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유다서 강해
유다서 강해
창원 늘푸른 교회 이장우 목사
유다서 1:1-2 예수 그리스도의 종 2007. 12. 26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2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마다 예수님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구원하여 주는 예수님,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예수님, 부자 되게 해주는 예수님, 병 고쳐주시는 예수님, 성공하게 해주는 예수님, 이런 식으로 나열하자면 천 명이면 천 명의 예수님이 나오고 만 명이면 만 명의 예수님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입니까?
오늘 말씀 1절을 보시면 이 서신의 저자인 유다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야고보의 형제라고 합니다. 여기서 야고보란 사도 야고보가 아닌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사도 야고보의 형제는 요한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야고보란 예수님의 육신적인 동생으로서 초대교회 때에 예루살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보면 이방인이 구원받는 것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야고보도 자신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합니다(약1:1).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어려서부터 자기들과 꼭 같은 형제로 알았던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자신들은 종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지금 주와 그리스도라는 말을 그 뜻과 의미를 제대로 모른 채 많이 사용하다보니 익숙하여져서 별 의미 없이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주와 그리스도라는 말은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이 한 마디의 말을 전하기 위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지만 않는다면 아무런 핍박도 받지 않을 것인데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기에 순교까지 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중요한 고백이,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라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과 얼마나 다릅니까!
그러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평소에 자신들과 같은 부모 밑에서 자기들과 꼭 같은 사람인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특별한 사람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7:1-5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유대에 가지 않으시고 갈릴리에만 다니시니 그의 형제들이 왜 유대에 올라가지 않느냐고 합니다. 이렇게 말한 것은 형제들이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마가복음3:21절에 보시면 예수님의 친속들이 붙들러 옵니다. 예수님이 미쳤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믿기 힘든 사람들이 그 형제들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된 이 일이 어떻게 일어난 것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오백여명의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셨기에 그 제자들의 무리 속에 예수님의 동생들도 함께 있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기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였는데 이 머물러 있는 무리 중에 예수님의 동생들이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1:14절입니다.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예수님의 제자들과 함께 모인 무리 중에 예수님의 동생들도 함께 있었습니다. 그 무리의 수가 120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들에게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자 그 제자들이 나가서 전한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도행전 2:36절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게 되니 그동안 자신의 육신의 형으로 알았던 예수, 심지어 미쳤다고 여기기까지 한 예수, 그래서 믿지 않았었는데 성령이 임하게 되니 자신은 갑자기 종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건이 바울에게도 일어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려고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자 이단의 괴수라고 여긴 예수가 갑자기 주와 그리스도가 되고 자신은 그의 종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믿고 있습니까? 내가 주인이고 예수님은 알라딘의 램프처럼 주문만 외우면 펑 나타나서 주인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하면서 나타나는 그런 거인으로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 거인을 불러내는 주문을 기도로 바꾸고 그 램프는 문지르는 손길을 정성으로 바꾸어 예수님도 기도와 정성으로 불러내어 자기의 욕망을 이루고 싶어 한다면 이것은 결단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1절을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곱의 형제인 유다라고 합니다. 자신을 예수님의 형제라고도 말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형제는 야고보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자신을 노예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호칭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호칭입니까! 마귀의 종이 아닙니다. 세상의 종이 아닙니다. 자기 영광이나 자기 자존심의 종이 된 것이 아닙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이 얼마나 명예로운 명칭인 것입니까! 오늘 우리에게 과연 이런 믿음이 있습니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이 감사와 감격으로 나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회개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말로만 예수님을 주라고 부른 것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입술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고 말하면서 그 마음이 멀어져 있지는 않습니까?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성령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사람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가르침이란 사람이 언제나 주인공이요 중심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세상의 모든 학문이라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결국 사람 중심입니다. 대통령 후보로 나온 사람들의 구호가 무엇이었습니까? 사람 중심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가르침입니다.
이사야 29:13절입니다. “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입술로만 존경하고 마음이 떠난 이유는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혜자의 지혜와 명철자의 총명을 가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들어도 사람의 가르침만 가득하니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라는 말은 입술만의 고백이고 마음은 여전히 자신이 주인 된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이사야의 예언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5장에서 무엇을 배경으로 말씀하시는가 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왜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지 않느냐고 하는 상황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장로들의 유전은 지킨다고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계명을 범한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마땅히 공경하여야 할 일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말로서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것은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의 중심이란 하나님 사랑이 아니라 자기 사랑이었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맞습니까? 우리는 그의 종입니까? 아니면 여전히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있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우리의 주인이 내 자신 아닙니까?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하여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 유다라는 이 말한 마디 앞에서 회개할 것이 갑자기 산더미같이 밀려오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의 삶 전부가 회개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란 다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종의 자리에 있지 않고 주인의 자리에 있는 것을 회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것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이것을 알려주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늘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내용도 성령인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어야 자신이 종임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지를 알게 됩니다.
1절 중간을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란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알 수 없는 가치를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부르심을 입은 것,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얻은 것,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먼저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부른 것이 아닙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 있었는데 어떻게 우리가 주님을 부를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길은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이러한 부르심에 대하여 바울사도는 이렇게 증거 합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2:13-14절입니다. “13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14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복음으로 불렀다고 합니다. 이렇게 부르심을 입은 것은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며 이런 자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됩니다.
이런 부르심의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역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나타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 되어 있을 때에 그 사랑을 십자가로 확증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복이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기에 신령한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 신령한 복이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입니다. 자녀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상속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르심과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신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킨다는 말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지키신다는 말씀도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날이란 고린도전서 1장 8-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부르신 것은 사랑으로 그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사실 하나입니다.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내용들입니다. 창세전에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끝까지 견고케 하시는 것이 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과 성령의 역사가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은혜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주님의 사랑이 고맙고 감사할 것입니다. 그러면 유다는 이 편지를 쓰면서 왜 이런 인사말을 하는 것입니까? 3절에 보시면 우리가 일반으로 얻은 구원에 대하여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였다고 합니다. 구원이 도대체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 은혜와 사랑이 넘쳐서 편지하려고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단들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것과 함께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권면은 다음 주에 다시 보겠습니다만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구원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권면을 추가로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유다서를 받는 성도들은 지금 어려움에 처하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도 무엇을 통하여 너끈하게 이기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랑을 입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는다는 말씀으로 세상의 그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사의 마지막 말은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라고 합니다. 긍휼이란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입니다. 이 긍휼로 인하여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자들은 평강을 누립니다. 사람들이 평강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의 염려들로 인하여 평강을 누리지 못합니다. 또 믿는 자라고 하여도 자기의 행위를 돌아보면 결코 평강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부르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 이십니다. 의롭다 하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누가 감히 송사하겠습니까? 환난이나 핍박이나 위험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죽음조차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결코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우리에게도 더욱 많아져서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는 것이 천하를 주고도 얻을 수 없는 기쁨임을 맛보아 가기를 소원합니다.
