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복음서

[스크랩] 누가복음 강해 3

공 상희 2009. 5. 6. 12:48

 

 

 

 

 

 

누가복음 강해 3

 

 

 

창원 늘푸른 교회 이장우 목사

 

 

 

 

 

 

 

누가복음 10:25-37 내 이웃이 누구인가? 2007. 7. 22

 

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 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질문합니다. 율법사라면 율법의 전문가입니다. 모세오경 정도는 거의 완벽하리만큼 외울 정도로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여 질문을 하는데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것은 이미 알고 묻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이미 율법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이 되어 있느냐고 되물으십니다. 율법사가 자기 전공분야이니 완벽하게 대답을 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다는 대답에 예수님께서 네 대답이 옳다고 하시면서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하십니다. 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서 영생 얻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어느 인간이 이 율법을 지킬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이 율법사에게 이것을 지키면 살리라고 하신 것입니까?

 

 

 

 

율법사가 영생 얻는 길을 율법을 통하여 잘 알고 있고 또 실천도 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자에게 예수님은 율법의 원래 정신앞에 직면시키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은 그 율법사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왜 인간이 스스로 율법 지켜서 영생을 얻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으로 구원하시는지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고 계신다고 하였습니까?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입니다. 그 길은 하나님의 아들이 죽는 길입니다. 그 길만이 자기 백성에게 영생을 주시는 자비로운 하나님의 섭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사에게 무엇이 문제인가 하면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잘 해 왔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물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을 열심히 지키는 것을 사랑으로 여기고 있기에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자기 확신이 있는 자들입니다. 이제 이웃에 대하여 질문한 것입니다. 이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내 이웃이 누구인가를 묻습니다. 이렇게 묻는 이면에는 자신이 이웃도 사랑하여 왔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이 누구라고 정하여주면 그 이웃도 자기 몸처럼 사랑할 의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율법사의 대답이 구약 어디에 나오는지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하나님 사랑에 대하여는 신명기 6:4-5에 나옵니다. 이웃 사랑에 대하여는 레위기 19:17-18절입니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여기서 이웃이란 우선적으로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나온 자들입니다. 이 백성은 자기들의 힘으로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보여주시기 위한 백성이기에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이런 사랑은 이스라엘이라는 지역과 혈연만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나오는 이방인들도 포함이 됩니다. 이런 내용은 구약에서 부분적이지만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서 나온 것처럼 이방인 중에서도 하나님의 소문을 듣고서 이스라엘 편에 선 기생 라합과 기브온 족속의 예를 보게 됩니다. 이들이 이스라엘에 소속이 되었고 이들을 공격하는 자들을 여호수아의 군대가 물리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 사랑이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입은 자 안에서의 사랑인 것입니다.

 

 

 

 

사무엘 하 21장에 보시면 다윗이 왕이 된 시대에 연속 3년간 기근이 있어서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니 사울이 기브온 족속의 피를 흘린 까닭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브온 족속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물으니 사울의 집안사람 7명을 목 메달아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들의 말을 들어주자 비가 온 것입니다. 이것은 이웃의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 앞에 피하여 온 자들이 다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 질문하는 바리새인들의 이웃의 개념은 긍휼과 자비, 하나님의 선택과 사랑의 내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굳어진 자기들의 율법체계 안에서의 사랑인 것입니다. 사울과 같은 사고방식입니다. 자기 혈통의 우월성을 가진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랑 받을 만한 사람이고 그런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모르는 자들과 알아도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을 죄인으로 여기고 더구나 사마리아인들과 이방인들을 개같이 여기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웃에 대하여 질문을 한 것입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예를 들어서 답변을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데 강도를 만났는데 강도들이 그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습니다. 그때 제사장이 지나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갔고 레위인도 피하여 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이 지나다가 그를 불쌍히 여겨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부어 응급처치를 하고서 자기 나귀에 태워서 주막으로 데리고 간 것입니다. 이튿날에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잘 부탁을 하고서 부족하면 자신이 돌아와서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냐고 물었습니다.

 

 

 

 

너무 쉬운 대답이지요? 그런데 율법사가 평소에 개같이 여기는 사마리아인이 선한 이웃으로 등장하였으니 기분이 좋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를 들어도 꼭 이렇게 화를 돋우는 예를 듭니다. 율법을 잘 지킨다는 대제사장들과 장도들에게 너희보다 세리들과 창기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갈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예수님이 죽이고 싶도록 밉겠습니까? 지금 율법사도 얼마나 곤혹스러운 대답을 해야 하는 지경입니까? 그래서 사마리아인이라고 대답을 하지 않고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말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이 대답이 더 정답인 것입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자비를 베푼 자가 이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게 자비를 베푸신 분이 누구십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기 22장에 보시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자비한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을 따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비 안에서 서로 돌보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사랑의 결국은 하나님 사랑으로 연결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나서 이웃을 사랑하게 되면 그것은 자기 사랑이지 하나님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나타난 사랑이라야 하나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율법을 따라 하나님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한다는 율법사의 사랑은 어느 정도의 사랑인 것입니까? 누가복음 6:27-33절을 봅니다. “봉독” 원수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도 사랑하는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율법사가 한다는 그런 사랑은 죄인들도, 도둑놈들도 하는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합니다. 강도만난 자의 입장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그가 받고자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태복음 7장에서는 율법과 선지자라고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참된 이웃은 누구입니까? 누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었습니까? 누가복음 11:21-22절을 봅니다. “21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22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마치 강도 이야기 같습니다. 강한 자가 지키고 있을 때에 다른 자가 빼앗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이기면 그의 소유를 빼앗아 나온다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에 사람들이 다 마귀라는 강도에게 붙잡혀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죄와 사망의 그늘에 갇혀 있는 자들에게 무엇이 자비입니까? 그들이 대접받고 싶은 것은 그 강도에게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 능력은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사람들은 허물과 죄로 죽어있기에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생각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기 위하여 오신 참된 우리의 이웃을 어떻게 대하였습니까? 오히려 그를 대적하여 죽였습니다. 십자가 말고 다른 것 내어놓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실 수 있는 것이 십자가라고 하시자 그러면 너 죽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죽인 강도들입니다. 예수님 죽이는 일에 공범자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실 분이 계십니까? 지금까지 누구를 사랑하며 살아왔습니까?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셨습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마음과 힘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자기를 사랑하여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 강도란 말입니다. 천지만물이 다 주님의 것인데 마치 자기 것인 양 여기면서 지금도 그 소유를 더 늘리기 위하여 이웃을 헤치면서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 소유 늘리는 일은 재물만이 아니라 명예나 자존심도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하여 남을 나보다 낮게 여기며 사는 것이지 언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겼습니까? 이런 강도들의 세상에서 참된 이웃으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이 자비를 베풀기 위하여 오신 분이 너무나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분이 오시니 그동안 우리끼리 사랑하면서 지낸 것은 도둑놈들의 사랑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율법사의 대답에 예수님께서 너도 이와 같이 행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자비를 베풀 수가 있습니까? 자비를 베푸는 자가 이웃인데 자신이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까? 율법사가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서 의에 이를 수가 있습니까? 결국 참된 이웃이 되지 못합니다. 의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이웃은 자비를 베푸신 분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웃이 되시기 위하여 십자기를 지시는데 이 일에 인간은 무슨 역할을 하겠습니까?

 

 

 

 

누가복음 22:52절입니다. "예수께서 그 잡으러 온 대제사장들과 성전의 군관들과 장로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나왔느냐" 누가 예수님을 강도처럼 잡기 위하여 왔습니까?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한다는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입니다.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들의 욕망을 채우는 일에, 힘을 보태기는커녕 방해만 되는 예수를 죽이는 일에 앞장 선 자들이 그들입니다. 그 일에 세상의 권력은 함께 동조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하지 않습니까? 나의 필요를 채워달라고 하는데 주님은 십자가를 내 미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우리는 밀쳐내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들에게 주님은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 자비의 대상이 된 자들은 자신이 강도임을 압니다. 내가 강도 만난 자 정도가 아니라 내 자신이 강도인데 이런 강도를 주님께서 용서하신 것입니다. 마치 십자가의 한편 강도처럼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이런 자비를 받은 자는, 이런 자비를 베푸신 참된 이웃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고린도전서 16:22절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가 따릅니다. 이것은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영생의 문제입니다. 또한 이 사랑을 함께 받은 형제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우리가 이런 사랑을 받다니!이런 은혜가 우리에게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누가복음 10:38-42 빼앗기지 아니할 일 2007. 7. 29

 

38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 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 하더라 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41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한 주간 내내 탈레반, 아프가니스탄, 피랍, 이런 뉴스들을 접하였을 것입니다. 외국인들이 잡혔다고 할 때는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큰 뉴스가 되지 못하였지만 이번에 샘물교회 교인들이 잡혔다는 소식에 온 나라가 다 요란합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잡혔다는 것이지요! 그 결과 탈레반이 무엇이며 왜 이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가를 뉴스를 통하여 아셨을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왜 일어나는 것입니까? 한 쪽은 빼앗아야 한다고 여기고 한 쪽은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인간이 살아있는 한 계속 될 문제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있다고 합니다. 그 고통의 목록들이 이런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자긍하고 교만하고 훼방하고 부모를 거역하고 감사치 아니하고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반하며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 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라고 합니다. 이런 자에게서 돌아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13절에서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속이기도 하는 말씀대신에 빼앗기도 하고를 넣어도 말이 됩니다. “악한 사람들과 악한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빼앗기도 하고 빼앗기기도 하나니”로 말입니다. 탈레반이 한때 정권을 잡았다가 지금 미군과 그 동조세력에 의하여 빼앗긴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빼앗기 위하여 항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국가 간에도 일어나고 국내에서도 일어나고 개인들 사이에서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가 나왔습니다. 몇 년 전 광주 금남로와 5.18묘역을 여름휴가 때 아이들과 함께 가 보았기에 함께 영화를 보았습니다. 막내는 영화 내내 눈물을 흘리면서 보았는데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그 영화를 다시 생각해 보니 결국 뺏고자 하고 빼앗기지 아니하려고 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결국 무력이 강한 군부세력이 장악을 하지만 그러나 27년이 지난 지금은 그 세력들이 권력을 빼앗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다시 정권을 장악하려고 합니다. 결국 빼앗고 빼앗기는 전쟁터인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틈바구니 속에서 자기의 가족의 행복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모습들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빼앗기도 하고 빼앗기기도 합니다.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는 세상입니다.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못합니다. 권불십년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부자가 몇 대를 가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떤 사람들은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려고 합니다. 선행이나 봉사로 자신의 이름을 남기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마저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아름다운 이름이라고 하여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의 영웅이 다른 나라에서는 적이 되는 것입니다. 더더구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아름다움이란 썩은 것에 불과합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 정말 우리가 보기에 흠이 없는 몇 사람 중에 다니엘이 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다니엘, 거대한 제국의 총리가 되어 왕이 세 번이나 바뀌어도 계속하여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시기를 받지만 아무리 조사해도 먼지하나 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다니엘이 하나님의 영광, 구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영광 앞에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다니엘 10:8절에서 자신의 아름다운 빛이 썩은듯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서인 잠언 31:30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의 보내신 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믿지도 아니하는 자들에 대하여 마귀에게 속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는 결코 빼앗길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니 마르다가 자기 집으로 영접합니다. 그에게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더니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대접하고자 준비하는 마음이 분주하였습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꼼짝도 않고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다가 화가 났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대접하고자 이렇게 정신없이 바쁜데 마리아는 얌체같이 예수님의 발아래 앉아서 말씀만 듣고 있으니 예수님께 이르는 것입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십니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명하소서! 예수님도 눈치가 좀 있으시면 마리아더러 언니를 좀 도와주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잘 먹자고 이렇게 바쁘게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여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하여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예수님 혼자만 오신 것이 아니지요. 최소한 12명의 제자도 함께 온 것이니 얼마나 분주하겠습니까? 아마 마리아가 평소에도 언니 말을 잘 안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서운 언니라면 눈치만 해도 나올 것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전혀 의외의 대답이 예수님께로부터 나왔습니다. 이름을 두 번씩이나 불러가면서 말씀하십니다. 왜 두 번씩이나 불렀겠습니까? 마르다가 하도 분주하니 두 번씩이나 불렀을 수도 있고, 또는 안타까워서 간절하게 부르시는 뜻도 될 것입니다. 어떻게 부르셨던 두 번이나 부르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 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너무 놀라운 대답이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들어야 합니까? 그러면 마르다가 봉사하는 일이 소용없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적은 소자 한사람 대접한 것이 바로 예수님을 대접한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여러 명의 여인들이 공궤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사도는 자신과 함께 복음에 동역하는 자들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지금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무엇을 주시고자 하시는지를 아는 것이 먹고 사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한 후에 광야생활을 약 40년간 하였습니다. 40년간 무엇을 먹고 살았습니까?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와서 먹고 살았습니다. 물은 반석에서 터져 나왔습니다. 40년 동안 신발과 의복이 헤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40년이 지난 후에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8:1-4절입니다. “1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40년을 주리게 하시고 낮추신 이유가 나옵니다.

 

 

 

 

그러면 지금 마리아는 어떤 상태에 있는 것입니까? 저는 이 마리아가 40년의 광야를 경험하였다고 봅니다. 물론 나이 상으로 경험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나 세상의 일들이 어떠한지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1-2절입니다. “1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2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러라” 여기서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씻기던 자라고 합니다. 이 내용은 누가복음 7장에 나오는데 누가복음에서는 이름은 나오지 않고 한 여인의 이야기만 나옵니다.

 

 

 

 

누가복음7:36-50절에서 이 여인은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자기의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이 여인은 귀한 향유옥합을 부었는데 예수님을 청한 바리새인 시몬은 발 씻을 물로 내오지 않았다고 예수님께서 책망하십니다. 그런 반면 마리아는 귀한 향유옥합을 부은 것입니다. 그 결론 부분이 많이 사함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발 앞에 앉은 이 여인이 누가복음 7장의 마리아라면 죄 많은 여인이 용서받은 것입니다. 그 주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마르다가 식사 대접하는 정도가 아니라 향유를 붓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향유향기도 날아가는 것입니다. 무엇만 남겠습니까? 주님께서 행하신 일만 남는 것입니다. 주님의 행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지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장, 마가복음 14장, 요한복음 12장에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여인을 마리아라고 합니다. 이 여인의 향유 붓는 것을 가룟 유다가 왜 그렇게 낭비하느냐고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는 것이 낫다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 그대로 두어라고 하십니다. 자신의 장사를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기에 이 여인의 이야기가 온 천하에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마리아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6:12-13절입니다. “12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1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이 마리아가 무엇을 알았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많은 죄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용서 받은 것을 알았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마리아는 안 것입니다. 지금 바로 앞에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시며 이 말씀이 자신의 영생임을 알았기에 지금 다른 곳에 마음 빼앗길 틈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한다고 무언가를 했다는 것은 주님의 살과 피의 희생의 공로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 외에 나의 이름과 나의 공력으로 된 것은 불에 타서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그러나 몇 가지만이라도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다른 번역을 보면 이렇습니다. “필요한 일은 하나뿐이다(표준 새 번역).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공동번역)여러 가지도 아니고 정말 필요한 일은 하나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의 영원한 양식임을 받아들이는 것이 빼앗기지 아니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삽니까? 눈에 보이는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많이 소유한다면 제대로 사는 것입니까?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갖추었다고 행복하게 살겠습니까? 소유가 많으면 염려도 늘어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치 어리석은 부자처럼 많은 수확을 하고서는 창고를 넓히고 재물을 가득 쌓아두고 내 영혼아 편히 쉬며 즐기자고 합니다. 그것이 행복인줄 압니다. 그러나 오늘 밤에 네 영혼을 거두어 가면 이 모든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예수님이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 내가 주님께 무엇을 얼마나 많이 하는가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 보다 귀한 것이 없습니다. 초대교회 때 직분 자를 세운 것도 사도들이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기 위하여 세운 것입니다. 교회의 여러 가지 다른 봉사들도 말씀을 위한 봉사여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듣고 생명의 말씀을 증거 하기 위한 봉사여야지 봉사 자체가 목적이 되면 안 됩니다. 부디 영원토록 빼앗기지 아니할 좋은 것을 택한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말씀, 빼앗기지 아니할 생명의 말씀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1:1-4 거룩하신 이름 2007. 8. 5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기도는 사람의 본능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이루지 못할 때에 자기보다 능력이 많은 대상에게 빌어서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는 기도입니다. 세상에서 통용되는 이런 기도의 내용을 가지고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에 그대로 적용하게 되면 거저 자신이 정성을 바칠 테니 소원성취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몇 달 전에 부산에 있는 해동 용궁사에 가 보았습니다. 한 가지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기위하여 인간이 빌고 싶은 대상을 마음껏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기도란 무엇입니까? 인간이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고 하나님이 무엇을 응답하시는가 하는 내용이 가인에게 나옵니다.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고서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땅에서 피하고 유리하는 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가인이 그 형벌이 너무 중하다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이 7배나 될 것이라고 하면서 표를 주셔서 사람들이 죽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첫 간구의 내용으로 봅니다. 그러면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형벌을 감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전에 새벽 기도회 때 기도의 주제를 가지고 살펴볼 때에 처음 기도를 아브라함에게서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간구하고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내용은 소돔과 고모라성에 의인 10명만 있어도 그 성을 멸하지 말아달라는 간구였습니다. 그러나 의인 10명이 없어서 멸망하게 되는 상황에서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 아내와 딸들이 성에서 천사들에게 이끌려 나오게 됩니다. 아내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명령을 어기고 뒤로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만 그들이 구원받아 나온 것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가인에게서나 아브라함에게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하나님께 대한 간구의 내용은 형벌에서 구하여 달라는 간구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서 1:4절에서 이렇게 증거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께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까?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처럼 소돔과 고모라 같은 이 세대에서 우리를 건져달라고 하십니까? 아니면 세상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멋있고 고상하고 우아해서 보암직한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하십니까?

 

 

 

 

골로새서 1:1-5절입니다.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우리가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면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합니다. 땅에 속한 것은 우리의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인데 이 탐심이 우상숭배입니다.

 

 

 

 

제가 이런 설교를 하면 목사님은 그런 설교하시면 탐심이 없느냐고 묻고 싶으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저는 평소에도 늘 우상을 품고 살지만 이번 여름에 또 정전, 누수가 일어나니 지하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더 간절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게시판에 여러분이 보시라고 올려놓았는데 댓글이 하나만 올라왔습니다. 다들 옮기기는 해야겠다고 여기지만 누가 선뜻 말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돈이 들어가니 말입니다. 이 두 욕망사이에 끼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이 땅에서 살면서 본능적으로 기도하는 것은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고 있으니 그런 것들이 있으면 나를 편하게 해주고 기분 좋게 해 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 증거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왔기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기에 그 안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기도에 아주 힘을 쓰셨습니다. 예수님의 최종적인 기도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 하였습니다. 그 기도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셨고 그 뜻을 이루심으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수님으로부터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라면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위엣 것이 무엇입니까? 골로새서 1:3-4절에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우리도 영광중에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위엣 것인데 이것을 찾고 있습니까?

 

 

 

 

전에 손성식 목사님이 오셔서 마태복음에서 주님의 기도를 설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란 하나님의 뜻을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펼쳐내시겠다는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보는 이 말씀도 사실 우리가 이루어낼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루어내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소에 이런 기도할 마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우리가 어떤 기도를 얼마나 해 오셨고 얼마나 응답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다 내려놓으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도에 대하여 귀를 기울여 보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11:1-2절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기를 마치실 때에 제자 중 한 사람이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처럼 자기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기도에 힘을 쓰셨는지 종종 사람들과 떨어져서 한적한 곳에 가셔서 기도하시고 때로는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을 제자들이 보고 자기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무턱대고 본능을 따라 기도하기 전에 먼저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내용이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3절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이 기도의 일순위입니다. 여기서 거룩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교회를 어려서부터 다니면서 거룩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면 근엄한 모습으로 잘 웃지도 않고 가볍게 움직이지도 않는 그런 것을 거룩으로 여겼습니다. 예배시간에 웃지도 않고 찬송을 해도 몸을 움직이거나 손뼉을 치면 거룩한 예배가 아니라고 그렇게 여겨왔습니다. 거룩이 그런 식으로 된 것은 청교도의 후예들이라는 장로교의 영향과 또 우리의 유교문화적인 현상도 있습니다.

 

 

 

 

그런데 시편에 보면 춤을 추며 악기를 동원하여 손뼉 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윗을 보고 체통이 없다고 비웃은 다말은 아기를 낳지 못하는 벌을 받았습니다. 이런 말씀을 가지고 요즈음은 온갖 세상에 유행하는 악기를 가지고 사람의 정신이 하나도 없도록 만들어 놓습니다. 특히 청소년이나 젊은이들 집회에 가보면 술집 밤무대나 연예인들 노래하는 현장에 나오는 조명과 온갖 기계를 동원하여 그냥 펄떡펄떡 뛰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과연 자기 기분 좋아서 뛰는 것인지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뛰는 것인지, 제가 보기에는 거의 자기 기분에 젖어 가사와 상관없이 곡의 템포에 몸을 맡기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거룩을 한글사전에서 찾아보면 명사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타이핑을 해도 오자로 나옵니다. 형용사로 사용되는데 “누구도 함부로 대하기 어려울 만큼 성스럽고 위대하다”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도 잘 차려진 음식을 보고서도 거룩하게 차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새벽기도회 주제를 거룩으로 보고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나타난 거룩 몇 가지를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첫 번째 거룩은 창세기 2:3절입니다. “안식일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하나님의 창조를 기억하게 하시기 위하여 특별히 시간을 거룩하게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출애굽기 3:5절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데 모세가 선 곳이 거룩한 땅이기에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와 가인의 범죄로 의인 아벨의 피가 흘린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그 저주의 땅에 하나님께서 임하시니 그 곳이 거룩한 땅이 되는 것입니다. 공간의 거룩으로 봅니다. 출애굽기 13:2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 유월절 밤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초태생의 수컷은 다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초태생을 거룩히 여겨 여호와께 드리라고 한 것입니다. 이들의 희생의 의미는 나중에 레위지파와, 유다지파로 연결이 되면서 희생하는 자가 장자가 됨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희생하심으로 맏아들이 되시고 그를 믿는 모든 자를 하나님의 양자로 입양시키시는 것이 거룩입니다. 그 결과 거룩한 백성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15:11절에서 홍해를 건너고 나서 모세가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라고 찬송합니다. 그리고 13절에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거룩이란 시간이나 공간이나 구원이나 간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것을 거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거룩에는 인간이 행한 일이 포함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만난 자는 자신이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지를 알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9:6절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 거룩한 백성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거룩한 백성이란 하나님의 일하심이 온전히 담겨있을 때에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하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자세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우선순서가 아닙니다. 내 이름의 거룩이 우선입니다. 말로서는 하나님의 거룩을 말하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의 거룩을 내세우면서도 자신의 거룩을 세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사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스스로 조치하신다는 것이 더 분명한 뜻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일에 우리가 행한 일을 무엇입니까?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일에 방해만 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우리를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시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기 위하심입니다.

 

 

 

 

에스겔 36:16-38절입니다.'16.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17.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그 고토에 거할 때에 그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나니 나 보기에 그 소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느니라  18. 그들이 땅 위에 피를 쏟았으며 그 우상들로 더럽혔으므로 내가 분노를 그들의 위에 쏟아  19. 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각국에 흩으며 열방에 헤쳤더니  20. 그들의 이른바 그 열국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인하여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니라  21.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아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23.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24.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방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8. 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29. 내가 너희를 모든 더러운 데서 구원하고 곡식으로 풍성하게 하여 기근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30. 또 나무의 실과와 밭의 소산을 풍성케 하여 너희로 다시는 기근의 욕을 열국에게 받지 않게 하리니  31.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  3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닌 줄을 너희가 알리라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 행위를 인하여 부끄러워하고 한탄할지어다  3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를 모든 죄악에서 정결케 하는 날에 성읍들에 사람이 거접되게 하며 황폐한 것이 건축되게 할 것인즉  34. 전에는 지나가는 자의 눈에 황무하게 보이던 그 황무한 땅이 장차 기경이 될지라  35. 사람이 이르기를 이 땅이 황무하더니 이제는 에덴 동산같이 되었고 황량하고 적막하고 무너진 성읍들에 성벽과 거민이 있다 하리니  36. 너희 사면에 남은 이방 사람이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무한 자리에 심은 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37.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인수로 양떼같이 많아지게 하되  38. 제사드릴 양떼 곧 예루살렘 정한 절기의 양떼같이 황폐한 성읍에 사람의 떼로 채우리라 그리한즉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우상숭배로 더럽혔습니다. 그래서 심판을 받아 열방에 흩어 졌습니다. 이렇게 된 것은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힌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범죄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 영을 보내셔서 거룩하고 깨끗하게 하셔서 돌아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백성을 위하여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위하여 말씀하시고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기도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일은 하나님의 일임을 알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소서!

 

 

 

 

누가복음 11:1-4 나라가 임하옵시며 2008. 8. 12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지난주에 이어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두 번째 내용인 “나라이 임하옵시며”를 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첫 번째 내용이 무엇이었습니까?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거룩한 행실을 함으로 너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사람이구나! 이런 입장으로 대부분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난주에 살펴본 바로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이 거룩한 것임을 보았습니다. 천지 창조와 안식일을 주심이 거룩한 것이며, 범죄 한 인간으로 인하여 땅이 저주를 받았지만 이 저주의 땅에 하나님께서 임하시니 거룩한 곳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자의 희생으로 다른 형제들이 혜택을 받는 것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자기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기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기 위하여 범죄 한 자기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여 내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오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내용은 어떤 뜻을 담고 있을까요? 엘리 위젤이는 사람의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하늘나라의 왕좌에 앉은 하나님께 가서 사람노릇 하는 것과 하나님의 노릇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힘이 드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하나님 노릇 하는 것이 더 힘들다는 것이 하나님의 답변이었습니다. 그러자 이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자신 있게 말씀하실 수가 있느냐며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본 적이 없고 나도 하나님이 되어 본 적이 없으니 딱 1초만 입장을 한번 바꾸어 보자고 하였답니다. 그런 후에 다시 바꾸면 되지 않겠느냐고 한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내키지 않았지만 워낙 졸라대니 그렇게 하도록 하셨답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역할이 서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일단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은 다시 자리를 내주려 하지 않았고 그때부터 인간이 이 세상의 통치자가 되고 하나님은 멀리 내쫓기도 말았다는 우화입니다.

 

 

 

 

이 이야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 이 세상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선악과를 따 먹고 난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되었다고 착각하면서 살기에 바벨탑을 쌓으면서 자기들의 이름을 내자고 한 것입니다. 이 세상 어디를 둘러보아도 전부 인간의 소리들입니다. 신을 섬긴다는 종교단체들을 보아도 인간들의 욕망의 투사물을 신으로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를 신으로 여기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는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다른 종교이고요, 우리는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다고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탐심이 우상숭배이기에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하더라도 자기의 욕심을 위하여 부르고 있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욕망을 이루어주는 알라딘의 램프처럼 주문을 외워서 부르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말은 하지만 속으로는 자기 영광을 감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시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아가면서 무슨 나라를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먼저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 집안 아닙니까? 그리고 내 회사 아닙니까? 그 다음 여유 있으면 우리나라 잘 되기이고, 그리고 좀 더 여유가 있으면 내세까지 생각해서 교회에도 관심을 가져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 와서 무엇을 한다고 해도 내가 무너지고 내 가정이 무너지고 내 나라가 무너지고 내 뜻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이 임하기를 기도하는 경우가 과연 있기는 한 것입니까?

 

 

 

 

이미 하나님을 쫒아 내고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한 인간은 자신이 만물의 중심인줄 알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에서 자신이 피조물임을 알고 자신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자신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는 일들이 나타나는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속하여 내시고서는 너희가 내 말을 잘 들으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순종하겠다고 피를 뿌려 언약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율법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율법을 지키면 율법을 지키는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 주신다고 보았습니다. 율법과 선지자가 그러합니다. 그렇게 하여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예언자들의 예언을 대망하면서 누가 과연 메시아인가 하면서 기다려왔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세례요한의 외침이었습니다. 옷은 낙타 털옷을 입고 먹는 것은 들 꿀과 메뚜기를 먹으면서 제사장의 아들인데도 성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들판에서 거침없이 외친 것입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이 메시아인가 하고서 따르기도 하고 묻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그가 한 말이 자기 뒤에 오실 메시아를 소개하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많이 행하시자 이 분이 정말 우리가 기다려 온 메시아라고 생각하고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부 종교 기득권자들은 예수님이 율법 파괴자로 보인 것입니다. 그러니 메시아가 될 수가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의 권세와 그 행하시는 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메시아로 알고 따라다닌 것입니다. 그렇게 따라 다닌 이유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증거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은 천국이라고 하는데 누가복음은 하나님의 나라로 되어 있습니다. 몇 곳만 찾아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로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눅4:43). 제자들도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보냄을 받습니다. 예수님께 적대적인 바리새인들도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는지를 예수님께 물었습니다(눅17:20). 제자들의 관심도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고 부활하신 후에도 관심사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이 언제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의 나라의 관심사는 결국 유대인들 중심의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결국 자기들 중심의 나라를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러한 생각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봅니다. 내가 믿는 예수님, 내가 믿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든 하나님이든 내 중심의 나라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도 내가 잘 되어야 하겠고, 하늘 나라가서도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아지고 상도 많이 받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나라는 자기 나라의 연장이지 하나님의 나라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하지 못한다고 하시면서 너희 안에 있다고 하십니다(눅17:20-21).

