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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베드로전서 강해

공 상희 2009. 5. 6. 12:56

 

 

 

 

 

 

 

베드로전서 강해

 

 

 

창원 늘푸른교회 이장우 목사

 

 

 

 

 

 

베드로전서 1:1-2 흩어진 나그네 2006. 1. 25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찌어다

 

 

 

 

오늘부터 베드로 전 후서를 보려고 합니다. 수요일에 구약의 소선지서와 신약의 서신서 들을 교대로 보고 있는 중에 베드로전서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구약과 신약을 교대로 보면서 구약과 신약을 대비해 볼 수가 있어서 좋습니다.

 

 

 

 

지난주까지 구약의 스바냐서를 보았습니다. 스바냐서를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 그것도 남쪽 유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마저 진멸당하여 마땅한지 그 죄악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받고, 제사장이 있으며, 율법으로 백성을 섬겨야하는 왕과 지도자들이 주어진 나라가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을 거역하게 되는지를 보면서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들의 범죄로 인하여 전부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소멸되어야 하는데 갑자기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의 조건이나 회개가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구원이 일어났다는 것은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자기 이름과 자기 영광을 위하여 일으키신 사건임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구원 하시고서는 하나님의 자기 솜씨를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선지자들의 기록인 것입니다.

 

 

 

 

지금 새벽기도회 때 보는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렇게 간구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레미야 14:7-9절입니다. “봉독” 자신들의 죄악과 타락과 범죄를 인정합니다. 그러면 구원 받을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함에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여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들이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버리지 말아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남은 자란 자기 이름을 의지한 자들이 아니라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남은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구약을 모르고 신약을 보게 되면 이런 오해에 빠지게 됩니다. 성경에서 무엇을 하라 하지 말라는 것은 우리 인간이 무엇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기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상식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식이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도 있고, 아니 지킬 수도 있다는 자기 주체성과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기에 나오는 발상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 사도들의 증언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율법이 가입한 것은 죄로 심히 죄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사람을 죄 아래 가두어 버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죄인 줄 모르는데 율법이 가입하니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율법이 가입하여 사람이 죄 아래 갇혀 있다는 사실도 사실은 성령이 임하여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베드로 사도가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베드로 그러면 무식한 어부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4:1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베드로와 요한이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서 구약의 흐름을 이야기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증거하고 있으니 사람들의 반응이 학문 없는 자가 어떻게 저렇게 말을 잘 하는가 하면서 의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학문이 없다는 것은 바울사도처럼 가말리엘 문하에서 특별하게 공부한 그런 학문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베드로가 율법도 모르고 아무렇게나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율법대로 할례를 행하고 집에서든 회당에서든 율법의 교육을 받으면서 자랍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이방인 백부장 고넬료 에게 전도하러 가라는 주님의 지시를 받을 때에 환상으로 부정한 음식을 먹으라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정도로 율법을 알고 지키는 사람입니다.

 

 

 

 

율법의 영향이 성령이 임하고 나서 복음을 전하면서도 떨쳐버릴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메여있던 자들입니다. 나중에 이방인과 식사를 하다가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들어오자 먹지 않았던 것처럼 하다가 바울에게 심한 책망을 받기도 합니다만 그 정도로 율법을 알고 지키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복음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약만 아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바울이 전한 복음도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모습을 성경에 나온 대로 몇 부분을 보겠습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 잡은 어부로서 안드레와 형제이고 요한과 야고보와 동업도 하였습니다. 이들이 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다른 제자들보다 더 놀라운 것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함에도 서로간의 시기와 질투들이 나오는 것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의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것을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게 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고백한 것이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로 된 것이기에 그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반석위에 교회를 세우리라는 말씀을 합니다.

 

 

 

 

그 반석이란 시몬의 이름을 예수님께서 베드로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혈육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세워진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경험을 베드로 자신이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부인할지라도 자신은 부인하지 않는다고 장담하면서 죽는 자리까지 함께 가겠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네가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자신은 그렇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결국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세 번 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이 고백만이 아니라 변화산에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시는 주님도 보았습니다. 그러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왔는데 그것이 무효가 되는 것입니까?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다고 하십니다. 비록 베드로가 세 번이나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부인할지라도 예수님께서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기에 그는 다시 돌이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돌이킨 후에 예수님의 양 떼를 먹이라고 부활 후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시고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무엇을 알게 되었습니까? 율법이 무엇이며 예수님이 누구신지 구약의 성경을 인용하면서 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될 것도 예수님께서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25-26절입니다.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베드로 사도가 성령이 임하고 나서 모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4장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보면 구약의 요엘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면서 성령의 임하심을 증거 하고 다윗의 시편을 들어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지금 성령을 보내신다고 담대하게 증거 하게 됩니다. 심지어 공회에서도 구약 성경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됩니다. 그러자 장로와 서기관들이 반박할 수 없어서 위협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지 못하게 하지만 오히려 우리가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옳은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은지 판단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된 것이 베드로의 일입니까 주님의 일입니까? 주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키자 사람들이 자신을 주목하여 볼 때 무어라고 합니까? 이 사람이 일어난 것이 왜 나의 권능이나 경건으로 일어난 것처럼 나를 주목하느냐고 하면서 자기를 부인합니다. 이 사람이 일어나게 된 것은 너희가 생명의 주를 죽였지만 그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 내셨고 그 이름이 낫게 하였다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을 알게 된 베드로가 이 서신을 기록하였기에 이미 바울사도가 전한 복음을 다 알고 있는 상태에서 전한 말씀으로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후서 3:15-16절의 말씀을 봅니다. “봉독” 바울사도가 편지 쓴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서신을 보면서 또다시 율법을 보는 것처럼 우리가 무엇을 지키고 아니 지키고의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놀라운 성취가 이루어졌고 그것이 성도에게 신기하게 공급되어졌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 억지로 풀다가 멸망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억지로 풀다가 멸망하게 된 자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율법학자와 서기관들입니다. 물론 그들의 해석을 받아들인 자들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몰라 본 것입니다. 그들이 열심히 율법지킴으로 만들어낸 자기들의 의가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지 아니한 결과가 된 것입니다. 이제 구약을 보든 신약을 보든 어떻게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시고 자기 택하신 백성에게 주어지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3절입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은 자기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우리의 영광이나 우리의 덕으로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그 신기한 능력 속으로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베드로전서 1:1-2절입니다. 여러 지명이 나오는 것은 지금의 터키에 있는 곳들입니다. 이 곳에만 흩어진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흩어진 성도들이 있습니다. 오순절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절기를 지키러 왔다가 복음을 듣고 또 흩어져간 것입니다. 야고보의 순교로 인하여 사도들 외에 많은 사람들이 각처로 흩어져 갔습니다. 그들에게 베드로전후서는 소망을 주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사는 것이 성도의 모습이기에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면서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조상들의 특징이 이 땅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이라는 증거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을 위하여 더 나은 본향을 마련하여 놓았다고 합니다. 이번 주가 설날이라서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참된 본향은 새 하늘과 새 땅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누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한 구절 안에 어마어마한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른 것입니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부르신 그들을 거룩하게 하신 것입니다.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우리가 거룩하여 졌으니 이제 순종하자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하심이 순종으로 나온 것입니다.

 

 

 

 

새 번역에서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미리 아심을 따라 여러분을 택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해주셨으므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되었으며, 그의 피로 정결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은혜와 평화가 가득하기를 빕니다” 미리 아신 자를 거룩하게 하셔서 즉 구별하셔서 피 뿌림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내가 안 것이 아니고 내가 거룩하려고 노력을 한 것이 아니고 내 땀이나 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입은 자들에게는 이 말씀이 놀라운 은혜와 평강으로 주어질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3-7 찬송하리로다. 2006. 2. 1

 

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고향에 잘 다녀오셨습니까? 고향이라고 찾아가서 하루 이틀 다니다보면 여러모로 피곤하여 집니다. 그래서 빨리 내 집으로 돌아가서 푹 쉬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정작 우리의 고향은 어디가 고향입니까? 지금 살고 있는 곳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태어나서 자라고 부모님이 살고 있는 곳이 고향입니까?

 

 

 

 

성도는 이곳도 저곳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1장 1절 말씀에 보시면 성도의 별명이 흩어진 나그네인 것입니다. 지난주에 보았습니다만 우리가 흩어진 나그네이기에 이 땅에 고향을 두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사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우리가 고향을 다녀왔기에 어느 고향이 참된 고향인지 다시 한번 그 말씀을 찾아보기를 원합니다.

 

 

 

 

히브리서 11:13-16절입니다.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 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면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자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반대로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자기의 영원한 본향인 것처럼 살며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 성,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지 않고 사는 자들은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특징은 이 땅에서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늘 쓸쓸하게 나그네 설움이나 부르면서 사는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나그네로 살게 하심을 찬양하면서 살게 됩니다. 흩어진 나그네로 살게 하시는 것은 아무나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미리 아신 자를 성령께서 분리시켜 거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미리 아시고 부르신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왜 피를 뿌려야 합니까?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습니다. 피는 곧 생명입니다. 죄로 인하여 생명에 이를 수 없는 자를 대속하기 위하여 그 아들의 피 뿌림을 얻게하시기 위하여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사말을 하고나니 갑자기 찬송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찬송하리로다. 무엇을 찬송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흔히 찬송하고 감사하고 영광을 돌릴 때는 나에게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날 경우에 찬송을 한다고 합니다. 나에게 좋은 일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 이 세상에서 좋은 것들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좋아하는 것들을 가지고 찬송을 한다고 합니다. 물론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찬송과 감사를 돌려야 마땅합니다.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우리가 평소에 찬송을 한다는 내용과 너무나 다른 내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3-4절입니다. 긍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거듭남, 산 소망, 하늘의 기업 이런 내용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찬송하고 감사하는 그런 내용이 있습니까? 전부 영적인 것들입니다. 주의 성령이 임하지 않고서는 이런 내용을 찬송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이 보면 이런 내용은 허황된 이야기로, 꿈꾸는 이야기로 들릴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성공을 하지 못하였기에 보이지 않는 세상을 가지고 위안을 삼으려고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입은 자라면 이 말씀을 인하여 찬송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입니다.
세상에 수많은 하나님이 있습니다. 제가 어저께 부산에 가면서 어느 교회당 바깥벽에 대형 태극기가 걸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감리교는 강단에 태극기를 올려놓은 것을 보았는데 그 교회는 장로교인데 대형 태극기를 걸어놓고서 주여 대한민국을 축복하소서! 그런 글을 적어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구덕운동장 바로 옆이라서 저는 붉은 악마들이 대형 태극기를 걸어놓은 줄 알았는데 교회에서 붙여 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대한민국의 하나님입니까?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보호하시는 하나님이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맞습니까?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대한민국의 하나님은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은 우리가 만들어낸 상상의 하나님입니다. 그런 착각을 유대인들도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친히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임을 철썩 같이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요한복음 8:31-59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인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줄 안다고 하시면서 그러나 너희의 행사를 보니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하는 말이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않고 아버지는 한분 뿐이시니 곧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아버지 논쟁이 나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뿐인 하나님 아버지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너희의 아비는 마귀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겠지요!

 

 

 

 

오늘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아버지는 어떤 하나님 아버지입니까?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입니까? 내가 상상한 아버지 하나님입니까? 요한복음 1:18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엉터리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보지도 알지도 못한 예수님께서 아버지라고 부르신 그 하나님을 알 수가 있습니까? 3절에 보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심으로 알게 됩니다. 요한복음 20:17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지금 베드로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내 아버지를 너희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자기 제자들이 하나님을 드디어 아버지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거듭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에 자기 뜻대로 부모를 정하거나 나라를 정하여 태어날 수가 없는 것처럼 거듭나는 것도 사람의 능력으로 될 수가 없습니다. 그 예를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의 경우를 통하여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하여도 거듭나지 못하였고 거듭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듭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라고 부르신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 것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의 능력입니다. 그 사실을 자기 백성들에게 알리시고 증거 하시기 위하여 성령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이 영을 로마서 8:15절에서는 양자의 영이라고 합니다. 양자의 영을 받았기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 안에 찬송이 터져 나옵니까? 지금 베드로 사도는 이런 복음의 말씀을 증거 하기도 전에 찬송이 먼저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에베소서 1:3-6절에서 이렇게 증거 하고 있습니다. “봉독” 하늘에 신령한 복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전에 자기 백성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증거 하는데 그 가슴이 벅차서 먼저 찬송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또 찬송할 내용은 산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설날이라고 인사를 하면서 새해에는 소원하는 바들이 다 이루어지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 말을 덕담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모르고 거듭나지 아니하면 그 어떤 소망하는 것이라고 하여도 다 썩어지고 더럽혀지고 쇠하여지는 것들입니다. 그런 것을 욕심이라고 합니다.

 

 

 

 

산 소망을 견고케 하시기 위하여 시련을 주십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감사의 찬송이 터져 나오고 있습니까? 우리는 늘 그렇지 않는 것입니다. 잠시 잠간만 이런 말씀이 은혜가 되지 늘 은혜가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것이 또 있습니다. 5-7절입니다. 그것을 시련입니다. 여러 가지 시련을 통하여 헛된 소망을 가지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여러 가지 시험 중에도 하나님은 말세에 나태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시 잠간 당하는 시련으로 인하여 염려하지 아니할 수가 없지만 그러나 그런 시련을 통하여 불로 연단하여 나온 금보다 더 나은 믿음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금을 만들기 위하여 용광로에 넣어 불순물을 제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금보다 더 나은 믿음을 위하여 성도에게 여러 가지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시련을 통하여 불순물이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붙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환난 중에도 찬송할 이유가 분명한 것입니다.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하는 찬송가 가사처럼 믿음의 시련이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찬송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시련 가운데 찬송이 나오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하늘의 기업은 우리의 실력과 능력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3절을 봅니다. 긍휼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로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늘 썩어지고 더럽혀지고 쇠하여 질 땅의 것들을 좇아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그 아들의 피로 구속하시고 하늘의 소망을 가지게 하신 것입니다. 하늘의 소망이 희미하여 지면 시련을 통하여서라도 하늘의 기업을 분명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완벽하게 인도하여 가시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찬송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자기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것들을 인하여 찬송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8-12 믿음의 결국 2006. 2. 8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 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는 자들의 노력이나 애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거듭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우리가 그 은혜를 갚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마땅하고 또 그 노력에 따른 보상으로 하늘에서 상도 차이가 나게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사고방식은 우리가 이 세상의 방식에 젖어있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 것입니다. 무언가 처음에 공짜인 것 같이 주지만 나중에 엄청난 청구서가 날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의 상이란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17절입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 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느니라”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부하고 자기 힘으로 살겠다고 나왔기에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것입니다. 그 결과가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은혜를 받는 자리에 들어선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구원이후에는 무엇을 합니까? 그 은혜가 얼마나 크고 풍성하고 놀라운지를 알게 됩니다. 또한 왜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무궁한 은혜를 받아야만 되는지 자신의 죄와 악함과 연약함도 동시에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서 베드로 사도는 찬송하리로다하는 고백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 삼성그룹의 회장이 8천억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하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그동안 불법으로 모은 돈을 반성하는 의미도 있겠지요! 그런데 그 돈 가운에 2천2백억이 얼마 전에 죽은 딸의 유산도 포함이 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외국에서 유학하는 딸이 재벌아버지를 만나서 2천2백억의 재산이 있었지만 그의 죽음을 막아내지 못하였습니다. 아무리 주고 싶어도 죽어버리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이 상속받을 하늘나라의 기업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업을 받을 자가 연약하여 죽어버리면 받지 못하는 그런 기업이 아닙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능력으로 거듭나게 하셔서 살아있는 소망을 가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분명하고 확실한지 불로 연단한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의 연단을 통하여서도 반드시 만들어 내시고야 마신다는 것입니다. 어찌 찬양하지 아니할 수가 있습니까? 어찌 기뻐하지 아니할 수가 있습니까?

 

 

 

 

8-9절입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나 사랑한다고 합니다. 흩어진 나그네들이 직접 예수님을 보지는 못하였을지라도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니 보지도 못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은 보여주어야 믿는 세상입니다. 마치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입니다. 내가 직접 손의 못 자국과 허리의 창 자국을 만져 보아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도마에게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확인을 시켜 주셨습니다. 그때 도마가 나의 주님이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죽은 자가 살아나고 하나님께서 택하시지 않은 자는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그들의 지금 믿지 아니하는 핑계를 대기 위하여 그렇게 말할 뿐입니다. 그리고 영광을 받으신 주님을 죄인이 만나게 되면 바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어찌 죄인이 하나님을 뵐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믿는 자들은 어떻게 보지도 않고 믿게 된 것입니까? 성령이 임하심으로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의 일인 것이며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동일한 복음을 듣고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나오는 반응이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즐거움과 기쁨이기에 이런 즐거움과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즐거움과 기쁨인 것입니다. 받은 사람만이 아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은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과 기쁨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즐거움과 기쁨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첫 사랑의 감격을 이야기 합니다. 옛날에는 한때 그랬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 말해도 그저 감격이 되고 기쁨이 되었다는 말들을 합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 기쁨이 더욱 풍성하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것들로 채워지고 눈이 가려져서 참된 기쁨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 아닙니까?

 

 

 

 

요한계시록 2장에서 에베소교회를 칭찬도 하지만 책망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책망은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주어진 하늘의 신령한 것들로 인한 기쁨이 사라졌다면 회개하여야 합니다. 어디에서 떨어졌는지를 조사해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즐거움과 기쁨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들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이라면 다 썩어지고 쇠하여지고 없어질 것입니다. 성도인데도 계속하여 세상의 것들을 붙들고 있다면 연단을 통하여서도 반드시 참된 기쁨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기에 이 썩어질 세상에 물들어 살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주님께서 살아계셔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시고 성령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시는 것은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을 인한 것입니다.

 

 

 

 

믿음의 결국인 영혼의 구원이 주어지기 위하여 얼마나 엄청난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겠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생각할 때에 내가 믿어줌으로 무슨 자격증을 얻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구원은 일단 확보 해놓았다고 생각하고서 그 다음부터 얼마나 노력해서 이 땅에서도 복을 받고 하늘에서도 상을 받을 가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으로 신앙생활을 하려면 힘들고 지치는 것입니다. 지치게 되면 구원의 확신이라는 자격증만 챙겨서 천국만 가고 상은 받지 않아도 그만 이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은혜도 아니고 사랑도 아닙니다. 그리고 구원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10절입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살폈다고 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선지자 그러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책망을 하고 심판을 선포한 것으로 압니다. 대부분의 내용이 사실 그런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런 심판과 저주의 말씀 중에서도 은혜의 말씀들은 항상 있습니다.

