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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히브리서 강해 1

공 상희 2009. 5. 6. 12:53


 

 

 

 

 

히브리서 강해 1

 

 

 

창원 늘푸른교회 이장우 목사

(2003. 11. 19. - 2004. 11. 24.)

 

 

 

 


目    次

1. 아들로 말씀하심 

2. 맏아들 
3. 왕이신 아들 
4. 큰 구원 
5. 고난으로 온전함 
6. 주의 이름으로 구원 
7. 사망으로 사망을 이김 
8.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9.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10. 안식에 들어감 
11. 살아있는 말씀 
12. 큰 대제사장 
13. 구원의 근원 
14. 말씀의 초보 
15. 그 마지막 
16. 맹세로 보증함 
17. 폐일언하고 
18. 별다른 한 제사장 
19. 온전한 구원 
20. 가장 중요한 것 
21. 더 좋은 언약 
22. 언약궤의 증거물 
23. 온전함 
24. 피로 세운 언약 
25. 죄와 상관없이 

 

 

 

 

히브리서 1:1-3  아들로 말씀하심  2003. 11. 19.


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2절 말씀을 보시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마지막이란 것은 더 이상 할 말씀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들로 말씀하신 것이 모두 다이며 완성이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아들로 말씀하시는 것을 마지막으로 삼아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과 모여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면 사람들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들이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이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부분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마치 퍼즐 그림을 헤쳐 놓고서 그 한 조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퍼즐 조각만을 하나님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는 언제나 자기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과 확신들이 고발을 받을 준비를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로 히브리서를 대하고자 합니다.

 

 

 

 

히브리서의 저자와 수신자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어떤 배경 하에서 기록되었는가는 대부분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 배경은 유대교에 익숙한 자들이 개종을 하여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도처에 퍼져있는 유대교의 핍박이 만만치 아니한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전도할 때 가장 핍박하는 자들이 유대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 이들에 대한 핍박을 견디기 힘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었다면 특별한 능력이 나타나서, 핍박하는 자들이 꼼짝하지 못하게 되고 자기들은 늘 승리하게 되면 견디기 쉬울 것인데 예수를 믿어도 별 다른 것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자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할까, 하는 위기에 처한 성도들에게 쓰여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히브리서의 말씀은 그때 그 시절의 말씀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아주 절실한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 새벽기도회 때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의 교회는 이방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이 복음을 듣고 복음의 진리 속에서 자유하고 있는데 가만히 들어온 거짓형제들이 예수 믿는 것만으로 부족하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지만 할례도 행하고 절기도 지켜야한다고 그들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울 사도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자신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며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히브리서를 보는 성도들도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위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을 들은 자들이 왜 또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잘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인간의 본성상 자기 행위가 없는 것이 불안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자기의 힘으로 사는 것이 당연한데 자기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은혜라는 것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행위로 돌아가려는 것입니다. 그것을 안전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할례와 안식일 지킴을 봅시다.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할례를 받으라고 하면 예수 믿는 것은 자기의 증거물로 가지기가 모호한 것입니다. 정말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 아니면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할례는 자기의 몸에 흔적이 있으니 얼마나 분명하고 확실합니까? 그리고 안식일 지킴도 얼마나 분명합니까? 예수님만 믿는 것으로 부족하고 허전한 것처럼 여겼는데 할례나 안식일 지킴을 자기의 행위로 간주하게 만들어주니 귀가 솔깃한 것입니다.

 

 

 

 

교회 다니던 많은 사람들이 이단에 넘어갑니다. 이단들의 공통된 특징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부족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추가하는 것입니다. 안식교의 예를 들어봅시다. 안식을 지키기 위하여 학교도 삼육학교를 보내는 것입니다.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삼육대학교로 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목숨처럼 안식일을 지키는 것입니까? 예수 믿는 것만으로 부족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핍박 중에도 안식일 지킴이 얼마나 자기들의 정체성 확인에 분명하고 좋은 것이겠습니까? 여호와의 증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집총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군에 징집되어도 집총을 거부하여 전과자가 되어도 자기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지키기 위하여 그렇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열심과 확신은 얼마나 대단하겠습니까?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이런 모습은 없습니까? 목사나 교인이나 모두가 예수님만으로 무언가 허전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행함의 교리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주님에 대한 복음의 설교가 아니라 인간의 행함을 강조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의 결과인 예수님은 간곳이 없어지고 인간들의 행함만이 가득한 교회가 되어버렸다면 그곳은 이미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가 아니라 인간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모든 구약의 내용들의 완성이 되는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모든 내용들이 모형이고 그림자인데, 예수 그리스도는 실체라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과 선지자들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짐승의 피가 아닙니다. 연약함을 가진 제사장이 아닙니다. 자신의 피로 단번에 완벽하게 영원한 제물이 되시고 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구약을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예언의 정점으로 설명합니다. 모세는 종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집의 아들인 것입니다. 천사보다 뛰어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고서도 무언가 부족한 것처럼 흔들리고 있는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모든 것이 완전하고 부족함이 없으니 염려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역시 오늘 우리에게도 주어지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예수님만 계신다면 아무 부족함이 없습니다. 교회가 잘되고 못되고 하는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일하고 계시기에 주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라도 모이면 그것이 완전한 교회입니다. 목사가 없어도 장로가 없어도 됩니다. 찬양대가 없어도 건물이 없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 이름의 능력으로 모여진 사람이라면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그 이름을 오늘 말씀에서 아들이라고 합니다.

 

 

 

 

1절을 봅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구약을 말합니다. 구약 전체가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위한 예언이 되는 것입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도 아들을 목표로 한 것입니다. 아담도 아들을 증거하기 위한 것입니다. 첫 아담이 범죄하여 모든 사람이 죄인 되었다는 모형을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을 살려주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도 아담은 오실자의 표상이었습니다(롬5:12-21). 라멕이 노아를 낳았을 때도 그 아들이 안위케 하리라고 하였습니다(창5:29).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모세도 다윗도 결국은 하나님의 아들, 즉 약속으로 태어나는 아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씨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갈3:16).

 

 

 

 

2절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아들로 인하여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셨다고 합니다. 시편 2편에서 열방이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이들을 비웃으시면서 그들에 대하여 진노하십니다. 한 왕을 시온에 따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름 부음 받은 왕을 아들로 말씀합니다. 이 아들이 온 열방을 기업으로 받고 다스리시기에 그의 아들에 입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급하십니다.

 

 

 

 

마태복음 3:17절에서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변모하시고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을 때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시자 그때는 이미 모세와 엘리야는 사라지고 없었습니다(막9:2-8). 그러므로 열방이 다 예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만유를 그 아들이 받은 것입니다. 이 아들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13-23절입니다.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3)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그 아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러한 아들로 완성된 세상을 하나님께서 창조 전부터 계획하시고 이루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로 말미암아 창조되고 아들을 위하여 창조된 것입니다. 아담도 아들을 위하여, 노아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모세도 바로도 그 아들을 위하여 창조된 것입니다. 이 아들은 단순한 아들이 아니라 장자 즉 맏아들이 되신 것입니다.

 

 

 

 

구약에서 장자의 역할을 하는 자는 혈통의 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떨어지고 그 약속을 받아 희생하는 자가 맏아들이 되는 방식입니다. 요셉도, 유다도, 야곱도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맏아들이 되시기 위하여 동생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자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됨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맏아들이 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빈틈없이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위하여 구원을 하신 것입니다.

 

 

 

 

3절입니다. 이 아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입니다. 그 본체의 형상입니다. 부분적으로 말하던 것들이 실체가 드러난 것입니다. 그 아들이 만물을 말씀으로 붙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아들이 죄를 정결케 하시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보좌에 앉으신 것입니다. 이보다 더 아들에 대하여 어떻게 증거 하겠습니까? 이러한 아들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무엇이 부족합니까? 그러므로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 자기 의를 챙기는 쪽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완전하고 영원한 제물이 되시고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님만 있으면 천하를 얻는 것보다 더 나은 것입니다. 그 아들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누구를 위하여 창조된 것입니까? 그 아들을 위하여 창조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관심이 어디로 가야 합니까? 우리 가정을 위한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우리 가정입니다. 우리 교회를 위한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한 우리 교회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살아도 예수님을 위하여, 죽어도 예수님을 위하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 아들에게 입 맞추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이 만물의 마지막입니다. 아들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나와 세상은 간곳없고 구속한 주님만 보이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1:4-7  맏아들  2003. 11. 26.


4 저가 천사보다 얼마큼 뛰어남은 저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심이니 5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ㄱ)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ㄴ)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하셨느뇨 6 또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에 ㄷ)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찌어다 말씀하시며 7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ㄹ)그는 그의 천사들을 1)바람으로, 그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셨으되

 

 

 

 

사도들의 복음의 핵심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내용입니다. 세상이 볼 때는 분명히 실패한 증거물이 십자가입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아도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저주받아 죽은 죽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도들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이 임하심으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의 뜻이 이해가 되고, 기억나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그 말씀대로 복음이 증거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복음 선포의 결과 유대인들 중에서도, 이방인 중에서도 예수를 믿는 자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보다 유대인들이 더 힘들었습니다.

 

 

 

 

예수 믿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예수 믿는 유대인들을 심하게 핍박하였습니다. 그런 대표적인 사람이 바울입니다. 이런 핍박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미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의 택하심을 입었기에 세상이 미워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환난가운데서 유대 기독교인들이 다시 유대교의 전통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서, 율법으로 돌아가면 유대인들의 핍박은 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가는 곳마다 회당을 만들어 유대인 공동체를 유지하고 살아가는데 그런 곳에서 추방을 당한다는 것은 정말 살기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위기를 알고 있는 히브리서의 기자는 예수가 어떻게 완전한 메시아인지를 구약 성경을 인용하면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히브리서는 초대교회 때의 핍박받은 성도들에게만 주어지는 말씀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성,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이 교회에서조차 무시되는 세상에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을 바라보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지난주에 1-3절을 통하여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신다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마지막이란 더 이상 추가할 것이 없이 완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에 이 아들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내시고 그 새로운 세상을 통일하시며 다스리는 분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이 아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우선 1장에서만 보아도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기능을 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2절에서 아들로 말씀하시니 선지자입니다. 3절에서 죄를 정결케 하시니 제사장입니다. 4-14절은 천사보다 뛰어난 왕이십니다. 그래서 보좌와 홀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아들을 3절에서 무어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영광의 광체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그의 능력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시며 죄를 정결케 하시며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다고 증거합니다.

 

 

 

 

예수님을 이렇게 증거함으로 지금 믿음에서 흔들리는 자들을 붙들어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서 믿게 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르게 알므로 확신에 거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래된 습관과 선입견에 의한 예수님이 아니라 성경에서 계시된 예수님을 바르게 알고 믿는 것이 영생입니다. 오늘은 맏아들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이미 지난주에 하나님의 창조가 아들로 말미암고 아들을 위하여 창조된 것을 다른 서신서를 통하여 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아들에서 맏아들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냥 아들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왜 맏아들이라고 하시는지를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처음으로 장자권의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에서와 야곱입니다. 이미 태중에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하심으로 육신으로 태어난 형이 장자의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동생으로 태어난 야곱이 장자의 복을 받게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서를 자연스럽게 장자로 축복하시면 무리가 없을 텐데 왜 그렇게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일하시는지 의아해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은 육체로 태어난 자식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태어나야 된다는 것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장자를 봅니다. 야곱 자신이 차남이면서 장자의 권리를 받았습니다. 야곱이 죽으면서 누구에게 장자의 권리를 이양하는지를 보면 요셉에게 장자의 권리를 줍니다. 야곱의 원래 장자는 르우벤이지만 계모와의 관계로 인하여 장자권이 박탈되고 요셉이 이스라엘의 두 지파의 몫을 차지하게 됩니다. 요셉이 장자가 되는 것은 그의 희생 때문입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됩니다. 그 계시를 받음으로 형들의 미움이 심하여져서, 요셉을 죽이려고 하다가 팔아버립니다. 죽인 것과 동일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요셉이 그 형들을 살려냅니다.

 

 

 

 

그러므로 장자란 육체의 서열이 아니라 누가 희생하는가를 담고 있는 것이 장자의 기능입니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면서 손을 어긋나게 하여 오른손이 차남인 에브라임에 가고, 왼손이 장자인 므낫세에게 가도록 하여 축복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장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므낫세가 장자이기에 야곱의 오른손의 축복을 받기 원하였지만 야곱은 손을 어긋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혈통의 장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태어나서 희생하는 자가 장자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야곱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언약대로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약속의 때가 이르러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어 자기 백성을 인도하여 내십니다.

 

 

 

 

출애굽기 4:22-23절입니다. “22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23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장자로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거절하면 바로의 장자를 죽이신다는 것입니다. 장자 만들기의 싸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장자를 만드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그 언약의 완성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온전한 장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 영원하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지금 하나님의 장자가 어떤 방식으로 오게 되는지를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하고서 율법이 제정됩니다. 이 과정에서 모든 처음 난 곡물과 짐승과 사람까지 모두 여호와께 바쳐져야 합니다. 그것은 출애굽 할 때 어린양의 희생으로 처음 것이 대속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레위 지파가 땅의 기업을 받지 않고 제사장의 직분을 받음으로 이스라엘의 처음 난 모든 장자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헌신되어 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위 지파도 기능상 장자의 역할을 담당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1:4-5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천사보다 뛰어나십니다. 천사들보다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 이름이 아들입니다. 5절에서 시편 2편을 인용하면서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언제 천사에게 하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인용한 구절은 사무엘하 7:14절의 내용입니다.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지어 드리겠다는 소원을 말하자 하나님께서 거절하시면서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지어 주겠다고 하시면서 하신 언약입니다. 다윗도 이새의 8명의 자식들 중 막내였습니다. 그래서 전쟁에도 참여하지 못하는 아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지 아니하시기에 막내인 다윗에게 주어짐으로 역시 인간의 생각들을 부정하시고 자신의 뜻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유다 지파로 나온다는 야곱의 유언이 또한 장자에게서가 아니라 다윗에게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이 하나님의 집을 지을 것이며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솔로몬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지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성막에서 성전이 됨으로 성전이 고정이 됩니다. 그러나 이 성전은 모형이고 그림자이기에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무너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고 하시면서 3일 만에 일으키겠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고발한 죄목이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성령이 임하고서야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이제 영원한 성전이 되신 것입니다. 다른 성전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에게, 다윗의 후손이 성전을 짓고 내 아들이라고 부를 자인 솔로몬은 모형이며, 실체는 영원한 성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계시한 것입니다.

 

 

 

 

6절입니다. 이 아들을 맏아들이라고 합니다. 맏아들, 즉 장자의 특징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혈통의 서열이 아니라 누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희생하는가가 장자로 나타난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구약의 모든 장자들의 희생을 그대로 담고 있는 최종적인 맏아들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결론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 맏아들은 천사보다 뛰어난 정도가 아니라 천사들에게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시편 89:27-29절입니다. “27 내가 또 저로 장자를 삼고 세계 열왕의 으뜸이 되게 하며 28 저를 위하여 나의 인자함을 영구히 지키고 저로 더불어 한 나의 언약을 굳게 세우며 29 또 그 후손을 영구케 하여 그 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 시편 89편은 다윗언약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윗에게 기름을 붓고 그의 왕위를 영원하도록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를 장자로 삼고 세계 열왕의 으뜸이 되게 하며 그 후손을 영구케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왕위가 영원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7절에서 “맏아들을 강보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맏아들은 요셉의 아들이 아닙니다. 약속대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의 혈통으로 오지 않으시고 약속으로 맏아들로 오신 분이 이제 희생을 통하여 맏아들 장자의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장자의 희생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지심으로 장자의 희생으로 많은 아들을 살려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로마서 8:29절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 맏아들이 되기 위하여 다른 형제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2:10-12절입니다. “10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ㄴ)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히브리서 12:22-25절입니다. “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 24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 우리는 시내산에 이른 사람이 아닙니다. 하늘의 예루살렘 장자들의 총회로 부름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새언약의 중보이신 맏아들의 피로 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표가 아들로 인하여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 맏아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나라가 하나님 나라요 아들의 나라인 것입니다. 이 나라는 이 세상의 혈통과 육정과 사람의 뜻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오히려 배척받은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오직 맏아들, 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만 만들어진 나라입니다. 이것이 하늘에 있는 장자들의 총회입니다. 이 총회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지금 이 땅에서 교회로 모인 것입니다. 무엇을 하라고 말입니까? 미리 그 공로를 찬송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8-14  왕이신 아들  2003. 12. 3.


8 아들에 관하여는 ㅁ)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9 네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으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즐거움의 기름을 네게 부어 네 동류들보다 승하게 하셨도다 하였고 10 또 ㅂ)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바라 11 그것들은 멸망할 것이나 오직 주는 영존할 것이요 그것들은 다 옷과 같이 낡아지리니 12 의복처럼 갈아 입을 것이요 그것들이 옷과 같이 변할 것이나 주는 여전하여 연대가 다함이 없으리라하였으나 13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ㅅ)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느뇨 14 모든 천사들은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이 아니뇨.

 

 

 

 

히브리서 전체에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모세보다, 여호수아보다, 천사보다 뛰어나신 분이시라고 증거합니다. 오늘 말씀은 1:4-14절까지 전체가 천사보다 뛰어나신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만이 아니라 모든 성경이 아들에 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요5:39). 그 아들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하셨는지를 알고 믿는 것이 구원이며 영생입니다. 이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이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여기에 모인 저와 여러분은 누구의 이름을 위하여 모인 것입니까? 예수의 이름을 부르기는 부르는데 무엇을 위하여 부르고 있는 것입니까? 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주님의 세계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부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를 위한 가정, 나를 위한 교회, 나를 위한 세상을 꿈꾸고 있으면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동일하게 주여! 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그 안에 담겨진 생각들이 다 다른 것입니다. 각자의 우선적인 필요에 의하여 부를 것입니다. 목사가 주여, 하는 내용이 있을 것이고, 토요일 결혼을 앞둔 사람이 주여, 하는 내용이 있을 것이고, 각자 각자의 관심사가 다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관심사는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일까요? 그 아들에 있습니다. 히브리서를 시작하면서 그 아들로 말씀하시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선지자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죄를 정결케 하시는 제사장으로서의 아들입니다. 오늘을 자기 백성을 영원히 다스리시는 그 왕위가 영원히 바뀌지 아니할 왕으로서의 아들입니다.

 

 

 

 

시편 28: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저희를 파괴하고 건설치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파괴하시고 건설하지 아니하실 대상이 누구입니까?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지 아니하는 자들입니다. 여호와의 창조는 누구로 말미암고 누구를 위하여 창조하였습니까? 히브리서 1:2-3절에서 아들로 후사를 세우시고 아들로 만유를 지으시고 아들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행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아들로 말씀하시고 아들로 영원한 제사장을 삼으시고 아들로 영원한 왕으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범죄한 이후로 하나님의 피조세계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들로 일하심을 믿지 아니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마귀의 유혹으로 피조물인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이 된 양 착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를 지은 인간의 현실입니다. 이것을 죄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남편은 자기를 위한 아내여야 하고, 아내는 자기를 위한 남편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모 자식간에도, 교인과 목사 간에도 모두 이런 사고방식으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이것은 결국 모든 피조세계가 다 자기를 위하여 존재하여야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기겠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창조주조차 자신을 위한 창조주가 되어야 좋은 창조주로 믿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까요?

 

 

 

 

히브리서 1:10-12절입니다. 태초에 주의 손으로 지으신 땅과 하늘을 멸망시키신다고 하십니다. 왜 멸망시키시는 것입니까? 자신이 창조하신 것을 잘 보관하시고 망하지 않도록 만드시지 아니하시고 왜 헌 옷이 되면 버리고 새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하시는 것입니까? 아들을 위하여 창조하신 세계인데 범죄한 인간들이 자기들이 주인인 양 행세하고 있으니 참된 하나님의 아들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시기 위하여 땅에 속하여 땅만 바라보고 사는 자들을 심판하시며 참된 주인이 누구신지를 알리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원수가 등장합니다.

 

 

 

 

히브리서 1:13절입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시편 110편의 말씀입니다. “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1)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5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 6 열방 중에 판단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파하시며 7 길가의 시냇물을 마시고 인하여 그 머리를 드시리로다

 

 

 

 

다윗의 시편입니다. 1절에서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왕이 아니라 이미 다윗의 주가 따로 있습니다. 여호와 우편에 계신 분이십니다. 여호와께서 네 원수라고 하신 자들이 누구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들입니다. 이 분이 권능의 홀, 왕의 지팡이를 가지고 원수 중에서 다스릴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맹세하시고 변치 아니하시는 여호와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는데 그 왕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십니다.

 

 

 

 

마태복음 22:41-46절입니다. “41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 가라사대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 ㅁ)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46 한 말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 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바리새인들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묵시세계에서 대답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시간관념으로 해석이 되지 않습니다. 시간상 나중 온 자가 먼저 온 자보다 먼저 있었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시편에서 이미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하였다는 분명한 말씀 앞에서 입도 열수 없었던 것입니다.

