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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요한 1서 강해

공 상희 2009. 5. 6. 12:58

 

 

 

 

 

 

 

요한 1서 강해

 

 

 

창원 늘푸른교회 이장우 목사

 

 

 

 

 

 

 

요한1서 1:1-4 생명의 말씀 2007. 5. 16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 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오늘도 세상은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끊임없이 빠른 속도로 승부하고 있습니다. 속도에 뒤처지면 실패한 것으로 취급받는 세상입니다. 자동차의 속도, 비행기의 속도, 무기의 속도, 컴퓨터의 속도들이 얼마나 빨라지고 있는지 보통 사람들은 새 기술을 배울 틈도 없이 다시 새로운 기술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빨리 달려가는 그 끝이 무엇일까요? 그런 것을 생각할 틈도 없이 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증거 합니다. 사람들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면서 새로운 것이라고 만들고 찾아내고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결국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이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것이 없다는 것은 어떤 물건이나 사상이 새롭다고 하여도 그것이 영원한 새로움을 주는 것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은 이미 타락한 것이기에 그 어떤 것도 영원한 새로울 것이 없고 생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새로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야 새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알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던 그 능력으로 자기 백성을 새롭게 창조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성도라고 합니다. 이런 성도들의 관심사가 무엇입니까?

 

 

 

 

생명의 말씀이 나타남


1절입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는 이 말씀에 눈이 번쩍 뜨여집니까? 요한서신을 주석하고 강해한 사람들의 글을 보면 요한서신은 원뿔형이 역으로 서있는 모습이라고 봅니다. 이 땅에서는 한 점이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지는 형태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선형 계단이라고도 봅니다. 이런 표현을 제 나름의 해석을 하자면 지상에서 한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 안에는 한량없는 하늘의 영광과 영원한 세계로 확대되어진다고 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여전히 시시한 한 점 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모두가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들을 귀 있는 사람만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로 올라갈수록 넓어지는 그 접촉점이 무엇입니까?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오셨을 뿐만 아니라 그 태초의 생명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아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1서 2:15-17절입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불행하다고 여깁니까? 세상의 것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도 정욕도 다 지나갑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요한1서 5:11-13절입니다.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음으로 영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들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다시 요한1서 1:1절을 봅니다. 태초로부터 계신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태초라고 하면 성경에서 무엇이 떠오릅니까? 창세기 1:1-3절입니다.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면 그 말씀자체가 창조의 능력이 있기에 빛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창조의 능력이 되시는 말씀이 바로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요한복음 1:1-4절은 이렇게 증거 하고 있습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시게 되자 이 세상은 두 편으로 나누어졌습니다. 빛과 어두움이 나누어지듯이 예수님을 믿는 자와 믿지 아니하는 자로 나뉘는 것입니다. 이로써 생명에 속한 사람인지 사망에 속한 사람인지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생명의 말씀을 증거 하면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생명에 속한 사람은 생명의 말씀을 좋아하게 됩니다. 베드로 사도도 그렇게 증거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1-5절을 봅니다. “봉독” 1절에 그러므로 라는 말씀은 이미 1장에서 거듭난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금이나 은이나 없어질 보배로 구속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항상 살아있는 말씀으로 된 것인데 바로 복음이라고 합니다. 이 복음을 듣고 믿어 거듭난 사람은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의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마음이 끌립니까? 그러면 그 말씀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고 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 태초의 말씀에 대하여 요한과 사도들은 들었고 눈으로 보았고 주목하여 손으로 만져보았다고 합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었던 제자입니다.

 

 

 

 

사도요한은 가장 먼저 예수님을 좇은 제자이고, 마지막 만찬에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있었던 사람이며, 예수님이 재판받는 자리까지 함께 간 사람입니다. 물론 제사장과 잘 아는 사이라서 그런 것이지만 십자가의 현장까지 함께 가서 예수님으로부터 모친 마리아를 돌볼 것을 부탁받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보다 앞질러 빈 무덤까지 달려갔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분이 바로 태초부터 생명의 말씀인 것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분이 바로 생명의 말씀이란 것을 성령이 임하게 됨으로 더욱 확정적이고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만 이 생명의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2절입니다. 이 생명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즉 생명의 말씀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냥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보았고 증거 하여 전한다고 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되었다고 합니다. 이 생명의 말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왜 증거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도들과의 사귐을 통하여 아버지와 아들과의 사귐이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사귐

3절입니다. 사도들이 보고 들은 바를 전하는 이유는 사도들과 사귐이 있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과의 사귐이란 사도들이 증거 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사귄다는 말이 헬라어로 코이노니아입니다. 이 말은 인간관계 속에서 가장 깊은 결혼 관계를 묘사할 때 즐겨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귐이란 세상의 그 어떤 사귐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천하를 주고도 얻을 수 없는 생명을 받아 누리는 사귐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귐,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 아무에게나 일어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인간이 처음 사람 아담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서 단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은 생명나무로 가는 길이 차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인간도 스스로의 능력이나 힘으로 생명나무로 나아갈 수가 없도록 천사들이 화염검을 들고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하나님 편에서 오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 영원한 생명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이 영접하지 아니하고 싫다고 배척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의 사람들이 이미 죄와 사망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이며 생명이 그 안에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알고 나아와서 믿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1:12-13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받는 것이며 이로써 아버지와 아들의 사귐 속에 합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허물과 죄로 죽어있기에 스스로 영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되는 것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누가 하나님께로 난 자들인가 하면 복음을 듣고 받아들인 자들이 하나님께로 난 자들인데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분이시며 그 영광이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며 은혜와 진리가 충만함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사귐이 있게 되는 내용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이 땅에서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올라가는 것처럼 세상이 알 수도 없고 비교할 수도 없는 영원한 생명의 사귐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기쁨


이런 사귐은 기쁨입니다. 사도들의 기쁨만이 아니라 그 복음을 받은 자들의 기쁨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쁨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진 기쁨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쁨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과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서 주님과 사귐이 일어난 사람들의 기쁨은 세상 사람들이 알 수도 빼앗을 수도 없는 기쁨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6:20-22절입니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리니 세상이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지 아니하느니라 22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떠나실 것을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근심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그러면 너희의 마음이 기쁠 것이며 그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 성령이 임하게 되자 이제 본격적인 아버지와 아들의 사귐 속에 합류가 된 것입니다. 아 사귐이 너무 좋아서 그 어떤 세상의 유혹이나 핍박도 빼앗아 갈 수가 없는 사귐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핍박 가운데서도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세상의 환난과 핍박은 잠시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받았기에 그 생명의 사귐이 있기에 죽는 것도 두렵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죽음을 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쁨을 맛보고 싶지 않습니까? 세상의 염려에서 해방되는 정도가 아니라 죽음조차도 끊어낼 수 없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 생명의 말씀과의 사귐으로 우리도 이 기쁨을 함께 맛보기를 소원합니다.

 

 

 

 

요한1서 1:5-10 빛 가운데 행함 2007. 5. 23

 

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오늘 말씀에서 빛과 어두움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빛과 어두움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사용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빛은 좋은 것이며 어두운 것을 싫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어두움이란 빛이 있음으로 어두움이 있기에 빛이 빛 되기 위하여 어두움도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삶의 상황에서 어렵고 힘들고 괴로운 것을 어둠으로 성공하고 밝고 좋은 일들을 빛으로 여깁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무엇을 빛으로 여기고 무엇을 어두움으로 여기고 있습니까?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 믿기 전에 세상을 사랑하면서 행하여 왔던 여러 가지 일들을 어두움의 일로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났으니 이제는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일을 하자고 합니다. 그 빛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고 물어보면 교회 일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또는 세상에서 착하게 바르게 소금과 빛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들이 거의 다 사람들이 행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윤리나 도덕이나 착한 일들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빛으로 오셨는데 만약에 세상에서 사람들이 평소에 가지고 있는 그런 빛으로 사셨다면,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빛 된 삶이라는 방식으로 사셨다면, 예를 들어 국경없는 의사회 같은 단체가 있습니다. 여기에 소속된 사람들은 일 년에 몇 주간씩 또는 몇 달씩 자기 돈을 들여서 가난한 나라에 가서 의료봉사를 합니다. 우리는 적십자 회비 5천원도 잘 내지 않는 형편인데 그런 사람들을 보면 빛으로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그런 식의 빛으로 사셨다면 결코 십자가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빛과 어두움이 무엇인지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5절에서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라는 말씀을 봅니다. 사도요한이 예수님에게서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은 1-4절을 보시면 태초부터 있었던 생명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보고 만졌다고 합니다. 그렇게 듣고 보고 만진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은 사귐이 있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와의 사귐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사귐인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과 사귐 속에서 들었던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어두움이 조금도 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빛이라고 하니 어떤 말씀이 생각이 납니까? 창세기 1장이 생각날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데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이 그 수면에 운행하신다고 되어있습니다. 혼돈 공허 흑암 속에 빛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빛이 비추임으로 천지의 만물이 질서가 생기고 창조의 역사가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창조의 세계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어두워졌습니다. 죄와 사망이 캄캄한 어두움처럼 가려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은 세상의 빛과 어둠을 안다고 하지만 그 빛과 어두움을 구별하는 능력은 이미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므로 빛으로 여기고 선으로 여기는 것은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인간 중심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하든지 자기에게 유익을 주는 것은 빛으로 선으로 여기고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것은 어두움과 악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다 그러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사람들이 어두움을 멀리하고 빛을 원한다고 하는 것도 자기 욕망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아한 세계라는 영화의 선전을 보았습니다. 조폭세계에서 열심히 일하여 우아한 삶을 살고 싶어 한다는 내용입니다. 빨리 어두움의 세계에서 손을 씻고 그림 같은 전원주택을 짓고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한다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어두움의 일을 벗고 우아한 세계로 진입하였다고 합시다. 그 우아한 세계의 하부구조는 무엇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까? 조폭활동으로 벌어들인 돈이 받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성경이 아니라 조금만 세상에 눈을 뜬 사람들이라면 다 보게 됩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에서 빛과 어두움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6절을 봅니다. “만일” 오늘 본문에서 만일이 네 번이나 나옵니다. 지금 이 말씀이 증거 되는 그 당시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자신들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신들은 더 이상 죄가 없고 죄도 짓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특별한 어떤 경지에 들어간 사람들이기에 자기들은 죄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참된 하나님과 사귐을 통하여 빛 가운데 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7절을 봅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이 단지 윤리도덕적인 차원의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만약에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윤리와 도덕적인 사람이고 법을 잘 지키는 착한 사람이어서 예수님 없이도 천국 갈만한 그런 사람이라고 여긴다면 이 사람은 어두움에 거하는 사람입니다.

 

 

 

 

어두움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은 죄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혹 죄가 있다고 하여도 대수롭지 않는 죄로 여기고 그런 죄들은 자신들의 선행으로 얼마든지 상쇄시킬 수 있는 죄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가 자신을 위하여 대신 죽어야만 하는 그런 죄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자신은 죄가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나 하나님과 사귐이 없으면서도 자신은 착하게 산다는 사람이나 다 어두움에 행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이 어둠에 속하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평소에 착하다 바르다는 것들이 참 빛이신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지가 드러나는 사람이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입니다. 구약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는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임을 보게 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거룩 앞에서 신을 벗고 엎드려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다윗은 죄악 중에 잉태하여서 죄만 행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빛 앞에서 감히 설 수가 없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바로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 즉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들은 어디로 달려갈 수밖에 없는가 하면 예수의 피로 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다고 합니다. 이 사귐이란 사도들과의 사귐을 말합니다. 그러나 근원적인 사귐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귐이며 이는 또한 하나님과의 사귐인 것입니다. 이런 사귐 안에 들어가는 것은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며 이 빛 가운데 행하는 자들은 자신의 추함과 더러움을 아는 것입니다. 어두움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빛 가운데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욱 자신의 추함과 더러움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피 밖에 없다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를 보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는 자신이 빛 가운데 행하는 사람이라고 여긴 사람입니다. 죄가 없다고 여긴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어둠에 속한 사람들로 보고 그들을 잡아 죽이는 것이 빛이신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대낮에 태양보다 더 밝을 빛을 보았습니다. 그 빛을 보고서 장님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지금까지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였기에 자신은 빛 가운데 행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제대로 된 빛,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보고서는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를 알았습니다. 처음 믿을 때보다 예수님을 더 알아갈수록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예수의 피 만이 우리를 모든 죄에게 깨끗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빛 가운데 행하는 모습입니다.

 

 

 

 

8절입니다. 두 번째 만일입니다. 첫 번째 만일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두움에 있다면 거짓말 하고 진리를 행치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어두움임을 알고 예수의 피 만이 자신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빛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십자가 마을에 박윤진 성도가 ‘요한일서라는 칼’이라는 제목의 글을 올린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빛과 어두움을 나누어 버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형제 사랑의 칼을 들이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것처럼 우리가 서로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랑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 계명을 예수님이 새 계명이라고 하셨기에 이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계시지요!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죄인입니다. 다시 8절을 봅니다.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다고 합니다. 나는 죄 없다고 하는 말들을 우리가 얼마나 흔히 사용하고 있습니까? 부부나 가족관계가 교회의 형제자매라고 하는 관계가 이웃과의 관계에서 항상 자기는 죄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들도 거의 대부분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기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억울하게 잡혀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늘 그러지 않습니까? 다툼이 왜 일어나는 것입니까? 자기 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지못해 인정한다고 하여도 죄를 인정함으로 인정하지 아니하는 것보다 더 나은 혜택이 주어질 때에 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범죄 수사도 그런 식으로 많이 협상한다고 들었습니다.

 

 

 

 

세상살이나 교회생활이나 무엇이 문제인가 하면 자신이 죄 없다고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죄 없다고 하는 것이 왜 일어나는 현상입니까? 진리가 그 속에 없기에 죄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그 속에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자기 죄를 시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그 속에 없는 사람은 스스로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죄가 없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구원파가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번 예수 믿으면 그 다음부터는 죄를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미 모든 죄를 다 용서하셨다고 합니다. 한편으로 맞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피가 단 한번만 필요한 것입니다. 한번 죄 사함으로 거듭나고 난 이후에는 속죄의 찬송을 부를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10절입니다. 네 번째 만일이지만 먼저 봅니다.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이 다 죄인이라고 하셨는데 아니다 나는 범죄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8절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진리가 우리 안에 거하게 되면 자신의 죄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되면 죄가 무엇인지를 압니다. 그 죄란 자신은 죄가 없다는 사람이 되거나 자기 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됩니다.

 

 

 

 

9절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그 속에 들어온 사람은 자기 죄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입니다. 그 미쁘심, 그 신실하심과 의로우심으로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시기 때문에 우리 죄를 자백하면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있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갑니다. 요한복음 3:16-21절입니다. “봉독” 사람들이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함으로 빛으로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고 함입니다. 우리가 빛 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나아가면 갈수록 자신의 죄를 더 깊이 알게 됩니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였듯이 예수님의 피의용서가 더욱 넘침을 알고 믿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며 이것이 빛 가운데 행하는 삶입니다.

