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요한복음 강해 1
요한복음 강해 1
창원 늘푸른교회 이장우 목사
(1999. 7. 4. - 2001. 11. 11.)
目 次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2. 증거
3. 하나님께로 난 자
4. 독생자의 영광
5. 은혜와 진리
6. 어린 양을 보라
7. 표적과 때
8. 이 성전을 헐라
9. 마음을 아시는 주님
10. 동문서답
11. 이처럼 사랑하사
12. 쇠함과 흥함
13. 하늘과 땅
14. 사마리아로 가신 예수님
15. 참된 예배(1)
16. 참된 예배(2)
17.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양식
18. 표적과 믿음
19. 베데스다
20. 안식
21. 일하시는 주님
22.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23. 성경의 증거
24. 오병이어
25. 얼마나 되겠습니까?
26. 두려움
27. 하나님의 일
28. 만나와 생명의 떡
29. 영생의 말씀
30. 초막절
요한복음 1:1-4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1999. 7. 4.
오늘부터 주일 낮에는 요한복음의 말씀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복음서는 4복음서가 있습니다. 그 중에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같은 관점이라 하여 공관복음이라 하고, 요한복음은 복음서이지만 세 복음서와는 구별합니다. 공관복음서는 예수님의 사역을 중심으로 기록하는데 비하여 요한복음은 그 뜻과 의미를 더 중심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에 다른 복음서보다 좀 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 그대로 복음은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기에 요한복음을 차례대로 보아 나가면 우리에게 큰 기쁨의 소식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의 사고가 복음적으로 되어 있기보다는 선악체계로 굳어져 있기에 복음이 우리의 기존의 생각과 충돌이 일어날 것입니다.
선악체계란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인간들 안에 새겨진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체계입니다. 선과 악의 결정은 하나님만이 하셔야 하는데 인간이 교만하여 하나님처럼 되고자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부터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스스로 선악의 구조를 세워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이익이면 선, 나에게 손해이면 악이라는 체계와 함께 스스로 선한 일을 많이 하면 어떤 누구의 도움이 없이도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도 선악과를 따먹고 난 후의 인간의 실상입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사람들마다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이런 체계 속에 살고 있으니 우리의 행함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은혜로만 구원 받는다는 복음이 이해도 안 되고 믿어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한 자는 이 복음의 말씀이 참으로 복음으로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의 성령의 역사로만이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지를 알게 되고 동시에 주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 됨을 알기 때문입니다.
1. 오늘 말씀에 태초부터 말씀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고 생명이며, 빛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 요한복음의 시작입니다. 태초로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이 왜 이 땅에 오셔야 하셨는가 하는 것을 요한복음은 증거하고 있는 것이지, 태초에 어떻게 계셨으며 어떤 모습으로 계셨는가 하는 존재론적인 서술을 성경은 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존재하심은 이미 사실로 받아들이기에 존재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일하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1:1-4절에서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
지금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을 보고, 만지고 그 품에 기대어 누웠던 사랑받던 제자이기에 그분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그분을 소개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한지가 몇 년이나 되었습니까? 어떤 분은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나온 분도 있을 텐데 예수를 믿을수록 기쁨이 더욱 넘치고 있습니까? 지금까지 예수님을 섬겨오니 섬길수록 더 귀한 주님이라는 고백이 우리의 마음에서 우러나오고 있습니까? 어느 복음성가 가사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주 내 맘에 오신 후에 주 날 인도하시네.
주께 내 맘 드린 후에 더욱 섬길수록 더 귀한 주님
더욱 섬길수록 더 귀한 주님, 더욱 사랑 할수록 주 날 사랑해
매일 내 맘에 기쁨이 넘치네, 더욱 섬길수록 더 귀한 주님”
우리 안에도 주 예수님을 알아갈수록, 섬겨갈수록 더욱더 사랑이 넘치고 기쁨이 넘쳐야 예수를 제대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갈수록 짐스러워지고 부담이 된다면 무언가 초점이 맞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시 복음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교회 교인들이 이미 복음을 듣고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바울 사도는 로마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노라, 라고 하였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기에 우리는 그 의만 있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 복이란 이 세상 사람들이 알 수도 없고 깨달을 수도 없는 그 엄청난 하늘에 속한 복을 받는 길이 복음 안에 있습니다. 세상에 속한 것들은 이방인이나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자는 그런 것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대할 때 마다 명심할 것은 세상의 영광이 아니라 독생자의 영광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 영광 버려두고 스스로 자신을 비워 종의 모습으로 오신 그분에게서 우리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함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진리관이나 영광관을 가지고 성경을 대하면 성경은 스스로 숨어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셔야 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자기들의 상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대로 두면 모두가 치우쳤기에 아무도 하나님을 바로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하니까 각자의 하나님이 다 다른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유대인들조차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참되신 하나님을 알리려고 오신 것입니다.
1:18절을 봅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다는 말씀이 있으나 하나님을 보고는 살 자가 없기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바위틈에 두고 하나님의 손으로 덮었다가 그 영광이 지나가고 나서 그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죄인이 하나님을 보고서는 살아남을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여 주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나타나시면, 보는 즉시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니 그런 말 하는 것이지요? 우리도 때로는 하나님이 한번 척 나타나면 예수 믿는다고 욕하고 애먹이는 자들 한번 손을 봐줄 텐데, 하는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재림 때까지는 십자가의 방법으로만 하나님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이유는 주의 택한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6-10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느니라.”
지금 예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예수님을 통하여서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았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사람들 모두가 자기들의 상상의 하나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셨기에 예수님께서 증거하신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이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요한복음 17:3절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2. 말씀으로 오신 분이 어떤 분이십니까? 2절, 3절에 보면 그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된 것입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으로 오신 분이 창조주요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주인이 이 땅에 왔으면 주인 대접을 받아야 마땅한데 사람들이 주인을 못 알아보더라는 사실입니다. 못 알아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죽여 버렸다는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고발입니까?
마태복음 22장과 누가복음 20장의 포도원의 악한 품꾼의 비유가 나옵니다.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어 세를 주었습니다. 이제 기한이 되어 세를 받기 위하여 자기 종들을 보내니 어떻게 합니까? 때리고 죽이고 쫒아내어 버리는 것입니다. 다시 종들을 보내지만 꼭 같이 처리합니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내 아들은 공경하겠지 하면서 아들을 보냈는데 어떻게 합니까? 아들마저 죽여 버렸다는 비유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아들이 예수님 자신이지요?
이것이 복음서를 시작하는 처음부터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 분을 알지도 못하고 영접하지도 않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요한복음하면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 무엇입니까? 3:16절이지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이지요? 그러나 아무도 믿지 않더라, 하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그러면 누가 믿을 수 있습니까? 이런 질문이 나오지요. 그러나 염려 마십시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다 하실 수 있느니라.”
3. 말씀이 육신으로 오신 그 분이 생명과 빛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이고 빛이시기에 예수님 없는 사람은 생명도 빛도 없는 것입니다. 죽음과 어두움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귀한지 아시겠습니까? 예수님 없으면 죽음이고 어두움이란 사실을 우리가 얼마나 절감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 없어도 잘 먹고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들의 실상은 죽음과 어두움만 가득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는 벌써 믿었다고 이미 마스터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예수는 믿어 구원은 따 놓았고 설설 멋진 일이나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 있다고 말씀합니다.(골2:2-3)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로 모시고 있다는 이 사실이 천하를 주고도 살수 없는 귀한 선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가 노래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 되심을 요한복음 3:36절에서 봅시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요한복음 6:40절입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아들을 보고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하시는 것이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길이 예수 믿는 것임을 아시고 예수 믿게 된 이것보다 더 좋은 일이 없으며, 더 기쁜 일이 없음을 알고 참으로 주께 믿음주심을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5-8 증거 1999. 7. 11.
세례 요한은 증거자입니다. 무엇을 증거하는 증거자입니까? 8절입니다. 빛에 대하여 증거 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빛이 예수님임을 압니다만 그러나 그 당시든 지금이든,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을 빛에 대하여 증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모두가 흑암의 권세아래 갇혀 있었기에 빛을 보지 못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장 79절에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라고 합니다. 빛에 대하여 장님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장님에게 빛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에게 빛과 색깔을 증거하고 설명할 수가 있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그로 하여금 빛을 믿게 하려고 증거하였으나, 증거는 하였는데 믿지는 않더라는 것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믿지도 않을 것을 증거는 왜 합니까? 그런 질문을 하게 되지요?
‘전도하면 된다.’ 이런 유의 책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전도가 해병대나, 공수부대 구호쯤이나 되는 줄 아는 모양입니다. ‘안되면 되게 하라’ 이런 식의 전도방법은 참으로 곤란한 것입니다. 전도란 사람이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된다는 고백이 나와야 제대로 전도한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전도왕들이 간증집회를 하러 다니는데 이렇게 하면 전도된다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증거는 하였는데 사람들이 안 믿더라는 것입니다. 빛에 대하여 증거하는데 빛으로 안 오더라는 것이지요?
요한복음 3:19-20절을 봅시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이 세상을 어두움으로 봅니다. 어두움 가운데 빛이 오니 전에는 어두움인줄 몰랐는데 참 빛이 오니 모두가 어두움이라는 것입니다. 전에는 율법 좀 지키고, 착한일 좀 하면 그것이 빛인 줄 알았는데 참 빛이 오니까 모두가 엉터리요, 어두움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빛을 싫어할 수밖에 없지요? 마치 불법 댄스홀에 카메라 출동하면서 카메라의 밝은 불빛을 비추며 들어가면 한참 신나게 춤을 추던 사람들이 어떻게 합니까? 빛 가운데로 옵니까? 아니지요. 모두 얼굴을 숙이고 어두운 곳으로 숨기에 바쁩니다. 옷을 뒤집어쓰고 빛을 싫어합니다. 나중에는 그 카메라를 빼앗아 부수어 버리지요. 참 빛이 세상에 오니 모든 사람이 합동으로 빛을 추방해버렸다, 하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이 증거가 됩니까?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어느 관원이 예수님께 왔지요.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등 십계명의 일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대단한 사람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니까 오히려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심히 근심하며 돌아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재물이 있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 앞에 제자들이 놀랐습니다. 이 부자가 세리처럼 부정하게 돈을 모은 것도 아니고, 도적질해서 모은 것도 아니지요?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켰다고 하였으니 정당하게 벌었든지 유산을 많이 받았든지 그렇게 나쁘게 부자가 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는 그런 사람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고 하시니 제자들이 그러면 도대체 누가 천국에 들어 갈 수 있습니까?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그러므로 요한복음 1장에서 13장까지는 왜 사람으로는 안 되는가를 보여 줍니다. 사람이 율법 지켜도 안 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지내도 안 되고, 안식일 잘 지켜도 사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성령이 오셔야 된다는 것을 14장부터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세례 요한은 빛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증거 하는 지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첫째, 자신은 아니요, 라고 합니다. 세례 요한의 등장을 봅시다. 세례 요한은 제사장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성전에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난데없이 광야에서 외치는 것입니다. 그것도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와 석청-들꿀-을 먹으면서 외치는 소리가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이렇게 외치니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이 메시아인가, 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어려울수록 자기들의 어려움에서 구해줄 영웅을 기다리듯 이들도 성경이 약속한 메시아를 자기들의 입장에 맞도록 생각하며 기다리는 중이기에 세례 요한에게 제자가 생기고 많은 사람이 와서 물로 세례를 받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도대체 너는 누구냐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20절부터 28절까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말하면서 자신은 단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는 것입니다. 어떤 소리입니까? 주의 길을 곧게 하라는 광야의 소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내 뒤에 계시는 분을 소개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나는 감히 그 분의 신들메를 푸는 종의 역할도 감당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의 자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증거하고나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때 요한의 제자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간다는 보고를 하자 요한의 응답이 무엇입니까?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 말을 하면서 자신은 기쁨이 충만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이 믿든지 아니 믿든지 자신의 사명을 따라 증거를 다 합니다. 그 증거의 내용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것과 다른 하나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분이라고 증거를 합니다.
둘째,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합니다. 수요일 저녁에 오시는 분은 어린양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국가로 출범한 것은 그들이 독립 운동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구속받았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거합니다.
그러면 어린양의 피로 이스라엘을 새롭게 창조하여 내신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이스라엘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미 세례 요한의 선포에서도 보았듯이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돌멩이라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이스라엘을 부정하고 어린양으로 새롭게 이스라엘을 만들어 내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주인이 왔는데 주인을 영접치 아니하는 것을 보니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마귀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외칩니다. 독사는 독사의 새끼들아! 해야 어울리는 말이지요? 부드럽게 번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독사, 뱀의 후손이 됩니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너희의 아비는 마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예수님을 믿지도 않는 것 보니 너희는 마귀의 자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이 있으면 말해보십시오?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하는데, 어찌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보게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미련하다고 어리석다고 하는 그 십자가의 도를 어떻게 믿게 되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로 새롭게 이스라엘을 만들어 내셨기 때문입니다. 그 어린양의 피로 새롭게 된 자들이 새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므로 기존의 혈통적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남은 자,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자만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자가 바로 나다나엘 같은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무어라고 평가하십니까? 나다나엘은 빌립의 말을 듣고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하면서 왔는데 나다나엘을 참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어린양과 이스라엘이 이제 새롭게 정립되는 것임을 세례 요한은 증거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은 어린양의 희생에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공로를 모르고 잊어버리고 무시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방 나라와 같이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교회가 세상 죄를 지고 가신 하나님의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피로 세워진 교회라면 이 피의 능력을 한시라도 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피의 능력이 제대로 있다면 그 모양이 어떠하던 하나님의 새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셋째,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2-34절입니다. “요한이 또 증거 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시니라.”
요한의 증거는 물로 세례를 주고 있을 때 아무도 성령이 임하지 않았는데 성령이 임하시는 그 분이 장차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증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기까지는 성령의 이끌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부활 승천하시고 하늘에 오르심으로 이제는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이제 부활 승천하셔서 왕의 자리에 등극하셨기에 아버지와 아들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 분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이제 왜 사람으로는 안 되고 성령이 임하셔야만 되는지를 우리가 확인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의 사명을 감당하시고 자기의 택한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신 것을 성령께서 그 택한 백성에게 적용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는 증인이 되는데 무엇을 증거하는가 하면 오직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시기에 이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하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그 분만을 붙들도록 하시는 분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성령이 임하였다면 자신의 죄와 비참을 깨닫게 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달리 소망이 없음을 알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또한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데 어떤 증인이 되는가 하면 결코 자기의 그 무엇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나는 아니요’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종교계의 슈퍼스타들이 나타났습니다. 전도왕이 있고 이것도 한두 명이 아닙니다. 그들은 전도 방법을 간증하러 다닙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전도를 많이 하였습니까?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시오, 하는 곳에 가서 자신의 전도 간증을 하는데 세례 요한의 증거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낍니다. 말은 은혜라고 하는데 내용이 아닌 것입니다.
전도왕 뿐만 아니라 수많은 유명한 목사들도 자신들의 기도와 금식과 투병생활을 자랑처럼 드러내는데 과연 주님의 증인인지가 의심스럽습니다. 그들의 목회 성공담이라는 것을 듣고서 그렇게 따라 하는 자들이 또한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제자훈련, 경배와 찬양, 제3의 물결, 이슬비 전도편지... 무수한 방법론들이 쏟아지는 것을 보면 꼭 만병통치약 선전하는 것 같습니다. 이 약 저 약 다 써 보셔도 효험을 못 보았습니까?
이 약을 쓰시면 꼭 효과를 볼 것입니다, 하는 선전들이 교계 신문에 가득합니다. 특정 방법과 특정 인물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어린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을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고, 사람의 힘으로도 능력으로도 아니 되고, 오직 성령이 임하셔야만 된다는 성경의 증거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셔야 된다니까 성령을 받는 비결을 말하는 자도 있는데 성령은 바람과 같이 역사합니다. 이는 사람이 좌우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임의로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성령이 임한 자는 결코 자기에게서 원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고 보니까 자신은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한 세례 요한의 증거처럼 ‘나는 아니요’의 사람으로 오직 세상 죄를 지고 가는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제대로 성령이 임한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성령이 임한 제자들의 증인된 모습을 찾아보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사도행전 3장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 가다가 성전 미문에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구걸하고 있다가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한 푼 얻을까하여 바라볼 때 베드로가 무어라고 합니까?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 하시니 곧 일어났지요. 놀라운 사건입니다. 그 앉은뱅이를 사람들이 다 아는데 베드로가 온전케 하였으니 사람들이 베드로를 주목하여 보는 것이 당연하지요? 아니 도대체 무슨 능력으로? 40일 금식 기도 했는가? 산에서 기도하다가 불 받았는가? 하면서 주목하여 봅니다.
아마 성령이 임하기 전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어깨 힘주고 다녔을 것입니다. 제자들끼리 누가 높으냐고 서로 다툼과 시기가 있었고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치맛바람까지 일으킨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한 증인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3:12)
우리 같으면 비디오 찍으라고 하였겠지요? 그러나 자신의 권능도 자신의 경건도 아니라 오직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이를 낫게 하였다고 증거합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성령을 받은 증인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의 성령이 임한 자라면 지금까지 지내온 것이 나의 기도와 나의 경건과 나의 권능이 아니라 오직 주의 은혜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도 오직 나는 아니요, 세상 죄를 지고 가신 그분의 공로임을 잊지 마시고 우리의 범사에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고 높이는 성도님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9-13 하나님께로 난 자 1999. 7. 18.
예수님을 믿는 일에 제일 방해되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내가 예수님을 선택하였고 내가 예수님을 믿어 주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 종교가 많은데 내가 그중에 기독교를 선택하였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에 얼마나 많은 걸림돌이 되느냐 하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하여 확인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꾸만 내가 예수를 이렇게 많이 믿어 주었는데 왜 이 모양 이 꼴이냐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내가 나무나 돌에 빈 것도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 그것도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그런 하나님을 믿는데도 믿기 전과 별반 다른 게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잘은 못해도 남만큼 믿느라고 예배도 나오고 헌금도 드릴만큼 드렸는데 이만한 정성이라면 뭔가 다른 게 있어야 되는데 나는 왜 이럴까? 이런 생각해보신 적이 없습니까?
어떤 사람은 예수 믿고 3년 만에 집샀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런 것이 아니라 영적이라 하면서 이상한 말도 하고, 이상한 것을 보았다고도 하는데 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니니 나는 믿음도 없고 나이롱 신자인가보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이며 축복인지를 놓치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예수를 이만큼 믿어 주었는데, 하는 생각이 우리의 믿음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얼마나 예수를 믿기에 불가능한 사람들인지를 알고서 내가 예수를 믿는 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능력인지를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빛이시다, 생명이시다 하시면서 요한복음은 시작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어두움과 사망에 사로잡혀있기에 빛으로 보자면 어두움이고, 생명으로 보자면 우리는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봅시다. 9절에서 11절입니다.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치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치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왔는데 왜 주인을 알아 모시지 않았을까요? 이미 다른 주인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 전세를 들고서 예배드리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비켜 달란다고 비켜줍니까? 아니지요? 전세계약 기간까지는 우리의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전세가 아니라 완전히 우리의 소유로 등기이전 된 토지와 건물을 가지고 있을 때 누가 와서 이거 내 땅과 건물인데 내놓아 라고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정신없는 사람 취급 받겠지요?
지금 예수님이 이 땅에 주인으로 오셨는데 모두가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있기에 영접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2절 말씀에 보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맞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믿어야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예수 믿지 않으면 죄 때문에 심판받고 지옥 갑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 가르침을 받고 전도한다고 전하다가 보니 우리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예수를 믿었는데 너는 왜 예수를 믿지 않느냐? 아 그저 믿기만 하라 그러면 된다고 아무리 말해도 믿지 않을 때 어떤 생각이 듭니까? 이상하다 믿으면 될 텐데 왜 안 믿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아직도 죄의 권세가 무엇인지, 믿는다는 것의 그 깊이를 너무나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되어 버린 것은 오늘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 교회 교인 한사람 더 확보하기 위한 잘못된 전도방법들이 동원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도의 동기가 영혼을 사랑하여 순수하게 한다고 하는 분도 있겠지만 정말 자기 교회와 관계없이 전도하는 자들이 얼마나 있으며 자기 선교단체와 관계없이 전도하는 자가 얼마나 됩니까? 이러한 전도 속에서 수많은 전도 방법들이 나왔지요?
그런데 그 전도훈련과, 전도지들 가운데 요한복음 1장 12절은 있는데 13절이 있는 전도지와 전도훈련 교재는 아직 한번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다 알지 못하여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주류를 이루는 선교단체이든 교회이든 전도지들이 모두가 사람의 결단과 의지를 가지고 예수를 믿으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긍정합니다. 사람이 예수를 믿을 수 있기에 믿으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요한복음 1:12절 외에도 앞뒤 다 자르고 필요한 구절만 가지고 사람이 믿을 수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기만 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믿은 사람은 또 다른 사람을 그렇게 전도합니다. 내가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니 예수님이 내 안에 오시더라, 너도 네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된다고 요한복음 3장 16절에 있다고 말씀을 척 들이 됩니다. 그래서 교인도 늘어나고 선교단체 회원도 늘어나게 되었는데 과연 하나님께로 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믿어 주었으니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기분나면 열심히 하고 기분 맞지 않으면 나중에 믿어 줄게요, 좀 쉽시다, 그러지요?
내가 오고 싶으면 오고, 말고 싶으면 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미 이런 식으로 나온 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사람들을 많이 모으는 기술을 발휘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좁은 문, 좁은 길로서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께로부터 난 자들만이 모이게 될 것입니다. 부산의 브니엘 고등학교 교목으로 계셨던 박정일 목사는 설교 중에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사람 다섯 명 있는 곳에 개가 백 마리 오면 그 개를 사람 수에 치느냐고 말하였습니다.
저도 예수전도협회라는 전도단체에서 4박 5일간 전도훈련을 받았습니다. 하루에 4시간 정도도 못자면서 목회자들 전도훈련을 받았는데 그래도 이 단체는 자기 교회 교세 확장하는 전도는 아닌 것이 조금 나아 보였습니다만 이 전도는 노상에서 외침과 무릎 꿇고 기도합니다. 이렇게 길거리에 수백 명이 나가서 외치고 맨투맨을 하는데 그런 훈련을 자주 하는 곳에서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하면 억지로 영접을 시키려고 하니까 자기들끼리 예수 믿는다고 해라, 빨리 영접하면 보내준다 이러는 겁니다. 특히 학생들이 좀 만만하니까 학생들을 붙드는데 학생들이 피할 길을 알지요?
이렇게 해서라도 한사람 영접시켜야 저녁밥을 주니까 영접 못시키면 저녁에 또 길거리로 나가야 되니 어떻게라도 한명이라도 영접시키는 것이지요? 이 방법을 교회에서 하였지요? 골목골목 다니면서 하긴 하였는데 그래서 예수를 영접하고 죄를 고백하고-비록 윤리 도덕적인 죄일지언정-그래서 주소와 전화를 적어오면 엉터리가 많은 것입니다. 실정이 이러한데도 계속 이런 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 1장 12절만 믿고 13절을 안 믿기 때문이라고 생각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자의 후손인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을 때 유혹이 무엇입니까? 너도 하나님처럼 되리라. 이것은 하나님만이 주인이고 피조물은 종으로 있어야하는 것을 깨뜨린 것입니다. 너만 주인이냐 나도 주인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란 하나님의 주인 됨을 거절하고 스스로 주인이 되고자 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므로 영접하는 자라는 것은 자기가 주인 아닌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자신이 자기의 주인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 배후에는 더 큰 세력이 우리를 속이고 있지만, 사람들마다 자기가 주인임을 나타내는 것이 이 세상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지지요? 그래서 노래 중에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노래도 있지 않습니까?
또한 직장에서도 자기가 부하 직원으로 있고 싶은 자가 있습니까? 어쩔 수 없이 있는 것이지 자신이 주인 되고 싶은 것이 당연합니다. 누구나가 대통령을 욕할 수 있지요? 내가 대통령 되면 저렇게 안한다 하지요. 모두가 자기중심적이고 모두가 주인으로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다른 주인이 들어올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내가 죽어야만 영접이 되는데 우리 모두가 이렇게 펄펄 살아있는데 어떻게 예수님을 주로 영접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도 나는 예수 믿고서 다 죽었다, 옛날 성질 다 죽었다는 분 계십니까? 그런 분이라도 자신의 조그마한 자존심 살짝 건드리면 단번에 천사의 얼굴이 마귀의 얼굴로 바뀌는 것입니다. 진짜 죽은 자는 죽었다는 말도 안하겠지요?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원하시는 사람 즉 자기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이라고 영접하고 고백하는 일이 사람으로는 안 된다, 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영접하는 자가 나오게 됩니까? 13절 말씀입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혈통, 육정, 사람의 뜻 모두가 사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태어난 자만이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애쓴다고, 정성들인다고, 기도한다고 영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낳으셔야만 된다는 것입니다. 왜 영접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낳으셔야 한다고 말씀하실까요? 그 이유는 출생이란 내가 원하여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 땅에 태어나고 싶다고 해서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까? 나는 이씨 집안, 김씨 집안, 박씨 집안에 태어나야지 하고 골라서 태어나신 분 계십니까?
태어나 보니 이 땅의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가 스스로 예수를 영접할 수 있다고 말하게 되면 나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어느 집안에서 태어나겠다고 말하는 것과 같지요? 그러므로 내가 예수 믿고 싶어서 믿은 자가 한사람도 없다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내가 언제 어디서 태어난 지 모르는데 김씨 집안에 살고 있는 것 보니 김씨 집안에 태어난 것임을 아는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가 어느 날 예수를 믿는다고 교회로 모인 것이 내가 선택하고 내가 예수 믿어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낳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낳으시기 위하여 얼마나 크신 해산의 고통을 하셨는지를 아십니까? 그 고통을 제대로 알 때에 우리가 예수를 믿고 있는 이 사실이 천하를 주고도 얻을 수 없는 귀한 보배인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음이 전해지지 않고 자꾸 종교적으로 흐르다 보니 내가 예수 믿어주고 내가 정성 바친 것만 보이게 되면 이것은 교회와는 무관한 사설 종교단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낳기 위하여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누가복음 11장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벙어리 귀신을 쫒아 내셨을 때 사람들이 귀신의 힘을 빌려서 그렇게 한다, 라고 비난을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저를 이길 때에는 저의 믿던 무장을 빼앗고 저의 재물을 나뉘느니라.”라고 21,22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 힘으로 빠져 나갈 수 없는 우리보다 강한 사단의 손아귀에 갇혀 있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주인을 배신하게 하고 스스로 주인이라는 착각을 하고 살게끔 한 그 사단의 세력에 붙들려 있기에 스스로 영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영접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강한 자보다 더 강한 자가 와서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전쟁입니다. 구약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전쟁의 의미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주님 홀로 싸우신 것입니다. 우리의 도움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보다 강한 사단의 지배 아래 있기에 주님을 도우기는커녕 함께 배척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용사가 되셔서 사단을 이겨 버리신 것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에베소서 4장 8절에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강한 자에게 사로잡혀 있던 자를 예수님께서 위로 올라가실 때 다시 주님께서 사로잡아 내신 것입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를 말만 들었는데 보신 분 계십니까? 포로로 잡혀 있으니 혼자서 못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로를 지키는 것보다 더 뛰어난 군대를 보내야 그 사로잡힌 포로를 구하여 오는 것입니다. 람보 같은 자를 보내야 되겠지요?
이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사망 권세가 깨어져 버렸기에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을 만날 때 마다, 믿는 사람이 귀합니다만, 얼마나 주님의 공로가 크신가, 얼마나 주님께서 해산하시기 위하여 고통을 받으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아들을 십자가에서 외면하시기까지 하는 그 고통을 통하여 영접하는 사람을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을 믿고 나오는 자는 성령이 아니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내 진심으로 믿는다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의 진심이라는 것도 얼마나 잘 변합니까? 남녀가 연애할 때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고백하고서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왜 이혼합니까? 진심으로 미워하니 이혼하지요. 진심으로 사랑한 것도 사실이고 진심으로 미워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이 나의 진심에 바탕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주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는 고백을 들으시고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혈육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난 자만이 예수를 믿을 수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3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하나님께로 나지 아니하고는 예수님을 주시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하는 것이 얼마나 습관적이고 기계적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해산의 고통을, 그 십자가의 고통을 통하여 주 예수를 영접하는 자로 만들어 놓았는데 우리는 주 예수님, 할 때마다 어찌 나 같은 죄인이 예수님을 주로 영접할 수 있었는가를 생각하며 감사와 감격이 넘쳐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이 기초가 아니라, 전부이며 최고입니다. 그러므로 나 예수 믿었다, 그건 기본이다, 그 다음에는 좀더 나은 차원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이렇게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 믿게 하신 이 엄청난 일을 위하여 우리 주님 행하신 일들을 더욱더 풍성히 알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신앙의 성숙으로 봅니다. 우리가 얼마나 고집스럽게 자기가 자신의 주인으로 있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을 깨트려 부수시면서까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케 하셨습니다. 이제는 그 놀랍고 크신 주님의 사랑 외에는 할말이 없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14-18 독생자의 영광 1999. 7. 25.
지난주에 우리가 예수를 믿는데 가장 방해되는 것 중의 하나가 내가 예수를 믿어 주었다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 주었다고 하면 할수록 나의 영광을 챙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5장에서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마다 자기들의 영광관에 붙들려 있으니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영광관이 깨어져야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세상의 영광을 구하는 곳이 아니라 독생자의 영광을 구하는 곳입니다. 독생자의 영광을 바로 알고 볼 수 있는 사람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영광이 무엇인지 독생자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면 이미 눈이 떠진 사람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빛이 왔으되 사람들이 어두움에 붙들려 있기에 빛을 보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14절 말씀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보니”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독생자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기적입니다. 예수님을 보고서 독생자의 영광임을 아는 것이 왜 기적이며 은혜인지를 증거하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먼저 세상 영광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세상에서는 언제 영광스럽다고 합니까? 무언가 승리하였을 때, 목표를 달성하였을 때, 크고 놀랍고 위대하고 아름다운 일을 하였을 때 영광스럽다고 하지요. 이러한 세상의 영광을 가지고 사탄은 예수님을 유혹하였습니다.
첫째, 돌로 빵을 만들어라. 경제 문제의 해결입니다. 둘째, 산에 올라가 세상의 영광을 보여 주며 나에게 절하면 이것을 다 주겠다고 하였지요. 셋째, 종교적인 것입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이지요. 이 세 가지가 모두 세상의 영광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모습입니다. 돈 잘 벌고, 세상의 영광스러움과 종교적인 기적과 체험까지 나타낼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세상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사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이것을 위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 유혹은 최초의 유혹이며 동시에 최후의 유혹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바쁘게 사는 것도 이 세 가지 안에 다 들어갑니다. 이 부분은 이번 주부터 시작하는 금요 성경공부 시간에 더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영광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보고서 독생자의 영광을 알아본다는 것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너무나 세상 영광에 젖어있다 보니 독생자의 영광에 무지하고, 시시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지난주 방학하여 성적표를 받아왔지요? 모두 ‘수’를 받아온 기쁨보다 우리 아들이 예수 믿는 것이 더 기쁘다고 말해주신 부모님 계십니까? 이제 독생자의 영광이 무엇인지 몇 곳의 말씀을 증거하고자 합니다.
빌립보서 2:6-8절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자기를 비워 종이 되심이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세상의 영광은 미꾸라지가 용 되는 것이 영광이지요. 그러나 독생자의 영광은 종의 모습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낮아지심을 영광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낮아지심과 십자가의 죽으심이 왜 영광이 되는지 두 곳의 말씀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1:14절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지금 예수님께서 마구간에 누워계시는데 이것을 천사가 무어라고 노래합니까? 지극히 높으신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사건이 독생자의 마구간 탄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영광과 분명 반대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가난하여 어렵게 태어난 사람은 다 영광스러운 것인가요? 결코 그런 것은 아닙니다. 독생자, 하나님의 아들이 말구유에 누이신 것이 표적이라고 합니다. 표적이 말구유에 누이신 것이랍니다. 말구유는 먹이통이지요. 짐승 같은 우리를 구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살과 피를 흘리시기 위한 표적으로 구유에 누이신 것입니다.
12절입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가 큰 백성에게 미칠 기쁨의 좋은 소식을 주는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탄생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드러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손으로 사람의 능력으로 무엇을 만들어 내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독생 하신 그 분을 보니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독생자의 영광인데 이 영광을 누구만 알아보는 것입니까? 크리스마스라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만이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낮아지심이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라고 천사들이 노래하는 것입니다. 오직 기뻐하심을 입은 자만이 독생자의 영광을 아는 것이고 그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만 이러한 모습이 아니지요? 우리가 보는 세상의 영웅적인 모습들은 어려서 아주 많은 고생을 하지만 나중에는 아주 큰 성공을 하였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는 어떠합니까? 이사야 53장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 예언의 말씀대로 사신 것입니다. 정말 세상 영광과는 반대인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수난 받으실 때의 모습이 얼마나 비참했으면 그 얼굴을 마주보고 침을 다 뱉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 멸시천대를 해야 얼굴에 침을 뱉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그 정도의 수모를 받는다는 것이 어느 정도의 비참한 자리인지 상상이나 되십니까? 제가 어지간히 나쁜 짓을 하였다고 해서 여러분이 저의 얼굴을 향하여 침을 뱉을 수 있겠습니까? 뒤로야 욕할지 모르지만 면상에 대고 그렇게 한다는 것은 얼마나 무시하였기에 그렇게까지 하였겠습니까?
