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복음서

[스크랩] 요한복음 강해 4

공 상희 2009. 5. 6. 12:46

 

 

 

 

 

 

  요한복음 강해 4

 

 

 

창원 늘푸른교회 이장우 목사

 

 

 

 

 

 

 

 

91. 주님이 주시는 기쁨 
92. 말씀을 받은 자 
93. 거룩 
94. 같이 
95. 신앙이란? 
96. 주님이 주시는 영광 
97. 하나됨 
98. 동거 
99. 아버지를 앎 
100. 말씀을 이루심 
101. 검을 집에 꽂으라 
102. 대제사장 가야바 
103. 베드로의 부인 
104. 행악자 
105. 진리가 무엇이냐? 
106. 예수냐? 바라바냐? 
107. 왕이 없나이다 
108. 십자가 밑에서 
109. 다 이루었다(1) 
110. 다 이루었다(2) 
111. 다 이루었다(3) 
112. 십자가의 능력 
113. 부활 
114. 왜 우느냐? 
115. 나를 만지지 말라 
116. 두려움과 평강 
117. 믿는 자가 되라 
118. 성경의 기록 목적 
119.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 
120.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121. 너는 나를 따르라 

 

 

 

 

 

요한복음 17:13  주님이 주시는 기쁨  2001. 4. 15.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저희로 내 기쁨을 저희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오늘이 부활절입니다. 부활절 그러면 부활의 영광, 부활의 기쁨, 그렇게 말들을 합니다. 부활절이 기쁜 날이라고 오늘 점심은 특식으로 준비를 하였는데 점심이 특식으로 준비되었다고 기쁜 것이 아니라 참으로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는가를 점검하고자 합니다. 지금 아들이 병원에 입원하여 있고, 남편이 오랜 기간을 치료를 해야 하고, 또 실직을 하여 있는 상황에서 기쁨이 있습니까? 주님의 부활이 나의 기쁨이 됩니까?

부활이고 무어고 간에 내 아들, 내 남편 빨리 났기나 하였으면, 빨리 취직이나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라면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무언지도 모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수요일 저녁에 한국통신의 파업을 다룬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비정규직의 현실을 보여주고자 하였습니다. 현재 한국의 노동자들 중에 53%가 비정규직이고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인데 여러분이 비정규직으로 있으면서 감사하고 기뻐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느 비정규직 노동자의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여 들려주었는데 그 내용은 자기 아들은 절대로 비정규직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정규직이 되든지 아니면 다른 노동을 할지라도 비정규직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그런 말을 할까, 하는 이해는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런 상황에서라도 나는 기쁩니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비정규직이라도, 내가 믿는 예수님으로 기뻐합니다, 그리고 나의 아들이 정규직 사원이 되기를 원하기 보다는 예수를 믿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구요?

 

 

 

 

오늘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기를 예수님의 기쁨이 제자들에게 충만하도록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기도가 무능한 기도가 아니기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예수님의 기쁨이 그 안에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신 그 기쁨이 없는 것입니까? 여기에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으로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선물이기에 믿음을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 이유는 주님이 주신 기쁨이 무엇인지 그 내용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서도 기쁨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후자라고 보아집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께서 주신다는 그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하여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기쁨과 우리가 생각하는 기쁨이라는 말의 차이를 먼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문제를 다룬 것인데 어느 나그네가 마을로 들어서면서 목이 말라 물을 어느 집에 가면 마실 수 있는지 물어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선비가 말을 타고 마을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나그네가 물었지요. “말 좀 물어 봅시다” 그러자 말을 탄 선비가 “아니 멀쩡한 말은 왜 물려고 하시오?” 이런 식의 대화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나그네가 목이 말라서 그렇게 합니다. 그러자 당신 목이 튼튼해 보이는데 마르긴 무얼 마르다고 하시오 이런 식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주님과 만나고 있는 것이 이런 식의 동문서답이 아닙니까?

 

 

 

 

나의 기쁨이란 나의 소원과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비하여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기쁨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무엇이 기쁨이었는지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기쁨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기쁨으로 여기신 것이 우리 안에 충만하여 지는 것이 예수님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신 그 예수님의 기쁨이 무엇인지 말씀을 통하여 확인을 하고자 합니다. 우선 요한복음에서 봅니다.

 

 

 

 

요한복음 15:11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15장은 포도나무의 비유입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를 저절로 맺는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의 관계가 하나로 결속이 되어 있으니 예수님은 기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이 너희에게도 충만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가장 고통스러워하신 것은 십자가에 아들의 죽음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는 순간이라고 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 버림 받으심의 고통이 어떠한 고통인지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하나됨의 그 기쁨을 알지 못하면 그 고통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한 버림 받으심이 아버지와의 단절이 일어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 죽으심으로 끝이 아니라 다시 살려 내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심이 부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영광, 부활의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는 그 기쁨이 단절되지 않는 기쁨이 주어진 것입니다. 창세전의 그 영광과 그 사귐의 기쁨이 부활로서 영원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에서의 아버지와 아들의 단절은 죄인을 위한 대속의 단절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러한 단절의 고통을 모르는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어 그 고통을 모르는 것입니다. 죄가 마취제처럼 아버지와의 관계가 끊어져도 아무런 고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2:17-19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나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길에 있음은 어찜이며 또 그 하수를 마시려고 앗수르길에 있음은 어찜이뇨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 여호와를 버리고 여호와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고통이어야 하는데 이러한 고통이 없는 것입니다. 죄가 이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지만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에 하나님 아버지와의 온전한 사귐이 있었고 그것이 주님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제자들이 음식을 구하여 와서 잡수시라고 말씀드리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양식이 따로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자신의 양식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 외에는 사실 예수님께 세상에서의 기쁨이란 없었습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예수님께서 기뻐서 크게 웃으셨다는 그러한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자신의 기쁨을 제자들에게 충만히 주시도록 기도하셨으니 이러한 기쁨은 결코 세상이 알 수 없고 찾지도 아니하는 기쁨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6:22절입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조금 있으면 떠나신다는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근심할 때 하신 말씀입니다. 떠나는 것이 영원히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보내심으로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쁠 것이고 이러한 기쁨은 빼앗기지 아니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성령을 받고서는 감옥에 가도 기뻤고, 집에서 쫓겨나도 기뻤습니다.

그들의 기쁨을 세상의 어떠한 환난과 핍박이 빼앗아 갈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감옥에서 사형언도를 받아도 기뻐한 것입니다. 주려도, 극한 가난도, 주님이 주신 기쁨을 빼앗아 갈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만 이러한 기쁨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전도를 통하여 복음을 알게 된 자들이 다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이러한 기쁨이란 그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누가복음 10:21절에서 봅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권세를 주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겨갑디다 하면서 기뻐, 보고를 합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귀신이 쫓겨 가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에서 능력 행함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시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기쁨을 세상 것으로 바꾸어 버렸으니 예수님을 믿고서도 기쁜 일이 없다고 아우성입니다. 세상의 것들을 잃어버리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지 않게 되는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 잃어 버렸다고 근심하고 있으니 그것이 기쁨이어야 하는데 근심하고 있으니 초점이 맞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우리가 생각하는 기쁨이란 나의 욕심과 나의 계획과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기쁨으로 정리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인가 물어보면 다 자기의 기쁨과 위로를 위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들에게 예수님의 기도가 이루어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던 그런 기쁨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기뻐하신 그 기쁨으로 충만하여 지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1-3절입니다. “형제들아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였느니라.” 마게도냐의 성도들이 복음을 들었는데 그들의 형편이 어떠하였습니까? 환난과 많은 시련과 극한 가난이 있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넘치는 기쁨으로 풍성한 연보를 드린 것입니다. 자기 살기도 힘이 드는데 형제를 위하여 연보를 힘에 지나치도록 하게 한 그 기쁨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께서 주신 기쁨이 그들에게 임한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6절에서도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 받은 자가 되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들이 복음을 받을 때 많은 환난과 시련과 극한 가난이 복음을 받고 나서 다 없어지고 부자가 되고 평안하여 졌다고 말하지 아니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전에는 가장 힘들고 어려운 문제였지만 그러나 이제 복음을 듣고 나니 복음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복음이 왜 자랑스러운 것입니까?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없는 곳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믿는 자는 그 진노하심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니 이것이 얼마나 좋은 소식이 되는지 큰 기쁨이 그들을 사로잡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령의 기쁨으로 복음을 받은 자들이 예수님을 본 받고 복음 전한 사도들을 본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사셨습니까? 그리고 오늘도 그를 본 받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부자가 되신 것이 아닙니다. 장가가신 것도 아닙니다. 오래 사신 것도 아닙니다. 미남도 아닙니다. 집안이 좋은 것도 아닙니다. 명문대 출신도 아닙니다. 신명기에 의하면 저주 받아 죽는다는 죽음인 나무에 달려 죽었습니다. 멸시를 받았습니다.

 

 

 

 

아무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수치와 조롱과 고통을 받았습니다. 전혀 기쁨의 삶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볼 때 예수님이 이런 모습이고, 제자들이 이런 모습이고, 제자들의 복음을 받은 자도 이런 모습을 본 받았다고 성경이 증거합니다. 그러니 세상의 그러한 어려움과 환난과 가난과 시련과 핍박과 죽음까지도 빼앗아 갈수 없는 기쁨을 주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쁨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이러한 기쁨이 우리에게 오기가 겁이 나지 않습니까? 그런 기쁨이 어떻게 기쁨이 됩니까? 물론 고통스럽습니다. 아프고 가난한 것이 고통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보다 더 큰 기쁨이 주님과의 사귐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영생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기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러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4:7-11).

 

 

 

 

예수님과 함께 죽는 자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을 주고도 살수 없는 기쁨의 소식이기에 그 어떠한 것도 빼앗아 갈수 없는 기쁨입니다. 이러한 기쁨을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지금도 부활하셔서 살아계신 주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을 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7:14-16  말씀을 받은 자  2001. 4. 22.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 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 잘됩니까? 아니면 미움을 받습니까? 오늘 말씀을 보시면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당장에 그러면 예수 왜 믿어? 그러실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게 된다면 자기 스스로 예수를 믿으려고 덤벼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수 믿는 자는 세상에서 미움을 받고 고난을 받습니다, 하고서 전도지를 만들어 내어 놓은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예수 믿으면 자신이 행복하고, 가정이 행복하고, 나라가 잘 된다 그러면서 성공을 위한 십계명, 행복한 부부생활 십계명, 행복한 가정생활 십계명, 그러한 내용을 인쇄하여 마구 뿌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십계명이 성경에 있습니까? 그러한 전도지를 보면 그런 교회에 가기만 하면 그냥 행복이 덩굴 채 굴러 오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 마태복음 10:34-39절을 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로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로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그 어미와, 며느리와 시어미와 불화 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가정의 행복이 아니라 가정의 분리가 일어나고, 원수가 생기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됩니까? 한 가정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가 없을 때는 서로 서로 사랑하고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와 그렇지 않는 자가 서로 원수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아니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잘해서 원수가 되지 않도록 해야지 그래서야 되겠는가 하시겠지만 아무리 잘 한다고 하여도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말씀을 보고서 자기 가정의 행복을 위하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니구나, 이곳은 아니구나 하고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교회들마다 예수 믿으면 행복한 가정이 된다고 선전을 하고 있고, 행복한 가정생활 세미나를 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성경의 말씀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물론 온 집안 식구가 다 예수를 믿고서, 같은 신앙이라면 행복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행복하겠습니까?

 

 

 

 

남편이 실직을 하고 들어오면 부인이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예수 믿는 아내라면 “여보! 공중의 새도 들의 풀로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너무 염려 말아요.” 이러지 않겠습니까? 자식이 삼수를 해서 시험을 치렀는데 전문대도 떨어지고 오면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아들아 너의 이름이 생명책이 기록된 것으로 나는 참으로 기쁘단다, 이러지 않겠습니까? 정말 이렇게 예수 믿는 아내가 있다면 그 남편은 행복할 것이요 그 자녀는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번에 항의합니다. 아니 그렇게 해서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요, 그런 걱정이 되시지요. 그러니 주님께서 무얼 하십니까? 기도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자기의 백성들이 악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결코 이 세상의 행복이나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미움을 받고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오늘 말씀을 보니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는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려고 하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에서 미움을 받습니다.

 

 

 

 

자,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면 도망갈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는 것입니까? 이런 말씀 듣고서 다시는 교회 나오지 않겠다하고서 나오지 않으면 지금까지 잘못된 신앙이 들통이 날까봐서 여기 앉아 계시는 분은 없으시겠지요? 그런 사람이 혹시 있다면 지금까지는 참았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말씀 앞에 견디지를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는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0:22-24절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제자들을 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돠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니 못하였고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많은 선지자과 임금들이 보고 듣고자 하였어도 보고 듣지 못한 것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그 음성을 듣는 것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믿고 그 말씀을 받게 되는 것이 복인 것입니다.

 

 

 

 

이것이 왜 복입니까? 요한복음 1장에서 이미 보았듯이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없이 창조된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씀으로 창조된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거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입니다. 단지 숨쉬고 산다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 있지 않은 상태를 죽은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상태는 어떤 상태인지 에베소서 2장을 봅니다.

 

 

 

 

에베소서 2:1-3절.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의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 이었더니” 이렇습니다.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권세아래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 공중의 권세 잡은 자 마귀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에게서 미움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는 모두가 한 동료입니다. 빈부귀천 남녀노소 이러한 구분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크게 보면 모두가 마귀의 종으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고 있는 중에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그 크신 사랑을 인하여 마귀에게 붙들려 본질상 진노를 받아야 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나온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성경을 읽다가 나오게 되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을 통하여 주시지 않으시면 결코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지금 기도하시는 것이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들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아버지의 말씀을 받은 자는 이제 마귀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속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도 세상에 속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세상이 볼 때는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어제까지 동지였는데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예수님께 속한 자가 되었으니 마귀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편이 아내가 자식이 원수가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주신다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에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도움은커녕 오히려 미움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보았듯이 예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무엇을 주시기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기쁨을 주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쁨이란 하나님과 아들의 온전한 사귐의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쁨이 충만한 곳이 새 하늘과 새 땅임을 수요일 저녁에 살펴보았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있다는 것은 비록 아직 발을 이 땅에 딛고 살고 있지만 그러나 소속이 분명히 다름을 아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5:18-20절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는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는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주라고 따른다면 어찌 예수님이 세상에서 받으신 대접을 우리가 받지 않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얼마나 미움을 받았는지 아십니까? 모두가 마귀에게 속하여 있었으니 이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얼마나 틈을 보고 이를 갈고 있었습니까? 그런데 이들이 누구였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거의 외우다시피하는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 위하여 아주 구체적인 세목들까지 정하여 지켜온 그들입니다. 그러니 결국 그들의 아비가 마귀였음이 예수님 때문에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편에 들게 되었다는 것은 반드시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세상에 여러 가지 시험 당하는 일을 만나면 이것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처럼 여기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이 당하는 고난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금요일 구역공부에서 예레미야서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 예레미야서에서 두 곳만 보고자 합니다.

 

 

 

 

예레미야 15:16절. “만군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내가 기뻐하는 자의 회에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을 인하여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심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어서 기쁘고 즐거우나 그러나 삶은 괴롭고 고달프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신이 태어나지도 않았다면 좋았겠다고 할 정도입니다. 왜 그렇게 말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바르게 전하니 그렇다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선지자들은 모두가 평안하다, 평안하다, 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잘된다, 하나님께 제사지내니 잘된다, 선지자가 이렇게 많은데 목사가 이렇게 많고 교회가 이렇게 많은데 결코 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선교사를 많이 보내고, 구제도 많이 하니 결코 망하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는 입만 열었다하면 멸망과 재앙을 말하니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매로 치고 감옥에 가두고 물 없는 웅덩이에 집어넣어 버리고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0:7-8절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이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하나님이 자기보다 강하셔서 할 수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받기 싫은 것입니다. 말씀을 받고 선포하기만 하면 괴로움을 당하니 전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중심이 불이 나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받고 바르게 전하는 자는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참되신 말씀이신 예수님을 세상이 미워하고 추방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이로 인하여 세상은 마귀에게 속한 것이 증명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아직도 자기의 택한 백성들이 있기에 그들에게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주셔서 받게 하시고 그들이 악에 빠지지 않도록 지금도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행복이나 나의 행복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나를 치고 나를 책망하고 말씀 때문에 핍박을 당하는 이러한 말씀을 받는 것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음임을 아시고 기뻐하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찌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 모두가 거부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게 되었는고!

 

 

 

 

요한복음 17:17-19  거룩  2001. 4. 29.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또 저희를 위하여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거룩이란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나십니까? 우선은 거부감정이 일어날 것입니다. 특히 어려서부터 교회 다니신 분은 우리의 문화적인 요인도 있었겠지만 목사님, 장로님 그러면 말과 행동이 경박스럽지 않고 무언가 근엄하고 함부로 웃지도 않는 그런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어느 교회 목사님은 부교역자들에게 교회에서 뛰어 다니지도 못하게 한답니다. 누워 잘 때에도 넥타이를 매고 잔다고 그러구요. 그러다보니 목사는 화장실에도 안 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외형적인 모습에 비하여 사는 것은 별고 거룩하지 않고 하니 거룩하다는 것들에 대하여 반발심이 일어나서 일부러 반대되는 행동들을 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외형적인 거룩의 모습을 나타내거나, 이것을 거부하는 행동-이 성도의 거룩함을 오해하게 되어 거룩이라는 말도 사용하지 않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오해는 세상에서 사는 시간은 세속적인 시간이니, 일주일에 하루는 거룩한 날로 정하여서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배하고 성경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전도하는 시간은 거룩한 시간이고 세상에서 일하는 것은 거룩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거룩이 정리가 되어 있다가 보니 여러분 거룩하게 사십시오, 그러면 무어라고 하십니까? 너무 바빠서, 그렇습니다. 지금 환경이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환경이 조금 나아지면 그때 거룩한 생활을 두 배로 하겠습니다, 라는 식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환경과 여건이 좋아지면 예배도 열심히 나오고 성경도 많이 보고 기도도 많이 하고 전도도 많이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만 거룩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작 거룩이 발휘되어야 할 시간은 아이들 공부시키면서, 회사에서 일하면서, 설거지하면서, 시장 보면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환경이나 여건이 좋아지고 여유가 있어서 거룩하여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일들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해본 말이고 일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고 홍해바다를 건넙니다. 그 엄청난 기적을 보고서 3일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없습니까? 물이 없다고 원망을 합니다. 물을 주십니다. 그리고 두 달 반이 지나자 양식이 떨어집니다. 그러자 양식 없다고 원망합니다. 양식 줍니다. 고기 없다고 원망합니다. 고기 줍니다. 그리고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 전천후 에어콘이 가동되고 있습니다. 옷이 헤어지지 않고 신발이 닳지 않고 발이 트지 않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고 자고 하는 모든 것을 다 주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까?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항상 하는 말이 내가 이 문제만 해결되면 하나님을 잘 섬길 텐데, 이것만 해결이 되면 열심을 낼 텐데, 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여 주지 않으니 나도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지 않겠다, 그러면 하나님 손해지 뭐, 좀 미안하면 하나님도 내 사정 아시겠지 뭐, 하면서 자기 합리화에 바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쁜 그 현장, 어려운 그 환경에서의 거룩을 말하는 것이지 예배당 안에서의 거룩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거룩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레위기 19:2절에서 “너는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려면 반드시 거룩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자격이 “의”라고 말씀을 드린 적이 몇 번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자격,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아갈 자격이란 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의란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켜 행하여야 나오는 것입니다. 죄를 하나도 짓지 않아야 거룩한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로마서 3장 23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 스스로는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자기를 스스로 낮추시어 자신을 계시하실 때에 그 계시를 받는 자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난 것은 그들이 거룩해서 살아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살아난 것입니다. 시내산에 하나님께서 강림하셨을 때 얼마나 두렵고 떨리는 장면인지 감히 사람이 가까지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난 모든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이 되는 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자들의 공통된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제사를 잘못 지내도 죽는 것이고, 율법을 어겨도 죽는 것이고, 언약궤를 잘못 만져도 죽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과 관련된 것들에 죽음이 따르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어느 누구도 거룩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목표, 참된 인간됨이란  거룩하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거룩함입니다. 그런데 이 거룩함을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이루어 낼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유대인들이 이미 시도를 다 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키기 위하여 어려서부터 율법을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게 한 것입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였는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는 말을 한 정도로 열심히 거룩을 유지하며 살았습니다. 십계명 정도는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참된 의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3-4절에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율법을 완성하셔서 의를 만들어 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인데 오히려 자신들이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을 자기들의 의로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오늘날도 자기의 거룩을 챙기려고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나는 너보다 더 거룩하다는 것을 무엇으로 과시합니까? 성경 읽은 것, 기도한 것, 예배 잘 참석한 것, 전도하고 봉사한 것으로 자기 거룩을 챙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거룩한 일이라고 하였으니 목사는 아무래도 전문적으로 그런 일을 하니까 상대적으로 거룩하여 보이게 된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말을 들을 때 마다 기가 죽거나 아니면 반발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목사니까 그렇지 당신도 회사에서 일해보라, 그렇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까? 오늘 말씀에 보시면 진리가 거룩하게 합니다. 진리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들으면 또다시 그래 진리인 말씀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니까 성경을 읽음으로 거룩하게 되고, 성경을 많이 알면 거룩하게 되겠구나, 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아무리 많이 알고 신학교를 나온다고 하여서 사람이 거룩하여 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스스로 거룩하여 지는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거룩하게 됩니까?

 

 

 

 

다시 오늘 말씀 17절을 봅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우리가 스스로 거룩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시니 거룩하여지는 것입니다. 그 진리란 말씀인데 그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게 되어야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을 받은 자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죄인입니다. 죄인 중에서 거룩하여 지는 것은 죄를 하나도 짓지 않음으로 거룩하여질 자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자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 말씀을 주셔서 분리를 시키는 것입니다.

 

 

 

 

19절을 봅니다. “또 저희를 위하여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만이 자신을 거룩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자신을 거룩하게 하심으로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거룩을 이루어 내시기 위하여 주님께서 어떤 일을 하신 것입니까?

 

 

 

 

베드로전서 1:13-25절입니다. “13○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찌어다 14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15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16기록하였으되 ㄱ)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17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18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 같이 1)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19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20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21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22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23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24그러므로 ㄴ)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25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거룩이란 흠도 점도 없는 어린양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거룩함을 입은 사람은 더 이상 풀과 같고 안개와 같은 인생을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에 관심을 가지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면 젖을 빨아 먹는 것이 당연하듯이 우리가 거룩한 자녀로 태어났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먹으면서 이 말씀으로 힘을 얻고 이 말씀으로 위로를 얻고 이 말씀에 우리의 모든 가치를 두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1-2절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이들 같이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거룩함을 입었다면 신령한 젖을 사모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신령한 젖인 말씀을 사모함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한다고 하시는데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구원에 부족한 것입니까? 그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을 사모함으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가라는 말씀은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얼마나 대단한 능력이 되는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3:1절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이미 하늘의 부르심, 즉 예수님의 기도로 말씀을 받아 거룩하게 된 자들입니다. 거룩하게 되었으니 이제 예수님은 벗어 버리고 더욱 거룩한 모습으로 나아가자 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시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거룩함을 입은 것이 얼마나 주님의 대단한 능력과 위력인가를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자신의 죄의 깊이를 알게 되면서 더욱 주님의 의만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10절을 봅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단번에 드리심으로 단번에 거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14절입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미래형이 아니라 완료형입니다.

 물론 다른 말씀에 미래형으로 이루라는 말씀이 나옵니다만 결국 이루라는 것도 단번에 이루어 내신 그 보혈의 능력이 얼마나 완전하며, 온전하며 영원히 거룩하게 하셨는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거룩의 능력을 맛보게 되면, 더욱 그 보혈의 능력 안에 살기를 소원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도 주의 거룩함을 입을 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이 거룩함을 얻었다면 성공한 것입니다. 실패가 더 이상 없습니다. 죽음도 질병도 가난도 이 거룩을 빼앗아 가지 못하는 거룩입니다. 그러므로 이 거룩하게 하신 분의 능력을 더욱 넘치도록 알아가서 자녀 공부시키면서 주님의 거룩이 나오고, 일하면서 주님의 거룩이 나오고, 놀면서 주님의 거룩이 나오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같이 더럽고 추한 죄인을 단번에 영원히 거룩하게 하신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찬송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7:18-22  같이  2001. 5. 6.

 

 


오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번 주는 어린이 주일, 다음주는 어버이 주일, 그 다음은 스승의 주일 그렇게 정하고 있는데 그런 주일이 있습니까? 주일은 주의 날이라는 개념에서 주일이라면 그러한 날이 자리 잡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월은 가정의 달이라고 하면서 행복한 가정생활을 위한 예수님이나 되는 듯이 선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월만 가정의 달이 아니라, 일년 열두 달 늘 가정의 달이지요?

왜냐구요? 자기 가정이 제일 우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일하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교회 나와서 기도하는 제일 우선순위가 무엇입니까? 자기 행복, 자기 가정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일년 열두 달 늘 가정의 달인데 무얼 그리 또 가정의 달이라고 하는 것입니까?

 

 

 

 

어제가 어린이 날이지요? 그런데 어린이날이 아닌 날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관심사가 자기 자녀에게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또다시 어린이 날이라고 선물을 사주고 놀이를 나가고 맛있는 것을 사주는 것입니까? 늘 자기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서 사는데 왜 그렇게 하십니까? 평소에 자식에게 공부 잘 하라고 늘 그렇게 말하다 보니 조금 양심의 가책이 됩니까? 어린이날이 처음 제정될 때는 어린이들이 워낙 대접을 못 받아서 그랬지만 지금 어린이들이야 과잉보호입니다. 먹을 것이 넘쳐서 교회에서 간식을 주면 봉지 채 버려두는 것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입을 것이 넘칩니다. 어린이가 우상이 되어 있는데 무슨 어린이 날입니까?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고 계실 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 형제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하였습니까? 누가 내 모친이며 내 형제냐?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내 모친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려면 부모와 전토와 가족과 자기의 모든 소유까지 버리고 나를 따르지 아니하면 따라 올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가정의 달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가지고 또 이용하는 것입니다.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는 자는 믿지 않는 자 보다 더 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 예수님을 따른다 하는 것은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가를 알고 따르든지 말든지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사셨습니까? 오늘 설교 제목이 “같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신 것처럼 살게 하도록 자기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게 하신 것처럼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라면 예수님 같은 모습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신 것은 하나도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신 것이 없습니다. 오직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리까지 오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의 활동하시고 말씀하신 모든 일들은 모두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이 아니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삶인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자기의 백성들이 살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만 몇 곳을 찾아봅니다.

 

 

 

 

6:57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 예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처럼 예수를 믿는 사람도 예수님을 인하여 사는 것입니다. 15:9-10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또한 그 계명을 지킴으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면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새 계명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입니까? 예수님을 우리를 사랑하사 죽기까지 하신 그 사랑입니다.
 

 

 


17:14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기에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17:18절.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자기의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자기의 삶을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닙니다. 그러한 삶은 이미 죽은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린도전서 6:19-20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러한 말씀만 보아도 이미 우리는 우리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었고, 주님의 피로 값을 주고 사신바 되었으니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니 마땅히 주를 위하여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다는 사람의 마땅한 목표요 방향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나를 부르신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이냐 아니냐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 같이 내가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의 삶인가를 점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문제는 예수님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은 대부분 이야기를 합니다만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있습니다.
 

 

 


제가 세 가지의 경우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몇 번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1)사람이 예수님처럼 살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모범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숙달된 조교이고 우리도 그를 배워서 그렇게 행할 수 있다. 욕심도 버리고 마음도 비우고 사랑을 실천하며 살수 있다.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이 있기에 스스로 이러한 도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2)사람이 타락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전적으로 타락한 것은 아니기에 조금만 외부에서 자극을 주어서 깨어나게 하면 사람이 신처럼 될 수가 있다. 3)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였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어떠한 가능성도 없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의 은혜와 능력으로만 이렇게 된다.

 

 

 

 

몇 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1)번은 불교식입니다. 길상사 입구에 프랭카드로 “우리도 부처님 같이” 그렇게 붙여 두었습디다. 부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부처는 먼저 해탈한 모델이니 그러한 길로 우리가 고행을 하고 욕심을 끊고 집착을 끊어서 스스로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2)번은 카톨릭 식입니다. 신인 협력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개혁교회가 카톨릭식으로 변질이 되어 버렸습니다. 3)번은 우리가 받고 있는 내용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설교를 통하여 성경공부를 통하여 3번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반드시 어떤 반응이 나타나는가 하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네, 죄를 지어도 되겠네,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6:1-2절에서 무어라고 하십니까?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살리요.”

 

 

 

 

우리가 복음을 들으면서 그 크신 주님의 용서와 긍휼을 알게 되면 될 수록 더욱 자신의 죄와 비참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알고서 그러한 것이 싫어지고 주님이 자꾸만 좋아져야 당연한 것인데 오히려 복음을 가지고 자신의 안일과 나태를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말씀 좋다고 하면서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어느 목사의 설교를 즐겨 볼까? 인터넷에 어느 교회를 찾아 가볼까? 아 그 교회 목사 말씀 좋더라, 그렇게 말합니다. 마치 인기 가수를 찾아 나서는 것처럼 재미있는 영화를 보러 가는 것처럼 그렇게 하고 살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34:30-33절입니다. “30○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를 의논하며 각각 그 형제로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보자 하고 31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 32그들이 너를 음악을 잘하며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준행치 아니하거니와 33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 있었던 줄을 알리라

 

 

 

 

에스겔 선지자에게 말씀을 들으러 오기는 오는데 어떤 자세입니까? 그 말씀을 듣고 말씀 좋다고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는 것입니다. 말씀 좋다고 하면서 자기들의 귀에 좋은 말만 골라서 듣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에스겔 선지자를 보고 음악을 잘하고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처럼 여겼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설교하는 목사들이 이렇게 되어 버렸고 또 청중들이 이렇게 되기를 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다시 말씀을 봅니다.

 

 

 

 

요한복음 20:21절입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또 다시 말씀하신 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내시면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충만케 되셨듯이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승천을 하시고 성령을 보내심으로 성령을 받고서 어떤 모습으로 살게 됩니까? 예수님의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복사판처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받은 그러한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은 것처럼 미움을 받았습니다. 배척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처럼 죽어 갔습니다. 물론 아주 소수는 그 복음을 듣고서 기뻐하는 무리들이 생겼습니다만 그러나 그들도 역시 주님의 모습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이 땅에 미련을 두지 않고 살았습니다. 날마다 아버지의 뜻을 구하면서 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어떻게 사람으로 가능하겠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기도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의 제자들을 위하여 아버지께서 자신을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제자들도 그렇게 되도록 기도하시고 그리고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죽기까지 순종하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주의 성령으로 인하여 거듭난 사람들은 예수님같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서 이 세상에서 세상의 영광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대접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앞장서신 예수님께서 황금마차를 타고 가셨다면 우리도 황금마차를 타고 가겠지요?

예수님 같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엇을 지고 가신 것입니까?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를 따르는 무리도 무엇을 지고 가는 것입니까?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자기 인생에 미련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을 위하여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피한다고 피하여 지는 것이 아닙니다. 도망간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피하고 도망가면 피하고 도망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망갈 생각 마시고 피할 생각 마시고 나는 죽었다고 복창하시고 주님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만드시기에 거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까? 죽으면서 죽이는 자를 축복하는 수준까지입니다. 스데반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목표임을 아시고 사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 한마디 섭섭한 소리 들었다고 밤잠을 못자는 우리이지만 죽으면서도 죽이는 자를 축복하는 그러한 사람으로 주님께서 지금도 만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낮추셔서, 스스로 낮아지셔서 오신 것과 같이 오늘날 성도는 이 세상에 낮아진 자로 섬기는 자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어디까지? 죽으면서 까지 죽이는 자를 용서하고 축복하는,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통하여 주님의 일하심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주님께서 영접하시기 위하여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과 같이 오늘 주의 백성들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20-21  신앙이란?  2001. 5. 13.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신앙이 무엇입니까? 신앙이란 말 그대로 믿고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믿는다고 하기는 하는데 그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신앙이 아닌가를 먼저 정리하고 신앙이 무엇인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우선 신앙이 아닌 것은 보이는 것을 믿고 바라는 것이라면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이 좋아 보이는 사람이라도-우리는 이러한 평가를 일단 사람의 열심으로 봅니다.