 

 

 

 

마치 캄캄한 흑암 속에 작은 한 줄기의 빛처럼, 또는 흙탕물이 된 우물 속에 바늘구멍 같은 샘물이 나오는 것처럼 은혜의 말씀들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선지자들이 살펴본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늘 거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어떻게 하나님께서 저들을 진멸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실 것인지를 살펴보았던 것입니다. 언약의 저주에 의하면 반드시 진멸되어야 마땅한데 진멸하지 아니하는 것을 보면서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이 은혜를 예언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11절입니다. 선지자들이 율법을 말하고 심판을 말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은혜를 내다보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란 성령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구약시대에 오신 것이 아니라 구약의 끝과 신약 시작되는 지점에 오셨는데 어떻게 그리스도의 영이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임하여 활동하신 것입니까? 우리의 시간개념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22:41-46절입니다. “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 ㅁ)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하였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46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요한복음 8:56-59절입니다.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7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59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이 두 곳의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도 다윗도 다 예수님을 증거 한 선지자들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그들에게 감동을 주셔서 예언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시간 개념으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임한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야만 이런 말씀에 아멘이 되는 것입니다. 그 영이 임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그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게 되고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선지자들이 이렇게 섬긴 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예수를 믿는 우리를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편지를 받는 초대교회 때로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전하여진 것입니다. 이 소식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이냐 하면 하늘의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시중드는 천사들도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그렇게 반역하고 죄만 짓는 저런 자를 택하시고 자기의 백성을 삼으실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언약의 내용이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 하셨지만 그 언약을 거역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하나님이 진멸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실 것인지를 천사들도 굽혀서 살펴본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방법으로 하나님의 모든 언약을 성취하시면서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한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으로 인하여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그의 부활하심으로 인하여 의롭다 하셔서 자기의 백성을 삼으신 것입니다. 그런 자기 백성에게 주어진 선물은 하늘의 영원한 기업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을 누가 이루어내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맹세를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그 결과가 자기 백성에게는 구원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 믿음의 결국이 영혼의 구원입니다. 이런 은혜를 알아갈수록 믿을수록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마지막을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베드로후서 3:18절입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자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베드로전서 1:13-17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2006. 2. 15

 

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찌어다 14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15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성경을 볼 때에 중요한 단어들이 있습니다. 설교 제목을 삼아도 중요한 단어를 중심으로 설교제목을 삼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중에 무슨 단어가 중요하게 여겨집니까? 저는 제목을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라는 제목을 잡았습니다. 저는 그 단어를 중요하게 여겨서 설교의 흐름도 그렇게 전개를 하고자 합니다만 정작 전체의 흐름을 알려면 가장 중요한 단어가 ‘그러므로’라는 말입니다.

 

 

 

 

13절에서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은 지금까지 말씀한 모든 것을 까닭으로 하여 이제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12절까지 한 번 더 요약하여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각 지역에 흩어진 나그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이미 복음을 듣고 믿고 있는 자들에게 편지 한 것입니다. 비록 흩어진 나그네이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를 먼저 증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라고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역사가 다 나타납니다. 그 엄청난 하나님의 일로 인하여 성도가 된 것입니다. 이 내용을 이제 본격적으로 증거 하려고 하니 먼저 찬송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통하여 죄인을 거듭나게 하시고 산 소망을 주시고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하늘의 기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한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는데 그 보호하심이 얼마나 완벽한가 하면 믿음의 여러 가지 시련을 통하여 정금같이 연단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존귀와 영광을 얻게 하신 다는 것입니다. 이런 소식을 듣고 믿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소식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증거 하여 놓았고 하늘의 천사들도 살펴보기 원한 것입니다.

 

 

 

 

방금 요약한 이 말씀이 믿어지지 아니하는 사람에게는 ‘그러므로’ 하면서 다음의 말씀을 전개하여도 알 수가 없는 내용들입니다. 이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지금부터 계속되는 말씀입니다. 지금부터 계속되는 말씀에 아멘이 되시면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예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관심도 없으면 하늘의 소망보다 땅에 소망을 두고 있기에 그럴 것입니다. 부디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13절입니다. ‘마음에 허리를 동이고’ 허리를 동인다는 것은 한복이나 두루마기를 입고 먼 길을 가거나 일을 할 때에 허리에 끈을 묶는 것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성경에서 허리에 끈을 매는 것에 대하여 출애굽기 12:11절을 봅니다. “너희는 그것을 이렇게 먹을찌니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 유월절 저녁 식사를 하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30년의 종살이를 하고 이제 하나님의 언약대로 출애굽하여 가나안땅에 들어가야 하는 때입니다. 마지막 10번째 재앙은 짐승이나 사람이나 간에 초 태생의 수컷이 죽임당하는 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별되는 유일한 방법은 어린 양의 피를 바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잡은 어린양의 고기를 불에 구워서 먹게 되는데 먹는 모습이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먹어야 하는 것입니까? 떠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애굽에서 떠나야 하기 때문에 허리에 띠를 띠고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허리를 동인 것입니다. 식사를 하다가도 신호만 떨어지면 바로 떠나는 자세로 먹는 것입니다. 이때에 허리를 동이는 것은 옷을 묶기 위하여 허리를 동이면 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고 합니다. 어린 양의 피를 바를 때는 애굽에서 떠나기 위하여 허리에 끈을 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바른 이 시대의 성도들은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예수님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13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마음의 허리만 동일 뿐만 아니라 근신까지 하여야 합니다. 근신이란 술 취하지 않고 정신을 바짝 차린 상태입니다. 세상이나 다른 것에도 마음 빼앗기지 아니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 하시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이 다 불에 살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시에 허리에 띠를 띠는 정도가 아니라 마음의 허리를 동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와 함께 하늘에 속한 영원한 기업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그러므로’를 통과하여야 된다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선택된 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는 비록 자신이 땅을 향하여 살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런 말씀 앞에 회개하면서 다시 하늘의 기업을 바라보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의 허리를 동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다리는 모습을 성경 한곳에서 더 찾아보기를 원합니다.

 

 

 

 

누가복음 12:35-40절입니다.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여기서도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기다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인이 혼인잔치에 갔다가 늦게 돌아오는데도 종들이 그렇게 깨어 있으면 그 종들이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복이 무엇입니까?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수종드는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하여도 마땅히 할 것을 한것 뿐인 종에게 주인이 친히 허리에 띠를 띠고 종을 섬긴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예수님께서 친히 하셨습니다. 유월절 마지막 만찬 때에 예수님께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0:28절에서 인자는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하고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주님의 섬김을 먼저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피 뿌림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은 다시 오실 주님을 사랑함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즐거움과 기쁨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주님 고대가를 부르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 자에게 또 놀라운 소식이 있습니다.

 

 

 

 

역시 13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가 있습니다. 이 은혜가 무엇입니까? 이미 1-12절에서 성도에게 주어진 은혜와 또 약속된 은혜가 있습니다. 거듭나게 하시고 산 소망을 주셨는데 그 소망은 하늘의 영원한 기업이며 그 기업을 받음과 동시에 예수님과 함께 영광과 존귀와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은혜를 사모하면서 마름의 허리를 동이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가져올 은혜’는 어떤 것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성도에게 주어질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입니다. 이것은 이미 약속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최종적인 몸의 부활과 하늘의 기업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보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주일 낮에 보고 있는 고린도후서 3:18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그러므로 성도는 이 가져올 은혜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성도에게 주셨고 또한 친히 마련하셔서 가지고 오실 이 은혜를 기다리기에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을 믿고 그 은혜를 알고 나면 은혜를 갚자는 식으로 나섭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니 우리가 은혜를 갚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져올 은혜입니다. 지금까지 베푸신 은혜도 한량이 없지만 또 가져올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그 은혜란 지금 우리의 몸으로는 다 받을 수가 없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신령한 몸이 되어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영광의 형상과 같이 변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게 되는데 이것이 주의 영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14-16절입니다. 여기서도 ‘그러므로’를 붙여야 되겠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기다리는 자는 알지 못할 때에 사욕을 쫓던 것을 본 삼지 말고 순종하는 자식처럼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성경에 기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룩하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만드시고야 마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공부하라고 하면서 자신은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다면 자식이 공부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참고서도 사주고 함께 매도 들고 상도 주면서 공부하도록 만들어내고야 마는 것이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안에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능하지 못하기에 그렇게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마음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거룩하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반드시 그렇게 만들고 마시겠다는 하나님의 거룩한 의지인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를 성령으로 구별하여 내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입니다. 거룩이라는 것이 구별입니다. 이 썩어질 세상에서 구별하여 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함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가 구속을 받은 것은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보배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닙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거룩이 없습니다. 이렇게 거룩함을 입은 자들은 거룩하게 하신 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마음 자세가 바로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한 성도입니다. 우리가 흔히 거룩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어떤 특정한 행동을 통하여 거룩을 나타내려고 하였습니다. 구약에서는 먹는 것과 입는 것까지 구별되게 하였습니다. 먹는 것도 땅에 붙어서 기어 다니는 것을 먹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물고기도 비늘이 있고 지느러미가 있어서 물결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은 먹을 수 있고 비늘이나 지느러미가 없이 강이나 바다의 바닥에 붙어사는 것은 먹지 못하게 하시 것입니다. 땅에서 떨어져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거룩이라 구별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께서 마음을 보십니다.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간에 그 마음이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17절입니다. 그래서 외모를 보시지 않고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기에 나그네로 있을 때에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하는 것입니다. 즉 겉으로의 구별이 아니라 속의 구별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속의 구별이란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주님을 기다리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겉으로도 드러날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조상들이 찾은 것은 이 땅의 고향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는 나그네와 외국인으로 살았습니다. 우리 마음의 허리를 다시 여미고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사모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1:18-21 보배로운 피 2006. 2. 22

 

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1)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어제 저녁시간에 심방이 있어서 남전도회 회장에게 전화를 하여 같이 갈 수 있을지 물었습니다. 삼성에 다니는데 전에는 일찍 출근하고 자기 일 다 하면 빨리 퇴근할 수도 있다고 알고 있어서 전화를 하였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일찍 출근하고 죽을 때까지 일해야 합니다. 늦게 퇴근 하는 정도가 아니라 죽을 때 까지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세상의 모습입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죽도록 일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일해서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자신을 영원하도록 살릴 수가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가 없지만 세상은 속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좀 모아두어야지 자식 교육도 있고 장래 노후대책도 마련하게 된다고 합니다. 금과 은이 보배라고 살아가는 이런 세상에서 오늘의 말씀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할 그런 내용입니다.

 

 

 

 

1:18절입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이 편지를 받는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 알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이 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어린 양 같은 보배로운 피로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도 잘 알고 있습니다. 주일학교 때부터 들어왔고 배워왔습니다.

 

 

 

 

그러면 이제 묻습니다. 우리의 보배가 무엇입니까?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입니까? 예수님의 피 입니까? 우리가 평소에 무엇을 보배로 여기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피? 사람들이 가치 없다고 여겨지는 것에 대하여 피-하는 그런 피처럼 들리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들어야 합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다시 들어야 하는 말씀이 보배로운 피 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조상으로부터 유전되는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으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상으로부터 유전되는 망령된 행실로는 구속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지켜온 율법으로는 구속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이방인들이 행한 어떤 선행으로도 구속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들이 행할 수 있는 자구책이란 썩을 것뿐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전쟁의 포로나 노예는 은이나 금으로 살 수가 있습니다.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에 보면 나치의 포로가 가스실로 가는 것을 쉰들러씨가 돈을 주고 구하여 냅니다. 나중에 자기의 반지나 자동차로도 사람을 더 구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감동을 합니다. 그러나 가스실로 가는 유대인들을 돈으로 구하여 낼 수는 있어도 그들이 지옥으로 가는 죄에서는 구속하여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시편 49편입니다. “6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는 자는 7 아무도 결코 그 형제를 구속하지 못하며 저를 위하여 하나님께 속전을 바치지도 못할 것은 8 저희 생명의 구속이 너무 귀하며 영영히 못할 것임이라 9 저로 영존하여 썩음을 보지 않게 못하리니 10 저가 보리로다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우준하고 무지한 자도 같이 망하고 저희의 재물을 타인에게 끼치는도다 11 저희의 속생각에 그 집이 영영히 있고 그 거처가 대대에 미치리라 하여 그 전지를 자기 이름으로 칭하도다 12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13 ○저희의 이 행위는 저희의 우매함이나 후세 사람은 오히려 저희 말을 칭찬하리로다(셀라) 14 양 같이 저희를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저희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가 아침에 저희를 다스리리니 저희 아름다움이 음부에서 소멸하여 그 거처조차 없어지려니와 15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셀라) 16 사람이 치부하여 그 집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 말찌어다 17 저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 영광이 저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18 저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찌라도 19 그 역대의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영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20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조상으로부터 오는 망령된 행실이란 이미 죄가 사망의 권세를 가지고 왕 노릇을 하고 있기에 어떤 인간의 노력으로도 구속하여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풍부함으로 자긍하며 자기의 속생각에 그 집과 거처가 영영히 있으리라고 여기는 자들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3절에 보시면 이러한 행실이 우매한 것인데도 후세 사람들이 저희 말을 칭찬한다고 합니다. 오늘 이 시대가 그러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음부에 두기로 작정된 자며 사망이 그들의 목자가 되었기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는 어떤 사람입니까? 은과 금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더 보배로운 사실을 믿는 자들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만 구속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알거니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모르면 더 이상의 이야기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은과 금으로 수량화하고 측정하는 세대에서 더 이상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상에 증거 할 수 있는 것은 은과 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미문에 앉은 앉은뱅이가 무엇을 얻으려고 바라볼 때에 한 말이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 앉은뱅이가 일어났을 때에 사도들을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한 말이 왜 이 사람이 일어난 것이 우리의 권능이나 경건으로 일어난 것처럼 우리를 주목하느냐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이름으로부터 나온 믿음이 이 사람을 온전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1:19절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구속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이나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이란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유월절 어린 양을 준비하는데 흠 없는 어린 양이나 염소 가운데 일년 된 수컷을 준비하라고 합니다. 그 피를 바른 집은 죽음이 넘어간 것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모든 제물의 생축은 흠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물은 모두 점과 흠이 없이 자기 몸을 제물로 삼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이 언제부터 알려진 것입니까?

 

 

 

 

1:20절입니다. 창세전부터 알려진 것입니다. 그러나 감추어져 있다가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자기 백성을 구속하실 계획을 창세전부터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범죄하고 나서 후속조치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추가적으로 계획하신 것이 아니라 아예 창조 전에 그리스도를 인하여 구속을 계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창조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드높이는 것으로 목적삼은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시는 것도, 에덴동산에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두신 것도, 인간을 만드신 것도 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기 위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생명이 무엇이며 죽음이 무엇인지 인간이 무엇인지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제대로 알 수 있도록 지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모르면 그 사람이 세상의 학자라고 하여도 부자라고 하여도 명예와 권세를 가진 자라고 하여도 멸망하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창세전에 미리 알리신바 되었으며 구약에서도 예언한 것을 이 말세에 밝히 드러내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한 말세란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성령이 육체에 부어지는 때를 말한 것입니다. 이 성령의 오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인하여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이제 성령을 부어주시는 분으로서도 등극을 하셨기에 가능한 일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시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만 구속됨을 알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약 2천년 전에 종말이라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래서 말세에 부어진 성령을 종말론적인 성령이라고 합니다. 은이나 금을 붙들게 하면 이 세상의 종말을 믿지 않게 만듭니다. 마치 어리석은 부자가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서 이제 먹고 마시며 즐기자고 할 때에 예수님은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 재물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영이 임한 자는 종말을 사는 자들입니다. 종말을 살기에 가장 귀한 것이 은과 금이 아니라 구속의 능력이 되는 보배로운 피임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낼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사는 한 순간인들 은과 금을 무시하고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도 전기를 켜고 있으니 이렇게 환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은과 금이 전기세로 지급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로 오고갈 때에 차를 타고 오고 가야하면 은과 금이 역시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늘 마음이 어떻게 하면 돈이 좀 많아질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자동적으로 나오게 됩니다. 모든 가치를 돈으로 측량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삽니다. 그런데 어떻게 은과 금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보배로 믿고 살수가 있는 것입니까?

 

 

 

 

21절을 봅니다.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영광을 받게 하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우리가 가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선물인 것입니다. 이 믿음의 선물을 받은 사람은 자기의 믿음을 자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믿음을 주신 분만 자랑하게 되어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너희 부르심을 보라고 하면서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않고 능한 자가 많지 않고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만드시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심은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되어지는 곳이 교회이며 천국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피를 가장 보배로운 것으로 믿지 않는 사람은 천국에도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피를 가장 큰 보배로 여기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믿음인 것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자꾸만 하는 것입니까?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려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습니다! 하는 믿음의 내용과 그 믿음의 소망이 땅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게 하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믿음을, 우리의 목표를 가지고 믿습니다! 하게 되면 그 목표가 썩어질 헛된 것들을 목표로 삼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우리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 온 믿음이라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이 세상의 그 어떤 보배보다 귀한 것임을 알고 믿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위엣 것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땅의 것은 썩어질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만들어진 그 아들의 나라는 썩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하늘나라의 기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보배로운 피 임을 믿고 살게 됩니다. 이 보배로운 피가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1:22-25 항상 살아있는 말씀 2006. 3. 1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오늘이 3.1절입니다. 1919년 3월 1일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불렀건만 독립은 오지 아니하고 일본은 점점 더 힘이 있어 보이니 많은 사람들이 친일을 하였습니다. 지금 ‘1945 서울’이라는 드라마를 한 두 번 보았는데 해방전후에 친일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독립운동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일본이 1945년에 연합군에 의하여 무조건 항복을 할 것을 알았다면 그 당시에 친일을 하였겠습니까? 일본이 중국을 이겼습니다. 우리나라가 중국을 큰 나라로 여겼고 일본은 미개한 나라라고 업신 여겼는데 그런 일본이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보면서 그 힘이 영원할 것으로 본 것입니다.

