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세 기

[스크랩] 창세기 강해 2

공 상희 2009. 5. 6. 12:35

 

 

 

 

 

 

창세기 강해 2

 

 

 

창원 늘푸른 교회 이장우 목사

 

 

 

 

 

 

35. 사라의 죽음 
36. 이삭의 결혼 
37. 아브라함의 죽음 
38. 선택 
39. 장자 만들기 
40. 이삭 
41. 이삭의 축복 
42. 벧엘 
43. 서원 
44. 우물가에서 
45. 총이 없음 
46. 경쟁 
47. 야곱과 하란 
48. 돌아가라 
49. 얍복 나루에서 
50. 얍복강 이후 
51. 다시 벧엘로 
52. 야곱의 허리 
53. 야곱의 복 
54. 라헬의 묘 
55. 에서의 형통 
56. 요셉의 꿈 
57. 유다와 다말 
58. 요셉의 형통 
59. 하나님의 섭리 
60. 죄를 깨닫게 함 
61. 유다의 희생 
62. 자신을 알리는 요셉 
63. 애굽으로 간 야곱 
64. 야곱의 유언 
65. 야곱의 예언(1) 
66. 야곱의 예언(2)
67. 유다 
68. 야곱의 죽음 
69. 요셉의 죽음 

 

 

 

 

 

창세기 23:1-20  사라의 죽음  2000. 3. 5.

 

 


사라의 죽음을 통하여 사라의 생애를 점검하고 또한 무덤을 위하여 밭을 사는 그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사라의 생애는 아브라함과 함께한 생애입니다. 아브라함이 신앙의 훈련을 받을 때 사라도 동일하게 신앙의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 낯선 곳으로 여행이 시작됩니다. 그런데 남편이라는 사람이 가는 곳마다 자기의 목숨을 살리고자 아내를 여동생이라고 말하도록 하는 그런 남편과 함께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놀라운 것은 사라가 남편을 주라고 하면서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5-6절입니다. “봉독” 남편 같지도 않은 남편, 자기가 죽을까 하여 아내를 팔아먹는 이런 남편을 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아내들이 본받으라고 베드로 사도가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까? 1-4절을 함께 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범죄 이후에 하나님이 주신 삶의 원리입니다. 비록 남편이 믿지 않는다 할지라도 남편에게 순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 믿지 말라는 말까지 순복하면 안 되지만 정말 남편을 순복하는 그 행위로 말미암아 남편도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부인이 믿음 좋다는 사람이 남편이 신앙생활을 잘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회에서는 신앙이 좋다고 하는데 가정에서 어떤지 모르지요. 늘 기도원이나 부흥회나 쫓아다닌다고 아이도 남편도 제대로 안 챙기면 남편이 그런 아내가 믿는 예수를 믿으려고 하겠습니까? 아내가 남편에게 순복하는 일에서도 믿음의 조상의 아내가 본을 보인 것입니다. 물론 남편도 아내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7절을 봅니다. 또 생명의 은혜의 유업을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부부관계를 교훈하면서 왜 사라를 예를 들고 있는지를 알겠습니까?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시면서 사라를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창세기 17:15-16절입니다.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을 주라 한 것은 아내가 남편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타락이후에 하나님이 주신 질서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조상의 아내에게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라의 실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기다리지 못하고 이스마엘을 낳게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씨라고 하였으니 여종을 통하여 낳아도 아브라함의 씨가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은 아브라함과 사라 사이에서 나온 자녀를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으로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게 하시겠다면 처음부터 아이를 잘 놓는 여인을 선택하시지 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이런 여인을 선택하셨을까요?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아이를 낳았다 하면 서너 쌍둥이씩 그것도 연년생으로 마구 낳게 되어야 자손이 많아질 텐데 원천적으로 자녀를 못 가지는 이런 여인을 선택한 이유는 언약의 자녀는 사람이 낳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낳으셔야 함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라가 가장 적절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자녀란 혈통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의하여 나오는 것임을 아브라함은 할례를 행함으로 상징화하고 사라는 아예 자녀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제 늙어서 경수가 끊어진 상태에서 이삭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무언가의 원인을 나에게서 찾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이 이루어 내신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낳으셔야만 된다고 요한복음 1:13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의 자녀가 주어지는 것을 이삭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삭이 결혼하여 몇 년 동안 자녀가 없습니까? 20년입니다. 그러니 이도 또한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가 어떻게 나오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데서 살리시는 그런 방법으로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사라가 127세를 향유하고 죽습니다. 성경에서 여인으로 죽은 나이가 기록된 유일한 여성이기도 합니다.

 

 

 

 

사라가 죽자 아브라함이 사라의 장지를 사려고 나갑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땅에서 지금 수십 년을 살면서 땅 한 평을 사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에서는 이것을 나그네로 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사라가 죽자 그 땅을 조금 사서 무덤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렇게 땅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서 그곳을 약속의 터로 삼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땅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후손들이 계속하여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무덤을 사기 위하여 그 지방의 사람에게 가서 밭과 거기에 딸린 굴을 팔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곳의 사람들이 아브라함에게 우호적입니다. 어느 땅이라도 무덤으로 사용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방백임을 그들이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가 아브라함에게 대한 호의적인 반응도 있지만 그들의 상술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중동의 사람들이 장사하는 태도가 이러한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냥 주듯이 하면서도 받을 것은 다 받아 낸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값을 치르겠다고 하니 은 400세겔이나, 어찌 사고팔겠습니까? 그냥 장사 하십시오, 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가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굴과 밭과 둘레의 수목인데 400세겔은 엄청 비싼 가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아브라함은 그 돈을 주고서 땅을 사므로 그들이 다른 말을 하지 못하게 그들의 법적으로도 정당하게 치룹니다. 
 

 

 


또 다른 의미는 언약 안에 들어오는 세상의 것은 반드시 값을 지불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희생을 치르지 아니하고서 언약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의 특색입니다. 이방인이 이스라엘 백성이 되려면 치러야 할 의식이 무엇입니까? 할례를 행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할례란 단지 통과의례가 아니라 세상과의 단절이라는 의미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막벨라 굴을 대가를 지불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입한 굴에 사라를 장사지냅니다. 이곳이 400년 후에 돌아올 거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도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 있다면 죽음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사라의 죽음을 아브라함이 슬퍼하고 애통하였지만 그러나 그 죽음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극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덤을 준비하여 자기도 그곳에 묻히고 이삭도 리브가도 야곱도 레아도 그곳에 묻히는 것입니다. 야곱과 요셉의 경우만 보겠습니다.

 

 

 

 

창세기 49:29-33절입니다. “봉독” 야곱의 최후의 유언이 무엇입니까? 그 언약의 땅에 묻히는 것입니다. 지금 아들이 출세한 애굽에서 묻히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땅의 그 조상이 있는 무덤에 묻히는 것이 최후의 유언입니다.

 

 

 

 

창세기 50:24-26절입니다. “봉독” 요셉 역시 최후의 유언이 자기의 해골을 애굽에서 메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약속의 땅에 묻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권고하셔서 이 땅에서 나갈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때에 나를 메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미이라를 만들어 두는 것입니다. 애굽의 총리이기에 우선 애굽에 그 시신을 안장하여 두지만 그 유언은 남아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할 때 요셉의 시신을 메고 나가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들어와서 살기 시작하여 430년의 세월이란 요셉의 생애를 뺀다고 하여도 300여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약속의 때가 차매 출애굽을 합니다. 이때 요셉의 해골을 가지고 나갑니다. 그런데 요셉의 해골은 막벨라 굴에 묻히는 것이 아니라 야곱이 세겜의 추장에게서 산 땅에 장사를 지냅니다. 이곳이 요셉의 후손들인 에브라임 지파가 정착한 곳이니 그곳에 요셉을 묻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다 정복하였다는 것이 여호수아서인데 그 마무리가 요셉의 해골을 가나안 땅에 묻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언약을 받은 당사자들이 죽어도 그 언약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해골을 메고 와서 그 약속의 땅에 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그 땅의 일부를 사는 것은 앞으로 하나님이 이 땅을 약속하신 대로 주실 것을 믿고서 준비한 것입니다. 이곳에 제일 처음으로 묻힌 사람이 사라입니다. 이러한 죽음이 복 있는 죽음입니다. 성도의 죽음이란 하나님이 귀하게 보시는 것입니다.

 

 

 

 

시편 116:15절.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요한계시록 14:13절. “자금 이후로 주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도다.” 사람의 죽음은 두 가지입니다. 주안에서 죽는 자와 주밖에서 죽는 자입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죽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부활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안에서 죽는 자의 복이며 지금 주안에서 죽은 자는 죽은 것이 아니라 쉬는 것입니다. 그 영광의 부활의 날을 기다리며 수고를 그치고 쉬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의 죽음은 복인 것입니다.

군대에 가보신 분은 처음 훈련을 마치고 작대기 하나 달고 자대에 배치를 받아 가는데 얼마나 불안하고 두렵습니까? 그런데 가는 그 날에 나오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누구입니까? 개구리 복을 입고 제대하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부러운지 나는 언제 제대하는가? 그러나 훈련을 받을 만큼 받아야 제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좋은 사람은 일찍 제대를 하는가 봅니다. 예수님은 33세에 제대하셨으니 우리는 모두가 예수님보다 오래 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보다 사라가 먼저 제대를 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훈련 중임을 아시고 부지런히 훈련에 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따라 믿음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다가 우리를 부르시면 얼른 달려가는 사람들이 됩시다. 그러기 위하여 준비를 항상 해두어야 합니다. 무덤을 준비해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안에 죽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죽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복입니다.
 

 

 


히브리서 2:14-15절을 봅니다. “봉독” 죽기를 무서워 일생에 종노릇 하는 자를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이 해방을 받은 자는 죽음의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이기에 이사 가는 날, 제대하는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신 집사님이 많이 아팠답니다. 그래서 아파서 죽겠다고 그런 모양이지요. 그러니 민석이가 있다가 아빠는 좋겠다, 빨리 천국가니까! 이게 아이의 철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창세기 24:1-67  이삭의 결혼  2000. 3. 12.

 

 


1절 말씀에 아브라함이 나이 많아 늙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늙었다는 말은 단지 나이만 많아진 것이 아니라 신앙이 진전되었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진전된’이라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나이만 많다고 신앙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만 아브라함은 이제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진전된 신앙이란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드린 그 사건으로 인하여 확정적인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56절에서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여호와 이레의 사건을 경험한 것이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언약의 핵심인 대속의 사건이 여호와 이레로 준비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어떤 믿음인가 하면 세계의 모든 역사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내리신 언약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고 믿게 된 것입니다. 그 언약은 무엇입니까? 너를 축복하는 자는 하나님이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하나님이 저주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약속이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이루어 진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 아들 이삭의 아내를 자기의 고향에서 취하여 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라가 죽었고 자기도 나이가 많았기에 하나님의 언약의 계속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약을 받은 사람은 죽어도 하나님의 언약은 계속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계속되는가 하면 아브라함처럼 계속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아브라함이 원래부터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믿음의 훈련을 통하여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신 것처럼 이제 그 언약에 들어오는 자들도 아브라함 같은 과정을 통과하게 하는 것입니다.(여기에는 고통이 수반됩니다)

 

 

 

 

그러므로 이삭의 아내를 가나안 현지인으로 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고향에서 데리고 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믿는 자는 믿는 자 끼리 결혼하여야 된다는 식으로 보아서는 곤란합니다. 물론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의 그 어떠한 조건 보다 믿음을 보아야 당연합니다만 그러나 이때는 아직 아브라함의 고향 사람들이 여호와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의 고향에서 자기 아들의 아내를 데리고 오라는 것은 약속의 민족은 아브라함 자신이 겪은 과정을 반복하고 답습시킴으로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약속에 포함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불러내신 것처럼 이제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격으로 그들을 불러내어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이 자기의 종들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에게 이삭의 아내 될 사람을 자기의 고향에 가서 데리고 올 것을 말하면서 맹세를 시킵니다. 이 종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만 이 종이 옛날에 아브라함이 자기의 아들이 없어서 자기 집에서 길리운 엘리멜렉이 자기의 상속자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한 그 사람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어떻든 이 종을 아브라함이 보내면서 하는 중요한 이야기가 7절에 있습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 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실찌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 찌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지금까지 이루어 오신 그 하나님이 너의 앞서서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어 준비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이 아브라함 평생을 통하여 만들어 내신 믿음인 것입니다. 이제 세상 그 무엇이 방해한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언약은 이루어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자를 종보다 앞서서 보내신다는 것을 아브라함이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아들 결혼을 준비하는 것은 단지 자기의 혈통을 유지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자기의 혈통으로 되지 않음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게 하시고 사라는 경수가 끊어진 뒤에 이삭을 주심으로 이삭 언약을 이어갈 자라는 것이지 자기의 혈통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의 결혼이란 주님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전쟁인 것입니다. 이 전쟁을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합니다. 결혼이 왜 전쟁이 됩니까?
 

 

 


창세기 3:15절의 전쟁인 것입니다. 범죄 이후의 세상을 하나님이 이 기준에 의하여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입니다. 여인의 후손이란 범죄한 아담의 혈통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뜻이 아브라함의 할례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적의 문을 얻을 자는 언약의 자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으로 태어난 씨가 바로 대적의 문을 얻을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의 통로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약의 하나님을 제대로 안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단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부자가 되었더라, 그러니 우리도 이렇게 하면 부자가 된다, 그런 식의 믿음의 족장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을 통하여 전쟁을 벌이시고 계시는데 한가롭게 다른데 정신을 팔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전쟁을 이루어 가시는데 그 전쟁을 아는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 전쟁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를 알고 믿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바로 여호와께서 앞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창세기 24장의 핵심이며 성경 전체의 흐름입니다. 24:1-27절까지만 말하고 그 다음은 그래서 리브가가 따라 왔다고 하여도 되는데 아브라함의 종이 아브라함의 명령을 받고 어떻게 인도되어 왔으며 리브가를 만날 때 어떻게 기도하였으며 그러한 내용을 리브가의 가족에게 또다시 상세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앞서 일하심이 어떤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드디어 먼 길을 여행하여 아브라함의 고향에 왔습니다. 그리고서 기도합니다.

 

 

 

 

12-14절입니다. “봉독”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여,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순적히 만나게 하옵소서, 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물을 달라고 하여 물을 줄뿐만 아니라 낙대에도 물을 주면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알겠습니다, 라는 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한 처녀가 오는 것입니다. 이가 바로 리브가입니다. 그리고 기도한 대로 물을 줄뿐 아니라 낙대에게도 물을 길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인지를 물어 보니 아브라함의 동생집인 것입니다. 그러자 이 종이 어떻게 합니까?

 

 

 

 

26-27절입니다. “봉독” 여호와께 경배하고 자기의 주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인자와 성실을 끊지 아니하심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시지만 그 언약을 하나님의 인자와 성실로 이루어 가시는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인자와 성실을 베푸시고 하나님이 사자를 앞서 보내셨기에 여호와께서 자기를 인도하여 이곳에 이르게 되었나이다, 라고 찬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리브가의 아버지와 오빠와 그 가족에게 다시 말하는 것이 48절까지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시고 일하셨는지를 증거하고 나서 49절에서 당신들이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라고 묻습니다. 가족이 반대할 수도 있고 리브가가 반대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먼저 사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니 일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족도 허락하고 리브가도 허락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백을 50절에서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그러니 여호와의 말대로 하라고 하자 종은 또다시 여호와께 경배합니다. 그러면서 리브가를 보내는데 무어라고 보내는 것입니까? 전쟁터에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60절입니다.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찌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찌어다.” 이삭이 모리아산에서 받은 내용과 같은 내용입니다. 대적의 성문을 얻는 것, 이것이 아브라함의 씨, 이삭의 씨가 할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수를 무찌르는 내용을 여호와의 전쟁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전쟁이 족장들에게서 좀 더 확대되어 나타나는 것이 국가 이스라엘로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전쟁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시기 위한 차원의 전쟁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자체의 힘과 능력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만약 자신들의 힘과 능력으로 가나안을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하나님의 언약을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여리고성과 아이성의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할 때도 역시 하나님은 전쟁을 하시는데 어떤 식으로 하시는가 하면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하여 종이 먼저 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사자가 먼저 가는 것처럼 이스라엘 국가가 출애굽하여 가나안을 정복할 때도 역시 여호와께서 먼저 사자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몇 구절만 찾아봅니다.

 

 

 

 

출애굽기 3:2절. “봉독” 하나님이 모세를 만나심. 출애굽기 23:23절 “봉독” 하나님의 사자가 먼저 가서 적을 치심. 이러한 하나님을 믿지 못하여 40년 동안 광야에서 믿지 못한 자들이 죽습니다. 40년이 지난 후. 신명기 1:29-33절. “봉독” 하나님이 앞서 가셔서 적을 물리칠 것이니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라고 하시는데도 이들이 가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앞서 행하심으로 애굽에서처럼 하신다고 가나안에 들어가라는 것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린 아이를 안음같이 안고서 이것까지 왔는데 너희가 믿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가는데도 믿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31장에서 남편이 되어 너희를 손을 잡고 인도하여 내어도 거역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언약은 마음에 기록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신명기의 책망이 그러한 하나님을, 앞서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출애굽의 광야에서 망한 이유이고 또 이스라엘 국가가 망한 이유입니다. 32절. 이 일에 하나님이 앞서 일하시는 이 일을 너희가 믿지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앞서 일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실력을 믿는 것은 신념입니다. 그러니 자기의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앞서 행하시는 실력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러한 믿음이란 세상의 사람으로는 불가능 한 것입니다. 33절입니다. 그는 너희 앞서 행하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의 행할 길을 지시하신 자니라.

 

 

 

 

오늘날 우리의 신앙의 싸움도 이 싸움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앞서 일하심을 믿느냐, 못 믿느냐.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온갖 염려와 장래에 대한 걱정을 혼자 다하고 있다면 우리의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러니 이제 아브라함만큼 살지를 못하니 그 나이를 우리에게 적용하면 약 절반으로 줄여서 보면 되겠지요. 이제 우리가 모리아산에서 여호와 이레를 발견하는 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개인뿐만 아니라 교회도 하나님이 앞서 일하심을 믿지 못한다면 그곳은 교회가 아니라고 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얼마나 세초부터 세말까지 지키시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언약은 늘푸른 교회가 있거나 없거나 간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67절을 봅니다. “봉독” 마치 사라가 죽은 장막에 리브가를 대신 채워 넣듯이 하나님이 언약을 받은 사람은 죽어도 그 언약은 영원한 것입니다.

 

 

 

 

창세기 25:1-18  아브라함의 죽음  2000. 3. 19.

 

 


아브라함의 생애를 살펴보는 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부름을 받았기에 오늘 이방인인 우리가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후손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우리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지금까지 창세기를 보아오면서 또 금요일 성경공부를 통하여 우리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아브라함이 애초에 믿음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인데 하나님이 부르시고 택하셔서 하나님의 언약을 주셨기에 하나님이 자기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동일하게 믿음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 내시고야 말 것을 이제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우리가 어떻게 믿음의 길로 인도되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기에 그의 출발과 과정과 죽음까지 우리 모두에게 교훈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생애를 잠시 요약을 하고 오늘 본문 말씀의 의미를 보고 신약에서 아브라함을 어떻게 인용하고 있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첫째, 아브라함의 생애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 우상을 섬기던 곳에서 부름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시니 떠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나타나셨으니 어떻게 거부를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순간부터 이미 믿음의 걸음이 시작된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길이라도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아브라함을 그 고향 친척 아비집을 떠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그런 것에서 떠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끊어내는 것이라고 하면서 취미, 습관, 인정, 애정까지 끊는 것이라고 말합디다. 일리가 있는 말이지요. 고향 친척 아비집을 어떻게 떠나옵니까? 그런데 우리가 자칫 잘못 생각하면 내가 굳은 각오와 결심으로 그런 일을 이루어 내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극기운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등을 떠밀어 마침내 가나안땅에 들여 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 흉년이 들어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아내를 동생이라 속이고 자기가 죽을까봐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 이런 모습이겠습니까? 그러니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바로왕이 오히려 자기에게 잘못하였다고 하는 경험을 통하여 자기를 불러내신 하나님의 능력을 조금씩 알아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다시 아내를 여동생이라 하는 사건이 있고 아예 가는 곳 마다 그렇게 하자고 사라와 약속을 합니다.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시고 마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드디어 믿습니다. 그러자 그 믿음을 보고서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언약을 체결하시는데 쪼개진 짐승 사이로 지나가는 언약을 행합니다. 그런데 지나가신 분은 하나님만 지나가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쪼개어지는 즉 생명을 담보로 맺는 계약입니다. 아브라함은 보고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이 사건도 결국 하나님이 이루어 나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하고 이스마엘을 86세에 첩을 통하여 낳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13년간이나 말씀하지 아니하시다가 99세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 다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언약의 후손은 사람의 혈통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라도 경수가 끊어진 상태에서 이삭을 주심으로 약속의 씨란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어짐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후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을 합니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죽어 마땅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대속으로 인하여만 살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자신도 자신의 능력으로가 아니라 그 씨로 인하여 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생애 최후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사라 죽은 후에 후처를 취하여 자녀를 몇 명 더 낳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죽기 전에 이들을 어떻게 정리를 하는가, 봅시다.

 

 

 

 

6절입니다. 모든 소유를 이삭에게 주고 다른 자녀에게는 재물만 주어서 자기 생전에 그 아들들이 이삭을 떠나서 살게 합니다. 동쪽으로 가서 살도록 조치를 합니다. 죽기 직전에 이제야 하나님의 언약을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다른 자녀들 그것도 이삭보다 더욱 노년에 낳은 자녀라 할지라도 그들이 이삭과 함께 유업을 받을 수 없음을 알고 분리를 시키는 것입니다. 

 

 

 

 

7-8절입니다. 아브라함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 100년을 하나님에 의하여 인도되어 이제 드디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이 함께 아버지의 장례를 지내고서 이스마엘도 역시 이삭과 분리가 일어납니다.

12-18절에 이스마엘의 족보와 거주지가 나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16절에 이들도 12방백이라는 것입니다. 비언약의 자손이라도 언약의 자손이 나중에 12지파가 되는 것과 비슷한 흐름이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날도 참과 거짓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가짜를 만들어 내는데 꼭 진짜처럼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테이션 보석들이 인기가 있지요. 그리고 유명제품의 모방한 제품을 가짜인줄 알고도 사는 것이라고 하지요. 진짜가 있으니 가짜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가짜가 더 진짜 같은 일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동일하게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영광 그러는데 그 궁극점이 무엇인지 유심히 분별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면서 십자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들로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은 아들을 통하여서만 영광을 받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힘을 모아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성경이 어떻게 인용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의 생애가 믿음의 조상으로서의 여정이라면 우리가 동일하게 믿음으로 부름 받았다면 아브라함을 신약에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봄으로 우리의 믿음에 대한 정리를 하는 것입니다. C.D성경에서 성구를 찾아보니 아브람이란 단어가 53회, 아브라함이란 단어가 신구약 총 235회, 신약에만 74회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족보를 말할 때도 사용되고 사람들이 자기들의 혈통을 주장하는 일에도 사용되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데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동안 창세기를 통하여 아브라함을 보았는데 과연 신약이 그렇게 증거하고 있는지를 검정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를 받는 것입니다.

 

 

 

 

1. 마태복음 1:1절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신약이 시작됩니다. 그러니 아브라함과 다윗과 언약하신 그 하나님으로 태어나는 언약의 후손, 약속된 씨가 신약의 시작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씨에 대한 약속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후에 하나님이 네 씨가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그 씨의 언약이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후 약 2,000년이 지나서 그대로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아브라함이 이 씨로 인하여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족보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제 새롭게 만들어 지는 족보가 되는데 여기에 아브라함과 다윗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의 족보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을 그리스도에게서 소급하여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의 흐름도 없느냐고 물으신다면 예수님이 요한복음 8:56절에서 아브라함에 대하여 말씀 하시기를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시간의 전후도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렇다고 하시면 우리는 아멘 하는 것입니다.

 

 

 

 

다윗도 예수님을 보고서 나의 주여 라고 하였다는 것이 누가복음 20:41-44절의 말씀입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보고서 주라고 하였는데 어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도 다윗도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으로 시작되는 하늘의 족보입니다. 온 세상을 없는 것처럼 여기시고 예수님으로 온 세상을 통일하시어 새로운 족보를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하시고 그 언약을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2.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에 대하여 아브라함을 예로 듭니다. 이 내용이 가장 많이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이 자동적으로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혈통이나 전통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의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아브라함의 혈통을 정면으로 부인하면서 나타나는 것이 세례요한입니다.

 

 

 

 

마태복음 3:8-9절입니다. “봉독”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하나님이 이 돌들로도 능히 아브라함이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기존의 혈통과 전통으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는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말을 예수님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인데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 것을 보니 너희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 마귀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충격의 말씀입니까? 자기들은 누군가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하지만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 것이 이미 마귀의 종이라는 것을 증거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복을 받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마귀의 자녀가 하나님이 자녀가 되는 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도대체 더 큰 복과 기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은 이것을 복이라 하나님의 큰일이라고 하는데 도대체 우리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기에 이러한 하나님의 복을 우습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믿음으로 주어지는 이러한 복을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잘 증거하고 있는데 갈라디아서 한곳만 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3:1-16절까지 봉독합니다. “봉독”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 아브라함의 복이고 또 이러한 복을, 이방인도 예수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복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인데 이러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선물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이 대신 저주 받으시고 믿음으로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씨란 결국 갈라디아서 3:16절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리라는 그 자손들이 바로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속함을 받는 자들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생애가 보여주는 복인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에서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믿음이란 분명한 변화가 따르는 것입니다. 자기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믿음의 결단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행위가 바뀌어 지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믿음입니다. 그러니 야고보서의 믿음과 갈라디아서의 믿음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3. 아브라함의 죽음. 히브리서에서 아브라함은 나그네요 외국인이라고 합니다. 하늘의 본향을 사모하다 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순간부터 고난의 길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종을 부리는 정도의 기반이 잡힌 삶을 뒤로 하고 죽음의 위협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고대 사회에서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그러나 부르심을 받고 그 고난의 길을 걷게 하심으로 결국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영원한 본향을 향하여 간 것이 아브라함의 복인 것입니다. 갈대아 우르의 풍요가 주는 그곳에서 떠나옴으로 불안한 장래를 향하여 나아갔지만 그것이 영생의 길이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오늘 우리는 순례자의 걸음을 걷고 있는가를 점검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이 복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아브라함의 죽음 앞에서 더욱 새롭게 확인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죽는 자는 죽어도 삽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복이며 소망인 것입니다.

 

 

 

 

창세기 25:19-34  선택  2000. 3. 26.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아브라함은 죽었지만 그 언약은 영원하기에 그 아들 이삭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 갑니다. 25:11절에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라고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은 하갈에게서 낳은 이스마엘도 있고, 그두라에게서 낳은 여러 아들도 있지만 하나님이 지명하여 복을 주셨다는 사람은 이삭입니다. 이러한 이삭의 복은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이스마엘 같은 복이 아니라 언약을 이어가는 복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언약을 이어가는 복은 사람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의 선택이란 말이 많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개입되면 사람들이 무엇을 이루어 내고자 하는 일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이 빠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교회의 여러 가지 일들이 사람들이 이루어 낼 수 있는 일들로 바꾸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선택을 말하게 되면 사람들의 일이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에 말하지 아니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선택으로 일하십니다. 그러한 선택을 받은 자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서 다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가는데 그 언약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22:17-18절에서 1)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땅의 모래와 같게 하겠다. 2)네 씨로 대적의 문을 얻게 하겠다. 3)네 씨로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겠다. 이러한 약속을 받았지만 그러나 문제는 결혼한 이삭에게 자녀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이 결국 자녀가 있어야 하는데 자녀가 없는데 무슨 언약이 이루어지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왜 이런 방식으로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지를 사라와 연결하여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지금 리브가는 사라의 장막에 들어왔습니다. 사라의 모습처럼 언약을 이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사람의 실력으로 아이를 낳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하여 20년간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 자녀가 없는 것입니다. 
 

 

 


21절입니다. 이삭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리고서 자녀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하셨다면 기도 안하여도 자녀를 주시면 될 텐데 왜 기도를 하게 하시고 자녀를 주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는 너희의 실력으로 낳는 것이 아님을 보이시고자 하신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보면 당장에 기도하면 된다, 이런 식으로 보게 됩니다. 기도란 나는 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인데 오히려 기도가 방법론처럼 되어 가지고 봐라 기도하면 되잖아 이런 식으로 말하면 곤란합니다. 기도 자체가 자기의 부족과 무능력을 고백하는 것인데 기도하니 자녀 얻었다 이렇게 되면 다시 자신의 기도한 실력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한 기도란 언제나 자기가 부인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가다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는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이들을 주목하여 봅니다. 그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합니다. 자신들이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자기의 기도나 경건의 능력이 아니라 주 예수의 이름이 이를 온전하게 하였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대로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이 기도하여 자녀를 낳았다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심을 보여주는 사건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여 아이를 주시려면 하나님이 언약을 이어갈 자 하나만 주시면 되는데 쌍둥이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쌍둥이가 뱃속에서부터 싸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리브가가 하나님께 이게 왠일이냐고 기도하자 하나님이 무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23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두 민족이 네 태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그리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뱃속에서 무슨 일을 하였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이미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하고 그 언약을 믿고 이루어 가는가를 보면, 자기들은 전혀 그런 관심조차 없는 것입니다. 그저 자기들의 취향대로 가는 것입니다. 자기들 입맛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언약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가를 야곱의 생애에서 더 철저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의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이 자기의 언약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가를 보여주는 도구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 놓고서도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봅니다. 하나님이 이미 태중에 있을 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선택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야곱과 에서가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면 모두가 자기 이익을 따라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삭입니다. 이삭이 누구를 좋아합니까? 에서를 좋아합니다. 육신적인 장남일 뿐만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고기를 사냥하여 와서 요리해 주니 더욱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언약은 아랑곳없이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을 해 줄 테니 사냥한 고기로 별미를 만들어 오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여 축복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삭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야곱이 가로챈 것을 통하여 그제서야 이삭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리브가입니다. 단지 야곱이 언약을 받았다는 차원에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을 잘 도와주니 야곱을 더 좋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야곱이 이어갈 줄로 확신을 하였다면 이삭에게 바른 말로 이야기를 하여야지요. 야곱이 언약을 이어갈 자라고 말하기보다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야곱이 장자권을 받아 내기 위하여 속이는 것입니다.

 

 

 

 

에서입니다. 배고파서 야곱이 끓이고 있는 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넘겨주는데 이것을 대수로운 일이 아닌 것처럼 여긴 것입니다. 말로서 그렇게 한다고 하여서 장자권이 바뀔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자기를 축복할 아버지가 자기를 더 좋아한다는 확실한 보장이 있는데 어떠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는 망령되다고 합니다.

 

 

 

 

야곱입니다. 이름이 ‘발꿈치를 잡다’ 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태어날 때 형의 발꿈치를 잡고 나왔기에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인데 이 이름의 뜻이 사기꾼이라는 뜻이 있답니다. 그러니 야곱은 장자권을 하나님의 선택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모르고 어떻게 하든지 자기가 확보하여야 되는 줄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갖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하여 장자권을 빼앗아 가로채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방법이었습니다.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그 현장에서 원수에 대하여 나타납니다. 네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원수가 누가 됩니까? 아브라함이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하였으니 아브라함이 이삭을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니 네 사랑하는 이삭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을 바치는 그 희생 안에 누가 들어가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의 대신으로는 어린양이 희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삭도 나중에 야곱보다 에서를 축복하려고 한 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야곱도 마찬가지 자기가 장자권을 획득하여야 되는 줄 알고 온갖 꾀를 다 동원하는 모습이 하나님의 원수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얍복강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를 원수로 알고 씨름을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대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얍복강에서 누가 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낮아지심이며 하나님의 자기희생입니다.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곳에서 환도뼈가 위골되어 평생 절름발이로 살아야 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절름발이 이스라엘 그리고 마지막에 요셉의 두 아들에게 손을 어긋나게 안수하고 축복을 함으로 하나님의 선택과 일하심이 어떠한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들이란 자신들이 하나님의 원수였음을 제대로 알아 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모습은 자기들의 이익과 욕심을 따라 행동한 것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언약은 변함없이 이루어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럴 때 적절한 속어가 무엇입니까? 강아지는 짖어도 경부선 열차는 달린다,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보태 드린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오늘날 저와 여러분을 부르시고 이렇게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하나님의 언약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이 선택에는 우리의 어떠한 선행 조건이 없기에 창세전에 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손을 쓸 수 없을 때에 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에서와 야곱의 쌍둥이를 통하여 바울 사도가 무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까?

 

 

 

 

로마서 9:10-13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선택을 말하고 있습니다. 뱃속에 있을 때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 이전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서와 야곱에게서 야곱을 태중에서 선택한 이유입니다. 
 

 

 


이러한 선택의 말씀을 이 세상이 받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입니다. 자기의 행위의 결과로 복과 화가 주어져야지,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도 이러한 하나님의 택하심을 우습게 여기는 사례가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되는 것임을 부정하고 시비를 거는 자들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계속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9:14-16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의 선택이 사람의 행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말하면 반대론자들이 있을 줄 알고 먼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 무슨 불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너 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하나님의 선택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원한다고 달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도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다면 계속하여 로마서 9장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를 강퍅케 한 것이 하나님이 진노의 그릇으로 삼은 이유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 바로가 억울하지 않느냐고 항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토기장이가 자기 마음대로 그릇을 만드는 권한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네가 감히 무언데 하나님을 그렇게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택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다 파하여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체계가 인과율에 의하여 세워지는 것입니다. 모든 과학적인 원리가 그렇습니다. 현대 그룹의 회장 승계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장자를 제치고 5남이 회장의 승계를 한 것은 이 사람이 전체 경영면에서 더 낫다는 판단에 의하여 승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는 그 사람의 어떠한 자질과 능력에 의하여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과 불쌍히 여김으로 선택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자는 자기가 잘난 자가 아니라 불쌍히 여김을 입은 것이 얼마나 좋은지 나는 불쌍한 죄인입니다 하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하고 오히려 그것을 알게 하심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각 사람들은 자기의 욕심을 따라 후계구도를 세웠지만 결국 부르시고 택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됨을 보여주시는 것이 야곱의 생애입니다. 그럼으로 오늘 우리가 이러한 주님을 알고 믿게 된 것이 주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이라면 이제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베드로후서 1:10-11절을 봅니다. “봉독” 힘써 할 것이 무엇입니까?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천국에 넉넉히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직 주의 긍휼과 자비하심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신 것을 굳게 붙드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25:19-34  장자 만들기  2000. 4. 2.

 

 


하나님의 언약과는 상관없이 자기들이 좋아하는 자를 장자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의 선택으로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야곱이 장자가 되는 것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에 대하여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우리도 늘 누구에게 기대를 더 거느냐 하면 장자에게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러니 딸만 낳는 집안에서는 아들 낳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아들이란 자기의 이름을 이어갈 자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을 낳지 못하면 자기의 대가 끊어지기에 아들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자기가 죽더라도 제사를 지내주는 아들이 있음으로 자기의 존재가 아들로 통하여 영속되어 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속마음이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기력의 시작이기도 하니 더욱 장남에 기대를 거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과 꼭 같은 심정은 아니더라도 이삭이나 리브가는 자기들이 사랑하는 자로 장자를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장자가 되면 아버지의 축복권과 상속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에서는 장자는 다른 아들보다 유산을 두 몫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태어난 서열순서 보다는 누가 아버지의 장자권을 받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 야곱과 리브가도 그 장자권을 노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가는 장자권을 믿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믿음의 자세입니다. 이미 복중에 있을 때, 어떤 행함이 있기 전에 장자권을 약속받았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 언약대로 이루어 가실 것이기에 일부러 속여가면서 장자권을 따 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과 리브가가 그렇게 장자권을 따 내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위한다기 보다는 마치 몽구와 몽헌이 회장권한쟁탈을 하는 것과 같다고 보아집니다. 몽구와 몽헌이를 야곱과 비교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러나 야곱이 깨어지기 전의 삶의 모습은 자기가 장자의 축복을 이루기 위하여 얼마나 잠도 안자고 수고하고 애쓰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생애는 장자가 무언지를 알아가는 한 생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알아간 장자란 이 땅의 서열이나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이 장자를 만들어 내신다는 것을 그의 말년에 아는 것입니다. 그 사건이 요셉의 두 아들 중에서 장자권을 에브라임에게 위임하는 것입니다. 므낫세가 장자인데도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을 얹고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가 야곱의 생애 중에서 야곱 자신보다 요셉을 통하여 더 분명히 계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에게 주어진 언약이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구체적인 실현이 요셉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요셉의 생애를 통하여 누가 장자가 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요셉은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꿈을 꾸었지요. 그런데 요셉이 꾼 꿈을 가지고 사람들은 비전을 가지라고 하는데 2,000년대의 비전이 어떻고 하면서 요셉을 들먹이는데 그러한 인생의 포부나 야망을 위한 꿈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당찬 꿈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모두가 주가 되고 싶고 황제가 되고 싶고 신이 되고 싶은데 단지 현실이 그렇게 받혀주지 못하니 눌려 살 뿐입니다. 이 세상이 그런대로 질서 있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사람들이 힘에 의하여 마지못하여 그렇게 살고 있지 누가 좋아서 낮아진 자리에 있으려고 하는 자는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요셉을 가지고 꿈을 크게 가져라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셉을 통하여 성경은 무엇을 계시하고 있습니까? 요셉도 그런 꿈을 꾸고 나니 자랑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형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것은 자기가 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분이 높아진다는 것을 알고서 자랑하니 더욱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평소에도 아버지에게 형들의 비리를 고자질하는 요셉이고 또 야곱이 요셉을 편애하고 있으니 더욱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 한번 죽어보라고 형제들이 사막의 빈 우물에 던졌다가 직접 피를 흘리기보다는 종으로 팔아 버려서 종으로 살다가 죽어버리라는 식으로 팔아 버립니다.

 

 

 

 

그러나 이렇게 팔려간 요셉이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주’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란 세상이 주의 뜻대로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는가를 주의 역할을 받은 자가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주의 역할을 할 자가 세상에서 버림을 받고 배척을 받는 것입니다. 세상의 주란 버림받는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신 주가 세상에서 버림받는 것을 통하여 세상의 주의 개념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버려짐 속에서도, 인간의 방해 속에서도 주님께서 한 사람을 주로 지목하여 세우셨다면 그가 주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처음 팔려간 집에서 요셉이 주가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있어도 명목상 일뿐이고 실제 가정의 제반 상황을 주관하는 자는 요셉인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안주인의 유혹과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게 되지만 감옥에서도 역시 주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감옥의 제반 사무를 요셉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궁의 총리가 되어서도 애굽의 역사를 좌우하는 것은 바로왕이 아니라 요셉입니다. 7년 풍년과 7년 흉년을 대비하는 것이 요셉이 주장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통하여 야곱이 이집트에 오게 되고 야곱이 바로왕을 축복합니다. 누가 주입니까? 축복을 하는 자가 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역할은 야곱이 주가 됨을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그 주가 됨을 보이기 위하여 먼저 애굽으로 파송된 자인 것입니다. 야곱의 잃어버린 아들, 버림 받았던 자가 버린 자를 구하는 주가 되는 자리에 이른 것이 바로 하나님과 야곱과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을 나중에 장자로 축복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요셉을 축복하는 내용이 창세기 49:22-26절입니다. “봉독” 형제 중에 뛰어난 자가 되는 것은 희생하는 자 섬기는 자가 장자가 되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혈통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으로 장자를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장자는 세상의 장자와 전혀 다르게 오히려 버림받고 배척받고 죽는 모습으로 나오는 장자입니다.  요셉의 장자에 대한 기록을 한곳 더 보고자 합니다.

 

 

 

 

역대상 5:1-2절입니다. “봉독”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왕은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유다 지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어려운 부분입니다. 요셉에게서 왕이 나오면 쉬울 텐데 왕은 또 유다지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장자의 명분이 요셉에게 주어지는데도 주권자는 유다지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장자의 명분이라도 그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주권자가 오면 자리를 비켜서야 되는 그런 장자의 모습입니다. 이제는 개인의 장자 만들기가 야곱을 하나님이 장자로 만드시고 그것을 요셉을 통하여 보이신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가 이제는 한 국가를 장자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4:22절.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장자를 죽이리라”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의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의 아들로 삼아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려고 애굽에서 출애굽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스라엘의 장자를 만들어 내는 일을 위하여 10가지 재앙이 주어지고 마지막이 무엇입니까? 장자의 죽음입니다.

 

 

 

 

장자의 죽음을 면하려면 어린양의 피를 발라야만 장자의 죽음을 면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하나님이 누구를 장자로 삼으십니까? 히브리인들입니까? 애굽인입니까?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만을 생각하는데 그러나 여기에서구별이 없습니다. 히브리인이라도 어린양의 피를 바르지 않으면 장자는 죽는 것이고 애굽인이라도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 장자가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0재앙을 통과하는 마지막은 혈통이 아니라 어린양의 피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정체성이란 어린양의 피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유월절을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서 매년 유월절을 지키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장자로 남아 있으려면 어린양의 피 안에 머물러 있어야만 장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더욱 구체화하기 위하여 모든 초태생의 수컷을 하나님께 바치게 하시고 사람의 장자도 하나님께 바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자를 대신하여 누가 바쳐집니까? 한 지파를 선택하여 장자를 대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지파가 레위 지파입니다.

민수기 3:11-13절입니다. “봉독” 장자를 대신하는 지파가 레위지파입니다. 레위지파가 장자를 대신하는 것은 장자는 희생당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위지파는 제사를 담당하는 역할 즉 하나님 앞에 어린양의 희생을 반복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자의 역할입니다. 그러면 이 레위 지파에서 영원한 제사장이 나오면 되는데 또 다시 유다지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혈통이나 족보가 아니라 제 3의 인물이 나와야 하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들에 대하여 시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2:7절. “봉독” 아들을 낳으심. 2:12절. “봉독” 아들에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가 급하심. 시편 89:27-29절. 장자를 세워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장자가 어떤 일을 당합니까? 89:38-51절을 봅니다. 기름 부은 자가 버림받음. 그리고 52절에서 여호와를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란 희생하는 자를 통하여 장자를 삼으시고 그 장자로 인하여 다른 아들을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맏아들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29절입니다. 예수님을 맏아들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장자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장자를 보여주시는 것으로 이스라엘을 아들로 삼았지만 이스라엘이 제대로 아들의 역할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완전한 제사를 드릴 완전한 장자를 가다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도 아니요, 율법도 아니요, 레위 지파도 아니요, 성전도 아니요 한 별다른 대제사장이 나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7:11-17절입니다. “봉독” 28절입니다.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이 아들로 인하여 새로운 장자들의 모임을 만드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4:22절에서 이스라엘을 내 아들 내 장자라 이들을 만들어 내시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의 장자를 만들어 내시는 것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만들어 내셨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자기 백성을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바로 맏아들의 희생을 통하여 새로운 장자들의 총회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8-29절입니다. “봉독” 이러한 하나님의 장자를 만들어 내신 것이 아들의 피로 이루어진 주의 백성들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남아 있다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피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장자 만들기의 결론입니다. 맏아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그 나라가 아들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희생의 흔적을 지닌 장자의 모습으로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부인의 모습이 없이 쓸데없는 욕심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유월절 어린양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 모두 장자의 희생아래 장자의 총회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놓치지 말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26:1-35  이삭  2000. 4. 16.

 

 


지금까지 아브라함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았습니다. 오늘은 이삭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고 자신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역사가 발전한다고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발전하지 않는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보십니까? 옛날보다 나아졌다고 봅니까? 아니면 여전히 그대로라고 봅니까? 사람들마다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겠습니다만 성경은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전도서 1:9-10절입니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찌라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무언가 새로운 것이라고 하여도 사람이 달라지지 않았기에 새것이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질문명이 발달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것은 옛날에도 어느 정도의 발전은 있었기에 정도와 완급의 차이이지 다른 새롭다 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삭의 시대와 지금을 대비하여 보아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별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전기, 전화, 자동차 등이 아무리 발달하여도 사람들이 먹고 입고 마시는 것에는 별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변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 삶의 내용을 보면 꼭 같습니다. 이삭의 살아가는 모습은 유목민의 모습입니다. 그 당시에 정착하여 사는 곳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유목민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유목민의 삶을 사는 사람이 아주 극소수라고 생각하시겠지만 그러나 현대와 미래에도 여전히 유목민의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단지 양과 소떼를 몰고 다니지 않는 것일 뿐 여전히 유목민의 생활형태를 띠고서 산다는 것입니다. 
 

