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요한 2서 강해
요한 2서 강해
창원 늘푸른교회 이장우 목사
요한2서 1:1-4 진리를 아는 모든 자 2007. 9. 19
1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자요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리하는 것은 2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할 진리를 인함이로다 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4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공자는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에 대한 수많은 해석이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공자가 참된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였기에 이런 말을 하였다고 봅니다. 그러니 평생 도를 찾기 위하여 노력을 하였습니다만 이것이 진리라고 내세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몇 년 전에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도 나왔습니다.
우리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4:6절을 아시지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을 믿으시지요? 수많은 사람들이 길과 진리와 생명이 무엇인지를 찾고자 하였지만 무엇이 길이며 생명이며 진리인줄 모르고 죽어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길과 생명과 진리를 알게 되었으니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까? 다른 것들에 대하여 목마름이 없습니까?
오늘날은 진리에 대한 질문조차 없는 세상이라고 봅니다. 가끔 길에서 “도를 아십니까?” 하면서 접근하는 사이비 도가 아니라면 길과 진리와 생명이 무엇인지 관심도 없는 세상이 되었다고 봅니다. 이미 이 시대의 흐름이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고 여기는 세상입니다.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이라고 여깁니다. 성경적인 표현을 하자면 사람들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미가가 우상을 만들어 놓고서 거룩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그 자기가 옳다는 것을 절대적인 진리로 간주하고 사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디모데 후서 3:1-5절은 이렇게 증거 하고 있습니다. “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세상이 꼭 이 말씀과 같은 세상입니다. 이렇게 사는 이유는 자기 사랑이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진리의 기준이며 척도가 되어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면 진리이고 나를 괴롭게 하고 손해가 나게 하는 것들은 다 비진리로 여기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백번을 잘 해주다가도 한번 잘 못하면 그것이 화가 나는 것입니다. 백번 잘해 준 것은 어디에 갔는지 간곳이 없고 나의 마음에 상처가 되거나 경제적인 손해가 생긴다면 그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를 안다느니 생명을 안다고 하는 말들이 사실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고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라고 하여도 그것이 내 마음에 들어야 진리로 여기는 것은 이미 진리의 주체가 자기 자신임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남편이 좋은 남편입니까?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남편이 좋은 남편이라는 진리가 아내들 속에 있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까?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교회라는 진리관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엉터리 진리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참으로 길과 생명과 진리가 되신 예수님이 배척을 받았던 것이며 지금도 여전히 배척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어 진리를 아는 모든 자들은 진리가 무엇임을 알며 그 진리를 아는 자들을 또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봅니다. 이 서신을 기록한 사람이 장로라고 표현합니다. 자신의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문체나 내용을 보아서 요한 1서를 기록한 사도요한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이 편지를 최초로 받는 사람은 장로라고 하여도 다 알아보는 것입니다. 이 장로가 어디에 편지를 보내는 것입니까?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자녀에게 편지한다고 합니다.
이 부녀와 자녀를 특정한 인물로 보는가 아니면 교회 공동체로 보는가하는 의견들이 있습니다. 둘 다 가능하다고 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시면,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 비두니아 지역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밤에 환상 중에 마게도니아 지역의 사람이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보고서 마게도니아 지역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루디아라는 여인을 만납니다. 주님께서 이 여인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십니다. 그러자 그 사람과 그 집의 모든 사람이 다 세례를 받고 바울 일행을 그들의 집으로 들어와 유하라고 강권하여 있게 합니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곳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내용은 한 가정이든 교회이든 간에 택하심을 입은 것입니다. 이 택하심을 인하여 장로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참으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장로만이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쏟아지는 설교들을 들어보면 하나님의 택하심에 대하여 듣기가 정말로 희귀한 세대가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택하심을 이야기하면 사람의 선택과 결정이 무너져서 그런지 모두가 사람들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방식들만 주로 이야기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선택을 이야기하면 그 사람이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요즈음 시대에도 사람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으로 만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1절 말씀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자녀를 향하여 참으로 사랑한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진리를 아는 모든 자도 또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진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를 사랑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어 진리를 아는 일들이 어떻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2절을 봅니다. 진리가 우리 안에 거하여 영원히 함께하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진리가 어떻게 우리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14:16-17절입니다.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예수님께서 진리가 되시는데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보혜사를 진리의 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영입니다. 예수님이 영으로서 자기 택한 자들에게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영은 진리의 영이기에 세상은 능히 받을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세상이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기에 받을 수도 없는 진리입니까? 예수님이 진리며 생명이며 길이라고 하시는데 예수님을 바라보니, 사람들에게 배척받아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진리라고 따르겠습니까?