 

 

 

 

열심히 출석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전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면 일단 신앙이 좋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그 사람의 믿고 바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교인이 아주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는데 그 열심을 하나님께 드려서 자신이 원하는 이 세상에의 눈에 보이는 무엇을 받아 내려고 한다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믿고 바라는 바가 자식이 좋은 대학에 가는데 보탬이 된다든지 그래서 평소에는 기도 안하다가도 입시철에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 남편의 승진을 위하여 특별헌금을 하는 것, 이런 것을 믿음이라고 부추기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될 줄 믿고 감사헌금을 하시면 그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역사 하신다고 그렇게 말합니다. 교인만 이렇겠습니까? 목사가 아주 열심히 목회를 합니다. 보통사람들이 감히 따라 갈수 없을 만큼 초인적으로 열심을 냅니다. 너무나 헌신적이고 희생적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서 우리 교회가 창원에서 제일 아름다운 교회가 되도록 합시다, 또는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가 되도록 합시다, 그러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온전한 교회입니다. 더 이상의 아름다운 교회가 없는 데도 계속하여 사람들은 자기 교회가 더 낫다는 식의 차별화를 두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인과 목사가 함께 만들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교회, 멋진 교회라는 자랑거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누가 교회를 자랑하라고 하였습니까? 교회를 교회되기 위하여 피를 흘리신 주님을 자랑하는 것이어야 하는데 눈에 보이는 예배당 건물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기념한다고 신문을 만들어 내었는데 그 안에 보니, 성도들의 땀과 눈물과 피가 들어가서 이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당을 만들어 놓은 것을 그렇게 말하지요? 그런데 그것이 신앙의 내용, 믿음의 내용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돈을 가지고 땅을 사고, 벽돌을 사고 시멘트를 사서 집을 짓는 것은 어느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로마서 8:24-25절.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고린도후서 4:18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 신앙한다 하면서 이 세상에서 보이는 것, 손에 만져지는 것, 붙들 수 있는 것들을 믿고 바란다면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사단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세 가지 아닙니까? 40일을 주리고 배가 고픈데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고 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산 위에서 세상의 영화를 보여주면서 자신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보라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간단히 말하면 경제적인 능력, 정치적인 권세, 종교적인 기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두가 눈에 보이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거절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할 때에 예수님께서 거절하신 이러한 것을 위하여 교회에서 열심을 내는 것을 가지고 믿음이다, 신앙이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따르면 빵을 준다거나, 세상의 권세와 힘을 준다거나, 예수님을 잘 믿으면 신비한 능력을 가지고 보통사람들이 행할 수 없는 병을 고치거나 이상한 기적들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위하여 믿고 따른다면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 예수님을 따라 다닐 때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면서 따라 다녔습니다.

 

 

 

 

마가복음 10:32-45절을 봅니다. “32○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저희가 놀라고 좇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 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의 당할 일을 일러 가라사대 33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34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저는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35○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36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37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39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40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41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기거늘 42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43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45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야고보와 요한의 구하는 바는 이 세상에서 한 자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38절에서 보시면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구하고 있는 것이 야고보와 요한의 구하는 바와 같다면 지금 우리가 무엇을 믿고 바라고 구하는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제자들은 어떠합니까?

41절에 보시면 열 제자가 분히 여깁니다. 꼭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너희는 그렇지 않다, 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원리와 정반대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크고자 하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래 지금은 내가 낮아지고 종이지만 내가 열심히 헌신 봉사 충성하여서 하늘나라 가서 한번 보자, 지금은 비록 내가 별 볼일 없지만 나중에 너희들 내 앞에서 꼼짝 못하게 할 거야, 그런 사람은 없겠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까? 45절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이것이 신앙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섬기기 전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섬겨 주셔야만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내용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믿음이 없는지,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위하여 일을 행할 능력이 없는지를 반증하는 것이 주님을 믿습니다, 신앙합니다, 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봅니다.

요한복음 17:20-21절입니다. 역시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지금 예수님 앞에 있는 제자들만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제자들의 말을 듣고서 예수님을 믿게 될 사람들까지도 위하여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예수님을 보지도 않고 믿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여서 가지게 된 믿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21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내용입니다. 아니 그것을 누가 믿지 않나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지 않는 사람이 교회에 나오겠습니까? 라고 반문을 하시겠지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믿지를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라면 이러한 일을 하실 수 있을거야,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기적을 베풀어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니 네가 과연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보내신 자라면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믿을만한 표적을 보여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하신 것입니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나 내가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뿐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방금 마가복음에서 찾아 본 것처럼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고난을 받고 죽으신 후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죽으심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이렇게 죽으심은 결국 자기 백성을 속량하기 위한 죽음입니다. 많은 사람의 대속물이 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 신앙한다는 것을 제대로 알려면 성령이 임하지 않고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셔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셔서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신앙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을 가지게 된 사람은 무엇을 믿는다고 하였습니까?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보내셔서 하신 일임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하신 일이 평소에 자신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과 다르기에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여 버린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무슨 사건입니까? 요한복음 6장에서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야, 이만하면 우리의 임금이 되어도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사단의 처음 유혹을 물리친 내용입니다. 그런데 민중들의 요구는 무엇입니까? 빵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것을 먹어도 죽는다, 그러므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는 일, 즉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하고 물은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서 자꾸만 눈에 보이는 일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였다고 과시하고 싶은 것입니다. 참으로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떠벌릴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기에 조용히 참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 전에 내가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이미 믿음 안에, 약속 안에 죽은 자들은 그 약속에 다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이라고 요한복음 6:29절에서 말씀하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즉 자기 백성의 대속물이 되시기 위하여 오신 이 예수님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것을 믿는 것을 믿음의 내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이 왜 사람으로는 불가능한가 하면 사람들마다 믿음의 내용을 무엇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자신들의 믿고 바라는 것들, 눈에 보이는 것들, 세상에 속한 것들이 가득하게 들어 있기에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나의 믿음의 내용이 날마다 부수어 지고 깨어지고 포기되어 지고 주님의 약속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믿음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말씀으로 수술을 받아 잘려 나가고 주님의 약속이 우리 안에 채워지는 것이 바른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주님께서 지금도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듣고 공부하면서 나의 생각과 다르다고 싶으시면 과연 말씀이 그러한가 하고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말씀이 그러하다고 하시면 나의 생각을 버리시고 말씀을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는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예레미야 1:9-1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보라 내가 너를 열방 만국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평소에 신앙이라고 생각한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뽑혀야 하고, 파괴 되어야 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려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새롭게 건설하며 심기워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말을 듣고 또 예수 믿을 사람들을 위하여서도 주님은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의 내용이 분명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으로 끝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이 교회에서 어버이 주일이라고 지킵니다. 저는 교회에서 어떤 특정의 날을 만들어 지키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무슨 날, 무슨 기념일, 학위 취득, 교회 기공, 상량, 준공, 이러한 날짜를 정하여 지킨다는 것이 믿음의 내용이 아닙니다. 전도회에서 선물을 하신다는 것은 말리지 않습니다. 무슨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가 하면 부모는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고자 합니다. 아무리 악한 부모라고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집에 가서 집사람이 어머니께 봉투를 드렸는데 다시 차안에 넣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들 위하여 장어라도 사 먹이라고 한 것입니다. 기름진 것을 먹으면 설사하는 체질인데 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비쩍 말라보이니 불쌍해 보이는 모양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 아닙니까? 자신의 몸이 불편하여도 자식이 건강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누가 한다고 합니까? 악한 부모라도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어떤 좋은 것을 주십니까? 잠시 있다가 없어질 것을 주시겠습니까? 영원하도록 있을 것을 주시겠습니까? 우리의 손에, 마음에,  보이는 것이 가득하게 들어 차있다면 그것을 털어 버리고서라도 좋은 것을 주시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모두가 쓰레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쓰레기를 부여잡으려고 주여 주여 하고 있다면 이것이 무슨 신앙입니까? 그러므로 참으로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손에 들려 있는 쓰레기를 빼앗아 내시면서까지 우리로 하여금 영생의 가치를 알게 하시고 천국의 소망과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을 맛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세상의 환난이나 핍박이나 곤고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심지어 죽음까지도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시는 사랑의 손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내용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것으로 신앙의 내용을 채워 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다 흙으로 만든 그릇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 안에 쓰레기가 가득하면 쓰레기통입니다. 천국에 쓰레기통은 필요 없습니다. 쓰레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그 약속들, 그 언약의 말씀들로 채워나가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4:7-11절입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여 함이라 우리 산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능력의 심히 큰 것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오직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이 우리의 보배입니다. 이 예수님의 생명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으로 신앙의 내용을 삼으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7:22  주님이 주시는 영광  2001. 5. 20.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기본 도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냐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영광과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영광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한다는 말은 많이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면서 행하는 일들은 세상 사람들도 부러워하는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들을 만들어 놓고서는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자녀가 공부를 잘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입니까? 못하는 것이 영광입니까? 자녀가 공부를 이미 마치신 분은 자기 자녀가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이 영광입니까? 취직도 못하고 있는 것이 영광입니까? 우리는 이런 질문에 물어볼 것도 없이 공부 못하는 것보다 공부 잘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고 취직도 못하는 것보다 일류회사에 취직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생각을 이미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 자녀가 다른 자녀보다 공부를 더 잘하여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좋은 회사 취직을 해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서조차 이상한 경쟁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교회 안에서도 영광이라고 여기고 있는 한 교회가 가는 방향은 세상의 영광을 위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이러한 교회는 교회라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기적을 행하고, 능력을 나타낸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는 영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버지의 뜻대로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 아들을 믿는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그 아들을 믿는다는 것은 그 아들이 말씀하시는 바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것이 영광이라고 말씀하시면 우리도 아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것을 제쳐 두고서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던 것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것은 일단 접어 두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영광이 무엇인지 이 한 가지를 살펴보고서 우리도 그 영광으로 충만하여 지기를 소원합니다. 우선 요한복음에서 영광이라는 말씀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1: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의 말씀은 거룩하고 두려운 말씀입니다. 감히 하나님의 음성을 그대로 듣고서 살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이 낮아지셔서 육신을 입고 오신 것입니다. 보통 사람보다 더 상한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을 성경은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이 영광은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는 분으로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믿는 것이 영생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5:41-42절입니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영광이라고 하면서 영광을 돌리는 것은 사실 자신들의 영광이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광이 아니더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그 마음을 보시고 아신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아무리 자신들이 온갖 정성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한들 그것이 어찌 영광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자가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지만 결국은 자신들의 영광을 챙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44절입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영광을 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인데 이 영광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예수님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자신에게는 일체의 의나 선이 없음을 고백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는 도대체가 믿을 수 없는 인간입니다, 완전히 구제 불능입니다, 하는 것이 신앙의 출발점인데 출발부터 자기로부터 출발이 되어 있으니 어찌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면서 온갖 일을 다 한다고 하여도, 엄청난 돈을 바치고, 금욕적인 일을 행하고, 초인적인 일들을 이루어 낸다고 하여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과 아무런 상관없이 자기들끼리의 잔치를 벌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예수님께서 드러내시고자 하시는 궁극적인 영광이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2:2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이 말씀을 하시고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자신의 죽음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을 살려내시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28절입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가 영광스럽게 하였고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하신 일만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것은 십자가를 지시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심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31-32절입니다.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러 나가는 사건을 가지고 영광을 얻으셨다고 하시는 것은 곧 자신의 죽으심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까? 그것은 어느 인간도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죄인인 채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그대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뇌성으로 울릴 때 그 강퍅하던 바로왕도 두려워서 떨지 않습니까?

 

 

 

 

다니엘서에는 그 거대한 제국의 바벨론 왕 벨사살이 하나님의 성전의 그릇으로 술을 마실 때 그 왕궁의 벽에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씨가 씌여질 때 얼마나 두려웠는지 안색이 변하고 무릎이 부딪혀 달달 떨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이 이렇게 놀랍고 두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분을 보니 그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고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이 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 볼 자가 누구입니까?

 

 

 

 

요한복음 16:13-14절입니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 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음이니라”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의 영광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오셔야 예수님의 영광이 어떤 영광인지를 바르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주신다는 것입니까?

 

 

 

 

오늘 22절 말씀에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광이란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를 회복시키심으로 자기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사귐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우리의 어떠한 행함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의 사귐이 일어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원리가 우리 안에 가득하게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원리는 무엇입니까? 무엇이나 업적 중심입니다. 누가 얼마나 많은 이익을 남겼나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영업사원만 얼마나 실적을 올렸는가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상의 평가가 모두 업적 중심입니다. 학생의 성적도, 그래서 고등학교가 명문이다, 아니다는 것이 서울대에 몇 명이 갔는가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미술학원은 얼마나 홍익대에 많이 들어갔는가, 입니다. 그러니 바로 앞의 상가 벽에 무슨 현수막이 걸려 있습니까?

 

 

 

 

어느 피아노 학원에서 자기 학원의 학생이 어느 피아노 대회에서 금상, 최우수상, 대상, 특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어느 것이 일등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러한 것으로 평가를 내리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홈런을 많이 쳤느냐? 골을 많이 넣었느냐로 승부가 나는 세상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서도 누가 많이 헌금을 하였느냐? 누가 많이 전도를 하였느냐로 사람의 등급이 매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행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으면 무엇이 하나님께 영광입니까? 도대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영광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이 영광이 됩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내시는 것이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어 내시는 것이기에 하나님께 영광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도 이러한 십자가의 길이 하나님께 영광의 길이 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지는 십자가란 대속의 십자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십자가입니다.

 

 

 

 

요한복음 21:19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라” 베드로가 자기가 원하지 않는 삶이 주어질 것이며 그것은 결국 순교의 희생이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살아서 큰일을 행함으로 영광이 아니라 주님의 증인으로서 죽음이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역설입니다. 세상에서의 영광이란 아무리 큰일을 이루어 낸다고 하여도 그 사람이 죽어 버리면 실패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죽음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죽음이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어떠한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까? 남에게 지는 것을 통하여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모두가 이기려고만 하는 세상에서 지는 삶을 살고자 하는 자가 누가 있습니까? 자신이 실력이 없어서, 지고 나서는 자기변명용으로 내가 져 주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길 수 있음에도 져 줄 수 있는 여유가 있습니까? 내가 손해보고 짐으로 그리스도가 증거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은 십자가를 지심으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도 역시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는 모습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가 증거 되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란 십자가의 방법으로만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악착같이 세상에서 잘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일등을 해야 영광이고 꼴지를 하면 영광을 가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저주 받아 죽은 십자가의 죽으심이 영광을 가린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 길만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신 그 영광을 오늘날도 자기의 제자들에게, 자기의 백성들에게 십자가의 영광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영광을 버려두고 세상의 영광을 주님께 구하고 있다면 그것은 주님이라고 말은 하지만 그러한 주님은 우상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영광을 거절하셨는데 그 영광을 달라고 하고, 그러한 영광을 돌리겠다고 하는 것이 어찌 주님이 말씀하시는 영광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두 번째로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사귐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영광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의 사귐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귐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8절입니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여기서 과실을 많이 맺으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주님의 제자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과실이 무엇입니까? 주님과의 사귐의 열매입니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몸으로 계실 때에 하나님과 늘 교제하였습니다. 그것이 기도의 형태로 나타났고, 또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요한복음 3:34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하나님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제가 있으시기에 아버지의 원하는 열매가 나온 것입니다. 단 한번도 아버지의 뜻을 어긋나게 하신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이 볼 때는 예수님은 안식일을 지키지도 않고, 율법도 지키지 않고, 성전도 헐어버리라고 하는 극단적인 이단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모든 행위는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홀로 계신 것이 아니라 늘 하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8:16절.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8:29절에도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16:32절에서는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시며,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계속된 사귐을 통하여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일을 온전히 행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신 영광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독단적인 어떠한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순종하는 것으로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그러한 순종이 바로 낮아지심과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까지 감당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지금 기도하고 계시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신 이러한 영광을 자기의 제자들에게도 주시기를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은 세상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 않았던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을 쓰레기처럼 여기고 하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어디에서 세상의 영광을 누렸다는 말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십자가의 영광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낮아지는 길로, 좁은 길로, 자신을 죽이는 길로 들어가는 것이 예수 믿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헛된 세상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살면서 생각하고 바라고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말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영광은 외면한 채 세상의 영광을 구하고 있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수가 있습니까? 세상에서 쓸모없다고 버린 돌입니다. 건축자들이 쓰다가 쓸모없다고 자신들에게 보탬이 안 된다고 버린 돌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을 따른다면서 다른 영광을 구한다는 것은 출발부터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라도 회개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영광이 주님이 원하시는 영광이 되도록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잘 되지 않을까요? 역시 주님과의 사귐의 문제입니다. 일요일 한번 나와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우리가 함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찬양과 감사를 드리고 헌금을 하는 것들이 다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만이 신앙의 전부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을 하게 되면, 내가 일요일 하루 예배를 잘 드려주었으니 나머지는 내 마음대로 살아도 되겠지 하는 생각은 종교적인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종교인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와의 사귐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범사에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자세입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영광, 즉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가지셨던 그 영광을 우리에게도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사건, 어떠한 일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모든 사건 속에서 주님과의 사귐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녀 교육도, 취직도, 결혼도, 가정의 목표도, 교회의 목표도 분명하여 지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사귐의 그 풍성한 열매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비록 고난이 겹치더라도 그러한 것이 그 영광의 교제를 방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감옥도, 핍박도, 고난도, 죽음까지도 그 주님과의 교제를 방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에게 나타난 그러한 열매들이란 자신들의 불굴의 의지가 아니라 주님과의 교제를 통한 열매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과의 사귐의 열매가 범사에 풍성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7:22-23  하나 됨  2001. 5. 27.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서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가끔씩이라도 밤하늘을 보시는 때가 있습니까? 너무 바쁘셔서 보실 시간도 없으시겠지요? 저는 새벽기도회를 나오면서 자주 하늘을 쳐다봅니다. 요즈음은 환해서 별들이 잘 보이지 않지만 겨울에는 그래도 별들이 잘 보입니다. 그런데 정말 별빛이 맑고 환하게 비치는 곳은 수련회 때 시골로 가거나 지리산 산꼭대기쯤에 가서 밤하늘을 보면 별들이 와르르 쏟아질 듯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시에서는 그런 것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공해문제도 있고, 도시의 환한 불빛들 때문에 별들이 보이지 아니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캄캄한 밤중에 맑은 별빛처럼 영롱하게 보여야 하는데 예수님이 보이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들이 성전에 왔다가 돌아가면서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3일 길을 걸어간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3년을, 30년을 다니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요한복음 17장이 예수님의 기도인데 그 기도의 결론적인 부분이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벌써 몇 번에 걸쳐 하나 됨에 대하여 말씀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이듯이 우리를 그 하나 됨에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 은혜인지 알아 가는 것입니다. 우주 속에서 이 지구를 보면 무엇처럼 보이겠습니까? 보이지도 아니하는 하나의 먼지입니다. 그러면 그 먼지에 붙어사는 땅의 티끌인 사람이야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인간을 왜 하나 됨에 참여시키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이루시기 위함이며, 자기의 이름을 위한 것이며,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우리가 바로 알고 나 같은 죄인이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참여가 되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며 은총인가를 알게 된다면 지구를 통 채로 준다고 하여도 그것은 작은 먼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도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인데도 그러한 것에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우리 안에 예수님 외에 보이는 것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오월 달에 스승의 날이 있다고 교회 선생님들에게 1여전도회서 저녁 식사를 대접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어느 집사님이 선생이 너무 많다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적어도 초등학교 선생 이상은 되어야지 선생이라고 할 수 있지, 무슨 과외선생들까지 다 선생이라고 하니 선생이 너무 많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어떤 집사님은 목사님 설교 안 들었느냐고 교회 선생님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서 누가 더 중요하다 아니다, 하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가 너무 많다는 말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교사가 너무 많아서 참된 교사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학교 선생님뿐만 아니라 모든 과외학원까지. 그리고 학습지 선생님까지 온통 선생님 천지입니다.

 

 

 

 

교사만 많습니까? 지도자도 너무 많아서 탈입니다. 모두가 자기가 지도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모도 너무 많아서 탈입니다. 자신들이 부모라고 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도 오월달의 설교의 대부분이 어린이, 부모, 선생님에게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이가 아예 우상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버르장머리가 없습니까? 오냐 오냐 하면서 키워 놓으니 완전히 자기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에 떠드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식사시간에도 마찬가지이고 공공장소에 나가보면 아이들의 자기 멋대로 하는데도 부모들이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를 하면 이상한 사람 쳐다보듯이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나 여러분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어린이 우상, 어버이 주일은 어버이 우상, 스승의 날은 스승 우상을 양산시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8-12절을 봅니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선생은 유일하신 선생을 가리키는 선생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비는 참된 아버지를 증거 하는 아비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도자란 우리의 지도자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는 자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 형제인 것입니다. 이것이 가정의 달 오월의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너무 많은 선생이 있고 부모가 있고 지도자가 있는 것입니다. 모두 자기의 말을 잘 들으라고 합니다. 자신이 참부모라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주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 속에서도 주님은 여전히 일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이듯이 그로인한 영광과 기쁨을 자기의 택한 백성들에게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그 하나 됨에 참여를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운명이란 고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운명입니까? 주님과 함께 되는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모습이 성도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까? 다른 말씀도 많지만 방금 읽은 말씀에서만 보아도 어떠한 부르심을 입고 있는 것입니까? 섬김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로, 높임을 받는 자가 아니라 낮아진 자로 부름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십니까? 주님과 하나 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 되게 하심을 통하여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17:21절을 봅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3절에서도 봅니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서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자기 백성들과 하나 됨을 통하여 하실 일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분이 하나님 아버지인 것을 믿게 하기 위함이고 또 세상으로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세상에 아직도 남아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하시는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20절을 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오늘 성도가 예수님과 같이 됨을 통하여 무엇을 보여 주는 것입니까? 성도의 말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들도 위하여 예수님이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자 하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지금도 기도하시며 성령을 보내셨기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성도에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복음을 들으면 어떤 반응들이 나오는가 하면, 처음에는 당황합니다.

모든 인간의 행위를 부정하기에 당황해 하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적응이 되면 이런 반응이 나타납니다. 그래 이래도 죄고 저래도 죄인데 내 마음대로 살자,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전에는 열심히 성경도 보고, 기도도 하고, 헌금도 하였는데 이제는 아예 놀자 쪽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너 그렇게 하는 것이 너 자랑하는 것 아니냐? 폼 잡지 말라,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잘하는 사람도 싸잡아 비난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못하는 것으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이 하는 일까지 못하게 막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의 열심히 하는 것이 성령의 열매인지 육체의 일인지는 누가 알겠습니까?

 

 

 

 

이러한 문제로 전에 주일 저녁에 왔던 몇 명의 청년들이 돌아가면서 계속 토론을 하다가 결론을 내린 것이 자기 자신은 안다, 라는 것이었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도 속고 있을 수 있기에 자기 자신도 잘 모릅니다. 단지 주님만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떠한 일을 할 때 그 일들이 성령의 열매라면 틀림없이 성령의 열매의 특징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나오는 것입니다. 어느 것은 되고 어는 것은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특징들이 한꺼번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을 크게 하고 적게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열매가 나타나면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신 기도가 이루어진 것이기에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예배당의 청소를 하든지, 전도를 하든지, 예배당을 건축하든지 아니면 잠잠히 있던지 간에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는 것이라면 주님과 하나 됨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이 나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 됨이 주님의 향기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기에 꽃이 있습니다. 이 꽃은 생화인데 이보다 더 아름다운 조화를 사람들이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일이라고 위장하여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조화란 향기가 없습니다. 인공적인 향기를 만들어 넣을 수는 있지만 나비와 벌들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가 일을 안 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말과 행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모습이 보여 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의 모습을 한번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밖에서 점심을 먹고 여러 가지 운동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그러자 가을에 또 하자고 그럽디다. 그래도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참으로 그리스도의 향기가 가득하였는지를 한번 돌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식사시간에 자기 부모들이 없이 온 아이들이 제대로 대접을 받았습니까? 물론 전체 아이들이 김밥을 먹었지만 그래도 부모가 목사나 집사나 된 사람 아이하고 그렇지 않은 아이하고 같은 대접을 받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른들이 식사할 때 옆에 끼어들게 자리를 만들어 주었습니까? 아니면 자기 자식, 자기 친한 사람 챙기기 바빴나요? 우선 내 입을 즐겁게 하고 내 배를 채우는 것이 급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라면서요? 사람의 혈통이나 육정과 비교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형제라면서요? 그런데도 자기 핏줄이 먼저 챙겨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핏줄보다도 내 입이 먼저 챙겨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다른 사람, 소외된 사람 챙기다가 자기는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였다고 짜증이 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게 됨을 인하여 기뻐한 사람이 얼마나 되었습니까? 이래도 죄고 저래도 죄인데 내입이나 먼저 챙기고 보자고 누가 그렇게 가르쳤습니까? 물론 여러 모양으로 헌신하고 봉사한 분들 때문에 즐거운 시간들을 가졌습니다만 그러한 모습이 더욱 풍성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나는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밥을 먹어도, 운동을 하여도, 그리스도의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녁에 예배당에 와서 보니 찬양대석에 평소보다 훨씬 많은 교회비치용 성경이 놓여져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을 해보니 놀러 가는데 성경도 귀찮은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 있는 성경 보고서 가볍게 가려고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 혼자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제가 틀린 추측입니까? 그러니 우리가 가만히 자신을 돌아보면 모든 행동들이 결국은 나의 몸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편리와 만족과 유익을 위하여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우리가 주님과 함께 됨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 참으로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그리스도와 다른 모습입니까? 그러므로 성도에게 고난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한 고난을 통하여 결국 주님과의 하나 됨을 확인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어떤 일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성경 몇 곳을 찾아봅니다.

 

 

 

 

로마서 8:17절.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성령이 임하여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 것이 이미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보증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함께한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기업을 함께 받을 것입니다. 러나 그렇게 하기 전에 무엇도 함께 하는 것입니까? 고난도 함께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 됨이란 그리스도의 영광에만 아니라 그 고난의 자리에로 먼저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가 안 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왜 이러한 고난에 참여를 시키는 것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시키시기 위함입니다. 자주 이런 예화를 말씀드립니다만, 어느 재벌회사 회장이 자기 아들에게 기업을 물려주려면 어떻게 합니까? 재벌 아들이라서 공부도 안하고 놀기만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혼을 내든지 패든지 해서라도 그 기업을 이을만한 자식으로 키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러한 기업을 물려주기 위하여 말단 직원으로 입사를 하게 해 놓으니 어떤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자재창고에서 몰래 물건 빼내다가 팔아먹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이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성도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드러내는 자들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채우는 자의 모습이 아니라 영원을 준비하는 냄새가 나는 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자기 이익을 악착같이 챙기는 사람이 아니라 나누어 주고 포기하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기는 사람이 아니라 지는 사람으로 지고서도 웃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송사를 할 일이 있다면 차라리 손해를 보고 마는 것이 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가는 망하기 십상이라는 말을 듣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자들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2:14-16절.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게 하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게 하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자, 향기를 내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향기를 하나님께서 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망에 이르는 자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저렇게 살다가는 망하기 십상이다, 하면서 예수 믿는 사람을 피하여 가는 것이 사망의 냄새가 됩니다. 그런데 구원 얻는 자들에게는 그렇지 저렇게 망하는 것이 사는 길이구나, 하면서 생명에 이르게 하는 냄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 저렇게 하다가 망하지, 자기 밥그릇도 하나 챙기지 못하면서 하는 그런 모습이 나오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게 보여야 망하는 자들이 다시는 교회근처에 얼씬도 안할 것입니다. 너희들 교회에 가지 마라, 그곳에는 죽는 곳이란다, 이 세상에서 망하는 곳이란다, 이렇게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란 것이 무엇입니까? 죽음의 형틀 아닙니까? 그런데 사망에 이를 자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어야 하는데 오늘날 교회가 모든 사람에게 좋은 냄새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을 단지 윤리 도적적인 착함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것은 전혀 세상과 섞일 수 없는 질이 다른 것입니다. 빛과 어두움이요 썩음과 썩지 않음의 구별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보면 교회가 죽는 곳이요 썩는 곳이요 캄캄한 곳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신자도 좋아하는 교회를 만들라고 합니다. 결코 아닙니다. 불신자가 교회에 와 보고서는 이렇게 살다가는 내가 망하겠구나 하면서 도망을 가야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란 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 얻는 자에게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 이러한 예수님의 일에 우리를 참여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냄새가 나오는 것이 당연하고 우리의 부르심의 길이요 목표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낮아지고, 섬기고, 희생하고, 봉사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고 그러한 모습으로 부름을 입었다는 것이 기쁨과 감사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금도 주님께서 자기의 택한 백성들을 자신과 아버지의 하나 됨의 자리로 초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하나 됨의 영광, 그 거룩의 자리로 부르심은 먼저 거치는 과정이 고난으로 부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당하는 고난은 잠시입니다. 이 세상의 평생이 잠시의 고난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 현재의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영광으로도 역시 초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하나 됨의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알고 받아들이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7:24  동거(同居)  2001. 6. 3.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도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님께서 기도할 때에는 어디에 가서 하라고 하신 것입니까? 바리새인들처럼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지 말고 골방에 가서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은밀히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들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제자들이 다 듣도록 요한복음 17장의 기도를 하시는 것입니까? 은밀히 기도하시면 되실 텐데 왜 이렇게 듣고 알도록 기도하시는 것입니까? 어떤 전도사가 산기도를 가서는 큰 목소리로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 장가 좀 보내주십시오.

 

 

 

 

이 전도사가 키도 작고 얼굴도 남자답고 그래서 장가를 못 간 모양입니다. 그런데 산에서 그렇게 큰 소리로 기도하니 어떤 사람이 그러한 것을 보고서 믿음이 좋다고 생각해서 자기의 여동생인가 친척인가를 소개하여 장가갔다는 이야기를 직접 들었습니다. 신부는 키도 크고 예쁘기도 합디다. 그래서 기도란 큰 목소리로 기도하라 그러는 말이 전도사들 세계에서 잘 통합니다. 하나님, 쌀이 없습니다, 학비가 없습니다, 하고서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왜 제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기도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기도하신대로 예수님께서 이루어 가실 것이기에 제자들도 듣도록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기도가 역시 하나님이 하실 일을 보이시는 계시라는 것입니다. 그 일들을 우리가 요한복음 17장에서 여러 가지 내용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24절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24절에서 보시면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신 자들을 예수님과 함께 있게 하시기를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께 살면서 무엇을 보게 하여 달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예수님을 사랑하심으로 주신 그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주님과 함께 있습니다만 그러나 아직 우리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고 있지는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결국이란 예수님과 함께 살게 되는 것이 목표점입니다. 신부가 신랑과 약혼을 하고서 신부수업을 하면서 기다리듯이 교회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신부로 부름을 받았는데 아직 신부 화장이 덜되어서 천국으로 못가고 있는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신부화장은 주님만을 사랑하는 것이 신부화장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주님을 그렇게 사랑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 심판의 기준이 예수님을 사랑하였느냐 아니냐에 달린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그렇게 사랑하고 함께 살고 싶어 하십니까? 늘 주님이 보고 싶어서 ‘주님고대가’를 부르고 있습니까? 단지 세상사는 것이 힘이 들어 도피하고 싶은 생각에서가 아니라 정말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님과 함께 거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이러한 질문에 자신이 없으시지요? 어떤 집사님은 아직도 세상에 좀더 살고 싶어서 주님의 말씀대로 다 순종하지 않는다는 농담 같은 말씀도 하시든데!

 

 

 

 

우리의 형편이 좋고, 가정에 어려움이 없고,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 행복한데 그런데도 만사 제쳐두고 지금 주님께서 당장 오라고 하시면 예, 하고서 주님께로 달려가시겠습니까? 대답하시기가 곤란 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 당신이 지금 창원에서 제일 큰 교회를 담임하고 멋진 예배당을 건축하여 입당을 앞두고 있는데 지금 올라오라 그러면 갈 마음이 있느냐 그러면 저는 당장 올라 갈 것입니다, 라고 말은 합니다만 그러나 마음으로 동의가 잘 될지 그것은 의문입니다.

 

 

 

 

지난주에 고추 몇 포기에 제 마음이 끌려서 며칠을 가는 것을 보고서 롯의 처를 기억하였습니다. 사위 보려고 온갖 혼수 장만 해놓았을 텐데 그 아까운 것들을 버려두고 도망을 나와야 하는데 어찌 뒤가 돌아 보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그만 뒤를 돌아보았다고 그 자리에서 소금기둥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이곳을 떠나라, 그러시면 여기서 소금기둥 될 사람 제1호가 저이고 그 다음에는 누구인지는 스스로 생각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설교 들으시면 기분이 좋습니까? 부담이 되십니까? 부담이 되시지요?

저 목사는 세상에서도 행복하게 사는 것이 무언지 모르는 모양이구나, 주일 저녁에 출애굽으로만 부족하여 요한복음을 하면서도 역시 출애굽이냐 하시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스스로 사랑하여 떠나기를 소원하는 그런 정도의 수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보내셔서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여러 가지 도움이 되어야 사랑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시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시고서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이 사랑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도대체 어떠한 사랑인지를 오늘 알아보고서 이제 우리도 주님과 함께 동거하기를 더욱 소원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창조 마지막에 인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만물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유일하게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피조물이 인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와 함께 거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3:8절에 보시면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것입니다. 산책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는 아담과 하와가 숨었습니다. 그 이유는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하여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생명나무에 나아가지 못하고 죽음이 이르렀고, 온갖 악이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동산에서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두려운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 앞에서 감히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모습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아니면 자신을 낮추시어서 나타나시고 계시하셔야만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얼마나 두려운 사건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쉽게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 죄인과 함께하시면 죄인이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타나실 때에 어떤 모습인지를 보겠습니다.

 

 

 

 

신명기 5:22-27절입니다. “22○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을 산 위 불 가운데, 구름 가운데, 흑암 가운데서 큰 음성으로 너희 총회에 이르신 후에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두 돌판에 써서 내게 주셨느니라 23산이 불에 타며 캄캄한 가운데서 나오는 그 소리를 너희가 듣고 너희 지파의 두령과 장로들이 내게 나아와 24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25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26무릇 육신을 가진 자가 우리처럼 사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27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 하였느니라.”

