나에게 자식을 주지 않은 것이 한나에게 복을 주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그러나 본문은 누가 복을 받고 안받고의 차원에서 생각할 문제가 전혀 아닙니다. 그리고 뒤에 한나가 기도함으로 사무엘을 낳게 된 것을 두고 기도해서 복을 받게 된 것으로 말하는 것도 전혀 잘못된 것입니다. 애초부터 하나님은 한나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가 한나가 기도를 안했기 때문도 아니고, 또 한나더러 기도하게 하기 위해서 자식을 주지 않은 것도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다른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가 있게 하심으로서 인간에게 있는 속성을 드러내시고자 한 것입니다.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자식을 가진 브닌나가 자식이 없는 한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심히 핍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남편인 엘가나가 한나를 더욱 사랑한 것에 대한 분풀이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브닌나는 자식이 있다는 것을 권세 삼아서 한나를 곤란케 합니다. 이것이 바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관계에서 보여지는 인간의 속성인 것입니다.
브닌나가 자식을 가졌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한나가 자식을 가지지 못하였다면 그 역시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구분하면서 가진 것을 가지지 못한 것에 비해 뛰어난 것으로 말한다면 결국 가지지 못한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차별 대우를 받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실 소유에 대한 현대인의 시각은 거의 동일합니다. 가진 것을 가지지 못한 것보다 나은 것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더 나은 것을 받았다면 그것은 그가 그만큼 나은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진 것을 복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잘한 자에게 주는 상으로 인식을 하는 것입니다.
비록 한나가 남편의 사랑을 갑절이나 받았다고 하지만 자식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자식이 없어서 브닌나에게 받는 고통은 남편의 사랑으로도 해결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 보면 “그 남편 엘가나가 그에게 이르되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뇨”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가지고자 하는 욕망이 살아있습니다. 이 욕망은 누군가가 가진 자로서 내 옆에 존재할 때 더욱 주체할 수 없는 힘으로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한다고 하면서도 가진 자를 볼 때 상대적으로 가지지 못한 자신에 대해 낙심하고 하나님에 대해 아쉬움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에 다른 무엇인가가 보태지기를 원합니다.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 사랑보다는 많은 것이 주어지는 사랑을 더 강렬하게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에게 가장 귀하신 아들을 주심으로서 나타났습니다. 사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능히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전부로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내 소유를 계산을 합니다. 세상 것을 기준으로 하여 가진 것과 가지지 못한 것으로 판단하면서 하나님의 전부로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들의 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고 예수님으로 사는 것보다는 더 좋은 자가용을 소유하고 더 크고 넓은 집을 소유하는 것으로 자기 만족을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엘가나는 자식이 없는 한나를 갑절이나 사랑하였습니다. 이것은 약자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자식이 없다는 것은 약자를 뜻합니다. 내세울 것이 없고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엘가나가 이러한 한나를 사랑한 것은 하나님은 약자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은 힘을 복받은 것으로 말하고 교회 역시 힘을 소유한 것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으로 말하지만 이것은 복에 대한 잘못된 개념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복에 대한 이러한 사고방식에서는 소유로 인한 경쟁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경쟁에서 승리한 자는 패배한 자의 위에 군림하게 되고 브닌나가 한나를 격동한 것처럼 가지지 못한 자의 마음을 격동케 하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신자임을 생각한다면 여러분의 소유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소유란 단지 하나님이 맡긴 것에 대한 차이일 뿐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내가 저 사람보다 나아서 더 받았다’는 생각은 그리스도를 아는 성도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안다면 결코 자신을 남보다 더 나은 존재로 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남을 나보다 더 나은 존재로 여기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자에게 있어서 소유는 크게 기뻐해야 할 조건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조심해야 할 조건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소유로 인해서 나에게서 브닌나와 같은 사고방식이 보여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대로 한나가 자식이 없는 것은 한나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벌받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 브닌나가 한나를 격동케 하고 핍박을 한다면 그것은 한나가 당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하시는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더 많이 가졌다는 것 때문에 우월감을 가지고 남을 무시하게 된다면 그것은 한 개인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격동케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소유가 얼마가 되든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차별을 가지고 일하신 것이 아닙니다. 소유가 많은 자나 적은 자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모두가 동일합니다. 똑같은 죄인이고 예수님이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입니다. 이러한 무능함이 소유가 있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세상은 소유에 의해서 사람의 가치가 달라지고 대접받는 것이 다르지만 하나님의 대접은 누구에게나 공평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우리보다 못한 처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난한 자들도 있고 몸에 장애를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그러한 삶이 주어진 것은 그들이 원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그러한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자는 그들에게서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고통에서 예수님의 고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들의 가난과 장애는 결코 누군가에게 무시 받을 조건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예수님의 고통을 보게 하는 도구로 쓰여지고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소유는 곧 힘과 연결됩니다. 힘은 곧 권세이며 힘없는 자를 다스리고 통치할 수 있는 권력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은 소유한 자가 곧 권력자로 존재하고 소유하지 못한 자는 소유한 자에 의해 다스림 받으며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나와 브닌나를 세워서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 브닌나에게는 자식을 주고 한나에게는 자식을 주지 않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을 염두에 두고 산다면 누가 어떤 처지와 형편에 있다 할지라도 그 배후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때 약자에 대한 무시보다는 그 고통에 함께 하기 위한 삶으로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약자를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 사랑 받기 위해서 약자가 되어라는 것이 아니라 과연 누가 하나님의 사랑안에 거할 수 있는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약자란 소유와 연관이 없습니다. 즉 소유가 많다고 해서 강자고 없다고 해서 약자로 분류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유와 상관없이 자신의 것을 의지하지 않고 힘으로 삼지 않는 자는 누구나 약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기에 자신의 약자 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자로 산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에 거한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약자로 모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존재할 수 없는 철저한 무능력자입니다. 그 무엇을 소유했다고 해도 여러분의 소유물이 구원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구원을 책임지실 뿐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결코 소유의 많음이 권세가 되어서 없는 자를 다스리고 무시하는 행위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모두가 동일한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목사 장로라는 직책에 상관없고 부자 가난한 자라는 소유에 상관없고 검사 청소부 등 직업에 상관없이 동일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절대로 세상의 직업이나 신분 또는 소유로 인해서 차별이 보여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삶의 질은 소유에 의해서 얼마든지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결과만큼은 소유와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에 달렸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마지막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리스도만을 고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떠난 삶에는 아무런 희망이 없음을 날마다 자각하면서 소유를 보지 않고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감사하는 삶이 되기를 열망하고 힘쓰는 것입니다.
비록 소유가 없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가 있다면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보이는 것만을 소유라고 여길 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소유의 의미를 두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에 눈에 보이는 소유를 보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모든 것을 소유한 자입니다. 썩어질 것을 소유로 보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영원한 것을 참된 소유로 여기며 그것으로 감사하며 살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보이는 소유로 인한 갈등과 싸움속에서 끝까지 그리스도로 감사하는 자로 살기를 소원하고 힘쓸 것입니다. 보이는 것으로 인해 낙심하지 마시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2강) 삼상 1:9-18 한나의 기도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내용은 자식이 있는 브닌나가 자식이 없는 한나를 괴롭히는 것이었습니다. 한나가 자식이 없는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브닌나가 자식이 있는 것 역시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브닌나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식을 힘으로 삼아 한나를 괴롭힌 것입니다. 이러한 브닌나를 성경은 ‘대적 브닌나’로 말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한 대적으로 일컫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여호와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것이 주어졌다고 해서 그가 의롭기 때문에 복을 받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고, 주어진 것이 없다고 해서 그가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사랑하지 않은 결과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러한 시각으로 살아갑니다. 외형적인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규정합니다.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고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나와 브닌나의 관계에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나로 하여금 성태치 못하게 한 것은 한나를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자식이 있는 자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의 속성이 한나에 대한 브닌나의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되는 것이 주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미움을 받고 저주받은 자로 규정한다면 세상에서 가난하고 어려움을 받고 고통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외면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속성이 결국 예수님을 배척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예수님께 세상의 힘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었지만 힘으로 살아가는 세상 속에 힘있는 자로 보내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힘이 최고인 세상으로부터 외면을 당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힘으로 군림하는 세상에 힘없는 자로 보내심으로 세상의 악한 속성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님이 오시기 오래 전에 한나와 브닌나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주어진 것으로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힘을 견주고 경쟁하고 상대적으로 나보다 없는 자를 무시하는 것이 얼마나 악한 것이며 그것이 곧 여호와를 대적하는 것임을 분명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신자로서 중요한 것은 힘으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힘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힘으로 사는 세상에서 힘을 포기한다는 것은 무시와 업신여김과 고난을 자청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주님이 가신 길임을 알기에 그 길을 가야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통해서 세상이 왜 악한 것인가를 증거 해야 하는 것이 신자의 책임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약한 자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예수는 약하나 우리는 강해야 한다’는 식으로 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약함은 예수님의 덕목을 드러내는 것으로 여길 뿐, 예수님의 약함이 나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발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기 위해서는 힘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세상에서 뛰어난 자, 힘있는 자로 성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속성이 곧 브닌나의 모습 그대로이고, 결국 한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로 취급될 뿐입니다.
브닌나에게 괴롭힘을 받는 한나가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10-11절을 보면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고 합니다.
한나의 기도 내용을 쉽게 생각하면 아들이 없어서 괴롭힘을 당한 한나가 하나님에게 아들을 달라고 기도해서 아들을 낳게 되었다는 것으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사실 많은 현대 교회가 한나의 기도에 대해서 그와 같은 이해를 하고 힘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에게 기도해야 한다는 식의 가르침을 하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자식이라는 힘을 가진 브닌나에게 자신도 자식을 얻어서 브닌나를 이기겠다는 것이 한나의 기도인 것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에게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신에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나의 기도를 보면서 아들이 없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 아들을 낳을 수가 있다고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단지 오래 기도하고 많이 기도해야 한다는 것만 생각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생각이 결국 기도를 함으로써 죄를 범하는 결과까지 낳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라면 무조건 선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큰 실수입니다. 기도라는 행위 자체를 믿음이 있는 선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라면 무조건 많이 하고 오래하고 자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를 적게 하는 것보다는 많이 하는 것이 선한 것이고 짧게 하는 것보다는 길게 오래 하는 것이 믿음이 있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곧 브닌나가 보였던 속성임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외형적인 시각에서만 바라보는 잘못됨으로 인해서 기도를 적게 하는 사람이 믿음이 없는 것으로 무시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나의 기도가 과연 그런 의도의 기도인가를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들이 없음으로 인해 브닌나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분해서 브닌나를 이기려고 아들을 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기도할 때 흔히 말하는 것처럼 아들을 주면 그 대가로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한나는 하나님이 자기의 고통을 생각하시고 아들을 주시면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그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겠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아들을 나실인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민 6:5절에 보면 “그 서원을 하고 구별하는 모든 날 동안은 삭도를 도무지 그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날이 차기까지 그는 거룩한즉 그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할 것이며”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나실인에 대한 규례입니다. 나실인은 그 몸이 하나님께 드려진 구별된 자로 거룩한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한나가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면 그를 나실인 되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아들을 내 아들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아들로 바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한나의 기도를 보면서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기도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를 신학교에 보내서 목사되게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들을 목사되게 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 바친 것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나의 기도는 결코 그런 의미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무엘이 제사장 된 것을 두고 그가 목사가 된 것이 아니냐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사무엘이 제사장 된 것은 하나님이 그를 제사장으로 세웠기 때문이지 한나가 자신의 서원을 지키기 위해서 한나 스스로 사무엘을 제사장으로 만든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제사장은 오늘날의 목사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기에 한나가 말하는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을 목사되게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나의 기도는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면 그에 대한 보답을 하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기도를 들어 주시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은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고 흥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에 있어서 아주 악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기도에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복종하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으며 오직 자신의 욕심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악한 발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번 일만 잘되게 해주면 좋은 일을 많이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한다면 결국 자기 일을 잘되게 해주지 않으시면 좋은 일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이 잘되든 안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좋은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번 일을 잘되게 하면 좋은 일을 많이 하겠다고 하는 것은 결국 기도를 하면서 자신이 그처럼 악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은혜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나의 기도는 아들을 주시면 아들을 바침으로써 하나님께 보답을 하겠다는 의도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말한대로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겠다는 것은 나실인이 되게 하겠다는 것을 뜻합니다. 나실인은 거룩하게 구별된 자로 살아갈 사람입니다.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 않고, 시체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나실인인데 이처럼 나실인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 사람과는 별개의 삶을 사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아들은 어머니에게는 힘입니다. 꿈이며 모든 소망입니다. 아들을 통해서 자신의 욕심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만약 아들을 목사 되게 한다면 시골구석의 목사로 남기보다는 큰 교회를 이루고 유명한 목사 되기를 원할 것입니다. 아들을 통해서 자기 이름을 높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부모들의 욕망입니다.
그런데 한나는 아들을 세상과 상관이 없는 자로 살게 하겠다고 서원합니다.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하나님이 준 아들을 내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 아들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아들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보답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아들을 다시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것은 결국 한나가 아들에 대한 욕심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약 한나가 ‘아들을 주시면 십일조를 얼마를 하겠습니다’라는 식의 기도를 했다면 한나는 분명 아들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브닌나에게 당한 수모를 복수하기 위해서 나도 아들을 낳아 성공시켜 가지고 브닌나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겠다는 경쟁적 사고에 의한 기도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나는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다시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합니다. 자기 아들로 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힘으로 삼는다거나 아들을 통해 자기 욕망을 이루는 도구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아들을 주신다고 해도 여전히 아들이 없는 자로 살아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나는 무엇 때문에 아들을 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까? 아들이 없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입니까? 그렇다면 아들을 하나님께 바칠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훌륭한 자로 키워야 합니다.
한나의 고통은 아들이 없는 약자가 당하는 고통이었습니다. 아들이라는 외형적인 것으로 복과 저주를 판단하는 세상에 의해서 당하는 고통이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세상을 세상과 똑같이 힘의 사고방식으로 이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그런 사고방식이 잘못된 것임을 아들을 받았으나 그 아들을 자신의 힘으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아들이라는 외형적인 것이 결코 복이 아님을 보이겠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아들을 힘으로 삼아 아들 없는 자를 괴롭힌 브닌나의 악함을 아들이 있으나 그 아들을 버림으로써 보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들을 힘으로 삼음으로써 누가 고통을 받는가를 보이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한나의 기도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고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브닌나처럼 세상의 힘을 원하고 힘없는 것을 저주로 여기는 악한 속성으로 인해서 약자로 오신 예수님이 고통을 받으신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나가 기도할 때 제사장 엘리가 있었습니다. 한나가 오래 기도할 때 엘리가 그 입을 보니 음성은 들리지 않고 입술만 움직입니다. 당시 한나는 속으로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본 엘리는 한나가 술에 취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고 합니다. 이러한 엘리의 말이 당시 브닌나만 아니라 제사장까지도 외형적인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잘못됨으로 살았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엘리는 기도는 소리내어서 해야 하는 것으로 여겼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기도하면서 입술만 움직이는 것을 보고 술 취한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오늘날도 기도를 이런 식으로 판단하는 것이 많습니다. 기도를 할 때 속으로만 하지말고 크게 소리쳐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결국 속으로 하는 기도는 힘이 없는 기도, 믿음이 없는 기도, 열정이 없는 잘못된 기도로 규정되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구체적으로 기도하라느니, 하루에 몇시간 기도해야 한다느니라고 말하면서 그러한 기준에 미흡한 기도는 뭔가 부족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현대 교회의 기도 분위기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처럼 외형적인 것으로 기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이러한 사고방식에 의해서 예수님이 배척을 받게 되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외형적인 기도에 열심이었던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시장 길거리에서 기도하기를 좋아했던 그들에게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기도가 자신들에게 의가 되었던 바리새인들로서는 싫은 말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엘리는 기도하는 한나의 속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기도하는 한나의 모습만 보고 그를 판단했을 뿐입니다. 이것으로 당시 제사장까지도 잘못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무엘을 보내심으로써 제사장을 교체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의 속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단지 예수님의 조건과 외형만을 보고 모든 것을 판단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판단에 의해서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할 때 그 내용이 힘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예수님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는 기도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통에 참여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의 고통을 외면하고 벗어나려는 기도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가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는 아들을 주시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한나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주신 것을 힘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버림으로써 약자로 오신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기 위한 기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달라고 하는 기도보다는 주신 것을 버릴 줄 알게 해달라는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고통을 염두에 둔 기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기도를 외형적인 것으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형제의 속마음은 보지 못하고 외형적인 것으로 판단한다면 한나의 기도를 술취한 것으로 판단한 엘리 제사장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마십시오. 자기 믿음을 증거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기도를 잘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하는 것은 사단의 미혹일 뿐입니다. 기도를 자신의 욕심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는 것 역시 사탄적 발상일 뿐입니다. 기도하면서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고통에 참여하는 기도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얻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버리기 위한 기도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3강) 삼상 1:19-28 아들을 주심
현대 교회에 한나는 하나님께 정성으로 기도하여 아들을 얻은 여인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자녀 교육의 모범을 보여주는 신앙의 어머니로 교훈되어 지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로 한나를 예로 들면서 아들이 없는 여인들에게 기도할 것으로 가르치기도 하고, 자녀를 잘 교육시킬 것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나의 경험은 한나에게만 해당되는 유일한 것입니다. 한나의 경험만이 아닙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에게 있었던 경험들이 하나같이 그들에게만 해당되는 유일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어떤 경험을 주시는 것은, 이스라엘과 구속의 역사를 위해서 진행해 가시는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는 계시의 역할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바르게 보는 신자라면 ‘나도 저런 경험을 해보고 싶다’라거나 ‘어떻게 하면 저런 경험을 할 수 있을까?’에 호기심을 가지기보다는 ‘저 사람에게 저런 경험을 하게 하셔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살필 것이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아들이 없는 한나가 하나님께 오랫동안 기도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여러분도 아들을 낳기를 원하시고 또 소원을 이루시기를 원한다면 한나처럼 오랫동안 정성으로 기도하십시오’라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은 보지 않고 단지 성경에 등장한 인물의 경험을 자기 것으로 삼고 싶은 욕망에서 나온 말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받은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열왕기하에 등장하는 히스기야를 보면 병이 들어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그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생명을 연장해주신 일이 있고, 창세기에 보면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므로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그 아내가 잉태한 일도 있습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 받은 경험들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본 현대교회가 그들의 기도에 담겨있는 의미를 살피기보다는 다만 기도해서 응답 받았다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이 계시하고자 하시는 뜻은 묻혀지고 다만 ‘기도하라’는 강조와 ‘어떻게 기도하면 응답 받는가?’라는 쓸데없는 방법론만 난무하는 현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성경에는 기도했는데도 응답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이런 분이 기도하면 하나님은 틀림없이 응답해 줄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분의 기도도 외면해 버리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 한 예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사도 바울께서 자신의 몸에 있었던 가시를 위해서 기도한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사도 바울의 기도에 대해서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군가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나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신 내용을 보면서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것에만 마음이 끌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심으로써 지금 나에게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가는데 모든 마음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등장하는 사건 하나하나는 단지 사건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흔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제대로 대하는 바른 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한나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드디어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19-20절을 보면 “그들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서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한나가 잉태하고 때가 이르매 아들을 낳아 사무엘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는 내가 여호와께 그를 구하였다 함이더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여호와가 한나를 생각하셔서 잉태하게 하시고 아들을 낳게 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에서 흔히 추측하는 것은 한나가 눈물로 오랫동안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면서 기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한나의 고통을 생각하셔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들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추측으로 인해서 사람들이 상상하는 하나님은 눈물로 기도하는 신자의 호소를 외면하지 않고 들어 주시는 분으로 굳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의 기도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기도응답 받은 한나가 아니라 한나가 기도한 내용인 것입니다. 한나가 무엇을 기도하였습니까? 알다시피 아들을 구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면 한나가 아들을 구하는 목적과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상의 여인들처럼 아들이 곧 힘이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성 확보와 힘을 위해서 아들을 구하는 것이었습니까? 아니면 브닌나에게 당하는 것이 억울해서 아들을 구하는 것이었습니까? 창세기에 등장하는 야곱의 아내들을 보면 아들 낳기 위해 투쟁하는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아들을 낳지 못할 때는 여종들까지 동원해서 상대방을 이기려고 하고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투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의 기도는 그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것은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는 기도의 내용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머리에 삭도를 대지 않겠다는 것은 ‘나실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실인은 자신의 삶이 없습니다. 철저하게 여호와께 바쳐진 자로 여호와를 위해서 살아가기를 서원한 사람이 나실인입니다. 그러므로 한나가 아들을 주면 나실인 되게 하겠다는 것은 주신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나가 아들을 주시면 나실인 되게 하겠다는 것은 아들을 주신 보답으로 아들을 바치겠다는 의도로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은 어떤 사건을 동원해서 당시 시대생황을 고발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계시하기도 합니다. 즉 한나가 아들을 구하고 또 아들을 주시면 나실인 되게 하겠다는 기도에는 당시 시대 상황을 배경으로 한 기도이기도 한 것입니다.
당시의 시대가 만약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으로 존재하는 시대가 아니었다는 것은 아들이 있는 브닌나가 아들이 없는 한나를 괴롭히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한나가 아들이 없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잉태치 못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즉 한나는 자신의 잘못으로 아들을 낳지 못하는 처지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것은 한나를 통해서 당시 이스라엘의 죄가 어떤 것인가를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한나가 기도할 때 엘리 제사장이 등장합니다. 왕이 없는 당시 상황에서 제사장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제사장이 잘못되어 있다면 그것은 이스라엘 전체의 신앙이 잘못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엘리는 한나가 기도하는 것을 보면서 술취한 여인으로 취급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한나는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15-16절)고 말합니다.
엘리 제사장의 잘못은 한나의 기도를 기도하는 모습만으로 판단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들이 있다는 것 때문에 한나를 괴롭게 한 것이나 기도하는 모습으로 한나를 판단하는 이 모든 것이 당시 이스라엘이 눈에 보이는 것, 외형적인 것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으로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한나의 기도는 당시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하는 기도라고 볼 수 있으며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아들을 주시는 것은 아들이 있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곧 구원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저의 추측이 아니라 2:1절의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라는 기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해서 아들을 낳았으면 ‘하나님 아들을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고 감사헌금하면 되는 것이지 위와 같이 뿔을 들먹이고 원수를 들먹이고 주의 구원까지 들먹일 이유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 과연 한나와 같은 감사기도를 하십니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그냥 ‘감사합니다’라는 기도가 전부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들을 종합해 볼 때 한나의 기도는 한나 개인의 문제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떠나있는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하는 기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나가 아들을 낳은 것은 그냥 한 여인이 기도해서 아들을 낳은 것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나를 생각하사 잉태케 하신 것은 한나가 기도한 정성을 보셨다는 것이 아니라 한나의 마음에 함께 하셨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한나의 마음을 어떤 것이었습니까?
세상의 악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생명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물질이 생명이고 브닌나처럼 아들이 곧 힘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하늘의 것은 생명으로 힘으로 취급받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면 아들이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세상의 힘을 소유한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으로 사는 세상 사람들에게 아들이 없는 것은 저주로 보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사탄의 세력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한나를 괴롭히는 브닌나를 대적으로 표현하고, 2:1절의 기도에서도 내 원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단지 한나를 괴롭혔다고 해서 원수가 아니라 사탄의 세력을 드러내는 원수로 표현한 것입니다. 결국 한나의 기도는 아들을 힘으로 여기는 세상의 세력을 고발하기 위한 것이며 때문에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서원한 것입니다. 세상에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고 참된 생명이 어떤 것인가를 보이게 해달라는 의미로 아들을 주시기를 소원하는 것이 한나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한나의 마음에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한나의 마음을 의로 여기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기도할 때는 다만 기도하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되며 본문에서 나타난 한나의 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재에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하늘의 것입니다. 하늘의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늘의 생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주어지는 것이지 돈이나 세상의 지위 등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돈도 아들도 권력도 생명이 아니며 영원히 존재할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처럼 보이는 세상 것을 생명으로 여기고 힘으로 여기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보이지 않는 하늘의 생명이 천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말할 때도 그 흔적을 세상 것으로 확인하려고 합니다. 세상 것이 주어지지 않은 약자로 사는 것은 죽음으로 여기며 한탄하고 낙심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신자의 기도가 세상과 다를 바 없이 힘을 축적하기 위한 것으로 되어지고, 세상에 지지 않기 위한 것으로 되어지고, 남들이 가지고 자랑하는 것을 보면서 자신도 가지기 위해서 기도한다면 과연 그러한 기도가 합당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기도는 한나의 마음과 비교할 때 어떻습니까? 아들을 주시면 나실인 되게 하겠다고 기도하는 한나의 마음은 보이는 것을 생명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세상에 무엇이 생명인가를 보이겠다는 마음의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아들 없는 자에게 참으로 귀할 수밖에 없는 아들을 다시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기도한 것입니다. 아들을 바침으로써 아들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님을 보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나의 기도에 응답하시고 아들을 주신 것은 하나님은 곧 한나의 편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들 있는 브닌나 편이 아니라 아들이 없는 한나 편에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돈 있는 자의 편이 아닙니다. 권력이 있고 출세한 사람 편에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에 의해서 약자로 살고, 그로 인해서 고통을 받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악으로 인해 애통해 하는 마음 편에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애통은 바로 그러한 애통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세상에 비해 적은 것을 소유한 자신으로 인해서 애통해 하지말고 의가 없는 세상으로 애통해 할 수 있는 그 마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5: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의 가난은 한나의 기도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신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것, 내 아들로 여기지 않겠다는 것, 그것이 곧 심령이 가난한 상태의 기도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5: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애통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5:6)라고 말씀하십니다. 애통은 의에 주린 마음에서 나옵니다. 의에 주렸기 때문에 의가 없는 세상을 보면서 애통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어떤 기도가 나오겠습니까? 신자의 기도는 세상을 고발하는 차원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로 사는 새로운 세상의 백성들에게서만 보여지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가 여러분께 있기를 바랍니다.
(4강) 삼상 1:21-28 아들을 바침
본문의 내용은 이제 막 젖을 뗀 어린 사무엘을 하나님에게 바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여러분과 상관이 없는 한나라는 한 여인에게 있었던 일로만 여기기보다는 모두 자식을 가지고 있는 부모의 심정에서 생각해 본다면 어린 아들을 떼어놓아야 하는 부모의 고통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성경을 대하는 신자에게 한나와 똑같은 행동과 삶을 요구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우리에게 자식이 주어진 것은 한나와 다른 상황에서입니다. 자식이 없다고 해서 괴롭힘을 당한 일도 없었고 아들을 낳지 못한다고 해서 천대를 받은 일도 없었습니다.
간혹 사회 한구석에서 아들을 낳는 문제로 인해서 고통을 받는 여인들의 이야기가 들려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핏줄에 대한 인간의 욕망의 모습으로 비춰질 뿐입니다.
그러나 한나의 이야기는 단순히 아들을 사이에 두고 두 여인이 투쟁하는 이야기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동안 한나의 이야기를 말씀드리면서 언급을 한 것처럼 하나님은 브닌나에게는 아들을 주시고 한나에게는 아들을 주지 않음으로 해서 하나님에 대해 대적하는 세력이 어떤 존재인가를 확인시키신 것입니다.
인간의 상태는 죽음입니다.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러한 인간이 자신의 상태를 죽음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 소유된 것들이 희망과 삶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돈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희망이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절망과 죽음의 상태로 보지 않습니다. 브닌나는 아들을 희망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없는 한나가 절망의 상태로 보인 것입니다.
인간에게 무엇이 있든 인간의 상태는 죽음이며 절망입니다. 이것을 잊으면 우리는 브닌나로 살아가게 됩니다. 구원은 돈과 아들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돈있는 사람도 아들있는 사람도 그리스도가 아니면 죽음이며 절망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것에 자신의 희망을 둔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대적으로 존재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신 아들을 다시 하나님께 바치는 한나를 등장시킴으로써 아들이 결코 힘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신자에게는 단순한 성경 이야기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는 과정을 지나 영혼에 필요한 생명의 양식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해할 때 한나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개인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확고하게 하는 사건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시편 116:1-2절에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그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는 말씀처럼 신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더욱 깊은 헌신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며 평생토록 우리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끊임없는 선하심을 맛보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한나에게서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나가 아들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신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깊은 헌신이며 사랑이며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본 자의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한나의 행동에서 부모가 아이를 양육할 때 하나님에 대한 깊은 헌신으로 양육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브닌나는 아들을 자신의 희망으로 여겼습니다. 그것이 곧 인간의 절망의 상태를 보지 못하게 하는 이유였던 것입니다. 아들이 희망이었기 때문에 아들만 있으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곧 세상의 것을 희망으로 여김으로써 그리스도에게 희망을 두지 않고 사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희망은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만이 희망이라는 것은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에는 희망을 두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희망을 둘로 나누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천국을 가는데는 그리스도가 희망이고, 세상을 살아가는데는 돈이 희망이고 자식이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세상을 살아갈 때 그리스도는 소홀히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오직 천국의 문제에서 희망이 되는 분인데 세상을 살아갈 때 천국은 멀리있는 것으로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조금 소홀히 해도 괜찮다는 생각들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한나는 사무엘이 젖을 떼고 제사장 엘리의 보호와 가르침을 받을 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 사무엘을 실로로 데려갈 결심을 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어머니가 젖을 뗀 아이를 떼어놓는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나에게 중요한 것은 아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했었던 서원과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한나는 사무엘을 자신의 아들로 여길 수 없었던 것입니다.
27-28절을 보면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여호와께서 나의 구하여 기도한 바를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 아이는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고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아이이기에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엄마가 이제 막 젖을 뗀 세 살 난 아들을 제사장의 지도와 감독 아래 있도록 갖다 바치는 것은 보통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서 한나가 겪는 고통과 희생이 있음은 뻔한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희망으로 여기는 아들을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이며 하나님에 대한 깊은 헌신과 사랑이 아니고서는 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어머니라는 인간의 정으로 양육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헌신으로 양육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을 제사장으로 바친 것입니다. 한나가 사무엘을 자신의 자식으로 잘 길렀다고 해서 사무엘이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우리가 깊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자식을 잘 양육을 해서 성공시켰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아들이 천국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내 자식으로 양육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식으로 양육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브닌나처럼 자식에게 모든 희망을 두고 삽니다. 자식을 통해서 자신의 꿈과 소망을 실현해 보려고 합니다. 이것이 곧 자식을 내 자식으로 여기는 부모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인 부모라면 자식의 구원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 자식으로 기르기보다는 하나님의 자식으로 기르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자식을 하나님의 자식으로 기르게 해달라는 것이 진정한 부모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자로서 자식을 하나님께 드리는 한나에게서 자식을 양육하는 부모의 태도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식을 나의 자식이 아닌 하나님의 자식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식으로 여긴다는 것은 자식을 자신의 소망을 이루기 위한 희망으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자식의 구원만을 생각하고 양육하는 것입니다. 자식의 구원만을 생각한다면 자식에게 필요하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해지지 않겠습니까?
