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골로새서 강해
골로새서 강해
창원 늘푸른교회 이장우 목사
골로새서 1:1-8 복음의 열매 2008. 7. 27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2 골로새에 있는 1)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2)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7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군이요 8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고한자니라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지난주에 누가복음의 마지막부분에서 본 것처럼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하셨고 성령이 임하면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되고 나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성령을 보내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40일간 지상에서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승천하신지 10일 만에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이 날이 오순절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게 되자 제자들이 복음을 전합니다. 그 복음의 내용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죄 사함을 얻게 된다고 증거 하였습니다. 요엘서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증거 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이름만이 죄 사함을 얻는 능력의 이름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한 사도들이 가는 곳 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 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4:12절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사도행전 16:31절입니다.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러한 그의 이름의 증거가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사마리아로 땅 끝까지 증거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누가 복음의 후편인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이 이렇게 복음을 증거 할 때에 이 복음 증거 하는 자들을 잡아 죽여야 마땅하다고 여긴 유대교에 열심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 일에 앞장 선 사람이며 얼마나 열심히 복음 전하는 자들을 없애버리려고 하였는지 외국에서 예수 믿는 자들까지 잡아 오기 위하여 대 제사장의 공문을 받아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바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특히 그의 전도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유대교에 열심을 낸 사람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을 얻는 다는 것을 증거 한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또 다른 곳에 가서 복음을 증거 하여 열매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골로새의 교회는 조그마한 성읍인데 이곳에는 바울사도가 직접 복음을 전하지 않은 곳입니다. 2:1절에 보면 바울의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1:7절에서 보면 에바브라에게서 배웠다고 하는 것을 보면 에바브라가 바울에게 복음을 듣고 자기 고향에 가서 복음을 증거 하여 세워진 교회가 골로새 교회인 것으로 봅니다. 이 골로새 교회가 복음을 받고 복음의 열매가 나타나고 있는데 거짓 선생들이 이곳에도 나타난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이 에바브로를 통하여 골로새에 전하여지고 이들에게 복음의 열매가 타나나고 있는데 거짓 선생들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 즉 이단들의 특징은 딱 한가지로 모아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함을 부인하는 쪽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은 모든 하나님의 언약을 다 이루신 것이기에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온전히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공로를 흠집 내는 것이 이단입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님을 피조물로 봅니다. 통일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실패이며 반쪽 구원이라고 합니다. 몰몬교는 새로운 계시가 미국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안식교는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알려진 이단들보다 더 교묘한 이단들이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믿느냐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6-31절입니다.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 심판에 이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가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증거 한 것처럼 골로새서도 거짓 선생들의 선동 앞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우주적인 필치로 증거 하고 있습니다.
우선 1:14-16절을 먼저 봅니다.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만물이 예수님에게서 창조되되 모든 것들이 다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고 그를 위하여 창조된 것입니다. 우주만물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까지도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된 것입니다. 이런 웅장하고 완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골로새에 편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1:1절을 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라고 합니다. 자신을 소개할 때에 자기가 사도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커녕 예수님을 이단의 괴수로 보고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는 것이 자기가 섬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개인의 결정으로 사도가 결코 될 수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전한 것은 바울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입니다.
편지를 받는 사람은 일차적으로 골로새 교회 성도들입니다. 그러나 이 편지는 오늘 우리에게까지 여전히 유효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편지를 받는 사람을 성도라고 합니다. 복음을 받기 전에는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똑 같았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받아들인 것 때문에 거룩한 무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도대체 복음이 무엇이기에 어제까지 세상에 속하여 세상의 것만 전부인줄 알고 살던 사람이 오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어떻게 거룩한 무리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성도가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타고난 능력이나 소질을 개발하여 될 수가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태어날 수가 없듯이 복음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도 결코 그 사람의 자질이 아닌 것입니다. 율법의 선생인 니고데모도 예수님 앞에서는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거듭나야 한다는 말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상태를 성경은 허물과 죄로 죽어있다고 합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 스스로 다시 살아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37장에 보면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신에 이끌림을 받아 한 골짜기에 갔습니다. 그곳에 보니 바짝 마른 뼈들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 뼈들이 살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에스겔이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신다고 답을 합니다. 그때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 대하여 대언하라고 합니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여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이 명을 좇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였습니다. 그러나 뼈들이 움직이듯이 서로서로 연결되어 사람의 골격이 되고 거기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였지만 생기는 없었습니다. 또 이르시기를 생기야 사방에서 불어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대언을 하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서 곧 살아나니 큰 군대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 함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지만 하나님의 언약과 사랑과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다시 회복하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는 일이 즉 마른 뼈가 살아나는 것과 같은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니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니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마른 뼈들을 조직하고 사람의 모습이 되고 또한 생기에 대하여 대언하니 생기가 들어와서 사람이 되어 일어나는 것처럼 복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이며 능력이기에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 말씀이 살과 피를 입으시고 오셔서 그 살을 찢고 피를 흘리심으로 자기 백성에게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증거 되는 곳은 어디서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이름을 들은 자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복음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게 된 자들을 성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입니다. 그냥 타고난 신실한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자들입니다. 이렇게 성도가 되는 것은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자 마른 뼈들이 큰 군대가 되어 일어나듯이 복음을 증거 하자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파하면 그것을 듣고 믿는 자들이 나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이 증거 되어 골로새 지역에 성도가 생겼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와 평강을 전하는 것입니다.
1-2절에서 이렇게 인사말을 하고서는 3-8절까지는 골로새 교회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한다고 합니다. 그냥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인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도 하나님을 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은 사람들마다 가지고 있는 자기들의 신의 개념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하나님이신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내신 하나님인가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내신 하나님은 인간의 욕망을 채워주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도 평소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어떤 하나님을 믿는가 하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하여 점검 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간증하는 하나님이 다 다릅니다. 그러면 도대체 바울 사도는 무엇을 듣고서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성도에 대한 사랑은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인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복음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며 이를 인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사람이 만들어 낼 수가 없는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믿음이 좋다고 자랑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결단코 자기의 믿음을 과시할 수가 없습니다.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게 되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의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십자가를 통하여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구하는 믿음입니다.
사랑입니다. 역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한 형제자매가 되었다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는 빈부귀천의 차별이 없습니다. 인종이나 피부색이의 차별이 없는 사랑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신 그 사랑을 받은 자이기에 용서가 나오는 사랑입니다. 긍휼이 나오는 사랑인 것입니다. 세상의 사랑이란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그리스도 안의 사랑이란 자기를 버려 형제의 유익을 위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형제 사랑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과 사랑이란 결국 하늘에 쌓아둔 소망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5절을 봅니다. 하늘에 쌓아둔 소망 때문인데 이 소망이란 곧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땅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땅에 소망을 두고 산다면 이런 믿음과 사랑은 결코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늘에 쌓아둔 소망이 있는 사람에게 이런 열매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골로새 교회에서 언제부터 나왔습니까? 6절입니다. 이 복음이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또한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란다고 합니다.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때가 언제입니까? 그런데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열매로 나옵니까? 없다면 회개하여야 할 문제입니다. 다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은혜를 깨닫고 난 날부터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다면 그것이 더 풍성하고 충만하여 열매로 나타나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부디 우리도 복음의 은혜를 깨닫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믿음과 사랑이 하늘에 쌓아둔 소망으로 인하여 더 풍성하여지고 충만하여 지기를 소원합니다.
골로새서 1:9-14 아들의 나라로 2008. 8. 3
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0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11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전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천국의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이후로 하나님의 나라가 아들의 나라로 증거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13절에 보시면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합니다. 전에 살던 나라는 흑암의 권세 즉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던 나라에서 이제는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하는 곳으로 옮겨놓으셨다는 것입니다. 나라가 달라졌기에 살아가는 방향과 목표도 달라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들의 나라는 어떤 곳입니까? 지난주에 본 말씀에 의하면 은혜와 평강의 나라이며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를 주신 것에 대하여 먼저 감사를 한 것입니다. 이 나라에 대한 소식이 복음이며 이 복음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그 나라의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의 믿음이며 같은 믿음의 형제들끼리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열매가 나타나는 것은 그 아들의 나라 곧 하늘에 쌓아둔 소망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아들의 나라로 소속이 옮겨졌기에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 알도록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9절을 봅니다. 골로새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음과 사랑이 나타난다는 이야기를 듣고부터 골로새 교회를 위하여 그치지 않고 기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첫째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이 주어져야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즉 아들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 곳입니다.
그러면 제일먼저 왜 이런 기도를 하게 되었을까요? 골로새 교회가 에바브로를 통하여 복음을 듣고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는 교회인데 이곳에 여러 거짓 선생들이 나타나서 예수 믿는 것만으로 부족하다고 하면서 율법의 행위나 신비체험이나 금욕적인 주장을 하는 자들이 나온 것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자기들의 가르침을 따르면 훨씬 더 믿음의 성장이나 고급한 신앙에 이른다고 말한 것입니다.
골로새서 2:16-23절을 봅니다. “봉독” 먹고 마시는 것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이 다 그림자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그림자를 붙들고 있는 자들이 실체를 붙들고 있는 자들을 폄론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 겸손함을 떠는 것입니다. 천사 숭배함과 그 본 것을 의지하여 육체의 마음을 좇아 과장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또 세상의 초등학문에 속하는 것과 같이 의식적인 문장에 순종하는 것과 육체적인 금욕들이 지혜 있는 모양으로 보이지만 육체 쫓는 것을 금하는 데 조금도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오는 것이 영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육체의 모양을 내는 육체적인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주장이 참으로 많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아주 초보적인 신앙으로 보고 고급한 신자가 되려면 방언을 해야 하고 신비체험을 하여야 한다고 하는 자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자들만이 아니라 삼박자 축복, 4단계 회개를 해야만 영적인 깊이에 들어가는 것처럼 말합니다. 수많은 교회성장 프로그램들을 제시하면서 자기들만이 예수님이 이 시대에 허락한 교회성장 프로그램이라는 식으로 선전합니다. 그러므로 골로새서는 이천년 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현실에 그대로 적용되는 진리의 말씀인 것입니다.
바울사도도 자람과 열매와 충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런 자들과 전혀 다름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의 자람과 열매와 충만함에 대한 것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생들은 예수 그리스도는 마치 통과 의례처럼 여긴다는 것입니다. 다 같이 예수님을 이야기한다고 비슷한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같아 보여도 끝에 갈수록 점점 더 크게 벌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다른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단이란 끝이 다르다는 말처럼 무엇이 최종 방향이며 목표인가를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첫째로 기도한 내용이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채워지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두 번째 기도의 내용입니다. 10절에서 주께 합당히 행하며 범사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자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열심히 일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하나님과 원수 된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서신을 쓰는 바울사도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다른 사람보다 훨씬 더 율법을 잘 지키며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였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채워지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역시 분별하게 되기에 범사에 어떻게 행할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까?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이 믿음의 삶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염려와 걱정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7:10절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세상의 근심은 세상을 최종목표로 여기는 근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하나님의 뜻에 최종목표를 두는 것입니다.
세 번째 기도제목은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선한 것이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선한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의 진선미를 가지고 선한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힘으로 나오는 것이 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선한 열매들이 나오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선한 열매인지 아닌지 어떻게 아는가 하면 어떤 일의 결과를 자기의 자랑으로 돌리는지 아니면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 하는지 그 사람 자신이 잘 알 것입니다.
네 번째 기도제목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라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예수님을 본 것이 보내신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쳐두고 다른 하나님을 찾는 것이 가짜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을 알아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18절에서 베드로 사도도 이렇게 증거 합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주어진 것을 아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 영광의 힘이란 2:15절의 말씀에 보시면 십자가의 힘입니다. 십자가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겼기에 승리요 영광의 힘인 것입니다. 이러한 능력을 에베소서 1:19-20절을 이렇게 증거 합니다. “봉독”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 앉히신 것이 하나님의 능력인데 이 능력으로 자기 백성도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앉히신 것입니다(엡2:5-6). 이러한 분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만물의 으뜸이 되시는 그 능력은 골로새서 1:18-19절에도 증거 합니다.
여섯 번째 기도는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견디고 참는 것은 편하고 좋은 일이 아니라 환난과 핍박과 고난의 상황입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 어떻게 기쁨으로 견디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현재 당하는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에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으로 주님의 그 영광의 날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 기도입니다. 12절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로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도록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닙니다. 이미 얻게 하셨기에 그렇게 해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골로새 교회는 복음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는 교회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교회를 향하여 바울의 간구는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 자라는 것입니다. 그 영광의 나라를 상속받은 자라고 인정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의 시민으로서 그 나라의 내용을 증거 하면서 알게 해 달라는 간구인 것입니다.
이렇게 일곱 가지로 나눈 것은 하나님께 이렇게 하여 달라는 부분을 나누어 보니 일곱 가지가 되었습니다. 이 내용을 한 가지씩 설교를 하면 일곱 번을 해도 부족한 내용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 설교 집을 보니 골로새서 1장만해도 책이 한권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기도들이 우리의 삶에 무슨 보탬이 되는 기도는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경제가 잘 돌아가게 해 달라거나, 자녀들의 취직을 위한 것이거나, 공부를 잘하게 해 달라거나, 세상의 영광을 위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습니까?
13절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놓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른 나라 시민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전에 오후에 잠시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시골에서 도시로 이사를 오면 시골에서 농사짓던 것 다 버리고 와야 하는 것입니다. 도시에서 농사짓는 도구들이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입니다. 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차이는 이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차이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렇게 죽자 살자 좋아하고 추구한 것이 그 나라에서는 아무 쓸모없는 배설물이요 쓰레기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아들의 나라에 배설물과 쓰레기가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예 들어갈 수조차 없습니다.
요한 1서 1:5절입니다.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하나님이 빛이시기에 하나님이 계신 곳이 빛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를 아들의 나라라고 합니다. 이 나라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21장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합니다. 그곳에는 사망이나 애통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는 있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 처음 것은 다 지나간 것입니다. 계시록 22장에서는 다시는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있으며 그 얼굴을 볼 것이며 다시는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흑암의 권세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이런 나라에서 어떻게 아들의 나라 빛의 나라의 기업을 얻게 된 것입니까? 14절입니다. 그 아들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겨지는 것은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죄를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피 즉 십자가의 피로 해결한 것입니다. 그래서 20절에 보시면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썩어질 기업을 받아도 그 기업의 경영을 알기 위하여 회장의 아들이라도 평사원으로 입사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하물며 영원한 하늘의 기업을 받은 자들이 그 나라의 비밀을 알아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 나라는 아들의 공로로만 들어가는 나라이기에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더 많이 알아가는 것이 자라는 것이며 충만함이며 열매인 것입니다. 이 소식을 바울사도가 전하는 것은 그의 받은바 사명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26:17-18절입니다.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어둠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것은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죄 사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신령한 지혜와 총명이 우리 모두에게 충만하여 우리도 그 나라를 자랑하며 증거 하기를 소원합니다.
골로새서 1:15-17 그분을 위하여 2008. 8. 10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사람이 어디에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저 이 땅에 태어났으니 보이는 세상의 풍습에 따라 살아갑니다. 이런 삶은 자기 마음과 육체의 원하는 바를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이 땅의 현실이 전부인양 그렇게 바쁘게 살아갑니다.
지금 가장 바쁜 사람들은 아마 올림픽 선수들과 그 가족들일 것입니다. 금메달이라도 하나 따야만 청춘을 바친 보상이 될 것이기에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금메달을 기원하고 있을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교회에서 기도할 것이고, 절에 다니는 사람은 절에서 기도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천지신명에게 빌 것이며 무신론자라고 하는 자들은 자기 자신에게 빌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얻은 것을 성경은 썩을 것이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9:24-27절입니다.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찌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고대 그리스에서 사람들은 육체미를 자랑하기 위하여 온갖 스포츠가 발달하였습니다. 그들이 절제하며 열심히 운동하여 면류관을 얻고자 하지만 그것은 썩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기 위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한 종류는 썩을 것을 위하여 달려가는 사람이고 한 종류는 썩지 아니할 것을 위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그래도 자신이 중간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역시 썩을 것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7-8절입니다.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심고 있습니까? 자기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거두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거두게 됩니다. 돈이나 권세나 명예를 원하면 그런 것을 거둘 수가 있지만 그것이 썩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둡니다.
