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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베드로후서 강해

공 상희 2009. 5. 6. 12:57

 

 

 

 

 

 

 

베드로후서 강해

 

 

 

창원 늘푸른교회 이장우 목사

 

 

 

 

 

 

 

베드로후서 1:1-3 보배로운 믿음 2006. 7. 5

 

1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오늘 말씀에 보배로운 믿음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믿음이 보배롭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면서 온 몸으로 느끼는 보배는 어떤 것들입니까? 금이나 은을 보배로 여깁니다. 그런 것을 살 수 있는 돈을 보배로 여깁니다. 그런 돈을 벌수 있는 능력 있는 인간이 보배로운 인간입니다. 그래서 가정이나 회사나 교회나 간에 돈을 잘 벌어올 수 있는 사람이 보배로운 인간 대접을 받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현실을 가짜 현실이라고 합니다. 마귀에게 속아서 가짜 보물을 진짜 보물인 것처럼 여기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보물이라는 것을 믿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보물이라는 것을 믿고 사는 것이 우리의 어렸을 적부터의 습관인 것입니다. 놀이나 교육이나 관습이 모두 다 이 세상의 보물을 차지하는 것이 복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종이 딱지를 가지고 놀았습니다. 문방구에서 파는 켄트지 정도의 크기에 온갖 그림과 기호들이 들어있습니다. 별의 수자가 많으면 이기는 것인데 그 중에서 가장 높은 것은 보물입니다. 보물 상자가 그려져 있는 딱지는 어떤 딱지와 싸워도 이기는 것입니다. 만약 같은 보물이 나오면 비기는 것이기에 손해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보물을 많이 들고 있을수록 어떤 게임에서도 든든한 것입니다. 이런 게임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의 교육은 세상의 보물을 많이 가지는 것이 성공이며 행복이라고 배워온 것입니다.

 

 

 

 

홈페이지 게시판에 이귀선 집사님이 쓴 ‘진원이가 행복한 이유’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언니들이 용돈을 받는 것을 보고서 돈을 셈할 줄도 모르면서 자기도 용돈을 달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몇 백 원을 주고 누나들도 조금씩 보태어 누나가 준 지갑에 넣어 주었더니 그때부터 아주 당당해지고 여유가 있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자기만의 보물이 생긴 것이지요! 생각만 해도 든든하고 행복해지기까지 하는 그런 보물이 성도에게 예수 그리스도 이어야하지 않는가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보배로운 것입니까? 성경을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이 다 불에 살라져 없어진다고 합니다.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좇아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것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지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6: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무시무시한 저주 선포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곳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모든 삶의 내용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나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늘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긍정하면서 살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에 예수님을 보고 우는 여자들을 보고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네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의 심판의 말씀은 예루살렘의 파괴와 함께 세상 끝 날의 심판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일에 대하여 회개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자녀들이 예수님보다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눈물로 기도하고 있습니까? 자녀들이 공부하지 아니하는 일에 대하여 애타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는 일에 애타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솔직하게 우리의 보물이 무엇입니까?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보물로 여기고 있다면 이 말씀 앞에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참된 보배임을 아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이 세상이 다 불살라져도 없어지지 아니할 보배입니다. 천하를 주고도 살 수 없는 것이 보배로운 믿음입니다. 그러면 이 보배로운 믿음이 무엇인지 그 믿음이 어떻게 성도에게 주어지는 것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베드로후서 1:1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보냄을 받은 사도입니다. 사도들은 사도 자신들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은 자이기에 그들의 말은 자신의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임의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어떻게 증거 하였는지를 보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가 개인의 자질과 능력이 아님을 다음의 말씀에서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들에게”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은 것이지 자신의 의가 아닌 것입니다. 베드로도 유대인이기에 자신의 의가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이 금한 음식을 먹지 않고 이방인과 교제를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주님께서 어떻게 이끄셨습니까?

 

 

 

 

사도행전 10장에 보시면 주님께서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먼저 환상을 통하여 부정한 음식을 잡아먹으라는 말씀을 세 번이나 듣습니다. 자신은 어려서부터 그런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하자 주님께서 깨끗하게 한 것이니 너는 속되다고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것은 고넬료가 보낸 사람을 따라 고넬료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에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고서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방인도 우리와 똑 같이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말하면서 율법의 멍에를 매게 하지 말자고 합니다.

 

 

 

 

이방인도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다는 이 고백이 나오기까지 주님께서 사도들을 직접 이방인들에 이끄시고 복음을 전하여 구원받게 하시는 것을 목격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가 된 것도 자신이 잘나서 된 것이 아니라 은혜로 된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일하게’라고 하는 것입니다. 동일하게 의를 힘입어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도 받는 것이며 믿음도 받는 것입니다. 누가 더 의롭거나 누가 더 잘 믿는다는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동일하게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바로 보배로운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각 지역에서 믿음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환난을 당하는 자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편지가 되는 것입니다.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들은 세상의 썩어질 보배가 아니라 하늘에 간직한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더러워지지 아니하는 보배를 받은 것입니다.

 

 

 

 

이 보배로운 믿음이 무엇인지 베드로전서에서 다시 찾아봅니다. 베드로전서 1:18-19절입니다.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그리스도의 피가 보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보배입니다. 그로부터 주어진 믿음과 소망이 보배입니다.

 

 

 

 

베드로전서 2:4-5절입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사람에게는 싫어버린 바 된 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들은 세상에서 썩어지고 없어지고 불에 살라질 것들을 보배로 여기고 있었기에 예수님이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에게는 보배로운 돌이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침돌입니다.

 

 

 

 

베드로전서2:6-8절입니다. “6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세상이 싫다고 버린 돌을 보배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세상에서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그들이 지혜로운 자들이며 복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런 예수님을 우리의 힘으로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도 여전히 얼굴 돌리고 싶은 예수님이 아닙니까? 이런 예수님이 이미 이사야 53장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세상의 도깨비 방망이처럼 주문 외우고 두드리기만 하면 은과 금이 쏟아지는 것처럼 전하고 있고 그런 자들을 좋아라고 따라다니는 자들이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다 그렇게 미리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신앙상담 란에 서울의 어떤 분이 질문을 하였습니다. 자기 교회의 목사님의 설교가 갑갑하다고 하면서 질문을 하셨는데 자신이 성경을 목사님보다 모르는데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교만한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사도들이 무슨 복음을 전하고 있는지를 보면 헷갈릴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보배는 세상에서 버림 받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의 보배입니다. 아무도 그런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기에 창세전에 미리 예정된 자들에게 주셔서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보배로운 믿음입니다.

 

 

 

 

그러면 이런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대부분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대부분 대답은 그런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는 그 은혜에 보답하자는 식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답을 하거나 갚을 수 있는 은혜라면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빚입니다. 우리가 일한 댓가로 받을 수가 없는 것이기에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면 그런 선물을 주신 것은 갚으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1:2절입니다. 그런 선물을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그 선물이 어떻게 준비되고 어떻게 주어졌는지 알아가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것이라고 합니다. 각 지역에 흩어진 성도들이, 세상에서 버림 받은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믿는 자에게 보배가 된다는 사실을 알면 알수록 은혜와 평강이 더욱 넘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3절에서는 이렇게 증거 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며 더 많이 알아갈수록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알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 놀라운 일들이 무엇입니까?

 

 

 

 

1:3절입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입니다.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생명과 경건에 속한 것을 모두 다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자기의 영광과 덕입니다. 생명을 주셨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보배로운 믿음을 받지 못한 자는 숨쉬고 밥 먹고 세상의 영광과 권세를 누리고 세상의 복을 받아 산다고 해서 그것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죄와 허물로 죽어있었기에 더러워지고 썩어질 것들만 좋아하는 우리를, 마치 시궁창에 온갖 파리가 들끓듯이, 썩어질 세상의 보물이라는 것에 왕왕거리며 달려드는 우리를 부르신 것은 부르신 분의 영광과 덕인 것입니다. 그 부르신 자를 알아갈수록 그 주님의 영광과 덕을 찬송하고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신기한 능력이 우리에게 나타났기에 세상에서 버림 받은 돌을 우리는 보배로운 돌로 믿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배로운 믿음인 것입니다. 불타 없어질 세상의 모든 것들과 결코 바꿀 수 없는 보배를 받았기에 더욱 이 보배의 가치를 알아가는 남은 생애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후서 1:4-7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 2006. 7. 12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한 주간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아졌습니까? 1:2절에 보시면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을 것이라고 베드로 사도가 인사를 합니다. 누구에게 하는 것입니까? 약 2천년 전의 성도들만이 아니라 바로 오늘 믿음의 사람들에게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사람이란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믿음은 내가 믿습니다 하는 결단이 아니라 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받은 보배로운 믿음이기에 이 편지가 약 2천년 전에 쓰인 죽은 글자가 아니라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동일한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들은 3절처럼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사실을 아는 자들입니다. 보배로운 믿음 안에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다 주신 것입니다. 이는 그의 영광과 그의 덕으로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더욱 풍성하여 질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주의 결론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보배로운 믿음을 주신 것이 무엇 때문에 주어졌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4절에서 ‘이로써’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1-3절의 결론으로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것은 우리의 의가 아니라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예언하고 성취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하실 일을 미리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구약 자체에서도 그러하지만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 약속의 성취는 신약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약속이기에 신약입니다. 이 신약이란 모든 구약의 약속을 완성하심과 동시에 장차 이루어질 일조차도 이미 새 약속 속에 선취되어 있는 것입니다.

 

 

 

 

장차 이루어질 일조차 새 언약 속에 선취가 되었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을 보시면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시작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표현은 우리가 역사를 시간적인 관점에서 보기에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치 해가 떠오른다고 하는 것처럼 그렇게 약속된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보다 자신이 먼저 계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때 볼 것을 바라다가 보고 즐거워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다윗이 성령에 감동이 되어 그리스도를 주라고 하였는데 어떻게 다윗의 후손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다윗이 그렇게 된 것은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 때문에 일어난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들은 보배롭고 지극히 큰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그 약속은 혈통과 육정과 사람의 뜻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의 뜻을 따라 성령으로 인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은 변역되지 않습니다. 파기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그 신실하심으로 약속을 이루셨기에 일어나는 일인 것입니다. 이보다 더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베드로전서 1:10-12절을 봅니다.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이렇게 놀라운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은혜이지만 믿고 나서는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 책임 있는 삶을 여러 가지 방향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거듭난 것은 내 속에 영적인 능력이 내장되어 있기에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믿고 나서의 자신의 책임에 따른 상급의 차등을 말합니다. 행함이 없으면 지옥에는 가지 않겠지만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들이 다 세상에서 통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의 정욕과 통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4절을 봅니다.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무엇 때문에 주신 것입니까? 이 약속을 받은 자들로 하여금 정욕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정욕으로 인하여 썩어질 것을 피하게 하는 것과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세상의 썩어질 정욕들이 어떤 것들입니까? 사람들이 스스로 말하는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답다는 것들은 정욕적인 것들이 아닙니까? 세상에서 통하는 것들은 전혀 진실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대 따라 상황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 것이 진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30년 전만 하여도 산아제한운동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인구가 적어서 큰일이라고 합니다. 결국 세상에서 말하는 진선미란 얼마나 인간에게 이로움을 주는가가 목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누가 어느 단체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이야기를 합니까? 빌립보서 2:10-11절의 말씀입니다.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그런데 성경의 말씀을 믿는다는 교회들조차 세상의 정욕에 따른 이야기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아무리 교회에서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여도,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없는 것입니다. 요한1서 2:15-17절입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야고보서 3:13-18절입니다. “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찌니라 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세상의 지혜와 하늘의 지혜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와 야고보서의 말씀에서 정욕적인 것이 무엇인지 보았습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시기하고 질투하며 쟁투하는 것이 다 정욕적인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을 피하라고 해서 피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보배롭고 지극히 큰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 다른 말로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들은 이 세상의 정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피하여야 할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세상의 정욕들은 다 썩어질 것들임을 아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불살라져 없어질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게 되고 피하게 되는 것은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의 능력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썩어질 것을 피하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하는 것입니다. 방금 두 곳의 성경에서 정욕적이란 것은 자신의 욕심을 위하여 시기와 질투가 일어나며 세상을 사랑하는 것에서 나왔습니다. 나의 만족과 이익을 따라 선과 악을 결정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그런 자리에게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5:43-48절입니다. “봉독”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들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이지만 율법을 지키지 못한 자들을 죄인 취급하면서 세리와 창기를 경멸하고 이방인들은 짐승처럼 여긴 그들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하고 있는 수준이란 것이 이방인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란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악인과 선인에게 동일하게 햇빛과 비를 주시는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어떤 누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거나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이를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받은 자만이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약속의 능력이 썩어질 세상의 정욕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이제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베드로후서 1:5-7절입니다. “이러므로”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받았기에 세상의 썩어질 정욕을 피하고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로서 더욱 힘쓰라고 합니다. 여기서 더욱 힘쓰고 끝에는 공급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다시 전적인 우리의 책임으로서 이루어가야 할 사항이라면 앞에서 하신 말씀과 모순이 되는 것입니다. 이미 1-4절까지에서 보배로운 믿음을 주셨고,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믿음만 주시고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우애와 사랑을 빼 놓고 주셨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늘로서 온 지혜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들이 다 주어졌으니 그것을 더욱 알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에서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아지는 것입니다. 1:3절에서도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는 것은 이미 주어진 것 속에 이런 것들이 있음을 알아가라는 것입니다. 제가 종종 예화로 사용했습니다만 어렸을 때에 집안에 손님이 자주 왔지만 선물을 들고 오는 분은 드물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종합선물세트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안에는 놀라운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습니다. 어느 것을 먼저 맛보아야 할지 흥분된 마음으로 조금씩 맛보아 갔습니다. 순서와 차례는 의미 없습니다. 이미 다 받아 놓은 것이기에 하나씩 맛보아 갔습니다.