유다서1:3-4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 2008.1.2
3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사람들이 다들 새해라고 합니다. 그러면 언제부터가 새해입니까? 사람들은 2007년 12월 31일 11시 59분 59초에서 땡 하는 순간 환호성을 지르면서 새해가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 믿는 다는 사람들은 어떻게 합니까? 서울 사랑의 교회 송구영신예배를 생방송 한다고 해서 보았더니 찬양을 하고 있다가 2008년 9초전부터 전교인이 카운트다운을 하고서는 박수를 치고 예배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송구영신이 되는 것입니까?
성경은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배당에서 새해를 맞이한다고 해서 새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정동진에서 새 해를 맞이한다고 해서 새 것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새 해라는 것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목사님은 새해라는 인사말을 문자로 보내셨느냐고 하실 것입니다. 저는 그 새해라는 말보다 의미를 둔 내용이 새 하늘과 새 땅에 의미를 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새 해라고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 하지만 저는 종말론적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왜 멀쩡한 하늘과 땅을 두고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야기 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지금 보이는 하늘과 땅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문제란 사람이 범죄 함으로 죄악이 관영하게 된 천지라는 것입니다. 죄악이 관영하게 되었다는 것은 지난주에 본 말씀대로 예수님이 주인인줄 모르고 자기 자신이 모든 것의 주인인양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고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이사야 45:18절입니다. “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그 말씀에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그런데 사람도 이런 말을 하면서 삽니다. 스바냐 2:15절입니다. “이는 기쁜 성이라 염려 없이 거하며 심중에 이르기를 오직 나만 있고 나 외에는 다른 이가 없다 하더니 어찌 이같이 황무하여 들짐승의 엎드릴 곳이 되었는고 지나가는 자마다 치소하여 손을 흔들리로다” 구스만 이런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다 이러한 모습입니다.
이런 세상에 대하여 선지자는 외칩니다.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이사야 1장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조차 하나님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만드시고 그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새 사람만 들어가게 하시는데 그 새 사람으로 들어가는 것이 오직 은혜로 된다는 것입니다. 유다 자신도 유대인이기에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인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모든 구원 얻는 자들은 은혜로 얻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 구원에 대하여 인사말에서 보았듯이 부르심을 입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것입니다.
3절입니다. 이 놀라운 구원에 대하여 편지를 쓰려고 하였는데 가만히 들어온 몇 사람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헛된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구원이란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얻은 것인데, 이 구원의 도가 사람의 행위나 노력이 아니라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몇 년을 노력하여야 된다는 그런 조건이 아니라 단번에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도를 무용지물로 만들려는 거짓 선생들의 유혹이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4절을 봅니다. 가만히 들어온 몇 사람이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어 버리고 홀로 주재이신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꾼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방금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주어진다고 하였습니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구원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다 공통적인 구원인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단번에 얻은 구원이기에 우리의 어떤 노력이나 애씀이 들어갈 틈이 없는 것입니다.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인하여 구원도 단번에 얻은 것입니다. 로마서 6:10절에서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7:27절에서도 자신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제사를 이루셨습니다. 히브리서 10:10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일어난 엄청난 일이 죄 사함과 거룩함과 영생을 다 얻게 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하려다가 이제는 이 놀라운 소식을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것입니다.
이런 구원에 대하여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내가 한번 구원받았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어떻게 살더라도 구원은 따 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얻을 수도 없지만 얻은 것은 죄 짓는다고 잃어버리지도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는 어차피 썩어질 것이니 육체를 가지고 온갖 죄를 지어도 상관이 없다고 여기는 자들이 나온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몸을 가지고 온갖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도 하는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정말 은혜를 받았다면 구약이나 신약이나 은혜를 받은 자들의 모습이 나오는데 은혜를 주신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바치면서도 기뻐하는 모습들이 나오는데 어떻게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자들이 그런 은혜를 색욕거리고 바꾸고서도 뻔뻔스럽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구원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얼마든지 그렇게 이용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는 교회역사에서 계속되는 싸움입니다. 오직 믿음만이라고 하니 방종하게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방종하게 하지 않도록 율법이 구원을 주지는 못하지만 구원 얻는 자들에게 생활의 규범으로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 중에서도 제사법이나 시민법은 또 아니고 도덕법만 유효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람을 묶어두지 않으면 방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가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갈라디아서 2:3-5절입니다.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은 무엇을 노립니까? 복음의 진리로만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할례를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는 두 가지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쪽은 모든 것이 은혜이니 이제는 마음대로 살자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편에는 복음만으로는 부족하니 율법의 조항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둘 다 결국은 무엇을 부인하게 하는 것입니까? 홀로 하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만히 들어오는 거짓 형제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하는 일을 하고자 오직 은혜이기에 내 육체의 욕망대로 살겠다는 자들이 나오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율법의 조문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싸움이 있습니까?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는 내 마음대로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겠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아무래도 복음만으로 부족하다 그러니 율법적인 행함이 있어야겠다는 식으로 나옵니까? 아마 이 둘 사이에 왔다 갔다 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오직 은혜라고 하니 내가 좀 편하기는 하지만 그런데 나의 모습을 보니 너무 내 마음대로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다시 율법적인 열심을 내려고 하니 그것도 잘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묻고 싶은 것은 이런 갈등이라도 있기는 한 것입니까?
그런데 이런 논쟁을 살펴보면 그 안에 무엇이 중심이 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중심은 언제나 인간의 구원이 중심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은혜만 이야기 하거나 아니면 율법적인 행위를 강조하거나 간에 결국의 중심은 내가 구원받느냐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구원 파 같은 이단도 나오는 것입니다. 얼마나 구원을 받고 싶었으면 이름이 구원파라고 하겠습니까? 물론 그들이 구원파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을 접촉하는 자들이 그렇게 이름붙인 것입니다만 구원파의 주장들이 유다서의 내용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단번에 구원을 얻었는데 왜 또다시 속죄에 대한 찬송을 부르느냐는 것입니다. 왜 또다시 죄 사함을 위하여 기도하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단번에 구원을 얻었기에 그런 것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결정적으로 간과한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이 인간의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지 인간의 구원이 중심내용이 아닌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만약 성경이 인간의 구원이 목적이라면 유다서에 나온 그런 이단들처럼 자기 구원확신 얻고서 자기 육체의 정욕대로 살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의 기록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며(요5:39). 천지만물의 창조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된 것입니다(골1:16). 그러므로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따라 일반으로 구원 얻은 자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한 구원이지 자기 구원에 만족하고 자기 마음대로 살라는 구원이 아닌 것입니다. 참된 은혜가 임한 자는 그 은혜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은혜가 은혜 받은 자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7-12절입니다. “7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셨나니 8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9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10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승천하셔서 은혜를 주신 분이 지금도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계시기에 여러 가지 은사를 주셔서 봉사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았다는 사람이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꿀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본문에서 분명히 은혜를 받았다는 자들이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자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나타나는 것은 그것이 옛적부터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어려운부분입니다. 아니 옛적부터 심판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꾼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 받기로 작정된 자와 구원 받기로 작정된 자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11-12절입니다. “11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12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 보전하는 자가 있고 멸망의 자식이 따로 있다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구원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구원받은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으로 얻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19절입니다.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은혜로 사는 자가 성도입니다.