그러면 썩지 아니할 나라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12절을 봅니다.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빛이신 하나님의 기업을 얻은 성도는 썩지 아니할 기업을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13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그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놓으신 것입니다.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사람만이 썩을 것과 썩지 아니할 것을 구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사람입니까? 이것이 사람의 지혜로는 알 수가 없고 오직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됩니다. 9절입니다. 신령한 지혜와 총명이 사람에게 들어와야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마을 수련회에서 잠언을 보고 들었습니다. 잠언서는 지혜서입니다. 지혜가 천지를 창조하였고 이 지혜가 소리를 내어서 부르짖고 있습니다. 이 지혜는 결코 사람이 가질 수가 없는 지혜입니다. 이 지혜가 스스로 활동하여 사람에게 들어와야 참된 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서 8:1절입니다. 지혜가 부릅니다. 22절에서 31절을 보면 이 지혜는 천지를 창조하기 전에 이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시는 바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지혜를 요한복음 1장에서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1-5절입니다. “1 태초에 1)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2)깨닫지 못하더라”
지혜요 말씀이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천지를 누가 창조하신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몰라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 안에 생명의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절에 이 말씀이 바로 예수님이신데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이 생명이 사람의 빛인데 이 빛이 사람에게 비추어지는데 사람들은 전혀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즉 사람 속에 참된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지혜도 없고 말씀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기도하는 내용이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채워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골로새 성도들이 들은 그 복음 즉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나사렛 예수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령한 지혜와 총명이 채워져야 신령한 복과 그 세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신령한 지혜를 가지고 두 가지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창조가 누구를 위하여 창조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아담이 범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범죄 한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아담이 곧 흙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낳은 자식은 아담의 형상입니다. 창세기 5:3절입니다. “아담이 일백 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아담의 형상이기에 천년을 가까이 살아도 죽었더라는 것입니다. 즉 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담의 후손이라는 것은 흙에 속하였다는 것입니다. 흙에 속하였다는 것은 땅에 속하였다는 것입니다. 땅에 속하였다는 것은 즉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흙에서 태어나서 흙에 속한 것을 먹고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전부인양 알고 살기에 오직 땅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하늘에 속하신 분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모두가 아담의 형상이기에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사람만 알아보는 것입니다.
15절입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사람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제쳐두고 하나님을 논하는 것은 다 엉터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자신은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말씀을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세상 신이 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3-6절입니다. “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고린도후서 4:7절에서 우리는 질그릇이라고 합니다. 흙으로 된 그릇인데 이 질그릇 안에 보배를 가진 것입니다. 그 보배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제 소속이 달라진 것입니다. 전에는 흙에 속한 형상만 입고 있었는데 이제는 하늘에 속한 분의 형상을 입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두운데 빛이 비취라고 하신 그 창조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은 새로운 창조가 일어난 것입니다. 흑암의 권세에서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이것이 실체로 드러나게 되는 날은 부활의 날입니다.
고린도전서 15:45-49절입니다. “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48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그 형상은 아들의 형상입니다(롬8:29).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을 이렇게 새롭게 만들어내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를 위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15절에서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님을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자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이런 구절을 가지고 예수님도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피조물이라면 어떻게 피조물이 피조물을 창조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먼저 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16-17절입니다. 만물이 다 예수님에게서 창조되고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된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이 다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된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라고 하는 것도 다 예수님이 창조하셨고 또 예수님을 위하여 창조한 것입니다. 만물이 유지되는 것도 예수님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지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우리가 믿습니까? 잘 믿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왜 잘 믿어지지가 않는가하면 세상 만물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강력하게 원하고 있는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죄라는 것이 천지 만물의 창조가 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창조되고 예수님으로 유지되고 예수님을 위하여 지어진 것인데 이것을 거부하고서 자신이 만물의 주인이 되고자 한 것이기에 이런 말씀을 우리가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살고 있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든지 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갈 것입니다. 만약에 계속하여 끝까지 항상 늘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사람입니까?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까? 열심히 자기를 위하여 사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상한 말로 들리지요! 구원받는 사람도 주님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고 구원을 받지 못하는 자도 주님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구원받는 자는 주의 긍휼이 얼마나 큰지 지옥가야 마땅한 죄인을 용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의 풍성함을 찬양하는 자로 지음 받은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평생 자기만 위하여 살다가 지옥 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가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로마서 9장에 보시면 에서와 야곱이 복중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바로 왕을 강퍅케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시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이 여기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어떤 그릇이든지 만들 권한이 있습니다. 로마서 11:36절에서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기에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습니다.
골로새서 1:18-20 교회의 머리 2008. 8. 17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모든 피조물이 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는 것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세상 사람들은 모르게 되어있습니다. 이 세상의 신이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도록 가리고 있기 때문에 알지 못합니다.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중심이 자기인줄 알고 착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모든 창조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누가 알게 되었습니까?
에베소서 3:8-11절입니다.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영원 전부터 감추어진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을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9-12절입니다.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이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살핀 것이며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고 믿게 된 무리가 교회인데 하늘과 땅의 비밀을 아는 곳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본문 18절을 봅니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고 합니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건물이 아닙니다. 따라서 사람이 만들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교회인 것입니다. 하늘과 땅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의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야만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지혜를 공급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근본이라고 합니다. 나무라면 뿌리가 있고 샘이라면 근원이 있듯이 교회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근원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이 부활의 주님께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이 임한 자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을 믿게 되고 증거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출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이 지상에 등장하였다는 것은 이미 종말입니다. 종말론적인 현상이 교회의 등장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그렇게 예언하고 증거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16-21절입니다. “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하였느니라” 말세에 성령이 부어짐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나나왔습니다. 이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요 근원이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만물의 으뜸이 되려고 하십니다. 만물의 으뜸이 예수 그리스도 이심을 교회를 통하여 알리시는 것입니다. 세상은 알지 못하고 삽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만물의 으뜸이 자기자신인줄 알고 삽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세상의 으뜸이 자기인줄 알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기는 하지만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 예수님은 자기의 으뜸 됨을 도와주는 분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 교회라고 이름을 갖고 있지만 실상은 교회가 아니라 사단의 회가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모습입니까?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있습니까? 날마다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시를 받고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자기의 행위를 믿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것이 무슨 말장난 같지만 잘 들어보아야 합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믿고 있는 증거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자신이 교회에 다닌다는 것입니다. 헌금을 한다고 합니다. 봉사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믿음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 구분을 어떻게 합니까?
골로새서 2:16-19절입니다.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8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골로새 교회에 무슨 문제가 있었습니까? 복음을 받았는데 다른 거짓 선생들이 들어와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라는 것입니다. 일부러 겸손한 자들도 있고, 천사숭배도 있습니다. 자의적인 숭배를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자의적이라고 하는 것은 머리의 지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이렇게 하는 것이 신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금욕을 하는 자들도 나옵니다. 대단한 열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육체를 금하는데 조금도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것이 자기 의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신비체험주의자도 있는 것입니다. 무언가 본 것을 의지하여 과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다 머리로부터 공급받지 않고도 나오는 모습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교회됨이란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시를 받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을 적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지시를 받고 있습니까? 저의 큰 딸에게 물었습니다. 너는 예수님의 지시를 받고 있는 것이 있느냐? 한참 생각하더니 억울해도 참으라는 말을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지시라면 너는 어떤 반응이 나오더냐고 물으니 나는 억울하면 못 참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빠는 어떤데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묻는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답변을 어떻게 했겠습니까? 나도 억울하면 열 받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지나고 나면 나의 억울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억울함이 생각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마는데 이것이 예수님의 활동성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지시를 늘 받지만 그 지시조차 영 마음에 들어 하지 않습니다. 늘 씩씩 대면서 예수님은 왜 나만 미워해! 이런 식의 반응을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씩씩거리는 것조차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 앞에서는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충만”이라는 태풍이 불어오는데 우리의 콧김이 당하기나 하겠습니까?
19절을 봅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한글이 이럴 때 참 어렵게 느껴집니다. 공동번역을 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본질을 그리스도에게 기꺼이 주시고” 이것도 어렵습니다. 새 번역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모든 충만함을 머물게 하시기를 기뻐하시고” NIV입니다. “For God was pleased to have all his fullness dwell in him” 하나님의 충만함을 예수님 안에 두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저는 이렇게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충만함이며 또한 예수님이 만물의 충만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는 하나님은 인간들의 상상의 하나님이며 예수님 없는 만물은 공허입니다.
인간들은 자기들이 빈껍데기인줄 모르고 빈껍데기에 자꾸만 무엇을 채워 넣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생명의 본질에서 단절되었기에 근원적인 결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핍이 무엇인지를 모르기에 계속하여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감각이 죽어있는 상태입니다. 영적인 감각이 죽어 있는 인간은 몸으로 느끼는 오감의 만족을 위하여 달려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채워도 만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서 1:8절에서 이렇게 증거 합니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인생이 이렇게 된 것은 첫 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아담의 후손들은 생명나무로 나아갈 길이 막혀진 것입니다. 뿌리 뽑힌 나무가 아무리 애를 쓰도 말라죽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것을 가지고 이것이 새롭다거나 충만하다거나 할 것이 없는 세상입니다. 날마다 허상을 따라 허겁지겁 달려가고 있으니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충만을 말합니다. 충만이란 완성이며 더 이상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모두가 원하지만 아무도 이르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 충만이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충만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던 인간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고 나니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오늘 우리가 보는 골로새서를 쓰는 이 바울사도가 경험한 충만함입니다. 그는 하늘나라를 보고 온 사람입니다. 그 충만한 은혜를 말로 다 할 수가 없어서 가히 사람의 말로는 이를 수가 없다고 합니다. 얼마나 좋았는지 온갖 어려움과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하늘을 소망할 수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하루라도 빨리 죽는 것이 낫다고 하였습니다. 그 충만의 세계를 맛본 것입니다.
또 한 사람의 충만한 사람을 봅니다. 스데반 집사입니다. 그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일곱 집사로 뽑혔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할 뿐 아니라 권능도 충만하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이 스데반 집사에게서 무엇이 나왔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의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습니다. 그래서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돌을 던지는 그들을 향하여 저들을 사하여 달라고 저들이 알지 못하고 저런다고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모습이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우리는 다 기가 죽습니다. 나는 그렇게 되지 못하는데 그러나 바울이나 스데반도 그들의 능력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능력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말입니까? 20절입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 입니다. 십자가의 피가 만물 곧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들이 화해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21절에 보시면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어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자들이 다 이랬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의 충만 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신 분이 자기 피로 값을 주고 사신 것이 교회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것들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힘으로 화평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올림픽을 하면서 서로 화합하자고 한문으로 화자를 만들어 내어도 수많은 소수 민족을 힘으로 누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값을 주고 우리를 구속하여 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머리되신 분이 자기 지체를 끝까지 돌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라면 반드시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돌보심이 있을 것입니다. 범사에 교회의 머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를 충만하게 받고 사는 성도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골로새서 1:21-23 터 위에 굳게 서서 2008. 8. 24
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
21절을 보시면 사람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있다고 합니다. 무슨 선한일이나 악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이미 마음으로 원수가 되어있기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있다고 합니다. 골로새 지역이 이방인의 지역이기에 멀리 떠나 있다는 표현을 하지만 그러나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롬3:9). 죄 아래 있고 죄 아래 태어났기에 거룩하신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있습니다. 그런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성경 말씀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인정하지 않더라도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 사람들이니 이런 말씀을 믿겠지요! 그러나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지 않고 삽니다. 교회 다니면서도 자신이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원수라면 당연히 진노를 받아 마땅하고 영원한 형벌이 처하여져도 유구무언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내가 무얼 거리 잘못했다고 하나님과 원수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다는 그 결과를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골로새서를 보면서 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모든 창조는 누가 무엇을 위하여 창조하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온 우주만물의 창조의 근원이며 유지자며 조정자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온 세상 만물이 눈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다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다는 이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밀을 세상은 알 수가 없고 오직 교회만 안다고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에 다닌다는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어떤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천지창조의 중심이며 만물을 그리스도로 통일하시는 그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기에 그저 시키는 대로 할 뿐입니다. 이렇게 사셨는가 하는 말입니다. 저도 한 주간을 돌아보면 주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사는 것보다 내 마음과 몸이 원하는 것을 먼저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니 종이 주인노릇 한 것입니다.
잠언서 30:21-23절을 봅니다. “21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22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23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이것이 세상을 진동하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서너 가지라고 합니다. 이것은 세상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위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견딜 수 없는 것이란 하나님이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종이 주인 되고 계집종이 주모되는 것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시겠습니까?
연속극이나 소설 같은 경우를 보면 종종 이런 주제가 나옵니다. 아주 큰 부자 집의 집사가 주인이 갑자기 변을 당하게 되면 주인의 재산을 가로채고 주인의 어린 자식들을 쫓아내는 그런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주인의 아들이 이런 사실을 알고 복수하는 그런 장면들을 보면서 우리는 주인의 아들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드라마를 보면서 자신이 그 악한 사람과 동일시하면서 보아야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2:1-9절입니다. “봉독” 한 사람이 포도원을 완벽하게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에 갔습니다. 때가 이르매 소출 얼마를 받기 위하여 종을 보내니 종을 잡아 심히 때려서 보낸 것입니다. 다시 종을 보내니 또다시 그렇게 한 것입니다. 또다시 종을 보내어도 때리고 죽이고 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내 아들을 보내면 공경하겠지 하면서 보냈으나 그 농부들이 이는 상속자이기에 죽여 버리면 이것이 우리 유업이 되리라고 하면서 잡아 죽여서 포도원 밖에 내어던진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말씀을 하셨는데도 예수님께 이 일이 그대로 일어납니다. 예수님이 주인의 아들이신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여 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런 예언이 이미 시편118편에 예언되어 있는 것입니다. 10-12절을 봅니다. “10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11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 12 저희가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버려두고 가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안다고 해서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인간이 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는지를 밝히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마음으로 원수가 되어있기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있다는 것이 이런 모습입니다.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인줄 알고 살뿐 아니라 온 세상이 자기가 주인인줄 알고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다는 증거를 하나만 더 보겠습니다. 야고보서 4:4절입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우리 중에 싸움과 다툼과 요란함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우리 지체 가운데서 나오는 정욕으로 인한 것입니다. 그 정욕이란 세상과 벗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벗 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있다는 것을 인정하든지 아니하든지 간에 현재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습이 세상의 중심을 자기에게 두고 사는 것과 또한 세상과 벗되고자 하는 모습은 인정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있는 것이며 악한 행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는 상태임을 인정하십니까? 우리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결코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자들이 어떻게 원수관계를 청산하고 화목하게 될 수가 있습니까?
22절입니다.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역하여 하나님의 아들을 죽여 버렸는데 그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화목의 제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20절에 보시면 십자가의 피라고 말합니다. 십자가의 피가 화평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비밀입니다. 어떻게 인간의 죄가 가장 궁극적으로 드러나는 그 사건이 동시에 하나님의 용서의 현장이 된다는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1:18-25절입니다.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하였으니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그러면 어떻게 마음으로 원수가 되어 악한 행실을 할 수밖에 없던 자들이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된 것입니까?
고린도후서 5:14-19절입니다. “봉독”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합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성도란 자기를 위하여 살수 없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집을 하면서 나를 위하여 살려고 해도 가만히 두지를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드신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을 어떻게 다루시는 것입니까? 18-21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한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신 것입니다. 그 화목이란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피로 이루어진 비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이 함께 나올 수 있는 유일한 자리인 것입니다.
시편 85편입니다. “봉독” 여호와께서 주의 땅에 은혜를 베푸셔서 야곱의 포로 된 자로 돌아오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은 주의 백성의 죄악을 사하고 저의 모든 죄를 덮으심으로 되는 것입니다.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구원을 우리에게 달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성도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 구원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면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는 방식입니다. 진리와 의대로 하면 심판을 해야 하는데 그 심판의 장소에서 긍휼과 화평이 입을 맞추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11-22절입니다 “봉독”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다는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또한 원수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받았다는 유대인들은 율법이 있고 할례와 안식일이 있다고 그래서 이방인과 다르다고 여겼습니다. 율법을 통하여 인간이 죄인임을 알게 하는 것인데도 자기들은 이방인들보다 낫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원수가 되어있었지만 이 둘을 십자가의 피로 한 새 사람을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상관없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한 몸을 만들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전한 복음의 내용이며 터가 됩니다.
이렇게 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은 22절에 나옵니다.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이 서려면 어디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의 육체의 죽음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 안에 있어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로운 피조물이며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터를 흔들려고 하는 자들이 골로새 교회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골로새 교회를 향하여 그들이 듣고 믿는 복음이 바른 복음임을 전하면서 흔들리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들은 복음의 풍성함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온 우주적인 내용으로 선포하면서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터 위에 굳게 서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너희가 들은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소망이란 1:5절에 하늘에 쌓아둔 소망입니다. 땅에 쌓아둘 수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골로새 교회 성도들만이 아니라 지금도 성도들이 무엇에 흔들리는가 하면 하늘에 간직된 소망이 아니라 땅에 마음을 둔 소망 때문에 흔들리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데 왜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가? 무언가 예수님을 잘 못 믿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닌가? 수많은 교회의 설교를 들어보면 하나님을 잘 믿으면 세상에서도 복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 말이 다 틀린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흔들림입니다.