 

 

 

 

이뿐만 아니라 성막이나 성전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면 항상 가리우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지 아니하시면 죄인이 그 영광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인이 그 영광을 보면 죽음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의 그 영광을 보고도 산 것은 왜 입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계시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모세를 긍휼히 여긴 것입니다. 모세가 거룩하거나 훌륭하여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로 인하여 살아난 것입니다. 그런데 시내산에서 그 하나님의 영광의 끝자락을 보았는데도, 하나님의 손으로 덮으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가고 난 뒤의 모습만 보고 왔는데도 모세의 얼굴이 어떠하였습니까? 그 얼굴에 광채가 나서 사람들이 감히 쳐다 볼 수가 없어서 수건을 가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수건이 벗겨지는 것이 신약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영광을 보게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의 모습 안에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을 보게 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어서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분이지만 하나님께서 택하여 보내어 주신 자들은 예수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3:6-17절입니다. “6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군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0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7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8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9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10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11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12○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14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17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8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린도후서 4:3-6절입니다. “3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4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ㄱ)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구약에서 감추신 그 영광을 이제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영광을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니 영광스러운 것이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사람들이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에게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4:6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에게 비추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비추어 주셔야만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알게 된 자들은 결국 주의 영광을 알게 되고 우리도 그의 영광의 모습으로 변하여 주님의 영광을 얼굴을 마주대하며 함께 살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16-18절에서 우리의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잠시 받는 환난의 가벼운 것들이 지극히 크고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는 것이랍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광이 그리스도안에 있음을 알고 발견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여러 가지 환난들이 닥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환난들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죽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주님의 영광을 알고 맛본 자들에게는 그러한 것이 너무나 가벼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기도하심으로 우리가 그 영광을 말씀을 통하여 보게 되면 이 영광이 너무 좋아서 다른 것은 다 잊어버리고 주님과 함께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래서 빨리 죽고자 한 것입니다. 주님의 그 영광을 맛보고 나니 주님과 함께 살 것이 너무나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복음을 전하여야 하는 일로 인하여 빨리 가지 못한 것입니다. 다른 미련이 남았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주님의 택한 백성이라면 반드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그 일을 지금도 이루어 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과 함께 살게 되고 창세전의 영광을 우리가 보면서 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영광을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미리 맛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하여야 할 영광은 세상의 없어질 영광이 아닙니다. 모세의 영광도 아닙니다. 장차 없어질 영광이 아니라 새 언약의 영광,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그 영원한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 영광을 알도록 우리가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그 영광이 이 세상의 썩어질 영광과 얼마나 다른지를 날마다 말씀을 통하여 확인하시고 그 영광을 사모하며 사는 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 영광을 맛보게 되면 나와 세상이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님만이 보이게 되고 그 곳에서 그냥 살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을 이미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맛을 보았습니다.

 

 

 

 

마태복음 17:1-8절입니다. “1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2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3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는 것이 저희에게 보이거늘 4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와 가로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께서 만일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5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6제자들이 듣고 엎드리어 심히 두려워하니 7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8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이러한 영광을 우리가 이미 받은 자들입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지금 집안 생각도 사업도 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그 영광 앞에서 무슨 다른 생각이 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광을 버려두고 헛된 영광을 구하려고 다니니 이러한 영광의 맛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미 허락된 이 영광을 날마다 더 풍성하게 맛을 보시고 알아감으로 정말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 생의 최고의 소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7:25-26  아버지를 앎  2001. 6. 10.

 

 


의로우신 아버지여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저희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줄 알았삽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사람이 범죄함으로 하나님을 바르게 알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각자가 자기들 마음대로 하나님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마다 하나님이라고 하기는 하는데 그 내용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에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나 그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이 영생입니다.

 

 

 

 

요한복음 17:3절에서 이미 보았듯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참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을 몰랐기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도 몰랐다는 것이 구약의 증거입니다.

 

 

 

 

예레미야 9:23-2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치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찌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이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지혜나 용맹이나 부함을 자랑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것을 기뻐하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을 아는 것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심을 알라는 것입니까?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알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이러한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망한 것입니다.

 

 

 

 

우리가 호세아서 4:6절에서 이미 보았듯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이 백성이 망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식을 물론 정보를 말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호세아서 6:6절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인애며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성경에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잘 몰랐을 것입니다. 거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많은 헌신과 충성과 봉사로 커다란 업적들을 남기는 것을 하나님께서 원하고 계시는 줄로 알았을 것입니다. 지옥 갈 인생을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하였으니 이제는 그 은혜를 열심히 갚아내자, 라고 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 은혜에 보답한다는 차원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라고 하신 것입니까? 제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애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제사 안에 담겨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알라는 것입니다. 대신 희생당하는 짐승을 보면서 대신 희생당하는 어떤 분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구약의 제사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구나, 우리의 죄로 인하여 대신 희생당하는 자가 있어야 하는 것이구나를 알고서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인애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가 이러해야 하였다면 신약의 예배도 어떠해야 합니까? 주님의 긍휼과 자비가 드러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말씀 25절에서 “의로우신 아버지여”라고 예수님께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의롭지 아니하면 알 수도 없고 부를 수도 없는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인간도 스스로 참 하나님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참되신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25절에서 “세상이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도”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이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는 아십니까? “나는 아버지를 알았삽고” 즉 예수님만이 하나님 아버지를 제대로 아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참되신 하나님 아버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시고, 예수님의 보이신 행동이 모두 하나님의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은 오직 예수님을 통하여서만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쳐두고서 직통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도 하나님과 직통으로 통한다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한 자도 역시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25절을 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의로우신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예수님께 붙여주신 자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기도하시는 내용뿐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과 생애가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26절을 봅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자기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하시고 또 앞으로도 알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의 기도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바르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분의 인격과 뜻과 일하심을 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알게 하심을 통하여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신 사랑이 하나님의 백성 안에 있고 예수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금요일 구역성경공부로 ‘성경정독집’을 보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한번 읽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만 이 성경정독집을 통하여 성경을 보게 되니 얼마나 다른 하나님을 발견하였습니까?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었는지를 말씀을 통하여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교회를 나오고 여러 가지 사업을 거창하게 한다고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주님의 이름으로 굉장한 능력들을 행하였지만 주님께서 그들을 모른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능력 행함이 아니라 아버지를 아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9:9-13절을 봅니다. “9○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10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1)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1)앉았더니 11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12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13너희는 가서 ㄱ)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자 바리새인들이 와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어떻게 너희 선생은 저런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느냐고 시비를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들으시고는 호세아 6:6절을 인용하시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는지 너희는 배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자임을 또한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인을 대신하여 속죄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또한 알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런 정도는 다 압니다, 라고 하시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아는 것이 지식으로만 가지고 있는지를 이제부터 점검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이 뜨겁다는 사실을 다 압니다. 그런데 알고 있으면서 불에 손을 집어넣을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안다고 하면서 불에 손을 넣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불이 뜨거운 것임을 말로만 안다고 한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저녁에 이사야서의 결론이 새 하늘과 새 땅과 꺼지지 아니하는 불이었습니다. 이 불은 벌레도 죽지 않고 영원한 불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러한 지옥에 들어가지 않게 되는 유일한 길이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임을 알고 믿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지옥에 가지 않고 영생으로 천국으로 가게하심을 믿으십니까? 그것은 기초인데 왜 또 그 말을 하시느냐고 물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안다고 하지만 결코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우리의 삶에서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정말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천국을 사모하는 삶이 아니라 그저 불타 없어질 이 땅의 것들을 어찌 그리도 사모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니 안다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안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르면서 다 안다고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아는지 모르는지 시험을 쳐보아야 아는 것입니다. 어떻게 시험을 치릅니까?

 

 

 

 

이렇게 무더운 날에도 천국을 생각하고 주님을 생각하면서 감사가 나옵니까? 땀을 뻘뻘 흘리면서 식사를 준비하면서 감사가 나옵니까? 자식이 내 마음에 들 만한 수준이 안 되어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한가지로 감사하실 수가 있습니까? 남편이 아내가 세상적인 조건이 부족하고 어리석어도 주님을 사모하는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안다는 것은 그 아는 것에 목숨을 거는 것이 아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는 앎이란 사실 말장난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을 아노라 하는 것은 귀신도 아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된 사람들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고린도전서 1:26-2:2절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기록된바 ㄴ)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2:1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1)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 사도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그의 가치관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모든 것들이 거꾸로 되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세상은 지혜와 문벌과 가문이 좋은 것을 자랑합니다. 세상의 강하고 귀한 것들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을 하나님께서 고발하시기 위하여 오히려 미련하고 천하고 약하고 멸시받는 자들을 택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을 통하여 세상을 부끄럽게 하시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세상의 그 어떠한 것이라고 자랑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귀하고 가치 있는 것들이 무가치 합니다. 무가치한 정도가 아니라 해가 됩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천하고 멸시받는 것이 귀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합니다.

 

 

 

 

계속하여 고린도전서 2:6-14절을 봅니다. “6○그러나 우리가 2)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7오직 3)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기록된바 ㄱ)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11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이러한 십자가의 비밀을 아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알았다면 영광을 주를 못 박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은 아무도 참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알아보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이 심판 받아 마땅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영광의 주를 죽여 버린 세상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합동으로 행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성령이 임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뜻을 제대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이 심판받아야 하는 사실을 알게 되고 또한 십자가를 통하여 택하신 백성은 구원받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함께 나타난 사건이며 모든 언약의 완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지혜란 사람의 없어질 지혜가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내용인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12절을 봅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다는 것은 무엇을 알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이 임함으로 사도들이 알게 되었고 또한 이렇게 말씀으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보는 우리가 이 내용이 믿어지고 알게 된다면 우리도 동일한 성령이 임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씀이 우리의 소망이요 힘인 것입니다. 세상의 썩어질 것들, 없어질 것들이 우리의 삶을 좌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끊임없이 흔들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참으로 알아야 할 것은 알지 아니하고 몰라도 될 것들을 얼마나 많이 알려고 합니까? 어떤 물건이 좋은 물건이며, 어느 식당이 맛있으며, 어느 선생이 쪽집게 선생인지, 이러한 정보들이 성도의 모임 안에서도 대화의 주제가 되어야 합니까? 
 

 

 


빌립보서 3:7-9절을 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우리가 이러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선물로 받았다면 이것이 가장 큰 성공이요 복이요 가장 고상한 지식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 은혜에서 날마다 자라감으로 우리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이 기쁨 때문에 세상의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8:1-9  말씀을 이루심  2001. 6. 17.

 

 


1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 2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 3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4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5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6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7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저희가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8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9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요한복음 17장이 좀 오래 걸렸습니다. 17장의 내용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자신의 소원을 아뢰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이기에 기도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거의가 정욕대로 구하기에 제대로 응답이 없습니다만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는 말로만 기도하시지 않으시고 친히 그 기도하신 바를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신 것이 18장부터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란 어떤 식입니까? 자신이 할 일을 기도로 때우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저희 교회에서는 그러한 기도를 들어보지 못한 것 같은데 어릴 때부터 대표기도 하시는 분이 아주 많이 하는 내용 중에 하나가 ‘하나님 아버지 빈자리가 많습니다. 빈자리를 채워주시고’ 이런 기도 들어 보셨지요? 그렇게 기도만 하고서는 전도는 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예를 들자면 ‘주여 저희 교회에 사랑이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게 하옵소서.’하는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서는 자신이 사랑의 수고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기도만 하고서 때우는 것입니다.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기도로 때워버리는 식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의 어떠한 부족한 모습들이 보이게 되면 그것이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그러므로 나팔 불지 말고 그 보인 것을 묵묵히 실천하시는 것이 성도의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성도란 모두가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런 말 한마디 없이 예배만 참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러한 분이 더 큰 은사라고 우리가 신앙클리닉을 통하여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말로서 때우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구체적인 내용의 삶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일들이 가능한가 하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내용들을 지금도 쉬지 않고 이루어 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 주님의 기도하신 내용들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나오지 않는 것이 비정상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나오지 않는 것을 억지로,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것들은 육체의 열매이지 성령의 열매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기도하신 내용이 무엇이지 한 번 더 제목이라도 살펴보고자 합니다.

 

 

 

 

설교제목으로 요약합니다. 영생을 주시는 권세, 영생, 아버지의 일,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저희를 보전하사,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이 주시는 기쁨, 말씀을 받은 자, 거룩, 신앙이란, 주님이 주시는 영광, 하나됨, 동거, 아버지를 앎. 이러한 제목을 통하여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엄청난 내용들이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은혜를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는데 별 보탬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위하고 싶은데 오히려 예수님의 기도는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세상의 기쁨을 원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린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누리신 기쁨이란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가난한 가정, 배운 것도 많이 없음, 시골 출신, 얼굴이 잘 생긴 것도 아님, 풍채도 없으심, 장가도 못 갔음, 33살에 성경대로 하면 저주받아 죽는 죽음인 나무에 달려 죽는 죽음이며 로마식으로 하면 로마를 반역하다가 잡힌 자들의 처형방법인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떤 기쁨이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주님은 자신의 기쁨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란 바로 아버지와의 사귐의 기쁨인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기쁨은 우리가 원하거나 바라지 않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은 이러한 기쁨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그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기쁨이란 세상 사람이 알 수 없는 기쁨인 것입니다. 감옥에서 무엇이 기쁜 일이 있어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세상이 빼앗아 갈수 없는 기쁨이 성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내용들이 성도에게 이루어지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빼앗기고, 당하고도 기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인간으로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이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이러한 기쁨을 맛보게 하시는데 우리는 얼마나 결심하고 이러한 기쁨을 거절하고 있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희생하고, 섬기고, 손해보고, 욕을 얻어먹고, 낮아지는 이러한 기쁨을 저주처럼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피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하신 바를 이루어 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피할 길이 없습니다. 주님의 뒤를 따라가야만 하는 것이 성도의 피할 수 없는 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보다 강하시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23:19절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아니하시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말씀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중에 발락왕이 발람을 불러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입만 벌리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발람이 하는 말이 내가 축복의 명을 받았으니 그가 하신 축복을 내가 돌이킬 수 없도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신다는 그 말씀을 이루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허물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얼마나 허물이 많은 야곱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허물을 보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의 복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이십니다. 그러므로 그 어떠한 환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것이 저주입니다.

 

 

 

 

이사야 55:10-11절입니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신이 말씀하시고 기도하신 내용을 반드시 이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기에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세상은 결론지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말씀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까?

 

 

 

 

18:1-5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아가시는 것입니다. 이곳이 감람산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주 가시던 곳이기에 가룟 유다도 잘 아는 장소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가 배신하여 자신을 팔아넘기고 사람들을 이끌어 이곳으로 오고 있는 것을 이미 다 아십니다. 그러면서 일부러 유다도 아는 곳으로 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잡히시기 위하여 그곳으로 가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룟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병기를 들고 예수님을 잡으려고 온 것입니다.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합니다. 그러자 나사렛 예수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십니까?

 

 

 

 

6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려지는지라” 잡으러 온 사람이 내 여기 있다, 하시는 말씀에 오히려 나가 자빠지는 것입니다. 땅에 엎드려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힘이 없어서 잡히신 것이 아닙니다. 당장이라도 하늘의 군대를 동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시고 다시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물으시고 내가 여기 있다고 하시면서 잡히시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자기의 제자들을 다 놓아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내 혼자 잡혀 갈 테니 이들은 풀어주라고 비는 차원이 아닙니다. 이들은 내어 보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세 있는 말씀이신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무어라고 하십니까?

 

 

 

 

9절입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결국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 일을 지금 잡히시면서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이루어 내시는 것이 예수님의 기도 중에 있었습니다.

 

 

 

 

17:12절입니다.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가지고 ‘저희를 보전하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기억이 나십니까? 우리 인간은 아무리 무엇을 보전하려고 하여도 인간의 한계로 인하여 보전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자기의 재산을 보전하려고 하여도 은행이 부도가 나는데 무슨 수로 보전을 합니까? 자기의 가진 모든 것들을 보전하기 위하여 애를 씁니다. 그 가진 것들을 보전하고 더 확장하기 위하여 우리는 신의 이름까지 거론하면서 신에게 뇌물을 바쳐가면서 자신의 소유를 보전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이 바로 어리석은 부자 인 것입니다. 오늘 밤에 내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이 모든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아무리 붙들고 보전하려고 하여도 자신의 죽음 앞에 다 빈손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떻게 자기 백성을 보전하시는 것입니까?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그 능력으로 자기의 백성들을 보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성경을 응하게 하시려고 하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응하려고, 말씀을 이루시려고 하시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6:35-40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더러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쫒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늘로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이 일을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오는 자는 아버지께서 보내셔야만 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다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잡혀 가시면서도 하시는 말씀이 자기에게 주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 내시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말씀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세상의 그 무엇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결국은 견디지를 못합니다. 말씀을 가지고 세상의 것을 준다고 하면 그러한 사람들은 많이 모이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세상의 것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최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시면서 자기의 백성들에게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 아들을 믿는 자에게 무엇을 주시는 것입니까?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얻기로 작정이 되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란 이렇게 영생을 얻은 자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루어 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그 은혜를 말씀을 통하여 더 크고 깊게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은혜를 함께 나누며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놀라운 선물을 받았고 알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다른 세상의 것들이 사소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좀더 밝히 알아 가시기를 소원합니다.

 

 

 

요한복음 18:10-11  검을 집에 꽂으라  2001. 6. 24.

 

 


이에 시몬 베드로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예수께서 베드로 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람들에게 잡히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십니다. 힘이 없어서 잡히신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찾는 자가 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잡으러 온 자들이 나가 엎드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잡히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에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십자가를 지심은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잡히시고 고난 받으시고 죽으심을 통하여 인간의 죄가 어떤 것인지를 밝히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이 자신의 죄로 인한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재판관인 빌라도가 죄 없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죽으신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죽이도록 내어주지 않으면 민란이 일어날 것 같으니까 십자가에 못 박아 죽도록 내어 준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고 고함을 질러 댄 자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신 일들이 어떠한 일들입니까? 병을 고치시고, 먹을 것을 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실 때 그들은 예수님을 임금으로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피하여 가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여 줄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치와 경제문제를 해결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미 그들은 그들 스스로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고 있기에, 로마의 세력을 꺾어버릴 정치적인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경제적인 문제도 해결하여 줄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지 위하여서 필요한 것은 힘인 것입니다. 힘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힘을 모으시려고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모았으면 무언가 비밀 조직을 만들고, 독립자금을 모으고, 결사대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러한 일들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는 일이란 게 죄인들과 친구가 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언제 한번 힘을 떨치고 일어날까하고 바라보아도 도무지 그러한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늘 생각한바가 무엇입니까? 언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왕으로 등극하실까를 기대한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한자리 차지해야지 하는 생각이 12제자 모두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들이 원하는 것은 현실적인 힘을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이 아니라 ‘’입니다. 세상 모든 나라가 추구하는 그러한 힘을 추구하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을 추구하는 나라이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다른 나라들은 말과 병거의 힘을 의지할지라도 너희는 너의 주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것이 구약의 전체 흐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끊임없이 힘을 원한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오히려 망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힘을 추구하는 모습이 예수님의 십자가 바로 앞에서 제자들을 통하여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자들을 향하여 칼을 빼들고 휘두르는데 대제사장의 종인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베어 버립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칼을 집에 꽂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칼을 준비하라고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22:35-38절을 봅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서 사라고 하십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폭력을 사용하시기 위하여 검을 사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검을 집에 꽂으라고 하시면서 왜 검을 사라고 하신 것입니까? 이것도 역시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검을 사라고 하신 것입니다. 37절에서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는 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을 보고 사람들이 저가 불법자가 되어서 저렇게 죽었다는 예언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것이라는 겁니다.

 

 

 

 

로마시대에 십자가형이란 로마인이 아닌 범죄자를 처형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형되실 때 좌우에 사형당하는 죄수 두 명과 함께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러니 악인과 함께 죽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에는 불법자가 되어서 죽은 것이구나 하는 말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이 이미 이사야 선지가가 예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3:12절입니다.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즉 이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검을 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검을 사라고 하였으니 어떻게 생각을 하는 것입니까? 그래 이제 드디어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칼을 뽑을 때가 왔다, 이제 칼을 사용하여 적을 물리치고 우리 주님의 나라를 만들어 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2:48-49절입니다. “봉독”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 입을 맞추어 인사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내가 입맞춤으로 나를 파느냐 하시자 제자들이 무어라고 합니까? 제자들이 그 될 일을 보고서 우리가 검으로 치리이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검을 사라고 말씀하셨고 두 자루가 있다고 하시자 되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칼을 사라고 하신 것을 칼을 사용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하고서 칼로 칠까요, 말씀만 하옵소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도 전에 성질 급한 베드로가 한 칼 휘두르는 것입니다. 그러자 말고의 귀가 날아 가버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하십니까?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시면서 그 떨어진 귀를 붙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칼은 왜 준비하라고 하신 것입니까?

 

 

 

 

보아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칼을 들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은 불법자다 그렇게 여김을 받게 하시는 것이 이사야 53:12절의 불법자로 여김을 받았다는 말씀을 이루시는 차원에서 검을 사라고 하신 것이지 그것을 힘으로 여기고 휘두르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힘이 없어서 잡히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베드로가 칼을 휘둘러서 예수님을 구하고자 한 것은 아직도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6:51-56절입니다. “봉독” 52절에서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하십니까? 역시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라고 하십니다. 검을 가진 자, 힘으로 무엇을 해보고자 하는 자는 다 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지금 당장이라도 내 아버지께 구하면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천사 한 명만 와도 이들을 다 쓸어버릴 수 있는데 열두 사단이 온다면 말할 것이 무엇이냐? 그런데 그렇게 된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는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다 선지자의 글을 이루려고 하시는 것이라고 5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검을 가지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힘과 권세와 기득권을 가진 자를 보고서 무어라고 합니까? 칼자루를 쥔 자라고 합니다. 칼을 쥐고 있는 자가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가 칼자루를 쥐고 싶은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힘을 가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의 힘으로 삼지 않기에 세상의 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삼는 것이 죄된 인간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무엇을 공격하시는 것입니까?

 

 

 

 

자기 스스로의 힘을 구축하는 자들을 다 공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선지서를 구역공부시간에 하고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재앙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까? 의지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재앙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앙을 내리시는 것은 헛된 것들을 의지하지 말고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습니다. 죽도록 재앙이 닥치는데도 끝까지 자기들의 힘을 의지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어떤 모습으로 세상에 보이고 있습니까? 교회는 세상이 구하는 힘을 구하는 곳이 아니라 정말 신령한 것들을 구하는 곳이라고 보이고 있습니까? 세상은 돈을 구하고, 권세를 구하고, 명예를 구하지만 교회는 정말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 거룩을 구하고, 영적인 것들을 구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볼 때에도 그렇지 못하는데 세상이 볼 때에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대입합니다. 검을 가진 자는 검으로 망한다. 교회가 힘을 추구하면 교회가 망한다. 그렇습니다. 지금 교회들마다 힘 키우기에 온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숫자도 많고, 건물도 커지고, 대단한 영향력-수와 힘에 의한-도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무엇입니까? 망한 것입니다.

이미 이러한 문제는 초대교회 때에도 있었습니다. 야고보서 2장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가 동시에 교회에 들어오게 될 때에 어떻게 대우하는가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는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면서 가난한 자에게는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교회도 힘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교회가 망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이들이 오는 것을 왜 막았겠습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대업을 이루셔야 하시는데 어린애들이 와서 방해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애들은 저리 가라는 것입니다. 왜 애들을 가라고 하겠습니까? 뱀 장사들이 장사를 하면서 애들은 가라고 합니다. 혹시나 뱀에게 물려서 다칠까봐서 가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애들은 아무리 많이 몰려와도 돈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아이들을 꾸짖은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과 함께 힘을 모아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여야 하는데 왜 애들이 와서 걸리적거리느냐는 것 아닙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시면서 아이들이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시고 어린이 하나를 모델로 세우시면서 이 어린아이 같아야 천국에 간다고 하신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착하고 순수해서가 아닙니다. 이미 창세기에서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악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름성경학교 특강강사로 오신 어느 대학교 교수가 어린이가 하나님의 창조의 원형이라고 합니다. 아직 죄가 어떤 것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죄를 조금만 좋은 환경과 교육과 격려로 고쳐질 수 있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어린아이 같아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 나라는 너희 힘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모든 것을 부모로부터 받아야 살아가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들의 힘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셔야 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나를 따라 오려거든 무엇을 하고 하신 것입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서 따라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란 자신이 살면서 여러 가지 고생하는 것을 십자가라고 하지 않습니다. 애먹이는 남편이나 자식이 내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것은 너희 힘을 포기하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너는 죽었다 하고서 따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마태복음 16:21-25절입니다. “봉독” 이 때로부터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을 말씀하십니다. 이 때란 베드로의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베드로가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말씀하시자 말리고 나서는 것입니다. 그러한 일이 일어나면 안 됩니다, 그러한 일은 우리가 맡을 테니 주님을 더욱 큰 힘을 모아서 대업을 이루셔야 합니다. 그런 간청이지요. 그때 예수님께서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왜 이러한 책망을 받은 것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로 이루어지는 나라인데 그러한 십자가의 길을 막아서고 있는 것입니다. 힘이 없어서 죽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힘을 원하고 있는 그 죄를 드러내시고 또한 자기 택하신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기 위하여 힘이 아니라 약하심으로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러한 말씀을 듣고서도 오늘 또 칼을 빼어서 휘두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베드로가 나중에 자신이 원하는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역시 약함으로 죽는 모습으로 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요한복음 21:18-19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베드로가 원하던, 젊어서의 길은 힘으로 해결하려는 길입니다. 돈으로, 칼로 해결하려는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늙어서는 단지 나이만 많아 늙어서가 아니라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알고 나서는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힘없이 죽임 당하는 길로 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까? 칼을 휘두르고 싶습니까? 칼을 도로 집에 꽂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꼭 칼만이겠습니까? 혀도 칼입니다. 말 한마디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것입니다. 나의 말 한마디가 상대를 죽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은 입 바른 소리라고 하였을지라도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죽음의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마 이러한 칼은 목사가 제일 잘 휘두를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전부다 칼을 다가지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3:1-12절을 봅니다. “1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2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3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1)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4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5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2)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7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8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9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11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12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시편 141편 3절에서는 내 입에 파수꾼을 세워주소서, 라고 하는 것입니다. 혀만 칼입니까? 자기의 이력이나 공적이 역시 칼이 됩니다. 자기의 가진 힘이 다른 사람에게 칼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러한 수많은 칼들을 빼고 싶어서 근질근질 한 것입니다. 혀가 잠시도 제 자리에 있지를 못합니다. 혀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것처럼 다른 칼들도 우리의 속에서 들썩거리고 있습니다. 여차하면 빼어서 반격을 하든지 아니면 선제공격을 하려고 눈에 힘을 주고 있습니다. 눈에 힘을 뺍시다. 어깨도 힘을 빼시고, 목의 곧음도 낮춥시다. 우리에게서 나오는 모든 칼들을 꽂으시기 바랍니다. 사단의 궤계를 대적하기 위한 말씀의 칼은 더욱 예리하게 갈아서 적을 물리쳐야 하겠지만, 주님께서 다시 꽂으라고 하시는 그러한 것들이 꽂아 지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합니까? 죄인들을 이렇게 오래 참으신 주님을 바라보시고 그분과 더 깊은 교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여 칼을 빼시는 것이 아니라 비록 칼을 맞을지라도 나는 칼을 뺄 힘조차 없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요한복음 18:12-14  대제사장 가야바  2001. 7. 1.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러라.

 

 

 

성경에서 인간이 어떠한지를 밝히고 있는 대로 인간을 알지 못하면, 인간에 대하여 수많은 환상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도 세상에서는 인간의 위대성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학이 이렇게 발달되고 있으니 앞으로는 모든 인간의 문제들을 과학이 해결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사람의 의식주뿐만 아니라 인간의 질병이나 복지까지도 인간 스스로 해결하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과학만능주의가 되어 버렸습니다. 성경을 이야기하는데 과학적인가 하고 따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변호하기 위하여 ‘창조과학협회’에서 부지런히 창조가 과학적 사실이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까? 인간이 얼마나 죄로 가득한가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를 해결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임을 또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하여 인간의 죄가 어떠함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계속하여 인간에 대한 잘못된 기대와 환상에 붙들려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결국은 죄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못하도록 너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는 인간을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자기의 주인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주인을 알아보는 짐승만도 못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수요일 저녁에 이사야서에서 이러한 내용들을 보았습니다.

 

 

 

 

이사야 1:2-4절입니다. “하늘이여 들어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죄라는 것입니다. 주인을 몰라보는 것, 기르신 아버지를 몰라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범죄요 허물이요 행악의 종자요 부패한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8:7절입니다.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과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하셨다 하라” 소나 나귀보다 못한 것이 아니라 학이나 비둘기 제비와 두루미만도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욕할 때 짐승을 빗대어 말하면 짐승이 기분 나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정도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마지막 성경인 말라기에서는 무어라고 합니까?

 

 

 

 

말라기 1:6-10절을 봅니다. “6○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비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비일찐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찐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7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주의 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함을 인함이니라 8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으로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느냐 너를 가납하겠느냐 9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를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10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 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아들은 그 아비를 공경하는 것이 당연한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시는데도 이스라엘이 공경하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이렇다고 할지라고 그러나 제사장들을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증거해야 하는 제사장들은 이렇게 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6절에서 무어라고 하십니까?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라고 합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오히려 무어라고 합니까? 우리가 언제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습니까? 하고 따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수많은 제사들이 얼마나 외식적이었느냐고 고발하는 것입니다. 제사를 다 지낸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하나님의 기쁨이 아니라 자기들의 기쁨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생각은 뒷전인 것입니다.

 

 

 

 

아모스에서 보면 무어라고 합니까? 너희가 아침마다 희생을 드리고 삼일마다 십일조를 드리고 온갖 제물을 드리지만 그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순전히 자기 기쁨을 위한 것,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함부로

제사를 드리지 못하도록 성전의 문을 닫아 버릴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결론입니다.

 

 

 

 

일반 백성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증거 해야 할 제사장이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사장의 모습이 결국 어디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제사장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는 그 중심에 대제사장이 있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경악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어디로 끌려가신 것입니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에게 가는 것입니다. 안나스도 대제사장을 지낸 사람인데 이제는 그 대제사장직이 사위인 가야바에게 가있지만 그래도 권세가 대단하였던가 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아 결박하고서 안나스에게 갑니다. 그리고 심문을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8:19절 이하를 봅니다. 대제사장이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을 묻습니다. 이러한 질문은 진리에 관심을 가지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너 이 모양 이 꼴이 되었구나, 너의 가르침과 너를 따르던 제자들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는 식의 힐난의 질문인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목사가 열심히 가르쳤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 좋아라고 따라다니다가 그 목사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서 재판정에 서게 되었을 때 아무도 그를 지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할 때 너의 가르침과 너의 제자들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 얼마나 조롱하는 것입니까? 자신은 지금 은퇴를 하였지만 아직도 대제사장의 지위보다 더한 권세와 힘을 가지고 있는데 너는 무어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는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다고 하십니다.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 말한 것이 없다 그러니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보라고 하셨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고를 받아서 다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자 옆에 있는 대제사장의 하속이 예수님을 손으로 치면서 감히 네가 건방지게 대제사장에게 그런 버릇없는 말투냐는 것입니다.

 

 

 

 

참으로 가짜 대제사장을 위하여 참된 하늘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멸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결박한 채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보내는 것입니다. 자신이 법적인 처결권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체포하여 심문하는 것도 불법입니다. 그런데도 자기의 권세와 힘을 가지고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제는 가야바 대제사장을 봅니다. 14절을 봅니다.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러라” 이 말을 가야바가 한 것은 예수님께서 백성들을 위하여 대속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오직 자기들이 살기 위하여 한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이 낫다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민란이 일어나면 로마가 무력으로 진압을 하게 되면 우리가 다 죽게 되니 한 사람을 죽여서 다수가 안전하게 지내자는 것입니다. 대를 위하여 소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가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대가 진리가 아니라도 그 속에 자신이 들어있기에 진리인 소를 희생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세상은 이 모양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다수를 위하여 소수가 희생되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수가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다수가 이기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힘으로 이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세상입니다. 민주주의라는 원리가 다수주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결정한 것은 진리이냐 비진리이냐를 따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다수 속에 자신이 들어 있음으로 안전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노아 홍수 때에 노아는 단 한 가정이었습니다.

 

 

 

 

절대 다수가 홍수를 우습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수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진리를 기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의 형태가 진리를 따르지 않습니다. 다수를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육문제의 중심에 교육부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 다수의 학부모의 욕심에 교육의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다른 부모들이 다 과외를 시키니 나도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23:2절에서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0:5절에서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신,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는 정신이 예수님을 처형하는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중심에 대제사장이 있었고 그 안에 오늘 우리도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5-52절을 봅니다. “45○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46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47○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2)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8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49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50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51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52또 그 민족만 위할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53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을 어떤 사람이 바리새인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서 예수님을 제거할 의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가 됩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왜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예수를 왕으로 삼고, 저를 따르게 되면 로마인들이 와서 자기들의 땅과 민족을 빼앗을 것이라고 걱정을 하니 가야바 대제사장이 무어라고 합니까? 대를 위하여 소를 희생하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사람 죽여서 민족을 살리는 것이 유익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악한 의도로 말하였지만 그러나 그 형식은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죽는 죽음인 것입니다. 즉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시기 위한 죽음이지만 대제사장이란 사람이 어떤 식으로 예수님을 죽이고 있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때로부터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를 하는 것입니다. 기회만 되면 예수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한곳을 더 봅니다.

