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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3서 강해
창원 늘푸른 교회 이장우 목사
요한3서 1-4 영혼이 잘 됨 같이 2007. 10. 10
1 장로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3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 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4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자신을 장로라고 소개하여도 이 편지를 받는 사람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아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사랑하는 자, 가이오에게 편지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관계란 진리 안에서의 사랑입니다. 세상의 이해관계로 만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은혜로 만난 관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보다 더한 즐거움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가이오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 복음의 진리대로 행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너무나 기뻐서 반가운 마음으로 편지의 인사말을 합니다. 그 내용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인사말이 한국교회의 교인들이라면 거의 다 아는 내용이 되었습니다. 기독교서점에 가면 용품을 파는 곳이 있습니다. 그 용품들에 새겨진 말씀 중에 이 말씀이 제일 많을 것입니다.
이 말씀이 왜 그렇게 많이 알려진 것입니까? 이 말씀으로 삼박자 구원이라는 책도 나왔습니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예 체계화하여 공식적인 신앙의 틀로 형성이 된 것입니다. 영혼만 잘 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다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못되어 있기에 범사에 일이 잘 안되고 병이 든다고 보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맞기도 합니다. 범죄 하여 하나님과 단절된 인생이기에 수고와 슬픔과 사망의 고통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잘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영혼이 잘 된다는 것을 종교적으로 풀어낸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정성 바치는 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물론 삼박자 구원을 말한 사람이 교회 개척을 할 때에 가난한 동네에서 천막치고 개척을 하여 가난하고 병든 자들이 어떻게 하면 부자도 되고 건강하게 될까를 생각하면서 성경을 보니 이런 말씀이 눈에 확 들어오게 된 것이 아닌지 추측해 봅니다. 우리가 자기의 필요를 위하여 성경을 보면 얼마든지 그렇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영혼이 잘 된다는 것을 우리가 세상에서 무슨 일이 잘된다는 그런 개념을 가지고 있기에 일이 잘 풀리고 어려움이 없고 승진하고 성공하는 것을 잘 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교회도 개척하여 몇 년 만에 성공하였는가를 간증하며 성공사례로 제시하면서 잘되는 교회라고 하는 것이니, 무엇이나 잘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성경에서 다시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에서 하나님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다 지켜 행하면 범사에 복을 받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라도 어기면 범사에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영혼이 잘되는 길을 교회에서 제시하는 것은 몇 가지 안 됩니다. 주일을 잘 지키고, 십일조를 잘하고, 주의 종을 잘 섬기고, 교회의 봉사를 잘하고, 전도를 잘하는 정도만 하면 교회에서 제일 알아주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영혼이 잘되어 복을 받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인간의 행함으로는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잘 된다는 것도 범사에 잘 된다는 것도 세상의 가치관이 전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거짓 선지자들이 외친 내용이 무엇입니까? 제사를 잘 드리면, 절기를 잘 지키면 복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참된 선지자들은 그런 제사나 절기가 무슨 소용인가며 걷어치우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돌이켜지지 않았는데 그런 제사나 분향을 받지 않는다고 이사야 선지자, 예레미야 선지자, 아모스 선지자들이 외쳤습니다. 다른 선지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럴 때에 거짓 선지자들에 의하여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영혼이 잘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잘 된다는 단어가 로마서 1:10절에서 쓰이고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로마로 가기를 원하는데 그 길이 잘 열려지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자기의 사사로운 욕심이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길이 잘 열려지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잘됨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죄수의 몸으로 묶여서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이 일어나 배가 파선하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잘 된 일이 하나도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기에 잘 된 것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범죄 하지 않았을 때에 오히려 감옥에 갇혔습니다. 얼마나 억울하였으면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주면서 복직하면 자신의 신세를 왕에게 알려서 풀어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감옥에 갇히는 것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형통하였다고 합니다. 나중에 총리가 되었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총리가 되어 죽고 유언할 때에 자기의 해골을 매고 나가라고 하였습니다. 애굽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하나님의 약속 안에 들어가는 것이 복임을 안 것입니다.