그러나 이런 흔들림 속에서 무엇이 흔들리게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를 버리고 자기의 의로운 행위를 챙기기 위해서 나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입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증거 한 터란 한 가지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 터에 굳게 서는 것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이며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서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런데 이일조차 주님께서 이루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1:6절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이 터 위에 섭시다.
골로새서 1:24-29 비밀의 영광 2008. 8. 31
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오늘 본문에서 비밀이라는 말씀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왜 비밀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골로새 교회에 거짓 선생들이 나타나서 자기들을 따라야 영적인 비밀한 세계에 들어간다는 가르침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금욕주의나 신비주의자들 이었습니다. 그들이 유혹할 때 기존에 들었던 복음보다 자기들이 더 뛰어난 비밀한 영적인 지식들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단들도 이런 수법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자들의 공격과 유혹을 방어하면서 참된 비밀이 무엇인지를 증거 하기 위하여 비밀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면 무엇이 비밀이었습니까? 하나님의 계획하신 뜻이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1-13절을 봅니다. “봉독” 여기서도 비밀이라고 합니다. 이 비밀이 그리스도이며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셨지만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게 하지 아니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비밀이 알려졌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하늘의 천사들에게도 알려진 것입니다. 이 비밀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밀이 이제 밝히 나타났고 이 비밀을 증거 하는데 왜 고난을 당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마태복음11:25-27절입니다.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을 배척하는 자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느 누구도 천국의 비밀을 스스로 알아서 들어오는 방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미로를 찾아가듯이 어려운 문제를 풀어가면서 비밀에 접근하는 그런 식이 아닙니다.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숨겨버리고 어린아이 같은 자들에게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만이 안다는 이런 배타성이 싫다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아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10-13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0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1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되었나니 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한 대로 되는 것입니다.
24절을 봅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며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하니 예수님의 속죄가 미흡한 것처럼 들립니다. 그렇다면 골로새서 자체에 모순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2:15절에서 십자가로 승리하였다고 하면서 고난이 남았다고 하면 십자가가 부족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한 고난입니다.
왜 예수님의 몸 된 교회가 고난을 받는가 하는 것은 바울사도가 체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하면서 살 때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 잡아서 죽여서 예수의 이름도 부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러 가던 사울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이 예수님을 직접 핍박한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한 것인데 그것이 그리스도를 핍박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성도 안에서 즉 교회 안에서 함께 고난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운다는 것은 교회의 일군으로서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세상에서 당연히 받을 그 고난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난은 기쁨의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고난이 어떻게 기쁨이 됩니까? 바울의 고난이란 사람으로서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고난을 다 당하였습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그런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고난이 왜 기쁜 고난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핍박하던 자가 이제는 예수님의 몸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니 이것이 기쁘다는 것입니다.
25절입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자가 이제 교회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것이 결코 사람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교회의 일꾼이 된 것은 죄인 중의 괴수인 자신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증거 하기 위한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스스로 교회의 일꾼이 되겠다고 자처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과업을 스스로 만들어내어서 목표를 달성하겠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 자들은 골로새 교회에 나타난 거짓 선생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오늘날도 교회에 이런 일꾼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정하여 만들어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교회들이 교육관을 지으면서 비전센터라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자기가 스스로 일꾼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전하는 복음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내용만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일꾼이며 교회의 일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사도는 교회의 일꾼이 되어서 무엇을 하였습니까? 25절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을 펼쳐 보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뜻과 비전과 목표가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펼쳐내는 일에 자신이 도구로 쓰임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이루어내시는 계획이 무엇인지 이제부터 증거 합니다.
26절입니다.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사도의 증거도 봅니다. 베드로전서 1:9-12절입니다.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천사들도 몰랐던 비밀이 성도들에게 알려진 것입니다.
27절입니다. 이 놀라운 비밀이 이방인에게 얼마나 풍성하게 나타났는지 약 2천년이나 지난 오늘 우리들도 이 복음의 소식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백년정도 전해지다가 끝이 나버린 것이 아니라 약 2천 년 전에 증거 된 복음이 이 이방인 지역, 하나님도 모르고 율법도 없고 약속 밖의 사람들이며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인 우리에게도 이 비밀의 영광이 풍성하여 증거 되고 있다는 것이 경이롭지 않습니까? 2천 년 전에 주어진 이 말씀이 지금도 살아서 활동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밀의 영광입니다. 이 비밀이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광입니다. 그런데 이 영광이 밝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만 밝혀진 것입니다. 어떻게 알려집니까?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알게 됩니다. 이것은 또한 성령의 역사이기에 성령이 임함으로 알게 됩니다. 성령이 임한 것은 성령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에 성령이 임한 것이 곧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대와 만세로부터 감추어져 왔던 그 비밀의 영광이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안에 거하시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됩니다(고전12:3). 고백이란 내가 결심하고 결단하여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의 성령이 임하심으로 나오는 고백인 것입니다. 로마서 8:14-17절입니다.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기에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렇게 믿고 사시지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비밀의 영광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이비밀의 영광인 예수 그리스도가 또한 영광의 소망입니다.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세상의 썩어질 것이 아닙니다. 썩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할 영원한 영광의 나라입니다. 그 영광의 소망도 역시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이 영광이 아직 온전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소망입니다.
그러면 비밀의 영광이 나타났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다 나타난 것은 아닙니다. 오직 성도들에게만 영광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왜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모르는 것입니까? 그것은 십자가의 영광이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영광인데 이것이 세상에는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십자가가 저주 받아 죽은 십자가만이 아니라 그 안에 만대와 만세로부터 감추어져 있던 비밀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비밀의 영광이란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밀의 영광을 간직한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로마서 8:17절 말씀대로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이기에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와 함께 받을 영광이란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에 소망입니다. 이 소망으로 인하여 성도는 고난도 기쁘게 여기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닥치는 고난은 소망 안에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5:1-4절입니다.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현재 당하는 고난 중에도 즐거워 할 수 있는 것은 환난이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어내기 때문입니다. 그 소망이란 하나님의 영광 즉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28-29절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비밀의 영광이며 영광의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함은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완전하다는 것은 우리의 완벽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함이 얼마나 넘치는지 어떤 죄인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바울사도가 자신의 속에서 역사하시는 이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고 합니다. 비밀의 영광이 우리 안에 계시되었지만 아직 온 세상에 영광으로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곧 이 영광이 온 천하에 드러날 것입니다. 그 영광의 날을 소망하며 사는 사람이 비밀의 영광인 예수 그리스도가 마음에 계신 사람들입니다.
골로새서 2:1-7 하나님의 비밀 2008. 9. 7
1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4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5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의 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 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예수님을 따라나선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시고 먹을 것을 주시는 것을 보고 그들의 임금을 삼으려고 따라나섰습니다. 그 수많은 무리들을 보고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썩지 아니할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셨습니다. 지난 한 주간도 우리는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애쓰고 힘쓰며 살았을 것입니다. 과연 무엇을 위한 힘쓰고 수고한 것입니까?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바울사도가 교회를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지를 골로새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가 알기 원한다고 합니다. 자기가 힘을 쓰는 것을 알아달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위하여 얼마나 힘을 쓰는지를 알게 함으로 그렇게 힘쓰는 그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1:29절을 봅니다. 바울 사도 안에서 역사하는 이의 역사를 따라 자신도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애씀과 수고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1:28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지난주에 교회에 나온 지 한 달 정도 되는 분이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보다 중요하다고 하는데 자신도 동감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제일 뒤에 앉아서 한번 쭉 훑어보니 과연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는 세계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몇 사람이 되겠느냐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말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 찔림이 없습니까? 성경의 말씀은 믿음의 세계를 말하고 믿음이란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것 즉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이는 세계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보이는 세상을 포기하는 그런 사람을 찾아볼 수가 있는가 하는 질문에 누가 나설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조금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포기하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어느 누구도 자신의 행위로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하여 그렇게 애를 쓰고 힘을 쓴다는 것은 다른 차원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완전한 것입니다. 지금 골로새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에 거짓 선생들이 들어와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완전을 무너뜨리려는 자들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 얼굴을 보지 못하였지만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것 때문에 그들을 향하여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는 것입니다. 그 수고란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뿐 아니라 이렇게 복음의 편지를 써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사도가 그렇게 애를 쓰고 편지를 보낸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지난주에 본 대로 그것은 영광의 비밀입니다. 그 영광의 비밀은 그리스도이며 또한 영광의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비밀에 대한 말씀입니다. 지난주는 ‘비밀의 영광’인데 오늘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영원 전부터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져 있었는데 구약에서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들이 여러 모양과 여러 부분으로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지만 종말인 이제는 그 아들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1절을 봅니다. 바울사도가 그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얼마나 애를 쓰는지 알기원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의 수고를 알아주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서 2절에서 골로새 교인들과 라오디게아 교인들이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지금 골로새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에 거짓 선생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의 말을 들으니 불안감이 생긴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완전하게 되는가 하는 두려움입니다. 거짓 선생들이 예수 믿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영적인 신비체험이 있어야 한다거나 또 다른 금욕적인 모습들이 나와야 된다고 하면서 그들을 흔들고 있기에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비밀을 알게 되면 그들이 위안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이단들이 들어오게 되면 교회 안에서 분리가 일어납니다. 그들의 가르침에 따라 파당이 생기는 것입니다. 한편은 저 말이 틀렸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편은 그래도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할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완전하다고 할 수가 있는가? 무언가 내 쪽에서 내 놓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분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들에게 위안을 주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부요에 이르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 원만한 이해의 부요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그 안에는” 누구 안입니까?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 안입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왜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은 보화라고 하니 세상의 금은보화를 말하는 것으로 압니다만 지혜와 지식의 보화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비밀인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인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세상의 지혜와 지식이 아닌 하나님의 은사로 주어진 지혜와 지식인 것입니다(고전12:8).
고린도전서 2:1-13절입니다. “봉독” 1절에 하나님의 증거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증거’라는 말이 어떤 사본에는 ‘비밀’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비밀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2절에서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비밀을 전하기 위하여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헬라철학의 화려한 수사학으로 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될까봐서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전도가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 비밀의 내용이 6절부터입니다. 6절에서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온전하다는 것과 완전하다는 것은 비슷한 표현입니다. 그러면 이 온전한 자들이라는 말은 장성하다는 말인데 복음의 풍성함을 맛보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신앙 상담 란에서 복음의 초보적인 답변을 했다고 불쾌해 하셨는데 저는 복음의 진보가 무엇인지 잘 모릅니다만 바울이 증거 하는 온전한 자들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하고 말하는 자들입니다. 그 안에서만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들어있기에 무슨 말을 하든지 십자가가 증거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는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지혜가 아닙니다. 7절에 보시면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감추었던 것인데 하나님의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입니다. 이 지혜를 세상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세상의 관원이란 통치자들입니다. 유대의 종교적인 통치자들도 로마의 통치자들도 결코 알 수 없었던 지혜인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한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10절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이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는데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속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외에는 알 수 없듯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영 외에는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된 것이며 육에 속한 사람은 미련하게 보이게 되어 있기에 비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어떤 것들이겠습니까? 12절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입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이 무엇인지 말해 봅시다. 설교시간에 제가 일방적으로만 말하는데 이번에는 여러분도 말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애를 쓰고 노력하지 않아도 주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주와 지구입니다. 햇빛과 공기와 비입니다. 이런 것이 없다면 한 순간이라도 살아갈 수 없는 것들인데 모두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자동차가 없어도 텔레비전이 없어도 휴대폰이 없어도 다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7:24-28절입니다. “봉독” 하나님께서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기에 그를 힘입어 우리가 살며 기동합니다. 이 은혜는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야고보서 1:17절입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아버지께로 오는데 그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어디에 담아두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냥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담아두셨기에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게만 알리시는 방식입니다.
이 말씀을 볼 때마다 이런 예화를 말씀드렸습니다. 어릴 때 종합선물 세트를 받은 것입니다. 약 40년 전에는 과자가 귀하였습니다. 더구나 시골에는 더 귀하였습니다. 용돈도 없었기에 과자 사먹을 수도 없었을 때에 벌초한다고 모사한다고 손님들이 오면 가끔 과자를 하나씩 주는데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종합선물세트를 사들고 온 것입니다. 황홀한 것입니다. 얼마나 여러 종류가 많은지 그 여러 가지 과자류를 하나씩 맛보는 그 기쁨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이런 것과 감히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왜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다 들어있다고 하는 것입니까? 4절입니다.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모든 보화가 있는데 예수 믿는 것은 기본이고 이제는 예수님을 떠나서 더 나은 단계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십자가가냐고 말하는 자들이 우리 주변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므로 속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편 2편을 보면 대적이 무엇을 노리고 있는 것입니까?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을 받은 자에게서 끊어내려고 온 세상의 권세를 다 동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내려는 것이 사단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주 공교한 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노골적으로 부인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그런 이단들이야 오히려 구별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아주 공교하게 말하는 것은 분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분별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골로새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만이 아니라 오늘날의 교회들도 속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가 무엇을 자랑하고 증거 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어떤 곳은 예수님보다도 자기 교회가 우선이고 자기 목사가 우선인 곳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떤 곳은 예수님을 이야기 하는데 예수님 때문에 받는 선물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그 선물도 신령한 것이 아니라 그저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 하는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다 감추어져있기 때문 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생에 알아가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비밀을 알고 맛보아 가는 것입니다. 십자가 안에 이런 보물이 숨겨져 있었구나! 세상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환난과 핍박을 당하여도 오히려 기쁘다고 하는 세계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세계를 맛볼까봐서 두려워하지만 그러나 그런 두려움조차 날아가 버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맛보고 있는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교회의 소식을 들은 바울사도는 5절에서 기쁘다고 합니다. 몸은 함께 하지 못하여도 심령으로 함께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를 더 알아가라는 것입니다.
6-7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의 주가 되십니까? 주인이라는 말 정도가 아니라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의 칭호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분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 안에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다 담겨있어도 사람들은 알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은 자들은 아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만 이야기 하고 더 나은 영광을 이야기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뿌리를 박고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는 것입니다.
종합선물 세트 받은 아이처럼 새로운 봉지를 하나 열 때마다 설레고 기쁘고 그 선물을 주신 분에게 감사하듯이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상황이 범사에 감사하고 기뻐할 일임을 알아가면 좋겠습니다. 혹 세상에서 부요하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그것에 마음 빼앗기지 않는 기쁨을 맛보시고 혹 가난하게 되더라도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과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그 일들을 통하여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가며 사랑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32-39절입니다. “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33 혹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로 사귀는 자 되었으니 34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35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36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37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38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하셨느니라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비방과 환난과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것은 더 나은 기업, 영원한 기업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환난조차 기쁨이라는 이 놀라운 비밀!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모든 일이 다 감사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를 하나씩 캐내어 맛을 보아 갈수록 감사는 넘치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히브리서 11:13-16 더 나은 본향 2008. 9. 14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 로라 증거 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오늘은 고향을 찾아서 민족의 대 이동이 일어나는 추석명절입니다. 그래서 말씀도 더 나은 본향에 대하여 보고자합니다. 우리나라의 제일 큰 고유명절은 설과 추석입니다. 설은 음력으로 새해가 되었기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라면 추석은 추수감사의 뜻으로 조상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제사를 드리지 않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제사가 중심입니다.
그렇다면 구약성경의 명절은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23:14-17절입니다. “14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찌니라 15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찌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찌니라 16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17 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 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찌니라”
신명기 16장에서 이 세 절기에 대하여 더 상세한 내용이 나옵니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나온 것을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어린 양을 잡아서 피를 문의 인방과 설주에 바르고 그 고기는 불에 구워서 먹었습니다. 이때 음식을 먹는 모습은 신을 신고 허리에 띠를 띠고 지팡이를 들고 급하게 먹었습니다. 느긋하게 허리띠 풀고 앉아서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곧 떠날 차비를 하고서 먹었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애굽 전역을 칠 때에 오직 어린 양의 피가 묻어 있는 집만 넘어갔기에 유월절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절기입니다. 이 절기가 있기에 맥추절과 수장절도 따라 나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향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명절은 도심은 텅 비고 시골이 복잡해지는데 유대인의 명절을 시골은 텅 비고 예루살렘에 수 백 만 명의 순례 객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이들이 이곳에 와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고 또한 제사장들로부터 율법을 듣기도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태어나서 자란 고향을 찾는 명절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찾게 됨으로 그들의 근원과 뿌리가 사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있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16절을 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다고 합니다. 믿음을 따라 죽었다는 것은 직접 약속의 실체를 받지는 못하였지만 약속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바라보며 살았기에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다는 것은 본향을 찾는 것을 나타내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향이 자기들이 태어난 땅이라면 얼마든지 찾아갈 수가 있었지만 그런 본향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자들의 하나님이라 불림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합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한 이 사람들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1:1-3절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합니다. 오늘날 이 본문만큼 오해하여 보는 말씀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믿음을 말하고 꿈과 희망과 비전을 말하면서 이 본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하니 자기 마음에 무엇을 바라는 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보이지도 않지만 이미 이루어졌다고 믿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대한 꿈과 비전을 가지고 안 된다는 부정적인 말은 하지 말고 믿음대로 된다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이루어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장하는 내용들이 히브리서 11장의 내용과 전혀 맞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소개되는 믿음의 사람들이 무엇을 바라보고 살았는지 그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보면 결코 사람들의 바라는 소원을 이루어내는 것이 믿음의 실상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말 그러한지 처음으로 등장하는 아벨에 대하여 봅시다. 4절입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가인보다 나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결론이 무엇입니까?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는 땅에서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예배에 성공하면 인생에 성공한다는 설교를 많이 들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믿음의 제사를 드린 아벨은 땅에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5절입니다. 에녹은 65세부터 3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여 세상에 어떤 자취를 남긴 것입니까? 거부가 되었다든지 영광스러운 업적을 남긴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 저를 땅에서 옮겨가버린 것입니다. 데려가시기 전에 어떤 증거를 받았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3백년을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는데 하나님이 데려 가버린 것입니다. 이 당시에는 천년을 가까이 살았기에 다른 사람에 비하면 3분의 일만 살고 하나님이 데려가신 것입니다.