 

 

 

 

마태복음 26:57-68절입니다. “57○예수를 잡은 자들이 끌고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가니 거기 서기관과 장로들이 모여 있더라 58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 59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증거를 찾으매 60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61가로되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하니 62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의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뇨 하되 63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64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5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요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66생각이 어떠하뇨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67이에 예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혹은 손바닥으로 때리며 68가로되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선지자 노릇을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더라.

 

 

 

 

가야바 대제사장이 심문을 합니다. 그런데 누구의 이름으로 맹세를 시키는 것입니까? 63절에 보시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시키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가 말하였다 하시고서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십니다. 그러자 대제사장이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이렇게 참람한 말을 하느냐고 자기의 옷을 찢으면서 화를 냅니다.

이러니 더 이상 무슨 증인이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합니다. 사형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참람 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빌라도에게 보내서 억지로 사형을 허락받아 나오는 그 중심에 대제사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께 대하여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섬기느니, 예배를 드리느니, 선교를 하느니, 구제를 하느니 하지만 과연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주고,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신을 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인간의 실상이요 한계인 것입니다. 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한다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란 인간이 신을 위하여 무엇을 거창하게 이루어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어느 정도의 부패한 종자인지를 아느냐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서의 말처럼 행악의 종자이고 부패한 자임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이러한 자임을 아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순전히 나만을 위하여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 예수님 말하고는 있지만, 아주 작은 이익 앞에 나의 양심도 신앙도 간곳이 없습니다. 나의 작은 자존심 상하는 일 때문에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부모도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자입니다. 정말 나는 구제불능의 죄인입니다.

 

 

 

 

그러니 어찌 눈에 보이지도 아니하는 주님을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말로서는 주님 앞에서 산다고 하고, 이제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라고 성경은 보고 노래는 부르지만 막상 나의 삶에서는 얼마나 주님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고백이 말씀을 통하여 나를 볼 때에 나오고 있습니까? 나오고 있다면 참으로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자신이 죄인 됨을 알고 주님 외에 나의 구원자가 없음을 아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얼마나 인간이 부패하여 있는지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러한 죄인을 위하여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이라고  말하였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뜻대로 자기 백성을 살리시기 위한 대신 고난 받으심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을 제대로 알아 가면 갈수록 할말이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입을 닫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주님의 그 은혜에 그저 감사하는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너희가 십자가에 죽인 그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이것이 사도들이 증거 한 복음의 핵심내용입니다. 얼마나 못 견디게 괴로운 소리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라면 그리스도를 죽인 자가 바로 자기 자신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살인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갈고 돌을 던졌습니다. 저놈들이 우리를 살인자로 만든다고 하면서 돌로 들어 쳐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택한 백성들을 그 복음의 소식을 듣고서 어찌 할꼬, 하면서 회개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안에서도 이러한 회개가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어찌 할꼬, 하는 회개가 말씀을 통하여 일어날 때 무어라고 합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 입니다. 이때 믿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예수님입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가 우리의 일상의 고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8:15-27  베드로의 부인  2001. 7. 8.

 

 


15○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16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 17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18그 때가 추운고로 종과 하속들이 숯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19○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20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21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22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 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23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24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25○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아니라 하니 26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의 일가라 가로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27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예수님을 죽이라고 선동하는 무리의 중심에 대제사장이 있었다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율법을 지키고 안식일을 지키고 성전을 유지하고 할례를 행하면서 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사형에 몰아넣으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참람(僭濫)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대표라는 대제사장의 모습임을 지난 시간에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지금까지 하나님을 위한다는 것이 얼마나 자기들의 배만 섬기고 있었는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빛이 와서 비추니 어둠을 사랑하는 자들이 견디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로 나아가는 것이 살길인데 오히려 빛을 꺼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예수님 당시에만 제사장이 타락한 것이 아니라 이미 제사장이 세워지고부터 계속하여 그러한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같은 레위지파인데 왜 아론과 그 직계만 대제사장을 하느냐고 고라와 다단이 원망하고 대어 들었습니다. 대제사장의 자리가 무슨 권세를 부리는 자리인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차지하려다가 죽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 홉니과 비느하스도 제사가 무엇인지 모르고 그 제물을 발로 밟아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다시 속함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제사장들의 타락이 미가서에서 잘 나와 있습니다. 이번주 성경정독집의 내용입니다. 제사장과 선지자들과 지도자들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봅니다.

 

 

 

 

미가서 3:1-3, 5,11절입니다. 11절만 봅니다. “그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이것이 예수님 오시기 약 700년 전의 모습입니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어떤 모습인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무어라고 합니까?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우리에게 재앙이 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가 자기들 가정이나 자기들 국가의 수호신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신데 이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던지 제사를 드려줄 테니 우리의 안전과 평안과 복을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대제사장이 무엇을 위하여 예수님을 죽이는 것입니까? 자기들의 안정된 직장과, 수입을 흔들고 있는 위험천만한 예수를 그냥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섬긴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말하였지만 실상은 자기들의 배를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장들의 실상이었습니다. 그들의 아비가 마귀였던 것입니다.

 

 

 

 

오늘은 베드로의 부인을 통하여 인간이 어떠한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베드로는 제사장들과 다릅니다.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누구든지 예수를 따르면 유대교에서 출교를 시켜버린다고 협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러한 협박과 상관없이 용감하게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왕이 되시면 자기들이 한자리 할 생각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제사장들처럼 예수님에 대하여 적대감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이들을 적대감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위한다고 따라 다녔습니다. 그중에 베드로가 늘 앞장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를 보면, 다른 제자들도 함께 보는 것입니다.

 

 

 

 

이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따라다니면서 말씀을 듣고 과연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자신이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됩니다, 하고서 말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하여 자신을 충성을 나타내는 것 아닙니까? 주인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무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사단아 물러가라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막아선 것이 바로 사단의 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곧 사람의 생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각=사단의 일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 자기는 정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음을 알고, 죽은 자 임을 알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면, 내가 주를 위하여 힘을 다하여 봉사하고 헌신하고 충성하는 것으로 자기 십자가를 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충성도를 보고서 하나님께서 내신 성적을 매기듯이 그 충성도에 따라 차별적으로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면 이 세상에서 자자손손 복을 받는다고 하니 아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미가서에 나타나는 제사장이나 선지자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입에 물려주면 평강이요 물려주지 아니하면 전쟁인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님께 목숨을 바쳐 충성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결심과 목숨을 건 결단입니까? 마치 청소년이나 젊은이들이 수련회나 집회에 가서 설교를 듣고, 기도회를 하면서 분위기가 고조되면 선교사 나갈 사람 하면, 죽기를 각오하고 일어서는 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리고서 기도하라고 하면 주여, 제가 주를 위하여 죽겠나이다. 이 한목숨 바쳐 주의 일을 감당하겠나이다, 하고 기도합니다. 물론 그때 그 마음이 진심일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진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잘 변하는지 그 기도회 자리 일어서면서 깔고 앉았던 신문지 한 장 제대로 들고 가지 않는 것입니다. 돌아서면서 신발 없어졌으면 난리가 나는 것입니다. 방금 주를 위하여 죽겠다고 한 것은 다 어디로 간 것입니까?

 

 

 

 

요한복음 13:36-38절을 봅니다.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 오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의 목숨을 걸겠다는 것이 헛말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진심이고 충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베드로의 말에 고맙다고 하시거나 책망하시거나 하시지 않습니다. 담담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보다 좀더 강력하게 나타나는 곳을 봅니다. 
 

 

 


마태복음 26:31-35절입니다.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하고 모든 제자도 이와 같이 말하니라

 

 

 

 

베드로가 다른 사람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자기는 버리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부인하리라 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진실로를 두 번이나 말씀하시면서 네가 나를 부인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진실로, 라는 말은 아멘이라는 말입니다. 아멘으로 말하노니 너는 나를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부인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누구 말이 맞았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의 말씀이지요!

 

 

 

 

그러면 베드로의 진심이 지금 엉터리입니까? 거짓으로 이렇게 말한 것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다른 제자들도 시기심에 버리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목자를 치면 양들이 다 흩어지리라는 말씀이 응하는 것입니다. 누가 십자가까지 따라 갑니까? 그런데 베드로와 다른 한 제자가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끌려가시는 곳까지 따라 갑니다. 이것이 대단한 용기입니다. 칼을 휘두르는 것도 용기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은 다른 제자들은 다 도망갔는데 베드로와 다른 한 제자가 안나스 대제사장의 뜰에까지 따라 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 제자는 누구입니까? 요한복음 18:15절에 보시면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이면서도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사도 요한으로 성경학자들이 보고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이 제자라는 표현으로 자신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도 요한이야 대제사장과 아니까 들어간다고 하여도, 베드로는 대제사장과 알지도 못하는데 그 제사장의 뜰에까지 따라 갔으니 대단한 용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요한복음 보다 더 생생하게 부인하는 마태복음을 다시 봅니다.

마태복음 26:69-75절입니다.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하신 말씀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가 죽을지언정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죽는 자리까지 함께 하겠다고 맹세를 하였지만 그러나 계집종 앞에서조차 예수님을 부인한 것입니다. 단순한 부인이 아니라 맹세하고 저주하면서까지 세 번을 부인하니 이제야 닭이 운 것입니다. 닭이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하기까지 기다린 것 아니겠습니까? 두 번 부인할 때 닭이 울었다면 베드로가 정신이 번쩍 들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세 번 부인을 하고나니 곧 닭이 울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부인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이러한 베드로의 부인한 내용의 설교들을 들으면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한 이유는 두 가지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마태복음 26:41에 나와 있는 대로 기도 실패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이 피곤하여 누워 잤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 실패로 인하여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였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마태복음 26:58절처럼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였으니 기도에 깨어 있어서 실패하지 말고, 예수님을 멀찍이 따라가지 말고 바짝 따라가라는 이야기를 아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면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는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예수님께서 진실로 진실로 네가 나를 세 번이나 부인하리라는 말씀은 공수표가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또 이렇게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부인한 것이 자기 잘못이 아니지 않습니까?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배신하고 파는 것이 자기 잘못이 아니니 억울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질문이 나올 만 합니다. 그러면 무어라고 대답하는지 아십니까? 그런 질문하는 사람을 위하여 지옥을 만들어 놓았다고 대답을 합니다만, 그러나 이것을 통하여 성경을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 
 

 

 


인간이 아무리 결심하고 다짐하고 최선을 다하고 목숨을 바친다고 하여도 그것이 주님을 위한 일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해서 죽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죽지 않도록 목숨 바쳐 막아낸다고 막아질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자기들의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어떻게 예수님께서 잡히시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베드로가 목숨을 바친다고 한들 예수님의 십자가로의 길은 막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은 어떠한 인간도 만들어 내거나 거부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 홀로 창조하신 것처럼 십자가를 통하여 자기 백성을 창조하여 내시는 것도 하나님과 그 아들과의 언약으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을 성경에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그렇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서도 나중에 어떻게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2:31-34절입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니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으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 하였나이다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옥에도 가고 죽는 자리에도 가기를 준비하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각오하고 준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결심과 준비와 각오가 어떤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막상 위협 앞에서 도망가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돌이키게 된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하여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맹세와 저주로 예수님을 부인하였지만 그 부인한 것보다 주님의 기도의 능력이 더 크시기에 베드로를 돌이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자신이 옥에도, 죽는 자리에도 가겠다고 하였을 때에는 부인하였지만 성령이 오시고 나서는 옥에도 가고 죽는 자리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순교의 길은 베드로가 간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그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자기가 한 일을 주님을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부인하였지만 주님께서는 다시 찾아오셔서 자신의 말씀을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자주 주님을 부인하고 있습니까? 사람들 앞에서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시인을 하고 있습니까? 학생들이 학교에서 밥 먹을 때 당당히 기도하십니까? 회사에서 회식 가서 음식과 술이 함께 나와 있는 자리에서 주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까? 이런 것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의 상황 속에서 주님이 나의 주인이 아니라 내가 언제나 주인이 되어서 내 뜻대로 살고 있는 모든 것이 사실은 주님을 부인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를 하면서도 나의 위신과 체면과 자랑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질문을 하면서도 답을 하면서도 자기 과시가 나오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설교를 하면서도 자기 과시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이렇게 말씀을 듣고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나의 실력이 아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다시 찾아오셔서, 그 기도하시고 말씀하신 내용을 이루어 가신 것처럼 오늘도 자기의 백성들을 향하신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이루어 나가시고야 마실 것입니다. 이러한 신실하신 주님 앞에 더 이상 고집부리지 마시고, 이러한 주님의 고집스러운 사랑 앞에 항복하는 기쁨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8:28-32  행악자  2001. 7. 15.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하니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예수님을 죽이는 중심이 하나님의 율법을 잘 안다는 대제사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예수님께 충성을 다짐하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하여 죽을지언정 부인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베드로도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나 죽도록 충성하겠다는 자이거나 간에 50보 100보입니다. 노골적으로 죽이려는 자나,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부인하는 자나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주님께로 돌이키는 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였기 때문에 배신하였을지언정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것은 결코 자기의 장담이나 결심으로 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 주님을 부인하고 배신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데 언제 주님을 부인하고 실족하고 넘어지는 것입니까? 무언가 좀 안다고 할 때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나서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과 부인하기 전의 모습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부인하기 전에는 매사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내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못 바치리요! 시간도 물질도 나의 목숨도 주를 위하여 바치겠습니다, 하고서 따랐습니다.

 

 

 

 

그러나 부인하고 나서는 그러한 자신감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 오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에 전에 같으면 그러면요, 제가 사랑하지요, 다른 사람들은 다 사랑하지 않더라도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였을 텐데 무어라고 합니까?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지는 주님이 아십니다, 라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부인후의 모습입니다.

 

 

 

 

오늘날도 신앙생활에 있어서 무엇이 가장 문제이겠습니까? 노골적으로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이 아니라 자기는 예수님을 잘 알고 충성한다는 열심파들이 더 문제입니다. 자신의 생각과 방향이 주님을 위한다는 것이 제일 문제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라는 고정관념이 머리 속에 들어있어서 자기 생각대로 일이 추진되지 않으면 기분 나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의 주장과 고집대로 밀고 나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이 하는 말은 언제나 무엇을 동원합니까? 성경을 동원합니다. 물론 아전인수격으로 적용을 하면서 자기의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합니다.

 

 

 

 

목사가 이러한 잘못을 가장 많이 하겠지요. 자기 과시를 위하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자고 하면서 온갖 성경구절을 동원합니다. 자기 목회 성공을 위하여서 전도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구워삶아서 데려다 놓으라는 것입니다. 목사가 그럴 수 있다고 하니 은근히 기분이 좋아집니까? 그래 목사도 별수 있겠나, 그러십니까? 그런다고 여러분이 피할 수 있겠습니까? 목사가 왜 자기를 치겠습니까? 다음 타켓은 바로 여러분입니다.

 

 

 

 

성경을 좀 안다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들은 무언가 배웠다는 것입니다. 나는 제자훈련 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구역장 훈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목사 앞에서는 내가 비록 배우는 자이지만 그러나 구역원들 앞에서는 내가 가르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사를 성경적이라고 말은 하는데 그것이 늘 자기의 주장에 뒷바라지 하는 성경구절밖에는 동원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섰다고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주의하라는 말씀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면 무엇을 얼마만큼 알겠습니까? 차라리 몰랐으면 나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는 것이 병입니다. 죄인이기에 알면 아는 것만큼 겸손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교만하여 지는 것입니다. 벼는 익으면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빈 깡통이 요란하다는 말이 왜 나왔겠습니까? 뭔가 알지도 못하면서 무언가 안다고 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으니 그러한 속담으로 사람들의 입을 좀 막아 보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성경은 어떻습니까? 성경은 세상의 지식이 아니기에 성경은 알면 알수록 겸손하여 집니까? 물론 성령의 역사로 제대로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어줍쟎게 성경을 보면 역시 성경을 가지고서도 자기 치장과 자기 자랑으로 사용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로 가는지를 오늘 말씀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인간이 성경을 가지고 어느 정도로 사용하고 있는지를 점검하고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먼저 안나스에게 갑니다. 그해 대제사장이 가야바인데 종교적인 문제로 재판을 하려면 가야바에게 먼저 와야 하는데 가야바의 장인인 안나스가 더 큰 실권을 가지고 있었던지 안나스에게 먼저 갔다가 가야바에게 결박한 대로 끌고 갑니다. 그러면 가야바가 그 해 대제사장이기에 유대인의 율법의 문제라면 자신들이 처결할 수가 있습니다.

 

 

 

 

로마가 다스리고 있더라도 유대인들의 자치권을 어느 정도 인정하여 주고 있습니다. 특히 종교적인 문제는 로마가 관대하게 자율권을 주고 있습니다. 그래야 전세계를 장악하는 일에 걸림이 덜 되기 때문입니다. 궁예가 유명한 스님들을 공개처형을 하자 백제의 견훤왕이 무어라고 하였습니까? 백성들의 종교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은데 궁예, 실수하는거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의 종교란 목숨을 거는 것이기에 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다스리려면 종교는 관대하게 처리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성전과 모세율법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내어 놓는 일을 얼마나 잘하는지 요세푸스라는 사람의 유대전쟁사를 보시면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유대를 다스리는 로마의 분봉왕들이 제일 신경 쓰이는 문제가 유대인의 종교문제였습니다. 그러므로 되도록 유대인들 자치회인 70인 공의회 같은 곳에서 해결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금지하고 있습니까? 사형만은 로마의 허락을 받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에 의하면 사형에 해당하는 죄들이 율법에 나와 있습니다.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들 중에 안식일에 일을 한다든지 우상숭배를 하게 한다든지 그 아비를 욕하거나 치는 자라든지 수많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목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죄에 대하여 두 사람의 증인만 있으면 돌로 쳐 죽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시에 현장에서 간음하던 여인을 끌고 와서 무어라고 합니까? 이러한 자를 모세율법에 의하면 돌로 쳐 죽여라고 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때 하신 말씀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돌을 놓고서 돌아서 간 것입니다.

 

 

 

 

아니 이러한 여인은 자신들이 돌로 치려고 둘러섰는데 왜 예수님은 바로 돌로 치지 않고 빌라도에게 재판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벌써 영향력이 있어서 그렇게 하였습니까? 그럴 수도 있었겠지요. 백성들이 그를 선지자로 여기고 있기에 자기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로마의 힘을 빌어서 처형을 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처형도 결국은 예수님의 예언대로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0:17-19절.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고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유대인들만의 죄를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유대 땅에서 유대인들 만에 의한 처형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에 의하여 재판을 받음으로 인하여 모든 인류가 합동으로 예수님을 죽인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24-28절.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전도하지 못하도록 하는 자들 앞에서 이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시편 2편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을 합동으로 죽인 자들이 지금 제자들을 위협하고 있으니 주님께서 하감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유대인들만이 죽인 것이 아니라 합동으로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볼 때마다 합동이라는 교단이 생각납니다. 오늘도 자기들의 힘을 불리기 위한 것이 교단들의 정책입니다. 서로 장자교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만 교회 운동을 벌리고 있습니다. 누가 더 덩치가 크냐의 싸움입니다. 누가 예수님께 가까우냐가 아닙니다. 누가 더 진리냐가 아닙니다. 진리라고 말하면서도 진리를 이용하여 자기의 몸집을 키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느 특정교단이나 교파이 문제입니까? 대부분의 교회들의 모습이고 더 좁히면 우리 개인의 문제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죽이면서 무어라고 합니까? 예수님을 행악자라고 고발합니다. 무엇에 근거하여 행악자라고 합니까? 자기들의 율법에 근거하여 행악자라고 합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너희의 율법 문제라면 너희가 알아서 해결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자기들에게는 사형권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죽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왜 죽이려고 합니까?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긴 행악자라는 것입니다. 이정도로 자신들을 율법을 잘 지킨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잘 지키고 있습니까?

 

 

 

 

요한복음 18:28절에 보시면 예수님을 결박하여 끌고 가는 무리들이 빌라도의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밖으로 나와서 고소건을 받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자기들이 유월절 잔치를 먹기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유월절은 하루입니다. 그러나 유월절 다음날부터 무슨 절기입니까? 무교절입니다. 주일 저녁에 나오신 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무교절은 집안에서 누룩을 내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의 집안에는 누룩이 있기 때문에 이방인의 집안에 들어가게 되면 부정하게 되기에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교절의 규례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자기 집안에 누룩을 내어 버리라고 하셨지 남의 집에 들어가면 그 집안에 누룩이 있다면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자의적으로 해석을 하여서 적용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장로들의 유전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인 것입니다. 이러한 장로들의 유전까지 지키면서 지금 하고 있는 짓이 무엇입니까? 율법의 제정자를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동일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싸움이 어디에서 시작이 됩니까? 자기 정당성을 위하여 싸우는 것입니다. 자기가 옳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 근저에는 자기의 자존심이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최고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여 상대방을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가지려하고, 힘을 가지려하고, 지식을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싸움을 보면 힘으로 누르고, 지식으로 누르고, 그것도 안 되면 나이로도 누릅니다. 너 몇 살이냐는 것입니다. 그것도 안 되면 목소리로 누릅니다. 목소리가 크면 대부분 이기지요! 그것도 아니면 깡으로 악으로 버티는 것입니다. 그러다가도 안 되면 할 수없이 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마음으로 항복을 하지 않습니다. 두고 보자, 내가 이번에는 졌지만 다음에는 꼭 원수를 갚고 말거야 하면서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나타납니까? 성경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성경을 다 동원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행악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완전히 전쟁터입니다. 누르고 던지고 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말이 안 되면 그래 주님은 내 마음 아시겠지, 라고 합니다. 이것으로 상대방을 또 깔아뭉개는 것입니다. 자기는 고상하게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사람이고 상대방은 마귀새끼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우리의 부부간에 부자간에 목사와 성도 간에 일어나지 않습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워서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디어 이겼습니다. 드디어 상대방을 행악자로 몰아부쳐서 이겼습니다. 왔노라 싸웠노라 이겼노라고 만세를 부르는데 그런데 자세히 보니 거기 피 흘려 죽어있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죄라는 것입니다.

 

 

 

 

시편 94:20-23절을 봅니다. “율례를 빙자하고 잔해를 도모하는 악한 재판장이 어찌 주와 교제하리이까 저희가 모여 의인의 영혼을 치려하며 무죄자를 정죄하여 피를 흘리려하나이다” 이것이 이미 시편에 예언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율례를 빙자하여, 율법을 가지고 무죄한 자에게 죄를 정하여 피를 흘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도 그대로 들어있음을 오늘 말씀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습니까? 나의 말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서 상대방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행동이 상대방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아는 사람은 성경을 아는 것으로,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은 자기 기도하는 것으로, 헌금 많이 하는 사람은 자기 헌금하는 것으로, 전도 많이 하는 사람은 자기 전도하는 것으로, 찬양대는 자기 찬양하는 것으로, 모두가 또 다른 이기적인 집단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전도회가 많으면 월례회 장소를 가지고 싸우는 것입니다. 직분을 가지면 그 직분으로 상대방을 누르는 것입니다. 섬기라고 세운 자들이 섬기기는커녕 권세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인하여 오늘도 주님은 현저히 욕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6:4-8절입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 땅이 그 위에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컹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이 말씀을 보시면 또 다시 이러한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아니 한번 구원하셨으면 끝까지 구원하신다고 하고서는 왜 이렇게 말씀하시는가 하시는 분은 아직도 자기가 주인이고 자기의 구원만을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아직도 악한 밭이라는 것입니다. 주인이 쓰시기에 합당하지 않고 아직도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가시와 엉컹퀴가 가득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는 말씀 앞에서 회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나의 가진 것을 가지고 상대방을 죽이는 일에 사용하고 있는지를 보자는 것입니다. 나는 의롭고 너는 행악자라고 몰아치는 것이 우리의 일상입니다. 이러한 악으로 인하여 주님이 죽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을 우리가 안다면 이제 입을 좀 닫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가는 비수들을 도로 집에 꽂아야 할 것입니다. 이 주님 앞에 겸손히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용서받은 행악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요한복음 18:33-38  진리가 무엇이냐?  2001. 7. 22.

 

 


28○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29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30대답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31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하니 32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33○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3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35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36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38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오늘 우리가 여기에 왜 모였습니까? 진리의 말씀에 관심이 있어서 모인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것에 관심이 있어서 모였습니까? 찬양대 지휘자는 오늘 아침에 나오면서 가장 우선적인 관심사가 무엇이었습니까? 오늘도 내가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지 그것이 우리의 생명이고 그 말씀만이 진리이다,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나왔습니까? 아니면 오늘 찬양은 어떤 식으로 해야지, 하는 생각으로 나왔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후자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은혜를 제일 받지 못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찬양대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기도합시다, 그러면 뒤적뒤적 거리며 찬송가 펼치기 바쁘고, 아멘 하기도 전에 눈뜨고 지휘자 봐야하는 것입니다. 아주 바쁩니다. 그러다가 찬양이라도 제대로 되면 뿌듯함을 느끼고, 혹시 누가 목소리라고 튀어 나오면 그날은 예배고 말씀이고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표기도 하는 사람도 자기가 기도를 잘했는가, 못했는가에 관심이 가는 것입니다. 또 다른 특별순서 맡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서 죽는다는 생각으로 하지 아니하고 이렇게 설교하면 교인들이 감동을 받을까? 나를 좋은 목사로 알아줄까? 이러한 설교를 한다면 이미 그것은 간사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로 모이는 것은 오직 진리에 관심을 가지고 모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무어냐를 빌라도의 질문을 통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을 잠시 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결박하여 안나스에게 갔다가, 그 해 대제사장 가야바에게로 갑니다. 그리고 빌라도에게 사형 허락을 받기 위하여 빌라도의 관정으로 몰려갔습니다. 이 빌라도가 바로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 나오는 빌라도입니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하는 그 빌라도입니다. 그러나 빌라도 혼자서 한 일이 아니라 그 세대의 모든 사람들이 합동으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이 빌라도는 로마의 총독으로 유대 땅에 와 있습니다. 유대의 왕은 헤롯이라고 따로 있습니다. 이 헤롯은 예수님 태어나실 때 그 헤롯은 아니라 헤롯의 아들입니다. 우리나라 식으로 말하자면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의 황제가 있었지만 실권은 일본의 총독부가 다 쥐고 있는 것으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빌라도가 로마의 총독으로 유대 땅에 와있는데 자기가 다스리는 땅에서 민란이 일어나면 자신의 책임이기에 늘 민심을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몇 십 년 전에 터키에 있는 성 소피아 사원에서 빌라도가 시저 황제에게 보내는 보고서가 발견되었습니다. 진위 여부는 논란이 있지만 그 당시의 배경을 충분히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빌라도의 보고서라고 해서 작은 책자로도 나왔습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빌라도가 치안을 담당할 만큼 많은 군대를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무조건 힘으로 유대민족을 억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적당하게 타협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대의 기득권층과 서로 결탁을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들, 서기관들, 산헤드린 공회 같은 지도층과 서로 결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심을 살피게 되어 있는데 예수라는 민중의 지지를 받는 자가 있으니 정탐을 보내서 보고를 받는 것입니다. 죽은 자도 살렸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였다. 이러한 보고들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며칠 전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에 수많은 군중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고 외친 그 사람입니다. 이 예수가 만약 민중들의 지지를 입어서 반역을 일으키면 자신의 힘으로 감당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가 자기에게 끌려 온 것입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33절을 봅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이 네가 물어보고 싶은 것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서 묻는 거냐고 하십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들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유대 땅을 로마가 다스리고 있는데,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면 어떻게 네 나라 백성들이 나에게 넘겨줄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대답이 36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 넘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볼 때에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다고 고발을 받았는데도 예수님의 대답은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보는 나라는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세상뿐입니다.

이것이 빌라도의 진리관입니다. 그러나 다시 빌라도가 묻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고 하니 그러면 이 세상에서 왕이 되려면 땅이 있어야 되고 백성이 있어야 되고 주권이 있어야 되는데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면 그러면 너는 왕이 아니구나? 이러한 질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니라 내가 너의 말처럼 왕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왔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왕은 왕인데 어떤 왕입니까? 무슨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입니다. 왕은 왕인데 이 세상에 속한 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자신이 왕으로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대답이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고는 그 진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지 아니합니다.

 

 

 

 

38절입니다. 진리가 무엇이냐 묻고서 다른 말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질문을 하여 보니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니 로마를 반역할 그러한 죄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죄를 찾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월절 특사로 풀어주면 되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빌라도도 한편으로는 예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9:8절입니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유대인들이 고발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다고 하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아내도 예수에 대하여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7:19절. “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빌라도의 부인까지 이런 이야기를 하니 빌라도가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두려움보다 빌라도의 진리는 무엇이었습니까? 결국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진리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가 무엇이냐 하고서는 더 이상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진리가 밥 먹여 주냐 그런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으라고 그러면 바빠서 교회 못 간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교회 나가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사람들이 하는 말이 교회가면 밥을 주나 떡을 주나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의 진리란 우선 내가 먹고 사는 것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니고서 교회 나가는 것은 사치스러운 취미생활로 보이는 것입니다. 먹고 살만 하니 교양삼아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모든 종교의 발생이 사후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발생된 것입니다. 그러니 일단 먹고 살만하면 나중에 죽어서 어떻게 되지, 그래 죽어 봐야 알겠지만 그러나 만약에 사후의 세계가 있다면 어느 정도 신에게도 잘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다른 데 기부도 하는데, 장래를 대비하여 보험 들 듯이 사후세계를 위하여 보험 하나 들어 두는 것도 괜찮은 것이지 라는 생각들을 합니다.

 

 

 

 

보험이라는데 사고가 안 나면 그만이지만 만약 사고가 나면 얼마나 큰 혜택을 받습니까? 그러니 지옥이 없으면 좋겠지만 혹시라도 있다면 사후보험이라고 생각하고 종교 하나 가지겠다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관이란 결국 자기 몸에 한하여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진리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나에게 무슨 도움과 이익이 되는가를 따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철학적으로 실용주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오늘날 교회들도 진리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실용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라고 이야기를 하면서, 인간의 죄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저 사람들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이렇게 좋고 저렇게 좋다고 선전을 합니다. 예수에 대하여 전혀 필요를 느끼지도 않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증거 하고자 하니 믿게 되면 따라오는 것들을 경품처럼 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 모두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후의 세계도 이야기하지만 단지 종교적인 차원에서 죽어 극락 가는 정도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느 나라 왕입니까? 오늘 말씀에 의하면 진리에 속한 자들에게 왕이라는 것입니다. 진리에 속하지 아니하면 예수님을 왕으로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똑똑하지 못해서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로마의 총독입니다. 지혜도 있고 권세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직접 진리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진리에 속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빌라도의 진리란 손에 만져지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진리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나라는 허상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이 세상에 보이는 것들이 허상이고, 주님이 약속하신  세상이 눈에 보이거나 드러나지 않았다 하여도, 주님의 약속의 말씀만이 진리임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진리이신 예수님을 믿고, 진리의 말씀을 듣는 것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구하고 찾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내 마음의 위안이나 받고자 하는 사교단체가 아닙니다. 자기의 힘과 능력을 과시해보는 곳도 아닙니다. 오직 이 세상이 불타 없어질 세상임을 알고서 주님의 피로 만들어진 그 나라와 그 의를 사모하는 곳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우리의 왕이라고 하면서도, 이 세상의 임금이 줄 수 있는 것을 구하고 있다면 이것이 진리에 속한 자녀라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주기기 위함이 아닌 것입니다.

 

 

 

 

다시 36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 넘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속한 나라를 위하였다면 오늘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싸움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온갖 세상의 우상들을 부수어 내어야 하고, 예수 믿지 않는 세력들을 힘으로라도 물리쳐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러한 전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는 것입니까? 함께 떠나자는 것입니다. 이미 심판을 받아 마땅한 곳에 무얼 거리 애착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의 예화 중에 타이타닉호를 이야기합디다. 지금 물속에 가라앉고 잊는 타이타닉호 위에서 귀하신 분들이 온갖 사치스러운 모임을 가지고 지상의 낙원인냥 그렇게 즐기고 있었지만 바다 속으로 침몰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침몰하는 타이타닉호에서 무엇을 해야 합니까? 탈출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이것이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시작 전에 세 가지의 유혹을 받았습니다. 이 세 가지를 세상이 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공중권세 잡은 자가 줄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세상에서도 부자 되고 잘된다고 하면 그러면 예수 믿지 않는 자는 모두가 가난하고 저주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훨씬 잘되는 것입니다. 육을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들을 거두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은 무엇을 심는 것입니까? 성령으로 심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거두는 것입니까?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얻는 것을 사람이 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사단의 세 가지 제안을 거절하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단이 줄 수 있는 그러한 것을 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로마 황제가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로마의 황제가 줄 수 있는 것을 진리로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 힘없이 잡혀있는 예수가 준다는 진리는 진리로 여겨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빌라도뿐이겠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이 원하고 바라는 것들이 사실 빌라도가 원하고 있는 것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진리이신 예수님을 발 앞에서 차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이러한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세상의 것들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죄로 인하여 자신의 살과 피를 주셔서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이 주님의 일이라는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결코 이 세상의 것들이나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5:18-19절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이 미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어떻게 대접을 받고, 세상의 사랑을 받고 살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아니 그러면 교회가 세상이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면 누가 교회에 나오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구하려면 교회에 나오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무려 천만 명이 넘는다고 하니 도대체 교회에서 무엇을 준다고 하였길래 이다지도 많이 몰려 왔을까요?  
 

