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 5 경

[스크랩] (성경공부) 신명기

공 상희 2009. 5. 6. 13:21

 

 

 

 

 

 

 

 

신명기

 

 

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신명기 1장

 

 

 

 

지난 주일에 민수기 공부가 끝나고 계속 이어서 신명기 공부를 하게 되었다. 어찌 생각하면 성경을 이렇게 계속 연결해서 공부해 나간다고 하는 것이 끊임없이 진행되는 것 같아 요한계시록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려야 할까 라는 마음이 들 수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것을 지루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요한계시록까지 배워보지 못하고 주님 앞에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혹시 성경의 다른 부분이 긍금하다고 해서 그것을 해결하려는 마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궁금증이 생기고 긍금증을 먼저 해결하려고 하는 마음이 죄악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의 어떤 부분이든지 공부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내가 십자가에 죽는 것이 확인되고 예수님의 십자가, 거기서 주님의 피가 흘려졌다는 사실이 왜 가장 소중한 것인지를 날마다 확인해야 하는 차원에서 말씀을 대해야 할 것이다. 왜 이렇게 서론을 말씀드리는가 하면 오늘부터 살펴볼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하신 반복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막연한 반복은 아니지만 앞에서 주신 율법을 다시 선포하신다는 차원에서 주어진 말씀이다.

 

 

 


신명기는 1장에서 먼저 이스라엘이 어떠한 때에 어느 자리에 와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다. “이는 모세가 요단 저편 숩 맞은편의 아라바 광야 곧 바란과 도벨과 라반과 하세롯과 디사합 사이에서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이니라”(1절). 신명기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동편 언덕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밝히고 있다. 특히 1:3은 이 시기를 출애굽 한 지 “제 사십 년”으로 언급한다. 그러면서 2절에서 “호렙 산에서 세일 산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에까지 열 하룻길이었더라”고 말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열 하룻길을 애굽에서부터 40년이 걸려서 모압 동편 땅까지 와야 했던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시간과 장소는 모두 하나님의 약속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즉 광야에서 40년 동안 거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민 14:33)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것이 1,5절의 “요단 저편”이라는 문구 속에서 확연히 드러나고 있다. 신명기는 분명히 요단 이편 즉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말씀하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장소를 “요단 저편 모압 땅”이라고 장소적인 상황을 약속의 땅 안으로 끌어다 놓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실제적으로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주신 말씀이지만 이미 약속의 땅에 들어가 있는 관점에서 신명기 말씀을 듣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명기 1장을 보면, 이스라엘이 있는 위치(1-5절)와 하나님의 약속(6-8절)을 설명한 이후 곧장 재판장을 임명한 것(9-18절)과 가데스 바네아의 반역(19-46절)을 길게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먼저 재판장을 임명한 사실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데, 어떤 자가 지도자가 되는가 하는 것이다. 13절에 보면, “너희의 각 지파에서 지혜와 지식이 있는 유명한 자를 택하라 내가 그들을 세워 너희 두령을 삼으리라 한즉”라고 했다. 지혜와 지식이 있는 자로 골라 세운다고 했는데 “지혜와 지식이 있는 자”란 어떤 자인가? 16,17절에서 답변을 이렇게 주고 있다. “내가 그 때에 너희 재판장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너희 형제 중에 송사를 들을 때에 양방간에 공정히 판결할 것이며 그들 중의 타국인에게도 그리할 것이라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일반으로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 말 것이며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거든 내게로 돌리라 내가 들으리라.”

 

 

 

이것이 지혜와 지식이 있는 지도자의 모습이다. 즉 재판장이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가 지혜와 지식이 있는 자라는 의미이다. 그리고는 가데스 바네아에서의 반역을 다시 말씀하신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어떤 존재인가를 확인시키시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가 이스라엘이어야 하는데 실제적으로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행한 것처럼 하나님에 대하여 반역을 일삼는 죄인이라는 뜻으로 신명기 1장에서부터 공박하면서 율법을 다시 선포하시는 것이다.

 

 

 


가나안 땅을 지척에 두고 하나님께서 다시 율법을 말씀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가나안 땅 입구까지 왔으면 그냥 들어가게 하시면 되지 하나님께서 또 말씀을 주시는 이유는 한 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 때문이다. 다시 폭넒게 말하자면 인간의 본질이 얼마나 죄악된 존재인가를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긴장을 하지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지금의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보았다면 말씀을 다시 선포할 이유가 없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구원하시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무조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로 보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지금 교회라고 간판 걸린 교회(주성교회도 마찬가지로)를 교회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교회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성도로 보지 않으실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신명기를 본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긴장하게 만드는 것이다.

 

 

 


신명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법에 대한 지식을 갖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가나안 땅 앞에서 다시 말씀이 선포되는 것은 이미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의 법을 받은 자로서 광야 생활을 했는데 과연 그 말씀에 맞게 살았는가를 고발하기 위해서 다시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악한 본질을 낱낱이 파헤치는 것이다. 때문에 40년 11월 1일이라고 말씀을 다시 선포하는 시점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또 다시 율법의 말씀을 선포하시는 것은 그들이 잊어버렸을 것을 염려하셨기 때문이 아니다. 또 가나안 땅에서 실천해야 할 행동지침을 내려주시기 위해서도 아니다. 말씀을 통해서 과거를 해석하기 위해서이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법을 받은 자로서 그 삶이 어떠했는가를 다시금 법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도 이방인과 똑같이 악한 자이고 말씀에 실패한 자임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방인이나 이스라엘이나 둘 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똑같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선포하신 말씀이 신명기이다.

 

 

 

29-3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앞서 행하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이 말씀은 한 마디로 이스라엘의 힘으로는 안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시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안아서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고, 또 하나님이 안아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안으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갓난아이로 보실 뿐만 아니라 출애굽기 4:22에서 “내 아들 내 장자”라고 말씀하신 대로 아들로 인정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대로 믿는가 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원수 노릇만 하며 반역을 밥먹듯이 일삼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밖에 없고 그분이 친히 약속을 성취하실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믿는가? 이렇게 새롭게 믿어진 자가 바로 이스라엘이다. 어제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버리게 하신다. 그러므로 어제의 믿음을 믿음으로 그대로 고수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버리시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제의 교회가 교회 아니고 오늘 성령께서 말씀으로 새롭게 모으시는 공동체가 바로 주님의 교회이다.

 

 

 

 

그러기에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여야 하고 또한 그런 자들에게 신명기가 주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보자면 결국 믿지 않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가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어 있다.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듣는다고 할지라도 지루한 말씀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송이꿀보다 달게 느껴지게 되기 때문에(시 19:10) 날마다 말씀을 사모하며 묵상하게 된다. 그런 자가 복 있는 자이다(시 1:1,2)(1999.5.2).

 

 

 

 


신명기 2장

 

 

 

 

본 장에서 하나님은 에돔과 평화할 것(1-8절), 모압과 평화할 것(9-15절), 암몬과 평화할 것(16-23절)을 말씀하신 반면 아모리 사람 시혼과는 전쟁할 것(24-37절)으로 말씀하신 내용으로 구분된다.

 

 

 


에돔과 모압과 암몬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또 백성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세일에 거하는 너희 동족 에서의 자손의 지경으로 지날진대 그들이 너희를 두려워하리니 너희는 깊이 스스로 삼가고 그들과 다투지 말라 그들의 땅은 한 발자국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세일 산을 에서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4,5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게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9절),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게 말라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 암몬 족속의 땅은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롯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19절).

 

 

 


그러나 시혼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헤스본 왕 시혼이 우리의 통과하기를 허락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네 손에 붙이시려고 그 성품을 완강케 하셨고 그 마음을 강퍅케 하셨음이라 오늘날과 같으니라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가 비로소 시혼과 그 땅을 네게 붙이노니 너는 이제부터 그 땅을 얻어서 기업으로 삼으라 하시더니”(30-31절). 여기서 헤스본 왕 시혼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고 하신다. 이 말씀은 애굽의 바로 왕이 이스라엘을 보내주지 않으려고 했을 때의 마음 상태를 표현한 말이다. 시혼 왕이 더욱 나쁜 마음을 먹도록 하나님께서 조장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죄악의 본성대로 살도록 버려두셨다는 것이다. 죄악의 본성대로 산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산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수밖에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7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하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고 네가 이 큰 광야에 두루 행함을 알고 네 하나님 여호와가 이 사십 년 동안을 너와 함께 하였으므로 네게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하셨다 하라 하시기로”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살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싸우고 다툼으로써 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복을 주고 부족함이 없게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인간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사는 것이지 자기 힘으로 양식을 구하고 자기 자리를 마련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언약 백성들에게 항상 풍족함으로 채우셨지만 이스라엘은 늘 불만족이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풍족이란 무엇인가 많아서 풍족이 아니라 내가 부족함을 느끼지 않으면 풍족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만으로도 풍족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지 못하고 늘 불만족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형편이다. 그래서 남보다 늘 뒤쳐진다고 생각하고 피해를 당하는 입장에서 자신을 생각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늘 부족하고, 자녀들에게 제대로 풍족하게 해주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밤이 늦도록 벌어서 물질로 자녀들이 원하는 것을 다 해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피해를 당하신 분은 예수님이시다. 그분은 이 땅에서 인간들에 의해 죽은 분이시다. 그분만큼 억울하게 피해를 입은 자 있는가? 내가 당하는 피해가 예수님보다 더 큰가?

 

 

 


24절에 의하면, “너희는 일어나 진행하여 아르논 골짜기를 건너라 내가 헤스본 왕 아모리 사람 시혼과 그 땅을 네 손에 붙였은즉 비로소 더불어 싸워서 그 땅을 얻으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주고자 하신 땅이 따로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 땅을 네 손에 붙였다고 하시는 것이다. 붙였다는 것은 이미 네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싸우라고 하신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하는 독특한 싸움이다. 이 땅에서의 싸움은 힘겨루기이다. 힘을 겨루어서 그 결과에 따라서 승자와 패자가 가려지는 것이지 미리 승자와 패자를 결정지어 놓고 싸우라는 것은 상식적인 것이 아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싸움의 결과로 승리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임을 알아야 했던 것이다. 자기 힘으로 싸워 놓고도 그것을 자기들의 승리로 보지 않는 것이 이스라엘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자기 임의로 결정해서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수로 삼으신 자를 원수로 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실 때에 그 말씀에 따라 전쟁을 수행하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이 담겨져 있는 이스라엘이란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행동하여야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내 힘으로 싸우고 노력해서 얻어진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붙여주신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약 싸우지도 않았는데 하늘에서 주어지는 선물이 있다면 누구나 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수긍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내 노력이 들어갔는데 그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인간다운 인간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다. 천국은 바로 이런 신자가 들어간다. 천국은 어린 양의 희생만 자랑하지 자기 힘을 자랑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34절에 “그 때에 우리가 그 모든 성읍을 취하고 그 각 성읍을 그 남녀와 유아와 함께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진멸하였고”라고 한다. 하나님이 진멸해 버리시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존재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붙여주시는 것을 감사히 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싸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존재할 가치가 있어서 이스라엘이 시혼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나 시혼이나 동일한 존재이다. 하나님 앞에서 존재할만한 가치가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다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스라엘은 시혼을 진멸하면서 깨달아야 했던 것이다. 우리가 바로 시혼과 같이 진멸당해야 하는 자들인데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살려 놓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걸맞는 존재로 살아가는 것이 이스라엘의 본분이다.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우리는 너무도 쉽게 ‘왜 저 사람은 택하지 않았는가?’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의로움과 사랑을 한 껏 뽐내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성도란 남과 비교하여 우월감을 가지거나 자신의 넓은 마음을 자랑하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존재로 버려두신 자들을 보면서 자신이 죄악 가운데 그들과 똑같이 버려져 있는 존재임을 늘 깨닫고 아는 자이다. 그러기 때문에 십자가의 은혜에 또 굴복하고 엎드려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살게 하시는 것은 나그네 인생임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미리 앞서서 나그네 인생을 살았던 이스라엘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시는 것이다. 이 땅에 세상 것으로 내 자리 만들려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정착하려는 순간부터 이미 불만족이 생기며 싸움과 다툼이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는 나그네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서 부지런히 달려가야 할 나그네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것을 배우라고 우리로 하여금 교회로 부르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른 것이 다 없어도 예수님 한 분만으로 족하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자들이 모여지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거기에는 시기와 질투가 있을 수가 없고 더 많이 가졌고 더 적게 가졌다는 비교가 있을 수 없는 곳이어야 한다. 아니 혹 그런 일이 있을 수는 있어도 그것으로 좌절하는 모습이 아니라 다시 자신을 십자가의 주님께로 되돌려 놓는 자들이 모여지는 것이다(1999.5.9).

 

 

 

 


신명기 3장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광야 40년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들어갈 상황에 처해 있다. 2:14,15에서 말씀하듯이 이스라엘은 불신의 세력으로 상징되는 애굽에서 나온 백성들은 다 죽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생성된 백성으로 상징된 광야에서 난 새로운 세대로 구성되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좇아 사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원수로 삼는 자들과 싸워야 하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혜택을 누리는 자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마음과 똑같은 심정으로 그들을 대해야 하는 것이다. 언약 백성이란 바로 이러한 자들이다. 즉 하나님께서 싸우라고 하는 자들과 싸워야 하고 평화하라고 하는 자들과는 평화하는 순종이 있는 자들이다.

 

 

 


본 장에서도 2장에서 헤스본 왕 시혼을 정복하였듯이 바산 왕 옥을 정복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를 두려워말라 내가 그와 그 모든 백성과 그 땅을 네 손에 붙였으니 네가 헤스본에 거하던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에게 행한 것과 같이 그에게도 행할 것이니라”(2절)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산 왕 옥과 그 모든 백성을 우리 손에 붙이시매 우리가 그들을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였느니라”(3절)고 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바산 왕 옥을 점령하면 되는 것이었다. 주저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이스라엘에게는 전혀 없었다. 하나님의 전쟁은 사람대 사람이 하는 전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바산 왕 옥의 침대를 소개하고 있는데 장이 아홉 규빗(≒4m 5㎝), 광이 네 규빗(≒1m 80㎝)이라고 했다.

 

 

 


이렇게 소개하는 이유는 과거 이스라엘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탐지하였을 때에 그 땅의 사람들을 장대한 자로 말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거부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께서는 그 장대한 자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손에 붙이셨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손에 붙이신 결과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쟁이란 하나님 자신이 어떤 목표를 가지고 벌이는 전쟁이다. 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군대로 동원된 것뿐이다. 그들은 그 전쟁터에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시는 특별한 은혜와 긍휼을 알아야 했던 것이다. 그래야 전쟁터에서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왜 살아야 하는가? 그 이유를 모르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재앙만 떨어질 뿐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전쟁은 이 세상에 무가치한 인종을 멸하고 살려둘 가치있는 인종만 남기자는 조치이다.

 

 

 

 

그러면 무가치한 인종과 가치있는 인종이란 어떤 존재를 말하는가? 여기서 가치있고 없고 하는 문제는 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학벌이 좋은가? 혹은 경제력을 지녔는가? 아니면 권력이라도 있어서 그것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가 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무가치한 인종과 가치있는 인종의 차이는 “붙이는” 하나님의 뜻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점에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붙여주는 것만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가치있는 인종이요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족속은 이 지상에서 멸종되어 사라지는 인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결혼을 앞둔 자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여 세상의 것은 아무 것도 보지 않는다고 하면서도 막상 선을 보게 되면 키가 작느니 인물이 못생겼다느니 하면서 외모로 모든 판단을 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잠깐 만나서 사람 됨됨이를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 됨됨이를 보고 결혼하라는 말이 아니라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관점에서 가치있는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2절이하에서는 요단 이 편의 땅, 즉 가나안 땅을 건너기 전의 땅을 르우벤과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분배한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들에게 이렇게 먼저 기업을 주신 것은 약속의 땅에 건너가지 말고 요단 이 편 땅에서 편안하게 잘 살라는 것이 아니다. 그 의미는 21,22절에서 이렇게 밝혀주고 있다. “그 때에 내가 여호수아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두 왕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네가 목도하였거니와 네가 가는 모든 나라에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행하시리니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노라.”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얻을 기업이 가나안 땅인데 그 땅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주신다는 보증으로 요단 이 편의 땅에 있는 족속들과 싸워 이기게 하시고 그 땅을 주신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싸우시는 것을 구경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업을 누리면 되는 것이었다. 이는 출애굽 처음부터 누누히 제시되고 있었다. 출애굽기 14: 13,14에 의하면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홍해 앞에서 모세가 말한 것을 볼 수 있다.

 

 

 


모세는 이 원리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이끌고 여기 모압 평지까지 왔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계속해서 보고 싶다고 했다. 하나님은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그 이유는 모세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모세가 여기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며 계속 하나님의 일하심을 본다는 것은 모세의 욕심이었다.
모세를 부르시고 모세에게 일을 맡기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여호와 하나님 그분은 백성들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드러내셨고 또한 모세에게 “여호와”, 즉 “스스로 있는 자”로 나타내셨다. 하나님께서 여호와로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하시는 분이라는 뜻으로 계시하신 것이었다. 때문에 모세는 모세에게 주어진 역할대로 일하면 끝나는 것이었다. 그 일이란 다름 아닌 백성들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진노의 희생물이 되는 역할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약속했을 때 축복과 저주 양편을 다 이야기하셨다. 모세는 그 약속 중에 실패의 경우를 담당했고, 성공의 경우는 여호수아가 맡아서 모세를 대신하여 백성들에게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여호수아는 모세와 같은 실수를 해서는 안되고 그리고 또한 여호수아를 따르는 백성들도 마찬가지이다. “너는 여호수아에게 명하고 그를 담대케 하며 그를 강경케 하라 그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건너가서 네가 볼 땅을 그들로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하셨느니라”(28절).

 

 

 


하나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여호수아에게 명하여 담대케 하라고 하셨다. 여기서 담대하라는 말은 겁없이 달려들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승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다워야 한다는 뜻이다. 여호수아는 승리하기 위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승리한 것을 발휘하기 위해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담대함으로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모습을 나타내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모습이란 내게 있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이루신 십자가를 귀하게 여긴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은 내 것을 내어 놓는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만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것이란 사람의 도움을 일체 받지 않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이 극적으로 드러난 것이 십자가이다. 악마가 항상 두려워하는 것은 인간의 것이 개입되지 않은 것뿐이다. 이미 악마는 인간을 이긴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것이 제거된 상태가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가 예수님 한 분만 계셔도 좋은 나라라면 교회는 그 모습 그대로 만족할 줄 아는 모임이어야 하는 것이다(1999.5.16).

 

 

 

 


신명기 4장

 

 

 

 

1절에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의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아담에게는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는데 여기에서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면 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산다는 것’에 대한 의미가 무엇인가? 뿐만 아니라 규례와 법도를 지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단순히 규례와 법도를 잘 지키면 가나안 땅에서 별 어려움 없이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또한 규례와 법도를 지킨다고 하는 것도 조목조목 형식적으로나마 의식을 잘 지키면 된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잘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그 역사를 통해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규례와 법도를 지킨다는 의미와 산다는 의미가 본질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생각할 필요성이 있다. 왜냐하면 5장에 가면 모세가 다시 십계명을 선포하는 것을 대하게 되는데 여기서 그 의미를 정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조건 십계명을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고 또한 오늘날도 십계명을 지키는 것을 신앙으로 착각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과 대비해서 ‘죽음’이란 본래의 인간 모습을 잃어버린 결과이다. 죽음이라는 것과는 대비되는 생명이란 본래의 인간 모습이 회복되어진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한다는 것은 생명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말씀하심이 분명하다. 결국 본래 인간 모습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규례와 법도에 담겨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것을 누리는 상태가 생명이다.

 

 

 


그렇다면 생명과 연관된 규례와 법도는 죽음에 처한 인간의 모습과 반대의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는 말씀을 단순하게 생각한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십계명이나 그 외 다른 말씀들을 잘 지키면 지옥가지 않고 천국에 간다는 정도로 이해한다. 그것이 바로 죄인의 본성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현실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말씀에만 순종해야 할 인간이 자기를 바라보고 자신의 욕망에 순종할 때 인간은 자기의 위대함을 위해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이후 인간은 늘 선악에 대한 자기 기준을 가지고 끊임없이 판단하면서 살아가게 된 것이다. 자기에게 유익되면 선이고 자기에게 유익이 안된다면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목사가 자신이 목회하고 있는 교회가 날로 커질 때 그것을 목회 성공이라고 떠들며 자랑하게 된다. 그것은 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기술과 재주를 과시하게 된다. 교인들은 자기가 속해 있는 기업이 다른 기업보다 커지기를 소원하며 직장을 다니듯이 자기들이 돈 내면서 다니는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더 커지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그것을 교회 다니는 보람으로 삼는다. 이렇게 큰 것을 좋아하고 높아지고 이름이 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죽음에 처한 인간이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 속에 이런 심성이 드러나고 있었다. 제자들의 자리 다툼하는 것을 보신 주님은 천국에서 가장 큰 자가 누구인가를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셨다(마 20:20이하). 그래서 하신 말씀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는 말씀이다. 마태복음 18:4에 보면,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고 하셨다. 천국에 큰 자가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는 큰 자만 있지 작은 자는 없다는 것이다. 즉 세상에서 고난과 죽음의 모습으로 작은 자로 살아간 자에게는 천국에서 큰 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한 것이다.