 

 

 

 

우리가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그 안에는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이미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약속 안에서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우애와 사랑을 맛볼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원해서가 아니라 이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받았기에 절제하기 싫은데도 절제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됩니다. 인내하기 싫지만 인내가 공급되는 것을 맛보게 됩니다. 형제우애와 사랑까지도 다 맛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의 영광과 덕으로 부르신 그분을 찬송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8-11 넉넉히 들어감 206. 7. 19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고3을 둔 부모는 지금 제일 중요하고 시급한 소원은 자기 자녀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넉넉한 성적으로 들어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소원만 들어준다면 무엇이나 하겠다는 마음이 들것입니다. 어느 절 앞을 지나가다 보니 대입 100일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서원을 하고 정성을 바치는 것입니다. 합격만 시켜 주신다면 자신의 힘에 부치는 일이라도 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것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장래가 우리의 서원과 맹세로 이루어질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듣고 아는데도 실제 현장에서는 서원이 나오더라는 어느 집사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건축공사 낙찰을 받아야 하는데 낙찰만 되면 무엇을 하겠다는 서원이 마음속에서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들이 다 이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11절의 말씀을 먼저 봅니다.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주시리라”는 자녀의 대학입시보다 공사를 낙찰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마음에 두고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원한 나라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이 소경입니다. 멀리보지 못하기에 지독한 근시안이어서 바로 눈앞의 것만 보고 사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다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웬 은혜인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보배로운 믿음을 받았고,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셔서 받았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우리를 부르신 것이 부르신 분의 영광과 덕으로 되었다는 사실을 부르신 분을 알아갈수록 더욱 분명하여 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이 주어졌기에 그 약속으로 인하여 우리가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한 것입니다. 그 결과 믿음과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 우애와 사랑의 공급을 받아서 맛보게 되고 더욱 힘써 이런 것이 공급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난주까지 살펴본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봅니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하다고 합니다. 바로 앞에서 말씀한 것들이 흡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하여 이런 열매가 풍성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기를 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갈수록 이러한 열매들이 더욱 풍성하고 흡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은 지식으로만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온 몸으로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를 알아갈수록 은혜와 평강은 넘치게 되며,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맛본 사람은 게으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2-3절에서도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는 것인데 이것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는 것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기에 더욱더 신령한 젖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63편에서는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낫다고 합니다. 이 시편의 머리말에 보면 다윗이 유대 광야에 있을 때에 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울의 추격을 받아 도망 다니는 중에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낫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로 간절히 사모하는가 하면 물이 없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자신의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자신의 육체가 주를 갈망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의 인자를 맛보았다면 그 무엇보다도 주의 인자하심을 갈망하게 됩니다. 내 앞의 문제가 발등에 떨어진 불같이 급하다고 하여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감으로 믿음과 사랑의 열매가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 안에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가 들어있습니다. 이런 열매가 우리에게 풍성하지 못하다는 것은 우리 주 예수를 알아가는 일에 게으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난주 오후에 잠언서 6장을 보았습니다. 게으른 자는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고 하게 되는데 그러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온다는 말씀을 보면서 단지 세상에서 게으른 것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게을러서 영적인 빈궁함이 온다는 것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아모스 선지자는 말하였습니다.

 

 

 

 

지금 장마로 전국에 물난리가 났는데 이 많은 물속에서 정작 마실 물이 없어서 생수를 공급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정욕을 따라 썩어진 것을 구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것은 홍수와 같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주의 말씀에는 기근이 들어있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지금도 급하게 구하고 찾고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입니까? 세상의 정욕을 따라 썩어질 것입니까?

 

 

 

 

9절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열매들이 없다는 것은 소경이라고 합니다. 원시치 못한다고 합니다. 멀리보지 못하고 지극히 근시안으로 눈앞의 것만 본다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2장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2:3절에 보시면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는다고 합니다. 세상의 정욕을 따라 살도록 부추기는 자들입니다. 눈앞의 이익에 눈이 먼 자들입니다.

 

 

 

 

거짓 선생들의 유혹을 받아 멀리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무엇을 잊어버린 자들입니까? 우리의 옛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 깨끗함을 입었다는 사실을 어느새 잊어버리고 다시 세상의 썩어질 것에 마음이 빼앗겨 있기에 멀리보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깨끗하게 되었음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기쁜 소식으로 들리고 있습니까? 이것이 없기에 우리에게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거짓 선생들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잠시 언급만 할 뿐이지 그것은 속히 잊어야 할 것으로 말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스스로 영광스러운 일들을 만들어내자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부추기는 것들이 세상의 썩어질 것들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쏟아지는 설교를 들어보시면 그 결론이 거의 다 세상의 영광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천년 전의 성도나 오늘날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나 간에 동일한 유혹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잊어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말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지만 그 내용이 성경이 말씀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심판과 멸망에 관한 이야기는 되도록 피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해서 하지 않는 것입니다. 혹시 한다고 하더라도 심판받을 세상이기에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해서 하늘의 복을 쌓자고 합니다. 그것도 또 다른 욕심인 것입니다. 이러한 유혹에서 피하도록 바울사도는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0절을 봅니다.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합니다. 부르심과 택하심을 힘써 굳게 하면 언제든지 실족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시험과 유혹에서 실족하지 않는 길이 우리를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합니다. 지금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성도를 부르시고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로마서 8:29-30절입니다.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가 주님을 부르거나 주님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불러주신 것입니다. 불러주시되 아무나 불러주신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전에 미리 정하신 자를 즉 택하신 자를 불러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지금 거짓 선생들의 유혹에 흔들리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확실하고 견고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르심과 택하심이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부르심과 택하심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부르심과 택하심만이 아니라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까지 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내셨는데 이것을 잊어버리면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6-19절입니다.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17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함이로라 18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우리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과실을 많이 맺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없는 것은 베드로후서에서는 원시치 못하여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근시안으로 눈앞의 이익만 바라보게 되니 주님이 원하시는 생명의 열매가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가 세상에서 미움을 받습니까?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지 않기에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가 미움을 받는 현장은 어디라고 보십니까? 세상이나 교회에서나 간에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는 이야기를 하면 미움을 받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어서 세상의 복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미움을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을 받고 간증하라고 수많은 곳에서 초청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데 세상에서 미움과 핍박을 받는다고 하면 교회 안에서도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지금만이 아니라 베드로 사도가 있는 당시에도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힘써서 주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과 택하심만이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을 넉넉하게 이기게 하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8:31-39절을 봅니다. “봉독” 부르심과 택하심을 이루시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주신 분이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는 그 사랑에서, 그 어떤 세상의 환난과 곤고와 핍박과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에서도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그 어떤 피조물로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잇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힘이 됩니까? 얼마나 든든합니까? 현재의 일만이 아니라 그 어떤 장래의 일도 부르심과 택하심을 무효케 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힘써 굳게 하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르심과 택하심은 주님께서 하신 것이고 굳게 하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부르심과 택하심만이 우리가 넉넉하게 천국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확정하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11절에 보시면 이같이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넉넉하게 들어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보탤 것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과 택하심만으로 되는 이것을 믿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시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넉넉하게 들어갈 것입니다. 이런 자는 세상의 넓은 문에 들어가지 못하였다고 안달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열광하는 넓은 문은 멸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주의 부르심과 택하심만을 붙드는 자는 좁은 문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생명으로 가는 길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베드로후서 1:12-18 항상 생각할 것 2006. 7. 26

 

12 ○이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으나 내가 항상 너희로 생각하게 하려 하노라 13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14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이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15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베드로 사도가 장막을 벗을 때가 임박한 줄을 압니다. 장막을 벗어난다는 것은 우리말로 죽는다는 것입니다. 정확한 날짜는 모르지만 죽을 때가 다 되었다는 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알려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란 죽는 것이 아니기에 장막을 벗는다고 말하거나 잔다고 말하거나 안식에 들어간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읽는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의 마지막 유언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가 죽기 직전에 즉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성도들에게 항상 기억해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생각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떠난 후에도 이런 것이 계속 생각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생각나게 하려고 이 서신을 남긴 것입니까? 16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을 알게 한 것을 항상 생각나게 하기 위하여 남긴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이 공교하게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2장에 보면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이 있어서 주님을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자초하고 있는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생각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과 그의 능력을 생각하여야 합니까?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만이 주님의 강림과 심판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세상의 썩어질 정욕을 따라 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전부가 주님의 강림과 그의 능력을 믿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날마다 쏟아져 나오는 신문들과 방송들과 정보들이 홍수처럼 넘쳐납니다. 그런 소식 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에 대한 이야기 있습니까?

 

 

 

 