우리가 영화나 그림에서처럼 얼굴 뒤의 후광이 비치고 신비한 위엄이 있었다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이처럼 낮아지심이 결국은 십자가로 가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니 이 독생자의 영광과 십자가의 영광이 얼마나 세상의 헛된 영광을 고발하고 있는지를 아시겠습니까? 억지로 짜내고 짜내어 사람보기에 멋있는 건물 만들어 놓고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가 되어 버립니까?
요한복음 13:31-32절입니다.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지금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셨고 하나님도 영광을 얻으셨다고 말씀하시는데 무엇 때문에 영광을 얻으셨다고 하십니까? 저가 나간 후에, 가로 유다가 예수님을 팔기 위하여 나간 후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러 나간 것은 이제 곧 잡혀서 십자가에서 죽는 일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예수님이 영광 받으시고 하나님께서도 영광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광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과 은혜가 그 십자가에서 가장 크게 드러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이 영광을 이해하면 이제 주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작정하고 십자가만 자랑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독생자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영광은 갑자기 배설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 독생자의 영광이 얼마나 충만한지 요한복음 1장 16절에서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위에 은혜러라, 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독생자의 영광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꾸만 세상 영광의 유혹에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어떤 식이냐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의 영광을 다 쥐고서, 공부도 일등하고, 돈도 제일 잘 벌고, 인물도 좋고, 정치도 다하고, 무엇이나 일등, 일등을 하여 주님께 영광 돌리자는 생각이 얼마나 자주 듭니까? 나는 예수를 믿고서 10년이 되었는데 전세방에 사는데 우리 옆집은 절에 나간 지 3년 만에 자기 집 샀는데 하나님 아버지 나는 저사람 보다 더 나은 집 주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옵소서. 이런 것이 바로 예수님이 거절하신 세상 영광인데도 우리가 이런 식으로 싸움을 하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이제부터는 독생자의 영광을 제대로 알아갑시다. 그 십자가의 영광을 알아갑시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는 독생자의 영광이 하나님께로 난 자만이 알게 됩니다. 그러나 재림 시에는 누가 말 안 해도 그 독생자의 영광,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양의 영광 앞에서 세상의 모든 헛된 영광들이 날아가 버리게 됨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영광이 아니라 독생자의 영광을 온 세상에 드러내실 그 영광의 날을 소망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14-34 은혜와 진리 1999. 8. 1.
‘예수 믿어 구원 받는다’는 말과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말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우리는 예수 믿는다, 하면 자연스럽게 내가 믿어주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은혜와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믿은 것이 은혜라고 말은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내가 마음으로 믿어준 게 있을거야, 라는 생각 때문에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을 은혜로 구원 얻는다는 말과 꼭 같이 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그 믿음이란 말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믿어주었다는 자랑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어준 행위의 결과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선물 주신 분의 그 은혜만을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반복하는가 하면 사람이 다른 것은 믿지 못해도 자기의 행위는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행위를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은 부인할 수 없기에 내가 이렇게 믿음생활하고 있으니 구원 얻을거야, 하는 생각을 자기 구원의 근거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확신을 강하게 심어줄수록 종교적인 열심은 더 내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를 해도 주님께서 지금 쉬지 않고 기도하고 계시고,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시는데 그것은 자기 일이 아니니까 믿지 못하고 자기의 철야와, 눈물 콧물과, 목쉰 것으로 기도 많이 했다고 뿌듯해 하는 것이 우리들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이 따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이십니까? 우리가 빛과 진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는 것을 아시고 오셨습니다. 이미 우리가 어두움 아래, 마귀의 권세 아래 붙들려있음을 아시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에게서 우리는 거저 받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6절을 봅시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위에 은혜러라.” 이 말씀을 보면 우리는 은혜를 한번만 받고서 그 다음은 우리가 알아서 해결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충만하니까 받고 또 받는 것입니다. T.V 드라마 ‘보고 또 보고’는 식상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받고 또 받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메마른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한번만 받는 것으로 알고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 알아서 해야 된다는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은혜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것은 아직도 우리가 율법적인 생각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행위로서 그 법을 다 이루어야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거룩하고 선합니다. 그러므로 그 율법을 다 지키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고 곧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는 누구도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육체가 없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이미 주님께서 알고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 율법의 모든 요구를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을 다 지켜 행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입장에서는 율법을 어긴 것 같았지만 처음 율법을 주신 분의 원래 율법의 뜻을 100% 순종하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 내실뿐 아니라 율법을 어기면 오는 그 율법의 저주도 예수님께서 다 담당하신 것입니다.
갈라디아 3장 13절.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님의 이러한 은혜의 역사가 율법의 시대와는 전혀 다른 율법 외의 다른 한 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을 은혜가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율법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말은 은혜라고 하는데 은혜를 주님께서 이루어 놓았으니 네가 이 은혜를 받아드리는 것은 네가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은혜가 네 앞에 있으니 너는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이 믿으라는 말이 은혜임을 모르니 자꾸만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직도 은혜와 율법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엇을 더 쉽게 이해합니까? 은혜가 완성되어 있으니 네가 믿고 영접만 하면 된다. 이것이 쉽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덮쳐온다. 이것이 쉽습니까? 전자가 쉬운 이유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원리가 전자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 부뚜막에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지. 이러한 원리 속에서 사니까 그저 주시는 은혜를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로 난 자는 은혜의 은혜 됨을 알기에 우리가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위에 은혜러라, 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7절을 봅시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이 말씀을 더 이해하기 위하여 로마서 3:19-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이 말씀에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는 것이 믿음의 법이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무엇과 대조합니까? 행위와 대조합니다. 그러므로 모세를 통하여 준 율법으로는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는 것입니다. 그 갇힌 자를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하시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화목 제물로 삼아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이 알고 나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분의 은혜와 진리란 이루 말할 수 없이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베드로전서 1:10-1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 원하는 것이라.”
이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우리에게 임할 은혜를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영의 인도를 따라 부지런히 살피고 심지어 하늘의 천사들까지도 살펴보기를 원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곁에서 수종을 드는 천사들도 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사건을 살펴보기 원하였다는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바대로 이 일을 위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신 것입니다.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홀로 골고다 언덕길로 걸어가신 그 십자가의 고난으로 우리를 대속하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하셔서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며 하늘나라까지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다른 하나님의 은혜를 독생하신 하나님이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은혜와 진리를 우리가 받았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소식이며 기쁜 소식입니까? 그런데도 이러한 복음의 소식이 기쁘지 아니함은 아직도 우리가 우리의 행위에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이며, 아직도 죄가 무언지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은혜의 풍성함을 알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설교자는 한계를 느낍니다. 아무리 말씀을 전하여도 씨를 뿌리고 물을 주더라도, 여러분의 속에서 확신과 믿음의 반응은 성령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나 듣는 자 사이에 사실은 단절이 있습니다. 이 단절을 사람이 쉽게 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쉽게 이해가 되기는 윤리 도덕적인 설교는 이해가 쉽습니다. 복음이란 들을 귀 있는 사람만 듣게 하시는 주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 나라’를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비유로 말씀하셨다고 말하는 자들이 많은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비유로 말씀하심은 알아들을 자만 알아듣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에게서 그 은혜를 날마다 거저 받는다는 사실을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 말씀은 은혜를 받은 자만이 아는 것입니다. 자신이 은혜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엄청난 죄인임을 알기에 이런 은혜가 충만한 분에게서 날마다 순간마다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저절로 아멘, 하는 것입니다. 미안해서 어떻게 그렇게 늘 받기만 하느냐고 말한다면 아직도 자존심이라는 죄가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자리입니다. 세상의 종교는 신에게 나의 정성을 바쳐서 신에게서 무언가를 받아내는 것이라면,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배가 하나님께 드림의 의미가 없습니까? 있지요.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감사를 받으시는 것이지 돈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찬송과 기도와 헌금도 이제는 모두 감사의 반응입니다. 이것을 함으로 더 나은 물질을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배란 일의 개념이 아닙니다. 받는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며 또한 은혜를 받으러 가는 것은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느 곳에 가면 멋진 선물을 준다고 할 때 어느 곳까지 가는 것을 일의 개념으로 생각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44:18절에서 제사장의 복장을 땀나게 하는 것으로 허리를 동이지 말라고 하십니다. 제사장의 복장이 시원한 세마포로 입어서 땀이 나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의미를 나타냅니다. 제사드림이 우리의 땀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모두가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아무 할 일이 없네요, 하시겠지요?
그러나 성경은 더욱 은혜를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은혜를 받은 자만이 은혜를 더욱 사모하게 됩니다. 은혜를 받는 일은 일이 아니라고 하였지요. 그러므로 은혜를 받기위해 힘쓴다는 것은 힘써 일을 하여 그 결과로 무엇을 따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신가를 더욱 풍성히 알아 가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4-16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오늘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십니다. 우리의 시험받는 것과 우리의 약함을 이미 자기 몸으로 체험하신 그 제사장에게서 긍휼히 여기심을 받았습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주님 고맙습니다, 이제 주님 가만히 계십시오, 제가 주님을 위하여 멋진 일을 해 드리겠습니다, 하는 것이 아니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또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이리 중요한지 성경 한 곳만 더 보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히브리서 12:26-29절입니다. “그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가라사대 내가 또 한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이 또 한번이라 하심은 진동치 아니하는 것을 영존케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든 것들의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시내산에 임하실 때 땅이 진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땅뿐만 아니라 하늘까지 진동시켜 버리실 때가 곧 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흔들어 버리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흔들리는 것은 모두 흔들어 버리고 흔들리지 아니하는 것들만 남겨두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모두가 흔들리는 것입니다. 수백억, 수천억을 들여서 멋진 예배당을 지어도 하나님이 흔들어 버리시는 그날에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흔들리지 아니한 것이 무엇입니까? 변동하지 아니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나라입니다. 진동치 못할 나라를 우리가 받았습니까?
그러면 이제 무얼 합니까? 은혜를 받자. 왜요? 주님의 은혜로 주신 것만 남습니다. 주님께서 은혜로 주신 하나님의 나라, 영생, 자녀 됨, 그 기업, 용서, 사랑하심,,,, 이런 것만 남습니다. 성도의 봉사도 자기 힘으로 봉사한 것은 모두 소멸됩니다. 그러나 주께서 주신 힘으로 봉사한 것은 남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의 힘 나의 열심이 아니라, 주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은 경건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더욱 은혜위에 은혜를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요한복음 1:35-51 어린 양을 보라 1999. 8. 8.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실 때 비유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잘 알아듣도록 쉽게 말하여 많은 사람을 구원하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벌써 이상하게 들리지요? 우리의 생각에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구원받아야 될 텐데, 어떻게 그렇게 말하는가 하는 의문이 날 것입니다.
우선 오늘 본문을 들어가기 전에 마태복음 13:13-17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습니까?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너희와 저희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두 편으로 나누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이사야 6장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수요일 저녁에 이 부분을 차례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만, 간단히 보자면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고 제단 숯불로 입술이 지져지고 나서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라는 음성에 주여, 나를 보내소서! 하지요. 이때, 가서 전할 내용이 무엇인가요? 귀를 막고 눈을 감겨버리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깨달아 돌아오지 못하도록 막아 버리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이상한 말씀입니까? 우리가 받는 전도 훈련과 성경이 말씀하는 전도가 이렇게 다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꼬시든지, 협박을 하든지 그저 사람 수를 늘려 보려고 하는데 물론 말이야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지만, 지금 정작 하나님의 전도는 구별하고 두 편으로 나누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들어오지 말아야 할 자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비유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천국 비유 중에 그물로 고기 잡는 비유에서도 분리를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4:13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죄사함을 얻지 말아야 할 자는 얻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주님을 제대로 알아본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이며 복인지 아시겠습니까?
이제 오늘 말씀을 보겠습니다.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님의 다니심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고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합니다. 구약에서 그토록 많이 희생 제물로 드린 대표적인 짐승이 어린 양인데 이제는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 그 어린 양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무슨 사건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힌트를 드리면 ‘서서 보라’입니다. 바로 출애굽 사건이지요. 홍해 바다 앞에서 뒤에는 애굽 군대의 추격이요. 앞에는 홍해 바다입니다. 진퇴양난에서 모세가 무어라고 말합니까?
너희는 가만히 서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베푸시는 구원을 보라는 것이지요. 지금 세례 요한이 두 제자와 함께 섰다가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어린양의 피로 구출 받아 나오듯이 이제는 어린양의 피가 아닌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죄와 사망의 그늘에 앉아있는 주의 택한 자들을 구하러 오신 어린양,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복음입니까?
그러나 이 어린양을 제대로 알아보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설교 서론에서 비유를 말씀드린 이유가 비유를 알아듣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따로 제자들에게 설명을 해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즉 주님께서 알아듣게 하셔야 비유를 깨닫듯이 지금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하는데 그 어린양을 보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런데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16-17절에서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제자들이 많은 선지자와 의인보다 복 있는 자입니다. 예수님을 보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가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바르게 안다면 이것보다 더 큰 복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보고 들음으로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아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러한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이 몇 사람 나타납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 중 두 사람입니다. 요한이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님의 다니심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하니까 지금까지 요한의 제자로 있던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로 가버리는 것입니다. 이때 세례 요한의 기분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아주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자신이 그 일을 위하여 왔기 때문입니다. 요한의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두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세례 요한의 증거를 따라 예수님을 따라 나섰지만, 이들이 원하는 것은 자기들이 원하는 메시아였음이 십자가 앞에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셔야 제대로 알게 되지만 그러나 이 정도로 예수님을 알고 따라 나선 것도 은혜요, 기적입니다. 이 두 사람이 예수님의 질문에 랍비여, 어디 계시옵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 대답은 이제 우리가 주님을 따르며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라는 대답이겠지요.
그 때 주님께서 ‘와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라 그날 주님과 함께 거하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거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본 것이지요. 그래서 이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알고는 두 제자 중 한 명이 안드레인데 베드로의 형제입니다.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가서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하면서 베드로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장차 ‘게바’라고 하겠다고 하십니다.
이튿날 예수님께서 빌립을 부르십니다. 빌립도 예수님을 알아보고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뭐라고 말합니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예수님이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라고 나다나엘에게 소개합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시기는 어디서 태어나십니까?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지요. 자라기는 나사렛에서 자랍니다. 나사렛은 예루살렘 수도의 입장에서 보면 이방인 나라와 가깝고 별 볼일 없는 촌구석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빌립이 뭐라고 합니까? 와보라는 것입니다. 와서 보라는 것이지요. 와서 봐도 보지 못하는 자가 많은데 와서 보고 메시아임을 아는 자가 오늘 말씀에 다섯 사람입니다. 요한의 두 제자. 그리고 베드로. 빌립. 나다나엘. 이들의 공통점은 ‘본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임을 보고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 보고 아는 것이 자신들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임을 우리가 요한복음 1:13절을 통하여 이미 확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는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자라는 말씀을 우리가 압니다. 이처럼 주께로 난 자는 주님을 보고 알아 본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두 제자에게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두 제자에게 ‘와보라’고 하셨지요. 빌립도 나다나엘에게 ‘와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와보라’ 라는 말로 전도의 표어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은 전도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는지 나다나엘과의 대화 속에 나타납니다.
47절에서 나다나엘이 빌립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로 오자 예수님께서 먼저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속에 간사한 것이 없이 참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라는 자들이 몇 사람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25-33절까지 봅시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 부모가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시므온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아기 예수를 보고 이 아기가 이스라엘의 위로를 줄 자임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주의 구원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36-38절에 안나라는 선지자가 예루살렘의 구속을 바라는 자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증거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는 자가 하나님의 남겨놓으신 참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자기들의 정치적인 메시아, 지상왕국을 꿈꾸는 그런 이스라엘의 구원을 모두 다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참 이스라엘이라고 나다나엘을 부르면서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유대인들의 국수적이고 자기 나라 중심의 왕국 건설의 생각이 아니라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므온이나 안나가 아기 예수를 보고 내가 주의 구원을 보았다고 한 것입니다. 이 아기 예수는 이방인에게까지 비치는 빛이 되신다는 사실에서 유대인의 선민의식이 깨어지는데도 오직 자기 나라 중심인 것입니다. 이미 나라가 망하였는데도 메시아를 통한 자기 나라 이 땅의 나라만 관심하는 것이 대부분의 모습입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참 이스라엘이란 적은 수입니다. 나다나엘에게 예수님께서 너는 참 이스라엘이다, 라는 말씀을 하시자 나다나엘이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그러자 나다나엘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무화과 나무아래서 무엇을 하였는지 예수님께서 아신 것입니다. 그래서 참 이스라엘이라 하시며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는 말씀에 놀라는 것입니다.
미루어 짐작컨대 나다나엘도 무화과나무 아래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기에 주님의 이 말씀 앞에서 이런 고백이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그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며 기도를 한 것이 주님이 아셨다는 것은 주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임금임을 나다나엘이 알게 되었지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느냐 하던 사람의 이 엄청난 신앙고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을 주님이 들으시고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은 또 말씀 하십니다. “네가 무화과 나무아래서 보았다고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고 말씀합니다.
그 더 큰 일이 51절 말씀입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하여 도망 가다가 들판에서 잠을 자게 되었을 때 꿈에 하늘에 연결된 사닥다리가 있고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잠을 깨어서 그곳을 ‘벧엘’이라 이름 합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닥다리, 그 역할을 지금 예수님이 하실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인간의 범죄로 단절되어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의 사닥다리가 되시는 것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이 일을 감당하십니까?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그 일을 감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예수님을 보고서 아는 것이 더 큰일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아는 자는 더 이상 자기 세계를 구축하지 아니합니다. 더 큰일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고 알고 믿는 자는 복 있는 자입니다. 이 세상 아무나 보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우리로 하늘의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하늘나라의 사닥다리가 되시고, 우리로 타고 올라가라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그 안에 묶어버린 그 사랑에 감격하여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요한복음 2:1-11 표적과 때 1999. 8. 15.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내용입니다. 이 표적을 요한복음에서 첫 표적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본문은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여러 종류의 해석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순종하면 기적을 본다’ 라든가 기적을 행하시는 때가 포도주가 완전히 떨어진 때라든가 라는 말을 하면서 예수님께서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으로 이 본문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요즈음 목회자들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교회의 모델이 미국의 새들백 교회라는 교회인데 이들의 전도 질문 5가지를 말합니다. 초기에는 두 가지 질문인데 그것을 수정 보완하여 5가지로 질문하는 것입니다.
1) 당신은 이 지역에서 가장 큰 필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2) 당신은 교회에 활동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까?
3) 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4) 당신이 다닐 교회를 찾는다면 어떤 종류의 교회를 원하십니까?
5) 내가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에게 진정 도움을 주는 목사가 되도록 내게 주고 싶은 충고는 무엇입니까?
각 질문마다 설명이 있는데 다섯 번째의 내용이 이러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지역 사회에 물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다. 복음서를 공부해 보라, 예수님이 얼마나 자주 “내가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분은 사람들의 필요에서 출발하셨다. 결국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러 오신 예수님이니까 사람들의 필요를 물어보고 그들의 필요를 잘 채워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들이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에 관심을 가지는 것보다 사람들의 요구가 무엇인지 잘 알기를 원하고 그들이 원하는 요구를 성경을 인용하여 채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나중에는 십자가를 이야기하면 되지 않겠는가 합니다. 기존의 신자는 알아듣지만 새 신자에게 십자가를 바로 말하면 알아듣겠느냐는 것이지요? 여러분 예수님께서 사람의 지혜보다 부족합니까? 그런데도 오히려 사람의 필요를 얼마나 무안하도록 부인하는지 아십니까? 물론 주를 부르짖은 자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말씀하시고 그들을 고쳐주신 적이 있지만 그 고침의 의미를 모든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으로 보는데서 출발한다면 성경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부모형제 심지어 자기의 목숨까지 미워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자기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면 오늘 말씀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 주신 첫 표적의 의미는 무엇인지 말씀을 통하여 찾아보고자 합니다.
우선 이 첫 표적의 배경을 봅시다. 마리아도 잔칫집에 있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도 청함을 받은 것을 보니 예수님을 잘 아는 사람의 집에 잔치가 있은 모양입니다. 잔치가 한참인 때에 포도주가 떨어지니 잔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예수에게 어떻게 해보라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말합니다. 이 본문을 예수님께서 어찌 자기 어머니를 여자여, 라고 부를 수 있느냐, 면서 여자여, 라는 말은 그 당시에 존칭어다, 하면서 예수님의 효성을 드러내는 분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태복음 12:48절에서 “누가 내 모친이며 내 형제냐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내 모친이며 내 형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여자여, 나와 이 일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말씀은 나를 포도주 만들어 내는 사람으로 보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 이 말씀인데도 나중에 포도주를 만들어 주시니까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어렵습니다. 안된다면 포도주도 만들어 주지 말아야 하는데 나중에 만들어 주시니까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는 말씀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12:13-15절을 봅시다.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지금 이 말씀을 보시면 아마 자기 형이 부모의 유산을 형이 가로챈 모양입니다. 놀부 같지요.
그래서 예수님께 재산을 나눌 수 있도록 부탁하자 이 사람아 내가 그런 일 하러 온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사람의 필요는 유산 나누는 일이 가장 필요로 하는데 주님은 그런 필요를 채워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탐심을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소유가 넉넉하다고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면서 그 유명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여자여, 이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신 말씀은 나를 잔칫집에 포도주나 만들어 주기 위하여 온 사람으로 아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나의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때를 많은 사람이 포도주를 만드는 때로 말합니다만 요한복음에서 ‘때’에 관한 말씀이 오늘 본문 외에 6번이나 나타납니다. 이 ‘때’가 무엇인지 찾아보면 이 때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과 함께 비교하여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말씀을 해석한다.’ 그러지요. 그러면 요한복음의 ‘때’에 대하여 직접 찾아봅시다.
요한복음 7:30절, 8:20절, 12:23절, 12:27절, 16:32절, 17:1절. 이 모든 ‘때’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난의 길과 십자가의 ‘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든 이적과 표적들은 그 한 가지 사건의 필요를 위하여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십자가 지셔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표적입니다. 물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십자가의 사건을 나타내기 위한 표적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사건을, 첫 표적을 나타내시는 ‘때’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이 포도주를 만들어 달라는 요구에 예, 그러지요 하시고 만들어 내신 것과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면서 만드신 그 차이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상관이냐 하시고서 만드심으로 예수님이 무슨 ‘때’를 위하여 오셨는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자신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첫걸음을 내디디셨다는 의미에서 첫 표적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잔치의 기쁨이 되겠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표적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때’인 것입니다. 병자를 일으키는 것도,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도, 자신이 세상 죄를 짊어지고 가시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표적 보여 주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13:39절.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결국 예수님께서 보여주실 표적은 오직 십자가의 표적뿐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표적은 십자가의 표적에 메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구하는 표적은 무엇입니까? 물로 포도주 만드는 것입니까? 재산 문제 해결되는 것입니까? 병 고침 받는 것입니까? 그런 표적을 주님 보이시고자 함이 아니라 요나의 표적을 보이고자 하신 것입니다. 자신이 죽어 땅속에 묻히는 것이 예수님이 보이고자 하시는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2:11절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이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이 표적을 통하여 영광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포도주 만드시고 영웅적인 대접을 받았기에 영광을 나타내신 것이 아닙니다. 이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길이기에 그것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길이기에 영광의 길입니다. 전에 독생자의 영광에 대하여 말씀을 드렸지요. 낮아지심, 십자가의 죽으심이 영광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십자가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떤 표적을 구하시겠습니까? 십자가의 표적입니다. 이 표적이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비록 주님은 희생의 길로 가신 십자가의 길이지만 오늘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 되었기에 우리는 그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입어 나아갈 수 있는 기쁨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쁨이 다는 아닌 것입니다. 우리를 주의 성령께서 함께 십자가의 길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29절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우리가 은혜를 받은 것은 믿음뿐만이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시기 위하여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십자가에 함께 참여시키시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십자가의 의미를 드러내시고 우리로 더 깊이 십자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길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 사람들도 부러워하는 그런 표적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꺼려하고 싫어하는 그런 십자가의 표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억지로 운동하여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어떤 모습입니까? 명예를 잃고, 건강을 잃어도,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없어도, 외양간과 우리에 짐승이 없어도, 은행 잔고가 없어도, 정기적금과, 노후보장보험을 들지 못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기적 아닙니까?
그토록 잘난 자존심이 짓밟혀도 아무 일 없는 듯이, 죄인이 무슨 자존심이 있겠습니까? 하고 살아가는 것이 기적 아닙니까? 오늘 새벽에 시편 16편 2절에 “주 외에는 다른 복이 없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이 세상 다 주어도 주님 없으면 복이 아니라는 것이 신자의 기적입니다.
이러한 자는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표적을 제대로 알고 따라가는 주의 백성들입니다. 이러한 기적이 병 고침보다, 어떠한 세상의 신기한 일들보다도 더 놀라운 십자가의 영광이며 기적입니다. 이러한 기적을 놓치지 말고, 이러한 기적과 표적을 인하여 오히려 감사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느니라,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요한복음 2:12-22 이 성전을 헐라 1999. 8. 22.
예수님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첫 표적을 행하시고 그곳에서 오래 계시지 아니하십니다. 그리고 가버나움으로 내려가 계시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데 그 때가 유대인의 가장 큰 절기인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 받은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이 유월절에 전국에서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다 예루살렘에 오는 것입니다. 성인 남자들만 오더라도 이들의 수는 굉장합니다.
예루살렘의 도시가 그렇게 큰 도시가 아니기에 유월절이 되면 사람으로 넘쳐나는 것입니다. 이들이 와서는 모두가 성전에 나아가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니 예루살렘 성전이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마치 사월 초파일 같겠지요. 흩어진 유대인 남자들이 각국에서 몰려왔으니 어떤 사람은 이 숫자를 200만 명으로 추산을 하기도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때 한 대목 보는 것이겠지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성전에 관련된 사람들은 싱글벙글 하였을 겁니다. 마치 총동원주일 행사하는 것처럼 한곳에서는 줄 세우고 안내하고 한쪽에는 예배드리고 야단법석인 풍경이겠지요. 짐승들의 울음소리, 피 비린내,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길게 줄을 늘어서 있을 것이고, 성전 안에서는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소와 양을 사고 돈을 바꾸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성전세를 내기 위하여 외국에서 온 사람들이 환전하는 것이 잘못이 아닌 것입니다.
신명기 14:25-26절에 보면 하나님의 택하신 곳에 십일조를 드리기 위하여 가야 하는데 길이 너무 멀면 돈으로 바꾸어 가서 그곳에서 양이나 소를 사서 제물로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성전에서 일어난 일을 보시고 왜 분노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분노가 성전 안에서 장사하였다는 그 장소성만 고발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 그 자체의 기능을 오해하는 모든 자들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분노가 얼마나 크신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이나 소를 성전에서 쫒아 내시고 비둘기파는 사람에게 그것을 들고 나가라 하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고 상을 둘러엎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이러한 이미지가 상상이 되십니까? 그저 죄인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마음씨 좋은 예수님으로 생각 하신다면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이해가 잘 안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마태복음 21:12-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성전 안에 들어 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쫒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그러므로 오늘, 성전을 헐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에서 왜 성전을 헐어버려야 하는지를 말씀을 통하여 확인하고자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 안에 잘못 인식된 성전들이 있다면 함께 허물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였습니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성전이 있을 때는 성전에 나오지는 못하여도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전에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겠다고 하신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범죄를 하여도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 갔을지라도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긍휼이 여겨 달라고 하는 말씀이 열왕기상 8장에 있습니다.
그러면 왜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들어 주시는 것입니까? 그 성전에 어린양의 희생이 있는 것입니다. 그 희생을 근거로 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전은 기도하는 집인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서의 제사 기능을, 액땜하는 식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강도의 굴혈로 만든다는 말씀이 이미 구약에 나타납니다.
예레미야 7:1-15절을 봅시다. “봉독” 지금 예레미야 선지자가 활동하는 시기는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으로 우상을 철폐하고,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하여 하나님께 제대로 질서를 따라 예배하는 때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들의 이중적인 모습으로 제사지내는 것을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성전으로 몰려오는 그들을 가로 막아 서서, 예레미야가 하는 말이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성전에 제사 지내고 있는 중인데 그 성전이라는 것이 거짓말이니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7절에서 9절을 봅시다. “너희가 무익한 말을 의뢰하는도다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세상의 삶은 온갖 우상숭배를 하면서 성전에 들어와서 제사 한번 지낸 것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는가, 그런 것은 너희의 범죄를 또 행하고자 하는 눈가림의 장사다, 그러므로 그런 짓은 이곳을 도적의 굴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처음 성막이 있었던 실로가 황폐화된 것처럼 이곳도 황폐화될 것을 말씀합니다. 이러한 거짓되고 부패한 제사가 더 이상 드려지지 않도록 구약 마지막 성경 말라기에서는 이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강도의 굴혈로 만들어 버린 사실을 구약을 인용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 오셔서 뭐라고 주님은 말씀하시겠습니까? 이미 성전을 헐어 버리시고 자기 몸이 성전 되심을 3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증거 하셨고, 그 예수님의 영을 받은 자가 성전인데도 아직도 예배당 건물을 성전시하고 있는 사람들이 과연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까? 그 뿐만 아니라 온갖 매매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납니까?
교회 안에 임직을 할 때 여러분은 누구를 선호합니까? 성도들은 목사가 돈 많은 사람 좋아한다고 하는데 여러분은 그렇지 않습니까? 저 사람이 우리교회 장로 되면 믿음은 조금 떨어져도 교회에서 무슨 일할 때 뭉칫돈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러면 우리의 부담이 적어지니까, 저 사람을 찍어주자, 그런 생각이 정말 없습니까? 사람들은 비판을 하면서도 실제 투표는 어디로 쏠리고 있습니까? 이러다 보니 정말 믿음이 있는 자는 투표에서 표를 못 얻습니다. 은근히 목사가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돈 많은 자를 밀기도 하지요.
이것이 교회가 망한 이유인데도 이것을 알면서도 왜 그런 교회 나가고 있습니까? 마치 3김을 청산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3김의 공천을 받지 못하면 국회의원 될 수가 없으니 '3김 청산' 말은 하면서 3김에게 줄을 서야하는 오늘날의 정치인이나 그런 3김의 공천을 받지 못한 사람은 국회의원이 못되도록 투표하는 사람이 안해야 되는데 막상 투표할 때는 자기 지역의 이익을 따라 3김의 공천 받은 자를 투표하는 사람이 바로 우리들 아닙니까? 이처럼 교회가 그런 모습을 비판하고 목사를 욕하면서도 정작 투표는 누가 합니까? 목사는 10표를 줍니까? 성도들이 뽑은 것입니다. 이런 행위가 하나님의 교회를 도적의 굴혈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서도 왜 그런 교회를 떠나지 아니합니까? 그렇지 않은 곳을 찾아가지 않습니까? 그런 곳이 없다고요? 서울이든 부산이든 그런 곳을 찾아보기는 하였습니까? 갈 길이 멀더라도 그런 곳을 찾아 나서야지요. 휴가는 좋은 곳 찾는다고 몽돌 해수욕장까지 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그런 수고를 하셨습니까? 부산의 어느 교회 목사가 기도원에 갔다오더니 성전을 다시 건축하자고 하였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집사 중 한 사람이 복음을 조금 듣고서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그 교회를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못나오느냐고 하니까 지금까지 그 교회에 투자 해놓은 것이 얼마냐는 것입니다. 자기의 피땀 같은 돈을 십일조로 헌금으로 얼마나 많이 갖다 바쳤는데 사람이 보물 있는 곳에 마음 있다고, 자신이 그 만큼 돈을 쏟아 부은 만큼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 성에 미련을 두고서 뒤를 돌아본 롯의 아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런 헌금이야 하나님께 드렸다고 생각하면 되지만, 자신이 지금까지 수십 년 부조를 한 것이 있는데 지금 자녀의 결혼을 앞두고서 나와 버리면 그 부조를 어떻게 받는가, 하는 말을 하더랍니다.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주님의 말씀을 발로 차버리는 순간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장사를 하지 않습니까? 내가 이만한 헌금을 하고 예배를 드리고 봉사를 하였으니 하나님이 복 주실 걸, 하는 자세는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님께서 한국 교회에 오신다면 둘러 엎어버리실까요? 그냥 두실까요? 저는 그냥 두시리라고 생각합니다. 한두 곳이면 둘러엎으시겠는데 너무 많으면 그냥 두시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심판인 것입니다. 온갖 인위적이 방법으로 교회 성장을 도모하는 교회들이 망하지 아니하고 세상적으로 더 잘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바로 심판임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시편 69편 9절 말씀입니다. 다윗이 원수들에게서 쫒기면서 예언한 것입니다. 주의 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로 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주의 집을 위하는 열심이, 다윗이 위험에 빠지는 것으로 볼 수가 있고, 또 하나는 다윗의 대적들이 하나님의 집을 위한다는 열심일 수가 있습니다. 다윗의 대적은 사울인데 사울이 염려하고 사모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왕권입니다. 이것을 수호하는 것이 자기는 하나님의 집을 위하는 열심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의 집을 세울 기름 부은 자, 다윗이 나왔으니 사울은 다윗을 제거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사울에게서 기름부음이 떠났기에 가짜 왕권입니다. 그 가짜 왕권을 고수하기 위하여 열심히 다윗을 죽이려 한 것입니다. 이것을 사울은 주의 집을 위한 열정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성전이 이미 도적의 소굴로 되어 버렸기에 예수님께서 그 성전을 둘러엎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는 시편 69편 9절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저러다가 예수님 오래 못가실텐데 하는 염려가 되지요. 그때 유대인들이 네가 이렇게 하는데 무슨 권위로 이렇게 하는 거냐고 묻는 것입니다. 어떤 표적을 보이겠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 만에 일으키리라” 이것이 성전을 향한 예수님의 열심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유대인들이 책잡아서 나중에 사형에 처하는 죄목으로 말하게 됩니다. 성전을 헐라는 말이 사형에 해당될 만큼 중대한 범죄입니다. 도적의 굴을 고수하기 위하여, 가짜 성전을 고수 하려는 열심이 참된 성전을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3일 만에 일으키리라는 말씀을 알아듣는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제사장들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이 말을 가지고 어쩌든지 예수를 죽이려고 음모하였습니다. 제자들도 이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언제 알아듣게 됩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3일만의 부활을 통하여 이 말씀을 알아듣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임을 말씀을 통하여 알고 있습니다. 성령이 임한 자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인데도 우리는 자꾸만 다른 성전을 건축하려고 합니다. 날마다 헐어지고 무너져야 합니다.