 

 


쟈크 아탈리라는 사람이 ‘21세기사전’이라는 미래를 예측하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만년 전에 정착된 문명은 머지않아 유목을 중심으로 재건될 것이다. 불안정하므로 모든 것을 휴대화 할 것이다. 사람, 사물, 기관, 기업, 정보는 물론....모든 것이 휴대 가능해질 것이다.’ 이러한 유목 물품 가운데 최초의 유목 물품으로 사막에서 석판의 형태로 받아 장막으로 가지고 온 주님의 말씀이며 이것이 최고의 성스러운 유목 물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세상은 정착민의 법과는 달리 박애의 정신이 생길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조금은 황당한 이야기인데 그러나 이 사람이 말하는 것 가운데 유목민이라는 이야기가 이런 것입니다. 앞으로의 인류는 유목민의 삶의 형태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최소한 30년 후에 인구의 10분의 1이 부유하든 가나하든 유목민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대략 세 종류의 유목민이 될 것이랍니다. 부유한 유목민, 가난한 유목민, 가상 유목민이라는 것입니다. 부유한 유목민은 어디든지 자기들이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여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을 말하고 가난한 유목민은 자기의 생업을 위하여 일거리가 있는 곳은 어디라도 찾아 나서야 하는 유목민이고 가상 유목민이란 이들이 가장 많겠지만 부유한 유목민의 생활을 꿈꾸며 한 곳에서 정착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정착이 아니라 부유한 유목민이 될 때까지만 가상적으로 정착하기에 가상 유목민으로 분류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형태를 따르기 위하여 모든 것이 휴대 가능한 그런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전화하나만 들고 나가면 안 될 일이 없을 만한 세상이지요. 단순한 통화만이 아니라 은행결제 업무 인터넷까지 안 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유목민의 질서가 새워질 것을 내다보는데 그런데 이런 예측가운데서 무슨 말을 하는가하면 가상 유목민은 언젠가 부자 유목민이 될 수 있다는 희망과 동시에 가난한 유목민으로 전락하면 어쩌나 하는 강박관념 속에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인용한 이유는 이 말 때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의 이삭의 삶이나 지금 우리의 삶이나 별다를 바가 없는 것이 자기의 생존을 위하여 강박관념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달라야 하지 않습니까? 이미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출생하고 아브라함과 함께 75년을 살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고 산 이삭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기근으로 애굽으로 내려간 일과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전하여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제물이 될 뻔하다가 대신 양을 바친 그런 사건도 잊을 수가 없는 일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기를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리라는 그 약속을 이삭도 동일하게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삭은 기근이 일어나자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26:1절. 아브라함 때 흉년으로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간 것처럼 이삭도 애굽으로 내려가고자 블레셋 왕 아비멜렉의 영토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랄이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가는 제일 끝 지역입니다. 이삭은 흉년이 들자 하나님께 기도한다거나 하지 아니합니다. 당연히 살길을 찾아 애굽으로 내려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26:7절. 자기 아내를 여동생이라 속이는 것도 꼭 같습니다. 그 말하는 내용도 꼭 같습니다. 그러니 이런  모습이 달라지지 않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무슨 역사의 발전이 있는 것입니까? 오직 자기의 생존을 위하여서만 움직이는 것이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백성됨은 어디에서 나타나는 것입니까? 무엇이 다르다는 말입니까?

 

 

 

 

26:2절. 하나님이 이러한 이삭에게 나타나시고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과 아닌 사람의 차이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게 되면 죄 지을 생각도 안 나십니까? 예수 믿으면 세상 것이 하나도 안 부럽습니까? 날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며 기뻐하며 감사하며 사십니까? 그렇지 않지요. 여전히 유혹이 있고, 죄가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다릅니까?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은 죄를 짓는데도 그 길이 막히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은 그 길이 막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고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회개하게 하시고 돌이키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적으로 볼 때 오히려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꼭 같은 일을 하여도 잘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는 길입니다. 금요일 구역공부시간에 하나님의 예정을 공부하셨지요. 우리를 기계적으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과 목표를 향하여 하나님의 열심과 고집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예정이라는 말로 보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불순종하고 고집부리고 다른 길로 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삭을 막아서신 것처럼 오늘 주의 백성들의 삶도 간섭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서 주와 동행하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그러나 우리도 늘 이삭처럼 인생의 문제를 만나게 되면 우선적으로 내 살길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길을 찾아 나선다고 찾아 집니까? 오히려 막힐 때가 많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많이 막히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내 마음대로 살고 있다는 증거도 되고 또 하나님의 개입이 있다는 증거도 됩니다. 그러면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을 막으시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 것입니까?

 

 

 

 

2-4절입니다. “봉독” 애굽으로 가지 말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머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한 그 언약을 이삭에게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언약을 이루시는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경우가 다 다릅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내려 갈 때 하나님이 막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막으시는 것입니다. 야곱은 오히려 내려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에 내려감으로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지 바로왕과의 만남에서 더욱 알게 되는 것이고, 야곱은 내려감으로 그곳에서 자기의 후손들이 400년간 있다가 나오게 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언약을 이루어 내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을 이 곳에 머물라는 것입니다. 동일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는데 그 구체적인 적용은 다 다른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 사람마다 다르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막으시니 내려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곳에 살게 되는데 하나님이 이삭에게 복을 주셔서 거부가 됩니다. 흉년이 들어서 다른 곳에 살려고 내려가다가 하나님이 막으심으로 흉년든 땅에 살았는데도 오히려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구약적인 방법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오늘날도 문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새 언약 시대의 복이 무엇인지를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이러한 복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자가 복 있는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의 복을 신약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복이 있는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신약에서의 언약 안에 있는 표적은 의를 위한 핍박인 것입니다. 이것이 정리되지 않으면 우리가 자꾸만 지금도 예수 믿어서 세상의 것들을 받는 것을 복으로 여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도 확인을 해 볼 수가 있습니다. 이삭이 애굽에 내려가지 않고 그 땅에 머물면서 거부가 되었는데 그런데 무엇이 따라 옵니까? 시기입니다. 우물을 파면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이 곳에는 우물이 생명과 같은데 우물을 파면 막아 버리니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합니다. 그리하여 점점 어디로 가는가 하면 브엘세바로 밀고 가는 것입니다.

창세기 21:31-34, 22:19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맹세를 한 곳이고 아브라함의 노년에 그곳에서 살았던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브엘세바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삭도 이곳에서 살다가 흉년이 들어서 애굽으로 내려가다가 하나님이 막으시자 그랄땅에 거하였는데 그곳에서 비록 거부가 되어도 하나님께 단을 쌓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기록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랄 사람과 계속된 다툼 속에서 브엘세바로 밀려나간 것입니다. 그리고 브엘세바에 이르러서야 이삭이 무엇을 합니까?

 

 

 

 

26:23-25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이 다시 이삭에게 언약을 반복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데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입니까? 24절에서 두려워말라,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복을 주어 내 자손으로 번성케 하여 주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자손이 누구인지 수차에 걸쳐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이라 하지 않고 단수로 그 자손이라 하셨으니 이는 바로 그리스도라고 갈라디아서 3:1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의 진짜 복이란 양떼 소떼가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 하여 주시는 것이 참된 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 있어서 복을 주겠다는 그 복이 자손을 번성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복을 위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복도 이삭이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그 약속으로 인하여 주어지는 복인 것입니다. 

 

 

 

 

이삭은 흉년이 들자 자기 살길 찾아서 애굽으로 가려던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돌이키시고 브엘세바로 인도하신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아비멜렉이 군대장관과 함께 찾아와서는 서로 사이좋게 지내자고 맹세를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본문을 보더라도 이삭의 참된 복은 재산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복인 것입니다. 이것을 몇 곳만 더 확인하고자 합니다.

 

 

 

 

출애굽기 33:1-3절. 약속을 이루어 가나안에 가게는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가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과자와 장난감을 달라고 떼를 쓰다가도 엄마가 가버리겠다면 어떻게 합니까? 그처럼 더욱 중요한 것이 가나안에 가서 사는 것 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더욱 중요한 복입니다.  

 

 

 

 

여호수아 1:5절. 모세와 함께 하였던 것처럼 내가 너와 함게 함이라. 마태복음 28:20절에서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신 이것이 성도의 복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적용을 하여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서 사는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틈만 나면 애굽으로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길이 막히고 돌이켜 져서 주님 앞에 예배하는 자리,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리로 인도하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복입니다. 이삭이 아브라함 때문에 그 언약 때문에 복을 받는 것처럼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복을 받고 사는 것입니다. 이 복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복입니다. 이것이 복임을 알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27:1-33  이삭의 축복  2000. 4. 30.

 

 


(무엇이 현실인가? 성경인가?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땅이 현실인가? 그런데도 가상현실 속에서 산다.)

이삭이 나이가 많아서 잘 보지를 못하였다고 1절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단지 육신의 눈만 어두운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도 어두운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란 이상한 신비적인 것을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볼 수 있는 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이었으나 그 언약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 나가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육체의 욕구를 따라 하나님의 언약을 해석하고 적용을 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언약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을 축복하여야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자기의 욕구를 따라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25:27-28절입니다. “봉독” 이삭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므로 에서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조용한 야곱을, 그래서 장막에 거하며 어머니를 돕는 야곱을 사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과는 상관없이 자기의 기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 질 것을 믿어야 할 텐데 그러나 늘 우리 편리한대로 해석을 하고서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나의 유리한 말을 찾아서 나를 합리화 시키며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혹시 목사와 이야기를 해보시면 어떤 부분에 대한 잘못을 말하게 되면 수긍을 잘합니까? 안합니까? 좀처럼 수긍하지 않습니다. 어떤 식으로 빠져나갑니까? 성경을 가지고 자기 합리화 시키며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성경을 조금 더 알고 있다는 것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이 아는 것만큼 이용하고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로서는 하나님의 뜻이 어떻고 하지만 사람들마다 자기의 뜻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믿음의 조상들이라고 예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네 사람이 모두가 어떤 식으로 살아가는지를 보고서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서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첫째, 이삭입니다.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먹었지만 이삭은 고기 한 접시에 하나님의 언약을 팔아먹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고 눈은 어두워지는데 입맛은 살아 있었는지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기에 에서의 사냥한 고기를 먹고서 마음껏 축복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의 입맛도 제대로 감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분명히 사냥한 고기와 집에서 잡은 양고기가 다를 텐데 그 고기를 먹고서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청각과 후각은 아직 살아 있습니다. 목소리가 야곱의 목소리임을 알지만 옷의 냄새를 통하여 에서인줄 알고서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으로 직접 만져보고서 에서임을 확인하고서 축복을 합니다.

 

 

 

 

만약에 야곱인줄 알았다면 축복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 거듭 내 아들 에서냐고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축복을 합니다. 아버지의 축복이란 장자권을 상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는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하나님의 언약의 전달을 이삭은 자기의 입맛을 채워주는 아들에게 주어버린 것입니다. 자기는 에서에게 축복하였다고 그렇게 믿고 있다가 나중에 에서가 고기를 요리하여 왔을 때 놀랍니다. 33절에서 이삭이 심히 떨며 가로되, 이삭이 심히 떠는 것은 자기의 축복이 뒤바뀐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였기에 심히 떨었다고 보아집니다. 그렇기에 그렇게 매달리는 에서에게는 축복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삭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정말 천국이 있음을 믿으십니까? 지옥이 있음을 믿으십니까? 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으십니까?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과 장래에도 오직 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질 줄을 믿으십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하면서 고민하고 근심하기보다는 그저 내 눈앞에 닥쳐진 작은 이익, 고기 한 접시에 우리는 하나님도 예수님도 다 팔아 먹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이삭의 이러한 태도가 주술의 시작이라고 어느 주석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주술의 시작, 제물을 바치거나 제사를 지내서 하늘의 뜻을 돌이키려는 것이 주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이삭이 자기의 욕심을 인하여 주술을 행하려는 것입니다. 고기를 먹고서 복을 빌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복채를 받고서 복을 빌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술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줄도 모르고 별미를 바쳐서 축복을 받자고 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그러한 수요가 우리에게 있기에 그러한 것을 공급하는 자가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삭 같지는 않습니까? 눈이 어둡고 세상의 맛에 길들여져서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지는 아니합니까?

 

 

 

 

둘째, 리브가입니다. 리브가 역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입니다. 쌍둥이가 자기 배안에 있을 때 언약을 받았기에 더욱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리브가는 하나님의 언약을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다가 야곱마저 자기의 마음에 드니까 더욱 야곱을 사랑하였겠지요. 그런데 이삭이 에서를 축복하겠다는 말을 듣고서 야곱을 에서로 변장시켜서 축복을 받아 내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의 뜻이 서는 것임을 알았다면 이삭에게 말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언약이 무엇임을 말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음이 우리 인생들의 모습임을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다윗도 늙어서 자기 후계자를 빨리 결정하지 않았을 때 아도니야가 반역을 합니다. 그러자 밧세바와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에게 간하여 전에 솔로몬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것을 상기시켜 솔로몬을 왕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속임으로 장자의 축복을 받아 내지만 리브가는 이 사건 이후로 야곱을 보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셋째, 야곱입니다. 야곱은 앞으로 계속하여 살펴보겠지만 형을 속이고 눈이 먼 아버지를 속임으로 자기 자신이 얼마나 많이 속는가를 보게 됩니다.

넷째, 에서입니다. 에서는 히브리서 12:16-17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봉독” 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지 못하는 자로 정하여져 있는데도 노력한다고 안 되는 것 아니냐,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러나 성경은 에서를 망령된 자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을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경계의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앞에 닥친 이익을 인하여 영원한 나라를 포기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위하여 에서를 사용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지금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가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을 보지 못하고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이미 받았다고 에베소서 1장에서 말씀하고 있는데 그러한 복은 현실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등한히 여기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시큰둥하게 여기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그러므로 히브리서 12:15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할까 두려워하라고 합니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칠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나중에 울고불고 하여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에서가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자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를 향하여 경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고 등한히 하다가 후회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 접시의 고기를 위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한 이삭이나 에서나 리브가나 야곱이나 간에 모두가 자기의 고집과 욕심과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깜짝 놀라는 사건이 생겼는데 자기는 에서인줄 알고 축복을 하였는데 야곱에게 축복이 간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성경 전체의 흐름입니다. 결국 축복이란 하나님의 언약대로 되는 것입니다. 사람의 뜻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로마서 9:11절입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하사” 뜻이 누구로 말미암아 세워지는 것입니까? 이삭도 아니요, 리브가도 아니요, 에서도 아니요, 야곱도 아닙니다. 야곱은 맞지 않나요? 할 수 있겠지만 야곱도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자기 뜻을 세우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축복이 물질적인 것으로 알고 평생을 물질을 모으는 일에 불철주야 노력하였지만 그러나 얍복강에서 그 축복이란 자신의 재산 모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한 재산이 자기를 죽이러 오는 형 앞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만 살아남기 위하여 자기가 좋아하는 순서대로 자기 가까이에 두고서 거리를 두어 가게 합니다. 앞에서 치면 자기 혼자 도망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이삭의 축복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27:27-29절입니다. “봉독”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땅의 기름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천사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이 드러납니다. 그러한 것을 의지한 야곱이 죽고서 하나님의 언약을 새롭게 이해하는 야곱이 되는 것이 얍복강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언약의 핵심은 아브라함에게 하시고 이삭에게 하신 그 언약의 내용인데 만민이 너를 섬기고 네 형제들이 굴복하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받게 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러므로 이 언약을 하나님이 이루시기 위하여 사람들이 거듭 실패하여도 하나님은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 언약을 이루어 내심으로 그 언약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새 언약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축복하면 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이 자기의 취미나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인지를 알고서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삭이 축복을 하다가 놀라게 된 것은 자기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장자권이 야곱에게 주어지자 이삭은 새로운 각도로 하나님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삭의 자기 취미에 의하여 자기 기호에 의하여 하나님의 뜻이 메이지 않음을 에서를 축복하였는데 야곱이 받은 사건을 두고서 분명히 확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 뜻과 상관없이 이루어지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는 일에 동원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사람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도구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리브가와 에서와 야곱은 서로의 갈등으로 골이 깊어지고 원한관계로 야곱이 도망가고 에서만 남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이삭이 알게 된 이러한 하나님이 자기들의 욕심이나 기호나 취미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야곱은 언제 알게 됩니까?

 

 

 

 

그것은 나중에 알게 되는 것입니다. 얍복강과 애굽에 내려가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의 축복의 내용처럼 야곱이 바로를 축복하는 주가 되고 형제들의 주가 되는 것이 요셉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유언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한 표가 나오는데 자기의 손자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축복을 하는데 요셉의 의도는 장자인 므낫세가 야곱의 오른손의 축복을 받으려고 하였으나 야곱이 손을 어긋 맡겨서 축복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말리자 나도 안다고 하지요. 이것이 야곱을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을 바로 알게 되어야 사람들이 자기들이 소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시는 소원성취사가 아니라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이루어 내시는 분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좋습니까? 우리의 뜻을 이루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이 좋습니까? 우리의 고집과 야망과 탐심을 꺾어 내시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에 감사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복을 받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우리의 뜻이 꺾어지는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55:6-11절을 봉독합니다. “봉독” 그러므로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내안에 이루어지도록 간구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다르신 그 하나님의 생각을 알도록 기도하고 말씀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며 이것이 우리의 참된 복임을 이삭의 축복을 통하여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 안된다고 원망하기 보다 아버지의 뜻이 내안에 이루어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임을 알고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잘 맺게 하기 위하여 가지를 치는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의 여러 가지 가지를 자르실 때 고함만 지르지 마시고 깊이 묵상하심으로 우리의 전부를 주님께 맡기시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사람은 망치는데도 하나님은 이루시는 그 은혜를 바라보고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부족하고 무능하며 기도할 때도 다른 생각과 허영심이 들어오는 우리를 주님이 지금도 당신의 뜻대로 이끌어 가심을 믿고서 범사에 감사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28:1-22  벧엘  2000. 5. 14.

 

 


이삭의 축복을 받아 내기 위하여 인위적인 방법을 사용하였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언약대로 된 것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이삭이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삭의 최고의 경험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왜냐하면 이삭 자신의 기호나 취미로 축복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대로 되는 것임을 알고서 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이 축복을 받고 나서 에서가 들어와서 축복을 간청할 때 이삭의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27:33절에서 그가 정녕 복을 받을 것이니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심히 떨면서 하는 이 고백은 자신이 하나님의 대적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들이 자기들의 신앙이나 잘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욕심을 따라 고기 한 접시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을 변개시키려 한 것이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먹은 것과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축복의 사건을 통하여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그렇게 축복을 애원하는 에서에게 축복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야곱이 형제들의 주가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에서뿐인데 복수로 형제들의 주가 되겠다고 한 것은 나중에 야곱이 바로왕 앞에서 주가 되어 축복하는 것까지 연결해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사건 이후에 에서가 야곱을 죽일 작정을 합니다.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나서 내가 야곱을 죽여 버려야지, 하는 말을 리브가가 듣고서는 결혼을 빌미로 야곱을 자기의 친정으로 보내도록 이삭에게 요청합니다. 그러나 이삭이 그렇게 하도록 하면서 야곱에게 축복을 다시 합니다. 이것은 전에 에서인줄 알고 축복한 내용이지만 이제는 야곱인줄 알고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28:1-4절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그 복을 네가 받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의 전달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삭의 축복을 받고서 밧단 아람의 라반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삭과 리브가가 하는 모습을 보고서 에서가 어떻게 합니까?

 

 

 

 

8-9절을 보면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서 이스마엘에게로 가서 이스마엘의 딸을 아내로 취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이삭의 축복을 받아 볼려고 하는 것이겠지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언약밖의 사람들이 같은 모양을 취하려고 하는 것을 봅니다. 이스마엘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의 육적인 아들입니다. 그러니 에서와 이스마엘이 함께 통하는 라인이고, 이삭과 야곱이 언약의 라인인데 에서의 의도는 그렇게 해서라도 이삭을 기쁘게 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흉내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시도가 자연인의 종교적인 노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도 이러한 위장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비슷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 때로는 가짜가 더 진짜처럼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광명의 천사처럼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도대체 동일하게 주의 일이라고 하는데 무엇으로 구별이 됩니까? 열매로 아는 것입니다. 은혜와 감사가 나오는가? 아니면 자기 자랑과 또는 억지로 마지못해 사람눈치 때문에 하는가? 자기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 새벽기도회에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자발적인 일이 되어야 하고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좀더 말씀과 기도에 깨어 있기를 소원하여 진행되는 일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며칠만 지나다보면 내가 괜히 새벽기도 차량오라고 했다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우리의 살길이 말씀과 기도에 있음을 더욱 인식하고 주를 더 알아가고 주를 더욱 사랑하는 일에 열심이기를 바랍니다. 에서처럼 어줍잖은 흉내를 내려고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제 이삭의 축복을 다시 받고서 길을 떠난 야곱입니다. 늘 집안에 있던 사람이 홀로 먼 길을 여행한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형님이 죽이려하는 곳에서 더 이상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 없이 떠나는 것입니다. 두렵고 외롭고 힘 드는 여행길입니다. 이렇게 도망가는 야곱의 나이가 몇 세쯤 되겠습니까?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대부분 젊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형 에서는 결혼 하였지만 야곱은 결혼을 안 하였기에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어느 목사님의 설교집에 보니 나이를 계산해 놓았습니다. 야곱이 바로왕을 만날 때 나이가 130세, 이때 요셉의 나이는 30세에 총리가 되고 7년 풍년과 2년 흉년을 지나 39세입니다. 그러니 야곱 91세에 요셉을 낳은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이 요셉을 낳은 때는 야곱이 외삼촌 집에서 14년 후에 낳습니다. 그러니 91세에서 14년을 빼면 77세입니다. 77세에 도망을 가다가 저녁이 되어서 광야에서 노숙을 합니다. 돌로 베게를 삼아 잠을 잡니다.

 

 

 

 

그런데 이때 놀라운 꿈을 꿉니다.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하나 섰는데 땅과 하늘이 연결된 사닥다리입니다. 그리로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입니다. 땅과 하늘이 연결되는 사건입니다. 이미 죄로 인하여 생명과 단절이 되어 있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사다리를 만들어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무엇으로 하늘에 사다리를 놓겠습니까?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종교적인 행위를 가지고 사다리를 만들어 하늘까지 가겠다고 합니다. 한 계단, 한 계단 공적을 쌓아 올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하늘까지 갈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꿈에 사다리가 나타나고 그곳에 하나님이 나타나시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계시를 야곱에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이제 이삭이 아니라 야곱에게 나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한마디도 책망의 말씀이 없습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인 것을 책망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주실 때 어떠한 사람의 자격이나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로 주어지는 것임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 있기에 본질상 진노의 사람이고 본질상 자기의 이기적인 욕심을 따라 사는 우리에게 어떠한 조건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통하여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왜 자꾸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성경이 강조를 하는가 하면 이렇게 계시하시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나를 위하고 인류를 위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 안에 잘못된 하나님의 상이 부수어 지는 것입니다. 이 꿈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신 그 언약을 야곱에게 직접주시는 것입니다. 이 언약의 내용이 13-15절입니다. 이 언약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졌기에 이것을 이제 야곱에게 직접 언약을 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입장에서 보면 이삭에게서 두 번 이 언약을 받고 이제 세 번째로 하나님께 직접 이 언약을 받습니다. 이 언약의 내용을 한 번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2) 네 자손이 땅에 편만할지며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3) 이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하며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란 자기의 언약을 이루기 위하심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언약을 받은 곳이 ‘벧엘’입니다. 벧엘이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엘이 하나님이고 베이트는 집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집이란 고정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 하나님의 집이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이삭을 통하여 하나님이 일하셨는데 이제는 야곱을 통하여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을 받은 사람은 하늘과 땅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모습이고 이 후손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되는데 그 언약의 절정 최고의 자리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절을 봅니다.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닥다리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늘과 연결되는 복을 예수님 때문에 받고 사는 것입니다. 누가 하늘과 땅을 연결할 수가 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을 이미 야곱에게서 보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을 받고나서 야곱이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두려움입니다. 17절을 봅니다.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로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의 원래 이름은 루스였는데 야곱이 벧엘이라고 이름을 바꿉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타나신 그 곳에 기둥을 세우고 기름을 붓습니다. 기둥을 세우고 기름을 붓는 것은 기념과 성별을 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서 서원을 하는데 서원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나를 지키시고 먹고 입을 것을 주시고 아버지의 집으로 평안히 돌아오게 하시면 이라는 조건을 답니다. 그런데 이러한 조건을 전제로 서원을 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이 이미 이렇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약속을 믿고서 아멘 하면 될 텐데 그 언약을 자기가 또다시 조건화 하여 서원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자기의 행위를 보탬으로 자기의 안전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서원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이 13-15절에서 아브라함의 언약을 이루시겠다고 하시는데도 자기의 서원에는 아브라함의 언약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 신변의 보호뿐입니다. 그러니 나중에 돌아올 때도 자기의 목숨을 위하여 작전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모습이며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서원을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정당한 반응이라고 보는데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자기의 신변보호를 위하여 그렇게 서원한 것인데 스스로 이 서원을 지켜내지 아니하는 야곱임을 그의 생애에서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서원이 세 가지인데 첫째는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먼저 나타나셔서 너의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곳에 하나님의 전을 짓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짓습니까? 아니지요? 세 번째는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하는데 한번도 십일조를 드렸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단지 자기의 목숨을 살리기 위하여 형 에서에게 엄청난 선물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서원을 하였지만 서원은 서원이고 자기의 뜻대로 삽니다. 그러나 계속하여 속임을 당하는 과정에서 할 수없이 벧엘로 올라오는 것입니다. 형이 기다리는데도 올라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창세기 31:41절에 보면 라반이 야곱을 열 번이나 속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라반에게서 도망하여 형에게로 벧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벧엘로 가는 것이 누구의 일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31:13절. 이곳을 떠나 벧엘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벧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벧엘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가다가 세겜에 또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자 세겜의 추장과의 사건이 있고나서 또 다시 벧엘로 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35:1절입니다. 그리고 벧엘로 올라가자고 3절에서 야곱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벧엘로 올라가는 것은 구약에서는 장소적인 면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장소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의 언약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벧엘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언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미 구약에서 벧엘이란 우상을 섬기는 장소가 되어 버립니다. 여로보암왕 때에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서 너희를 구원한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약에서도 장소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 언약의 하나님께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호세아 11:12-12:6절을 봅니다. “봉독” 벧엘의 하나님을 말씀하면서 무어라고 합니까? 북 이스라엘 남 유다 모두가 하나님께 정함이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거짓과 포학을 행하며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찌라.

 

 

 

 

야곱이 도망가다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언약을 하신 것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벧엘은 어디 입니까?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정말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요 나의 전부임을 고백한 자리가 어디입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디에 있습니까? 야곱처럼 자기 살길 바빠서 불철주야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일하지만 열 번이나 속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벧엘로 돌아가야 합니다. 방향을 바르게 설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쓸데없이 고생하고 방황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벧엘로 돌아갑니까? 벧엘로 돌아가는 자세는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봅시다.

 

 

 

 

창세기 28:16-22  서원  2000. 5. 21.

 

 


야곱의 서원을 통하여 성경 전체적인 서원의 의미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서원이란 개념은 우리의 소원의 간절함과 긴박함에 따라 즉 나의 절실한 필요에 의하여 서원을 하게 됩니다. 그 대상이란 자기가 믿고 의지하는 대상이든 아니면 생소한 대상이든 간에 자기의 소원을 들어줄만한 대상이라고 믿는다면 그러한 대상에게 자기의 소원을 빌고 또 비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비는 것 보다는 서원을 하면 더 잘 들어주겠지 라는 생각을 누구나가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에게 무슨 부탁을 할 때 부탁을 받는 입장에서 쉽게 해줄 수 있는 입장이라도 한마디 하는데 무엇입니까? 맨입으로 되겠나, 하는 말을 하지요. 이러니 우리가 정말 다급하고 꼭 필요한 일이라면 무슨 서원을 못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일반적인 서원이란 것은 이것은 꼭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들어만 주신다면 제가 이것은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는 것이 서원한다는 기본적이 생각입니다.

 

 

 

 

야곱도 이런 생각과 별 차이 없이 서원을 하는 것입니다. 형은 자기를 죽이려 하고 자신은 77세가 되어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길을 떠나야 하니 고대 사회일수록 혼자서 다니다가 강도를 당하여도 죽어도 어디서 항변도 못하는 시대인데 얼마나 두렵고 불안했을까요? 그런데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계시를 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그리고 이곳에 돌아오게 하고 너의 후손을 통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하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언약하신 그 언약을 반복하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언약을 받는 사람은 다르더라도 언약의 내용은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을 주시는 것은 언약을 받는 자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야곱이 언약을 받는 경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언약을 받고서 야곱은 나름대로의 서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서도 또 자기가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해결하여 주시고 자기를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여주시면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 것이요, 이곳에 하나님의 전을 지어드리겠으며,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서원을 합니다. 이러한 서원은 자기를 지켜주시고 돌아오게 하신다는 조건하에 서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은 이미 함께 하시겠다고 지키겠다고 자기의 언약을 다 이루시기 까지 떠나지 아니 하시겠다고 하셨는데도 조건을 내세운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차원보다는 자기의 신변보호가 우선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의 세 가지 서원을 살펴봅시다. 자기를 보호하여 이곳으로 돌아오게 해 주시면 하나님이 자기의 하나님이 되시리라는 것과 하나님의 전을 짓는 것과 십일조에 대하여 야곱이 그 서원대로 행하였는가를 보면 야곱이 자기의 하나님으로 부르기는 합니다만 이것이 그 서원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야곱을 선택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오신 것이기에 야곱이 자기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조건을 이루어 주었기 때문에 자기의 하나님으로 부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야곱이 생각하는 하나님이 지켜주신다는 의미와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신다는 뜻은 다른 것입니다.

 

 

 

 

야곱의 함께 한다는 생각은 자기를 지켜주는 수호신 정도의 함께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하신다는 것은 자신의 언약을 다 이루시기까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전혀 초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의 하나님되심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선택하여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심으로 하나님이 스스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15:41절을 봅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하여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출애굽시키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아브라함과의 약속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을 우리가 지금까지 보았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는 것입니까? 후자죠. 그러므로 우리가 스스로 어떠한 신을 선택한다면 그런 신은 사실 우상입니다. 분명히 나의 필요와 나의 편의와 완급경중에 선택하고 부르는 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만들어 내는 신이 우상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 예수님 하여도 하나님의 자기 언약중심이 아닌 나를 위한 하나님 예수님이 되어 버리면 결국 우상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도 자기의 위급 중에 꿈에 나타난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의 서원을 말하지만 그러나 그의 노년에의 고백은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고백을 보면 나를 나의 뜻대로 지키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의 뜻대로 지키시는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서원 때문에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오늘날 또다시 쓸데없는 서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전체에서 서원에 대하여 살펴보면 처음으로 서원하는 자가 야곱이고 그 나머지의 서원의 말은 주로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시편과 잠언 전도서에 조금 나오고 사사기와 사무엘서와 소선지서에 조금 나오고 신약에는 사도행전에서 꼭 두 번만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원이란 말이 구약적인 용어이며 그리고 서원이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서 쓰이는 경우는 자기의 어떠한 특정한 소원을 위한다기 보다는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는 기간 또는 자세가 훨씬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나실인으로서의 서원과 같은 것입니다.

 

 

 

 

민수기 6:2절입니다. 민수기 6장이 나실인에 대한 규례인데 남자나 여자나 나실인으로 서원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한다는 의미입니다. 민수기 30:2절입니다. 민수기 30장은 일반적인 서원에 관한 규례인데 서원을 하는 동기가 마음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절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르게는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동기가 서원인데 그러한 서원을 하는 경우에 결혼 안한 자녀이면 부모가 그 서원을 파기하여도 됩니다. 그러나 동의하면 서원을 지켜야 합니다. 아내의 서원은 남편이 파기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서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어떠한 절박한 자기의 소원을 관철하기 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고 괴롭게 하기 위한 그런 서원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자면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서로 분방하는 것 등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너무 무리한 서원을 하면서 무엇을 드리겠다고 하였을 경우 그 사람이 그 서원을 갚을 힘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합니까?

 

 

 

 

레위기 27:8절을 봅니다. 레위기 27장의 서원은 어떤 사람이 여호와께 자기를 드리기로 하였다면 나이에 따라 그 값을 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정가를 정하여 주는데 그러나 어떤 사람이 여호와께 자기를 드리기로 하였는데 너무 가난하여 그 대속의 돈을 드리지 못할 때는 제사장이 보고서 그 형편대로 깎아 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물건 중에서 서원한 것이 있다면 우열 간에 바꾸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혹 부정하면 그 가치의 오분의 일을 더하여 내고 혹시 서원하였다가 그 짐승이나 집이나 간에 무르려고 하면 그 값의 오분의 일을 더하여 무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구약의 서원을 살펴보면 하나님께 헌신하겠다는 서원입니다. 자기의 어떠한 소원을 조건으로 내어 걸고 서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헌신의 서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서원 외에 조건부 서원도 있습니다. 그러한 대표적인 경우가 입다의 서원입니다.

 

 

 

 

사사기 11장에서 입다를 사사로 이스라엘 장로들이 부릅니다. 그러자 한때는 기생의 아들이라고 내어 좇아놓고 위험할 때 자기를 구하여 달라고 온 것입니다. 그래서 입다가 말하기를 하나님이 암몬자손을 나에게 붙여 주시면 과연 나를 당신들의 지도자로 삼겠느냐고 합니다. 그러자 그렇게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입다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합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였다는 것은 이미 적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입다가 서원하기를 자기가 승리하고 돌아오면 자기를 환영하는 가장 먼저 나오는 자를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승리를 하고 돌아오는데 누가 나옵니까? 무남독녀인 자기 딸이 영접하러 제일 먼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딸의 태도를 봅시다.

 

 

 

 

사사기 11:36절입니다. 하나님께 한 서원이기에 자신이 희생이 됨. 그러나 서원대로 하나님께 드리기로 하는데 이것을 참으로 번제로 드렸는가, 아니면 처녀로 시집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성막을 봉사하기 위하여 평생 드려졌는가 하는 논쟁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 서원에서 보면 서원을 통하여 희생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모든 서원에는 서원의 대가가 있고 서원에 따른 희생이 따르는 것입니다. 전도서에서 서원의 의미를 봅니다.

 

 

 

 

전도서 5:5-6절입니다. 서원하고 갚지 않는 것보다 안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원하였다면 갚으라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해로울지라도 서원은 갚으라고 시편15편 4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서원이 신약에서는 거의 없습니다. 단지 두 곳에서 나오는데 바울이 무슨 서원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서원이 겐그리아에서 머리를 깍은 것과 이방인이 복음을 듣고서 서원한 자들이 네 사람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율법자들에게 힐난을 받지 않도록 결례와 머리를 깎는 일을 합니다. 이외에는 서원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맹세에 대하여서는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서원과 좀 다른 의미이기는 하지만 맹세에 대하여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5:33-37절입니다. 도무지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네가 무엇인데 맹세를 하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머리카락 하나 희고 검게도 못하면서 무슨 맹세를 하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맹세를 한다거나 서원을 한다는 것은 자기의 행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 서원이고 맹세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서원이나 맹세를 하지 말 것이고 단지 우리에게는 예 할 것은 예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앞에 헌신하고자 서원하신다면 자기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 예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 무슨 부탁을 하더라도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하면 됩니다. 여기서 지나치는 것이 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급한 일이 있거나 사업이나 인생의 중요한 계획을 세울 때 어떤 자세로 하면 됩니까? 서원을 하고서 이 일은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그런 일이 우리에게는 사실 없는 것입니다. 단지 있다면 주의 뜻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을 위하여 기도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서원이나 맹세보다는 이런 말씀을 기준으로 세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야고보서 4:13-16절입니다. 우리가 안개인데 무슨 서원이나 맹세를 합니까? 주님이 허락하시면 이것도 저것도 하겠습니다, 하는 자세로 살면 되지 않겠습니까? 성경전체의 흐름에서 서원이란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표가 서원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자기의 급한 사정을 해결하기 위하여 서원을 하는 자도 있습니다. 야곱이 그렇고 입다가 그러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서원에 대하여 희생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야곱의 서원에서 자기가 서원을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희생이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한다고 하시고 성전도 야곱이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하는 온전한 성전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온전한 십일조가 되신 주님이 희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실 날마다 서원하고 날마다 서원을 파기하는 부도수표를 남발합니다. 찬송하고 기도할 때의 마음과 돌아설 때의 마음이 다른 것입니다. 이러한 서원 불이행자를 대속하신 분이 계시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든 서원을 하나님 앞에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온전한 서원을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도 서원을 온전히 이루어 내신 주님으로 인하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급한 필요를 위하여 서원하기보다 예수 믿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29:1-20  우물가에서  2000. 6. 4.

 

 


야곱이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면서 까지 자기의 축복을 만들어 내려고 하다가 이제는 한번도 가보지 못한 길로 도망 중에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도망 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언약을 주시는 것입니다. 네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네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이다, 이제 내가 너로 언약을 세우노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을 받는 것이 이미 태중에서 결정된 일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언약을 야곱에게 세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이었습니까? 네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자손이 많아지리라는 것과 네 자손을 인하여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는 것입니다. 이 내용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동일하게 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이 언약을 이루시기까지 야곱을 떠나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이뻐서가 아니라 자기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야곱을 훈련시키시고 연단하셔서 결국 언약의 사람이 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언약의 중요성을 알게 하심으로 야곱의 생애를 마무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은혜의 언약을 주신 것입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사 하늘의 기업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늘의 기업보다 우선 눈앞에 보이는 이 땅의 기업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니 마치 야곱처럼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하여 자기의 땅의 기업을 이루어내기 위하여 불철주야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우리를 결국은 하나님이 꺾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더 좋은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련과 어려움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더 좋아지기 까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훈련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야곱을 통하여 미리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야곱 자신이 훈련받는 부분도 있지만 야곱에게 붙여져서 함께 언약의 자녀로 편입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을 받은 자들의 특징입니다. 야곱은 야곱 나름대로 자기의 살길을 찾아 나서는데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물어물어 드디어 자기의 외삼촌 라반이 사는 곳 가까이 왔습니다. 그리고는 우물가에 이르러 라반에 대하여 물어 봅니다. 그러자 마침 그 우물가에 라반의 딸 라헬이 양에게 물을 먹이기 위하여 온다는 것입니다. 요즈음이야 수돗물을 틀지만 우리나라도 몇 십 년 전까지만 하여도 우물을 길어 먹었지 않습니까? 좀 부잣집은 자기 마당에 우물을 파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네의 공동우물을 사용하지요.
그런데 이러한 우물이란 정보교환장소이지요. 이웃의 소문도 듣고 타지의 소문도 듣는 곳입니다. 이러한 장소에 야곱이 가서 라반에 대하여 묻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 우물가에 라반의 딸 라헬이 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바로 하나님이 자기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드디어 라반의 딸이 양떼를 몰고 옵니다. 혼자서는 돌을 옮기지 못하기에 여러 사람이 모여서 돌을 옮기고 우물을 길어서 양들을 먹게 하는가, 봅니다. 그러니 라헬 혼자서는 못하겠지요. 그래서 야곱이 돌을 옮게 물을 먹게 하고서는 자기가 리브가의 아들임을 말합니다. 그러자 라헬이 자기 아버지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라반이 달려와서 자기 조카를 맞이합니다. 그리고서 한달쯤 되었을 때 어떻게 공으로 일을 하겠느냐 네가 품삯을 정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는 까닭에 7년을 일해 줄 테니 라헬을 달라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신부를 맞이하려면 신부의 값을 신부의 부모에게 지불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7년을 일하겠다는 것입니다. 언니보다는 동생이 더 마음에 들은 모양입니다. 17절에 보면 레아는 안력이 부족하고 라헬은 곱고 아리따웠다고 합니다. 새번역에 보면 레아는 눈매가 부드러웠으며 라헬은 몸매가 아름답고 용모도 예뻤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전체적으로 라헬이 훨씬 예뻤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야곱이 아마 첫눈에 반한 모양입니다. 그러니 7년을 수일같이 라반에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목이 무엇입니까? 우물가에서, 이지요. 우물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데 야곱은 우물가에 와야 정보를 알 수 있기에 우물가에 간 것입니다. 그리고 라헬은 양들에게 물을 먹이기 위하여 우물에 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만남이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라는 사실을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연히 그렇게 된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만남 속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야곱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에게 붙어지는 사람은 하나님의 언약에 편입이 되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가 살길을 찾아서 라반에게까지 왔고, 라헬은 양에게 물을 먹이기 위하여 간 것이지만 그 곳에서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을 다른 곳에서도 함께 찾아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24:27절을 봅니다. “봉독” 아브라함의 종이 하나님께 감사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감사를 하는지를 아시지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아내를 얻기 위하여 이곳까지 와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이지만 아브라함의 말을 듣고 왔기에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그 내용을 종을 통하여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우물가에서 언약을 받은 자가 먼저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리브가는 알고 갑니까? 모르고 갑니까? 모르고 가지요. 그리고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물을 좀 달라고 하면 물을 길어 주고 약대에게도 물을 주면 그 처녀가 하나님이 보내주신 처녀로 알겠습니다, 하고 기도를 하였는데 처녀가 그 기도의 내용을 모르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리브가는 평상시의 물 긷는 일을 하는 중에 하나님의 언약을 수행 중에 있는 자를 만남으로 그 운명이 바뀌어 지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15-22절을 봅니다. “봉독” 모세도 야곱과 비슷하게 도망을 가는 중입니다. 그런데 우물가에 앉아 있다가 미디안 제사장의 딸들을 만나게 됩니다. 다른 목자들이 우물물에서 쫒아 내는 것을 막고서 양떼에 물을 먹이게 합니다. 야곱이 라헬의 양떼에게 물을 먹인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들을 함께 보면 언약을 받은 자의 모습이 지나가는 나그네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오히려 주도권이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윤리 도덕적인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도망가는 신세이고 또 살인자가 되어서 도망가는 신세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없는 도망자의 신세입니다. 물론 아브라함의 종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만 이들에게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사람에게 붙여질 때 이들의 공통점은 우물가에서 만난 것입니다. 우물가가 신기한 장소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에 나온 여인들은 모두가 자기들이 하나님의 언약속에 들어가리라는 생각을 꿈에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단지 자기들의 육신적인 필요에 의하여 물을 길러 오든지 아니면 양떼를 먹이러 왔을 뿐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자리에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우리도 다 동일하게 생존을 위하여서만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학교를 다니고, 직장생활을 하고 그냥 그렇게 세상의 모습처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천국이 있는 지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주님이 다가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우리가 알지 못하고 행하고 있던 때에 주님이 나타나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언약에 편입시키신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여서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원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던 자들입니다.

 

 

 

 

그저 물이나 쉽게 길어 오고, 양떼에 물이나 잘 먹일 수 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의 발전이 수도로 연결되는 것을 사람들은 발전이라고 합니다만. 예수님을 만나기전에 유일한 싸움이란 어떻게 하여야 이 생존세계에서 더 나은 고지를 점령할까 그런 생각으로 살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주님의 나라에 편입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다른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영적인 전쟁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을 떠나는 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내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면 주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떠날 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제는 약속의 나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까지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비록 떠나는 아픔이 있고 장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지라도 언약을 받은 자와 함께 동행 하는 길이 영생에 이르는 길이기에 우리를 다른 길로 이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을 받은 사람이란 다른 삶으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약을 받고서도 다른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속성입니다. 야곱의 언약에 포함이 된 라헬과 레아와 그의 종들까지도 언약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기들의 생존경쟁을 위하여 살아갑니다. 이런 모습이 ‘자녀낳기’ 시합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야곱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살고 있는 이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만들어 가시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그렇게 불철주야 애를 쓰고 고생하며 잠도 안자고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를 견디며 모은 재산, 교묘하게 양들을 불린 것, 이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게 만드심으로 결국 하나님의 언약 하나만을 남기시는 것이 언약을 받은 자의 생애 속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약의 인물들이 우리에게 경계가 되고 거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어떤 방법으로 인도하시는지를 보고서 우리도 그러한 인도를 받아서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은 갑자기 나타나셔서 우물물이 아니라 생명수를 말씀하시고 생존이 아니라 생명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마실 물이 아니라 생명수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물가에서 일어나 사건이 단지 마실 물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수로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필요가 무엇입니까? 그저 생존에 필요한 물이라면 이곳에 나오실 이유가 없습니다. 구약에서 우물을 단지 물로서만 말하지 않는 곳이 몇 곳 있습니다. 함께 찾아보고자 합니다.