유다서 1:5-7 다시 생각나도록 2008. 1. 9
5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으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하노라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으며 6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7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한 유다는 일반으로 얻는 구원에 대하여 편지를 쓰려고 하였습니다. 일반으로 얻은 구원이란 인간의 어떠한 자격이나 조건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얻는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이런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 그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선물인지 편지를 쓰려던 마음이 간절하였는데 이런 은혜를 색욕거리고 바꾸는 자들이 나타났기에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편지를 한 것입니다.
이런 은혜로 인한 구원이 얼마나 귀하고 좋은 것인지 철저한 율법주의자인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 얼마나 복음이 좋았으면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 순간에 가슴에서 벅차오르는 기쁨으로 인하여 복음의 내용보다 먼저 찬송의 말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1-14절을 봅니다. “봉독”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를 하는데 인사말이 끝나자 말자 ‘찬송하리로다’라는 말로 시작하여 복음의 내용을 전합니다. 이 내용 전체를 한마디로 말하면 오직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나 바울이나 율법아래 있던 자들이 은혜를 입고 나니 그 은혜가 얼마나 좋은지 그것을 전하기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를 오해하고 이용하는 무리들이 항상 등장하는 것입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하니 그러면 은혜를 더하려면 죄를 더 지어야 되겠네 하는 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싸움은 복음이 전하여지고 부터 계속되어온 싸움입니다. 오직 은혜라고 주장하는 곳에서는 은혜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정욕을 따라 사는 것을 정당화 하는 일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은혜만이 아니라 행함도 따라야 한다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런데 은혜만이 아니라 행함도 있어야 한다고 하는 곳에서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가리는 일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방법이 둘을 절충하는 것입니다. 신인협력설이 나온 것입니다. 성경을 그렇게 볼만한 구절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 유다서도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하면서 구약에서 여러 가지 예를 들고 있습니다. 그러면 유다가 말하는 구약의 예들이 행함이 없어서인지 믿음이 없어서 인지를 추적하여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싸우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입니다.
5절입니다. 너희가 본래 범사를 알았다고 합니다. 이 범사를 알았다는 말은 그들의 구원이 은혜로 된 것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이미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이기에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쓴다는 것입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1-3절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음을 듣고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다른 거짓 선생들이 들어오니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교회도 열심히 다니고 봉사도 곧잘 하는데 무언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을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 하는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무엇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까? 다시 복음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만 구원이 일어나는가 하는 것을 다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를 정말 잘 잊어먹는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행한 것은 오래도록 기억하고 원수도 오래도록 기억하면서도 받은 은혜는 얼마나 잘 잊어버리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다시 생각나게 하기 위하여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는데 첫째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주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후에 믿지 않는 자들을 멸하셨다고 하십니다.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실 때에 어떻게 구원하여 내셨습니까?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따라 때가되어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실 때에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구원받습니다. 어린 양의 피가 발린 집은 죽음의 천사가 넘어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피 안에 있었던 자들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살아남은 것은 피의 능력임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홍해 바다 앞에서 어떻게 나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앞에는 홍해바다요 뒤는 애굽 군대의 추격을 받고서는 믿음이 없어졌습니다. 어린 양의 피로 구원받은 것은 다 어디로 잊어버리고 당장 눈앞에 닥친 위기 속에서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종이 되어 그들을 섬겼다면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가만히 있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고 합니다. 그들이 한 일은 하나님의 구원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바다를 육지처럼 건너고 추격하던 애굽 군대는 홍해에 수장되는 것을 보고서 여호와의 구원을 찬송합니다. 여호와는 용사시라고 모세가 찬송하고 백성들이 다 화답합니다. 하나님의 큰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이 큰 구원을 보고서도 3일 만에 물이 없다고 원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 없는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이 광야 40년 동안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광야 40년 동안은 믿음 없는 자들을 멸하시는 기간이 됩니다. 왜 멸하셔야 하는가 하면,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출애굽한 후 열두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40일간 정탐하고 와서 보고하기를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대한 사람들과 강한 성벽으로 되어 있기에 그들과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 같아서 당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온 백성들이 또 원망하면서 장관을 세워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합니다. 민수기14:1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출애굽부터 홍해를 건너 시내산의 강림을 보고 지금도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작은 글씨로 생각하지 아니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문자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뜻을 이해하도록 첨부한 글씨이지만 믿음과 연결하여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생각하지 않으니 믿음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당한 자들은 행함이 없어서 멸망당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 멸망당한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믿음입니다. 지금까지 은혜로 인도하신 그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어야 하는데 믿지 못한 것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이렇게 놀라운 은혜로 인도하셨기에 가나안도 은혜로 들여놓으실 것을 믿어야 하는데 그런 믿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무엇을 생각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생각지 않고 자기들의 손익만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이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렇다면 광야에서 죽은 자들이 다 구원을 받지 못하고 중도에서 멸망당하였는가? 하고 물으신다면 역시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역시 나의 개인적인 구원에 대한 관심사에서 나온 질문입니다. 다 멸망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모세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반석에 물이 나오도록 명하라는 것을 지팡이로 치면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기 않았기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였지만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함께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관심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이런 출애굽의 과정을 통하여 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유다가 이 편지를 쓰면서 왜 출애굽의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입니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가 어떤 것인지를 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얻은 구원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지 생각하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3:12-4:2절을 봅니다. “봉독” 광야 40년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12절에서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있을까 하여 매일 서로 피차 권면하라고 합니다. 14절에서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된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처음 시작할 때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라는 것입니다.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노하셔서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 자들이 순종치 아니한 자들입니다. 여기서 순종치 아니한 자들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광야 40년을 이야기 하는 것은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싸우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6절입니다. 