성경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일반적인 현상은 세상에서 어렵고 힘들면 저주 받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봅니다. 무언가 세속적으로 성공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이 무엇인지 또 간증하러 다닙니다. 나는 하나님께 이렇게 하여 이런 복을 받았다는 간증들이 오늘도 수백만부씩 찍혀서 온 거리에 흘러넘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가장 영혼이 잘 되신 분이 누구입니까? 그 분의 삶을 보면 무엇이 진리인지 아닌지 구별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백퍼센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신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이 예수님은 정말 그 영혼이 잘 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떤 대접을 받았습니까? 공중의 새도 깃 들 집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예수님은 머리 둘 곳조차 없었습니다. 젊은 나이에 저주 받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산다고 하면서 어떻게 세상의 성공을 말하는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오히려 그 사람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사람들은 땅의 영광을 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기다려왔던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은 그들이 원한 메시아였던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다고 배척받은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한다는 것은 민중들의 요구를 채워주는 이야기는 아닌 것입니다. 송대관의 네 박자라는 노래를 직접 들어 본적이 있는데 그런 노래가 히트를 하는 것은 그 시대의 흐름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삼박자 구원이란 우리나라가 가난한 시절에 민중들에게 딱 들어맞는 신화였던 것입니다. 그와 함께 경제성장이 일어나면서 세상의 부요함이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야고보서 5장에서는 자본의 축적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자본의 축적을 교회에서 복이라고 여기는 것입니까? 막스 베브라는 독일의 사회과학자가 이 문제를 가지고 연구를 하였습니다. 자본주의의 발달이 서구에 집중이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서구에서 자본을 축적하는 자본주의가 그렇게 발달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연구해 본 것입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증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는 것은 예정 되어있어야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정 되었는지 아니 되었는지 불안한 것입니다. 내가 예정되었다는 징표를 자기 직업에 충실 하는 것이 구원의 징표로 본 것입니다. 그래서 직업 소명설이 나온 것입니다. 자기 직업에 충실하여 자본을 축적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욕심이 아니라 신이 주신 사명에 충실함으로 주어진 도덕적 성격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물론 칼빈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 시대적 배경도 고정된 신분제도들이 무너지면서 상공인들이 자본을 축적하는 하나의 정당한 논리로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자본이 힘이 되는 것을 알았지만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였는데 이제는 자본이 많은 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표이며 축복이라는 근거를 가지게 되니 얼마든지 자본을 축적하여 나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자본주의의 발달에 칼빈의 사상이 영향을 미친 것입니다.
이제 교회에서 특히 개혁주의라고 하고, 칼빈주의라고 하는 교회에서 무엇을 하나님의 축복의 기준으로 보겠습니까? 얼마나 부자가 되었는가를 그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위대한 종교개혁자요 신학자인 칼빈의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니 누가 반박도 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보다 더한 문제는 사람들마다 부자 되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더 문제이지만 그러한 마음에 불을 지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한국 교회에서 부자는 복 받은 것이고 가난한 것은 저주 받은 것으로 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이 잘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과 비교하면 너무 벅차기에 바울사도와 비교해 봅시다. 그가 성령의 충만을 받은 사람입니다.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제거하여 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되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시험에 들 만한 육체적인 질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제거하여 달라고 기도하였지만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다는 것을 우리의 욕망에 기초하여 정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진리를 따라 산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런 모습이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약할 그때에 오히려 강하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시각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의 영혼의 잘 됨이란 로마서 8장에 의하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비록 그 사람의 처한 상황이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 같은 신세라고 할지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는 것이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것입니다. 이런 잘 됨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요한3서 5-8 진리를 위한 수고 2007. 10. 17
5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신실한 일이니 6 저희가 교회 앞에서 너의 사랑을 증거하였느니라 네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저희를 전송하면 가하리로다 7 이는 저희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8 이러므로 우리가 이 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시편 90:10절에 보시면, 사람이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한평생을 살면 기쁜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는데 왜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앞뒤의 말씀을 보면 인간이 범죄 하였기 때문입니다. 범죄 한 인생을 향하여 너희는 티끌로 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기에 아무리 수고하여도 흙으로 돌아갈 인생이기에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밤의 한 경점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잠간 자는 것 같고 아침에 돋는 풀과 같아서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 벤바 되어 마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의 분노 중에 날아가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주의 분노 중에 수고와 슬픔으로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에 사람들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이 무엇이었습니까? 율법이었습니다. 유대인들 중에는 철저하게 율법을 지킨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실상은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었습니다. 겉과 속이 일치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기들의 의가 있다고 여겼기에 주님의 초청을 거부하였습니다.