6절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가 계신 것과 그를 찾는 자에게 상 주심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상이 무엇입니까? 아벨은 죽임을 당하였고 에녹은 다른 사람의 3분의 1도 세상에서 살지 못하였는데 하나님께서 데리고 가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상으로 여기겠습니까? 예수님은 가장 완벽하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33세에 저주받아 죽는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상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것이 상입니다. 그 약속의 실체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7절입니다.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를 받아서 경외함을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선두주자가 아니라 의의 상속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도 노아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종말에 어떤 모습이 나타난다고 하셨습니까? 노아의 때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면서 그 심판의 날이 임하는 것을 알지 못한 것처럼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도 마찬가지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믿음의 사람이란 노아가 방주를 예비한 것처럼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어디인지 알지도 못하였지만 순종하여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그 약속의 땅에 살았지만 그들의 후손들이 약 400년 뒤에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땅조차 영원한 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장막에 거하였다고 합니다. 이것은 외방에 있는 것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 가나안 땅에서 타국인처럼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산 것은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본 것입니다.
11-12절입니다. 사라 자신도 늙어서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믿음으로 얻었다고 합니다. 이는 약속하신 이가 미쁘신 줄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사라도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약속을 믿지 못하고 웃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이삭을 받았다는 것은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실실하심을 믿을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 편에서 일하신 결과로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방식인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사람들이 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다는 것입니다. 더 나은 본향은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 땅에 속한 나라가 아닌 것입니다. 이 나라를 아들의 나라라고 합니다. 골로새서 1:12-14절입니다. “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지금 주일 낮에 보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히브리서와 창세기와 다 연결이 됩니다.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는데 그 아들의 나라는 이 지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2:22-23절입니다.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구약의 모세가 이른 곳은 시내산입니다. 그곳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는지 감히 접근 할 수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입니다. 이곳은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성도역시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사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1-4절입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성도의 별명이 흩어진 나그네입니다. 그냥 흩어진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흩어진 자들입니다.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베드로 사도가 편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이렇게 흩어진 자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아시는 자들입니다. 이 미리 아심은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입니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구별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새벽기도회 때 이 말씀을 벌초와 연결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래된 산속의 묘지들은 산인지 무덤인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벌초를 함으로 구별이 됩니다.
이처럼 성령께서 세상에 칡넝쿨처럼 뒤엉켜 사는 우리를 구별시켜 내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하여 구별하여 내시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구별하시는 것입니다. 성부 성령 성자의 사역이 이 한 구절이 다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역사하심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산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이 소망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는데 곧 하늘에 간직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오늘날 성도가 도대체 나그네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인용하였지만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볼 때에 교회가 보이지 않는 세계가 더 중요하다고 말은 하는데 아무도 그렇게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이는 세계를 보이지 않는 세계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기며 사는 것처럼 보이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믿는다고 하는 말들이 다 헛된 구호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사역이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반드시 자기 백성을 구별하셔서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들로 하여금 날마다 숨 쉬는 순간마다 어려움을 주시고 내 뜻대로 되지 않게 하셔서 이 세상에서 들어붙어 살고자 하는 우리를 떼어 놓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할 수밖에 없도록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가지 어려움과 낙심되는 일이 있더라도 주눅 들지 마시고 고향을 오가며 친척들을 만나면서 우리가 찾아야 할 본향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 본향임을 증거 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16절입니다.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하늘의 본향을 위하여 외국인과 나그네로 사는 자들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골로새서 2:8-15 십자가로 승리 2008. 9. 21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 정사와 권세를 1)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올림픽에서 승리하면 금 은 동의 메달이 수여됩니다. 그 메달을 목에 걸고 손을 들고 환호하는 관중들에게 답례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시면 희한한 승리를 이야기 합니다. 누가 보아도 승리가 아닌 실패와 저주의 죽음인 십자가를 승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보면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은 저주 받아 죽은 것이기에(신21:23)에 너무나 거리끼는 것이며 이방인들에도 십자가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십자가가 승리가 된다는 말입니까?
8절을 봅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 하라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골로새 교회에 이런 편지를 보내는 것은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가지고 노략질 하는 자들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속임이란 사람의 유전이며 세상의 초등학문을 좇은 것이지 그리스도를 좇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철학이라고 하면 흔히 헬라 철학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볼 것만은 아닙니다. 철학이라는 말자체가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지혜를 사랑하고 추구한다는 자들이 어떻게 속임수로 노략하여 나오는가 하면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기에 속임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요 구원의 능력이 되는 십자가를 멀리하게 만들고 더 이상 십자가에서 머물지 않고 더 나은 신비한 체험의 세계라든지 영적인 비밀한 지혜나 지식을 말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골로새 교인들을 노략하려 하는 것은 그때만의 일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철학이며 사람의 유전이며 세상의 초등학문인 것입니다.
사람의 유전이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다 있는 내용입니다. 유대인들의 유전이란 마가복음7:1-23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그 중에 4절까지만 봅니다. “1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2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의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3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4 또 시장에서 돌아 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괄호부분이 유대인들의 유전인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으니 예수님께 어떻게 당신의 제자들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느냐고 비난하며 질문합니다.
예수님께서 답변하시기를 이사야 선지자가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해 놓았다고 하시시면서 그 말씀을 인용하시는데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다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는 것은 사람의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의 가르침과 유전이란 세상의 초등학문의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가 있고 행할 수가 있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명은 무엇입니까? 그 마음의 문제를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속에서 무엇이 나옵니까? 21-23절입니다.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사람의 겉은 씻을 수가 있지만 속에서 터져 나오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가 있습니까? 사람의 유전이나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결코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유전이나 세상의 기초적인 원리라는 것이 다 선악과를 따 먹고 난 이후의 생각들이기 때문에 가르치는 자나 가르침을 받는 자가 다 선악체계 속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선을 권장하고 악을 배척하는 것으로 의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철학이며 사람의 유전이며 세상의 초등학문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철학이든 가르침이든 간에 다 이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이 알아들고 고개를 끄떡이는 내용들은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제시하는 하나님의 지혜와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알아들을 사람만 알아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사도가 증거 하는 내용이 무엇인지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9절입니다. 그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거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성이란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문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모든 영광과 능력이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기에 사람과 화해가 일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충만함이 예수님을 믿는 성도에게도 주어진 것입니다. 10절입니다.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해 졌다는 것입니다. 장차 충만해 질 것이 아니라 이미 충만해 졌다는 것입니다.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가 되십니다. 정사와 권세란 하늘과 땅의 모든 통치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권세를 다 받으신 것입니다(마28:20). 이 충만함이 성도에게도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골로새 교회에 이 예수그리스도의 충만함을 받고 있는 성도들이 세상의 철학이나 유전이나 초등학문을 가지고 미혹하는 자들에게 흔들리고 있기에 그러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골로새 교회의 문제만이 아니라 주님 오시는 날까지 계속될 문제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꾸만 예수님의 십자가로 마음과 눈이 가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다른 것에 기웃거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증거 되는 수많은 내용들이 정말 십자가에 못 박하신 예수 그리스도만 알고 그만을 증거 하고자 하는 것인지를 물어보아야 합니다. 분명히 예수님 이야기도 하고 십자가 이야기도 하는데 그것은 시작이고 그것을 속히 벗어나서 세상의 영광과 권세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중심에는 미국이야기가 나오고 그런 미국을 본받자는 것이 미국제 복음주의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의 금융가가 술렁거리고 있습니다. 주택담보대출로 휘청하더니 세계 4대 보험회사라는 곳이 부도가 난 것입니다. 국방부에서 금서로 정하여 더 유명해진 영국 캐임브리지 대학의 장하준 교수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미국 경제가 하수도로 쓸려 들어가는 꼴이라고 합니다. 이런 소식들을 들으면서 우리가 이 세상에 믿을 것이 없다는 것을 실감하시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믿던 모든 것들이 다 끊어질 날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야기하면서 세상의 것들을 받아내는 비결을 말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유전이며 세상의 초등학문이며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속임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에게 베풀어진 신성의 모든 충만함이란 도대체 어떤 것들입니까? 11절에서 손으로 행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모세가 받기 400년 전 아브라함 때부터 할례의 언약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 할례란 목숨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모세 율법에서 할례를 마음의 할례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행하는 할례는 누구나 할 수가 있지만 마음의 할례를 어떻게 행할 수가 있습니까? 마음에서 일어나는 온갖 죄악을 끊어내고 잘라낼 수 있는 방법이 사람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손으로 행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다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의 충만함에 참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할례는 육적 몸을 벗는 그리스도의 할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할례가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할례를 받게 되었습니까? 12절에서 세례라고 합니다. 세례란 우리가 물로 세례를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연합 된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면 그리스도와 연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인데 이것을 연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연합으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성도에게도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세례로 다른 말로 성령의 연합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나는 죽은 적도 없고 부활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일어났다는 것입니까? 그것을 체험할 수 있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란 예수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이것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믿음을 선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예수님 홀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12-13절에서 함께를 보시기 바랍니다. 함께 장사한바 되고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고 함께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3절에서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 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신성의 충만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함께 참여 시키셔서 모든 죄를 사하셨다고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의 권능은 율법입니다. 죄를 지으면 어김없이 율법이 찾아와 송사를 합니다. 너는 죄인이라서 죽어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에 율법을 받은 사람은 스스로 변명합니다. 내가 좀 더 노력하여 법을 더 충실히 지켜서 사망을 이겨 보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유대율법주의의 모습입니다. 반면에 이방인은 양심의 법이 이런 행위를 합니다. 로마서 2:14-15절입니다.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우리가 다 이런 모습에 붙들려 살고 있습니다. 스스로 송사하고 변호하고 하는 일이 늘 일어나고 있습니다.
율법이나 양심이 우리를 늘 송사하면서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시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합니다. 의문에 쓴 증서란 율법의 조문을 말하는 것인데 여기서 의문의 증서라고 하는 것은 마치 빚을 진 사람의 채무증서와 같은 것입니다. 빚을 지고 있는 사람은 빚쟁이가 얼마나 끈질기게 찾아오는지 경험 해 보신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영화 같은 것을 보면 조폭들이 집안에까지 들어와서 들어 눕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권능이 율법입니다. 죽어버리면 그만이 아닙니다. 죽어버리면 다시 살려내어서라도 죄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시고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입니다. 14절을 새 번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리한 조문들이 들어 있는 빚 문서를 지워 버리시고, 그것을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 가운데서 없애 버리셨습니다.” 죄의 빚은 사망입니다. 그 사망의 권능인 빚 문서를 지워버리고 없애버리고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이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완벽하게 해결된 것입니다.
15절입니다. 이 말씀을 공동번역으로 봅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권세와 세력의 천신들을 사로잡아 그 무장을 해제시키시고 그들을 구경거리로 삼아 끌고 개선의 행진을 하셨습니다.” 로마시대에 전투에서 승리한 장군이 개선을 하면 포로들을 무장해제 시켜서 줄에 묶어서 승리의 행진 대열 끝에 끌고 오듯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모든 통치자들과 권력들이 다 무장해제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의 조문이든 양심의 법이든 마귀의 송사든 간에 전부다 무장해제 되는 곳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그 안에서는 정죄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로 승리한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속임수에도 넘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 모든 충만함과 교제와 자유가 넘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16-19 그림자와 실체 2008. 9. 28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8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지난주에 십자가로 승리하였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유대인이 보아도 이방인이 보아도 십자가란 저주받아 죽은 죽음인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은 승리라고 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에 대한 승리입니까? 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신 것입니다. 또한 우리를 죄인이라고 몰아붙이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린 것입니다. 마치 갚을 수 없는 빚 문서가 있는데 이것을 대신 다 갚으시고 찢어버리신 것이 십자가의 승리입니다.
더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삼거리 분식집에서 된장찌개를 먹으려고 갔는데 그곳에 홍 집사님이 다른 분들과 식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식사를 하고 나가셨는데 나중에 밥 먹고 나가서 계산하려고 하니 이미 계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대신 밥값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몇 년 지났는데도 아직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체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은 그림자 같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성경이 실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그림자 같고 실체라고 하는 것은 그림자 같이 보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서를 보면 솔로몬이 무엇을 증거 하고 있습니까? 해아래 행하는 모든 것들이 다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솔로몬은 지혜도 있었고 부자이기도 하였고 권력도 있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사람들이 평소에 해보고 싶은 것들을 다 해보았습니다. 사업을 확장도 해 보고, 별장도 지어보고, 술을 마셔도 보고, 여자를 무려 천명이나 거느려도 보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 말이 이 모든 것이 다 헛되고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결국은 죽어가는 인생에게 무엇이 새롭다고 할 것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무엇을 가지고 저 사람은 성공하였다 실패하였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솔로몬이 말한 모든 것들을 기준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바람을 한번 잡아보려고 평생을 허덕거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말씀을 보면 실체를 붙들지 않았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승리를 기뻐하는 사람은 자신의 죄와 허물을 아는 사람만이 기뻐하는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와 허물이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여야만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아버지로부터 받아 보내신 성령은 거룩한 영이시기에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그 죄를 사함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임을 알고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승리임을 믿는 것은 중세시대 십자군이 십자가 마크를 달고 전쟁에서 승리하려고 한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앞세웠지만 탐욕의 다른 이름입니다.
16절을 봅니다.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연결하는 것은 바로 앞에서 말한 십자가로 승리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로 이미 승리한 것을 믿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까? 지금 골로새교회에 새로운 선생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승리라고 하는 복음을 듣고 믿었는데 그 십자가만이 승리가 아니라 다른 것도 더 추가하여야 더 고급한 신자가 되고 더 충만한 영적인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하는 자들이 나온 것입니다. 이들이 십자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단번에 알아채겠지만 분명히 이들도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교묘하게 그것으로 부족하다는 식입니다. 그러니 일리가 있어 보이는 것입니다.
이런 거짓선생들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가 하면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어야 할지 마셔야 할지 아니면 먹고 마시지 말아야 할지에 대한 금령들은 다 율법에 속한 것입니다. 또한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도 다 율법에 속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여주기 위한 그림자인가 하면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한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확실하게 실체라고 여기며 붙들 수 있는 것을 그림자라고 말하고 내가 확실하게 붙들 수 없는 믿음의 영역을 실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실체가 오기 전까지는 그림자의 안내를 받지만 그러나 실체가 오면 이제 더 이상 그림자를 붙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림자란 붙든다고 붙들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여기서 말하는 그림자란 너무나 잘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것들이기에 전혀 그림자로 여겨지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면 내가 어떤 음식을 먹고 아니 먹고 하는 것을 율법을 따라 지키는 것은 자기가 분명히 잡을 수 있는 실체로 여기는 것입니다. 또 절기를 지키고 월삭을 지키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얼마든지 실체라고 여기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다 그림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고를 디모데전서 4:1-5절에서도 보게 됩니다. “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3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4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자들이 귀신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양심에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림자를 실체라고 여기고 붙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들이 무엇입니까? 날과 달과 절기 안식일과 먹고 마시는 것들입니다. 또한 18절을 보시면 일부러 겸손한 것입니다. 일부러 겸손하다는 것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이렇게 보면 되겠습니다. 그저 주시는 은혜를 내가 미안해서 어떻게 받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사양할 수도 있고 또는 겸손하게 그 은혜를 갚아 내겠다는 식이 나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 천사 숭배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사를 숭배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성경에서는 천사를 섬기는 것이 아니기에 천사처럼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으로도 봅니다.