 

 

 


사실 지금 대부분의 교인들이 말씀대로 산다는 것의 실상을 보면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의 귀여움을 받겠다는 이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말씀대로 산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교회에서 요구하는 모임에 빠지지 않고 목사가 말하는 법칙에 따라 순종하는 것이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하면 현세에서도 복을 받고 죽어서는 천국으로 연결된다고 믿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주일 한 번이라도 빠지면 천국에 못들어 갈 것같은 느낌을 가지는 것에서 우리들의 신앙이 얼마나 허구적이며 말씀에 근거하지 않고 있는가 하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실제적으로 규례와 법도를 지킨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라는 것은 규례와 법도의 세부 사항을 조목조목 무조건 다 지키면 된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인간에게서 요구하신 것은 선악과를 따먹지 않는 행동을 요구하신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 본래의 모습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은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만 순종하는 본래의 인간 모습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선악과를 먹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으로 있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일 잘 지키고 십일조 잘하며 전도 잘하고 기도 열심히 하며 교회에 열심히 충성하며 봉사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된다. 규칙을 완벽하게 지켜서 하나님 앞에 떳떳하고 당당하려고 하는 자체가 죄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율법은 먼저 우리에게 이것을 가르쳐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 율법이 주어지니까 무조건 지키려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인간의 죄악이 얼마나 뿌리깊게 박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 앞에 율법을 지켜 당당해지려고 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는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율법은 그것을 철저히 폭로하고 있다. 결국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좋아하고 감사하는 인간이 되라는 것이다. 자기의 욕망으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인간이 바로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이다.

 

 

 


3절에 “여호와께서 바알브올의 일을 인하여 행하신 바를 너희가 목도하였거니와 바알브올을 좇은 모든 사람을 너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에서 진멸하셨으되”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는 민수기 25장에 나오는 사건으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신을 더 좋아하고 이방 여인과 간음함으로 모두 죽여버린 사건이다. 즉 표면적으로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에 어긋나서 죽였다고 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감사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방신을 섬기고 이방 여인과 간음한 것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따로 두고 있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인간이 죽음에 처한 이유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것으로 살지 못하고 인간이 따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정하고 그것을 위해 살았을 때 주어진 결과이다. 그리고 반대로 생명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것으로 감사하면서 하나님만 좋아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말씀 안에 있는 삶이고 또한 규례와 법도를 준행하는 것이다.

 

 

 


6절에 보면,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지켜 행하라는 것은 항목 하나하나를 철저히 의식으로 실천할 것으로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시고 하나님이 하늘에서 주신 것으로 부족함이 없음을 믿으라는 것이다. 이 믿음이 곧 지혜요 지식이다.

 

 

 


그 어떤 형상이든지 그것을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것으로 만들지 말라고 당부하신 하나님은 그 이유를 소멸하는 불로 자신을 소개하셨다(23,24절). 왜 세상은 가차없이 소멸되어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처음 세상을 만들 때 말씀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현재에 이르러서는 그 말씀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가장 하나님다운 모습은 말씀 그 자체이다. 바로 에덴 동산의 상태가 그런 상태였으나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함으로 에덴에는 불이 놓여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계신 곳은 무서운 곳이다. 아무도 접근될 수 없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불이 놓여있다. 불은 생명 나무 가까이 인간들이 침범하는 것을 막아준다. 하나님이 무서운 곳에 계시는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 자신의 영생을 지키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영생을 지키기 위함이 일차적인 목적이다. 즉 자기 백성들을 자신의 말씀 안으로 집어넣어서 자신의 말씀을 따라 살도록 하신 것이다. 이 일을 위해 성령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교회가 알지 못하는 것은 율법보다 성령께서 일하심이 훨씬 더 강력하고, 법도와 규례보다 더 엄중한 규제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성도는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을 믿기 때문에 율법에 매여서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그저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하게 되는 것이다.

 

 

 


민수기 35장에서 이미 도피성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하나님께서 이쯤에서 도피성에 대해서 다시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땅과 하나님의 언약의 성격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시혼과 옥이 힘으로 통치하던 땅을 빼앗아 이스라엘에게 주심으로 이제는 세상의 힘의 방식으로 다스려지는 땅이 아니라 혹시 잘못하여 살인한 자라 할지라도 제사장의 지배하에서 은혜로 사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제사장의 지배하에 산다는 것은 제사장이 궁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제사를 통한 희생이라는 점을 감안해 볼 때 결국 하나님의 희생에 의한 은혜의 지배를 받는 인간이 살아가는 땅이 약속의 땅이라는 사실이다. 곧 이러한 자가 규례와 법도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누리며 살 수 있는 땅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실현이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1999.5.23).

 

 

 

 


신명기 5장

 

 

 

 

3절에 의하면 “이 언약은 여호와께서 우리 열조와 세우신 것이 아니요 오늘날 여기 살아 있는 우리 곧 우리와 세우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십계명은 출애굽기에서 모세를 통해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미 세워진 언약이다. 그런데 이 언약은 우리 열조와 세운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있는 백성들과 세워진 것이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언약은 죽은 자와 세워진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와 세워진 것이라는 점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있다는 증거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에게 하나님은 십계명을 말씀하신다. 십계명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전제는 6절이다.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라”는 말씀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속하시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 여호와이시기 때문에 앞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에만 순종하며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며 하나님의 통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표가 언약의 말씀인 십계명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지를 십계명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계명이란 우리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이다.

 

 

 

 

첫 번째 계명에서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힘으로 삼거나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어떤 자가 그렇게 살 수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구속을 입은 자만이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계명이란 하나님이 나를 구속하셨다는 것을 진심으로 깨달은 사람만이 지킬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4:1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는 것이 사는 것임을 아는 자, 곧 하나님에 의해 살아난 자요 언약을 맺은 자가 여기서 말씀하는 계명들을 지킬 수 가 있는 것이다.

 

 

 


두 번째 계명은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위해서 살아간다. 그런데 여기서 자기를 위한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은 자기를 위한 본능적인 것을 죄라고 하나님은 규정하신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죽어야 비로소 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위한 우상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존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죽었다가 인간이 다시 살 수 있는가? 그렇다면 다시 살아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은 누가 다시 살려 주셨는가를 알고 오직 그분을 위해 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세상의 형상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로써 세상의 모든 것들은 반드시 불로 소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세 번째 계명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하셨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다는 것은 단순히 성경을 읽을 때에 유대인들과 같이 ‘여호와’라는 말이 나오면 ‘아도나이’(주님)라고 조심성 있게 읽어서 망령되이 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다. 두 번째 계명에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의 이름은 구원과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셨다(마 21:9, 롬 10: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나의 우상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자기 소원 성취를 위한 구원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은 우상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다.

 

 

 


네 번째 계명은 안식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는 것이다. 누가 거룩하게 할 수 있는가? 거룩이란 하나님의 영역이다. 인간이 안식일을 지킨다고 거룩할 수 있는가? 결코 없다. 안식일에 노동을 전혀 하지 않음으로 애굽에서 건짐받은 것을 선포하고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안식을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의 힘으로 약속의 땅을 얻은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노동에 의해 안식을 얻은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이는 오늘날 주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영생(안식)을 얻은 것이 어떻게 주일 하루를 안식일로 지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날마다의 삶이 십자가의 주님을 드러내는 삶이라면 날마다 안식일이다.

 

 

 


다섯 번째 계명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것이다. 당시에 부모란 하나님의 구원을 알고 전하는 자이다. 그러기에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을 가진 자만 약속의 땅에서 사는 복을 계속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약속의 땅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면 거할 수 없는 땅이다. 그러므로 결국 부모 공경을 통해 하나님께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여섯 번째 계명은 살인하지 말라는 것이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다. 애굽에서 건짐받은 자이기에 그 속에는 하나님의 희생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죽였다 안죽였다는 식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들어있는 하나님의 희생을 고귀한 것으로 생각하느냐 않느냐 하는 문제이다.

 

 

 


일곱 번째 계명은 간음하지 말라는 것이다. 간음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부부 관계 외에 행해지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간음한다는 것은 부부의 관계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배우자와 관계가 만족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곧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성경은 음행과 우상을 섬기는 것으로 항상 관련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여덟 번째 계명은 도적질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이다. 개인 소유는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베푸신 은혜의 모습이다. 그것을 도적질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만족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베푸신 은혜를 내 소유로 만들겠다는 욕심이 밖으로 표출된 것이다. 구원받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며 사는 자이다.

 

 

 


아홉 번째 계명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이다. 거짓 증거를 한다는 것은 먼저 자신의 유익을 위한다는 것이 있고 그 다음은 이웃을 해한다는 것이 들어 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함께 구속받은 자를 해한다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성을 무시한 행위이다. 애굽에서 건짐받은 자의 증거는 항상 구원하신 분을 증거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짓 증거를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항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심정으로 사는가 하는 문제이다.

 

 

 


열 번째 계명은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것이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욕심이 어디를 향해 있는가를 보라는 말씀이다. 결국 땅에 것에 매여있고 땅의 것을 목표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를 통해 하늘의 것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구원받은 자란 이 땅에 있는 이웃의 것을 탐내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나눠주면서 사는 자이다.

 

 

 


우리는 흔히 인간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생각하자고 하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인간 문제의 해결 방안이라도 되는 듯이 사람들은 말을 하곤 한다. 그리고 세월이 가고 세대가 바뀌고 똑똑한 사람이 많아지면 좀 나아지지 않겠느냐고 생각한다. 세월이 가고 공부를 하면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세월이 가고 공부를 해도 여전히 그 악한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도리어 자기가 가진 학문이나 겸양 이런 것들로 더더욱 치장을 하며 가리는 수법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니 위선만 더욱 교묘하게 변해갈 뿐이지 인간은 악한 것에서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십계명에서 말씀하는 완전한 인간으로 나아지기를 기대하기 때문에 모세를 통해 다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 자기 실체를 깨달아 알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통해 언약의 말씀대로 행하실 분이 오실 것을 기다리도록 하기 위해 주신 말씀이다. 그래도 알아듣지 못하는 인간이기에 출애굽 이후 재차 또 말씀하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 편에서 자기 약속을 확실하게 하신 조치로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십계명을 보고 지켜야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아직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지 못한 것이다. 십자가의 주님은 우리를 살려주는 분이 아니라 십자가로 먼저 죽이시는 분이시다. 적당히 죽이시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죽이신다. 인간에게서 율법적 행위가 나오지 않도록 말이다. 그래야 주님의 십자가 은혜만 드러나기 때문이다(1999.5.30).

 

 

 

 


신명기 6장

 

 

 

 

4절에서 “이스라엘아 들으라”(들으라 이스라엘아!)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4-5절)고 하셨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가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만 섬기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마음이나 성품이나 힘을 두 개로 쪼개서 하나는 하나님을 향해 사용하고 다른 한 쪽은 나를 위해서 사용한다는 식으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 맡겨진 실천적인 문제로 보아서는 안 된다. 즉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들의 마음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있는가를 물으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신과 행동으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들에게 가르칠 뿐만 아니라 손목에 매어 기호로 삼고 미간에 붙여서 표를 삼으라고 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정신으로 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것으로 하나님만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자는 애굽에서 자기 백성들을 건지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부지런히 자녀들에게 가르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의 한 단면으로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가나안으로 상징된 하나님의 안식을 가르쳐주고 생활로 보여주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요한계시록 13:16-18에서 이마와 손목에 666 짐승의 표를 받는다 말은 단순히 컴퓨터의 바코드표를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악의 세력, 즉 마귀의 정신에 의해 마귀의 사고 방식으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반대로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으로 사는 자는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다”(계 14:1)고 했다. 그러므로 단순히 문자적으로 미간과 손목에 표시하여 기호를 삼으라는 식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하려고 하는 위선에 불과하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칠 뿐만 아니라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고 하신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해서 실제로 이마와 손목에 말씀을 새겨 달았다. 그것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믿음의 표시였기 때문에 남보다 더 믿음이 좋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큰 것으로 달고 다녔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손목이나 미간에 말씀을 새겨 다는 것을 문자적으로 이해했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한다”(마 23:5)고 책망하셨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와 같은 동일한 모습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전도의 실적을 공개하는 것에서, 또한 특별히 교회의 차량을 헌납하였거나 에어콘을 기증하면 모든 교인들에게 공개를 하여 칭송을 하게 하는 일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경문을 넓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결국 여기서 지키고 행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임이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율법을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신명기에서는 하나님을 말씀과 더불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다(7:9, 10:12, 11:1,13,22, 13:3, 19:9, 30:6,16,20).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의도는 결국 신명기는 다시 주어지는 율법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을 물으시는 것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의 말씀을 사랑하고 그것을 지켜 행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 신명기에서 말씀하는 요지이다.

 

 

 


우리는 이제 구약의 모든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표현하며,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오는 사랑의 행동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요일 5:1-5).

 

 

 


또한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고 하셨고.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고 하셨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 믿음이다. 언제나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저주의 대상이 될 뿐이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전 16:22).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사랑을 나타내고 보여주게 되어 있다(요일 4:11,12). 나의 사랑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사랑을…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로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얻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얻게 하사 너로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너는 조심하여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를 잊지 말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10-13절).

 

 

 


하나님께서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규례와 법도를 지킬 것을 말씀하셨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대로 지키지 못할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분이시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말씀까지 하시는 것이다. 즉 한 마디로 ‘너희들은 나의 명령들을 제대로 못지키는 존재들이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분명히 하나님 편에서는 약속대로 그 땅을 주신다(18,19절).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게 될 것이다. 후일에 자녀들이 물으면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설명하라고 하신다(20절). 이렇게 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에 대한 답변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자녀들에게 아무리 교육하고 잘 가르칠지라도 배가 부르고 모든 것이 풍족해지면 반드시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인간이 교육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교육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를 남기실 것이다(25절). 그러므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한다(고전 10:12). 우리는 우리의 형편이 나아진다고 해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셨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일이라고 말씀하셨다(눅 18:24-27).

 

 

 


결국 우리는 죄인으로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잠 30:8,9)라는 기도가 우리의 기도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 이렇게 기도할 수 있는 자가 성도이다(1999.6.6).

 

 

 

 


신명기 7장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의 일곱 족속들을 쳐서 철저히 진멸하고 쫓아내실 것을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들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단순히 그들과 함께 살아서는 안된다는 뜻에서 하신 말씀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신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들의 죄가 불쌍히 여길 성질의 것이 아니라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시는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우상을 만들어 섬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상을 섬겼다는 것이 이스라엘이 진멸하고자 하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고 의미가 있는가?

 

 

 


가나안 족속들은 무수한 신을 섬겼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것들이 바알과 아세라이다. 5절에서 주상이라고 부른 것은 “바알”을 주(主)로 부르는 말로 바알이란 소유주, 남편이라는 뜻을 가진 남자 신으로서 다산(多産)의 신으로 인식되었다. 바알이 바람과 비를 주관하고 세상의 계절을 지배하면서 생명과 풍요를 주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기 때문에 가나안 족속들은 바알에게 농사의 풍년을 빌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세라”는 바알의 아내쯤 되는 여신으로 그 형상을 나무 기둥에 새겼기 때문에 ‘아세라 목상’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종교 의식이란 사제들과 음행을 하는 것이었고 심지어는 아이를 제물로 바치기까지 하는 것이었다(렘19:5).

 

 

 


우리가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가나안 사람들이 섬긴 신은 실제적인 신이 아니라 자기들의 욕망이 만들어 낸 신들이라는 사실이다. 이 신들은 그들의 욕망을 조각하여 놓은 것들이다. 그들의 욕망을 형상화시켜 놓은 것이 우상이다. 번영과 풍요를 향한 욕망을 신상으로 만들어 놓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섬겼던 것이다. 여기에 그들의 구원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한 없이 강한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한 없이 약한 존재이다. 그러기 때문에 때때로 기적을 원하고 그 기적을 통해 자신이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기적을 원한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인간이 우상을 만들고 섬기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자기 한계를 느끼면서도 계속 자기 사랑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 때문이다. 자기를 위해서 인간은 신을 찾는다. 자기의 나약함, 외로움, 허무함, 죽음 등을 느끼고 그것에서 자기를 지켜줄 능력자를 찾는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신들 곧 우상이다.

 

 

 


사랑의 신, 지혜의 신, 능력의 신, 전쟁의 신, 풍년의 신, 해결사로서의 신 등등. 신들이란 인간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것들이다. 인간이란 자기가 필요하지 않으면 절대로 신들을 만들지 않는다. 신들을 두기를 싫어하는 것이 인간이요 더구나 절대성을 주장하며 인간의 의사를 무시하는 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수하에 둘 수 있는 신을 원하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원하는 신이란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인간이 요구하는 것을 채워주는 신이다.

 

 

 


청소년들이 연예인 스타를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표현을 한다는 것은 그 스타 안에 자기 자신을 집어넣고 사랑하는 것이다. 자기가 그렇게 되고 싶은 욕망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연예인 스타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들어 있는 자기 욕망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도 결국은 자기 사랑이다. 우상의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자기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우상 섬김의 본질이다. 모든 인간은 자기 욕망을 추구하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우상이든지 가지고 있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상숭배자가 되고 있다. 하나님이, 예수가, 교회당이, 예배 의식이, 목사가 우상이 되고 있는 것이 한국 교회의 현실이다. 여기에 복음의 본질만 외치는 자가 있다면 가차없이 처단당하고 만다. 자기들의 조직에 도움이 안될 뿐만 아니라 장사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애들은 가라!’는 식으로…

 

 

 


그렇다면 가나안 족속들과 그 우상을 진멸하는 이스라엘은 누구인가? 이스라엘이 무엇 때문에 가나안 족속을 심판하는 대리자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는가? 이 점에 대해 하나님은 단순히 이스라엘을 택했다고 말씀하신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6,7절).

 

 

 


그러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근거가 무엇인가? 이스라엘이 수효가 많은 백성이기 때문인가? 오히려 그 수효는 모든 민족 중에서 가장 적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8절에서 그에 대한 답변이 이렇게 나타나고 있다.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이 말씀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이 아니다.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열조에게 맹세하신 것을 지킨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가지고 일하시며 그 언약의 성취를 위해 일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라는 외형적인 국가나 혹은 민족에게 의미를 두어서는 안된다. 실제로 하나님의 선택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로마서 9장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하리요”(롬 9:21-23). 즉 하나님의 선택이란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 이 두 가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언약을 중심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이다.

 

 

 


그래서 9,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인간의 구원 자체에 관심을 갖고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언약에 관심을 가지고 일하시기 때문에 그 언약의 기준에 맞으면 복이고 맞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보응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실하신 하나님”이라고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란 자기 언약에 충실하신 하나님이라는 의미이다. 자기 언약을 따라 복을 줄 자들에게는 복을 주고 죄에 대한 보응을 해야 할 자들에게는 분명히 하신다는 것이다. 즉 반드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이 담겨 있는 말씀이다.

 

 

 


그 속에서 살아날 수 있는 자가 누가 있는가? 다시 말해서 우상을 섬기는 자기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만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자가 누가 있는가? 없는가? 있다.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다. 그래서 그분에 의해 보내진 성령을 받은 자가 또한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살게 되어 있다. 성령이 믿게 하시는 자는 구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그저 하나님만을 사랑하게 된다. 자기 사랑이 늘 불쑥불쑥 튀어나오기 때문에 늘 겸손해질 수밖에 없고 자기 죄가 늘 눈에 보이고 깨달아지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자로 살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가나안 땅의 족속들을 멸하시기로 한 것은 이스라엘이 의로워서도 아니고 이스라엘이 그 땅에서 편하게 잘 살도록 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24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가나안 땅에서의 전쟁은 가나안 땅의 족속들의 이름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다. “그 이름을 천하에서 제하여 버리라”(24절). 그리고 거기에 어린 양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애굽에 건짐 받은 이스라엘이라는 존재가 들어가서 살므로 약속의 땅 전체에 오직 자기 희생을 치루신 하나님의 이름만 남기게 하기 위해서이다. 교회란 십자가의 자기 희생을 치루신 예수님 이름만 구원의 이름으로 남기는 작업, 이 전쟁에 선택받아 부름받은 하나님의 군대이다(1999.6.13).