부모에게는 부모로서의 역할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 역할이라는 것이 단지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키고 결혼시키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자식이 원하는 대로 해주면서 남부럽지 않게 키우는 것이 부모의 도리가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부모의 도리를 잘못 이해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남부럽지 않게 잘 키우면 그것이 부모의 도리를 다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자식들도 자기 부모가 다른 아이들의 부모처럼 해주지 못할 때 부모의 도리를 다하지 않는 것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자신이 원하고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것이 곧 부모의 책임인 것으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 부모의 도리는 자식이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식을 하나님이 원하는 길로 양육해 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기도하며 하나님 편에 서서 자식이 잘못했을 때 나무라면서 양육하는 것이 부모의 도리입니다. 자식이 귀여운 것과 나무라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귀엽기 때문에 자식이 원하는 대로 해준다는 것은 이미 부모의 책임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한나가 사무엘을 귀엽게만 봤다면 제사장에게로 보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 젖을 뗀 아이를 어머니에게서 떨어져 산다는 것이 얼마나 애타는 일이겠습니까? 하지만 한나는 사무엘을 귀여운 자식으로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가게 하신 길을 가야할 자식으로 본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 사무엘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사무엘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았기 때문에 인간의 정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한나의 마음이 오늘 우리들이 마음이 될 때 비로소 저와 여러분이 신앙의 부모로서의 도리를 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앙적인 부모란 자식을 위해서 기도해주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꾸짖고 매를 들기까지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로서 신앙적인 부분에서만큼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의 구원을 위해 양보할 수 없는 부분에서는 부모의 분명한 의지가 보여져야 합니다. 자식으로 하여금 부모가 과연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자식으로 하여금 ‘우리 부모는 신앙의 문제보다는 공부 잘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판단을 하게 한다면, 먼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생각부터 고쳐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식이 아닌 내 자식으로 여긴 것은 아닌지, 그리고 자식을 자신의 희망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식의 구원보다는 세상의 출세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먼저 부모 자신부터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자식에게 보여주는 것이 겨우 주일에 교회 가는 것과 헌금하는 것이 전부라면 이것은 분명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가면서 자식에게는 좋은 대학에 들어갈 것만을 요구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교회에 소홀히 하고 신앙적인 문제를 조금 소홀히 해도 괜찮다고 말합니다. 신앙적인 문제는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회사에 취직을 한 후에 열심히 하면 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세상에서 자신이 잘되는 문제가 신앙보다 더 중요한 것임을 가르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를 사랑하기보다는 자신을 더 사랑하며 사는 법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적인 부모 역할에서 이미 멀어져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부모들은 자식을 좋은 학교에 보내고 좋은 회사에 취직시키는 것이 최대의 목표가 되버렸습니다. 자녀에게 세상에서 잘사는 법만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헌신하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는 가르치지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신자라면 자녀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로 사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이 부모의 책임입니다. 이 책임을 다하라고 여러분에게 자녀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사무엘을 자신의 자식으로 여기지 않은 한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자식을 주신 그 이유와 뜻을 곰곰이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자식으로 여기지 말고 하나님이 맡기신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한나의 헌신은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보여졌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의 헌신은 자식을 양육하는 데에서도 드러나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이런 저런 일에 부지런하고 헌신을 한다고 하면서도 자식을 양육하는 문제에서는 세상과 다를 바가 없다면 그의 헌신은 사실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의 헌신인지 아니면 자신의 체면과 이름을 생각한 헌신인지 말입니다. 자녀는 여러분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내 자식이니까 내 맘대로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신자된 부모의 생각이 아닙니다. 거듭 말하지만 자식은 하나님이 맡긴 큰 책임으로 주어진 것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키우면 그 자녀가 신앙으로 훌륭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성경을 보면 사무엘의 자녀들이 신앙적인 자녀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보면 신앙으로 양육했다고 해서 그 결과가 신앙적인 사람이 되는 것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의 결과는 하나님의 소관입니다. 부모는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에만 충실할 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깊은 헌신입니다.
신자가 가진 소망은 영원한 나라에 관한 것입니다. 세상은 알지 못하는 것을 신자는 알고 있고 그 나라가 곧 올 것입니다. 신자는 이것으로 큰소리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맡겨진 자녀가 다른 아이에 비해서 세상적으로 뒤떨어진다고 해도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자녀의 희망은 그리스도지 공부도 아니고 출세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이러한 마음을 자녀에게 분명히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가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어떤 것인가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무엘을 제사장에게 맡기는 한나의 마음을 생각하시면서 신앙인의 부모로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다시 확인하시고 내 자녀가 아닌 하나님의 자녀로 여기십시오. 그것이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입니다.
(5강) 삼상 2:1-10 한나의 찬양
세상의 약함과 강함은 소유의 질과 양으로 결정되어집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강한 자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필히 다른 사람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소유의 많음을 자신의 행복과 직결되는 것으로 믿고 있으며 따라서 소유가 적다는 것을 불행하며 복을 받지 못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신을 찾는다면 그 내용이 어떠할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지금의 것보다 더 많은 것으로 채워달라는 요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는 진정한 신자로서 살아가신다면 분명히 말씀드릴진대 앞서 말씀드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현재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은 결코 신앙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러한 하나님을 계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사무엘을 낳은 한나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기도라고 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습니다. 한나가 사무엘은 낳은 것은 단지 없던 아들을 하나 얻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한나는 사무엘을 낳음으로써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일하시는 분인지 사무엘을 낳음으로써 배우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본문의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면 분명 우리가 흔히 하는 평범한 기도는 아님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들이 없던 여인이 아들을 낳았으면 ‘아들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이 우리가 이해하는 전부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한나는 아들을 주심을 감사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먼저 1절을 보면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미 주어진 것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인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 즉 아들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없던 자신에게 아들이 있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사무엘 때문에 사무엘을 바라보고 기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나의 마음은 여호와로 인하여 즐겁습니다. 그리고 여호와로 인하여 뿔이 높아짐을 찬양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뿔이라는 것은 힘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힘이 되는 아들을 주셨음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주심으로써 자신을 높이신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심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이 내용들만 곰곰이 생각해 봐도 한나가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하는 것과 우리의 기도가 어떻게 다른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한다면 그 대부분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바라보고 하는 감사와 찬양입니다. ‘하나님 아들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직장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차원의 기도가 거의 모두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본문의 한나의 기도와 비교할 때 어떻게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바라보고 있지만 한나는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나에게 주어진 것에 있지만 한나의 마음은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한나에게 주어진 것은 한나의 마음을 하나님께 있게 하는 통로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나의 찬양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잘못됨은 우리의 마음이 수시로 하나님이 주신 것에 빼앗겨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알아가게 되고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더욱 확고하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을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빼앗겨 버리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따라서 받았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는 잠시 하나님께 감사하지만 결국 자신에게 있는 것을 내 것으로 여기게 되고 하나님보다 더 큰 힘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한나와 브닌나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브닌나는 자신에게 자식을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아들을 더 깊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즉 아들을 주신 하나님이 나의 힘이라는 사고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힘이 되는 아들을 주셨다는 사고방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이 되는 아들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별의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셨다와 안주셨다’는 의식에서 발생되는 차별인 것입니다. 이런 차별의식에서 브닌나는 한나를 괴롭혔던 것입니다.
이러한 브닌나에 대해서 한나는 1:6절에서 ‘대적’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이것은 ‘네가 나를 괴롭히니까 너는 나의 원수다’라는 의식에서 나오는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그 증거는 본문 1절에서 ‘내 원수들을 향하여’라는 구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나는 ‘원수’라는 단수가 아닌 ‘원수들’이라는 복수의 용어를 사용합니다. 즉 브닌나 한 사람에 대해 원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한나가 지칭하는 원수는 누구일까요? 그것은 곧 브닌나와 같은 사고 방식을 가진 모든 이들을 지칭하는 것이고, 이러한 사고방식에 의해서 예수님이 배척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결국 한나의 찬양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까지 이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라고 노래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반석’이시라는 말을 합니다. 한나 역시 ‘하나님 같은 반석이 없으시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한나에게는 반석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들 사무엘도 한나에게는 반석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이 계셨고, 바로 그분이 아들을 주신 것이기 때문에 한나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이 반석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반석의 의미는 전혀 다를 수가 있습니다. 즉 나에게 반석이 되고 힘이 되는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에서 반석이신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반석이기에 그분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지켜주고 힘있는 자로 만들어 주신다는 의미에서의 반석인 것입니다. 이것이 한나가 말하는 반석의 의미와 다른 점인 것입니다.
이렇게 한나의 찬양을 보면 그의 모든 관심과 마음은 오직 하나님을 향해 있습니다. 아들이 없던 자신에게 아들이 주어지고, 그것으로 큰소리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는데도 한나의 관심과 마음은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사무엘은 한나의 마음을 더욱 하나님께 붙들어 놓는 기회였던 것이지 한나에게 힘을 실어주는 도구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의 잘못됨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분명 힘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세상은 소유의 여부로서 강자와 약자로 차별됩니다. 있는 자는 없는 자를 무시하고 업신여기며 괴롭힙니다. 그리고 없는 자는 고통을 당하며 힘을 가진 자가 되기 위해서 애를 쓰게 됩니다. 이런 사고방식으로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분명 힘을 가지기 위한 목적과 수단으로 작용될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세상을 향해서 한나는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써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의 원수된 것이 어떤 것인가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나의 찬양은 선지자의 찬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시고 증거하시기 위해서 세우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4-8절을 다시 보면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유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도다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간단하게 말하면 있게도 하시고 없게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있다고 해서 자랑할 것이 못되며 없다고 해서 낙심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있을 때는 있는 것을 자랑하며 자신의 힘으로 내세우고, 없을 때는 없는 것으로 불평하고 낙심하며 살아갑니다. 한나는 이것을 하나님의 원수된 것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코 여러분에게 있는 것으로 교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교만을 꺾으실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에 비해서 없는 분들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얼마든지 그들을 부하게 하실 수가 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여러분의 소유를 보지 마시고 하나님을 보십시오. 여러분의 소유가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의 굳건한 힘이라는 것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한나를 잉태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나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없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있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든 그것은 모두 없는데서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올 때부터 가지고 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본래부터 내것인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교만이 나오는 것입니다. 본래부터 내것이라는 사고방식 때문에 남보다 많이 가진 자신을 뭔가 다른 존재로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없는 사람보다 복을 더 많이 받은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더 특별히 사랑해주시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원수된 사고방식임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은 아무것도 없는 분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상에 머리 둘 곳도 없는 분이 예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없는 분으로 보내셔서 소위 있는 자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약자로 오신 예수님이 소위 있다고 하는 강자들로부터 고통을 당하고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인가를 증거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아들이 없는 한나가 당한 고통은 예수님의 고통을 보여주는 것이며, 한나의 찬양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46-55절을 보면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의 찬양이 나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찬양의 의미가 본문의 한나의 찬양과 일치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찬양은 장차 오실 예수님이 어떤 분으로 오시고 무엇을 위해서 오시는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서 하시는 일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나의 찬양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찬양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고 말합니다. 교만한 말, 오만한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나는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수된 자의 특징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생각할 뿐, 있게 하신 하나님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있게 하신 하나님이 없게 하실 수도 있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만하고 오만한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유를 바라보기 때문에 그것이 없으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돈이 없으면 못산다는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때문에 있는데서 더 보탬으로써 더욱 힘있는 자로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유로 살아가는 교만이 아니겠습니까?
9-10절을 보면 “그가 그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으로 흑암 중에서 잠잠케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 우뢰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베푸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하니라”고 말합니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의 마지막이 어떠한가를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고 자기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신다고 하십니다.
한나가 말하는 하나님이 힘을 주실 왕은 다윗 왕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다윗 왕은 결국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짐을 생각해 볼 때 한나의 찬양은 장차 하나님이 왕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힘을 주시고 기름 부음 받은 분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높이실 것임을 계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대에 있어서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필요한 생명의 양식임을 믿지 않는 자입니다. 세상의 소유가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양식이며 생명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 여호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말하면서도 ‘돈 없이는 못산다’는 사고방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그 모습이 바로 여호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렇게 보니 바로 오늘 우리가 여호와를 대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예수를 말하면서도 돈을 놓지 못하고 포기하지 못하는 나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원수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한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음을 생각할 때 예수님은 진심으로 나의 생명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매일 매일 우리에게 필요한 생명의 양식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으로 주리고 목마른 자, 그는 예수님으로 배부름을 얻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입니다.
오늘 한나의 찬양이 우리들의 찬양이 되어서 세상 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기보다는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이 되어지길 바랍니다. 세상의 소유는 결코 우리의 힘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반석이시고 전능하시고 힘이 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없게 하시는 분도 있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입니다. 있다는 것 때문에 교만하지 마시고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6강) 삼상 2:12-17 불량자
세상의 중심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은 세상은 절대로 우리 중심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세상의 모든 일이 자신에게 유익된 쪽으로 흘러가기를 원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생각은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항상 모든 일이 나에게 유익이 되는 쪽으로 되어지기를 원하며 살아갑니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 다른 사람은 다 다쳐도 나는 안다쳐야 하고, 다른 사람은 죽어도 나는 안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을 자기 중심적으로 보는 시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시각이 잘못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세상은 하나님 중심으로 되어진다는 것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으로 되어진다는 것을 잊고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기준으로 볼 때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한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유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도다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한나는 세상의 중심을 하나님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리는 것도 주리지 않는 것도, 죽는 것도 사는 것도, 가난한 것도 부한 것도, 천국 가는 것도 지옥 가는 것도, 낮아지는 것도 높아지는 것도, 이 모든 것이 인간의 노력과 행위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임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해도 소용없으니까 되는 대로 살아라’는 의미의 말이 아닙니다. 열심히 사는 것이 스스로 부자 되기 위해서, 또는 세상에서 높아지기 위한 스스로의 목적을 가지고 사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는 것은 열심히 했는데도 왜 이런 일을 당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때로 사람을 기막히게 하는 것입니다. 나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악하게 산 것도 아니고, 사기치고 도둑질을 하면서 잘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남에게 피해 입히지 않고 열심히 살았는데 왜 홍수가 나서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늘을 원망하는 것이 우리들이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세상을 자기 중심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착하게 살았으니까 나에게 손해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당함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 자신을 중심으로 되어지기를 바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웃의 자녀보다는 내 자녀가 더 잘되기를 바라고, 옆의 교회보다는 내가 다니는 교회가 더 크게 되기를 바라는 이런 마음들이 바로 세상을 자기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신이 손해를 보고 다른 사람보다 다른 교회보다 뒤떨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앞서 말한 한나의 찬양대로 세상의 모든 일은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집니다. 하나님이 세상의 중심에 굳건히 존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여러분이 누리며 살아가는 모든 것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부한 자로 산다면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가난한 자로 살아도 그 중심에는 역시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가난함은 단순히 못먹고 못입고 사는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요함도 세상의 좋은 것을 마음껏 누리는 풍요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삶과 환경에는 하나님의 뜻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가난하다고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되고 부요하게 산다고 해서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내가 잘나고 특별해서 부요하게 하신 것이 아니고 못나서 가난하게 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릴 때 우리는 신자의 본분을 잊고 살 수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는 이러한 신자의 본분을 잊어버린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엘리 제사장과 그의 아들들입니다.
12절에 보면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마치 엘리의 아들들이 목사의 아들이면서 교회도 다니지 않고 나쁜 짓만 일삼는 그러한 불량자라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내 자녀가 어쨌든 교회만 잘 다니면 된다’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잘 다닌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안다는 증거가 교회를 잘 다니는 것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보면 하나님과 상관없이 다른 목적과 이유 때문에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학생이든 청년이든 어른들이든 각기 나름대로 교회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 때문에, 또는 기대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혀 상관없는 마음으로 열심히 교회를 출입하는 것이 얼마든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에 열심이라는 것 때문에 그의 믿음에 대해 안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엘리의 아들들을 불량자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12절에서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것을 두고 불량자로 말합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알지 못한 이들의 행위는 13-16절의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3-14절의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습관은 이러하니 곧 아무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그것으로 남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서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취하되 실로에서 무릇 그 곳에 온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는 내용을 보면 먼저 이들은 세 살 갈고리를 사용해서 고기를 삶는 솥을 휘저어 무엇이든지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을 가져간 것입니다.
레위기를 보면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 중에서 제사장이 먹을 수 있는 부분과 먹을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레위기 7:31-36절을 보면 가슴 부분과 우편 뒷다리 부분만이 제사장이 먹을 수 있도록 허락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의 아들들은 갈고리를 휘저어서 어떤 부위든 걸려 나오는 것을 자기 것으로 삼아 버린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자신들이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에 대한 구분을 하지 않고 무시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한 채 자기들하고 싶은 대로 한 것입니다.
또 15-16절을 보면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치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취하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라고 말합니다.
율법은 제물의 기름을 먹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으며 이것을 어긴 벌은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는 것이었습니다(레 7:22-25). 이것은 희생 제물의 일부인 기름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침으로써 하나님만이 거룩한 분임을 나타내는 것이고 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그들이 세상과 분리되어 하나님께 속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의 아들들은 기름을 태우기 전에 고기를 내라고 강요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바쳐지는 것이 있음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오직 자신들이 먹을 것에만 마음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신들 중심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며, 성경은 이것을 두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량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는 말을 함으로써 그들의 죄가 어떠했고 어떠한 죄였는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한 그들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했습니다. 여호와 앞에서 이것이 큰 죄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했다는 것이 오늘날 주일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즉 교회를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 제사를 멸시한 것이냐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교회를 나오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열심히 나온다고 해서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자식 교육을 잘 시키자는 교훈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본문을 통해서 부모가 자식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할 것인가를 말한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없겠지만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이 말하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 엘리의 아들들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우리들이 정작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량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 본문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엘리의 아들들의 불량스러운 행위에서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불량함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율법적으로 하면 제사장직을 이어갈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제사장이라는 직책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제사장이라는 직을 이스라엘안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는 특별직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 안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무시한 채 일반 사람은 전혀 손댈 수 없는 제물을 그것도 갈고리에 걸려나오는 것을 무조건 자신들의 것으로 취함으로써 그만큼 자기들이 특별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누리고 싶어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기름을 하나님께 바치기 전에 고기를 날 것으로 요구함으로써 제사장 가문인 자신들의 특별함을 드러내고 싶어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제사장은 결코 특별계층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제사장을 특별한 존재로 세우셨습니다. 제사장은 자기 기업이 없었습니다. 먹고사는 것도 자신들이 벌어서 그 소득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바친 것에서 하나님이 허락한 것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제사장을 특별한 존재로 대우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제사장의 희생의 삶을 보면서 이스라엘은 누군가의 희생으로 그 존재가 유지되는 것임을 배우라는 의도로 제사장을 있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특별 대우를 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가장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에 대한 희생과 헌신을 보여줌으로써 이스라엘을 가르쳐야 하는 역할이 주어진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러한 의도를 생각지 아니하고 제사장이란 직책을 자기 중심으로 생각할 때 결국 제사장이라는 것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게 되고, 특별계층으로 생각하게 되고, 이스라엘의 지도급으로 여기면서 결국 힘을 행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타락은 언제나 제사장 계층이 자신들의 역할을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때 일어났던 것입니다. 현대 사회의 잘못된 사고방식은 권력과 힘이 있을 때 그것을 특권층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권력이 주어지고 힘이 주어질 때 도대체 그것들이 주어진 이유가 무엇이며 그것이 주어진 자로서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것으로 횡포를 일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야 그렇다 할지라도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보여진다는 것은 결국 그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지 않고 자기 중심으로 살고 있다는 증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중심이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이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자신에게 세상적인 힘이 주어졌다고 해도 그것을 하나님이 맡기신 역할로 볼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생각하며 사는 신자의 본분이지 않겠습니까? 그러한 신자라면 자신에게 주어진 직책이나 지위 등을 이용해서 횡포를 일삼는 하나님을 모르는 불량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언제나 다른 사람과는 다른 대우를 받고 싶어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러한 본성이 주어진 직책과 지위를 이용해서 타인의 위에 군림하려는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엘리의 아들들의 죄와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목사든 장로든 하나님이 맡기신 역할일 뿐이지 결코 교회에서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결국 목사나 장로라는 직책을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이 특권층임을 증거하는 도구로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자에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량자라는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인간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일 뿐입니다. 그리고 죽습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죽음은 동일합니다. 목사든 평신도든 죽음은 동일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자로 죽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로 죽는가의 차이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을 바로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중심으로 보지말고 하나님 중심으로 세상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여러분의 인생의 중심도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잊고 살 때 우리에게서 보여지는 것은 엘리의 아들들과 같은 불량자의 모습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역할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자기 이익을 생각하면서 주어진 것을 누리며 사는 것에 모든 관심을 두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는 목사, 장로, 평신도의 구별이 없습니다. 목사라고 해서 평신도보다 하나님께 더 많이 헌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맡은 역할이 그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기죽을 이유가 없으며 항상 당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세상에서 누리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한이나 권력을 누리신 것이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맡기신 대로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는 희생의 역할을 감당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것은 다만 하나님이 맡기신 역할을 위해서라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이것을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불량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여러분을 지키심으로써 여러분의 인생이 불량자가 아닌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7강) 삼상 2:22-26 부모와 자녀
하나님은 엘리의 아들들을 불량자로 말합니다. 불량자인 그들은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을 자기들 멋대로 취했습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을 알지 못한 자의 행동이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이 이러한 행동을 하는 것은 하나님을 보지 아니하고 제사장이라는 자신들의 위치만을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제사장이라는 권세를 휘두르는 것이었습니다. 전능자이신 하나님이 그들 위에 계신다는 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단지 ‘나는 제사장이다’는 것만 내세우면서 권세를 누렸던 것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자신의 죄인됨을 알지 못했습니다. 비록 자신들이 제사장 가문에 속한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똑같은 죄인임을 알았다면 제사장이라는 직책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제사장이라는 것을 권세 삼아서 제물을 마음껏 취하는 행동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죄인임을 생각하지 않은 채 제사를 드린다면 그것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자신도 역시 죄인임을 잊어버린 채 목사라는 직책의 권세만 누리려고 한다면, 그리고 그러한 마음으로 예배에 참여한다면 그것이 곧 예배를 멸시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세상 어떤 사람에게도 다른 사람을 지배할 권세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각기 다른 역할을 맡기셨을 뿐입니다. 즉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맡은 역할인 것이지 한 국가를 지배할 권세로 주어진 것이 아니란 얘기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역할을 힘으로 여겨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에 계신 참된 권세자를 보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을 알지 아니한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도 주어진 역할을 힘과 권세로 삼는 자가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알지 아니한 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목사라 할지라도 목사란 직책을 힘과 권세로 누리려고 한다면 그는 누가 뭐래도 하나님을 알지 아니한 자일뿐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권세를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점을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분명히 말씀 드렸듯이 세상에 특별한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만 존재할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고 그분 앞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인식하는 신자라면 이러한 내용들을 깊이 깨닫고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불량자라 불려지는 엘리의 아들들에 대한 엘리의 반응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살펴보면서 부모와 자식과의 바른 관계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자식을 기르는 부모라면 자식을 기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실감할 것입니다. 이것은 자식을 낳아서 길러보지 아니한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물론 자식을 기르기가 어렵다는 것이 육체적으로 피곤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있는 사람이라면 사람을 고용해서 자식 기르는 것을 맡길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육체적인 피곤을 느낄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기르기가 어려운 것은 자식이 커갈수록 부모에게서 독립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즉 커갈수록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들의 뜻대로 하려고 하게 됩니다. 때문에 자식에 대한 어려움은 자식이 부모 마음대로 안된다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22절에 보면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과 동침하였음을 듣고”라고 말합니다. 엘리가 늙었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엘리가 늙었다는 것은 반대로 엘리의 아들들이 더욱 장성했다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엘리는 아버지로서의 권위가 떨어지고 반대로 엘리의 아들들은 자신들의 주장과 고집으로 살아갈 위치에 도달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볼 때 가정교육이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인격적인 면에서 생각해 본다면 가정교육이 영향을 크게 미칠 수도 있습니다. 가정의 분위기가 자식들의 성격에 영향을 주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인격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면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즉 신앙은 가정교육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이 말의 뜻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저는 신앙을 위해서 교육을 시키지 말라는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의 가정이라면 하나님을 믿는 부모라면 자식을 하나님의 자녀로 기르는데 모든 힘을 다 쏟아 부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신앙으로 살아가고 구원을 얻는 것은 가정교육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25절에 보면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고 말합니다.
엘리는 아들들의 행실을 나무랐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들은 엘리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이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다면 ‘엘리가 가정교육만 잘했다면 그 아들들이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엘리가 자식을 어떻게 양육했는가에 대해서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신앙을 위한 가정교육은 필요 없다는 의미로 하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가정교육을 잘하고 못함이 자식의 구원과 연관된 것은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만약 가정 교육이 구원에 연관된다면 신앙의 부모를 두지 못한 사람은 구원에 지장이 있다는 얘기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자된 자가 자녀를 기른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도록 교육한다는 의미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가 밥먹을 때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밥먹을 때 손을 모으는 것은 사실 하나님을 알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엄마에 의한 반복적인 교육의 결과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들은 그것을 보면서 대견스럽게 여깁니다. 마치 자신의 아이가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오해하는 것입니다. 내 아이는 신앙에 있어서 어릴 적부터 이렇게 남다르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자랑거리로 삼는 것입니다.
엘리의 아들들이 제사를 드리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즉 그들이 예배에 아예 참석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교회는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 멋대로 행동했던 것입니다. 엘리가 아들의 행동에 대해서 나무랐을 때 그들은 아버지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그것은 엘리가 말하는 하나님 자체를 무시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여호와께 범죄한다는 것 자체를 우습게 여긴 것입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잘못을 하면 하나님이 벌준다’는 얘기가 먹혀 들어갑니다. 그러나 커갈수록 부모의 그런 말들이 그냥 하는 소리라는 것을 실제로 체험하고 또 부모를 보면서 배우기도 합니다. 죄를 지어도 아무 일이 없음이 반복될 때 아이들에게는 ‘하나님은 없다’라는 인식이 점차 심어져 가는 것입니다. 부모가 말하는 하나님은 그냥 말에만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부모의 삶을 보면서 확인하기도 합니다. 부모가 하나님을 높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세상을 포기하기보다는 오히려 세상 것을 위해서 순간순간 하나님을 포기하는 것을 볼 때 그것을 더욱 더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내 부모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의 가정에 자녀를 주신 것은 그 자녀를 신앙으로 잘 교육시켜서 구원시키라는 의도가 결코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 소관입니다. 하나님이 죽이기로 한 자는 죽을 것이고 살리기로 한 자는 살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에 의해서 되어지는 것이 구원이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신앙교육을 잘받았느냐 받지 못했느냐는 구원과 연관될 수 없는 것입니다.
교육이란 지식을 가진 자가 상대적으로 지식이 없거나 부족한 자를 가르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자녀 교육이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아는 부모가 하나님에 대해 알지 못하는 자식을 가르친다는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의 자녀 교육의 잘못됨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모는 무조건 자식보다 신앙적인 면에서 우위에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크게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된 부모들이 자녀에게 요구하는 것은 ‘교회만 잘 다녀라’는 것입니다. 자신들부터 교회를 잘 다니는 것을 신앙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자녀에 대해서도 교회를 잘 다녀 줄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교회만 나가면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부모 역시 교회에 잘 다니는 모습을 자녀에게 보여주는 것이 신앙교육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물론 교회를 다니고 기도하고 봉사하는 행동을 본다면 부모들이 자녀들보다 훨씬 우위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인지를 부모부터 모른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부모가 자녀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려고 하기보다는 다만 교회에 다니면 되는 것으로 가르쳐 버리는 것입니다.
23-24절을 보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내 아들아 그리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과케 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엘리가 자식들의 행실에 대해서 듣고 나무라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신명기 21:18-21절에 보면 부모의 훈계를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리는 방탕한 자식은 부모가 그 자식을 잡아다가 장로들에게 데려가서 자식을 고발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면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 자식을 돌로 쳐죽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죄지은 자식을 벌준다는 차원의 법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운 분인가를 알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즉 죄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단호한 하나님을 보여주는 율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는 자식의 행위에 대해서 다만 말리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는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자식을 더 위하는 것입니다.
과연 어떤 부모가 율법대로 자식이 부모를 거역하고 무시할 때 장로들에게 내어 주어 죽게 하겠습니까? 만약 이스라엘이 그 법대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곧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죄지은 자녀에 대해 관대함으로 넘어간다면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엘리의 모습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는 누구나 자식을 사랑합니다. 물론 어떤 이는 부부싸움을 하고 홧김에 자식을 죽이기도 하고, 돈 때문에 자식을 버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지만 모든 부모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자식에 대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초월해 버리는 것입니다.