 

 

 

 

하나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는 세상의 나라 개념인 영토와 백성과 주권이 있어야 한다는 그런 개념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고발한 정치적 이유는 누가복음 23:1-4절에 보시면 나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심문을 해본 빌라도는 정치적인 죄는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이 말씀하셨고 또 유대인들이 시기심으로 예수님을 고발한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꼭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선교사를 가장 많이 보낸 나라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서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고 하면서, 영국을 이야기 하고 미국을 이야기 합니다. 지금 전 세계에 선교사를 가장 많이 보내는 나라가 미국이고 그 다음이 한국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더욱 많은 선교사를 보내어 세계에서 가장 힘 있고 강한 나라가 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는 성서한국 통일한국 선교한국을 말하니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 좋다고 따라나서는 것입니다. 어떤 정치인은 서울시를 봉헌한다고 하더니 이제는 대한민국을 봉헌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정치인을 목사들이 앞장서서 지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그렇게 사모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공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듯이 오늘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입니까? 이제는 아들의 나라입니다. 아들의 나라란 예수님께서 인자되심을 인하여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자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아들의 나라인 것입니다. 물론 이 아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하셔서 최종적으로 아버지께 돌려드릴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24절입니다. “.....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우리 가정, 우리 회사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도 포함이 되겠지요! 넓혀보아도 우리나라입니다. 더 넓혀도 세계의 평화 정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골로새서 1:9-23절입니다. '9.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10.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11.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12.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3.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4.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 15.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자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자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1.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3.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고 합니다.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이유가 나옵니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습니다. 그 아들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으로서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이란 그 아들의 일인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피로 화평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것은 십자가의 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란 그 아들의 십자가의 피로 이루어진 나라인 것입니다. 그 안에서 사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입니다. 이 백성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의 피로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시는 나라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나라의 기업을 얻은 자들은 이 세상 나라의 흥망성쇠에 목숨을 걸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의 흥망성쇠에 울고 웃는 것이 아닙니다. 부동산 가격의 등락이나 증권의 등락에 따라 희비가 교차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날마다 이런 문제들로 시름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세상사는 것이 다 문제투성이인데 이런 문제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맛보고 누리는 것입니까?

 

 

 

 

로마서 14:17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란 이 땅에서도 맛보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주어진 의가 있어야 참된 평강을 맛보는 것입니다. 그 의로 주어진 용서 안에서만 평강과 희락이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맛 볼 수는 있지만 아직은 부분적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하나님의 나라를 맛 본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하게 됩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는 그 아들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일하고 계시는 나라입니다. 나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이어지는 말씀이 또 있습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일을 누가 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열심히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하여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를 다 멸하시고 그 아들이 승리하셔서 아버지께 바치는 그날까지 쉬지 않고 일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 승리는 묵시적으로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승리를 지금도 예수님은 온 땅에 펼쳐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 예수님의 일에 공격당한 자들입니다. 그 결과 내가 무너지고 나의 자리에 주님이 주인 되시는 일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지만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지금도 기도하시기에 우리가 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졸기도 하고 자기도 하지만 주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오늘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를 기도하시는, 그 주님의 능력과 실력을 믿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11:1-4 세 가지 우리 간구 2007. 8. 19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하라

 

 

 

 

지난 주 까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세 가지 우리 간구입니다. 먼저 일용할 양식에 대하여 보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입니까? 생존의 문제이지요! 먹고 마시고 입어야 합니다.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가 사람의 손에 달렸다고 하는 사람들은 기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영생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 땅에 살아가는 것조차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일용할 양식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쌀독에 오늘 양식만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것은 아무 의미 없는 간구가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일용할 양식이 아니라 천년만년 먹고 살 양식이 있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많이 소유할수록 안전하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죽자 살자 열심히 일하여 소유를 늘이려고 합니다. 그런 소유가 자신의 세대만이 아니라 자기 자식까지 대물림되기를 원하기에 그런 소유욕은 결코 끝이 없습니다.

 

 

 

 

출애굽기 16장에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여 광야로 들어섰습니다. 먹을 것도 없고 농사도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을 먹고 살았습니까? 하늘에서 만나가 내렸습니다. 모세가 명하기를 자기 가족이 먹을 만큼만 거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이 거두어 이튿날까지 남겨 두었더니 냄새가 나고 벌레가 생긴 것입니다. 안식일전에는 이틀 분량을 거두어 남겨도 썩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나가지 말라고 하였는데도 나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일용할 양식의 테스트에서 합격할 수가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광야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주리게도 하시고 낮추시기도 하신 이유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40년의 광야체험을 하고서 가나안의 경제체제에 물들어 살지 않도록 율법까지 주어서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법대로 순종하며 산 것이 아니라 애굽의 경제체제와 가나안의 경제체제를 그대로 따랐습니다. 율법에 토지를 사고팔고 할 수가 없도록 희년제도까지 주었지만 이방나라와 같아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나라가 아니라 세상의 나라가 되어버린 이런 이스라엘의 상황에서 선지자들은 메시아가 올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약속대로 메시아가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오늘 피었다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 입은 옷보다 더 아름답게 입히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누가 좋아하면서 따라나섰겠습니까? 우리는 소유가 많은 것을 복이라고 여기고, 소유가 많아야 안전하다고 여기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생명이란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소유를 늘리려는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 소유 늘어가는 기쁨으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누가복음 21:1-3절을 봅니다. “봉독” 과부가 겨우 동전 두 개를 헌금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과부가 헌금한 것이 부자들이 많이 헌금한 것보다 더 많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풍족한 중에서 헌금하였지만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생활비 전부를 다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 과부가 어떻게 생활비 전부를 드릴 수가 있었습니까? 이런 모습이 일용할 양식만 구하는 모습이며 내일 일은 내일의 주인이신 주님께 맡기는 믿음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2:43-47절입니다. “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런 믿음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믿음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는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인류의 절반이 굶주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매일 수 만 명이 일용할 양식이 없어서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햇빛과 비를 주시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이 땅의 사람들이 현재보다 더 많아도 다 먹고살 양식이 주어집니다. 그런데도 굶주리는 이유는 사람들이 일용할 양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은 일용할 양식으로 살아갑니다. 짐승들도 일용할 양식으로 살아갑니다. 저장하는 짐승들도 있지만 한 겨울을 지나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그러면 누가 제일 일용할 양식으로 살지 않겠습니까? 저는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라고 봅니다.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들은 이야기가 서양의 여러 나라들이 예수님을 믿어서 축복을 받아 강대국이 되었고 선진국이 되었다고 합니다. 부자가 되는 것은 소유가 많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나라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다 엉터리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만이라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면서 산다면 세상에 굶주리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두 번째로 우리가 우리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달라는 간구입니다. 이 기도를 하면서 찔리지 않았습니까? 내 마음에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자가 많은데 그러면 나도 용서를 받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기도를 할 수가 있습니까? 내가 나에게 잘못한 자를 먼저 용서하여야 한다는 조건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용서 받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용서의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지난 수요일 저녁에 요한 일서 4장의 말씀을 보았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세상에서 사랑을 많이 이야기 하지만 참된 사랑은 여기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기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확대하여도 자기 사랑의 연장일 뿐입니다. 그런 상태를 성경은 죄인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원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라고 하니 사람들은 자꾸만 세상의 윤리 도덕적인 죄를 생각하고 세상의 법에 저촉되는 죄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런 죄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 안에 모든 용서와 화목케 하심을 다 담고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모든 죄가 먼저 용서된 채로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님이 오시지 않으셨다면 유대인들도 죄를 몰랐을 것입니다. 율법을 잘 지키고 있는데 무슨 죄가 있다고 여기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니 사람들의 속에 있는 것들이 다 들통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들통이 나서 죄로 드러나는 것은 이미 어떤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까? 화목제로 용서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과 용서를 받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기에 이런 용서를 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죄를 지은 사람에게 용서를 하지 못한다면 그 사람이 받은 용서와 사랑이 진짜인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정말 죽을 죄인이요 하나님의 원수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한 것임을 믿는 사람은 이제 우리에게 원수처럼 닥쳐오는 이웃을 향하여 내가 받은 용서를 증거 하는 사람으로서 세움을 입은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임금에게 다 탕감을 받았습니다. 일만 달란트는 개인의 능력으로 결코 갚을 수 없는 어마 어마한 양입니다. 그런 사람이 용서를 받고 집으로 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나서는 목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한 것입니다. 조금만 참아달라고 하여도 감옥에 가두어버린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임금이 어떻게 하였겠습니까? 그 놈을 다시 잡아와서 한 푼도 남김없이 다 갚도록 옥에 가두어 두라고 하였습니다.

 

 

 

 

백 데나리온은 백일만 일하면 갚을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런데 1달란트는 6000일을 해야 갚을 수 있는 돈입니다. 사람이 평생 노동할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일 년에 3백일을 일한다고 하면 20년을 해도 1달란트밖에 갚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엄청난 용서를 받고서도 자기에게 조그마한 빚 진자를 용서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베드로가 형제가 자기에게 잘못한 자를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느냐는 질문에 예수님은 일곱 번에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시면서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천국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여러 가지 죄가 지적이 될 때에 그것을 오히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나에게 이런 악한 죄도 있었구나! 말씀을 보고 들으면서 또 살아가면서 계속 들추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정죄하고자 들추어내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효력과 능력이 어떻게 대단한지 이런 죄도 용서 받는 구나를 보이시기 위하여 드러내실 것입니다. 베드로가 일곱 번 용서해주면 되겠습니까? 하였지만 베드로 자신이 끝없이 용서 받아야 하는 자임을 십자가 앞에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부인한 베드로가 예수님께 용서를 받고서 이제 남을 몇 번이나 용서해주면 되겠습니까? 이런 건방진 이야기는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시험에 들게 말라는 기도입니다. 시험에 든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유혹에 빠지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도 무엇에 빠진 것입니까? 시험에 빠진 것입니다. 사람이 시험에 빠지는 것은 각 사람의 욕심 때문이라고 야고보서 1장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유혹거리입니다. 견물생심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지금 우리는 다 어디로 달려가고 있습니까? 사망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의 성령이 임하지 않고서는 이런 기도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초적인 시험이 무엇이었습니까? 선악과를 따 먹을 때에 있었습니다. 이것만 따 먹으면 너도 하나님처럼 된다는 사단의 유혹에 아담과 하와가 넘어간 것입니다. 그 아담의 후손들로 우리가 태어났기에 유혹에 끌리는 것은 본능입니다.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이생의 자랑이 될 만한 것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얼마나 마음이 끌립니까?

 

 

 

 

그러므로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어느 누가 이런 기도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할 인간이 없습니다. 정말 일용할 양식이 없던 사람이 일용할 양식이 채워지는 순간 또 다른 소유욕에 눈뜨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남을 용서합니까?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기는 우리이지 않습니까? 내 눈에 흙이 들어가지 전에는 네가 잘 되는 꼴을 못 보겠다고 날마다 다짐하지 않습니까?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기는커녕 어떻게 하면 시험에 좀 더 깊이 들까를 생각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예수님께서 만들어 내시겠다는 자기 약속입니다. 성경의 진술문이나 명령이나 꼭 같은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시키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어떻게 이루어내시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다 이루셨다고 하십니다. 이 다 이루심 안에서 부활과 승천 성령이 임하기까지 하여 자기 백성들에게서 이런 기도가 나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 우리의 고백이 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한 마디 한 마디 고백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며 은혜인지 알고서 사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1:5-13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2007. 8. 26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6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찌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취업 운은 기도로 바꿀 수 있습니다.’ 지난 주 금요일 어느 일간지에 큼직하게 실린 광고문구입니다. 관음기도 도량 월명사에서 낸 광고입니다. 기도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어디서 많이 듣는 이야기입니까? 교회나 기도원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기도하면 무엇이나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기도하면 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주 인용하는 말씀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말씀입니다.

 

 

 

 

특히 이 말씀과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7장에서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좋은 것을 주시겠다고 되어있습니다. 이 좋은 것에 괄호를 만들어서 그 안에 좋은 것을 한번 넣어보시기 바랍니다. 신문 광고에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지 내용만 보면, 결혼, 건강, 소원, 취업, 학업 등이 나옵니다. 이런 내용들은 누구나가 다 좋아하는 내용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사람들이 성경의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좋은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기도응답을 많이 받았다는 곳에 사람들이 몰립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기도의 방법론처럼 보입니다. 간절히 구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곳에서는 ‘강청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8절 말씀에 강청함으로 준다는 말씀을 가지고 주실 때까지 강청하는 기도를 하면 반드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기도하여야 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강청기도의 결론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구하라고 하였습니까? 지난 주 까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보았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기를, 일용할 양식, 죄 사함, 그리고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살펴 본대로 우리는 이런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혹시 한다고 해도 자기의 영광을 속에 감추어두고서 겉포장만 기도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데 자기의 이름의 영광을 염두에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면 자기의 나라가 무너져야 하는데 자기의 나라의 견고함과 왕성함을 하나님의 나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일용할 양식보다 더 많은 소유를 원하고 남을 용서하지 않고 유혹에 더 빠져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런 기도를 가르쳐 주시고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주님께서 이런 기도를 자기 백성들에게 이루어 내시겠다는 자기 약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이름의 영광과 자기 나라의 강함을 위하여 따르던 제자들이 성령이 임하고 나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이 기도가 나온다면 그것은 주님이 살아서 역사하시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본문 5-8절을 봅니다. 너희 중에 어떤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 벗에서 가서 내 벗이 여행 중에 왔으나 준비된 떡이 없으니 떡 세 덩이를 빌려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벗이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서 줄 수가 없다고 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여기에 듣는 사람들의 답변이 무엇이었을까요? 이구동성으로 아니요! 하였을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율법에 나그네 환대의 법이 있습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고 잘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나그네 환대는 율법에서만이 아니라 중동의 아랍권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낯선 손님만이 아니라 사막에서는 적이라도 그 사람의 기력을 회복하도록 대접한다고 합니다. 방문객에 대한 인사말이 ‘만질루나 만질루쿰’이라고 한답니다. 내 집을 당신 집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런 나그네 환대의 풍습에서 귀찮다고 떡을 내어주지 않으면 그 집은 완전히 왕따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밤중에도 빵을 빌리러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혹시 어떤 사람이 아이들 다 재우고 이제 막 잠이 들었다고 하면서 줄 수 없다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밖에서 계속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벗됨을 인하여는 주지 않을 수 있어도 계속 강청하니 어쩔 수 없이 일어나서 빵을 내어줄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빵을 빌리는 자의 태도가 참으로 뻔뻔하지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뻔뻔하게 구하여도 되는 것이 당연시 되는 사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는 그 당시의 청중은 너무나 잘 이해하는 것입니다. 구하면 반드시 준다는 것입니다.

 

 

 

 

9-12절입니다. 그 당시의 청중들이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을 하시고서는 예수님께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십니다. 구하는 자마다 받을 것이며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의 풍습을 이야기하시면서 구하는 자들이 받는 다는 말씀을 하시고서는 예수님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그것은 벗이 나그네 대접을 위하여 구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식이 부모에게 구하는 것으로 나아갑니다.너희 중에 아들이 아버지에게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자가 있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우리에게 물어도 아니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뱀장어를 맛있게 먹어본 아이가 시커먼 뱀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잡아 달라고 한다고 해서 잡아줄 아버지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알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줄 아비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알을 먹어본 아들이 전갈이 도르르 말면 알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그런 전갈을 알인 줄 알고 달라고 하는데 줄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말씀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다 외울 정도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아는 말씀입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말은 열 번만 찍으라는 말이 아니라 넘어갈 때까지 찍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말씀을 우리가 들어도 이해가 됩니다. 그래 내가 필요한 것을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간절히 구하기만 하면 반드시 주시는 것이구나! 그래서 나온 것이 철야기도 특별새벽기도 금식기도 일천번제 릴레이 기도입니다.

지난 주 심방하러 부산에 가면서 라디오에서 설교를 들으니 자신이 어느 교회에서 40억이 넘는 교육관 공사를 돈이 하나도 없이 건축을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하자 IMF가 일어난 것입니다. 건축을 하자 말자는 의논이 있었지만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을 보면 할 수가 없지만 믿음으로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24시간 릴레이 기도가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자 공사대금 몇 억씩 지불할 때마다 맞추어 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사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실 너머를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 들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7:11절입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여기서 좋은 것이라고 하니 사람들은 자기가 좋은 것을 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여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응답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좋은 것이란 누가복음에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입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가 우리에게 이루어지도록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이루어달라고 기도는 할지언정 하나님 버지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과연 기도하고 있습니까?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일을 위하여 기도하십니까? 내 뜻은 무너지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십니까? 그러므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아버지께서 좋은 것을 주시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무엇이나 구하라고 하는 곳이 있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일용할 양식인 만나를 싫어하였습니다. 그래서 고기를 달라고 떼를 쓴 것입니다. 시편 106편을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10가지 재앙을 보고서 나왔지만 홍해 바다 앞에서 원망하였다고 합니다. 홍해가 갈라집니다. 찬송합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서 하나님의 일을 잊어버리고 광야에서 크게 욕심을 냅니다. 일용할 양식으로 만나가 내리는데 그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기를 달라고 하자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영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15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찌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파리하게 질릴 것들만 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보다 그저 내 나라와 내 의를 구하면서 사는 우리이지 않습니까?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것들로 바꾸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상태를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18-30절입니다. “봉독” 우리가 피조물로서 허무한데 굴복하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성령으로 인하여 거듭난 자들은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소망이기에 참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참음으로 기다려야 할 내용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내용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루어낼 문제가 아니라 기도하면서 기다려야 할 내용입니다. 기도하면서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는 무력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오래 참고 기다릴만한 능력조차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데 우리는 마땅히 무엇을 빌어야 할지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더렵혀지지 아니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여야 할 자들이 썩어질 것들만 구하고 있으니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된다는 것은 내가 무슨 일을 하다가 손해를 보았는데 기도하였더니 오히려 이익이 되었다는 그런 내용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여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자들로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좋은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돈을 달라고 하였는데 가난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건강을 달라고 하였는데 질병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멋있는 예배당을 달라고 하였는데 오히려 더 못난 형편으로 만드실 수도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원하였는데 가정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구 원망을 합니다. 하나님이 이럴 수가 있느냐고 항의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자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구하는 것들은 잠시 잠간 지나가는 바람과 안개와 같은 것들입니다. 아버지께서 주시려고 하는 것은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알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면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지셔야하시는지를 알게 됩니다. 자신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서 얻고자 한 그 욕망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신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도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시는지 알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누가복음 11:14-28 하나님 나라가 임함 2007. 9. 2

 

14 ○예수께서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벙어리가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기이히 여겼으나 15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저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16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하니 17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18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단이 스스로 분쟁하면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19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1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22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23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24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25 와 보니 그 집이 소제되고 수리되었거늘 26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27 ○이 말씀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가로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도소이다 하니 28 예수께서 가라사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한 주간 무엇을 구하고 찾고 두드렸습니까? 지난 수요일 창원극동방송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부산에 극동방송국을 세우는데 협찬하는 물건이 있어서 교회에 홍보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럴 수는 없고 안내지만 보내라고 하였더니 금요일 다시 왔습니다. 극동방송 운영위원이며 남해보물섬 흑 마늘 영농조합장이 직접 교회로 찾아와서는 하는 말이 두드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그것이 선교를 위한 일이라고 열심히 두드린답니다.

 

 

 

 

우리는 무엇을 구하고 찾고 두드렸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급박한 문제가 생기면 구하라고 하지 않아도 구하고 찾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구하라고 하신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과 그 나라가 임하는 것과 죄 용서와 시험에 들지 않게 되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한 주간 우리가 구한 것은 본능적으로 내가 필요한 것이지 예수님이 구하라고 하신 내용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고 하는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14절부터 보시면 예수님께서 한 벙어리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벙어리는 대부분 귀머거리가 벙어리가 됩니다만 여기서는 귀신이 들려서 벙어리가 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셔서 고쳐주시니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무리들이 기이하게 여깁니다.

 

 

 

 

귀신 들린 사람이 고침을 받고 말을 하게 되자 사람들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더러는 예수님을 시험하면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 지고 스스로 분쟁하는 집안은 무너진다고 하십니다. 나라나 집안이 무너지는 것은 내부의 분란으로 무너지는 것이 많습니다. 외부의 적이 오면 오히려 단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누구나 알아듣고 고개를 끄떡일 수밖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사단이 스스로 분쟁을 하면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할 말이 없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한 말씀 더 하십니다.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너희 자녀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고 하시면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 중에서도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귀신을 평소에 쫓아낸 경험이 있었다면 그들이 바알세불의 힘이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또 하나의 가정은 그들이 쫒아내지 못하였기에 예수님을 모함하기 위하여서 그렇게 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떻든 간에 예수님에 대하여는 적대적인 모습이 나타납니다.

 

 

 

 

20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 내는 것이면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확장하여 가는 것이 아니라 임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가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위로부터 임하여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사건을 무엇으로 보고 있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사건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한 것이라고 보시는 것입니다.

 

 

 

 

21-22절입니다.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키면 그 소유가 안전합니다. 그러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 강한 자를 이겨버리면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가져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탈레반에 억류된 인질들이 다 풀려나왔습니다. 그들이 잡혀있을 때에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공수특전단원이 그들을 구출하면 안 되겠는가 하는 영화 같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면 인질들을 다 살해하겠다고 해서 군사작전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협상하여 구출하였습니다만 예수님은 사단과 협상하지 않으십니다.

 

 

 

 

요한일서 3:8절입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함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라보아도 귀신들은 예수님을 알아보고서 벌벌 떠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과 협상하시는 것이 아니라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이 물러가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이런 일은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처럼 떨어지는 것을 예수님이 보았다고 하신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님 당시에 현재로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귀에게 속한 자들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해방되어 나오는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이 땅에서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재림하셔서 모든 사단과 그 부하들을 다 영원한 무저갱에 결박하심으로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성도는 부분적으로 맛을 보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그런 하나님의 나라, 즉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셔서 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까? 물론 성경의 말씀처럼 귀신들린 자들이 고침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려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만 귀신들린 자라고 본다면 그것은 또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1-3절을 봅니다. “봉독” 공중 권세 잡은 자가 누구입니까? 지금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고 합니다. 이런 영에 사로잡힌 자는 어떤 증상이 나타나는 것입니까? 이 세상의 풍속을 쫒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고서 세상의 풍속과 세상의 도리를 쫓아서 사는 사람을 보고 귀신들렸다고 하면 오히려 미친 사람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세상의 풍속을 따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이 세상의 풍속을 따라 살지 않습니까? 대한민국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냥 생존이 아니라 세상에서 말하는 사람답게 산다는 기준을 따라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어야 합니다. 서울에서는 남자들이 보통 두 가지 일을 한다고 합니다. 남들처럼 해서는 남들보다 앞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강남 아줌마 따라잡기라는 프로그램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 교육비 어마어마하게 투자하여 좋은 학교 가게 만듭니다. 다른 사람들은 집이 두 채나 되는데 나는 한 채밖에 없으니 나는 얼마나 가난한가 하면서 또다시 허리띠를 졸라맵니다. 세상풍속을 따라 자기 마음의 욕심대로 삽니다.

 

 

 

 

모두가 제정신이 아닙니다. 저도 자녀를 학원에 보내고 있습니다. 세상풍속을 따르고 있습니다. 모두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데도 사람들은 오늘도 채워지지 아니하는 욕망을 쫓아 신의 이름까지 부르고 있으니 이런 모습이 귀신들린 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빠져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세상의 풍속을 거부하면서 살아가겠습니까?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인데 거부하는 것이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구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이 더 강한 자로 오셔서 자기 백성을 구속하여 내셔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4-10절입니다. “봉독” 3절과 4절 사이에 인간의 조건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으로 귀신에 사로잡혀 세상풍속을 쫒아가는 우리를 건져내신 것입니까?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것입니다. 살리신 정도가 아니라 함께 일으키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향은 하늘나라입니다. 멸망할 이 세상의 나라가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이 다 은혜로, 선물로 되었기에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이제 이렇게 만들어진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을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세상 풍속에서 자유롭습니다. 세상에는 사람의 할 도리라는 것이 많습니다. 사람도리라는 것이 대부분 체면을 세우는 일입니다. 자신의 품위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가문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그 최대의 목표는 소유의 많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면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믿게 됩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면 이것을 놓으면 죽을 것 같은 것들을 놓게 됩니다.

 

 

 

 

제가 방금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에 대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증거 하였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에 대하여 여러분은 동의가 되십니까? 아니면 거부반응이 일어나십니까?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23절을 봅니다. “봉독”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을 거부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시면 대부분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옳지만 그러나 그렇게 하면 세상을 어찌 살겠는가? 하는 두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중간지대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도덕적 각성이나 율법으로 자신의 더러운 생활을 청산하고 깨끗한 삶을 산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금연과 금주를 하고 도박도 끊고 바람피우는 것도 끊겠다고 각서를 쓰면서 깨끗하게 살겠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깨끗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타락하면 전보다 더한 모습이 나옵니다.

 

 

 

 

24-26절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집이라고 봅니다. 귀신이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깨끗하게 소제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온 것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깨끗하게 하면 어느 정도 바른 삶을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아니한 인간의 바른 삶은 더 악한 귀신 일곱이 들어온 것과 같은 상태가 됩니다. 이런 자들의 모습이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며 깨끗하게 산다고 자처한 율법주의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아비를 마귀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이렇지는 않습니까? 세상의 철학과 교육과 경제정책들이 예수님을 밀쳐놓고 우리가 한번 바르게 잘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교회마저 예수님을 밀쳐버리고 자기들의 왕국을 세워나가겠다고 합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기다리는 자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런 말씀을 듣는 무리 중에 한 여인이 외칩니다. 27-28절입니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다고 합니다. 위대한 한 인물이 태어나는 것을 그 가문의 영광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혈통을 이야기 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들이 복 있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사단의 권세를 십자가로 깨뜨리고 승리하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세력에서 해방시키시는 은혜를 맛보게 됩니다. 또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누가복음 11:29-41 눈은 몸의 등불 2007. 9. 9

 

29 ○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30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31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으며 32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33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니라 34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35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36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광선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37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이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밖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 오직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오늘 말씀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몸의 등불이 눈이라고 합니다. 눈이 밝으면 몸도 밝은 것입니다. 이런 말씀은 누구나가 다 이해하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눈이 밝다는 이야기를 할 때 시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추어진 것을 보는 눈, 미래를 예측하는 눈, 심미안 등으로 말을 합니다. 또는 무엇을 하면 돈을 잘 벌게 될지를 아는 눈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런 눈은 없는 모양입니다. 학교 다닐 때에 소풍가서 보물찾기조차 찾아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 나를 선생님이 불쌍히 여겨서 한 장 주어서 연필 한 자루인가 받아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어떤 눈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크게 세 단락인데 먼저 눈이 몸의 등불이라는 33-36절을 먼저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등불을 켜면 환히 잘 보이는 곳에 둡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 빛을 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등불을 밝히면 어두울 때에 사람들이 출입하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몸에서 이런 등불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눈이라는 것입니다. 눈이 성하면 온 몸도 밝을 것이지만 눈이 성하지 못하면 몸도 어두울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35절입니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않은지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눈이 몸의 등불이라면 속에도 눈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속에 있는 눈을 빛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속에 빛이 어두운지 밝은지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몸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입니다. 몸의 눈으로 빛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빛을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못 알아듣는 내용입니다. 네 속의 빛이 밝으면, 어두운 부분이 하나도 없으면 등불이 환하게 비출 때와같이 네 몸이 온전히 밝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빛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3:16-21절입니다. “봉독” 사람들이 요한복음 3:16절을 좋아하는데 연결되는 말씀을 잘 보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으면 구원을 받고 믿지 않으면 심판을 받는데 왜 믿지 않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는데 사람들은 어두움을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빛이시니 예수님께 나아오면 그들의 죄가 드러나기에 나아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빛을 쫓아내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의 마음의 눈이 어두워져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상태를 이 세상의 신이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가리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고후 4:4). 이런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니 어디를 가더라도 하나님께로 부터 오는 유일하신 영광과 빛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영광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자면 제가 지난주에 가스 충전소에서 가스를 넣고 카드로 계산을 하는데 당첨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하고 보니 쇼핑백을 주는 것입니다. 70만개인가 만들어서 준다는 것인데 그 중에 하나가 당첨되었지만 기분이 좋았습니다. 한번 펼쳐보니 제법 큰 가방이었습니다. 제가 무어라고 하였는가 하면 여기에 만 원짜리 담으면 얼마나 들어갈까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제 마음이 얼마나 돈에 눈이 멀어있는지 아시겠습니까! 그러니 불쌍히 여기셔서 선생님이 보물찾기 하나 주시듯이 생명의 빛을 비쳐주시기를 바라볼 뿐입니다.

 

 

 

 

29-32절을 봅니다. 여기서도 보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수많은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계속하여 예수님을 향하여 표적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하시면서 예수님이 보여주실 표적은 요나의 표적이라고 하십니다. 요나는 구약의 선지자입니다. 그 당시의 세계적인 강대국이 앗수르이고 그 앗수르의 수도가 니느웨성입니다. 이 성의 죄악이 가득하였습니다.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지경입니다. 그런데 이 니느웨성에 가서 이 성이 40일 만에 망할 것이라고 전하라는 것입니다.

 

 

 

 

요나가 가기를 싫어하여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을 갑니다. 자기들을 괴롭히는 나라가 망하였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많으심을 알기에 만약에 망한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들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것이니 아예 회개할 기회마저 주지 않기 위하여 도망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탄 배가 풍랑이 일고 다 죽게 되었을 때에 그 원인을 알고자 제비를 뽑으니 요나가 걸렸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였기에 이렇게 되었다고 바다에 자신을 던지라는 것입니다. 바다에 던져버리자 풍랑이 곧 잔잔해졌습니다. 그러나 바다 속에 이미 큰 물고기를 준비하여 요나를 삼켜서 삼일 밤낮을 지냅니다. 그곳에서 회개하자 물고기가 육지에 토하여 내었습니다. 그리고 니느웨로 가서 전합니다. 3일 길이나 되는 큰 도시인데 하룻길을 행하면서 이 성이 40일이 지나면 무너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열심히 했을까요? 마지못해 했을까요? 어쩔 수 없이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요나의 말을 듣고서 백성들이 회개합니다. 왕에게까지 이르고 왕으로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금식하며 회개하는 일이 일어나서 용서를 받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보여주실 표적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3일을 있다가 나온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실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회개를 이루는 표적이 되는 것이지 세상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하는 것으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죽은 자가 살아온다고 하여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요나가 마지못해 전하였지만 그 불충한 요나의 말을 듣고도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였는데 이 세대 사람들은 요나 보다 더 크신 이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회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당시의 사람들은 무엇이 없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을 보는 눈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두움으로 가득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하시는 표적이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17:30-31절입니다.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기적을 가지고 표적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 심판과 믿을 만한 근거가 다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다른 표적을 구하는 자들은 니느웨 사람들이 정죄할 것입니다. 그들은 물고기 뱃속에 3일이나 있다가 나와서 마지못해 전한 요나의 말을 듣고도 회개하였는데 지금 천지를 만드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그 주님의 표적을 믿지 않는 자의 받을 심판이 얼마나 중하겠습니까?