 

 

 

 


신명기 8장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은 인간들을 향해서 책망하는 말씀이다. 인간들은 떡 때문에 사는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니다. 도리어 인간이 사는 것은 하나님 때문이라는 말씀이다. 떡으로 사는 것을 긍정하고 인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만이 인간에게 생명이 된다는 것을 알라는 말씀이다.

 

 

 


광야의 생활이 이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광야에서 인간이 만든 떡이 없어도 만나로 먹이신 것이 바로 이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다. 광야에서 낮추시며 시험하시며 의복도 신도 떨어지지 않게 하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라는 것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을 깨닫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것을 깨닫고 알게 하려고 그들을 광야에서 낮추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기는 것이 생명이라는 의식이 사람의 마음에 새겨지면 행동하게 된다. 이런 마음이 그 마음에 심겨지면 하라고 말하지 않아도 하게 된다. 그러므로 행동은 그의 마음을 보여주는 거울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바꾸어 이야기하면 말씀에 이끌려 행동하지 않는 믿음이란 없다는 말이다. 말씀을 믿는 믿음이 있으면 그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다. 행동은 그 사람의 마음에 하나님을 두렵게 섬기고 있구나 하는 것을 보여주는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사람은 말씀을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이렇게 하라 저것은 저렇게 하라고 말하지 않아도 상황에 따라서 필요한 일을 알아서 하게 되어 있다. 그 일을 자기 희생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결국은 이스라엘을 인도한 것은 무엇인가? 만나인가? 말씀인가?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을 때에 그들은 약속의 말씀이 성취되는 가나안 땅으로까지 제대로 갈 수 있는 것이다. 가나안 땅으로까지 제대로 갈 수 있다는 말은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말씀 안에 있는 것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이다.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만나란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이다.

 

 

 


우리가 예수 믿는 즉시 천국으로 불러들이시지 않고 계속 죄 가운데서 살면서 우리 자신의 죄를 보며 동시에 교회를 통해 천국을 부분적으로 경험하게 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즉 세상의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며 그 생명 안에서 사는 것만이 참된 삶임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도는 죄 가운데서 날마다 한 없이 낮아지며 하나님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며 살게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차이는 여기서 확연히 나타나는 것이다. 믿지 않는 자는 세상의 것이 전부인줄로 알고 그것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 것으로 알지만 믿는 자는 하늘의 생명을 바라보고 자신의 인생 전부가 오직 주님께 달려 있음을 알기 때문에 이제는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다는 복이 바로 이런 것이다.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16절).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을 복이라고 하고 그런 사람을 복 있는 자라고 하는 것이다. 고난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만이 참 생명이구나라는 사실을 배운 사람이 복있는 사람이요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다. 이런 사람이 천국에서 찬양할 수 있는 사람이다. 천국에는 들어가기만 하면 좋을 줄 아는데 그런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참으로 영생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는 않는 사람은 천국에 보내어 주어도 그것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좋지 않고 자기가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들어갈 땅이란 바로 천국을 가르쳐주는 곳이다(7-10절). 이곳을 아름다운 땅이라고 했고 산과 골짜기에 샘과 시내가 흐르고 밀, 보리, 포도, 무화과, 석류,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서 결핍과 부족함이 없는 땅이라고 한다. 철과 동이 나고 옥토라고 했다. 하나님의 동산 에덴과 같은 곳이다. 여기는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감사하는 사람이 참으로 찬양할 곳이다. 10절에 보면,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로 네게 주셨음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리라
광야를 피해가는 천국을 원한다. 광야가 없는 천국이란 없다. 그것은 십자가 없는 구원이다. 십자가 없는 구원 사역이란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마귀가 제시한 것이었다. (1999.6.20).

 

 

 

 

 

신명기 9장

 

 

 

 

1,2절을 보면, “이스라엘아 들으라 네가 오늘 요단을 건너 너보다 강대한 나라들로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니 그 성읍들은 크고 성벽은 하늘에 닿았으며 그 백성은 네가 아는바 장대한 아낙 자손이라 그에게 대한 말을 네가 들었나니 이르기를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 하거니와”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크고 강대한 나라와 부딪힐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가나안 땅에 있는 족속들을 강대한 나라라고 소개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이유를 4절에서 밝혀주고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이 악함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가나안 족속들의 악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땅에서 쫓아내신다고 말씀하신다. 물리적인 면에서 가나안 족속들이 강대하지만 그들은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서 쫓아내신다는 것이다. 결국 가나안 땅에서의 싸움은 물리적인 힘의 우열을 가리는 싸움이 아니라 무엇인가 다른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들은 왜 악하게 보시고 이스라엘은 왜 선하게 보시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밝히므로 무엇에 관한 전쟁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스라엘과 같은 일을 당한다면 어떤 생각을 하겠는가? 분명 우리가 선하기 때문에 혹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일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편을 들어주셨다고 생각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장대한 아낙 자손들을 물리치게 하실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일의 원인을 자신에게 둘 수 있다. 우리가 의로워서,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었기 때문이고 율법의 말씀을 잘 지켰기 때문에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아니 인간은 항상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애초부터 그런 생각을 가지지 못하도록 사전 조치를 취하시는 것이다.

 

 

 


만약 이스라엘이 의로워서 그들을 복주기 위해서 아낙 자손을 물리친 것이라면 결국 아낙 자손들은 이스라엘 때문에 애매한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낙 자손들을 물리치신 것은 그들이 악하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서 쫓아내시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죄악을 용납하지 않는 분이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보시는 기준을 어디에 두고 계시는가?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한마디로 하나님 자신의 언약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자를 의롭게 보시고 약속 밖에 있는 자를 악하게 보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 안에 있는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자기들의 의로움 때문에 들어가게 된 것이 아니다.

 

 

 


누가 악하냐 선하냐 하는 것은 결코 세상의 윤리나 도덕에 의한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기인하고 있다. 결국 가나안 땅의 강대한 자들을 물리치시고 가나안 땅에서 쫓아내시고 이스라엘에게 그 땅을 주시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어 세상에서 잘 살게 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약속에 초점이 있는 전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어떤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존재해야 하는가? 자기 의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약속을 주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해야 한다. 여기서 하나님의 뜻이란 진멸 당하는 아낙 자손들이나 이스라엘이나 동일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언약 때문에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자기 언약 백성들에게서 찾으시는 의이다.

 

 

 


6절에 보면,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인간의 의로움이 결코 아니라고 강조하시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의로움을 하나님 앞에 얼마나 내세우기를 좋아하는 인간이고 그것이 우리 안에 얼마나 깊히 뿌리박혀 있는가를 철저히 밝혀내시는 것이다. 그런 인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선언하신다. 목이 곧다는 것은 자기 의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굽힐 줄을 모른다는 뜻이다. 나에게 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인으로서의 겸손한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교만한 마음으로 산다. 이것이 목이 곧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목이 곧은 백성이 아닐 수 없다. 신자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인간을 전혀 선하게 보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제 아무리 선한 행동을 보이고 착하게 살고 의로운 행동을 나타낸다고 할지라도 오직 죄인으로만 보실 뿐이다. 따라서 신자는 기도하면서도 자신이 죄인임을 잊어서는 안되고, 성경을 보면서도, 예배를 드리면서도 항상 되새겨야 할 문제이다. 주일에 모이면서도 주일성수(?)하지 않는 자들보다 잘난 인간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항상 죄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은 진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찾으시는 의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엉뚱한 것을 의라고 고집하며 붙잡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우리의 의란 하나님이 하신 일을 아는 것인데 자신의 행함을 의로 알고 있다. 그러기에 온갖 종교적 행위로 자신의 의를 자랑하려고 힘쓰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것은 우리의 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행함을 내세우면 안된다. 아니 성도는 자신의 의를 내세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게 되어 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우리를 살리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도이다.

 

 

 


목이 곧은 백성의 주특기는 여호와 하나님을 격노케 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이다.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케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 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7절).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한 것이라고는 여호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뿐이었다. 그 거역하던 일을 모세는 다시금 언급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왜 이렇게 해야 하는가?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죄인의 특징이 하나님의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세는 29절까지 계속 이어서 이스라엘의 반역을 언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거듭 말씀하셔야 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인이라고 철저히 기를 죽이시는 것은 인간은 항상 자기 의로움에 빠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29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이 범죄했을 때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다. 범죄의 결과는 멸망인데 멸망받을 문제를 모세가 해결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격노케 하고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을 멸하고자 했을 때에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사십 주야를 산에 거하며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면서 기도함으로 심판을 면하게 한 것이다(9,18,25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로 인하여 모세가 고통을 당했던 것이다. 지금 모세는 자신이 백성들 때문에 고통 당했으므로 그것을 좀 알아달라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이제까지 살아 있다는 것은 그들의 의가 아니라 누군가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서 언약의 중보자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즉 모세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이 멸망당하지 않은 것처럼 누군가 언약의 완전한 중보자로 설 때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새 언약의 중보자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로 언약을 성취하신 것이다. 우리들도 우리가 천국가게 된 다면 그것은 우리의 의와는 전혀 상관없이 하늘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사이에 맺어진 새 언약 때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27절에 보면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생각하사 이 백성의 강퍅과 악과 죄를 보지 마옵소서”라고 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셔서 이스라엘의 죄를 보지 말아달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보지 않으시는 것은 이 땅에 약속의 실체로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의로움에 빠지면 자기 언약 백성들을 대신해서 의로 오신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아무리 은혜를 외친다고 해도 자기 의를 내세운다면 은혜가 아니다. 십자가의 피를 이야기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 마음 속에 자기 의가 살아 있다면 십자가는 한낱 장식용에 지나지 않으며, 예수님의 피는 적십자에 헌혈한 우리의 피보다 효용 가치가 없는 것이 되고 만다(1999.6.27).

 

 

 

 


신명기 10장

 

 

 

 

1절에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 내게로 나아오고 또 나무궤 하나를 만들라”고 하신다. 처음에 하나님은 모세를 산위로 불러서 계명을 새긴 돌판을 주셨다. 그러나 모세가 돌판을 깎아서 내려올 때 산 밑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섬기고 있었다. 그때 모세는 돌판을 깨뜨려버린다. 출애굽기 24:12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는 말씀을 보면, 처음의 돌판은 하나님께서 주신 돌판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처음의 돌판이 깨어지고 다시 계명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돌판을 모세가 직접 준비해서 가야 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무슨 이유로 두 번째 돌판을 만들 때는 모세더러 친히 돌판을 만들어서 오라고 하시는 것인가? 처음의 돌판이 깨어진 이유는 이스라엘의 죄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도저히 받을 수 없는 더러운 존재였다. 즉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깨어진 돌판이 산 밑에서 다시 만들어지는 것은 돌판을 깨뜨린 책임을 어디에 있는가를 알라는 암시가 들어 있다. 다시 말해서 모세가 돌판을 만들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이 깨어진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의미가 있다. 말씀을 어긴 죄의 책임을 땅에서 누군가가 해결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시키겠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죄를 책임지고 해결하심으로서 은혜가 우리에게 지속되게 된 것이다. 이것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모세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위치에 있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의 행위 속에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는 메시야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죄는 누군가가 책임지고 해결하지 않으면 구원은 영원히 불가능 할 수밖에 없다. 그 책임을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담당하시고 죄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신 것이다.

 

 

 


그런데 1절에 보면 돌판만 만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나무궤도 만들라고 하신다. 나무궤의 용도는 2절에 이렇게 나와 있다.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쓴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너는 그것을 그 궤에 넣으라 하시기로” 또 5절에 보면,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고 한 말씀을 보면 나무궤는 모세가 다시 받은 돌판을 넣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의 돌판은 모세가 직접 들고 내려 왔다. 그 결과는 돌판이 깨어진 것이다. 그러나 두 번째로 받은 돌판은 미리 준비한 나무궤에 넣는다. 그 이유는 돌판을 그대로 둔다면 또 다시 깨뜨려야 하든지 아니면 그 계명의 말씀이 공개됨으로 말씀이 이스라엘을 다 심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8절에 의하면 돌판을 넣는 나무궤는 “언약궤”라고 했다. 언약궤는 속죄소 혹은 시은좌라고 하는 것으로 덮어두었다. 속죄소 혹은 시은좌란 죄를 대속해 주는 장소로 하나님의 은혜가 내려앉는 자리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지성소에 피를 들고 들어가서 언약궤의 뚜껑 곧 속죄소에 뿌린다. 그것으로 이스라엘의 죄가 용서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이스라엘은 말씀을 지켜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그렇게 피를 흘려주는 책임을 지는데 그것을 믿는 자가 구원을 받는 방식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돌판과 언약궤는 하나님의 자기 희생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역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은혜 갚겠다고 나서지 말고 말씀을 실천해 보겠다고 설치지 말고 다만 피의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라는 것이다.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래서 피를 믿는 신자는 결코 자신의 윤리와 도덕을 내세우지 않는다. 오직 피를 앞세우고 피를 기뻐하며 살아갈 뿐이다.

 

 

 


주님의 피를 높이고 피만 증거하는 은혜로 살아가는 삶이란 어떤 삶을 말하는가? 8,9절을 보면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이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고 그 일은 오늘날까지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레위는 그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고 말씀하신다. 레위 지파 사람들은 언약궤를 중심으로 사는 사람으로 부름받았다. 그들은 땅에 기업이 없다. 오직 여호와가 기업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모든 것을 소유한 자로서 살아가야 했다. 그들에게는 땅이나 땅에서 나는 양식이 기업이 아니었다. 이런 삶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바로 이러한 제사장, 레위인들의 삶의 확대이어야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12,13절)라고 하나님은 요구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16절에서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요구대로 살았던 것이 아니라 목이 곧은 모습으로 살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하나님께 소유된 백성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았던 것이다(14,15절).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마음의 할례를 요구하신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할례란 남자의 생식기 끝을 잘라냄으로 인간의 생식 능력에 의해 후손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언약의 후손을 주셔서 하나님께서 친히 홀로 이루실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에게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언약 정신으로 살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 정신으로 산다는 것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며 나그네를 생각하는 것이다(18절).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과거에 애굽에서 나그네의 삶을 살았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항상 고아와 같고 과부와 같으며 나그네와 같이 누구도 돌 볼 자가 없는 그러한 존재였는데 하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의 피에 의해 애굽에서 건지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어린 양에 의해 건짐받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자들이 이스라엘이고 또한 언약 정신으로 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생각하며 늘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분께 소유된 모습으로 사는 것이다. 하나님은 22절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자기 언약을 충실히 이루고 계시지만 언약을 어기고 깨뜨리는 쪽은 언제나 이스라엘 편이고 인간이기 때문이다.(1999.7.4).

 

 

 

 


신명기 11장

 

 

 

 

10절과 11,12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하나님은 땅을 둘로 구분해서 말씀하셨다. 하나는 애굽 땅이고 다른 하나는 가나안 땅이다.

 

 

 


그런데 이 두 땅이 살아가는 방식이 서로 판이하게 다르다. 10-12절을 보면 애굽 땅은 “파종한 후에 발로 물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라고 말한다. 즉 애굽 땅에서 농사 지을 때는 사람이 물을 모아 놓은 후에 그 물을 발로 수차를 돌려 대는 방식으로 농사를 지었다. 한 마디로 애굽 땅은 인간의 수고와 노력으로 농사를 짓는 땅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물을 모아 놓을 수도 없기에 사람이 발로 수차를 돌려서 물을 댈 필요가 없는 땅이다. 그러면서 12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고 한다. 세초부터 세말까지라는 것은 일년 내내라는 말이다. 가나안 땅은 인간의 수고와 노력이 아니라 일년 내내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땅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자기들의 수고와 노력으로 살려고 하는 애굽적 방식을 그대로 도입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약속의 땅이 거부한다. 여호와의 눈이 항상 지키시고 보살피는 땅이기 때문에 잘되든 못되든 항상 주님의 은혜로 살아감을 잊지 말아야 하는 땅이다.

 

 

 


1절에 보면,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 직임과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 후에 2절부터 6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끌어내신 일, 광야에서 행하신 일, 땅을 열어서 다단과 아비람을 삼키게 한 일 등을 말씀하신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고, 광야에서 수많은 원망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지키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런데 이 은혜를 망각하고 다단과 아비람은 스스로 높아지고자 했고 하나님은 그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으심을 보이시기 위해서 땅을 열어서 삼키도록 하신 것이다.

 

 

 


결국 1절에서 말씀하는 직임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보이는 민족으로 부름받은 것을 의미한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목사 장로 이런 것이 직임이 아니라 직분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야 할 신자로 부름받은 것이 우리들의 직임이다. 때문에 직임을 받은 자가 지켜야 할 것은 자기 노력이 아니라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다. 1절이 바로 그와 같은 의미이다.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는 것은 항목 하나하나를 실천하라는 것이 아니라 법도와 규례와 명령이 내포하고 있는 그 정신으로 살아가라는 의미이다. 그것이 곧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다.

 

 

 


8-25절의 말씀이 모두 이러한 의미로 주어진 말씀이다. 13절에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나의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섬기면” 즉 자신의 노력으로 살아가는 방식이 아니라 은혜가 나를 존재케 한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모든 마음을 두고 살면 “여호와께서 너희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육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14,15절)라고 한다. 그러나 다른 신을 섬기면, 즉 인간의 욕심을 앞세우고 스스로의 수고와 노력으로 살아보고자 할 때에는 비가 내리지 않고 소산을 내지 않아 아름다운 땅에서 멸망하도록 하겠다고 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조건부가 아니다. 인간이 잘하면 하나님도 기뻐하셔서 약속의 땅에 살게 하시고 인간이 잘못하면 하나님께 노하셔서 약속의 땅에서 쫓아내시겠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스스로 무엇인가를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알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모습으로 살면 약속의 땅에서 계속 풍성함을 누리면서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의 약속의 땅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사는 존재만 거주할 수 있는 땅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계시하는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약속의 땅과 같은 천국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들어갈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살아갈 수 있는 곳이기에 모든 인간의 공로나 행위, 인간의 의가 부정되는 곳임을 가나안 땅을 통해 가르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안다면 그들이 행할 것은 무엇인가? 18-20절에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으로 너희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하라”고 한다.

 

 

 


이것이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이 살아가야 할 삶의 원칙이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면 신자는 항상 성경을 가지고 다니든지 보지 않더라도 늘 차에다 싣고 다니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이해한다면 그것은 유대교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은혜의 땅에서는 삶의 중심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애굽에서 건짐받아 은혜의 땅에 살 수 있는 것은 순전히 어린 양의 피 때문이라는 사실을 삶의 구석구석에 배어진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것이 곧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삶의 원칙은 오늘날 우리들에게서도 동일하다. 어떤 이가 하기 쉬운 말로 구약은 율법으로 구원을 받고 신약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성경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무지의 결론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한국 교회가 그 무지의 결론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율법을 온전히 성취하시고는 새롭게 우리에게 또 계명으로 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의 말씀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컴퓨터 통신상에 ‘한국컴퓨터선교회’라는 동호회가 있습니다. 여기 상담방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것으로 고민합니다. 술, 담배 문제, 또는 노래방이나 나이트 클럽에 마음대로 갈 수 있는가? 혹은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등등의 쓸데없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언제 주님이 우리에게 그런 것들로 고민하라고 하셨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사는 것은 오늘날 신자들이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이 어린 양의 피로 인한 하나님의 능력이요 은혜라면 세상에 매여 살던 우리들이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이 되었다면 그것 역시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성령 안에 거하는 신자에게 마땅한 삶의 모습은 은혜로 사는 것이다.

 

 

 


은혜란 받을 가치도 없는 자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나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며 동시에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가장 고귀한 것’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 성령 안에서 사는 모습이다. 신자는 무엇을 해도 이런 입장에서 행해야 한다. 그래야만 자기 행위를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22-23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령께서 우리 육체의 소욕을 죽일 때에 자기 행위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성령의 열매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항상 나오는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성령께 사로잡힐 때에 나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로서는 우리의 악행에 대하여 대책이 없는 존재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만 믿는 자가 성도이다(1999.7.11).

 

 

 

 


신명기 12장

 

 

 

 

11:26 이하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고 하셨다. 그래서 본 장에 와서는 그 복이 어떻게 주어지는 것인지를 말씀하신다.

