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디모데전서 강해
디모데전서 강해
창원 늘푸른교회 이장우 목사
디모데 전서 1:1-2 인사 2002. 6. 26
"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찌어다"
오늘부터 디모데전서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디모데전서는 디모데후서와 디도서를 포함하여 흔히 목회서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여러 가지 교회에서의 사역을 말하고 있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붙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목회적인 내용이 아니라 역시 성경으로서 하나님의 계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디모데와 그 시대의 교회에 대하여만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이 서신이 기록 된지 약1940여년이 지난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의 형태가 한통의 편지이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한꺼번에 읽어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이 오래된 편지가 옛날의 편지가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말씀하고 있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중에 한 말씀만 우선적으로 보자면 디모데전서 6:10절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문제는 돈을 사랑함이 문제인 것입니다. 마땅히 사랑하여야 할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것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죄가 어떤 것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서신은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증거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편지의 서문인 인사말을 봅니다. 서신의 특징인 발신자와 수신자가 나옵니다. 발신자는 바울 사도이고 수신자는 디모데입니다. 그런데 발신자와 수신자를 밝히면서 덧붙이는 말을 보시면 먼저 바울 자신에 대하여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예수의 사도가 된 바울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은 열두 사도는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사도권에 대하여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을 서신서에서 보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자신의 사도직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의 권위로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란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보냄을 받았기에 사도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란 자기의 사사로운 뜻과 비전과 계획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를 배척하는 것은 그를 보내신 자를 배척하는 것이고, 사도를 영접하는 것은 그를 보내신 자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으로 작은 소자에게 대접 한 것이 곧 주님에게 한 것이고 대접하지 아니한 것이 주님께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나타나는 사도들의 서신은 철저하게 주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사도가 없습니다. 사도가 없다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세움을 입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자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사도의 권위로 하나님의 계시를 증거 하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는 자는 철저하게 성경에 메이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는 곳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곳에 멈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도 자신이 무슨 사도나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신의 계획과 뜻과 포부를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여 말하고 있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무슨 그럴듯한 말을 할지라도 성경이 증거 하지 않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면 가짜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복잡한 세상에서 성경으로 되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이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사도직을 명령하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호칭을 보고자 합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 구주 하면 무슨 이름이 먼저 나옵니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인데 여기서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먼저 나오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구주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은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아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주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그의 아들이 어떻게 이루어 내신 것입니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죄인은 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의로운 자만이 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을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으로서는 결코 하나님과 함께 살아 갈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추방을 당하고 저주를 받고서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는 결코 돌이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새벽기도회 때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악에 익숙한 유다 백성들이 스스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가능성이란 구스인이 그 피부색을 표범이 그 반점을 바꿀 수 있다면 악에 익숙한 그들도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모르고서는 아무리 인간들끼리 서로 서로 잘해 보자고 하여도 결국은 허사인 것입니다.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잡았다 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바람이요 헛된 것이라는 겁니다. 이미 그러한 경험들을 해 보셨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가지고 싶고 밤낮 소망하던 것들도 막상 손에 잡게 되면 그것은 허무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허무함을 또 다른 허무한 것으로 메우기 위하여 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 중의 하나가 월드컵인 것입니다. 그동안 이 땅의 암울한 현실을 보면서 어디 미칠만한 곳이 없었는데 의외로 한국이 계속하여 이기니 거기에 열광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자신의 이루지 못한 꿈들, 그래서 억눌리고 한스러운 것들을 집단적으로 풀어 놓고자 고함을 질러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바람도 잠시입니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것입니다. 이제 그러한 분위기가 사라지면 그 허무함을 또 다른 것으로 채우기 위하여 이리 저리 기웃거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왜소하여지고 작아지는 자기의 현실을 보면서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기 남의 이야기기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허무한 일을 하지 말고 뜻있고 의미 있는 일들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좋은 일, 보람 된 일들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종교적인 이상과 가치를 따라 목표를 제시하면서 달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이 결국 바람을 잡는 것임을 아는 것이 복음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누가 인생의 모든 노력과 애씀을 허무하다고 보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들마다 자기들의 소망을 따로 만들어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소망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인 것입니다. 다른 이름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이란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예수 그리스도만이 소망이 되는 것입니까? 이미 바울은 지상 최고의 종교인 유대인 중의 유대인 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유대교가 결국 구주 하나님과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배척하는가를 절감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이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다가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하는 일이 하나님을 위하는 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는 것을 옳다고 하였습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옳다고 여겼기에 더욱 열심을 내어서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음을 주님을 만나고서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게 되고, 사람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다는 복음을 받고서는 그렇게 귀하게 여기던 것들을 모두 배설물로 여기고 주님만 소망으로 삼고 산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인사말에 그의 가장 큰 관심사를 가지고 인사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인사말의 관심사는 단연 건강입니다. 배고플 때는 진지 잡수셨습니까가 인사이지만 지금은 다들 먹고 살만하니 건강에 관한 이야기가 주종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의 인사말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은 우리도 아직 소망을 주님께 두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굉장한 신앙적인 핍박을 받고 있기에 오직 소망이 주님께 두고 사는 상황이라면 디모데 전서 1:1절 한 절만의 말씀으로도 우리는 위로를 넘치게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이 전부 땅에 있는 것이고, 그래서 주님과 상관없기에 이러한 말씀이 위로가 되기는커녕 아예 우리에게서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닙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는 자기의 소망이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고 완벽한 것입니다. 다른 소망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우리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편지를 받는 디모데는 어떤 사람입니까? 바울사도와 함께 선교여행을 하다가 에베소에 머물게 한 것입니다. 그 곳의 교회들을 돌아보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디모데에 대하여서는 바울사도가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와 외할머니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1:3-5절을 봅니다. "3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바울 사도가 밤낮 기도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디모데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디모데 안에 있는 거짓 없는 믿음을 인함이라고 하면서 그의 어머니와 그의 외조모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자신이 믿음 안에서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왜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한 것입니까? 그것은 믿음 안에서라는 말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을 본 받으라고 까지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본 받으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자기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주는 자로서의 아버지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믿음의 아버지 같은 분들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단지 육신의 아버지가 아니라 믿음에 있어서 아버지 같은 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인사하는 이런 말을 말로서만 인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으로서 말하는 믿음의 사람을 곁에서 두고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저희 교회는 젊은 사람들이 많은데 앞으로 여러분들이 이러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단지 나이만 드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에서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인사말을 하면서 마무리 인사말은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 지어다라고 합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로부터 무엇을 받도록 인사를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받기를 원하고 계십니까? 이것저것 다 치우고 돈이나 좀 주시오 하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마음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이미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은혜와 긍휼과 평강입니다.
자신이 정말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아는 자라면, 물론 이것은 성령이 임하셔야만 되는 문제입니다. 성령이 임하심으로 자신의 죄와 비참을 보게 된 자는 다른 것을 구할 틈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 외에는 긍휼 외에는 바라 볼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와 긍휼이 있는 자에게는 그 결과로 평강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아직도 세상의 염려와 걱정에 메여 사는 것은 아직도 자신이 무엇이 필요한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인사의 말씀이 제대로 실감나게 받아들여지기를 소원합니다.
디모데 전서 1:3-11 디모데의 임무 2002. 7. 3
"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5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6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8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줄 우리는 아노라 9 알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10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 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1)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 11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
바울 사도가 마게도냐로 가면서 디모데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고 한 것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을 따라 가고 싶었기에 디모데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무르게 한 것입니다. 에베소에 머물면서 무엇을 하여야 할지를 말씀하는 것이 디모데전서의 내용입니다. 에베소 지역은 바울 사도가 이미 복음을 전한 곳입니다. 바울사도가 선교여행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여 3년 동안 간절히 복음을 전한 곳입니다.
사도행전 20:29-32절을 봅니다. "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32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에베소 교회는 바울사도가 2차 3차 전도여행시에 복음을 전한 곳이며 본문의 말씀은 바울 사도가 3차 선교여행을 마치면서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 중에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불러서 부탁하는 내용입니다. 배를 타고 가고 있는 중이었기에 에베소를 들리지 않고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부르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예루살렘에 가면 자신이 잡혀 갈 것임을 예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자신이 떠나고 나면 흉악한 이리들이 오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교훈을 전하여 자기들에게로 끌어갈 자가 올 것이기에 사도의 가르침을 잘 기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은혜의 말씀께 부탁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의 고소로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에서 어느 정도 재판을 기다리는 동안 상당한 자유를 얻어서 다시 여행을 하면서 에베소에 디모데를 두고 떠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디모데는 이미 에베소 교회에 다른 교훈을 전하는 흉악한 이리들이 들어와 있기에 그러한 교훈을 막고, 바른 복음을 다시 세우기 위하여 남겨진 것입니다.
이제 디모데의 임무를 살펴봅니다. 3-4절을 보시면,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함으로 하나님의 경륜인 믿음의 역사를 이루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디모데로 하여금 경계하게 하는 목적은 5절처럼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에베소 교회 안에 다른 교훈이 들어 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경계하고 바른 복음의 열매가 나타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오용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교훈들이 얼마든지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종교적인 본성이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이나 복음은 생소하게 여겨지고 모든 사람들이 수긍할 만한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인양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보면서 우리의 경계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미 에베소에 복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떠나고 나자 사도의 예언대로 이리들이 나타나 다른 교훈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말이 왜 복음을 들은 자들에게 먹혀들어 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수긍할만한 내용인 것입니다. 어떻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만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 믿어서는 안 되고 다른 것들을 보태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할례를 행하여야 한다든가. 특정한 날짜를 지켜야 한다던가 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부정하는 교훈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훈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화와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라고 합니다. 신화와 족보란 영지 주의적 체계에서는 자세하게 늘어놓은 신화와 신들의 족보와 구약 성경의 인물들에 대한 사변적 해석이 큰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7절에서도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라고 합니다. 6:20절에서도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고 합니다. 이 당시에 신들의 족보를 따지면서 사변적으로 논쟁하는 일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이교의 영향도 있었지만 유대인들도 얼마나 족보를 따지기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권위를 주장할 때 어느 집안이냐? 누구의 후손이냐를 따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의 문하생인가를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 랍비들이 자기들의 권위를 주장하기 위하여 자기들 스승의 족보도 따지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권위는 모세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자기들이 더 정통파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이제는 다 헛되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구별이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복음의 시대에 쓸데없는 족보 논쟁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족보에 대한 변론만이 아니라 참된 복음을 가리는 모든 것들을 전부 신화로 포함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화 하면 그리스 로마 신화를 떠 올립니다. 요즈음 이윤기씨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베스트 셀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만 그러한 신화들은 결국 인간의 내면을 그려낸 인간들의 이야기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화만이 아니라 요즈음 우리나라에서 무슨 일을 신화라고 하고 있습니까? 월드컵 4강을 신화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문마다 우리가 신화를 만들어 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족보나 신화나 간에 결국 사람들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오늘도 이러한 신화창조에 나서고 있는 것입니다. 감히 사람이 어떻게 이러한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찬사를 자신들이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에 착념하고 족보와 전통을 따지는 것은 결국 자기들의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다른 자들보다 우월함을 내세우는 것이지 가난한 심령으로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들에 착념치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변론을 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다른 교훈과 신화와 족보에 착념하지 말고 그러한 것들을 금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참으로 성도에게서 나타나야할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으로 나오는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열매는 없이 도리어 율법의 선생이 되려고 하니 율법의 뜻도 모르고서 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율법의 선생이 되려고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그것을 잘 지키라고 주신 것이지, 그래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하는 것이 율법의 선생들이 주장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렇게 주장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3:10절입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ㄷ)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려면 율법 책에 기록된 모든 명령을 항상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제까지 율법을 행하였으나 오늘 행하지 않으면 저주 아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고 하면 오히려 저주를 자청하러 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1-12절을 계속 봅니다.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ㄹ)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것이 아니라 ㅁ)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선생이 되려고 하는 자가 이러한 율법의 뜻을 모르고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시키신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게 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대신 저주 받으심을 아무런 효력이 없는 것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13-14절을 봅니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ㅂ)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다시 디모데전서 1:8절을 봅니다. 그러나 율법을 법 있게 쓰면 율법이 선한 것 인줄 우리가 아노라고 합니다. 율법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것을 제대로 알고 율법을 쓰면 선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선생이라는 자들이 율법의 목적을 모르고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자체가 악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통하여 인간이 죄인임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법이 없으면 죄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란, 율법을 통하여 인간이 얼마나 죄인인가를 알게 하므로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으로 사용하여야 하는데 오히려 율법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그것을 스스로 지킴으로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본 것입니다. 여기서 유대인의 오해가 있는 것입니다.
9절을 봅니다. 법은 누구를 위하여 있는 것입니까? 옳은 자를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하여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옳은 자라면 율법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에게는 법이 소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율법의 저촉을 받지 않을 자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다 지켰다고 착각하고 있으니 율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입니다. 율법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데 메시야가 온다는 것은 자기들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적이고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메시야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참으로 죄인임을 율법을 통하여 제대로 알았다면 예수님께서 어디에서 구속하시고자 하신지를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란 죄를 드러내는 것임을 바울 사도는 십계명을 중심으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불법한 자, 복종치 아니하는 자. 경건치 아니하는 자, 죄인, 거룩하지 아니한 자, 망령된 자, 아비를 치는 자, 어미를 치는 자, 살인 하는 자, 음행 하는 자, 남색 하는 자, 사람을 탈취하는 자, 거짓말 하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을 위함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에 해당 사항이 없습니까? 완벽하게 한 가지도 빠짐없이 이러한 죄 목록에서 깨끗하십니까? 여기에 기록된 것만이 아니라 기타 여러 가지 바른 교훈을 다 지키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다 저주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기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이 저주를 왜 받아야 당연한지를 알게 하는 것이 율법을 법 있게 쓰는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 앞에서 정죄를 당한 자는 그리스도의 대신 저주 받으심만을 사모하며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거듭난 자들이며 복음을 믿는 자며 그 양심이 깨끗하고 청결하고 거짓 없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사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열매는 다른 교훈으로 안 되는 것입니다. 족보와 신화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대신 저주 받으신 그리스도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이제 이런 자들에게 율법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늘 복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복음은 이 모든 것들을 다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1절에서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고 증거 하고 있습니다. 다른 교훈이 아니라 바울 사도가 전하는 교훈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인데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 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 바로 그리스도의 대신 저주 받으심으로 죄인이 의롭다 함을 입은 것입니다. 이것을 디모데에게 부탁하는 것이며 오늘 우리에게도 부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영광의 복음을 쫓아서 살고 있습니까? 복음을 복음으로 사용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또다시 유대인들이 율법을 잘못 사용한 것처럼 사용하고 있습니까? 이 영광의 복음 앞에서 이 세상의 그 어떤 영광스러운 것도 빛을 잃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복되신 하나님의 복음의 영광만!
디모데전서 1:12-17 죄인중의 괴수 2002. 7. 10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
지난주에 본 말씀은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경계하라고 한 내용입니다. 다른 교훈 말하는 자들과 족보와 끝없는 신화에 착념하는 자들을 경계하고 그렇게 가르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다른 교훈이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부정하는 교훈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는 다는 것을 부정하는 다른 교훈에 대하여 경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증거 한 복음은 도대체 누구로부터 받았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받아서 된 것이 아니라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는 것입니다.