 

 

 

 

또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합니다. 남방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의 말을 듣기 위하여 땅 끝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솔로몬보다 더 크신 예수님이 계시는데도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 때에 이 남방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을 정죄할 것이라고 합니다. 솔로몬은 죄인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기에 그의 말을 듣고서 땅 끝에서 찾아와서 당신의 지혜는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솔로몬보다 크신 분, 솔로몬을 지으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믿는 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인지 기적인지 아시겠습니까?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눈을 뜨는 것 보다 더 놀라운 사건이 됩니다. 요한복음 9:39-41절입니다. “봉독”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한 사건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보지 못하는 자는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을 보고 하는 말인 줄 압니다. 우리도 소경인가? 너희가 소경이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다고 하셨습니다.

 

 

 

 

37-41절을 봅니다. 예수님을 바리새인이 초청하여 식사를 대접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손을 씻지 않으시고 음식을 드시자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따라서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손을 씻습니다. 부정한 자들이나 부정한 것들에 부지중에 접촉하였을까 해서 손을 씻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 바리새인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고 하십니다.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않았느냐고 하십니다.

 

 

 

 

그런데 눈이 밝다고 자기들은 율법을 잘 안다면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자들을 경멸하면서 살았던 그 바리새인들의 눈은 실상 어두운 장님인 것입니다. 그들은 그릇의 겉을 깨끗하게 하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보이는 겉모습만 깨끗하게 하고서 산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은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 것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 믿는다고 예배를 드리지만 주님께서 우리의 무엇을 보시겠습니까?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로는 사람을 속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까지 만드신 주님을 속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가장 경건한척 하면서 율법을 제일 잘 지키는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을 때에 바리새인들이 비웃었습니다. 그들은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사랑 이웃사랑을 한다면서 열심히 율법을 지켰지만 그러나 그 율법지킴도 결국은 자기 사랑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계산적으로 놀았겠습니까? 그 속에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 것을 주님은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41절에서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고 합니다. 그 안에 있는 것이란 그들의 소유를 말합니다. 그들이 돈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예수님의 말씀이 싫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눈이 밝습니까? 어둡습니까? 우리의 눈이 밝아지면 자기 속의 더러움을 알게 됩니다. 반대로 눈이 어두우면 자기는 깨끗한 줄 압니다. 남보다 자기가 신앙생활 잘하는 줄로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에 주님의 빛이 비쳐지면 자신의 탐욕과 악독을 보게 됩니다. 그때 나오는 고백은 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이런 고백이 나오는 사람들이 빛을 본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날마다 빛에 거하기를 즐거워합니다. 그렇게 된 것이 주님이 행하신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요1서 1:5-10). 
 

 

 

누가복음 11:42-54 표리부동(表裏不同) 2007. 9. 16

 

42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찌니라 43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44 화 있을찐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45 ○한 율법사가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46 가라사대 화 있을찐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47 화 있을찐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도다 저희를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48 이와 같이 저희는 죽이고 너희는 쌓으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 49 이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일렀으되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저희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 더러는 죽이며 또 핍박하리라 하였으니 50 창세 이후로 흘린 모든 선지자의 피를 이 세대가 담당하되 51 곧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과연 이 세대가 담당하리라 52 화 있을찐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53 ○거기서 나오실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맹렬히 달라붙어 여러 가지 일로 힐문하고 54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을 잡고자 하여 목을 지키더라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을 우리가 압니다. 누가 들은 말씀입니까? 젖을 떼고부터 성전에서 자란 사무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전하면 그의 말은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는 그런 사무엘이 사람의 외모를 본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지난주에 본 37-41절의 말씀에서 겉과 속을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모든 생활 속에서도 실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하여 율법에는 없는 내용들까지 장로들의 유전으로 만들어 지키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규정가운데 음식을 먹을 때는 손을 씻으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드시니 그들이 이상하게 여긴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예수님은 너희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그 속은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표리부동한 이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거침없이 ‘화있을진저’라는 저주를 오늘 본문에서만도 여섯 번이나 퍼붓고 계시는 것입니다.

 

 

 

 

첫 번째는 42절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율법에 충실하려고 하였는가 하면 십일조를 하는데 채소와 박하와 회향까지 십일조를 한 것입니다. 채소란 그저 텃밭에 고추 몇 그루 심고 오이 한두 포기 심은 식의 채소를 말합니다. 그리고 박하와 회향이란 음식의 향신료로 우리의 방아나 산초 같은 것인데 이런 것 까지 철저하게 계산하여 십일조를 드린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버렸다고 합니다. 십일조의 정신에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야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버렸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철저하게 십일조를 하였으니 하나님께 복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 그런 십일조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들이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과시도 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다 겉을 꾸미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십일조의 외형만이 아니라 그 중심이 되는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가나안 땅도, 햇빛과 비도, 이른 비와 늦은 비도 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으로 공급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통하여 무엇을 드러나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 공의와 사랑이란 십일조가 레위인과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에게 공급되는 것을 봅니다. 물론 성전에서 제물로 드려지는 것도 있지만 그 제물로 드려지는 것은 일부이고 대부분이 땅이 없이 성전에서 시중드는 레위인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매 3년마다 십일조를 더하여 고와와 과부나 나그네 같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의 정신에 더 중요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빼버리고 외형적인 율법조문을 철저히 지킴으로 약하고 가난한 자들은 더욱 율법을 지킬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자기들은 더 의롭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율법을 가지고 그들의 기득권을 더 강화하는 그들을 향하여 화 있을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종교나 세상이나 다를 바가 없이 서로 서로 기득권 차지하기 위한 싸움을 하면서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니 어찌 예수님께서 화를 퍼 붓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시면서 이것도 행하도 저것도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십일조도 하고 공의와 사랑도 함께 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3:23절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신약시대에도 십일조를 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공로사상을 포기하지 않는 카톨릭에서는 십일조가 율법이기에 십일조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직 은혜라고 하는 개신교에서 십일조를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약에 이것도 저것도 하라는 말씀을 가지고 십일조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철저한 십일조를 하면서도 의와 인과 신을 함께 할 수없는 모습으로는 율법을 완성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율법의 완성 자는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그 율법을 지키지 못하여 받는 저주까지 몽땅 다 이루시는 것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까지는 십일조를 제대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십일조의 겉모양만 갖추었지 그 속의 뜻은 갖추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 시대는 십일조가 없는 것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만약에 율법의 조문을 따라 십일조를 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모든 율법을 다 지켜야하는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0절입니다.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율법의 모든 계명을 항상 행하지 않으면 저주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율법지킴이나 어떤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는 것은 저주아래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시대의 헌금은 어떤 것입니까? 이미 우리를 값을 주고 사셨기에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십일조도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담아내는 도구인데 하물며 신약시대의 헌금이야 더더욱 주님의 은혜를 담아내는 것이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그 헌금의 정신과 내용은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을 통하여 우리가 이미 보았습니다. 극심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힘을 다하여 자원하여 기쁨과 감사로 연보하였던 것입니다. 억지나 인색함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연보의 정신입니다.

 

 

 

 

두 번째 화는 43절입니다. 회당의 높은 자리에 앉으려 하고 시장에서 인사를 받으려고 하는 자들이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철저하게 율법을 지킨다는 그것을 가지고 서로 높아지려고 한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직분자를 세우는 것이 높은 자리에 세우는 것으로 안다면 그것은 화를 자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하기 위하여 세우는 것입니까? 봉사하기 위한 직분입니다. 섬기기 위한 직분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 앉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세 번째 화는 44절입니다. 겉으로는 얼마나 깨끗한지, 얼마나 열심인지 모두가 다 인정할만한 그런 사람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교회에 열심히 잘 나옵니다. 열심히 봉사도 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보시면 다 압니다. 그 안에 어떤 생각으로 행동하고 있는지를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겉으로 볼 때는 사람들이 다 칭찬을 하여도 그 속은 평토장한 무덤과 같이 온갖 썩은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한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네 번째 화는 45-46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화를 퍼 붓고 계시니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율법사들이 자기들도 그런 사람이기에 찔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율법사인 우리까지 모독하는 것이라고 항의를 합니다. 율법사는 아예 직업이 율법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목사와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화있을 진저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까딱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율법사들이 지우는 짐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대하여 더욱더 세밀한 규칙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가르침을 좋아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이들은 주님의 긍휼과 자비로 나아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의로 무장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가난하고 병든 자들은 아예 율법을 지키지도 못하니 자연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가르치고 지킨다는 자들은 상대적으로 더 의로운 자들이 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율법사와 바리새인의 모습이 오늘날 어떤 모습입니까? 어떤 분이 우리교회는 기도하고 전도하고 성경보고 헌금하라는 것을 강조하지 않아서 싫다고 다른 교회로 가신 분이 있습니다. 은혜대로 믿음대로 하라는 말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하기에 목사님이 이것저것을 시켜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안 시켜주니 다른 교회에 갔습니다. 그곳에는 온통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다. 직분을 맡기는 것도 경쟁과 점수제를 도입하여 맡기는데 얼마나 열심히 하라고 하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다른 사람이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 이야기 아닙니까? 아무런 부담이 없다는  게 여러분의 자랑이었는데 이제 부담이 되는 일이 있으니 어떻게 해야 됩니까? 여기에서 모두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다니는 것도 진리의 문제보다는 자기 취향대로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느 집 음식이 맛있는지 찾아가듯이 내 입맛에 골라 찾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그것이 비록 복음이라는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말씀이 좋다고 하지만 정말 우리의 겉과 속이 같습니까? 오히려 부담 없음이 좋은 것은 아닙니까?

 

 

 

 

다섯 번째 화는 47-51절입니다. 선지자들을 무덤을 꾸미는 자들입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참 선지자들이 배척받고 죽임 당하였습니다. 그들의 무덤을 꾸미면서 자기들은 그 시대에 있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면서 순교자들의 무덤을 꾸미는 것입니다. 오늘 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순교자의 전통을 이어받은 교단이라고 자랑하면서 일제 강점기 때 순교자한 분들의 무덤을 꾸미고 기념관을 만들면서 자기들의 외식을 덮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까? 마치 정치인들이 무슨 일이 있으면 광주 5.18묘역을 찾아가서 묵념하는 것처럼, 자기들은 그렇게 함으로 나쁜 짓을 한 사람과 다르다고 하지만 그 속에는 그 혈통이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화는 52절입니다. 율법사들이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다고 합니다. 율법이란 죄가 무엇임을 알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해야 하는데 오히려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율법사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자들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섯 가지의 화 있을 진저에 대한 말씀이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 것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예수님이 지금 우리에게 이 설교를 하신다면 우리의 속을 다 보시고 저주를 퍼부으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53-54절이 우리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결국은 그들의 예수님을 죽임으로 선지자들을 죽인 자들의 후손임이 증거 되었습니다.

 

 

 

 

오늘날 천국을 증거 하는 일에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 아닙니까? 우리가 천국을 말하지만 오히려 천국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당신을 보니 천국이 있는 모양입니다. 이렇게 말합니까? 아니면 네 꼴을 보니 네가 가는 그런 천국은 죽어도 가기 싫다고 그렇게 나옵니까? 우리가 얼마나 겉 다르고 속 다른 바리새인들이며 율법사들입니까? 그러므로 화 있을 진저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앞에 자신이 저주를 받아 마땅한 자 임을 아는 사람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저주가 자기 백성을 대신한 저주이며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다시는 정죄함이 없다는 말씀이 참으로 복음이 됩니다.

 

 

 

 

누가복음 12:1-11 참으로 두려워할 자 2007. 9. 23

 

1 그 동안에 무리 수 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2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6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7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8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9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 10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11 사람이 너희를 회당과 정사 잡은 이와 권세 있는 이 앞에 끌고 가거든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무엇으로 말할 것을 염려치 말라 12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1-3절, 외식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화 있을 진저라는 저주를 퍼 부었지만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이렇게 따라 나선 사람들은 여러 가지 기적을 보기도 하고 먹고 배부르기도 하여서 따라 나섰을 것입니다. 그리고 병이 있는 사람은 고쳐 보려고도 하였을 것이고 혹시 그렇게 고대하던 메시아가 아닐까 하면서 따라나섰을 것입니다. 그리고 평소에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 의하여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속이 다 시원하였을 것입니다. 물론 그 중에는 예수님의 말꼬리를 잡아서 올무에 걸려고 기회를 노리는 자들도 포함이 되어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15-16장에 보시면 떡 일곱 개와 생선 두어 마리로 사천 명이 먹고 일곱 광주리나 남은 기적이 있습니다. 이 기적 후에 예수님께서 무리를 흩어 보내시고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가시는 중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떡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교훈을 누룩이라고 하셨는데 제자들은 떡의 누룩을 생각한 것입니다. 동문서답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왜 무리 수 만 명이 따라오는 이 시점에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까요?

 

 

 

 

저는 이렇게 보았습니다. 무리 수 만 명이 예수님께 모여들면 자연스럽게 제자들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무엇이나 된 것처럼 외식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에 사회에서 존경을 받던 사람들입니다. 더구나 율법사는 더 존경과 명예를 받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에 수많은 사람들이 추종하며 따라나선 것입니다. 추종자가 많을수록 감히 범접하지 못할 신비한 사람으로 자연히 추앙이 됩니다. 그러면 계속하여 그들은 더욱더 외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두운데서 말한 것이 광명한데서 들리고 골방에서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속담이 생각나지요! 변씨와 신씨가 이메일 주고받은 것을 삭제하였지만 전문가가 삭제한 것도 다 복원을 해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무엇을 감추고 가린다고 해서 그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외식을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눈만 속이면 된다고 생각하기에 외식을 하는 것입니다.

 

 

 

 

4-7절, 참으로 두려워할 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친구에게는 비밀을 다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참으로 두려워할 자를 말씀하십니다. 외식의 문제는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란 죽이기 밖에 더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능히 몸과 영혼을 지옥에 던지시는 분이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운지 죄에 대하여 얼마나 엄중한 심판을 하시는지 바리새인들도 율법사들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제자들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제자들은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말씀으로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친히 십자가를 통하여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를 자신의 저주받는 죽음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이 되셔서 죄인이 받을 형벌을 고스란히 받는 현장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 버림 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처절하게 보이신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외침 속에 죽어가는 것이 죄인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직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기에 하나님의 두려움을 무엇으로 말씀하고 있습니까? 지옥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어떻게 하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몸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나 세상을 두려워합니다. 물론 이런 두려움도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온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는데도 유혹을 받아 그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두려움이 온 것입니다. 범죄 후에 부끄럽고 두려워서 숨은 것입니다. 그때부터 인간들은 외식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자기들의 부끄러움을 가리고 두려움을 피하기 위하여 온갖 치장을 다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런 치장 가운데 하나가 율법지킴도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실 때는 너희가 이것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율법을 다 지키겠다고 큰소리칩니다. 그런데 광야 40년을 지나고 난 후에 모세가 다시 언약을 갱신할 때는 너희가 율법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신명기 31장 24-29절을 보시면 모세가 마지막으로 언약을 갱신한 후에 하는 말이 내가 살아 있을 때에도 너희가 여호와를 거역하였거늘 하물며 내가 죽은 후의 일이랴 내가 알거니와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여호와의 명을 떠나서 재앙을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모세의 예언대로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알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두려워 하기보다 사람들 앞에서 보이기 위하여 율법으로 자기를 치장한 것입니다. 마치 새들의 왕을 뽑기 위하여 경연대회를 하는데 참가도 하지 못한 까마귀가 냇가에 갔다가 각종 새의 깃털을 자기 몸에 붙여서 왕이 되었지만 비가 오니 다 떨어져 내려 들통이 나듯이 예수님 앞에서 그들의 외식이 다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그들이 존경과 명성을 받았습니다. 그에 따라 돈도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예수님 앞에서 외식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이런 누룩을 예수님께서 주의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두려워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가 있으신 분이시기에 너희는 그를 두려워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참으로 말하노니 그를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합니까? 세상이나 사람들을 두려워합니까? 추석에 며느리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무엇이겠습니까? 시 어머니가 더 있다 가라는 말이랍니다. 이런 며느리의 불평을 들어야 하는 남편들은 또한 두렵습니다. 그러니 두려움이란 결국 자기 몸의 이익을 따라 조건 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선악과 이후에 사람들의 두려움이란 자기 이익과 결부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옥을 말하니 지옥이 두렵습니다. 지옥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지 눈이 범죄 하면 눈을 빼고서라도 지옥에 가지 않는 것이 나은 것입니다. 손이 범죄 하면 손을 찍어버려 불구가 되어도 지옥에 가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 지옥은 유황 불 못이 항상 끓어 넘치지만 구더기도 죽지 않는 곳이라고 합니다. 저도 어렸을 때에도 교회에 가장 열심히 나간 이유는 지옥에 갈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성경을 보니 그것도 내 몸의 이익을 위한 열심이지 예수님을 사랑한 것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과연 오늘 우리가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나마 있기는 한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왜 몸을 죽이고 그 이후에는 어떻게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8-9절을 봅니다. 예수님을 사람들 앞에서 시인하면 하나님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시인할 것이며 부인하는 자는 예수님도 부인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유대교의 회당에서 출교하였습니다. 그러니 속으로는 믿지만 겉으로는 출교당할까봐서 예수 믿는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외식인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고대사회일수록 자기들의 생업의 기초가 되는 공동체에서 추방된다는 것은 목숨을 잃는 것과 같은 두려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사람들 앞에서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9-10절입니다.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합니다. 이 시대도 예수를 입으로 시인하면 죽음의 핍박까지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운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예수 믿는다고 죽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의 이익을 위하거나 또는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여 예수님을 시인하지 못하는 경우가 없습니까?

 

 

 

 

무엇이 두렵습니까? 먹고 사는 일이 두렵습니까? 병들까, 실패할까, 비참하게 죽을까봐서 두렵습니까? 종종 병원심방을 가보면 온통 죽을 사람들이 누워있습니다. 의학이 발달해서 오히려 사람들이 고생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옛날 같으면 병도 모르고 죽어갔을 텐데 이제는 그것을 고치겠다고 온갖 고생을 다하지만 결국은 늙고 병들어가는 것을 해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것도 두려움이 됩니다. 나는 그렇게 되지 않아야겠다고 온갖 장치를 다 해 둡니다. 그래서 가장 많은 광고가 생명보험 광고일 것입니다. 서로 경쟁하듯이 자기 회사에서 인생의 노후를 책임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누가 인간의 두려움을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요한계시록에서 지옥에 가는 목록 중 첫 번째가 흉악범이 아니라 두려워하는 자입니다. 두려움은 이미 에덴동산에서부터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모든 인간이 다 지옥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내일에 대한 두려움, 자기 몸이 괴로워질까 하는 두려움, 명예를 잃을까 하는 두려움, 온갖 두려움이 사람들을 일생동안 종노릇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에서 이기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믿음입니다. 사랑입니다.

몇 주 전 수요일 저녁 설교에 두려움 없는 사랑이라는 설교를 하였습니다. 오늘 말씀과 연결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것입니다. 그런 사랑은 믿음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인 것입니다. 이것이 있는 사람은 두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믿음 소망 사랑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아무리 두려움을 없애려고 하여도 해결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선물을 받은 사람은 두려움을 이깁니다. 주님의 사랑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란 세상에서 죽임을 당하여도 괜찮은 사랑입니다. 아니 기꺼이 세상에서 죽음을 환영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6-7절을 봅니다. 참새 다섯 마리가 앗사리온 둘에 팔립니다. 앗사리온은 아주 작은 동전의 명칭입니다. 한 앗사리온에 참새 두 마리인데(마10:29) 두 앗사리온에 다섯 마리라면 한 마리는 으로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덤으로 주어지는 참새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 매일 몇 십 개씩 빠지고 나기도 하는 머리카락까지 다 헤아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새는 두렵지 않습니다. 비록 오늘 사냥꾼에 잡혀서 술안주가 될지라도 그 죽고 사는 일이 하나님의 손에 있기에 즐겁게 짹짹 거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새를 술안주로 먹는 인간들은 온갖 두려움에 사로잡혀 삽니다. 술을 먹는 것도 두려움을 잊고자 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참새보다 귀하다고 합니다. 여기서 너희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니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 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두렵다면 우리의 믿음 없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이런 믿음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두려워할 분을 만났다면 다른 것은 두렵지 않은 것입니다. 모세가 두려운 하나님을 만나고서 바로 왕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바로의 궁에 있는 금은보화와 세상의 권세보다 그리스도와 함께 능욕 받는 것을 보배로 여겼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두려운 하나님을 만나고서 세상에 그 어떤 것도 두려움 없는 선지자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떠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권고를 받는 자들입니다.

 

 

 

 

10-12절을 봅니다. 예수님을 주로 시인해야 구원을 받는데 예수님을 부인하여도 용서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함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말씀 때문에 오늘도 여러 사이비 단체에서 이상한 성령 운동한다는 사람들이 큰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자로 오셨을 때는 예수님도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외모를 보고서는 실족할 수도 부인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예수님을 증거 하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행하심을 귀신의 힘으로 보는 그들이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무엇이 됩니까?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의 일을 기억나게 하시고 예수님에게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성령이 증거 하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됩니다. 또한 성령이 증거 하는 이 예수님은 인자되심을 인하여 모든 심판의 권세를 아버지께로부터 다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십니까?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신다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이 땅에 사셨습니까?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살려내셨습니다. 세상의 관원들과 임금들이 요란하게 예수님을 죽였지만 그러나 죽인 이후에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무덤 문을 지키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죽은 이후에도 살리시고 지옥에도 보내시고 천국에도 보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을 다시 일으키신 것입니다. 오늘 이 예수님의 운명 속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는 것이 믿음의 일입니다. 이런 자들은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에 끌려가도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성령께서 하실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고서 세상의 힘을 가지고 두렵지 않다고 큰소리치는 자들은 두려우니 허장성세로 더 큰 소리를 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다시 오시는 그날에 모든 것이 다 판결 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12-17절입니다. “12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 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 같이 되며 13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 같이 땅에 떨어지며 14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 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 자리에서 옮기우매 15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16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누가 감히 서겠습니까?

그러므로 참으로 두려워할 분을 지금 두려워하면서 사는 것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다른 것으로 주눅 들거나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이 믿음으로 명절에 그 어느 누구를 만나도 담대하게 예수님의 증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2:13-34 오늘밤 네 영혼은? 2007. 9. 30

 

1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14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16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18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23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25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6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27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28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31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자신의 형이 아버지의 유산을 가로챈 것을 공정하게 나누어 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율법에 재산의 상속법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 온 것은 예수님을 랍비로 보았거나 아니면 예수님은 공평하게 해결해 줄 것으로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답변을 주시는 것입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답변을 들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삼성그룹 회장이 자기 아들에게 변칙상속을 하는 것이 불법이고 탐심이지 어떻게 한 개인이 정당하게 받을 상속을 해결하여 달라는 것을 탐심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이런 항의가 나올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탐심이라고 하면 탐심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을 지으신 분이시기에 그 사람의 속마음도 다 아시는 것입니다.

 

 

 

 

상속의 문제로 다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 가난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들 먹고 살만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정작 가난한 사람들은 상속은커녕 가난이 대물림되는 현상입니다. 그러니 상속의 문제로 다투는 이야기조차 사실은 있는 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무 유산도 없는 부모를 둔 자녀는 상속 문제로 다툴 일은 없는 것입니다. 몇 년 전 추석 때에 자식들 간에 상속문제로 칼부림이 났는데 그 아들들의 직업이 의사며 교수며 사장이었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상속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사람에게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시면서 생명의 문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소유만 넉넉하면 행복하게 잘 살 것이라고 여깁니다. 우리의 모든 불평과 원망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 소유가 넉넉하지 못하다고 여기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이 소유의 문제란 얼마나 오래된 싸움인지 그 어느 누구도 해결하지 못하는 인류의 숙제입니다.

 

 

 

 

반 집사님이 ‘좋은 글’이라고 사진 찍어 올린 글이 있던데 그 글이 법정 스님의 글입니다. ‘무소유’라는 유명한 책도 지은 사람입니다. 그런 무소유를 주장해서 소유의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스님들이 각목 들고 설치는 것이나, 대형교회를 자기 아들에게 세습하는 것이나 다들 소유의 문제로 다투는 것입니다. 그렇게 피 터지며 싸우는 것은 그런 소유의 넉넉함으로 자기 생명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부자가 농사를 지었는데 그해 소출이 많아서 기존의 창고로 부족한 것입니다. 그 많은 소유물을 더 소유하기 위하여 기존의 창고를 헐고 더 넓게 지었습니다. 그곳에다 가득 채워두고서는 아주 만족해하면서 내 영혼아 몇 해 먹을 것을 쌓아두었으니 이제 편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이 모아둔 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어리석은 자가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일용할 양식만 있어도 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소유를 늘리려고 온 힘을 다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삶의 모습은 생명의 삶이 아닌 것입니다. 오직 자기 생존을 위하여 몸부림치면서 소유를 늘려 가지면 그 소유가 자신의 목숨을 연장하지 못할 뿐 아니라 더더구나 생명과 상관이 없는 삶이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들이 이러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헌금을 강조하면 좋겠지요! 이 말씀에 걸리지 아니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기를 위한 것이 우선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면서 하나님께는 인색하기에 복을 받지 못한다고 하면서 교회에 헌금하라고 합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합니다. 그러면 교회가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가 아닙니까? 교회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에 교회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사랑해야 하는데 왜 십자가의 피보다 교회가 돈을 더 사랑하면서 그것을 탐심인줄 모르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면 하나님께 부요하지 못하다는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6:13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두 주인을 하나님과 재물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인 사람과 재물이 주인인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바리새인들은 평소에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살았기에 열심히 십일조도 하고 텃밭의 향신료까지 십일조를 한 사람이지만 그 속은 돈을 사랑한 사람들이었기에 바리새인들이 비웃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사는 것에 대하여 회개가 나옵니까? 비웃음이 나옵니까? 예수님을 믿습니까? 돈을 믿습니까? 세상을 살아가면서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두다 돈에 모든 것을 다 걸고 살아갑니다. 돈이 없으면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는 것이 자기의 생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철석같이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쩐의 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너는 하나님을 믿고 살겠느냐는 것입니다.

 

 

 

 

22절을 봅니다. 자신의 재물이 없으면 자신의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가 됩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그런 염려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30절에 보시면 그런 염려는 아버지가 없는 세상의 백성들이나 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너희 아버지는 그런 것이 있어야 할 것을 다 아신다고 하십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고 목숨이 의복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고 마실 까는 목숨이 있는 사람이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목숨을 누가 붙들고 있는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지난주는 덤으로 팔리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떨어지지 아니하고 머리카락까지도 헤아린바 되신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24절에서 까마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까마귀는 율법에 의하면 부정한 새입니다. 그런 부정한 새마저 하나님께서 먹이신다는 것입니다. 욥기 38:41절에서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는 하나님의 질문에서 욥은 입을 가리고 회개할 뿐입니다. 우리가 언제 까마귀 새끼 먹을 것을 걱정이나 한 적이 있습니까? 그저 내가 먹고 살 재물만 염려하였지 않습니까? 시147:9절에서 하나님께서 비를 주시므로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까마귀는 하나님께 부르짖는데 우리는 하나님보다 재물을 의지하니 부정한 까마귀 새끼보다 믿음이 없는 자들입니다.

 

 

 

 

25절에서 누가 너희 중에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한 자라면 약 30센티미터입니다. 요즈음 키가 크기를 더 원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코미디 프로그램도 ‘키 컸으면’하는 코너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키를 30센티미터나 키울 수 없는 것은 누구나 다 압니다. 그래서 다른 번역에는 목숨을 조금이라도 더 늘일 수 있는가 하는 것으로도 되어 있습니다. 어떻든 키나 목숨이나 사람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지극히 작은 것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들의 키나 목숨을 자기의 것인 양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다들 착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언제 실감하게 될까요? 사고가 나서 무엇이 부러지면 압니다. 늙고 병들어서 자기 몸이 자기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을 때 자기 몸이 자기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자기 몸이 자기 것인 줄 평생 관리하면서 몸에 좋다는 것은 비싼 것이라도 마다않고 다 먹었는데도 늙어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요즈음 우리나라의 질병은 못 먹어서 오는 질병이 아니라 너무 잘 먹어서 오는 질병이 훨씬 더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몸에 좋다는 것 너무 많이 챙겨 먹으면 죽을 때 그렇게 고생한다고 합니다. 그런 돈 있으면 가난한 자들에게 베푸시기 바랍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베푸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27절입니다. 백합화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실도 만들지 않고 옷감을 짜지도 않지만 가장 부자였던 솔로몬이 그 영광으로 입은 옷도 이 꽃 하나만도 못하다는 것입니다. 유명한 백합화만이 아니라 우리가 이름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조그마한 들풀 하나에 피는 들꽃도 앙드레김의 옷보다 더 아름다운 것입니다. 추석연휴에 영화를 보고서 내려오는데 미소니 매장에 옷을 하나 보았습니다. 남자 티셔츠 하나가 14만 7천원인 줄 알았는데 동그라미가 하나 더 붙어 있었습니다. 그런 옷 입으면 늙지 않습니까? 병들지 않습니까? 죽지 않습니까? 추석연휴에 고 권정생씨에 대한 특집 하나를 일부러 챙겨 보았습니다. 평생 가난하게 살면서 옷은 주워 입었고 5평 남짓 오두막에서 살았습니다. 그의 책 인세를 다 북한 어린이를 위하여 사용하였답니다.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보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엇을 더 맛있게 먹을까? 무엇을 더 멋있게 입을까를 염려하고 있다는 것이 예수님 앞에서 회개할 일인 것입니다.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하나님께서 입히시거늘 왜 내일에 대하여 염려하느냐 이 믿음이 적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29-31절입니다. 그런 것을 구하지도 말고 염려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고 합니다. 마태복음의 평행구절에서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의 나라를 구하라는 것은 나의 나라가 아닙니다. 나의 나라란 나의 소유로 쌓아가는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는 나를 지킬 수가 없습니다. 오늘 밤에 내 영혼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나라가 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의 나라는 주님의 것으로 세우시는 나라입니다. 주님의 의와 주님의 공로로 세워지는 나라이기에 결코 무너지지 아니할 영원한 나라인 것입니다. 이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기에 믿음의 사람만이 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결코 많지 않습니다.

