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성경공부) 민수기
민수기
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민수기 1장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 1년 1월 15일에 출애굽하여(출 12:37) 3월 15일에 시내산에 도착하였으며(출 19:1,2), 제 2년 1월 1일에 성막을 완성하였다(출 40:17). 시내산에서 모세와만 만나셨던 하나님께서 성막을 완성하였을 때에 성막에 영광으로 임하셨다(출 40:34).
시내산 위에서 모세와 만나셨던 하나님께서 성막에서 제사장을 통하여 백성들과 만나시겠다는 것이다. 단순히 만나는 정도가 아니라 성막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약속의 땅으로 진행하시겠다는 것이다. 가나안 땅으로 가기까지의 모든 과정 속에서 적용되는 원리는 레위기에서 보여주신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에 의한 거룩과 성결이다. 그 원리가 적용되는 이스라엘이어야 한다. 이 광야의 여정을 담고 있는 것이 민수기이다.
민수기는 제사 제도를 말씀하신 이후 제 2년 2월 1일에 시내 광야 회막에서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가족과 종족을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1절)라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시작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를 조사하라는 말씀이다. 2절에 의하면 “이스라엘 중 이십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군대대로 계수하라”고 하셨다.
이 인구 조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20세 이상 싸움에 나갈 자를 계수하는 것이었다. 즉 이스라엘은 이제 군대라는 말이다. 물론 출애굽기 7:4이나 12:41에서 출애굽 할 때부터 이스라엘을 군대로 지칭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서 계수한다는 것은 군대로서 전열을 가다듬고 군대로서의 이스라엘로 시작한다는 의미가 있다.
애굽이라는 적으로부터 이미 해방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또 군대로 싸워야 한다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군대라는 말은 전쟁할 상대자가 있다는 말이다. 즉 원수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원수란 누구인가? 우선 원수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여호와께서 택하신 이스라엘을 어떻게 대하시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대로 청종하면 살려두고 율법의 말씀대로 청종하지 않으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버리겠다고 하셨다(참고 출 15:26). 애굽에서 건짐받은 자들이 이스라엘임에도 불구하고 언약의 말씀에 합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지 않는 모습이라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로 여기시겠다는 뜻이다. 즉 율법의 말씀에 합당한 언약의 정신으로 사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다. 곧 애굽과 같이 비언약적 사고방식으로 사는 자 그들이 하나님의 원수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비언약적 사고방식의 소유자와 항상 싸우시는 분이다.
하나님께서 싸우시는 모습은 창세기 3:15에서 이미 표현되었다. 그 의도를 그대로 이스라엘 속에 담으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속에 그 의도를 담으시되 우리가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결코 혈통적인 이스라엘 속에 전쟁하는 여호와 상을 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점이 중요하다. 이는 왜 이스라엘에게는 진노가 임하지 않는가 하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계수하는 대상에서 제외된 레위인과 그들의 역할을 통해 밝혀진다.
3:12에 보면,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출애굽 때에 애굽의 장자들을 죽이실 때에 이스라엘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에 의해 장자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초태생은 다 여호와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출 13:1,2).
그런데 여기 민수기에 와서는 각 가정의 장자를 레위 지파로 대치하신 것이다. 즉 이제까지의 혈통적 개념에서 지파 개념으로 바뀌어졌다는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의 장자는 레위 지파이다. 시편 78:51과 105:36에 의하면 장자란 힘의 상징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힘은 레위 지파로 상징되는데 과연 그들의 힘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레위기에서 계시하신 희생 제사 안에서 보여진다. 희생 제사는 거룩과 정결로서 유지된다.
그래서 “레위인은 증거막 사면에 진을 쳐서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할 것이라 레위인은 증거 막에 대한 책임을 지킬지니라 하셨음이라”(53절)고 말씀하신 것이다. 레위 지파는 날마다 희생 제사를 반복하여 행함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 임하지 않는 것은 어린 양의 희생 때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20세 이상 남자는 속전을 내서 생명을 속하는 것으로 레위 지파 안에 모든 이스라엘이 속하게 되는 것이다. 출애굽기 30:11-16의 말씀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따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 함이라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에 세겔대로 반 세겔을 낼지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지며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 곧 이십세 이상 된 자가 여호와께 드리되 너희의 생명을 속하기 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 부자라고 반 세겔에서 더 내지 말고 가난한 자라고 덜 내지 말지며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속전을 취하여 회막의 봉사에 쓰라 이것이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이 되어서 너희의 생명을 속하리라”고 하셨다. 즉 이스라엘의 20세 이상 된 자는 생명의 속전을 드린 자들이다. 그들이 전쟁의 군사로 계수함을 입는 것이다.
이렇게 생명을 속함 받은 자들이 이스라엘이요 군대이다. 환언해서 말하자면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 정신으로 무장된 자들이며, 그들이 곧 하나님의 언약 정신의 소유자로서 원수와 전쟁하는 자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싸우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하는 자들로 부름 받았다. 즉 여호와 전쟁의 도구라는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가는 도구로서 세상의 것을 힘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는 도무지 힘으로 여겨지지 않는 거룩과 정결을 힘으로 삼아 어린 양의 희생 때문에 하나님의 원수가 아닌 심판자로서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반대로 이 언약 정신이 결여된다면 이스라엘이라도 예외 없이 언제든지 원수가 되는 것이다.
긍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신 것은 혈통적 승리가 아니라 모세 언약의 정신으로 점철된 제사장 나라의 승리를 요구하셨으며, 뿐만 아니라 여호와 전쟁은 세상에서 힘의 우열을 가리는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어둠의 권세에 대한 싸움(엡 6:12)이라는 것을 이 민수기 1장을 통해 드러내시는 것이다.
어둠의 권세를 깨뜨리고 악의 실체를 무너뜨리는 전쟁은 십자가를 통해 극적으로 낱낱이 완전하게 공개되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미 십자가의 승리를 내다보시고 세상을 이기었다고 선언하셨다(요 16:33, 참고 요일 5:4,5).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따라서 지금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는 존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발린 자들뿐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어둠의 권세를 물리치고 약속을 성취하신 모든 여호와 전쟁의 승리에 동참되어진 자이다. 창세기 3:15에서 약속하신 대로 말씀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의 진노를 막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의 피 아래에 진노의 대상으로 있는 자신을 날마다 발견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원리와 법칙을 힘으로 여기지 않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날마다 영생으로 인도하는 것을 보는 자이다.
민수기 2장
본 장은 “이스라엘 자손은 각각 그 기와 그 종족의 기호 곁에 진을 치되 회막을 사면으로 대하여 치라”(2절)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에 1장은 군대대로 이스라엘을 계수한 것이지만 2장의 내용은 성막(회막)을 중심으로 하여 각 지파별로 진을 치는 모양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정리하면 다음 그림과 같이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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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달리 |
단 |
아 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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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 |||
므 낫 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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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라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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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 사 갈 | ||||
에브라임 |
게르손 |
성 막 |
아론,모세 |
유 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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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 냐 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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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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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 불 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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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
르우벤 |
시므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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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12지파가 각각 회막을 중심으로 하여 어디에 진칠 것인가를 친히 지시하신다. 동편에는 장자 지파인 유다 지파를 중심으로 잇사갈, 스불론 지파가 진을 치고, 남편에는 르우벤 지파를 중심으로 시므온, 갓 지파가 진을 치며, 서편에는 에브라임 지파를 중심으로 하여 므낫세, 베냐민 지파가, 북편에는 단 지파를 중심으로 하여 아셀과 납달리 지파가 진치도록 말씀하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진의 대형은 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것으로 상징된 회막을 중심으로 한 진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그 말씀대로 형성된 진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회막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진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요 총사령관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작전을 지시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움직여지는 군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것이 이스라엘이다. 행군하는 순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고, 출발도 쉬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은 전혀 개입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명령하시되 무엇을 근거로 하시는가? 그것은 시내산에서 주신 언약의 말씀이다. 언약의 말씀이 어디에 있는가? 언약의 말씀은 지금 이스라엘이 진치고 있는 회막의 지성소 안, 법궤 안에 두 돌판으로 상징되어 들어 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만 해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는 근거를 아브라함 언약으로 말씀하셨다(출 3:6). 아브라함 언약에 의해 생성된 후손이란 야곱의 후손으로 출애굽기 1장에서 말해지고 있다. 그 야곱의 아들들은 어떤 아들들인가? 창세기 29-30장을 보면 여인들의 질투에 의해 출생되는 것이 야곱의 아들들이었다. 다시 말해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혈통적인 이스라엘이었다. 이스라엘이 혈통적인 의미에서 출애굽한 사실을 모세의 지팡이의 지휘에 의한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모세의 지팡이로 홍해를 갈랐고, 모세의 지팡이로 물을 내어 광야에서 물을 마셨다.
창세기에 의하면 야곱이 후손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할 때에 “야곱이 또 가로되 내게 맹세하라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경배하니라”(창 27:31)고 되어 있는데 이를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히 11:21)라고 달리 쓰고 있다. 그것은 야곱의 후손으로서의 혈통적인 이스라엘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혈통적인 이스라엘로서는 여호와 전쟁의 도구로 쓰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 성취는 이 땅의 혈통적인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혈통적인 후손은 아담의 후손으로 죄인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혈통적인 이스라엘에서 여호와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제사장 나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모세 언약으로 시내산에서 유월절 어린 양이 희생된 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핏줄을 자르고 의의 피가 개입될 때에만이 제사장 나라로, 여호와의 군대로 전환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성막을 주시고 거기에 철저히 피뿌림으로서만 죄사함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모세 언약을 통해 나타내신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모세 언약에 의해 시내산 이후부터는 유월절 피의 정신이 지배하는 나라로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제사장 나라는 레위인이 장자가 되어 거룩과 성결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을 통해 여호와 전쟁을 수행하도록 되었다. 혈통적인 이스라엘의 장자가 각 집안의 초태생이라면 이제 이스라엘의 장자를 레위인으로 대치하심으로 하나님의 군대로서, 제사장 나라로서의 장자는 레위 지파이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성막의 법궤이다. 시내산 이전까지는 모세의 지팡이로 인도함을 받는 것으로 나타내었다. 그것은 혈통적인 이스라엘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법궤를 앞세우고 법궤의 인도함을 받는 여호와의 군대로서 전혀 새로운 공동체로 전환된 것이다.
그래서 민수기에서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의 군대의 모습으로 등장된다. 하나님의 군대란 하나님의 언약에 철저히 매여있는 자이다. 즉 언약 정신으로 무장된 자들이다. 여기에는 혈통의식이 전적으로 배제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상징된 법궤가 움직일 때에 이스라엘은 움직일 수 있었다. 하나님의 법궤가 설 때에 행군을 정지할 수 있었고 쉴 수 있었다. 모든 것이 여호와 중심이다.
법궤를 앞세우고 나가면 무조건 승리하고 여호와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는 미신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실제로 엘리의 아들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는 법궤를 미신적으로 사용하였다. 블레셋과의 전쟁에 법궤를 들고 나갔다가 비참하게 패배하였고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했다(삼상 4:1-11). 법궤 자체에 무슨 능력이나 전쟁을 수행하는 힘이 있는 것이 아니다. 법궤 위에 여호와께서 좌정해 계시는 것으로 상징되고 거기서 말씀으로 다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대로 성취되게 하시는 것이다.
성막의 둘레를 레위 지파가 진치고 있으므로 이스라엘은 날마다 자신들이 무슨 전쟁을 수행하는지 볼 수 있다. 레위 지파는 안으로는 거룩과 정결을 힘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막고 있고 밖으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진에 합류시킨 의를 담고 있는 자들이다.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진이요, 하나님의 군대이다.
바로 그 모습대로 언약을 성취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죄인을 하나님의 진중에 합류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직접 담당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이요 성도란 이런 하나님의 진노를 품고 있는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쟁을 수행하는 자이다. 교회는 바로 이러한 자세로 세상을 향해, 주님을 향해 서 있는 자들이다.
우리는 우리의 몸으로 무엇인가 이 땅에 남겨서 주께 드리려고 하지 우리 몸 자체를 주님의 것으로 드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님의 것으로 주님의 말씀 성취에 부름 받은 자들이 교회요 성도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신의 개인적인 사정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연관될 수 없다.
하나님의 힘을 빌려서 세상에서 이겨보자는 심보로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예수 이름을 가지고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다면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피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힘이 아니라 우리를 죄 안에서 죽이고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살게 하는 능력이다. 그것을 믿는 자가 신자이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여 각기 가족과 종족을 따르며 그 기를 따라 진치기도 하며 진행하기도 하였더라”(34절)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살아지고 움직여지는 것을 믿는 그 사람이 성도요 교회이다.
민수기 3-4장
3:7에 “그들이 회막 앞에서 아론의 직무와 온 회중의 직무를 위하여 회막에서 시무하되” 라고 레위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레위인은 아론의 제사장 일도 담당하며 또한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해야 할 일을 대신 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즉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해야 할 일은 레위인이 특별히 뽑혀 나와서 대신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임무는 각 가족별로 달리 주어지고 있다. 게르손 자손은 성막과 장막의 덮개, 회막 문장, 뜰의 휘장과 줄 등이고, 고핫 자손은 증거궤와 상과 등대와 단, 성소의 봉사에 쓰이는 모든 기구등이며, 므라리 자손은 성막의 널판과 띠, 기둥, 받침, 말뚝과 줄 등이었다. 회막에 봉사할 수 있는 자는 30세에서 50세까지 8,580명이었다.
레위인이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할 일을 대신 한다는 것은 레위인이 이스라엘, 즉 제사장 나라의 장자라는 말이다. 레위인들이 회막에서 봉사해야 하는 이유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첫 태에 처음 난 자를 대신케 하셨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처음 난 자는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히 구별하셨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3:12,13).
보통 장자를 먼저 태어난 것으로 본다. 창세기에 보면 이삭의 가족은 거부감 없이 모두가 다 에서를 장자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방식으로 장자가 주어진다고 말씀하셨다(창 25:23). 에서부터 먼저 출생하여 야곱이 에서를 극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생각하는 장자 개념은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장자 개념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 안에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것이 들어 있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빠져 나올 때에 있었던 마지막 재앙은 장자 재앙이다. 모든 처음 난 것은 다 죽였던 것이다. 그런데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만은 죽음을 면했다. 어린양이 죽음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결국 어린양이 대신해서 살아난 자를 가리켜서 처음 난 자라고 한다. 처음 난 자를 각 가정의 장자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레위인으로 대치하셨다. 즉 혈통적 의미에서의 장자가 아닌 제사장 나라로서, 여호와의 군대라는 공동체의 한 지파가 전체를 대신하는 역할을 하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레위인을 장자로 대신하게 하신 것은 인간의 장자를 공박하는 차원에서 주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금송아지 형상으로 대체했을 때에 하나님은 레위인들을 뽑아서 헌신하게 하셨다. 이런 점에서 레위인을 장자로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담아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장자란 아버지의 속성을 담고 있는 자여야 하기 때문이다. 바로의 아들을 죽인 것은, 사실은 바로를 죽인 것이다. 그런데 아들을 죽이면서 바로가 하나님 앞에서 이미 제거당했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는 아들이 죽는 것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악된 자임을 알아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이스라엘을 혈통적 차원에서 보시지 않는다. 이스라엘이란 국가를 혈통적인 차원에서 보시지 않는다는 것은, 각 가정의 장자를 뽑지 않으시고 그 가정의 장자 대신 레위인으로 대신하셨다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즉 이스라엘 전체를 제사장 나라로 보시며 그 가운데서 레위인을 장자로 세우시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희생을 담아내게 하셨다. 어린양의 희생을 대신해서 보여줄 자로 세움을 입은 자가 레위인이다.
레위인이 하나님의 희생을 담아내는 역할은 어떻게 하나? 레위기에서 이미 계시된 바와 같이 제사라는 방식을 통해서이다. 장자는 땅의 기업이 없이 여호와 하나님만을 기업으로 삼기 때문에 제사만을 드린다. 후에 오신 예수님 역시 땅이 없이 유리하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신이 곧 제사장이심을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레위인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존재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레위인을 바라보면서 그 레위인을 통해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야 했던 것이다. 즉 레위인이 희생하고 섬기는 그 모습이 바로 자신들이 희생하고 섬겨야 할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야 했던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앞에 레위인을 세워 놓으신 하나님의 마음이다. 결국 레위인이 죄의 기준이고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가 하는 것을 드러내는 기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기준이 궁극적으로 누구인가?
우리의 잘못된 신관과 메시야관 때문에 진짜 메시야가 살해 당하셨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처리해 준다는 것을 온전히 믿게 하기 위해서 이루신 것이 십자가이다. 오늘날 누가 제사장이며 장자인가? 십자가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리셔서 하나님의 희생을 온전히 드러내신 예수님뿐이시다.
레위인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기업으로 삼고 하나님의 희생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러나 선지서들을 보면 제사 제도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말라기에서도 십일조를 드리라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십일조란 복의 계통을 인정하는 표시였다. 즉 제사 제도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하나님의 복이 어디서 오는지 십일조를 통해 고백하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구약의 레위인은 장자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했다. 실패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희생적 마음을 온전히 드러낼 수 없는 자였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만이 장자이시다.
그래서 인간 제사장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차원에서 제사장의 기능을 행하는 자들은 있다. 그들이 곧 모든 성도이다. 구약에서 레위인들을 장자로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일이 목적이라서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성막에 일할 자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돕도록 레위인들을 세우신 것이 아니다. 레위인이 없어도 이스라엘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은 홀로 언약을 이루신 분이다. 하나님은 홀로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일 자체를 위해 레위인들을 장자로 세우신 것이 아니듯이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들을 부르셔서 은혜를 베푸신 것은 하나님의 손이 모자라서가 결코 아니다. 그러니 교회 봉사에 목숨을 걸어서는 안된다. 또한 목회자는 그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교인들을 예배당에 묶어 놓아서도 안된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더불어 사는 희생적 삶이다.
봉사란 단순히 내가 남에게 베푸는 것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주셨다는 것은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을 알라는 것이다. 레위인에게 있어서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일이 없이 모두가 다 동일하게 성막의 봉사에 각 부분을 맡았듯이 목사든 장로든 집사든 관계없이 성도로 부름을 받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그 일을 위해 복음의 증인 역할을 하도록 한 지체가 된 것이다(엡 4:11,12, 고전 12:12-21). 그러므로 성도란 자신을 남과 비교하는 자가 아니라 십자가에 자신을 비추어 보는 자이다.
민수기 5장
1장은 이스라엘 군대를 계수하고, 2장에서는 지파대로 하나님을 중심으로 진을 배치하는 것을 살펴 보았다. 그리고 3-4장에서는 레위 지파의 위치와 그 자손들이 각기 할 일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했다. 이렇게 하여 성막을 중심으로 진영이 진을 치고 행진할 준비가 이루어지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 5장에서는 ‘진의 성격’이 어떤 것인가를 밝혀주고 있다.
3절에 보면, “무론 남녀하고 다 진 밖으로 내어 보내어 그들로 진을 더럽히게 말라 내가 그 진 가운데 거하느니라”고 말씀한다. 이스라엘이 왜 이스라엘인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진 중에 거하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언약 백성다움은 하나님이 진 중에 거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진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은 이 진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사장도 레위인도 백성도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이라는 진을 움직이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문둥병과 유출병으로 부정케 되고 주검으로 인해 부정하게 된 것으로 대표되는 모습은 모두 제거되어야 할 사안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부정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레위기에서 이미 살펴 보았듯이 이런 질병들이나 그러한 모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스스로 어떻게 저지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만약 나았다면 그런 환경에서 벗어났다면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죄가 무엇인지를 가르치신 것이다. 결국 깨끗하다든지 더럽다든지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는 것들이라는 의미로 하나님은 보여주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문둥병자와 유출병이 있는 자, 시체를 만진 자는 다 진 밖으로 쫓아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진에 결코 죄가 용납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 중심에 하나님이 거하시듯이 교회의 중심에도 하나님이 계신다. 교회는 하나님의 피로 사신 주님의 몸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결코 인간의 죄가 개입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이 오늘날 교회에서도 쫓겨나야 할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 그러면 누구를 어떻게 쫓아 내어야 하는가?
이 말씀은 오늘날 교회에서 어떤 사람을 쫓아 내어야 한다는 의미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주님의 몸으로서의 교회에 용납될 수 없는 요소가 있다는 것으로 주신 말씀이다. 교회란 의인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죄인이 모이는 곳이다. 자기가 원초적인 죄인인줄 아는 사람들이 모여진 공동체가 교회이다. 즉 자기 자신이 죄인으로 이스라엘에서 문둥병자나 유출병자, 시체를 만진 자가 진 밖으로 쫓겨나듯이 교회라는 주님의 몸에 합류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거룩한 공동체에 합류되었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는 자들이 교회이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내가 더러운 자요, 죄인이다. 우리가 바로 진 밖으로 쫓겨가야 할 자들이다. 그런데 누가 쫓겨남을 당했는가?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질고를 담당하셨다. 그것이 복음서에서 나타내 주는바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의미이다.
히브리서 13:10절 이하에 의하면, “우리에게 제단이 있는데 그 위에 있는 제물은 장막에서 섬기는 자들이 이 제단에서 먹을 권이 없나니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제사 제도에서 피를 성소로 가지고 나가고 (속죄)제물은 밖에서 태우는(레 4:11,12) 이유를 밝혀주고 있다.
즉 예수님께서 자기 피를 하나님께 온전한 제사로 드리며 성문 밖에서 죽임을 당하시는 것으로 자기 백성들을 대신해서 성문 밖으로 쫓겨나신 것이었다. 이러한 중보자적 역할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모든 정하게 하는 요소에 대한 지정과 소유를 제사장에게로 돌리는 것이었다(8절).
우리는 그분 때문에 하나님의 진 안에, 교회의 한 일원으로 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서 히브리서 기자는 13:13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예수님 그분을 따라 영문 밖으로 나가는 자가 교회이다. 우리도 영문 밖으로 나가면 교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그분의 영이 십자가의 길을 가신 그대로 우리를 이끄실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영구한 도성으로 알고 세상에 영원히 안주할 것처럼 살 것이 아니라 세상과 세상의 것을 속히 털고 영원한 도성을 향해 가는 모습을,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으로 보여주는 자여야 한다. 그 모습은 교회를 위해 무엇을 행하는 모습이 아니라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모습이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이름을 증거하는 열매가 되는 것이다.
자기 힘으로 무엇인가 아직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는 행위이고 십자가의 은혜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진을 더럽히는 것이다. 이것이 곧 거룩한 교회에서 쫓겨남을 당해야 할 모습이다. 결국 이러한 모습은 주님의 십자가에 의해 제거되는 것이지 우리가 십자가의 모습과 맞지 않다고 마음대로 판단하여 제거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지금 주님께서 살아 계시고 성령께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주장하고 계신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알아서 철저히 주님의 몸만 남기는 작업을 진행하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주님뿐만 아니라 언약 백성들을 괴롭히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을 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상대방을 감시하거나 어떤 한 개인을 쫓아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를 내세워 주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모든 세상적 사고방식이 주님의 교회에 발붙일 수 없도록 오직 십자가만 전하고 또한 영문밖에 주님께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십자가만 전해지는 설교가 싫으면 그 교회를 떠나면 된다. 그렇게 자기 마음대로 교회를 정하고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아직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맛보지 않은 자이기 때문에 스스로 떠날 수밖에 없다. 이 말씀을 통해서도 여전히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 갖도록 하신다. 예배 순서, 예배당 건물, 직분, 교회 구성원의 조직 등에 관심을 가진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다. 천국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은 교회 성장이나 잘 조직된 교회에 관심있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주님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십자가를 따라가는 자는 이미 천국에 살고 있는 자이다.
민수기 6장
나실인의 서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장이다. 그런데 왜 여기서 하나님은 나실인에 대한 규례를 말씀하실까? “나실”이라는 말은 ‘구별된 자’라는 의미의 말이다. “자기 몸을 구별하여”라는 말이 12번이나 나오는 것을 볼 때 나실인은 구별된 자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기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절에 의하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거든”이라고 말씀하고 있어서 하나님이 정해서 뽑아 세운 것이 아니라 누구나 원하면 나실인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이제까지 하나님의 진을 막고 있는 레위인, 제사장의 역할이 단순히 그들만의 특별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가 제사장 나라로서의 역할을 하도록 택하셨기 때문에 백성들도 나실인으로 서원하여 자신을 구별되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직접 알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나실인으로서 사는 삶이 결코 자신의 인생에 도움이 되거나 즐거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나실인은 자신이 기간을 정해서 나실인으로 구별된 삶을 살게 되는데, 그 기간을 무사히 마치고 나면 뭔가 큰 축복이 주어진다는 약속이 없다. 뿐만 아니라 나실인으로 사는 기간을 지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한 능력을 베푸신다는 말씀도 없다. 나실인으로 살다가 그 기간이 끝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다른 혜택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나실인으로 사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할 뿐이다.