결코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 곳만은 잊지 않고 늘 생각해야 할 곳이 있습니다. 그곳을 교회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 예수의 강림을 기다려야할 교회마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주님의 능력과 재림을 얼마나 생각하면서 살 수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볼 필요도 없이 우리 자신을 보면 주님의 재림을 별로 생각하지 않고 삽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그의 강림을 혹이라도 생각할 수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께서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공급하심으로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늘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가 자신의 장막을 벗어날 때가 임박한 때에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이 이런 것이라고 사도로서 알려준 것이 베드로 전후서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12절입니다. ‘이러므로’ 즉 1절에서 11절까지의 결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섰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미 알고 진리에 선 내용이 무엇인지를 다시 확인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잊기를 잘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잘 잊고 잊어야 할 것은 잊지를 못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사파성당 사거리에 카센터가 있는데 그 곳에 글자가 나오는 간판이 있습니다. 광고만 싣기에 미안하였든지 이런 말도 하나 넣어두었습니다. ‘은혜는 돌에 새기고 상처는 물에 새겨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글이 나오게 된 것입니까? 우리가 늘 거꾸로 생각을 하고 있기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이미 이것을 알고 진리에 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1-11절의 내용입니다. 다시 반복합니다. 너무나 잘 잊기에 자꾸 반복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에게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는 더욱 믿음에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와 경건과 형제우애와 사랑이 공급되게 조치하시는 것 까지 공급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없는 것은 소경이라서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이 진리에 섰기 때문에 이것을 잊지 말고 늘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명시적으로 이것을 생각하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베드로 사도 자신이 장막에서 벗어날 때가 가까웠다는 것을 통하여 우리도 지금은 장막에 거하고 있는 것임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이 몸, 이 장막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이 몸을 그대로 가지고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새 몸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새 몸을 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시각으로 볼 때에 빨리 죽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10절을 봅니다.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2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3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베드로 사도와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장막집이 무너지면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이 하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절히 사모한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 빨리 죽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죽을 몸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생각하고 기억해서 이루어질 일이 아니기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담대하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늘 생각하고 있습니까? 생각하지 않고 살다가 이런 말씀을 보고 들으면 이 순간이나마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들음으로 나는 것이며 그 들음이란 인간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가 있어야 듣지요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내셔야 전하게 됩니다. 결국은 우리가 말씀을 듣고 믿게 되는 것은 주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로 와서 말씀을 듣는 것이 내가 결정한 행동이라고 여기다면 아직도 자신이 주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21:18-19절을 봅니다.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님의 십자가 지시기 전 까지는 자신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결과였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다시 베드로를 찾아 오시고부터는 이제 베드로는 자기의 걸음을 걸을 수가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에 의하여 움직이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국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의 죽음에 대하여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예수님처럼 바로 매달려 죽겠는가 하면서 거꾸로 매달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성경에서 베드로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곳은 오늘 이 본문입니다. 그가 죽기에 임박하여 남기고자 한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을 이야기 하면서 이것을 항상 생각나게 하려고 기록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예수님의 능력과 재림을 기억하고 생각을 하면서 주님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 주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순간에도 베드로는 남과 비교를 하고 있습니다. 20-22절입니다. “20 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21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이랬던 베드로가 성령이 임하고서 죽기 직전에 오늘 계시로 남긴 말씀에서 그런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그의 강림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알게 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그의 능력과 강림인 것입니다. 그의 능력과 강림에 대하여 사람들은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서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이 나옵니다. 베드로 후서 3장 1절부터 보시면 이 편지를 쓰는 이유가 우리의 마음을 일깨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전한 말씀을 기억나게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세상의 종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물이 처음에 지음 받은 그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지가 하나님을 말씀으로 지어진 것과 노아 홍수로 인하여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일부러 잊어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늘 속이고 있습니다. 종말을 이야기 하여도 에너지의 문제, 핵의 문제로 이야기 하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주의 능력과 강림을 말하고 믿는 사람이 눈치 없는 사람이고 세련되지 못한 광신자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16-17절을 봅니다. 그러나 이 내용, 즉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자신들이 직접 목격하였다는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주님을 뵈었던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나타났기에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짓고 여기서 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초막을 마련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너무나 좋았던 것입니다. 그때 하늘로서 음성이 들리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시면서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때 모세와 엘리야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누구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공교히 꾸며낸 말들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합니다. 그의 말씀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영광이며 그의 재림에 관한 내용입니다.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의 초림과 십자가와 부활이 다 성취가 되었습니다. 이제 사도들을 통하여 증거 된 그 십자가의 완성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이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생각하여야 하는 것은 세상의 썩어질 것들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그의 재림을 늘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베드로후서 1:19-21 등불과 샛별 2006. 8. 9

 

19 또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데 비취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20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어제 저녁 수련회 일정을 마치고 밤늦게 까지 여섯 사람이 교제를 가졌습니다. 그 이야기 중에 세상에 일어난 여러 가지 끔찍한 일들을 몇 가지 들었습니다. 듣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고 몸서리 쳐지는 이야기들이라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하지는 않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이 세상의 일들은 오늘 말씀에 비추어보면 어둡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어둡고 캄캄하고 빛이 보이지 않는지 날마다 접하는 뉴스를 보면서 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그래도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고 여기십니까? 악한 사람도 많지만 그래도 착한 사람이 많기에 이만하게 살고 있으니 그래도 살만하다고 여기십니까? 그러나 이미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으로서는 스스로 선하고 옳다는 것을 결정하여 그것을 실천한다고 하여도 하나님보시기에는 이미 선악과를 따 먹은 죄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을 그대로 영원토록 고정시켜 버리면 이곳이 바로 지옥, 땅의 옥인 것입니다. 물론 이 곳에다 꺼지지 아니하는 유황불이 더하여져야 하겠지요! 그래서 어제 저녁에 교제한 결론이 자연스럽게 이 지옥 같은 세상을 경험하게 하심으로 천국이 얼마나 좋은지를 대비시킨다는 이야기와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맺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둡고 캄캄한 이 세상에 무엇이 과연 등불이며 빛인 것입니까? 그것은 오늘 말씀 19절에서 더 확실한 예언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더 확실한 예언’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변화되신 모습을 본 것이 더 확실한 예언입니까? 아니면 그런 체험이 아니라 기록된 이 성경의 말씀이 더 확실한 예언이라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의 그런 체험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예언이 기록된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무엇을 보았다. 들었다는 말에 현혹되지 말고 기록된 말씀에 주의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보는 것도 타당한 면이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워낙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어떤 신비체험을 가지고 마치 직접 받은 계시인양 여기면서 천국과 지옥을 간증하고 신기한 이야기들을 계시처럼 말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더 확실한 예언이라는 말씀은 구약의 모든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더 확실한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16-18절을 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을 이야기 한 것은 거짓 선생들처럼 공교하게 꾸민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직접 목격한 사건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위엄을 본 것입니다.

 

 

 

 

그 변화된 모습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좋았든지 여기가 좋사오니 하면서 아예 그곳에서 살려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가족이고 배고 무엇이고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막 셋을 짓고 살려고 하였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나타난 것을 보았기에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자기들은 초막도 없이 노숙자로 있어도 좋다는 정도입니다.

 

 

 

 

이 장면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모세와 엘리야가 베드로보다 몇 년 전 사람입니까? 모세는 무려 1500년 전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베드로보다 약 900년 전 사람입니다. 이때 무슨 사진이 있었습니까? 초상화라도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척 알아본 것입니다. 이곳에서 천국을 맛본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음성이 났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신 것입니다. 이때 모세와 엘리야는 보이지 않고 예수님만 보인 것입니다.

 

 

 

 

모세든 엘리야든 예수님을 증거 한 자들인 것입니다. 율법과 선지자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 것입니다. 모든 성경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재림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공교히 꾸민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확증된 예언을 더 분명하게 된 예언에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사건조차 성경에 기록이 됨으로 계시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지 아니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더 많지만 성경에 기록한 것만이 참된 계시라는 것을 사도들이 확증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의 권위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아서 증거 한 것이 사도의 권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 어떤 누가 무엇을 보았다. 들었다고 하여도 심지어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기적을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이 있다고 하여도 그것을 계시로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번 십자가마을 수련회의 주제가 “끝을 기억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선지서를 통하여 종말과 심판에 대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부록으로 소개한 천년 왕국 운동사라는 책에서 제목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몇 가지만 보면 이런 내용입니다. 156년에 몬타누스라는 사람이 자신의 체험을 제 3의 성서라고 주장하면서 새 예루살렘이 도래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자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닙니다.

 

 

 

 

591년에는 익명의 메시아가 출현하여 마리아라는 여자 동료와 함께 각가지 병자들을 치료하고 남의 것을 약탈하여 추종자와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준 일도 있습니다. 8세기에는 사도적 청빈을 흉내 내면서 자칭 성자라고 하면서 자신의 손톱과 머리카락을 추종자들에게 나누어준 일도 있습니다. 1145년에는 에온이라는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자처하며 산자와 죽은 자의 심판주라고 공포한 것입니다. 이 외에 무려 37가지의 사례들을 소개하였는데 이런 일들은 지금도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더 확실한 예언입니까? 사도들이 증거 한 내용이 더 확실한 예언인 것입니다. 그 사도들이 증거 한 내용은 십자가 못 박히신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으로 구약이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5:39절에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 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등불이 비치지 않고 샛별이 떠오르지 아니한 상태에서 구약을 해석하고 율법을 지킨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바울입니다. 이 바울이 율법을 따라 흠이 없는 자며 율법에 대한 열심이 남보다 특심하여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인 사람입니다. 그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구약 성경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진 것입니다. 성경을 이렇게 보게 된 것은 베드로나 바울의 자격이나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 사도가 이 성경을 기록하기 까지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직접 보고 들으면서 변화산의 사건도 목격을 하였지만 그렇게 하고서도 세 번이나 예수님을 배신하고 부인하고 저주하며 돌아선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성령이 임하고서는 이제 성경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에서 보여야 그것이 더 확실한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20-21절을 봅니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을 사사로이 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카톨릭 에서는 성경 해석의 권한이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사로이 풀면 안 되기에 교황이 인정한 종교회의에서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중세에는 신부들만 성경이 있고 일반 대중은 성경이 없었습니다. 성경은 없고 믿음은 가져야 하겠기에 성경의 말씀을 준 것이 아니라 말씀의 대체물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온갖 종교적인 형식과 가운과 기구들과 스테인 글라스와 웅장한 건물들과 뾰족탑을 하늘로 솟구치게 만들어 그들에게 믿음을 주고 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났는데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된 것은 성경의 번역이었습니다. 라틴어로 되어있는 성경을 일반 대중들이 읽지는 못하였기에 마틴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을 해서 많은 사람들이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신부들이 하는 짓들이 성경과 얼마나 엉터리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성경이 보급되면서 또 어떤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보는 사람들마다 또 제각각의 해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성경의 예언이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때의 경이란 물론 구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구약의 예언들을 아무렇게나 풀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예언은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께 받아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해석하고 또 그 해석한 것을 기록한 것이 신약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15-16절을 봅니다.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2)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사도 바울의 모든 편지를 하나님께 받은 계시로 인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성경과 같이 억지로 풀다가 멸망할까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경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얼마든지 볼 수가 있습니다. 수많은 주석과 해설서와 설교집이 있습니다. 그러면 수많은 사람들이 다 제각기 해석하고 있는데 어떤 해석이 옳은 것입니까? 사사로이 풀지 말라고 한 것은 자신의 사욕을 위하여 풀지 말라고 하는 말씀도 됩니다. 성경은 결코 우리 개인이 이용하기 위한 사유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지고 내 자신 잘되기, 우리 가정, 우리 교회, 우리나라 잘되기 같은 내용으로 푸는 것이 바로 사사롭게 성경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무엇을 보아야 더 확실한 예언이 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야 합니다. 모든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고린도후서 1:20절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어디에서만 예가 됩니까? 그리스도 안에서만 예가 됩니다. 우리는 그 사실에 대하여 아멘 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면서 성경의 모든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내셨고 또 이루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바른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두운데 등불이 비치는 것과 같고 새벽별이 마음에 떠오르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즉 성경이 등불인데 이 등불인 성경을 통하여 샛별이 마음에 떠오르기 까지 이 확실한 예언에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새벽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도록 일한 사람을 등불 이라고도 합니다.

 

 

 

 

누가복음 1:67-79절입니다.
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71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72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74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75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세례요한이 출생하였을 때에 그 아버지 사가랴가 세례요한의 사역에 대하여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예언한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사역이 빛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돋는 해처럼 비취게 될 것을 구약에 예언하였고 그 예언을 이루실 분을 세례요한이 증거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35절입니다. “35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 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 하는 것이요” 요한이 잠시 등불이 되었습니다. 왜 등불이 된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기 때문에 등불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 자신은 자신이 빛이 아니요 빛을 증거 하러 왔다고 한 것입니다. 세례요한 자신이 빛이 아닌 것입니다.