 

 

 

 

요한1서 2:1-6 대언자 2007. 5. 30

 

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1)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2)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 찌니라 1) 보혜사 2) 참

 

 

 

 

성도가 빛 가운데 사는 것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처음 예수를 믿을 때는 죄를 많이 짓는 사람이 오래 믿을수록 점점 죄를 덜 짓는 상태로 거룩하여 지는 것입니까? 아니면 죄를 짓든 아니 짓든 상관없이 빛 가운데 거할수록 자신의 죄가 더 드러난다고 하였습니까? 후자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나쁜 죄를 마구 지어서 죄인임이 더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죄라고 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로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봅니다. 나의 자녀들이라고 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어린애라는 뜻입니다. 사도가 이 편지를 쓰면서 자녀들이라고 부르는 그들에게 무엇을 위하여 편지를 쓴 것입니까?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죄를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이 편지를 쓴다고 하는데 요한일서에서 죄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4절입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서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거짓말 하는 자이며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3: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것이 어느 정도입니까? 자기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기 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몇 가지의 주석을 보았습니다만 어느 누구도 예수님처럼 완벽하게 형제를 사랑하여 자기 몸을 내어줄 자가 없다고 말합니다. 다만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온전하지는 않아도 서로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노력하면 점점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자란, 율법을 완전히 만족시키는 사람이 아니라(그런 사람은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도다), 인간의 연약한 능력대로 하나님께 순종하여 살려고 애쓰는 사람을 의미 한다”고 합니다.

 

 

 

 

아마 거의 대부분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명이 무엇입니까? 완전히 지키느냐 완전히 지키지 못하느냐의 문제이지 노력을 얼마나 했느냐고 계명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행함을 강조한다고 하는 야고보서에서도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2:10)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으로 말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 나왔으니 좀 더 계명의 핵심에 들어가 봅시다. 율법과 선지자의 대 강령이 무엇입니까? 바리새인에 예수님께 시험하여 묻는 내용입니다.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큰 계명입니까? 마태복음 22:37-40절입니다. “37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핵심입니다.

 

 

 

 

한곳을 더 봅니다. 로마서 13:8-10절입니다. “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9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찌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사랑이 율법의 완성인데 어느 정도여야 합니까?

 

 

 

 

예수님이 행하신대로 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3:14-16절입니다. “봉독”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미 살인하는 이며 영생이 그 안에 없다고 합니다. 제가 지금 계속하여 계명을 지키는 것이 무엇인지 보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하는가 하면 사람들이 대부분 성경에서 기록된 말씀을 자신들이 지킬 수 있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면 원수조차 자신이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율법과 선지자의 대 강령이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와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이 계명을 받아서 열심히 지킨다고 한 사람들이 참된 이웃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구약은 성령을 받지 못하여 그렇지만 신약에서는 성령을 받아서 지킬 수가 있다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성령을 받았기에 믿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런 경우에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기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고 그 남편의 고향에 아들 하나 데리고 내려와서 살려고 하는데 그 아들마저 유괴당하여 죽었습니다. 그 고통 중에 거리에 걸려있는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기도회’였습니다.

 

 

 

 

밀양’이라는 영화이야기입니다. 그 전에 하나님 믿으라는 이야기를 우습게 여겼는데 그 고통 중에 교회를 찾았습니다. 그 교회 분위기와 벽에 붙어 있는 내용을 보니 아마 지금 유행하고 있는 제자훈련 프로그램 중에 치유를 위한 집회로 보였습니다. 잔잔한 음악과 기도회 중에 주인공이 갑자가 울음을 토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서는 마음에 평안이 왔다고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열심히 교회 다니며 전도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중에 자기의 아들을 유괴하여 죽인 사람을 용서하여야 되겠다는 마음이 있어서 교도소로 갑니다.

 

 

 

 

죄수의 얼굴이 너무 환하고 좋게 보입니다. 그를 용서하기 위하여 왔다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자 그 원수가 감사하다고 하면서 자기도 교도소에 들어와서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회개하고 용서받았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안하게 살고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순간 신애의 얼굴은 완전히 변하여 가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일부러 대낮에 장로를 유혹하기도 하고 기도회 하는 집에 돌을 던지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것입니다. 하나님 자기가 무엇인데 나의 원수를 내가 용서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용서해 놓는가 하는 원망인 것입니다.

 

 

 

 

저는 그 영화에서 십자가 없는 하나님의 현실을 보았습니다. 온갖 좋은 말을 다 갖다 부치지만 야외집회 현장에서 설교하고 나서 기도하는 데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을 위하여 살자는 기도를 하는 중에 신애가 시디를 틀었습니다. 한참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데 신중현의 거짓말이야 하는 노래가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교회 다니면서 하나님의 사랑이라느니 하는 것이 거짓말로 보이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가 없는 현실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즉 십자가를 모르고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였다는 사람들에 의하여 발생한 십자가의 사건을 모른다면, 오늘도 이런 성경의 말씀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셨으니 이 계명을 지키자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다시 옛 계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나는 사랑했는데 너는 왜 사랑하지 않았느냐고 따지는 것입니다.

 

 

 

 

요한1서 4:7-21절을 봅니다. 나중에 다시 보겠습니다만 전체적으로만 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만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화목제물을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한 영원한 중보자가 되십니다. 이것은 또한 성령을 보내심으로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킴으로 온전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 안에서 이루어내신 것이 온전한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고 이 편지를 쓰고 계명을 지키라는 말씀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1절을 다시 봅니다.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고 쓴다고 하면서 누가 죄를 범하면 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인간이 사랑의 계명을 지킬 수가 없다는 것을 미리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난 주에 보았던 것처럼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내가 계명을 지켜서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끌림을 받는 것이 빛 가운데 행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는 것과 계명을 지키게 하는 것이란 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율법의 마침이 되시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죄 사함을 받는 길이며 예수님을 믿는 것이 모든 계명을 지키는 것이 됩니다. 그 안에서만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조차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2절을 다시 봅니다. 예수님의 화목제물 되심은 우리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미 예수를 믿는 자들의 구속주 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구속주가 되신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는 다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속죄가 온 세상의 죄를 위한 것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가지고 만민구원설이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결국은 예수님의 속죄로 다 구원받는다는 희망을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더 복음처럼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분명한 선택설이 있기에 만민 구원설을 이야기하지는 못하지만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속죄는 예수님이 이루어 놓았으니 그것을 믿고 안 믿고는 개인에게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이 지정의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달려있는 것입니까? 결국 인간에게 달린 것입니다. 그러나 허물과 죽은 죄인이 무슨 수로 예수님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주일 오후에 보았던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뼈다귀들이 무슨 수로 살아나겠습니까?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가 더 이상 지역이나 혈연중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신분이나 지위와 인종이 상관이 없이 오직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자를 다 불러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온 세상인 것입니다.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에 이른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인간의 조건도 따지지 않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과 아들의 약속대로 성령을 보내셔서 구원하신다는 것이 온 세상의 죄를 위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란 5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서 온전케 된 사람들입니다. 온전한 사랑이 그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 아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루어졌으니 참으로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의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이런 사랑을 받은 형제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랑은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5:3). 내가 지키려면 무거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을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라고 합니다(5:4-5).

 

 

 

 

이런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늘도 대언자가 계속하여 중보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34절입니다. “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히브리서 7:22-25절입니다. “봉독”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살아서 간구하시기에 온전히 구원하실 수가 있습니다.

 

 

 

 

요한1서 2:7-11 새 계명 2007. 6. 6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9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오늘 말씀에 옛 계명과 새 계명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7절을 보시면 새 계명을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라고 합니다. 이 옛 계명은 너희가 이미 들은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8절에서는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쓴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새 계명에 대하여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용상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 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전에 들었던 그 말씀을 다시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새 계명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3:34-35절입니다.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이것이 새 계명입니다. 그러면 이런 계명이 구약에는 없었습니까? 구약에서도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레위기 19:18절입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러면 구약, 정말 옛 계명에도 있는 이런 형제 사랑의 말씀을 지키라고 하시면 될 텐데 왜 예수님은 새 계명을 말한다고 하셨습니까? 내용은 같은데 그 계명을 성취하는 방법에서 전혀 다르기에 새 계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먼저 구약에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았습니까? 주일 오후에 에스겔서를 보고 있으니 그곳의 말씀을 봅니다. 에스겔 34:1-2절입니다.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찐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3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양을 돌보아야 할 목자들이 오히려 양을 잡아먹고 있는 것입니다.

 

 

 

 

목자와 양 사이만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양과 양 사이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20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나 곧 내가 살찐 양과 파리한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21 너희가 옆구리와 어깨로 밀뜨리고 모든 병든 자를 뿔로 받아 무리로 밖으로 흩어지게 하는도다” 목자들이 살진 양을 잡아먹고 양들 사이에서는 또 힘 있는 양들이 약한 양들을 어깨로 밀치고 뿔로 받아 흩어지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은 이스라엘의 실상이 이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 양떼를 친히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2-24절입니다. “22 그러므로 내가 내 양떼를 구원하여 그들로 다시는 노략거리가 되지 않게 하고 양과 양 사이에 심판하리라 23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찌라 24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한 목자 다윗을 세워서 그들 중에 왕으로 세우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약속을 따라 오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새 언약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살과 피로 새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 새 언약 안에서 주어지는 계명이 새 계명인 것입니다. 이 새 계명은 옛 계명과 내용면에서 같습니다만 그 성취의 면에서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고서 이웃을 사랑하느라고 구제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함이었고 자기들의 의를 내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행위로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구약에서 새 언약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새 언약은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 안 되는 것을 확인시키면서 나오는 것입니다. 힘으로도 안 되고 능으로도 안 됩니다 오직 주의 신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은 하나님의 신을 자기 백성들에게 부어주시는 방식으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셔야 하셨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주시는 그 앞뒤의 내용을 보면 유월절 만찬을 행하시는 중에 하신 말씀입니다. 만찬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팔기 위하여 그 자리에서 나갔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31-32절입니다. “31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32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이 영광이 무슨 영광입니까?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것까지 다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광을 받으시는 자리에서 자기 피로 이루어내신 새 언약의 결과물을 자기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행전 2:33절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베드로 사도가 이 말씀을 전하면서 다윗의 이야기를 합니다. 다윗이 예언한 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서에서도 다윗 같은 목자를 세워 자기 양떼를 먹이는 왕으로 삼겠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왜 이렇게 길게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8절 때문입니다. 8절을 보시면 새 계명을 쓰는데 이 계명이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되다고 합니다. 여기서 저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새 계명이 예수님에게 참되었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새 계명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새 계명을 다 지켰다는 것입니다. 정말 자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셔서 자기의 살과 피를 주셔서 사랑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말씀은 이 새 계명이 예수님에게만 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너희에게도 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데 새 계명을 지키고 있습니까?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십니까? 물론 여기서 내 이웃을 예수 믿는 형제자매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들이라고 봅니다. 이들을 과연 내 몸처럼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새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새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는 아직 어두움 가운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많은 고민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새 계명을 지켜야 하는데 어떻게 지키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여러 가지 실천방안들을 다시 만들어 냅니다. 구약에서는 지키지 못한 것이 성령이 임하지 않았기에 지키지 못한 것이고 이제 신약은 성령이 임하였기에 성령을 도움을 받으면 내가 지킬 수 있다고 하면서 열심히 새 계명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노력하여도 내 몸처럼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을 현실로 절감하게 되니 어떤 타협안이 나오는 것입니까? 완벽하지는 못하여도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려고 최선을 다하여 노력하는 것은 하나님이라도 인정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 아직 어두움에 있는 것이라고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8절 후반부에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라고 합니다. 어두움은 자기의 힘과 능으로 이웃을 사랑하고자 애쓴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된 이웃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밖에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어둠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을 이루시고 그 새 언약의 완성의 결과물이 새 계명인데 그 계명이란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9절입니다. 그러므로 빛 가운데 거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 어두움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형제 사랑이 도대체 어떻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바울과 바나바의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예수님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바울을 바나바가 추천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어떤 일을 행한 사람인줄 알기에 그를 꺼려하였습니다. 이런 바울을 나중에 사도들이 형제로 맞이합니다. 교제의 악수를 하였습니다.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형제로 교제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이 한가지의 고백이 형제를 사랑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 증거 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 증거 하는 곳이 얼마나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는 기본으로 여기고 그것은 이미 지나간 것처럼 여기고 지금 우리가 실천하여야 할 내용들만 가득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믿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그야말로 반갑고 기쁘고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무슨 도움을 주어서가 아닙니다. 나 같은 죄인이 예수님의 피로 용서를 받았는데 당신도 그런 용서를 받은 사람이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사랑합니다. 이런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계명을 지키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지 나의 힘과 능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각처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복음을 받아들인 자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위하여 생명이라도 내어 놓으려고 한 것입니다. 눈이라도 빼어 주려고 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루디아 같은 경우는 주께서 그의 마음을 열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러자 바울의 일행을 자기 집에 맞아들이기 위하여 나로 예수 믿는 자로 여기거든 나의 집에 유하라고 하여 강권하여 있게 합니다.

 

 

 

 

이런 새 계명은 오늘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계명을 지키자고 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지금도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자기 백성들에게 적용시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치 빛이 어두움에 비치듯이 새 계명이 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8절 후반부를 다시 봅니다.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라고 합니다. 참 빛이 비취는 것을 어두움이 막아낼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를 만나게 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거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9-11절을 봅니다.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 어두움에 속하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형제를 미워하고 있다면 아직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다 이 어두움 가운데 갇혀 지낸 사람입니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따라서 친분을 유지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사람과 사귀면 세상에서 손해가 나고 핍박이 오는데도 그런 사귐을 피할 수가 없는 사귐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절을 봅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는 번역이 이기지 못하더라는 말로 번역이 됩니다. 어두움이 빛을 결코 이길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를 빛이 밀어붙이니 이방인의 집에도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새 계명이 오늘도 땅 끝까지 증거 되고 있기에 이해관계를 넘어서며 목숨도 버리는 일들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계명에 우리도 사로잡히기를 소원합니다.