나실인에게는 세 가지 금지 사항이 있다. 첫째,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해야 한다. 심지어 포도즙, 건포도, 생포도도 먹지 말아야 한다(3,4절). 다시 말해서 포도 근처 얼씬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이 풍성하지 못한 중동 지역의 사람들에게 포도주는 없어서는 안될 음료요 식수와 같은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음식을 끊는다는 것은 세상의 좋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세상의 좋은 것에 취한 자는 하나님의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의 것과 세상의 것을 분별하지 못하게 된다.
레위기 10:9-10에 의하면,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분향하려고 하다가 죽은 이후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영한 규례라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즉 술로 인해 하하나님께 속한 것과 세상에 속한 것을 분별하지 못할까봐 포도주와 독주를 금하시는 것이다.
에베소서 5:17,18에서 바울 사도는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라고 하면서 술 취하지 말고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한 말씀에 비추어 볼 때에 술 취하는 것은 술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는 주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성령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서만 주님의 뜻을 제대로 알고 주께 복종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은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보여주는 자이기 때문이다.
둘째, 머리에 삭도를 대서는 안된다. 즉 머리털을 길게 자라게 해야 한다(5절). 머리털을 자르지 않고 길게 자라게 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여자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는 문제로 말하는 것을 보면, 권세가 위에 있음을 표시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고전 11:10).
7절에 의하면 “자기 몸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표가 그 머리에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나실인이 머리털을 기른다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표시로서 자기 위에 다른 권세자가 있다는 뜻이다. 즉 하나님의 진에 속한 자로서 권세 아래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의해 움직여지는 자임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셋째,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한다. 심지어는 부모 형제가 죽은 때에라도 그 몸을 시체에 접촉하여 더럽혀서는 안된다(7절). 시체가 부정한 것은 인간이 에덴에서 쫓겨나서 저주 아래에 있는 죽음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참고 창 2:17, 5:3-5).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생명의 하나님이시며 산 자의 하나님이시다(마 22:32).
그러기 때문에 나실인은 시체와 접촉하지 아니함으로 생명의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나실인으로 서원한 기간 중에는 부모 형제가 죽어도 장례에 참석할 수가 없다는 것은, 결국 나실인은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고 부모 혈육에게서 멀어져야 하는 고통과 어려움의 삶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면 결코 어려움이 어려움으로 고통이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13절부터는 나실인으로 서원한 기간을 무사히 마쳤을 때 행할 규례가 나온다. 나실인이 서원한 기간을 마치게 되면 예물과 함께 제사를 드린다. 그리고 18절에 보면 자기의 머리털을 잘라서 제물로 드리게 된다. “자기 몸을 구별한 나실인은 회막문에서 그 머리털을 밀고 그것을 화목 제물 밑에 있는 불에 둘지며”라고 했다.
머리털은 나실인으로 살았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는 유일한 증거이다. 그 머리털을 잘라서 화목 제물과 함께 드린다는 것은 구별되어졌던 자신의 증거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다. 신체의 일부를 드리는 제사는 바로 이 제사뿐이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이 나실인으로 서원하여 이러한 과정과 제사를 통해 제물이 인격화되어 제사장과 제사 제물이 일치가 되는 하나님의 자기 희생을 알도록 하신 것이 이 나실인 제도였다.
하나님은 이 땅에 나실인을 찾으셨다. 아니 이 땅에 이런 완전한 나실인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이 제도를 주셨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실로 진정한 나실인은 이 땅에 없었다. 그래서 나실인 되시는 분을 하늘에서 보내셨다. 그분이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완전하신 나실인이시다. 세상에서 온전히 구별된 삶을 사셨고 또한 마지막에는 자신의 몸을 희생 제물로 드리심으로 대속을 이루셨다.
결국 오늘날 나실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을 드러내는 자이다.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짐으로 우리에게서 말씀이 불거져 나와 다른 사람의 죄 용서가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헌신시키는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다.
그러면 오늘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주님께 드린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가? 우리는 보통 자신을 여호와께 드린다는 말을 할 때에는 목사가 되거나 해외에 선교사로 나갈 것을 헌신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몸을 여호와께 드린다는 것은 목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선교사로 나가는 것도 아니고, 아들을 신학교에 보내는 것도 아니다. 세상과 구별되이 사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내 인생을 내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사는 것,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지 않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여호와께 자신을 구별하여 드리는 것이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리라” (롬 12:1)는 것은 바로 세상과 구별되어 사는 것을 의미한다.
22절 이하에는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 아들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을 하도록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로서 나실인의 경험이 있게 된다면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은 제사장 나라로서의 모습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실인이기 때문에 이러한 축복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24-26절).
이 축복의 핵심적인 의미는 나실인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에 의해 이루어 나가실 것을 아론으로 하여금 선언하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복이다.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27절)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나실인과 같은 이스라엘을 통해 언약을 이루어가실 것임을 선언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복은 목사의 축도를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성취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는 축도가 없는데 축도를 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목사의 축도로 복을 받고자 하는 미신적 마음이 늘 책망받고 예수님의 피에게만 우리의 관심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목사의 축도에 관심을 가지고 복을 받기 위해서 오는 자라면 돌아가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민수기 7장
출애굽기 40:17에 보면, “제 이년 정월 곧 그 달 초 일일에 성막을 세우니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레위기 8장에는 제사장들이 취임하는 기록이 나오며 모세가 기름을 가지고 성막의 각종 기구들에 발라 거룩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날에 족장들이 하나님께 봉헌 예물을 드렸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일에 대한 기록을 본 장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을 레위기나 출애굽기에 연결해서 기록하지 않고 이렇게 따로 떼어서 민수기 7장에서 말씀하는 의미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실 의도가 민수기와 연결되는 의미에서 주어지기 때문이다. 즉 이스라엘을 군대로 계수하고 거룩을 유지하는 차원에서 단순히 모세나 아니면 제사장의 헌신으로가 아니라 나실인으로서의 이스라엘로서 백성 전체의 헌신이 요구되는 것이다.
헌신이란 단순히 윤리적, 도덕적으로 잘 살겠다는 결심 정도가 아니라 모세 언약 안에서 그 언약의 정신으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겠다는 뜻에서 예물을 봉헌하는 의식으로 치루어지고 있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이 일이 단순히 세상을 힘으로 정복해서 힘의 우위를 가지고 군림하는 일이 아니라 언약 정신을 드러내는 일인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모세가 장막 세우기를 필하고 그것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하고 또 그 모든 기구와 단과 그 모든 기구에 기름을 발라 거룩히 구별한 날에”(1절) 이스라엘 족장들이 예물을 드리게 된다. 그 예물은 덮개 있는 수레 여섯과 소 열 둘이다. 그리고 열 이틀 동안 각 지파의 대표들이 봉헌 예물을 드린다. 수레와 소는 레위인에게 주어져서 레위인이 회막 봉사에 쓰여지도록 말씀하셨다. 족장들이 드린 수레와 소는 레위인이 장막의 기구들을 나를 때 사용된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말은 3절까지에서는 성막을 장막으로 표현하고 있고, 5절에서 수레와 소가 드려진 상황으로 말할 때에는 회막이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막이란, 하나님이 텐트를 치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산다는 뜻에서 표현하고 있고, 회막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이고 하나님의 희생에 참여한다는 뜻으로 회막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레위인들이 회막을 메고 옮기는 것은 그들만의 일이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의 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레위인이 회막 봉사를 맡았으니까 그들에게 다 맡겨버리는 것으로 신경 끊고 살라는 것이 아니다. 수레와 소를 드림으로 우리 역시 회막을 메고 가는 일에 동참되었다는 뜻이다.
레위인의 일은 레위인만이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만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은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 역시 회막의 일에 참여하는데, 그것은 레위인과 같이 그들도 동일하게 장막을 메어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자들이 이스라엘이다.
오늘날 교인들은 교회의 일거리를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를테면, 교회에서 선교헌금을 드리는 것으로 해외에서 선교사가 하는 일에 동참한다는 식이다. 자기 생색내면서 선교헌금 몇 푼 내고는 거룩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 실로 선교헌금이란 자신의 욕심을 가리는 또 하나의 무화과 잎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서 레위인이 하는 회막의 일에 동참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것임을 보여준다. 십자가를 제단으로 삼으시고 스스로 제물이 되셔서 피흘리신 예수님은 각 지파대로 예물을 드린 참 신앙의 모습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을 제물로 드린 제사만 온전한 제사로써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된 희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 의에 동참되었다는 뜻이다. 이 사실을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믿는 자 속에 하나님의 의가 들어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 안에 있고, 하나님의 안식 안에 있는데 교회가 어떤 일거리를 만들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는 발상은 주님의 십자가를 무시하는 처사이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떠 맡아서 일거리에 관심을 쏟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그 정신에 동참하는 자로 살아야 한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드려지는 각 지파별로 드려지는 예물은 모든 지파가 동일하게 드려진다는 것이다. “그 예물도 성도의 세겔대로 일백 삼십 세겔 중 은반 하나와 칠십 세겔 중 은바리 하나라 이 두 그릇에는 소제물로 기름 섞은 고운 가루를 채웠고 또 십 세겔 중 금 숟가락 하나라 이것에는 향을 채웠고 또 번제물로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와 일년 된 어린 수양 하나이며 속죄제물로 수염소 하나이며 화목제물로 소 둘과 수양 다섯과 수염소 다섯과 일년 된 어린 수양 다섯이라”(13-17절)고 12지파대로 똑같은 내용을 반복해서 기록해 놓고도 84-88절에 가서 또 12지파의 예물을 모은 것이 각 지파별로 동일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어떤 지파에서도 따로 더 추가된 것도 없고, 또한 누락된 것도 없이 동일한 것으로 드려졌다는 뜻에서 강조되고 있는 말씀이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충성과 헌신의 표로서는 어떤 지파도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쓸데없는 경쟁심과 시기심이 예물을 드리는 일에 있어서 개입될 수 없도록 차단하시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들은 ‘상급의 차등’이라는 성경에 없는 개념을 도입하여 교회 내에서 경쟁심을 유발시키고 있다. 더 잘 드리는 예배, 더 많이 하고 더 잘 하는 봉사가 있고, 더 많이 드린 기도나 헌금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처럼 꾸며놓고 종교 사업을 벌이고 있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다.
목사의 신앙과 성도의 신앙이 다른 것이 아니다. 오래 믿은 자의 신앙과 새 신자의 신앙이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신앙의 연륜으로 서열을 정하는 나라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교회는 결코 경쟁심이 유발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동일한 의를 은혜로 받아 누리게 되었으므로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민수기 8장
8장은 먼저 1-4절은 성소에 대해, 5-26절에서 레위인을 요제로 드리는 것에 관해 언급을 하고 있다. 출애굽기 25:23-40과 37:10-29을 보면, 성소에 배치하는 성물들에 대한 규례가 나온다. 성소에는 진설병 상과 등잔과 분향단이 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은 등잔에 대한 내용이다. 등잔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불이 꺼지지 않게 해야 한다(레 24:1-5). 즉 날마다 계속해서 성소 안을 밝게 해야 한다. 그리고 등잔 맞은 편에는 진설병 상이 있다. 그 진설병 상 위에는 열 두 덩이의 떡이 있다(출 40:22-25, 레 24:5-6). 2절에서 “등을 켤 때에는 일곱 등잔을 등대 앞으로 비취게 할지니라”고 한 것을 보면, 등잔은 성소 안을 밝히면서 특히 맞은 편을 비추는 상태임을 알 수 있다.
등잔은 일곱 등잔으로 만들어지지만 따로 따로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로 쳐서 일체가 되게 했다(4절). “7(일곱)”이란 수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때에 처음 등장하는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복을 주셨다고 했다(창 2:1-3). 일곱째 날에 복을 주셨다는 것은, 일곱째 날 자체가 특별히 의미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7일 전체가 일곱째 날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이다. 일곱째 날에 하나님은 안식하셨다고 되어 있다.
즉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은 모든 것과 모든 날이 하나님의 안식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거룩과 은혜에 의해 모든 피조 세계가 다스림을 받는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 두 덩이의 떡을 일곱 등잔이 비춘다는 것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은혜성과 거룩성이 이스라엘 전체를 지배하신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제 5절 이하에서는 레위인을 요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요구가 뒤따른다. 그러면 왜 레위인을 요제로 드릴 것을 요구하는가? 여기서 새삼스럽게 성소의 등대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인가? 15절을 보면, “네가 그들을 정결케 하여 요제로 드린 후에 그들이 회막에 들어가서 봉사할 것이니라”고 한다. 여기 보면, 레위인을 요제로 드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5-13절까지가 레위인을 하나님께 요제로 드리는 의식에 대해서 언급하는 내용이다.
요제로 드리는 의식은, 첫째로 몸을 깨끗하게 하는 일이었다. 7절에 “너는 이같이 하여 그들을 정결케 하시되 곧 속죄의 물로 그들에게 뿌리고 그들로 그 전신을 삭도로 밀게 하고 그 의복을 빨게 하여 몸을 정결케 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다. 히브리서 10:22에 보면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라고 말씀한다. 레위인을 깨끗하게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둘째로는 제사를 드려야 했다. 레위인들은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한다. 그리고 수송아지들을 번제와 속죄제물로 드린다. 수송아지들이 레위인들의 죄를 지고 죽었으니 사실은 죄인된 레위인들 자신들이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하여 봉사하게 된 레위인은 완전히 다른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레위인을 요제로 드리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나님이 사람을 죽여서 지내는 제사를 원하시는 분이신가?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
레위기 7장에 보면 다른 번제와 속죄제는 화제로 드리지만 화목제를 드림에 있어서는 요제로 드리는 것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7:28-34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드리는 화목제 희생 중에서 기름과 가슴을 여호와께 예물로 가져오면 제사장은 그것들을 받아 기름은 하나님께 불태워 드리고 가슴은 흔들어 요제를 삼으라고 말씀하셨다(레 7:30).
요제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방법의 하나로 제물을 흔들어서 지내는 제사이다. 이것을 제사장의 몫으로 주어서 제사장이 먹도록 되어 있다. 즉 기름은 단 위에서 불살라 하나님께 드리고 요제로 드린 제물의 가슴은 제사장의 몫이 되고 거제로 드린 뒷다리는 화목제를 드리는 헌제자의 것으로 돌린다(레 7:33).
여기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여호와께 바쳤다는 말과 제사장에게 주었다는 말이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말은 제물의 기름과 가슴은 하나님의 몫으로 바친다는 것이다. 출애굽기 29:18-28의 제사장 위임식 제사에서는 가슴뿐만 아니라 기름도 요제로 흔든 후에 불태워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출 29:22-25). 이것을 볼 때에 제물을 들고 흔드는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께 바쳐진 것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결국 제사를 드리는 자가 제물을 나누며 즐거워하는 자리에 하나님의 몫으로 구분하여 바치게 함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잊지 않도록 했으며, 그것을 얻어먹는 제사장은 자기가 일한 대가를 받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살려주시는 은혜에 의해 산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한 조치로 주신 것이 요제로 드리는 의식이다.
레위인을 요제로 바친다는 것도 이와 같은 차원에서 주어진 말씀으로 생각해야 한다. 11절을 보면,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레위인을 요제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이는 그들로 여호와를 봉사케 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이 말은 여호와를 섬기기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 대신에 레위인을 여호와의 몫으로 구분하여 바치라는 뜻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를 16절 이하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게 온전히 드린 바 된 자라 이스라엘 자손 중 일절 초태생 곧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으로 내가 그들을 취하였나니 이스라엘 자손 중에 처음 난 것은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내게 속하였음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모든 처음 난 자를 치던 날에 내가 그들을 내게 구별하였음이라 이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 모든 처음 난 자의 대신으로 레위인을 취하였느니라”(16-18절).
레위인은 이스라엘을 대신하고 있다. 즉 처음 난 자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난 자란 누구를 말하는가? 처음 난 자란, 이스라엘 자손 중에 장자, 혈통의 장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민수기 자체가 처음부터 증거하고 있는 내용이라고 이미 살펴보았다.
17절 뒤에 보면, “내가 애굽 땅에서 그 모든 처음 난 자를 치던 날에 내가 그들을 내게 구별하였음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애굽을 치실 때 맨 마지막 재앙이 장자 재앙이다. 애굽에 있는 모든 장자를 죽이시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그 속에서 살아난 자가 있었는데 그들은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사람들이다. 그들이 바로 장자 재앙에서 구별된 자이고 어린양의 피로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라는 의미로서 처음 난 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장자는 장자의 역할이 있다. 하나님은 레위인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이다. 처음 난 자는 하나님의 장자로서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을 이 땅에 계속해서 해낼 수 있는 사람을 뜻한다. 하나님의 장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태어난다. 때문에 장자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 자이다. 그리고 그 뜻을 실행하며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하나님의 구원이 무엇인가는 레위인의 회막 봉사를 통해서 계속 보여지게 된다. 제사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났으니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가는 것임을 보여주는 역할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다. 죽어야 할 자가 누군가의 희생 때문에 살아났으므로 그 희생을 담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장자이다.
여기 민수기 8장에서 초반에 성소의 등잔을 언급하고 레위인을 요제로 드리는 것에 대한 의식을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레위인은 레위인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레위인이 하는 회막 봉사란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힘과 은혜에 의해 유지되는 삶이라는 것을 나타내주기 위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레위인에게는 약속의 땅에 대한 기업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레위인들의 기업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만을 기업으로 삼고 하나님의 회막에서 봉사하는 것 자체를 기업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 레위인이고 그 레위인은 곧 이스라엘 전체이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 모두는 레위인과 같은 심정으로 세상에서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사는 즐거움에 의해 살아가는 존재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 84:10).
19절이 말씀하는 바의 의미란 바로 이런 것이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취하여 그들을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선물로 주어서 그들로 회막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봉사하게 하며 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에 가까이 할 때에 그들 중에 재앙이 없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애굽에 떨어졌던 재앙이 내려지지 않는가? 그것은 애굽 백성들보다 이스라엘이 바르게 살아서도 아니고 애굽보다 잘난 백성이라서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늘 쪼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재앙을 받아 마땅한데 어떻게 하나님의 재앙이 내려지지 않고 있는가 하는 것을 이스라엘은 레위인들이 회막에서 봉사하는 것을 봄으로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하나님의 재앙을 감싸고 있음을 느끼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레위인들을 뽑아서 이러한 하나님 자신의 메시야적 희생을 가르치시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이 오셔서 그 모든 그림 언어들을 십자가로 온전히 계시하셨다. 십자가로 모든 약속이 성취되었다. 더 이상 의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간다는 것은 구약 시대를 사는 것이고, 십자가 외에 다른 것으로 더 확실하게 하고자 하는 우리의 죄성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것이니라”(히 9:9,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가 온갖 눈에 보이는 의식들을 만들어 그것으로 교인들의 눈을 충족시키고, 무엇인가 행하려고 하는 인간의 욕구을 만족시키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로 돌리는 행위이다. 오늘날 주님은 성령을 통해 말씀으로 우리를 바꾸어 나가신다. 그 주님의 일하심만 있을 뿐이다. 그 주님의 일하심에 복종된 자가 성도이다.(1998.9.6)
민수기 9장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나온 지 만 일년만에 시내 광야에서 유월절을 지키도록 명령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으로 유월절을 그 정기에 지키게 하라 그 정기 곧 이 달 십사일 해질 때에 너희는 그것을 지키되 그 모든 율례와 그 모든 규례대로 지킬지니라"(2,3절). 그런데 여기 11절에 보면, 2월 14일 해질 때에 유월절을 한 번 더 지키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다. 그 이유는 사람의 시체로 부정하게 되었거나 먼 여행 중에 있어서 지키지 못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유월절이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건짐 받은 날이다. 그래서 그 날짜를 기억하라는 뜻이거나 단순히 의식을 행하라는 말이 아니다. 유월절의 의미를 알라는 말씀이다. 그 날에 있었던 사건의 의미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즉 날을 지키는 것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식으로 유월절을 지키지 못한 자들을 위해 한달 후에 지키도록 하신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애초부터 날짜 자체의 의미는 없었다. 오늘날 우리가 주일이라는 한 날에 의미를 두고 그것을 지킨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면 유월절의 의미란 무엇인가? 유월절의 의미는 그 의식들을 통해 나타내 주고 있다. "이월 십사일 해 질 때에 그것을 지켜서 어린 양에 무교병과 쓴 나물을 아울러 먹을 것이요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11,12절). 유월절에는 어린 양을 먹고,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는다. 그런데 어린 양은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뼈를 꺾지 않은 채로 먹는다. 이러한 음식은 결코 단순한 음식이 아니다. 자신의 건강이나 음식의 맛을 즐기는 차원에서의 식사가 아니다.
무교병이란 누룩을 넣지 않은 떡이다. 이렇게 누룩없는 떡을 먹으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하는 것을 기억하라는 말이다. 이스라엘이 바로의 손에서 해방을 받아 출애굽 한다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이런 일을 집안에서 가만히 앉아서 고기를 먹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이 하셨다.
이는 어찌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인지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재촉하여 그 지경에서 속히 내어 보내려고 하므로 이스라엘 백성이 발효되지 못한 반죽 담은 그릇을 옷에 싸서 어깨에 매니라"(출 12:34)고 했다. 그러므로 무교병을 먹으라고 한 것은 일어날 수 없는 출애굽을 하나님이 너무나도 순식간에 하셨음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쓴 나물은 애굽의 고통을 의미한다. 고통 속에서 울부짖으며 고난을 먹고 사는 생활에서 건짐 받은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어린 양을 먹되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고 먹으라고 한 것은, 그 동물은 뼈가 꺾여야 할 동물, 즉 죽어야 할 동물이 아닌데 죽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죽을 필요가 없는 어린 양이 죽는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9장에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다리를 꺾어서 시체를 치워 달라고 요구한다. 그때 군병들은 예수님과 함께 못 박힌 자들의 다리는 꺾어서 죽음을 확인했지만 예수님은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않았다고 말한다.
36절에 보면, "이 일을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결국 예수님의 뼈가 꺾이지 않게 하신 것도 죽음을 당할 필요가 없는 분이 애매하게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며 또한 하나님이 보호하고 계신 존재임을 알 수 있다(시 34:20). 이러한 언약적 성취의 죽음을 하나님께서는 이미 유월절 뼈를 꺾지 않은 양고기를 먹는 유월절 의식 속에 담아서 주신 것이다. 누군가 죽지 않아야 할 분이, 즉 죄 없는 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애굽에서 건짐 받았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로서의 하나님의 백성이란, 절기를 잘 지키는 자가 아니라 유월절을 통해 하나님의 희생을 아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희생을 담고 가나안으로 가지 않는 이스라엘이라면 가나안 족속들을 심판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것이다. 때문에 유월절을 지키지 않으면 가나안 족속들을 심판할 자격이 없는 백성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진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유월절이라는 의식을 지키지 않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을 무시하고 있는 그 자체가 누군가의 희생으로 살아난 은혜를 모르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약속으로 주어진 땅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15-2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밝혀준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막을 만들자 구름이 성막을 덮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성막을 덮었다고 한다(15절). 출애굽기 13:21,22에서는 이것을 기둥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만날 수도, 볼 수도 없는 분이다. 그래서 낮에는 잘 보이는 구름으로 밤에는 불의 모양으로 나타내셔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보여주셨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움직이는 것은 구름기둥, 불기둥에 의해서이다. 구름이 머무르면 머무르고 진행하면 진행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자의로 움직이거나 방향을 정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유진하고 진행치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진행하였으니"(22절).
민수기 1장에서부터 이스라엘이란 여호와의 군대로 말하고 있다. 여호와의 군대로서 계수함을 입고 각 가정의 장자 대신 레위인을 하나님의 장자로 삼아서 군대의 역할을 하도록 이스라엘의 임무는 이미 하나님에 의해 정해져 있다. 여호와의 군대는 철저히 인간적인 정이나 혈통에 얽매여서 여호와의 군대로서의 임무를 잊어버려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여호와 군대의 살고 죽는 문제는 여호와의 말씀에 달려 있다. 이것이 여호와의 군대의 특징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결코 유월절이라는 절기, 안식일로 정해진 날짜의 규칙을 따라 살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살라는 의미로 9장의 말씀이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었다. 여호와의 명을 좇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다. 신자는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가는 것이 바로 천국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하여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을 이렇게 인도하신 것이다.