 

 

 
진리가 밥 먹여 줍니까? 오히려 고생을 합니다. 그런데도 진리가 좋다고 따라나서시겠습니까?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면 그 사람은 진리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우리가 알고 받았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세상 것 주지 않는다고 하는데도 나오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진리에 속한 사람이고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 다 없어져도 예수님만으로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진리에 속한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8:38-40  예수냐? 바라바냐?  2001. 7. 29.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

 

 

 

빌라도가 예수를 심문하여 보아도 로마를 반역할 정치적이 범죄가 아니라 그들의 종교적인 문제임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면서도 이 땅에 속한 왕이 아니라고 하면서, 진리에 속한 자들은 알아듣는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정치적인 문제로 죄가 없는 것을 알고서 풀어 주려고 합니다. 자기 아내가 그 옳은 사람에게 해를 가하지 말라는 말도 듣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두렵기도 하여서 무죄 석방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하여 누가 복음을 한번 봅니다.

 

 

 

 

누가복음 23:13-25절입니다. “13○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14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을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어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15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저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 16그러므로 때려서 놓겠노라 172)(없음) 18무리가 일제히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우리에게 놓아 주소서 하니 19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러라 20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저희에게 말하되 21저희는 소리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22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 23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24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25저희의 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를 놓고 예수를 넘겨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

 

 

 

 

백성들이 예수를 고소하면서 갈릴리에서부터 유대까지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고 자칭 왕이라고 하면서 고발을 하자 빌라도가 갈릴리 출신이라는 말을 듣고 헤롯에게로 보냅니다. 헤롯이 갈릴리 지역의 분봉왕인데, 그때 마침 예루살렘에 있었기에 빌라도가 예수를 헤롯에게 보냈습니다. 그러자 헤롯이 예수의 소문은 들었지만 직접 만나지는 못하여 궁금하여 했는데 직접 보게 되어 기뻐하였습니다. 헤롯이 기뻐한 이유는 무슨 기적을 한번 볼까 하였는데 예수님은 헤롯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자 화가 난 헤롯이 예수를 업신여기고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서 빌라도에게 다시 보냅니다. 그러자 그 날에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는 서로 친구가 된 것입니다. 공동의 적이 생기게 되니 어제의 원수가 오늘의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이란 이렇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한자리에 앉아 있어도 어떠한 이해의 문제에 부닥치면 당장에 나타날 현상들입니다. 누구든 진리편이 아니라 자기 이익 편에 서게 되어 있습니다. 어제까지 서로 원수처럼 지내더라도 그 원수 간에 공동의 적이 생기면 당장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 된 현실입니다.

 

 

 

 

이제 다시 빌라도가 예수를 재판하여야 하는데 헤롯도 저의 죄를 찾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죽일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때려서 놓아주겠다는 것입니다. 죄가 없는데 왜 태장을 가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민중들의 욕구를 채워 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이미 로마의 정치술이고 오늘날도 정치적인 제스추어들로 사용하는 것들입니다. 로마에서는 노예 검투사들을 동원하여 피를 흘리는 전투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민중들의 욕구를 그런 것으로 대리 만족시키는 것입니다.

 

 

 

 

군사 독재정권 때는 자기들이 더 큰 강도요 깡패들이면서 오히려 사회악을 일소한다면서 전국적으로 깡패와 건달들을 잡아 들여서 삼청교육대에 보낸 것입니다. 이름이 범죄와의 전쟁이지요. 어떤 사람은 전혀 깡패가 아닌데 술에 취하여 길에서 자다가 붙들려 간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프로스포츠를 만들고 대통령이 시구하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치적인 행위를 하면서도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고자 한 번 더 최종적인 제안을 합니다. 상당히 풀어주고자 애를 쓴 것입니다.

 

 

 

 

마태복음 27:15-26절을 봅니다. “15명절을 당하면 총독이 무리의 소원대로 죄수 하나를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16그 때에 바라바라 하는 유명한 죄수가 있는데 17저희가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가로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이는 저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줄 앎이러라 19총독이 재판 자리에 앉았을 때에 그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을 인하여 애를 많이 썼나이다 하더라 20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를 권하여 바라바를 달라 하게 하고 예수를 멸하자 하게 하였더니 21총독이 대답하여 가로되 둘 중에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가로되 바라바로소이다 22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저희가 다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빌라도가 가로되 어찜이뇨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24빌라도가 아무 효험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가로되 1)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백성이 다 대답하여 가로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찌어다 하거늘 26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최종적인 제안이 예수냐, 바라바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죽일 만한 죄를 재판장이 찾아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라바는 어떤 사람입니까? 유명한 죄수입니다. 이 죄수는 민란을 주도한 사람이요 살인한 강도입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백성들의 지도자들이 시기심으로 예수를 넘긴 줄을 알고서 유월절 특사로 예수냐 바라바냐로 제안을 합니다. 설마 살인강도를 원하겠는가 하는 생각이었겠지요?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무리들을 충동질 합니다. 바라바를 달라고 하고 예수를 멸하자고 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바라바를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는 어떻게 하려는가 하니 그는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계속 고집을 하다가는 민란이 일어날 것 같으니 나는 책임이 없다고 하면서 손을 씻으면서, 이 사람의 피에 나는 무죄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처형 판결은 빌라도가 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라도에게 진리란 무엇입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던 권세와 지위가 진리였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무어라고 대답합니까?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소서라고 합니다. 결국 살인강도 바라바는 살리고 예수는 죽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선택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를 선택하겠습니까? 나는 그 당시에 있었다면 예수님을 살리라고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십니까? 아무리 그렇지 어떻게 살인강도를 살리고 그렇게 착하신 예수님을 죽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시는 생각이 드십니까? 이러한 분은 아직도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택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의 이익을 택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나의 이익이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 앞에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는 예수님을 선택할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를 선택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 우리를 무시하셔도 그렇게 무시할 수가 있습니까? 지금 나는요, 그래도 미신적이거나 기복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성경적으로 예수님을 믿는다구요,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하지요, 라는 생각이 됩니까?

 

 

 

 

그러나 자신의 모습을 오늘 아침 눈 뜨면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고 무엇을 중심으로 행동하였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예배에 간다고 나오시면서, 좀더 일찍 일어나서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들이 기분 좋게 예배당에 갈수 있도록 배려하셨습니까? 아니면 어제 저녁에 더워서 잠도 못 잤는데 5분이라고 더 자려고 신경질 내지는 않았습니까? 우리는 진리를 선택할 만큼 그렇게 괞찮은 사람들이 아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알아가는 것이 신앙의 출발이고 복음의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살인강도가 어떤 강도였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오늘날 몸에 문신 새기고, 유흥가를 주름잡는 그런 살인강도가 아닙니다. 요즈음 ‘미션 바라바’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일본의 거대한 야쿠자의 부두목쯤 되는 사람입니다. 어느 정도의 범죄자인지 짐작이 가시겠지요! 이런 자가 한국 여인을 만나서 지극한 사랑과 기도로 사람이 바뀌어 전도자가 되었다고 해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러한 강도도 예수님 믿어서 새로운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라바를 이러한 강도와 같은 수준에 놓는다면 굉장히 기분 나쁠 것입니다. 바라바는 민란을 주도한 사람입니다. 자기의 민족을 로마의 속박에서 해방시키고자 일어난 사람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로마군에만 피해를 입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들에게도 피해를 입혔겠지요!

 

 

 

 

마치 우리나라에 빨치산들이 민중을 해방한다고 하면서도 그들의 모든 군수품을 자급자족해야 하는 상황에서 민중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 땅에도, 이 당시에 수많은 강도떼들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자들은 정말 물불 안 가리고 동족이든 적이든 간에 강도짓을 하는 자들이 있었고, 바라바 같은 경우는 민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왜 민란을 일으킨 것입니까? 지금의 지도층을 갈아 치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민란을 일으키면서 살인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로마군에 의하여 잡힌 것입니다. 이러한 민란에 대하여는 요세푸스가 기록한 역사서에 아주 상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도 이러한 민란 주도자들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는 곳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5:36-37절.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 졌느니라.” 이 말은 베드로와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자 소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들을 잡아다가 위협합니다. 그러자 이들이 담대하게 우리가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을 때 바리새인 중 가말리엘 교법사가 모든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이들을 그냥 두라고 합니다. 드다라는 사람도, 유다라는 사람도 일어났지만 그들이 죽으니 곧 흩어져 버렸는데 지금 이들도 사람에게서 일어 난 일이라면 가만히 놓아두어도 스스로 무너지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의 일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이라고 하자 그들을 놓아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이 지금까지 살아 역사하여 이곳까지 온 것을 보면 사람이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이러한 말을 하면서 예를 든 내용이 그 당시에 수시로 백성들을 모집하여 민란을 일으킨 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기에 무언가 특별한 사람이 나왔다 그러면 이 사람이 메시아인가 하여 이리 저리로 나가 보는 것입니다.

 

 

 

 

한곳을 더 보자면 사도행전 21:37-38절. “바울을 데리고 영문으로 들어가려 할 그 때에 바울이 천부장더러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말할 수 있느뇨 가로되 네가 헬라말을 아느냐 그러면 네가 이전에 난을 일으켜 사천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 아니냐” 이 내용은 바울사도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의 공격을 받습니다. 그러자 또 민란이 일어난 줄 알고 천부장이 와서 바울을 잡아서 데리고 가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네가 민란을 일으킨 자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바라바는 유명한 죄수라고 하는 것은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민란을 주도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 바라바가 민중들에게 무엇을 약속하였을까요. 당연히 이스라엘의 해방을 외쳤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런데 외국인의 지배를 받고 있다니 수치스럽다. 그러므로 싸우다가 죽은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율법을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싸우자, 하면서 백성들의 종교심에 호소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내어놓고서 모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민란들이 많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의 군대는 이러한 민란을 진압하는 것이 주 임무였습니다. 이러한 결과로 바라바가 민란 주도자로 잡혀 있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은 누구를 지지하겠습니까? 로마를 물리치고 로마에 결탁하여 있는 무리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보자라고 한다면 누가 따르지 않겠습니까? 물론 기득권을 가진 자들은 따르지 않겠지만 그러나 민족적 자긍심으로 무장되어 있는 자들이라면 재산도 바치고, 재산이 없으면 몸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이들이 제시하는 바는 현실적인 정치 독립을 이루어 주권을 회복하는 것이며, 그로 인하여 경제적인 자립과 부국강성을 통하여 자기들의 하나님을 위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혈당원들이 있었고 비밀 자객들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에 이러한 일들을 하지 않았습니까? 안중근 의사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것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대부분의 민중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이러한 기다림 속에 예수라는 사람이 대단한 가르침과 기적을 일으키면서 온 민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으니 지도자들은 불안한 것입니다. 저러다가 민란이 일어나면 로마가 쳐들어 올 것이고 그러면 나라가 망하게 된다고 그렇게 부추긴 것입니다. 이만한 혜택을 받고 사는 것도 다 로마의 선정 때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예수님을 고발하고 바울 사도를 고발할 때도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왕은 오직 가이사입니다, 그리고 그 선정과 분봉왕의 선정으로 우리가 평안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자들이 예수를 시기하여 넘겨주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민중들이 겁이 나서 예수님을 잡아 가지 못하였습니다. 대제사장들의 하속들이 몇 번이나 예수를 잡고자 하나 민중들에게 돌 맞을까 해서 공개적으로 잡아 가지를 못한 것입니다. 민중들의 관심사도 역시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병고쳐주고 기적을 행하고 먹을 것을 주니 이 사람이 우리의 왕이요 메시아라고 따라나섰는데 갈수록 일하여 가시는 방향이 현실적인 문제와 동떨어진 이야기들만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빵을 원하는데 자신의 살과 피를 먹어야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못 알아들을 이야기만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원하는 정치적인 현실은 로마를 물리치고 자주독립하는 것인데 칼을 들고 싸우려고 하지는 않고서 내 나라는 이 땅에서 속한 것이 아니다, 무력으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니다, 하니 점점 백성들의 마음이 이건 아니다, 싶은 찰나에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과 지도자들이 보아라, 율법을 범하는 저 사람이 메시아일수가 없다, 그러니 저를 죽여야 한다고 부추기는 것입니다. 한두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 다수가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런 것입니다. 자기들에게 현실적인 이익을 갈수록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고함을 지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원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까? 바라바입니까? 예수님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게시판에 어느 초등학교 4학년의 시를 보셨습니까? ‘주님의 피’가 어떤 피라고 합니까?
  
주님의 피 열매를 맺게 해주시고
주님의 피 우리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네
주님의 피 크신 사랑 여러 사람 감탄하고

주님의 피 용기와 희망을 불어 넣어주시네
주님의 피 크신 사랑 우리교회 성장하여 주시고
주님의 피 우리가족 건강하게 하여 주시네

 

초등학교 4학년이 이정도로 시를 쓴다는 게 놀랍습니다만 그러나 1연에서는 어느 정도 무난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2연에서 주님의 피란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서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따라 갔는데 그러한 용기와 희망을 제공하기는커녕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꿈과 희망이 있습니다. 이것을 자아실현이라고 고상하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꿈과 희망을 예수님께서 산산이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는데 나는 죽었다, 하고서 따라가는데 무슨 꿈과 희망이 있습니까?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아이가 이러한 시를 쓴 것이 누가 가르친 것입니까? 우리가 그렇게 가르친 것입니다. 그저 주님의 피를 인하여 우리 가정 잘되고 우리교회 성장하고 우리가족 건강하게 지켜주시는 주님의 피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주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피를 주님께서는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수님을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바라바를 원하는 것입니다. 바라바가 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이름만 바라바라 하지 않고 예수라고 바꾸어 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나타나게 되면 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되는가를 고린도후서 11:20절을 봅니다. “누가 너희를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이 말씀을 바울 사도가 왜 하는가 하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변질시키는 자들의 말을 듣고서 그것에 미혹이 되는 자들에게 책망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6-7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속히 다른 복음을 따르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자들이 나왔는가 하면 유대인들에게서 나온 자들이 믿음만으로 안 된다, 할례를 행하라, 안식일을 지키라, 율법을 지키라는 식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큰 구원을 공짜로 주었겠는가? 그러니 내가 어느 정도 보답을 해야지 마음이 편하다는 것입니다. '체면이 있지 어떻게' 하는 죄된 자존심이 예수님을 믿는 일에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 아십니까? 그러므로 사단이 이러한 면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1:13-15절에서는 이러한 자들을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강도입니다. 영혼의 강도들입니다. 이렇게, 이렇게만 하면 복을 받는다고 축복을 남발합니다. 일단 바쳐봐, 그러면 복 주시는가 안 주시는가 시험해보라고 했다고 하면서, 반말 투로 자기들의 종으로 삼는 것입니다. 잡아먹는 것입니다. 심지어 뺨을 칠지라도 용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강도 아닙니까? 그래 그 정도의 각오는 해야지 우리가정 잘된다는데, 우리 남편 정년퇴직까지 무사하다는데 직장생활 한다면 그 정도의 희생이야 못하려구, 새벽기도 하지요, 금식 하지요, 철야 하지요, 우리교회 잘되는 길이 우리가정 우리자식이 대대손손 복을 받는다는데 내하나 희생하는 것, 내가 종이 되는 것이 무슨 대수냐 하면서 오늘도 수도 없이 사람의 종이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제시하고 있는 바가 바라바의 제사하는 바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라바를 원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라고 고함을 지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름은 예수님, 예수님 하고 있지만 그 내용에 바라바를 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 죽은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아시겠습니까? 이러한 것을 주님께서 죽으심으로 고발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이 일을 하지 않으셨다면 아직도 죄가 무언지 모르고 살아갔을 것입니다. 진리란 예수님이 이루신 일이 진리가 아니고 그저 내 가정, 내 교회, 내 직장, 내 나라 잘되고 발전되고 성장하는 것이 진리인양 여기고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다툼과 싸움과 전쟁이 무엇 때문에 일어나고 있습니까? 전부 자기의 이익을 진리로 여기고 있기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상을 주님께서 멸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을 사랑하고 있는 나는 진멸 받아 마땅하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실상은 괴롭지만 그것이 은혜입니다. 이제 이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왜 예수님께서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인지 아시겠습니까? 그동안 우리는 얼마나 자신을 갈무리 해왔습니까? 이렇게 하면 죄고, 저렇게 하면 죄가 아니고, 이렇게 하면 선이고, 이렇게 해야 복을 받고, 이러한 기준들은 스스로 세우거나 또는 세뇌를 받아가면서 익혀 왔던 것들이 결국 예수님을 원한 것이 아니라 바라바를 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 앞에서 허탈해 집니까? 홀가분해 집니까? 죄를 숨기고 있으면 홀가분할 수가 없습니다. 비록 부끄럽고 창피하더라도 들켜 버리면 오히려 가벼워집니다. 주여 그렇습니다, 내가 바로 바라바를 원하면서 주님을 죽인 자이군요! 당신의 처분만 기다립니다, 하는 것이 죄인의 자세가 아니겠습니까? 지옥가야 마땅한 죄인입니다, 하는데 주님께서, 아니야 너의 죄를 내가 사하였노라! 내가 너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고 살아난 것이니라, 이것을 믿는 것이 의란다. 이 복음 앞에서 감격이 없는 사람이 이상한 것이지요!

 

 

 

 

요한복음 19:1-22  왕이 없나이다  2001. 8. 5.

 

 


1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2군병들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3앞에 와서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하며 손바닥으로 때리더라 4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5이에 예수께서 가시 면류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저희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6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노라 7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저가 당연히 죽을 것은 저가 자기를 하나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8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9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서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10빌라도가 가로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11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 하시니 12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13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히브리 말로 가바다)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더라 14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 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15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16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저희에게 넘겨주니라 17○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18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쌔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19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예수의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21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22빌라도가 대답하되 나의 쓸 것을 썼다 하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실 때에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물론 하나님의 언약에 따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언약의 관계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은 자연스럽게 왕이 되는 것입니다. 왕과 백성의 관계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인 것입니다. 다르게는 아버지와 자녀, 남편과 신부 등의 관계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을 우리의 주, 우리의 왕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보시면 이스라엘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나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단지 예수 그리스도만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고유한 전통신앙인 하나님의 왕되심을 버리는 행위인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자신을 아버지와 하나라고 하실 때 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예수가 하나님과 하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참람 된 말을 하는 자이기에 죽여 마땅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하나님과 하나라고 하면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볼 때에 예수님의 모습이 자신들이 기대하는 왕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왕은 우리에게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왕되심을 얼마나 조롱하고 있는지 19:2절에 보시면, 가시로 면류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7:27-31절을 봅니다. 27○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하며 30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예수님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니 왕이 쓰는 면류관 대신에 가시 면류관을 씌우고, 왕의 붉은 옷을 입히고, 왕의 홀을 갈대로 대신하여 들게 하고서는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이여 하고서 놀리는 것입니다. 여기에다가 주먹으로 치고, 눈을 가리고 때리고서는 네가 선지자라면 알아맞추어 보라고 합니다. 침을 뱉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말씀을 우리가 볼 때에 감상적이기 쉽습니다. 잔잔한 음악을 깔고 얼마나 아프셨을까? 얼마나 수치스러웠을까? 하면서 감상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일을 지금 누가 진행시키고 있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기는 유대인들과 로마의 군병들이 합동으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을 진행하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 19:10-11절입니다. “봉독” 빌라도가 다시 예수님께 심문을 합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을 하니 두려워하면서 네가 어디로서냐고 묻는 것입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렇게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누가 너에게 왕권을 주었다는 것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을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미 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진리에 속한 자만이 알아듣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자신이 예수님을 놓아줄 권세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세도 있다고 합니다. 자신이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라고 합니다. 지금 네가 나를 이렇게 심문을 하고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주는 것은 다 위에서 허락하셨기에 되는 것이지 네가 권세가 있어서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힘이 없어서 잡히신 것이 아님을 우리가 18장에서 이미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잡히심은 결국 누가 이 일을 진행시키고 계시는 것입니까? 위에서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진행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나타나는 무서움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죽으심을 생각하면 그저 예수님이 고통과 수치를 생각하면서 감상적이 되면서 눈물 몇 방울 짜내는 것으로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십자가에 못을 박도록 누가 끌어가고 계시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도록 넘겨준 자들의 죄는 더 크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려고 하셨다면 거기에 동원된 가룟 유다나 로마 군병이나 지도자들의 죄란 자기들의 책임이 아니지 않겠는가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인간들의 악도 십자가에서 다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피할 수가 없는 것이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악한 포도원의 품꾼 이야기를 봅시다. 주인이 종들을 보낼 때에 두 번이나 때리고 죽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러자 그 아들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심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아들을 보내실 때 아버지께서 아들이 죽을 것을 모르시고 보내셨겠습니까? 결코 아니지요? 그러면 아버지는 알고서 아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인간들의 죄악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 아들의 죽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 전체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너희가 핍박하고 죽이지 않은 자가 어디에 있는가 하시면서 고발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죄라는 것입니다. 아들이 없으면 상속자가 없어지니 자신들이 영원히 주와 왕으로 살수 있으리라고 여긴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결국이 스스로가 왕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스스로의 왕됨을 위하여 결국 하늘의 왕을 버리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8:4-9절입니다. “4○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5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6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한 그것을 사무엘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매 7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8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9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

 

 

 

 

사사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왕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믿고 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세상의 다른 나라들을 보니 왕의 말 한마디에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며 전쟁을 하는 모습을 보니 자신들도 왕이 있어야 되겠다고 사무엘에게 요청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하나님께 아뢰니 하나님께서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라 나를 버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은 왕을 달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왕을 달라고 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버리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목사를 왕처럼 여기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목사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그런 교회들이 많습니다. 목사의 말 한마디가 왕보다 더 절대적으로 행사되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닙니다. 이러한 목사를 원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왕되심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의 왕되심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주님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눈치를 살피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하나님의 왕되심을 버리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왕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 라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원하신 왕을 없애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라고 고함을 지르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가 왕이 없는 시대입니다. 눈에 보이는 왕을 달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의 왕되심을 거부하는 것이 되지만, 지금 눈에 보이는 가이사라는 왕 외에는 우리의 왕이 없나이다, 라고 하는 것도 주님의 왕되심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왕이 누구입니까? 우리의 생사여부를 쥐고 있는 왕이 누구입니까?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치면서 버린 그 모퉁이 돌이 우리의 왕입니까? 아니면 세상의 권세를 쥐고 있는 가이사 같은 자가 우리의 왕이 되어 있습니까? 다시 본문을 봅니다. 빌라도가 예수를 사형에 넘겨주지 않도록 애를 쓰지만 그러나 유대인들의 소리가 이깁니다. 12절을 봅니다. “....유대인들이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15절입니다. “....보라 너희 왕이로다”  16절입니다. “저희가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대 가이사 외에는 우리의 왕이 없나이다” 대제사장들이 자기들의 왕은 가이사 외에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왕은 언제나 하늘에 계시는 왕입니다. 그리고 지상의 왕은 그 하늘의 왕의 심부름을 하는 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가이사 외에는 우리의 왕이 없나이다,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왕되심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줍니다. 그리고 죄목을 쓰는데 히브리어와 로마어와 헬라어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씁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라고 합니다. 그러자 빌라도가 나의 쓸 것을 썼다고 합니다.

결국 유대인들이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고 하면서 유일하신 왕을 배척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의 진행을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얼마나 무서운 심판이 되는 것입니까? 자기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시면서까지 인간들의 죄를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하나님께서 진행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심판임과 동시에 자기의 택하신 자들의 구원의 길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사야 52:13-53:12절, 빌립보서 2:5-11절. “봉독” 그 앞에 무릎을 꿇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백성의 할 일입니다.

 

 

 

요한복음 19:23-27  십자가 밑에서  2001. 8. 12.

 

 


23군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군병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ㄱ)저희가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병들은 이런 일을 하고 25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1. 십자가 옆에서.


19:18절을 보시면, 예수님의 좌우편에 다른 두 사람도 십자가형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을 누가복음에서 자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3:39-43절을 봅니다. “39○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가로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41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4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시고 좌우편에 두 행악자가 함께 달립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예수를 조롱합니다. 네가 구원자냐 그렇다면 너와 우리를 구원하여 보라고 합니다. 함께 힘없이 십자가에서 달려 죽는 주제에 무슨 구원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 강도는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마땅한 보응을 받는 것이지만 이 분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좌우편에 있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엄청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도대체 강도짓을 하다가 사형당하는 사람을 보고 예수님께서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합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한편의 강도는 악한 강도이고 예수님 저를 생각하여 주소서, 한 강도는 착한 강도입니까? 다같이 사형당하는 주제에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늘 어떤 생각을 하는가 하면 큰 죄 작은 죄를 구별합니다. 더 착하냐, 아니냐로 구별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큰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크던 작던 심지어 마음속에 있는 죄까지 모두가 사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둘 다 같은 강도입니다. 이 두 강도가 인류의 모습입니다.

 

 

 

 

모두가 누가 누가 더 잘났는가 하고 살지만, 그러나 모두가 사형에 마땅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한편은 예수님을 끝까지 조롱하고 한편은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믿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리실 때 커다란 기적이 일어나서 십자가에서 그들의 조롱하는 말대로 십자가에서 못을 다 뽑아 버리고 내려가셔서 십자가를 빼어 들고 한번 휘둘려 십자가에 못을 박는 자들을 다 죽여 버렸다면 구원자로 믿어 줄만한데 도대체 그러한 모습이 없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강도 둘 다 욕을 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16:32절. “이스라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로 보고 믿게 할찌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두 강도가 처음에는 함께 욕을 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편의 강도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까? 이것이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옆에서 함께 죽어가는 자를 보고서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는 것입니다.

 

 

 

 

고통을 느끼지 않거나 기적을 일으키지 아니하시고 동일하게 고통 중에 죽어가는 자를 보고서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자신은 죽어 마땅한 죄인이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죄가 없음을 인정하고 자신을 그의 나라가 임할 때에 생각하여 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 속하여 있다고 자신을 보고 있습니까? 구원받은 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욕하고 있는 강도입니까? 구원받은 강도라고 생각을 하시겠지요? 그러면 다시 질문을 합니다. 정말 우리가 우리의 죄로 인하여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인정하십니까?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신이 한편 강도처럼 죽어서 마땅합니다, 라는 고백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조금만 어려움을 당하면 왜 날 구원하여 주지 아니하는가 하면서 원망을 합니다. 마치 예수님을 끝까지 조롱하는 강도처럼 우리는 늘 예수님이 왜 이 문제를 해결하여 주지 아니하는가 하고서 원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능력이 그렇게 많으시다면서,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분이시라면서,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라면서 왜 나의 형편이 이 모양 이 꼴이냐, 하는 항의가 생기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한번 멋있게 사용하셔서, 사람들에게 내가 믿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라고 큰소리 치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믿고 따라 왔는데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보니 어떤 모습입니까? 자신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시고 자기 옷도 하나 챙기지 못하시고 벌거벗고 죽임당하는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고서 죽더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런 예수님께 무엇을 기대하여 여기에 모였습니까? 아직도 한편 강도의 요구가 우리에게 있다면 예수님을 욕하고 돌아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인임을 안다면 죄로 인하여 버림받아 저주받아 죽은 십자가에서 그렇게 죽는 것이 자신의 모습이어야 함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강도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고백이 우리에게 나오고 있습니까? 정말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제대로 인식하신다면 날씨 덥다고 죽겠다고 하더니만 며칠 만에 추워서 죽겠다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2. 십자가 밑에서.


십자가 위에서는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밑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 주변에 수많은 군중들이 모두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조롱을 합니다. 자기 자신도 구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을 구원한다는 말인가, 하면서 조롱과 희롱의 말을 하고 있는데 그 십자가 밑 한편에서는 예수님의 옷을 가지고 서로 차지하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겉옷은 두루마기처럼 되어 있는 옷이기에 군인 네 명이 네 조각으로 나누어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속옷은 통으로 짜서 만들어진 옷이라 찢지 말고 서로 제비뽑아 나누어 가지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제비뽑아 옷을 나누어 가진다는 말씀이 시편 22편에 나와 있습니다. 시편 22편이 메시아의 고난에 관한 내용들입니다.

 

 

 

 

시편 22:1-21절을 봅니다. “봉독” 18절.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다윗의 시편인데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고난을 눈으로 보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6-8절.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나를 보는 자는 다 입술을 비쭉이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걸 저를 기뻐하시니 건지실걸 하나이다” 15-17절.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잇틀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사망의 진토 에 두셨나이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이러한 말씀들이 얼마나 세밀하게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제대로 증거 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입을 비쭉이고 고개를 흔들며 욕하고 조롱하고 떠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안에서 어떤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있습니까? 성경에서 증거하고 계시는 이러한 예수님에게 무엇을 달라고 하시겠습니까? 한 벌 뿐인 옷과 속옷까지도 군인들이 나누고 제비뽑아 가져 가버린 그러한 예수님께 무엇을 달라고 하시겠습니까? 이러한 주님을 우리가 모르면 십자가가 높이높이 세워져서 붉게 네온사인으로 밤하늘을 수놓고 있는 예배당 안에서 서로 서로 예수님을 옷을 나누어 가지려는 자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아래 모인 자들이 서로의 영광이나 자신의 자존심이나 챙기려고 한다면 어찌 이들과 다르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합동측 총회에서 선거를 제비뽑기로 하자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다른 교단들도 환영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그동안 총회장 선거를 하면서 부정이 많았으면 이러한 제비뽑기를 동원하고 있는 것입니까? 총회장 선거에 수억 원을 쓴다는 것은 이미 옛날 이야기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벌거벗기우고 고통 중에 죽어가고 있는데 우리가 하는 일이란 서로서로 자기들의 이익을 챙기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44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믿지 못한 것은 자기들의 영광을 서로 구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들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거창한 일들을 이루어 내고 있지만 과연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까? 자기들의 영광입니까? 말로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지만 자기들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십자가의 영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제대로 알게 된다면 우리가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구하게 됩니까? 한편 강도처럼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는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위력인 것입니다. 강도라도 예수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이 사실이 복음인 것입니다.

 

 

 

 

3.요한에게.


십자가 밑에서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요한은 십자가의 현장까지 따라 왔습니다. 이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자신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밑에서 군인들은 겉옷 조각이라고 챙기려고 하였는데 요한은 오히려 마리아를 평생 모셔야 하는 짐을 지게 된 것입니다.

 

 

 

 

26-27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미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집에 모시니라” 마리아에게 요한을 아들이라 하시고 요한에게 네 어머니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새 가정이 된 것입니다. 혈통적 가족이, 가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들이 가족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모든 것을 이루셨기에 그러한 새 가정이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요한에게 맡기심으로 요한이 또한 사람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요한은 마가복음 3:17절에 보시면, 보아너게라는 별명을 가진 자입니다. 보아너게란 우레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와 함께 받은 별명입니다. 누가복음 9:49-54절에 보시면, 요한과 야고보의 불같고 천둥 같은 성격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쫒는 것을 보고서 자기들을 따르라고 하자 따르지 않는 것을 보고서 주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도록 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사마리아 성으로 지나가게 되었는데 사마리아 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저희를 멸하라고 할까요, 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천둥과 벼락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께서 마지막 부탁으로 마리아를 모시라고 합니다. 그러자 요한이 그때로부터 마리아를 모시면서 자기 성질대로 살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성질대로 하였다면 아마 제일 먼저 순교할 그런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를 모셔야 하니 결국 제일 오래 산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서신서 요한일,이,삼서에 보면 서로 사랑하라, 서로 사랑하라는 말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이단은 그 발걸음도 들여 놓지 못하게 하는 엄격함이 역시 있습니다. 그러나 천둥의 아들이 이렇게 사랑의 사도가 된 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한 것을 통하여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요한은 십자가 밑에서 자신의 이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멍에를 메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멍에가 오히려 자신을 살리는 길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1:28-30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께 가면 쉼을 얻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어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가 무겁고 힘이 드는 것이 아니라 쉽고 가볍기에 마음에 쉼을 얻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쉼이 십자가 안에 있습니다. 십자가 밑에 있는 것입니다. 강도처럼, 군병들처럼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따라 살던 우리에게 주님께서 십자가를 주신 것입니다. 이 안에서 쉼을 얻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9:28-30  다 이루었다(1)  2001. 8. 19.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지난 화요일 장례식에 참여하였습니다. 고인은 43세의 여집사였습니다. 남편이 있고, 중학교 1학년 아들과 초등학교 6학년 딸을 두었습니다. 자기보다 남을 배려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죽음을 두고서 다 이루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직 자녀들이 어린데 이들을 더 돌보다가 가는 것이 순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무어라고 말합니까? 천국 갈 때가 되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위로를 합니다. 그렇게 위로를 하지만 한 번 더 물어보면, 정말 그것이 다 이룬 것이고 잘된 일인가고 물어본다면 우리가 그 가족이라면 잘된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위에서 죽으시는 장면입니다. 온갖 수치와 모욕을 다 당하시고 속옷까지 벗기운 비참한 몰골로 사람들마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지나가는 그러한 죽음입니다. 입술이 타들어가는 목마름으로 “내가 목마르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목마르다고 하는 말 한마디 까지도 성경을 응하게 하려고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모든 생애와 말씀하심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지금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시는 것도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까? 참으로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저주스러운 죽음을 죽으신 것인데 도대체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이 말씀을 우리가 모르면 예수님께 엉뚱한 것들을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면서까지 자기 백성에게 주시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자꾸만 다른 것을 예수님께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원하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예수님을 죽인 것처럼 오늘 우리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그 내용을 모르면 자기가 원하는 무엇이나 다 준다는 것으로 알게 되면 역시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무엇을 다 이루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도 나왔지만 내가 목마르다고 하신 그 말씀조차도 말씀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면, 십자가에 밑에서 옷을 나누어 가지고 제비뽑아 속옷을 가지는 것도 이미 시편의 내용대로 되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이 증거 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루어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켜 행하여야 영생이 있고 의가 되는 것인데 성경은 이미 인간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을 신약이 아니라 구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켜낼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간단히 율법이라고 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면 반드시 저주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명기 28:1절과 15절을 봅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하는 그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미칠 것이니

 

 

 

 

여호와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면 나가도 복을 받고 들어가도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다 지켜 행하지 못하면 반대로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가 ‘복음적 설교’라는 글에서 몇 가지라고 보았습니까? 금지명령 365조, 적극적으로 하라는 것 283조를 합하면 648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613가지라고 합니다. 어떻든 600가지가 넘는 규례와 명령들을 하나도 빼먹지 않고 다 지키면 복을 받고, 그 중에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 1절과 15절에만 보아도 그러합니다. 그리고 야고보서 2장 10절에도 보시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그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소에 자기가 잘하는 몇 가지 주특기를 가지고서 나는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전에 어느 교회에 가보니 커다란 현수막에 성도의 4대 의무를 써 놓았습디다. 주일성수, 십일조, 봉사, 전도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이것만 잘하면 일등 신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도 받는 비결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우리가 무엇을 지키거나 행하여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이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복이 주어질 수가 있습니까?