11절 말씀에 보시면,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고 증거 합니다. 자신이 증거 한 교훈은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맡기신 영광의 복음을 좇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영광의 복음을 자신이 증거 하게 된 것은 결단코 자신이 의롭거나 자격이 있어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이 신기하고 특별한 것을 가르치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것을 배우고 알았는가 하면서 의아해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특별함에 주목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받아서 증거 하는 일에 자신을 전혀 자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일부러 겸손하여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실감이 났으면 자신이 복음을 받은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은혜 받을만한 자가 아니라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12절을 봅니다.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직분을 받은 것은 자신이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능하게 하심으로 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바울이 사울 때에 얼마나 하나님께 열심이었고 구약에 능통하였는가! 그러니 이런 사람을 사용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바울 자신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오히려 악이었고 배설물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의 직분을 받은 것은 주님께서 능하게 하셨고 충성되이 여기셔서 이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나에게 능력을 주셔서 내가 맡은 일을 하게 하시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께 감사합니다. 그것은 주께서 나를 신실하게 여기셔서, 그분을 섬기는 이 직분을 맡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표준새번역 딤전 1:12) 그러므로 자신이 이런 직분을 맡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 맡은 것이라면 자기 자랑이 있을 수 있지만 맡을 수 없는 자를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기에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어떤 직분을 받았든지 간에 그 직분을 자신이 받을만한 자격이 되어서 맡은 것으로 안다면 감사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거나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너희가 나를 무엇으로 알고 이렇게 하는가 하면서 화를 내거나 책망을 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목회자들에게 특히 많은 것입니다. 저 스스로에게도 이런 모습이 자주 나옴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모든 직분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기에 그 은혜를 드러내는 자로 그 직분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신다면 모든 직분에 감사가 나오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바울은 정말 자신이 이러한 직분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었는데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인하여 이런 직분을 맡겨 주셨기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대부분 자신의 경력과 이력을 치장합니다. 부끄러운 부분은 할 수만 있다면 숨기고 좋은 면은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자신의 약함과 악함과 죄인 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13절을 봅니다. 자신이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라고 합니다. 사도행전 22:4-5절을 봅니다. "4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5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19-20"19 내가 말하기를 주여 내가 주 믿는 사람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리고 20 또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 내가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킨줄 저희도 아나이다" 26:9-12 " 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될줄 스스로 생각하고 10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11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12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바울 사도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기전에 얼마나 훼방하고 핍박하였는지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을 죽이기까지 한 것입니다. 나사렛 예수를 대적하여 범사를 행하여야 할 줄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 열심이 얼마나 특별한지 외국의 성에까지 가서 핍박한 것입니다. 그리고 강제로 예수를 모독하게 하는 말도 한 것입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긍휼을 입은 까닭은 알지 못하고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알지 못하고 하였다고 죄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자기의 정당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음(14절)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15절을 봅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믿음직하다는 것입니다. 진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기에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라는 것입니다.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기에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자가 얼마나 복이 있는 자 입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내가 죄인이 아니라면 나는 예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모두 다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바울이 전에는 자기가 죄가 없는 사람이라고 한 것입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그러한 자기 의에 대한 자랑이 예수님을 죽인 것임을 알고 의인을 구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려고 오셨다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죄인이냐고 하시면 "저요! 제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하면서 손을 번쩍 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전에는 바울이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혹시 죄를 지을까봐서 조심하고 조심하며 살았습니다. 혹시나 율법을 어기지나 않을까 하면서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조금만 비틀하여도 큰일 나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율법에 어긋나는 사람을 가만히 두고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는 자들을 보니 모두 율법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저런 이단들을 가만히 두면 안 되겠다고 잡으려고 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자세, 태도가 이미 죄 아래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잘못입니까? 죄를 짓지 않으려고 그렇게 애를 쓴 사람은 죄인이 되고 세리와 창기처럼 내놓고 죄를 지은 사람은 용서하여 주시는 그런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마음껏 죄나 짓고 살자 그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는 자들이 바울 사도 당시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죄라는 것을 알지 못하여 그런 것입니다. 죄라는 것을 인간들의 도덕적인 기준으로 죄다 아니다, 선이다 악이다 결정하게 된 것 자체가 죄 아래 팔린, 죄의 권세아래 들어 있는 죄인의 결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스스로 정하여 놓은 선이다 악이다 하는 기준 자체가 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만드신 인간은 하나님께 의존되어야 하는 인생입니다. 선과 악의 결정은 하나님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단의 유혹은 무엇이었습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따 먹으면 너도 하나님처럼 된다고 한 것입니다. 드디어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이때부터 선과 악의 결정을 자기들 마음대로 정하는 것입니다. 분명한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담의 죄를 하와에게 전가 시키는 것입니다. 하와는 뱀에게 전가 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 그 책임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하와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아담아래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작은 실수로부터 큰 잘못과 악하다는 일에 있어서까지 우리는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자기의 책임을 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잘못과 죄를 인정하면 자신에게 손해가 돌아오는 것만을 고려하여 부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 선과 악을 잘 조정하여 행할 수 있다는 그 자존심이 무너졌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이나 어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나 어른이나 간에 잘못을 지적하면 당장 방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신이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행하는 일에 대하여서는 언제나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가 하는 일을 죄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윗을 예로 들어 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야를 죽였을 때 죄로 압니까? 모릅니까? 죄인 줄 몰랐습니다. 밧세바를 다윗이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왕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왕이기에 자기 백성을 자기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고대 왕국에서 예사로 있던 일입니다. 자신의 말이 곧 법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다윗에게도 그대로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이 종으로서 하나님의 왕 되심을 드러내어야 하는데 자기가 모든 결정권을 행사하는 세상의 왕으로 행세한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 것입니다.
드디어 나단 선지자가 책망합니다. 비유로 죄를 지적하면서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오' 라는 지적에서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가를 인정하고서 회개합니다. 그러한 죄의 인정과 고백이 시편 51편인데 놀라운 것은 8절에 나타납니다.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정말 자신이 죄악 중에 출생하여 죄 가운데 살았음을 인정하면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자신이 죄인인데 자기 때문에 꺾어진 뼈가 있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우리야가 희생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미쁘도다 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은 주님의 구원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난 모든 사람의 공통점이 자신이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는 것은 참으로 복음인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는 자는 오히려 기분이 나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어떻게 보고 그러나 내가 스스로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는 것이지 처음부터 죄인이라면 말이 안 되지! 그러면 그 책임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의 죄를 자신이 처리할 수 있어야 합당한 것이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죄인 된 인간의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은혜가 아니고서는 스스로 죄인임을 알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은혜가 임한 자는 자신이 얼마나 처절한 죄인인지를 알게 됨으로 주님 외에는 다른 것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같은 사람이 주님의 긍휼을 입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심으로 장차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16절). 자신 같이 죄인중의 괴수가 구원을 받는다면 어떤 죄인인들 구원하시지 못할 인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다 끊고 나서, 술 담배 다 끊고 나서 예수를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 발견된 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다들 죄를 숨기려고 바쁜 세상에서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그러나 나 같은 자를 예수님께서 용서 하신 것입니다.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17절). 아멘!
디모데전서 1:17-20 선한 싸움 2002. 7. 17
"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시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죄인 아닌체하고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이고 이러한 죄는 아담 이후의 모든 인생이 다 그 아래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종교를 가지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선행을 가지고 스스로 선과 악을 선택하여 행할 수 있다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말씀이 기쁜 소식이 되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이미 사단의 속임수에 넘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러한 죄인을 먼저 찾아오시지 않고서는 스스로 죄인임을 알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심으로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된 사람은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15절을 봅니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전에 주의 성령이 임하시기 전에는 자신은 정말 의로운 인간인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은혜를 입은 것은 철저하게 주님의 은혜라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긍휼을 베푸사 일절 오래 참으심으로 후에 믿는 사람들에게도 본이 되게 하려고 자신을 그렇게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어떻게 쓰임을 받을지는 상관없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17절의 말씀입니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어지이다 아멘" 이라고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자기 구원의 기쁨이 아니라 이제 제대로 영광을 돌려야 할 분을 안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만세의 왕이시며 썩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고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함으로 모든 인생의 영광을 헛된 것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인생의 영광이란 언제나 썩게 마련이고,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믿음의 눈으로만 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이란 이상한 신비스러운 것을 본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의 약속을 눈에 보듯이 믿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인에게 은혜가 주어진 것은, 죄로 인하여 영원한 심판과 저주를 받아야 할 인생에게 크나큰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결과 우리에게 믿음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이란 사람에게서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구하는 것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나 간에 썩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는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3-9절을 봅니다. "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베드로 사도도 바울과 같은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 많으신 긍휼로 주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자기 백성을 거듭나게 하셔서 산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영원한 기업입니다. 이러한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받음으로 인하여 닥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시험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으로 오히려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험들이 연단을 가져와서 더 귀한 믿음의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려지는 그 영광과 존귀에 죄인인 우리가 함께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영광과 존귀하신 분이시기에 그의 자녀도 영광과 존귀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날이 이르기 까지 성도에게는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까? 믿음의 선한 싸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선한 싸움이란 결코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혈과 육에 속한 싸움이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경쟁과 다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싸움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지키는 싸움인 것입니다. 이러한 싸움은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싸움은 자기의 정욕을 따라 다투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다 그런 싸움만 싸우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님의 은혜가 임하고 나니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입니다. 그것은 전에 내가 쟁취하고자 열심히 싸우던 그런 것들을 오히려 대적하여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에 싸우던 이러한 싸움이 예수를 믿고서도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싸움을 싸우지 말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1-10절입니다. "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2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3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5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ㄱ)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찌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찌어다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이 말씀에서 무슨 싸움을 싸워야 할지를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내용이 이러한 말씀에 다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싸움과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아직도 지체의 정욕을 좇아 욕심을 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살인과 시기까지 나오도록 다투고 싸운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같이 경쟁이 치열한 세상에서 모두 다 이렇게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도의 싸움이란 세상과 벗되지 않기 위하여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벗됨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하나님께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마귀를 대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마귀에게 순복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면서 어떻게 마귀를 대적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하여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것입니다.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이것이 선한 싸움의 내용입니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이것이 역시 믿음의 싸움의 내용인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기뻐하고 웃는 것들을 슬퍼하며 애통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의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선한 싸움입니다.
이러한 싸움이 우리에게 있기는 한 것입니까? 오히려 세상의 것들을 더 많이 가지지 못하고 더 사랑하지 못하여 안타까워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믿음의 싸움을 싸우는 것이겠습니까? 오히려 적에게 포위되어 꼼짝 달싹하지 못하고 적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있는 우리의 형편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바울사도의 경계를 받아들이기를 소원합니다. 디모데전서 1:18절을 봅니다.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지도한 예언이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내용이겠지요! 그 지도를 따라서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합니다. 방금 본 베드로전서와 야고보서에서 무엇을 싸워야 할지를 이미 보았습니다만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지키고 간직하도록 싸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선물로 받은 자는 그 양심이 이제 하나님을 찾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9절을 봅니다. "봉독" 짐승의 피로서는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14절을 봅니다. "봉독" 짐승의 피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죽은 양심에서 나오는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진 자는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히10:22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이제 옛 사람이 죽고 양심이 살아난 것입니다. 이러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 가는 것입니다(벧전3:21). 그러므로 선한 싸움이란 이렇게 주님께서 주신 믿음의 선물로 인하여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찾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을 향하야 나아가는 것을 막는 자들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딤전 1:3-4절에서 이미 본 것처럼 다른 교훈과 족보와 끝없는 신화에 착념하는 자들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선한 양심에서 떠나게 하는 자들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양심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살펴본 어떤 양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입어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양심을 버린다는 것은 스스로의 양심으로 선을 이루어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양심을 이야기 하고 이성을 이야기 하지만 그러나 이미 죄로 인하여 더러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무리 양심을 이야기 하여도 그 양심을 바르게 쓴다고 하여도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장과 가르침과 경계하고 싸우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에 파선한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에 파선 한 자라면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친 자들입니다. 은혜로 시작하여 은혜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은혜에서 다시 자기 행위로 돌아서는 자들이 믿음에서 파선한 자들입니다. 물론 또 하나의 경계는 있습니다. 칼빈의 디모데전서 강해에서 보면 '복음을 이해한 자들도 자신들의 야망과 자만심으로 충만 된 사람이 하나님께 헌신하는 대신에 자신을 자랑하는 계기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혀에서만 이야기하면서 자기들의 탐욕을 채우는 일과 자기를 치고 나쁜 짓을 하는데 사용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탕발림을 해서 귀를 즐겁게 하는 그러한 자들이 잇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들과도 물론 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안에 있는 적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믿음과 선한양심에서 떠나게 하는 여러 가지 대적들을 분별하며 선한 싸움을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싸워 나가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디모데전서 2:1-8 기도 2002. 7. 24
"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3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만한 것이니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1)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7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복음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의 반응이 기도할 것이 없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정신을 차리고 깨어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복음을 들으면 기도할 것이 없어진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지금까지의 기도가 자신의 정욕을 위하여 구한 것이었다는 반증입니다. 복음을 들어보니 지금까지 자신이 신앙생활이라고 해온 것이 순전히 자기의 욕심을 이루기 위한 종교생활이었음이 들통이 난 것입니다. 그러면 회개하고 제대로 구하여야 할 바를 구하여야 하는데 이래도 죄, 저래도 죄인데 기도하면 뭘 하나 하면서 기도를 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제 기도가 무언지 제대로 알고서 더욱 기도에 힘쓰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난주에 본 말씀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이란 날마다 기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싸울 수 있는 것이라면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에 속함 싸움이라면 우리의 실력으로 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혈과 육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기에 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위에 무엇을 더하라고 하였는지 말씀을 봅니다.
에베소서 6:10-20절입니다. "10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13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14 그런즉 서서 2)진리로 너희 허리 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16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17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19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20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영적인 싸움을 위하여 주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 지라는 것입니다. 그 무장이란 진리, 의, 복음, 믿음, 구원,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장은 세상을 사는 일에 도움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무장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무장위에 무엇을 더하라는 것입니까?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또 깨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바울 사도를 위하여서도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증거 할 수 있도록 기도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성도에게서 당연히 나타나야할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위한 기도만 하다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니 아예 기도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하라는 것입니까? 2:1-3절입니다. 내가 첫째로 권한다고 합니다. 그 권하는 내용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벌써 자기만을 위한 기도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간구, 기도, 도고, 감사가 모두 기도에 대한 말입니다. 간구는 특별할 제목이 있는 것, 기도는 일반적인 기도, 도고는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 감사는 모든 간구를 감사함으로 아뢰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별도 하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하나님께 감사가 교회의 기도생활에 으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6-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합니다.
기도의 대상은 모든 사람들인데 특히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 당시는 로마 황제의 핍박이 심하여 지고 있는 때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자들을 위하여서도 기도하라고 합니다.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겠습니까? 그들도 회개하여 진리를 알고 구원에 이르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또한 성도들이 경건하고 단정하게 고요하고 평안하게 생활을 할 수 있음도 포함이 됩니다.
여기서 논란이 되는 말씀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바란다는 말씀이 보편 구원론인가 하는 논란이 있습니다. 바울이 다른데서는 보편 구원론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미리 택하신 자들만이 구원에 이른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디모데 전서 4:10절을 봅니다. "․․․․․․․․․․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고 함으로 믿는 사람들의 구주라고 구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바란다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두 가지로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사람이 헬라어에서 관사가 없이 모든 이라는 뜻이기에 전체를 말하는 모든이 아니라 구원하기를 원하는 모든 자라는 뜻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자라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9절을 봅니다. " 9 주의 약속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여기서도 아무도 멸망치 않고의 대상이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라는 제한을 받는 것입니다.
둘째는, 유대인들의 배타주의를 배격하는 말로 보는 것입니다. 지금 에베소 교회 안에 다른 교훈을 전하는 자들이 온 것입니다. 그들의 구원관은 배타적입니다. 특정한 신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이여야 하고 이방인이라도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는 등의 교리를 전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주일 낮에 사도행전에서 보고 있습니다만 유대인들이 얼마나 배타적이었는지 사도들이 성령을 받고서도 이방인에게 전도 되는 것을 꺼려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특별한 구원관을 깨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방인도 죄인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인간의 신분과 자격으로 구원에 이르지 못함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오직 주님께서 차별 없이 선택하여 주신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나는 말씀을 잘 알아들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귀머거리요 소경이었던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은혜로 구원에 이르게 되었기에 우리가 누구를 판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볼 때에 가장 미운 사람, 가장 원수 같은 사람이라도 그를 위하여 기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도를 하는 자는 자신이 의로워서가 아니라 그러한 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자신의 무가치함을 아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도 은혜를 입었다면 저 사람이 은혜를 입을 경우 나는 그 사람의 발바닥도 따라 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은 이미 완성된 상태에서 교만한 자세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엉터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수록 자신이 은혜로 부름 받았음을 더 절실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됨으로 오직 한 분 중보자가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만 증거 되고 자랑되어 질 것입니다. 요즈음 중보기도가 마치 유행처럼 사용되어 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선교단체에서 주로 사용하였는데 지금은 교회에서도 아주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예 기도회 이름도 중보 기도회라고 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수준 낮은 기도이기에 이제 이웃을 위하여 남을 위하여 기도하는 중보 기도를 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수준이 자기 욕심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 보다 더 의롭고 높다는 은근한 과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중보기도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예수님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중보의 기도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이 얼마든지 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 인간들이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그러면서 근거로 성경을 인용합니다. 아브라함이 조카를 위하여 기도한 것과 특히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고, 또 도고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도 남을 위한 기도라는 뜻이 있지만 그러나 세 번씩이나 간구 기도 도고라는 말은 기도를 강조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지만 그 기도함이 결국 어디로 가야하는 것입니까? 참된 중보자가 되시는 주님에게로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2:5-6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한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셨지만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4: 14-16절을 봅니다.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다른 대제사장은 온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도 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만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에 대 제사장의 직분을 영원토록 온전하게 하실 수 있는 중보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 없으신 자기 몸을 속전으로 지불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의 유일한 중보는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자신이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중보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이 중보자의 역할을 무효화시키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는 것입니다. 가장 그럴듯한 하나님의 일인 양 꾸미면서 속이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 기도를 하면서 중보자를 배척하게 만들고 기도를 하지 않으면 하지 않는 대로 중보자를 찾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대로 기도를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대로 기도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하면 할수록 이 중보자를 알아 가고 그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받아야만 살아갑니다하는 것이 기도의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란 자신의 실력이 없기에 날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겸손한 자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하지 않고 신앙생활 하는 자가 있다면 신앙이 아니라 교만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8절을 봅니다.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이 2년간이나 성경을 가르친 교회입니다. 바울 사도로 2년간이나 성경의 가르침을 받았기에 상당한 성경지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겠지요! 그래서 다른 교훈을 전하는 자들과 족보와 신화에 매달리게 하는 자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잘 분별하여 물리치도록 디모데를 보내기는 하였지만 나중에 요한계시록에서 에베소 교회를 보면 거짓 선지자를 잘 분별하여 내었지만 첫 사랑을 잃어 버렸다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에서 떨어 졌는지 조사를 해보고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무엇이 옳은지 그런지 말은 잘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을 놓고서 기도하는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다툼과 변론을 그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의 눈에 티보다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를 보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더 깊이 은혜의 보좌로 나아갑시다.