천사처럼 예배하는 것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천사들이란 하나님을 섬기는 영적인 존재들이기에 허물과 실수가 많은 사람들의 예배와는 비교할 수가 없겠지요! 그래서 우리도 아주 착한 사람을 보면 천사 표라고 합니다. 이런 경우가 오늘날에도 재현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은 결코 제사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우리의 죄를 위하여 다시 속죄할 제사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승리를 믿는 것이 예배요 죄 사함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예배를 어떻게 하는가 하면 열린 예배라는 것을 들어보셨지요! 완전히 한편의 멋진 뮤지컬 드라마와 같습니다. 예배를 디자인하고 리허설하면서 분초를 따지면서 음악과 배경과 설교가 함께 어우러지게 합니다. 그리고 예배 마치고 나면 예배기획자들이 모여서 다시 회의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제대로 되었고 무엇이 시정해야 할 것인가를 의논해서 실수하지 않게 합니다. 고객의 감동을 넘어서 고객을 졸도하게 할 만큼 예배를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주 열심히 예배를 드렸다고 하지만 예수님을 붙든 것이 아니라 얼마나 매끄럽고 세련되게 예배를 드렸는가 하는 것을 붙드는 것이 됩니다.
다시 정리해 봅니다. 먹고 마시는 것, 절기와 월삭이나 안식일, 일부러 겸손함, 천사를 숭배함 이런 것들이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인하여 너희의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이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원한 상이며 실체인데 이 상을 빼앗으려고 무엇을 대치시키는 것입니까? 그림자를 대치시키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도 주일성수를 붙들고 있습니다. 십일조가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림자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서는 많은 말씀을 드렸기에 구체적으로 다시 말씀을 드리지는 않겠습니다만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여전히 그림자를 붙들게 하는 일들이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줄 알았는데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다고 여기는 자신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줄 알았는데 자기가 다니는 교회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목사를 믿는 것입니다. 목사는 교회를 믿기가 쉽습니다. 교회에서 월급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목사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이런 것이라고 하면서 그림자를 붙들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들도 좋아하고 교회의 수입도 좋아지고 목사의 형편도 나아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만 줄기차게 전하면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입니다. 목사도 밥 먹고 사는 인간인데 그런 것을 눈치 채지 못하겠습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면 교인도 목사도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나갈까를 궁리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오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먹고서 성경을 보면 얼마든지 사람의 행위를 부추길 수 있는 내용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무엇이 그림자인지 실체인지 구별하지도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 복을 받고 이렇게 하면 저주를 받는 다는 이야기를 계속 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믿어서 세상에서 복을 받고 성공한 사람들 이야기를 설교시간마다 몇 개씩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충성하고 목사에게 잘하니 하나님이 복을 주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성경공부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집사님 중의 한분도 우리 목사님도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도 잘된다는 이야기를 좀 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런 이야기 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그런 것만 좋다고 붙들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승리를 말하지 않으면 이 땅에 교회가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 십자가의 승리가 아닌 이야기는 과장되게 되어 있습니다. 18절입니다. 그 본 것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상한 환상을 보았다는 그런 것을 말하지만 그러나 오늘날은 내가 어떻게 교회에 열심을 내었더니 복을 받았다는 것도 내가 본 것이 됩니다. 이런 것들은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간증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미혹하게 하는 영과 사단이 배후에 역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무엇을 노리는 것입니까?
19절입니다. 머리를 붙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머리가 되시는데 머리를 붙들지 못하게 함으로 머리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은혜와 은사를 막아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머리로부터 온 몸이 마디와 힘줄로 공급을 받습니다. 성도란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복이 바로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에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들이 아니라 영원한 죄 사함과 영원한 아들 됨과 영원한 기업이 모두다 우리의 머리요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그림자를 붙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를 붙들어야 산다고 말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골로새 교회나 갈라디아 교회나 오늘날 교회나 이단들이 노리는 노림수는 한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말씀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율법도 그림자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10:1절입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10:9-10절입니다. “9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것이 참으로 복이며 실체인 것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골로새서 2:20-23 어찌하여 의문에 순종하느냐 2008. 10. 5
20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21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오늘 말씀의 시작이 책망으로 시작됩니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에 세상의 초등학문에 다시 순종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세상의 초등학문에 속하는 의문에 순종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초등학문이 무엇인지 2:8절부터 다시 보겠습니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세상의 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세상 속에 살고 있으니 세상의 지혜는 누구나가 귀에 솔깃하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철학을 배우지 않고 논리학과 수사학을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고개를 끄떡이며 동의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의 유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남기고 전하여 온 것이기에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이방인들에게 해당된다면 유대인들은 의문입니다.
14절입니다. 의문에 쓴 증서란 율법입니다. 그런데 이증서가 무엇을 하는가 하면 거스르고 대적한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5:55-56절입니다. “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사망의 화살이 죄에 대하여 날아오는데 그 죄의 권능은 율법입니다. 율법이 죄를 죄로 드러내고 그 죄에 대하여 사망의 화살이 날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망의 화살을 예수님께서 대신 맞으신 것입니다. 죄 없으신 분이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사망의 화살을 다 맞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더 이상 이런 의문에 쓴 증서가 사망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이나 날과 달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로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일부러 겸손함이나 천사숭배나 본 것을 의지하지 말고 예수님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 하면 사망의 화살을 맞으신 것만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다시 살아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등극하여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어내신 이 일에 아무런 행함도 없이 함께 죽고 함께 살고 함께 하늘에 앉혀지는 은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믿지 않았느냐고 하실 분이 계시겠지만 믿음이란 은혜의 선물이기에 어느 누구도 자신의 행위를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11절에 보시면 손으로 행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유대인의 자랑이 할례인데 이방인인 우리는 할례도 행하지 않았는데 참된 할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육적인 몸을 벗는 것인데 이는 그리스도의 할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하신 일에 우리를 거저 넣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범죄와 육체의 무 할례로 죽은 우리를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모든 정사와 권세를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지난주간에 톱뉴스가 고 최진실씨에 대한 뉴스였습니다. 빈소에 ‘고 성도 최진실’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교회는 좀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신문에서 이렇게 보도한 것을 보았습니다. “악플이 진실을 죽였다” 온갖 소문들이 고인을 괴롭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외롭다, 세상 사람들이 섭섭하다, 죽고 싶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는데 인기가 있고 돈이 많고 가족이 있어도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게 괴로웠겠습니까? 의문에 쓴 증서가 아니라 인터넷에 쓴 악플들이 그를 괴롭힌 것입니다.
누가복음 7장에 보시면 동네에서 죄인이라고 알려진 한 여인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예수님께 나아와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러자 주변에 둘러선 사람들이 속으로 수군거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선지자라면 저 여인이 어떤 죄인인 것을 알 것인데 왜 가만히 두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자신을 초대한 바리새인 시몬에게 묻습니다. 오백 데나리온 빚진 자가 있고 오십 데나리온 빚진 자가 있는데 둘 다 갚을 능력이 없어서 둘 다 탕감하여 주었다면 누가 더 저를 사랑하겠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당연히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더 사랑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 시몬에게 말씀합니다.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는데 저 여인은 눈물로 발을 씻겼다고 합니다. 너는 내게 입 맞추지 않았는데 저 여인은 내가 들어올 때부터 내 발에 입 맞추기를 쉬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너는 감람유도 붓지 않았는데 이 여인은 향유를 부었다고 합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는 사람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동네에서 죄인으로 알려진 이 여인은 무슨 죄가 있었기에 죄인으로 알려졌겠습니까? 은밀한 죄야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죄인으로 알려졌다면 창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아랑곳 하지 않고 예수님께 나아와서 그렇게 한 것은 자신의 많은 죄가 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용서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누가 정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는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런 여자는 모세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의문에 쓴 증서는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군중들이 예수님께 와서 어떻게 할까를 묻습니다.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하는 질문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셨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부터 돌을 놓고 돌아섰습니다. 그 자리에는 돌 떨어지는 소리만 툭툭 들렸을 뿐입니다. 다 돌아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 누가 너를 정죄하느냐? 여인이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보내십니다.
그러면 여기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는 말씀이 또 다른 율법을 주신 것입니까? 어떤 형제가 이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사는 것이 죄 짓는 일인데 어떻게 또다시 그런 죄를 안 짓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마음에 음욕을 품어도 간음한 것이며 탐심이 우상숭배인데 어떻게 죄를 안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렇게 답변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정죄하지 않음을 믿지 않는 것이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용서 안에 있으면 세상의 어떤 소문이 돌팔매로 날아오더라도 상관없이 예수님 믿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종종 말씀드리지만 토요일 저녁에 부부싸움을 하여 눈에 멍이 들어도 교회는 나오라고 말입니다. 심지어 부부가 이혼을 하였더라도 다른 교회가지 말고 다니던 그 교회 나올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수군거리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바리새인 시몬과 같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정죄하지 않으시는데 누가 감히 정죄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다 하신 자를 누가 송사할 수가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승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8절부터 시작된 말씀의 최종 마무리입니다.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초등학문이란 이방인에게는 세상사는 원리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의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을 붙들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나의 행위가 다 부인되어지는 일일뿐 아니라 자신의 모든 행위가 죄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자랑이나 공로는 설 자리가 없는 것이 믿음의 세계이기에 이런 믿음은 결코 사람에게서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골로새 교회에 거짓 선생들이 들어와서는 예수님을 붙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다른 요소들을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거짓 가르침은 21절에서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22절에서 이런 모든 것들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마치 전염병균이 들어있는 음식물과 같이 취급하라는 것입니다. 병균이 있는 물건을 만지고 맛보고 붙잡으면 전염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왜 이런 가르침에 사람들이 흔들리는 것입니까?
22절에 보시면 사람의 명과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사람이기에 사람들의 가르침과 명을 따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본성에 맞지를 않는 것입니다. 내가 행한 대로 받겠다는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무엇을 선호하는가 하면 23절에서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훨씬 더 지혜로워 보이는 것입니다.
자의적 숭배가 어떤 것이겠습니까? 사무엘 상 15장에 보시면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셨을 때에 광야에서 최초로 공격한 족속입니다. 진멸이란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짐승과 금은보화도 다 진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이 양과 소떼 중에서 좋은 것을 남겨 옵니다. 사무엘이 책망하자 하나님께 제사 드리기 위하여 가져왔다고 합니다.
사무엘 상15:22-23절입니다. “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자기 딴에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고 하였으나 우상에게 절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삼상 13장에서는 군인들이 흩어짐을 면하기 위하여 사무엘이 오기 전에 제사를 드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자의적 숭배란 임의적인 방법으로 신을 기쁘게 하여 복을 받겠다든지 아니면 예배에 참석한 청중들을 기쁘게 하여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보려고 하는 모든 것들이 다 자의적 숭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사란 무엇입니까? 호세아 6: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나 번제가 아니라 인애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제사와 번제를 드리라고 하셨습니까? 그 제사와 번제를 드릴 때에 정결한 짐승의 대신 피 흘림을 보면서 네 자신이 그렇게 죽임을 당해야 마땅한 죄인인데 대신 피 흘림 때문에 네가 산다는 그 인애를 품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언제 사용하셨는가 하면 마태복음 9장에서 마태 세리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에 바리새인들이 힐난합니다. “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 라야 쓸데 있느니라 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교회란 이 긍휼을 입은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런데 이런 긍휼을 베푸신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일들이 바로 자의적인 숭배며 스스로 겸손한 체하면서 몸을 괴롭게 하는 금욕적인 것까지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육체를 제어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지혜로운 모습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참으로 지혜로운 모양 같지만 오히려 그런 행위자체가 육체를 부지런히 좇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이것도 육체를 좇는 것이다. 저것도 육체를 좇는 것이라고 하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대안이 무엇입니까? 그것에 대하여서는 3장부터 나옵니다. 오늘 우선 맛만 보겠습니다. 3:1-4절을 봅니다. “봉독”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면 땅에서 일어나는 어떤 칭찬과 영광과 어떤 악담과 괴담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유를 빼앗아 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골로새서 3:1-4 위엣 것을 찾으라 2008. 10. 12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여러분은 삶의 좌우명이 있습니까? 저의 딸이 어느 날 밥을 먹다가 자신의 좌우명은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는 것이라고 합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그러더니 6학년이 되어도 그 말을 하는 것을 보니 평생의 좌우명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2년은 가는 것입니다. 5학년 때 학교 담임선생님께 이 말을 써 보낸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분이라는 말을 듣고서 애들이 애를 먹이니 이 말씀으로 힘을 내라고 한 것입니다. 믿음이 있어서 그 말을 하는지 아니면 아빠를 보니 도대체 믿고 살만한 사람이 못 되어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후자인것 같은데 여러분의 좌우명은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을 보니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러나 이 말씀을 보는 순간이나마 우리의 좌우명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 말씀을 드리면 또 이런 설교를 한다고 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왜 땅의 것이 중요하지 않는 것처럼 자꾸만 그렇게 말하느냐고 하시겠지만 그러나 우리의 본성이 땅의 것을 추구하고 살기에 그것은 말하지 않아도 너무나도 다들 잘 알아서 땅의 것을 찾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강력한 본능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나마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정생활도 하지 말고 직장생활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위에 것을 찾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가정생활을 해야 하는지 직장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말씀이 이어지는 말씀에 나오고 있습니다. 3:18절 이하에서 남편과 아내와 자녀와 아비와 종들과 상전에 대하여 다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몽상가처럼 뜬 구름 찾듯이 위를 보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가정생활을 하든 직장생활을 하든지 간에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어디에 속하여 있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3:1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는 앞부분 전체를 받고 있는 것인데 몇 절만 보겠습니다. 2:6절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내가 살아서 주체적으로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모셔 들였다는 것이 아닙니다. 13절에서 범죄와 육체의 무 할례로 죽었다고 합니다. 죽어 있는 자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을 주로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우리를 넣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예수님 혼자만의 죽으심과 부활이라면 우리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떤 방식으로 넣어주시는가 하면 세례라고 합니다. 12절을 봅니다. 세례란 연합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6:1-11절을 봅니다. “봉독” 이것이 세례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묶여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으로부터 온 성령이 임하게 되면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다시 살리심을 받은 것이며 위로부터 거듭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만이 위엣 것을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살리심, 위로부터 거듭나지 못하였다면 아무리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여도 엉뚱한 것을 찾게 됩니다. 위에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내용물들이 다 땅에 있는 것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이 하는 말이 하늘에서 돈벼락이라도 맞았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위에서 무언가 복이 쏟아지기를 원하는데 그것이 땅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설교를 하고 있는 저 자신도 돈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수시로 일어납니다.
이미 소문 들으신 분은 아시겠지만 사택을 비워주어야 합니다. 집 주인이 직장 때문에 홍천인가 하는 곳의 사택에서 사는데 어느 날 출근을 하다가 쓰러졌는데 그대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나이 53세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 월요일 저녁에 그 사람의 친구 분이 삼오를 지내고 왔다면서 집을 비워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날 저녁부터 이제 이사할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다음날부터 2일간 전셋집을 알아보니 얼마나 가격이 올랐는지 몇 곳을 다니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겠습니까? 온갖 땅의 생각들이 다 들었습니다. 이 나이에 전셋집을 알아보러 다녀야 하는가? 로또 복권이라도 한번 사볼까? 이게 저의 수준입니다.