 

 

 

 
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그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 무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그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서 그 이름을 그 곳에서 멸하라”(2,3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파멸하며…헐며…깨뜨리며…불사르고…찍어서…멸하라”는 말씀을 볼 때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철저히 우상들이 제거되기를 원하시는가를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여기서 주신 이 말씀은 단순히 우상을 멸하라는 차원으로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3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그 이름을 그 곳에서 멸하라’고 했다. 즉 이름과 이름의 싸움이다. 우상의 이름은 멸하고 하나님의 이름만 높이는 곳, 그 곳이 약속의 땅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느 곳이든 단을 헐고 주상을 깨뜨리고 아세라 상을 불사르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의 이름이 아닌 우상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을 용납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5,6절).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서 제사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 곳에서나 제사 드리면 안되고 왜 꼭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서 제사해야 하는가? 가나안 땅이 특별한 땅이라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셨기 때문이다. 장소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이름이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담고 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인가? 출애굽기 20:24에 보면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고 말씀하셨다. ‘내 이름을 기념하는 곳’이란 제사가 행해지는 곳이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는 것은 제사를 의미하는 것이고 제사란 흠없고 죄 없는 제물이 희생당하여 피를 흘리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일이란 자기 희생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에 자기 이름을 두시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란 법궤 위에 피가 뿌려지는 일이 행해지는 성막(성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장소에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지게 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그 성전의 실체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 주어진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이란 가나안 땅의 어떤 한 장소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였다. 이런 점에서 예배당이 성전이 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예배의 장소적 의미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장소에는 흠없는 제물이 희생을 당하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는 희생을 치루실 것을 미리 보여주신 것이었다. 인간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이 희생할 수밖에 없는 일을 보여주는 장소에서 인간이 자기 이름을 높이고자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희생을 무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님의 희생을 아는 자라면 자기 이름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기 이름을 내고 자기 자신을 자랑하며 자기 영광성을 추구하는 것이 곧 우상 숭배임을 알고 그것을 날마다 포기할 줄 아는 모습이 성도의 모습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에게는 너희가 그처럼 행하지 말고”(4절)라고 하시고 또한 “우리가 오늘날 여기서는 각기 소견대로 하였거니와 너희가 거기서는 하지 말지니라”(8절)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광야에서는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하였지만 가나안 땅에서는 오직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택하신 곳에서 예배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25-28절에서는 제물을 먹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제물을 먹되 그것은 아무렇게나 되어서는 안되고 제단을 중심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7,18절을 보면 제물을 각 성에서 먹지 말고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시는 곳에서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다만 각 성에서 먹을 수 있도록 허락된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먼”(21절) 경우에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해 볼 때 결국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이 단순한 장소적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장소가 중요하다면 아무리 멀어도 그 장소까지 오라고 하셨을 것이다. 따라서 제단 중심이란 소위 고정된 교회(예배당) 중심을 말하는 것이 아님이 명확하다. 그렇다면 오늘날 아무리 멀어도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에 매 주일 출석해야 하고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에 반드시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교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신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는 자들이다. 그러한 주장과 행위는 교인들을 자기 교회에 붙들어 매고자 하는 목회자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신앙 생활은 고정된 교회 생활이 따로 있고 자기 일상 생활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그 이름을 두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냥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에는 제단이 있다. 그리고 그 제단에서는 제물의 피를 쏟아내고 제물을 태우는 일이 벌어진다. 하나님은 이런 일을 반복하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은혜의 땅의 삶의 원칙을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이다. 애굽은 떡으로 살지만 가나안 땅은 말씀으로 사는 땅이다. 그러나 애굽의 삶의 방식에 쉽게 수긍하고 적응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단에서 피가 뿌려지고 제물이 태워지는 것을 이스라엘에게 보이심으로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배우도록 하신 것이다.

 

 

 


말씀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규례와 법도를 실천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을 항상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에 세워진 제단에서 벌어지는 피의 사건으로 인도해 가시는 것이다. 그곳이 하나님의 복이 내리는 자리이다. 왜 복이 내리는 자리인가? 하나님의 자기 희생으로 말미암아 죄용서가 이루어지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달리 복이 아니라 죄 용서가 이루어지는 그것이 복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교회여야 한다.

 

 

 


예수님께서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고 하셨다.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서 벌어지는 사건, 즉 제물이 피를 흘리고 죽는 사건은 죽음과 생명이 교차되는 현장인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택하신 곳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제물이 되셔서 죽음과 생명이 교차되는 현장이 오직 십자가이다. 그 현장이 십자가라면 당연히 우리가 죽어야 하는 현장이 십자가이다.

 

 

 


15절 이하에서 보듯이 각 성에서 고기를 잡아 먹으며 즐기되 피는 구별하여 땅에 쏟아야 했다(16절). 그러면서도 자녀와 노비와 함께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 한다고 했다(12절). 철저히 희생의 피는 구별하되 그 희생의 피를 구별하는 모든 자들과 함께 즐거워 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었다. 제사 자체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의 백성 모두가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고기를 나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부름받은 자들이 함께 신앙을 공유하는 삶이다.

 

 

 


신앙의 자유라는 것 때문에 예배 한 번 힐끗 구경하고 자기 마음대로 나머지 시간을 활용하는 모습이라면 과연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 즉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점검해 볼 필요성이 있을 것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자기 유익을 위해 살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곧 위선으로 무장한 죄인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그것을 우리 안에서 철저히 없애도록 노력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알고 날마다 회개하는 모습으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무조건 논다고 자유함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놀면서도 십자가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마음인가? 하는 것이 자신에게 늘 물어야 할 물음이다(1999.7.18).

 

 

 

 


신명기 13장

 

 

 

 

가나안 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원하시는 것은 물질적인 부요를 누리면서 아무 걱정 없이 잘사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기 이름만이 약속의 땅에 펼쳐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곳에서 하나님의 이름만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서 먼저 제거되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을 1-3절,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3a). “너희 중 어떤 잡류가 일어나서 그 성읍 거민을 유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가서 섬기자 한다 하거든”(13절). ‘선지자나 꿈꾸는 자’라고 한 것으로 보아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를 지칭하는 것이며 또한 잡류이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선지자들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거짓 선지자들이 꿈꾸는 것을 가지고 계시를 삼으며, 신비한 체험을 가지고 점을 치고 예언하는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이다(참고 렘 23:25).

 

 

 


그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처리하라고 하시는가? 5절에 의하면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여 취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케 하려 하며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고 하셨다. 또한 19절에도 보면, “돌로 쳐죽이라”고 하셨으며 “너는 마땅히 그 성읍 거민을 칼날로 죽이고 그 성읍과 그 중에 거하는 모든 것과 그 생축을 칼날로 진멸하고 또 그 속에서 빼앗아 얻은 물건을 다 거리에 모아 놓고 그 성읍과 그 탈취물 전부를 불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라”(15,16절)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단호하게 죽이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비판자들에 의해 말해지듯이 하나님은 사람을 즐겨 죽이는 잔인한 분인가? 그런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을 따라 일하신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언약과 관계없는 것들을 제거해 나가시는 것이다.

 

 

 


2,3절에 보면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즉 거짓 선지자나 꿈꾸는 자들은 이적과 기사를 내세우면서 다른 신을 섬기자고 꾀는 자들이다. 단순히 우상을 섬기라고 꾀는 정도가 아니라 애굽 땅에서 구원해 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케 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는 죄악이라는 것이다(5절).

 

 

 


12장에서도 상고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만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런 점에서 거짓 선지자들이나 꿈꾸는 자들이 행하는 모습은 약속이 지향하는 바와는 거리가 멀다. 아니 반대로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은혜의 땅에서 살 수 없는 자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죽이라고 하신 것은 바로 그러한 사고 방식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끊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거짓 선지자/참된 선지자, 비언약적 신앙/언약적 신앙이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 하나님의 언약을 기초로 하고 있는 신앙은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나 거짓 신앙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사적인 일을 바라보게 한다. 아니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 그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이다. 자기 문제를 중심으로 하나님을 보게 하는 것, 이것이 다른 신을 섬기게 하는 것이며 은혜의 땅에서 용납될 수 없는 악의 모습이다.

 

 

 


인간은 이적과 기사에 약하다. 이적과 기사에 약하다는 것은 인간에게 한계가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한계가 있기 때문에 그 한계를 극복한 어떤 형태를 보게 되면 거기에 자신의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그랬을 때에 그것은 가히 진리로 받아들일 만한 것이 되고 만다. 하나님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이적과 기사를 행할 수 있는가 하고 쉽게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2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거짓 신이라고 할지라도 얼마든지 이적과 기사를 보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때문에 신자가 신기한 이적과 기사에 마음을 두고 있을 때에 마귀는 그 틈을 노리게 된다. 신기한 이적과 기사를 나타내서 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 성장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를 크게 키운 목회자는 자기가 교회를 부흥되게 한 그 법칙이 성경이 되고 있다. 그래서 교회가 부흥된 이적 거기에 철저히 매여 있게 된다. 그것은 더 이상 십자가의 주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마귀의 올무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개인적인 신앙 체험, 개인적인 문제 등과는 상관없이 하나님 자신의 일을 이루어 가신다. 그래서 신앙이란 자기로부터 벗어나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을 말한다. 자기 자신이라는 사소한 문제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구속이라는 엄청나게 큰 일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이다. 나의 일은 망할지라도 주님께서 자기 나라를 이루시는 것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취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자들의 모임이 교회이다.

 

 

 


그런데 다른 신은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문제만을 바라보게 하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의 욕심을 드러내게 만든다. 이것은 은혜의 땅에서 끊어져야 할 모습이기에 성도를 꾀는 다른 모습을 근원적으로 차단하도록 말씀하신 것이 선지자와 꿈꾸는 자들, 잡류뿐만 아니라 꾀임을 받은 성읍 거민들을 죽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자기 개인적인 문제 해결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다른 힘을 구하는 것이다. 그 다른 힘이 곧 꿈꾸는 자의 모습이고 무당이고 거짓 선지자들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분명히 교인들의 개인적인 문제에 하나님을 연관시켜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신자 개인적인 문제에 관심이 없으시다는 것을 분명히 선포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나님을 찾지 말고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바라볼 것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죽을 병이 들었다가 기도원에 가서 나았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내 문제이지 하나님의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죽을 병에 들었다가 나은 것에는 온 교회가 놀라고 신기해 하고 평생을 잊어버리지 않을 듯이 자랑하고 떠들며 간증하고 다니면서 예수님의 피로 인해서 죽었던 죄인이 살아나고 멸망의 자리에 있던 자가 생명의 자리로 옮긴 바가 되고 심판 속에서 건진 바 된 이 놀라운 이적, 은혜에 대해서는 놀라워하지도 않고 신기해하지도 않으며 시큰둥하게 여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결국 다른 신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하나님의 구속이라는 놀라운 일보다는 내 문제에 훨씬 더 큰 관심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런 자들을 하나님께서 철저히 끊어버리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말씀을 대할 때에 우리는 너무도 쉽게 이 말씀을 다른 사람에게만 적용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자를 죽이라는 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을 보고 그런 모습이 나오면 잘 감시해서 그 사람을 죽이라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그런 모습이 있다는 것에 놀라야 하고 내 안에 그런 모습을 죽이는 자가 성도인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애초부터 이런 거짓 선지자들을 직접 제거하시면 되지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는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3절b).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지 아닌지를 몰라서 시험한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거짓 선지자들을 사용하셔서 자기 백성들을 세상에서 구별하여 세우시기 위함이다. 다시 말해서 거짓 선지자들을 둠으로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만을 고귀한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참된 백성의 모습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지금 하나님은 가짜 교회를 두셔서 참된 하나님의 교회가 어떤 것인가를 말씀으로 더욱 분명히 제시하신다.

 

 

 


여기서 우리가 놀라야 하는 것은 거짓 선지자, 가짜 교회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형제나 자녀나 아내, 친구가 될 수 있다(6절). 우리의 학연, 지연, 혈연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마 10:36)고 말씀하신 것이다. 성도란 세상적 인연에 편승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요구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자이다(1999.7.25).

 

 

 

 


신명기 14장

 

 

 

 

1,2절에 보면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보면 믿는 자를 그냥 신자, 자녀라고 말하지 않고 ‘여호와의 자녀’ ‘여호와의 성민’ ‘자기 기업의 백성’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들은 여호와의 자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상 만민 중에서 택함 받은 자가 여호와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감사하면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우리 자신들을 돌아볼 때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이 어느 정도 닫혀 있는가를 알 수 있다.

(1999.8.1).

 

 

 

 

 

신명기 15장

(없음)

 

 

 

 

 

 

신명기 16장

 

 

 

 


본 장에서는 이스라엘의 3대 절기라고 말해지는 유월절과 칠칠절(오순절), 초막절(수장절)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 절기들은 각각 다른 의미로서의 절기가 아니라 유월절에서 기준하여 날짜를 배정하여 지키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세 절기는 유월절을 중심으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1절에 "아빕월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유월절 예식을 행하라 이는 아빕월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밤에 너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이라"고 했다. 여기서 '여호와의 유월절' 이라는 말은 유월절의 주인이 여호와라는 뜻이다. 즉 유월절은 여호와 하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월절은 어떤 여호와를 보여주고 있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이 본문의 중심이다.

 

 

 


이것을 위해서 이스라엘이 유월절에 세부적으로 지켜야 할 규례가 있다. 그것은 유월절의 기간 동안에는 사경 내에 누룩이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다(4절). 그리고 첫날 해질 때에 제사드린 고기는 밤을 지내어 아침까지 두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4절). 그리고 유월절 제사는 반드시 자신들의 각 성에서 드리지 말고 오직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드려야 하고(5,6절), 제사 드리는 시간은 애굽에서 나오던 시각 곧 초저녁 해질 때에 드리고(6절),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 고기를 구워먹고 아침에 장막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다(7절). 그리고 6일 동안은 무교병을 먹고 제 7일에는 여호와 앞에서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말아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유월절이다(8절).

 

 

 


이러한 유월절의 규례를 보면 아주 복잡한 듯 보이고 유월절이라는 절기를 지키기 위한 하나의 의식과 방법으로 제시되어 있는 듯 하지만 사실 하나님은 이러한 의식들이 지켜지는 것을 보고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의식 속에 담겨서 전해지고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스라엘이 알고 그 마음을 자신들의 마음으로 삼을 때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유월절을 지키는 방법 하나하나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이다. 특히 이렇게 유월절을 지키는 자세한 규례를 주심으로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야 하는 것임을 이스라엘은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규례들의 내용들을 각기 나누어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관점에서 하나의 의미로 담겨져서 반복해서 주시는 것이다.

 

 

 


한 마디로 유월절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기 위해서 희생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다. 즉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통해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약속의 땅을 주시기까지 이스라엘을 위해 고난받으시고 희생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유월절에 양을 잡아서 무교병과 함께 먹어야 했던 것이다. 무교병은 고난의 떡이었다(3절). 무교병이란 누룩을 넣지 않고 밀가루로만 만들었기 때문에 딱딱하고 맛없는 떡이다. 이것을 하나님은 고난의 떡이라고 말씀하셨다. 즉 먹기에는 불편하였기에 단순히 먹고 배부르도록 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무교병에는 하나님이 보여주고자 하시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떡이다. 무교병을 제사드린 고기와 함께 먹는다는 것은 고난과 희생을 함께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생각한다는 것은 단순히 생각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고난과 희생 안에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고난의 떡과 제사드린 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고난이 아니라 떡과 고기를 먹는 것을 통해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홀로 고난 당하시고 희생하신 은혜 덕분에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말도록 하기 위해 유월절을 지키라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리는 장소를 지정하신 것에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2,6,7,11,15절)에서만 제사를 드려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지금 개인적인 구원의 차원에서 어린 양을 잡고 고난의 떡과 함께 먹는 것으로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한 곳을 지정하심으로 그곳에서만 제사를 드리도록 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계시가 한 초점으로 모이도록 하셨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희생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지를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곧 유일무이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다.

 

 

 


7,8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그 고기를 구워 먹고 아침에 네 장막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너는 육 일 동안은 무교병을 먹고 제 칠 일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의 의미로 볼 때 이스라엘은 첫날 하나님이 택하신 장소로 모여 제사를 드리고 고기와 떡을 먹고 다음날 아침이 되면 자기 장막으로 가 있으면서 무교병을 먹고 7일째 되는 날에는 또 성회로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모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시작을 유월절 제사로 시작하고 마지막 날을 유월절 제사로 끝낸다는 것이다. 단 하루만의 행사로 끝내지 말고 일주일 내내 유월절 정신으로 살라는 것이다.

 

 

 


그러면 일주일만 그렇게 하면 되는가? 이런 점에서 유월절을 기준으로 하여 계속 두 가지 절기를 가지고 지킬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즉 칠칠절을 지키고 초막절을 지킴으로서 일년 내내 유월절 정신으로 살라는 것이다. 유월절 정신으로 산다는 것은 일년 중에 절기가 돌아오면 그때 그때마다 생일축하 하듯이 의식에 맞추어 적당히 행사를 치루면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을 11,12절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너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 가난한 자들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어야 한다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과거 애굽에 있었을 때에 나그네요 고아와 과부와 같은 존재였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이스라엘 중에 가난한 자들과 함께 나누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배우고 인정하며 살도록 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구원 안에 있는 상태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빈손으로 나오지 말라고 말씀하셨다(16,17절). 이 말씀은 오늘날도 교회에 올 때 하나님 앞에 헌금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스라엘에게 이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 바친다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께 은혜로 베푸신 것에 대한 증거를 하나님 앞에서 확인한다는 차원이다. 그래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10절), "네 하나님 여호와의 주신 복을 따라"(17절)서 드리도록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18절 이하는 재판장과 유사를 세우되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하지 뇌물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왜 여기서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주셨을까? 뇌물이란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을 받아 누리는 차원이 아니라 인간이 베푸는 것을 받아 누리는 차원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성을 거부하는 모습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뇌물을 받고 공의롭지 못하게 재판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위한 우상 숭배이다(22절).

 

 

 


우리는 지금 부활절이나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등 어떤 절기를 지킨다는 개념이 없이 모이고 있다. 물론 다른 교회가 다 하고 있는 것을 굳이 거부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불만이 있을 수 있고, 뭔가 밍숭맹숭하여 허전한 느낌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지금 한국 교회가 지키고 있는 절기들을 우리가 안 한다는 것에 대해 과연 어떤 마음에서 허전한 마음이거나 불만이 생기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경적으로 납득할만한 어떤 근거를 제시한다면 생각해 보겠지만 그렇지 않고 종교적인 어떤 재미나 자신의 허전함을 채우고 종교적 열심을 부추기는 것에 따른 불만이거나 아니면 한국 교회 전체가 다 하고 있는데 우리만 유독 그렇게 튀는 짓을 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문제로 들고 나온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종교적 의식에 매인 결과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한국 교회가 지키고 있는 절기를 다 하지 않아야 옳다거나 그래야만 바른 교회라는 말이 아니다. 다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절기가 어떤 정신을 담고서 주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이 헌금을 거두어들이고 종교적 욕구 충족을 위한 행사에 치중한 절기라면 신앙에 아무런 득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 성경의 모든 절기와 함께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성도에게 있어서는 매일매일이 부활절이고, 추수감사절이며, 성탄절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절기 폐지론이 아니라 십자가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말씀하고 있는 절기를 지킨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 십자가로 하나님의 약속이 온전히 성취되었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 사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1999.11.14).

 

 

 

 

 

신명기 17장

(없음)

 

 

 

 

신명기 18장

 

 

 

 


본 장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 대해 말씀하시고(1-8절) 그리고 이방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라고 하시며(9-14절), 한 선지자(15-22절)에 대해 말씀하신 것으로 되어 있다.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레위 사람 제사장과 레위의 온 지파는 이스라엘 중에 분깃도 없고 기업도 없을지니 그들은 여호와의 화제물과 그 기업을 먹을 것이라."

 

 

 


다른 사람들은 다 기업을 받아 땅을 가지고 내 땅이라고 하면서 사는데 레위 사람들은 땅이 없으니 허공을 딛고 살아야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기업으로 주는 땅은 사람이 사는 터전인데 이것이 주어진다는 약속이 없다는 것은 그들의 미래가 한없이 불안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요즈음 말로 하자면 물려받을 재산도 없고 돈도 없고 땅도 집도 없는 사람의 미래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상태에서 레위인은 오직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고 살라는 것이다(2절). 즉 하나님을 삶의 터전이요 힘의 근원으로 삼으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삶이라고 할지라도 성전에서 봉사하고 있는 레위인 외에 어떤 이유로든지 각 성읍에 흩어져 살고 있는 레위인이 그 생활을 청산하고 성전에서 다른 레위인과 같이 섬기고자 하는 자가 있다면 동일한 차원으로 대우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세상에 전혀 의미를 두지 않고 살아가기는 힘든 삶이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자원해서 살려고 하는 자가 나타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해서 베풀어지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전에서 제사 직무를 수행하고 성전을 관리하는 레위인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희생이 계속해서 제사 제도를 통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한다는 차원에서 백성들은 그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레위인들이 이런 삶을 살게 하신 것은 레위인들만 그렇게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모든 이스라엘이 레위인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레위인들을 보면서 우리도 하나님을 기업으로 하여서 살고 있구나 하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레위인들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희생을 보여주도록 뽑혀나온 자로서 일종의 실물 교육을 위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모든 성도 역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보여주는 도구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해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9절)라고 말씀한다. 본받지 말라는 가증한 행위란 10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들이다. 즉, 자식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 복술자, 길흉을 말하는 자 요술하는 자, 무당, 진언자, 신접자, 박수, 초혼자들을 가까이 하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그들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시는가? 먼저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이방인들의 행위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아들과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란 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자기 자식을 불에 태워서 제물로 바치는 것을 말한다. 당시 이방 나라에서는 자기 열심을 신에게 보여주기 위해 이런 일이 성행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하나님께 자기 열심을 보여주려고 하는 종교적인 일체의 행위가 우리에게는 항상 있는 것이다.

