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누가복음 강해 1
누가복음 강해 1
창원 늘푸른 교회 이장우 목사
누가복음 1:1-4 이루어진 사실 2006. 10. 15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저녁에 운동을 하느라고 길을 걸어 가다보면 사람들마다 수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혼자서 가는 사람들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마치 미친 사람마냥 중얼대며 가는데 자세히 보면 휴대전화 이어폰을 귀에 꽂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꿈속에서 까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정말 중요한 이야기, 사람이 영원히 살고 죽는 이야기가 있습니까?
전에 몇 번 드린 말씀입니다만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에 저희 담임교수님의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학생들은 다리 꼬고 앉아서 질문하면 교수님은 정중하게 일어나셔서 대답하시는 분이십니다. 한 학기를 마치고 개강 수련회 때 어떤 학생이 교수님의 사생활에 대한 질문을 하였습니다. 역시 정중하게 일어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에 대한 이야기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영원히 이야기해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금으로부터 만 7년 전에 요한복음을 시작해서 사도행전 로마서 고린도 전, 후서까지 보았습니다. 물론 어느 성경도 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복음서를 보고자 하는 것은 다시 복음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들어야 할 이야기, 우리가 영원히 찬양할 내용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보좌에 계신 이와 어린 양께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리는 것이 구속받은 자들이 누릴 특권이며 영광인 것입니다. 그 영광의 찬송의 자리를 복음서를 통하여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오늘부터 볼 누가복음은 바울사도와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함께 동역하고 끝까지 함께 한 의사 누가입니다. 의사이면서 역사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헬라 역사가들이 기록하는 방식의 서문이 나와 있습니다. 이 복음서의 기록 목적이 무엇인지를 밝히면서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누가는 사도행전도 기록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미 사도행전을 보았습니다만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누가가 밝히고자 한 것은 우리 가운데 일어난 사실을 밝히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일어난 사실의 일차적인 수신자로는 데오빌로 각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데오빌로는 어느 지역의 행정관의 이름으로 추측이 됩니다만 이 사람이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배우기는 하였는데 무언가 미심쩍은 것이 있었나 봅니다. 그래서 누가가 우리 가운데 일어난 사실을 조사하여 차례대로 적어 보냄으로 데오빌로가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왜 2천년 전에 일어난 그 사건의 이야기를 읽는 것입니까? 이 사건은 옛날에 있었던 이야기이고 이미 흘러간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도 계속하여 그 사건이 일어나고 있기에 읽혀지는 것입니다. 그 동일한 사건들이 2천년 동안 끊임없이 일어난 것입니다. 핍박 속에서도, 타락 속에서도, 그 어떤 방해의 세력에도 불구하고 2천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한 사건이 지금도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약 2천년 전에 세계사에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별로 알려지지도 않았습니다. 그 당시의 역사가들의 눈에는 역사의 전면에 등장시킬만한 인물이 못 되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온 세상에 가득하게 전파되는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후대의 사람들이 기원전과 기원후의 구분 점을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B.C 와 A.D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중간을 가르는 분기점이 아니라 예수님은 처음과 나중이며 시작과 끝이신 분입니다. 요한계시록 22:13절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시작과 과정과 끝을 다 예수님이 주장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아는 것은 역사와 묵시를 다 아는 것이며 동시에 영생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7:3절에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가가 기록하고 있는 우리 안에 일어난 사실이라는 것이 2천년전의 과거의 한 사건이 아니라 오늘도 현재진행형인 것입니다. 누가복음과 연결되는 사도행전에서 증거 된 복음의 확산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이 복음을 듣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증거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복음이 땅 끝 까지 모든 민족에서 증거 되면 그제야 이 역사세계는 끝이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모르면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박사라고 하여도 그는 캄캄한 어두움에 갇혀 있는 사람입니다. 죄와 사망의 그늘에 앉아서 심판의 때만 기다리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학교 문 앞에도 못 가본 사람이라고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는 자는 하늘과 땅의 세계를 다 아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사람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누가가 보고 믿고 증거 한 우리 안에 일어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2절을 봅니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이 전하여 준 그대로의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이 다 그러한 복음서들입니다. 여기서 살펴볼 내용은 말씀의 목격자와 일군 된 자들에 대한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부터 3년간 제자로 부름을 받아 함께 따라다니면서 예수님과 전도와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한 자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이루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과 나라들과 역사들은 무엇의 증인들입니까? 심지어 믿지 않는 이방의 나라들인 애굽이나 앗수르나 바벨론조차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다는 도구들인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그 시대에 세계의 최강대국이 바벨론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의 임금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왕위에서 폐위되기도 하고 복직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은 이 역사세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배후의 세계까지 하나님의 말씀이 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의 목격자들이 어떻게 증거 하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1-4절을 봅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이 말씀이 천지를 창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이 사람들의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 그 사람은 생명도 없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계속 되는 말씀을 보면 사람들이 어두움을 사랑하여 생명의 빛이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척하였다고 합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것이 바로 말씀을 배척한 것이 됩니다.
요한 1서 1:1-4절입니다.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 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4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태초의 말씀을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았다고 합니다.
베드로 후서 1:16-21절입니다.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
베드로 사도의 마지막 소원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그의 강림을 증거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 영광을 자신들이 직접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기록하여 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공교히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베드로나 요한 같은 제자들이 처음 말씀의 목격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복음을 증거하면서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 것입니다.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증거 합니다.
이러한 처음 목격자들의 증거로 인하여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조차 예수님을 믿고 나오는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을 누가 자신이 받게 된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일어나게 된 것을 보면서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가를 역사가가 사료를 수집하듯이 자세하게 조사를 한 것입니다. 미리 기록된 복음서도 참고를 하고 직접 사도들을 만나기고 하였던 것입니다.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면서 우리 가운데 일어난 일들을 자세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2천년 전의 오늘이란 지금도 계속되는 오늘의 이야기가 됩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계속되는 복음의 증거와 그 현재성이 오늘도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이라는 표현을 몇 곳 찾아봅니다. 누가복음 2:11절입니다. “오늘날 다윗의 동리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 시니라”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예언한 그 구주 그리스도가 오늘날 나셨다는 천사들의 통보입니다. 누가복음 19:9절에서 삭개오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십니다.
누가복음 23:43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평생 강도짓 하다가 십자가형에 처형되어 죽는 두 강도 중의 한 강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주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때 주님께서 진실로 이르노니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내일이 아닙니다. 나중이 아닙니다. 오늘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복음입니까? 평생 강도짓 하였는데 그래서 사형까지 받을 정도라면 보통 강도가 아니라 살인강도인 것입니다. 그런 강도가 예수 믿고서 착한 일을 많이 해서가 아니라 바로 ‘오늘’ 구원이 일어난 것입니다.
처음 말씀의 목격자들이 증거한 그 복음이 증거 됨으로 놀라운 일들이 현재형으로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일어나는 이 구원에 대하여 자세하게 사실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계속되는 증거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예수 그리스도로 구원한다는 내용입니다. 이것이 2천년이 지난 오늘 이곳까지 증거 된다는 이 놀라운 사실이 기적이 아닙니까!
사도행전 4:12절에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현재형으로 일어나고 있는 구원의 사건, 오늘 우리에게도 현재형으로 나타나기를 소원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누가복음 2:28-32절을 봅니다.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아기 예수를 품에 안고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죽어도 행복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5-25 믿지 아니함 2006. 10. 22
5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 ........... 17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18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19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20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 ............. 24 ○이 후에 그 아내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가로되 25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누가가 복음을 증거 한 내용은 우리 가운데 일어난 사실에 대하여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이 일어난 사실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고 그 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성령을 보내셔서 오늘 우리 가운데 믿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증거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2천년 전에 일어난 과거의 한 사건이 아니라 오늘도 여전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사실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이 일어난 사실,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사실을 믿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일어난 사실을 전하는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하고 있는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8:23-31절을 봅니다. “봉독” 바울사도가 로마에서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기 까지 연금 상태로 있었지만 사람들을 자유롭게 접촉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였는데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 한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 한 것은 바로 예수님을 증거 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에서 증거 한 우리 가운데 일어난 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 율법과 선지자가 증거 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도 있고 믿지 아니한 자들도 나오는 것입니다. 분명히 일어난 사실을 증거 하는데도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훨씬 더 많았음을 사도행전을 통하여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이 결국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사명이 무엇인가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을 감기고 귀를 막아서 스스로 돌이켜 오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이 메시아 오시기까지 계속되었고 메시아 오시고 난 이후에는 택한 자와 아닌 자를 구별하기에 택함을 입지 않은 자는 아무리 증거 하여도 믿지 못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이 나온다는 것은 결코 자신들의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못 알아듣는데 나는 복음을 알아듣고 믿었다고 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믿음이 있노라고 자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8-9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고 그를 힘입어 의롭다 함을 입는 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참으로 기적이요 은혜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세례요한의 수태고지입니다. 구약에서도 여러 번 수태고지가 나타납니다. 먼저 아브라함의 예를 봅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내가 너의 방패와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하시자 자기에게 무엇을 주겠는가 합니다. 자신은 자식이 없으니 자기 집에서 기른 엘리에셀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하시면서 네 몸에서 날 자가 하늘의 별과 같을 것이라고 하시자 이 말씀을 믿게 됩니다. 여기서 아브람이 무엇을 믿습니까? 자기 몸에서 자식이 날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이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믿음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아브람을 하나님께서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시고 하란을 거쳐 가나안에 이르게 됩니다. 가나안에 흉년이 들자 애굽으로 내려가서 가뭄을 피하고자 할 때에 자기 아내가 아름다워서 아내를 빼앗기 위하여 자기를 죽일까 해서 동생이라고 속입니다. 그러다가 바로 왕이 자기 아내 삼으려고 데리고 갔다가 하나님에게 혼이 나서 사라를 돌려보냅니다. 또 소돔과 고모라 성의 조카가 연합군에 의하여 잡혀간 것을 318명으로 구하여 냅니다. 이러한 놀라운 경험들을 통하여 자기를 불러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고 그분이 무엇이나 말씀하시면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 자식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약속을 받기 전에는 자식을 못 낳는 사람으로 알았는데 이제 약속을 받고서 믿었는데도 자식이 생기지 않자 자기 아내 사라가 어차피 당신의 씨면 될 것이니 여종 하갈을 취하여 자식을 낳으라고 합니다. 그렇게 낳은 자식이 이스마엘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86세입니다. 그로부터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무려 13년이나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브람의 나이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이름을 바꾸어 주십니다. 아브라함이라고 합니다. 열국의 아비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할례를 행하라고 합니다. 언약의 표시라고 합니다. 그 아내의 이름도 사래가 아니라 사라라고 고쳐주십니다. 여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그 사라에게 자식을 주어서 그로 하여금 열국의 어미가 되고 민족의 열 왕이 그에게서 날 것이라고 합니다. 이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이 믿었습니까?
창세기 17:17절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이것은 속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라고 하시면서 너와 사라 사이에서 자식이 나올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장막 뒤에서 듣고 있던 사라도 속으로 웃었습니다. 이미 경수가 끊어진 사람인데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장막 뒤에서 웃는 사라를 보시고 네가 왜 웃느냐고 하십니다. 놀라서 웃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지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일년 뒤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없는데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이 믿을 수 없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아들을 이삭이라고 부를 때 마다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여 비웃었는데 하나님은 그 약속을 인간의 비웃음과 불신 속에서도 이루어 내셨구나! 이것을 동시적으로 알게 하시는 이름이 웃음인 것입니다.
세례요한을 이야기 하면서 왜 이렇게 길게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 아브라함이 믿음이 좋아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니라 믿음이 하나도 없는 사람을 불러서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신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믿음의 사람이란 그 사람의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 없음이 드러나고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짐을 통하여 모든 믿음의 일이란 우리의 의지나 결단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선물임을 알게 됩니다.
5-7절을 봅니다.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 사가랴가 아론의 후손인 엘리사벳과 결혼하여 살지만 자식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한다고 합니다. 마치 바울사도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하는 정도의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경건하게 사는 사람들이라면 복을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자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믿고 기다린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의 경건하다고 하는 자들의 공통적인 소망인 메시아의 오심입니다. 메시아가 오기만 하면 그들의 나라는 정치적으로 독립을 하게 되고 세상에서 다윗 왕과 같은 왕이 다스림으로 꼬리가 되지 않고 머리가 되는 그런 날을 기다리고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침묵하고 계신 기간이 너무나 오래되었습니다.
사사시대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였다고 합니다. 제사장이라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을 자기들의 식욕을 위하여 먼저 챙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제사를 제사장이 멸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때 사무엘이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엘리 가문이 멸망할 것을 예언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여지면 제사장이나 백성이나 간에 타락하여 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고 나서 그 이후로는 듣지 못한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가 구약의 마지막 선지서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말라기 이후로 무려 4백년이 지났습니다. 이 시기를 신구약 중간기라고도 하고 침묵의 기간이라고도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게 된 이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부패할 때로 부패하여 졌습니다.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고 도적의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남겨주신 자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그 약속이란 바로 메시아가 오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렇게 신실하게 믿는다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 사가랴 제사장입니다. 이 사람이 자기 반열이 되어 제비를 뽑았는데 성전에서 분향할 자에 뽑힌 것입니다. 다윗 시대에 성전에 봉사할 제사장을 24반차를 따라 세웁니다. 이 당시의 제사장이 약 이만명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돌아가면서 봉사를 하는데 일년에 일주일씩 이 주간 봉사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수많은 제사장 중에서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는 일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비 뽑혀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제비는 사람이 뽑지만 결정을 하나님이 하시기에 하나님께서 사가랴를 선택하셔서 분향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소에 천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밖에서는 다른 제사장들과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기도는 이스라엘의 회복입니다. 메시아를 보내서 구원하여 달라는 간구인 것입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권력에 결탁한 사람들은 로마가 망하지 않기를 바랐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들은 메시아가 와서 회복하여 주시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가랴가 지체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앞으로 될 일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가랴가 놀라고 두려워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서 살 자가 없다고 여기는데 하나님이 보내신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사가랴에게 자식이 태어날 것과 이 자식이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그토록 믿고 기다렸다면 아멘이라고 하여야 할 텐데 성경은 사가랴가 믿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이 자식이 없어서 간구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늙어도 자식이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야 자식을 주신다고 하시니 18절에서 아브라함이 고백한 것과 똑 같은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늙고 아내도 늙었는데 어떻게 자식이 태어나는 것입니까? 그러자 천사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20절에서 네가 이 일을 믿지 아니하였음으로 이 일이 이루어지기 까지 벙어리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자식이 태어날 때까지 벙어리가 되어 있다고 자식이 태어나서 이름을 지을 때에 말문이 트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일에 인간들의 모습이 순종하여 무엇을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불순종을 배경으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미 범죄 한 인간은 불순종이라는 통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스스로 믿고 순종하여 나올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믿고 나온 자가 있다면 이것은 그 사람의 믿음이 아니라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신 믿음인 것입니다.
로마서 11:3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서 순종하지 않는 가운데 가두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스스로 순종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나온다면 이것은 하나님보다 강한 사람입니까?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그들의 눈과 귀를 막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스스로 깨닫고 돌아오면 자기 자랑할 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믿음의 사람들의 공통된 고백은 나는 그를 믿지 않았다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긍휼로만 부름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고백이며 다윗의 고백이며 사가랴의 고백이며 오늘도 일어나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인 것입니다. 어떤 인간의 자랑도 다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무엇입니까? 14-17절입니다. 나실인의 규례가 주어집니다. 사사시대에 삼손의 부모에게 주어진 내용과 같은 말씀입니다. 이들 부모도 자식을 못 낳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자식을 낳지 못하는 자들을 통하여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이란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떤 용도로 사용이 된 것입니까? 얼마나 믿지 못하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은 주어집니다. 태어날 아기가 모태로부터 성령이 충만하게 되어서 무슨 일을 하는 것입니까? 구약 말라기 4:5-6절입니다.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구약의 마지막 성경에서 약속한 바가 4백년이 지나도록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사가랴를 통하여 이 약속의 실현이 나타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엘리야의 심정으로 오는 자가 자기의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그 아이가 바로 세례요한입니다.
이 세례요한이 할 일이 말라기 4장에서 예언된 자의 일입니다. 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가랴가 믿지 아니함으로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아니하는 자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린다고 하느냐?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믿으십니까? 주님 다시 오시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불에 살라진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말로서는 믿는다고 하는데 오늘 밤에 주님이 네 영혼을 도로 찾을 것이니 이 모든 것을 다 포기하라면 하시겠습니까?
여러분 천국이 좋습니까? 다 가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지금 가실 분은 손을 드세요! 아무도 없었다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입술로는 믿는다고 합니다. 기도도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에 온 교회가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풀려나기를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풀려 나오니 사람들이 믿지를 않았습니다. 계집아이가 베드로의 소리를 듣고 문을 열러 갔다가 너무 반갑고 놀라서 문을 열어주지도 않고 안에 들어가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왔다고 하니 믿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런 일을 경험 하는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에 있습니까? 자기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믿음 없음이 드러납니다. 우리의 믿음이 없기에 주님은 오늘도 믿음을 선물로 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은 인간의 능력으로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죄인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있습니까? 그것도 내가 믿는다는 결단과 실천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조차 주님께서 주신 믿음이라는 것을 누가 믿겠습니까? 자신의 믿음 없음을 인정하시고 주여 믿음을 더하여 주소서! 부르짖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쉬지 않고 빌고 계시기에 우리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26-38 말씀대로 2006. 10. 29
26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28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찌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하니 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30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38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 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누가복음을 시작한지 벌써 3주일째입니다. 그동안의 제목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이루어진 사실’이었습니다. 제목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제목을 상기함으로 그 내용의 줄기를 잡아보려는 것입니다. 누가가 기록한 이 복음서는 사람들의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분명하게 이루어진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루어진 사실이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가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사실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제목은 ‘믿지 아니함’이었습니다. 이루어진 사실을 증거 하여도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는 것을 사도행전 끝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믿지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들이 나온다는 것은 이 믿음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차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인데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제목은 ‘말씀대로’입니다. 이루어진 사실을 사람들이 믿지 아니하여도 말씀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그 말씀대로 이루어 질것이라는 마리아의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임하는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어떻게 되는지 그 은혜가 얼마나 불가항력적으로 오는지는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임한 은혜를 찬양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6-30절을 봅니다. 세례요한이 태어날 것을 고지한 천사 가브리엘이 6개월 후에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 다윗의 자손 요셉과 정혼한 처녀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소식을 전합니다. 그 소식의 첫 번째 내용은 ‘은혜를 입은 자여 평안할 지어다’하는 인사입니다. 예루살렘도 아닌 시골 변방인 갈릴리 나사렛의 처녀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처녀가 놀라서 이런 인사가 어찌함이냐고 합니다. 그때 천사가 일러 가로되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외적인 조건을 따라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기치 못한 은혜입니다. 나는 이런 행위를 하였으니 이런 은혜를 주실 것이라는 그런 예측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예측을 하는 은혜란 사람들이 얼마든지 조건을 만들어낼 수가 있습니다. 그런 것을 은혜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은혜란 우발적입니다. 손성식 목사님이 주로 쓰는 표현인데 우발적이란 사람의 기대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물인 것입니다. 묵시세계에서 역사세계에 돌입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은 사람들이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에게서 여러 가지 표적과 기적이 나타났지만 그런 표적과 기적을 일으킨다고 사전에 광고할 수가 결코 없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때그때 사도들을 사용하실 뿐이지 사도들이 능력을 자기의 소유물인양 늘 소지하고 다닐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도 어느 장소에 어떤 사람에게 어떤 방법을 동원하면 반드시 은혜를 받는다는 말들에 속지를 마시기 바랍니다. 은혜란 난데없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가 나타난 결과가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다 은혜를 사모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사람들은 다들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하고 적용하기에 은혜를 받자고 하고 은혜를 사모한다고 하지만 성경에서 나타난 은혜를 받은 자들의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피하려고 할 것입니다. 제가 전에 이런 말을 하니 어떤 분들이 아니 목사님! 어떻게 은혜를 받지 않으려고 피하려고 한다고 그런 말을 합니까? 나의 신앙을 그렇게 무시합니까! 하는 듯한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살펴봅시다. 31절입니다. 그 은혜의 내용이란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으리라는 소식입니다. 이것이 은혜로운 소식입니까? 요즈음은 시집을 가지 않아도 아이를 배는 경우가 허다합니다만 참으로 이상합니다. 그런데 2천년 전에 유대의 율법이 지켜지고 있는 땅에서 처녀가 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은혜가 아니라 죽음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만약 정혼한 요셉이 결혼하기도 전에 임신한 마리아를 거부하면 부정한 여인으로 취급되어 돌에 맞아 죽는 것입니다. 다행이 도망을 쳐서 산다고 하여도 그런 여자가 살아갈 길이 막막한 시대입니다. 마태복음 1:18-19절입니다. 요셉이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서 가만히 끊고자 합니다. 그러면서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의롭다는 수준이 임신한 사실을 공개해버리면 맞아 죽을 것인데 조용히 정혼을 없는 것으로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역시 천사가 나타나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데리고 오라고 해서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러니 은혜를 입는 다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 신세 망쳐놓은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노아 홍수 때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노아는 은혜를 입은 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전부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아파트 마련하느라 바쁜데 그때 아파트는 산업폐기물 넣은 시멘트로 지은 것은 아니겠지요! 노아의 가족은 방주 만드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그러니 세상의 좋다는 것들을 준비할 틈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사모하십니까?