오늘날에는 성령께서 하신다. 무엇으로? 말씀으로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인격적 말씀으로 주어진 것이 성경이다. 성경이 우리 모든 삶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규칙이나 원칙 내가 정한 기준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 말씀대로 살아지는 것이 믿음이다. 따라서 믿음이란 가만히 있는 것이다. 가만히 있다가 가라고 하면 가고, 서라고 하면 서고, 쉬라고 하면 쉬는 것이다. 앞서서 설치며 리더쉽을 발휘하여 어떤 일을 성취시키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주께서 하라고 하신 것만 하고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다. 시키지도 않은 것을 먼저 성취시켜서 바치는 것이나, 주님이 요구하신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이루기 위해 잔머리 굴리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란 자기가 아무 것도 주체가 되어 할 것이 없고 주님께서 절대적인 주체임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다.(1998.9.13)
민수기 10장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은나팔 둘을 만들되 쳐서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을 진행케 할 것이라”(2절)고 말씀하셨다. 나팔은 제사장이 불게 되어 있고, 부는 때는 비단 소집과 진행하는 것에 대해서만 아니라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도 불게 되어 있고(9절), 10절에 의하면 희락의 날, 정한 절기, 월삭에도 나팔을 불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나팔을 사용하라고 하신 것에는 무슨 뜻이 있는가? 단순히 신호용 정도로만의 의미밖에 없는가?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9절에서 대적과 싸움에서 나팔을 불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대적에게서 구원하리라”고 하셨고, 10절에서도 절기 때에 나팔을 불면 “그로 말미암아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씀들을 볼 때에 나팔을 분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출애굽기 19장에 나팔 소리가 난 것에 대해 처음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을 살펴보자. 13절에서 나팔을 길게 불거든 모든 백성들이 산 앞에 머물라고 하셨다. 그리고 16절을 보면 “제 삼일 아침에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니 진 중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고 했다. 19절에 의하면 나팔 소리는 계속 나는 가운데 점점 더 커지고, 이런 나팔 소리 가운데서 모세가 말하니 하나님이 음성으로 대답하셨다고 했다. 이 말씀 속에서는 나팔 소리가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또한 하나님의 장엄하신 음성, 즉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상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나팔 소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더욱 장엄하게 만들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나팔 소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직접 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들리게 하신 소리였다. 우뢰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는 것만으로는 자연 현상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그 속에서 나팔 소리가 굉장히 크게 나기 때문에 백성들이 자연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타나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두려워서 떨었던 것이다. 따라서 나팔 소리가 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나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기억되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에게 나팔을 불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제는 이스라엘 스스로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바라보고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사는 것으로 알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이스라엘은 나팔을 불고 또한 그 소리를 들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며 대적의 압박에서 구원해 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 쪽에서는 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을 되새기라는 의미로 부는 나팔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중요한 의미가 드러나고 있는데 10절에 보면, 절기 때에는 “번제물의 위에와 화목 제물의 위에 나팔을 불라”고 하셨다. 번제물, 화목 제물은 모두 희생을 의미한다. 즉 희생 제물을 드리고 그 위에 나팔을 부는 규례를 지킴으로써 하나님께서 유월절 희생을 통해 구원을 이루셨기에 그 희생 위에 서 있음을 기억하고 표시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규례는 전부 하나님의 희생을 기억하도록 요구하시는 내용들로 되어 있다. 이스라엘에게 제사 제도나 절기뿐만 아니라 나팔을 부는 것으로도 하나님의 희생을 기억하여야 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며 그 언약에 순종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언약이 유지되고 있으므로 또한 여호와 하나님께서도 그 언약을 잊지 않으시고 하나님 편에서 신실하게 지켜 나가실 것을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팔을 분다는 것은 이스라엘 쪽에서 하나님의 희생을 기억하고 그 언약을 따라 순종하며 살겠다는 의미로 지키는 영원한 규례였다(8절).
요한복음 12:28-29에는 하나님께서 우뢰소리와 같은 소리로 예수님께 대답하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고, 요한계시록 1:10에는 예수님의 음성을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이라고 했다(참고 계 4:1).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낸다고 했고(마 24:31), 고린도전서 15:52에는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 했다. 또한 데살로니가전서 4:16에서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신약에서 나팔 소리는 예수님과 또한 그분의 재림과 연관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뿐이다.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팔을 부는 규례를 통해 하나님의 희생을 배우고 그분의 백성이 된 것을 기억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모든 제도나 규례들을 완성하셨기에 우리는 나팔을 부는 것으로 십자가의 희생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성령께서 우리 육체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을 때에 주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게 된다. 지금도 성령님은 날마다 순간순간 계속해서 이 일을 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에 우리는 재림의 주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주님이 다시 만나시는 자는 하나님 자기 언약 안에 있는 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언제 오시는가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주의 성령께서 우리의 모든 탐욕들을 날마다 깨뜨려 주시기를 기도함으로 복음 안에 머물러 있는 자로 사는 것에 관심가져야 하는 것이다.
11절에 보면 “제 이 년 이월 이십일에 구름이 증거막에서 떠오르매” 시내 광야에서 출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 1년 3월 15일에 시내산에 도착하여(출 19:1, 2) , 제 2년 2월 20일에 시내산에서 떠났으므로 약 열 한 달을 머물렀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내산 경험은 모세를 통해 언약을 맺으신 것이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이 배운 것은 언약의 하나님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는 언약의 하나님으로 알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모세 언약을 통해 하나님께서 과거에 주신 언약의 의미를 더욱 밝히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은 시내산 위에 계시던 하나님께서 시내산 아래로 내려오신 낮아지신 하나님이고, 성막을 짓고 이스라엘 속으로 들어오셔서 죄인들과 함께 하시며,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자신을 희생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셨다. 비록 낮아져 자기 희생을 치루면서 오셨지만 그분은 죄악과 타협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스라엘 속에 죄를 철저히 응징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이스라엘이라고 할지라도 언약을 무시하는 모습이 있다면 그것을 죄로 규정하고 대적으로 삼으시는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다. 그러기에 이스라엘도 꼼짝없이 하나님의 거룩의 요구대로 언약에 순종해야 하는 자들어야 함을 여러 가지 제도, 절기들과 규례들을 통해서 보여주심으로 이스라엘은 제사장 나라로서 살 것을 요구하신 하나님으로 배웠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언약의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생활해야 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진행하여 간 곳은 언약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는데 있어서 전혀 장애가 없고 안전하며 편안한 삶이 펼쳐지는 곳이 아니었다. 여전히 불편하여 불평과 원망이 나올 수 있는 광야이기 때문이다(12절). 이스라엘의 앞 길은 탄탄대로가 아니라 3일 동안을 쉬임없이 갔지만 역시 광야였다(33절).
중요한 것은 광야를 걷느냐 젖과 꿀이 흐르는 안식의 땅을 걷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고 사느냐 하는 문제이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고 산다는 것은 내 마음대로 살면서도 하나님이 언제든지 나타나셔서 나를 보호해 주시고 도와주실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언약의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산다는 것은 늘 말씀에 붙잡혀 사는 것을 말한다.
이스라엘이 시내산을 떠날 때의 모습은 민수기 1,2장에서 하나님께서 정해준 지파별로 진영을 만들어 군대의 모습으로 출발하고 또한 진행한 것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이 진행할 때에 이와 같이 그 군대를 따라 나아갔더라”(28절)는 말씀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였다는 뜻이다. 비록 광야를 걷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사는 것이라면 그것이 곧 안식의 상태에 사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법궤가 움직일 때마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라고 했고, 법궤가 멈출 때에는 “여호와여! 이스라엘 천만인에게로 돌아오소서!”라고 노래했다(35,36절).
이스라엘은 법궤가 움직일 때에 진행했고 법궤가 멈출 때에 멈추어 섰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대로 계획을 잡고 방향을 정하며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을 가지고 방향을 정하시며 움직이게 하셨다. 그 움직임대로 움직이는 자들이 이스라엘이었다. 비록 그 길이 광야라고 할지라도 이스라엘이 자의로 피해갈 수 있는 길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오히려 광야라고 하는 사실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복음을 인간들이 복을 받고 유익이 되는 것만으로 말해왔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내세에서도 영생이라는 보험을 들어 놓고 현세에서도 물질의 풍부함과 가정이 잘되며 자신의 꿈을 이루는 복을 누릴 것이라고 선전하고 있는 것이 한국 교회가 전하는 가짜 복음이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더 곤경과 어려움에 처하며 핍박받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이름과 자기 의를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데 그 길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도는 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주께서 함께 하시며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심에 대하여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시 23:3,4).
르우엘의 아들이요 모세의 처남인 호밥은 모세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내 고향 내 친족에게로 가리라”(30절)고 한다. 호밥은 고향과 친족의 끈을 끊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복에 동참하지 못한다. 이렇듯 인간적인 끈과 핏줄은 항상 복음의 걸림돌이 된다.
모세는 “청컨대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 당신은 우리가 광야에서 어떻게 진칠 것을 아나니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31절)라고 호밥에게 요구하지만 정작 모세와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분은 법궤로 상징된 하나님이시다(33절). 우리 삶에 있어서 인간의 안내나 세상적인 도움의 환경이 전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의지할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계획을 세우면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 안에서 나의 계획이나 인간적인 도움이나 환경이 무의미하며 주님께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모습으로 사는 자가 성도이다. 성도는 주님만을 목표요 방법으로 바라보며 살기 때문이다.(1998.10.11)
민수기 11장
10장까지에서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이 혈통적인 이스라엘에서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한 여호와의 군대로서 전환되어 전열을 가다듬는 작업이 있었다. 여호와의 군대는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심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움직여져야 하는 존재이다. 이스라엘이 관심 가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존재 의의는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일에 있다.
그러한 군대로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곳으로 따라 갔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3일 길은 광야의 연속이었다. 비록 광야로 행진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내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는다. 1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진 끝을 사르게 하시매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그 곳 이름을 다베라라 칭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연고였더라”(1-3절). 여기서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믿음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실 민수기는 여기서부터 계속해서 원망과 불평의 연속으로 되어 있다. 어떻게 실패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 진 외곽을 살라 버리셨다. 일종의 경고를 하신 것이었다. 모세의 기도에 의해 불은 꺼지자 원망은 잠시 누그러졌다가 다시 폭발하고 있다. 실로 그들이 원망과 불평을 거두어들인 것은 잠깐이었다. 또 다시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의 탐욕이 발동한 것이다(4절). 여기서 섞여 사는 무리란 출애굽기 12:38에서 표현하고 있는 “중다한 잡족”으로 이방인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기에 동조하고 있고 동일한 원망과 불평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4절)라고 불평이 노골화되고 있다.
이방인들과는 다른 언약의 백성으로서 사는 모습이 다르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방인과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있는 것이다. 탐욕이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는 없는 것이 아니었다. 자극을 받으니 다시 본성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 잠깐동안 절제하고 잠깐동안 사랑을 베풀며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쉽다. 일시적으로 예수님의 삶을 흉내를 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잠깐동안 예수 믿는 흉내를 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일생을 주님께 드린바 되어 주를 따른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시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에 불만이 생기는 것이 탐욕이고 그 탐욕이 죄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매일 내려주시는 만나에 대하여 싫증을 느낀 것이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고기도 먹어야 된다고 불평하고 있다. 늘 새로운 것을 찾는 인간의 탐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이스라엘의 탐욕이 애굽에서 겪었던 시절을 생각나게 하듯이 언제나 인간의 탐욕은 과거에 좋았던 시절을 동경하게 되어 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5,6절).
애굽적 심성이 늘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유혹한다. 그들의 애굽적 심성은 세상의 힘으로 자신들을 유지시키고자 하는 정신이다. 즉 세상적 힘으로서의 건강 유지는 음식에 달려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관심은 하나님의 약속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1절에서 “악한 말로 원망”했다는 말에서 드러나고 있다. 무엇이 악한가? 단순히 하나님을 대항했다는 것이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언약과는 반대로 나아가는 사안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과 대치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그들의 원망과 불평으로 증명되고 있는 셈이다. 이스라엘은 약속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대한 관심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의 관심은 전에 행했던 것에 관심을 끊지 못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관심은 애굽과 같은 세상이지 약속의 나라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늘 세상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집착하면서 세상것이 부족하면 불평과 원망이 튀어나오는 것이 세상에 집착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11절에 보면, 마침내 모세에게서도 불평이 나오고 있다. “여호와께 여짜오되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의 목전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급기야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15절).
모세는 자신이 맡은 짐이 너무 무겁다고 생각했다. 즉 지금 이 순간에 모세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스라엘에게 평안과 건강을 유지하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의 무거운 짐을 나누어지게 해 달라는 것으로 구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원망 속에 모세의 원망도 들어 있었다. 이를 통해 모세는 모세대로 하나님 편이 이스라엘 중에 없음을 깨달아야 했다. 과연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자가 누구인가를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세도 하나님 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결국 모세도 온전한 중보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즉 모세도 이스라엘을 대속하는 메시야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목사들의 목회는 교인들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 일에 불과하다. 목사들이 가지는 착각이 교인들은 믿음이 없고 자기만 하나님 편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얼마나 안믿는 존재였으면 목사라도 시켜서 하나님에 대해서 먼저 그리고 많이 배우게 하셨는가 하는 것을 생각할 줄 아는 자가 목사다. 나도 예수님의 피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하나님은 장로 70인을 모아 하나님의 신이 임하게 하신다. 여호와의 신이란 신약에서 성령을 말한다. 여기 70인은 이스라엘에서 대표로 뽑혀 나온 원로들이다. 그렇다면 70인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이 임하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삼으시겠다는 뜻이다.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29절). 이스라엘은 고기를 먹고 싶어서 모세와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이스라엘로 세우신 것은 모두에게 하나님의 신을 주셔서 하나님 선지자로 삼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선지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이다. 성령이 임하는 자는 하나님의 선지자의 모습으로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만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25절에 보면, 하나님의 신이 임한 때만 예언을 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하나님의 뜻대로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가 선지자이다.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고 유월절 어린양의 피의 정신으로 사는 자여야 함을 이를 통해 드러내신 것이다. 때문에 자기의 탐욕으로 하나님을 대항하는 자들에 대하여 진노를 내리심으로 이스라엘에서 잘라내셨다(33절). 먹는 문제로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는 자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1998.10.18)
민수기 12장
1절에 보면, 모세가 구스(에디오피아) 여자를 취했다고 말씀하고 있고 그것 때문에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했다고 되어 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한 이유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아내 십보라가 죽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첩으로 구스 여자를 취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어쨌든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한 것은 구스 여자를 취했다는 것을 빌미로 삼아 모세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2절).
하나님께서 이 말을 들으셨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3절에 보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말씀하고 있다. 즉 모세는 인간적인 온유함으로 인해 미리암과 아론의 개인적인 비방에 대해 넘어가려고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문제에 대하여 결코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께서는 구름 기둥 가운데로 강림하셔서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신다.
미리암이 주동이 되어 모세를 비방하고 나서는데 아론이 동조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들의 비방은 아마도 11:29에서 언급하고 있는 모세의 말에 근거를 두었는지도 모른다.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래서 미리암과 아론은 모세를 비방하면서 자신들도 하나님과 교통하는 존재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계시가 자신들에게 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와의 관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8절). 여기서 여호와의 형상이란 신약에서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다(고후 4:4, 골 1:15). 그렇다고 모세가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구속자의 영광스러운 모습과 그 광채를 본 자라고 생각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늘의 귀하고 영광된 것을 모세에게 보여주시고 나타내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를 “내 종 모세”라고 말씀하시면서 모세에 대한 일체의 도전을 막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한마디로 모세는 너희와 다르다고 하신다. 다른 선지자는 꿈이나 환상으로 말씀하셨지만 모세는 직접 대면하여 명백히 말씀하셨다고 하신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은 모세라는 사람을 아주 특별하게 대우하시는 듯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모세가 특별한 사람이라서 특별하게 대우하시는 것이 아니라 단지 보통 사람과 같은 존재인 모세를 불러서 하나님의 계시를 담아서 보여주는 그릇으로 사용하실 뿐이다.
따라서 모세라는 한 인간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모세에게 담겨 있는 계시가 특별한 것이다. 즉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계시하시고 모세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순종하는 것이다. 아론과 미리암은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 방식에 대하여 구스 여자를 취했다는 빌미로 모세를 비방했던 것이기에 하나님은 간과하실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할 때에 원망하는 연약한 모습이 비쳐질 수 있고, 또한 70인의 장로에게 하나님의 신을 허락하셔서 예언을 하게 하셨을지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전달하는 중보자의 역할과 계시는 모세라는 그릇에 담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시에 도전하는 미리암을 문둥병이 들게 하셨고 그것에 대하여 모세가 중보 기도를 하는 형식을 취한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하나님이여 원컨대 그를 고쳐 주옵소서”(13절). 하나님은 미리암을 칠일 동안 진 밖에 가두었다가 다시 들어오게 하신다. 모세의 기도 때문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다시 이스라엘 진에 합류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의 계시와 그 방식에 도전하는 자는 결코 이스라엘이라고 할 수 없다.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르는 군대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3:5,6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또한 모세는 장래의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이렇듯 출애굽 때에 모세에 대한 모든 도전들을 철저히 차단하신 것은 종말의 때에 완전한 중보자 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드러내시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모세를 중심으로 하여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을 자신의 집으로 표현하였듯이 오늘날에는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충성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만을 자랑으로 삼는 자를 두고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씀하신다. 신약에서의 하나님의 집은 건물로 표현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이다(엡 2:20-22).
흔히 이 본문을 가지고 행해지는 대부분의 설교는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도전해서는 안될 것으로 교훈하는 설교에 그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목사에게 도전하여 패가망신하였다는 거짓말을 마음껏 유포하면서 교인들에게 공포심을 조장한다. 그리고는 자신의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교인들의 정신을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하는 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 목회자들의 모습이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본문은 결코 목사에게 도전해서는 안된다는 뜻으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와 그 계시의 방식에 있어서 중보자에 대한 도전이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그렇게 쉽게 넘어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목사에게는 권위가 없다. 다만 말씀의 권위가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로 권위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하신 말씀대로 이루어진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 앞에 떨며 경외하는 마음으로 복종하게 되는 사람이 성도이다. 비록 목회자가 아닐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고 말씀 안에 있는 자이기 때문에 말씀의 권위로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전하게 되는 것이다.(1998.11.1)
민수기 13-14장
(없음)
민수기 15장
15장에서 갑자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해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 이렇게 갑자기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교육하시려는 것이다. 20세 이상의 성인들은 거의 남김없이 광야에서 죽게 되었고 어린 아이들만 자라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이러한 시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왜 가나안 땅에 못들어 가는가 하는 것과 어떤 사람이 가나안 땅에서 살기에 합당한 땅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가르치실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광야에서 죽는 이 사람들도 비록 가나안 땅에는 못들어 가지만 사는 동안에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참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그 약속이 어떤 것인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시는 것은 그들이 구원 받느냐 못받느냐가 관심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알리시는 것에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가나안 땅은 어떤 자들이 들어가서 살 수 있고, 어떤 사람이 못들어 가며 살 수 없는 곳인지 본문을 통해 이해해야 할 것이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제사에 대한 것이다.
여기 제사에서 소제와 전제를 통해 그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데 소제는 계속된 헌신의 생활을 의미하고 전제(관제-딤후 4:6)는 남김없이 드린 최종적인 헌신으로 온전한 헌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께 즐겨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사는 자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께 즐겨 헌신된 자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온전히 그리고 기꺼이 드려진 자가 약속의 땅에서 살 수 있는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22-26절에서는 백성 전체가 명령을 ~~~ (이후 내용 없음)
(1998.11.22)
민수기 16장
레위의 후손인 고라와 르우벤의 후손인 다단과 아비람이 주동이 되어 하나님을 반역한 사건을 다루고 있다. 반역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에게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회중에서 두령이요 족장들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없었다. 그들은 불신자들이었다. 그들은 그 동안에 배우고 체험하고 있는 바대로 지적으로 이해는 하고 있었다.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3절)라고 하고 있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출 19:6)이므로 온 이스라엘이 다 제사장이요 거룩한 백성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나 그 산을 출발할 임시에 명령하신 진영의 의미에 대해서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머리가 좇고 이해하는 것이 빨라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모세가 명령하는 말씀들을 정확히 잘 파악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두령이요 족장이 되기에 족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이들에게는 하나님을 실제로 믿는 믿음이 없었고 신뢰가 없었다. 이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지식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 머리 좋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하나님이었다. 야고보서가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들은 귀신의 믿음과 다름없는 신앙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사실을 다음의 사실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라와 함께 레위 자손들은 제사장 직분을 구했다(10절). 제사장 직분이란 사람이 구해서 주어지는 것이나 시험쳐서 일등한 사람들이 차지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선택하심으로 차지하는 직분이다(7절). 그런데도 이 사람들은 마치 아론이 혼자서 제사장 직분을 독차지하고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듯이 비난하면서 이론을 원망한다.
그래서 모세는 너희들이 패거리를 지어서 여호와를 반역하고 아론을 원망하는구나 고 하면서 그들을 책망한다(11절). 여기서 “아론은 어떠한 사람이관대 너희가 그를 원망하느냐 ” 고 한 말씀은 아론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받아 제사장이 되었을 뿐인데 너희들이 왜 아론이 스스로 제사장 직을 독차지 하고 있는 듯이 그를 원망하느냐는 책망의 말씀이다. 이 고라 일당에게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선택하셨다는 것이 받아 들일 수 없는 불평등같이 여겨졌다. 그래서 자기들의 위치를 감사하지도 않고 불평불만을 늘어 놓으면서 제사장 직분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래서 모세는 “레위 자손들아 너희가 너무 분수에 지나치느니라”(7절)고 하면서 탄식한다.
(1998.11.29)
민수기 17장
고라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징계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족장대로 각각 지팡이를 하나씩 가지고 오게 하여 지팡이마다 각 족장의 이름을 기록하게 하되 레위의 지팡이에는 아론의 이름을 쓰도록 명하셨다. 그리고 회막(증거의 장막) 안에 두었다가 그 다음날 보니 아론의 지팡에만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리었다(8절).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지팡이는 통솔하고 지휘하는 역할로 쓰이는 것임으로 이 지팡이는 통치자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통치자의 위치에 선택한 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하심으로 다시는 반역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려는 것이다(5절).
이것으로서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를 제사장 족속으로 선택하셨다는 것을 확증해 주셨다. 나머지 다른 지파의 족장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자기들의 지팡이를 받아 쥘 수밖에 없었다(9절). 하나님이 택하지 않았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반면에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가져다가 패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했다(10절). 하나님의 선택에 불복하고 선택받아 세움을 입어서 일하는 자를 원망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고 다시는 원망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10절). 그렇다면 단순히 아론이 이스라엘의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마른 나무 막대인 지팡이에 하루 동안 움이 돋는다는 것도 이상하고 신기한 일인데 하루 사이에 지팡이에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아무 것도 말할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서 생명과 죽음에 대한 본질적인 뜻을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이다. 즉 아론의 지팡이만 생명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죽은 모습이라는 뜻이다. 너희들은 본래 죽은 자들이다. 그것이 너희들의 정직한 실체이다. 그런데 왜 자신의 존재에 가치를 두려고 하느냐는 뜻으로 지팡이를 가지고 물으시는 것이다.
비록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론만이 살아 있는 자라는 뜻이 아니다. 아론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똑같이 죽은 자이다. 창세기 49:5-7에 의하면 레위 지파는 세겜 사건(창34장)으로 인해 저주를 받은 존재로 그리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의 후손을 “이스라엘 중에 흩으리로다”(창 49:7)고 하셨다. 즉 레위 지파에게는 기업이 주어지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중에 흩어지게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흩어지지만 실제로 하나님은 이들을 자기 곁에(성막과 관계된 일) 두시고 하나님 자신을 섬기도록 하셨다. 즉 하나님은 레위 지파를 선택하셔서 제사장의 일과 성막을 관리하는 일을 하도록 맡기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론도 아담의 후손으로 죽어야 할 죄인의 모습 그대로이다. 그런데 왜 유독 아론의 지팡이에만 열매가 맺혔다는 것은 이 점을 보여주고 있다.
5절에 보면, “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리니 이것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너희를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내 앞에서 그치게 하리라”고 한다. 하나님이 아론을 택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아론을 통해서 생명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죽은 자라는 것을 발견하고 아론을 통해 생명이 주어지는 것임을 알고 아론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아론을 따른다는 것은 아론이라는 인간이 생명을 준다거나 아론이 메시야라는 의미가 아니다. 아론도 이스라엘의 여느 백성들과 같이 죽은 자이기 때문에 아론이라는 인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론을 선택하셔서 생명의 길을 제시하셨기 때문에 아론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생명의 길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고라 자손이 반역을 했다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한 처사이며 하나님의 약속을 하찮은 것으로 여긴 모습이다. 오늘날 고라와 같은 모습은 약속의 모든 것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 오직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백성으로 만드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선택에 반발심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에 불만이 생기는 것 자체가 죄라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된 것으로 예수님이 이루신 모든 의 안에 사는 것이다. 또 무슨 의를 이루어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는 없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은 자는 무엇인가 하려고 설치는 모습이 아니라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묵히 따라갈 뿐이다. 이 말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은혜의 선택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하나님이 시킨다고 생각되거든 하라.