 

 

 


"복술자"란 점을 치면서 인간의 복을 예언해 주는 사람을 말한다. 즉 복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하고 화를 면하기 위해서는 이러저러한 것은 하지 말라는 식으로 화를 피하고 복을 받도록 유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오늘날 교회도 이렇게 하면 세상적인 복을 받고 저렇게 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고 가르치는 모습은 복술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쟁이를 찾아가는 똑같은 마음으로 목사를 찾아와서 묻는 것이다.

 

 

 


"길흉을 말하는 자"란 날짜와 시간을 따지면서 미래의 길흉에 대해서 미리 말하는 사람을 뜻한다. 오늘날 이사할 때나 결혼식을 할 때에 길일을 택하기 위해 날짜를 따지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요술하는 자"는 어떤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며 사람들을 미혹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적이 나타난다고 해서 단순히 하나님의 일이라고만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마귀가 나타내는 이적들도 우리가 하나님의 이적이라고 속을 만큼 놀라운 것들이 많다. 오늘날 교회가 이런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복음을 증거하고자 한다면 십자가를 부인하는 모습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무당"이란 신으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받아 그 능력으로 화를 물리치고 복을 끌어들이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목사가 자신을 하나님의 대리자와 같은 존재로 나타내면서 자신의 능력으로 교인들에게 복을 주는 것처럼 말한다면 그는 무당이다. "진언자"란 신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그 계시를 통해서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고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오늘날 목사들이 계시 운운하면서 신자들을 미혹하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떠드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특별한 계시란 없다. 오직 성경만 계시이다.

 

 

 


"신접자"란 신과 접촉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을 말한다. 귀신을 불러내어서 귀신으로부터 미래의 길흉을 미리 듣고 그것을 말해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박수"는 남자 무당을 가리킨다. "초혼자"란 죽은 귀신의 영을 마음대로 초청할 수 있다는 사람이다. 죽은 영을 불러내어서 그 힘으로 앞으로의 일을 미리 예언도 하는 사람이다. 오늘날 목사들이 최면술을 많이 배운다고 하는데 이런 능력을 한번 발휘해 보고자 하는 우상 숭배에 빠진 결과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용납하지 말라고 하신다. 우리는 용납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쉽게 그들이 우상을 섬기기 때문에 용납하지 말라는 식으로 이해한다. 그러기 때문에 적어도 오늘 교회에 나온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이 문제들과 전혀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이러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고 있는가?

 

 

 


우리가 살펴본 대로 앞에서 말한 이런 모든 일들은 인간의 복과 연결되어 있다. 저주는 피하고 복을 끌어들이자는 차원에서 복술자와 점쟁이를 찾고 무당을 불러들이는 것이 아닌가? 즉 저주와 복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해결해 보겠다는 발상이다. 사람들이 복을 왜 원하는가? 그것은 세상에 대한 탐욕 때문이다. 세상에 모든 기대를 걸고 세상에서 실패하지 않는 인생을 살려고 발버둥치기 때문에 일이 잘 안될 때에는 점치는 자를 찾아서 화에서 벗어나서 복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물어보기도 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을 인정한다면 과연 그러한 본질적인 욕망이 교회에서 보여지지 않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13절에 보면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이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과 같이 되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만 하시고 끝낸 것이 아니라 친히 십자가를 지셨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 아버지와 같이 온전해 질 수 없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셨으며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신 것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완전한 자가 될 수 없기에 예수님이 대신 이루신 것으로 믿게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하심 안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이방인들이 행하는 마술이나 무당, 신접, 우상 숭배를 받아들이지 말고 하나님께서 이루신 언약을 바라보고 그 언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것이다.

 

 

 


15절에 하나님께서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고 하셨다. 모세가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하나님께서 세우시겠다고 말한 것은 모세 역시 완벽한 선지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스라엘은 시내산에서 선지자를 구했던 적이 있었다. "뭇 백성이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산의 연기를 본지라 그들이 볼 때에 떨며 멀리 서서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출 20:18,19).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받을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심을 보고 두려워하면서 모세가 말해주기를 요청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한 것은 모세가 아닌 다른 선지자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모세는 하나님이 나와 같은 다른 선지자를 세우실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 말은 결국 모세는 이스라엘과 백성들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선지자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 즉 모세가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에 중보의 역할을 했던 것과 같은 선지자를 세운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선지자는 궁극적으로 하나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모세 이후에 세움을 입은 구약의 모든 선지자는 한 선지자를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을 통해서 어떤 메시야가 이 땅에 오게 되는지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선지자들을 보면 한 사람도 자신의 위치를 굳게 하고자 하는 선지자는 없었다. 그런 자는 거짓 선지자들뿐이었다.

 

 

 


모두가 고난을 당하고 외면 당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만을 선포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백성들에게서 반대를 당하고 그들의 손에 죽어가면서도 선지자들은 말씀을 포기하지 않았다. 고난과 희생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 보여주는 자들이 선지자들이었다. 예수님의 모습은 바로 그러한 고난과 희생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무수한 선지자들은 고난과 희생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한다고 해서 다 믿을 것이 아니고, 무당, 점치는 것, 신접 등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즉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근거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22절). 여기서 증험이나 성취란 오늘날 언약의 성취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 속에서 알게 된 하나님이 아니라면 가짜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수기 11:29에 의하면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결국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약속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 피의 증거자가 되기를 원하신 그것이 곧 모든 자기 백성들을 선지자로 만드시겠다는 의도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도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과 핍박들을 그대로 받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고 오히려 당연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1999.11.28).

 

 

 

 

 

신명기 19~22

(없음)

 

 

 

 

신명기 23장

 

 

 

 

본문 1,2,3,8절에 “여호와의 총회”라는 말이 등장한다. 이토록 중요한 것이 '여호와의 총회'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총회에 합당치 못한 자가 들어오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자를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거부를 하는 것입니까? 1절에 보면 "신낭이 상한 자나 신을 베인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신낭이 상했다는 것이나 신이 베였다는 것은 남자구실을 할 수 없게 된 자를 의미합니다. 즉 자손을 번식할 수 있는 기능을 상실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자를 여호와의 총회가 거부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아는 민족으로서 대대로 하나님의 마음이 전달되어야 할 민족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살지 않으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은 전달되지 못하고 단절되고 맙니다. 즉 하나님을 아는 대를 이어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총회, 즉 교회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들이 모여서 그 마음이 끊어지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전달되고 이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있는 자들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게 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끊어지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 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그저 아무나 교회에 들어오면 좋아합니다. 숫자가 늘고 교회가 부흥된다는 것 때문에 누구라도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대환영합니다. 일단 교회에 들어오게 되면 말씀을 배우고 신자로 자라갈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은 교회인데, 그런 교회에서 무슨 진리된 말씀을 들을 수가 있고 그리스도를 배울 수가 있습니까? 교회란 오직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고자 하는 신자들이 모이는 모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기를 싫어하는 자는 나가달라고 하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말입니다.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기를 싫어하는 자가 개입된다면 몸의 관계가 단절되기 때문입니다.

 

 

 


2절에 보면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십 대까지라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사생자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호세아서 5:7에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저희가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자를 낳았으니 그러므로 새 달이 저희와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는 말씀을 보면 사생자란 곧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나은 자식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총회란 여호와의 백성들이 다 모인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총회란 오늘날 교단의 총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단의 총회는 인간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간 조직이지만 본문에 등장하는 여호와의 총회란 여호와에 의해서 창조되어진 단체를 의미합니다. 총회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은 이스라엘이라는 혈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만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된 것은 자기들 스스로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서 탄생되었습니다. 어린양의 피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탄생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총회만이 마지막 때 남는 유일한 단체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총회는 지상에서 인간들이 만들어낸 단체와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하늘에서 창조되어서 지상에 내려온 여호와의 총회와, 지상에서 인간들이 모여서 자기들 멋대로 교회라고 이름 붙여서 만들어낸 단체와는 분명한 구별이 있습니다.

 

 

 

 

그 구별은 생각 자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분명합니다. 여호와의 총회의 사고방식과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사고방식과 일치하고 있는지 아니면 전혀 다른 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일치하고 있다면 여러분이 바로 여호와의 총회에 소속된 교회이고 일치하지 않는다면 교회라는 껍데기만 둘러쓰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총회가 하나님의 창조작업에 의해서 발생한다면, 교회 역시 하나님의 창조 작업에 의해서 발생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작업은 세상에 있는 것을 보완하고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없는 것 가운데서 있게 하시는 것이고, 죽은 것 가운데서 살리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 작업은 지상에서 인간들이 내세우는 것은 모두 부인해 버립니다. 오직 하나님 홀로 하시는 것이 창조작업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창조작업에 의해서 발생한 존재입니다. 죽은 자였던 우리가 산 자가 되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홀로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마치 내가 신자답게 되고 싶어서, 기도하고 성경 보면서 애썼기 때문에 믿음 있는 신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창조 작업을 부인하고 스스로 되고자 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신명기 24장

 

 

 

 

1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이 말씀은 사람들이 듣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나쁜 쪽으로 이용할 수 있는 소지가 있다. 즉 아내가 싫어졌을 때 이혼 증서만 써주면 얼마든지 쫓아낼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을 그런 식으로 오해를 했다(마 5:31-32).

 

 

 


그러나 본문은 ‘이혼증서’를 써 준다는 것에 중요성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혼 증서를 써준다는 것은 이혼을 당한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로 재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이다. 즉 여자를 보호하기 위한 장치이다. 여자는 부정한 일을 한 외에는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당할 수가 없다. 부정한 일을 해서 쫓겨남을 당했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이혼 증서를 써 주어서 여자를 보호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내를 데려온 후에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라고 했다. 그러면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수치 되는 일이라는 것이 여자가 부정한 일을 한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여자의 부정함을 보호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수치 되는 일’이란, 남자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수치 되는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단정적으로 이것을 의미한다라고 추측할 필요는 없다. 그 의미를 모른다고 해서 본문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여자에게 수치 되는 일을 발견하고 그것을 수치 되는 것으로 여기는 남자의 마음이 문제라는 것이다. 남자가 자신에게 수치가 된다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지 여자의 입장에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럴 때 이혼을 하려거든 이혼 증서를 써주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여자는 부정한 일을 한 것이 없이 이혼을 당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문서를 써주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서 여자로 하여금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갈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자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혼 증서만 써주면 얼마든지 이혼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혼 증서를 써 준다는 것을 통해서 자기의 정욕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남자의 탐욕을 드러내시는 것이다.

 

 

 


결국 본문 1-5절의 말씀은 여자의 권익에 대한 보호를 위한 율법의 말씀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 남자는 강자로 등장을 하고 여자는 도움을 받아야 할 약자로 제시하고 그것을 통해 인간의 탐욕 그리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고자 하시려는 것이 중심적인 뜻이다. 즉 약자는 항상 강자로부터 피해를 입는 위치에 있다. 그것이 여자에게는 남자로부터 내어 쫓김을 당하는 것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혼을 당한 여자가 재혼을 했는데 재혼한 그 남편이 죽었거나 그도 여자를 버렸을 때 전남편이 그를 다시 취하지 못하도록 하는 말씀도, 모든 일이 힘이 있다고 해서 그 힘으로 인간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4절에서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라고 말씀하는데, 여자가 몸을 더럽히게 된 이유는 남자에게 있다. 그러므로 재혼하고 홀로된 여자를 다시 취하지 못하게 함으로서 여자가 몸을 더럽히게 홀로 살아가게 된 모든 이유가 바로 남자의 욕심 때문이었음을 두고두고 잊지 말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5절의 말씀도 역시 약자인 여자를 들어서 하시는 말씀이다. 결혼을 했으면 그 남자를 군대도 보내지 말고 어떤 직무도 맡기지 말고 일년 동안 아내를 즐겁게 하라는 것이다. 이 역시 약자인 여자를 보호하는 것을 통해 이스라엘의 본질을 알라는 말씀이다. 6절에서 맷돌의 전부나 그 윗짝을 전집하는 것은 그 생명을 전집 하는 것과 같다고 하는 것도, 맷돌은 곡식을 갈아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 도구인데 그것을 저당 잡는다는 것은 가난한 자들이 음식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최소한의 것까지 뺏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생명을 저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7절은 사람을 납치하여 종으로 부리고 팔아먹는 인신매매를 말한다. 이 역시 힘을 가지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말하고, 8,9절의 문둥병의 이야기는 이스라엘 백성 개개인이 문둥병자와 같이 이스라엘 진 밖에 쫓겨나야 할 약자요 죄인임을 알라는 것이다. 이때 미리암은 이스라엘 전체의 대표적 모습이었다. 10-13절에서도 이웃에게 꾸어줄 때도 스스로 집안에 들어가 저당을 잡지 말고 꾸는 자가 스스로 주는 것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그가 가난한 자거든 저당물을 해질 때에 반드시 돌려주라고 말씀하고 있다. 왜냐하면 가난한 자가 저당 잡힐 것은 옷밖에 없는 데, 가난한 자들에게서 있어서 옷은 밤에 잘 때에 이불로써 요긴하게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참고 암 2:8). 14-15절에서는 곤궁하고 빈한한 일군의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지 말라는 것도 가난한 일군은 그날 품삯이 그날의 생계인데 그것을 미룬다면 그것은 곧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고 그것은 곧 약자와 가난한 자를 압제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16절에서 “아비는 그 자식들을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비를 인하여 죽임을 당치 않을 것이라 각 사람은 자기 죄에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는 말씀은 인간은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멸망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죄 때문에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쯤에 와서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이제까지 약자와 가난한 자를 압제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는데 약자의 입장에서 1-15절의 말씀을 받아들인다면 약자는 강자의 도움으로 살아가게 된다고 착각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도 늘 약자의 편에서 약자와 가난한 자를 도우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누구나 자기 죄 때문에 멸망 받아야 마땅한 존재임을 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약속의 땅에서 살 수 있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강자는 약자를 압제해서는 안되며, 약자는 약자대로 자신의 신세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한탄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17절도 객이나 고아라고 해서 송사를 억울하게 하지 말고, 과부의 옷을 전집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19-22절의 말씀도 고와와 과부를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이다. 밭에서 곡식을 벨 때 벨 것을 잊어버린 밭이 있거든 다시 가서 베려고 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서 그냥 두라고 하신다. 감람나무나 포도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제까지의 말씀들은 결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이렇게 지키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정신을 가지고 있을 때 이러한 모습들이 보여지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18절과 22절의 말씀을 핵심적인 의미로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너는 애굽에서 종이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18절),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하라 명하노라”(22절)는 이 말씀들은 ‘네 자신이 바로 저들처럼 옛날에 종으로 살고 압제 당하고 남의 나라에서 나그네로 살고 과부와 고아처럼 고통을 당하던 사람들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 본질을 잊어버린다면 주위에 있는 약자들을 돌아보지 않고 애굽과 같이 압제하는 모습으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약자를 통해서 나 자신의 본질을 찾아가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 가는 것이 아니라 약자가 내 주위에 있다는 것만으로 귀찮아하고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약자를 단지 도와줘야 할 대상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턱대고 약자를 도와주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약자를 압제하며 힘을 길러 강자 되기를 소원하고 살아가고자 하는 우리를 고발하고 계신다. 그러한 애굽적 심성이 인간들 속에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에 약자로 오신 예수님(사 53:2)을 압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에게 약자로 다가 오신다(마 25:40).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교회는 구제를 사명으로 알고 사회 봉사에 좀더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주위의 약자를 통해서 바로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발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내가 멸망 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모습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잠언 14:31에 보면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리에 두셨다. 때문에 가난한 사람을 돈 없다고 해서 힘이 없는 자라고 해서 멸시하고 무시하는 것은 곧 뜻이 있어서 가난하게 지으신 하나님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똑같은 형편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힘을 가진 자로, 어떤 사람은 가진 것이 전혀 없는 약자, 가난한 자로 살아간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가난하게 태어나는 것도, 가난하게 살다가 가난하게 죽는 것도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포함된 것이다. 우린 여기에 불만을 가질 수가 없다. 피조물이요 멸망 받아야 마땅한 죄인이기 때문이다.

 

 

 


가난을 이유로 하나님께 불만을 가져서는 안된다. 가난을 이유로, 가난하기 때문에 우선 돈을 벌어야 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서도 안된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가난이 없는 세계이다. 가난이 없는 세계라는 것은 물질이 풍족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과 부자에 대한 구분을 가지지 않는 세계라는 것이다. 가난은 악이고 부자는 선이라는 개념이 없는 세계이다. 가졌다 못가졌다 라는 개념으로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천국은 가난이 없는 나라이다. 영생의 나라를 소망하며 산다고 하는 신자들이 돈에 매달리고 부자 되기를 소망하며 산다는 것은, 결국 천국을 소망한다는 자체가 단지 신자라는 이름을 위한 위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약자는 나보다 힘이 없고 무시 받아야 할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돈이 없기 때문에 무시 받는 것은 자본주의 세상이다. 그러나 천국은 돈이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힘이다. 우리가 이 천국을 소망한다면 이 세상에서부터 그리스도를 힘으로 삼고 살아가는 삶이 보여져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 그 어떤 약자라도 우리에 의해서 무시를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교회가 천국이다. 그래서 성령받은 교회의 모습을, 세상 것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 그런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행 2:44-45)(2000.1.16).

 

 

 

 


신명기 25장

 

 

 

 

1-4절에 의하면 이스라엘 중에서 시비가 생겨 재판을 하여 악인과 선인이 드러나면 의인은 의롭다고 하고 악인에게는 그에 따른 정당한 태형을 가해야 한다. 가하되 형제를 천하게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이 담긴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4절을 말씀하신다.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이 말씀의 의미는 동물을 학대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고린도전서 9:9-10에서 잘 밝혀주고 있는데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 두시고 언약 백성들을 통해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실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유지시키고 보존하신다. 이런 점에서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않듯이 형제들을 천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5-10절에서는 소위 ‘시형제 결혼법’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시형제 결혼법이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금 처음 제정하여 주시는 전혀 생소한 것이 아니라 고대 사회에 혈통을 보존하는 방법으로 널리 행해지고 있는 풍습이었다. 창세기 38장에서 유다와 다말의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 백성들도 전혀 알지 못했던 제도가 아니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들에게 율법으로 주셨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시형제 결혼법이란 당시 사회의 풍습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즉 언약 백성에게 계시로 주어진다는 면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계시적 차원에서 주셨기 때문에 혈통을 보존하는 차원이 전적으로 배제된다. 이방 민족과 같은 것을 행할지라도 어디에 목표를 두고 어떤 의미로 행하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그 뜻을 드러내어야 하는 자들이 이스라엘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시형제 결혼법이라는 율법을 통해 드러내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6절에 의하면 “그 여인의 낳은 첫 아들로 그 죽은 형제의 후사를 잇게 하여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을 보존하여 그 이스라엘을 통해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시고 언약을 성취하시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언약의 나라가 끊어짐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방편으로 자식이 없는 형제의 자식을 대신 낳도록 한다는 것은 자기 이름의 희생이다. 즉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을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신 그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속에 담고 있는 메시야의 희생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계시가 바로 이러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하신 것은 그 아들을 아브라함이 바치는가 아닌가를 보시기 위함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마음을 몰라서 시험하신 것이 아니었다.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요구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들을 버리고 진정한 언약의 후손을 바라보게 하신 것이었다.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희생의 마음에 동참한 것으로 보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독자 이삭을 포기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는 것을 동일한 믿음으로 말씀하셨다.

 

 

 


그러나 형제의 자식을 낳는 것을 거부하는 자는 “그 형제의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잇기를 싫어하는”(7절)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을 통해 약속의 후손이 오심으로 성취되는 영생을 거부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이런 자들에게는 “그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 형제의 집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할 것이며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기운 자의 집이라 칭할 것이니라”(9-10절)고 했다.