히브리서 11장에 나타난 은혜를 받은 믿음의 사람들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 제사를 받아주신 아벨은 형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은혜를 입은 아브라함은 평생을 나그네로 살았고, 야곱은 험악한 세월을 보냈고, 모세는 애굽의 영광과 보배를 버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 받는 길을 갔고, 전쟁에서 이기기도하고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였지만 그러나 어떤 자는 더 좋은 부활을 받기 위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않고, 어떤 이는 희롱과 채찍질과 결박과 옥에 갇히는 것과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과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며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이런 은혜를 받고 싶습니까? 아마 받기 싫어할 것입니다. 쉬운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어느 큰 교회 목사님이 간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식 수술을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광고시간에 광고를 하고서 누가 간을 이식하여 주면 수술을 할 수 있는데 목사를 위하여 간 이식을 해 줄 수 있는 사람 손을 들라고 했습니다. 평소에 다 목사님을 존경하고 시키는 대로 잘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앞줄의 장로들이 손을 들자 권사님도 들고 집사님들도 들고 모든 성도들이 다 들었습니다. 그러자 다음주에 정하도록 하겠다고 하고서 제가 여러분 중에 한명을 지목하면 다른 사람들이 섭섭해 할 것이나 제가 오리털을 하나 날려서 그 오리털이 여러분의 머리에 내려앉는 사람을 선택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강대상에서 오리털을 후 불어서 날렸답니다. 먼저 장로님 석으로 날아가서 어느 장로님 머리에 내려앉으려는 순간 아푸지! 하면서 숨을 내쉬니 다른 곳으로 날아 가버린 것입니다. 권사님의 머리에 오자 권사님은 오 추여! 하면서 불어낸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서는 아직도 오리털을 불어대고 있다고 합니다.
저의 메일로 교회정보를 보내는 곳에서 예화 유머로 온 것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가 말로는 은혜를 이야기 하지만 진짜 은혜가 무엇인지 알고 그 은혜를 받으라고 한다면 우리 가운데 그런 은혜를 받을 자가 누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가 임한다는 것은 나를 지으신 분을 위하여 죽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니 이런 은혜는 사람들이 스스로 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살리는 것이 제일 우선입니다.
그러니 가족이든 교회든 신이든 간에 나를 살려보라는 것입니다. 나를 멋지게 살려주면 그런 가족과 교회와 신은 좋은 것으로 인정하여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어렵게 만들고 고생스럽게 하고 심지어 죽는 자리로 몰아넣은 그런 이웃과 교회와 신은 죽어도 싫다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좁은 문 좁을 길로 따르라는 주님의 은혜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은혜는 우리가 원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를 불가항력적 은혜라고 합니다.
오늘이 종교개혁 489주년 기념일입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어받아서 칼빈이 5대교리라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전전타락,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적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 이렇게 다섯 가지입니다.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였기에 인간의 어떤 조건을 보고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을 다 용서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정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임하는 것은 인간이 거절할 수가 없는 것이며 이런 은혜를 입은 자들을 끝까지 견고히 인내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이야기를 하는 곳도 별로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인간이 자기하기 나름대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구원도 인간이 자기하기 나름대로 받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세상의 종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은 불가항력적인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지 아니하였음에도 이삭을 주시는 것처럼, 사가랴가 믿지 아니하였음에도 세례요한을 주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능치 못함이 없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마리아도 입은 것입니다.
31-33절을 봅니다. 처녀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고 합니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은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흔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이 말씀을 이사야 7:14절을 인용하여 말씀합니다. 그런데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예언도 아하스 왕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할 때에 주어진 약속입니다. 적이 사방을 포위하고 있는데 이길 표적을 구하라고 하니 구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믿음이 좋아서 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하겠는가 하는 불신앙의 대답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책망하는 식으로 주신 약속이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하신 예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남을 다윗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인데 주 하나님께서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셔서 영원한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영원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사무엘 하 7장에서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지어드리려고 하였다가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집을 지어 주시겠다는 약속에서 나온 말씀입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지어주고 너의 왕위를 영원하도록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왕위는 세상적인 면에서 이미 끊어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고 나서는 다윗의 왕위가 끊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후손은 끊어지지 않고 요셉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고 합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세워질 왕국은 지상의 왕국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의 왕국인 것입니다. 이 나라는 영원히 망하지 아니할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왕으로의 등극은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등극하셔서 지금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다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34절입니다. 이런 어마어마한 내용을 마리아도 알고 있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분이 자기 나라를 회복할 것이라는 내용을 유대인들이라면 다 기다리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소식이 갈릴리 나사렛의 한 시골처녀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누가 상상인들 한 내용입니까? 더군다나 그것이 처녀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기를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사내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아직 숫처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임신한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35-36절입니다. 천사가 대답합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고 하면서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뱄다고 하는 것입니다. 본래 수태하지 못하던 자가 벌써 6개월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무엇에 능치 못함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자기 소원 이루는 일에 전능한 능력을 동원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정욕을 위하여 구하는 것은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하는 것의 결국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영광이라면 그것이 다 정욕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란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이루시는 일에 전능하신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약속이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어졌고 그 약속들을 이제 마리아를 통하여 이루어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마리아가 믿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불가항력적인 은혜입니다. 이런 믿음을 복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그 자리는 자기 자신이 죽어야 되는 자리입니다. 자신이 버림을 받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가 무엇입니까?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자기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마리아를 도구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때 마리아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을 봅니다.
38절입니다.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이 고백이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를 입은 자의 고백입니다. 무슨 약속을 받았습니까? 처녀가 아이를 가진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죽음조차도 상관을 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지위를 알았습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것이 은혜를 입는 자의 모습입니다.
이런 믿음을 예수님이 칭찬하신 사람이 있는데 이방인 백부장입니다. 자기수하에 사람이 있어서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하면 온다는 것입니다. 로마 군인인 백부장이 자기 부하에게 죽음의 자리인들 돌격 앞으로 그러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히 천하를 만드신 주께서 말씀하시면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이런 고백을 예수님이 들으시고 이만한 믿음을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보지 못하였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세상을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자신의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신의 이름까지 부르고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약속대로만 세상을 이끌어 가십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실 것입니다. 다른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이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누가복음 1:39-56 마리아의 찬양 2006. 11. 5
39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42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45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46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56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대방동을 지나가다보면 창문에 ‘사람은 하나님을 담는 그릇’이라는 글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아마 지방교회 집회소에서 붙여놓은 것으로 아는데 사람 안에 하나님이 담겨야 제대로 된 사람이 된다는 것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사람 안에 하나님이 담기지 않았다면 무엇이 담겨있을까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을 중립적인 존재로 봅니다. 내가 주인으로서 어떤 신을 선택할 수가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선택하면 하나님을 담는 것이고 부처를 선택하면 부처를 담는 그릇이 된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기독교라고 이름 하는 곳에서도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안에 하나님을 담는 것이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종교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그 안에 죄와 사망을 담고 있습니다. 그 배후는 사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당신의 주인은 사단이라고 하면 굉장히 기분 나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오히려 기분좋아합니다. 당신 인생의 주인은 당신입니다. 그러므로 당신 하기 나름대로 복을 받기도 하고 저주를 받기도 합니다. 그러니 당신이 당신 운명의 결정자가 되어서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그런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짐승과 다른 차이점입니다. 당신의 능력을 사용하세요! 이런 사상이 인간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 사용한 수법입니다. 너도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따 먹으라. 그러면 너도 하나님처럼 된다는 유혹입니다. 인간이 피조물의 자리에서 떠나서 신의 자리로 가도록 만든 것이 사단의 유혹입니다. 그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은 죄와 사망이라는 권세에서 놓여날 수가 없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죄와 사망의 몸에서 구원하여 낼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태어나면서부터 사람은 죄의 권세아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을 모셔 들여서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단코 인간의 힘으로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집 주인이 자기의 소유를 지키고 있다면 안전합니다. 그 소유물이란 여러 가지 가구들입니다. 그런데 그 주인보다 더 강한 자가 와서 주인을 결박하면 그 주인의 소유물을 마음대로 내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소유물이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스스로 주인이 될 수가 없고 둘 중의 한편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라고 여기고 사는 사람은 그 사람의 사실상의 주인은 사단입니다.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인생 중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면 어떤 고백이 나오게 됩니까? 주의 종이오니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은혜를 입은 것이요. 이것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이야기하면서도 내가 신을 믿고 신에게 잘 보여서 내가 위대하게 되는 것을 꿈꾸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종교이지 성경이 증거 하는 복음이 아닙니다. 주인이 마음대로 사용하시는 것이 지극히 당연합니다. 이렇게 나오는 모습이 로마서 9장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와 야곱이 어머니의 배속에 있을 때에 그 어떤 행위가 나타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인간의 선행조건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한 사람은 미워하고 한 사람은 사랑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분노가 일어나면 그 사람은 아직도 자기 인생의 주인이 자기인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 배후는 물론 사단이 장악하고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에 아멘이 되는 사람이라면 은혜를 입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토기장이의 비유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무슨 그릇을 만들든지 그것은 주인의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진흙으로 보석함을 만들든지 요강을 만들든지 그것은 주인의 뜻대로 되는 것이지 그릇이 주인을 원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을 드러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본 말씀에서 마리아에게 은혜가 임한 것을 보았습니다. 이미 은혜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 은혜란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정혼한 사람에게 버림받고 가족에게서 버림 받는 것이 당연한 세상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누가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은혜를 입었기에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서 임신의 징후를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이 사가랴의 집입니다.
39-45절입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친척입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 땅까지 상당히 먼 거리입니다. 그곳을 찾아갑니다. 엘리사벳에게 마리아가 문안하는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마리아의 문안 소식을 듣고서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는 아이가 기뻐서 뛰노는 것입니다. 이 아이가 세례요한인데 이미 메시아를 증거 할 자로 복중에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마리아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기도 전에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마리아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집안의 처녀가 임신하여 왔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대책을 논의해야 할 텐데 오히려 큰 소리로 말하기를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도다!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찐 된 일인고!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엘리사벳의 이 말은 성령이 충만하여서 나온 말입니다. 배속의 태아도 성령이 충만하여 메시아를 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사람으로서 일어날 일입니까?
이 엘리사벳의 성령 충만한 말속에서 몇 가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43절에서 “내 주의 모친”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내 주”가 누구입니까? 이제 갓 잉태한 태아를 향하여 “내 주”라고 고백합니다. 만약에 왕의 부인이 아이를 가졌으면 왕손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처녀가 잉태하여 온 것을 보고서 엘리사벳이 내 주라고 고백하는 것 역시 성령이 아니고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2:3절에서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또 한 가지는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예언된 일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니 그 믿음을 보고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란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손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스마엘의 후손들도 있고 이삭의 후손들도 있습니다. 그 후손들 가운데서 누구라는 것입니까? 갈라디아서 3:16절을 보시면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아브라함의 자손 누구를 통하여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까? 여럿이 아니라 오직 한 분을 꼭 집어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것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도 예수님을 믿어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오실 때를 기다리다가 보고서 기뻐하였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시간의 순서를 초월하는 묵시적인 말씀인 것입니다. 다윗도 예수님을 보고서 주라고 이미 고백하였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인물이 아니라 이제 신약에서 아기 예수님이 태어나시기도 전에 내 주라고 고백하게 된 사람이 성령이 충만한 엘리사벳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축복합니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도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세상의 상황으로 보자면 복이 아니라 저주스러운 현상입니다. 정혼한 사람도 모르는 임신을 하였으니 버림 받는 것은 당연하며 죽음도 각오해야 하는 현실인데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 보면 복을 받은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복이란 세상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서 하나님의 도구가 된 것이 복인 것입니다. 이러한 복은 사람이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들은 마리아가 찬양합니다.
46-55절입니다. 마리아가 찬양합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자신의 신세를 망친 것이라고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비천한 자신을 돌아보아 주셔서 감사하고 기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세 이후로 자기를 복되다고 할 것이라고 합니다. 왜 복된 것입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자기의 몸에 담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을 마리아 역시 내 구주로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마리아를 선택하셔서 큰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 도다!
이런 찬양 역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 주님께서 하실 일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셔서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냈다고 합니다. 주의 팔이란 구약에서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을 하실 때에 주의 오른팔로 싸우셨다고 합니다. 그 오른팔의 역할을 지금 예수님이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리아의 찬양은 한나의 찬양과 비슷합니다. 사무엘 상 2:1-10절입니다. “1 한나가 기도하여 가로되 내 마음이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를 인하여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을 인하여 기뻐함이니이다 2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찌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4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5 유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도다 전에 잉태치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8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 위에 세우셨도다 9 그가 그 거룩한 자들의 발을 지키실 것이요 악인으로 흑암 중에서 잠잠케 하시리니 힘으로는 이길 사람이 없음이로다 10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 하늘 우뢰로 그들을 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베푸시고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며 자기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한나의 찬양과 마리아의 찬양이 거의 같은 내용입니다. 교만한 자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고 가난한 자들을 높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심판을 베푸실 것인데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고 자기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한나의 찬양은 한나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한 여인입니다. 그래서 그의 남편 엘가나가 후처를 취한 모양입니다. 그 이름이 브닌나인데 이 여자가 아들을 낳게 되자 한나를 심히 대적합니다. 자식도 낳지 못하는 여자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없는데서 생긴 나라입니다. 모든 것이 없는데서 은혜로 주어진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있는 것으로 없는 자를 무시하고 깔보는 것은 이스라엘의 정신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한나가 괴로움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처사가 이스라엘에 팽배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나라는 하나님의 뜻하시는 나라가 아니기에 심판하심이 마땅하다는 내용입니다. 이 기도는 한나가 기도하여 아이를 가진 것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죄악을 고발하고 심판하시는 장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맥이 마리아에게서도 나오는 것입니다.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를 흩으시고 권세 있는 자를 내리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행하신 일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당시의 권세 잡은 자들을 공격하셨습니다.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을 영접하여 주셨습니다. 그 결국은 그들 배후의 사단의 권세를 치시기 위함입니다. 마리아의 찬양의 내용대로 예수님은 이 땅의 공중 권세 잡은 자 마귀를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로 승리하신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이제는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 되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신 분으로 성령의 인도대로 사신 분이시지만 이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시는 분이 되십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에게 성령을 보내시면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세상이 싫다고 버린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됩니다. 마치 마리아가 고백한 것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마리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예수님을 몸에 담게 되자 자기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가는 상관이 없이 그 영혼이 찬양하고 기뻐하였습니다. 오늘날 주의 성령을 받아서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되면 그 영혼이 찬양하고 기뻐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에게 주님이 오시다니요! 범죄 이후에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씀대로 질그릇으로 살다가 이 질그릇이 낡아지고 약하여져서 깨어지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 할 질그릇입니다.
2주전 오후에 보았던 전도서 12장의 내용입니다. 공동번역으로 봅니다. “1 그러니 좋은 날이 다 지나고 "사는 재미가 하나도 없구나!" 하는 탄식소리가 입에서 새어 나오기 전, 아직 젊었을 때에 너를 지으신 이를 기억하여라. 2 해와 달과 별이 빛을 잃기 전, 비가 온 다음에 다시 구름이 몰려오기 전에 그를 기억하여라. 3 그 날이 오면 두 팔은 다리가 후들거리는 수문장같이 되고, 두 다리는 허리가 굽은 군인같이 되고, 이는 맷돌 가는 여인처럼 빠지고, 눈은 일손을 멈추고 창밖을 내다보는 여인들같이 흐려지리라. 4 거리 쪽으로 난 문이 닫히듯 귀는 먹어 방아 소리 멀어져 가고 새소리는 들리지 않고 모든 노랫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리라. 5 그래서 언덕으로 오르는 일이 두려워지고 길에 나서는 일조차 겁이 나리라. 머리는 파뿌리가 되고 양기가 떨어져 보약도 소용없이 되리라. 그러다가 영원한 집에 돌아가면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애곡하리라. 6 ○은사슬이 끊어지면 금 그릇이 떨어져 부서진다. 두레박 끈이 끊어지면 물동이가 깨진다. 7 그렇게 되면 티끌로 된 몸은 땅에서 왔으니 땅으로 돌아가고 숨은 하느님께 받은 것이니 하느님께로 돌아가리라. 8 ○설교자는 말한다. "헛되고 또 헛되다. 모든 것이 헛되다”
이런 질그릇에 보배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오셔서 우리 안에 임재 하셨다면 우리 영혼은 앞으로의 나의 운명이 세상의 시각으로는 어찌될지 모르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마리아의 찬양이 나오게 됩니다.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대에 나를 복이 있다 하리로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대로 됩니다. 54-55절입니다. 그 종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고 그 조상에게 말씀하신 대로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언약하신 대로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대로 예수님을 여러분의 마음에 모시고 사는 것이 영원한 복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1:57-80 사가랴의 찬송 2006. 11. 12
57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58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저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59 팔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60 그 모친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61 저희가 가로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62 그 부친께 형용하여 무엇으로 이름하려 하는가 물으니 63 저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 쓰매 다 기이히 여기더라 64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65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매 66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가로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하니 이는 주의 손이 저와 함께하심이러라 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71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72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74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75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80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오늘 말씀은 세례요한의 출생입니다. 그런데 아버지 사가랴가 노년에 낳을 수 없는 아들을 낳은 기쁨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로 인하여 찬송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상태를 성령이 충만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성령이 충만하다고 그러면 무슨 특별한 능력을 행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을 위하여 기도 합니다. 저도 한때 성령의 충만을 위하여 많이 기도하였습니다. 신학교 다니면서 밤중에 학교 뒷산에 있는 기도 굴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였는데 그런데 어느 날 너 성령 충만해서 무엇 하려고 그러니?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 해서 능력 있는 전도사가 되어서 복음도 능력 있게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않는가 하는 자문자답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도한 것은 결국 내가 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성령이 충만한 사람치고 고생하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에서 나타나는 마리아를 봅시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성령의 능력이 임하게 되니 처녀가 아이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세상의 시각으로 보면 신세 망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집안의 처녀를 보고서 엘리사벳은 큰 소리로 복이 있는 여자라고 말합니다. 기쁘고 복되다고 하는데 세상에 보면 모두 미친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습니까!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 집사님은 설교하다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를 향하여 돌을 던지는 자들을 향하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면서 죽어갔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바울사도는 사도행전과 고린도전후서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지 우리가 이미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자발적으로 성령의 충만을 구하시겠습니까?