이러다가 불현듯 말씀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이번 주 본문이 위엣 것을 찾으라는 말씀인데 이런 사건을 통하여 내가 얼마나 위엣 것을 찾지 않고 사는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었다는데 믿음의 사람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았다는데 하는 말씀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스스로 위엣 것을 찾아 나설 능력이 없기에 주님께서 위엣 것을 생각할 수밖에 없도록 조치를 하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만약 내가 평소에 생각하는 대로 되었다면 위엣 것을 찾을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하늘을 쳐다봅니까? 땅에서 모든 일이 잘 될 때 쳐다보지 않습니다. 땅의 소망과 기대가 끊어질 때, 농사짓는 사람들은 비가 오지 않을 때 하늘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하늘을 쳐다볼 때 무엇을 생각하겠습니까? 제비가 박 씨를 물고 오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공중의 새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는 것을 보고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붙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말씀은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면 또 어떤 특징이 있는가 하면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됩니다. 베드로 전서 2:1-3절입니다.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버릴 것과 추구할 것을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말과 평행이 되는 말씀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다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면 위엣 것을 찾게 되는데 위엣 것이란 우리의 상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의하여 주어진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약속의 결정체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기에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찾는 다는 것은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만이 가능한 일이며 찾는 다는 것은 다른 말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2절을 봅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과 늘 거꾸로 살아갑니다. 목사가 위엣 것을 찾으라고 설교를 하면서도 내가 설교를 잘 해서 은혜를 끼치면 사람들이 땅의 것으로 보답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한다면 이것도 또한 땅의 것을 생각하는 설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엣 것을 찾고 생각하는 것도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라면 주님께서 자기의 몸이기에 가만히 두시지 않으시고 우리를 흔들어서라도 위엣 것을 찾고 생각하도록 조치를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어느 큰 부자가 있었는데 아들이 둘 있었습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달라고 합니다. 살아생전에 유산을 달라고 하니 이런 불효자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유산을 줍니다. 유산 다 날려버릴 것을 알고 주신 것이라고 봅니다. 유산을 몽땅 현찰로 바꾸어 외국으로 사업하러 갔습니다. 그게 사업이 되겠습니까? 아버지도 보지 않는 곳에서 유흥비로 다 날려버린 것입니다. 그때 마침 그 나라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취직을 할 수가 없습니다. 겨우 구한 곳이 돼지를 치는 곳입니다.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짐승으로 여기는데 그 돼지를 치면서 돼지가 먹는 것을 먹으려고 해도 배부르게 주는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때 아들이 어디를 보았을까요? 아마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를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내 아버지 집에는 종들도 다들 배부르게 먹고 사는데 나는 이것이 무슨 신세냐!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어서 아들의 자격이 없지만 품꾼의 하나라도 여김을 받게 해달라고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미 집 앞에서 아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집에서 순종한 큰 아들과 대비하여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즉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누가 흉년이 들게 하였을까를 생각 해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하나님을 비유하기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이 가서 장사하여 성공하겠다는 그 나라에 흉년이 들게 함으로 결국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도록 조치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이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위엣 것을 생각하도록 조치를 하실 것입니다. 믿었던 사람이 배신을 하고, 손해를 보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애매하게 고난을 받고, 온갖 어려움들이 닥칠 때 왜 내 인생이 이렇게 꼬이는가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위엣 것을 찾게 하시는 사랑의 손길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사소한 이익들로 인하여 이런 일을 당할 때에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는가 하면서 원망하지만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데도 우리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에 보시면 바울이 당한 고난은 자기의 욕심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다가 당한 고난입니다. 얼마나 심한 고난을 받았는지 살 소망 까지 끊어졌다고 합니다. 그런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신 것입니까? 자기를 믿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자기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의 어떤 능력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의 말씀대로 하면 세상의 초등학문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금욕적인 행위도 믿지 않습니다. 의문에 속한 것을 지킨다고 하는 것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들이 아무리 지혜롭게 보인다고 하여도 이런 것들은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에는 조금도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을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땅의 것이라고 한다고 해서 세상이나 세상의 속한 것들만이 아니라 세상적인 방법으로 위엣 것을 추구하겠다는 것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엣 것을 생각하고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시는 이 말씀의 성취는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에게 해당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리심을 받은 자는 우리가 영원히 거하여야 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찾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살았다고 하는 이 살아있음은 실상 죽은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만이 생명이 있는 사람입니다.
감추어져 있다는 것은 지금 성도들을 보면 세상에서 별 볼일 없어 보이기 때문에 감추어져 있어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상 사역과 그 결과를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볼품이 없었으면 그 얼굴에 침을 뱉었을까요? 손바닥으로 얼굴을 때리고 온갖 모독을 다 하고 십자가에 죽였을까요? 그 분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음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므로 땅의 것을 찾는 사람들의 눈에는 하늘의 생명이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도들 역시 이런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믿는 사람들도 여전히 세상에서 이런 대접을 받을 것입니다. 역시 생명이 감추어져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4절을 봅시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소망입니다. 이것이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을 생각하는 사람의 소망인 것입니다. 비록 지금 생명이 감추어져 있어서 세상에서 여러 가지 환난을 당하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다시 오실 그날에 예수님의 영광을 함께 입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들이 거의 다 이루어져 갑니다. 한 가지 남은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중에 재림하실 것입니다. 이 날을 생각하면서 위엣 것을 찾고 생각하며 살기 바랍니다.
골로새서 3:5-11 새 사람을 입었으니 2008. 10. 19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7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11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지난주에 위엣 것을 찾으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땅에 것을 생각지 말고 위엣 것을 찾는 다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기에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위엣 것을 찾는다는 것은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그 영광의 날을 소망하면서 사는 것이 위엣 것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아무에게나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어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과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다시 태어나야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면 과연 내가 거듭난 사람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는가 하면 땅의 것을 찾는가 아니면 위엣 것을 찾는가 하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교회는 다니는데 생각하는 것과 삶의 방향과 목표가 오직 땅의 것 만이라면 그 사람은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전혀 땅의 생각은 하지도 않고 하늘의 것만 생각하고 하늘의 것만 사모하며 사는 그런 사람이 됩니까? 과연 당신은 그러합니까? 이런 질문이 나올 것입니다. 저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땅에 발을 딛고 사는 한 계속하여 땅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몸을 가지고 밥을 먹고 배설하는 인간으로서는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왜 땅의 것은 생각하지 말고 위엣 것을 찾으라고 설교하는가 할 것입니다. 저의 고백은 땅의 것에 대하여 추구하며 사는데도 그 길이 막힌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것만이 삶의 방향과 목표일 수밖에 없도록 하나님께서 개입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만난 저의 주일학교 선생님이었던 장로님께서 자기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다 들어주셨다면 큰일 날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양으로 사는 것이 자기에게 가장 적합한 하나님의 조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을 봅니다. ‘그러므로’로 시작합니다.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면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위엣 것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위엣 것을 찾는가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다시 살리심을 받기 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옛 사람은 벗어버리고 이제는 새 사람을 입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새 사람을 입었다고 합니다. 새 사람을 입었기 때문에 전과 지금이 있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전에는 우리가 이러하였는데 지금은 이렇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에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5절에서 봅니다.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입니다. 이런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이런 죄 가운데서 살면서 이런 것이 죄라는 것도 모르고 그저 당연하게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은 골로새 교회만이 아니라 온 세상이 다 이러한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세상의 문제들이 결국은 탐욕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음란이나 부정 사욕 악한정욕 같은 성적인 탐욕만이 아니라 지금 세계적인 경제문제도 탐욕으로 야기된 것입니다. 또한 명예와 권력에 대한 탐욕도 다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것입니다. 로마서1:18-23절을 봅니다.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19 이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진노가 우상숭배에 임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어떻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먼저는 그대로 내 버려두는 것입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그대로 내버려 두시면 어떻게 됩니까? 24-32절중에 목록만 봅니다. “봉독” 골로새서 3:5-6절을 확대한 것이 이런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란 이런 상태 그대로 내버려 두시는 것이 진노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이런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새 사람을 입게 하셔서 간섭하여 나서시는 것입니다.
7절을 봅니다.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죄악 가운데 살면서도 하나님의 진노를 모르고 어떻게 하면 좀 더 나의 욕망을 채울까만 생각하면서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을 서로 옳다고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세상의 사람들을 욕할 것은 못되는 것입니다. 그들과 똑 같은 우리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별하셔서 새 사람을 입혀놓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새 사람을 입고 보니 그런 것들이 죄인 줄 드디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더러운 욕망과 탐욕들을 죽이라고 합니다. 3:5절을 봅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사지백체만 우리 몸의 지체가 아니라 우리의 탐심들이 우리의 지체처럼 들어붙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지체들을 어떻게 해야 죽이는 것입니까? 사마귀를 때내는 방법을 아십니까? 머리카락으로 사마귀 뿌리 부분을 꽁꽁 묶어두면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하여 몇 주 후면 상처도 없이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갑니다. 그런데 마음에서 일어나는 이런 것들을 어떻게 하면 죽일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죽인다는 것을 다른 말로 벗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고 하는데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고 합니다. 땅의 지체를 죽이고 벗어버리는 일에 먼저 말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9절에서도 거짓말을 말라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에 가득한 것이 입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또 말이란 이상해서 마음에 가만히 있는 것들을 말로서 격동을 시킵니다. 마치 말이 뇌관과 같이 마음의 탐욕을 터뜨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6절입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이런 말씀을 다시 종합해서 말씀하는 곳을 봅니다. 에베소서 5:1-14절을 봅니다. “봉독” 골로새서는 새 사람을 입었다고 하는데 여기서는 사랑을 입었다고 합니다. 사랑을 입은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 사랑을 입었기에 너희도 그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고 합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않다는 것입니다.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진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과 함께 하지 말라고 합니다.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믿는 다는 것은 전과 지금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전이 다 날아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전의 것이 더 이상 주장하고 다스리지 못하는 영역에 들어온 것이 지금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전과 지금을 표현합니다. 전에는 죽었던 자이고 이제는 산 자라는 것입니다. 전에는 옛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새 사람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서 여전히 옛 사람의 모습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에 이 권면을 하고 골로새 교회에도 권면을 하고 오늘 우리도 이 말씀을 읽고 보면서 권면을 받는 것입니다. 지금 너희가 어떤 사람이냐는 것을 묻는 것입니다. 이런 책망을 받는 것이 비록 듣기에는 괴로울 지라도 이것이 우리들로 하여금 빛으로 나타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에베소 5:13절을 봅니다.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의 책망을 달게 받을 수가 있다면 그것은 빛으로 드러납니다. 말씀의 책망이 싫으면 아직도 어둠에 속하여 어두움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속의 모습이 말씀을 통하여 드러나게 되는 것이 빛으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히브리서 4:12-13절입니다. “봉독” 그러므로 말씀을 읽고 보고 듣고 그 가운데 기록된 대로 지키는 자는 복이 있다는 것은 수술을 받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몸에 암 덩어리가 있다면 수술하여 도려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들이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으려면 수술실에 들어오지 않으면 됩니다. 그저 수양이나 하고 도나 닦는 곳으로 가면 됩니다. 절에 가셔도 얼마든지 좋은 말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그리고 해탈에 이르려면 어떻게 바르게 수양해야 하는지 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우리의 모습을 책망하고서는 이제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새 사람답게 살라는 말씀이 불교의 가르침과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바울서신을 보아도 앞부분은 복음을 말하고 뒷부분은 복음을 받은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기에 이제 새 사람을 입었으니 새 사람답게 살자고 하는 것이 무엇이 잘 못 되었는가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러하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것은 반쪽밖에 되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지기 까지는 내가 이루어 내었고 그 다음에 믿고 바르게 살면서 천국까지 오기는 너의 책임이라고 한다면 반쪽 복음인 것입니다. 아니 그래도 골로새서만 보아도 1장부터 2장까지는 하나님께서 흑암의 권세에서 우리를 끄집어 내어서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하나님의 일을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3장부터는 그러므로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고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하고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하지 않습니까?
그에 대한 답변은 10절입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 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는 것입니다. 새롭게 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수동태입니다. 하나님께서 새 사람이라고 말씀하시고서는 새 사람으로 만들어 내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인 것입니다. 학교 다닐 때 무서운 선생님이 오시면 죽었다고 복창하라고 합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죽었다고 복창하는 것입니다.
창조주의 하나님의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골1:15)를 본받도록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누가 꺾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죽었다고 복창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날마다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새겨지는 것입니다. 옛 사람을 죽이시는 것입니다. 벗겨버리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탐욕을 위하여 살다가 그 탐욕의 무덤에 들어가겠지만 우리는 그런 것들이 깨어지고 부수어지고 잘라내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죄 인줄 알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도록 하는 것이 다 새롭게 하심을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리하여 지식에까지 새롭게 됨을 우리가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입니다.
11절을 봅시다. ‘거기는’ 즉 새 사람을 입은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이곳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의 분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헬라인과 유대인이 차별이 없다는 것은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선민이라고 여기는 자기들과 짐승 중에도 부정하게 취급되는 개나 돼지와 같다는 말이 됩니다. 야만인이나 문명인의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종과 자유인의 구별이 있을 수가 없는 곳이 새 사람을 입은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곳에는 예수 그리스도만 만유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만유(萬有)라는 말은 모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all 입니다(Christ is all, and is in all). 그리스도가 전부인 사람에게 더 이상 분별은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 되도록 만들어 지는 사람이 새 사람을 입은 사람입니다.
골로새서 3:12-17 주 예수의 이름으로 2008. 10. 26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금요일 성경공부시간에 ‘어떤 분이 목사님 어디가세요?’라고 물었습니다. 평소에는 양복을 입지 않는데 지난 금요일에는 문상가려고 양복을 입고 왔기에 그렇게 물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다른 장소에 가려면 그곳에 맞는 옷을 입습니다. 학교를 가면 교복을 입고 운동하러 가면 운동복을 입고 일하러 가면 작업복을 입습니다. 그런데 천국에 가려면 어떤 옷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까?
로마서 13:11-14절입니다. “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13 낮 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옷처럼 입는 것입니다.
옷을 입기 전에 먼저 벗어야 할 옷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난주에 보았는데 한 번 더 보도록 합니다. 5절부터 9절까지가 벗어버려야 할 것입니다.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입니다. 이런 탐심이 곧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이런 우상숭배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 이 가운데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시 살리심을 받았기에 이런 것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벗어야 할 것들이 우리의 팔다리처럼 몸에 들어붙어 있기에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도 아울러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새 사람을 입는 것은 주님께서 입혀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10절을 봅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함을 받는 것입니다. 결국 새 사람이란 이미 입혀졌다고 말씀할 뿐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은혜를 받고 사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그 어떤 차별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만유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 모든 것이 되는 사람은 세상의 그 어떤 것을 가지고도 분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나 아직 지상의 교회는 온갖 잡동사니가 함께 모여 있는 것입니다. 양도 있고 염소도 있고 이단도 있는 것입니다. 지상의 교회가 왜 이래야 하는가 하면 성도가 가야할 궁극적인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갈 옷을 입었기에 그 옷의 가치를 날마다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미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끄집어내어서 그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 놓았기에 이제는 그 아들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큰일 났습니다. 그동안 그렇게 좋아하던 세상의 것들이 떨어져 나가고 하늘의 신령한 것으로 채워져야 하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복음이 아니라 고음이 될 것입니다.
12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새사람을 입은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자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부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입니다. 먼저 택하심을 봅니다. 요한복음 15:16절입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하여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거룩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거룩함을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택하신 자를 구별하여 내시는 것이 거룩함입니다. 히브리서 10:10절입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거룩함이란 예수님의 몸을 십자가에 제물로 드리심으로 우리가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일서 4:10절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이런 말씀을 보시면 그 정도는 우리도 압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사랑하셨기에 이제는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살라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말씀하실 분이 계시겠지만 이것은 또다시 너무 성급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거룩함과 사랑을 받은 자답게 사는 것이 이미 구약에서 실패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명기 7:6-8절을 봅니다. “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또는 너희 열조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을 인하여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 여기서 하나님의 선택과 사랑이 나옵니다. 거룩함도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어린 양의 피로 속량한 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택함과 사랑과 거룩함을 입은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이어서 나오는 말씀에 봅니다. 9절에서 11절입니다. “9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되 10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는 당장에 보응하여 멸하시나니 여호와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에게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당장에 그에게 보응하시느니라 11 그런즉 너는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찌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말씀대로 순종하겠다고 말은 했지만 결국 순종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한 방법으로 신약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너희가 하나님의 택하심과 거룩함과 사랑을 입은 자로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으라고 한다면 은혜아래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율법아래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나오는 이 다섯 가지 목록들도 다른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구원이 됨을 신구약 성경이 다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 긍휼과 자비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를 지기까지 겸손하셨으며 온유하시고 오래 참으심이 우리의 구원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과 신약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주도권의 싸움입니다. 구약에서도 택하심과 거룩함과 사랑을 받은 자들인데 자기들이 말씀대로 살아보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철저하게 실패한 것입니다. 그 실패란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인간의 죄가 얼마나 엄청난지 자기 의를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내가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을 옷처럼 입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제 13절부터 보겠습니다. ‘혐의’라고 되어 있는데 불평이라고 보면 됩니다. 누구에게 불평이 나오면 서로 용납하고 피차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지옥가야 마땅한 죄인이 예수님의 용서를 받고 산다고 말은 하지만 평소에 불평과 원망을 쏟아놓지 않습니까? 전부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누구를 용서하였다고요? 조금만 자존심 건드리면 안색이 달라지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너는 이제 용서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가 되셔서 이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서 용서가 나오는 경우에는 결단코 자기를 자랑할 수가 없는 용서가 나옵니다. 이상하게 용서가 될 뿐 아니라 나는 더 큰 죄인임을 알게 되고 내가 더 용서받아야 할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 예수의 이름과 그 이름을 힘입어 나오는 모습입니다.
14절입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합니다. 사랑은 온전하게 매는 띠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보시면 사람이 사랑 없이도 온갖 일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천사의 말을 할 수도 있고 자기의 전 재산으로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다른 사람을 위하여 내어 줄 수도 있습니다. 그 엄청난 일을 하고서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데 그것을 알아주지 않으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주보에 헌금명단이 빠지기만 해도 당장 항의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교회는 헌금 명단도 없으니 그런 항의자체가 나오지 않지만 그러나 다른 모습으로 얼마든지 변형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하며 이것이 온전하게 매는 띠라고 합니다. 옷을 입고 나서 띠를 띠는 것처럼 사랑이 전체를 아우르는 띠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띠를 매는 것에 대하여 에베소서 4:1-16절을 봅니다. “봉독” 여기서는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합니다. 몸과 믿음과 주와 소망과 세례와 하나님도 하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가 되도록 하시기 위하여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워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사랑으로 묶여 있다는 것입니다.