 

 

 

 

구약에서 예언된 그리스도가 이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러한 모형을 이미 다윗에게서 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에서 선지자요 예언자입니다. 그리고 제사장이 입는 예복을 입고 제사를 지냅니다. 다른 왕들은 함부로 제사를 지내다가 문둥병이 들기도 하는데 다윗에게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왕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온전하지 못하였습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게 구원하지 못하였습니다. 자신도 죄 아래 있었음이 드러났을 뿐입니다. 단지 주님의 도구로서 장차 오실 메시야의 역할을 모형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장차 나타날 왕이 어떤 역할을 할지를 보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지자로 지금도 성령을 통하여 교회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교회에 말씀하실 때 누구의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교회에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끝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는 말씀을 들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교회들에게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천사들은 예수님의 심부름꾼입니다. 그리고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주님께서 사역자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사는 감히 주님과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천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아들로 말씀하시고, 제사장으로서 자기 백성의 죄를 정결케 하시고, 이제는 왕으로서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시면서 왕의 홀을 가지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그의 다스림을 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8-9절입니다. 주의 보좌가 영영합니다. 다시는 그 보좌가 바뀌지 아니합니다. 이스라엘의 수많은 왕들이 바뀐 것처럼 바뀌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홀은 공평합니다. 다윗이나 솔로몬처럼 인간의 한계와 약점을 가진 왕이 아니시기에 공평한 홀입니다.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시는 왕이십니다. 다윗은 자신이 행한 일이 불법인 줄도 몰랐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아들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창조의 목적도 그 아들을 위하여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들에 대하여 자기 백성들이 어떻게 대접하였습니까? 자기 땅에 오셨건만 그 아들이 싫다고 죽여 버린 세상입니다.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세를 받으러 보냈으나 종들을 때리고 죽여 버렸습니다. 두 번째 종들을 더 많이 보냈습니다. 그래도 죽여 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내면 공경하리라고 보냈지만 그 아들마저 죽여 버리고 자기의 소유로 삼아버리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오직 자기에 대한 관심만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스스로 왕으로 살고자 하는 모든 자들을 향하여 원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입니까? 오늘도 내가 온 세상의 주인인양 살아가는 내 자신이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이런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시면서 멸망시킬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만 바라보고 사는 자들로 하여금 함께 멸망 속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에도 지금 보이는 이 하늘과 땅이 경건치 아니한 자들과 함께 불살라지기 위하여 보존되어 있다고 증거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사시렵니까? 그 심판의 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것이 심판입니다.

 

 

 

 

히브리서 6:5-6절입니다. “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5 하나님의 2)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지금 유대 기독교인들이 다시 율법과 제사로 돌아가려는 것을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것은 다 용서를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면 어떻게 용서를 받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도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도 되었지만 타락한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타락한 자들이 어떤 자들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영원한 대제사장 되심과 지금도 왕으로서 다스리고 계시는 것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부족합니까? 왕같은 제사장으로서 자기 백성을 완벽하게 속죄하시고 왕으로 빈틈없이 다스리시는 주님이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여겨집니까? 변화무쌍한 자신의 감정과 세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변하지 아니하는 주님의 약속, 시편 110편의 말씀처럼 맹세하시고 변하지 아니하시는 여호와의 언약이 그 아들로 하여금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게 하시고 영원한 왕이 되게 하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살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급하십니다. 그래서 시편 2편에서 그 아들에 입 맞추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자기 아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일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 개인의 소원성취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의 소원성취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소원이신 그 아들의 영광에 모든 초점을 맞추시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10:26-31절을 보면서 말씀을 맺겠습니다. “봉독” 그 아들의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벌이 얼마나 중하겠습니까?

 

 

 

 

히브리서 2:1-4  큰 구원  2003. 12. 10.


1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찌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 2 천사들로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치 아니함이 공변된 보응을 받았거든 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4 하나님도 1)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및 자기 뜻을 따라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써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느니라.

 

 

 

 

3절에서 이 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냥 구원이 아니라 이 같이 큰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이 크게 들려집니까? 늘 듣던 그렇고 그런 이야기입니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중요하고 크게 여기지 않는다고 봅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관심사가 언제나 자기에게 집중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행한 일은 중요하고 커 보이지만 다른 사람이 한 것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하나님의 일까지도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나는 중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죄 용서를 받는다는 말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이 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습니까?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중요하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입니까? 그러면 용서 받을 수 없는 죄가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신 적이 있습니까? 모든 죄는 다 용서받습니다. 그런데 용서 받을 수 없는 죄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2:31-32절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시자 사람들이 놀라면서 두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하나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는 것이며 하나는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그렇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는 것은 메시아가 아닌가 하면서 놀라는 것이고 바알세불의 힘을 입어 그렇게 하였다고 하는 자들은 예수가 메시아가 아니라 귀신의 힘을 입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오늘날도 자기들이 성령의 지시를 받아서 말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기도원을 위하여 무엇을 하고, 교회를 위하여 무엇을 하라고 합니다. 누가 보아도 엉터리 같은 이야기에도 사람들이 잘 넘어가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성령을 훼방하면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결국 자기 구원욕구의 모습입니다. 혹시 내가 저 사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 민족의 심성이 오랫동안 샤머니즘적인 영향아래 살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주술사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성령 받았다는 자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훼방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는 제자들도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이 임하게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을 부인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것입니다. 성령을 증거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임하게 됨으로 십자가에 죽으신 나사렛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장에서 성령이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죄에 대하여서 책망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함을 죄라고 합니다. 유일한 용서의 길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훼방한다는 것은 이제 성령이 임하시니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임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이 임함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만이 아니라 교회역사에서 지금까지 계속된 싸움은 한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완전한가? 부족한가? 의 싸움입니다. 믿음이냐 행함이냐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기를 믿지 아니하고 주님께서 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자기 힘으로 성소에 심으시는 일까지 친히 하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일하심에 있어서 인간은 늘 배반하고 불신하고 망치는 일만 한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을 통하여 충분히 계시하셨지만 그러나 유대인들의 눈에 수건이 가려져서 보이지 아니한 것입니다.

 

 

 

 

이런 유대인 가운데 하나님의 남은 자들이 있어서 복음을 듣고 예수 믿는 자들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여러 가지 핍박이 오는 것입니다. 모든 믿는 자들에게 오는 핍박만이 아니라 유대 기독교인들은 율법적인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이 가중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런 핍박을 면하기 위하여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오는 핍박을 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얼마나 완전하고 완벽한가를 구약성경을 가지고 철저하게 논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1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가라고 합니다. 이미 들은 복음과 함께 또 1장에서 증거한 내용에 대하여 간절히 삼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삼가라는 것은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혹 흘러 떠내려갈까 하노라고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들었습니다. 복음의 내용은 아들에 관한 소식입니다. 아들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하셨고 지금도 무엇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1장의 내용을 다시 한번 요약해서 봅니다. 모든 날 마지막, 즉 종말에 하나님께서 아들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아들은 천지의 창조자시며, 만유의 후사이시며,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며, 그 본체의 형상이시며, 그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분입니다. 천사보다 뛰어나시며 지금도 살아계셔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며 친히 다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놀라운 내용입니다. 세상이 믿을 수 없는 내용입니다. 오직 성령이 임한 자만이 믿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을 흔드는 일들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 떠내려 가버리는 일이 있습니까? 흘러 떠내려 가버리는 구원은 구원이 아닐 것입니다. 그 큰 구원이 얼마나 분명하고 확실한지를 알고 세상의 변화에 흔들리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주님 오시는 날까지 우리로 하여금 흔드는 일들은 일어날 것입니다. 사단이 우는 사자와 같이 믿는 자를 노리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도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구원을 흔들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로 주님의 구원은 크고 확실하고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흘러 떠내려갈까 주의하라는 것입니까? 그 큰 구원의 영광됨을 훼손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부족하게 여기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인간의 열심들을 추가시켜서 자기들의 이름도 함께 나타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주님께서 행하신 그 큰 구원을 등한히 하고서 지금 무슨 이야기들을 하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 큰 구원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빨리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그 십자가는 이 세상을 정죄합니다. 십자가로 세상의 경계를 정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십자가 안과 밖은 전혀 다른 세상입니다. 세상이 십자가를 바라보면 십자가 안에는 다 죽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십자가 안에서 세상을 보면 세상이 다 죽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십자가를 빨리 벗어나고 싶은 것이 육체의 소욕이 아닙니까? 세상에서 죽은 자로 남아있기가 싫다는 것입니다.

 

 

 

 

연말이라고 세상이 분주합니다. 여러 모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모임들 중에 자기 자신이 부인되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신 일만이 크게 부각이 되는 모임이 있습니까? 교회에서조차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신 그 큰 구원이 등한시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들의 일만 부각이 되지 않습니까?

 

 

 

 

2절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로 하신 말씀을 지키지 않아도 공변된 보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천사들로 인하여 주어졌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3:19절에서 율법은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고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기까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천사를 통하여 주어진 율법도 그 범죄함을 인하여 심판을 받게 되었는데 하물며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친히 말씀하신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3-4절입니다. 주로 말씀하신 것이며,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며, 하나님도 표적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자기 뜻으로 성령의 나눠주신 것으로 저희와 함께 증거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며 사도들이 듣고 확증하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나눠주셔서 확증한 일이 하나님의 큰 구원입니다. 이 큰 구원을 등한히 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구원받은 백성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큰 구원은 사람이 한 것이 없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사람들이 자꾸만 못마땅해 합니다. 그래도 사람이 체면이 있지 어떻게 늘 은혜만 받아야 되는가! 은혜를 갚을 줄도 알아야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사람들이 무언가를 보태거나 거들어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으니 은혜를 갚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일방적인 은혜를 무한히 받아야 할 만큼 불쌍한 형편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선까지는 주님께서 일하시고 그 다음 단계부터는 우리에게 일임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큰 구원은 우리가 손댈 수 없을 만큼 완벽합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얼마나 완벽하신지 의와 생명이 왕 노릇한다고 합니다. 그 왕 노릇하심의 능력이 성도들에게 나타나 여러 가지 은사들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은사들도 자기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성령의 나눠주심을 인하여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 큰 구원을 대체할 만한 다른 것이 없습니다. 교회 역사 속에서 복음을 대체할 수많은 시도들이 있어 왔습니다. 영적 부흥이라는 것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영향을 받아서 새로운 단체들이 생겨났습니다. 타락하였다고 부흥이 일어나고 각성하여 이제 우리는 바르게 살겠다고 완전하게 살겠다고 다짐하고 공동체를 만들어 왔습니다만 한 세기를 지나지 못하고 다 실패로 돌아간 것입니다.

 

 

 

 

미국에서 ‘제2차 대각성 운동의 여파’로 일어난 운동들 가운데서 ‘승리의 삶 운동’의 지도자가 이런 말을 하였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의 생각이나 행동이나 말에서 하나님의 법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죄 없이 살아갈 특권을 받았다” 그러나 그 높은 이상들이 그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절망과 패배주의에 빠지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결국 그렇게 못한 원인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면서 그런 죄 없는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한 것은 자신이 충분히 믿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한 것입니다. 결국 영적 대각성 운동의 방향이 어디로 흘러 가버린 것입니까? 어디로 떠내려간 것입니까? 자기 자신의 가능성에로 흘러 가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은혜를 입은 자들이라면,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면 이같이 큰 구원을 이루신 주님을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얼마나 완벽하고 온전한지 히브리서 6:13-20절을 봅니다. “봉독”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기의 이름으로 맹세하신 것입니다. 그 맹세를 이루시기 위하여 하신 일이 하나님의 큰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동일하게 믿음을 은혜의 선물로 받았다면 이 소망이 너무나 든든하여 영혼의 닻 같이 튼튼하고 견고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다고 합니다. 예수 믿어도 연약하고 넘어지고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그 큰 구원의 능력은 영원한 제사장의 효력으로 인하여 오늘로 어김없이 터져 나와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그 큰 구원에서 흘러 떠내려가지 않게 하십니다.

 

 

 

 

히브리서 2:5-10  고난으로 온전함  2003. 12. 17.


5 ○하나님이 우리의 말한바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는 복종케 하심이 아니라 6 오직 누가 어디 증거하여 가로되 ㄱ)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7 저를 2)잠간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3) 8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저에게 복종케 하셨은즉 복종치 않은 것이 하나도 없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저에게 복종한 것을 보지 못하고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2)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0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삶의 현장에서 여러 가지 고난을 당하는 경우에 늘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나타나서 한번 보란 듯이 능력을 나타내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천지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의 능력이 지금 나타나서 나의 곤란한 문제들을 척척 해결하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다고 깔보는 자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히브리서를 처음 받는 수신자들도 고난 중에 천사들이 나타나서 도와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수많은 하나님의 천사들이 나타나서 기적을 일으켜 주었듯이 자기들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능력을 발휘하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고난과 죽으심보다 다른 능력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4절부터 2:16절까지 천사들에 대하여 자주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기대하는 천사들보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완전하고 뛰어나신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2:5절에서 장차 오는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에게 복종하게 하는 것입니까? 인자에게 복종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인자에게 복종하게 된다는 말이 아주 어려운 말입니다. 그 인자가 잠시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시편 8편을 부분적으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인자가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입니다.

 

 

 

 

시편 8편을 봅니다. “1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2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 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의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5 저를 1)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7 곧 모든 우양과 들짐승이며 8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9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우선 느낌은 사람에 대하여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피조물을 다스리게 하신 내용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성령에 감동되어 시편을 기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을 그렇게 해석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본문에서는 인용하지 아니하는 2절의 내용을 봅니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원수와 싸우려면 용사가 되어야 하는데 어떻게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21:16절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마태복음의 상황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입성하셔서 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사건입니다. 성전에 입성하실 때에 백마를 타고 가신 것이 아니라 나귀를 타고 가신 것입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면서 환호하며 겉옷을 길에 깔고 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합니다. 이들이 환호하는 것은 이제 다윗의 후손으로 오는 메시아가 그들을 해방시켜줄 영광의 왕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는 길은 고난과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제자들에게 몇 번이나 장로들에게 잡혀서 고난을 받고 죽은 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과 죽으심을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민중들이 더더구나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현실적인 왕으로서의 등극하기를 바라고 따라나선 것입니다.

 

 

 

 

드디어 성전에 들어가 성전을 정결케 하십니다. 이때 아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소리 지르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에게 아이들의 소리를 듣느냐고 하자 예수님께서 시편 8:2절의 말씀을 인용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 받고 죽으시는 길은 어린 아이와 젖먹이로 하여금 원수를 대적하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세상의 힘과 권세를 사용하지 아니하십니다. 천사들을 동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고난과 죽음의 길로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난으로 온전케 되시는 길입니다.

 

 

 

 

시편 8편을 히브리서에서 인용하는 부분은 4-6절입니다. 천사보다 잠시 못한 인자가 되셨지만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케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아담도 아니고 다윗도 아니고 인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인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고난을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을 썼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니엘 7:13-14절을 봅니다. “13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인자 같은 이가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받습니다. 모든 백성과 나라들이 다 그를 섬기고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고 폐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이 인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5:22-27절입니다.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2)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인자되심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인자가 되신 분이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계시는데 왜 고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와야 하는 것입니까? 그대로 오셔서 심판을 집행하시면 되실 텐데 왜 어린 아이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고난의 삶을 사셔야 하시는 것입니까? 창조자가 피조물 되심이 낮아지심이며 고난입니다. 율법의 제정자가 율법아래 오신 것입니다. 죄가 없으시면서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고난의 삶을 사셨습니다. 배신과 모함과 경멸을 받으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무덤에까지 내려갔습니다. 심판을 집행하셔야 마땅하신 분이 왜 심판을 보류하시고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까?

 

 

 

 

히브리서 2:9-10절을 봅니다.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시는 일을 하시기 위하여 저희의 구원의 주를 온전케 하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홀로 하늘로 가실 것 같으면 고난이 필요 없습니다. 이 땅에 오셔서 구경하시고 그냥 가실 것 같으면 고난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에 하나님의 천사들이 가서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죽는 일이 없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같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고난으로 온전케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여 온전케 되심이 아닙니다. 고난으로 많은 아들을 이끌어 내시기 위하여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맏아들이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형상이요 참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또다시 많은 아들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맏아들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하심이 맏아들이 고난을 인하여 많은 아들들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들을 로마서에서는 양자라고 합니다. 양자의 영을 받았기에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양자라고 할지라도 아들의 모든 혜택을 다 받는 것입니다.

 

 

 

 

이사야 53장에서 고난 받은 종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고난이 대신 받는 고난입니다. 대신 매 맞고 대신 상함을 받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고 합니다. 대신 고난 받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이끌어 내셔서 아들의 영광에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고난 받으심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기를 무서워하여 일생동안 죽음의 종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죽음을 맛보시려고 하시는 것은 사망으로 사망을 잡아버리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그늘에 앉아 죽어가는 자기 백성을 이끌어 내시기 위하여 스스로 죽음을 맛보시는 것입니다. 그 고난으로 인하여 자기 백성들을 이끌어 내시는 일에 온전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들을 지금도 이끌어 내시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 아들의 희생으로 양자들을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 아들의 희생으로만, 그 아들의 고난으로만 많은 아들들을 영광으로 이끌어내시는 것입니다. 이제 구원받은 백성들이란 그 아들의 영광에 참여가 된 것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아들이 된 것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죄인 되었고, 원수 되어 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정하신 것입니다. 이보다 더한 사랑이 없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자기 아들을 만들어 내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먼저 인간의 죄의 깊이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죄가 무엇이기에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것인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도 함께 드러내시는 것이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십자가를 모르면 죄도 모르고 하나님의 공의도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도 모르는 것입니다.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는 유일한 길은, 원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되는 유일한 길은, 그 아들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언약입니다.

 

 

 

 

오늘도 성도들이 여러 가지 고난과 환난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과 환난이 죄를 지어서 오거나 무엇을 잘못하여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시키는 것이며 더 이상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고 주를 위하여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조치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넘어지고 깨어지더라도 그것이 실패나 절망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온전함을 더욱 알아갈 뿐입니다. 그분의 고난과 희생의 완전함을 더욱 깊이 알아갈 뿐입니다.

 

 

 

 

히브리서 2:18절입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였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리라” 히브리서 5:8-10절입니다. 그가 아들이라도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온전하게 되신 것은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이 고난 받은 아들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입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으로 우리가 온전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당하는 어떠한 고난과 환난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고난의 완전함을 알아가는 겁니다.

 

 

 

 

히브리서 2:10-13  주의 이름으로 구원  2003. 12. 24.


10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12 이르시되 ㄴ)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13 또 다시 ㄷ)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 다시 ㄹ)볼찌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온 세상이 떠들썩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의 의미를 사람들 나름대로 해석하여 자기들 입맛에 맞는 크리스마스라고 야단들입니다. 총회에서는 산타클로스 대신 동방박사 캐릭터를 만들어 성탄의 문화를 바꾸어 보자는 지침서도 내려 보냈습니다. 그런다고 문화가 바꿔지겠습니까? 세상은 주님 오시는 날까지 세상대로 가는 것입니다. 다만 주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람들만 성탄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이 세상을 두 조각내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온 세상을 다 화평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0:34-39절을 봅니다.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2)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성탄절에 이 본문이 인용되는 적을 본 적이 없습니다. 각 교단장들의 성탄 메시지나 교황청의 성탄 메시지나 절에서의 축하 메시지나 간에 성탄의 메시지는 반목과 갈등을 풀고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인류의 평화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런 예수님의 말씀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예수님에 대하여 생각하여 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왜 오신 것입니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왕으로 등극하시는 날만 관심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계속하여 고난과 죽으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고난 받기 위함입니다. 죽기 위함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주가 되시는 분이 고난을 받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온전케 하신다는 말씀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성탄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사람이라면 무엇을 기뻐하는 것입니까? 다윗이 꺾어진 뼈를 인하여 즐거워한다고 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실체인 십자가의 의미를 알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땅에서 주님 오심을 진정으로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이 누구인가를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가 누구입니까? 지상에서 예수님뿐이십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와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을 때에 하늘에서 들린 음성입니다. 이런 말씀은 천사에게도 하지 않으신 말씀입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는 것은 예수님 자신이 죄 없이 죄인의 길에 들어서신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의 길에 들어서심으로 십자가로 나가시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사건에서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예수님과 무엇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신 말씀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는 것과 십자가에서 죽으심의 내용에 있어서 하신 말씀입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심이란 죄 아래 들어오신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성령과 불로 세례주실 분을 맞이하기 위한 회개의 세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이유가 없는데 물로 세례를 받으심이 바로 고난에 들어가시는 길입니다. 죄 없이 십자가로 가시는 길입니다.

 

 

 

 

죄 없이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죄 없이 십자가 지시는 심판을 받으시는 것은 고난으로 구원의 주를 온전케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그 아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백성을 구원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으로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것이 온전케 되셨기에 구약에서 여호와가 하시는 일을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고난으로 온전케 하신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고난으로 구원의 주가 온전케 되신다는 것은 구원의 주가 부족하여 온전하게 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에 온전케 되신 것입니다. 그 고난으로 인하여 무엇을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고통으로 인하여 자기 백성을 생산하여 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이란 단어가 ‘자궁’이라는 어원에서 왔다는 말을 어느 신학자가 하였습니다. 자궁이란 출산이요 출산은 고통입니다. 하나님의 고통으로 출산한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으로 온전케 된 구원자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10절을 봅니다. [표준 새번역]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많은 자녀를 영광에 이끌어 들이실 때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으로써 완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자녀를 영광에 이끌어 들이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예수님만 죽음에서 살리시고 하늘에 앉히시면 되실 텐데 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맏아들이 되기 위함입니다. 맏아들이 된다는 것은 다른 형제들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의 성취입니다.