 

 

 

 

이사야 12:2-3절. “봉독”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으리라고 하십니다. 구원의 우물이 있는 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힘이고 우리의 노래가 되며 구원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9:10절입니다. “봉독” 샘물 근원으로 인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포로로 잡혀간 그들을 인도하시는데 샘물 근원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은 구원을 샘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구원의 샘물을 어떻게 마십니까? 이사야 55:1절입니다. “봉독” 값없이 거저 마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긍휼로 그저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계시록 22:17절에서 값없이 생명수를 마시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우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물마시기 위하여 가다가 영생수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영생을 가지신 분이 미리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신약에서 우물가의 사건이 하나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우물가가 생각이 나십니까? 요한복음에서 이미 우리가 보았습니다. 누가 미리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언약의 완성이시오 실체이신 예수님이 생명수로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우물가에 누가 나옵니까? 죄 많은 한 여인이 단지 자기의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하여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우물가에서 생수를 만날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우물가에 일어나 기적이요 은혜의 현장인 것입니다. 그러자 이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생수에 취하여 마을로 달려 간 것입니다.

 

 

 

 

요한복음 4:5-6절입니다. “봉독” 무슨 우물입니까? 야곱의 우물입니다. 야곱이 판 우물이 그대로 남아 있는지 모르지만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까운 곳입니다. 그래서 그 우물을 야곱의 우물이라는 곳에 예수님이 앉아 기다리는 것입니다. 야곱이 우물가에 기다리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주님이 먼저 찾아 오셔서 세상에 목말라 하던 우리에게 영생수를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부터인가 이 영생수로 인하여 기뻐하지 아니하고 다른 물을 좋아 하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이스라엘의 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구원의 샘물을 버리고 스스로 물을 마련한 것입니다.

 

 

 

 

예레미야 2:13절.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것, 17:13절. “봉독” 여호와를 떠나는 것이 생수의 근원을 버리는것 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향하여 달려갑니까? 생존의 현장에서 생명수를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더욱 풍성히 맛보시며 살기를 소원합니다.

 

 

 

 

창세기 29:21-35  총(寵)이 없음  2000. 6. 11.

 

 


총이 없다는 말은 은총이 없다는 말입니다. 은총이란 사랑을 받다, 라는 것인데 총이 없다, 라는 것은 사랑을 받지 못하다, 라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는데 누구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남편에게서 사랑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사랑을 받지 못하였는가를 살펴보면 성경의 이 총이 없음이란 말이 실감이 납니다. 야곱이 처음부터 사랑한 사람이 라헬이지만 그러나 이렇던 저렇던 이제 아내가 되었는데도 계속하여 라헬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하지 않는 레아까지 자기의 이내가 되었습니까? 외삼촌 라반이 야곱을 속인 것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는 것을 보고서 그것을 이용하여 자기의 이익을 챙기는 것이 라반입니다. 누구의 모습입니까? 바로 야곱 자신의 모습인 것입니다. 자기 형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와서 배가 고파 헐떡거리는 그 간절함을 빌미로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사는 그런 야곱 아닙니까? 그러한 야곱에 비하면 라반은 점잖은 편입니다. 단지 7년 더 봉사하도록 하기 위하여 속인 것이며 라헬을 결국 주지요. 그러니 야곱이 더 교활한 속임수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신의 모습은 간곳없이 신혼 첫날밤을 보내고 아침에 보니 레아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하지만 유대인들의 혼인잔치는 술이 있고 또 밤에 이루어지니 분간을 못하였겠지요. 당연히 라헬인줄 알고 지냈지만 레아인 것을 알고 왜 나를 속였느냐고 따지니 라반이 무어라고 합니까? 우리 풍습에 동생이 언니보다 먼저 시집가는 일이 없다, 라고 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7일 신혼기간이 지나면 라헬을 줄 테니 그 대신 7년을 더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얼마나 사랑하였으면 또 다시 7년을 봉사하겠다고 합니다. 7년을 수일같이 지냈는데 결혼하고서 7년을 더 봉사하지 못할게 없지요?
 

 

 


30절을 봅니다. 7일이 지나서 라헬을 주니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므로 칠년을 또 봉사하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라헬을 사랑하니 레아는 뒷전입니다. 그러므로 주로 어디 가서 잡니까? 라헬에게만 가서 잡니다. 가뭄에 콩 나듯이 레아에게 한번씩 오는 것입니다. 아마 라헬과 다투어서 한번씩 오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이런 신세의 레아입니다. 다투었다니 이상하게 들립니까?

 

 

 

 

30:1-2절을 봅니다. 라헬이 자기는 자식이 없으니 언니를 투기하여 야곱에게 나도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죽겠노라, 그렇게 말합니다. 이 말을 할 때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부드럽고 교양 있게 했겠습니까? 내 죽겠다고 하는 정도로 하니 야곱이 노를 발하는 것입니다. 이를 보면 싸운 것이지요?

 

 

 

 

31절을 봅니다. 이 정도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레아에게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하심을 보시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태를 여신 것입니다. 얼마나 야곱이 자기를 사랑하여 주기를 원하였으면 장남을 낳고서 무어라고 하는지 32절을 봅니다.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였더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들 하나 낳았다고 하여 야곱의 마음이 레아에게로 돌아서지는 않았는가, 봅니다.

33절을 봅니다. 두 번째 아들을 낳고서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고 하면서 그 이름의 뜻이 들으심인데 나의 총이 없음을 하나님이 들으시고 또 아들을 주셨도다, 합니다. 그러나 야곱의 마음이 레아에게로 돌아서지는 않은 것입니다. 여전히 라헬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 아들을 낳고서도 무어라고 합니까?  34절입니다. ‘레위’입니다. 뜻은 연합이라는 의미인데 나의 남편이 이제는 나와 연합하리라고 이름을 짓는 것입니다. 얼마나 남편이 자기와 연합을 하지 않았으며 이런 이름을 다 지을까요? 이름들에 대하여는 다음주에 한 번 더 살펴보기로 하고 오늘은 하나님의 은총이 어떻게 주어지는 지를 보고자 합니다. 넷째 아들 ‘유다’를 낳고서도 여전히 야곱이 레아보다 라헬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30:14-16절을 봅니다. 남편의 잠자리 주도권을 여전히 라헬이 쥐고 있는 것입니다. 레아의 아들 르우벤이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서 자기 어머니에게 드리니 이것을 라헬이 달라고 합니다. 합환채는 임신촉진제로 사용되거나 또는 흥분제로 사용되는 그런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라헬이 그것을 형에게서 달라고 하자 내 남편도 빼앗더니 이제는 합환채마저도 빼앗느냐고 말하자 라헬이 무어라고 합니까? 내 남편을 형과 동침하게 해 줄 테니 합환채를 달라고 합니다. 둘 다 자기 남편이라고 하지만 야곱의 주도권을 라헬이 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하는 쪽이 레아입니다.

 

 

 

 

공빈과 인빈이 서로 왕의 총을 받기 위해 시기 질투하는 것이 ‘허준’이라는 드라마에 나오지요. 성경의 인물이나 드라마속의 인물이나 인간의 속성이란 별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인물들이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삶의 모습 속에서 죄가 무엇인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죄된 모습을 드러내기 위하여 율법이 가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서는 한 남자가 자매를 동시에 아내로 취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다른 점이 무엇이겠습니까? 이들의 삶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읽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아와 라헬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은총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라헬도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심으로 자녀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남편을 독차지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고 합환채를 가지고 간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라헬을 하나님이 들으심으로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총이 없는 몇 사람들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의 족보에 나오는 여인들입니다. ‘밧세바’는 이름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서 뺍니다. ‘우리아의 아내’라는 이름으로 나오기에 오히려 우리아의 희생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렇지 않고 이름이 나온 네 여인의 모습을 보면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면 한결같이 총이 없는 사람들이고 기구한 팔자요 운명이라고 할만한 사람들입니다. 먼저 다말입니다.

 

 

 

 

창세기 38:1-11절입니다. 다말은 야곱의 아들 중 유다의 며느리입니다. 유다의 며느리인데 시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베레스와 세라라는 쌍둥이를 낳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유다가 자기 아들 엘을 다말과 결혼시켰는데 큰 아들이 악하여 하나님이 죽이십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자기 둘째 아들 오난에게 형님의 대를 이어서 형수를 취하여 아들을 낳아야 합니다. 그런데 동생이 오난인데 형의 씨를 이어주기 싫어서 설정을 할 때 땅에다 설정을 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죽게 됩니다. 그런데 유다의 셋째 아들이 아직 어려서 다말에게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유다는 그 아들마저 죽어 버리면 어떻게 하나 하면서 주지 않는 것입니다. 시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자기 아들 잡아먹는 며느리라고 할만 하지요. 그러니 셋째 아들을 주지 않자 다말이 기생으로 변장하여 자기 시아버지와 동침을 하고서 아이를 잉태합니다. 그리고나서 임신소문이 나자 바람을 피웠다고 죽이려하자 누가 그 아이의 아버지인지 도장과 끈을 가지고 증명하자 네가 옳도다, 합니다. 다말의 희생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참으로 남편복도 없다 싶은 그런 기구한 운명의 여인 아닙니까?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라합입니다. 라합 하면 항상 따라 붙는 수식어가 있는데 무엇입니까? 기생입니다. 기생 라합. 기생이 되기까지 얼마나 기구한 운명의 여인입니까? 웃음을 팔고 몸을 팔아야 하는 여인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조국을 배신하고 소문에 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편을 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리고성의 진멸 속에서도 살아남습니다. 살아남는 정도가 아니라 역시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갑니다.

 

 

 

 

세 번째 룻입니다. 이방인 모압 여인으로 베들레헴에서 이민 온 사람의 집에 시집을 갑니다. 시집을 갔지만 시아버지 죽은 집인데 자기 남편 죽고 자기 남편의 동생도 죽어버리고 과부만 세 명 남은 그런 집안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에서도 벌하시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임을 고백하며 늙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에 돌아와서 보아스와 결혼하게 되고 결국 예수님의 족보에 오릅니다.
 

 

 


끝으로 마리아입니다. 처녀가 잉태한 것입니다. 요즈음이야 처녀가 아이를 가져도 할말이 있지만 유대인의 사회에서 처녀가 아이를 낳으면 돌에 맞아 죽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그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면서 처녀의 몸에 아이를 가지는 것은 자기의 죽음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기구한 운명입니까?

 

 

 

 

이 네 사람을 인간적인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한결같이 복이 없는 여인, 팔자 사나운 여인, 남편복도 없는 여인이 자식복도 없다고 누가 내 어미이며 누가 내 형제이냐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모친이며 내 형제라고 하는 자기의 마음에 칼을 꽂는 것과 같은 예수였습니다. 이러한 기구한 운명의 여인들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서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 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세상의 분복을 다 받아 누린 것이 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어간 것이 참된 복임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팔자가 사납다느니, 운명이 어떻다느니 하는 그런 것들이 우리에게는 해당사항이 안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이 없다느니 저주를 받았다느니 하는 말도 우리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는 바의 저주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는 것이 저주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저주스러운 모습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붙어있다면 이것이 우리에게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6-31절을 봅니다. “봉독” 하나님이 이렇게 하심은 세상의 천하고 약한 것이 자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쓸데없는 것으로 자랑삼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천하고 약한 것이 자랑이 아니듯이 부하고 강하고 지혜롭다는 것이 자랑이 역시 아닙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아무 육체라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는 무엇을 자랑하는 것입니까? 우리처럼 천하고 약하고 악한 죄인을 살려주신 주님의 은혜와 긍휼만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사람의 총을 받지 못한 레아에게 하나님이 총을 허락하셔서 그에게서 유다가 나오는 것입니다. 유다지파에게서 왕이 나오고 그 지파에서 그리스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있는 것은 주님의 긍휼하심이 바탕인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싫어버린바 되었지만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것이 우리의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삶에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세상적인 것들이 없다고 하여 기죽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총을 받고 있다면 하나님의 긍휼이 있다면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복이 없음을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는 것이 복입니다. 여기에서 끊어지면 세상의 아무리 좋은 것으로 다 누린다고 하여도 그것은 이 세상의 분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세만 사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준비하며 사는 사람임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 그런데 야곱이 나중에 죽을 때 누구 옆에 묻히는지 아십니까? 라헬입니까? 레아입니까? 그렇게 사랑한 라헬 옆이 아니라 레아 옆에 묻히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죽자 철드는 것입니다. 라헬은 베냐민을 낳다가 죽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 길가에 장사를 지냅니다. 그러나 레아는 나중에 죽고서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가 묻혀있는 곳에 장사를 지내고서 자기도 죽을 때에 어디다 묻어 달라고 하는가 하면 레아 곁에 묻어 달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49:29-33절입니다.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 나도 그곳에 장사하라고 하면서 죽습니다. 야곱의 생애 마지막에 보여준 두 가지 하나님의 계시가 손자를 축복할 때 손을 어긋 맡기는 것입니다. 요셉은 장자가 더 축복받기를 원하여 야곱의 오른손으로 가게 하였지만 야곱이 바꾸는 것입니다. 사람의 사랑과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기의 죽음 앞에서 라헬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레아에게 가는 것입니다. 라헬은 사랑을 받았지만 레아가 사랑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하나님이 은총을 더하신 것을 보이는 것이 야곱의 유언에서 자기를 레아 곁으로 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의 한 가지 소망은 이 세상의 위로도 아니요 사람의 은총도 아니요 하나님의 은총만 있다면 이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레아에게 은총을 베푸셨듯이 오늘 우리도 주님의 긍휼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은총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30:1-24  경쟁  2000. 6. 18.

 

 


8절에 보시면 내가 크게 경쟁하여 이기었다고 합니다. 자기 언니와의 ‘자녀낳기경쟁’에서 이겼다고 이름을 ‘납달리’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이름이 이렇게 인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인하여 지어진 이름입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믿음의 조상이고 하나님이 택하신 열두 지파는 무언가 태어나는 것도 고상하게 아름답게 신비롭게 태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오늘 말씀을 보면 산산이 부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의 욕망, 경쟁, 시기, 질투 이러한 것에 대하여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하여 인간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시는 길 외에는 달리 구원의 길이 없음을 또한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을 보기 전에 잠시 야곱의 도망과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처신을 그동안 보았습니다만 몇 가지를 조금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야곱평전’이라는 책을 지난주에 책 소개하는 것을 듣고서 한권 사서 보았는데 그중에서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 즉 장자가 되리라는 것을 리브가를 통하여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30년이 지나도 장자가 되리라는 기미마저 보이지 않자 드디어 형의 배고픔을 동원하여 장자의 권리를 빼앗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자기중심적인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장자의 권리를 죽 한 그릇에 사기는 하였지만 30세에서 70세까지 40년을 기다려도 누가 너 장자 하라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이삭은 에서에게 장자권을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듣고서 리브가와 야곱의 합작으로 장자의 축복을 아버지를 속여서 받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나서 이삭이 크게 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에 설교 중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사람의 기호와 취미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야곱을 다시 축복하여 하란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도망가는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벧엘까지 약 180리길인데 하루 만에 온 것입니다. 죽도록 달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피곤에 지쳐 잠이 들었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브라함과 이삭의 언약을 야곱에게 하시자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을 겨우 자기의 먹을 것, 입을 것 해결하여 주시면 하나님으로 섬기겠고 그렇지 않으면 국물도 없다는 식으로 서원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야곱의 모습입니다. 그리고서 드디어 외삼촌 라반의 집 가까이 와서 라헬을 보는 순간 한눈에 반해 버리는 것입니다. 레아는 안질이 약하고 이 부분을 야곱평전에서 잘 말하고 있어서 소개합니다. 레아는 ‘안질이 약하고’를 ‘눈매가 아름답고’로 말하기도 하고 눈이 부드럽다 약하다, 라고 말하는 데 시력이 약하다는 말이 아니라 성적 매력이 없다, 라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중동의 여인들의 특유한 성적 매력이 라헬에게 있었다고 그 당시의 여인들의 모습을 통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야곱이라고 하여도 얼마나 자기의 취향을 따라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의 죄란 자기는 살아야 한다는 것, 그래서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기의 인생을 스스로 챙겨나가는 것, 이것을 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야곱이 가장 잘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야곱뿐만 아니라 그 주변의 인물들도 다 동일합니다. 라반이든 레아이든 라헬이든 서로 서로 경쟁하여 이기려고 하는 것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러한 경쟁 속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의 이름을 통하여 이들의 경쟁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고자 합니다. 야곱이 라헬만 사랑하고 레아를 등한히 하자 하나님이 레아의 총이 없음을 보시고 레아의 태를 여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하는 그런 이름을 지어야 할 텐데 어떻게 이름을 짓습니까? 29:32절절. 르우벤, 뜻은 ‘보라 아들이다’ 남아 선호사상은 어디라도 다 있었습니다. 그러니 보라 아들이다, 하면서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라고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나의 괴로움을 권고하셨다고 하면서도 결국은 하나님의 권고를 가지고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라는 쪽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29:33절. 시므온, 뜻은 ‘들으심’이라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기에 자기의 소원을 들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29:34절. 레위, 연합. 이제는 세 명을 낳았으니 이제는 남편이 나와 연합하리라는 이름입니다. 29:35절. 유다, 찬송함.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한다는 믿음의 표현 같아 보입니다만 그 정도의 수준이 안 됩니다. 야곱이 자기를 보호하여 주시면 나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는 정도인데 레아인들 별수 있습니까? 단지 자기의 억울함이 풀렸으니 이제 아들을 네 명이나 낳았으니 이제는 이겼다, 야호 하나님을 찬양하자 이런 정도라고 보아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네 명의 아이로 만족하지 않고 나중에 라헬의 시녀가 아이를 낳자 자기도 자기의 시녀를 주어서 아이를 낳게 하는 경쟁을 보면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라헬의 시녀가 아이를 낳습니다. 아무리 백방의 노력을 하고 야곱을 거의 독차지하여도 안 되니 자기의 시녀 빌하를 주어서 자기 아들로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낳은 아들이 단입니다. 30:1-6절. 단, 억울함을 푸심, 그러나 하나님이 억울함을 풀어 주신 것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자기의 억울함을 푼 것입니다. 나로 아이를 낳게 하라고 고함을 지르다가 야곱이 내가 하나님이냐 그렇게 하게 하니까 자기의 종을 남편에게 주어서 아이를 낳게 하고서 자기의 몸종이니 자기의 품에 두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를 낳는데 단, 나의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한 남편을 두고서 두 자매가 투기하고 질투하는 그 소리를 들어주셔서 응답하신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단이라고 하지만 그러나 스스로 자기의 억울함을 풀어내는 것입니다. 언니가 네 명의 아들을 낳기까지 얼마나 투기가 불 붙었겠습니까? 그러니 나로 아이를 낳게 하지 않으면 내가 죽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가 애써서 일하여 놓고서 속으로는 자기의 공로를 챙기면서도 겉으로는 다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은혜라면 지금 자기의 받은 것이라는 것을 몽땅 거두어 가버려도 할말이 없이 당연합니다, 주신이도 하나님이시오, 취하신 이도 하나님이시라고 하여야 할 텐데 만약 라헬에게서 단을 빼앗아 간다면 하나님과 싸울 라헬입니다. 우리도 그러하지 않습니까? 함부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면 전혀 나의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기와 경쟁과 투기 속에서 억지로 만들어 낸 것을 가지고 은혜라고 말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집을 하나 사서 집들이를 하면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라고 하면 정말 은혜라면 그 집을 내어 놓으시지요 하면 아멘 하여야 하는데 당장 안색이 달라진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 내가 이것을 마련하기 위하여 얼마나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고 장만하였는데 내어 놓으라니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 생각이 든 것이라면 앞으로 은혜라고 하지 맙시다.

 

 

 

 

30:8절입니다. 납달리, 경쟁. 라헬의 여종에게서 둘째 아이가 태어나자 라헬이 무어라고 이름을 짓습니까? 납달리입니다. 내가 언니와 경쟁하여 크게 이겼다고 좋아하면서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여기까지 6명의 자녀가 태어나는데 언제 한번 양보하여 낳은 자녀가 있습니까? 서로 서로 남편을 차지하기 위하여 시기하고 경쟁하고 질투하는 것입니다. 레아가 자기의 자녀 4명으로 만족이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는 생산이 멈춘 줄 알고 어떻게 합니까? 라헬이 자기의 몸종 빌하를 주듯이 자기도 자기의 시녀 실바를 야곱에게 줍니다.

그래서 낳은 아들이 12절에 보면 갓입니다. 복 되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시녀가 야곱에게서 아이를 낳아 주었으니 복 되도다, 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복의 기준은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자기들의 복입니다. 이렇게 자녀들이 출산하는 과정들을 통하여 인간이 얼마나 시기와 경쟁을 하는지 보게 됩니다.

 

 

 

 

실바가 두 번째 아이를 또 낳습니다. 그러자 이름을 무어라고 합니까? 13절에서 기쁘다, 라고 이름을 ‘아셀’이라고 지었습니다. 모든 딸들이 나를 기쁜 자라 할 것이라고 하면서 이름을 짓는 것입니다. 이 정도만 하여도 한풀 꺾여져야 하는데 경쟁의 불은 끝이 날줄 모릅니다. 산불이 나도 어느 정도 지나면 자연 소화가 되는데 사람의 경쟁의 불은 끝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시녀들이 자녀를 두 명씩 낳고 나자, 잠시 조용하게 보이든 자매간에 또다시 불꽃이 튀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레아의 장남 르우벤이 들에서 합환채를 발견하여 들고 온 것입니다. 임신촉진제로 사용되는 식물인데 이것을 레아에게 드리니 라헬이 그것을 보고 달라고 합니다.

 

 

 

 

14-15절입니다. 레아가 분노하지만 라헬이 그 대신 자기의 남편을 하룻밤 언니에게 양도 하겠다는 것입니다. 서로 자기의 남편이라고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레아가 합환채를 주는 대신 야곱을 하룻밤 자기와 동침할 수 있기에 양보합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들으시고 레아에게 아들을 주시니 그 아들을 받아서는 무어라고 이름을 짓습니까?

18절입니다. 잇사갈, 값. 자기의 시녀를 남편에게 준 값으로 아들을 주셨다고 합니다. 합환채도 동생에게 주었지요. 그러니 그 아들의 이름을 값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대가 또는 삯이라는 이름입니다. 그리고 레아가 다시 잉태하여 딸까지 낳습니다. 이제 레아는 없는 것이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자기 몸에서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고 자기의 시녀에게서 아들 둘을 낳았으니 아들 일곱과 딸까지 있습니다.

 

 

 

 

처음에는 레아에게 야곱의 총이 없어서 하나님이 총을 베풀어 주셨는데, 이제는 라헬이 총이 없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몸에서는 자녀가 없고 시녀에게서만 두 명을 얻었으니 이를 하나님이 보시고 라헬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드디어 라헬에게 하나님이 은총을 허락하셔서 태를 열어 아들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아들을 얻고서 무어라고 이름을 짓습니까? 이제 내가 내 몸으로 아들을 하나 얻었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러겠습니까? 아닙니다. 나에게 아들 하나를 더 주시면 좋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이름을 짓습니다.

 

 

 

 

경쟁은 끝이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만족도 끝이 없습니다. 상대방과 자꾸만 비교 경쟁을 하니 상대적인 빈곤감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처음 텔레비전 나올 때 흑백, 동네 한 대 정도이었습니다. 지금은 완전평면 아니면 안 되지요. 그런데 이제는 평면 정도가 아니라 컴퓨터 모니터 겸용 초박형 벽걸이용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어제의 평면 텔레비전은 이것을 보는 순간 고물이 되어 버리고 아 나는 가난하구나, 언제 저런 것 한번 가져볼까?

그러면 더 경쟁을 하여야지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요즈음의 광고란 없는 욕망까지 만들어 내어서 가지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원초적인 욕망이 내재되어 있기에 화약에 불을 붙이는 것이고 기름에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24절입니다. 요셉, 더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경쟁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경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된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여기서 라헬의 둘째 아들의 출생까지 함께 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35:16-20절입니다. 라헬이 난산을 합니다. 그래서 아들을 낳으면서 죽습니다. 이름을 ‘베노니’라고 짓습니다. 자기가 죽게 되어 그렇게 짓습니다만 야곱이 베냐민이라고 오른손의 아들이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이렇게 하여 드디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태어난 것입니다.

 

 

 

 

라헬과 레아의 시기와 경쟁과 질투 속에서 태어난 이들이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되는 것을 보면서 무엇을 알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택하심에 인간의 선제적인 조건을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미 인간이 타락한 후로는 자기 주인이 되어서 철저하게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살고 있는 것을 주님께서 이미 아시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세계에서는 경쟁과 시기와 질투가 끊어지지 아니함을 아시는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 자들을 택하셔서 자기의 백성을 삼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예 다 쓸어버리시고 끝장을 내어 버리시면 될 텐데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자기 영광을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그 좋으심이 죄로 인하여 좋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시는 그 상태를 회복하시고 유지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입니다. 그러나 그 회복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는 말씀으로 이루어 내셨지만 그러나 재창조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셔서 자기의 피를 흘리심으로 재창조를 하시는 것입니다. 즉 자기의 피로 만들어 내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것 보다 죄인을 의인 만드시는 것이 더 힘이 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속의 은혜를 보이시기 위하여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내어 가시는 모습을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신명기 7:6-11절입니다. “봉독” 이스라엘을 택하심은 잘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8절에서 두 가지의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그리고 자기의 언약을 인하여 선택하신 것입니다.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과 자기의 언약을 따라 선택하셨기에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그렇게 경쟁과 시기로 태어난 자녀들이라도 이스라엘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역대상 16:7-36절을 봅니다. “봉독”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선택하실 때 이스라엘은 인수가 매우 영성하여 이리 저리 떠돌아다닌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약속을 위하여 보호하시고 가나안에 들여 놓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동일한 하나님의 사랑과 자기의 언약을 따라 된 것입니다. 우리가 잘난 것이 있어서 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도 라헬과 레아 못지않게 경쟁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얼마나 시기와 질투와 경쟁이 많습니까? 그러한데도 우리를 부르심은 무엇 때문입니까?

 

 

 

 

디도서 3:5절입니다. “봉독” 우리의 의로운 행실이 아닙니다. 주님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욱 은혜의 풍성함에 거하는 것입니다. 6-11절을 봅니다. “봉독” 쓸데없는 변론을 하지 맙시다. 무익합니다. 족보, 변론, 율법에 대한 다툼을 버립시다. 이미 경쟁이 끝나고 은혜가 임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경쟁이 끝난 나라입니다. 그 천국을 약속으로 받았다면 우리의 삶에서도 경쟁이 끝난 안식과 쉼의 복을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경쟁끝. 행복시작.

 

 

 

 

창세기 30:25-43  야곱과 하란  2000. 6. 25.

 

 


야곱이 하란에서 사는 동안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자 합니다. 야곱이 하란에서 몇 년을 살았습니까? 20년을 삽니다. 이 20년 동안의 야곱의 고생이란 것은 이루 말할 수가 없는 정도입니다. 왜 이런 고생을 시키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이미 태중에서 선택을 하셨다면 태어날 때부터 장남으로 태어나게 하셔서 장자권을 가지고 속이지 않게 하시지 않고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이삭이 하나님의 언약을 제대로 이해하고 비록 차남이라도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장자의 축복을 하지 않고 에서를 축복하려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 때문에 야곱이 하란으로 도망을 오게 되고 하란에서 고생을 하게 됩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켜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바로 들여놓으시지 않고 왜 사막으로 인도하여 물도 양식도 없는 곳으로 인도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 없다고 양식 없다고 길이 험하다고 불평과 원망을 하게 하는 것입니까? 원망하기 전에 주시면 될 텐데? 여러분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없습니까? 왜 이리 고생이 심하노, 차라리 탁 죽어서 천국이나 갔으면 좋겠다고 하지요. 그런데도 고생할 것 다하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신명기 8:2-3절을 봅니다. “봉독” 이것이 대답입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임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사람들은 밥만 먹고 사는 것입니다. 그 밥이 모자랄 때는 어떻게 배부르게 먹느냐가 문제이고, 이제 배가 부르면 어떻게 더 맛있게 더 멋있게 먹는가 하는 것으로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은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일부러 물이 없고 양식이 없는 사막으로 인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괴로운 겁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고 내 힘으로 이루어 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없이 내 마음대로 나의 뜻을 세워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지적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이제 야곱의 하란에서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야곱이 생각하는 축복의 개념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손으로 자기의 인생을 부요하게 만드는 것이 축복으로 알았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세상의 출세와 성공이 나의 손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서도 세상에서의 성공과 출세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런 가르침을 많이 받아왔습니다. 세상에서 잘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예수 믿는다면서 어려움을 당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느냐는 식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기초가 안 되어 있는 것인지 ‘신앙클리닉’으로 공부해보니 어느 정도 감이 잡히지요? 그런데도 세상에서 출세하고 부자 되어야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 하니 이것이 얼마나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대하여 악착같아 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남보다 부자 되어야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이고 예수를 믿는데도 어려움이 있으면 무언가 예수를 잘못 믿어 벌을 받아 저렇지 하는 그런 분위기에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왔습니다. 그러니 모든 일에 여유와 넉넉함이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헌금을 안 하고서 모으니까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소득의 십분의 일 이상을 헌금으로 하지요. 십일조 감사 선교 건축들의 헌금을 하고자 하니 더욱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이라도 장만을 하고, 회사에서도 혹독한 상사가 되어서 승진을 빨리 하고서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지요.

 

 

 

 

야곱도 자기의 인생을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고 부를 스스로 만들어 내어 보겠다고 얼마나 애를 쓰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아내를 위하여 14년을 봉사하고서 나서 야곱이 라반을 떠나려고 합니다. 야곱 때문에 라반이 부자가 되었으니 야곱이 간다고 하니 이제야 품삯을 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정하는 품삯이 양과 염소 중에서 얼룩진 것을 따로 구별하고 나서 따로 먹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얼룩진 것이 나오면 그것을 자기의 품삯으로 하자는 것입니다. 라반이 생각해보니 별 손해 볼일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양이나 염소 중에 얼룩이 있고 점이 있고 검은 것이 많지 않지요. 주로 희거나 회색계통의 양이나 염소입니다. 물론 우리나라는 흑염소가 많지만 대부분의 목축하는 염소들은 희거나 회색의 염소로서 젖을 생산하는 염소입니다. 여기다가 얼룩진 것을 구별하여 3일 길이나 떨어지게 하고서 목축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계산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나무껍질을 벗겨서 얼룩덜룩 하게 하고서 양이나 염소가 물먹으러 와서 그것을 보고서 새끼를 배면 얼룩덜룩한 양과 염소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 당시의 어떤 속설로 그렇게 한 모양입니다만 그러나 근거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야곱이 오랫동안 양과 염소를 치다보니 흰 양이나 흰 염소에게서도 얼룩배기가 나온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룩진 것을 다 구별하여 가더라도 얼룩배기가 나오는 것은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지 아닌지 모르지만 야곱의 빠른 계산으로 보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긴 합니다.

 

 

 

 

그래서 계속하여 얼룩진 것의 번식을 위하여 힘을 쓰는 것입니다. 나무껍질 보고서 새끼가 얼룩진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임신하고서 오리고기 먹으면 오리발 나옵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얼룩진 것이 왜 나오는 것입니까? 얼룩진 놈이 새끼를 배게 하였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구별하여 따로 놓았는데도 그렇게 나오는 것은 양과 염소의 임신 기간이 있지요? 그러니 구별해 놓아도 임신 중에 있는 것은 나오기 마련입니다.

 

 

 

 

창세기 31:10-12절입니다. “봉독” 꿈에 보니 양떼를 탄 수양은 전부 얼룩진 것으로 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라반의 소행을 보시고 하나님이 야곱에게 갚아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하기까지의 야곱의 생애가 어떻습니까? 창세기 31:38-41절입니다. “봉독” 야곱의 20년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양을 치다가 도적을 맞거나 짐승에게 찢겨 죽으면 자기가 다 물어 넣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낮에는 더위를 무릎서고 밤에는 추위를 무릎서고 일한 것입니다. 거기다가 결혼하고서는 네 명의 아내에게서 서로 시기와 질투 속에서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 삼촌 라반이 열 번이나 자기의 품삯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어떤 사람입니까? 형과 아버지를 속이는 사람입니다. 자기 살기 위하여 무슨 일이든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란에서의 삶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라반에게서 호되게 당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심각하였으면 라반에게서 야반도주를 감행해야 할 만큼 무시무시한 세상입니다. 그리고 라반이 야곱이 자기의 딸들을 위하여 14년을 봉사 하였으니 딸들에게도 14년 동안 일한 것이 딸의 공적도 있기에 최소한 10%정도는 딸에게 주는 것이 그 당시의 풍습이라는 것입니다. 14년 동안 양을 1천 마리로 늘렸다면 적어도 딸에게 100마리는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라반은 이것도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라반의 딸들이 야곱과 함께 도망가면서 하는 말이 31:14-15절입니다. 자기 아버지가 우리를 팔고 14년 품값으로 받은 그 돈을 라반이 다 먹어 버렸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딸에게 응당 돌아갈 것까지 다 먹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에게 일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일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마땅히 돌아올 몫까지 돌아오지 않았을 때 어떤 기분이 듭니까? 저것은 나에게 어느 정도 돌아오리라 기대 하였는데 돌아오기는커녕 오히려 일이 잘못되어 손해가 오는 경우를 당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특히 신앙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려고 하면 당장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겨우 해결하는 정도입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는 것으로 족한 줄 알라 하셨고, 또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염려 말라고 하셨으니 우리가 주님을 따르면 그런 것은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상대적인 빈곤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세상에서 성도가 남보다 더 잘 살려고 하면 세상 사람의 노력보다 얼마나 더 악착같아야 하겠습니까? 일요일 마다 쉬어야지요. 수요일 금요일 새벽기도까지 하면서 직장생활 사업하려니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리고 그런 삶 속에서 남보다 앞서고 윗자리에 오르고 하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였으니 정말 불철주야 애쓰고 힘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요 복이라고 하니 정말 속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복이라는 것을 실감을 하십니까? 전혀 아닙니다. 내가 피땀으로 번 것인데 어찌 하나님의 것이란 말입니까? 그런데 그렇게 번 것을 누가 가로채 가버리는 것입니까? 나보다 더 강한 사람이 가로채 가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라반의 말을 한 번 더 봅니다.

 

 

 

 

31:43절입니다. 딸들이 자기 딸이요 자식들도 자기의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것이 모두 자기의 것이라는 겁니다. 이런 억지가 어디에 있습니까? 야곱이 정당하게 14년 일하고 받은 아내이고 그리고 자기의 아내에게서 낳은 자녀이니 자기의 자녀이고 짐승 떼들도 자기의 정당한 품삯인데 라반이 자기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다 빼앗아 갈수 있지만 어젯밤에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에게 나타나셔서 선악 간에 야곱에게 말하지 말라고 해서 내가 참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아무리 야곱이 영악하고 자기의 부를 축적하려고 하여도 세상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이 부모의 유산 없이 자기의 정당한 힘으로 정직하고 성실하게 땀 흘려 일하여서 큰 부자가 되는 것은 얼마나 희소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 믿고 사는 것은 세상에서의 출세나 성공이나 부자 되는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돈버는 일에 마음을 쓰고 애를 쓰면 돈은 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란 이 세상의 것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아니기에 세상에서 혹독한 시련을 당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그러한 시련 속에서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미 언약을 하셨지만 야곱이 만약에 하란에서의 생활이 안락하고 성공적이었다면 그냥 머물러 있으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환난과 시련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미 서두에서 보았듯이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야곱이라는 개인의 삶을 통하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여전히 자기가 신이고, 왕이고 주인이기에 하나님마저도 자기의 부하로 신하로 부려먹으려는 그런 야곱을 꺾으시는 것이 하란입니다.

 

 

 

 

결국 하란의 마감이 얍복강에서 일어나는데 지금까지의 하란의 생활을 청산하게 하시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야곱의 허리가 위골되어 버리는 불구자가 되는 것이 하란 생활의 종착점입니다. 얼마나 항복을 안 하였으면 하나님에게까지 대어드는 야곱입니까? 그런데 이런 야곱을 믿음의 조상으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불리움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이미 성도가 된 사람은 가야할 본향이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곳으로 스스로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땅에서 태어나서 땅에 붙어 있으려고만 합니다. 세상에 들어붙어 있으려고 합니다. 그러니 성도라면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떼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야곱평전’의 말을 인용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셨으면 바로 천국에 데려가시지 왜 이 세상에서 살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실직, 이혼, 이별, 전학, 이직. 실연, 재정적 어려움, 파산, 망신, 비난, 위축, 쇠약, 교통사고, 갑작스런 죽음, 낙방, 시험, 핍박, 자녀의 일탈 등등 오만가지 일을 다 겪게 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장자의 복을 받기 위함이며 두 번째는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이 이곳이 아니구나, 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에서를 하란에 보내어 고생하게 합니까? 아니지요. 에서는 자기도 부자입니다. 나중에 야곱이 선물로 바치자 에서가 무어라고 합니까? 33:9절에 내 소유도 넉넉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고 합니다. 야곱이 그렇게 고생하고 얻은 짐승떼보다 에서가 훨씬 많다고 봅니다. 적어도 자기의 개인 군대가 400명입니다. 아브라함은 318명인데 에서가 아브라함보다 군대가 더 많습니다. 에서가 세상에서의 힘과 부과 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그동안 놓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을 위한다면 에서가 되는 것이 났지요.

 

 

 

 

그러므로 오늘 성도에게는 세상의 사람보다 세상에서 더 어려운 일을 겪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것이 무언가 하나님께 잘못하여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로 대우하시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 살게 하시는 동안 더욱 주님의 나라와 그 의를 사모하라고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련을 주시는 것을 이제 감사하는 수준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태복음 24장에서 처처에 지진과 기근과 전쟁과 난리가 나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이 좋다고 하면서 살면 더욱 큰 시련으로 떼어 놓고야 마시는 주님의 고집에 항복을 하는 것이 신상에 이롭습니다. 이번 주의 2주간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골로새서 3:1-4절입니다. 위엣 것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31:1-16  돌아가라  2000. 7. 2.

 

 


야곱이 하란에서 죽을 고생을 하는 것을 지난주에 살펴보았습니다. 야곱도 남에게 뒤지지 않는 사람인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부를 취할 줄 아는 사람인데 그러나 라반에게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야곱에게 함께 하시고 너를 지켜서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하셨으면 순조롭게 돌아오게 하시지 왜 그렇게 고생을 시키시는 것입니까?

 

 

 

 

만약 야곱이 하란에서 외삼촌이며 장인인 라반이 대우를 잘해주고 평안하였다면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고향에는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형이 버티고 있는데 갈 마음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한곳에 더 보면 야곱이 하란을 떠나 벧엘로 올라 가다가 또 머무는 곳이 있는데 그곳에 세겜입니다. 그곳에서 올라갈 생각을 안 하니 디나 사건을 통하여 벧엘로 올라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야곱이 스스로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가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라반의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올라가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 때문입니다.

 

 

 

 

창세기 28:13-15절을 봅니다. “봉독” 이 언약이 야곱의 생애를 이끌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 자신은 나름대로 최선의 삶을 산다고 고생을 합니다. 불철주야 고생을 합니다. 속고 속이는 세상 속에서 자기의 부를 이루려고 하니 얼마나 더 교묘하고 영악해져야하겠습니까? 그러한 삶을 살고 있는 중에 드디어 자기의 소유가 많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갑자기 장인의 안색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창세기 31:1-3절입니다. 야곱이 자기 아버지의 재산을 다 가로채서 거부가 되었다는 말을 하자 장인의 안색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정당한 품삯이라도 라반의 안색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자 야곱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드는 것입니까? 여기서 더 살다가는 한 푼도 못 건지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때 야곱에게 하나님이 무어라고 하십니까? 3절에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꿈에 하셨는지 음성으로 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 말씀을 듣고서 순종하는 것은 어떤 상황입니까? 라반의 안색이 변하니까 이 말씀에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 순종을 하고 싶어서 하기 보다는 더 이상 이곳에서 살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하나님의 약속이 기억이 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아니면 친히 말씀하셨다고 보아도 이 말씀이 들리고 떠날 준비를 하는 것은 라반의 안색이 변한 것이 하나의 이유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게 되는 때가 언제입니까? 모든 일이 내 뜻대로 잘 풀려지고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고 가족들도 애를 먹이지 않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면 이곳을 떠나라는 말이 들리겠습니까? 얼마나 불쾌하고 거북한 말이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어려움을 주시는 것은 돌아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사람이 좋은 환경 속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서 그 언약대로 살려고 하는 정도의 수준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에서 야곱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도는 결국 창세기 28:13-15절의 벧엘에서 나타나신 그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 이상으로 올라가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언약하신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시는 것입니다.

 

 

 

 

왜 언약, 언약 하는가 하면 성경이 하나님의 언약하심과 그 언약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가를 중심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존재론적인 질문을 하면 성경을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존재론적인 질문이란 그리스 철학에 바탕한 서구의 정신사의 흐름이며 이것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수입되었기에 어떤 종교를 말하게 될 때 항상 질문이 신이 누구인가 하는 존재론적인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거나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무엇을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이루어 내시는가를 보아야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하나님은 자기의 언약을 변함없이 신실하게 이루어 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가 예수를 믿고서 이렇게 말씀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하란에 있는 야곱에게 개입하셔서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31:5절. 라헬과 레아의 아버지 안색이 변하였을지라도 내 아버지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라반의 안색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느냐 아니냐에 따라 안색이 바뀌는 것이지만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란 바로 언약의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사위에게 조차 안색을 변하는 이런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늘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의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넘어지더라도 그것이 실패와 끝이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결국 주님의 신실하심에 두 손을 들게 만드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31:7절. 열 번이나 나의 품삯을 변역하였으나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금하사 나를 헤치 못하게 하였다고 합니다. 31:13절.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벧엘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이다, 그러니 너는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너의 출생지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하심으로 20년 전의 그 벧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곳에서의 언약대로 하나님께서 야곱을 끌어 올리시는 것입니다. 모든 형편이 좋았을 때 이런 말씀을 하셨다면 순종을 하겠습니까? 여기가 좋사오니 여기서 살게 하소서, 하는 것이지 어떻게 형이 20년 동안이나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벧엘로 가라고 하니 떠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31:16절. 아내들도 동의를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그대로 준행하라는 것입니다. 아내들도 고향을 떠나야 하는 상황인데 왜 그렇게 선뜻 반응을 보였습니까? 자기들이 생각해 보아도 이대로 있다가는 국물도 없겠다 싶으니 야곱을 따라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편만 가고자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아내도 동의를 해야 하는데 이러한 환경이 그러한 결정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우리가 자원하여 어떤 일을 하기 보다는 안하면 안 되는 상황에서 그렇게 되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환경이 그렇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까지도 하나님은 자기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조성하시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하나님은 자기의 약속을 빈틈없이 이루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더욱 주님의 뜻을 분별하여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집 부린다고 될 일이 아닌 것입니다. 아내까지 동의를 하자 야곱이 몰래 도망을 합니다. 장인과 사위 간에 도망을 해야만 하는 지경입니다. 고상한 내용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있는 모습 그대로가 다 들어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다른 종교의 경전처럼 고상하고 좋고 아름다운 말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온갖 탐욕과 죄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가고나자 야곱이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양털을 깎는 것은 우리의 추수와 같기에 며칠을 먹을 것 준비하고 가서 양털을 깎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회를 틈타서 야곱이 도망을 가는데 도망가고 나서 3일이 지나서 라반이 이 소식을 듣고서 추격을 합니다. 며칠 동안 추격을 하는가 하면 일주일을 추격하여 야곱을 따라 잡습니다. 야곱도 부지런히 도망을 갔지만 라반은 야곱보다 언제나 이런 면에서 한수 위입니다. 이토록 집요하게 추격을 하여 따라 잡았기에 몽땅 빼앗아 올 기세로 달려갔습니다만 누구 때문에 야곱의 것을 빼앗아 오지 못하는 것입니까?