디모데전서 2:8-15 여자들도 2002. 8. 14
"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9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10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11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12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찌니라 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14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디모데 전서가 기록된 배경은 에베소 교회입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 사도가 두란노서원에서 2년에 걸쳐 성경을 가르쳤던 곳입니다. 이 교회에 여러 이단들의 공격이 있었습니다. 그 일의 중심에는 1:20절에 보시는 바와 같이 후메내오와 알렉산더 같은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다른 교훈과 신화와 족보들에 착념하였던 자들로 보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세력들은 영지주의자들의 도전입니다. 이들은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하는 것입니다(4:3). 영지주의에 대하여 잠시 인용하여 봅니다.
영지주의란 1세기 끝 무렵에 그리스도 교회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고 2세기에는 고대 교회가 격렬하게 싸웠던(딤전6:20-21 참조), 후기 고대의 한 정신 사조를 가리켜 '그노시스'라고 한다. 그노시스의 밑바닥에는 물질과 몸에 속한 것에 대해 아주 비관적인 태도가 깔려 있었다. 이것들은 낮고 악한 영(나중에 생긴 '그리스도교' 그노시스에서는 이 영을 구약 성경의 하나님과 같게 보았다)이 창조한 열등한 것들로 통했다. 사람의 가장 깊숙한 데 있는 본질적인 것은 이 나쁜 세상에 속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의 불꽃인데, 이 불꽃은 태초의 타락(우주적인 사고라 하는 것이 더 낫다) 때문에 물질 가운데로 쫓겨난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비참한 상황을 스스로는 알지 못하고(더러는 이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기도 한다) 자신이 본디 어디서 왔으며 어떤 종류의 존재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빛의 나라에서 한 심부름꾼이 와서 사람을 자기 망각의 잠에서 깨우고 본질적으로 사람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본디 어디에 속하는지에 대한 지식을 전해 주어야 한다. 이런 지식(헬라 말로 '그노시스')에 이미 '구속'의 길이 있는데, 구속은 자신이 신적인 종류의 존재인 것을 돌이켜 생각하는 데서 실현되고 하나님의 심부름꾼이 열어주는 길로 빛의 나라에 돌아감으로써 완성된다. 이리하여 '그리스도교' 그노시스 주의자들에게 '구속'은 개인의 죄에 대한 인식이나 또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이 죄에서 풀려난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오히려 일종의 우주 경영상의 사고를 꿰뚫어보고 이를 취소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뜻의 '구원'은 영혼의 불꽃을 물질세계에서 철저하게 끄집어내는 것이므로, 몸의 부활 사상은 의미를 잃고 '그리스도교' 그노시스 주의자는 자기는 자신의 참된 존재에 대한 '지식'에 이르렀기 때문에 장래에 닥칠 것으로 기다리는 부활은 이미 자기에게 일어났다고 주장할 수 있다(딤후2:18). 이런 종류의 '지식'을 깨달은 사람은 물질을 깔보고 현세의 질서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 질서가 존속하도록 애쓰지도 않으며, 세상에서 져야 할 모든 책임을 회피한다. 특히 '그리스도교' 그노시스 주의자들이 자기들은 구약 성경의 율법에서 가르치는 바들에서 자유롭고 그것들을 넘어서 있다고 느끼는 것은 그 율법은 낮은 영에게서 비롯되었고 그 영은 이 율법을 가지고서 자기의 창조물들이 늘 기능을 발휘하게 만들려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노시스주의자들이 세상과 몸을 멸시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 성경 바깥의 증언들에 따르면 주로 - 엄격한 금욕 생활로 나타나는데, 특히 혼인과 성을 적대시하는 점에서도 나타나고(딤전4:1-5 참조) 부분적으로는 그와는 반대로 - 삶을 보존시키는 - 윤리적인 질서를 일부러 무시하고 파괴하려는 방종주의로 나타난다(유7-8,18)" 그러므로 이러한 사조들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의 의미를 무시하고 특별한 영적인 지식만 가지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기에 금욕적으로 나가든가 아니면 방종으로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이러한 이단들이 전하는 다른 교훈에 흔들리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들에게는 8절에서 보았듯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비 복음적인 것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 올 때에 분노와 다툼으로 싸울 것이 아니라 기도로 싸우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끊임없이 변론과 변론만 나오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복음을 증거 할 때 때로는 반론도 필요하고 변론도 필요할 때가 있겠지만 그것이 논쟁이나 다툼으로 가는 것은 바람직한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분노와 다툼으로 일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를 남자들에게 먼저 요구하고 이제는 여자들에게도 교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9절에서 "이와 같이 여자들도"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여자들에게 바울사도가 어떻게 권면하고 있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외모로 단장하지 말고 속사람을 단장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외모를 아무렇게나 하라는 말이 아니라 아담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머리를 꾸미고 금이나 진주가 값진 것으로 꾸미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당시에 신전의 창기들이 머리를 땋아서 높게 하고 거기에 온갖 보석으로 장식하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의 유행이었겠지요! 그러한 외모를 꾸미는 일들이 교회 안에도 밀려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그러한 것들을 따라 꾸미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사람들이 먹고 살만하게 되니 이제는 보암직한 것들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아 보이는 것들이 많습니까? 머리꾸미는 것에서부터 보석, 옷, 핸드백, 속옷에 이르기까지 명품이라는 이름으로 수백만원짜리가 없어서 팔지 못하는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까지 이러한 이야기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는 것이 오늘만이 아니라 이천년 전의 여자들도 그리한 것입니다. 인간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보게 됩니다.
최초의 꾸미는 일이 어디서 일어난 것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서 자기의 몸을 가린 것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으로 가린다는 것은 자기의 수치를 가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역사란 자기의 수치를 가려보고자 하는 역사인 것입니다. 단지 여자의 화장술이 발달하고, 옷 입는 것이 화려하여지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역사가 인간들의 솜씨를 뽐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대로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이 죄를 지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수치를 노출시키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화장술로 가리고 성형수술을 하는 것이 여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들의 자기 가리기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여자들은 무엇으로 단장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아담한 옷이면 됩니다. 그리고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염치와 정절이란 무엇과 비교를 합니까? 땋은 머리나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선행으로 단장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가 한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베드로 전서 3:1-6절을 봅니다. " 1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1)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3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결국 외모로 꾸미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꾸미려고 하는 것들은 다 썩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들은 썩지 아니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여자가 꾸며야할 것은 세상의 여자들이 꾸미는 것으로 꾸미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로 단장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들이 마땅히 할 일이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입니다.
둘째로,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는 것입니다. 여자는 주일학교 교사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교회의 공개적인 석상에서 남자를 가르치려하는 것을 금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에베소 교회가 거짓교사들에 의하여 분노하며 말다툼이 벌어지는 일에 여자들로 함께 가세를 한 것입니다. 교회가 어떤 싸움이 일어나면 누가 더 나섭니까? 여자들이 더 앞장을 섭니다. 그러다보니 무익한 변론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며 이러한 것은 남자들을 이기고 지배하려고 하기까지 하는 결과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외부의 적에 대항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더욱 소란스러워지는 것이며 결국 사단의 술책에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들은 남자보다 좀더 쉽게 분노와 말다툼에 잘 빠지는 속성이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용하라는 문제를 어디까지 소급을 시키고 있는가하면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까지 소급을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이 먼저 만들어 졌고 여자는 남자의 돕는 배필로 주셨다는 것이며, 여자가 먼저 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단이 아담보다 하와를 유혹하는 것이 더 쉬웠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선악과를 보고서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던 것입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여자들이 백화점이나 텔레비전 홈쇼핑 같은 것을 보고서 물건을 사고 싶어서 남편에게 조르지 않습니까? 요즈음은 그렇게 조르지도 않고 여자가 다 결정하는 세상입니다만 그런데 남자는 그런 것을 보고서 시큰둥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남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여자도 있습니다만 일반적으로 그러하기에 교회에서 좀 종용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여자들이 기분이 별로 안 좋을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치고 우리에게 기분 좋은 말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러나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말씀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일차적으로는 그 당시의 이단들에 대하여 경계하기 위함입니다. 디모데전서 4:1-5절입니다. "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3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영지주의 이단들이 나타나서 혼인도 폐하고 음식도 폐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을 잘 돌보고 남편에서 순복하며 결혼하여 자녀를 낳게 하는 것을 통하여 이단을 방어하는 것이면 또한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3절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자가 남자를 머리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인정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여자가 기도할 때에 머리에 수건을 쓰라고 하는 것은 권세아래 있다는 표시입니다. 그래서 성당에서는 여자들이 지금도 머리에 수건을 쓰고 미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건대신 무엇으로 대신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긴 머리카락이 대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건을 쓰거나 머리를 기르는 것은 결국 무엇아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권세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하와가 아담의 권세를 떠나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먹는 날에 정녕 죽으리라고 한 말씀의 권세를 부정한 것입니다. 물론 그 책임이 아담에게 있습니다. 아담의 불순종으로 봅니다. 그것은 아담이 여자의 머리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안에서 이러한 구분도 사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주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는 남자나 여자나 할 것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11-12절을 봅니다. "11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12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으나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그러므로 구원이란 아이를 낳고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주님을 머리로 믿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머리가 되셔서 우리의 잘못을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여자라면 외모로 단장하지 않고 염치와 정절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으로 가정을 돌보며 해산함이 주님께 순복하는 길임을 아시고 감사함으로 감당하시기를 바랍니다. 때로는 남편이 무리하게 보일지라도 그리스도께 순복하는 마음으로 순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주님을 섬기는 한 방법입니다.
디모데전서 3:1-7 감독 2002. 8. 21
"1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4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찌며 5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 보리요) 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찌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7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찌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디모데전서 3장에서는 교회의 직분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독과 집사에 대한 직분을 말씀하고 있는데 오늘은 감독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감독이란 장로와 바꾸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같은 의미로 목자 또는 목사로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독 그러면 오늘날로 말하면 목사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교회에서 감독이라고 말하기 보다는 목사와 장로를 구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감독직이 교회에서 잘못 사용되어져서 마치 신분상의 계급처럼 행사하여 왔기에 종교개혁을 하면서 성직자가 아닌 회중가운데서 대표를 선출하여 장로를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를 도와 교회의 당회를 구성하고 교회를 치리하는 기능을 행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목사 장로 감독 목자 등의 이름은 성경을 가르치는 것과 성도를 다스리는 일을 같이 한 것입니다. 오늘날 장로제도에서 장로라는 개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말씀은 목사의 자격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1절을 봅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이것은 다음의 말이 신실하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무엇인가 하면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한다면 선한 일을 사모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독만이 아니라 모든 직분이 다 그러합니다. 교회에서는 직분이라는 것이 자기의 야망이나 자존심이나 위신을 세우는 직분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교회의 직분이 얼마든지 사람의 체면 때문에 주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서리집사 명예집사 권사라는 직분은 성경에 없는 내용입니다. 그런데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의 체면 세워주기 위한 것인지는 다음주에 좀더 보기로 하고 우선 오늘은 목사의 직분에 대하여 보고자 합니다.
목사가 선한 일을 사모하여 목사 되기를 원하였다면 그 사람의 자격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점검해보라는 것입니다. 항목으로 말하자면 무려 15가지가 됩니다. 이 항목들 가운데 제 자신이 목사로서 몇 점을 받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15점 만점이라면 도대체 몇 점을 줄 수 있을지 여러분이 한번 평가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그 기준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낙제 점수가 되면 불신임을 하시는 것이 여러분에게 좋을 것입니다.
교회 정치로 보면, 임시목사란 일년에 한번씩 신임을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속한 노회는 워낙 작고 대부분의 교회가 당회를 구성할 형편이 되지를 못합니다. 우리 교회 정도는 당회구성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세례교인 25명에 장로 한 사람 세울 수 있으니 장로 두 명은 충분히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당회가 구성이 되어야 임시 목사가 아니라 위임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당회가 구성이 되지 않았으니 합동 측 헌법에 의하면 매년 연말에 당회장을 모셔다가 임시목사 시무 계속하기를 원하는지 아니하는지 투표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몇 년 전 까지는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가 보니 정말 크나큰 잘못이 아니고서는 거의 계속청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상노회에서 부칙을 만들어 임시목사라도 당회권을 주어서 매년 시무투표를 하지 않아도 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니 장로 세우지 않아도 목사가 당회장의 역할을 다 할 수 있으니 목사에게 편리한 제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목사를 바꾸고 싶으면 공동의회 회원 3분의 2만 서명날인을 받으면 공동의회를 소집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불신임 투표를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방법은 교회 정치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15가지 항목을 체크해 보시고 아니다 싶으면 불신임을 물으시는 것이 여러분에게 유익이라는 것입니다.
우선 일반적인 해석에 따라서 말씀드립니다. 괄호 안은 저 자신의 평가로 봅니다.
1. 책망할 것이 없으며 이 내용은 사회나 교회 안에서나 책망할만한 범죄사실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밖으로 드러난 범죄는 없더라도 마음속으로 죄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을 주님께서는 밖으로 드러난 행위가 같다고 보십니다. 그렇다면 저는 책망 받을 것뿐입니다).
2.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그러나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몇 명과 간음을 하였겠습니까? 헤아릴 수도 없을 것입니다).
3. 절제(이 세상의 것에 취하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절제가 얼마나 안 되는지 날마다 통감하고 있습니다).
4. 근신(자기 마음을 잘 단속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늘 마음의 단속이 되지 않습니다).
5. 아담(외모에 관한 것으로 인격적 내부에 규칙과 질서가 있음을 말합니다. 역시 그렇지 못합니다).
6. 나그네 대접 잘함(당시에는 복음으로 핍박당하며 유리하는 신자들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역시 못합니다).
7. 가르치기를 잘함(늘 답답함을 느낍니다. 가르치고 나면 늘 후회가 됩니다).
8. 술을 즐기지 아니함(술은 즐기지 않아도 다른 것을 즐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9. 구타하지 않음(행동만이 아니라 언어도 폭력입니다).
10.관용함(제가 얼마나 관용하지 못하는지 다른 사람은 잘 모르지만 우리 집사람은 잘 압니다).
11.다투지 아니함(어떤 분이 저를 까다롭다고 하시던데 잘 다투는 사람입니다).
12.돈을 사랑치 아니함(오늘 교회 입구의 전신주에 있는 벼룩시장 신문을 보면서 돈이 좀 있었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3.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함(어느 누가 장담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14.새로 입교한 자는 안 됨(세례 받은 지 오래 되었다고 해서 새로 입교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15.외부인 에게도 선한 증거를 받은 자(글쎄요!)
몇 점이 나옵니까? 그러나 그러한 채점은 피상적입니다. 제대로 다시 평가를 해봅니다. 괄호안의 내용으로 평가를 하는 것입니다. 다시 평가해 보면 엄격하게 보면 빵점입니다. 그러면 스스로 그만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만두고 싶습니다. 그런데 왜 그만두지 않고 아직 미련을 떨고 있는 것입니까?