또 다른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율법을 지키는 자들로부터 죄인취급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가난하여 율법을 지킬 수도 없는 자들과 장애인들과 세리와 창기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이중적인 짐들을 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 중에서 예수님께 나아와 쉼을 얻는 자들이 있었습니다만 그러나 결코 다는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육신의 고침을 받는 것으로 또는 육신의 배부름으로 그치는 경우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에게 무엇을 주시고자 부르신 것입니까?
요한복음8:32절에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때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종이 된 적이 없는데 왜 자유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였습니다. 인간이 왜 자유가 없고 쉼이 없는가 하면 죄로 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를 짓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죄의 종이기에 아들이 자유케 함으로 자유를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죄의 종을 아들이 자유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들을 향하여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아들이 진리로 자유케 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나는 자유다 이제부터 내 마음대로 살겠다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가 되신 예수님의 권세아래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종에서 진리의 종으로, 사망의 종에서 생명의 종으로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이제부터 진리가 우리를 이끄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주가 되셔서 자기 백성을 이끌어 가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고 감사하는 일들이 나오는 것을 진리로 자유케 된 자들에게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진리로 인한 자유를 맛보며 사는 것이 아니라 온갖 세상의 염려와 걱정과 스트레스에 쌓여 사는 것은 아직도 진리로 자유하지 못한 모습이 아닙니까(찬송가 474장)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도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의 사람들과 똑 같은 것이라면 그것은 사망에 이르는 근심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7:10절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일평생 수고를 하였는데도 그 수고가 사망을 위한 수고를 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역시 수고를 하지만 진리를 위하여 수고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수고가 무엇을 위한 수고인지 돌아보려고 합니다.
요한 3서 5절입니다. 또다시 사랑하는 자라고 부릅니다. 왜 장로가 가이오를 이렇게 사랑하는 자라고 부릅니까? 4절에서 보았습니다. 진리에 행하는 것을 보고서 사랑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가운데 일어나는 관계입니다.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사랑하는가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기뻐하고 사랑하는 내용들이 진리가운데 행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사람들도 다 원하는 것들입니까?
지난 주 새 신자 공부하면서 사도신경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살펴보았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어리석어 보이지만 과연 어리석은 것인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란 저주받아 죽은 죽음입니다. 그 앞에 인생이 맞닥뜨려지지 않고서는 진리를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실존의 궁극적인 자리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았다고 하면서 온갖 의미 있다는 활동을 합니다. 생로병사, 관혼상제, 진선미를 추구하면서 살지만 우리가 목숨처럼 여기는 것들이 과연 죽음 앞에서도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이 죽음 앞에서 인간이 의미 있다는 것이 모두가 절망으로 허무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비로소 새로운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염려하고 근심하면서 이루고자 한 나의 세상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이루어진 다른 세상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받고 나니 이제부터 다른 진리체계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진리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온갖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런 수고가 얼마나 허무한지 직접경험 해보고야 후회하는 어리석은 인생들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은 자는 지혜와 진리의 말씀을 듣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은 왜 사랑하는 자라고 하면서 진리가운데 행하는 것을 듣고서 그렇게 기뻐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그 진리가운데서 행하는 내용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5-6절입니다.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신실하게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나그네 된 자란 순회전도자들을 말합니다. 이 순회 전도자들이 각 지역으로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받은 자들에게도 말씀을 증거 하면서 다니는 중에 가이오에게서 여러 가지 대접을 받고서는 장로가 속한 교회에 와서 선교보고를 한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서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과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행한 것처럼 계속하여 하나님께 합당하도록 저희를 전송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저희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들에게 아무것도 받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이 당시에 여러 이방의 신들을 소개하면서 돈을 요구하는 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이들 이방인의 신들을 전하는 자들과는 다르게 오직 복음을 전함으로만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보내실 때에 아무것도 없는 자로 보내신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자로 보내셨는데도 그들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세상의 다른 것을 보고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진리만 보고서 받아들이게 하시는 예수님의 전도방법입니다.