 

 

 

 

요한복음 8:12절입니다.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님이 세상의 빛입니다. 세상은 온통 어두움입니다. 이 어두움 속에서 빛을 보게 되는 것은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빛을 본 것이 됩니다. 그런데 아무나 보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소경이기 때문에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주셔야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빛이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두운 밤중에 등불을 비추어서 사물을 보듯이 이 어두운 세상에서 성경이 우리의 등불이 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시라고 시편 119편 105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하여 새별별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마음에 떠오르기 까지 이 확실한 예언의 말씀에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라는 등불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라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메시아를 예언할 때에 한 별이 나타난다고 하였습니다. 민수기 24장에서 발람이 발락왕의 사주를 받아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섰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신에 사로잡혀서 이스라엘을 축복한 내용 중에 나오는 말씀이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에 동방박사를 인도한 것이 별이었습니다. 그 별빛을 따라 왔는데 그 별이 비취는 곳은 헤롯의 궁전이 아니라 베들레헴의 한 마굿간에 태어난 아기 예수님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22:16절입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 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예수님이 새별별입니다. 교회 들을 위하여 예수님의 사자를 보내서 증거 하였는데 다윗의 뿌리이며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별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새벽별이라는 것이 성경이라는 등불을 통하여 보게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세상의 다른 선이라든가 빛이라든가 옳은 것이라는 것들이 다 어두움임을 동시에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직 참된 새벽별이신 주님, 장차 재림 때에 새별별처럼 나타나실 그 주님이 지금 우리의 마음속에 떠오르게 된다면 그것이 성경의 확실한 예언을 맛보는 것입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 까지 이 성경에서 샛별이 우리 마음에 늘 떠오르도록 더욱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후서 2:1-3 임박한 멸망 2006. 8. 16

 

1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2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3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는 주인공이 죽거나 비극적으로 끝나는 이야기가 아니라 위기를 극복하고 끝끝내 승리하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요즈음은 주인공을 과감하게 죽이기까지 합니다만 그러나 아직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는 행복한 결말입니다. 지금 세계 제일의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헤리포터의 이야기 결론이 주인공이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자 수많은 세계의 독자들이 주인공을 죽이지 말라고 작가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답니다. 소설이나 텔레비전의 드라마조차 관객의 요구에 따라 결론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코 변개함이 없는 드라마는 하나님께서 연출하시는 성경이라는 드라마입니다. 성경에서 약속된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이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전 세계 인구가 다 달려들어 바꾸려고 하여도 점 하나도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세상의 끝은 행복한 결만이 아닌 심판입니다. 그것도 무시무시한 불로서의 심판인 것입니다.

 

 

 

 

왜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면 죄란 무엇입니까? 인간이 피조물의 지위를 떠나서 스스로 신이고자 한 것이 죄입니다. 이 세상을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만드셨는데 그 영광이란 하나님의 아들에게 무릎을 꿇고 그에게 입을 맞추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얼마나 죄악이 관영한지 시편 7편에 보시면, 이런 세상에서 대하여 하나님은 매일 분노하십니다. 회개치 아니하는 자들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칼을 갈고 계시며 화살을 당겨 예비하셨는데 그 화살은 불화살이며 또한 죽일 기계를 예비하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진노하시는 것입니까?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다고 합니다. 공동번역에서 14절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악한 생각 빚어서 몸속에 사악을 품었다가 속임수를 낳는 원수들아!즉 노아 홍수 전후에 인간에 대한 말씀 그대로인 것입니다.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한 것입니다. 항상 악한 생각에서 잉태되어 나온 것이 죄악을 열매들만 쏟아놓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지위를 떠난 천사들도 심판하시고 노아의 홍수와 소돔과 고모라 성을 심판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차 온 세상을 불로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심판의 말씀이 좋습니까? 아니면 희망을 주고 가능성을 이야기 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은 쏙 빼놓고 하나님의 사랑만 이야기 하는 것이 좋습니까? 우리의 호불호와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자신의 언약대로 이루어 가실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멸망이라는 말씀이 무려 세 번이나 나옵니다. 이러한 임박한 멸망이 어떻게 임하게 되는지를 살펴보고서 우리가 지금 멸망을 자초하고 있는 자리에 있지 않는지를 돌아보고자 합니다.

 

 

 

 

2:1절을 봅니다.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여기서 민간이라고 하니 일반 세상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났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바로 앞에서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된 예언의 말씀을 사사로이 풀다가 멸망한 자들을 연결시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민간이란 이스라엘 가운데서 거짓선지자들이 일어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세상은 이미 거짓말의 아비에게 장악되어 있는 곳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거짓선지들의 특징은 한마디로 심판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선지자들이 다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였습니다. 임박한 심판을 예언하면서 회개하고 돌이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선지자들을 백성들이 좋아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백성들의 마음을 충족시켜 주는 자들이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면서도 늘 평안과 희망과 성공을 이야기한 자들입니다.

 

 

 

 

특히 예레미야 선지자 같은 경우에는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하였습니다. 바벨론이 쳐들어오면 힘을 합쳐서 막아낼 생각을 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여 적을 물리쳐달라고 해야지 선지자라는 자가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니 어떻게 미움을 받지 않겠습니까? 예레미야는 매국노 취급을 당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바벨론이 쳐들어오지 못한다고 하는 예언자들, 쳐 들어왔지만 곧 물러간다는 예언을 하는 자들을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어제가 광복 61주년 이었습니다. 천안에 두 집사님 가정을 방문하면서 가까운 곳이라 독립기념관을 둘러보았습니다. 일제의 침략을 온 몸으로 항거한 독립군들의 이야기들을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일제 침략시기에 일본과 합병하는 것이 국익이라고 말하는 자들을 친일 매국노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배경이라고 가정을 하면 예레미야는 이완용과 같은 사람이 됩니다. 물론 이완용은 호의호식하고 그 후손들도 부자로 삽니다만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으로 온갖 고난을 다 당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20:7-9절입니다. “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8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하나님이 예레미야보다 강하시기에 권하시는 말씀을 전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전하였는데 말할 때마다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게 되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종일 치욕과 모욕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태어난 날이 저주 받았다면 좋았겠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혹독한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짓 선자들은 평안을 전합니다. 그들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면서 평안하다 평안하다고 합니다. 누구의 말을 듣겠습니까? 더구나 평안을 전하는 자들이 절대다수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들은 자들은 그 거짓 선지자들과 함께 심판을 받고 멸망을 받은 것입니다. 이처럼 지금도 너희 중에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은 구약에서만이 아니라 베드로 사도가 있는 그 당시에도 있었고 지금도 역시 거짓 선생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입니다.

 

 

 

 

거짓 선생들이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인다고 합니다. 이단이 확연하게 표가 나도록 나오면 분별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끌어들이면 잘 모릅니다. 더구나 사단의 일군이 의의 일군으로 위장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리가 양의 탈을 쓰고 오기에 분별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행위로 드러나는데 다른 복음, 다른 영, 다른 예수를 받게 하는 것이 이단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이단을 끌어들여서 결국은 주님을 부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게 하는 것은 주님의 공로를 무효화시키려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값을 주고 사셨는데 그 피로 인하여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는데 우리를 사신 주님을 부인하다는 것은 예수님의 공로를 무시하고 그 안에다 인간의 공로를 집어넣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인간의 공로를 집어넣음으로 그 결과에 따라 세상에서도 복을 받고 하늘에서도 상을 많이 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임박한 멸망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2절을 봅니다.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여럿이라고 하니 몇 사람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여럿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멸망으로 가는 길에 사람이 많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은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아주 많은 사람들이 거짓 선지자나 거짓 선생들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들이 따르는 것은 진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저희의 호색을 따르는 것입니다.

 

 

 

 

호색이란 다만 성적인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색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로 사용됩니다. 음악도, 소설도, 영화도, 음식도 늘 색다른 것을 좋아합니다. 같은 것은 지루하다는 것입니다. 무언가 사람의 감각을 자극할 만한 것들을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결국 거짓 선생들이 제시하는 것은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자들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는 것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주님오시는 그날까지 이러한 싸움은 계속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11절입니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왜 그대로 두라고 하는 것입니까? 이미 종말이기 때문입니다. 종말의 특징이 이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한 자들은 자기들의 탐심을 따라 호색하는 자들을 좇아가는 것입니다.

 

 

 

 

3절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나 거짓 선생들이 하는 일이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옵니다. 성경을 말하지만 교묘하게 자기들의 지은 말로 변개시키는 것입니다. 그 지어낸 말을 결국 자기들이 탐심을 충족시키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3:16절을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억지로 풀다가 멸망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억지로 푼다는 말씀이 교묘하게 푼다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20절에서는 사사로이 푸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들의 탐욕을 채워주는 해석이 나오는 것이라면 그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인 것입니다.

 

 

 

 

어떤 성경도 인간의 욕심을 채워주는 성경은 없습니다. 인간의 탐심이 곧 죄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면서 자신의 탐심이 죄임을 알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말하고 성령님을 말하면서 인간의 욕심을 채워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거짓 선생들입니다. 물론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결국 거짓 선생들이란 탐심을 이용하여 그들을 따르는 자들을 자신들의 이득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른 번역으로 보면, 그들은 탐욕을 품고 그럴듯한 말로 여러분의 호주머니를 털어갈 것이라고 합니다. 경건도 이익의 재료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온 세상에 널려있습니다. 한국 최고의 다단계 판매회사의 회장이 구속된 사건을 뉴스로 보았습니다. 왜 다단계의 문제들이 계속 나오는 것입니까? 대학생들이 다단계에 빠져서 등록금을 날리고 다른 친구들까지 끌어 들이는 것은 그들의 탐심 때문입니다. 속이는 자들이나 속는 자나 한 통속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속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진리의 도에 대하여는 속지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피 값을 주고 사신 주를 부인하게 하는 거짓 선생들이 얼마나 교묘하게 우리 안에 침입하고 있는지를 아시기 바랍니다. 거짓 평안을 약속하는 것에 대하여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영광을 준다는 것에 대하여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옛적부터 심판이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저희 멸망이 자지 않았습니다. 멸망이 쉬지 않고 계속하여 일어났습니다. 이제 최종 멸망이 임박한 시기입니다. 더욱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봅시다.

 

 

 


베드로후서 2:4-8 심판의 본보기 2006. 8. 23

 

4 하나님이 범죄 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 5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7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 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8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

 

 

 

 

말세의 특징이 무엇인지 베드로후서 3:3-5절에 보시면, 주님의 재림과 심판을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서 만물이 조상대대로 그대로 있다고 합니다. 즉 종말이나 심판이 없다는 사상이 팽배한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부터 이런 말세가 된 것입니까?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부터 시작된 인간들의 사상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을 일부러 잊어버리게 하는 것이 마귀의 전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유혹은 이 세상이 결코 망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위기는 오지만 그 위기를 기회로 삼아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도 그들은 인간들로 하여금 바벨탑을 쌓게 만든 것입니다. 하나님을 정면으로 거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늘까지 닿게 하려는 탑을 쌓아서 어떤 홍수가 오더라도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말세의 특징입니다.

 

 

 

 

어제도 아리랑 5호라는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습니다. 민과 군이 함께 만들어서 사용한다고 합니다. 상업적인 것만이 아니라 군사적인 위협도 미리 살펴서 대치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휴대폰도 인공위성을 통해야 하는 것이며, 기상예보도 다 인공위성으로 정보를 얻고 있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우주를 향하여서도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하여 개발하고 있습니다. 지구의 자원이 고갈되면 우주로 나가겠다는 것입니다.

 

 

 

 

너무 넓고 멀리 잡아서 실감이 나지 않습니까? 바로 우리의 모습을 보아도 주님의 재림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의 재림을 갈망하며 살고 있습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라고 증거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의 재림보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영원할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말세이고 노아 홍수 때에도 말세인 것입니다.

 

 

 

 

2:3절을 보시면 이런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은 지체되지 않았고 자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시대마다 계속된 하나님의 심판이 있었고 그런 심판들은 이 말세를 맞이한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본보기가 구약에서 수도 없이 많습니다. 출애굽의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을 보게 되고, 광야에서도,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수많은 심판을 보게 됩니다. 그 중에 오늘 본문은 세 가지만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4절에서 범죄 한 천사에 대한 심판입니다. 천사란 하나님의 일을 시중들기 위하여 지음 받은 영적인 피조물입니다. 이 천사들이 어떻게 범죄 하였는지 자세히는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 몇 곳을 보면 천사가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났다고 유다서 1:6절에 되어 있습니다. 범죄 한 천사를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 까지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하늘에서 쫓겨난 범죄한 천사가 갇힌 곳이 이 지상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2절에 보시면 공중 권세 잡은 자, 곧 지금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늘에서 쫓겨난 범죄 한 천사들이 이 지상으로 쫓겨나 인간들을 유혹하여 자기편으로 삼아 하나님을 거역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7-9절입니다. “7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쌔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8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하늘에서 내어 쫓긴 이 사단이 지상에서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예수님을 유혹할 때에 자기에게 절하면 세상의 영광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이 유혹이 지금도 온 세상을 미혹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영원한 영광을 이야기 합니다. 통일교나 여호와의 증인만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에서 선포되는 대부분의 메시지가 주님의 심판과 재림보다 세상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귀에서 속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노아 홍수의 심판입니다. 5절에서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는 아까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지만 죄악이 관영한 세상을 보시고 한탄하시면서 쓸어버리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은 노아는 그 당대에 의인이었습니다. 의롭게 살아서 은혜를 입은 것이 아니라 은혜를 입어서 의롭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 의롭게 산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의를 전파한 것입니다.