디모데전서1:12-17절을 봅니다. "봉독" 이미 본 말씀입니다만 바울 자신이 직분을 받은 것은 결코 자기의 의로움이나 선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직분을 받게 된 것은 주님의 오래 참으심과 긍휼과 자비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고 죄인중의 괴수인 자신에게 은혜와 긍휼을 베푸신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하여 직분을 맡기신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격에 완벽한 조건을 갖추어서가 아니라 이러한 조건에 얼마나 부족한 자인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조건이 갖추어진다면 더 좋겠지만 그러나 이러한 조건에 비추어 볼 때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하고 단 한걸음도 주님의 은혜와 도움심이 아니면 안 되는 자로 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의 모든 직분은 자기의 의를 자랑하는 자들이 아니라 주님께서 얼마나 큰 은혜를 베풀고 계시는가를 증거 하는 자로서 서야하는 것입니다.
신앙클리닉 공부할 때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직분은 주님과 동역하기 위해 인간 편에서 갖춰야 할 최소한의 조건을 구비한 사람이 맡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단 한 발자국도 갈 수 없다고 절절하게 깨달은 사람이 그분의 부요하심을 드러내기 위해 맡는 사랑의 일이다." 그러므로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간에 모든 직분은 은혜로 받는 것이고 그분의 은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사가 교회의 무엇을 감독해야 하는 것입니까? 바울 사도는 교회 안에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들어오는 것을 경계하라고 하였습니다. 디도서 1:9-14절을 봅니다. "9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1)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10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11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 12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 13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2)온전케 하고 14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들을 책망하고 할례당의 입을 막고 악한자들을 꾸짖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들어오는 온갖 거짓된 가르침을 거부하게하고 바른 진리가 증거 되도록 하기 위하여 장로와 감독을 세우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0:28-30절을 봅니다. "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3)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주님께서 교회에 감독자를 세우신 것은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저들 가운데 감독을 세우신 것은 주님의 피로 값을 주고 사신 교회가 주님의 피의 능력 안에 머물러 있게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들이 와서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너희 중에서도, 교회 안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는 자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도전들을 막아내고 책망하고 감독하기 위하여 감독자를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고 사신 주의 몸 된 교회가 예수님의 피 외에 다른 것으로 가려지면 교회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독의 제일 중요한 기능이 복음이 제대로 증거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효력과 능력이 제대로 드러나는 가를 감독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들의 행위나 공로로 복을 받고 사는 줄 압니다.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으로 인하여 모든 복들이 다 주어지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만이 아니라 대신 죽으심이란 우리를 죄의 권세에서 끄집어 내셔서 자신의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독이 해야 할 일은 이러한 감독을 친히 하고 계시는 주님을 증거 하고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다스림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벧전 2:18-25절을 봅니다. "18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1)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우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참된 목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신 주님입니다. 이렇게 하심은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신 것입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목사나 감독이나 장로나 목자로 불리는 자들을 주님께서 세우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대신 피를 흘리신 분이 따로 계심을 증거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 되심을 증거 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목사의 기능이라고 봅니다.
디모데전서 3:8-13 집사 2002. 8. 28
"8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 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9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찌니 10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요 11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찌니라 12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찌니 13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지난주에 교회의 감독에 대하여 알아보았습니다. 감독은 장로 목자 목사로 바꾸어 쓸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감독의 자격 중에 15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그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자는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 서신을 쓴 사도 바울 자신도 그러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주의 긍휼과 자비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감독의 조건을 보면서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자인가를 알고서 단 한걸음도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맡을 수 없는 것이 직분임을 알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감독의 가장 중요한 감독의 기능이란 주님의 피로 값을 주고 사신 교회이기에 그 피의 공로와 효력이 제대로 나타나는가를 감독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독의 직분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집사를 세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집사의 직분도 결국은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드러내는 일을 위하여 집사의 직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최초로 집사를 세운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6장에서 보았습니다.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하기 위하여 집사를 세운 것입니다. 사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두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다고 하면서 교회의 구제문제를 집사들에게 일임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일곱 집사를 세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초의 집사가 세워진 것은 사도들이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집사들도 결국 봉사하는 것은 봉사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선포 되도록 하는 것이 주 목적이었습니다. 교회의 교회됨이란 바른 말씀의 선포가 가장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의 말씀 전하는 것도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한 봉사요 집사들의 직분도 동일한 봉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직분은 봉사의 직분이기에 기능상의 구별이지 신분상의 구별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역사 속에서 계속하여 교직자의 신분적인 차이를 강조하여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사라지고 대신에 성직이라는 신성한 한 계급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거부하고 만민 제사장이라는 기치로 종교개혁을 하여 왔지만 그러나 개혁교회 안에도 또다시 중세와 같은 신성한 계급이 있는 것처럼 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보고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위한 봉사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8-10절입니다. "이와 같이" 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란 감독들의 기준이 있는 것처럼 집사들도 그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한번 점검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않고, 술에 인 박이지 않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않고, 깨끗한 양심,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입니다. 그리고 12절에서 한 아내의 남편이고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시험하여 보고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남자 집사의 기준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11절입니다. "여자들도 이와 같이" 여기서 여자들을 집사의 아내로 보는 사람도 있고 여자 집사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자 집사는 앞의 조건이 어느 정도 되는데 그 남자 집사의 아내가 단정하지 못하고 참소하고 절제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안수 집사가 중요한 의논을 하고 아직 알려지면 안 되는 내용인데도 그 말이 퍼져 나가는 경우는 대부분 아내들에 의해서 퍼져 나가는 것입니다. 물론 남자 집사가 자기 아내에게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침묵하는 것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집사의 아내가 절제하지 못하고 떠벌려 버리면 안 되기에 여기의 여자들을 아내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자 집사도 분명히 있습니다. 로마서 16:1-3절에 보시면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1)일군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2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찌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여기서 겐그레아 교회의 일군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일군을 집사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을 자매라고 하면서 주 안에서 합당한 예절로 영접하라고 합니다. 그가 여러 사람과 바울 사도 자신의 보호자가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 집사로서 복음을 전하는 바울과 여러 사람들을 보살피고 도와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자 집사의 아내로 보거나 여자 집사로 보거나 간에 교회 안에서의 일군의 역할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여자 일군, 집사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단정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않고, 참소하지 말고,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채점을 해보시니 어떻습니까? 좀더 세밀하게 목록들을 살펴봅시다. 남자 집사부터 봅니다.
1. 단정합니까? 외모만이 아니라 그의 인격도 단정한가 하는 것입니다.
2. 일구이언을 하지 않습니까? 한 입으로 두말하는 것, 상황 따라 달라지는 사람이 아닙니까?
3. 술에 인 박이지 않았습니까? 술만이 아니라 다른 것도 인 박이는 것이 많을 것입니다.
4.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는 자입니다. 구제를 하고 봉사를 하면 물건과 돈을 다루는 것이기에 그렇겠지요!
5. 깨끗한 양심입니까? 양심을 어떻게 알아 볼 수가 있습니까? 오래 함께 있어 보아야 아는 것입니다.
6.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 입니까?
7. 한 아내의 남편이고 가정을 잘 다스립니까?
여자 집사입니다.
1. 단정합니까? 남자들의 첫째 조건과 같습니다.
2. 참소하지 않습니까? 참소란 고자질하는 것입니다. 고자질은 대부분 침소봉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참소는 여자들이 잘 하는가 봅니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고 바울이 책망한 것입니다. 물론 남자도 참소를 잘 하는 자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러한 참소는 마귀의 주특기입니다.
3. 절제하십니까? 남자나 여자나 제일 안 되는 부분이 절제가 아니겠습니까? 마땅히 해야 할일은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일은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재미가 없고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은 재미가 있으니 어떻게 절제가 되겠습니까?
4. 모든 일에 충성하십니까? 대부분 교회의 집사는 교회에 충성하는 것으로만 결정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 충성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도 충성하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집안은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교회 일에 충성한다고 다니지는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 집안일만 충성하느라고 마땅히 집사로서 감당해야할 일을 하지 않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건들 중에서 다들 부족하지만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없으면 안 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것은 다 부족하여도 이것 하나만은 꼭 있어야 된다고 보시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조건들은 세상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도 갖추어야 하는 조건입니다. 직원 채용할 때 용모단정한 사람 그러지 않습니까? 그리고 중요한 직분을 맡은 사람이 술에 인 박이고, 절제하지 못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한다면 어찌 감당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의 아무리 중요한 직책을 감당하는 사람이라고 하여도 이것을 물어 보지는 않습니다. 믿음의 비밀을 가지고 있습니까?
믿음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교회의 어떤 직분이라도 믿음이 없는 사람이 맡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능력과 실력을 인정받는 사람이라고 하여도 교회에서의 직분은 그 사람의 일 잘하는 능력이 아니라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능력이란 경쟁에서 이겨야만 능력을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능률과 실질을 숭상한다는 국민교육 헌장을 어려서부터 외우고 자라서 그런지 교회로 모였는데도 일을 처리하는 모습이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는 모습으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교회들은 아예 교회에 장단기 발전 기획위원회를 조직하여 운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영의 합리화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결코 일 잘하여 능률을 올리는 사업장이 아닌 것입니다. 일 잘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다워지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방향과 목표가 그리스도를 알고 그를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면 교회 안은 장사하는 기업체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교회에 주 5일 근무제가 시행되는 때에도 살아남겠는가 하는 연구를 하는 것이 됩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로 계시고 그에게 붙어 있으면 그것이 교회요 성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직분 자는 필히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믿음의 비밀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적인 능력을 보고서 직분을 주다가 보니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장사하는 분위기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을 투표하는 교인들의 마음도 세상의 능력을 보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우리교회 안수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면 우리교회에 어떤 도움이 될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눈에 보이는 이익을 따져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즉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야 하는 것인데 저 사람은 믿음은 조금 부족해도 돈이 많으니, 권세가 있으니 장로가 되면 우리교회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거야 하는 이 생각이 교회를 장사하는 곳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두의 책임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조적인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도 돈 있어야 된다. 믿음은 있어도 돈 없으면 장로가 못된다. 그래서 돈 없는 사람이 장로 될 만 하면 아예 교회를 옮겨버리는 이런 일이 모두 믿음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직분자는 무엇보다도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여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의 비밀이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사람의 신념이나 의지적인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비밀을 가진 사람이라면 반드시 자신의 믿음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에게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임을 알고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직분을 맡고 봉사를 하게 되면 그 모든 봉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알아주든 아니든 간에 감사함으로 봉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직분을 감당하지 않는 자들은 언제나 불평과 원망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맨 날 어려운 것만 시키고 누구는 편한 것만 하고 이런 원망들이 나오니 어느 교회는 식사 당번과 청소 당번을 하다가 너무나 말이 많아서 아예 용역 업체에 하청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돈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귀찮으니 돈으로 해결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여야 한다는 것은 모든 것이 은혜로 받는 자임을 아는 자가 은혜로 봉사하는 것이 교회의 직분자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8-10절을 봅니다. "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10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1절부터 보시면 우리는 이미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 크신 긍휼과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내용을 우리가 알게 되고 믿게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로 믿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을 선물로 받은 사람이라면 결단코 자기의 행위를 자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라는 고백만이 나올 뿐입니다. 자신이 재산을 다 바친들, 목숨을 다 바친들 그것은 당연히 해야 할 것을 한 것뿐이며 그저 무익한 종일뿐입니다 하는 것이 믿음의 비밀을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조건들 중에서 다 갖추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직분을 감당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일 시키려는 목적이 아니라 직분을 감당함으로서 우리가 얻는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그 유익이란 바로 13절입니다.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하심으로 더욱 믿음에 담대해 지기를 바랍니다.
디모데전서 3:14-16 하나님의 집 2002. 9. 4
"14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바울 사도가 디모데전서를 기록한 목적이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 사도가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에게 속히 가기를 원하나 만약 지체가 된다면 디모데가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고 이 서신을 보낸 것입니다. 여기서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집, 즉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합니다. 여기서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씀하고 있으니 교회당을, 건물을 하나님의 집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입니다.
부산의 어느 교회당 입구에 보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대리석에 새겨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그러면 그 건물이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된다는 것으로 보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오해하는 사람을 얼마나 있을까 생각하겠지만 평소에 우리의 종교적인 본능들이 그렇게 보게끔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집이나 특정 건물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본다면 그곳은 우상을 섬기는 신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집이 무엇인지를 말씀을 통하여 다시 한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먼저 바울 사도는 집이라는 말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시멘트와 벽돌로 연결된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3:16-17절입니다. "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2)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합니다. 너희는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한 성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성전입니다. 이 한 말씀만 제대로 알고 있어도 건물을 성전이라고 말하는데 오해하거나 속지 않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6:19-20절입니다. "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여기서는 너희 몸이, 즉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성령이 계시는 몸이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후서 6:16절입니다.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ㄴ)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ㄷ)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여기서 구약의 성경을 인용하여 성도가 하나님의 성전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20-22절을 봅니다.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여기서도 건물을 비유로 하여 교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터에 대하여 나옵니다. 디모데전서 3:15절에서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터를 닦아 놓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시 건물의 터가 아닙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터를 닦아 놓은 것 위에 예수님께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성도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 즉 하나님의 집이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거하실 집을 짓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거하실 집을 어떻게 지으시는지를 성경전체를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창조세계 속에 거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 거니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의 유혹과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거하실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 피조세계가 없어진다고 거하실 곳이 없으신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기 이름으로 창조된 세계이기에 결국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타락한 피조 세계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집 만들기에 나서신 것입니다.
게시판에 서철원 교수의 창조신앙이라는 논문을 김신철 집사가 올려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쉽게 여긴 점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창조라는 말이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우리는 시간 속에 살다가 보니, 시간이란 앞뒤 순서를 정하여 사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일하심도 우리의 시간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성경은 해석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브라함과 다윗보다 예수님이 먼저 계셨다는 말씀입니까? 그러나 성경은 아브라함보다 다윗보다 예수님이 먼저 계셨다고 하십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모든 창조를 예수님께서 하셨고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시간상으로 계산하여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죄가 들어와서 흠이 났으니 수습차원에서 일을 하신 것이라고 우리는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런 시간 순서상으로 하신 것이 아닙니다. 애초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골로새서 1:15-18절입니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예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심으로 교회를 그의 몸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집을 짓고자 하시는 목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목사가 있고 장로가 있어 돈을 모아 건물을 지어 놓은 것을 가지고 교회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의 집을 지으시는 차원에서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에 나타난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 백성 만드시는 것이 이미 창세전에 예정된 일인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목표로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은 하나님께서 거하실 집을 만드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6:3절에서 사람이 육체가 되어 버림으로 하나님의 신이 육체와 함께 거하실 수가 없게 되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든 인간이 범죄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골로새서 1:15절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육체가 되어 버린 인간을 심판하시는 것이 노아 홍수인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어서 살아남게 됩니다. 그리고 바벨탑을 쌓자 하나님께서 흩어버리신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한 사람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 약속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출애굽하게 됩니다.
출애굽기 15:13-18절을 봅니다. "13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14 열방이 듣고 떨며 블레셋 거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15 에돔 방백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16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이 돌같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 17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18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언약을 따라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키십니다. 주님의 은혜와 주님의 힘으로 그 백성들을 어떤 방해와 거부에도 불구하고 성결한 처소, 즉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심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심은 결국은 하나님의 자기 처소를 만드시고자 하심인 것이 17절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처소를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거하심을 성막과 성전의 건물로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막과 건물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로 본 것이 아니라 그 건물 안에 신을 모셔놓고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이방인들과 같은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러할 때에 성전마저 하나님께서 던져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 선지자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거하실 터를 닦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신을 부어 주심으로 새롭게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를 만드실 것임을 여러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곳만 말씀을 봅니다. 예레미야 31:33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것이라" 하나님의 법을 사람의 마음에 기록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을 보내시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이 거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드디어 때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서 건물 성전을 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성전 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건물 성전을 헐라고 하는 이단을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 처형을 하라고 고발하는 죄목이 성전을 헐라는 것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이제는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성전이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증거 한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여 증거 하자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바울 사도도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결국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증거, 성경에서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입은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으로부터 소급해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거하실 집을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피로 값을 주고 사신 교회입니다. 성도입니다. 이것이 성전이요 하나님의 거하실 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제부터 자기의 몸이 자기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값으로 사신 것이니 더 이상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자기의 몸을 썩어질 육체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거하실 처소로 삼으셨다면 그런 사람의 자세는 고린도후서 5:1-10절과 같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봉독" 주의 성령이 임하여 있는 것은 장차 완전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처소가 되었음을 보증하기에 몸의 구속을 바라며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집입니다.