우리 속담에 ‘공든 탑이 무너지랴’는 속담이 있지요. 사람이 정성과 공을 들여서 세운 탑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 탑은 여러 가지입니다. 사람들마다 자기의 탑들을 쌓아가는 것입니다. 돈의 탑을 쌓기도 하고 명예의 탑을 쌓기도 합니다. 종교인들은 자신들이 신에게 바치는 정성이라는 공든 탑을 쌓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의 본래 기능, 어린양의 희생의 공로로 주께 사유함을 받고 살아간다는 제사의 뜻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이 세상에서 더 잘살아가는 일에 보탬이 되는 식으로 생각하고 내가 이만한 제물을 드렸으니 올해는 만사형통할거야, 하는 식입니다. 이것이 장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식의 성전을 짓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건물 성전 헐어버리시고 3일 만에 일으키신 자기 몸으로 제물이 되신 그 은혜로 살아가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계산된 헌금이나 봉사로 무언가를 기대한다면 이것이 새롭게 성전을 짓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성전이 헐어져 버리고 오직 참으로 성전 되신 주님, 다시는 헐리지 않으실 주님만을 붙드시는 성전 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2:23-25 마음을 아시는 주님 1999. 8. 29.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다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서로가 내 마음을 알아 달라고 합니다. 또 서로의 마음을 알려고 합니다. 또 어떤 오해가 있을 때는 내 마음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마음이 문제입니다. 연애할 때는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내 마음을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왜 내 마음을 이리도 몰라주느냐는 것이지요? 내 마음을 열어서라도 보여주고 싶다고 그러지요.
그러나 결혼하고 나면 자기의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내색을 안 하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부부라도 그 속마음을 다 알게 되면 함께 살 수 없을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이가 좋을 때야 마음을 알아도 별문제가 없겠지만 사이가 나쁠 때는 어떤 마음이 드는지 우리가 말 안 해도 다 알고 있지요? 겉으로는, 말로는 안 그러는 것처럼 하여도 속은 다른 마음을 가지는 것이 사람입니다.
짐승은 한번에 두 가지를 생각 못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훈련된 개가 ‘앉아’하면 앉고 ‘서’하면 서는데 ‘앉았다가 일어서’ 하면 못 알아듣는다는 것입니다. 이러니 두 마음을 품을 수가 없지요. 미우면 으르렁거리고, 좋으면 꼬리를 흔드는 것이지, 미운데도 좋은 척, 좋은데도 싫은 척 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예레미야 17:9절에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부패한 마음은 겉으로 나타나는 것과 속의 생각이 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속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25-26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우리가 오늘 이렇게 예배한다고 옷을 깨끗하게 입고 화장하고 나와 있으니 모두가 깨끗해 보이지요. 그러나 속까지 깨끗하십니까? 지난 한 주간의 삶 속에서 가장 드러내기 싫은 부분을 여기 뒤편에 비디오를 보듯이 나타난다면 우리가 여기에 나올 수 있을까요? 서로 서로 모르기에 함께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앞에서까지 숨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앞에 우리의 더럽고 추한 우리의 마음을 고백하고 주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내 중심으로 살았는지,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얼마나 화를 내었는지, 도대체 주를 믿는다면서도 누가 주인지 구분도 없이 살아온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 서로 위장하지 말고 주님 앞에 있는 그대로를 내어 놓으시기 바랍니다. 저의 속모습도 여기에 비추어 본다면 어찌 여기 설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의 더럽고 추하고 두 마음을 품은 것이 화면에 비추어 지더라도 설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보혈의 능력이 그 더럽고 추한 우리의 마음보다 훨씬 더 크신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많은 표적을 행하시므로 그 표적을 보고 사람들이 많이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예수님이 몸을 의탁지 아니하셔도, 믿는 자들에게 의탁하시면 되실 텐데 왜 믿는 자들에게도 그 몸을 의탁지 아니하십니까? 의탁하지 아니하심이란 의지하지 아니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유초등부나 중고등부 수련회를 할 때 촛불로 분위기를 맞추고 은은한 음악 배경으로 깔고 죄를 고백하게 하면 처음에는 한두 명이 훌쩍거리다가 나중에는 거의 다 울면서 회개하고 그리고 간증하라고 하면 자신의 부끄러운 죄까지 고백하면서 이제부터는 주님을 위하여 살겠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을 믿을 수 있습니까? 그 다음날 예배에도 오지 않는 경우를 우리가 보지 못하였습니까? 어느 목사님이 청년 집회에서 기도시간에 자기가 이 민족을 위하여 죽겠노라고 고함을 지르면서 기도하는 것을 보고 가서 ‘야 죽으려면 조용히 죽으라.’고 말하였답니다. 죽는다고 고함지르는 그들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목사를 오래 하다보면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이 사람은 제대로 할까 믿었더니 아니더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경우를 너무 많이 당하다 보니 사람을 믿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앙생활 오래 하다보면 목사도 믿을 게 못됨을 자연히 알게 됩니다. 그래서 명언이 하나 나왔는데 ‘사람이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다’ 기억해 둘만 합니다. 사람들도 이 정도로 사람에 대하여 알고 계시는데 예수님은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잘 아시겠습니까? 예수님이 사람의 마음을 아신다는 내용을 몇 곳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9:1-8절 말씀에 중풍병자를 침상 채 들고 온 내용이 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네 죄가 사하여졌다는 말씀을 하시자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자기가 뭔데 죄사함을 말하는가, 속으로 생각하였는데 예수님은 그 생각을 아시고 너희가 왜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죄 사함을 받았다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 중에 어느 것이 쉽겠느냐? 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죄사하는 권세가 있음을 보이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7:36-50절 말씀에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하였을 때 어느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의 발에 눈물로 적시고 머리털로 씻고 향유를 부을 때 그 바리새인이 마음속으로 예수님이 선지자라면 어찌 저런 여자가 자기를 만지도록 두느냐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이 아시고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9:46-48절 말씀에 제자들 사이에 누가 더 크냐하는 마음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세우고서 가장 작은 자가 가장 큰 자라고 말씀합니다. 서기관, 바리새인, 제자들이 예수님이 자신들의 마음의 생각을 아셨을 때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황당하였을까요?
오늘 우리는 주님이 우리의 속마음을 다 아시고 계심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이제부터 사람의 눈치 보지 말기로 합시다.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시면 됩니다. 예배도 헌금도 봉사도 어떤 직분도 하나님 앞에서 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어떻게 볼까 생각하고서 행하는 모든 일은 주님과는 이미 상관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서도 사람에게 나타나는 일로 평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아시기에 어느 누구에게도 자신을 의탁하지 아니하신 것입니다. 많은 무리가 믿고 따랐지만 제자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자신이 끝까지 충성한다고 목숨까지 바친다고 다짐하고 결심하였지만 어느 누가 십자가 앞에서 주님의 무죄를 주장하고 변호하고 나왔습니까? 다른 사람은 다 배신하여도 나는 죽어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하면서 굳은 결심을 한 베드로이지만, 이미 그 마음을 아시기에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는 말씀대로 예수님을 철저하게 부인하였습니다. 맹세하며 저주하기까지 부인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주님께서 어찌 의지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어느 누구도 의지하지 아니하심은 사람의 마음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결단과 결심, 혈서를 쓴다고 하여도 그것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언제나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그 안에 주님의 성령이 거하시기에 그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능력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25절에서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기에 사람이 뭐라고 증거하여도 그것을 예수님은 필요로 하지 아니하십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사람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를 믿지 못하시는지 아십니까? 그런데도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사람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하셨으니 그렇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사람을 믿지 아니하시기에 사람에게 자신을 의탁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증거를 필요로 하지도 아니 하신다는데, 사람들은 그래도 사람이 아니면 주의 일을 못하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일하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할 수 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도 예수님은 사람의 증거를 취하지 아니한다고 하십니다.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시는 역사가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증거를 믿는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5:41-42절에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우리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통하여 얼마나 인간이 하나님의 일과는 상관없는 자인지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귀하다고 합니다. 그것은 내가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사람의 죄 된 본성과 부합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내가 없으면 소용없다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우리의 일상에서 어떻게 나타납니까? 신혼부부 집에 가면 사진을 구경하지요.
그 때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보고 있는 사진은 어떤 사진입니까? 주인공이 신혼부부이기에 그들을 주목해 보아야 하지요. 그러나 그런 사진은 대충 대충 넘어 갑니다. 그리고 고정되는 곳이 있는데 자기가 나오는 우인 대표사진입니다. 주인공도 아니고 한쪽 귀퉁이에 있는 자기의 사진을 보고 자기가 주인공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러다 보니 주님이 하시는 일에도 내가 없으면 기분 나쁘다는 태도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우리를 믿고서 일을 맡기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보내셔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사람이면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야 하는지를 알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가 떠나가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 성령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셔야 우리가 주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찬송가 441장 3절 가사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전능하신 예수께 나의 소원 있으니 병든 자와 소경을 고쳐주심 빕니다.
나는 죄와 악함이 가득하게 찼으나 예수께는 은혜와 진리 충만하도다.”
나의 속에 죄와 악함이 가득하게 찼음을 아는 자가 성령이 임한 자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시기에 그 분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는 우리의 마음을 주님이 아신다는 사실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사람의 눈치가 아니라 주님의 눈치만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이 나의 마음을 아시는 것이 기쁜 일이지만, 다른 마음을 품을 때는 주님이 내 마음을 아시는 것이 부담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의 마음까지 다 아시는 주님 앞에서 사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3:1-15 동문서답(東問西答) 1999. 9. 5.
우리나라에 선교사가 들어와서 전도를 할 때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 라고 하였겠지요? 그러자 어떤 사람이 예배당에 나왔고 예배를 마쳤는데도 돌아가지 않자 왜 가지 않느냐 하니까? ‘9원’ 준다고 하고서는 왜 안주느냐는 이야기를 본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구하는 것은 동(東)인데 주님의 대답은 서(西)가 아닙니까? 오늘 말씀에도 니고데모와 예수님의 대화를 보면서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니고데모는 바로 앞에 계시는 예수님을 믿으면 될 텐데 어찌 그리 못 믿느냐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니고데모가 어느 정도의 사람인지를 아시면 우리가 함부로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어떤 사람입니까? 바리새인입니다. 유대인 사회에서 가장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키기 위하여 얼마나 애를 쓰는 사람인지 우리가 안다면 함부로 말을 못합니다. 자신들이 경건하기 위하여 얼마나 말씀을 가지고 분리를 잘 하였는지 바리새파란 것이 분리주의자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자 애쓰는 사람이기에 예수님이 그들을 비판한다고 우리도 덩달아 비판하면 안 됩니다.
그들이 우리 교회에 왔다면 가장 모범적인 사람으로 보통 사람은 따라갈 수조차 없는 사람으로 대접받을 것입니다. 이런 바리새인 가운데 그것도 유대인의 관원입니다. 지도자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선생입니다. 이러한 니고데모가 동문서답을 하는 것은 나머지 유대인들은 말할 것도 없이 동문서답을 하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지난주 목요일 저녁에 APT음악회가 있었지요. 이때 초청받아 온 성악가가 엄정행입니다. 엄정행이 노래를 부르다가 어려워서 틀린 노래가 있다면 다른 사람은 불러볼 것도 없이 다 틀린다는 말입니다. 니고데모가 바리새인이요, 관원이요, 이스라엘의 선생이라는 사람이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얼마나 초점이 맞지 않는지를 살펴봅시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밤에 온 이유는 알지 못합니다만 자신의 체면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생이 난데없이 나타난 젊은이에게 찾아가는 일이 쉽지 않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하시는 일들을 보니 이것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을 하기에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뭐라고 합니까?
2절에서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다른 바리새인들과는 얼마나 다른 차원입니까? 다른 자들은 죽이려 하는데 니고데모는 7장 50절에 보면 예수님을 변호하기까지 합니다. 이 정도로 예수님께 호의적으로 다가오면 예수님이 사랑이 많으시다면 알아들으시도록 설명을 해 주시면 되실 텐데 오히려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절에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대하여 니고데모는 본격적인 동문서답이 시작됩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다시 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서 날 수 있습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우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에 이 여인은 그런 물 좀 주셔서 이 더운데, 물 길러 오는 고생 안하도록 해 달라고 역시 동문서답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대하여 이 정도의 무지의 사람임을 알아야 합니다. 니고데모가 거듭남의 의미를 모르는 것은 자신이 아직 거듭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의 선생이니 다른 사람들도 마찬 가지로 거듭나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더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세례와 성령세례인데, 유대인들은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몸에 새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인의 대단한 자부심이고 정체성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그것을 깡그리 무시하고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할 수 있다면서 회개를 부르짖습니다. 이 회개는 바로 성령으로 세례주실 자를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서의 물세례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할례를 무시하고 물로 수장시키고 성령으로 세례 받아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물로 세례 받으실 때 오직 예수님만 성령으로 세례 받으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물세례를 통하여 예수님만이 성령으로 세례주실 분임을 증거한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고 말씀하셔도, 유대인의 정체성으로 똘똘 뭉쳐있는 니고데모에게는 지금 무슨 말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다”하시니 더욱 알아듣지 못합니다.
거듭나지 못한 것은 육이라는 것입니다. 육에서 영으로 발전되는 것이 아니라 출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육으로 났지만, 잘 다듬고 훈련하고 큐티 하고 제자훈련하면 거듭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나다는 것은 위로부터 났다는 말입니다. 땅에서 태어난 자는 땅엣 것만 압니다. 그러니 네가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은 니고데모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조그마한 가능성만 있어도 그것을 키워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한 단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에도 한번 말씀 드렸지만 태어나는 것은 어떤 인간도 스스로 선택하여 태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보니 대한민국이었고, 김씨 박씨 이씨 성을 가지게 되었지 내가 스스로 선택하여 태어날 수 없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지금 사람으로는 불가능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또한 바람으로 말씀하십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듯이 성령으로 난 자도 이러하니라. 출처를 사람이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람이 부는 것을 알기는 알겠는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난 자도 기도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정성 바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바람이 임의로 불듯이 성령도 임의로 역사하시는 것이기에 어떤 누구도 성령을 움직일 재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에 니고데모가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도대체 감을 못 잡는 것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이것이 니고데모의 반응입니다. 니고데모만 동문서답입니까? 오늘날 우리는 이런 말씀을 보면서 당황되지 않습니까? 도대체 뭔가를 붙들 것이 없도록 만들어 버리시는 주님 앞에서 무엇을 들고 나가겠습니까? 이러한 니고데모에게 네가 이스라엘의 선생이면서도 어찌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거듭나고 성령으로 난다는 내용을 이 사람이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미 예레미야 31장과 에스겔 36장과 요엘서 2장에서 하나님의 성령을 새 언약과 함께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이 분이 새 언약의 완성자인 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운다고 해서 예수님을 알고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아는 것은 아주 어려서부터 팔목에 붙여 다니며 문에 써 붙여가면서 외우는 말씀들입니다.
그런데도 성령이 임하셔야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모습입니다. 유대인들이 이 정도라면 우리는 더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봅시다. 11절에서 13절입니다. “땅의 것을 말하여도 믿지 못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이야기를 어떻게 믿겠느냐”는 것입니다. “오직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늘에 증거를 가지고 왔지만 너희가 믿지 아니 하였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을 보시면 니고데모는 거듭나지 못한 자요, 육이요, 땅의 사람입니다. 이것이 니고데모 뿐 아니라 모든 유대인들이기에 이방인인 우리들은 말할 것도 못됩니다. 이러한 사실을 주님께서 아시고 오셨겠습니까? 모르시고 오셨겠습니까? 아시고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오심은 인간이 얼마나 예수님을 믿을 수 없는 존재인가를 드러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심판의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동문서답만 하는 자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 것입니까?
14절에서 15절을 보겠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사람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특히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이요 이스라엘의 선생인 니고데모조차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어떻게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가 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사건이 무엇입니까?
민수기 21:4-9절을 봅시다. “봉독” 광야에서 백성들이 길과 음식과 물로 인하여 원망할 때 불뱀이 나와 백성들을 물었습니다. 죽은 자가 많았습니다. 이들이 회개하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라고 하시면서 그것을 쳐다보면 산다고 하십니다. 지금 불뱀에 물려 죽어 가는데, 또 뱀을 쳐다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놋으로 만든 뱀입니다.
적어도 뱀에 물렸으면 더 나은 것을 쳐다보게 해야 하는데 놋뱀을 쳐다보게 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쳐다볼 마음이 없지요. 특히 놋이 사용되는 때는 심판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쳐다본 자는 살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한다는 말씀은 예수님도 나무에 달리셔야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나무에 달리는 것은 저주받은 죽음입니다. 신명기 21:23절 하반절에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예수님께서 나무에 달리심으로 자기 백성을 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죄에 대한 저주를 죄 없으신 자기 몸으로 받아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말할 때 감상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하여 얼마나 단호하고 무서운 분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 죄의 처절함이, 그 죄의 비참함이 저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저주의 심판이 모든 죄인에게 내려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한데도 주님의 그 크신 긍휼하심은 자기가 택한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저주의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이길 외에는 동문서답하고 있는 우리를 살려내실 길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영’ 하시는데 우리는 ‘육’ 하고, 예수님은 ‘하늘’ 하시는데 우리는 ‘땅’ 하고, 예수님은 ‘영생’ 하시는데 우리는 ‘돈’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자기 백성 만드시는 길이 자신이 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3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니라.” 이 대신 저주받으심이 예수님의 들리심입니다. 나무에 매달리는 들리움, 이것이 우리의 저주를 대신하신 것입니다. 누가 십자가에 저주받아 죽은 자를 믿을 수 있습니까?
지난주에 어떤 할머니가 교회 옆으로 지나가다가 십자가를 보고 마구 욕을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놈이 무슨 하나님이냐고 소리 지르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혀 저주받아 비참하게 죽어 가신 그분을 믿는다는 사실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누구나 고개를 흔들며 보지 않으려하는 그 나무에 매달리신 그분을 믿는다는 것이 기적입니다.
성경 두 곳만 보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요한복음 6:44절과 12:32-33절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께로 이끄셔야만 예수님께 나아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이끌려 온 자들을 예수님께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라” 자신이 들리심으로, 나무에 매달리심으로 자기 백성을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요한복음 3:16-21 이처럼 사랑하사 1999. 9. 12.
우리가 어려서부터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뼛속 깊이 체득한 원리가 하나 있습니다. 이 원리가 무엇일까요?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는 원리입니다. 이 원리를 조금 어렵게 말하면 ‘인과율’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심히 고생을 하면 뭐라고 합니까? ‘아이고 내가 전생에 무슨 죄가 많아가지고...’ 이렇게 말하지요. 그 고생의 원인을 전생에서 찾고자 하는 것은 내가 잘못한 것이 이 고생을 할 만큼 잘못하지는 않았는데 이렇게 어려운 일이 닥치니 틀림없이 전생에서 무슨 죄를 많이 지은가 보다, 라는 생각이 우리에게 다 들어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체계를 ‘행함의 체계’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체계와는 정 반대되는 원리입니다.
예) 흥부와 놀부-놀부가 흥부의 부자 된 비결을 알고 방법론으로 제비 다리를 부러뜨림.
성공시대-성공한 사람들의 원인과 방법을 찾아서 우리도 그렇게 하여 성공을 하자.
이러한 세상의 원리에 지배되어 살고 있기에 성경을 보아도 사람의 행함으로 어떻게 할까, 하는 원리를 찾기에 바쁜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제목들이 축복받는 비결, 기도 응답의 비결, 교회 성장의 비결, 건강의 비결, 이러한 비결들이 성경에 있다는 것입니다. 몇 가지의 행함의 원리만 찾으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개척교회 목사라면 성경을 볼 때 무엇만 보이겠습니까?
교회 성장이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아 사도행전에 보니까 이렇게 이렇게 하니까 되더라는 식의 성경을 인용합니다. 그렇게 하여 사람이 많아져서 예배당을 지으려고 하면 온통 성경에서 예배당 짓는 일을 성전 짓는 일이라고 하면서 나무를 가져다가 내 집을 지으라는 식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만약 선교 단체 같으면 자신들의 단체가 가장 성경적이다, 라는 것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성경을 인용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자들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는 사실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함의 원리를 가지고 성경을 통하여 얻어내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적인 생각이 있다면 영생을 얻기 원하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어느 누구라도 죽는다는 사실 앞에서 영생의 소망이라는 것이 얼마나 간절하겠습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은 다 죽어도 나는 살아남아야 해, 다른 사람은 구원 얻지 못해도 나는 구원 얻어야 해, 어떻게 하면 구원 얻을까? 그런 생각으로 성경을 보다가 보니 눈에 번쩍 띄는 구절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어떤 말씀입니까? 오늘 읽은 3장 16절 말씀입니다.
아마 가장 많이 외우는 구절 중에 몇 손가락 안에 들어 갈 것입니다. 아예 노래로 만들어 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그래,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 그래서 자기 아들을 보내 주시고 그 아들이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 지셨기에 이제 누구든지 예수만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 야, 이렇게 쉬운 구원의 길이 있었구나. 그러면 내가 믿어야지 이렇게 해서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전도할 때도 믿기만 하면 되는데 그것도 못 믿느냐, 하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에서 가장 큰 맹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요한복음을 처음부터 들어오셨으면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일 큰 맹점은 ‘내가 믿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아직 행함의 원리에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 주어서 구원 얻었다는 생각입니다. 구원 못 받은 자는 그 쉬운 것을 왜 못 하느냐, 그냥 믿기만 하면 되는데 왜 못 믿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행함의 원리 속에서 믿음을 이해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성경에서 믿음이란 말은 행함과 대조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사람의 행함의 차원이 아닌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대도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구원의 길을 만들어 놓았으니 네가 믿고 영접하고 선택하라는 식의 전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큰 맹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이해하거나 믿는다는 사실이 불가능 합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는 이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찾아보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사” 라고 말씀 하시는 이 사랑을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3:16절에 강조점을 두라면 어디에 두겠습니까? 아주 자연스럽게 나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믿는 자는’이지요.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스스로 믿을 자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2절에서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그 영접이 사람의 힘이 아니라는 것을 1:13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믿는 자도 사람의 능력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믿으십시오, 하는 것은 마치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자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헤엄을 쳐라, 헤엄을 쳐라, 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가 없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18절을 봅시다.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 하지만 믿지 아니하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19절에서 사람들이 믿지 아니하는 것은 어두움을 더 좋아하기에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 것이랍니다.
빛보다 어두움이 좋은데 어떻게 스스로 빛으로 나아 올 수 있습니까? 여기서 ‘어두움의 일’이란 우리가 세상에서 쾌락적인 그런 일로만 보는데,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 어두움의 일을 ‘사람의 이성과 견해’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과 사람의 견해는 공짜는 없다, 라는 행함의 원리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모르는 것입니다. 왜 이처럼 사람의 불가능을 말하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니고데모가 구약을 그렇게 잘 아는 데도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그들의 선입견 때문입니다. 메시아가 오면 죄인과 이방인들을 다 심판해버리고 자기들처럼 경건한 바리새인 같은 자들만 구원받아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어 내는 그런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대가 무리가 아닌 것은 구약에서 메시아가 오는 그날을 심판의 날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날에 심판의 날로 말씀하지만 이방인도 주께로 돌아오는데도, 역시 인간이 성경을 보는 것은 아전인수 격으로 보는가 봅니다. 두 곳만 확인하고자 합니다.
아모스 9:11-12절을 봅시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 이 말씀을 보면서 유대인의 입장이면 무엇만 눈에 들어옵니까? 다윗의 장막을 일으키리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방인이라면 에돔의 남은 자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도 주님의 기업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은 나머지는 심판이고 자기들만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미가서 4:1-3절을 봅시다.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작은 산들 위에 뛰어나고 민족들이 그리로 몰려 갈 것이라 곧 많은 이방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 그가 많은 민족 중에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을 판결 하시리니...”라는 말씀을 보아도 유대인이라면 자기들 중심으로 세계가 새롭게 재편되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대인의 생각이나 이방인의 생각이나 모두가 메시아가 오시자 모두가 심판아래 들어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메시아를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들대로, 자기들은 물론 성경의 증거라고 말하지만 어떻든 간에 메시아를 배척한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은 꼭 같이 하나님의 심판과 정죄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심판아래, 정죄아래 있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처럼 사랑하사”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겠습니다.
19절에서 20절에 보면 심판과 정죄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믿지 아니함이요, 빛을 미워하고 어두움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21절에서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나아온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어두움이요, 그래서 빛으로 나아오지 않는데 어떻게 빛으로 나오는 자들이 있다는 말입니까? 이들이 도대체 누구입니까? 지난주에 보았던 14절의 사람들입니다. 주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자기 백성을 이끌어 내신 자들입니다. 이들은 빛으로 나아오는데 왜 빛으로 나아오는 것입니까? 이들의 나아오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이 자기 행함의 체계 속에서 사는데 어떻게 은혜의 체계로 나아 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씀입니다. 도대체 그 사랑이 뭐길래, 행함의 사람이 은혜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입니까? 이 사랑을 성경에서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잘 아는 말씀 몇 구절만 보겠습니다. 롬 5:8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정하셨느니라.” 요한일서 4:10절.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이러한 사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조건을 요구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죽은 자가 무슨 수로 사랑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우리 스스로는 그러한 사랑을 은혜를 받아들일 수조차 없는 무능하고 불가능한 자들입니다.
이러한 죄인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십자가를 제시하고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의 능력이 우리를 삼켜 버리는 능력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단지 조건을 제시하고 그 조건을 충족시켜야 되는 구원이라면 아직도 행함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은혜에서 은혜로, 믿음에서 믿음으로 되는 이러한 복음의 내용을 믿는다는 사실이 행함의 원리만 나타나는 이 세상에서는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참으로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만 믿게 될 수 있는 복음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라는 말씀 안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으셨습니까? 이러한 사랑이 믿어지십니까? 이것이 믿어지는 사람은 이제부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님을 아는 자입니다. 속된 말로 개코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개코도 아니라는 말을 실감하는 기회가 있었기에 잠깐 소개합니다. 보신탕을 먹는 자리에서 옆에 앉은 집사님이 꼭꼭 씹다가 뱉어내면서 하는 말이 에이, 개코네, 그러더라구요. 개고기가 몸에 좋다면서 몽땅 탕 속에 넣었는데 그러나 개코는 너무 질겨서 도저히 먹지 못하는 것이지요. 보신탕에서 아무 쓸모없는 것이 개코입니다. 그런 자들이 바로 우리라는 사실에 기분이 나쁘지 않는 사람이 은혜를 입은 자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개라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다는 그 말을 예수님이 들으시고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자신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정도가 아니라 죄인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서 무엇을 합니까?
함께 21절을 봅시다.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우리가 진리로 나아온 것이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알기에 그 분만 높이고 증거 하는 것이 우리의 당연한 반응입니다.
요한복음 3:22-30 쇠함과 흥함 1999. 9. 19.
제가 창원에 이사 온 지 석 달째입니다. 이제 시내에 나가도 어디가 어딘지 방향감각이 생깁니다. 처음에는 도로는 좋은데 어디로 가야 될지 몰랐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접하게 되어도 이런 혼동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옳은가 혼동스러워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런 혼돈이 말씀에 대한 방향감각이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망망대해처럼 여겨지는 바다 가운데서 나침반을 보아야 하듯이 성경이 과연 그러한가, 하고 열심히 상고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린 유다 땅에 흉용하고 창일한 유프라테스 강물이 목에까지 차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수요일 오신 분만 아시겠지요? 그처럼 세속의 물결이 가득하게 밀려와 바다처럼 되어 있기에 우리가 방향을 잡기가 더 힘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론이 길어집니다. 앞으로는 서론이 짧아지고, 바로 본문으로 들어가도 될 때가 있겠지만 그때까지 조금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발전, 성장, 번창, 부흥을 좋아합니다. 이러한 단어에 열광을 합니다. 모든 상태가 늘 나아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좋은 일이라고, 복이라고 여깁니다. 이러한 생각은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자녀가 공부를 점점 잘하는 것이 좋지, 갈수록 성적이 떨어지는 것을 좋아할 부모가 있겠습니까? 월급도 점점 올라야 하는데 자꾸만 감봉되는 것이 좋지 않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번영과 발전을 좋아하기에 하나님의 일도 우리가 좋아하는 일을 해놓고서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론이 백성들의 요구에 못 이겨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황금송아지 우상이 얼마나 좋은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춤을 춥니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한 하나님이라고 그렇게 기뻐합니다. 사람이 기뻐하고 좋아하는 것이라고 하나님도 좋아하시리라는 생각을 먼저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신앙생활하면서 예수 믿는 사람이 잘되어야지 전도도 잘된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주의 종이라는 목사들이 그렇게 말하니까 우리는 철석같이 그 말을 믿은 것이지요.
구약의 몇 구절을 인용하여 설교하니 그런가 보다, 부자 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망하는 것은 저주이구나, 공부 잘해 일류대학 가면 하나님의 축복이고, 재수 삼수하다가 안 되어 학원이나 가게 되면 무언가 문제가 있기에 그렇게 된 것으로 보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아마 수능 100일 기도를 안 해서 그렇겠지, 십일조를 안 해서 그렇겠지, 감사헌금을 안 해서, 주의 종을 섭섭하게 해서 그렇겠지,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풍토가 되어왔지 않습니까? 전에 교회에서 담임 목사님이 안계시면 구역장 공부를 제가 인도하는데 제일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내가 잘되어야 전도가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사실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지요. 예수 믿고서 뭔가 잘된 것이 있어야, 봐라 예수 믿으면 이렇게 잘된다 하지요. 그러다가 자기가 잘된 것이 없으면 다른 사람의 간증도 끌어대고 선진국들이 부자 된 것이 하나님 잘 믿어서 그렇다고 불교나라는 다 가난하다고 얼마나 많이 들어왔습니까?
그러나 이런 식의 전도를 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하고 재벌이 되었다든지, 커다란 강대국의 왕이 되었다든지 그것도 아니면 참으로 행복한 가정생활이라도 하였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그렇게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의 마구간에 오셔서 가난한 목수의 집에서 30년을 지내시고 3년 공생애를 마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을 전하면서 어떻게 나의 소유된 무엇으로 증거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여우도 굴이 있고 참새도 자기 깃들 집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신 주님에게서 무엇을 달라고 하시겠습니까? 십자가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으시고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면서 죽으신 그 분을 무엇으로 치장하여 증거하겠습니까? 치장하면 할수록 십자가를 가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잘사는 것은 사실 아니냐, 하지요. 시골에서도 예수 믿는 사람이 몇 년이 지나면 살림이 펴지고 자녀들이 나아지는 경우가 많지요. 그것을 축복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보았습니다. 예수를 믿게 되면 적어도 윤리 도덕적으로 나은 삶을 살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생활에 질서와 규모가 잡히고 술 마시고 노름하던 것을 끊게 되니까 자연히 나은 삶을 사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지 않아도 삶에 규모 있게 살면 부자로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이 며칠 전에 책을 보다가 발견하였습니다.(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
‘신앙을 통해 익혀진 규율은, 이슬람의 군대나 크롬웰의 혁명군의 끈질긴 강인성의 근원이었다. 퓨리턴의 일상생활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한 내면적인 절제와, 구원받기 위한 규율 잡힌 생활태도가, 일상의 일을 달성할 때의 교묘한 생활 기능의 근원이 된다.’