 

 

 

 

왜 이런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하는가 하면, 오늘 말씀을 보시면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풀이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관심사는 늘 썩어지고 더럽혀지고 쇠하여질 것에만 관심이 가기에 오늘도 우리로 하여금 이 말씀은 정신을 차리게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없던 것에서 생기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면 무언가 있던 것이 순종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자체가 살아있고 능력이 있기에 그 말씀이 없는데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창조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로마서 11:35-36절입니다. “35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인간이 주님께 무엇을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만물이 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목숨마저 다 드렸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원래 주님의 것이기에 당연한 것입니다.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파기가 되어도 전혀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께 인간이 도대체 무엇을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이사야 40:12-17절입니다. “12 ○누가 손바닥으로 바다 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재었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명칭으로 산들을, 간칭으로 작은 산들을 달아 보았으랴 13 누가 여호와의 신을 5)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14 그가 누구로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공평의 도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뇨 15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6)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 16 레바논 짐승들은 번제 소용에도 부족하겠고 그 삼림은 그 화목 소용에도 부족할 것이라 17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 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

 

 

 

 

이 말씀 앞에서 인간이 무엇을 하나님께 해 드린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제물을 드리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지어드리겠습니까? 베르베르라는 사람이 지은 ‘개미’라는 소설에 보면 개미들이 동굴에 갇힌 몇몇 인간과 소통하면서 인간을 먹여 살리는데 그들은 인간전체를 파악을 못하여 ‘손가락’이라고 말합니다. 손가락도 붉은 색 공이 다섯 개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자체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55:10-11절입니다. “10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11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이 헛되이 돌아가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에 대하여 요한복음 1:1-5절은 이렇게 증거 하고 있습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생명으로 오셨으나 사람들이 어두움에 갇혀서 깨닫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러면 누가 영접하게 됩니까? 요한복음 1:12-13절에 보시면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만이 영접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난 것을 거듭났다고 합니다.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말씀이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결단코 주와 그리스도로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믿는 자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봅니다. 베드로전서 1:22절입니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순종해서 내가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서로 사랑하자고 합니다. 그러면 말씀의 성취력이 아니라 나의 행함의 능력이 됩니다. 말씀이 항상 살아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말씀이 어떻게 성취할까요?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만듭니다. 그렇게 되면 영혼이 깨끗하게 됩니다.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누가 뭐라고 안 해도 피차 사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지난주에 허 집사님 가족이 천안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이사 간다고 떡을 해왔습니다. 함께 나누어 먹고 집사님 가족이 갈 때에 집사님이 울었습니다. 모든 성도가 다 나와서 배웅을 하였습니다. 찬양대는 찬양연습 하다가 간다는 소식을 듣고 다 나왔습니다. 그 사람들이 우리의 친척입니까? 같은 고향이고 동문입니까? 우리와 얼마나 알았습니까? 만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사랑이 가고 오는 것입니까? 오늘 오후에 전화를 하였더니 또 울먹이면서 안부를 전하였습니다. 누가 시켜서 될 일입니까? 똑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말씀으로 확인하고서 기뻐하고 사랑할 뿐입니다. 그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제가 이 말씀으로 인사를 하지는 않았지만 아마 이 설교를 들을 것입니다. 설교를 빨리 올려달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으로 다시 인사를 합니다. 사도행전 20:32절입니다.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바울사도가 에베소교회 장로들과 헤어지면서 서로 끌어안고 눈물로 인사하는 내용입니다. 그 장로들에게 부탁하기를 내가 떠나면 흉악한 이리가 들어와서 양떼를 아끼지 아니할 것인데 그들이 어그러진 말을 하여 자기들을 따르게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은혜의 말씀께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의 능력으로 그들을 붙들어 달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23절입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거듭나기 위하여 노력하여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노력은 썩어질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육체이기 때문입니다. 흙으로 돌아갈 육체이기에 영원한 것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육은 육이요 영은 영인 것입니다. 육에서 영으로 넘어가는 방법이 인간에게서는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듭나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영생을 얻고 하늘의 영원한 기업을 받는 것은 썩지 아니할 씨로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썩지 아니할 씨가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말씀의 능력을 1:2절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이루심에 인간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시고 그의 피 뿌리심을 얻게 하려고 성령으로 구별하여 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썩어지지 아니할 씨로 된 것입니다.

 

 

 

 

24절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0:6-8절을 봅니다. “6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외쳐야 할 소리가 이 소리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풀의 꽃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운이 한번 불어버리면 다 말라버리는 풀과 같은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이란 아무것도 아닙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지음을 받았고 말씀에 의하여 풀처럼 사라지게 하시면 사라질 뿐입니다. 아무리 인생이 영광스럽다고 하여도 하루아침에 풀의 꽃처럼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잠시 사라질 헛된 아름다움에 빠져서 평생을 허덕거리며 살고 있는 불쌍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은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인생들아 너희는 한 포기 풀과 같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들리는 자는 영원한 주의 말씀을 붙들게 됩니다.

 

 

 

 

25절입니다. 그 영원한 말씀이 바로 복음입니다.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살아있고 영원히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계시고 영원히 있는 분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도 살아서 역사하시기에 복음 전하는 자들을 도구로, 나팔로 사용하셔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여 내신 자들을 불러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전하는 자의 능력도 아니고 복음을 듣는 자의 능력도 아니라 오직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의 능력이 그대로 성취가 되어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복음의 말씀을 믿는 자들이 나온다면 동일하게 말씀의 능력을 맛보는 자들이기에 서로서로 기뻐하며 사랑하게 됩니다. 누가 시켜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말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그렇게 만들어 내시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한곳만 말씀을 더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4:12-13절입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그 말씀의 능력이 베드로전서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것입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질 인생의 헛된 영광이 얼마나 속속들이 우리 골수 깊숙이 박혀있는지를 아시기에 그 예리한 말씀의 검으로 수술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와 만물을 상관하시는 분 앞에서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드러남 속에서 어찌할꼬? 탄식을 하게 되는 일이 성령의 역사로 나타납니다만 이 성령의 역사도 말씀을 떠나서 독자적으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부끄러운 그때에, 주 예수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는 복음의 말씀도 듣게 됩니다. 천지는 없어지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질 것임을 믿고 사시기를 바랍니다(마24:35).

 

 

 


베드로전서 2:1-3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2006. 3. 8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어떤 일을 할 때에 자기의 능력보다 무모하게 도전하는 사람을 보고서 엄마 젖을 더 먹고 오라고 말합니다. 그런 말을 듣는 사람은 굉장히 기분이 나쁜 말로 들립니다. 아직 젖을 먹어야 하는 어린아이라는 취급을 받기에 기분이 나쁘게 들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젖을 먹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직도 젖을 먹고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느냐는 책망의 말씀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1-3절입니다.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3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여기서 젖을 먹는다는 것은 시기와 분쟁으로 파당이 생긴 것에 대하여 책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런 의미에서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거듭나고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1절에 보시면, ‘그러므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내용으로는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거듭났다고 말씀합니다. 썩어질 씨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하여 거듭난 자들이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말씀입니다.

 

 

 

 

젖을 먹으라는 말도 기분 나쁘게 들리는데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 나쁜 정도가 아니라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이 됩니다. 세상에서 멀쩡하게 걸어 다니는 사람을 보고 당신은 아직 젖을 더 먹어야 한다든가 당신은 거듭나야 된다고 말할 때에 누가 알아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거듭나지 않았다면 결코 알아들을 수가 없는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에 보시면,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께 찾아왔을 때에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시자 어떻게 늙은 사람이 다시 태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어미의 모태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와야 합니까? 하면서 질문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하시면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썩어질 것이며 영으로 난 것은 썩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선생이라고 한 자가 육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나는 것은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1:2절의 말씀대로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입은 것이 거듭난 것입니다. 이것을 또 줄여서 이야기를 하면 1:3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것입니다. 거듭난 자는 썩을 소망이 아니라 산 소망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거듭난 사람입니다.

 

 

 

 

젖을 먹는 모든 짐승들은 태어나자말자 눈을 뜨지도 못하면서 어미의 젖은 본능적으로 빨게 됩니다. 그것이 건강하게 태어난 증거입니다. 인간도 태어나자말자 어미의 젖을 찾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거듭난 자는 반드시 신령한 젖을 사모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사모함이 없다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과연 거듭난 사람이 맞는지 아닌지 자기를 시험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모이고 있지만 과연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목사님들이 신학적으로 전공을 하였으니 우리는 거저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겠습니다. 그 복잡한 성경 언제 다 보고 알겠습니까? 그저 어떻게 하면 저주를 받지 않고 복을 받게 될지 그 방법만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식으로 나가면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는 증거입니다.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 하고서 말씀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목사님이 그렇게 말하지 않더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목사님의 말을 듣고 순종해보니 복을 받는데 어쩌라는 말입니까? 이런 식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실제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어제 화요일 부산의 모임이 있어서 갔다 오다가 저의 집사람의 잘 아는 어느 여 집사를 만났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얼마나 열심히 충성을 하는지 목사님의 말씀이라면 자다가도 일어나서 순종하는 스타일입니다. 그 목사님이 권위적으로 교인들을 사로잡고 가는 모습인데 그런 이야기를 제가 하면 안색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종교적인 모습이라고 복음이란 이런 것이라고 가끔 만날 때 마다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목사님이 시키는 대로 하니 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16년을 충성하여 여 집사가 교회의 회계가 되었는데 그렇게 충성하면서도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한마디씩 한 모양입니다. 드디어 작년에 어떤 문제로 인하여 목사님과 갈등이 생기고 교회를 나오게 되는 경우가 생긴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모릅니다. 다른 교회를 가면서 이제 성경을 다시 보아야겠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제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떤 개척교회를 갔더니 주보에 목회자에게 잘하면 자녀가 축복을 받는다는 말을 보고서는 이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전에만 해도 그것을 진리로 여겼는데 그런 눈이 튀어지는데 16년이 걸린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합니까?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것은 모든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단어들이 방금 제가 예로 들은 그 집사가 다 당한 일입니다. 지금도 당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악독하게 나오는지 교회를 어지럽게 했다고 경찰에 고소한다고 하면서 말을 만들어 궤휼을 하고 시기와 비방하는 말을 인하여 한동안 밥도 못 먹고 잠도 자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가 거듭난 사람이라면 반드시 신령한 젖을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이 다른 것에 관심이 있으면 반드시 일어나는 일들이 악독과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인 것입니다. 이 단어들을 조금 더 살펴보면 악독이란 남을 헤치기 위한 악의입니다. 궤휼이란 남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계략입니다. 외식이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속은 아닌데도 겉으로 포장하는 것입니다. 시기와 비방하는 말은 남이 잘 되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신령한 젖을 사모하지 않는 자들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2:2절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자라면 이러한 것을 버리고 갓난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육에서 영으로 거듭난 자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먹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사단의 유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 아니라 떡으로만 산다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의 능력이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보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말씀의 능력이 오늘도 햇빛을 주시고 비를 주시고 공기를 공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소리 한번 발하시면 천하에 있는 모든 것이 망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자가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며 사모할수록 자신이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지 아니하면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줄 알고 자기에게 힘을 더하여 달라고만 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 이익이 안 되고 힘이 안 되는 모든 현실에 대하여 원망과 불평만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이웃이든, 하나님이든 왜 내 신세를 이렇게 만들어 놓았느냐며 불평과 불만만 쏟아놓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사모하면 자신의 죄를 알게 되고 그런 죄를 용서하신 주님의 은혜를 알게 됩니다. 그런 모습을 너희로 구원에 이르게 자라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다시 봅니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함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령한 젖을 사모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까? 결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거듭난 자는 구원을 받은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입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을 아는 자는 성령이 임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자들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구원에 이른다는 것은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를 알아가라는 것입니다.

 

 

 

 

지금 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들은 먹고 마시며 놀기에 바쁩니다. 그러나 정작 지금부터 제대로 공부를 해야 하는 때인 것입니다. 새롭게 공부할 세계가 얼마나 무궁무진 한지를 안다면 지금 먹고 마시는 시간이 아까울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예수 믿고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면 그때부터 이제 놀아도 구원되겠네! 하면서 노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또는 반대로 이제 구원을 받았으니 예수님은 가만히 계시기 바랍니다. 제가 그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다가 혹시 제가 힘이 부족하면 그때 잠간씩만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식으로 나올 수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후자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자가 신령한 젖을 사모하면 할수록 왜 은혜로 구원이 이루어지는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말해도 모르는 세계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구원이 무엇인지 왜 은혜인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는 것입니다. 마치 대학 신입생이 대학에 들어와서 온 세상의 모든 공부를 다 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처럼 거듭난 자는 신령한 젖을 사모하면 할수록 모든 것이 은혜로 된 것임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소변을 편안하게 볼 때는 그것이 은혜인줄 모르고 삽니다. 그런데 갑자기 신장에 이상이 와서 소변을 볼 수가 없으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태어나서 지금까지 고장한번 안 나고 소변이 잘 나온 것에 대한 감사가 나오기보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병이 들었는가 하면서 이웃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반응이 나오겠습니까? 지금까지 지내온 것도 주님의 은혜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약하고 병들게 하심을 통하여서도 더욱 주를 의지하게 하옵소서! 이것이 신령한 젖을 사모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면 세상에서 성공을 하고 복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왜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야하는지를 점점 더 깊게 높게 넓게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나오는 고백은 범사에 감사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시켜서 될 일이 또한 아닙니다.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사람이 그 신령한 은혜를 맛보게 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2:3절입니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합니다. 신령한 젖을 통하여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더욱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가끔 이 마트에 가면 맛보기를 내 놓습니다. 상당히 많은 양을 내 놓으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시식해봅니다. 그 맛을 보고 맛이 좋다고 여긴 사람은 사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의 인자를 맛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구원은 주님의 인자로 된 것입니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기에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인자를 맛본 사람은 더욱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인자하심을 찬송할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용서를 받은 것은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보배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임을, 그렇게 된 것이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주의 인자함으로 된 것임을 더욱 많이 맛보아 알아가도록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2:4-8 버린 돌 2006. 3. 15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6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오늘 말씀에 돌이라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사람에게 버린 받은 돌,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 모퉁이 돌, 건축자의 버린 돌, 모퉁이의 머릿돌, 부딪히는 돌, 거치는 반석이라고 합니다. 무려 일곱 종류의 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돌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얼마 전에 아파트의 쓰레기 분리수거하는 곳에서 어떤 초등학생이 바퀴가 달린 가방을 주워서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끌고 가는 것입니다. 마침 그때 그 아이의 어머니가 보고서는 기겁을 하면서 왜 또 그런 것을 주워 오느냐며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아마 평소에도 그런 물건을 잘 주워서 오는 아이인가 봅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아주 아쉬운 듯이 아직 쓸만한데 하면서 입맛을 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모두 이 아이와 같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수많은 물건들이 있는데 그 물건들을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필요하고 이익이 되는 것들을 우선적으로 확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저것을 저울질하면서 모아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계속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 있는가 하면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지고 있음으로 계속하여 불편하고 손해가 될 것은 빨리 버리는 것이 득입니다.

 

 

 

 

4절 말씀을 봅니다. 사람에게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살아있는 돌이라고 합니다. 누구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 보배로운 살아있는 돌인 이 예수님을 사람들이 왜 버렸겠습니까? 무언가 쓸만하다면 버리지 않고 주워 모았을 텐데 자기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손해만 나고 방해만 되기에 버린 것입니다.

 

 

 

 

7절에 보시면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라고 합니다. 건축자들이란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가 다 집을 짓는 사람입니다. 자기 인생을 설계하고 계획하면서 어떻게 하면 성공적인 인생을 살까? 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니 모두가 다 집을 짓는 사람들입니다. 그 인생의 집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끌어 모으는 것입니다. 행복한 인생을 위하여 아이들에게는 열심히 공부하라고 합니다. 친구를 사귀어도 도움이 되는 친구는 사귀고 그렇지 않는 친구는 버리라고 합니다.

 

 

 

 

저도 시골에서 집 뒤의 담을 쌓아본 적이 있습니다. 비가 많이 와서 무너진 담을 돌로 쌓아올리는데 여러 가지 돌을 모아서 사용합니다. 그런데 정말 불필요한 돌이 있습니다. 럭비공 같은 돌입니다. 이 돌은 어디에 놓아도 맞지를 않는 것입니다. 다른 돌들과 함께 쌓아두면 다른 돌들을 흔들리게 만드는 거추장스러운 돌입니다. 그런 돌은 깨어서 구석에 끼워놓는 돌로 사용해야 되는데 잘 깨어지지도 않으면 내다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필요가 없다고 버린바 된 돌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4절 말씀처럼 사람들에게 버린바 된 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평소에 우리는 예수님을 너무나 피상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저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합니다. 그 복이란 예수 믿어서 영생도 얻고 천국도 가고 이 세상에서도 성공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정말 이러하다면 사람들이 버릴 이유가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들은 보험들 듯이 하나 들어두어도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위안도 되고 복도 받는다면 그런 것도 하나 장만해둘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왜 이 세상이 심판받아야 하는지를 먼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심판의 근거는 이 땅을 만드신 주인이 이 땅에 오셨는데 그 주인을 싫다고 버린 것입니다. 처음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기뻐하면서 따라갔던 사람들조차 다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병 고침을 보고, 떡을 얻어먹고, 세상의 영광을 줄 임금을 기대하면서 따라 갔던 그들이 십자가 앞에서 다 버리고 도망간 것입니다. 십자가에 힘없이 매달려 죽어가는 그 예수님을 누가 자신의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섬기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버려진 돌을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보배로운 산돌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제 이 세상은 큰일이 났습니다.

 

 

 

 

마태복음 21:33-46절을 봅니다. “33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34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35 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거늘 36 다시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그렇게 하였는지라 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39 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좇아 죽였느니라 40 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41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찌니이다 4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44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45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줄 알고 46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예수님께서 자신이 어떻게 될 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다는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님 자신이 이렇게 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은 철저하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하시던 제자들에게서조차 버림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제자들이 결심을 하고 죽도록 충성하겠다고 다짐을 하여도 결국은 저주하고 맹세하면서까지 부인하고 버려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볼 때에 이 말씀을 기반으로 하여 세상을 보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버린 이 세상은 이제 큰일 났다는 마음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신자의 시각입니다.

 

 

 

 

그런데 누가 예수님을 믿으면서 이런 마음으로 믿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서 나는 진멸 받아 마땅하다는 자세로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그렇게 믿고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이라면 결코 자기의 능력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능력과 결단과 의지력으로 주님을 죽기까지 따르고자 하였지만 세 번이나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부인하였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란 예수님을 버린 적이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 자들을 예수님께서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4절을 다시 봅니다. 사람에게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님에게 나아가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다시 찾아가신 그 방식대로 오늘도 자기 백성을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바로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사람들이 싫다고 버린 그 예수님을 나의 보배라고 믿게 되며 그 안에 연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산돌이 되신 예수님에게 붙어서 신령한 집이 지어지는 것입니다. 이 신령한 이라는 단어가 성령으로라는 뜻입니다.

 

 

 

 

이제 5절을 봅니다. 성령으로 주님께 나아온 자는 주님께 붙어서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제사장이 된다고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다는 것은 자신은 예수님을 쓸모없다고 버렸지만 그 버림받은 예수님이 오히려 자신을 살려주셨다는 그 인자를 맛보아 아는 사람인 것입니다. 지난주에 거듭난 사람이라면 신령하고 순전한 젖을 사모하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 말씀을 맛보는 것이 바로 주의 인자하심인 것입니다.

 

 

 

 

6절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이사야 28:16절의 말씀의 성취를 예수님이 버림 받았지만 하나님의 보배로운 돌로 택하심을 입었다는 증거로 삼습니다. 그러므로 이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시는데 그 돌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한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부끄러운 짓을 하였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믿음으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끄러움을 예수님이 대신 담당하신 것을 이제 알기에 예수님이 버림 받은 이유를 이제 아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그러므로 버림 받은 예수님, 그 예수님을 버린 자가 바로 자신임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보배가 됩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보배로 여기고 있습니까? 나의 죄를 용서하신 보배, 나의 부끄러움을 대신 담당하신 그 보배를 믿습니까? 그런데 자기 자신이 부끄러움이 없다고 여기는 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을 보배로 여기지 않습니다. 자기 잘난 것이 있고 자기 의가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보배로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에게만 보배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시편 118:22절과 이사야 8:14절을 인용하면서 그 돌을 보배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입니다. 그 돌이 보배가 아니라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의 인생을 설계하고 건축하는 건축자라고 처음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도움이 될만한 것들을 모아보는 중에 예수도 도움이 된다고 하여 한번 모아본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예수를 조금이라도 알고 보니 전혀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도움이 되기는커녕 부딪히는 걸림돌이 예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돌을 버리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걸림돌이 됩니까? 부자가 되고 싶다고 하면,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합니다. 행복 하고 싶다고 하면,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높아지고 싶다고 하면,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살고 싶다면,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우리가 평소에 원하는 것은 단 하나도 들어주지 아니하는 분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향하여 주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서 주님을 사랑한다고, 나의 보배라고 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버림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을 믿는 자가 있고 믿지 아니하고 버리는 자가 있는데 이 결정을 인간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마 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이런 부분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다 싫다고 버려도 나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내가 믿기로 선택하였습니다. 이렇게 나올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믿는 것도 주님이 하시는 일이며 믿지 아니하는 일도 주님이 하시는 일인 것입니다.