디모데전서 3:14-16 경건의 비밀 2002. 9. 11
"14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지난주에 이 본문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집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집을 만드시는 것을 성경전체를 통하여 간략하게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집이란 하나님께서 거하실 집이기에 건물이 아니라 자기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백성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가 하나님의 집이며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성령이 임하신 것이며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기에 성령의 전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경건의 비밀에 대하여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도 세상 사람들에게는 비밀입니다.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란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야만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1장에서 기도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비밀인 것은 성경을 아무나 읽지 못하도록 꽁꽁 감추어 두었기에 비밀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라도 지금은 다 성경을 구할 수가 있고, 사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사람들이 구하거나 찾지 않는 내용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내용이 아닌 것입니다.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기에 아무리 성경을 통하여 밝히 드러나 있더라도 사람들이 원하는 내용들이 아니기에 비밀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만이 알도록 하시기에 비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의 비밀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경건이라 하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하면 무언가 경직되고 엄숙하고 딱딱한 느낌으로 여깁니다. 걸음걸이 옷차림 목소리 분위기들이 경건으로 여겨지는 것은 경건의 비밀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육체의 모양을 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특히 성직자라는 계통에 종사하는 자들에게 기대하는 모습들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오히려 참된 경건의 비밀을 가리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16-23절을 봅니다.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8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20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 (이 모든 것은 쓰는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일부러 겸손함, 천사 숭배함, 그 본 것을 의지함,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함, 자의적 숭배, 겸손, 몸을 괴롭게 함, 이러한 것들은 지혜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금욕적인 행위를 보면 경건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승복을 입거나 가운을 입고서 행동도 장중하게 하는 모습을 보면 경건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다 육체의 모양을 내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것이 결단코 자기의 육체를 좇아가는 것을 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죽어도 좋아"라는 영화를 상영하느냐 못하느냐를 가지고 말들이 많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이 영화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성적인 문제를 다룬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육체적인 힘이 없어진다고 마음마저 없어지는 것은 아니랍니다. 그러니 우리가 몸을 가지고 있는 한 우리 스스로 철야를 하고 금식을 하고 고행을 한다고 하여도 그 안에서 무슨 선한 것이나 경건한 것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이란 다른 차원에서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 후서 3:5절을 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고 합니다. 경건의 모양을 얼마든지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으로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마음을 어떻게 자기가 만들어내는 경건의 모양으로 제어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경건의 능력이란 따로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장 이런 질문을 하실 것입니다. 디모데 전서 4:7절에서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경건에 이르도록 날마다 연습을 하면 경건하여 지는 것이라는 겁니까? 이 말씀은 이미 성도에게 주어진 경건의 능력, 경건의 비밀 안에 있는가를 자신이 확정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네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가를 점검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후서 1:1-11절을 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1)주시리라"
이 말씀을 보시면 역시 우리가 무엇을 자꾸만 더하여 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3절을 봅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자체에서 생산되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보배로운 믿음을 주셨고 그 믿음 안에는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종합선물을 받은 것입니다. 그 선물들이 우리에게 드러나게 하는 것이 경건에 이르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만들어 내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들인지 아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들로 부요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만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것들을 외면하고, 내가 무언가 쥐어 짜내어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모습을 부인하고 주님이 주신 것으로 단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열매들이 없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9절입니다.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고 합니다. 멀리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의 옛 죄를 깨끗하게 하심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욱 힘써 주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요청하고 내가 택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부르시고 택하심을 굳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넉넉히 그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이란 비밀이고, 능력인 것입니다. 이러한 경건의 비밀이란 결국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골로새서 2:25-29절입니다. "25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4)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바울 사도가 교회의 일군이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인데 이것이 만세와 만대로부터 비밀로 왔다는 것입니다. 이제 성도 안에서 나타났는데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풍성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이 비밀은 곧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우리의 영광의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이 분을 전파하므로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의 비밀이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안에 있는 자를 경건하다고 인정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의 비밀인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주님께서 무슨 일을 하신 것입니까?
다시 디모데전서 3:16절로 갑니다. "육신으로 나타나심,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심, 천사들에게 보이심, 만국에 전파되심, 세상에서 믿은바 되심.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심" 이것이 경건의 비밀인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러한 주님의 사역이 경건의 비밀이 되는가를 다시 봅니다.
로마서 1:2-4절입니다.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1)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2)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경건의 비밀이 복음입니다. 복음이란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인데 육신으로 나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러면 왜 육신으로 오셨고 부활하심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신 것입니까?
로마서 8:3-4절입니다.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죄를 지은 인간의 육신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이루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서 그 육신에 죄를 정하여 십자가에 죽이신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인간의 육신으로도 죄를 이기고 의에 이를 수 없음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대신 죄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인하여 의롭다 함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이로 보건데 우리가 경건함을 입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경건함과 거룩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의 비밀인 것입니다.
로마서 4:25절을 봅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 나셨느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모든 이방인에게도 동일한 은혜가 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 범죄함을 인함이며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의 비밀인 것입니다. 이를 확정하는 것으로 온 우주 만물에 다 알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이러한 경건은 비밀에 속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우리가 이러한 비밀을 알았습니까?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는 이러한 경건의 비밀을 알기에 더 이상 자기의 육신을 의지하지 않고 경건의 비밀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경건에 속한 열매들이 맺혀 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알아감으로 이러한 열매들이 더 풍성하여 지기를 바랍니다.
디모데전서 4:1-5 미혹의 영 2002. 9. 18
"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3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진짜가 있는 곳에는 가짜도 있습니다. 진짜가 귀하고 좋은 것일수록 가짜는 더 많을 뿐만 아니라 가짜가 더 진짜 같아 보이는 것입니다. 보석도 이미테이션 보석이라는 것이 있지요. 진짜 보석은 아닌데 보석모양을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사람은 구별이 안 됩니다. 그래서 보석감정사도 있는 것이지요! 보석만 아니라 우리가 사는 모든 곳에서 가짜가 진짜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 인지도 모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영적인 분야에서도 여전히 가짜가 진짜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별하라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미혹의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처음부터 미혹의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 아니라 함께 믿는다고 하는 자들 안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별이 더욱 힘 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통일교라든지 여호와의 증인이라든지 하는 이단들은 구별이 쉽습니다. 문제는 가장 정통이고, 보수적이라고 하는 곳, 결코 이단이 아니라는 곳에서 더 구별이 힘 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무엇이 미혹의 영이며 귀신의 가르침인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함께 믿는다고 하는 자들 안에서 미혹의 영과 귀심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나오게 되는데 이들의 특징은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양심이 화인을 맞았다는 것은 양심이 마비가 된 것이지요! 양심이란 사람의 인격의 중심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곳에 화인을 맞았다면 양심이 마비가 된 것입니다. 화인은 옛날에 노예들이 도망가다가 붙잡히게 되면 다시는 도망을 가지 못하도록 쇠붙이를 불에 달구어 이마에 지져버리는 것입니다. 짐승을 구별하기 위하여서도 이렇게 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화인은 지울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미혹의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이들은 외식하며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외식하며 거짓말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것이 양심에 화인을 맞은 모습인 것입니다.
바울사도 당시에 에베소교회에 이러한 자들의 주장은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2세기에 본격적으로 드러난 영지주의자들의 선조들로 보는 것입니다. 이 당시는 금욕주의적인 모습으로 나옵니다만 나중에는 육은 악하고 영은 선하다는 이원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들은 육체에 관련된 모든 욕망은 곧 악이며, 따라서 일상적인 성과 음식조차도 제거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 교사들은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물질이란 본래적인 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선한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을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사용하게 된 것이지 그 물질 자체는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는 것입니다. 물질 자체가 거룩하고 안하고가 아니라 성도가 된 자들은 모든 하나님의 창조물을 감사로 받는 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범사에 감사를 하는 사람입니다. 물을 한잔 마셔도 주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공기를 마시면서,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주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성도란 거룩함을 입는 자로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거짓교사들은 물질 자체를 악한 것으로 보고서 금욕적으로 나간 것입니다. 그러면 훨씬 더 경건해 보이고 신비해 보이는 것입니다. 성직자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아옹다옹 사는 것보다 결혼도 하지 않고 늘 금식을 일삼고 사는 사람을 더 신령하게 보는 경향이 우리의 종교적 본능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목사 그러면 목사는 언제나 청렴결백하기를 요구하고 있을 것입니다. 목사는 우리와 다르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꼭 같은 잘못을 하더라도 목사가 잘못한 것이라면 그 비판의 강도가 더 센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목사들이 스스로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민중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자기를 포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외식인 것입니다. 이러한 외식은 거짓말이 반드시 동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보면 얼마나 자신들이 초월적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고생을 무슨 신비한 금욕적인 일로서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존경하게 되거나 아니면 보통사람들과는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말을 따르고 추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분별을 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증거 하는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영적이라고 하고 육적이라고 합니까? 신비하고 초월적인 것을 영적이라고 보고 물질적인 것을 육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원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육적이다 영적이다'라는 말씀은 물질과 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된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모두 육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이란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을 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5-10절을 봅니다. "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2)산 것이니라"
이 말씀에서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과 신비한 것으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육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영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은 영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은 육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에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영이 없는 자로서 자기가 모든 것의 주체가 되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지고 선도 행할 수 있고 악도 행할 수 있는데 내가 스스로 선을 택하여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선악과 따 먹고 난 이후의 인간의 보편적인 생각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육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육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기쁘시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나님을 원수로 여겨서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육입니다.
요한복음 6:63절을 봅니다.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우리를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 영이란 예수님의 말씀이 영이요 생명인 것입니다. 여기서 육이란 인간들이 바라고 원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원한 것은 육인 것입니다. 이것이 오병이어 사건에서 분명하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으로 난 것은 육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사상과 지혜와 힘을 다 합하여도 결국 육 밖에는 나오지 않기에 생명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의 일인 것입니다.
요한일서 4:1-6절입니다.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5 저희는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1)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여기서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영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방금 로마서에서 무엇을 영이라고 하였습니까?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을 영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한다는, 진리를 전한다는 사람을 영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 한 두 사람이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러한 자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가 시험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세상에 속하였는가 하나님께 속하였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자는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나 바울이 증거 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예언된 그 메시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받지 않는 자는 세상에 속한 자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체로 오실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거룩하신 분이 악한 물질 안에 오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당시의 철학들이 그러하였으니 일리가 있는 것처럼 먹혀 들어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이란 허상일 뿐입니다. 헛것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사단의 노림수가 이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 이것이 미혹의 영,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사도들이 증거 한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세상에 속한 것인지 하나님께 속한 것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어떤 모습으로 미혹하겠습니까?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들은 다양하게 전개 되더라도 그들의 미혹의 목표는 한 가지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야기는 하여도 단지 옛날에 있었던 과거의 일로 치부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를 믿는 우리가 무엇을 이루어 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신화속의 인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도 살아서 일하고 계시는 주님으로 믿지를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시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게 함으로 계속하여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12-14절을 봅니다.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이란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인간의 육적인 능력을 완전히 부정하기에 미련하여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18-25절 "봉독" 십자가의 도는 육의 사람이 보기에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절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디모데전서 4:6-11 예수의 일군 2002. 9. 25
"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9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만하도다 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11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6절에 보시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라는 말씀은 바로 앞의 4:1-5절의 내용입니다. 거짓 선생들을 구별하고 바른 믿음과 진리를 증거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넓게 보면 디모데 전후서 모두가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란 진리로 형제를 깨우침과 동시에 자신도 양육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의 말씀과 선한 교훈입니다. 믿음의 말씀이란 유다서 3-4절에서 봅니다. "3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믿음의 도는 성도에게 단번에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어온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만들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단번에 주어진 믿음의 도를 어떻게 하면 바꾸어 버리겠습니까?
지금 십자가 마을의 질문과 응답 란에 엄기옥씨라는 글이 올라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이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죄 사함을 받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사람의 논리에는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의 피로 구원받는다고 하면서 그것을 이용하여 마음대로 살고자하는 사람들에 대한 염려가 조금 보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철저하게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이러한 내용들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로 정리하여 볼 수가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단번에 의롭다고 하신 그 믿음의 말씀을 굳게 붙잡도록 하기위하여 바울과 유다가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단번에 주신 믿음과 의롭다 함을 부정하고 인간의 선한 행함을 보태어야 한다는 것과 싸워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는 은혜를 악용하여 자기의 정욕을 좇아가는 것에도 경계를 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이래도 죄. 저래도 죄인데 애라 죄나 짓고 살자 라는 것이 신자의 태도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울 사도도 디모데에게 경고하기를 믿음의 말씀과 그 믿음의 말씀을 따라 교훈한 것을 지키고 전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라고 말한 의미에 대하여 말씀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다른 곳에서는 교회의 일군이라고 바울이 자신을 소개하기도 합니다. 골로새서 1:24-29절입니다. "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4)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이 말씀에서 바울 사도 자신이 교회의 일군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한 일군인가를 보시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교회를 위한 일군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을 따라 말씀을 이루려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비밀한 경륜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니 곧 영광의 소망이라고 합니다. 이분을 소개하고 증거하고 가르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군이라고 하여도 결국은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기 위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이 그리 중요한가라고 생각하시겠지만 만약 여러분이 지금 목사가 없어서 목사를 구한다면 어떤 사람을 구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기를 원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모여서 만들어 놓은 늘푸른 교회를 위한 목사를 원하시겠습니까? 전에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부산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말씀을 듣기 위하여 따로 모인 곳에서 목사를 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설교 시간이 윤리도덕시간이 되어 버려서 견딜 수가 없어서 모였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어떤 목사를 원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을 원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모인 단체를 다른 교회와는 차별되게 좀더 멋있는 교회가 되도록 하는 목사를 원하겠습니까? 아마 후자 일 것입니다.
또한 가까운 곳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목사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자기들보다는 윤리 도덕적으로 더 나은 사람이어야 할 것이고, 또 목사가 재정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을 1,2순위로 꼽을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따로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목사가 그런 조건을 갖추고 우리 이제는 한번 좋은 교회를 만들어 보자고 하면서 교회를 위한 헌신과 충성을 다하는 목사가 온다면 좋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된 자가 와서, 우리가 주님보다 교회를 더 사랑하면-물론 이 교회가 자기들이 헌신한 열매로 되어졌다고 여기는 부동산과 사람들이 다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 만을 사랑합시다! 그렇게 말한다면 누가 좋아 하겠습니까? 개인이 돈을 축적하는 것만이 탐심이 아니라 교회가 돈을 사랑하고 돈을 축적하는 것도 동일함 탐심이라고 지적을 한다면 그런 목사를 좋아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6-10절을 봅니다. "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그리스도의 종이란 오직 복음을 증거 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에게 좋게 하고 그들에게 기쁨을 구하는 자라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종이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 졌습니까? 자기들의 성전을 위하지 않고 허물어 버리라는 예수님을 사형에 넘긴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 그대로 적용이 되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 우리 교회하는 것이 과연 예수님의 뜻에 부합이 되는 것입니까?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은 맞는 말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성도를 사랑한다는 뜻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단지 내가 출석한다는 것으로만 우리교회를 사랑한다면 이것은 또 다른 이기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일군이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오늘 분문에서 한 번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거짓교훈을 주의 하고 바른 복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그리스도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선한 교훈을 좇아 양육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도 늘 양육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는 모든 것이 이미 완성되었으니 너희는 내 말만 들어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음의 말씀과 선한 교훈으로 늘 양육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고 하였습니다. 경건의 비밀에 대하여 이미 말씀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경건의 비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가를 날마다 확정을 해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에 이르는 연습인 것입니다. 내가 믿음에 있는가를 날마다 확인해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13: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너희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것인가를 즉 믿음에 있는가를 시험하여 보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건에 이르는 연습인 것입니다.