‘자식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자식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게 되는 것이 부모라는 말이 되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양보는 신앙적인 면에까지 퍼져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자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식 편에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린대로 신앙의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절대로 양보하지 않는다는 부모의 강한 모습을 자녀에게 보여주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식을 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다는 것은 엘리의 교육과 상관없이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죽을 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죽을 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한자임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엘리의 아들들은 아버지로부터 신앙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하나님에 의해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은총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자식교육 제대로 시켜라는 것을 권면하는 내용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자식 교육을 제대로 시켰다고 해서 하나님이 죽이기로 뜻한 자가 살아나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부모와 자식을 만나게 하십니다. 여러분의 자식은 하나님이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식을 신앙으로 교육시킨다고 해서 하나님이 죽이기로 뜻한 자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자식에 대해서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여기서 부모된 자가 잊고 있는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는 자식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식을 통해서 자신을 확인해야 하는 것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대로 교육은 아는 자가 모르는 자를 가르침으로써 그 지식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의 자녀교육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녀를 통해서 부모가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엘리는 아들들의 잘못됨을 나무라는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아들들을 보면서 아들에 대해 탄식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아들들의 그 모습이 바로 자신의 모습임을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바로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복종치 아니하고 살았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자의 가정에 자녀를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부모의 말을 듣지 않은 자식은 부모에게는 큰 근심거리이며 탄식거리입니다. 그럴 때 그러한 자식을 주신 하나님께 원망할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바로 하나님에게 그러한 자식으로 살았음을 깨닫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속썩이는 자식 때문에 괴로워하는 자신의 심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나 좋은대로 살아가는 나를 보면서 괴로워하시고 탄식하실 하나님을 발견하라고 그러한 자식을 보내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보여줄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복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보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신앙으로 잘 가르쳐서 천국 보내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내 역할은 예수를 전하고 증거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자식을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은 부모를 떠나서 제사장 엘리에게 맡겨졌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아버지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즉 정상적인 신앙의 가정에서 부모의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았던 것입니다. 즉 사람의 교육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교육을 받아서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기 때문에 신앙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식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부모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보여주는 역할에 충실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자식에게 전달하면 됩니다. 자식이 부모의 가르침을 무시할 때 자식만 나무랄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자로 살았으며 그러한 자신에 대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탄식하셨을까라는 것을 깨닫고 회개할 때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라면 바로 그러한 부모에게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식을 기르면서,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불신앙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독생자까지 버리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그 사랑을 외면하고 살아가는 나에 대해 얼마나 탄식하실까를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이 그처럼 하나님을 깊이깊이 생각할 때 그것으로 자연히 자식에게 하나님을 가르치고 예수님을 보여주게 되는 것입니다. 말을 하지 않더라도 부모를 통해서 하나님이 누구시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자식이 잘못을 했을 때 나무라고 야단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자식의 잘못된 행동을 나무라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이 어떠했던가를 살피고 자신을 먼저 나무래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신앙하는 참된 부모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8강) 삼상 2:27-30 존중히 여김
30절을 보면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신자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긴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고 멸시하는 자는 경멸히 여긴다고 분명히 선언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벼이 들어서는 안됩니다. 나와는 상관이 없는 말씀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천국을 소망하고 사는 신자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이니 만큼 이 말씀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볼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이라고 고백하고,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고 하면서도 삶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절대적이며 반드시 이루어질 말씀에 대해 전혀 두려움이 없이 무시하는 듯한 태도로 살아가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삶은 말씀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으로 나아가야 하고 그 어떤 세상 것이나 일에 대해서도 양보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만 우리의 삶을 보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 의해서 밀려나고 포기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따라가기보다는 내 욕심을 따라가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솔직한 모습이고 또한 우리 스스로도 인정할 수 있는 사실이라면 본문의 말씀은 그야말로 우리를 긴장시키는 말씀이 아닐 수 없지 않겠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는 하나님 역시 그를 경멸히 여기신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이 농담으로, 우리를 겁주기 위해서 한번 해본 말로 여겨집니까? 아니면 ‘나는 절대로 하나님에게 경멸히 여김을 받지 않는다’라는 자신감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긴장됨이 있어야 하고 다시 한번 자신을 깊이 살펴볼 기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두고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도대체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은 무엇이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은 또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먼저 알아야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인데도 정작 자신은 존중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안타까운 일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잘못된 존중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르게 존중함으로써 하나님의 존중히 여기시는 복을 누리는 자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문제를 교회와 연관지어 생각하기도 하고, 또는 자신의 도덕적인 착한 행동과 연관짓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존중하기 때문에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것이 곧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섬기는 것을 헌금이나 봉사로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 역시 하나님을 대신하기 위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교회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했다는 것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이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거룩한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마치 교회가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을 것으로 오해하기도 하지만 교회란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들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교회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으며, 그들을 한 몸으로 즉 교회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하셨습니다. 그때도 역시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에게 남겨진 것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에 복종하는 것이 아담으로서는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됩니다.
말씀으로 창조된 피조물의 가장 피조물다운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진심으로 창조주로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것으로 드러나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면서 복종할만하면 복종하고 그렇지 않으면 거부하고 피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기준으로 해서 말씀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면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이렇게 일했는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있게 합니까?’라는 불평을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행동하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은 별개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보면서 하실일을 결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한 것이 있으면 편하게 살게 해주고, 열심히 하지 않으면 그 대가로 고생을 시키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하나님에 대하여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모른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분으로 계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전 생애를 하나님을 위해 살았다고 할 수 있는 선지자 사도들이 과연 그들의 행위로 인해서 세상의 편함을 누린 적이 있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으로 인해서 애매한 고통과 고난을 당한 것이 그들이 아니었습니까? 그처럼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삶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증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행함은 세상의 복과 연결 지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결국 성경을 덮어 버린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한대로만 살아가면 됩니다. 말씀앞에서 ‘그렇게 하면 나에게 어떤 복이 주어집니까?’라는 불순한 생각은 버리고 말씀으로 지어진 피조물이기에 말씀의 다스림을 받아 사는 것이 나의 본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전도서에 보면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는 말씀을 합니다. 이것은 분명 솔로몬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입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을 세워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이러한 말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말이라 할지라도 그 말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말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그러한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의 말이라면 얼마든지 우리의 생각에 의해서 거부할 것은 거부하고 받을 것은 받을 자유가 있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를 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헛되다고 했으면 헛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내가 볼 때는 헛되지 않은데, 귀하고 가치있는 것이 많은데 왜 하나님은 이렇게 좋은 세상을 헛되다고 하는가?’라는 반발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나서 ‘너희들 마음에 맞으면 받아들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무조건 순종하라’를 요구하십니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높으신 하나님의 생각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내 자신을 사랑하며 나를 중심하기 때문에 우리의 판단은 선한 것이 될 수 없으며 옳은 것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헛되다’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세상을 헛된 것으로 보고 살아가는 것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고 이것이 곧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 됩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하나님이 생명나무를 감추시고 두루도는 화염검으로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인간은 스스로 생명으로 나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의 착한 일과 교회에서의 봉사 등등의 공로로 생명에 도달하고 상도 얻어보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내가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잘하는데 이런 나를 천국보내고 상주시지 않겠는가?’라는 기대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기대가 곧 자신의 올무가 되어서 멸망으로 이끌어 갈 수 있음을 생각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을 말하면서도 성경을 덮어버린 것은 스스로 눈을 감아버린 것과 같습니다. 소경으로서 어떻게 제대로 길을 갈 수 있겠습니까? 아무쪼록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각을 이정표로 삼아 신앙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이정표로 삼아서 참된 신앙의 길을 걸어갈 수있기를 바랍니다.
27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 조상의 집이 애굽에서 바로의 집에 속하였을 때에 내가 그들에게 나타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너희 조상의 집’은 엘리 가문이 속한 레위지파, 그중에서도 특히 제사장직을 위임 받은 아론의 가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이 말은 옛날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이스라엘을 구출하셨는데 그때 아론의 가문도 함께 구출되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하나님으로 인해서 애굽의 종되었던 처지에서 구출된 그 은혜를 생각해 보라는 의도로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너희는 지금 나의 은혜를 잊어버렸다’는 것을 책망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28절에서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내가 그를 택하여 나의 제사장을 삼아 그로 내 단에 올라 분향하며 내 앞에서 에봇을 입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자손의 드리는 모든 화제를 내가 네 조상의 집에 주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하십니다. 구약시대에는 아무나 제사장을 할 수 없었습니다. 오직 엘리의 조상인 아론의 가문에서만 제사장직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 에봇을 입게 하셨는데, 에봇은 가슴에 우림과 둠밈이라는 것이 있는 제사장 복장으로서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입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아론의 가문을 특별히 제사장으로 삼아서 그들만이 하나님의 뜻을 물을 수 있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드리는 화제를 네 조상의 집에 주셨다는 것도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의 일부를 먹을 수 있는 특별한 사람으로 세움을 입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을 이어가는 아론의 가문은 특별히 구별된 존재입니다. 하지만 제사장은 권력이 아니라 역할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안에 제사장을 세움으로서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이 어떤 것임을 보이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는 하나님이 자신의 가문을 제사장으로 세우신 그 뜻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 이스라엘은 먹지 못하는 제물의 일부를 자신들만 먹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들은 제사장 집안으로서 다른 이스라엘과는 다르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이라는 것을 권력으로 남용을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엘리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고 세상에서 이런 저런 형편과 환경에서 각기 살아가게 된 것에는 모두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살다보니까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인도하심에 의해서 되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다만 소유한 것을 누리면서 내 배를 채우고 살찌우기 위해서 살기에 급급한다면 결국 그것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됩니다.
결국 하나님은 엘리를 통해서 ‘너희 자신만을 생각하지 말고 너희들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신자다’는 것만 생각하고 말 것이 아니라 ‘나를 신자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소유한 것을 바라보면서 그것을 힘으로 삼지 말고, ‘나는 누구의 은혜로 사는가?’ ‘나에게 주어진 이 모든 것이 어디로부터 주어진 것인가?’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우리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지 않도록 붙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몸이 편하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여기는데 하나님은 ‘너에게 그러한 복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 왜 너를 특별히 그렇게 만드셨는가 생각해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귀찮은 일입니까? 그래서 성경보기를 싫어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주시고는 ‘누가 내 말을 존중히 여길래’라고 묻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남겨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세상에서 잘먹고 잘살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끝까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붙드시는데 있습니다. 하늘을 소망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잘 알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보다 세상을 소망하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은혜는 필요 없다면 무시해 버릴 것입니다.
신자는 세상에 서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면서 세상의 헛됨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세상의 헛됨을 볼 때 자신이 헛된 것을 추구하지 않고 하늘의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자로 되어진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보고 사는 신자인 것입니다.
29절을 보면 엘리는 아들들을 하나님보다 더 중히 여겼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엘리의 책망을 대해보면 우리 역시 엘리와 다를 바 없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엘리가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며 살지 않습니까? 엘리는 자식을 더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제사와 제물을 멸시하는 그들의 죄를 그냥 넘겨버렸습니다. 아들들의 죄를 미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의 죄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사나 제물은 모두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멸시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죄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중히 여기는 엘리 자신의 죄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죄를 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네 자식을 버리고 하면 아마 ‘하나님 어떻게 내 자식을 버릴 수 있습니까?’라고 반발할 것입니다. 자식을 버린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식이 곧 자기 보람인데 자기 보람을 버리라는 말에 곱게 순종하겠습니까? 결국 하나님보다는 내가 중하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식을 바치라는 명령에 그대로 순종합니다. 이것으로 아브라함에게는 자식보다 하나님이 더 크신 분이었음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에게는 하나님보다 내가 중하고 내 자식이 더 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버렸으면 버렸지 나 자신을 버릴 수 없고 내 자식도 버릴 수 없다는 고집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죄를 깨닫고 죄에 대해 미워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볼 수 있을 때 그 죄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보게 되었을 때 내 자신을 위한 삶보다는 나를 살리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찾기보다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존중하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결론은 하나님을 존중하는 자로 살아 갈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보고 그 죄를 미워하는 것으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죄인일 수밖에 없는 모든 인생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없는 인생은 헛된 인생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말들이 세상을 사는데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인된 내가 생명을 얻는데는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헛된 것을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희망이신 예수님을 좇아가는 인생이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죄를 보면서 멸망할 수밖에 없는 나를 구원하신 은혜를 생각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의 중심에 깊어질 때 우린 ‘내 인생에서 유일한 희망은 예수님이다’는 고백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신자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9강) 삼상 2:31-36 심판의 의미
신앙은 자신을 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보고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저에게는 ‘허공에 외치는 것이 아닌가?’라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아무도 듣지 않고 관심 두지 않는 말을 그저 홀로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신앙이란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신앙이 제대로 된 것이라면 모든 관심을 하나님께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이 있음으로 보여지는 모습입니다. 신앙은 절대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외에 다른 것을 소망하거나 의지하지 않게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 외에 의지하는 다른 것을 치면서 우리의 심령을 하나님께만 붙들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내쪽에서 하나님을 찾아가는 행동이나 의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죄인된 자를 찾아오셔서 역사하신 결과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만을 말하고 그리스도만을 전하는 것은 그래도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두게 되는 자가 있을 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신앙은 하나님 한분 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 믿고 다른 신은 안믿는다는 차원의 말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만 믿고 부처나 서낭당 같은 우상은 믿지 않는다는 얘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외에 다른 것은 의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그렇게 살아갑니까?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 한분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신앙입니까? 엘리는 아들들을 하나님보다 더 중히 여겼다고 책망을 받습니다. 즉 하나님보다 아들을 더 중히 여기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신앙이 있는자라고 말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보다 더 중히 여기는 것이 있을 때에는 그것을 신앙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뭐 그렇게까지 심하게 하는가? 좀 적당히 하면 안되는가?’라는 불만이 있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보다 더 중히 여기는 것이 존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엘리와 다를 바가 없음을 스스로 인정할 것입니다. 엘리가 하나님보다 아들을 더 중히 여겼다면 우리도 엘리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과연 누가 아들보다 하나님을 더 중히 여기며 살아갈까요? 과연 이것은 우리에게는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수준의 신앙일까요? 인간에게 불가능한 수준의 신앙이라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삭을 바치는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아브라함은 특별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도 한때는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치사하고 연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바치기까지 하였다면 분명히 아들보다 하나님을 더 중히 여기는 신앙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일단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아들보다 하나님을 더 중히 여기는 그러한 신앙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소망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엘리에게 말씀하신대로 하나님보다 아들을 더 중히 여기는 것을 신앙으로 간주하지 않고 아들보다도 하나님을 더 중히 여기는 신앙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소망이 있는지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그러한 소망이 아예 없다면 제가 지금 하나님만 신앙하기 위해서 말하는 이런 얘기들은 관심 밖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항상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는 것은 자식에 대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식의 건강 문제, 자식을 교육시키는 문제, 항상 이러한 문제들로 인해서 걱정하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것이 오늘날의 부모들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신앙하는 문제를 두고 고민하고 걱정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입니다. 자식의 신앙을 두고 걱정하기도 하겠지만 그것도 엄밀히 따져보면 다만 내 자식이 지옥가면 안된다는 자식 사랑에 나온 걱정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자식의 신앙을 걱정하는 것도 잘못이니까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다만 우리의 신앙의 밑바닥에 과연 무엇이 있는가를 살펴보자는 의도에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히 여겨서 사랑하는 것들이 무엇인가를 하나하나 따져보면서 과연 우리의 중심에 하나님이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말고 다른 것을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싸움입니다. 내 중심에 있던 다른 것을 쫓아내고 하나님이 자리하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앙을 주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시겠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믿는다’고 하는 우리의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속중심을 차지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속중심에 다른 것이 들어있을 때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쫓아내어 우리의 중심을 점령하시기 위해서 싸우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렇게 저를 세워서 이 말씀을 하게 하시는 것도 우리와 싸우시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중히 여기는 것들이 결코 중한 것들이 아님을 알게 하시고 진심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시는 싸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한자이기 때문에 택한 자에게 구원을 베풀기 위해서 우리와 싸우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승리하셨을 때 구원받은 자는 자신이 잃어버린 자였고 악한 자였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잃어버린 자였고 악한 자임을 깨달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볼 때 하나님보다 더 중한 분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그 어떤 것도 심지어 사랑했던 자식도 하나님 앞에서 버림받은 죄인된 존재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살리실 하나님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원하는 자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다른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은 보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만 원하는 자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인데 온통 세상을 향해 있는 우리들의 마음으로서는 사실 하나님을 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돈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면 원하겠는데 그동안 제가 외쳤던 것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었기 때문에 세상을 살아가는데 하나님을 불필요한 분으로 여기는 마음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시기 위해서 오늘도 말씀으로 우리와 싸우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처음에 말씀드린대로 ‘과연 이 말씀에 관심둘 자가 누구인가?’라는 의문에 저에게 있지만, 저로서는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제 생각만으로 ‘말해도 관심없을거야’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말씀드리는 것이 저의 할 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의 집을 위해 행하신 모든 일을 상기시켰습니다(2:27-28). 애굽에서 조상의 집을 구원하신 일, 그리고 조상의 집을 통해서 제사장 직을 이어가게 하신 일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은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함을 선포하는 임무를 맡은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는 제사를 통해서 보여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제사장이 제사를 멸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는 제사를 멸시하는 아들들의 행위를 그냥 넘겨 버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무시당하고 제사가 멸시를 받는 것보다 아들을 더 중히 여기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엘리에게 하나님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30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존중히 여길 자가 못됩니다. 악한 존재이기 때문에 버림받아 마땅합니다. 그러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존중히 여김을 받는다면 그것은 말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에게 경멸히 여김을 받는다면 그것은 곧 멸망을 의미하지 않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시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31절에 보면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고 말씀합니다. 팔을 끊는다는 것은 힘을 끊는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젊어서 죽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한다는 것입니다. 젊어서 죽었기 때문에 노인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 일은 후에 있게 될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그렇게 될 것이라는 표징으로서 홉니와 비느하스를 죽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34절에서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날에 죽으리니 그 둘의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새로운 제사장이 일어날 것이고(35절) 엘리의 후손들은 자기들을 대신해서 일어난 제사장을 의지해서 먹고 살아가게 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36절).
우리는 이 말씀들을 결코 가볍게 넘길 수는 없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못된 짓을 하다가 하나님께 심판 받아 망했다라고만 생각할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로 우리들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고, 지금 하나님이 이 말씀으로 우리와 싸우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로 돌이키기 위해서 싸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홉니와 비느하스를 한날에 죽게 하셔서 이 일이 표징이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과연 어떠한 표징을 말하는 것입니까? 죄지으면 이렇게 죽는다는 표징이겠습니까? 그런 표징이라면 사실 지금의 사람들에게는 먹혀들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죄지어도 죽어나가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일처럼 사도 앞에서 거짓말만 해도 죽어나가는 일들이 계속되어진다면 죄짓는 것에 대해 겁을 먹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죄지어도 죽어나가지 않는 이 시대에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는다고 하는 것이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표징입니까? 35절을 보면 “내가 나를 위하여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리니 그 사람은 내 마음 내 뜻대로 행할 것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리니 그가 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하리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과연 누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존재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인데 하나님에 의해서 죽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키실 것인데 그는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영구히 행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이것은 무엇이 죽는 것이고 무엇이 영구히 행하는 것인가를 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홉니와 비느하스를 죽임으로써 영원한 것이 있음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30절의 말씀은 영원한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존중히 여기신다는 것이 세상에서 귀한 존재로 만들어 주겠다는 뜻이라면 아마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존중이란 다만 예배드리고 헌금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중이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중히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라는 뜻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그를 영원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로 사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며 그것이 영원히 사는 길임을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영원한 것에 마음을 두고 살아갈 때 무엇이 중한 것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천국을 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을 다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 마음은 천국에서 멀어져 있는 것이 우리일 수 있습니다. 관심 자체가 영원한 것보다는 세상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 마음을 영원한 것으로 돌리시기 위해서 엘리 집안의 심판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심판받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만을 중히 여겨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죽고 사라지는 세상에 영원한 것이 있음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인생은 죽고 사라집니다. 세상의 것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지금 당장은 눈 앞의 자식이 중하게 여겨지겠지만 부모 자식의 관계도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세월이 지나면 부모 자식의 관계도 끝나는 것이고, 또 살아가면서 자식이 속을 썩일 때는 자식에 대한 사랑보다는 미움이 더 클 수도 있습니다. 자식을 믿는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자식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사람을 맡아 키운다는 마음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은 자식말고 돈말고 영원한 다른 것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영원한 분을 믿고 따르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영원한 것에 관심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죽고 사라지는 세상사를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쓸모없는 인생이 무엇으로 존중히 여김을 받고 영원한 존재로 남을 것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신앙으로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모시도록 인도하십니다. 그것이 영원히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주님을 향하시기 바랍니다.
(10강) 삼상 3:1-9 하나님의 부르심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 살아가게 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특별한 은총이 있었기 때문에 되어진 일입니다. 즉 하나님이 불러줬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이 부르시지 않았다면 그 누구도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살아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은 말 그대로 신자에게는 엄청난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그리스도를 믿게 된 신자들이 부르심이 엄청난 은총임을 자각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마치 ‘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았고 내 발로 예수를 찾아서 믿었다’는 식으로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하는 것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시하는 태도가 있게 된 것에 대해 인간적 사고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이야 하나님이 부르셨다고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부르심을 체험했다고 하기는 무척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울처럼 하늘에서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가지고 “○○야 네가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않느냐 이제부터 나를 믿어야 하느니라”는 식으로 음성을 들었다면 ‘그래 나는 하나님이 부르셨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스스로도 확신하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직접적인 음성에 의해서 부르심을 입은 것이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도 내 스스로 예수를 믿기로 작정하고 교회를 찾은 것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 자체를 경시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적으로 생각하면 하나님이 불러줘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이 맞게 여겨지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은총이라고 말하는 것에 동의를 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과연 우리의 삶이 부르심을 입은 자로서 합당한 모습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어쩌면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인정은 하면서도 부르심에 대해 마음을 두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드리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은 신자로서 과연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는가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혹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경시하는 태도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시는 일이 나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내용의 초점을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것에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본문을 자세히 보면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것이 중점이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드디어 사무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서 제사장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는 그러한 순간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내용을 조금 다른 측면에서 이해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심으로서 이미 부르셨던 다른 누군가가 버려지는 것을 보이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적이 드물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만큼 하나님과의 교통이 멀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하나님께 나와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제사장이었습니다. 따라서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제사장이었던 엘리의 말씀에 대한 무능력과 무관심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2절의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라는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엘리가 늙었다는 것을 설명하는 내용으로도 볼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엘리가 늙어서 쓸모가 없어졌기 때문에 대신 어린 사무엘을 제사장으로 대체하신 것이라는 얘기밖에 안될 것입니다.
신명기 34:5-7절을 보면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 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 이십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엘리의 경우와 매우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모세는 나이가 들기는 했지만 늙어 기력이 쇠하여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했기 때문에 모세와 여호수아를 교체하신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모세의 할 일이 다 끝났기 때문에 모세의 자리에 여호수아를 세우신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나이 들어 늙었다고 해서 쓸모없는 사람으로 취급하여 젊은 자로 교체하시는 분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엘리가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잘 보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엘리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던가 나이가 들어서 제사장의 일을 할 수 없게되었음을 설명하기 위함이 아니라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영적인 상태가 어떠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신 것은 단지 사무엘을 쓰시기 위해서 불렀다는 것보다는 어린 사무엘을 부르심으로서 엘리를 지적하시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누군가를 부르셔야 한다면 당연히 엘리를 부르셔야 합니다. 제사장은 분명 엘리였지 사무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무엘은 어린 아이였습니다. 7절에 보면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것은 여호와를 믿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1절에서 말한대로 사무엘은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고 말하는 것은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과 부르심을 듣고 분별할 수 있는 특별한 은사를 부여받지 못했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무엘은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시는 것을 듣고도 그것을 엘리가 부른 것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셨을 때에도 사무엘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을 깨닫지 못했지만 엘리가 그것을 깨닫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알려줬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이해하고 따를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시고 있는데 정작 부르심을 받은 본인은 깨닫지 못하지만 엘리가 깨달았음을 본다면 아직까지 사무엘보다는 엘리가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무엘을 부르셔서 엘리에게 가게 하시는 것은 제사장으로서의 엘리가 끝났음을 보여주기 위함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엘리를 부르셔야 하는데 어린 사무엘을 부르셨다는 것이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엘리가 늙었기 때문에 사무엘로 제사장을 교체하시는 것이 아니라 엘리가 제사장으로서 살아가지를 않았기 때문에 엘리를 버리시고 사무엘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에서 사무엘에게 관심을 두기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엘리에게 관심을 두는 옳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무엇 때문에 엘리를 버리시는가?’에 관심을 둔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옳은가?’ 를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하면 목사나 선교사 또는 장로가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은 목사되고 선교사가 되고 장로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론 목사로 살아가고 선교사로 살아가고 장로로 살아가면서 해야 할 역할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부르심을 그러한 것으로만 이해해 버린다면 결국 일반 신자들에게 부르심은 관심 밖이 되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를 죄에서 건지셔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목사되게 하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이 쓰실 그릇으로 삼으셔서 어떤 일을 하시고자 하시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은 모든 신자들이 생각해야 할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부르신 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바로 그분을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히 부르셔서 아들을 믿게 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에 대해 그리스도를 담아서 보여주고 증거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신자는 그리스도라는 보배를 담고 살아가는 그릇으로서 내 속에 담겨 있는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할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에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지시고 구원하기 위한 목적이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 구원된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8:19-20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8절에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들은 단순히 전도해서 많은 사람들을 교회로 모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가신 마당에 이제 예수님을 증거하고 드러내고 보여줘야 할 일이 제자들에게 맡겨졌음을 뜻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너희가 부름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기 구원에 만족하고 살아갈 것이 아니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알았다는 것으로 다 끝난 것처럼 여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알게 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증거해야 하는 것이 곧 내가 살아가는 이유임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게 된 우리는 과연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절실함은 무엇을 향해 있습니까? 하나님은 엘리의 가문을 제사장으로 부르셨습니다. 제사장으로 부르셨다는 것은 단순히 제사라는 의식을 주관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사장이라는 직무를 통하여 이스라엘안에 보이시고자 하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물이 흘린 피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가르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은 제사만 드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으로 사는 자신의 삶에 제물의 피가 보여주는 희생의 의미를 담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사장 자신이 제물의 피를 통하여 죄씻음의 은혜를 깊이 자각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의 관심은 제물의 피가 아니라 아들들에게 있었습니다. 13절에서 말한대로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엘리에게는 제물의 피가 경시되는 것보다는 아들이 더 중하고 사랑스러웠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엘리는 이미 제사장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엘리를 버리시고 그 자리에 사무엘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단순히 엘리와 사무엘의 직무교체로 이해돼서는 안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우리의 전부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자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보배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담은 그릇으로 사용하고자 하시는데 정작 우리에게 담겨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엘리처럼 내 자식일 수 있는 것이고 세상의 좋은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속마음은 세상을 사랑하는 내 마음에 대해서 하나님이 모른척 해주기를 바라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종교적인 행동에 열심을 냄으로 인해서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님을 스스로 확인하려고 하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엘리를 버리시고 대신 사무엘을 세우신 그 이유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엘리를 제사장으로 부르신 것은 엘리의 마음에 제물의 피를 담아 두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들의 마음에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의 은혜를 담아두기 위한 그릇으로 삼기 위함이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스라엘에 필요한 것은 제물이 흘린 피의 의미를 잊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엘리를 제사장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필요로 하십니까? 물론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직장이 있어야 하고 사업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필요들이 결코 여러분을 생명으로 인도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생명을 두고 생각한다면 저와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필요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멸망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담아서 전달할 그릇으로 여러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세상 끝까지 그리스도를 전파하라는 명령과 함께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세상에 대한 우리의 욕심을 버리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필요로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라 세상 것으로 남을 때가 많습니다. 세상에 천한 모습으로 오셔서 나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님의 피에 대한 마음보다는 세상의 좋은 것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합니다. 결국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해도 하나님에 대한 절실함이 전혀 없는 무미건조한 마음일 뿐입니다. 혹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9절에 보면 “이에 사무엘에게 이르되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이에 사무엘이 가서 자기 처소에 누우니라”고 말합니다. 종의 자세는 여호와께서 말씀할 때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죄를 지적하는 것은 단순히 나무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듣는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내 마음에 그리스도의 은혜가 남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기보다는 세상의 화려함을 보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감사함이 없습니다. 항상 부족을 느끼며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은총과 사랑을 봅니다. 그리고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 그리스도를 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기를 소원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생각하며 부르심에 합당한 신자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여러분의 절실한 소원으로 남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11강) 삼상 3:10-14 말씀으로 사는 것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이제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전해 드리기 전에 이 내용이 의미하는 것과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에 대해 예사롭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이것은 말씀에 대한 여러분의 마음 자세가 잘못되었음을 단정하고 책망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 신자에게 있어서 말씀은 곧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사귐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가 말씀을 경시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의 사귐 자체에 관심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에게 위와 같은 질문을 함으로써 말씀을 대하는 여러분의 마음 자세를 새롭게 하도록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임하여 서서 전과 같이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지라 사무엘이 가로되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사무엘은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험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엘리가 부른 것으로 착각하였던 것입니다. 사무엘을 부르시는 것이 하나님이었음을 안 것은 엘리였습니다. 그리고 엘리가 사무엘에게 다시 또 부르시거든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응답하라고 지시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엘리는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를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을 부르시는 것이 여호와였음을 아는 깨달음도 있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여호와께서 제사장인 자신을 제쳐두고 어린 사무엘을 부를 리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결코 사무엘을 부르는 분이 여호와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제사장인 자신을 제쳐두고 어린 사무엘을 부르시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진 반응을 보이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제사장으로서 어린 사무엘에게 밀린다는 것 때문에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무엘에게 가서 누웠다가 다시 부르시거든 어떻게 하라는 것에 대해 가르쳐준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시고 대신 사무엘을 택하셨음을 깨달았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어쨌든 엘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전혀 무지한 상태가 아니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가 결국 하나님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됩니다. 말씀에 대해 무지한 상태가 아니었다면 아들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어긋난 길로 갈 때 그것을 책망할 수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내가 그 집을 영영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이른 것은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 이는 그가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의 아는 죄악을 인함이니’라는 말씀을 보면 엘리는 아들들의 죄악에 대해 알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금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엘리는 하나님을 아는 제사장이었으며 율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아들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는 행동을 하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금하지를 않았다는 것이 엘리 집안에 임한 심판의 이유였던 것입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리기를 말씀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과 제시하는 것에 대해 예사롭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묻고 싶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경시하는 태도가 조금이라도 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말씀을 대하는 신자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엘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지금 식으로 말하면 교회를 나오지 않거나 기도를 하지 않았다거나 성경을 읽지 않거나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는 이유가 아니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엘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몰랐다는 것이 아니라 알았으면서도 말씀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 중대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문제를 심각한 마음으로 깊이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저를 포함한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는 분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히 저는 여러분보다는 말씀을 많이 또는 깊이 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고, 또 복음을 증거한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저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은 분명 아닌 것이며, 입으로는 복음을 증거하되 삶에서의 저의 움직임은 말씀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될 수 있기에 특히 저는 더욱 더 저를 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은 말씀의 적용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 곧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이 삶에서 실천되어지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실천하는 문제에 대한 오해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적용한다는 것이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런 수준의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행하고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대 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을 살아가는 삶에 적용시켜야 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는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필요 없는 것임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우려하는 것은 그것을 기독교의 전부로 또는 중심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즉 말씀을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말씀에 잘 순종하고 있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믿어버리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기독교를 그렇게 이해해 버린다면 우리는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는 그 내용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기독교의 본질은 말씀을 삶에 적용하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삶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이 내용을 조금 실천하는 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하며, 더군다나 자신이 교회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실 허무맹랑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교회를 다니는 사람으로 남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결코 구원의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엘리의 경우를 말씀드리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12절에 보면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말한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날에 그에게 다 이루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엘리 집에 대한 심판을 그대로 이루실 것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지는 지금도 변하지 않고 우리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 가실 것임을 보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말씀을 소홀히 여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성품이 좋고 마음이 너그러운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사람을 그리스도인답다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곧 기독교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단지 종교인의 겉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외적인 것에 치중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가령 신자가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줬다고 합시다. 과연 그것으로 그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라고 말씀하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의미라기보다는 ‘너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다. 그 사랑을 아느냐?’라는 물음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 주어진 사람에게서만 나타날 수 있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섣불리 말씀을 실천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오히려 말씀의 인도를 벗어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엘리는 아들들의 죄를 알면서도 죄를 금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모르는 자도 아니고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종으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아들들의 죄를 금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이것은 엘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는 했지만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말씀을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엘리가 말씀을 통해서 여호와를 아는 자였다면 그는 아들들의 죄를 미워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책망하면서 금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죄를 알되 죄를 미워하지 않았다는 뜻이며 죄를 미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지 않았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죄가 무엇임을 알고 죄를 미워하고 죄의 길을 가는 자에 대해 안타까워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신자가 이러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세상을 단순하게 윤리나 도덕의 차원에서 바라보지 않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세상을 윤리와 도덕의 차원에서 바라봅니다. 그리고 세상이 가지고 윤리와 도덕의 기준에서 벗어난 것을 악으로 규정하고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 역시 세상을 그러한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과연 어떻게 죄악의 세상에서 죄에 대해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세상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습니다. 반면에 신자가 아닌 사람들은 비록 세상에는 함께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종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에 대해 믿지 않고 자기들의 능력과 힘을 최고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이러한 세상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살아야 세상의 죄를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말씀을 적용하고 실천한답시고 좋은 일을 하고, 만나는 사람에게 교회다니라고 전도한다고 해서 세상의 죄가 증거 되어지겠습니까?