 

 

 

 

32절에서 적은 무리여 두려워말라고 합니다. 교회 다닌다고 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사데 교회에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은 몇 명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적은 무리, 재물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런 자들에게 그의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나라 자기의 왕국을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다 썩고 불타서 없어질 것들입니다.

33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소유를 팔아서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합니다. 이것이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입니다.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지 않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는 곳입니다. 너희 보물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땅의 재물을 보물로 여기면 마음이 땅에 빼앗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보물이 예수 그리스도로 믿는다면 땅을 것을 생각하지 않고 위엣 것을 찾을 것입니다. 그곳에 우리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 안에 우리의 생명이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금요일 성경공부를 마치고 김 집사님 댁에서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처음 오신 분이 계셔서 한 참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참으로 험악한 세월을 보내신 분이신데 이제 예수님을 조금 알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분이 하는 말이 어느 목사님이 30년 이라는 말이 마음에 남더라는 것입니다. 30년만 견디자는 이야기였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났는데 희란씨도 자기 남편에게 40년만 지나면 이 모든 것들이 다 소용없어진다는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잠깐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우리 주님의 약속을 믿고 사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밤에 주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도로 찾으신다는 생각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12:35-48 예비하고 있으라 2007. 10. 7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하리라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의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9 너희도 아는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적이 어느 때에 이를줄 알았더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41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42 주께서 가라사대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45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노비를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지난주에 본 말씀에서 너희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조상 대대로 이 땅에서 발 딛고 살아왔기에 이 땅이 전부인줄 알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시고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를 골로새서에서 아들의 나라라고도 합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여야 하는가 하면 지금 보이는 하늘과 땅은 영원한 나라가 되지를 못합니다. 사람들이 지금까지 연구하고 실천해온 모든 것들을 다 동원한다고 하여도 이미 영원한 생명에서 떠난 인생이란 뿌리가 뽑혀진 나무와 같은 신세입니다.

 

 

 

 

늪에 빠진 사람이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딜레마를 말할 때 마다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의 비유를 이야기 하였습니다. 황새가 진흙에 다리가 빠져서 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참 생각 끝에 머리를 박고서 다리를 빼 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머리가 박혀서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시장에서 어느 교회 집사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느 지역에 새 예배당을 지어서 이사한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사람들이 많이 오지요 라고 하였는데 그 분이 하는 이야기가 밑에 돌 뽑아다 위에 놓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유명한 학자보다 전혀 못하지 않는 통찰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먼저 구할 것이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먼저 구하는 것도 나의 나라이고, 최종적인 것도 나의 나라인 것입니다. 나의 나라란 나의 소유가 넉넉하면 된다는 것이 나의 나라입니다. 그것이 생명인줄 알고 땅에 보물을 쌓기에만 급급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란 나의 소유로 살아가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한량없는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만으로도 염려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까마귀나 한포기 들풀들도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구합니까? 나의 나라를 구합니까? 믿음의 사람들입니까? 세상의 사람들입니까? 이것을 어떻게 점검할 수가 있습니까? 지난 주 보았던 34절을 봅시다. 너희 보물 있는 곳에 너의 마음이 있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보물이란 사람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입니다. 이 보물이 땅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땅의 것을 구하고 쌓아두고 사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물이 하늘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늘의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를 믿는 다는 사람들조차 땅의 보물을 쌓아두는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까? 역시 믿음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예수 믿고 죄 사함을 받고 영생 얻는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운명에 합류되는 것이며, 또한 그런 자들에게 하늘나라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 약속을 믿는 자는 장차 나타날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사모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떤 자세로 기다려야 합니까?

 

 

 

 

35-40절의 말씀을 봅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고 합니다.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고 합니다. 이 당시의 예루살렘의 혼인잔치는 주로 밤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잔치는 일주일도 걸리고 한 달도 걸리는 것입니다. 그런 주인이 언제 올지는 오직 주인의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종에게 언제쯤 올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종이란 주인이 언제 오시든지 띠를 띠고 등불을 준비해서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아무 때 오든지 간에 그 종들이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이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종이 이렇게 행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만약 이렇게 깨어 있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45-46절을 봅니다. 주인이 늦게 오리라고 생각하고 종이 노비를 때리고 여기서 종이란 청지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종 가운데 주인의 집 재산을 다 담당하는 집사인 것입니다. 이들의 권세는 노예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청지기가 종들을 때리고 먹고 마시고 있다면, 생각지 않는 날에 주인이 와서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않는 자에 받을 율에 처한다고 합니다. 이 당시 종의 생사여탈권이 주인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은 주인이 언제 오시든지 밤중에 오시든지 새벽에 오시든지 깨어 있어서 맞이하는 종은 복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인이 이 종에게 보상할 필요가 있습니까? 누가복음 17:5-10절을 봅니다. “봉독” 제자들에 믿음을 더하여 달라는 말씀에 예수님께서 한 종의 예를 들어서 말씀합니다. 종이 종일 밭에서 일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는데 이런 종에게 주인이 수고했다고 쉬고 먹으라고 할 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종이 종일 수고한 것도 당연하고 또 집에 와서는 띠를 띠고 주인의 식사 수종을 다 들고서 그 후에 먹으라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였다고 주인이 그 종에게 사례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마땅히 행할 것을 행한 것뿐이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믿음을 더하여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있습니까?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한 것뿐입니다. 그저 무익한 종입니다. 이것이 믿음인데 우리는 죽도록 충성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는 일에는 죽도록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위하여 봉사하라고 하면 어떤 반응이 나옵니까?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자기가 섬기는 기회가 주어지면 그것을 너무나 억울해 하는 것입니다. 제가 방에 있어도 밖의 이야기들이 들립니다. 형제를 섬기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인데도 왜 나만 손해 보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37절을 봅니다. 종들이 깨어 있어 주인이 언제 오시든지 문을 열어드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을 한 것입니다. 주인이 칭찬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무익한 종이라고 하여야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런 종을 주인이 어떻게 대접하시는 것입니까?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주인의 자리에 앉히고 수종을 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나라가 세상에 있습니까?

 

 

 

 

남북 정상회담에 재벌 회장들이 참여했습니다. 그들이 자기 회사에서 왕과 같은 사람들인데 수행원도 없이 자기 가방을 들고 온갖 제제를 받으면서 밥도 제때 못 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니 정치권력이 더 무서운 것이지요! 이런 회장들이 회사의 직원들의 종이 되어서 섬기겠습니까? 정치하는 사람들은 입에 발린 말이 국민을 위한다고 하는데 그들이 과연 국민을 섬기고 있습니까? 국민들 위한다고 나서지 않는 것이 국민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13장을 봅시다. 1-2절입니다.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가 된 줄 아시고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 끝까지 사랑하는 모습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종이 되신 것입니다. 베드로 차례가 되자 제가 주님의 발을 씻겨야지 어떻게 주님이 저의 발을 씻기느냐고 거부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놀라서 그러면 발만 아니라 온 몸을 씻어 달라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한 번 목욕한 사람은 발만 씻으면 된다고 하시면서 베드로의 발을 씻겨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모습입니다. 주인이 종의 발을 씻어주시는 나라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펼쳐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시면서 제자들에게도 너희도 서로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와 선생이 되어서 종과 제자들의 발을 씻겼듯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곳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런 나라가 좋습니까? 세상의 능력을 따라서 높은 자들이 낮은 자들을 학대하고 군림하는 그런 나라가 좋습니까?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진 자, 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싫어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세상의 정치 종교 경제적인 기득권자들은 예수님을 싫어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메달아 죽이는 일에 그들이 다 합동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그 나라를 증거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세상을 뒤집어엎는 혁명으로 이루어낼 수가 있습니까? 목사가 성도들의 발을 씻어주고 선생님이 학생들의 발을 씻어주는 세족식으로 이루어 낼 수가 있습니까? 그런 시도들을 2천년 동안 실천해 왔지만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은 오늘도 주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어떤 자세로 기다리는 것입니까? 우리 주님께서 이 역사의 문을 열고 들어오실 때에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기다리다가 주님을 맞이하는 자들이 복된 자들입니다. 그러면 그때가 도대체 언제입니까? 때란 종이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오고 싶은 때 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39절에서 도적이 오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도적이 언제 올지 예고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비하라고 합니다.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고 하십니다.

 

 

 

 

41-48절입니다. 이 비유에 대한 해석을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하신 것입니까? 여기에 예수님은 즉답을 하시지 않으시고 다음의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서 주인에게 그 집의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사실 우리는 다 청지기들입니다. 모든 것을 다 은혜로 받았기에 나의 것이라고는 원래 없는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청지기가 아니라 자기기 주인이라고 여기며 사는 불신앙인 것입니다. 여기서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주는 청지기의 일을 하는 것처럼 제자들은 구약과 신약의 양식들을 때를 따라 나누어 주어야 하는 청지기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생된 자들이 더 많은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많이 맡은 자는 많은 책임이 따라는 것입니다. 많은 재물을 가진 자도 많은 책임이 있습니다. 많은 권세를 가진다는건 많은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에 사용하라고 맡겨 주신 것을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신을 위하여 쓰고 하나님께 부요치 못한 자의 모습이 바로 책망 받을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며 진실하고 충성되게 청지기의 직분을 감당하는 자들은 복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맡길 것이라고 합니다. 하늘나라의 유업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이 늦게 오리라고 생각하면서 먹고 마시고 취하여 있다면 생각지 아니한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이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치 아니한 자의 받을 율에 처하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주님 오시기를 밤이나 낮이나 기다리고 있습니까? 저 하늘에 이상한 구름만 떠도 주님 오실 것을 생각하십니까? 문 밖에 무슨 소리만 들려고 이제 주님 오시려는가 하면서 기다리고 있습니까? 나이가 드신 분들은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사실은 잠시입니다. 그런 말하다가도 남북 통일되고 철도가 연결되면 열차타고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유럽까지 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그래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삽니다. 젊어서는 아직 세상을 좀 더 즐기고 나중에 늙고 힘이 없을 때에 그때 예수님을 믿겠다고 합니다. 왜? 예수님만 믿으면 된다고 하니 그렇게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믿음이라면 귀신도 웃습니다.

 

 

 

 

그러므로 예비하고 있으라고 합니다. 깨어 있으라고 합니다. 그러나 누가 과연 깨어있고 예비할 수가 있습니까? 먼저 주님으로부터 섬김을 받은 자만이 기다릴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섬김을 받았습니다. 끝까지 사랑하심을 받았습니다. 그 발 씻김을 받고 나서도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끝까지 사랑하심, 그 끝까지 섬기심이 있었기에 베드로가 제자가 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도 십자가형에 처형을 받는데 자신이 감히 십자가에 똑 바로 박힐 자격도 없다고 하여 거꾸로 십자가에 박아 달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종이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무익한 종이라고 하여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주인이신데도 거역하고 반역한 종을 섬겨 주셨습니다. 단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정도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20:28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자기 두 아들을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하였을 때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결론입니다. 세상에서는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권세를 부리지만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시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가장 크고 높으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은 가장 높은 자리에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게 자기의 살과 피를 주시기까지 섬기신 주님입니다. 이런 섬김을 받은 자들은 또한 형제를 섬기게 될 것입니다. 이런 섬김을 교회에서 부분적으로 맛보는 것입니다. 목사는 말씀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장로는 장로의 역할로 섬기는 것입니다. 권사나 집사는 또 자기의 직분을 따라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직분은 다 섬기는 직분입니다. 그러나 결코 온전히 못합니다. 그래서 온전한 섬김의 나라인 예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깨어 기다리며 사는 것입니다.

 

 

 

 

금요일 성경공부하면서 요한 계시록의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문을 두드린다는 말씀을 아가서 5:2-7절 말씀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이 말씀으로 오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2 ○내가 잘찌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

예수님의 사랑을 맛 보셨습니까? 주님의 살과 피로 섬김을 받는 그 사랑을 받았습니까? 그런데 이런 예수님이 새벽에 문을 두드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잘지라도 마음은 깨어 있었는데도, 꾸물대다가 문을 열어보니 이미 신랑이 가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 문고리에 몰약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기에 손에 몰약이 묻었습니다. 몰약이란 좋은 향유이지만 예수님의 시체에 바른 향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신랑이 찾아와서 주고 간 것은 죽음같이 강한 사랑을 주고 간 것입니다. 그 사랑도 귀찮아서 늦게 나갔다가 이제야 사랑하므로 병이 들었다며 신랑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사랑하므로 병이 들었다면 이 병은 신랑 만나기 전에는 치료가 되지 않습니다. 이 마음으로 주님께서 다시 역사의 문을 두드리실 때에, 오늘 밤이라도 다시 오실 때에, 얼른 열고 맞이할 준비로 살아가는 신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12:49-59 불을 던지러 오심 2007. 10. 14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54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55 남풍이 붊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57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 58 네가 너를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저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관속에게 넘겨주어 관속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59 네게 이르노니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여서는 결단코 저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평화의 기도라는 노래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눈물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 이런 가사입니다. 이런 기도나 노래를 들으면 사람들은 다 공감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너무나 낯설고 당혹스럽습니다. 예수님께서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고 합니다. 화평을 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분쟁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집안에서도 분쟁이 일어나서 서로 갈라진다고 합니다. 아니 예수님이 오셨으면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시고 분쟁이 있는 집안에 화평이 와야지 어떻게 분쟁이 일어나게 만드시는 것입니까? 49절을 봅니다. 내가 불을 던지려고 오셨다고 합니다. 불이란 구약에서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으로 사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 타는 횃불 모양으로 지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소멸하는 불이라고도 합니다(신4:24). 또한 심판을 말할 때에 불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소돔과 고모라성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죄악이 관영하여 하늘에 사무친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사람의 모양으로 소돔과 고모라 성을 직접 방문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 성에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이 천사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였지만 그 성의 사람들은 이 천사마저 자기들의 성적인 노리개 감으로 삼고자 롯의 집을 포위하고 농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성은 더 이상 고칠 수 없는 지경임이 사실로 확인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너의 가족들을 데리고 이 성을 떠나라고 합니다. 이 성은 불에 살라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딸들과 약혼한 사위들에게 이 성이 멸망하니 떠나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미적거리는 그들을 두 천사가 네 가족의 손을 잡아 성 밖으로 끌어냅니다. 한 가지 주의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천사들이 서둘러 이들을 끄집어내는 것입니까? 천사들의 눈에는 지금 하늘에서 유황불이 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끌려 나오면서도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것입니다. 얼마나 미련이 남아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돌아보는 순간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불을 던진다는 것은 분명히 심판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심판만은 아닙니다. 불 가운데서도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아브라함의 기도를 생각하셔서 롯의 가족을 구원하여 내시는 것을 보면 불이란 심판과 구원을 동시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들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더욱 구체화 됩니다. 선지자들이 불을 말할 때에는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을 정결케 하는 과정이 불로 나타납니다.

 

 

 

 

구약의 마지막 성경인 말라기 3:1-6절을 봅니다. “봉독” 구원과 심판의 말씀이 동시에 주어집니다. 구원이란 불로 금을 연단하듯이 자기 백성을 정결케 하시는 것입니다. 표백제로 깨끗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불은 또한 심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렘5:14). 그러므로 불이란 정결케 함과 심판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불을 예수님께서 던지시겠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3:15-17절을 봅니다. “봉독”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있을 때에 사람들이 세례요한이 그리스도인가 하면서 의논하였습니다. 그때 세례요한이 증거 하기를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은 능력이 많으신 분이신데 그 분의 신들매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은 구원과 심판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불을 던지러 오셨다는 것은 구약의 이런 예언들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불을 던지시기 위하여 예수님 자신이 받으셔야 할 세례가 있습니다. 이 세례를 이루기까지 얼마나 예수님이 답답하셨는지 그 답답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이미 이런 불이 붙었다면 무엇을 더 원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불이 붙지를 않았습니다. 이런 불을 붙이려고 불쏘시개처럼 온 선지자들을 이 세상이 다 배척하여 버린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 천사가 찾아왔던 것처럼 하나님을 자기들만 알고 자기들만 잘 섬긴다는 이스라엘 땅에 그곳도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은 이미 소돔과 고모라 성이었습니다. 이미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도 예루살렘의 관원들을 향하여 소돔의 관원들아 고모라의 백성들이라고 하였습니다(사1:10). 그들의 무수한 제물과 분향함을 거부하십니다. 성전 마당만 밟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들이 제사를 드리는 것은 자기들의 구원을 확인하고서 또 다시 악을 행하러 가기 위한 요식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최종적으로 불을 던지기 위하여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가장 사랑한다는 유대인들, 그 중에서 가장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을 보니 그들은 외식하는 자들이요, 입술로만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고 마음은 먼 자들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뱃속이나 채우려는 자들 즉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자들이 득실거리는 성전을 보고서 어떻게 불로 태워버리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이 불을 던지기 위하여 예수님이 받으실 세례가 있습니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이 받으시는 물세례를 받으심으로 죄인들과 연합이 되셨습니다. 그 물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이 다시 받으실 세례가 바로 십자가를 지시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세례를 받으심은 저주 받으심입니다.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저주의 세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신 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구약적인 표상으로 불의 심판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의 저주아래 온 자들, 즉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 되는 것이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불을 던지러 오셨다는 것은 십자가를 던진다고 보아도 됩니다. 이 십자가의 이야기는 유대인들에게나 헬라인들에게나 다 거리끼고 미련하고 어리석어 보시는 불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니 세상에 분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일어나는 현장이 십자가의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십자가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사도행전 24:5절에 염병이라고 합니다.

 

 

 

 

51-53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불을 던지러 오셨기에 2천 년 전의 유대사회도 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52절에서 이 후부터라고 합니다. 즉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승천하신 후 성령을 보내심으로 본격적으로 분쟁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한 가정이 다섯이면 둘과 셋이, 아버지와 아들이, 어미와 딸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분쟁이 일어납니다. 세상에도 이런 분쟁이 일어납니다. 대부분의 분쟁은 자기들 이해관계로 일어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불을 던지시면 왜 가정에 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마태복음 10:34-36절입니다.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가족이 서로 불화하며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미가서 7장에서 이스라엘이 부패하였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불을 던지신다는 것은 선지자들의 심판에 대한 예언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불의 심판 가운데서 구원받는 자들이 나오는데 그들은 집안의 원수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이 들어올 때에 제사문제가 굉장한 걸림돌이었습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다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하면 집안에서 내어 쫓긴 것입니다. 집안에서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약 2년 전에 최 현주 집사님 회사 동료도 교회에 몇 번이나 왔는데 주말 등산을 줄이고 교회로 오려고 하였는데 그 분이 장손이라 그 문중에서 제사를 모시는 조건으로 상당한 재산을 물려준다는 말에 고민하더니 아직 보이지 않습니다. 만약 거부하고 예수 믿는다고 하면 재산 상속도 없다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37-39절을 봅니다. “37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분쟁의 이유가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느냐 다른 것을 사랑하느냐의 싸움입니다. 남편이 예수님을 사랑하여 헌신하려고 하면 누가 말립니까? 아내가 말리는 것입니다. 아마 지금 여러분들의 가정에서 분쟁이 일어나고 있을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그럴 때에 해결책은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로 해결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불을 던지러 오셨고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종말의 현상입니다.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로 이미 2천년 전에 이 땅에 불이 던져졌습니다. 그 불이란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이며 이 십자가는 마치 강력한 블랙홀처럼 자기 백성들을 빨아들이는 것입니다. 도저히 자기 힘으로 벗어날 수가 없는 모양으로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변에서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나도 예수님을 부인할 수가 없는데 어쩌라는 말인가 하면서 울면서도 예수님을 따라 갈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지금도 예수님께서 불을 던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이 이미 종말의 시작이었습니다. 초림이 종말이었음이 확정되는 사건은 재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종말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종말의 특징을 말씀하셨습니다. 종말은 분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부가 그물을 바다에 던져서 건져 올리고서는 좋은 것은 담고 나쁜 것을 버리는 식입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분리되는 것입니다. 양과 염소가 분리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부분적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예수님 재림하시면 확정이 되지만 그 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분리가 되는 것입니다.

 

 

 

 

54-59절입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일기에 관심이 많습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도시 사람보다 일기에 민감합니다. 그래서 구름이 서쪽에서 일어나면 소나기가 올 것을 알고 남풍이 불면 무더울 것을 잘 압니다. 천지의 기상을 잘 분별하는데 그들이 시대는 분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표적을 분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종말이기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데 그들이 분별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말이란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심판을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 가기 전에 중간에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재판관에게 끌고 가서 재판장이 너를 관속에게 넘겨주고 옥에 가둘까 염려한다는 것입니다. 네게 이르노니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면 결단코 저가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호리란 로마시대 동전의 가장 작은 단위입니다. 이렇게 작은 것까지 해결하지 아니하면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죄란 많고 적음이나 강력하거나 미미하거나를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죄라도 그 죄의 삯은 사망이요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대 앞에 서기전에 호리라도 다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모든 죄를 해결할 수가 있습니까? 죄를 알아야 해결할 것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인데 우리가 말로서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하지만 얼마나 내 인생을 내가 주인인양 살아왔습니까?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는 말씀을 알고 있지만, 실상은 살아도 나를 위하여 죽어도 나를 위하여 교회를 나와도 나를 위하여 나오고 있다면 교회 나오는 것도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대체 우리는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갚기는커녕 우리 평생에 애를 써도 호리도 갚지 못할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다시 요약해 봅시다. 불을 던지러 오신 주님 이미 이천년 전에 불이 붙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때부터 지금까지 시간과 상관없이 종말인 것입니다. 이 불은 심판과 구원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주님의 불에 심판을 받는 자리에 서는 것이 말씀을 듣는 자리가 됩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서 떠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돌보십니다. 그들은 구원에 이른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는 자들은 그 말씀이 구원이 아니라 심판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말씀을 보고 들으면서도 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아직도 주님이 재림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그 이유는 아직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할 자들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이 증거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회개하고 예수 믿어야 할 자들이 누구입니까? 세상에서 예수님도 모르고 그래서 믿지도 않는 그들만이 회개할 자들이 아니라 오늘 예수 믿는다고 앉아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아닙니까? 언제 한번이라도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누가복음 13:1-9 더 늦기 전에 2007. 10. 21

 

1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 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8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 이 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1절에 보시면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왔다고 합니다. 이 그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앞의 말씀을 하시는 중입니다. 바로 앞의 말씀은 천지의 기상을 분별하면서도 이 시대를 분변치 못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시대의 분변이란 종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불을 던지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불을 던지심으로 지금 분리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분리가 일어나는 것이 마지막 종말의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재판장 앞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 재판이란 모든 사람이 다 가야하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며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재판장에 이르기 전에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청산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썩은 일로 예수님께 고하는 것입니다. 여기의 빌라도란 주후 26-36년까지 유대지역을 통치한 로마의 총독이었습니다. 사도신경에서 빌라도에게서 고난을 받으시고 하는 그 인물입니다. 이 사람이 갈릴리 사람 몇이 성전에서 희생제물을 드리려고 하는데 빌라도가 이들을 죽이니 그들의 피가 제물에 썩여버린 것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외세를 배격하는 일에 열심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들이 예루살렘에 오는 것을 첩자들이 빌라도에게 보고하였을 것이고 빌라도는 이들을 죽임으로 그들의 독립운동을 잠재우고자 죽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경악할 일입니다. 하나님께 짐승으로 희생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을 칼로 죽여 버렸으니 그 사람의 피가 희생 제물에 뒤섞여버린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도대체 하나님이 살아 계신가 하는 의심이 들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중에 이방인의 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일이 일어난 것을 보고서 어떤 해석들을 하였겠습니까? 오늘날도 예배드리려고 가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해석하시겠습니까? 이 당시의 유대인들은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은 그들의 죄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본 것입니다.

 

 

 

 

2-3절을 봅니다.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그렇게 해를 받은 것이 모든 갈릴리 사람들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고 하십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다가 그 제물위에서 죽임을 당하였으니 얼마나 큰 죄를 지었으면 저렇게 죽었을까? 그런 생각들을 하는 자들에게 너희도 다 그렇게 죽임을 당하여야 되는 사람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죽음이 닥치지 않았는가 하면 너희가 그들보다 죄가 더 많지 않다던지 더 선하다던가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과 같이 망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2년 전에 태국 푸켓에 대규모 쓰나미가 몰려왔을 때에 한국의 어느 큰 교회 목사가 그들이 죄가 더 많아서 그런 심판을 받았다고 하였다가 얼마나 많이 욕을 얻어먹었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그들보다 죄가 더 작아서 그런 재앙이 오지 않고 올해도 이렇게 풍년이 온 것이라는 말입니까? 푸켓보다 훨씬 더 죄악이 관영한 곳이 이 땅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재앙들을 보면서 회개하여야 할 사람들이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을 보면 이 땅에 예수 믿는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해석하는 것입니다. 무슨 재앙을 당하거나 교통사고가 나거나 중병에 걸리거나 일찍 죽는 것을 보고서 죄가 더 많아서 그렇다고 보는 것은 유대인들의 생각과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유다와 사마리아와 갈릴리 이렇게 세 지역으로 나누어집니다. 유대 사람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개같이 여겼고 갈릴리 사람들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이방인 지역과 같이 있는 곳이기에 그곳에는 선한 자들이 나오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도 갈릴리 나사렛 출신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보고서도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빌립이 예수님을 소개할 때에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나중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보고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였을까요? 무슨 죄가 저리도 커서 저주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도리질 하고서 떠나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보고서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망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4-5절을 봅니다. 갈릴리 사람들을 예루살렘에 살던 사람들이 깔보았는데 그렇다면 예루살렘의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서 열여덟 명이 죽은 것은 그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다른 사람들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고 하십니다. 아니라고 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갈릴리 사람들이나 예루살렘 사람들이나 오늘 우리나 간에 심판받고 멸망하는 것이 이미 기정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죽음의 심판을 벗어날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이후에도 영원한 운명을 결정할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심판대 앞으로 밀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6-9절입니다. 이 두 가지의 사건을 말씀하시면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를 심고서 그 열매를 구하고자 삼년을 기다렸는데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과수원 지기에게 찍어 버리라고 합니다. 어찌 땅만 버리겠느냐고 하십니다. 포도원에 왜 무화과를 심었겠습니까? 포도나무의 열매가 시원찮아서 무화과를 심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무화과마저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농부가 과일나무를 심는 이유는 열매를 얻고자 합입니다. 그런데 열매가 맺히지 않거나 열매가 좋지 않으면 나무를 뽑아버립니다.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포도나무로 또는 무화과로 비유를 하십니다. 이사야 5장1-2절의 말씀을 봅니다. “1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시면 포도원을 위하여 부족함 없이 다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들 포도를 맺었기에 황무케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열매란 공평의 열매를 바랐는데 오히려 포학이요 의로움을 바랐는데 도리어 부르짖음이 가득하였다는 것입니다.

 

 

 

 

호세아 9:10절입니다.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열조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저희가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의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고 기쁘게 받아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들을 사랑으로 대하여 주셨건만 그들이 행한 일이란 우상숭배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포도나무도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하고 대체작물인 무화과도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무화과마저 찍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본문 8-9절을 봅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그러면 열매가 맺힐지 모릅니다. 만약 그때 가서도 열매를 맺지 아니하면 그때 찍어버리소서! 이 무화과나무는 일 년 유예기간을 얻었습니다. 이 설교의 제목을 생각하다가 집행유예라는 말이 생각나서 찾아보았습니다. 사전적 정의가 이렇습니다. “일단 유죄를 인정하여 형을 선고하되, 정상을 참작해 일정한 요건 하에 일정한 기간 동안 그 형의 집행을 유예한 후, 특별한 사고 없이 그 기간을 경과하면 형의 선고의 효력을 상실하게 하는 제도” 유죄를 인정하되 정상을 참작하여 집행만 유예를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간 동안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또 다시 범죄 하면 더 가중된 처벌을 받겠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함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어떤 열매를 맺어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목적은 구원받은 사람 좋으라고만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위하여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음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범죄 한 이후의 인간은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던지 자기 영광이 드러나고 자기 이름이 높아져야 좋아합니다. 그러니 인간들이 열심히 애를 써서 맺어내는 열매들을 하나님께서는 드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땅만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청년 때에 남은 자 이야기를 하다가 못생긴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선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빙 둘러 나무를 심어둡니다. 그러면 바르고 곧은 나무는 사람들이 재목감으로 베어 가버리고 삐뚤삐뚤하고 못난 나무들만 선산을 지킨다는 의미지요! 그러면서 교회도 어려움을 당할 때 잘난 사람들은 가버리고 못난 사람들만 남았다는 이야기를 하였더니 그때 지금의 장 목사가 땅만 버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의 충격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나는 못생겼지만 그래도 남은 자 축에 들것이라고 여겼는데 땅만 버린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십자가 마을에서 “목사가 되어 베려버린 인간들” 이라는 글이 게시판에 올랐습니다. 이근호 목사의 글인데 목사가 됨으로 베려버렸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되지 않았으면 오히려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저도 해봅니다. 내가 목사가 되지 않았다면, 늘푸른교회 목사로 오지 않았다면 여러분들이 훨씬 더 좋은 신앙인들이 되지 않았을까를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내가 있음으로 오히려 땅만 버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렇다고 생각이 되신다면 언제라도 저에게 이야기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에게 직접 이야기 해 주기 어려우시면 장로님들을 통하여 이야기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조용히 떠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무슨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일의 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일이든 각 사람에게 맡겨진 대로 감당을 할 것입니다. 집사로서 교사로서 찬양대로서 각자의 봉사의 일을 어떻게 해 오셨습니까? 이름은 올라 있는데 사람은 어디에 갔습니까? 몸은 와 있는데 마음은 어디에 가 있습니까? 열심히 참여한 사람은 그 안에 과연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있습니까? 이런 것이 없이 열심히만 하는 것은 자기 자랑과 자기 의와 자기 공적과 업적을 내세우며 또한 시기와 질투라는 육체의 열매를 맺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다 찍혀져야 할 나무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유예기간을 신청하셔서 허락을 받았습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일 년이지만 우리는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 밤에 우리의 영혼을 주님께서 도로 찾으실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나의 전부를 주님 앞에 내려놓는 것입니다. 아직 우리의 목숨이 붙어 있는 이유는 유예기간을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열매 맺는 일을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부지런히 땅을 일구고 거름을 주시고 가꾸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홀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가 찍혀야 되는데 예수님이 대신 찍히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심으로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나는 땅만 버리는 사람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이기에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는 저절로 맺히는 것입니다. 더 늦기 전에 이렇게 일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살기를 소원합니다.