8절을 봅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습니다. 그러나 경건에 이르는 연습은 범사에 유익이 있습니다. 육체를 강건하게 하기 위하여 오늘날 사람들이 쏟고 있는 정성이란 대단합니다. 가장 장사가 잘 되는 사업이 건강사업입니다. 그래서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 운동 등이 모두 육체의 건강을 위하여 투자하고 있는 것입니다. 뭐니 뭐니 해도 건강이 제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도 스스럼없이 건강이 제일이라고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무어라고 말해야 합니까?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에 이르는 연습은 범사에 유익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투자하는 시간과 돈이란 어디로 몰려가고 있는 것입니까? 잠시 있다가 썩어질 육체를 위한 투자는 그렇게 많이 하면서, 우리의 영혼을 위한 투자는 얼마나 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맞이하기 위한 신부로서 얼마나 단장을 하고 있는가를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경건이란 금생과 내생에 다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사모하는 그 연습이 얼마나 되는지를 점검해 보시고 우리의 관심이 달라지기를 소원합니다.
10절을 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라고 하는 바울사도가 이렇게 수고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라고 합니다. 오늘날 내가 성도인가? 아닌가? 믿음 안에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을 어떻게 점검을 합니까? 우리의 소망이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고 있습니까? 우리의 소망이 주님의 그 말씀에 소망을 두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라는 자들이 수고하는 것은 결국 사람들의 영원한 소망이 땅에 있는 썩어질 것들이 아니라 썩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임을 증거 하는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땅에 소망을 두고, 썩어질 것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일군들이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살아가는데 무슨 도움이 될까를 바라고 왔는데 오히려 반대로 말하니 싫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0절 하반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님이 모든 사람들의 주가 되심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만 주가 되는 것입니까? 특히 믿는 자들의 주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를 판단하셔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을 좋게 해주고 여러분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사람들의 말을 듣던가 여러분이 비록 괴로울지라도 주님의 일군의 말을 듣던가를 결정하셔야 할 것입니다.
11절입니다.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고 합니다. 디모데 자신만이 믿음의 말씀과 선한 교훈을 인하여 양육 받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성도들에게도 명하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자신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을 받는 자도 함께 구원에 이르게 함이라고 16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우리의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기를 바랍니다.
디모데전서 4:12-16 착념하라 2002. 10. 2
"12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15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16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목회를 어떻게 하라고 한 것이기에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목회란 성도가 있어야 하는 것이기에 바로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무엇에 착념해야 하는지. 무엇에 전심전력해야 하는지를 여러분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이 성경을 통하여 목사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면 목사가 교회에서 하고자 하는 일들이 과연 주님의 뜻인지 아니면 목사 개인의 야망을 기독교적인 용어로 성경적인 용어로 포장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여러분의 영혼과 직결된 문제라는 것입니다.
16절을 먼저 결론적으로 보자면,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고 합니다. 디모데가 착념해야 하는 일이 자기 자신을 구원할 뿐 아니라 그것을 듣는 자들도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사도가 디모데에게 무엇에 전념하라고 하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디모데가 상당히 젊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에베소 교회에는 나이 많은 자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새파란 젊은 목사가 와서 목회하니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업신여기는 일이 없었다면 이러한 말을 하지 않았겠지요! 특히 동양권의 문화란 체면문화가 되어서 장유유서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젊은 목사가 진리를 증거 하여도 아직 젊어서 저런 말을 하겠지 이렇게 받아 들여 진다면 듣는 자가 진리를 배척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성상 외모를 중요시 여깁니다. 그 사람의 신체적인 모습만이 아니라 나이, 직업, 출신, 학력, 이력 등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중심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평가하는 영웅주의를 배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모든 일-말과 행실, 믿음과 정절-에 모범을 보임으로 업신여김을 받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결국 목사의 권위를 세우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위하여 업신여김을 받지 말아야 하고, 말씀을 위하여 조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관심사도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목사와 여러분과의 관계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는 말씀을 읽고 권하고 가르치는 일에 착념하여야 하는 것이고 여러분은 이러한 권함을 받고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목사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면 그 목사가 전하는 모든 말씀을 너나 잘해 하면서 흘려듣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여러분의 손해인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정말 말씀 듣기를 원하여 목사를 부르셨다면 목사가 말씀을 읽고 권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것은 환경적인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말씀을 받기 위하여 애를 쓰는 것도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저와 여러분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모든 목사와 성도와의 관계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목적, 말씀을 읽고 권하고 가르치는 것이 교회의 가장 우선적 순위일 뿐만 아니라 최종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기록된 말씀으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말씀을 제쳐 두고서 다른 일에 관심이 있다면 벌써 방향과 목표가 흐려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권하고 가르치는 것을 통하여 목사 자신이나 성도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는 것은 회중 앞에서 낭독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특히 느헤미야 8:1-8절을 봅니다. "1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칠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2 칠월 일일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남자, 여자 무릇 알아 들을만한 회중 앞에 이르러 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 들을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4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매 그 우편에 선 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요 그 좌편에 선 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라 5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6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 7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이 다 그 처소에 섰는 백성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는데 8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으로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부흥회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새벽부터 오정까지 무려 여섯 시간을 무릇 알아들을만한 자들에게 율법 책을 낭독하는 것입니다. 에스라가 율법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섭니다. 그렇게 낭독하고 나서는 그 뜻을 해석하여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읽고 권하는 것입니다. 낭독과 설교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가르칩니다. 느헤미야 8:13절에 보시면 그 이튿날 뭇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의 곳에 모여서 율법 책을 본 것입니다. 그러자 그 때가 초막절이어서 일주일간 초막절을 지키면서 첫날부터 끝 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고 성을 다시 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회복이었던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 조차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모르고 있는 지경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권하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까? 이것이 가장 우선적인 관심사 입니까? 이스라엘의 이스라엘 됨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동일하게 오늘날 교회의 교회됨의 가장 중요한 표지는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선포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심의 결과로 교회가 탄생이 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탄생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생명력이란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되면 교회도 잘못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나 여러분의 관심사가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초대교회는 날마다 모였습니다. 말씀의 교제가 풍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이 가까이 올수록 모이기를 더욱 힘쓰라고 하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모이라고 하셨겠습니까? 말씀의 교제를 통하여 성도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서로 격려하기 위해서입니다. 함께 말씀으로 위로를 받고 힘을 얻어서 주님 오심을 기다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이 일을 착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가 장로회에서 안수를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된 그 은사를 조심 없이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 은사가 바로 영생에 이르는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착념해야 하는 것은 말씀을 읽고 권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디모데 자신은 이미 완벽하였기에 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끊임없이 그 영생과 생명의 말씀에 대하여 진보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남에게도 증거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누가 먼저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함께 배워가는 것이요 함께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스승이란 이미 어느 과정을 마스터 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스승이란 예수님 한분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다 예수님의 제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가르치는 자나 가르침을 받는 자나 간에 모두가 주님 앞에서 배우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단지 한 걸음 먼저 말씀을 깨달은 대로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함께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읽고 권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많이 변질이 되었습니다. 제자훈련이라는 명목으로 성경공부가 얼마나 많이 나와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제자 훈련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제자로 만든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훈련을 받아야 하는데 자기 교회 성장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제자 훈련을 도입하고 있으니 말씀을 아무리 읽고 권하고 가르쳐도 결국은 우리교회 잘되기 우리집안 잘되기 우리나라 잘되기 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나라와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다시 디모데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6절을 봅니다. "16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네가 네 자신과 네 가르침을 삼가라는 것입니다. 삼간다는 것은 자신의 언행을 조심하고 살피고 경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증거 하는 본인이 자신을 먼저 살피고 조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신의 가르침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르침도 역시 조심하여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가르침이 과연 무엇을 위하여 가르치는 것인가를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인가?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고 있는가? 아니면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한 것인가? 늘 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 마음의 욕심을 따라 성경을 읽고 설교하고 가르치기 시작하면 이것을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문을 닫아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도 천국에 가지 못하면서 남도 천국에 못가도록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1-13절입니다. "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6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8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9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10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12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디모데가 자신과 자신의 가르침을 삼가면서 계속하여야 하는 일은 말씀을 읽고 권하고 가르치는 일입니다. 이를 통하여 디모데 자신도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자도 함께 구원에 이르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구원은 주님께서 하십니다. 그 주님의 일을 제대로 알고 믿도록 말씀에 착념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디모데전서 5:1-16 참 과부 2002. 10. 9
"1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하고 2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하라 3 참과부인 과부를 경대하라 4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만한 것이니라 5 참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6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7 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그들로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라 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9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자로서 10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것이요 11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12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13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 다니고 게으를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14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15 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 16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주고 교회로 짐지지 말게 하라 이는 참과부를 도와주게 하려 함이니라"
교회란 단지 일주일에 몇 번 만나서 예배드리는 집단이 아니라 새로운 가족입니다.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가정은 우리의 혈통으로 이루어진 가정입니다. 그러나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고 사셨기에 주님의 가족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새로운 가족인 교회의 구성원들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와 자세를 가져야 하는가를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목사가 성도에게 대하는 자세만이 아니라 성도가 성도에게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도 동일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교회가 새로운 가족이라는 말씀부터 보고자 합니다. 마가복음 3:31-35절입니다.
"31 때에 예수의 모친과 3)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3)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3)동생들이냐 하시고 34 둘러 앉은 자들을 둘러 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3)동생들을 보라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예수님의 모친인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이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인가 하면서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을 향하여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고 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라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가족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29-31절을 봅니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2)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31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결론부분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너의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 네 보화가 있으리라 하시면서 그리고 나서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그 사람이 부자인고로 근심하며 떠났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 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놀라면서 그러면 누가 천국에 들어 갈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어느 누가 이러한 조건을 갖추어 들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의 대답은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방금 읽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형제나 자매가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자는 금세에 있어서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얻지 못할 자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영생을 얻을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베드로가 다 버리고 주를 따랐다고 하지만 결국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배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얻는 길이란 사람의 손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새 가정을 만들어 내심을 통하여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사도행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43-47절입니다.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1)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 4:32-35절입니다. "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6)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33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이 두 본문의 말씀이 예수님께서 만들어내신 새 가족인 교회가 현세에서 미리 천국의 맛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핍박과 겸하여 받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서 가정에서 핍박을 받아 쫓겨나서 교회 공동체에 들어오게 되니 형제자매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재산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버린 것들을 백배나 현세에서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 것입니다. 그러자 구제받을 사람도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는 구약에서도 구제의 대상이었는데 특히 과부가 많았습니다. 이들을 구제하는 문제로 인하여 초대교회에서 집사를 세운 것입니다. 그러한 교회 공동체에서 과부를 구제하는 일이 상당한 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교회가 구제가 풍성하여 지다보니 아무나 과부의 명단에 올려서 구제를 받는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왜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주나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구제를 받으면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당연한 듯이 여기고 심지어 안주면 왜 안주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도 과부의 문제가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디모데전서 5:1-2절을 봅니다.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늙은이는 남자로서 나이가 많은 사람입니다. 이런 자에게는 자기 아비에게 하듯이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디모데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그렇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젊은이는 형제에게 하듯이 하라고 합니다. 늙은 여자는 어미에게 하듯이 하라고 합니다. 젊은 여자에게는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젊은 여자에게는 한 가지가 더 붙습니다.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이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남녀의 문제가 생길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이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가 새로운 가족인 교회에서의 질서인 것입니다.
그리고 과부에 대한 문제가 3절에서 16절까지입니다. 이렇게 많은 분량을 기록한 것을 보면 교회 안에서 과부에 대한 구제 문제가 상당한 문제요 짐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과부로서 구제 받아야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아니할 사람을 구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부의 명단에 올려야 할 기준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양할 가족이나 친척이 없는 사람입니다. 4절에 보시면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가 있으면 그들로 부양하게 하는 것을 배우게 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고 교회에 떠넘기려는 자들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짓은 믿지 않는 자들도 하지 않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서 불신자보다 더 악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의 집안이나 친척 가운데 과부가 있는 자라면 자기들이 도와주고 교회에서 짐지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참 과부를 도와주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60세 이상이여야 합니다. 그 당시로는 상당한 고령입니다. 요즈음으로 하자면 한 70정도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만 왜 이렇게 나이를 제한하는가 하면 11-12절을 봅니다. "젊은 과부를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젊은 과부가 명단에 올라서 구제를 받게 되면 자기 힘으로 일하여 벌지 않아도 되기에 많은 시간이 남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하러 다닌다는 것입니까? 13절입니다. 게으름을 익혀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기 보다는 오히려 시집가서 아이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꼭 과부만 해당되겠습니까? 시간이 있고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 한가하게 돌아다니며 폄론이나 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모든 사람에게 다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겉으로는 활발하게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데 그것이 망령된 폄론을 하고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고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은 자와 같은 것입니다. 그런 일들은 죽은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남편의 아내였고 선한 행실이 있는 자라야 합니다. 한 남편의 아내였다는 자로 선한 행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선한 행실이란 자녀를 양육, 나그네를 대접, 성도들의 발을 씻기는 것, 환난 당한 자 구제함, 모든 선한 일을 좇는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조건에 해당되는 사람으로 참 과부에 명단에 올려 구제하게 하라는 것은 단지 구제의 차원이 아니라 이들을 교회에서 구제함으로 영적인 유익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 과부로 선정이 된 사람은 단지 구제를 받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의 본이 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존경을 받는 것입니다. 단지 구제를 받는 늙은 과부가 아니라 성도들에게 존경을 받는 자로서 참 과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구제를 하건, 구제를 받건 간에 무엇에 초점이 맞추어 져야 하는 것입니까? 주님에 대한 소망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3절과 5절을 봅니다. "참 과부를 경대하라"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이것이 참 과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늙은이와 젊은이와 젊은 여자와 과부를 대하든가 간에 결국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를 경대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분위기가 마땅히 이러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어디에 속한 사람입니까? 어디에 속한 사람이든지 간에 어디에 소망을 두는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하고, 그러한 자를 존경하는 곳이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인 것입니다.
누가복음2:36-38절입니다.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 된지 팔십 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우리가 젊든지, 늙었든지, 남자이든지, 여자이든지 오직 과부된 심정으로 주님을 기다리며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디모데전서 5:17-25 직분에 대하여 2002. 10. 16
"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18 성경에 일렀으되 ㄱ)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19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20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하게 하라 21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며 22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 23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24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 25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
오늘 말씀은 교회의 직분 자에 대하여 어떻게 대우하여야 하며, 치리문제와 안수문제를 어떤 기준에서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 개인에게도 권면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직분자란 우리가 알고 있는 장로의 개념과는 좀 다릅니다. 물론 잘 다스리는 자와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자로 구분을 합니다. 그래서 전자를 치리장로 후자를 교훈장로로 구별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기란 장로와 목사로 구별합니다. 그러나 이 당시에 교회에서는 장로와 목사를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장로라 그러면 오늘날의 목사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에 대한 대우와 치리와 안수문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디모데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7절을 봅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 더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직분에 비하여 교회를 잘 다스리고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배나 존경하라고 합니다. 이 존경이란 단어는 보상이나 보수라는 말로도 번역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장로들은 교회에서 전적인 사역을 하는 자들로서 사례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말로만의 존경이 아니라 보수를 잘 다스리는 자에게 배나 지급하고,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자에게는 이보다 더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근거를 18절에서 두 곳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신명기 25:4절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원리에서도 일하는 자가 삯을 받는 것이 당연한데 복음을 전하는 자는 그 복음으로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10절에서 예수님께서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를 보내시면서 그들에게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게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일군이 그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다가 너희를 영접하는 자가 있으면 거기서 머물고 영접하지 않으면 떠나면서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제자들을 대접하고 안하고가 아니라 그 제자들이 주님의 복음을 들고 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받아들이는 것이 복이고 배척하는 것은 그들의 심판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서는 어떻습니까? 목사가 사례이야기를 하면 아주 속물적인 목사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 자신도 그런 말을 하는 것을 금기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또 다른 자기의 자존심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바르게 아셔야 하는 것은 목사의 사례를 많이 하고 적게 하고가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이 말씀에 대한 자세가 어떠한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에서 디모데의 연소함으로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쓸데없이 목사의 권위를 세우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6-8절을 봅니다.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관심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면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각양 좋은 것을 함께 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것은 목사에게 대접을 잘하여 복을 받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은 여러분의 영원한 운명에 관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의 시간과 물질을 어디에 가장 많이 투자하고 있습니까? 영원한 말씀에 있습니까? 아니면 잠시 있다가 없어질 것들에 대한 것입니까? 아이들 교육비중에서 말씀을 위한 부분이 몇 퍼센트 되십니까? 신앙서적이라도 한권 사주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 거두는데 결국 썩어질 것을 거둘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둘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자들을 배나 존경하라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말씀에 대한 관심과 사랑입니다. 사람은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갑니다. 마음이 가는 곳에 물질도 시간도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자에 대한 여러분의 자세와 태도란 곧 말씀과 가르침에 대한 자세와 태도인 것입니다.