신자의 관심은 하나님의 목적을 세상에 전달하는데 있어야 합니다. 신자는 이것을 위해서 묵상하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함께 나누는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받아들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종의 자세인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삶의 태도인 것입니다.
엘리가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알았다고 하나 엘리는 하나님의 생각에 그의 생각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서 엘리는 아들들의 죄를 금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고 그 결과가 심판인 것입니다. 엘리는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사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지 않은 것입니다. 제사장으로서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나누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가진 채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엘리는 그 무엇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과 상관없는 행동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신자가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그리스도인 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를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 마음을 나누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신앙의 덕목으로 여기는 말씀의 적용이니 실천이니 하는 문제들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나눌 때 그 마음에 우리로 하여금 말씀이 가는 길로 따라가게 함으로서 자연적으로 맺어지는 열매인 것입니다.
엘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지 않았다는 것은, 제사를 멸시함으로써 저주를 자초하는 아들들의 죄를 금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아들들의 죄를 심각하게 보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제사를 통해서 드러내신 하나님의 마음에 전혀 마음을 두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이며 생각이고 뜻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대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과 그 뜻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내것으로 삼고 살아가겠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자신의 신앙 문제를 두고 고민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 고민의 대부분은 열심이 없다는 것에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열심이 없고 남들처럼 봉사하지 못하고 말씀을 실천하지 못한다는 것으로 자책감을 가지기도 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이 그러한 자신을 신자로 여기실까라는 의심을 가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시는 것은 우리를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거나 노력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을 아는 신자로서 올바른 길에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인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만일 신자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서게 되면 우리가 고민할 수 있는 모든 문제들은 저절로 해결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우리의 관심을 생명과 연관된 진리의 길로 이끌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말씀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신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과연 그리스도의 마음을 나누는 자로 살아가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안에서 살아가는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심으로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나눈 자로 살아가는 그를 통해 그리스도가 증거될 것입니다.
(12강) 삼상 3:15-21 사무엘과 엘리
갈라디아서 5:11절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의 이 말은 율법을 주장하는 자기 동족인 유대인들을 향하여 하는 말입니다. 우린 이 말을 사도 바울의 심정이 되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알다시피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그들의 전부였습니다. 율법을 준수하지 않는 것은 곧 율법에서 멀어지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율법 준수는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신앙과 삶의 전부였던 것입니다.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사도 바울이 전했던 복음은 율법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을 준수하는 것이 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의가 됨을 선포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바울의 입장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아마 여러분은 말씀을 듣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전하는 자의 고충이나 입장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말씀을 전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어떤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의해서 전혀 다른 반응으로 저에게 전달되어지는 것을 체험하는 저로서는 바울의 입장이 결코 나와 상관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을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바울이 그들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내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았겠느냐?’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할례와 율법을 준수하는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전했다면 바울은 핍박을 받지 않았을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출신성분이 남다른 자로서 한 몸에 존경을 받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라고 말함으로써 비록 자신에게 핍박으로 돌아오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듣는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된다 할지라도 복음을 복음대로 전하는 것이 그의 일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분명 우리에게는 기쁨이 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거치는 것으로 작용하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인가 아닌가가 판별되어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자는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예수님이 선포한 말씀을 그대로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 들은 말씀을 전해야 하는 입장에 있는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는 바로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엘리가 지시한 대로 하나님이 부르실 때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엘리 집안에 대한 심판에 대하여 선포하십니다(1-14절).
그런데 15절에 보면 사무엘이 하나님에게 들은 말씀을 엘리에게 고하지를 못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는 엘리가 들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분명 사무엘에게만 가르쳐 주기 위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엘리 집에 대한 예언을 엘리에게 직접 하지 않으시고 어린 사무엘을 전달자로 내세우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정황들을 살펴볼 때 하나님은 단순히 엘리 집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사무엘을 부르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인 엘리에 대한 심판을 어린 사무엘을 내세워서 전달하고자 하시는 것은 사무엘에게도 곤혹스러운 일이지만 엘리에게도 비참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어린 사무엘을 통해서 자신에 대한 심판에 대해서 들어야 한다는 것은 매우 자존심 상하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엘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듣는 것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어찌 생각하면 ‘하나님께 들은 대로 가서 말해주면 되는 것인데 그것이 뭐 그리 어려운가?’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은 제사장이며, 더군다나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심판에 대한 말입니다. 그러한 말을 쉽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상대방을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는 증거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누군가에 대한 심판에 대해 예언을 하셨다고 한다면 그것을 아무 생각 없이 마음에 갈등도 없이 가서 전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여러분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리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나쁜 말은 감추고 싶어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전하는 자의 입장인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 가운데 예레미야란 사람은 ‘눈물의 선지자’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해 선포하면서 눈물로 회개를 촉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는 길이 곧 멸망의 길이었기 때문에 그 길을 가지 않기를 눈물로 선포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예레미야만이 아니라 모든 선지자가 같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너희들 한번 혼나봐라’는 심정으로 재미 삼아, 또는 고소하다는 마음으로 심판에 대해서 선포하는 선지자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을 기분 나쁘게 하는 말이라고 해서 선포해야 할 말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해야 할 말을 안한다는 것 자체가 이스라엘이 멸망의 길을 가는 것을 보고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듣는 자가 기분 나빠할 것을 염려해서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선지자는 자신이 선포해야 할 말이 이행하기 힘든 것일 때, 자신 한 말을 따르지 않을 때의 결과는 멸망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을 때, 눈물로 호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 말대로 하든가 말든가 모르겠다는 식이라면 절대로 진정한 선지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선지자의 사랑은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을 말리고 그들의 길을 돌이켜 진정한 생명이 있는 길로 이끌고자 하는 열정으로 드러납니다. 설사 자신에게 돌이 날아오고 핍박이 온다 할지라도 그 사랑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감수하게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사랑은 절대로 인간의 친분관계로 보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선포함으로써 자신의 형제들이 멸망으로 가는 것을 말리고 생명으로 가기를 촉구하는 것, 그것이 선지자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눈물은 그들이 얼마나 애타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지자의 길을 가는 신실한 말씀의 설교자라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죽어가는 사람으로 설교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말은 저에 대한 경고로 삼고 싶습니다. ‘과연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죽어가는 사람으로 설교했던가? 길이 아닌 길을 가는 사람에게 얼마나 애타하는 마음으로 호소를 했던가?’ 이러한 물음을 제 스스로에게 하면서 제가 가야 할 길을 다시 정립하고자 합니다.
설교자가 신실한 말씀의 설교자라면 왜 죽어가는 사람에게 죽어가는 사람으로 설교할 수밖에 없습니까? 그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에 있습니다. 죽어가는 자신의 죄를 덮어주신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죽어가는 사람의 자리에서 바라볼 때 진심으로 진리만을 선포하게 되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신실한 말씀의 설교자요 하나님의 말씀의 일군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설교자에 대해 바른 생각을 가질 것을 원해서입니다. 설교자란 목사를 말합니다. 목사는 곧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입니다. 저는 결코 목사를 교회나 부흥시키고 발전시키는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크게 하지 못한 저의 무능을 합리화하기 위한 말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을 바르게 깨닫게 될 때부터 이러한 생각이 저를 붙들었습니다. 제가 할 일이 무엇이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길을 벗어나지 않기 위해서 기도하고 힘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목사를 교회를 발전시키는 기능인으로 바라본다면 저로서는 참으로 힘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과 저와의 만남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커지면 안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작은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모이고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들으며 교회를 이루는 것은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타락한 가운데서도 돌이키지 않고 있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애통해 하시고 눈물을 흘리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진정한 종들은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참으로 착찹한 심정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으로 돌이키지 않는 모습들을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만큼 어느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깨닫고 회개하고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오는 것을 볼 때 그것으로 위로를 얻고 기뻐하고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엘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두고 두려워하는 것에서 선지자들의 말씀이 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며 어려운 일이었던가를 길게 생각을 해봤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말을 깊이 생각해 보시면서 아무쪼록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안에서 설교자와 설교를 듣는 자들이 서로 만나게 되고 교제하게 되어지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설교자를 이해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를 통해서 서로가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기를 소원하는 마음으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사무엘이 하나님께 받은 예언은 그 어떤 것보다 전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제사장님 하나님이 그러시는데 앞으로 많은 복을 받고 잘 되실 것이랍니다’라는 말을 전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그러시는데 제사장님 집안이 영영히 심판을 받을 거랍니다’라는 말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입니까? 앞으로 선지자로서 계속 말씀을 전해야 할 사람으로서의 첫출발이 자신이 모시고 있는 제사장 집에 대한 심판을 전해야 한다는 것은 부담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무엘은 엘리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말하기를 두려워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무엘에게 엘리가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말하라고 합니다. 17절에 보면 “가로되 네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 네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합니다.
엘리는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하나도 빼놓지 말고 다 말하라고 합니다. 만약 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 너에게 벌을 내리시기를 원한다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18절을 보면 “사무엘이 세세히 말하고 조금도 숨기지 아니하니 그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시니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니라 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사무엘을 통해서 하신 자신의 집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엘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엘리의 이러한 말이 쉽게 이해가 안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18절의 말은 그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는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심판의 말을 들었을 때 원망을 하거나 심판을 받지 않게 해달라고 애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는 자신의 심판이 하나님이 선하신 소견대로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자신에 대한 심판도 하나님의 선하신 소견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앞에서 등장한 엘리는 분명 믿음에 있어서는 부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엘리가 심판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 여호와의 선하신 소견대로 할 것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분명 심판에 대해 들었을 때 믿음이 없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에 말씀드린 대로 성경은 옛날에 존재했던 한 인간의 마지막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앞서 살았던 사람들을 내세워서 현대를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믿음이 무엇이고 믿음이 아닌 것이 무엇인가를 계시하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문제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질문하셨을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 16)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러한 베드로를 복이 있다고 칭찬하시면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16:19)는 말씀을 합니다.
그런데 이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음을 당해야 하실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자 베드로가 그리하지 말라고 말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책망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내용들이 베드로 개인에게 국한된 것이겠습니까? 그렇다면 베드로는 말 한번 잘해서 천국 열쇠를 네게 주겠다는 엄청난 말을 들은 반면 또 다시 말한 번 잘못해서 사단이라는 엄청난 책망을 들은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였다가 다시 예수님을 넘어지게 하는 사단이라는 말을 들은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은 베드로 한 개인의 믿음의 문제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베드로를 내세워서 무엇이 믿음이며 무엇이 믿음이 아닌가를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엘리도 이러한 차원에서 생각해 본다면, 엘리같이 믿음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믿음의 모습을 보여주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기보다는 무엇이 말씀을 대하는 신자의 바른 자세인가를 가르침 받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사무엘과 엘리의 관계를 통해서 설교하는 저와 설교를 듣는 여러분의 입장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실 설교하는 저와 여러분은 매우 곤란한 입장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대로 전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저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성령이 깨닫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전해야 하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우리를 기분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설교자의 곤란함이 있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에 부담이 되는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 곤란한 점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설교자가 말을 바꿀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엘리의 기분을 생각해서 말을 바꾸거나 빠뜨릴 수 없는 것처럼 설교하는 사람은 듣는 신자의 기분과 입장을 생각해서 말씀을 바꿀 수 없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분명한 것은 여러분이 진정한 신자라면 설교자에게 ‘말씀을 그대로 전해달라’는 요구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를 기분좋게 하려고 말씀을 그대로 전하지 않거나 바꾸면 당신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기를 원한다’는 단호한 마음으로 말씀을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말씀이 생명임을 알고 말씀을 따라가기를 소원하는 신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말씀을 그대로 전해달라고 원한다면 그것은 말씀의 귀중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음을 알기에 그러한 요구를 할 수 있어지는 것입니다. 나를 심판하는 말씀이든 책망하는 말씀이든 말씀을 그대로 전해달라는 단호한 마음이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전달되는 것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간혹 말씀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사람을 봄으로 인해서 자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반발을 하는 경우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전해져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설교자는 그 일을 맡은 자입니다. 그리스도도 전하고 다른 것도 전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설교자에게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말하라는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생각과 마음에 맞는 말을 해줄 것을 기대한다면 말씀안에서의 만남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의 하나됨과 통일은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말씀에 대한 생각이 일치 될 때 그것이 곧 교회의 하나됨이며 통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한몸된 교회가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결코 인간의 친분과 인간적 관계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만 모든 관심을 두기 바랍니다. 인간적인 마음은 모두 버리시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아가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말하라. 그리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당신을 저주하기를 원한다’는 단호한 심정으로 말씀을 대하십시오. 이것이 말씀에 대한 바른 자세입니다.
(13강) 4:1-11 이스라엘의 패배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겠지만 저는 어렸을 때 대한민국은 좋은 나라고 북한은 나쁜 나라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그때 반공에 대한 포스타를 그리라고 하면 총 들고 늑대처럼 생기고 뿔이 난 사람으로 그렸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것은 저뿐이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그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학생들 가운데는 우리나라는 좋은 나라고 북한은 나쁜 나라라는 인식을 많이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과 남한이라는 것은 하나의 사상의 차이고 이념의 차이일 뿐 이쪽은 좋은 나라 저쪽은 나쁜 나라로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북한을 나쁜 나라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과연 그들이 우리와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옛날 남한을 침략한 전적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좋은 나라고 너희는 나쁜 나라라는 구분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북한’하면 그저 무작정 ‘나쁜 나라’라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다만 그동안 머리에 박혀 있던 선입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남한과 북한이 대립되어 있는 것처럼,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과 대표적으로 대립된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블레셋입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을 두고 볼 때 하나님을 믿고 있는 우리는 그래도 뭔가 이스라엘은 좋은 나라라는 인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블레셋은 틈만 나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마치 북한과 같이 머리에 뿔난 그런 악한 나라로 인식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블레셋은 단지 하나님을 믿지 않은 국가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블레셋은 사실상 이스라엘보다는 우월한 국가였습니다. 군사적이나 기술적인 면에서 이스라엘보다 앞선 국가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감당할 수 없었고, 또 블레셋은 자신의 땅을 넓히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과거의 역사가 땅을 넓히기 위해 서로 싸우고 죽이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블레셋은 아주 질이 나쁜 악한 나라고 이스라엘은 선한 나라라는 인식을 가지고 이 두 국가의 관계를 대한다면 이들의 관계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오류가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블레셋과 이스라엘을 대할 때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나라와 믿는 나라라는 관계에서 봐야 하고, 그럴 때 이들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로 이 두 나라의 관계가 등장합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과 블레셋과의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집니다. 전쟁에 있어서 만큼은 이스라엘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 나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이스라엘은 수많은 전쟁을 했었고 그 전쟁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자신들보다 더 막강한 상대들을 이긴 경험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전쟁에 대해서는 일가견이 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전쟁에서도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은 그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을 때 이스라엘은 모든 상대에 대해 승리하였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았을 때는 상대 여하에 관계없이 패배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전쟁의 승패여부는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는 척도이기도 한 것입니다. 싸움에서 패할 때 그것은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지 않는 가장 확실한 증거물이 되는 것이고 이스라엘에게 뭔가 신앙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패할 때는 그 원인이 무엇인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해 보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답을 전혀 잘못된 것으로 내리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 한 예가 바로 본문의 내용인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 진쳤더니 이스라엘을 대하여 항오를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명 가량이라” 고 말합니다. 이것은 보면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사천 명이라는 군사가 죽는 패배를 당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 민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할 때 다른 나라가 싸움을 걸어와도 참고 평화를 위해서 힘을 쓰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지는데 이스라엘은 마치 싸움을 즐기는 것처럼 전쟁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승리할 때는 무자비하게 상대방을 진멸시키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과연 성경은 왜 이처럼 전쟁을 동원하고 있는 것입니까?
현대 사회는 평화를 외칩니다. 전쟁이 없고 평화만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 현대인에게 이스라엘의 전쟁의 역사는 별로 달갑지 않게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전쟁을 통해서 가르쳐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싸움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전쟁이라는 점에서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을 내세워서 이방인을 침으로 인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에 남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치시는 상대는 하나님의 적이며 원수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이스라엘이 패배를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당연히 승리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할 때 승리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한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으로 살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패배를 했다면 그것은 이스라엘이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존재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제사를 드리는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무조건 편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지금 식으로 말해본다면 우리가 교회다니고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무조건 우리편이 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나는 교회를 다니니까 하나님은 내편이라는 생각을 많이 가집니다. 이것부터가 크게 잘못된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해주십시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우리와 함께 해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우리 자신이 과연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있는 그런 존재인지를 살피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나를 사랑해달라고 하기 이전에 ‘나는 과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사람인가?’를 살피는 것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나는 어떤가?’를 살피는 것은 생략해 버리고 다만 사랑해주고, 도와주고, 함께 해달라고만 요구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는 나 자신을 더 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를 고치시고 새롭게 하시기 위해서 세상을 이용하여 우리를 치시기도 하고 힘들게 하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역시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패배를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지 않으셨다는 증거입니다. 뭔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할 수 없는 악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치시기 위해서 블레셋을 이용하여 이스라엘을 치시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의 패배의 이유는 군사력에 있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한대로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군사력으로 싸우는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싸우시는 국가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조건 승리했고 함께 하지 않으면 무조건 패배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패배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치셨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고 이스라엘에게 뭔가 악한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게 있었던 악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3절에 보면 “백성이 진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블레셋 사람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먼저 전쟁에서 패한 것이 하나님이 패하게 하셨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왜 패하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패한 역사적인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자신들에게 실패를 경험하도록 허용하신 이유를 찾는 질문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살아가는 백성으로서 바른 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실패했을 때 실패했다는 것만 생각하며 낙심하기보다는 실패하게 하신 분이 여호와임을 생각하며 ‘왜 실패하게 하셨는가?’를 스스로 물어보고 생각한다는 것은 바른 신앙의 자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이러한 질문은 우리의 삶에 포함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셨는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막으시는가?’ 이러한 질문을 함으로써 나의 모든 일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임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에게 아주 유익된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는 좋은 일에 대해서 감사하기는 매우 쉽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이런 좋은 일을 주셨구나’라는 생각을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 문제는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아무리 생각하려고 해도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무조건 내 편이 되어야 하고 나에게 좋은 일만 있게 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실패와 어려움에서 기껏 생각한다는 것은 ‘내가 뭐가 잘못해서 그것을 고치고 회개하라고 이런 일을 주셨는가보다’라는 답을 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생각하기는 하지만 전혀 다른 답을 내리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지 못한 결과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로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왜 전쟁에서 패하게 하셨는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얻은 답은 언약궤를 앞세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앞세우지 않고 우리끼리 전쟁에 나갔기 때문에 하나님이 패배하게 하신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내린 결론은 실로에 있는 언약궤를 가져다가 우리 가운데 있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승리하게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언약궤가 우리 가운데 있으면 하나님도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고 우리를 도와서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실 것이라는 것이 그들이 노리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 철저하게 무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언약궤가 그들 가운데 있는 이유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언약궤를 어떤 효험이 있는 궤로 여기고 언약궤만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이 저절로 자기들과 함께 하고 도와주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언약궤는 이스라엘의 죄를 보여주기 위해서 있습니다. 언약궤 안에는 이스라엘의 죄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세가지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는 깨어진 돌판이고, 다른 하나는 먹을 것이 없어서 하나님을 원망함으로써 주어진 만나가 들어있는 항아리이고 세 번째는 하나님이 택한 사람에게 도전했을 때 아론의 지팡이에만 싹이 남으로써 하나님이 택한 자가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증거물이었던 아론의 싹 지팡이입니다. 이 세가지가 언약궤에 들어있는 것은 결국 이스라엘의 죄가 언약궤에 들어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를 드릴 때 그 언약궤에 제물의 피를 뿌림으로써 이스라엘의 죄가 용서받는 것인데, 당시 이스라엘은 언약궤의 의미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언약궤 자체만을 두고 어떤 효능이 있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피로 말미암아 죄가 용서되고 구원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자신들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도구로 이용하고자 한 것입니다. 언약궤만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이 자동적으로 자신들을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생각하는 미신처럼 인간의 의식적인 행동이나 주문에 의해서 호출되는 분이 아닙니다. 또한 특정지역에 국한되고 특정한 국가의 신으로 자신을 계시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언약궤가 있으니까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믿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스라엘과 같은 잘못된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 나와 함께 해달라고 기도만 하면 함께 해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나는 과연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 있는 존재인가를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성막이나 지성소 언약궤 등과 제사장의 희생 제사에 대한 의식과 절차 등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가르쳐 주기 위해서 존재할 뿐이지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고 실체가 세상에 드러났을 때는 자연히 쇠퇴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눈에 보이는 것 자체를 믿어버리는 미신에 빠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치시는 이유를 생각하고, 자신의 죄를 깨닫고 고백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대신 언약궤를 앞세워서 자신들의 실패를 만회해 보려는 악한 의도만 보였을 뿐입니다.
언약궤는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죄를 폭로하기 위해서 있습니다. 언약궤가 보여주는 것은 언약궤에 뿌려지는 제물의 피가 과연 누구의 죄 때문에 뿌려지는 것인지를 피로써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언약궤를 자신들의 승리를 위해 하나님을 내편으로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동원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원수된 모습과 동일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이기에 하나님은 블레셋을 내세워서 그들을 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적이라는 것입니다.
언약궤에 대해서는 이방인인 블레셋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오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칩니다. 언약궤가 있으니까 이제는 이겼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소리를 듣고 이상하게 여겼던 블레셋은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진에 들어온 것을 알고 크게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애굽을 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신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으로 왔으니 그것은 곧 하나님이 온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언약궤를 신의 힘을 발휘하는 효능이 있는 궤로 보는 것은 이스라엘이나 블레셋이나 동일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블레셋은 두려워하지 말고 대장부답게 나가 싸우자고 스스로를 독려하고 결국 이스라엘은 다시 삼만 명이 죽고 궤는 빼앗기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게 됩니다. 언약궤를 믿었지만 전쟁은 패하고 궤는 빼앗기고 제사장은 죽습니다.
(14강) 삼상 4:5-11 이스라엘의 하나님
오늘 설교의 주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면 대개 ‘이스라엘을 위하시는 하나님’ 또는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 등등으로 이해합니다. 즉 이스라엘을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은 설교 주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처럼 보입니다. 이유는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삼만 명이 죽고, 제사장인 홉니와 비느하스까지 죽는 실패를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러한 분이시라면 그토록 큰 실패를 하도록 하지 않으시는 것이 옳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하시는 하나님이라면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하시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실패하게 하시고 오히려 하나님을 믿지 않고 대적하는 블레셋이란 이방인에게 승리를 안겨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이러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자신있게 부르실 수 있습니까?
이것을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스라엘이란 국가의 일로 보지 마시고, 여러분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일로 빗대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하나님’이라고 할 때 우리의 마음에 다가오시는 분은 나를 사랑하시고 도와주시고 지켜주시며 항상 모든 일이 잘되게 하시는 분으로 상상되지 않습니다. 그럴 때 기분 좋게 ‘나의 하나님’이라고 소리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만약 실패의 자리에서, 여러분이 직장에서 쫓겨나고 하는 일에 실패하고 참으로 다른 사람보기 민망할 정도로 실패를 했다고 할 때, 과연 그 실패의 자리에서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의 자존심 때문에, 하는 일이 안되더니 신앙까지도 망가졌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억지로 웃으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말고, 진심으로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고백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마 어려울 것입니다.
실패의 자리에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참된 신앙에게서만 볼 수 있는 능력이며 힘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러한 힘이 없기 때문에 환경과 생활의 영향을 수없이 받으면서 좋을 때는 웃었지만 좋지 못할 때는 하나님조차 생각하기 싫을 정도가 인상을 찌푸리며 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오늘은 전쟁에서 크게 패배하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그래도 여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는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배우고 깨달음으로서 신자에게 당연히 있어야 할 능력과 힘을 잃어버렸다면 다시 새롭게 회복되어지는 시간이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을 믿는 백성과 믿지 않고 오히려 대적하는 민족과의 싸움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식은 하나님은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편을 들어서 이기도록 도와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되어지는 일은 우리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일어납니다. 1차 전쟁과 2차 전쟁 모두 이스라엘이 패합니다. 1차 전쟁에서 군사 사천 명이 죽음을 당합니다. 그리고 2차 전쟁에서는 삼만 명이 죽음을 당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과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존재하신다면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어야 합니까?
혹 이스라엘이 죄를 범했을 때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었다가 다시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위치로 돌아오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분명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이리저리 마음을 바꾸시는 분이 아닙니다. 한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면 영원토록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는 신실하신 분이 바로 우리가 부르는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이스라엘을 국가적 차원의 이스라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라는 차원에서 의미하는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는 이스라엘을 보면서 그런데도 여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불려지시는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인가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부르는 신자로서 어떤 실패와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되어질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실패와 고통들이 하나님과 어떤 연관속에서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인지를 깨닫게 됨으로써 실패속에서도 나를 붙드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을 고백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제대로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멋대로 상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죄악의 세상에서 배운 상식대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성경조차도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하고 해석을 해버리는 관계로 세상에서 통용되는 하나님은 아예 우상의 수준으로 전락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먼저 이것부터 이해해야 하고 받아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식에 머무시는 분이 아니고 우리의 생각대로 행동하시는 분이 아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에 육신의 문제를 덧붙입니다. 즉 우리들의 영혼과 육신의 문제 모든 것을 해결해주시는 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서 죽음으로 밀어 넣으셨다는 것을 말하면서도 우리 자신의 육신의 문제가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화를 내고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수 십년 교회를 다녔는데 왜 이런 일을 있게 하느냐?’고 얼굴을 붉히며 반발을 합니다. ‘그동안 하나님께 바친 것이 얼만데 이렇게 하느냐?’고 하기도 합니다. 결국 조그마한 고통으로 인해서 인간의 믿음 없는 악한 본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독생자를 악한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하심을 겨우 수 십년 교회 다닌 자신의 공로와 빗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었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십자가에서 흘리시고 계시는 예수님의 피는 보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지금도 피흘리시는 예수님을 보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에게 있는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과 힘을 볼뿐입니다. 그리고 그것만을 기대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그 능력으로 내 문제를 좀 해결해 달라는 것입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마귀의 시험에 대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도 우리는 예수님에게 제발 돌을 떡으로 만들어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이스라엘에게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첫 번째 전투에서 패배한 원인을 언약궤를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으로 이해했다고 했습니다. 언약궤를 앞세워서 요단강을 건넜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는데, 그런 신비의 궤를 가져오지 않았으니 패배한 것이 마땅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약궤를 그들의 진으로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길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기적의 힘이 있는 언약궤가 자신들에게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에서 자신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흘린 희생의 피를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제물의 피가 무엇을 덮고 있는가를 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신비의 힘이 있는 궤로만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앞서 말한 오늘날 그리스도를 부르는 사람들의 실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부르는 것이나 우리가 십자가를 부르는 것이나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언약궤에서 죄에 대한 용서를 보지 않고 다만 자신들을 위한 신비한 힘을 기대한 것이나,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죽으시고 피흘리신 예수님의 희생의 피를 보지 않고, 그저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신비한 능력을 발휘해서 내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도 믿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을 그냥 두고 보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착각에서 건지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블레셋을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시는 것입니다. 언약궤를 가져왔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먼저보다 더 큰 패배를 하게 함으로써 언약궤가 그들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힘이 되는 것이 아님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패한 원인을 언약궤를 가져오지 않은데 있는 것으로 분석했지만 언약궤가 있음에도 패하게 하심으로써 원인은 다른데 있음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이 발생할 때 ‘혹시 내가 십일조를 안해서 하나님이 어려움을 주신 것인가?’라고 생각하고 십일조를 열심히 했지만 어려움은 계속되고 오히려 더 큰 어려움에 빠지게 하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곧 우리들이 하는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것이 결국 육신의 복으로 다가오게 된다는 잘못된 생각을 깨뜨리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5절에 보면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고 말합니다. 여호와의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진에 도착하고 온 이스라엘의 사기가 충천합니다. 힘이 나는 것입니다. 언약궤가 있으니 이제 하나님은 우리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람들이 기도를 하고 봉사를 하고 헌금을 하면서 힘을 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기도했으니 이제 일이 되어지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이 들면서 힘이 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목사들이 교인들에게 힘을 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기도하면서 힘을 내고, 봉사하면서 힘을 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힘이란 언약궤가 있다고 해서 힘이 나는 이스라엘과 같은 수준입니다. 그러한 힘은 잠시 뿐입니다. 이스라엘이 힘을 내고 사기가 충천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신앙은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했을 때 힘이 나는 것은, 기도한 자신의 행위를 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도한 나를 기쁘게 보실 것이라는 착각에 의해서 힘이 나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힘은 그 어떤 어려움도 환경도 이기지 못합니다.