즉 신앙생활이라는 규율이 생활에 좀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었던 문화적인 현상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칼빈이 ‘직업소명설’을 통하여 모든 직업은 거룩한 것이라고 하면서 정당한 수입은 하나님의 축복이며 구원의 표지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이 중세 사회의 잘못된 금욕주의와 신성한 직업은 신부나 성직에 종사하는 자만이라는 중세의 사고방식을 개혁하는 일에는 잘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를 구원의 표지로 보았기에 산업사회의 문명을 칼빈주의가 구축하였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를 자신을 위하여서 사용하거나 그 부가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였지만 그러나 부가 주는 안일과 쾌락은 걷잡을 수 없이 세상을 바꾸어 놓았던 것입니다. 이제는 부가 모든 가치척도의 기준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십자가를 증거한다는 자체가 아주 미련한 일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마다 십자가를 전하면서 자기의 쇠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흥함을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뒤틀려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세례 요한이 말한 나는 쇠하여야 하겠고 그는 흥하여야 하겠다는 말씀의 뜻을 찾아봅시다. 세례 요한의 세례 주는 숫자보다 예수님이 세례 주는 숫자가 더 많다는 유대인의 말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세례 요한에게 말합니다. 그러자 세례 요한은 자기가 쇠하여야 하고 예수님이 흥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의 자세입니다. 자신은 메시아의 신발 끈을 추스리는 자도 되지 못한다고 말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자기를 따르던 자들이 예수님께 몰려가자 당연하듯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7절에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예수님께로 몰려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보내 주셔야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 올바르지 못한 것 같은데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부흥했다, 성공했다, 하나님의 축복이다, 하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이런 문제로 신학교 다닐 때 이야기 한 적이 있습니다. 어쨌든 사람이 저렇게 많이 모이는 것을 보니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겠는가? 그 당시 한참 뜨는 교단의 교회였습니다. 다른 교회는 개척하여 40년이 되어도 겨우 200명인데, 그 교회는 개척 4년 만에 천명을 넘어서는 정도이니 하나님이 보내주신 것 아니겠느냐는 말에 그러면 인기 연예인 올 때 수천 명 모이는 것은 뭐냐, 사람을 모으는 것이 하나의 기술이다, 그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말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9-12절을 보겠습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수많은 이단들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갑니다. 진리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구원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진리보다도 불의를 더 사랑하기에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에서 주신바 되지 아니하면 아무도 받을 수 없다는 이 말씀을 우리는 세상의 가치나 기준으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16-19절을 보겠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느니라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위로부터의 선물입니다. 이런 선물은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시면 결코 사람으로는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신 이 선물의 차원에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사람의 기술과 집념과 마케팅으로, 주님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고 사람의 욕망을 만족시켜줌으로 모아낸 것은 위로부터 온 선물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머물러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다는 것은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람이기에 오직 나는 쇠하여져야 하고 없어져야 하고 죽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세례 요한이 자기가 쇠하여야 한다는 사실은 주님의 증인으로서 참 바른 자세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 모두도 이런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흥하여야 한다는 이 말씀을 우리는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내가 희생하고 수고하여서 예수님의 일을 크게 흥하도록 하자, 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직도 쇠하는 것과 흥하는 것을 세상적으로 비교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이 부분은 오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성령에 의하여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흥하는 길은, 잘되는 길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감옥에 갇혀서 예수님의 소문을 들으니 과연 메시아일까, 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성령에 의하여 증거하고서도 예수님의 행하심이 흥해야 하는데 빨리 세력을 규합하여 이 세상을 심판하고 다윗의 왕국을 재건하여야 하는데-이것이 유대인의 공통된 메시아관-들리는 소문이 죄인과 함께하시고, 병든 자를 고쳐 주시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 지내신다는 소문을 듣고 자기 제자를 예수님께 보내어 물어보게 합니다.
마태복음 11:2-6절을 봅시다. 세례 요한이 실족할 만큼 예수님의 하시는 일이 유대인들의 기대에 못 미치는 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배척 받으신 이유입니다. 적어도 메시아라면 영웅으로 도탄에 빠진 민족을 구원하는 초인이 되어야 하는데 예수님은 나는 죽어야 한다. 그래야 내 백성을 나에게로 이끄는 것이라는 말씀을 누가 이해하겠습니까? 베드로도 이해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말씀이 무엇입니까?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가 고생을 하지만 그것을 견디고 나를 따라 오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너의 힘, 너의 능력, 네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죽은 자로 나를 따라 오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예수님을 위하여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십자가를 가리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잘하니 이것으로 하나님의 일에 보탬을 드리겠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나는 다른 것은 못해도 봉사는 잘한다, 이것으로 주님의 일을 흥하게 하자는 것도 버리고 오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도 저것도 없지만 돈은 좀 있으니 돈을 내어서 주님의 일을 흥하게 하여야지, 이 생각이 한국교회를 망쳐버린 가장 큰 독소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부자 청년이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느냐고 물어 왔을 때 너의 가진 재산을 팔아서 나에게 바치고 오라고 하셨습니까? 버리고 오라고 하셨습니까?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은 선행을 하라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율법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만큼 선행도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자신의 부자 됨은 정당한 것일 수 있습니다. 개같이 번 돈이야 예수님은 싫어 하셔도 정당한 것은 헌금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면 되실 텐데 버리고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주의 일에 보탬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내가 남에게 도움을 주는 것은 내가 좀 희생을 하고서 남이 잘 되도록 해주는 것이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모양의 도움을 주어서 그 사람이 망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용기를 가지도록 하는 것이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이런 생각이 마귀의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나의 가진 어떠한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일을 흥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보자는 생각이 십자가를 가린다는 사실입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되십니까?
마태복음 16:16-23절을 봅시다. 베드로가 멋진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 신앙고백이 누구에게로 왔습니까?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온 이 신앙고백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베드로 위에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음부의 권세를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나오는 신앙고백이 음부의 권세가 흔들 수 없는 교회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21절에서 이때로부터 즉 바른 신앙고백이 있고부터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과 죽으심과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주님 안 됩니다. 주님은 주인공입니다. 주인공이 죽으면 안 됩니다. 그러니 그런 일은 제가 맡겠습니다. 예수님은 대업을 이루어 내셔야지요. 나는 죽어도 예수님은 흥해야지요. 이러한 모습을 세상에서는 충성으로 보아야 하지요.
삼국지를 보아도, 사무라이 소설과 만화와 영화를 보아도 주인공을 살리기 위하여 수도 없이 부하들이 죽어가고 그것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주님 안 됩니다. 예수님을 붙들고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면 안 됩니다, 하는 베드로의 말에 예수님은 오냐 고맙다, 그래도 수제자인 네가 충성돼구나, 이러시는 것이 아니라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무엇을 뜻하고 있습니까? 베드로가 예수님을 돕겠다는 생각이 마귀의 일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생각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실패한 것으로 보는 이단이 통일교입니다. 반쪽만 구원하고 온전히 구원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단의 특징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만으로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반쪽 구원으로 여기고 특별한 인물을 성경의 새벽별, 감람나무, 아침빛 등으로 어떤 인물을 추종하게 만듭니다. 문선명, 박태선, 정명석, 이만희, 안재홍...수도 없이 많이 나타나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자들만 이단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인데 무언가 다른 것을 자꾸만 보태어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 자들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돕겠다고 나선 자들이 오히려 사단의 일을 하는 것이라는 책망을 받는다는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쇠함과 흥함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 비참한 죽으심이 예수님의 흥하는 길이었습니다. 아무도 이해 못하는 그 길이었기에 아무도 도움을 줄 수 없이 예수님 홀로 걸어가신 그 흥함의 길이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길을 이해하고서 따르는 자는 오직 성령이 임한 자만이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고 난 후의 제자들의 자세는 어떠하였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지기 전까지 누가 크냐고 다툼하던 그들이 나는 아니요, 나는 아니요, 왜 나를 주목하느냐고 말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나의 개인의 권능과 경건의 능력이 아니라고 오직 십자가에 죽으신 주 예수의 이름이 이루어 내었다는 말을 하면서 제자들도 한결같이 주님의 뒤를 따라 세상에서 비참하게 죽어 갔습니다. 이것이 주님을 따르는 자의 길입니다.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짊어지고 가는 것, 그래야만 그리스도의 능력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마치 고장 난 차가 견인차에 끌려가듯이-칼뱅주의 5대 교리 가운데 견인-그러므로 끌려가는 주제에 무엇을 자랑 합니까? 끌려가는 자세는 나의 힘이 아니라 견인차의 힘으로 가고 있음을 나타내는 역할이 고장 난 차의 할 일입니다. 나는 쇠하여야 하고 그는 흥하여야 한다는 이 말씀의 깊이를 아시고 날마다 자기는 이미 죽은 자임을 확인하시면서 주님께 끌려가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3:31-36 하늘과 땅 1999. 9. 26.
추석을 잘 보내셨습니까? 오랜만에 가족과 친지를 만나면 반갑고 정겨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게 되지요. 그런데 그런 가족이고, 친척이고, 고향의 죽마고우라도 조금만 이야기를 하다 보면, 이야기가 안 되는 것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내가 비록 예수 믿는 것이 시원찮고 마누라 등살에 끌려 교회는 다니고 있지만 그래도 예수를 믿고부터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 자꾸만 초점이 맞아지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이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 믿지 아니하는 사람과의 이야기가 너무너무 재미있게 된다면 이건 무언가 이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좀더 말씀을 알아가고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아가게 되면 함께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도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점점 차이를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를 자꾸만 분리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차이를 크게 느끼면 하늘과 땅 차이다, 하는 말이 실감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하늘 이야기하는데 한 사람은 땅 이야기, 부동산 이야기하면 말이 안 되지요. 이처럼 큰 차이를 하늘과 땅이라는 식의 말을 합니다만 오늘 말씀에서 하늘과 땅이라는 말씀은 차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단절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31절에서 예수님을 위로부터 오시는 이,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라고 세례 요한이 증거합니다. 자기는 땅에서 났고 땅에 속하였고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이 정도면 우리는 어느 정도이겠습니까? 하늘과 땅보다 더 큰 차이를 표현하기가 어렵지요. 그러니 하늘과 땅이란 큰 차이보다 단절의 뜻이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을 한곳 더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8:31-32절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세례 요한의 증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유대인들 그것도 세상 속에서 자기 나라만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고 하나님의 섬긴다는 백성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을 제일 잘 섬긴다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다는 말씀이 차이 정도가 아니라 단절이요, 출처가 다른 것입니다. 그 출처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모두가 죄 아래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믿지 아니하는 그들은 아무리 아브라함의 혈통이라고 하여도 결국은 마귀에게서 났다는 것입니다. 마귀에서 났다고 하니 좀 심하십니까?
요한복음 8:43-47절을 봅시다. “봉독” 마귀에게서 난 것이 세상에 속한 것이고 이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처가 다르고 소속이 다른 것입니다. 이러한 하늘과 땅 같은 단절이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어떤 식이냐 하면 내가 조금만 잘하면, 조금만 더 정성을 쏟으면 될 텐데, 라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도 우리의 사는 세상의 원리가 우리 안에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제대로 받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제대로 받은 자는 날마다 자기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아니한 자는 끊임없이 자기의 공적과 이력을 챙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위로부터 오신 분, 하늘로서 오신 분이 어떠한 분이시며 무엇을 하십니까? 31절과 32절에 보시면 만물위에 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만물위에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피조물 안에 속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물이 이 분을 수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물위에 계시는 분이 만물 안에 오신 것이 얼마나 큰 자기 낮춤입니까? 너무 낮추어 오셨으니 땅에 속한 자들이 알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이단 중에 예수님이 만물위에 계시는 분임을 부정하는 이단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특히 여호와의 증인은 예수 그리스도가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피조물인데 가장 처음 창조된 피조물로 보는 것입니다. 다른 이단들도 예수님을 이 세상의 피조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만물위에 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만물위에 계시는 분이 만물 아래로 오신 것을 빌립보서 2:6-8절에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심이라”
이렇게 만물위에 계시는 분이 종의 모습으로 사람에게서 나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오셨으니 누가 이를 알아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런 분이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32절입니다.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예수님만이 하늘에서 오신 분이요 하늘의 보고 들은 것을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한 나라인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증거하신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행하심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증거한 나라는 용서의 나라며, 은혜의 나라이며, 차등이 없는 나라임을 비유로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증거하신 것 가운데 하나만 찾아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20:1-19절을 봅시다. “봉독” 포도원의 일군을 부르는데 이른 아침에 나가서 일군을 부릅니다. 일당 한 데나리온, 제 삼시에 나가니 또 놀고 있는 자가 있어서 일군으로 부릅니다. 유대인의 시간은 우리 시간으로 환산하려면 더하기 6시간을 하면 됩니다. 제 삼시는 오전 9시이지요. 이른 아침은 오전 6시경입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6시(12시), 9시(오후 3시), 11시(오후 5시)에 일군을 불러서 품삯을 주는데 오후 6시경에 일을 마칩니다.
그러면 가장 뒤에 온 사람은 한 시간 일하였습니다. 그런데 얼마를 줍니까? 일당을 그대로 다 주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른 아침에 온 자는 나는 더 받겠거니 하였는데 한 데나리온 밖에 안 주는 것입니다. 화가 납니까? 안 납니까? 따졌지요. 그러니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주는데 네가 왜 잔소리냐? 너는 한 데나리온 약속하였으니 네 거나 가지고 가라, 내가 선함으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 비유의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자본주의 사회에 사는 우리, 행함대로 받는 세상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해가 안 되니 자본주의 식으로 해석을 합니다. 아침 일찍 온 사람은 날일 하는 식으로, 세월아 가라 하는 식으로 어영부영하였고, 마지막에 온 사람은 죽을동 살동 모르고 일하였기에 주인이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도 최선을 다해서 충성하면 처음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앞선 자를 앞지르자는 것은 역시 자본주의 원리, 경쟁 사회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오늘 천국의 비유는 부름 받은 자들이 모두 놀고 있는 자들입니다. 실직자들입니다. 그들이 부름 받았다는 것은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각자가 그들의 은혜대로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실력이 있어서 어디에 스카웃 되어 가면 일당을 내가 조정하면 됩니다. 일당을 얼마 내어라. 그러나 놀고 있는 사람이 호구지책으로 일하러 가게 되면 기본 일당만 받고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아직도 유대인의 선민의식을 가지고 자기들은 다 버리고 예수님을 쫓으니 무얼 주실 것입니까? 하는 제자들과 오늘 이 세상의 원리로 사는 사람에게는 걸림돌이 되는 비유입니다.
이러한 하늘나라를 전하니 유대인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럴 수가, 아니 내가 평생토록 율법을 지키며 하나님을 위하여 충성하였는데 어찌 저런 자들과 함께 상을 받는다는 말인가? 이런 생각이 유대인들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있지 않습니까? 나는 목사인데 적어도 평신도 보다는 나은 상을 받을 거야라는 생각이 우리에게는 자연스럽지요. 그런데 세상에서 손가락질 당하던 자가 어느 날 예수 믿고 함께 주님 앞에 나아갔을 때 주님께서 목사와 엉망으로 살았다가 죽기 직전에 은혜로 예수 믿고 천국 간 사람하고 같이 대우한다면 목사가 뭐라고 할까요? 이른 아침에 온 자처럼 말할 것입니다. 나 싫어, 이렇게 불공평한데가 어디 있노? 그러나 그곳이 천국임을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은혜의 세계를 이해하겠습니까? 자신이 말로만 아니라 참으로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알 때에 오직 주님의 은혜만으로 천국 온 것 때문에 영원토록 주님을 찬양하는 그런 나라가 은혜의 나라이고 차등이 없는 나라입니다.
만약 바울과 예수님 십자가 옆에서 죽은 강도와 상급을 꼭 같이 준다면 바울이 신경질 날까요? 안 날까요? 신경질 난다면 아직 이 비유가 이해가 안 된 것입니다. 신경질은커녕 죄인중의 괴수인 내가 어찌 이런 상을 받습니까? 감격의 눈물에 앞이 가릴 것으로 저는 봅니다. 그러므로 상이란 영생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라고 창세기 15장 1절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잘 됐구만, 이제 슬슬 놀다가 죽기 직전에 예수 믿고 가자, 그래도 상은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드는 분은 자신이 정말 은혜를 받은 자인지 점검 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제대로 은혜를 받은 자면 모두가 바울 같은 자세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도록 충성하고도 나는 죄인중의 괴수로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위에서, 하늘나라에서 오셔서 하늘의 보고 들은 그 은혜의 세계를 가르치시고 그 실천으로 죄인의 친구가 되어주심을 사람들이 알아들었습니까? 못 알아들었습니까? 32절 말씀,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이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증거를 받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를 증거하고 참되신 하나님 아버지를 증거 하시는 그를 죽여 버렸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얼마나 우리가 무지하며 얼마나 하늘과 땅처럼 단절이 있는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즉 위로부터 다시 나야만 예수님의 증거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33절을 봅시다. 하나님의 증거를 받는 이가 나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로 받은 자들입니다. 위로부터 난 자들입니다.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시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심판하는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아까 빌립보서 2장을 찾아보았습니다만 만물위에 계신 분이 만물아래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예수님을 빌립보서 2:9-11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모든 무릎이 예수의 이름 앞에 끓게 하셔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3:35-36절을 봅시다. 모든 만물을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믿으면 영생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습니다.오늘 저와 여러분이 하늘과 땅의 간격, 그 단절을 뚫고 오신 그 예수님을 믿는 일보다 더 귀하고 더 복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온 우주 만물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영생을 선물로 받았기에 나는 죽어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4:1-26 사마리아로 가신 예수님 1999. 10. 3.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몇 번에 나누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간단히 보고 넘어가자면 한번에 다 넘어갈 수도 있지만 성경이란 한번에 보고서 끝나는 정보지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우리는 평생토록 말씀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전체를 보기도 하고 때로는 세밀히 살펴보기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풍성함을 모르고서 단순히 도식화하여 정리하고 있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가 흔히 외우다시피 하는 성경구절들이 모두 나에게 좋다고 여겨지는 구절을 내 임의로 정리하여 있기에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로 나아가기 보다는 산수 공식처럼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게 하면 기도응답이 되고, 이렇게 하면 축복을 받고, 이렇게 하면 교회가 부흥을 하고, 하는 식의 정리를 하고 있기에 정작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내용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복음을 지금까지 신앙생활 해오면서 알고 적용하는 구절이 어느 정도입니까? 누구든지 예수 믿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니 너도 예수 믿으라, 라는 정도입니다. 13절은 그런 말씀이 있었는지조차 모를 정도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서 구원해 놓았으니 이제 하나님을 위하여 멋진 나의 실력을 보이자 하는 식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이제부터 본문 말씀을 한 절씩 보아 갑시다. 1절에 보시면 예수님이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은 후 세례를 주는 숫자가 요한보다 많다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것을 예수님께서 아십니다. 그리고서는 예수님이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자신이 메시아라면 중앙무대에서 활동해야 하는데 왜 갈릴리로 가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동생들도 자신을 나타내려면 중앙으로 가야지 왜 시골에 있습니까, 하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수요일 저녁에 이사야 9:1-2절의 말씀을 통하여 보았습니다.
마태복음 4:12-16절을 보겠습니다. “봉독”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신 것은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려고 가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크게 세 구분을 하는데 북쪽이 갈릴리, 중간이 사마리아, 남쪽이 유대입니다. 유대에 예루살렘 성이 있고 성전이 있는 곳이기에 정치와 종교와 문화의 중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갈릴리로 가시는 것입니다. 시골 변방으로 가시는 것입니다.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아있는 자기 백성들을 찾아 가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요한복음 4:3-4절을 봅시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쌔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남쪽 유대에서 북쪽 유대로 가려면 중간의 사마리아로 지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성을 빙 둘러 가는 것입니다. 직선으로 가면 빠른데도 둘러서 가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누어지고서 북은 앗수르에 망하고 남은 바벨론에 망합니다.
그런데 앗수르 보다 뒤에 일어난 바벨론이 초강대국이어서 앗수르까지 정복합니다. 그래서 바벨론이 넓은 지역을 통치하는 수단으로 혼혈정책을 폅니다. 그래서 사마리라성에 에돔 사람과 앗수르 사람을 강제 이주시켜 피를 섞음으로 그들의 신앙과 사상의 구심점을 헐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에서 돌아오니 사마리아는 혼합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이방인보다 더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 좀 달라고 하시자 사마리아 여인이 아니 어떻게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는 반응입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상종치 아니한다고 9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니 상종치도 말아야 할 사마리아인의 동네에 들어가시고 또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하시면서 결국에는 예수님 자신이 메시아임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놀라운 복음인지를 니고데모와 비교를 해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입니까?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이며 선생입니다. 대단한 신분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에 대하여 상당한 호감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당신이 하는 일을 보니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면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네가 거듭나야 한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선생이면 율법을 거의 외우다시피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예수님은 너는 거듭나지 못하였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모른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여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현재 또 다른 남자와 사는 여인입니다. 유대인의 사회는 폐쇄사회이기에 여자가 대낮에 함부로 돌아다니지 아니하는데 이 여인은 낮 12시에 물 길러오는 내놓은 그런 여자입니다. 이 여자나 니고데모나 못 알아듣고 동문서답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영생수를 말씀하시는데 이 여인은 마실 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우물을 마시는 자는 또 목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는 말씀에 여인의 반응은 그런 물 좀 주어서 더운데 물 길러 오지 않게 해달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두 사람의 대조를 통하여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란 자신의 어떠한 이력과 공적이 주님을 믿는 일에 보탬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보탬이 되기는커녕 방해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을 보시는 평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죄인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오신 것입니다. 성경 박사라는 니고데모,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선생이라는 사람이나, 사마리아의 이름 없는 한 천한 여인이나 예수님을 몰라보는 것은 꼭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누구입니까? 니고데모입니까? 사마리아 여인입니까? 우리는 이도 저도 아닌 단군신상을 세우자고 하는 단군의 후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은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고 야곱의 우물에서 물을 마시는 자이지요. 그러니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보다 못한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우리는 니고데모가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얼 좀 아는데, 하는 것이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 우리 모두가 절실히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설교를 하는 목사는 말씀을 좀더 잘 알겠습니까? 물론 신학을 하고 말씀을 보는 것이 주업이라 조금은 낫겠지만 그러나 성경이 살아있는 말씀이란 사실을 실감합니다. 어떤 때는 이렇게 설교해야지, 하고 말씀을 보면 전혀 아닐 때가 많고 또 어떤 때는 성경이 무슨 말씀인지 캄캄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자세여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한곳 찾아보겠습니다. 요한복음 9:39-41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예수님의 심판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자기가 뭐 좀 안다고 본다는 자는 보지 못하게 하시고 보지 못하는 자는 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본다는 자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보지 못하는 자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몰랐는데 예수님이 찾아가신 것입니다. 둘 다 동문서답은 마찬가지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을 알리시고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둘 다 장님이지만 니고데모는 버려두시고 사마리아 여인은 보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장님인 사마리아 여인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장님입니다. 사물을 못 보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를 몰라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알리시기 시작합니다. 알려 주어도 믿지 못하는 자가 있지만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알리시고 또한 믿게까지 하시는 것입니다. 그 대화의 시작이 물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여인이 어찌 유대인이 물 달라고 하느냐는 말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선물을 말씀합니다.
10절 말씀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과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네가 나에게 구하였을 것이고 그러면 내가 생수를 주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여인은 하나님의 선물도 모르고 지금 앞에서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수가 샘물인 줄로 압니다. 그래서 대답이 이 우물은 깊은데 두레박도 없이 어찌 물을 주겠느냐고 합니다. 그리고 이 우물은 야곱이 주었는데 야곱보다 당신이 큽니까? 하고 되묻는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대답은 이 우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마치 모세가 주는 떡을 먹은 자는 사막에서 죽었지만 내가 주는 떡은 생명의 떡이라는 말씀과 동일한 말씀입니다. 영생을 주는 물과 영생을 위하여 자기 살을 주시는 것을 도무지 이해 못하는 것이 장님 된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영생수를 말씀하시자 그런 물 주어서 다시는 물 길러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간구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간구하는 수준입니다.
예수 믿으라고 하니까 내 병이나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내 아들 좋은 대학이나 합격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때, 어떤 할머니가 교회 나와서 학습을 받으려고 문답을 하는데 목사님이 예수님 믿으십니까, 하니까 예수고 뭐고 내 몸이나 나았으면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영생에 관심이 없으면 결국은 떠나갑니다.
예수 믿고 병 고치고자 하는 사람은 병 고쳐지면 목적 달성하였으니 떠나는 것이고 먹고 배부르기 위하여 따라 나선 자는 먹고 배부르면 떠나는 것입니다. 단지 지옥이 두려워 죽어서 좋은데 가야겠다는 사람은 교회가 정해 주는 몇 가지의 규칙만 마지못해 지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결코 예수님을 사랑하지는 않는 것입니다. 거래할 뿐입니다. 이런 자들에 대한 성경의 경고는 단호합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라고 고린도전서 16:22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는 자세가 이 여인이 물 길러 안 오면 좋겠다, 하는 수준이 아닌지 점검해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영생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이 여인은 물 길러 오지 않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늘과 땅 차이입니까? 그러면 우리는 아예 말이 안 되니 그만 두어야 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이 여인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여 이곳 사마리아로 오신 것입니다. 우리도 교회 처음 나올 때 이런 자세로 나왔는지 모릅니다. 그러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설득을 하시는 것입니다. 주의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계속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구원받은 시점이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메시아임을 확인하고 물동이도 버려두고 와보라고 한 그때입니까? 저는 예수님이 이 여인을 찾아 가시는 것이 구원이라고 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는 이 여인에게 자신의 과거를 들추어내시자 드디어 선지자입니까? 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아직 메시아인줄을 모릅니다. 이제 예배에 관하여 대화가 계속됩니다. 이 말씀은 다음주에 전하기로 하고 그 대화 후에 내가 바로 그니라, 라는 말씀에서 이 여인이 동네에 들어가 메시아를 소개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꼭 같이 이 세상에 영적인 소경으로 태어났습니다. 이 소경을 눈뜨게 한 것은 어떤 누구의 공로도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어떠한 능력도 아닙니다. 흔히들 교회는 순교의 피 위에 세워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순교의 피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 위에 세워지는 것이 음부가 흔들 수 없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을 눈뜨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의 피 흘리심과 부활과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가 눈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메시아를 만났습니까? 그러면 잊어버려야 할 것이 하나 있는데 물동이입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가장 필요한 물동이가, 물 뜨러 왔다가 영생수를 만나게 되니 그 중요하든 것이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까지 찾아오신 주님의 그 사랑 앞에 세상의 염려들, 근심들 다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주의 은혜가 그런 것에 가리기에는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1-26 참된 예배(1) 1999. 10. 10.
우리는 예배 또는 제사라고 할 때 우선적으로 예배드리는 자의 구비조건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4:24절도 어떤 식으로 보는가 하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는 말씀을 예배는 신령하게 드리고 진정은 나의 진정한 마음으로 드려야 된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진리와 영’으로 예배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진리와 영으로 예배하는 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와 영으로 드리는 이 예배란 우리의 구비조건이 아니라 주님이 준비해 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배가 내가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준비해 주셔야 예배가 된다는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는 아주 오래전 조상들로부터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단지 자연물에 대한 숭배만이 아니라, 제천의식이라 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그런 제사의 특징은 한마디로 사람의 정성이 관건입니다. 나의 정성 여부에 따라 신의 축복이 결정되기에 온갖 정성을 다 기울입니다. 목욕재계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신이 좋아한다는 예물을 올리고서 정성을 다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혈통을 이어받은 우리이기에 제사, 예배 그러면 나의 갖추어야 할 조건을 우선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준비해주시는 예배는 생각을 못하는 것입니다.
예배 중에 헌금을 하고 헌금기도 중에 빠지지 않고 하는 기도가 무엇입니까? 오늘도 빈손으로 나오지 않게 하셔서 감사합니다. 혹시 빈손으로 온 자라도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다음에는 빈손으로 오지 않게 하소서. 아주 어려서부터 헌금 기도 시간에 들어온 내용이라서 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평소에 늘 빈손으로 안 오는 사람에게는 부담이 안 되는 말씀인데 저 같은 경우는 어릴 때 부모님은 신앙생활 안하시고 형제들만 교회에 나갔으니 헌금을 가져가기가 곤란하지요. 가난한 시골가정에서 용돈이라고는 없는데 무엇으로 헌금할 수 있습니까? 가끔은 헌금을 주시기도 하지만 못할 때가 더 많았습니다. 그런데 헌금시간의 기도만 하면 빈손으로 하는 말이 마음에 박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에 헌금을 빠지지 않고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만 하여도 헌금을 점수에 넣지는 아니한 모양입니다. 제가 주일학교 때 종합일등상을 거의 다 받았으니 헌금은 점수를 안했든지 아니면 아주 적게 한 모양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물론 주일학교는 다르지만 어른들을 직분자로 세울 때 어디에 점수를 많이 줍니까?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성경을 보다가 빈손으로 오지 말라는 말씀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출애굽기 23:15절과 34:20절 두 곳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빈손으로 오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34:18-20절을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너는 무교절을 지키되 내가 네게 명한대로 아빕월 그 기한에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으라 이는 네가 아빕월에 애굽에서 나왔음이니라 무릇 초태생은 다 내것이며 무릇 네 가축의 수컷 처음 난 우양도 다 그러하며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며 네 아들 중 장자는 다 대속할찌며 빈손으로 내 얼굴을 보지 말지니라.”
빈손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말라고 하신 것은 대속제물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무교절은 유월절에 누룩 없는 떡을 먹는다고 무교절이라고 하는데 이때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빈손으로 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유월절 날 어린 양의 대속의 피로 구속받았기에 대속의 제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인간은 누구도 스스로의 자격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이만한 예물을 가져왔으니 하나님이 기뻐할거야! 하는 그런 식은 이방종교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대속제물입니다.
우리의 능력으로 드릴 수 없습니다, 하는 것이 대속제물을 하나님께 들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우리가 어떤 조건이나 자격을 갖추고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의 희생, 그 대속을 들고 나오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인이기에 하나님께 스스로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빈손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꼭 우리의 손에 대속의 제물이 있어야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대속의 제물이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나는 돈은 부족해도 정성입니다, 하는 정성입니까? 무엇인지 아시겠지요. 주 예수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좋은 옷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돈 한 푼 없어도 주님 만나는 일에는 아무 하자가 없습니다. 오직 대속 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만 믿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빈손 들고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오늘 혹시 빈손으로 나아 왔더라도 주눅 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준비가 아니라 하나님이 준비한 제물이 있어야 온전한 예배입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예배가 안 되고 자꾸만 물질드림이 강조 되었는가? 지난주 ‘복음묵상’ 내용을 이번 주에 그대로 두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목사들이 설교를 교회 유지 차원에서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투자하고 고생해서 세운 교회라고 생각하니 이것을 빨리 번창하게 해야 하겠는데 그 좋은 방법이 무엇인가? 돈이 있어야 되겠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빈손으로 나아오지 말라고 하는 것이 성경에 있으니 성경적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속셈은 교회 유지 차원에서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발전하여 하나님께 바친 것만큼 비례하여 복을 받는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무엇을 들고 나갈 수 있습니까? 돈을 들고 나가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흠 없는 어린양의 대속의 제물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희생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는 헌금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이러한 주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감사와 사랑의 형식으로 자원하여 내어 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 안의 헌금의 기준은 자원하여 감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15-16절.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 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는 예수로 말미암아 드려지는 예배와 제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찬미하는 것, 그 사랑을 함께 입었기에 형제에게 나누어 주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사에게 사례를 하는 것은 직업이 없으니까 여러분이 사랑의 형식으로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직원처럼 월급을 준다거나 또는 제사장처럼 예물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또 형제에게 구제를 하거나 어려운 교회를 돕는 것도 자원하여 사랑의 형식으로 내어 놓는 것입니다. 오늘 출애굽기와 히브리서 두 곳의 말씀만 보아도 우리의 헌금과 예배가 얼마나 빗나가 있는지를 아시겠습니까? 그러면 이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을 누가 준비하시는 것입니까?
창세기 22:7-8절을 봅니다. “봉독”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번제할 어린양이 어디 있나이까? 하니 아브라함이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자신이 친히 준비하신 제물인 것입니다. 그야말로 아브라함과 이삭은 빈손 들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188장 3절에 빈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빈손으로 나아가지 못하는데 빈손으로 가는 것은 내가 정성으로 준비한 예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는 제물만 기대하기에 빈손 들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창세기 22:13-14절을 봅시다. “봉독” 하나님이 준비한 제물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이삭을 대신하여 번제를 드리고 그 산 이름을 원래는 모리아산인데 ‘여호와 이레’라고 이름을 바꾸어 부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여호와 이레하면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쪽으로만 생각합니다. 물론 크게 보자면 우리의 모든 것이 여호와의 준비하심입니다.