오히려 피하고 싶지요! 그러나 피할 수 없도록 우리 마음에 들어와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도 무엇으로 기뻐하고 무엇을 복되다고 하게 되는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확인을 해 보려고 합니다. 57-66절까지 봅니다. 엘리사벳이 해산할 때가 되어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웃과 친족이 다 주의 긍휼히 여기심을 기뻐하였습니다. 팔일이 되어 할례를 행하기 위하여 와서는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로 지으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난지 팔 일만에 할례를 행하고 할례를 행하는 때에 공식적인 이름을 지어 부르게 됩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요한으로 해야 한다고 하자 친척들이 그런 이름이 없다고 사가랴로 지으라고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사가랴에게 형용하면서 이 아이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지어야 할지를 물었습니다. 사가랴가 가브리엘 천사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여 벙어리가 되었는데 단지 말만 못한 것이 아니라 듣지도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들을 수 있었다면 아이의 이름으로 실랑이를 벌일 때 글로 써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형용으로 의사를 표현했다는 것은 말로 한 것이 아니라 손짓발짓을 한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 살펴볼 문제는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였으니 그런 사람은 들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게 되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믿지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져서 아들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때 아들의 이름을 서판에 요한이라고 써주자 그 순간에 혀가 풀린 것입니다. 천사가 전하여 준대로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웠습니다. 이 아이가 장차 어떻게 될 것인가를 기대하였습니다.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린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서 예언하기 시작합니다. 그 예언의 첫 내용이 무엇입니까?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노년에 아들을 얻어서 기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 백성을 돌보아 주심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런 찬송은 성령이 충만한 자들이 속에서 터져 나오는 외침인 것입니다. 주님의 일에 대하여 증거 하는 자들이 이런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3-7절입니다.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편지를 시작하자말자 바로 찬송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 찬송의 내용을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거저 주시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는 것입니다. 거저 주신 은혜가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3-6절입니다. “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6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은혜들을 생각하면 찬송이 터져 나오는 것이며 여러 가지 시험과 근심 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126:1-4을 봅니다.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도다 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열방 중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저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다 하였도다 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이 찬송이 주님의 구원을 맛본 자들의 찬송입니다.
이제 사가랴의 찬송을 봅니다. 놀라운 표현은 아직 예수님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이미 완료형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엘리사벳도 배속의 태아를 보고서 내 주를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성령이 충만하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기쁘고 신나서 증거 하는데 오늘도 제 혼자 기뻐서 날뛰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지난주에 어떤 사람이 제가 설교하고 나니 자기 혼자서 좋아서 난리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부디 여러분도 함께 이 기쁨이 충만하여 지기를 바랄 뿐입니다.
사갸랴의 찬송을 계속하여 봅니다. 68-71절입니다. 하나님이 돌아 보셨다고 합니다. 이런 표현은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자기 백성을 돌아 보셨다는 말씀과 연결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셔서 어린 양의 피로 속량하여 내셨듯이 지금 자기 백성들을 속량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에서 메시아가 올 것이라는 구약의 선지자들의 예언이 지금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모든 원수에게서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이렇게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이스라엘이 의로워서입니까? 율법을 잘 지켜서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제사를 잘 드려서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성전을 잘 지키고 있어서 구원을 얻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72-73절을 보시면 세 단어가 나옵니다. 긍휼과 언약과 맹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언약을 맺으신 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셨는데 창세기 15장에서 언약체결을 할 때에 쪼개진 짐승사이로 하나님의 형상이 타는 횃불처럼 지나가고 아브라함을 지켜만 보고 있습니다. 이로서 언약이 체결이 된 것입니다. 즉 언약을 지키지 못하면 죽은 짐승처럼 죽임당하여야 된다는 맹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보다 높으신 분이 없기에 자기 이름으로 맹세하신 것입니다. 그 맹세를 지키셨기에 지금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메시아를 보내셨다는 것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원수가 누구입니까? 우선 눈에 보이는 적으로는 로마군대입니다. 옛날 애굽에서 구원시켜 주셨듯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신 것처럼, 지금 로마군대를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옛날 다윗 왕국처럼 세워주시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영광을 위하여 언약을 맺으시고 일하신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75절입니다.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 없이 섬기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출애굽 할 때에도 출애굽의 목적은 종에서 해방되었다. 이제 자유다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살자! 이렇게 되는 것이 출애굽의 목적이 아닙니다. 출애굽 시키신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나의 행복과 기쁨이 목적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구원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알고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것 자체가 기쁨이요 감사인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고 예배하지 못하는 것이 심판이요 저주인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섬길수록 더 귀한 주님임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이 주님의 은혜를 입어서 주님을 섬길 수 있다니! 이런 기쁨이 세상에 어디에 있을까? 이 기쁨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다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되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이 세상의 정치적인 구원이 아닙니다. 경제적인 구원이 아닙니다. 새로운 종교적인 힘을 가지고 세계를 지배하여 보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죄와 사망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구원이란 이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이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지 않는 곳이 없기에 이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이란 죄로부터의 구원인 것입니다.
76-79절입니다. 사가랴의 기쁨은 노년에 자기 아들을 얻는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돌보신다는 기쁨을 찬송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아들인 요한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선지자요 그 길을 예비하는 자라고 합니다. 그 예비자로서 무엇을 선포하고 증거 할 것인지를 성령의 충만함으로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 사함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말합니다. 죄에서의 구원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사가랴의 찬송의 절정이 이것입니다. 죄에서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상태는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갇혀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로운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 우리를 속량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찬송의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서도 이 찬송이 터져 나오기를 소망합니다.
누가복음 2:1-20 큰 기쁨의 좋은 소식 2006. 11. 19
1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8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15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16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17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18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19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20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마태복음 7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7○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같은 말씀을 세 번이나 하였으니 간절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좋은 것을 준다는 것입니다. 악한 아비라고 자기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줍니다. 도둑놈도 사기꾼도 자기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흔히 이 좋은 것을 내가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난 주 수능시험 치른 학생은 수능시험 만점이 좋은 것이고, 로또복권 산 사람은 1등 당첨이 좋은 것이겠지요! 그러나 이 좋은 것은 아버지께서 좋으신 것을 자식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 좋은 것에 대하여 누가복음 11장에서 성령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얻는 좋은 것이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처음부터 성령의 역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이 영광스러운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누가복음 1장에서만 성령이 임하게 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사람에게 어떻게 나타난 것입니까? 처녀가 아이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처녀에게 죽는 일임에도 이것이 성령의 일로 나타난 것입니다. 가난한 나사렛 마을의 마리아가 언제 한번이라도 처녀로서 아이를 가질 생각을 꿈에라도 꾸었겠습니까?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이기에 거저 착실한 남자 만나서 가난하지만 서로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기를 꿈꾸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꿈과는 정 반대로 처녀가 잉태한 것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낮고 낮아지셔서 비천한 계집종의 몸에 오심을 가지고 신세한탄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엘리사벳도 성령이 충만하여 태어나지도 아니한 아기 예수를 내 주라고 고백합니다. 사가랴는 벙어린 된 입이 열리면서 주님을 찬송하는데 죄 사함으로 인한 구원,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빛이 비취고 평강의 길로 인도하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게 되면 오늘 말씀처럼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게 됩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는 것이 사람마다 제각각입니다. 자기들이 평소에 소원하고 바라는 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쁨의 소식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교회에서 복음이라고 복된 소식이라고 기쁜 소식이라고 전하는 것들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소식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충만한 바울사도는 내가 사람을 좋게 하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말씀도 성령이 임한 자만 기뻐하고 좋아할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2:1-2절입니다. 역사적인 배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인구조사란 왜 하는 것입니까? 징병과 조세를 위한 것입니다. 그때의 로마 황제가 아구스도입니다. 아구스도란 아우구스투스의 음역입니다. 아우구스투스의 뜻은 존귀한 자라는 뜻인데 로마 원로원에서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은 최초의 황제가 옥타비아누스입니다. 그리고 수리아 총독은 구레뇨입니다. 이때를 팍스로마나라고 해서 세상을 로마가 정복하고 지배한 시대입니다. 이 황제의 영으로 호적 하라는 명이 났습니다.
요셉이 다윗의 후손이라서 베들레헴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호적조사에 임하지 않아도 되는데 왜 마리아를 함께 데려왔을까요? 마리아를 보호하기 위하여서 그랬을 것입니다. 결혼식도 하지 않았는데 배가 불러오는 마리아가 친정에선들 대접을 받았겠습니까? 요셉이 마리아와 파혼하려고 하다가 천사가 나타나서 알려줌으로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러니 요셉의 신세도 버려놓은 것입니다. 유대인의 율법적인 전통을 지키지 못한 속된 사람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올라온 것입니다.
로마 황제의 명령에 거부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황제의 명령으로 인하여 호적 하러 베들레헴으로 온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니 로마의 황제란 단지 하나님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런 예언이 미가서 5:2절에 나타납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시기 전 이미 700년 전에 예언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헤롯 왕 때에 아기 예수를 경배하려고 온 동방박사들이 왕이 어디에 태어났는지를 물었을 때에 서기관들이 정확하게 베들레헴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요셉과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와서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는 것은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 황제도 도구이고 요셉과 마리아도 하나님의 도구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다 죽이도록 명령한 헤롯도 도구입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묵시가 역사를 결정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인 줄로 아는 사람은 소경입니다. 세상이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만물이 다 주님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3-4절입니다. 베들레헴에 와서 해산할 때가 다 되었습니다. 방을 구하여도 없습니다. 이것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가 참 가난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돈이 많았다면 여관 주인에게 말하면 안방이라도 내어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한 젊은 부부에게 선뜻 방을 내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찾은 곳이 짐승들의 우릿간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셨는데 어디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짐승이 태어나는 우리에서 태어나셔서 짐승들의 먹이통에 누이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몰라주어도 허다한 천군천사들은 찬송합니다. 8-14절입니다. 그 지경에 밖에서 양을 치든 목자들에게 주의 사자가 나타납니다. 천사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의 영광의 비취자 크게 무서워합니다. 그때 천사의 소식이 이것입니다.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고 합니다. 그 기쁜 소식을 들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이 받습니다.
그 기쁜 소식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다윗의 동리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이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구주가 오셨답니다. 그리스도 주가 오셨답니다. 왜 이것이 기쁨의 소식입니까?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죄와 사망의 그늘에 갇혀있던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다고요? 그것은 마귀가 속이고 있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소식을 기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세상에서 가난하고 비천하고 죄인들이었습니다.
세상의 영광을 가지고 있고, 왕궁에 살고, 성전에서 높은 자리 차지한 사람들은 기쁨의 소식이 아니라 재앙의 소식이었습니다. 마리아의 찬양 속에 높은 자를 내리치시고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 일을 주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가난한 사람들이 다 복음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이 더 지독하게 세상의 부를 탐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복음을 기뻐한다는 것은 오직 주의 성령이 임하여야만 됩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요한복음 16장 말씀에 보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서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성령이 임하여 알게 된 죄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누구를 믿고 살았나요? 자기 자신을 믿고 삽니다. 자신의 착함의 능력,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예수님도 나를 도와주는 알라 딘의 거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나의 구주라고 고백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구원한 주님이 어디에 오셨습니까?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라고 합니다. 마굿간에 태어나는 아기도 없겠거니와 구유에 놓인 것이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메시아가 될 표적을 줄게 없어서 구유에 놓은 것을 표적으로 주시는 것입니까? 주님이 오신다면 좀더 대단한 능력으로 초인적으로 태어나셔서 자신이 구주임을 알리시면 되실 텐데 왜 이런 모습으로 오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 인간의 죄를 다 들추어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무엇을 기쁜 소식으로 여기고 있는지를 다 들추어내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소원이 무엇입니까? 나는 지금 죽어도 마땅한 비천한 벌레보다 못한 짐승임을 인정하십니까? 찬송가 가사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141장에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 가셨나 이 벌레만도 못한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이 찬송을 입술로는 고백하면서 누가 자존심 좀 상하게 하면 상대방을 죽이려고 설치는 우리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이 구유에 오신 것이 표적이 되는 것은 단지 목자들이 알아보기 위한 표적만이 아니라 짐승의 먹이통에 오셔서 짐승 같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한 낮아지심입니다. 제가 청년 때에 기독사상이라는 월간지를 보다가 어느 분의 성탄설교가 이 본문을 가지고 짐승이 먹이통에 오셨다는 표현을 보았습니다. 좀 알레고리 한 느낌이 없지는 않지만 그러나 저는 짐승의 먹이통에 오셔서 예수님은 짐승 같은 우리의 먹이가 되셨다는 것에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짐승을 빗대어 욕하면 기분이 나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인간은 짐승보다 못합니다. 이사야 1장 3절에 보시면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내 백성은 깨닫지 못한다고 합니다. 예레미야 8장 7절에서는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소나 나귀나 학이나 비둘기 제비 두루미만도 못하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아멘이 되십니까? 그러므로 짐승보다 못한 죄인을 위하여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신 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이것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의롭다고 여기고 자신이 착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는 자들은 얼마나 기분 나쁜 소식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의 오심의 뜻을 제대로 알고 믿는 일이란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알게 되고 예수님의 대속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서 따라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그런 양식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살과 피로서 영생의 양식을 주신다는 말씀을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심히 어렵다고 하면서 떠나가서는 다시는 따라다니지 않았습니다. 육적인 양식과 기적을 바라고 오는 자들이 걸려 넘어지는 지점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영생의 양식이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들도 가려느냐고 하십니다. 그때 제자들이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매 우리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그렇게 답변을 하였지만 그러나 정작 십자가 지는 현장에서는 다 도망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 홀로 자신의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죽기까지 백퍼센트 순종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볼때에는 가장 저주받고 실패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큰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13-14절입니다. 홀연히 허다한 천군이 그 천사와 함께 있어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가운데 평화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말구유에 태어나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짐승보다 못한 인간들의 죄를 위하여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시기 위하여 오신 그 주님의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이 소식을 기쁜 소식을 받는 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아닙니다.
성탄절이 되면 세상의 장사꾼들이 먼저 난리입니다. 나이트클럽이나 백화점이 먼저 장식을 합니다. 교회도 뒤질세라 장식을 하지만 세상의 장식만큼 멋있거나 화려하지 못합니다. 세상이나 교회나 간에 자기들이 기뻐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자에게만 평화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에게만 평화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못한 자들에게는 평화가 아니라 심판의 소식입니다.
이 천사들의 찬양을 들은 목자들이 베들레헴에 달려가서 구유에 놓인 아기를 보고서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 한 이 아기의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러자 듣는 자들이 기이히 여기지만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합니다. 목자들에게서도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 이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이른바와 같이 듣고 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갔습니다.
오늘 성찬식을 합니다. 일년에 한두 번 하는 성찬식 때만 주님의 살과 피를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새벽기도회 때도 성찬식을 합니다. 어떻게 하느냐고요?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의 영생의 양식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듣는다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그 살과 피를 주신 예수님을 보고 듣고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은혜가 충만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면서 돌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2:21-39 시므온의 찬송 2006. 11. 26
21 ○할례할 팔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러라 22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함이더라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 된지 팔십 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39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마태복음 17장에 보시면 가버나움에서 성전 세를 받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당신의 선생은 세를 내지 않느냐며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낸다고 하고서는 예수님께 갔더니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정세와 관세를 받는가 하였습니다. 자기 아들에게 받느냐 타인에게냐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타인 에게라고 답변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또는 넘어지지 않도록 성전 세를 내라고 합니다.
내는 방법을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물고기의 입을 열어 한 세겔이 나오면 그들에게 주라고 하십니다. 성전 세가 반 세겔이니 베드로와 예수님의 성전 세를 내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집에 대하여 세를 낼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의 임금의 아들도 세금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 세를 내지 않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밝히시지 아니하시는 것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왜 이 말씀으로 시작하는가 하면,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의 제정자 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간의 그 어떤 의무도 지실 이유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땅에 오시면서 비천한 계집종의 몸을 사용하십니다. 태어나실 때는 말구유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평화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자들이 주님을 찬송합니다. 마리아가 찬송하고 엘리사벳이 찬송하고 사가랴가 찬송하고 천군천사들이 찬송하고 목자들이 찬송하고 오늘은 시므온이 찬송합니다. 왜 이런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까? 갈라디아서 4:4-5절입니다. “4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무엇에서의 속량입니까?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율법을 받지 않은 자들은 어떠합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이 율법의 의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성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괴로우면 자살을 합니다. 요즈음도 자살이 많은데 언론에서 보도를 하지 않습니다. 자살이 유행처럼 번지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자살한다고 끝이라면 착각입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려 내셔서 심판을 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거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이 전부인줄 알고 사니 괴롭다는 말이 나오고 죽겠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캄캄한 어두움에 갇혔다는 증거입니다. 죄와 사망의 그늘에 앉아서 죽어가는 인생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세상에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 어디로 오셨다고 하였습니까? 율법 아래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율법을 다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그 어떤 누구도 이루어 낼 수가 없는 율법을 온전하게 다 이루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0절 말씀을 보시면 모든 율법을 항상 지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아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저주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 저주를 예수님이 율법을 다 지키심으로 의를 만들어내실 뿐만 아니라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시는 곳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이 일을 이루시어 하나님이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예수님을 믿는 자도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율법아래 오신 것입니다.
21-25절입니다. 예수님이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한 것도 율법을 따라 행한 것입니다. 물론 이 할례는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한 것이지만 율법에서도 할례를 행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할례를 행할 때에 이름을 지어 부르는데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합니다. 이미 천사의 예언대로 부른 것입니다. 이 이름은 유대사회에서 흔한 이름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잉태하여 처녀의 몸으로 오셔서 말구유에 누이신 분이 표적이었습니다. 물론 가장 분명한 표적은 십자가의 표적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입니다.
이 이름의 뜻을 마태복음 1:21절에서 이렇게 증거 하고 있습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 그런데 자기 죄를 모르는 사람은 예수님을 각자의 욕망대로 부르는 것입니다. 마치 정월 대보름에 달을 보면서 각자의 소원을 빌듯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자기 죄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 영광을 위하여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지 않고서는 자기 죄를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종종 드는 예를 권정생 이라는 동화작가 이야기입니다. 강아지 똥, 몽실 언니를 지은 사람이라고 하면 잘 아실 것입니다. 이 사람의 책 중에 도토리 예배당의 종지기 아저씨라는 책을 보면, 함께 사는 생쥐와 고무다라기를 타고서 하늘로 올라간 것입니다. 드디어 천국에 도달하니 천사가 지키고 있더랍니다. 왜 왔느냐고 하자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서 왔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하나님을 만나러 왔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나러 왔다고 하였지요! 그런 하나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러면 어떤 하나님이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각 교회마다 하나님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교회 이름을 말하려고 하니 시골의 작고 초라한 교회라서 도시의 어느 큰 교회 이름을 말하니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큰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하나님이 가득 한 것입니다.
죽 늘어선 하나님 밑에 이름이 적혀있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하나님, 어느 교회 하나님, 그래서 드디어 자기가 지목한 교회의 하나님께 가니 하나님이 온갖 보석으로 치장이 되어 있는데 인상을 쓰면서 또 무엇을 달라고 그러느냐고 하는 우화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모르면 하나님도 모르는 것입니다. 누구도 하나님 아버지를 본 자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 아버지를 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모르고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엉터리 우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가복음을 통하여서 예수님이 어떻게 오셨으며 무엇을 이루셨는지를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누가의 인도를 따라서 우리 중에 일어난 사실에 대하여 자세히 조사하여 기록한 이 말씀을 따라 살펴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는데 할례를 행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사내아이를 낳으면 7일과 33일 동안 즉 40일의 결례기간을 마치면 성전에서 예물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다 모세 율법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번제와 속죄제로 어린 양이나 비둘기를 드릴 수가 있는데 요셉과 마리아는 가난하여 비둘기를 드리기 위하여 성전으로 왔습니다. 그렇게 결례를 행하기 위하여 성전으로 들어가는데 그때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와서 그 아기를 보게 됩니다. 이 시므온은 25-27절에서 보시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 사람입니다.