 

 

 

 

11절을 봅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함을 입은 자들이 하나에서 난 자라고 합니다. 거룩하게 하시는 자는 예수님이고 거룩함을 입은 자들은 구원받은 백성들입니다. 이들이 하나에서 난 자라고 합니다. 한 사람은 위에서 났고 한 사람은 땅에서 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라고 불러 주신답니다. 그것은 약속을 인함입니다. 이 엄청난 일을 위하여 구원의 주가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 고난은 일부분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완전하고 온전한 고난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것으로 자기 형제들을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주의 형제들은 누구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까? 주님의 고난으로 온전하여 졌기에, 구원의 주를 부르는 자들이 됩니다. 자기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아니라 구원의 주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들에게 주의 이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시편 22:22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조금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회중에서를 교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주의 이름을 선포하면 그 이름을 인하여 찬송하는 자들이 교회입니다. 그 구원의 주가 어떤 이름으로 선포되는 것입니까? 고난으로 온전케 되신 구원의 주의 이름입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는 것입니다. 시편 22편은 이사야 53장과 쌍벽을 이룰 만큼 메시아의 고난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22편 몇 구절을 봅니다.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7 나를 보는 자는 다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아들이 십자가에서 버려지는 것입니다. 죄인만이 버려져야 하는데 죄 없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 십자가에서 버림 받으심으로 구원의 주가 온전케 되신 것입니다. 이 온전함으로 많은 아들을 하나님의 영광에 이끌어 들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중에서 교회에서 주의 이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고난으로 온전하게 되신 주의 이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일이란 그를 배척하고 그를 향하여 입을 비쭉거리며 돌아선 일 뿐입니다. 그 저주스러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주님의 이름을 회중에게 선포하면 찬송하는 자들이 나올 것이며 이들이 주의 형제들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23:1-3절을 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 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아주 잘 아는 내용입니다. 시편 22편 다음에 나오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고난으로 온전케 되신 구원의 주님께서 자기의 이름으로 자기 백성의 영혼을 소생시키셔서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데 누구의 이름을 위한 것입니까?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자들은 주의 이름을 찬송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는 자들도 그 앞에 절하게 될 것입니다. 시편 22장 “22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29 세상의 모든 풍비한 자가 먹고 경배할 것이요 진토에 내려가는 자 곧 자기 영혼을 살리지 못할 자도 다 그 앞에 절하리로다 30 후손이 그를 봉사할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31 와서 그 공의를 장차 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히브리서 2:12-13절을 봅니다. 교회 중에서 주의 이름을 선포하고 그를 찬송합니다. 13절에서는 그를 의지하리라고 합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자들입니다. 요한복음 6:38-40절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뜻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루신 일입니다. 이런 자들은 반드시 주의 이름을 의지하게 되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게 되고 주의 이름을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란 자기의 완전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주의 완전함을 이야기하는 곳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자기 이름으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주의 이름을 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의 이름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교회란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두세 사람이라도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 완전한 교회입니다. 두세 사람의 완전함이 아니라 그의 고난으로 온전케 하신 주의 이름이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모인 자들은 대대에 주의 일을 증거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의 결과물로서의 교회이기에, 교회 안에서 주의 이름이 선포되고 그 이름이 찬송을 받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14절에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천사들이 노래합니다. 우리의 뜻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기뻐하심을 일방적으로 받은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기 위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뻐할 것입니다. 그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살게 하시는 그 능력이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결과로서 만들어진 백성들이 교회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자들을 형제라고 부르시기에 부끄러워하시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의 솜씨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2:14-18  사망으로 사망을 이김  2003. 12. 31.


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16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4)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언제부턴가 송구영신예배가 한국교회에 도입이 되었습니다. 처음 의도는 올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소망하자는 의도였겠지만 그러나 그것조차도 해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씀 앞에서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지 날짜가 바뀌고 사람의 결단과 결심을 새롭게 한다고 새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수많은 교회에서 오늘밤에 송구영신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종교적인 행위들이 결국은 살고자 하는 몸부림으로 보입니다. 지난해에 실패한 일이 있다면 새해에는 실패하지 않고자 하는 욕망의 발산이라고 봅니다. 세상에서 실패하면 안 된다는 본능이 터져 나오는 현장입니다. 주여! 새해에는 실패하지 않고 더욱 큰 능력을 주셔서 멋지게 성공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라고 포장을 합니다.

 

 

 

 

이런 모습은 아직도 일생에 매여 죽음의 종노릇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 15절 말씀에 보시면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이 마귀의 세력 안에 붙들려 있는 인간의 현실입니다. 태어났기에 무조건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국 자기의 생존이 가장 큰 삶의 목표입니다. 절대로 죽으면 안 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못하기에 자기의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후손을 남기고, 아들을 선호하고, 자기의 업적과 명예를 남기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존재가 잊혀짐에 대하여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입신양명(立身揚名)이 왜 효도가 되는 것이겠습니까? 자기 죽음, 자기 존재의 잊혀짐을 막아주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세상은 능력이라고 보기에 절에 가든지 교회 가든지 정성을 바쳐서 자기 존재를 확고히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무엇이 능력이라고 합니까?

 

 

 

 

고린도전서 1:18절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왜 십자가가 능력이 됩니까?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들에게 미련한 것인데 어떻게 구원을 얻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까? 십자가란 사형 형틀입니다. 죽음의 자리요 실패의 자리인데 어떻게 능력이 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사망으로 사망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죽음을 두려워하는데 스스로 죽음을 향하여 성큼 성큼 들어가면 죽음이 얼마나 두려워하는 것일까요? 죽일 무기를 들고 있는 자에게 죽여라고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는 자의 모습니다. 그 죽음의 길이 십자가의 길이었고 그 길은 사망으로 사망의 권세 잡은 자 마귀를 없이하려는 주님의 일이었습니다.

 

 

 

 

히브리서 2:14-15절입니다. 사망으로 사망을 이기시기 위하여 자신이 사망을 맛보셔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2:9절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고 하십니다. 죽음을 맛보시기 위하여, 또 사망을 이기시기 위하여 혈육으로 오셔야 하신 것입니다. 혈육에 속하여야 죽음을 맛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오심은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고 벌벌 떨면서 일생동안 그 죽음의 세력을 잡은 마귀에게서 해방시키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 일이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16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은 천사들을 붙들어 주시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을 붙들어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자들입니다. 이들을 붙들어 주시기 위하여 무엇을 하신 것입니까? 17절입니다.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신 것입니다. 혈육에 속하심으로 배고프고 목마르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금식하시고 나시면 하나도 배가 고프지 아니할까요? 십자가 지실 때 고통이 하나도 없을까요? 아닙니다. 똑같이 배가 고프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형제들과 같이 되신 것이 아닙니다. 그저 모양만 흉내 내신 것이 될 뿐입니다.

 

 

 

 

18절입니다.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으로 자비하고 충성스러운 대제사장이 되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속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들은 짐승의 피를 흘렸지 자기들의 피를 흘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온전치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으로 혈육에 속한 자들의 연약과 부족을 다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비하고 충성스러운 대제사장이 되시는 것입니다.

 

 

 

 

19절입니다. 자비하고 충성스러운 대제사장이 되시므로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사단의 세 가지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 시험을 이길 인간이 없습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과, 세상의 영화를 줄 테니 나에게 절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유혹을 이겨낼 수가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13장에서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시는 데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그 중에 세 번째 밭이 가시떨기입니다.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입니다. 경제적인 문제를 극복할 사람이 있습니까?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른 사람이 있습니까? 사람은 여기서 다 넘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시험을 이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넘어지는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벽한 대제사장의 일을 감당하시는 것입니다.

 

 

 

 

그 다음의 시험은 더더욱 우리가 감당치 못하는 내용들입니다. 능력을 달라는 것, 능력만 주신다면 무엇이든지 하겠습니다, 하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번에 이 문제만 해결하여 주신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라고 말하지만 그 문제의 해결이란 결국 자기의 능력을 갖추는 것입니다. 가정의 문제이든, 회사의 일이든, 교회의 일이든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발을 다치지 않게 하는 그런 능력을 보이고 싶지 않습니까?

 

 

 

 

다른 가정은 어려움이 있어도 우리 가정은 얼마나 복되고 형통한 가정인지 과외도 받지 아니하였는데 좋은 대학에 합격을 하고, 회사는 안정이 되고, 다니는 교회는 날로 부흥이 되는 그런 능력을 갖고 싶지 않습니까? 그런 능력을 받기 위하여 철야를 못하며, 송구영신예배를 못하며 조금 넉넉하게 봉투를 준비하지 못하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세상의 영광입니다. 누가 뿌리치겠습니까? 날마다 원하고 원하는 바가 아닙니까?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받는 유혹은 나는 살아야 된다는 유혹입니다. 살아도 이름도 빛도 없이 미미하게 별 볼일 없이 살다가 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존경을 받으면서 자기 존재를 마음껏 부각하면서 살고 싶은 것입니다. 다른 교회는 몰라도 우리 교회는 무조건 잘 되어야 한다는 것이 목사만의 욕망이겠습니까?

 

 

 

 

그러므로 각자가 자기들의 이상향을 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 살고자 하는 방향으로 몸이 움직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죽음의 길로 나아가는 자는 없습니다. 때로는 그런 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죽음을 통하여 자기의 이름이 남겨진다면 죽음의 길로 갈 수가 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가는 죽음의 길도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그 정도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자기 자존심을 혼자서 누리며 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안 되면 자살이라도 하여 자기의 부끄러움과 수치를 드러내지 않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세상에서 죽음에 매여 일생동안 마귀의 종노릇하고 있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나는 실패하여도 괜찮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죽어도 괜찮습니다. 내 대신 죽으신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 대신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 죽으심 안으로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함께 죽게 하는 것입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길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더 이상의 실패가 없습니다. 더 이상의 죽음이 없습니다. 사망으로 사망을 이기신 주님 안에 있기에 더 이상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혹시 내가 시험에 넘어가면 어떻게 할까 하는 두려움도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주님께서 우리보다 더한 유혹을 다 당하시고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시험이나 유혹의 단계가 시작단계에서 무너져 버리기에 더 높은 시험과 유혹을 당하여 보지도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최후의 유혹까지 다 경험하시고 이기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유명한 소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적으로 그렸다고 비판도 있었기에 이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져서 상영이 되었을 때 많은 기독교계에서 비판도 하였습니다만 그러나 한번은 볼만한 내용입니다. 오래전에 보았던 책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잠시 동안 기절하는 순간까지 유혹이 따라온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유혹에는 평범한 한 가정의 남편이 되어 자녀를 낳고 살아가는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최후의 유혹인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이 들고서 그것을 뿌리치고 십자가에서 죽는 모습으로 저는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험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 가지 시험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 시험의 최종적인 모습은 죽으면 안돼! 나는 살아남아야 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생동안 죽음의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사망으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없이하신 것입니다. 마귀를 결박하여 버린 것입니다. 그 안에서 자기의 백성을 해방시킨 것입니다. 이제 그 해방을 맛 본 사람들은 죽어도 괜찮은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시험에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사망을 이긴 주님 안에 있기에 더 이상 죽음이 왕 노릇을 할 수가 없는 세상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당하는 어떤 환난과 시험도 넉넉히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올해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들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이겨온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새해를 맞이하여도 이미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에 어떤 시험도 넉넉히 이길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습니다. 죽음으로 이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시험도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것입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뿐입니다.

고린도전서 10:13절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사망으로 사망을 이기신 주님께서 성도의 시험 당함을 이미 다 경험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시험보다 더 한 시험을 이기신 분이시기에 능히 감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더 이상 죽음의 두려움에 붙들려 살지 마시고 주님의 능력 안에 살기를 바랍니다. 그 능력이란 지금 죽어도 괜찮습니다. 죽어도 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그 어떤 것도 그 어느 누구도 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3:1-6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2004. 1. 7.


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2 저가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충성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으니 3 저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4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5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6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현대인들의 특징은 바쁘다는 것입니다. 바쁜 세상에서 더 빠름이 돈이 되고 느림은 무능한 것입니다. 우리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빠름으로 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혹 느린 것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서두름보다 더 나은 이익이 있을 때만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자동차도 기차도 비행기도 컴퓨터도 정보도 모두가 속도전입니다.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 그저 빠르게 달려갈 뿐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말씀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들리겠습니까? 예수를 깊이 생각하면 무슨 유익이 주어지는가를 재빠르게 계산하여 볼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조차 얼마나 빠름을 요구하는지 성경을 읽는 것도 4박 5일에 성경통독을 한다는 수련회가 있고, ‘성경 일천독 사관학교’도 있습니다. 그곳에서는 학생들의 속독도 시켜서 공부 잘하게 해준다고 하니 사람들이 비싼 회비를 내고서 참가를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어떻습니까? 멀리 볼 것도 없이 우리의 모습만 보아도 새벽기도회에 나와서 자기 말만 총알같이 쏟아놓자 말자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들은 세상이나 교회나 간에 결국 자기몰두입니다. 예수님을 생각할 틈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도 깊이 생각할 틈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예수님을 얼마나 빨리 벗어나 버리는지 예수 믿는 것은 아주 초보단계이고 더 나은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이용하여 자아를 더욱 고양시키는 쪽으로 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이 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려고 하니 자신의 자존심이 허락치를 않는 것입니다. 무언가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나은 점이 있어야 할 텐데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기쁨이고 보람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무어라고 합니까?

 

 

 

 

갈라디아서 1:6-10절을 봅니다.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6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는 것을 이상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8절에서 바울 자신도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결국 사람들의 기쁨을 더하여 주는 것입니다. 사람의 가능성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인간의 죄를 드러내는 것이지 인간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하신 일을 주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깊이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3:1절을 봅니다. 함께 부르심을 입은 형제들에게 다른 것을 권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부르심을 입었다면 이미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전도나 봉사나 건축이나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라는 말씀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것들을 보면서 무엇을 생각하라는 것입니까? 그들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농사짓지 않고 길쌈하지 아니하여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기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바쁜 이유는 내일에 대한 염려 때문입니다. 내일에 대한 염려만 없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우리의 미래가 우리의 손에 달려있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내 인생을 내가 책임져야 하는데 이제는 맡길 수 있는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얼마나 완벽하고 완전한지 한번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첫째,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라고 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복음을 믿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분이 우리의 사도입니다. 사도란 보내심을 입은 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입은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권세와 능력이 다 위임되어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것이며,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사도를 증거하기 위하여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입었고, 신약의 사도들이 보내심을 입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구약의 보내심을 입은 자들과 신약의 보내심을 입은 자들은 증인들이며 그 증거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엘리야도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이며 바울도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분이 바로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둘째, 대제사장입니다. 구약에 흠이 있는 제사장들과 달이 자기의 몸으로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심으로 완벽하고 흠 없는 대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7장에 의하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으로서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상들이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이 갈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를 온전히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7:26-28절을 봅니다. “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27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이 보다 더 완벽한 대제사장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과 부족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대제사장을 바라보고 생각함으로 더욱더 은혜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레이먼드 브라운’의 강해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인용합니다. “우리에게는 큰 대제사장이 있다. 이 진리가 우리의 확신을 이루는 근거다. 우리는 우리의 소망을 우리가 하는 일에 두지 않고, 그 분이 하신 일에 둔다. 신자들은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가에 의지하지 않는다. 그럴 경우 그것은 공로주의의 종교가 될 것이다. 그들은 영적인 확신을 전적으로 그분이 어떤 존재인가에 둔다.” 우리는 늘 흔들리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그분이 하신 일과 그분에게 의존되는 것만이 영원한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집이 있는데 모세는 사환이고 예수님은 그 집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모세란 유대인들의 신앙과 사고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 심부름꾼이었을 뿐입니다. 모세는 계시를 받아 증거한 사람이지만 예수님은 계시 그 자체이십니다. 신약의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집에 사환들입니다. 구약에서 선지자들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고 신약의 사도들은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 것입니다. 물론 이 안에는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도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옛날 동네에 텔레비전이 한 대만 있을 때에 그 집에 들어가서 텔레비전을 보려면 머슴에게 잘 보이거나 그 집의 아버지께 잘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 집의 아들에게 잘 보여야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집의 결정권을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일체 위임하셨기에 하나님의 집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관리하시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9-12절을 봅니다.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는 것인데 이것에 대하여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서 증거한 것이며 지금은 성령을 힙 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의하여 계시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바는 무엇으로 다 집중이 되고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모든 것이 다 집중이 되고 있습니다. 선지자, 제사장, 사도들이 모두가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서 구약이든 신약이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가 반드시 그리스도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는 것이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쁜 세상에서 언제까지 예수 그리스도안에만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은데 그런 도의 초보는 빨리 졸업을 하고서 거듭난 이성과 양심으로 보다 온전하고 완벽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내자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만이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하나님의 모든 일을 위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 권세를 위임받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차질 없이 진행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증인들입니다.

 

 

 

 

사도행전 1: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성령이 임하면 누구 증인이 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자기 교회 증인이 아닙니다. 자기교회 목사 증인이 아닙니다. 교회를 자랑하고 목사를 자랑해야 전도가 잘 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자기들의 사조직은 부흥할지라도 전도가 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자신의 완벽함이나 거룩함이나 예수 믿고 나서 괜찮은 사람 된 것을 증거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주님의 이름으로 일으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사도들을 주목하고 바라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하는 말이 이 사람이 온전하게 된 것이 왜 우리의 개인의 경건과 권능으로 된 것처럼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하면서 자기를 부인합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온전케 된 것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그 이름이 이렇게 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증인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증거하는 것입니까? 자신의 완벽함을 증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2:9-10절입니다.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바로 앞에서 버림받은 모퉁이 돌이 나옵니다. 이 돌,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 되어 버림 받은 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흑암의 권세에서 빛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엄청난 일을 이루신 그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자들로 사는 것입니다. 그 긍휼을 입은 것이 오직 주님의 공로였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더욱더 예수를 깊이 생각함으로 범사에 주님의 아름다운 덕이 선전되어 지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3:7-14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2004. 1. 14.


7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ㄱ)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9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를 노하여 가로되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 11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하였으니 12 형제들아 너희가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요 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본문 14절 말씀에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 광야에서 강퍅하여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함께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안식으로 말씀하고 있는데 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 끝까지 견고히 잡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삼가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말씀은 주님께서 다 알아서 하신다고 하셔놓고는 지금은 또 끝까지 견고히 잡으라고 하니 내가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만 된다고 하는 것입니까? 하는 질문이 나옵니다. 이 질문에 대답을 하려면 지금 내가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지를 먼저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신문에 70세가 된 할아버지가 책을 낸 것에 대한 보도가 있었습니다. 다른 것들은 다 포기가 되던데 글쓰기만은 포기가 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70평생에 여러 가지 일들을 노력도 해보고 성취도 해 보았지만 다 포기가 되는데 한 가지 포기가 되지 않는 것이 글쓰기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무엇 한 가지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다른 것은 다 포기하여도 이것 한 가지만은 죽어도 포기하지 못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그것을 자기 의라고 합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자존심입니다. 자존심이 상하느니 차라리 죽자고 하는 것입니다. 자존심 빼면 시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는 것도 또 하나의 자존심 챙기려는 것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수요를 알기에 종교전문가들은 적절한 공급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위대한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인간의 심보를 보고, 그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 마땅한 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인간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긍휼과 자비로 이루어지는 일이지 인간의 열심과 가능성으로 되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우선 3:6절에서도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소망의 담대함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소망이 없어질 것이라면 소망이 아닌 것입니다. 성경은 눈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못을 박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란 사람들이 만들어 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아니하는 영원한 소망, 그 아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은 인간의 손으로 조절이 불가능하기에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인하여 우리가 참된 소망을 가지고 되고 이 소망으로 담대해 지는 것입니다. 세상에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날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사와 내 소망 더욱 크리라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랑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달리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죄인이기에 불쌍하고 가난하고 진멸을 받아 마땅한 자들에게서 무슨 자랑거리가 나오겠습니까? 질그릇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보배가 소중한 것이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이요 우리의 자랑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에서도 사람들이 자기들이 본 것과 행한 것들을 의지하는 것을 경고하면서 이들이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입니다. 처음에는 믿고 그 다음에는 나의 행함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나오는 열매들은 자기 부인이 함께 동반되는 것들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끝에 가서 남는 것이라곤 믿음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님이 남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난 이후의 자기의 행함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아들의 나라인 것입니다. 아들의 행함으로 만들어지는 나라인 것입니다. 그 곳에 죄인들이 동참되는 것은 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자기를 자랑할 수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익히고 체험하고 누리는 곳이 교회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강퍅함이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그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의 모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출애굽하고 광야에서 그들의 강퍅함을 시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시편 95:7-11절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그들이 광야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믿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지난주 오후에 신명기 4장을 보았습니다. 그 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하신 일을 상고해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어느 민족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고, 기적을 보이시며, 약속을 주셔서 이루어내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열 가지 재앙 속에서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살아남았으며, 홍해 바다 앞에서 바다가 갈라지고 적들이 바다에 수장되는 것을 그들의 눈으로 보았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아래 있었고, 만나를 먹으면서,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셨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입구에서 들어가지 못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들의 실력만 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일하심을 끝까지 견고하게 붙들지 못한 것이 됩니다.

 

 

 

 

히브리서 3:12절을 봅니다. 구약의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상기시키면서 오늘 신약의 성도들에게 권면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옛 언약 하에서 보여주는 인간의 한계요 실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새언약 안에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옛 모습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지 아니하고 자기의 실력과 능력을 붙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로 인하여 성도가 좌절하고 낙심을 하는 것입니다.

 

 

 

 

이 서신을 처음 받는 성도들도 그들의 신앙의 갈등으로 인하여 옛 언약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이미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믿지 못하여 흔들리고 있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완전하고 온전한지를 히브리서 전체를 통하여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할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의 능력으로 살겠다는 에덴동산의 유혹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유혹은 이 근원적인 유혹의 부산물들입니다. 그런 유혹들이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에게도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이 모양으로 어떻게 천국갈 수 있는가? 나 같은 게 무슨 자격으로, 하면서 주님을 붙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13절입니다. 오직 오늘이란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죄의 유혹으로 강퍅하게 됨을 면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강퍅함이란 바로에게서는 하나님이 누구관대, 하는 것이 강퍅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강퍅함이란 하나님의 일하심을 눈으로 보고서도 믿지 아니함이 강퍅함이었습니다. 오늘 성도들의 강퍅함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말로서는 믿는다고 하지만 그러나 내용으로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실력을 믿지 아니하고 예수 믿고 난, 자신의 실력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주어진 은혜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들을 붙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9-12절을 봅니다. “9 기록된바 ㄱ)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예비한 것은 사람이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엇을 붙잡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해 아래, 아담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알게 하시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함이라고 합니다.