사실 아무 것도 없는 정도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전하면 누가 그들을 영접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영접하는 자가 있다면 이것이 바로 진리 가운데서 만나는 교제인 것입니다. 지난 주 금요일에 앞으로 이사를 하면 교회 이름을 바꾸면 어떨까 하는 말들이 나왔을 때에 어떤 집사님이 교회 이름을 “늘 죽는 교회”로 하자고 하였습니다. 저를 놀린다고 그랬는지 아니면 십자가를 전하자는 의미로 그랬는지 모르지만 이름한번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아마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웃었습니다.
초대교회 때에 순회전도자들은 거의 거지 행색이었을 것입니다. 주면 먹고 안 주면 굶어야 되는 그런 전도자들을 자기 집에 받아들이고 먹이고 입히고 여비까지 마련하여 주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가이오는 신실함으로 감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 교회에서 일어난 일로 보자면 디오드레베 같은 사람은 그런 사람들 영접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영접하는 사람을 교회에서 쫓아내기도 한 것입니다.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순회 전도자들을 영접하고 환대하는 일이 바로 진리 가운데 행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일을 다만 접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리를 옳게 분별함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 2서 10-11절을 봅시다. 바른 교훈을 가지지 않고 오는 자들은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고 합니다.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라고 합니다. 그러니 단지 순회전도자라고 해서 아무다 다 영접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전하는지를 알아보고서 참된 진리를 전하는 것을 보고 형제로 맞아들인 것입니다.
저에게도 많은 선교사들의 요청이 있습니다. 또 선교를 나가려고 하는 사람들의 전화가 옵니다. 월요일에도 어떤 목사가 전화가 와서 선교사로 나가니 연말에 선교헌금 작정할 때에 좀 고려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가운데 선교사로 나가지 않았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말하지 않아도 할 수만 있다면 선교헌금을 더 보내고 싶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 자신을 보아도 얼마나 진리를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지를 늘 실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은근히 다른 속셈을 가지고 설교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저나 여러분이 늘 깨어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담대하게 전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다시 7절을 봅니다. 저희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들에게 아무것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구원의 이름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증거 하는데 사람들에게 미련하고 어리석고 거리끼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다들 배척하기에 바쁘지만 그러나 구원받기로 택정된 사람들은 그들의 외모를 보지 않고 그들이 전하는 십자가의 도를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영접한 것입니다.
8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이 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단을 영접하는 것은 그들의 악한 일에 참예하는 것이 됨을 요한 2서에서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바른 진리를 전하는 자들을 영접하는 것은 그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즉 진리를 위하여 수고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증거 되는 길에 어떤 사람은 나가서 전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후원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성경책을 만들어 보내기도 합니다. 전도지를 만들어 보내기도 합니다. 이런 일에 참예하는 것은 진리를 위한 수고입니다.