그러나 여호와 이레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여호와 이레를 난하주에서 여호와께서 준비하심인데 누가 준비합니까?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여호와의 산, 모리아산에서 무엇이 준비됩니까? 대속 제물이 준비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준비합니까?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준비된 제물을 통하여서만 우리가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속에서 여인이 유대인들만 잘난 것이 아니라 자기들도 야곱의 우물이 있고 또 그리심산이 있다는 것입니다.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들어와서 이스라엘 백성이 반반씩 나누어서 에발산과 그리심산에 서서 저주의 말과 축복의 말을 하게한 산이 에발산과 그리심산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당신 못지않는 야곱의 후손이요 그리심산이 있는데 왜 당신들은 예루살렘만 고집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의 대답은 장소가 아님을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4:21절입니다. 여자여! 내말을 믿으라고 말씀하시면서 너희들이 주장하는 사마리아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곳도 저곳도 아닌 유대인에게서 구원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유대인에게서 구원이 나온다는 말씀은 다시 구약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야곱이 죽기직전 마지막 유언을 하는데 이 유언은 사사로운 유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유언의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 개인적인 일로 보여서 개인에게 그대로 적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하나님의 계시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유언의 내용 중에 유다에 대한 예언에서 창세기 49:8-12절까지 유다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 내용은 유다가 형제들의 찬송이 될 것이며,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며, 네 아비의 아들이 네게 절할 것이며, 홀이 임금님의 지팡이가 떠나지 아니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온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면서 참된 예배란 장소와 시간의 문제가 아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장소와 시간이 아니라 한 인격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22절에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사마리아인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자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유대인은 나은 점이 있습니까? 역시 똑같은 것입니다. 그들도 성전과 율법과 전통을 자랑하지만 역시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이 유대지파에서 나오는데 그 구원을 가져오는 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유대인들인데 이들은 지금 빵 사러 가고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유대인이, 예수님 홀로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온다는 것은 바로 구원이 예수님 자신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이란 말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할 때가 오나니 바로 이때, 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있는 이것이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때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를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입니다.
눈앞에 계시는 예수님은 성령이 충만하신 분이요, 자신이 진리이시기에 하나님 앞에 참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란 그리스도의 영이기에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란 예수님이 주가 되시는 예배, 그 공로만 의지하는 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내가 억만금을 가져온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제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는 예배가 참된 예배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진리와 영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메시아 오심으로 이루어지는 예배입니다. 24절에서 예수님이 계속하여 예배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시자 여인이 그런 때는 메시아가 와야 하는데요, 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바로 그로라, 하십니다. 내가 메시아이고 내가 하나님의 준비된 제물이니 나를 믿는 것이 참된 예배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가 장소와 시간에 얽매이면 예수님이 제물 되심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나는 빈손이오나 어떤 것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제사나 예배를 드릴 수가 없지만 오직 준비된 주님의 희생이 나를 예배케 함을 아는 자는 늘 예배의 삶이 연속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른 예배를 알게 된 여인, 이곳도 아니요 저곳도 아니라 바로 메시아가 오심으로 바르게 예배할 때를 알게 된 여인은 물동이를 잊어버리고 달려가서 내가 메시아를 만났다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러한 예배의 회복이 되어 지기를 소원합니다.
요한복음 4:20-26 참된 예배(2) 1999. 10. 17.
세상 사람들이 제사나 예배를 생각할 때 언제나 드리는 자의 자세와 구비조건을 먼저 생각한다고 지난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예배는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제물이 있어야 하며 그 제물을 의지하고 나아가는 것이 빈손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님을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통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참된 예배란 장소와 시간이 아님을 먼저 말씀드리고 참된 예배가 무엇인지 확인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제사와 예배를 생각할 때 사람의 구비조건을 먼저 생각한다고 하였지요. 그 조건 속에 자신의 정성이나 제물 못지않게 중요시 여기는 것이 장소와 시간입니다. 그래서 어떠한 특정한 장소와 시간을 중요시 여깁니다. 정월 대보름날 촛불을 켜는 곳이 어떤 곳입니까? 정하여져 있지요. 큰 바위나 나무아래 또는 맑은 물이 흐르는 개울가 등입니다. 여기에 이미 신성한 장소와 신성한 시간을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에서도 하나님이 지정하신 장소와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이루신 이후에는 새로운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새로운 예배를 말씀하셨는데도 계속하여 장소나 시간을 고집한다면 우리는 장소와 시간의 우상을 섬기는 것이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는 무시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예배를 좀 잘못 드려도 용서는 받지만 예수님의 공로를 무시하고서야 어찌 용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먼저 장소의 문제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자기들의 조상은 사마리아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하여야 한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이 21절에서 이 산도 아니요 예루살렘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예배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배란 장소의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때는 시간으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와 영으로 임하는 예배이기에 특정한 시간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장소와 시간에 얽매여 있는가하면 여러분이 늘 앉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 자리에 앉아야 마음이 안정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자기 자리에 먼저 앉아 있으면 비키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의 자리가 확보되어야 안정감을 누리는 것이지만 또 다르게 그런 특정한 장소를 좋아합니다. 어느 기도원 어느 바위에서 응답을 받았다고, 꼭 기도를 하러 가면 그 바위에서 기도하여야 한다는 것이지요. 작년 여름에 부산의 가나안 수양관이라는 곳에 여름 산상부흥회가 있어서 한번 간적이 있습니다. 점심을 먹으려고 어느 바위에 펼쳐놓았는데 어떤 사람이 그 바위에서 기도 좀 하고 가야겠다고 그러더라구요. 남 밥 먹는데 와서 기도하고 가더라구요. 나도 문제이긴 하지요. 남 기도하는 바위에 밥 먹으려고 펼쳐 놓았으니...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이러한 장소의 우상성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정한 시간의 우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특정한 장소와 시간을 구별되게 여기는 마음이 있는데다가 교회에서 예배당을 성전화 하고 주일을 거룩화 하여 장소와 시간을 정하여 거룩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하여 지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것이지 결코 특정한 장소나 시간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문제가 된 것이 안식일의 문제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을 생명처럼 붙들고 있었기에 안식일에 일하시는 예수님을 고발하고 안식일의 주인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성경 몇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골로새서 2:16-17절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실체가 왔기에 그림자를 붙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아직 실체를 만나지 못하였다면 그림자를 붙들고 있겠지요. 그러나 절기나 안식일이 그림자로서 예수님을 보여 주었다면 이제는 그 기능이 완성된 것이기에 완성된 주님을 붙드는 것이지 날이나 장소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10-11절입니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하노라.”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는데 또 다시 날자와 절기를 지키니 바울의 전한 것이 헛될까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질문이 아무날도 안 지키면 언제 모입니까? 성령이 인도하심을 따라 날마다 모이기를 힘쓴 것이 초대교회의 모습입니다. 어떠한 특정한 날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일요일 낮예배와 저녁예배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낮 11시 예배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저녁에는 안계십니까? 수요일은? 그러므로 우리가 주일 낮예배만을 예배로 생각한다면 이미 날과 시간의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주일낮과 저녁, 수요일이 차이가 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날에 대한 개념을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로마서 13:5-6절 상반절입니다.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마음에 확정할찌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우리가 어느 날을 귀하게 여길 수 있고, 꼭 같이 여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주를 위한 것입니다. 단지 어느 특정한 날이 거룩하여 그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주일날 혹 예배 못하였으면 수요일에 예배하면 되는데 주일 낮예배 드리지 않으면 주일성수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날을 아직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정성도 우리의 제물 준비함도 아니고 장소와 시간도 아니라면 도대체 예배를 어떻게 드립니까?
요한복음 4:23절입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 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진리와 영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사마리아 여인이 듣고서는 그런 예배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가 와야 되는데요, 라고 말합니다. 메시아가 오시면 제대로 예배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실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 여인이 기대하는바가 메시아입니다. 그가 오면 모든 예배의 문제는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나 유대인이나 서로 옳다고 주장할 것도 없이 메시아만 오면 참된 예배를 알게 할 것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메시아의 기대는 구약 에스겔의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에스겔 34:23-24절에서 하나님께서 한 목자를 세우시는데 그 목자가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스겔 36:26-27절에서는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란 왕이 와서 새 영을 부어 주셔야만 참된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 즉 그리스도가 오시면 참된 예배가 되는 것인데요, 라고 말하자 예수님이 ‘내가 바로 그다’ 내가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예배의 조건입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형식을 갖추고 정성을 갖추어도 예수님이 왕이 되셔서 새 영을 보내시지 않으시면 참된 예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참된 예배를 모르고 예배를 형식화, 고정화하였습니다. 새 영을 받지 못하였고 진정한 왕의 통치를 받지 않은 것입니다. 마음밖에 그냥 문자로만 남아 있는 율법으로는 진리와 영으로 드리는 예배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밖에 또 하나의 우상의 전을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을 파괴하려고 한 것입니다. 성전 파괴는 ‘제사예배의 종결’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새로운 예배는 진리와 영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합니까? 예수님이 온전한 예배를 하시는 일에 참여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어떻게 참된 예배를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까?
성전을 무너뜨리시고 성전 대신에 성령을 처소로 삼으시고 그 안에서 예수님과 하나님을 함께 만나는 것이 예배입니다. 성령이 주도하는 예배는 예수님이 이 땅위에 계실 때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는 그 상태가 참된 예배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모든 삶은 하나님 앞에서의 예배였습니다. 하나님과의 중단 없는 교제가 예배의 전형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예배를 성령께서 오늘날 주의 백성들에게 반복시키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란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하나님과 나누신 그 교제가 참된 예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러한 예배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니고데모는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육의 사람에게는 철저히 감추어진 세계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적으로 아무리 화려하고 장중한 예배의식을 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여전히 육의 잔치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니고데모의 세계는 전부가 육 자체인 것입니다. 영생은 인자의 살을 먹고 마시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이고 부활입니다. 생명이요 부활이요, 진리 그 자체가 등장하였는데 무엇으로 예배를 한다는 말입니까?
그러면 무엇이 참된 예배입니까? 성령은 새로운 예배의 형식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만을 소개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참예배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자기가 예배할 수 있다는 능력을 믿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율법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온전하였다면 메시아가 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예배의식은 예수님의 사역과 활동을 부분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예배의 완성이란 성도가 성령 안에서 예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교제는 사랑을 새롭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이 모든 율법을 완성하고 우리의 심령에 주님과의 교제를 통한 하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이러한 예배가 초대교회에서 계속 일어난 것입니다. 초대교회 안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사도들의 능력인줄 알고 사도들을 주목하여 보니 그들이 하는 말이 왜 우리 개인의 능력과 경건으로 된 것처럼 우리를 주목하느냐? 이 사람을 낫게 한 것은 주 예수의 이름이 이를 온전히 낫게 하였다고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지금도 계속하여 주님의 일하심과 사랑으로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예배를 통하여 더 풍성히 깨닫고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같은 은혜를 입은 성도끼리도 그 사랑으로 인하여 함께 교제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1:3절을 봅시다. “사도와의 사귐은 곧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예수님과 하나님만의 사귐 속에 죄인인 우리, 그래서 원수 된 우리를 그 피로 용서하시고 성령을 보내심으로 우리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하심으로 사귐을 허락하신 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이러한 예배를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국한시키는 것 자체가 예배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 사랑으로 세상의 사랑과 세상의 사귐을 훌훌 털어 버리시고 날마다 주님과의 사귐이 있는 참된 예배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4:27-38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양식 1999. 10. 24.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먹고 사는 문제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상태에서 다른 일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은 사치입니다. 지금 북한에서는 굶주리는 자가 많다는 소식을 우리가 듣고 있습니다. 물론 간부들은 그렇지 않겠지만 인민의 지상낙원이라는 곳의 인민들은 먹을 것을 찾아 온갖 일을 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정에서 다른 취미 생활이나 종교생활은 사치일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에 나온 것도 만약 빵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라면 나올 수 있겠습니까? 당장 점심 때거리가 없어서 처자식이 굶고 앉아 있다면 여기서 예배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예배를 드리고 나면 밀가루를 한 포대씩 준다면 앉아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먹을 것을 구하러 가야 할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선교를 한다, 전도를 한다 하면서 교회에서 구제품으로 나온 밀가루와 옷가지를 나누어 주었던 것이 바로 얼마 전에 우리의 모습이었습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오늘 말씀의 결론을 너무 쉽게 ‘우리는 빵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있다 그것은 전도다’ 이런 식의 공식을 너무 쉽게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치고 이 말을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식의 말이 명분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여러 전도단체나 선교단체에서 ‘직장은 부업이고 전도는 주업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직장이란 전도하기 위한 곳이지 내가 밥 먹고 살기 위한 곳이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정말 직장에서 쫓겨나서 당장 먹을 것이 없는데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겠지요.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직장보다 전도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보게 되면 사마리아 여인이나 제자들의 모습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모습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명분론에 빠져 있다면 사마리아 여인이나 제자들이 어리석어 보이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 예수님이 계시는데도 그것도 모르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염려하느냐고 공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박하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믿음 좋다는 교인들과 목사들입니다. 저도 사람들의 염려들을 명분론으로 몰아 부칠 때가 많습니다. 뭘 걱정하느냐고 주님이 다 알아서 해 주시는데 하면서 윽박 지르기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빵에 대한 염려를 하든지, 아니면 그것이 무엇이 그리 큰일이냐고 큰소리치든지 간에 우리의 수준이 그 나물에 그 밥인 정도임을 아시고 오늘 말씀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드디어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이때 제자들이 빵을 구하여 왔습니다. 제자들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하시는 예수님을 보고서 제자들이 이상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하여 그렇게 하십니까? 하고 묻는 자가 없었습니다. 너무 놀라서 그런지 몰라도 그러는 사이에 이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이 사람이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면서 동네사람들에게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전하면서 와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제자들과 예수님의 대화 속에서 양식의 문제가 거론됩니다. 제자들이 사마리아인의 동네에 가서까지 빵을 구해온 것은 상당히 주렸기 때문으로 보아야 합니다. 상종치도 않는 사람들에게 빵을 구하러 갔으니 절박한 상황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빵을 구하여 와서는 선생님 잡수소서, 라고 권하자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32절에서 “가라사대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있다는 말씀에 제자들은 뭐라고 말합니까? 누가 예수님께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고 서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6:38-39절입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이것이 예수님의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알지 못하는 양식입니다. 마치 사마리아 여인이 마실 물을 말하고 예수님은 영생수를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마실 물 말하는 여인에게 영생수가 되시는 자신을 소개하고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지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여인은 마실 물 하는데 예수님은 영생수, 제자들은 먹을 빵 하시는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못 알아듣는 것이 바로 우리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벽창호 같은 자를 예수님이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그 주님의 열심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전도를 쉽게 하셨을거야, 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은 신이시니까 십자가에서 별로 아프지 않으셨을거야, 라고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찾아 오셔서 구원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양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로 전쟁입니다. 악한 마귀, 사탄과의 전쟁입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로 향하신 것이 우연히 길가다가 들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살리시기 위하여 사마리아까지 가신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전도여행 차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적과의 치열한 싸움 안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몸을 입고 있으니 예수님도 주리고 목마르십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살리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전쟁을 홀로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알아야 도와주지요.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끔씩 돕는다고 나서는 것이 엉뚱한 염려나 하고 그러다가 사단아 물러가라! 하는 책망을 받는 것이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지금 빵을 구하여 와서 예수님의 말씀을 못 알아듣는 것과 같이 못 알아듣는 곳이 또 한곳에 나옵니다. 배경은 다르지만 예수님의 관심과 제자들의 관심의 차이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5-12절입니다. “봉독”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않았다고 의논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로 사천 명이나 먹고서 일곱 광주리가 남았는데 그것을 들고 오지 않았다고 염려하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의논하느냐? 너희가 아직 깨닫지 못하였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이 먹고 주운 것이 얼마며 떡 일곱 개로 먹고 주운 것이 얼마냐? 하고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제야 제자들이 떡이 아니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가르침을 주의하라는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마리아 여인과 제자들의 관심사와 예수님의 관심사가 이렇게 다르듯이 오늘 우리의 관심사와 예수님의 관심사가 이렇게 다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꾸만 우리 자신이 쓸만한 사람으로 생각을 하기 때문에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세가 예수님 내가 무엇을 하여 드릴까요, 하는 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사마리아 여인이나 제자들이 예수님의 양식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마리아 여인과 제자들에게 참된 양식이 무엇임을 알게 하는 일이, 쉬운 일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이 전쟁을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 전쟁이란 바로 사탄의 세력에 붙들려 있는 우리를 구하여 내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속하시는 전쟁인 것입니다. 이러한 싸움을 싸우신 결과로 우리에게 영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사마리아 여인과 제자들에게 참된 생수와 양식을 증거 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하여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68:12절에 “여러 왕들이 도망하니 집에 거한 여자도 탈취물을 나누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전쟁에서 여호와께서 앞장서서 싸워 주시자 대적들이 도망가게 되고 그러므로 거두어온 전리품을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집에 앉아있던 여인들에게도 전쟁의 승리로 인한 전리품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여호와의 전쟁의 결과로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양식이란 하나님의 뜻대로 원수를 물리치고 택한 자를 구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동문서답하는 사마리아 여인을 구하여 내시듯이 오늘 저와 여러분을 구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주님은 노력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4:35-38절을 보겠습니다. 아직 추수하려면 넉 달이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은 벌써 추수할 때가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도 제자들이 보지 못하는 면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전쟁을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미 사탄이 꺾인 것입니다. 사탄이 예수님 앞에서 쫓겨나는 것이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이 추수 때라는 것입니다. 지금이 종말인 것입니다. 추수를 함으로 알곡과 가라지가 나누어지듯이 추수할 때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지금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추수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초림하신 때부터 종말인 것입니다. 지금은 추수 때인 것입니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았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누가 심고 누가 거두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심으시고 예수님이 거두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는 말이 옳도다, 라고 합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무엇 하는 사람들입니까? 이들도 역시 하나님이 심으시고 예수님이 거두어들이신 열매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되어진 것이 아닌 것을 거두러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전도할 때 내가 공을 많이 들여서 한 사람을 전도하였다고 말합니다만 그러나 38절에 보십시오. “내가 너희로 노력치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노력치 아니한 것을 거두는 것입니다. 노력은 다른 분이 해 놓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노력해 놓은 것입니다. 이미 승리해 놓은 전리품을 거두어 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노력치 아니한 것을 거두어 오는 것을 통하여 주님의 노력한 것에 참여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노력으로 참여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노력에 참여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나타납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제자훈련이나 전도훈련을 받으려고 온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그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노력, 예수님의 힘쓰심이 그를 살려놓은 것입니다. 이제 눈을 뜬 이 여인이 동네에 들어가서 와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을 사마리아 동네에 모셔다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가 많아졌습니다.
그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한 말이 42절입니다.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줄 앎이니라 하였더라.” 그러면 여자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예수님의 노력한 것에 참여되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전도입니다. 오늘 우리의 전도가 노력치 아니한 것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설교 잘해서 구원 얻을 자가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노력에 참여되어진 자로서 주님의 일하심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의 말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주님을 직접 만나게 되면 우리는 서로가 주님의 노력에 참여되어진 자로서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일을 일으키시고 오늘도 변함없이 이 일을 이루고 계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며 그 일을 이루시는 것이 예수님의 양식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의 양식도 주님의 뜻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양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양식, 썩지 아니할 양식을 위하여 일하시는 사람-즉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요한복음 4:43-54 표적과 믿음 1999. 11. 7.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서 표적이 나타났으면 하는 때가 참으로 많지요? 표적이란 이적, 기적이란 말과 바꾸어 쓸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니 나에게서 기적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언제 하게 됩니까? 예수 믿는다고 나를 괄시하는 사람들에게 한번 본때를 보여 주고 싶을 때가 많지요? 사람들 앞에서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면 하나님이 잘 증거되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그 기적을 행하는 내가 자랑스러워지는 것도 포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를 할 때 이러한 생각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 집회, 그러면 많은 간증인들이 나오는데 그들의 간증들은 대부분 기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꼭 신기한 마술 같은 기적만이 아니라 병 고침 또는 사업실패에서 성공 등의 요소들을 하나님의 은혜와 자신들의 기도와 노력을 적당히 비빔밥을 만들어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많이 믿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시대정신입니다. 무언가 보여 주어야 믿겠다는 것입니다.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과학적 사고방식’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말하면 미신이다, 라고 합니다. 비과학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믿게 하려면 과학적인 증거를 가지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어려서는 예수님을 잘 믿는 것 같은데 청소년이 되고 대학생이 되면 많은 수가 세상으로 달려갑니다.
자기들의 공부한 내용으로 보니까 즉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보니까 엉터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사고는 아직 신화의 세계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관심이 되는 이야기는 천사니 요정이니 귀신이니 하는 이야기들이 호기심을 유발합니다만 조금만 크면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대들이 원하는 것은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1:1-3절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는 것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어떤 눈에 보이는 표적을 보고서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과학적인 사실을 확인하고서 믿는다는 그런 믿음이란 말과 성경에서 믿음이란 말을 구별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3절에서 이 세상의 보이는 것들이 나타난 것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나타나 있는 어떤 원인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이웃의 사람이 보입니다. 추적을 하여 거슬러 올라가면 어디로 갑니까? 부모, 조부모, 증조, 고조 이렇게 올라가면 어디로 갑니까? 과학자들은 태초에 대폭발이 있었고 그 폭발에서 수천만 년이 지나서 우연히 단백질이 합성되어 생명체가 나타났다는 가설을 세우고 있습니다. 결국은 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보일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어라고 말씀합니까?
누가복음 3:38절에서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아담은 보이지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분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믿겠습니까? 아무도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지 아니하면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사람들이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한 것은 너를 보니 하나님의 아들임을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네가 하나님이 아들 되는 표적을 보여 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많이 보여 주셨습니다. 바람을 잠잠케 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등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만 그러나 그러한 이적을 보고서 믿지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 중에서 부자가 나사로를 자기 형제들에게 보내면 믿고서 지옥에 오지 않으리라는 말을 할 때 아브라함이 무어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의 말을 믿지 아니하면 죽었던 자가 살아가도 믿지 아니할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표적을 보고서 믿지 아니합니다. 만약 우리 중에 누가 특별한 능력이 있어서 사람이 할 수 없는 기적을 행한다고 해서 예수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 거참 신기하다! 하고 가는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표적을 보여 달라는 사람들에게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십자가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란 어떤 표적입니까? 가장 표적 같지 않는 표적입니다. 사람이 큰일을 하다가 죽어버리면 그것은 실패입니다. 아무리 거창한 계획을 가지고 일을 추진하더라도 그 사람이 죽어버리면 실패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죽음의 형틀입니다. 예수님만이 아니라 수많은 범죄자들이 죽어간 그 사형형틀입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표적이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하는 놈들을 십자가를 빼들고서 한번 휘둘러 모두 죽여 버리든가 아니면 아예 예수님을 배척하려고 마음만 먹어도 벙어리가 되거나 수족이 말라 버리면 아무도 부인 못할 표적이 될 텐데 왜 묵묵히 십자가에 죽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표적이라고 믿으라니 이해가 됩니까?
이러한 표적과 믿음에 대한 내용을 오늘 말씀에서 어떻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지 귀를 기울여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이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시면서 사마리아에 들리시고 그곳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동네사람들에게 전도하시면서 이틀을 그것에서 지내시고 다시 갈릴리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지자가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는데도 갈릴리 사람들이 영접을 합니다. 영접을 하였다는 것은 환영을 한다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높임을 받지 못하는데 어떻게 환영을 받습니까? 그 이유는 갈릴리 사람들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행하신 일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갈릴리 가나에 가십니다.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입니다.
이곳에 가셨는데, 이때 가버나움에서 사는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가버나움은 가나와의 거리가 걸어서 약 4시간의 거리라고 합니다.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걸어와서 예수님을 찾은 이유는 하나뿐인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들이라는 단어 앞에 관사가 붙어 있기에 하나뿐인 아들로 보는 것입니다(헬).
왕의 신하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기의 병들은 아들, 거의 죽게 된 아들을 낫게 하려고 예수님을 찾아와서는 ‘내려 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달라고 합니다. 이 사람이 찾아온 유일한 이유는 자기 아들의 병고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모셔 가려고 합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책망의 말씀입니다. 도무지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책망은 예수님을 환영한 갈릴리 사람들뿐만 아니라 왕의 신하도 마찬가지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유월절에 예수님의 행하심을 보았기에 환영한 것이고 왕의 신하는 예수님이 친히 내려오셔서 자기 아들을 고쳐 주시기를 청하니 예수님께서 둘 다 표적을 보고야 믿으려고 하는 자들이란 책망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데도 왕의 신하가 48절에서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하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하십니다. 그러자 이 왕의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서 갔다고 합니다. 표적을 보이지 않으시고 말씀을 하셨는데 믿고 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참으로 주님의 말씀을 믿고 갔는지가 의심스럽습니다. 여기에 대하여 두 사람의 해석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박윤선목사 : 믿었다. 그러므로 천천히 하룻밤 자면서 내려갔다.
박영선목사 : 믿지 못한 것 같다. 그래서 다른 곳에 들러서 자기의 아들을 구할 방법을 찾아보았을 것이다.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가 하면 가나에서 가버나움까지 4시간 거리인데, 왜 그 다음날 집에 가다가 종들이 아들 나았다는 소식을 전하러 올 때 만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들이 나은 것을 믿고 천천히 다른 볼일 보고 갔다고 생각이 됩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찾으러 다닌 것이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후자가 옳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직접 가셔서 표적을 보여주신다고 하시지 않고 그냥 말씀으로만 네 아들이 낳았다. 가라고 하시니 마지못해 간 것 같습니다. 만약에 그 말씀을 그대로 믿었다면 지금 하나뿐인 아들이 다 죽어가다가 나았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전화로 확인하지도 못하는데 보고서야 믿을 것 아닙니까?
그리고 궁금해서라도 달려서 집에 가보아야 정상이지요. 그런데 다음날 종들을 만났는데 아들이 낫기 시작한 때가 어제 제7시라는 것입니다. 어제 오후 1시라는 것입니다. 어제 오후 1시라면 걸어가도 어제 오후 5시에는 갔을 거리입니다. 그런 기쁜 소식을 믿었다면 달려서 간다면 3시간만이라도 갔을 것입니다. 그러니 앞에서 믿고 갔더라는 말은 반신반의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왕의 신하가 놀라는 것은 어제 말씀하신 그 시간에 아들이 낫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표적을 보여 주신 것이 아니라 말씀만 하신 그 시간에 아들이 낫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제 제대로 믿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표적을 보고서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이, 제대로 된 믿음을 만들어 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마리아 동네에서도 예수님은 표적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사마리아 동네 사람에게도 표적을 보이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서 난 것입니까? 무언가 보고서 납득할만한 사건이 있어서 믿게 되었습니까? 혹 그럴 수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보고서 믿는 것이 아니라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교회에 나올 때는 여러 가지 이유로 나올 수 있습니다. 이 병원 저 병원 다니다가 안 되니 병이나 고쳐볼까 하고서 나오기도 합니다. 예수 믿어서 무슨 덕을 볼까 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나는 예수님을 사랑해서 나온다, 그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상태로 계속 있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자꾸만 표적이나 기적을 바라게 되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기가 쉽습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9-12절. “봉독” 사탄이 얼마든지 표적과 기적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는 표적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무엇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표적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책망을 하시고 내가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표적은 결국 요나의 표적을 보이시기 위한 것입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예수님이 죽으시는 십자가의 표적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모든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리고 모든 표적의 완성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최고의 표적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기에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최고의 표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어떻게 봅니까? 가장 실패한 사건으로 보는 것입니다. 오늘도 수많은 이단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표적을 미완성적인 것으로 보고서 자신들의 능력으로 새로운 기적을 보여 주겠다는 자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신비적인 기적들을 나타내기도 하고 초인적인 힘과 불굴의 투지를 가지고 종교적인 업적을 만들어 놓고는, 자 기적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볼 기적은 십자가뿐입니다. 세상사람 모두가 꺼리고 싫어하는 그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 되심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임을 믿으십니까? 이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공로로 죄사하여짐을 믿으십니까? 이것이 세상 사람은 불가능합니다. 자존심과 인과율로 장악하고 있는 사탄의 세력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바라고 믿는다는 이것이 가장 큰 표적이요 기적임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른 표적을 보고서 바로 믿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1-9 베데스다 1999. 11. 14.
지난주에 어느 청년과 전화통화를 약 40분간 하였습니다. 어떻게 늘푸른 교회를 오게 되어, 좀 다른가 하여 등록을 하였는데 별 것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이야기나 관심이 아니라 다른 교회와 마찬 가지로 먹고 사는 세상이야기 외에는 하는 이야기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화가 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맞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화가 난 이유는 얼마나 다녀보고서 그런 말 하는가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최소한 몇 달이라도 다녀보고서 그런 말을 하든지 해야지 몇 번 와보고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고 말하였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말이 맞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별수 있습니까? 베데스다의 못가의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인데 별수 없는 모습이라고 인정하였습니다. 그러자 자기도 그러한데 교회 나오기는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몇 번의 설교를 들으니 너희는 꼼짝마라, 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디다. 그래서 잘 보셨다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꼼짝하지 말라는 말이 맞다고. 그러니 꼼짝마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손들고 항복해 하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적이 나타나서 ‘꼼짝마라’ 하고서는 뭐라고 합니까? ‘손들어’ 그러지요. 그러니 속히 하나님께 항복하고 두 손 들고 나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물론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사로잡고 두 손 들게 하시니 이곳에 나오는 것이지 제정신으로 나올 수는 없는 곳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교회란 사람의 자존심을 죄라고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자존심 하나 챙기며 사는데 교회는 자존심을 죄라고 하면서 우리는 불쌍한 존재입니다.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 빌어야 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하는 말을 듣고 앉아있을 자존심 꺾인 자들이 많지 않은 것입니다. 전에 이 본문을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오늘 차례대로 보는 중이니 한 번 더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한번 들으신 분은 한 번 더 자존심이 꺾이고 처음 듣는 분은 처음 듣는 대로 자존심이 꺾여지는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은 경쟁사회입니다. 그것도 무한 경쟁의 사회입니다. 경쟁이 불붙듯 하기에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하여서 쉼이라고는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한 무한 경쟁을 통하여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까? 발전이라고 합니다. 발전이 가져온 피해를 지금 당하고 있으면서 계속하여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발전이 좋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발전하지 못하고 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나라나 부족을 미개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류학자들이나 의식 있는 자들은 그러한 생각이 편견과 오만이라고 합니다. 행복지수란 빠른 발전과 많은 물질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 가지 행복지수를 가지고 검증해보면 발전될수록 스트레스가 많은 것입니다.
우리 학생들에게 학교에 대해서 말하라고 하니 학교가 아예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학교가 없는 곳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살아가는데 하나도 불편하지 않는 것입니다. 강과 숲만 있다면 그들은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식물을 취하는데 고구마 비슷한 뿌리를 캐는데 꼭 자기 먹을 만큼만 캐고 나머지는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캐어낸 곳을 다시 줄기를 심어두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 같으면 한꺼번에 다 캐올 것입니다. 더 빨리 더 많이 캐 와서 시장에 내다 팔고서 빨리 부자 되자는 것이지요. 이것이 발전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빨리 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경쟁의 사회에서 살다가 보니 교회 안에서도 자연스럽게 경쟁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교회와 교회끼리 경쟁합니다. 교회와 교회끼리 경쟁하여 이기기 위하여서 교회 안에서 능률을 올리기 위하여 경쟁을 붙입니다. 전도경쟁, 헌금경쟁, 충성경쟁... 이러한 경쟁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경쟁이 없으면 발전이 없으니 교회 안에서도 경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치 대형 할인마켓이 생기면 작은 구멍가게가 죽듯이 교회도 대형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작은 교회가 대형 교회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으려면 교회를 특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형 슈퍼에서 이것저것을 다 취급하면 작은 슈퍼마켓은 몇 가지를 선택하여 완벽하게 준비하라는 것이지요. 그래야 경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은 경영을 하는 사업체에서 말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유명한 목사에게서 작은 교회는 특화를 해야 하고 중형교회는 어떻게 해야 하고 대형교회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세상의 목사들이 부러워 할 만큼 큰 예배당을 지었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그 사람의 책도 많이 팔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교회의 현실입니다. 이런 말을 왜 하게 됩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좀더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예루살렘의 성 안에 있는 ‘베데스다’라는 곳으로 가십니다. 베데스다는 ‘베이트’와 ‘헤세드’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베이트는 집이라는 말이고 헤세드는 은혜, 자비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베데스다란 은혜의 집, 자비의 집입니다. 이곳에 연못이 하나 있는데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는 한번씩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동하게 하는데 그때 가장 먼저 물에 들어가는 자는 어떠한 병이라도 낫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은혜의 집이라고 불려졌는가 봅니다. 그러니 수많은 병자들이 그 연못가에서 기적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이 이름만 자비의 집이고 은혜의 집이지 정작 은혜와 자비는 없이 경쟁만 있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누구든지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는 낫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병자들 중에 가장 먼저 들어 갈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가장 몸이 성한 사람입니다. 정작 가장 은혜가 필요한 사람은 들어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경쟁에 뒤처지는 것입니다. 눈치 빠르고 잽싼 사람들이 먼저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중증 환자들은 그림의 떡입니다. 암으로 죽게 된 자가 들어가야 하는데 많이 먹어서 과식한 자가 뛰어 들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들어가야 하는데 눈에 다래끼 난 자가 먼저 들어가는 것입니다. 앉은뱅이가 먼저 들어가야 하는데 족구 하다가 다리 삐끗한 사람이 먼저 들어가는 이러한 경쟁의 아수라장이 자비의 집입니다. 은혜의 집입니다. 이것이 무슨 베데스다입니까? 이름을 바꾸어야지요. 무늬만 은혜를 말한다고 은혜가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경쟁이 난무하고 경쟁에서 뒤쳐지면 살아남을 수도 없는 곳이 교회라면 은혜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 어떤 사람을 목사로, 교역자로 부르고 있습니까? 운전은 일종 면허를 가지고 있습니까? 컴퓨터는 잘 합니까? 제자훈련을 잘 합니까? 찬양 인도를 잘합니까? 이런 것이 조건입니다. 그래야 다른 교회와 경쟁에서 이길 것 아닙니까. 그러다 보니 당신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이런 말이 들어설 틈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교회 안에서 가르침도 사람이 은혜를 따 내는 기술을 가르치는 기술학원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은혜 받는 비결, 복 받는 비결, 교회성장의 비결. 성공비결... 그러나 온몸이 장애로 움직이지 못하는 자에게 아무리 비결을 제시하여도 그 비결을 이루어 낼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헤엄칠 줄 모르는 자가 물에 빠졌는데 수영강습으로 살려낼 수 있습니까?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 앞에 먹을 것 차려 놓고 먹으라고 말해서 먹을 수가 있습니까?