 

 

 

 

이제 우리가 무엇을 끝까지 견고하게 붙잡아야 하는지 아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행한 것만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자기의 소유를 늘여가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소유물만 늘여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의 가치도 계속하여 증폭시켜 나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정신적인 가치라고 하지만 이것도 결국 자기 소유물의 목록에 산입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교회라는 곳에 와서도 지속적으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더 신령한가를 내기하고 있는 경우가 됩니다. 누가 더 믿음이 좋은가로 내기를 하려고 합니다.(예화-삶은 씨앗을 나누어 주고 꽃을 피우라는 왕의 이야기)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모든 소유를 몰수하여 버립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로 대신 채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에게 소유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붙잡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3:12-14절을 봅니다.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3)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바울사도가 지금 붙잡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자기가 붙잡힌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부르신 하늘의 상인데 그 상이란 곧 영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상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상과 방패가 되시듯이 그 상을 향하여 달려가는데 그 달려가는 것이 자기가 붙들거나 정한 목표가 아닙니다. 잡힌바 된 그 세계가 얼마나 엄청나고 대단한지 평생을 달려가도 다 알지 못하는 세계입니다.

 

 

 

 

3:14절입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이 확실한 것입니다. 이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는 것입니다. 더 추가할 것이 없습니다.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복음이 우리를 붙잡아 버린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10-11절에서는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고 합니다. 부르심과 택하심이란 우리의 소관이 아닙니다. 이것을 굳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간다고 합니다. 붙잡힌바 된 것을 끝까지 견고하게 붙잡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3:15-4:3  안식에 들어감  2004. 1. 21.


15 성경에 일렀으되 ㄴ)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할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하였으니 16 듣고 격노케 하던 자가 누구뇨 모세를 좇아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가 아니냐 17 또 하나님이 사십년 동안에 누구에게 노하셨느뇨 범죄하여 그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자에게가 아니냐 18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19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1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2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3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ㄱ)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성경에서 성도를 나그네라고 합니다. 그것은 가야할 목적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델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안식에 들어가는 것인데 출애굽한 사람들이 가나안에 다 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경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의 말씀에서,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소망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영원한 소망을 받았다면 그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소망을 끝까지 잡지 못하고 늘 보이는 소망만을 좇다가 계속하여 원망과 불평을 하였습니다. 길이 좋지 않다고, 먹는 것이 부실하다고, 지금 가나안에 들어가야 하는 자들이 가야 할 목표를 놓치고 있으니 늘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데모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강퍅함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예수 믿는다는 것이 감사와 기쁨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책망하신 강퍅하다는 평가가 우리의 모습이겠습니까? 예수를 믿고서 어렵고 힘 드는 일이 생기면 어떤 마음이 듭니까? 내가 예수를 잘못 믿어서 이런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처음에 예수를 믿으라는 말을 들을 때 어떤 마음을 들었습니까?

예수 믿으면 천국 간다,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 병 고침 받는다, 등의 여러 가지 말들을 들었을 것입니다. 저는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말이 무서워서 어려서부터 아주 열심히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 고생한다는 말은 듣지를 못하였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말을 해주어야 하는데 그런 말을 하면 아무도 예수 믿는다고 하지 않을까 봐서 그런지 처음에는 그런 말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인도를 따라 애굽에서 나왔을 때에는 대단한 기대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10가지 재앙의 위력을 보면서 바로 왕이 항복한 그런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면 자기들은 이제부터 행복한 생활이 보장 될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광야로 나서게 되자 온갖 것이 다 불평과 불만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할 때가 훨씬 나았다는 것이 원망의 이유였습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것이 낫지 왜 우리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느냐는 것입니다. 구름기둥 불기둥의 인도를 받아 가는데도 물 없는 곳으로 양식 없는 곳으로 인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 올 자를 가려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심사나 우리의 관심사가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나의 만족과 유익만이 관심이 되어 있기에 하나님도 언제나 나를 위하여 주는 하나님이어야 좋은 하나님으로 간주하여 주겠다는 본능적인 죄의 모습이 우리 안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오늘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강퍅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3:15절을 봅니다. 시편 95:7-8절을 인용합니다. “7 대저 저는 우리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 손의 양이라 너희가 오늘날 그 음성 듣기를 원하노라 8 이르시기를 너희는 1)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 2)맛사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하게 말찌어다” 므리바와 맛사라는 곳은 같은 장소입니다. 이곳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이 없어서 원망할 때 반석을 쳐서 물을 마신 곳입니다. 이곳에서 다투었다고 므리바, 시험하였다고 맛사라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3:16-17절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격노케 한 것입니다. 이러한 다툼과 시험은 광야 40년간 계속되었습니다. 그 범죄로 인하여 광야에서 다 죽는 것입니다. 광야는 지나가는 곳입니다. 나그네로 가는 곳입니다. 불편함이 있습니다. 고생이 있습니다. 그러나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향하여 가야하기에 그러한 고생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에 견디며 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순종치 아니함이란 약속의 땅의 아름다움을 보았지만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3:18-19절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그들의 행함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믿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주여, 주실 줄 믿습니다하면서 자기의 목표와 소원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기의 열심과 의지를 믿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과, 그리고 출애굽하면서 그 약속을 따라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없으니 그들의 현실만 보고서 들어가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 없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뢰는 사라지고 자기들의 욕망에 대한 집념만이 가득하다면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이든, 교회 다니는 사람이든 하나님을 격노케 하는 강퍅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은 당연히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를 날마다 점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4:1-2절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혹시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고 합니다. 저희와 같이 즉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고서도 복음이 유익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유익이 되지 못하는 것은 믿음으로 화합치 아니한 것입니다. 복음은 복음이고 나는 나다는 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율법 외에, 인간의 행함 외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이 복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4:3절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믿는 자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믿지 아니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이 있는 것처럼 지금도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4:3절 하반절에서 시편 95:11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9 그 때에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며 나를 탐지하고 나의 행사를 보았도다 10 내가 사십년을 그 세대로 인하여 근심하여 이르기를 저희는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도를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11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저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수준에서는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아니 모든 인간을 다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게 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다우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아 버리시는 일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안식에 들어갈 자와 들어가지 못할 자를 정하여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백성은 이미 창세전에 예정된 자들이어야 함을 믿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어떤 인간도 자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이 자명한 것입니다. 이미 안식에 들어갈 자와 들어가지 못할 자를 정하여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안식에 들어가는 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면 아무나 나그네처럼 사는 사람이면 됩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그 약속을 믿으며 보이지 아니하는 약속의 세계를 오늘도 눈에 보듯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미 안식을 맛보면서 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자신을 보아도 주위를 보아도 정말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주님의 약속을 최고로 믿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마음속을 우리는 볼 수가 없어서 잘 모르지만 그 나타나는 모습을 보면 영원한 안식,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면서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3-16절입니다.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14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15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이미 영원한 안식에 들어간 사람들의 삶의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살면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자기들이 떠나온 고향을 찾으려고 하였다면 얼마든지 찾아 갔을 것이지만 그러나 이 땅에는 영원한 본향이 없기에 더 나은 본향을, 즉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이들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갈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는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고 있습니까? 이 세상을 나그네로 외국인으로 잠시 있다가 가는 사람처럼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러한 자들에게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설날이라고 많은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습니다. 그런데 막상 고향이라고 찾아 갔는데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너는 들어오지 못한다면 어떤 심정이 되겠습니까? 제가 어렸을 때 그런 추억이 있습니다. 서울에서 밀양 시골로 오촌 아저씨 가족이 왔습니다. 밤중에 잘 시간이 다 되었는데 대문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때 마을에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인줄 알고 문을 열어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아닌 것을 알고 문을 열어 주었을 때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우리가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기까지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난이 닥칠 것입니다. 이 약속 하나만을 우리에게 남기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가족과의 아픔도, 이웃과의 아픔도, 경제적인 고통도, 신체적인 고통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기쁨과 감사도 허락하시지만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잡게 하기 위한 사랑의 손길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4:4-13  살아있는 말씀  2004. 1. 28.


4 제 칠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ㄴ)하나님은 제 칠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5 또 다시 거기 ㄱ)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6 그러면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치 아니함을 인하여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7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ㄷ)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말라하였나니 8 만일 1)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9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10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11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지난주에 ‘안식에 들어감’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보았습니다.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은 여호수아 이전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으로 화합치 아니하여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은 자들을 예로 들면서 강퍅하지 말라고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광야에서 죽은 자들과 가나안에 들어간 자들이 있는데, 이렇게 된 것이 4:3절 말씀에 의하면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4:4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제 칠일에 쉬셨다고 어디 일렀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창세기 2:2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 쉼, 그 안식에 모든 사람이 자동으로 들어가게 하시면 되실 텐데 아무나 들여놓아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4:3절에서도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시편 95편에서 말씀하고 있는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리라고 하신 이 말씀이 창세기에서는 나오지 않는데 창세기에까지 소급하여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안식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안식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것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이렇게 조치하신 것입니까? 아담의 범죄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치 아니함 때문입니다. 즉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자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하셔서 너희는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 이후로 인생이 참된 안식이 없이 수고로이 일하다가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하신 작정과 계획은 변함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담의 범죄이후에 계속하여 드러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에녹이 죽지 아니하고 안식으로 들어갔습니다.

 

 

 

 

노아는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에게 안위를 주라는 이름입니다. 노아가 보여준 안식은 심판의 홍수 가운데서 방주를 타고서 살아남은 것이 안식입니다. 그 방주 안에 온갖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였지만 홍수 후에 정결한 짐승의 희생 제사를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은 사람의 손을 이미 떠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을 누가 이루어내시는가를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5: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17-18절에서는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주의 힘으로 가나안에 들여놓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주 편안하고 기분 좋게 들여놓으시면 되실 텐데 왜 광야로 향하게 하여 온갖 불평과 원망이 다 터져 나오게 하시고서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까?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전히 쪼개지는 과정입니다. 인간의 죄의 실상을 다 드러내는 것입니다. 출애굽하여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게 되는데 율법을 받는 그 두렵고 무시무시한 시내산 아래서 그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십계명을 정면으로 거역하는 행위를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가입한 것은 그들의 죄가 무엇인지를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고서 가나안에 들여놓아야 뭐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신명기 9:6절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준 것은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이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언약을 갱신하는 내용입니다.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과 목이 곧은 모습을 그대로 다 노출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들어간 자들이 있다는 것은 그들의 의로움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그 조상들에게 언약하신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세의 후계자로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땅에 들여 놓습니다. 가나안을 정복하고 그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완전하고 영원한 안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8-9절입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다면 또다시 안식을 말하지 아니할 텐데 그 안식이 온전하지 못하게 때문에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안식의 때가 언제인지를 시편 95편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95:7절 말씀에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이란 바로 이 시대에도 동일한 말씀입니다. 오늘 이 시대에 누구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 말씀의 내용은 아들을 믿는 자는 안식이 있고, 생명이 있고, 영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선행도 안 되고, 다른 이름도 안 되고, 오직 십자가 지시고,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만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선택하여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시고 다 찾아내어 안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으니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느니라, 라는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내 이름도 아니도, 목사 이름도 아니요, 조상 이름도 아니요, 교회 이름도 아니요, 어떤 신령한 단체라고 하는 이름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구원한다는 것은 예수의 이름이 자체적인 능력으로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방식입니까?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의 운동력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되어지는데,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는 자들은 살아있는 말씀에 의하여 완전히 분해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온갖 죄와 수치가 벌거벗은 듯이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동안 그들의 강퍅함이 다 드러나는 것처럼 오늘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우리의 감추어진 모든 것들을 다 드러내어 버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2-13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더 예리하다는 것입니다. 회를 뜨는 칼이 예리하지요. 수술하는 칼이 더 예리합니다. 그러한 칼보다 더 예리하여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것입니다. 아무리 예리한 수술 칼이라도 우리의 혼과 영을 어떻게 찔러 쪼개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은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과 그 악함을 다 드러내어 버리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해체시켜야 하시는 것입니까? 아담의 최초 범죄이후에 아담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부끄러워서 숨고 자신을 가린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죄악된 역사입니다. 피조물이 자기를 지으신 분 앞에서 폼을 잡아 보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과 양심과 법과 도덕과 과학과 교육을 가지고 치장을 해온 것입니다. 옷을 입는 것도, 화장을 하는 것도, 공부를 하는 것도, 가운을 입는 것도, 결국 자기 포장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삶은 계속된 피로의 누적일 뿐이지 그 어느 것도 참된 안식을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서에서 해 아래 인간이 행하는 모든 것이 다 헛되고 헛되다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살아있는 능력의 말씀으로 해체를 당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안식에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자기 수치와 부끄러움과 죄악이 만물을 지으신 분 앞에서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듯이 드러납니다. 무엇이 이렇게 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를 포장하려고 합니다. 무언가 고상한 것이 있는 것처럼 위장하려고 합니다. 예수 믿는 것만으로 부족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누구든지 그 돌에 걸려 넘어지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는 자이며 그 돌을 믿는 자는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1-8절입니다.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6 경에 기록하였으되 ㄱ)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ㄴ)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8 또한 ㄷ)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버림받은 돌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는 것입니다. 8절에 보시면 믿는 자와 믿지 아니하는 자를 미리 정하여 놓았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는 것입니까?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 앞에서 벌거벗겨 졌는데 그 앞에서 스스로 무슨 장식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믿지 아니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의 능력으로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다 드러내고 해체되어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는 자들은 주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날이 갈수록 자기를 치장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와 마음의 생각과 계획까지 말씀 앞에서 다 해체되어서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 지면 질수록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안식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그 안에 쉼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위하여 영원한 안식이 마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2-16  큰 대제사장  2004. 2. 4.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14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14절 말씀에 큰 대제사장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제사장이 있고, 대제사장이 있는 것이 구약의 제사장 제도인데 여기는 대제사장에다가 다신 ‘큰’자를 더 붙여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대제사장보다 더 위대하고 큰 대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전통에 익숙한 독자들로 하여금 흔들리지 말고 견고하여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으라는 권면에 확증을 주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성을 1장부터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 마지막에 아들로 말씀하시며, 이 아들은 만유의 후사이며,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은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며,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보좌에 앉으셨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천사보다, 모세보다 뛰어나신 분임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왜 구약의 제사장으로 완성이 되지 못하고 또 다시 큰 대제사장이 있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제사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연약하다는 증거입니다. 자기들 스스로 율법을 다 지켜서 의로울 수가 있다면 제사를 통한 속죄는 필요치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와 제사장이 온전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믿는 성도들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역시 연약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15절에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으로 대제사장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필요가 어느 정도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지난주에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의 능력에 대하여 보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말씀의 능력이라고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능력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의 필요와 소원을 채워주는 말씀의 능력을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현실적인 필요나, 내세적인 필요나, 종교적인 필요와 소원들을 이루어주는 것을 말씀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이 평소에 소원하고 바라는 것들을 이루어지는 비결을 말씀을 가지고 방법론을 제시하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3-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1)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귀가 가려웠다는 것은 평소에 자기가 생각한 기독교는 이런 것이고, 예수는 이런 분일거야, 라는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한 것을 채워주면 은혜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모스 8:11-12절입니다. “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12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자들이 없었습니까?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민중들의 사욕을 채워주는 거짓 선지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이들은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늘 평강을 말하고 축복을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회개의 외침은 듣기가 힘이 들었습니다.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요청하는 자들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런 때가 구약이나 신약이나 여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서 우리의 그러한 생각들을 다 분해 시키는 것입니다. 좌우에 날이 선 어떤 검보다 더 예리하여 우리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까지 다 찔러 쪼개어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을 다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다 드러내셔서 벌거벗은 듯이 노출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상관하시는 분 앞에서입니다. 여기서 상관하신다는 것은 회계하신다는 말로도 번역이 됩니다. 창조주 앞에서 벌거벗은 듯이 드러내어 버리면 우리가 얼마나 자기가 주인인양 착각하고 살았든지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떠하다고 드러내신 것입니까? 우리가 잘 아는 구약의 몇 구절만 찾아보겠습니다. 이미 창세기에서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하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합니다. 가끔씩이라도 선한 것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항상’ 악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노아 홍수 심판의 원인이었지만 홍수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사야에서는 소는 그 주인을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지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한다고 합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라고 합니다. 종자, 즉 씨가 행악의 종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그 행위가 부패하여 여호와를 버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며 물러갔다고 합니다.

 

 

 

 

예레미야에서는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돌아올 가능성을 표범의 반점과 구스인의 피부색을 스스로 바꿀 수 있다면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도저히 스스로는 어찌 할 수 없다는 죄악의 종자임이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하여 구구절절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직도 인간 안에서 가능성을 찾아 나서고 있습니다. 아무리 우주를 개척하고 달을 정복하고 이제는 화성에 로봇을 보내어 탐사를 하고 있을 지라도 인간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한 것은 찾아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9:7,24절입니다. “6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7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케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 “24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오므로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였느니라” 지난주 오후에 본 말씀입니다. 여기서 ‘늘’ 여호와를 거역하고,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알던 날부터 지금까지 늘 항상 거역하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성경의 평가를 인정하십니까? 이런 말씀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면 아직도 죄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죄가 늘 항상 나오는 것임을 알지 못하고서 가끔씩 어쩔 수없이 실수로 나오는 것인 줄 알고 있으니 자기에게 불리한 일이 닥치고 손해가 오면 당장 하는 말이 내가 무엇을 그렇게 잘못하였기에 나에게 이런 고통이 오는가 하면서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구약의 대제사장이 아니라 왜 큰 대제사장이 필요한지를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가끔씩 죄를 짓는다면 제사장은 가끔씩 필요할 것입니다.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하여서만 제사장을 필요로 하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늘’ ‘항상’ 죄를 짓는 죄인이라면 ‘늘’ ‘항상’ 있을 제사장이 있어야만 속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이 확실하고 온전하려면 그 직분이 영원하고 변함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7:22-25절을 봅니다. “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23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예수님은 더 좋은 언약, 즉 새 언약의 보증이 되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장 수효가 많은 것은 그들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있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영원히, 항상 계시는 것이기에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4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가 받고 있는 가장 가까이 있는 내용으로는 12절과 13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다 드러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듯이 드러내어지는 것입니다. 벌거벗겨지면 부끄러운 것뿐입니다. 나 행한 것 죄 뿐이니’ 라는 찬송가 가사가 실감이 나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에 누가 필요한 것입니까?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필요한 것입니까? 온 천하를 다 얻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것입니다. 온 천하를 다 얻어도 주님의 가림을 받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 결국이 영원한 멸망인데!

 

 

 

 

그러면 우리에게 있는 큰 대제사장이 무엇을 하신 것입니까?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승천하신 분이십니다. 승천하신 분이라면 원래 계시던 자리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고 합니다. 이 분이 우리의 믿는 도리입니다. 우리가 믿는 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이분을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14절에서도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결국 다른 것을 다 놓아버리고 예수님을 제대로 붙잡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그 어떤 것도 다 놓아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만 붙잡는 것이 최종적인 성공이며 승리이면 축복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보다 다른 것들은 너무나 많이 손에 쥐고 있습니다. 그 손에 잡고 있는 것들을 놓지 않고 그 손에 쥘 수 있는 것들을 더 많이 쥐고 더 오랫동안 붙잡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무언가를 많이 가지고 있다면 주님을 붙잡기는 더욱더 힘이 들 것입니다. 세상의 재물이나 명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선을 행할 수 있고, 스스로 착할 가능성이 있고, 스스로 선과 악을 결정하여 신에게 이르고자 하는 속마음이 있는 한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여러 가지 어려움이나 시련들이 오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 풍랑, 연연하여서 더욱 주님을 붙잡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오히려 우리는 만사가 형통하고 편안해서 주님을 날마다 붙잡지 않아도 편안하게 살아갈 그런 내용들을 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너무 염려를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이러한 연약함을 다 아시는 것입니다.

 

 

 

 

15절을 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시는 것입니다. 체휼하신다는 것은 동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시험을 다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신 것입니다. 시험에 넘어가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완벽하고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런 대제사장이 계심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16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라고 합니다. 은혜의 보좌 앞에 어떻게 나아갑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날마다 쪼개지고 부수어지고 벌거벗은 듯이 드러날 지라도 담대하게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늘’ ‘항상’ ‘영원히’살아계셔서 지금도 자기 백성을 중보하시는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5:1-10  구원의 근원  2004. 2. 11.


1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2 저가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이니라 3 이러므로 백성을 위하여 속죄제를 드림과 같이 또한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4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 5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ㄱ)너는 내 아들이니 내가 오늘날 너를 낳았다 하셨고 6 또한 이와 같이 다른데 말씀하시되 ㄴ)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세상을 살면 여러 가지들이 필요합니다. 돈이 절실하게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갑자기 누가 나타나 돈을 준다면 구세주를 만났다고 합니다. 자기의 필요를 스스로 채울 수가 없을 때에, 누군가 필요를 채워주면 메시아를 만났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구원이란 결국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에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자체에서 구원되고자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4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드리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 악한 세대란 어느 특정한 한 세대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전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from the present evil age NIV, from this present evil world KJV).

 

 

 

 

그러므로 구원이란 이 악한 세상에서의 건짐인데, 우리는 이 악한 세상에서의 건짐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악한 세상에서 더 든든하고 안전하게 살기를 구하면서 구원하여 달라고 한다면 주님과 전혀 코드가 맞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는 말씀에서, 마태복음 7장에서 좋은 것을 말하지만 이 좋은 것이 그저 세상을 사는 일에 좋은 것들이 아님을 누가복음 11장에서는 성령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만이 하나님께 제대로 구할 것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의 구하는 내용들이 성경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만 모든 것들을 다 빼버리고 단 하나만 남기라면 무엇을 구하게 될까요? 성령, 즉 거룩한 영이 임하면 자신이 거룩하지 못한 죄인임을 알게 되기에 자기를 거룩하게 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지 않겠습니까?