 

 

 

 

누가복음 13:10-21 매임에서 푸는 것 2007. 10. 28

 

10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1 십 팔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18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19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20 또 가라사대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할꼬 21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예수님의 초림이 이미 구약 예언의 종말론적인 성취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증거 하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면서 회개하지 아니하면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천국을 몰고 오신 예수님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면 그것이 이미 심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느 시대입니까? 천기는 분별하면서 시대는 분별 못한다고 예수님께서 책망하셨는데 그 시대가 바로 종말의 시대인 것입니다. 종말이란 추수와 같은 것입니다. 무화과에 열매를 맺지 못하니 찍어버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과원지기가 일 년만 더 유예기간을 청하였습니다.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도 열매가 없으면 그때 찍어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열매의 문제가 누구의 문제인가 하는 것입니다. 무화과는 열매를 맺지 못하였습니다. 땅만 버리는 나무를 찍어버려야 하는데 과원지기가 열매를 맺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과원지기를 예수님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를 고쳐내셔서 열매를 맺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란 이스라엘백성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열매를 맺게 하시는지 보고자 합니다.

 

 

 

 

10-17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회당이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이후에 생긴 제도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도 이런 회당의 모임은 계속되었습니다. 매 안식일마다 예루살렘성전까지 가지 못하기에 안식일마다 회당에 모여서 가장 중요한 행사가 율법과 예언서를 낭독하는 것입니다. 유대 성인10명이면 회당을 세울 수가 있고 또 유대 성인이면 회당장이 지적하는 사람누구나 성경을 읽고 읽은 말씀에 대하여 언급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런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에 그 회당에 18년 동안이나 귀신에 들려서 앓는 사람인데 허리가 꼬부라져서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회당예배는 남자들이 주도하였고 여자들은 뒤편에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계속 그 회당에 나오는 여인인지 아니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온지는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회당에 그 여자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가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여자는 예수님께 먼저 고쳐달라고 요청도 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께 요청하여 치료를 받는 경우가 있는데 이 여자는 요청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야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수하시매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만으로도 여자를 고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안수를 하심은 그 여자의 질고를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을 하신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를 두루 파고 거름을 주어 열매를 맺게 하는 모습으로 보았습니다. 이 여인은 귀신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스스로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허리가 꼬부라져서 18년을 꼼짝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 고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온갖 노력을 다 하였을 것입니다. 좋다는 약은 다 구해보고 용하다는 의사는 다 만나 보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꼬부라진 허리는 도저히 펼 수가 없었습니다. 허리가 꼬부라져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인지 모내기를 한다고 한참 허리를 숙이고 있으면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때 못줄 옮길 때 잠시 허리를 펴면 얼마나 시원합니까! 그러나 아무리 펴고 싶어도 펼 수가 없는 채로 18년을 지났습니다. 그럼에도 안식일에 회당에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을 맛보아야 되는 안식일에 도저히 안식이 없었습니다. 아무리 안식일이 닥쳐도 18년간 단 한 번도 안식을 맛보지 못한 여인입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였을까요?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무슨 죄가 저리도 커서 저런 벌을 받는가!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도 대부분 그렇게 봅니다. 그러니 몸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마음도 괴로워서 쉼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시고 안수하시면서 여자여 네 병에서 놓였다고 하십니다. 그 순간 허리가 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예수님께서 열매를 맺고 계시는 모습입니다. 과원지기가 돌보아서 열매를 맺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18년 동안 귀신들려 허리한번 펴지 못한 여인이 귀신에게서 놓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열매를 맺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주님의 일을 비난하는 자들이 나옵니다. 회당장이 안식일에 예수님이 병 고치시는 것을 보고서 분을 내서 무리에게 말합니다. 예수님께 직접 화를 내지는 않지만 무리에게 말하는 것은 곧 예수님의 안식일 날 치유행위를 문제 삼는 것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병자가 고침을 받는 것은 의료행위이기에 노동에 속한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일이란 6일 동안 얼마든지 해도 되는데 왜 이렇게 거룩한 안식일을 어기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마구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짐승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하여 안식일에도 일을 하면서 어떻게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푸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지당하신 말씀입니까? 반대한 자들이 입도 벙긋하지 못할 말씀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하시매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를 그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한 것입니다.

 

 

 

 

안식일이란 두 가지 의미에서 노동하지 아니하고 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6일 동안 창조하셨습니다. 제일 마지막 창조가 인간입니다. 그리고 7일째에 그 창조를 완성하셨기에 그 날을 복되게 하시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로 안식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란 하나님의 창조를 아무런 노동 없이 그저 받은 것입니다. 어느 한가지인들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에 보탬이 된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6일 창조 다음날 인간이 최초로 맞이한 것은 안식일이었습니다. 노동하지 않고서 맞이한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기 위하여 율법에서도 안식일을 명하여 아무노동도 하지 말게 한 것입니다(출20:8-11).

 

 

 

 

또 하나의 안식일의 의미는 구원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신명기 5:12-15에서는 출애굽기 20장의 안식일지킴의 의미와 다르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시내산에 이르러 첫 율법을 받을 때에 안식일에 노동의 쉼을 창조와 연관하여 말씀하지만 광야 40년을 지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광야에서 언약을 갱신할 때에 안식일의 의미가 창조보다 구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창조나 구원의 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안식일을 노동하지 말고 지키라고 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이란 모두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은 안식일의 의미보다 그 안식일을 지키라는 율법의 조문에 묶여서 사람이나 짐승에게조차 쉼을 주어야 할 안식일을 오히려 안식이 없도록 묶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안식일을 잘 지킨다고 여긴 것입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에 이들은 이단적인 성경해석으로 보고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의 주인이란 예수님이 안식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18년 동안 안식을 누리지 못한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쳐주십니다. 베데스다, 자비의 집에 자비가 없었고 안식일도 안식이 없었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자 왜 안식일에 일하느냐고 따집니다. 그때 예수님은 아버지께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러자 예수님을 더욱 죽이려고 합니다. 안식일만 범할 뿐만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의 친아들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안식을 주시는 것, 즉 매임에서 풀어내시는 것을 반대하는 자들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8장에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기에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를 짓는 자 마다 죄의 종이라고 하셨습니다. 혈통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유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죄로 다 종노릇 하고 있기에 아들이 자유를 주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명목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 자유케 하시지 않는 한 그들의 아비가 마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18년 동안 귀신에 잡혀서 허리를 펴지 못한 여인을 향하여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딸인데도 귀신에 묶여 꼼짝을 못한 것입니다. 이 여인을 예수님께서 안수하심으로 풀어주신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디에 묶여 있습니까?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다 묶여있습니다. 이런 자들을 예수님께서 풀어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오히려 이런 것에서 풀어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묶이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를 믿으면서 몇 년이 되었습니까? 18년 동안 무엇 하나 풀려난 적이 있습니까?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일에서 풀려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는 일에서 풀려본 적이 있습니까? 너 이것 놓쳐버리면 죽는다는 위협에 두렵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어떤 열매도 맺지 못하고 18년이 아니라 38년을 교회에 다녀도 참된 안식을 맛보지도 못하고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도 못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낙심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18-21절을 봅니다. 비록 예수님의 일을 비난하고 방해하여도 하나님의 나라는 중단 없이 전진하고 있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자기 채전 밭에 겨자씨 한 알 심은 것과 같은 방식입니다. 겨자씨를 직접 보았는데 정말 작았습니다. 너무 미미하고 작아서 아무도 대단하게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씨가 자라면 큰 나무처럼 자라서 새가 깃들기 까지 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여자가 가루 서 말에 넣은 누룩과 같다고 합니다. 가루 서 말에 누룩을 한 숟가락만 넣어도 그 가루 전체가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누룩의 모양이 미미하고 적어도 변화시키는 능력이 나타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우리가 이 땅에 속하여 땅만 바라보고 삽니다. 이런 자들을 예수님께서 풀어내셔서 하늘을 바라보게 하시는 방식입니다. 요한복음 12:31-33절입니다. “31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33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를 이 땅에서 지금도 이끌어 내시고 계십니다. 이 풀림의 기쁨을 맛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3:22-30 좁은 문 2007. 11. 4

 

22 ○예수께서 각성 각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23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26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27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28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29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30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

 

 

 

 

지난주에 18년 동안 귀신에 사로잡혀 허리를 조금도 펴지 못한 여인을 예수님께서 고쳐주시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이 설교를 하고나서 월요일 신문을 보니 16년 동안 허리가 굽어서 한번 도 하늘을 보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KBS현장기록 병원’이라는 프로그램의 내용이었습니다. 일부러 시간을 기억 해 두었다가 보았습니다. 23살 때부터 강직성 척추염을 앓는 사람인데 정말 허리를 조금도 펴지 못하여 시야가 전방 2-3미터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대수술 끝에 시야가 20-30미터로 확보되면서 나무도 보고 하늘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시야는 어떻습니까? 몇 미터를 내다보십니까? 허리가 굽어져서 땅만 바라보는 사람의 소원이 허리 펴고 하늘한번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멀쩡한 허리를 가지고 뒤로 굽히기도 잘하면서 하늘을 보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매주일 하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여전히 바라보기는 땅만 바라보고 사는 우리들을 주께서 땅에서 들리심으로 우리를 이끌어 올리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죽으심의 능력이 우리도 세상에 대하여 못 박히게 하시고 하늘로 이끌어 올리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는 눈에 보이는 것은 잠깐이며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한 것임을 알고 보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들을 때에 성령께서 이끌어주심으로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이 보이기를 소원합니다.

 

 

 

 

22-23절을 봅니다. 예수님께서 각성과 촌으로 다니시면서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그 방향이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길을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을 아주 중요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목적은 33절처럼 죽기 위하여 가셔야 하시는 길입니다. 이렇게 가시는 중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구원을 얻는 자가 적겠는가 하고 묻습니다. 유대의 랍비들은 구원 얻는 자가 많을지 적을지에 대한 관심이 그들의 논쟁의 주제이기도 하였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묻는 사람들은 이미 구원을 확보하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수능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자기 자녀가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고 났을 때에 다른 사람의 자녀의 합격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질문한 사람들은 구원을 얻기 위한 질문이라기보다는 자기 구원의 확신을 더 보장받으려는 저의가 있는 질문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런 질문에 대하여서는 즉답을 하시지 않으십니다. 많다 적다고 하지 않으시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24절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합니다. 여기서 힘쓴다는 것은 싸운다는 말입니다. 싸울 정도로 힘을 써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13-14절에서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좁은 문은 생명의 문이지만 그 문이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합니다. 반면에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문도 크고 길도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합니다.

 

 

 

 

그러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그것도 힘써서 들어가라고 하는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 다 단풍놀이 가는 이런 날에 우리는 좁고 협착한 지하까지 내려와서 예배드리니 좁은 길로 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또 좁은 문이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뒤따라가는 길이기에 좁은 길이라고 여깁니다.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위엣 것을 찾는 것이 좁은 길이라고 여깁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다 좁은 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그 좁은 문이라는 것이 우리가 그렇게 힘을 써서 들어갈 수 있는 문이라면 결코 좁은 문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자식이 잘되고 남편이 잘되도록 정성을 바치는 일에는 오늘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런 정성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열심이었습니다. 정화수 떠놓고 빌기 위하여 새벽 가장 이른 시간에 우물물을 길어옵니다. 그리고 깨끗이 씻고 깨끗한 옷을 갈아입고 얼마나 정성을 다하여 비는지 모릅니다. 말도 조심하고 행동도 조심합니다. 혹시나 부정이 탈까봐서 설거지도 조심스럽게 합니다. 설거지 하다가 혹시나 그릇이라도 깨어지면 나쁜 징조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특히 시험 치는 날에는 더욱 조심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하는 이런 모습을 좁은 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결국 인간의 종교성입니다.

 

 

 

 

그러면 좁은 문이 무엇입니까? 다시 24절을 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합니다. 구원이란 좁은 문입니다. 그렇지만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고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을 쓰면 정성을 다하면 죽도록 애를 쓰면 무조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애를 쓰고 힘을 다하여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부분이 참 어렵습니다. 아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해 놓으시고는 힘을 써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다고 하시는 것은 도대체 좁은 문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5:39-40절입니다.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영생은 누구나가 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영생이 성경에 있다고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였습니다. 거의 외우다 시피 하고 성경에 대한 해석도 얼마나 많은지 그렇게 목숨 걸고 성경을 필사하고 읽고 상고한 것은 영생을 얻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께로 그들이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의 양들의 이름을 알고서 불러 우리에 넣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이란 예수님이며 예수님이 문이시기에 움직이는 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르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양이라야 예수님의 양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나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좁은 문이라는 것은 우리가 고정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좁은 길로 간다며 온갖 고행을 한다고 해서 찾아지거나 열리는 문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문을 열고 닫는 권세가 집 주인에게 있는 것입니다.

 

 

 

 

25-27절입니다. 집 주인이 문을 한번 닫아 버리면 밖에서 아무리 두드린다고 해도 열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열어달라고 하면 나는 도무지 너희를 모른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 사람들이 우리가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님은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다고 하지만 그러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니 행악하는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마태복음 7장에서는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많은 권능도 행하였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도무지 모른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그렇게 큰일을 한 사람도 주님께서 모른다고 하신다는 것은 구원으로 인도하는 좁은 문이라는 것이 사람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큰 능력을 행한 사람들은 당연히 생각하기를 자기에게는 반드시 구원의 문이 열릴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유대인들, 그 중에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선택받은 자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일뿐만 아니라 율법도 철저하게 지킨다는 그들은 당연히 구원의 문에 들어갈 것이라고 여겼는데 예수님은 못 들어가는 자가 많다고 하십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입니까? 나중에 바울사도가 분명하게 증거 합니다. 그들이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은 ‘자기 의’였습니다. 그러므로 빌립보서 3장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여긴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하였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잡힌바 된 것을 쫓아간다고 합니다. 뒤엣것을 잊어버린다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행위를 고정화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좁은 문이란 사람이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주님께서 열어주셔야만 되는 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 보다 쉽다고 하셨습니다. 약대가 어떻게 바늘귀로 들어갑니까? 그런데 성경의 문화를 살펴본 사람들에 의하면 성문이 밤에 닫히고 나면 위급한 상황을 대비하여 조그마한 쪽문을 만들어 두었는데 이것을 바늘귀문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약대는 짐을 싣고 다니는 동물인데 어떻게 그런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 정도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자란 꼭 재산만의 문제가 아니겠지요! 우리가 평소에 좋아하면서 소유하기를 원하는 모든 것이 다 좁은 문으로 가는 길에 방해물들입니다.

 

 

 

 

그런데 누가 스스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습니까? 혹시 그렇게 다 버리고 노력한다고 해도 문이란 주인의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기에 노력하는 그 자체로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 좁은 문입니다. 그런데 이 좁은 문으로 누가 들어오는 것입니까? 28절에 보시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선지자들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선지자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들은 특징은 결국 땅의 것들을 다 놓아버리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본토친척 아비 집을 떠납니다. 비옥한 소돔과 고모라 땅을 떠납니다. 나중에 백세에 얻은 아들조차 포기합니다. 이삭도 야곱도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약속 하나 남기고 다 버려지는 것임을 히브리서 11장에서 증거 합니다.

 

 

 

 

이러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 내시는 하나님을 증거 한 선지자들을 누가 핍박하고 배척한 것입니까? 율법을 지킨다고 하는 사람들, 성전을 사수한다는 사람들,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을 낸다는 사람들에 의하여 배척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율법 외의 한 의라는 좁은 문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잔치에 놀라운 장면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은 슬피 울며 이를 가는데 사람들이 동서남북에서 와서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천국의 문은 좁은 문인데 그 문을 사람이 고정적으로 소유할 수 없는 문이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그 앞에 열어주시면 그 사람이 이방인이든 죄인이든 창기이든 들어올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 지역의 동서남북에서 들어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의를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닫혀버리고 숨겨져 버리는 문인 것입니다.

 

 

 

 

끝으로 요한계시록 3:7-8절을 봅니다.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8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요한계시록의 일곱 교회가 다 이방인의 지역입니다. 그 중에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하여 열린 문을 두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적은 믿음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고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그 믿음이란 자기의 의를 붙드는 사단의 회 곧 유대인의 회와 달리 예수님의 의만을 붙든 것입니다. 그 믿음 앞에 열린 문이 있습니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도 있기를 소원합니다

 

 

 

 

누가복음 13:31-35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2007. 11. 11

 

31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이르되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32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33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35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지난주에 좁은 문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왜 좁은 문인가 하면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문을 열어주셔야 하시기에 좁은 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문이라면 인간의 애씀과 노력과 상관없는 것이기에 좁은 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자가 있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자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도 많은 사람들이 처음 교회 다니는 사람들보다 뒤에 다니는 사람이 열심을 내면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바로 앞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에 반드시 들어간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쫓겨나서 슬피 우는 자들이 있고 반면에 도저히 들어가지 못한다고 여긴 이방인들이 동서남북에서 와서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할 자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먼저 되었다고 항상 먼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질서는 앞장 선 사람이 늘 앞장서기를 좋아합니다. 이것을 기득권 지키기라고 하지요! 천국에는 이런 기득권이라는 것이 통하지 않는 은혜의 나라인 것입니다.

 

 

 

 

31절입니다. 이런 말씀 중에 어떤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와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니 이곳을 떠나라고 합니다. 헤롯은 갈릴리 지역의 분봉 왕으로서 세례요한의 목을 벤 사람입니다. 이런 정보를 제공한 바리새인은 예수님께 호의를 가지고 있었는지 아니면 예수님이 하도 문제를 일으키니 보내버리려고 이렇게 말하였는지 모르지만 이런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 헤롯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헤롯을 여우라고 합니다. 여우란 교활하고 꾀가 많은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 당시에는 무의미하고 중요하지 않는 사람을 뜻한다고 합니다.

 

 

 

 

32절입니다. 그 여우에게 가서 말하기를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 지리라고 하십니다. 완전하여 진다는 것은 완전히 이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 삼일이라는 말은 멀지 않는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이 세상의 통치자인 헤롯이 예수님의 길을 결코 막거나 방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천지의 주재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일을 이루고 계시기에 그 어느 누구도 가로막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당할 때가 많을 것입니다. 왜 내 일이 이렇게 잘 풀리지 않는가? 길이 열리지 않는가 하면서 염려하고 근심할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염려와 근심이 누구의 일 때문에 하고 계십니까? 나를 위한, 나에 의한, 나의 일로 인하여 근심하고 염려할 것입니다. 그런 염려는 또 목표가 무엇인가 하면 눈에 보이는 세상입니다. 그런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룬다고 합니다(고후7:10).

 

 

 

 

예수님의 근심은 무엇입니까? 오늘과 내일을 가야할 길이 있고 제 삼일에 완전히 이루셔야 하실 그 일과 그 길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길이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물론 다른 복음서도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십자가의 사건이 중심으로 기록이 됩니다만 특히 누가복음에서 그 길을 더욱 선명하고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길이란 이 땅에서 십자가로 가실 뿐만 아니라 부활과 승천과 성령을 보내심과 다시 오심도 다 그리스도의 길인 것입니다. 이런 길의 궁극적이 목표점이 에베소서 1:10절에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길입니다. 그 중심의 자리가 바로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길의 목표점을 분명히 알고 가시는 것입니다. 33절을 봅니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고 하십니다. 헤롯이 아니라 온 세상이 다 달려들어도 예수님의 가시는 길을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려도 가셔야 하시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죽기 위하여 가시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 죽는 법이 없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몇 곳 찾아봅니다. 예레미야 2:30절입니다. “내가 너희 자녀를 때림도 무익함은 그들도 징책을 받지 아니함이라 너희 칼이 사나운 사자 같이 너희 선지자들을 삼켰느니라” 예레미야 26:20-23절에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루살렘 성과 그 당을 쳐서 예언한 우리야를 여호야김왕과 용사와 방백들이 다 죽이려고 하자 두려워서 애굽으로 도망갑니다. 그런데 이 우리야를 잡아오기 위하여 여호야김 왕이 사람을 보내어 예루살렘까지 끌고 와서 죽이고는 그 시체를 평민의 묘실에 던졌습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섬기는 성읍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이는 성읍이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자기들의 귀에 좋은 소리를 하지 않는다고 죽인 것입니다.

 

 

 

 

역대하 24:20-21절입니다. “20 ○이에 하나님의 신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감동시키시매 저가 백성 앞에 높이 서서 저희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스스로 형통치 못하게 하느냐 하셨나니 너희가 여호와를 버린고로 여호와께서도 너희를 버리셨느니라 하나 21 무리가 함께 꾀하고 왕의 명을 좇아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돌로 쳐 죽였더라 22 요아스왕이 이와 같이 스가랴의 아비 여호야다의 베푼 은혜를 생각지 아니하고 그 아들을 죽이니 저가 죽을 때에 이르되 여호와는 감찰하시고 신원하여 주옵소서 하니라” 여호와의 전 뜰 안에서 선지자를 죽였습니다.

 

 

 

 

누가복음 11:47-51절입니다. “봉독” 이렇게 핍박받은 선지자를 누가 보냈습니까? 하나님께서 보내셨는데 49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지혜가 더러는 죽이며 핍박할 것을 일러주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지혜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보냄을 입은 자들입니다. 베드로전서 1:10-11절입니다.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참된 선지자들은 다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선지자를 죽였다는 것을 예수님은 너무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탄식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수님의 이 부르심의 심정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어미닭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고 한 일이 몇 번이냐고 합니다. 참으로 부지런히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그 날개아래 피하여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 이들이 그 주님의 날개아래 피하여 오지 않았던 것입니까?

 

 

 

 

그들에게는 율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이 있고 제사장이 있으니 대신 죽을 메시아는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들같이 의롭고 바르게 사는 자들을 구원하여 주고 율법도 없고 있어도 지키지도 못하는 자들, 성전에 나올 수도 없는 자들, 제사장도 없는 그런 자들은 심판하고 자기들만은 구원하여 주실 그런 메시아를 기다린 것입니다. 사실은 율법과 성전과 제사장이 다 예수님을 증거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눈이 감겼고 그들의 귀가 막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탄식을 하시는 것입니다.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은 것을 저는 많이 보아왔습니다. 어미 닭이 알을 3주간 품고 부화시키는 것은 주로 봄입니다. 그렇게 부화된 노란 병아리들이 마당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모이를 먹고 있을 때에 제가 휘파람을 휙 불면 어미 닭이 갑자기 긴장을 해서 자기 새끼들을 불러 모읍니다. 휘파람 소리가 마치 매가 새끼를 낚아채려고 오는 소리로 들리는지 새끼들을 구구하면서 부르면 마음대로 놀던 병아리들이 얼마나 쏜살같이 달려오는지 너무 빨리 달려서 넘어지고 자빠지면서도 어미의 날개아래 속속 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주님의 날개아래 피하러 오지 않았습니다. 소도 임자를 알고나귀도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내가 양육한 내 자식은 나를 모른다고 탄식한 이사야 선지자의 말이 예수님의 탄식 속에 묻어있는 것입니다. 부를수록 멀리 도망간 이스라엘입니다. 예수님의 부름조차 거절한 이들은 예수님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란 예루살렘 입성 때에 잠시 호산나를 외쳤지만 그러나 그 군중의 외침은 며칠 만에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는 소리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그날까지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예수님을 보지 못하기에 지금도 율법의 전통에 있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도 그 날개아래 피하여 온 이방여인이 있었습니다. 룻기서를 보시면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자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과 그 아내 나오미가 두 아들과 함께 모압 땅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남편을 잃었습니다. 두 아들을 결혼시켜 며느리를 보았는데 두 아들마저 죽었습니다. 남은 것은 과부만 세 명입니다. 이때 베들레헴에 다시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두 며느리도 시어머니를 따라 나섰지만 시어머니가 돌아가라고 합니다. 자기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으니 자기 민족에게 가서 재혼하여 잘 살라고 합니다.

 

 

 

 

그러자 두 며느리 다 울면서 같이 간다고 합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나를 치셨으니 나는 너희로 인하여 마음이 아프다고 하면서 돌아가라고 강권합니다. 그러자 한 며느리 오르바는 돌아가고 룻은 시어머니를 끝까지 따라나서며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며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어머니 죽는 곳에 함께 죽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스스로 저주의 맹세를 하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더 이상 말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여인이 무엇을 보고 이렇게 시어머니가 섬기는 하나님을 따라 나선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를 치셨다고 하는데도 따라 나선 것은 참으로 기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몽땅 망한 집안이 섬기는 그 하나님을 믿고자 나선 것입니다. 베들레헴에 돌아온 그 여인이 이삭을 줍다가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이르게 되고 보아스로부터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룻기 2: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네 행한 일을 보응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하노라” 이 룻이 받은 온전한 상이 무엇입니까? 다윗의 증조모가 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편입된 것입니다. 그 온전한 상이란 바로 예수님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날개그늘 아래 피하여 오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가진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율법과 성전과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장로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진 것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의 소유물만이 아니라 우리의 자존심도 한 몫 합니다. 자기 영광을 구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복음은 알지도 못하면서 복음을 안다는 또 다른 소유물도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시는 탄식이 우리 각자를 향한 탄식이 아니겠습니까? 목사야! 장로야! 권사야! 집사야! 하시며 부르시는 주님의 탄식소리가 들리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십니다. 이 탄식을 들으시고 우리도 룻처럼 가난한 심령이 되어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기를 소원합니다. 그 날개 그늘을 찬송가 478장에서 노래합니다.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그런데 471장에서는 이 주님의 날개 그늘을 십자가로 표현합니다. “십자가 그늘 아래 내 쉴 곳 찾았네.... 이 광야 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에 주 십자가의 그늘 에 내 쉴 곳 찾았네

 

 

 

 

누가복음 14:1-24 하나님 나라의 잔치 2007. 11. 18

 

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2 주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일러 가라사대 안식일에 병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4 저희가 잠잠하거늘 예수께서 그 사람을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5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6 저희가 이에 대하여 대답지 못하니라 7 ○청함을 받은 사람들의 상좌 택함을 보시고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8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보다 더 높은 사람이 청함을 받은 경우에 9 너와 저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이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라 하리니 그 때에 네가 부끄러워 말석으로 가게 되리라 10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2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13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14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15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7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19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20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여러분들이 식사 초대를 받거나 또는 어떤 잔치에 갔을 때에 참으로 거북한 자리를 경험해 보셨습니까? 저는 그런 경험을 몇 번 하였습니다. 그런 곳에서 음식을 먹으면 체하게 되고 결국 토해 내어야 시원해집니다. 그러나 토하여도 시원해지지 않는 것은 그 거북하였던 분위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다가 예수님께서 식사에 초대받아 가셨는데 그 자리가 얼마나 거북한 자리가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길지만 함께 연결이 되어 있어서 같이 봅니다. 우선 첫째 단락 1-6절을 봅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떡을 잡수시기 위하여 들어가십니다. 바리새인의 두령이 초청을 한 것이겠지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호의적이지 않았는데 왜 초청을 했을까요? 13:10-17절에서 보았습니다만 예수님께서 18년 동안 귀신에 사로잡혀 허리를 펴지 못하는 한 여인을 안식일에 고쳐주셨습니다. 그러자 회당장이 화를 내면서 왜 안식일에 일하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자들아 안식일에 소나 나귀를 물 먹이기 위하여 마구에서 풀어내지 않느냐? 그런데 18년을 매여 있던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풀어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을 들은 바리새인의 두령이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지를 직접 보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

 

 

 


1절에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번역에서는 철저하게 감시당하고 있었다고도 번역합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고창병 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고창병이란 몸이 붓는 병이라고 하는데 왜 안식일에 바리새인의 두령 집에 이 사람이 와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지 보려고 의도적으로 그 사람을 오게 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의도를 모르시겠습니까? 다 아시기에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킨다는 율법사와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이 다 잠잠합니다. 이미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시면서 그들로 하여금 어떤 변론도 할 수 없도록 말씀하셨기 때문에 대답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고서 병자를 고쳐서 보내십니다. 그리고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할 말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안식일을 지킨다고 노동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그들의 아들이 우물에 빠졌는데 그냥 있을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사람을 살리고 봐야지요! 소가 빠져도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물어볼 필요도 없이 당연한 일을 가지고 질문하심으로 그들의 입을 막아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8년 된 여인을 고쳐주시고, 고창병 든 자를 그들의 질병에서 놓아주시는 것은 예수님이 안식을 주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시면서 참된 안식이란 예수님께 있음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식사자리가 얼마나 거북하였겠습니까?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7-11절을 보시면 그 식사자리에 청함을 받은 자들이 먼저 상좌를 택하여 앉는 것을 보시고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식사자리는 U자형 테이블로 가운데 자리가 주인의 자리이고 그 주인의 자리 가까울수록 상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초대받아 오는 사람들이 다들 율법사요 바리새인들이니 모두 한자리씩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들을 보고서 예수님께서 네가 누구에게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에 상좌에 앉지 말라고 합니다. 만약 상좌에 앉았다가 주인이 와서 그 사람에게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내어주라고 하면 그때에 네가 부끄러워서 말석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청함을 받을 때에 말석에 앉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주인이 벗이여 이리로 올라오라고 하면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합니다.