이 주제에 대하여 한 곳의 말씀만 보고서 마치겠습니다. 히브리서 13:17절입니다. "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19절입니다. 이제는 장로 또는 목사에 대한 송사입니다. 두 세 증인이 없으면 장로의 송사는 받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로나 목사를 세울 때 신중하게 세워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2절에서 아무에게나 경솔하게 안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직분 자를 세울 때 안수하여 세우니 조심스럽게 직분자를 세우고 또 그러한 직분자에 대한 송사문제도 가볍게 다루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범죄 하는 것을 볼 때에 어떻게 하여야 할지를 마태복음18:15-17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5 네 형제가 4)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세 단계를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첫 번째부터 어긋나게 합니다. 만약 누가 잘못하는 것을 보았다면 그날 안에 전교인이 다 압니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하더라고 전화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꼭 하는 말이 너니까 하는 말인데 너만 알고 있어라. 그러지요! 그러나 정말 형제를 사랑한다면 혼자서 조용히 말해보고 들으면 형제를 얻은 것이요 안 되면 신실한 두 세 증인이 가고 그래도 듣지 아니하면 교회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에서 모든 사람들 앞에서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듣지 아니하면 이방인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안의 치리 문제는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치리나 재판은 언제나 주님의 심판을 염두에 두고서 행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감정이나 인맥이나 이해관계에 의하여 재판이 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송사문제가 발생이 되면 대부분 감정적 싸움으로 나갑니다. 서로 상대방을 마귀라고 몰아 부치는 것입니다. 여기는 변명도 이해도 설득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세상의 법정에까지 나가서 소송을 거는 부끄러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판을 하게 될 때에 자세를 2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엄히 명한다고 합니다.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라고 합니다. 치우치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송사나 재판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솔하게 안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직분 자를 함부로 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를 청빙하거나 장로를 세우고 안수집사나 권사를 세울 때 과연 무슨 목적으로 세우고 있는 것인지 우리 스스로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때가 되면 적당한 시기에 진급시키는 식으로 직분을 주어서 그 교회에 충성하게 하도록 발목 붙잡는 직분이 될 수가 있습니다. 또는 교회에 급한 재정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직분 자를 대량으로 세워서 감당하게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경솔하게 직분 자를 세워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22절을 봅니다. 경솔하게 안수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치 말라는 것입니다. 장로를 잘못 세우면 그것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기에 자기를 지켜 정결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교회에서 직분자를 세울 때 목사가 세우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목사라면 어떤 사람을 장로로 세우고 싶겠습니까? 그런 욕심에 이끌려 직분자를 세우게 되면 그것이 결국 쓴 뿌리가 되기에 경솔히 안수하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디모데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당부하는 말씀입니다. 23절입니다. 디모데가 위장이 좋지 않았나 봅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정결을 유지한다고 전혀 포도주를 마시지 않으니 바울이 디모데에게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합니다. 이것은 디모데가 자기 자신에게 지나친 엄격함을 가지고 있는 것을 경계하는 것으로 봅니다. 이렇게 되면 자칫 금욕주의로 흐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위장병과 또 다른 질병으로 인하여 약용으로 포도주를 조금씩 쓸 것을 권장합니다.
24-25절입니다. 결국은 모든 것이 다 드러나리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행도 드러나고 선행도 드러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다 밝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22절의 경고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어떤 사람은 직분을 세워놓고 나서 그들의 죄가 드러나는 자가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미리 드러나는 자도 있을 것이기에 안수를 할 때는 신중 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격에 대하여서는 이미 디모데전서 3장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직분자 세우는 것은 어떠한 현실적인 문제나 사심을 따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위에 서야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다 설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직분을 받았든지 아니든지 간에 주님 앞에 모두가 설 것이라는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신앙이란 예배당이 나오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가치관과 시간을 쓰는 것과 물질을 쓰는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말씀과 그 가르침에 착념하시면서 우리의 삶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서리라는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6:1-2 주종관계 2002. 10. 23
"1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찌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2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니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우리가 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왜 먹고 마시며 삽니까?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엇일까요?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이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이 훼방을 받지 않으니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이 훼방을 받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아니 종이라면 종의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서 자기도 주인이 되어야 하나님의 영광이 되고, 종업원이 평생 종업원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승진하고 창업하여 자기도 사장이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어떻게 평생 말단 종업원으로 있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는가? 이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본문이 기록될 당시에 종이란 노예입니다. 그런데 노예로 있으면서 주인에게 잘하라는 것입니다. 특히 믿는 상전이라면 같이 형제로 부름 받았다고 해서 가볍게 대하지 말고 더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형제를 잘 섬김으로 그가 유익을 받는 것이요 또 사랑을 받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디모데전서에서 계속보고 있는 말씀입니다만 디모데가 연소하다고 해서 업신여김을 받지 말게 하라고 하는 것은 디모데 자신의 권위를 세우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이 삼가 주의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업신여김을 받지 않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늙은이나 젊은이나 과부나 간에 어떻게 대하여야 할 것도 역시 영적인 유익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교역자에 대하여 배나 존경할 자로 여기고, 또 직분 자를 함부로 세우지 않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 종과 주인과의 관계를 말씀하면서 역시 하나님의 이름과 그 교훈이 훼방을 받지 않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의 가르침이 체제 순응적이지 않습니까? 노예제도가 철폐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그대로 있어도 상관없다는 것입니까? 상관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종으로서 주인을 더 잘 섬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오늘같이 민주주의의 꽃이 피어있는 세상에서 통할 수 있는 말입니까? 자유와 평등을 위하여 얼마나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싸워왔습니까! 우리나라의 역사에서도 민중혁명들이 일어났습니다. 외국에서도 왕과 성직자 귀족의 계급들을 무너뜨리고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얼마나 엄청난 피를 흘리면서 싸워 왔습니까! 그래서 이만큼이라도 살게 되었다고 보는 세상에서 종이 주인에게 더욱 순종하라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공생애 동안 한번도 사회변혁 프로그램을 제시하신 적이 없습니다. 도시문제나 농촌문제나 노동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사도가 예수님과 다른 노선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의 모든 가르침과 권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른 것입니다. 즉 성령의 지시를 받아서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구체적인 가르침으로 보이는 주인과 종에 대한 내용이 사람들에게 수긍이 가지 않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말씀을 봅니다. 마가복음 10:42-45절입니다. "42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 말씀은 제자들이 누가 서로 높으냐의 다툼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은 집권자들과 대인들이 권세를 부리지만 그러나 너희 중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과 완전히 다른 질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회변혁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어떻게 타락된 세상인지 얼마나 하나님의 창조의 모습과 거꾸로 되어 있는 세상인지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 세상을 갱신하고 개혁하고 바르게 세워서 될 일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구원받아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악한세대에서 자기 백성을 건져 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건짐을 받기 보다는 이 세상에서 높은 지위와 권세와 부귀를 가지는 것을 구원으로 보고 있으니 영원히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를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이제 주님의 말씀이 들리는 것이며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바울사도에게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20-24절입니다. "20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4)그러나 자유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 여러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할례를 받고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일부러 할례 받은 흔적을 지우려고 하지 말고 그대로 있고, 할례를 받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할례 받지 않은 그대로 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하여 아내와 메여 있다면 놓이기를 구하지 말고, 어떤 경우로 이혼을 하였던가 아니면 사별을 하였다면 다시 아내를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종으로 부름을 받았다고 해서 억지로 그 신분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 할 수 있다면 사용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또 다른 번역에서 자유 할 수 있어도 그대로 지내라는 말씀으로 번역이 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22절에서 23절입니다. 주님께 부르심을 받았다면 종이라도 자유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자라도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주님의 종인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자유자다, 나는 종이다. 라는 구분이 주님 안에서는 아무 쓸데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 자체를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아래 있다고 본다면 종이든 자유자든 모두가 마귀의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작 중요한 자유란 주님의 권세아래 있는 것이야 말고 진정한 자유라는 것입니다. 신분적으로 종이나 자유인, 신체적으로 장애인이나 건강한 사람의 구별이 예수 안에서는 무의미한 것입니다. 당신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지 지금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종이거나 주인 이거나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세상의 흔적은 지나가기 때문입니다(31절).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지나가는 이 세상의 흔적에 목숨을 걸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면서도 결국 세상의 영광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잘되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고 있고 그러한 말들을 우리가 믿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 영광을 가지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속이고 속는 것입니다. 모두가 그런 것들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승진하면 복 받았다고 하고, 전세에서 새 집을 사면 축복이라 하는 것은 아직도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이 너무나 좋아 보이기에 그런 것입니다.
에베소서 6:5-9절을 봅니다.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하여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1)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7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하고 사람들에게 하듯하지 말라 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9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줄 너희가 앎이니라"
육체의 상전에게 대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이 하라고 합니다.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그 상태에서 신분과 상황이 달라지지 않더라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역시 세상은 지나가며 내세가 있는 것입니다. 종이나 자유자나 모두가 주님 앞에서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에베소서에서는 종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상전에게도 말씀합니다. 자기 종들에게 공갈을 그치라는 것입니다.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체제 순응적인 것 같고 자기 신분의 상승이나 자아실현을 위하여 노력하는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더 자기 맡은 일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눈가림만 하지 말고 모든 일을 주님께 하듯이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종이라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라도 섬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역사들이 사람들 안에 나타나기 시작하자 구체적인 변혁프로그램이나 노예해방운동을 한 것이 아닌데도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는 노예 해방이 일어나고, 신분적 차별이 철폐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모습의 발전이 그대로 천국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발전 개념으로 본다면 민중 신학이나 해방신학이 말하는 세상이거나 여호와의 증인들이 말하는 왕국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러한 변화와 변혁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맛보는 것입니다. 맛보기이지 완전한 실현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힘과 노력과 지혜로 만들어내는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이상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주님께서 완전히 새롭게 창조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빌레몬서를 봅니다. 빌레몬이 어떤 사람인가 하면 4-7절에 나옵니다. 성도들을 사랑하고 바울을 사랑하여 여러 가지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 오네시모라는 종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어떻게 하다가 도망을 나왔는가 봅니다. 그래서 감옥에서 바울이 오네시모를 만나 복음을 전하고 그가 복음을 받아 들여 바울에게 아주 중요한 일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유익한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보내면서 오네시모를 형제로 맞이하라고 합니다. 노예가 도망갔으면 죽여도 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형제로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명령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22절에 보시면 바울 자신을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고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먼저 보내어 억지로 하지 않고 자의로 하게 하려고 빌레몬에 보내면서 하는 말입니다. 이 편지를 받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어떻게 영접하였을까요? 바울이 21절에서처럼 바울이 부탁한 말보다 배나 더 잘 하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원래 종이었던 이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어떻게 하였을까요? 건방지게 굴었을까요? 결코 아닐 것입니다. 정말 그리스도안에서 같이 형제 되었다고 하여서 함부로 행한 것이 아니라 더 주께 하듯이 하였을 것입니다. 전에 노예로 있을 때는 억지로 마지못하여 시키니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 안에서 다시 옛 주인에게 돌아갔지만 전과는 전혀 다르게 단 마음으로 주인을 섬겼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게 될 것인지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들의 모든 인간관계입니다. 이렇게 함을 통하여 결국 하나님의 이름과 그 가르침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더 약아빠진 사람이 되거나, 신세타령이나 상사들 욕이나 하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보거나 아니거나 간에 모든 일을 주님 앞에서 주님께 하듯이 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종이나 자유자입니다. 이런 삶을 맛보며 삽시다.
디모데전서 6:3-10 일만 악의 뿌리 2002. 10. 30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1)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4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6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홈페이지 게시판에 북한 성도에 대한 편지가 올라와 있어서 보았습니다. 우리가 모퉁이 돌 선교회의 소식지를 통하여 북한의 선교소식을 듣고 있습니다만 이 편지는 다른 선교단체에서 보낸 편지입니다. 북한이 어렵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굶어 죽어가는 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성도들은 굶어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비록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 못하지만 성도 가운데 어려운 자들이 있다면 십일조를 거두어 돕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에 카타콤 소식지에서는 여건만 허락되면 다시 예배당을 세우기 위하여 헌금을 모으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어려울수록 돈에 대한 위력이 커지고 따라서 소유에 대한 집착이 더할 것인데 오히려 돕고 산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경고를 두 가지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다른 교훈에 대한 경고와 나머지 하나는 돈을 사랑함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단이 나쁩니까? 돈을 사랑함이 나쁩니까? 둘 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이기에 꼭 같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악하다. 선하다는 기준을 언제나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기에게는 후한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악의 출처는 한 곳이기 때문에 돈을 사랑하는 것만이 일만 악의 뿌리가 아니라 모든 악의 뿌리가 한 근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악의 출발은 에덴동산에서입니다. 하나님과 같아진다는 사단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바라보니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래서 자기들도 하나님처럼 되고자 따 먹은 것입니다. 이 범죄가 모든 범죄의 뿌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자신의 욕구를 따라서 산 것입니다. 단 한가지의 요구를 거역하였습니다. 이것이 모든 거역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인간은 교만하여 졌습니다. 그 교만이란 자기가 자신을 책임지고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선과 악을 아는 지식과 먹고 사는 모든 문제도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것이 죄인된 인간의 본성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다른 교훈을 하는 자들입니다. 다른 교훈이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미 4:13절에서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바른 가르침에 착념하지 아니하면 결국 교만하여 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고 다른 교훈을 전하는 것이 이미 교만하여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교역자가 평신도나 간에 아무것도 알지도 못하면서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들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변론과 분쟁을 좋아 하겠습니까?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알아도 주님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변론과 분쟁을 통하여 자기를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복음입니다. 복음을 제대로 알게 되면 사실 할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입을 닫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함께 복음을 받은 자들은 자신들의 무능과 죄를 고백하고 복음이 주는 기쁨으로 인하여 주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고 교만하여 진 상태는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경건을 이익을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이 누구겠습니까?
미가서 3:9-12절을 봅니다. "9 야곱 족속의 두령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 곧 공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청컨대 이 말을 들을찌어다 10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11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 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12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 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
미가서 3:5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입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주지 아니하면 전쟁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고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고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칩니다. 그런데 그런 교훈을 받고, 점을 치기 위하여 누가 오는 것입니까? 백성들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서로 서로 한 통속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돈을 내니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무엇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재앙이 임하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령 제사장 선지자 백성 모두가 경건을 자기들의 이익의 재료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5장 30-31절을 봅니다. "30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31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 선지자들이 거짓을 예언하고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는데 백성들이 그것을 좋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결국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사용하는 것은 혼자만 될 일이 아닌 것입니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목사 혼자서 될 일이 아니라 그런 목사를 좋아하는 교인들이 많이 있으니 바울의 이런 경고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 시대나 사도들의 시대나 오늘 이 시대나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교를 가질 때 무엇을 계산하겠습니까? 이 종교를 내가 믿어서 무슨 이익을 얻을까를 계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보니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을 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끔 하는 이유는 개인이 돈을 사랑하면 탐심이라고 하지만 그것을 교회에 바치라고 합니다. 그래서 천국에 보물을 쌓고 더 많은 복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니 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바라는 것입니까? 자기들의 이익을 계산하는 것입니다. 서로 서로 짜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떤 계산을 해보아야 합니까? 경건은 이익의 재료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핍박이 옵니다.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의 바른 교훈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말씀을 들어야 합니까? 지금이라도 계산해 보고 따르든지 말든지 해야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계산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님을 따르려면 계산해보고 따라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라 나서겠다는 자들에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다고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따라 나서시겠습니까?