그러니 사람들에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영광과 행복을 진리의 척도로 여기며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이야기는 밀쳐내고 싶은 진리이지 환영하며 받아 들일만한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도 마찬가지지 않습니까? 언제 진리에 관심이나 있었습니까? 그저 내 몸 하나 편하고 행복한 것이 진리라고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행복한 교회, 행복한 가정, 이런 슬로건이 교회에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꿈대로 되는 교회도 있고 말입니다. 진리는 간 곳이 없고 자신들의 욕망만이 담겨져 있는 곳이 과연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에서 말씀하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를 기뻐한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직 진리가 주체가 되셔서 창세전에 택하신 자들에게 진리의 영을 보내주심으로 진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넣어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그 약속하신바 진리의 영을 우리 속에 넣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진리가 임하면 영원토록 함께 하시기에 이제부터 자기의 진리관은 무너지고 주님의 진리가 그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님의 진리가 채워지는 것입니까? 3절입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함께 합니다. 은혜란 우리가 행한 것이 없이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영이 임한 자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압니다. 고린도전서 2:1-16절입니다. 1-5절입니다. 바울사도가 전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하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전하면서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고 합니다. 바울의 말과 전도가 사람의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나타내신 일이 무엇입니까? 6절부터 봅니다. “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요한서신을 보면서 바울서신을 더 길게 보았습니다. 그래도 되는 것은 서로 공통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 공통점이 진리에 대한 내용이 같은 것입니다. 내용만이 아니라 진리가 어떻게 성도에게 주어지는지 그 과정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한 성령을 받았다는 통일성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이 임하게 되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의 바탕은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그 긍휼과 자비가 무궁하시므로 자기의 택하신 자들에게 진리를 영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자들은 드디어 평강을 맛보게 됩니다. 이 평강 또한 세상이 알 수도 없고 맛 볼 수도 없는 평강입니다. 마치 진리의 영을 세상이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는 것처럼 은혜와 긍휼로 주어지는 평강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3절을 봅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고 합니다. 진리를 아는 모든 자들은 한 결 같이 주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을 이야기 합니다. 그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런 진리에 행하는 자를 보는 것은 장로의 기쁨인 것입니다. 동일하게 진리를 아는 모든 자들의 기쁨인 것입니다.
4절입니다.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다고 합니다. 이 계명은 이미 요한 1서 3:23절에서 보았듯이 예수님을 믿음과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과 사랑이 나타나는 것을 보니 심히 기쁘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나타나는 것은 역시 택하심을 입고 우리 안에 영원히 함께 할 진리로 인한 것입니다. 이런 진리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진리와 사랑 안에서 주어집니다. 이런 내용이 기쁨이 됩니까? 지금 세상을 사는 형편은 돈도 없고 몸도 아프고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는데도 성경이 약속하는 이런 진리로 인한 기쁨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진리를 아는 모든 자 중에 포함이 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의 약속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요한2서 1:4-9 처음부터 가진 것 2007. 9. 26
4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5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 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6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7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8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9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추석을 지내면서 무슨 기쁜 일이 있었습니까? 사람들마다 자기들의 기쁜 이야기들을 늘어놓지만 그런 이야기들이 오늘 말씀에 나타는 기쁨과 같은 것입니까? 3절에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한다고 합니다. 4절에서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기쁨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어른들은 누가 승진을 하였는지, 누가 부자가 되었는지를 가지고 기쁨을 이야기 합니다. 아이들은 누가 용돈을 많이 받았는가를 가지고 자기들의 기쁨의 척도로 삼는 것입니다.