 

 

 

 

노아가 어떻게 의를 전파한 것입니까? 120년 동안 배를 만드는 것이 의를 전파한 것입니다. 배를 만드는데 바닷가도 아닌 곳에 배를 만들고 있으니 왜 그러느냐고 물어 보았을 것입니다. 그때 노아의 대답은 하나님은 이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여서 물로 심판을 행하실 것이라고 대답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노아의 말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런 노아를 미치광이 취급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 노아 때의 심판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4:37-3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7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38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3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예수님의 재림도 노아의 홍수 때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노아가 얼마나 외롭게 방주를 준비하였겠습니까? 방주를 만드는 것도 몇 년의 일이 아니라 120년을 만들고 있으니 사람들은 무슨 홍수가 난다는 말인가 하면서 아예 노아는 관심 밖의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똑똑하고 착한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의 가족 8명 외에는 단 한 사람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가정 수로는 단 한 가정입니다.

 

 

 

 

노아의 가정 외에는 거저 세상에서 먹고 마시며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만 관심사일 뿐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중요한 관심사는 세상에서 어떻게 재미있고 행복하게 사는가에 있지 이 세상의 심판과 멸망에 대하여서는 관심 밖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경건치 아니한 모습입니다. 결국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한 사람도 깨닫지 못한 것처럼 예수님 재림 하시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누가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깨어 기도하면서 기다리고 있습니까?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의를 전파하고 있습니까? 노아가 전한 의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죄악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전파할 의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세상에 의는 없다고 알려야 합니다. 오직 의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만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임을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루신 그 의에 대하여 누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교회를 다니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지만 여전히 관심사는 그저 세상에서 먹고 마시고 사고팔며 시집가고 장가 가는 일에만 부르고 있다면 노아의 홍수 때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사는 사람은 주님의 의를 전파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누가 관심을 가져주든지 아니든지 간에 그렇게 믿고 사는 것이 의를 전파하는 모습입니다.

 

 

 

 

셋째로 6-8절의 소돔과 고모라성의 심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셔서 재가 되게 하신 것은 후세에 경건치 아니한 자들에게 본을 삼기 위한 것입니다. 노아 홍수는 전 지구상에 다 덮친 심판입니다. 그러나 노아와 언약을 맺으실 때에 다시는 물로 심판을 하시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장차 어떻게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소돔과 고모라성이 유황불에 살라진 것으로 본보기를 삼은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은 어떤 곳입니까? 마치 에덴동산과 같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의 종들 사이에서 싸움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짐승 떼들이 많아졌기에 함께 할 수가 없어서 조카에게 먼저 갈 곳을 선택하라고 하였을 때에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반대로 척박한 곳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기 좋았던 소돔과 고모라성은 죄악이 관영한 곳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환경이 좋고 경제적으로 풍부하면 행복할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범죄 한 인간이 어떤 환경에 처하더라도 개선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할 때에 어떻게 롯이 구원을 받게 됩니까? 여기서의 의로운 행위,즉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 하는 의로운 롯을 건졌다고 합니다.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 비록 살지만 그 세상에 동화하지는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하기 위하여 천사가 소돔과 고모라를 방문할 때에 롯이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소돔과 고모라성의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먹고 마시며 다른 색을 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과 어울리지 못하니 혼자 외톨이가 되어서 성문 입구에 앉았다가 그 성에 들어오는 나그네를 자기 집으로 영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그 사람을 이끌어내라고 우리가 상관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남색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롯은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이러한 롯이 구원받는 것도 또한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듯이 롯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구하여 내신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입은 롯의 모습은 그 소돔과 고모라를 떠나지는 못하였지만 근심을 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세상이 이래서는 안 되는데, 죄악이 너무 관영하다는 것을 인하여 마음이 상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마음이 있습니까? 이 소돔과 고모라 같은 세상에서 이 세상이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는 생각을 가지고 사십니까? 눈에 보이는 세상의 헛된 영광만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을 보고서 마음이 상하십니까? 아니면 나는 왜 이렇게 가난해서 저런 영광을 누리지 못하는가 하면서 원망하고 살고 있습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세상을 향하여 달려가더라도 은혜를 입은 사람은 그런 세상을 보면서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이런 롯의 고통을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내도 딸들도 사위들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심지어 사위들은 장인의 말을 농담으로 여긴 것입니다. 노아 홍수의 심판이나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이야기가 여러분은 어떻게 들리고 있습니까? 농담으로 들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말세의 특징인 것입니다. 이런 경건치 아니한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은 심판을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행하셔서 본보기를 삼으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7:28-33절입니다. “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30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31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32 롯의 처를 생각하라 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주님의 심판이 지체되지 않았고 자지도 아니합니다. 살기 위하여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된 롯의 처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세상이 노아의 홍수 시대와 같고 소돔과 고모라의 시대와 같습니다. 누가 의를 전파합니까? 누기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합니까? 무엇으로 근심하고 있습니까? 무엇으로 마음이 상하십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습니다. 이런 복이 주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베드로후서 2:9-16 발람의 길 2006. 8. 30

 

9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10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 11 더 큰 힘과 능력을 가진 천사들이라도 주 앞에서 저희를 거스려 훼방하는 송사를 하지 아니하느니라 12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13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14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 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15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16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

 

 

 

 

세상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기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 그렇게 된 것입니까? 죄를 지어도 즉각적인 벌이 내리지 않으니 죄 짓기에 담대해지고 심판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서 8:11절 말씀입니다.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징벌이 속히 일어난 편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악을 행하기에 담대하였던 것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많으셔서 오래 참으신 것인데도 하나님은 없다고 하면서 죄를 짓기에 용감하였던 것입니다.

 

 

 

 

구약성경 마지막 성경인 말라기 3:13-1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3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14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15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고 합니다. 오히려 교만한 자가 복되고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시대나 일어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불의한 자들이 형통하고 의롭게 사는 자들이 고난을 받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시편 73편에서도 욥기에서도 하박국 선지자도 이런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런 마음이 없습니까? 내가 그래도 지금까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믿어왔는데 믿지 않는 사람보다 형편이 나아진 것도 없고 여전히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있는데 이래도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 그런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다가 복음이라는 것을 듣고 보니 인간의 행함과 상관없이 은혜로 모든 것이 주어진다고 하니 모든 의욕이 다 사라지고 그저 되는대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교회 어떤 집사님은 토요일 배드민턴을 얼마나 열심히 쳤는지 그 다음날 몸살이 나서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예배 드리나 마나 어차피 인간이 죄인인데 하는 허무감에서 그저 내 몸의 감각대로 살고 싶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베드로후서 2장의 말씀에서 거짓 선생들이 나와서 유혹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하면 육체의 정욕대로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대로 살게 하는 모습은 구약시대나 베드로 사도의 시대나 오늘 이 시대나 꼭 같은 모습입니다. 옛날에는 거짓 선생들이 믿는 자들을 교묘하게 유혹하여 세상의 정욕대로 살게 하였지만 지금은 교묘하게 유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표현의 말이 나는 내 감정에 충실하였다는 말입니다. 내 육체가 끄는 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체의 정욕대로 사는 오늘의 세상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 심판이 어디에 있느냐며 자기 마음의 정욕대로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말라기 3:16-18절입니다. “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 책에 기록하셨느니라 1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18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이러한 심판이 지체하지 않았으며 지금도 자지 않고 집행되고 있습니다. 그 본보기로 천사들도 범죄 하면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에 가두어 버리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노아 때의 홍수 심판, 소돔과 고모라 성의 불 심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세상에 심판이 없다고 하면서 먹고 마시며 즐기자는 쪽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고치자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심판을 면하기 위하여 바른 길로 돌이키라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종말이 어떻게 되어지는 지를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저렇게 사는 것이 멸망당하는 모습이구나! 구원 받은 자는 저렇게 사는구나! 이렇게 심판이 지금 집행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그러합니까?

 

 

 

 

요한계시록 22:11절 새 번역으로 봅니다. “이제는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도록 내버려 두고, 더러운 자는 그냥 사람이 더러운 채로 내버려 두어라. 의로운 사람은 그대로 의를 행하게 하고, 거룩한 사람은 그대로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여라.” 이 말씀은 고치고 돌아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확정된 대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안에 자신의 정욕대로 사는 것이 죄 인줄 알고 주님의 보혈 안에 거하고자 하는 사람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자신이 돌이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구원을 베푸신 결과인 것입니다.

 

 

 

 

이제 본문 2:9절을 봅니다. 2:1-8절까지 하나님의 쉬지 않으신 심판을 말씀하시고서 결론부분입니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게 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경건한 자란 노아의 경우에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믿어서 방주를 예비한 것입니다. 그리고 롯은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살았지만 그 성에서 일어나는 악한 일로 인하여 마음이 상한 것입니다. 이들이 경건한 자들이며 이들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주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그러면 심판을 받을 불의한 자들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2:10-14절입니다.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노아홍수의 심판 때에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때에 멸망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에는 관심이 없고 그들의 평소 관심사인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에만 관심을 가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만이 전부인줄 알고 산 사람들입니다.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것입니다. 주관하는 이란 우리주님이 온 세상을 주관 하시는데 그 주님을 멸시한 것입니다. 노아를 통하여 계시하셨는데 그것을 멸시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구원받기로 작정이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멸시하는 자는 심판 받기로 작정이 된 자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자신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면서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자를 막아 나선다는 마태복음 23장의 예수님의 책망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날 교회가 노아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롯의 모습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심판의 징조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과 짝하여 세상의 정욕을 따라간다면 이것은 이미 심판이 집행 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멸망 받는 자들의 모습은 담대하고 고집하며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이 세상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주님의 재림과 심판을 믿는다는 우리가 주님을 두려워해야 할 자로 여기고 있습니까? 멸망 받을 자들은 양심에 화인을 맞아서 고집스럽고 심판에 대하여 두려워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잡혀 죽기위하여 난 짐승과 같다고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모르고 사는 것은 그 사람이 아무리 세상의 영광을 가지고 살아도 잡혀 죽기 위한 짐승과 같은 것입니다. 짐승도 여러 쓸모가 있는 짐승이 많습니다. 그러나 오직 잡혀서 사람들의 먹이감이 되는 짐승은 돼지입니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가 어울리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멸망할 짐승에게는 진주를 발로 밟고 도리어 해치려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이들은 짐승처럼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즐기는 자들입니다. 사람들은 주로 밤에 쾌락을 즐깁니다. 그런데 낮에도 쾌락을 즐기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시대에 멸망 받을 자들의 모습이나 오늘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요즈음 낮과 밤이 따로 없습니다. 또한 성도들 안에서 음식을 먹고 교제를 하면서도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음심이 가득한 눈으로 범죄 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마음이 탐욕에 길들여져 있는 저주의 자식들입니다.

 

 

 

 

15-16절입니다. 지금 베드로사도가 거짓 선생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예를 들어 말하면서 그 구체적인 인물로 발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발람은 술사로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하여 모압 왕 발락의 요청에 의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하여 온 사람입니다. 불의의 삯을 사랑하여 따라 나섰다가 당나귀가 사람의 말로 하여 이 미친 선지자를 금지하였다고 합니다. 멸망당할 짐승보다 못하여 짐승의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저주가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하는 바가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백성을 어떻게 저주할 수 있는가 하면서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발람이 떠나면서 발락 왕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미혹할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미디안 여인들이 제사를 지내는 곳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초청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을 숭배하고 이방의 축제가 다 그러하듯이 그 뒤에는 음란한 짓을 하게 만들어 범죄 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 40년을 광야를 지나고 나서 가나안 근처에 와서 유혹을 받은 것입니다. 40년 동안 만나만 먹고 같은 옷 같은 신발만 신은 여자를 보다가 기름진 음식과 매혹적인 여자들의 유혹에 넘어간 것입니다. 이런 유혹들이 발람의 길인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유혹은 동일하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만을 믿고 산다는 것은 이 화려한 유혹의 세상에서 무언가 바보스럽고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 같을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성경대로 사느냐고 놀릴 것입니다. 물론 성경대로 살아갈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유혹에 그대로 몸을 맡기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속이라도 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왕따를 당하여도 노아가 120년을 기다린 것처럼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자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이 옴을 볼수록 그리하자고 히브리서 기자가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보고 들으면서 주님의 심판이 두렵다고 여겨지십니까? 그렇다면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을 것은 혈과 육, 금과 은이 아니라 주의 보혈입니다.