진정한 신앙의 힘은 어려운 환경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해서 기뻐하고 감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신앙의 힘이라면, 이러한 힘은 어려움이 없을 때는 불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욕망과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힘을 기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에 감사한다면 어려움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하나님으로 인해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신앙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을 패배하게 하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말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육신의 고통에서 건지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면 그 사랑을 그들을 죄에서 건지시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깨닫고 받아들일 때 진정한 이스라엘로 불려지는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고 말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에게 심판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약궤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지 않은 것입니다. 그들부터 제물을 자기들 마음대로 취함으로써 제물의 의미가 무엇인지 염두에 두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대할 때마다 저의 심령에는 하나님이 누구신가가 분명히 새겨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원한다고 해서 양보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싫어한다고 해서 멈출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이스라엘을 실패하게 하고 쳐서라도 죄에서 건지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와 열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스라엘을 치는 것이 곧 이스라엘을 건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진리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치기도 하시고 질고와 곤핍함으로 이끌어 가기고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인간이 스스로 힘을 모아 큰 일을 해보자고 하지만 인간의 마음대로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에 보면 인간들이 힘으로 모아서 탑을 쌓았습니다. 인간의 이름을 내어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블레셋도 보면 이스라엘 진영에 언약궤가 들어왔을 때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한 것이 아니라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어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같이 말고 대장부같이 되어 싸우라” (9절)는 말로 스스로를 독려하고 힘을 모았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사고방식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하면 된다는 신념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소위 ‘마인드 컨트롤’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자신이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있는 잠재력을 끌어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는 힘이 없을 때 자신들이 믿는 신의 힘을 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바로 이런 종교의 수준으로 전락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무엇을 보십니까? 행여 기도하면 내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 때문에 기도하면 힘이 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언약궤를 보면서 힘을 내는 이스라엘의 수준과 같음을 다시 말씀드립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러한 신앙에 머물러 있지 말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에게서 볼 것은 독생자를 보내신 사랑과 긍휼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볼 것은 그분의 희생과 섬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복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하늘의 영원한 생명에 소망을 두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에게 힘이 되는 것이고 어떤 어려움에서도 승리하게 하는 능력이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8:44절에 보면 마귀를 거짓말쟁이로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신자에게 거짓을 가지고 다가오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는 거짓말을 가지고 다가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짓에 빠지게 합니다. ‘열심히 하면 복받는다’는 거짓에 빠지게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깊이 생각하시고 참된 하나님을 좇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의 피 때문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는 그가 참으로 힘있는 신자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5강) 삼상 4:12-22 이가봇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형편 속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판단합니다. 환경과 형편이 다른 사람들보다 나을 때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는 것을 인식을 하고, 반면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것보다 형편없다고 여겨질 때 끝없는 불행을 자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환경과 형편에서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것을 보면, 자신이 누리는 모든 환경과 형편, 즉 자신의 모든 것을 종합해서 어떤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이 하나라도 있을 때 그것으로 인해서 다른 소유로 인한 모든 기쁨을 박탈당해 버리고 상대적으로 불행을 느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돈은 마음껏 쓰고도 남을 정도로 풍부하게 소유하고 있는데 자식들이 공부도 안하고 망나니 노릇을 하면서 부모의 속을 썩일 때 그 부모는 물질의 풍부함으로 인한 행복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차라리 돈은 없어도 번듯한 자식을 두고 살아가는 부모를 볼 때 그들이 더 행복하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돈이 없어서 항상 곤란을 당하지만 자식들은 공부를 잘하고 착할 때 그 부모는 항상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도 돈으로 인해서 곤란과 고통을 겪을 때 돈있는 자가 행복하게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한없이 불쌍한 존재로 여겨질 것입니다.
결국 돈은 있으나 자식 때문에 속 썩는 사람은 착한 자식을 둔 부모에 비해서 자신이 불쌍하다고 여겨질 것이고, 돈이 없는 사람은 또 그 나름대로 자신을 불쌍하다고 여길 것입니다. 돈 많은 부모를 둔 덕분에 호화롭게 살아가는 사람을 보면, 갑자기 가난한 부모를 둔 자신이 초라해지고 불쌍히 여겨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많은 사람들은 서로 저 사람에게는 있는데 나에게는 없다는 것 때문에 자신을 불쌍한 존재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인간의 본질은 불쌍함 그 자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의 것을 소유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있는데 나에게는 없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가장 불쌍함은 인간의 운명이 사망이라는 것에 있습니다. 육신의 사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토록 끝이 없는 영의 사망까지 인간에게 주어질 몫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러한 인간의 불쌍함을 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진리에 서서 보면 진짜 불쌍함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인간의 불쌍함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한 가문이 몰락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이었던 엘리의 가문이 엘리 본인과 자기아들들과 며느리까지 죽어 버리는 비참한 광경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모든 식구들이 하루아침에 죽는 것이 불쌍함의 전부로 봐서는 안됩니다. 물론 한 가문이 몰락하는 것을 보면서 불쌍하다는 느낌은 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불쌍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불쌍함, 즉 동정으로 끝날 뿐입니다. TV를 보면 날마다 사고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화재로 인해서, 또는 교통사고로 인해서, 아니면 수해로 인해서 일가족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우리는 ‘불쌍하다’는 느낌을 가집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일을 당한 그들이 불쌍한 것이지 나 자신을 불쌍한 존재로는 인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얘기는 이러한 시각으로 대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나와는 상관없는 한 제사장의 가문이 잘나가다가 하나님께 잘못해서 일가족이 다 죽는 것을 보면서 ‘참 안됐다’ ‘불쌍하다’는 동정심으로 끝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나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믿는 우리는 엘리가 불쌍한 존재로 보여진다면 엘리의 불쌍함에서 오늘 우리들의 불쌍함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본문을 엘리 제사장 한 개인의 일로 여겨서는 안되며, 단지 한 가문이 몰락하는 것으로만 봐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17-18절을 보면 “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 많고 비둔한 연고라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패전하고 언약궤는 빼앗기고 언약궤 옆에 있던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합니다. 이 사실을 진중에서 나온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알릴 때 엘리가 의자에서 자빠져 목이 부러져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 엘리가 의자에게 자빠진 것을 보면 언약궤를 이방인인 블레셋에게 빼앗겼다는 것이 제사장인 엘리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며느리인 비느하스의 아내가 잉태하여 산기가 가까웠었는데 언약궤를 빼앗기고 시부인 엘리가 죽고 남편도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갑자기 배가 아픈 후에 아들을 낳은 후에 죽게 됩니다. 죽어갈 때 곁에 있던 여인들이 아들을 낳았다며 두려워 말라고 위로하였지만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며 아이 이름을 이가봇(영광이 없다)이라고 짓게 됩니다. 시부와 남편이 죽고 또 언약궤를 빼앗겼음으로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엘리 가문의 이야기를 볼 때 참으로 불쌍하다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것은 엘리라는 이스라엘의 옛사람의 가문에 있었던 일화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엘리 가문의 이야기를 대하면서 엘리의 불쌍함이 곧 우리 자신의 불쌍함으로 다가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불쌍하다 하지 않습니다. 물론 자신의 처지가 다른 사람에 비해서 현저히 차이가 날 때, 다른 사람은 잘사는데 자신은 고난과 고통으로 살아갈 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불쌍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남들에 비해서 비교적 걱정 없이 풍족하게 살아갈 때, 부족함이 없을 때 자신을 불쌍하다고 여기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신을 불쌍히 여기든, 여기지 않든 세상적인 것을 기준으로 해서 판단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인간의 본질을 보지 못하는 무지함에 있는 것입니다.
엘리가 의자에서 자빠져 목이 부려져 죽은 것은, 물론 자식이 죽었다는 것도 큰 충격이겠지만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언약궤를 빼앗겼다는 것이었습니다. 18절에 보면 엘리는 소식을 전하는 자가 언약궤에 대해서 말할 때 의자에서 자빠진 것으로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제사장인 엘리에게 가장 충격적인 일은 언약궤를 빼앗긴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비느하스의 아내도 22절에서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다는 것이 제사장 가문에게 있어서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언약궤를 빼앗긴 것이 왜 이처럼 충격적인 일입니까? 그것은 언약궤를 빼앗긴 것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언약궤는 하나님이 그들이 함께 하시는 영광의 궤입니다. 그러므로 언약궤는 이스라엘의 중심이며 그들의 전부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 언약궤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궤를 빼앗겼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 사라졌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때문에 언약궤에 피를 뿌림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의 대표자였던 엘리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엘리 가문의 불쌍함은 무엇입니까? 그들이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생명의 길이 되는 언약궤가 그들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의 불쌍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이스라엘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느하스의 아내는 갓낳은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지었다고 했습니다. 이가봇이란 하나님의 영광이 없다는 뜻이며, 그것은 이스라엘에게는 저주의 말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인과 같은 존재임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이의 이름을 이가봇이라고 한 비느하스의 아내의 심정도 이해할 수 없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말하는 우리의 말에 대해 의심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진심으로 내 속에 그리스도가 계심으로 십자가를 말하는지, 십자가의 의미가 내 마음속에 생명으로 남아있는 가운데 십자가를 말하는 것인지 생각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든 말든 세상의 것이 자신과 함께 한다는 것으로 마음 든든해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없는 것이 자신의 불쌍함이 아니라 세상 것이 없는 것이 자신을 불쌍한 존재로 만든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속중심에 다른 것이 존재하는데 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간에 진정한 불쌍함이 무엇인가 알아야 합니다. 진심으로 불쌍한 것이 어떤 것인가를 깨닫고 행여 우리가 그러한 불쌍한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지 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언약궤를 주시고 제사장을 세우신 것은, 죄로 인해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이 막혀 있는 인간에게 내려주신 유일한 생명의 길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그 길로 인도해 가는 것이 제사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언약궤도 제사장도 사라지고 없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구원의 길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 저주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고 생명의 길이 사라졌으니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서 완전히 끊어진 저주의 자리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이방인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 전락된 것입니다. 인간은 죄를 용서받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데, 죄 용서 받을 길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가 있을 때 언약궤에서 자기들의 생명의 길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블레셋을 이기고 승리하는 힘만을 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언약궤를 빼앗기게 하시고 제사장을 죽게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이 사라질 때 자신들이 어떤 처지에 놓이게 되는지 살피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인간의 이러한 처지를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방인은 그렇다 쳐도 심지어 믿는 신자들조차도 생명의 길이 없을 때 인간의 처지가 어떠한지에 대해 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공기가 없으면 죽는데도 숨쉬는 공기가 풍부하게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처럼 구원의 길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면 우리는 저주에 처할 수밖에 없는데도 예수님이 안계신다면 우리의 처지가 어떠할지 그 심각함과 우리의 불쌍함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궤를 빼앗기게 하시고 제사장인 엘리 가문도 다 죽게 함으로써 구원의 길이 사라져 버린 이스라엘의 처지가 어떠한가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고 없는 이스라엘이라면 그들이 아무리 풍요롭게 살고 배부른 자로 산다 할지라도 그들은 불쌍하다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의 처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언약궤도 제사장도 이스라엘에게서 사라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에는 과연 누가 불쌍한 사람으로 보여집니까? 지하도에서 남루한 옷을 입고 동전 하나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불구자나, 노인들이 불쌍하게 보입니까? 그렇다면 머리 둘 곳도 없이 사셨던 예수님도 돈이 없어서 불쌍하신 분입니까? 인간의 불쌍함은 소유가 적은 것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 하나님의 영광이 없다는 것, 이것이 인간의 불쌍함입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저주아래서 건짐 받을 수 없는 운명으로 끝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구원의 길을 봅니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구원의 길이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구원의 길이 사라져 버린 우리의 처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언약궤와 제사장이 사라져 버린 이스라엘의 처지와 같은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부활하게 하신 것은 구원의 길이 없고 저주 아래 있던 우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감사와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활이 어렵고 힘들게 사는 분이 있다고 해서 섣불리 그들을 불쌍히 보지 마십시오. 특히 교회에서 그러한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힘들게 산다고 해서 불쌍히 본다면 결국 힘들게 살지 않고 모든 것을 갖추고 편하게 사는 자신에 대해서는 불쌍히 여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생활이 힘들다 해도 그 분의 마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감사와 기뻐함으로 살아간다면 그분은 절대로 불쌍한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행복자입니다. 행복자라면 기뻐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예수님으로 기뻐한다면 그가 바로 진정한 행복자인데 그러한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을 생활이 곤란하고 환경과 형편이 자신이 보기에 나쁘다고 해서 불쌍하다 한다면 아무것도 없는 자가 모든 것을 가진 부유한 사람을 동정하는 것과 같은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비참함은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스스로 노력한다고 해도 결국 멸망으로 끝날 것이 세상입니다.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이 오시고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써 세상의 생명의 길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셔서 택하신 자기 백성들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구원의 길에 들어설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신자에게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되는 것이며 그 길을 걸어가는 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의 소유 여부를 떠나서 성공한 자며 행복자라 말하는 것입니다. 이 행복과 기쁨과 감사를 알고 살아간다면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러한 기쁨과 감사를 맛보며 살아가십니까? 진짜 불쌍한 것이 무엇인가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16강) 삼상 5:1-12 다곤과 하나님
세상은 온통 전쟁터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누르고 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대적하고 경계하면서 자기 한 몸을 살리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전쟁터입니다. 그렇게 보면 세상은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보같이 굴면 언제 누구에게 당할지 모르는 곳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순박한 시골 사람에게 경각심을 갖게 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는데 ‘서울은 눈감으면 코 베어 가는 곳’으로 표현하기도 한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눈뜨고도 코 베어 가는 곳’으로 표현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점차 살벌해져 가는 삶의 현장을 표현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러한 살벌한 삶의 현장이 서울 시골로 구분되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시골도 나름대로 살아 남기 위해서는 누군가를 이겨야 하고 눌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자신의 힘의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신보다 더 능력있고 재주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날마다 위기감을 느끼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잘못되어야 내가 산다는 생각 아래 항상 누군가를 저주하는 입장에서 살아가기도 하는 것이 세상사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거나, 다른 사람이 잘되기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사치스런 이상으로 여겨지기 십상입니다. 아직까지 삶의 현실이라는 뜨거운 맛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상에 파묻혀 있다는 비난만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삶의 전쟁터에서 믿음이 이러한 취급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이 한낱 이상으로 여겨지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믿음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으면 하나님이 이기게 하신다’는 믿음이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고 신뢰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이겨야 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믿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내가 이기기 위해서 믿음을 선택하고 믿음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대상인 신이 자신에 대해 소홀히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 성의를 보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들이 원하는 신은 자신을 이기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의 공통된 신에 대한 염원이며 소망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정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승리를 위한 믿음’ 이것이 지금의 현실에서 볼 수 있는 믿음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을 고발하고 폭로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죽이고 짓밟는 세상에 남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이 죽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사랑하는 아들을 세상에서 승리하는 영웅으로 위대한 자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패하고 나약하고 패배하는 모습으로 남기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러한 예수님을 부르면서 ‘내가 이기게 해달라’고 외쳐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니까 이길 것이다’는 성경과는 전혀 거리가 먼 헛된 공상에 빠져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이 죽는 피의 현장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 밑에서 여전히 다른 사람의 피흘리는 것은 상관없이 내가 승리하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것은 믿음도 아니고 복음도 아니고 예수도 아닙니다. 이것은 깨닫지 못하면 결국 다른 예수를 찾다가 망하는 길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신 길은 남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이 죽는 길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길을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우리의 본성은 결코 이 길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함께 하신 성령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가는 것만이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음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세상에서 지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 잘못 없이 손해를 봐야 하고, 애매하고 억울하게 당하는 일에 대해서도 참지를 못하고 분통이 터지는 것이 우리들인데, 지는 자로 살아라는 말에 대해서 달가워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신자가 가는 길은 아무나 갈 수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고 주님이 이끌어 가지 않으시면 가지 못하는 길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기기 위해 살아가지 마십시오. 이겨야 한다, 내가 질 수는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가게 되면, 자연히 하나님에 대해서도 승리를 요구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 지는 것은 실망과 낙심과 좌절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그 마지막을 지는 자로 보이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면, 지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 곧 예수님이 가신 길에 동참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은 과연 자기 백성을 어떻게 다루실까요? 백성이 원하고 기뻐하는 대로 승리의 길로 인도해주실까요? 우리는 그것을 원할지 모르지만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동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블레셋 군대에게 패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전쟁으로 인해서 수만 명이 죽는 패배를 맛봐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전에 설교한 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입니다.
이스라엘을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패배하게 하나님인 것입니다. 세상은 분명 이런 하나님을 원하지도 않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현대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 교회의 대부분 역시 이기기 위한 승리의 탐욕으로 가득차 있는 악한 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부를 뿐이지, 자신들을 패배하게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상상조차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은 있을 수도 없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근처의 다른 교회가 경쟁자가 되고 그들을 이기고 누르기 위해서 우리 교회를 부흥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웃지 못할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만약 진심으로 같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라면 서로 다른 교단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안에서 형제 되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결국 자식이 아버지에게 나는 살려주고 다른 형제는 죽이라고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도 오로지 나를 위해서 사랑만 베풀어주는 아버지로만 여길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부르는 아버지는 이러한 아버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나를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으로만 믿으려고 한다면 결국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이 아닌 다른 하나님을 찾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현대 종교는 신들의 싸움이라고 해도 맞을 것입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의 종교는 서로 자기가 믿는 신이 더 우월하다는 생각으로 서로 대립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종교적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종교의 화해를 주장하는 무리들도 많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종교의 화해는 결국 다른 종교도 인정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의 대상은 각기 다르다고 할지라도 추구하고 목적하는 바가 같으면 모두가 선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우상과 같은 반열에 놓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지고 있는 것이 현대의 교회입니다.
모든 종교가 서로 화해를 하든 말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일이기에 상관할 바가 없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만 높이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앞에서 현대 종교는 신들의 싸움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누가 더 잘되는가를 잣대로 해서 자신이 믿는 신의 우월성을 드러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는 집안보다 기독교를 믿는 집안이 더 잘될 때 하나님이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이 다곤을 섬기는 블레셋에 패했기 때문에 하나님보다 다곤이 더 세다고 할 것입니다. 사실 블레셋은 그러한 생각을 가졌습니다.
1-2절을 보면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당에 들어가서 다곤의 곁에 두었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서 부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신인 다곤의 신상 옆에 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설사 전리품으로 보관을 하려고 했다 하더라도 창고 같은 곳에 두면 될 일을 굳이 다곤 신상 곁에 언약궤를 둔 것은 우리의 신인 다곤이 이스라엘의 신인 여호와보다 더 세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신에 대한 생각은 이스라엘이나 블레셋이나 다를 바가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앞세우면 전쟁에서 이길 것으로 믿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자기들의 편을 들어서 이기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블레셋 역시도 신에 대해서는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분’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그러므로 언약궤를 빼앗았다는 것을 하나님을 이긴 것으로 간주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생각만이 아니라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신에 대한 공통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것이 신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자기들에게 패배한 것을 보면서 ‘역시 우리의 다곤 신이 이스라엘의 여호와보다 더 세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도 이러한 생각으로 신자를 바라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왜 그 모양으로 살아가느냐?’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그래서 세상 속에 있는 여러분은 ‘나는 하나님을 안믿어도 이렇게 잘되기만 하는데 날마다 기도하고 성경보고 하나님을 찾는 너는 왜 하는 일마다 안되냐? 혹시 가짜 신자가 아니냐?’라는 조롱 섞인 말들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참으로 분통이 터지기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조롱을 받는다는 것으로 인해서 분이 나기보다는 내가 조롱을 받는다는 것 때문에,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 때문에 분이 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블레셋에 패배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과연 하나님이 패배한 것입니까? 불교를 믿는 사람들의 자녀는 대학에 다 들어갔는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자녀는 반밖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부처라는 신적 존재에게 패배한 것입니까? 분명 그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패배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고 세상을 주관하시는 문이며 유일한 신이시기 때문에 하나님보다 우월한 피조물은 있을 수 없고 그러므로 하나님을 이기는 것도 역시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곤 신상을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3-4절을 보면 “아스돗 사람이 이튿날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더라”고 말합니다.
블레셋이 언약궤를 다곤 신상 곁에 둔 이튿날에 보니까 다곤 신상이 엎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우연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다음날에는 역시 다곤 신상이 엎어져 있고 이제는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몸뚱이만 남아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을 다곤에게 패배한 신으로 여기는 것이 화가 나서 내가 더 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도 역시 아무것도 아닌 우상과 싸우는 그런 분으로 전락되어 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곤 신상을 부숴 버리신 것은 이스라엘을 보고 하나님을 판단하는 블레셋에게 이스라엘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신이심을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패배를 하든 망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여전히 창조주로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존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깊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는 블레셋 사람들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해서 하나님을 판단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일이 잘되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한다느니, 하나님은 역시 살아 계시는 위대한 신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반면에 실패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불신하게 되고, 모든 원망을 다 끄집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상황과 형편에 처하든 그것과 상관없이 전능하시고 위대하신 창조주로 존재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내가 잘되고 못되는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사랑하는 독생자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잘되고 못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승리와 잘됨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그것이 곧 하나님이라고 이름하는 우상을 섬기는 것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자신의 형편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할 이유는 분명합니다. 세상의 축복을 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에 속한 자가 되게 하셨다는 그 일만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내 모습 내 형편을 볼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전부를 내어주시는 희생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희생 앞에서 우리 일이 조금 잘못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을 한다면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희생을 자신이 잘되는 것보다 더 못한 것으로 여겨버리는 처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패배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패배한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세상에서 실패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실패하고 하나님이 힘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신의 모습과 처지를 보면서 비관하고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나는 세상일에 실패했지만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신 분이고, 그러므로 나는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는 신자일 것입니다.
6-7절을 보면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종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경을 쳐서 망하게 하니 아스돗 사람들이 이를 보고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게 못할지라 그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하고”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언약궤가 있는 아스돗 사람들을 독종으로 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치는 것으로 여기고 언약궤를 가드로 옮깁니다. 그러자 다시 언약궤를 가드로 옮겼으나 역시 가드 사람들에게 독종이 내려집니다. 다시 언약궤를 에그론으로 옮기려고 하였으나 에그론의 사람들이 우리를 죽이려 한다고 부르짖음으로 결국 언약궤를 본처로 돌려보낼 것을 계획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하나님께 택함 받고 죄가 용서됨으로써 천국에 들어가게 될 사람들에게 의미있는 것이지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심판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언약궤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언약궤에 있는 제물이 흘린 피의 의미를 깨닫고 진심으로 죄의 용서를 구하는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이 담긴 언약궤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언약궤에서 하나님의 희생을 보기보다는 자신의 승리를 위한 힘을 구하는 것으로 이용한다면 결국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블레셋이며 애굽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세상에서 승리한 자로 살기 위해서 하나님이라는 신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상일 뿐입니다. 혹 그런 생각이 있었다면 하나님 앞에서 다곤 신상이 엎드려져 부서진 것처럼 부서져야 할 잘못된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과 블레셋은 결코 다르지가 않습니다. 신에 대한 생각이나,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모두가 그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블레셋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우리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무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블레셋과 다를 바 없는 것이 우리들이지만 그러나 우리는 심판을 받지 아니할 자로 살아갑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택하신 결과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주어진 복입니다. 세상에서의 우리 형편을 보지 마시고, 다만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바라보며 살아가기 바랍니다. 세상이 보는 초라함에 하늘의 부유함이 있는 자로 살아갈 때 항상 감사만이 있을 것입니다.
(17강) 삼상 6:1-9 불신앙과 신앙
우리는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필히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 무엇인가?’ 부터 철저하게 배우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만약 누구든 ‘나는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전제하에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 사람은 잘못된 기초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은 것이고, 옷의 단추를 꿸 때 이미 첫 단추부터 잘못되어 있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신앙이 무엇인가를 배우지 않고는 참된 신앙이 무엇인가를 알 수도 없고, 또한 그 길을 갈 수도 없는 불의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대 교인들은 인간의 이러한 면을 깨닫지 못하고 ‘나는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전제하에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다만 구별하는 것은 정도의 차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얼마나 열심히 신앙하느냐에 그 초점을 둘 뿐이지 과연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가르치시고 계시하시는 그런 신앙으로 하나님께 나오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지를 않는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성조차 가지고 있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스스로 굳게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믿음이 있다 없다라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제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소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성경이 있고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이 사실인 이상 저는 여러분께 단호하게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디 하나님의 말씀 편에 서서 세상을 보시고 여러분 자신을 보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랜 세월을 교회를 다니며 배우고 행해왔던 신앙이기 때문에 무조건 ‘내것이 옳다’라는 생각을 버리시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겸손하게 들으시면서 과연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분별하려는 자세를 가지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 악한 것이고 해로운 것이고 잘못된 것이라면 버리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제가 여러분께 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자세입니다. 이것이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고 따르는 자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성경의 권위에 복종하는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서두에 이러한 말씀을 또 드리는 것은 오늘 본문에서 보여지는 이방인의 형태들이 오늘날 교회라고 이름하는 무리들에게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들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행위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며 자화자찬하는 웃지 못할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지금껏 하나님을 신앙하며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지만 과연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원하시는 그러한 신앙의 길을 살아온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생각하고 만들어낸 우리들의 신앙의 길을 헛되이 살아온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잘못된 신앙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의 내용은 언약궤가 있는 곳마다 재앙이 내려지자 블레셋 사람들이 재앙의 원인이 언약궤에 있다고 생각을 하고 언약궤를 어떻게 처리할까 고심하는 이야기입니다. 언약궤가 보내진 곳마다 독종이 일어나서 많은 사람들이 죽자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신의 궤를 돌려보내야 한다고 요청을 합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어떻게 돌려보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의논들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9절의 “보아서 궤가 그 본 지경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 손이 아니요 우연히 만난 것인 줄 알리라”는 말씀을 보면 그들은 자기들에게 일어난 재앙이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진 것인지 아니면 그저 우연히 내려진 것인지에 대해 아직 의심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보내는 방법을 이용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려는 생각을 가진 것입니다. 만약 우연이라는 것이 증명된다면 언약궤를 보내지 않고 계속 자기들이 갖고 있겠다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생각들이 우리들에게 있지는 않습니까? 이렇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친구들이 여행을 가자고 하는데 그 날이 주일입니다. 그때는 그냥 한 주 정도야 빠져도 되겠지 하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여행 도중에 사고가 나서 발을 다쳤습니다. 그럴 때 ‘주일을 지키지 않아서 하나님이 벌주신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도 ‘주일에 빠져서 하나님이 벌주신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지지 못합니다. 마음 한구석에는 우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그런데 다음 주일에 또 약속이 생겨서 빠지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사고가 나서 이번에는 손을 다치게 됩니다. 그러자 점점 주일에 빠져서 하나님이 벌주신 것이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집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이것도 역시 우연일 수 있다는 의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이번에도 주일에 한번 빠져 보자. 이때도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하나님이 벌주신 것이 분명하고, 아무 일도 없으면 지금까지 사고는 다 우연이 분명하다’
여러분은 이것과 비슷한 생각을 해보신 적은 없습니까? 죄가 된다고 여겨지는 행동을 했는데 좋지 않은 일이 생기면 인간의 양심은 혹시 벌받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벌받았다’는 것을 부정하려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이 벌주신다면 그것은 참으로 힘들고 두려운 삶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하나님이 벌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연한 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한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이 벌주신 것이 확실하다면 앞으로는 죄가 되는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즉 인간이 가지고 있는 심보는 우연히 일어난 일인데 하나님이 벌준 것으로 오해함으로 인해서 하고 싶은 일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벌준 것이 확실하다면 벌을 받지 않기 위해 조심해야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모두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예로 드린 이야기에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듭니까? 혹시 ‘그래 주일 안 지키면 하나님이 벌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시겠죠? 여러분은 그러한 수준에서 벗어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은 주일 안 지킨다고 벌주는 분이 아니야’라고 하면서 성도가 함께 모이기로 약속한 날을 소홀히 생각하는 수준도 아니기를 바랍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벌주신 것이냐 아니면 우연이냐?’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생각입니다. 왜 그러한 생각을 하겠습니까? 그것은 끝까지 자기하고 싶은 대로 하기를 원하는 고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다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불신앙이며, 오늘 본문에서 블레셋이 이러한 모습을 대변해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신앙한다면, 진심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의 길을 가기를 원한다면 주일에 여행을 가서 사고가 난 것이 하나님이 벌주신 것이든 우연이냐를 따지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사고를 통해서 혹 자신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보다는 내 자신을 위해 살고자 한 것은 아닌가를 돌아보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신앙하는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앙함에 있어서 바로 이점이 잘못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을 신앙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기쁨을 위해 살고자 힘쓸 뿐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벌받은 것이냐? 아니면 우연이냐?’를 따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발 우연이었기를 바라는 마음을 버리지 못합니다. 앞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간섭 아래 있다는 것이 심히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사람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잘못된 신앙의 모습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3-5절을 보면 “그들이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려거든 거저 보내지 말고 그에게 속건제를 드려야 할지니라 그리하면 병도 낫고 그 손을 너희에게서 옮기지 아니하는 연고도 알리라 그들이 가로되 무엇으로 그에게 드릴 속건제를 삼을꼬 가로되 블레셋 사람의 방백의 수효대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이라야 하리니 너희와 너희 방백에게 내린 재앙이 일반임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독종의 형상과 땅을 해롭게 하는 쥐의 형상을 만들어 이스라엘 신께 영화를 돌리라 그가 혹 그 손을 너희와 너희 신들과 너희 땅에서 경하게 하실까 하노라”고 말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통이 하나님으로 인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쨌든 일단 언약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그냥 돌려보내면 안되고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알기론 속건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제사법입니다. 이것을 보면 블레셋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대하여 알고 있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라는 신의 진노를 달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때문에 이스라엘이 신에게 드리는 제사를 그대로 흉내내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며 용서를 구하는 속건제를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들이 속건제에 바치고자 한 제물은 금독종과 금쥐였습니다. 금독종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발생한 독종의 환부의 모양을 금으로 만든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금쥐를 만든 이유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블레셋 사람들이 받은 재앙에 쥐가 관련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집니다. 이렇게 볼 때 이들의 생각은 받은 재앙의 어떤 모양을 만들어서 신에게 바치면 그 재앙이 사라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명령하신 속건제의 제물에는 금독종이나 금쥐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이스라엘의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자 하는 마음은 있었으나 제사방법에 대해서는 자기들 생각대로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께 속건제를 드리는 목적은 다만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서 재앙에서 벗어나자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블레셋을 통해서 신앙과 불신앙이 무엇인가를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불신앙은 하나님말고 다른 신, 즉 다곤과 같은 우상을 섬기는 것만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불신앙의 분명한 구분은 하나님을 향하느냐 아니면 자신을 향하느냐로 되어집니다. 하나님을 신앙한다는 것은,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한다는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마음이 자신에게서 벗어나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을 두고 하나님을 신앙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블레셋이 속건제를 드리는 목적은 신의 진노를 달래고 병이 낫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마음이 자신을 향해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신앙입니다. 이러한 블레셋과 오늘날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벌을 받지 않고 복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주일을 지킨다고 하거나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하는 것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과연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원하는 것이 그것입니까? 블레셋은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하나님께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란 신을 달래서 자기들에게 진노가 떨어지지 않게 하는가가 관심거리였던 것입니다.