자기의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의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심판의 날까지 영원한 흑암에 가두셨다고 합니다. 천사란 하나님의 영광과 그 일을 위하여 시중드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이런 천사조차 자기의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을 타락한 천사로 보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늘의 처소에서 쫓겨나서 영원한 심판의 날까지 흑암에 가두어 두셨다는데 이 흑암의 세계가 이 땅으로 보기도 합니다. 하늘의 영광에 비하면 이 땅은 캄캄한 흑암의 곳이기도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사단은 끊임없이 이 세상이 가장 좋은 세상이라고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싸움이란 무엇입니까? 고린도후서 4:1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신은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가로 막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3-6절입니다. “3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이 비쳐졌다면 그것은 천지창조의 능력처럼 우리에게 임한 것입니다. 이것을 붙들고 지키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7절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성과 그 이웃의 도시들이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저희와 같이’라는 이 저희들이 바로 거짓 선생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꾼 자들입니다. 이미 구원을 얻었다는 자들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얻었기에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자들입니다. 그 결과 다른 색을 따라가고 음행한 소돔과 고모라성과 그 주변의 도시들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원한 형벌에 처하여 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 세 가지를 내용을 통하여 성경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7절 끝에 보시면 거울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거울을 왜 보는 것입니까? 얼굴에 무엇이 묻었는지 봅니다. 머리나 몸을 살핍니다. 옷매무새를 살펴봅니다. 거울에 비추어 봄으로 자신을 살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무엇을 비추는 거울입니까? 우리의 마음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내용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거울입니다. 날마다 거울을 보듯이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서도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라고 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1-11절을 봅니다. “봉독” 유다도 바울사도도 광야생활을 거울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거울이 되어 경계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 은혜가 어떤 은혜인지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그 은혜를 한번 따 놓은 면허증처럼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필요할 때만 꺼내 써 먹는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은혜가 천하보다 귀한 것임을 날마다 생각하며 사는 성도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유다서 1:8-11 꿈꾸는 사람들 2008. 1. 16
8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는 도다 9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10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 도다 또 저희는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11 화 있을찐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고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들이 어떻게 심판 받는 것인가를 구약의 예를 들어 증거 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 증거의 세 가지는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멸망하는 것과, 천사들이 자기들의 지위를 지키지 아니함으로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갇힌 것과,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도시들이 간음과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은 것에 대하여 거울이 되었음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분명한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서도 그런 심판을 우습게 여기는 자들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8절에서 꿈꾸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꿈꾸는 사람들이란 교회나 세상이나 가릴 것 없이 꿈과 희망 비전에 대한 그런 꿈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런 꿈에 대하여서도 잠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 월드컵 때에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구호가 온 나라를 들썩거리게 하였습니다. 이런 꿈이란 사람들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꿈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얼마나 많은 교회의 표어로 사용하고 있는지 꿈이라는 단어, 비전이라는 단어가 들어가지 않으면 아주 시대에 뒤떨어진 교회이기나 한 것처럼 꿈이 지배하는 그런 교회들이 되어가는 것을 봅니다. 큰 꿈과 큰 비전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물도 옛날에는 예배당 외에 짓는 건물을 교육관이라고 지었는데 이제는 비전센터라고 짓고 있습니다. 예배당보다 훨씬 더 멋있고 크게 짓습니다. 다양한 문화시설과 운동시설을 만들어 놓고서 자신들의 비전을 이루겠다고 합니다.
만약 유다서의 저자가 오늘 한국에 와서 본다면 이런 교회들을 보고서 꿈꾸는 자들이라고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교회나 세상이 꿈을 이야기 하지만 그런 꿈은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꿈들입니다. 정말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꿈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욕망을 모아서 그것을 꿈이라고 여기며 그것을 이루도록 하는 것은 다른 복음인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종이 아닌 것입니다(갈1:10).
그러면 본문에서 말하는 꿈꾸는 자들이란 어떤 자들입니까? 다른 번역을 보면 ‘제 정신을 잃고(공동번역)’, ‘몽상에 빠져서(표준 새 번역)’등으로 번역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 꿈꾸는 자들이란 구약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거짓 계시를 받고서 참된 계시라고 말한 자들처럼 된 것입니다. 열왕기 상 22장에 보시면, 아합 왕 때에 시드기야 선지자와 미가야 선지자의 대립을 보게 됩니다. 시드기야도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증거물로 철 뿔을 만들어 가서 아람과 전쟁하면 이긴다고 합니다. 미가야는 하나님께서 거짓말 하는 영을 그들에게 부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아합 왕은 결국 다수의 말을 듣고 나갔다가 죽게 됩니다.
신명기 13:1-5절을 봅니다. “1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2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찌라도 3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4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하고 5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여 취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케 하려 하며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찌니라“
이처럼 거짓 선지자들도 그들대로 보는 꿈과 환상과 계시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그들이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물론 심판받기 위하여 그렇게 됩니다만 그들의 말을 듣는 자들도 결국 심판에 이른다는 것이 데살로니가 후서 2:9-1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자들을 심판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일 낮에도 누가복음 17장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고 하여도 가지 말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시대나 꿈꾸는 자들이 자신들을 추종하게 하려고 온갖 이야기들을 다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꿈꾸는 자들이란 마음의 욕망을 하나님의 일로 포장하여 위대한 일을 이루어내자는 이런 자들을 더 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꿈꾸는 자들이란 결국 자기들의 주장을 펼치기 위하여 계시를 보았다, 환상을 보았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전하는 영적인 지식만이 참이라고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이러한 자들과 힘써 싸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자들의 특징이 어떻게 드러나는 것입니까? 첫째로 육체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 성의 사람들처럼 육체를 더럽히고 다른 색을 따르면서도 자신들은 자유 한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또 권위를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정당한 권위들마저 업신여기는 자들입니다. 이런 권위를 업신여기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비방하는 것은 말과 행동으로서 비방하였습니다.
이런 꿈꾸는 자들이 왜 이렇게 나오는가 하면 그 배후에는 영지주의 사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는 이 세상을 창조하였다는 창조주를 평가 절하합니다. 우리도 그런 생각이 들 때가 많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신다면 세상이 어떻게 이런 꼴로 돌아가도록 내 버려두셨는가 하는 의문이 들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모르기에 이런 반항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꿈꾸는 자들은 이 세상을 창조한 신은 등급이 낮은 신으로 보고 이런 세상에서의 구원이란 세상의 모든 속박에서 자유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권위를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그 어떤 규범에도 메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교회에서 사도들이 가르친 내용들도 무시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어떤 세상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자기들의 음행이나 우상숭배들조차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서 그렇지 못하는 자들을 믿음이 연약한 자나 믿음이 없는 자로 보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들은 고린도전서에서 우리가 이미 보았습니다. 교회 안에 그런 자들과는 사귀지도 말고 쫒아내라고 하였습니다.