5장 3절을 봅시다.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가 누워 있습니다. 많은 병자 중에 병명이 기록된 사람이 누구입니까? 소경입니다. 소경이 물이 동하는지 아니하는지 알 수 있습니까? 백년을 기다려도 불가능합니다. 절뚝발이가 얼마나 잘 달려야, 다리 성한 자를 이기고 물에 먼저 들어가겠습니까? 혈기 마른 자는 중풍병자입니다. 중풍병자가 무슨 수로 물에 들어갑니까? 은혜가 임하여 있는 강물이라 하여도 자비가 흐르고 있는 연못이라고 하여도 내가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자비의 집에 자비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의 집에 은혜가 없는 것입니다.
이 현장에 누가 오십니까? 자비와 은혜의 실체적인 진실이신 예수님이 오십니다. 요즈음은 진실이라는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진실이라고 하고서도 또 그 말을 뒤집기 때문에 실체적 진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비가 없는 자비의 집에 자비이신 예수님이 오십니다. 그리고 누구를 찾아 갑니까? 가장 불가능한 자, 혈기 마른 자, 그것도 38년이나 누워있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다가가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러면 이 사람이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면 뭐라고 하여야 합니까? 예 제가 낫고자 합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사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하여야겠지요. 그러나 이 38년 된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38년 동안 은혜의 집에 누워있어도 자기에게 은혜 베푸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몇 사람이 그 곳에서 나음을 입었는지 모르지만 과연 그런 곳이 있다면 누가 이런 38년 병자를 물에 넣어 주겠습니까? 능력 있고 빽 있는 자가 물가 가장 좋은 자리 차지하고 있다가 뛰어 들지요. 저는 교회가 세상에서 세상이 원하는 것을 주면 안 되는 이유를 이렇게 봅니다. 만약 예수를 3년만 믿으면 자기 집을 살수 있고, 5년만 믿으면 어떤 병도 고칠 수가 있고, 10년만 믿으면 아들이 자녀가 서울대 합격할 수 있다면 아마 교회는 가난한 사람은 발도 못 디뎌 놓을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는 상종가를 칠 것입니다. 목사님 다음번 등록은 우리 삼촌입니다, 하면서 돈을 보따리로 들고 올 것이며, 또 청와대에서 청탁이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습은 일체의 경쟁이 없는 곳이어야 합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만 넘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러니 38년 된 병자는 자리에 누워서 예수님을 보고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고 하소연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고 찾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병자에게 무어라고 하십니까? 너는 내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느냐,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를 믿어라, 그렇게 아니하셨습니다. 나를 믿으면 내가 고쳐주마, 그러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네가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하면 내가 고쳐주마, 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임을 너무나 잘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중풍병자가 38년이나 누워 있었는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그 말씀을 믿었기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까? 그렇다면 역시 무늬만 은혜입니다. 그럴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그 말씀의 능력이 이 병자를 건강하게 한 것입니다. 그 말씀이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동일한 주님의 능력으로 주님을 알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 연못가에 수많은 병자들이 있었지만 다 고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선택적인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이러한 은혜를 입은 자가 모이는 곳이기에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음을 자랑 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교회됨은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었기에 어떠한 방법으로도 스스로 은혜 속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집에 갔다가 ‘딥 라이징’이라는 비디오를 보았습니다. 거대한 문어 종류의 변종인데 배를 공격하면서 사람을 집어 삼키는 것입니다. 수많은 다리로 쇠도 부수면서 밀고 들어와서 사람을 통채로 삼키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은혜란 그런 것이라고 봅니다. 은혜란 무서운 힘으로 우리를 삼키는 것입니다. 여기 은혜 있다, 날 잡아봐라, 하는 식이 아닙니다. 그 은혜가 우리를 삼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거부하고는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자존심이 우리의 의가,,, 그 영화에 사람이 절반쯤 삼키워졌는데 더 이상 들어가지 않으려고 들어가면 죽으니까 안간힘으로 버티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삼키워진 사람입니다. 이 은혜를 입은 자는 은혜 외에는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목숨을 바쳐도 당연한 것이지 그것이 무슨 자랑이 됩니까?
이러한 은혜가 제대로 흐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베데스다가 이름만이 아니라 그 말대로 은혜가 넘치는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5:1-18 안식 1999. 11. 28.
베데스다 은혜의 집에 은혜가 없었고 경쟁만 있는 곳에 예수님이 오셔서 참된 은혜가 무엇임을 보여 주셨습니다. 수영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물에 빠졌는데 수영방법을 가르쳐 준다고 그 사람이 헤엄을 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뛰어 들어가서 건져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38년 된 병자가 무슨 수로 물이 동할 때 뛰어 들어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병자에게 예수님은 자신을 말씀하시고 믿어라, 그러면 고쳐주마, 하신 것이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말씀으로 고치신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자기를 고쳐준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은혜의 모습입니다.
불교에서는 도를 깨치는 방법을 부처님이 마련해 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도를 깨치는 것은 자신이 수행을 하든지 고행을 하든지 스스로 해탈에 이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 마음속의 욕심을 버리고 참된 마음을 가지면 길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정말 욕심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무소유로 사는 제대로 된 승려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러한 무소유에서 오는 자유는 있어도 주님의 생명과는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베데스다 사건에서 보면 이 병자는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기에 예수님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람은 아예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아무리 율법을 주어도 그것을 보는 눈이 없는 장님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대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베데스다에 은혜가 없는 이곳에 참된 은혜를 베푸셨건만 이 날이 안식일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왜 일을 하느냐고 따지고 드는 것입니다. 나음을 입은 이 사람은 자기가 나은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자리를 말아 들고 가는데 오늘 안식일인데 왜 자리를 들고 가느냐, 일하느냐고 유대인들이 율법적으로 따지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사람의 대답이 나를 낫게 한 그 사람이 자리를 들고 일어나 가라고 하였다는 것이라고 말하자 그 사람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자리를 피하셨기에 누구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나중에 성전에서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제야 이 사람이 자기를 고쳐준 사람이 예수님인줄 알고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왜 유대인에게 가서 예수라는 말을 하였을까요? 아마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어겼다고 책망하였기에 책임을 돌리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모세의 율법에 안식일을 어기면 사형까지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중한 범죄였으면 자기를 낫게 한 그 분을 유대인에게 가서 말하였을까, 라는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안식은 말 그대로 쉼입니다. 안식일을 법대로 지킨다고 지키는데 참된 안식이란 없는 것입니다. 38년 동안 한번도 안식이 없는 그 사람을 예수님께서 참된 안식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참된 안식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그림자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이 눈이 가려 있기에 그림자를 붙들기 위하여 안식일의 주인이시오 참된 안식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안식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날을 지킵니까? 주일을 지킨다, 그러는데 우리는 이 날을 안식일의 변경된 날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완성되어지는 것이지 어떤 다른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날을 예배하기로 모이는 날이기에 중하게 여기고 모이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동일하게 수요일도 모이기를 힘쓰는 귀한 날입니다. 이 안식에 대하여 창세기에서 안식일에 대하여 한 번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만. 좀더 안식일이 왜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인지를 말씀을 통하여 증거하고자 합니다.
우선 최초의 안식을 말씀한 곳은 창세기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기념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시고 안식의 날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날을 안식함으로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사람이 노력치 아니하고 받았음을 안식함으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을 출애굽기에서 율법으로 제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같은 모세의 기록에 의하는데도 출애굽기의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를 인하여 안식하라고 하는데(출20:8-11), 신명기에서는 창조라는 말 대신에 하나님의 구원을 인하여 안식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속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안식하는 것입니다(신5:12-15). 그러므로 같은 모세오경 안에서도 이미 안식의 개념이 발전되고 있습니다. 둘 다 공통점은 노동을 하지 않고 쉬는 것입니다. 자녀나 종이나 짐승이나 간에 다 안식을 하는 것입니다. 이날을 가장 기뻐하는 자는 종들이겠지요.
종들에게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복음입니다. 쉴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이 날은 쉼이 메시지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메시지입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선물을 우리에게 은혜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명기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하나님의 계명을 약 40년 후에 모세가 죽기 전 모압 평야에서 새롭게 갱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같은 안식일을 지키는데 이미 구속을 말하고 있는 것이 신명기입니다. 그러므로 신명기에서는 하나님의 창조의 내용을 담기위하여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을 담기 위하여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속이란 재창조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식의 공통점은 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기에 일하지 않음으로 그 날을 메시지화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 날의 뜻과 의미를 새기기보다는 문자적으로 받아 들여 그날을 자기들의 여러 가지 추가적인 것들을 더하여 안식일 법을 만들어 지키는 것입니다.
이들이 그렇게 소중하게 여기는 안식일을 지키면서도 그것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이기에 결국 십일조도 문자대로는 지키는데 그 뜻을 빼버린 것입니다. 의와 인과 신은 버렸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십일조도 예수님을 예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의 십일조를 말씀드릴 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킨다고 하지만 그들이 안식의 의미와 내용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은 지킨다고 하는데 안식년이나 희년을 제대로 지킨 기록이 성경에는 없습니다. 안식일만큼 중요한 것이 안식년인데 얼마나 안식년을 안 지켰으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에 70년 동안 포로로 잡혀 가게 하시면서 땅이 안식년을 쉬는 것처럼 안식하였다고 역대하 36장 20절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안식일과 함께 살펴보아야 할 내용이 안식년과 희년입니다.
레위기 25장을 보겠습니다. 25:1-7절은 안식년입니다. “봉독” 땅도 지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쉬게 하라고 하셨습니다만 그러나 일년 농사를 쉬게 되면 얼마나 손해입니까? 그러니 안식년을 제대로 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안식일은 지킨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25:8-12입니다. “봉독” 희년에 대한 규례입니다. 이 때는 모든 종들이 자유를 얻고 팔린 땅이 돌아오는 엄청난 자유가 이루어지는 해입니다.
그러므로 7일 안식일, 7년 안식년, 7년x7년 한 다음해, 희년. 이러한 날들이 날 지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 참된 안식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형편이 어려워 몸을 종으로 팔았다고 하여도 희년이 되면 자유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무상으로 받은 땅도, 살다가 어려워서 팔았다면 희년이 되기 전에 형편이 되면 언제든지 무를 수가 있고 자신이 어려우면 친척이 물려주어도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룻기에서 나오미의 고엘이 보아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도 저도 안 되는, 참으로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라도 희년이 되면 모두가 자유를 얻도록 하나님이 법으로 정하여 놓았지만 아무도 희년을 지키지 않은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는 이것을 적당히 타협하여 행하였다는 성경 밖의 기록은 있습니다만 성경대로 제대로 안식년이나 희년을 지킨 기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작 중요한 안식이 주는 참된 자유와 해방은 간 곳없고 단지 일주일 중 하루, 날 지키는 일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정말 형편이 어려운 가운데서 지키지 못하는 자들은 죄인 취급하고서 자기들은 안식일을 지킨다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베데스다에서 고침 받은 자가 참된 안식을 받았고 누리는데 날 지키는 자들은 왜 안식일을 어기느냐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늘과 땅 차이입니까? 지금 참된 안식을 누리는 자를 보고 안식을 누리지도 못하는 자가 왜 그러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안식일의 의미가 참된 자유와 해방을 주는 것이라면 날짜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의미가 성경에 있을 것입니다.
이사야 61:1-3절을 보겠습니다. “봉독”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신이 임한 분이 참된 안식의 완성인 희년, 즉 하나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러 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누가복음 4:14-21절에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보겠습니다. “봉독” 이사야의 이 말씀이 오늘 너희에게 응하였느니라, 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자신이 참된 안식을 주러 오신 분이요 희년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도 이루어 내지 못한 그 희년의 기쁜 소식을 예수님이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주인이신 분이 참된 안식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날 지킴’으로만 생각하고 그 날을 붙들고 있던 자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안식일에 구원을 베푸시는 것이 안식일을 깨는 범죄자로 보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 15절부터 봅시다. 그 사람이 유대인에게 자기가 안식일에 걸어간 것이 예수임을 밝히자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행한다고 예수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무어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그러신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더 큰 참람된 죄이기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안식을 못하시고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있어도 너희에게는 안식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새롭게 안식을 주시는 일을 하는데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은혜의 집에 은혜가 없고 안식일에 안식이 없는 현실이 예수님의 그 당시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안식이 있습니까? 이제는 날 지키는 것으로 안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4장 10절에서 11절에, 바울 사도는 복음을 들은 자들이 다시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라는 율법주의자들의 말을 듣고 흔들리는 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 즉 십자가의 복음을 헛되게 하느냐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또한 골로새서 2장 16절에서는 먹고 마시는 것이나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고 하면서 이런 것은 장래일의 그림자라는 것입니다. 그림자로서 날과 달과 절기와 안식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림자인 안식일과 안식년과 희년의 실체가 되시는 예수님이 오셨기에 이미 안식일이 완성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어떠한 특정한 날짜를 지킴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것이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온통 경쟁과 경쟁으로 얼룩진 이 세상, 경쟁에서 뒤쳐지면 살아남기도 힘든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는 예수님을 더 깊이 알아감으로 그 안식이 얼마나 좋은지를 더욱 풍성하게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안식이 나중에서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안식을 맛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영원한 안식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이 세상에서도 안식을 못 누리고 죽어서도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유황불 속에서 밤낮 괴로움을 당하는 것입니다(계20:10). 안식의 복! 예수 !
요한복음 5:1-8 일하시는 주님 1999. 12. 5.
이 본문으로 세 번째 설교를 합니다만 열 번을 하여도 부족하고 백 번을 하여도 부족합니다. 주님의 은혜의 풍성함과 사람의 악함을 얼마나 극명하게 드러내는지를 요한복음을 볼수록 더욱 뚜렷하여 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두 번의 설교를 잠시 요약하여 봅시다. 처음에 베데스다입니다. 은혜의 집에 은혜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날이 안식일입니다. 유대인은 안식일만 안식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절기를 안식일의 기준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유월절, 맥추절, 수장절 등의 절기를 안식일에 기준하여 지킵니다.
그런데 베데스다의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날이 5:1절에 보면 유대인의 명절에,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명절이 안식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이 7일마다 쉬는 안식일일 수도 있고 명절 기간이기에 안식일로 지키는 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안식교인들이 이런 절기도 안식하고 있지 않다면 그들은 안식일 지킨다고 하여도 반쪽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참된 안식을 얻어 자유와 해방을 누리는데 다른 사람들이 무어라고 합니까? 너 왜 안식일을 안 지키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이 힐난은 곧 예수님께로 화살이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왜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대답이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대답하십니다. 이 대답이 예수님을 죽일 구실이 되는 것입니다. 감히 사람이 하나님과 동등 되게 여긴다는 것이지요. 참람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자기 친아버지로 말하느냐며 죽이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것은 그 발단이 무엇입니까? 베데스다의 사건입니다. 은혜를 베푼 사건입니다. 사람들이 은혜를 베푸시는 예수님을 왜 죽이려고 할까요? 그것은 자기들이 지키는 안식일을 어기는 것이기에 자기들의 정체성을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의 배후가 중요합니다. 은혜를 베풀지 못하게 하려는 마귀의 조종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44절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은 결국 사탄의 조종을 받는 것입니다. 사탄이 하는 일은 예수님의 은혜를 차단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사단의 자기 체제를 유지하려는 것입니다. 사단의 체제란 행함의 체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나라는 은혜의 나라입니다. 사람이 범죄함으로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구원의 길에 들어 설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치 38년 된 병자가 베데스다의 연못에 들어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은혜가 있는 곳이라고 하여도 스스로 은혜의 자리에 갈수가 없기에 은혜가 그를 삼키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여기에 나와서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오직 주님의 은혜입니다.
나의 노력과 애씀과 실력으로 나올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면 마귀는 은혜를 막기 위하여 무엇을 합니까? 사람들의 자기 행함을 붙들게 합니다. 은혜의 연못에 사람이 들어 갈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조금만 더 애를 쓰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다. 은혜 대신에 사람의 행함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그래서 경쟁을 부추깁니다.
사람들의 공적과 업적을 드러냅니다. 상을 줍니다. 세상의 실력자를 교회의 중직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그래야 교회가 세상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주님을 더 잘 증거 한다고 그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사단의 속임수입니다. 은혜와는 반대되는 길입니다. 예수님이 증거되는 길은 세상의 방법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떤 모습으로 예수님을 증거하였는지 너무나 성경에 잘나와 있습니다. 한결같이 죽는 모습으로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길을 버려두고 세상에서 통하는 방식으로 나가려고 하니 교회가 돈과 힘이 있어야 된다고, 돈과 힘이란 수에서 나오기에 어떻게 하든지 사람을 꼬여서라도 사람을 채우고자 하는 것이라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란 은혜를 입은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어떠한 공로나 자랑거리가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소경이요, 절뚝발이요, 중풍병자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어떻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하려는 것은 지금 안식을 얻어서 가는 사람을 보고서 너 왜 안식일 안 지키느냐고 말하는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은혜를 베푸신 예수님을 모독하며 더 나아가면 예수님마저 죽이려고 덤비는 것입니다.이처럼 사람들이 거저 주시는 은혜를 싫어합니다. 은혜를 입지 않은 사람에게 은혜를 이야기하면 반드시 화를 내는 것입니다. 자기의 모든 종교적인 공적들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때에 어느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은 안식일에 안식이 없는 자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하여 일하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3:10-17절을 봅시다. “봉독” 이 말씀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가지고 유대인을 공격하시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사단에 눌려 18년 동안이나 고생하는 자를 풀어 놓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너희는 안식일에 소나 나귀를 풀어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4:5절에서는 그렇게 물을 먹이다가 나귀나 소가 또는 그 아들이 우물에 빠지면 끌어내지 아니 하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그렇지 않는 자는 환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안식일에 일하시는 것은 안식일을 지켜도 안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일하심을 따라 자신도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물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는 구실이 됩니다만 그러나 예수님은 죽으실 줄 아시고서 안식일에 일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죽으심으로만 자기 백성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안식을 받은 것은 주님께서 죽도록 일하신 결과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안식이 얼마나 놀라운 복인지를 대조를 해보아야 알겠습니까?
요한계시록 20:10절에 보면 지옥 불에서는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주님의 안식이 없는 자들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주님이 주시는 안식의 가치가 나의 목숨(생존)보다 소중한 것입니다. 이 소중한 안식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얼마나 일하시는지를 말씀을 통하여 확인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냥 쉬신 것이 아닙니다. 우주만물을 운행하시고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은 재창조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일의 정점으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을 믿는 자만의 세계를 따로 만들어 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하나님은 자기의 처음 창조세계를 보존하고 섭리하고 계시는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자기의 택한 자를 다 골라내시고 나면 처음 창조물이 불살라지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자기의 은혜를 입은 자들을 위하여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아들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 나라는 은혜를 받고서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 가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은혜가 아닌 것은 발을 들여 놓지 못하는 곳입니다. 이 일을 주님은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121편 4절에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2:31-32절.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까부르듯 하려고 너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 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베드로가 이 말씀을 듣고도 저는 죽는 자리까지 주와 함께 가겠습니다, 하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믿음이 떨어지지 않고 돌아올 수 있었습니까? 예수님이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26절.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시느니라” 그러므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은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34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지금도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의 기도와 예수님의 기도 때문에 우리가 믿음을 잃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얼마나 자주 예수님을 부인합니까? 나의 눈앞의 이익 앞에서, 그 잘난 자존심 하나 지키려고, 자기 자랑하려고 얼마나 자주 주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발로 차는지 아십니까? 그러한 우리를 위하여 주님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무어라고 하여야 합니까? 그러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하라는 것입니까? 아무 할 일이 없는데요. 그렇습니다. 할 일이 없음을 정말 아무것도 할 일이 없음을 알아야 자신이 불쌍한 사람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존심이라는 죄로 똘똘 뭉쳐있는 인간에게서 불가능한 일입니다.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서 나의 공로가 아니라 오직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된 사실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다는 사실은 기적중의 기적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권세를 이긴 증거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희미합니까? 주님이 일하신다는 사실이 왜 못마땅합니까? 그 이유는 내가 주인공 되고 싶고 내가 멋있게 보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멋있는 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뒤에서 힘이나 보태 주시고 영웅적인 일을 제가 한번 이루어 내겠습니다. 예수님 제발 가만히 좀 계세요. 이런 자세가 우리에게 늘 나오는 것입니다.
마치 어려운 장난감 조립할 때 아이가 아빠의 도움을 요청하다가도 조금만 틈이 나면 아빠 내가 할게, 하고 빼앗아 가는 아이의 마음속에 내가 이것을 만들어 내었다는 뿌듯한 보람과 성취감을 느끼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피조물이 누려야 할 영광은 아닌 것입니다.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멋진 일을 하여서 영광을 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어린 아이는 아빠가 만들어 주는 것을 보고서 우와! 우리 아빠 최고다, 어떻게 그렇게 멋있게 만들었어요, 고맙습니다! 하는 이런 자세가 어린 아이입니다. 이런 자세가 천국 백성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조금만 크면 결코 그렇게 안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의 죄 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주님이 일하심을 믿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싸움인지 히브리서에서는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합니다.
히브리서 4:1-11절을 교독합니다. “교독” 이 말씀을 오늘 더 깊이 묵상해보시기 바랍니다.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이란 바로 우리의 믿음의 도리인 예수 그리스도를 굳게 잡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입니다. 오늘도 일하시는 주님 때문에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5:19-29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1999. 12. 12.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더욱 죽이고자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유대인들이 그것도 하나님을 잘 섬긴다는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 계열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서 사사건건 죽일 구실을 찾아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그들이 섬긴 하나님과 예수님이 소개하는 하나님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아비가 마귀라고 노골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도 심각한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섬기고 있는 하나님이 성경의 언약대로 나타난 참된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유대인들이 섬긴 그런 하나님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교회, 그러면 다 하나님을 섬기는 곳인데,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보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내용과 별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말은 하나님, 하고 예수님, 하는데 성경의 하나님과 성경의 예수님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라는 말 한마디도 성경적으로 정립이 안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겨우 붙들고 있다는 것이 자신의 의지적 결단으로 예수 믿어준다는 그것을 붙들고 있습니다. 전도를 그렇게 받았기에 그런 믿음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의 클리닉을 좀 받으셔야 합니다. 광고한 책을 꼭 구입하셔서 함께 공부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섬기고 있다는 하나님이 과연 예수님이 소개하시는 하나님이신지를 점검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예수님만이 위에서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제대로 드러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아버지를 믿는 것이고 예수님을 본 것이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미 구약 속에서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실지를 예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메시아를 학수고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이미 그들의 배후에 사단이 붙들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만의 메시아를 꿈꾸어 왔기에 자기들의 구미에 맞지 않은 메시아를 배척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그리고 전할 때, 늘 바라는 바가 있다면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기적을 한번 베풀어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잘 믿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구약을 보면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시면 죽게 됩니다. 직접 말씀만 하셔도 죽게 됩니다. 그러니 이러한 배경을 먼저 알게 되면 왜 예수님이 인자로 오게 되셨는가를 알게 됩니다. 구약을 보겠습니다.
신명기 5:22-27절입니다. “봉독”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의 모습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장로들이 모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 살아남은 것이 놀랍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림하심을 멀리서 알게 하시고 모세는 가까이 나아가서 그 음성을 듣고 그 돌판에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왔는데도 죽지 아니한 신기한 일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5절에서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죽을 것이니 육신을 가진 자가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 살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도 죽지 않은 당신이 듣고서 전해 주시오, 그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사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이 전제되어 있지 않으니까 자꾸만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인 이 성경을 읽을 때 사람들이 마구 죽어 나간다면 누가 이 말씀을 읽어 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말씀을 읽고 듣는데도 죽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세가 대신 전하여 주었기에 죽지 않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 것이 아니라 모세가 대신 전하여 주었기에 죽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이미 신명기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8:15-20절을 봅시다. “봉독” 하나님이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 너희가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죽기에 나와 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하신 바를 다 너희에게 이르실 자가 나타나리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6장에서 스데반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들면서 설교하는 가운데 모세의 이 말을 전합니다. 그러면서 메시아가 오리라 예언한 선지자를 죽인 것처럼 너희가 예수를 죽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스데반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예수님을 제대로 증거 하면 죽이는 것입니다.
왜 이럴까요? 모든 복음서를 통하여 보면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예수님이 구원하러 오셨는데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고 죽였더라, 하는 것이 복음의 무서운 면입니다. 이것을 성경이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것은 죄가 사람을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임을 모르면 아직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예수 믿는 것이 참된 복인 줄 모르고 자꾸만 예수 믿어 줄 테니 나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 내 잘되고 내 집안 잘되는 일이고 내 나라 잘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다 할 수 있으니 시켜만 주세요. 이런 자세가 우리 민족의 심층에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식 단순하게 갖다 바쳐봐, 복 주나 안주나, 일단 기도해봐 응답하나 안하나, 이런 식으로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지극 정성으로 빌고 또 빌어 왔습니까? 이런 자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유대인들에게도 동일하게 있는 것입니다. 그저 우리나라 선택된 백성, 우리나라 잘되는 것, 여기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는 자들에게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1.그러면 예수님이 아버지의 일을 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들이 하는 일은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그 일이 20절에 보니까 아버지가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는 것 같이 예수님도 자기가 원하는 자를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26절에 보니까 하나님 안에 생명이 있음과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었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생명의 능력으로 죽은 자를 살려내실 분이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자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을 살리는 권세를 가지고 왔기에 예수님을 믿으면 살아납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처럼 25절에서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는 것입니다. 아들의 음성을 듣는 자는 살아납니다. 그런데 들을 귀가 없다는 것입니다. 살리러 오신 분이 바로 앞에 계시는데도 눈이 가려지고 귀가 막혔으니 어찌 알아보고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 자체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생명과 무관하게 살고 있는가를 보여 주는 고발이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유대인들조차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아니하였다는 사실을 성경은 죄라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떤 식의 전도를 받고 어떤 식의 전도를 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구원을 이루어 놓았으니 너는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믿을 능력이 없는데 어떻게 믿습니까? 이러다 보니 예수 믿는 것이 사람의 결단과 의지적 초청으로 되는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복음이 왜곡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을 내가 믿었으니 이제 예수님께 뭔가 잘 보여서 복 받고 상 받는 것도 내가 잘 알아서 하면 되겠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은혜는 간곳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을 주러 오신 것을 사람들이 배척하므로 죄가 죄됨을 증거 하시고, 동시에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예수님이 친히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우리는 그의 음성을 들을 귀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생명을 가지고 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주신 것입니까? 자기의 죽음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 길 외에는 길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공급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 지시기 전에 이렇게 자신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증거 하시는 것은 나중에 성령이 임하고 나면 그때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못 알아듣습니다.
요한복음 14:25-26절을 봅시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지금 자신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자기를 믿지 아니함이 곧 심판이다, 라고 말씀하셔도 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일은 오직 주님의 일인 것입니다. 목사가 아무리 유식하고 청산유수 같은 설교를 한다고 하여도 단 한사람도 살려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가 왜 필요하고 복음 전하는 자가 왜 필요한가, 하는 질문이 나옵니다. 목사나 복음 전하는 자가 할 일은 예수님이 살려 내시는 것입니다. 나의 설교도 전도도 아니요 오직 생명을 가지고 계시는 예수님이 살려 내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하는 자가 전도자입니다. 그런 말을 듣고서 맞다, 예수님이 살려 내시는 것이 맞다, 하는 자는 한 성령을 마신 증거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예수님만이 우리를 살려내는 분이심이 믿어지십니까? 내가 믿고자 하여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생명이 있기에 그 생명으로 우리를 살려 내셔야 눈이 열리고 귀가 열려서 주님을 알아보고 복음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생명을 살려 내시는 권세만 아니라 심판의 권세도 가지고 계십니다. 22절과 27절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예수님의 인자되심, 사람이 되어 오심이 심판의 권세를 가지시는 것입니다. 인자되신 예수님이 생명을 주시고 심판의 권세를 가지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함같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아버지도 공경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하면서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것은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공경하는 길이 결국 예수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생명을 주시고 또한 심판의 권세를 가지고 오셨건만 인자로 오셨기에 사람들이 알아보지도 못하였고 믿지도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역시 복음이 전해지는 길은 십자가의 도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싫어하고 미련스럽다하고 거리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전도를 하시는가 하면 이세상이 추구하는 바가 심판받을 일이기 때문입니다. 온 인류가 새천년 새 희망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교회마저 새 희망 새천년을 꿈꾸고 있습니다. 모두가 자기의 이름을 내려는 욕심의 다른 발로입니다. 해아래 새것이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이 새로운 것입니다. 이 새로움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 살아난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하나님의 선물인지 아십니까?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제대로 알게 하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시고 주님을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신 그 일이 무엇입니까?
5:24절을 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것입니까? 졌습니까? 이것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를 아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이 선물을 아는 사람은 세상의 가치관인 출세와 성공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것이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 아니고 심판을 면하는 것이 아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능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디 이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좀더 여유 있게, 넉넉하게 세상에 굴복되지 마시고 지금 죽어도 이미 승리한 사람임을 믿고 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세상을 이기신 주님을 믿는 자의 자세입니다.
요한복음 5:30-47 성경의 증거 1999. 12. 19.
사람들은 모두가 자기만 사랑합니다. 그러므로 관심이란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로 모여도 역시 관심은 자기에게 있는 것입니다. 교회 모인 사람들의 관심도 어떻게 하면 나와 내 집안이 잘되는가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거저 내가 잘되고 내 집안 잘되는 길이라면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내가 속한 단체, 내가 속한 국가가 잘되는 일이라면 부처도 좋고 예수도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중심에는 오직 내 하나 잘되는 것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고 해내겠다는 것입니다.
백일기도 하라면 하지요. 특별 새벽기도회 하라면 하지요. 일천번제 하라면 하지요. 구제와 전도 하라면 하지요. 그러한 것을 통하여 내가 잘된다면 무엇이나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적당히 저주를 말하면서 잘못하면 저주까지 주어진다면 더욱 열심히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것이 우리 속에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공부를 한다고 하는데도 결국은 성경을 이용하여 나의 배를 불리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증거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읽어도 관심은 역시 자기에게 있는 것입니다. 병든 자가 성경을 보면 어떻게 하면 건강해질까에 관심을 가지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오는 책이 성경의 건강비결, 가난한 자가 성경을 보면 부자 되는 비결, 이런 내용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의 구미를 맞추어 주기 위하여 복 받는 비결, 하면서 헌금을 어떻게 하면 복을 받는다는 식의 책이 잘 팔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부분에 대하여 잘 지적한 책이 하나 있는데 십일조를 넘어서 하는 책입니다.
그리고 개척교회를 하는 목사는 어떻게 하면 사람을 많이 모아서 개척교회를 벗어날까라는 생각에서 성경을 보니 성경이 교회성장의 이론서나 되는 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 목사들이 있습니다. 선교단체의 목사, 회사의 목사, 병원의 목사 등이 결국은 무엇을 위하여 성경을 보겠습니까? 성경을 통하여 자기의 소원을, 자기의 욕망을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가족이나 자기의 속한 단체를 예수님보다 사랑하는 자는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미워하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통하여 무언가 다른 노림수를 가지고 접근하는 자를 사전에 차단시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그러므로 성경이 무엇을 증거하는지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무엇을 증거 합니까? 오늘 말씀 5:39절에서 성경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봅니까? 못 알아봅니까? 못 알아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죽이려고 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은 자신을 증거하는 것은 사람의 증거를 필요치 아니하고 하나님이 자기를 증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잠시 증거를 하였으나 그러나 그러한 것은 너희로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이고 나의 증거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증거를 하시는 것입니까?
36절입니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위하여 증거 하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증거하고 계시는가 하면 예수님이 하시는 그 일들로 인하여 아들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이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미리 말하여 두는 것은 너희가 나중에야 그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가 무엇을 질문하면 뭐라고 합니까? 나중에 어른 되면 안다고 그러지요.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는 자가 없다는 것을 요한복음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지금 하시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기를 보내심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시는 최종점이 어디로 갑니까? 그것은 십자가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킨다는 유대인들조차 십자가 앞에 세워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의 어떠한 능력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 라는 것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증거는 의인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증거 합니다. 오직 의를 주시는 분이 오셔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킨다는 자들에 의하여 배척받는 모습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어떠합니까?