다른 것 다 없어도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하는 것이 성령이 임한 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바울 사도가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큰 대제사장’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보았습니다. 구약에서 제사장들이 왜 필요한 것입니까? 그들의 죄를 속죄하기 위하여 제사장이 필요한 것입니다. 율법이 주어지는 시내산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데 모든 백성들이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지 감히 가까이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접근 불가 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듣고 자기들에게 전하여 주기를 원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그의 음성을 듣는 것이 사는 길이 아니라 죽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대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필요란 세상을 살기에 유익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대면한 자들의 절실한 필요란 무엇이겠습니까? 누가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여 주는 자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다 죽게 된 자리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감당할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장의 역할입니다. 또한 그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았는데 그 율법을 어기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변개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죄를 속죄 받을 길을 마련하여 두신 것이 제사장 제도입니다.

 

 

 

 

히브리서 5:1-4절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의 역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 가운데 취하여 하나님께 속한 일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제사장이 무식하고 미혹한 자들을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신도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무식하다는 것은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미혹이란 길을 알면서도 무시하는 자들이라고 해설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무식하다는 그런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을 말하고, 미혹이란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순종치 못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대제사장이 율법으로 심판을 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용납하여 속죄의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사장 자신도 연약하기에 그들을 용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제사장 자신이 연약하다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도 속죄의 제사를 지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존귀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제사장에 대한 말씀이고 이것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5-10절입니다. 시편 2:7절과 110:4절을 인용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증거합니다. 그것은 너는 내 아들이니 오늘날 너를 낳았다고 하시는 말씀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 되리라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하심과 영원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다음에 보기로 하고, 오늘은 그 아들의 대제사장직이 어떻게 온전하고 완전한 구원의 근원이 되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7절에서 그는 육체의 계실 때에,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에 계심으로 사람의 연약을 다 체험하신 것입니다. 연약하여지심으로 인간의 연약을 아시는 것입니다. 5:2절에서 구약의 제사장들이 용납하는 것도 자신들도 연약하기에 용납을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만약 자신들이 완벽하다면 용납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연약하기에 속죄의 제사를 드리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한 육체로 계셨기에 인간의 모든 연약을 다 체험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2:18절입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셨기에 시험 받는 자들을 도우시는 것입니다. 육체의 모든 시험을 다 받으신 것입니다. 4:15절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느니라.” 육체로 계셨기 때문에 우리의 받는 시험과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육체에 계실 때에 죽음에서 구원하실 하나님께 심한 통곡과 눈물과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여 이러한 통곡과 눈물과 간구를 하였겠습니까? 자신의 십자가 죽으심의 두려움과 고통을 인하여 이렇게 하였겠습니까? 그렇다면 십자가 지기 위하여 오셨다는 주님의 말씀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심한 통곡과 눈물과 간구란 자기 백성의 대속을 위한 간구였습니다. 이러한 경외를 하나님께서 들으신 것입니다.

 

 

 

 

여기서 경외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을 경외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나서 아들 이삭을 바친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아브라함의 경외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몸을 십자가의 대속물로 제공하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신 것입니다. 8절에서 그가 아들이시라도 고난으로 순종을 배워 온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고난을 받아서 순종이 된 것이 아니라 이미 성육신 자체가 순종이며 고난인 것입니다. 그 순종의 완성이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히브리서 2:9-10절입니다. “9 오직 우리가 천사들보다 2)잠간 동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 곧 죽음의 고난 받으심을 인하여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 10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고난이 구원받을 자의 대신 죽음을 맛보신 것이며, 고난으로 온전케 하신 것이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5:17-19절을 봅니다. “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예수님의 고난의 뜻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 그 죽으심의 자리까지 순종하심으로 무엇이 이루어진 것입니까? 여호와를 경외하게 되었고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 것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자신만을 높여왔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여호와를 경외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근원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의 순종으로 구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분의 변함없는 대제사장의 역할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대신 전하여 달라고 요청한 것처럼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과 구원의 근원이 되심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길만이 살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 때에는 그들이 모세를 거역하였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역할 수 없도록 그 법을 마음에 기록하여 버렸습니다. 더 이상 도망갈 수가 없도록 만들어 버리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앞에 순종하고 항복하지 않을 수 없도록 우리를 몰아 넣어버리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겠습니까?

 

 

 

 

히브리서 12:18-29절입니다. “봉독” 모세 때에는 땅만 진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늘도 진동하여 버리실 것입니다. 전에는 시내산에서 경고한 모세였지만 이제는 하늘로서 경고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렇게 두렵고 놀라운 사실, 천지를 진동하며 소멸하는 불이신 그 하나님 앞에 누가 감히 설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가겠습니까? 우리의 몸을 바치면 되겠습니까? 우리의 아들을 바치면 되겠습니까? 오직 새 언약의 중보시오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만이 우리의 온전하고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순종하는 것은 무엇을 위함입니까?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요 대제사장으로서 입니까? 아니면 나의 세상적인 필요와 만족을 위한 것입니까? 시내산의 두려움보다 더 놀라운 심판주로 오시는 주님 앞에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이 구원의 근원인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전부를 걸어놓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28절을 봅니다. 진동치 못할 나라를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근거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받았습니다. 이제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더욱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 은혜로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즉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5:11-14  말씀의 초보  2004. 2. 18.


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13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운전하다 보면 ‘초보운전’이라는 표를 차 뒤에다 붙이고 운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표를 보게 되면 일단 조심을 해야 합니다. 갑자기 설 수도 있고, 차량 흐름에 따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초보 딱지는 보통 한두 달 안에 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일년이 가고 이년이 가도 초보운전이라는 딱지를 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운전 연수를 다시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서 초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 히브리서 서신을 받는 사람들에게 대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복음을 받고서 벌써 선생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에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상태를 젖을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젖을 먹는 자는 어린 아이로서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단단한 식물을 먹으면 장성한 자라고 합니다. 벌써 장성하여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선생이 되어야 할 텐데 아직 어린 아이처럼 젖이나 받아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성장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흔히 우리가 이해하는 성장이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어린 아이가 어려서 젖을 먹고 자라면서 부모의 보살핌을 받고 자라다가 점점 장성하면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을 성장이라고 합니다. 이런 상식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신앙의 성장을 어떤 식으로 보게 됩니까?

 

 

 

 

처음에 예수 믿을 때는 은혜로 되지만 일단 예수 믿고 나서는 거듭난 양심과 이성으로 이제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기까지 하셨으니 이제 남은 것은 내가 예수님을 위하여 할일만 남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제는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의 일을 잘 하겠다는 것을 신앙의 성장으로 보는 것입니다. 과연 이런 모습을 성장이라고 할까요? 원초적인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간섭과 보호하심을 벗어버리고 스스로 독립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스스로 하나님처럼 살아가겠다는 것이 죄입니다.

 

 

 

 

지난 월요일 김용옥 교수의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텔레비전 강의에서 유교의 민본사상을 강의하였습니다. 백성이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묘사직도 갈아 치울 수 있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임금이 백성에게 덕이 되지 않을 때 임금을 갈아 치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임금 정도가 아니라 사직도 갈아 치운다는 것입니다. ‘사직’은 ‘사’는 땅의 신이고 ‘직’은 곡식의 신이기에 신도 백성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갈아 치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이라는 이 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갈아 치우라는 것입니다.

 

 

 

 

일요일 교회가지 않고서도 편안할 수 있고 교회 가는 것 보다 훨씬 더 종교적인 마음 비움으로 살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박수가 쏟아졌는데 결국 인간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신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신들은 얼마든지 갈아 치울 수 있습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마든지 종교든 신이든 갈아 치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신은 신이 아닙니다.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신, 인간이 갈아 치울 수 있는 신이라면 그것이 바로 우상인 것입니다. 그런 우상이란 부수어야 하고 갈아 치워야 마땅한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 때에 수많은 신들을 다 부수어 버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를 아는 것이 영생이며 그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17:3. 6:29). 그러면 어떻게 예수를 알고 믿게 되는 것입니까? 성경은 이것을 오직 은혜로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허물과 죄로 죽었기에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먼저 선택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거듭나게 하셔서 자기 백성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자들이 성장하는 것이 무엇인지 몇 곳을 보고자 합니다.

 

 

 

 

에베소서 4:11-16절입니다.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1)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2)사랑 안에서 3)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이것이 자람입니다. 자라야 하는 이유는 어린 아이처럼 유혹에 밀려 요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과자만 주어도 부모를 버리고 과자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말씀의 초보에 있다면 이러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히브리서를 받는 처음 독자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대하여 유혹을 받아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온전하고 완전한지를 알라고 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16-19절입니다.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8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머리로부터 온 몸이 도움을 입어서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면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지 아니하고 아직도 그림자를 붙들고 있다면 그것이 어린 아이요 자라지 못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스스로 무언가 잘하게 되면 장성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장성함이란 장성 할수록 주님께 메이는 삶입니다. 아예 동거하는 것입니다. 더욱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을 장성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머리에 붙어있어야 자라는 것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월 지나갈수록 더욱 주를 의지할 수밖에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세상의 원리는 장성한 것이 독립이지만 성경에서의 장성이란 더욱 주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젖을 먹는 자란 어떤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까? 멜기세덱에 관하여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의 이해가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을 이해하면 말씀의 초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을 이해하면 의의 말씀을 경험한 자요 젖을 먹는 것이 아니라 단단한 음식을 먹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멜기세덱에 대하여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찾아보고자 합니다. 멜기세덱이란 이름은 성경에서 열세 번 나오는데 창세기에서 두 번, 시편에서 한 번, 히브리서에서 열 번이 나옵니다.

 

 

 

 

창세기 14:17-24절입니다. “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18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21 소돔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22 아브람이 소돔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23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24 오직 소년들의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찌니 그들이 그 분깃을 취할 것이니라

 

 

 

 

소돔지역의 왕들이 그돌라오멜 왕에게 12년간 지배를 받다가 13년에 반역을 하자 14년에 그돌라오멜 왕을 중심으로 한 4개국 연합군이 쳐들어 와서 소돔과 고모라성의 재물과 사람들을 약탈하여 간 것을 아브라함이 듣고서 자기들의 사병을 끌고 추격합니다. 개인이 4개국 연합군을 대파하고 사로잡힌 사람들과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오는 중에 소돔 왕과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납니다.

 

 

 

 

멜기세덱의 축복이 방금 읽은 말씀인데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아브람에게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적을 이긴 것이 아브라함의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대적을 아브라함의 손에 붙여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그 얻은 것 중에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줍니다.

 

 

 

 

여기서 최초의 십일조가 나오는데, 십일조를 드림은 자신의 승리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붙여 주신 결과물임을 알기에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소돔 왕이 사람만 넘겨주고 재물을 가지라고 하자 아브람이 거절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손의 도움으로 치부하였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입니다. 여기서 아브람의 신앙이 자라는 것입니다. 그 자람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부르신 분의 능력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지극히 높으신 분의 복을 빌어준 이 멜기세덱이 누구인가를 아는 것이 오늘 말씀에서 말씀의 초보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 멜기세덱에 대하여 창세기에서 보면 아브라함이 먼저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가 나타나서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제사장인 멜기세덱은 아브람이 원하여 나타난 제사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로 하여금 믿는 자의 조상의 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란, 아브람이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나타나서 일방적으로 축복을 하는 이런 방식의 제사장을 통하여 만들어 내신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멜기세덱에 관하여 성경이 그 이후로 계속 침묵을 합니다. 모세가 율법을 받고 율법에 의하여 제사제도를 수립하고 제사장 제도를 말하는 그 수많은 제사제도 속에서도 단 한번도 멜기세덱에 대하여 언급이 없다가 다윗의 시편에서 멜기세덱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 것입니다.

 

 

 

 

시편 110편 1-7절입니다. “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2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1)주의 권능의 홀을 내어 보내시리니 주는 원수 중에서 다스리소서 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4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5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 6 열방 중에 판단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파하시며 7 길가의 시냇물을 마시고 인하여 그 머리를 드시리로다.”

 

 

 

 

예수님께서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하였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인용하신 시편입니다. 여기서 다윗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말하는 이 제사장이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히브리서 5:6,10절에서 보았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제사장에 대하여 예언한 것이 아브라함과 다윗으로 바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중간에 있는 율법과 레위지파 계열의 제사장이 아닌 다른 영원한 제사장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레위지파 제사장들이 그 기능상으로는 영원한 제사장의 그림자가 될 수는 있으나 그 실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시작이라는 선언은 이러한 뜻까지 다 포괄하는 선포인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에게서 나타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은 흔들리지 아니합니다. 영원합니다. 완전합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처럼 요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흔들리고 항상 유혹을 받지만 영원하고 완전한 제사장,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의 하신 일에 대하여 너무 쉽게 초보라고 돌려버리고 우리 스스로의 능력을 발휘하는 영역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은 오직 그 아들과 그 아들이 하신 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실 때도, 변화산에서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라고 선언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도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장성함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믿는 것이 젖을 먹는 자리에서 단단한 음식을 먹는 자리로의 성장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7장에서 다시 보겠습니다만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는 것입니다(히7:7). 오늘 저와 여러분이 복을 받는 유일한 길이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하고 완전한 제사장직으로 인하여 복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낮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높으신 분으로부터 복 빎을 받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복을 빌어 주시기에 이렇게 예수 믿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6:1-8  그 마지막  2004. 2. 25.


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1)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찌니라 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4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5 하나님의 2)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사람이 무슨 일이나 그 마지막을 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시작과 과정도 알아야 하겠지만 그러나 이미 그 결론을 알고 있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신명기 32:28-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모략이 없는 국민이라 그 중에 지식이 없도다. 그들이 지혜가 있어서 이것을 깨닫고 자기의 종말을 생각하였으면-”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종말을 생각하지 못하였기에 어리석은 백성이 된 것입니다.

 

 

 

 

8절 끝에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마지막이 무엇입니까? 만물의 마지막이면 예수님의 재림이 있는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만물의 마지막 때에 불사름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기준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별 관심이 없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마친 학생회 수련회에서 강사가 캐나다에서 공부를 하면서 요셉의 꿈에 대한 설교와 강해를 한국사람 것과 캐나다 사람의 것을 비교를 해보았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구할 수 있는 것으로 비교를 해보니 한국 사람의 것은 처음 요셉이 꿈꾸는 장면을 이야기하는 데서 벌써 국무총리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캐나다 사람의 책에서는 단 한사람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얼마나 타이틀을 좋아하는지를 말하면서 한 예화를 들었는데 평생 힘쓰고 애써서 화장실 다섯 개 있는 집 마련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우리의 그 마지막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모든 것이 불살라지는데 과연 남겨질 것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지난주에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말씀의 초보가 되어 젖이나 먹고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게 되었다고 책망을 하였습니다. 벌써 선생이 되어야 할 자들이 아직도 말씀의 초보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멜기세덱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달린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사병 318명을 거느리고 4명의 왕들이 연합한 군대를 물리치고 사람과 재산을 다 도로 찾아오는 중에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분명히 역사적인 인물입니다. 이 땅에서 아비와 어미와 족보가 있고 시작과 끝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멜기세덱은 히브리서 7:3절에서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고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원한 것도 아니고 먼저 십일조를 바친 것도 아닙니다. 묵시적인 인물이 난데없이 나타나 아브라함을 축복한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느냐는 것입니다.

 

 

 

 

6:1-2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즉 말씀의 초보에서 벗어나 젖을 먹는 자리에서 단단한 음식을 먹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데 나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초보에서 완전한데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초보가 무엇입니까? 초보란 죽은 행실을 회개함, 하나님께 대한 신앙, 세례, 안수, 죽은 자의 부활, 영원한 심판에 관한 것입니다. 이런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이러한 기초적인 그리스도의 도를 전하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도의 초보라는 것입니다. 그 터를 다시 닦지 말고 더 완전한데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데 나아가는 것을 우리가 세상의 상식으로 생각을 하면 초보운전 때에 옆에 사람이 붙어 있어야 하지만 어느 정도 익숙하여 운전에 익숙해지면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상식이라면 성경에서 말하는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데 나아가라는 것은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밀접하여 지는 것입니까? 내가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한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으로 착각하는 것은 초보는 예수님을 믿어야 하지만 자라고 성숙하면 스스로 독립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런 모습을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남기려고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무엇을 기준으로 온 세상을 불살라 버리는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6:4-6절입니다. 한번 비췸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을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요즈음 어느 연예인이 두 번 죽이는 것이라는 말을 해서 유행을 시켰는데 그런 말은 웃어넘기는 말이지만 지금 말씀은 심각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는 것에 대하여 불살라버리겠다는 것입니다.

 

 

 

 

한번 비췸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가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다면 이것도 얼마나 엄청난 일입니까? 그런데 이러한 자가 중간에 타락하여 배신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다면 이 말씀은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경고입니까? 그렇다면 이런 체험을 가지고도 배신할 수 있다면 그 배신을 누가 한 것이 됩니까? 대단히 복잡한 논쟁이 있어 왔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였더라도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엄청난 능력을 행하였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그렇게 큰 능력을 행하여도 주님께서 모른다고 떠나가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는 어떻습니까? 역시 능력을 받았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같은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예수님을 배신하고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도 배신하고 다른 제자들도 배신하였는데 어떻게 그들은 제자가 되었습니까? 이러한 질문은 성경에서 수도 없이 많이 나올 수 있습니다.

 

 

 

 

출애굽 한 것이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나왔고, 홍해바다를 건넌 것이 세례였고, 다 같이 신령한 음식과 신령한 반석에서 나오는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가나안 입구에서 믿지 못하여 여호수아와 갈렙만 빼고 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이들은 다 천국 갔을까요? 지옥 갔을까요?

 

 

 

 

개인의 구원의 관점에서 성경을 보면 풀리지 아니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보아야 풀리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만 높이시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름이 다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을 높이는 차원에서 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주의 이름으로 행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는 것 같은데 그 속으로는 이리라는 것입니다. 양의 옷을 입은 이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예외가 될 수가 없습니다. 저도 여러분도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 그러면 나의 구원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염려는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물이 다 주님의 뜻대로 쓰일 뿐입니다.

 

 

 

 

악한 자도 악한 날에 필요하여 주님께서 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다고 하였습니까? 빌립보서 2장에서 모든 무릎이 예수를 주로 시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는 것이며, 골로새서 1장에서 천지의 만물이 다 주를 위하여 창조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기 아들 높이시기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성경이 풀어지지 아니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의 대표로 모세를 보고자 합니다. 모세는 왜 못 들어갔습니까?

 

 

 

 

민수기 20:7-12절에서 반석에서 물을 명하여 내라고 하셨는데 반석을 두 번이나 치는 것입니다. 그 현장에서 모세를 향하여 믿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믿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하였기에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는 것은 두 번 기록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17:6절에서는 반석을 치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번 침을 받은 반석이 두 번 침을 받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명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1-4절에서 이 반석을 그리스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처음 반석을 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요 십자가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한번으로 완전하고 완벽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를 무효한 것으로 돌리는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는 구원받았습니까? 못 받았습니까? 이렇게 보면 안 된다고 하였지요! 모세의 구원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한번 고난 받으신 것으로 충분하고 완전하다는 것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하나의 도구인 것입니다. 주인집의 사환인 것입니다. 아들을 높이기 위한 사환이라는 것을 히브리서 3:1-6절에서 이미 보았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함께 예수님의 별세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하나님의 아들 높이기,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하나님께서 물으시고 최종 심판의 근거로 삼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떤 대단한 능력을 행하였는가가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함으로 나아가는 것이 완전함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6:6절을 봅니다. 타락한 자가 어떤 자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는 것입니다. 초보시절에는 예수님을 믿고 그 다음 장성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버리고 자기 능력으로 살수 있다면 이것이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히브리서 10:26-29절을 봅니다. “봉독”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범죄 하면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받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모세의 법을 폐하여도 두세 사람의 증인으로 죽임을 당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받은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할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히브리서 6장의 말씀과 같은 말씀이지요! 즉 온통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너희가 어떻게 대하였는가 하는 것이 모든 심판과 불사름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6:7-8절을 봅니다. 복과 저주가 나옵니다. 그 마지막을 불사르게 됩니다. 그러면 불에 탈 것은 사라지고 없어질 것이지만 불에 타지 아니할 것만 남게 될 것입니다. 불에 타지 아니할 것은 어떤 것들입니까? 은혜로 주어진 것들만 남게 될 것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그 처절한 자기 부인이 된 은혜만이 남게 될 것입니다. 그래야만 아들의 공로만 남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고백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그 말씀이 초보가 아니라 완전한데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얼마나 엄청난지를 더욱 풍성하게 알아가는 것이 완전한데 나아가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아들의 공로만 남기시고 다른 것들은 불살라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마지막입니다. 만물이 주의 뜻대로 되어질 뿐입니다.

 

 

 

 

히브리서 6:9-20  맹세로 보증함  2004. 3. 3.


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10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11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12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13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14 가라사대 ㄱ)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15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17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19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20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

 

 

 

 

옛날에 아이들이 무슨 약속을 할 때는 하늘과 땅을 두고 맹세를 하였습니다. 자기보다 높고 위대한 대상을 걸고 약속을 하는 것이지요! 요즈음도 그렇게 약속을 하지만 조금 다르게 하는데 요즈음은 새끼손가락을 걸고, 검지로 도장을 찍고, 손바닥에 사인을 하고, 복사까지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냥 말로 하는 약속은 믿지 못하기에 이중 삼중의 보증을 하고자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약속을 하고 보증을 하고 맹세를 하여도 인간이 한 그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기에 영원한 신뢰가 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가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약속과 맹세가 있기에 흔들리지 아니한 든든한 영혼의 닻과 같은 것입니다. 배가 정박해 있을 때에 닻을 내리고 있어야 바다의 조류에 떠내려가지 아니하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로 인하여 흘러 떠내려가지 아니하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2:2절에서도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주의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디에 우리의 영혼의 닻이 내려져 있는가를 점검하고자 합니다.