 

 

 

 

31:24절입니다. 야곱을 따라 잡기 전날 밤에 하나님이 라반에게 현몽하여 가라사대 너는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야곱을 지키시는 것은 역시 자기의 약속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까지 야곱을 떠나지 않으시겠다는 그 벧엘의 약속 때문입니다. 드디어 야곱을 만나서 라반이 무어라고 합니까?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느냐 내가 잔치하여서 보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전날 밤에 나타나셔서 라반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그렇지 아니면 다 빼앗아 가고도 남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추격을 하고 온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자기 집의 우상인 드라빔이 없어 진 것입니다. 드라빔이란 자그마한 여성상의 우상입니다. 이 드라빔이 있으면 그 집안의 상속권을 이어 갈수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중에 야곱이 나타나서 드라빔을 가지고서 라반의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면 주어야 하는 것이랍니다. 그래서 라반이 31절에서 네가 돌아가는 것은 좋지만 어찌 나의 신을 도적질해 갔느냐는 것입니다.

 

 

 

 

이미 라헬이 훔쳐서 가지고 있는 것을 야곱은 몰랐던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부름 받은 아브라함이 우상을 섬기는 데라의 아들이었고, 야곱의 장인이 우상을 섬기고 자기 아내가 우상을 취하여 오는 그런 정도의 사람들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은 막힘이 없습니다.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 드라빔을 라헬이 숨기고 있는 것을 야곱이 모르기에 그것이 발견되는 자는 죽어도 좋다, 라고 합니다. 그래서 라반이 그 드라빔을 찾기 시작합니다. 다 뒤지고는 라헬의 장막에 까지 오는데 라헬이 어떻게 합니까? 자신이 생리중이니 일어 날수가 없다고 하면서 약대의 안장아래 두고서 그곳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못 찾았습니다. 드라빔을 못 찾아내자 야곱이 드디어 라반에게 한소리 합니다.

 

 

 

 

그 내용이 38절에서 42절입니다. 내가 그렇게 고생하여 외삼촌의 재산을 불려 놓았는데 나에게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의 경외하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 하셨더면 외삼촌께서 나를 빈손으로 보냈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어젯밤에 막았기에 나의 것을 빼앗아 가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20년 동안 깨달은 것 한 가지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죽을둥 살둥 재산을 모은 것이 결국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시면 아무것도 스스로 지켜낼 수 없는구나 하는 것 한 가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도에서 마치는 훈련이 아닙니다. 나중에는 재산마저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또 경험하여야 하는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20년 동안 불철주야 내 인생은 나의 것 하면서 자기의 소유를 늘리고 지키려고 하였지만 자기 외삼촌이, 자기 장인이 빼앗으려고 달려 온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다면 나는 빈손으로 갈수밖에 없었다는 말을 드디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의 자세는 이런 고백이 나오고 있습니까? 이런 고백이 말로서는 은혜로 된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잘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야곱의 고백처럼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정말 나의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빈손입니다 라고 고백시키는 것입니다. 재산도 남편도 자녀도 그 무엇도 우리의 의지가 아니기에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돌아 갈 곳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돌아갈 곳이 따로 없다면 구태여 이런 고생을 하게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나그네는 짐이 가벼워야 하는 것입니다.

 

 

 

 

드라빔을 찾던 라반은 심정은 가는데 물증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자신의 재산을 지킬 수 있을까 생각하여 야곱과 라반 사이에 언약을 합니다. 커다란 돌무더기를 쌓고서 증거의 무더기라 하면서 이곳을 경계로 내가 너에게로 넘어가지 않고 너도 나에게로 넘어오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돌무더기를 아람 방언으로 여갈사하두라라고 하고 히브리어로는 갈르엣입니다. 증거의 무더기라는 것입니다. 야곱의 자신의 재산을 하나님이 아니면 지킬 수가 없다는 고백이 20년이 되어서 이제 고백하는 수준이 되었습니다만 그러나 라반은 자기의 재산은 자기가 지켜야 하기에 야곱과 언약을 맺어서 경계를 넘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야곱의 무엇이 잘나서 하나님이 이렇게 지켜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무엇 때문이라고 하십니까? 자기의 언약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하가 없어지더라도 자기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 내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지키시기 위하여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 하신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23:18-24절을 봅니다. “봉독”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들어올 때 이것도 하나님의 약속대로 되는 것입니다. 모압왕 발락이 발람을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저주를 하려고 입만 열면 하나님의 신에 붙들려서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허물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야곱의 허물이 있는 데도 그 허물을 보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식언한다는 것은 말을 먹어버리는 것입니다. 자기 말을 먹어버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이 야곱을 하란에서 돌이키고 또 언약하신 그대로 야곱의 후손들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데 저주가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셔서라도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이 정도의 어마어마한 능력 안에 들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쓸데없는 미련 그만 버리시고 하나님이 돌아가라는 자리로, 돌아오라는 자리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고 마땅한데 그렇지 않는 것이 비정상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마치 탕자가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 허랑방탕하다가 다 날리고 나서야 그래도 아버지의 집이 좋았는데 나는 아들의 자격이 없으니 이제는 품꾼의 하나라도 써 주옵소서라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면 아버지는 혼을 내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 영접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그만 방황하시고 아버지께로 돌아갑시다.

 

 

 

 

창세기 32:1-32  얍복 나루에서  2000. 7. 9.

 

 


야곱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 일어나는 곳이 얍복 나루입니다. 이제 외삼촌이며 장인의 집에서의 20년 생활을 청산하고서 자기도 재산을 많이 모아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장인에게서 벗어났다는 안도감도 잠깐이고 자기를 죽이려는 형이 기다리고 있는 곳을 향하여 가야 하는 길입니다. 싫어도 가야만 하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언약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에 자기도 서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기는 가야 하는 길인데 두려움이 야곱을 떠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두려움이 없습니까? 예수를 믿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기는 어느 정도 알겠는데 그러나 만약 그렇게 살다가는 당장 길에 나앉게 되지는 않을까 두려울 때가 없습니까? 아니면 어떤 중요한 일을 결정하여야 할 때 혹시 잘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없습니까?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7절에 보면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히 두렵고 답답한 상황입니다.

 

 

 

 

자기 형이 자기를 죽이려고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자기에게로 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자기 장인에게서 죽음의 위기를 넘겼는데, 벗어나자 말자 심히 두렵고 답답한 소식을 또 듣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어떤 어려운 문제가 하나 지났다 싶으면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나는 경우가 없습니까? 이제 한숨 돌릴 만 하면 숨 돌릴 틈도 없이 또 다른 일이 닥치는 것을 경험해보지 않았습니까?

 

 

 

 

욥기서 7:17-1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크게 여기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주께서 내게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나의 침 삼킬 동안도 나를 놓치 아니 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얼마나 큰 고통이었으면 이런 탄식을 하겠습니까? 분초마다 시험하시고 침 삼킬 동안도 놓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성도에게 이러한 고난과 고통이 따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주를 의뢰하라고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사인을 다 주셨습니다. 이미 약속을 하셨고 그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내가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나의 인생을 주님께 맡기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싸움이고 오늘 우리의 싸움인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에게 무슨 사인을 주셨습니까? 장인을 벗어나자 형의 위협에 두려워하는 야곱을 하나님이 이미 아시고 누구를 먼저 보내신 것입니까? ‘마하나임’ 즉 하나님의 군대를 먼저 보내신 것입니다. 야곱보다 앞서 하나님의 군대가 있는 것입니다. 1절을 봅니다. 야곱이 그 길을 진행하더니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그들을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앞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아도 못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함부로 볼 수가 없는데 야곱에게 하나님의 사자를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자를 보았다면 지금 가는 이 길이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되어질 일이구나 하면서 가면 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이것이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만약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서 씩씩하게 나아갔다면 우리는 절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군대를 만나고서도 두려워 갑갑해하는 야곱을 볼 때 우리와 별수 없는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일을 행하실 때 하나님의 군대를 먼저 보내시는 장면을 두 곳만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 갈 때 누가 먼저 그 땅에 버티고 있었습니까? 여호수아 5:13-15절입니다. “봉독”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서 여리고로 향하는데 한 사람이 칼을 빼들고 서있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이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전쟁이니 너희는 두려워말고 하나님의 언약을 의지하여 싸우라는 것입니다. 먼저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둘째는, 열왕기하 6:14-17절입니다. “봉독” 엘리사가 사는 도단성을 아람군대가 밤중에 포위를 하였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성 전체가 적군에 포위당하여 있는 것입니다. 엘리사의 사환이 이것을 보고서 큰일 났다, 이제 우리는 다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때 엘리사가 기도합니다. 눈을 열어 보게 해 달라고 그러자 하늘에 불말과 불병거가 엘리사를 두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는 엘리사는 두려워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아람의 군대장관이 와도 문도 안 열어 보고서 요단강에 가서 씻으라는 겁니다. 우리의 믿음의 눈이 뜨여지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기에 담대하여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를 보고서도 또 다르게 자기의 살길을 마련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두 가지의 견해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야곱이 기도하고 계획하는 것이기에 불신의 행위가 아니다 라고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야곱이 믿음이 없어서 이렇게 하였다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야곱의 생애를 보면 하나님의 언약을 말하면서도 계속하여 자기의 계획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상황이 급하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부르짖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군대를 보고서도 어떻게 하든지 형의 분노를 풀기 위하여 세일에 거하는 에서에게 사람을 보냅니다. 그러면서 은혜입기를 구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에서에게 갔다 온 그들의 대답은 에서가 400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온다는 말에 야곱은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7-8절입니다. 자기의 가축떼를 둘로 나누고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고 먼저 살 궁리를 합니다. 우리의 기도도 이런 식이 아닐까요?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하기보다는 나의 살길을 다 마련하여 놓고서 기도하는 것은 아닙니까? 저도 여러 위기 속에서 기도보다는 나의 살길을 먼저 챙기더라는 것입니다. 막상 어떤 문제에 부딪히니 어떻게 할까 라고 생각을 하고서 한 다섯 가지의 어떻게 해야 할 일을 생각하였는데 그 다섯 가지 생각들 중에 기도하여야겠다는 것은 없었습니다. 오직 나의 살길을 찾기에 바쁜 것입니다. 결국은 그 다섯 가지의 생각들이 다 되지 않았기에 오늘 여기서 목사로 서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야곱을 보면서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노가 아니라 이런 모습이 우리의 모습임을 보는 것입니다. 야곱의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야곱을 인도하시고 끌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에서가 자기를 치면 어떻게 하리라 계산해놓고서 또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 기도만 본다면 바른 기도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기도하고 자기는 지팡이만 들고 갔는데 가축이 두 떼나 늘었고 처자식이 생긴 것은 오직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은 하지만 자기의 소유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을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나서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기도 하였다면 그 언약의 내용을 믿어야지요.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그 약속을 믿고서 기다려야 하는데 그러나 그 기도 후에 야곱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13-22절입니다. 에서를 위한 선물을 준비합니다. 이 정도는 그럴 수 있습니다. 선물로 환심을 사는 것이야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선물의 양도 엄청납니다. 암염소 200과 수염소 20, 암양 200과 수양 20, 젖 나는 약대 30과 그 새끼, 암소가 40에 황소가 10, 암나귀 20에 그 새끼나귀가 열입니다. 선물의 양이나 수보다도 더 놀라운 것은 그 짐승의 떼를 나누어서 상거가 뜨게 하라는 것입니다. 멀직이 띄워서 가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 떼로 나누어 그렇게 하게 하고서 에서에게 말을 잘하라고 합니다. 선물을 세 떼로 나누어 하고서 그 뒤에 자기의 아내들과 자식들을 얍복 나루에서 건너게 하고서는 자기 혼자 남습니다.

 

 

 

 

이때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온 것입니다. 밤중에 어떤 사람이 왔으니 야곱이 싸우는 것입니다. 혹시 에서의 정탐꾼이 아닌가 하고서 싸웠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을 씨름하다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대등한 관계에서 다투는 것입니다. 그러니 야곱이 이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고 덤비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야곱이 간절하게 기도하였다고 하는데 야곱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온 것입니다. 이 온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천사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맞상대를 하는 야곱입니다. 기도란 야곱이 먼저 하나님께 간구하여야 하는데 여기서는 기도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먼저 야곱에게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야곱의 행태를 호세아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12:3-4절입니다. “봉독” 하나님과 겨루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싸워온 대상은 지금까지 라반이나 형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과 겨루어 온 것입니다. 자기의 싸움의 대상이 하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표현이 하나님을 이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겼으면 기뻐야지 왜 웁니까? 겨루어 이기고서 울며 매달리는 것입니다. 야곱의 그 고집, 그 자기 주장 모든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런 고집이 하나님도 이겼는데 왜 우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이 야곱의 이김이 하나님을 이겼다는 말씀에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왜 얍복강의 야곱을 찾아오신 것입니까? 벧엘에 나타나신 그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분과 싸움이 붙고 나자 싸우는 중에 이분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축복하여 주기를 간구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에게 이름을 묻습니다. 야곱입니다. 그러자 이제는 너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지금까지 사람과 겨루어 이기고 하나님과도 겨루어 이겼다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 이름에는 지금까지 야곱이 살아온 모든 삶이 사람과 하나님마저도 적으로 간주하고 싸워온 것입니다. 하나님마저 싸울 정도가 된 야곱의 사고방식이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나타나신 그런 언약의 이루시는 방법이 아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야곱식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야곱에게 또 오늘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하여 야곱의 씨름상대로까지 낮아지신 주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주님의 겸손하심이 바로 하나님이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언약을 이루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라는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는 것을 통하여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하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벧엘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이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하시겠다는 언약은 야곱의 방식으로 이루어 내시는 것이 아님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야곱 때문에 희생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하나님 이김이란 바로 인간의 탐욕이 하나님을 죽이는 일까지 나가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란 인간의 탐욕이 어디까지 가는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낮아지심, 죽으심이 구원이 된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것이 기쁨이 아니라 울음이 된 것은 이제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야곱의 그 탐욕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자기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얼마나 낮아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무엇이든 하면 된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무엇이나 할 수 있다고 밀어붙이는 것이 바로 야곱적인 사고방식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 때문에 하나님이 고통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이러한 언약을 알고서 주님이 그 낮아지심이 우리의 구원이 되었다면 어떤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까?

 

 

 

 

야곱의 절름거리는 모습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지금까지는 자기 다리로 달릴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형이 죽이러 오면 자기는 제일 나중에 있다가 도망가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도망도 못가는 절름발이 신세가 된 것입니다. 얍복강에서 하나님에게까지 겨루어 이긴 이 야곱의 싸움의 흔적은 절름발이였습니다. 이제는 치열하게 싸우는 야곱이 아니라 지팡이를 의지하여야만 걸어갈 수 있는 의존적인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저는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탐욕이 부모와 형제와 하나님마저 원수로 여기고 싸워온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하나님이 낮아지시고 낮아지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심으로 자기의 언약을 이루신 이 주님 앞에 얍복강을 지난 야곱, 이제는 이스라엘의 모습으로 가는 것입니다. 절룩거리면서 하나님과도 겨루었다는 그 영원한 흔적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러한 흔적이 없습니까? 하나님마저도 나의 이익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그 탐욕으로 인하여 낮아지신 주님의 모습, 그 십자가를 우리고 짊어지고 주를 따르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울면서 한편으로 그렇게까지 낮아지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창세기 33:1-20  얍복강 이후  2000. 7. 16.

 

 


야곱의 이름이 얍복강에서 이스라엘로 바뀝니다. 얍복강에서의 씨름에서 씨름 상대자가 야곱에게 이름을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야곱이란 이름이 쌍둥이 형 에서의 발목을 잡고 나왔다고 하여 야곱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발목을 잡다 라고 하면 무슨 뜻입니까? 상대방을 넘어지게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야곱의 이름이 ‘발목을 잡다’이니 사기꾼이고 모사꾼이고 속이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이름이 바뀌는 것은 단지 작명소에서 이름이 좋지 않다고 바꾸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생애를 바꾸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야곱의 생애를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야곱처럼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야곱처럼 하여서 악착같이 자기의 축복을 챙기는 그런 모습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꾸어지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낮아지심과 하나님의 희생에 바탕한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얍복강에까지 찾아오신 하나님의 낮아지심입니다.

 

 

 

 

그러면 이제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으니 사람이 달라졌겠지요? 그러나 사람이 하루아침에 달라지지 않는 것임을 야곱을 통하여 보게 됩니다. 아침에 대나무를 비유로 들었지만 한두 번 휘어잡는다고 해서 휘어진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아예 부러뜨리는 것입니다. 야곱의 환도뼈를 침으로 환도뼈의 힘줄이 나가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야곱이 도망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전에는 도망가려고 자기가 제일 나중에 섰지만 이제는 그럴 수도 없는 것입니다. 절뚝이며 형 에서를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에서는 여전히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야곱에게로 오고 있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도 자기의 가족들을 줄을 세우는데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뒤쪽에 세우고 종과 그 자녀를 앞장세웁니다. 그리고서 에서에게 자기가 먼저 나가서 몸을 일곱 번이나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나아갑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그렇게 무서워 떨었던 형이 반갑게 맞이하면서 끌어안고 입 맞추면서 울면서 맞이하는 것입니다. 야곱을 죽이려고 벼르던 에서가 어떻게 이렇게 달라진 것입니까? 그 이유는 에서의 문제가 아니라 얍복강을 지난 야곱이었습니다.

 

 

 

 

얍복강에서 깨어진 야곱이 되고 나니 에서는 변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목표는 에서가 아니라 야곱입니다. 에서는 그냥 잘 먹고 잘살게 하신 것입니다. 에서가 이 앞선 짐승 떼들이 무엇이냐 하니 야곱이 형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하자 에서가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도 족하니 네 것은 네가 가지라고 합니다. 이정도로 에서가 부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에서가 바뀌어진 이유가 야곱이 얍복강에서 깨어진 이후의 상황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적용을 합니다. 대부분의 가정문제는 자신이 깨어지지 않아서 일어나는 문제들입니다. 특별한 경우는 있겠지만 그러나 대부분 예수 믿는다고 하는 가정에서 부부갈등이나 자녀의 문제들이 나타나는 것은 결국 자기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 남의 탓만 하고 있을 때가 많은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의 속성 이브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선악과를 따 먹었느냐 하나님이 물으시니 아담이 무어라고 합니까?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이 여자가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는 전혀 책임이 없고 하나님과 여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것입니다. 여자에게 물으니 뱀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싸움의 99% 이상을 차지한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책임을 통감하고서 내가 잘못했다고 꺾여지면 거의 문제는 해결이 됩니다. 그러나 잘못했다고 말은 하면서도 어떻게 말합니까? 그래 내가 잘못했다 안 그러나? 라고 언성을 높이는 것입니다. 이러면 다시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정말 하나님 앞에서 깨어진다면 정말 자신이 낮아지게 되고 엎드리면 상대방이 달라져 있는 것입니다.

 

 

 

 

잠언 16:7절 말씀.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화목하게 하시느니라.” 야곱이 하나님 앞에서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자 원수였던 형이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의 싸움은 바로 나를 주님 앞에 쳐서 복종하는 것입니다. 남의 탓이 아닙니다. 내 탓입니다. 내 잘못입니다. 내가 바뀌면 상대방이 바뀌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싸움이 너무나 힘이 드니까 안 하려고 하고 남에게 핑계대기 바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에서의 문제만이 아니라 교회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누가 어떻고 누가 어떻고 하기 전에 나라도 주님 앞에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편에 서서 누가 옳고 그러냐의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중립을 지키면 회색분자라 하고 서로 마귀라 그러고 아무도 죄인이 없는 꼴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8:33-40절을 봅니다. “봉독” 범죄함으로 적국에게 패하게 될 때, 비가 오지 않을 때, 기근이나 온역이나 곡식이 시들거나 깜부기가 나거나 메뚜기나 황충이 나거나 적국이 에워싸거나 무슨 재앙이나 질병이 있을 때, 한 사람이나 혹 주의 온 백성 이스라엘이 각각 자기의 마음에 재앙을 깨닫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용서하소서, 하는 내용입니다.

나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일 같아도, 한 사람이라도 재앙인줄 알고 회개하면 하나님이 들어 주소서 하는 솔로몬의 기도입니다. 물론 우리나라는 이스라엘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지만 교회라고 생각한다면 교회가 어려움에 처하면 내 죄라고 회개하십니까? 우리 교회만이 아니라 다른 교회들이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받을 때 그것이 나의 죄임을 알고 회개합니까?

 

 

 

 

목사들이 교계 지도자들의 범죄함을 인하여 우리가 회개합니까? 결국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무엇을 위함 입니까? 바로 나를 꺾으시기 위함 입니다. 지금가지의 인생의 방향을 바꾸시는 것입니다. 가치관을 바꾸시는 것입니다. 얍복강 이전에는 돈만 있으면 복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복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내 다리로 도망갈 수 있는 것이 복인 줄 알았는데 이제는 절름거리며 도망도 못가기에 주님만을 의지 하는 것이 복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얍복강 이후의 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얍복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놀라운 일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얍복강을 건넌 후에, 이러한 놀라운 일을 경험하자 말자 야곱이 어떤 자세가 나오는지를 또 찾아보아야 합니다. 형 에서를 처음 만날 때는 일곱 번이나 땅에 엎드려 절하더니 이제 형이 화목하게 되자 말자 야곱의 태도를 봅시다. 이제 에서가 화해를 하고 나서 자기들이 선도를 할 테니까 고향으로 가자고 합니다. 그러자 야곱이 무어라고 합니까?

13-14절입니다. 자식들이 어리고 짐승 떼들이 새끼를 가졌으니 하루라도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라고 하면서 천천히 세일로 가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에서가 다시 호의를 베풀면서 그러면 천천히 올수 있도록 에서의 부하 몇 사람을 두고 가겠다고 하자 그것도 거절합니다.

 

 

 

 

15절에 보면 내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라는 말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은혜를 얻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형님의 은혜를 입은 것도 과분하오니 저희들끼리만 가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아주 겸손하게 말하는 것 같은데 그러나 에서에게로 가는 것이 아님을 나중에 보면 알게 됩니다. 지금 자신이 어디로 올라가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까? 벧엘로 가야합니다. 그러면 형에게 자기는 세일로 갈 것이 아니고 벧엘로 가야합니다, 라고 하여야 하는데 형님에게로 가겠습니다, 하고서는 안갑니다.

 

 

 

 

에서가 떠나자 세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숙곳으로 갑니다. 지도를 봅니다.(O.H.P) 숙곳에서 조금만 있다가 떠날 것 같으면 텐트를 쳐야지 집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일로도 가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벧엘로도 가는 것이 아닙니다.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리를 짓습니다. 아예 몇 년이든지 눌러 앉아 있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곳까지 하나님이 밀어 올리시고 얍복강에서 만나주시고 이스라엘로 만들어 주셨는데도 지금 한 고비가 지나자 말자 또 자리를 펴고서 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하는 것입니다. 이제 태풍이 지나갔으니 내 살길을 또 준비하는 것입니다. 꼭 누구 같다고 생각이 됩니까? 우리 같지 않습니까?

 

 

 

 

아이들과 길을 가면 아이들이 힘들어하면 무어라고 합니까? 조금만 더 가면 다 되었다고 하지요. 그런데 아이들이 어떻게 합니까? 몇 걸음 걸어놓고서 이제 다 왔어요? 그러지 않습니까? 아직 벧엘까지 가려면 멀었는데 눌러 앉아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은혜의 세계로 그 약속하신 신령한 복들의 세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겨우 한 문제 풀어 놓고서 이제 다했지요? 나가 놀아도 되지요? 그러고 있는 것입니다.

 

 

 

 

얍복강에서 깨어지고 나니 에서가 화해를 합니다. 후유! 이제 좀 쉬자는 것이지요. 집을 짓고 짐승의 우리를 짓습니다. 짐승 떼가 많으니 얼마나 많은 짐승의 우리를 지었겠습니까? 그래서 그 곳 이름을 짐승의 우리간이라는 뜻으로 숙곳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몇 일만 쉬다가 갈 길이라면 왜 집을 짓고 삽니까? 왜 짐승의 우리를 짓습니까? 나중에 벧엘에 가서 집을 짓고 우리를 지어도 될 텐데 그렇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숙곳에서 몇 년을 살았는지 살고서는 이제 세겜으로 갑니다. 세겜에서는 무엇을 합니까? 아예 돈을 주고 땅을 삽니다. 물론 이곳은 가나안 땅이라고 하여도 벧엘이 가깝다고 하여도 그러나 벧엘은 아닌 것입니다. 이 정도는 되겠지 하고서 그곳에 돈을 주고 땅을 사서 살았는지 모르지만 디나가 그 동네에서 나가서 당한 것을 보면 디나가 시집갈 때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이 디나를 낳고서 하란을 떠날 때가 약 일곱 살로 봅니다. 그러면 적어도 열다섯 살이 되었다고 본다면 무려 숙곳과 세겜에서 칠년을 넘게 산 것입니다.

 

 

 

 

이것이 얍복 이후의 야곱의 모습입니다. 얍복 이후에 놀라운 사건-원수와 화목하는 사건이 있었지만 그러나 또다시 숙곳과 세겜에 집짓고, 짐승의 우리를 짓고, 땅을 사고서 눌러 있는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아예 세겜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고서 그 단의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 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단을 쌓았으니 신앙의 자세가 아닌가 하는 분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단을 쌓아야 할 곳은 세겜이 아닙니다. 어디에 단을 쌓아야 합니까?

 

 

 

 

창세기 31:13절입니다. “봉독” 이미 벧엘에서 하나님이 언약하시고 그곳에 야곱이 하나님의 전을 세우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세겜에서 벧엘까지는 얼마 되지 않는 곳입니다. 그런데 세겜에서 머물면서 단을 쌓은 것입니다. 이 부분을 우리에게 적용을 해보고자 합니다. 왜 예배를 위하여 모여야 하는가, 그냥 인터넷으로 하면 되지 하는 분이 안계십니까? 요즈음 인터넷 교회가 우리나라에도 생겼습니다. 인터넷을 통하여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헌금은 온라인으로 결제하고 성찬식은 어떻게 하느냐고 하니 일년에 한두 번 모여서 하겠다고 합니다.

 

 

 

 

이런 교회가 실제로 있고 지금 진행중에 있습니다. 예배당에 모일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금 어떤 특정 장소의 거룩성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란 성도의 모임입니다. 그곳이 지하이든 지상이든 산속이든 들판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도의 모임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모임 가운데 하나님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두세 사람이라도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디오테이프나 녹음테이프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특별한 경우에 환자가 말씀을 사모하여 비디오나 테이프로 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러나 예배란 인격적인 만남의 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에서는 그날이 가까이 올수록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신 것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자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모이기를 힘쓰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야 훈련의 장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서 그대로 하늘나라로 직행할 것 같으면 교회가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허락하신 것은 우리가 혼자서 신앙 생활하면 얼마나 속 편하겠습니까?

 

 

 

 

꼴보기 싫은 사람 보지 않아도 되고 그러나 그런 사람을 만나서 서로 부딪히고 깨어지고 그래서 원망도 하고 회개도 하면서 훈련되어 지는 장으로서의 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 교회가 뭐 이래 하면서 교회의 모임을 폐하고 혼자 신앙생활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의 요구를 끝없이 들어주다 보니까 미국에서는 이미 드라이브인 처치가 오래전에 생긴 것입니다. 마치 야외극장에 차를 몰고 가서 차안에서 영화를 보는 곳처럼 차를 몰고 가서 그대로 예배를 드리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예배가 되는 것이 세겜에 단을 쌓은 것이 아닌가, 라고 적용을 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결론을 내려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다 크고 작건 간에 얍복강들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자기가 주님 앞에 깨어지는 순간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찬송 중에 말씀을 듣다가 읽다가 기도하다가 깨어질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 그 이후에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어디에 머물러 있습니까? 숙곳입니까? 세겜입니까? 어디다 집을 짓고 우리를 짓고 땅을 사고서 눌러 있으려고 하십니까? 벧엘로 올라가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떠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결국 더 나은 본향을 향하여 떠나면서 사는 것임을 히브리서에서 보여줍니다.

 

 

 

 

히브리서 11:8-16절을 봉독합니다. “봉독” 우리가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습니까? 숙곳입니까? 집을 사고 우리를 짓고 있습니까? 아니면 땅을 사둔 세겜입니까? 그곳에 너무 오랫동안 머물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직 가야할 곳이 남아 있습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얍복 이후에도 계속되어야 할 신앙의 걸음입니다.

 

 

 

 

창세기 35:1-8  다시 벧엘로  2000. 7. 23.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벧엘로 가는 것이 아니라 틈만 나면 옆으로 새는 야곱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형 에서에게 세일로 가겠다고 하고서는 옆으로 갔습니다. 그곳이 숙곳이였습니다.  집을 짓고 짐승의 우리를 만들어 산 것입니다. 얼마나 짐승의 우리를 많이 지었으면 그곳 이름을 숙곳이라고 지을까요? 그리고 다시 세겜으로 가서는 아예 그곳에서 땅을 삽니다.

 

 

 

 

자기 형에게 약속한 곧 뒤따라 세일로 간다는 것도 아랑곳없고, 더더구나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자기의 언약을 따라 벧엘로 밀어 올리시는 것도 관심 밖인 것입니다. 엄청난 얍복강의 씨름을 통과하고서 이름이 바뀌고 다리를 절면서도 아직도 하나님의 언약대로 제대로 가지 못하는 야곱을 보면서 오늘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봅니다. 얼마나 더 이끌어 주셔야 하나님의 언약을 제대로 믿고 따르겠습니까?

 

 

 

 

우리의 생각에는 우리가 하나님이라면 야곱을 버리시고 다른 사람을 다시 택하여 하시던지 아니면 그 능력으로 단번에 벧엘로 쑥 가게 하시든지 하시면 될 텐데 왜 그렇게 하시는가 할 수 있습니다. 얍복강에서의 씨름만이 아니라 야곱을 항복시키시고 결국 벧엘로 올라가도록 하시기 위하여 얼마나 설득하고 계십니까? 이것에 놀라야 합니다. 그리고 가게 하시는데 절대로 비행기 태워서 가듯이 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 한걸음 자기 발로 걷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숙제를 할 때 엄마가 볼 때 답답하다고 해서 아이의 숙제를 자기가 다 풀어주면 어떻게 됩니까?

 

 

 

 

아이의 실력이 자라지 않지요? 그러므로 야곱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데 자기 걸음으로 걷게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돌아갔다면 돌아간 만큼 그 자리에서 다시 벧엘로 올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기 언약을 이루시는 신실하심이고 열심이고 고집인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부족하고 연약하여도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면서 아! 나도 야곱 같지만 하나님이 결국 만들어 내시고야 마시겠구나, 하는 것으로 확신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시면 드디어 세겜을 떠나서 벧엘로 향하여 갑니다. 그러나 벧엘로 가기까지 34장의 사건이 있습니다. 세겜에서 땅을 사고서 그곳에 눌러 앉아 살고 있으니 야곱의 딸이 그 곳의 여인들을 구경하기 위하여 나가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세겜의 추장 이름이 세겜입니다. 하몰의 아들로 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디나를 보고서 한눈에 반하여 자기의 아내를 삼을 목적으로 디나를 범하고 맙니다. 세겜이 디나를 한번 욕을 보이고 버릴 생각이 아니었음을 그 후속조치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34:3-4절입니다. 비록 강제로 끌어들여 디나를 범하였으나 깊이 디나를 연련하여 자기 아버지 하몰에게 이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해달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몰이 야곱에게 와서 디나를 자기 아들과 결혼을 시키면 우리가 서로 통혼을 하고 그리고 서로 매매하고 기업을 얻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디나의 혼인을 위하여 어떠한 예물을 청구하여도 다 해주겠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들은 야곱은 아들들이 오기까지 잠잠히 있습니다. 가타부타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주석가는 이러한 야곱의 가만히 있는 태도가 그 하몰의 말이 좋게 들렸다는 것입니다. 디나와 통혼을 하게 하면 그 세겜의 재산들이 자기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전력을 보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고 보아집니다. 특히 세겜은 그렇게 큰 성읍은 아닌 것으로 볼 때 야곱의 그러한 계산이 있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야곱은 가만히 있는데 디나의 오빠들이 가만히 있지를 않는 것입니다. 하몰의 제안에 그들은 속입니다. 할례를 행하면 서로 통혼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할례로 고통중에 있을 때 습격하려고 속인 것입니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입니다.

그러자 세겜의 사람들이 그 말을 좋게 여기고 다 할례를 받습니다. 할례를 받고 제 삼일째 시므온과 레위가 부지중에 기습하여 세겜의 남자들을 다 죽여 버리고 자기 누이 디나를 데리고 옵니다. 이미 디나는 세겜의 추장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재산들은 약탈하였습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하여 야곱의 태도를 봅시다.

 

 

 

 

34:30절입니다. “봉독” 너희가 네게 화를 끼쳐 우리로 모두 죽게 하였다고 탄식을 합니다. 큰일 났다는 것입니다. 이 소문을 듣고 이들이 연합하여 우리를 치면 이제 꼼짝없이 다 죽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수가 적은데 어찌하려고 그렇게 하였느냐는 것이지요. 야곱의 이런 말에는 그저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 비록 디나가 욕을 당하였어도 추장에게 시집을 가게 되는 것이고, 그리고 그 세겜 지역이 여러모로 살기도 좋은 곳이기에 우리가 여기서 살면 될 텐데 너희 때문에 다 틀렸다 이제는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 아들들이 그러면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처럼 대우함이 옳습니까,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태가 왜 일어났습니까? 사실은 야곱 자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벧엘로 올라가라는 말씀을 몇 번이나 듣고서 이곳까지 왔는데 다시 이곳에 머물러 땅을 사고서 살고 있으니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떠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나 선지자를 압니다. 물론 요나서 자체는 이런 주제가 아닙니다만 그러나 니느웨로 가라는 말씀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서 배 제일 밑에 가서 누워 자는 것입니다. 이 요나를 깨우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태풍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요나 까닭에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자기들의 무역할 물건들을 전부 바다에 던지는 것입니다. 요나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 야곱 때문에 세겜의 일들이 일어났는데 야곱은 도리어 자기의 아들들에게 너희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화를 내고 있습니다. 물론 이들이 할례를 빌미로 속이고 죽인 것은 잘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점령하여 들어갈 때 기브온 족속이 변장하여 와서는 화친을 청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 물어 보지도 않고 화친을 청하고 나서 나중에 그들이 진멸 받아야 할 가나안 거민임을 알았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약속을 하였기에 살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들은 아브라함의 할례의 언약을 가지고 남을 살해하는 일에 사용한 것은 잘못입니다만 그러나 이러한 일이 일어난 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야곱 때문이며 바로 우리 자신 때문입니다.

 

 

 

 

야곱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가를 벧엘로 가라는 말씀이 떨어지는 때가 언제 입니까? 자기의 목숨이 위태로울 때에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장인에게서, 형 에서에게서, 이제는 이방인들에게서 죽음의 위협 속에서 벧엘로 한 걸음씩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씀을 순종하면 그것이 인생의 복이며 생명의 길인데도 죄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치열한지 하나님께로 가지 못하도록 얼마나 많이 방해를 합니까? 그러나 그 모든 장애보다 하나님의 열심히 더 지극하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편에서 보자면 이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아픔입니다. 두려움입니다. 자기의 딸이 강간을 당하고 그로 인하여 아들들이 살인을 하고 이제 그 부족사람들이 알고서 죽이러 올텐데 얼마나 놀랍고 두렵습니까? 우리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왜 택하시고 사랑하신다면 이렇게 하시는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렇게 하지 않으시면 생명의 길로 가려고 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매를 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기에 다른 나라보다 죽도록 고생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망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탁 죽고 싶어도 죽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강물에 뛰어 내리면 하필 물이 얕아서 다리만 부러지고 죽지도 않는 것입니다. 약을 먹고 죽으려고 하여도 약이 목에 걸려 넘어가지를 않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신세입니다. 왜 이렇게 하시는지 아시겠습니까? 너희가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너희의 살길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고집을 부리고 주님께로 가지 않으려고 하는지 야곱의 모습이 재현되는 것이 이스라엘의 국가의 모습입니다.

 

 

 

 

이사야 1:2-9절입니다. “봉독” 돌아오라는 외치심이 너무 많아서 다 찾아볼려면 몇 날 몇  일이 걸려도 다 보지 못합니다. 온갖 상처투성이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맞은 흔적뿐인데도 주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때리시는 이유는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다시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어찌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매를 들고서 우시는 것입니다. 야! 이 녀석아 잘못했다고 빌어라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하여라, 이런 심정으로 매를 드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녀를 징계할 때에 잘못했다고 빌면 용서를 하지요. 다음에 비록 또 그렇게 할지라도 비는 데에 장사는 없습니다. 그런데 매를 드는데도 버티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이를 꼭 깨물고 내가 무얼 잘못하였는데 그러느냐고 버티면 때로 무섭기까지 하지요. 그런 아이들은 사실 매를 더 맞습니다. 얼마나 더 맞으려고 그러느냐? 이것이 하나님께서 매를 드시는 마음입니다. 이사야 몇 곳을 더 보겠습니다.

 

 

 

 

이사야 9:13절. 치시는 이유는 치시는 자에게로 돌아오라. 돌아오지 않으니 더 맞음. 이사야 31:6-9절을 봅니다. 거역하던 여호와에게로 돌아오라 돌아오면서 무엇을 던져 버리고 오는 것입니까? 그들이 의지하고 범죄 하던 은우상 금우상을 던져버리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적군이 사람의 칼로 하지 않았는데 다 물러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의 사건 이후에 얼마나 많은 세월이 지났는데 이런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까? 그러니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동일하게 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돌아오라고 매를 드시는 것이지 버린 자식 같으면 팔 아프시게 매를 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버립니까? 은우상 금우상을 버립니다. 자기들이 의지하던 것들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버리니 오히려 적들이 두려워 떠는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의 개인적인 싸움이든 아니면 교회의 싸움이든 하나님께로 돌아가려면 무엇을 던져버려야 합니까? 하나님 외에 의지하는 모든 것을 던져버려야 합니다. 세상의 힘을, 사람의 수를, 부동산과 동산을 의지하면 그런 것들을 던져 버려야 적들이 두려워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런 것이 힘인 양 가지고 있을수록 적들이 그것을 공격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으려고 하면 살고 살려면 죽는 것입니다.

 

 

 

 

창세기 35:1절 이하를 이제 다시 봅니다. 벧엘로 올라가라 네가 형을 피하여 도망하던 그때 벧엘에서 나타났던 하나님이 거기서 단을 쌓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야곱이 도망간 지가 20년이 훨씬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벧엘로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왜 벧엘입니까?

 

 

 

 

창세기 28장 15절입니다. 이 언약의 말씀이 네게 이곳에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언약 때문에 야곱은 죽을 수도 도망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곳까지 가야만 하는 것이 야곱의 운명입니다. 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위와 같습니다. 하늘나라를 약속으로 받아 놓았다면 그 하늘나라를 좋아할 때까지 우리를 이끌어 가시고야 마실 것입니다. 세상의 여러 환난과 고난을 통과하여도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하늘나라가 정말 좋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세겜에서 벧엘로 올라가면서 전에는 하지 않았던 일들을 합니다. 그 일이 무엇입니까? 버릴 것을 버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 버리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이방 신상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옷을 바꾸어 입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결케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우상을 의지하였지만 이제는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야곱의 식솔들이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들을 빼어 야곱에게 주자 야곱이 그런 것들을 땅에 묻어 버리고 벧엘로 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라헬의 드라빔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자기 아버지에게서 훔쳐온 드라빔. 자기를 지켜주리라던 우상들을 제거하고 옷을 바꾸어 입고서 버릴 것을 버리고 벧엘로 향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의 환난을 당하면서 배우는 것이 있습니다. 쓸데없는 것을 너무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씩 버리는 것입니다. 버리고 땅에 묻어 버리고 벧엘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무거울 정도로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나그네는 짐이 가벼운 법입니다.

 

 

 

 

하늘을 향하여 순례하는 나그네는 더더구나 짐이 가벼워야 합니다. 지금까지 자기를 지켜주리라, 여겼던 우상들 금이나 은으로 만든 것들까지 다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우리의 힘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버리고 나자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35:5절입니다. 하나님이 사방의 고을들로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심으로 어느 누구도 야곱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드디어 벧엘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단을 쌓고 이름을 엘 벧엘이라고 합니다. 벧엘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이것이 다시 벧엘로 가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떠나라는 곳에서 떠나시기 바랍니다. 버리라는 것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죽음의 위기 속으로 몰아넣으셔서라도 떠나게 하시고 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벧엘의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아모스 4:6-11절. 재앙의 이유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 돌아오라고 하는 사인임.)

 

 

 

 

창세기 35:9-15  야곱의 허리  2000. 7. 3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였다고 하시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였느냐고 말라기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였다면 우리에게 해 주신 일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는 다른 나라 백성들은 우상을 숭배하여도 저렇게 나라가 잘되고 강하게 되는데 우리는 꼴이 이게 무어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려고 애를 써 본들 무슨 소용이 있는 것입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다면 더 나았을 것 아닌가 하는 항변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내가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것입니다. 에서는 장남이지만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하시고 야곱을 사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고생을 합니까? 야곱이 훨씬 더 고생을 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이렇게 고생하게 된 것이 하나님이 사랑하였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입장에서 보면 무척이나 고난의 길입니다. 그의 생애가 얼마나 고생으로 점철되어 있는지 잠시만 한 번 더 살펴봅시다.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도망을 하던 때가 나이 70입니다. 그리고 객지에서 비록 아내와 자녀와 재산을 얻게 되지만 장인이며 외삼촌인 라반에게서 죽을 고생을 하고 나중에는 생명의 위협까지 받지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살아나게 되는 것을 봅니다. 그 뿐입니까? 자기의 딸이 강간을 당합니다. 자기의 큰 아들 르우벤이 서모 빌하와 통간하는 이런 일이 다 일어납니다. 나중에는 그렇게 사랑하는 요셉이 형들의 시기에 의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 실신을 하는 정도였습니다.

 

 

 

 

노년에 애굽으로 내려갔지만 그것이 어찌 평안한 여행이겠습니까? 자기가 살던 땅에 흉년이 들어서 남의 나라에 목숨 살리기 위하여 가는 걸음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바로왕 앞에서 하는 고백이 무엇입니까? 내 나이 우리의 조상들보다는 적지만 그러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라고 한 마디로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인생은 한마디로 고난으로 점철된 인생입니다. 그러기에 스스로가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험악한 인생을 보내게 된 야곱을 보고서 하나님이 사랑하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험악한 세월을 보내게 하시고서 무엇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까?

 

 

 

 

그러면 야곱이 당하는 이러한 환난과 고생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김이곤 교수의 구약의 고난신학이라는 논문에서 보면 성경에는 고난의 기원에는 별로 말하지 않고서 고난의 원인과 그 목적을 말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고난에는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고난의 의미를 세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고난은 인간의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제동 활동 양식.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고난이 왔고 그러므로 인간의 고난이 죄스러운 인간의 현실을 제도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준 것이지만 그러나 단순히 인간의 죄에 대한 보응적인 차원에서의 고난만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제동을 거시는 것으로서 고난이 주어지기도 하지만 요셉 같은 경우에는 이유 없는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난이 나중에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였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계론적으로 죄에 대한 응보의 고난만이 아니라 고난을 자유롭게 이용하시는 역사의 유일한 주인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식이 동시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2) 고난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교육 또는 하나님의 훈련수단.
아모스에서 보면 고난의 의미를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재앙이 나타나고 그로 인한 고난이 점철되는 것은 내게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돌이키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내용이 이사야서에서도 많이 나타납니다. 너희가 어찌 더 맞으려고 거듭 거듭 반역하느냐는 것입니다. 호세아서 한 곳을 보고자 합니다.