 

 

 

 

요한1서 2:12-14절 그의 이름으로 2007. 6. 13

 

12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니라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시고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지난주에 새 계명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새 계명이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라 새 계명 자체가 빛으로서 어두움인 우리에게 밀고 들어온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두움이 결코 빛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스스로 어두움을 물리치고 빛 된 삶을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마치 어릴 때에 만화를 보면 검은 천사와 흰 천사가 서로 자기 쪽으로 오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두움의 일을 택하느냐 빛의 일을 택하느냐 하는 것은 나의 선택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고방식 자체가 이미 어두움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죄인 줄 어두움 아래 있기에 모르는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떤 모습이 나오는가 하면 지난 주 점심시간에 교회 나오신지 한 달 좀 넘으신 분이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목사님이 설교시간에 예수님이 우리 죄 때문에 죽으셨다고 하시는데 나는 그런 죄를 지은 적이 없고 착하게 살아왔는데 내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을 펴고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개별자라고 생각을 하기에 그렇게 말합니다만 오십년 전에 당신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이 세상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표현대로는 조상의 허리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미 내가 수 천 년 전에 조상의 허리에 있었고 그 최초의 조상인 아담의 허리에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내가 인정하고 안 하고의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후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데 그 특징이 당신과 같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선과 악을 결정하면서 살겠다는 사고방식이 아담의 범죄 안에 들어있다는 증거입니다. 그 결과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5:14절입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아담과 같은 죄를 짓지 않아도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행위와 상관없이 이미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아담이 오실 자의 표상인데 무슨 표상이 되는 것입니까? 아담 안에 속한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의 행위와 상관없이 사망이 왕 노릇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역시 그 사람의 행위와 상관없이 생명이 왕 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성경의 말씀을 믿습니까? 이것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의 지성이나 감정이나 의지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새 계명이 빛으로 우리에게 밀고 들어왔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정말 그러합니까? 다음의 말씀을 보시면 이미 성도 안에 이루어진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빛으로서 살아야 이런 모습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아니라 성도 안에 이미 주어져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자녀들은 나이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신학교 다닐 때에 이 본문을 어느 목사님이 설교하셨는데 다른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오징어 한 마리 들고 와서는 ‘사람은 오징어가 아닙니다.’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였습니다. 사람을 단면적으로 보지 말라고 하면서 한 사람에게 아이 같은 모습, 어른 같은 모습, 청년 같은 모습이 다 있다는 이야기를 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12-14절에서 나오는 자녀, 아버지, 청년이라고 한 것은 나이나 신앙의 성숙도를 따라서 구별하는 내용이 아니라 한 성도를 여러 면으로 보고서 말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쓰는 것은 이미 적그리스도가 활동하고 있기에 성도가 무엇으로 무장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비 이기에 아비의 내용만 챙기면 된다든지 나는 청년이기에 청년 부분만 챙긴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는 나는 신앙이 성숙한 사람이기에 믿음의 전투만 한다는 그런 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성도라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첫째가 우리의 죄가 그의 이름으로 사함을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놓쳐버리면 건물의 기초가 무너지듯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가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가 사함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 전부터 시작하여 이 땅에서 이루신 모든 일들을 포함한 이름입니다.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야 하셨고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성령을 보내심까지 모두다 주의 이름으로 일어난 일인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주의 이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구원하시는 것이지 결코 이스라엘의 선한 행위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자들입니다. 단 한 번도 제대로 순종해 본 적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 실상을 보이시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죄인임이 드러나고 결국 율법의 저주대로 이방의 포로가 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것입니다.

 

 

 

 

에스겔 36:22-28절입니다. “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23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찌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24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1)굳은 마음을 제하고 2)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혔습니다. 그런데도 구원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위하여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구원하시되 맑은 물로 뿌려서 정결하게 하여 모든 더러운 것에서 우상 섬김에서 깨끗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주어서 자기 백성을 삼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일하신 그 결과가 주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말일에 모든 육체에 주의 신을 부어주심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는 요엘서의 예언도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 성령이 임함으로 베드로가 외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성도가 어떤 사람입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자기의 이름은 부인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 사함이란 오직 주의 이름으로만 된다는 것을 증거 하는 사람이 주의 백성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고 그 이름으로만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그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무엇을 합니까? 그 이름의 비밀과 그 이름의 능력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13절입니다.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앎이라고 합니다. 태초부터 계신이가 육신으로 오셨으니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제 그 분을 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다만 역사적인 한 인물이 아니라 태초부터 계신 그분과 지금도 사귐이 있다는 것입니다. 1:3절을 봅니다. 사도들이 보고 들은 바를 전하는 것은 사도들과 사귐, 사도들이 전한 복음과의 사귐을 통하여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았다면 도대체 그 이름이 무엇이기에 죄를 사함 받게 되었는가를 더 알아가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8-13절입니다.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9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10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정사와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11 곧 영원부터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하신 것이라 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예수 믿는 교회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져 있던 비밀의 경륜을 교회로 말미암아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비밀의 경륜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뜻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았다면 이제 내가 주를 위하여 무엇을 하여 보답할까 하는 차원이 아니라 도대체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이 무엇인지 이제부터 알아가고 맛보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비입니다. 어른입니다.

 

 

 

 

자녀나 아비나 청년을 한 개인의 신앙 성숙도로 말할 수 없고 한 사람에게 이런 모습이 다 들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방금 말씀드린 대로 보자면 신앙의 아이란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압니다. 그 이후에는 우리가 무엇을 많이 만들어 갖다 바치는 것을 신앙의 성숙이라고 들어왔습니다. 언제까지 죄 사함의 단계에만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 성숙의 단계로 나아가야지 하면서 여러 가지 빛 된 삶을 살라고 하면서 주문을 합니다. 그것을 신앙의 성숙이라고 합니다.

 

 

 

 

저도 그렇게 알아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아왔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고서 성결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한다는 말을 늘 들었는데 그 말씀을 들을 때는 그렇게 믿고 결단과 결심을 하지만 그러나 돌아서면 결코 그렇게 살 수 없는 현실이 부닥치게 되니 어떤 생각을 하였는가하면 예배시간에 말씀을 듣고서 은혜가 된다고 싶은 그 순간에 그대로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 죽으면 그나마 죄를 덜 짓게 되는 것이 아니냐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니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았는데 이제 그 이름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 분이 태초부터 계신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4절을 보시면 다시 아이들아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아들에게서 이루어진 것이기에 아버지를 안다는 것은 곧 아들을 아는 것입니다. 아들을 모르면 아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아비들은 여전히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다고 합니다.

 

 

 

 

13절 끝에 청년들입니다. 청년은 악한 자를 이겼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긴 것입니까? 14절 끝에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니 흉악한 자를 이겼다고 합니다. 흉악한 자란 거짓 선생들을 말합니다. 복음의 진리를 왜곡하는 자들을 물리쳐 이긴 것은 말씀이 그 안에 거하였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결국 태초에부터 계신 말씀이며 영원하신 아버지의 뜻 안에서 예정 된 대로 자기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 백성을 속죄한 이름입니다. 그 이름으로 속죄함을 입고 그 이름의 비밀과 능력을 알아갈 수록 그 보혈의 능력을 더 깊이 알게 되고 그렇게 되면 흉악한 자들을 물리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이며 그 이름을 알아감으로 그 사귐의 깊이가 더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흉악 한 자를 이길 뿐만 아니라 손도 대지 못할 것입니다. 5:18-21절 "18. 아이들아 이것을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 19.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게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21.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히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요한1서 2:15-17 세상을 사랑하면 2007. 6. 20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우리가 지금까지 전도를 받아도 보았고 전도도 해 보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전도하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땅의 것을 생각지 말아야 합니다. 위엣 것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이 세상은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이런 전도를 들어보셨습니까? 아마 다 도망갈 내용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면서 어떻게 하는가 하면 세상에 온갖 좋다는 이야기들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부터 합니다. 사실 우리 자신도 이런 말씀을 보면 피하고 싶은 말씀이지 않습니까? 방금 인용한 이런 말씀이 나에게 이루어지도록 기도의 제목을 삼고 있습니까? 이것이 아버지의 뜻인데 기도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구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하라는 것을 구하지 아니하고 구하지 말라는 것은 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과 원수 되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세상이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시고 비록 죄를 지었지만 그러나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다는 말씀도 하셨는데 왜 이런 말씀이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는 말씀은 사람들이 거의 다 외울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을 잘 모릅니다. 안다고 하여도 세상의 죄짓는 것들이나 세상의 악한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지 이 세상 자체를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우선 요한복음 3:16-21절 말씀부터 먼저 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는 멸망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까? 사랑한다면 다 용서하시지 왜 멸망시키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까? 또 계속 되는 말씀을 보면 믿지 아니하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심판을 받는 정죄가 무엇입니까?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빛을 예수님으로 어두움을 세상으로 대입시켜도 됩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사랑하기에 빛이신 예수님을 미워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세상을 사랑하는 일에 도움이 된다면 사람들이 미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다 걸림돌이 된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율법을 사랑하면서 지킨다는 사람들에게도 걸림돌이었습니다. 결국 율법 사랑이 아니라 율법을 사랑하고 실천한다는 자기를 사랑한 것입니다. 자기들이 신앙심 좋다는 평판을 사랑한 것이며 자기는 남보다 낫다는 우월감을 사랑한 것입니다. 이런 것이 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이 합동으로 빛이신 예수님을 제거해 버린 것이 세상이 한 일입니다.

 

 

 

 

마태복음 21장에 예수님께서 악한 농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을 다 마련해놓고서 농부들에게 세를 주었습니다. 때가 되어 소출을 거두러 종을 보내니 때리고 죽여 버린 것입니다. 다시 종들을 더 많이 보냈는데도 여전히 그렇게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내면 그들이 소출을 바치리라 생각하고 아들을 보내니 그 아들마저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오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예수님이 물으신 것입니다. 듣는 자들이 그들을 진멸하고 다른 이들에게 세를 줄 것이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다는 말씀을 이어서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는 것인 줄 알고 잡아 죽이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23:33-35절입니다.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35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36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아벨의 피는 이미 창세기 4장의 사건입니다. 아담의 범죄가 3장입니다. 그러니 범죄 이후로 이 세상에는 의인의 피를 흘린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의 심판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하면 나는 그런 죄를 짓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노아 홍수 때의 심판 받는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마태복음 24:37-39절입니다.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특별히 악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 아닙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무엇이 그리 큰 죄입니까? 세상에서 살려면 사고팔고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런 일이 있으면 목사님 불러서 축복기도도 받고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이 그리 잘못되었다고 심판을 해 버리는 것입니까?

 

 

 

 

이들은 무엇을 몰랐습니까? 아벨의 피가 땅에 흘렸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 결과 땅이 저주를 받았다는 것에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자로 아내를 삼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그리 큰 죄라고 세상을 다 심판하시는 것입니까?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 그 모습을 창세기 6: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우리가 평소에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것이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하다는 것입니다.

 

 

 

 

어디에 가서 장사해서 이익을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악한 것입니까?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 악한 생각입니까? 회사에서 성실하게 일하고 가정에 충실하겠다는 것이 악한 것입니까? 이런 열심들이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야고보서 4:13-16절을 보시면 어디에 가서 장사해서 이를 보리라고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뜻은 제쳐두고 허탄한 자랑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어떤 계획과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이루고자 하는데 그 이룸을 통하여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을 악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야고보서 4: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세상과 벗되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원수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나와서도 사람들이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자랑거리를 구한다면, 세상과 벗되고자 하는 것을 구한다면 그곳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자 발악을 하는 곳입니다.

 

 

 

 

이제 본문의 말씀을 봅시다. 15절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는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하나님의 아버지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이 죽임을 당한 그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에 사랑할만한 것이 있을까요? 자기 아들이 피를 기준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그 피 앞에서 회개하는 자와 그 피를 무시하는 자 이렇게 둘로 나누어 볼 뿐입니다.

 

 

 

 

지금도 위안부 문제는 늘 뉴스에 오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관심 밖의 일입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이 그런 수모를 당하였다면 어떻겠습니까? 자기 가족이, 자기 사랑하는 연인이 그런 일을 당하였다면 일본이라는 말만 나와도 이가 갈릴 것입니다. 광주 5,18묘역을 가 보셨습니까? 그 날의 끔찍한 학살의 현장을 사진과 비디오로 지금도 계속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가족들은 군사독재자들의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면 역시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일 뿐입니다. 우리는 늘 자기 생각밖에 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켜나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16절입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한 이 세 가지의 욕망에서 벗어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이미 우리가 이 정욕들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이기에 이 욕망은 근원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보았을 때에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이생의 자랑이 될 만큼 탐스러웠던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 보이는 것들이 얼마나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이생의 자랑이 될 만한 것들로 가득 차 있는지 전부 그런 방향입니다.

 

 

 

 

사람들이 날마다 살아가는 방향과 목적이 전부 이 세 가지 안에 다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먹고 살기 힘들 때는 먹고 사는 일에 열심을 냅니다. 먹고 살만하면 이제 보암직한 것에 나서는 것입니다. 좋은 옷도 입어야 하고, 좋은 집도 사야하고, 비싼 차도 굴려야 하고, 게다가 얼굴까지 뜯어고쳐야 하고, 얼굴만이 아니라 몸매까지 관리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자꾸만 살기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어떤 사람들은 그런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하면서 반대로 사는 사람들도 나옵니다. 무소유를 이야기 하고, 나눔을 실천하며, 환경운동을 하고, 봉사활동을 하면서 세상과 다른 가치를 위하여 산다고 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이생의 자랑거리가 됩니다. 요즈음 세상에 그렇게 착한 사람이 다 있다니! 이 얼마나 세상의 자랑거리입니까! 보람도 있는 일이라고 여깁니다. 결국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는 이 욕망 속에 한평생을 보내면서 사는 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이런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지 않고 살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말씀을 왜 하신 것입니까? 12-14절까지 다시 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도 바로 앞의 말씀과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는지 들통이 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들통이 날 때에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세상에서 살고자 하는 것이 다 죄가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12-14절의 말씀이 그야말로 기쁜 소식이 됩니다.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여 흉악한 자를 이겼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믿음인 것입니다. 이 믿음이 주어진 자에게는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삶의 목표가 아닙니다. 다른 목표가 생긴 것입니다.

 

 

 

 

17절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란 그 아들을 보고 믿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그 아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 살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5:12).

 

 

 

 

요한1서 2:18-23 마지막 때 2007. 6. 27

 

18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19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21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2)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가 앎을 인함이요 또 모든 거짓은 2)진리에서 나지 않음을 인함이니라 22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구뇨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뇨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23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18절 말씀을 보시면 이것이 마지막 때라고 합니다. 마지막이라는 말이 좋게 들립니까? 나쁘게 들립니까? 그 사람의 처한 상황 따라 다를 것입니다. 아주 재미있는 일이 있는데 마지막이라고 하면 기분 나쁘게 들릴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지루하고 힘들 때 마지막이라는 소식은 기쁜 소식이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마지막 때라는 것이 기쁜 소식인지 화가 나는 소식인지 점검해 보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디모데후서 3:1-2절을 봅니다. “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여기서도 말세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특징이 여러 가지 나옵니다만 제일 먼저 나오는 자기 사랑과 돈 사랑만 보고자 합니다. 자기 사랑 돈 사랑이라는 이런 특징은 사실 아담의 범죄이후로 항상 있어왔던 일입니다. 지난주에 보았단 15-16절의 말씀도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모든 인생의 현실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살아가는 것이 말세의 특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을 하나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심판을 하셔도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또다시 특별히 마지막 때라고 하는 것입니까? 사도행전 17:30-31절입니다.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허물치 아니하셨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14:16절에서는 묵인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묵인하지 아니한 나라가 있으니 그 나라는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기에 범죄 하면 심판이 오는 것입니다. 그런 심판의 과정을 통하여 장차 온 세상을 어떻게 심판하실 지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때가 이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이 기준으로 심판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나 이방이나 상관이 없이 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부터 재림 때까지가 모두 마지막 때입니다. 이것은 시간의 의미가 아니라 사건의 의미입니다. 구약에서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 그리하여 하나님의 신이 부어지는 것을 종말로 보았습니다. 그 약속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으로 성령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성령이 모든 육체에 부어지는 사건이 종말의 특징인 것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 주에 더 상세하게 보기로 하겠습니다만 오늘은 마지막의 때가 된 증거를 적그리스도의 등장을 중심으로 보고자 합니다.

 

 

 

 

이제 18절을 봅시다.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일어나리라고 하였는데 벌써 많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적그리스도라고 하면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일어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때 유행하였던 666, 휴거, 천년왕국설, 적그리스도 등에 대하여 말이 많았습니다만 이제는 그런 말들조차 사라졌습니다. 몇 몇 극성스러운 이단에서나 그런 이야기 하는 것이지 그런 이야기는 이 세상을 보람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방해거리가 된다고 여기는 실정입니다.