이사야 성경에 보면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 위로를 기다린 것입니다. 위로란 어떤 사람에게 필요합니까? 모든 것이 부여하여 부족함이 없다는 사람에게는 위로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새벽에 본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우리는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여기는 그들에게는 위로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떠하였습니까? 곤고하고 가련하고 벌거벗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환난과 궁핍을 당하는 서머나 교회의 실상은 부요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말씀을 우리에게 비추어주셔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의 가련하고 곤고하고 벌거벗은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 자에게 십자가를 지셔서 우리의 죄를 가려주신 예수님만이 위로가 됩니다. 이런 위로를 기다린 시므온이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메시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아마 많이 늙어서 오늘내일 하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늙어서 빨리 죽는 것이 해방으로 여기고 있는데 죽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슨 약속을 받았기 때문입니까? 메시아를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느 가정에 심방을 갔습니다. 어느 집사님의 모친이 연세가 많으신 것입니다. 내가 빨리 죽어야 자식이 고생을 안 할 텐데 이렇게 안 죽어서 큰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시라고 그래서 살려두셨다고 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믿자고 하였습니다. 순순히 예수님을 믿겠다고 아멘으로 화답을 하였습니다. 성령께서 그 마음을 움직여서 그렇게 고백하였다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시므온의 이야기를 계속 봅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는데 성령의 감동이 오는 것입니다. 성전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27-32절입니다. 그 아기를 안고서 주를 찬송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 놀라운 찬송을 합니다.
주의 성령이 메시아를 보기 전에 죽지 않으리라고 하였는데 이제 메시아를 보았으니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았으니 이제야 종을 놓아주시는 군요! 이 자유의 외침을 아시겠습니까? 이제 평안히 눈을 감겠다는 것입니다.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모습을 보면 늙고 늙은 사람들이 끌어않고 울면서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족이 만난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여 이방의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됩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교회로 이렇게 모이게 된 것이 성령의 감동으로 모였지요! 그러면 누구를 만나야 합니까?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이제야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는 이유의 최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알고 만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최고가 아닌 사람은 아직도 시므온의 찬송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제 구원을 보았는데 무슨 소원이 더 있겠습니까?
온갖 욕망에 붙들려 살면서 그것이 사망에 이르는 죄가 되는지도 모르고 열심히만 달려온 인생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공통된 고백이 이 세상의 영광이라고 여긴 것들이 배설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단지 세상 사람들이 성공이며 복이라고 여기는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것만이 헛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의롭고자 율법을 지키고 선행을 하고 착하고 바르게 살고자 한 것조차 주님의 빛 앞에서 더럽고 추한 것으로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 기쁜 소식이 마냥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이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여서 하루라도 빨리 얼굴과 얼굴로 대하여 보고 싶다면 이 육신의 장막을 지금이라도 벗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젊고 해야 할 일이 많이 있고 세상의 것들이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이생의 자랑이 될만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에게는 이런 소식이 기쁜 소식이 아니라 원망과 비방이 될 것입니다.
33-35절입니다. 시므온의 찬송을 듣고서 부모들이 의아해 합니다. 천사들의 소식을 들은 자들이지만 지금 시므온의 찬송을 듣고서 의아해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이 보통 아기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으로 자라나신 것입니다. 젖을 먹고 배설을 하고 잠을 자는 것입니다. 별다른 특징이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첫 아이 놓고서는 얼마나 분주하고 정신이 없습니까? 그렇게 바빠서 그런지 천사의 말도 잊어버린 모양입니다. 다시 시므온의 찬송을 듣고서 의아해 하는데 그때 시므온에 메시아의 역할을 또 예언합니다.
시므온이 그 부모를 축복하고서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분명히 축복하는데 그 축복이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려내려 함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축복의 내용입니까? 자식을 축복하려면 이 아이가 입신양명하여 부모의 이름을 높이라고 그렇게 하여야 축복으로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저주입니다.
마리아의 마음을 찌르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의 고난과 배척과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본 마리아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부모를 묻으면 산에다 묻고 자식을 묻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우리나라의 말도 있는데 성령으로 잉태하였으나 자신의 몸에서 10달을 지내고 자신의 젖을 먹고 자란 예수가 그 고난과 죽임당할 때에 마리아의 심정은 혼절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차라리 자신이 대신 죽는 것이 낫지 그러나 예수님의 그 죽으심으로 인하여 마리아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축복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이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됩니까?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고 흥하게 한다고 하십니다. 메시아가 오면 사람들을 흥하게 하여야지 패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패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무너뜨리는 것이 먼저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사명이 이러하였습니다. 예레미야 1:10절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기존의 모든 생각, 우리 조상으로부터 받은 모든 교육, 세상의 가치관, 세상의 기준들이 다 무너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야 새롭게 건설하고 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시면 정말 이 시므온의 예언대로 됩니다.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시기에 비방의 표적이 됩니다.
예수님이 드러내신 인간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그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이 마태복음 15: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 말씀은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고 바리새인들이 비방 할 때에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장로들의 유전을 따라서 손을 씻고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비방 할 때에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 비방 받을 만 하지요!
우리도 서로 좋은 것이 좋다고 좋은 말만 하면 비방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분이 제가 설교하면 목사님이 우리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저는 전혀 그런 은사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속을 모릅니다. 다만 성경의 말씀을 증거 함으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말씀의 예리한 검으로 수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이 벌거벗은 듯이 우리의 실상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때 어떤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까?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법에서 어찌할꼬? 그때의 복음은 이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할 것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정죄함이 없도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였도다! 이것이 감사와 찬송의 제목이 됩니다. 이 찬송이 여러분의 삶에서 나오고 있습니까? 아니 이 예배시간이라도 나오고 있습니까? 오 주여 종을 놓아주시기 감사합니다.
세상에서 살고자 발버둥 친 것이 참으로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 외에 더 나은 소망이 없습니다. 이런 고백을 꼭 다 늙어서 죽기 직전에만 해야 할 고백입니까? 여러분을 묶고 있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염려들입니까? 자녀? 사업? 결혼? 입학? 이런 것을 해결하여 준다는 곳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절에도 이런 문제 해결한다고 하고 길에서 사주보는 사람들도 해결한다고 하고 심지어 교회에서 얼마나 많이 이런 문제를 해결하여 준다고 합니까?
그러나 정말 예수님을 만나면 시므온의 찬송이 나옵니다. 주여 이제야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이 고백은 죽기 직전의 고백이 아니라 젊은 청년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고백이 참된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계신다면 나는 됩니다. 이 고백이 바울의 고백입니다. 이 몸을 떠나 하루라고 빨리 가고 싶지만 그러나 주님께서 맡기신 복음 때문에 산다고 합니다.
이제 한 사람의 이야기만 보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36-39절입니다. 아셀 지파의 안나라는 여 선지자입니다. 이 사람의 운명도 기구합니다. 결혼하여 7년 만에 남편이 죽고 과부로 84년을 지냈습니다. 과부 된지 84년 결혼 7년 더하면 91세입니다. 결혼을 몇 세에 하였겠습니까? 우리나라도 조혼을 하면 16살 때도 하였지요! 15살에 결혼하였다고 하여도 106세입니다. 과부되어 무엇을 하였습니까? 주야로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금식하고 기도함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마침 아기 예수를 보고서 시므온처럼 하나님께 감사를 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구속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입니다. 연세 드신 분들이라고 할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다 이 주님을 만나기를 소원합니다. 참으로 주의 성령께서 감동하여 주셔서 우리에게도 이런 고백, 주여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니 감사합니다. 또한 안나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감사하고 증거 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누가복음 2:40-52 구원자이신 예수님 2006. 12. 3
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41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 예수께서 열 두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48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 예수께서 한가지로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모친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52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사람들은 복 받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복이 무엇인지를 복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새벽기도회 시간에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살펴보았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성경인 요한 계시록에서 복이라는 단어를 보고 있는데 20:6절에서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복이 무언가 하면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망이 무엇인가 하면 마귀와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와 사망과 음부도 유황 불 못에 던져지는데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는 곳이 둘째 사망입니다. 즉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하면 무슨 광신도쯤으로 여기는 시대입니다. 지옥을 이야기하면 위협하기 위하여 하는 것인 양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오른 손이 범죄 하면 그 손을 찍어내더라도 지옥에 가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오른 눈이 범죄 하면 그 눈을 뽑아내더라도 지옥에 가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지옥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곳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그런 주님의 말씀에 별 귀를 기울이지 않고 삽니다. 그저 이 세상에서 내 몸 편한 것이 제일이고 내 자존심 세우면서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다 달려들어 지옥이 없다고 하여도 주님의 말씀을 변개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옥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은 첫째 부활에 참예한 사람입니다. 첫째 부활에 참예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니 주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이 첫째 부활에 참예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5:24-26절입니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이미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자들은 지금 죽어있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살아있다고 큰소리치는 자들도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면 죽어있는 자들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귀에 이 성경 말씀이 들리고 있습니까? 그리고 이 말씀이 믿어지십니까? 그렇다면 세상에 이보다 더 중요한 소식이 어디에 있습니까? 천하를 얻어도 자기의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고 사도행전 4:1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 얻을 다른 이름이 없는 유일한 이름이 누구 입니까? 예수입니다.
그러나 예수란 이름은 유대사회에서 흔한 이름입니다. 어떤 예수를 말합니까?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처녀에게서 나셔서 구유에 누인 분입니다. 나사렛에서 자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는데 언제부터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아기 때 불러야 됩니까? 청년 때 불러야 합니까? 십자가를 지신 이후의 예수님을 불러야 합니까? 우리는 흔히 예수님의 공생애를 마치고 십자가를 지신 후에만 집중을 합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구원입니다. 아니 이 땅에 오시기 전에도 예수님은 구원자였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을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복음 8:56절에서 아브라함이 자신의 때를 볼 것을 바라보다가 보고서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또 예수님은 마태복음 22:43절에서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구원자입니다.
이미 1장에서 살펴보았습니다만 이런 사실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믿을 수도 없고 고백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배속에 들어있는 아기를 보고서 내 주라고 고백을 하겠습니까? 구약에서 이런 고백은 여호와 하나님께 하는 고백입니다. 자신의 태중에 있는 아기가 자기를 구원할 자 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태중의 아이를 주로 고백하겠습니까? 사가랴가 성령으로 고백하고 시므온이 성령으로 아기 예수를 안고 구원을 보았다고 합니다. 안나도 그렇게 합니다.
오늘말씀은 예수님의 소년 시절에 대한 유일한 기록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태어난 사건과 애굽에 피난 갔다가 나사렛에서 자라셨다는 보도만 하고 바로 공생애 사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누가만 예수님의 12살 때에 이야기를 그것도 성전을 중심으로 아주 단편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소년이었던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고자 합니다.
40절입니다.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고 합니다. 자라고 강하고 지혜가 충족하다는 것은 보통 사람의 성장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52절도 봅니다. 지혜와 그 키가 자랍니다. 온전한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키도 자라고 지혜도 자라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참되신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41-47절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최대절기입니다. 애굽에서 어린 양의 피를 바르고 나온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해마다 유월절에 성전에 올라왔는데 예수님이 12살 되신 해에 예수님과 동행하여 온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12살이 되면 율법의 아들이라 하여 율법의 의무를 부과한다고 합니다. 물론 어려서는 가정이나 회당에서 율법을 배웁니다. 이제 12살이 되었기에 부모들이 유월절을 지키는 일에 함께 참예한 것입니다.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120킬로미터이기에 친척들이 함께 동반하여 여행을 합니다. 그러니 12살 정도면 친척들과 함께 가기도 하고 한나절을 있다가 보기도 하고 그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월절 성전순례를 마치고 별 염려 없이 돌아가는데 하룻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주변을 찾아도 없는 것입니다. 다시 하룻길을 되돌아오면서 찾았습니다. 드디어 3일 째 성전에서 찾았습니다.
48절을 봅니다. 부모가 놀랍니다. 랍비들과 대화하는 것도 놀랐고 찾아서도 놀랐고 그러면서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며 너를 찾았다고 합니다. 이러면 보통 아이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성경공부 하느라 너무 재미가 있어서 가는 것도 잊어버렸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 착한 아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십니까?
49절을 봅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당신들이 무언데 나를 찾아왔느냐는 말과 같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12년 동안이나 수고하여 키워놓았는데 자기 아버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가슴에 서늘한 비수가 들어오는 느낌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될 것은 이미 시므온의 예언 속에 들어있는 내용입니다. 2:35절에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의 악함을 드러내시기에 비난을 받고 비방을 받아 십자가에 죽임당하는 것을 목격하는 마리아의 심정이 칼을 찢는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눈앞에 자기 자식이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 얼마나 칼로 마음을 찌르는 것과 같습니까?
그러나 그 보다 더한 고통이 오늘의 이 말씀이 아닙니까?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다른 번역으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일에 관계하여야 할 것을 알지 못하였는가 하는 말입니다. 이미 천사들이 지시한 내용을 잊어버렸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몇 곳 더 보겠습니다.
마가복음 3:31-35절입니다. “31 ○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32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34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가족과 친척들이 어떻게 생각하였을까요?
마가복음 3:20-21절입니다. “20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21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병자도 고치시고 귀신들린 자도 고치니 친척들이 붙잡으려고 온 것입니다. 미쳐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얼마나 말렸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가족을 가족으로 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그들이 예수님의 형제요 모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새 가족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혈통과 가족을 가족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여러분은 믿고 싶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내 가족 내 자식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우리의 본능인데 예수님은 가정에 화평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불화하게 하려고 오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가정 행복 세미나를 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가족 중에 누가 예수를 믿으면 교회를 다니기는 다니지만 너무 빠지지는 말라고 합니다.
지금 예수님의 주변의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너무 빠졌다고 미쳤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자기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가족이 말려도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말려도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이 무슨 길입니까? 12살 때에 성전에서 하신 말씀대로 내 아버지의 일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의 일을 하여야 한다는 그 길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며 그 복음의 완성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4:43절입니다. “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44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예수님을 왜 떠나지 못하게 하였을까요? 병 고침 받고 기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붙들고자 하는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입니까? 가정 행복하게 해주는 예수님, 병 고쳐 주시는 예수님, 부자 되게 해 주시는 예수님, 천국가게 해 주는 예수님, 그런 예수님은 붙들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며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고 하신 말씀은 어떻습니까? 나를 따르려고 한다면 부모와 처자식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자기 목숨조차 미워하고서 나를 따르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실천하실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추운 날 이렇게 모이는 것도 무언가 얻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죽으라니요! 내가 죽고 싶어서 예수 믿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살고 싶어서 믿지! 살아도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폼 나게 살고 싶은 것입니다. 세상에 가면 세상에서 알아주는 사람이 되고 싶고, 교회에오면 교회에서도 알아주는 사람이 되어서 2차 투표 갈 것도 없이 1차에 압도적으로 장로도 되고 권사도 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죽으라고 하니 이런 예수님은 솔직히 밀쳐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마리아의 마음에 칼로 찌르는 것과 같은 심정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2절 말씀입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예수님이 왜 사람들에게 비방 받는 표적이 되십니까?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그저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좌우에 날선 예리한 검으로 우리 마음의 생각을 드러냅니다. 사도요한이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을 보았는데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우리의 마음을 찔러야 합니다. 그래서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벌거벗은 자 임을 알아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나는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련하고 곤고하며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교회는 이만하면 되었다고 말하고 싶습니까? 그저 좋은 것이 좋다고 말하고 싶습니까? 뭘 하라는 것도 없고, 뭘 해서 복 받는 것도 아니고, 거저 예수만 믿으면 된다고 하는데 그 믿는 것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주셔야 된다고 하니 그저 날 건드리지 말라고 하고 싶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 안에 사건을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십자가로 휘저어 버리는 것입니다. 옛날에 짐승에게 먹이기 위하여 설거지 한 물을 모아둡니다. 나중에 보면 맑은 물이 위에 있습니다. 그런데 짐승에게 그 물을 주기 위하여 휘휘 저으면 밑에 가라 앉아 있던 온갖 음식찌꺼기가 다 떠오릅니다. 오늘도 주님은 자신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휘휘 저으시는 것입니다. 사건을 통하여, 사람을 통하여, 우리 속을 벌거벗겨 놓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평소에 없는 줄 알았는데 교회에서 봉사 해보시기 바랍니다. 욕 얻어먹는다고 뒤로 숨지 마시고 앞에 나서 보시기 바랍니다. 온갖 모습들이 다 드러납니다.
이때 두 가지 반응이 나옵니다. 화를 내면서 자기 의를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 편은 어찌 할꼬 하면서 회개할 것입니다. 복음이 마냥 사람을 행복하고 기분 좋게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아편입니다. 사람의 속을 확 뒤집어 놓고서 너의 실체를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도 죄인이구나! 남의 말 할 것도 없이 이런 내 죄가, 이런 나의 자존심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였구나! 어찌할꼬! 이 때에 사도들이 무엇을 증거 하였습니까? 회개하고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한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가 분위를 만들고 이렇게 하자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12살 때 성전에서 하신 예수님의 자기 말씀을 이루셨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가족들이 말리고 제자들이 말렸지만 예수님은 아버지의 일을 이루셔야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9:22절입니다.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이 말씀은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나서 하신 말씀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하셔야 할 일이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말합니까? 누가복음에는 없고 마태복음에 나오는 말씀입니다만 베드로가 만류를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십니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생각하는 사람의 일이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지 않고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런 생각이 바로 사단의 생각인 것입니다. 오늘도 사단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잊어버리게 합니다. 성탄절이라는 행사 속에 과연 십자가 지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이 홀로 아버지의 일을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3:33-34절입니다. “33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아무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홀로 그 길을 가셔야 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 25절입니다.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할찌니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이 길을 가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길입니다. 이 모든 일을 예수님이 홀로 이루어내셨습니다.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24:44-48절입니다.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오늘도 증거 되는 것은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늘도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 일을 도와주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홀로 하나님의 아버지의 맡겨진 일을 이루어내신 결과로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셔서 마음의 찔림을 받고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게 된다면 그것은 지금도 주님이 살아계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이루고 계시는 증거입니다. 오늘도 자기 백성을 자기 십자가의 능력으로 이끌어내시는 주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보좌에 계신 이와 어린 양께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아멘!
누가복음 3:1-14 빈들에서 2006. 12. 10
1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지 열 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2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3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4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바 ㄱ)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5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6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함과 같으니라 7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10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것이니라 하고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하고 14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산이나 사찰주변에 보면 많은 돌탑들이 보입니다. 그 탑들을 왜 쌓는 것입니까? 자기들이 소원하는 바를 이루어 달라는 심정으로 정성을 다하여 탑을 쌓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담에도 공든 탑이 무너지랴는 말이 있습니다. 각 사람들마다 자신들이 원하는 소원들을 이루고자 정성을 다하여 탑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무언가 소원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그 소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하여 무슨 정성으로 탑을 쌓아가고 있습니까? 혹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정치에서 성공하기 위하여 온갖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경제계에서 성공하기 위하여서는 또한 잠도 자지 않고 경제의 동향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종교계에서 성공하려면 초인적인 금욕으로 신기한 능력을 받고자 하든지 특별한 부흥의 비결을 배우고자 공을 들일 것입니다.