 

 

 


여기서 신을 벗긴다는 것은 종의 모습으로 되돌린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언약의 후손을 잇는 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애굽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의 희생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의 자식을 낳아주기를 거부한 자는 신을 벗겨 애굽에서 건져냄을 받기 전의 상태, 즉 종의 상태로 되돌린다는 뜻이다. “이스라엘 중에서 그의 이름을 신 벗기운 자의 집”이라고 칭하게 되는 것은 계속적으로 그에게 수치와 모욕을 주자는 뜻이 아니라 이스라엘 중에 만약 그러한 자가 있다면 그것을 보고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메시야의 희생을 바라보고 사는 나라가 이스라엘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11-12절에서 “두 사람이 서로 싸울 때에 한 사람의 아내가 그 남편을 그 치는 자의 손에서 구하려 하여 가까이 가서 손을 벌려 그 사람의 음낭을 잡거든 너는 그 여인의 손을 찍어 버릴 것이고 네 눈이 그를 불쌍히 보지 말지니라”고 주신 규례 역시 위에서 상고한 그러한 의미에서 처벌하라는 것이다. 즉 싸울 때에 남자의 음낭을 잡는다는 것은 언약의 나라를 이어가는 후손(씨)을 거부한다는 뜻이 된다는 것이다.

 

 

 


13-16절에서는 저울추를 큰 것 작은 것, 되를 큰 것, 작은 것을 두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오직 십분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십분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15절)고 하셨다. 이 말씀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정직하게 살라는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언약의 나라로 후손을 이어간다는 것은 잘 사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저울추와 되를 큰 것과 작은 것을 둔다는 것은 저울과 되를 속이는 짓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15절 하반절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장구하리라.” 즉 살고 죽는 문제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러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서 장구함, 즉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는 것은 인간이 잘살기 위한 목적으로 장사하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언약의 나라는 자기 이익을 위해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오직 언약의 후손인 메시야를 소망하며 살아가야 한다.

 

 

 


17-19절에서는 과거에 출애굽 할 때에 이스라엘을 공격하였던 아말렉을 반드시 기억하여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왜 이렇게 잔인하게 말씀하시는가? 우리는 이렇게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왜냐하면 출애굽기 17:8 이하에 보면 본문 1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말씀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곧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를 길에서 만나 너의 피곤함을 타서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느니라”(18절). 이스라엘의 피곤함을 틈타 약한 자들을 공격했다는 것이 그렇게 크게 문제삼을 만한 일인가?

 

 

 


출애굽기 17:16절에 보면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고 했다. 여기 ‘여호와께서 맹세하신다’는 말을 성경 난하 주(foot note)에 보면 “여호와의 보좌를 치려고 손이 들렸으니”라는 말과 같은 의미라고 나타내고 있다. 즉 여호와의 보좌를 공격하려고 한 것이 아말렉의 죄악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신명기 본문에서는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이스라엘에게 약자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셨다.

 

 

 


약자의 하나님으로 나타내셨다는 것은 애굽에서 종으로 약자로서 억압당했던 이스라엘을 건지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아말렉이 이스라엘의 약한 자들을 공격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좌를 치려고 했다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하나님은 보신다는 것이다. 아말렉이 약자를 공격하고 자신의 힘을 과시한 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성을 무시한 마귀적 행위였다. 이 모습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의 모습 속에서 그대로 다 드러났다. 그래서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너희의 아비는 마귀”라고 하시고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마 23:33)라고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아말렉을 상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말렉으로 상징된 비언약적 정신과 끝까지 싸우신다. 그 이름을 천하에 도말하기까지 싸우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나라는 “그 이름을 이스라엘 중에 끊어지지 않게 할 것”(6절)이지만 비언약적 나라는 “천하에서 그 이름을 도말하시겠다”(19절)고 하심으로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남기는 작업을 홀로 계속 하시는 것이다(2000.1.23).

 

 

 

 


신명기 26장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땅에 들어가서 거기 거할 때, 그 토지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취하여 광주리에 담고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제사장에게 나아가 “내가 오늘날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고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리라고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3절)라고 고백하라고 말씀하셨다.

 

 

 


1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하시는 땅”이라고 했고 2절에서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그 토지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라고 하셨다. 즉 하나님께서 약속에 의해 주신 땅이 아니고서는 이런 말씀이 실행될 수 없다는 뜻이다. 오늘날 이런 말씀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취직을 해서 받은 처음 봉급은 맏물이기 때문에 전체를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고 가르치는 교회들도 있는 것을 보았는데 말씀을 왜곡해도 너무한다는 생각이 든다.

 

 

 


본문의 말씀은 결코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 의미가 있고 그 땅의 어떤 한 곳에 계시의 핵심이 부여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얻은 것을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2절)으로 가서 맏물을 드리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에 드릴 수 있는 땅이 약속의 땅이고 또한 인간의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신 것을 드리는 땅이다.

 

 

 


따라서 하나님께 맏물을 드린다는 것은 단순히 바치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이루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차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두신 이 땅에서 우리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로 돌려 드린다는 고백이 맏물을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맏물이란 단어적 의미는 처음 맺은 열매라는 시상적인 의미에서 맏물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표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전체를 드린다는 뜻으로 드리는 것이 맏물이기 때문에 그것은 대표이다.

 

 

 


그냥 가나안 땅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사 얻게 한 땅이라고 구제적으로 언급을 하고 있는 것은, 결국 그 땅에 들어가게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 덕분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덕분에 약속의 땅에 들어갔으면 약속의 땅에서 주어지는 것, 누리는 것, 그 모두는 하나님 덕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약속의 땅에 들어오지 못했을 것이고, 들어오지 못했다면 약속의 땅에서 얻은 모든 소산물들은 자기들의 것이 될 수 없었음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 손수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김을 매면서 농사를 지어서 소득을 거둬들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모두가 하나님 덕분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는 말은 누가 할 수 있는가? 이 말은 '우리는 하나님 덕분에 이 땅에 들어왔다. 하나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애굽의 종으로 고생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팔자였다'는 것을 항상 잊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 맏물을 하나님이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은 애굽의 종으로 살던 우리가 이렇게 자유를 누리고 약속의 땅에서 농사 짓고 살아가면서 이런 풍성한 소득을 거둬들인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가를 묻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결코 가나안에서 거둬들인 소산물의 처음 것이 아니었다. 즉 곡식으로서의 맏물을 원하신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곡식 자체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신자들이 교회에 바치는 돈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하고, 몸으로 봉사하는 것을 기뻐하신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이러한 거짓말은 결국 저주를 쌓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원하신 것은, 곡식으로서의 맏물이 아니라 맏물을 들고 오는 그 마음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마음을 원하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맏물을 가지고 어디로 가는가? 왜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가지고 가라고 하셨는가? 여호와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은 제사가 드려지는 곳을 말한다. 즉 피가 흘려지고 하나님의 희생이 있는 곳으로 맏물을 들고 가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땅의 소산물은 모두가 하나님의 희생 덕분에 주어진 은혜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시기 위해서이다. 맏물의 출처가 어디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맏물을 들고 왔을 때 제사장은 그것을 받은 후에 이스라엘의 옛날 처지와 현재의 은혜에 대해서 되새겨 볼 것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5-11절까지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이 어떤 상태에서 벗어나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었는가를 언급하고 있다. 5절에 보면 "내 조상은 유리 하는 아람 사람으로서"라고 말한다. 아람 사람이란 아람 지역에서 오래 살았지만 그 지역에 융화될 수 없는 자로 살았던 야곱을 의미한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아브라함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나그네로 한곳에 정착하여 안정된 생활을 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다니는 유랑민의 삶을 살았다. 즉 나그네였다.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의 조상이다. 이스라엘의 조상이 유리 하는 사람이었다면 그 후손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유리 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약속의 땅을 주시고 안식을 누리게 하신 것이다. 이것을 맏물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되새기라고 하시는 것이다. 결국 이 맏물은 우리의 손으로 거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루어진 은혜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게 되는 것이다.

 

 

 


맏물을 바친다는 것은, 맏물만 바치면 나머지는 우리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즉 나머지에 대한 인간의 소유권을 인정하기 위해서 맏물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맏물, 처음 것이란 처음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뒤에 생산되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대표되는 것을 말하기 위해 맏물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다.

 

 

 


11절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을 인하여 너는 레위인과 너의 중에 우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는 말씀에서 복이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이 은혜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은혜를 알고 있기 때문에 맏물을 가지고 자기 혼자만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레위인, 객과 함께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이다.

 

 

 


레위인이나 객은 똑같은 세상의 것을 소유하지 못한 자들이다. 세상 것을 소유하지 못했다면 자기들의 힘으로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이들에게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생이며 고통일 것이다. 오늘날도 소유 없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고통이다. 그런데 그러한 레위인과 객이 어떻게 복을 인식하며 다른 백성들과 함께 즐거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이스라엘이 레위인과 객을 자기들의 즐거움에 참여시켰을 때 가능하다. 즉 이스라엘이 레위인과 객과 함께 나누었을 때 소유 없는 그들이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제 삼 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문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고 하신 것이다(12절).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맏물이 되셨다. 대표되시고 구원받는 처음이 되셨다. 십일조를 함으로 그리스도안에서 주님과 연합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믿음으로 된다는 말은 믿으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자기 백성들)의 대속은 예수님 외에 어떤 자도 이루어 낼 수 없었으며 그것을 오직 십자가를 통해 하셨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말씀을 지켜서 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베푸셔서 주님의 말씀을 실행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도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날 너를 자기의 보배로운 백성으로 인정하시고 또 그 모든 명령을 지키게 하리라 확언하셨은즉 여호와께서 너의 칭찬과 명예와 영광으로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그 말씀하신 대로 너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18,19절)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반드시 성민으로 만들어 내실 것이다. 오늘날도 동일하게 이 말씀이 믿어진 자가 성민이다(2000.2.6).

 

 

 

 


신명기 27장

 

 

 

 

이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가장 먼저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지를 말씀하신다. 2,3절에 보면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이미 건넌 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네가 들어가기를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하리니”라고 하셨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고 그 위에 율법의 말씀을 기록하라고 하셨다. “큰 돌들”을 세우라고 하신 것을 보아서 아마 율법의 말씀의 어떤 부분을 기록하게 하신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상당한 분량의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것 같아 보인다. 석회를 바르라고 하신 것은 아마 눈에 잘 띄도록 한 것이리라 생각된다(참고 마 23:27).

 

 

 


그러면 하나님께서 율법의 말씀을 이토록 많이 기록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4절에 보면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4절)라고 말씀하셨다. 율법의 말씀을 새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라고 하신다. 신명기 11:29에 의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너를 인도하여 들이실 때에 너는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 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고 하셨는데 에발 산이라면 저주를 선언하는 산으로 되어 있다. 왜 하필 저주를 선언하는 산에다가 율법의 말씀을 새긴 돌들을 세우라고 하시는가? 저주를 선언한다고 해서 저주의 산이 아니고 축복을 선언한다고 해서 축복의 산이 아니라 이 두 산은 서로 마주보고 있는 상황 하에서 서로 축복과 저주를 선언함으로 저주를 선언하는 산이 축복의 산이 되고 축복을 선언하는 산이 저주의 산이 된다. 이런 점에서 저주의 산에 돌을 세우고 율법의 말씀을 새긴다는 것은 저주의 자리에서 축복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애굽에서 탈출하여 홍해를 건너는 것과 마찬가지로(고전 10:2) 기존의 세상과는 결별하고 전혀 새로운 세상에 사는 삶이다. 새로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땅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으로 하나님의 말씀인 약속을 얼마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느냐에 따라서 복의 상태냐 저주의 상태냐로 갈라진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에발 산에 기록하여 세운다는 것은 저주의 자리에서 복을 바라보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저주 아래에 말씀을 주셨다는 것은 말씀이 앞으로 이룰 복을 바라보게 하신 것이다.

 

 

 

 

즉 말씀이신 그리스도 그분이 저주 아래로 친히 들어오셔서 약속을 성취하시고 복을 주시는 형태로 구원을 이루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복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복이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영생이다. 때문에 성도란 자신의 죄 때문에 저주 아래에 있고 그 저주 아래에서 죽어 마땅한 존재임을 아는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복이 되심을 아는 자이다.

 

 

 


그런데 5절에 의하면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철기를 대지 말지니라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고 했다. 철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이나 망치 같은 것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연석을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사무엘상 13:19,20을 보면 “때에 이스라엘 온 땅에 철공이 없어졌으니 이는 블레셋 사람이 말하기를 히브리 사람이 칼이나 창을 만들까 두렵다 하였음이라 온 이스라엘 사람이 각기 보습이나 삽이나 도끼나 괭이를 벼리려면 블레셋 사람에게로 내려갔었는데” 라고 말씀하고 있다. 출애굽 할 당시의 이스라엘은 철을 사용하거나 철을 다루는 문화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철을 사용해서 돌을 다듬고 제단을 만든다는 것은 철기를 사용하게 될 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철기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블레셋과의 교류를 하여야만 가능한 것이다.

 

 

 

 

블레셋과의 교류는 곧 이방 문화의 유입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의 신들(우상)을 받아들이게 되는 가능성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다. 반면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그대로 즉 인간이 하나님께 바치고자 하는 정성, 문화 등이 가미되지 않는 상태 그대로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그것이 곧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원하신 것만 받으시는 분이시다.

 

 

 


번제와 화목제란 제사의 기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희생을 다 보여주신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림으로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약속의 땅까지 이끌고 왔는지를 알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희생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고 왔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왜 이런 확인이 있어야 하는가? 그것은 약속의 땅이 말씀만이 실현되는 땅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지향하는 바가 곧 메시야를 이 땅에 보내시어 저주 아래에 있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을 건지시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러한 확인을 늘 가지도록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만든 예배당(성전), 예배 순서, 우리의 전도나 기도, 봉사, 헌금이 필요하신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만든 제단만을 필요로 하시며 그것을 통해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이시다. 번제와 화목제를 통해 보여주셨듯이 하나님은 인간의 노력이나 인간의 문화를 가나안 땅에 남기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희생만 약속의 땅에 남기고 선포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의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미리 차단하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홀로 이루신 것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누리는 차원에서 사는 삶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홀로 이루신 하나님의 자기 희생인 십자가 그것을 알기를 원하시고 그것만 믿기를 원하신다. 십자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누리는 자가 성도요 교회이다.

 

 

 


9-10절에 보면 “모세가 레위 제사장들로 더불어 온 이스라엘에게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아 잠잠히 들으라 오늘날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복종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과 저주를 스스로 결정해서 무엇을 하나 따르라는 것이 아니다.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말씀에 복종해야 하고 규례와 명령을 따르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말씀을 지키면 복을 받고 말씀을 어기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기 때문에 복의 상태에 있는 것을 드러내고 보여줄 뿐이다.

 

 

 


이런 점에서 11절 이하에서 말씀하는 12가지 저주에 대한 말씀은 이것들을 어기지 말고 잘 지키라는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저주를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이 이러한 저주의 상태에 있는 것을 싫어하신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하다는 것이다. 우상을 섬기는 것,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것, 이웃의 경계표를 마음대로 옮기는 것,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것, 고아나 과부, 객을 억울하게 하는 것, 계모나 짐승, 자매, 장모와 구합하는 것, 이웃을 암살하는 것, 뇌물을 받는 것, 율법의 말씀을 실행치 않는 것 등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심해서 지키면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싫어하신다는 마음을 알고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로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사는 자여야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 12가지의 저주는 한 마디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해서 막연하게 좋은 것을 주며 선을 베푸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신 하나님의 희생을 증거하고 드러내는 역할을 말하는 것이다. 약속의 땅에 하나님의 희생만 드러나야 약속의 땅이 약속의 땅다운 복의 상태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비록 약속의 땅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저주 아래에 있는 상태이다. 마찬가지로 비록 교회 다닌다고 할지라도 십자가를 알지 못하면 저주 아래 있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2000.2.20).

 

 

 

 


신명기 28장

 

 

 

 

1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우리는 이 말씀의 문맥과 상황을 무시한 채 너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오늘날도 우리가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말씀을 지켜 행하며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복을 받고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목사가 심방을 다니면서 자기 말을 잘 들으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엄포를 놓는다. 그런 목사는 무당이다. 지금 한국 기독교는 무속 신앙과 섞여 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이 무엇인지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철저히 성경에서 점검하지 않으면 안된다.

 

 

 


복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모든 인간은 복 받기를 원하고 있다. 그래서 베개, 이불, 숟가락 등 집안 곳곳에 ‘’이라는 글자를 형상화해서 넣고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마음을 버리지 않고 여전히 교회에 찾아 나오고 있다. 그러다 보니 목회자들은 민중들이 복을 원한다는 것을 알고 그들이 알고 있는 복의 개념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복의 개념이 다른지 같은지 점검도 없이 막무가내로 복을 남발하면서 사람을 모으고 있다. 그래놓고는 주님의 축복이라고 헛소리를 하고 있다.

 

 

 


인간들이 원하는 복은 자기 자신 또는 자신과 관계된 것들의 팽창이요 확장이다. 자기 자신과 관계되지 않는다면 팽창이 되든 확장이 되든 별로 상관이 없는 것이다. 속담에도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의 팽창이나 확장, 번성, 발전은 결코 복이 아니다. 이렇게 인간은 이미 자기 자신이라는 것에서 복의 개념을 잡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이란 무엇인가? 창세기 2:3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이 말씀을 가지고 결코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 자체에 복을 주셨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창세기 1:28에서도 복을 주셨다는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만약 일곱째 날 자체에 복을 주셨다는 것으로 본다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날에 차별이 생기게 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날은 복되고 어떤 날은 복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곱째 날이 복되다고 한 것은 창조한 날 자체에 복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완성을 담고 있는 날이기 때문에 복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창조하신 상태 전체가 복되다는 의미이다. 즉 말씀이 복을 함유하고 있는 상태이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선언하시고 그 말씀하신 대로 다 성취되었다는 것이 복의 상태이다. 환언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졌고 그 말씀대로 하나도 어긋나는 것이 없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지어졌기 때문에 모든 것들이 다 순종하게 된 상태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곧 복이라는 의미이다. 창조함을 받은 모든 피조 세계가 하나님의 복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이탈되었다. 하나님은 그것을 저주의 상태로 표현하셨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고 했고 또한 아담으로 하여금 범죄하게 만든 뱀에게도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창 3:14)고 하셨다.

 

 

 


인간과 모든 피조 세계는 하나님의 복의 상태에서 벗어나 저주의 상태에 있게 되었다. 특별히 누가 저주를 하나 안하나 저주의 상태에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죄의 권세에 매여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복과 저주를 말씀하신 것은 누가 누구를 저주하고 안하고 하는 그런 문제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복의 상태와 저주의 상태가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명기 27:9에 보면 이스라엘을 두고 하나님께서 이미 애굽에서 건져낸 하나님의 백성으로 전제하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은 인간이 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을 먼저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복에 대한 말씀보다 저주에 대한 말씀이 훨씬 많다. 1-14절까지 복에 대해 말씀하는 반면, 15-68절까지 뿐만 아니라 이미 상고한 27장에서도 저주를 말씀하신 것을 볼 때에 인간은 본래 저주 아래에 있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저주 아래에 있는 것이 마땅한 데 복을 말씀하신 것은 누가 이런 복의 상태에 있을 수 있는가 하는 뜻으로 말씀하셨다. 그에 대한 답변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누가 하나님의 복 안에 있는가 하는 물음은 누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가 하는 뜻이다. 그렇다면 누가 온전히 순종했는가? 1절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하나님은 “”라는 단수를 쓰고 있다. 신명기 29:15에 의하면 “오늘날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여기 선 자와 오늘날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에게까지니”라고 했다. 즉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는 것이 아니라 후손으로 오실 누군가와 언약을 맺는다고 하셨다.

 

 

 


갈라디아서 3:15에서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고 함으로 언약의 궁극적인 후손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밝히고 있다. 결국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는 상대자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라고 지칭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대치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의 상태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신 것이 신명기 28장의 내용이고 동시에 인간이 저주 아래 있는 상태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저주와 복의 상태, 이 두 가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복의 상태에 계시는 분이심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친히 저주 아래 오셔서 인간들과 같이 되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복의 상태로 들어가게 하신 것이다. 때문에 성경은 인간이 세상에서 얼마나 풍족하고 얼마나 좋은 것을 누리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복이라고 말하지 않고 도리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생이 복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3)고 했고, 또한 신약에서는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생을 신령한 복이라고 나타내고 있다. 궁극적으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복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것 자체가 복이다. 이것을 믿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 안에, 곧 복의 상태에 있는 자이다. 따라서 성도는 늘 겸손하게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자이지 스스로 말씀을 지켜보겠다고 나서는 자가 아니다(2000.3.5).