39절에서 42절을 봅니다. “봉독”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성경을 상고하는데 성경이 나에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나에게로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영생을 구하러 오지 않는 것을 보고서 그 사람들의 마음에 무엇이 없다는 것을 안다고 하십니까? 42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다, 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성경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기독교서점에 가보면 성경에 대한 책들이 산더미 같습니다. 얼마나 많은지. 그러나 그 많은 책들이 과연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아니면 자기를 사랑하는지 조사를 해보고 사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베스트셀러가 되는 책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나는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라는 내용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 책은 잘 팔리지 않는다고 반품을 해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킨다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바리새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 속에 실천하기 위하여 구체적인 적용을 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안식일을 어떻게 해야 잘 지킬 것인가? 십일조는 어떻게 해야 잘 지키는가? 여러 가지 세목을 정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생활 속에서 잘 지킨다고 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이들이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였다면 분명히 성경이 증거하는 바 예수님을 믿을 텐데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을 보니 이들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는 자기를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킨다는 그들의 속마음은 자기 사랑이 가득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예수님이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뿐만 아니라 사두개인도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사람들이고 또 더 특별하게 세상이 악하니 우리는 따로 산이나 들로 가서 공동체를 이루자 하는 쿰란 공동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열심당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뜻을 자기들이 잘 알고 이루어 간다고 생각 하였지만 결국은 그들의 속에 자기 사랑과 자기 집단을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모든 집단들을 다 정죄하니까 이들이 합심으로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도 수많은 교단과 교파가 자기들이 하나님의 뜻을 잘 이루어 낸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자기들의 단체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교단을 자랑하고 자기 속한 교회를 자랑하는 것은 이미 예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자기의 속한 단체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자기영광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44절입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겠느냐” 예수님을 믿어야 영생을 얻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가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이란 결국 자기 영광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서로 영광을 취하고 있으니 예수님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영광을 어떻게 취하고 있습니까? 자기의 자존심을 세우는 것이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만약 자기 집이 초라하면 손님을 접대하기를 꺼려합니다. 그리고 자기 회사가 아주 보잘 것 없으면 회사 자랑 크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모든 부분이 자기의 영광을 취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니 자기는 아무것도 아닌 죄인이기에 예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데 다른 사람에게 무릎을 꿇느니 차라니 자결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살을 하는 대분의 이유가 자존심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자기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렇다면 교회는 어떻습니까? 별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좀 큰 교회의 교인들의 말을 들어 보면 자기 교회의 목사와 교회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합니다. 결국 자기가 속하여 있는 단체의 영광을 취하고 있으니 어찌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목사에게도 왜 자기 영광이나 자랑이 없겠습니까? 지난주에 창원시찰회가 저희 예배당에서 모였습니다. 보통 4-5명 모이는데 저까지 7명이나 모였습니다. 저희 교회보다 수나 건물이 큰 곳도 있고 작은 곳도 있습니다. 그러면 작은 곳에 가면 자기 자부심이 생기는 것이고 큰 곳에 가면 기가 죽겠지요. 이것이 목사인들 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는 사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선악과를 따 먹을 때 그 유혹이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그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려 한 그 죄가 우리의 뼛속 깊이 살 속 깊이 흐르고 있기에 그러한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스스로 자기의 죄인 됨을 알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인간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니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영광을 평생 취하다가 헛된 자기 영광 속에서 죽어 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나의 업적을 보라, 나의 이름을 보라, 이렇게 아름다운 이름을 업적을 남겼노라, 그리하여 나의 이름은 역사 속에서 영원히 아름답게 남으리라 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요 이것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이제 성경에서 말하는 죄가 어떤 것인지 조금이라도 아시겠습니까? 이러한 죄인이기에 예수님이 죽지 않고서는 죄가 죄 됨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고 또한 그 죄에서 구속하여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증거는 바로 예수님이 자기의 하시는 그 일을 인하여 증거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만이 그리고 그 능력으로 성령을 보내셔야 만이 우리가 죄인임을 알고 주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을 믿고 나온 자는 자기를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들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영광을 구할 것이 없는 자가 예수님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우리의 영광스러운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못할까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 거리가 없습니다. 교회가 이것을 놓쳐 버리고 교인수와 헌금액수와 건물과 목사를 자랑하게 되면 이미 교회가 아니 것입니다.
이솝우화 중에 하늘을 날고 싶은 개구리 이야기를 하고 마치고자 합니다. 하늘을 날고 싶은 개구리가 두루미에게 부탁을 하지요. 나도 날고 싶다고. 그래서 나뭇가지를 서로의 입에 물고 하늘을 날았지요. 자기 마을 위로 날고 있을 때 모두가 쳐다보고서 ‘저게 누구냐고 저게 누구냐’고 이 개구리 가만히 있을 수가 없지요. 자기 영광을 드러내어야지요. ‘나야 나’ 하는 순간 땅으로 곤두박질 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러한 것이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임을 아시고 날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시고 그분을 높이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6:1-15 오병이어(五餠二魚) 1999. 12. 26.
지난주에 성경이 누구를 증거한다고 하였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고 요한복음 5:39절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서와 시편과 역사서와 선지서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제사제도와 정결의식만 완성된 것이 아니라 성전과 십일조와 헌물과 안식일과 달과 절기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다 이루어 진 것입니다.
제가 부임한 것이 6월 27일인데 지금이 꼭 6개월째입니다. 6개월 동안 증거한 것은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한마디였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6개월을 더할지 6년을 더할지 아무도 모르지만 제가 목사로 설교를 하는 한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가지고 개인적이고 현세적인 가치관의 복이라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며, 동시에 성경을 가지고 교회를 성장시키고 부흥시키는 비결이 담긴 것처럼 보아서도 안 되는 것이며 성경으로 설교를 하는데 자기 교회 유지 차원의 설교를 하여서도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에 대하여서는 별 의의가 없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동시에 수반되는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이 가치가 별 볼 일 없어지는 것입니다. 가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동일하게 배척한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임이 따라 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 견디기 힘 드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을 일반적인 종교처럼 만들어 버리면 사람들이 꺼려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떤 신에게 나의 정성과 나의 물질을 바침으로 이 세상에서도 잘되고 죽어서도 좋은 곳에 간다면 사람이 싫어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안하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만 높이게 되면 자연히 사람의 가치를 드러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자기의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재미로 사는데 그런 것을 무너뜨리고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을 누가 좋아 하겠습니까? 그것도 몇몇 가지의 죄를 지었기에 죄인이 아니라 아예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행하는 모든 마음의 생각과 행위가 악하다는 성경의 평가 앞에서 우리는 어떠한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까? 일반인이라면 도망가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내 돈 내고 예수 믿고자 왔는데 나를 인정해주고 잘한다 하기는커녕 오히려 죄인이라고 하니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서도 어떻게 예수님이 증거되며 동시에 사람들은 얼마나 자기의 이익만 챙기는 사람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오병이어의 사건은 너무나 많이 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결론이 어떻게 나왔습니까? 우리도 어린아이처럼 자기의 적은 것이라도 주님의 손에 드림으로 큰 축복과 기적을 맛보자, 그런 식의 결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제목을 보시고 그런 생각을 하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니 어린이 설교를 하여도 어른 설교를 하여도 어린이의 도시락 바친 사건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놀랍게도 단 한번도 도시락 바친 어린이를 칭찬한 적도 없고 우리도 어린이처럼 우리의 가진 것을 몽땅 바쳐서 하나님의 기적을 맛보자는 식의 내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병이어 사건을 통하여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 자신이 살을 찢어 주시고 피를 흘려주실 것을 보이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오병이어를 통하여 결국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를 보여주신 것이지 어린아이 도시락 바치듯이 우리도 우리의 적은 것이라도 바쳐서 주님의 손에 올려놓아 주님이 축사하심으로 큰 기적을 맛보자, 그러한 간증까지 곁들여 가면서 올해는 선전 건축을 하고 교육관과 주차장과 묘지와 수련원까지 마련합시다, 라는 식이 되어 버리면 결국 성경을 가지고 자기의 단체를 키우는 욕심에 동원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2절을 봅시다.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많은 사람이 따라 나섰습니다. 왜 따라 나선 것입니까? 2절에 보니 예수님이 병자를 고쳐주신 표적을 보고 따라 나선 것입니다. 이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따라 온 이유는 기적을 보고서 무슨 신기한 일을 구경도 하고 또 자기의 병이 있는 자들은 병도 고치고자 따라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보시고 예수님이 빌립에게, 어디서 이 무리에게 떡을 사서 먹이겠느냐고 하시자 빌립이 사람들이 배불리는 못 먹고 조금씩 먹는다고 하여도 이백 데나리온은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성년 남자의 하루 일당입니다. 그러면 일당이 3만원이라면 600만원의 돈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안드레가 여기 한 아이의 도시락이 있습니다만 이것으로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마태복음에 보면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나온 것이 오병이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받으시고 사람들을 앉게 하십니다. 그리고 축사하시고 사람들에게 떡과 고기를 나누어 주십니다. 그 결과 오천 명이 먹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았습니다. 이 기적을 보고서 사람들의 반응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14-15절을 봅시다.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2절에서 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왜 따라 나선 것입니까? 병자를 고쳐주신 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무슨 기적까지 보았습니까? 빵 문제를 해결하여 주는 메시아가 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제를 해결할 준비된 그 선지자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이 분을 임금 삼자는 것입니다. 분위기가 무르익은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신당을 창당하고 조직을 구성하고 새로운 정권을 창출하기 위하여 힘을 합하여야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 수많은 민중들의 간구를 외면하고 산으로 떠나가십니다. 도망가신 것입니다. 그 민중들의 절절한 간구를 외면하고 피하여 버린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역사를 통하여 빵과 고기를 주시고서 사람들이 임금을 삼으려고 하는데 도망가시는 것입니까? 여기에 눈이 열려지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를 평생 따라 다녀도 병이나 고치고 경제문제나 해결하는 그런 예수를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이들을 피하여 가신 것입니까? 내가 온 것은 단지 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온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빵 문제, 경제문제가 우리에게는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을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는 없을 것입니다. 먹어야 살지요. 그러니 우리가 여기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빵 문제는 해결된 사람이 모인 것입니다. 지금 집에서 처자식이 굶주리고 있는데 여기서 한가롭게 예배를 드리고 있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자기 혼자 점심이나 해결하려면 앉아 있을 수 있겠지만 예배 후에 점심을 주니까 그렇지 않으면 예배란 굶주린 자에게는 사치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기독교란 중산층의 취미생활이라고 하였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중요한 빵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임금 될 자격이 충분하다는 것이 유대인들이 기다린 메시아 상입니다.
현재 그들은 로마의 압제 아래 있습니다. 경제적인 착취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십일조와 성전세라든지 종교적인 세금까지 부담을 하고 있기에 소수의 기득권층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더욱 병자가 많은 그런 시대입니다. 이러한 때에 자기들의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성경의 예언에 메시아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기다린 메시아는 성경에서 말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자기들의 요구를 이루어줄 그런 메시아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런 메시아사상은 어느 민족이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 같은 왕이 와서 자기들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여 줄 그런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데, 예수라는 사람이 병도 고치고 빵도 해결하여 주니 자기들의 임금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민중의 열망을 뒤로 하고 왜 예수님이 도망갈까요?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사단의 시험을 받지요 세 가지인데 첫 번째가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어라고 하십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지요. 그러므로 오늘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사람들의 배고픔을 해결하셨지만 그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예수님 보이고자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산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함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서 그 살을 떼어 주시고 그 피를 나누어 주심으로 생명을 얻게 하시는 것임을 요한복음 6장 전체를 보면 더욱 분명하여 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병이어를 통하여 무엇을 나타내고자 하시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의 요구를 피하여 가시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갑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예수님도 놓치고 제자들도 놓쳤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이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바다 건너편까지 와서는 예수님께 무어라고 합니까?
6:24-25절입니다.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습니까? 우리가 당신을 많이 찾아 다녔습니다, 하는 것이지요. 그때 예수님의 대답이 26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의 분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건널 수 없는 강처럼 나누어집니다. 그러면 가까이 따르던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부르신 제자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길이 십자가를 지러 가시는데 제자들은 뒤에 따라 오면서 누가 더 높은 자리 차지할까 하는 공로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 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을 보고서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예수님을 따라 나서시겠습니까? 먹고 배부른 까닭입니까? 아니면 표적을 본 까닭입니까? 여기서의 표적은 오병이어를 통하여 무슨 표적을 보이고자 하신 것입니까?
30절을 봅니다. 무슨 표적을 보이시겠습니까? 31절 이하에서 자신이 살을 찢고 피를 흘려 너희에게 주어서 먹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표적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것을 믿지 못합니다. 60절에서 이 말씀이 어렵도다, 합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자기를 살리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66절에서 제자 중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사람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누가 주님을 믿고 따라 나설 수 있습니까? 아무도 못합니다. 어렵도다, 하면서 다시는 주님을 따라 나서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경이 증거 하는 이런 예수님이 증거된다면 많은 사람이 따라 나서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65절에서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시지 않으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게 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떠한 것들을 구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살 찢으시고 피 흘리신 그 주님에 의하여 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임은 언제나 주님의 공로만 높아져야 마땅합니다.
(박영선 목사의 이야기-고삼 수능고사 기도회에서)
요한복음 6:1-15 얼마나 되겠습니까? 2000. 1. 2.
2,000년 첫 주일입니다. 그런데 설교 본문은 지난해 것과 동일합니다. 아마 대부분의 직장이나 교회가 새로운 천년, 새 희망 새 목표를 세울 것입니다만 그러나 성경이 증거 하는 바로는 해 아래 새 것이 없습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전1:9-10)
이미 1천년 전에도 새로운 밀레니엄이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인간이 큰 희망을 가지고 출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천년의 역사 안에는 온갖 범죄와 질병과 전쟁이 얼마나 이 지구상에 흘러 넘쳤습니까? 그러므로 새 천년이라고 한들 무엇이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새로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이 새로운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로운 것이 되었도다”(고후5:17)
그러므로 우리의 목표는 다시 새로운 천년이 오든지 아니면 오늘밤에 주님이 재림하시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소망인 것입니다.
지난주에 오병이어를 통하여 어떻게 예수님을 증거하는지를 보았습니다. 어린아이의 작은 도시락을 가지고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았으니 우리도 우리의 작은 정성을 모아서 하나님이 큰일을 이루어 내자는 식으로 할 수 없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 많이 세상적인 가치관에 젖어서 살고, 또 많은 설교와 간증을 통하여 내가 하나님께 어떻게 하였더니 이렇게 하여주셨다는 식의 정리가 이미 되어 있기에 고쳐지기가 힘이 듭니다. 힘이 드는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주님이 역사하지 아니하시면 사람의 가르침과 공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증거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면 ‘아무리 그래도 제자들이 도시락을 찾아오지 않았거나 어린아이가 도시락을 내어 놓지 않았으면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야’ 라는 생각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제자들과 어린 아이가 있었으니 그런 일이 이루어졌지’ 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래도’ ‘그래도’
그러한 이유는 세상의 가치관이 그렇게 우리를 만들고 있고 또 그러한 가치관에 따라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쉽게 알아듣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도 헌금을 많이 하면 돈을 많이 벌게 되는 것처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 보면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거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돈을 벌려면 열심히 돈버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돈을 버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생을 주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썩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하는 것이 다름을 말하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려면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권의 흐름을 알고 잘 투자하는 것이 부자 되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에 솔깃해지는 이유는 그런 말이 알아듣기가 쉬운 것입니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 ‘티끌 모아 태산’ 이러한 속담처럼 사람의 작은 힘이지만 모으면 큰일을 이루어 낸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린 아이의 도시락이지만 제자들이 그것을 주님께 드렸기에 주님이 그것을 사용하여 기적을 베푸셨다, 라고 하면서 우리의 적은 것이라도 바치자, 라는 식으로 말하면 옳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려서 그 드린 것으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런 분이 작은 도시락 하나 없다고 할 일을 못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제자들이 가지고 온 어린 아이의 도시락이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가 증명되는 것입니다.
지금 배고픈 사람들이 성인 남자만 5천명이니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하면 만 명이 넘는데 그 작은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 더 힘 빠지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다면 차라리 포기하기에 허탈감이라도 덜하지요. 그런데 겨우 구하여 온 것이 어린 아이 도시락 하나라는 것입니다. 집안에서 1,000만원이 필요하다는데 아이가 그것을 보고 아빠 나 돈 있어요, 하고 가지고 온 것이 200원일 때 그러한 모습인 것이 오병이어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작은 정성을 모아 주님의 기적을 유발시키자는 차원이 아니라 더 실망하게 하고, 더 보잘 것 없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오직 주님의 일하심만 부각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주님의 모습이고 교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능력을 행하셨지 않느냐고 반문하시겠지만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자신의 살 찢으심과 피 흘리심을 말씀하시고 점점 십자가로 가까이 나아가실 때 예수님은 그야 말로 보잘 것 없는 모습이셨습니다. 그 당시의 로마 군인들과 대제사장들 앞에서 초라한 몰골이었습니다. 이사야 53장의 예언대로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바로 자신의 살과 피로 자기의 택한 백성을 영생의 양식으로 배불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이러한 모습으로 부름 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 1:26-31절을 봉독합니다. 우리의 부르심이 세상의 잘난 것이 없는 자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이 싫지만 그러나 그렇게 부르심을 통하여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동원하시고 그 기적에 참여시키시고 어린아이의 도시락을 통하여 그런 일을 하시는 것이 주님의 일하심에 보탬을 주고 협력하는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 홀로 일하심을 드러내는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드레가 9절에서 무엇이라 합니까?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이 말을 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제자들에게 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먹게 하겠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적용을 해보고자 합니다. 올해도 교사를 임명하고 서리집사를 임명하고 찬양대를 임명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대부분 저는 잘못하는데요, 그렇게 말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일하심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유능하고 실력이 있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목사라면 학교 선생과 은행원이 두 사람 있을 때 어디에 임명하시겠습니까? 선생은 교사로 은행원은 회계로 하면 좋겠지요. 이러한 생각이 하나님의 일을 세상의 일과 같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실력과 능률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국민교육헌장을 외워서 그런지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교회일도 세상의 능력 있는 사람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사용하듯이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교회는 무엇을 생산하는 공장이 아닙니다. 회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람됨을 훈련받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고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자존심이나 잘남을 내세우는 곳이 아니라 얼마나 자기의 부족함을 아는가 하는 것으로 부름 받는 곳입니다.
그러니 교사를 하면서 말 안 듣는 아이들과 다투다가 화를 내고, 내 다시는 교사 안한다 하다가 또 아니야 이러면 안 되지, 하는 것입니다. 교사를 하면 다 마음이 맞습니까? 맞지 않습니다. 다 다릅니다. 어느 교회에서 여름 수련회 셔츠를 만드는 일에 한 시간을 의논했다는 것입니다. 서로 자기 잘났으니까? 그러나 그런 모습 보고서 나는 싫다 하고서 나는 교사 안하겠다고 물러서서 구경만 한다면 무엇을 손해 보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시고 오병이어를 사용하시는 것은 그 자체의 능력이 아니라 주님의 일하심을 보이시고자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실력과 능력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무능을 일하면서 발견하고 더욱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하려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교사하는가, 하나님의 일에 보탬을 주는 것이 아니라면 대충해도 되고 안 해도 되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하여 우리를 부르셔서 일 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통하여 주님의 일하심이 드러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니요의 사람입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정말 주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나는 아니요의 자세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겸손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하심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아는가? 일함으로 아는 것입니다. 구경만 하는 자는 잘 모릅니다.
기드온과 300명의 용사는 자기들의 용맹이 아니라 주님이 어떻게 싸우셨는지를 증거 하는 자들입니다. 무서워서 돌아간 자들은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3만 2천에서 무서우면 돌아가라. 2만2천이 돌아감. 남은 자 1만. 그래도 많다. 9,700명 제외. 겨우 300명으로 13만 5천명을 이긴 것입니다) 이들이 승리하고 돌아올 때 사람들이 환영하면 무어라고 말합니까? 머리만 걸쩍거리겠지요. 우리의 솜씨가 아닌데.... 이런 식으로 동원되는 자들이 바로 성경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십니다. 떼어주는 자들이 앉아서 받아먹는 자보다 나은 점이 무엇입니까? 어떠한 개인의 자질과 능력의 나은 면이 아닙니다. 주님의 일하심에 참여된 것입니다. 참여되었다고 하여 주님의 일에 보탬을 주는 것이 아니라 참여한 만큼 주님의 능력을 더욱 맛보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교사로 찬양대로 섬기는 자로 교회 안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구경꾼이 아니라 일함으로 주님의 기적을 더욱 맛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일을 우리가 이루어 내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자, 그런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은 일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보다 천사를 보내면 더 완벽하게 목사도 하고, 교사도 찬양대도 집사도 잘 해 냅니다.
그런데 왜 우리를 동원시키시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정리하면 우리의 일함을 통하여 나의 실력이 아니라 주님의 일하심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처럼 시기와 질투심이 많은 자가 무슨 주의 일을 한다는 것입니까? 그러니 우리 안에서 그래도 교회가 되어지는 것은 목사의 실력도 아니고 모든 직분자의 실력도 아님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유익을 위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름을 받아 교회 안에서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훈련입니까? 무슨 업적을 이루어 내기 위한 훈련이 아닙니다. 사람 되는 훈련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만드는 일을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딪히기 싫다고 팔장끼고 구경만 하게 된다면 자신의 죄와 악함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부딪혀 보아야 자신의 실력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아 나는 아직도 이 정도밖에 안되는 구나, 그러니 나는 죄인이고 예수님의 공로가 아니면 안 되구나 하는 것을 서로 부딪치며 알아가는 것입니다. 교사를 하면서 찬양대를 하면서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도할 것이 많아집니다. 일 멋있게 이루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나를 죽여 달라는 기도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직도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내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주님을 죽인 죄이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는 자리가 교사의 자리고 찬양대의 자리고 제직회의 자리이고 공동의회의 자리입니다. 아직도 지고는 못살고 당하고는 못사는 우리가 언제 주님의 그 형상이 이루어지겠습니까?
물론 주님의 말씀의 능력이 이루어 가실 줄을 믿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마술처럼 펑하고 바꾸어 놓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아주 사소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간섭하시고 다듬어 내시는 것입니다, 신부수업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우리 성질 그대로 다 부리다가는 주님의 나라에서 신랑하고 살겠습니까?
연고전을 아시지요. 양대 사학 명문끼리 체육대회를 하는데 지금은 학생들이 직접 뛰는 것이 아니라 특기생을 뽑아 와서는 대신 뛰고 있습니다. 연고전의 역사를 모르지만 처음에는 학생들끼리 친선을 도모하는 의미에서 체육대회를 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정작 땀을 흘리고 뛰어야 할 본인들은 벤치에 앉아서 응원만 하는 것입니다. 뛰기는 용병들이 뛰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이와 같아집니다. 용병들을 구입하는 것입니다. 찬양 잘하는 용병, 전도 잘하는 용병, 설교 잘하는 용병, 정작 뛰어야 하고 부딪혀야 하고 훈련되어야 할 사람들은 관중석에 앉아서 관람료만 내고 누가 누가 잘하나 구경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 되도록 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교사도 찬양대도 집사도 시키시는 것임을 아시고 올해도 많이 싸우시고 부수어 지고 깨어져야 합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를 알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직 주님만 우뚝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6:17-21 두려움 2000. 1. 9.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불안과 두려움이 다 있습니다. 현재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혹시 어떤 사고가 일어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보험을 들기도 하고 종교를 가지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나오는 것도 무언가 불안하니 의지할 데가 있어야겠다는 필요에 의하여 나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자신의 현실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나오기도 하는 것입니다. 병을 고치기 위하여, 위로 받기 위하여, 죽음후의 불안에 대비하여, 등등의 필요에 의하여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종교인들을 보고서 혀를 차면서 어떻게 그렇게 나오는가, 착한 일을 하고 선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 영생과는 무관한 사람들입니다. 마치 먹고서 배불렀기에 따라 나선 사람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두려운 주님을 아직 만나지 못하였기에 그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제자들에게 두려운 분으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 라고 말씀하시지만 예수님의 나타남이 풍랑 이는 밤중에 바다 위를 걸어오시니 제자들은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왜 오병이어를 말씀하시는 가운데 이 사건을 넣어서 말씀하고 있을까요? 지금까지 오병이어를 통하여 예수님을 어떻게 증거하는지 첫 번째로 보았고, 두 번째는 우리의 적은 것이라도 주님께 바쳐서 큰일을 이루어내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라는 자기 한계를 발견하게 하기 위한 도구로 제자들과 어린이의 오병이어가 동원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계속하여 자신이 살과 피를 주시기 위하여 오심을 말씀하시면 되는데 왜 중간에 이런 사건이 들어 있느냐 하는 질문을 해보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하고서 보면 그냥 슬쩍 넘어간 것보다 얼마나 풍성한 내용이 그 안에 들어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성경을 가지고 2,000년 동안을 전 세계에서 지금까지 설교를 하여도 또 새로운 은혜의 풍성함이 나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본문을 봅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으로 사람들이 억지로 임금을 삼으려고 하자 예수님이 제자들을 먼저 배를 타고 건너가라고 하시고서는 자기도 산으로 피하여 가십니다. 이 내용이 좀더 상세히 기록된 마태복음을 봅니다.
마태복음 14:21-33절. “봉독” 오병이어를 행하시고 나서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보냅니다. 왜 제자들을 재촉하여 보냈을까요? 제자들이 미적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왜요? 이제 예수님이 임금이 되면 자기들이 한자리 하는데 이런 분위기를 잘 살리면 뭔가 일이 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왜 이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가시는데 제자들은 누가 서로 크냐며 서로 다투면서 따라가는 자들 아닙니까? 그러니 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니까 제자들이 이제 일이 되어간다 싶은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제자들을 먼저 재촉하여 배를 타고 건너가게 하시고서는 예수님이 무리를 보내시고 홀로 피하여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산에 가셔서 기도하시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건너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 갈릴리 호수는 그들의 생업 터전이기에 누구보다도 더 잘 압니다. 그리고 대부분이 어부출신이라 어지간한 파도는 이겨냅니다. 그러나 물결이 거슬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큰 바람으로 풍랑이 일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나타납니다. 어떻게 나타납니까? 바다위로 걸어오시는 것입니다. 다른 배를 타고 오시면 제자들이 두려워 안 할 텐데 바다위로 걸어오시니 얼마나 두려워하였는지 유령이다, 그러면서 벌벌 떠는 것입니다. 풍랑보다 더 두려운 유령을 만난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왜 예수님이 두려움으로 오시는 것입니까? 처음부터 같이 타고 가시든지 아니면 배를 타고 오시든지 하시면 될 텐데 마가복음에서는 제자들의 마음이 둔하여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오심을 통하여 무엇을 분리시키는가를 보여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를 통하여 떡만 먹은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두려움으로 다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두려움으로 다가오심을 통하여 떡의 문제가 아님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분리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으라고 말할 때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 그렇게 말합니까? 아니면 예수 믿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두려운 예수님을 말하고 있습니까? 처음부터 두려운 예수님 이야기 하면 되겠느냐고 처음에는 좋게 말하고 호감을 가지게 하고서 나중에 차차 심판도 죄도 이야기 하면 되지 그렇게 말합니다. 거의 전도가 이런 모습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전합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고, 회개하지 않으면 찍어 버린다고 외치는 것이 복음서의 시작입니다.
금요일 성경공부 시간에 보았지요. 복음이 자랑스러운 이야기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어떠한 실리적인 이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죄와 심판의 무서움을 알기에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가 아니고는 안 됨을 알기에 오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것이 복음이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저 사랑의 주님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의 주님이기에 내가 외로울 때면 위로 해주고 힘이 빠지면 힘을 채워주고 어려운 일 있을 때 해결해 주고, 이런 예수님만 소개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예수님 아니더라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그런 일 해결하시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닙니다. 단지 빵 문제 해결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2장에 어떤 사람이 자기의 형이 유산을 가로챈 모양입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예수님께 자기의 형에게 말하여 재산을 나누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야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산이나 나누는 그런 재판관으로 세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삼가 탐심을 물리쳐라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께 온 이유는 자기의 상속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나왔습니다. 그러나 해결 받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탐심을 물리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서 예수님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밤에 네 영혼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무엇 때문에 나오라는 것입니까? 영생의 문제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재산 문제 그런 것 나에게 묻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당한 유산을 받아야 한다는 이 사람의 필요를 탐심을 물리치라는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두려움을 느껴야 마땅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돈을 명예를 지위를 인생의 문제를? 아닙니다. 극동방송을 들으니 어떤 목사님이 모든 인생문제의 해결자이신 예수님이란 말을 인사말처럼 사용합니다. 그러나 재산 문제 해결 받으러 왔다가 해결 받지 못하였습니다. 병고침 받는 자가 다 고침 받은 것이 아닙니다. 고침 받았다고 영생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왜 자꾸만 예수님이 구하지 말라는 것을 자꾸만 사람들이 구하고 있는 것입니까?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 하지 말라면 염려 안하면 되는데 우리의 염려와 불안과 두려움이 모두 내일 일을 위한 염려입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께 구하는 것이 구하지 말라는 것만 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잘못 구하는 이유는 우리가 아직 주님의 두려움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주님을 만나고서 뭐라고 합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그렇게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약이기에, 라고 말하시겠습니까? 그러면 바울 사도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 엎드려 진 것은 무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십니까? 그 품에 안겼던 사랑받던 제자 요한도 예수님을 보고서 죽은 자와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자신의 현실적인 필요를 위하여 구하는 것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영생과 무관한 종교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유익이 있겠지요. 그러나 내가 이만큼 정성을 바치니 하나님도 알아서 무언가를 보답하여 주시겠지. 설마 지옥에야 보내겠는가? 교회에 나오지도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러한 착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먹고서 배부르고 병고침을 받고서 따라 나선 자들이 어디에서 떠나는 것입니까? 영생의 양식이라는 주님의 살과 피를 말씀하시자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떠나는 자들과 떠나지 않은 제자들의 분기점이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의 두려움의 사건입니다. 병 고침을 보고, 오병이어를 통하여 빵문제 해결을 보고서 자기들의 임금을 삼으려는 자들은 모두가 다 물러 갑니다. 그러나 풍랑 이는 바다위에서 풍랑보다 더 무서운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어떻게 말합니까? 빵 문제가 아니라 영생을 말씀하시고 자신의 살과 피를 말씀하시자 그 수많은 무리가 다 떠나고, 많은 제자들도 떠나고, 이제는 배에 탔던 제자들만 남았습니다.
67절을 봅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68절에 제자들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오병이어에서 떡을 얻어먹은 자들은 주님의 두려움을 맛보지 못하였습니다. 이들은 영생의 문턱에서 모두가 떠납니다. 그러나 주님의 두려움을 맛본 자는 빵 문제에서 영생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제자들도 십자가 앞에서 부인하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하시고 나자 이들이 고백한 그 영생의 말씀을 위하여 자기들이 두려움 없이 죽어 가는 것입니다. 관원들 앞에서 두려워하였던 제자들이 예수의 일을 전하지 말라는 그들의 요청 앞에서 우리가 사람의 말 듣는 것과 하나님의 말 듣는 것 중에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고 담대히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이름으로 핍박받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왜 찾아 나오셨습니까? 인생의 여러 문제를 해결받기 위하여 나왔습니까? 돈이면 해결되는 인생의 문제라면 주님께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누가복음 12장의 어떤 사람의 경우를 보셨지요.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외로워서 위로 받기 위하여, 사랑받기 위하여 오셨습니까? 사회에 나가서 불우 이웃 돕기를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해결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근원적인 두려움에 사로 잡혀 삽니다. 그것은 히브리서 2:15절 말씀에 보시면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사람이 무엇을 두려워하여 종노릇하고 있습니까? 죽기를 무서워하여 일생 사망의 권세에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시는 것입니까? 사망으로 사망을 이기신 십자가의 모습으로 다가 오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시무시한 십자가가 우리를 집어 삼키게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이렇게 죽은 자는 이제 사망이 왕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왕노릇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죽음을 극복한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으로 두려워하면서 벌벌 떠는 일이 없는 곳이어야 합니다.
이미 생명이 왕노릇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생존을 위한 떡에서 생명을 위한 주님의 살과 피로 나아가는 길에 주님의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와 사망이 무엇인지 그 두려움이 어떤 것인지 더 잘 알도록 주님의 말씀을 보아야 하고 주의 성령의 역사를 간구하여야 합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세상의 판단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을 바로 알게 되고 믿게 되면 어떤 고백이 나오겠습니까?