만약 이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능력에 굴복했었다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들은 속건제를 드리면서 제물로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을 만듭니다. 이것은 그들이 신을 섬기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신에게 나아가고 신을 달래는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달래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들은 자기들의 방식으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즉 자신들의 종교 방식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제사만 드리면 될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블레셋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속건제는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죄를 속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제사였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은 제물의 피였던 것입니다. 그것도 아무 것이나 가지고 나오면 안되면 하나님이 정하신 제물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은 자신들의 죄를 위하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재앙을 피하고 병이 낫기 위한 목적으로 제사라는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제사만 드리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이 되었다는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신자가 그리스도의 피로써 죄 용서함을 받았음을 믿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제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 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라는 제물입니다. 따라서 신자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의지하고 감사하며 사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살아가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많은 사람들은 블레셋과 똑같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병이 낫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처럼 금독종과 금쥐를 바칩니다. 다시 말해서 주일을 안 지켜서 벌받았다고 생각되면 주일을 잘 지켜서 벌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십일조를 안해서 벌받았다고 생각되면 십일조를 함으로써 벌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이 그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블레셋과 같은 불신앙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제사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블레셋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방식을 그대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다곤을 섬기는 상식에서 이해해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는 성경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할 것인가에 대해 하나님은 인간에게 맡기지를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의 길, 이 모든 것에 대해 하나님은 낱낱이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자기 개인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찾아서는 안됩니다. 자신의 생각과 상식을 기준으로 해서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라는 답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며, 무엇에 대해 진노하시며,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가에 대해 배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배워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시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알 때 우리의 손에 있는 무엇인가를 바친다고 해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은 아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생각이야말로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을 우상의 수준으로 대하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불신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이 다만 자기 기쁨과 자기 만족을 위해 신을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블레셋이 하나님께 제사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제사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할 필요가 없었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제물의 피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다만 자기들이 생각한 것을 바침으로써 죄값을 치르려고 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은 상한 심령과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마음에 담고 나가는 것이 진정한 제사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고 벌을 받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있는 뭔가를 바쳐서 하나님의 마음을 달래므로 진노를 복으로 바꾸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이것은 모두 불신앙일 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 살고자 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로 감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려고 한다거나 벌을 받지 않으려는 의도는 다 버리십시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있지 않고 아직 율법 아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가면 하나님이 치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백성을 백성답게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라면 자신이 잘못된 길을 갈 때 나를 쳐서라도 진리의 길로 이끌어 달라고 원해야 하는 것이 옳습니다. 진리의 길을 가는 것만이 생명임을 알기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신자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께 두십시오. 마음을 하나님께 두는 것은 뭔가를 바치는 것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가 무엇으로 용서되었는가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에 감사하며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를 생각하는 이것이 마음을 하나님께 두는 것이며 이것을 두고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불신앙은 무엇이며 신앙은 또 무엇인가를 말씀을 통해서 깊이 생각하시고 혹 우리들이 블레셋과 같은 불신앙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지 않았는지 자신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18강) 삼상 6:10-21 하나님이 지키시는 것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내용은 신앙과 불신앙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앙한다고는 하지만 무엇이 신앙인가에 대해서는 신앙해야 하는 인간쪽에서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정하시고 요구하시는 신앙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기 전까지는 인간이 신앙한다고 하는 모든 것이 가짜며 잘못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블레셋을 통해서 배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고 하면서 자기들 마음대로 ‘이것을 바치면 하나님이라는 신이 기뻐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언약궤를 보내면서도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들이 과연 하나님이 하신 일인가를 확인하고자 했던 그 모든 것이 불신앙이었으며, 바로 그러한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 있다면 결국 우리는 불신앙을 신앙으로 착각한 채 잘못된 길에 있었음을 깨닫고 그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언약궤가 벧세메스에 도착한 후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하나님이 지키시는 것’입니다. 이 설교 제목대로 창조주이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이 과연 무엇을 중심으로 일하시고 무엇을 지키시고자 하시는지를 깨닫고 하나님이 지키고자 하시는 것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여김으로써 하나님의 진노에 거하는 자로 끝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9절을 보면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고로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인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애곡하였더라”고 말합니다. 13절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것의 보임을 기뻐하더니”라는 내용을 보면 하나님의 언약궤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벧세메스에 거주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뒤에 나오는 대로 레위인이 소를 잡아 제사를 드리고 하였는데 벧세메스의 사람들이 언약궤를 들여다 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법궤를 들어다 봤다는 이유만으로 오만 칠십 인을 죽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19절에서는 크게 살육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분명 벧세메스의 사람들이 크게 잘못한 것처럼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언약궤 한번 들여다봤다고 해서 오만 칠십 명의 사람을 살육하는 신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성경에는 오만이라는 글이 괄호로 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본에는 오만이라는 글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칠십 명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칠십 명이라는 수가 타당할 수도 있습니다. 법궤를 들여다 본 사람이 오만 칠십 명이라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만 칠십이라는 수가 법궤를 구경하려면 오래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리고 법궤를 본 사람은 몇 명이었는데 그 벌이 벧세메스 전체에 내려졌다는 추측도 해볼 수가 있지만 이 역시 추측일 뿐입니다. 또 사본을 기록한 사람이 오만 칠십 명이라는 수가 너무 많기 때문에 ‘설마 하나님이 오만 칠십 명을 죽였겠는가?’라는 생각에 오만이라는 글을 뺏을 가능성도 있다는 추측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 역시 추측일 뿐입니다.
물론 우리가 생각할 때 오만 칠십 명을 죽인 것보다 칠십 명을 죽였다고 하면 하나님의 벌이 뭔가 가볍게 여겨질 수가 있습니다. 오만 칠십 명을 죽였다고 하면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 수 있는 것을 칠십 명을 죽였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뒤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벌이라는 것은 죽은 사람의 수에 따라 그 경중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많이 죽으면 죽을수록 하나님의 진노가 컸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이신 사람의 수가 칠십 명이든 오만 칠십 명이든 상관없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에 그토록 진노하셨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벧세메스의 사람들은 다만 언약궤를 들여다봤을 뿐입니다. 일반 사람이 마음대로 대할 수 없는 언약궤이기 때문에 호기심에서 들여다 볼 수도 있고, 아니면 블레셋에 빼앗긴 법궤가 무사한지 염려스러워서 들여다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에 상관없이 법궤를 들여다봤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을 살륙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런 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과연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벧세메스 사람들에게 그토록 진노하셨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앎으로써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에 거하는 자로 살아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오늘 생각해 볼 말씀인 것입니다.
민 4:20절에 보면 “그들은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소를 보지 말 것은 죽을까 함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성소를 보지 말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성소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체에 피를 바름으로써 정결하게 한 후에 들어가야 했던 것입니다.
성소에는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소를 보지 말라는 것은 언약궤를 들여다 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국 벧세메스의 사람들은 언약궤를 들여다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입니다. 그러면 단순히 말씀을 어겼다고 해서 죽음을 당했을까요? 그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무엇 때문에 언약궤를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했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언약궤를 들여다보지 말라는 것은 단순한 명령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언약궤를 지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언약궤는 이스라엘의 죄가 희생의 피로 인해서 용서되는 현장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언약궤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이라면 언약궤 앞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게 됩니다. 자기들의 죄 때문에 죽어야 하고 피를 흘려야 했던 제물을 보면서 죄에 대해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언약궤에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는 자라면 언약궤를 한낱 호기심이나 구경거리로 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오직 언약궤 앞에 엎드리어 자신의 죄를 고하며 용서를 구하고 제물의 흘린 피로 인해서 살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자신 때문에 죽어간 제물에 대해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벧세메스의 사람들은 언약궤를 보면서 자신들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그들에게 언약궤는 다만 호기심의 대상이 되고 구경거리가 될 뿐이지 그 앞에 무릎 꿇을 대상으로는 보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진노하신 이유였던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벧세메스 사람들이 가로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뉘게로 가시게 할꼬 하고”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오만 칠십 명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진노로 죽은 후에야 자신들의 불의함이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거룩한 여호와의 궤 앞에 설 수도 없는 존재가 바로 자신들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취할 인간의 겸손입니다. 이스라엘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거룩은 언약궤입니다. 죄가 용서되고 깨끗함만 남게 되는 언약궤에 하나님의 거룩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에 있어서 하나님의 거룩은 어디에 존재합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 현장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이 나타난 현장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벧세메스 사람들의 고백대로 하자면, ‘거룩하신 십자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라는 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이 십자가를 바르게 대하는 신자의 태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의 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언약궤를 대하고도 자신들의 죄를 보지 않는 것입니다. 언약궤 앞에서 자기가 곧 죄인임을 생각하지 않는 정신상태가 언약궤를 단지 구경거리로 여기고 들여다보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언약궤를 들여다 본 사람들을 오만 칠십 명이나 죽이시는 하나님이 과연 어떤 분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에 대해서 그토록 진노하시고 미워하시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벧세메스 사람들과 같은 길을 가지 않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은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를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신자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모든 죄가 용서되었습니다. 이미 죄없다 선언을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죄인임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죄인 됨을 생각하라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깊은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죄인 됨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로서 스스로 죄를 씻어 나갑니다. 신앙이라고 생각되는 행위를 부지런히 함으로써 죄를 가볍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십자가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미움과 진노 아래 거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뿐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착한 행위를 산더미처럼 쌓았다고 해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십자가 앞에서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우리가 예수님이 흘린 피의 은혜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별것 아닌 것으로 여겨집니까? 그저 지나가는 얘기로만 들려집니까? 세상에서 돈벌고 자식 키우는 일에 비해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집니까?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간 여러분의 마음을 새롭게 정리하셔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분명히 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십자가를 말하되 그냥 들여다보는 구경거리로 여기는 진노의 자식으로 살아가게 될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언약궤는 나무와 금으로 만든 단순한 상자가 아니었습니다. 벧세메스의 사람들은 단지 상자를 봤다는 이유로 죽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멸시했던 것입니다. 언약궤가 가르치는 진리를 무시함으로써 죽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은 심판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며 하나님이 지키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설명하겠습니다. 언약궤는 이스라엘의 죄를 보여주고 그 죄가 제물의 피로써 용서되는 현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용서해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과 만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불의한 자는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는 언약궤를 이스라엘 안에 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언약궤를 함부로 들여다 본 것은 바로 그 모든 것을 무시한 처사였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는 불의한 자임을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깨끗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 안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오늘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에 피흘리신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가장 신자다운 것이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려고 합니다. 자신의 잘난 행위를 가지고 하나님께 가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십자가를 멸시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망하는 것으로 가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죄를 보면서 예수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사망에 처한 자로 죽어야 할 운명이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이 달리 보이는 것입니다. 가졌다 못가졌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살아가는가를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부자로 사는 것보다는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살다가 죽는 것을 더 귀한 것으로 여기는 신자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돈은 여러분을 부자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높은 지위는 여러분에게 권력을 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풀의 꽃처럼, 안개처럼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돈과 권력이 사람을 영원토록 지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마지막에 서서 자신을 생각해 본다면 세상 것은 헛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의 자리에 서지를 않습니다. 마치 마지막은 자신과 상관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인간이 이처럼 어리석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어리석음으로 살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아니면 구원될 수 없는 죄인임을 아는 그 마음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만이 십자가를 높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죽어야 할 죄인임을 보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우리의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저 성경에서만 말하고 있는 가상적인 세계로만 인식을 합니다. 그러니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며, 따라서 심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도 감사함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앞에서도 죄인된 자가 구출 받게 된 은혜를 고백하는 것보다는 자기 이익과 자기 중심의 삶에 대한 문제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멸시하는 것이며 하나님은 이러한 자를 미워하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지키십니다. 십자가의 정신이 멸시받는 것을 묵과하지 않으십니다. 십자가를 높이는 그가 바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19강) 삼상 7:1-11 범죄
잠언서 29:19절에 보면 “종은 말로만 하면 고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가 알고도 청종치 아니함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종은 말로 하면 안듣고 때려야 말을 듣는다는 뜻입니다. 과연 성경에 왜 이런 구절이 기록되어 있을까요? 이런 구절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가르침은 무엇이겠습니까? 일단 우리 자신을 종의 자리에 두고 생각해 봅시다.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이 말로는 안듣는, 알고도 청종치 않는 그런 종으로 살아간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종은 주인의 소유물입니다. 종에게는 개인 재산이 없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그것은 제것이 되지 못하고 모두가 주인의 소유일 뿐입니다. 결국 종은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도 않는 일에 힘쓰고자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악한 종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진정한 주인의 종은 어떤 자입니까? 그는 바로 자기 유익을 보지 않고 오직 주인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자신을 주인을 위하여 존재함을 자각하고 주인을 위하여 살아가는 그가 바로 진정한 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자처한다면 우리에게는 분명 그러한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악한 종으로 살아갈 뿐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우리가 곧 악한 종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내 유익을 기준으로 해서 살아가면서도 우리 스스로를 착한 종이라고 자처하는 것입니다. 요즘 신자들은 교회에서 사랑하라느니, 주의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라느니라고 말하면 늘 하는 말로 여기고 흘러 들으면서도, T.V에 어느 의학박사가 나와서 사랑을 베풀고, 항상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면 몸에 엔돌핀 같은 물질이 생겨서 건강에 좋다는 식으로 말하면 그 말은 감동적으로 들으면서 ‘앞으로 사랑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야겠구나’라는 마음을 가진다고 합니다.
사랑하며 살고 감사하고 기뻐하며 사는 것도 주님의 말씀이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몸에 좋고 내게 유익이 되고 오래 사는데 도움이 된다고 하니까 할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결국 아무리 예수님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내게 유익이 되지 않는 일에는 힘쓰지 않는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손해가 되는 일이라면 그대로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현대 교인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 유익이 기준이 된 삶입니다.
여러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살인을 하고 강도짓을 하고 도적질을 하고 사기를 치는 그런 나쁜 행동들이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결코 아닙니다. 내 속에 도사리고 있는 나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사는 것보다 나 자신의 유익에 매달려 살아가는 나로 인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악한 종처럼 알고도 청종치 않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아닌 나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두고 성경은 범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5-6절에 보면 “사무엘이 가로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미스바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니라”고 말합니다.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여서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금식하면서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는 그 범죄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은 과연 무엇을 범죄라고 여기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범죄’라는 말을 하면 악한 행동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범죄를 말할 때도 역시 윤리와 도덕을 기준으로 하고 말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결국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면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종교적인 범죄도 강조합니다. 주일에 교회를 나오지 않는 것, 즉 주일을 범하는 것을 죄로 말하고, 십일조 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전도하지 않는 것도 죄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그런 것들을 모두 행하면 죄를 안짓는 것입니까? 죄가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까? 분명 그것은 아닙니다.
요한일서 5:18절에 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않는다고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요한은 과연 무엇을 범죄로 말하는 것입니까? 요한도 십일조 안하고 기도 안하고 전도 하지 않는 것을 범죄로 말합니까? 아니면 살인하고 강도 짓을 하는 것을 두고 범죄로 말하고 있습니까? 물론 살인과 강도 등의 행위가 죄가 아니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면 그런 행위를 하지 않고 소위 착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마치 범죄와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그것을 더 위험한 것으로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신자에게 중요한 것은 세상도 아는 죄를 아는 것이 아니라 세상은 전혀 알 수 없는 범죄를 아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러한 범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알 수 없고, 설사 말한다고 해도 범죄로 인정하지 않는 그러한 범죄가 무엇인가를 본문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범죄함 속에 있으면서도 범죄가 무엇인가를 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어리석음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은 죄를 규정할 때 ‘사람에게 어떻게 행했는가?’로 판단합니다. 이웃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 자체를 죄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범죄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행하였는가를 따집니다. 이스라엘이 고백하는 범죄 역시 같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다투고 분쟁하는 것이나 아니면 살인하고 도적질한 행위를 두고 범죄하였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었던 자신들의 행위에서 범죄가 무엇인가를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과연 그들이 자신들에게서 무엇을 봤을까요?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범죄를 깨닫게 된 동기는 하나님의 징벌에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은 벧세메스에서 언약궤를 들여다봄으로 인해서 오만 칠십 명이 죽는 엄청난 재앙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그들은 거룩하신 여호와 앞에는 아무도 설 수 없음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삼상 6:20). 언약궤는 하나님이 임재하여 계신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안에서는 거룩한 것으로 구별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궤를 들여다 본 것은 거룩하신 여호와 앞에 설 수 없는 불의한 자신들의 본질을 보지 않은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불의한 존재임을 잊어버린 것에 대해 왜 그토록 진노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어린양의 피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과 동일한 불의한 존재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내리신 애굽의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어린양의 피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피의 은혜가 이스라엘 안에 살아있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불의함을 잊지 않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위해 이스라엘 안에 유월절이라는 절기를 마련한 것을 잘 아실 것입니다. 유월절을 통해서 자신들의 불의함과 어린양의 피의 은혜를 되새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이스라엘인데, 벧세메스에서 그들이 제물의 희생의 피가 뿌려지는 언약궤를 함부로 들여다 본 것은 결국 자신들의 불의함을 보지 않고 있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어린양의 희생을 멸시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진노하셨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범죄라고 말하고, 이스라엘은 이 범죄를 하나님께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십계명에서 1계명과 2계명이 모두 포함된 내용입니다. 여호와만 섬기라는 것이 1계명의 ‘너는 나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는 것과 같고, 이방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라는 것이 2계명의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에게 여호와만 섬기라고 명령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희생으로 살아난 경험을 가진 족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희생으로 살았다는 것을 아는 이스라엘이라면 하나님만 섬기라는 말씀에 대해 당연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살려줬으니까 섬겨주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희생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것이 불의한 자신들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우상을 섬긴다면 결국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자신들을 살게 하는 것임을 잊어버리고 세상의 것이 나를 살리는 것으로 믿기 때문에 우상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우상은 인간의 행복과 부를 책임지는 신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방인이 우상을 섬긴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이방인에게 재앙을 내려서 고통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스라엘보다 더 부요하고 강한 국가로 성장을 했습니다. 그것을 이스라엘이 바라볼 때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우상을 섬기면 저런 부요함을 누린다는 생각을 하지 않겠습니까? 결국 이방인처럼 세상의 것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욕망에 빠지기 때문에 우상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상을 통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힘을 얻고자 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됨을 버려버리는 것이기에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그런 행위 자체가 범죄함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나를 살게 하는 것임을 잊고 세상의 것으로 살고자 하는 것이기에 범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말하는 범죄는, 인간의 행위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희생으로 불의한 자를 살리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멸시하는 것 자체를 범죄함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말한 요한일서 5장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한다’는 말은 죄에 대해서는 완벽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살아간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일서 5:21절의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는 구절로 알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세상 것으로 살려고 하는 것이 곧 우상에 가까이 하는 것임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상을 가까이 하지 말라는 것은 절에 가지 말라거나, 불상을 집에 두지 말라거나, 제사를 드리지 말라거나, 점을 치지 말라는 단순한 행동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우리를 살게 하는데 세상사람들이 세상 것으로 재미있게 살아가는 것을 보고 자신도 세상 것으로 살아보고자 세상에 매달리는 그것을 두고 하는 말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것은 세상 것이 나를 살린다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에 나를 살린다는 생각으로 살아갈 것을 요구하는 말씀으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미스바에서 ‘우리가 범죄하였나이다’라고 할 때 그냥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물을 붓고 금식하는 행위를 같이 하였습니다. 과연 그러한 행동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이스라엘과 물의 연관성은 홍해와 요단강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물이 없을 때 원망하는 죄를 지은 것도 있지만, 여호와 앞에서 물을 붓고 금식한 것은 아무래도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을 잊어버린 자신들의 범죄함을 고백하는 것과 연관된 행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애굽의 군대에 쫓길 때 하나님이 홍해를 건너게 하심으로써 살아났고, 요단강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건넘으로써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 은혜와 사랑을 잊어버린 것이 자신들의 범죄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금식을 하는 것은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이 나그네로 살아가던 자신들을 하나님이 먹이심으로 살았는데 그것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의 힘으로 살고자 했던 불의함을 고백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자신의 불의함을 인식하는 신자들에게서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아무리 교회에서 봉사하고 힘써 일한다고 해도 자신의 불의함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에게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공로만이 보여질 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이 우리를 살렸음에도 불구하고, 또 지금도 역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으로 살아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는 범죄만이 보여질 뿐입니다. 여러분 범죄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범죄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희생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희생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육신의 생명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진 생명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하심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기에 하나님만 섬기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것은 나의 유익이 세상에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유익이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9절에 보면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을 취하여 온전한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응답하셨더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안에 어린양의 희생, 즉 유월절 정신을 회복시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그 증거로 블레셋을 이기게 하신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 회복은 이스라엘이 유월절의 정신을 회복함으로써 되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신자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살아가는 것은 여러분의 행위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여러분이 유월절 정신, 즉 어린양의 희생의 은혜를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가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나를 살린다는 그 정신이 살아있느냐는 것입니다. 날마다 여러분의 심령에 유월절이 행해지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거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곧 여호와께 범죄함이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린양의 피가 아니면 영원한 죽음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여러분 자신의 불의함을 보시고 그 죽음에서 여러분을 건져내신 어린양의 피의 능력과 은혜를 생각하기 바랍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섬기는 삶입니다.
(20강) 삼상 7:12-17 에벤에셀
지난 시간에는 범죄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이스라엘의 범죄는 하나님만을 섬기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이스라엘에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외친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우상을 섬긴 것을 범죄라고 보기보다는 그들이 왜 우상을 섬겼는가를 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부처나 제사지내는 것 등을 우상 섬기는 것으로 여기는 현대인들은 우상의 실체를 깨닫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은 언약궤와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에는 어린양의 희생의 피가 있는데 이스라엘은 그 피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데 실패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언약궤는 다만 국보 같은 물건이나 그들을 지켜주는 수호신 같은 것이었을 뿐입니다. 이처럼 언약궤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보지 못하는 이스라엘은 결국 시선을 세상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희생의 은혜가 그들의 마음에 채워지지 않았기에 그들의 마음은 세상 것을 갈구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미 하나님이 베푸신 것이 무엇인가를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것으로 마음이 채워지지 않는다면 자연 인간의 갈망은 세상을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애초부터 세상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한 것이 인간의 부패한 마음인데 그 마음이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지지 않았다면 항상 부족과 목마름을 느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부족을 채워줄 신을 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입니다. 결국 우상을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희생의 은혜를 보지 않는다는 것이고 여기에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범죄를 깨닫는데 참으로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1,2절의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 놓고 그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히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을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는 말씀을 보면 그들이 언약궤를 아비나답의 집에 모셔 놓은 지 이십 년이 지난 후에 비로소 여호와께 범죄하였다는 고백을 하였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궤가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20년을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고통을 받으며 지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20년의 세월은 결코 무의미하게 고생만 한 세월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고통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모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고통속에서 하나님만이 유일한 소망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우상을 제하고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라는 사무엘의 외침은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는 외침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 회복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칠 때 하나님이 블레셋을 물리치심으로 증거 되었습니다. 그리고 본문 12절을 보면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미스바와 센 사이에 돌을 하나 세웁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합니다. 에벤에셀이란 ‘도움의 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있습니다. 4:1절에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치고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 진쳤더니”라는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처음 전투할 때의 지명이 ‘에벤에셀’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에벤에셀에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하자 실로에 있는 언약궤를 가져와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처참한 패배였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돕지 않으신 결과라고 여기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항상 현실을 하나님편에서 제대로 보지 못하는 우리의 무지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돕고 계셨던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도우심은 전쟁에서 이기고 승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머물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이스라엘을 패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얻기 위해 언약궤를 가져온 이스라엘이 패배한 그 에벤에셀의 이름대로 미스바와 센 사이에 돌을 세우고 ‘에벤에셀’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우심의 참된 의미를 알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의미로 에벤에셀이라는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것은 지금 현재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왔음을 의미하는 것이지 10절에서의 승리만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10절에서의 승리만을 두고 말한다면 ‘여호와께서 도우셨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것은 과거에 있었던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제사장이 죽고 언약궤를 빼앗기고 20년 동안 고통을 받고 살아온 모든 세월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전의 모든 세월까지 다 포함한 도우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에벤에셀이란 기념비입니다. 즉 하나님이 여기까지 이스라엘을 도우셨음을 기념하는 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기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돌을 볼 때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도우심 속에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역할의 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무엇인가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의 기념비는 에벤에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베게하던 돌을 세우고 기름을 부은 후에 ‘벧엘’이라고 한 얘기가 있고, 여호수아 4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넌 후에 열 두 돌을 길갈에 세운 일이 있고, 또 24장에 보면 여호수아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책에 기록하고 큰돌을 세운 기록이 있습니다. 이러한 돌들은 모두 기념비로서 단순한 돌이 아니라 특이한 기능을 수행하는 돌이었던 것입니다. 그 기능이란 하나님이 행하신 사건들을 증거하기 위하여 세워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호수아 4:6-7절에 보면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 자손이 물어 가로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뇨 하거든 그들에게 이르기를 요단 물이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서 끊어졌었나니 곧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에 요단 물이 끊어졌으므로 이 돌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영영한 기념이 되리라 하라”고 말합니다. 돌의 기능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증거하는 것에 있었던 것입니다. 즉 기념비들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그의 백성을 위해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증거함과 동시에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그와 같이 행하고 계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에벤에셀’ 역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물로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그 말의 의미를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해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고백을 자신있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말로만 하는 고백이 아니라 지금까지 살아온 여정속에서 겪었던 고생과 고통들 많은 실패들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무엇인가를 발견하실 수 있겠습니까? 만약 여러분의 고생과 고통을 ‘100보 전진을 위한 50보 후퇴나’,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식으로 성공을 주기 위해서 실패를 겪게 했다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아직까지 하나님의 도우심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만약 과거의 고생이 지금 현재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그런 상황에서는 하나님이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말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시기 위해서 패배하게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해 바르게 깨닫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처음 블레셋과 전투할 때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생각은 ‘하나님은 당연히 자신들을 도우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니 승리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리석음과 무지에서 그들을 벗어나게 하시기 위해 전투에서 패배하게 하시고 오랜 세월을 고생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범죄가 무엇인가를 깨달았을 때 승리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었음을 알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도록 하기 위해 도우신다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여러분, 여기까지의 여러분의 인생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되어진 것입니다. 돌아보면 고생과 위기가 있을 때마다 여러분의 수고와 노력과 땀으로써 모든 것을 극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을 신뢰하는 세상의 어리석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도우셨다면 내가 왜 그런 고생을 했어야 하느냐?’라는 생각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도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 놓기 위해 여러분을 도우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패배가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던 것처럼 여러분의 실패와 고난과 고통 역시 하나님의 도우심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말로 하면 되지 꼭 그렇게 고생시켜야 하는가?’라는 불만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완악함을 깨닫지 못한 생각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포기해야 합니다. 즉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신념과 의지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결코 그렇게 하지를 못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바라볼 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는데 이러한 인간의 완악함을 무엇을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야곱의 환도뼈를 쳐 쓰러뜨린 것처럼 우리가 힘으로 여기고 있는 것을 쳐서 우리를 쓰러뜨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일속에 있는 것입니다.
신자는 인간의 일말고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고 살아가야 합니다. 인간의 일에 몰두하게 되면 결국 자신의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랄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일, 즉 블레셋에게 승리하기 위해 언약궤를 가져와 도움을 구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일을 돕기 위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해 일하십니다. 그 일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패배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를 실패하게도 하시고 고통에 있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별 탈 없이 잘사는 것을 두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물론 그것 역시 하나님이 도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잘살게 하기 위해 도우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세우시기 위해 도우시는 과정에서 주어진 것들로 여기셔야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가진 것으로 교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잘사는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면 힘들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는 것이란 뜻입니까? 이것이 곧 블레셋에 패배할 당시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었던 사고방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여기까지 도우셨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여러분을 도우실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 돕는다는 말입니까? 바로 여러분의 신앙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도우시는 것입니다. 이 도우심을 잊지 않도록 하기 바랍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이 도우셨다는 기념으로 돌을 세우고 에벤에셀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돌이 앞으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우신 일에 대한 증거물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도 하나님이 여기까지 여러분을 도우셨음을 인정하신다면 사무엘처럼 기념비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도 돌을 하나 가져다가 세워야 합니까? 이왕이면 흔한 돌말고 이태리 수입석을 가져다가 예배당에 세워놓을까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돌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도행전 26:22절에 보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밖에 없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증언할 때 했던 말입니다. 이것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이 그 자리에 서서 증거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되어진 일임을 말합니다. 즉 바울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 증거물로 모든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신을 내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오늘 본문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도 바울 자신이 에벤에셀이라는 기념비 역할을 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모든 시대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그리스도인 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즉 그리스도인 된 여러분 자신이 에벤에셀로 세워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여기가지 도우셨다’는 것을 외치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5-17절을 보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되 해마다 벧엘과 길갈과 미스바로 순회하여 그 모든 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라마로 돌아왔으니 이는 거기 자기 집이 있음이라 거기서도 이스라엘을 다스렸으며 또 거기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을 다스렸다는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도우심을 잊지 않도록 힘썼음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희생이 보여주는 은혜와 사랑을 잊지 않고 살아가도록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잊지 않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멸망에 처해야 할 우리를 도우십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안에 살아가도록 저와 여러분을 도우십니다. 그것을 위해서 여기까지 여러분을 도우신 분이 바로 하나님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서 그 도우심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에벤에셀 돌이 되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끊임없이 증거하는 증거물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여러분을 볼 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볼 수 있도록 하는 증거물이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위해 그리스도만 보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1강) 삼상 8:1-9 왕을 구한 이스라엘
본문 4-5절을 보면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장로가 사무엘에게 와서 자신들을 다스릴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는 내용입니다. 이때까지 이스라엘은 왕이 없었습니다. 아니 그것보다는 왕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을 왕으로 여기지 않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통해서 오늘 우리가 왕을 왕으로 여기지 않는 불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를 생각할 수 있기 바랍니다.
먼저 이스라엘이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왕을 요구하는 것은 첫째는 사무엘이 너무 나이가 많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무엘의 아들들이 사무엘의 행위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3절의 내용을 보면 사무엘이 그 아들들로 이스라엘 사사를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들이 사무엘의 행위를 따르지 않고 자기 이익을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했다고 합니다. 즉 사사로서 재판을 할 때 뇌물을 준 자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은 이러한 이유를 내세워서 왕을 구했던 것입니다.
어찌 보면 아주 합당한 이유며 요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늙어서 예전과 같이 자신들을 다스릴 수가 없고, 사무엘이 사사로 세운 사무엘의 아들들은 뇌물을 받고 엉터리로 재판하는 악한 자들이었으니 만약 이런 상태에서 사무엘이 죽어 버린다면 결국 악한 아들들이 사사로서 이스라엘을 계속 다스릴 것인데 우리 이스라엘을 위해서 왕을 세워야 한다는 이 논리가 극히 자연스럽고 합당한게 아니겠습니까?
이들이 왕을 구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강력한 지도력이 있는 지도자를 구하는 것입니다. 민중들이 실질적으로 원하는 것은 생활의 안정입니다. 즉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는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살기 좋은 나라, 이것이 모든 민중이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나라를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이루어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대통령 선거를 했습니다. 민중들이 대통령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대로 생활의 안정입니다. 부패청산 등 여러 가지 것도 말을 하지만 가장 우선적인 것은 생활 안정입니다. 아무리 부패를 청산하고 깨끗한 나라를 만들었다고 해도 경제적인 면에서 실패하여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고 물가는 치솟는 나라가 된다면 민중들은 불안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에 대한 불만이 쌓여갈 것입니다. ‘조금 부패했다고 해도 그런 대로 생활하기에 낳았던 옛날이 더 좋았다’는 말을 할 것입니다. 이것이 민중들의 실질적인 요구입니다.