 

 

 

 

죄를 지어서 죄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죄인이기에 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떠한 종교적인 규율과 규례를 지킨다고 하여도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은 결국 저주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려고 노력한 사람인가 하면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거리는 얼마, 일은 어떤 것은 안 되고 하는 세부규정까지 만들어 지킨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을 위한다고 율법을 지킨 그들이 저주아래 있었다는 것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란 권세의 개념입니다. 모든 인간이 아담의 혈통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이 왕노릇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사단이 속이고 있어서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오늘도 사람들에게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 것이지 애초부터 죄인이 아니라고 속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착한 일을 하면 예수를 믿지 않아도 스스로 구원에 이른다고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이 하는 일이란 전설의 고향이나 드라큐라 같은 이야기들이 아니라 사람들이 참으로 좋아할 만한 윤리 도덕으로 포장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종교를 가지는 것은 좋지! 서로 서로 착하게 살자고 하는 것이니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꼭 예수 만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 나가도 된다고 하겠지요. 그러나 종교적으로 다니라는 것입니다. 꼭 예수만 믿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착한일도 하여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바울사도는 저주를 받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인간이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지난주에 어떻다고 하였습니까? 강도이지요! 그런데 한 강도는 자신이 그렇게 죽어 마땅함을 인정하고 예수님께 자신을 부탁한 것입니다. 그러자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하실 수 있음이 예수님께서 다 이루신 내용입니다.

 

 

 

 

인간이 어떠한 자리에 있는지를 히브리서 2:14-15절입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인간의 자리란 결국 사망의 종노릇하고 있었습니다. 죽기를 무서워하여 일생토록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평생토록 나는 죽으면 안돼, 나는 살아남아야 돼, 이것은 이유가 없습니다. 무조건적입니다. 자기만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형사고가 나더라도 자기는 살아남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렇게 무조건 살아남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더 잘살아 남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실패하면 안돼! 성공해야지! 그래서 나도 한번 성공한 인생임을 드러내어야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은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의 소원이나 욕망이라는 게 만족이 없음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끝까지 가는 것입니다. 이것만 이루어지면 소원이 없겠다고 하더라고 그것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 이룸이란 게 허무하여지고 또 다른 목표가 눈앞에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에 매여있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남은 죽더라고 자신은 성공해야 한다는 시기와 경쟁 속에서 오늘도 계속하여 가속도가 더하여 가는 것이 세상의 삶이 아닙니까? 이런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더 잔인하여야 되고, 더 경쟁을 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다 이루었다”는 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도 우리는 이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 달려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도 무한경쟁의 시대라고 어떤 정신 나간 목사가 말하고 책을 내기도 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성도란 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에 참예된 사람들입니다. 이 다 이루심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혈육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고 사망의 권세아래 들어가셔서 죽으심을 당하신 것은 사망으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없이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오히려 사망의 권세를 가지고 있던 마귀의 권세를 깨트려 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심으로 사망의 권세가 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하신 일이란 자기의 택한 백성들을 사망의 권세에게 벗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사망의 권세란 죄의 권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죄에서 우리를 건지심이 예수님의 다 이루심입니다.

 

 

 

 

골로새서 2:8-23절을 봅니다. “8○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9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11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2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13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정사와 권세를 1)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16○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17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18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19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20○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21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22(이 모든 것은 쓰는대로 부패에 돌아 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23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12절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이제 사망이 두렵지 않은 자들이 된 것입니다. 이미 죽은 자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살고자 할 때 두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에 속한 것들이 그림자입니다. 16절 이하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날과 달과 절기들이 법에 속한 것들 모두를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신 것입니다. 다 이루신 분이 옆에 계시는데 그것을 또다시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그러한 일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예수님의 다 이루심을 믿지 않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다 이루신 일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골로새서 3:1-11절입니다. “1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3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4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5○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6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1)진노가 임하느니라 7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8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9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10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11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예수님의 다 이루심을 믿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다 이루지 못함에 안절부절 하며 살지 아니합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습니다.

 

 

 

 

요한복음 19:28-30  다 이루었다(2)  2001. 8. 26

 

 


이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하사 가라사대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머금은 해융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저주스러운 죽음을 죽으시면서 도대체 무엇을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까? 그 다 이루심이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다 이루심인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담에게는 하지 말라는 것이 몇 가지였습니까? 단 한 가지입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가지고 자꾸만 시비를 겁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지 않았으면 되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란 한 가지의 명령이지만 사실은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인 됨을 인정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를 어김이 결국 자신이 자신의 모든 삶의 영역에 주인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유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 세상의 모든 삶의 원리가 인간이 주인이요 주체로서 인간의 능력을 개발하여 우리가 신처럼 살고자 하는 것이 이 세상의 흐름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인간이 발전하였다고, 학문이 발전하였다고 하면서 만들어진 사상체계입니다. 그러나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죽음이라는 인간의 운명은 어찌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운명도 자기 마음대로 한다고 하면서 자살하는 것입니다. 운명을 이겨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살도 결국 어떤 운명에 붙들려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이 이러하다면 과학자들은 인간복제를 통하여 질병과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인간이 날 때부터 죄인이라는 사실은 모든 학문에서든, 사회에서든, 종교에서든 인정하지 않습니다. 죄가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는 죄라는 것도 결국 윤리와 도덕적인 죄일 뿐입니다. 이러한 죄란 것은 언제나 상대적이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로마서 3:9-18절을 봅니다. “9○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1)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기록한바 ㄴ)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ㄷ)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ㄹ)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ㅁ)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ㅂ)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16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ㅅ)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든 사람들이 죄 아래 있는 것입니다. 해 아래 새것이 없듯이 아담아래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이라는 것이 어떤 상태입니까? 자신이 죄인이라고 깨닫고 하나님을 찾는 자가 하나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치우치고 무익하게 되었는데 그러한 사람의 특징이 13-18절의 내용입니다.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라는 것입니다. 속에서 나오는 것이 모두 썩고 부패하고 더러워진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혀와 입술에 독사의 독이 있고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발을 피 흘리는데 빠르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위가 이러하지 않습니까? 언제 우리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오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까? 진심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있습니까? 우리가 구역모임을 가지던, 전도회를 하든, 성경공부를 하든지 간에 참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입을 다물고 자숙하는 자세입니까? 아니지요? 질문과 대답 속에서 모두 자기 의가 팽팽하게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시 없는 질문이 없고 과시 없는 대답이 없는 것 아닙니까? 아니라고 하여도 그 모임을 마치고 진지하게 주님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여 보면 어찌 그리 자기의 자존심과 자기 자랑을 드러내기 위하여 한 말이 그렇게나 많은지 모릅니다. 혹시 틀린 말을 하여도 끝까지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려고 하는 모습들이 없습니까? 정말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합니까? 어제 구역모임 후에 차를 마시면서 어떤 분이 자신은 착하고 바르게 말씀대로 살려고 하였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윤동주의 서시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움이 없이 살겠노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기는커녕 살면 살수록 그렇게 원수가 많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원수가 순전히 나는 착한데 일방적으로 상대방이 악하여 나의 원수가 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내 안에 나만을 위하는 생각들이 들어 있으니 원수가 있는 것입니다(남북문제, 환영과 반대, 해방과 6,25 전쟁시 원수의 문제). 이러한 모습들이 말씀을 통하지 않고서는 드러나지가 않습니다. 결국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란 인간이 결코 이루어 낼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다 이루심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하나님의 율법이란 것은 우리 모든 인간을 죄아래 가두어 버리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3:19-20절을 봅니다. “19○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2)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도둑질하지 말라, 라고 하지 않았다면 죄가 무언지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도둑질하지 말라, 라는 율법이 주어지니 갑자기 탐심이 더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이 우리를 죄 아래 가두는 것입니다. 그러면 탐심이 없었는데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이 나오자 갑자가 탐심이 생긴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탐심이 내장되어 있는데 율법이 그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됨을 통하여 우리가 죄인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의 모든 말씀들이 우리의 이러한 죄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무엇을 하라는 말씀과 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라는 말씀은 하기 싫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고 싶지 않습니까? 이것은 우리 모두의 속성입니다. 아이나 어른이나 간에 몰래먹는 사과가 맛있다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는 것은 죽어도 하고 싶고 하라는 것은 죽어도 하기 싫은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 된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인간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을 육체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죄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인정을 하든지 아니하든 간에 성경이 증거 하는 인간의 현실입니다. 이로 보건데 어떤 인간도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3:21절에 보시면 ‘이제는’ 이라는 말씀 앞에 ‘그러나’라는 접속사가 생략이 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현실이 이러합니다. 누구든지 죄에서 탈출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과 선지자의 증거를 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내용입니다. 어느 인간도 스스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의는 하나님의 의이기에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란 하나님의 의를 다 이루심이요 이것으로 또한 자기의 택한 백성을 의롭다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간 편에서는 ‘값없이’가 되는 것입니다.

 

 

 

 

23절에서 26절을 봅니다.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3)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값없이.
우리가 얼마나 무능력 하였으면 값없이 주시는 것이겠습니까? 이렇게 우리는 값없이 구속의 은혜를 받았지만 그러나 그 값을 대신 지불하신 분이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분을 믿음이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단지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 자체가 최고의 목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아도 늘 인간중심으로 봅니다.

 

 

 

 

그래서 인간 구원론 중심으로 성경을 보게 됩니다만 그러나 그러한 인간 구원중심으로 성경을 보았기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통하여 자기들의 영생에 대하여 상고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메시아가 오기를 그렇게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정작 메시아가 와서는 너희들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의 완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완성이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율법도 이루지 못하였고, 제사와 제사장도 이루지 못하였고, 왕도 이루어 내지 못한 그 일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부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성전을 지키고 안식일을 지키고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들을 부정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붙들고 있는 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담아래 있는 자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로마서 5:12-21절을 봅니다. “12○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14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15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16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18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아담의 불순종으로 모든 사람이 죄 아래 갇히게 되었고, 사망의 왕 아래 갇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는 아무리 순종을 한다고 하여도 죄 아래, 사망아래 갇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순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서 의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다 순종하심으로 우리에게 의를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가 완성이 되고 그 완성된 의의 선물을 믿는 자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순종이 아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순종을 보고 믿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예수님의 순종이 결국 십자가의 죽기까지의 순종이셨습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죽기까지의 순종이 바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이루신 순종인 것입니다.

 

 

 

 

끝으로 히브리서 5:8-11절을 봅니다. “8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9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예수님의 순종이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의 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이러한 고난의 순종에 이른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것이 일차적인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자, 즉 그를 순종하는 자에게도 의롭다함을 받도록 하시는 구원의 근거가 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무엇을 받게 되었습니까?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구원이며 영생인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받지 못한 인생은 아무리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귀와 영화와 권세를 누린다고 하여도 가장 불쌍한 인간이며 실패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세상의 그러한 가치기준에 요동하지 아니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값없이 의롭다함을 받은 이 사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인하여 영원토록 기뻐하고 감사는 자들이 성도들이며 참으로 복 있는 자들입니다.

 

 

 

 

요한복음 19:31-37  다 이루었다(3)  2001. 9. 2.

 

 


31○이 날은 예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32군병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3예수께 이르러는 이미 죽은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그 중 한 군병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35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으니 그 증거가 참이라 저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니라 36이 일이 이룬 것은 ㄷ)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 37또 다른 성경에 ㄹ)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하시고 영혼이 돌아가신 이후의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고서 죽으셨는데 죽으신 몸으로 또 이루어내실 일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으면 끝인데 예수님은 죽으신 그 주검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다가 삼국지에서 제갈공명이 죽어서도 적을 물리치는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삼국지를 고우영의 만화 삼국지로 보았는데 그것도 하도 오래전이라서 죽어서 물리친 적이 누구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만화의 장면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제갈공명의 군대가 물러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적이 후미를 치려고 오다가 제갈공명의 주검을 의자에 묶어두었다가 의자를 돌려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적이 죽은 제갈공명의 시체를 보고서 혼비백산 도망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감히 제갈공명의 죽음으로 비유를 하여서 불경하여 보입니다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은 주님의 공생애 사역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과 그 죽으신 몸에 이루어지는 일과 장사지냄과 부활과 승천과 성령오심과 재림까지 다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입니다. 이것이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먼저 죽으신 이후의 십자가에서의 일을 살펴보고 나서 다 이루심의 의미를 다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날이 금요일입니다. 그러니 토요일이 안식일인데 이 안식일은 큰 날이라고 합니다. 보통 안식일보다는 큰 날이 되는 것은 유월절 다음날부터 일주일간 무교절기입니다. 누룩 없는 떡을 먹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보통 안식일도 아니고 큰 안식일인데 십자가 그것도 저주받아서 죽은 자의 시체가 나무에 달려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지 않은 일입니까? 그러니 자기들의 큰 안식일을 기분 좋게 지키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린 자들을 그대로 두지 말고 빨리 죽이자는 것입니다.

 

 

 

 

원래 십자가형이란 십자가에 못을 박아 달아놓고서 말려 죽이는 것입니다. 때로는 며칠씩 강한 자는 일주일씩도 가는 것이 십자가의 처형입니다. 그런데 금요일 못 박았는데 내일 큰 안식일이니 시체를 빨리 치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좌우의 강도는 아직 살아 있어서 다리를 꺾어버립니다. 나무에 다리가 못 박혀 있으니 긴 창으로 주리를 틀듯이 다리를 꺾어버린 것이지요. 그렇게 죽여 버리고서 예수님께 가보니 이미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리를 꺾지 않고서 옆구리를 창으로 찌릅니다. 확인사살이지요. 그런데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물과 피가 나왔습니다. 이것을 본 자가 증거 합니다. 이 성경을 기록한 요한 자신이 직접 목격한 것이지요. 그런데 옆구리를 찌르니 물과 피가 함께 나온다는 것은 심장이 파열된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현대 의사가 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이란 심장이 파열되는 고통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36절과 37절입니다.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꺽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으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감상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냉철하게 그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시도록 하나님께서 이미 작정하신대로 이루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보면서 얼마나 아프셨을까 하는 감상적인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어떻게 처리하시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처참하게 죽어가는 십자가의 모습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인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우리가 감옥에 가지 않는다고 죄인 아닌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을 떠나 자기 자신이 자신의 주인인양 여기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자 하는 것이 죄인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연하게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가 십자가위의 예수님의 모습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에게 죄를 정하셔서 죽이신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죄인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을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예수님의 모습이어야 함을 인정하지 않는 한 우리에게서 나오는 모든 것은 전부 불평과 원망과 짜증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도도 찬양도 예배도 헌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자신의 죽음인 것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과 거래하고자 하거나 아니면 뇌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에 죽으신 그 예수님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 어떤 인식이 오게 되겠습니까? 이사야 선지가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식입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율법으로는 흠이 없다고 예수 믿는 이단들을 잡아 죽이러 가던 사울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자 죽은 자와 같이 된 것입니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다”라는 고백이 십자가 앞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만난 것이고 자기의 죄를 안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자세가 되겠습니까? 주여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처분대로 하옵소서, 저 같은 죄인에게는 지옥도 과분한 것입니다, 이래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믿는다면서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십자가를 부적처럼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차 뒤에 ‘익투스’라고 물고기 모양을 달고 다니면 사고가 안 납니까? 십자가 모양을 그리면 드라큐라가 물러갑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날마다 그 십자가에 나를 못 박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나는 날마다 죽는다는 말을 왜 하였겠습니까?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따라서 죽으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어찌든지 세상에서 더 잘 살아남으려고 믿으려고 하니 어찌 예수님을 제대로 알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새벽기도회 때 본문 말씀이 열왕기상 22장이었습니다. 아합 왕이 여호사밧 왕과 함께 길르앗 라못을 차지하기 위하여, 아람나라를 치기위하여 하나님께 물어보는 장면입니다. 여호와의 선지자 400명이 나와서 아합 왕이시여 올라가서 싸우소서, 그러면 이길 것입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유다 왕 여호사밧이 아무리 보아도 이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선지자가 없느냐고 하니 한 사람 있기는 한데 그 자는 늘 흉한 일만 이야기 하여서 미워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빈말이라도 칭찬하여 주는 것을 좋아합니다. 예쁘지도 않는데 예쁘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얼굴이 어찌 그리 팍 상했노, 하는 것보다 얼굴 좋아 보인다, 그러면 뭘 그래 하면서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만 하면 저주니 심판이니 재앙이니 하는 사람을 누가 좋아 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왕에게 좋게 말하는 400명의 선지자에게 거짓말 하는 영이 들어가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야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 전쟁에 이긴다고 응답받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거짓말하는 영에 의하여 나온 대답입니다. 오늘날도 얼마든지 이렇게 됩니다. 기도한다는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데 그것이 거짓말하는 영에 의하여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사람들이 자신의 사욕을 좇아 자기 귀를 즐겁게 하려고 거짓 스승을 많이 두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거니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아시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만 자랑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엇이길래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까?

 

 

 

 

출애굽기 12:46절을 봅니다. “한 집에서 먹되 그 고기를 조금도 집 밖으로 내지 말고 뼈도 꺽지 말지며” 민수기 9:12절.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 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꺽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지니라” 시편 34:20절.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꺽이지 아니하도다.” 즉 유월절 어린양을 잡아서 피를 받아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고기는 불에 구워서 먹는 것이 유월절 규례입니다. 그런데 유월절 양을 잡을 때 그 뼈는 꺽지 말아야 하는 것이 유월절 규례인 것입니다. 이미 주일 저녁에 출애굽기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의 어린양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월절의 절기에 잡히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데 다음날이 큰 안식일이라 안식일에 시체를 나무위에 달아 놓지 않으려고 다리를 꺽어서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강도는 다리가 꺽어지지만 예수님은 이미 돌아가셨기에 다리가 꺾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다 이루심이란 이러한 유월절 어린 양의 다리를 꺽지 말라는 한 말씀까지 다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영혼이 떠나시고 나서 주검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역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찌른 자도 보리라는 말씀은 스가랴서 12:10절 말씀입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라” 이 말씀은 지난주 금요성경공부 시간에 본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찔리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찌른바 나를 바라보고,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주시면 그 찌른 자를 보고서 자기 죄로 인함을 인하여 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여 나의 죄로 인함이니이다, 하면서 십자가 앞에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는 자입니다. 이것이 오순절 성령이 임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도들이 너희가 십자가에 죽인 그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심으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복음을 듣고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어찌할꼬, 하는 회개가 일어난 것입니다. 자신이 찔러 죽인 자가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느 정도의 애통입니까? 독자가 죽고 장자가 죽은 것처럼 애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를 인하여 이러한 애통이 나옵니까? 자기의 가슴을 치면서 내 죄로 인함이라는 애통함이 나옵니까? 그러한 애통함이 있는 자가 복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약의 모든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뼈가 꺾이지 않는 것과, 예수님께서 찔림을 당하시는 것까지 모두가 다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지는 없어지나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다 이루심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오늘까지 세 번에 걸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한 번 더 무슨 의미인지 말씀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이사야 9:1-7절입니다. “1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1)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3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4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5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묻은 복장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6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던 자들에게 그 흑암과 사망의 권세를 십자가로 물리치시고 빛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전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전쟁을 위하여 한 아기가 나와서 싸우시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로 오신분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은 결국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열심이, 모든 성경에 나타나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입니다.

이 결과로 오늘 우리가 죄인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 우리의 구원이 됨을 알기에, 우리는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이 없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와 그 다 이루심과 그 능력을 알아 가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9:38-42  십자가의 능력  2001. 9. 9.

 

 


38○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더러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39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40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41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42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약하신 모습으로 죽으셨습니다. 양편의 강도보다 더 빨리 돌아가신 것입니다. 이렇게 약하심으로 십자가위에서 저주받은 죽음을 죽으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에는 다 이루기는커녕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렇게 기적을 베풀더니 죽는 마당에서는 기적도 한번 베풀지 못하고 죽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다시 36절에서 37절을 봅니다. “이 일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꺽이우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 또 다른 성경에 저희가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심은 모든 성경을 다 이루심인 것입니다. 그러면 돌아가고 나신 다음의 일들은 어떻게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까? 그것도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돌아가시고 난 시체에 대하여서도 성경을 응하게 하려고 뼈가 꺾이지 아니하고, 창에 찔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에 찔리심으로 물과 피를 흘리신 것입니다. 이 물과 피로 임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일서 5:4-8절입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 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곧 진리니라 증거 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 예수님께서 영으로만 임하신 것이 아니라 온전한 육체로 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물과 피로 임하신 것이고 이를 증거 하시는 분이 성령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진리를 증거 하시는데 진리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물과 피로 임하신, 온전한 육체로 임하신 분이 물과 피를 흘리심으로 죽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죽으심이 도대체 무엇을 다 이루었기에 능력이라고 할 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분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장사되시는데 그 무덤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입니다. 죽으심은 강도와 함께 죽으시고 묻히시는 것은 부자의 묘실에 묻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7:57-60절입니다.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어주라 분부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정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자기 새무덤에 넣어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라는 말씀에 보면 아리마대의 요셉이라는 사람이 부자인데 자기의 새무덤을 마련하여 놓았습니다. 이곳에 예수님께서 장사지내게 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니고데모도 향품을 백 근쯤 가져와서 함께 장사를 지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생을 요람에서 무덤까지 요약하여 봅시다. 태어나실 때 예수님은 어디에서 태어나신 것입니까? 남의 집 마굿간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 요람이 남의 집에 것을 빌려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무엇을 타고 들어가신 것입니까? 나귀, 그것도 나귀 새끼를 빌려서 타고 가신 것입니다. 공중의 새도 깃들 집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다고 하신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죽으실 때 자신의 무덤도 하나 없어서 남의 무덤 빌려서 장사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생애입니다. 보험도 하나 들지 않았고, 노후 연금도 없고, 적금 들어 놓은 것도 없었습니다. 마지막 옷 한 조각까지도 군인들이 다 가져 가버렸습니다. 이러한 예수님께 도대체 무엇을 달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이현주라는 감리교 목사는 어느 시에서 “나를 둘러 당신의 옷으로 삼으소서.”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벌거벗기우신 것이 불쌍해 보인 모양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의 벌거벗기우심이 우리의 수치를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천지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주인이십니다. 그런데 이 주인이 땅에 오셨는데 오히려 가짜 주인들이 이 주인을 어떻게 대접한 것입니까?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나를 모른다고 한 이사야 선지자의 탄식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철새들도 자기들의 때를 알건만 너희는 나에게로 돌아올 줄을 모른다고 합니다. 이것이 죄된 인생의 모습입니다. 주인을 몰라보는 것입니다. 주인이 이 땅에 빛으로 오셨건만 사람들은 어두움을 더 사랑하여 빛을 싫어한 것입니다. 주인의 아들이 왔는데 주인의 아들을 죽여 버리면 이 땅의 모든 것이 자기의 소유가 되는 줄 알고 주인의 아들을 죽여 버린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리고서는 자기들만의 잔치를 열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누가 더 많이 소유하는가의 싸움이 지금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정신입니다. 이러한 시대의 정신 속에서 교회마저 자기 소유를 늘리기 위하여 철야기도, 특별새벽기도, 금식기도까지 하고 있는 이러한 세상을 어찌 하나님께서 가만히 두시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주인을 몰라보고 오히려 주인을 죽여 버린 이 세상을 위하여 불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불에 타버릴 이 세상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하며 살아야 할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주인이고 나의 소유를 늘여주고 나를 이 세상에서 잘되게 하고 천국에도 보내주는 그러한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의 주인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시간이 누구의 것입니까? 여러분의 물질이 건강이 몸이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지라도 우리는 원망이 나올게 없는 자들입니다. 열명의 자녀가 한꺼번에 죽고, 모든 재산이 다 날아가고, 몸은 악창이 나서 재에 뒹굴며 기와조각으로 긁으며, 마누라는 당신을 그렇게 만든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라고 하는데도 욥은 무어라고 합니까?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오 취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이것이 인간의 가장 마땅하고 당연한 자세입니다. 여러분이 재산에 손해를 보았습니까? 건강을 잃었습니까? 그래서 억울합니까? 억울해 하는 것이 이미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과 따먹을 때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죄의 모습니다. 원래 내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하고서 하나님께 찬송을 돌릴 수 있는 것이 인간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현실이 어떠한지 아십니까? 지금 기독교 출판계에서 부르스 윌킨스의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이 출판된 지 5개월 동안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약 10만부가 팔린 책인데 미국에서는 100만부를 넘어선 책입니다. 야베스의 기도란 성경에 단지 한두 절 나오는 내용입니다.

 

 

 

 

역대상 4:9-10절을 봅니다.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되 원컨데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우리가 얼핏 보기에 얼마나 좋은 내용입니까? 그러니 이 말씀을 가지고 무엇이나 하나님께 구하면 복에 복을 더하고 지경을 넓혀주신다고 하니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입니다. 이 책에 대하여 기독신문과 카타콤 소식지에 동시에 실린 것을 잠시 말씀드립니다.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는 지금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기도하여 복을 받으려고 하니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출판업자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너무 기복적이라고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10만부가 베스트셀러라고 하니 책을 얼마나 읽지 않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그나마 읽는다는 것들이 겨우 이런 책들입니다. 그런데 이 야베스의 기도를 카타콤 소식지에서 전혀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성경원문읽기 코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야베스라는 말 자체가 히브리어로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고통이라는 주제가 역대기에서 공통된 신학의 주제인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통에 참여하신다는 것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야베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향하여 불렀다고 하는 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이제부터 고통을 당하게 될 거이다”라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평생 자신의 이름처럼 고통가운데서 무엇을 알았습니까? 하나님의 고통을 안 것이 복인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자기의 고통만 생각하고 관심을 가지고 사는데 야베스의 복이란 하나님의 고통을 알아차린 것이 진정한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베스의 기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를 십자가 안으로 밀어 넣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누가 스스로 이러한 십자가의 길로 가고자 합니까? 아무도 갈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제대로 된 믿음이란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유사믿음이야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가 있습니다만 그러나 참된 믿음이란 십자가에서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봅니다. 38-39절입니다. 예수님을 장사지낸 사람이 두 사람이 나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라는 사람과 니고데모입니다. 우선 요셉을 봅시다. 요셉은 방금 마태복음에서 부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보면 공의회 의원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공의회에서 예수를 죽이자는 결의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을 예수님의 제자라고 드러내지 못하였습니다. 은휘하였다고 합니다. 속으로는 인정하지만 겉으로는 숨긴 것입니다.

 

 

 

 

그리고 니고데모는 우리가 요한복음 3장에서 본 것처럼 밤중에 예수님께 찾아온 유대 랍비입니다. 왜 밤중에 찾아 왔을까요? 다른 사람들의 이목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남의 눈치를 살피던 사람들이 어떻게 당돌하게 빌라도에게 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까? 지금 분위기는 어떤 분위기입니까? 예수를 죽였으니 그를 따르는 자도 위험한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다 도망가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살아 있을 동안에는 드러내어 놓고 나서지 못하더니 어떻게 죽고 나자 따라 나서는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는 그 이루심의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서 세상의 복을 받는다고 하면 우리의 힘과 의지를 가지고 따라 갈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함께 십자가에 정과 욕심을 세상을 못 박자, 라고 하는 길을 스스로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란 단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실 뿐만 아니라 당신의 택한 백성을 끌어당기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마지막 기적이라도 일어날까 하고서 따라나선 자들이 예수님의 물과 피를 흘리심을 보고서는 이제 죽었다, 끝났다, 하면서 돌아가고 있는 그 자리에서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 같은 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이요 십자가의 기적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러한 예수님의 물과 피를 흘리심이 우리에게 효험이 되어서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를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죽으심을 이사야 53장에서 봅니다. 7-9절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그는 강포를 행지 아니하였고 그 입에 궤사가 없었으나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

 

 

 

 

예수님께서 악인과 함께 죽으셨지만 그러나 죽고 나서는 부자와 함께 되셨다는 것까지도 이루심을 통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고난당하신 것입니다. 그 대신 고난당하심을 믿는 자는 자신의 고난과 고통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요한복음 20:1-10  부활  2001. 9. 16.

 

 


살아나시다(마 28:1-10; 막 16:1-8; 눅 24:1-2)

1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간 것을 보고 2시몬 베드로와 예수의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3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쌔 4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아나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구푸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시몬 베드로도 따라 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 있더라 8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저희는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10이에 두 제자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 소식을 지금 여러분이 들으시면서 어떤 놀라움이나 감격이 있습니까? 늘 듣던 소리 아니냐! 하면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세계무역센터가 비행기 테러에 의하여 무너졌습니다, 하는 뉴스는 온 세계에 전하여 지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라는 이 소식을 전하는데 여러분의 반응이 소귀에 경읽는 식의 답답함이 느껴지는 것은 왜입니까? 물론 다는 아니겠지요.

 

 

 

 

그러나 이러한 소식들은 이미 식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정도는 이미 사도신경 외울 때 다 아는 내용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이란 사도들이 복음을 전한 내용의 핵심을 정리한 것입니다. 그 내용들 하나하나가 얼마나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습니까?

전에 어느 집사님께서 사도신경이 예사로 고백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소식들입니까?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이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하시고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분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냥 아무런 의미 없이 어려서부터 습관적으로 외워온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까? 예배 전에 의례히 행하는 하나의 순서이상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지금 죽음의 고통에 있는 형제자매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 말씀이 위로가 됩니까? 위로는커녕 그게 지금 내하고 무슨 상관이냐는 식으로 반응하지 않습니까? 지금 나의 형편을 보십시오, 도대체 이런 꼴을 왜 하필이면 나만 당하는 것입니까? 그때 목사가 옆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한다면 그런 목사 다시는 보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설교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 졸음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 졸음이 확 달아납니까? 간증시간에는 졸음이 확 달아나는 것입니다. 어느 집사가 어떻게 하였더니 부자가 되었더라하는 소식에는 귀가 쫑긋하여 지는 것입니다. 몇일 전에 새벽기도회 본문이 엘리사와 수넴 여인의 내용이었습니다. 수넴 여인이 귀부인입니다.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를 간곡히 청하여 그곳을 지날 때 마다 자기 집에서 식사를 하고 쉬고 갈수 있도록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남편에게 말하여 옥상에서 방을 하나 더 만들고 침상에 책상과 의자와 등불까지 주도면밀하게 준비합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그 집의 무슨 필요한 게 없는가하고서 물어봅니다. 왕이나 군대장관에게 말할 수 있는 엘리사 선지자입니다. 그러한 요구는 없었습니다.

 

 

 

 

그러자 게하시에게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하고서 물으니 남편이 나이가 많은데 자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엘리사 선지자가 자녀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들이 죽고 맙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다시 살려냅니다. 이러한 본문을 말씀드릴 때는 꼭 예화를 어느 집사가 목사에게 잘하였더니 이렇게 부자가 되었더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조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을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를 받음으로 엘리사의 하나님을 알아보게 된 사실을 복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목사에게 주도면밀하게 준비하여서 무엇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 받는 것입니다. 이분이 우리를 살과 피로, 죄로 죽을 우리를 살려내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여러분의 영원한 복인 것입니다.

 

 

 

 

오늘 분문의 내용입니다. 안식후 첫날입니다. 금요일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안식일을 지났으니 3일째입니다. 여인들이 무덤에 온 이유는 향품과 유향을 예수님의 시체에 바르기 위하여 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장사한 날이 안식일이 다되었기 때문입니다. 금요일 해질 때부터 다음날 해질 때까지가 안식일이기에 향품과 향유를 바르다가는 안식일을 어기게 되기에 무덤과 그 시체 두는 것을 보고서 안식일이 지나서 이른 아침 어두울 때 무덤으로 갔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제일 먼저 간 모양입니다. 그런데 가보니 돌이 무덤에서 옮겨져 있는 것입니다. 빈 무덤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서 말하기를 사람들이 주를 무덤에서 가져가서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단지 누가 시체를 어디로 옮겼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요한이 먼저 도착하나 무덤에 들어가기는 베드로가 먼저 들어가서 봅니다. 이스라엘의 무덤은 바위에 굴을 파서 시신을 세마포에 싸서 반듯이 눕혀두고서 굴입구를 바위로 막아 두는 것입니다. 그러니 흙으로 덮어버리는 우리의 무덤과는 다른 방식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무덤이 열려버리면 무슨 얼마나 썩는 냄새가 나겠습니까?