 

 

 

 


신명기 29장

 

 

 

 

앞의 28장에서 복과 저주에 대한 말씀이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이 여기 29장에서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지적하는 것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4절에 보면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시지 아니하셨다고 하지만 이것은 이스라엘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책임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그만큼 완악하기 때문에 아직도 하나님이 애굽에서 그들을 건져내어 광야를 거쳐 인도하여 오신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이런 식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깨닫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하나님께서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다. “너희로 떡도 먹지 못하며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못하게 하셨음은 주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나실인에게 적용하는 무슨 특별한 규례로 이스라엘을 통제했다는 뜻이 아니다. 떡과 포도주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식사와 음료수였다. 이는 땅에서 나는 곡식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은 광야를 지나면서 땅에서 나는 것을 먹고살았던 것이 아니라 만나를 먹고살았다. 하나님께서 광야 과정 중에 내내 만나를 먹이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만나란 단순히 먹고사는 양식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만나는 광야 중에 계속 하늘에서 내려졌다. 땅에서 나는 것을 먹지 않고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것을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사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 자신을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만나를 가지고 살게 하셨던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었던 것은 만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고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보여주시고자 했던 약속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계속된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경험하면서도 결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지 못하고 먹고사는 일에 급급했다. 그래서 모세는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고 탄식하는 것이었다. 실로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오늘날까지’ 우리들도 주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약속의 성취 때문에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신 결과이다(고전 12: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압 땅에 세워놓고 다시 약속을 주시게 된 것이다. 언약의 내용이 달라졌기 때문에 언약을 변경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언약의 내용은 호렙산이나 모압 땅이나 동일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언약을 반복해서 다시 주시는가?

 

 

 


호렙산에서의 언약은 이스라엘이 광야 40년 생활을 하기 전이었다. 그러나 모압 땅에서의 언약은 광야 40년의 생활이 마무리될 즈음에 주어진 언약이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이스라엘을 광야 과정을 지나게 한 다음에 다시 언약을 주심으로 언약을 하나님 편에서 철저히 이루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스라엘은 광야 과정을 거치면서도 결코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 편에서 계속적으로 언약을 맺으심으로 언약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이스라엘 대신 새로운 이스라엘을 세워 그로 하여금 언약을 세우고 성취하시기 위한 것 때문이다.

 

 

 


그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 바로 14,15절이다. “내가 이 언약과 맹세를 너희에게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여기 선 자와 오늘날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에게까지니.” 이 말씀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대대로 후손과 언약을 끝없이 이어가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후손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언약의 후손을 세워 그를 통해 언약을 성취하실 것임을 말씀하신 것이다(갈 3:16).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셔야 되는가? 왜 이렇게 하나님 편에서 하시지 않으면 안되는가? 애굽에서 광야 40년이 지나도록 이스라엘은 결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들이 되지 못했다. 그것은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임을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셨다. 그래서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날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위로하여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을 강퍅케 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을 멸할지라도 평안하리라 할까 염려함이라”(18,19절)고 하신 것이다. 그러면서 “여호와는 이런 자를 사하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분노와 질투의 불로 부을 것이며 기록된 모든 저주로 더할 것이며 필경은 이스라엘을 천하에서 도말하실 것”이라고 하셨다(20,21절).

 

 

 


그리고는 22절 이하에서 하나님은 참으로 충격적인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후손들과 객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는 재앙을 보고 놀라며, 온 세상 사람들도 놀라서 말하기를 ‘어찌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이 땅에 그렇게 진노하시는가? 무슨 뜻으로 그렇게 하시는가?’ 라고 물을 것이며, 사람들은 ‘이스라엘이 그들 조상들이 세운 언약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좇아 섬겼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망했고 가나안에서 온 세상에 흩어졌다고 말할 것이라고 한다. 이스라엘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어서 망했다고 할 것이라고 한다. 소돔과 고모라는 선민이 아니었는데 이스라엘을 그들에 비기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소돔과 고모라처럼 될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미래를 훤히 아시고 모세 역시 그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훤히 내다보고 있다. 이스라엘의 본성을 알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본성은 죄인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하나님과 약속을 맺고 다짐을 해도 별수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요즈음 식으로 말하자면 예수를 잘 믿기로 서약을 하고 세례를 받고 다짐을 해도 삼일을 못가고 별 수가 없더라는 말이다. 장담을 할 수가 없다. 부모가 믿으니 자식도 믿는다는 것을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의식적인 종교 즉 주일에는 교회에 나오고 예배하니까 하고 기도하자니 기도하고 세례받으니 세례받는다고 해서 세상의 유혹에 빠져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들 속에는 이스라엘과 같은 죄성이 여전히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는 죄인이니까 그냥 그대로 죄를 지으면서 살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주의 영에 의해 붙잡힌 바 된 자는 결코 그렇게 살아갈 수 없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모습이 표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아니라 늘 그 사고나 행동의 중심이 십자가에 맞추어져 자신의 죄를 보고 그 안에서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는 자라는 뜻이다.

 

 

 

이것을 29절은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내가 구원 받는가 아닌가 하는 것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하고 그 분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살아가는 자가 성도의 모습이라는 의미이다.

 

 

 

 

때문에 29절 끝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는 말씀은 오늘날 우리가 열심 노력해서 순종하면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 위해서 완전히 율법을 지키시고 이루셨다는 것을 믿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다. 주님이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구원이란 주님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온전한 완성 안에서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을 누렸던 것과 같은 상태로 누리는 것이지 죄인의 노력으로 무엇을 얻는 것이 아니다(2000.3.12).

 

 

 

 


신명기 30장

 

 

 

 

신명기 29장에서 하나님은 모압 땅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우신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결과로 복과 저주에 대해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주를 내리실 것을 말씀하셨다. 신명기 29:28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또 진노와 분한과 크게 통한하심으로 그들을 이 땅에서 뽑아내사 다른 나라에 던져 보내심이 오늘날과 같다 하리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범죄하는 상태로 될까봐 염려하시는 것이 아니라 범죄하는 상태로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약속의 땅에서 뽑아내어 이방 땅에 던지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지금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모압 땅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언약을 받고 있는 입장이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도 전에 약속의 땅에서 쫓겨날 것을 미리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어떻다는 것을 미리 아신다는 뜻이다.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 염려하셔서 사전에 조치를 취하신다는 의미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될 것을 미리 내다보고 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면 이스라엘을 이방 땅에 던지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1절에 보면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방 땅에 있을 땅에 “이 일이 마음에 기억이 나거든”이라고 하셨다. “이 일”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말씀을 볼 때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로 쫓겨간 가운데서 다시금 여호와께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은 “이 일이 마음에 기억 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다른 나라로 쫓겨가는 징계를 받았다고 해도 그 가운데서 “이 일”이라는 것을 마음에 기억하지 못할 때는 여호와께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압 땅에서 언약을 맺으신 일, 즉 복과 저주에 대한 언약의 말씀이다.

 

 

 


이방 땅에서 언약의 말씀이 생각나거든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2,3절)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였을 때에 약속의 땅에서 몰아내셔서 이방 땅에 그냥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약속의 땅으로 불러모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이스라엘이 범죄하도록 버려두셨다가 이방 땅에 쫓아 내시고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여 회개하면 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다시 약속의 땅으로 불러모으시는 이런 방식으로 일하시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이스라엘의 죄를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6절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마음에 할례를 받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할례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 명하셨다(창17장).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할례를 명하신 것은 성기의 표피 끝을 잘라내게 하심으로 아브라함의 생리적인 현상으로 말미암아 후손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에게 거세를 한 것과 같은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마음에 할례를 한다는 것은 인간의 죄인된 마음을 잘라낸다는 의미에서의 마음의 할례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 후손들의 마음의 할례를 하나님께서 행하신다고 말씀하셨다. 마음의 할례를 행하심으로 비로소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실로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망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도 없는 그 죄성을 하나님 편에서 끊어주시지 않으면 안된다. 죄의 본성을 잘라내고 새로운 마음으로 바꾸어주시지 않는 한 인간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때문에 하나님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11절)고 하셨고 또한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와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14절)고 하셨다. 예레미야 31:31-34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참고 겔 36:26-28).

 

 

 


결국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마음을 바꾸고 더 이상 돌판에 기록한 말씀이 아니라 바꾼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새겨 언약의 말씀을 행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인간의 마음은 심히 부패하여 근본적으로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원수로 삼고 있다(롬 1:21-31).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 12:34)고 하심으로 사람의 행위는 나타나기 이전에 이미 마음이 죄에 의해 지배받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가? 결코 없다. 단언코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신을 부어주셔서 새 마음으로 주시고 거기에 하나님의 법을 새겨 그 언약의 말씀을 순종하게 하시는 것이다. 그 일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성취하셨던 것이다. 십자가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실 수 있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게 하시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2-14). 그래서 예레미야 31:31-34의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에레미야서를 인용하면서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히 10:15-18).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기대하는 것은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지 않는 인간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언약도 잊어버리고 땅의 풍족함에 빠져서 살아가게 될 것을 아셨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기대를 걸고 있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왜 쫓겨나야 하는지 그 이유를 미리 말씀하심으로서 쫓겨났을 때 이스라엘이라는 자신들은 하나님 앞에 도무지 희망이 없고 오직 언약에 의해 오실 분, 즉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것을 바라보게 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언약의 성취자로 보내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스라엘로 하여금 실패하게 하시고 철저한 죄인임을 보게 하신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모든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이다.
구원이란 우리 쪽에서 대충 말씀을 지킴으로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말씀에 실패한 자리에서, 인간 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에만 모든 희망을 두고 사는 것이 참된 백성이며 구원받은 자이다. 따라서 말씀에 실패한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하게 지킬 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해서 어느 정도는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많이 듣는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자기에게 편리한 대로 적당히 조절한 것에 지나지 않다. '어느 정도'라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고 어느 정도는 말씀을 지키는 것으로 성공하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에 결국 자기의 종교적 행동을 높이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는 분명히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모습이다.

 

 

 


왜냐하면 신명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순종하면~하겠다”라고 표현된 말씀이 결코 조건으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성취자를 계시하기 위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20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면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조건으로 말씀을 잘 지키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인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사랑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말씀을 좇아 살게 되어 있다. 아니 주의 영이 자기 백성들에게 새 마음을 주시고 그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새겨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좇아 살게 하시는 것이다(2000.3.12).

 

 

 

 


신명기 31장

 

 

 

 

6절 같은 말씀은 우리가 참으로 좋아하는 성경 구절이다.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 하고.” 이 말씀은 여호수아 1장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데 우리는 너무도 쉽게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자신을 위한 하나님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하는 사실만 가지고 좋아하는데 이 구절은 결코 자신에게 막무가내로 적용해야 하는 구절이 아니다.

 

 

 


2절에 의하면 “곧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날 일백이십 세라 내가 더는 출입하기 능치 못하고 여호와께서도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내가 오늘날 일백이십 세라 내가 더는 출입하기 능치 못하고”라는 말이 늙어서 기력이 없어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신명기 34:7에 보면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고 모세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늙어서 수명이 다하여 죽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2절 하반절에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요단을 건너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는 말씀이다. 즉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일하고자 하시는 것이 끝났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세는 도구로써 하나님의 일에 대해 할 일이 끝나서 죽는 것이다.

 

 

 


민수기 20장에서 있었던 사건을 보면 하나님께서 지팡이로 반석을 가르쳐서 물을 내라고 하셨는데 모세는 반석을 두 번이나 쳤다. 반석을 두 번 쳤다는 것은 단순히 혈기를 부린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드러내지 못한 것이었다(민 20:12).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것은 약속의 땅으로 이스라엘을 이끄시어 언약을 성취하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그 성품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불신앙이다. 불신앙은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시는 땅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은혜가 통용되고 그 은혜 때문에 어린 양의 희생을 생각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확실한 자라고 여기는 모세를 하나님은 대표적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셨다. 모세도 들어갈 수 없었다면 이스라엘의 어떤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사람이 죽는 것은 나이에 의한 것이거나 환경 때문이거나 수명이 다하여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일에 모세의 역할이 끝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중심으로 해서 일하시지 인간들의 일에 맞추어 인간들의 형편을 고려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러기 때문에 모세는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일에 도구요 소모품으로 쓰임받은 것으로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 입장에서 자신은 요단을 건널 수 없다는 뜻으로 말하는 모세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자신의 실패에 대한 부끄러움을 말하면서 자신의 죄악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말씀이 성취된다는 측면에서 모세는 자신의 부끄러움도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이”라고 했고, 4절 하반절에도 보면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명령대로 그들에게 행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 즉 언약하신 대로 성취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관심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을 위해 말씀을 성취하는 일에 합당하지 않은 걸림돌이 된다면 비록 모세라고 할지라도 제거하시고 자신의 일을 이루어나가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대신하여 여호수아를 세우도록 하신다. 단순히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로 이스라엘을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도구로 모세를 대신해서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때 주시는 말씀이 6절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단순히 여호수아더러 힘을 내고 마음을 강하게 해서 담대함을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는 의미가 아니다. 사람이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함을 가진다고 해서 약속의 땅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말씀하신 대로 이루고자 하시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6절 하반절에 의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마음을 담대히 해서 가나안 땅을 쟁취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담대하고 강한 마음을 주시도록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면 무조건 좋은 의미로만 생각한다. 물론 좋은 의미이다. 그러나 무조건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내게 채워주는 그런 좋은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 자신이 원하신 영생을 주신다는 의미에서 좋은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고 하신 것은 자신의 언약을 성취하는 목적을 가지고 그것을 이루기까지는 떠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에게는 아픔과 고난이 있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가고자 하는 죄의 본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반대나 거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반드시 이루어 내시는 분이시다. 이것을 가지고 성경은 전능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어 내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한다는 것은 여호수아나 혹은 우리 인간들이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함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집어넣으신다는 의미이다. 29:14에 의하면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앞에서 우리가 살펴보았지만 그 말씀은 결코 하나님의 허풍이 아니라 언약을 온전히 이루시는 그 날에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이 땅에 보내셔서라도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행하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의지의 표명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을 성취하시기까지 이스라엘을 괴롭히시겠다는 뜻이다. 왜 이스라엘에게 괴로움이 될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이스라엘이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세는 그것을 알기 때문에 14절 이하에서 이스라엘이 앞으로 어떻게 하나님께 반역할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열조와 함께 자려니와 이 백성은 들어가 거할 그 땅에서 일어나서 이방 신들을 음란히 좇아 나를 버리며 내가 그들과 세운 언약을 어길 것이라”(16절). 이것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의 선언이다. 아니 죄인에 대해서 너무도 잘 아시기 때문에 이러한 선언을 하실 수 있는 것이다.

 

 

 


분명히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다른 신을 섬기고 하나님을 멸시하며 언약을 어기게 되는 것은 뻔한 사실이었다(20절).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섬긴다고 하니까 막연하게 어떤 우상, 혹은 다른 종교로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의 언약을 거부하는 모든 행위 자체가 바로 다른 신을 섬기는 모습이다. 즉 여호와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다른 신을 섬기는 모습이다. 부자가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부자가 되는 것이 목표가 된 것이 바로 우상숭배이다(잠 23:4,5).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진노를 내리신다고 하셨다(17절). 그러나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재앙이 우리에게 임함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뇨”(17절)라고 한다. 인간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은 바로 이런 것이다. 자기에게 재앙이 없어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재앙이 내리고 이스라엘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 인해 재앙이나 고난을 피해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으로 자신의 죄에 비추어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고자 하는 자가 신자의 모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피하지 않으시고 받으심으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 성도란 그 십자가 때문에 오늘도 환난과 고난을 피해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도리어 기뻐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자이다(2000.3.26).

 

 

 

 


신명기 32장

 

 

 

 

31:30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총회에게 이 노래의 말씀을 끝까지 읽어 들리니라”고 했다. 모세는 31:27에서 고백하고 있는 바와 같이 “내가 너희의 패역함과 목의 곧은 것을 아노니 오늘날 내가 생존하여 너희와 함께 하여도 너희가 여호와를 거역하였거든 하물며 내가 죽은 후의 일이랴”고 했다. 또한 29절에서는 “내가 알거니와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한 길을 떠나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너희의 손으로 하는 일로 그를 격노케 하므로 너희가 말세에 재앙을 당하리라 하니라”고 함으로 이스라엘의 죄악, 아니 인간의 죄에 대하여 모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노래를 불러 늘 하나님을 생각하도록 했다.

 

 

 


이스라엘의 상황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더더욱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위엄을 우리 하나님께 돌릴지어다”(3절)라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향해 배반하고 반역할지라도 하나님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공평하며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정직하시도다”(4절).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선언하고 있다(5절).

 

 

 


그런데 본 장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무엇인가 하면 ‘반석’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을 반석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은 여기서 모세를 통해 왜 자신을 반석으로 말씀하시고 있는가? 31장에서 모세는 자신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이유를 과거 반석에서 물을 낼 때에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드러내지 못했었다고 말했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석에서 물을 내신 하나님이란 어떤 하나님이신가 하는 것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요소가 되는 것이다.

 

 

 


출애굽기 17:6,7에 의하면 “내가 거기서 호렙 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고 말씀하고 있다. 맛사 또는 므리바에서 있었던 이 일은 한 마디로 하나님을 시험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편에서는 함께 하신다는 증거를 보여주시며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생명의 원천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성경의 기록자들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의도를 잘 알고 있었기에 곳곳에서 하나님을 반석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시편 78:15 이하에 보면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시고 깊은 수원에서 나는 것같이 저희에게 물을 흡족히 마시우셨으며 또 반석에서 시내를 내사 물이 강같이 흐르게 하셨으나 저희는 계속하여 하나님께 범죄하여 황야에서 지존자를 배반하였도다”(시 78:15-17)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진노하신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연고로다”(시 78:22)라고 밝히고 있다. 광야의 반석에서 물을 먹었다는 것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과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드러내고 있다.

 

 

 


시편 105:41-42에서는 “반석을 가르신즉 물이 흘러나서 마른 땅에 강같이 흘렀으니 이는 그 거룩한 말씀과 그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라고 하여 반석에서 물을 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이신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은 이러한 표현법을 계속 쓰면서 하나님께서 성취하실 언약이란 자신이 친히 생명이 되시고 생명의 공급자가 되시는 것으로 나타내시면서 구원 사역을 설명하고 있다(참고 사43:14-21, 48:17-22).

 

 

 


그리고 신약에 와서는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0:4에서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말씀은 어떤 이들이 해석하는 것처럼 구약에서 모세가 쳐서 물을 내게 된 반석이 그리스도의 수난이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반석에서 물을 낸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되심을 드러내셨다는 측면에서 언약의 궁극적인 성취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본문에서 반석의 하나님으로 나타냄으로 이스라엘의 죄악과 하나님의 생명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죄악을 이야기 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 홀로 일하실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여호와께서 홀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12절). 하나님은 홀로 친히 만물을 창조하셨고 그것을 주관하시는 분으로서(6절)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셨다(13,14절).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모든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하나님을 경홀히 여겼다(15절). 경홀히 여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마귀에게 제사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이었다(17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풍족하고 배부르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었다. 그것이 죄인의 속성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광야로 불러내셔서 광야에서 만나셨다고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10절). 배부른 상황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는 없다. 우리가 보기에 풍족하고 모자람이 없는 것 같이 살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다 자기 나름대로 부족하고 무엇인가 하나님을 향해 얻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늘 이렇게 자기 중심적이다. 자기 자신의 부족을 느끼기에 그 부족을 채워서 세상에서 남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고 자존심 세워가며 살고 싶은 마음 때문에 신을 찾고 예수님을 찾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그런 의도와 상관없이 세상의 것을 없게 하셔서 만나고자 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들과 만나고자 하신 것 때문에 하나님은 항상 이렇게 일하시는 것이다.

 

 

 


아무튼 인간은 자신의 풍족을 느낄 때에 하나님을 무시하게 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서 미리 지적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나타내시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죄인들을 향해 진노하실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종말의 어떠함을 보이신다고 말씀하고 있다(20절). 그리고는 21절에서 28절의 내용을 통해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주어지는 종말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종말을 말씀하셨다고 해서 세상의 종말만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 안에는 나 개인의 종말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종말을 아는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성경은 ‘지혜’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들이 지혜가 있어서 이것을 깨닫고 자기의 종말을 생각하였으면 그들의 반석이 그들을 팔지 아니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어 주지 아니하셨더면 어찌 한 사람이 천을 쫓으며 두 사람이 만을 도망케 하였을까”(29,30절).