 

 

 

 

8절을 봅니다. 예수님이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된 사람은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함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 말씀만 보면 순종하고 안하고 하는 것이 사람에게 달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씀에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만약에 사람들이 싫다고 버린 예수님을 나의 보배로 여기고 믿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잘한 것이 아니라 미리 정하셨기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에베소서 2:20-22절입니다.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원수된 것을 소멸하시고 그 피로 한 몸을 이루어내셨습니다. 이것을 집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그 집은 예수님이 모퉁이 돌이 되신 것입니다. 그 모퉁이 돌에 연결이 되어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 일을 이루어가고 계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거치는 돌, 버려야 할 돌입니까? 아니면 보배입니까? 
 

 

 

 

베드로전서 2:9-10 성도의 지위 2006. 3. 22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어린애가 태어나서 나는 누구인가를 묻지 않습니다. 거저 본능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청소년기에 들어서면서 나는 누구인가를 묻기 시작합니다. 며칠 전에 저의 딸도 ‘아빠, 정체성이 뭐예요?’ 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답을 하기를 나는 누구인가에 대하여 답할 수 있는 것이 정체성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고민들을 하면서 지금까지 지내왔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질문은 이렇게 해봅니다. 성도란 무엇인가? 예수님을 믿는 자를 신자라고 하고, 구별된 자라고 해서 성도라고도 하는데 과연 오늘 말씀에서 성도를 어떻게 말하는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자기의 정체성을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절에서 성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람이 한 일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 애가 태어나기 위하여 노력한 것이 없듯이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만들어진 자가 성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자기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거듭나고 나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1:23절에서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항상 살아있는 말씀으로 거듭났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고 거듭난 사람이라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 젖을 먹고 자라면서 자신이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게 된 것인지를 묻게 되고 또한 알게 됩니다.

 

 

 

 

왜 사람이 스스로 거듭날 수가 없는가 하면 이미 허물과 죄로 죽어 있기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허물과 죄로 죽어있다는 증거는 지난주에 보았던 대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보배롭고 요긴한 돌을 사람들은 싫다고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버려진 이 돌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거치는 돌과 넘어지는 반석이 되는 것입니다.

 

 

 

 

이 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는 정도가 아니라 명예로운 호칭이 주어집니다. 9절에 보시면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칭호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칭호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방인도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이런 칭호를 주는 것입니다. 어떻게 성도에게 이런 칭호가 주어지는지 살펴보고 또 그런 성도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출애굽기 19:4-6절입니다. “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언약을 체결하는 장면입니다.

 

 

 

 

이 언약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미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약속을 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씨와 땅에 대한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많아지리라는 것과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하나님께서 이루셔서 이삭과 야곱에게 거듭 약속하시고 야곱의 후손 70여명이 애굽에 가서 430년 동안 많은 후손이 만들어졌습니다. 이제 씨가 완성이 되었기에 땅이 주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땅에 들어가기 전에 언약을 맺으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들으면 나의 소유가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사장 나라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전도를 열심히 하자는 그런 식의 제사장이 아니라 하나님과 유일하게 연결된 백성으로서 존귀하고 높다는 뜻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만난 멜기세덱과 같은 높은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제사장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복을 받게 됩니다만 고귀한 신분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라는 말씀이 오늘 본문에 다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언약의 체결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응답을 합니다. 출애굽기 19:7-8절입니다. “7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8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회보하매” 모세가 언약 중재자가 되어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을 중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강림하시고 이제 언약이 체결이 되었습니다. 그 언약을 유지하기 위하여 모세가 법을 받아 옵니다.

 

 

 

 

그러나 모세가 40일 동안에 하나님의 법을 받아 오는 동안에 시내산 아래에서 무슨 일을 합니까?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이 단지 우상을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금송아지를 무어라고 불렀습니까? 애굽에서 우리를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합니다. 그 신을 여호와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래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여호와의 절일이라고 하면서 축제를 즐긴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하고 금송아지와 언약을 맺고 축제를 벌이고 있는 중에 모세는 언약을 유지하기 위한 법을 들고 내려온 것입니다.

 

 

 

 

40일 만에 언약을 배반한 것입니다. 40일 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독수리 날개로 업어왔다고 하십니다. 온 세계가 하나님께 속하였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면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온 백성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을 하고서는 40일 만에 언약을 배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능력으로는 결코 하나님의 소유가 되거나 제사장나라가 되거나 거룩한 백성이 될 수가 없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말씀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까? 씨와 땅의 약속을 하셨고 씨와 땅이 완성되면 하나님께서 친히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데 그 약속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가 됩니다. 그 언약은 파기가 될 수가 없기에 이루어 내시는 것을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하여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배반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언약을 자기 이름으로 맹세하셨기에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가나안 입구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세대를 광야에서 40년 동안 진멸시키면서도 다시 새로운 세대를 일으켜서 가나안에 들여놓으시는 것입니다. 가나안의 땅을 차지하고 이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를 만들고자 하셨는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고 사람 왕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제 자기들의 힘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보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구한 왕이 제대로 역할을 못합니다. 그러므로 씨와 땅에 대한 약속이 이루어져도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의 모습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들을 거듭거듭 약속의 말씀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약속입니다. 어떻게 이 약속을 이루어내시는 것입니까? 씨에 대한 약속은 사람의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야 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땅에 대한 약속은 눈에 보이는 이 땅이 아니라 하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예수님께서 친히 다 이루심으로 성도에 대한 이런 호칭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 이 호칭들은 출애굽기 19장에서 내 언약을 잘 지키면 이렇게 삼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 언약을 지켜 내지를 못합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오늘 말씀에 이런 칭호가 주어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언약을 다 이루심으로 자기 백성에게 이런 칭호를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5:9-10절을 봅니다. “9 새 노래를 노래하여 가로되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하더라” 일찍 죽임 당한 어린 양이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사셨기에 예수님의 소유가 됩니다. 그래서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고 제사장이 되고 왕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 놀라운 신분을 가지게 된 것은 오직 어린 양의 피로 되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새 노래의 내용입니다. 이 새 노래를 노래하게 될 때에 수많은 천사들이 화답송을 합니다. “11 내가 또 보고 들으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 12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하더라

 

 

 

 

천사들의 화답에 이어 만물이 찬송합니다. “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찌어다하니 14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이것이 성경 마지막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성도가 이렇게 놀라운 신분과 지위를 받게 된 것은 결코 성도의 공로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어두움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빛이 어두움에 비취었지만 사람들이 어두움을 더 사랑한고로 빛을 배척하였다고 요한복음 1장에서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런 어두움에 사로잡혀 있어서 빛의 세계를 보지 못하고 그저 썩어지고 낡아지고 더러워질 세상의 헛된 영광들만을 좇아가던 우리를 불러 내셔서 빛의 세계로 들어오게 하신 것입니다. 이 세계는 긍휼의 세계입니다. 용서의 세계입니다. 사랑의 세계입니다.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그분의 그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기위하여 세상에서 택하신 족속으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거룩한 나라와 그의 소유된 백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 성도란 특별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다 이 신분이며 직분을 얻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10절입니다. 성도란 전과 지금으로 나누어집니다. 전에는 백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까? 그의 긍휼하심으로 된 것입니다. 어두움에 있을 때는 자기 잘난 맛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제 거듭난 사람들은 예수님의 아름다운 덕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성도에게는 다시는 자기 잘난 체 하는 모습이 나오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계속하여 나오게 될지라도 그것이 죄 임을 알고, 또 그 잘난 체 하는 것보다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이 더 큼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성도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호칭을 받게 된 것은 오직 그의 피로 값 주고 사셨기에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어두움에서 불러내어 빛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신 그 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면서 자기를 자랑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직 주의 긍휼을 증거 할 뿐입니다.

 

 

 

 

베드로전서 2:11-17 이중 국적 2006. 3. 29

 

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3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 혹은 악행 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7 뭇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지난주에 성도의 신분과 지위에 대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성도란 비록 이 땅에서 발붙이고 살고 있지만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백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 아닌 자들을 자기백성 삼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선택받은 자의 어떤 조건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보았습니다.

 

 

 

 

빌립보서 3:17-21절을 봅니다.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성도란 하늘에 시민권이 있기에 하늘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신은 배라고 합니다. 배가 그들의 신이라는 것은 세상의 정욕을 위하여 사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그 영광은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땅의 일을 생각하고 땅의 영광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시키실 그 영광의 주님, 우리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1-6절입니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우리가 거듭났다면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합니다.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합니다. 땅의 것을 생각하고 찾는 것을 탐심이라고 하며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이 두 곳의 말씀만 보아도 성도란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서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땅의 것을 추구하지 말고 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땅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오늘 분문 11절입니다.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라고 합니다. 성도를 부르는 호칭입니다. 1:1절에서도 “흩어진 나그네”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란 이 땅에서 나그네와 행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 땅에서 살면서 영혼을 거스리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이란 방금 본 에베소서 3장과 골로새서 3장에서처럼 땅의 것을 생각하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란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을 하늘에 속한 기업을 받은 사람인데 자꾸만 이 세상에 속한 것에 마음이 빼앗기는 것과 싸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게 이런 싸움이 있습니까? 육체의 정욕과 싸우기는커녕 오히려 육체의 정욕을 구하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날 교인을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무엇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있습니까? 아니 나의 가까운 사람들이 나를 볼 때에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처럼 산다고 하십니까? 아니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욱 세상의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합니다. 그 싸움이 무엇인지 봅니다.

 

 

 

 

12절입니다. 이방인 가운데서 선한 행실을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악행 한다는 비방들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습니다만 초대교회 때에 성도들을 향한 비방은 여러 가지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을 파괴하는 이단들이라는 비방을 들었고, 이방인들에게는 국가를 거부하는 단체로 비방을 받았습니다. 그런 내용들을 13-17절을 보시면 몇 가지 짐작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고 합니다. 그 제도란 왕이나 방백들에게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세운 것은 악행 하는 자들을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들을 상주기 위하여 세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선행을 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마땅히 행할 바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의 무식한 입을 막으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모든 것에서 자유 하지만 그러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모든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왕을 공경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당시에 성도를 향하여 악행 한다는 비방이 어떤 것들인지 짐작을 해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곧 재림하시면 이 세상은 심판을 받고 믿는 자들은 왕 노릇하게 될 것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성도의 왕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세계는 로마가 지배하고 있기에 로마의 통치자를 왕으로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이 두 왕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이 문제가 2천년을 지나오면서 많은 갈등과 싸움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말만 들으면 됩니다. 그런데 교회, 즉 성도가 아직도 땅이라는 공간에 자리 잡고 있기에 이 땅에서는 국가가 형성되어 있고 그 국가에는 최고의 권력자가 있는 것입니다. 이 둘 사이의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때는 국가가 교회를 핍박하였습니다. 중세 때는 교황 권과 황제권의 세력다툼이 있었습니다. 누가 더 높으냐의 싸움이었습니다. 서로 힘겨루기를 한 것입니다. 교황이 황제를 임명 하는가 황제가 교황을 임명하는가 하는 문제들로 싸운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대부분 정교분리정책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도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마태복음 22:15-22절에 보시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예수님께 세금문제로 질문을 합니다. 가이사 에게 세금을 내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세금을 내어야 한다고 하면 율법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내지 말라고 하면 로마법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답변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의 악함을 말하지만 세금문제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있느냐는 식의 답변입니다.

 

 

 

 

로마서 13:1-7절입니다. “봉독” 성도가 국가의 권력에 대한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면 됩니다. 그런데 국가의 권력이 악행 하는 자를 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행을 행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쿠데타를 일으켜 많은 사람을 죽이고 불법으로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그것도 순복해야 합니까? 이 땅에 군사독재시절에 권력자 앞에서 목사들이 로마서의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순복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권력에 아부를 한 것입니다. 독재자들이 교회를 얼마나 우습게 보았겠습니까? 그러면 아닌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사도행전 5:27-29절입니다. “27 저희를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28 가로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29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공회란 유대인들의 자치적인 통치기구입니다. 그들이 사도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증거 하지 못하게 하여도 계속 증거 한 것입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제도를 순복하지만 주를 위하여 순복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과 상반되는 것이라면 거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쉽게 예를 들자면 우리나라에도 이중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원정출산을 해서 이중 국적을 가진 자도 많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군에 가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이런 이중 국적을 가진 자가 아니라 외교관으로 이 땅에 와서 사는 사람들을 봅시다.

 

 

 

 

그들이 대한민국에서 살면 대한민국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법보다 그들이 우선하는 법은 그들의 모국의 법입니다. 그들이 이 땅에서 살면서 법도 지키고 세금도 내어야 하겠지만 언젠가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도란 이중 국적을 가진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이 땅에서 발을 딛고 살고 있지만 우리의 진짜 시민권이 있는 하늘나라를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 성도의 자세인 것입니다.

 

 

 

 

지난 월요일 문상을 가면서 어떤 여 집사님이 자기 남편과 나눈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 이 세상에서 김삿갓처럼 그렇게 살아야 되는 것처럼 말한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남편이 멀리보고 길게 보면 우리가 다 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그것이 맞는 말이지 않느냐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부탁하기를 그래도 믿는 사람이 가정에서나 회사에서 어떻게 살라고 구체적으로 말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답변하기를 아무리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자고 하여도 남편이 직장을 그만두거나 회사의 일을 소홀히 할 사람이 아니니 걱정을 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발 딛고 살면서 위엣 것을 찾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 땅에 살면서 전혀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갑니까? 하는 염려들에 대하여 오늘 말씀은 적절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정당한 법에 대하여 순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국가의 종이어서 순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를 위하여 순복하는 것입니다.

 

 

 

 

16절입니다. 이 세상에 대하여 얽매일 것이 없는 자유인입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나라가 대한민국이 아닙니다. 온 세상이 평화롭게 되어서 지상낙원을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이 세상을 나그네처럼 행인처럼 살아가는 참된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가지고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학 법 투쟁한다고 바퀴달린 십자가 메고 행진하는 꼴사나운 짓 하지 말고 학교 재정을 투명하게 하는 것이 악행 한다는 비방을 막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가 사학법을 기독교 학교 재단에는 적용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세무조사를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깨끗하게 집행이 된다면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이 입을 닫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단체들이 숫자라는 힘을 가지고 자기들의 불법을 가리려고 하면 무슨 종교의 자유를 말한다고 할지라도 욕을 얻어먹을 것입니다.

 

 

 

 

성도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하여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의 입을 막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에 대하여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나의 행동을 통하여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보다 더 악착같고 이기적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동네에서 무슨 일을 하려고 하면 가장 잘 따지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자유를 가지고 악을 가리는 데 사용하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뭇 사람을 존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중 국적을 가진 사람이 이 땅에서 자유롭게 사는 모습입니다.

 

 

 

 

베드로전서 2:18-25 그 자취를 따라 2006. 4. 5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22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성도란 하늘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는 자유 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국가나 풍습이나 인습에 매여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제 곧 독일 월드컵이 시작될 텐데 또다시 붉은 악마의 물결이 전국을 휩쓸 것입니다. 그렇다고 일부기독교에서 응원단을 화이트 엔젤로 하자는 것에 찬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그들은 모두 대~한민국 하면서 박수를 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란 거기에 휩싸이지 아니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요한복음 8:32절에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1차적인 대상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유대인들입니다. 자신들은 특별한 선민이며 자신들은 택한 민족이라고 여기고 있는 그들에게 자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자기들은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그들을 향하여 너희의 아비는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즉 마귀의 권세에 포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자신들이 종이 아니라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하여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죄와 사망의 종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세상에서도 역시 동일합니다. 나는 주인이다. 나는 자유인이다. 우리 가정은 부채가 하나도 없다. 우리 국가는 완전한 자주 독립국가 이기에 어떤 제재도 받지 않는다고 해서 자유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여전히 죄와 사망의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3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에서 자유입니까? 이 세상에서의 자유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큰 그림을 출애굽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자유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내 마음대로 하고 살면 됩니까?

 

 

 

 

아닙니다. 그 자유를 가지고 자기의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모든 것에서 자유 하지만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자유란 나를 위한 자유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자유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난주에 보았던 2:16절 말씀에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늘에 시민권이 있기에 이 세상에서 자유 하지만 그러나 이 세상을 떠나기 까지,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동안에는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순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하기에 하루라도 빨리 떠나는 것이 소원이지만 그러나 아직 이 세상에 남겨두신 것은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또 그 은혜를 더 알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살 동안 존경할 자를 존경하고 해야 할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사환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환은 종입니다. 이 당시에 종이란 주인의 재산입니다. 사고 팔 수 있는 권리가, 살리고 죽일 수 있는 권리가 다 주인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런 시대에 종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런 종이 예수님을 믿었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제 예수님을 믿고서 세상에서 자유하게 되었으니 상전의 말을 듣지 않고 자유 한다고 하면서 인권운동을 하고 데모를 하면서 평등과 자유를 외치라는 것입니까?

 

 

 

 

해방신학이나 민중 신학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런 곳에서는 그렇게도 말합니다. 이 세상의 잘못된 제도들을 개혁하고 고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위를 사회변혁적인 내용으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나 사도나 간에 어떤 사회개혁적인 프로그램을 말하거나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전혀 변혁을 위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은 고쳐서 될 일이 아니라 완전히 무너져야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준비되어있기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의 18절을 봅니다. 사환들에게 말씀하시를 범사에 주인에게 순복하라고 합니다. 너그러운 주인에게만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가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들어오기로는 예수 믿고 구원 얻는 것은 은혜의 선물로 기본이고, 그 다음에 열심히 잘 믿으면-그 잘 믿는다는 기준이 교회에 열심을 내는 것을 말합니다만- 세상에서 가난한 자가 부자가 되고, 신분이 낮은 자가 신분이 높아진다고,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 나라들이 얼마나 잘 사는가를 보라는 말을 지금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사도는 종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주인에게 더 잘하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바울사도는 에베소서 6:5-7절에서 종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7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한곳을 더 봅니다. 고린도전서 7:20-24절입니다. “ 20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자유 할 수 있거든 차라리 사용하라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21절의 난 하주에 다르게 번역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은 “혹 자유 할 수 있어도 그대로 지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종에서 벗어나는 것이 축복이지 어떻게 종으로 그대로 지내도 된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세상에서 주인을 섬기며 사는 노예라고 할지라도 예수 안에서 참된 자유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외모로 보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어떤 외적인 조건을 보시지 않는 것입니다. 종으로 있어도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 사람은 왕 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백성이며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주인으로 왕처럼 산다고 하여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죄와 사망의 노예일 뿐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베드로전서 1:24-25절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비록 지상에서 종으로 산다고 하여도 그것은 잠시 잠간 지나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도를 고치고 개혁을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19-20절입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운 것이라고 합니다. 애매하게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잘못한 일이 없는데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고난을 받는 일을 당하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견디지를 못합니다. 어디라도 하소연을 하면서 그 억울함을 풀려고 합니다. 내가 왜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여야 하는가 하면서 길길이 날뛸 것입니다. 또 나의 자녀나 가족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왜 그렇게 바보처럼 사느냐고 흥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평소에 억울하다고 하소연 하는 것들도 조금만 냉철하게 돌아보면 우리의 잘못들이 다 들어있습니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무언가 잘못된 일이 있기에 욕을 얻어먹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고서 매를 맞고 참는다면 그것에 무슨 칭찬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신이 잘못해놓고서 믿음으로 고난을 받는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고난을 당하거나 핍박을 받을 때에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참는 것이 아름답다고 합니다.