 

 

 

 

마귀는 어떻게 하든지 마지막이 없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심어주고자 말세론 자들이 혐오스럽게 보이게 하여 말세가 없다는 사상을 주입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말세가 없기에 세상을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자기의 정욕을 따라 사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모인 교회조차 자기들의 정욕을 보암직하게 포장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여도 그 속에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들이기에 심판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이란 아담의 범죄 이후로 계속된 마지막이요 종말이요 심판이지만 그러나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만 심판을 보이시고 다른 나라들은 묵인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마지막은 예수님 오심으로부터 왜 세상이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를 보이시는 본격적인 마지막인 것입니다. 이 요한서신이 기록된 시기가 지금으로부터 약 1900년 전입니다. 그런데 그때 이미 적그리스도가 많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적그리스도는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티그리스도입니다. 요즈음 안티기독교라는 사이트도 있습니다. 기독교에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에 대하여 무엇을 반대하는 것입니까?

 

 

 

 

22-23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는 아버지도 부인하는 자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영광 돌리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그러면 참 하나님이 어떻게 나타나신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 하나님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모르고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다 가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들은 하나님 아버지도 부인하는 자가 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이야기는 좋아하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거리끼는 것입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 십자가입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이야기를 싫어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인간의 모든 공로가 다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하나님을 위한다고 열심히 행한 일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선 것이 됩니다. 유대인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하나님 사랑이, 그들의 율법 사랑이, 그들의 성전에 대한 열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적그리스도인지 아닌지의 점검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여 보면 드러나게 됩니다.

 

 

 

 

19절을 봅니다. 저희가 우리에게 나갔다고 합니다. 여기서 저희가 누구입니까? 적그리스도입니다. 적그리스도가 우리에게서 나갔다고 합니다. 그러면 적그리스도와 함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로 모였지만 우리 안에도 적그리스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일수도 있고, 교회에 열심히 충성하는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적그리스도인지 아닌지 무엇으로 안다고 하였습니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제대로 전하면 드러나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전하지 아니하는 교회가 있습니까? 예배시간마다 사도신경을 암송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적그리스도라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일을 완벽하게 이루어내신다는 것이 포함이 된 말씀입니다. 구약에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제사장이나 선지자나 왕입니다. 이들이 기름부음을 받은 이유는 자기 백성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함입니다. 죄를 고발하고 속죄를 하고 왕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즉 기름부음 받은 자가 온전히 자기의 임무를 수행하면 자기 백성을 온전히 구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그리스도의 일을 어느 누구도 온전하게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다들 죄인이기에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들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그리스도가 되려면 죄가 없어야 하고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계셔야 하는 분이어야 합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의 공로만이 우리를 온전하게 구원하신다는 것이 포함되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일에 우리가 무엇을 보탠 것이 없이 오히려 방해만 한 자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 믿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믿고 난 후에 우리가 열심히 주를 위하여 충성 헌신 봉사하여야 하지 않습니까? 그 결과에 따라 땅에서도 복을 받고 하늘에서도 큰 상을 받을 것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알고 열심히 해 왔는데 복음을 들으니 갑자기 헷갈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 하시는 일이라면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하면서 놀자고 합니다. 그런데 진짜 복음을 들은 자들은 자기들의 목숨조차 아깝지 않게 내어 놓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들의 고백을 들어보면 그것조차 예수 그리스도의 일로 돌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겸손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연예인들이 모여서 축구를 하였는데 공형진이라는 배우가 2골을 넣었습니다. 경기를 마치고 안성기가 잘하였다고 하니 축구는 골 넣은 사람보다 넣을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람이 잘하는 것이라고 하자 안성기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건방지게 겸손하기 까지 하다고 말입니다. 일부러 겸손한 것은 건방진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들의 고백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사실인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 혼자서 다 하신다는 말씀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 홀로 영광 받으신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나는 그런 복음이 싫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데? 감히 나를 뭐로 보고? 살아가면서 제일 화나는 부분이 이럴 때 아닙니까? 그런데 세상에서는 내가 비록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지만 그러나 교회에서 믿음만은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나은 인정을 받고 싶다고 여기신다면 그 사람은 복음 앞에서 견뎌 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은 뛰쳐나가게 됩니다.

 

 

 

 

다시 19절을 봅니다. 저희가 누구입니까? 적그리스도가 우리에게서 나갔다고 합니다. 우리란 사도들입니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견디지 못하고 나간 자들이 적그리스도입니다. 사도들의 복음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을 견디지 못하여 나간 것은 그들이 처음부터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소속이 다른 자들이 함께 섞여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 앞에서 갈라지게 됩니다. 복음이 증거 되지 않으면 그냥 그대로 묻혀서 가겠지만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 재림의 날에는 완전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 모습들이 지금도 부분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20-21절입니다. 너희는 거룩한 자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기에 모든 것을 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는 기름부음을 받았기에 믿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모든 것을 압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쓴 것은 진리를 알지 못함을 인함이 아니라 진리를 알기에 쓴 것이라고 합니다. 이미 진리를 아는 자들,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은 이 서신을 보면서 누가 거짓말 하는 자인 것을 알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복음의 핵심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거짓말쟁이라고 하는 자들이 나온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일 수가 있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자들이기도 하고, 예수님이 한 인간일 뿐이지 결코 그리스도가 될 수 없다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서신을 통하여 누가 거짓말하는지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알 것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날마다 얻어먹어야만 하는 거지여야 하고, 상한심령이어야 하고, 여종이 그 주모의 손을 바라보듯이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만 목 놓아 바라보아야 하는 이 복음이 과연 좋습니까?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요한1서 2:24-29 처음부터 들은 것 2007. 7. 4

 

24 너희는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 25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26 너희를 미혹케 하는 자들에 관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28 자녀들아 이제 그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바 되면 그의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29 너희가 그의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사람들은 발전과 성장을 좋아합니다. 특히 우리나라 상황에서는 느린 것을 봐주지 못합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빠른 경제성장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과물을 내어 놓아야 하는 풍토가 온 국민의 사상을 지배하면서 일어나는 사회전반적인 현상이 되었습니다. 엘지 연구원으로 일하는 조 집사가 어느 날 회사를 가지 않겠다고 하더랍니다. 내가 이정도로 일하면 무슨 일을 해서라도 못 먹고 살겠느냐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조 집사 연구팀에서 드럼세탁기를 만들어 히트상품을 만들고 한 연구원이지만 그러나 계속하여 새로운 상품을 다른 경쟁회사보다 더 빨리 만들어 내어야 하는 중압갑을 이기기 힘든 것이라고 봅니다.

 

 

 

 

이런 모습이 교회 안에도 그대로 들어왔습니다. 세상의 모습이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세속화라고 합니다. 세상의 마케팅 원리, 경영원리를 용어만 몇 개 바꾸어 성경적인 리더십인양 소개하는 책들이 얼마나 많이 쏟아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세상의 기업이 몇 년 만에 얼마나 규모가 커졌는가를 기업성공의 기준으로 세우듯이 교회에서도 개척 몇 년 만에 교인이 얼마나 많아졌는가를 경쟁하듯이 내세우는 것입니다. 이런 풍토 속에서 신앙도 속성코스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빨리 빨리 전도하고 제자를 양육하여 재생산 해 내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으니 인기리에 팔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오늘의 말씀은 격에 맞지 않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24절을 봅니다. 처음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고 합니다. 처음부터 들은 것이 너희 안에 거하면 너희가 아들의 안과 아버지의 안에 거하리라고 합니다. 처음부터 들은 것이란 바로 복음입니다. 성도들이 복음을 들어놓고서는 지금 적그리스도에 의하여 유혹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들은 복음의 내용을 변개하려고 하는 자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같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19절입니다. 우리에게서 나갔으니 우리에게 속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이 마지막 때라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가 나타난 것이 마지막 때인데 이런 마지막 때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처음부터 들은 그 복음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적그리스도가 하는 일이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부인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하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자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천상적인 존재가 이 땅에 육신으로 와서 피를 흘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적그리스도의 활동은 어느 시대에나 늘 있어왔습니다.

 

 

 

 

시편 2:1-2절을 봅니다. “1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3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온 열방과 민족들이 분노하며 허사를 경영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세상은 분주하게 경영합니다. 국내에서는 대권에 도전하는 자들이 분주하고 과테말라에서는 동계올림픽 유치로 대통령까지 동원하여 온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노력들이 국민소득 3만 달러로 가는 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무엇을 하자는 것입니까? 다시 더 높은 소득을 향하여 또 달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허사를 경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영이 영원한 생명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왕들과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일하는 내용이 결국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각 나라의 왕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하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하는 그런 정상들의 회의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세상에서 돌아가는 그 일들이 결코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세상에서 끊어지면 죽는 줄로 알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이 사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조차 처음에 들은 복음, 오직 은혜는 교회의 성장에 방해가 되는 것처럼 여기면서 계속하여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는 쪽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들은 복음이 성경적인 복음이 아니라 그저 사람들이 입맛에 맞고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거짓된 복음이라면 처음부터 가짜입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들은 내용이 무엇입니까? 25절입니다.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라고 합니다.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요한복음에서 몇 구절을 봅니다. 처음부터 들은 내용이 바로 복음의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14-15절입니다.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광야에서 놋 뱀을 만들어 높인 것은 백성들의 원망으로 인하여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그 저주로 죽어 가는데 뱀을 쳐다본다는 것은 원망하는 자들이 그런 저주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인정할 때에 나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신의 저주임을 믿는 자가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는 것도 주께서 들리심으로 자기 백성을 이끌어 주셔야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32-33절입니다. “32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을 이끄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셔서 자신의 죽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처음부터 들은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3:35-36절입니다. “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아들에게 만물을 다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은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도 아들을 보고 믿는 자 마다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요6:40).

 

 

 

 

요한복음 17:2-3절입니다.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아들에게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아는 것은 아버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인 것입니다. 우리가 몇 구절을 찾아본 내용을 요약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을 자기 백성을 이끄셔서 영생을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며 이렇게 처음 들은 것을 믿고 그 안에 거하면 아들 안에 있는 것이며 곧 아버지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처음부터 들은 것 안에 거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26절입니다. 너희를 미혹하게 하는 자들이 있어서 이것을 썼다고 합니다. 이미 복음을 들어서 믿고 있는 자들을 미혹하기 위하여 적그리스도들이 활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리스도란 구원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하게 이루어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적그리스도는 이것을 부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모습은 환난과 핍박을 주든지, 세상의 재미와 쾌락을 주든지, 교묘하게 복음의 내용을 변개하여 인간의 행함을 개입시키고자 하든지 간에 예수님의 공로로만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믿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혹하는 자들이 어느 시대에나 활동하는 모습인 것입니다.

 

 

 

 

27절입니다. 너희는 주께 기름부음 받은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기름 부으심이 있다는 것은 성령이 임한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성령이 임하여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은 아무것도 배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까? 그 말이 아닙니다. 이미 처음부터 들은 복음의 내용이 있는데 그 복음을 버려두고 다른 교묘한 이야기들을 배우기 위하여 좇아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가 유혹하는 것은 처음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떠나게 만들고자 하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배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는 처음부터 전한 복음을 계속하여 믿을 뿐 아니라 그 처음 받은 복음의 내용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27절 하반절에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합니다. 복음을 들으면 들을수록 주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가르치시는 일입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는 자는 세월 지나갈수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 됨을 더욱 더 절실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처음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은 기초를 다시 든든히 하자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나 공부하는 학생들도 처음부터 다시 하는 것은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기 위하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처음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그 처음이 기초가 되는 것이고 그 기초를 익히면서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간다는 차원이 아니라 그 처음의 들은 이야기, 그 복음 안에 나중의 것까지 몽땅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런 생각을 잘 못하는가 하면 시간 개념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무언가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처음과 나중을 따로 생각하지만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처음과 나중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안에서 완성입니다. 요한복음 5:24절을 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미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어디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골로새서 2:1-4절입니다. “1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4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바울사도가 힘쓰는 이유는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의 모든 부요에 이르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처음부터 들은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가 부족한 것인 양 속이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28절입니다. 우리가 주님 강림하실 때에 그 앞에 담대하게 나아가는 것은 무엇으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입니까? 우리의 행함입니까? 히브리서 4:14-16절입니다.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무엇을 굳게 잡아야 합니까? 우리의 대 제사장이시고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보좌 앞에도 담대히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 예수 강림하실 때에도 담대함을 얻어 부끄럽지 않는 길은 그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29절입니다. 주 안에서 사는 자는 어떤 모습입니까? 주님이 의로우신 분이시기에 그 안에 거하는 자가 의가 나옵니다. 그 의를 행하는 것은 그에게서 났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시 주님을 증거 하는 의가 되는 것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이때에 처처에 유혹이 넘치는 이런 적그리스도의 때에 처음부터 들은 복음 안에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안에서만 주님 재림하실 때에 담대하게 맞이할 것입니다.

 

 

 

 

요한1서 3:1-3 어떠한 사랑을! 2007. 7. 11

 

1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니라 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을 좋아합니다. 요한일서 4:8절에도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랑을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평소에 이 세상에서 통용되는 사랑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사랑의 개념으로 가지고 성경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에서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낯선 사랑입니다. 1절에 “어떠한 사랑”이란 외국에서 온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질적이고 놀랍고 신기한 그런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 낯선 사랑의 내용을 우리에게 주신 결과가 무엇인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계속되는 1절 말씀을 보시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랑을 받았지만 그러나 세상이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세상이 알아주어야 할 텐데 세상이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시기할만한 그런 요소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동등하게 경쟁하여 얻어낼 그런 가치가 이 땅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설교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잘 섬겨서 세상이 알아주는 사람이 되자고 합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입신양명하라는 것입니다.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더 잘 드러낸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오는 수많은 간증들이 세상의 성공담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설교와 간증을 듣다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나오면서도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하면 내가 하나님을 잘 섬겨서 세상이 알아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를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가치로서는 파악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한일서 2:15-17절을 다시 봅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내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증거물을 어디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까?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가지고 내세우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과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기에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나 세상이 있는 것들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고 아름답고 귀한 것이라고 하여도 그것은 이미 세상에 있는 것이라면 어떤 상태에 있는 것입니까?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 이미 이 땅이 저주를 받은 상태입니다. 타락해 있는 것입니다. 타락해 있는 것을 아무리 좋게 만들고 포장해도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낡아지고 더러워지고 썩어갈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증거로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자녀가 되었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오히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그럴 수가 있습니까? 늘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을 더 가지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는 사람들인데 말입니다. 우리도 똑 같이 세상의 보암직한 것들이 좋아 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의 사랑을 들먹이면서 이렇게 생각하고 기도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주의 일을 하면 세상의 더 나은 것을 주실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무엇을 상속받겠습니까? 세상의 썩어질 것을 상속받겠습니까? 썩지도 더렵혀지지도 아니할 영원한 하늘의 것을 상속받겠습니까? 분명히 후자입니다. 그런데 자꾸만 앞의 것들을 이야기하면 그런 것은 마귀가 예수님께 줄 수 있다고 유혹한 것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오히려 세상의 것들을 끊어버리고 하늘의 것들로 채우시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자기 자녀 사랑인 것입니다. 이런 사랑에 대하여 말라기서를 봅니다.