 

 

 

 

그 식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얼마나 거북하였겠는지 실감이 되십니까? 아마 그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체하여 소화제를 먹든지 토하든지 하였을 것이라고 상상해봅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런 책망을 받아야 하는 자들이 그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 모두입니다. 우리도 다 높은 자리를 좋아하지 낮은 자리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교회에 왔는데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고 네가 왔거나 말거나 하는 대접을 받으면 교회 올 기분이 나겠습니까? 날 무시하다니 나를 무엇으로 보고 이런 대접을 하는가 하는 마음이 들면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네 믿음이 크다고 하신 이방여인을 생각해봅시다(마15장, 막7장). 자기 딸이 귀신이 들렸다고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소리쳐도 대꾸도 하지 않으시다가 겨우 하신다는 말씀이 주인의 상에서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무엇이라고 말하였습니까?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떡 부스러기를 먹는다고 하였습니다. 이 여인을 보고 예수님은 믿음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눈치도 없이 천덕꾸러기처럼 잔치 집에 와서 음식이나 얻어가고자 하는 자와 잔치자리에 높은 자리에 앉고자 하는 사람 중에 오늘 우리는 어느 편의 사람입니까?

 

 

 

 

12-14절을 봅시다. 더욱 거북한 말씀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에서 무슨 잔치가 있을 때에 누구를 초청합니까?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을 초청하겠습니까? 요즈음 많은 교회에서 무료급식을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실천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렇게도 하지 못하니 무어라고 할 말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정말 자기 자녀의 결혼 잔치에 그런 노숙자들이 몰려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회갑잔치를 하는데 구걸하는 사람들이 몰려오면 잔치 망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자들을 초대하라고 하십니다.

 

 

 

 

몇 주 전에 교회에서 잔치를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챙겼습니까? 여러분의 가족 친척 그리고 전에 그들의 잔치에 가 주었던 사람들을 챙기기 바빴지요! 왜 그들을 챙기는 것입니까? 내가 그들을 챙겨 주었기에 그들도 나를 대접하는 것입니다. 내가 대접을 받았기에 나도 대접을 하는 것입니다. 그날 잔치에 오지도 못한 사람들을 생각이나 해 보셨습니까? 선물 하나라도 챙겨주려고 마음이나 먹어 보았습니까? 그러므로 세상에서 아무리 보암직한 잔치를 열고 대단한 사람들이 온다고 하여도 다 이기적인 거래관계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잔치를 열면 갚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베풀라고 합니다. 그러면 부활시에 갚음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모든 인간관계는 논외로 한다고 하더라도 은혜로 모였다는 교회에서 조차 식사를 초대하거나 선물을 주고받거나 할 때에 누구에게 하고 있습니까? 나에게 무언가 도움이 되는 쪽으로 하지 않습니까? 이런 생각은 부활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세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이렇게 현실적으로 살아가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의도를 아시면서도 그들의 잔치에 참여하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식사의 자리를 천국의 잔치자리로 연결시키고 계십니다. 천국은 어떤 나라입니까?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는 나라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어떤 사람은 스스로 낮추어서 천국에서 높아지려고 계산하여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사람은 천국과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자신을 가난한 자로, 병신으로, 저는 자로, 소경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단락 15-24절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에 대하여 말씀하시자 그 말을 듣고 있던 사람 중에 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다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부활 시에 갚음이 있다는 말씀을 듣고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늘나라의 잔치에 대하여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나라에 참여하는 자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으로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이라도 개종하여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키면 들어오게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에 참여 못한다고 여깁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습니다. 잔치를 하기 전에 미리 청하여 두어야 합니다. 사소한 잔치가 아니라 아주 중요하고 큰 잔치이기에 다른 약속을 잡지 않도록 미리 알려두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잔치 날에 종들을 보내서 청하였던 사람들을 오라고 합니다. 그러니 두 번을 청한 것입니다. 앞에서는 예비초청이고 이제 본격적인 잔치가 시작되니 바로 오도록 초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치하게 다 사양을 하였습니다.

잔치에 초청하였는데 오지 않는다는 것은 초청한 주인을 모독하는 행위가 됩니다. 그러니 사양을 하기는 하는데 굉장히 그럴듯한 이유를 들이 됩니다. 밭을 샀으니 부득불 가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용서하라고 합니다. 소 다섯 겨리를 샀으니 시험하러 가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장가들었으니 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종들이 돌아와서 보고하자 주인이 화가 났습니다. 잔치는 준비되었고 청한 사람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시내와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여도 아직 자리가 더 남아 있기에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고 합니다. 그리고서 24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한 사람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잔치를 예수님은 결론에서 “내 잔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잔치에 누가 맛보지 못하는 것입니까? 전에 청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을 부르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종들을 보내셨습니다. 모세를 보내고 선지자들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종들입니다. 이제 드디어 주인이 오셨습니다. 그 주인을 맞이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를 맛보는 자리인데 그들은 다 사양하였습니다.

 

 

 

 

지금 바리새인의 두령 집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서 얼마나 거북한 자리가 되었는지 짐작이 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는 기쁨의 잔치가 됩니까? 그런 잔치에 나갈 자격도 없고 그런 잔치에 누가 오라고도 하지 아니할 가난하고 병든 자들, 사회에서 격리시키고 싶은 사람들, 만나기도 싫은 그런 사람들을 불러서 잔치에 채웠습니다.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 자리가 누구의 자리이겠습니까?

 

 

 

 

나는 목사고 장로고 권사이니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서도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겠습니까? 아니면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감히 그런 천국에 초청이나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결단코 그런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하는 자들의 자리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세리와 창기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를 맛보여 주셨습니다. 맛보여 주실 뿐만 아니라 친히 자신의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셔서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한 자는 흰 세마포 옷을 입고 나갑니다. 그 옷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의의 옷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조차 은혜의 선물이기에 하나님의 나라 잔치는 참으로 은혜로운 잔치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떤 잔치와 구별되는 거룩한 잔치입니다. 그런 잔치를 날마다 맛보시기를 소원합니다.

 

 

 

 

누가복음 14:25-35 제자의 길 2007. 11. 25

 

25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쌔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28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찐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29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30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31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32 만일 못할 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찌니라 33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34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35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하시니라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 한때 책상 앞에다 이런 문구를 적어 놓고 공부하셨을 것입니다. 좀 유식한 척 하느라고 한문으로 고진감래(苦盡甘來)도 써 붙이고 그랬지요! 이 말 한마디 안에 여러 뜻이 들어 있습니다. 사람의 노력에 따라 그 성취도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자기 행위에 대하여 정당한 보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봄에 부지런히 씨를 뿌려야 가을에 거둔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무슨 보상이 주어지는 것입니까? 여러분들이 이렇게 교회로 모여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봉사도 하고 헌금도 하고 예배도 드리는데 왜 이렇게 하는 것입니까? 아무런 보상을 생각하지 않고 정말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하여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여 기쁨으로 헌신하고 봉사하시는 것입니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복을 받지 못한다든지 혹 하나님께서 벌을 내릴까봐 두려워서 하는 것입니까?

 

 

 

 

25절을 봅니다.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과 함께 갑니다. 왜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나섰을까요? 어떤 사람들을 병 고침의 기적을 보고 자기도 고침을 받을까 하고 따라나섰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서 떡을 얻어먹을까 하고서 따라 나선 자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기득권을 향하여 거침없이 비판하시는 그 말씀에 속이 시원하여 따라 나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따라 나섰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 나선 목적은 사람들마다 다 달랐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돌이켜 보시며 허다한 무리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는 자기 부모와 처자식과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이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나서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가족만이 아니라 자기의 목숨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따라 올 수가 없는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가시는 길이 무슨 길이기에 제자들에게 자기의 목숨마저 미워해야만 따라 갈 수 있는 길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누가복음 9:51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누가복음 18:31-34절입니다. “31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로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기워 희롱을 받고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겠으며 33 저희는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추였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예수님께서 굳게 결심하시고 가시는 길은 예루살렘이며 그 곳에서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받고 채찍에 맞고 죽으신 후에 삼일 만에 살아나시는 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 왕으로 등극하는 줄 알고 서로 높은 자리 차지하기 위하여 시기와 질투와 경쟁을 하면서 따라 나선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러하다면 다른 허다한 무리는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길이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렇다면 제자의 길도 당연히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십자가의 길을 잘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혹 말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십자가의 길을 그저 교회생활 하는 일에 열심 내는 정도를 가지고 십자가 이야기를 합니다. 십일조 주일 성수만 열심히 해도 엄청난 보상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현세에서도 복을 받고 잘 되고, 내세에서도 잘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현세를 너무 강조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내세만 강조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두 가지 다 조화롭게 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에서 아무런 보상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런 보상도 말씀하시지 않으시고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어떤 것인지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내 욕심 조금 줄이고 남보다 수고를 조금 더 말하는 것을 가지고 자기 부인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과 자기의 소원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포기하는 길은 더 이상의 자기 소원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치욕적인 사형 선고를 받은 자가 항소의 가능성이 더 이상 없고 그 사형 선고가 최종적으로 확증되었을 때에 짊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고 가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보상이 따를 것이라는 기대조차 없는 것이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길입니다. 이러함에도 예수님을 따라 나서시겠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나서는 제자의 길이 무엇인지 엄밀하게 계산해보고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28-30절입니다. 어떤 사람이 망대를 세우려고 하면 준공하기 까지 비용이 얼마나 들지 예상하고서 일을 진행한다는 것입니다. 비용이 얼마나 들지를 생각하고서 일을 진행해야 하는데 기초만 쌓아두고 완성을 하지 못하면 지나는 사람들이 다 비웃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비유의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도 현실적인 문제로 닥쳤습니다. 예배당을 주인이 사용한다고 비워주어야 하는데 어디로 이사를 해야 할지 계산을 해야 합니다. 몇 사람들이 나서서 이리저리 알아보니 우리의 예산으로 갈만한 장소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산으로는 턱 없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래서 위원들을 뽑고 모여서 몇 번을 의논하여도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비용의 문제였습니다. 모두들 열심히 계산을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정도는 감당하겠다는 계산을 하고서 한 곳을 정하기는 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여전히 감당해야 할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당을 옮기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길이라고 보지 않습니다만 어쩔 수 없이 옮겨야 하는 상황에서 어떤 계산을 하고 계십니까? 저도 계산하느라고 머리가 복잡하여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참 믿음 없는 저의 모습을 또다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고 하면서도 당장 나갈 곳이 없으면 어떻게 하는가 하는 목사로서의 염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이 본문의 말씀이 위로가 되었습니다.

 

 

 

 

목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이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막상 예배당을 옮겨야 하는 문제가 생기고보니 어떻게 하면 적당한 곳에 이사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우선으로 떠오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다들 직장생활 하시느라 바빠서 알아 볼 시간도 별로 없고 그러니 제가 아마 제일 부지런히 부동산에 들락거렸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말씀을 보면서 내 자신이 목사라는 것 그래서 이 목회하는 교회마저 포기하겠느냐는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참으로 많은 고민을 해 보았습니다만 결국은 포기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인지 아니면 저의 오기인지 잘 구분이 안 되기도 합니다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이라면 목사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목회의 현장까지 포기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결론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사가 평생 목사노릇 하고서 붙든 것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붙든 것이 아니라 자기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라는 것을 붙든 것이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떠하였습니까? 예배당을 옮기는 일에 얼마나 예상을 하시고서 헌금하셨습니까? 그러고서는 우리가 욕심을 부리지 않게 하여 달라고 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기도 속에 여러분 개인의 소유를 늘이고자하는 욕심을 제거하여 달라고는 하였습니까? 개인의 소유에 대한 집착이 탐심이듯이 교회건물이라든지 목회의 성공이라든지 하는 것도 다 탐심인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이런 일이 닥치니 교회당을 위한 탐심과 여러분의 소유의 탐심 사이에 어느 쪽으로 기울어졌습니까?

 

 

 

 

목사는 교회당으로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집으로 기울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들 예수님의 길로 따라가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전부 중도에 탈락 될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계산해보시고 이 길이 아니다 싶으면 돌아서야 합니다. 어떤 분들이 그동안 늘푸른 교회를 다닌 것은 헌금에 대한 부담이 없고 교회의 일에 대한 부담이 없어서 다녔는데 이제 이사를 해야 하니 부담이 된다고 합니다. 정 부담이 되신다면 부담이 전혀 안 되는 곳으로 옮기시는 것이 현명한 계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에 대하여 다시 계산을 해 봅시다. 31-32절입니다. 어느 임금이 자기의 군사 일만이 있는데 적은 군사 이만으로 공격하여 옵니다. 이기지 못할 것 같으면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화친을 청하여야 하는 것이 계산입니다. 망대를 세우는 일이나 임금이 전쟁을 대비하는 두 이야기는 한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할 때에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예상 해보고서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이 어느 정도여야 합니까? 한국교회에서 통용되는 기본은 십일조와 주일 성수입니다. 이것만 잘 해도 교회에서 집사정도는 됩니다. 우리교회는 그런 기준도 없으니 더 수월하기도 합니다만 그러나 물질이나 시간의 십분의 일 정도만 제대로 하면 교회가 운영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큰 일이 생기면 목돈을 좀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장로도 되고 권사도 됩니다. 다들 그렇게 돌아갑니다. 그러면 도대체 예수님을 제대로 따르려면 어느 정도로 포기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33절입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에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소유가 무엇이 있습니까? 자신의 소유라는 것을 다 버리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예수님을 따라 나선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다 탈락입니다. 어느 누가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의 소유를 다 버렸습니까? 그리고 다 버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지 어떤 보상을 요구할 처지가 못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16-30절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것인가를 질문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어려서부터 다 지켰으니 무엇이 부족합니까? 라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놀라서 묻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천국에 들어갑니까?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소유를 포기하면서 들어갈 사람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 잘 알지 않습니까? 얼마 되지도 않는 재산을 생명처럼 붙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있다고 여기니 나를 살리기 위하여 재산도 필요하고 그냥 사는 것만이 아니라 영생도 필요하니 교회도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 모든 것들을 다 버리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소유를 위하여 사는 사람은 참된 자유가 없습니다. 그것이 가정이든 교회이든 자기 의이든 명예이든 자존심이든 자기 자신이든 간에 자기 것이라는 것을 가지고서는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 수가 있습니까?

 

 

 

 

마태복음 19:27절에서 베드로가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으니 우리가 무엇을 얻겠습니까? 라고 질문하였고 예수님은 세상이 새롭데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12보좌에 앉아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라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배도 버리고 부모도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섰지만 결국은 십자가 앞에서 자기 목숨을 버리지 못하고 배신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보좌에 앉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예수님의 길을 따라 오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 결과로 제자들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가게 되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뒤를 따라간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자기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면서 따라갈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가 임할 때에 그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길과 우리가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결심하시고 결단하셔서 끝까지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자기의 모든 소유를 다 버리신 것입니다. 자기의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그 생명마저 십자가에 내어 놓으신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자기의 백성들도 그런 길로 가도록 이끄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올 때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이 왔습니다. 갈 때도 아무것도 가지고 갈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자기 백성을 천국으로 이끌어 들이실 때에 그 어떤 자기의 소유물도 필요가 없도록 조치하시면서 데리고 가십니다.

 

 

 

 

이 주님의 말씀에서 자기 소유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의 모든 소유를 버리셨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예수님만 계시다면 세상의 모든 소유, 자기 자신마저 사라진다고 하여도 아무런 이의가 없는 삶이 세상의 소금으로서의 삶입니다. 이런 제자로서 살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15:1-10 잃어버린 자를 찾으심 2007. 12. 2

 

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4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5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8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9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사사건건 예수님께 원망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시면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세리와 죄인들을 예수님께서 영접하셔서 음식을 함께 드시는 것에 대하여 원망을 하는 것입니다.

 

 

 

 

로마시대의 세리들은 세금을 과하게 받아서 자기 주머니를 채운 것입니다. 그러니 도둑이나 강도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세금 징수 자들은 이교도인 로마의 점령군을 섬기고 또 직업상으로 비유대인들과 숱하게 접촉했기 때문에 '부정한' 사람들로 통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경건한 사람들에게 멸시와 미움을 받아 죄인과 동일한 취급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자들을 영접하여 함께 식사를 하시니 원망을 듣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시는 사람은 세리나 죄인이 아니라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율법을 지키고 의롭게 사는 사람들을 구원하시지 구원받을 자격도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에는 착한 사람들이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전에는 아무리 악한 짓을 하였더라도 구원받으려면 자기 잘못을 회개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을 구원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생각이나 우리들의 상식적인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엎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미 누가복음에서 이런 논쟁에 대한 말씀이 몇 번 나왔습니다. 그 말씀들을 다시 상기하여 보고서 오늘의 본문을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5:27-32절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은 세리 레위를 향하여 자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레위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하니 많은 세리들이 모여왔습니다. 이것을 보고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비방을 합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합니다.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이었습니까?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은 예수님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죄인임을 아는 자들은 예수님이 불러주심이 그야말로 천국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7:34절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하는 말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나오는 36-50절에서는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하였습니다. 그 식사자리에 한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눈물로 발을 씻기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고 그 발에 향유를 붓고 그 발에 입 맞추기를 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청한 바리새인이 마음으로 이 사람이 선지자라면 저 죄 많은 여인이 만지는 것을 말릴 텐데 왜 그냥 두느냐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마음의 생각을 아시고 많이 용서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서도 죄인과의 접촉을 시비건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먹는다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시비와 원망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세 가지 비유로 말씀 하십니다. 양 백 마리 중에서 한 마리를 잃어버린 목자가 그 한 마리를 찾는 이야기와 어떤 여인이 열 드라크마 중에서 하나를 잃어버리고 찾은 이야기와 두 아들 가운데 한 아들을 잃어버렸다가 찾은 이야기입니다. 다 같은 주제입니다.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두 가지 비유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 비유입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어버리면 아흔 아홉을 들에 두고 그 잃은 한 마리를 찾지 않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주로 목축을 하는 청중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다 알아듣습니다. 어떤 목자도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버려두고 그냥 99마리만 챙겨서 갈 목자가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다른 양들은 들에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찾을 때 까지 찾아서는 즐거워하여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잔치를 여느 것입니다.

 

 

 

 

저도 어려서 소를 먹이거나 염소를 먹이다가 잃어버린 경험들이 있습니다. 여름에 소를 산에 풀어놓는데 친구들과 놀다보면 소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을 때는 눈앞이 캄캄합니다.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잃어버린 소만 눈에 가득합니다. 이리저리 찾아가 멀리서라도 자기소를 발견하면 그냥 기쁨에 눈물이 다 납니다. 환호성을 지릅니다. 그 소를 몰고 내려올 때에 기쁨이란 무엇과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이 첫째 비유의 말씀을 하시고서 7절에서 결론을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 보다 더하리라고 합니다.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이 정말 회개할 것이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자신들을 회개할 것이 없다고 여기는 아흔 아홉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하늘에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과 잃어버린 자임을 알고 목자가 찾아주시는 것을 감사하는 이런 자들을 하늘에서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33:10-11절입니다. “10 ○그런즉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말하여 이르되 우리의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우리로 그 중에서 쇠패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리요 하거니와 11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하나님께서 악인이 돌이키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돌이킬 능력이 없습니다. 에스겔 34:1절부터 보시면 이스라엘에 여러 목자를 세우셨지만 그들은 양들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양을 잡아 먹어버린 못된 목자들이었습니다. 지도자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양떼들 사이에서도 힘센 양들이 꼴을 먼저 먹고서는 발로 밟아 버리고 물을 먼저 마시고서는 물을 더럽히고 약하고 병든 양들을 뿔로 받아서 무리 밖으로 쫒아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양떼를 찾아 나서신 것입니다.

 

 

 

 

에스겔 34:11-15절입니다. “11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12 목자가 양 가운데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찌라 13 내가 그것들을 만민 중에서 끌어내며 열방 중에서 모아 그 본토로 데리고 가서 이스라엘 산 위에와 시냇가 에와 그 땅 모든 거주지에서 먹이되 14 좋은 꼴로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 위에 두리니 그것들이 거기서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 위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15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친히 내 양의 목자가 되어 그것들로 누워 있게 할찌라 16 그 잃어버린 자를 내가 찾으며 쫓긴 자를 내가 돌아오게 하며 상한 자를 내가 싸매어 주며 병든 자를 내가 강하게 하려니와 살찐 자와 강한 자는 내가 멸하고 공의대로 그것들을 먹이리라

 

 

 

 

에스겔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잃어버리고 쫒기고 상한 자를 싸매어 주며 병든 자를 강하여 하고 살찐 자와 강한 자는 멸하시는 그 일을 예수님께서 지금 성취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을 보고서 누가 원망하는 것입니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백성들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원망합니다. 어떻게 저런 죄인들을 영접하느냐는 것입니다. 백성의 지도자라면 약하고 상한 자들을 돌보아야 하는데 오히려 그들을 죄인취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비단 이스라엘의 문제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나라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지금 대통령 후보로 나온 12명의 사람들이 지금의 그 자리, 대통령 후보라는 자리에 오기까지 과연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왔습니까? 법을 제대로 지키며 세금을 제대로 내었습니까? 그러면서도 입만 열면 나라를 구한다고 합니다. 입만 열면 백성들을 행복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없으면 오히려 행복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백성들 사이에서도 서로 힘으로 밀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큰 교회 작은 교회로 나뉩니다. 교회 안에서도 잘난 사람 못난 사람으로 나뉩니다.

 

 

 

 

세상이나 교회나 이런 모습이 왜 나타나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처럼 되라는 유혹을 받아서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 온 세상이 이렇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힘으로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힘을 키우는 자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잃어버린 자임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잘나서 선택받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잃어버린 자임을 몰랐습니다. 율법을 알지 못하는 자들과 알아도 지키지 못하는 죄인들과 이방인들이 잃어버린 자 인줄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은 구원받은 자 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오면 자기들처럼 깨끗하고 거룩한 자들을 구원하여 주시고 세리와 죄인들과 이방인들을 심판하실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과 정 반대로만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예수님이 싫었으면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원망하고 죽이기까지 하였겠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이 세리와 창기와 같이 잃어버린 자였음을 아십니까? 자신이 잃어버린 자임을 모르는 사람은 예수님이 고맙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 예수 믿을 때는 예수님이 참 고마웠는데 갈수록 어떻습니까? 세월 지나갈수록 예수님이 더 고맙고 자신은 더욱더 죄인의 괴수로 드러나십니까? 아니면 내가 그래도 이정도만 해도 천국은 이미 따 놓은 당상이고 이제 적당하게 놀아도 아무런 하자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에 그런 마음이 드신다면 그 사람은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입니다.

 

 

 

 

바울사도가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 내가 복음을 전한 후에 버림을 입을까 자기를 쳐서 복종시킨다고 하였겠습니까? 바울사도가 그의 행함이 부족하여서 죄인중의 괴수라고 하였겠습니까? 주님을 섬길수록, 주님을 사랑 할수록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신 주님의 사랑이 너무나도 커서 그 사랑이 너무나 좋아서 달려간 것입니다.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가 얼마나 한량이 없는지 그 사랑을 알아가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은 지 몇 십 년 되었다고 교회 생활하는 이력이 붙어가지고 적당하게 눈치껏 살아가면서 잃어버린 자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8-9절입니다. 한 여인이 드라크마 10개중에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등불을 켜고 방을 구석구석 쓸면서 찾을 때 까지 찾고 또 찾았습니다. 드디어 찾아내고서는 기뻐서 이웃을 불러 잔치를 열었습니다. 이렇게 잃어버린 것을 찾는 기쁨을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기쁨이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잃어버린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우리를 찾아주셨기에 알게 됩니다. 그런 자는 자신을 찾아주신 주님께 감사할 뿐 아니라 또한 주님의 이 기쁨에 함께 참여하여 잃어버린 자를 찾아 나설 것입니다. 주님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는 기쁨이 복음전하는 기쁨입니다(요4:27-39).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누가복음 15:11-32 누가 잃어버린 자인가? 2007. 12. 9

 

11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4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로마서 4장에 보시면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는 복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을 한 사람이 품삯을 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일한 사람은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않고 당연히 받아내야 할 빚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분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하여 다윗이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전한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런 복음에 대하여 누가 제일 화가 나겠습니까? 자기들은 열심히 선행을 하였다는 자들입니다. 유대인들의 선행이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누가 얼마나 더 많이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는가에 따라 상급과 지위가 달라진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행동하셨습니까? 누가복음 15:1-2절을 보시면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시고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행위를 보고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였습니다. 이렇게 원망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세 가지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첫째는 양 백 마리 중에 잃어버린 한 마리를 끝까지 찾아내고서는 기뻐하여 잔치하는 목자의 이야기입니다. 두 번째는 10 드라크마 중에서 하나를 잃어버린 여인이 역시 끝까지 찾아내고서는 기뻐하여 잔치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두 이야기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가장 긴 내용이고 가장 감동적인 내용입니다. 첫째와 둘째는 목자와 주인이 찾아야 하는 양과 은전의 이야기라면 세 번째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결국 두 이야기는 이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이야기의 서론 격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양이나 은전은 주인이 찾아나서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세 번째 아들을 찾는 이야기에서 대부분 돌아서는 아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앞의 두 이야기와 동일하게 잃어버린 아들을 찾는 아버지의 이야기로 보는 것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비유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가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미리 달라는 것입니다. 유산이란 아버지가 죽고 나서야 돌아오는 것인데 이렇게 말한 것은 아버지를 얼마나 노엽게 하는 것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둘째 아들의 몫을 나누어 줍니다. 받자말자 현금으로 바꾸어서는 먼 나라로 갔습니다.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나라로 간 것입니다. 젊은이가 많은 돈을 가지고 아버지의 눈이 미치지 아니하는 곳에 간다는 것은 어떻게 될지 짐작이 됩니다. 결국 모든 재산을 다 탕진하고 맙니다. 재산을 다 허비하고 나니 마침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었습니다. 돈 있을 때는 수많은 친구들이 붙지만 돈 떨어지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냉정한 현실에 부닥친 것입니다.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삽니다. 이것은 거지가 된 것입니다. 그 주인이 돼지를 치게 합니다. 유대인들은 돼지가 부정하다고 기르지도 먹지도 아니하지만 굶어죽게 된 지경이니 돼지를 치면서 돼지가 먹는 음식을 먹으려고 해도 도와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인생이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바닥까지 내려간 것입니다.

 

 

 

 

17절입니다. “스스로 돌이켜” 스스로 돌이켰다고 합니다. 그 돌이킨 내용이 무엇입니까? 내 아버지 집에는 품꾼도, 양식이 풍족한 사람도 얼마나 많은데 나는 여기서 굶어죽게 되었구나! 내가 아버지께로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으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으니 거저 품꾼의 하나로 여겨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아들이 돌이킨 것에 초점을 두지만 저는 여기서도 아버지의 일하심을 보게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아버지가 유산을 주지 않으면 됩니다. 유산을 나누어줄 때에 아버지는 그 아들이 어떻게 될지를 다 아는 것입니다. 알면서도 준 것입니다. 유산을 주지 않고 혼을 내는 것도 사랑입니다. 그러나 유산을 주면 반드시 탕진할 것을 알면서도 주고서는 결국 아버지 품으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은 더 큰 사랑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 흉년이 들게 하는 것도 아버지의 일입니다. 굶어죽게 되었을 때에 비로소 아버지의 집을 기억하고 아버지의 아들의 자격이 없지만 그저 품꾼의 하나로 여기셔서 먹고 살게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아들의 의가 될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내쳐버린다고 하여도 아무런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돌아온 아들은 무엇을 알고서 돌아오는 것입니까? 자신이 아들의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고서 돌아오는 것입니다. 거저 품꾼의 하나로 여겨주셔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것은 정말 인생의 바닥에 내려가 본 사람의 자세입니다. 굶어죽을 지경이 되어본 사람은 밥만 먹여주어도 죽도록 충성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이런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예레미야 31:17-20절입니다. “1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의 최후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경내로 돌아오리라 18 에브라임이 스스로 탄식함을 내가 정녕히 들었노니 이르기를 주께서 나를 징벌하시매 멍에에 익숙지 못한 송아지 같은 내가 징벌을 받았나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시니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 19 내가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고 내가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사오니 이는 어렸을 때의 치욕을 진고로 부끄럽고 욕됨이니이다 하도다 20 에브라임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 기뻐하는 자식이 아니냐 내가 그를 책망하여 말할 때마다 깊이 생각하노라 그러므로 그를 위하여 내 마음이 측은한즉 내가 반드시 그를 긍휼히 여기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 함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포로로 잡혀가게 된 나라에서 다시 돌아올 것을 예언한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입니다. 죄를 지었기에 다른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서 그곳에서 고생하다가 죽어가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돌이켜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돌이킬 능력이 없기에 나를 이끌어 돌이켜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내가 돌아오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돌이킴을 받은 후에 뉘우쳤고 교훈을 받은 후에 내 볼기를 쳤다는 것입니다. 돌이켜 주시니 자신의 죄와 부끄러움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째 아들이 스스로 돌이켜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자신의 의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아버지께서 돌아오게 하시니 그제야 돌아오는데 이렇게 돌아오는 자들의 특징은 자기들의 의가 없음을 알고 오직 아버지의 긍휼만 바라보고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 언약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이 새 언약이 나오는 예레미야 31장입니다. 옛 언약은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 남편이 되어서 그들의 손을 잡아 끌어내어도 그들의 마음은 애굽으로 향하였습니다. 이제 새 언약은 그들의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대립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대립인 것입니다. 아직도 옛 언약을 붙들고 있는 그들은 새 언약을 이루시고 계시는 예수님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다는 사실을 그들은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세리와 죄인과 창기들을 하나님의 나라에 영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자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포로로 잡혀 간 것이 죄로 인하여 잡혀간 것입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께 돌이켜 주셨기에 돌아오는데 그들이 돌아오는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예레미야 31:7-9절입니다. “7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는 야곱을 위하여 기뻐 노래하며 만국의 머리 된 자를 위하여 외쳐 전파하며 찬양하며 이르기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8 보라 내가 그들을 북편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니 그들 중에는 소경과 절뚝발이와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하여 큰 무리를 이루어 이곳으로 돌아오되 9 울며 올 것이며 그들이 나의 인도함을 입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로 넘어지지 아니하고 하숫가의 바른 길로 행하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돌아오는 자들은 자기 힘으로 돌아올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돌이키시는 것은 예레미야 1:3절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무궁한 사랑입니다.