바울사도는 빌립보서 4:3절과 18절에서 이렇게 증거 합니다. “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복음의 진리에 수고한 자들에게 대하여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이 되었고 하나님께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입니다. 죄인의 것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진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 안에서 일어나는 성도의 교제를 이렇게 받아주신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 인생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은 어떻게 살아도 수고의 삶을 삽니다. 썩을 것을 위하여 평생을 수고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위하여 평생 수고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나의 수고가 진리를 위한 수고입니까?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위한 수고입니까? 부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끌어 내셔서 이제 남은 삶이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요한3서 9-15 으뜸 되기 2007. 10. 24
9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 10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 유위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 쫓는도다 1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12 데메드리오는 뭇사람에게도,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았으매 우리도 증거 하노니 너는 우리의 증거가 참된 줄을 아느니라 13 ○내가 네게 쓸 것이 많으나 먹과 붓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14 속히 보기를 바라노니 또한 우리가 면대하여 말하리라 15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각 친구 명하에 문안하라
요한 3서에서 세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지금까지 본 대로 가이오입니다. 이 사람은 진리 가운데 행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장로가 가이오를 축복하면서 계속하여 진리 가운데 행하기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 진리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나그네들을 잘 영접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가이오와 정 반대의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는 디오드레베입니다. 9절을 보시면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다고 합니다. 이 요한 3서 외에 다른 편지를 보냈는데 디오드레베가 그 편지를 받고서도 그 편지를 가지고 온 사람들을 영접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장로가 보낸 편지와 사람을 영접하지 아니한 것은 곧 장로를 영접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 장로란 사도 요한입니다. 그러면 사도를 영접하지 아니한 것은 결국 주님을 영접하지 아니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10:40-42절입니다. “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보내신 자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또한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보내신 자들이 어떤 모습으로 오는가 하면 마태복음 10:34-39절의 내용으로 오는 것입니다. “봉독” 말씀대로 사도행전에서 복음이 증거 되는 현장은 언제나 소동과 요란함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염병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기꺼이 영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심지어 목숨이라도 대신하고자 하는 자들이 나왔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일컬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한 자들이 그 성중에 있었다는 말씀의 성취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디오드레베는 사도의 편지를 가지고 온 사람들을 영접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 편지의 내용이 무엇인지 전하여 지지 않으니 알 수는 없습니다만 요한 1서와 2서를 미루어보면 진리 안에 거하기를 권면하는 내용일 것입니다. 진리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란 요한 일서에서 보았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을 보내신 그 사랑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받은 자는 형제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린다고 할지라도 결코 자기의 위대함을 내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디오드레베는 자신이 교회에서 으뜸이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사도의 권면을 받아들이면 자신이 종이 되어야 하기에 사도의 권면을 좋아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을 접대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사도들을 망령되이 폄론하고도 유위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들을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 쫓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가서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좀 더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다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것도 현재 주어진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더 나아지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끝없는 경쟁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으뜸이 되기를 원하기에 피곤한 것입니다. 지고는 못 살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요란한 것도 모두가 으뜸이 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정치권에서도 대선을 앞두고 요란한 것은 모두가 으뜸이 되고자 합니다. 왜 으뜸이 되고자 하는가 하면 정치는 독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기 아니면 살기로 으뜸이 되고자 덤벼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그 으뜸의 자리에 이르게 되면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기에 내려오는 길 뿐입니다. 그러니 내려오지 않으려고 또 발버둥을 치는 인생들입니다. 지금 로스쿨 문제로 말들이 많습니다. 법조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은 숫자를 줄이자고 합니다. 그러나 대학들은 로스쿨 허가를 위하여 엄청난 돈을 투자해 놓았기에 적은 숫자를 책정하면 전부 보이콧하겠다고 합니다. 세상의 싸움은 언제나 이런 싸움인 것입니다. 끝없이 으뜸이 되고자 하고 그 자리를 계속 유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치만이 아니라 경제도 교회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으뜸이 되고자 다른 경쟁상대를 밟아 누르는 것입니다. 교회와 교회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한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교회 안에서도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나 이런 다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직분 자를 세워도 투표를 하여 누가 으뜸이 되는지를 뽑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일들이 일어납니까? 누가 몇 표를 얻었는가? 이 문제로 기분이 좋은 사람도 있고 기분이 나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통하여서도 우리의 죄를 보게 됩니다.
이런 으뜸이 되고자 하는 근원적인 죄의 모습은 역시 아담과 하와의 범죄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다 아담의 후손들이기에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범죄가 무엇입니까? 네가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모든 피조물의 으뜸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피조물의 으뜸은 양에 차지 아니하여 창조주의 으뜸의 자리에 도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인간이 정치를 하거나 경제를 하거나 종교를 하거나 간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꿈을 버리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 최고의 정점은 하나님처럼 되려고 합니다.