 

 

 

 

이 아름답다는 말이 난 하주에 보면 은혜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데도 가만히 참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참아지는 때가 간혹 있습니다. 까닭 없이 나를 괴롭히는 상대방이 불쌍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내가 믿음이 좋거나 성품이 좋아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되는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왜 이 일이 아름다운 일이 되는가 하면 바로 위에서 은혜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은혜는 받고 싶어 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것은 빌립보서 1:29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그러므로 은혜로 주어진 것이 두 가지입니다. 믿고 구원받는 것만이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도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이 은혜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습니다.

 

 

 

 

21절입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참는 것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다가 무언가 애매한 고난과 환난을 당하면 내가 무엇을 잘못 믿어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애매히 고난을 받고 있다면 예수님의 발자취를 제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취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길을 잃으면 앞서간 사람의 발자국을 보고 따라 가듯이 예수님을 발자취를 제대로 따라가는 것이 애매히 고난을 받는 길입니다.

 

 

 

 

22-24절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이 없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욕을 받으실 때에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부탁하시며 자신은 친히 나무에 달려 우리 죄를 담당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애매히 고난을 받을 때에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죄 없이 고난을 받으신 것 때문에 우리가 죄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대신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은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고난 앞에서 자기의 억울함을 하소연할 인간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참지 못한 것에 대하여 회개할 뿐이지 자기 정당함을 내세울 겨를이 없습니다. 주의 자취를 따르는 것이 결국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혜를 더 깊이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주의 발자취를 제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임을 확인시키시는 것입니다.

 

 

 

 

25절입니다. 우리가 전에는 길을 잃었으나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예수님께로 돌아왔기에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목자와 감독이 되신 예수님께서 빈틈없이 자신의 자취를 따라오도록 인도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매히 고난을 받으면, 그것을 통하여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대신 고난 받으시면서 참으신 것을 기억하게 하시는 은혜의 장치이며 또한 복음이 증거 되는 길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3:1-7 아내와 남편에게 2006. 4. 12

 

1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1)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3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7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2)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의 집사람에게 한번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은 결혼하기 전에 왜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했느냐고 말입니다. 그러자 행복하기 위하여 결혼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행복하기 위하여 결혼한다는 것이 우리는 지극히 당연하게 여깁니다. 물론 저 자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목표와 방향 자체가 잘못 설정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시면 아내는 남편에게 순복하기를 어느 정도로 순복하라고 하는지 말씀하고 있는데 남편을 ‘주’라고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내는 종이 된다는 말입니다. 어떤 여자가 결혼하면서 남편을 주인으로 모시고 자신은 종으로 살겠다고 결혼하는 여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남편을 바깥주인 여자를 안주인 그렇게 말합니다. 종이 아니라 주인이고 싶은 것입니다. 특히 요즈음은 안팎으로 여자가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세상에서 누가 남편을 주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을 나의 행복의 관점에서 본다면 도저히 말이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성과 정말 맞지를 않습니다. 성경을 오해하지 않고 제대로 본다면 우리 결혼생활의 행복이나 직장생활의 성공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산다고 할지라도 나의 행복과 나의 기쁨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장에서 이미 보았습니다만 왜 나라의 법을 지켜야 한다고 합니까? 주를 위하여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면 자유인입니다. 하늘의 시민권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발 딛고 사는 나라의 법도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선행으로 어리석은 자들의 무식한 입을 막게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땅에 사는 예수 믿는 다는 사람들이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로부터 어떤 비난을 받습니까? 제일 불법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한답니다. 그러니 주를 위하여 법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또 종들은 주인을 대하기를 너그러운 주인만이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이라도 범사에 두려워하며 순복하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6장에서는 종이 자기 상전에게 하는 것을 주께 하듯이 하라고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눈 가림만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이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종이 자유 할 수 있어도 그대로 있어도 무방하다고 합니다. 이미 자유인이기에 종으로 있다고 하여서 주님을 섬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열악한 환경이라도 주를 섬기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을 봅니다. 3:1절입니다.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와 같이’란 무엇과 같이 남편에게 순복하라는 것입니까? 바로 앞에서 말한 종이 주인에게 순복하듯이 하라는 것입니다. 이때의 종은 그야말로 노예입니다. 생사여탈권을 주인이 쥐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런 시대의 종이 주인에게 순복하듯이 아내들이 남편에게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순복해야할 남편이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내는 믿는 사람이고 남편은 믿지 않는 사람인데 그런 남편에게 순복하기를 자신은 종이요 남편을 주인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흔히 예수를 믿는 아내와 믿지 않는 남편사이의 갈등을 이야기 합니다. 남편이 이해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물론 전혀 다른 세계에 소속되어 있기에 이해를 하지 않고 방해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제는 아내가 남편을 ‘주’로 여기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아내는 교회를 다니는데 남편이 교회를 나오지 않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대부분의 남편이 자기 아내가 보기 싫어서 교회를 나가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너처럼 믿으려면 나는 가지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말로만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행동으로 믿는 모습이 어디에 나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원하는 행동도 착한 아내 착한 며느리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겠지만 그런 남편이 요구하는 것과 상관이 없이 오늘 말씀에서 답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다시 1절을 봅니다. 종들이 주인을 대하듯이 아내가 남편에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 남편이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라고 하여도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도를 순종치 아니하는 남편, 말씀을 듣지도 않고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남편이라도 말로서가 아니라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이 아내의 행위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는 아내를 통하여서인데 아내가 말만 하고 자기 이기적인 모습으로만 산다면 남편은 복음조차 잔소리로 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아내의 행실을 본다는 것입니다.

 

 

 

 

2-4절입니다. 어떤 행실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두려워하며, 누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범사에 주님을 생각한다면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삶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남편도 두려워할 것입니다. 남편을 두려워하다니 무슨 조선시대 이야기를 하는가 하시겠지만 정말 믿는 여자가 남편을 두려워한다면 백 마디 말보다 그 행동 하나가 더 큰 전도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두려워하는 자는 정결한 행위를 나타내고 그 행위를 보게 될 것입니다. 정결한 행위란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아내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패물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단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아내가 온유하고 안정이 되어 있으면 남편이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아내가 사납거나 다른 남편이나 가정과 비교하여 우리는 왜 그렇게 되지 못하느냐며 안절부절 못해하면 남편은 귀가 공포증에 걸릴 것입니다. 온유하고 안정된 썩지 아니할 속사람으로 단장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갚진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은 듣는 아내들은 마음에 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씀만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모든 말씀이 죄 지은 아담의 후손으로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이라면, 속사람이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미리 아심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입은 사람이라면 이런 말씀을 다 실천하지는 못하여도 자신이 죄인인 줄 알고 부끄러워는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 아내들이, 믿는 다는 아내들이 이런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5-6절입니다.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다고 합니다. 아내의 단장은 남편에게 순복하는 것이 자기를 단장하는 것입니다. 그 예로 사라의 예를 듭니다. 사라는 자기의 남편 아브라함을 주라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18:12절을 보시면 사라에게 아이가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에 자신도 노쇠하고 내 주인도 늙었다고 하면서 속으로 웃습니다. 여기서 자기 남편을 주인이라고 합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남편이 자기 목숨 살리고자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속이라고 하는데도 그렇게 순종하였습니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그렇게 하였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런 남편하고 살겠습니까? 그런데 사라는 자기 남편을 주인으로 여겼기에 자기가 다른 남자의 여자로 팔려 가는데도 순복하였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보호하셔서 무사히 돌아오게 됩니다만 이것이 하나님께 소망을 둔 여자들의 모습이라고 오늘 말씀은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믿는 여자는 사라처럼 하는 것이 선을 행하는 것이며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라는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한 것은 남편을 주인으로 섬겼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을 많이 당한 사라입니까? 그러나 남편을 주로 여겼기에 감당하였고 또한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오늘날 믿음의 여자들이 소망을 하나님께 둔다면 어떤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할 것입니다.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면 남자보다 여자들이 더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소망을 하나님께 둔 자는 놀라지 아니합니다. 그런 모습이 바로 믿음의 딸인 것입니다.

 

 

 

 

7절입니다. 남편에게는 한절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절만 말씀하여도 지금까지 말씀한 모든 원리는 그대로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라는 말씀으로 앞과 연결합니다. 인간의 세운 제도나, 사환이나, 남편으로서 모든 일을 주님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아내와 지식을 따라 동거하라고 합니다. 지식이란 여자의 특징을 이해하는 지식을 말합니다. 남편이 주인이라고 해서 폭군처럼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역시 아닙니다. 아내에 대한 지식이란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또 생명의 유업을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부부가 그 부모를 떠나 한 몸이 되었으니 생명의 유업을 함께 받을 자로 알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야 기도가 막히지 않는다고 합니다. 기도가 막히지 않는 다는 이 말씀은 말라기서를 보면 상세하게 나오는 말씀입니다.

 

 

 

 

말라기 2:13-16절입니다. “13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리우게 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14 너희는 이르기를 어찜이니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찌기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 15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찌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치 말찌니라 16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학대로 옷을 가리우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궤사를 행치 말찌니라

 

 

 

 

10절부터 보시면 유다와 이스라엘이 궤사를 행하기에 하나님께 제물을 드려도 받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그 궤사란 이방인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또한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단을 가려도 다시는 헌물을 돌아보지도 않고 그들의 손에서 받지도 않겠다고 하십니다. 즉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려서 취한 아내에게 궤사를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이용하여 이혼증서를 써 주면서 이혼하면 된다고 합법화 하여 살았던 것을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내용을 알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자나 남자나 자기의 행복을 위한 결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결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생활에서도 나의 만족이나 보람이나 수입이 목적이 아니라 주를 위하여 생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만물이 다 주님에게서 창조되었고 주님을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1:16절에서 천지의 모든 것들이 다 예수님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고 합니다.

 

 

 

 

에베소서 5:22-33절의 말씀을 보시면 아내와 남편에게 주시는 말씀이 교회와 그리스도에 대한 비밀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내는 교회의 역할을 남편은 그리스도의 역할을 하는 것이 믿는 자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면 전혀 그러하지 못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를 중심에 두고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중심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 회개의 열매가 나타나면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이 복종하고 남편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는 것 같이 아내를 사랑하는 그런 은혜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아내와 남편의 역할을 통하여 교회와 그리스도에 대한 비밀이 증거 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8-12 부르심의 목적 2006. 4. 19

 

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 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하였느니라

 

 

 

 

우리가 성경 말씀을 제대로 보게 되면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은 하지 말라고 하고, 하기 싫은 것은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성경의 말씀이란 우리가 늘 기피하고 싶은 말씀이지 주야로 묵상하고 즐거워하고 싶은 내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치 어느 날 갑자기 모세가 바로 왕에게 나타나 히브리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내 백성을 내어 놓으라는 말씀을 들은 바로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갑자기 나타나서 조상 때로부터 바로 왕의 소유요 재산인 히브리 노예들을 여호와의 것이라고 내어 놓으라고 하니 바로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말도 안 되는 행패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가 누구관데 감히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느냐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론은 그렇게 말한 바로 왕은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자기의 아들도 죽고 나라도 망하고 나서 노예들의 하나님인 여호와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었음을 증거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결국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뿐이었습니다.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성경의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 도저히 나의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들이 전부일 것입니다. 그래서 몇 몇 분들은 설교를 듣다가 뛰쳐나가고 싶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솔직한 심정을 말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어느 날 예수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리가 된다면서 밥도 사주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만 우리가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이 보이고 들린다는 것은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일하심인 것입니다.

 

 

 

 

8절을 봅니다. 마지막으로 말한다고 합니다. 이 마지막이란 편지 전체의 마지막이 아니라 믿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마지막입니다. 예수를 믿는 다는 사람들도 세상에서 인간을 위하여 세운 제도들을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는 말씀과, 종들이 까다로운 주인이라도 순복하라는 내용과, 아내와 남편들에게 주시는 말씀을 하고서 이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함이라. 여기에 나오는 한 말씀 한 말씀이 우리의 본성상 얼마나 불가능한 말씀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도대체 단 한 말씀이라도 우리가 평소에 잘 실천하는 말씀이 있는지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먼저 다 마음을 같이 하라고 합니다. 어떤 단체이든지 하나가 되려면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하나가 되지 않고 법으로 하나가 되어 있는 곳은 언제나 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마음이 하나가 되면 법이 없어도 하나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하나가 되려면 나의 마음이 없어져야 하나가 됩니다. 나의 마음이 낮아질 대로 낮아져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낮아짐이 어떤 것입니까? 이 설교를 준비하는데 누가 찾아 왔습니다. 멀쩡한 사람이 집도 없다고 하면서 도움을 요청하는데 주시는 대로 받아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사무소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생활보호 대상자가 되면 정부에서 지원하는 것이 있으니 가라고 했지요! 그러자 잘 몰라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하였더니 화를 내면서 욕설 비슷하게 하면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사람들 보면 대부분 술에 절어 있습니다. 전에 부산에서 강의 중에 구걸하는 사람이 와서 강의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 얼른 돈을 주었는데 강의 마치고 나가보니 길에서 소주 마시고 있었습니다.

 

 

 

 

구걸하는 정도면 얼마나 마음이 낮아졌겠습니까? 그러나 몇 마디 한다고 자존심이 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낮아진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기적인지를 예수님께서 이방인 여인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인의 자녀에게 줄 떡을 개들에게 주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자, 옳소이다마는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떡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여인을 향하여 예수님은 네 믿음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한 마음이 되려면 다 이 낮아진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거지가 되어 있어도 자존심 상한다고 화내고 돌아서는데 어느 누가 마음을 낮추어 하나가 되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니 서로 적당하게 상호위선과 기만 속에 가면무도회가 되는 것이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까? 자기의 약함과 부끄러움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까? 마음을 같이 하여 함께 울고 함께 즐거워할 수가 있습니까?

 

 

 

 

마음이 높아지고 눈이 높은 것이 다 죄가 되는데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높아져 있는지 이 말씀 앞에서 보게 됩니다. 주의 성령께서 이 말씀으로 우리를 찔러 쪼개어 주시면 우리의 마음이 낮아질 것입니다. 히브리서 4:12-13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어떤 예리한 검보다 더 예리하여 우리의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어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면 우리의 마음이 낮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서로 체휼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5-16절을 봅니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체휼이란 어려움을 함께 하는 것인데 현대어로 동정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체휼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기에 주님의 체휼을 입은 자이기에 마음이 낮아지게 되고 한 마음이 되면 형제를 체휼하게 되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이런 말씀 하나 하나도 결국 우리의 능력과 실력으로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언제 제대로 형제를 사랑하고, 언제 한번 제대로 형제를 불쌍히 여겼으며, 언제 마음이 겸손하여 진 적이 있습니까? 늘 경험하는 바는 자신만 사랑하고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다고 여기며 교만덩어리로 살고 있는데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은 주님께서 이루어 내셔야만 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루어 내시되 우리의 불순종을 배경으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자기를 부인하고 그런 열매가 나타난 것을 인하여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 같은 죄인에게 이런 열매가 나올 수가 있는가? 이것은 전적인 주님의 은혜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주님께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지금도 일하고 계심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9절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고 합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형제를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게 되는 것과 이 말씀 중에 어느 것이 더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입니까? 두 말씀 다 우리의 본성적인 능력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말씀입니다. 어떻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욕을 욕으로 갚지 않고 도리어 복을 빌 수가 있는 것입니까?

 

 

 

 

이 말씀은 모세의 율법을 생각나게 합니다. 출애굽기 21장의 폭력에 관한 법에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법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이 받은 손해보다 지나치게 복수 하려는 마음 때문에 주어진 것입니다. 손해를 되로 받으면 말로 갚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봅니다. 마태복음 5:38-42절입니다.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베드로 사도가 주님의 이 말씀을 증거 하고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정황에서 가능한 적이 얼마나 있습니까? 우리는 원수가 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살지 그 사람이 복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그 사람에게 복을 빌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고 살고 있기에 우리의 삶이 고달픈 것입니다.

 

 

 

 

자신의 삶이 불행하고 힘들고 어렵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모두가 남의 탓입니다. 가족을 탓하고 이웃을 탓하고 환경을 탓합니다. 그러니 갈수록 더 고달프고 기쁨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도 이렇게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더더욱 고달픈 인생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9절을 보시면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입은 것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욕을 욕으로 갚지 않고 도리어 복을 비는 사람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이런 삶이 되지 않으면 계속하여 원수 같은 자들이 더 많이 생길 것입니다. 숙제를 미루어 놓으면 더 많아지듯이 날마다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부르심으로 이끄시는데 우리가 거부하고 있으니 자꾸만 원수가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숙제를 대신해주시면 안 됩니까? 대신해주게 되면 내가 주님의 원수였는데 주님께서 우리를 원수로 갚지 않고 도리어 복을 주신 그 사랑을 알지 못하기에 그렇게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23-25절입니다. “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셔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시고 욕을 욕으로 갚으시지 않으신 그 은혜를 맛보게 하시기 이하여 우리 주변에 원수들을 포진시켜 두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되는 것이 결국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고 그렇게 부르신 것입니다. 그 받을 복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에게 돌리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지난주일에 보았던 고린도후서 5:19-21절의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이것이 성도가 받은 복이고 누릴 복인 것입니다.

 

 

 

 

10-12절입니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들은 혀를 금하고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며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고 이를 좇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 하는 자를 향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눈을 피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르심을 입은 것은 나의 편함과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맛보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 자리는 원수가 둘러쳐진 자리에 있습니다. 그런 현장에서 원수를 사랑하시면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으시고 욕을 욕으로 갚지 않으신 그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맛보게 하시기 위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복을 이어받게 하시기 위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받을 복입니다.

 

 

 

 

베드로전서 3:13-17 소망에 관한 이유 2006. 4. 26

 

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찐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지난주의 말씀에서 마지막으로 말한다고 하고서는 오늘 말씀에 보면 ‘또’ 라고 합니다. 마치 교장선생님이 조례 시간에 마지막으로 해놓고 또 하는 그런 말로 들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난 주 오후에 보았던 시편 119편의 말씀대로라면 또 말씀하심에 대하여 기뻐하고 즐거워 할 것입니다.

 

 

 

 

시편 119:14절에서는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가 돈을 즐거워하는 것처럼 주의 말씀을 즐거워한다면 또 돈을 주겠다는데 이제 그만 싫어요! 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72절에서는 주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승하다고 합니다. 103절에서는 주의 말씀이 꿀보다 더 달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이런 기적이 맛보아 지기를 소원하면서 또 말씀을 봅니다.

 

 

 

 

13절을 봅니다. 또 너희가 열심히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겠느냐고 묻습니다. 2:12절에서 예수 믿는 자들을 향하여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예수 믿는 자를 비방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에 비방을 하는 것입니까? 세상의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보다 윤리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거나 세상 사람보다 더 이기적이고 세속적일 때에 비방을 받습니다. 종교인이란 비 종교인보다 깨끗하고 바르게 사는 것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사도는 그러한 일들로 인하여 비방을 받지 않도록 인간이 세운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할 것과 종들이 주인에게 범사에 두려워하며 순복하라고 합니다. 바울사도도 이와 같이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다는 사람들을 이런 관점에서 욕을 하다가도 자기 주변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더 양심적으로 사는 것을 보면 그들이 입을 막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되는 세상이 아닙니다.