 

 

 

 

누가복음 14:21절을 봅니다. 누가 청함을 받습니까? 처음에 청한 자들은 다 거절하였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청함을 받는 자들은 가난한 자들, 병신들, 소경들, 저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아무런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아버지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구약에서 예언하였건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런 말씀은 눈에 수건이 가려져서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고 계시는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20절입니다. 아들이 드디어 집 가까이 왔습니다. 이렇게 온 것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아버지께서 돌이켜 주신 것입니다. 돌이켜 주신 결과는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입니다. 아무런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순간부터 늘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멀리 사람 그림자만 나타나도 아들인가 하여 기다린 것입니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제대로 알아볼 수도 없는 거리인데 벌써 아버지는 알아보고서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21-24절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런 아들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나쁜 짓을 하였는가 하면서 책망하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기를 제일 좋은 옷을 내어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합니다. 이것은 완전한 아들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종이 아니라 아들로 대접한 것입니다. 그리고서 살질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엽니다. 우리가 먹고 즐기자고 합니다.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왔고 잃었다가 찾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잔치입니다.

 

 

 

 

이 말씀을 보다가 어느 소설이 생각이 났습니다. 제목도 기억이 나지 않는데 시골에서 엄마와 딸이 사는데 딸이 가출을 한 것입니다. 몇 년을 도시로 떠돌다가 몸만 버리고 병만 얻어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밤에 돌아오겠지요! 대문이 열려있는 것입니다. 방문도 고리가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평소에 엄마는 문단속을 꼭꼭 하고 자는 분이신데 왜 그랬느냐고 하였더니 네가 나가고 나서 단 한번 도 문을 잠가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혹시 돌아왔다가 문이 잠겨있으면 들어오지 못하고 돌아갈 까봐서 그렇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이런 아버지의 사랑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결코 자기의 의를 내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너보다 오래 믿었다든가? 나는 일을 많이 했다든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 아버지의 집에 올 수가 있었는지 생각만 하여도 감사와 감격이 나오는 것이 정상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쁨의 잔치에 정작 화가 난 아들이 있었습니다. 25-28절입니다. 그 아들은 큰 아들입니다. 종일 일하고 집 가까이 오니 잔치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한 종을 불러서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기에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고 합니다.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거절합니다. 이제 아버지가 나와서 권합니다. 동생이 돌아왔으니 함께 가서 기뻐하고 즐기자고 합니다.

 

 

 

 

그런데 아들이 뭐라고 합니까? 29-30절입니다. 내가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새끼 한 마리 주셔서 나와 벗으로 즐기게 하지 않으시고는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까? 하면서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너는 나와 항상 함께 있고 또 내 것이 다 너의 것이 아니냐! 그런데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으로 비유의 말씀은 끝입니다.

 

 

 

 

그러면 과연 잃어버린 아들이 누구입니까? 흔히 우리는 탕자의 비유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말 탕자는 작은 아들이 아니라 큰 아들입니다. 자신은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의롭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잃어버린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법을 다 지켰다는 것입니다. 의로운 자이기에 마땅한 보상을 자기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가 잃어버린 자입니다. 이미 아담의 범죄 이후에 모든 인간은 다 하나님 앞에서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자기의 의로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돌이켜 주셔서 되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6:37-40절입니다. “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돌이켜 주신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돌이켜 주셔서 돌아온 자들은 자신이 죽었다가 살아난 자임을 압니다. 잃어버렸다가 찾아진 자 임을 압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돌아오게 된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의 모임은 잔치입니다.

 

 

 

 

교회란 이런 자들의 모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자기의 잘남을 자랑할 수가 없는 곳입니다. 오히려 자기의 못남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예수님의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자기를 자랑할 것이 있다면 자기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합니다. 이런 모임은 천국의 잔치를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은혜를 맛보는 신앙생활이 되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6:1-18 두 주인 2007. 12. 16

 

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4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6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 또 다른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9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 18 무릇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리운이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비유의 내용이 1-8절 중간까지입니다. 이 비유의 내용은 어떤 청지기가 주인의 재산을 허비한다는 소문이 주인에게 들렸습니다. 이 당시에 주인은 따로 살고 이 청지기는 집사로서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인이 그 청지기를 보고 이제 일을 그만두라고 합니다. 서류 정리하여 넘기라는 것입니다. 이제 큰일이 났습니다. 지금까지 배운 기술도 없고, 청지기로서 일을 잘 못했다고 해고당하는 판에 다른 사람들이 청지기로 채용할리도 없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걱정이 된 것입니다.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러다가 묘안이 떠올랐습니다. 아직까지 서류를 정리할 시간이 남았으니 자신이 해고되고 나서 살길을 마련하려고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일일이 불러다가 빚을 탕감하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실직할 때에 나를 그들의 집으로 영접하여 줄 것이라는 계산으로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청지기를 보고서 주인이 칭찬한 것입니다. 이 부분이 가장 어렵다고 여기는 부분입니다. 어떻게 자신의 재산을 허비한 청지기를 해고하는 마당에 더 손해를 보게 하는 청지기를 칭찬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해석들이 나오는데 이 당시의 이자는 법으로 정하여 진 것이 아니라 엄청난 고리대금이어서 청지기가 삭감하여 줌으로 주인에게 좋은 평판이 돌아가서 칭찬하였다는 말도 하고, 또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끝을 일부러 비틀어서 교훈하기 위함이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말하니 갑자기 복잡하여 질 것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설교를 들으면서 정직하고 바르게 살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자를 칭찬하는 주인의 이야기도 이해가 안 되는데 예수님은 이런 청지기를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그런 청지기가 빛의 아들들 보다 지혜롭다고 하십니다. 저는 이 비유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8절 중간을 봅니다. 비유를 통하여 예수님께서 정작 하고자 하시는 말씀의 시작입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 빛의 아들들 보다 지혜롭다는 것입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란 빛의 아들들과 대비되는 어둠의 아들들입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불신자들입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장래를 대비하기 위하여 지혜롭게 준비하는데 빛의 아들들이라고 하는 신자들은 도대체 어떤 장래를 대비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무엇을 준비하면서 살아갑니까? 우리가 아침 일찍 일어나며 저녁 늦게 누우며 수고하는 것이 무엇을 위한 준비입니까? 늙어서 힘이 없게 될 때 어떻게 살 것인가를 염려하면서 준비하실 것입니다. 물론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느 정도를 모아야 노후를 대비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람들마다 다를 것이지만 충분하게 준비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를 영원한 집으로 인도하느냐는 것입니다. 9절을 봅니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것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고 합니다. 불의한 청지기는 영원한 처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후를 위한 준비를 약삭빠르게 준비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즉 제자들은, 오늘 우리는 무엇을 준비하여야 하는 것입니까?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원한 처소로 영접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또 어려운 단어가 나왔습니다. 재물이 왜 불의한 것입니까? 사람들은 돈 자체는 불의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돈은 가치중립적인데 어떻게 버느냐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선악이 나누어진다고 봅니다. 그러나 재물이란 이미 범죄 한 이후에 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에 결코 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범죄 하기 전 에덴동산에서는 어떤 재물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 후에 자신의 힘으로 살아야 하기에 재물이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에서 은혜로 살아가는 것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 과정을 출애굽에서 봅니다. 재물의 힘으로 살아가는 애굽에서 출애굽하고 난 이후에 광야에서 일용할 양식으로 살게 하심으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알게 하셨지만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산 것이 아니라 재물을 의지하고 살았던 것입니다. 재물은 단지 돈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의 재물을 맘몬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므로 말과 병거과 명예와 세상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도 다 맘몬을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것은 재물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돈만 있으면 산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런 돈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필요한 것이지 영원한 나라에는 오히려 방해거리가 됩니다. 다음 주에 보게 될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도 저는 이 말씀의 연장이라고 봅니다. 부자란 재물이 많은 자입니다. 재물이 많다는 것은 자기의 소유를 나누지 않고 축적한 것입니다. 그 부자는 영원한 지옥에 갔고 거지 나사로는 영원한 천국에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재물은 영원에 비추면 작은 것입니다. 10절을 봅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면 큰 것에도 충성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하면 큰 것에도 불의하다고 합니다. 재물이 지극히 작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작은 것에 충성한다는 것은 돈 벌기 위하여 충성한다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사용하는 일에 신실 하라는 것입니다. 재물이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작은 재물을 사용하는 일에 신실하지 못하면 어떻게 큰 것, 영원한 것에 충성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재물이 작아 보입니까? 커 보입니까? 돈이 커 보입니까? 하나님이 커 보입니까?

 

 

 

 

그렇게 묻는 목사 당신은 무엇이 커 보입니까? 이렇게 묻고 싶으실 것입니다. 저도 답변을 해야지요! 교회당 이사를 해야 하는 마당에 제일 큰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돈이지요! 우리가 가진 것으로는 임대할 만한 곳도 구하지 못하는 형편임을 여러분도 아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리 저리 고민하면서 선택하였지만 그것도 역시 아직 돈이 많이 들어가야 합니다. 제가 밤잠도 못자고 고민한 것은 돈이 얼마나 커 보였으면 그렇겠습니까? 주님을 사랑하지 못함에 안타까워서 밤을 새본 적이 거의 없으니 저도 역시 돈이 커 보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요?

 

 

 

 

11-12절입니다. 불의한 재물에 신실하지 못하고서 어떻게 참된 것을 맡기겠느냐는 것입니다. 돈에 쩔쩔 매고 있는 자에게 어떻게 영원한 나라를 맡기겠느냐는 것입니다. 재물이란 사실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돈을 벌 능력도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기에 우리는 거저 청지기일 뿐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다 남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인인양 착각하면서 재물을 자기 것인 양 여기고 살면 참된 것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참된 것과 영원한 것을 주겠느냐는 겁니다. 돈을 사랑하면서 천국 갈 생각일랑 말라는 것입니다.

 

 

 

 

13절입니다.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한 편으로 기울어지기 마련입니다. 대조영을 보니 금란이라는 여인이 미모사와 걸사비우 사이에 갈등을 하는데 결국 걸사비우의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주인이라고 여기고 목숨 바치겠다고 여긴 미모사 보다는 여인의 감정이 동한 이성을 향하여 기울어지는 것은 숨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돈과 하나님 사이에 누구 주인입니까?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는데 어느 쪽으로 기울어집니까?

 

 

 

 

지금까지 말씀드린 대로 우리의 주인은 돈이지 않습니까? 돈을 생각하고 돈을 사랑하고 돈을 벌기 위하여 애쓰는 시간과 정성과 노력이 주님을 사랑하는 시간과 정성과 노력에 비하여 어느 쪽을 기울어집니까? 나는 돈을 벌어서 주님을 위하여 사용하기 위하여 법니다. 그런 분들도 있겠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그러합니까? 나는 먹든지 마시든지 돈을 벌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십니까? 예수님께서 두 주인을 왜 하나님과 재물로 말씀하셨겠습니까? 그 정도로 재물의 힘이란 막강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보다 돈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돈을 섬기고 있습니다.

 

 

 

 

14-15절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서 비웃습니다. 왜 비웃는 것입니까? 그들은 돈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한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을 사랑하여 안식일도 지키지 못하고 십일조도 못하지만 자기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철저하게 십일조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심을 보시는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보시니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키면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가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 알았더니 결국 그 속에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도 다 자기 사랑하는 쪽으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이혼증서 써주고 이혼해도 된다고 하니 살다가 미우면 이혼증서 써주고서 합법적으로 이혼하였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율법을 지킨다고 하였지만 그 속에는 돈 사랑 자기 사랑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목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 알았더니 그 속에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사랑한다면 돈 내어 놓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저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임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니 천국은 이미 물 건너 간 것입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별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이제 어떤 인간의 노력이나 애씀이나 율법지킴도 돈을 사랑하는 것에서 이길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인데 누가 이 자본주의 세상에서, 거대한 맘몬의 세력이 온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세상에서 돈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고 나설 자가 있습니까? 대통령을 뽑는데도 최고의 기준이 돈 잘 벌게 해주면 뽑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유일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입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까지입니다. 어느 인간도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음을 확인시키시고 이제는 오직 복음으로만 들어가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 천국에 들어가는 자는 자기 힘이 아니라 천국을 침노할 수 있는 예수님의 힘만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잠시 잠간이라도 돈보다 예수님을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 은혜가 깊어지는 것이 믿음이 깊어지는 것이며, 이런 은혜가 가득한 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해고의 통지를 받은 것처럼, 오늘 우리는 이 땅으로부터 해고의 통지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청지기처럼 염려가 없는 것은 이미 영원한 처소를 준비하신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19-31 부자와 나사로 2007. 12. 23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20 나사로라 이름 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21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26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찌니라 30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지난주의 말씀을 듣고서 찬양대에서 몇 분이 이해가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 부분이 무엇인가 하면 어떻게 자신의 재산을 허비한 청지기를 주인이 칭찬할 수 있는가에서 걸린 것입니다. 그때 김 집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빚진 자가 부도직전인데 탕감을 해줌으로 절반이나 받아내면 칭찬들을 만 한 일이라고 하면서 그런 일을 주변에서 많이 본다는 것입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기는 합니다만 그러나 정작 우리가 왜 그런 문제에 걸려서 정말 중요한 말씀을 보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설교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이 세대의 아들들이 빛의 아들들 보다 지혜롭다는 것은 그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재물입니다. 그러니 재물을 마련하기 위하여 온 마음을 다 기울이는 것입니다. 재물이 자신을 살린다고 믿기에 그 사람은 재물이 신인 것입니다. 그러나 빛의 자녀라고 하는 너희들은 무엇을 준비하면서 사느냐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빛의 아들들이라고 여기는 바리새인들은 겉으로 보기에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그들의 속도 여전히 돈을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왜 청지기를 칭찬하였을까? 잘 모르겠다. 이런 말씀을 그냥 넘어가자는 식으로 무엇을 피하고 싶은 것입니까?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는 말씀을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람이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이 말씀을 끝까지 밀어붙여보면 결국 우리가 어느 주인을 섬기느냐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냐 돈이냐?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부담감에 이르고 싶지 않아서 이런 말씀은 그냥 잘 모르겠다면서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분명한 말씀 아닙니까? 누구를 사랑하느냐의 문제인데! 사랑과 기침은 감출 수가 없습니다. 목이 간질거려서 기침이 나오면, 기침을 하여 들키면 죽음에 이른다고 하여도 나오는 기침을 어쩔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기관지가 좋지 않아서 기침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기침을 참으려면 정말 미칠 지경입니다. 이처럼 사랑도 기침과 같아서 숨기거나 감출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이 말씀은 너무나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생각하였습니까? 그들은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면 부자가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율법에서 하나님의 모든 규례를 잘 지키면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으며 꾸어주는 자가 되고 꾸는 자가 되지 않는다는 말씀이 신명기 28장에 분명히 나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열심히 율법을 지킴으로 그런 복을 받는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질병이 들거나 가난하게 된 것은 율법을 지키지 못하여 저주를 받아서 그렇다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모든 규례와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명령과 규례에는 무엇도 포함이 되는 것입니까? 신명기 15:7-9절을 봅니다.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8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9 삼가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곧 이르기를 제 칠년 면제년이 가까왔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에게 악한 눈을 들고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네가 죄를 얻을 것이라

 

 

 

 

율법에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아보라는 말씀은 너무도 많습니다. 왜 그들을 돌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는가 하면 너희도 애굽에서 나그네요 외국인이었다고 하십니다. 그러한 너희를 하나님의 자비로 구원하여 내었기에 너희가 들어가서 살 가나안 땅에서 그 하나님의 자비가 실현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율법의 내용을 줄인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와 같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배가 고프면 밥을 챙겨 먹듯이 내 이웃이 배가 고프면 밥을 먹여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추워서 옷을 입으면 같은 마음으로 가난한 자에게 옷을 입혀야 합니다. 내가 따뜻한 집에서 사는데 이웃이 집이 없어서 노숙하고 있다면 그들에게도 집을 지어주어서 따뜻하게 살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죄인데도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법을 잘 지켜서 부자로 살고 있다고 여깁니다. 가난하고 병든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지 못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의 사고방식과 오늘날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설교가 같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잘 섬기면 복을 받아 부자가 되고 잘 못 섬기면 저주를 받아 가난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나라가 부자 나라가 되고 선진국이 되었다고 하면서 우리도 하나님을 잘 섬겨서 복을 받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돈을 사랑한 것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정말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라면 그들 가운데 가난한 자들을 돌보아야 했습니다. 물론 형식적으로는 구제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기 몸처럼 구제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렇게 하려니 돈이 아까운 것입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 것이 아니라 돈을 사랑하고 섬긴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말만 나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떻고 하는 그들의 가증함을 예수님은 견디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라고 저주를 퍼붓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들어 가봅시다. 저는 이 본문이 누가복음 16장 전체의 결론이라고 봅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오늘 말씀에서 결론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볼 때에 저주받고 잃어버렸다고 여기는 거지 나사로를 구원하시고, 세상이 볼 때에 성공하고 복을 받았다고 여기는 부자는 지옥에 가서 고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다는 말씀의 결론도 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 특히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세상을 지배하는 대한민국이라는 이 땅에 살면서 돈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고서는 결코 돈이 모아지지 않습니다. 돈을 주인으로 섬기고 모실수록 돈이 모아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돈을 섬기고 사는 사람은 부자처럼 삽니다. 날마다 연락합니다. 즐겁게 잔치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호의호식하면서 삽니다.

그러나 그 집 앞에 거지는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고 삽니다. 그뿐 아니라 몸에는 헌데가 나서 개들이 핥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사람의 이름이 나사로인데 그 뜻은 히브리어의 ‘엘레아자르=하나님이 도우신다, 도우셨다'를 그리스어화한 형태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가 세상에서 가난하고 병든 상태로 살고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는 자는 부자로 호의호식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 역설을 여러분이 받아들일 수 있으십니까?

 

 

 

 

물론 이 말씀은 자기들이 의로워서 복을 받고 산다고 여기는 바리새인들과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을 비교하면서 하신 의도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복을 받은 사람인가는 이 세상에서 다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다 부러워하는 성공한 사람으로 여김을 받아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지옥에 가야하는 불쌍한 인생인가 하면, 세상 사람들이 다 저주 받았다고 손가락질 하는 병든 거지로 살았다고 할지라도 천국에 가서 영원한 위로를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자는 지옥가고 가난하면 천국 갑니까? 이렇게 묻고 싶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물으시는 저의가 무엇입니까? 나도 부자로 살고 싶다는 것이지요! 이 말씀을 바리새인과 죄인들이라고 보면 어떻게 됩니까?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입니다. 의롭다고 여긴다는 것은 부자가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반면에 가난한 자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아는 자들입니다. 특히 구약에서 가난한 자와 경건한 자를 같이 보는 것은 믿을 것이 하나님밖에 없는 자를 가난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라고 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이들이 믿을 곳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나사로입니다. 그러니 나사로라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런 나사로 중에는 재산이 수십억이 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정말 나사로라면 그 재산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말씀드리니 위로가 되십니까? 내가 수십억이 있어도 하나님만 의지하면 되지 돈을 의지 하지 않겠다고 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런데 이상한 것은 소유가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소유를 믿고 의지하게 되어있습니다. 누가복음 18:18-27절을 보시면 어떤 부자 관원이 예수님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것인지를 질문합니다. 율법을 지키라고 합니다. 그러자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더 부족합니까? 예수님께서 그 사람이 부자인 것을 아시고 그 재물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부자는 재산이 많으므로 심히 고민하며 돌아갔습니다. 그 사람이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하지만 결코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지 못하였으니 그 사람도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재물을 사랑하고 섬겼기에 영생의 문턱에서 돌아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움만 바라는 나사로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도우심을 입어야만 나사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가운데 병들고 가난한 분이 계십니까? 그 가난과 병듦이 한과 저주로 여겨집니까? 아니면 이렇게 하셔서라고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인 줄 알고 감사가 나오십니까? 참으로 어려운 질문을 하였습니다만 우리 가운데 그런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러면 그 약한 가운데서도 오히려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병들고 가난한 나사로라도 죽고 부자도 죽었습니다. 조금 빨리 죽고 늦게 죽을 뿐이지 사실 다 죽습니다. 아무리 몸에 좋은 것 때를 따라 챙겨먹어도 죽음을 이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22절을 봅니다. 나사로는 죽어서 천사들에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갔습니다. 부자도 역시 죽어서 장사 지냈는데 장사 지내는 것도 화려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가 눈뜬 곳은 음부였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은 유대인들이 생각하기를 의인이 죽어서 가는 곳으로 여깁니다. 음부는 악인이 죽어서 가는 곳이라고 여깁니다. 우리가 이해하기로는 천국과 지옥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천국과 지옥은 오고 갈 수가 없는 곳인데 이 부자가 지옥의 고통 속에서 잠시 천국을 보게 됩니다. 자신은 지옥의 불꽃 가운데서 고통 받고 있는데 자기 집 앞에서 헌데를 앓으며 밥을 얻어먹던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24절입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라고 부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아브라함이기에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자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에서 자신들을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여기는 그들에게 오히려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닌 것입니다. 오직 약속으로 나야만 아브라함의 자녀가 됩니다. 그 약속으로 난 자가 이삭입니다. 이삭은 없는데서 나온 자식이고 죽었다가 산 자식입니다. 그러므로 부자와 나사로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어떤 자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로만 아브라함이라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예수님을 믿어야 제대로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자는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손이기에 구원을 받으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자기의 의와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살았지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산 것이 아닌데도 그렇게 믿고 살았던 것입니다. 의로운 것도 자기의 행위로 되고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사는 것도 자기의 행위로 되는 줄로 아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나를 긍휼히 여기셔서 나사로의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케 하여 달라고 합니다. 어느 정도의 고통인지 지옥을 생생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얘야 너는 세상에서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다고 합니다. 살아서 의롭다 함도 받고 사람들의 칭찬과 존경도 받고 부자로도 살았습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는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뿐 아니라 이곳과 그곳은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오고 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또 부탁을 합니다. 그렇다면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어서 내 형제 다섯이 있는데 그들에게 증거 하여 그들이 회개하여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 신약이 기록되지 않았기에 율법과 선지서만 있을 때입니다. 그들이 분명히 증거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면 죽은 자가 살아가서 말해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려 주셨습니다. 그런다고 믿었습니까? 나중에 죽은 마르다 마리아의 오라비 나사로를 살려내자 나사로 까닭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나오니 나사로마저 죽이고자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자가 살아나서 말해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기적을 통하여 믿게 하려고 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믿지 않으면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온갖 기적을 보여주어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세상에서 보잘 것 없이 보여도, 만물의 찌끼 같은 대접을 받을 지라도, 그들의 복음을 듣고 믿는 자가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신약에서 이런 대접을 받았습니까? 세상의 영광을 약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의를 말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은혜로 주어지는 의만을 증거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결론을 내립시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싶은 것입니까? 부자로도 살고 천국도 가고 싶습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하나님도 믿고 돈도 믿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보다 돈을 섬긴 것입니다. 왜요?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자는 돈이 없으니 하나님만 믿은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시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타나면 자기 의를 부인하게 만듭니다. 자기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게 하십니다. 이런 의만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재물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가 나를 살린다는 것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재물을 주인으로 믿지 않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이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누가복음 17:1-10 믿음을 더하소서! 2007. 12. 30

 

1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2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찐대 차라리 연자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4 만일 하루 일곱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5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7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찌니라

 

 

 

 

오늘이 일 년 52주 중에 마지막 주일입니다. 사람들마다 이때쯤이면 어떻게 한해를 살았는지 돌아보면서 결산을 해봅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수익을 남겼는지를 계산해보고 새해를 위하여 새로운 계획을 세웁니다. 우리도 다 그런 결산들을 하면서 살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점검보다 더 중요한 점검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2007년 한해를 주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았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았는지 아닌지가 왜 중요한가 하면 믿음으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중요한가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장로교에서 채택하는 웨스트민스터 교리문답 1번에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의 삶은 누구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살아왔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믿음의 삶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살았는지를 점검하고 결산해보자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하는가 하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가 됩니다(롬14:23). 그러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1-2절을 봅니다. 먼저 실족에 관한 문제입니다. 실족하게 한다는 것은 나의 언행심사가 다른 연약한 자를 넘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서 일어나는 문제들입니다. 자기들은 의롭다고 여기고 세리와 창기와 이방인들을 죄인취급 하는 그들에 의하여 많은 사람들이 실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천국 문을 닫고 자신들도 들어가지 못하고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자들도 가로막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전도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배나 지옥 자식을 만든다고 하신 것입니다(마23:15,16).

 

 

 

 

이런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 안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없을 수는 없지만 실족하게 하는 그 사람은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실족이라는 것을 다른 번역에서는 죄 짓게 하는 일로 번역합니다. 그러므로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죄 짓게 하는 자는 차라리 자기 목에 연자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이정도로 실족하게 하고 죄 짓게 하는 일이 두려운 일입니다.

 

 

 

 

그러면 제자들 사이에서 실족하게 하고 죄 짓게 하는 일들이 어떤 것입니까? 여자들이 어린아이들을 예수님께서 만져주시기를 원하여 데리고 오니 제자들이 책망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제자들을 책망하신 후에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들처럼 받아들이는 자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린 아이는 모든 것을 받아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자기 의로 가는 곳이 아니라 은혜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자란 어린이만이 아니라 사람들이 볼 때에 죄인이라고 여기는 그런 자들이 다 작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서로 경쟁하고 시기하였습니다. 자신들이 작은 자임을 몰랐습니다. 그러니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이냐며 예수님의 뒤를 따라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죽기위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데 제자들은 서로 높은 자리 차지하기 위하여 따라가고 있으니 이런 모습들이 자기들도 실족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도 실족하게 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자기들끼리 파당이 생기는 것입니다. 누가 더 예수님의 측근이 되느냐로 싸웠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안에서 실족하게 하는 일들이 어떻게 나타나겠습니까? 요한복음 13:34-35절입니다.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인줄 세상의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서로 사랑하면 압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세상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다들 자기만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새 계명을 받은 자들은 그 새 계명의 능력이 돌 판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지기에 서로 사랑하는 일들이 나타남으로 예수님의 제자임이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교회는 서로 사랑함이 나타나고 있습니까? 새 계명, 새 언약을 받으면 서로 사랑하게 되는데 그것이 모든 율법의 완성인데 서로 사랑하고 있습니까? 오히려 서로 시기하고 흉보고 뒤에서 수군 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모습을 처음 교회에 온 사람이 보고서는 교회도 세상과 전혀 다를 바 없는 곳이구나! 교회는 사랑이 있는 줄 알았는데 이런 교회 다닐 필요가 없겠구나 하면서 그 사람이 실족하게 된다면 이것은 누구 책임입니까? 서로 사랑하지 못한 우리들의 책임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차라리 나은 것입니까?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져죽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다가 제가 제일 먼저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할 사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고보서 3: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여기서 선생 된 자란 물론 앞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자도 해당이 되지만 먼저 믿은 모든 자가 사실은 다 선생입니다.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누구를 보고서 따라 하겠습니까? 먼저 믿은 자들을 보고 따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믿는 자들의 모습을 본 받게 됩니다. 기도도 본을 보게 되고, 먼저 믿는 자들이 성경을 보는 대로 보게 되고, 먼저 믿는 자들이 지각하면, 처음 온 사람들도 그렇구나! 예배라는 것은 지각해도 되는 구나! 이렇게 배우는 것입니다. 헌신과 봉사를 할 때에 몸을 사리는 것을 보면, 나중에 온 사람도 그렇게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대부분 사람들은 앞선 사람들에게서 보고 배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합니다.

 

 

 

 

3-4절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산다는 다음의 문제는 용서입니다. 형제가 죄를 범하면 경계하라고 합니다. 경계하라는 것은 책망하라는 것입니다. 책망을 받기 싫어하는 자는 회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죄를 책망할 때에, 믿음으로 살지 못함을 책망 할 때에 그 책망을 받아 회개하는 자면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한두 번은 용서가 됩니다. 물론 완전한 용서는 아닙니다. 완전한 용서는 기억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용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용서입니다(히10:17).

 

 

 

 

그런데 우리가 하루에 일곱 번을 같은 잘못을 저지르고 오는 자를 과연 용서 할 수가 있습니까? 이 일곱 번이란 사실 횟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고 완전하게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일곱이란 완전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도 횟수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늘 항상 완전하게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런 용서를 우리가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 제자들은 이런 용서를 아직 모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부인한 후에 성령이 임하고 나서 왜 자신들이 영원한 용서를 받아야 하는지를 제대로 알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은 몇 번 정도야 용서할 수 있지만 어떻게 하루에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용서할 수가 있느냐의 문제에서 자신들의 믿음 없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실족하게 하는 문제도, 용서의 문제도 그들은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성경의 단락의 문제인데 앞의 단락과 연결이 되느냐 안 되느냐의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만 그런 단락과 상관없이 성경의 모든 말씀을 믿음의 문제로 볼 수 있기에 이렇게 연결하여 보는 것입니다.