셋째로 영광을 훼방하는 자들입니다. 영광을 훼방한다는 것은 이들이 얼마나 안하무인인지 천사의 예를 들어서 증거 하고 있습니다. 9절입니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천사장이라도 감히 훼방하는 말을 못하고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한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미가엘과 마귀가 모세의 시체를 두고서 다투었다는 내용은 유대인들의 전승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전승을 유다가 성령의 감동으로 사용한 것이라고 봅니다.
성경에 나오는 내용은 신명기 34:5-6절입니다. “5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6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약속의 땅을 보기는 하지만 들어가지는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므리바 물가에서 하나님의 명하라는 말씀을 지팡이로 치면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기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장사되었지만 그 묘를 아는 자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묘는 천사에 의하여 감추어진 것입니다. 이 사건의 배후에 미가엘과 마귀의 다툼이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모세의 무덤을 왜 알지 못하게 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다가 불 뱀에 물려 죽어갈 때에 하나님께서 놋으로 뱀을 만들어 그것을 쳐다보는 자는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놋 뱀을 히스기야 왕 때까지 보관하고서는 음란하게 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스기야 왕이 그 놋 뱀을 부수어버렸습니다. 그런 물건들이 우상숭배에 사용된다면 모세의 묘지도 우상숭배의 대상이 될 것이기에 천사가 숨겨버린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런 천사장 미가엘조차 함부로 훼방이나 비방의 말을 못하는데 이들 꿈꾸는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조차 함부로 비방하는 안하무인인 자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늘 교회 안에서도 이런 모습들이 얼마나 빈번하게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농담거리로 바꾸어서 코미디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다서에서 경고하는 이런 꿈꾸는 자들의 말과 행동들이 오늘날 교회에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면 우리가 믿음의 싸움을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을 용납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를 더럽히고, 권위를 업신여기고, 영광을 훼방하는 일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자연스럽게 들어와 있는지를 이런 말씀에 비추어 조사를 해보면 깜짝 놀랄 정도입니다.
10절을 봅니다. 이 사람들, 즉 꿈꾸는 자들입니다. 자신들은 진리에 섰다고 말하고 행동하지만 그러나 그들의 말과 행위를 보면 성전 된 육체를 음행으로 채우고 정당한 권위마저 업신여기고 하나님의 영광마저 비방하면서도 자신들은 진리를 알기에 자유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는 것입니다. 바른 권면을 들으면 오히려 비방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절대적이라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이성이 없는 짐승과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꾸는 이런 자들은 사실 짐승과 같이 본능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11절입니다. 이런 꿈꾸는 자들에 대하여 한마디로 저주를 발합니다. 화 있을진저! 이런 자들을 또다시 구약의 세 인물을 예로 들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고, 영광을 훼방하는 자들에 대하여 그 순서는 상관이 없습니다. 세 사람이 다 같이 이성 없는 짐승처럼 그 본능으로 행하게 된 결과가 살인과 음행과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먼저 가인의 경우를 봅니다.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사만 받아주시고 자신의 제사는 받아주시지 않으시는 것을 보고 동생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있다고 경고를 하시면서 너는 죄를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짐승 같은 본능은 죄를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결국 동생을 살해한 것입니다. 이러한 가인의 길이란 자신이 받아들여지지 아니함으로 인하여 시기와 질투와 미움으로 형제를 살해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가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의 동기를 예수님은 행위로 보시기에 우리의 마음에 가인과 같은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멸망의 길인 것입니다.
두 번째 발람입니다. 발락 왕이 발람을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라고 합니다. 발람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그 어그러진 길을 가는 것입니까? 삯을 위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삯을 위하여 거짓 것을 참되다고 합니다. 쓴 것을 단 것이라고 합니다. 평화가 없는데도 평화를 말합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이런 모습들이 발람의 길입니다. 우리는 이러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행동의 원인과 목표점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 번째 고라입니다. 고라는 모세와 아론이 대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는 것을 보고서 왜 너희만 잘난 체 하느냐고 대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정당한 권위에 대하여 대항한 것은 곧 하나님을 거역한 것입니다. 모세가 지도자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고라는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유명한 족장 250명을 대동하고서 왜 똑같이 자신들도 레위지파로 거룩한데 왜 너희만 높이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모세가 너희가 분수에 지나치다고 하면서 성막의 일이 적은 일이냐고 하였습니다. 결국 이들은 하나님 권위를 업신여기고 영광을 훼방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말은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에서 자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것은 정말 주님의 은혜가 드러나는 삶입니까? 아니면 오늘 책망을 받는 꿈꾸는 사람들처럼 자신들은 가장 영적이라고 여기지만 그러나 그 속은 멸망 받는 짐승처럼 자신들의 본능에만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자신의 본능대로 살아가면서도 자신은 예수 믿고서 자유 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오늘 책망 받은 사람들처럼 꿈꾸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참된 꿈이 있습니다. 24-25절입니다. “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25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찌어다 아멘”이 말씀이 우리의 참된 꿈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유다서 1:12-16 에녹의 예언 2008. 1. 30
12 저희는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의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13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 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14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1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성경에서 증거 하는 구원이란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인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노력하여 받을 수가 없는 것은 이미 허물과 죄로 죽어있기에 영적인 일에 대하여는 아예 감각조차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구원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우리에게는 단번에 주어졌지만 하나님께서 일하신 것은 너무나 엄청나서 이 말을 하려고만 하면 가슴이 벅차서 찬송부터 터져 나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은혜로 받고 그 다음 성화는 우리의 노력을 동원해야 한다는 이런 주장들은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오해하고 있다고 봅니다.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는 은혜로 받았지만 그 다음부터는 내가 은혜를 갚아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주고받는 원리입니다. 그러나 단번에 주신 그 믿음의 도는 은혜를 받고 또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가 얼마나 대단한지 그 은혜와 사랑을 알아가기에는 우리 평생에도 모자라기에 하늘나라 가서도 영원히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구원의 기쁨을 무너뜨리려는 자들이 나오는데 두 종류로 나타납니다. 은혜는 받았지만 우리가 무엇 무엇을 해야 한다는 새로운 율법주의가 있습니다. 다른 편에서는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우리는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사람들 즉 은혜를 자기들의 색욕거리로 바꾸어버리는 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다서에는 어떤 자들을 경고하는 것입니까? 후자입니다.