 

 

 

 

베드로후서 2:17-22 거짓 된 자유 2006. 9. 6

 

17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저희를 위하여 캄캄한 어두움이 예비 되어 있나니 18 저희가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여 미혹한데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여 19 저희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기는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니라 20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22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베드로 사도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운 줄 알고 마지막으로 주의 계시를 증거 하고 있는 것이 베드로전후서입니다. 3:1-2절을 보시면 이 둘로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이 것을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하면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구속을 받은 것은 금이나 은이나 없어질 보배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얻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이러한 주의 보혈의 공로를 희석하고 왜곡하여 부정하게 만드는 거짓 선생들을 경계하라는 교훈입니다. 세 번째는 주의 재림과 심판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거짓 선생들의 유혹과 그들의 유혹에 따라가는 자들에 대한 경고를 말씀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 대표적인 사람의 예로 발람의 예를 들었습니다. 발람 선지자를 모압의 왕 발락이 부른 이유는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저주 받아 망함으로 자기나라는 보전하고자 하는 것이 발람의 길을 따르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정 반대로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군대를 가지고 세상의 나라를 진멸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무슨 자격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허물과 죄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발람이 입을 여는 순간 하나님의 신에 사로잡혀 축복의 말이 나오는 내용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민수기 23:18-21입니다. “18 발람이 노래를 지어 가로되 발락이여 일어나 들을찌어다 십볼의 아들이여 나를 자세히 들으라 19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20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21 여호와는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 중에 있도다

 

 

 

 

이스라엘에 저주가 통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식언치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시는 결과로 지금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인데 이스라엘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없어서가 아니라 보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 중에 어린 양의 피아래 있을 때에 죽음의 사자가 넘어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기에 허물과 패역을 보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발람의 길은 유다서 1:11절에서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을 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장 14절에서는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불의의 삯과 우상의 제물과 음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유혹은 인간의 종교적인 정성이나 사술을 통하여 자기들 마음대로 복과 저주를 조절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짓 선생들의 유혹의 모습과 그 결과들을 보고자 합니다.

 

 

 

 

2:17절입니다. 이들은 물 없는 샘이며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라고 합니다. 외형은 무언가 있는 것 같은데 실상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속이는 것입니다. 샘에 물이 없으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라고 하는데 무언가 있는 것 같지만 잠시 후에 보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안개입니다. 또는 이 안개를 비 없는 구름으로 보아도 됩니다. 이들의 결과는 캄캄한 어두움에 들어갈 것입니다.

 

 

 

 

유다서 1:11-13절입니다. “11 화 있을찐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12 저희는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의 애찬의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13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 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베드로 후서와 비슷한 경고의 말씀이 주어집니다. 여기서는 발람 외에 가인과 고라가 함께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며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나무며 결국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자들입니다. 이들의 유혹에 왜 사람들이 끌려가는 것입니까? 가인과 발람과 고라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언약보다 사람들의 요구를 먼저 내세우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위하여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자기의 제사를 받아주지 않는다고 제사가 받아들여진 동생 아벨을 쳐 죽인 것입니다. 왜 내 제사 받아 주지 않는가 하는 것이 바로 가인의 길인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정성을 바쳐도 하나님이 들어주지 않는다면 그런 신을 좋아하겠습니까? 고라의 반역은 하나님이 왜 사람을 차별대우 하는가 하는 항의입니다. 왜 모세의 말만 들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어떻게 사용하시든 하나님의 뜻인데도 그것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불만인 것입니다.

 

 

 

 

18-19절입니다. 허탄한 자랑을 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하여 나온 자들에게 다시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으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겨우 세상의 정욕의 유혹에서 피하여 나온 자들에게 자유를 준다는 말로 미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왔더니 오히려 고생하는 것이 무슨 구원이며 자유냐며 그런 것에서 자유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재미와 영광을 마음껏 취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유라고 하면서 세상에서 겨우 피하여 나온 자들을 다시 유혹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출애굽과 관련하여 생각해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빠져나와 광야에서 어떻게 모세를 대적하였습니까? 구원하여 준다고 하고서는 왜 이렇게 고생시키는가 하면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한 것입니다. 구원하기 위하여 애굽에서 나왔다면 양식도 풍부하고 물도 마음껏 마실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하여야지 어떻게 광야로 인도하여 다 죽게 만드는가 하면서 항의를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데모를 한 것입니다. 이것을 자유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유를 준다고 말하는 자들이 멸망의 종들이기에 결코 자유를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저지른 최초의 범죄가 하나님으로부터 자유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안에 구속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자유입니다. 그런데도 마귀는 계속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서 끊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혹을 자유라는 고상한 이름으로 미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들으면서 율법과 종교성에서 자유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유 한다고 하면서 복음을 듣기 전보다 더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것이 과연 자유입니까? 전에는 자신의 행함의 결과로 인하여 복과 저주가 결정된다는 생각에 무언가 두려움이라도 있었다면 이제는 노골적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자유라는 이름으로 행하고 있다면 이것은 자유가 아닌 것입니다. 이런 자유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놓이는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우리의 율법적인 행함이나 도덕적인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입게 하려고 성령이 임하신 것입니다. 그런 자는 세상의 썩어질 것들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된 자들입니다. 이렇게 된 자들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베풀어주신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더욱 알아가면서 주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자유라고 하지만 그 자유가 누구의 자유인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19절에서 누구든지 진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리스도의 종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사단을 이기심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의 종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옛날 마귀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면 그것이 과연 누구의 종인가 하는 것입니다.

 

 

 

 

20-22절입니다. 만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 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났다고 합니다. 이런 예를 들겠습니다. 부산의 모 입시학원의 두 선생이 있었습니다. 학원전단지에 십자가를 새기고 자신의 강의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강의한다고 합니다. 강의 전에 항상 기도하고 합니다. 그런데도 학생이 가득 찹니다. 그런데 한 선생은 성경을 너무 잘 압니다. 신학적인 지식도 많습니다. 교무실에서 만나면 빈정거리며 성경의 모순을 이야기 하면서 놀리는 것입니다. 뒤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강의 한다는 그 선생과 버스 안에서 만나서 이야기 하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제가 다른 한 선생에 대하여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차라리 성경에 대한 지식이 없었더라면 그 사람에게 더 나았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모습입니까? 예수님을 알고 복음을 알았습니까? 그런데 어떤 모습입니까? 자유를 말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 오히려 마귀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흔히 하는 말로 귀만 커지지 않았습니까? 입만 살아있지는 않습니까? 과연 복음을 아는 자의 모습이 이런 모습입니까?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주님께 충성하지도 못하고 제대로 순종하지도 못하면서 입으로 때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부담 되는 성경은 애써 외면하고 싶고 부닥치면 교묘한 말로 피하여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고 하고, 자유 한다고 하면서 우리의 모습이 22절의 모습과 같다면 거짓된 자유에 속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가 토하였던 것에 다시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세상의 더러움을 피하여 그리스도를 안 후에 이렇게 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여기에서 피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히브리서 3:1-19절입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충성하였으니 사환이었지만 예수님은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 자유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짓 자유란 그리스도와 하나님에게서 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 시찰회 김종기 목사님이 별세하셨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저희교회 임시 당회장도 하신 분이시지요! 우리도 그렇게 떠날 것입니다. 우리가 떠나든지 주님이 다시 오시든지 그날까지 주님을 바라보며 살기를 소원합니다.

 

 

 

 

베드로후서 3:1-7 동일한 말씀 2006. 9. 13

 

1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둘로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 2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 3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4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5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6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누가복음 18:8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이 말씀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가 세상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여 밤낮 부르짖는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겠느냐며 하신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모든 것을 심판하신다는 약속을 믿을 자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이 결코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믿는다는 말을 하지만 과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있습니까? 믿는다고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정욕대로 소원하는 것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믿음대로 된다고 믿으라고 합니다. 아무리 말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여도 우리를 지으신 분이 우리의 속을 모르겠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믿음이란 우리의 정욕대로 나오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3:1-2절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둘째편지를 쓰는 이유는 성도들의 진실한 마음을 일깨우기 위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는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한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은 죽어가고 오신다는 예수님은 아직 오시지 않자 여러 가지 혼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때를 틈타서 주의 강림이 없다고 말하는 자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그들의 거짓 교훈을 경계하고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도록 하기 위하여 이 서신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편지를 읽으면서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하면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그리스도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한 것을 기억하게 하려한다고 합니다. 먼저 구약의 선지자들이 무엇을 예언하였습니까?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렇게 예언한 대로 메시아가 오신 것처럼 이제 사도들을 통하여서는 그 오신 메시아를 증거 할 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메시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먼저 구약의 선지자들이 어떻게 예언하였는지 봅니다.

 

 

 

 