 

 

 

 

호세아 2:6-7절입니다. “봉독” 호세아 선지자가 음란한 여인 고멜과 결혼을 하는데 이 여인이 틈만 나면 바람을 피우는 것입니다. 아이를 낳고 살다가도 가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여인을 다시 값을 주고 데리고 오라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렇게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멜과 같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 것입니까? 가시로 길을 막고 담으로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가시와 담이란 고난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비록 아내가 바람을 피울지라도 그 아내를 다시 돌이켜 오시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아내가 바람을 피운다고 그냥 너 갈 데로 가라 이혼 해 주마,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값을 주고서 데리고 오는 것입니다. 아내의 입장에서는 바람피우고 살도록 내버려 두지 왜 가시로 막고 담으로 막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진정한 사랑이란 가시와 담으로 막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7:14절입니다. “봉독”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시는 언약의 내용입니다. 너의 자녀에게 내가 아비가 되어서 범죄를 하면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는 하겠지만 사울처럼 은총을 빼앗지는 않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고난이란 아버지가 자식을 사랑하여 매를 드는 그런 고난입니다.

 

 

 

 

3) 동족이 받을 징벌을 대신하여 받는 속량적 고난.
예를 들어 모세를 본다면 이스라엘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이 다 쓸어버리시고 다시 만들어 내시겠다고 하시자 자기의 생명을 걸고 용서를 구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려면 저의 이름도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지워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동족의 범죄로 인하여 받을 징벌을 대신 감당하고자 하는 그런 고난이 있습니다. 
 

 

 


그러면 야곱의 고난은 어떤 의미로 보입니까? 2번으로 보입니다. 죄를 지었기에 인과응보적인 고난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택하시고 부르시고 언약을 맺으셨기에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차원에서 고난을 주시지만 그 고난을 통하여 훈련되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약이 우리에게 거울이 되는 것은 우리가 꼭 죄를 지어서 그 죄의 결과로만 고난이 오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생애를 볼 때 하나님이 죄에 대하여 보응하시거나 정죄의 차원이 아니라 야곱에게 나타나실 때 마다 야곱의 죄를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네가 가야할 곳으로 가야 하지 않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고난이 많았다는 것은 야곱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대로 가지 않으니 훈련의 강도가 더 세어지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성령이 임함으로 하나님의 언약에 들어가게 됨으로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안 되지요? 그러니 우리가 고난이 많은 것입니다. 여름방학 때 마다 대학생을 모집하여 국토순례를 하는 행사가 있습니다. 어느 제약회사가 지원하고 대학생을 모집하는데 부산에서 출발하여 서울까지 걸어가는 것입니다.

 

 

 

 

590킬로미터를 걸어가는데 21일 만에 걸어갑니다. 마침 그때에 비가 한참 올 때여서 비를 맞고도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발이 물에 불어터서 껍질이 발바닥만 하게 떨어지는 것입니다. 약 150여명이 출발하여 완주한 학생이 140여명인가 하였는데 그런데 중간에 실신하여 쓰러지는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앰블런스에 실어서 가긴 하는데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나면 함께 합류하여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쓰러진 자리에서 다시 출발하는 것입니다. 자기 걸음으로 걸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쓰러진 곳까지 차로 싣고 와서 혼자서 다시 출발하여 다른 사람들이 자고 있는 시간에도 걸어서 가야만 완주를 하는 것입니다.

 

 

 

 

그 프로를 보다가 우리의 훈련도 저렇다고 보았습니다. 예수를 믿고서 하나님의 나라로 바로 데리고 가지 않는 것은 우리의 걸음으로 걷게 하시는 것입니다. 무엇이 허무한 것인지, 쓸데없는 것인지를 알게 하시고 정말 생명이 좋은 것이구나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가 좋은 것이구나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훈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이 훈련에 부름 받은 자는 포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니 포기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국토 순례에서는 정 안되면 탈락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시기에 반드시 완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발에 붕대를 감고서 절둑거리며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처와 매 맞은 흔적의 절둑거림이 야곱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라는 것입니다. 그 절정이 야곱의 허리가 위골되는 것입니다. 환도뼈가 위골되는 것입니다.

 

 

 

 

35:11절입니다. “봉독” 밧단 아람에서 벧엘로 돌아오자 하나님이 야곱에게 복을 주시는 내용이 11절입니다. 우선 9절에 보시면 “다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벧엘로 돌아온 야곱에게 다시 나타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리하여 야곱에게 복을 주시는데 그 내용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이 전능을 아시겠습니까? 야곱이 아무리 도망가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대로 이루어 놓고야 마시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입니다. 그리고서 그 전능하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고 하십니다.

 

 

 

 

지금 야곱의 허리는 부러진 것입니다. 그런데 부러진 허리로부터 어떻게 열왕들이 나오는 것입니까? 물론 지금까지 낳은 자녀들이 있으니 그들로부터 많은 후손이 나오지 않는가 하시겠지만 그러나 성경이 그러한 내용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야곱의 부러진 허리로부터 열왕들이 나온다는 것은 단지 야곱의 개인의 훈련차원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야곱의 위골된 허리로부터 하나님은 새롭게 이스라엘을 만들어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하고서 이삭을 낳듯이 그렇게 자기의 백성을 만들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야곱이라는 그 이름으로 지금까지 버텨온 것들을 부수어 버리는 것입니다. 깨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골된 허리, 불구가 된 그 허리를 통하여 열왕을 만들어 내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와, 이삭의 아내 리브가, 야곱의 아내 라헬이 모두 자녀를 생산치 못하는 여인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에게서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나왔다는 것을 이제 야곱의 위골된 허리로부터 하나님의 자기 백성을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위골된 허리는 개인적인 훈련차원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만들어 내실 지를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골된 허리에서 나오는 백성이란 바로 새롭게 창조 되어야 나오는 것입니다. 없는 것을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방법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흔히 하는 말이 깨어져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아직 더 깨어져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복음성가에는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부서져야 하리 더 부셔져야 하리 깨져야 하리 더 깨져야 하리”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야곱의 허리로부터 나오는 후손들은 깨어진 허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인생입니다. 그 열왕들의 결국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의 깨어짐, 그 십자가의 버려짐이 자기 백성을 만들어 내는 대속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고난에는 야곱을 훈련시키시는 내용도 있지만 그러나 부러진 허리로부터 열왕들이 나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의 창조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상의 깨어짐이 우리의 구원이 된 것입니다. 마치 야곱의 위골된 허리로부터 열왕들이 나오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희생의 고난으로 자기 백성들을 살려 내시고 창조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려 내시는 길은 어떤 방식으로 하시는 것입니까? 우리도 야곱처럼 꺾으시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꺾어짐을 당하여 깨어짐을 통하여 우리가 원래부터 목이 곧은 백성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깨어지기 전에는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깨어지고 나니 그 위골된 허리로 인하여  자랑은커녕 절뚝거리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위골된 그 허리, 부러진 그 허리를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이 복의 통로였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 통로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깨어진 모습들이 있습니까? 많이 깨어질수록 주님의 은혜는 더욱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런 현장에서 주님은 11-12절의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신 땅까지 주신다는 것입니다. 열왕이 허리로, 많은 민족이 야곱의 허리로 나오는 것만이 아니라 그 약속의 땅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서 깨어지면 무슨 땅을 주시겠습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자꾸만 눈에 보이는 땅을 원하니 하나님이 우리를 꺾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은 야곱의 복을 우리도 받게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위골된 허리로부터 열왕이 나오게 된 것을 기억하시고 주님 앞에서 많이 깨어지시기를 바랍니다. 그 안에서 새로운 은혜의 세계가 열릴 것입니다.

우리의 알량한 자존심이 깨어지고 우리의 쓸데없는 고집이 깨어지고 나의 나됨을 나의 것인 양 인정하려한 것이 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이러한 은혜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3:5절. “봉독”

 

 

 

 

창세기 35:9-15  야곱의 복  2000. 8. 6.

 

 


지난주에 이 본문으로 야곱의 허리에서 열왕이 나오는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야곱에게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셔서 복을 주시고 하시는 이 복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동안 우리의 복의 개념이 성경적으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아서 많은 혼동을 가져 왔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분적으로 무엇이 복인지를 말씀을 자주 드렸습니다만 오늘은 야곱을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하나님 앞에서의 복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서 우리도 그러한 복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우선 오늘 본문에서 무엇을 복이라고 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자 다시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전능한 하나님으로서 야곱에게 약속하시는 복은 후손과 땅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 약속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고 이삭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후손과 땅을 주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복인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야곱이 부자냐, 아니냐 그런 것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을 봅니다.

 

 

 

 

창세기 12:1절에서 3절을 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하신 약속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을 복의 통로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복을 주시고 저주하면 저주를 하시겠다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복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루어 내신는지를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5:1-7절입니다. “봉독” 15:16절. “봉독” 땅의 약속.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내신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어떤 복을 허락하시는가 하면 후손과 땅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후손과 땅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이고 이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복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복이며 그 후손의 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생각해왔던 복과는 무언가 다른 느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후손이라고 하여 출세하는 그런 후손이 아니고, 땅이라고 하여 이 세상의 부동산이 늘어나는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이미 후손과 땅의 약속을 하시면서 어떤 후손과 땅인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땅부터 봅니다. 창세기 15:16-21절입니다. “봉독” 부동산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죄악과의 싸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죄악이 관영하여지는 것과 그 죄악된 땅을 정복하는 차원에서의 땅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부동산의 확보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감당할 자가 바로 아브라함의 약속의 후손인 것입니다. 이 후손이란 이미 창세기 3:15절에서 말씀하신 여인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치신다는 차원의 전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을 획득할 자는 죄악을 물리치는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그 전쟁을 말하는 후손이란 창세기 22:17절입니다. “봉독”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후손이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큰 복이란 아브라함의 후손이 전쟁을 하여 땅을 차지하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복을 언약하신 그 분위기를 보니 이미 전쟁을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을 이제 야곱에게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야곱을 하나님이 이미 복중에 있을 때 선택을 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어떠한 선한 행위가 없을 태중에 있을 때 하나님이 야곱을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식으로 말하자면 창세전에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것은 어떠한 사람의 전적인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행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복이란 하나님의 선택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인생이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내는 일에 사용되어지는 도구입니다. 이러한 부르심을 받았기에 야곱은 하나님의 손길에서 벗어 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아무리 자기의 수단과 꾀를 동원하여 자기의 뜻을 이루어 내고자 하여도 결국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하나님이 하시면서 야곱의 죄와 허물을 보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그러한 간사한 꾀와 속임수를 하나님이 한번도 책망을 하시는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태중에 있을 때 선택하시고 나서 야곱에게 직접 나타나신 것은 야곱이 형 에서를 속이고 도망가는 때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권을 속임수로 받아내어도 하나님은 그냥 계셨습니다. 그런데 속일대로 속이고 도망가는 중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벧엘입니다.

 

 

 

 

창세기 28:13-15절입니다. “봉독” 자주 본 말씀이라서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그런데 역시 이 언약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약속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땅과 후손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야곱에게는 처음 나타나시는 하나님께서 야곱의 허물을 책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 왜 약속을 믿지 못하고 그렇게 속였느냐고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네가 그런 줄 알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결코 나의 언약을 이루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언약이란 야곱이 직접 받은 것이 아니니 지금부터 그 언약을 지키지 않으면 책망하지 않으실까 하는 생각이 들지요. 그런데 야곱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마다 비록 벧엘로 올라가지 않고 다른 곳에 있을 지라도 야곱에게 책망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언약만을 반복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고생을 하고 자기의 딸이 강간을 당하고 세겜성의 사람들에게서 두려움을 느끼지만 그러나 혼자의 두려움이고 오히려 세겜의 사람들이 두려워 한 것입니다.

 

 

 

 

31:3절입니다. 라반에게서 20년이 지나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벧엘로 올라가라. 그런데 책망의 말씀이 있습니까? 없다는 것입니다. 32:29-30절입니다. “봉독” 역시 여기서도 책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을 하다가 환도뼈가 위골이 되었지만 오히려 야곱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짓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을 지으면서 야곱의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고서 살자가 없는데 자신은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의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만나고서도 죽지 않은 것이 바로 야곱의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고서도 죽지 않은 이 복이 어떻게 주어졌습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이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으면 하나님을 만나고도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는 우습게 들릴지 모르지만 유대인들은 감히 여호와의 이름도 부르지를 못합니다. 여호와 또는 야훼라고 우리는 발음을 합니다만 유대인들은 감히 부르지 못하여 아도나이 즉 주님이라고 부르거나 거룩한 네 글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만나고서 살 자가 없음을 출애굽기를 통하여 시내산에 강림하신 모습을 통하여 더욱 각인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고서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고도 살아난 몇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입니다. 하나님을 만났으니 죽으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기의 천사를 보내어 만나게 하시는 것은 죽이시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기드온 같은 경우도 하나님을 만나고서는 죽지 않았다고 하여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샬롬’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여호와 평강입니다. 유대인의 인사말인데 우리식으로 하면 안녕하십니까, 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안녕이란 하나님을 만나고서도 죽지 않은 것이 샬롬이며 평강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자의 받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이 허물이 없어서 하나님께 책망을 받지 않은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개인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면서 이스라엘 국가를 한 인격체로 보면 됩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많은 범죄를 행합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 있으면 그 죄들을 하나님이 더 이상 묻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의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 언약 안에 있으면 허물을 보시지 않는다는 것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이란 결국 언약의 후손이 와서 그 땅을 차지하여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민수기 23장을 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언약하신 그 내용을 이제 때가 차매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야곱에게 언약하신 그 복을 후손과 땅에 대한 약속을 이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개념으로 보아도 되겠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여 가나안으로 진군을 하여 들어오는데 모압왕 발락이 겁이 나서 이들을 막아보려고 발람 선지자를 불러서 저주를 퍼붓게 합니다. 그러나 저주를 하려고 입을 열면 주의 신이 임하여서 저주 대신 축복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축복의 내용을 봅니다.

 

 

 

 

민수기 23:7-8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이 저주치 않은 자를 내 어찌 저주하리요 하는 것입니다. 민수기 23:19-24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이 언약하신 바를 이루어 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떠한 저주라도 통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야곱의 허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지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를 힘입고 이곳까지 온 것이기에 이들의 허물을 하나님이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패역을 보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복이며 이스라엘의 복이라는 것입니다.

 

 

 

 

민수기 24:9절입니다. “봉독” 누구에게 하신 언약입니까? 아브라함 이삭 야곱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어린양의 피를 힘입고 있으면 어떠한 저주가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거룩하지 않은 백성을 치는 것입니다. 민수기 24:7절입니다. “봉독” 야곱에게서 한 홀이 나와서 적을 다 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야곱에게 하신 하나님의 복의 내용인 것입니다. 후손이 와서 적을 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하나님의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떤 복으로 다가왔습니까? 그 후손이란 여럿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고 갈라디아서 3:1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후손에 대하여는 분명하여졌습니다. 야곱의 복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허물의 가리움을 받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땅의 약속은 어떻게 됩니까? 구약에서의 땅은 가나안땅입니다. 그러나 그 언약의 땅이 그 기능을 다하였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이 성지가 아닙니다. 성지순례라고 하는데 이스라엘은 성지가 아닙니다. 이미 그 기능이 끝난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의 땅이 하나님의 언약의 땅으로 자리 잡고 있으려면 그 땅을 거룩하게 하는 제사를 드리는 성전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냥 세월이 지나서 무너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전이 없어진 이스라엘은 더 이상 약속의 땅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일으키리라 하신 그 성전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실 자신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후손도 예수 그리스도이고 그 땅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그 후손의 복과 땅의 복을 다 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새 언약 안에 있는 자는 이제 어떤 복을 누리는 것입니까?

 

 

 

 

그 허물의 가리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 후손 즉 예수 그리스도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그를 사랑하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믿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 바로 아들의 피로 세워진 아들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복입니다.

 

 

 

 

히브리서 11:8-12절을 봅니다. 후손과 땅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았다고 합니다. 그 후손이란 이미 말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땅이란 가나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를 바라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이 완성이 된 상태에서의 복이 무엇인지를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 성도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허물과 죄사함을 알고 그의 지으실 터가 가나안땅이 아니라 영원한 주님의 나라임을 내다본 것이 복이라고 하는데 오늘 이 언약의 이루어짐을 보면서 아직도 이 세상의 없어질 것들을 복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야곱의 복이 무엇인지를 통하여 오늘 우리의 복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확인하시고 세상의 것들에 기죽지 마시고 담대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35:16-29  라헬의 묘  2000. 8. 13.

 

 


야곱이 그렇게 사랑하였던 라헬이 죽습니다. 네 명의 아내 중에 가장 사랑한 라헬이 가장 먼저 죽습니다. 그러자 야곱이 라헬의 무덤에 비석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후대 사람들도 그 무덤을 보고서 라헬의 무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내용으로 장남 르우벤이 그의 서모 빌하와 통간하는 부끄러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은 인간의 이러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인간의 배신 분노 애증 추함 탐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택하시고 부르시고 자기의 언약의 백성으로 편입시키시는지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의 죽음입니다. 이삭의 나이 128세로 죽게 되는데 그 장사를 야곱과 에서가 함께 지내게 됩니다. 에서가 야곱을 향하여 복수의 칼날을 간 것은 아버지가 죽으면 야곱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되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언약을 야곱과 맺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야곱과 에서가 함께 아버지를 장사하고서는 서로 따로 살게 됩니다.

 

 

 

 

창세기 36:6-7절을 봅니다. 에서가 동생 야곱을 떠나 타처로 갑니다. 소유 재산이 너무 많아서 야곱과 함께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서가 다른 곳으로 가고 야곱이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하던 곳에서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장남인 에서가 아버지 이삭이 살던 곳에서 거하지 않고 에서가 떠남으로 야곱이 아버지의 살던 곳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연결이 됩니다. 이는 언약의 흐름입니다. 이삭은 죽었지만 그러나 그 언약은 야곱을 통하여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에서는 자연히 분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라헬의 죽음과 그 라헬의 무덤과 그의 통곡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러기 전에 먼저 라헬의 전체 생애를 한번 조망하여 보자면 라헬은 야곱의 눈에 띄었고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였습니다. 그것 뿐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한 것 외에 라헬이 스스로 하나님을 위하였다던가, 마음씨가 고왔다던가 하는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의 신랑을 두고서 무섭게 질투하면서 야곱을 독차지 하려고 하였던 라헬이며, 남편을 조르던 그런 라헬입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남편을 따라 도망을 칠 때도 드라빔을 훔쳐서 떠나는 라헬입니다. 하나님보다 우상이 앞섰던 그런 여인입니다. 우상 드라빔을 훔치고 그것을 숨기기 위하여 아버지 앞에서 거침 없이 거짓말을 하는 라헬입니다. 이러한 여인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어미가 되는 것입니까?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생산되는 것이 이러한 인간들의 질투와 시기 속에서 생산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만드시는 것은 인간의 구원이 사람의 자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있음을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라헬이 하나님의 언약 속에 들어가게 되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어머니가 되는 것은 - 물론 직접적인 자기 몸으로 나은 자는 요셉과 베냐민이지만 라헬과 레아를 함께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의 어머니로 보는 것이 성경의 관점입니다-단지 야곱의 아내가 되었다는 이유입니다. 야곱의 눈에 뜨이고 야곱이 사랑하였기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의 위력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내용이 후손과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문제는 지난주에 살펴보았습니다. 이 언약 외에 또 다른 복을 허락하셨는데 그것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축복하는 자는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저주하는 자는 하나님이 저주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들을 통하여 일을 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다른 곳으로는 하나님과의 통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이들에게 붙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에 편입이 되는 것입니다. 라헬은 기존의 여인들 보다 더 욕심과 시기와 질투가 많은 자로 볼 수가 있습니다. 자녀가 없었기에 더욱 더 집착하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여인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어머니로 복을 빌어 줄 때 불리우는 이름이 된 것입니다.

 

 

 

 

룻기서 4:10-11절을 봅니다. “봉독” 보아스가 룻을 자기의 아내로 맞아들이는 내용입니다. 보아스 보다도 룻과 더 가까운 친족이 있어서 그에게 나오미의 남편의 유업을 이어 주겠느냐고 하자 거절합니다. 그러자 보아스가 그 일을 합니다. 보아스가 이일을 다 마치고서 이 일에 너희가 증인이라고 하자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 일에 자신들이 증인이 된다고 하면서 보아스를 축복하는데 어떤 축복을 합니까?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룻이지요. 이스라엘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라헬과 레아가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자로 불리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롯을 축복하는데 이러한 복을 빌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땅 모압의 여인이 라헬과 레아의 복을 이어 받아서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들이 야곱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주어지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야곱 자신도 얼마나 욕심꾸러기이고 교묘하며 속임수의 사람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그러한 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는 것이 우리가 바로 모든 언약의 완성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 복을 놓치면 기독교가 아니라 이방 종교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라헬이 죽는 것은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마지막 아들 베냐민을 낳으면서 그 산고로 인하여 죽게 됩니다. 라헬이 산고로 거의 죽음에 이르게 되었을 때 자 아들이다, 라는 말을 듣고 슬픔의 아들이라고 이름을 ‘베노니’라고 짓습니다. 그러나 야곱이 그 이름을 바꾸어 베냐민, 오른손의 아들이라고 지어버립니다. 그렇게 하여 라헬은 고통 중에 베냐민을 해산하고서 죽게 됩니다. 라헬이 야곱의 사랑을 받았지만 자녀가 없어서 고통 하였고 그리고 겨우 두 번째 아들을 낳다가 죽게 됩니다. 그러자 야곱이 라헬의 무덤에 비석을 세우는데 후대에도 이 라헬의 무덤을 사람들이 기억하였습니다.

 

 

 

 

사사시대 말기에 사울이 왕으로 부름을 받을 때에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붓고서 사울이 왕으로 부름 받은 징조를 말하면서 라헬의 무덤에서 두 사람을 만나리라고 합니다. 이를 보건데 수백 년이 지난 때에도 라헬의 무덤이 그대로 있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라헬은 자녀가 없어서 통곡한 여인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물론 요셉과 베냐민을 낳았지만 그 자녀를 낳기 전까지 통곡하였습니다.

 

 

 

 

창세기 30:1,22절을 봅니다. 내가 죽겠노라고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라헬을 들으시고 자녀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라헬의 고통을 예레미야에서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보겠습니다. 예레미야 31:15-17절입니다. “봉독”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입니다. 그 라마라헬의 무덤이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입니다. 라헬이 애곡한 것을 지금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침략으로 인하여 많이 죽고 또 포로로 잡혀 가는 그 고통의 부르짖음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룻기서에서 본대로 이스라엘을 세운 라헬과 레아라고 하였듯이 라헬의 통곡은 이스라엘이 자녀를 잃고서 통곡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헬의 자녀가 요셉과 베냐민인데 요셉이 두 지파로 되지요. 에브라임과 므낫세입니다. 에브라임은 북쪽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지파가 되고 므낫세 반 지파는 요단 동쪽에 절반은 북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 베냐민은 남쪽 유다에 속하여 집니다. 그러므로 라헬의 자녀가 남북으로 다 나누어져 있는데 이 라헬의 묘가 있는 곳이 남북의 경계선이 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라마에서 라헬이 통곡한다는 것은 이미 죽은 라헬이 무엇을 통곡합니까? 그러니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죽고 포로로 잡혀 갔기에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라헬이 위로 받기를 거절한다는 것입니다.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이스라엘의 비참함과 그 고통을 라헬의 통곡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애곡 속에서 하나님이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울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는 것입니다. 너의 최후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입니다만 그러나 예레미야 31장에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을 말하면서 동시에 새 언약을 말하고 있는 장입니다. 그러므로 라헬의 통곡은 한걸음 더 나아가는 고통이 되는 것입니다. 자녀를 잃고서 울부짖는 자들의 소리가 있게 된다는 이 예언을 마태복음에서 어떻게 성취가 되는 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16-18절입니다. “봉독”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동박 박사들이 헤롯의 궁으로 들어가서 왕의 나심을 묻게 됩니다. 그러자 소동이 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왕이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모아서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물으니 정확하게 유대땅 베들레헴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왕이 자기도 그 왕에게 경배하도록 찾거든 자기에게 알려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천사들이 박사들에게 현몽하여 다른 곳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그제서야 헤롯왕이 자기가 속은 것을 알고서 베들레헴의 영아들을 학살하는 것입니다. 헤롯은 자기의 왕권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의 자식까지 죽이는 그런 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왕이 태어났다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학살하라는 명을 내린 것입니다. 베들레헴의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수십 명에서 수백 명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갑자기 군인들이 들이닥쳐서 어린 아이를 죽였으니 그 아이의 죽임을 본 어머니들의 통곡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이 통곡의 사건을 예레미야 31장의 라마에서 라헬의 통곡이 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고 죽고 하는 그런 상황에서의 슬픔의 고통을 지금은 헤롯 시대에 영아의 학살로 인하여 울고 있는 자들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이 세상의 세력이 야곱의 후손을 미워한 것처럼 그러한 세력이 헤롯을 통하여 야곱과 라헬의 자손을 대항하는 것입니다. 결국 세상의 분노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에 대항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노의 표출이 그리스도를 대항하는 세력이 이 세상의 세력임을 보이는 사건이 영아의 살해입니다.

 

 

 

 

시편 2편 1-6절을 봉독합니다. “봉독” 세상의 열왕들이 모여서 분노하는 것은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적의 한 형태가 라마의 통곡을 유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그리스도를 대적한다고 하여도 결국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웃으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을 향하여 분노하시며 그들에게 진노를 쏟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무슨 싸움에 휘말려 있는 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3;15절에 예언되어 있는 대로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의 싸움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싸움이 요한 계시록에 잘 나타납니다.

 

 

 

 

요한계시록 12:1-17절입니다. “봉독” 용이 해산하는 여인의 아이를 삼키고자 하나 그러나 그 아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탄생을 막으려고 용이 싸움을 거는 과정에서 라헬의 통곡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철장권세로 다스릴 자가 시편 2편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쫓겨난 용이 땅으로 내어 쫒기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또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와 더불어 싸우는 것입니다.

 

 

 

 

12:17절입니다. 용이 누구를 대적합니까?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싸움의 대상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싸움의 방법이 요한계시록 13장에서 보면 짐승에게 절하고 표를 받지 않으면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는 짐승에게 절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싸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를 따름으로 오는 고난을 원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가치관에 절함으로 세상적인 편안을 누리며 사시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면 결코 세상 속에서 편안하게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를 흔들어 내시고 깨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자가 세상에 닥치는 환난으로 인하여 애곡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 아들 빼앗겼다고 울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위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위로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어떤 싸움이 있습니까? 라헬의 애통이 있습니까? 라헬은 그 고통이 너무나 크기에 위로 받기를 거절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위로하시는 것입니다.

그 위로가 예레미야 31:16-17절입니다. 이러한 위로가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로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어떠한 위로도 진정한 위로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인한 위로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창세기 36:1-8  에서의 형통  2000. 8. 20.

 

 


창세기 36장 전체가 에서에 대한 기록입니다. 에서의 후손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에서와 쌍둥이 형제인 야곱을 중심으로 보면서 에서는 간간히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에서의 모습을 성경 전체에서 조명을 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하신 것이 태중에 있을 때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 하셨다고 말라기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사람의 행위 이전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문제가 성경을 보는데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고 난 아담의 후손이기에 모두가 선악의 기준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 그저 주셔야만 하는 의는 모르고 자기의 행위에서 만들어 내는 선한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서의 생애를 보면서 과연 하나님의 복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신다면 야곱은 형통하게 해주시고 에서는 망하게 하셔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물론 그 형통과 망함이 세상의 기준으로 봅니다. 그렇게 보니 야곱은 죽도록 고생하는데 에서는 야곱 같은 고생이 없어도 잘 먹고 잘 삽니다. 축복의 약속을 받은 야곱이 하란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있을 때 에서는 세일에서 큰 번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사병이 400명이나 된다는 것은 아주 강력한 세력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후손들이 애굽에서 400년의 종살이를 할 때 에서의 후손은 에돔 땅에서 독립 왕국을 세우고 8대에 이르러 왕이 됩니다.

 

 

 

 

오늘 36장의 말씀 전체를 읽지 못하였는데 보시면 에서의 후손들에서 족장들이 나오고 왕들이 나오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셨다고 하시면서 고생은 훨씬 더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에서는 미워하신다고 하시면서도 형통한 것을 보면서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것들이 의구심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면 다시 야곱의 축복과 에서의 축복을 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27:27-29절입니다. “봉독” 이삭이 야곱을 축복한 내용입니다.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 풍성한 곡식 포도주로 주시기를 원하신다고 합니다. 만민이 너를 섬긴다고 합니다. 너를 축복하면 복을 받고 너를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에서는 어떠합니까?

 

 

 

 

창세기 27:38-40절입니다. “봉독” 에서가 축복을 애걸하자 이삭이 무어라고 합니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요. 새번역을 보니 이렇습니다. “네가 살 곳은 땅이 기름지지 않고 하늘에서 이슬도 내리지 않는 곳이다. 너는 칼을 의지하고 살 것이며, 너의 아우를 섬길 것이다. 그러나 애써 힘을 기르면, 너는 그가 네 목에 씌운 멍에를 부술 것이다.” 멍에를 부순다는 것은 야곱의 후손의 지배를 받겠지만 힘을 쓰면 그 지배를 겨우 벗어나는 정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축복입니까? 아니지요.

 

 

 

 

에서의 운명을 확정짓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야곱과 에서의 축복내용을 두고 보자면 야곱은 모든 것이 풍성해지고 에서는 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에서의 결국과 야곱의 결국을 알고 있기에 에서보다 야곱이 복이 있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야곱시대의 사람이라면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지금도 마찬가지로 예수 믿지도 않는 사람은 하는 일마다 잘되는데 예수 믿는 자는 왜 하는 일 마다 안 되는가, 하는 의문이 없습니까? 에서의 형통을 부러워하듯이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습니까? 성경에서도 이런 문제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진 자들이 있었습니다. 새벽기도회 때 시편을 보면서 몇 번이나 말씀을 드린 내용입니다. 몇 곳만 보겠습니다.

 

 

 

 

시편 73편 1-14절을 봅니다. “봉독” 악인은 벌 받고 의인이 형통하여야 당연한데 어떻게 악인이 형통한가에 대한 의문입니다. 그런데 결국 성소에 나가서 그 결국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이 오래가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졸지에 망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의 형통이 망하게 되어 있다고 하여도 당장 나타나는 것이 아니기에 시험에 들만 합니다. 악인이 몇 백 년을 형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럴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들의 결국이 망하는 것입니다.

 

 

 

 

시편 73:16-20절입니다. 사람이 아침에 일어나면 꿈에 있었던 것들이 사라짐같이 주님께서 일어나시면 그들은 한낮 꿈처럼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장에 우리 세대에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이러한 약속을 믿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니 에서의 결국을 보니 그렇다는 것입니다. 에서의 형통이 몇 백 년을 갈지라도 하나님의 시간에서 보면 잠시 잠깐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37:1-2절입니다.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 하지 말지어다 저희는 풀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채소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우리의 시간으로 보면 왜 이다지도 악인이 득세하고 그것도 오래가는가 싶지만 그러나 영원에 비추어 보면 그것은 풀이나 채소 같은 것입니다. 이들을 인하여 불평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고 합니다. 하박국서도 이 문제로 질문합니다. 주님이 답하십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에서의 잠깐의 형통보다 그 결국을 보고서 우리가 붙들어야 하는 복이 무엇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즉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400년간 종살이를 할 동안 에서의 후손들은 족장으로 왕으로 에돔에서 잘 살았습니다. 에서의 별명이 에돔입니다. 이것이 지명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야곱의 후손들을 그 언약하신대로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십니다. 가나안땅으로 들어오면서 정복하여야할 족속과 그대로 두어야 할 족속을 하나님이 구별시켜 주십니다. 그 중에 에돔땅은 정복을 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 이유는 에돔의 땅은 에서의 후손에게 주신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돔땅을 통과할 테니 길을 좀 열어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열어주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돌아서 가게 됩니다.

 

 

 

 

민수기 20:14-21절입니다. 이렇게 길을 비켜주지 않았는데도 에돔 사람을 좀더 후하게 대우하십니다. 신명기 23:3-8절입니다. “봉독” 길을 비켜주지 않은 것은 꼭 같은데 모압과 암몬 족속은 영원토록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에돔은 길을 비키지 않았는데도 3대 후에는 들어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의 내용을 볼 수가 있습니다. 둘 다 길을 열어주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모압왕 발락이 발람 선지자를 불러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한 사건이 있습니다. 그러나 에돔은 저주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축복 속에 무엇이 적용되는 것입니까? ‘야곱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고’가 적용이 되는 것입니다. 에돔은 저주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에돔이 형제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애굽의 사람도 미워하지 말고 3대 후에는 총회에 들어올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결국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신다는 차원을 보여주심과 동시에 그 바탕에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종되었던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에돔의 결국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면 하나님은 이들을 그래도 대접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기름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는 결론이 나옵니다.

 

 

 

 

다윗 시대 때 다윗이 사울이 죽이려고 하자 도망을 가다가 놉땅의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들린 것을 고발하는 자가 에돔인 도엑입니다. 다윗을 고발하는 자가 에돔의 후손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 탄생시에 두 살 아래를 죽이라고 명령한 헤롯이 에돔의 후손이라고 헤르만 리델보스라는 사람의 주석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결국 에서의 저주가 무엇이 됩니까? 이삭을 통하여 받은 축복의 내용 중에 무엇 때문에 걸리는 것입니까? 야곱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받는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에서가 아무리 형통하고 부자가 되고 족장이 되고 왕이 되어도 야곱을 저주하면 끝이라는 것입니다.

 

 

 

 

오바댜서를 봅니다. 오바댜 1-21절을 봅니다. “봉독” 에돔에 대한 죄의 고발과 멸망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왜 에돔이 멸망합니까? 교만하여져서 유다를 괴롭힌 것입니다. 이방의 세력들이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할 때 너도 연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복이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후손으로 오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것이 복입니다. 세상의 것들은 노력하는 만큼 얻게 됩니다. 비록 에서가 땅의 기름짐과 하늘의 이슬이 내리지 않는 땅에서 살았더라도 부자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그런 복을 받았지만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영원하고 참된 복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죄에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복은 아무리 애를 쓰고 떼를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에서가 야곱에게 그렇게 애를 씁니다. 나에게 축복할 내용이 없습니까? 냉정하여 보이지만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땅의 것들은 심은 대로 거두고 노력한 대로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기업은 애를 쓴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로마서 9:10-13절입니다. “봉독”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였다는 그 복이 무엇입니까? 물질입니까? 아닙니다. 물질은 에서가 더 풍성하였습니다. 세상의 출세입니까? 아닙니다. 야곱이 후손이 400년 동안 종살이 할 때 에서의 후손들은 왕노릇 하였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진정한 복이란 말입니까?

 

 

 

 

로마서 9:14-18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이 긍휼이 여겨 주시고 선택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는 이것을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 받았다고 합니다. 이 복을 받은 사람은 이제 다른 것을 향하여 달려가지 못하는 복도 함께 받았습니다. 다른 것으로 달려가지 못하는 것을 사람들은 환난이다 할지 모르겠지만 우리의 복이란 멸망할 것들이 아닙니다. 에서의 형통, 악인의 형통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원한 복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아시기 바랍니다. 이제 이 복을 받은 사람은 그 아들의 영광의 나라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남은 생애는 그 아들의 영광의 신분에 어울리는 훈련이 우리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히브리서 11:20절입니다. “봉독” 이삭이 믿음으로 장차 오는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를 축복하였다는 것입니다. 야곱만이 아니라 에서도 축복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궁극적인 축복이 무엇인지 장래일에 대하여 계시하는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를 통하여 하나님의 복이 무엇임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에돔의 후손이 3대만에 총회에 들어올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거부하는 것이 저주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복을 알게 되었다면 더욱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시고 주님의 은혜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사시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12:15-17절입니다. “봉독” 참된 복을 놓치지 말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것에 마음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중에 울고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정신을 차리고 주님의 은혜를 더욱 사모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에서의 형통은 잠깐입니다. 악인의 형통이 몇 백 년을 가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잠시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일에 시험 들지 말고 주님 재림하실 그날까지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37:1-11  요셉의 꿈  2000. 8. 28.

 

 


요셉 그러면 꿈이 생각날 정도로 요셉은 꿈꾸는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37:19절에서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부르기를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라고 합니다. 그리고 요셉이 나중에 애굽의 총리로 등극하는 것도 왕의 장관들의 꿈을 해몽하여 주었고 그리하여 바로왕의 꿈도 해석하여 주었기에 요셉을 꿈꾸는 자로 생각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을 볼 때 가장 큰 오해가 무언가 하면 우리도 요셉처럼 큰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 살자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큰 꿈을 가져라고 하지 않아도 태어나면서부터 모두가 커다란 꿈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모두가 자기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꿈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왕자병과 공주병이 다 있는 것입니다. 정도의 문제이지 이런 병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가 스스로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어려서부터 항상 악할 뿐임을 우리의 자녀를 통하여 잘 보게 되지 않습니까?

 

 

 

 

모두가 자기중심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과자 하나 장난감 하나를 가지고 놀 때에 보시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이러한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는데 어른이 되면 자기의 형편과 처지를 따라서 조금씩 타협하고 살 뿐이지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는 자신의 야망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을 가지라고 하지 않아도 이미 모두가 당차고 야무진 꿈들을 다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슨 꿈을 자꾸만 더 가지라고 합니까?

 

 

 

 

그러면 요셉의 꿈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요셉은 한번도 자기가 꿈을 꾸고자 한 적이 없습니다. 요셉의 꿈이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받고자 하여서 받는 것이 아니라 주셔야만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때는 아직 성경이 책으로 주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계시 하실 때는 친히 말씀을 하시거나 천사를 통하여 하시거나 꿈과 이상을 통하여 계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꿈은 하나님의 계시로 보여주신 것이지 개인의 어떠한 야망과 장래의 포부를 가지는 것이 전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란 사람이 원하여서 받아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1:27절에서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시란 하나님을 아는 것이지 사람의 꿈과 야망을 이루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계시라는 말자체가 가리워진 것을 열어 보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요셉의 꿈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자신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셉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것이 무엇을 위함인지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37:1-2절을 보시면 야곱의 약전, 역사를 소개하면서 요셉의 이야기가 등장이 됩니다. 지금부터의 이야기의 중심은 요셉을 통하여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을 중심으로 일어난다고 하여도 요셉의 성공시대를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형제들간의 갈등과 반목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는 것입니다.

 

 

 

 

창세기 27:29절입니다. “봉독”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야곱을 형제들의 주가 되도록 축복을 하는데 야곱의 형제는 하나뿐입니다. 그러니 복수로 형제들의 주가 된다거나 네 어미의 아들들의 주가 된다는 것은 야곱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의 주가 된다는 것은 결국 요셉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열두 형제에게서 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의 역할을 요셉이 하게 되는 것은 결국 야곱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요셉에게서 완성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약에서의 언약들은 언약 당사자로서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후손으로 또는 다른 희생자로 연결되어서 완성되어 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하여 이삭은 야곱을 통하여 야곱은 요셉을 통하여 하나님이 행하신 언약의 완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완성과 이어짐이 결국은 모든 언약의 완성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모아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에게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모습은 언약을 받은 자가 고난을 받고 희생당하는데 그 고난과 희생으로 오히려 희생시킨 자들을 살려낸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셉의 생애를 통하여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는 어떻게 되는지를 봅시다. 요셉은 꿈을 꾸기 전에 이미 형제들의 미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인데 형들이 나쁜 짓을 하는 것을 아버지 야곱에게 알린 것이고 또 하나는 야곱의 편애입니다. 야곱의 편애는 요셉에게 형제들과 다른 옷을 입힌 것으로 나타납니다. 요셉에게 채색옷을 입혔다는 것은 구별되는 특별한 옷으로 봅니다. 이것은 편애로 보기도 하지만 장자의 권리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니 형들이 얼마나 미워하고 시기를 하였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요셉이 꿈을 꾸었다고 하는데 그 꿈의 내용이 더욱 형들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형들이 더욱 요셉을 미워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를 형들이 미워하는 것입니다. 요셉도 자신이 그런 꿈을 꾸게 된 것이 앞으로 자신이 높은 사람이 되리라는 그런 정도로 생각을 하였겠지요. 그러니 자랑삼아 그런 꿈 이야기를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그 꿈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높은 자가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희생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아직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요셉의 생애를 알고 있지만 요셉이나 가족들의 입장에서는 앞으로 일이 어떻게 전개 될지를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다만 아버지만이 마음에 둡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요셉의 꿈은 결국 미움을 받고 고난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그렇게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너의 후손이 타국에서 종이 되었다가 돌아오리라는 그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언제 자신의 개인적 야망을 요셉의 꿈에 빗대어 꿈을 가지고 이루어 내자, 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셉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서 당하는 어려움들을 보고자 합니다. 37:5절. 요셉이 꾼 꿈을 이야기 하자 그를 더욱 미워합니다. 꿈을 꾸기 전에도 두 가지 미움의 털이 박혀 있었지요. 그런데 이제는 형들의 곡식단이 내 단에게 절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들이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우리를 다스리겠는가 하면서 그 꿈과 말을 인하여 더욱 미워하는 것입니다.

 

 

 

 

37:9절입니다. 한번만 그래도 미움을 받을 텐데 또 꿈을 이야기 합니다.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기에게 절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야곱과 그 어미와 형제들이 다 절한다고 하니 야곱이 꾸짖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야곱이 마음에 둡니다. 이러한 꿈들로 인하여 요셉이 얼마나 미움을 받게 되는지 더 보고자 합니다.

 

 

 

 

37:18-20절입니다. 요셉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양을 치는 형들에게 보냄을 받아서 찾아 갑니다. 물어물어 찾아 갔는데 요셉이 오는 것을 멀리서 보고서 형들이 죽여 버리려고 작전을 짭니다.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저를 죽여 버리면 그 꿈이 어떻게 되는가를 보자 하면서 죽일 작정을 합니다. 그러자 장남 르우벤이 그렇게 하지 말자고 합니다. 형제의 피를 직접 흘리지 말고 물 없는 구덩이에 넣어 버리자고 합니다. 르우벤이 이렇게 하는 것은 나중에 몰래 와서 살려내어 자기 아버지에게 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르우벤은 이미 자기 아버지에게 크나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 서모 빌하를 범하였기에 이런 기회에 요셉을 구하여 자기의 지위를 확보하고자 함이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요셉의 꿈이 하나님의 뜻인지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입니다. 형들이 르우벤의 말을 듣고서 그렇게 하기로 하였습니다. 물 없는 웅덩이에 넣어 버렸습니다. 그리고서 자기들은 음식을 먹습니다. 생매장을 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마 울고불고 형님들 왜 그러느냐고 살려 달라고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음식을 먹을 정도였으니 사람의 악함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러한 사람들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시는 것입니까?

 

 

 

 

26절입니다. 유다가 그때 마침 지나가는 상인들을 보고서 우리가 요셉을 죽이고 피를 은닉한 들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그러니 팔아 버리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구덩이에서 끌어 올려 상인에게 팔아 버립니다. 은 20개는 그 당시의 노예의 몸값입니다. 그렇게 팔아 버리고 나자 르우벤이 어디를 갔다가 돌아옵니다. 보니 요셉이 없는 것입니다. 이미 팔려 가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자기들의 아버지에게 알리바이를 만듭니다. 옷을 찢고 염소의 피를 발라서 자기 아버지에게 가져다주면서 이것이 아버지의 아들의 옷이 아닌지 보십시오. 알아보지요. 알아보고서는 통곡을 합니다. 
 