지난주에 근처의 교회에서 청지기 부흥회를 한다고 등기우편으로 안내가 오고 직접 전화까지 와서 도대체 무슨 말씀을 전하는가 하여 한번 가 보았습니다. 예배의 삶에 대하여 요한복음 4장의 말씀을 한 절 읽어놓고서는 한 시간 내내 하는 말이 예배를 드리는 것은 정성을 드려야 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대통령을 만나도 미리 준비하고 정성을 다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면서 대충 준비하면서 나오느냐는 것입니다. 끝끝내 본문의 말씀은 한번도 거론하지도 않고 예배에 정성 바쳐 복 받자는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 4장의 말씀은 사마리아 우물가에 예수님이 일부러 찾아가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지역을 피하여 가는데 예수님은 한 여인을 만나러 가신 것입니다. 그 여인은 남편을 다섯이나 갈아 치우고 지금 여섯 번째 남자와 사는 여자인데 부끄러워서인지 한낮에 우물에 물 길러 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을 좀 달라고 하자 당신은 유대인인데 어떻게 사마리아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네가 물을 달라고 하는 자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우물은 깊은데 당신은 두레박도 없으면서 이 물을 어떻게 주겠습니까? 우리 조상 야곱이 판 우물인데 당신이 야곱보다 큽니까? 예수님이 이 물을 먹는 자 마다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여자가 동문서답을 합니다. 그런 물을 주어서 물 길러 오지 않아도 되도록 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 여인의 과거를 예수님이 다 말씀하시자 그 여인이 선지자인줄 알고서 질문을 합니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은 예루살렘이라고 하는데 예배할 곳이 어디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오나나 곧 이때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은 신령한 분위기에서 정성을 다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죄 많은 한 여인을 만나 주시는 그 순간이 바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과 진리로 임하셔야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정성을 다하여 준비하여도 주님께서 영과 진리로 임하시지 않으시면 그것은 인간들의 정성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정성 바친 것으로 서로 경쟁하는 곳이라면 그곳은 예배가 아니라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는 우상의 제단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이 각각 제물을 드렸을 때에 그 제물을 받고 받지 않고는 하나님의 선택에 달린 것입니다. 죄인의 제물을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하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제물이 받아들여진 아벨은 받아들여지지 아니한 가인에 의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예배에 성공하면 인생에 성공한다고 하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습니까? 그런데 아벨은 예배에 성공하니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말과 생각과 뜻이 단 한번도 죄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여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으나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요1 3:5). 그 예수님의 완벽한 예배의 결과는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온전한 제물이 되셔서 자기 백성을 용납하시는 예배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배란 이 예수님의 영과 진리가 임하는 현장이 예배의 현장인 것입니다. 그러면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현장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자신의 공든 탑이 무너지는 현장입니다. 자신의 욕망이 다 들추어지는 현장입니다. 그 여인이 우물가에 나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물 길러 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 물동이도 잊어버리고 동네로 달려가서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합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이란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영과 진리의 주님을 만나고 나니 자신의 부끄러움을 동네 사람들에게 다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와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영과 진리로 예배하게 되면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배란 나의 자존심을 세우는 장소가 아닙니다. 고상 떠는 곳이 아닙니다. 정성 바쳐서 복 받자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영이 임하시면 자신의 죄가 드러나고 회개하고 감사하는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기존의 모든 것들이 다 무너지는 현장이 됩니다.
이러한 예배가 이루어지기 위하여 그 예배의 준비자로 세례요한이 온 것입니다. 3:1-3절을 봅니다. 정치적으로는 디베료가 로마의 황제요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이며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에 두 살 이하의 아이를 죽이라고 한 헤롯의 아들 헤롯 안티파스가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있던 때입니다. 그리고 종교적으로는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 제사장으로 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임하는데 빈 들입니다. 왜 빈들입니까? 성전과 율법과 제사장이 있는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고 빈들에 있는 요한에게 임하는 것입니까? 요한은 제사장의 아들이기에 예루살렘 성전 주변에 있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빈들에 나와서 살았습니다. 광야에서 살면서 옷은 낙타 털옷을 입고 먹는 것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이런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것은 기존의 정치나 종교를 전혀 인정하지 아니하겠다는 것입니다.
빈들에서 새롭게 시작하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빠져 나와서 광야를 지나는 것처럼 새롭게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기존의 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율법지킴과 종교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모든 것을 깡그리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빈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고 요단강 부근 각처에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도 이미 구약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되는 것입니다.
3:4-6절입니다. 이사야 40:3절 이하의 말씀의 성취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구원을 말하면서 먼저 선포한 내용을 세례요한 지금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예언의 때가 지금이라는 것입니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서 그 길을 예비하는 자의 소리입니다.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게 되며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지금 이 길을 준비하는데 그것은 바로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율법이 있고 성전이 있고 제사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 성전에서 제사가 드려지고 있습니다.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자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향하여 세례요한은 무엇이라고 외치는 것입니까? 7-8절입니다. 세례 받으려고 나오는 무리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합니다. 회개하려고 나오는 무리들 중에 특히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거침없이 퍼붓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참으로 율법에 열심이 있고 성전제사에 충실한 사람들인데 이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고 하더냐는 것입니다. 지금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여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세상 온 천지가 하나님의 원수인 것입니다. 가장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예루살렘의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다 독사의 자식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안심하지만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완전히 둘러 엎어버리는 것입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는 것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아니하면 찍어서 불에 던진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찔림을 받은 자들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습니다.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서 어떻게 하여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정한 세 외에는 더 받지 말라고 합니다. 군인들은 받은 월급으로 만족하라고 합니다. 지금 이런 회개는 무엇을 위한 회개입니까? 죄 사함을 얻게 하기 위한 준비일 뿐입니다. 이런 일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의 회개로만 머문다면 윤리도덕적인 선에서 머무르게 됩니다. 세례요한의 외침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외친 내용이지 이것 자체가 죄 사함을 얻는 회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이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다고 그 분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9:1-7절을 봅니다. “봉독” 세례요한의 세례도 그 영향력이 대단하였습니다. 파급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이 증거 한 것은 예수님을 믿으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단지 윤리나 도덕적으로 착하고 바르게 사는 운동이 아니라 우리의 근본을 뿌리 채 뽑아버리는 것입니다. 빈들이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공적이라고 쌓아왔던 모든 것들이 다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2절 말씀입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예레미야서에서 불이요 몽둥이라고 합니다. 다 태우고 다 부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가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지 무슨 공든 탑을 쌓아 가는지! 그 모든 자기 의들이 다 무너지고 벌거벗겨져야 합니다. 빈들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왜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는지 알 것입니다.
누가복음 3:15-38 좋은 소식 2006. 12. 17
15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16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17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18 ○또 기타 여러 가지로 권하여 백성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으나 19 분봉 왕 헤롯은 그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과 또 그의 행한 모든 악한 일을 인하여 요한에게 책망을 받고 20 이 위에 한 가지 악을 더하여 요한을 옥에 가두니라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쌔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 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38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제가 어릴 때에 부고(訃告)를 전하는 사람이 저희 집에 왔을 때에 저희 어머니께서 마실 것이라도 대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전화도 없었고 우편으로는 늦으니 사람이 직접 부고를 전하였습니다. 집안의 사람이지만 부고는 슬픈 소식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고한다고 대접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18절을 보시면 세례요한이 백성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였는데 세례요한은 감옥에 갇히고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좋은 소식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소식이기에 어떤 사람은 좋은 소식이라고 하는데 어떤 사람은 죽일 정도로 싫은 소식이 되는 것입니까?
고린도후서 2:14-1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바울사도와 복음 전하는 자들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하나님께서 나타내신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사람들에게 좋게 하여서 향기가 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향기가 이상한 향기입니다. 구원 얻는 자들에게는 생명의 냄새이지만 망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의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보았던 세례요한의 증거가 어떠하였습니까? 기존의 모든 것을 다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정치도 종교도 다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빈들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것입니다. 빈들에서 다시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그 외침은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성전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자들에게 거침없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외친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는데 찍혀서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세례요한의 외침은 그 당시의 통치자를 향하여서도 거침없이 날아갑니다. 유대의 왕인 헤롯이 그의 동생의 아내를 빼앗아 자기 아내를 삼았습니다. 이 일을 세례요한이 책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감옥에 갇힙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시면 세례요한의 죽음이 나옵니다. 헤롯의 생일날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가 춤을 추자 헤롯이 기뻐하며 무엇이나 원하는 대로 주겠다고 합니다. 그 딸이 그 어미의 지시를 받아서 세례요한의 목을 달라고 합니다. 헤롯이 근심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한 말이 있으니 번복할 수가 없어서 그렇게 하라고 하여 목이 잘려 소반에 담겨져 오는 것입니다. 좋은 소식을 전한 자의 모습이 이런 모습입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이 그리스도인가 하였습니다. 15절을 봅니다.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린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기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그 어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담대하게 외치니 저분이 그리스도가 아닌가 생각하고서 그를 따르는 많은 제자들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다고 예언되어 있는데 세례요한은 레위지파입니다.
그러함에도 백성들이 세례요한이 그리스도인가 하면서 기대한 것은 자신들의 삶이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우리를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만 하여 준다면 믿고 따르겠다는 것이 백성들이 마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 나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병고쳐주심과 떡을 먹고 배부르게 하여주신 것을 보고서 임금 삼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세례요한이 메시아적인 기적과 능력만 행한다면 따라나설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의 증거를 봅니다. 16-17절입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분이신데 어느 정도인가 하면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담당할 노예의 입장도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간다고 말하자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자신은 쇠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예수님의 신들메 감당할 만한 사람도 되지 못한다고 합니다.
왜 자신이 신들메도 감당할 사람이 못되는가 하면 자기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고 합니다.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는 말씀을 가지고 어떤 사람들은 불같은 성령이라고 하면서 같이 봅니다. 그러나 저는 성령과 불을 다르게 봅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타작마당의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지만 쭉정이는 모아서 불에 태우시는 것입니다. 즉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일을 주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는 구원이고 불의 세례는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의 외침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입니다. 지금 타작하기 위하여 오신다는 것입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서 불에 던져진다는 말씀이 지금 메시아가 오셔서 구원할 자를 구원하시고 심판할 자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다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메시아만 오시면 구원과 심판이 동시에 일어날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것입니다.
21-23절입니다. 백성들이 세례요한의 외침을 듣고 세례를 받는 중에 예수님이 세례를 받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이 부분을 보면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당신이 나에게 세례를 받느냐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렇게 하는 것이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세례요한의 세례를 죄인들이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이기에 죄인들이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 세례의 결국은 예수님을 믿어야 제대로 된 세례입니다.
그런데 죄가 하나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그런 세례를 왜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기 백성과 연합하기 위한 것입니다. 세례란 연합의 뜻입니다. 함께 묶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죄가 없으신 분이 죄 아래 율법아래 오신 것은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길입니다. 드디어 물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이 열립니다. 성령이 비둘기 형체로 예수님위에 강림하십니다. 동시에 하늘로서 소리가 들리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한다는 하늘의 소리가 들린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증거 하는 하늘의 징표들입니다. 닫힌 하늘이 예수님 때문에 열린 것입니다. 이미 성령으로 잉태하신 분에게 성령이 임한 것을 가시적으로 보이신 것은 장차 성령으로 세례주실 분이시며 이분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구약성경 두 곳을 보고자 합니다. 시편 2편은 세상의 왕들과 관원들이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을 받은 자에게서 끊어내고자 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시는 분이 그들을 향하여 비웃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7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이 아들이 왕이시며 철장 권세로 만국을 다스리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에게 입 맞추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급하시는 말씀입니다.
또 한곳은 이사야 42:1절입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여기서 하나님 마음에 기뻐하는 하나님의 택한 자를 종이라고 합니다. 이어지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보면 이 종이 바로 고난 받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아들이며 내 기뻐하는 자라는 그 예언이 물로 세례를 받는 순간에 하늘에서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성령으로 잉태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이런 외적인 증거들이 나타나는 것입니까? 이제 그 공생애를 시작할 때에 서른 즈음이라고 합니다. 23-38절을 봅니다. 성경에서 공식적인 활동의 나이가 서른입니다. 그 예수님의 족보를 사람들이 아는 대로 조사하여 위로 소급하여 올라가는데 아담까지 이릅니다. 물론 아담 이상은 하나님으로 연결이 됩니다. 처음 사람 아담에서 이제 마지막 아담 예수님에게 까지 이르는 족보를 말하면서 예수님의 공식적인 사역을 선포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기뻐하시는 분으로서 왕의 역할과 고난 받는 주의 종의 일들을 다 감당하십니다. 그리고 구원할 자를 구원하시고 심판하실 자를 심판하시는데 구원받을 자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완성을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지 아니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엘서 2:28-32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시는 것과 심판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이 이런 구약의 예언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취된 것으로 보고 담대하게 외친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물로 세례를 줄때에 이런 지시를 받습니다. 요한복음 1:29-33절입니다. “봉독” 예수님을 드러내는 일을 하는데 성령이 누구에게든지 내려 머무는 자가 성령으로 세례 줄자임을 알라고 하여서 그대로 전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 줄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이 전한 좋은 소식입니다.
성령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감옥에 갇혀 죽어도 좋은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아니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신으로 된다고 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여야만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7-11절 말씀을 보시면 성령이 아니고서는 죄와 의와 심판의 의미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시게 되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임을 알고, 예수님만이 의가되심을 알고, 세상의 임금이 심판을 받은 것을 알기에 세상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령이 오셨다는 것이 좋은 소식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성령이 임하셨다면 이 소식은 정말 기쁜 소식이 됩니다. 성령이 임하셔서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알게 하십니다. 자신의 모든 공적들을 무너뜨려 주십니다. 그것이 오히려 감사가 됩니다. 나의 의는 누더기임을 알고 주님 주신 의만 사모하게 됩니다. 세상이 이미 심판 받았음을 알고 주님을 바라봅니다. 성령으로 세례 주실 분이 오셨다는 것, 이제 그 분이 직접 성령을 보내신다는 것이 좋은 소식입니다.
누가복음 4:1-13 유혹 2006. 12. 23
1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강에서 돌아 오사 광야에서 사십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2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3 마귀가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하기를 ㄱ)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5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올라가서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6 가로되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7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8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하기를 ㄴ)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9 또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 내리라 10 기록하였으되 ㄷ)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하였고 11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말씀하기를 ㄹ)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13 마귀가 모든 시험을 다 한 후에 얼마 동안 떠나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사십일 동안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셨습니다. 성령에 이끌려 가셨는데도 마귀는 시험한 것입니다. 마귀가 시험하는 것은 유혹입니다. 헬라어 성경에서 시험과 유혹을 같은 말로 사용하고 우리 한글성경도 같은 말로 사용합니다만 그러나 시험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훈련하고 연단하기 위한 시험이 있고 하는 유혹하기 위한 시험인 것입니다.
야고보서 1:13-15절입니다. “13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여기서 시험이란 유혹입니다. 하나님이 유혹하시거나 유혹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이 유혹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서 그런 것입니다. 그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 것입니다.
오늘 이런 말씀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의 현실에서 접근해보고자 합니다. 무안의 화평교회 사모님이 '십자가 마을'에 글을 올린 것을 보았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사회책에 인간의 욕망이 무한다는 내용이 있다는 것을 보고 저도 딸의 사회책을 보았습니다. 그 내용은 어떤 가정이 돈을 많이 들여 이사를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사를 하고 나니 집은 새 집인데 이 아이의 가구가 헌 가구인 것입니다. 그래서 떼를 써서 침대를 구입하였는데 침대를 사고 나니 책상도 새로 사고 싶고 컴퓨터도 언니와 함께 사용하는데 불편하니 따로 구입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하는 이유가 욕망은 무한한대 자원이 한정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소득은 그만큼 되지 않으니 합리적인 경제생활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만 되어도 자신의 욕망이 무한하다는 것을 아는 세상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러합니다. 끊임없는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을 추구하라고 광고라는 이름으로 불을 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아파트 광고를 보면서 화를 내시던데 왜 그런가 하니 좋은 아파트만 들어가면 행복이 거저 주어지는 양 선전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보험회사는 보험만 들면 행복이 다 보장되는 것으로 광고합니다. 그러니 사람의 마음에서 행복하고자 하는 욕구, 안전하고자 욕구들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 인간을 유혹한 내용을 살펴봅니다. 창세기에서 뱀이 하와를 유혹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허용하셨지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따 먹지 말게 하셨습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뱀이 하와를 교묘하게 유혹한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으면 죽는 것이 아니라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되기 때문에 따 먹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유혹을 받고서 선악과를 보니 어떻게 보입니까?
창세기 3:6절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사망에 이르게 할 선악과의 모습이 어떤 모습입니까? 흉측한 것이 아닙니다. 구역질나게 생긴 것이 아닙니다. 침이 꼴깍 넘어갈 만큼 먹음직합니다. 먹음직하려면 보기에도 좋아야 합니다. 그러니 보암직도 하고 그것만 먹으면 지혜로울 것같이 탐스러운 것입니다.
어느 누가 안 따먹고 배길 인간이 있겠습니까? 그 유혹을 받아 하와가 먹고 아담에게 주니 아담도 먹었습니다. 책임은 아담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 때로부터 인간은 사망아래 갇히게 된 것입니다. 사망아래 갇힌 증거가 무엇이냐 하면 인간이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지만 그 선악의 기준은 인간 자신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면 선, 손해가 되면 악으로 보는 것입니다.
또한 선악과 이후의 인간은 스스로 선을 쌓아서 영생에 이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살아서 악한 짓을 많이 하면 죽어서 나쁜 곳에 가고 살아서 선한 일을 많이 하면 죽어서 좋은 곳에 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문화마다 다른 용어를 사용한다고 하여도 이미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에게는 모두가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의 성경해석도 의의 기준을 율법을 못 지킨 것보다 지킨 것이 많으면 의롭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어떤 신이 좋은 신입니까? 자기를 이롭게 하는 신이 좋은 신입니다. 어떤 나라가 좋은 나라입니까? 어떤 가정이? 어떤 교회가? 모든 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나를 살리면 선한 것이고 나를 죽이면 악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좋은 분입니까? 악한 분입니까?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의 눈에는 예수님을 죽여야 할 정도로 악한 분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인간들은 끊임없이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이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하는 것에 목숨을 걸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15-17절입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창세기의 유혹과 같은 유혹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이 먹음직한 것이 육신의 정욕입니다. 보암직한 것이 안목의 정욕입니다.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이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입니다(약3:15).
오늘 저와 여러분이 사는 현실이 이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침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난 주 주보 칼럼을 보셨습니까? 자기의 집을 세우고 싶은 것입니다. 자기의 성을 세우고 싶은 것입니다. 자기의 교회를 세우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곳에서는 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완전한 잠은 죽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날마다 죽이기 위하여 십자가를 들고 오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은혜로 받게 된 자는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런 은혜가 어떻게 주어지는 것입니까?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하는 그런 고백이 나올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유혹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이기실 뿐만 아니라 그 이기신 효력을 오늘도 자기 백성에게 적용시키고 계시기에 바울과 같은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유혹을 이기신 모습을 봅니다.
제일먼저 당한 유혹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을 아무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주리신 것입니다. 이때 마귀가 유혹하기를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것입니다. 이 유혹은 오늘 우리에게도 날마다 오는 유혹입니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줘 봐! 서울의 어느 교회는 실제로 억만장자 되기 세미나를 열고 있습니다. 오늘도 이런 유혹들은 지천에 늘린 것입니다.
여기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주릴 때에 어떻게 하였습니까? 홍해를 건넌 것을 바울사도는 세례를 받은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고전10:2). 그런데 홍해 건너고 3일 만에 물 없다고 원망하고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 다 떨어지자 양식 없다고 원망한 자들입니다. 약속의 땅을 40일간 정탐하고 와서는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40일을 1년으로 환산하여 40년을 광야에서 다 죽이신 것입니다. 광야에서 행한 일이라고는 원망과 불평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들어간 사람은 갈렙과 여호수아뿐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로 나가셔서 40일간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는데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유혹에 광야에서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이 그대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 자신의 말씀인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신명기 8:3절의 말씀으로 물리치십니다.