베드로전서 1:10-12절입니다.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거룩한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하여 부지런히 연구하고 살펴서 그 받으실 고난과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였습니다. 그 예언대로 메시아가 오셨습니다. 이제는 사도들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시 오신다는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약속에 대하여 세월이 가면 갈수록 확신을 하는 사람은 적어지고 오히려 조롱하는 자들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세의 특징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이렇게 수요일까지 예배에 참석합니다만 과연 이 세상이 주님 재림하시면 다 불살라 질 것을 믿고 사십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계시를 따라서 믿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약속하고 있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인 것입니다. 물론 이런 믿음은 우리의 이성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여 우리의 눈과 마음을 열어주셔야 믿게 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은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하나님의 약속이 다 믿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없는데서 하나님의 말씀이 있으라고 하시니 하나님의 말씀이 창조의 능력이 있어서 천지 창조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떤 과학자가 무어라고 말하여도 온 인류가 다 믿지 못한다고 하여도 주의 영이 임한 자는 천하가 없어지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변함없이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이 그대로 성취되었고 또 앞으로도 말씀대로 성취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대로 믿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말세에 어떤 자들이 나오는 것입니까? 3-4절입니다. 기롱하는 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기롱이란 요즈음 잘 쓰지 않는 말인데 조롱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모든 자의 부활과 세상의 심판과 이 세상이 불살라 없어질 것을 믿는 자들을 보고 세상은 조롱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런 말씀을 세상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어떻게 보겠습니까? 광신도들의 미친 소리쯤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문제는 믿는다는 사람들인 교회가 이 말씀을 그대로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교회가 오늘날 주의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서 오늘이나 내일이나 주님의 다시 오시기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요한 계시록 제일 끝에 기록된 말씀대로 주님이 속히 오신다는 말씀에 시간과 상관없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렇게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런 자들에게 주의 은혜가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은혜가 있다면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릴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이 불살라 없어질 것을 믿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기다릴 것입니다. 그런데 믿는다고 말하는 자들마저 세상의 종말이 없는 것처럼 살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들의 정욕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정욕이란 결국 땅에 속한 것으로 눈에 보이는 것들인데 그것을 좋아하고 사모하면서 사는 자들에게는 세상이 불타 없어진다는 말씀이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종말이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니 직접적으로 종말이 없다고 말은 못하지만 사는 모습은 종말이 없는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서로 종말에 관하여 심판에 관하여 언급하기를 기피하고 혹 언급하는 자들이 있으면 조롱하는 것입니다. 또 말하기를 4절을 보시면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된 때와 같이 그냥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종말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자들의 이론입니다. 세상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이 땅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땅이 영원하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전도서 1:4절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지만 땅은 영원히 있도다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 구절을 가지고 여호와의 증인들도 이 땅이 영원하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허무한 인생에 비하여 땅에 영원한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 그 영원해 보이는 땅마저 불살라 없어진다는 것이 성경전체의 결론인 것입니다. 그러니 한 부분만 가지고 자기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일에도 빠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정욕대로 살고 싶은 사람들은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을 믿지 않고 또 세상의 멸망할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을 믿고 사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핍박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대세가 종말과 심판에 대한 말씀이 거의 사라지고 있는 형편입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말은 너무 원색적이라서 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해도 심판이나, 지옥이니 멸망이니 이런 말은 혐오감을 주기에 되도록 피하고 사랑, 행복, 성공, 번영, 삶의 질을 이야기 하자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는 것입니까? 5절을 봅니다. 하늘과 땅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것을 의도적으로 잊어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이 신이 수면위에 운행하시고 땅이 조성되는 것이 물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과 뭍을 분리하여서 바다와 땅으로 구별하십니다. 이렇게 말씀으로 천지가 창조된 것을 잊어버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주님의 강림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이 세상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물로 한번 멸망 받은 세상입니다. 6절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노아 홍수 때에 사람들이 물로 심판을 받은 것은 노아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것입니다. 노아를 외면한 것입니다. 조롱하였습니다. 세상을 물로 심판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은 믿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홍수가 나서 저희들을 다 멸하기 까지 깨닫지 못하고 사고팔고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만 삶의 목표였던 것입니다. 그때에 물의 넘침으로 모든 사람이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이 성경의 말씀이 믿어지십니까? 믿기는 해야 되겠는데 믿으려고 하니 내가 정욕대로 살고 싶은 것에 걸림이 됩니까? 우리가 이러하든 저러하든 간에 주님의 약속은 변함없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천지가 말씀대로 창조되고 말씀대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물이 다 주에게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게 하시는 조치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다는 것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성경의 말씀을 일부러 잊어버리기 위하여 주의 강림도 없다 세상의 심판도 없다. 이 세상은 처음 지어질 때부터 원래 그대로 있다고 자기들끼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들의 마음의 정욕을 따라 살고 싶어서 애써 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이 세상의 끝이 없다고 하고 주의 강림이 없다고 한들 주의 약속이 취소되거나 파기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시대에 노아가족 한 가족 외에는 다 멸망당하였다는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지금 눈에 보이는 이 하늘과 땅은 어떻게 됩니까? 7절입니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었다고 합니다. 그 동일한 말씀이란 노아 홍수 때에 세상을 멸망시킨 그 동일한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 동일하신 분이 말씀하신 것도 다 동일한 말씀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것도 동일한 말씀이요, 노아 홍수를 이루신 것도 동일한 말씀이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것도 동일한 말씀이요,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도 동일한 말씀이요, 부활승천하시고 성령으로 보내신 것도 동일한 말씀이요. 예수님이 영광 중에 다시 오셔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이 세상을 불로 심판하실 것도 동일한 말씀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란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그 약속하신 바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신실하게 이루어 내시는가를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어디에 기초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위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식이나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위에 서야하는 것입니다.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세워져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 아직 보관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정욕대로 세상의 욕심을 따라 사는 경건치 아니하는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관하여 두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재림하시면 주님 말씀하신 대로 추수마당이 되는 것입니다. 알곡은 모아서 창고에 들이고 가라지는 꺼지지 아니하는 불에 집어넣으실 것입니다. 옛 하늘과 땅이 불사르기 위하여 있다는 것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베드로후서 3:8-9 오래 참으심 2006. 9. 20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지난 주 토요일 주보 복사를 하러 갔는데 복사 집 건너편에 소방차가 와있는 것입니다. 보았더니 이층에 불이 나서 새까맣게 다 탄 것입니다. 창문을 깨고 불을 끈 모양인데 이미 안에 있는 것은 전부 불탄 쓰레기가 되어서 포대기에 담아서 내어 버리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 집에 누가 살았던지 간에 여러 가지 물건들을 두고 살았을 것입니다. 곧 버려야 할 쓰레기를 모아두고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몇 십 년을 살아오면서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 중요 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이사하면서 버리지 않고 남겨 두었던 것들이지만 불이 나기 몇 시간 전에 귀하던 것들이 이제는 버려야할 거추장스러운 쓰레기가 된 것입니다.

 

 

 

 

지난주 말씀과 오늘 말씀을 보면 눈에 보이는 이 하늘과 땅이 다 불살라져 없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기록된 성경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서 지금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이 다 불살라져 없어질 것이라고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모습을 보면 눈에 보이는 세상은 영원한 것처럼 보이고, 보이지 않는 믿음의 세계는 너무나 잠간인 것처럼 보입니다.

 

 

 

 

성경을 보거나 설교를 들을 때는 잠시잠간이나마 이 세상이 영원하지 않고 주님의 약속의 세계만이 영원하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는데 그러나 또 돌아서면 여전히 세상에 영원히 발 딛고 살 것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지 않을 수도 없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이 불살라져 없어진다고 하여서 출근도 하지 않고 학교도 나가지 않고 주부는 밥도 하지 않고 세상의 멸망만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단체들은 재림의 날짜를 성경에서 찾았다고 하면서 모든 것을 금하고 주님 오시기만을 기다려온 단체들이 역사상 많이 나타났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하다는 사람들이 주님의 재림의 날짜를 예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때부터 주님의 재림을 그렇게 기다렸는데도 주님은 오시지 않으시니 이것이 엉터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더구나 초대교회 때에는 여러 가지 핍박으로 흩어진 성도들에게 가장 큰 위로와 소망이 주님의 재림이었는데 그 기간이 자꾸만 길어지자 그들의 신앙이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는 말씀이 바로 오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이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는 것은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은 기쁨이 될 것입니다.

 

 

 

 

골로새서 3:1-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하늘에 소망을 두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위에 것을 찾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하는 말씀 앞에서 땅의 것만 찾는 것이 탐심의 우상숭배인줄 알고 위엣 것을 찾을 것입니다. 위에는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까?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어져 잇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성도가 영광 중에 나타날 것입니다. 이 말씀이 위로와 소망이 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거듭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만 오늘의 말씀이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고 기쁨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대로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왜 주님께서 빨리 오시지 않으시는지 그 두 가지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시간이 우리에게 속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주의 택한 백성들이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오래 참으신다는 것입니다.

 

 

 

 

먼저 8절을 봅니다. 무엇을 잊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까?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시간을 가지고 따지는 버릇이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구분합니다. 그렇게 분류하는 모든 시간의 중심을 자기에게 두는 것입니다. 무슨 역사적인 사건을 기억하여도 나를 중심으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나와 상관이 없는 시간과 공간과 사건들은 의미가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지금 태국에 쿠데타가 일어났다고 하는데 그것이 우리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태국에 여행갈 일이 있다면 관심이 있는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시간을 내 중심으로 보지만 그러나 만물만이 아니라 시간도 나의 때를 위하여 창조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때를 위하여 창조된 것입니다. 전도서 3장에 모든 것이 다 때가 있다고 하신 것도 나의 때가 아니라 주님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년이 지났다고 이천년이 지났다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만물이 다 주님의 때에 맞추어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구약의 예언자들이 부지런히 살핀 때도 그리스도의 때였습니다. 그래서 때가 차매 주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오실 주님도 주님의 시간표대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가 임한 것이 잠시 잠간이라도 있다면 그 시간은 영원하신 주님과 연결된 시간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오랫동안 기다렸다든지 우리가 무엇을 하였다는 것은 주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시편 90:1-4절입니다. “1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3 주께서 사람을 1)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임이니이다” 주님은 천지창조 이전부터,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님이십니다.

 

 

 

 

우리 인생이 천년을 산다고 하여도 주님 앞에서는 밤의 한 경점 같을 뿐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므두셀라가 969세입니다. 창세기 5장에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는 일백 팔십 칠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에 칠백 팔십 이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구백 육십 구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969년 간 얼마나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겠습니까? 우리의 짧은 인생을 소설로 쓰라고 하여도 몇 권을 다 쓸 수 있을 텐데 그 천년동안 수백 명의 아이를 낳았을 텐데 겨우 아이 하나 이름만 기록이 됩니다.

 

 

 

 

그 자녀 놓은 것도 결국 노아의 계보를 연결하고 그 족보가 그리스도에게 연결되는 것으로 기록이 된 것이기에 므두셀라는 삶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한 점이라도 기록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이 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왜 나의 때에 맞추어 주님이 일하여 주시지 않는가 하며 항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재림의 때만이 아니라 모든 때를 나를 중심으로 보지 말고 그리스도의 때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9절입니다. 주님의 약속, 내가 올라간 이 모습대로 다시 오리라는 그 약속의 말씀이 더디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여기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인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도 하나님의 때가 더디다고 여긴 사람입니다. 어떻게 세상에서 악한 자가 형통하고 의롭게 사는 자가 고난을 당하는가 하는 문제를 고민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빨리 의로운 심판을 집행하여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봅니다. 하박국 2:3-4절입니다. “3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나님의 묵시는 정한 때가 있는 것입니다. 묵시란 우리의 시간개념으로 측량하거나 추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응할 것인데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이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이 비록 더딜지라도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이란 내가 무엇을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 의인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약속이란 우리가 이성적으로 수납하고 믿을 만한 내용이 아니기에 우리의 능력으로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약속을 믿는 믿음이란 곧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는 오늘의 이 말씀이 참으로 기쁨의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지체 되는가? 두 번째의 이유는 주님의 오래 참으심입니다. 오래 참으심이란 누구를 대하여 오래 참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다 참고 기다리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조차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시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데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절하여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누구를 대하여 오래 참으신다고 합니까?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너희란 바로 베드로전서 1:2절에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신 자들입니다. 창세전에 미리 예정된 자들입니다. 이들이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신 자를 성령이 거룩하게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피 뿌림을 얻기 위한 자들이 다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기까지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직도 주님의 재림이 임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하나님의 미리 아신 자가 다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께로 돌아오는 미리 아신 자들은 어떻게 돌아오는 것입니까? 복음으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임하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신 말씀이 지금으로부터 약 2천년 전에 주신 말씀이신데 지금도 바로 어제 아레의 일처럼 복음이 증거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2천년 전에 있었던 주님의 그 한 말씀이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여 우리에게 복음이 증거 되고 우리가 죄인임을 알고 예수님을 믿게 되기까지 주님께서 오래 참으신 것입니다. 전에 어느 집사님이 주님이 왜 빨리 오시지 않으시냐고 물으실 때에 제가 이런 대답을 하였습니다. 바로 집사님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이 대답을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다시 해야 됩니다. 왜 주님이 아직 오시지 않으시나요? 저와 여러분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도록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다 찾으시겠다고 하신 그 말씀을 오늘도 신실하게 이루고 계시기에 아직 재림이 일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신 자들을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셔서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 거룩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입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직도 이 땅에 주의 택한 백성들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 되고 주님의 택한 백성들이 다 돌아오게 되면 지체 없이 오실 이가 오실 것입니다.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알고 회개하고 예수님 믿고 살기를 소원합니다

 

 

 

 

베드로후서 3:8-13 새 하늘과 새 땅 2006. 9. 27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적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1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왜 아직 주님이 재림하지 않았습니까? 지난주에 8-9절에서 본대로 회개하고 돌아올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맡기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다 찾으시기 까지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돌아와야 할 자들 중에 저와 여러분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이미 돌아온 자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전서4: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교회로 모인 성도가 하나님의 집인데 하나님의 집에서 먼저 심판을 받을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기준은 복음을 순종치 아니한 것입니다. 교회란 복음을 순종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믿고 산다면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교회라고 말하는 곳에서 무엇을 바라보고 추구하고 사모하고 있는 것입니까? 과연 주님의 재림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습니까? 교회가 제시하는 복음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세상의 영광은 아닙니까? 예수님을 잘 믿으면 세상의 영광과 세상의 권세가 주어진다고 오늘도 얼마나 많은 곳에서 외치고 있고 그것을 좋아하면서 따라가고 있습니까? 그것은 마귀가 준다고 하는 내용들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세상에서 고난의 길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12-14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성도들을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듯이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불 시험이란 고난입니다. 그런 고난을 당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기에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실 때에 즉 재림하실 때에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이 있는 자이며, 영광의 영이 함께 하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영이 함께 하는 자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변을 보면 예수 믿으면서 고난을 당하는 사람을 보고서 무언가 잘 못 믿어서 복을 받지 못하여 저렇게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고난을 받은 것은 잘 못 믿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이 세상이 얼마나 복음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지가 증거 되는 현장이 성도가 고난 받는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먼저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예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이 세상의 심판이야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주님이 언제 오시는 것입니까? 10절입니다.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올 것입니다. 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라는 것은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42-44절입니다.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43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은 도적처럼 생각지 않은 때에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시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됩니까? 10절입니다.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질 것입니다.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드러날 것입니다. 지금 보이는 하늘이 종이축이 말리듯이 사라지고 그 안의 체질이란 우주의 재료들입니다. 해와 달과 별들이 뜨거운 불에 풀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땅에 있는 것들이 다 드러날 뿐 아니라 불에 살라질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12-17절입니다. “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14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16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어린 양의 진노가 이렇게 나타날 것입니다.