15절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몸의 각 지체끼리는 분란이 없습니다. 손이 눈더러 필요 없다거나 팔이 다리더러 필요 없다고 하지 않습니다. 다리가 머리를 보고서 무겁다고 원망하지 않습니다. 팔이 부러지면 깁스해서 목에다 걸고 다닙니다.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는 평안함만 있으면 모릅니다. 때때로 팔이 부러지듯이 어려움이 닥쳐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입는 것인지 아니면 거저 내 한 몸 편하면 제일이라는 식으로 사는지 확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부르심을 입었다면 짐을 함께 지는 것이 오히려 감사가 될 것입니다. 어떻게 나 같은 죄인이 이런 일에 하나가 되었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은 평강입니다.
16절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하게 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풍성하게 되면 그 말씀자체가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풍성하게 거하게 되면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게 됩니다. 일방적인 가르침과 권면이 아니라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서로 교제하는 것이 다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게 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하게 거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기준에 맞추어서 정죄하고 판단할 뿐입니다. 그러면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하게 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우리가 새 사람을 입은 사람이라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깨어져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이 이루어지고야 맙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향하신 이런 말씀들을 반드시 이루어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의 옷을 입혀버리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어느 정도로 깨어지고 부수어지고 녹아져야 할지는 각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반드시 이루시고야 마십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께서 주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17절입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합니다. 그냥 예수의 이름이 아니라 범사에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셨기에 그 주의 이름의 능력과 힘으로 지금 사도를 통하여 말씀하신 이런 내용들이 일어나고야 마는 것입니다.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의 옷을 입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자기 부인도 반드시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혹 긍휼이나 자비나 겸손이나 온유나 오래 참음이 나오시면 주 예수의 이름과 그 힘의 능력을 덧입은 줄 아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골로새서 3:18-4:1 주께 하듯이 2008. 11. 2
3: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찌니 낙심할까 함이라 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24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25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4:1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찌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찌어다
3:1-5절을 다시 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지 않았다면 이 말씀은 그 사람에게 해당이 되지를 않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지는 않지만 세상에서 멀쩡하게 잘 살아가는 사람에게 당신은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위엣 것을 생각하라고 하면 정신 나간 사람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에게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죽었고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날 것입니다.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니 그러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고 질문을 합니다. 오늘 말씀이 그런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될 것입니다.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5-17절까지 보았습니다. 한 번 더 보고 오늘 본문을 보겠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합니다. 땅에 있는 지체는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이 우상숭배입니다. 또한 분과 훼방과 입의 부끄러운 말과 거짓말과 옛 사람의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합니다. 새 사람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는 것이며 다른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롬13:14).
이 말씀에 대하여 에베소서 4:17-24절을 봅니다. “봉독” 이방인의 허망한 것으로 행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들은 총명이 어두워지고 무지함과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감각이 없는 상태입니다. 영적인 감각이 없으니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입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들을 누가 듣겠습니까?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이런 말씀을 듣겠습니까? 서울시 교육청이 이런 말씀을 듣겠습니까? 국회에서 이런 말씀을 듣겠습니까? 오직 교회에서만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는 유일한 곳입니다. 그런데 교회마저 땅의 것에 관심을 가지게 한다면 교회도 땅에 속한 곳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금요일 성경공부시간에 에스겔을 봅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신에 이끌려 예루살렘의 성전을 보는데 성전 안에 우상이 가득하였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이 망하고 성전이 파괴된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성전인데 우리 안에 위엣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말씀드린 세상의 것들이 가득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5절을 봅니다.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는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고 합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은 그 이름이라도 부르지 말라고 합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본 모든 말씀들이 다 교회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란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가운데 이런 말씀이 읽혀지고 들려지는 것이 참으로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됩니다. 내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이며 탐심이 많은 사람인지를 이런 말씀을 통하여서만 드러나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는 사람은 새 옷을 입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신들이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하였지만 주님께서 보시니 그들은 가련하고 벌거벗은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희고 깨끗한 옷을 사서 입으라고 하십니다.
자신이 더러운 자임을 알기에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사는 곳이 교회입니다. 자신이 깨끗하다고 하면 주님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12절에서 17절까지가 다 교회의 생활 중에 일어나는 문제들입니다. 혼자서 사막에 가서 도를 닦는 것 같으면 서로 용서도 사랑도 필요가 없습니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하면 됩니다. 혼자 있을 때는 다 용서할 것 같고 사랑할 것 같지만 막상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는 이것이 안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함께 부닥치면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18절입니다. 가정생활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다 아내와 남편 또는 부모와 자녀에 해당되는 사람들입니다. 먼저 아내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다고 합니다. 아내 되신 분들에게 묻습니다. 남편에게 복종하십니까? 오늘 골로새 본문에서는 아주 간단하게 말씀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교회의 원리를 가정에도 도입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주 간단하게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주 안에서 마땅한 것입니다. 이것이 가정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입니다. 위엣 것을 찾는 아내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위엣 것을 찾는 아내라면 이 말씀에 아멘이 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5-6절을 봅니다. “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아내의 단장은 남편에게 순복하는 것이지 머리를 하고 화장을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말도 되지 않는 요구를 하였을 때에 사라는 남편의 말에 주라고 하며 순복하고 복종하여 자기를 단장하고 그의 딸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내의 머리는 남편이고 남편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고전11:3). 그래서 하나님께 소망 둔 자 즉 위엣 것을 찾는 여인의 마땅한 자세인 것입니다.
그러면 남편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19절입니다. 아내를 사랑하고 괴롭히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역시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모습입니다. 사랑하고 괴롭히지 말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5장에서 남편과 아내를 말하면서 교회와 그리스도에 대한 비밀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아내를 사랑하고 괴롭히지 말라는 간단한 말씀을 하지만 함께 포함되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기 몸을 주신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만 ‘주’라는 말씀이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 무엇이든지 주께 하듯이 주님의 뜻을 구하며 사는 것이 이 세상에서 부부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행복한 가정생활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사는 순간부터 불행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에게 해당되는 말씀은 보이지 않고 상대방에게 요구하는 말씀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하는 사람은 이런 말씀을 보면서 어떻게 적용하게 되겠습니까? 자기에게 주어진 말씀을 자기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남편은 아내에 대한 말씀만 보고 아내는 남편에 대한 말씀만 보면 싸움밖에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남편은 복종하라고 할 것이고 아내는 당신이 뭘 사랑했느냐고 나를 괴롭게만 하였다고 하면 이것은 천국을 맛보는 것이 아니라 지옥을 맛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말씀을 들어도 그렇습니다. 저 말씀은 누가 들어야 하고 저 말씀은 누가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자기는 항상 의인이 되고 남은 다 죽일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표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다시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어떻게 죽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다른 사람들이 띠를 매어 끌고 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요한을 보고서는 어떻게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 사건들을 만나겠지만 늘 관심사가 어디에 가야 하는가 하면 주님께서 이 사건을 통하여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늘 남의 말만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아내가 내게 복종하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를 사랑하고 괴롭히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시는 남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내들도 남편이 비록 나를 사랑하지 않고 괴롭힌다고 해도 복종해 봅시다. 왜 그래야 하는가 하면 우리는 주님의 종이고 주님이 우리의 주인이기에 지극히 마땅한 것입니다. 그렇게 안 되는 것인 줄 압니다. 그렇다고 그것을 합리화시키지 말고 주님께 순복하지 않는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20-21절입니다. 부모와 자녀에 대한 말씀입니다. 먼저 자녀들에게 말씀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의 부모의 역할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로서의 부모입니다. 구약에서 부모는 자녀들에게 길에 갈 때나 앉았을 때에나 누웠을 때에나 언제나 주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입니다. 신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에베소서 6:4절입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자녀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순종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아비들은 자녀들을 격노케 하지 말라고 합니다. 에베소서에서는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는데 자녀들이 어떨 때에 화를 냅니까? 주의 교양과 훈계를 멸시하는 자는 마땅히 매를 들어서라도 징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부모들은 자녀들을 통하여 대리만족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망을 자식에게 투영시켜서 그 자녀가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녀가 격노할 뿐 아니라 낙심케 되는 것입니다. 주의 교양과 훈계는 어떤 것입니까?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님을,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심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들이 낙심하지 않고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살 것입니다.
22-4:1절은 종과 상전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당시는 그야말로 노예와 주인의 관계인데도 종이 육신의 상전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처럼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고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유업의 상을 주께 받는 것입니다. 유업이란 유산을 말합니다. 하늘의 유산을 받는 것입니다. 그 유산이란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는 것입니다.
또한 상전은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라고 합니다. 이 당시에 종이란 거저 가정의 가재도구나 집안의 짐승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런 세대에 주인에게 종들을 의와 공평으로 대하라고 하는 것은 혁명적인 말씀입니다. 왜 그래야 하는가 하면 하늘에 상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25절에서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는 것입니다. 주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습니다. 종이라고 특혜를 주고 상전이라고 다르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모습으로 살던 과연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며 사느냐는 것을 묻는 것입니다.
위에 것을 찾는 사람이라면 삶의 원리는 하나입니다. 모든 일을 주께 하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종들에게만 모든 일을 주께 하듯이 하라고 하신 말씀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께 하듯이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생활하면 하늘의 유업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주님을 자기 삶의 우선순위에서 첫째가 아니라 꼴찌에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주님을 섬긴다고 하는 예배에도 지각하고 결석하기를 밥 먹듯이 하면서 이런 식으로 가정과 직장생활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욕이나 돌려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자리에 예수님이 주가 되는 삶이 먼저입니다. 그러고 나서 모든 일을 주께 하듯이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주께 하듯이 하면 얼마나 눈가림만 하며 대충해 치우고야 말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보아도 우리는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골로새서 4:2-6 권면 2008. 11. 9
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3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4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5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성경 중에 오늘 본문을 권면이라는 작은 제목을 붙여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권면(勸勉)이라는 말은 힘쓰도록 권한다는 말이 됩니다. 사도의 편지를 보면 많은 부분에 권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권면을 주고받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사도가 권면하고 이 권면을 받은 사람들이 지키면 된다는 식으로 봅니다. 그런데 그렇게만 본다면 세상의 수많은 가르침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나 도적질 하지 말라고 하면 그것을 듣고 지키면 권면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을 받을 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받았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말씀을 우리가 그대로 받고 지켰다고 하는 것이 바리새인들의 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런 권면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데살로니가전서 2:3-5절입니다. “3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4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 하시느니라” 바울의 권면이 인간에게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하나님이 증거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어떻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13절입니다. “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바울이라는 사람이 전하는 말씀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하는 자의 능력도 아니고 받는 자의 실력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기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권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우리도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대하면서 보겠습니다.
2절을 봅니다. 기도에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나름대로 복음을 전한다고 전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의 첫 번째 반응이 그러면 기도할 필요 없겠네요!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마치 잘못된 종말론 자들 때문에 종말론을 언급하면 이상한 사람취급당하는 것처럼 우리의 평소의 기도가 얼마나 탐심으로 무장되어 있는지를 알려주면 바르게 기도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기도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열심 있는 분을 만났는데 아들이 지금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며느리도 직장생활을 하고 아들도 직장생활을 하는데 며느리가 한 사람의 십일조만 하면 안 되겠느냐고 하더랍니다. 아들이 안 된다고 해서 두 사람이 함께 십일조를 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이 앞으로 사업하기를 기도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사업을 하도록 기도하는가 하면 사업을 해서 십일조를 천 만 원 하기를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혼자 잘 먹고 잘 살라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이웃들을 잘 돌보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몇 년 전에 십일조를 백 만 원 하기를 기도한다는 사람을 만나보았는데 이제는 천 만 원입니다.
이런 모습이 탐심이라고 하면 누가 기도할 맛이 나겠습니까? 그러니 대부분의 복음을 전한다고 하는 교회들이 제가 아는 한 기도에 별로 힘을 쓰지 않고 있습니다. 복음이 전해져서 기도를 힘쓰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만큼 복음에 정통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런데 이 바울사도가 기도에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있으라고 합니다. 기도하는데 감사가 넘치고 있다면 그것이 깨어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에 대하여 찬송이 터져 나오는 것이 감사로 기도에 깨어있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라는 것이 대부분 한풀이입니다. 신세타령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 기도의 맛도 보지 못한 상태가 아닙니까?
바울사도가 기도에 얼마나 힘쓰는지 1:9절을 봅니다. 에바브로를 통하여 골로새 교회의 소식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한다고 합니다. 에바브로 역시 골로새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데 4:12절입니다.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다른 성경에도 너무나 많이 나옵니다만 오늘 인용한 말씀에서만 봅니다. 1:9-12절입니다.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범사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기도입니다.
범사에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까? 지난주에 부부간에 부모 자식 간에 직장생활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권면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셨습니까? 남편들은 아내들을 사랑하고 괴롭히지 않았습니까? 저의 고백을 합니다. 주일 설교 후 점심을 먹는데 집 사람이 배가 부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배부르면 전도지 들고나가서 전도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웃는 것입니다. 아니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설교시간에 못 들었느냐고 했습니다. 그 말이 터져 나오고 나니 이미 적용을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희한하게 자녀에게도 부모에게도 제대로 못한 한 주간 이었습니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이번 주간에는 더 분명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죄인이기에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신 길 외에는 달리 구원의 길이 없음을 알게 되어서 감사하였습니다. 만약 이런 권면을 받지 않았다면 자기 잘났다고 큰소리칠 인간입니다.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자녀를 노엽게 하고서도 아버지로서 당연한 권리를 행사한 것처럼 또 부모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들이 다 터져 나오는 것을 저의 집사람이 옆에서 다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기도에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에 힘을 쓰는 것은 그런 감사함으로 깨어있는 것입니다. 기도에 힘쓰지 않고 깨어있지 않으면 무엇이 어두움인지 빛인지도 구별을 못하게 됩니다. 자기의 지식으로만 살아갈 뿐입니다.
계속하여 바울의 기도를 봅니다. 10-12절입니다.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이 모든 기도의 내용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의 영광을 위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행하신 그 일들을 알고 맛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듣고 이런 기도에 힘쓰는 자가 나온다면 말씀이 역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이렇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3-4절입니다. 바울사도 자신과 복음 전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 달라고 합니다. 바울은 사도입니다. 사도이면서 성도들에게 기도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선생이 제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실력 없는 선생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에서는 선생이 될수록 더 실력 없는 자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선다고 하는 사람은 자신이 부족한 자임을 더욱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하는 것입니까? 전도할 문을 열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금 바울사도가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혔는데 감옥에서 빠져나오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갇혔거나 아니 갇혔거나 간에 전도할 문 즉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 할 문을 열어달라는 것입니다. 전도의 문이 열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은 이미 골로새서 1장에서 3장을 통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를 거스르고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여 십자가에서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밝히 드려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알아들을 자만 알아듣게 되어 있어서 비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를 위하여 기도하여 달라는 것은 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담대하게 증거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증거 하는 일은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1:11절을 봅니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기도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라고 합니다. 이런 은사를 가지고 복음을 증거 하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사도행전 26:16-18절입니다. “16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바울이 복음을 핍박하다가 오히려 복음에 사로잡혀 복음의 일군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복을 증거 하는 것 즉 그리스도의 비밀을 증거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눈을 뜨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는 눈이 밝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나라에 대하여서는 장님인 것입니다. 이것이 어두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며 사단의 권세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오직 복음만이 눈을 뜨게 하고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예수님을 믿음으로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오늘도 교회의 기도는 이런 기도에 힘을 쓰고 이런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있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교회의 성도가 이런 자세로 살아가도록 깨어 기도하여 합니다. 뿐만 아니라 외부 사람들에게 어떻게 대하여야 할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5절입니다. 외인들에게 지혜롭게 행하고 세월을 아끼라고 합니다. 기회를 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만날 때에 지혜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들과 접촉을 영 끊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구를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과 동화되어도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과 몇 시간을 함께 그것도 재미있어 하며 보낸다는 것은 믿는다는 사람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롭게 행한다는 것은 세월을 아끼는 것인데 때가 가까웠기 때문에 더욱더 외인에 대하여 기회를 선용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6절에서 외인에 대하여 말할 때에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과 같게 하라고 합니다. 소금으로 고루게 한다는 것은 새 번역에서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나, 소금으로 맛을 내는 것과 같이, 은혜가 넘치게 말을 하십시오. 여러분은 묻는 이들에게 적절한 대답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말이 은혜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은혜가 넘치는 말은 외인에게도 복음을 전할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든지 퉁명스럽게 한다든지 아니면 교만해 보이면 누가 진리에 대하여 물어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은혜가 넘치면 말도 은혜로운 말이 됩니다. 은혜가 넘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말씀과 기도 외에는 달리 길이 없는 것입니다(딤전4:5). 말씀을 사모하고 그리스도의 비밀을 알아갈수록 은혜가 더하여 넘치게 되면 감사가 나옵니다. 그런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은 이미 말에서 다르게 나옵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에서는 언제나 친절하고 유익한 말을 하라고 합니다. 우리의 말 중에 얼마나 무익한 말이 많은지 아십니까? 남의 흉을 보는 말에서 모함하고 참소하는 말까지 마귀의 주특기를 사용하고 있다면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진리에 대하여 물어보려고 오겠습니까?