 

 

 

 

14절을 봅니다. ‘그러나’ 즉 선을 행함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고난이란 의를 위한 고난입니다. 이 세상에서 윤리나 도덕적으로 옳고 세상에서 양심적인 사람이라는 평가를 들으면 고난과 핍박이 아니라 오히려 존경이 따라 올 것입니다. 이미 죽었지만 데레사 수녀를 욕하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교회나 성도가 세상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도우는 일에 온 힘을 쓰고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일조를 한다면 욕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종교단체들이 이런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를 위한 고난과 핍박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5:10-12절입니다. “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자신이 잘못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의를 위하여 즉 예수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복이 있다고 합니다. 선지자들도 이같이 핍박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열심히 바르게 하면 비록 어려움이 따르지만 이 세상에서 인정받고 세상에서도 성공하고 하늘에서도 많은 상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에서 보상을 받은 자는 하늘에서는 받을 보상이 없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땅과 하늘의 차이, 전혀 다른 세계를 말씀하는 것이지 땅에서 보상을 받으면 하늘에 상이 없으니 일부로 오른 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하늘에서 상을 받아야겠다는 그런 심보가 들어설 자리는 없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의를 위한 고난이 왜 오는 것입니까? 이 세상이 의를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이 의란 단지 세상에서 착하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 외에 나타난 한 의가 되시는 예수님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의롭다고 하는 것을 믿는 사람을 세상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를 마귀가 가만히 두지를 않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면 이 세상의 선악체제가 근본부터 무너지기에 그런 자를 가만히 두지 않는 현상이 고난과 핍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이 그런 고난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그렇다고 자기는 자기 욕심대로 마음대로 살아가면서 그 말을 이용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자신이 율법대로 바르게 살았다고 하여도 주님 앞에서 자신이 썩은 자와 같은 자임을 알게 될 때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난주일 낮에 보았던 말씀처럼 이사야 다니엘 사도바울 사도요한이 보았던 그 주님의 영광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알게 되었을 때에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고백이지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따라 살면서 하는 말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가 하면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소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사야 8:12-13절을 봅니다. “12 이 백성이 맹약한 자가 있다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맹약한 자가 있다 하지 말며 그들의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13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이 말씀은 북 이스라엘 왕 베가와 아람 왕 르신이 연합하여 유다를 공격하려고 할 때에 남쪽 유다의 왕 아하스와 백성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연합군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앗수르에 원조를 요청하는 유다의 정책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하는 것입니다. 왜 두려워하고 놀라는가 하면서 책망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지깽이 끝에서 불이 꺼지고 연기만 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말고 소동하지 말고 여호와만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눈에 보이는 힘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사람들마다 어떻게 하든지 세상의 힘을 의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신앙의 싸움은 이 싸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8:14-15절입니다. “14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15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

 

 

 

 

오늘도 세상의 힘을 추구하면서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에 민감한 것입니다. 정권이 누구에게 돌아가는 지를 관심가지면서 자기의 손익을 저울질 합니다. 경제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두려워합니다. 현대 회장이 구속된다는 말이 나오자 전국의 현대자동차 협력업체 5300곳의 대표들이 신문에 광고를 냈습니다. 선처를 부탁한다고 합니다. 독도문제로 한일간의 관계가 경색되자 어떤 사람은 일본과 사이좋게 지내지 않는 것은 자살하는 것과 같다는 말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의 일들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온 우주와 만물을 지으시고 지금도 통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서 두려워하는 일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기에 미움을 받고 고난을 받고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란 보이는 세상을 믿는 것이 아니기에 보이는 세상의 그 어떤 경천동지 할 일이라도 두려워하지 않고 소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6절에서 사라가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다고 합니다. 사라가 믿음 없는 아브라함과 산다고 얼마나 두려운 일을 많이 당했습니까? 남의 남자에게 두 번이나 팔려가야 하는 상황에서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을 주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부르고 있습니까? 주 예수라고 부르며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15절입니다. 세상에 어떤 일에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를 마음에 주로 삼고 살기에 그렇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 불에 들어갈 때에 두려워하지 아니한 것은 그들은 이미 주를 섬기고 있었기에 그렇게 담대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하시겠지만 구하여 주지 아니하여도 당신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왜 그렇게 하였습니까? 그들의 주인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주인은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있습니까? 단지 나를 구원하는 주 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통치자며 주인이심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세상의 일들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랄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이 눈에 보이는 하늘과 땅이 불살라 없어질 것을 믿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조그마한 세상의 일들로 인하여 죽을 둥 살 둥 바동거리며 악을 쓰면서 두렵고 놀라면서 살아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아무도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물으려고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세상의 두려운 일로 놀라거나 요동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이 보고서 놀라서 물어올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두려움이 없는 것이냐고 물어올 것입니다. 그렇게 물어오는 사람들이 없지요? 그 이유는 우리도 똑 같이 죽음을 두려워하면서 죽음의 종노릇 하는 모습으로 보이고 있기에 물어볼 필요도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정말로 주를 그리스도로 마음에 모신 사람은 거룩하게 됩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두려워하는 일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거룩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요동치는 세상을 믿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주변에서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세상에서 두렵고 힘들어하면서 헉헉거리다가 물어보는 사람이 나올 것입니다.

 

 

 

 

도대체 당신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그렇게 두렵지 않고 소동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이렇게 물으면 그 소망에 관해 물어보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 우리에게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물어오기나 합니까?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 세상의 꿈을 실현하여 준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가서 소망을 이루는 비결에 대하여 물으려고 몰려가지 누가 이런 지하실에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소망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고서 물으러 오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를 마음에 모시고 보이는 소망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소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 묻기 위하여 오는 것도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런 소망을 우리가 원해서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변화무상한 세상의 것들에 소망을 두지 않고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이는 그 십자가 안에서 이루어진 약속을 믿는 자들이라면 그런 소망을 사람이 스스로 가질 수가 없는 소망입니다. 그래서 전적으로 은혜로 주어진 소망입니다. 그러기에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런 소망을 가진 것이 자기 잘나서 된 것인 양 교만하고 자기 자랑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선을 행함으로 오는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왜 하나님의 뜻인가 하면 그리스도의 고난을 알게 되고 그 고난에 참여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뜻이기에 복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악을 행하다가 고난 받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주어지는 약속과 그 소망으로 인하여 고난이 온다면 그것을 복으로 여기고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3:18-22 하늘에 오르사 2006. 5. 3

 

18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22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일상의 삶에서 무엇에 웃고 울었습니까?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과 손에 잡혀지는 나의 몸의 상태에 따라 웃고 우는 삶이 되었을 것입니다. 걱정과 근심과 어쩔 수 없는 포기, 그러다 다시 희망을 가지면서 자기를 닥달하기도 하고 위안하기도 하고 합리화하기도 하면서 분주하게 자신을 중심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분주하게 사는 것은 고생하지 않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속마음이 깔려 있습니다.

 

 

 

 

살아서도 행복하게 살고 죽어서도 좋은데 가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자신의 행위를 저울질 해 보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닥치면 내가 무엇을 잘못 해서 이런 일이 왔는가를 생각하면서 무슨 선한 행위를 보태어서 라도 그 어려운 순간을 빨리 면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일이 축적이 되면 자신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착한데 나에게 복을 주지 않고 누구에게 복을 주겠느냐는 식입니다.

 

 

 

 

그러나 지난주에 보았던 17절 말씀에서 선을 행하다가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낫다고 합니다. 방금까지 말씀드린 자기중심적인 계산을 가지고 고난이니 아니니 하는 것은 그 기준점이 이미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런 자기중심적인 계산은 선악을 저울질 하면서 선을 축적한다고 하여도 악일뿐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한가지의 기준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만 고난이냐 아니냐가 판가름 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선한 일을 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때에 그 고난이 무엇으로 연결이 되어야 하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연결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억울하게 고난과 핍박을 받을 때에 내가 이렇게 의로운데 왜 고난이 오는가 하면서 자기를 항변하게 되면 그것은 또 다른 자기 의가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인도되어야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혹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았습니까? 거의 그런 경우가 없지만 혹 그런 일이 있는 분이라면 ‘그리스도께서도’ 라는 말씀 앞에서 입을 닫을 뿐입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을 지라도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만유의 주가 되시고 만왕의 왕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 왜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까?

 

 

 

 

18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고난을 받으신 것은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신 고난인 것입니다. 한 번이라고 한 것은 한 번으로 완성이며 영원한 것이기에 한번입니다. 이 한번 고난을 받으신 것은 성도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고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입은 자라면 반드시 고난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고난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며 그 고난에 참예시키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빌립보서 3:7-12절입니다.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그동안 유익이라고 생각한 것들을 모두 해로 여기고,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의 의가 무너지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나오는 것인데 그 믿음조차 하나님께로 온 것이지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 받아 그 고난에 참예함으로 그 부활에 이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조차 그리스도에게 잡혔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간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벗어나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고난이란 단지 자기 개인이 무슨 의로운 일을 한 결과로 고난이 오고 그 고난을 이기고 견디면 나중에 그 개인에게 큰 상이 돌아가는 차원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개인적인 구원관이란 역시 이기적인 자기중심적인 구원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구원,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참예시키시고 부활에도 참예 시키는 것이 이 역사 속에서는 성도의 고난으로 연결이 됩니다.

 

 

 

 

베드로전서 4:1-2절을 봅니다. “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입을 갑옷이 그리스도의 고난의 갑옷인 것입니다. 이 고난의 옷을 입음으로 죄가 그쳐지고 다시는 사람의 정욕을 쫓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괴로운 것입니까? 감사할 일입니까?

 

 

 

 

베드로전서 3:19-20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 하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난해 구절이라고 합니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제가 보기로는 두 가지의 의미로 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시기 전에도 영으로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모든 죽은 자가 갇혀있는 옥에까지 선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먼저 구약시대에 어떻게 전파 된 것인지 베드로전서 1:9-11절입니다.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리스도의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과 그 부활의 영광이 옥의 영들에게까지 다 선포가 된 것입니다. 즉 노아 방주시대 때에 불순종하여 물로 인하여 멸망당한 그들이 갇혀있는 곳에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이 증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노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당시의 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사고팔며 시집가고 장가 가는 일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살았습니다. 지금 살아가야 하는 세상의 일들도 바쁜데 언제 죽음이나 종말을 생각할 틈이 있었겠습니까! 그런 것은 나중에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홍수가 노아 600세 되던 해 이었기에 그 당시에는 약 천년 가까이 살았기에 사는 것에 더욱 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연수가 10분의 1로 줄었지만 모든 것이 빠른 시대이기에 그 때에 천년을 사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가지고 삽니다. 그러니 백년 미만을 살지만 노아시대보다 더 바쁜 시대가 오늘 이 시대입니다. 정신없이 바쁘게 경쟁하면서 살아가는 세상에 잠시 한숨 돌리면 이미 뒤쳐져 버리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살자고 하는 사람들이나 홍수가 나서 온 세상을 심판할 것이라고 하는 노아가 따돌림을 당하고 고난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시대에 구원 얻는 자가 겨우 여덟 명 뿐이었습니다. 가정 수로는 한 가정입니다. 왜 그렇게 구원 얻는 자들이 적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신 것입니다.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든 것은 그 당시의 기술로도 걸려야 하는 시간이지만 그러나 그 기간동안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시며 오래 참고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노아에게 관심두지 않았습니다. 오직 노아의 가족만 그 일에 묵묵히 감당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노아 가족이 먹고사는 일은 어떻게 하였을까요? 정말 최소한의 의식주만 해결하고 나머지는 전력으로 방주를 준비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새집을 사고 유행하는 옷을 사고 그러기 위하여 더 열심히 일하고 돈을 벌어야 하는데 노아의 가족은 그런 일에 시간을 빼앗길 틈이 없었습니다.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기 위하여 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 노아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준비를 할 수가 있었습니까?

 

 

 

 

창세기 6:9절에 보시면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기에 그 은혜가 헛되지 않아서 그렇게 준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노아의 방주 준비는 바로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하여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세상에서는 따돌림을 당하고 미친 사람 소리를 들었습니다. 멀쩡한 날에 홍수로 세상이 심판을 받는다는 말을 하는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은 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며 은혜를 받은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빌립보서 1:29절에 보시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를 믿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왜 주신 것입니까? 나를 위하여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고난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가 은혜를 입었기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방주를 예비한 것입니다.

 

 

 

 

이 방주를 만들던 시대만이 아니라 모든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하여 선포된 것입니다. 시편 19:1-4절입니다. “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 1)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핑계치 못할 것입니다.

 

 

 

 

21-22절입니다. 노아 홍수 때의 그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하여 우리를 구원하는 표가 되는 것입니다. 물로 인하여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일어나듯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일어나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가 은혜를 입어 방주를 예비한 것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로 인한 심판과 구원을 미리 증거 한 것입니다.

 

 

 

 

그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성령이 임한 것을 성령의 세례라고 합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세례를 받은 것은 율법에서 더러운 몸을 씻는 것처럼 씻는 것이 아니라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입니다. 모든 권세를 받으시고 집행하시는 자리입니다.

 

 

 

 

그 하늘에 오르심의 소식이 이제 지옥에 까지 다 선포가 된 것입니다. 노아시대에 노아를 우습게 보며 불순종 하던 자들과 모든 시대에 복음을 거부한 자들에게도 하늘에 오르신 그리스도가 선포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것은 하늘과 땅과 지옥에까지 다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누가 믿을 수 있습니까? 이 사실을 믿는 자는 노아처럼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오르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이나마 나와 세상이 간곳이 없고 구속한 주님만 보이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1-6 육체의 남은 때 2006. 5. 10

 

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4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을 주로 믿는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순간부터 나를 주장하고 나를 고집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까?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헷갈리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내 속에서 내가 주인으로 살려고 하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기에 이제부터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육체의 남은 때를 살아야 하는 것을 내 책임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의 결단과 결심과 나의 의지적인 실천력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몸을 가지고 사는 한 평생토록 내 몸을 우선으로 챙기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내 몸처럼 사랑하고 심지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처럼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굶고 매 맞고 감옥에 갇히고 죽어가는 자들이 바로 가까이 북한에 있습니다. 그들을 위하는 것과 나의 몸을 위하는 것과 똑같이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북한에 성경을 보내는 일에 조금 참여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을 전체 교인으로 나누기 하면 얼마나 됩니까?

 

 

 

 

그러므로 나는 나 밖에 모르는 인간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고서 이제부터 육체의 남은 때를 주를 위하여 산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육체의 남은 때를 내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운명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육체로 살아가야 하는 남은 때가 있습니다. 이 기간을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까? 나의 뜻이 꺾어지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기간입니다.

 

 

 

 

이방인으로 살던 때는 내 뜻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내 뜻대로 살려고 하면 계속하여 막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현실적으로 경험하는 것이 고난이라고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그런 고난이 성도에게 유익한 것은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들이 죄를 그치게 되고 다시는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고난이 온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4:1절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3:18절의 말씀처럼 자신의 죄로 인한 고난이 아니라 불의한 자를 대신한 대속의 고난입니다. 그 고난을 인하여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속하셨습니다. 죄의 종에서 해방시켜 의의 종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고난을 받을 때는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무장이란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한번 고난을 받으심으로 자기 백성을 온전히 의의 종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4:2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자기 백성을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자기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우리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께서 접수하신 것입니다. 이제 내가 관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장악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관리를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관리는 전능하신 능력으로 행하시기에 결코 누수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통치는 영원하시기에 레임덕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제 네 인생은 끝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전에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3절입니다.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입니다. 우리도 다 이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에베소서 2:1-3절을 봅니다.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1)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우리가 이방인이었습니다. 혈통적으로 보아도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공중권세 잡은 자를 따라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이 세상의 풍속을 쫓아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풍속이 무엇입니까? 방금 3절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음란과 정욕과 술 취함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가 온 세상에 가득하여 아예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이 세상의 풍속에 함께 어울리지 않으면 배척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빠져나올 생각조차도 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세상의 풍속을 따라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에베소서 2:4-10절을 봅니다. “봉독” 이것이 바로 은혜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육체의 남은 때는 우리 뜻대로 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자비와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드러내는 도구로 살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풍속에 휩싸이지 아니하는 일이 일어나게 되면 그것은 나의 결단과 의지적인 실천력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였음을 증거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체 자기를 자랑할 수 없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전에 예비하신 대로 그 가운데서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 이상 도망갈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로 나타는 것이 세상에서 구별됨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전에는 세상의 친구가 그렇게 좋아서 하루라도 만나지 않으면 몸살이 날 정도였는데 이상하게도 그런 친구와 만나서 세상의 재미라는 것을 누려보아도 재미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허무하여지는 것입니다. 단지 재미없거나 허무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한 마디씩 들려지고 그 말씀이 사실임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의 본성적인 능력으로 될 일이 아닙니다. 이런 일들이 저와 여러분들에 일어나고 있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개입하셔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의 남은 때를 이제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가 없도록 막으시기에 일어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은혜가 임한 자는 무엇을 알게 되는가 하면 지나간 때가 족함을 아는 것입니다.

 

 

 

 

3절을 봅니다. 이방인의 뜻을 행한 것은 이제 지나간 때가 족하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입은 자와 입지 못한 차이가 여기에 있습니다. 은혜를 입은 사람이란 세상의 정욕들이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것이 허무한 것임을 알기에 족하다는 것입니다. 할 만큼 해 보았으나 그것이 나의 영혼을 만족하게 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지 않은 사람은 세상의 정욕을 취함에 있어서 족함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계속하여 자신의 욕망의 충족을 위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잠언 30:15-16절입니다. “15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고 다고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16 곧 음부와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 족함을 모르는 것이 거머리의 딸이라고 하는데 거머리처럼 족함을 모르는 서넛이 무엇입니까? 무덤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불입니다. 이것은 자연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탐심의 끝없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족함을 모르고 세상의 정욕을 좇아 달려가는 것이 정상적인 우리가 이제부터는 그런 곳으로 달려가는 일에 브레이크가 걸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변에서 지금까지 함께 그렇게 가던 자들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4:4절입니다. 함께 극한 방탕에 달음질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그런 자들과 함께 하지 않으면 비방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상히 여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 이상히 여김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삶의 목표와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에게 이렇게 이상히 여김을 받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세상의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너는 참 이상하다.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이 많은데 왜 이런 것을 좇아가지 않느냐고 묻는 경우가 있기는 한 것입니까?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더 악착같이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들을 구하기 위하여 신의 힘까지 빌려서 구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그러니 세상의 것을 구하지 아니함으로 이상히 여김을 받고 비난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보다 더 세상의 것들을 구하기에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지금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일하심으로 인하여 나타나는 결과로 우리가 옛날에 행하던 모든 일들을 원통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일에 대한 유혹과 욕구가 일어날 때에도 지난 때가 족하였다는 마음이 들게 하심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난 때가 족하였다는 것은 잘한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죄를 지을 만큼 지었다는 것입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다시 먹고 돼지가 씻고서 다시 더러운 곳에 드러눕는 일을 할 만큼 하지 않았느냐는 생각이 드는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하심의 결과로 거룩과 분리가 일어나게 되면 그렇지 아니한 사람들이 비방을 할 것입니다. 그렇게 비방하는 자들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게 될 것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보니 사도신경이 생각날 것입니다. 사도들의 고백이라고 해서 사도신경이라고 하지만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그런 문장대로 고백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이곳저곳에서 고백된 내용들을 후세의 사람들이 모아서 만든 것입니다.