 

 

 

 

5-6절입니다. 제자들이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어도 이 뽕나무 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믿음이 있다고 여기지만 믿음이 작다는 사실을 알고 믿음을 더하여 달라고 하였는데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에게는 지금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습니까?

 

 

 

 

몇 년 전에 경상여전도회 순회예배를 저희 교회에서 했을 때에 제가 설교한 것을 예수사회 원고에 실었습니다. 각 교회의 여전도회 임원들이 모이고 권사 집사들이 모였으니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은 있겠지요? 라고 하였더니 아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과연 그런 믿음이 있는지 실험하였습니다. 뽕나무는 지금 밖에 나가야 되기에 여기 화병의 꽃 한 송이 뽑혀서 물 컵에 옮겨지도록 믿음으로 기도해 보자고 하였습니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도 이런 말씀을 가지고 꿈대로 된다고, 비전을 품으라고, 야망을 가지라고, 마음의 상상한 것을 입으로 말하고 목표를 세우라고 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기에 마음의 소원을 말하고 기도하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이런 것은 세상의 심리학자들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인간의 가능성을 가지고 말하는 내용들입니다.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라는 책에 보면 세상 사람들이 이루고 싶은 욕망을 성경의 단어를 사용하여 대치시키는 것이 어찌 기독교라고 할 수가 있느냐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분명 기적입니다. 이런 기적적인 내용이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저는 다음의 말씀에서 이 말씀의 해답을 찾습니다. 7-11절입니다. 예수님께 믿음을 더하여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대한 결론부분입니다. 너희 중에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어서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온 종이 있다면 그 종에게 앉아서 먹으라고 할 자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당연히 밭에서 온종일 일하고 온 종이 주인의 상을 준비하고 주인이 다 드시도록 시중들고 나서 자기 먹을 것을 먹으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종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주인이 사례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무엇을 계산하면서 따라가는 것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위하여 배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데 우리에 무엇을 줄 것이냐를 계산하면서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하나님이 계신 것과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자임을 믿어야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런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히브리서 11:6절을 인용한 말씀이 이런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 상이란 예수님이 상입니다. 영생이 상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세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씀 들으니 봉사조차 하기가 싫어졌지요!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여전히 주인이고 예수님은 나를 도와주는 종이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 없는 증거요. 죄 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주종이 전도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라면 가고 서라면 서는 것입니다.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무익한 종이라고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주여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 
 

 

 


누가복음 17:11-19 사례한 사마리아인 2008. 1. 6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12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14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16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19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이 누가복음의 줄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가시는 길입니다. 그 가시는 도중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제일 남쪽에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지역과 그 중간이 사마리아입니다. 그리고 제일 북쪽이 갈릴리 지역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인과 같이 취급하였기에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려면 중간의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러운 지역이라고 부정하게 여겨서 빙 둘러 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사마리아를 이방인 취급하여 개같이 여겼는가 하면, 북 이스라엘이 범죄 함으로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 의하여 정복을 당합니다. 북 이스라엘을 정복한 앗수르가 다른 정복 지역민들을 사마리아로 이주시켜서 통혼정책을 편 것입니다. 그리고 북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성의 이름을 따라 사마리아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북 이스라엘을 욕하던 남쪽 유대나라 사람들도 역시 그들의 범죄로 인하여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하여 멸망합니다. 바벨론 포로생활 70년 만에 돌아와서는 자신들은 포로로 잡혀갔을 지라도 혈통을 지켰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북 이스라엘을 유대인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할 때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함께 하겠다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주전 3세기경에 완전히 분리가 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모세오경을 인정하고 그리심산을 하나님께 예배할 장소로 믿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마리아 지역을 유대인들은 지나다니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지역을 일부러 찾아가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을 만나서 구원을 베푸시고 오늘도 사마리아와 갈릴리사이를 지나가시는 것입니다. 갈릴리도 예루살렘 사람들이 보면 이방인과 접하여 사는 곳으로 여겨서 별 인정을 받지 못하지만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과 갈릴리 사람의 차이는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벽이 있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인 것입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의 사이에 있는 한 촌으로 예수님이 들어가십니다. 그러자 그 소문을 들은 10명의 문둥병자가 멀리서서 소리를 높여 예수님을 부릅니다. 문둥병자는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전염성이 있기에 마을에서 격리됩니다. 문둥병자에 대한 세세한 규정은 율법에 다 나와 있습니다. 문둥병자는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가까이 오면 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고 외쳐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자신들에게 접촉함으로 부정하게 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멀리서서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10명의 문둥병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겠지요! 예수님이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주시면 고침을 받으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부릅니다. 멀리 있기에 소리를 높여야 하지만 문둥병자는 몸이 일그러지기에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10명이 다 한마음 한목소리로 소리를 높인 것입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부릅니다. 아직 예수님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그저 능력 있는 선지자자 랍비정도로 생각한 것입니다. 엘리야나 엘리사 선지자도 기적을 행하였기에 그런 기적을 바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제사장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문둥병자에게 직접 손을 대어 고쳐주시고서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즉석에서 고쳐주시지 않으시고 제사장에게 가라고 합니다. 문둥병자가 나았다는 확인을 제사장이 해 주는 것이 율법의 규례입니다. 그런데 몸이 하나도 낫지 않았는데 제사장에게 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면 갈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열 명이 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제사장에게로 갔습니다.

 

 

 

 

제사장에게로 가는 도중에 자기들의 몸이 나은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동안의 모든 장애물들이 한꺼번에 날아간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아무리 보고 싶어도 접근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까이 가다가는 돌에 맞아 죽을 수 있습니다. 그 엄청난 소외감 속에서 죽는 것 보다 더한 고통 속에 살아가는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제사장에게 가다가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그 중에 한 사람은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제사장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로 돌아와서 그 발아래 엎드려 사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감사하다고 엎드려 절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온 자가 없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열 명의 문둥병자들 중에 아홉은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개같이 취급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마리아 인이 유대인들과 같이 있게 되었습니까? 죽음 앞에서 모든 사람이 다 공평합니다. 죽음보다 더한 질병인 문둥병 앞에서 신분과 지위고하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의 구별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문둥병이 고쳐지자 말자 갑자기 자기들의 신분의 차이를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제사장에게 확인을 받고 다시 유대사회에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이방인이요 개같이 취급을 받기에 문둥병에서 나아도 역시 유대인들에게는 개 같은 취급을 받습니다. 그런 사마리아인이 예수님의 발 앞에 와서 엎드려 사례한 것입니다. 그를 낫게 한 것은 제사장이 아니라 자신에게 말씀하신 예수님인 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단순히 선생 예수가 아니라 메시아임을 알아보았기에 그 발 앞에 엎드려 사례한 것입니다. 그 사마리아인을 향하여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나머지 아홉 명은 몸만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구원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죽음 같은 질병에서 벗어난 것이 구원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한 구원은 받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병 고침 받는 정도의 믿음만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병 고침을 받고서는 제사장에게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는 제사장에게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머지 아홉 명도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을 받고 또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을 것입니다. 문둥병에서 낫게 되면 제물을 드리는 것도 율법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리가 제사장이나 성전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을 성취하시는 예수님에게 모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감사하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서도 예수님은 지금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알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인가를 통하여서도 선한 사람을 레위인도 아니고 제사장도 아닌 사마리아인으로 말씀하신 것은 새로운 시대가 다가 왔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사마리아 우물가의 한 여인을 만나셔서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의 제사장들과 참된 예배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개 같이 취급을 받는 사마리아인, 그 중에서도 자기의 삶이 부끄러워 아무도 오지 않는 한 낮에 물을 길러온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이를 통하여 예수님이 이루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유대인이나 사마리아 인이나 문둥병이 들면 다들 격리됩니다. 여기서 무슨 차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이 모습이 모든 인생의 모습이라고 봅니다. 문둥병이 든 사람들, 신체의 일부가 문드러져 흘러 내려도 고통을 모르는 것처럼 우리의 죄악이 우리를 지옥으로 끌고 가도 그 고통을 모르는 것과 동일하다고 봅니다. 평생을 살면서 온갖 더러운 것들을 뿜어내면서 가는 곳마다 부정하게만 만드는 인생들이지 않습니까? 부정한 자는 가는 곳 마다 부정하게 됩니다. 앉아도 누워도 손을 대어도 부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이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이런 문둥병자의 부정함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는 부정한 자들임을 알지 못하는 한 인생은 껍데기만 꾸미다가 한 평생을 보내는 것입니다.

 

 

 

 

이사야 6:1-5절입니다. “1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4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이사야는 선지자입니다. 평소에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고발하던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자신이 입술이 부정한 사람임을 압니다. 문둥병자는 입술을 가리고 자신이 부정하다고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과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다 부정한 자임을 알고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의 배경이 웃시야 왕이 죽던 해입니다

역대하 26장을 보시면, 웃시야 왕은 하나님의 놀라운 도우심을 입어서 강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강성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께 범죄 하였습니다. 그 범죄란 교만자체가 이미 범죄이지만 구체적인 범죄행위로는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향단에 분향하려고 한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말려도 왕권으로 밀어붙이고서는 분향하려고 향로를 잡았을 때에 그 이마에 문둥병이 발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이 그 이마의 문둥병을 보고서 쫓아내었습니다.

 

 

 

 

그는 평생 별궁에 거하며 여호와의 전에 나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 아들 요담이 대신하여 치리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죽자 문둥병이었기에 왕의 묘실에 묻히지도 못하고 그 근처 열조의 묘실 곁에 장사되었습니다. 이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그러자 자신과 백성들이 다 부정한 자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나라가 역사 이래 이만큼 부강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경제가 죽었다고 살린다고 합니다. 나라가 더 부강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이런 요구에 수많은 목사와 예수 믿는 다는 사람들이 앞장서서 경제 살린다는 대통령을 뽑았습니다. 벌써부터 강한자만 살아남게 하는 정책들의 조짐이 나오고 있습니다. 학교를 성적으로 서열화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다 그렇게 흘러갑니다. 그래야 경제가 살고 부강한 나라가 된다고 합니다. 웃시야 왕 때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속에는 문둥병처럼 곪아 썩어 흘러내리는데도 껍데기를 꾸미는 일에 정신을 다 팔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나머지 아홉 명은 어디에 갔느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오히려 문둥병에 걸렸을 때에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지는 못하였어도 예수 선생이여 라고도 불렀습니다. 우리나라도 기독교가 들어올 때에 예수님을 선생으로 알았습니다. 예수 선생 믿어서 문명이 개화되고, 예수 선생 믿어서 병 고침 받고, 예수 선생 믿어서 부자가 되었지만, 초라하고 멸시받는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평소에 개같이 취급을 받던 사마리아인 한 사람만 예수님께 돌아와서 엎드려 절하며 감사하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몸과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누가복음 17:20-37 인자의 날 2008. 1. 13

 

20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23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가지도 말고 좇지도 말라 24 번개가 하늘 아래 이편에서 번뜻하여 하늘 아래 저편까지 비췸 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 25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할찌니라 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30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31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 세간이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오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이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32 롯의 처를 생각하라 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3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35 두 여자가 함께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36 2)(없음) 37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가라사대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어느 개인이나 나라나 간에 사는 것이 어렵고 고달프면 걸출한 영웅이 나타나서 모든 문제를 단숨에 해결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런 기대심리를 메시아 사상이라고 합니다. 어느 민족에게나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나라는 막연한 메시아를 대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대로 출애굽 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와 나라를 이루고 살았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나라를 이루고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나라가 망하여 포로로 잡혀가기도 하고 돌아오기도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선지자들은 계속하여 메시아가 올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메시아가 오기만 하면 옛날 다윗시대처럼 주변의 나라들을 다스리는 그런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는 이가 누구인지 늘 관심과 기대를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놀라운 말씀을 하시고 놀라운 일들을 행합니다. 그 말씀하시는 것이 기존의 랍비들과 달리 권세가 있습니다. 또한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 분이 메시아가 아닐까 하면서 따라나섰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아의 나라와는 너무나 달랐기에 헷갈리는 것입니다. 도대체 메시아가 맞느냐 아니냐는 의문이 들어서 바리새인들이 질문을 합니다.

 

 

 

 

20절을 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는지를 묻습니다. 이런 질문은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 높은 자리를 차지할 사람들은 자기들처럼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하면서도 바리새인들이 기대하고 모든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한 모습이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한나라당이 잃어버린 10년을 찾았다고 정권인수위원회를 만들어 현 정권을 인수하듯이 그동안 다윗의 왕위가 끊어진지 수 백 년이 되었으니 메시아라면 왕으로 등극하여야 하는데 그런 조짐이 보이지 않으니 물어보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답변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결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면 믿음의 세계인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 안에 있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너희 안에 있다는 이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입니까? 지금 바리새인들이 질문하였는데 그 바리새인 안에 있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너희의 손이 닿을 수 있는 영역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나라란 그들 사이에 있는 예수님 자신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하였습니다. 그 천국이 바로 예수님이 몰고 오신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다스림과 통치를 받는 그 현장이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영토와 사람과 주권이 있어야 된다는 그런 나라와 전혀 다른 나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1: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는 것이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이 세상이 공중 권세 잡은 자의 세력 안에 놓여있었으나 이제 예수님께서 그 세력들을 물리치시고 자기 백성을 찾아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을 보지 못하고 있는 그들을 자기들 상상의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바리새인들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유대인들이기에 마찬가지 생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22절입니다.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제자들도 생각하는 인자의 날이란 예수님이 왕으로 등극하여 세상을 통치하는 그런 나라를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인자의 날이란 구약에서도 선지자들이 예언한 여호와의 날입니다. 그러나 그 여호와의 날이란 이미 선지자들도 그날이 무조건 이스라엘의 구원이 날이 되는 것이 아님을 예언하였습니다. 오히려 그 날이 심판의 날이 될 것임을 더 많이 예언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나라를 다르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자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하나님의 나라란 자기들의 세력을 확장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를 세력화하여 대통령도 만들고 국회의원도 만들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한다고 합니다. 그렇지는 않지만 세상에서 중요한 요직을 차지하여 기독교인의 영향력을 행사하자고 합니다. 또 어떤 단체는 구제나 사회봉사활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보이자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고 합니다.

 

 

 

 

23절을 봅니다.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고 하여도 너희는 가지도 말고 쫓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 운동이라는 것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모든 선교단체들이 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나라 운동을 한다고 합니다. 자기들 방식이 옳다고 합니다. 그러니 선교헌금을 보내라고 합니다. 가지도 말고 쫓지도 말라고 합니다. 인자의 날은 그런 사람들의 운동에 따라 이리 저리 끌려 다니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임하는 것입니까?

 

 

 

 

24절입니다. 번개가 번쩍임같이 인자의 날도 그러하리라는 것입니다. 번개가 한번 번쩍하면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동시에 번쩍 하는 것입니다. 빛이 1초에 지구 일곱 바퀴 반을 돈다고 하는데 온 지구상에서 동시에 볼 수 있도록 임하는 한 날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인자의 날은 사람들이 예측하거나 짐작할 수 없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깨어 있는 자들에게는 평소에 준비하면서 살지만 그렇지 아니한 자들에게는 오히려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홀연히 도적같이 임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인자의 날이 임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일어나야 할 일이 있습니다. 25절입니다.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림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메시아가 버림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분명히 예언자들의 예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눈이 가려져 있기에 메시아가 고난을 받는 것은 이해할지 몰라도 그 세대, 자기들의 손에 의하여 버림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세대에 버림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버림받은 이 십자가의 사건을 가지고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나타나는 종말의 심판은 어린 양의 진노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어떻게 생각하면서 살고 있느냐를 이 종말의 시대에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 그거요! 믿으면 천국 간다고 하던데요!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하던데요! 내가 확실하게 생명 걸고 믿을 만 하지는 못하지만 보험 드는 셈 치고 믿어 보는 거지요! 혹시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그렇지 않으신다고요? 그러면 예수님께 목숨을 걸고 사십니까? 우리의 삶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고 사십니까?

 

 

 

 

26-27절을 봅니다. 인자의 때가 노아의 때와 같다는 것입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노아의 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물어보았을 것입니다. 왜 방주를 만드느냐고? 홍수가 나서 세상이 심판받을 것이라고 말하자 사람들은 더 이상 노아와는 상종 못할 인간으로 여기고 그들은 그들끼리 먹고 마시며 시집가고 장가갔습니다. 그러면서 홍수가 나서 멸하기 까지 아무도 깨닫지를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방주 만드는 것을 통하여 사인을 주셨는데도 그들은 믿지를 못한 것입니다. 단지 그들이 믿은 것은 내가 행복하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삶이 목적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예 잘못된 정도가 아니라 죄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먹던지 마시던지 시집을 가던지 장가를 가던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여야 하는데 오직 자기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 직전에 죄악이 관영한 상태를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창세기 6:2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은 지라” 이것이 사람들이 육체가 된 증거이며 죄악이 관영한 것이기에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할 수가 없어서 떠나버리신 것입니다. 이것이 노아 홍수의 심판입니다. 그 핵심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좋아하는 일만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의 진리가 무엇입니까? 이미 현대에 들어와서 절대 진리란 없어졌습니다. 사람들마다 진리를 다르게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새롭게 나온 절대 진리가 무엇인가 하면 내 좋은 대로 살겠다는 것이 이 시대의 절대 진리입니다. 나만 편하면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나에게 잔소리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하여도 그것은 내가 좋은 대로 한다면 그것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노아 홍수시대의 죄악이 관영한 모습입니다. 당신이 목사라고 해서 나에게 이런 저런 잔소리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니 소돔과 고모라니 이런 불편한 이야기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 가 주는 것만 해도 감사한 줄 알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헌금도 하는데 이런 나를 받아주는 교회는 세상에 늘리고 늘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라는 자가 인간의 죄만 말하고, 인간의 공로를 무시하고, 수고하는 것을 알아주지도 않는데 내가 무슨 재미로 교회에 다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칭찬은 고사하고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무익한 종이라고 해야 그것이 믿음이라고 말하는데 도대체 재미없어서 교회 못 다니겠다는 표정들이지 않습니까? 우리의 반응이 어떠하거나 간에 주님은 계속 말씀하십니다. 28-32절입니다. 인자의 날은 롯의 때와도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 하여 저희를 멸하였다고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 사인은 롯이 그 성에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롯의 사위들에게 함께 나가자고 하였을 때에 그들은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인자의 날도 이와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세상살이에만 바빠서 도대체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날에 만일 지붕에 있다면 집안에 세간을 가지러 가지 말고 밭에 있다면 돌이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롯의 처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롯의 처가 왜 뒤를 돌아보았겠습니까? 사람의 보물 있는 곳이 마음이 가는 것입니다. 롯의 아내가 보물이라고 여긴 것들이 소돔과 고모라성에 다 있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불타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것입니다. 그 순간 그는 소금기둥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롯의 아내는 평소에 무엇을 진리라고 여기며 살았겠습니까? 소돔과 고모라 성 안에서 먹고 마시며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고 딸을 시집보내고 능력 있는 사위를 맞이하는 것을 진리로 여기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심판의 날에 그것이 오히려 발목을 잡았던 것입니다.

 

 

 

 

33절을 봅니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고 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사는 사람은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은 세상이 볼 때에 죽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런 사람은 살 것입니다. 살고 죽는 일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나중에 죽고 나서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는 노아 홍수 때처럼 소돔과 고모라 때처럼 분명하게 증거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섬기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현장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교회를 다니면서도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자가 있는가 하면 자기 자신을 주로 여기고 거저 예수님은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머슴으로 여기고 있다면 이것은 결코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주님으로 믿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가 다 그렇지 않습니까? 언제 예수님이 시키시면 예하고 순종하십니까? 아니요! 예수님 그것은 안 됩니다. 그것은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먼저고 우리 가정이 먼저이지 예수님을 위하여 나의 전부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나오지 않습니까?

 

 

 

 

34-35절입니다.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웠는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돌리고 있다가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누워 자든지 일을 하든지 데려갈 자가 있고 버려둠을 당할 자가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 때와 소돔과 고모라 때와 꼭 같을 것입니다. 방주에 탄 사람은 구원을 받고, 소돔과 고모라 성을 벗어난 사람은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사실은 은혜로 된 것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든지 주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살 것입니다.

 

 

 

 

37절입니다. 이런 심판의 장소가 어디냐고 제자들이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의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이 모여들듯이 오늘날도 주검이 있는 곳에는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이 있는 곳이 어떤 곳입니까?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곳입니다. 내가 먹고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곳입니다. 이들에게는 그 날이 도적같이 임하여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언제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면서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디모데후서 4:1-8절입니다. “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귀가 가려져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진리에서 돌이킨다고 합니다. 오늘이 이러한 때입니다. 온 세상의 진리란 자기의 욕심을 채워주면 그것을 진리라고 여기는 세상에서 주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켰기에 의의 면류관이 주어진다고 합니다. 자기뿐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주 예수님 다시 오시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18:1-8 믿음을 보겠느냐? 2008. 1. 20

 

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2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지난주에 인자의 날에 대한 말씀을 보았습니다. 인자의 날이란 주님 재림하시는 날인데 이 날은 성경의 어떤 날과 같다고 하였습니까? 노아 홍수 때나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 때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나무를 심고, 집을 짓는 이런 일들을 삶의 유일한 목표로 살면서 주님의 심판에 대하여 생각도 준비도 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한 사인을 주었음에도 무시하고 살다가 심판이 임하는 그 순간까지도 깨닫지 못하고 살다가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

 

 

 

 

참으로 부담되는 말씀이지만 이 말씀이 누구의 말씀입니까? 우리가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천지가 없어지더라도 그대로 다 성취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지난 한 주간 이 말씀을 듣고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재림을 얼마나 생각하면서 사셨습니까? 일하고 학교가고 가정생활 하느라고 바빠서 인자의 날을 생각할 틈도 없었습니까? 저도 참 바빴습니다. 부동산에, 은행에 담보대출 알아보고 또 서류는 얼마나 많은지, 전기 업자를 만나고, 또 문상에 그렇게 바쁜 와중에서 주님이 오시면 이런 것 아무것도 소용없는 일인데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한 이런 일들은 닥치게 마련이니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천국으로 이사 가면 이런 것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은 정말 주님을 사랑해서 인자의 날을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렵고 귀찮은 일들이 쌓이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교회에 오면 이런 문제를 기도하라고 합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다른 설교집도 보았는데 그 설교집에서도 어려운 문제가 닥치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당장 응답하지 않더라도 믿음을 가지고 끈질기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즉각 응답이 없어서 기다리는 것은 그 과정을 통하여 우리를 성숙시키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늦어도 반드시 응답하여 주시기 때문에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간절히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여 주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본문의 말씀을 근거로 우리의 소원을 아룁니다.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을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런데도 응답이 잘 안되면 소나무 뿌리를 뽑든지, 금식을 하든지, 특별 작정기도를 하되 이미 응답받은 것인 줄 믿고 감사헌금부터 드려놓고 기도하라는 말들도 듣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정말 우리의 소원을 아뢰면 무엇이나 들어주는 그런 본문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절부터 봅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말씀하시면서 비유로 말씀하시는데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하여 재판관에 찾아갔습니다. 이 당시의 과부란 사회에서 가장 약자입니다. 아무도 도와줄 자가 없는 과부인데 그나마 억울한 일을 당하였습니다. 조금 있는 재산을 사기 당하였든지, 아니면 그나마 의지하던 하나뿐인 아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하였든지 모르지만 자신의 원수를 갚아달라고 재판관에게 호소를 합니다.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변호사도 사고 검사 판사에게도 줄을 대어 재판을 벌이겠지만 아무 힘도 능력도 없으니 거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재판장에게 호소할 뿐 다른 방도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재판관이 어떤 재판관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도 무시하는 재판관인데 과부 정도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나 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루 이틀도 아니고 계속하여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재판관이 무어라고 합니까?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그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그 원한을 풀어주어야 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6절을 봅니다. 주님께서 비유의 결론을 말씀하십니다. 이런 불의한 재판관도 간절히 간청하면 들어주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읽어놓고 우리도 간절히 기도하여 응답받자는 식으로 나오면서 기도하여 응답받은 간증들을 쏟아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의 눈빛이 반짝거리면서 집중합니다. 그래 내가 복을 받지 못한 것은 간절히 기도하지 못하여 그렇구나! 기도의 양이 차지 않아서 응답을 못 받았구나! 간증 자들의 예대로 하면 나도 응답받고 축복받고 뜨겠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보니 그런 것과 전혀 반대라는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1:26-31절입니다. “봉독”이 말씀을 보니 꼭 저희교회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사를 하려고 하니 필요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부동산 업자, 은행 근무자, 법무사, 인테리어 시공자등이 있었으면 좋겠고, 그렇지 않더라도 이런 일을 잘 알고 관리할 수 있는 집사님이나 장로님이 계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러 분이 한분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문제들도 한 번에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무엇만 있으면 해결됩니까? 돈만 있으면 사실 다 해결될 문제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왜 돈돈 하는지 좀 더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이 고린도전서에서 왜 이런 모양입니까? 세상의 것을 믿지 말고 하나님만 의뢰하라고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복음을 증거 하는데도 사형선고 받은 것처럼 살 소망까지 끊어질 정도의 고난이 닥쳐왔을 때에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내시는 하나님만 의지 하게 하려고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고후1:8-9). 그러므로 하나님만 의지한다는 것은 세상에 여러 가지 조건들이 충족되어질 때에 하나님만 의지하는 경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세상의 소유가 많을수록 세상의 힘을 의지하지 하나님을 의지하기가 힘 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비유의 말씀에서 재판장에게 간청한 과부는 아무런 힘이 없는 사람입니다. 마치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처럼 세상에 가진 것이라고는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못난 자들이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의와 거룩함과 구속함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이 세상 전부와 바꿀 수 없는 복인 것입니다. 이것이 참 된 복임을 아는 사람이 성도이며 택함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심은 아무도 자기 육체를 자랑하지 않고 예수님만 자랑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창조의 목적인 것입니다.

 

 

 

 

정말 그러한지 이제 결론의 말씀을 봅시다. 8절 끝에서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는 것입니다. 무엇을 위한 기도입니까? 인자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기도입니다. 사람들은 지금도 다들 기도도 하고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한 열심들입니까? 노아 홍수 때와 같이 소돔과 고모라의 때와 같이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 어떻게 한번 잘 살아보겠다고 그렇게들 열심을 냅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인자의 날에 대하여서는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노아 시대의 인류가 얼마였는지 모르지만 모든 인류 중에 단 한 가정만 은혜를 받아 방주를 준비하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성도 단 한 가정이 끌려 나오다 한 명은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은 누가복음 17:20-37절까지 말씀의 결론부분이 오늘의 말씀인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날을 맞이하는 자의 자세를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 것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생각하는 인자의 날과 전혀 다른 날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인자의 날과 다른 날입니다. 인자의 날은 도적같이 임하는 날이며 번개가 번쩍이는 것 같이 전 우주적으로 갑자기 임하게 될 것이기에 깨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미리 하여 두시는 이유는 제자들이 나중에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요한복음 13-14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에 제자들이 따라 올 수가 없다고 하셨을 때에 제자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근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처소를 준비하시고 나면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그들을 영접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부활 승천하신 후에 곧 오실 것을 기다렸습니다. 성령님을 보내시겠다는 약속은 승천하신지 10일 만에 이루어졌는데 예수님이 직접 재림하시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때에는 임박한 종말론이 있었습니다. 오늘인가 내일인가 주님이 언제 오실는지 하면서 온갖 핍박 속에서도 순교하면서까지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나도 주님이 오시지 않는 것입니다. 수 십 년이 지나도 주님이 오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기다렸지만 복음이 확산될수록 핍박이 가중되는데도 인자의 날은 도래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일들이 일어나겠습니까? 낙망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지 않는다는 사람들도 있고 이미 그 날이 지나갔다는 사람들도 생긴 것입니다.

 

 

 

 

이럴 때에 베드로사도가 증거 한 말씀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전체를 봅니다. “봉독”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나와서 주의 강림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원래대로 있다는 것입니다. 노아홍수의 심판도 일부러 잊어버리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불살라 질 것입니다. 경건치 아니하는 자들을 심판하기 위하여 그 멸망의 날까지 보존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라면 이 말씀을 믿고서 천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천년같이 주님 오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 주님의 약속을 믿고서 기다릴 자가 예수님 재림하시는 그 날에 있겠습니까? 인자의 날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많다는 말이 아니라 아주 적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렇게 오래 참으심은 주의 택하신 백성들이 남아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오늘도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자들은 어떤 자들이겠습니까? 누가복음 2:36-39절에 보시면 안나라는 여선지자가 나옵니다. 결혼 한지 7년 만에 과부가 되어 84년 동안을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하다가 오시리라든 메시아를 만났습니다. 아무것도 바라볼 것이 없는 이 과부! 그러나 그렇게 됨으로 메시아의 약속만 기다리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도록 오늘도 주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조치하십니다. 세상에 믿던 것들이 끊어짐을 맛보게 하시고 또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끊어짐을 알게 하셔서 예수님만 믿도록 조치하시는데 이런 믿음을 인자가 올 때에 보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믿다가 실망한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영원히 믿어야할 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게 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조치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인줄 아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6:9-11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말씀과 그 증거로 목 베임 당한 자들이 땅에 거하는 자를 심판하여 신원하여 달라고 합니다. 현재 고난을 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순교한 자들이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입혀 주시며 동무들의 수가 차기까지 잠시 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십니다. 그 날이 인자의 날입니다. 이 인자의 날에 과연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지난 주에 맷돌 갈다가 한 사람이 데려감을 당했다고 하니 어느 집사님이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 50퍼센트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50퍼센트가 아니라 거의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러나 주님의 택하신 성도는 정말 세상에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어서 오직 주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자들로 만드셔서라도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않게 하실 것입니다. 더딜지라도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천년을 하루같이! 
 

출처 : 심플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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