고위직의 부패에 대해 분노하는 것도 그것을 강자의 횡포로 보기 때문입니다. 약자인 우리는 이렇게 힘들게 사는데 강자의 자리에 있는 자들이 강한 힘을 이용해서 자기 배를 불린다는 것에 분노하는 것이지 누가 뇌물을 받았다는 것 자체에 분노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만약 그가 뇌물을 받았다 할지라도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그리고 민중들의 생활의 안정을 이루는데 있어서 큰 일을 행했다면 얼마든지 그에게 관대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생활의 안정을 원하는 민중들이기에 사무엘의 아들들의 행위를 보면서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느낀 이스라엘로서는 왕을 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해 볼 수 있는 또 하나는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의 정치체제에 매력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5절에 열방과 같이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보면 이스라엘의 눈에는 이방인들의 정치체제가 마음에 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의 사사체제보다는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왕정체제가 자신들의 생활 안정을 이루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민중들은 생활의 안정을 원합니다. 생활의 안정에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선하게 보고 그것을 수용할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민중들인 것입니다.
서방의 공산주의가 하나 둘 자본주의 체제로 변하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이들이 왜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변하려고 하겠습니까? 그것은 생활의 안정에는 공산주의보다는 자본주의가 더 효과적이고 필수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들이 만약 공산주의로서 생활의 안정을 이루고 이들이 추구하는 것처럼 모든 민중들의 평등한 삶을 이루었다면 오히려 자본주의 체제로 살아가던 나라들이 공산주의에 매력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북한이 우리보다 더 잘살고 빈부격차가 심한 우리나라에 비해서 모든 민중들이 평등하게 부를 누리고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아마 북한의 공산주의를 환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추구하는 이론은 비록 민중의 평등이었다 할지라도 결과는 지배계층을 제외하고는 생활의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공산주의란 체제를 악하게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사사체제에 있던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처럼 부강하고 강한 국가를 이루고 있었다면 굳이 이방인들과 같은 왕정체제를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왕이 없어도 잘사는데 무엇 때문에 왕을 구하겠습니까? 다만 지금의 자신들의 형편이 이방인들보다 월등히 떨어져 있는 것을 보면서 자신들의 사사체제는 실패한 것이며 따라서 이방인의 왕정체제로 나가는 것이 곧 자기들이 사는 길이라고 여겨진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요구에 대해 사무엘은 기뻐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6절). 그리고 하나님은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는 것을 선하게 보시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그들이 왕을 구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버린 것으로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인도하시는 강력한 지도자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방인과 같은 왕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들은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것에 대해 별로 호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하나님이 다스린다고 해서 이방인보다 나은 것이 전혀 없는 자신들의 형편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이라는 보이지도 않는 왕보다는 자신들의 눈에 보이는 강한 힘을 가진 왕을 더 선호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악하게 보신 것입니다. 왕되신 하나님을 왕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깊이 생각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들은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만족하고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누구나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정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왕이 되어서 우리를 통치하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 자신들이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 있는가가 문제입니다. 왕앞에서는 그 누구도 절대적 복종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가 그러한 복종을 보이는 자로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왕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믿는다 할지라도 인간 스스로 꿈꾸고 원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말고 다른 지도자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교회적인 문제로 생각해보겠습니다. 현대교회가 생각하는 교회의 지도자는 두말할 것 없이 목사입니다. 그리고 국가에 속한 민중들이 지도자에게 강한 나라를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교회에 속한 민중들 역시 자기 교회의 지도자가 교회를 강하게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능력있는 목사를 원하는 이유가 모두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을 능력이라 여기고 그러한 목사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이스라엘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이 왕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은석교회에서 여러분께 강조했던 것 중 하나가 목사를 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란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서 여러분께 전해주는 역할 할 사람인 것뿐이지 교회의 지도자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지도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머리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말씀에 복종하고 살아가면 되는 것이지 사람의 지시를 받고 다스림을 받으며 살아가겠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포기하고 사람의 단체인 종교모임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사람들은 목사를 중심으로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다스린다는 것에 대해 싫증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꿈꾸는 것은 교회가 부흥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스린다고 해도 교회는 부흥되지 않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다만 말 뿐으로 받아들일 뿐 믿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부흥을 이루어줄 자를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고 하나님을 왕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왕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허락을 하십니다. 왕을 구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불신앙이라면 그것을 막으시는 것이 옳은데 무엇 때문에 오히려 허락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들로 하여금 실제 왕정체제로 살아가게 함으로써 그들 스스로 자신들이 구하는 것이 크게 잘못된 것임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지 않고 무조건 막으신다면 이스라엘은 끝까지 왕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지를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왕을 허락하신 것은 선물이 아니라 다만 승인이었을 뿐인 것입니다.
10-18절까지 보면 왕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이 당할 어려움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들이 독재군주의 노예가 될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왕을 원하고 있습니다. ‘노예가 되어도 좋다. 왕이 있어야 우리가 잘 산다’는 것입니다. 왕으로 인해서 잘만 살게 된다면 그까짓 노예가 무슨 상관이냐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8-10절에 보면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대로 우리의 지도자는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지도자와 다른 것은 예수님은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도자의 참 모습입니다. 이러한 지도자가 세상에 또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의 지도자는 말만 섬긴다고 할 뿐 결국 지배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목사 역시도 교인들을 지배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물론 힘으로 지배하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덕으로, 인품으로 교인들을 지배하려는 목사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덕을 보이고 인품을 보임으로써 자신을 추종하고 따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것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왕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지도자로 삼고 살아가십시오. 그리고 지도자이신 그분이 여러분의 죄를 대신 지셨음을 생각하십시오. 세상에 그 누가 여러분의 짐을 대신 질 수 있습니까? 오히려 여러분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주지 않습니까? 헌금해라 봉사해라 목사 섬겨라고 하면서 여러분들 위에 군림하고자 한다면 그는 여러분을 지배하고자 하는 거짓된 목사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위대한 지도자처럼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여러분을 천국으로 인도하지는 못합니다. 그 사람이 여러분의 죄를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먼저 교회에 대한 여러분의 욕심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부흥되고 발전하기를 원하는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것은 곧 우리들의 욕심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 욕심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다스림을 보는 것을 가리고 대신 사람을 보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곧 불신앙입니다.
사람이 교회를 크게 했다면 그 사람은 결국 교회의 주인행세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인들은 한 사람의 부하노릇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믿음가운데 있다면 교회다운 교회를 소망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높은 자와 낮은 자가 없고, 섬기는 자와 섬김을 받는 자가 없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신자로 만나고 살아가는 것이 참된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바쳤으니까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통치를 받고 살아가는 예수님 나라의 백성된 표입니다. 이것만 생각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2002년도 마지막 주일에 예수님만을 나의 지도자로 믿고 살아왔던가를 생각해 볼 수 있기 바랍니다
(22강) 삼상 8:10-22 백성의 고집
하나님의 뜻과 자신의 열망 사이에서 하나의 선택을 해야만 했던 이스라엘은 자기 자신들이 가고자 하는 길을 고집했습니다. 막연하게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맹목적으로 믿으며 살기보다는 능력 있고 위대한 사람을 왕으로 세워서 그를 따르는 것이 더 확실하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왕을 구하는 이스라엘에게 왕의 제도가 자신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멍에가 될 것임을 사무엘을 통해서 말씀하셨으나 이스라엘은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고 막무가내로 왕이 있어야 되겠다고 고집을 부립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보다는 자신들의 생각이 더 옳다고 여긴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왕이 없이 하나님만 부르는 자신들에 비해, 하나님이 없으면서도 왕을 중심으로 왕에게 복종하며 살아가는 열방들의 부강함에 마음을 뺏겨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나님 앞에서 왕을 구하는 자신들의 잘못이 무엇인지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버려 그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7절).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들은 다만 왕을 구할 뿐, 그래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 보자는 목적을 가지고 있을 뿐, 추호도 하나님을 버릴 생각으로 왕을 구하는 것은 아니라고 소리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그것이 곧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왕을 구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대에 섰다고 합시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다는 것으로 심판을 받는다고 합시다. 그때 이스라엘이 ‘우리는 왕을 구했을 뿐이지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고 항변한다고 해서 과연 그 항변이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뜻 앞에서 우리의 생각은 결코 정당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내가 생각할 때 이것은 결코 틀린 것이 아닙니다’라고 주장한들 하나님이 틀리다고 하신다면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국가의 발전을 위해서 왕을 구하는 것이 아무리 정당하게 여겨진다고 해도 하나님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시면 잘못된 것입니다. 물론 왜 잘못된 것인지 이유를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생각할 때 옳기 때문에 무조건 옳은 것으로 고집하는 태도를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씀을 넘어서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을 남겨 놓으신 것은 장차 세상을 말씀을 기준하여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 말씀에 온전히 복종하는 그가 바로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 일컬음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인 저의 역할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그대로 여러분께 전달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만약 말씀이 왜곡되어 전달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잘못됨을 전혀 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스스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나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는 자로 살아가게 되는 위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로서는 여러분이 싫어하든 듣기를 거절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목사로서 여러분께 할 수 있는 최대의 봉사며 여러분에 대한 저의 사랑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왕, 곧 자신들을 잘 다스리고 이끌어갈 지도자를 구했습니다. 우리 상식으로 생각하면 분명 그렇게 큰 잘못은 아닌 것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것을 하나님을 버리는 심각한 잘못으로 보고 계신다는 것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이것쯤이야’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지나치는 것들이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하나님을 배척하고 거절하는 심각한 죄악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19-20절을 보면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의 말은 사무엘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말 듣기를 거절한 것입니다.
만약 사무엘이 한 말을 하나님께서 직접 우뢰와 같은 음성으로 하늘에서 외치셨다면 어땠을까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성경에 있는 내용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기는 하지만 다만 책에 지나지 않은 것이기에 소홀해지고 가볍게 여기는 것은 없습니까? ‘이까짓 것 쯤 조금 어긴다고 해서 대수겠는가?’라는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만약 그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큰 실수를 하는 것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이 직접 하늘에서 외치시는 것과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였습니다. 이미 왕 제도에 매력을 느낀 그들에게 사무엘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왕만 있으면 우리도 열방처럼 잘될 수 있다는 생각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마치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유혹하는 뱀의 말을 들었을 때 자신이 잘 될 수 있다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앞서가고 넘어서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잘되기를 원하는 욕망인 것입니다.
‘내가 잘된다’ ‘교회가 잘된다’는 이것 하나로 모든 것을 정당화 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교회가 잘되기를 원하시고 또 잘되도록 도우시는 분이라고 아예 못박아 생각하기 때문에 교회가 잘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고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단정지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며 진정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살피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으로 밀고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이스라엘이며 오늘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삼서 1:2-4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이 말씀에서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한다는 것은 순복음 교회의 조용기 목사가 말하는 것처럼 영혼과, 육신의 일과, 건강 모든 것을 잘되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진리에 관심을 두고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영혼을 잘되게 하고 영혼이 강건해지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범사에 잘된다는 것도 진리 안에서 영혼이 잘 된 것처럼 세상의 어떤 일에서도 그 영혼이 잘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사랑하는 자가 진리 안에서 살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했습니다. 사도의 마음은 곧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두고 기뻐하시는 것은 백성이 진리 안에서 살아갈 때입니다.
요한삼서에 보면 사도는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을 나그네를 접대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즉 형제를 섬기고 대접하는 것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 나는 성경에 관심두고 있으니까 진리 안에서 행한다고 쉽게 단정지을 것이 아니라 형제에 대해 어떻게 대하는가를 두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참고로 사도 요한은 요한삼서 9절에서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으뜸 되기를 좋아한다는 것은 낮아지는 자리를 싫어하는 것이며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 위에서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을 즐기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관심은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주도권을 자신이 가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배척하고 쫓아내었던 것입니다. 사도는 이것을 악한 일을 행하는 것으로 말하며 결국 하나님을 뵈옵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3요 11절).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우리의 육신을 잘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영혼의 잘됨과 강건을 위해 일하실 뿐입니다. 영혼의 강건을 위해서 필요 하시면 오히려 육신의 것을 빼앗아 가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가 잘되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우리들의 욕심입니다. 그러한 생각은 곧 자신이 진리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밖에 안됩니다. 조금이라도 진리에 관심을 두고 진리를 살핀다면 진리와 우리의 욕심은 아무런 상관이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물론 교회는 잘돼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는 잘됨은 교회가 오직 진리에만 관심을 두고 진리 안에 살아가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진정한 교회다움이 아니겠습니까?
교회가 진리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을 거절하는 교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살피고 진리를 따르기를 원하기 보다는 인간의 생각과 욕망을 따라 행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교회를 맡은 목사로서 교회가 부흥되는 것을 마다할 이유가 뭐겠습니까? 그러나 교회가 부흥되는 것이 진리가 아니고 저에게 맡겨진 책임도 아니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기에 교회 부흥을 목적으로 살아가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사는 길임을 알기에 여러분에게 진리로만 살아가자고 외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말씀에서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는 이 말씀이 오늘 여러분에게 어떻게 적용되어집니까? 왕을 구하는 것은 지도자를 구하는 것입니다. 지시하고 다스릴 자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너희를 지시하고 다스린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것으로는 안되겠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눈앞에서 직접적으로 다스리고 자신들을 대신해서 싸워주고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줄 능력있는 사람을 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여러분에게는 여러분을 지시할 사람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지시하고 다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음성을 들은 적이 없다’고 말씀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진리를 마음에 전혀 두고 있지 않는 사람에게서나 나올 수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생생하게 살아서 우리 앞에 있습니다. 수시로 하나님의 말씀이 외쳐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가에 대해 여러분께 전달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남은 것은 말씀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섬기라고 했으면 그 말씀대로 형제를 섬기기 위해 힘쓰며 살아가면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간다면 또 다른 지도자가 필요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다시 한번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신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자기 생각을 기준하여 살게 되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여러분 스스로 ‘나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외친다고 해도 하나님 편에서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한 사실을 성경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은 스스로는 하나님은 잘 섬기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인정하셨습니까?
성경은 우리의 거울입니다. 말씀에 대한 나의 태도가 어떤가를 보게 해주는 티하나 없는 거울입니다. 그 거울을 외면한 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면 결국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고, 고쳐야 할 것을 고치지 못하는 결과만 가져올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목사가 아니라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여러분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은 목사가 아니라 말씀입니다. 목사란 단지 말씀을 위해서 이용하는 존재로 여기십시오. 목사를 이용해서 여러분이 말씀에 더욱 깊이 다가갈 수 있다면 저는 그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만족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는 것이 왜 하나님을 버리는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가 목사를 지도자로 섬기고자 하는 것은 과연 왕을 구하는 이스라엘과 다르다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에게는 다스리는 왕이 계시기에 왕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을 다스리는 분이 분명 존재하시기에 여러분을 다스리고 지도해줄 다른 지도자는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에는 우리의 왕으로 오신 분이 있습니다. 우리의 지도자로 오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지도자로 오신 그분은 자신을 섬길 것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백성을 섬기시는 분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지도자입니다. 자신의 생명까지 내어 놓으시면서 백성을 섬기신 분입니다.
과연 이 세상에 자기 목숨까지 내어 놓으면서 섬기는 지도자가 있었습니까?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목사가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 진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처럼 여러분을 섬기는 분으로 오신 지도자가 엄연히 여러분과 함께 하고 지금도 여러분의 지도자로 왕으로 존재하시는데 무엇 때문에 사람의 지도를 받으려고 하십니까?
목사가 교회를 지도하지 않으면 교회가 질서가 없고 엉망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말씀이 살아있고 교회가 말씀을 중심으로 말씀 안에서만 제대로 살아간다면 그 교회는 최고의 질서를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질서는 계급이 아니라 섬김이고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을 섬기신 주님만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23강) 삼상 9:1-10 사울
지난주에 제가 참여하고 있는 목사 모임에서 오랜만에 모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넥타이를 매고 오신 것입니다. 평소 편안한 복장으로 만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에 저는 농담으로 ‘넥타이를 맨 분이 있으니까 그분이 설교하기로 하고 예배드리자’는 말을 하였습니다. 평소에 메지 않던 넥타이를 매고 온 것에 대한 의문감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목사님이 하는 말이 누군가의 부탁으로 면사무소에 볼일이 있어서 넥타이를 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은 ‘넥타이를 하고 가야 대우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관공서의 직원들이 넥타이를 멘 사람과 메지 않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분명 넥타이를 하고 가면 무슨 신분이 있는 사람인가 하여 좀 더 신경을 써서 일을 처리해준다는 말일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쉽게 평가하는 버릇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상대방을 잘 알지도 못하고, 또는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나름대로 그에 대해 평가하며 잘 대해야 할 사람과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사람으로 구분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모두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외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메고 괜찮은 자가용을 타고 나타날 때 ‘혹시 저 사람이 사회적 신분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행동을 조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그 사람의 모든 신분이 외형에 담겨 있는 것처럼 겉모습을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설사 그런 의식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기도 모르게 허름한 옷차림을 한 사람보다는 정장을 한 사람에 대해 더 신경을 쓰게 됩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얘기도 들었습니다. 모 교회가 목사를 구하는데 목사로서의 틀이 있는 목사를 고른다는 것입니다. 목사로서의 틀이라는 것이 무슨 박사 학위 같은 것을 의미하는 줄로 알고 ‘목사 틀이라는게 무엇인가?’라고 물었더니 키가 크고 외모도 괜찮은 것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교회 목사님입니다’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내세울만한 외형적인 조건을 갖춘 사람을 말하는 것이기에 저같이 키 작고 외모도 볼품없는 사람은 절대로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목사가 교회의 얼굴 마담도 아닌데 키 크고 얼굴 잘생긴 것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을 기준으로 하여 목사를 고르는 교회도 있는가 봅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다 같은 목사인데 키 크고 잘생긴 목사가 와야 우리 교회의 체면이 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을 보면 사람이 사람을 대할 때 외모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편견없이 대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사실 사람을 외모로 평가하고 대하는 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습성이니까 말입니다.
본문의 내용도 보면 그럴듯한 외모를 갖춘 한 사람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 이름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요 스롤의 손자요 베고랏의 증손이요 아비아의 현손이라 베냐민 사람이더라 기스가 아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 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앞에 8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는 것은 그들이 의지하고 믿을만한 한 사람을 세워서 국가를 발전시켜 보겠다는 의도였습니다. 이처럼 왕을 구하는 이스라엘을 얘기한 뒤에 이스라엘의 입맛에 맞을만한 한 사람을 소개하는 것으로 9장이 시작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왕을 구하지만 정작 이스라엘에게는 왕이 필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다스리고 인도하시는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왕이 계셨기 때문에 또 다른 왕이 존재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며 의지하고 살기가 미심쩍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이 왕이라고는 하지만 그들의 형편이 이방인보다 나은 것이 전혀 없고 오히려 이방인으로부터 고통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지키신다는 것에 대해 결코 신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믿음직한 인간을 왕으로 세워 국가의 발전을 이뤄보고자 한 것입니다. 왕이란 그냥 사람이어서는 안됩니다. 믿음직하고 신뢰가 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떤 사람을 신뢰하겠습니까? 그가 바로 1-2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사울입니다.
사울은 베냐민 지파의 유력한 사람인 기스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베냐민 지파는 비록 숫자는 적었지만 이스라엘 안에서는 존귀한 지파로 여겨졌습니다. 그러한 지파에서도 유력한 사람인 기스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뼈대 있는 가문 출신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자손중에서는 사울보다 더 준수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준수했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할 정도로 컸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영웅으로서의 조건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울의 외적인 조건은 나무랄 데 없었습니다. 아무도 사울을 따라갈 만한 조건을 갖추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3절부터 보면 사울의 아비인 기스가 암나귀를 잃어버리고 사울에게 찾아오라고 했을 때 사울이 여기저기 암나귀들을 찾아 헤매는 모습이 나옵니다.
잃어버린 것은 말이 아니라 나귀였습니다. 즉 값이 적게 나가는 재산이었다는 것입니다. 비싼 것도 아닌데 그냥 잃어버린 것으로 여기자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암나귀를 찾아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5절에 “그들이 숩 땅에 이른 때에 사울이 함께하는 사환에게 이르되 돌아가자 내 부친이 암나귀 생각은 고사하고 우리를 위하여 걱정하실까 두려워하노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사울은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말에 순종하는 사울이었고, 부모의 걱정거리를 덜어주려는 사울이었고, 자신으로 인해서 부모에게 걱정이 되는 것을 삼가기 위해 애쓰는 사람인 것입니다. 즉 사울은 출신성분에서 뛰어났고, 외모에서도 월등했으며 거기에 부모에 대한 효심까지 있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지도자로서의 모든 조건을 갖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도자에게서 출신을 보기도 하고, 경력을 보기도 하고, 자질을 보기도 하고, 인격을 보기도 합니다. 아무리 외모가 뛰어나고 출신이 좋다고 해도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하는 사람은 꺼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백성을 위해서 국가를 잘 이끌어 갈 수 있는지에 대해 의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대통령을 뽑을 때는 그의 이모저모를 면밀하게 살필 것입니다. 그런 경우 외모에서 풍기는 인상도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험악한 인상보다는 뭔가 인자한 듯한 인상에 더 호감이 가는 것이 사실이지 않습니다. 마치 그의 내면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처럼 아무리 내면에 인자함과 자비가 쌓여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외모가 험악할 때 내면 역시도 뭔가 포악할 듯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후보로 나온 사람들은 사진을 하나 제작을 해도 어떻게든 좋은 인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말을 할 때도 신뢰와 믿음을 줄 수 있는 어투가 어떤 것인가를 연구하고 전문가에게 배우기도 할 것입니다. 아이들을 안고 있는 사진을 찍어서 마치 아이들을 좋아하는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느낌을 주려고 하기도 하고, 이번에 당선된 노무현 씨처럼 눈물을 흘리는 사진을 통해서 뭔가 국가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애타하는 심정을 나타냄으로써 ‘저런 마음이라면 혼신의 힘을 다해서 국가를 위해 일하려고 하겠다’ 는 신뢰를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전에 김영삼 전대통령이 출마했을 때는 멀리 계시는 노부모에게 거의 매일같이 안부 전화하는 것까지 선전함으로써 효심이 지극하다는 것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효심이 지극하다는 것은 나이든 중장년층의 사람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지도자의 조건을 그의 외모와 출신 그리고 인격을 통해서 찾을 수밖에 없는 것이고, 인격 역시 그 사람의 내면을 볼 수 없는 우리로서는 부모에 대한 효심이라든지 사람을 대할 때의 태도와 말투 등등 눈에 드러나는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사울은 모든 사람들이 호감을 가질만한 지도자다운 면을 갖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미리 준비되고 이루어진 하나님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15-16절에 보면 “사울의 오기 전 날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여 가라사대 내일 이맘 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하였음으로 내가 그들을 돌아보았노라 하시더니”라고 말씀한 것을 보면 사울이 사무엘을 찾아올 것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계획된 일이었으며 하나님은 사울을 이미 왕으로 세우시기를 작정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기스가 암나귀를 잃어버린 일이나 사울이 암나귀를 찾아다니다가 찾지 못한 것이나, 사환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암나귀가 어디 있는지 물어보자고 해서 사무엘을 찾아오게 된 것이나, 사울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릴 예물이 없음을 걱정할 때 사환에게 은 한 세겔의 사분의 일이 있었던 것이나, 어디에 가야 사무엘을 만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물을 길러 나오는 소녀들을 만나 산당으로 제사 드리러 가기 위해 길을 떠난 사무엘을 극적으로 만난 것 모두가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사울로 하여금 사무엘을 만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이었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도 이러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하나하나가 우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어떤 결과를 예비해 놓으시고 그 결과로 우리를 이끌어 가시기 위해서 일으키시는 사건들인 것입니다.
사울은 아버지의 나귀를 찾으러 나갔다가 길에서 왕위에 오른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런 경우를 두고 ‘행운’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섭리’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사소하고 평범한 것들이 인생에 중요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세상은 내 생각과 내 뜻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살아가는 것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살아가기보다는 인간관계를 원했던 것입니다. 영웅 같은 왕을 원하고 그 왕이 자기들을 잘 이끌어 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기보다는 믿을만한 사람을 하나님이 세워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믿을만한 조건을 갖춘 사람을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조건으로는 나무랄 데 없는 흠이 없다고 할 수 있는 사울을 등장시켜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이 인간적인 조건으로는 훌륭하다고 할 수 있지만 신앙적인 면에서는 바르지 못했습니다. 사울이 암나귀를 찾지 못하고 부친이 자신을 걱정할 것을 염려해서 그냥 돌아가려고 하자 사환이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가서 물어보면 암나귀가 어디 있는지 가르쳐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때 사울이 하는 말이 “우리가 가면 그 사람에게 무엇을 드리겠느냐 우리 그릇에 식물이 다하였으니 하나님의 사람에게 드릴 예물이 없도다 무엇이 있느냐”(7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가서 도움을 받고 싶어도 드릴 예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울이 하나님의 사람을 찾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은 다만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고 싶은 마음에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조차도 방해하였던 것은 갖다 줄 예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물을 주지 않으면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은 잃어버린 암나귀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을 찾으려고 하는 사울이 옳다고 여겨지십니까? 하나님의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찾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속에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로 세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것은 인간의 실존 자체가 하나님이 없이는 흙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을 벗어나서는 살 수 없다.’며 하나님과의 관계에 충실하고자 하는 그 사람이 곧 인간의 실존에 대해서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을 찾을 때 예물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 역시 세상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유지 될 것으로 여기는 착각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울은 인간적인 조건에서는 뛰어난 사람이었을지 몰라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그릇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이런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는 것입니까? 이왕 왕으로 세우시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고 하나님께 충성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왕이 되게 하시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미 이스라엘에게는 사무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사무엘이 늙었다며 싫어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입맛에 맞는 사람을 왕으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적 조건은 갖추었으나 하나님과의 관계는 좋지 못한 사람을 왕으로 세우시고 이스라엘이 그러한 왕을 환영하는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어떤 수준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들 입맛에 맞는 수준에서 지도자를 원합니다. 이러 이러한 사람을 원함으로써 그들의 수준이 어떠한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수준에 맞추어 지도자로 오게 된 사람은 결국 인간의 입맛에 맞게 행동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그러한 것을 원하지 않는데 하나님과의 문제에 신경 쓸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결국 그러한 수준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니 사울처럼 자신의 실존의 문제로 인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암나귀를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한 수준에서 찾는 것이고, 그것도 예물을 가져가야 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재물을 받고 인간을 도와주는 우상의 수준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것을 교회와 연관지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과연 목사에게서 무엇을 보십니까? 인간적인 조건을 보는 것은 없습니까? 대개 목사를 지도자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목사인 저에게서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든 상관없이 그저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인간이면 그것으로 만족하십니까? 아니면 인간적인 조건이나 신앙적인 모든 것이 완벽하기를 원합니까? 죄송하지만 저에게는 그런 면이 없습니다.