그러므로 은혜가 충만하다는 것은 대답할 말이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3:15-16절입니다.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믿지 않는 자들이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물어오는 그런 기적을 맛보아 가기를 소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1:17-34 주의 만찬 2008. 11. 16
17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18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19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20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21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22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7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찌니 29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30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31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32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33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34 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찌니 이는 너희의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함이라 그 남은 것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귀정하리라
오늘 세례 받는 분도 계시고 입교문답도 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방금 세례식을 하였고 설교 후에 성찬식을 행할 것입니다. 성찬의 뜻이 무엇인지 성찬식을 통하여서만 증거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일 때 마다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하고 또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증거 해야 할 일이 주님의 살과 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로 모이든지 성경공부로 모이든지 구역으로 모이든지 찬양대로 모이든지 간에 예수님의 살과 피를 잊어버리면 그것은 세상의 수많은 모임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을 통하여 성찬의 의미를 다시 보려고 합니다. 3년 전에 고린도전서를 강해하면서 이 본문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제가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기에 성찬식 때만 되면 자기를 살펴보고 성찬을 받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는 말씀과 함께 자신을 살피지 않았기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 즉 죽은 자도 적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갈등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일주일 전에 광고를 하면 한 주간이라도 금욕적으로 보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자기를 살펴보고 나서 죄가 있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찬을 받아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아니면 떡과 잔을 받기 전에 얼른 회개기도하고 받으면 되는 것입니까? 그래서 받지 않은 적이 있는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만 대개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이기에 예수님의 살과 피만이 나를 살리기 때문입니다. 만약 죄인이 받을 수 없는 주님의 살과 피라면 그림의 떡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에 더욱더 나 같은 죄인에게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를 살피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보고자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참으로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음행이 있었고, 우상 숭배한 음식의 문제, 파당의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 말씀은 주의 만찬에 관한 문제입니다. 17절에 보시면 주의 만찬에 있어서 너희를 칭찬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주의 만찬을 위한 모임이 유익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해로움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분쟁은 파당의 문제만이 아니라 주의 만찬에서도 분쟁이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분쟁이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19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씀인가 하면 분당이 있어야 진실한 사람이 누구인지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교회에서 어려운 일이 드러나면 평소에 그 사람이 진실하였는지 아닌지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그렇게 하는 것은 주의 만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책망을 듣는가 하면 초대교회 때는 저녁식사와 주의 만찬이라는 것이 엄격하게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식사와 완전히 분리하고 있습니다만 원래 주의 만찬이란 유월절 식사시간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살아나온 것을 기념하는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입니다. 그런데 이 유월절 만찬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떡을 떼시면서 자신의 살이라고 받아먹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잔을 주시면서 이것을 받아 마시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바 곧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이 애굽에서 나온 것을 기억하는 것이라면 주의 만찬은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늘로 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주의 만찬을 행하면서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까? 주의 죽으심을 주님 다시 오실 때 까지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만찬을 행하면서 고린도 교회에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저녁의 공동식사와 주의 만찬을 함께 하였다고 보기도 하고 식사 후에 주의 만찬을 따로 기념하였다고 보기도 합니다. 어떻든 식사를 함께 하는 자리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가 하면 먼저 온 사람들이 먼저 먹고 배부르고 심지어 포도주를 많이 마셔서 취한 사람도 있는 반면에 늦게 온 사람은 먹을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음식을 가져와서 함께 나누어 먹어야 하는데 좀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음식을 가지고 일찍 와서는 다른 사람들이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자기들이 먼저 먹어버린 것입니다. 늦게 온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라서 일을 늦게 마치고 와 보니 먹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굴욕을 받으신 적이 있습니까? 이런 식의 주의 만찬이 되어버린다면 이것은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신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차별이 생겨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과연 주의 만찬을 나누기 위하여 온 것이냐는 것입니다.
22절을 봅니다.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고 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고 합니다. 이것으로 너희를 칭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고 오라는 것입니다. 공동식사를 하고 주의 만찬을 나누는 자리에서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것이 되기에 이런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심으로 그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와 잠자는 자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주의 만찬의 의미를 바르게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이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주의 만찬의 의미를 봅시다. 23-26절입니다. 바울사도가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바울사도는 예수님의 유월절 만찬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께 받았다고 합니다. 유월절에 참여한 사도들의 전한 것을 주께 받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바울사도가 친히 주의 계시를 받아서 전한 것이라고 보아도 무리는 없습니다. 이 주의 만찬은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내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유월절의 그 떡이 예수님의 자기 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식후에 잔을 주시면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새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예언한 새 언약이 예수님의 피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피를 흘리기 위하여 살이 찢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자기 백성을 살리는 방식이 새 언약의 방식입니다. 이 새 언약은 옛 언약과 달라서 돌 판에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판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을 보내심으로 마음에 인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새 언약의 백성들은 오직 예수님의 살과 피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입니다.
구역공부 하신 분들이 계십니까? 에베소서 3장14-21절 내용 중에서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어디에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야 합니까? 하는 질문입니다. 대답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랑에 뿌리는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뿌리는 내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영양분을 빨아 먹어야 굳건히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입니까?
로마서 5: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죄인 되어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이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사랑의 확증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화목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뿌리를 내리고 그 영양분을 공급 받는다는 것입니다(골2:19). 제가 이 말씀을 드리면서 겨우살이에 대하여 예를 들었습니다.
겨우살이는 다른 나무의 줄기에 붙어서 그 나무의 영양분을 빨아먹고 사는 식물입니다. 그 식물의 열매를 새들이 먹고 나무에서 배설을 하면 씨앗들이 나무에 들러붙어서 발아하는데 뿌리를 나무줄기에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무의 껍질을 파고 들어가 수액을 빨아먹고 자라는 식물이 겨우살이입니다. 이런 식물을 기생식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집에 가서 겨우살이에 대하여 다시 보니 겨우살이가 나중에 자라서는 엽록소가 있기에 광합성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반 기생식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기생식물은 어떤 것인지 보니 ‘새삼’이라든가 ‘야고’라는 식물은 전기생식물이라고 나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질문합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반기생식물입니까? 전기생식물입니까? 우리는 동물인데 식물이라고 하니 느낌이 잘 오지 않습니까? 그러면 기생충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입교문답 하는 학생들에게 질문합니다. 기생충에는 어떤 종류가 있습니까? 선충류 흡충류 조충류가 있는데 우리 몸에 다 들어올 수 있는 기생충들입니다. 많이 들어본 이름은 회충 요충 편충 십이지장충 등 온갖 기생충들이 있습니다.
사람의 살과 피를 빨아 먹고 사는 것이 기생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시면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영생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것인 참된 양식이며 참된 생명수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하는 기생충이라는 것입니다. 욥기 25장에서 빌닷 사람 수아가 욥을 공격하면서 하는 말이 벌레인 사람 구더기인 인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인생이 깨끗하다고 할 수 있느냐는 공격인데 나중에 자의 의로움을 주장하던 욥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합니다. 자기가 모든 이치를 아는 것처럼 말했기에 회개하는데 이사야 41:14절에서는 지렁이 같은 야곱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다 기생충처럼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가나안이 진멸당할 때에 구원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냥 라합이라고 하지 않고 그 직업을 밝혀 기생 라합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옥함을 깨뜨린 여인이 누구입니까? 동네사람들이 다 아는 죄인이라면 창기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의롭다 함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사람들은 자기들은 기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혹 기생이라도 반쯤 기생이라는 것입니다. 처음에 믿을 때는 은혜이지만 그 다음은 자기가 자체적으로 영양을 만들어 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분리되면 그대로 말라죽어 불에 던져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자는 그 어떤 차별도 없다는 것입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피부색으로 차별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하거나 병들었거나 성공하였거나 실패하였거나 이런 세상의 조건들로 차별할 수 없는 것입니다(골3:11).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만이 생명임을 아는 자들이 서로서로 긍휼히 여길 뿐입니다. 너도 이 떡을 먹어야 사는 인생이구나! 나도 그렇다! 너도 이 피를 마셔야만 사는구나! 나도 그렇다! 이 하나 됨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소원합니다.
골로새서 4:7-18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2008. 11. 23
7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니 그는 사랑을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군이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 8 내가 저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낸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9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저희가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11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희는 할례당이라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12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13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거 하노라 14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5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16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17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18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찌어다
지난 주 목요일 새벽기도회를 오는데 은행잎들이 함박눈처럼 길과 차위에 쌓인 것을 보았습니다. 노란 잎들만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 파란 잎들도 추위와 바람에 다 떨어져 있었습니다. 아마 그런 모습으로 보고서 어느 신문에 카툰을 그리는 사람이 이렇게 표현하였나 봅니다. 제목이 ‘바람 불어 좋은 날’인데 ‘은행잎 위로 단풍잎이 단풍잎 위로 플라타너스 잎이 플라타너스 잎 위로 은행잎이/ 땅으로 돌아가는 순간이 가까워 달관의 경지에 이르러버린 낙엽들이/ 가리지도 않고 나누지도 않고 허물을 감싸줍니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서도 이런 생각들을 하는데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골로새서 마지막 인사부분입니다. 에바브로를 통하여 골로새 교회의 소식을 들은 바울사도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성도에 대한 사랑에 대하여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복음 곧 진리의 말씀을 듣고서 하늘에 쌓아둔 소망 때문에 믿음과 사랑이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이 복음을 듣고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이런 믿음과 사랑의 열매가 나타나고 있는 것에 대하여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골로새 교회의 여러 문제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주의하라고 합니다. 이런 것은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이며 그리스도를 좇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로 인하여 폄론하는 자들과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숭배의 문제들 그리고 본 것을 의지하여 육체의 마음을 좋아 헛되이 과장하는 것 몸을 괴롭게 하는 것들에 대하여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게 하는 것이 아니기에 붙잡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라고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성도는 그 안에서 충만하여 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며 우리를 거스리고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승리는 2천 년 전의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강력하게 살아 역사하시기에 사도들이 증거 한 복음이 아직도 증거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땅의 것을 찾지 않고 위엣 것을 찾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마지막 인사말에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을 보면서 무엇 때문에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게 되었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에게도 그 십자가의 능력이 임하여 평생 자기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단 한번이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다가는 그런 은혜가 임하기를 소원해보는 것입니다. 왜 단 한번만이라도 라는 말을 하는가 하면 우리의 삶이 무슨 일을 해도 그것이 다 나를 위한 것이기에 하는 말입니다. 일을 해도 나를 위한 것이고 교회를 다녀도 내 좋으라고 다니고 목회를 해도 자기 좋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언급하지만 그 속에는 수많은 이해관계를 따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언급되는 여러 사람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점검해 보고자 합니다.
7-8절을 봅니다. 첫째로 두기고라는 사람입니다. 골로새교회에 바울사도의 편지를 들고 간 사람입니다. 이 외에도 에베소서와 빌레몬서도 전달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바울사도와 함께 동역하는 에바브로의 사정을 알게 함으로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더 중요한 내용은 이미 본 말씀대로 입니다만 이런 편지를 보내는 일에 두기고를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사랑을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얼마나 신실하였으면 형제들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일까요? 두기고의 특징은 신실함입니다. 신실함이란 충성이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고린도전서 4: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예수님께서도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많은 것으로 맡기겠다고 하시면서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고 하셨습니다. 신실함이란 크고 엄청난 일이 아니라 아주 사소하고 작은 것에서부터 나타나는 것입니다.
둘째로 오네시모입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노예였다가 어떤 손해를 끼치고 도망친 종입니다. 그런데 로마의 감옥에서 바울을 만나서 복음을 듣고 역시 신실한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9절을 보시면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두기고와 함께 보낸다고 합니다. 전에는 도망을 친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신실한 사람이 되어서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서 역사하고 계신 증거이기도 한 것입니다.
셋째로 아리스다고와 마가와 유스도라고 하는 예수입니다. 아리스다고는 에베소의 폭동 때에 바울과 함께 했으며 그 이후로도 바울과 함께 사역한 사람이기에 지금 함께 갇힌 자라고 합니다. 감옥에 갇혔다는 뜻보다는 감옥에 갇힌 바울과 함께 동역하고 있기에 즉 복음에 매였다는 것으로 봅니다. 애보트라는 사람은 함께 갇혔다는 것을 바울을 대신하여 감옥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 아리스다고와 마가와 유스도라고 하는 예수라는 사람이 교대로 감옥에 들어가고 바울은 주거의 제한은 있지만 여러 사람을 만나서 복음을 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가를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사도행전 15:36-41절입니다. “봉독” 전도하다가 의견차이로 갈라서기도 합니다. 각 사람의 성격을 볼 수가 있는데 바나바는 바울사도도 추천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러니 마가가 한때 중도에 포기하였지만 다시 데려가자고 한 것은 자기 조카이기 이전에 사람을 포용하며 함께 사역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그런 사람은 자격이 없다고 데리고 가지 말자고 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는 서로 갈라져서 오히려 두 팀이 되어 전도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나중에 마가도 신실한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마가도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하였습니다(딤후4:11).
여기에 나온 세 사람이 다 할례 당입니다. 할례 당들이 바울이 복음전하는 것을 굉장히 핍박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할례 당 중에서 이 세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한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울의 위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모두가 반대하고 핍박하여도 이 몇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사역하고 있으니 이것 또한 주님이 그들을 붙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핍박 중에도 이 사람들을 인하여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넷째로 에바브로입니다. 인사에 거론된 사람으로는 여섯 번째 사람입니다. 골로새지역에 복음을 전한 사람으로 골로새 교회의 소식을 바울에게 전한 사람입니다. 이 에바브로도 지금 바울과 함께 사역하는 중이기에 골로새 교회를 위하여 항상 기도합니다. 그리고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합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내용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바라는 그 하나님의 뜻이란 앞에서 보았던 대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유혹과 이단들의 핍박은 한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붙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16-19절을 다시 봅니다.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8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날마다 은혜와 은사를 공급받아 사는 것입니다. 날마다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삽니다.
다섯째로 누가와 데마입니다. 14절을 보시면 누가에 대하여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라고 합니다. 누가는 바울사도와 함께 가장 오랫동안 동역한 사람입니다. 의사이기에 바울의 건강도 돌보면서 사역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누가를 사랑받은 의원이라고 하는 반면에 데마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수식어가 없습니다. 그냥 데마도 너희에게 문안한다고 합니다. 지금까지의 인물들은 다 신실하고 사랑받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역사한다는 그런 표현들이 다 있는데 이 데마는 아무런 그런 표현이 없습니다. 평소에도 별 신실하지 못하였든지 결국에는 세상을 사랑하여 떠나버렸다고 합니다.
디모데후서 4:9-12절입니다. “9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12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오늘 본문에서 거론된 이름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세상을 사랑하여 간 것이 아니고 다른 사역으로 간 것입니다. 두기고도 나오는데 에베소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누가만 함께 있다고 합니다.
여섯째로 눔바입니다. 15-16절입니다. 눔바는 라오디게아에 있는 여인으로 자기 집을 교회로 내어놓은 사람입니다. 이곳은 골로새 교회가 문안하도록 합니다. 골로새와 라오디게아 히에라볼리는 가까운 곳에 있기에 골로새 교회가 바울의 편지를 받아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도록 하고 또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를 골로새 교회가 받아 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편지란 사소한 개인의 편지가 아니라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보낸 편지이기에 그리스도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특정지역의 교회만이 적용되는 문제가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교회에 다 적용되는 것이 바울의 서신입니다.
끝으로 아킵보입니다. 아킵보는 골로새 교회에 사역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사람은 모두 10명입니다. 그 중에 세 부류로 나누어 볼 수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신실하게 사역하여 사랑받는 자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중도에 포기하였다고 다시 돌아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여 떠나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도 동일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은 아무도 모릅니다. 누가 어떻게 될지를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실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토록 신실하십니다. 그러므로 자기 백성을 반드시 구원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의사도 노예도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마가처럼 중도에 포기한 자라도 돌이켜 주실 것입니다. 데마가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떠났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택한 백성이 아니라면 끝까지 세상을 사랑하다가 멸망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나 택한 사람이라면 마가처럼 돌이켜 주셔서 유익한 사람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을 것은 신실하신 주님입니다. 자기 백성은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게 하시고 자기 백성이 아닌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지 못하게 조치하실 것입니다. 이런 주님의 은혜를 맛보고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