 

 

 

 

그 고백들 중에 지난주에 본 말씀은 ‘하늘에 오르사’입니다. 오늘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주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5절에 보시면 주님께서 오시면 모든 자들이 그 앞에서 직고하게 될 것입니다. 숨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곽 집사님이 직장에서 피고나 원고를 불러서 조사를 하면 절대로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범죄를 하였음에도 시치미를 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주님 앞에서는 사실대로 불어! 이렇게 말할 필요도 없이 모두가 다 직접 자기 죄를 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그 주님이 하늘에 오르시고 지금도 일하고 계시며 장차 심판하러 오실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된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것은 베드로 사도 당시의 사람들에게 복음이 증거 되었다는 것만이 아니라 지난주에 3장에서 본 대로 노아 시대에도 복음이 증거 된 것입니다. 그렇게 복음이 증거 된 것은 복음을 듣고 믿은 사람이나 믿지 않은 사람이나 다 육체대로 심판을 받은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미 복음을 듣고 믿은 사람들이 육체적으로 모든 사람들처럼 심판을 받아 죽은 모습으로 보이지만 듣고 믿은 사람들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따라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산 모습들이 노아입니다. 노아도 일반 사람들과 같이 죽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 안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래서 산 것입니다. 그가 완전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덮어주심의 은혜가 그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살았지만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믿은 것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 약속의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곧 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세상의 풍속을 따라서 살 수가 없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란 이 세상의 정욕은 지나간 때가 족한 줄 알고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하며 살도록 조치하시는 시기가 육체의 남은 때입니다. 평생에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주님을 믿고 살아갑시다.

 

 

 


베드로전서 4:7-11 만물의 마지막 2006. 5. 31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지난번의 말씀에서 성도에게 고난이 오는 것은 육체의 남은 때를 정욕을 위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기 위함이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육체의 남은 때가 있다는 것은 마지막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 개인의 육체의 남은 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말씀을 보시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깝다고 합니다.

 

 

 

 

모든 만물의 마지막이 있고 그 마지막 때가 가깝다는 것을 아는 것은 성도에게만 주어진 지혜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평소에 살아가면서 마지막을 의식하며 살지를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현재를 더 행복한 삶으로 만들고 싶어 하고 어느 정도 성취가 되면 그 행복한 삶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이지 마지막을 생각하며 살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서로 암묵적으로 끝을 말하지 않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란 이 세상이 이미 끝장난 세상임을 알고 사는 것입니다. 마지막이 얼마나 남았는가 하는 역사적인 시간은 의미가 없습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성령의 임하심이 종말인 것입니다. 구약에서 증거 한 종말의 때가 이미 도래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세에 성령을 부어주시겠다는 약속이 성취가 되었고 그 성령이 임한 자는 종말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란 늘 종말론적인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가장 종말론적으로 살았던 사람을 예로 들자면 에녹입니다. 유다서 1:14-15절입니다. “14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15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에녹이 예언자입니다. 세상의 심판에 대하여 예언한 것입니다. 그 시기는 창세기 5장에 보면 에녹이 므두셀라를 65세에 낳았는데 그때부터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므두셀라를 낳을 때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입니다. 그 계시란 므두셀라가 죽으면 이 세상에 심판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므두셀라가 죽던 해가 노아 600세 되던 해가 됩니다. 그러므로 에녹은 심판의 날을 늘 의식하여 산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도 성령이 임한 성도라면 늘 마지막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마지막이 가깝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지금 염려와 근심과 걱정들이 부질없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지금 이루고 싶어 하고 꼭 해결하고 싶은 문제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오늘 밤에 내가 죽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 오늘 밤에 이 세상의 종말이 온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들입니까? 그러므로 만물이 마지막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자이며 그런 자만이 이 종말을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지금, 아니 베드로 사도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깝다고 한 것은 벌써 2000년이 다 되어 가는데 무엇이 그렇게 가까운 것입니까 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사실을 잊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경험하는 시간은 진리가 아닙니다. 자기 신체의 변화에 불과한 것입니다. 자기 신체가 편하면 시간은 짧게 여겨지고 자기 신체가 괴로우면 시간은 길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마지막이 이런 것이라고 하면 그 말씀에 아멘 할 뿐입니다.

 

 

 

 

디모데후서 3:1-5절입니다. “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 말씀에서 말세의 고통 하는 때라고 합니다. 아담의 범죄 후에 이러한 고통의 때가 아닌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늘 말세의 고통 하는 때였습니다. 그래서 심판과 저주가 가득하여 사람의 일평생이 수고와 슬픔 가운데 지나가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 후의 모든 인간의 삶이 말세요 고통 하는 때요 심판의 때인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의 심판도 일어나고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계속하여 인간들은 고통에서 벗어나 보려고 몸부림 쳐온 것이 인간의 역사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상황을 아브라함 요수에 헤셀이 이렇게 비유하였습니다. 진흙에 다리가 박혀 빠지지 않자 생각해 낸 것이 머리를 박고서 다리를 빼낸 것입니다. 그러나 머리가 진흙에 박혀버린 것과 같습니다.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이것이 아담 이후의 종말의 상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인간의 힘으로 일어날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언약하신 대로 그 아들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이 임하시고 성령을 보내심으로 종말을 알게 된 자들이 성도인 것입니다. 이런 성도는 어떻게 이 마지막 때를 삽니까?

 

 

 

 

4:7절입니다. 성령이 임하여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줄을 아는 성도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라는 것은 세상에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취하여 사는 사람은 세상의 종말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영원하리라고 보고 이곳에서 영원히 안정적이고 평안하게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기도를 하는 것은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여 그것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물의 마지막을 알기에 불타 없어질 것들을 구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4:8절입니다. 무엇보다 열심히 사랑하라고 합니다. 종말의 특징이 디모데후서 3장에서 보았던 대로 자기만을 사랑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물론 이 자기 사랑이란 아담의 범죄 이후에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죄악 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의 영인 성령이 임한 자는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 것입니다. 죄를 덮는다는 것은 자신의 죄가 덮어진 것을 아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모습입니다. 자신의 허다한 죄가 덮어지고 가려진 적이 없거나 있는데도 그것을 무시하는 사람은 남의 죄를 덮어줄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노아가 술에 취하여 벌거벗어 누웠을 때에 함은 그 아비의 수치를 드러내었습니다. 그러나 셈과 야벳은 그 수치를 덮어 주었습니다. 노아가 술에서 깨어났을 때에 그 사실을 알고 함을 저주하였습니다. 그 저주는 형제들의 종의 종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이 술 취해서 벌거벗었는데 왜 아들을 저주한 것입니까? 함이 노아 홍수에서 살아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덮어주셨기에 살아남은 것입니다. 노아 방주의 덮어줌, 정결한 짐승의 희생으로 자신의 부정함이 가려졌는데 그 아비의 허물을 덮어주지 못하여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때의 복은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림을 받은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 복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줍니다. 이것이 열심히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죄를 모르는 사람에게 너의 죄를 덮어줄게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성령이 임하여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알고 그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가림을 받은 사람에게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종말을 아는 사람이 열심히 사랑할 내용인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 사도가 열심히 사랑하라고 하면서 그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죽도록 충성하겠다고 따라나섰지만 세 번이나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부인한 경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을 예수님께서 다 덮어주신 것입니다. 그 사랑을 입었기에 허물을 덮어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의 허물을 덮어줄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죄인인지를 알면 알수록 덮어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4:9절입니다. 서도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라고 합니다. 인도에서 현지 성도에게 식사를 대접받았습니다. 멀리서 예수 믿는 형제가 왔다고 대접을 하는데 식사가 끝날 때 까지 서서 계속 시중을 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자라면 더 가져다주고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하는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접을 하다가 원망이 나올 수 있는 경우가 생깁니다. 마르다가 마리아를 원망하는 것처럼 대접하는 일에 원망이 나오는 경우가 있을 때에 원망 없이 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원망 없이 하게 됩니까?

 

 

 

 

4:10절입니다. 각각 받은 은사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은사가 없이 하는 것은 원망이 나오게 됩니다. 사람들 앞에 보이기 위한 것이나 자기를 과시하기 위함 이라면 누가 알아주지 않을 때에 원망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받은 은사대로 한다면 원망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서의 봉사란 모두가 은사대로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란 은사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은사를 받았기에 청지기입니다. 주인이 따로 있고 자신은 집사인 것입니다. 선한 청지기처럼 서로 봉사하는 것이 마지막 때를 사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4:11절입니다. 새 번역으로 봅니다. “말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답게 하고, 봉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는 사람답게 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영광과 권세가 영원무궁 하도록 그에게 있습니다. 아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과 봉사하는 사람을 따로 말하고 있지만 원리는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이 자신의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사상이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안 됩니다. 말씀을 전하는 것도 은사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람답게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야망을 이루기 위하여 전하는 것도 안 되지만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여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마치 아모스 선지자가 전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니 어찌 말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느냐는 자세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각양 봉사하는 것도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봉사하는 사람답게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힘으로 봉사하는 것은 반드시 자기가 부인되어지고 은혜가 드러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공급하시지 않는 자기 과시나 자기 힘으로 하게 되면 누가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서 여러 가지 봉사하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께서 은사로 주셔서 하게 되는 일이 귀한 것입니다. 누가 알아주든지 아니든지 간에 주님이 주시는 은혜대로 봉사하는 것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움을 아는 사람의 자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봉사를 하든지 간에 자기가 부인되어지고 주의 은혜가 드러나는 봉사는 우리의 자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9-11절 말씀을 봅니다. “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 그러므로 내나 저희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습니다.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주님의 오심이 더 가까워졌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을 진데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기도합시다. 열심히 서로 사랑하는 것은 허다한 죄를 덮어주는 것입니다.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양 받은 은사대로 선한 청지기로 봉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 헛되지 아니하여 자기가 부인되어지고 주님의 은혜만이 드러나서 주님께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히 있기를 소원합니다.

 

 

 


베드로전서 4:12-19 복 있는 자 2006. 6. 7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17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18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

 

 

 

 

지난주에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한 주간동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음을 경험하며 사셨습니까? 아니시지요? 세상은 여전히 활기차게 돌아가고 있는데 만물의 마지막이라는 어떤 조짐도 보이지 않았지요! 그러나 성경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고 말씀할 뿐만 아니라 마지막의 특징이 이미 창세기에도 드러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지식이나 학문으로는 만물의 마지막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자원의 고갈이라든가 환경오염으로 인한 대 재앙을 말하기는 하지만 성경은 그런 것으로 마지막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마지막과 심판을 말씀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이루시기 위한 마지막인 것입니다. 기존의 세상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아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나라를 만드시는 것입니다.

 

 

 

 

기존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다 폐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미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 나라를 아들의 나라라고 합니다. 이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미리 아신 자를 아들이 찾아내서 구원하시는 방식으로만 만들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기존의 세상의 질서를 고집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눈에 가시와 같은 자들이 예수 믿는 자들인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세상이 따로 있다고 말하는 자들이기에 싫어하는 것입니다. 물론 믿는다는 말을 하면서도 보이는 세상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자기들 편이기에 핍박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의 영이 임하여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것을 믿는 자들이 있다면 이들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만물의 마지막이라는 세대에 일어나는 일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시대에서 복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14절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이 무엇인지를 전체적으로 보고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지금 새벽기도 시간에 성경에서 복이 무엇인가 하는 주제로 성경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전에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대로는 성경에서 최초로 기도하고 응답이 주어지는 형태로 아브라함의 기도를 보았습니다. 그 기도는 소돔과 고모라 성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의인 열명이 없어서 멸망하는 그 성에서 아브라함을 생각하셔서 롯을 구하여 냅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처음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도의 내용이 멸망당하는 성에서의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면 복이란 무엇입니까? 역시 같은 상황입니다. 창세기에서부터 심판이 거듭되고 있는 상황에서 무엇이 복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성에서 물질의 풍요와 성적쾌락으로 살고 있는 것은 저주와 심판아래 있는 모습입니다. 그 성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복인 것입니다. 물론 그 성에서 나오게 되면 당장 살 곳이 없어서 산 속에 굴에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됩니다만 오늘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새벽기도시간에 미가서를 보고 있습니다. 미가서에서 무엇이 복인가를 보고 있습니다. 선지자 미가의 시대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반적인 역사가 다 그렇습니다만 전혀 복 받을 처지가 못 됩니다. 저주와 심판만 받아야 마땅한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라는 것은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것만 골라서 하는 모습입니다. 그 총체적인 범죄의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가서 3장을 봅니다. “1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두령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들아 청컨대 들으라 공의는 너희의 알 것이 아니냐 2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좋아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3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남비와 솥 가운데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4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찌라도 응답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의 악하던대로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우시리라 5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 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6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흑암을 만나리니 점 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 7 선견자가 부끄러워하며 술객이 수치를 당하여 다 입술을 가리울 것은 하나님이 응답지 아니하심이어니와 8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9 ○야곱 족속의 두령과 이스라엘 족속의 치리자 곧 공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는 자들아 청컨대 이 말을 들을찌어다 10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11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 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12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 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 이런 시대가 만물의 마지막의 모습입니다. 과연 무엇이 복입니까?

 

 

 

 

미가서 7:18-20절입니다. “18 ○주와 같은 신이 어디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19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20 주께서 옛적에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주의 긍휼히 여기심이 복입니다. 야곱에서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신 것이 복입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이런 복이 참 복이라고 믿고 말하는 자를 세상은 핍박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뺨을 치고 감옥에 가두고 죽인 것입니다. 그런 선지자를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하신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고 하시면서 그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모든 긍휼과 자비가 주어지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는 심판과 저주아래 있다는 소식을 전하는 사도들이 역시나 세상에서 핍박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워졌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인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이 증거 한 것을 믿고 말하지 아니하고 세상의 것들을 바꿔 치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으면 세상에서 성공하고 세상에서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도인 베드로 사도는 전혀 그렇게 말씀하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믿고 잘 믿을수록 핍박과 시련과 고난이 더 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2절을 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처럼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그냥 시련이나 시험이 아니라 불같은 시험이 닥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자들이 생각하기를 내가 무엇을 잘 못 믿어서 이런 시련이 오는가 하면서 이상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풍토가 그렇습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만사가 형통하고 복을 받는다고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시면 정 반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누구 말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까? 수많은 목사의 말과 수많은 간증 자들의 말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까? 성경 말씀을 믿어야 합니까? 목사들이 신학교에서 배울 때에는 성경의 기록만이 계시라고 배웁니다. 다른 신학교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장로교라고 이름 하는 신학교에서는 대부분 그렇게 가르치고 배웁니다. 그런데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회를 하면서 계시가 바뀌는 것입니다. 목회 현장의 경험들이 계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성공적인 목회가 된다면 누가 뭐라고 해도 진리인양 계시인양 먹혀들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가 만물의 마지막 때인 것입니다.

 

 

 

 

13절을 봅니다. 그러나 성도라는 것 때문에, 그리스도인 이라는 것 때문에 오는 시련과 고난이라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왜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런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19절을 봅니다. “19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16절에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택한 것이 아니요 예수님이 우리를 택하셨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택하심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베드로 사도가 그대로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성도가 고난을 당할 때에 즐거워해야 합니까? 그런 고난은 잠시 받는 고난이며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바울사도가 로마서 8장에서 역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13절에서도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4절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라고 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15절 말씀입니다.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것으로 고난을 받지 말라고 합니다. 자기가 잘못해서 당하는 고생을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으로 오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택하여 세우셨기에 세상의 미움을 받는 일이 일어나면 그것이 복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 위에 하나님의 영 곧 영광의 영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영이 세상의 영광을 받는 자리에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는 자리에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처럼 스데반 집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 하다가 돌에 맞아 죽을 때에 보좌 우편에 주님께서 일어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영광의 주님이 스데반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16절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초대교회 때에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경멸의 의미로 불렀던 이름입니다. 그러나 그런 고난이라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이 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거나 부끄럽게 여기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이 심판아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7-18절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먼저 심판이 시작됩니다.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는다면 하나님의 복음을 복종치 아니하고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의 그 마지막이 어떻겠는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는 자들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다면 복음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은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19절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에게 부탁할 것이라고 합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 그 영혼을 주님께 부탁하였습니다. 이 복이 우리에게 있기를 소원하십니까? 아니면 피하고 싶은 복입니까?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기에 더욱 복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1-4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 2006. 6. 14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오늘 말씀은 장로들에게 권하는 말씀입니다. 장로란 신약성경에서 감독 목자 목사와 함께 쓰이는 말입니다. 각 지역의 교회에서 말씀을 증거하고 치리하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장로들에게 권하는 말씀이기에 장로가 아닌 사람은 상관이 없는 말씀이 아니라 더욱 분명히 알아야 할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5:8절에 보시면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삼킬 자를 어떻게 삼키겠습니까? 거짓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다른 복음을 전하고 다른 영을 전하여 진리에서 떠나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인도하는 자가 장로이든 목자이든 목사이든 바른 영에 속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도자인데 얼마나 잘 알아서 하시겠느냐고 하면 안 됩니다. 요한 일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4:1-6절입니다. “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2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찌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3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5 저희는 세상에 속한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1)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는지 시험하여 분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들이란 거짓 선지자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니 그 사람이 목사라고 해서 다 믿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분별합니까?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셔서 고난을 받으신 것을 말씀합니다. 또 한 가지의 중요한 특징은 저희가 세상의 영을 받았기에 세상에 속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은 그들의 말을 듣습니다. 세상사람 듣기 좋은 말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사도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라고 간판을 걸어놓은 곳 치고 그리스도가 육체로 오셨고 고난을 받으셨다는 말씀을 하지 않는 곳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다 이 말을 하고서는 결론부분에 가면 결국 세상에 속한 말을 하고 세상의 영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속한 사람들이 그 말을 좋아하고 듣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사도들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증거의 핵심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목사거나 목자거나 장로는 무엇을 증거 해야 하는가 하면 사도들의 증거를 증거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지식이나 경험이나 체험을 새로운 계시인양 증거 하면 안 됩니다. 더더구나 그 내용들이 세상에 속한 것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고 그 영광을 바라보게 하는 것은 바로 적 그리스도가 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오늘날 장로들에게 권면하는 이런 말씀을 잘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세상이 무엇인지를 간단하게 정리해 보고서 다음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독일성서 공회의 새 번역 성경 해설부분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요1:1-3),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다(요3:16). 그렇지만 세상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여(3:19) 생명수(4:10)와 생명의 떡(6:35)을 물리쳤으므로, 곧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세상은 '이 세상', 곧 사단이 임금 노릇 하는 어두운 세상(12:31),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세상(3:19)이 되었다. '이 세상'이 악의 세력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은 신약 성경의 다른 여러 곳에서도 표현된다(갈1:4; 엡6:12).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죄에서 해방되고 새롭게 창조된 사람은 이미 악의 세력에서 벗어났고 아직 '이 세상'에 살더라도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다. 이 사실을 그는 변화된 행동으로 드러내지만(롬12:2; 고전5:9-11) 또한 그는 선이 유일한 세력인 새 세상을 기다린다(벧후3:13).”