참된 지도자는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을 본받아 살기를 힘쓰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을 보게 되고 인간에게서 지도자다운 면을 찾게 되면 단지 내 맘에 드는 사람만을 원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여러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구원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으나 사나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아가야 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 앞에서 예수님만 의지하고 살아가자고 외치기 위해서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 다함께 인간의 실존이 어떠한가를 깨닫고 예수님만으로 살아가자고 외치기 위해서 제가 이 은석교회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관계로 만나지 마시고, 서로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끼리 만나지도 마시고, 다함께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예수님을 지도자로 삼고 살아가는 한 몸의 관계로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은석교회가 이러한 수준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4강) 삼상 9:15-21 하나님의 섭리
사람은 각자 자기 수준에서 하나님을 만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무엇을 구하며 사느냐에 의해 하나님을 찾는 수준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보다 나은 삶을 꿈꾸며 구하는 자가 하나님을 찾을 때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미 그 마음을 사로잡은 다른 무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그들의 마음은 국가 발전에 대한 꿈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없다면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다른 무엇엔가에 빼앗겨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육신의 편안함과 좋은 환경에 눈길이 갈 때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은 내 마음에서 멀어졌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감사할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항상 그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 두기 위해서 일하시고 우리의 삶에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삶에서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날마다 이러한 지혜를 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이에 대한 말씀을 생각해 보 고자 합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암나귀를 찾으러 길을 나셨던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16 절의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고 말씀하는 것을 보면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게 되는 일에는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결국 사울의 아비가 암나귀를 잃어버린 것을 시작으로 하여 사울에게 있었던 모든 일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이 분명합니다. 두루 다니면서도 나귀를 찾지 못한 일이나, 집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 사환이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가보자고 권유한 일이나, 도중에 소녀들을 만나서 극적으로 사무엘을 만나게 된 모든 일 하나하나가 우연이 아니라 사울로 하여금 사무엘을 만나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인도하신 일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게 된 일의 시작부터가 재미있습니다. 앞서 말한 대로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게 된 일의 시작은 암나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암나귀는 재산입니다. 즉 하나님이 사울을 끌어내어 사무엘과 만나게 하신 일의 시작은 재산상의 손해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사울의 아비가 나귀를 잃어버리게 하시고, 사울은 아비의 말을 따라 그 나귀를 되찾기 위해 길을 떠난 것이 결국 사무엘을 만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물질의 손해를 보게 하시고 인간 쪽에서는 물질의 손해를 보지 않기 애를 쓰게 되는 그 일에서 결국 하나님을 만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울이 사무엘을 만나게 된 일은 오늘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시각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답답해하는 것은 나의 삶을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내일 일을 전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삶을 산다는 것이 참으로 답답할 뿐입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이 어려움이 어떤 결과로 끝날지, 해결은 될지, 그리고 해결의 길은 무엇인지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막막하다’고 하고 ‘답답하다’고 하면서 한숨을 내쉬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미래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특히 자신의 미래와 자식의 미래에 대한 궁금증은 더할 것입니다. 그래서 용하다는 점쟁이를 찾아가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알아보고자 하지만 미래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으며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신자들은 자신의 미래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육신의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미래를 향해 가고 있는가를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가 어디를 향해 있는가를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을 인도하실 때는 ‘가나안’이라고 하는 땅을 약속하시고 그 약속의 땅을 향하여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광야에서 어떤 일을 겪을지에 대해서는 몰랐지만 결국 가나안 땅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 확실한 자신들의 미래임을 믿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도중에 발생한 모든 일은 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것을 알 때 현재의 고난과 어려움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일에 실패했습니다. 이유는 확실한 미래인 약속의 땅을 바라보기 보다는 현재의 삶이 편안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러한 이유로 확실한 미래를 바라보는 삶에서 벗어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울에게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전혀 다르지가 않습니다. 사울의 아비가 나귀를 잃은 것처럼 우리도 살면서 물건을 잃어버릴 수가 있고, 도둑도 맞고 사고도 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사울이 잃어버린 나귀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헤매는 것처럼 우리 역시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헤매는 일이 있을 수도 있고 또 그런 일을 겪은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사울의 얘기를 두고 생각해 볼 때 사울에게 있었던 일들이 분명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신 섭리라고 말할 때 우리에게 있어지는 수많은 일상사들도 우연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사울을 사무엘에게로 보내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기스의 길을 잃은 나귀들도 사울로 하여금 선지자 사무엘을 만나게 하기 위한 수단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작정하신 대로 사울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길과 주권속에서 하나님이 작정하신 바를 이루기 위한 삶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어디로 붙들어 가실까요? 물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붙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기까지의 과정이 결코 순탄치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만 바라보고 소망가운데서 현재의 고난을 이겨낸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도 비록 천국을 말하지만 그 천국이 굳건한 소망이 되어서 현재의 삶에서 승리하는 자로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항상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붙들어 놓기 위해서 힘써 일하시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사울이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는 일의 시작은 나귀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재산의 손해가 있는 일이 발생하는 것으로 사울이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게 되는 하나님의 일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속성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 그 속성을 이용하여 사울을 끌어내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항상 재물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기 때문에 재물을 잃어버리게 하고 손해가 있게 하여서 우리를 여기에서 저기로 옮기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참으로 완악합니다. 그 마음은 재물이 풍족할 때는 더욱 완악해집니다. 재물은 곧 힘을 의미하기에 재물이 있음으로 해서 교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재물의 힘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인간이 고개를 숙이게 되는 일에는 힘이 되는 것을 꺾는 것이 최선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일을 동원하셔서 결국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는 것으로까지 나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현재의 어떤 일에서도 고민하고 낙심하기보다는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하여 나를 그리스도와 만나게 하시고 내 마음을 그리스도께로 붙들어 놓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지혜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어려운 문제가 발생할 때 대부분은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합니다. 나쁜 일은 악한 자에게만 발생하는 것이 신의 섭리고 세상의 이치인데 자신은 악한 일도 하지 않고 남에게 해를 끼친 일도 없는데 왜 이런 일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하나님의 처사가 부당하다는 항변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순탄하게 만들기 위해서 일하시지 않습니다. 일부러 고생을 시킨다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이 없고서는 완악한 우리의 마음이 도무지 움직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육신이 편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 마음을 주께 두려고 하겠습니까? 이러한 사람의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결국 힘이 되는 것, 손에 쥐고 있는 것을 꺾어 버리고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실망하게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게 하시고, 우리의 손에서 재물을 빼앗아 가심으로써 구원자이신 예수님만을 의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것이 인생의 귀한 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에 순응하며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인생이라면 염려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사흘 전에 잃은 네 암나귀들을 염려하지 말라 찾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사울의 염려거리는 잃어버린 나귀였습니다. 그리고 그 염려를 해결하기 위해 사무엘을 찾아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사울이 자신의 염려거리를 꺼내놓기 전에 잃은 나귀를 찾았다고 말합니다. 즉 사울의 걱정거리가 무엇이었는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걱정거리는 사울이 부탁하지 않더라도 이미 하나님께서 해결해 놓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와서 고하지 않으면 들어주지 않으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 필요한 것, 그리고 우리가 무엇으로 근심 걱정하는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애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에게 필요한 대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다만 내가 필요로 한 대로 채우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기에 필요한 대로 채우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욕심을 채우시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그리스도로 채우시기 위해서 우리의 삶을 도구로 하여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습니다. 길을 가다 사람을 하나 만나는 것까지 하나님의 섭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는 무시해도 좋은 사건은 없는 것입니다. 조그만 말다툼까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그리스도께 붙여 놓기 위해서 일하시는 흔적들임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요구하는 대로 들어주시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시기도 합니다. 16절을 다시 보면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아보았노라 하시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내용을 보면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지도자로 삼으라고 하시면서 이스라엘이 왕을 달라고 요구하는 부르짖음을 들으셨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분명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는 행동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다고 말씀합니다. 뭔가 모순되는 말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면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즉 잘못된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를 들으시면서 ‘내가 그들을 돌아보았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포기하지 않는 기도에 하나님의 마음이 변하신 것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열성에 마음을 바꾸신 것이 아니라 왕을 구하는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그것을 도구 삼아 이스라엘의 마음을 하나님께 붙들어 놓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이스라엘에 왕을 세우실 뜻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시는 왕은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스라엘을 통치할 왕이었지 이스라엘의 발전을 위한 왕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인 다윗을 등장시키기 전에 이스라엘의 마음에 합한 사울을 왕으로 등장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간섭하시고 섭리하시는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마음에 순응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평강이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여러분을 섭리하실 것입니다.
신자에게는 우연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떠나 발생하는 사건은 없습니다. 우리의 삶 하루하루가 모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며 섭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고자 하시는지 하나님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삼으시고 날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5강) 삼상 9:25-10:8 무엇이 중요한가?
본문은 사울이 사무엘에게 기름부름을 받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지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왕으로서의 자격과 권한이 주어졌음을 뜻하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왕으로 세울 사람에게 기름을 붓는 것은 국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아주 중요한 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결코 소홀히 행할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내용을 보면 마치 지나가던 사람이 얼떨결에 왕이 되어지는 것과 같은 식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 사울에게는 왕이 되고자 하는 계획도 뜻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에 의해서 왕으로 선택되고 하나님에 의해서 사무엘을 만나게 되고 왕으로서의 기름 부음을 받게 된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사울이 얼떨결에 왕이 된 것과 오늘 우리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입니까? 어찌 보면 지금의 나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성경 내용인 것처럼 보여질 수 있겠지만 본문의 내용을 우리의 삶에 재현시켜 보면 오늘 사울의 이야기 속에는 지금의 우리의 삶이 그대로 펼쳐져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그것을 볼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사울의 인생을 세상적인 시각으로 말한다면 이구동성으로 ‘억세게도 운좋은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어릴적부터 왕이 되는 것을 계획하고 미리 준비하고 노력해 온 결과가 아니라 그저 사람 하나 잘 만나서 한순간에 왕으로 신분이 뒤바뀐 인생이 되었으니 억세게도 운좋다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되어진 사건 하나하나가 서로 연결되어 이루어진 결과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운이 좋다’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사울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과연 무엇이라고 말하게 되겠습니까? 가령 집으로 돌아가는데 아이가 빵이 먹고 싶다고 전화를 합니다. 그러자 마침 빵집이 보이고 그곳으로 들어가서 빵을 사려고 하는데 갑자기 ‘축하합니다’라고 하면서 일만 번째 손님이라며 상금으로 백만 원을 준다고 했을 때 과연 여러분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라는 것에 마음이 쏠리겠습니까 아니면 그저 운이 좋았다는 생각에 쏠리겠습니까?
사실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말은 할지언정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당연하다고 여기는 생각을 하는 것뿐이지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이 사실과 현실로서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지는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는 말은 하면서도 내심에는 그저 ‘운이 좋았다’는 정도로 여기고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좋지 않은 사건에 대해서는 ‘운이 없다’거나 ‘불행하다’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사울 한 사람에게 해당된 것이 아닙니다. 왕을 세우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특별한 사건이기에 하나님이 친히 계획하시고 일을 이루시지만 우리의 사소한 일상생활에까지 하나님의 계획이나 작정은 필요없는 것이 아니냐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기스가 나귀를 잃어버린 것은 사소한 일입니다. 그리고 사울이 나귀를 찾다가 사무엘을 만나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한 것도 역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평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일들이 사울을 왕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일에 포함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사소하다고 여기는 작은 일 하나하나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작정하심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며 도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에게서 독립된 나만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의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일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쓰이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현재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 문제인가를 바로 깨닫는 것이 우리의 삶에서 참으로 중대한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시려고 부르시기 위해 암나귀를 잃어버리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두고 생각한다면 과연 나귀를 잃어버린 것이 큰 문제입니까? 아니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중요한 문제입니까? 분명 후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에게는 오로지 잃어버린 나귀를 찾는 것만이 중대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이끌고 계시는데 사울은 하나님의 이끄심을 보지 못하고 다만 나귀를 잃어버렸다는 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신앙문제보다는 물질적인 문제를 더 크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되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이러한 사울과 다를 바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인도하시듯 오늘 우리도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기 위해서 인도하고 계신다면, 오늘 우리 역시 장차 하늘나라에서 주와 함께 왕노릇하는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인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에게는 이것이 중대한 문제입니다. 이것을 위해 필요하다면 우리의 소유를 없애기도 하시고 힘들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항상 보이는 것은 사울과 같은 모습입니다. 사울이 나귀를 잃어버린 것을 중대한 문제로 여기는 것처럼 세상적인 일들을 중대한 문제로만 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의 문제보다는 내 자식이 잘되는 것이 더 중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보다는 돈을 더 버는 것을 중대한 문제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6-7절)고 말씀합니다. 과연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가를 깨닫는다면 삶에 대한 신자의 태도가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한 가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꼽는다면 2-5절까지일 것입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붓고 사울에게 있을 세 가지 일에 대해서 말합니다. 하나는 사울이 사무엘을 떠나 가다가 두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또 하나의 일은 두 사람을 만나고 더 나아가다가 이번에는 하나님을 뵈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있게 될 일은 사울이 하나님의 산에 이르러 성읍으로 들어갈 때 선지자의 무리를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고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울이 사무엘을 떠난 후에 있게 될 일들인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있게 될 일들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무엘이 앞일을 내다보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사울에게 하실 일을 사무엘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두 사람을 만나고 세 사람을 만나고 선지자의 무리를 만나는 모든 일들도 하나님께서 사울의 인생에 예비해 놓으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사울에게 그러한 일들을 준비하신 이유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먼저 사울이 만난 두 사람은 사울에게 “네가 찾으러 갔던 암나귀들을 찾은지라 네 아비가 암나귀들의 염려는 놓았으나 너희를 인하여 걱정하여 가로되 내 아들을 위하여 어찌하리요 하더라”(2절)는 말을 전합니다. 두 사람이 전한 말은 단순히 사울에게 아비의 소식을 전해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염려라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 기스나 사울에게 염려거리는 나귀를 잃어버린 것이었습니다. 나귀를 찾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토록 애를 써도 찾지 못한 나귀는 하나님에 의해서 찾게 됩니다. 결국 나귀 때문에 염려한 것들이 부질없는 일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이미 찾게 될 것이었다면 그냥 안심하고 집에서 쉬고 있는 것이 더 낫지 않았겠습니까? 결국 염려라는 것은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지 못하고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것에서 발생하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나귀 때문에 염려한 사울의 아비 기스는 나귀를 찾자 이번에는 아들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으로 염려합니다. 한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또 다른 문제가 염려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아비의 염려가 괜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왜냐하면 자신은 무사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왕이 되어 돌아오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의 문제로 인해서 염려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며 하나님께 맡기지 않은 결과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나귀를 찾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던 사울이 두 사람을 만나고는 나귀를 찾는 일이 중대한 문제가 아니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괜히 고생했다는 마음도 들지 않겠습니까? 나귀는 사울의 수고와 노력으로 해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게 하셨습니다. 결국 우리가 염려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삶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소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문제에 대해 신자가 가져야 할 바른 태도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 두 사람을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이 두 번째로 만나 세 사람을 보면, 하나는 염소 새끼 셋을 이끌었고, 하나는 떡 세 덩이를 가졌고, 하나는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사울에게 문안하고 떡 두덩이를 주고 사울은 그 떡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이들 세 사람은 하나님을 뵈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사람들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뵈려고 올라간다는 것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들 세 사람이 염소 새끼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 역시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한 사람들이었음을 말해 줍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은 사울이 하나님을 뵈려고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게 하심으로써 사울에게 중요한 것은 나귀를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는 것임을 가르쳐주고자 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토대로 할 때, 오늘날 우리가 범하고 있는 중대한 잘못은 내 인생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을 중요한 일로 여기고 사는 것이 아니라 사울처럼 나귀를 찾는 일, 즉 세상의 일만 중요하게 여기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울처럼 나귀를 잊어버린 것과 같은 것을 중요한 일로 여기고 산다면 평소 아무 일이 없을 때는 자신의 삶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찾는 것을 중요한 일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내 삶에 아무런 문제만 없으면 그저 평탄하게 살아가는 것으로 착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사울을 깨우치기 위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4절에 보면 “그들이 네게 문안하고 떡 두덩이를 주겠고 너는 그 손에서 받으리라”고 말합니다. 사울이 떡 두덩이를 받는다는 것은 사울이 그들 세 사람과 함께 하나님을 뵈러 가는 일에 참여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서 하나님이 사울을 어떤 사람으로 만드시고자 하시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울이 하나님의 산에 이르면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선지자의 무리를 만날 것이라고 합니다. 이들 선지자는 하나님을 노래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모습으로 사울을 만납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산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신자란 하나님을 뵙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뵈었으면 내가 만난 하나님을 세상에서 전하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에서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처음에 하나님을 찾은 것은 나귀 한 마리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적인 일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나귀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려고 했던 사울에게 하나님은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사람을 만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사울의 잘못됨을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사울이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구별됨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구별됨을 받은 사울에게 두 사람을 만나게 하고 세 사람을 만나게 하고 선지자들을 만나게 하시는 것은 구별된 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하게 하셔서 사울을 어떻게 이끌어 가실 것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새 사람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을 하는 자로 변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 임하는 것은 바로 그런 목적인 것입니다. 예언을 하는 자로 변한다는 것은 나귀 한 마리 잃어버린 것을 중요한 문제로 보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을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을 크게 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울을 구별하여 세우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뜻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7절에 보면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기회라는 것은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세상의 문제들이 실상은 우리가 하나님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보여줄 기회로서 주어진 것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일어난 어떤 문제든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 문제가 어떻게 되어질 것인가? 를 중요한 것으로 여기기보다는 그러한 문제는 하나님의 소관으로 맡기고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기회 삼아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수 있을 것인가를 중요한 문제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회를 따라 행하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 일에 하나님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참으로 중대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울처럼 나귀 한 마리를 잃어버린 것을 중대한 문제로만 보면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신자로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전하고 증거해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를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실체라면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별된 자로 세우셔서 인도하시고자 하시는 방향을 새롭게 정립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자는 하나님에 의해 구별된 자로 부름을 입었습니다. 성령을 보내셔서 변하여 새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의 문제로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자로 살아가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신자에게 중대한 문제는 몸이 아픈 것도 아니고 어려운 일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 문제 때문에 믿음을 소홀히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26강) 삼상 10:9-13 새마음
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새 마음’을 주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새 마음을 주셨다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은 내용이지만 하나님이 주신 새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본문에 대해 잘못된 오해를 할 수 있는 여지가 많기 때문에 오늘은 ‘하나님이 주신 새 마음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은 마음을 새 마음과 새 마음이 아닌 다른 마음으로 구분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인간은 새 마음을 가진 인간과 새 마음이 아닌 다른 마음을 가진 인간으로 구분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 마음이 아닌 다른 마음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새 마음, 즉 새로운 마음을 주셨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이미 기존의 마음이 존재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인간이 세상에 오면서 본래적으로 가지고 오는 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인간의 본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본래적인 성품,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새 마음을 주셨다는 것은 기존의 마음의 인간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본래 마음의 인간은 하나님께서 받아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인간 본래의 마음은 하나님의 나라에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택한 자에게 새 마음을 주시고 새사람이 되게 하셔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에 맞는 사람으로 바꾸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새 마음을 가진 자로 살아가는가 아니면 옛 마음 그대로 살아가는가를 아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새 마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먼저 6절에 보면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고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사울이 선지자의 무리들을 만났을 때 있게 될 일에 대한 사무엘의 말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보면 사울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했을 때 나타날 현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이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켰을 때 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주셨고 그날 징조가 다 응했다고 한 후에 10절에서 “그들이 산에 이를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그를 영접하고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므로 그가 그들 중에서 예언을 하니”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새 사람이 된 것과 새 마음을 받은 것과 예언을 하게 된 것 모두가 서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사울이 선지자의 무리를 만났을 때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서 선지자들처럼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했는데 9절에서는 사울이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켰을 때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선지자의 무리를 만났을 때 여호와의 신이 임하고 예언을 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보면 마치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신 것과 여호와의 신이 임하고 예언을 하고 새 사람이 된 것과는 서로 별개의 문제인 것처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새 마음이 임하지 않고서 새 사람이라 할 수 없는 것이고, 여호와의 신이 임하지 않고서 옛 마음이 새 마음으로 될 수 없는 것임을 생각해 본다면 결코 별개의 사건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새 마음을 받은 사람은 분명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사울이 사무엘을 떠날 때 이미 새 사람이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나중에 선지자의 무리를 만났을 때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 예언을 하고 새 사람이 되었다는 말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마치 새 마음을 가지긴 하였으나 아직 여호와의 신이 임한 것은 아니고 새 사람이 된 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먼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시간의 의식을 가지고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즉 사울이 새 마음을 받은 후에 선지자의 무리를 만나서 여호와의 신이 임하고 새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새 마음을 받고 길을 떠나 선지자의 무리를 만날 때까지는 새 마음을 가진 사람이기는 하지만 아직 여호와의 신이 임한 것도 아니고 새 사람이 된 것도 아니라는 얘기가 됩니다. 즉 여호와의 신과 상관없이 새 마음의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이고 새 마음을 받았으되 새 사람이 된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새 마음을 가지는 것과 새 사람이 된 것은 서로 같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23-24절에서도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심령으로 새롭게 되는 것이 새 사람을 입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심령으로 새롭게 된다는 것은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 새 마음을 가지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사울에게 새 마음을 주셨다는 것은 이미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 새 사람 되게 하셨음을 뜻하는 것임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마치 시간적인 차이가 있는 것처럼 먼저 새 마음을 주시고 다음에 여호와의 신이 임하고 새 사람이 된 것으로 말씀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시고 새 사람이 되었다면 분명 달라진 것이 있을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되었는데 옛 사람 그대로일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사울의 달라진 모습으로 인해서 여호와의 신이 임하고 새 사람 되었음이 증거되었기 때문에 달라진 모습과 함께 여호와의 신이 임하고 새 사람 되었다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울의 달라진 이러한 모습이 여호와의 신이 함께하고 새 마음을 입어서 새 사람 된 모습이라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울의 새 사람 된 모습은 무엇입니까? 사울이 만난 선지자의 무리는 예언을 하며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그들처럼 예언을 하는 사람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것은 선지자들이 예언하는 것을 듣고 깨닫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되었음을 뜻합니다. 사울이 예언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선지자들이 예언하는 것을 듣고 그대로 옮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의 예언을 들었을 때 그 예언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알고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울 역시 예언,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이 사울에게 새 마음을 주셔서 보내셨다는 것은 사울이 선지자들의 무리를 만나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들었을 때 그것을 듣고 깨달아 알 수 있는 새 마음을 가진 자로 만들었다는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새 사람이었는데 새 사람의 모습이 선지자들의 무리를 만나서 예언을 들었을 때 분명히 드러난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두고 볼 때 ‘누가 과연 새 마음을 가진 새 사람인가?’라고 묻는다면 답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역사하십니다. 말씀이 있다는 것이 곧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확고한 증거입니다. 비록 형체는 보이지 않지만 말씀이 우리에게 존재하시고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말씀에 의해서 다스림 받고 살아갑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말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합니다. 불신자들이야 물론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못믿겠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자신과 함께 하시는 것을 실제적으로 체험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사무엘을 만났을 뿐이지 하나님을 만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사무엘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뿐입니다. 사울이 사무엘을 떠날 때 하나님께서 새 마음을 주셨다고 하지만 그것을 어떤 큰 체험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마음이 갑자기 뜨거워진다거나 이상한 환상을 본다거나 신비한 체험을 하게 해서 ‘아하 내가 새 마음을 받았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새 마음을 주신 것은 사울이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사울 편에서는 자신이 새 마음을 받았는지 알 수 없지만 새 마음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선지자의 무리를 만났을 때 확실하게 드러났던 것입니다. 그것은 앞서 말한 대로 선지자가 하는 예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만난 것도 아니고 신비하고 이상한 체험을 한 것도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만으로도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어진 것이 곧 새 마음을 가진 새 사람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세상에서 체험할 수 있는 어떤 현상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것은 새 마음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 것으로 충분한데 말씀 외에 다른 체험을 함으로써 하나님을 알고 믿고자 하는 것은 새 마음이 아니라 옛 마음이 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울도 옛 마음의 사람일 때는 하나님을 단지 자신의 곤란하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주는 대상으로만 여겼습니다. 말씀으로 하나님을 알아가고 믿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나귀를 잃어버린 일을 해결받기 위해서 찾는 분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사울이 선지자가 예언하는 것을 듣고 자신도 그 예언을 받아들이고 예언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은 사울 본래의 마음으로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오직 새 마음이 있을 때에만 나타날 수 있는 증거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새 마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알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세상에서 복을 받아야 하나님이 함께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람인 것입니다.
따라서 새 마음으로 산다는 것은 특별한 체험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남들이 누리지 못하는 복을 누리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남들이 보기에는 평범하게 살아가지만 그 속 심령은 항상 하나님을 향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는 것이 힘들고 어떤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전혀 없이 하나님으로 힘을 얻고 살아가는 것이 새 마음의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증거물인 것입니다.
세상은 재수 없다는 것을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새 마음의 사람인 신자는 뒤로 넘어졌는데 코가 깨지는 상황에서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주어지는 상황과 형편에 의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남기신 유일한 계시인 말씀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과연 이러한 사람으로 살아가는가 깊이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둘로 구분합니다. 새 마음의 사람과 옛 마음의 사람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 다니지 않는 것으로 사람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천국은 결단코 새 마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몫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새 마음의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내가 새 마음의 사람이 되었는가는 체험이나 세상 것을 누리는 것으로 확인되어지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느냐에 있습니다. 물론 모두 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말씀으로만 족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기 때문에 어려움과 고통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으로 사는 새 마음의 사람입니다.
새 마음의 사람에게는 말씀이 곧 즐거움일 것입니다. 말씀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더욱 더 깊은 확신과 믿음에 거하게 되는 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는 말씀으로 인한 기쁨보다는 세상의 즐거움과 기쁨에 마음을 뺏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민수기 11:18절에 보면 “또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재미있었다 하는 말이 여호와께 들렸으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향해 가는 도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장차 주어질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보다는 지금 당장 고기를 먹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옛날의 애굽 생활이 더 재미있었다고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노예로 살아도 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그 때가 좋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혹시 광야에서의 이스라엘처럼 살지 않는가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천국을 향해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길에는 우리가 포기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포기해야 할 것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누리는 재미를 잊어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천국보다는 세상의 재미가 더 끌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새 마음의 사람답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신자되게 하시고 새 마음을 주셨다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기 때문인가를 깊이 살피시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살아가는 삶의 기쁨과 평안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7강) 삼상 10:17-27 뽑힌 사울
지난주에는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새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울이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을 하는 내용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새 마음이란 하나님의 신, 즉 성령이 임한 마음을 말하는데 새 마음은 예언을 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언을 한다는 것은 하늘의 일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신이 임한 자들만 알 수 있는 비밀이므로 신자가 세상의 일을 바라보며 세상의 일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이 세상에 행하시는 모든 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것이 곧 성령이 함께 하시는 새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울이 드디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왕으로 뽑히는 내용입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원하는 대로 왕을 세우시는데 사울을 택하셔서 그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게 하시고 새 마음을 주셔서 왕으로서의 역할을 잘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시는 것처럼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왕으로서 어떻게 행했으며 결국 어떤 결과를 맞이했는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뭔가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의 신이 임한 새 마음으로 예언을 하게 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행할 수가 있는가라는 의문이 있을 수 있고, 더군다나 사무엘상 16:14절에 보면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여호와의 신이 왔다가 다시 떠나 버릴 수도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고 다시 버림도 받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신앙에 대한 불안감을 가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본문을 대할 때 차근차근 살펴보기로 하고, 우선 여러분이 참고적으로 기억하실 것은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했을 때 계시의 성격을 바로 이해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계시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택한 특정 국가나 특정 인물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역사 속의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즉 성경은 어느 한 인간을 알리는데 목적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울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새 마음으로 예언을 하기도 하고, 왕이 되어서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행동과 결국 여호와의 신이 떠나 버리는 모습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는 것은 여호와의 신이 임한 신자를 계시하기도 하시고, 또한 여호와의 신이 떠난 자에 대해 계시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언젠가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으면서도 잠시 후에 ‘사단’이라고 칭하신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나타난 것으로 보아 예수님과 함께 계시는 것이 분명한데 마치 구원받지 못한 것처럼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과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한 사람을 세워서 성령과 사단, 양쪽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이 새 마음을 받고 여호와의 신이 임하고 예언을 하는 모습들을 사울 개인의 신앙으로 국한 시키지 마시고 사울을 세워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점을 기억하시면 마치 신앙이 좋았다가 다시 나빠지고,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가 다시 버림받는 것처럼 보여 지는 사울의 일생으로 인한 혼란은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사울이 공식적으로 왕으로 뽑히는 본문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17절에 보면 “사무엘이 백성을 미스바로 불러 여호와 앞에 모으고”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왕을 뽑는 장소를 미스바로 택하였습니다.
사무엘은 왜 이스라엘의 왕을 뽑는 장소를 미스바로 택하였겠습니까? 물론 장소에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또 성경에 등장하는 사건들에서 모든 장소에 의미를 두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도 사실상 무리일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장소에서 사건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면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즉 어떤 장소에서 있었던 과거의 사건을 배경으로 해서 현재의 사건의 의미를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미스바라는 장소를 생각할 때 본문의 의미는 더욱 명확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미스바라는 장소는 어떤 사건이 있었던 곳입니까? 사무엘상 6장을 보면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던 언약궤가 하나님에 의해서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때 벧세메스 사람들이 언약궤를 들여다봄으로써 오만 칠십 인이 죽는 징벌을 받았고 언약궤는 오벧에돔의 집에서 이십년을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게 되었을 때 사무엘은 이스라엘에게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외친 후 미스바로 모이게 합니다. 그리고 금식하고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다’고 회개를 합니다.
그때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공격을 하게 되고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를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을 도우사 블레셋을 이기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돌을 세우고 그 이름을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으로 에벤에셀이라고 지은 사건이 미스바에서 있었던 것입니다. 전에 자세히 살펴본 내용들이므로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그때 저는 여러분께 미스바는 자기의 범죄함을 깨달은 이스라엘이 회개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그로 인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알게 된 곳임을 말씀 드렸습니다.
에벤에셀이란 돌을 기념으로 세운 이스라엘은 그때만 해도 블레셋에 패하고 고통을 당했던 모든 것도 자신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고백을 했습니다. 그곳이 미스바입니다.
미스바는 이스라엘에게는 왕이 필요 없음을 확인시켜 준 곳입니다. 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살아가는 것이 필요함을 가르치는 곳이 미스바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이러한 미스바에 이스라엘을 다시 모아 놓고 왕을 뽑는 것은 분명 그냥 지나칠 내용은 아닐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자 과거에 블레셋에게 패한 모든 것도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고 고백한 그들이 이방 나라의 강한 힘과 발전을 보자 그쪽으로 마음이 끌리게 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보다는 위대한 인물 하나를 내세워서 그의 힘과 도움을 의지하는 것이 더 확실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결국 미스바에 모이게 해서 왕을 뽑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가지 않고 인간을 의지하려고 하는 죄악을 고발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사람은 항상 회개하면서 하나님께 나오기를 힘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절대로 사람을 의지하거나 힘으로 삼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하나님이 도우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지 모든 일을 내가 원하는 대로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찾거나 사람을 의지하려고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을 미스바에 모이게 해서 왕을 뽑는 것은 하나님이 도우시기에 왕이 필요 없는 이스라엘이 왕을 구하는 것은 곧 여호와를 버리는 죄악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8절부터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고 너희를 애굽인의 손과 너희를 압제하는 모든 나라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 하셨거늘 너희가 너희를 모든 재난과 고통 중에서 친히 구원하여 내신 너희 하나님을 오늘날 버리고 이르기를 우리 위에 왕을 세우라 하도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애굽의 손에서 건져 내셨고 고통중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다른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방 나라처럼 힘있고 부강한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다른 것에 마음을 뺏겼을 때 그들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도우심은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분명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라는 놀라운 도우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를 사단의 손에서 건져 내신 것입니다. 사망과 고통에서 해방시키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깁니다. 왜냐하면 세상 속에서 많이 가진 자로 힘있는 자로 사는 것에 더 마음이 끌리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더 크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처럼 여호와를 버리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에게 매 지파마다 천 명씩 여호와 앞에 나오게 합니다. 그리고 베냐민 지파가 뽑히게 되고, 다시 베냐민 지파를 그 가족대로 나오게 하였더니 마드리의 가족이 뽑혔고 그 중에서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히게 됩니다. 매 지파마다 천명이면 도합 일만 이천 명이 됩니다. 결국 사울은 일만 이천 명 가운데 뽑힌 것입니다. 어떤 식으로 뽑았는지 그 방법은 알 수 없지만, 추측컨대 매 지파마다 일천 명씩 나오라고 했을 때 그래도 자기 지파에서 잘 난 사람으로 뽑았을 것입니다. 결국 잘 난 사람 일만 이천 명 가운데 한 명으로 뽑혔다는 것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으뜸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즉 일만 이천 명의 대표가 되는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사무엘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느니라 하니 모든 백성이 왕의 만세를 외쳐 부르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택하여 세우신 것은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마음에 합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모든 백성이 사울을 향하여 왕의 만세를 외쳐 부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마음에 합한 자를 택하여 왕으로 세우신 것은 이스라엘이 원하는 것에 호응을 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울은 장차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고 하나님이 택한 다윗을 죽이려는 대적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대적하는 역할을 위해 세워진 것이 사울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모두 만세를 외치며 호응하는 사울을 택하여 세워서 결국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하여 불순종하는 무리임을 보여주기 위해 사울을 택하여 세웠음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택하여 왕으로 세운 일이 이스라엘의 마음에 들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원하는 인물이 왕으로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뽑힌 사울은 다른 백성들보다 어깨 위나 더 크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무엘은 사울이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을 정도로 뛰어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원하는 왕이 될만한 사람의 기준으로 하는 말입니다. 즉 ‘너희가 원하는 왕의 기준으로 본다면 사울보다 나은 인물은 없다’는 뜻으로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이가 없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 할지라도 구원자는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구원에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 부강하고 그로 인해서 풍족한 삶을 누리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우시는 방식이나 이끌어 가시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보면서 우리가 혹 이스라엘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것도 원하고 저것도 원한다는 식으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가지만을 주시고자 하는 분이지 우리가 원하는 것은 모두 챙겨 주시는 분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만세를 부를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며 죄의 용서가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안다면 다른 것에 마음을 뺏길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예수님께 붙들어 놓기 위해서 하나님이 돕고 계신다는 것에 참으로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보고 산다면 지금의 도우심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것을 주시지 않았다는 것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십니다. 이러한 왕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서 천국에서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이것을 위해서 왕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그 마음은 사울을 보면서 만세를 외치는 이스라엘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을 향해 있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해 못마땅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하나님을 버린 마음임을 기억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