주님이 세상의 것 아무것도 안 주셔도 영생 주심으로만 영원토록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참으로 두려운 주님을 만나심으로 세상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마시고 담대히 영생을 맛보며 살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6:22-40 하나님의 일 2000. 1. 16.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사람의 글을 보니까 자기가 교회에 나왔더니 사람 모으라, 돈 내라, 건물 짓자, 이 말만 들었다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용어로 바꾸면 전도하라, 헌금하라, 성전 짓자, 그런 말이 되겠지요. 이런 말에서 자유로울 교회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워낙 하나님의 일이라는 말로써 전도하라, 헌금하라, 성전 짓자, 라는 말을 많이 들어 왔기에 하나님의 일이란 이것만이 하나님의 일인 양 생각한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주일성수, 십일조까지 하나님의 일로 강조하여 온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 요한복음 6:29절에 보니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나는 예수 믿으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단순한 생각을 하시면 안 됩니다. 예수 믿는 일이 사람으로는 불가능하기에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이란 사람의 모든 능력을 다 동원하여도 결코 할 수 없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 보시면 됩니다. 다르게 말하면 사람이 이루어낼 수 있는 일이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무엇을 이루어 내고서, 보라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이루어 내었다 하는 그런 일은 사람의 일이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러한지 전도에 대하여만 잠시 말씀드리고, 예수 믿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이 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전도하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이라고 하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상명령이라고 합니다. 지상명령(至上命令)이란 최고의 명령이라는 뜻인데 그러면 전도만 그러하고 나머지는 대충하여도 된다는 것입니까? 구약은 그냥 두고서라도 신약의 명령문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한 명령들은 다 내어버려두고 몇 가지만 그렇게 중요하게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은 왜 안 지킵니까? 네 눈이 범죄 하거든 빼버리라는 말은 왜 안 지키는 것입니까?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은 왜 안 지키는 것입니까? 그런데도 전도가 하나님의 일이라고 그렇게 강조된 이유가 무엇입니까?(어느 목사 이야기. 왜 전도하는가?)
그러니 전도가 사람이 총동원 주일하여서 교인 만드는 것이 전도가 아니라 십자가의 도가 증거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의 도란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십자가로의 초대는 주님께서 나와 함께 죽자는 초청인데 누가 이런 전도를 하고 있습니까? 사람으로는 못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흔히 사도행전 1:8절을 증인되자, 전도하자는 말씀으로 인용하는데 이 말씀은 화자의 의지입니다. 말씀하시는 분이 이루어 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의 전도들을 보면 예수님이 어떻게 성령을 보내어 전도하시는가를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이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가는 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 가정에 가는 것을 싫어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보내시니 간 것입니다. 바울이 아시아 쪽으로 가려고 하니 성령께서 막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3차 전도 여행이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일인 것이지 자기의 어떤 비전을 품고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전도자들의 공통적인 고백은 전도가 하나님의 일임을 보여주는 도구들입니다. 주께서 가게 하시고 붙여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께서 전도를 하게 하시면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전도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어야 하는데 오늘날 수많은 전도 프로그램이 사람의 일로, 사람의 의지적인 결단으로 되는 일처럼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람의 욕심을 따라 교인 모아 놓고서 하나님의 일을 하였다고 상주고 받고, 전도 간증하러 다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자랑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이 됩니까? 전도뿐만 아니라 헌금을 하던 예배당을 건축하든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하나님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결코 우리의 일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성령의 은사로 주어진 것입니다. 은사란 은혜로운 선물이기에 누구의 공로가 아니라 주신 분의 공로입니다. 그러니 주신 분만 높이기 위하여 은사가 주어진 것인데 사람들은 은사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일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22-25절입니다. 오병이어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입니다. 사람들이 배 한 척 뿐이었고 그 배에 제자들이 타고 갔고 예수님은 타시지 않은 것을 알고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그래서 배를 구하여 타고서 예수님을 찾아 바다 건너편까지 와서는 무어라고 말합니까?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발견하고서는 반가워서 물었겠지요? 우리가 당신을 찾아 이렇게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26절을 봉독합니다. “봉독” 진실로 진실로, 두 번이나 말씀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너희가 나를 찾음은 먹고 배불러서이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병이어를 통하여 배부른 것, 그것만이 너희가 나를 찾아온 목적이지 내가 너희를 위하여 살을 찢고 피를 흘려서 영생의 양식을 주는 것을 모르는 자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27절에서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합니다.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하나님의 인 치신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시니 당장 무어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28절입니다.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 하나님의 일을 자기들의 행위로 할 수 있는 것으로 질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들의 질문에는 자기들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제시만 해주면 얼마든지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하나님의 일이 무엇이다, 라고 말씀만 하시면 얼마든지 해 내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러한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하나님의 일이 사람 모으라, 돈 내라, 건물 짓자, 라는 식으로 본 것이 아니라면 그러면 하나님의 일, 바른 하나님의 일이 있을 것 아닙니까?
바른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해낼 테니 목사님 구체적으로 이것저것을 하라, 하지 말라 정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꼭 같은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니까 그게 어떤 일입니까?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지요, 그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답을 하여야 합니까?
29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하나님의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신앙의 6,29선언’이라고 말합니다. 군사 독재를 하다가 자꾸만 데모를 하니 노태우씨가 6,29선언을 하였지요. 민주화 하겠노라고. 저는 이 말씀을 외우기 쉽게 6,29라고 외웁니다.
하나님의 일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는 것이며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일은 다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더 중요하게 부각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믿어 줄께, 내가 믿어 주면 되지 않느냐, 하는 자신의 결단과 의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말이 어렵습니다.
나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 라고 하자 사람들이 무엇을 요구합니까? 30-31절에서 표적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그 떡을 먹은 자들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58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34절에서 무어라고 합니까?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합니다. 이 떡을 달라고 하였으니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서 떡을 달라 한 것이 아닙니다. 아니 이 정도를 설명하였으면 알아듣고 영생의 떡이 무엇인지 알아듣고 또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척 믿어주면 될 텐데 바보인가? 왜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는가, 하고 싶으시겠지요? 그러나 이들이 도저히 믿지를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35-36절 말씀입니다. “봉독” 내가 생명의 떡이다, 그러니 나를 믿는 것이 영생의 길이고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여도 그러나 사람들이 안 믿더라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죄가 무엇인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는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여 죄에 대하여 책망을 하시는데 죄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지 아니함이 죄입니다. 그러니 지금 사람들이 죄의 권세에 사로 잡혀 있기에 스스로의 힘과 능력과 결단으로는 결코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신앙의 6.29선언’이라는 말을 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일을 사람이 할 수 없기에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까?
37절에서 40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내시는 자를 사람이 절대로 믿지 못하기에 어떤 사람만 아들에게 옵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오는 것입니다. 아무나 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선택하시고 보내어 주시는 자만 예수님께로 오는 것이고 그들은 예수님이 내어 쫒지 아니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이 이러한 일을 하시는 것은 자기의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아들만이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예수님께 보내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시고 마지막 날에 다 살려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누구의 일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하신 자를 살려 내시기 위하여 성령을 보내시고 한 명도 실수 없이 잃어버리지 않게 하시기 위하여 오늘도 성령을 보내시어 전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빌립과 스데반과 베드로를 사용하시듯이 바울을 사용하시듯이 이들이 쓰임을 받는 것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일을 멋있게 이루어야지 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한 제자들은 마귀라는 소리를 들었고 바울은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은 지금도 하나님이 손수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고전9:16)
전적으로 하나님이 일하신 결과로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무능하고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게 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에 우리가 자신의 죄를 알고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알라고 이 요한복음에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오해하고 모르는 그런 말씀이 다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참된 하나님의 일이 그 아들을 믿게 하신 것임을 알고 이 하나님의 일이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확산되어 지는 그 능력을 맛보며 사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6:41-59 만나와 생명의 떡 2000. 1. 23.
오늘날 교회 안에서 영생이 천대를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생이 천대를 받는다는 것은 영생을 말하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으면 죄사함 받고 영생을 얻는다고 말을 다 하지만 이 영생 때문에 다른 것 아무것도 없어도 좋습니다, 하는 고백이 안 나오는 것이 영생이 천대를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떤 식이냐 하면 예수 믿고 영생을 얻었으니 이제 멋진 일을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죽어 천국 가서 상도 많이 받고, 또 이 세상에서도 폼 나는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세가 자기의 자존심을 내세우는 죄라고 금요일 ‘신앙클리닉’ 공부할 때 보았습니다. 이러한 자세가 하나님 앞에서조차 떳떳해 지려고 하는, 그래서 선물보따리 들고 가서 보란 듯이 내어 보이려는 자세가 얼마나 자기 영광과 자존심을 챙기는 죄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구정이 가까이 다가오는데 어떤 사람이 집안 식구들 모였을 때 큰소리칩니까? 그런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도 되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의 죄와 비참한 상태를 제대로 모르니 엉뚱한 곳에 신경을 쓰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와 비참을 제대로 알게 되면,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라는 말 외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합니까?
그러한 죄인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신다는 데 이보다 더 큰 복이 없습니다. 이 영생이 천하를 주고도 살수 없는 것이기에 이제 천하를 나에게 준다 하여도 그런 것은 나에게 이제 더 이상 가치가 없습니다. 그런 것은 배설물과 같습니다, 하는 자세가 나와야 영생의 가치를 제대로 안 것입니다. 즉 이제 죽어도 아무런 미련이 없습니다, 하는 것이지요.
죽어도 된다는 말을 오해하고서 자꾸만 무책임한 말처럼 들리는 것 같아서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지난주 수요일 학생회 수련회 갔다 오면서 경집사 운전 마치고 불안하지 않았느냐고? 그러면서 목사님은 지금 죽어도 상관 없다는 분이니,,,, 그렇게 봐주시니 참 감사합니다만 그런 쪽의 죽음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세상의 영광이 소용이 없다는 죽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영광이 아무것도 아님을 안 것입니다. 목회 성공 그런 말이 성경에 없습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다가 가는 것이 가장 큰 성공입니다. 미련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영생의 가치를 알게 됨으로 시시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만나와 생명의 떡’이라는 이 대조를 보고자 합니다. 만나, 그러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출애굽기, 광야, 백성들의 원망이 생각납니다.
출애굽기 16:1-4절을 봅니다. “봉독” 애굽에서 나온 지 두 달 보름 만에 양식이 다 떨어집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애굽에 있을 때에는 배불리 먹었는데 광야에 나와서 다 굶어 죽게 되었다고 원망을 합니다. 물은 며칠 만에 원망한 지 아십니까? 3일만입니다. 그 홍해 바다의 기적을 보고서도 3일 만에 원망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영생을 이야기하고 그 영생의 가치를 말하고 돌아서는 순간 밥문제로 싸우는 것이 우리의 모습 아닙니까?
물은 3일 만에 원망을 하였는데 양식은 두 달 보름이나 되어서 원망을 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러는데 한 사람이 가장 간단한 도구를 챙겨서 양식을 가지고 가면 약 한 달 정도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두 달 보름동안 버텼으니 얼마나 아껴 먹었겠습니까? 그것이 자기들의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견디다, 견디다 양식이 다 떨어지자 원망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나를 주시는데 하나님이 테스트를 만나로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내 말을 순종하는가, 아니하는가, 테스트합니다. 어떤 식으로 하십니까? 날마다 거두어들이되 하루 양식만 거둘 것, 안식일은 전날 두 배로 거둘 것. 이 두 가지의 말씀을 다 지키지 못합니다. 많이 거두어 다음날까지 두었더니 썩어서 벌레가 생겼고 안식일에 거두러 나갔더니 없었고, 그러니 만나를 통한 테스트에 합격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 40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신 이유는 그것을 먹고 살아라고 광야에서 영원히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나를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까지만 주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그 땅의 곡식을 먹을 때에 만나가 끊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나를 통하여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가를 광야 생활이 끝날 즈음에 하신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신명기 8:1-3절입니다. “봉독” 광야 40년 동안 낮추시고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나를 주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보이시는 것이 만나를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어디에서 인용하십니까? 40일 금식 후에 사탄이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유혹 앞에서 말씀하시지요. 그러니 오병이어를 통하여 오병이어로 너희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의 살을 먹어야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썩는 양식이 아니라 영생 하도록 있는 양식을 말씀하기 위하여 오병이어를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만나와 예수님 자신이 생명의 떡이라는 대조를 통하여 우리의 한계가 무엇이며 왜 예수님이 자신의 살을 영생의 양식으로 주셔야만 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1) 만나는 사람들이 거두어들일 수가 있었습니다. 많이 거둘 수도 있고 적게 거둘 수도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 왔지만 자기들의 눈에 보이고 만져지고 먹을 수 있는 양식의 형태로 주어졌기에 거두어 들여서 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도 41절에서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사람들의 말이 무어라고 합니까?
42절. ‘가로되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 하늘로서 내려 왔다고 하느냐?’ 그 아버지를 아는데 어찌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고 하는가 하는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친절하게 설명하거나 이해시키려고 하지 아니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놀라는 것입니다. 전도란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43절, 44절입니다. “수군거리지 말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살리리라”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으로 알아보고 나에게 오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만나 먹고 죽었으니 이제 나를 믿으라는 그러한 요청이 아닙니다. 그러니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아니하시면 예수님께로 오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롯이 소돔, 고모라 성에서 천사들의 손에 끌려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이 끌어 내셔야만 예수님이 영생의 양식인줄 알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2) 만나는 사람들이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떡은 요구조차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우리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라고 말하여도 그들은 예수여 당신이 필요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만나와 같은 것을 지금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병이어를 보고서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고 하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병고침을 보고, 먹고 배불러서 온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은 생명의 떡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의 요구는 여전히 자신들의 육의 요구만 하는 것입니다. 썩는 양식만 관심이 있습니다. 영생에 대하여는 감각이 아예 없다, 라는 것이 성경의 지적입니다. 이것이 허물과 죄로 죽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자신이 지금 죽어 있기에 영생의 떡, 생명의 떡이 필요한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세상에 예수님을 소개하고 증거 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이 택하시지 않은 자는 예수님을 향하여 영생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영생은 처음 믿을 때 영생 얻은 것으로 일단 정리를 합니다. 요한복음 1:12절, 5:24절, 좀더 나가면 고린도전서 12:3절. 그러니 영접하고 믿었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생을 얻었다고 확신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이란 우리의 영접의 결과도 아니요 우리가 확신을 가진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면 그런 말을 못하고 또 그 선물로 주어진 믿음으로 인하여 영생이 주어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를 알기에 지금까지의 귀하게 여기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영생 얻었다면 목회 성공 시시하다, 노회장, 총회장 시시하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 하려고 돈을 쓴다니 도대체 영생을 무엇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날 누가 교회 나와서 영생을 구하고 있습니까? 누가 예수님을 향하여 나는 영생 주신 것만으로도 평생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하는 사람이 있는가를 남을 보지 말고 우리 자신을 봅시다. 만약 우리 안에 영생의 귀함을 알고 예수님의 살과 피가 우리를 살리는 영생의 양식임을 안다면 그것이 바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우리가 요구하지도 않은 영생이 선물로 주어진 증거입니다. 천하를 주고도 살 수 없는 영생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48-51절입니다. “봉독” 너희 조상은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 그러나 나를 먹는 자는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역시 사람들은 어떤 반응이 나타납니까? 52절,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서 먹게 하겠느냐고 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한계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의 살을 먹고 자신의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기에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살은 참된 양식이요 자신의 피는 참된 음료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는 어렵지가 않습니다. 이미 십자가 이후에 성령이 임하심으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사람으로는 불가능한 영생의 양식을 받아 살아가면서 이 영생의 가치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좋았으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르는데도 기쁠까요? 다 빼앗기고도 기뻐할까요? 감옥에서도 기뻐할까요? 그런데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복음을 인하여 고생하는 자들의 고생을 전혀 하지 않는데도 왜 그리 불평과 원망이 많이 나오는 것입니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아예 영생이 없어서 그런지, 아니면 영생이 있기는 한데 그 가치를 몰라서 그런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영생이 있는 자라면 영생의 가치를 말할 때 이것만으로 은혜가 됩니다. 이것만으로 감사가 됩니다. 이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세상의 모든 영광과 바꿀 수 없는 것이 영생입니다. 무엇으로 주님의 살과 피를 대신 하겠습니까?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보배로 대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아들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대속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삶은 만나의 풍족함이 관건이 아닙니다. 먹고도 죽은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풍족함이 아닙니다. 먹고 배불러 따라온 자들은 영생의 문턱에서 물러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사나 죽으나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출세하고 세상의 영광을 가짐으로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착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 영광 하나도 없어도 나는 이 예수님이 더 좋다, 하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4:16-18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요한복음 6:60-71 영생의 말씀 2000. 1. 30.
그동안 다섯 번에 걸쳐 요한복음 6장을 설교하였습니다. 오늘 6장을 마무리 하면서 그동안의 설교를 제목을 따라 한 번 더 확인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 ‘오병이어’ 우리는 이 사건을 보면서 너무 쉽게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먹을 것, 입을 것을 위하여 염려 말라고 하셨으니 이것들도 주님께서 채워 주십니다. 그러나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알라는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먹을 것을 해결하여 주는 메시아, 현실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메시아를 기다려 왔다는 것이 임금 삼으려고 한 사실에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생명이니 영생이니 하는 것은 아예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 ‘얼마나 되겠습니까?’ 오병이어 같은 작은 것이라도 주님께 바쳐서 큰 기적을 이루어 내자 하면서 사람들의 주머니를 긁어내는 것이 아니라 정말 보잘 것 없는 것임을 사람의 일로서는 어찌 할 수 없음을 보이시기 위하여 제자들과 어린이의 도시락이 동원되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들의 무능의 모습인 것입니다.
세 번째, ‘두려움’ 사람마다 생존의 두려움과 장래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계속하여 자신의 생존을 염려하며 그것을 보장하여 주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두려운 주님을 만나게 되면 빵 문제가 아니라 영생의 문제를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만나 주신 성경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서 죽었노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을 만나면 현실적인 필요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이며 의가 없기에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당에 와서 세상의 영광을 구하거나 세상의 현실적인 필요를 위하여 나오는 것이 아니라 두려우신 주님을 알기에 영생의 말씀을 위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네 번째, ‘하나님의 일’ 우리는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 내가 무엇을 행하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내가 정성을 바치고 열심을 다하고 하는 쪽으로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나중에 한 번 더 보겠습니다만 우리의 육의 생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영생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여야 할까요? 예수님이 무슨 법칙을 제시하면 자기들이 이루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까? 믿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람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만나와 생명의 떡’ 만나는 사람들이 요구하였고 거두어 들여 먹을 수도 있었지만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은 요구하지도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하늘의 떡을 아무나 알고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선택하신 자만 먹을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내용을 한 번 더 요약하면, 1) 예수님을 믿어야 영생을 얻는다. 그러나 2) 믿을 수 있는 것이 사람으로 불가능하다. 3) 그러므로 주님께서 일하심으로만 믿게 하신다. 이것을 통하여 사람이 무엇이 죄임을 알게 하시고 우리가 얼마나 영생 얻기에 불가능한 자인지를 확인시키시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한 번 더 확인을 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이 영생의 선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고서, 먹고 사는 문제보다도 이것이 더 좋아지는 성도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60절을 봅니다. 오병이어로 시작하여 영생의 양식이 자신의 살과 피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이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하면서 수군거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못 알아듣는 제자들은 자기들이 스스로 자원하여 따라 나선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라 나선 자들 중에 그냥 대중의 무리가 있고 또 가까이 따라 나선 제자 그룹이 있지만 이 안에서도 열둘과 구분이 되고 그중에서도 또 하나는 아닌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모여 들은 것은 사람들의 다양한 욕구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있으며 그들의 요구가 관철이 안 되면 어떻게 떠나는지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남아 있을 자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말씀이 걸림이 되기 때문입니다.
61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수군거림을 아시고서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이 말이 너희로 실족케 하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사람들로 하여금 걸림돌이 되는 것이고 실족케 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의 사역의 내용이 걸림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야 걸림돌이 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얼마나 걸림돌이 되고 눈에 가시 같았으면 걸림돌 자체를 없애 버렸겠습니까?
우리에게도 복음이란 걸림돌입니다. 우리의 모든 노력과 열성과 종교적인 업적들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기에 복음이 기쁜 소식이기 이전에 걸림돌이 먼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걸림돌로서 다 무너지고 부수어 지고 깨어져야만 복음의 가치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란 언제나 걸림돌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전도가 십자가의 도를 전하는 것이기에 사람마다 자기의 생존과 장래를 위하여 디딤돌을 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자기의 성장과 발전의 디딤돌을 삼을 뿐 아니라 신을 자기의 디딤돌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신의 비위를 맞추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신이 돼지 머리를 좋아하면 돼지머리를 바치겠고, 돈을 좋아하면 돼지머리 입에다가 돈을 넣는 것입니다. 정성을 원하면 겨울이라도 찬물로 몸을 씻고서 정성을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자기의 디딤돌로서의 신을 찾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 복음이니 복음이 얼마나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갈게 만들고 안색을 변하게 하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자를 돌로 쳐 죽이기 까지 합니다.
여러분도 설교를 지금까지 들으면서 도대체 헌금을 하라는 말인가 말라는 말인가? 열심을 내라는 말인가 말라는 말인가? 헷갈리시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예수 믿으라는 말입니다. 물론 이것이 주님의 은혜로만 되는 것입니다만 적어도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이기에 예수 믿으라는 말이 됩니다. 예수를 믿지 아니하는 사람에게 예수 믿으라는 말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그렇게 하지 말고 할 일을 정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지금 요한복음 6장에서 우리가 말씀만 하시면 표적만 보여 주시면 우리가 믿겠습니다, 하는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믿음의 주체를 가진 것처럼 말하는 것과 꼭 같은 것입니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까요? 이것은 사람들이 은혜를 모르고 자기들의 행함만 알고 자기들의 행할 수 있는 능력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이러한 행함의 체계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 외에 한 다른 법이 왔으니 곧 믿음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된다는 것은 우리의 행함으로 구원이 오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에 속하였다는 것은 살과 뼈를 가지고 있다는 표현이 아니라 우리의 행함의 능력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63절을 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 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 라는 말씀에서 육이라는 것이 바로 사람의 행함의 능력입니다. 유대인들이 영생의 양식을 위하여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런 일이라면 다 해왔습니다. 또 무엇이 부족합니까? 안식일 지켰습니다. 십일조 합니다. 구제 합니다. 전도 합니다. 무엇이 더 부족합니까? 무엇이든지 할게요, 말씀만 하옵소서. 이것이 육에 속한 모습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님이 나를 믿어라, 그것이 사는 길이고 영생의 길이다, 나의 말이 영생이다, 영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뭐라고 합니까? 어렵도다.
그런데 우리는 쉽게 생각합니다. 믿으면 될 텐데 그것을 못 믿는가, 하는 것도 역시 육체의 일입니다. 어떻게 믿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 이러한 육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자신의 살을 주셔야만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가 있다, 가룟 유다입니다. 열둘 중에서도 하나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닌 자를 택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는 긍휼의 그릇으로 하나는 진노의 그릇으로.
그러므로 결국 65절입니다.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시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오게 하시지 않은 자는 병 고침을 받았든지 먹고 배불렀든지 간에 모두가 떠나는 것입니다.
66절입니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육적 욕구를 따라 나선 자들은 결국 다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은 무익한 것입니다. 그러니 살리시는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육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을 말씀하시자 다 물러갑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종교적인 열심이 우리를 영생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고 하니 그동안의 자기의 종교적인 열심조차 다 내어 버렸지요? 그래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종교적인 열심이 빠져나가서 교회가 유지가 안 되더라도 영생을 받는 길은 오직 주님의 일하심 만이라는 것을 증거하여야 합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것은 오직 주님의 살과 피가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다 떠났습니다. 자기의 필요를 위하여 모인 무리들은 영적인 문제 앞에서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제자들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결국 영생의 말씀이 있음을 알고 남은 자는 자기들이 잘 알아보고서 남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예수님께로 보내신 자들입니다. 그러니 자기들의 실력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열둘 중에서 하나는 또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당에 왜 나옵니까? 영생이 말씀을 받았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육은 무익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말씀입니다. 내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서 자신의 살과 피를 주심으로 우리를 살려내신 것입니다.
이 영생 주시는 일을 요한복음 7:39절에 예수를 믿는 자가 받을 성령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임하심으로 우리가 생명을 받았고 이제는 떡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영생을 주신 분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영생을 받은 자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이미 나의 것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인데 무엇을 주님께 드리고 말고 할 것이 있습니까? 모든 것이 은혜로 주어진 것이기에 우리가 모든 것을 내어 놓아도 그것은 우리의 공이나 자랑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일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할 때에도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각자 은사대로 하시는 것입니다. 쓰레기가 보이시면 보는 분이 청소하면 됩니다. 연보도, 섬김도 이렇게 하는 것이 영생을 은사로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요한복음 7:1-13 초막절 2000. 2. 6.
명절을 잘 쉬셨나요? 오늘 읽은 성경에서 유대인의 명절이 나옵니다. 초막절인데 유대인의 3대 절기 중 끝에 있는 절기입니다.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이 유대인의 3대 절기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명절인 설, 대보름, 추석 등의 명절은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입니까? 음력이지요. 음력은 태양력이 아니라 달을 기준으로 보고 절기를 정한 것입니다. 음력을 중요시 한 것은 농사에 직결되기 때문이지요, 바닷가에서도 달의 움직임으로 밀물과 썰물의 때가 일어나는 것이니 음력의 절기들을 중요시 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양력을 중요시 하더라도 아직 우리의 정서는 음력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명절은 자기들의 농사나 자기들의 중요한 날을 기념하여 만든 명절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런 날을 명절로 하라고 지정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명절도 하나님이 정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의 3대 절기를 알아야 오늘 말씀의 뜻을 알게 됩니다. 명절을 배경으로 말씀하시니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명절의 의미를 보아야 하고 그리고 예수님이 그 명절을 어떻게 해석하시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선 2절에 보시면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라고 시작합니다. 유대인들은 3대 절기에 성전에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형제들이 갈릴리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하는 것입니다. 갈릴리는 변방이고 유대가 수도이니 당신이 스스로 나타내기를 원한다면 서울로 가시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어 무슨 일을 이루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려면, 뜨려면 서울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막절에 전국적으로 유대에 사람이 모이니 당신을 나타내려면 유대로 가소서, 하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시면, 스스로 나타내기를 원하면서 묻혀서 지내는 자가 없지 않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자신을 나타내려고 하는 분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가 하나님이면서 자기를 비워 종의 모습으로 오셨기에 자기 스스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종으로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나타내어 자기를 증명하는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형제들이 그렇게 오해하고 유대로 가소서, 하니 예수님이 나의 때가 아니라고 거절하십니다. 그러면서 나중에 몰래 유대로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방금 때가 아니라고 하시고서는 또 몰래 가시는 것입니다. 때에 대하여 갈릴리 가나의 혼인 잔치를 보면서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때라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때를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때가 아니라는 것은 동생들의 그러한 요청을 거절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나의 나타냄을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과 때를 따라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아무도 모르게 초막절에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에서 유대인의 명절과 초막절의 의미를 살펴보면 예수님이 초막절 뿐 아니라 모든 명절과 절기를 어떻게 완성하시는지를 보게 됩니다. 조금 복잡하여도 유대인의 명절을 아는 것이 예수님의 일하심의 의미를 알게 되기에 성경을 찾아가면서 유대인의 명절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레위기 23장입니다. 1) 먼저 유월절입니다. 5-6절입니다. 정월 14일을 유월절로 지키고 15일부터 칠일 간 무교절로 지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국가로 출범하는 기초가 되는 날입니다. 애굽에서 430년간 종살이 하다가 출애굽한 날입니다. 이 유월이라는 말은 넘어가다, 라는 말입니다. 애굽의 열 가지 재앙 중에 마지막 재앙이 장자의 죽음이지요. 짐승까지 처음 난 것의 수컷을 멸하는 재앙인데 살아남는 방법은 어린양의 피를 바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피가 발린 집을 죽음의 천사가 넘어가는 것입니다. 유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출발은 자기들의 독립운동도 아니고 자기들의 혈통도 아닌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의 혈통을 중심으로 구원한다면 어린양의 피를 바르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피를 바른 집만 살아남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어린양의 피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유월절이 이스라엘의 명절의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월절은 어린양의 고기를 먹고, 이어서 칠일은 누룩 없는 떡을 일주일간 먹기에 이 절기를 무교절이라고 합니다. 쓴 나물과 누룩 없는 딱딱한 떡을 먹으면서 애굽의 고난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교절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무교절은 유월절에 붙어 있어서 유월절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유월절을 하나님이 제정하시면서 해의 첫 달이 되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기존의 달력이 있는데 새롭게 첫 달이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기존의 달력은 3월 중순쯤인데 새롭게 달을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어린양의 피로 새롭게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12:2절.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
2) 오순절입니다. 15-16절에 보시면 유월절을 지나 칠 안식일을 지나서 오십 일째 되는 날을 절기로 삼아 곡식단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 절기를 오순절이라고 하고 칠칠절이라고도 합니다. 칠일을 일곱 번 세기 때문에 그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보리 수확을 거둘 때이기에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니 오순절, 칠칠절, 맥추절, 다 같은 절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절기도 역시 무엇을 기준으로 헤아리고 있습니까? 유월절을 기준으로 헤아리는 것입니다.
3) 초막절입니다. 34절과 42-43절을 봅니다. 초막절을 수장절이라고도 합니다. 이 절기는 가을 곡식을 거두어 저장하는 때이기에 수장절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 날도 결국 어디로 돌아가는가 하면 광야의 고난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일주일간을 나뭇가지로 만든 초막에서 지내게 하심으로 출애굽 하여 광야에서 나온 것을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대인의 3대 절기가 모두 어디에 연결되어 있습니까? 유월절에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유월절 없는 오순절, 유월절 없는 초막절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유월절에 기초하여 오순절이고 이 때가 보리 수확이니 맥추절이라고 하여도 유월절 없는 맥추가 의미 없는 것입니다. 역시 가을 수확도 유월절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핵심이 3대 절기 속에서 무엇을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까? 유월절을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지키는 맥추절과 추수감사절이 성경의 맥추절, 수장절과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하는 뜻이어야지 성경의 절기를 지키는 의미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 3대 절기의 의미를 좀더 추적하여 봅니다.
출애굽기 12:5-10절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을 14일 저녁에 잡아서 피는 바르고 고기는 구워서 먹되 다음날 아침까지 남겨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혹시 남으면 불태워 없애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5절에서 무교절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교병은 누룩 없는 떡이니까 곡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무교절은 어디에서 행할 수 있습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25절입니다.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그러므로 출애굽하고서 이스라엘 백성이 일년 째 되던 해에 광야에서 첫 유월절을 지킵니다. 그러나 무엇은 못 지키겠습니까? 무교절은 못 지키는 것입니다. 무엇이 없습니까? 곡식이 없는 것입니다. 곡식이 출애굽하고 얼마 만에 떨어집니까? 2달 보름 만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광야에서는 만나를 먹었기에 무교병을 만들어 먹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어디에서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키는가 하면 광야 40년을 다 지나고 나서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5:10-12절을 봅니다. “봉독” 유월절 고기를 먹고 무교병을 먹는 것은 가나안의 곡식을 먹을 때 무교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만나는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 12장 25절에서 너희가 그 땅에 이를 때에 무교절을 지키라는 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무교절이 결국 유월절에 붙어 있는 것이고 오순절과 초막절이 다 유월절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월절에 이미 무엇을 하나님은 마음에 두고서 일하신 것입니까? 출애굽만 아니라 가나안에 들여 놓으시는 일까지 다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나안땅에서 수확을 거두어 수장하는, 즉 곡식을 거두어 알곡과 가라지를 분리하여 창고에 저장하는 날까지 어디로 연결시키는 것입니까? 유월절로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핵심이 유월절의 어린양입니다. 이 정신이 빠지면 언제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대신 희생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자체적인 힘을 의지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신약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유월절의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것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유월절을 지켜야 된다는 정신 나간 자들이 있는가 하면 특정 날자와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는 마귀적인 이야기입니다.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이 예수님을 버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것을 완성하셨기에 이제는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이 초막절에 왜 올라가십니까? 그 초막절을 지키시기 위함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초막절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백성을 구하여 내시는 일이 초막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만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는 것도 역시 유월절에 연결된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하여 성령이 오신 때가 언제입니까? 오순절입니다. 칠칠절입니다.
이 성령이 누구의 영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는 것이 오순절입니다. 그러면 수장절은 무엇으로 보면 됩니까? 모든 곡식을 거두어 알곡과 가라지를 분리하여 창고에 들여놓는 수장절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희생하시고, 오순절 성령을 보내시는 것이 주님 홀로 하신 일이듯이 역시 재림도 주님 홀로 이루어 내실 일입니다. 주님 홀로 이루어 내신다는 것은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출애굽기에서 유월절을 말씀하시면서 이미 무교절을 그 땅에서 지킬 것을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영원한 잔치는 주님의 나라가 임하는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약속을 이미 받았기에 미리 그 잔치를 맛보며 사는 것입니다. 어떤 자세로? 초막을 짓고 사는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초림하심으로 이미 종말이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말이기에 지금 주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추수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추수가 끝나면 주님이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시고 죽정이는 불에 넣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가 주님의 임하심을 기다려야 마땅한 신부의 자세가 되는 것입니다. 초막절에 유대로 올라 가셔서 초막절을 완성하시는 예수님이 이 마지막 때의 주님의 알곡을 추수하시는 것입니다. 이 소망을 바라보며 오늘도 내일도 초막에서 산다는 자세로 영원한 집을 바라보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성경의 명절이 우리에게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