 

 

 

 

말라기 1:2-3절입니다. “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무케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시랑에게 붙였느니라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받은 자들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였습니까? 라고 항의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셨다고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랑받지 않았다고 하고 누가 문제입니까?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답을 하시는데 에서는 야곱의 형이라도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어나기도 전에 쌍둥이로 뱃속에 있을 때에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와 야곱의 생애를 보면 누가 고생을 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야곱이 죽을 고생을 합니다. 자기가 하나님께 택함을 입은 자라는 것은 세상에서 성공함으로 보이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장자권도 챙기고, 형이 죽이고자 하여 외삼촌의 집에 도망갔습니다. 그곳에서 20년을 죽도록 고생해서 두 아내와 자녀들과 자기 재산을 이루었습니다만 그것조차 얍복 강가에서 다 포기하여야 될 정도로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아들이 아버지를 건드리는 험한 꼴을 보지요, 자기가 사랑한 아내 라헬의 첫 아들이 요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요. 그래서 나중에 바로에게 갔을 때에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반면에 에서는 어떠하였습니까? 아들 둘 뿐인데 야곱은 외삼촌 집으로 가서 20년이나 되었고 이삭은 나이 많아 늙었으니 그 재산을 누가 차지하겠습니까? 에서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병 400명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은 아브라함보다 더한 부자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형에게 선물을 주려고 양떼 소떼를 드리려고 하니 자신도 넉넉하다고 합니다. 동생이 간청하여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에서와 야곱이 함께 살다가 둘 다 가산이 늘어나서 형 에서가 에돔 지역으로 가서 그곳에서 세력을 이루고 살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는 야곱과 그의 후손들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까? 에서보다 훨씬 고생을 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이 국가를 이루게 된 이스라엘이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애굽의 종살이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그 사랑을 입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지만 광야에서의 일과 사사시대를 보면 그들의 죄와 고난을 봅니다. 왕들의 시대에도 잠시 영광스러운 왕국이 되었지만 수많은 고생을 한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나라가 남북으로 나누어지고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하고 남 유다는 바벨론에 망하고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나라의 힘은 미약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니 사랑한다는 말씀을 하지 마시든지 사랑하신다면서 왜 이렇게 고생시키는 것입니까? 사랑하는 자녀이기에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야곱은 무엇을 받았다는 것입니까? 세상의 부자가 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부자는 아니더라도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누렸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하신 증거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 약속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약속으로 받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자녀는 이렇게 다루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5-12절입니다.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ㄱ)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그러므로 세상이 볼 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가 어떻게 보이는 것입니까? 무슨 죄가 많아서 저런 고생을 하느냐는 시각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운명이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런 길로 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자는 역시 아들의 대우를 받기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 생각한 하나님의 사랑과 얼마나 낯섭니까? 그래서 어떠한 사랑을 주셨는지 그 사랑은 너무나 낯선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은 전혀 알 수가 없는 사랑이며 오히려 피하고 싶은 사랑인 것입니다.

 

 

 

 

2절을 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세상에서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장차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그때는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영광중에 계십니다. 변화산에서 변화하신 그 영광의 모습으로, 사도요한에게 나타난 그 영광의 모습으로 주님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떻게 됩니까?

 

 

 

 

빌립보서 3:17-21절입니다.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십자가의 원수는 땅의 일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늘에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구원하시는 분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가 오시면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받는 낯선 사랑입니다.

 

 

 

 

3절입니다. 그러면 이 소망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주님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 주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자기를 깨끗하게 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만 깨끗하게 됩니까? 우리가 깨끗함을 얻은 것은 금이나 은이나 없어질 보배로 된 것이 아닙니다. 즉 우리의 행위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피 안에 머물러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1서 1장 7절입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어떠한 사랑, 즉 낯선 사랑입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이 피의 사랑 안에 거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1서 3:4-12 범죄 치 못하는 것은 2007. 7. 18

 

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5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나니 범죄 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7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11 우리가 서로 사랑할찌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 12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1)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지난주에 하나님의 어떠한 사랑이 나타났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는 사랑인데 이 사랑은 세상이 알 수 없는 사랑이기에 낯선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랑은 성령이 임하지 않고서는 결단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아들이라는 이름만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참 아들의 영광스러움까지 다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시는데 우리가 일한 것이 없이 받는다는 것이 참으로 낯선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사랑을 받은 사람은 주님이 계신 그대로 볼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이 소망이 있는 사람은 주님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고 합니다. 이 깨끗하게 함이 무엇이라고 지난주에 결론을 보았습니까? 1:7-9절입니다. 주님과 사귐이 있다는 것은 빛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거하게 되니 자신의 더러움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들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안에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지금 믿고 있는데 죄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죄가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며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안에 거하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게 되면 반드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죄를 예수님의 피가 깨끗하게 하는 사실까지도 또한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안에 있는 자는 그 사람의 행위를 보지 않고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발린 집을 천사가 넘어가듯이 우리의 모든 죄를 그 피로 용서하시고 가려주셔서 더 이상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유월절 밤을 생각해 봅시다. 피를 바른 집안에 죄인이 있습니다.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천사는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소에 죄가 없다고 여기고 피를 바르지 않은 집이 있다면 어김없이 죽음의 천사가 들이닥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9절을 보시면 하나님께로 난 자는 죄를 짓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씨가 그 안에 거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그 사람도 범죄 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자라는 사람, 다른 말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죄를 짓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1장의 말씀과 3장의 말씀이 이렇게 다릅니다. 그러면 어느 것이 맞는 말씀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은 죄를 짓지만 예수님의 피 안에서 용서를 받는다는 이야기 입니까? 아니면 아예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3:9절에서는 하나님께로 난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합니다. 4절에서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6절에서는 그 안에 거하는 자는 범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범죄 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고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한다고 합니다. 8절에서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고 그 생각들 따라 각자의 주장들을 하게 됩니다. 어떤 주장들이 있는가 하면 아마 우리의 생각들도 이러한 생각들 중에 하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나서 범죄 하는가 아니하는가? 전혀 범죄 하지 않는다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영육 이원론을 주장하는 자들인데 영혼은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은 죄를 범한다고 합니다. 육신은 하찮은 존재이며, 영혼의 감옥이기에 이것은 아무리 범죄 하여도 영혼에는 영향을 끼칠 수가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참 편리한 이론이지요! 다만 자기들처럼 특별한 영적인 지식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영지주의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과 다르게 금욕주의가 있습니다. 철저하게 금욕과 고행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로 난 자는 범죄 하지 않는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구원파의 박옥수씨는 어떻게 말합니까? 한번 죄 사함과 거듭남을 받았다면 다시는 죄 사함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단번에 완전히 용서 해주셨는데 또 다시 죄를 거론하는 것은 예수님의 공로를 모독하는 것이기에 속죄를 위한 기도나 속죄에 대한 찬송도 부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주장도 무엇을 인용하겠습니까? 하나님께로 난 자는 즉 거듭난 자는 범죄 할 수 없다는 이런 말씀들을 근거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자기 구원을 위한 도구로 삼아버린 것입니다. 한번 죄 사함 받고 거듭났으면 이제 예수님과 이별하고 거듭난 멋진 자아로 재정립하여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면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죄를 완전히 짓지 않을 수는 없지만 습관적으로 반복적으로 죄를 범하지는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점점 성화의 노력을 할수록 죄 짓는 횟수가 줄어들어서 거의 다 줄어들 때까지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죄를 덜 짓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생각하는 죄라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행함에 기준을 두고서 정의를 내리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주장하는 바는 말씀을 근거로 제시하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동기를 이미 행함으로 간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하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습관적으로 반복적으로 죄를 짓지 아니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몇 번을 반복하여야 습관적이고 반복적인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마음의 생각이 얼마나 빠르게 반복되고 움직이는지 생각을 해 보셨습니까? 마음의 욕망들이 순식간에도 얼마나 많이 떠오르고 있습니까?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들이 쉴 틈도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도 자신들은 범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속이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로 난 자는 범죄 하지 아니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누구에게 소속이 되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아버지께로 난 자는 아버지와 아들의 소원대로 된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는 아버지를 알게 됩니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께로 난 자들입니다. 이들은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것이 그 아들의 피로 죄 사함을 받는 다는 사실입니다. 즉 아들의 일하심으로만 범죄 하지 아니한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3:5절을 봅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를 없이 하려고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없이 하시기 위하여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신 것입니다. 그 안에서만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를 없이 한 것입니다. 우리의 살과 피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죄 없는 상태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8절을 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난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의 일이 무엇입니까?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한 자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께서 두 가지 소속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고 하시자 유대인들이 자기들은 아브람의 자손으로 종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고 도리어 죽이려고 하는 그들을 향하여 너희의 아비는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즉 두 소속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와 마귀에게 속한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귀가 한일은 처음부터 거짓말 장이라는 것입니다. 그 거짓말로 속인 것이 선악과를 따 먹으면 너희도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하는 유혹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 하나님처럼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와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알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물론 이것이 범죄의 결과입니다만 하나님만이 선과 악을 결정하셔야 하시는 분이신데 인간이 스스로 선과 악을 결정하겠다고 나서는 것입니다. 이런 체제하에서는 결단코 예수님의 공로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우리의 몸에 본능적으로 들어있기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공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더 멋있게 선을 많이 행하고 악을 물리쳤는가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투입되면 드러나는 것입니다. 9절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 마다 범죄 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씨가 그 안에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도 범죄 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로서 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범죄 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자기의 소속을 부인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흔히 씨 도둑질은 못한다는 말을 합니다. 몰래 바람을 피워서 자식을 낳아도 그 부모의 씨를 자식이 그대로 물려받는 것입니다. 부모의 유전자가 자녀에서 그대로 복제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세상도 그러하다면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난 자라면 반드시 자기의 소속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인정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4:2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입니다. 육체로 오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만이 죄가 없는 육체로서 온전히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로 난 자는 범죄 하지 못한다는 이 범죄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요한 일서에서 다루는 가장 중요한 죄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과연 그리스도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 로서 난 자들이기에 이들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범죄를 행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위를 보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의 영원 전부터 언약하신 그 언약대로 자녀를 삼아 주셨기에 그 사랑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 사랑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다른 말로 범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는 범죄 할 수가 없다는 것이 왜 그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근본적인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난 것이 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스스로 독립하고자 한 것이 선악과를 따 먹고 난 이후의 인간의 범죄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로 난 자는 그 아들의 사랑 안에 그 아들의 피 뿌림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범죄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거나 선택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선택하셨습니다. 디모데후서 2:13절입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찌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우리는 믿음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항상 영원토록 미쁘시기에 자기를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미쁘심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한 우리는 주님을 부인하는 죄를 범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자녀와 하나님의 자녀가 어떻게 드러나는가 하면 가인과 아벨의 경우를 보면 압니다.

 

 

 

 

12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신 것입니다. 범죄 한 인간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의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일방적인 은혜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입니다. 마치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신 것처럼 일방적으로 아벨의 제사를 받아주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분개한 것이 가인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일방적인 사랑이 부어지는 것에 대하여 감사가 일어납니까? 분노가 일어납니까? 하나님께로 난 자라면 거저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부인하는 죄를 범할 수가 없습니다.

 
 


요한1서 3:13-24 이로써 사랑을 알고 2007. 7. 25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 이로써 우리가 2)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20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거든 하물며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일까 보냐 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2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것이니라 24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13절에서 예수 믿는 형제들에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미워합니까? 지금 가장 큰 뉴스가 피랍사건입니다. 정부가 아프가니스탄에 가지 말라고 하였는데도 기어이 갔다가 그렇게 되었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쪽에서는 그렇게 해서라도 선교를 해야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으로 욕을 먹습니까? 아니면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의 행동들이 너무나 이기적이라서 미움을 받습니까? 다 해당이 됩니다만 오늘 본문에서 미움을 받는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15:18-19절입니다.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가장 싫어하는 부분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대한 부분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선악간의 행위로 천국도 가고 지옥도 가는 것이지 어떻게 일한 것도 없이 거저 주시는 은혜로 되느냐며 싫어하고 미워합니다.

 

 

 

 

지난주에 가인과 아벨에 대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아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아 주시지 않으시니 가인의 안색이 변한 것입니다. 죄가 가인의 문 앞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그 죄를 다스릴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일어난 현장에서 가인이 얼마나 동생을 미워하였겠습니까? 그 미움의 결국은 살인에 이르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미움이 세상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믿는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이런 선택에 대하여 안색이 변하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범죄하고 난 이후에 자신이 주인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범죄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단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는 피조물인 인간이 주인이 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를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애굽으로 보내실 때에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묻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답변이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스스로 계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신데 인간이 범죄하고 나니 자신도 스스로 있는 자로 착각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이니 종교니 하는 것들도 결국 인간의 신 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좋은 면을 잘 개발하면 무궁무진한 능력을 행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인슈타인도 그 뇌를 10프로 밖에 사용하지 못하였다고 하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의 출처나 근거는 없는 것입니다. 누가 뇌의 용량을 측정하여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함에도 그런 말들로 사람들의 가능성을 부추겨서 인간이 신으로서 살고 싶은 욕망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기독교라는 이름 안에서는 어떻게 사용되고 있습니까?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는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을 가지고 슈퍼맨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이론과 다를 바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성경적인 용어만 차용하여 인간 안에 있는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나타낼 뿐입니다. 그런 모습이 바로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내가 자기 사랑만 있었던 사람이지만 이제 내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났기에 거듭난 자아로서 행함과 진실함으로 이웃도 사랑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 17-18절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들게 합니다.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서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거하느냐고 합니다.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어떻게 적용하고 대입하느냐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가지고 말로만 하지 말고 행함이 나타나야 한다고 합니다. 야고보서 2:14-26절에서도 행함이 나타나지 아니하는 것은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행함이 나타나는 것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행함이 나타날 때에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나은 행함이 나타나고 사람들이 인정을 받고 칭찬을 받는 것이 나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가실 때에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이 나옵니까? 아니면 감사와 사랑이 나옵니까? 전자라면 그 사람의 행함이라는 것이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서 나온 것입니다. 만약에 후자라면 주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러니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어떤 행위로 판단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야기가 있습니다. 5장 바로 앞에 바나바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나바가 밭을 팔아 사도들 앞에 가져온 것입니다. 이 바나바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입니다. 아마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그런 인정을 받고 싶어서 그 소유를 팔아서 바치려고 하였는데 돈에 욕심이 나서 일부를 감추고 사도들에게 가져왔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죽고 그 아내도 함께 속이다가 같은 날 죽임 당하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그런 일이 있다면 칭찬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사랑하여 이렇게 많은 헌금을 하였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행위가 원인을 증거 하기도 하지만 사람의 행위가 얼마든지 주님의 사랑에 근거하지 아니한 자기 과시의 행위나 복을 받고자 하는 조건부의 행위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서나 세상에서 어떤 사랑의 실천이라고 하는 것들이 어디에 근원되어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선행이라는 것들이 오히려 미움과 살인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14-15절을 봅니다.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안다고 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한 자가 되고 살인한 자는 영생이 그 속에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형제 사랑이 있는지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방금 예를 들은 대로 다른 형제가 나보다 칭찬과 인정을 받는다고 해도 그 형제를 사랑합니까? 혹시 그 형제를 험담하고 깎아내리지 않습니까? 가인이 아벨을 미워하여 죽여 버렸습니다. 지난주일 낮에 말씀드린 내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한 말씀에서 이웃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기를 실천한다는 사람들에 의하여 오히려 죽인 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받은 사람만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16절을 봅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이로써 우리가 사랑을 안다고 합니다. 이것을 모르면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다 자기 사랑의 연장일 뿐입니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너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완전히 소유하고 싶다는 정복욕에 불과한 것입니다. 혹자는 사랑하기에 희생하겠다는 사랑도 있겠지만 그것도 자아사랑의 일부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참 사랑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 사랑만이 참 사랑입니다. 4:7-10절입니다.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이 사랑 모르면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사람을 세상이 미워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5장의 내용이 이런 사랑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입니다. 이 사랑은 한 몸 되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주체가 되고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사랑을 멋있게 하는 사람일수록 그 사람의 위대함이 드러납니다. 데레사 수녀의 사랑, 슈바이처의 사랑 등을 말합니다. 데레사 수녀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웠는지 인도의 칼리 신도들이 신앙의 대상이 전혀 다른 데레사 수녀에게 신전의 일부를 내어주어 죽음의 집을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를 안내한 선교사가 사랑의 힘의 위대성을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형제사랑을 말하고 그 형제 사랑은 그리스도의 한 몸 된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한 나무입니다. 한 나무에 각 지체들이 다 연결되어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아 사는 것입니다. 한 가지가 나무쪽에 가까이 붙어 있다고 해서 자기만 포두나무의 진액을 빨아먹고 가지 끝으로 보내지 않는 그런 가지는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말라죽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한 몸임의 증거가 가지에서 열매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증거 하는 것이 받은 사랑을 나타내는 모습입니다.