 

 


여기서 요셉을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형제들의 손에 의하여 팔리는 것입니다. 은 20은 당시의 노예 몸값인데 예수님도 형제라는 유대인들, 그중에 제자의 손에 의하여 은 30에 팔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요셉이 형들을 살려 냅니다. 그것을 통하여 형들은 요셉을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들을 살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죽인 자들을 용서하여 달라고 간구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를 찌르고 상하게 하고 죽였지만 그는 살아 나셔서 우리를 살려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미리 당한 고난을 통하여 애굽에서 자기의 가족들이 거할 처소를 미리 마련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으심으로 성도들의 처소를 예비하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모형론적으로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요셉이 이렇게 되는 것을 요셉 자신이 나중에 무어라고 하는지 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50:18-21절입니다. “봉독” 형들이 엎드려 빕니다. 그러자 요셉의 하는 말이 이러지 마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대신 하겠습니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라고 합니다. 자신이 죽을 뻔 하다가 노예로 팔려 갈 때에 형들을 얼마나 원망을 하였겠습니까? 노예로 팔려서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 모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나서야 요셉이 알게 된 것은 무엇입니까? 형제들의 주가 되는 것은 희생하는 자가 주가 되는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섬기는 자가 주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섬김을 받는 것이 주인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지 자기들의 꿈을 이루고자 합니다. 그 꿈이란 그저 높은 것입니다. 월급이 올라가야 하고 승진하여야 하고 학생의 성적이 올라가야 하고 이것만이 꿈입니다. 요셉도 처음에 곡식단이 자기에게 절하고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기에게 절할 때에는 자기가 높은 사람이 되는 것만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물론 나중에 총리가 되고 그의 부모 형제들이 요셉에게 나아와 절하게 되었습니다만 그러나 그렇게 절 받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의 주가 되는 것은 섬김에 있는 것입니다. 제가 당신들과 당신의 자녀들을 기르겠습니다. 이것이 주의 역할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주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자기들이 섬김을 받고자 하나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섬기는 자가 높은 자라는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누가 더 크냐고 서로 서로 시기와 경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섬기는 자가,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꿈을 이야기 하면서 우리도 이 세상에서 야망을 가지고 우리의 꿈을 이루어 내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자리에 있든지 높든 낮든 부자이든 가난하든 실패와 성공, 이런 것에 메여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거룩한 나라요 주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섬기는 자로 부름을 받았고 또한 형제를 섬기는 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형제들의 주가 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빌립보서 2:1-11절입니다. “봉독” 겸손한 마음으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남도 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높으신 분이십니까? 그러나 그가 자기를 비워 종으로 오셨고 죽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주가 되는 것은 종으로 팔리고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를 높여서 다른 이들이 무릎을 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요셉처럼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라면 이 마음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

마음을 낮추시고 남을 섬기는 자리로 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때가 되면 주님께서 높이실 것입니다. 헛된 세상의 자리에 연연하지 마시고 교회에서도 서로 섬기는 자로 세워 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의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자만이 말씀을 받을 것입니다.

 

 

 

 

창세기 38:1-30  유다와 다말  2000. 9. 3.

 

 


우리는 이 본문을 잘 압니다. 물론 창세기를 몇 번 읽어 보신 분에 한하지만 며느리와 시아버지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창세기 38장을 연구하면서 어떻게 성령 하나님께서 이런 수치스러운 일을 기록하게 하셨을까 라고 묻고는 대답하기를 그것은 아무도 자신의 의로움과 지혜를 자랑치 못하게 하고 또 자신의 죄로 인하여 절망치 않게 함이라고 하였답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이 죄인의 족보를 통하여 오신 것이 은혜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 말씀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왕실의 족보를 연구하던 사람이 예수님의 족보를 연구하다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국의 왕실의 족보는 얼마나 순수 왕가의 혈통인가를 따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에는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서 나온 자녀도 있고, 창녀도 있고, 하는 것을 보고서 이것이 인류의 구원자의 모습이다 그렇게 보았나 봅니다.  

 

 

 

 

이런 말씀의 적용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갑니다만 그러나 저는 조금 다르게 보고자 합니다. 그러면 네가 마틴 루터 보다 나은 해석을 하는가 하고 물으실지 모르지만 그동안 성경의 해석이 더욱 발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방향이 세 가지로 나가고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인간 중심적으로 하나는 하나님 중심적으로 또 하나는 하나님과 인간의 합작품으로 보는 입장이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 중심적으로 보고자 합니다. 그것이 종교개혁의 흐름입니다. 마틴 루터와 칼빈의 흐름입니다. 오늘날 어떤 분이 복음을 전하니 신학교 교수가 ‘하이퍼 울트라 칼빈주의’라고 한답니다. 칼빈주의를 아시지요.

 

 

 

 

다섯 가지의 중요교리를 5대교리라 하는데 전적타락,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적 속죄,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 그런데 이러한 내용을 강조하다가 보면 무언가 사람의 의지적인 결단과 힘들이 빠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장로교라는 사람들은 이 정신이 성경적임을 알고 그대로 적용을 하여야 하는데 그런데 오늘날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장로교 안에서 장로교의 개혁의 정신을 이야기 하면 싫어하고 쫓겨나는 현실입니다. --가덕도 강도사 이야기. 사람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오늘날 하나님의 일하심과 하나님의 은혜만을 증거하는 것이 이다지도 이상한 일이 되어 버렸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유다와 다말의 사건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성경의 본문을 보고자 합니다. 그런데 유다와 다말의 관계에서 쌍둥이가 태어나고 그 아들 중에서 베레스가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루터식으로 말하기에는 좀 부족한 면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어떻게 보자는 것입니까? 독일성서공회에서 나온 주석성경이 있습니다. 그것을 대한성서공회에서 번역하여 주석성경이 나왔습니다. 여기에서 다말의 일을 무어라고 하는가 하면 다말은 단지 후손을 얻을 권리만 찾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명예와 목숨을 걸고 죽은 자기 남편의 제 권리를 찾도록 나선다는 것-  다말의 희생의 차원에서 보는 것입니다. 희생은 무슨 희생이냐 더러운 짓을 하였지 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다말을 보고서 성경에서 정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본문을 봅니다. 요셉의 이야기가 전개되다가 갑자기 유다와 다말의 이야기가 전개되니 낯설게 여겨집니다만 그러나 유다가 누구의 자식입니까? 야곱의 자식입니다. 그러니 야곱의 언약이 이제 아들들에게 이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다가 결혼을 하는데 가나안 사람 수아라는 자를 보고서 동침하여 아들을 낳는데 세 명의 아들을 낳습니다. 엘과 오난과 셀라입니다. 아이들이 자라서 장자를 결혼시켰습니다. 그 아내의 이름이 다말입니다. 그런데 장자 엘이 하나님 앞에서 악하므로 죽었습니다. 자녀가 없이 죽어 버리자 그 당시의 풍습대로 동생이 형수를 취하여 대를 이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난이 형수를 취하여 결혼을 하여 형의 대를 이어 주어야 하는데 이것을 오난이 싫어합니다. 그 씨가 자기의 씨가 되지 않을 것을 알고 부부관계를 하는데 땅에다 설정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류 최초의 피임이라 하여 약 7-8년전에 총신 신대원 입학시험에 나온 문제입니다. 답은 오난입니다. 그런데 이 오난의 이름이 불명예스럽게 남아 있는데 자위행위를 ‘오나니즘’이라고 하는데 이 오난의 이름을 근거로 합니다. 오난의 이러한 형의 대를 이어주기를 싫어하는 것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므로 그를 죽이시는 것입니다. 형의 씨를 이어주는 것이 자신의 희생이라고 본다면 그 희생을 싫어한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에서 나타나는데 물론 이때는 성문법으로 주어지지는 않았습니다만 신명기에서 한번 찾아봅니다.

 

 

 

 

 

신명기 25:5-10절. “봉독” 이 말씀의 구체적인 적용이 룻기에서 나옵니다. 보아스가 나오미의 며느리 룻을 맞이할 때 보아스 보다 더 가까운 나오미의 친족이 있어서 그에게 룻을 맞이하여 나오미의 남편의 대를 이어 주겠는가 하니 거절합니다. 그래서 신을 벗기고 장로들 앞에서 증거를 합니다. 자기의 희생을 싫어한 것입니다. 이렇게 비추어 볼 때 오난은 자기의 마땅한 도리, 유다가문의 씨를 이어주는 일을 싫어한 것입니다. 그래서 죽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입장에서는 어떻습니까? 이거 며느리 잘못 들인 것 아닌가 큰 아들 잡아먹고 작은 아들까지 잡아먹는 며느리다. 이제 막내 하나 남았는데 저 아이 마저 죽어버리면 자신의 대가 끊어지는 것이니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며느리에게 친정에 가서 수절하고 있으라고 합니다. 셀라가 어리니 장성하면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셀라를 주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11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12절에 보니 유다의 아내가 죽습니다. 그리고서 유다가 양털을 깎으러 갑니다. 이 소식을 다말이 듣고서는 과부옷을 벗고 창녀의 옷을 입고 기다립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14절입니다. 셀라가 이미 장성하였는데 자기에게 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 당시에 창기의 옷이 따로 있었다는 것은 양털을 깎는 것은 가나안인들의 축제기간이며 이때에 다산을 위한 종교적인 제의식으로 음행을 공공연히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제의식에 유다가 참여된 것으로 봅니다.

 

 

 

 

그러니 아내도 죽고 없으니 창녀인줄 알고 그에게 들어갑니다. 그리고서 그 대가로 염소새끼를 한 마리 주기로 하면서 약조물로 도장과 그 끈과 아마 끈으로 연결된 도장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지팡이를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염소새끼를 사람에게 보내고 자기의 도장과 지팡이를 찾으려고 하였으나 그 창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동네에는 창녀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더 이상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도 없는데 계속 찾다가는 유다의 체면만 상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그냥 두라고 합니다. 그리고 석 달 후에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를 인하여 임신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그 며느리를 화형 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누구의 자식이냐고 묻습니다. 그제서야 다말이 이 도장과 지팡이를 가진 분입니다 하고서 내어 놓습니다. 유다 자신의 것입니다. 
 

 

 

 
이때 유다가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26절입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들 셀라를 그에게 주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다시는 동침치 아니합니다. 그러면서 다시 자기의 집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다말 네가 옳다는 것입니다. 다말은 그것이 자기의 목숨을 건 행위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자기의 목숨을 걸고서 한 그 자기 남편의 이름을 잇고자 한 것이 유다보다 옳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말의 옳음을 조금 더 살펴봅니다. 무엇이 옳다는 것입니까?-이근호 목사의 ‘성경의 중심사상’에서 인용.

 

 

 

 

‘아들의 죽음의 이유를 며느리에게 돌려 셋째 아들을 보호하고 유다 때문에 다말은 창녀로 변장하였습니다. 여기서 유다는 하나님의 희생을 보았습니다. 자기 가문의 후손을 잇게 하기 위한 헌신적인 결단을 한 다말의 고통 속에서 야곱에게 언약하신 그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된 것입니다. 유다 자신의 과오와 수치를 다말이 담당하게 하심으로 유다는 자기 조상의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게 된 것으로 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요셉의 생애를 보아야 합니다. 요셉은 자기의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고 팔려 가지만 그러나 그 희생이 오히려 형들을 살려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38장의 요셉의 이야기 중에 갑자기 유다와 다말의 사건이 나온 것이 우연이 아닌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37장과 38장이 시간적으로 보자면 뒷부분이 무리가 있기도 하지만 38장 1절에 그 후에, 라고 하니 요셉을 팔아먹고 난후로 봅니다. 

창세기 37:25-27절입니다. 유다가 팔자고 합니다. 직접 피를 흘리는 것보다 낫다는 말에 형제들이 동의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팔아먹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과 다말과의 관계를 비교하여 보자는 것입니다. 다말의 옳음을 어떤 방향에서 알게 됩니까? 희생하는 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가심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희생이 자신의 택한 백성을 구하여 내심을 본 것입니다. 이렇게 되고 난 후에 유다의 태도를 봅니다. 세월이 흘러서 요셉은 총리가 되었습니다.

 

 

 

 

가나안에도 기근이 들어서 애굽에 곡식을 사러 갔다가 요셉이 알아보고서 일부러 그들을 정탐꾼이라 하여 한명을 볼모로 잡아 두고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사간 곡식이 다 떨어지고 베냐민을 야곱이 보내지 않으려고 할 때에 르우벤은 베냐민을 못 데리고 오면 자기의 아들들을 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유다는 자기의 목숨을 담보로 합니다.

창세기 43:8-9절입니다. “봉독” 그리고 나중에 요셉 앞에서 베냐민을 대신하여 자신이 종이 되겠다고 합니다. 이런 모습이 유다의 지파에서 희생자가 왕으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이제 다말이 화형이 될 각오를 하고서 자기의 남편의 대를 이은 것은 바로 유다의 가문을 잇는 것이 됩니다. 드디어 다말이 자녀를 낳게 되는데 쌍둥이입니다. 그 이름이 베레스와 세라입니다. 이 베레스가 어디에서 등장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룻기서 4:12절입니다. “봉독” 룻과 보아스의 결혼을 축복하는데 어떻게 축복합니까?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기를 원하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 이름이 먼저 나옵니까? 유다가 아니라 다말입니다.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말이 유다에게서 아이를 낳은 것을 수치로 봅니까? 자랑스럽게 봅니까? 자랑스럽게 봅니다. 그러니 축복을 다말의 아들 베레스의 집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다말의 희생으로 유다의 계보가 이어지고 그 베레스를 통한 족보를 룻기서 4:18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말도 대를 이어주는 그런 자녀 생산이었습니다. 룻과 보아스 사이도 대를 이어주는 그런 결혼입니다. 그 기업을 이어주는 사건입니다. 결국 베레스를 통하여 다윗이 나오는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족보에서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를 낳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유언대로 이 유언은 사사로운 개인적인 유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유다지파에서 왕이 나오는 것입니다.

 

 

 

 

창세기 49:10절입니다. “봉독” 홀과 치리자 왕입니다. 이것을 실로가 오시기까지입니다. 실로란 화평을 가져오는 자라는 뜻으로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족보에 편입이 되어 양자로 들어가는 것은 양자의 영을 받았기에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을 위하여 누가 희생을 하신 것입니까? 주님의 희생에 근거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1-5절입니다. “봉독” 전에도 한번 보았지만 여인들이 나옵니다. 첫째가 다말, 두 번째가 라합, 세 번째가 룻입니다. 이 세 여인의 특징이 모두 이방인으로서 기구한 운명속의 여인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여인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족보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생이 파멸이 아니라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다말의 희생이 요셉의 희생에 더빙 되면서 하나님의 희생을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인한 복을 받고 삽니다. 이 복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라면 나의 희생으로 복을 누리는 사람이 많아져야 할 것입니다. 다말처럼 요셉처럼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입니다. 주님의 희생에 참여시키심으로 우리로 인하여 덕을 보는 자들이 많아져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희생은 세상의 방식을 좇지 않고 살기에 세상에서 쫓겨나는 경험을 하는 자리에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처럼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희생자를 통하여 살려내시는 하나님. 궁극적으로 자신의 희생을 통하여 살리심.

 

 

 

 

창세기 39:1-23  요셉의 형통  2000. 9. 10.

 

 


몇 주 전에 에서의 형통을 살펴보았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기에는 야곱은 고생하고 에서는 형통하여 보였지만 그러한 세상의 관점에서 형통과 고난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이 어느 쪽으로 역사하고 있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의 고난이냐 형통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누구에게 이루어지는가를 눈여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요셉의 결론을 알고 있으니 고진감래라는 식으로 요셉의 상황을 보시면 성경이 정작 말하고자 하는 바를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셉의 형통이 무엇인지를 보고자 합니다. 미리 결론을 말씀드리자면 하나님이 함께하심이 형통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려움을 느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형통하다고 하는데 왜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서 노예가 되어 남의 집에 종살이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총리가 되었잖아 라고 보지 마시고 지금 요셉의 입장이 되어 보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셉의 입장이 되어서 아직 애굽의 총리가 될지를 모르는 상황에서 요셉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볼 때 이미 자신의 결론을 가지고 보고 있기에 성경의 풍성함을 맛보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성경의 한 인물을 두고서도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인도하셨으며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 계시는가? 이런 면을 묵상하면서 보기 보다는 그래 그 결론이 무어냐 그렇게 살면 성공하느냐? 성공의 비결이 무어야 결론만 빨리 말하라는 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세상에서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요즈음에 등장하는 책들이 내용이 가벼워야 하고 한눈에 볼 수 있어야 하는 것들이 잘 팔리는 것입니다. 한눈에 보는 이라는 제목의 책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경에서 성공지침을 뽑아내겠다는 것입니다. 마치 ‘최고 경영자 예수’라는 책이 잘 팔리는 것과 같습니다.-천천히 성경을 봅시다.

 

 

 

 

1-6절을 봅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간 집이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입니다. 이 집에 노예로 팔려간 나이가 17세 정도로 봅니다. 37:2절에서 그 형제와 함께 양을 칠 때의 나이가 17세라, 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꿈을 꾸었고 그 꿈을 이야기하고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예로 팔려간 나이가 17세나 조금 더 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이 요셉을 노예로 사서 그 집안에서 일을 시키니 꾀를 부리거나 하지 않고 성실하게 하는 모습이 눈에 뜨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이 들어오고서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집주인이 요셉에게 모든 재산의 권리를 다 맡깁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약 10년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아침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형통하여 하루아침에 주인의 인정을 받았다, 이렇게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형통을 보시려면 아예 노예로 팔리지 않는 것이 훨씬 형통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형통이 2절에서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며 이것을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보디발이 보아도 알 수 있을 만큼 요셉을 범사에 형통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형통을 통하여 요셉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습니다. 물론 그 집안을 다 다스리는 위치에 있다고 하여도 노예의 신분인 것입니다.

 

 

 

 

그래도 이만한 지위에 이르게 되었는데 또 다른 유혹이 그에게 닥칩니다.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미남이라는 것입니다. 나이는 20대 중반으로 본다면 얼마나 젊음의 열기가 왕성할 때 입니까? 이때 주인의 아내가 유혹을 합니다. 은근한 눈짓을 합니다. 요셉이 거절하자 더욱 더 노골적으로 접근을 합니다. 한두 번이 아니라 날마다 요셉에게 동침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요셉의 말을 들어 봅시다.

 

 

 

 

39:7-10절입니다. “봉독” 내가 이 큰 악을 행하여 어찌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이것이 요셉의 자세입니다. 어찌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하면서 그 여주인과 함께 있지도 아니한 것입니다. 피한 것이지요. 그러자 여주인이 안 되니 어떻게 합니까? 다를 종들을 다 집안에서 내보냅니다. 바깥일을 보게 하든지 하여 아무도 없게 해 놓고는 요셉이 일을 보러 들어가자 이제는 육탄 돌격입니다. 그때 요셉이 겉옷을 붙잡혔겠지요. 그러자 그 옷을 벗어두고 도망을 갑니다. 그러자 이 여주인이 이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아예 모함을 합니다.

여기서 요셉이 잘못한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는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형통케 하신다고 하시면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여기서 형통이란 무엇입니까? 저는 이렇게 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형통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할 수 없다, 라고 한 것이 형통입니다. 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형통이란 반드시 악의 세상에서 모함을 받고 핍박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요셉은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에 넣어버립니다. 그런데 감옥에 넣을 이유도 없습니다. 감히 노예가 여주인을 농락했다는 것은 즉결처분하여도 누가 뭐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보디발이 요셉을 바로 죽이지 않고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은 요셉의 신실함을 보았고 또한 아내에 대한 의심을 조금은 하지 않았을까 그렇게도 생각이 됩니다. 어떻든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하다가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혹시 우리는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려고 하다가 고난을 당한 경험이 없습니까? 말씀대로 살려고 하다가 당하는 고난이 없었습니까? 지금은 핍박을 받는 시대가 아니라서 그런 고난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결코 아닙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십시오. 당장 고난이 산더미처럼 밀려 올 것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없는 것은 아직 믿음이 연약하여 감당치 못하기에 오지 않든가 아니면 아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려고 작정을 하고 살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혹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고난을 당하였을 때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지 않습니까? 지금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지 않으려다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두고서 성경은 무어라고 하고 있습니까?

 

 

 

 

21-23절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전옥에게 은혜를 입게 하시고 감옥에서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니 그의 범사에 형통하였더라. 성경은 이것을 보고서 형통하였더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형통입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이란 노예로 팔리지도 않고 감옥에도 안가야지 노예로서 형통한들 감옥에서 형통한들 그것이 무슨 형통으로 보이는 것입니까? 요셉의 입장이 되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성경을 요셉이 기록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기로는 모세의 기록으로 압니다. 그런데 요셉의 이런 감옥의 일을 모세가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서 기록할 때 형통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요셉의 형통이란 개인의 성공과 출세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형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뜻이 무엇입니까? 형제들의 주가 되는 길인데 그 주가 되는 길은 섬기는 주, 희생당하는 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노예로 팔려간 집안이지만 요셉까닭에 그 집이 잘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형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래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노예라도 감옥에 가더라도 잘된 것 아닌가 합니다만 그러나 요셉의 고난을 시편에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시편 105:16-19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이 한사람을 먼저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모습입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먼저 보내시는 사람이라면 좀더 우아하게 멋있게 보내셔서 구원하셔도 되실 텐데 왜 꼭 그런 고난 받는 모습으로 보내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종으로 팔리고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제대로 보여야 성경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될 때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는가를 알게 됩니다.

 

 

 

 

요셉은 착고에 상하고 발을 쇠고리로 묶어서 도망 못 가게 하는 것입니다. 노예들을 쇠사슬에 묶어서 끌고 가서 팔지 않습니까? 그리고 감옥에서도 착고와 쇠사슬에 묶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간수장의 인정을 받아서 제반 사무를 보게 됩니다만 그러나 요셉의 고난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난을 말하면서 성경은 형통하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형통이란 무엇입니까?

 

 

 

 

시편 105편 19절입니다.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요셉의 형통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저에게 응하는 것이 형통입니다. 그 말씀이 요셉을 단련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형제들의 주가 되었을 때 그 말씀의 단련의 결과로 인하여 어떻게 합니까? 형님들이 악하게 나를 파셨으나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허락하신 것은 나를 통하여 형들을 살리기 위함이라고 그 고난의 의미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요셉의 고난을 보면서 그 고난이 하나님의 형통이라고 보아야 예수님의 고난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한 고난이 아닙니다. 요셉이 자신의 잘못으로 노예로 팔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인하여 팔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고난이란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인한 대속적 고난인 것입니다. 이것을 요셉을 통하여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도에게도 이러한 고난이 얼마든지 오게 됩니다. 무엇을 하기 위한 고난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고난이 닥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야 하는데 자꾸만 세상을 사랑할 때 고난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보다 귀한 것들이 있다면 그런 것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과실을 잘 맺게 하기 위한 가지치기입니다.

 

 

 

 

그런데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고난이 닥칠 수 있습니다. 나의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실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유 없이 고난이 닥치더라도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난을 통하여서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에 우리 안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형통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만사형통이라는 말을 그저 내 하는 일이 어려움 없이 술술 잘 풀려 나가는 것을 형통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만사형통이란 하나님의 뜻이 내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 형통인 것입니다. 세상의 실패와 성공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관점이 아닙니다. 주님의 뜻이 내안에 이루어지는 것이 형통인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493장에서 ‘나의 갈길 다가도록 예수 인도하시니 내 주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그런데 이 찬송을 작사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크로스비’라는 사람인데 어려서 장님이 된 사람입니다. 장님이 되었는데 무슨 만사가 형통하겠습니까? 만사가 불통하지요. 무언가 보여야지 형통이든 불통이든 알 텐데 장님이 되었다고 한번 가정을 해보십시오. 아니면 예배마치고 눈을 감든지 반창고를 눈에 붙이든지 하여 집에까지 한번 가 보시기 바랍니다. 형통은 커녕 온갖 것들이 다 부딪힐 것입니다. 얼마나 원망하고 불평하겠습니까? 세상에서 성공출세한 사람이 만사형통하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장님이 만사형통하리라고 노래하였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주의 긍휼을 안 것입니다. 족한 은혜를 안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이 곤하고 갈할 때 반석에서 샘물이 나게 하시는 주님을 안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영 부를 나의 찬송이 주님이 인도하셨다는 것을 인하여 만사형통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에 불평과 원망이 있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크로스비가 믿는 하나님이 다릅니까? 아마 다른 것 같습니다. 장님이 되어도 주의 은혜가 족한 줄 알고 주님의 긍휼에 감사하면서 만사 형통하다고 감사하면서 가는데 우리는 두 눈 뜨고 원망하고 가니 이 어찌 같은 주를 믿는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외국에는 장애인 시설이 잘되어 있어서 그렇습니까? 우리나라에 안요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30대 초반에 실명이 되었는데 안과에 가 보아도 고칠 수가 없자 아내도 떠나 버렸습니다. ‘낮은데로 임하소서’ 하는 소설의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장님이 되고서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집회 신청이 와서 그곳에서 말씀을 증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미국의 유명한 안과의사가 와서 은혜를 받았는지 안목사를 데리고 가서 정밀검사를 해보고 나서 지금도 수술만 하면 볼 수 있다고 하였답니다. 수술하여 주겠다고 하였답니다. 그때 이 목사님이 내가 눈을 뜨고 있을 때 주님을 만나지 못하였는데 장님이 되고서 주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눈을 다시 뜰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눈을 뜰 수가 있는데도 그 은혜가 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을 뜨고 있습니까? 사지가 멀쩡합니까? 그렇다면 그들보다 우리는 훨씬 더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장님이 안 되고도 주님의 은혜를 알았다면 얼마나 더 큰 감사를 하여야 합니까? 제발 우리 앞에 닥치는 세상의 사소한 일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당하는 어떠한 고난과 환난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에 그러나 모든 것들 가운데서도 우리는 만사 형통하다고 외치는 자들입니다.

 

 

 

 

끝으로 로마서 8:18-30절입니다. “봉독” 지금 당하는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만사형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선이란 무엇입니까? 아들의 형상을 본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의 형통이며 우리의 형통입니다.

 

 

 

 

창세기 40:1-41:57  하나님의 섭리  2000. 9. 17.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고자 애를 썼는데 감옥에 갇혀 버렸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서 변호할 기회도 없었습니다. 노예에게 무슨 변명의 기회나 주어졌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기회가 왔습니다. 요셉이 갇혀 있는 감옥에 바로왕의 고위 관리가 잡혀 들어 온 것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과 떡 맡은 관원장입니다. 이들이 무슨 고위직이냐 하시겠지만 술과 떡이란 왕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가장 신뢰할만한 사람을 임명하는 자리이지요?

 

 

 

 

느헤미야가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이었는데 왕에게 청구하여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는 허락을 받습니다. 이 정도로 술 맡은 관원이란 높은 지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감옥에 들어온 것은 요나단의 탈굼에 의하면 왕을 독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쳐서 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요셉이 수종을 듭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보니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것입니다. 꿈을 꾸었는데 그 뜻을 알 수가 없어서 근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자 요셉이 그들에게 무어라고 합니까?

 

 

 

 

8절입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으니 청컨대, 나에게 고하소서라고 합니다. 자신의 이름을 내지 않고 하나님께서 해석을 하실 거라고 하면서 그 꿈의 해석을 해줍니다.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은 포도나무의 세 가지에서 포도를 따서 그 즙을 바로에게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해석이 3일안에 당신의 직위가 복직되리라고 합니다. 그러자 떡 맡은 관원장도 그 결론이 좋음을 보고서 자기도 흰떡 세 광주리가 있는데 그 윗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각종 구운 식물이 있는데 새들이 그것을 먹었다는 꿈입니다.

 

 

 

 

그러자 요셉이 3일안에 당신의 목이 잘리고 그 시체가 나무에 달리고 새들이 당신의 살을 뜯어 먹으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꿈의 해석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해석을 하고서 그대로 되리라고 한 것은 요셉의 능력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요셉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요셉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죄를 안 짓고 살았고 정말 믿음으로 살았기에 잘 견뎠으리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얼마나 감옥에서 억울하게 생각하였을까 하는 면을 등한히 여길 때가 많습니다. 요셉은 우리와 달라, 사무엘은 우리와 달라, 다윗은 우리와 달라, 아브라함은 우리와 달라, 그런 생각을 먼저 하고서 성경을 보게 되니 요셉을 사람들이 참 좋아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고결하게 살수가 있을까 하면서 요셉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시면 요셉이 자신이 당한 일이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누구에게 하는 것입니까?

 

 

 

 

40:14-15절입니다. “봉독”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합니다.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알려서 여기에서 나를 건져 달라고 합니다. 자신은 히브리에서 끌려온 자인데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술 맡은 관원장에게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구하여 달라고 합니다. 요셉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을까요? 하나님이 응답을 안 하시는 것입니다. 그냥 침묵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셉인들 기다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꿈은 해몽을 해 주면서도 자신의 꿈은 어떻게 될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난주에 시편 105편에서 본 것처럼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저를 단련하였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연단의 기간인 것입니다. 그 때가 차기까지는 감옥에 갇히고 착고에 상하고 쇠사슬에 묶이는 것입니다. 노예에서 감옥까지 무려 13년입니다.

 

 

 

 

이러한 기간이 믿음의 사람들에게 다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부르시고 약속을 주셨지만 75세에 부름을 받아 이삭을 얻기까지 25년이 걸렸고, 이삭은 네 후손이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는 약속을 받고서도 결혼 20년 만에 자녀를 얻었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의 세월을 보냅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40년을 양치기로 보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훈련이라는 학교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하심을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펼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러한 연단의 기간동안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하는가를 보게 됩니다. 인간의 온갖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하여 봅니다. 그러나 결국은 지쳐서 모든 것을 포기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될 때 하나님이 그들을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연단의 과정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과정입니다만 그런 기간을 꼭 거치게 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이루어 내시는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의 꿈 해석대로 되었고 복직을 하였는데도 23절에 보니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을 수 있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오래된 사건도 아닌데 꿈을 꾸고 3일 만에 복직이 되었는데 3일 만에 잊어버린 것입니다. 요셉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술 맡은 관원장이 복직을 하고나서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연락만 오면 풀려 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고 기다렸지만 술 맡은 관원장이 잊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 2년 동안 무엇을 하였을까요? 대책 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잊어 버렸지만 요셉에게 꿈으로 계시하신 그 하나님은 요셉을 잊지 않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온 세상을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요셉을 중심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어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물론 요셉은 감옥에서 고통 중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다시 2년이 지납니다.

 

 

 

 

41:1절입니다. 만 2년 후에 바로가 꿈을 꿉니다.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하고서 만 2년이나 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섭리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고서 복직 후에 요셉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면 그래 그 자를 풀어 주어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은 풀려 나왔을 것이라는 겁니다. 이 때는 바로가 아직 꿈을 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성경밖의 기록들이지만 이집트의 관리로 나아가는 나이가 30세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요셉이 총리가 될 때에 애굽의 왕조가 셈 계통의 왕이었다고 합니다. 이집트의 왕조는 주로 함 계통이었는데 요셉 때에 셈 계통의 왕이 등극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란 자신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렇게 주도면밀하게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로의 꿈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살찌고 좋은 일곱 암소를 파리하고 흉악한 일곱 암소가 잡아먹어 버리는 것과 충실한 일곱 이삭을 세약하고 마른 일곱 이삭이 삼켜 버린 것입니다. 이 꿈을 바로가 꾸고서 그 해석을 애굽의 술객과 박사들에게 고하였으나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때 술 맡은 관원장이 기억을 합니다. 3일 만에 잊어먹은 것을 2년이 지나서 기억을 하고서 요셉을 추천하는 것입니다. 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급하게 요셉을 준비시켜 왕 앞에 데리고 갑니다. 목욕하고 옷을 입히고 수염을 깎습니다. 유대인들은 수염을 깍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요셉을 형들이 알아보지 못한 것은 수염을 깎고 있었기에 더 알아보지 못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수염이 깎이는 것은 수치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왕 앞에 나왔습니다.

 

 

 

 

41:15-16절입니다. “봉독” 바로왕의 질문과 요셉의 대답을 볼 수 있습니다. 너 꿈 해석 잘한다면서 그러자 요셉의 대답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요셉됨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보게 됩니다. 17살 때 하나님이 계시를 꿈으로 받고서는 그 꿈을 마구 자랑하였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있는 지금은 꿈의 해석이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아마 자기의 꿈이 지금까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에 겸손하여 졌는가,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기까지 감옥에서 연단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앞에서 꿈의 해석이 하나님께 있음을 말하고서 해석을 합니다. 해석뿐만 아니라 처방까지 내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해석을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돌립니다.

 

 

 

 

41:25절. 하나님이 그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임이라. 41:32절. 두 번 겹쳐 꿈을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속히 이루시기로 정하셨다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자 바로가 요셉을 총리로 임명을 합니다. 그 임명의 이유는 하나님의 신이 요셉을 감동하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애굽의 온 땅을 치리하는 총리가 되었습니다. 총리가 되고 애굽의 제사장의 딸과 결혼을 하고서 아들을 낳습니다. 그리고서 그 이름을 무어라고 합니까?

 

 

 

 

51절입니다. 자신의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이 아직도 무슨 뜻인지 정확히 파악을 못하고 있다고 보아집니다. 그 총리가 되고서 아들을 낳고 이름을 ‘므낫세’라고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로 나의 고난과 아비의 온 집안의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는 이름을 짓는 것입니다. 자신의 고난과 아비의 집에서 자신이 팔린 것을 잊어버리게 하신 것으로 애굽의 총리직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풍년과 흉년이 일어나게 하시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예정된 프로그램입니다. 요셉 개인의 고난과 형통의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로서 이렇게 하심으로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애굽만이 아니라 온 땅에 기근이 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7년 풍년동안 저축을 하지 않은 나라들은 당장 양식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약속을 하나님이 이루어 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란 요셉의 노예로의 팔림과 감옥행 총리가 됨. 이런 모든 것을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크고 멀리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되면 우리 앞에 닥친 자잘한 것들에 대하여 어떤 자세가 됩니까. 금요일 저녁에 성경 공부 한 것처럼 종말론적인 자세와 영원의 시각으로 사건들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낮추시면 낮추어지라는 것입니다. 정당하고 옳다고 고함을 지르지 마시고 감옥에 있으라면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술 맡은 관원장에게 호소하여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대가 주의 손에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시적으로 보게 되면 하나님의 일하심이 보이는 것입니다. 물론 세미하게 역사하시고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알지 못하고서는 늘 자신의 주변의 상황에만 빠져서 허덕이는 것입니다. 나는 왜 일이 이렇게 풀리지 않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까지 요셉을 단련하듯이 우리를 단련시키는 것입니다. 요셉 자신의 꿈이 자신의 개인의 성공이나 출세의 차원이 아니라 형제를 살리는 희생자로서의 부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지 형제들의 주만 되는 것이 아니라 온 세계의 주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자들입니까? 우리도 하나님의 계시를 다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않고서는 누구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계시는 이미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즈음에도 꿈 이야기를 자주 하는 사람이 있는데 요즈음 우리가 꾸는 꿈이 계시가 아니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꿈이란 무엇입니까? 자신이 평소에 늘 생각하는 것들이 꿈에 꾸어 지는 것이고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들로 스트레스 받는데 꿈에서 대리 만족을 하기도 함으로 정신 건강을 지킨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요즈음의 꿈을 지나치게 의존하여 해석하려 하지 마시고 우리는 이미 주어진 계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꿈이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의 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꿈에 매달려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꿈들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 우리의 꿈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섭리를 보면서 살게 됩니다. 주의 말씀을 보고 묵상하면서 주님의 마음을 알고 주님의 섭리에 인도함을 받아 사는 것이 복 있는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지금 고난 중에 계십니까? 그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로 인도하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비록 노예 같고 감옥 같을 지라도 하나님이 계시를 주셔서 자신의 자녀를 삼은 자를 결코 잊지 않고 계십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의 억울함을 잊어버린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기대하고 바라던 사람이 전혀 반응이 없을 때 그것으로 인하여 원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저것 다 놓게 하셔서 지푸라기라도 잡을 것이 없게 하시고서 주님을 붙들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섭리의 손길을 믿고서 마음 푹 놓고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때는 우리의 손에 있지 않습니다.

전도서 3:1-11절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시종을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님의 섭리와 인도를 받으며 사는 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창세기 42:1-17  죄를 깨닫게 함  2000. 9. 27.

 

 


요셉의 생애를 간단히 보자면 계시를 받고, 그 계시를 인한 고난, 그리고 그 계시의 성취. 이런 차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이 형제들의 주가 되는 꿈을 이루시는 방법이 고난 없이 주어지면 될 텐데 고난을 통하여 주어진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니 이러한 요셉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볼 때에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대속적 고난인 것입니다.

형제들의 죄악을 담당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고난을 통과한 후에 주가 되는데 이때 형들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요셉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것이 이미 주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온 세상이 누구를 중심으로 움직이는가를 보면 요셉이 노예로 있을 때도 그 집안에 주의 역할을 하고 감옥에서도 주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제 눈에 드러나게 주가 되어 있을 때, 요셉의 형들 열명이 양식을 구하려 왔는데 엎드려 절하며 양식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요셉이 당장 알아봅니다. 그러면 당장 알아보고서 형님들 바로 제가 요셉입니다 하든지 아니면 당신들이 나를 팔았지 맛 좀 보아라, 하는 식으로 해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지금 형들을 알아보고서도 모른 체 하면서 이들을 여러 가지로 시험을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드러내는 그 이유를 오늘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함을 계속하여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예수님을 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임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됩니까?

세례문답서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33문, 우리가 어떻게 구속에 참여하게 됩니까? 성령님의 내적 부르심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34문, 성령님은 먼저 무엇을 깨닫게 합니까? 우리의 죄와 비참함을 깨닫게 합니다. 35문, 누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까? 성령께서 하십니다. 36문, 성령께서 우리를 중생시키는 방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37문, 진정한 회개는 무엇입니까? 성령님의 역사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얼마나 잘 정리되어 있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기초적인 내용이 우리 안에 얼마나 적용이 되고 있는 가를 물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말씀으로 세례 문답공부를 하였다면 무언가 지금의 상황은 아닐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주에 어느 집사님이 신학교에서 어떻게 가르칩니까? 하고 묻길래 신학교에서는 그런대로 바르게 가르칩니다. 그러니 배운 대로만 하여도 반칙을 하지 않을 텐데 최소한 이러한 세례 문답을 할 때의 정도라도 제대로 지킨다면 오늘 날 전도라든가 선교라든가 하는 것이 이렇게 혼탁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제대로 예수님을 믿게 되면 무엇이 나타난다고 하였습니까? 자신의 죄와 비참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은혜가 무엇인지를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만나면서 어떻게 자신들의 죄를 알아 가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아 가는 것도 얼마나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아는가가 먼저입니다. 요셉은 이미 형들을 알아보지만 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죄와 비참함을 철저하게 알도록 일부러 알리지 않고 감옥에 가두기도 하고 볼모로 잡아 두기도 하는 것입니다.

 

 

 

 

42:6-9절입니다. “봉독” 요셉이 알아보고서 자기의 꿈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 꿈이 무엇인지를 이제 알게 된 것입니다. 형제들의 주가 되는 것은 자신의 출세를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그 고난을 통하여 형제들을 살리기 위한 주가 됨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당장 그 형제들에게 보시오, 내가 그 요셉이요, 나의 꿈대로 되지 않았소, 하여도 될 텐데 그렇지 아니하는 것은 그 하나님의 계시에 함께 참여시키기 위하여 자신들을 죄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은혜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요셉이 모른 체 하고 정탐꾼이라 하고서 그들을 엄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니라고 자기들의 가족을 이야기 하여도 막무가내로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17절입니다. 3일간 감옥에서 이들이 무엇을 하였을까요? 그 내용이 42:21-22절입니다. “봉독”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 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더니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야 그때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그러자 르우벤이 보아라, 내가 죽이지 말자고 하여도 그렇게 안하더니 우리가 그 피의 값을 내게 되었도다, 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들을 죽이고 살리는 것이 요셉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다 죽여도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시므온만 인질로 잡아 두고 다른 형제들을 보내어 동생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가는 중간에 짐승에게 먹이를 주려고 자루를 풀다가 돈이 그대로 들어 있는 것을 보고 두려워합니다.

 

 

 

 

42:28절입니다. “봉독” 돈이 생겨서 좋은 것이 아니라 두려움입니다. 이것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난 이후의 모습입니다. 전에는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동생을 은 20에 팔아서 나누어 가졌든지, 형제들의 유흥비로 사용하였든지 그들은 자기 동생의 생명의 값을 받아 챙긴 자들입니다. 그러면 이런 것을 횡재로 받아 들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돈을 지불하였는데 영수증도 받았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이 갑자기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42:35-36절입니다. “봉독” 역시 두려움입니다. 야곱조차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가지고온 양식은 다 떨어지고 아직 흉년이 끝나려면 5년이나 더 남았습니다. 다 굶어 죽든지 베냐민을 데리고 가든지 해야 하는 지경입니다. 어쩔 수 없이 베냐민을 딸려 보냅니다. 야곱의 포기입니다. 잃으면 잃으리라. 그리하여 다시 요셉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요셉은 잔치를 준비하고 이들을 받아들이는데 이들은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43:18절입니다. “봉독” 우리를 억류하고 잡아서 노예로 삼으려는가 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요셉은 한 번 더 시험을 합니다. 베냐민의 곡식자루에 요셉의 은잔을 넣고서 그들을 추적하여 다시 잡아들입니다. 그러자 그 형제들이 어떻게 나옵니까? 서로 핑계하거나 베냐민만 잡혀 있으라고 하지 않고 모두가 종이 되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들이 어떤 처분을 받아도 할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엄격하게 따지자면 요셉이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요셉의 형들이 어떤 자세가 됩니까?

 

 

 

 

44:16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이 종들의 죄를 적발하셨으니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주의 종이 되겠나이다, 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죄를 적발하셨으니 우리가 무어라 변명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종이 되어도 할말이 없습니다. 이 자세가 나오기까지 요셉이 모른 체 하고 몰아세운 것입니다. 그러자 요셉이 베냐민만 종이 되고 나머지는 가라고 합니다. 그러자 유다가 자신이 대신 종이 되겠다고 합니다. 자기 늙은 아버지와 약속을 하였기에 그렇게 해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여기에 이르자 요셉이 통곡을 하면서 자기를 알립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만나면서부터 여기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끊임없는 두려움과 자기들의 죄와 비참한 신세를 보게 된 것입니다. 이러고 나서 요셉이 자신을 드러내자 이들이 요셉에 대한 자세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우리는 너를 죽였는데 너는 우리를 살려 내는구나. 이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제일 먼저 발견되어야 하는 것이 자신의 죄와 비참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물론 성령께서 말씀을 통하여 조명을 하여주셔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작업이 없이 우리가 그저 예수를 내가 믿어 주었기에 예수는 나에게 구원도 주고 세상의 복도 주어야 된다고 생각하면 성경도 하나님도 모르고 오해한 것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왜 예수님이 죽으셨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것은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제대로 알게 될 때 주님께 부탁하는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주여 죽어도 마땅한 죄인입니다. 이렇게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도식을 출애굽을 통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고서 바로 가나안에 간 것이 아니라 광야를 통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아 가는데도 어디로 갑니까? 물이 없고 양식이 없는 곳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당연히 불평과 원망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 놓고서는 너희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너희의 마음이 완악한지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가나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된 것이 무엇으로 들어가게 된 것입니까? 자기들의 능력과 실력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불신앙이 광야에서 다 노출되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아는 것입니다. 아무도 들어 갈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광야에서 죽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한데도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은 이것이 너희의 실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8:2절입니다. “봉독” 이들을 시험하여 보니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광야 40년은 이들이 얼마나 죄악이 가득한지를 드러내는 기간인 것입니다. 그리고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신명기 8:11-17절을 봅니다. “봉독” 너희 실력과 너희 능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셉 자신이 팔림과 고난에 그 형제들을 참여시킴으로 자신들의 죄와 비참함을 알게 하시고서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받은 형제들이 요셉에 대하여 어떤 마음자세일까요? 늘 자기들의 죄에 대하여 죄스럽고 한편으로는 그 용서에 대하여 감사하고 그렇지 않겠습니까?