두 번째 유혹은 세상의 영광을 보여주면서 자기에게 절하면 세상의 영광을 준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하늘에서 쫓겨나서 이 지상과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되었지만 그것이 원래 자기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자기의 것 인양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유혹을 받은 예수님이 주 너희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는 신명기 6:3절의 말씀으로 이기십니다. 오늘 우리가 이런 성경 말씀을 외운다고 해서 마귀를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외우신 것이 아니라 그 말씀하신 바를 친히 이루어내시는 현장입니다.
세 번째 유혹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마귀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유혹합니다. 시편 91:11,12절의 말씀을 가지고 천사들이 너를 받으러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할 것이라는 말씀으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을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이단들이 다 어디서 이단의 이론을 세우는 것입니까? 성경말씀으로 이론을 세웁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해서 다 믿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시자 마귀가 얼마동안 떠납니다.
얼마동안 떠났다는 것은 계속하여 유혹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중에 마귀의 시험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처음 이 세상에 오셨을 때에는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베들레헴의 어린아이 까지 학살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십자가로 향하여 가실 때에는 십자가에 죽지 않도록 막으려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십자가 길을 가로막고 나설 때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일이란 십자가 없이 영광을 받는 것입니다. 마지막 유혹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조롱을 합니다. 네가 남은 구원하면서 자기는 구원하지 못하는가 하며 조롱합니다. 지금이라도 내려만 오면 믿어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로 가시는 길은 주님이 원하시고 또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가시는 길이기에 십자가로 가셔서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이라는 소설이 영화로 만들어져 우리나라에 상영이 되느니 마느니 논란이 많았습니다. 저는 20여 년 전에 그 소설을 보았는데 저는 감명 깊게 받았습니다. 왜 최후의 유혹이냐 하면 십자가상에서 잠시 졸도합니다. 물론 소설이야기입니다. 잠시 졸도할 그때 예수님이 마리아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노년이 되어 쓸쓸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그런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소설적 상상인데 이 유혹을 이기고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으로 그 소설이 끝이 납니다. 그래서 제목이 최후의 유혹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 소설과 영화를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반대한다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부실하다는 증거 밖에 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으로 이끌고 계심을 믿지 못한 발상이라고 봅니다. 며칠 전에는 사학법을 개정하라고 교계의 어른이라고 하는 목사 20여명이 삭발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댓 글을 단 사람이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개종을 하려고 하는가 보다며 비아냥 거렸습니다.
무엇이 유혹입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세상의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이 세상의 자랑이 될 것들을 준다는 것이 유혹입니다. 우리가 이런 것을 교회에서 추구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유혹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힘으로 그것을 알고 물리칠 능력이 있습니까? 결단코 없습니다. 사람이 배고프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먹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먹음직 한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보암직한 유혹이 또 따라 붙는 것입니다. 전에는 배만 채웠으면 되는데 지금은 음식이 보암직할 뿐만 아니라 음식점의 분위기와 서빙하는 사람들조차 용모단정 하여야하는 것입니다. 지금 중국의 북경에 한국 사람들이 가서 식당 하는 사람이 많은데 중국의 부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실내장식 비용만 25억을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돈 25억이 중국에서 얼마나 큽니까? 그런데도 중국에 자본주의가 들어가고 먹고 살만하게 되니 그렇게 해도 손님들이 많이 온다는 것입니다. 먹고 배부르면 보암직한 것을 찾는 것을 가지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보암직한 것만이 아니라 초월적인 신성한 영역에까지 이르고 싶은 것입니다. 결국 신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최초의 유혹이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유혹은 오늘날 경제가 발달하고 먹고 살만큼 되자 더욱 스스로들 신이 되고자 영원한 영광을 꿈꾸는 이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방법은 십자가를 들고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 나랑 함께 죽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선뜻 함께 죽기 위하여 예수님의 험한 십자가를 붙들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모든 유혹을 물리치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셔서 그 승리의 능력을 오늘 성도들에게 부어주셔서 믿게 하시고 주님 오시는 그날에 영광스럽게 변화할 그 내용까지도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말씀 속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가 세상에서 애써서 살고자 하는 것이 죄 임을 알고 그런 자기를 부인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붙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맛보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4:14-30 은혜의 해 2006. 12. 31
14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15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18 ㅁ)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1)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지난주에 예수님이 시험을 받고 물리친 것을 보았습니다. 마귀의 시험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과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나타나는데 아담과 하와가 최초의 유혹을 받은 장면과 동일한 시험입니다.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입니다. 어느 인생도 이 유혹을 받지 않는 인생이 없고 이 유혹을 이길 인생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러한 인생들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삶의 목표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욕심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이세상의 자랑이 될만한 것들을 얼마나 많이 확보하느냐의 싸움이 이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행복하려고 열심히 달려가지만 마치 목마른 자가 바닷물을 마시듯이 아무리 추구하여도 그 안에 참된 만족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성경은 죄와 사망의 종이라고 합니다.
이런 인생의 특징은 안식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휴가도 얻고 쉬기도 하지만 그러나 더 열심히 일하기 위하여 쉴 뿐이지 참된 쉼이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휴가 중에도 휴가마치고 무슨 사업을 어떻게 할까하는 것을 구상하는 것입니다. 대통령도 신년휴가를 가지만 그곳에서 무엇을 합니까? 새해 국정을 구상하는 것입니다. 목사들도 연말에 세미나에 참여하여 어떻게 하면 새해에 목회성공을 할까하는 구상을 합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한 민족을 택하십니다. 그들에게 독특한 법을 주시는데 안식의 법입니다. 사람이 6일은 열심히 일하지만 7일째는 쉬라고 하셨습니다. 왜 안식일에 쉬라고 하셨는가 하면 출애굽기 20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만드시기를 다하시매 7일째 안식하였기에 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신명기 5장의 십계명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받아 나왔기에 안식하라고 합니다.
이렇게 안식일을 쉬라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거저 받는 다는 것을 쉼을 통하여 인식시키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범죄 한 인생이 안식일을 지켜도 참된 쉼이 없기에 구원받아야 참된 쉼이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이 안식일은 장차 참된 안식을 주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요 예표인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이스라엘은 안식년과 희년이 있습니다.
안식년은 매 7년째 땅을 쉬게 하는 것입니다. 희년은 안식년 곱하기 7년을 하면 49년이 됩니다. 49년 다음해가 희년입니다. 희년이 되면 전국적으로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 나팔은 7월10일이 대 속죄일에 붑니다. 희년의 선포를 대 속죄일에 행하는 것입니다. 전국에 나팔을 불면서 자유를 선포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 동안 살다가 빚 때문에 자기 기업을 떠났던 사람이 자기 기업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땅을 팔았던 사람은 다시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됩니다. 물론 땅을 영구히 팔지 못하기에 경작권만 팝니다. 희년이 되기 전에도 형편만 되면 땅을 되물을 수 있지만 그러나 한번 빚진 사람이 회복하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럴지라도 희년이 되면 자기 땅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남의 집에 종으로 팔렸던 자들도 다 자기 가족에게로 돌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쁜 날입니까? 빚에 팔려서 종으로 있다가 아무런 조건 없이 희년을 선포함으로 자유가 주어지는 꿈과 같은 날이 희년인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나라에 수많은 신용불량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 신용불량자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정말 열심히 일하여 몇 년 만에 회복되었다고 하는 소식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람의 기쁨도 말할 수 없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희년은 그와 비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희년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과연 시행된 적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기록에서는 단 한번도 희년이 지켜졌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희년은커녕 안식년도 한번도 제대로 지켰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얼마나 안식년을 지키지 않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70년을 포로생활 할 때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6:21절입니다.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 스스로 안식년을 지키지 않았으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셔서 땅이 안식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져야 하기에 그렇게 조치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안식일은 어떻습니까? 물론 안식일은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안식일을 지켜도 안식년을 지키지 못하고 희년을 지키지 못하면 참된 안식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년을 지키지 못하고 희년을 지키지 못하였을까요? 그들의 탐심 때문입니다. 자기 땅을 일년간 놀게 하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약속하시기를 안식년을 지키면 6년째에 삼년 먹을 양식을 주신다고 하셨지만 그들은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희년이 되면 아무런 조건 없이 다 돌려주어야 하는데 빚을 지고 온 사람을 희년이 되었다고 그냥 탕감하여 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땅을 사거나 팔게 하지 못하도록 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이사야 5장에 보시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포도원으로 심어서 극상품 포도를 심었는데 맺힌 것은 들 포도를 맺혔다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는데 도리어 포학이며 의로움을 바라셨는데 도리어 부르짖음이 가득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틈이 없게 하고 이 땅에서 홀로 거하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58장에 보시면, 금식하면서 말하기를 하나님이 금식하여도 왜 응답하여 주지 않느냐고 합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너희가 금식하면서 오락을 찾아 얻고 온갖 일을 시키고 다투고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친다고 합니다. 금식의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머리를 갈대같이 숙이고 굵은 베를 입고 재를 펴는 것이 어찌 하나님께 열납될 금식이 되겠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려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입히며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금식을 왜 할 수가 없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들의 욕심 때문입니다. 이것이 욕망에 사로잡혀있는 인간의 실상입니다. 아무리 법을 주어도 지킬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이 가입함으로 그들의 죄가 더욱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예언자들이 나타납니다. 예언자들이 나타난 것은 율법의 한계를 보고서 새로운 성취를 내다보면서 예언한 것입니다.
이사야 61:1-3절입니다. “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1)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이 구약의 이사야 61장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가 자라나신 나사렛의 회당에서 읽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회당에서 성경을 읽은 것에 대하여 조금 설명이 필요합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부터 회당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유대인 성인남자 열명이면 회당을 만들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 회당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서도 곳곳에 자리 잡게 된 것입니다. 이런 회당에서 안식일마다 모임을 가지는데 회당장이 랍비들을 초정하여 성경을 읽게도 하고 해석도 하게 합니다.
마침 예수님이 갈릴리 지역에서 전도하시고 그 소문이 나사렛에도 들린 것입니다. 갈릴리는 나사렛에서 이사야 성경을 예수님이 내신 것이 아니라 회당장이 내어서 드리는 것입니다. 두루마리로 기록되어 있으니 이 말씀을 찾아서 읽으신 것입니다.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리고서 어디까지 읽으시는가 하면 이사야 61:2절 중간까지만 읽으시고는 이 말씀이 오늘 너희에게 응하였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61:2절 은혜의 해 다음은 신원의 날입니다. 신원의 날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신원은 원수 갚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이루어질 일이기에 은혜의 해만 지금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선지자들의 예언을 믿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다고 하신 것은 이 놀라운 은혜의 해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우리나라가 일제 36년의 압제 속에 있다가 해방될 때에 얼마나 기뻐하였습니까? 그 소식을 듣는 사람들마다 만세를 불렀습니다. 물론 친일파는 큰일 났다고 하였겠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그렇게 기다렸는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읽으시고 오늘날 너희에게 응하였다고 하시자 사람들은 의아해 합니다. 아니 너는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들보다 먼저 말씀하시기를 ‘의원아 너를 고치라’는 속담을 이용하십니다. 의사가 자기를 고치지 못하면 능력이 없는 의사인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자기 동네의 평범한 목수의 아들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문이 나기를 다른 동네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였는데 여기서도 기적을 베풀어보라고 하는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일이 없다고 하십니다.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엘리야 시대 때에 삼년 육 개월의 가뭄이 있었을 때에 이스라엘의 수많은 과부들이 있었지만 시돈 땅의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엘리야 선지자가 찾아간 것과 엘리사 시대 때에 이스라엘에 수많은 문둥이가 있었지만 수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함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은혜를 받지 못하였는데 이방인이 은혜를 받았다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나사렛 사람들이 다들 분이 가득하여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낭떠러지에 떠 밀어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아직 주님의 때가 되지 않았기에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길이 안식일에 걷는 한계가 지났기에 예수님은 지나쳐 가시고 사람들은 더 이상 따라가지 못하였다고도 합니다. 그러면 자기들의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그 걸음마저 제한한 사람들이 참된 안식일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을 왜 죽이려고 하였을까요?
여기서 두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메시아가 와서 은혜의 해를 선포하고 참된 해방을 시키려고 하면 어떤 일을 예수님이 하셔야 된다고 생각하였겠습니까? 희년이 되면 나팔소리와 함께 자유가 선포되고 모든 종 되었던 자들이 자유를 얻고 빚으로 팔린 자들이 가족에게 돌아가고 팔렸던 땅들이 돌아오는 참으로 기쁜 날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4:18절을 봅니다. 주의 성령이 임하셔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는 은혜의 해를 전파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로마의 세력은 여전히 든든히 기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킬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이 돌아오고 참된 자유가 주어져야 하는데 그런 조짐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요한도 감옥에서 예수님의 행하시는 소문을 듣고서는 자기의 제자들을 보내어서 오실 그분이 당신이 맞습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까? 하면서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4-6절입니다. “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오늘 말씀과 같은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으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땅에서 수많은 교회에서 예수를 믿으면, 그것도 잘 믿으면, 잘 믿는다는 것은 주일성수와 십일조가 기준입니다. 그렇게만 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부자가 되게 하신다는 것을 설교만 틀면 나오는 내용입니다. 지난 토요일에도 부산에서 제일 크다는 교회에서 나오는 설교가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동방박사 이야기를 하면서 예배를 잘 드리면 세상에서 선진국이 되고 부자 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방박사들이 빈손으로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부자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아직도 소경입니다. 아직도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이생의 자랑이 될만한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하나라도 제공하였다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병이어어의 기적만 베풀어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신 것은 세상의 영광이 아닙니다. 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빼내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기분이 좋습니까? 나쁩니까? 더 기분이 나쁜 것은 그런 은혜라도 좋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런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받을 자격도 없다고 여긴 이방인들에게 주신다는 것이 더욱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낭떠러지에 밀쳐서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은혜와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은혜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원하는 은혜란 내가 편하고 잘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은혜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을 은혜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은혜의 해를 바르게 알고 우리 안에 그대로 받아들여져서 시므온처럼 고백하는 은혜의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므온의 고백이 무엇이었습니까? 주여 이제야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군요! 이러한 은혜의 해를 날마다 순간마다 맛보는 2007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누가복음 4:31-44 전도하시더라! 2007. 1. 7
31 ○갈릴리 가버나움 동네에 내려오사 안식일에 가르치시매 32 저희가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말씀이 권세가 있음이러라 33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34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35 예수께서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36 다 놀라 서로 말하여 가로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세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37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38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에 붙들린지라 사람이 저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40 ○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41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줄 앎이러라 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44 2)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습니까? 성탄의 의미도 모르고 떠들썩하던 연말의 분위기는 벌써 사라졌습니다. 새해 새 희망이라고 말하였지만 벌써 7일입니다. 달라진 것이 있나요? 참으로 해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씀이 실감이 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날마다 일탈을 꿈꾸면서 새로운 재미를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아무리 새것이라고 하여도 한두 번만 맛보고 나면 식상해져서 또다시 미친 듯이 새것을 찾아 나섭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새로운 것이 유일하게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새것이 있습니다. 옛 하늘과 옛 땅은 죄로 더러워졌기에 불살라 없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새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의 43절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예수님의 오신 목적이며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전도하신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시는 것이 예수님이 오신 일입니다. 이 일은 이미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의 첫 설교는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61장의 말씀을 읽으시고 이것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 내용은 지난주에 본대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의 해를 선포하셨고 응하였다고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은 예수님을 낭떠러지에 밀쳐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은혜의 해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는데 왜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들이 원하는 은혜는 세상의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세상의 영광과 자랑이 될만한 땅의 것을 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은혜란 오직 선민이라는 자기들만의 혜택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수님을 자기 동네사람이라고 믿지 아니하는 그들을 향하여 엘리야 시대 때에 수많은 과부들이 있었지만 시돈 땅의 과부에게만 보내심을 받았다는 말씀과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 수많은 문둥이들이 있었지만 한사람도 고침을 받지 못하고 이방인 나아만 장군만 깨끗함을 받았다는 말씀에 그들은 분노하면서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왜 죽이려고 까지 한 것입니까? 자기들이 원하는 방식의 은혜가 아니기도 하고 또 이방인들이 은혜를 받았다는 것에 분노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평소에 스스로 상상하고 생각한 하나님이 다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란 적어도 이렇게 하여야 하나님답다는 생각을 하면서 살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상상과 전혀 다른 하나님이 소개된다면 사람들은 분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지난주 어느 방송설교를 들으니 엘리야 시대의 과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새해를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흉년이 든 해에 사렙다의 한 과부가 자기 아들과 함께 마지막 양식을 먹고 죽으려고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데 엘리야가 자기를 위하여 떡을 만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과부가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떡을 만들어 드리고서 흉년이 끝날 때 까지 그 가루 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아실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어떻게 적용을 하는가 하니 새해가 되어서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면 먼저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남은 양식인데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종자와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농부가 아무리 굶주려도 종자 씨를 먹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처럼 하나님께 먼저 드려야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제일 먼저 헌금을 중요하게 여겨서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복을 받은 사람들의 간증과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 저주를 받은 자들의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열심을 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동일한 엘리야 시대의 과부를 설교하셨는데 왜 사람들이 죽이려고 하였습니까? 지금 예를 든 설교는 바쳐서 복 받자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의 종교성이기에 사람들이 다 이해가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엘리야와 과부의 이야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선택받았다고 여기는 그들은 배척하시고 이방인이라고 여기는 자들에게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기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믿는다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의 먹음직하고 보임직하고 세상의 자랑과 영광이 될만한 것을 공급하여 주시는 분이십니까? 아니면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세상의 멸시와 천대와 배척을 받은 십자가를 지도록 하시는 분이십니까? 이것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연합니다. 어렵고 복잡하게 계산해서 알아보는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너무나 쉬운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우리 안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가득 들어있기에 어려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예수님은 십자가에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으로 알아볼 수 없도록 자신을 숨기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학적인 용어로 메시아 은닉이라는 주제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은혜의 해를 선포하러 오신 메시아시라면 자신을 드러내셔야 하시는데도 자신을 숨기시는 것입니다. 메시아가 해야 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치시고 하는 사역들을 수행하시면서도 자신을 숨기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병 고침을 받은 자들에게도, 제자들에게도, 귀신들에게도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알리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31-41절을 보시면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또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놀랍니다. 그 말씀이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왜 권세가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 자신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자가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회당에 다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들통이 난 것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이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우리를 멸하러 왔느냐고 합니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안다고 합니다. 귀신이 귀신같이 알아보는 것입니다. 귀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면서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하시니 그 사람을 넘어뜨리고서 귀신이 나갔습니다. 다 놀랍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와 능력에 놀라는 것입니다. 이 소문이 그 근처에 파다하게 퍼지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장모도 열병이 난 것을 예수님이 고쳐주십니다. 그러나 곧 일어난 저희에게 수종을 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의사가 아닙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그 말씀이 임하시니 귀신이 쫓겨나고 열병 앓던 자가 바로 일어나서 수종을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질녘에 각색 병든 자들을 데리고 오자 일일이 손을 얹어 고쳐주십니다. 그렇게 치유 중에 귀신들도 나가면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시자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면서 그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십니다.