6-7절을 봅니다.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큰 유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가 되면 족한 줄로 알겠습니까? 사람마다 기준이 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수준에서 만족의 정도를 정하시지 말고 성경에서 만족하다는 수준을 말해 봅시다. 그 수준은 먹고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라고 하셨습니다. 왜 이것이 기준이 됩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듯이 갈 때도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입니다.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부족한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더 맛있는 것과 더 고급스러운 옷을 말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인 먹고 입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치나 자녀 학원비나 품위 유지비 같은 것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는 성경의 기준보다 부자들입니다. 그런데 왜 자꾸만 더 부자 되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탐심이라는 것입니다.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나 물질에 끊임없이 집착하는 것이나 그 뿌리가 다 한가지인 것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니 다른 것으로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다에서 소금물을 마시면 갈증이 더하듯이 아무리 채워도 만족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리를 향한 열정이라는 책에서 한 부분을 인용합니다. "사람들이 온통 돈버는 일에 몰두하는 것을 보고 코츠커는 속이 뒤집혔다. 사람이 먹고 살아가기 위해 일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왜 마음과 심장까지 모조리 재물을 쌓는 일에 쏟아야 한단 말인가? 네 손으로 일하여 그것을 먹으니 그것이 네 복이며 네 행복이라고 시인은 읊었다(시128:2). 인간의 손은 먹고 사는 일에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머리는 하늘에 두어야 한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손으로 일한 것을 먹을 수 있는 것이 복입니다. 아무리 농사를 짓고 회사에서 일하여도 자연재해가 오거나 회사가 부도나면 먹을 것도 없지 않습니까? 특히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것이 결정되기에 그들이 하나님을 거역하면 땅이 소산물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농사를 어렵게 지어 놓아도 적이 와서 빼앗아 가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그들의 삶이 그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언약 안에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시편 24:1-6절을 봅니다. "1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4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5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6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
이 세상과 그 안에 가득한 모든 것이 여호와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앞에서 살아갈 생각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돈을 구하며 사는 것이 죄인된 인간의 실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여호와를 찾는 자들입니다.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먹고 마시는 문제는 주님께서 다 채워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데도 자꾸만 부족을 느끼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모두 탐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지금 교회들마다 수능을 위한 기도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 인구를 100명이라고 본다면 백 명 가운데 대학을 나온 사람이 한명이랍니다. 그런데도 족함을 모르고 좋은 대학에 합격하게 해달라고 빌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지족하는 삶입니까?
결국 하나님보다 땅에 있는 것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있어야 자기 힘으로 살아간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른 아이들 학원가고 과외 하는데 우리 아이들이 하지 않으면 저들이 어떻게 살아갈까 생각하니 무엇이 필요한 것입니까? 돈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얼마나 돈의 위력을 절감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 섬기면 돈을 섬길 수 없고 돈을 섬기면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수많은 교역자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면 부자도 된다고 하는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자 그 말을 좋아하는 교인들이 몰려든 것입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10절을 봅니다. "봉독" 돈을 사랑하는 것이 미혹을 받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떠나 살려고 한 것이나 오늘 우리가 돈을 사랑하는 것이나 꼭 같은 모습입니다. 이렇게 됨으로 복음을 버리고 다른 교훈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믿음을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르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 모두는 회개할 것뿐일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정말 구하여야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주님만으로 만족케 하옵소서!
디모데전서 6:11-16 하나님의 사람아 2002. 11. 6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 하였도다 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
11절에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 위임받은 사람을 말할 때 사용합니다. 그렇다고 그렇게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말씀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디모데 같은 지도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어느 누구나 이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라는 말씀에 자기를 대입시키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먼저 피할 것이 있고 취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면 자기의 유익을 따라 피할 것을 피하고 취할 것을 취하면 됩니다. 또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지극히 당연하고 정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내가 내 마음대로 결정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와 지시하심이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은혜로 되었고 다음부터는 네가 알아서 천국까지 오라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보내셔서 늘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피할 것이다. 이것은 취하여야 한다고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피할 것이 무엇입니까? 지난주에 본 말씀입니다. 돈을 사랑함에 대한 것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합니다. 얼마나 돈의 위력이 대단하였으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겠습니까? 그 정도로 돈의 위력이 대단하기에 일만 악의 뿌리가 될지언정 돈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저는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서 얼마나 잘 아시기에 성경에 이런 말씀을 기록하여 놓았겠습니까? 이런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실상으로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취하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취하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시면 여러분은 어떤 느낌이 듭니까? 참 감사하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아니면 참으로 갑갑하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돈이 있어야 살아가는 세상에서 돈 되는 일은 피하고 돈이 안 되는 것을 취하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 앞에서 서지 않으면 자기가 돈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것을 정당하게 여기고 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듣고 있으면 오히려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모습은 피하라고 하는 것은 취하고 싶고, 취하라는 것은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을 봅시다. 하라는 것은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것은 잘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하라는 공부는 하지 않고 오락이나 하고 앉아 있을 때, 저 녀석이 누구를 닮아서 저런가? 하지 마시고 자기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라는 것은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것은 그렇게 하고 있는 자신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부모로서 아이들이 하라는 것은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고 있을 때 어떻게 합니까?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고 내버려 두십니까? 결코 그렇게 하지 않지요! 매를 들어서라도 자기가 할 일을 하게 만드는 것이 부모의 책임입니다. 때로는 상을 주어가면서도 부모로서 그 자녀를 바른 길로 인도하려고 할 것입니다. 물론 부모가 인도한다는 바른 길이란 것이 거의 자기 욕심입니다만 그래도 자기가 낳은 자녀이기에 그렇게 인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아란 그렇게 간섭하는 자가 없습니다. 잘못해도 나무라줄 부모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자유나 행복이 아닙니다. 그러니 고아는 부모 있는 아이가 부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부모 있는 아이는 고아가 부러운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로서 간섭받고 사는 것을 불행한 것으로 여기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도 아무런 제제나 어려움이 없는 사람들을 보고서 부러워한다면 이들은 아직도 아버지의 은혜가 무언지 제대로 모르는 자들인 것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피할 것을 피하고 취할 것을 취하라고 하시는데 늘 다른 길로 가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들로 받으시는 자기 백성들을 어떻게 대접하시는지를 히브리서 12:1-13절을 봅니다.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1)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ㄱ)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하나님의 아들로 부름을 받았기에 이제 믿음의 경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이 싸움을 하면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지 않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바라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믿음의 싸움, 즉 피할 것을 피하고 추구할 것을 추구하는 싸움을 싸우다 보면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더욱 절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주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의 경주를 하도록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조치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경주란 이미 영생이 주어 졌기에 하는 말씀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잘 하면 영생을 주마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주시고 믿음의 경주를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너희 마음에 주로 계시게 하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이미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말씀한 것입니다.
빌립보서 3:10-14절을 봅니다.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2)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3)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바울 사도가 이렇게 잡으려고 좇아가는 것은 아직 구원을 얻지 못하였기에 이렇게 달려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미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되었습니다.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울을 찾아오시고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삼아주신 그 놀라우신 은혜의 세계, 그 부르심의 상이란 것이 얼마나 엄청나고 대단한지 바울처럼 열심히 좇아가더라도 결코 다 알 수 없는 넓이와 깊이와 길이와 높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믿음의 경주를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저 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내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으니 내가 잘하나 잘못하나 예수 안에 있으면 하나님께서 사랑해 주신다고 합니다. 옳습니다. 이런 것을 복음이라,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서 결국은 내가 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정당화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 그런 거지 뭐! 죄인이 별수 있는가! 그런 말로 마땅히 추구해야 할 믿음의 경주를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경주를 하면 할수록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더 알기에 더욱 주를 바라보게 되고 더욱 주를 의지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은혜의 세계가 너무 좋아서 예전에 좋아하고 자랑하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는데 우리는 오히려 그 배설물들을 좋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 고삼들이 대학입학 수학능력을 보았습니다. 자기 능력 따라 대학을 가겠지요! 그런데 우리나라 대학의 단점이 무엇인가 하면 들어가기는 어려운데 졸업하기는 쉬운 것입니다. 그러니 대학 들어가기까지는 죽도록 공부하고서는 대학 들어가서는 죽자고 놀고 있는 것입니다. 프랑스 대학은 들어가기는 쉽답니다. 고등하고 졸업시험만 통과하면 어느 대학이라도 다 지원이 가능하답니다. 그리고 무료입니다. 그런데 1학년에서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80%를 탈락시킨답니다. 한번의 재수기회는 주어지지만 두 번 탈락하면 그 과에서 더 이상 수업을 받지 못한답니다. 그러니 우리나라와 프랑스의 대학의 실력차이가 어떻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입니까? 대학은 합격하였고, 탈락은 없으니 이제부터 놀기나 하자는 태도가 아닙니까? 그러나 정말 대학생이라면 이제부터 자기가 전공해야할 공부의 목표를 정하여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공부하는 사람이 대학생다운 것 아닙니까?
이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천국의 시민으로 당연히 취하여야 할 것들이 무엇인가를 봅시다. 디모데전서 6:11-12절입니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쫓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것들을 취하여야 영생을 얻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영생을 얻었기에 이러한 싸움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름을 받은 것은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추구하라고 부름을 받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주님의 은사들을 구하며 살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성령의 열매들입니다. 경건의 모양만이 아니라 의가 겸비된 경건입니다. 참된 믿음이라면 당연히 나타날 사랑이 있는가를 점검 해보라는 것입니다. 인내와 온유가 나오고 있습니까? 이것들을 위하여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위하여 부름을 입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을 산다는 것은 참으로 목숨을 걸어야하는 것입니다. 죽기를 각오해야만 이런 삶을 경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에서, 경쟁사회 속에서 이런 삶의 추구란 곧 죽음의 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길을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씀하시면서 세 가지로 엄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도 앞에서 진리를 증거 하신 것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영광 중에 계신 하나님을 말씀하면서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13-16절입니다. "봉독" 우리가 다 이 주님 앞에 설 것입니다. 그 날에 그 모습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주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피할 것을 피하고 취할 것을 취하는 믿음의 경주가 일어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부르심의 목적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날이 갈수록 주님의 그 은혜의 깊이 속으로 들어가서 피할 것들은 배설물같이 여겨지고 부르심을 향하여 달려가기를 소원합니다.
디모데전서 6:17-21 장래에 2002. 11. 13
"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20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21 이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찌어다"
오늘 말씀을 보면 여러분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부자 되려고 하지 말고 선한 일에 부하라는 말씀이구나! 그래 내가 욕심을 줄이고 선한 일에 나누어 주는 일에 열심을 내라는 말씀을 하겠구나! 이런 짐작이 갈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성경이 아니라 그냥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읽어 보고서 그래 모름지기 사람이라면 그렇게 살아야지 이렇게 긍정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계시의 책입니다. 무엇을 계시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하시는지를 계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무엇을 하시는지 이분이 정말 살아서 역사하고 계시는 분이심을 우리가 알고 믿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보아라!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으니 너희가 욕심을 버리고 이웃을 위하여 베풀면서 살아라! 그렇게만 말한다면 절에서도 말하고 세상의 윤리 도덕도 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구나! 역시 종교란 다 사람들이 서로 착하게 살자고 하는 것이지 그래서 가는 길은 달라도 결국 목적은 하나이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기억하여야 할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먼저 알고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약시대,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된 세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율법적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라 하지마라 하는 방식으로 자기를 세워나가게 되면 결국 남는 것은 자기의 행함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과 비교하게 되고 자신이 그래도 나은 사람인양 착각하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먼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하라 하지마라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하게 될 것입니다.
우선 19절 말씀을 봅니다. '장래에'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부하려 하지 말고 선한 일에 부하라 그러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생명을 취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내가 선행을 쌓으면 그 결과로 생명을 얻는다는 말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가 자기 선행으로 생명을 취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이 무엇을 하실지 알고 믿는 사람에게 나오는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는 장래에 대하여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주님의 나타나심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현재의 삶의 만족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 약속이 무엇인가를 성경전체에서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6:14-16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나타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여러분이 믿으십니까? 주님이 재림 하신다는 것은 주님께서 앞으로 하실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이 하실 일을 믿는 것이 믿음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로는 믿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말을 기다리며 장래를 소망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가증하다고 합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한다고 하지만 행위로는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하실 일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주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하실 일을 알고 믿는 자라면 당연히 주님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살지 말라고 하여도 무슨 소리하느냐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이루어 가실 주님의 성품에 대하여 계속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복되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복들을 말하지만 그러나 진정한 복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는 것, 즉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을 복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의 복을 모르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이나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마귀적이고 정욕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때 성도가 누릴 복이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둘째로, 홀로 한분이신 능하신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 같은 분이 없습니다. 그의 능력을 장차 온 우주에 나타내실 것입니다. 지금은 믿음으로만 보이지만 그러나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믿는 자이든 믿지 않는 자이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셋째로,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십니다. 지금 대선을 한달 여 앞두고 있습니다만 장래에 누가 확실한 대통령이 될지를 확증할 수 있다면 정치하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줄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힘 있는 쪽으로 움직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비열하다고 합니다. 그럴 수 있겠지요! 그러나 정말 자신의 목숨이 달린 일이라면 그리고 누가 대통령이 될 지 확실한 증거가 주어진다면 그 사람에게 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장래 일을 우리가 모르기에 이럴까 저럴까 방황하는 것입니다만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애매모호하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너무나 분명하게 자기의 영원한 이름으로 맹세하신 것입니다. 정말 확정적입니다. 그것을 성경전체가 계시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메시야가 오리라고 말씀하신 대로 메시야가 오셨고 구속의 사역을 이루시고 다시 재림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누구나 알고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알고 믿는다면 만왕의 왕이요 만 주의 주로 오실 분, 철장 권세를 가지시고 세상의 권세들을 질그릇 부수듯이 부수어버리실 만 왕의 왕으로 오실 분을 정말로 믿는다면 우리의 삶이 분명 이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넷째로,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습니다. 주님만이 영생이 있는 것입니다. 그 영생의 주님께서 허락하심으로 죽음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신 주님, 그분을 믿는다면 죽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죽어도 살겠고 하신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다섯째로, 아무도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볼 수 없는 분이 앞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이러한 속성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자기의 사역으로 말씀하시고 보여 주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일을 우리가 알고 믿는다면 당연히 어떤 삶이 나오겠습니까?
현재 내가 믿고 의지하고 사는 것을 믿지 않게 될 것입니다.
6:9-10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여기서는 부하려고 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부하려고 하는 자들은 결국 침륜과 멸망에 빠지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함으로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일하심을 믿지 않으니 모든 삶과 장래를 자기가 책임을 져야하니까 온갖 근심으로 살다가 주님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자가 되려는 자들에게 경고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이미 부자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17절을 봅니다. 디모데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에게 명하라는 말씀을 받습니다. 이미 부자가 된 자들에게 무엇을 명하라고 합니까? 마음을 높이지 말라고 합니다. 부자가 마음이 높아지는 것, 교만하여 지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족함이 없이 계속하여 마음을 높이게 되면 자기는 가난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라는 말씀에 비추어 보면 우리는 모두 부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이 높아져 있으면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자기는 가난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마음을 높이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라고 합니다. 재물이라는 것은 정함이 없기에 믿을 만한 것이 못됩니다.
그러므로 소망을 하나님께 두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소망을 둘 수가 있는 것입니까? 방금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17절에서는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후히 주셔서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우리가 늘 결핍을 느끼는 것은 이미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고 재물에 소망을 두고 있는 것이며 우리의 마음이 높아져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우리가 부하려는 자들의 경고를 받는 자들이 아니라 이미 부한 자들에 대한 경고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살아계시고 지금도 일하시고 계시는 주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제 다음의 말씀은 부담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말씀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지 못한다면 다음의 말씀을 부담스러워하고, 때로는 억지로라도 하려고 모양을 낼 것입니다. 미리 계산해 둔만큼만 구제도 하고 선교도 하고 헌금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후히 주셔서 누리게 하시는 주님을 믿으신다면 18절이 부담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18절을 봅니다.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들이 되라" 이것이 주님의 말씀을 믿는 자들, 이미 생명을 받고 믿음으로 사는 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율법적으로 행하고 지켜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생명을 얻은 자가 주님의 살아계심과 일하심과 그분의 약속을 성취할 것을 믿는다면 이런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당부를 20절에서 합니다. 디모데에게 바울사도가 부탁한 것을 지키라고 합니다. 그것은 바른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며,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고 합니다. 이런 자들은 이미 믿음에서 벗어났다고 말씀합니다. 믿음의 목표에서 벗어나 버린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미 1:3-4절의 내용입니다. "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처음에 경계한 것을 마지막에서 다시 강조함으로 서신을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경계하는 목적은 5절입니다. "5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을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바르게 알고 믿는 것입니다. 바르게 알고 믿는다면 당연히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오는 사랑으로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요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찌어다하면서 서신을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디모데전서를 마치면서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아셨습니까?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하실 지 또한 알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18절의 열매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열매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상태에 있는 것입니까? 주님을 알지도 믿지도 않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열매를 맺기 위해서 애를 쓰고 노력하여 열매를 맺자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절로 과실을 맺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믿음 없음을 인정하며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일과 믿는 일에 하나가 되도록 말씀을 배우고 익히는 일에 힘을 쓰시기 바랍니다. 말씀 안에 말씀 자체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