 

 

 

 

이 말씀들을 믿으십니까? 아니 믿어지십니까? 스스로 믿을 능력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우리는 자나 깨나 눈에 보이는 것을 향하여 최선을 다하여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 눈에 보이는 것들, 손에 잡히는 것들이 전부 불살라져 없어질 것으로 여기고 살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가 임한 자는 비록 이 땅에 발 딛고 살지만 소돔과 고모라 성의 롯처럼 그런 자신의 모습과 세상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상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마음이 상합니까? 세상의 것이 없어서 마음이 상합니까? 그러니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와야 할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결코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듣고서도 회개가 일어나지 않는 사람은 아직도 세상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는 종말과 심판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그런 희망과 가능성을 더 좋아하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어떤 설교를 전반에만 들었는데 존경받은 성경의 인물이라고 하면서 요셉과 다윗을 이야기 하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총리가 되고나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고, 다윗은 왕이 되고나서 꽉 찬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성전을 짓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준비 하였기에 다윗 사후에 이스라엘의 황금기가 왔고 요셉은 아무런 것도 하지 않아서 애굽의 노예로 전락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래는 준비하는 사람의 것이라고 하면서 성도 여러분도 지금 준비하여 미래의 주인공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세상에 희망을 두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요셉이 왜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까? 자기 해골을 애굽에서 매어내어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묻어달라고 한 것입니다. 멸망할 애굽에서 무엇을 준비하여야 잘 한 것입니까? 야곱도 요셉도 자기들을 약속의 땅에 묻어달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애굽이라면 이곳에서 남겨둘 것이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 안에 들어간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것은 세상을 다 얻는 것보다 더 나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성전준비를 한 것도 건물 성전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을 거룩하게 하는 참된 성전이며 사람의 손으로 세우지 않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전 됨을 이야기 하여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소유의 종말’ 이라는 제러미 러프킨이라는 사람이 쓴 책을 보았습니다. 제목이 멋있어서 사 보았습니다. 그 내용은 산업 시대는 소유의 시대였고 그러한 소유의 시대는 끝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소유의 반대말인 접속(일시적으로 사용하는 권리)의 시대가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항구적으로 소유하기 보다는 일시적으로 접속하여 사용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것입니다. 소유함으로 오는 비용과 책임을 부담스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품은 무료로 주고서 사용료만 받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벌써 이러한 상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체적인 사례들을 지적하면서 미래를 예측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까 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물론 문명비평을 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앞으로의 세대를 잘 준비하여 더 아름답고 나은 삶을 살자는 이야기 입니다. 진짜 종말에 대하여서는 아무 말도 없는 것입니다. 결국 희망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최근에 앨빈 토플러의 ‘부의 미래’라는 책도 사서 보고 있는 중입니다. 미래에 부의 가치가 어떻게 이동하고 달라질 것인가 하는 내용들인데 결론을 먼저 보니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미래의 경제와 사회가 형태를 갖추어 감에 따라 개인과 기업, 조직, 정부 등 우리 모두는 미래 속으로 뛰어드는 가장 격렬하고 급격한 변화에 직면하고 있다. 모든 사항을 고려했을 때, 이것도 한 번 살아볼 가치가 있는 환상적인 순간이다. 미지의 21세기에 들어온 것을 뜨거운 가슴으로 환영한다.’ 결국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인류가 다 반대한다고 하여도 주님의 약속은 빈틈없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에도 소돔과 고모라성에도 심판이 지체하지 않고 이루어진 것처럼 이 마지막 심판도 지체하지 않고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약속을 믿는 성도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11-12절입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합니다.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이 어떤 것입니까? 거룩하지 못한 것과 경건하지 못한 것이란 결국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들이 다 세상으로 좇아온 것입니다. 마귀로부터 온 것이기에 이것이 거룩하지 않고 경건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위에 것을 찾는 것이 거룩한 행실이며 경건함인 것입니다.

 

 

 

 

다른 말로 주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것입니다. 주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 세상의 썩어질 것 불타 없어질 것을 구하기 위하여 금식하고 철야하고 하겠습니까? 오히려 각양 좋은 은사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고 그것을 사모하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것들은 다 선하고 좋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처음 지어진 세상은 인간의 죄로 인하여 타락하고 범죄 한 세상이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을 다 불로 태워버리시고 새롭게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13절입니다. 그러므로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옛 하늘과 옛 땅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주의 약속대로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의가 거하는 곳입니다. 의가 충만한 곳입니다. 의가 없으면 들어가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인간을 향하여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도 자신의 노력이나 자신의 경건이나 거룩으로는 결코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새 하늘과 새 땅에 누가 들어갈 수가 있습니까? 고린도후서 5: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만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요한계시록 21:1-4절입니다.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요한계시록 22:1-5절입니다. “봉독”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생명수의 강이 흐르는데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흐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은혜가 있을찌어다. 아멘.

 

 

 

 

베드로후서 3:14-18 은혜에서 자라 가라 2006. 10. 4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15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2)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17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어제 울산을 다녀왔습니다. 오고 가면서 황금들판과 잘 익은 과일들도 보았습니다. 오곡백과가 저마다 자태를 뽐내며 추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들판을 보시면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요?

 

 

 

 

요한복음 4:35-38절입니다. “35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36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37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38 내가 너희로 노력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의 노력한 것에 참예하였느니라

 

 

 

 

자연의 때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 때가 이르는데 예수님은 벌써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고 보시는 것입니다. 즉 영적인 추수를 생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벌써 열매를 모으고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이 열매 거두는 일에 참예하게 하시는 것은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또 중요한 말씀은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둔다는 것입니다. 이미 다 이루어놓은 것을 거두게 하심은 즐거움에 참예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사도행전에서 보면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면서 맛보고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의 기쁨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으면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기쁜 것입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이 기쁨이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기쁨은 그렇게 배척을 받는 가운데서도 복음을 듣고 주께로 돌아오는 자들로 인한 기쁨인 것입니다. 이러한 즐거움에 참예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울산에 간 이유는 화평교회 오 목사님이 새순교회에서 말씀을 증거 하는 곳에 가기 위하여 갔는데 또 다른 일이 있어서 마지막 한 시간이라도 참여하려고 갔습니다. 공휴일인데도 대부분의 성도들이 참여하여 말씀의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추석대목이라고 사람들의 마음이 바빠지는 때에도 아랑곳없이 말씀의 교제를 나눈 것이 보기에 좋았습니다. 그러면 왜 그들이 그런 시간을 마련하였을까요? 오늘 결론의 말씀과 같다고 보아집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는 것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이제 베드로 전, 후서를 마무리하면서 베드로 사도가 무엇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 낮에 고린도 전, 후서의 마무리 부분도 보았는데 그 결론은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믿음에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성도의 마음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너희 마음에 계시지 아니하시면 너희가 버려진 자라고 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그 수많은 문제들은 결국 믿음의 문제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주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왜 결론이 되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14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바라본다는 것입니까? 바로 앞의 단락에서 본 대로 현재 보이는 하늘과 땅이 다 불에 타 사라지고 의에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이 재림하시면 주님 앞에서 나타날 것인데 그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점도 없이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날 수가 있습니까? 베드로후서 2:12-14절을 봅니다. “12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13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14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 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여기서 말하는 점과 흠이란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입니다. 이들이 교묘하게 행하는 일들은 세상에서가 아니라 교회라는 곳에서 이렇게 행하는 것입니다.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을 미리 하여 두는 것은 베드로후서 3:17절의 말씀처럼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굳센 터는 그리스도에 정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흔들어 내려고 온갖 유혹들을 다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점도 흠도 없이 그리스도 앞에서 평강 가운데 나타나려면 이런 자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결국이 영혼의 구원인데 이 영혼의 구원이 얼마나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인지 베드로전서 1:7-9절을 봅니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성도가 고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를 얻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는다면 다시 베드로후서 3:14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나타나기를 힘쓰라” 이 말씀에 아멘인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 주님을 맞이할 수 있을지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 말씀에 아무런 감동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저 세상에 사는 일에만 바쁘고 분주한 것입니다.

 

 

 

 

오늘 길을 가다가 보니 어떤 젊은 사람이 정장을 하고 있다가 더워서 그런지 짜증스럽게 넥타이를 푸는 것을 보았습니다. 추측컨대 고향에 간다고 평소에 잘 입지 않는 양복을 입고 긴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매었으니 얼마나 더웠을까요? 그러면 왜 그렇게 꾸몄을까요? 부모형제와 친구들을 만나는데 자신이 초라해 보이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입니다. 점도 흠도 없도록 꾸며서 나가고 싶은 것입니다. 저도 옛날에 명절에 집에 가려고 하니 돈이 없어서 가불하여 간 적이 있습니다. 가불해서 선물도 사고 용돈도 드리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원한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까? 사도행전 17장에서 바울사도가 그리스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도처에 널린 신전을 보고서 분이 가득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천지를 지으신 신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오히려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라고 증거 합니다.

 

 

 

 

로마서 11:35절에서도 누가 먼저 주께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고 하십니다. 이는 만물이 다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도 돌아감이라고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인데 우리가 그 앞에 무슨 선물보따리를 들고 간다고 해서 받아들여질 것이 있겠습니까? 땅을 바치겠습니까? 황금을 바치겠습니까? 우리가 지어낸 건물들을 바치겠습니까? 이 모든 것들이 다 불살라진다고 하는데 무엇을 준비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에베소서 5:25-27절입니다.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흠이 없게 하신다는 말씀이 여기서도 나옵니다. 우리 주님 오실 때에 흠과 점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티나 주름잡힌 것도 없이 완벽하게 거룩한 모습으로 나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으로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자신을 거룩하게 한다고 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점점 더 거룩하고 깨끗하게 자신을 자신이 유지한다고 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런 일의 전문가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하여 장로들의 유전까지 만들어 음식을 먹기 전에는 꼭 손을 씻고서 먹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자 왜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지 않느냐고 힐난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7장에서 보시면 이들을 향하여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멀다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그들의 마음의 문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속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가 있습니까? 손을 씻을 수도 있습니다. 금식을 할 수도 있습니다. 금욕적인 생활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속에서 나오는 더러운 것들을 점도 흠도 없이 깨끗하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에베소서 5장의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을 깨끗하게 하셔서 점도 티도 주름잡힌 것도 없이 깨끗하게 세우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인 것입니다. 이 은혜를 알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주시기 위하여 일하신 주님을 알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15-17절입니다.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고 합니다. 지금도 오래 참고 계시는 것은 9절에서도 보았습니다만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와야 할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복음의 소식을 바울도 그렇게 썼다고 합니다. 그가 모든 편지에도 이와 같이 썼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억지로 풀다가 멸망에 이르게 될까 염려합니다. 억지로 푼다는 것은 교묘하게 푼다는 것으로도 번역이 됩니다. 그러면 왜 성경을 억지로 교묘하게 푸는 것입니까?

 

 

 

 

자신의 주장과 교리를 지키기 위하여 아전인수식으로 푸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오늘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믿음이냐 행함이냐는 문제를 가지고 교회역사 2천년 동안 계속되어 온 것처럼 오늘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굳센데서 떨어지는 자들도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18절입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수록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베드로후서 1:1-3절의 내용을 다시 결론으로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3장에서 바울사도는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알아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주님께만 영광이 돌려지는 것입니다. 영광이 이제와 영원할 날까지 주님께!

 

 

 

 

출처 : 심플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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