 

 

 

 

지난주에 그 마지막이 불사름이 된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그 마지막에 불사름이 된다는 것은 한번 은사를 맛보았지만 타락한 자들인데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이는 자들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비가 와서 밭이 합당한 채소를 내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불사름이 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렇게 엄중한 경고의 말씀을 하면서 그러나 그렇게 배교한 자들보다 지금 연약하지만 신앙 안에 있는 자들에 대하여 아주 분명한 확신으로 격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9-10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르면서, 그 마지막이 불사름이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한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불의하지 않으시기에 너희의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성도를 섬긴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이 아닙니다. 율법으로 사랑을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랑은 임하는 것이고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고를 하여도 기쁨으로 하는 것입니다.

 

 

 

 

11-12절입니다. 이러한 사랑이 있는 성도들에게 간절히 원하는 바가 있는데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과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 받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과 소망과 믿음이 다 나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3절에서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에게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음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히브리서신을 받는 성도들에게도 이러한 사랑과 소망과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자들을 본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만 그것이 과연 무엇을 위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에 관한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나의 신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며, 소망도 나의 꿈과 비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이며, 사랑도 역시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지는 그 아들에 대한 사랑인 것입니다. 그 약속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 맹세로 이루어 내시는가를 아브라함을 통하여 보라는 것입니다.

 

 

 

 

13-15절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이 내용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사건이후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창세기 22:16-18절입니다. “16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창세기의 이 약속의 말씀을 받기까지 아브라함이 오래 참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오래 참고, 이삭을 바치고 나니 이러한 약속이 주어졌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다음 구절을 봅니다.

 

 

 

 

16-17절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를 합니다. 그래서 맹세가 최후 확정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다툼의 최종 확정도 맹세로 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맹세이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맹세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하여 스스로 지키시겠다는 결심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보다 더 높으신 분이 없으시기에 자신의 이름으로 맹세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하여 자기 이름으로 맹세하셨기에 이 약속은 절대로 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던 것입니다. 그 모델이 아브라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믿음이 좋아서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니라 믿음이 하나도 없는 아브람을 불러서 어떻게 믿음의 사람이 되도록 만드시는가를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일방적으로 부르시고 일방적으로 언약을 체결하시고 일방적으로 맹세하신 것을 이루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여야 하시는 것입니까? 아브람이 허물과 죄로 죽어 있기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에 대한 내용을 몇 번에 걸쳐서 말씀을 보았습니다. 창세기 설교를 통해서도, 구역 공부를 통해서도, 로마서를 통해서도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떤 것인가를 보았는데 로마서에서 한 번 더 찾아보고자 합니다.

 

 

 

 

로마서 4:17-25절입니다. “17 기록된바 ㄷ)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ㄹ)네 2)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19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22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23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24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결국 아브라함이 믿은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어 내신다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자신은 믿음이 없어서 자기 집의 종이 후사가 되리라고 하였고, 이스마엘이 후사가 되리라 하였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없는 가운데서 있게 하시는 그 능력으로, 사라의 죽은 태에서 이삭이 나오게 하시는 방식으로 믿음의 자손을 만들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그 믿음의 자손이 대적의 문을 얻을 것이며 그 후손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로 인하여 성취된 그 언약의 실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를 믿는 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신 것을 믿는 것이 죽은 가운데서 살리시고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방법인 것입니다.

 

 

 

 

18절입니다. 새번역으로 보겠습니다. “이는, 앞에 놓인 소망을 붙잡으려고, 세상에서 피신한 사람들인 우리가 이 두 가지 변할 수 없는 사실, 곧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의지하여, 큰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맹세하실 때에, 거짓말을 하실 수 없습니다.”

 

 

 

 

변할 수 없는 사실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거짓말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변하지 아니하는 사실,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가 변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약속 안으로 피신한 자들이 큰 안위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아브라함 됨은 사람의 맹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맹세로 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맹세를 하지 말게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5:33-37절입니다. “33 ○"옛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12)'너는 거짓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하고, 네가 맹세한 것은 그대로 주께 지켜야 한다' 한 것을, 너희가 또한 들었다. 3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말아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35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께서 발을 놓으시는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그것은 큰 임금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36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말아라. 너는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37 너희는 '예' 할 때에는 '예'라는 말만 하고, '아니오' 할 때에는 '아니오'라는 말만 하여라. 이보다 지나친 것은 13)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하늘과 땅을 두고 맹세하지 못하게 합니다. 자기의 머리를 두고도 못하게 합니다. 자기의 머리카락 하나 희게 하거나 검게 하지 못하는 자가 무엇을 맹세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란 오직 약속하신 것을 자신의 맹세로 이루어내신 하나님의 솜씨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것을 믿은 것입니다. 그의 평생에 믿게 된 것이 하나님은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심을 믿은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의 믿음이란 것이 역시 이러한 믿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흔들리지 아니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세상의 조류에 따라, 사람의 감정이나 의지나 지식에 따라 흔들리지 아니하는 믿음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믿음입니다.

 

 

 

 

19-20절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소망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내신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 약속의 실체란 아브라함도 믿고 기뻐하였던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모든 믿는 사람이 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 복이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이 휘장 안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성소와 지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입니다. 그 휘장이 찢어지고 이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이 아니라 하늘의 영원한 처소에서 영원한 제사장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영혼의 닻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근거란 우리의 의지나 감정이나 지식이 아닙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을 맹세로 이루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란 인간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께서 이루어내신 것이기에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에게 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 이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능력이 됩니다. 우리의 큰 안위가 이러한 약속위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로 이루신 일이기에 주께 감사하며 찬양할 뿐입니다.

 

 

 

 

히브리서 7:1-10  폐일언하고  2004. 3. 10.


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2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4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5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6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7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8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9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10 이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지난주에 100년 만에 폭설이 쏟아지고, 오늘은 태풍이 붑니다. 대통령을 탄핵한다고 국회에서 발의를 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 대하여 사람들은 각각이 자기들의 주장과 견해가 있습니다. 탄핵을 찬성한다는 데모도 하고, 반대한다는 데모도 합니다. 그런 일에 관심 없는 것도 하나의 견해가 됩니다. 이렇게 복잡하고 시끄러운 세상에 사람들마다 말들이 많습니다. 이럴 때 어떤 결론을 내립니까? 모두가 자기주장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과 견해는 다 폐하고 자기의 주장과 관점을 관철시키고 싶지만 그러나 모두가 다 신이 되어 있는 마당에 누구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경우가 얼마나 불가능한지 우리가 날마다 경험하면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요동하고 시끄러울 지라도 폐일언하고 자기의 주장을 흔들림 없이 이루어내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시편 2편에서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서 요동하고 소란스러운 것을 하늘에 계신분이 비웃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난주에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이름으로 맹세하신 것입니다. 더 높으신 분이 없기에 자기 이름으로 맹세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최종 확정인 것입니다. 오늘은 그 언약을 맹세로 보증한 내용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루어내셨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7:1-2절을 봅니다.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이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합니다. 아브라함은 여러 왕들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그 일하심이 바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입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이 기대하거나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일방적으로 오셔서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준 것입니다. 그것은 물론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그 이름을 번역하니 의의 왕이요 살렘 왕이라고 합니다. 이 멜기세덱이 빌어준 복이 무엇입니까? 의의 왕이기에 의를 선물을 주는 것이며 살렘의 왕이기에 평강을 선물을 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범죄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기에 인간의 의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공의 앞에 설수가 없는 것입니다. 설수 없을 정도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범죄한 인간에게는 참된 평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의 왕이 오셔서 의를 선물로 주시면 의롭다 함을 받게 되고 그 결과 평강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의 왕 살렘의 왕으로부터 축복을 받고나서 아브라함이 전리품의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바칩니다.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하여서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멜기세덱이 먼저 떡과 포도주를 준비하고 기다리다가 아브라함을 축복한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할 때 떡과 포도주를 준비한 내용은 인용을 하지 않고 있지만 창세기에서는 멜기세덱이 준비하고 있습니다. 떡과 포도주 조차 멜기세덱이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하여 전쟁하러 갔는데 작은 사병으로 연합군을 물리치고 전리품을 챙겨서 오는 중입니다. 그 전쟁의 승리가 자기의 능력과 실력이 아니었음을 멜기세덱을 만남으로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14:18-20절을 봅니다. “18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아브라함의 승리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붙여주셨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자기는 알지고 못하고 싸웠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붙이신 전쟁이었기에 승리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나서 자기의 승리가 높으신 분의 축복으로 된 것임을 알고 십일조를 바친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여서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십일조를 통하여 자신의 승리가 어디로부터 오는가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이러한 복이 주어지는 그 근원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브라함의 어떠한 자질과 조건이 아님을 밝히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이 전혀 손을 쓸 수 없는 인물이 투입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인물을 묵시적 인물이라고 합니다. 시간과 공간 속에 묶여 있는 인간으로서는 손을 쓸 수 없는 인물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7:3절을 봅니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하나님의 아들과 방불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요 그림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아들이신 자신을 인하여 기뻐하였다는 것을 요한복음 8:5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으로부터 일방적인 축복을 받는 것처럼 오늘날 믿음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일방적인 축복을 예수님을 통하여 받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의 노력과 애씀과 십일조를 함으로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이 복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복-오직 하나님의 약속과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거저주시는 것임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들을 거저주시는 것으로 믿으십니까? 그런데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이 예수님을 보고 기뻐하였다는 이 말씀을 듣고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너희가 내 말을 들을 것인데 그렇지 아니한 것을 보니 너희가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자 예수님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어떤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까?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이 방식으로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늘 내 중심으로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하여 살아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을 보내셔서 자기가 죄인임을 알게 하시고 자기 의가 아니라 전적인 주님의 의를 의지하고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는 방식과 같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7:4-10절입니다. “봉독” 멜기세덱이 얼마나 높은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받았다는 것은 레위지파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십일조를 받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레위지파는 자기들의 형제에게서 받지만 레위지파가 태어나기도 전에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침으로, 십일조를 받고 있는 레위지파도 아브라함의 허리에 속하여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레위지파는 죽을 자들이지만 멜기세덱은 항상 산 자로서 있는 것입니다. 결국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7:7절입니다.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런 말 저런 말 다 폐하고 한마디로 말해서 복이란 높은 자에게서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멜기세덱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받은 복이라는 것입니다. 멜기세덱이 높은 분으로서 낮은 아브라함을 축복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멜기세덱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바로 오시지 않으시고 왜 레위지파를 세웠다가 레위지파도 아닌 유다지파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까? 레위지파로 오셨다면 더 연결이 자연스럽지 아니한가, 하는 질문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레위지파는 율법에 의하여 세워진 제사장 직분입니다. 율법의 기능이 무엇입니까? 인간의 연약함을 알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알리고 죄를 심히 죄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의하여 세워진 제사장의 연약함을 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7:11-25절을 봅니다. “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12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13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14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15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16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17 증거하기를 ㄱ)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18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19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찌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20 또 예수께서 제사장 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21 (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ㄱ)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23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오셔야 하는지를 가장 분명하고 확실하게 증거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인하여 복을 받은 것처럼 오늘은 누구를 인하여 복을 받고 사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인하여 복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사는 것도, 죽은 것도, 먹는 것도, 입는 것도, 그 무엇도 다 주님의 은혜로 되는 것임을 아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말씀에 대하여 여러분이 무언가 말하고 싶어서 무언가 입술이 달싹거리지 않습니까? 그럴 때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겠습니까?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복 빎을 받는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정말 감사하고 기쁜 소식이 되는 사람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낮은 자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거북스럽게 들리는 사람은 아직도 자기가 무엇이 된 줄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가 고맙지 않고 예수 잘 믿는 자기가 드러나고 싶은 사람은 이런 말씀에 대하여 은근히 불만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예정하시고 일방적으로 선택하셔서 일방적으로 은혜를 주시는 방법으로만 구원하실 수밖에 없는 아주 악질적이고 고집스럽고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살아가는 인간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인간이기에 어떻게 그저 주시는 은혜를 그저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고린도전서 2:12절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실 것입니다. 그 앞에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거저 주시는 은혜로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자신이기에 폐일언하고 높은 분에게서 낮은 자가 복 빎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감사요 기쁨이 되는 사람이 성령이 임한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7:11-19  별다른 한 제사장  2004. 3. 17.


11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으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을 수 있었으면 (백성이 그 아래서 율법을 받았으니) 어찌하여 아론의 반차를 좇지 않고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울 필요가 있느뇨 12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13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14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15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16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17 증거하기를 ㄱ)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18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19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찌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 쉽지 않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모세로부터 율법을 받은 것을 계산한다면 약 3,400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서가 기록될 약 1,900년 전의 상황이라면 얼마나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고 있을 때였겠습니까! 그러므로 율법과 제사가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이 어느 정도로 생소하겠습니까?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러한 율법의 역사와 전통과 문화 속에 젖어 살던 사람들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보고 지키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율법 파괴자요! 성전 모독자요! 그래서 저주 받아 죽은 자라는 유대인의 일반적인 평가를 부정하는 일인 것입니다.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스스로도 어려운 일입니다만 또 어려운 것은 같은 동족들에게 더욱 많은 핍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핍박 속에서 그동안 늘 지켜왔던 율법과 제사를 폐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어려움이 생기면 내가 예수를 잘못 믿어서 이런 일이 생겼나, 하는 의구심이 들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을 잘못 믿어서 핍박이 아니라 잘 믿어서 핍박이 생기는데도 우리는 그러한 수준이 되지를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지만 그러나 과연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이 율법을 어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긴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히브리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율법과 제사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것이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완전한지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제사직분이 레위지파에게 있는데 왜 예수님께서 레위지파가 아닌 유다지파로 오셨는가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와 그림자가 된다면 레위지파가 늘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여 왔으니 예수님께서 레위지파를 통하여 오셨다면 훨씬 앞뒤가 맞는 이야기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아담이 범죄하고 나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지 않으시고 왜 오랜 세월을 지나게 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시지 않았습니까? 아담 이후에 가인과 아벨, 인구의 번성, 죄악의 관영함, 심판, 심판 중에 노아를 통한 구원, 노아의 후손들, 아브라함, 모세, 율법, 제사장 등등을 보시면서 왜 이렇게 복잡하게 오랜 세월을 통하여 천천히 계시하고 계실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까!

 

 

 

 

성경은 그러한 모든 과정을 통하여 인간의 죄악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손에 무엇이 주어지면 그것을 어떻게 악하게 사용하는지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면 율법을 가지고 죄를 짓고, 제사장을 주면 제사장이 죄를 짓고, 성전을 주면 성전으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어느 자리까지 가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시니 아들을 죽이는 자리까지 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식이 늘어나고 과학이 발전하면 편리하고 좋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편리를 위하여 만들어진 자동차나 전화기나 컴퓨터를 통하여 무슨 일이 더 일어납니까? 좋게 사용하면 된다고 하지만 그러나 더 정교하고 더 악하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없었으면 그런 범죄가 나오지 않았을 텐데 인간이 유용하고 좋다고 만들어진 것들로 인하여 더욱더 범죄에 악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것으로도 인간을 새롭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 유대인들이 모델로 선발이 되어서 다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7:11-15절을 봅니다. 레위 계통의 제사 직분을 통하여 온전함을 얻을 수 없었기에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별다른 한 제사장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위지파를 세운 것은 레위지파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다른 제사장의 직분을 다른 지파에서 이야기 하지 않았기 때문에 레위지파는 오직 자기들의 제사직분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범죄를 하였을 지라도 사함을 받을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제사직분이라는 것이 율법을 통하여 주어졌는데 그러면 율법 외에 다른 방법을 준비하셨다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율법을 받고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이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율법에서 유다지파를 통하여 제사장이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데 유다지파로 오신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어서 백성들의 죄를 속하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이 어떻게 말이 되느냐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아브라함을 축복한 멜기세덱이 어느 족보에 속하였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레위지파도 아브라함의 허리에 속하여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처럼 영원하고 완전한 제사장이란 율법의 계통이 아니라 다른 계통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3:19-24절을 봅니다.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2)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제사도 다 율법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자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율법의 기능입니다. 율법지킴, 날과 달과 절기지킴, 제사제도 등이 다 율법에 의하여 주어진 것인데 이러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은 자가 없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받은 자들은 우리가 이것을 지킬 능력이 있으니 주셨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고 나서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밝히 드러난 것입니다.

 

 

 

 

율법 외에 한 다른 법이 주어졌으니 그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인데, 그 믿음조차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 것이기에 이는 누구든지 자기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에서는 율법을 잘 지키는 자가 못 지키는 자 앞에서 자랑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는 결단코 인간의 개인적 능력을 자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죄인을 다시 살리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달리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레위지파를 통하여 세워진 제사장의 한계를 드러내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장임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레위지파 제사장의 한계란 히브리서 7:16절에서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은 것입니다. 즉 육체는 육체일 뿐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육은 육이요 영은 영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생각해 보면 유대의 율법선생이라는 사람이 거듭나지 못한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은 것입니다.

 

 

 

 

그러나 레위지파가 아닌 유다지파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에 상관된 법을 좇아오신 것이 아니라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온 것입니다. 육체에 상관된 법과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을 레위지파가 아닌 유다지파에서 오신 것으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레위지파의 제사장은 영원하지 못합니다. 죽습니다. 그러므로 수효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한분으로 영원한 제사를 단번에 드리셨기 때문에 그 직분이 갈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레위지파가 아닌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별다른 한 제사장이 오리라는 것은 율법에서 예언된 것이 아니라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멜기세덱을 다윗이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과 다윗 사이에 모세가 들어가는 것입니다. 멜기세덱과 멜기세덱으로 연결되는 아브라함과 다윗 사이에 모세를 통하여 레위지파의 제사직분을 말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계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언약 시대에 산다고 하지만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육체는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까? 육체에 상관된 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언가 분명하고 무엇을 붙들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하여는 믿음이 없이는 붙들지를 못하기에 모호한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일이란 육체로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차이점을 갈라디아서에는 하늘과 땅으로, 하늘은 자유로 땅은 종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4:22-31절입니다.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바 ㄱ)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23 ㄴ)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노릇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바 ㄷ)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2)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ㄹ)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 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여러 가지로 대비합니다. 계집종과 자유하는 자, 시내산과 위에 있는 예루살렘, 남편 있는 여자와 홀로 사는 여인, 육체와 약속 등입니다. 이것을 하나로 압축을 하면 육체에 상관된 법을 좇는 자와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육체를 좇아 된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궁한 생명의 능력은 인간의 손으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하시는 것입니까?

 

 

 

 

히브리서 7:18-19절입니다. 전엣 계명이 연약하여 무익하다고 합니다. 왜 무익한가 하면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하게 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즉 율법에서 레위지파의 제사로는 온전하게 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 외에 한 다른 법,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별다른 한 제사장으로 인하여 우리가 더 좋은 소망이 생긴 것입니다. 그 별다른 한 제사장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그 어떤 인간의 육체에 상관된 법이 아니라 별다른 한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중보로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7:20-28  온전한 구원  2004. 3. 24.


20 또 예수께서 제사장 된 것은 맹세 없이 된 것이 아니니 21 (저희는 맹세 없이 제사장이 되었으되 오직 예수는 자기에게 말씀하신 자로 말미암아 맹세로 되신 것이라 ㄱ)주께서 맹세하시고 뉘우치지 아니하시리니 네가 영원히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23 저희 제사장 된 자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을 인하여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26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27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교회 나오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구원을 받느냐고 물어보면 많은 아이들이 하나님을 믿고, 착한 일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예수님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을 더 많이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야기 하고서 다시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착한 일을 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보면 대부분 천국가지 못한다는 대답을 합니다. 이것은 어른들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어떤 목사님께서 자기 어머니에게 전도를 하였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하니 자기는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감히 나 같은 자가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분의 믿음의 내용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자신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포함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상의 강도 이야기를 하였더니 그러면 자신도 믿을 수가 있겠다고 하더랍니다. 강도 보다는 자신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겠지요!

 

 

 

 

전도를 하다가 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부족해서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믿으려면 글도 알아야 되고, 교회에 나가기도 하고, 헌금도 하는 것으로 먼저 알고 있는 것입니다. 더더구나 죄가 커서 믿지를 못하겠다는 말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을 모르고 스스로 능력을 갖추어서, 어느 정도의 기초 실력을 갖추고 예수를 믿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 결국 어떤 모습이 되겠습니까? 점점 도를 닦는 것처럼 해서 나중에 자신이 점점 더 온전해져서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을 누가 심어 놓았을까요? 마귀가 심어놓은 것입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인간의 죄 된 본성이 이렇게 표출되는 것입니다. 신의 존재를 알고 내가 신과 합류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성이 바탕이 되어 있기에 어떤 종교에 귀의한다고 하여도 내가 신을 바르게 알고 신의 가르침을 바르게 수행하여 신과 합류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종교성의 바탕에서 들리는 이야기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그러한 구원받고자 하는 욕구와 그에 따라 나오는 행위들을 다 죄로 돌려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선이나 의로움이나 가치 있다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믿기 전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예수 믿고 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흔히 믿기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으니 어쩔 수 없지만 그러나 거듭나고 나면 내가 무엇을 해야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야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울사도가 거듭나기 전에는 자신이 펄펄 살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자신은 죽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은 주님이셨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나고 나서 자신이 죽은 자로 여기며 사는 것이지 거듭나기 전에 무슨 수로 자기를 죽은 자로 여기고 살겠습니까? 이렇게 죽은 자에게서 성령의 열매가 나오게 되는 것은 그야 말로 주님의 일하심의 결과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얼마나 온전한 지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보고자 합니다.