저의 집이 큰 집이 되다보니 상당히 많은 손님들이 옵니다.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수적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역시 이야기의 중심은 세상의 이야기들이지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는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자기 기쁜 이야기들을 쏟아 놓지만 정작 진리에 대한 관심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자기에게 어떤 만족과 유익이 있는가가 진리의 기준이 될 뿐입니다. 손님들이 돌아갈 때 예수사회를 전도지라고 하면서 나누어 주었습니다. 사촌동생이 예수님을 믿는데 왜 이런 것을 주느냐고 말하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과연 무엇으로 기쁨을 삼고 있는지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다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 우리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금요일 성경공부시간에 에베소 교회를 보았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책망을 받은 것은 처음 사랑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거짓 사도를 분별하여 드러낸 것을 잘한 것이지만 처음 사랑을 잊어버렸다는 책망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받았던 복음으로 인하여 기뻐하며 사랑하였던 그 처음 사랑은 어디에 갔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처음부터 가진 것과 처음부터 들은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5절에 보시면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자 라는 말을 새 계명같이 쓰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가진 것이라고 합니다. 처음부터 가진 것이 새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거짓 선생들은 자꾸만 새로운 계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계시라고 말하면서 처음부터 듣고 처음부터 가진 새 계명을 지나쳐 버리게 하려는 자들이 있기에 처음부터 들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1서 2:7-11절입니다.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9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여기서도 옛 계명이라는 것이 율법이 아니라 복음을 말합니다. 복음이 새 계명인데 이 새 계명을 지나쳐 버리고 자꾸만 다시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는 자들이 나오기에 새 계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듣고 처음부터 가진 그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새 계명은 요한1서 3:23절에서 보았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들이란 자기의 이름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행위를 믿지 않습니다. 자기들이 어떤 계명을 지켰다는 것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주일 낮에 보는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화 있을 진저라고 화를 퍼부은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하게 잘 지킨다는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율법을 열심히 철저하게 잘 지켰다고 하는데 예수님이 보실 때는 그들의 악함과 탐욕을 감추기 위한 치장용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고 여긴 자들은 육신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서 저주를 받아 마땅한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계명이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1-6절입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5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율법을 사람이 지켜서 의롭게 될 수가 있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죄와 사망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육신이 연약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이 바로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의로 보내셔서 육신에 죄를 정하셔서 육신을 쫒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 계명입니다. 그러므로 새 계명은 다시 더 새로운 계명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처음부터 들은 것이며 처음부터 가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처음부터 듣고 처음부터 가진 이 새 계명,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담겨져 있습니까? 아니면 이것을 지나쳐 버리고 다른 것을 마음에 담고 있습니까? 이단들이 무엇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까? 자꾸만 새로운 계시를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는 부족하고 다른 것이 더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9절을 보시면 지나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다고 합니다. 적그리스도는 어떻게 하든지 새 계명 안에 거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즉 은혜 안에 거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책망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림에 대한 책망입니다. 시편 106:6-14절입니다. “6 우리가 열조와 함께 범죄하여 사특을 행하며 악을 지었나이다 7 우리 열조가 애굽에서 주의 기사를 깨닫지 못하며 주의 많은 인자를 기억지 아니하고 바다 곧 홍해에서 거역하였나이다 8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저희를 구원하셨으니 그 큰 권능을 알게 하려 하심이로다 9 이에 홍해를 꾸짖으시니 곧 마르매 저희를 인도하여 바다 지나기를 광야를 지남 같게 하사 10 저희를 그 미워하는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며 그 원수의 손에서 구속하셨고 11 저희 대적은 물이 덮으매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도다 12 이에 저희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 13 저희가 미구에 그 행사를 잊어버리며 그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14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발하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들은 것, 처음부터 들은 것은 사실 은혜의 소식입니다. 율법 이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부르신 것입니다. 왜 아브라함을 은혜로 부르셔야 하시는지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이후에 새 언약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자기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실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한 1서에서 보는 처음부터의 가진 것과 처음부터 들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이것이 새 계명입니다. 그러나 이 새 계명이란 이미 구약에서 다 예언된 것입니다. 이 진리가 어떻게 주어진 것입니까?