이 범죄로 인하여 지금 모든 인간이 탄식과 고통과 죽음에 허덕거리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사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고 있습니다.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인간 사회만 탄식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8장을 보시면 만물이 다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이 탄식과 울음의 소리가 가득합니다.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그 속은 이미 곪을 대로 곪아서 악취가 진동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세상의 으뜸이 되었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또 다른 으뜸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그렇게 높아지고 성공하는 으뜸이 되려고 하는 것만이 아니라 진리 가운데서 바르게 사는 일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것도 있습니다. 다른 교회는 몰라도 우리교회는 바른 교회다. 다른 단체는 몰라도 우리 단체는 바른 진리를 전한다고 하는 으뜸도 있습니다. 자유게시판에 김 집사님이 올린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복음을 잘 안다고 말들은 잘해요! 말로만 천국이지 사실은 돈을 더 사랑하고 세상을 더 사랑하고 있다고 합니다. 본인도 그러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자신은 복음을 잘 안다거나 말씀이 좋다는 말을 잘 못하겠고 거저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이 말밖에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11절을 봅니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악을 행하는 자란 디오드레베인데 이 사람이 교회의 중직을 맡은 사람이지만 하나님을 뵙지도 못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목사가 되고 장로와 권사가 되어도 하나님을 뵈옵지도 못한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의 특징은 무엇이나 으뜸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여도 자기의 뜻대로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월요일 새벽기도회 때 이사야 6장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화 있을진저! 라고 5장에서만 6번을 외친 선지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뵙고 나니 다른 사람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자신이 망할 자임을 알았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있으면서 거룩한 하나님을 보았기에 이제 죽었다는 것입니다. 입술이 부정하다는 것은 문둥병자가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고 외치는 것입니다.
이 배경이 웃시야 왕이 죽던 해입니다. 웃시야 왕이 처음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나라가 심히 강성하여 집니다. 그러자 교만하게 되고 자신이 직접 하나님께 분향하고자 성전에 나간 것입니다. 제사장이 말려도 왕의 권력으로 물리치고 향로를 잡는 순간 이마에 문둥병이 발하여 쫓겨나 평생 문둥병자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이 해에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서는 자신도 문둥병자처럼 부정한 자 임을 알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이 고백 후에 제단의 숯불에 그 입술이 지져지고 나서 하나님의 보내심을 다시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직분자란 자신이 문둥병자임을 아는 사람이어야지 자신이 의롭다거나 으뜸이 된다거나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아직 하나님을 뵈옵지 못한 사람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선한 것을 본받고 악한 것을 본받지 말라고 하였는데 이 실천력이 누구에게 속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에게 속한 것이라면 또다시 으뜸의 다툼이 나올 것입니다. 나는 선한 것을 본받는데 너는 왜 악한 것을 본받는가 하는 다툼이 또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면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훌륭해서 선한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였기에 그런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기에 하나님의 거룩을 만나지 못하였기에 자기의 으뜸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것이 나오는 사람은 결코 자기의 으뜸을 자랑할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바울사도가 율법에 흠이 없는 자라고 하던 사람이 거룩한 주님을 만나고 나서는 죄인중의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어떤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을지라도 자신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슨 자신의 으뜸이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사도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받던 제자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을 뵈올 때에 죽은 자와 같았습니다. 무엇이 선을 행하는 것인지 무엇이 악을 행하는 것인지 이렇게 분별이 되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가이오에게 데메드리오를 추천합니다. 이 사람을 잘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비록 디오드레베가 반대한다 할지라도 이 사람을 추천하는 이유는 뭇사람에게 증거를 받았고, 진리에게도 증거를 받았기에 우리도 증거 한다고 합니다. 진리 가운데 행하는 자임이 증거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진리에 속하였기에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13-15절입니다. 마지막 인사말로서 속히 얼굴로 보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평강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여러 친구가 가이오에게 문안한다는 것입니다. 또 각 친구 명하에 문안하라는 것입니다. 주종의 관계가 아니라 친구입니다. 형제와 자매로 되는 공동체인데 디오드레베는 주종관계의 공동체를 만들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참으로 으뜸이 되시는 분이 따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1:18절입니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앞뒤의 말씀을 보시면 교회의 머리만이 아니라 만물의 창조자요 만물이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진리를 아는 곳은 교회뿐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자가 있다는 것은 전에 악한 행실로 하나님을 떠나 있던 모습과 같은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십자가의 피로 화목케 되었는데 그 으뜸인 머리를 부인하고 있는 것이 디오드레베의 모습인 것입니다.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에서도 누가 으뜸인지 알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살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