그러나 자기의 의를 내세워서 예수님의 의에 끼워 넣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의 행위를 죄악된 것으로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는 심정으로 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의 일은 이런 정신으로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에 비로소 인간의 열심과 경쟁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천국의 모습이고 그 천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 교회여야 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참으로 가관이다. 12절 이하를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에게 말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는 죽게 되었나이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가까이 나아가는 자 곧 여호와의 성막에 가까이 나아가는 자마다 다 죽사오니 우리가 다 망하여야 하리이까”(12-13절)라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다 망하여야 하리이까?”라는 말은 이스라엘이 자기 방식대로 끝까지 해보겠다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은 레위인을 보거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하면서 아론을 따르고 순종하면 되는데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들이 나가서 설쳐 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가 죽게 되었나이다. 우리가 해보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다 죽이시잖아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요 나의 모습임을 알라!
하나님께서는 이제까지 자신의 생명을 은혜로 보여주셨는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그것을 못믿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18장 이하를 통해 하나님께서 다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신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18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알게 될 것이다(1998.12.6).
민수기 18장
1절과 5절을 연결시켜서 보면 이런 말씀이 된다.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들과 네 종족은 성소에 대한 죄를 함께 담당할 것이요 너와 네 아들들은 너희가 그 제사장 직분에 대한 죄를 함께 담당할 것이니라…이와 같이 너희는 성소의 직무와 단의 직무를 지키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미치지 아니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된 본성 때문에 그들에게 내려질 하나님의 진노가 애굽 백성에게 내려진 것처럼 내려지지 않고 지금 은혜 가운데 거할 수 있는 이유는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 때문이다. 그 희생을 담고 하나님의 진노를 가로막고 서 있는 자들이 제사장이라고 하는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고라의 반역을 통해 더욱 확고하게 보이셨다.
그렇다면 제사장의 의미를 깊이 깨닫고, 제사장에게 담겨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충분히 알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것은 17장에서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통해 보여주셨듯이 자신이 죽은 지팡이라는 것을 아는 자이다. 자신은 죽은 지팡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때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죽음의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즉 제사로 말미암아 자신이 죽고 하나님과 화목된 상태로 전환되어진 자임을 아는 자는 이제 그것을 나타내고 증거하는 차원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십일조를 바치라는 것으로 말씀하신다.
제사장은 죽어야 할 옛 사람을 새 사람으로 만드는 일을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물이요 증거자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바치는 것으로 제사장 나라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21,22절을 보면,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이 후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말 것이라 죄를 당하여 죽을까 하노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백성들이 레위 자손에게 십일조를 주어서 레위 자손이 하는 회막의 일을 갚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십일조를 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스라엘의 십일조는 레위인에게 가도록 되어 있다. 십일조를 받는 사람이 정해져 있다. 따라서 십일조의 중요성은 소득의 십분의 일을 정확하게 드리느냐 아니냐 하는 식으로 돈의 정확한 액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바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대대로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하나있다. 그것이 곧 유월절의 어린 양의 희생이다. 어린 양을 통해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희생을 잊어버릴 때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에서 끊어지게 되어 있다. 즉 이스라엘로서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이 그것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마련하신 장치가 세상에 기업이 없는 자들을 두시고 그들에게 십일조를 바치게 해서 그것을 통해서 세상에 기업도 없이 고아와 과부와 같은 비참한 모습이었던 자신들이 어린 양의 희생으로 인해서 살아났다는 것을 계속해서 기억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계속해서 복 안에 머물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십일조라는 것은 십일조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고 그 행동이 가상해서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복 안에 있기 때문에 그 복이 어디서부터 오는가를 늘 깨닫고 출처를 인정하며 증거하는 행위로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다.
복의 출처는 희생이다. 이 희생을 보여주기 위해서 세움받은 사람이 바로 레위인이며 그 중에서 제사장이다. 때문에 제사장에게는 땅의 기업이 주어지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의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백성들이 줄 십일조를 바라보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희생을 바라보고 사는 존재가 제사장이요 레위인이며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 복의 출처로서의 언약적 희생을 늘 기억해야 하는데 그 방식이 바로 제사장에게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확한 십일조를 바친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의 희생을 알고 그것을 인정하느냐 않느냐 하는 차원이다. 십일조에 대해서는 이미 레위기 27:30-33에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다시 강조되는 것은, 고라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이 언약적 계시가 혼돈될 상황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나고 살구 열매를 맺게 하셔서 언약적 희생을 드러낼 제사장으로 아론을 택하셨음을 공개하셨고 이스라엘 쪽에서 그것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십일조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십일조란 제사장이 죄를 담당한데 대한 대가도 아니며 복을 받기 위한 수단도 아니다. 한 쪽은 희생하는 자, 또 한 쪽은 그 희생 덕분에 살아있는 자의 사이에 십일조라는 연결 고리가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십일조는 하나님 편에서 복의 통로, 계통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스라엘 편에서는 그 복의 계통을 인정하는 언약적 반응이다.
구약의 제사장은 언약의 실체가 되시고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직분이다. 한 마디로 하자면, 구약의 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주는 직분이다. 그렇다면 복은 대제사장 되셔서 희생의 의를 완벽하게 보여주신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지 다른 통로가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에서 말씀하고 있는 십일조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교회가 십일조를 복의 통로로 혹은 복을 받는 믿음의 행위로 고집한다면 그것은 결국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온전히 이루신 십자가의 대속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구약의 십일조는 단순히 돈이라는 것에 국한되지 않았다. 삶의 모든 소득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을 오늘날 돈으로 대체시켜서 십일조를 강조한다는 것 자체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돈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십일조의 의미를 돈에 두고 있기 때문에 돈이 아까운 마음에서 헌금에 대한 불평을 하기도 한다. ‘얼마를 해야 하느냐, 나같이 가난한 사람도 헌금을 해야 하느냐, 하나님이 마음을 보시지 돈을 보시겠느냐’는 등등의 핑계를 대면서 헌금에 대해 자유하려고 애를 쓴다. 이런 모습이 바로 돈에 관심을 두고 사는 모습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에 헌금이라는 개념은 없다. 서신서에서 바울이 말한 연보의 개념은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 대신 자신의 몸을 온전히 바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이제 내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며 나 자신까지도 주님의 것이라는 차원에서 세상적이며 물질적인 것에 의미를 두지 않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겠다는 정신으로 연보를 함으로 세상의 힘을 흩어버리는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복음을 전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데 쓴다는 의미로 말했던 것이다. 교회란 돈을 쓰는 사업체가 아니기 때문이다.(1998.12.13)
민수기 19장
본 장은 이렇게 시작되고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일러 가라사대 여호와의 명하는 법의 율례를 이제 이르노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서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로 끌어오게 하고 너는 그것을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줄 것이요 그는 그것을 진 밖으로 끌어내어서 자기 목전에서 잡게 할 것이며”(1-3절).
그래서 그 붉은 암송아지의 피를 회막 앞을 향하여 7번 뿌리고 그 암송아지를 태울 때에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을 던져넣는 의식을 행한다. 여기 속죄제에서 나온 재를 정결케 하는 물에 섞어 그것을 부정한 사람에게 뿌리라고 말씀하셨다(12절).
그러면 왜 정결케 하는 물을 만들고 부정한 자에게 뿌려야 하는가? 어떤 상태에서 정결케 하기 위한 것인가? 하나님은 왜 이 시점에서 정결케 하는 의식을 말씀하시는가? 고라 자손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시체가 즐비한 상태이다. 즉 시체 처리 문제 때문에 하나님은 정결케 하는 의식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부정하고도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총회 중에서 끊쳐질 것이니라 그는 정결케 하는 물로 뿌리움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부정하니라”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21-22절에 관한 문제이다. “이는 그들의 영영한 율례니라 정결케 하는 물을 뿌린 자는 그 옷을 빨 것이며 정결케 하는 물을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할 것이며 부정한 자가 만진 것은 무엇이든지 부정할 것이며 그것을 만지는 자도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자세히 보면 암송아지를 잡는데 그 암송아지를 잡은 제사장도 부정하고(7,8절) 그 암송아지를 불 사른자도 부정하고 또 재를 모아 두는 사람도 부정하다고 선언하고 있다(10절). 왜 이러한 사람들을 부정하다고 하는가? 제물을 잡고 태우고 그 재를 만들었는데 왜 부정하다는 것인가? 그 제물이 누구의 죄를 위한 제물인가? 인간의 죄를 위한 제물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잘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이다.
정결케 하는 행위로 말미암아 무슨 신비한 능력이 나타나거나 물 자체가 사람을 정결케 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정결케 하는 물일지라도 사람이 그것을 만지면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사람은 본래 부정한 존재이기 때문에 부정한 존재가 주체가 되어 무엇에라도 접촉하게 되면 그것은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미 모든 인간이 부정하다는 전제를 가지고 여기서 정결케 하는 의식을 반복해서 말씀하심으로 꼭 고라 자손의 반역으로 말미암아서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근본적으로 부정한 존재임을 밝히고 알리시는 것이다.
이때까지 민수기의 기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한 행군을 하는 그러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가 왜 갑자기 제사장의 문제 그리고 오늘 본문에 시체를 만진 자들이 부정하게 되었는데 그 부정을 정결케 하기 위한 물을 만드는 그러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에는 약속의 땅에 못들어 가겠다고 거부하는 바람에 약속의 땅에 약속의 백성만이 들어가는 것임을,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재정비하시는 것이다. 즉 가나안 땅에 들어갈 자가 어떤 자인가를 가르치시는 것이다. 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느냐 그것은 깨끗한 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깨끗하다는 것은 윤리적이나 도덕적으로 고매한 인품을 가지고 사는 자가 아니라 자기가 부정한 존재, 곧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아는 자 그래서 하나님의 그 희생과 긍휼로 깨끗해 질 때에 그 가나안 땅에 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으로 바로 진입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
백성들은 아낙 자손과 같이 너무 힘이 센 무리들이 있기 때문에 못들어 간다고 했다. 그러면 이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우리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무기를 만들고 훈련을 받아서 그들이 정복할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를 않았다. 가나안은 힘으로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희생으로 인하여 정복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은 힘의 축적, 폭력, 다량의 무기 수입, 사기 충천, 부강, 발전, 성장 이런 것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부정함을 알고 하나님의 긍휼만 필요한 존재임을 아느냐 하는 것이다.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는 존재임을 알고 오직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에 의한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들어갈 수 있는 것임을 고백하는 자가 가나안 땅을 정복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자로 하나님은 만들어서 약속의 땅에 자기 백성들을 두려고 하시는 것이다.
반복되는 상세한 규례들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기들의 죄인됨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속죄의 필요성을 확실히 깨달아야 했다. 자세한 규례가 주어짐으로 그들은 시체에 접촉함으로 인해 생긴 ‘부정’을 씻어낼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그러나 이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이 알아야 했던 것은 자신들이 부정에서 깨끗하게 되는 것이 동물의 제사에 드리는 예물로는 완벽한 제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동물들의 흘린 모든 피, 백향목과 우슬초 그리고 홍색실의 사용, 이 모든 것으로도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관계된 부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히브리서 9장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히9:13,14).
바울 사도는 이러한 구약적 배경을 염두에 둔 듯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5:26)고 말씀해 주고 있다. 결국 민수기 19장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들이 장례식에 참여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부정함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정결케 됨에 대한 해결책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밝히 계시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 장례를 치를 때에 시신(관)을 예배당 안으로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로 시시비비할 것이 아니라 어느모로 보나 부정한 나 같은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천국은 바로 내가 얼마나 부정한 존재, 악한 존재라는 것을 알며 나같은 자는 반드시 십자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의 긍휼과 사랑만을 바라보는 가난한 심령 이러한 마음상태를 가진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 심령이 가난한 상태로 만들어서 천국에 넣으시는 것이다. 주님의 피가 아니면 나는 도대체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 이것이 신자의 모습이고 진정한 힘인 것이다.(1998.12.20)
민수기 20장
22절에 보면, 가데스 바네아에서 출발해서 호르산에 이르렀다고 했고 이때에 아론이 죽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26절). 민수기 33:38에 의하면, 아론이 죽은 해가 애굽에서 나온지 40년이라고 하였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지 못하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가 38년이라는 긴 세월을 방랑하여 이제 다시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하나님에게 불순종하여 가나안 정복에서 실패한 후에 이제 하나님의 말씀대로 20세 이상 되는 사람들 심지어 미리암과 아론까지도 죽는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시 약속의 땅으로 진입이 이루어져야 하는 시점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하자 일어난 사건이 무엇인가? 물이 없으므로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다. 5절에 보면,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 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라고 말한다. 지금 이스라엘은 물이 없어서 원망을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단순히 물이 없다는 것에 대한 불평이 아니었다. 물과 함께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원망하며 파종할 땅이 있는 애굽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배가 고파서 먹을 것 타령을 한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오늘 아침에도 만나가 내려서 그 만나를 먹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자신들의 환경을 탓하며 원망하고 있었다. 원망한 정도가 아니라 공박했다(2절).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공박했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항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대들고 반항한 것이다. 왜 사람들이 원망하는가? 그 이유는 다른데 있지 않다.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기가 바라는 대로 환경이나 여건이 되어지지 않기 때문에 왜 내가 태어났는가? 나는 왜 이런 환경에 태어났는가?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고 원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을 향하여 손가락질하며 대드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은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을 잘 드러내는 증거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주님께 반항하기 위해서이다. 기도로, 교회 봉사로, 헌금으로, 전도로, 반항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만히 계십시오, 제가 하나님을 위해 멋지게 일하는 모습을 보십시오.’라고 뽐내며, 나도 이만큼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반항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급기야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우리가 우리 형제들이 죽었을 때에 죽었더면 좋을 뻔하였도다”(3절).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두려워 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다 죽었는데 그처럼 자신들도 죽었으면 좋았다는 것입니다. 절망의 끝에 가면 인간은 이렇게 말한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말이다. 이때 죽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죽이므로 하나님을 죽인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극한 상황에 몰린 인간의 본래 모습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지니라”(8절). 하나님은 원망하는 이스라엘에게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신다. 왜 반석에서 물을 내시는가? 출애굽기 17:6을 보면, “내가 거기서 호렙 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마음 상태는 출애굽기 17장에서나 여기서나 달라진 것이 전혀 없다. 출애굽 이후 광야에 나온 처음부터 그들은 물이 없다고 계속 불평했었다(출15:22-24). 그런 점에서 다시 모세로 하여금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한 것은 과거에나 지금이나 이스라엘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하는 자들임을 공박하는 차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뿐만 아니라 짐승들에게도 물을 주어서 먹게 하셨다. 반석이란 물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반석에서 물이 나온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라는 것이다. 불가능에서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은혜이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 은혜, 약속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12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모세가 가나안 땅 즉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을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한 것’으로 들고 있다. 그것이 왜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될 만큼 큰 죄가 되는가 하는 의문을 우리는 가질 수 있다. 8절과 11절을 비교해서 보면, 하나님께서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는데 모세는 반석을 두 번 쳤다고 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모세가 반석에서 물을 내는 이 모든 작업이 단순히 물을 백성들에게 먹이는 것에 국한되는 작업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만 먹이고 말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통하여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또 이들이 받는 약속의 땅이란 어떤 땅인가를 보여주어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망령되이 말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자신의 경험과 혈기를 내세운 것이다(참고 시 106:32,33). 결국 모세조차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합당하지 않는 자는 어떤 자라도 약속의 땅에 용납되지 않는 것임을 가장 확실한 메시지로 주시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은 모세보다 우월한 온전한 중보자를 갈망할 수밖에 없어야 한다(히 3:1-6). 모세와 달리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순종한 새 언약의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늘 그분이 주시는 생명수를 공급받으며 사는 자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0:4에서 반석이 곧 그리스도라고 언급했다. 이스라엘의 주특기가 원망이듯이 우리의 주특기 역시 원망이다. 주님이 죽으신 것은 바로 인간의 원망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의 욕망을 채우려고 원망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주님이 죽으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불평과 원망이 나오거나 하나님을 공박하는 모습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주님의 은혜로 받으며 그 은혜 안에서 은혜를 먹고 마시며 사는 삶으로 살아지는 것임을 아는 자가 성도이다.
14절에서 모세는 에돔의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진로에 대한 협상을 하게 한다. 에돔은 야곱의 형 에서의 자손들이다. 그래서 “당신의 형제”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에돔은 많은 백성들을 데리고 나와 강한 손으로 막았다(20절). 그러자 이스라엘은 돌이킬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기록을 남기고 그 다음에 아론의 죽음과 더불어 엘르아살을 대제사장으로 세우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곧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에 진입함에 있어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모세가 아론의 옷을 벗겨 그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매 아론이 그 산꼭대기에서 죽으니라”(28절).
대제사장이 하는 일이란 바로 백성들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또한 대신해서 사하는 일이다. 에돔이나 가나안 땅의 나라는 힘이 있어야 살아 남을 수 있고 지탱할 수 있는 나라이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원망하는 이스라엘은 제사장의 죄사함에 의해 유지될 수 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용납될 뿐만 아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었다.
모세와 아론은 죽는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영원히 있어야 할 것은 탁월한 리더쉽을 가진 자가 아니고 미래에 대한 비젼도 재정적인 힘도 아니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희생과 사랑이 있어야 되었다는 것을 아는 모습이어야 한다.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있어야 할 힘이고 능력인 것이다. 역시 오늘날 주님의 교회가 이 땅에서 보여주어야 할 것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에돔이 많은 숫자를 데리고 나와서 힘을 과시하는 것과 같은 교회성장이 아니다. 예수님의 피에 의해 구원이 이루어지는 십자가의 능력을 날마다 공개하는 것이다. 아론은 죽었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죽고 또 죽어갔다. 그러나 영원하신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그분이 살아서 오늘도 이 일을 이루신다.(1998.12.27)
민수기 21장
이스라엘이 에돔 땅을 통과하기를 원했으나 에돔 왕에 의해 거절당하자 에돔 땅을 피해서 진행하여 호르산에 이르렀다(민 20:22). 여기서 아론이 죽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30일 동안 애곡했다(민 20:29). 이 상황을 틈타 가나안의 남방에 있는 아랏 왕이 군사를 이끌고 나와 이스라엘을 공격하였는데 몇 사람이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1절). 그래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서원을 하자 하나님께서 아랏 성읍을 이스라엘에 붙이시매 이스라엘이 아랏을 멸하였다(3절).
아마 가나안의 남방 아랏을 물리쳤다면 이제 가나안 땅으로 진입이 된 것이나 다름이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바로 진입하지 아니하고 다시 홍해로 내려가는 길로 가고 있었다(4절). 아마도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길이었기에 하나님의 구름 기둥이 계속해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지 않았던 것같다. 이스라엘은 이 때문에 몹시 마음이 상하여(4절)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게 된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 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5절).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바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하셨을까? 에돔에게는 세일을 기업으로 주셨기 때문에 침범하지 못하도록 하실 뿐만 아니라(신 2:4,5) 아직은 모세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고 하면,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말씀하셨고 또한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언약에 대하여 계시할 것이 있기 때문에 가나안 땅으로 바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막으신 것이다. 그래서 아론을 데려가시고 거기서 지체하게 하시며 아랏의 공격을 당하게 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정을 보고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따라 일하는 분이시다. 때문에 우리의 삶의 과정에서도 하나님께서 막으신다는 느낌이 들고 뭔가 안되게 하시는 일이 있다면 그것 때문에 원망하거나 불평할 필요가 없다. 불평할 것이 아니라 포기하고 후퇴하면 되는 것이다. 내 생각대로 하려고 하니까 불평과 원망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아서 나아가고 싶은 욕심에 쉽게 사로잡히게 된다.
우리가 성경을 읽는 이유도 어쩌면 이런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점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는가? 지금도 한국 교회의 대부분은 12월 31일과 새해 1월 1일을 기해 송구영신예배라는 굿판을 벌여놓고 헌금이라는 복채를 들고 오는 자에게 ‘복’에 대한 성경 구절을 뽑아 주면서 목사의 안수가 무슨 효험이나 있는 것처럼 남발하고 있는 작태는 무당 푸닥거리나 같은 미신적인 것이다.
원망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셨다. 이러한 상황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에 대한 문제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고통의 의미를 생각하기보다는 고통 그 자체를 애당초 싫어한다. 왜냐하면 고통은 내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분명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위해 일하신다. 자기 언약을 위해서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는 말이다. 그 안에서 우리가 사는 것이 구원이다.
따라서 기독교에서 산다는 의미는 우리 목숨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쉼, 즉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말한다. 주님 안에서의 안식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된 생명이다. 이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지기 위해서는 필연코 해결되어야 하는 문제가 바로 죄 문제이다. 죄 때문에 자신에 대해서 한탄하고 절망해야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고 그것이 곧 사는 길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원망할 때 불뱀을 보내신 것은 죽음 속에서만 참된 생명이 주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 살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살리는 방법은 어떤 것인가?
8,9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살리는 방법은 놋뱀을 쳐다보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은 불뱀을 물러가게 하는 것이 우리의 생각이다. 이스라엘도 이렇게 생각하였다.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7절)라고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뱀을 자기의 원망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면 하나님께서 불뱀을 없애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의 기도도 이스라엘과 같은 이런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려움이 주어지면 그때부터 온갖 감언이설(?)로 하나님을 꼬시기 시작한다. ‘이 어려움이 내게 큰 피해를 주지 않고 지나가도록만 한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뭐든지 할께요. 혹시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주일성수, 십일조는 기본으로 하겠습니다. 혹시 자녀를 주의 종(목사)으로 바쳐야 하는 것이라면 그대로 하지요.’라고 흥정하고서는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수준이다. 결국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한 기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하나님은 불뱀을 그대로 두고 이스라엘을 살리는 방법을 주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8절). 이것이 하나님의 처방이었다. 불뱀이 여전히 이스라엘 중에 있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놋뱀을 쳐다보는 것이 사는 것이다. 놋뱀을 쳐다본다는 것은 회개하는 것을 말한다. 7절에 의하면 백성들이 모세에게 범죄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자세인가 아니가 하는 것이 어떻게 드러나는가? 하나님은 그것을 드러내시기 위해 놋뱀이라는 것을 만들어 쳐다보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살리는 방법이 비록 놋뱀을 쳐다보는 하찮은 것일지라도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요한복음 3:14,15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높이 들릴 때 그것만이 하나님의 구속의 방법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님을 믿는 자에게 영생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순종하고 회개하면 구원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주의 영을 받은 자는 날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는 회개가 나오며 주님을 믿게 되는 것이다. 초라하고 구원의 능력이 될 것 같지도 않은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인간의 생각에 불합리한 것이다. 때문에 성령께서 우리를 장악할 때에 십자가가 믿어지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회개란 하나님과 흥정하고 협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이 십자가의 주님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런데 놋뱀을 누가 바라보는가? 뱀에게 물린 자이다. 뱀에게 물리지 않으면 놋뱀을 바라볼 이유가 없다. 자신은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은 죽여놓고 살리는 방법을 취하시는 것이다. 원망이 나오도록 하시고, 그 죄 속에서 죽게 하시고, 자신의 죽음을 알게 하셔서 생명 되시는 분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일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우리가 살아서 예수를 믿으려고 할 때에 인간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열왕기하 18:4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 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놋뱀이라는 형상이 있어서 그것이 달리 우상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욕심에 미혹되어 사는 것 자체가 우상숭배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으면 산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막연히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우상숭배임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은 살아 있고 예수를 믿고 있다고 생각한다. 죽어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한국 교회 안에서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신자란 죽은 상태에서 새 생명을 받았고 주님의 은혜 때문에 살고 있음을 아는 자이다.
21:10 이하에서는 이스라엘이 넓은 지역에 싸움을 계속하면서 가나안으로 행군하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서 아주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0-13절까지는 오봇에서 이예아바림, 세렛을 거치고 아르논까지 온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등장하는 지명들을 오늘날 지도에서 모조리 다 찾아낼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 기록이 엉터리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고고학적으로 지명을 찾아 증명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기 위한 증거로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즉 여정을 아주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그 지명을 구체적으로 기록함으로 아주 일사천리로 그 과정들을 거쳐간 것으로 말씀하여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함으로 하나님의 인도에 의해 잘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14,15절에서 “이러므로 여호와의 전쟁기에 일렀으되 수바의 와헙과 아르논 골짜기와 모든 골짜기의 비탈은 아르논 고을을 향하여 기울어지고 모압의 경계에 닿았도다 하였더라”고 여호와의 전쟁기에 기록된 내용을 잠시 소개하고 있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면, 모압 경계까지 오는데는 여호와 하나님의 인도로 오게 되어졌는데 여기까지 올 때에 마치 산과 골짜기들조차도 이스라엘을 아르논까지 안내하듯이 그렇게 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이 노래는 정말 쉽게 하나님의 인도로 아무 어려움 없이 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우물의 노래이다. “그 때에 이스라엘이 노래하여 가로되 우물 물아 솟아나라 너희는 그것을 노래하라 이 우물은 족장들이 팠고 백성의 귀인들이 홀과 지팡이로 판 것이로다 하였더라”(17,18절). 광야의 노정에서 하나님께서 물을 주신 것으로 인해 찬양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맛다나에서 나할리엘, 바못을 거쳐 비로소 광야가 내려다 보이는 사해북방 오른쪽 비스가 산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이스라엘은 피 한방울도 흘리지 않고 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에돔과 모압의 경계를 따라 둘러오는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 방법이었다.