요한2서 1:2-3절입니다. “봉독” 지난주에 본 말씀입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 보다 더한 기쁜 소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 진리와 사랑을 받은 자들이 너무 기뻐하는데 그렇게 기뻐하는 사람들을 만나기가 가뭄에 콩 나듯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연히 같은 기쁨을 말하는 자를 만나면 이보다 더한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같은 사랑을 받은 자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면 미혹하는 자는 무엇으로 미혹하겠습니까? 7절입니다. 이 처음 사랑을 가치 없는 것으로 몰아붙이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은 처음에 듣는 것으로 마치고 더 신비하고 놀라운 영적인 지식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지식은 자기들만 가지고 있기에 자기들의 말을 듣고 따르라고 하는 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하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이 말씀은 요한 일서에서도 이미 보았습니다만 영지주의적인 이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육체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말씀을 부인하는 것도 포함이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미혹 하는 자, 적그리스도가 하는 일은 그리스도에 대하여서만 흠집을 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 메시아의 역할만으로는 미흡하다는 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미혹인 것입니다. 시편 2편에 보시면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이 요란하게 들고 일어나는 일이 무엇입니까?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서 끊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가 하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서 끊어내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7절에서 미혹하는 자들이 세상에 많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교묘하게 미혹하는 지 사단이 광명의 천사의 모양으로 왔으니 구별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십니다. 그들을 비웃으시면서 그의 거룩한 왕을 시온 산에 따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 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에게 절하고 그에게 입 맞추라고 하십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이 급하시다고 합니다. 오직 그 아들에게 입 맞추지 아니하면 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적그리스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참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내려고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8절에서 너희는 삼가라고 합니다. 조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라고 합니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잃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 같은 경우는 자신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고 할지라도 저주를 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지금 요한2서를 기록한 장로의 관심도 복음에 있는 것입니다. 이 복음을 잃지 말고 온전한 상을 얻으라고 합니다. 여기서 온전한 상을 얻으라고 하니 우리가 노력하여 상을 쟁취하는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이 노력하느냐에 따라 상의 차등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온전한 상이란 이미 받은 것을 말합니다. 지금 요한2서에서 무엇을 계속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다시 봅니다. 5절입니다. 처음부터 가진 것입니다. 6절입니다. 처음부터 들은 것입니다. 이것이 새 계명입니다. 이 새 계명이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듣고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상입니다. 이 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온전한 상을 잃어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몇 년을 계속하여 듣고 몇 십 년을 계속하여 들으니 사람들이 다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듣고 가진 것에 대하여 시큰둥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가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9절입니다.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신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훈이 새 계명입니다. 그 아들의 이름을 믿는 것과 그런 믿음의 형제를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교훈 안에 거하는 자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지내쳐 버리게 하려는 자들이 적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게 하려는 것 이것이 미혹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적그리스도보다 강하십니다. 도저히 측량할 수 없는 은혜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더 많이 맛보고 알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처음부터 들은 것이며 처음부터 가진 것입니다.
요한2서 1:10-13 누구와 사귑니까? 2007. 10. 3
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11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12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치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면대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을 충만케 하려 함이라 13 택하심을 입은 네 자매의 자녀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라면 자기 자식이 누구와 사귐을 가지는지 관심을 가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어떤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의 친구를 보면 아는 것처럼, 누구와 사귐을 가지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사람됨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사람의 영향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라면 그 자식이 누구와 사귐을 가지는지에 대하여 늘 관심을 가지도 또 어떤 친구와 사귀라고 교훈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누구와 사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요한 1서 1:1-4절입니다.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 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사도들이 직접 듣고 보고 손으로 만진 바 되신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2서 9절을 봅니다. 이 사귐, 이 교훈을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 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이 교훈 안에 거하는 자는 아버지와 아들을 모신다는 것입니다. 이 교훈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무엇인지 요한복음을 17장을 찾아봅니다.