 

 

 

 

그래서 로마서에서 우리의 목구멍이 열린 무덤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의 말이 얼마나 악취가 되고 우리의 속에서 썩은 것이 많았으면 그렇게 말씀하고 있겠습니까? 이러한 무덤이기에 사람들이 들어가서 시체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여있고 머리를 쌌던 수건은 따로 개켜 있는 것입니다. 개켜 있더라는 말이 수건을 착착 접어서 두었다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쌌던 형태그대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세마포도 몸을 쌌던 그대로의 형태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몸만 싹 빠져나간 것입니다. 마치 이불을 덮고 있다가 몸만 싹 빠져 나가면 그 안에 사람이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듯이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을 보고서 믿었더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 다시 살아 나셨구나, 하고서는 그것으로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이상한 내용입니까?

 

 

 

 

8-10절을 다시 봅니다. 믿더라 하고서는 저희가 아직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 집으로 가는 것입니다. 분명히 빈 무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세마포와 수건이 놓여져 있는 것을 보니 누가 수건이나 세마포를 풀어놓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 시체를 옮겼다면 세마포 싸인 채로 가져가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분명히 다시 살아 나셨는데 제자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라는 말씀을 듣고서 무덤덤한 것과 마찬가지 아닙니까? 나중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21:3-4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더라” 도대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보고서도 나는 고기 잡으려 갈란다하고서 간 베드로와 거기에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따라나선 자들이 부활을 목격한 제자들의 모습이라고 상상이나 가십니까?

우리는 꿈에라도 예수님 만났다면-거의 비슷하게 흰옷 입고 인자하게 팔을 벌리고 있는 모습으로 말하고 있는데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사도 요한이 보았을 때는 너무나 영광스럽고 거룩한 모습 앞에서 죽은 자과 같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꿈에 예수님을 만났다는 자들이나 죽었다가 천국 같다온 자들은 어떻게 된 셈인지 예수님하고 아주 재미있게 천국에서 놀다가 온 것으로 이야기를 합니다.-당장에 뛰쳐나가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꿈도 아니고 분명히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서도 나는 고기 잡으러 갈란다, 하면서 옛날로 돌아간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은 부활이고 내일 당장 적금 맞춰 넣어야하는데 그것이나 해결하여 주소, 하는 식입니다. 그동안 삼년 동안 따라 다니느라고 사업도 하지 못하였는데 다시 사업이나 하러 가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도대체 왜 이런 반응이 나타났을까요? 오늘 우리도 부활의 소식을 듣고 있으면서도 왜 다른 염려들이 더 많은 것입니까? 제자들의 모습을 봅시다. 이들이 메시아로 알고 예수님을 따라 다닌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 자기 민족의 영광스러운 회복이었습니다. 선민의식. 자민족 중심주의였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셔도 그러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부활하셔서 40일을 땅에 계셨는데도 그것으로 무슨 큰일을 이루어 내시지 않았습니다. 살아계실 때에는 기적을 얼마나 많이 행하였습니까? 그래서 이 예수님만 따라 다니면 자신이 한자리 하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이 그렇게 수천 년을 기다라고 기다린 메시아의 왕국이 세워지리라는 기대로 따라 나섰는데 십자가에 죽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 나셨다고 하여도 별다른 변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고기가 잡으러 가련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절을 봅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하고서 묻는 것입니다. 지금 승천하기기 직전입니다. 그때의 관심사도 오직 이스라엘의 회복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나라도 이것을 아직도 꿈꾸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 그래서 약속의 땅에 살고 있는 이방인들 다 몰아내고 다윗의 왕국을 실현하고자 하는 운동이 시오니즘입니다. 막강한 경제력을 가지고 미국과 가장 군사적인 동맹을 철저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이 언제입니까? 이것이 제자들이 꿈꾸는 세상이었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이 구약에 얼마나 예언되어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것은 너희가 신경 쓸 것이 안 된다고 하시면서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대로 성령이 임하고 나니 제자들이 드디어 알아차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 중심이 아님을 알고서 이방에게까지 복음을 증거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존의 혈통중심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새롭게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내시는 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4장을 봅니다. 24:5절.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24:11-12절. 제자들이 믿지 아니하고 목격한 자도 기이히 여기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24:13-35절.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심. 그러나 이들이 알아보지 못함.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세히 말씀으로 풀어주심. 모세의 글과 모든 선지자의 글과 모든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바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나고 나자 겨우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줄 알았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제자들 가운데서 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그들 가운데서 보여주십니다. 완전한 부활을 보이시려고 음식을 드시기도 합니다. 그리고서 하신 말씀이 44절 이하입니다.

 

 

 

 

24:44-49절입니다.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단지 혈통적인 이스라엘의 회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는 것입니다. 이 일의 증인으로 제자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임하여 오늘 이곳까지 복음이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약속하고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구약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메시아의 고난과 부활이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까?

 

 

 

 

누가복음 24:47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부활을 합니다. 생명의 부활입니다. 그러면 세상에서 죽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실패하여도 상관이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계십니다. 이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서 사는 것이 성도입니다. 이러한 성도는 날마다 부활절입니다. 사망의 권세에 붙들려 나는 죽으면 안돼, 지면 안돼, 하면서 일평생 죽음의 종노릇하는데서 해방이 되어서 생명이 왕 노릇하는 예수 안에서 자유하며 가볍게 사는 것입니다.

비록 세계의 경제가 무너지더라도, 미국의 경기 악화로 우리나라에 더 큰 어려움이 오더라도 부활의 주님을 믿는 사람은 우리 주님이 거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마음 든든히 살수 있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요한복음 20:11-18  왜 우느냐?  2001. 9. 23.

 

 


11○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12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더라 15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17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18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막달라 마리아가 이른 아침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에 옵니다. 이로 보건데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무덤에 가볼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의 말을 듣고서 가본 것입니다. 이른 아침에 온 이유는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를 바르기 위하여 온 것입니다. 그런데 무덤문은 열려 있는데 시체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웁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고 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시체가 거기에 있었다면 울지 않았겠지요! 시체에 향유를 바르면서 또 울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만약에 시체가 거기에 그대로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러면 기독교도 없는 것이고 우리의 신앙도 헛것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시체가 없어졌다고 울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울고 있음은 마리아가 무엇을 믿지 못한 것입니까? 부활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이른 새벽,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에 올 정도로 예수님의 대한 사랑과 정성이 대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죽으신 것을 보고서는 이제 끝이라는 것입니다. 죽어 버렸는데 어떻게 다시 살아오시겠나, 그러니 시체에나 정성을 쏟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사랑한 모습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모습입니다.

물론 사랑을 많이 받았기에 이렇게 사랑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지만, 그러나 최고의 사랑을 나타낸다고 하는 것이 겨우 시체에 향유를 바르고 무덤을 꾸미는 생각뿐입니다. 성경에 마리아라는 여자가 많이 나옵니다만 막달라 마리아라고 하는 이 여인도 예수님의 부활하시리라는 말씀을 이미 들은 여인입니다.

 

 

 

 

누가복음 24:5-6절을 봅니다. “여자들이 두려워하여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지금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고 울고 있는 마리아에게 무엇을 기억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갈릴리에 있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이루어 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러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의 질문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러한 고백이 베드로의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결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고백 이후에 비로소 예수님께서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시고 제 3일에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셔야 된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됩니다, 하고서 말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십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마리아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의 생각, 마리아나 베드로의 생각의 한계란 죽음이 끝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으면 끝이라는 것입니다. 죽어 봐야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은 자가 눈앞에 살아나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살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죽어 냄새가 나던 나사로가 살아 나왔습니다. 나사로가 졸도하여 있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이 죽은 나사로를 살려 내신 것입니다.

 

 

 

 

이 나사로를 살리시는 사건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죽고 나서 나중에 부활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미 부활과 생명으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부활과 생명의 능력으로 오신 분이시기에 죽은 자를 살려 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3일 만에 살아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런데 왜 울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삶의 상황에서 울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고 우는 정도도 아니지 않습니까?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다고 울었습니다. 이것이 잘 하였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여도 죽음과 부활사이의 간격이 이렇게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부활을 어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마리아가 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언제 울고 있습니까? 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울지 않습니까? 세상만사가 내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울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눈물이 어떤 눈물입니까? 왜 울고 계십니까? 아니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살아 나셨다면 그 전능하신 능력으로 왜 내 코앞에 있는 이 문제 하나 해결하여 주시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원망과 짜증과 한이 뒤섞여서 눈물이 나는 것은 아닙니까? 남자들도 울 때가 있겠지만 여자들이 더 잘 울지요. 그래서 여자의 눈물에 속지 말라고 하는데 남편들이여, 여러분의 아내들이 언제 울고 있습디까? 예수님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울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까? 십자가의 사랑이 희미하여 진다고 애통하여 금식하며 우는 모습을 보았습니까? 아니면 롯의 아내처럼 불타버릴 것에 대한 연민과 뒤돌아봄으로 인한 눈물입니까? 우리 모두가 정말 울어야 할 때는 울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기뻐하여야 할 때는 울고, 울어야 할 때는 기뻐하고 있는 이러한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누가복음 7:31-32절을 봅니다. “또 가라사대 이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비유컨데 아이들이 장터에서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이 말씀은 백성들과 세리들은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았는데 바리새인과 율법자들은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세례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세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을 말씀하시면서 장터에 놀고 있는 아이들의 놀이를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놀이란 두 편으로 나누어서 한편이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한 편이 애곡을 하면 울어야 하는 놀이입니다. 그런데 무언가 마음에 맞지 않으면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애곡을 하여도 울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대하는 제자들이 이와 같다고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꼭 이와 같습니다. 울어야 할 때는 울지 않고 울지 말아야 할 때는 울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들을 잃어버리는 일에 대하여는 밤을 새며 몇 날 며칠을 울고불고 하는 것입니다. 사소한 자존심 건드리면 1주일 2주일씩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으시고 살아나신 분의 마음을 모르고 살아가면서도 울 줄 모르는 우리가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나의 삶에 무슨 도움이 되는가 하고서 손익계산을 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것을 나중에 죽을 때나 써먹을 보험증서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보험증서가 평소에는 필요 없습니다. 사고가 나야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이런 식으로 장롱 구석에 밀어 두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무엇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까?

 

 

 

 

로마서 4:25절입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 나셨느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의 범죄와 의롭다 하심과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무엇으로 해결하리요? 어떠한 선행과 고행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죄입니다. 이미 죄가 권세로서 왕노릇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죄 가운데 태어나서 죄 가운데 살다가 죄의 삯인 사망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인생에게 주의 죽으심과 부활이 능력이 되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를 없이 하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것이 이것이 가장 놀라운 소식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 있는 자격이 의로와야 합니다.

 

 

 

 

이 의롭다함이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고 믿는 것이 기적이며 복인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믿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알아가는 삶이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장롱 속에 넣어 두었다가 천국 들어갈 때 입장권으로 써먹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주의 죽으심과 부활이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에 세마포가 놓여져 있고 머리 쪽과 발쪽에 천사가 서 있습니다. 어떻게 머리와 발을 알 수가 있습니까? 세마포가 그대로 놓여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두 천사가 서있는 모습이 무엇과 연결이 됩니까? 여름수련회 때 성막론 할 때 생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출애굽기 25:16-22절입니다. “16내가 네게 줄 2)증거판을 궤 속에 둘찌며 17정금으로 3)속죄소를 만들되 장이 이 규빗 반, 광이 일 규빗 반이 되게 하고 18금으로 그룹 둘을 3)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19한 그룹은 이 끝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3)속죄소 두 끝에 3)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하게 할찌며 20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3)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3)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213)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2)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22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3)속죄소 위 곧 2)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증거궤 뚜껑의 이름이 속죄소요 시은좌입니다. 이곳에서 하나님께서 만나 주신다고 하신 곳입니다. 속죄가 이루어져야 은혜가 주어지는 곳입니다. 일년에 한번 대제사장이 어린양의 피를 가지고 이 속죄소에 바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뚜껑에 연결된 그룹이 있습니다. 두 그룹인데 천사가 날개를 펴고 있는 모양입니다. 지금 이 증거궤의 모습이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죽으심이 속죄와 은혜가 주어지는 자리인 것입니다.

 

 

 

 

이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속죄와 은혜를 받고 사는 삶, 이것이 성도의 기쁨이고 영광이고 자랑입니다. 이러한 능력의 삶이 나타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성도의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이러한 신령한 복들을 누리고 있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까? 땅에 있는 것 곧 사라져 버릴 안개 같은 것들이 없다고 울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런 것에 울지 맙시다. 주님이 부활하셨고 그리고 산 소망을 주셨습니다.

 

 

 

 

베드로전서 1:3-9절을 봅니다. “3○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6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7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8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 소망은 우리가 썩지 아니하고 더럽지 아니하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닥치는 여러 가지 시험과 근심으로 인하여 울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산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0:11-18  나를 만지지 말라  2001. 9. 23.

 

 


11○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푸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니 12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13천사들이 가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가로되 사람이 내 주를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14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의 서신 것을 보나 예수신줄 알지 못하더라 15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16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 17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18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지금의 시대를 접속의 시대라고 합니다. 인터넷에 접속을 하면 온 세계가 다 연결됩니다. 컴퓨터로만 접속이 되는 것이 아니라 들고 다니는 전화기로도 접속이 가능합니다. 접속만 되는 것이 아니라 동영상으로 바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방안에 앉아서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실시간으로 보게 되는 시대입니다. 이러한 접속의 시대에 왜 사람들은 명절이나 절기에 이렇게 많이 이동을 하고 있습니까? 특히 창원 같은 도시는 대부분 다른 곳에서 유입된 젊은 사람들 중심이니 명절이면 도시전체가 텅 빈 것처럼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집안에서 얼마든지 화면으로 보고 인사하고 할 수도 있는데 꼭 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느 철학자가 접속보다는 접촉이 좋아서 그런답니다. 아무리 접속의 시대이지만 그러나 직접 피부와 피부가 접촉하는 것이 가장 오래가는 느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반가운 사람을 만나면 무엇부터 합니까? 덥썩 손을 잡는 것이지요, 얼굴도 만져보고, 끌어안고 하지 않습니까?

 

 

 

 

오늘 말씀에 보시면 마리아가 울고 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처음에는 동산지기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니 예수님인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만져보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게 생신지 꿈인지 확인을 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꼬집어보든지, 아니면 상대방을 만져 보든지 확인을 해야 하는 순간인데 예수님께서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 만지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제가 청년 때에 어느 자매에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왜 마리아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셨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27절에 보시면 도마에게는 만져보게 하셨잖습니까? 그러니 예수님께서 왜 어떤 사람에게는 만지지 말라고 하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만져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제가 그 자매보다 교회 다닌 지가 오래 되어서 질문을 하였겠지요. 그때 저는 주일학교 교사이기도 하였고, 또 기독교 전문서점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라서 알아보고 말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까지 나온 거의 모든 성경주석을 다 찾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명쾌한 대답이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겨우 찾아낸 결론이 여자는 남자 보다 더 감성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 만져 보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불수도 없을 테니 미리부터 차단을 한다는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도마는 왜 만져 보라고 하셨는가 하면 부활을 의심하기에 모든 사람의 의심을 확인시켜주는 차원이라는 정도였습니다. 어느 정도는 대답이 되는 것 같지만 시원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박영선 목사님의 요한복음 설교에서 가장 시원한 대답을 보게 되었습니다. 더 나은 해석이 나올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보다 나은 해석을 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거의 인용을 합니다. 설교란 설교자 자신의 잘남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며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가가 목적이어야 합니다. 그로 인하여 주의 백성들이 유익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고집과 자기 주장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해석을 계속하여 보는 것입니다.

 

 

 

 

레위기 23:9-14절을 봅니다. “9○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0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위선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11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열납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12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날에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을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 13그 소제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 이를 여호와께 드려 화제를 삼아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전제로는 포도주 힌 사분 일을 쓸 것이며 14너희는 너희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오는 그날까지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찌니 이는 너희가 그 거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켜야할 규례들 중에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 가져가서 하나님 앞에 흔들어 바치는 제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제라고 합니다. 짐승을 불에 태우면 번제, 곡식을 불에 태우면 소제, 포도주나 기름을 부으면 전제입니다. 그런데 처음 익은 곡식단을 하나님께 예물로 드리기 전까지는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익은 곡식단을 하나님께로 가져와서 요제를 드리고 난 후에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흔들어 바치는 날이 안식일 다음날입니다. 이러한 곡식의 첫 단뿐만이 아니라 사람이나 짐승이나 간에 처음 태어난 수컷을 모두 하나님께 돌려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처음 것을 돌림은 그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출애굽 때에 처음 태어난 장자나 짐승이나 간에 다 죽었지만 이린 양의 피를 바르고서 살아남았습니다. 그러므로 처음 것을 하나님께 돌려야하는 것은 사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만 처음 것이 드려짐을 통하여 나머지도 거룩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익은 곡식단을 제일 먼저 하나님께 드리고서 먹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익은 곡식단은 사람이 손대지 못하는 것입니다. 손대지 못한다고 하여서 들고 오는 것도 금하는 것이 아니지요. 먹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처음 익은 열매가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의미에서 마리아에게 예수님께서 손을 대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만져보았다, 아니다가 중요하기 보다는 예수님께서 안식후 다음날에 부활하신 것이 무슨 의미냐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도마는 만져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태복음 28:8-18절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덥썩 붙들었기에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닌가하고 봅니다. 나는 지금 처음 익은 열매로서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23절을 봅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곡식에 비유합니다. 처음 익은 곡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요제를 드리듯이 하나님께 안식후 첫날 다시 사심으로 구약의 그 제사를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차원에서 마리아에게 만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첫 열매라고 하신 것은 다음 열매가 있다는 것입니다. 첫 열매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다음으로 나타날 열매들은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 그에게 붙은 자라고 합니다. 그에게 붙은 자들, 그를 믿는 자들이 다 함께 부활의 다음 열매들도 나타날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하심으로 예수님은 맏아들이 되신 것입니다.

 

 

 

 

로마서 8:29절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 첫 열매가 되시듯이 맏아들이 되시는 것입니다. 맏아들이 되신다는 것은 그를 이어서 다른 많은 아들들이 나오게 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첫 열매로서 하나님께 드려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다음 열매들이 계속하여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처음 열매로 드려지게 되심을 통하여 죄인들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17절을 봅니다.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시고서는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안식후 첫날 다시 살아나심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맏아들이 되심으로 이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이 드디어 예수님께서 아버지라고 부르신 분을 아버지라, 하나님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하면 예수님만이 하나님 아버지를 바르게 나타내신 분이십니다. 사람들마다 각각 하나님의 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열사람 만나면 열 사람의 하나님이 다르고 백사람 만나면 백 사람의 하나님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고, 맏아들이 되심으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이제 제대로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리아에게 나를 만지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이제 육체적인 접촉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고서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다른 차원, 다른 세계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정리로서 무덤까지 찾아오는 그러한 차원이 아니라 다시 사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육체대로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지고 확인하고 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품에 기대어 식사를 하던 사도 요한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만나 뵈었을 때 죽은 자와 같았습니다. 그러니 부활하신 몸을 본 것과 승천하셔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올리우신 분은 육체대로 알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지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여전히 예수님을 육체적인 접촉을 하고 싶어 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꿈속에서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자들도 예수님을 만나 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체적인 접촉을 하고, 예수님께서 안아 주시더라, 옷자락을 만져 보았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참 믿음이 좋은 사람들이구나, 어쩌면 나는 그런 비슷한 꿈도 꾸지를 못하는가 하면서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식으로 알면 안 되는 것입니다. 도마에게 무어라고 하십니까?

 

 

 

 

29절에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마리아나 도마처럼 신체적인 접촉을 통하여 확인하고서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지 않고서 믿는 것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성령이 임하심으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복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8-9절을 봅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예수님을 보지도 못하고서 사랑하고 기뻐하고 있는 것이 바로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성도란 흩어진 나그네로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들이 닥치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도 못하였는데 사랑하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복입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인하여 선물이 주어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6-17절을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을 지나 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예수님을 육체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고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마리아가 예수님을 찾고 만져보려는 식으로 믿고 있다면 주님께서 무어라고 하시겠습니까?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실 것입니다. 아직도 자신의 이력이나 경력으로 주님을 붙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누군데 그래도 지금까지 신앙하나로 버텨왔다고 하는 그런 오기와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한 것이 마리아의 수준인 것입니다.

 

 

 

 

나를 만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붙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 붙든다고 하여도 잠잘 때는 어떻게 합니까? 죽어 버리면 어떻게 붙들 수가 있습니까? 내 힘과 정성과 열심이 주님을 붙들고 있는 자리에서 오히려 놓아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도 살아 계셔서 주님의 보좌 우편에서 자기의 택한 자들을 위하여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빌고 계시는 그 주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야 쉼을 얻을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가장 큰 추석선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20:19-23  두려움과 평강  2001. 10. 7.

 

 


19○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안식후 첫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아 두었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자의 말을 들었고 일부 제자들은 빈무덤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두려워하여서 문을 닫아걸고 모였습니다. 이들이 기도하였다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저 두려워하여 전전긍긍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셔서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은 두려움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살펴보고 이러한 두려움에서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서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이 넘치기를 소원하는 바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두려움이 있습니다. 두려움의 종류는 다양하겠지만 모두가 두려워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 두려움이 해결되지 않고서는 아무리 안전장치를 하여도 평강을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도둑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리 안전장치를 한 집에서 산다고 하여도 늘 불안한 것입니다. 전자 경비를 설치하여도 혹시 세콤이 고장 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담을 높이고 경비원을 세우고 사나운 개들로 집을 지키게 하고서도 불안해서 잠을 못자는 사람이 한두 사람이겠습니까?

 

 

 

 

그러니 사람의 소유가 많으면 많을수록 안전이 더하여 지는 것이 아니라 불안과 두려움이 가중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두려움의 뿌리는 결국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죽음이란 무엇 때문에 온 것입니까? 죄로 인하여 온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도 결국은 죄 때문에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란 결국 일평생동안 죽음이란 공포 속에서 그 죽음의 종노릇하면서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15절에서 예수님이 오신 이유를 “죽기를 무서워하여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 죽기를 무서워하여 일생에 종이 되어서 벌벌 떨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죽으면 안돼, 나는 살아남아야 해, 나는 실패하면 안돼, 성공해야 돼, 하는 이러한 모습이 실패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붙들려 사는 불쌍한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두려움이 죄로부터 왔다는데 그 근원이 어디이겠습니까?

 

 

 

 

창세기 3:8-10절입니다. “8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죄가 들어오기 전의 에덴동산에서는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옷을 입지 않아도 해충이나 가시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물론 사나운 짐승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단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는 갑자기 하나님을 피하게 된 것입니다. 죄를 짓기 전에는 하나님 앞에서 가리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두렵지 않았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범죄이후에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동시에 생긴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 앞에서건 사람 앞에 서건 자기를 스스로 가리고, 또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범죄의 결과로 두려움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두려움을 느끼는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나서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아무리 심리적으로 사회학적으로 병리학으로 풀어낸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마다 일생동안 죽음에 종노릇을 하기에 두려움으로 지내다가 지옥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8절에 둘째 사망에 들어가는 자들의 목록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불과 유황에 들어가는 목록에서 자유로우신 분이 계십니까? 그런데 일순위가 무엇입니까?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는 것이 죄지은 결과입니다. 이것이 물론 믿지 아니하는 죄와 연결되고 나머지와도 한 뿌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만 두려워하는 것은 아직도 무엇이 해결이 되지 않았기에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이러한 두려움에서 해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두려움에 붙들려 있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무엇을 주시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무엇을 기대하고 믿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무엇을 주시기를 기대하고 있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종교적인 관점에서 자신이 무엇을 바쳐서 신에게서 자신이 기대하는 바를 받아 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신이 무엇을 좋아하는가를 알려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에 와서도 목사에게 요구하는 것이 자신이 어떻게 하면 신의 뜻을 잘 알아서 신을 기분 좋게 해드림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받아 내는가를 가르쳐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복 받는 비결, 성공의 비결이 설교제목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하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러니 정성을 바치라면 정성을, 돈을 바치라면 돈을, 40일 금식을 하라면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받아 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로마서 11:35-36절입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로 인하여 유지, 보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자기의 것이라고 하여 주님께 드릴 것이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갈 사람들입니다. 무엇을 내 것이라고 주장할 수가 있습니까? 모두가 주님의 것입니다.

 

 

 

 

불신자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신자들을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인정을 하지 않으려고 할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먼저 주께 드려서 내가 원하는 것을 받아 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도행전 17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주님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듣고서도 두려워서 떨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들고 오신 것이 무엇입니까? 빈손으로 오셨습니다. 손에 못 박힌 자국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옆구리에 창에 찔린 흔적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평강이 있을찌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돈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권세를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커다란 예배당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평강을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이것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이러한 평강을 어떠한 방식으로 주시는 것입니까? 숨을 내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흥사들이 흉내 낸다고 이상한 바람소리를 내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합니다만 이 장면은 무엇이 생각이 납니까?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숨을 불어 넣어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에게 숨을 내어 쉬시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는 것을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새 생명을 창조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이로 인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자만이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평강은 세상이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찾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셔야만 받을 수가 있고 받은 자만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평강을 받은 자는 내일 처형당한다는 감옥에서도 편히 누워 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평강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평강은 범죄 이전에 가졌던 두려움 없었던 때보다도 더 나은 평강인 것입니다. 이러한 평강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사야 53:4-6절을 봅니다. “4○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가 평강을 누리게 됨은 그의 대신 받은 고난을 인함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가오셔서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이신 것입니다. 대신 고난 받은 것은 죄인들에게 무엇을 주시기 위함입니까? 평강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결코 평안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갖추었다고 하여도 어떠한 담도 안전장치도 막아내지 못하는 두려움을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 받은 모습을 보이시면서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성령 임하심과 같은 사건입니다.

 

 

 

 

에스겔서 36:25-28절입니다. “25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26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1)굳은 마음을 제하고 2)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28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예수님의 상처받은 모습을 보이시면서 평강을 주시고 동시에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에스겔서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신을 자기의 백성들의 마음에 두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언약관계가 회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을 보내셔서 자기 백성들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다시 요한복음 20:17절을 봅니다.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서 전하라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제 내 아버지가 너희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내 하나님이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바른 관계가 성립이 되면 이제는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없어서 두려웠던 것입니다. 아이들의 두려움이란 부모가 없는 것이 두려움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아이 같아야 한다는 것은 부모만 있으면 두려움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집이 어떻게 될까? 앞으로 이 교회가 어떻게 될까? 염려를 접어 두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죄를 해결하셨습니다. 죄의 종으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자들이 이제 예수님으로 인하여 담대하게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나가면 죽는 것입니다.

 

 

 

 

사사기 6:22-24절입니다. “22기드온이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고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 23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24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단을 쌓고 이름을 1)여호와샬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고도 죽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단을 쌓고서 그 단 이름을 여호와 샬롬이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평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서도 죽지 않고 그와 함께 살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가 사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여호와의 평강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진 자는 세상에서 담대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20:21절. “봉독” 평강을 주시면서 세상을 향하여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샬롬!

 

 

 

요한복음 20:24-29  믿는 자가 되라  2001. 10. 14.

 

 


24○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고 27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두려워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평강이 있을찌어다, 라고 하신 말씀은 제자들에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전쟁의 소문만 듣는 것이 아니라 뉴스로 목격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앞으로 세계의 정세가 어떻게 변화할까하는 두려움에 사로잡히지는 않았습니까? 우리나라도 미국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나라이기에 이번 전쟁과 무관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그러니 자의든 타의든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들게 되어있습니다. 이러한 변화에 대처하는 좋은 책이 한권 나왔습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책 제목이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라는 책입니다. 빠르게 읽으면 30분에 다 읽을 수 있는 책인데 변화에 대한 해결책을 우화로 말하고 있습니다.

 

 

 

 

두 마리의 생쥐와 생쥐만한 꼬마 인간 두 명이 미로 같은 세상에서 치즈를 발견하여 먹다가 치즈가 없어졌을 때 대처하는 방법입니다. 새앙쥐는 재빠르게 다른 곳으로 찾아 나섭니다. 비록 여러 번의 실패를 하지만,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먼저 치즈를 찾아 나서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치즈를 찾아 나서는 일에 가장 큰 장애물이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면 성공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치즈는 여러 사람의 여러 가지 목표가 될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변화를 두려워하시는 분은 한번쯤 보실만합니다만 그러나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지난주의 설교가 기억이 났습니다. 두려움이 어디서 오게 되었는가?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단절에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떠한 세상의 변화에도 두려워하지 않아야 당연한 것이다, 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듣는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 모양 두려워 떨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을 십자가로 승리하신 분이 우리에게 평강을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도마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믿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 보아야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마의 말이 요한복음에서 두 번 나옵니다. 11장에서,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를 깨우려고 가려고 하십니다. 그곳이 베다니인데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곳입니다. 제자들이 유대인들이 돌로 들어 치려고 하는데 다시 베다니로 가야합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도마가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러가자고 합니다. 그리고 14장에서 예수님께서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하셨을 때 너희가 그 길을 알리라고 하시자 도마가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는데 어찌 그 길을 알겠습니까, 라고 말합니다. 이때 주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건데 도마는 어딘가 저돌적이고 분명한 사람 같습니다.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지요! 길을 보아야 아는 것이고, 부활도 직접 목격하여야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도마의 의심과 불신은 두 가지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 모두가 도마처럼 불신을 하고 있는데 도마가 대신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여 주었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인간이 얼마나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가를 고발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후자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도대체 믿음이 무엇인지를 한 번 더 확인을 하고자 합니다.

 

 

 

 

 

제자들이 3년 동안 따라 다니면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하여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이란 게 역시 보이는 것을 원하고 따라 다닌 것입니다. 믿음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 없음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 대표가 도마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말로서는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24-25절을 봅니다. 내가 직접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손으로 만져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겠노라는 것입니다. ‘믿지 않겠노라’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고 지나는데 8일을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서 모이고 문이 닫혔는데 그 가운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역시 평강이 있을찌어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의 말을 다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분명히 도마가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듣고서 나는 믿지 못하겠다고 말할 때는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도마의 말을 정확하게 그대로 아시고 도마의 말대로 손과 옆구리를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넣어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도마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오늘 우리의 마음속의 생각을 주님이 다 아십니다. 주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마음대로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의 말과 행실과 마음의 상태까지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앞에서 내숭떨지 맙시다. 도마의 말을 방금 들으신 것처럼 말씀하시는데 도마가 직접 만져 보았을까요? 저는 감히 만져 보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 말씀을 하시면서 상처의 흔적을 보이시면서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믿음이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도마의 고백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나의 주란 고백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이심을 내가 믿습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를 나를 보고서 믿느냐 그러나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보고서 믿는 사람이 셉니까?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이 셉니까? 세상에서는 보고서 믿는 사람이 세다, 라고 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백번 듣는 것 보다 한번 보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공부 백날해도 한번 체험을 해야 분명하여 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체험을 가지려고 방언 받으려고 이산 저산으로 쫓아다닌 것입니다. 어느 기도원에서는 강아지도 방언한다고 그럽디다. 그러니 사람이 그 기도원와서 방언 받지 못하면 강아지만도 못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방언 받아야 믿음의 확신이 생기는 것으로 한때 유행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상한 방언들이 얼마나 많이 나왔는지 모릅니다. 방언이란 모든 종교에 다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절에도 방언이 있고, 인도의 수많은 종교들에도 방언들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방언 없으면 구원도 없다는 말까지 돌면서 자기 구원을 확인하기 위해서 방언을 받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가 예수님 보실 때는 무어라고 하시겠습니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보고서 믿느냐, 그러나 보지 못하고서 믿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작 보지 않고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그냥 믿어지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믿어지는 것입니다. 안 믿어지는 것을 믿자, 믿자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 나셨다, 아멘입니다. 그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아멘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복인 줄 모르고 일부러 사서 고생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63빌딩의 63층까지 가는 길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한 가지는 고속 엘리베이터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손가락으로 단추만 누르면 자동으로 올라갑니다. 또 한 가지는 계단을 통하여 가는 것입니다. 걷든지 뛰든지 계단을 통하여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더 분명한 체험이 있는 것입니까? 계단을 걸어 올라간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미 63층에 올라가 있는 사람은 밋밋한 것입니다. 그러자 서로 만나는 것이지요.

누가 할말이 많은 것입니까? 계단을 걸어서 올라온 사람입니다.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 다리가 부었는지, 아직도 숨이 차다며 헉헉거릴 것입니다. 이것이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미 올라온 사람은 그것이 부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더 복된 사람입니까? 엘리베이터 타고 온 사람입니다. 무엇하러 그 고생을 하고 왔습니까? 믿음이 없으니 자기의 손으로 확인을 하고서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들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누가 이곳까지 잘 왔는가, 하는 싸움입니다. 그러면 늘 밋밋한 사람들이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63층에 올라온 것은 꼭 같습니다. 이제부터의 문제입니다. 그곳에 올라온 것은 최고급 뷔페식당이 있는 것입니다. 창원의 최고급과 비교가 안 되겠지요? 63층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빌딩의 고급식당 식사 한 끼에 수십 만원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을 먹어야 하는데 맛을 보아야 하는데 그 음식을 맛을 보기는 뒷전이고 자기가 여기까지 올라온 무용담 자랑하기에 바쁜 것입니다. 우리가 평탄하게 오늘 이 자리까지 왔던지 아니면 참으로 화끈하게 체험을 하고서 이곳에 와 있던지 모두가 주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입어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영원의 세계를 맛을 보고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20:21-23절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땅에 보내신 것과 같이 우리를 예수님께서 세상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세상에 증거 할 자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그러면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입니까? “같이”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여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일곱 번 용서가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의 방향으로 한걸음도 나가지 않고서 무엇을 점검하고 있는 것입니까? 누가 더 화끈하게 예수님 믿고 이곳에 왔는가, 하는 자랑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신의 세계에서 믿음의 세계로 넘어온 것은 전적인 주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밋밋하게 온 사람이든, 화끈하게 넘어온 사람이든 꼭 같이 은혜로 넘어온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여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믿어지고 넘어온 사람이 더 복 있는 사람이지, 믿어지기는 하는데 도마처럼 믿지 않으려고 작정을 하고 있으니 더욱 고난과 어려움을 통하여 들어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지금 어떤 주님과의 사귐이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가신 그 길로 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자기를 저주하는 자를 오히려 축복하고 있습니까?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가고 있습니까? 속옷을 달라면 겉옷까지 주고 있습니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상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어떻게 사람에게 일어나겠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란 것은 바로 예수님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을 받음으로 우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것이요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고 하십니다.