왜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지금 그리스도로서 일하고 계시는데 왜 자신을 알리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도 귀신들이 떠나가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왜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심지어 변화산에서 영광의 모습으로 변화되신 사실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보았는데 그 사실을 알리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언제까지 알리지 못하게 하셨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기 까지는 알리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왜 자신을 그리스도임을 공개적으로 알리지 못하게 하셨을까요? 유대인들의 메시아사상이 잘못되어 있기에 알리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는 땅의 메시아입니다. 제자들도 별 다를 바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땅의 이야기를 하였고 예수님은 하늘의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공개적으로 알려지게 되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상의 임금 삼으려고 하기 때문에 숨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병자를 고쳐주시는 것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 고쳐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가버나움에서 병을 고쳐주시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42절입니다. 예수님은 새벽미명에 조용한 곳을 찾으셔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찾아다니다가 드디어 만나서는 예수님이 자기들에게서 떠나지 못하도록 만류하는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곳에서는 어떤 병자를 고치거나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병자를 고쳐주시니 예수님이 그곳에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8장에 보면 거라사 지역의 미친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군대귀신이 들려서 수많은 귀신이 그 사람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 사람을 고치시는데 그 귀신의 이름을 물으시자 군대라고 합니다. 쫓아내시니 그 귀신들이 돼지 때에게로 보내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돼지들이 바다로 뛰어들어 몰사하니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 마을에서 떠나달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머무르게 하고 떠나달라고 하는 기준이 어디에 있습니까?
나에게 이익인가 아닌가에 그 기준이 있는 것입니다. 어디서라도 나는 주님의 피조물이요 종이오니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하겠습니다. 주께서 가라고 하면 가고 오라고 하면 올 뿐입니다. 말씀만 하옵소서! 이렇게 고백하는 자들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들 가운데서 그런 자들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 그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나의 수하에도 종들이 있는데 내 말 한 마디로 움직입니다. 죽는 전쟁터에도 가는데 주님이 말씀만 하시면 저의 하인이 나을 줄 믿습니다. 저는 주님이 저에게 오심을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그저 말씀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이런 믿음을 만나 본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나 여러분의 믿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도 달면 삼키고 쓰면 뱉지 않습니까? 그러니 모든 교우관계도 그렇지 않습니까? 나에게 얼마나 이익이 되느냐로 인간관계를 맺고 사는 것입니다. 이러면서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종교적이지만 우리는 복음적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의 삶에 예수님이 삶의 우선적인 경우가 얼마나 됩니까? 내 일이 항상 우선이고 바쁘고 최고이지 주님을 위한다는 일에 얼마나 빨랐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요구에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쫒아 내어도 계셔야 할 곳은 계시는 것이고 붙들어도 가야할 때는 가시는 것입니다. 42-43절을 봅니다. 자기들에게서 떠나지 못하게 만류를 하는데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다른 동네에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신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병 고침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병 고쳐 주심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병 고침을 받아도 다시 죽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5:17-26절을 보시면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는데 병을 고쳐주시기 전에 먼저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참람한 말을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만이 죄를 사하는데 어떻게 일개 인간이 죄를 사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 중풍병자를 향하여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것과 네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쉽겠느냐고 물으십니다. 대답을 못하지요! 왜요? 둘 다 인간의 능력으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씀도 하시고 네 침상을 들고 가라고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예수님이 죄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 복음이란 예수님이 죄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병 고침을 받은 자들이 또다시 다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려주었던 과부의 아들도 다시 죽었고 나사로도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나 죄 사함을 입은 자들은 죽어도 다시 삽니다. 그들은 죽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부활과 생명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지금도 부르시면 살아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생명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어도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소식을 전하고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께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전도하시는 이것은 2천년 전에 전도하시고 멈추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전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말씀하시는 분이 이루어내신다는 화자의 결단이요 결심입니다.
그 말씀대로 성령이 임하셔서 오늘도 복음이 증거 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전도하시더라는 말씀이 어떤 모습으로 증거 되겠습니까? 미련하고 어리석은 방법으로 증거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의 말씀처럼 십자가의 도가 증거 되는데 십자가의 도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며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에게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세상의 영광과 자랑이 안 되는 모습으로 전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의 부르심을 보라고합니다. 세상에서 약하고 천하고 미련한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전하여지는 전도란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너무나 세련되고 멋있어서 고객 감동을 넘어 고객졸도를 시켜야한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세상의 사람들이 잘못된 메시아 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숨기시라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상들이 있기에 십자가라는 미련한 방법으로 전도하시기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의 능력과 지혜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전도하시더라는 그 말씀이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질문을 또 하시는데 여러분이 마음에 감동이 되시는 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두 가지만 말씀드립니다. 예수사회를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선교헌금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드디어 우리 목사님도 무엇을 하라고 하는군요! 그것을 하면 우리의 의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게 하면 율법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제가 미리 말씀드렸지요! 주의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면 그 믿음의 분량대로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주님의 전도에 참여되는 자는 나 같은 죄인에게 이런 일을 맡겨주시니 감사합니다. 역시 주님께서 전도하고 계시군요! 이 고백이 나올 것입니다.
누가복음 5:1-11 나를 떠나소서! 2007. 1. 14
1 무리가 옹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쌔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두 배가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띄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맟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리한즉 고기를 에운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를 손짓하여 와서 도와달라 하니 저희가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와 및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을 인하여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누가복음 4:4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 전도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는 것이 오늘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시면서 병을 고쳐주시고 여러 가지 기적을 보여주셨기에 사람들은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다녔습니다. 오늘은 게네사렛 호숫가입니다. 흔히 갈릴리 호수라고도 하고 넓다고 바다라고도 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만 전하신 것이 아니라 들판이나 강가나 어디서나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들기에 조금 거리를 띄우고자 배를 타신 것입니다.
호숫가에 두 배가 있었고 그 배에서 어부들이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밤새 작업을 하여도 한 마리도 못 잡았으니 더욱 피곤에 지쳐 그물을 손질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시몬에게 배를 잠시 뭍에서 띄우도록 하시자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리고 배 위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시몬이 대답하기를 우리가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물을 내리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이 고기가 잡힌 것입니다. 두 배에 가득 차서 배가 잠길 정도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불러서 고기를 담을 정도로 많이 잡힌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초점을 대부분 어디에 맞추는가 하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배를 빌려 주었다는 것과 말씀에 순종하여 고기를 많이 잡았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질을 하여도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여 피곤한 몸으로 그물을 씻고 있는데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배도 빌려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고기 잡는 전문가이지만 자기의 견해를 버리고 말씀에 순종하여 고기를 많이 잡은 것처럼 우리 인생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축복을 받자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좀 오래 다닌 사람은 거의 외울 정도의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막상 고기가 많이 잡혔을 때에 사람들은 두려워하였습니다. 특히 그 중심인물로 시몬이 등장하는데 그는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8절을 보시면 예수님 앞에 무릎을 굻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니 고기가 그렇게 많이 잡혔다면 만선의 기쁨을 노래하여야 할 텐데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합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의 해석이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예수님께 드려서 성공하고 복 받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왜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는 고백이 나오는가를 다시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이 본문을 보고 있습니까? 베드로가 배의 주인이고 예수님이 그 배를 빌리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인으로서 베드로의 배를 임의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3절을 봅니다. 남의 배에 올라가면서 올라가도 되는지를 묻지도 않으십니다. 그냥 배에 오르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 사건 이전에도 시몬은 예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38절에 보시면 시몬의 장모를 예수님이 고쳐주신 것입니다. 물론 시간의 전후로 볼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아직 본격적인 제자로 따라 나서지 않았는데 그저 배에 오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배를 육지에서 조금 띄라고 하시자 그대로 순종합니다.
이것은 주인으로서 당연하게 사용하시는 모습입니다. 베드로는 거부할 권한이 없는 것입니다. 정말 그러한지는 4절의 말씀을 봅니다. 말씀을 마치시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내가 순종을 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데 베드로는 순종함으로 축복을 받았다고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5절의 말씀을 베드로의 순종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순종을 본 받아서 우리도 순종하면 기적을 보게 된다고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정작 물고기가 많이 잡혔을 때에 환호성을 지르고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순종하였더니 놀라운 복을 받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주여 나를 떠나소서!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런 고백이 나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베드로가 순종할 수밖에 없는 권세로 임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먼저 예수님께 배를 빌려드리고 그물을 내리는 순종을 한 대가로 물고기를 많이 잡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7:46-50절을 봅니다. “46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바 49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50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함과 같으니라”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지어드릴 마음이 있었기에 하나님이 다윗을 축복하여 다윗이 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무엘하 7장에서 보시면 하나님께서 오히려 다윗을 위하여 영원한 집을 지어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해 달라는 그 마음은 은혜로 된 것이지 다윗의 실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과 지혜와 권능이 충만한 스데반 집사의 설교입니다. 은혜를 받아 처소를 준비하게 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으나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십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내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하나님께 바쳐서 그 결과를 복을 얻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종교인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주께 먼저 드려서 갚음을 받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도 한국교회에서 나오는 거의 대부분의 설교가 바쳐서 복 받자는 이야기입니다. 좀더 고상하게 말하여도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으니 은혜를 갚자는 식이 됩니다.
로마서 11:35-36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 먼저 주께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이 말씀에 비추어보면 베드로의 배가 예수님의 것입니다. 물고기도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예수님께 순종한 대가로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천지를 지으신 주인으로서 베드로를 사용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지금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자들의 공통점이 이런 두려움인 것입니다. 그 앞에서 물고기가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배도 보이지 않습니다. 부모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의 죄인 됨을 알기에 그 두려우신 분이 가까이 계신 것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도 그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서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게 된 사람이라면 그 앞에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는 주의 오심을 감당할 수가 없나이다. 이런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내가 무언가 조그마한 것 드려놓고서 그것도 원래 주님 것인데도 무어라고 합니까? 예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왜 내 기도와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습니까? 하면서 데모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철야 농성하는 것이며 단식투쟁하는 것과 다를 바가 뭐가 있습니까?
그러나 정말 주님을 만난 자들의 모습이 어떠하였습니까? 이미 마리아의 경우를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동정녀인 처녀의 몸을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이 버림을 받고 죽임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사용하시겠다는 말씀에 어떻게 응답합니까? 주의 계집종이오니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은혜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그렇다고 마리아가 세상에서 무슨 복을 받았습니까? 오히려 그 마음이 칼로 찔리는 고통을 받은 것입니다.
마가복음 11:1-6절을 봅니다. “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섰는 사람 중 어떤이들이 가로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의 이르신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주님이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런 상태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이 여러분 가까이 오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까? 우리는 자신이 죄인임이 드러나서 나를 떠나소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까이 오심으로 경제적인 손실이 날까봐서 나를 떠나소서! 라고 하시는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떠나라고 하여 떠날 분도 아니시고 거부한다고 해서 오시지 않으실 분도 아니십니다. 주님은 자기의 뜻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어 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주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셨다면 이제는 영원히 붙잡힌 신세가 된 것입니다. 도망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자유라고 합니다. 이것을 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8-11절을 봅니다. 기적을 보고서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고백하게 된 것이 베드로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주님께서 베드로의 배에 오르신 것이 얼마나 두렵고 영광스러운 사건입니까? 오늘 우리는 우리가 주인이 되어 있기에 다른 사람이 나의 영역에 들어오는 것을 싫어합니다. 심방을 해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심지어 친척이나 가족이라도 나의 고유영역에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모든 것이 다 나의 것이라고 오시는데 환영하시겠습니까?
도망가고 싶을 것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다고 떠나실 것 같으면 찾아오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어떻게 만드시는 것입니까? 이제는 사람을 취하리라고 합니다. 물고기를 낚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고 말고 할 것이 없습니다. 이제 말씀이 능력으로 임하여 그를 새롭게 창조하여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이 말씀의 능력이 오늘도 저와 여러분을 끌고 가실 것입니다. 그것이 복임을 알고 사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 5:12-26 죄 사함의 권세 2007. 1. 21
12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1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14 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ㄱ)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 하라 하셨더니 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 예수는 물러 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하더라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내리니 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 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지난 금요일 아침에 천안에서 허 집사님 가족이 온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손님이 오시면 식사를 어떻게 할까? 아이들도 올 텐데 어디에 갈만한가?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그런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다음 주에는 의성에서 심 목사님이 오신다고 합니다. 산골에 계시는 분이니 바닷가로 가볼까? 그런 생각들도 합니다. 여러분들도 손님이 오신다면 그렇게 준비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늘 믿는다고 하고, 주님이라고 부르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예수님이 2천년 전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그 모습대로 우리에게 오셔서 몇 시간 단독으로 만나주신다면 여러분은 예수님과 무엇을 함께 하고 싶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저의 집사람에게 물어보니 차를 한잔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저 자신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냥 아무 말 안 해도, 어디에 가고 무엇을 하고 하지 않아도 그냥 곁에만 계셔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문둥병자와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는 내용입니다. 그런 병 고침의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많이 몰려옵니다. 왜 그렇게 몰려 왔을까요? 15절 말씀에 보시면,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왔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둘 중에 무엇이 우선이었을까요? 하나를 택하라면 무엇 때문에 왔을까요? 아마도 병 나음을 얻고자 함이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옵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았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 이는 참으로 이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고 하면서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을 피하여 산으로 피하여 가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 다음날까지 기어이 예수님을 찾아내어 따라 왔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렇습니다. 너희가 나를 따라 온 것은 먹고 배불러서 따라 온 것이지 표적을 보고 따라 온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기적과 표적을 같은 말로도 쓸 수가 있지만 다르게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표적을 보고 따라 오지 않았다고 하시는 말씀은 예수님이 정말 보여주실 표적은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시는 십자가의 표적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신 것은 병 고침이나 빵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시는 것이며 그것을 먹고 마시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복음 그 자체가 예수님의 살과 피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실로 어렵다고 하면서 떠나가고 다시는 따라나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예수님이 병을 고쳐주시는 기적만 보고 믿고 나선다면 언젠가 돌아설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만 전하시지 왜 병을 고쳐주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의 성취를 위한 것입니다. 이미 누가복음 4장에서 보았습니다만 소경이 눈을 뜨며 앉은뱅이가 일어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증거 된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말씀의 성취를 이루시는 분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4-6절입니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의 질고를 지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의 질병과 고통을 지셨다는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이며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입니다. 결국 자기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를 병자를 치유하심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 궁극적인 목적은 단지 육신의 병이 고쳐지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병 고침을 받아도 죽었고, 누가복음 17장에서는 열명의 문둥병자가 다 고침을 받았지만 예수님께 돌아와 구원받은 자는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무엇을 위하여 병을 고쳐 주셨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5:12-14절입니다. 온 몸에 문둥병이 든 사람이 예수님께 엎드려 구합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이 간구를 들으신 예수님께서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시면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시니 곧 깨끗하여 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고 제사장에게 가서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리고 네 깨끗한 증거를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문둥병자의 간구의 자세를 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면 자기를 깨끗하게 하여 주실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원하시지 않으시면 자신은 평생 문둥병자로 살다가 몸이 문드러져 죽어도 마땅하다는 자세입니다. 문둥병이 좀 불편한 정도의 질병이 아닌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지난여름에 중고등부 학생들이 여수 애양원을 다녀왔습니다. 다녀와서 사진을 교회 행사갤러리에 올렸는데 보셨을 것입니다. 몇 장의 사진만 올렸는데 얼마나 끔찍한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문둥병자는 더 비참합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하면 병이 든 것은 죄로 인하여 병든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 중에 문둥병은 전염성이 있기에 가정과 마을에서 격리시킵니다. 뿐만 아니라 문둥병이 들면 그 사람이 접촉하는 모든 것이 다 부정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까이 오면 그들은 윗입술을 가리면서 부정하다고 외치도록 율법에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저주스러운 병의 진단과 나았다는 결정을 제사장이 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고침을 받은 문둥병자에게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 제사장에게 가라고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아직 십자가를 지시기 전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을 그대로 성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환자는 예수님께서 친히 손을 대시면서 그 부정을 자신이 담당하심으로 즉 질고를 지심으로 온전케 된 사람인데 제사장에게 가서 확인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안에 있는 자는 율법으로 정죄를 할 수가 없고 오히려 온전하고 깨끗하다는 증거를 받을 뿐인 것입니다.
그러면 문둥병자에게 접촉한 예수님은 부정하게 되지 않습니까? 율법에 의하면 부정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율법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로 가셔서 저주를 받으신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의 부정함과 죄악과 허물을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둥병자의 부정함을 스스로 손을 대셔서 그 부정함을 자신에게 옮기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말씀처럼 질고를 지신 것입니다.
그린마일이라는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가 있습니다. 그린 마일은 사형대인 전기의자 까지 가는 길이 그린마일입니다. 이 영화는 강도가 들어와 아이를 죽였는데 말 못하는 흑인이 그 아이를 살리려고 품에 안고 있다가 경찰에 붙잡힌 것입니다. 이 흑인이 치유의 힘이 있는 것입니다. 톰 행크스가 그 죄수를 잘 돌보니 그 죄수가 행크스를 잡고 병을 고쳐주는 것입니다. 그런 장면에서 환자의 질병으로 표현되는 시커먼 것들을 자기의 입으로 빨아들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본인은 지치게 됩니다. 이 죄수를 살리려고 하지만 결국 사형을 받는 그런 이야기인데 질병을 대신 진다는 의미를 위하여 예로 들었습니다.
17-26절은 중풍병자를 고쳐주십니다. 혼자서는 꼼짝달싹 할 수가 없는 사람이라서 네 명이 침상채로 메고 왔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들어갈 수가 없어서 지붕을 열고 그 안으로 내려놓습니다. 이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다고 합니다. 어떤 믿음일까요? 예수님께 데려오면 병이 낫는다는 믿음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으로 왔는데 예수님은 전혀 엉뚱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현장에 누가 와 있는가 하면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나와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병 고침을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왜 나왔을까요? 예수님에 대하여 조사하려고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보시고서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당장 이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게 나옵니까? 하나님 외에 누가 죄 사하겠느냐며 참람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네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것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들이 대답을 못합니다. 둘 다 사람으로는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시겠다고 하시면서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걸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즉석에서 일어나서 침상을 들고 일어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갔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놀라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며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주신 것은 무엇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까? 죄 사하는 권세가 예수님께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무슨 병이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병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죽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무리 병 고침을 받아도 다시 죽었습니다. 그러니 근원적인 질병은 죽음입니다. 이 죽음은 어떻게 왔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죄로 인하여 죽음이 온 것입니다. 이 죽음의 문제는 죄를 사함 받아야 해결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를 받는데 왜 죽어 가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는 죽은 것이 아니라 안식에 들어갔다고 성경은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은 생명의 부활로 나오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아니한 사람은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기에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지금도 성령을 보내셔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고 영생을 주시는 분이심이 믿어지신다면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질병 정도가 아니라 사망아 네 쏘는 것이 어디냐며 오히려 큰소리치며 삽니다(고전 15:55). 죄 사함의 능력이 죽음조차 이기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5:27-39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2007. 1. 28
27 ○그 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28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2)앉았는지라 30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3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33 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며칠 전에는 새로운 만 원권 지폐가 나온다고 하니 몇 날 밤을 새면서 앞 번호를 받기 위해 줄서 기다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새 지폐가 작아졌으니 지갑도 새 지폐에 맞게 만들어 인기리에 팔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말을 만들어 보았습니다. ‘새 돈은 새 지갑에’ 사람들은 새 것을 좋아합니다. 새 옷, 새 차, 새 집, 새로운 예배당을 마련하고서는 새로운 마음을 가진다면서 이름도 바꾸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새것이 많이 나옵니다. 옛 언약과 대비한 새 언약이 있습니다. 옛 사람과 대비하여 새 사람이 있습니다. 옛 하늘과 옛 땅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성경에 나온 이러한 새것들도 좋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사람들이 왜 그렇게 싫어하는 것입니까? 이미 구약 예레미야서에서 새 언약(렘31:31)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에서 새 하늘과 새 땅(사65:17)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새 언약이 자신의 살과 피(눅22:20)라고 말씀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예수님 자신의 나라(골 1:13)라고 하는 것을 사람들은 견디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이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로운 것을 좋아하여도 그 새것이 주어지는 과정을 이야기하면 그것은 싫은 것입니다. 왜 싫은지 그 내용을 보고자 합니다.