요한복음 17장이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이듯이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이 하나가 됨으로 하나님 아버지와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또한 그 제자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서 믿는 자들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가 예수님임을 알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인 관계 속에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편입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이 관계는 성령으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활동하신 것은 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된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예수님이 하나가 된 관계입니다. 그래서 이때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실 때에 나의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의 아버지입니다.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서는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도 아직 예수님과 아버지의 하나 된 관계 속에 제대로 들어오게 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것은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이듯이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백성들과 예수님이 하나가 되심으로 아버지와 하나 되는 관계 속에 넣어달라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물세례를 받으시고 불세례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즉 죄인들이 받아야 하는 물로 세례를 받음으로 죄인들과 연합이 되시고 그 죄의 저주를 받으신 것이 십자가의 세례입니다. 이 일을 예수님께서 다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성령님께서 아버지와 아들과의 하나 됨의 관계를 만드셨듯이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가지고 자기 백성에게 임하심으로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이며 예수님과 하나 됨을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사귐이 있어야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지 예수님을 떠나서는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하나 됨이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들이 전한 바른 교훈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봅니다.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예하는 자임이니라. 이 당시에 순회전도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을 잘 대접하라고 요한 3서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회 전도자들이 무슨 교훈을 하는지 잘 분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교묘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만드는 자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적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이단들이 어떤 이단들입니까? 통일교를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구원하시는 일에 실패하였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구원은 이루었지만 십자가 지고 죽었기에 육적인 구원을 이루지 못하였기에 문선명 자신이 온전하게 이룬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증인은 예수님을 단지 피조물에 불과하기에 여호와를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식교는 안식일의 완성이신 예수님의 온전하심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또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안식일을 지키고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는 신흥종교가 지금 한국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동네 곳곳에 커다란 건물에 하나님의 교회라는 간판을 보셨을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 안상홍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였는데 그 안상홍이 죽었기에 이제는 그냥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는데 사회봉사를 열심히 하여 훈장 받은 것을 자랑하면서 자기들이 건전한 단체인양 선전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저희 집에 아마 이런 사람들이 온 모양입니다. 막내만 집에 있는데 문을 두드리더니 부모님 계시냐고 해서 안 계신다고 하니 물을 한잔 달라고 하더랍니다. 물을 한잔 주었더니 교회 다니느냐고 묻더랍니다. 저희 집 현관에 말씀 액자가 있으니 보았겠지요! 그렇다고 하니 너희는 하나님 아버지 믿지?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예라고 하니 하나님 어머니도 있다고 하더랍니다. 아마 그 단체에서 안상홍이 죽고 그의 딸인지 누구인지 여자가 대표가 되어있으니 이제는 하나님 어머니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전하였지요! 그런 사람들 인사도 하지 말고 집안에 들여놓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단들이야 단번에 알 수 있으니 별 위험한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위험한 것은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고 오는 자들입니다. 가장 전통적인 것 같고 바르게 말하는 것 같으나 자칭 유대인들의 회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 일곱 교회 보면서 자칭 유대인의 회라고 하는 자들이 바로 사단의 회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회가 주장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율법적인 조문들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사단의 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오늘날 어떻게 변장하고 유포되고 있습니까?