 

 

 

 

죄 사함의 권세는 아버지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 내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을 때 유대인들이 참람되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죄사함을 자기의 제자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증거 하면 그 말씀을 믿는 자들이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는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증인의 역할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계가 믿음의 세계인데 이러한 곳으로는 한걸음도 나아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클리닉 성경공부반에서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지금 믿음과 구원의 확신에 대하여 공부를 하고 있는데 혼동이 된다는 것입니다. 혼동이 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살아온 세상은 인과율의 세상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난 이후의 인간은 자기의 행함에 자기의 구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일의 결과는 나의 행함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란 일한 것이 없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기에 혼동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말도 되지 않는 논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내 지은 죄를 어떻게 남이 갚아주는가, 그러한 것을 믿는다는 사람이 뻔뻔스럽지 자기의 죄값을 자기가 지고 가겠다는 사람이 정상적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아주 우스운 이야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몰아 부치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그러한 복음의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이야기들로 믿음의 내용을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이렇게 좋은 일을 한다, 하는 것으로 대신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히브리서를 통하여 봅니다.

 

 

 

 

히브리서 11:1-7절을 봅니다. “1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2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것이 아니니라 4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5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6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7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합니다. 이 말씀에서 노아는 그 당시 사람들이 볼 때에 미친 사람입니다. 도대체 현실감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는데 자기 혼자 산속에서 방주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도 120년간이나 왜 이렇게 하고 있습니까?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를 받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보지 못하나 노아는 이미 보는 것입니다. 세상의 심판의 경고를 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의 심판당할 것을 믿습니까? 보이지 않는데요? 과학자들이 첨단 우주 망원경으로 살펴보아도 거대한 혹성이 지구로 향하여 돌진하여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혹시 돌진하여 오더라고 핵폭탄으로 날려버리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엇을 믿어야 하겠습니까? 주님의 약속을 믿을 것입니까? 과학자들과 경제학자들의 말을 믿어야 합니까? 둘 다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노아의 믿음입니다.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경고를 받았다면 노아처럼 방주 준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자세입니다.

 

 

 

 

23-28절입니다. “23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겨 임금의 명령을 무서워 아니하였으며 24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25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27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28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한 것이며.

 

 

 

 

모세는 바로왕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버리고 자기 백성과 함께 고난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상 주시는 분을 바라본 것입니다. 이러한 상이 무엇입니까? 영생의 상인 것입니다. 이것이 귀한 줄 아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을 다 말하려면 시간이 부족합니다.

 

 

 

 

33-40절을 봅니다.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36또 어떤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7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40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러한 믿음의 세계에 초대를 받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과 그 세계에 부름 받고 있습니다. 세상의 자잘한 것들에 흔들리거나 두려워하지 마시고 믿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20:30-31  성경의 기록 목적  2001. 10. 2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약 1,500년에 걸쳐서 40여명의 성경 기자가 기록하였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되었기에 정확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 즉 이 성경의 기록 목적이 무엇일까요? 그 핵심사상이 무엇인지를 오늘 말씀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이 좁게는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입니다. 그러나 넓게는 성경전체의 기록 목적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에 행하신 일들이 성경에 기록된 것 외에도 수없이 많지만 그러나 이것만 기록한 이유는 이것만으로 성경의 기록 목적이 충분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에 이것만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만으로 하나님의 계시는 필요 충분한 것입니다. 더 이상의 계시가 추가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성경의 핵심 목적이 무엇일까? 이것 한 가지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확인을 하고자 합니다.

 

 

 

 

31절을 봅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이것을 읽고 듣는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믿음으로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기록목적입니다.

 

 

 

 

이것을 여러분이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우리가 다른 것에 기대를 하고 있다면 핵심을 놓치는 것이요 중심을 놓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예배당에 모이고 열심히 종교사업을 한다고 하여도 변죽만 울릴 뿐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할 때에 반드시 그 행동에 대한 결과를 기대합니다. 이유 없이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이 움직이든지 행동이 움직이든지 간에 사람의 행동에는 무언가 기대하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 목적 없이 길에서 방황하는 것 같은 사람이라도 다 그 이유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교회를 나오고 성경을 보고 이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는 지금 무얼 기대하고, 무얼 바라고 있습니까? 수능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지금 고3 자녀를 둔 부모는 황제를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자녀의 신체적 정신적 컨디션이 최고가 되도록 마음을 졸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배드리면서 무슨 생각이 들겠습니까? 우리 아들 좋은 대학 들어가기가 목적일 것입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무턱대고 좋은 대학 들어가도록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도 안 되는 것인 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배운 것 잊어버리지 않고 실수 없이 잘 치도록 기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생명이 있는가, 없는가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예수님을 믿는다면서 목적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수능생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당장 전세금을 마련해야 하는 사람은 온통 전세금을 어떻게 해결할 수 없나,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진주에 어떤 사람은 복권이 25억원도 당첨이 되는데 우리교회는 부자가 와서 한 몇 억쯤 헌금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이번 사업이 제대로 잘 풀릴 것인가? 하는 생각들이 우선으로 들어 있다면 생명에 대하여 관심이 갈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생명에 관심이 없으니 생명에 관심을 가지자,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생명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된 생명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참된 생명이란 아버지의 뜻대로 사는 사람이다, 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자 지금까지 자신들이 생명이 있는 줄 알고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람들이 가짜였음이 드러난 것입니다. 그러자 자기들의 가짜 됨을 감추기 위하여 참된 생명을 죽여 버렸다는 것이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자세와 태도가 어떠한가를 보니 모두가 생명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마다 각자가 자신의 길이 있고, 자신의 진리가 있고, 자신의 생명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은 이미 참된 길과 진리와 생명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이미 어두움 가운데, 죄 가운데 있기에 이들에게 진리와 생명 길이라는 것들은 모두가 어두움 안에서 통하는 것들입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요한복음에서 추적하여 온 내용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어두움을 사랑함으로 빛 가운데로 나아오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두움에 속하여 있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에게서 생명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거저 자신들이 어두운 세상에서 살아가기에 유용한 것들만 찾더라는 것입니다. 병이 든 사람은 병 낫기만을 위하고, 가난한 사람은 부자 되기를 원하고, 억울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를 원하면서 예수님을 찾아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들으면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쳐주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병자를 다 고쳐주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엘리사 선지자 때에 수많은 문둥병자들이 있었지만 고침 받은 자는 이방인인 아람군대의 장관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고침 받은 문둥병자 열명 중에 몇 명이 구원을 받았습니까? 한명뿐입니다.

 

 

 

 

부자가 된다고요?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여우도 굴이 있고 새들도 자기들의 깃들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다고 하셨습니다.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하십니까? 형이 유산을 가로채서 억울하다고요? 예수님께서 재산 나누는 사람입니까?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소유가 많아짐으로 생명과는 거리가 더욱 멀어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여, 주여 부르면서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를 보시면 우리가 얼마나 성경이 목적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과 거리가 먼가를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고서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다 떠나가고 제자들만 남았을 때 너희도 가려느냐고 하시자 생명의 말씀이 여기 있으매 우리가 뉘게로 가리이까, 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는 생명이고 무엇이고 내 목숨 살리자고 다 도망갔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죽기까지 따르겠다던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것에 대하여는 관심조차 없더라는 것이 요한복음만이 아니라 성경전체의 증거입니다.

 

 

 

 

이사야 1장에서는 소나 나귀들은 자신의 주인이나 주인의 구유를 알아보는데 인간들은 자신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를 들고 때려도 못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맞았든지 온 몸이 머리끝부터 발까지 상처투성이인데도 주님께로 돌아올 줄을 모르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구약의 끝인 말라기 1:10절에서는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죄인 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죄인들이기에 이러한 상태를 허물과 죄로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믿으라고 한다고 해서 믿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은 들을 귀 있는 자만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들을 귀가 생긴 사람은 이미 하나님께서 살려주셨기에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은 아무나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귀가 있으니 아무나 들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목적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오직 자신들이 원하는 욕구를 채우기 위한 성경으로 보고 있다면 생명과 무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기초도 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늘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부인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긍정하고 자기를 세우고 자기를 살리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고 있으니 생명과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예수님을 제대로 믿어서 생명을 얻을 수가 있습니까? 이런 질문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마19, 막10, 눅18장에서 부자 관원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는 질문을 하였을 때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하십니까? 계명을 지키라고 하십니다. 무슨 계명입니까 하고 물었을 때 십계명을 말씀합니다. 그러자 그 관원이 그 정도의 율법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무엇이 더 부족합니까, 라고 질문을 하자 그 사람이 부자인줄 예수님께서 아시고 너의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이 부자 관원이 부자인고로 근심하여 물러갔습니다. 이 부자 관원이 영생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께 기웃거렸지만 그러나 그는 영생보다는 자신의 재산이 더 귀하였습니다. 그 재산이 자기를 살리는 줄 알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 없음의 증거인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아니 그러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여러분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는 부자가 아니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으니 일용할 양식보다 많으면 사실 모두 부자입니다.

 

 

 

 

우리의 가진 것 모두를 버리고 주를 따르라고 하신다면 누가 따르겠습니까? 결국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무어라고 하신 것입니까?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마 이번에 많이들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또 질문이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가 있습니까?

 

 

 

 

사람은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못하는 일을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다는 말로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땅을 구하는데 우리는 못하니 하나님 도와주세요, 하면 땅 주인이 반값에 땅을 내어 놓는다든지 하면 역시 하나님을 하실 수 있구나, 그러한 적용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나님께서 다 하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영생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인간이 영생을 위하여 자신의 조건을 제시하여 얻어낼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부자 관원이 율법을 다 지켜도 무엇을 사랑한 것입니까? 하나님보다 재물을 사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입니다. 영생 때문에 여러분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가 있습니까? 그럴 수가 없다면 우리는 아직도 영생의 가치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한두 번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어떤 사람이 교회를 몇 달간 나왔습니다. 그런데 학습문답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것을 믿으십니까? 예수고 무어고 내 몸이나 나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 사람의 말이 우습게 들립니까? 이 사람의 말이나 부자 관원이 영생의 말씀 앞에서 자신의 재산 때문에 돌아선 것이 무엇이 다릅니까? 그리고 오늘 우리와 무엇이 다릅니까? 그러니 우리의 실력으로는 영생이란 이미 물 건너간 것입니다. 영생이고 무어고 간에 내 몸 하나 건강하고 내 재산 불어나고 우리 집안 잘되고 우리 회사 잘되기 위하여 교회 나오면 무어라고 합니까?

 

 

 

 

교회를 위하여 헌신충성 봉사 많이 하면 여러분의 몸도 건강하고 집안도 잘되고 회사도 잘된다고 하니 일종의 거래를 하는 것입니다. 서로 서로 짜고 이렇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런 말씀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이 되십니까? 심하다고 여겨지시면 아직도 자신의 죄와 욕심의 깊이를 보지 못하여 그렇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지적에 예, 그렇습니다, 저는 정말 생명과 무관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몇 십 년 살다가 죽어질 목숨하나 부지하기 위하여 나의 온 인생을 걸어온 불쌍한 인생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통하여 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에게 다음의 말씀은 복음이 됩니다.

 

 

 

 

요한복음 1:29절. “보라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요한복음 3:16절. “.....믿는 자는 영생,,,,” 요한복음 5:39절.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요한복음 6:29절.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요한복음 6:40절.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요한복음 6:52-58절. “봉독” 이 생명을 은혜로 값없이 받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17절. “봉독” 왜 값없이 생명을 주셔야만 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생명을 위하여 어떤 조건도 만족시킬만한 수준이 못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리고 생명의 가치가 너무 커서 온 세상을 주고도 살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을 우리가 선물로 받았다면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부럽습니까? 목숨을 위하여 살지 마시고 주신 생명을 위하여 사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21:1-14  다시 찾아오신 예수님  2001. 10. 28.

 

 


1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2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줄 알지 못하는지라 5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9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11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이것은 예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오늘이 종교개혁 기념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484년이 되는 해입니다. 종교 개혁의 원리를 보면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이유를 알게 됩니다. 종교개혁의 원리는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입니다. 더 간단하게 압축한다면 ‘이신칭의’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과 대비되는가 하면 행위와 대비되는 개념입니다. 중세교회가 너무나 잘못된 행위들로 가득 차게 되자 많은 개혁자들이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하다가 종교재판에 의하여 순교한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고 하는데 죽임을 당하는 교회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중세 교회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과 멀어져 있는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마치 구약시대 때 선지자들이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증거 하니 사람들이 싫다고 죽여 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들을 보내어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려고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말씀이 싫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밀쳐 버린 것입니다. 우리의 죄 된 본성상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미워하고 싫어하였는지를 이스라엘의 역사가 극명하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시아 왕 때의 모습을 봅니다. 아예 하나님의 율법이 성전 구석에 쳐 박혀 있어서 말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길 성전에는 온갖 우상만 가득하였습니다. 이럴 때 요시아 왕이 성전을 수리하라고 명령합니다. 성전을 수리하다가 하나님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읽고서는 회개가 일어납니다. 결국 종교개혁이란 하나님의 말씀의 발견입니다. 이 개혁으로 인하여 남쪽 유다가 비록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새롭게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고 있는지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33-35절에서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 박고 그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사이에 너희가 죽인 바가랴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

 

 

 

 

이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여겼지만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계속하여 부지런히 자기의 종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37절에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얼마나 부지런히 열심히 찾아 오셨건만 대접은커녕 배척하고 매질하고 좇아내고 죽여 버린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이것이 죄인 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죄인을 그대로 버려두시는 것이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하나님께서 또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제일 나중에 인간을 만드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꼭 한가지만은 금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은 먹지 말라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에 대하여 얼마나 악의적인가 하면,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들어 놓고서 죄짓게 하는가 하면서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의 금지명령을 통하여 인간이 자신의 피조물 된 위치를 알고서 하나님을 주로 알고 섬기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자기 욕심에 끌려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서 따 먹어버립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정녕 죽을 것입니다. 그대로 두어 버리면 죽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 죽음이고, 그 다음에 호흡도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육간에 죽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 지은 아담에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찾아오시지 않으셔도 할말이 없는 인간입니다. 그저 두려움과 부끄러움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만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무화과 잎으로 자신을 가리고 있는 아담과 하와에게 주님은 찾아오신 것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이것은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물론 범죄에 대하여 그 책임을 물으십니다. 그리고 죄에 따른 형벌도 내리십니다. 그러나 놀라운 약속은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는 약속을 주십니다. 이 약속을 통하여 사단의 권세를 깨어버리시고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를 통하여 구원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범죄 한 아담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찾아 오셔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찾아오심이 구약에 얼마나 많이 나오고 있습니까? 정말 부지런히 자기의 종들을 보내셨건만 그러나 부지런히 하나님을 반역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동안 금요 구역성경공부를 통하여 선지서를 보았습니다. 선지자들의 한결같은 메시지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얼마나 더 맞으려고 그러느냐, 그러니 이제 그만 맞고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를 맞는 이유는 돌아오라는 매였습니다. 그러나 맞을수록 돌아오기는커녕 오히려 멀리 멀리 가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찾아오셔서 자기에게로 돌아오게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남은 자’입니다.

 

 

 

 

이사야 10:20-23절입니다. “20○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뢰치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 여호와를 진실히 의뢰하리니 21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것이라 22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23이미 작정되었은즉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야곱의 족속이 바닷가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올 것입니다. 이렇게 남은 자를 주께로 돌이키기 위하여 드디어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유대인들의 사고방식에 의하면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자 참람 되다고 하면서 죽이려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 자신이 친히 인간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인간세상에서 이보다 더 놀라운 소식은 없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분이 이 땅을 방문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주인을 세상이 바로 우리가 어떻게 대접한 것입니까? 죄인을 찾아오신 하나님을 어떻게 대접하였는지를 베드로를 통하여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유대인들은 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러한 능력을 행하시는 분이 자신을 부르시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입니다. 그리고서 다른 제자들과 함께 3년을 예수님을 따라 다닙니다. 그러면서 자신들도 능력을 받아서 복음을 전하고 병든 자들을 고쳤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이 죽으셔야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인간을 찾아오신 하나님이 죽으신다는 말씀에 베드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말리고 나섰습니다. 그러자 사단아 물러가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베드로의 생각이 사람의 생각이고 사람의 생각은 곧 사단의 생각인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이란 메시아가 와서 대신 죽지 않고서 힘만 보태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적들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이루어질 나라 같으면 하나님께서 친히 오시지 않으시고 자기의 종들만 보내어 말씀만 하셔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런 식으로는 될 수가 없기에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 오셔서 대신 희생하심을 통하여 자기의 남은 백성들을 찾아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자신들의 능력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목숨을 걸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얼마나 다짐에 맹세를 하였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절대로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그렇게 큰소리치던 베드로가 계집종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예수님을 배신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가 이미 배신할 줄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닭 울기 전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고 하신 말씀처럼 세 번을 부인하였습니다. 세 번 부인하고 나서 닭이 울었습니다. 만약 한 번이나 두 번 부인하였을 때 닭이 울었다면 베드로가 정신이 번쩍 들어서 내가 왜 이러지 하였을지 모르지만 세 번 부인하고 나니 그제서야 닭이 울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제야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운 것입니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대로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불같은 맹세도 결국 주님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면서 돌아선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 21:3절에 보시면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는지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서도 나는 고기 잡으러 가겠다고 하면서 고기 잡으러 간 것입니다. 이러한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다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14절에서 보시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세 번째로 찾아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찾아오심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찾아 오셨는지를 아직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니 밤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고 하시자 그 말씀대로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서 그물을 들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함께 끌어 올려보니 153마리나 되었습니다. 고기를 마리수로 헤아리는 것은 멸치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고급 어종이고 제법 씨알이 커야 헤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면 인생이 성공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누가복음 5:1-10절을 봅니다. “봉독” 이 장면은 베드로와 제자들을 처음 부르시던 때입니다. 그때도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더니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무어라고 합니까? 고기 잡힌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제 네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하시자 그 고기와 그물과 배와 집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것입니다. 이것을 지금 다시 확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부른 것은 고기를 잡으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배신한 베드로를 다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주님이 아십니다, 라는 대답에 내 양을 치라고 하십니다. 결국 주님의 찾아오심은 원래의 목적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님께서 또 찾아 오셨습니다. 그 앞에 무어라고 말씀드리겠습니까?

 

 

 

 

요한복음 21:15-19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2001. 11. 4.

 

 


15○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1)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18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세 번씩이나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부인한 베드로에게 주님은 다시 찾아 오셨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다시 물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분명히 부활을 목격하고서도 왜 다시 옛 직업인 물고기 잡으러 갔을까요?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처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실 때 물고기 잡는 현장에서 빈 배가 가득하도록 잡힌 사건에서 베드로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하면서 주님을 떠나가시라고 하였습니다. 물고기 많이 잡힌 기적을 보고서 이제 부자 되었다고 기분좋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임을 발견한 것이 참된 기적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고 하시면서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배와 고기와 그물과 집까지 다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리고 3년을 따라 다녔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기적을 보고, 자신도 능력을 받아서 능력을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다는 말씀을 하실 때 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신은 죽을지언정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장담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배신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24-34절을 봅니다.  “24○또 저희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25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26너희는 그렇지 않을찌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찌니라 271)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1)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28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29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30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31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32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34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베드로가 부인할 것을 말씀하시는 배경이 24절부터입니다. 누가복음 22장의 배경이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행하시는 내용입니다. 떡과 포도주로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시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피로 세우시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께서는 죽으시려고 가시는데 제자들은 무슨 다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누가 크냐의 싸움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세상에서는 높은 자가 주관하는 세상이지만 그러나 너희는 그렇지 않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섬기는 자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사단이 너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부인할지라고 근본적인 믿음과 주님에 대한 사랑이 떨어지지 않도록 주님께서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부인하지 않도록 기도하시면 되실 텐데 왜 부인하도록 허락하시고서는 다시 돌이키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베드로의 열심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용감하고 얼마나 자신 있게 주님을 위하여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였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것으로 결코 주님을 따를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 믿는다는 것이 결코 사람의 일이 될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결심과 마음은 조석지변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열심과 자존심이 다 무너져 내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자들은 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깨어지지 않고서는 감당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40세 때 자기 민족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애굽 감독을 죽였지만 오히려 도망가게 되었습니다. 다시 40년의 세월이 지나고 자기의 힘과 능력이 다 빠지고 나서 주님께서 다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도 자신의 열심과 능력들이 다 빠져 나가는 것이 예수님을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부인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어떨 때에 부르신 것입니까?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님 믿는 자를 잡아 죽이려고 다닐 때 주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을 모르느냐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이 능력 있게 일한다고 하는 것이 도리어 하나님의 일을 얼마나 망치고 있는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이정도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늘도 원하시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사랑인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의 어떤 문제가 생기거나 가정에 어떤 문제가 생길 때 늘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신 분이신데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는데 왜 이런 어려움을 단번에 해결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오래 두시는가 하실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능력을 달라고 합니다. 능력 받아서 하나님의 일을 크고 멋있게 원도 한도 없이 해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능력 행함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좇아내고 큰 능력을 행하였다고 하여도 주님께서 나는 너를 모르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 것입니까? 너 죽으라는 것입니다. 너 자존심 죽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능력 있게 일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섬기는 자로 오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고, 한 알의 썩는 밀알로서 오신 것이 하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는 자들의 능력이란 섬기는 것이 능력이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능력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결국 자신의 자존심이 죽어야만 되는 자리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일하심과 은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나오는 일들이라는 것이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지만 모두가 자신들의 힘과 땀과 수고를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베드로나 우리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물으시는 것은 무엇을 물으시겠습니까?

 

 

 

 

15절을 봅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사람들보다, 라는 말씀을 다르게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들 보다”라고 각주에 나와 있습니다. 두 가지 다로 보아도 되겠습니다. 베드로는 늘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자신은 죽도록 충성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겠느냐고 물으신 것이지 다른 사람과 비교 경쟁하기 위하여 물으신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운명에 대하여 말씀을 들은 후에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주님께서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신 것입니다. 그런 것에 네가 왜 신경 쓰느냐는 말씀이겠지요! 그리고 이것들 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로도 볼 수가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 앞에는 커다란 물고기 153마리가 잡혀져 있습니다. 그리고 배도 있고 동료들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질문에 답하여 보시기를 바랍니다. 너는 과연 이것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둘 다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교급입니다. 이것들 보다 더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자녀보다, 가정보다, 은행의 예금이나 보험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아직도 더 깨어져야 합니다.

베드로가 중심으로 주님을 사랑하여 따랐습니다. 죽기까지 충성하겠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부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예 주님을 사랑하기 보다는 다른 것들을 사랑하고 있다면 아직 출발도 되지 않은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사랑인 것입니다.

 

 

 

 

이 말씀 앞에 우리가 어떤 자세가 됩니까? 좌절입니다. 낙심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피상적으로 알 때에는 예,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고 말하였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베드로의 부인을 보면서 또한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가를 말씀을 통하여 보면서 어떤 심령이 되어야 합니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다른 것을 사랑한 것이 주님을 죽인 결과입니다. 세상의 능력을 달라고 주님께 사람들이 몰려들다가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세상의 능력이 아니라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심으로 영생을 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그 많은 무리들이 모두 돌변하여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소리를 친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바로 왕 앞에 섰을 때 그로 인하여 고난이 가중되니 모세를 벌하여 달라고 말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나는 나와 나의 가정과 나의 회사와 나의 종교단체와 나의 국가와 이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발전시키고 영원토록 보존하여줄 그런 메시아를 원하고 있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모든 것을 버리고 부정하고 자기 목숨마저 미워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주님을 과연 우리가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도대체 이 세상을 주님께서 어떻게 보시길래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주님은 다시 묻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부인하기 전 같으면 어떻게 대답하였을까요? 아주 당당하게 대답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무어라고 합니까?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을 세 번이나 물으십니다. 이 세 번의 질문을 헬라어 단어로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가파오로 물으시는데 베드로는 휠레오로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흔히 헬라어에서 사랑이란 에로스, 휠레오, 아가페로 말합니다. 애정적인 사랑, 우정, 신적 사랑 이렇게 구별하지만 그러나 휠레오와 아가페가 같이 사용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구분을 하여서 보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처음에 두 번은 아가페로 물으시는데 베드로는 계속 휠레오로 대답을 하자 예수님께서 세 번째는 휠레오로 낮추어 물으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눈높이를 낮추어 주심을 은혜로 볼 수가 있지만 그러나 이미 베드로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세 번이나 물으심은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회복시키시는 말씀으로 봅니다. 그리고서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에 대한 말씀으로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결국 처음에 주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실 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리라는 말씀을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저주하고 맹세하고 부인할지라도 주님은 또 다시 찾아 오셔서 자신의 말씀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루어 내시면서 왜 실패하고 부인하고 배신한 베드로를 사용하시는 것입니까?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아를 깨어내시고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자존심을 부수어 버리고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을 통하여 주님의 일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즉 베드로나 모세나 바울 같은 경우에 그러한 깨어진 자를 사용하심을 통하여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와 사랑이 증거 되는 자리는 참으로 처절하게 낮아진 자리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세상의 영광이나 우리의 자랑이나 능력을 드러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약함과 악함에도 불구하고 나타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긍휼이 드러나는 것이 주님의 제자로 부름 받은 자의 당연한 모습인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님께서 찾아 오셔서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것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주님의 말씀에 무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만약에 아직도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들이 있다면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부수어 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에만 항복하시도록 만들어 내실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이 사랑입니까?

 

 

고린도전서 16:22절에서,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8-25  너는 나를 따르라  2001. 11. 11.

 

 


18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베드로가 돌이켜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여 주를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러라 21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 22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24○이 일을 증거하고 이 일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25○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줄 아노라.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99년 7월 4일 요한복음 강해를 시작하여 오늘까지 만 2년 4개월이 걸렸습니다. 그동안 요한복음을 통하여서 남은 것이 무엇입니까? 가장 기억에 남으시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꼭 한 가지를 남기라면 무엇을 말씀하실 수가 있겠습니까? 몇 가지의 기억들은 떠오를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면 영생이란 무엇입니까?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기억이 나십니까? 그러면 믿는다, 안다, 하는 것들은 무엇과 대비가 됩니까? 하나님의 일을 내가 주체적으로 한다는 것과 대비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할까요, 이전에 네가 어떤 수준인 줄을 알라는 것입니다.

 

 

 

 

내년에 월드컵이 한국과 일본에서 열립니다. 그래서 히딩크 감독이 국가대표 선수들을 다른 팀들과 시합을 붙이고 있습니다. 평가전입니다. 왜 평가전을 가지는 것입니까? 우리의 실력을 알라는 것입니다. 아직도 형편없습니다. 이것을 인정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텔레비전을 보면서 무어라고 합니까? 아이고 저것도 한골 못 넣나,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입으로 평가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운동장에서 축구 선수들이 뛰는 정도로 십분만 뛰면 숨넘어갈 것입니다. 119 불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말들은 잘합니다.

 

 

 

 

우리가 모든 성경을 보면서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면 성경에서 가장 악질적이고, 가장 나쁜 놈으로 나타나는 그 사람이 바로 나라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성경이 제대로 보입니다. 모세와 바로와의 다툼에서는 내 자신이 바로 강퍅한 바로왕의 모습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망과 불평만 늘어놓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모세가 자기들을 구원하려고 왔건만 그들에게 고역이 가중되자 당장 하나님께 모세 벌 내려 달라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구원을 해 주려면 고생을 시키지 말아야지 이렇게 고생시키는 모세는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는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자기 고통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과 다를 바가 무엇입니까?

 

 

 

 

지금 새벽기도시간에 열왕기하 마지막 부분을 보고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벌써 앗수르에 의하여 망하였고, 남 유다도 바벨론에 포로 되기 직전의 상황입니다. 그런데 여호야김이란 왕이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구술하고 바룩이 두루마리에 기록한 것을 읽습니다. 그러다 여호야김 왕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대로 칼로 잘라서 화롯불에 던져 버리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자기에게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 저주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제대로 보면 칼로 오려내어 버리고 싶은 말씀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겠습니까? 이제 사업을 하여서 큰 성공을 꿈꾸고 있는 자들에게 야고보서 4장의 말씀은 찬물을 끼얹는 말씀입니다.

 

 

 

 

네가 어디에 가서 일년을 사업하여 돈을 벌자고 계획하느냐? 그러나 인생이란 안개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계획을 잘 세워서 성공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땅에서 발 딛고 살려고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계획을 하든지 이 땅에서 내 뜻을 펼치면서 잘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자아의 실현을 위하여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수단과 방법 중의 하나가 종교인 것입니다. 그러니 종교니 신이니 하는 것들도 결국 나의 꿈을 이루어주는 종교이고 신이어야 좋은 종교이고 좋은 신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똘똘 뭉쳐있는 인간에게 성경이란 그야 말로 폭탄선언입니다. 아무리 이리 저리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가서 버티려고 하여도 성경은 완벽하게 차단하여 버립니다. 해아래 새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될 뿐입니다. 모든 인간의 노력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 자체가 한줄기 바람과 같은 것이고, 입김보다 가벼운 것이라고 합니다. 호흡이 그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조차 없다는 것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본질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곳이 바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동안 요한복음을 통하여 가장 뚜렷하게 대비를 시킨 것은 그렇게 목숨을 걸고 주님을 사랑하고 따르겠다는 제자들이 얼마나 예수님과 동상이몽이었는가를 드러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어떻게 하면 서로 높은 자리 차지하는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진심으로 주님께서 고난 받지 않도록 하고자 한 말에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물러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위한다고, 성전을 위한다고 열심을 내면 낼수록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는 마귀의 짓이었다는 것이 얼마나 생생하게 드러났습니까?

 

 

 

 

그러므로 인간이 스스로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무리 목숨 바쳐 충성을 다짐하였지만 그 결국은 맹세하고 저주하면서 세 번이나 부인한 결과만 베드로에게 남았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결정과 의지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어느 정도로 불가능한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전히 무너진 베드로, 완전히 깨어진 베드로 그 상한 심령에 주님께서 처음에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이루시고자 하신 그 목표를 다시 이루어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오신 사랑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렇게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믿고 의지하였던 것들을 결국 놓게 하시고서 사랑의 고백을 받아 내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공의 자리가 아닙니다. 능력의 자리가 아닙니다. 철저하게 무너진 자리에서 나오는 고백인 것입니다. 주님 나의 모습이 이러함을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18-19절입니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그러나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자의 모습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곳으로 갈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대로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자의 모습입니다. 제자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입니다. 전에는 자신의 힘과 능력과 의지적 결단으로 다녔으나 이제는 남이 띠를 띠우고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리고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곳에 가고 싶고,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메인 자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원하지 않던 일들이 닥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최고의 기도가 나의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 주옵소서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 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도에게 동일한 요구는 너희가 원하는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이 네게 팔을 벌리게 하고 띠를 띠우고 데려갈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물론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을 죽을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제부터 자신이 원하는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메인바 되어서 우리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길로 부름을 받았기에 묵묵히 그분의 뒤를 따라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가야하는 것도 주님께서 하셔야 되지요! 물론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하셔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가야할 길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죽는 길로 가야하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내가 죽는 길 외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님으로부터 요구받고 있는 것은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능력 행함도 아닙니다. 커다란 예배당을 짓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업적을 남기는 것도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앞장서신 분이 십자가를 지고서 가신 것처럼 지금 그 뒤를 따르는 베드로에게 어떤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죽는 것이 영광이 됩니까?

 

 

 

 

죽는 것이란 실패요 망한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베드로의 죽음은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죽음인 것입니다. 양을 치는 일로서, 주님의 분부대로 죽는 죽음이기에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말씀하시면서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결국 주님을 따른 것을 주님의 죽으심이 베드로에게도 증거되는 것이 죽음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서 베드로가 말없이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도 남과 비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20-21절을 보시면,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이제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돌이켜 요한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런 것을 상관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왜 엉뚱한데 신경을 쓰느냐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결론 부분이 제자들의 이러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들에게 결국 주님이 보내신 성령이 임하시게 되고 모두가 주님의 뒤를 따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의 일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늘 곁눈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주님 앞에서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눈치를 살피고, 저 사람이 저 정도이니 나는 이만하니 잘한다, 라는 식의 비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주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결론입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우리는 늘 주님을 따르지 않고 다른 것을 따를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러한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기고 주님을 따르게 하시고야 마시는 것이 너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의 운명이 나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에 있음을 인정하시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귀 기울이며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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