 

 

 

 

이런 사랑을 받은 사람은 같은 사랑을 받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누가 시켜 될 일이 아니라 그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우리가 몸의 여러 지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지체 중의 어느 한 지체가 아프면 온 몸이 다 아픕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그 아픈 지체를 돕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이 있기에 같이 받은 사랑이 있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18절입니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안다는 것입니다. 16절에서도 이로써가 나옵니다. 즉 원인이 있어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나타난 사랑이 우리에게 임함으로 이제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지를 안 것입니다. 그 사랑에 눈 뜨게 된 사람은 동일한 사랑을 받은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한 몸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랑 안에는 시기와 질투가 없습니다. 시기와 질투란 미움을 유발하고 그런 미움을 결국 살인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받음으로 알게 된 사랑은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랑을 받은 자는 담대합니다.

 

 

 

 

20-21절입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을 보면 책망할 일이 왜 없겠습니까? 하물며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그동안 사랑이라고 무엇을 해 온 것이 얼마나 자기 자랑과 부끄러움이 많습니까? 그러나 무엇 때문에 담대함을 얻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 버린 그 사랑 안에서, 그 사랑을 받았기에 담대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4:16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긍휼과 사랑을 받았기에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갑니다.

 

 

 

 

22-24절입니다. 이런 자들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그의 계명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계명은 계명이라기보다 사랑입니다. 믿음과 사랑이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주신 것이 나오면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주신 분을 증거 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셔서 지키는 것이고 이런 자들은 주 안에 거하고 주는 저 안에 거하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역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압니다. 이로써 사랑을 우리가 알았습니다. 그 사랑을 하게도 하시고, 그 사랑을 알게도 하시기 위하여 성령까지 주셨습니다. 이 사랑 맛보아 가면서 살기 바랍니다.

 

 

 

 

요한1서 4:1-6 영을 다 믿지 말고 2007. 8. 8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5 저희는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속아본 적이 몇 번은 있을 것입니다. 사소한 문제로부터 큰 재산상의 손해를 당하여 고통을 받는 사람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에게 속은 것에 대하여 억울해 하지만 자신이 남을 속인 것에 대하여서는 별로 생각을 하지 않고 삽니다. 디모데 후서 3:13절에서 사람들은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한다고 합니다. 순서가 자신이 남을 속이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언제부터 남을 속이는 것입니까?

 

 

 

 

복음 칼럼에 글을 보셨나요? 영국의 어느 대학 박사가 조사를 하였더니 생후 6개월 만에 남을 속인다고 합니다. 그 속임이 몇 가지 단순한 속임이지만 날이 갈수록 더욱 지능화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타고난 본능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다고 합니다. 그러니 혹 다른 사람들에게서 속았다고 하더라도 너무 분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나 속지 말아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속는 일이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의 고통만 있을 것이지만 영적인 부분에 속는다면 이것은 영원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사기꾼들에게 넘어가지 않으려고 여러 가지 조심을 하지만 영적인 일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도 역시 세상과 세상의 신에 의하여 속고 있기에 그런 것입니다.

 

 

 

 

오늘 말씀 4:1절을 보시면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를 시험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영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선지자들을 말합니다. 초대교회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한다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목사나 전도한다는 사람들을 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해서 다 믿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를 시험하여 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구약에서도 거짓 선지자들이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거짓 선지자의 말을 들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5절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속하였기에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의 말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하였다는 것은 이 세상 신(고후4:4), 공중 권제 잡은 자 곧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엡2:2), 즉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 세상에 속한 말을 하니 역시나 세상에 속한 자들이 그들의 말을 좋아하면서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참된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전부 다 핍박과 고난과 죽임을 당하였지만 거짓 선지자들은 왕과 백성들에게 인기를 얻었습니다. 대표적인 한 곳만 보자면 열왕기 상 22:5-8절을 봅니다. “5 ○여호사밧이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청컨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 보소서 6 이스라엘 왕이 이에 선지자 사백인쯤 모으고 저희에게 이르되 내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우랴 말랴 저희가 가로되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7 여호사밧이 가로되 이 외에 우리가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있지 아니하니이까 8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오히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저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 여호사밧이 가로되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

 

 

 

 

북 이스라엘 아합 왕이 남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길르앗 라못이 원래 이스라엘 땅이나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함께 치자고 합니다. 그때 여호사밧 왕이 선지자에게 물어보자고 합니다. 이스라엘 왕이 4백여 명의 모아서 물어봅니다. 그러자 다 예언하면서 전쟁에 나가면 이길 것이라고 합니다. 철로 뿔을 만들어 보이면서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였다고 합니다. 여호사밧이 의심이 나서 다른 선지자가 없느냐고 물으니 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나에게 좋은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에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는 왕과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들은 환영을 받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들에게 좋은 말을 해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디모데후서 4:3-4절입니다.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므로 오늘도 사람들은 바른 교훈을 싫어합니다. 자기들의 귀에 듣기 좋은 소리를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합 왕의 시대에 평소에 미움을 받는 미가야 선지자 한명의 말을 듣겠습니까? 4백 여 명의 말을 듣겠습니까? 오늘날로 말하면 4백 명의 목사와 1명의 목사가 상반된 견해를 말하면 사람들은 어느 편에 서겠습니까? 대부분 다수 속에 안전을 선택합니다. 그뿐 아니라 4백 명의 그룹에서 표적과 기적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한 쪽은 진다고 말하는데 4백 명의 그룹에서는 계시를 받은 체험까지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더구나 전쟁에서 진다는 말을 하는데 누가 미가야 선지자를 좋아하겠습니까?

 

 

 

 

거짓 선지자들이 표적과 능력과 거짓 기적을 나타냅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2:9-12절입니다. “9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미가야 선지자를 공격한 시드기야가 철로 만든 뿔을 계시의 표적으로 가지고 나온 것처럼 이 시대도 표적과 기적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자들로 심판받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렇게 조치하신 것입니다.

 

 

 

 

오늘 이시대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자기 귀를 즐겁게 해주는 사람을 좋아하지 바른 교훈을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싫어합니다. 십자가의 고난이나 좁은 문 좁은 길을 싫어합니다. 십자가로 숨겨진 하늘의 영광보다 세상의 영광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가는 곳은 세상에 속한 이야기들입니다. 세상에서 더 나아지는 이야기입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유혹한 세 가지 유혹이 다 세상에 속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세상에 속하였기에 마귀의 이야기를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물리친 마귀의 유혹을 더 좋아하는 것은 그 사람이 세상에 속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로 온 영을 어떻게 구별합니까? 2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기독교 단체가 있겠습니까? 기독교라는 수많은 이름의 종교단체들은 다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 하나님께로 온 영이 아닙니까?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때는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이단들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사람으로 와서 십자가를 질 수 있는가를 부인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세상에 속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대에 교회라고 이름 하는 곳이면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다 시인한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도, 부활 승천하셔서, 다시 오실 것도 믿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다 하나님께 속한 영으로 보아야 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 나옵니다. 그런데 말로서는 그렇게 고백한다고 하지만 예수님의 살아계심과 다 이루심을 믿지 못하여 자기들이 해야만 한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아니면 안 된다는 자들이 많은 것입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성서유니온에서 나온 주석을 보았는데 그곳에서 이단의 징후 몇 가지 인용을 해 보겠습니다. 첫째가 결정을 내릴 중앙집권적 권위를 허용한다는 것입니다. 카톨릭이 그러합니다. 그러나 개신교회도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 권위를 성경에 두는 것이 아니라 강력하고 독재적인 지도자에게서 그 권위를 찾는 것이 이단적이 징후라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성경 외의 새로운 진리나 계시를 이야기 하고, 행위에 의한 구원을 장려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교훈과 신앙 행위에 충성하는데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소속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누구나 빠질 수 있는 유혹이며 함정입니다. 여러분들이 늘푸른 교회에 출석합니다. 만약 이 교회가 이단적인 교리를 전한다고 여긴다면 여러분들이 출석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석하고 있다는 것은 그래도 우리 교회는 바른 말씀을 전한다고 여기기에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이 전해진다고 말하기보다는 아무 부담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과연 아무 부담이 없는 것이 진리의 기준입니까?

 

 

 

 

신앙 상담 란에 어떤 분이 설교한편을 들어보고 형제라고 여긴다고 하면서 이 교회에는 십일조가 있는가 하면서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십일조가 있고 없고가 참된 교회와 형제의 표지가 됩니까?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자원하여 자기 소득의 십분의 일을 연보하기로 해서 십일조를 한다고 하는 것은 율법과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한 몇 가지를 가지고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것은 우리만이 옳다는 또 다른 교만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속한 영인지 악한 영인지 어떻게 구별이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자마다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대에 기독교라는 이름붙인 곳은 다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데 도대체 어떤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까? 6절입니다.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우리의 말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들은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란 누구입니까? 사도들입니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듣지 아니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들이 전한 복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너희들이 십자가에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을 죽인 가해자라는 것이 인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자이기에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것도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심판을 받아 지극히 마땅하고 구원받을 자격이 전혀 없음을 역시나 시인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시인은 사람으로 결코 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고백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4:1절을 시작하기 바로 전에 있는 3:24절에서 성령으로 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자는 사도들의 말을 듣습니다. 사도들이 전한 복음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와 그리스도란 자기 백성을 빈틈없이 완벽하게 구원으로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자기 이름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6절 끝에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구별한다고 합니다. 진리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완전성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들이 증거 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미혹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미진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모든 이단들의 특징이 예수 그리스도로 충분하지 않다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단 통일교는 예수님께서 육체 구원을 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여호와증인은 예수님의 선재성을 믿지 않습니다. 안식교인들 안식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는 내가 아니면 제대로 복음을 전할 자가 없다는 것도 미혹의 징후가 됩니다. 그러므로 영을 다 믿지 마시고 세상을 이기신 주님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요한1서 4:7-13 사랑은 여기 있으니 2007. 8. 15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12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13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교회에서도 세상에서도 사랑을 많이 이야기합니다. 사랑을 노래하고, 사랑을 소설로 쓰고,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 냅니다. 남녀의 사랑이나 부모자식간의 사랑이나 자연을 사랑하는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조국애도 인류애도 이야기 됩니다. 특히 오늘 같이 광복절인 날은 가슴 뭉클한 조국사랑도 나올 것입니다.

 

 

 

 

빛을 다시 보았다고 광복절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과연 우리가 빛을 보기는 보았습니까?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큰소리께나 친다는 사람들의 과거 행적을 보면 대부분 일제 강점기 때에 친일한 행적이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나라를 사랑한다는 어떤 단체들은 아직도 광복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가족도 버리고 목숨 바쳐가면서 독립 운동한 후손들은 지금도 고생하고 있는데 친일파의 후손들은 지금도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는 내용을 종종 듣고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사람마다 또 다른 생각들을 합니다. 자신이 어느 입장이 되는가에 따라 반응이 다른 것입니다. 친일파의 후손이면 과거는 과거이고 지금은 지금인데 왜 자꾸 옛날이야기를 들먹이냐고 할 것입니다. 독립군의 후손이면 지금이라도 과거를 청산하여 나라의 기강을 제대로 세워야 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시대의 젊은이들과 청소년은 광복절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합니다. 그저 하루 공휴일이니 마음껏 즐기자는 것이지요!

 

 

 

 

녹색 평론 2000년 11-12월호에 고 권정생씨의 “애국자가 없는 세상”이라는 글이 실렸습니다.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젊은이들은/ 나라를 위해 동족을 위해/ 총을 메고 전쟁터로 가지 않을테고/ 대포도 안 만들테고.. 탱크도 안 만들테고.. 핵무기도 안 만들테고../ 국방의 의무란 것도, 군대훈련소 같은 데도 없을테고/ 그래서/ 어머니들은 자식을 전쟁으로 잃지 않아도 될테고/ 젊은이들은/ 꽃을 사랑하고..연인을 사랑하고..자연을 사랑하고..무지개를 사랑하고../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

 

 

 

 

각 나라에 애국자만 없다면 전쟁도 없을 것 아니냐는 동화 같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사랑을 꿈꾸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는 종교를 가진 사람들도 이런 사랑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신의 사랑은 편애하지 않는 사랑이기에 모두가 서로 사랑하면 살기 좋은 세상이 온다고 하면서 서로 사랑하자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종교 간에 대화도 하고, 인종간의 차별도 없애고, 가진 자는 못 가진 자들을 위하여 좀 더 배려하면서 살면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고 합니다.

 

 

 

 

비록 동화 같은 이야기이지만 이런 생각이 좋지 않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상을 피력하고 행동합니다. 생명 운동하는 사람들도 있고 환경 운동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알아주고 존경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인간의 생각들조차 공중권세 잡은 자 아래서 이 세상 풍속을 따르는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받고 서로 사랑하는 자들이 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그 사랑 안에 거하고 그 사랑을 받은 자들끼리 서로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세상이 그런 사랑을 알아주고 칭찬하고 본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워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그들을 선택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선택적인 사랑을 받은 자들을 세상이 미워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세상이 미워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죽으셨는지를 모르고서 인간들이 서로서로 사랑한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죄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사망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끼리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그 안에서 생명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려는 제자가 자기 아버지의 장사를 치르고 따르겠다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는 죽은 자들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을 죽은 자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은 자가 몸부림치면서 쏟아놓은 사랑이라는 것이 생명의 향기입니까? 사망의 향기입니까? 참된 생명으로 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사망의 향기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인간들에게 속한 것이 아닙니다.