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지난주에 이어서 오늘도 보고자 합니다. 왜 알아야 하는가 하면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하는데 적을 알아야 싸울 것이 아닙니까? 다시 지난주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꿈꾸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육체를 더럽히고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훼방하는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알지 못하는 것을 훼방하고 이성 없는 짐승처럼 본능으로 행하여 멸망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가인의 길과 삯을 위하여 간 발람과 고라의 패역과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말씀 12-13절에서는 이 거짓 선생들의 특징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며 애찬의 암초라고 합니다. 새 번역을 보면, 이 사람들은 자기들만을 생각하면서, 염치없이 먹어대므로, 여러분의 사랑의 식탁을 망치는 암초라고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들이 식탐이 많아서 마구 먹어대므로 분위기 망치는 사람정도로 보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때에 성도의 공동식사는 아주 중요한 교제였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단지 식사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살 찢으심과 피 흘리심을 기념하는 성찬식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일 때 마다 애찬은 아주 중요한 성도의 교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식사에 거짓 선생들이 거리낌 없이 들어와서 함께 참여한다는 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이들을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애찬의 암초라고 합니다. 그저 밥을 먹다가 돌을 씹은 정도가 아니라 거대한 배를 침몰시키는 암초와 같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암초는 아니지만 이번에 서해에서 유조선이 삼성의 크레인과 충돌하여 기름유출의 사고를 보았습니다. 그 결과 얼마나 엄청난 피해가 왔는지 세 사람이나 자살까지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고가 일어나는 것처럼 단번에 주신 믿음을 버리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을 분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라고 합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 비가 오지 않으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지난주일 오후에 스가랴서에서 늦은 비를 구하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땅은 비를 흡수하는 땅이어서 제때에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이른 비와 늦은 비가 때를 따라 와야 농사가 되는데 구름만 일고서 비가 오지 않으면 얼마나 허망하겠습니까? 거짓 선생들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교제에 뛰어들어서는 자기들이 모든 진리를 아는 것인 양 큰소리를 치지만 그러나 빈말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죽은 나무인데 어느 정도인가 하면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인 것입니다. 이렇게 된 나무는 거저 비바람에 썩어져갈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죽고 또 죽은 나무이지만 살아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이 밥 먹고 활동한다고 해서 그것을 살아있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살아있다는 것은 생명의 주님과 연결이 되어 있어야 살아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지시와 개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짓 선생들은 자신들의 본능대로 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은혜를 알지 못하는 본성입니다. 은혜라는 단어를 쓰기는 쓰지만 세상에서 통용되는 말이지 하나님의 은혜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그러나 이 은혜가 우리의 본성에 거슬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1:24절에는 우리가 원 돌 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우리의 본성을 거슬러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거짓 선생들의 유혹이 들어오면 잘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적을 분별하여 힘써 싸우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바다의 거품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바다를 때로는 교만한 세력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거짓 선생들이란 무언가 거대한 임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 수치의 거품만 내는 거친 물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들이 무언가 대단한 것 같고 위협적이지만 그러나 세상의 권세나 힘이라는 것은 얼마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잠시 지나고 보면 그 대단하다는 것들이 한낮 거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겠지만 그러나 영원의 빛에 비추면 그런 것들은 거품인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유리하는 별들이라는 것입니다. 별들이란 각기 제 길이 있습니다. 찬송가 가사에도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75장에 보시면 하나님의 창조를 노래하는데 해와 달과 별들이 제각각 창조주의 솜씨를 드러낸다는 내용입니다. 그 중에 “행성과 항성 모든 별들이 저마다 제 길을 돌면서 창조의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하네” 하는 가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생들은 제 길이 없어서 유리하는 별들이라는 것입니다. 휙 하면서 지나가는 유성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흑암에 갇힐 운명이 거짓 선생들의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비유들은 결국 거짓 선생들의 허망함을 알게 하여 그들을 분별하고 싸우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고는 이미 에녹 때부터 있었다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예언하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에 대하여 예언하였다는 것은 에녹 당시에도 예언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거짓 선생들이 일어나는 지금도 해당되는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죄 한 인간의 특징이란 언제나 같은 모습입니다.
창세기 5:21-24절입니다. “21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23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에 대하여서 이렇게 짧게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속에 사람들에 대하여 예언하였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유다는 에녹이 예언하였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창세기 설교를 할 때에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다시 봅시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고부터 하나님과 동행합니다. 그렇다면 므두셀라를 낳았을 때에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 계시를 아들의 이름에 두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이름들은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기 위하여 지음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므두셀라는 무슨 뜻인가 하면 ‘창의 사람’입니다. 창이란 무기입니다. 창이 던져지면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므두셀라가 죽으면 그것이 심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이 예언을 한 것입니다. 에녹은 자기 아들이 죽으면 심판이 올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기에 늘 종말론적인 자세로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노아 홍수 시대의 사람들이 죄악이 관영하였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자기 좋을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에녹은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신약이 유다가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14-15절을 봅니다. “봉독” 주께서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상에 나타난 노아 홍수의 심판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에녹의 예언대로 므두셀라가 죽던 해, 노아 600세 되던 해가 홍수심판이 임하였습니다. 에녹은 므두셀라 300세 되던 해에 하늘로 들림을 받았고 므두셀라는 노아가 방주를 거의 다 만든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므두셀라 죽던 해가 노아 600세 되던 해이고 그때 홍수가 났습니다. 그러므로 에녹의 예언은 그대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죄악이 무엇이었습니까? 경건치 못함이었습니다. 경건이란 이 시대에 잘 사용하지도 않는 단어입니다만 글자 뜻은 정성껏 공경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경건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하나님의 말씀을 공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무려 네 번이나 경건치 아니하는 자들을 심판하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에녹의 이 예언은 오늘 종말을 우리에게도 여전히 증거 하는 것입니다. 무엇에 대하여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까? 베드로후서 3:1-7절을 봅니다. “봉독” 여기서 옛 선지자의 예언이 나옵니다. 노아 홍수에 대한 심판을 사람들이 일부러 잊어버리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들을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 홍수 때나 지금이나 경건치 아니한 자들에 대하여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경건이란 바리새인의 위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런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특징이 16절에 나옵니다.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또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경건치 아니한 자를 물로 심판하셨고 장차 불로 심판하실 것인데 그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특징들이 저에게 다 들어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보시니 해당되는 사항이 없습니까?
원망이 나오지 않습니까? 불만이 나오지 않습니까? 세상만사가 다 원망과 불만이지 않습니까? 집에서도 교회에서도 원망과 불만이 나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대하여서도 원망과 불만이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내 정욕대로 안 되니 원망과 불만인 것입니다. 이것이 정욕대로 행하는 자들이며 영적인 지식을 자랑하는 재미로 사는 자들이며 이익만 된다면 무슨 아첨이라도 다하는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아닙니까?