 

 

 

 

사도들의 설교를 봅시다. 무엇을 전하였습니까?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도들의 설교의 핵심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분을 너희가 죽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두 가지 반응이 일어납니다. 스데반의 경우는 이를 갈면서 돌로 쳐 죽이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전하는 자를 돌로 쳐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우리가 어찌할꼬, 합니다. 자신들의 죄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럴 때 사도들이 무어라고 합니까? 주 예수를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경우를 봅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이 의로운 자였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고서는 자신이 눈이 멀어 버렸습니다. 아나니아 선지자가 기도함으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주님입니까? 자신이 흠이 없노라고 큰 소리 치던 사람인데 주님을 만나고 보니 바로 자신이 주님을 죽이고 핍박한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임하심으로 알게 되는 자신의 죄와 비참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나쁜 짓만 죄로 생각하면 윤리 도덕적인 죄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이 주님을 만나는 장면을 보면 무엇이 죄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주님을 만나고 나서 그의 고백은 늘 이러합니다. 나는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외에는 다른 할말이 없습니다. 이 자랑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제대로 알아가는 것이 바르게 믿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요셉을 만난 형들이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서 회개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가 주님을 만나게 되면 될 수록 자신의 죄로 인하여 죽임 당하신 주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죽였는데 오히려 그는 우리를 살려 주셨습니다. 살려만 주시고 이제는 너 알아서 살아라, 하시는 것이 아니라 무어라고 합니까?

 

 

 

 

창세기 45:3-11절입니다. 요셉이 자신을 밝힙니다. 형들이 놀라서 능히 대답을 못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이러한 자세가 당연한 자세입니다. 놀라서 능히 대답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그를 찌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요셉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나를 이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당신을 살리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 내려오소서. 내가 봉양하겠나이다.
 

 

 


오늘 우리 앞에 서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너희가 나를 죽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희를 살려내노라 그리고 영원히 함께 살기를 원하노라 라는 이 말씀 앞에서 정말 무어라 말하여야 하겠습니까? 자신의 죄와 비참함을 제대로 아는 자가 그 은혜도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능히 대답지 못하는 그 놀라운 주님의 용서를 알기 위하여 우리의 죄의 깊이도 함께 알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은혜란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서야 그 용서를 제대로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들이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창세기 44:14-34  유다의 희생  2000. 10. 1.

 

 


요셉이 형들임을 알아보고서도 모른 체 하면서 형들을 테스트합니다. 무엇을 하기 위함입니까? 그들의 죄를 인정하게 되도록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말한바 베냐민을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이 말을 듣고서도 베냐민을 보내지 못하겠다는 야곱의 고집으로 인하여 곡식이 다 떨어진 것입니다. 만약에 베냐민을 데리고 갔더라면 두 번이나 갔다 올 그런 기간입니다. 이제 선택을 하여야 합니다. 베냐민을 살리기 위하여 다 굶어 죽느냐, 아니면 베냐민을 포기하더라도 다른 가족을 살리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야곱이 자신의 가장 사랑하던 아내 라헬의 첫째 아들이 죽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제 하나뿐인 베냐민을 잃는다면 자신이 죽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더욱 심하게 기근이 닥치고 있으니 드디어 야곱이 포기를 합니다. 잃으면 잃으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결정에는 또 다른 요인이 있는데 그것은 유다의 희생이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43:8-9절입니다. “봉독” 제가 저 아이의 몸을 담보하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데리고 오지 못하면 자신이 영원히 죄를 지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르우벤은 무어라고 하였습니까? 창세기 42:36-37절입니다. “봉독” 베냐민을 데리고 오지 못하면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물론 희생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몸으로 담보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근은 계속되고 양식은 떨어지고 이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야곱이 베냐민을 자기의 힘으로는 지킬 수 없음을 알고 포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두 가지를 합니다. 하나는 총리에게 선물을 가져가게 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43:11절입니다. 유다가 대신 담보한다는 말을 듣고서 선물을 보내는데 지금 시므온이 잡혀 있고 또다시 돈도 들어 있으니 용서를 구하는 차원에서 선물을 보냅니다.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유향 조금, 꿀 조금, 향품과 몰약과 비자와 파단행을 가지고 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애굽의 총리에게 얼마나 하찮은 것이겠습니까? 물론 준비한 자는 기근 속에서 가장 귀하고 값비싼 선물을 준비하였다고 하여도 그것이 요셉의 마음을 풀 수가 있겠습니까? 전혀 아닙니다.

 

 

 

 

요셉이 지금 원하는 것은 선물이 아니라 무엇입니까? 회개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형제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는 것입니다. 곡식값을 두 배로 가지고 가고 귀한 선물을 들고 가는 것은 준비하는 자들로는 최선의 것이라고 하여도 요셉이 볼 때는 그런 것은 너무나 하찮고 시시한 것들입니다. 무엇을 원하는 것입니까? 그들의 죄를 알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세도 이런 면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사야 1:10-17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선물이 아니라 회개입니다.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경외하며 주님과 함께 동행 하는 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들고 간 선물이나 돈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선물을 차려놓았는데 그 선물에 요셉이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볼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두 번째로 한 것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43:14절입니다. “봉독” 전능하신 하나님이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 베풀기를 원하노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란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서 주님의 은혜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에만 기대를 걸고 자신의 막내 아들 베냐민도 잃으면 잃으리라고 합니다.

 

 

 

 

43:29절입니다. “봉독” 요셉이 베냐민을 보고서 하는 말이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풀기를 원하노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가 베풀어지기 전에 또다시 시험을 하는 것입니다. 베냐민의 자루에 은잔을 넣어서 모두를 끌고 오게 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다시 붙들려 왔을 때 이들은 이제 모두 죽었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총리의 호의를 그렇게 받고서도 배신을 하였으니 더욱 죽어 마땅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분노 앞에 무엇으로 해결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요셉의 분노 앞에서 형제들이 모두가 종이 되겠다고 합니다. 대단한 변화입니다. 자신들이 함께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요셉이 아니라고 합니다. 죄를 지은 자만 종으로 잡히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가라고 합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장례식장에 가서도 먹을 것 다 먹지 않습니까? 전에 코미디언 김용순인가 죽었을 때 김미화라는 사람이 조사를 하는데 폼 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울면서 언니 언니는 죽었는데 그래도 우리는 살아 있다고 먹을 것이 목으로 넘어가데, 라는 말이 인상 깊게 들렸습니다.

 

 

 

 

죽은 자는 죽은 것이고 산자는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집안에 가족들과 늙은 아버지도 있는데 그러나 이때에 유다가 나서는 것입니다. 이미 자신이 아버지 앞에서 약속을 한 것이지요. 자신의 목숨으로 담보를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요셉에게 유다가 청원을 합니다. 그 내용이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저를 살리시고 나를 대신 종으로 삼아 주십시오.

 

 

 

 

44:33절입니다. “청컨데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보내소서” 이 간청과 대신 종이 되겠다는 탄원 앞에 요셉이 울음을 참지 못하고 자신을 밝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다의 희생을 보게 됩니다. 물론 다른 형제들도 모두다 종이 되겠다고 한 것입니다. 베냐민 혼자 두고서 자기들만 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서 유다의 탄원과 그 내용을 보면 자신이 베냐민을 대신하여 종이 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신 당하는 희생의 정신을 보는 것입니다. 단지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수준이 아닌 대신 고난의 의미를 알 때까지가 회개의 깊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과 죄를 반성하고 뉘우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애매히 고난을 받을 때 견딜 수가 있습니까? 남의 잘못을 대신 짊어지고 견딜 수가 있습니까? 이러한 모습이 유다에게서 나오는 것이 우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당한 그 고난의 여정을 유다가 반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고난당하는 자에게 형제들이 절하는 것이 요셉에게 성취되었듯이 이제는 대신 고난당하려는 유다에게 형제들이 엎드려 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49:8-12절입니다. “봉독” 유다가 형제들의 찬송이 되며 네 아비의 아들들이 절하리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요셉에게 야곱의 아들들이 절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장자의 직분을 르우벤 대신에 하였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유다가 형제들의 주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다의 대신 희생의 모습을 담아내기 위하여 유다지파에서 대신 희생하는 메시야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누가 희생당하는 자의 모습으로 나오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누가 미움을 받는 자로 등장하는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너무나 심한 미움을 받는 자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미움을 받는 자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치고 고난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다지파로 나오는 다윗의 예를 들어 봅시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고서 이스라엘을 위기에서 구하여 내자 누구에게서 미움을 받습니까? 그 당시의 최고의 권세를 가지고 있는 사울에게 미움을 받아서 늘 쫓겨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의 탄원들을 보면 자신의 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쫓겨 다니는 것입니다. 미움을 받는 것입니다. 결국 유다 지파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은 죄인을 위한 대신 받은 고난이었습니다. 그분이 대신 받으신 고난으로 인하여 우리가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대신 고난을 받으시는 모습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서 미움을 받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치 요셉이 형제들의 미움을 받는 것처럼 미워하고 싫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미워하고 싫어하고 멸시 천대하여 죽여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죽으심이 어떤 죽음이라고 합니까? 대신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대신하여 죽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고린도후서 5:14-21절을 봅니다. “봉독”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은 대신하여 죽으심입니다. 누구를 대신한 것입니까? 바로 예수 믿는 자를 위한 대신 죽으심입니다. 그러면 대신 죽으신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도 함께 죽은 것이 됩니다. 이전까지의 삶이 나를 위한 삶이었다면 대신 죽으신 분으로 인하여 죽은 자가 되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하여 대신 죽은 자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예수님을 위하여 하는 것입니다. 

 

 


 
토요일 극동방송에서 간증을 조금 들었습니다. 평소에 간증에 대하여 별로 좋게 여기고 있지 않는데 이분의 간증은 좀 달랐습니다. 중간에 들어서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아마 조선족으로 중국에서 공산당 서기의 아내로 예수를 믿었는가, 봅니다. 이 여인도 예수 믿는 것은 귀신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여 학교 다닐 때 배척 하다가 어떻게 믿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분의 간증의 내용이 자신이 8년을 남편에게서 죽도록 맞아 가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이 분이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과 부활과 재림의 단순한 사실을 믿고 있는데 얼마나 확신에 차 있는지 그 고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깊게 알게 되었는지 절절히 베여 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를 믿는 것은 고난을 받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아주 확신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을 위하여 죽으셨으니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서 부자가 되고 아들이 대학에 합격하기를 바라는 그런 예수믿음이 이상하게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나를 살리기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신 죽으심이란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신 것입니다. 21절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한 자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이 우리의 옛사람의 죽음입니다.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죽으신 분을 위하여 사는 것이고 그분에 의하여 살려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신 죽으신 분 안에 거하는 삶이란 이제 우리도 유다처럼 자신이 베냐민을 대신하여 종이 되겠다는 고백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하지 못한 우리의 이기적인 마음과 우리의 덜 죽은 모습을 안타까워하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분은 이제 우리가 자아에 대하여 죽고 예수님을 위하여 살도록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본분입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어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아 마땅한 우리를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셔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나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은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것이 얼마나 잘 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날마다 우리의 옛사람이 죽었음을 말씀으로 확인을 하셔야 됩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사는 이유는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주님을 위하여 사는 것임을 날마다 묵상하시고 분초마다 기억하시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45:1-28  자신을 알리는 요셉  2000. 10. 8.

 

 


드디어 요셉이 형제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알립니다. 그러면 그동안 왜 자신을 숨긴 것입니까? 전에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요셉 자신이 바르게 의롭게 살았는데도 고난의 길을 걷게 된 그 이유를 이제는 형제들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고난을 통하여 자신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버린 잘못을 알게 되고 또한 대속의 의미까지 알게 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동생 베냐민이 범인으로 지목되었을 때 모든 형제들이 모두 종이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냐민만 종으로 잡혀있어야 한다는 요셉의 말에 유다가 자신의 몸을 담보로 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고서 요셉이 자신을 밝히는 것입니다.

 

 

 

 

요셉이 자신을 밝히는 모습에서 특이한 것은 자기 자랑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이 이렇게 되기까지는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차원임을 알기에 자신은 그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것이지 자신의 착함이나 유혹을 이김의 결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차원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을 하지 않는 것이 요셉이 겸손하여서 안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고난을 통하여 그리고 애굽의 총리가 되는 과정을 통하여 자신에게 꿈을 주시고 그 꿈이 성취되도록 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 앞에서 무엇을 자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한 요셉의 결론적인 말이 오늘 본문입니다.

 

 

 

 

요셉이 자신을 알리니 형들이 놀라서 말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팔아 버린 자가 총리가 되어 있으니 어떻게 무슨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형제들의 두려움을 상상이 되십니까? 그래서 요셉이 자신을 무어라고 합니까? 4절에서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고 합니다. 당신들이 팔아버린 그 요셉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면 이제 형들은 처분만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왕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형제들과 아들들을 죽이는 세상에서 자신을 죽이려한 형들 쯤이야 죽여 버린다고 한들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이 무어라고 합니까? 형들이 얼마나 놀라고 두려워하였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런데 하는 말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서 보낸 것입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냈습니다. 8절입니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로 삼으셨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요셉의 이러한 말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자신을 판 형들을 원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셔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내셨으니까 형들이여 두려워 마소서, 근심하지 마소서,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형들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심에 함께 참여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언약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중요한 두 가지가 후손과 땅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요셉을 먼저 보내신 것이며 땅은 아직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4대가 되지 않았기에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에 들어와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 성경이란 요셉 참 훌륭하다, 그렇게 착하게 살더니, 고생 끝에 낙이라더니, 사람이 자고로 착하게 살아야 복을 받는다, 이렇게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요셉이 자신을 말하면서 자신이 바로의 나라에서 총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의 아비와 주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건방져 보입니까? 자신이 노예로 팔려 와서 꿈 해석하고서 총리가 되었는데 그런데 자신을 바로의 아비로 바로의 주로 말하고 있는 이러한 배짱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요셉이 야곱에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보고서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7:29절을 봅니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이것은 이삭이 야곱을 향한 축복의 내용입니다. 이러한 축복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기 마음대로 축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대신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이삭이 에서가 와서 간청을 하여도 에서에게는 축복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학교의 프로그램에 보니 아버지는 자녀에게 축복권이 있다고 합니다. 어느 아버지 치고 자녀에게 축복하지 않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언약의 차원에서 에서가 그렇게 매달려도 이삭이 축복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이 야곱에게 주어지는데 야곱의 그 언약이 요셉을 통하여 완성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란 야곱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하시는 차원에서 사용되어지는 계시를 드러내는 도구인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성도의 자세가 아닙니까? 바울이 그토록 죽도록 충성하고서 주님 앞에 가서 무어라고 할까요? 아 주님 제가 세상에서 주를 위하여 얼마나 고생하였는지 아십니까? 이런 말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들 보고 야 너희들 다 나보다 서열이 아래야 어디서 함부로 나와 맞먹으려고 그래 그런 식이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의 나 됨이 주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요셉이 자신을 알리면서 자신의 고생담이나 자신의 인내나 자신의 꿈을 해석한 능력을 한마디도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 일을 하셨고 자신을 부르시고 이 일을 이루어 내셨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에게 주어진 그 언약의 내용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지금 애굽에 양식 구하러 온 나라들이 한 두 나라입니까? 그리고 형제들의 주가 된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형제가 에서뿐인데 어떻게 형제들의 주가 되는 것입니까? 이것은 또 노아언약으로 올라가 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9:20-27절입니다. “봉독” 함의 후손이 셈의 후손의 종의 종이 되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함의 후손 중에서 가나안의 아들들이 주로 가나안땅에 살게 됩니다. 그러나 함의 후손들이 애굽에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애굽의 대부분의 왕조가 함의 후손입니다. 그러므로 함의 후손이 살고 있는 땅에 셈의 후손이 와서 무엇이 됩니까? 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종입니까? 바로가 종이고 셈의 후손이 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요셉이 자신이 바로 집안의 주요, 아비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중에 야곱이 바로에게 와서 야곱이 바로를 축복합니다.

 

 

 

 

창세기 47:7-12절입니다. “봉독” 야곱이 바로를 축복한다고 합니다. 겉으로 보면 누가 누구를 축복하여야 합니까? 바로가 야곱을 보고서 해야지요. 자기 땅에 밥 얻어 먹으로 온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야곱이 바로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축복이란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아비멜렉이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의 땅에 셈의 후손이 얻어먹으러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로 들어간 것입니다.

처음에는 요셉이 종의 모습으로 들어 왔지만 그가 주가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가 온 세상의 주로 등극할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 종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주로 알아보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요셉이 증거 하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려고 이렇게 하신 것이랍니다.

 

 

 

 

전에 한번 보았지만 한 번 더 시편 105:17-19절을 봅니다. “봉독”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저를 연단하였도다, 그러므로 형들에게 이러한 말을 하기까지 말씀이 훈련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23절에 보면 함의 땅에서, 라고 합니다. 이제 형들도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이 몇 번이나 사지로 몰아넣으면서 형들에게도 요셉의 받은 그 고난의 의미를 이해하게 하고서는 요셉이 자신을 알리는 것입니다.

 

 

 

 

만약에 양식 구하러 온 자에게 그래 여기 있다 하고 양식이나 주어 버리고 모른 체 하였다면 그것으로 먹고 배부르고 끝난 것입니다. 형제들이 애굽에 온 것은 양식을 구하러 왔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에게는 양식을 구하러 온 다른 나라 사람들이 당하지 않아도 되는 고생을 죽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고난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악해서가 아니라 우리는 양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이 몇 년을 훈련해야 되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을 훈련하였습니다. 그러나 또다시 먹고 사는 문제로 염려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너희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가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훈련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나라가 겪지 않아도 될 고생을 죽도록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 믿는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이 겪지 않아도 될 고생들을 할 수가 있습니다. 토요일에 김현주 집사 심방을 갔습니다. 말씀을 보고서 기도하고 나니 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가 교회 잘 안나가서 이렇게 아픈가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 잘 안나가서 그렇게 아픈 것 같으면 우리가 하루에도 여러 수천 번 벼락을 맞아 죽어도 할말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교회를 잘 안 나와서 그렇게 아프다면 교회 아예 나오지도 않고서 그렇게 일하면서도 아프지도 않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그러나 이런 기회를 통하여 내 인생을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그런 입원을 통하여 자신이 신앙생활 잘못하고 있구나를 알게 된 것이 은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칫 잘못 생각하면 자신의 어려움을 없애기 위하여 열심을 내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자신의 어려움의 문제만 해결되면 되는 그런 열심이란 사실 종교적인 것입니다. 내가 종교적인 공을 많이 들이지 않아서 이런 어려움이 오는가 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에게 양식만 주어서 보내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됨을 알게 하시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당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시켜서 주님의 뜻을 이해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이제는 요셉이 무엇을 합니까? 아직 5년이나 흉년이 남았으니 아버지와 가족이 모두 이리로 오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봉양하겠다는 것입니다. 은혜위에 은혜러라. 이럴 때 쓰는 말 아닙니까? 요셉을 죽인 죄에서 용서를 받을 뿐만 아니라 먹여 살리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용서를 받은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평생 고생을 하고, 병이 들고 가난하여도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하여야 마땅한 것 아닙니까? 팔아 버린 요셉이 주가 되어 있는데 평생 강제 노역을 시키더라고 할말이 없는 것 아닙니까? 오늘 우리가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죽여 버린 것인데 그런데 주님이 우리를 용서 하셨다면 우리가 평생을 죽을 고생을 하더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하여 감사 합니다 하고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조그마한 어려움만 닥치면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잘못하여 이렇게 되었나, 라고 하든지 아니면 남과 비교해 보고서 나는 저사람 보다는 열심히 출석하고 봉사하고 헌금하는데 왜 이렇게 어려움이 오는가, 주님이 원망스럽다 이런 마음이 없습니까?

 

 

 

 

제발 정신 차립시다. 우리가 어떠한 사랑을 받았으며 어떠한 용서를 받았습니까?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단지 먹고 마시는 문제만이 아닙니다. 이미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가장 적절하게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무언가 불만이 있는 것은 자신의 욕심이 커서 그렇지 하나님이 부족하게 주시는 적이 없는 것입니다. 가장 필요한 것을 가장 적절하게 주시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에게 대하는 그 자세가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자세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용서해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데 무어라고 합니까? 먹여 살릴 테니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45:16-24절을 봅니다. “봉독” 물론 바로의 명으로 하지만 그러나 이미 주는 요셉입니다. 그러니 형들을 보내면서 수레와 양식과 옷을 주고서 베냐민에게는 옷 다섯 벌과 은 삼백을 줍니다. 그렇다고 형들이 베냐민을 질투할까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지금 자기들이 받은 용서와 그 은혜가 너무나 큰데 다른 사람과 비교할 틈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심초사 길에서 서로 다투지 말라는 당부까지 합니다. 그런데 야곱이 그 땅에서 나오는 귀한 것을 요셉에게 가지고 가라고 하였는데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이 자기 아버지에게 보내는 것은 수나귀 열 필에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을 선물로 실어 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주께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습니까? 그저 주시는 은혜를 우리가 받을 뿐입니다. 이 은혜에 감사하면서 요셉에 형들에게 자신을 드러낸 것처럼 주님이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드려내심으로 주님을 바르게 알고 그를 섬기며 주님께 감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46:1-7  애굽으로 간 야곱  2000. 10. 22.

 

 


요셉이 자신을 알리고 자신의 가족들을 애굽으로 내려오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모시고 올 수 있도록 수레를 보냅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식을 들은 야곱이 기절을 할 정도입니다. 45:26절입니다. ‘기색하더니’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보낸 수레를 보고서는 기운이 소생하여 내가 죽기 전에 가서 보리라고 합니다. 야곱은 요셉을 어떤 자로 알고 있었습니까? 죽은 자로 알고 있었지요? 형들이 요셉의 옷에 짐승의 피를 묻혀 왔을 때 죽은 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브엘세바에 이릅니다. 브엘세바는 가나안의 끝 지역입니다.

 

 

 

 

이곳을 지나면 사막이 시작되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이 됩니다. 그리고 이 브엘세바는 이삭이 주로 살았던 지역입니다. 야곱이 이곳에 이르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립니다. 희생을 드리면서 그의 아비 이삭의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밤에 하나님이 이상 중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십니다. ‘야곱아 야곱아’ 하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대답하자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삭에게 언약하신 그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무어라고 하십니까?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고 하십니다. 야곱이 형을 피하여 외삼촌집으로 갈 때에 역시 밤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서 무어라고 하신 것입니까?

 

 

 

 

창세기 28:10-15절을 봅니다. “봉독” 브엘세바에서 하란으로 도망을 가다가 누워 잘 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무어라고 하십니까?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네가 누운 이곳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을 이루시기까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20년이 지나서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가나안을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러나 그 약속도 역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네 후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4대만에 돌아오리라는 것을 이미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자기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야곱이 하란으로 갈 때와 지금 애굽으로 갈 때에 달라진 점이 무엇입니까?

하란으로 갈 때는 희생제사가 없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배나 기도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애굽으로 내려가면서 희생을 드림은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는 것입니다. 야곱이 하란으로 도망갈 때에 약 70세로 보았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바로왕 앞에 설 때에 130세라고 하였으니 그때로부터 60년이 지난 것입니다. 달라진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 물어 보는 것입니다. 지금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브엘세바에 이르렀지만 어찌할지 망설여지고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의 뜻을 묻는 것이라고 봅니다. 60년 전에는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묻는 것입니다.

 

 

 

 

우리가 야곱의 절반을 산다고 본다면 예수 믿은 지 30년쯤 되었다면 이제 주님의 뜻을 물어도 보고 분변도 하여야 하지 않을까요? 그저 내 고집대로 밀어 붙여 놓고서는 ‘하나님 이것 이루어 주옵소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하여 나에게 무엇을 하시렵니까? 하고서 묻는 것이 기도입니다. 주보의 ‘복음묵상’이라는 란에 지금 기도에 대하여 계속 싣고 있습니다. 주보를 순서지로만 한번 보고 예배당에 그냥 버리고 가시지 마시고 한번씩 더 보시고 버리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자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고 하시면서 또 다시 하나님의 언약을 주시는 것입니다.

 

 

 

 

46:3-4절입니다. “봉독” 1,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계속 주어진 약속입니다. 2, 나도 너와 함께 내려가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동행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것도 역시 과거에 약속 하신 바가 있는 내용입니다. 하란으로 갈 때에 네게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3,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라고 하십니다. 야곱 자신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 것도 하나님이 일하심이고 지금 애굽에서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고자 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죽어서 가나안으로 오지만 그 후손이 430년 후에 가나안으로 나오게 되는 것을 보면 역시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시고야 마시는 것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4, 요셉이 너의 눈을 직접 감길 것이라고 합니다. 죽었다고 생각한 그 요셉이 자신의 임종을 지킬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약속대로 다 이루어지는 것임을 우리는 이미 성경을 통하여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약속이 몇 년이 걸리든지 상관없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세계 최고의 강대국 이집트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도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서 야곱의 일행이 드디어 애굽으로 갑니다. 요셉이 보낸 수레를 타고서 자신의 처자식을 거느리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가나안에서 얻은 재물도 가지고 갑니다. 그 당시의 재물이라면 주로 가축떼입니다. 그런데 이 이사하는 행렬을 보면서 우리도 이사할 준비를 하고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야곱의 후손들이 지금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들어가지만 또다시 가나안으로 나올 것입니다. 그러니 계속 떠남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떠날 때 그냥 떠납니까? 필요 없는 것들은 버리고 가는 것입니다. 요셉이 무어라고 하였습니까?

 

 

 

 

45:20절에서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가나안의 살림살이들을 아깝다고 보따리, 보따리 싸오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곳의 모든 것이 너희 것이라고 합니다. 요셉의 것이 자기들의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것들이 이러하지 않을까요? 아끼지 말고 버려두고 가자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 살 때는 귀하고 없어서 안 될 것 같지만 하늘나라에 필요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소풍 이야기이고 하나는 이사 이야기입니다. 인애가 소풍을 갔다 오는 것을 보고서 과자 남겨온 것이 있느냐고 물었지요? 동생 좀 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집사람이 아주 구질구질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얼 남겨오는가 이런 표정입니다. 이게 문화차이인가 봅니다. 저희가 어릴 때는 먹을 것은 일년에 소풍갈 때나 먹어보는 김밥에 돈 몇 십 원 들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풍에 따라온 장사하는 사람들에게서 사먹는 것인데, 도시 사람들은 먹을 것을 사서 들려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나들이 소풍 갔다 오면 꼭 동생 먹을 것을 사가지고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시는 먹을 것이 많은데 무얼 남겨 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서 생각하기를 그래 남겨오지 말자 냉장고를 열면 먹을 것 있고 가게에 가면 많은데 무얼 먹다가 남겨오는가 그냥 먹고 나누어 주고 그렇게 오자, 라는 생각이 든 것은 천상병 시인의 ‘귀천’이라는 시를 보면서 그래 소풍 나왔으니 그냥 주고 함께 나누고 가자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또 하나는 저희 집이 밀양에서 부산으로 이사 올 때입니다. 시골에서 도시로 오면 시골의 농사짓는 모든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지간한 것들은 다 그저 주고 어떤 것들은 돈을 조금씩 받고 팔기도 하고 그렇게 정리를 하고 온 것입니다. 농사짓고 살 때에는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도시로 이사를 오니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다 버리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 때에 없어서 안 되는 것 같지만 하늘나라로 갈 때는 아무것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가는 것이 천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지만 그러나 이사하는 모습을 통하여 이렇게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믿음으로 산다면 늘 이사할 준비를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조상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히브리서 11:13-16절입니다. “봉독” 이 땅에서 나그네라 외국인이라 하는 증거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의 이사할 준비를 하면서 사는 이 사람들의 하나님이라 칭함 받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하느뇨 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여자가 더 세상을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애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로 이사할 준비를 하면서 산다면 무엇을 버리고 가야 할지를 늘 생각하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요셉의 말을 기억합시다. 기구들을 아끼지 마시고 오시기 바랍니다. 이 땅의 것이 모두 여러분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어라고 하실까요? 너희들은 땅의 것들을 다 버리고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준 용서와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오너라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있는 것들이 다 너희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명수 강가에서 생명나무의 열매가 공짜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지고 갈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의 것들 버리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야곱의 가족이 47절에 보시면 70명입니다. 출애굽기 1:5절과 신명기 10:22절에서도 70명으로 되어 있는데 사도행전 7:14절에 보면 75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야곱의 아내와 네 명의 며느리를 포함하고 안하고 하는 차이라고 봅니다. 이런 숫자의 차이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야곱의 언약 안에 포함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야곱의 혈속, 야곱의 허리, 그 부러진 허리로부터 나온 70명이 애굽에서 커다란 민족으로 이스라엘 국가로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이 애굽으로 내려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들이 드디어 애굽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요셉과 바로를 만나게 됩니다. 요셉과 야곱의 뜨거운 상봉을 합니다. 목을 어긋 맞겨 울면서 이제야 내가 죽어도 여한이 없다, 라고 합니다.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있을 뿐 아니라 애굽의 주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미 하나님이 야곱에게 형제들의 주가 되리라는 말씀의 성취가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을 다시 만남으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다가 다시 받은 것과 같은 마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경험하는 언약의 조상들입니다. 이삭은 어떻게 경험을 하는가 하면 에서인줄 알고 축복하고 보니 야곱이었고, 야곱은 형이 죽이려는 것을 피하여 도망간 사건이 아닌가 하고 생각을 해봅니다. 모두가 같은 경험들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죽었다가 살아난 것과 같으며, 이삭은 야곱을 20년이나 지나서 만났으니 죽었던 것 같은 자가 살아 온 것이며, 야곱 또한 완전히 죽었다고 생각하였던 아들 요셉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들을 버리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게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잃어버림의 아픔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할 때에 늘 기억하여야 할 것은 나의 잃어버린 아픔보다도 하나님께서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아픔을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서 바로를 만나고 바로를 축복합니다. 이 내용은 지난주에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높은 사람이 낮은 사람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야곱이 애굽에 들어 온 것은 주로 들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을 한 번 더 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47:9절입니다. “봉독” 자신의 생애를 험악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애를 나그네라고 합니다. 두 번이나 나그네 사람이라고 합니다. 성도는 이 땅의 나그네입니다. 베드로가 성도들에게 편지하기를 흩어진 나그네들이라고 합니다.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한다고 하였습니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성도란 나그네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나그네임을 확인하는 것이 야곱이 가나안에서 하란으로, 다시 애굽으로, 다시 가나안으로 가는 것입니다. 결국 죽어서 가나안에 매장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묻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야곱의 나그네의 세월, 그 험악한 세월을 보시면서 무엇을 마음에 느낍니까? 우리도 결국 떠나야 할 나그네 들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도저히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삽니다. 그저 이 땅에 천년 만년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택한 자들은 그러면 그럴수록 고난이 많은 것입니다. 야곱이 그러합니다.

 

 

 

 

얼마나 악착같았습니까?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험악한 세월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야곱의 생애를 보면서 결국 누구의 고집이 센가를 보게 됩니다. 아무리 야곱이 발버둥을 치더라도 결국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시고 변함이 없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신실한 하나님을 우리가 믿을진대 너무 염려 마시고 세상에 눌러 붙어 있으려 마시고 오늘도 떠나는 준비를 하면서 주님을 맞이할 준비하면서 하루하루를 사시기 바랍니다. 이런 나그네는 짐이 가벼운 것입니다.

 

 

 

 

창세기 47:27-48:22  야곱의 유언  2000. 10. 29.

 

 


야곱이 드디어 임종을 맞이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제 죽을 때가 다 되었음을 알고서 유언을 합니다. 몇 가지의 일들을 유언합니다. 첫째는 자신을 열조의 무덤에 묻어달라는 것이며, 둘째는 요셉의 두 아들을 손을 어긋 맡겨 축복을 하는 것이며, 세 번째는 자신의 모든 아들들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다음에 살펴보기로 하고 오늘은 두 가지를 중심으로 보고자 합니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고서 죽을 때가 되면 그 생의 농축된 것이 유언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평소에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바라고 살게 되었는가를 그의 죽음 직전에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리 미리 죽음을 잊지 말고 준비를 하는 것이 참으로 지혜로운 것입니다.

 

 

 

 

전도서 7:2절에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치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가 이것에 유심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죽음을 잊고서 삽니다. 일부러 잊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온갖 세상의 일들에 분주하게 삽니다. 너무 바빠서 죽음을 생각할 틈도 없이 살고, 어떤 사람은 너무 바빠서 죽을 틈도 없다 라고까지 합니다.

 

 

 

 

그러나 나는 죽음을 잊어도 죽음은 어김없이 잊지 않고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소에 유언을 생각해두고 묵상하여 두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밤에 내가 죽는다면 무엇을 유언으로 남길 것인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평소의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신문에 난 이야기랍니다. 한 가난한 집에 노모가 죽으면서 평생에 소원이 다이아몬드 반지를 한번 끼어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었답니다. 아들이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마당에 그 소원을 이루어 드리려고 살 형편은 안 되고 친구의 부인에게서 다이아 반지를 빌려와서 어머니에게 끼워 드린 것입니다. 물론 빌려 왔다고 하지는 않았지요. 그런데 이 어머니가 반지를 두고 그냥 죽기는 너무 아까워서 반지를 물마시면서 삼켜버린 것입니다. 아들은 하는 수 없이 어머니를 화장하여 반지를 회수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웃을 일이 아니라 나는 죽을 때에는 어떤 모습이 나오겠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하니 저의 어머니가 들려주신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떤 사람이 돼지고기 장사를 하여서 부자가 된 사람이랍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사회사업도 하고 아주 유명한 사람이 되었는데 죽을 때 그의 유언을 지켜보려고 많은 사람이 모여 들었지요? 그의 임종의 말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돼지고기 얇게 썰어라 라고 하였답니다. 우리의 평소의 관심사와 소원이 드러나는 것이 자신의 죽음 앞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의 유언을 보고자 합니다. 애굽에 130세에 내려와서 17년을 지냅니다. 그리고 생육하고 번성합니다. 그러면 애굽의 호화로운 생활이 어느 정도 몸에 익을 만도 한 때입니다. 아들이 누구입니까? 바로의 아비요 주라고 불리우는 총리입니다. 그 엄청난 흉년을 지혜롭게 극복하였을 뿐 아니라 재산과 토지의 소득세까지 모두 정비하면서 애굽의 실질상의 왕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중심의 역할을 한 것이 물론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차원이지만 이러한 아들의 권세가 있는 곳에서 자신이 묻히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묻혔다면 초라한 가나안의 바위 구멍을 파서 넣는 그런 무덤이 아니라 호화 분묘를 마련하였을 것입니다. 피라미드 정도의 무덤은 아니더라고 얼마든지 자신의 무덤을 꾸밀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자기 아들에게 얼마나 신신당부를 하고 맹세를 시키고 있는지 49:29-31절을 봅니다. “봉독” 나를 애굽에 장사하지 않도록 맹세를 시킵니다. 손을 환도뼈 아래에 넣고서 맹세를 하게 합니다. 이러한 맹세는 아브라함이 자기의 종에게 이삭의 아내를 데리고 오라고 할 때에도 이러한 맹세를 시킵니다. 이것은 아마 목숨을 걸고서 지키라는 맹세로 봅니다. 환도뼈란 허리이고 사람의 생식을 나타내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최고의 맹세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자 요셉이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를 합니다.

 

 

 

 

야곱의 평생의 연단을 통하여 무엇이 소중한지를 이제 죽을 때가 되어서 분명히 안 것입니다. 그동안 자신은 세상의 성공과 출세를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였습니까? 형도 아버지도 속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마지막 소원이, 아들에게 맹세를 시키면서 하는 소원이 가나안땅 그 아비 이삭과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묻힌 곳에 묻어 달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앞으로 자기의 후손들에게 주실 그 땅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맹세를 받고서 야곱이 31절에 보면 침상머리에서 경배를 합니다.

 

 

 

 

이 침상머리에서 경배를 한다는 것이 히브리서 11:21절에 보면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침상에서 지팡이 머리를 의지하고서 하나님께 경배한 것으로 봅니다. 그러면 이 지팡이가 무슨 지팡이 입니까? 단지 늙어서 짚고 다닌 지팡이가 아니라 자신이 얍복강에서 환도뼈가 침을 당하고 나서 짚고 다닌 지팡이입니다. 그때로부터 의지하고 다닌 지팡이입니다.

 

 

 

 

그러니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것은 이때의 사건이후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에 의하여 꺾어지고 이제는 자기 힘이 아니라 지팡이를 의지해야 하는 그런 백성이 이스라엘인 것입니다. 야곱이 그렇게 독립하려고 불철주야 애를 쓰던 것이 이제는 그 노력조차 포기할 수밖에 없는 절름발이가 되어서 평생을 지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이제 임종직전에 그 지팡이를 의지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러한 야곱의 모습을 보면서 신앙이란 무엇이라고 생각이 됩니까? 신앙이란 하나님에 의하여 침을 당하는 것입니다. 천국이 나를 부수고 쳐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자신이 의지하던 것들이 부러지고 이제는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을 야곱의 생애를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이 두 아들을 야곱이 자기의 아들로 삼습니다. 손자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 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이 지금 장자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장자란 두 몫을 받는 것입니다. 그 두 몫을 요셉에게 주는 것인데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후의 너의 자손은 너의 자손으로 하되 그러나 그 형들의 명의하에 들어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이 5-6절입니다. “봉독” 그러므로 요셉이 장자가 되고 두 몫을 받기까지 요셉은 섬기는 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고난을 당하는 자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드디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할 때 손을 어긋 맡겨 축복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8-22절의 내용은 요셉이 자기의 두 아들을 야곱에게서 축복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장자인 므낫세를 왼손에 차자인 에브라임을 오른손에 잡고서 야곱 앞으로 갑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야곱의 오른손이 므낫세에게 왼손이 에브라임에게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갑자기 손을 어긋나게 하여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버지 그게 아니고 이렇습니다.’ 하자 야곱이 ‘아들아 나도 안다.’ 라고 합니다. 야곱이 눈이 멀어서 잘 보지 못하는데도 영안은 어둡지 않은 것입니다. 나도 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요셉의 생각에는 장자이니 당연히 오른손의 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마치 이삭이 장자인 에서가 당연히 복을 받아야 한다는 것처럼 요셉도 그렇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무어라고 합니까? 자신의 평생을 통하여 알게 된 것은 아우가 형보다 크게 되리라는 것은 섬기는 자가 큰 자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선택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이 승리하고 힘을 얻고 이기는 것이 큰 자가 되는 줄 알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일하심이 사람들의 생각과 어떻게 다른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야곱 자신이 큰 자가 되리라고 어머니 배속에 있을 때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러나 막상 야곱의 생애는 고난과 험악한 세월을 보내게 된 것입니다. 무엇을 계시하기 위함입니까? 높은 자는 섬기는 자가 높은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상의 방식은 남을 누르고 이기고 밟아야 높은 자가 됩니다. 한마디로 살아남기 전쟁입니다.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식으로 사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장자와 차자를 바꾸어 축복함으로 이 세상의 높고자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라 섬기는 자로 부름 받은 것이 큰 자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의 생애에서도 드러나는 것입니다. 희생당하는 자가 희생시키는 자를 살려낸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섬기는 자가 오히려 주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희생당하는 자가 주가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0:17-28절입니다. “봉독”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은 죽으러 가시는 길입니다. 이것은 자기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하여 죽기까지 섬기시는 길로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누가 서로 높냐의 싸움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고 하지요. 얼마나 반대되는 마음입니까? 한 편은 섬기기 위하여 죽음으로 가는 길인데 한 편은 서로 높아지려고 가는 길입니다. 이런 싸움에서 누구까지 동원합니까? 세베대의 아들은 어미까지 동원됩니다. 세베대의 아들이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그러니 야고보와 요한이 자기의 어머니까지 동원하여 예수님께 한 자리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구하느냐 하니 두 아들이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때도 치맛바람이 불었습니다. 높아지는데 무엇을 동원하지 못하겠습니까?

 

 

 

 

그때에 예수님의 질문이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겠는가 합니다. 그러자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마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잔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내는 잔입니다. 대신 고난당하는 잔입니다. 십자가의 잔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나의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예비하여 두셨기에 그들이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히 여깁니다. 아니 너희가 무언데 높은 자리 차지하려고 너희 어머니까지 동원하느냐? 누구는 어머니 없냐? 그런 식으로 높아지려고 하느냐 하면서 서로 서로 높아지려고 싸우는 것입니다. 마치 야곱의 깨어지기 전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마치 오늘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런 속마음을 예수님이 왜 모르시겠습니까?

 

 

 

 

25-27절을 다시 봅니다. “봉독” 이방인 가운데서는 집권자들이 임의로 주관하고 대인들이 너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것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는 그렇지 않다고 하십니다. 무엇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것입니까? 너희는 그렇지 않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그래 지금 섬기고 종이 되면 나중에 높은 자리 차지하리라는 식으로 계산하면 또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높은 자란 섬기는 자라는 것입니다. 으뜸이 되는 자란 종의 자세로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시고 자기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시기 위하여 오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섬김을 받아야만 하는 중환자들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일어날 수 없는 허물과 죄로 죽은 자입니다. 이러한 죽음의 증세가 어떤 것입니까? 내가 남보다 높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의 섬김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욕구가 무엇입니까? 섬김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두가 공주병, 왕자병이 다 걸린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자들을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삼기 위하여서 왕이요 주인이신 예수님이 섬기는 자로 종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분의 섬김을 받은 자는 이제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죽으셨는가? 내가 높아지려는 것으로 인하여 예수님이 죽으셨구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섬김을 받은 우리라면 마땅히 우리가 섬기는 자로 사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높아지기 위하여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높아졌기에 섬기는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주님 안에서 왕노릇 하기에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모습에서 그리스도의 모습이 증거되는 것이지 세상에서 높아지고 다스리고 군림하는 모습으로 증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이방인이 하는 모습입니다.

 

 

 

 

야곱의 생애를 보면서 우리의 유언이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고 소망하도록 자녀들에게 맹세를 시킬 정도의 믿음의 삶을 지금 살고 계십니까? 어느 날 갑자기 닥치는 죽음입니다. 순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미리 미리 준비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사는 방법은 섬김을 받기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섬기라고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이미 우리가 주님의 섬김을 받아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높아지려고 섬김을 받으려는 것 때문에 주님이 죽으신 사실을 아시고 이제는 섬기고 사는 복을 누리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의 평가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부렸나로 평가되지만 주님의 나라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섬겼는가로 평가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49:1-7  야곱의 예언(1)  2000. 11. 5.

 

 


지난주는 야곱의 유언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보았습니다만 오늘은 야곱의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되어 갈 것인지를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열두 아들의 예언은 단지 야곱의 가족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이 어떻게 역사 속에 펼쳐지는가를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 차원에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하나님중심으로 본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단지 나의 성공출세를 위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의 집 밑에 세 들어 사는 총각이 자기 누나는 교회 나간다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교회와 성경에 대하여 이야기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원하는 이유가 자신은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영업 관리직이기 때문에 무슨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성경, 교회 이런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관심을 가지는 경우도 있구나 하여 성경을 한 권 주고서 읽어 보라고 하였습니다만 우리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런 관심이 아니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작업을 위하여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보는 것입니다.

 

 

 

 

야곱이 그 아들들을 마지막으로 예언하는 내용을 보면 그 아들들의 평소의 행실을 가지고 장래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과율적인 면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런 모습을 인과율적으로만 보기 보다는 하나님이 이 야곱의 열두 아들들을 통하여 어떤 분이신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르우벤은 나쁜 짓을 하여 벌을 받고 요셉은 착한 일을 하여 복을 받았다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렇게 되어 버리면 성경에서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너무 좁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악인을 벌하시고 의인을 상주시지만 그러나 성경에서 악인이 오히려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을 받는 문제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다루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너무 권선징악적 차원에서 성경을 보면 의인의 고난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 지난주 수요일 이사야 53장에서 고난 받는 메시아의 예언을 보았을 때 왜 그가 고난을 받는다고 사람들이 생각한 것입니까? 그 고난 받는 사람이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죄인을 위한 대속적 고난인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예를 들자면 노아의 세 아들 중 저주를 받은 자와 축복을 받은 자가 나누어지는데 저주를 받은 자는 함이고 축복을 받은 자는 셈과 야벳입니다. 그 이유는 아비의 허물을 가려주었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과율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이신가를 알리시는 계시를 보는 것이며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적용을 하자면 남의 허물을 잘 가리워주자, 라고 적용을 하는 것은 너무 좁은 적용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 외에도 얼마든지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의 구원은 허물이 가리움을 받는 것이구나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아무도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행함대로 갚으신다면, 의인이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시고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는데 우리가 무슨 수로 구원에 이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야곱의 예언은 단지 개인의 유언이 아니라 앞으로 이스라엘에 나타날 하나님의 일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언된 일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 내실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일하신 참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목표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섬기는 것이 목표입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였던 것처럼 우리가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는 것, 그리하여 아들을 닮는 것이 신앙의 목표라고 금요 구역공부 때 하셨지요? 그러면 오늘 말씀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가기를 원하면서 보도록 합니다.