 

 

 

 

이제 본문의 말씀 1절을 봅니다. 사도 베드로가 지역 교회의 장로들에게 권하면서 자신이 함께 장로 된 자라고 합니다. 자신을 다른 장로들과 동등하게 말하고 있지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높은 위치에서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장차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그 영광에 참예할 자라고 합니다. 여기서 살펴볼 내용이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살면서 이런 말을 많이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합니다. ‘고진감래’ 고난을 잘 감당하고 이겨내면 성공이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성공시대’나 ‘신화창조’같은 이야기들을 보면 어떻게 세상에서 성공했는가의 이야기를 다루는데 여러 가지 어려운 고난을 잘 이겨내고 나서 성공을 했다는 이야기들입니다. 그 성공을 이 세상에서 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고난은 많이 말하지만 그 영광은 현세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광이란 것은 받은 자만이 알기에 세상 사람들이 겉으로 보기에는 그 사람은 고난 가운데 있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14절 말씀에서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라고 합니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머문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이 볼 때는 영광의 영은 보이지 않고 고난만 보이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을 때에 누가 영광의 주를 보았습니까? 돌 맞아 죽는 스데반만 본 것입니다. 이런 영광을 많은 사람이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보았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목격한 자들은 약 오백여명 뿐이었습니다. 그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을 마지막으로 본 자는 바울사도 뿐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증거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이 증거 되지만 지금 그 영광은 세상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 영광은 장차 나타날 영광인 것입니다.

 

 

 

 

다시 1절을 보시면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라고 합니다. 장차 나타날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할 자이지만 지금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장로 된 자들에게 세상의 헛된 영광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증거 하는 일에 참예할 것을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로들에게 권하는 말씀은 세상의 목회 성공이라는 개념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 권면의 결과는 현재적으로 고난을 당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전체가 현재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위로하고 격려하며 권면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1:7절에서도 성도가 당하는 현실을 무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는 금보다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잠간 근심하게 되겠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는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세상의 영광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주어질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전서에서 어떻게 말씀하는지 다시 봅니다. 1:11절에 보시면 선지자들도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부지런히 살폈는데 그것은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한 것입니다. 2:4절에 보시면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사람에게 버림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은 산돌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 버림 받은 돌에 붙어서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는 것이기에 세상에서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2:20-21절에서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것이며 이를 위하여 우리가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고난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3:14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라고 합니다. 4:1-2절에는 고난을 통하여 죄가 그치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한다고 합니다. 결국 사도란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도의 권면으로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는 사람은 세상의 영광을 바라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할 영광의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계시록에 보면 면류관조차 주님께 벗어드리는 것이고 보면 이러한 일조차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에 되었다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2-3절입니다.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시면서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양무리를 치게 될 때에 부득이 함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하여 하라는 것입니다.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목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익이란 물질만이 아니라 세상의 명예와 영광을 위한 것도 포함이 됩니다.

 

 

 

 

자신의 야망과 정욕을 위하여 양들을 몰아가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증거 하는 것하나님의 영광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것으로 바꿔치기 하여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는데도 그런 사람을 좇아가는 것은 왜 그런 것입니까? 요한일서 4장에서 보았던 대로 세상에 속한 자는 세상의 말을 듣기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합니다. 맡겨진 양무리는 자기의 양이 아닙니다. 주님의 양이기에 주장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행전20:17-35절을 봅니다. “봉독” 이 말씀과 베드로 사도의 장로들에게 권하는 말씀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 뜻과 의미에서 동일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장로를 감독자라고 합니다. 무엇의 감독자인가 하면 하나님의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로란 자기 양인 것처럼 주장하면 안 되고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나 바울사도가 권면한 이런 내용으로 목회를 하는 자가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여기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면류관을 받는 것이기에 현 세상에서 주어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면류관을 받지만 받고서는 그 면류관을 쓰는 것이 자신에게 합당치 아니함을 알고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보좌에 반납을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10-11절입니다. “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하더라” 이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하는 자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 들입니다. 그들에게 장차 나타날 영광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헛된 영광에 속지 마시고 세상에는 감추어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영광에 마음을 두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5:5-11 마귀를 대적하라 2006. 6. 21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11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찌어다 아멘

 

 

 

 

지난주에 장로들에 대한 권면을 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장로들의 다스림을 받는 젊은 자들에게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그렇다고 장로에게 해당되지 않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난주에 장로에 대한 권면의 말씀도 모든 성도가 다 알아야 하는 것처럼 오늘 이 말씀도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말씀은 내가 필요한 부분을 취사선택하는 말씀이 아니라 말씀 전부가 자기 백성을 향하여 살아 움직이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8-9절 말씀을 봅니다. 우리의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근신하고 깨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굳게 하여 마귀를 대적하라고 합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고 합니다. 베드로전후서가 다 성도들이 현재 수많은 고난을 당하는 중에 위로하고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6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은 고난이 오는가 하면서 믿음에서 떨어질까 봐 근신하여 깨어서 마귀를 대적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한가지입니다. 시편 2편에서 보면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서 끊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떠나게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온갖 작전이 다 나오는 것입니다. 그 작전들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5절입니다. 젊은 자들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마귀의 작전은 사람으로 하여금 교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교만케 함의 원천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일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으면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로 범죄 하게 한 유혹인 것입니다.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 너도 누구처럼 되리라! 너도 할 수 있다! 왜 바보처럼 당하고만 있느냐? 빼앗아라! 차지하라! 정복하라! 네가 최고다! 너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다! 강해야 산다! 지시를 받고 사느냐! 지시하면서 살아라! 우리의 모든 삶의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모습이 자족을 모르는 모습입니다. 더 높게 더 멀리 더 빠르게 성취하고자 합니다. 그 결국이 어디를 향하겠습니까? 나도 하나님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는 이유를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교만한 것과 높아진 것들에 대하여 심판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잠언서 몇 구절을 봅니다. 16:18-19절입니다. “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19 겸손한 자와 함께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18:12절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21:4절입니다.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이런 말씀들은 많이 들어보았습니다.

 

 

 

 

이사야 2:5-22절의 말씀을 봅니다. “봉독” 여호와의 날이 임하는데 어떤 여호와의 날입니까? 야곱의 족속이 여호와를 버리고 동방풍속이 가득하면 블레셋 사람 같이 술객이 되고 이방인으로 더불어 손을 잡고 언약 한 것입니다. 그러니 여호와의 언약을 배신한 것입니다. 언약을 배신한 저변에는 무엇이 있는가 하면 그 땅에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 우상도 가득하여 자기 손으로 지은 것을 공경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믿을 것들이 가득하기에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 심판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날에 사람들이 바위틈에 들어가며 진토에 숨어 여호와의 위엄과 그 광대하심의 영광을 피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 날에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며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입니다. 교만하고 거만한 자와 자고한 자를 낮아지게 할 뿐만 아니라 레바논의 높고 높은 산과 모든 백향목과 바산의 모든 상수리나무와 모든 높은 산과 솟아오른 작은 산들과 아름다고 좋다는 것들까지 다 낮추어 버리심으로 여호와 홀로 높이심을 받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22절에서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으니 수에 칠 가치도 없다고 하십니다.

 

 

 

 

수에 칠 가치도 없는 인생들이 높아지고자 안달을 하면서 사는 것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이 그 마음에 내장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바벨탑을 쌓기에 바쁜 것입니다. 월드컵에서 우리 이름을 내자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축구 감독이 목사인데 그 목사가 토고 전에서 승리하도록 간절히 눈물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토고는 우상을 섬기는 주술사가 선수들에게 기도를 해준다고 하면서 더욱 강력한 기도가 요청이 된다는 편지를 후원교회에 보낸 것입니다.

 

 

 

 

그러면 스위스 전에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그렇게 많이 들어온 종교개혁자 칼뱅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한, 기독교 전통이 아주 오래된 나라와 시합이 붙을 때 하나님은 어느 편을 들어주어야 합니까? 이런 식으로 하면서 승리하고 성공하여 높아지면 하나님의 영광인줄 압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면서 자기 이름도 덩달아 높아지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위스편도 한국편도 아닙니다. 홀로 높으심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6절 말씀에 보시면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 겸손하라고 하면서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하는 말씀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겸손하게 있으면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높여주신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 높여주심이란 세상이나 세상의 속한 것이 아닙니다. 그 높여주심이란 홀로 높임을 받으시는 주님을 높이는 자리에 참예하는 것입니다. 보좌에 계신 이와 어린 양께 찬양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무궁토록 돌리는 그 높은 자리에 참예하여 주께 영광을 돌리는 그 자리가 얼마나 높은 자리입니까!

 

 

 

 

베드로가 직접 체험한 것입니다. 세상에서 스스로 높아지고자 제자들과 다투고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세상에서 높아지고자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는 자리에 간다고 하니 말리려고 하다가 사단아 물러가는 말씀을 듣고, 또 죽는 자리까지 함께 하겠다고 하였으나 그 맹세도 죽음 앞에서는 부인하고 저주하고 도망간 것입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스스로 따르고자 한 것은 젊어서 스스로 띠를 띠고서 높은 자리에 이르고자 하였지만 그러나 노년에는 남이 띠를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간다고 요한복음 21장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원치 않는 자리가 십자가의 자리이며 세상이 알지 못하는 영광의 자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높아지고 교만한 것들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한나의 찬양과 마리아의 찬양 속에 이미 그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누가복음 1:46-55절입니다. “봉독” 세상을 뒤집어엎는 것입니다. 세상의 교만한자를 내리치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비천한 자란 세상에는 자신의 도움이 없어서 오직 여호와의 도우심만 바라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같은 심정을 가진 자들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교만할 것이 없는 자들입니다. 오직 주의 긍휼만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이들을 높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환난을 당하는 자들에게 권면을 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주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리라는 것입니다. 마귀의 유혹이 무엇인가 하면 세상에 대한 염려입니다. 내일에 대한 염려입니다.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가시떨기 밭에 떨어진 비유를 하시면서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막혀 결실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염려들로 인하여 재리의 유혹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염려들을 주께 다 맡겨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는 염려를 자꾸만 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므로 세상 근심은 사망에 이르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회개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마귀의 작전이 무엇인지 두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는 교만하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세상에 대하여 염려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마귀의 유혹은 날마다 있는 것입니다. 늘 교만하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것이 우리에게서 나옵니다. 그리고 늘 세상에 대한 염려 내일에 대한 염려에 사로잡히게 만듭니다. 이것이 바로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아다니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교만하고 싶은 자에게 교만하게 될 방법과 기회를 주는 것이며, 없는 염려까지 만들어 넣어주는 것입니다.

 

 

 

 

이런 마귀를 어떻게 대적해야 합니까? 8절입니다. 근신하여 깨어야 합니다. 그리고 겸손해야 합니다. 염려를 주께 맡겨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대적하는 것은 믿음을 굳게 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굳게 하라는 말씀은 내가 겸손해야지! 염려를 주께 맡겨야지! 근신하여 깨어 있어야지! 나는 할 수 있어! 나는 마귀를 이길 수가 있어! 이렇게 자신에게 다짐을 하는 것이 믿음을 굳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9절을 봅니다.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합니다. 마귀를 대적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요한일서 5:4-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세상을 이기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 믿음이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승리하셨습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마귀를 십자가로 이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승리란 그 십자가 안에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이 볼 때는 십자가 안에 머문다는 것은 죽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안에서 세상을 보면 세상이 죽은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믿는 형제들이 동일한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한 자들입니다. 왜 승리한 자들입니까? 10절을 봅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너무나 놀라운 말씀입니다. 세상이 받을 수 없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이런 말씀이 선포가 되는 것입니까? 지금 현재적으로 성도들이 여러 가지 고난을 받고 마귀의 시험과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데 이미 그리스도의 영광에 들어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분이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면 터를 견고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고난은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속하여있다는 사실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미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자에게 허락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도 로마서 8장에서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믿는 것은 사람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기에 장래 일은 아직 장담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장래일이 확증이 된 것이며 하늘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일로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 누구도 항의 할 수 없는 말씀이 이어서 나옵니다. 11절에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 찌어다 아멘. 이것을 믿는 믿음이, 이것이 믿어지는 믿음이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깁니다.

 

 

 


베드로전서 5:12-14 이 은혜에 굳게 서라 2006. 6. 28

 

12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 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13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14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베드로전서의 끝 인사입니다. 이 서신을 기록한 목적은 12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참된 은혜를 증거 하는 것이며 또한 성도로 하여금 이 은혜에 굳게 서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루아노는 실라를 그렇게 부릅니다. 사도 바울과 선교여행을 하기도 한 실라가 지금은 베드로와 함께 사역을 하고 있고 마가도 그러합니다.

 

 

 

 

이 서신은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구술하고 실루아노가 대필을 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경우에도 구술을 하고 대필을 한 것입니다. 때로 그 편지가 자신의 편지임을 증거 하기 위하여 끝 부분에 친필로 표시를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서신서의 끝 인사는 은혜를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12절에 증거 한 하나님의 참된 은혜가 무엇인지 베드로 전서 전체를 다시 한번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편지를 받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한꺼번에 읽습니다. 아무리 긴 편지라도 한번에 읽고나서 그 다음에 무슨 뜻인지 부분적으로 살펴봅니다. 우리는 그동안 부분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만 그러나 전체의 맥락은 하나님의 참된 은혜가 무엇이며 그 은혜에 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아왔습니다. 이제 전체를 봅니다.

 

 

 

 

1:1-2절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를 흩어진 나그네라고 부릅니다. 그 흩어진 곳에서 여러 가지 고난과 핍박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전합니다. 은혜의 결과로 평강이 주어지는 것이기에 은혜와 평강을 함께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 은혜가 무엇입니까?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무엇이 은혜인 것입니까? 그 고난을 빨리 면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2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것이 은혜입니다. 은혜란 내가 일한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슨 선한 일을 할 처지가 못 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허물과 죄로 죽어 있었기에 거역하고 반항하는 하나님의 원수였던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란 전적으로 주시는 분의 일하심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 은혜가 어떻게 나타난 것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사역이 한꺼번에 다 나타납니다. 이보다 더한 감격과 감사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까지 하신 그 일이 모두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찬양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3-12절입니다. 얼마나 찬송이 사무쳤으면 “찬송하리로다.”라고 하면서 다음 구절을 시작하겠습니까? 그 찬송의 내용은 주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찬송인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일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대로 상상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라고 부르신 하나님이 행하신 그 찬송받기에 합당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산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의 죽음과 부활이 되어 거듭나게 하신 것이 찬송할 내용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산 소망을 주신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인생들의 소망은 역시 죽은 소망이요 썩어질 소망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거듭난 자들에게는 산 소망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 소망이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는 것입니다. 곧 하늘에 간직된 소망인 것입니다. 이 소망은 사람이 가질 수도 없었고 이룰 수도 없는 소망인데 다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이미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을 성도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소망은 우리 힘으로 받을 수도 없고 지킬 수도 없기에 믿음을 주시고 시련도 주셔서 그 소망에 견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환난과 고난을 당하는 것은 하늘에 간직된 소망을 더욱 굳게 할 뿐이지 빼앗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난도 은혜이기에 잠간 근심하게 되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결국은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보지 못하나 이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인하여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성도가 은혜위에 서야할 내용입니다.

 

 

 

 

이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신비롭게 숨겨져 있었는지 구약의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살피고 연구하였습니다. 그 선지자들 속에 역사하신 그리스도의 영이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한 내용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1:13-25절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듣고 이 은혜의 주님을 믿게 된 사람들은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하시고 또 가지고 오실 은혜를 바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에 굳게 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은혜가 무엇으로 주어지는 것입니까? 우리의 조상으로부터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을 받은 것은 금이나 은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금과 은을 마련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 소망을 둡니다. 소망을 하나님께 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위에 두는 것입니다. 오직 주의 말씀만이 세세토록 영원한 것입니다.

 

 

 

 

2:1-10절은 이제 거듭난 자는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엄마의 젖을 본능으로 찾듯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거듭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게 되어 있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고 합니다. 신령한 젖을 맛보면 볼수록 더욱 사모하게 됩니다. 그 말씀의 맛을 보는 것은 나 같은 죄인이 용서를 받은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용서를 받았다는 그 은혜를 맛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자기의 자존심을 세우는 곳입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젖을 먹는다고 그러면 놀리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님은 버림받은 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은 자는 이 돌에 붙어서 신령한 집이 됩니다. 왜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은 돌이 되었습니까? 사람들이 원하는 메시아가 아니었기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메시아는 자신들의 자존감을 세워주고 자신의 자랑과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어 줄자를 찾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은혜의 주님이 싫은 것입니다.

 

 

 

 

2:11-25절입니다. 이런 은혜를 입은 자들이 어떻게 세상에서 살아야 합니까? 나그네와 행인으로 삽니다. 그러므로 인간에 세운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이런 예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십자가 마을의 게시판에 무안의 오 목사님이 질문한 내용에 이 목사님의 답변을 보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파트 관리비에 부녀회비 3천원을 첨부시킨다는데 대하여 오 목사님이 따지려고 하자 이 목사님은 오히려 수고한다면서 미리 갖다 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리는 투명하게 하라고 하겠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은 지나가는 곳이기 때문이랍니다. 이런 자세로 사는 것이 성도가 은혜로 세상을 사는 모습입니다.

 

 

 

 

3:1-12절은 아내와 남편이 어떻게 할 것인지 또 모든 형제들에게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주라고 하는 정도로 낮아짐이 은혜의 모습입니다. 남편은 아내가 더 연약한 그릇인줄 알고 또 생명의 유업을 함께 받을 자이기에 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부부의 행복한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생명의 유업을 받는 은혜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형제들에게는 마음을 같이 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합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고 합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복을 유업으로 받는 것입니다.

 

 

 

 

3:13-22절은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 세상의 생존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성도란 이 세상에서 이미 죽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에 세상의 사람들이 그런 자에게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물으러 올 것입니다. 그러면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4:1-19절은 고난의 의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육체의 고난을 받음으로 죄를 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후로는 육신의 정욕을 따라 살지 않고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고난이 오는 것은 사생자가 아니라는 증거이기에 역시 은혜입니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 성도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복 있는 자의 모습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영광의 영이 곧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머물러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시작될 때가 되었으니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겠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5:1-11절은 교회의 장로들에게 권면하면서 장차 오실 목자 장이신 예수님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 분이 나타나실 때에 영광의 면류관을 생각하면서 양 무리의 본이 되며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하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에게는 장로들에게 순복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높이실 것이라고 말씀하면서 마귀를 대적하라고 합니다.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마귀를 대적할 것인가를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까? 믿음을 굳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하였기에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이기는 이김은 믿음인데 그 믿음이란 바로 10-11절의 말씀입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그냥 은혜의 하나님이 아니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이 다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그 은혜가 어떻게 나타난 것입니까? 이 은혜에 굳게 서는 것이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란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분이 잠간 고난을 당하는 성도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히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누구도 항의를 못합니다. 그 이유는 모든 권력이 세세 무궁토록 그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은혜에 굳게 서기보다는 시편에서 보았던 대로 말과 병거와 사람의 다리를 믿고 서려고 합니다. 또 금과 은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우리가 영원히 설 자리가 아닙니다. 그것들은 다 쇠하고 부패하고 낡아지고 더러워지고 불타 사라질 것들입니다. 오직 은혜위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은혜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모든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은혜에 굳게 서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 참된 은혜를 알고 그 은혜위에 굳게 서기를 바랍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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