예수 믿는 것은 은혜로 상급은 자기 공로로, 믿고 구원 얻는 것은 은혜이지만 그 뒤에 성화되는 것은 자기 책임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심지어 인간의 공로와 행위가 없으면 은혜마저 부인되어 지는 일들이 지금 얼마나 많은지 분별이 되지 않습니까? 어떤 장로는 바른 구원 선교회라는 이름으로 성화가 되지 않으면 구원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성화를 강조하지 않았기에 지금 한국교회가 이 모양이라고 하면서 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그러나 그렇게 되면 결국 인간의 행위구원론 밖에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제대로 전하지 않았기에 문제인 것입니다. 교회만 나오면 다들 천국 가는 것처럼 말하면서 오히려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은 걸림돌이며, 사람들이 미련하고 어리석다고 배척하며 떠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만 구원의 능력이 되는데 한국교회에서 주류를 형성하는 설교는 사람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도깨비 방망이처럼 되어버린 것입니다. 주문을 외우고 원하는 것을 나오라고 하듯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만하면 무슨 소원이다 다 들어준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 처음 온 자매가 이야기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옆에서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조금 알아가는 중인데 시어머니가 오라고 해서 부산에 유명한 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였더니 순순히 받으면서도 하는 말이 그렇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되지 않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 한편으로는 기특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 교회의 설교를 저도 몇 번 텔레비전을 통하여 들어보았기에 그 말의 의도를 알았습니다.
이 자매가 보통 사람들 보다 험악한 세월을 보낸 사람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나가보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만 하면 인생이 역전되고 대박이 터지고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모든 일들이 술술 잘 풀린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 흉내를 좀 낸 표현입니다. 왜 실패하고 어려운 길을 가는가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하여 그렇다고 하면서 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된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아들의 일을 기뻐하신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별세를 의논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시면서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그 일이란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물로 세례를 받으심으로 죄인들과 연합이 되셨고, 그 죄악을 대신 감당하기 위하여 저주의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부활시키시고 승천하신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제 성령이 오시면 어떤 일을 자기 백성에게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시면서도 아버지와 예수님이 하나가 되어 사셨듯이 이제는 예수님과 자기 백성이 하나가 되어 살도록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예수님을 알게도 하시고 믿게도 하시고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도 하시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도와도 하나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독생자의 영광이며 감추어진 영광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누구와 사귀고 싶습니까? 예수 믿으면 구원 얻고 구원 얻은 다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모든 일이 다 잘 풀리고 만사형통하고 잘 되는 일만 일어난다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가 좋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세상에서 분리되는 것이기에 이 세상에서,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지 못하게 주님께서 방해하시면서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답게 하늘의 소망, 우리의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 그 나라를 소망하게 한다는 이런 사람들과 사귀고 싶습니까?
11절을 봅시다. 예수님의 교훈 외에 다른 교훈을 가진 자와 사귐이 있다는 것은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교회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무엇을 복음으로 붙들고 있는지 늘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교훈을 전하는지, 어떤 예수님을 전하는지, 세상에서 성공하는 예수를 전하는지, 세상에서 십자가에 못 박하신 예수를 전하는지 잘 분별하여 사귀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교회에서 사귐을 가져도 세상 적인 사람보다 영적인 사람과 사귀시기 바랍니다. 말만 나오면 세상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말을 썩다보면 함께 물듭니다. 더러운 이야기는 그 입에도 담지 말라고 합니다.
12-13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나 먹으로 쓰기를 원치 않고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고 말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바른 교훈을 전함으로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겠다고 합니다. 여기서 너희 기쁨이란 어떤 번역에서 우리라고도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전하는 자나 받는 자가 기쁨이 충만해지는 소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현장에서 맛보는 기쁨인 것입니다. 이런 기쁨은 아무나 맛보는 것이 아닙니다.
13절에서 ‘택하심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택하심을 입은 네 자매의 자녀가 네게 문안한다고 합니다. 다른 지역의 교회들이 이 편지를 받는 자들에게 문안을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이런 기쁨이 있습니까? 땅의 소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진 그리고 이루어내실 하늘의 소식만이 참으로 기쁨이 되는 소식입니까? 하늘의 소식만이 기쁨의 소식이 되려면 어느 정도로 이 땅의 소식들에 대하여 절망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러나 택하심을 입은 자녀들에게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만을 인하여 기뻐하는 사람들이 되도록 만드시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어떤 일을 만나도 그 일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만드시는 일인 줄 알고 기뻐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믿는 자들과 사귐을 가짐으로 기쁨이 더욱 배가 될 것입니다. 이런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더욱 넘쳐나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