27-29절의 노래는 아모리 왕 시혼이 모압을 정복해서 땅을 빼앗는 광경을 어떤 시인이 노래한 것을 기록해 놓았다. 아모리인은 아주 강한 족속이었는데 이것을 성경에 기록함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렇게 승리하게 함으로 승리의 노래를 불렀던 아모리와 시혼도 이스라엘에 의해 정복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이방 왕의 승리의 노래를 기록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33절부터는 바산 왕 옥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신명기 3:4을 보면, 옥의 나라에 친 성읍은 60성읍이라고 한다. 특히 바산 왕 옥은 거인 족속으로써 마지막에 남아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는 점으로 보아서 굉장한 전쟁이었음을 알 수 있다(신3:11).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수기 본문에서는 “이에 그와 그 아들들과 그 백성을 다 쳐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그 땅을 점령하였더라”(35절)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그렇게 장대한 자들이었고 많은 성읍이며 강한 족속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물리치는 것은 너무나 간단하고 쉬운 것이었다는 의미이다. 가지 않으려고 원망하고 불평하며 따라갔지만 사실 가보니 하나님이 다 하시고 따라가는 이스라엘에게는 너무 쉬운 것이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란 주님께서 홀로 친히 싸우신 현장이다. 우리가 싸워야 하는 자리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죽는 것으로 승리를 얻는 자리이다. 따라서 십자가의 길이란 주님께서 주신 승리의 길이다. 그러나 좁은 길임에 틀림이 없고 찾는 자들이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마 7:14).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그 길을 가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힘들고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쉽고 힘들지 않는 길이다. 주님이 이 길을 가셨고 주님과 함께 가는 길이라면 세상의 넓고 편한 길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된 길이다(롬 8:18).
지금 광야를 떠돌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적으로 보면, 참으로 비참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떠도는 나그네 인생이다. 농사를 지을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하늘에서 많은 양식이 내려오는 것도 아니다. 겨우 하루 분의 양식만 주어졌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은 그날그날 하늘의 것을 얻어서 먹고사는 거지이다. 내일의 것이 없고 오늘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31, 32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것은 오늘의 것으로 감사하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것을 스스로 정해놓고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말한다. 즉 이방인들은 내일의 것을 확보하기 위해서 오늘을 살아가는데, 언제나 내일의 것은 오늘 것보다 더 좋은 것이기를 기대하는 습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성도란 이런 습성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내일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고 하나님의 소관이기 때문이다.
내일, 미래에 대한 꿈이 없는 자 있는가? 아무도 없다. 미래에 대한 꿈이 오늘을 지탱시켜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우리네 인생이다. 내일에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 때문에 오늘의 어려움을 이기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미래에 대한 환상은 오늘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리게 한다. 오늘에 대한 감사를 잃어버린다면 결국 그 사람은 기쁨과 행복이 없는 오늘을 살게 될 것이고, 그 삶은 죽을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의 특성이기 때문이다(롬 1:21). 그러나 성도란 환상에 지나지 않는 미래에 매여 살지 않는 자이다. 성도에게 천국이란 미래에 대한 기대로 희망적인 것이 아니라 오늘 믿음으로 받아 천국으로 사는 삶 자체이다.(1999.1.3)
민수기 22장
민수기 22장은 모압 왕인 발락이 이스라엘을 두려워한 가운데 발람이라는 선지자를 시켜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21:21 이하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아모리 왕 시혼에게 아모리 땅을 지나갈 것을 부탁하는 내용이 나온다. 아모리 땅에는 그 어떤 피해도 입히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도 불구하고 아모리 왕 시혼은 도리어 이스라엘을 공격한다. 그러자 이스라엘은 아모리를 쳐서 그 땅을 빼앗고 바산 땅까지 점령한다. 그것을 본 모압 왕 발락에게 두려움이 생길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 두려움에 대한 발락의 행동은 점술가인 발람을 부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부탁한다.
6절에 보면, “우리보다 강하니 청컨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쳐서 이기어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고 한다. 발락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면 자신들이 이길 수 있을 줄로 알았던 것이다. 우리의 신으로 이스라엘의 신을 저주하자는 것이다. 이 당시 사람들의 의식에 전쟁은 신들의 싸움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두려움에 떠는 인간들의 심성에서 나온 종교이다. 이러한 종교를 가지고 기독교 신앙이라고 우기는 데서부터 교회는 타락의 길로 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신을 찾아나가는 형태의 신앙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종교적 형태의 한 모습일 뿐이다. 단언코 기독교 신앙이란 내가 하나님을 찾아간 경험이 있거나 내 쪽에서 신을 불러들이는 느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찾아오셨다는 것을 믿는 신앙이다. 이스라엘이 아모리와 바산 이런 족속들을 물리치는 것은 종교 집단은 멸하고 오직 하나님에 의한 신앙으로 남겨진 자만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신앙이 들어올 때 인간의 종교는 쫓겨나게 되는 것이다.
12절을 보면,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니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복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신다. 그러기 때문에 저주를 한다고 할지라도 그 저주가 복을 이겨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발람은 발락이 제의한 대로 가고 싶은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 무당 발람에게 하나님이 복을 준 자들을 저주하지 말며 그들을 대적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래서 발람은 발락의 제의를 거절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발락은 또 다시 더 존귀한 귀족들을 더 많이 보내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청했다. 최고의 대우를 하며 원하는 대로 시행할 것을 약속도 했다(17절). 발람에게 있어서 출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발람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욕심을 버릴 수가 없었던 발람은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더 하실 지 알아보겠다고 한다(19절). 하나님이 말씀을 더 하실 것을 기대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미 말씀하셨다. “함께 가지도 말고 저주하지도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 말씀하신 것 외에 또 다른 말씀을 더해 주기를 바라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바로 발람의 욕심 때문이다. 이 중요한 기회는 자기의 욕심을 채울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대면하는 인간의 죄악된 모습을 잘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서 기도하면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경우가 별로 없다. 장래의 진로나 직장이나 결혼이나 사업이나 무엇이든지 간에 주님 앞에서 자신을 살펴보면서 기도하면 방향이 보이고 가닥이 잡히며 현재의 위치에서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 닮은 자로서 자신이 나아갈 길을 깨닫게 되고 또한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욕심으로 인해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이의를 달고 다른 핑계를 제시하는 것이다.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단순한 진리에 ‘다른 무엇’을 더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더 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모두가 인간의 욕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발람은 돈에 욕심이 났던 것이 분명하다. 32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보라 네 길이 내 앞에 패역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라고 했는데 이 “패역”을 유다서 11절에는 “삯을 위하여 발람이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라고 했다. 이것은 발람이 돈에 눈이 어두워져서 하나님이 이미 말씀하신 것을 고쳐서 다시 말씀해 주실 것을 기대했다는 뜻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18절에서 “발락이 그 집에 은, 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고 한 것도 하나님을 두려워해서라기 보다는 은근히 하나님을 빙자해서 많은 은금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발람의 길이 패역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32절). 여호와를 빙자하여 얼마나 많은 돈을 요구하고 있는가? 이래서 유다서는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기의 재물을 축적하는 거짓 선지자의 전형으로 발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발람은 자기 욕심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에 그의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본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도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하니 나귀의 입을 열어 말을 하게 하시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뇨 발람이 나귀에게 말하되 네가 나를 거역하는 연고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네가 오늘까지 네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네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 가로되 없었느니라”(28-30절).
나귀가 말을 한다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미련하고 자기 욕심에 빠져서 사리분별을 못하고 있는 존재인가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나귀가 무슨 말을 했다는 것 자체로 이미 발람은 알아차렸어야 되는 문제였다.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열 때에 비로소 천사가 손에 칼을 빼어 들고 길에 선 것을 보게 된다.
“네가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 번 때렸느냐?”(32절)는 천사의 책망은 너는 “나귀 보다 못하냐? 나귀도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을 알아보는데 너는 사람이 되어 나귀보다 깨닫는 것이 더디냐?”는 의미이다. 인간이 짐승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 욕심에 빠진 인간의 모습이다. 이런 인간이 하나님을 부를 수 있고, 십자가를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은 눈을 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종교란 자기 스스로 눈을 열려고 하는 것이지만 기독교 신앙이란 열려진 눈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다(1999.1.10).
민수기 23-24장
1절에 의하면, “발람이 발락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여기 일곱 단을 쌓고 거기 수송아지 일곱과 숫양 일곱을 준비하소서 하매”라고 요구한다. 그래서 발락이 발람의 말대로 “매단에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씩”을 드린다(2절). 이것은 바벨론과 갈대아 지방에서 하는 제사의 방식이다. 자기들이 신을 접대하는 방식대로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제물의 주인인 발락을 제물의 곁에 세우고 발람은 신을 접하기 위해서 그 곁을 떠난다.
여호와께서 발람에게 임하자 그는 이렇게 하나님께 말한다. “내가 일곱 단을 베풀고 매 단에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를 드렸나이다”(4절). 발람이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제물을 받으시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버리고 이제 자기들의 편이 되어 달라고 하기 위해서이다. 발람은 지금 엄청난 요구를 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이끌고 나오셨지만 이제 제물을 받으시고 이스라엘을 버리고 자기들 편이 되어 달라는 것이다.
인간의 이기심이 어디까지인지 끝이 보이지 않는 그런 상태이다. 할 수만 있으면 신의 마음이라도 돌이켜서 자기의 편이 되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일해 주시도록 요구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이렇게 자기를 위해서 신까지도 동원시키려고 하는 것이 인간 종교심의 본질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종교심이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섬기는 것을 본 바탕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발락에게로 가서 할 말을 주셨다. 그것이 7-10절에 나온 노래이다. “발람이 노래를 지어 가로되 발락이 나를 아람에서, 모압 왕이 동편 산에서 데려다가 이르기를 와서 나를 위하여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도다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그를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야곱의 티끌을 뉘 능히 계산하며 이스라엘 사분지 일을 뉘 능히 계수할꼬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
특히 8절에 보면, 발람이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라고 노래했다. 이 말은 창세기 12:3을 근거로 생각해야 한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복의 근원이 되는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이루실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이다. 누구든지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특별 대우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이 결코 아브라함이 뛰어난 인물이라든가 아니면 개인적으로 훌륭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주셨기 때문에 그 약속으로 인해서 특별하게 만나시고 관계하시겠다는 것이다.
그 역할이 이제 이스라엘에게 이어졌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품고 있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품고 있다는 것은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존재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축복한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뜻이고 그분이 일하시는 언약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신약식으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정하고 그분을 영접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신약에서 말씀하고 있는 교회란 바로 이러한 고백을 하는 자들의 모임이다.
실로 발람이 한 말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었다. 발람은 발락이 요구한대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축복을 하게 되었다. 인간이 말 한 마디라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러나 결코 발람은 자기 자신이 그러한 하나님의 언약에 동의가 되어서 나온 자기 자신의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는 차원에 불과했다(5,12절). 그는 계속해서 자기 욕심에 끌리고 있기 때문이다. 발락은 발람이 이스라엘의 광대한 진영을 보고 겁이 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스라엘 진영의 부분만 볼 수 있는 곳으로 두 번씩이나 장소를 바꾸어가며 발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유도하였다. 이에 발람은 계속 응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런 발락을 계속 막으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획을 그 입으로 말하게 하셨다.
두 번째 발람의 노래가 18-24절에 기록되어 있다. “발람이 노래를 지어 가로되 발락이여 일어나 들을지어다 십볼의 아들이여 나를 자세히 들으라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야곱을 해할 사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 이 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논할진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뇨 하리로다 이 백성이 암사자같이 일어나고 수사자같이 일어나서 움킨 것을 먹으며 죽인 피를 마시기 전에는 눕지 아니하리로다.”
24:1,2에 의하면, 하나님의 편에 서서 제법 따르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발람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보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러한 말씀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발람은 결코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니라 자기가 믿는 신과 같은 방식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으며 뿐만 아니라 여러 신 중의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절대적으로 동의하고 도와줄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발람의 행위는 좋은 의미로 호감을 갖고 여호와 하나님은 참 좋은 분이고 기독교는 참으로 좋은 종교라고 하면서 긍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발람의 세 번째 노래가 24:3-9절에 이렇게 언급되어 있다. “그가 노래를 지어 가로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이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야곱이여 네 장막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가의 동산 같으며 여호와의 심으신 침향목들 같고 물가의 백향목들 같도다 그 통에서는 물이 넘치겠고 그 종자는 많은 물가에 있으리로다 그 왕이 아각보다 높으니 그 나라가 진흥하리로다 하나님이 그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그 적국을 삼키고 그들의 뼈를 꺾으며 화살로 쏘아 꿰뚫으리로다 꿇어앉고 누움이 수사자와 같고 암사자와도 같으니 일으킬 자 누구이랴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
이만하면 발람이 하나님의 비밀을 다 깨닫고 아는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하나님께 항복하지 않았고 그의 불순한 욕심을 계속해서 고수하고 있다. 결국 민수기 31:8, 여호수아13:22에 보면 발람이 칼에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발람은 자기의 욕심을 따라 행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막으시자 꾀를 내어 이스라엘로 하여금 범죄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민 31:16). 욕심에 미혹되어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역했던 자의 최후이다. 히브리서 6장의 경고가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히6:4-6).
오늘날 식으로 말하자면 발람은 하나님의 언약을 알고 하늘 나라에 갔다 왔다고 하는 사람이다. 그래도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 계속해서 하나님을 거역했던 것이다. 욕심에 이끌려 계속 추구해 간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발람과 같은 사람이 얼마든지 있다. 자기의 세상 정욕에 이끌려서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 추구하고 있다면, 실제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이다. 때문에 한국 교회 안에서 성도를 만나보기가 참으로 어렵다. 밤에 번쩍리는 붉은 십자가 철탑은 많이 세워 놓았는데 그리스도의 붉은 피는 밀쳐내고 있고 그리스도 이름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마태복음 7:22,23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 쫓아내고, 권능 행했다고 한 것을 보아 요즈음 같으면 목사의 직분도 가지고 있고 소위 신유의 은사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런 자들이 많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이들을 모른다고 하신다. 왜냐하면 이들은 좁은 문, 좁은 길을 거부하고 넓은 문으로 들어가며 넓은 길로 가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넓은 길로 가면서도 선지자 노릇하며 온갖 이적들을 다 행할 수 있다. 그러나 좁은 길로 가지 않은 것 때문에 주님의 거절을 당하는 것이다.
민수기의 본문에서 보자면 자기 중심의 종교성을 깨어 버리지 못한 사람, 그래서 세상의 욕심에 이끌려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기의 야망을 채우려는 사람, 하나님에 의해 부끄러움과 수모를 당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주님에게서 거부당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내가 얼마나 종교적인 행사에 익숙한가? 아니면 오랫동안 믿었는가? 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신앙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로 가는 기쁨이 있는가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 자체가 즐겁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를 내 생애 속에서 제거한다면 그것 자체가 아무 의미 없는 인생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나의 관심이 항상 십자가로 되돌려지는가 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1999.1.17)
민수기 25장
우리는 민수기를 공부해 나가면서 발람이 저주하고자 하는 사건이 왜 기록되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있었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한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저주받는 백성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방인 무당에게 왜 이렇게 간섭하시며 철저히 막으시는가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발람의 사건을 장황하게 기록한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욕심을 가지지 말라는 교훈을 주기 위한 정도가 아니다. 모세가 민수기를 기록하여 1차적으로 읽는 자들은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이스라엘이 이 성경을 읽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내부에 대한 주장뿐만 아니라 외부적으로도 이스라엘의 승리를 위해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정하는 언약 정신으로 사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을 여기 25장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발람이 자기 욕심에 사로잡혀서 발락의 요구대로 그토록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했다면 그러면 언약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스라엘은 어떠냐 하는 것이다. 1,2절에서 이스라엘의 상태를 이렇게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음행이란 이방인들의 종교 의식과 연관되어진 점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바알에게 속했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3절). 이렇게 이스라엘은 철저히 자기 욕심에 사로 잡혀서 어떤 신이든 좋다는 식이다. 이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염병으로 치셨다. 염병으로 죽은 자가 24,000명이라고 알려주고 있다(9절). 이 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두 가지 명령을 하셨다. 첫째는 백성의 두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해 목매어 달라는 것이고(4절), 두 번째는 사사들이 바알브올에 속한 자들을 죽이라고 하는 것이었다(5절).
이러한 상황에서 6-8절에 보면 희안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회막에 모여 울 때에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이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 온다. 그것을 본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인 비느하스가 손에 창을 들고 그 이스라엘 남자의 막에 들어가서 그 남자와 미디안 여인을 찔러서 죽인다. 그리하여 염병이 그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 중의 어떤 남자가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온 것은 아마 자신의 여자라고 강조하고 자랑스럽게 공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사람은 이스라엘이 지금 어떤 위기에 처해 있는지도 모르고 있으며, 하나님을 조소하는 행위를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것에 대해 전혀 의식을 갖지 않은 사람 같다.
우리는 이 본문을 가지고 쉽게 하나님은 음행과 우상숭배를 싫어하시니까 절대로 음행과 우상숭배를 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언약적 관점에서 생각할 때 단순한 음행이거나 우상숭배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고 따르기보다는 보이는 즐거움에 치우쳐 있는 인간의 죄악된 본성이 드러난 것이다. 음행은 단지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에 대한 증거에 불과한 것이다. 즉 죄악의 열매이다. 왜 이런식으로 말을 해야 하는가 하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교회에서 음행과 우상숭배가 죄가 된다고 말하면 많은 교인들은 음행하지 않고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으면 자신은 죄를 짓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타락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음행하지 않고 우상숭배하지 않는 자신을 바라보며 새 사람이 되어 간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음행이나 우상숭배에 대해서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우리더러 이렇게 하지 말라는 차원에서 기록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바로 이러한 존재이고 그럴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공박하는 차원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본문을 대할 때에 항상 생각하는 것이 나는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라고 하는 교훈적 차원에서 생각한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안믿는 이유이다.
이스라엘이 곧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우리 역시 이스라엘의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음행을 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으니 우리는 음행을 해서는 안되겠구나 라고 받아들인다면 과연 인간이 음행을 피할 수 있는가?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음행이라는 행동이 없다고 해서 자신은 음행의 문제에서만큼은 깨끗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때문에 성경은 이스라엘이 음행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고,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겨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면 우리 역시 보이는 것을 신뢰하는 우상에 빠져 있기 때문에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죄인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아브라함의 실수, 모세의 실패, 다윗의 범죄 등등을 기록해 놓은 것은 참으로 감사할 일이다. 그것을 가지고 성경은 참으로 지저분한 책이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지저분한 내가 성경을 볼 수 있음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마다 놀라야 하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말씀으로 인해 타락한 죄인의 정체가 낱낱이 폭로되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양심과 도덕과 윤리와 인격을 가지고 자신을 미화하고 더러운 모습을 가리면서 성도인척 했던 우리의 죄된 모습을 여지없이 폭로해서 죄인으로서 하나님께 엎드리도록 하는 이것이 말씀의 역할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도 보이는 것에 치우치고 마음에 가득한 자기 욕심을 가진 인간으로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말씀을 대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노는 단순히 이스라엘이 음행을 했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고 바알브올에게 속했다는 것에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가 무엇으로 인해서 그치느냐 하는 것이다. 11절에 보면,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라고 한다. 하나님은 비느하스가 창으로 남녀를 찔러 죽인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질투한 행동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시고 이스라엘을 속죄하신다. 이 일 때문에 4,5절에서 말씀하신 두 가지 명령도 아마 시행될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비느하스가 한 행동이 착한 행동이었다는 것이 아니다. 윤리와 도덕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사람을 찔러 죽인 것이 착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는가? 오히려 서로 융화하고 화합하도록 중재해서 음행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착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는가? 13절에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비느하스의 행동이 이스라엘 전체를 속죄하였다고 말씀하고 있다. 어떻게 사람을 찔러 죽인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되고 그것이 백성들의 죄를 속하는 것이 될 수 있는가?
질투는 사랑을 바탕으로 해서 등장한다. 사랑하기 때문에 질투하는 것이지 사랑하지 않는다면 질투도 없다. 즉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질투가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 이스라엘이 예뻐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이스라엘 속에 두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사랑하시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우상을 숭배하는 차원에서 음행을 했는데 그것이 곧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한 행위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중에 비느하스가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행동을 한 것이다. 그 결과로 이스라엘에 염병이 그치고 평화가 주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나의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12절)라고 하나님이 선언하셨다. 여기 평화의 언약은 비느하스가 두 남녀를 죽임으로서 주어졌다. 이 상태를 가리켜서 평화의 상태라고 말하는 것이다. 평화란 아무 일 없이 조용하게 그리고 화목하게 잘 지내는 것이 아니다. 평화란 다툼과 싸움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싸움과 전쟁이라는 것이 없다면 평화라는 말도 필요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평화의 언약이 주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싸움이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말씀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적이 되는 것이 세상에 있었는데 그것이 해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평화가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된 사고 방식이 하나님의 언약 정신에 의해 완전히 점령당할 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평화라고 하는 것이다.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음행한 두 남녀를 죽이는 것 자체가 전쟁이다. 이것이 제사장 직분이 소유해야할 정신이다(13절).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의 마음이 자기 속에 그대로 담겨 있어서 그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자가 세상에 등장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질투심으로 행동하는 자가 등장하고 그 행동에 동조하는 사람에 한해서 죄를 용서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제사장의 정신을 그대로 가진 자가 누구인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그대로 담아내며 그에 따라 행동하시고 사신 분이 오직 예수님 한 분 밖에 없다. 예수님이 온전히 하나님의 기쁨이 되심으로 우리에게 속죄가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자가 예수 안에 있는 자이고 곧 평화의 언약 안에 부름받은 자이다.
대부분 교회에 불화가 없고 문제가 없이 외적으로 조용하고 화목하게 지내고 있으면 교회가 발전되고 있다고 하고 목회자가 훌륭한 목회를 하고 있다고 칭찬한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이 땅에서 완전한 인간의 모임이란 존재할 수 없다. 마귀는 항상 주님의 교회가 주님의 교회의 모습 그대로 비쳐지지 않도록 활동하고 있다. 때문에 이 땅에서의 교회에는 항상 비언약적 세력(세상적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을 밀쳐내려고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기에 목회란, 무조건 사랑으로 대접하고 베푸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비언약적 사고방식이 잘려 나가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1999.1.24).
민수기 26장
1,2절을 보면, “염병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와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의 총수를 그 조상의 집을 따라 조사하되 이스라엘 중에 무릇 이십 세 이상으로 능히 싸움에 나갈 만한 자를 계수하라 하시니”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민수기 1장에서 이미 백성을 계수한 적이 있었는데 여기서 다시 계수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먼저 1:2,3을 보자.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가족과 종족을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이스라엘 중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너와 아론은 그 군대대로 계수하되.” 그 두 장에 기록된 수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지 파 |
1차 계수 (민 1장) |
2차 계수 (민 26장) |
증감 |
르 우 벤 |
46,500 |
43,730 |
▼ |
시 므 온 |
59,300 |
22,200 |
▼▼ |
갓 |
45,650 |
40,500 |
▼ |
유 다 |
74,600 |
76,500 |
△ |
잇 사 갈 |
54,400 |
64,300 |
△ |
스 불 론 |
57,400 |
60,500 |
△ |
에브라임 |
40,500 |
32,500 |
▼ |
므 낫 세 |
32,200 |
52,700 |
△△ |
베 냐 민 |
35,400 |
45,600 |
△ |
단 |
62,700 |
64,400 |
△ |
아 셀 |
41,500 |
53,400 |
△ |
납 달 리 |
53,400 |
45,400 |
▼ |
합 계 |
603,550 |
601,730 |
▼ |
△증가(△△가장 크게 증가한 지파) ▼감소(▼▼가장 크게 감소한 지파) |
다시 이스라엘을 계수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기 위해서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것이다. 민수기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에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의 법에 의해 다스림을 받는 국가로서 출발한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언약의 말씀에 의해서 다스려지는 하나님의 군대로 보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합당한 군대다운 모습으로 요구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민수기 1장에서 숫자를 계수하는 것은 그것으로 이미 하나님의 군대답다는 것이 아니라 군대로 부름받은 이스라엘이 어떤 식으로 살아야 군대다운 군대가 될 수 있는가를 광야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1장~25장의 내용을 통해 공개된 이스라엘의 원망과 반역 등 모든 모습들은 하나님의 군대다운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서 죽은 자들은 하나님의 군대에서 제외되는 것임을 경고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1장에서 계수한 군대의 숫자보다 26장에서 계수한 군대의 숫자가 1,820명이나 감소한 것이다.