에녹의 예언이 오늘날도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예언이 그대로 시행되고 있습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들, 하나님의 말씀을 공경하지 않고 무시하는 자들, 즉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불사르기 위하여 이 하늘과 땅이 보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자가 되어야 합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과 에녹처럼 동행하면서 그 분의 약속대로 주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노아가 은혜를 입어서 방주를 예비한 것처럼 주님을 기다리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유다서 1:17-23 기억하라 2008. 1. 30
17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18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19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 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21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 22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23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여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17절을 봅니다. 유다는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을 향하여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왜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인하여 한 형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은 우리가 평소에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과 얼마나 대조적인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한다는 말을 우리는 언제 사랑한다는 말을 나를 중심으로 사랑의 밀도를 측정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나를 중심한 그런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확증이 되었습니다.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는데 이것은 우리가 평소에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랑과는 전혀 다른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 안에는 신분이나 지위나 피부색으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구약의 예를 들자면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두 사람 다 여호와의 전쟁이 활과 칼에 있지 않음을 아는 사람들이기에 그 마음에 서로 연락되었습니다. 요나단이 죽었을 때에 다윗이 요나단을 위하여 시를 지었는데 사무엘하 1:26절입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승하였도다” 기이한 사랑이라고 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서로 원수사이이지만 그 사랑이 심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런 사랑으로 권면을 하는데 그 첫 번째 내용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미리 경고한 내용들은 거짓 선생들이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18절의 말씀은 베드로후서 3장 3절의 내용과 흡사합니다.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소식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모습은 지난 주 수요일과 주일 낮에도 계속하여 보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을 일부러 잊어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유다는 사도들이 전한 말씀을 기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이 일어날 것을 사도들이 이미 말하여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은 거울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자신의 마음을 자꾸 비추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사도만이 아니라 바울사도도 거짓 선생들에 대하여 여러 번 경고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0:29-31절 한곳만 봅니다. “29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31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흉악한 이리가 외부에서도 오지만 내부에서도 나온다는 것입니다. 같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서도 거짓 선생들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기억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마지막 때에 기롱하는 자들, 즉 자기의 정욕대로 행하면서 예수님을 신실하게 믿는 자들을 조롱하는 자들이 나올 것이라고 합니다. 이들의 특징은 19절에서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당을 짓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자들을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무시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육에 속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당을 짓는다고 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 안에서도 여러 파당이 있었습니다. 나는 베드로파가 바울 파다 아볼로 파다라는 것입니다. 이런 파당에 대하여 바울은 한마디로 정리합니다. 누가 십자가를 졌느냐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지도 않은 자들을 어떻게 중심의 자리에 두고서 그들을 따라 파당을 만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서는 이보다 더한 모습입니다. 거짓 선생들이 자신들의 정욕대로 행하면서 자신들이 참으로 영에 속한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이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같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전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은 파당이 있는지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우리나라에도 교단과 교파가 얼마나 많이 나누어 졌는지 수백 개가 넘습니다. 나누어질 때는 꼭 자기들이 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앙고백은 똑 같이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렇게 나누어진 것입니까? 진리를 사수한다는 미명아래 자신들의 이해타산을 따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유다서의 말씀 앞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비추어 보면 회개할 일 뿐입니다.
20절입니다. 다시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거짓 선생들이 자신들이 영적인 지식을 가진 자라고 하지만 그들이 사실 육에 속한 자이며 성령이 없는 자들이기에 자신의 정욕대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고 너희는 사도들의 말한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첫째로 지극히 거룩한 믿음위에 자기를 건축하라고 합니다. 거짓 선생들의 기초는 자기들의 지식이나 체험이나 감정들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지극히 거룩한 믿음위에 자기를 건축하라는 것입니다.
이 지극히 거룩한 믿음이란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입니다. 단번에 주어졌다고 해서 그것이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1절에 보시면 부르심을 입고 하나님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극히 거룩한 믿음이란 거룩한 아버지, 거룩한 아들, 거룩한 영에 의하여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 기초란 바로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 위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기초란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위에 세워지지 아니하면 모래위에 지은 집과 같은 것입니다. 반석위에 세운 집은 무너지지 아니합니다. 건물의 기초가 부실하면 아무리 높고 멋있게 지은 건물이라고 하여도 무너질 때는 그 무너짐이 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을 듣고 순종하지 하는 자는 반석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고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모래위에 지은 집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의 기초가 어디인지 다시 점검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성령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영적인 지식이 있다고 하면서 온갖 영적인 말을 해도 사실 그들은 성령이 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기도하라는 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기도하는 것은 자기의 정욕대로 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3절에서 너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을 위하여 쓰려고 잘 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은 내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충만하심을 기도하신 내용이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는 기도였습니다.
셋째로 21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자기를 지키라고 하면 자신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유혹들이 많은지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로마서 8장에 의하면 이 세상의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에 대한 믿음이 바로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넷째로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영생에 이르는 길이 우리에게 달린 것입니까? 아닙니다. 영생에 이르도록 무엇을 바라보라는 것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스스로 지킬 수가 있고 우리가 스스로 영생에 이를 수 있다면 결코 주님의 긍휼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긍휼이란 불쌍히 여김인데 자신이 이루어낼 수 있다면 긍휼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긍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다섯째로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의 유혹을 받아서 그들을 따라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의심이 일어나는 자들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이들을 보고서 정죄하거나 판단하기 보다는 긍휼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어떤 자들은 의심이 일어나지 않고 진리에 섰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실력으로 되었다면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아도 되겠지만 진리에 견고하게 서서 흔들리지 아니하는 것도 주님의 긍휼로 인한 선물이기에 다른 연약한 자들에 대하여서도 긍휼로 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형제를 대하는 태도는 어떻습니까? 나의 기준을 마련해 놓고서 도마 위에 많이 올립니다. 긍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어쭙잖은 자기의 의를 가지고 천하를 다 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은 야고보서 2:13절의 말씀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자신이 긍휼을 입은 자라면 혹 의심이 있어 흔들리는 자가 있더라고 그들을 긍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또 어떤 자들은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고 합니다. 지금 유혹을 받아서 넘어간 것입니다. 그러니 불에 타고 있는 것과 같은 자들입니다. 이들을 불에서라도 끌어내라는 것입니다. 이미 끝났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돌아올지 모르기에 불에서 끌어내는 심정으로 구원하라는 것입니다. 또 어떤 자는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향력을 입을까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향하여서도 역시 긍휼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 옷이라도 싫어하여야 하지만 그러나 긍휼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11:30-32절입니다. “30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2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구원얻는 모든 사람이 긍휼로 구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이런 판단을 하려면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기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기도하고 무시로 깨어 기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들이 전한 말씀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유혹을 받고 있으면서도 유혹 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심지어 자신이 불에 타고 있으면서도 불에 타는 줄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읽고 묵상도 하여야 합니다.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사는 자들을 조롱하지만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누가 뭐라고 하여도 주님의 약속의 말씀대로 될 것을 기억하고 믿고 기다립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유다서 1:24-25 능히 서게 하실 자 2008. 2. 6
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25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찌어다 아멘
짧은 유다서 본문을 그동안 여섯 번에 나누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내용들을 한 번 더 요약하여서 살펴보고서 마지막 송영에 대한 부분을 보고자 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육신적인 동생으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런 유다가 예수님을 어떻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1절을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합니다. 자신을 예수님의 동생이라고 소개하면 좀 더 권위가 있을 것인데도 자신은 야고보의 형제라고는 하면서도 예수님에 대하여서는 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새롭게 알고 믿게 된 것입니다.