 

 

 

 

4:7-8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제가 지금까지 인간들의 사랑이 얼마나 이기적인 발로에서 나오는 것인가를 말씀드린 이유는 성경에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고 하는 말씀과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말씀을 보고서는 자기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사랑이라는 것을 가지고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아닌 이기적인 자기 사랑을 상정해놓고서는 자기가 원하는 것이 주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해 놓고서는 왜 나에게 이런 어려움을 주는가 하는 불평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께 속한 사랑을 받은 자만이 같은 사랑을 받은 형제를 사랑하게 되고, 이렇게 사랑하게 되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로 나야 하는 것입니다. 즉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율법 선생이지만 예수님의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을 못 알아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일서의 사랑의 문제도 하나님께로 나지 않고서는 그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모르고서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사실 엉터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말하여도 그 사랑이 과연 하나님께 속한 사랑인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8-9절을 봅니다. 8절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런 하나님이 사랑이 이렇게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 나타난 사랑이란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를 살리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오직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하는 하나님의 사랑, 또는 신의 사랑이라는 것은 우리의 이기적인 욕심일 뿐이며 그런 사랑이 사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결론이 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여기 있다는 것은 먼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전제가 됩니다. 사랑하기는커녕 하나님의 사랑을 발로 밟아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주시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하나도 주시지 않으시고 사람들이 미련하다고 여기고 어리석다고 여기고 침 뱉고 돌아서버린 십자가를 내 밀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흉측스러운 물건입니까? 십자가를 들이대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언제 원한 적이 있습니까? 황금으로 꾸민 마차에 백마 탄 왕자가 데려가는 그런 사랑을 꿈꾸어왔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분의 사랑을 원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랑은 사람으로서 상상할 수도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시중들던 천사들도 몰랐던 사랑입니다. 베드로전서 1:3-12절을 봅니다. “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한 그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자기 백성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 10절에서는 화목제라고 합니다. 화목제는 출애굽기 20장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언약이 체결되고 나서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어기게 되면 죄를 범한 것이기에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범하면 먼저 속죄제를 드리고 나서 화목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가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짐승의 제사로는 온전한 속죄가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제사는 흠이 있는 인간이 드리는 것이며 제사장도 흠이 있는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편에서 마련한 화목제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이 화목제물이 주어지지 않으면 인간은 어떤 상태에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에 있습니다. 죄와 사망아래 있습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무엇이 과연 사랑입니까? 지금 사형수로 죽어가는 사람에게 무엇이 가장 큰 사랑인 것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구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란 사형수에게 멋 잇는 옷을 입히고, 맛있는 음식을 먹이고, 세상의 명예를 주고, 세상의 영광을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남들보다 더 낫게 채워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여겼습니다. 남들보다 나은 정도는 아니라도 남들만큼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고 여기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도 들어주시지 않으시고 함께 죽자는 십자가만 들이대시면서 그것이 내가 너를 사랑하여 보낸 화목제물이라고 하시니 이것을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정리가 되지 않으면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여도 자기 상상의 하나님일 뿐입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어려움이 오고 힘든 상황이 되면 원망밖에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면서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주시고서는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하나님께로 난 자가 아니면 결단코 알 수가 없는 사랑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로 하나님의 사랑을 측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신 그 사랑 안에는 도대체 무엇이 들어있는 것입니까?

 

 

 

 

골로새서 2:1-5절입니다. “봉독”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기 원한다고 합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늘의 신령한 복이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은 같은 사랑을 받은 사람들끼리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님께 속하였듯이 이런 사랑을 받은 자도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11-13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같이 사랑하셨기에 이 사랑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한 몸이기에 서로 돌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이 나타날 때에 아무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였지만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도 우리에게 맡겨두시는 것이 아닙니다. 13절에서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는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습니다.
 
 

 


요한1서 4:14-21 두려움 없는 사랑 2007. 8. 22

 

14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거 하노니 15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17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룬 것은 우리로 심판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찌니라

 

 

 

 

15절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고 그 사람도 하나님 안에 거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시 공간 안에서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이런 문제를 우리의 지식이나 이론으로 풀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은 영적으로만 분별이 되는 것입니다. 그 영적이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13절에서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16-20절을 봅니다. “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1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보혜사 성령을 보내심으로 이렇게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고 또 증거 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들임을 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심으로 사도들의 증거를 알게 되고 또한 믿게 되는 것입니다. 왜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함께 가야 하는가 하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들의 증거와 상관없이 내가 상상하는 바를 믿는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증거를 알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임하여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을 기억도 나게 하시고 그 뜻을 알게도 하시며 믿게도 하신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것입니다. 이것을 시인하는 자는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이 나오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에서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을 17절에서 사랑이 온전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하게 이루어진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거하시고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 거하시는 그 온전한 사랑에 우리를 넣어주신 것입니다. 어떻게 그 사랑 안에 넣어주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홀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심으로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게 됨으로 온전한 사랑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이 오심으로 알고 믿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순전히 주님께서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내셨고 그 사랑 안에 우리가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17절 뒷부분은 봅니다.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얻게 하신다고 합니다. 무엇 때문에 심판 날에 담대함을 얻는 것입니까? 온전한 사랑 때문에 담대함을 얻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주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도 세상에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이 되셨습니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 그 안에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떠한 일을 당하여도 주님의 온전한 사랑에 이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두려워하는 이유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길까봐서 두렵습니다. 또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할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더 궁극적으로는 죽음도 두렵고, 죽음 이후의 심판도 두려운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이 최초로 나타나는 곳은 역시 에덴동산에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기 전에는 전혀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에덴동산의 환경은 해로운 곤충이나 사나운 짐승이나 독초들의 위협조차 전혀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 먹은 범죄 후에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 이 두려움을 히브리서에서 봅니다.

 

 

 

 

히브리서 2:5-18절을 봅니다. “봉독” 하나님께서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복종하게 하십니다. 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셨지만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고 만물이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지금은 만물이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합니다만 이미 묵시세계에서는 이루어진 사실입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은 성령이 임한 자만이 믿게 됩니다. 이렇게 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죽음을 맛보셨습니다. 만물의 원인이 되시는 주님께서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주님을 고난으로 온전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 고난은 자녀들이 혈육에 속하였기에 같은 모양으로 오셔서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일생동안 죽음의 종노릇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죽으면 안 돼! 나는 실패하면 안 돼! 우리 남편은 성공해야 돼! 이미 남편에 대한 기대는 사라졌다면 우리 자식만은 성공해야 돼! 이것이 다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동안 종노릇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런 자들을 예수님이 대신 고난 받으시므로 구원하시고 충성된 대 제사장이 되셔서 백성의 죄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또한 고난 받으시고 시험을 당하셨기에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디에 머물러 있어야 두려움 없이 담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나의 능력이 아닙니다. 나의 의도 아닙니다. 나의 재산이 나를 지켜주지 못합니다. 나의 이력서가 나를 안전하게 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 피 안에서, 그 저주 받으심 아래서 다시는 심판과 저주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이 땅에서 여러 가지 환난을 당하나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기에 어떤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담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제일 두려웠던 것은 지옥이었습니다. 죄 지으면 지옥에 간다는 말이 제일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교회를 다녔지만 그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죄를 스스로 이길 능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노력하는 만큼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착하다는 소리를 들을지 몰라도 마음속으로도 짓는 죄도 같은 죄라는 설교를 듣고 자랐으니 날마다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니 온갖 고민과 타협이 다 나오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지금 생각해보니 십자가의 대속의 능력을 너무 몰랐던 것이라고 봅니다.

 

 

 

 

다시 16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까? 이미 9-10절에서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의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만 사랑했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부르고 예수님을 불러도 그저 내 지옥 안가고 천국 가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 사랑입니다. 주님의 사랑 앞에서 자기 사랑은 부인되어 지는 것입니다. 나는 나 밖에 모르는 인간이었구나! 이런 죄로 인하여 주님께서 대신 죽으시는 길 외에는 다른 사랑의 길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것 까지 몽땅 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사랑입니다.

 

 

 

 

18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랑 안에서는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랑이란 내가 무엇을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피로 값을 주고 사신 자기 백성들을 끝까지 온전하게 구원하시는 것은 자기 아들의 피의 공로를 헛되게 하시지 않으시는 아버지의 아들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사랑이 최종목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사랑하시니 자기 아들의 피를 보고서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랑 안에서 더 이상 두려움이 없습니다. 때로 두려워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직 그 사랑을 알지 못하여 그럴 수는 있을 것입니다. 마치 유월절 밤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서도 두려워한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린 양의 피를 바르지 않은 애굽의 옆 동네에서 곡소리가 들려올 때에 비록 어린 양의 피를 발랐지만 자기 집에도 죽음의 천사가 들어오지 않을까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죽음의 천사가 물러갔을 때에 그들이 무엇을 믿었을까요? 어린 양의 피의 효력을 알고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 자기 아들의 피로 인한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좇습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21:8절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 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새 하늘과 새 땅에 참예하지 못한 자는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는데 이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이 둘째 사망에 들어가는 첫 번째 목록이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다음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지옥에 가는 자들을 흉악한 자들이라고 여깁니다. 물론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 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 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이 다 불과 유황 불 못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죄들은 우리도 다 행하는 죄들입니다. 마음의 동기를 행위와 같이 보시는 주님 앞에 우리는 얼마나 흉악합니까? 남을 미워하는 것이 살인인데 얼마나 많이 살인하였습니까? 그럴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음으로 다 용서를 받습니다.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사함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는 자들은 근원적인 두려움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던 사람들입니다. 어려서부터 온갖 두려움에 시달려 왔습니다. 밤중에 화장실 가는 것도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그 두려움이 여러 가지로 바뀌는 것입니다. 친구들에게 따돌림 받을까 두렵고, 시험에 떨어질까 두렵고,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까 두렵고, 이유 없이 두려움이 몰려오고, 그래서 종교를 가져 보기도 하지만 두려움을 떨쳐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사랑, 그 십자가의 피 안에서만 더 이상의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 안에서는 자신이 죽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아는 자리입니다. 자기 죄가 무엇인지를 아는 자리입니다. 자기의 죄로 인하여 왜 예수님이 죽으셨는지를 아는 자리에서 더 이상의 두려움은 없는 것입니다. 아직도 사는 일에 두려움이 있다면 하나님 안에 나타난 사랑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면 알수록 두려움이 사라질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알아가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랑을 알아가는 길은 19-21절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에 그렇게 됩니다. 연못 한 가운데 돌멩이를 던지면 그 물결이 끝까지 밀려갑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온 사랑이 우리를 밀치면 반응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이 말씀 앞에 우리는 또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도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주님의 온전한 사랑 안에 다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다는, 같은 고백을 하는 형제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요한1서 5:1-5 세상을 이기는 믿음 2007. 8. 29

 

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3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4절 말씀에 하나님께로 난 자는 세상을 이긴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긴 이김은 우리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세상이 무엇이며 이 세상에서 이긴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곳을 세상이라고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면서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식으로 봅니다. 세상을 더 넓게 정복하고 자기의 힘으로 다스리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세상을 이긴다는 것을 어떻게 말합니까? 전에는 빛과 소금의 삶으로 어둡고 썩어져 가는 세상을 밝히고 썩지 않게 하는 역할이라고 많이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그런 소박한 말도 듣기가 힘든 세대입니다. 요즈음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라고 말하는 내용들이 세상의 사람들과 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교회가 힘을 많이 가져서 세상의 힘들을 굴복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은 교회역사에서 무수히 나타난 모습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십자군 전쟁입니다. 온갖 인간의 욕망을 담은 전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십자가를 내세우고 거룩한 성전이라고 전쟁을 벌인 것입니다. 요즈음도 방법만 다르지 내용은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기독교의 힘의 보여주자는 식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대형집회를 통하여 숫자의 힘을 과시하려고 합니다. 우리를 건드리면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식입니다. 정당한 입법조차 기독교의 이익을 보장받기 위하여 정치적인 압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자기들의 목표가 달성되면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세상을 이겼다고 합니다. 과연 그런 것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 입니까?

 

 

 

 

이사야 31:1-3절입니다. “1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찐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 2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 말을 변치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를 치시리니 3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시편 33:16-22절입니다. “봉독” 무엇을 믿을 것인가? 말과 마병의 힘이냐? 여호와냐? 전자는 모든 인간의 본능이지만 후자는 은혜입니다.

 

 

 

 

믿음이 내용이 무엇입니까? 요한일서 5:1절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의 믿음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힘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과 병거를 원하는데 예수님은 자신조차 이 세상에서 머리 둘 곳조차 없이 사신분입니다. 그리고 그 삶의 끝은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물론 부활이 있지만 그 부활은 모든 사람에게 보이신 것이 아니라 선택된 일부에게만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사람의 결단과 결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하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난 자만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율법의 선생인 니고데모조차 거듭나야 한다는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낳으셔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14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영접하는 것은 사람으로 될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만이 예수님을 영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는 예수님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의 증거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며 두 번째로는 사랑입니다. 내신 자를 사랑하는 자는 그에게서 난 자를 또한 사랑하는 것입니다. 즉 한 아버지께로부터 난 자는 같은 형제를 사랑하는 일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 백성을 낳으시는 것입니까? 천지를 창조하실 때는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범죄 한 인간을 다시 태어나게 하시는 일에는 하나님 자신이 피를 흘리셔야 하셨습니다. 이 피 흘림의 사랑은 받은 자는 그 피 흘린 분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같은 피 뿌림을 입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형제사랑이 나오면 그 사람도 하나님께로 난 자입니다.

 

 

 

 

2절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은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구약이나 신약이나 같은 이야기 아닙니까? 모든 구약 성경의 요약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인데 하나님의 자녀 사랑의 증거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켜야 믿음이 증명된다면 그것은 같은 내용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계명이 무엇임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계명이라고 하니 또 다시 율법이 조문으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3:23절입니다. 그의 계명은 무엇입니까? 믿음과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사랑인데 믿음이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산의 고통, 십자가의 고통을 통하여 낳으셨기에 믿음이 나오는 것이라면 사랑 또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자연스러운 열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사랑은 율법의 조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낳으신 결과물로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사랑이라는 열매는 우리가 맺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를 점검하는 차원에서 믿음과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과 사랑이 또다시 무거운 짐이 되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 계명이란 믿음과 사랑인데 이 믿음과 사랑을 우리가 지켜내어야 할 율법적인 계명으로 대치시키면 또다시 무거운 짐이 됩니다. 무거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한 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계명과 요한일서에서 말하는 계명과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 율법의 계명이란 사람을 무겁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계명을 지키지 못하면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여호수아 24:19-21절입니다. “봉독” 오늘 새벽기도회 본문이었습니다. 요단강 건넘과 여리고 성의 무너짐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 구원을 목격한 자들에게 마지막 고별 설교를 하면서 백성들에게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자기들의 정녕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은 모세에게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서 너희가 하나님의 법을 제대로 순종하지 아니할 것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사후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가나안 땅에서 여호수아의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이유는 이제 여호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살면 됩니다. 그러나 막상 그들의 삶은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 산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던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것입니다. 그 마음대로 살던 시대가 사사시대입니다. 사사시대 이후 왕들이 다스리던 시대는 어떠하였습니까? 선한 왕이 다스리면 조금 형편이 나아지다가도 다시 악한 왕이 다스리면 나라는 우상숭배로 가득하였습니다. 그래서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가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하였지만 그들은 계명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탄식과 한숨 속에서 세월을 보내던 유대인들이 다시 율법을 지키자고 나온 운동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분리하면서 자기들은 율법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율법지킴은 자기들의 의로 전환이 되고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무거운 멍에를 지운 것입니다. 율법을 알지도 지키지도 못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들이 얼마나 더하였겠습니까?