1절에서 알려주고 있는 바와 같이 “염병 후에” 계수되었다. 염병 후에 계수되었다는 것은 염병이 지나간 후에 살아남은 자를 헤아린 것이다. 52,53절에 의하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 명수대로 땅을 나눠 주어 기업을 삼게 하라”고 하셨다. 25장에서 살펴본 대로 염병이라는 하나님의 진노가 내릴 때에 하나님의 언약 정신을 가진 제사장에 의해 진노가 가리워진 자들에게만 약속된 기업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시내산을 떠난 후 아니 애굽을 떠난 후부터 불평과 원망이 연속된 모습을 보였다. 그들에게서 불평과 원망이 왜 나왔는가? 그것은 모두가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하는 것 때문이었다. 즉 먹고 사는 문제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 집착하는 존재가 이스라엘이며 또한 가나안 족속이요 애굽 백성으로 곧 모든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이는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의 계수한 자라 그들이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가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계수한 중에는 모세와 제사장 아론이 시내 광야에서 계수한 이스라엘 자손은 한 사람도 들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반드시 광야에서 죽으리라 하셨음이라 이러므로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아니하였더라” (63-65절).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애굽에서 나온 자 중에 두 사람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고 나머지는 광야에서 다 죽었으니 천국가는 사람은 그 수가 많지 않다는 식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물론 천국가는 사람은 소수이지만 이 본문에서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여기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무리 사람들이 많아도 하나님의 약속과 상관없는 모습이라면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애굽에서 나온 자 중에 갈렙과 여호수아 이렇게 두 사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아예 이스라엘 중에서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이고 동시에 이 둘을 통해 어떤 정신을 소유한 자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지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갈렙과 여호수아는 어떤 사람들인가? 아니 하나님께서 어떤 자로 이스라엘 중에 가나안을 기업으로 얻는 자로 남기셨는가? 이들은 세상에 집착하는 것을 포기하고 오직 하늘에 집착하는 사람들이다. 물론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어렵고 힘든 나그네 길임을 뼈저리게 체험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 다시 말해서 약속의 성취만 바라보았다.
갈렙과 여호수아가 약속의 성취만 기다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날 우리 중에 고생하지 않는사람이 누가 있는가? 돈이 많으면 많은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고생이다. 자녀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어려움이 있다. 한 마디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다 고생하면서 살고 있다. 사는 자체가 고생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정신이 어디에 집착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어렵고 고생되는 것들을 피하기 위해서 더 나은 것을 찾고 요구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서 편안함을 추구하는 모든 욕구를 포기하고 하늘의 것만 바라보고 거기에 집착된 자로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늘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현실에 집착하면서 세상에서의 편안함만 추구하면서 아니 하늘의 것을 바라볼지라도 자신의 유익을 위한 이기심에서 하늘의 것을 구한다면 그것은 언약 백성의 모습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모습이고 그것은 광야에서 죽어야할 모습이다. 결코 완전하라는 것이 아니다. 불완전하고 늘 부족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 매여 있을 수밖에 없다는 고백이 나와지는가 하는 것이다.
군대란 적이 없으면 존재의 의미가 없다. 싸울 상대가 없는 군대는 불필요한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 교회 또는 신자 각 개인이 상대해야 하는 적이 누군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비언약 정신이다.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스리는 자기 생존의 정신이다. 이 자기 생존의 정신이란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고 바로 내가 그러한 존재임을 먼저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내부를 먼저 공격하셔서 원망과 불평이 나오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원수인 것을 드러내셨듯이 주님은 오늘 지금 나를 공격하셔서 주님의 원수된 자임을 드러내시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게 하신다. 그가 곧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다. 그러므로 단지 안다는 차원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내 힘을 동원해서 내 생존의 문제를 스스로 책임지려고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반역하는 적의 모습을 철저히 주님이 치시도록 기도해야 하며 말씀 앞에 부단히 자신을 세울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성도를 그리스도의 군사로 비유하면서 디모데후서 2:3,4에서 다음과 같이 교훈하고 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1999.1.31).
민수기 27장
26장에서 이스라엘 군대로 계수한 것은 약속의 땅을 상속받는다는 데에 의미를 두는 계수함이다. 즉 어떤 정신을 소유한 자가 약속의 땅을 상속받는가 하는 것이다. 가나안 땅을 상속받기 위해 지파별로 그 수를 조사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 명수대로 땅을 나눠주어 기업을 삼게 하라 수가 많은 자에게는 기업을 많이 줄 것이요 수가 적은 자에게는 기업을 적게 줄 것이니 그들의 계수함을 입은 수대로 각기 기업을 주되 오직 그 땅을 제비뽑아 나누어 그들의 조상 지파의 이름을 따라 얻게 할지니라 그 다소를 물론하고 그 기업을 제비뽑아 나눌지니라”(민 26:52-56).
제비 뽑아 하나님께서 정해주시는 땅으로 기업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에는 여자들에게는 상속권이 인정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므낫세의 현손 마길의 증손 길르앗의 손자 헤벨의 아들 슬로브핫의 딸들이 탄원을 하게 된다. 즉 아버지인 슬로브핫이 아들이 없이 죽었기 때문에 기업을 받을 수 없게 되자 딸들에게도 기업을 상속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정당하게 여기고 기업을 이어가는 법을 새롭게 말씀하시는데 그것이 6-11절까지의 말씀이다.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나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영원히 거한다는 표시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기업을 대대로 물려줌으로서 후손들도 항상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살아가도록 했던 것이다. 때문에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토지를 빼앗기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상실하는 것으로 여겼고, 하나님은 이것을 위해서 희년이라는 제도를 만들어서 은총이 상실되지 않음을 보이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물론 땅 자체가 은총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이라는 기업을 통해서 하나님 안에서 주어질 영원한 기업을 바라보며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서 살아가도록 하시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러면 본문이 오늘날 우리에게 알려주려는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단지 여자의 상속권을 찾는 말씀인가? 하나님은 여성의 권위를 인정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말씀하신 것인가? 오늘 우리는 이 말씀에서 신자가 어떻게 사는 것이 마지막까지 구원을 이루는 것인가를 배울 수 있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하나님 앞에서 가나안 땅에서의 기업을 포기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공동체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그들의 결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사랑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것 아니겠는가? 슬로브핫의 딸들의 요구는 언약의 하나님 안에서 언약대로 살겠다는 결심이요 신앙 고백이었다.
하나님의 율법의 기초는 약자보호이다. 아들이 없어 상속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이러한 율법의 기초에 어긋나는 것이며 하나님의 성품과도 맞지 않다. 그런 점에서 슬로브핫의 딸들에게도 기업이 주어지도록 율례가 정해진 것은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인가 하는 것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중요한 관건은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남자냐 여자냐 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천한 자냐 귀한 자냐, 어떤 직업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약속의 땅에 맞는 정신을 소유한 자인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런 정신을 소유하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정신의 소유자가 약속의 땅에 부합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이 슬로브핫의 딸들이라는 미약한 여자들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이다. 안되면 이런 정신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셔서라도 자기 백성들을 약속의 땅이 집어넣으시겠다는 의미이다.
12절 이하는 여호수아가 지도자로 세움받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데 여호수아가 세움을 받는다는 것은 곧 이런 정신의 소유자로 세움받는 것이라는 뜻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을 것을 말씀하는 반면 여호수아가 모세 대신 백성 위에 세워지고 모든 책임을 위탁받는다. 백성의 지도자로서 세워져서 광야 40년 동안 갖은 고난을 겪으면서 백성을 인도하였던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것은 서글픈 일이지만 그러나 여호와의 신이 있는 여호수아에 의해 모세에게 맡겨졌던 일이 계속 된다.
먼저 모세가 자기의 사명을 끝까지 수행하지 못하고 죽어야 하는 이유를 14절에서 “이는 신 광야에서 회중이 분쟁할 제 너희가 내 명을 거역하고 그 물가에서 나의 거룩함을 그들의 목전에 나타내지 아니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 앞에서 하나님을 거룩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렸다는 것이다. 모세와 아론이 잘못한 것은 하나님이 바위에게 명하여 물을 내도록 하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화를 내면서 “패역한 너희여 들어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던” 일을 말한다(민20:10-11).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민20:12)고 하셨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내지 아니했다”는 말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지 못하게 했다는 말이다. 명하여 물을 내도록 한 일을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드러내시고자 했는데 모세와 아론이 이것을 방해했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가? 민수기20장에서 우리는 모세와 아론이 육신에 사로잡혔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육신에 사로잡혔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잊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부르실 때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을 대변하고 나타내도록 하기 위하여 불렀는데, 이들은 하나님 대신에 자기를 표현했다. 하나님을 대변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그들은 하나님과 하나 되지 않고 육신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더구나 백성의 인도자는 백성의 생명을 책임진 자인데 그가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과 하나 되지 못하고 육이 된 것은 백성 전체가 죽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백성도 죽고 모세도 죽어야 했던 것이다.
백성의 지도자가 육이 되면 자기도 죽고 백성도 죽는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도자 중에는 육이 아닌 사람이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세가 죽게 되는 이 사건에서 일반적인 원리를 찾아야만 한다. 즉 개인 구원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하여 육은 하나님의 나라에 결단코 용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육적으로 되는 것은 결단코 아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추호도 허용하지 않으신다.
약속의 땅에는 여호수아의 인도에 의해서 가게 된다. 즉 성령에 의해서 가게 된다. 18절에 보면,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라고 했다. 여호와의 신이 있다는 것은 여호와가 그와 함께 있다는 말이요, 여호와와 하나 되어 있다는 말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신이 여호수아를 사로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람에게 모세에게 주어졌던 일이 위탁되고 계승된다(19,20절). 성령에 의해 장악된 자에 의해서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되고 천국이 이루어진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인간을 주장하시고 이끄실 때에만이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된다는 것이다. 성령께서 슬로브핫의 딸들과 같은 정신의 소유자로 만들어서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역에 있어서도 성령의 사역은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신약에서 예수님께 성령을 한량없이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요3:34). 이 예수님에 의해서 천국이 열렸고, 또 성취되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성령을 받은 자이다. 성령을 받은 자는 성령 안에 사는 자이고 곧 약속의 땅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믿는 자는 성령을 따라 살게 되어 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8:12 이하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8:12-15)고 했다.
육신에 속해 있는 우리에게 성령이 오셨다. 성령이 오시면 그때부터는 성령에 속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다(롬8:9).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살려고 하는 소원이 생기게 된다. 만약 이 소원이 없다면 믿지 않는 자이며 죽은 자이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성령의 소원을 가진다. 예수님처럼 닮아야지, 기도해야지, 성경 보아야지, 사랑하고 봉사해야지 하는 소원이 생기는 것이다.
제가 복음을 말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우리더러 십일조, 교회 봉사, 전도, 기도를 부정하는 사람이라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육으로 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받은 자에게서는 이러한 것들을 억지로 시킨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나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믿자는 것이다. 억지로 우리 안에서 전도하고 예배하고 봉사하면 성령을 받게 되거나 성령받은 자처럼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를 장악하고 사로잡고 있을 때에 자연히 우리에게서 이러한 것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믿는 자가 성도가 아니겠는가? 그런 자는 모든 것을 자기의 공로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공로로 돌리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성령을 인간의 기분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성령을 도구화하면서도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을 이용하여 교회를 성장시키고, 성령을 이용해서 사업을 일으키고, 성령을 이용해서 선교 실적을 올리고, 성령을 이용해서 내가 잘되어 보자는 짓거리를 하면서도 성령을 좇아 산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께 자신을 내어맡기고 복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오는 어떤 능력을 빌리려고 한다. 그러니 수많은 기도원과 부흥회가 열리는 것이다. 이것은 편의점의 다양한 상품과도 같은 것이다. 내가 내 신앙을 위해서 어떤 상품을 선택해서 기분만 전환하면 되는 것이고, 정신이 쇄신되면 천국가는 것같은 느낌을 가지는 것이다. 그것을 한국 교회 교인들은 신앙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구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자기 부인, 복종, 자기 죽음이 없는 곳에는 성령의 역사가 있을 수 없다. 혹 있다면 거짓 영에 의해서 미혹되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만약 주를 믿는 자이며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신다고 믿어지거든 성령님을 의지하고 그분께 복종하라. 성령님을 의지하고 복종한다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그분만 존귀히 여기는 것이다. 성령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일하시기 때문이다. 때문에 말씀대로 살아지는 것이 능력임을 알라(1999.2.7).
민수기 28-29장
28,29장은 제사에 대한 규례를 길고 지루하게 다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길게 다시 제사에 대하여 언급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애굽에서 빠져나와 가나안이라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야 하는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일이 모세에서 이제 여호수아에게로 맡겨졌다. 즉 모세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지 못한 것으로 말미암아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하셨다. 그리고 그러한 이스라엘이란 결코 약속의 땅을 상속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광야에서 다 죽게 하심으로 보여주셨다. 이제 여호수아에게 성신을 주셔서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이스라엘을 형성된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새로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며 어떤 정신의 소유자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제사 규례를 통해 새롭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모세가 인도자일 때나 여호수아가 인도자일 때나 변함없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다. 그 하나님의 언약의 가장 핵심되는 것은 곧 제사에서 나타나는 희생의 피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게 애굽에서 건지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그분이 유월절 어린 양이라는 자기 희생의 피를 문에 바르는 것으로 애굽에서 빼내셨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스라엘이란 모든 관심을 피에 두고 살아야 한다. 피가 이스라엘을 영원한 가나안 땅에 둘 수 있는 유일한 약속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28:31에 보면, 하나님께서 “너희는 다 흠 없는 것으로 상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는 말씀으로 상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셨다. 상번제는 28:4에 의하면, 매일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제사임을 알 수 있다. 하루를 시작할 때 피로써 시작하고 마칠 때에도 피로써 마치라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오늘날 식으로 매일 아침 QT나 기도로 시작하고 또한 저녁 자기 전에도 QT나 기도로 마치라는 그런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나의 예물, 나의 식물 되는 화제, 나의 향기로운 것은 너희가 그 정한 시기에 삼가 내게 드릴지니라”(2절)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상당히 강조되고 있는 것은 ‘나의 것’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소유임을 하나님은 특별히 강조하시는 것이다. “나의 식물 되는 화제, 나의 향기로운 것”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나의 기쁨의 향기인 화제’라는 말이다. 하나님께 기쁨의 향기로운 화제란 곧 불로서 제물 전체를 태워서 드리는 제사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이러한 제사를 통해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의 의미를 생각해야 하고 그것을 통해 누군가의 희생에 의해 사는 것이 은혜인줄을 알아야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바쳐지는 제물 그 자체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제물에 의해 흘려지는 희생의 피, 그것을 기뻐하시는 것이다. 피가 곧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예물이며 식물이며 향기로 삼으시겠다고 하나님이 스스로 정하신 원칙이다. 때문에 상번제를 드리는 것을 통해 피와 피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이 언약 안에 있는 이스라엘다운 것임을 알아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29장까지 나오는 것을 보면 상번제에 추가해서 다른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식일, 월삭, 유월절, 오순절, 나팔절, 대속죄일, 초막절 제사를 이야기하면서 모두 상번제에 추가해서 드리라고 하신다. “이는 매 안식일의 번제라 상번제와 그 전제 외에니라”(28:10). 이러한 말씀이 28:15, 24, 31, 29:6, 11, 16, 19, 22, 25, 28, 31, 34, 38에 계속 언급되어 있다. 매일 상번제로 드리는 희생의 근거 때문에 속죄일도 있고, 안식일도 있으며, 월삭도 있고, 유월절, 오순절 등의 절기 제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희생의 근거 없이는 이런 것들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러한 희생의 제사를 기뻐하시는가? 그것은 화제 속에 하나님 자신의 모습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불로써 태워져서 재가되는 제사는 철저한 희생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제사를 상번제로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따라 희생을 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위해 희생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성이 이 희생을 드린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깨닫고 그 하나님을 닮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모습을 지닌 자를 원하고 기뻐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언약의 하나님이며, 유월절 희생의 하나님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 12:1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자신을 거룩한 제사로 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희생이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삶이 예배다’라는 말을 쉽게 하지만 그 의미는 왜곡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정해진 예배 시간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 전체가 예배여야 한다는 의미로 말하면서 실제로는 교회의 정해진 예배조차 부정하면서 자신의 욕심대로 사는 모습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허다하다. 그러나 주님께서 로마서 12:1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항상 주님의 십자가 정신으로, 희생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다.
29장에서 7월 한 달은 제사로 이어지고 있음을 말씀하신다. 1-6절은 나팔절, 7-11절은 대속죄일, 12-38절은 초막절에 대한 규례를 말씀하셨다. 그런데 각기 절기는 따른 제사나 지키는 방법은 다르지만 그 공통점은 속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초막절에 대한 규례는 출애굽기 23장이나 레위기 23장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절기이지만 출애굽기나 레위기에서는 속죄제를 드리라는 말씀이 없다. 이것을 볼 때에 출애굽기에서의 추수의 의미는 장래 약속의 땅에서 곡식을 먹는 것에 두고 있지만 민수기에서는 곡식을 추수하는 의미는 사라지고 속죄의 의미로 바뀌었음을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약속의 땅에서 곡식을 추수해서 먹는다고 해서 죄용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용서에 의해서 사랑이 공급되고 생명이 공급된다는 의미가 새롭게 실려있는 것이 민수기의 초막절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초막절 자체의 의미보다 대속죄일의 연장으로서 바뀌어져 있다.
모든 제사가 그러하지만 결국 7월에 있는 제사 전체는 속죄가 중심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29:7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칠월 십일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일 것이요 마음을 괴롭게 하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마음을 괴롭게” 한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스스로 굴욕감을 가진다’는 말이다. 회개하고 반성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계시의 의도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죄를 알고 회개하며 희생하는 자를 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28:26)라고 말씀하셨다(참고 28:18,24, 29:1,7,12,35). 세상은 노동하지 않고 살 수 없다. 땀흘려서 일해야 먹고사는 나라이다. 노동에는 기술과 능력이 포함된다. 기술과 능력이 있는 자는 노동의 효과가 뛰어나다. 그 사람은 자연히 노동으로 살아가는 세계에서는 뛰어난 자로 인정을 받게 되고 그만큼 배부름과 안락이 보장된다. 반면에 노동의 기술과 능력이 없는 사람은 뒤쳐지고 하위 그룹으로 밀려나게 된다. 경쟁 속에서 남을 눌러야 내가 살 수 있고, 남이 뒤떨어져야 내가 앞서갈 수 있는 세상이다. 때문에 강자가 약자를 다스리는 것, 이것이 세상 법칙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 법칙이 전혀 통용될 수 없는 나라가 있다. 그것이 바로 노동이 없는 안식의 나라로써 주님의 나라이다.
결국 인간의 노동은 자신의 삶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이다. 인간의 노동에는 자신의 건강, 지식, 경험 등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을 쉬라는 것은 우리 자신이 죽어야 하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결국 하나님의 속죄를 안다는 것은 자신을 죽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의 노동은 철저히 배제되고 하나님의 은혜만 지배하는 나라의 모습으로 세워져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피가 가져다주는 안식이란 어떤 것인지를 7일 성회기간동안 철저히 경험해야만 하는 것이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에 의해 애굽을 빠져나와 약속의 땅에 갈 수 있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그 은혜 안에서는 오직 희생되는 피만 인정된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피나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죄 없는 언약의 중보자가 흘리는 희생의 피라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죄 없는 분으로 십자가에서 피의 새 언약을 세우신 것이다. 그 피의 안식 안에 부름받은 자가 예수 믿는 자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그 피를 믿고 하나님의 희생을 알며 그 정신으로 사는 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않아도 이미 약속의 땅에 사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때문에 절기를 지킴에 있어서 노동을 그만두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사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는 자는 세상을 살 때 자기의 힘으로 얻을 것이 전혀 없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것을 받아 누리며 산다는 것을 아는 자이다. 교회란 그것을 이미 앞당겨 사는 자들을 두고 말한다. 세상은 열심히 일해서 벌어놓은 것으로 살아가지만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나라이다. 우리가 열심히 교회 다니고 기도해서 얻은 천국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흘리신 고귀한 피로 인해서 얻은 은혜 안에서 놀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사랑하며 사는 것이 천국이다.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10:29)(1999.2.14).
민수기 30장
본 장은 서원에 대한 규례를 다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여기서 왜 또 서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서원에 대한 규례는 레위기 27장에서 이미 말씀하신적이 있다. 물론 그 서술 방식에 대해서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우리는 서원이라는 동일한 문제를 다룬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 의미는 다르게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28,29장을 통해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중심한 새로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아 누릴 수 있는 자란 어떤 정신의 소유자인가를 보이셨다. 즉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 정신이 담긴 자이다. 다시 말해서 피의 정신으로 사는 자가 언약 백성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상번제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속죄 안에 사는 것이며 약속의 땅이란 곧 인간의 노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노동에 의해 받아 누리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 은혜에 참여하는 것은 남자들만 아니라 여자들도 서원을 통해 참여하게 되는 의미를 여기서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화목제의 한 부분(레 7:15,16)이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2절에 의하면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고 말한다. 즉 여호와께 서원한 것은 모두 행하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그 자세한 내용을 보면, 단순히 서원에 대해서 다루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3-5절을 보면, 여자가 어려서 아비의 집에서 거할 때에 그 여자가 여호와께 서원한 것이 있을 때 아비가 그것을 알고도 아무 말이 없으면 서원을 행하되 만약 아비가 허락지 않으면 서원을 이루지 못해도 여호와께서 사하신다는 것이다. 6-8절에는 여자가 결혼하기 전에 서원한 것을 이행하지 못하고 결혼했을 경우 비록 아버지가 서원을 허락했다고 하더라도 그 여자의 남편이 된 사람이 그 서원을 듣고도 가만히 있으면 서원을 행하여야 하지만 남편이 허락지 않으면 서원은 무효가 되고 여호와께서 그 여자를 사하신다고 한다.
9-12절은 부녀들, 즉 결혼한 사람들의 서원에 대한 규례인데 과부나 이혼한 부녀들의 규례이다. 남편이 죽거나 이혼한 부녀들은 자신들의 서원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지만 남편이 있는 부녀들이 서원을 했을 때 남편이 아무 말이 없으면 서원을 행하여야 하지만 허락지 않으면 서원은 무효가 된 것이고 여호와께서 그 부녀를 사하신다는 것이다. 이 서원의 규례들은 모두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규례임을 알 수 있다. 여자의 서원을 남자가 책임져주고 있는 것이다. 처녀일 때에는 아버지가 책임을 진다. 그러나 결혼하면 아버지가 책임자가 아니라 남편이 책임자가 된다. 즉 여자는 남자의 권위와 책임 아래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규례를 가지고 여자에 대한 무시로 보거나 남자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해석하면 곤란하다.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나타내고자 하시는 뜻이 남자의 우월이나 여자의 열등에 관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는 아버지와 자녀(신 32:6, 사 63:16), 남편과 신부의 관계(사 54:5, 호 2:19,20)로 비유되었다. 그러기에 아버지가 딸, 남편이 아내가 다짐한 서원의 준수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고 교훈하는 것은 언약 공동체가 철저히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서원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원을 하면서 애굽에서 자신들을 빼내어 약속의 땅에 두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한다면 자기 마음대로 서약하고, 또한 마음대로 파약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란 언약의 하나님과 같은 모습을 지니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신실하심, 언약적 성품을 그대로 담아내는 역할을 하는 자들이 이스라엘이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어야 하기에 혈기를 부린 것으로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여호수아로 교체해서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여기서 두령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주어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책임자로 보이시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적 성품을 그대로 드러내는 자들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시편 82편에 보면, 하나님의 회라는 이스라엘 중에 하나님이 서 계시며, 재판장들 중에 계신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백성의 지도자요 재판장들을 두고 신이라고 했다. 이것을 요한복음 10:34에서 예수님께서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하신다. 그래서 백성의 지도자들을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계시자로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계시의 말씀을 전달할 자로 두령들을 세우도록 하시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도 실제적으로 2절 이하에 보면, 이 계시의 말씀이 모든 백성에게 전달되어지는 것으로 묘사되는 것이다. 어쨌든 좁게 보자면 두령들이 하나님의 모습을 이스라엘에게 보여주어야 하고 넓게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하나님의 모습을 이방인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계시자로 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은 남녀의 관계, 가정의 관계를 통해서 서원이라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을 드러내고 있는가를 물으시고 확인하려고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맹세에 대한 문제는 이러한 본래적 뜻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니 아예 방향이 달랐다. 마태복음 5:33-37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들은 자기의 맹세가 더 높고 확실한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것들로 맹세를 확인시켜주려고 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두가 땅에 있는 것들로 서원한다고 해 보았자 그것은 하나님의 수하에 있는 것이고 하나님보다 높을 수 없다는 차원에서 세상의 것들로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맹세를 통해 하나님의 신실성을 보여주는 언약적 기능을 유대인들은 잊어버리고 자기를 위해 곡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언약의 책임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시고 그것을 이루시는 이도 역시 주님이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후서 2: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고 했다. 결국 서원에 대하여 무효를 선언하거나 계속 서원대로 행하여야 하는 책임을 남편이 지게 되는 것을 통해 누가 이 남편의 역할을 했는가를 신약에서는 보여주고 있는데 그 남편의 역할을 예수님이 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모든 죄를 책임져주시는 분이 있기 때문에 우리 죄를 무효화하시는 것이다. 과거에 어떤 죄가 있다고 해도 하나님 자기 백성들에게는 책임자가 있기 때문에 모든 죄가 무효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을 가정을 통해서 보여주시고 또 우리에게 그것을 보여주라고 가정이 있게 하신 것이다.