이 유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은 구원이 얼마나 좋았는지 그 일반으로 얻은 구원에 대하여 같이 구원을 얻은 형제들에게 편지를 보내려는 마음이 간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일반으로 얻은 구원이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부르심을 입고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한 것입니다. 1절 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이 내용은 오늘 읽은 마지막 송영에도 연결됩니다. 이들에게 편지하면서 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더욱 많기를 기원합니다.
바울서신의 인사말은 대부분 은혜와 평강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긍휼과 평강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평강이 주어지듯이 긍휼을 입은 자도 평강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평강이란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어난 구원의 상태를 포괄적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샬롬의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됨으로 이웃과 자연과의 관계도 바르게 되는 상황이 평강인 것입니다. 이러한 평강이 주님의 은혜와 긍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대에도 참으로 필요한 것은 세상의 권세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그런데 이런 평강을 깨어버리려는 자들이 등장한 것입니다. 4절에 보시면 가만히 들어온 몇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어버리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믿음으로 주어지는데 그 믿음이란 단번에 주신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단번에 받은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서 자신의 피를 흘리신 믿음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을 무너뜨리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하는 자들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써 싸우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범사에 알았던 것을 다시 생각나게 하기 위하여 이 편지를 쓴다고 한 것입니다. 일반으로 얻은 구원,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로 얻은 구원이 얼마나 기쁘고 놀라운 선물인지를 쓸 마음이 간절하였는데 가만히 들어온 몇 사람들 때문에 그들과 싸우기 위하여 다시 기억나게 하고 경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어버린 자들이 어떻게 멸망하였는지를 구약의 여러 인물들과 사건들을 통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 한 백성들이 믿지 아니함으로 광야에서 멸망당한 사실과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한 천사들을 영원한 결박으로 어두움에 가두어버린 것과 소돔과 고모라와 그 주변의 도시들이 간음을 하고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꿈꾸는 자들은 그들처럼 육체를 더럽히고 권위를 업신여기고 영광을 훼방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이성 없는 짐승처럼 자신들의 본능대로만 행하는 자들이기에 그것으로 멸망 할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들은 가인의 길에 행하는 자들이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간 자들이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은 자들과 같은 길로 가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받은 자들의 모임에 기탄없이 들어와서는 함께 먹고 마시며 교제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며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가을나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며 영원히 예비 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자들의 심판에 대하여 에녹의 예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녹이 사람들에 대하여 예언하였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수많은 천사들과 함께 강림하셔서 뭇 사람을 심판하시는데 모든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아니한 일과 또 경건치 아니한 죄인이 주께 거슬러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함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들이며 그 입으로는 자랑하고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에녹의 예언대로 노아 홍수의 심판이 난 것을 이 본문의 말씀을 살펴볼 때 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오늘 이 시대가 에녹이 예언한 때와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3장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말세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롱하는 자들이 나와서는 심판이 없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종말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유다가 말한 것처럼 이성 없이 자기들의 본능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종말이 없고 심판이 없다고 믿고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불을 보듯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성 없는 짐승처럼 자기 본능대로 사는 시대가 어느 시대나 다 있었지만 오늘 이 시대는 짐승처럼 사는 것을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사는 것입니다. 정말 자기 몸의 쾌락만을 위하여 사는 세상입니다. 모든 가치를 눈에 보이는 것에 둡니다.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였듯이 온 세상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아예 노골적으로 더 당당하게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3:1-7절을 봅니다. “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6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7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이 시대가 정말 이 말씀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17절을 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아니한 정욕대로 행하는 자들이 있으리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미 이천년 전의 문제만이 아니라 지금도 마지막 때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종말 안에 있는 것입니다. 종말의 특징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정욕대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당을 짓고 육에 속한 자로서 성령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지극히 거룩한 믿음위에 자신을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고 합니다.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이 여기며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며 또 어떤 자는 그 육체로 더럽힌 옷이라도 싫어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유다서 전체를 이렇게 살펴보니 두렵지 않습니까? 불안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자기의 정욕대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까? 주님의 뜻에 순종하기 보다는 내 몸이 끄는 대로 행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의 만족과 나의 유익을 위한 결정을 먼저 하면서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유다가 경계하기 위하여 예를 든 수많은 사건과 사람들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지극히 거룩한 믿음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주에 이 말씀을 보았습니다만 만약 우리에게만 이 일을 맡기셨다면 저는 정말 자신이 없습니다. 어떻게 지극히 거룩한 믿음위에 자기를 건축하겠습니까? 성령으로 기도하십니까?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게 하십니까?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긍휼, 불쌍히 여기심, 주님의 해산의 고통이 담겨있는 긍휼을 아는 유다는 인사말에서 긍휼과 평강과 사랑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세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의롭다고 하여 주신 긍휼의 주님이십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수많은 심판의 사례들을 통하여 두려워지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보는 사람들도 두려울 것입니다. 물론 마땅히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두려워 떠는 자들이 주님께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이 오히려 찬양으로 끝이 나는 것이 오늘의 본문입니다. 24절을 봅니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서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방해세력도 이단도 마귀의 위협에도 능히 보호하십니다. 4절에 보시면 가만히 들어온 이단들도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 위하여 미리 기록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이단들의 활동이 왕성하여도 능히 자기 백성을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능히 보호하시기에 거침이 없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거침도 제거하여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그 영광 앞에 서게 하시는데 그냥 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흠이 없이 세우신다고 합니다. 우리의 죄가 주홍같이 붉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게 하여 주신다는 그 주님의 말씀으로 흠도 점도 티도 없이 주님 앞에 세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주님 앞에 세워지는 것이 두려움과 공포로 세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세워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즐거움으로 설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를 그렇게 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신 것은 자신만이 하나님 앞에서 즐거움으로 서기 위함이 아닌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3절입니다.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참으신 것은 예수님만 하나님 앞에 즐거움으로 서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그 앞에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온몸이 전율할 정도로 기쁜 소식이지 않습니다. 거룩하신 주님 앞에 모든 경건치 아니한 것들이 다 불의 심판을 받을 것인데 나 같은 죄인이 즐거움으로 주님 앞에 선다는 그 놀라운 약속을 어찌 찬양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25절에서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찌어다 아멘” 라고 찬송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능히 보호하시고 그 앞에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것인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 것입니다. 이 찬송을 부를 수 있다면 이보다 더 큰 기쁨의 자리는 없을 것입니다.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