 

 

 

 

이 때 예수님이 오셔서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11:28-30절입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주신 멍에는 쉽고 가볍습니다. 그 멍에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지면 수고하고 무거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마음이 쉼을 얻습니다. 십자가를 질수록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믿음과 사랑이 십자가를 통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5:5-11절입니다. “봉독” 아주 중요한 사도들의 회의입니다.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바리새인들의 주장에 대한 대책회의 였습니다. 그런데 결론이 어떻게 나옵니까? 베드로가 말하기를 “10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11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은혜이기에 짐이 가벼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기에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믿음으로 세상의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고, 의를 행하기도 하고, 약속을 받기도 하고,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고, 연약한 가운데 강하게 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과 결박과 옥에 갇히고 돌에 맞기도 하고 궁핍과 학대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앞부분의 내용만 좋아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가까이 갈수록 어떤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까? 후자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런 믿음의 모습을 한마디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갈라디아서 6:14절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3절에는 육체를 자랑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자기들의 행위를, 자기들의 믿음과 사랑을 자랑합니다. 그런 것은 다 육체의 모양을 내려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바울을 십자가에 못 박고 바울은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겁고 어려운 짐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스럽고 가벼운 짐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 무거운 삶을 삽니다. 세상을 이기기는 커녕 온갖 세상의 것들에 눌려서 죽을 지경이 아닙니까? 남보다 뛰어나지는 못하여도 남 하는 만큼이라도 하려고 하니 얼마나 무거운 짐들을 지고 사는지 날마다 무거운 짐을 지고 견디다 못해 쓰러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 믿음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4절을 봅니다. 대저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깁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는 세상을 이긴 이김을 믿습니다. 여기서 ‘이긴’ 이라는 말씀은 이미 과거에 이겼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이기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이 세상을 이깁니다.

 

 

 

 

5절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겠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는 세상을 이깁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에 주눅 들어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이 세상을 나그네와 외국인처럼 살았습니다. 나그네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짐이 가벼운 것입니다.

 


 
요한1서 5:6-12 하나님의 증거 2007. 9. 5

 

6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7 증거 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8 증거 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9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찐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 하신 것이니라 10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관하여 증거 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11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하나님께로 난 자는 세상을 이긴다고 합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예수님에게 있습니다. 요한복음 16:33절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그런데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세상의 세력을 더 많이 확보하여 힘을 가짐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서 환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신 십자가의 승리이며 그 승리를 오늘도 자기 백성들에게 분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주님께서 주셔야만 일어나는 일이지 나의 피와 땀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다 자신의 피와 땀을 주장하면서 살아갑니다. 자기 자신의 정직한 노동으로 생긴 수입을 정당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땀 흘린 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자기 정당함의 주장조차 자기 의라는 죄가 된다고 증거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들의 노동의 가치, 자기들의 행위의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런 것들을 모아서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입니까? 자기 영광입니다.

 

 

 

 

요한복음 5:44절입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자기들의 영광을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영광이 나타나려면 자기들의 행위가 들어가야 합니다. 자기들의 공로인 피와 땀이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의 피와 땀을 더러운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율법에서 보면 사람에게서 나오는 분비물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거룩한 제사장이 입는 옷조차 땀을 흘리는 양털로 속옷을 만들어 입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땀이 요구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증거는 한 곳으로만 집중이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물과 피로 임하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로 난 자만이 가능하다는 말씀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다는 것에 대하여 오늘은 더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는데 그 내용이 6절에서 물과 피로 임하셨다고 합니다. 물로만이 아니라 피로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선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온전한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난 후에 창으로 그 옆구리를 찌르매 물과 피가 나왔다고 요한복음 19:34절에서 증언합니다. 고대의 성경주석가들이 이렇게 보았습니다.

 

 

 

 

그러나 물과 피로 임하셨다는 것을 그렇게만 보는 것이 아니라 물세례와 피 흘리심의 십자가 사건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형체로 임하시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시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4복음에서 다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물로 임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죄가 없으신 분이시면서 죄인들이 받아야 하는 물세례를 받으심으로 죄인들과 연합되신 것입니다. 그 죄인들의 죄를 사하시기 위하여 또한 저주의 십자가를 지심으로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물과 피로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과 피가 인격화 됩니다. 8절을 보시면 증거 하는 이가 셋인데 물과 피와 성령이라고 합니다. 성령이 증거 하신다는 말씀은 이해가 됩니다만 어떻게 물이 증거하고 피가 증거 하는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물과 피가 증거 한다고 하는 것은 물과 피를 흘리신 예수님이 물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세례요한이 증거 하였습니다. 물론 하늘에서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증거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죽으실 때에는 누가 증거 하였습니까? 로마의 백부장이 이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증거 하였습니다. 어떻게 피 흘려 죽어간, 저주스러운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7절에서 증거 하는 이가 셋이니 하면서 제일먼저 성령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성령과 물과 피가 증거 하는 데 이 셋이 합하여 하나라고 합니다. 이 셋이 일치하게 증거 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셔야만 예수님께서 물로 세례를 받으신 의미와 피를 흘리신 의미를 알게 되고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피 흘리신 것을 세례라고도 합니다.

 

 

 

 

마가복음 10:38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이 말씀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청탁하여 자기 두 아들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는 제안에 대하여 예수님이 대답하신 내용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마시는 잔과 받으실 세례란 십자가를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마실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피도 십자가의 세례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물세례로 죄인들과 연합되신 예수님께서 피 흘리심의 세례로 구속하신 자들과 연합되어서 죄를 속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9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거를 받을진대’ 이 말씀은 율법에서도 두 세 사람의 증인으로 증거를 확증하는 것입니다. 최소한 두 명의 증거만 있어도 유죄와 무죄를 확정지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두 명의 증인만 있으면 범죄 한 자에 대하여 사형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증인으로도 사람을 죽이고 살릴 수 있는 증거로 받아들이는데 하나님의 증거는 얼마나 더 크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성령을 보내셔서 물과 피를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인데 곧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증거란 아들에 대한 증거입니다. 아들에 대한 증거란 사람들이 죽여 버린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심으로 사람들은 죄인이 되어버렸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옳으신 분으로 증거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2:29-36절입니다. “봉독” 다윗이 미리 보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며 성령 임하심으로 증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십자가에 목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함께 한 사도들만이 아니라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며 잡아 죽였던 바울마저 복음의 내용을 이렇게 전합니다. 로마서 1:2-4절입니다.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그러므로 물과 피로 임하신 분이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가 되심은 성령이 증거 하는 것이며 이러한 증거들은 다 하나님의 증거로서 하나를 증거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증거 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증거 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증거입니다. 요한복음 5:30-47절입니다. “봉독” 예수님의 심판은 의롭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증거는 하나님이 자신을 증거 하신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이미 증거 하였지만 세례요한의 증거는 물로 증거 하였습니다. 물로 세례를 주면서 진리에 대하여 증거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증거 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역사가 바로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루신 일이 무엇입니까? 물과 피를 거치신 것입니다. 물로 세례를 받으심으로 죄인과 연합되시고 그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피 흘려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 일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들이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성경이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인 줄 모르는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식으로 말씀하자면 성령이 임하지 않고서는 결코 예수님이 물과 피로 임하신 분이심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가지고 다른 것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다른 것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전을 붙든다고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을 붙든다고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월절을 지킨다고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오히려 저주아래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런 것들은 다 그림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다시 9절을 봅니다. 사람의 증거도 받는데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큽니다. 그 하나님의 증거란 자기 아들에 대한 증거입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을 증거 하시는 것입니까? 10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그 사람 안에 증거가 있습니다. 무슨 증거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물과 피를 믿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성령으로 되는 일입니다. 나의 물과 피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물과 피가 나의 구원이 됨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적인 증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즉 하나님이 증거 하시는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법정에서 증인선서를 합니다. 국회청문회를 하여도 선서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증언은 다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위증을 하면 벌을 받는다는 선서도 하지만 그러나 얼마든지 위증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증언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증거는 그 아들에 대한 증거 인데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증거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거짓의 아비는 마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증거인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은 지금 거짓의 아비인 마귀에서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신이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도록 가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다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물과 피로 임하신 것을 믿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얼마나 큰 선물입니까? 왜 그렇게 놀랍고 큰 선물이 되는 것입니까?

 

 

 

 

11-12절입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증거 하신 그 증거는 영생을 주신 것인데 그 영원한 생명이 아들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세상의 어떤 소유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부러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해골들이 끌어안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서해안에 고려청자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 청자를 끌어안고 있다고 해서 생명이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 물과 피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생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그러면 이런 증거로 어떻게 됩니까? 히브리서 10:26-29절입니다.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심판의 기준이 확증되었습니다. 모세의 법이 아닙니다. 모세의 법을 어긴 자도 두 세 증인으로 인하여 죽임 당하였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증거인 그 아들, 물과 피와 성령으로 증거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밟아 버리는 것에 대한 형벌이 얼마나 중할지 생각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요한1서 5:13-21 영생이 있음을 2007. 9. 12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21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

 

 

 

 

사도요한이 이 서신을 마무리하면서 이 편지를 쓴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3절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고 썼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요한1서를 보아오면서 적그리스도에 대하여서도 살펴보았습니다. 적그리스도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우리의 온전한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을 부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을 확증하기 위하여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결론부분도 이와 비슷한 말씀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요한복음 20:30-31절입니다.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행하심이 더 많지만 오직 이것을 기록한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증거란 지난주에 보았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인데 이 영원한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다는 말씀을 11-12절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천하 인간에 다른 이름으로 구원 얻을 이름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아들에게만 생명이 있고 그 하나님의 아들만이 이 땅에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봅니다.

 

 

 

 

요한복음 5:21-23절입니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심판도 생명 주시는 것도 아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아들을 믿는 자는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이 생명이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것은 썩는 양식을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양식 즉 영생의 양식을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모세시대 때 만나를 먹은 자들도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늘로서 내려오셔서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살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가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요한은 복음을 기록하였고 또 이 서신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오늘날 이 성경을 보면서 무엇을 발견하고 무엇을 믿으면 제대로 보게 되는 것입니까?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삶은 생명 없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주 떠나가시면 내 생명 헛되네! 그런 찬송가 가사가 있습니다. 주님이 떠나 가버리면 우리가 발버둥 치면서 산다는 모든 것이 다 헛된 것뿐입니다. 도대체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영원하다고 할 것들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생명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면서 무엇을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생명을 받은 자는 다 받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예수님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우상으로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1절을 보시겠습니다. 너희 자신을 지켜서 우상에서 멀리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이 요한 1서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님보다 우상을 좋아하기에 예수님이 생명이심을 시큰둥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오늘 오전에 어떤 사람이 상담하려고 왔습니다. 중고등학교 때 미션스쿨을 다니면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였는데 교회에서 목사와 장로가 공동의회 때에 싸우는 것을 보고 회의를 느껴서 교회를 다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때 교회 다닐 때에는 교회에 열심을 내는 것만 가르쳤지 믿는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는 그런 말도 듣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남편과 결혼을 하고서 사는데 계속적인 환난이 겹치면서 다시 교회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남편은 교회 나가려면 이혼하고서 가라고 할 정도로 강경합니다. 그래서 몰래 나가기도 하고 구역예배도 드리고 했는데 구역장이 그러더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런 환난을 당하는 것이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하여 그런 것이니 목숨을 걸고서 예배를 드리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자기도 그런 경험을 하였지만 믿음으로 이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말을 들으라고 하더랍니다. 심지어 목사의 말을 불순종하면 아무런 일도 없는데 자기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자들이 감옥에도 가고 사고도 나는 것을 보았다고 하니 두렵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시간을 넘게 말씀을 가지고 교제를 하였습니다. 무엇이 믿음의 내용이며 무엇이 우상인지를 말씀을 찾아가면서 보았는데 너무나 순순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살과 피를 주셨는데 그것을 우리가 얼마나 무시하면서 사는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들도 오직 예수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가 다른 예수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면 모든 것이 형통하여 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8장을 찾아서 함께 보았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 무엇인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능력이 어떻게 나타나는 것입니까? 환난을 당하여도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도, 종일 주님을 위하여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을 지라도, 이 모든 일에 우리는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성도가 이러한 일을 다 당하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는 것이 복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환난과 핍박을 받는 것이 저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는 것이 저주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시 본문 13절을 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 이 편지를 쓴 것은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한다고 합니다. 영생이 있는 자의 삶은 어떤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는 것이 영생의 복임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영생이 있는 사람들은 담대합니다. 세상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 상담한 그 사람도 두려운 것이 세상의 환난이었습니다. 지금도 환난을 당한다고 생각하는데 이보다 더한 환난이 오면 어떻게 하느냐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예배를 잘 드려서 이 환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두려움을 이기는 길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세상을 이기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도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란 세상에서 볼 때에 죽음의 형틀입니다. 그 죽음의 모습이 사실은 생명의 모습이고 영생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를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환난과 핍박이 없는 것을 복으로 여기고 환난과 핍박을 저주로 보는 시각이 예수를 믿는 자들 안에서 있다는 것은 이들 역시 예수님을 모르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함이 무엇입니까?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그의 뜻대로 구하는 것이지 나의 뜻대로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뜻대로 우리가 무엇을 구하면 그 구하는 바를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구한 예수님의 기도의 결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아버지의 뜻대로 구하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담대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편안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을 받기에 담대해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대로 기도하여 담대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런 아버지의 뜻대로 기도하는 예가 무엇입니까? 16절입니다.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죄도 있으니 여기에 대하여 구하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난해한 구절입니다. 모든 범죄가 다 죄이며 죄의 삯은 사망인데 어떻게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고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느냐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 서신 전체를 보면 사망에 이르는 죄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생명이 있는 자들이 무엇을 구하여야 하는지 한 예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위하여 무엇을 구하였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서 구원하여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에서 평안하고 안전하게 살기를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 살고 있던 롯도 그 마음이 상하였습니다(벧후2:6-8). 그런데도 그곳에서 살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면 죽을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멸망의 성에서 롯을 구하여 내신 것입니다. 이런 기도가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물론 이런 기도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기도하시고 성령님께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그 기도의 결과가 성도에게 미치게 되면 그 생명을 얻은 자도 담대하게 주의 뜻대로 기도하는 것이 바로 세상에서 구원을 위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18-20절입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죄는 하나님께로 난 자는 지을 수가 없는 죄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믿는다고 하다가도 예수님을 부인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로 난 자가 아니라고 보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로 난 자라면 예수님을 부인하고서도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난 자라면 예수님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이 지키시기에 악한 자가 손도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두 영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속한 영역과 세상에 속한 영역입니다. 세상에 속하였다는 것은 악한 자에게 속하였기에 이들은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전에는 다 그런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을 믿는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더 귀하신 주님으로 믿는다면, 세상이 다 망하여도 예수님으로 만족한다면, 그런 믿음이란 하나님께로 난 자만이 가지는 믿음이며 그런 믿음을 지키시는 분도 예수님이시기에 담대한 것입니다. 이런 지각도 누가 주시는 것입니까? 20절에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이런 지각을 주신 것입니다. 그 지각을 주신 결과가 참된 자가 누구신지 알게 됩니다. 그 참된 자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하나님이시며 영생입니다. 이것을 알고 믿는 것이 바로 영생입니다(요17:3). 이 진리에서 떠나는 것이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이 영생의 풍성함을 더욱더 맛보아 가기를 소원합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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