먼저 쉬운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서울에서 가장 비싼 아파트는 수 십 억원을 한다고 합니다. 그런 아파트는 보통사람들은 공짜로 살라고 해도 관리비 낼 형편이 안 되어서 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곳에 사는 사람은 대단한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나 정도는 되어야지! 그런 자부심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서 모든 재산을 국유화하고서는 가난한 자, 병든 자, 무식하고 교양도 없는 자를 그 아파트에 들어와서 함께 살게 한다면 누가 가장 싫어하겠습니까?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쳤습니다. 그 천국을 몰고 오신 분, 천국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소개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 곳에는 가난한 자가 복음을 듣습니다. 모두가 저주 받았다는 문둥병자, 그래서 부정하다는 문둥병자에게 예수님이 손을 대시면서 그 부정함을, 더러움을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중풍병자의 병만이 아니라 사람이 할 수 없는 죄도 사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천국이 바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천국의 모습을 더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27-29절입니다.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좇으라 하시니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 나섭니다. 이 세리 레위가 마태복음을 기록한 세리 마태로 봅니다. 이 당시에는 이름이 여러 개였습니다. 유대식의 이름도 있고 로마식의 이름도 있는 것입니다. 이 당시의 세리란 로마의 앞잡이입니다. 로마가 세금을 할당하면 그 세금만 채워 넣으면 나머지는 자기 수입으로 잡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축적하는 사람이며, 더더구나 이방인과 늘 접촉하는 부정한 자로 여겼기에 세리나 죄인이나 동일하게 취급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앞에서는 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금을 거두는 사람은 공권력이 있기에 함부로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미운 털이 박혀있는 세리를 예수님이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리가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이 따르라는 말씀 한마디에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이신 증거입니다. 이 레위가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엽니다. 그러자 누가 모여듭니까? 평소에 경건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세리의 집에 들어가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리의 친구들이 모여듭니다. 죄인들이 모여듭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무엇이라고 비방합니까? 30절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고 합니다. 이런 비방을 하면서 누구를 동원하는가 하면 세례요한까지 동원합니다. 세례요한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외친 사람인데 왜 세례요한을 동원하는 것입니까? 33절을 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도 자주 금식을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을 먹고 마신다고 합니다. 요한과 바리새인들을 같은 선에 두는 것은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1:18-19절을 봅니다. “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세례요한이 금식하는 것을 보고서 귀신 들렸다고 할 때는 언제이고 지금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금식하는 것을 바리새인과 같은 동지로 보고서 예수님을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며 세리의 친구라고 하는 것입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돌아서서는 온갖 욕을 다하고서는 만나서 웃으며 인사하는 자들이 구역질나는 정치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보고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외치면 그 놈이 귀신들린 놈이라고 하고, 이제 예수님을 공격할 때는 그 귀신 들렸다고 하는 자의 금식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지키면서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고자 애를 씁니다. 그래서 열심 있는 사람들은 십일조와 구제헌금과 일주일에 두 번이나 금식기도를 합니다. 길거리 가다가도 기도시간이 되면 시장거리에서도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치 모슬렘이 정한 시간에 기도하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금식한다는 티를 냅니다. 기도한다는 자랑을 하고 구제한다는 표를 냅니다. 그런 바리새인들 앞에서 예수님은 정 반대로 행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꺼리는 세리와 죄인들과 창기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면서 늘 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적어도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자기들처럼 율법의 규례를 지킬 뿐 아니라 그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한 장로들의 규례까지도 열심히 지키고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혹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을 하려고 하여도 할례를 행하고 안식일을 지키고 율법의 규례를 지켜야 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31절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의사가 필요 없습니다. 병든 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의인을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시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 먹은 인간의 자기의 행함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더더구나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은 자기들은 율법을 지킬만해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의 기준이 율법을 지킨 것이 지키지 못한 것보다 많은 경우를 의인으로 보는 것입니다. 물론 율법 자체는 율법의 모든 것을 다 지켜 행하여야 하지만 인간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유대인들도 압니다. 그러니 타협을 하면서 그들의 전통으로 여기는 해석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일단 절반 이상을 지키면 의인으로 봐주고 그 다음부터 누가 더 많이 지키느냐에 따라 계급이 형성되고 차별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니 무언가 한국교회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구원은 은혜로 얻고 이 세상의 축복과 하늘의 상급은 인간의 행함에 따라 주어진다는 상급차등 론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복음에 서지 못하면 자신의 신앙행태가 유대교가 되고 카톨릭이 되는데도 못 알아채게 되는 것입니다. 더더구나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일수록 이런 사고방식이 많습니다. 내가 먼저 된 사람인데, 개척 멤버인데, 뒤에 온 사람들이 설치고 다녀? 이런 식이 얼마든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이나 오늘 이 땅의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대동소이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월급제가 아니라 성과급 제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일을 시키면 연장 썩을까 겁나고 할당제를 시키면 죽을까 겁난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말도 우리나라는 성실 근면한데 일제 식민치하에서 나온 말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이 이러합니다. 공산주의가 망한 이유가 성과급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평소에 자신들을 의롭다고 여기고 열심히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면서 죄인들과 세리들을 경멸하고 자기들의 의를 내세우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는 그들을 예수님은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식탁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죄인과 세리와 창기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지금 천국의 잔치를 미리 맛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전혀 초대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인데 하늘의 왕이 죄인들을 불러서 사면 복권시키시는 현장이니 이것이 천국인 것입니다.
사무엘 하 9장에 보시면, 다윗이 왕이 되어 요나단과의 언약을 기억하고서 요나단의 후손을 찾아냅니다.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있었는데 다섯 살 때에 사울과 요나단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었을 때에 유모가 도망가다가 떨어뜨려 절뚝발이가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 므비보셋을 불러서 왕의 식탁에 앉게 합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속하였던 모든 땅을 므비보셋에게 주도록 합니다. 이때 므비보셋의 말이 어떠합니까?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는 것입니까? 이것이 왕의 식탁에 참여한 자의 고백입니다. 이것은 은총이며 이 은총은 요나단과의 언약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34-35절을 봅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도 자주 금식을 하는데 어떻게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를 즐기느냐는 것입니다. 그것도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그렇게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예수님은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데 금식할 수가 있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금 죄인들을 천국잔치에 초대하여 천국을 미리 맛보는 현장입니다. 이런 자리에 금식이 웬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신랑을 빼앗길 때가 오면 그때는 금식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신랑을 빼앗길 때란 예수님이 잡히시고 고난 받을 때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언제 금식할 것입니까? 자기들의 소원성취를 위하여 금식하고 철야하는 것은 농성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금식하며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언제 입니까? 신랑 되신 예수님을 빼앗겼다고 여겨지면 금식하며 기도할 때입니다. 세상의 근심과 걱정이 예수님보다 커 보이고, 세상의 재미와 쾌락이 더 커 보이면 금식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36-39절입니다.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기 위하여 오셨다는 이 말씀을 또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서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새 옷을 찢을 뿐이지 헌 옷이 수리되는 것이 아니라 더 심하게 찢어질 뿐입니다. 옛 율법 체계아래 있는 자들, 이방인들은 양심이라는 체계 아래서 스스로를 갈고 닦아서 새롭게 되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새롭게 되기 위하여 율법을 지키고 양심을 지킨다고 하여도 표범이 그 얼룩반점을 바꿀 수가 없고 구스 인이 그 피부색을 바꿀 수 없는 것(렘13:23)과 마찬가지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유는 누구나 상식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발효가 계속 되어야 하기에 양이나 염소의 가죽으로 된 부대에 넣을 때 새 부대에 넣어야지 그렇지 않고 헌 부대에 넣으면 이미 가죽의 기름기가 빠지고 굳어있기에 새 포도주가 그 헌 부대를 터뜨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부대도 버리고 새 포도주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것은 다 압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다 새 것을 좋아하는데 술은 묵은 것을 좋아합니다. 특히 포도주는 오래 된 것을 더 좋아합니다. 물론 그 포도주의 생산된 해의 기후조건에 따라 차이가 납니다만 오래된 포도주 일수록 값이 비쌉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신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묵은 포도주가 무엇입니까?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을 따라 자기들의 행함으로 의를 챙기는 것입니다. 이 사고방식은 이방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공로를 따라 대우를 차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다 옛 포도주를 먹고 마셔 취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차별과 경쟁을 합니다. 경쟁을 통하여 성과를 더 내어야 더 나은 월급을 줍니다. 이것이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교회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정도의 규모인데 어느 교회에서 부 목사를 청빙하였습니다. 창원에는 전도사가 잘 오지 않는 곳이라서 부목사를 모시면서 열심히 해서 부흥시키는 것만큼 대우하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세상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새 포도주는 그런 인간의 가치를 인정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죄인이며 모두가 하나님의 원수인 것입니다. 마치 므비보셋이 다윗과 원수 집안 이었던 것처럼 죽어도 마땅한 죄인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인생 중에서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를 보이시고자 몇을 택하여 은혜를 베푸시는 방식이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의롭다 함을 얻고 영생을 얻는 이 천국의 잔치에 참여하에 된 것은 우리의 의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보다 나은 것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을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적용시켜 주시기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입니다. 죽은 개보다 못한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다만 주께서 언약을 따라 은총을 베풀어 주셨기에 천국의 식탁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도 이 말씀을 듣는 것이 천국의 잔치를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 믿자고 하거나 교회에 가자고 하면 어떻게 말하는 것입니까? 자신이 죄를 끊고 오겠다고 합니다. 최소한 술 담배를 끊으면 오겠다고 합니다. 입고 갈만한 옷이 있어야 가겠다고 합니다. 먹고 살만하면 가겠다고 합니다. 교회가 무엇을 보여주었습니까? 나 같은 죄인도 용서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나는 이만큼 잘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곳이 되었기에 이렇게 되지 않았습니까?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담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과 창기를 찾아 오셨듯이 오늘 우리를 복음으로 부르시고 복음의 식탁에 참여하게 하신 것은 바로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방식입니다.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시는 그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누가복음 6:1-11 쉼이 있습니까? 2007. 2. 4
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쌔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2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ㄱ)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5 또 가라사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쌔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니 8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서거늘 9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10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11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에게 그 마음의 쉼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 지금 와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음의 쉼이 있습니까? 저의 모친이 부산의 제법 큰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제가 집에 갔을 때에 한 걱정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교육관을 짓는데 한 구좌에 3백 만 원이라는 것입니다. 70중반의 할머니가 무슨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것만이 아닙니다. 매주 주보에 부담 되는 인쇄물이 거의 늘 끼워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 다녀오면 쉼을 얻는 것이 아니라 걱정이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 가지 복음의 교제를 하게 됩니다. 설교 테이프도 드리고 성경을 찾아가면서 말씀을 전하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너희 교회 교인은 좋겠다!’ 그리고서 걱정도 합니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아무도 헌금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먹고 살겠느냐는 걱정이지요! 그러면 공중의 새와 들풀도 먹이시고 입히시는 주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바리새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안식일에 대한 논쟁이 나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율법대로 지켜야 할 뿐 아니라 안식일을 잘 지키기 위하여 장로들의 관습법조차 다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잘 지키기 위한 세부규칙이 무려 39가지가 됩니다. 몇 가지만 봅니다. 1. 씨 뿌리지 말 것. 2. 밭 갈지 말 것. 3. 곡식 단을 묶지 말 것. 4. 곡식을 거두지 말 것. 5. 곡식을 타작하지 말 것. 6. 곡식을 까불지 말 것. 7. 곡식을 갈아 가루로 만들지 말 것. 이런 식으로 나열되는데 거기에 또 다른 규례들까지 붙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6:1-2절은 안식일 법 몇 가지를 어긴 것이 됩니까? 밀 이삭 자르고 비비고 불었으니 세 가지나 어긴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안식일이 아니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신명기 23:24-25절입니다. “24 ○네 이웃의 포도원에 들어갈 때에 마음대로 그 포도를 배불리 먹어도 가하니라 그러나 그릇에 담지 말것이요 25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가하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낫을 대지 말찌니라” 즉 지나가다가 배고파서 먹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지금 바리새인들이 문제 삼는 것은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어떻게 답변을 하셨습니까? 다윗을 사울이 죽이려고 할 때에 도망가다가 배가 고파서 놉 땅의 성막에서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떡을 먹었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사무엘 상 21장의 내용인데 이 말씀을 너희가 읽어보지 못하였느냐고 묻습니다. 너무나 잘 아는 말씀이기에 이들이 답변을 하지 못합니다.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제사장이 아닌 다윗과 그와 함께한 소년들이 먹었다는 것입니다.
5절을 봅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혁명적인 말씀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주신 안식일을 법으로 지켜야지 어떻게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평소에 그렇게 존경하는 다윗이 율법의 규례로 정한 제사장만이 먹는 진설병을 먹었다는 것 때문에 우선 대답을 못합니다. 그러나 다시 안식일을 어기는지 아닌지 호시 탐탐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6-10절입니다.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십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증거를 찾기 위하여 지켜보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면 안식일에 일한 것이 되기에 고소하려고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속마음을 예수님이 다 아십니다. 그래서 일부러 시위하시듯이 그 회당에 손 마른 자를 불러 한 가운데 세우십니다. 그리고 회중에게 질문합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으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무리를 둘러보십니다. 무리를 둘러보실 때에 아마 예수님과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개를 돌리거나 숙이거나 다른 짓을 하거나 바로 보아도 눈을 마주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서도 무언가 거리끼는 것이 있으면 눈동자를 바로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가 둘러보시는데 누가 감히 쳐다 볼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둘러보시고서는 그 사람에게 손을 내밀라고 하시니 저가 그렇게 하매 그 손이 회복된 것입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이 손 마른 자가 손을 내어 밀었기에 나았다고 합니다. 아니 손 마른 자가 지금까지 얼마나 내어 밀고 싶었겠습니까? 몸이 불편한 사람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자기 몸이 온전해 지기를 원하였겠습니까? 꿈에도 소원이 몸이 회복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하여도 손이 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이 임하니 손이 내밀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손 마른 사람의 반응보다 지금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문둥병자와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면서 무엇을 보여주시고자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찬 가지로 오늘 말씀은 손 마른 자를 고쳐주시면서 안식이 없는 사람에게 안식을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창조의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안식을 주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반응을 보입니까? 11절입니다. 저희가 분기가 가득하여 어떻게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인가를 서로 의논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켜도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안식일을 지킬 자격도 능력도 없는 자들에게는 안식을 주시고 평소에 안식일을 지켰기에 의롭다고 여기는 자들은 안식일의 주인을 죽이려고 의논한 것입니다. 결국은 죽이고야 말았습니다. 그러면 이 안식의 문제가 무엇인지 성경 전체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제일 처음에 나타나는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6일만에 다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 창조를 마치셨기에 일곱째 날을 복 주셔서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이 하나님의 안식을 받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안식이 깨어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말씀을 어긴 것입니다. 이제부터 안식은 사라진 것입니다.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남자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고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여자는 해산의 고통이 더하여지고 남편을 사모하게 되고 남편을 여자를 다스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남편을 사모하게 되고 남편이 여자를 다스리면 그것이 행복할 것입니다. 벌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번역에 조금 문제가 있습니다. 공동번역에 보면 “남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겠지만, 도리어 남편의 손아귀에 들리라.” 표준 새 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네가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너를 다스릴 것이다.” 이 싸움이 오늘날 부부 싸움의 원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그 속에 또한 들어있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이길 것이라는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약속이 주어지기 까지는 인간들이 무엇 속에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5:28-29절입니다. “28 라멕은 일백 팔십 이세에 아들을 낳고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 하셨기에 수고로이 일하는 것입니다. 천년을 가까이 살아도 저주받은 땅에서 수고와 슬픔이 가득하기에 안위를 기다린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의 이름의 뜻이 안위 즉 안식이라는 뜻의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죄악이 관영한 땅이 심판을 받을 때에 방주를 예비하여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런 안식이 율법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출애굽기 20장의 십계명에서는 하나님의 천지 창조를 기억하기 위하여 안식일을 아무 일하지 말고 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출애굽 40년 후에 신명기 5장에서 언약을 새롭게 할 때에 동일한 십계명의 말씀에서 안식일을 다르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애굽에서 구원을 받았기에 안식일을 쉬라고 하십니다. 이미 율법 안에서 안식일의 의미가 발전되고 있는 것입니다. 창조에서 구원으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 지킴의 공통점은 쉼입니다. 일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왜 일을 하지 않아야 하는가 하면 천지 창조도 인간의 일함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기에 일하지 아니하고 쉬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구원도 일하지 아니하고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이기에 쉬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쉴 수가 없습니다. 왜 쉬지 못하는가 하면 사람의 욕망이 끝이 없기에 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현재 있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고 성경을 말씀합니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늘 부족을 느낍니다. 남과 비교경쟁하면서 자기는 가난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몸을 눕힐 자기 집이 있고 자기 자가용이 있으면 세계 인구의 5% 안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가난하다고 합니다. 어렵다고 합니다. 국민소득 2만 달러가 달성되니 이제 어떤 대통령 후보는 4만 달러를 목표로 세웁니다. 4만 달러가 되면 또 높아질 것입니다.
이런 인생을 시편 90편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봉독” 시편 90편에 인생이 일평생이 수고와 슬픔뿐이라고 합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로 이 땅은 하나님의 진노 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인생도 수고와 슬픔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일천년을 산다고 하여도 그것은 주님 앞에 밤의 한 경점일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날 계수함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주님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수고하고 애를 쓴다고 하여도 주님이 안식을 주시지 않으시면 결코 만족함이 없이 평생을 거머리처럼 다고 다고 하면서 살다가 자기 욕망 속에서 죽어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인생들에게 예수님이 참된 안식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그 안식을 주시는데 무엇을 주시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주시는 것입니다. 너 나와 함께 죽자고 오시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지시면 그 멍에가 쉽습니다. 짐이 가볍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유일한 안식입니다. 이 안식을 우리의 노력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안식은 예수님이 일하셔서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안식일에 병 고쳐주시는 사건이 있습니다. 38년 동안 안식을 얻지 못한 자에게 안식을 준 날이 안식일이라고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안식을 하지 못하고 계시기에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일하심을 따라 예수님이 일하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일이 끝나면 하나님께서 안식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는 것이 목표인데 그 안식에 자기 백성도 참여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일하심으로 인하여 그 안식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안식이 아직 성도에게는 남아있습니다. 이미 안식에 들어간 자들은 자기 일을 쉼과 같이 안식하고 있습니다. 그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기 전에 성도는 안식을 맛보는 것입니다.
이 안식을 맛보는 것은 날과 달과 절기는 지키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고 누가복음 2:27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기에 자기의 안식을 자기 백성에게 주시면 그 사람은 안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안식일과 날과 달과 절기는 다 그림자입니다.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은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몸을 붙드는 것입니다(골2:16-19).
왜 구약에의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하였습니까? 모든 절기는 다 안식일처럼 일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참된 안식은 사람의 노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하심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게 하기 위하여 일하지 않고 쉬게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을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고자 하시는 안식보다 더 크게 여긴 것입니다. 자기들이 안식일을 지켰다는 자기 행위에서 나온 의를 포기하지 못하였기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안식이란 사람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성경 한 곳만 말씀을 보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로마서 4:1-8절입니다. “1 그런즉 1)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ㄱ)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4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5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7 ㄴ)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함과 같으니라”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행위로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복입니다. 이것은 일을 아니할찌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믿음인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은혜요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은 다윗처럼 고백합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이 행복한 것입니다.
안식일의 특징은 일하지 아니함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안식일은 예수님이며 예수님 안에는 참된 안식이 있는데 무엇으로 참된 안식이 되는가 하면 일한 것이 없이 죄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참된 안식이 있으려면 죄 사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 죄 사함을 일하지 아니하고 받는 자의 행복으로 다윗이 고백합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그 불법이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움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참 안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참된 안식입니다. 이 안식을 맛 본 사람은 누가복음 2장에서 보았던 시므온의 고백이 나올 것입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도다” 죽어도 좋다는 고백입니다. 이 안식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