에베소서 5:23-25에 보면,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이 부부이다. 남편은 그리스도의 자리에서 아내는 교회의 자리에서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이다. 아내는 교회의 자리에서 남편에게 복종함으로서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책임지심으로 우리의 죄에 대해 어떻게 책임지시는가를 배우는 것이고 남편은 그리스도의 자리에서 죄에 대한 책임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깨달으면서 주님이 우리의 죄를 책임져 주신 것에 대해서 배워가는 것이다.(1999.2.28).
민수기 31장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은 내부적으로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의 피에 관심을 가져야 함을 28-30장을 통해 말씀하셨다. 이제 본 장에서는 약속의 땅으로 가기까지 모세를 통해 치루어야 할 전쟁이 있음을 말씀하신 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여기서 중요하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이제 앞으로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하여 계속될 여호와의 전쟁에 대하여 이스라엘이 어떤 기준과 정신으로 전쟁에 임해야 하는 것이며 전쟁한 후의 그 전리품에 대하여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보이시기 위하여 규례를 정하여 제시하신다는 데에 의미가 있는 장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지시하시기를 각 지파별로 천명씩 택해서 미디안과의 싸움에 내보내라고 하셨다. 2절에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라고 표현한 반면, 3절에서는 “여호와의 원수”로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원수란 곧 여호와 하나님의 원수라는 사실이다. 그러면 어째서 이스라엘의 원수를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가? 이 말은 단순히 미디안이 하나님의 원수라는 말은 아니다.
그 근거를 16절에서 볼 수 있다.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좇아 이스라엘 자손으로 브올의 사건에 여호와 앞에 범죄케 하여 여호와의 회중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민수기 25장에 보면, 미디안은 발람을 통해 저주하려고 하였다가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여자들을 통해 이스라엘로 하여금 우상을 섬기고 음행을 하도록 유혹했었다. 이 때문에 염병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이스라엘 백성 24,000명이 죽었던(민 25:9) 사건이 있었다. 즉 미디안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게끔 만들었다는 차원에서 하나님의 언약에 대하여 어그러진 길로 가도록 한 원수라는 뜻이다.
결국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미디안이 원수라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의 길로 나가도록 하는 그 무엇이 원수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이 말을 좀더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처음에 하나님이 싸우셨던 대적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 옛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과 싸웠다. 그러나 애굽이란 나라 자체가 원수가 되어서 싸운 것이 아니라 바로의 사고 방식자체가 원수가 된 것이다.
바로는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이스라엘을 내어 보내기를 요청했을 때에 “여호와가 누구관대”라고 하면서 거절했었다(출 5:2). 그래서 하나님은 애굽에 10재앙을 내리시면서 애굽과 싸우셨던 것이다. 즉 여호와를 모르는 것이 하나님의 원수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는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적이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 언약에 근거하여 이스라엘과 다시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무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광야에서는 미디안이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고 언약의 땅으로 가는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했던 그것이 곧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는 사고 방식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라는 것은 어떤 국가나 인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과 반대되는 사고방식 자체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거부하거나 그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을 반대하며 방해하는 모든 세력을 원수로 규정하신다. 이렇게 보았을 때 오늘날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인가를 생각할 때에 단순히 불신자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 안에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고 반대하는 요소는 없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고 그러한 요소를 가진 나 자신이 곧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아야 한다.
미디안과의 전쟁은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 대하여 각 지파에서 일천 인씩을 싸움에 보낼지니라”(4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말씀대로 모세는 12,000명을 무장하여 보냈다. 각 지파별로 이렇게 전쟁에 보내는 이유는 아마도 이스라엘 전체의 전쟁임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어느 지파에서 일어난 일부분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각 지파별로 1000명을 뽑아 보냄으로써 공동체 전체의 문제라는 뜻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6절에 보면, “모세가 매지파에 일천 인씩 싸움에 보내되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에게 성소의 기구와 신호 나팔을 들려서 그들과 함께 싸움에 보내매”라고 했다. 제사장 엘르아살이 직접 나가지 않고 그의 아들 비느하스에게 이 일이 맡겨진 이유가 무엇일까?
이 역시 민수기 25장에서 그 근거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미디안의 유혹으로 말미암은 우상 숭배와 음행으로 인한 문제가 야기되었을 때에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었다(민 25:6-11). 하나님은 그에게 평화의 언약,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을 주셨다(민 25:12,13).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질투를 가진 자가 원수된 자를 제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평화요, 제사장 직분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오늘 여기서도 비느하스에게 동일한 일을 하도록 하신 것을 볼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의 질투심을 가졌던 자가 원수들에게 복수를 함으로써 평화의 제사장 직무를 완수하도록 하셨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평화의 제사장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가? 그 사람은 분명히 여호와의 질투를 가진 사람이어야 하고 또 여호와의 질투를 가진 사람만이 평화의 제사장 직무를 할 수 있는 그런 성격의 일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에 모세는 정결법과 전리품을 분배하는 규레를 선포하였다. 군인들과 포로들을 제 삼일과 제 칠일에 물로 씻게 하고 의복류를 빨게 하고 불에 타지 않는 것은 불을 지나게 하고 그리고 또 물로 씻게 한다. 이는 하나님의 진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고 부정하다는 것이다. 더러운 것을 접하고 죽이며 그것을 취급하여 그 사람은 필히 더러워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에는 거룩하게 하고 깨끗하게 한 후에만 들어올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삼일에도 깨끗하게 하고 칠일에도 깨끗하게 한 후에 들어오도록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접하는 모든 것은 죄악으로 오염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고 미디안이며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가 싸워야 할 이러한 근원적인 싸움을 하시기 위해서였다. 즉 예수님은 비느하스와 같은 질투심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요일 3:8). 예수님이 마귀와 가장 치열한 싸움을 했던 현장이 십자가였다. 그로 말미암아 죄악이 멸망을 받았고 속죄가 이루어진 것이다.
26절에 보면 미디안과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을 계수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백성들 전체와 골고루 나누기 위해서이다. 전리품을 반으로 나누어 절반은 전쟁에 나갔던 군인들에게 주고 절반은 회중에게 주라고 했다. 그리고 28절 이하에 의하면 군인들이 받은 전리품 중에서 오백분의 일을 여호와께 드리고(28절) 백성들에게서 오십분의 일을 취하여 레위인들에게 주었다(30절).
이렇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이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의 승리이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선물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전쟁에 나간 자나 나가지 않은 자나 동일하게 나누어진다는 것은 인간이 전쟁에 참여하여 무엇인가 했다는 것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주어지는 것임을 백성들에게 확인시켜주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 승리 안에 산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승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세상과 복음과 대치되는 것들과 싸우도록 이끄시는 영이다. 이런 점에서 초대 교회의 사도들은 성령을 받았을 때 공회의 위협에도 조금도 누그러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19,20)고 외쳤던 것이다.
복음 안에 있는 자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이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았다는 것은 십자가를 가지고 복음을 나타내는 자이다. 십자가로 일하시는 성령은 곧 질투의 영이다. 그러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자는 복음을 왜곡되게 만드는 죄의 본성, 곧 세상과 계속해서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승리하신 싸움이기에 우리는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복음 안에 살지만 동시에 미디안과 같은 하나님의 원수의 모습을 지닌 세상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 언약의 원수로 복음에 도전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이 일에 물러서거나 겁먹을 필요는 없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복음의 말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1999.3.7).
민수기 32장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때 요단강까지 와서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으로 인해서 일어난 사건이다.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의 떼가 있었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 곳은 가축에 적당한 곳인지라.” 그래서 르우벤과 갓 자손이 이렇게 요구하게 된다. “또 가로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산업으로 주시고 우리로 요단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5절).
당시 이스라엘은 가축을 키우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문제가 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빌미의 되어 그들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쏠렸다고 성경은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왜냐하면 가축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세상에서 먹고사는 문제에 부족이 없고 풍부하다는 것이고 가축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은 세상에서 자신의 생애를 풍요롭게 만들고 싶어하는 욕망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관심을 가축을 키우는 일에 두고 사는 르우벤과 갓 자손이 요단 동편에 있는 야셀 땅과 길르앗을 땅을 바라보니 그 땅들이 가축을 키우기에 아주 적당한 땅이었다. 야셀 땅과 길르앗 땅에서만 살면 가축은 더 번성을 하고 그렇게 되면 자기들의 삶은 더 풍부해 질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그들의 관심은 약속의 땅이 아니라 가축이었다. 그들의 관심은 이미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에서 자신들의 생계 수단이라는 것으로 옮겨졌다. 아니 애초부터 하나님의 약속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모세는 “보라 너희는 너희의 열조를 계대하여 일어난 죄인의 종류로서 이스라엘을 향하신 여호와의 노를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14절)라고 하면서 가데스바네아에서 정탐한 후에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겠다고 한 과거의 사건을 예로들고 있다. 여기서 “열조를 계대하여 일어난 죄인의 종류”라고 한 것은 조상들의 죄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똑같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과거 하나님을 향해 반역하며 약속의 땅에 장대한 자가 살고 있고 이스라엘보다 훨씬 힘이 센 자들로 보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한 죄와 동일한 것으로 보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요단의 이편 땅, 즉 가나안 건너 편 땅을 주고 싶지 않으신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결국에는 르우벤과 갓 므낫세 반지파에게 그 땅을 주셨기 때문이다(33절). 따라서 하나님은 르우벤과 갓 지파가 요구한 땅을 거부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금 요단을 건너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에 대해 하나님은 책망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곧 형제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신들만 생각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들에게 은혜는 약속의 땅, 즉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이생에서 풍요롭게 사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과연 은혜는 무엇인가? 이 땅에서 풍요롭게 잘 사는 것인가? 교회가 숫적으로 부흥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모든 것들은 이 땅의 것이다. 위엣 것, 하늘의 것에 관심을 가진다면 이 땅에서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는 것에 울고 웃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19,20)고 하셨다. 그러면서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마 6:21,22)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어디를 보고 있는가를 말씀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늘의 것을 보고 있는가 땅의 것을 보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6장의 결론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마 6:33). 하늘에 관심을 둔 자는 하늘의 것, 즉 예수님이 보여주신 의, 그분의 나라를 구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무엇이 신앙인가? 6절에서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았고자 하느냐”라고 모세가 책망한다. 르우벤과 갓 자손은 싸워야 한다는 것에는 마음 두지 않고 있다. 오직 가축을 기르기에 적당한 땅이 있는 것을 하나님의 복으로 여겼고 그 복을 누리기만 하면 된다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약속의 땅으로 가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군대가 싸움을 포기하고 있다.
자기들만 편안하고 쉴 수 있는 안식처만 있으면 될 문제가 아니다. 미디안과의 싸움에서도 보여주셨듯이 가나안 정복은 이스라엘의 한 부분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이스라엘 전체의 문제였다. 가나안 족속들 역시 하나님의 원수이기 때문이다(21절). 하나님은 그것을 이미 미디안과의 싸움에서 각 지파별로 1,000명씩을 뽑아 전쟁하게 한 것을 통해 보이셨다. 그러나 르우벤과 갓 지파는 그것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르우벤과 갓 지파가 약속의 땅에 가서 이스라엘의 공동체 정신을 가지고 싸워야 하는 것을 거부하는 그것이 곧 하나님의 원수이다. 지금 르우벤과 갓 지파가 가지고 있는 사고 방식이 하나님의 원수 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 마디로 신앙이란 싸우는 것이다. 민수기의 시작은 싸움을 전제로 하고 있다. 하나님의 군대로 수를 세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이 민수기이기 때문이다. 무엇과 싸워야 하는가? 바로 하나님의 원수와 싸워야 한다. 문제는 무엇을 하나님의 원수로 보는가? 우리는 우리의 입장에서 원수를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원수라고 말씀하고 있다. 곧 르우벤과 갓 지파와 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모습이다. 그러기에 우리 안에 이러한 사고방식이 있다면 자신을 죽이도록 주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고 부단히 자신을 부정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모습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군대로서 싸우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이런 것으로 싸우지 않는다. 자기 자신은 이미 하나님의 편이라고 전제하고 원수를 찾고 있다. 목사의 목회 방침에 거부하는 놈이 있다면 그 사람을 원수로 생각하고 교회에서 왕따로 만드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다. 그래서 개 교회 목회자를 중심으로 뭉쳐 다른 교회와 싸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군대란 목회자를 중심으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중심이 된다. 오늘날 우리에게 약속이 중심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라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다는 말은 무슨교단 어떤 교파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성도란 주님이 우리를 붙잡고 죽게 하시기 때문에 죽는 싸움을 하는 자들이다.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자랑할 수가 없고 교만할 수가 없다. 그러기에 더더욱 우리는 힘없고, 믿음없음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순교란 있을 수가 없다.
목사로서 제가 속해 있는 교단은 ‘재건’이라는 교단이다. 재건교회란,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옥고를 치르고 갖은 고생을 다 한 사람들이 해방이 되자 나와서 신앙의 재건을 부르짖었던 자들이 모여서 세워진 교단이다. 그러니 재건교회의 사람들이라면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신앙의 자부심이 대단한 사람들이다. 순교자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어떤 교회에 대고 제가 진정한 순교자는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말에 대해 꼬깝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원수로 보는 사람들은 그 말을 공감하였었다. 자기 자신을 원수로 본다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러한 일들로 깨달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주의 말씀대로 종들은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다 건너가서 싸우리이다” (27절)라고 한 것처럼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한 자들에게 비로소 땅이 기업으로 주어지게 되는 것처럼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며 죽는 자에게만 천국이라는 영생이 주어지게 되는 것이다. 약속의 땅이란 개인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에게 주시듯이 천국은 우리 각 개인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고 하는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교단이 우리가 모일 수 있는 중심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였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항상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이 중심에 있다면 항상 걷어낼 줄 아는 자가 성도이다(1999.3.14).
민수기 33장
요단을 건너지 않게 해 달라고 요구하며 요단 이 편의 땅을 요구했던 르우벤과 갓 지파에게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싸울 것을 다짐받았다.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로써 약속의 땅에 들어가고 여호와의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군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이제까지 애굽에서부터 모압 평지에 오기까지의 모든 광야의 과정을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와 아론의 관할하에 그 항오대로 애굽 땅에서 나오던 때의 노정이 이러하니라 모세가 여호와의 명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 진행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그 진행한 대로 그 노정은 이러하니라”(1,2절). “모세가 여호와의 명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 진행한 것을 기록하였으니”라고 한 것은 비록 모세와 아론의 지도하에 그들이 인도되어 나왔지만 그들을 실제로 인도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즉 여호와의 명대로 왔지 그들이 임의로 올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직접 인도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모세라는 인도자를 세웠다. 하나님은 모세를 인도자로 세우기 위하여 미리 모세에게 하신 일이 있다. 모세는 처음에는 자기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했다. 그러나 힘을 내세운 구원의 행위는 하나님이 거부하셨다. 그 때문에 모세는 미디안 광야로 쫓겨가게 되었다. 거기서 40년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하나님은 모세가 80세가 되어 힘이 없고 늙었을 때에 부르신다.
모세는 나이 들어 힘이 없음을 내세워 그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변명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세 가지 이적을 보여주시고 함께 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 모세 자신이 하는 일이 아님을 가르치셨다. 이렇듯 하나님을 만난 모세는 그로부터 오직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움직였다.
하나님은 이렇게 먼저 하나님 자신을 모세에게 보여주셔서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인도하셨다. 신자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은 자기 생각과 판단을 앞세워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로부터 인도함을 받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면 오늘날 하나님을 아는 자가 누구인가?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하여 얼른 목사라고 쉽게 단정하기 좋아한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하나님을 아는 분은 따로 계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분은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가장 잘 알았기에 십자가를 지셨던 것이다. 그 십자가 때문에 성령께서 오늘날 자기 백성들을 구원으로 이끄실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가장 잘 알아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가 이 땅에는 없다. 목사도 아니다. 오직 성령이시다. 로마서 8:26,27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 2:10,11)고 했다.
성령께서는 십자가라는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일하신다. 그러기에 성령 충만이란 말씀 충만이다. 우리가 충만이라는 말도 차고 넘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육체의 소욕을 십자가에 온전히 죽인 상태를 말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항상 주님의 인도를 받는다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죽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광야의 과정을 길게 말씀하심으로 애굽에서 출발하여 광야를 지나고 모압 평지까지 이르게 된 것은 순전히 자기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이스라엘의 욕심을 죽인 결과라는 것이다. 이렇게 일하신 이유는 하나님 자신의 약속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약속의 땅에 건너기에 앞서 모압 평지에 와 있는 이러한 상황까지 인도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심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켰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보자면 지금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그 건너편에 서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능력이 아니고 우연히 그렇게 된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약속을 가지고 이제까지 인도하셨다는 것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되는 보증이 되는 것이다. 때문에 약속의 땅에도 반드시 들어가게 될 것이고 그 땅을 빼앗는 일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내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은 한 발짝도 물러섬이 있어서도 안되고 그 땅의 거민들과 타협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너희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파멸하며 산당을 다 훼파하고 그 땅을 취하여 거기 거하라 내가 그 땅을 너희 산업으로 너희에게 주었음이라”(51-53절).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몰아내고…파멸하며…훼파하고”라고 말씀하심으로 가나안 땅에 있는 우상을 섬기는 자들뿐만 아니라 우상과 우상의 모든 요소들을 철저히 거부하고 축출하고 완전히 멸망시킬 것을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상과 우상을 섬기는 자들에 대한 철저한 심판을 하시겠다는 것으로 볼 때에 우상과 우상을 섬기는 자와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즉 죄와 죄를 범하는 인간을 분리해 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심판은 죄와 죄를 짓는 인간에게까지 행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구원파에서 말하듯이 구원받은 이후에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으며 죄를 범하였다고 할지라도 믿는 자에게는 더 이상 그것이 죄가 안된다는 논리는 비성경적인 터무니없는 주장임을 알 수 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 7:17에서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는 말씀이나 7:20에서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말씀한 것은 자신이 죄를 짓지 않으며 자신이 행하는 것은 죄가 안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죄의 실체에 대해서 말하고자 함이다. 다시 말해서 죄라고 하는 실체가 바울 자신을 사로잡고 늘 죄를 범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우리 인간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죄를 범하는 것이나 범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철저히 밝히기 위함이다. 때문에 인간은 죄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성도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십자가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내어 맡겨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이다.
결국 우상이란 예수를 믿었다고 내 안에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은 예수를 믿었다고 할지라도 끊임없이 우상을 좇아가며 죄를 짓는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우상이란 단순히 하나님 외에 무엇을 만들어 놓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주님을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 보려고 하는 모든 시도 자체가 바로 우리에게 우상이 된다는 사실이다.
출애굽기 20:4,5에 보면,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다. 우상을 만들지 말고 섬기지 말라는 전제 사항이 “너를 위하여”라고 되어 있다. 우상이란 자신을 위하는 것으로 출발한다. 자신을 위하는 것이라면 모든 것이 다 우상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4)고 하셨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고 죽는 것에서 시작한다. 자기 자신이 죽지 않으면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고 자신과 관련된 것들을 또한 우상으로 만들어낼 것이다. 자신을 위하는 자식이라면 자식이 우상이고, 자신을 위한 남편이나 아내라는 그것도 우상이고, 심지어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로 생각한다면 교회도 우상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시는 하나님, 예수님으로 믿고 있다면 그것이 곧 우상이다.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같이 표적을 일으키는 예수를 찾고 헬라인들과 같이 자신의 지적인 욕구를 채워주는 예수를 찾는다(고전 1:22). 그래서 바울 사도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 했다(고전 1:23).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만 걸러 넘어질 자는 걸려 넘어지고 십자가 안으로 들어올 자는 십자가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고전 1:18)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실 이스라엘이 이렇게 우상을 완전히 파멸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순종할 인간이 아니라는 것도 아셨다. 그러면서도 앞에서 장황하게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는 55,56절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너희가 만일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 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이 언약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살지 못할 때에는 결국 가나안 땅의 요소가 올무가 되고 가시가 될 것이다(1999.3.21).
민수기 34장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나온 과거를 돌아보게 하심으로 40년 기간을 정리했다(33:1-49).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행하여야 할 하나님의 명령을 다시 새기도록 하셨다(33:50-56). 이제 34장 이하는 미래의 일을 마치 현재 성취된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약속의 땅을 소유한 것으로 여기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살펴볼 34장은 가나안 땅의 사방 경계에 대해서(34:1-15), 그리고 기업 분배에 참여할 족장들의 명단을 기록하고 있다(34:16-29).
본 장에 이어져 다루어질 내용은 34장에서 제외된 레위 지파의 성읍과 도피성에 대한 것(35장), 그리고 여자들에 대한 기업의 분배(36장)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33장에서 광야의 노정을 정리하면서 이후로는 온통 약속의 기업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본 장의 전반부에서는 약속의 땅에 대한 경계를 말씀하셨는데 이는 이미 아브라함 때에 주신 약속 안에 있는 것이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15:18 ) .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라고 경계를 말씀하셨다.
이제 그 땅을 실제로 차지할 즈음에 와서는 더욱 구체적으로 각 성읍의 이름까지 지적하면서 그 땅의 경계를 일러주신다. 남편 경계는 신광야와 염해(사해) 끝으로 시작하여 가데스바네아까지이며, 서편 경계는 대해(지중해)까지이며, 북편 경계는 호르산, 하맛 어귀로 해서 하살에난까지 미친다고 하셨다. 그리고 동편 경계는 하살에난에서 스밤, 긴네렛(갈릴리)호수에까지 이른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실제로 이 땅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것보다 작은 땅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보다 축소된 땅을 주신 것이 아니다. 신명기 11:24에 의하면 “너희의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 소유가 되리니 너희의 경계는 곧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와 유브라데 하수라 하는 하수에서 서해까지라” 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현재 상황에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배려로 보인다(신 7:22).
하나님께서는 바벨탑으로 인한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 극도에 달했을 때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약속의 땅을 주시기로 하셨다. 이후로 언약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적극적으로 순종하기보다 오히려 반역과 실패, 하나님에 대한 거부의 연속이었다. 광야 40년은 순종의 반복이기보다 불순종의 반복이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패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존하시고 이끄신 것은 바로 이 약속을 이루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성취된다(사 55:10, 11). 실제 문자적인 의미에서 성취된 것은 솔로몬 왕 때이다. “솔로몬이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블레셋 땅과 애굽 지경까지의 열왕을 관할하였으며”(대하 9:26).
이처럼 앞으로 들어갈 가나안 땅을 분배하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그 땅을 분명하게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실 것이라는 보증이 되는 것이며, 또한 그 땅의 주인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 24:1). “저희가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저희 팔이 저희를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팔과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저희를 기뻐하신 연고니이다”(시 44:3). 하나님은 인간의 연대와 거주의 경계를 정하는 분이시다(행 17:26).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는 말씀에 있지, 어떻게 들어간다고 하는 말씀은 없다. 더 재미있는 것은 가나안 땅을 “제비 뽑아 얻을 땅”이라고 했다. 가서 싸워 보지도 않았고, 어떤 사람들이 살며, 지형이 어떤지 알아보지도 않고 제비를 뽑아 먼저 얻어 놓고 그 다음에 가는 땅이다. 그것이 약속의 땅의 성격이다.
인간의 계획과 계산에 의해 들어가는 땅이 아니라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제비를 뽑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나누어주신다는 뜻이다. 사람은 선택권이 없고, 얻는데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다. 그래도 하나님이 사람마다 나누어 주셔서 기업이 되게 하시겠다는 뜻이다. 이렇게 제비뽑아 얻는 것은 ‘약속의 땅에 자기가 참여하는 자 되었다’ 는 데 의의가 있지, 개인 소유물로 삼는데 의의가 있지 않다. ‘내 것, 네 것’ 따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가나안을 유업으로 받은 사람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것을 좋아하다 보니, 천국도 자기 천국, 자기 집을 원한다. 공동적인 것, 모두의 것이라는데 불안해 하는 경향이 있다. 때문에 어쩌면 교회 봉사, 전도, 기도, 예배, 주일 성수 등등 교회의 모든 활동들이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계산에 의해 크나큰 포부를 가지고 행해지고 있다. 이것은 종교 활동에 불과하다.
어쨌든 하나님이 이렇게 “제비 뽑아 얻을 땅”이라고 말씀하시고 이스라엘에게 나누어주시겠다는 것은 어떻게 들어가는지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이 전혀 신경쓰지 말라는 것이다.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을 거꾸로 말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들어가게 하시고 또 나누어주신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은 우리가 가지는 관심은 어떻게 주실 것인가 하는 것에 훨씬 더 관심이 많다. 앞으로 될 일들을 미리 알아서 대비하고자 하는 호기심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약속의 땅의 경계를 확실히 알라는 것이지 ‘어떻게?’라고 하는 방법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재림이 반드시 약속대로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십자가의 주님이 재림주로 다시 오신다는 것이 중요한 문제이지 어떻게 언제 오시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십자가로 버림당하신 그분이 자기 원수들을 척결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다는 것에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의 초점은 당연히 십자가의 주님 그분 자체이다.