 

 

 

 

20-2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 되심은 맹세로 되었다고 합니다. 레위지파는 혈통을 따라서 제사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맹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 되심은 맹세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맹세로 되었다는 것은 시편 110:4절입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여호와의 맹세로 된 것입니다. 사람의 맹세란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만 여호와의 맹세는 뉘우치지 아니하십니다.

 

 

 

 

히브리인들의 사상에는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셨으면 그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빛이 있어라 그러면 빛이 있어지는 것입니다. 순식간에 있어 지든지, 우리의 시간 개념으로 천년이 걸리든지 간에 반드시 성취가 되는 것이 여호와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맹세로 보증하신다면 얼마나 분명하고 완전하게 성취가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유대인이라면 하나님의 말씀하심과 그 성취의 능력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맹세와 성취를 누가 이루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시편 110:5절을 봅니다.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그 노하시는 날에 열왕을 쳐서 파하실 것이라” 주의 우편에 계신 주께서,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을 예수님께서 해석하시기를 다윗이 성령의 감동으로 그리스도를 주라고 칭하였는데 어떻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주가 지금 그리스도로 일하고 계시는 분이 예수님임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과도 단절을 시켜 버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즉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간과 의논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과 주님과의 일입니다. 여기서 유대인들의 역할은 그 주님의 일을 믿지 못하는 역할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제사장으로 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맹세를 이루시기 위하여 일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본 사람은 이방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7:6-9절입니다. “6 예수께서 함께 가실쌔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7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1)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되는 것임을 믿습니다. 그러나 그 성취를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것은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이 말씀만 하시면 이루어 질 줄로 믿은 것입니다. 이를 보시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본 적이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맹세로 이루어진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물 되심과 제사장 되심인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온전한 속죄가 이루지기에 온전한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 나은 언약의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인간이 연약하여 감당을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나은 언약이 와야 하고 더 나은 언약의 보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이것이 더 좋은 소망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더 나은 것에 대하여 히브리서에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 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8:6절에서 더 아름다운 직분, 더 좋은 약속, 더 좋은 언약의 중보가 되시는 예수님입니다. 히브리서 9:11절에서 좋은 일의 제사장으로 더 크고 온전한 장막 즉 하늘 장막의 제사장이신 예수님입니다. 히브리서 11:16절에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한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11:35절에서 더 좋은 부활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더 좋은 약속, 더 좋은 본향, 더 좋은 부활을 보증으로 받은 것입니다.

 

 

 

 

히브리서 7:23-24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시는 것은 영원히 살아서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시기 때문입니다. 옛 언약 아래서 제사장들은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의 직분이 바뀌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원히 계시기에 그 제사 직분이 갈리지 아니하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를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7:25절입니다. 왜 온전한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이루어지는지를 다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가 한 분이시며 이 분의 그 직분이 갈리지 아니하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제사장으로 계시기에 자기를 힘입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의 능력과 실력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도대체 어떤 분이시며 무슨 일을 하셨기에 죄인 된 인간을 온전히 구원하신다는 것입니까? 이것을 모르면 자꾸만 예수님께서 온전히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무언가 보태어서 온전하여 지려고 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이 수에 칠 가치 조차 없다고 합니다. 인간에게서 나온 것으로 온전하여 질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자기를 스스로 구원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구원이란 사람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온전히 구원하신다는 것은 인간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고 있는 인간이 스스로 영원을 찾아 나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위에 계신 분이 찾아오심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야 온전한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온전하신 제사장입니까?

 

 

 

 

히브리서 7:26-27절입니다. 우리에게 합당한 제사장, 우리를 구원하시기에 온전하신 제사장이 어떤 분이십니까?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분이십니다. 구약에서 제사장들은 온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을 위하여 속죄를 하고서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합니다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한 제사장이시기에 단번에 자기를 드려서 이루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7:28절입니다. 율법은 약점을 가진 인간을 제사장으로 세운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인간의 연약함을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전하시다는 것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율법 하에서 모든 제사, 성전, 제사제도, 제사장, 왕이 다 실패를 하는 것입니다. 약점을 지닌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하게 구원을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배경들은 온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기 위한 무대장치인 것입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온전하신 분이 따로 있습니다. 더 이상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없으며 더 이상 온전한 구원이 없습니다.

 

 

 

 

새 옷이 주어졌다면 낡고 헌 옷은 더 이상 입고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냄새나고 더러운 옷은 벗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가 누더기와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의의 옷은 우리의 모든 더러움과 수치를 다 가리고도 남는 온전한 의의 옷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온전케 되신 하나님의 아들만이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들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영생입니다.

 

 

 

 

히브리서 8:1-5  가장 중요한 것  2004. 3. 31.


1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2 성소와 참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3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찌니라 4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ㄱ)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세상을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쁜 것과 덜 바쁜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잘 분별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런데 늘 경험하는 바는 중요하지도 바쁘지도 아니한 일들에 너무 오래 매달려 있을 때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장 중요한 일이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1절 말씀에서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이란 우리에게 대제사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가 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참으로 은혜 가운데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 그리 중요한가 하신다면 성경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을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것들은 무시하여도 됩니다. 천지가 다 잠시잠간만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말씀입니다. 영원한 것 때문에 일시적인 것이 결정이 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3절입니다.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기를 자신이 야망을 설정하여 놓고서는 그 야망이나 꿈이 현실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믿습니다! 하면서 밀고 나가면 현실로 나타난다는 식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 나타나서 보이는 이 세계가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진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이 보이는 현실이 있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한 것입니다.

 

 

 

 

신명기 29:29절입니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새번역으로 봅니다. “이 세상에는 주 우리의 하나님이 숨기시기 때문에 알 수 없는 일도 많다. 그것은 주님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뜻이 담긴 율법을 밝히 나타내 주셨으니, 이것은 우리의 것이다. 우리와 우리의 자손은 길이길이 이 율법의 모든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다 알지 못합니다. 오묘한 일은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여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로 나타난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전체가 계시로 나타났고 그 구약성경이 증거 하는 최고 최종적인 증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아니하는 모든 세계가 지음을 받았고 그를 위하여 존재하고 그로 인하여 통일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16-17절입니다.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에베소서 1:9-10절입니다. “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보다 더 명확하게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아니하는 것에 대한 해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말씀이 사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인데,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더 이상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하게 보시는 분은 이제 1절의 말씀이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고 은혜가 되는 말씀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혼돈스럽고 무언가 되는 일이 없는 것처럼 보일 지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신다면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는 것입니다.

 

 

 

 

1절을 다시 봅니다. 이러한 대제사장이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일인데 이러한 대제사장은 1장에서 지금까지 증거 하여 온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한 제사장으로 오신 것입니다. 레위지파는 연약하여 온전한 제사장이 될 수 없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온전한 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한 것입니다. 거룩하고 악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분이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계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이 영원하고 완전한 대제사장은 2천년 전에 한번 제사지내고 마친 것이 아니라 그 제사의 효력이 영원한 것입니다. 지금도 하늘 성소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입니다. 여기서 무엇을 하시는 것입니까?

 

 

 

 

2절입니다.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고 합니다. 여기서 부리는 자란, 섬기신다는 것인데 제사장으로 섬기시는 것입니다. 하늘에 참 성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영원한 제사장으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섬기시는 일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땅의 성소는 무엇입니까? 5절에서 모형과 그림자라고 합니다. 그러면 구약에서 율법을 받아서 성소를 만들고 제사장을 세우고 제사제도를 마련한 모든 것은 모형과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땅과 하늘로 갈라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땅에서는 사람들의 손으로 지은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이 땅의 일로 하늘까지 연결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천국 갔다 왔다는 사람이 천국에 자신이 거할 집을 짓는 것은 이 세상에서 행한 선행의 공로로 지어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성소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베푸신 것입니다.

 

 

 

 

모형과 그림자란 실체가 오면 그 자리를 내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아파트 모델하우스와 같습니다. 모델하우스를 보고서 계약을 하지만 모델 하우스에서 살 것이 아니지요! 아파트가 다 완공이 되면 모델하우스는 헐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에서 주어진 모든 것들이 다 하늘의 모형과 그림자이기에 이제 실체가 왔으면 그 실체를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림자를 붙들고 사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9:24절을 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예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소에 들어가서 제사장의 역할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레위지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8:4절에서 땅에 계셨더라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십자가로 대속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 성소에서 계속적으로 제사장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은 더 이상 갈리지 아니하고 영원한 효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10:1절을 봅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율법 하에서 그림자로서는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림자가 아니라 참 형상이요 실체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든지 온전케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모형과 그림자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16-19절을 봅니다.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8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율법에 속한 모든 것이 그림자입니다. 그런 그림자를 붙드는 것은 그림자 잡기 놀이처럼 결코 실체가 잡히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림자를 밟거나 잡는다고 해서 실체가 잡혀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림자 놀이를 끝내는 방법은 실체를 붙잡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어떤 날짜 지킴이나 절기, 십일조 등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사람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땅의 일은 사람들이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일은 사람들이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하늘의 일이요 하늘의 일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인데 땅의 일로 하늘을 움직이려 드는 것입니다. 그 중요한 일을 이루신 것이 무엇인지 봅니다.

 

 

 

 

누가복음 24:44-49절입니다.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49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에서 기록한 것이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신 이 계시의 말씀에서 가장 중요하게 증거 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구약에서 모형과 그림자로 예시된 그 실체가 이제 나타났고 그 예언된 사역, 고난, 죽으심, 부활, 승천, 성령오심이 이루어 졌으며 지금도 그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모든 족속에서 증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면 지금 이 주님과 함께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는 것입니다.

 

 

 

 

실체가 왔다면 실체를 붙들어야지 그림자를 붙들고 있다면 실체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어부가 고기잡이 갔다가 실종이 되었습니다. 그 아내가 죽은 줄 알고 남편의 유품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낸다고 합시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살아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집어 치워야 하는 것입니까? 제사상을 치우고 남편과 함께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계속 제사를 지낸다면 그야 말로 헛되고 부질없는 짓을 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시편 39:4-7절입니다. “4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5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셀라) 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7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전도서 6:11-12절입니다. “11 헛된 것을 더하게 하는 많은 1)일이 있나니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하랴 12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 누가 알며 그 신후에 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그림자를 붙들면 평생 가도 헛일입니다. 세상의 일만 헛된 그림자가 아닙니다. 교회 나와도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그림자만 잡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고 더 고상한 일도 없음을 날마다 실감하며 사시기를,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요 신랑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시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8:6-13  더 좋은 언약  2004. 4. 7.


6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7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8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ㄴ)주께서 가라사대 볼찌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9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10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11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12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3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이니라.

 

 

 

 

6절에 보시면 더 아름다운 직분, 더 좋은 약속, 더 좋은 언약의 중보를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구약 제사장의 직분과 율법이 다 모형과 그림자이며 실체는 더 좋은 언약의 중보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인데 이것을 한 마디로 새 언약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처음부터 더 좋은 언약을 주시지 왜 제한적이고 흠이 있고 낡아지는 것을 주시고 나서 더 좋은 언약을 주시는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로마서 3:19-20절입니다.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2)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하시고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개가 이미 계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아브라함이 받고나서 430년이 지나서 율법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이 주어지는 것은 왜 인간이 율법의 행위로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거저주시는 일방적인 은혜로서만, 즉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복음을 받고서 이러한 시각으로 보게 됩니다만 구약에서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은 그 율법을 지킴으로 자기들이 구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써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국가의 법이 율법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삶의 바탕과 근거가 율법에 의한 것이지만 그들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지 못한 것입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사회 속에서 온갖 죄악과 범죄가 다 도출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는 것은 더하고, 하라는 것은 더 하지 아니하는 모습을 보면서 예언자들이 예언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문제가 마음의 문제인 것을 안 것입니다. 법이 없어서가 아니고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없어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들의 마음이 문제라는 것을 보면서 새로운 언약을 내다본 것입니다.

 

 

 

 

여기서 언약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한 번 더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이 언약의 책입니다. 그러면 그 언약의 내용이 과연 무엇입니까?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범죄 한 인간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아 주시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겠다는 것이 언약의 내용입니다. 그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이 왜 은혜로 되는 것인지를 율법을 통하여 확인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얼마나 악하고 연약하며 근원적으로 잘못되어 있는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결국 외부의 문제가 아니라 내부의 문제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7절과 13절을 봅니다.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라면,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것은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진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흠이 있었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미 로마서에서 보았던 것처럼 율법 자체는 거룩하고 흠이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인간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율법 자체는 거룩하고 흠이 없지만 그 율법이 죄인을 구원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죄를 죄로 드러내게 하는 역할을 하지만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구원에 이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8-12절입니다. 예레미야 31장을 인용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새 언약을 계시로 예언할 때에 어떤 상황과 배경인지를 아는 것도 필요합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지키지 못하고 온갖 우상숭배가 가득하여 언약의 저주가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강대국들이 쳐들어오고 나라는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갈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나라가 망하고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성전도 무너질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새 언약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 언약의 내용을 옛 언약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옛 언약은 남편이 손을 잡고 가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 율법을 주셔서 이끄신 것이 남편이 손을 잡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몸은 끌려가면서 마음은 늘 애굽으로 향하더라는 것입니다. 늘 원망과 불평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가 싫다는 것입니다. 만나도 싫고 광야도 싫고 다 싫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옛 언약의 한계, 율법의 한계인 것입니다. 그들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돌아보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포로로 잡혀가고 성전이 파괴되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세울 언약은 옛 언약과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 나은 것이며 더 좋은 언약입니다. 헌 집에 살다가 새 집이 마련되었다면 헌집을 버리고 새집을 이사 가는 것입니다. 더 나은 집이 생겼는데도 헌집을 고집하고 있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그렇게 애를 쓰면서 이사도 가고 집도 넓히면서도 하나님의 나라로 이사 가는 것은 좋아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노아 방주에 타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어느 목사님이 책 소개를 하는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58등에서 1등이 되게 하신 하나님’이라는 책 제목입니다. 자기 딸, 아들, 며느리, 사위까지 학벌을 소개하면서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가를 말하는데 과외 시키지 않고 그 돈으로 아이들 이름으로 헌금하고, 주일성수하고, 태중에서부터 기도하고 그런 식으로 키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명문 대학을 나오고 유학을 하고 하는 이야기들을 책으로 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이 새 언약에 담겨 있을까요?

 

 

 

 

10절을 봅니다. 마음에 기록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은 하나님의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기록하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게 하셔서 무엇을 하시는 것입니까?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결국 하나님의 백성 만들기입니다. 이 내용은 옛 언약이나 새 언약이나 그 내용은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율법으로 될 수가 없음을 구약을 통하여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생각과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기록하여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11절을 봅니다. 주님을 알게 됨: 이 새로운 언약이 성취가 형제들에게 주님을 알라고 가르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주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12절입니다. 긍휼과 용서: 저희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기록이 되고 그래서 주님을 알게 되고 그러한 자를 긍휼히 여기셔서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시고 자기의 백성을 삼으시는 것이 새 언약의 내용입니다.

 

 

 

 

구약에서 새 언약이 예언되는 배경이 이스라엘이 망하고 성전이 파괴될 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피로 세워질 새 언약이 성취되는 배경도 이스라엘이 로마의 지배 하에 있고 예루살렘 성전은 곧 파괴될 시점입니다. 그러므로 옛 언약 하에서의 성전과 제사장이 무용지물이 되는 시기가 성전의 파괴로도 곧 닥칠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 놓이지 아니하고 다 무너지리라는 말씀대로 AD 70년에 로마에 의하여 무너진 것입니다.

 

 

 

 

누가복음 22:14-20절입니다. “14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1)앉으사 15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1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7 이에 잔을 받으사 사례하시고 가라사대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1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19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주님의 피로 세우시는 새 언약입니다.

 

 

 

 

고린도전서 11:23-26절입니다. “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24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6 너희가 이 1)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새 언약이신 주님의 살과 피는 고난 주간이나 성찬식을 행할 때만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초대교회는 모일 때 마다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한 것입니다. 날마다 모였기에 날마다 기념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피로 세우신 새 언약을 마음에 기록하시기 위하여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성령이 임하게 됨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한 자는 주님을 부인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끌리는 것입니다. 옛 언약 하에서 몸이 법으로 움직여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몸이 연약하여 움직이지 않으려고 해도 마음이 끌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이 새 언약의 위력입니다.

 

 

 

 

또한 주님을 알게 됩니다. 요한일서 2:27절에서 주의 기름 부음이 있으면 아무도 가르칠 필요가 없고 주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가르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르쳐서 되는 일이 아니라 주의 영이 임하므로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사하시되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신다고 합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소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죄의 짐으로 죽어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는 기억조차 아니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의 위력입니다. 옛 언약 하에서는 죄를 지을 때 마다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단번에 속죄를 위한 제물이 되셨기에 이제 다시는 속죄를 위하여 제사를 드릴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 새 언약의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까? 더 좋은 언약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지금까지 좋다고 여겨온 모든 것들이 배설물로 보여 지는 것입니다. 더 좋은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언약입니다. 이 안에 더 이상 정죄가 없습니다. 다시는 그 죄를 기억치 아니하십니다. 이 기쁨을 맛보시는 새 언약의 백성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9:1-10  언약궤의 증거물  2004. 4. 14.


1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 2 예비한 첫장막이 있고 그 안에 등대와 상과 진설병이 있으니 이는 성소라 일컫고 3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4 ㄱ)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5 그 위에 속죄소를 덮는 영광의 그룹들이 있으니 이것들에 관하여는 이제 낱낱이 말할 수 없노라 6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7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8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9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10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히브리서를 보면, 모형과 그림자가 있고 실체가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고 하늘에 속한 성소가 있습니다. 옛 언약이 있고 새 언약이 있습니다. 이러한 대비를 통하여 무엇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까? 사람의 손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의 한계를 보이고 있습니다. 동시에 사람의 손에 의하지 아니하는 하늘 성소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늘성소는 사람이 섬길 수가 없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늘 성소에서 섬긴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인간의 손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지 못하는지를 그 죄악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를 옛 언약 하에서 다 노출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느 정도로 죄악 된 인간인지를 계시의 말씀을 통하여 확인을 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원망과 불평이 나올 때가 많습니다.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자기의 원망이 항상 정당하다고 합니다. 자기는 옳은데 상대방이 잘못해서 그렇다고 합니다. 또는 환경이 좋지 않아서 그렇다고 원망을 합니다. 이러한 원망의 대상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나서 그 책임을 누구에게 돌리고 있습니까? 아담은 하와에게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책임전가를 하면서 무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실과를 주었다는 조건을 붙임으로 결국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덴동산의 환경이 나빠서 범죄 한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범죄 이후로 태어나는 인간은 아담의 범죄를 몰라도 그 범죄의 속성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아담의 자식인 가인과 아벨의 경우를 우리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아 주시고 형 가인의 제사는 받아 주시지 않자 분하여 안색이 변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을 어찜인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화가 나지 않겠습니까? 가인의 제사를 받아 주시지 않음에 대하여 아무런 말씀도 없습니다. 받아 주시고 받아 주시지 않으시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는 것이며 받아 주시지 않아도 당연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 피조물의 자세입니다. 더더구나 범죄 이후의 인간의 제사를 받아 주시지 않으시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조치입니다. 그런데 왜 나의 제사는 받아 주지 않느냐고 분하고 안색이 변하는 것이 이미 선을 행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경고를 하십니다. 죄가 문 앞에 도사리고 있으니 너는 죄를 다스리라고 하시지만 그러나 살인을 하고 맙니다.

 

 

 

 

인간은 자기의 부당한 분노에 대하여 경고를 받는다고 해서 고쳐지는 것이 아님을 보게 됩니다. 잘못 한 것을 잘못하였다고 하면 오히려 달려들며 대적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실상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시고 율법을 주시면서 그러한 모습을 다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죄악을 모르고서는 복음도 은혜도 모르는 것입니다. 죄와 은혜를 모르면 교회가 종교화 되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1-4절입니다. 세상에 있는 성소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설계도를 받은 성막의 구조입니다. 그 성막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으며, 첫 장막에는 등대, 상, 진설병, 금 촛대, 향로가 있습니다. 그리고 둘 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이 지성소입니다. 이 지성소에는 언약궤가 있고 그 언약궤 안에 세 가지의 증거물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만나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 그 위에 속죄소를 덮은 영광의 그룹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이 지성소안에 있는 언약궤의 증거물들을 통하여 인간의 반역의 증거를 보고서 그 반역을 덮고 있는 속죄소를 보고자 합니다.

 

 

 

 

첫째 증거물은 만나 담은 항아리입니다. 이미 주일 오후에 구약 성경을 통하여 보았던 말씀이기에 일일이 성경 구절을 찾지 않아도 아시리라 생각하고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광야에 들어 왔습니다. 제일 먼저 원망과 불평은 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양식의 문제였습니다. 왜 구원으로 인도하였다면 물과 양식이 떨어지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니 원망이 당연히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양식이 주어지면 그들이 원망을 하지 않겠습니까?

 

 

 

 

만나가 주시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여 보시는 것이 있습니다. 내 말을 순종하는가, 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양식이 없어서 원망이 나왔다면 양식이 주어지면 순종을 잘 하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패합니다. 매일 하루분만 거두라고 하셨는데 여분을 구하여 썩고 벌레가 생긴 것입니다. 안식일에는 나가지 말라고 하였는데도 나갔습니다. 나중에는 만나는 질린다고 원망을 한 것입니다.