 

 

 


이스라엘에게 종말을 아는 것이 지혜라면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신자에게 있어서 종말을 아는 것이 지혜이다. 물론 이 말이 어느 날에 주님의 재림이 있을 것인가를 안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이 어떻게 끝이나고 내가 어떻게 끝이 나는가를 아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세상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존재이고 또한 내가 죽어 마땅한 존재임을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게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증거한 모든 말을 너희 마음에 두고 너희 자녀에게 명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46절). 이것이 바로 생명이다(47절). 오늘날 우리가 종말을 알고 산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다. 즉 종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이 중심이 된 삶을 사는 것이 성도의 모습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만이 온전한 지혜이시다. 그 지혜로 살고 있는가?(2000.4.2).

 

 

 

 


신명기 33장

 

 

 

 

신명기 33장은 모세가 이스라엘을 향해 축복을 선언하고 있다. 2절에 보면 “일렀으되 여호와께서 시내에서 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산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서 강림하셨고 그 오른손에는 불같은 율법이 있도다”라고 했다. 왜 하나님은 율법에 대하여 “불 같은 율법”이라고 표현하고 있을까? 불이란 심판의 성격을 의미한다. 즉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모두다 죽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3절에 보니까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백성을 사랑하시나니 모든 성도가 그 수중에 있으며 주의 발 아래에 앉아서 주의 말씀을 받는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발 아래 앉아서 그 율법의 말씀을 받고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기에 어떤 사건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애굽에서 탈출 할 수 있었던 근거가 된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이다. 어린 양의 피가 개입되어졌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율법에 의해 죽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월절 어린 양이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율법이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기업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을 두고 “야곱의 총회”라고 하는 것이다(4절). 그러므로 6절 이하에서 선언되고 있는 모세의 축복은 이렇게 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축복이다. 이런 점에서 여기에 나열되고 있는 각 지파들은 각 지파에 대한 축복이라는 의미로만 생각해서는 안되고 각 지파들을 대표한 이스라엘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축복의 선언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각 지파들을 통해 선언되는 축복이 율법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라는 의미이다.

 

 

 


먼저 르우벤 지파에 대한 축복을 살펴보자. “르우벤은 살고 죽지 아니하고 그 인수가 적지 않기를 원하도다”(6절). 르우벤에 대한 축복은 한 마디로 숫적으로 번성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우리는 창세기에서 야곱이 예언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데 창세기 49:3,4에 의하면 “르우벤아 너는 내 장자요 나의 능력이요 나의 기력의 시작이라 위광이 초등하고 권능이 탁월하도다마는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치 못하리니 네가 아비의 침상에 올라 더럽혔음이로다 그가 내 침상에 올랐었도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야곱의 이 예언은 르우벤을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저주하는 것 같다. 르우벤은 장자이기 때문에 야곱의 생명력이 다음으로 전해지는 시작이다. 야곱의 자손들은 이 르우벤에게서 야곱의 생명력의 영광을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그의 위엄과 영광은 뛰어나고 그 권능이 탁월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뛰어나고 탁월한 자리를 잃게된다. 왜냐하면 르우벤이 아비의 침상에 올랐기 때문이다. 즉 르우벤이 그의 서모 빌하와 통간하였기 때문에 그는 장자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상실하고 따라서 그의 자손들이 안정되지 못하고 번성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르우벤이 서모를 범했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아버지의 아내를 범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야곱이 르우벤을 저주한 것은 르우벤이 하나님을 대적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서모의 벌거벗음을 드러내는 일은 아버지의 벌거벗음을 드러내는 일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일은 노아가 술에 취하여 하체를 벗고 있었을 때에 함이 아버지의 수치심을 드러냈던 것에서 볼 수 있다. 함에게 선언된 저주는 단순히 노아가 앙심을 품고 한 독설이 아니라 언약의 후손이 이어지는 것이 죄 아래에서 부끄러운 것이 되었는데 그것을 공개하고 드러냄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행위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비웃는 것이 된다. 야곱이 르우벤을 저주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그러나 모세는 르우벤에 대한 이러한 저주와 같은 예언이 있기 때문에 그와는 반대로 수가 많아지고 힘에 세어져서 번성하게 될 것이라고 축복하고 있다. 차이가 있다면 야곱은 저주로서 죄악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었고 모세는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 때문에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뜻으로 생명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결국 생명에의 참여란 유월절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에게 주실 영생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르우벤에 대한 축복의 선언이 아니라 르우벤으로 대표되는 저주받은 죄인들이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며 축복이 주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영생에 대한 복이 어떤 것인가를 말씀하신 것이었다.

 

 

 


7절은 유다에 대한 축복을 말씀하고 있다. “유다에 대한 축복은 이러하니라 일렀으되 여호와여 유다의 음성을 들으시고 그 백성에게로 인도하시오며 그 손으로 자기를 위하여 싸우게 하시고 주께서 도우사 그로 그 대적을 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창세기에 보면 야곱 때에 흉년이 들어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러 가야 하는 일이 있었다. 요셉은 시므온을 볼모로 잡았고 남은 아들 베냐민을 데려옴으로 정탐하러 온 것이 아님을 증명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야곱이 극구 반대하자 유다는 아버지 야곱에게 자기가 죽는 한 있어도 베냐민을 보호하겠다고 했고 또한 요셉 앞에서도 자신이 아이 베냐민을 대신하여 종이 되겠다고 말했다(창 43:8-9, 44:30-34). 한 마디로 유다의 대속적 희생 정신이었다.

 

 

 


유다의 이러한 대속자 정신은 어디에서 왔는가? 간단히 말하면 다말 사건에서 왔다고 할 수 있다. 창세기 37장과 38장을 보면 유다는 자기 형제들을 떠나 아둘람 사람 히라에게로 나아갔던 적이 있다. 이렇게 한 것은 아마도 37장의 사건 즉 형제들이 요셉을 팔고 죽은 것으로 아버지에게 보고한 것에 상심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어쩌면 그것이 자신만 의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유다는 자기 형제를 떠나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고 아들들을 낳고 하는 중에 아들들도 죽고 나중에는 며느리 다말과 관계를 가지는 부끄러운 일을 하게 되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그는 다말보다 자기가 더 못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창 38:26-“그는 나보다 옳도다”). 다말은 언약의 정신에 철저했었지만 자신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실패를 통해서 그는 다시 언약을 주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그 형제들과 함께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창세기 49:8-12에서 야곱은 유다를 칭송했다. 여기서 유다가 형제들의 찬송이 된다는 것은 유다가 보여준 희생이 바로 이스라엘을 지탱하고 원수를 이기는 힘이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왕의 모습이다. 이스라엘의 왕은 이러한 모습을 한 자일 것이며 이러한 왕의 희생에 의해 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출애굽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신 희생적인 왕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었다. 그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희생의 본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신 것이었다.

 

 

 


8절에서는 레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8절 하반부에 보면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라고 했다. 맛사의 사건은 출애굽기 17장에 나오고 므리바 사건은 민수기 20장에 나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레위를 시험하고 레위와 다투신 것으로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통해서도 볼 때에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은 한 지파에 대한 축복을 선언하시는 것이 아니라 레위 지파를 통해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축복을 말씀하시려는 의도임을 알 수 있다.

 

 

 


9절에 의하면 “그는 그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들을 보지 못하였다 하며 그 형제들을 인정치 아니하며 그 자녀를 알지 아니한 것은 주의 말씀을 준행하고 주의 언약을 지킴을 인함이로다”라고 했다. 아마 이 말씀은 출애굽기 32장에 기록된 금송아지 사건과 민수기 25장에서 모압 여자들과 음행을 하여 우상을, 바알브올을 섬겼을 때에 아론의 증손자 비느하스가 그들을 죽인 사건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을 두고 하나님은 레위가 하나님께 헌신하였고 여호와의 질투심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다고 말씀하셨다(출 32:29, 민 25:13). 이것이 신앙이고 이것이 언약 정신으로 사는 것이었다.

 

 

 


그러한 언약 정신의 소유자만이 주의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고 주님께 분향할 수 있는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권위 때문이 아니라 말씀의 권위 때문에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자로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것이다. 실로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한 증표이자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이기신 증표이다. 이런 점에서 성도란 십자가를 통해 자신의 죄를 보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할 줄 아는 복을 누리는 자이다.

 

 

 


12절에는 베냐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축복하고 있다.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는 그 곁에 안전히 거하리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날이 맟도록 보호하시고 그로 자기 어깨 사이에 처하게 하시리로다.” 창세기 49:27에 보면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라고 했다. 물어뜯는 이리가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로 바뀌었다. 그러면 무엇이 이렇게 바꾸어 놓았는가?

 

 

 


그것은 바로 유월절 어린 양의 피 때문이다.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가 되어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는 베냐민 지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베냐민을 통해 이스라엘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다.

 

 

 


13절에는 요셉에 대하여 축복하고 있다. 요셉에 대하여는 “그 땅이 여호와께 복을 받는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 땅’이란 다름아닌 약속의 땅이다. 약속의 땅이란 굳이 이렇게 축복하지 않더라도 복된 땅이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창세기 49:22-26에서 요셉에 대하여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라고 축복하고 있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16절에 보면 “가시떨기 나무 가운데 거하시던 자의 은혜”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시떨기 나무 가운데 임하신 모습으로 나타내신 것은 모세를 애굽에 보내실 때이다. 그때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나무가 타지 않았던 것을 모세가 보았다. 가시떨기란 인간이 당하는 고난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창 3:18). 애굽에서 고난 당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임재하셨다. 당연히 심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가시떨기 나무가 타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는데도 능히 견딘다는 것인데 이는 유월절 어린 양의 피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임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가시떨기 나무 가운데 거하시던 자의 은혜”이다. 그 은혜로 인하여 “복이 요셉의 머리에 그 형제 중 구별한 자의 정수리에 임할지로다”(16절)라고 한 것은 요셉이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희생의 은혜를 이스라엘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구별된 자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가? 17절에 의하면 “그는 첫수송아지 같이 위엄이 있으니 그 뿔이 들소의 뿔같도다 이것으로 열방을 받아 땅끝까지 이르리니 곧 에브라임의 만만이요 므낫세의 천천이리로다”라고 축복하고 있다. 송아지 같은 위엄이 얼마나 큰 위엄인가? 송아지의 뿔이 얼마나 위협적일까? 아주 연약하고 힘없는 존재이다. 그런데 “첫수송아지”라고 했다. 제사 제물을 염두에 둔 말이다. 첫수송아지는 아주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그것이 희생을 이루어 모든 이방인들에게까지 이르게 된다. 이것이 희생의 힘이다.

 

 

 


예수님의 희생은 사람들이 보기에 아주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고 새로운 나라를 가져오게 한 힘이다. 그러므로 희생의 힘이란 세상에서 군림하는 모습이 아니라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죽는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임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십자가가 영광이요 하나님의 힘인줄 아는 자들이 요셉의 축복에 참여된 자들이며 곧 교회이다. 교회란 물질을 힘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소외당하고 밀쳐냄을 당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스불론과 잇사갈에 대하여는 “스불론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스불론이여 너는 나감을 기뻐하라 잇사갈이여 너는 장막에 있음을 즐거워하라”(18절)고 축복하고 있다. 잇사갈은 레아의 다섯째 아들이고 스불론은 여섯째 아들이다. 레아는 큰 아들 르우벤이 구해온 합환채를 라헬에게 주고 야곱과 함께 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낳은 아들이 잇사갈(하나님이 내게 그 값을 주셨다)이고 스불론(이제는 그가 나와 함께 거하리로다)이다. 레아는 남편을 서로 차지하여 안식을 얻으려고 하는 라헬과의 경쟁에서 얻은 아들이었다. 사랑을 독점하여 쉼을 누리며 살고자 하는 인간의 경쟁적 욕망 그것이 바로 저주의 상태에 있는 인간의 모습이다.

 

 

 


창세기 49:13-15에 보면 “스불론은 해변에 거하리니 그 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 지경이 시돈까지리로다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 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서 섬기리로다”라고 했다. 쉴 곳을 좋게 여기며 땅의 안정을 그리워하면서 압제 하에서 중노동 하는 나귀이다. 스불론 그는 배 메는 해변에 살기 때문에 땅의 안정과 부요함을 알지 못하는 삶이었다. 스불론 즉 ‘집에 거하는 자’가 나가는 것은 저주인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내려오신 후에는 그 나가는 것이 기쁨이고, 잇사갈은 보답을 기다린 끝에 온 압제는 하나님의 유월절 희생 이후에는 안식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바뀐 자들이 하는 일이란 “그들이 열국 백성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바다의 풍부한 것, 모래에 감추인 보배를 흡수하리로다”(19절)라고 했다. 즉 이방인들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한다고 했는데 여기 산이란 앞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서게 되는 시온 산을 의미한다. 거기서 의로운 제사를 드리게 되고 바다의 풍부한 것, 모래에 감추인 보배를 흡수할 것이라고 한다. 이는 아브라함 언약을 염두에 둔 말이다. 아브라함 언약이 성취되어 이방인들에게까지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이 전해지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복 안에 거하는 자들이 하는 일이란 바로 언약의 피의 확산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전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전도요 선교이다. 스불론과 잇사갈에게 주어진 축복 역시 스불론과 잇사갈이 잘 되고 번성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을 통해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을 드러내는 것이다.

 

 

 


20-21절에서는 갓에 대하여 축복하고 있다. 레아가 연달아서 아들 넷을 낳는 것을 보자 라헬은 자기가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에 대신 자기의 몸종 빌하를 남편에서 주어서 아들 둘을 낳게 되었다. 라헬에게 아들 둘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본 레아가 자기의 시녀 실바를 야곱에서 주었다. 이렇게 하여 태어난 아들이 갓이다. 야곱의 일곱째 아들이다. 이 아들이 태어나자 레아는 ‘복되도다’라고 하면서 이름을 갓이라고 지었다. 하지만 이것은 레아가 가진 욕망의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라헬과의 경쟁에서 이기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다.

 

 

 

 

인간들은 이와 같은 욕망을 이루는 것을 복이라고 하지만 성경은 이런 것을 복이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이런 인간의 욕망을 죄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욕망이란 하나님은 사랑하지 않는 결과로 생기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두고 있지 않은 사람이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믿지 않는 것이다. 이런 불신에서 인간의 욕망이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복으로 여기고 있는 것들은 사실상 죄악이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다. 

 

 

 


그러나 모세는 “갓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갓을 광대케 하시는 자에게 찬송을 부를지어다 갓이 암사자같이 엎드리고 팔과 정수리를 찢는도다”라고 축복하고 있다. 갓이 복의 사람으로 바뀌어진 것이다. 누구 때문인가 갓을 광대케 하시는 분 때문이다. 그분께 찬송을 부르게 되는 것이 복 안에 있는 상태이다. 애굽에서 건져내고 약속의 땅에까지 이르게 하신 것은 갓이 아니라 하나님의 희생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께 찬송을 돌려드리게 된다. 자기 공로를 생각하는 자는 하나님의 희생과는 관계가 없는 자이다.

 

 

 


갓은 요단의 이 편 땅을 요구했었다. 그러나 민수기 32장에 보면 거기에 안주한 것이 아니라 이 편을 땅을 얻고도 요단을 건너 형제들을 위하여 싸움에 참여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형제들을 위하여 희생하는 그것이 곧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 정신으로 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공의와 이스라엘과 세우신 법도를 행하도다”(21절)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이다.

 

 

 


단은 길의 뱀이요 독사였지만(창 49:17) 바산에서 평안히 노는 사자 새끼와 같은 존재로 바뀐다(22절). 납달리도 하나님의 은혜가 족한 상태가 되고(23절), 아셀 역시 다자한 복을 받으며 그 발이 기름에 잠긴다고 했다(24절). 많은 후손으로 인해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풍족한 상태로 살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 안에 있는 상태를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하나님의 희생 안에 있는 이것이 바로 복이다. 그래서 하나님 때문에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29절)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2000.4.9/16).

 

 

 

 


신명기 34장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느보산에 오르게 하여 이스라엘에게 주실 약속의 땅을 바라보게 하셨다. 그리고는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4절)라고 하셨다. 이쯤 되면 모세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신명기 3:23-25에 보면 “그 때에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주 여호와여 주께서 주의 크심과 주의 권능을 주의 종에게 나타내시기를 시작하였사오니 천지간에 무슨 신이 능히 주의 행하신 일 곧 주의 큰 능력으로 행하신 일같이 행할 수 있으리이까 구하옵나니 나로 건너가게 하사 요단 저편에 있는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을 보게 하옵소서 하되” 라고 모세는 기도한 적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 모세가 알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은 죄인이라는 사실과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인은 결코 하나님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모세는 “내가 너희의 패역함과 목이 곧은 것을 아나니 오늘날 내가 생존하여 너희와 함께 하여도 너희가 여호와를 거역하였거든 하물며 내가 죽은 후의 일이랴”(신 31:27)라고 하면서 “내가 알거니와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한 길을 떠나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너희의 손으로 하는 일로 그를 격노케 하므로 너희가 말세에 재앙을 당하리라 하니라”(신 31:29)고 했다.

 

 

 


그래서 모세는 32장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하여 노래를 지어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지시고 광야에서 어떻게 일하셨는가를 생각하도록 했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희생에 의해서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희생을 알기 때문에 모세는 33장에서 이스라엘의 각 지파를 들어서 축복을 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희생 안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본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지금 모세가 느보산에서 가나안 땅을 본 것은 가나안 땅을 본 것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끌고 가시는 곳은 가나안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장소로 이끄시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미 네 이름을 창대케 하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이 때 아브라함의 이름을 창대케 한다는 것은 아브라함을 드높여 아브라함의 이름을 드러낸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언약으로 이스라엘 안에 들어와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4절)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 한 개인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지금 하나님의 관심이 아니다. 도리어 모세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합당한 정신이 아니라면 결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메시지화 하여 이스라엘에게 주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므로 모세가 느보산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증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을 이끄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 성취되는 일에 모세는 단지 도구로 쓰임 받은 것뿐이다. 때문에 5절에서도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대로 성취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7절에 보면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 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고 했다.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에 모세는 결코 나이가 많아 죽을 때가 되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세가 충분히 일할 수 있는 나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자기 말씀 성취를 위해 죽어야 할 입장이라면 모세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모세의 죽음은 하나님의 언약 성취의 차원에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수고한 공로가 있기 때문에 모세가 반드시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은 우리 생각이고 그것은 세상에서 요구하는 법칙이다. 그러나 모세는 인간의 죄를 철저히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희생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날마다의 유혹은 살아야 한다는 욕망이다. 살기 위하여 애를 쓰다보니 비굴한 행동을 할 수밖에 없고 사람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목회자들이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하는 것은 자기 힘으로 큰 예배당을 짓고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으며 당회장으로 군림하는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큰 성전(?)을 지을 수 있었습니까?’라고 하는 놀람과 경탄을 우습게 넘기며 남들에게 자신의 목회 능력을 과시하는 것이 일생일대의 가장 큰 보람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도 하고 또한 카리스마적으로 밀어붙이기식의 강행군 목회 방식이 아니면 안된다. 그것을 위해 목회자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한 자기 최면이 필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차피 주님과는 상관이 없기 때문에 세상에서라도 영광을 얻고 명예를 가져야 했기 때문인가? 이렇게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하는 사고방식이 바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정신이요 언약 정신과 위배되는 사고방식이다.

 

 

 


9절 이하에 의하면 “모세가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였으므로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여호수아의 말을 순종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는 이제 여호수아가 모세를 대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모세가 없으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이런 질문을 무색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일로 이루어진다. 모세의 일도 아니고 여호수아의 일도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세가 없더라도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제 여호수아를 바라보고 여호수아를 좇아 갈 것이 아니라 모세가 일러준 대로 진정한 선지자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 대한 언급을 다시 간략하게 제시하시고 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10-12절)고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은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 매이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선지자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모세가 애굽에서 그리고 광야에서 행한 모든 행적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한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 스데반 역시 사도행전 7:36-37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 마디로 모세가 행한 것과 같은 이러한 표적과 기사를 행한 자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보내신 ‘모세와 같은 선지자’, 즉 진정한 선지자로 메시야인줄 알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행한 이적은 바로 이런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의 이적을 본 자들은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요 6:14), “그(니고데모)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요 3:2)라고 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진정한 선지자이셨다. 결국 모세가 하나님의 언약 성취를 위하여 일한 것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언약의 실체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였던 것이다.

 

 

 


오늘날 성도란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오직 주님을 위해 사는 자이다.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 중의 한가지가 무엇인가 하면 내가 높아지고 영광스럽게 되면 그것이 곧 주님의 높아짐이고 주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오직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요 17:1).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나의 정과 욕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것을 통해서이다.


 

 

 

출처 : 심플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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