본문에서 땅의 경계를 바로 파악하도록 그 경계를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로 알도록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이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가 무엇인가를 알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음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라는 것이다. 주신 은혜를 알아가는 것이 신앙 생활이다(고전 2:12).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 3 ).
교회에 무슨 물건이 필요한지를 아는 것이 아니고 예배당 건축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아는 것이 영생이 아니다. 장로는 장로, 집사는 집사, 목사는 목사의 일을 잘 아는 것이 영생이 아니며, 목사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 지를 아는 것이 영생이 아니다. 그것은 약속과 관계없는 것들이다.
약속의 땅의 경계를 안다는 것은 약속이 지향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을 말한다. 신약에 와서 약속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임이 분명하게 계시되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람들은 거부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며 사는 것이 약속 안에 사는 사람이다.
본 장의 후반부는 가나안 땅을 실질적으로 나눌 자의 이름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다. 땅을 기업으로 나눌 자는 제사장 엘르아살과 여호수아로 말씀하시고 10지파의 족장들을 거명하신다. 여기서 10지파만 언급된 것은 르우벤과 갓 지파는 이미 요단 동편에 땅을 얻었기 때문이다.
제사장 엘르아살이라는 의미는 백성들을 대신하여 제사를 드리는 자이므로 곧 유월절 어린 양의 희생 정신 안에 있는 자라는 의미이다. 여호수아라는 의미는 이제 모세를 대신하여 여호수아를 중심으로 약속의 땅에 분명히 들어가게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신에 의한 감동으로 이루어지는 일임을 뜻하는 것이리라(27:18). 18절에 의하면, “너희가 또 기업의 땅을 나누기 위하여 매지파에 한 족장씩 택하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투표해서 백성들이 대표를 뽑으라는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지명해서 말씀하신 자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말씀이다.
약속의 땅은 선물이기 때문에 지파에서 대표자를 뽑아 하나님과 협상하여 기업의 땅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편에서 요구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 누리는 입장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일방적인 선물이지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엡 2:8). 은사를 받기 위해서나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발악(?)을 하며 기도로 떼를 쓰는 자는 아직도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받은 것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1999.3.28).
민수기 35장
34장에서 약속의 땅에 대한 경계와 어떻게 분배하실 것인지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조건 약속의 땅에 들어간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사는 생활이란 어떤 것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는 레위인에 대해 말씀하신다. 레위인들이란 하나님의 성전 일을 위하여 땅에 대한 기업이 없는 자로 선택받은 가문이다. 즉 하나님만 지향하고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임을 보여주는 자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레위인을 보면서 자신들을 가나안 땅에 두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레위인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가 된다. 만약에 그들이 뿔뿔이 헤어져서 아무도 레위인답게 살아가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면 그 나라는 하나님을 거부했다는 뜻이 된다. 이런 점에서 약속의 땅에서의 삶이란 땅을 기업으로 받은 자가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땅의 기업이 없는 레위인들과 더불어 살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우는 곳이다. 따라서 레위인들에게 살 곳을 제공해 준다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표시이다.
창세기 49장에 보면, 야곱이 레위에 대하여 예언하기를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 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창 49:7)고 했다. 레위 지파가 기업을 얻지 못하고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지는 것은 이 저주 때문이다. 그래서 레위인들은 한 곳에 모여 살 수가 없었다.
그런데 레위인들이 인간적으로 보자면 저주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저주가 아니라 복을 받은 것이다. 온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하나님의 성전에 부름을 받아 하나님 곁에서 일을 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을 그들의 기업으로 얻을 자들이다. “그들이 그 형제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은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심같이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니라”(신 18:2).
그러면 무엇이 레위인들을 이렇게 저주에서 복된 상태로 바꾸어 놓았는가? 물론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지만 이들의 저주를 복으로 바꾸어 놓은 것은 제사장들이 드리는 희생 제물 때문이다.
희생 제물 밑에서는 저주가 복으로 바뀌어지게 되어 있다. 희생 제물을 근거로 해서 제사장의 통제하에 있는 것이 저주를 복으로 바꾸는 길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희생과 자비 아래에서 저주가 복으로 바뀌었음을 말한다. 이스라엘이 레위인들에게 거처를 제공해 준다는 것은 바로 저주를 복으로 바꾸신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다는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우리도 똑같이 은혜를 입은 자라는 고백이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은혜가 존종시되고 그의 자비가 소중히 여김을 받는 땅이다.
때문에 레위인들은 다른 12지파 모두가 다 필요로 하는 가문이다. 만약에 레위인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 가문이 있다면 곧 하나님이 필요없다는 태도와 같은 것이다. 병원이라는 것이 한 곳에 뭉쳐 있으면 소용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모두에게 다 필요하기 때문에 레위인들은 각 지파에 모두 분산되어서 도피성에서 조금씩 모여 살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레위인들이란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식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보통 사람들과 섞여 사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것이 된다. 과연 우리가 사는 것이 하나님께 칭찬 받을만한 생활인가 하는 점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레위인은 폭로자, 고발자의 기능으로 이스라엘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어 나오는 도피성에 관한 이야기는 앞에서 이야기한 레위인을 통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성의 또 한 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의성 없이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위하여 피할 것을 마련한 것이 도피성인데 요단 건너편에 셋, 가나안 땅에 셋을 두도록 말씀하셨다. “세 성읍은 요단 이편에서 주고 세 성읍은 가나안 땅에서 주어 도피성이 되게 하라” (14절).
이 도피성에서 복수를 피하도록 하여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도피성 자체가 무조건 살인자를 위한 장소라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도피성을 주셨다는 것은 땅을 깨끗하게 하기 위한 의미로 주신 것이다. 살인을 했다는 것은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땅에 죄인의 피가 흘려진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그 땅이 깨끗해지려면 피를 흘리게 한 그 당사자가 자기도 피를 흘려 책임을 다 감당하는 경우에만 땅이 깨끗해질 수 있는 것이다.
“너희는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 이런 점에서 도피성이란 살인자가 흘린 피를 대신해서 대제사장이 땅의 저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제사장이 흩어져서 살아야 하는 이유이고 또한 도피성이 있는 이유이다. 즉 제사장이 약속의 땅에 흩어져 살면서 도처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은헤와 자비성을 신실하게 보여주어야 하는 장소로서 도피성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그러면 언제까지 도피성에서 살아야 하는가? 25절에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라고 했다. 자기가 실수하여 사람을 죽였을 때의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도피성에서 살다가 대제사장이 죽으면 고향집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대제사장의 죽음은 한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제사장 밑에서 생명을 유지하고 살던 사람, 환언하자면 대제사장의 생명을 얻어서 살던 사람이 대제사장이 죽음으로서 그도 함께 죽어 버린 것이다. 죄인으로서는 그는 죽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새 시대가 되었으니 새로운 사람으로 산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피를 흘리고 대신 죽어주신 분이 예수님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땅을 더럽힌 장본인이 바로 ‘나’라고 하는 존재가 아니던가? 그러기에 우리의 피가 아닌 그리고 구약에서 흘린 동물의 피가 아니고 죄 없는 예수님의 피흘리심, 하나님은 그것을 단번에 드린 영원한 제사로 받으신 것이다. 레위인이 도피성에서 보여주어야 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 그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약속에 포함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옛 사람은 죽고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죽음에서 부활의 생활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예수 그리스도가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시지 세상과 세상의 것이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범위는 단순히 사람만 아니라 인간으로 말미암아 저주 아래 놓이게 된 모든 하나님의 피조 세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이 아니고서는 새로운 것이라고는 없다. 그리스도 안이란 하나님과 연합된 개념이다. 하나님과 연합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거하고 주와 더불어 산다는 것이다.
성도가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죄와 함께 거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없는 곳에만 거하신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마음대로 죄를 짓는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나가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밀쳐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럴 경우에 하나님은 나가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멸하시는 것이다. 그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 나라에 소용이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과연 오늘날 성도들이 레위인과 같은 역할을 하면서 살고 있는가? 다 어두운 생활을 할 때 혼자 공개해도 괜찮을 만큼 떳떳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 자신이 있음으로 해서 이 자리에 하나님의 자비가 지속된다고 여겨질 만큼 하나님의 복과 도움을 먼저 생각하고 있는가? 우리는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을 쳐다보기 때문에 끊임없이 망상에 사로잡힌다. 자신은 항상 상대방보다 낫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자들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선 고발자, 폭로자의 기능으로 서는 자가 구약의 레위인이고 오늘날 성도이다.(1999.4.11).
민수기 36장
35장에서 하나님께서 도피성에 대해서 말씀하셨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피해야할 도피처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서 사는 삶의 큰 원칙을 제시하신 것이었다. 곧 “너희는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 너희는 너희 거하는 땅 곧 나의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함이니라”(33,34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란 땅을 더럽히지 않는 삶이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36장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민수기 27장에 보면, 요셉의 아들 므낫세의 현손인 슬로브핫이 아들이 없이 죽자 그의 딸들이 모세에게 나아 와서 자기들에게 기업을 달라고 했다. 자기 아버지의 이름이 그 지파중에서 없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구대로 아버지의 기업을 딸들에게 줄뿐만 아니라 이것을 이스라엘의 율례가 되게 하였다. 그런데 길르앗 자손(슬로브핫은 길르앗의 손자) 가족의 두령들이 여기에 문제점이 있음을 생각하고 이렇게 요구하게 된다.
“그들이 만일 이스라엘 자손의 다른 지파 남자들에게 시집가면 그들의 기업은 우리 조상의 기업에서 감삭되고 그들의 속할 그 지파의 기업에 첨가되리니 그러면 우리 제비뽑은 기업에서 감삭될 것이요 이스라엘 자손의 희년을 당하여 그 기업이 그가 속한 지파에 첨가될 것이라 그런즉 그들의 기업은 우리 조상 지파의 기업에서 아주 감삭되리이다”(3,4절). 즉 슬로브핫의 딸들이 자기 아버지의 이름으로 기업을 받았지만 만약 이들이 다른 지파의 사람들에게 시집을 가게 되면 그들이 물려받은 기업도 함께 따라가게 되기 때문에 집안 전체로 보면 기업이 줄어드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이 사실을 발견한 집안의 어른들이 모세에게 나아와서 그들의 염려를 모세에게 전달했다. 그래서 모세는 슬로브핫의 딸들로 하여금 그 지파 안에서만 시집가게 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므낫세 자손들이 유산을 다른 지파에게 빼앗기는 것이 아까워 많이 가지려고 욕심을 부린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뿐만 아니라 오늘날 부모에게서 유산을 받는 문제에 여자들도 많이 받아야 하는 정당성을 제시받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더더욱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5절에서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이스라엘에게 명하여 가로되 요셉 자손 지파의 말이 옳도다”라고 하나님의 뜻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의 요구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이러한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딸들에게 기업을 주라고 말씀하실 때에 시집은 집안 사람들에게 가도록 하라는 한 마디만 덧붙였더라도 이런 문제는 새삼스럽게 제기될 필요가 없었을 것 아닌가? 이 문제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조그만 결함도 생각지 못하시는 분이며, 인간들보다 더 지혜롭지 못한 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동행하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면 여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숨겨져 있음을 깨달을 수 있다.
이스라엘과 동행하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문제를 사전에 다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다. 이 말이 사건이 터지면 그제야 그에 따른 조치를 취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때마다 사건에 따라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에게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하시며, 또 사건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동행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논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모든 세세한 일을 통해서 여호와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하는 것을 묻고 싶으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매사에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고 늘 그분 중심으로 사고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므낫세의 자손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나온 것은 그들이 기업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즉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각 지파에게 주어진 기업이란 자손 대대로 계승되어야 하는 것이지 다른 지파에게로 가거나, 빼앗을 수도 없는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의도를 므낫세 자손들이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므낫세 자손들의 요구를 통해 하나님 자신의 약속과 기업의 성격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더욱 분명하게 확인시키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하신다.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대한 여호와의 명이 이러하니라 이르시되 슬로브핫의 딸들은 마음대로 시집가려니와 오직 그 조상 지파의 가족에게로만 시집갈지니, 그리하면 이스라엘 자손의 기업이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이 다 각기 조상 지파의 기업을 지킬 것이니라”(6-7절). 그리고 하나님은 이 말씀에 이어서 “지킨다”(7,9절) 혹은 “보존한다”(8절)는 말씀을 반복하시면서 므낫세 자손들이 기업을 중요하게 여긴 것처럼 온 이스라엘 지파가 다 이러한 정신을 가지고 기업을 소중히 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결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주신 기업이 소중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결혼이라는 것도 기업을 유지하고 보존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인간들의 결혼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사에 있어서 결혼을 무척 소중한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한 번 하는 결혼인데!’라고 하면서 온갖 사치를 다 부려서 거창하고 성대하게 결혼식을 치르고, 있는 것 없는 것 다 갖추어서 살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치하고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살려고 하는 것을 시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어떤 정신에서 나왔는가 하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무엇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인가 하는 것이다.
단순히 결혼이라는 것 자체를 소중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결혼이라는 것을 통해서 죄 아래에 있는 인간은 결코 한 몸 될 수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고 그분과 한 몸 되었다는 구원의 비밀을 알고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정신이 필요한 것이다.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 사랑하기 때문에 사는 것이 결혼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결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결혼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하는 측면, 즉 자신의 죄인 됨을 아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임을 보여주는 도구로 남편과 아내의 역할로 주어졌다는 것을 아는 차원에서 행해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업에 대한 문제를 왜 이토록 강조하시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이러한 모든 일들을 통해 강조하고 나타내고자 하시는 것은 땅의 중요성이다. 땅이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창조 행위를 계속 담아내고 있다는 데서 중요한 것이다. 인간들은 천사처럼 날아 다니는 존재가 아니다. 애초부터 지음받은 의도가 땅 위에서 땅을 다스리고 보존 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지음받았다. 그러나 인간은 범죄하여 하나님의 땅에서 쫓겨나서 땅에 살고 있지만 땅의 위협을 받고 땅의 저주 속에 살게 되었다.
이렇듯 인간은 싫든 좋든 땅 위에서 살아가게 되어 있다. 죽어서 음부에 간다는 것은 당시 세계관으로서는 땅 아래로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죽어서 음부에 내려가는 것을 싫어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땅이 없다는 것을 죽음으로 생각했고, 반대로 땅을 소유할 수 있고 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곧 자신의 삶의 의미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유지하게 하신 것은 가나안 땅 자체가 지금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다시 말해서 땅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어떤 영역이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약속의 실체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런 고로 약속의 땅에 산다는 것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이요 그것이 곧 성령 안에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소중하게 여겼다는 것은 가나안 땅으로서의 부동산을 소중하게 여기는 의미가 아니라면 동일하게 우리 역시 부동산을 소유하게 된 것을 하나님의 복이나 선물로 여길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게 된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최상의 복이요 선물임인줄을 알고 감사할 수 있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살 집이 없어도 이 땅에 거처를 삼을 수 없었고 머리 둘 곳도 없으신 예수님과 같은 입장에서 감사하는 모습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자가 아닐 것이다.
민수기는 군대의 수를 헤아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하나님의 군대로서 이스라엘은 민수기 전체를 통해서 볼 때 제대로 된 군대의 모습을 보여준 때가 없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의 적들을 원수로 규정하시고 친히 싸우시며 주의 적들을 물리치셨다.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던 원수까지도 하나님께서 미리 조치를 취하셨던 것을 볼 수 있었다. 군대로서의 가나안 땅에 진입은 원망과 실패의 연속이었다. 이런 점에서 보았을 때에 실로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군대는 하나님의 군대라고 이름 붙이기에 참으로 부끄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와 사랑으로 그들에게 일일이 자신을 구체적으로 계시하시며 약속을 확인시키셨다. 결국 민수기 마지막 부분에까지 와서도 하나님은 므낫세 자손과 그 가족 안에 있는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주어질 기업을 통해 이스라엘 전체가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셨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여 기업이 지켜지도록 하였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슬로브핫의 딸 말라와 디르사와 호글라와 밀가와 노아가 다 그 아비 형제의 아들들에게로 시집가되 그들이 요셉의 아들 므낫세 자손의 가족에게로 시집간 고로 그 기업이 그 아비 가족의 지파에 여전히 있었더라”(10-12절).
엄밀히 말하자면 슬로브핫의 딸들은 하나님의 군대로 속하지 않은(하나님의 군대로 계수함에 들지 않은) 자들이었다. 즉 군대 아닌 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군대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함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자신이 의도하신 바를 드러내시며 성취하신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이 민수기이다.
하나님의 일이란 항상 그러하다 인간의 실패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실패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인줄 알고 십자가의 주님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를 통해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시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 안에서만 비로소 주님과 더불어 죽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우리의 구원에 대한 공로를 자신의 행위나 공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희생으로만 돌리게 되기 때문이다(1999.4.18).
민수기 정리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제대로 지켜나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반항하며 원수 노릇하기 때문에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고 그 실패의 연속 가운데서 하나님의 언약의 본질적인 면이 드러난다는 것이 민수기의 내용이다. 민수기는 처음부터 수를 세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20세 이상 싸움에 나갈만한 자를 계수하는 것이다(1:3). 이는 하나님께서 유월절과 홍해 사건 이후 군대로서 이스라엘을 끌어내셨음을 의미한다(출 12: 41). 이 군대의 특징은 성막을 중심으로 진을 치고 행진하게 되어 있다(2:34).
성막을 중심으로 진을 치고 행진한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뜻이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을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군대가 싸워야 할 대상이 이스라엘의 개인적인 원수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원수라는 사실이다(31:3).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전쟁하는 여호와의 모습을 자신의 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에 담으려고 하시는 것이다. 이미 애굽이라는 적을 징치하고 나온 마당에서 또 무슨 원수가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약속이 가나안 땅으로 지정되어 있고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기로 오래 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약속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브라함 때가 아니라 후에 주실 것이었다. “네 자손은 사 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창 15:16). 하나님은 가나안 땅 족속들의 죄가 관영할 때까지 기다리셨다. 그리고는 그들을 언약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어 심판하고 그 땅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민수기의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향해 진행함에 있어서 군대로 명명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심판자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심판자란 하나님의 모습이 담겨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이 싸우는 싸움은 보통 싸움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거룩한 분이 악의 세력과 싸우는 싸움이기에 항상 정결과 거룩이 선결되지 않으면 군대의 의미가 없다(5:1-8:26).
정결과 거룩을 유지한다는 것은 유월절 정신으로 언약의 말씀(율법)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하나님이 항상 거하시는 것으로 상징된 성막으로부터 나온다.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지성소의 언약궤에 있는 돌판에 새겨진 말씀이 이스라엘을 치게 될 것이다. 그것을 극적으로 표현한 말이 “궤가 떠날 때”(10:35) 혹은 “궤가 쉴 때”(10:36)라고 표현하여 언약궤를 따라 움직이는 자들의 존재로 나타내고 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레위인들에게는 기업을 주지 아니하고 성막의 주위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막는 형식으로 배치하셨다(1:53). 레위인들에게 기업을 주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기업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기업이 됨으로 레위인들은 모든 지파의 처음 난 자를 대신한 하나님의 소유로서의 언약적 의미를 드러내기에 충분하다(3:12, 41, 8:18).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내 하나님의 군대라는 것을 망각하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과 불평을 토로한다(11:1-3). 그 때 여호와의 불이 진 끝에 떨어지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일인지 모르고 있었다가 이 일로 말미암아 놀라게 된다. 이 때문에 모세가 대신 여호와께 기도한다. 그랬더니 불이 꺼졌다. 그 일을 계기로 하나님은 70인의 장로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하게 하여 모세가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이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보이셨다(11:16-25). 이는 후에 여호수아를 세울 때에 하나님의 신이 감동된 자가 이스라엘을 인도하도록 하셔서(27:18) 하나님의 신이 추구하는 인간이란 중보자적 기능을 위한 인간이 되는 것임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11:29).
드디어 가나안 접경에 도착하여 정탐꾼을 보내어 알아본 결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것은 사실이었지만(13:26-29) 그 땅의 거민들을 볼 때에 도무지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모두가 다 거부하였다. 가나안 땅을 거부하면 다른 땅으로 가면 되지 않느냐 하는 것이 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 땅은 하나님께서 애초부터 주시기로 약속하신 약속의 땅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땅에 대한 거부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불신앙이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정탐꾼을 보내도록 지시하셨는가? 결국 하나님은 이 일을 통해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의 언약을 못믿고 있는가 하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드러내시고 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상을 초월하여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의 땅을 주실 것이라는 암시가 들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여호와 하나님은 단순한 신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그 일하시는 방법이 특이하다는 점이다. 그 특이한 방식이란 언약을 중심으로 해서 일하신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약속의 성취를 위해서 이스라엘과 동행하는데 동행한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거부한다면 언제든지 그들을 심판하시고 새로운 이스라엘과 상대하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결국 하나님의 최종 관심은 땅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약 공동체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땅이란 약속을 확인해 주는 증거로만 작용할 뿐이다. 하나님은 언약 공동체 그들을 통해 약속의 실체가 되시는 분을 이 땅에 보내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도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군대로서 정결과 거룩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언제든지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사실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창세기 3:15에서 주신 말씀의 의미는 이스라엘 중에 한 온전한 중보자를 세워 그로 하여금 뱀의 머리를 짓밟아 승리하는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이 여기서 암시되고 있다.
그래서 모세조차도 온전하지 못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했다는 것으로 하나님은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으로 말씀하셨다(20:10-12). 그러나 현재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는 책임은 일단 모세에게 맡겨졌고 유일한 중보자로 세우셨다. 이를 통해 오직 한 중보자를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계시적 의미 때문에 모세에 대한 어떤 도전이나 반역도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론과 미리암의 도전이나(12장), 고라 자손의 반역을 철저히 차단하시는 것이다(16장). 그래서 언약궤에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만나의 항아리가 들어감으로 반역의 증표가 다 들어가서 증거궤로 불리게 된다. 그 증표와 함께 있어서 인간의 반역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돌판)이 있으나 속죄소로 덮어놓아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백성임을 나타내주고 있다.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이며 하나님의 군대요 또한 교회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 때문에 하나님은 철저히 비언약적 속성을 제거하시는 것이다. 정탐꾼들이 정탐한 일 수를 일년으로 환산하여 광야를 방황하게 하신다(14:34). 방황하게 하시는 이유는 훈련이 목적이 아니라 비언약적 정신을 드러내고 제거하시는 것에 있다. 그래야만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에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뒤늦게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였으나 모세의 만류를 아랑곳하지 않음으로 가나안 공격에서 실패하였다(14:39-45). 자기 힘으로 해보겠다는 정신이 아직 충만하게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군대란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행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불뱀 사건을 통해 잘 보여주셨다(21장).
사람들이 하찮게 생각하는 놋뱀을 장대에 매단 것을 보는 그것이 믿음이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방법,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는 것만이 생명으로 사는 것임을 배우고 있었다.
이제 미리암의 죽음(20:1)과 아론의 죽음(20:28)으로 시작하여 출애굽 제 1세대는 서서히 죽게 된다. 심지어 모세까지도 가나안 땅에 합당치 않다고 하나님께서는 거절하심으로 그 중보자 직분 자체도 한계를 드러내게 되어서 온전한 중보자를 바라보게 하셨다.
여기서 하나님의 심판의 독특한 성격이 나타나고 있는데 불순종한 세대에 대하여 하나님은 광야에서 완전히 망하게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압의 발락 왕이 발람의 마술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을 저주하려고 하였지만 발람은 복을 빌게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속적 안목에서 의롭다고 인정되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의로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그 백성 중에 임재해 계시기 때문이다.
한 별로 예언된 메시야는 어느 누구도 저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전체에서 보면, 완전히 멸망 상태라기 보다는 새로운 세대, 곧 새 이스라엘을 생겨나게 하셔서 그들 선조들의 불순종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을 철저히 겪게 하심으로 심판 과정 또한 이스라엘에게 언약의 성취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계시가 되었다.
그래서 민수기의 두 번째 계수는 새로운 이스라엘에 대한 조사이다. 첫 번째 조사에서 계수된 자는 603,550명이었고(1:46) 두 번째 계수된 자는 601,730명이었다(26:51). 두 번째 조사는 첫 번째 조사의 때와 수적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광야 생활 중에서 이러한 인구 조사를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은 가나안 족속들을 쳐부술 전쟁을 위해서이고(26:2), 또한 중요한 사항은 약속된 땅의 공평한 분배를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희생시키더라도 자신의 언약에 대하여 결코 양보하지 않는 분이시다. 그것을 마지막에서 하나님의 군대로 계수되지 않은 자인 슬로브핫의 딸들이 기업을 지키려고 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군대 아닌 자가 하나님의 군대의 못남을 고발하면서 약속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보여주신다(36장)(1999.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