 

 

 

 

양식이 충분하게 주어지고, 옷이 해어지지 않고, 신발이 닳지 않고, 발이 부러 터지 않아도 그들은 원망을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 광야 40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만나를 항아리에 담아서 언약궤에 보관하게 하신 것은 기적적으로 광야에서 먹고 살았다는 것만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는가를 증거하고 있는 증거물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상황에서 이렇지 않습니까? 이 문제만 해결되면 감사하겠다고 하지만 그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원망과 불평이 나오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가 나오지 않는 다면 이미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터져 나오는 원망은 누구 때문에, 환경 때문에 결국 하나님께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단지 양식의 원망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원망임이 드러난 것입니다.

 

 

 

 

두 번째 증거물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입니다. 민16:1-3절입니다. “1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2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 오십인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리니라 3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

 

 

 

 

모세를 거역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지명하여 그 임무를 맡겼기에 결국은 하나님을 거역한 것입니다. 모세가 다른 사람보다 특별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세를 세우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처사가 못 마땅한 것입니다. 우리도 다 같이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는데 왜 너희가 여호와의 총회 앞에 스스로 높이느냐고 항의한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이 스스로 높인 것이 아닌데 그들이 그렇게 본 것은 자기들도 능력이 있는데 왜 우리가 너희의 말만 들어야 하는가 하는 원망이었습니다. 우리도 다 알아서 행할 능력이 있는데 사사건건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가 그렇지 않습니까? 제발 내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라는 것입니다. 간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관심을 가지는 것도 귀찮다는 것입니다. 바로 옆집의 사람이 죽든지 살든지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인사를 하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 되어 버리는 시대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데 누가 나서서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것에 대하여 얼마나 분노가 일어나고 있습니까?

 

 

 

 

세 번째 증거물이 언약의 두 돌판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친히 새겨주신 돌판을 들고 내려오는데 산 아래에서는 그 언약의 돌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금송아지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돌판을 깨뜨리고 두 번째 돌판을 다듬어 가서 다시 새겨진 돌판이 언약궤에 담겨진 것입니다. 만약 그 돌판이 깨뜨려지지 않았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부 깨뜨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첫째 계명과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둘째 계명을 그대로 거역하는 현장이 금송아지 섬기는 현장인 것입니다. 이러한 반역을 그대로 담고 있는 것이 두 번째 돌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궤 안에 담겨진 만나 항아리,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언약의 두 돌판이 모두 하나님을 거역하고 원망하고 불평한 증거물들입니다. 이 세 가지는 어느 말씀하나 제대로 순종한 적이 없다는 것을 다 말하는 증거물들입니다. 이러한 불순종과 거역에 대하여 하나님은 진노를 내리셔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진노를 무마시킬 수 있는 장치가 역시 언약궤 안에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5절입니다. 그 위에 속죄소가 있는 것입니다. 속죄소는 언약궤를 덮는 뚜껑인데 그 뚜껑에 연결된 그룹이 있습니다. 그룹이란 천사의 형상인데 두 천사가 날개를 펴서 언약궤 뚜껑을 덮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 속죄소 위에 일년에 대제사장이 단 한번 피를 가지고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속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 속죄소의 별명이 시은좌(施恩座)입니다. 은혜가 베풀어지는 장소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9:6-10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반역의 증거물들이 속죄소의 뚜껑에 덮어지고 가려지는 것입니다. 이 뚜껑에 피를 바름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자기 백성의 죄가 가려지고 덮어지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성소는 제한적이고 한시적인 것입니다. 이러한 제도를 통하여 성령께서 보이신 것은 비유이며 개혁할 때까지 맡겨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우리의 양심으로 온전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은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덮어쓰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의 방향과 목적이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내가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구하고 취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나 원망과 불평들이 터져 나올 것입니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고, 가족이 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고, 교회도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원망과 불평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의 증거물들이 언약궤 안에 담겨진 세 가지의 물건이었다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반역하고 거역한 증거물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스라엘의 반역을 그 언약궤의 뚜껑이 덮어주고 가려주는 것처럼 오늘 우리의 반역을 십자가로 가려주고 덮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덮어주심이 아니라 우리의 죄악을 고발하면서 덮어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의 삶의 흔적들에서 얼마나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살았는지 언약궤의 세 가지 증거물이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이요 자기만을 위하여 살던 죄의 종에서 이제는 주님의 은혜, 속죄소의 은혜, 시은좌의 은혜, 그 십자가의 은혜를 입었기에 그 죄에서 해방되어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된 것을 참으로 기뻐하는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다른 것은 이 문제 앞에서 모두가 시시한 것들입니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9:11-15  온전함  2004. 4. 21.


11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 나의 행위가 얼마나 온전한가가 문제가 아니라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온전한 분인가를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담이후의 인간의 인식이라는 것은 언제가 자기중심적이기에 늘 자기의 온전함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온전함을 추구하는 방법은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율법이 투입되면 율법을 지키려하고, 율법 없는 자들은 자기들의 양심이나 도덕이나 이성적인 능력으로 자신들의 온전함을 나타내려고 합니다. 그렇게 노력하고 애를 쓰는 본인들은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와 사망이 그들의 왕이 되어 있고 그들이 죄와 사망의 종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밝히고 있는 바는 어느 인간도 스스로 온전한 인간이 없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율법지킴도, 양심도, 도덕도, 이성도 그 어떤 인간의 노력으로도 온전해 질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사망은 생명의 끊어짐이요, 생명은 피에 있기에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를 지으면 자기의 죄를 인하여 자기의 피를 흘리면 그것으로 용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사망이요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죄인은 피를 흘려 죽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이렇게 수요예배로 모였지만, 자신의 죄로 인하여 정말 피를 흘리고 죽어야 마땅한 자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자기의 종교성을 충족하거나, 자기 정당성을 내세울 뿐입니다. 자기가 죽어 마땅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기도를 하면 할수록 기도한 것이 자기의 의가 되고, 예배 참석한 것이 자기의 의가 되고, 자기가 옳게 살았다는 것을 자기 정당성과 자기 온전함으로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자존심이나 부당함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아는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대속의 피라는 사실을 복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도 또한 성령으로 우리에 알게 하신 것이기에 우리의 믿음조차 우리가 믿어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를 믿는다는 것은 사람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11절을 봅니다.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창조에 속하여 손으로 지은 장막이란 모세의 장막으로부터 솔로몬 성전과 스룹바벨 성전과 헤롯의 성전까지 다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전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기에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현현하시는 장소요 제사를 드리는 곳이며 기도를 들으시기 위하여 눈으로 주목하시고 자기 이름을 두시는 곳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사람의 손으로 지은바 된 곳이기에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온전하지 못하기에 무너지고 사라져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성전으로 헐라 내가 삼일 만에 일으키라고 하셨을 때 제자들은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였고,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사형에 처하는 죄목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나중에 성령이 임하고서야 예수님의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육체를 성전으로 말씀하신 것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순교하게 된 설교가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7장에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 하나님께서 거하실 수 없다는 설교로 인하여 죽임 당하였던 것입니다. 이사야 66:1-2절의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 “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신약이 아니라 구약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란 사람의 손으로 지을 수 없다는 분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열왕기상 8:27-30절을 봅니다. “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28 그러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종이 오늘날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29 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솔로몬이 성전을 완성한 후에 하는 기도입니다. 자신이 건축한 전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전을 향하여 주목하여 달라는 간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구약에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의 한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7:22-25절입니다.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바울사도가 아덴에서 전도하면서 한 말입니다. 이방인들이 온갖 신전을 다 지어 놓고 있기에 참 신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땅에서 성전을 건축한다고 말하는 정신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람의 손으로 성전을 지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는 발상은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성전 되심과 온전한 속죄를 모독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장막이 아니요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온전한 장막은 하늘에 있는 장막입니다. 이 장막에서는 사람이 섬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장막에서는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더 온전한 장막 하늘의 장막은 이러한 짐승의 피로 속죄를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12-13절입니다. 구약에서의 제사가 온전하지 못한 이유는 다만 육체만 정결케 할 뿐입니다. 그 양심은 온전케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겉만 씻는 것이지 속은 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리는 것은 율법 하에서 정결케 하는 규례입니다만 이러한 것은 육체를 정결케 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을 섬기되 겉으로만 섬기지 마음으로 섬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의 때까지 육체의 예법만 된 것이라고 9:9-1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장막과 짐승의 피로 인한 속죄는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양심으로부터 하나님을 섬기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고, 짐승의 피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온전한 속죄를 이루시고 하늘의 성소에서 대제사장으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온전한 속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속죄의 제물이 되심으로 나머지 온전치 못한 것들은 다 철거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늘의 성막과 제사장을 믿지 못하기에 늘 보이는 건물과 지상의 인물들을 의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손으로 만든 어느 장소가 거룩한 곳이 되겠으며, 지상의 어느 인물이 양심으로 죽은 행실을 깨끗하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직 우리의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정결하게 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만이 온전합니다. 이를 인하여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함이란 영원하신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께 드려진 그리스도의 피만이 온전한 것입니다.

 

 

 

 

15절입니다. ‘이를 인하여’ 즉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여 양심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이 일을 인하여 예수님은 새 언약의 중보가 되신 것입니다. 옛 언약 하에서 속죄제사는 과거의 죄들을 다루는 것이지만 그러나 새 언약의 제사는 과거 현재 미래를 위한 영원한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미 구약에서 예언한 새 언약의 특징이 사람의 마음에 새겨지는 것이며 또한 죄를 사하되 영원히 기억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온전함을 어디에서 찾고 있습니까? 율법주의에서 찾고 있는 경우는 없습니까? 자기 열심에서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온전함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온전함을 얻는 것입니다. 온전함에 대한 히브리서의 말씀을 몇 곳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5:8-9절입니다. “8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예수님께서 온전하게 되셨기에 예수님을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7:24-25절입니다. “24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지금도 살아서 항상 간구하시기에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0:14절입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습니다. 이미 완료형입니다. 온전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거룩하게 되었기에 영원히 온전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의 온전함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함을 믿는 것입니다. 자기의 불완전함에 일희일비하지 마시고 자기 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항상 기뻐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9:15-22  피로 세운 언약  2004. 4. 28.


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1)유언은 1)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17 1)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1)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18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 19 모세가 율법대로 모든 계명을 온 백성에게 말한 후에 송아지와 염소의 피와 및 물과 붉은 양털과 우슬초를 취하여 그 책과 온 백성에게 뿌려 20 이르되 ㄴ)이는 하나님이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라 하고 21 또한 이와 같이 피로써 장막과 섬기는 일에 쓰는 모든 그릇에 뿌렸느니라 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온전함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분이 얼마나 온전한가를 그 내용으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세상에서는 다른 것을 믿을 수가 없기에 자기 자신만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의 능력과 실력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교회로 들어오게 되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들로 믿음의 유무를 따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행하신 일의 정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 즉 피 흘리심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어떻게 하여야 영생 얻을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됩니까 하는 질문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이 살을 찢고 피를 흘리심으로 영생을 주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성경을 모른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피 흘리심이 없으면 사함이 없다는 이 말씀이 어떻게 언약으로 제시되고 그 언약을 성취한 것인가를 말씀을 통하여 찾아보고자 합니다. 14-15절을 다시 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되며 이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가 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언약 때의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15절에서 언약이라는 말과 16절에서 유언이라는 말이 같은 단어입니다. 언약, 계약, 유언이라는 말로 사용되는데 왜 언약을 유언이라는 말로 사용하였을까요? 언약이라는 말은 상호언약입니다. 세상에서 계약을 체결하려면 상대방과 서로 협의하여 계약을 체결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러한 언약, 계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내용상으로는 일방적인 언약이며 계약인 것입니다. 왜 일방적이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인간이 이루어낼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 전체가 증거하는 것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자면 허물과 죄로 죽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이라는 말을 유언이라는 말로 사용한 것은 일방적이기 때문에 사용한 것입니다. 유언이란 받는 자와 상관없이 주는 자가 일방적으로 주는 것입니다. 주는 자 마음대로 주는 것이 유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언약, 즉 유언으로 인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이 체결되는 것을 아브람의 경우를 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일방적으로 부르시고 일방적으로 복이 되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브람을 축복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아브라함을 저주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일방적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여러모로 인도하시고, 이름을 바꾸게 하시고, 드디어 언약체결을 하십니다.

 

 

 

 

그 언약체결방식이 창세기 15장에 있습니다. 쪼개진 짐승 사이로 두 사람이 함께 지나가야 언약체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언약을 어길 경우 쪼개진 짐승처럼 죽음을 담보로 언약을 체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타는 횃불의 형상으로 지나가시고 아브라함은 구경만 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일방적 언약체결이 되고만 것입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아브라함의 씨로 후손을 주실 것이며 그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으리라는 약속과 가나안 땅을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이제 하나님의 이러한 일방적인 언약이 이루어져야만 되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역사란 왜 하나님의 희생으로만 구원이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는 모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의 법을 성취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체결할 때에 피 뿌림으로 체결이 된 것입니다. 즉 옛 언약도 피 없이 체결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4:3-8절입니다. “3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고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4 모세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기록하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산 아래 단을 쌓고 이스라엘 십 이 지파대로 열 두 기둥을 세우고 5 이스라엘 자손의 청년들을 보내어 번제와 소로 화목제를 여호와께 드리게 하고 6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7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피를 단에도 뿌리고 백성에게도 뿌려서 언약을 체결합니다. 나중에 장막을 만들고 나서는 장막에도 피를 뿌려 정결케 하였습니다. 피 뿌림으로 정결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범죄에도 피 흘림으로 속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 언약도 피 없이 세운 언약이 아니라 피로 세운 언약입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짐승의 피로 속죄를 하였지만 짐승의 피는 온전한 속죄를 이루지 못하는 것으로 참된 속죄의 모형과 그림자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19-22절입니다. 한마디로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피를 흘린다는 것은 생명은 생명으로 속함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짐승의 피가 사람의 생명을 온전하게 속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단지 육체의 예법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속으로부터 새롭게 하려면 흠 없는 그리스도의 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여기서 사람의 땀과 피는 배제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가 없기에 범죄 한 사람의 땀과 피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려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너무나 분명한 이 말씀을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자신들이 무시당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치를 끝없이 높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에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는 주여 나는 당신의 피 흘리심만으로 속죄를 받습니다, 하는 고백을 하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의롭다 함을 받는 사람이 나오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일어나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언약의 능력입니다. 유언의 능력인 것입니다. 피로 세운 언약, 피로 세운 유언의 능력이 실현되어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외국에서 어떤 부자가 많은 재산을 자기의 애완견에게 상속으로 남겼다는 보도를 오래전에 본 적이 있습니다. 주인은 죽고 개만 남았는데 그 개에게 법정 대리인이 정하여 지고 상속이 주어져 있기에 개가 호사스럽게 키워진다는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같지만 유언이라는 이런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누구의 유언 덕분에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고 거룩함을 입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을 받게 된 것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유언으로 인하여 우리가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상속을 요구할 자격이 전혀 없는 자들입니다. 개가 주인의 상속을 받는 이야기보다 더 말이 안 되는 것이 죄인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다는 것입니다. 개란 주인의 사랑을 받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였던 자들입니다. 그러니 상속은 커녕 진노만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나서 그 언약대로 이루어 내셨기에 죄인이 의롭다 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27-28절입니다. “27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에서 잔을 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의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바 예수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하신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다는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성취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2:20절입니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예수님의 피로 세우신 언약이 새 언약입니다. 예수님의 피 만이 온전하게 죄를 속하는 것입니다. 그 피는 더 이상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 피의 속죄의 능력은 단번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보혈의 능력이며 그 능력이 유언으로 확실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받을 자격이 없는데도 유언으로 인하여 주어진 것입니다.

 

 

 

 

사도행전 20:28절입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3)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교회란 하나님의 피로 값을 주고 사신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하나님의 피라고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피로 세우신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사람의 피와 땀에 의하여 세워질 수가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만 세워지는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온전하게 증거 되도록 교회가 감독을 세운 것입니다. 이런 교회는 사람의 수나 건물의 유무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으로 세워진 교회만이 음부의 권세가 흔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교회는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살 찢으심과 피 흘리심을 기념하며 증거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공로가 증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워진 언약의 능력이 교회를 세우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자기를 부인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어느 정도로 자기를 부인할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까?

 

 

 

 

마태복음 15:21-28절입니다.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 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네 믿음이 크다는 인정을 받은 여인이 이방여인으로 자신을 개와 같은 자임을 인정한 여인입니다. 주의 긍휼과 자비를 입을 하등의 자격이 없지만 개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그 부스러기를 먹는다는 자세가 주님 앞에서 믿음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능력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우리의 어떠한 조건이 아니라 유언을 하신 분의 선택과 그 유언하신 분의 능력인 것입니다. 제가 유언을 해 보았자 아무런 효력과 능력이 없습니다. 무슨 권세도 재산도 없으니 별 효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유언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유언이 되었습니다. 그 능력으로 속죄가 일어나고 지금도 중보가 계속되며 영원한 나라를 상속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 주님을 찬송하여 그 능력 안에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9:23-28  죄와 상관없이  2004. 5. 5.


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찌니라 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찌니 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요즈음 신문에 아주 많은 광고가 나오는데 그 중에서도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점치는 자들의 광고입니다. 가난한 동네에 대나무 세워놓고 점친다는 것이 아니라 기업화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점치는 자들의 심리가 어떤 것일까요? 추측컨대 현재의 일들이 잘 풀리지 않든지, 미래에 대하여 불안하기에 나쁜 일들은 피하고 좋은 일들이 생기도록 처방을 해보겠다는 심리로 보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나쁜 운명을 피하려고 하여도 절대로 피하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하여 놓으신 일입니다. 사람이 제 아무리 점을 치고 처방을 내린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정하여 놓으신 일을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도 점치는 사람들처럼 하고 있다면 그것이 점치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데도 그래도 자신은 미신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 것입니다.

 

 

 

 

이러하든 저러하든 간에 모든 사람에게 정하여져서 피할 수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의 27절 말씀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것이 사람에게 정하여져 있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어 버리면 그만이지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러나 죽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것은 아주 미래에 일어날 일로 보는 것입니다. 자기와는 상관없는 일로 여깁니다. 마치 천년만년을 살 것처럼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았는데 오늘 믿는다고 말하는 우리들도 종말론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영원히 살 것처럼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과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먼 미래의 일로만이 아니라 바로 지금 눈앞에 있는 현실로 보고 사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창세기 18:16-21절입니다. “그 사람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소돔으로 향하고 아브라함은 그들을 전송하러 함께 나가니라 1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18 아브라함은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 아니냐 19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 20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21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하노라

 

 

 

 

아브라함이 나그네 세 사람을 접대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나그네가 천사였습니다. 두 천사는 소돔과 고모라로 가고 한 천사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알려 주었습니다. 여기서 천사를 여호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사자로 왔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알려 주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자손과 땅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알려주신 것은 소돔과 고모라성에 대한 일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이 죄악이 가득하여 심판을 집행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릅니다. 그들의 모습은 디모데후서 3장의 말세에 고통 하는 때라는 상황과 같은 것입니다. “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이런 특징이 종말의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소돔과 고모라성과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동일하게 말세의 고통 하는 때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복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과 같은 복이 복입니다. 그것은 심판의 소식을 들었던 것입니다. 심판 당할 소돔과 고모라성에서 무엇이 가장 필요한 것입니까? 그 성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세상에 장차 일어날 심판에 대하여 아무런 경각심이 없이 살고 있다면 경건의 모양만 있는 것이지 경건의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각심을 가지든 아니든 간에 주님은 주님의 일을 이루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그 이후에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21-29절입니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2)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27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28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위임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죽음에 이르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이후에게 심판이 있습니다. 그 심판의 결과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됩니다. 불러내시는데 나오지 아니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심판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이며,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입니다. 선한 분이란 하나님만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분의 일만 선한 것입니다. 그분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것을 의로 보아주시는 것이지 그 외에는 선으로 인정을 하지 않기에 모두가 악한 일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지 아니한 모든 것이 죄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봅니다. 23,24절입니다. 땅에 있는 모형들은 짐승의 피로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서 제사장의 역할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있는 참 장막에서 제사장으로 계시는 것입니다.

 

 

 

 

25-26절입니다. 구약에는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서 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의 피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단번에 온전하게 영원토록 효력 있는 제물을 드린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께서 창조로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리심으로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초림입니다. 이때로부터 종말인 것입니다.

 

 

 

 

2천년 전에 예수님이 오신 것이 죄를 없이 하시려고 오신 것이며 그것이 이미 세상 끝의 일입니다. 종말이기에 심판과 구원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심판의 소식을 사람들이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저 오늘을 살기가 바쁘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나와서 예수님에게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어떻게 하든지 나를 위한 삶을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대하여 주님은 심판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27절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무엇에 대한 심판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지 않고 그 앞에 무릎을 꿇지 않음에 대하여 심판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와서도 자신을 주의 자리에 놓고서 예수님은 자기를 도와주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은 아직도 자신이 죽음으로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태어나자 말자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는 죽지 아니할 사람처럼 생각하고 사는 것이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잊혀지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존재가 그렇게 중요하게 보이더라도 죽음이란 그 존재성마저 사라지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단지 사라지는 것으로 끝이 아니라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든 죽음은 오게 되고 죽음 이후에 원하든 원하지 않든지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심판의 소식을 안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는 것이 가장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는 것입니까?

 

 

 

 

28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희생 당하심은 많은 사람, 즉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하여 드리신 것입니다. 죄를 담당하시기 위하여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대신 죄를 담당하신 것이 이사야에서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53:4-6절입니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11절에서도 죄를 담당하신다는 말씀입니다. 12절에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지신 것입니다. 죄를 대신 담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와 상관없이 주님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이제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을 구원하시고 그렇지 아니한 자들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두 번째 나타나실 것입니다. 이 주님을 기다리며 사시기를 소원합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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