 

 

 

 

창세기 49:1절에 보시면 너희의 후일에 당할 일을 이른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들의 삶이 어떻게 전개될지를 미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삭이 야곱을 에서인줄 알고 축복을 하였다가 나중에 에서가 돌아와서 축복을 해달라고 빌어도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을 통한 이 아들들의 장래란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있는 것이지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에 의하여 축복하고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3절입니다. 르우벤의 내용입니다. 장자로서 굉장한 능력을 가진 자로 되어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 능력과 영예와 권능이 탁월하였지만 그러나 그 아비의 침상에 올라간 것으로 인하여 탁월치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르우벤이 자기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한 사건을 두고서 말하는 것입니다. 장자로서 그 능력이 뛰어 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잘못 사용하여 오히려 장자권이 요셉에게로 넘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5-7절입니다. 시므온과 레위입니다. 이들의 모의에 참예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들은 세겜에서 자기의 누이동생 디나가 강간을 당한 사건에 대하여 지나친 복수를 하였습니다. 세겜의 추장의 아들이 그냥 장난삼아 한 것이 아니라 정말 연애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그러니 어떤 대가를 요구하더라도 다 응할 테니 결혼을 허락하려 달라고 하였을 때 할례를 받으라고 해 놓고서는 그들이 고통 중에 있을 때 가서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 사건에서는 기록이 되지 않았는데 오늘 말씀에서 보면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다고 합니다. 그냥 사람만 죽인 것이 아니라 소들까지 그 힘줄을 끊어버리는 분노와 혈기가 가득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노와 혈기는 자신들의 자존심에 관한 분노와 혈기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분노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저주를 받아서 이스라엘 가운데 흩어지리라고 하였습니다. 나중의 역사를 보면 시므온은 유다 지파 중에 부속되거나 북쪽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민수기에서도 가장 적은 족속으로 나타납니다. 결국 예언대로 되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레위 지파도 시므온과 함께 흩어지리라고 하였는데 레위 지파가 이스라엘의 전역에 흩어져서 살게 됩니다. 그러나 시므온과는 달리 레위 지파는 제사장으로서 흩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다같이 흩어지리라고 하였는데 레위지파는 제사장의 직분으로 흩어지게 된 것입니까?

 

 

 

 

출애굽기 32:25-29절입니다. “봉독” 금송아지 사건 때 이들을 진멸할 자를 모세가 불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금송아지를 섬기는 진, 이문에서 저 문까지의 사람을 죽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자 레위 지파가 칼을 차고 나가서 그 형제와 친구와 이웃을 도륙하였는데 삼천 명 가량이나 죽었습니다. 이것을 모세가 보고서 오늘날 너희가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2여전도회 헌신예배 때 이 말씀을 정 목사님이 하셨지요? 헌신은 하나님에 대한 질투입니다.

 

 

 

 

비느하스가 음행하는 이스라엘의 남자 시므리와 미디안 여인 고스비를 창으로 찔러 죽인 것을 여호와의 질투로 질투하여 백성이 진멸되지 않았다고 비느하스를 축복하면서 영원한 제사장의 직분을 허락합니다. 그러므로 레위 지파가 세겜에서 자신들의 자존심에 대한 지나친 분노와 혈기가 흩어짐의 저주를 받았지만 그러나 금송아지 사건에서 여호와께 헌신하여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야곱의 저주와 모세의 축복이 함께 성취되는 것이 레위 지파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건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받는 일에 있어서는 얼마나 무덤덤합니까? 교회와 성도가 주님의 이름 때문에 욕을 얻어먹는 것이라면 성도의 고난으로 복일 수 있지만, 그러나 성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전혀 성도 아닌 행동으로 욕을 얻어먹으면 누구에게 욕이 돌아가는 것입니까? 하나님께 욕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도란 거룩한 무리입니다. 세상과 구별된 무리입니다. 땅의 것을 찾는 사람들이 아니라 위의 것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세상의 사람들이 교회와 성도에 대하여 전혀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신문에 오르내리는 교회의 소식들이 대형교회의 부자 세습 문제를 다루고 이것을 반대한다는 시민단체의 항의가 따르고, 대형 교회의 재산이 자신의 아들의 회사로 수백억이 들어갔다는 이야기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싣고 있는 잡지들을 그 교회가 많이 사들여야 다른 곳으로 덜 팔린다고 생각하였는지 그 잡지를 무더기로 사들이기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잡지는 좋게 기사화 하지 않을까요? 이렇던 저렇던 간에 오늘날에 교회에 대하여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요즈음 기름값이 올랐다고 하니 러브호텔의 네온사인과 교회의 십자가의 네온사인을 끄라고 합니다. 이런 모습에 대하여 분노가 일어납니까? 이제는 분노가 아니라 그저 체념입니까?

 

 

 

 

그런데 만약에 자신의 명예에, 자신의 자존심에 상처가 갔다면 여러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만히 있겠습니까? 시므온과 레위처럼 끓어오르는 분노와 혈기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겠습니까? 직접 죽이지는 못하여도 이를 갈면서 미워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살인입니다. 그런데 나로 하여금,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받고 있는 일에 참으로 분노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가 가리워지는 것에 대하여 얼마나 분노가 일어납니까? 교회가 주님의 피 흘리신 공로가 사라지고 사람들의 인위적인 경영방법이 동원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기쁘게 하는 프로그램에 분노가 일어나십니까?

 

 

 

 

오늘 새벽에 여호수아 22장에서 어떤 사건이 있습니까? 요단 동편으로 돌아가는 두 지파 반이 커다란 돌단을 쌓습니다. 요단 서편의 아홉 지파 반이 이 소식을 듣고 현장을 보러옵니다. 만약 이방신을 섬기는 단이라면 이들을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단을 쌓은 것은 우리가 이스라엘중의 기업이 있음을 증거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적용이 된다면 교회 오지마라는 것이 가장 큰 걱정과 염려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 이제 교회 오지 말라는 것이 가장 큰 치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 지파 반이 단을 쌓으면서 ‘우리도 이스라엘입니다’ 하는 증거를 가지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에서 나가라, 그러면 ‘안 됩니다. 살려 주세요’ 그렇게 말합니까? 여기 없으면 교회 없나? 차 보내라 그러면 가줄께, 이런 건방진 일들이 무엇 때문에 나온 것입니까? 교회 나와서도 조금만 기분 나쁘면 여기 아니면 교회 없나, 그러는 것입니다. 교회가 진리를 따르는가, 아닌가가 문제가 아니라 나의 자존심을 채워주는가 아닌가가 되어 버린 이런 현실에 대하여 우리가 얼마나 분노하고 있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모두 자기 자신에게 헌신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우리는 시므온과 레위를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동시에 우리가 바로 시므온과 레위처럼 자기의 이름에 목숨을 걸고 있음을 지적당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저주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저주가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저주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난 것은 레위지파의 헌신이었습니다. 이들의 헌신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진멸되지 않는 것입니다. 비느하스 사건 때도 그렇게 된 것입니다.

 

 

 

 

민수기 25:1-13절입니다. “봉독”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그 음행한 자들을 죽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누가 나섭니까? 레위지파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질투를 대신하였기에 그 진노를 돌이키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때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킨 것이 바로 비느하스의 질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레위 지파의 제사장의 직분이란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범죄를 짐승을 잡아서 피를 흘림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는 것이 제사장의 역할입니다. 이것을 레위지파가 감당함으로 하나님의 진노가 어떻게 하여야 피하여 지는지를 그들의 지파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레위 지파가 금송아지 사건에서 헌신하여 형제들을 죽인 사건과 비느하스가 그 음행하는 자를 죽인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질투로 질투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킨 것입니다.

 

 

 

 

구약에서 레위 지파의 역할이란 하나님의 진노를 제사를 통하여 돌이키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정신이 빠져버리면 제사란 또다시 우상숭배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금 어려운 부분이 대두됩니다. 그러면 레위 지파에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나와야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레위지파의 제사장이 영원하지 못한 것을 히브리서에서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번 봅니다.

 

 

 

 

히브리서 7:1-10절을 봅니다. “봉독” 레위 지파가 아직 나기도 전에 아브라함의 허리에 있을 때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친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보다 멜기세덱이 높은 자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는 레위 지파의 후손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짐승의 피도 아니요, 죽어버리면 대제사장이 바뀌는 그런 제사장이 아니라 영원한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히브리서 8장, 9장, 10장에 계속 이어집니다. 이 시간에 다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예수님이 오셔서 행하신 일들을 보시면 어떻게 행하시는 것입니까? 질투하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질투로 질투하시는 것입니다. 그 질투로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다른 사람에게 갚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에 받으심으로 자기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이란 야곱의 이 유언 속에서 단지 레위지파가 자신의 분노와 혈기가 넘쳐서 흩어짐을 저주로 받는 것만 야곱의 유언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서 레위지파의 모습을 보면 야곱의 이 저주가 그대로 이루어지면서 동시에 모세의 예언대로-물론 이러한 예언이 모세 자신의 예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예언입니다-되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씀들을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시는 계시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일에 분노하시며 어떤 일에 그 분노를 돌이키시는가를 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가 자기의 이름과 자기의 명예와 자기의 자존심에 대하여 질투를 하고 있기에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합니다. 그런데 레위 지파에서 헌신자가 나온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킨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 자기의 몸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오는 하나님의 진노를 돌이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라면 나의 이름에 대하여 자존심 상하는 일에 대하여 분노하고 있는 것이 죄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은 오직 주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예언을 읽으면서 우리가 받는 하나님의 계시라고 봅니다.

 

 

 

창세기 49:8-28  야곱의 예언(2)  2000. 11. 12.

 

 


지난주에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의 예언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자신의 이름과 자신의 명예에 대한 분노와 혈기로 인하여 저주를 받게 되었지만 그러나 나중에 하나님의 질투로 질투함으로 그 저주가 오히려 축복이 됨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축복과 저주란 어떻게 보면 됩니까? 자기의 이름에만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것, 자기의 이름에 모든 가치를 두는 것, 이것이 저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축복이란 무엇입니까? 나의 이름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에 기뻐하는 자가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자신이 만물의 찌끼같이 여김을 받아도 그리스도가 증거됨을 인하여 항상 기뻐한 것입니다. 이것이 저주 받을 우리 인생에 주어진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복을 받은 자의 당연한 자세가 아닙니까?

 

 

 

 

제가 은혜만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이 행함을 강조하지 않는가 하는 분이 계십니다만 그러나 어떤 집사님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목사님은 십일조가 아니라 하면서 전부 다를 바치라는 것이고, 주일성수 아니라 하면서 모든 날을 주일로 지키라는 것이라고 합디다. 그러니 주일성수, 십일조 하라는 것 보다 더 무섭다는 말을 합디다. 그러니 제가 행함을 강조 안한 것이 아니지요?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놀랍고 큰지를 우리의 어줍잖은 열심으로 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은혜를 제대로 알아 가면,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를 주신 분이 감동하심으로 정말 자원하는 심령으로 기쁨과 감사로 자신의 목숨까지를 바쳐도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그렇다 할지라도 그저 종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하는 것이 은혜 받은 자세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줍잖은 행함으로 감히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약을 통하여서도 주님의 복음을 받는 것입니다. 구약이 왜 복음인지를 먼저 보고서 오늘 말씀을 봅니다.

 

 

 

 

갈라디아서 3:8-14절입니다. “봉독” 아브라함이 복음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이미 율법과 선지자에 의하여 즉 구약에 의하여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복음의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그렇지 않고 또다시 행함으로 돌아가는 것은 갈라디아서 3:10절로 돌아가는 것이 됩니다. 르우벤과 시므온과 레위에 대한 야곱의 예언을 지난주에 보았고 오늘은 나머지 아들들에 대한 예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편의상 유다를 제일 나중으로 돌리고 나머지 아들들부터 보고자 합니다.

 

 

 

 

13절입니다. 스불론인데 그 지경이 해변에 거하리니 그곳은 배 매는 해변에서 시돈까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예언대로 갈릴리와 지중해 사이의 땅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지파가 가나안에 들어가서 땅을 나눌 때 제비뽑아 나눕니다. 그런데 스불론이 야곱이 말한 경계를 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바다 더 가까이 아셀지파가 위치하지만 스불론도 그 지경에 이르러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성경이 오랜 세월 여러 사람에 의하여 예언되고 기록된 것이 통일된 중심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의 통일성이라고 합니다.

 

 

 

 

14-15절입니다. 잇사갈인데 그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긴다고 합니다. 이들이 차지한 땅이 역시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어깨로 짐을 메고 압제 아래서 섬긴다는 것은 그들이 농사를 짓고 산다는 것도 되고 또 그들의 생필품을 구하기 위하여 그 자유를 매매하는 것으로도 봅니다.

 

 

 

 

16-18절입니다. 단인데 두 가지입니다. 그 백성을 심판하리라 하여 단 지파에서 삼손이 나온 것을 말하고 하나는 단은 뱀의 길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말굽을 물어 그 탄자를 떨어지게 하는도다‘ 라는 것을 단 지파의 폭력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사사기 18장에 단지파의 내용이 나오고 미가 집안의 우상과 레위 소년을 탈취하여 가서 자기들의 우상과 제사장을 삼습니다.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 단 지파에는 이 신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또 교부들 중에는 이 단 지파에서 적그리스도가 나온다고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7장에서 이스라엘 지파의 명단에 단 지파가 없습니다. 왜 그런지는 아직 명확하게 드러난 주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 중에서 특이한 것은 18절입니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라는 내용입니다. 단 지파와 같은 악당들의 손에서 구원하여 달라는 그런 내용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메시야에 대한 간구로 봅니다.

 

 

 

 

19절입니다. 갓 지파인데 군대의 반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라는 내용처럼 다윗시대에 용기를 발한 적이 있습니다(대상12:8-15). 20절입니다. 아셀 지파인데 기름진 땅이라고 합니다. 이 예언처럼 솔로몬시대 때 이 땅의 곡식으로 히람 왕에게 양식을 공급하였습니다. 21절입니다. 납달리 지파인데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식을 발한다고 하는 것은 전쟁의 승리를 말하는 것으로 납달리 지파가 가나안왕 야빈을 이긴 것입니다(삿4-5장)

 

 

 

 

22-26절은 요셉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희생과 형제를 섬김과 야곱을 봉양함으로 장자의 지위를 얻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형제들 보다 두 몫의 기업을 받아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 지파가 되는 것입니다. 24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씀의 정확한 번역은 ‘이스라엘의 반석이신 목자의 계신 곳에서부터’입니다. 그러니 요셉의 왕성함과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축복을 누구의 이름으로 하는가를 25절과 26절에서 보면 네 아비의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언약의 하나님을 말할 때 언제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불리우시는데 지금 야곱은 오히려 자기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네 아비의 축복이 네 부여조의 축복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잘나서 하는 말이 아니라 야곱이 얼마나 하나님께 대항한 자입니까? 사람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겨루어 싸운 야곱입니다. 그러한 야곱을 하나님이 얼마나 열심히 언약의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으면 이렇게 표현하겠습니까? 야곱이 고집을 부릴수록 고난은 심하였습니다. 그러한 고집과 고난 속에서 아브라함보다 이삭보다 더 많이 하나님께 매를 맞으며 연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 깊이 하나님을 체험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야곱이 축복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창세기의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보면서 누구에게서 힘을 얻습니까? 야곱입니다. 아브라함도 높아 보이고 이삭도 순종의 사람으로 보이지만 야곱 정도는 우리도 상대할만한 사람 아닙니까? 그러니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의 열심히 더 큰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자신의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야곱의 이런 고백처럼 할 수 있습니까?

 

 

 

 

27절입니다. 베냐민 지파입니다. 물어뜯는 이리처럼 호전적인 지파입니다. 베냐민 지파의 이러한 모습이 사사기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파들에 대한 야곱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보아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계시가 어떻게 예언되고 성취되어 지는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지를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예언에 야곱의 사사로운 감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임을 전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죽으나 언약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이 언약대로 온 세상이 움직여 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하고, 가나안에 들어가고, 사사시대, 왕정시대, 포로시대, 포로귀환을 하면서 그 역사의 초점이 어디로 가는가 하면 유다지파로 모아지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러한 예언의 성취가 어떻게 유다지파로 연결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우선 이미 살펴본 대로 유다가 베냐민의 목숨을 자기의 목숨으로 담보하겠다고 나선 사건을 우리가 이미 보았습니다. 이러한 정신을 담아내는 것이 바로 유다가 메시야의 모형론적인 역할입니다. 형제를 대신하여 자신의 목숨을 바치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파에 대하여 어떤 예언이 주어지고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8-12절입니다. 유다라는 이름이 찬송의 뜻입니다. 그러니 이 이름을 언약 속에서 구체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며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서 절하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요셉이 어릴 때 꾼 꿈의 내용과 비슷합니다. 형제들이 그 앞에 절하는 꿈을 꾸었지요? 결국에는 요셉에게 형제들이 절을 하였지만 그러나 그 일이 있기까지는 요셉이 얼마나 많은 고난과 희생을 당하는지를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러면 요셉에게서 메시야가 나와야 하지 않는가 할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요셉은 그의 역할이 끝나는 것입니다. 이제는 유다에게서 형제들이 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의 희생을 보이시면서 형제들이 절하게 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다가 자신을 담보로 베냐민을 살리고자한 그 모습이 메시야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누가 애매히 고난을 받는가를 유심히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지파에서 사자가 나오고 홀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로가 오시기까지 그 이 미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란 왕위를 말합니다. 왕의 지팡이인데 이 이 ‘실로가 오기까지’라고 합니다. 이 실로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 메시야로 봅니다. 그러니 메시야가 올 때까지 홀이 유다지파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21:26-27절을 봅니다. “봉독” 유다 지파도 결국 왕이 끊어집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입니까?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르면 그에게 주리라. 무엇을 준다는 것입니까? 관을 제하며 면류관을 벗기라고 하였으니 왕의 면류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유다 지파로 오시지만 육으로는 유다 지파요 영으로는 유다 지파와 단절된 하늘로부터 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요셉도 아니요 레위 지파도 아니요 왕도 아니요 제사장도 아니요 이스라엘 국가도 아니요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실로가 오시기까지 유다가 홀을 이어가기는 하지만 그 홀을 그대로 이어 받는 것이 아니라 새롭고 완전한 왕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왕입니까? 9절에 보시면 사자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유다는 사자 새끼, 수사자, 암사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자란 짐승의 왕입니다. 라이온 킹입니다. 이러한 사자 즉 왕으로서의 유다의 모습을 두 곳에서 보고자 합니다.

 

 

 

 

민수기 24:9,17절. 발락왕이 발람 선지자를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라고 하지만 저주가 통하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축복이 나오는데 그 축복의 내용 중에 9절에서 이스라엘을 사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17절에서는 홀과 별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사자가 되고 홀과 별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 때의 일이 아니고 가까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장래에 일어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시편 60편 7절에서 유다는 나의 홀이라고 합니다. 유다 지파에서 홀이라는 것은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시편이니 자신의 왕됨이란 바로 하나님이 언약을 따라 주신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특히 사무엘하 7장에 나단의 신탁에 의하면 하나님이 다윗의 왕위를 영원히 세우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서에서 본 것처럼 다윗의 왕위가 끊어집니다. 그러나 누가 오시기까지입니까? 마땅한 자가 오시기까지입니다. 그리하여 오신 영원하신 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왕이 사자로서 오시는데 어떤 사자인지 계시록을 봅니다.

 

 

 

 

요한계시록 5:1-10절을 봅니다. “봉독” 요한이 웁니다. 왜 웁니까?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 인봉된 책이 있는데 이것을 하늘위에나 땅위에나 능히 펴거나 읽을 자가 없어서 웁니다. 그런데 장로중의 하나가 울지 말라고 하면서 유대지파의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이겼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자란 메신저가 아니라 라이온입니다. 창세기 49:9절의 라이온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가지나 열매가 아니라 다윗의 뿌리가 이겼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다윗의 뿌리로부터 나온 하나의 열매입니다. 그러니 다윗이나 아브라함의 뿌리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윗이 자신을 주라고 하였고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분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사자 즉 왕인데 어떤 왕입니까? 이것이 중요합니다.

 

 

 

 

6절입니다. 일찍 죽임당한 어린 양입니다. 왕으로 오신 분이 어떤 모습입니까? 일찍 죽임 당하신, 희생하신 어린 양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분이 그 책을 떼시기에 합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책이란 열려질 때 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시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 쏟아지면서 온 세상에 심판을 행하시는 심판주가 다윗의 뿌리가 되시며, 유다지파의 사자로 오시되 어떤 모습으로 오십니까? 일찍 죽임당한 어린 양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임 당하신 어린양 그분을 왕으로,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 심판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기에 예수 믿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제 모든 하나님의 인봉된 계시를 손수 집행하시는 분이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 양임을 잊지 마시고 우리의 마음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늘 향하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49:8-12  유다  2000. 11. 26.

 

 


강아지는 짖어도 열차는 달린다는 말이 있지요? 경부선 열차가 달리는데 옆에서 강아지가 아무리 짖어 된다고 하여도 열차는 아무런 상관없이 달리는 것입니다. 요즈음 도울의 강의로 인하여 기독교계가 KBS에 항의를 하고 여러 사람이 설교 중에 그의 잘못을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강아지는 짖어도 열차는 달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임을 믿는 것입니다. 누가 믿으라고 하여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사이기에 누구나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1:1절이 무엇입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누가 이 말씀을 믿습니까? 누가 변호한다고 해서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누가 이 말씀을 비판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말씀도 아닌 것입니다. 수천 년을 성경을 없애 버리려고 하였습니다. 문서비평이 일어났을 때는 성경이 사라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역사비평, 문서비평을 통하여 성경을 해체시킨다고 하여도 그러나 성경은 여전히 제 갈길을 묵묵히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세기 1:1절의 말씀을 믿을진대 믿기지 않는 말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몇 구절의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로마서 11: 36절입니다. “봉독” 에베소서 1:10절입니다. “봉독” 베드로후서 3:10-13절입니다. “봉독” 요한계시록 21:1-2절입니다. “봉독” 이러한 말씀이 믿어지십니까? 우리가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이 이 말씀대로 되어질 뿐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성취하여 가는 것입니다. 말씀이 운동력이 있는 것이며, 비가 와서 땅을 적시고 싹을 틔우고 열매를 내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그 입에서 나온 말씀은 헛되이 돌아가지 아니하고 말씀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에 돌아가는 일들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세상이 이렇게 되면 내가 어떻게 될까를 두려워하지 마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되는가를 관심을 가지는 것이 성도의 당연한 자세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이러한 관심이 본능적으로 싫은지를 우리가 말씀을 배워 가면 갈수록 더욱 절감을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신앙클리닉을 공부하면서 배운 것 한 가지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우리가 평소에 생각한 신앙이라는 것이 얼마나 엉터리가 많았는가를 확인하였을 것입니다. 
 

 

 


오늘은 야곱의 예언이 단지 한 늙은이의 유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가 되는 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야곱의 유언 중에서 유다의 부분을 확인하고자 그리하여 세상이 어떻게 말씀대로 되어지는 가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49:9절입니다. 유다라는 이름이 태어날 때에 찬송이라는 뜻으로 지어졌습니다. 유다는 레아의 네 번째 아들입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고 레아에게 사랑을 주지 않자 하나님이 레아를 긍휼이 여기심으로 자녀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총이 없는 레아에게 네 명의 아들까지 주시니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라고 이름을 짓는 것입니다. 이 이름의 뜻대로 유다가 형제들의 찬송이 되며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서 절하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누구에게서 그대로 성취가 됩니까? 다윗입니다. 다윗이 처음에는 형제들의 업신여김을 받습니다. 이 건방진 놈이 하는 대접을 받습니다만 이미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치고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형제들의 찬송이 되었으며 그리고 다윗시대 때에 가장 많은 적을 정복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형제들이 왕에게 절하여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이 예언되고 성취가 되는 것이 요셉의 경우와 비슷합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서 그것으로 형들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형들이 요셉에게 절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유다가 요셉처럼 희생의 뜻을 담고 있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베냐민을 대신하여 내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정신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희생당하는 자가 살려내는 방식이 언약의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요셉이 그리하였고 다윗도 처음에 희생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잘못한 것도 없이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희생당하는 자들을 사람들은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사야 53:3절에 보시면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다고 합니다. 메시야로 오신 분이 고난 받는 종으로 멸시받는 모습으로 비참한 모습으로 오셨기에, 희생자의 모습으로 오셨기에 우리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아니한 것입니다. 마치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미워한 것처럼 다윗의 형들이 다윗을 건방진 놈으로 본 것처럼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기름부음 받은 자를 우습게 여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가 예수님을 귀하에 여기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모습으로 자신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만 주님의 백성들을 모으시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시지 않으신다면 세상의 볼만한 것들을 주시는 것으로 나타난다면 아마 우리 중에 대다수가 탈락이 될 것입니다. 빽도 없고 돈도 없고 있는 것이라고는 없는 것만 있는 자들이라면 어디에 감히 줄이라도 설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의 나라는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미련한 모습으로 감추어져 있기에 찾는 사람이 적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인기 있는 곳으로 만들려고 하니 이것이 교회의 타락을 가져오는 지름길이 됩니다. 그렇게 하든 아니 하든 하나님의 일은 막히는 적이 없습니다만 우리의 시각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9절을 봅니다. 유다는 사자라고 합니다. 사자 새끼, 수사자, 암사자라고 합니다. 10절입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홀이란 왕의 지팡이입니다. 이것이 실로가 오시기까지라고 합니다. 그러면 사자라는 것과 홀이라는 말이 어디에서 나오는가를 봅니다. 민수기 24:9,17절입니다. “봉독” 발락 왕이 발람을 불러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였으나 저주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신이 임하여 축복의 말이 나와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람의 입에서 하나님의 신의 강권적인 역사로 나온 말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사자 같고 홀이 나온다는 내용입니다. 사자와 홀이 이스라엘 전체로 말하고 있지만 그러나 홀이 한 지파에서 나오는 것임을 볼 때 이스라엘 가운데서 유다지파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진을 치고 행진할 때 동편 가운데가 유다 지파입니다. 성막 사면으로 세 지파씩 진을 치고 행진할 때도 그렇게 하는데 유다 지파가 앞장을 섭니다. 그리고 사사기 1장에서 여호수아가 죽고 나서 가나안을 치러 올라갈 때 하나님께서 유다지파로 먼저 올라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60:7절에서 유다는 나의 홀이라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한 지파를 거론하여 나의 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홀, 왕위가 다윗에게 영원한 왕위로 세워진다는 것이 사무엘하 7장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다윗의 왕위가 영원하리라 하면서도 바벨론 포로시에 왕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21:26-27절을 봅니다. “봉독” 관을 벗기고 면류관을 제하라고 합니다. 언제까지? 마땅히 얻을 자가 이를 때까지랍니다. 이 말씀을 실로가 오시기까지의 예언으로 봅니다. 실로가 오시기까지의 말씀을 메시야 구절의 성취로 보는 것이 이 구절입니다. 사자니 홀이라는 부분은 다른 곳에서도 나오지만 실로라는 말이 나오지 않기에 여기서의 마땅히 얻을 자가 오시기까지를 실로의 변형된 단어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것을 메시아적인 내용으로 보는 것입니다. 즉 유다의 왕위가 벗겨지나 그러나 언제까지 메시야가 오실 때까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이제 영원한 왕위를 이어가시는 것입니다. 

 

 

 
홀, 왕의 지팡이에 대하여 봅니다. 히브리서 1:8절입니다. 시편 45;6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홀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시편 45:6절은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이 말씀의 성취를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아들에 관하여는”이라고 추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구약의 성경의 예언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성취로 보는 것입니다. 아들에 관하여 영영한 보좌와 홀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영한 보좌와 그 홀을 가지신 분이 바로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사자입니다. 요한계시록 5:1-10절을 봅니다. “봉독” 요한이 웁니다. 왜 웁니까? 보좌에 앉으신 분의 오른손에 인봉된 책이 있는데 이것을 하늘위에나 땅위에나 능히 펴거나 읽을 자가 없어서 웁니다. 그런데 장로중의 하나가 울지 말라고 하면서 유대지파의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이겼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자란 메신저가 아니라 라이온입니다. 창세기 49:9절의 라이온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가지나 열매가 아니라 다윗의 뿌리가 이겼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다윗의 뿌리로부터 나온 하나의 열매입니다. 그러니 다윗이나 아브라함의 뿌리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다윗이 자신을 주라고 하였고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분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사자 즉 왕인데 어떤 왕입니까? 이것이 중요합니다.

6절입니다. 일찍 죽임당한 어린 양입니다. 왕으로 오신 분이 어떤 모습입니까? 일찍 죽임 당하신 희생하신 어린 양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이 분이 그 책을 떼시기에 합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책이란 열려질 때 마다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시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곱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 쏟아지면서 온 세상에 심판을 행하시는 심판주가 다윗의 뿌리가 되시며, 유다지파의 사자로 오시되 어떤 모습입니까?

 

 

 

 

일찍 죽임당한 어린 양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임 당하신 어린양 그분을 왕으로 주님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 심판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기에 예수 믿는 것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제 모든 하나님의 인봉된 계시를 손수 집행하시는 분이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 양 즉 다윗의 뿌리 사자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앞으로 심판주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창세기 49:11-12절을 봅니다. 나귀를 포도나무에 메며 옷을 포도주에 빤다고 합니다. 아니 옷을 포도주에 빨면 어떻게 됩니까? 붉게 물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윗이 가나안 지경을 정복하고 나서 그 땅의 소산물의 풍요로움으로 주석가들이 보고 있습니다. 뒤에 나오는 포도주로 눈이 붉겠고 우유로 이가 희리라고 하는 내용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풍요로와도 그렇지 어떻게 포도주로 옷을 빱니까? 아마 포도를 따서 수확하여 발로 밟아서 즙을 짜니 옷이 붉어졌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다가 떨칠 수 없는 말씀이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유다지파에서 홀이 나오고 사자가 나오는 것입니다. 일찍 죽임 당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앞으로 재림하실 때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요?

 

 

 

 

요한계시록 14:17-20절을 봅니다. “봉독” 천사가 예리한 낫을 들고서 익은 포도를 거두어서 진노의 포도주 틀에 던지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밟는데 말을 타고 밟았는지 그 틀이 밟히니 피가 말굴레까지 닿았습니다. 포도즙이 아니라 피가 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11-16절을 봅니다. “봉독” 피뿌린 옷을 입었고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는 것입니다. 그러니 천사가 거두어 진노의 포도주 틀에 던지면 이 백마타신 분이 밟아 버리는 것입니다. 너무 무시무시한 장면 같습니까? 그러니 이러한 심판을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러한 심판을 정말 알고 있다면, 믿는다면 우리의 삶이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노아가 배를 만들고 있는 곳은 산위입니다. 그러나 산 아래에서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기 바쁜 것입니다. 누가 노아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 그보다 더 높이 물로 심판을 준비하고 계신 분을 기억이나 하겠습니까? 노아를 미친놈 보듯이 한 것입니다. 지금 주님께서 심판주로 오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사느니 죽느니 괴롭느니, 슬프느니 하는 것들에 초연해지지 않습니까? 사랑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다투는 일들이 우스운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자세로 살면 됩니까? 서로 사랑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나누어 주는 기쁨으로 사는 것입니다. 용서를 하고 용서를 받는 복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은혜와 긍휼을 입은 대로 은혜와 긍휼이 나오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 약하고 보잘 것 없는 자들입니다. 그러니 더욱 주님의 도우심을 사모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주님은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언약의 말씀을 따라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사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49:28-50:14  야곱의 죽음  2000. 12. 3.

 

 


언약을 받은 사람은 죽어도 언약은 영원하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으나 죽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언약은 영원하여 이삭에게로 연결이 되고 이삭은 죽으나 그 언약은 영원하여 야곱에게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이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이 이루어내고 계신 결과로 오늘 우리도 이 언약에 참여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복이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그 복이 모든 족속에게 미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동안 살펴보았던 야곱의 생애를 하나님이 친히 말씀하신 부분을 중심으로 야곱의 생애를 돌아보고 그 죽음의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야곱에게 하나님이 처음으로 말씀하신 것은 태중에 있을 때입니다. 야곱이 직접 듣지는 못하였지만 리브가에게 하나님이 야곱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출발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바울이 말하면서 내가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였다고 합니다. 아직 선과 악을 행하기 이전에 배속에 있을 때 그렇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이며, 성경의 특징이고 기독교의 특징입니다.

 

 

 

 

이 선택이 없어져 버리면 인간의 종교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이 아무리 정성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여도 하나님이 받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앙의 가장 큰 걸림돌이 바로 하나님의 선택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생애는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생생하게 보여주시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태어난 야곱은 어려서부터 자신의 야망에 붙들려 사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성공의 발판으로 삼고자 하는 것입니다. 형제이든 부모이든 친척이든 상관없이 오직 자신의 성공과 출세를 위한 도구들도 본 것입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면 함께 하는 것이고 도움이 안 되면 거짓말하고 속이고 도망가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야곱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우리와 꼭 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야곱이 나쁜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보통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지난 금요일 저녁에 장근식 강도사와 전화를 하였습니다. 지금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동안 성경을 통하여 발견한 인간의 죄성을 확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성도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믿음으로 살려고 한다면 단 하루도 살지 못하는 세상임을 확인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가 살려고 하니 얼마나 힘이 듭니까? 어떻게 양보하고 손해보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면서 살겠습니까? 그저 강한 자가 내 앞에 나타나면 굽신거리며 그의 비위를 맞추고 그를 이용하여 나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하려고 하며, 약한 자를 만나면 나의 희생물로 삼으려고 하는 세상 아닙니까?

 

 

 

 

야곱이 이러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야곱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주어지는가 하면 가끔씩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상황과 환경을 인도하시지 않으신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하심아래 있지만 그러나 야곱의 147년 동안 하나님이 야곱을 향하여 말씀하신 것은 몇 번 되지 않는 것입니다. 간접적으로 말씀하신 것을 합하여 약 9번 정도입니다. 그러니 야곱에게 이러한 말씀이 주어지는 것과 야곱의 힘들이고 애를 쓰며 살아가는 것과 비교를 해보자면 어느 것이 비중이 큽니까?

 

 

 

 

시간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147년의 생애 가운데 하나님이 친히 꿈에서 말씀하시고 얍복강에서 씨름하신 그런 시간을 다 합하여도 24시간이 안될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애를 쓰고 자신의 성공을 위하여 달린 야망의 세월은 얼마나 엄청납니까? 그런데 결국은 누구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곱의 생애 가운데서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그동안 그렇게 불철주야 자신의 성공을 위하여 애를 쓰고 고생한 것이 남는 것이 아니라 무엇만 남기게 됩니까? 하나님의 언약만 남는 것입니다. 그 남겨진 언약이 무엇인지 말씀을 찾아봅니다.

 

 

 

 

창세기 25:23절. 리브가에게 야곱에 대한 말씀. 27:27-29절. 이삭의 축복. 28:3-4절. 이삭의 축복을 반복함. 28:10-15절. 하나님께서 친히 야곱에게 말씀하신 내용. 31:3, 11-13절. 야곱에게 하나님이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심. 32:28절. 얍복강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함. 여기서 이름 바뀜. 35:1절. 세겜에서 지체할 때 다시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심. 35:9-13절. 벧엘에서 말씀하심. 야곱이 도망갈 때 약속하신 그 장소. 46:1-4절. 애굽으로 내려갈 때 하나님이 말씀하심.

 

 

 

 

이것이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말씀하신 내용의 전부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야곱에게 하신 말씀의 내용을 요약하고 보니 야곱이 147년 동안 살면서 남아진 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언약만이 남아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이 앞으로 이루어질 내용만 남은 것입니다. 그동안 야곱의 고생과 피와 땀이 남았습니까? 그 야망이 남았습니까? 오히려 그러한 고집을 부리다가 꺾어진 허리로 인하여 절룩거리는 흔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야곱입니다.

 

 

 

 

결국 야곱의 고집과 하나님의 고집의 충돌입니다. 누가 이깁니까? 두말 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기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무엇을 더 고집하시겠습니까?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인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국 하나님이 남기시는 것은 자신의 언약만 남기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 눈에 보이는 것, 사람들의 칭찬, 자신을 알아주는 것, 모두 모두 사라집니다. 안개처럼 사라집니다. 하나님의 언약만이 영원합니다. 
 

 

 


이러한 부르심을 우리가 입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십니다. 반드시 그 부르심의 목적대로 만들어 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편으로 두려움이 됩니다. 고집부리면 혼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큰 위로가 됩니다. 나의 모습이 비록 이러할지라도 주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고 나를 인도하시구나 하는 것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란 결국 하나님의 은사이지만 그 믿음의 내용이란 바로 하나님의 언약인 것입니다. 로마서 11:30절.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이제 야곱의 죽음의 장면을 봅니다. 무엇을 남기고 갑니까? 지난 2주간 살펴본 대로 자신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하실 일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그 예언대로 되는 것은 이 예언이 야곱의 사사로운 예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야곱의 유언대로 되었음을 지난주에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유다에게서 왕이 나오는 것입니다. 영원한 왕입니다. 그러므로 이 왕에게 절하지 아니하면 다 망하는 것입니다. 열두 아들을 축복하고서 자신의 매장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29절입니다. 자신이 열조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열조 곧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에게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예표로서 그 언약의 사람들이 묻힌 곳에 묻어 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맹세시킵니다. 야곱이 애굽에서 묻혔다면 호화분묘를 꾸몄을 것입니다. 바로왕이 죽으면 애곡하는 기간이 72일인데 야곱을 애곡하는 기간이 70일이었다면 왕과 버금가는 예우입니다.

 

 

 

 

이처럼 요셉의 권세가 막강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곳에 묻히길 원하지 않고 초라한 가나안땅의 아브라함이 사 놓은 그 곳에 묻히기를 소원한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마지막 유언입니다. 147년 동안 무엇을 남기고 갑니까? 무엇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까? 인생의 수고와 애씀이 무엇입니까?

 

 

 

 

시편 90편 1-12절을 봅니다. “봉독” 인생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의 목전에서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고 밤의 한 경점 같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이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가운데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평생이 일식 간에 다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여도 팔십입니다. 그러나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야곱이 바로에게 무어라고 합니까? 내 나그네의 세월이 130이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남겨진 자신의 인생의 한마디 아닙니까? 우리의 인생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신속히 날아갑니다. 인생이 40을 넘기면 5단위가 없어지고 10단위로 넘어간답니다. 그러니 날아가는 인생을 어떻게 살라는 것입니까? 11절입니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주여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를 알게 하소서.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수고와 슬픔뿐인 인생을 사시겠습니까? 지혜롭게 사시겠습니까? 야곱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그 험악한 나그네 세월을 살았지만 남겨진 것은 오직 주님의 약속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무엇을 많이 남겼습니까? 세상의 업적들이 있습니까? 아니면 앞으로 남기기 위하여 열심히 살고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 무엇을 남기기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 아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무엇을 위하여 사는 것입니까? 영원한 세계를 준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보이는 것을 남기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을 준비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즉 출세상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출세는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지만 우리는 출세가 아니라 출 세상을 목표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야곱의 매장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어서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40일 동안 미이라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집트의 미이라 만드는 법으로 시체를 처리합니다. 코 구멍으로 뇌를 긁어내고 옆구리로 내장을 드러내고 그 속에 향재료를 넣어서 미이라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 기간이 40일이 걸립니다. 그리고서 70일을 애곡하고 드디어 장례행렬이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누가 따라 갑니까? 이스라엘의 어른들이 다 따라 갑니다. 그리고 애굽의 관리들도 많이 따라 갑니다. 이러한 행렬을 보면서 무엇이 함께 더빙이 됩니까? 출애굽입니다. 지금 야곱은 죽어서 자신의 시체로서 출애굽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할 것을 이미 언약으로 받았고 자신의 시체를 가나안에 묻어 달라고 함으로서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질 것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최고의 성공이 무엇입니까? 내가 죽었을 때 그 사람은 참으로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평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가난하든 부자든 건강하든 병이 들었든 그런 평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가야할 곳입니다. 이러한 출애굽이 일어났고 이제는 영원한 출애굽이 우리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일평생 동안 남긴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의 땅에 묻히기를 소원하였으며 그 언약을 내다보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죽음조차 출애굽을 미리 보여 주는 행렬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것은 이러한 자세로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대하여 시위하는 것입니다. 데모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데모입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이 있음을 시위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죽음을 보면서 우리가 살아야 할 방향인 것입니다.
 

 


 

창세기 50:1-26  요셉의 죽음  2000. 12. 10.

 

 


일년 반 동안 창세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런 속도로 보신다면 수요일, 주일낮, 주일저녁 다 참석하면 성경을 평생 동안 한 번 정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분을 통하여 전체를 보고 전체를 통하여 부분을 보면서 보아 간다면 다 보지는 못하여도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는 알게 될 것입니다. 앞으로는 조금 더 많은 분량을 한번의 본문으로 하여 보고자 합니다. 이렇게 성경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을 알고 믿고자 하는 것입니까? 세상의 모든 일들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는 사실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45:5-8절을 봅니다. “봉독” 형들을 만난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알리면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생은 헤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형들이 죽이려하고 동생은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지만 결국 노예로 팔려가고 남의 집 종살이에서 유혹을 뿌리치다가 감옥에 가고 감옥에서 애굽의 총리가 되기까지의 모든 역사의 결론을 지금 요셉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신 것이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는 겁니다.

 

 

 

 

오늘은 요셉의 죽음 앞에서 두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요셉의 형들이 용서를 믿지 못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통하여 우리가 주님의 용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는 역시 요셉의 유언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그러면 먼저 요셉의 형들이 용서를 믿지 못하는 모습을 살펴봅니다.

 

 

 

 

15-17절을 봅니다. “봉독” 아버지 야곱이 죽고 나자 혹시 요셉이 다시 자기들을 보복하지 않을까 걱정을 합니다. 우리가 행한 악을 다 갚지나 않을까 염려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효자이기에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는 아버지를 의식하여서 형제들에게 잘해 주었지만 그러나 아버지가 죽고 나면 우리를 해치는 것이 아닌가 하고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마치 에서가 동생 야곱을 미워하여 죽이려 하였지만 언제까지 참습니까? 아버지 야곱이 죽을 때가 다 되었으니 ‘죽고 나면 보자’ 하는 것처럼 지금 요셉의 형들이 아버지가 죽고 났으니 보복을 하면 어떻게 하나 하면서 두려워합니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말을 상기 시키면서 용서해달라고 합니다.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 지라도 너는 용서하라고 한 그 말을 다시하면서 용서를 구합니다.

 

 

 

 

이것이 요셉의 형들의 모습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용서를 얼마나 믿지 못하는가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만나기 전에는 양심에 어느 정도 가책은 있었을 지라도 이 정도로 자신들의 죄악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노예로 팔아버린 그 요셉, 죽인 것과 다름없는 그 요셉이 지금 모든 권력을 가진 자로 나타나 있으니 늘 자신들의 죄가 생각이 나는 것입니다.

용서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안해하고 염려합니다. 그래서 요셉의 안색이 조금만 달라져도 벌벌 떠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리하여 형들이 다시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서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이러한 죄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죽인 것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 때에 주여 나를 용서하소서라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죄라는 것을 죄로만 여기고 있으면 그런 죄는 다른 선행으로 대신 갚아 낼 수 있으려니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말 죄인임을 아는 것은 오직 십자가 앞에 직면하여야 죄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 앞에 직면하여서야 자신들의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처럼 오늘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 앞에 직면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과 우리의 욕심과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 모든 것들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을 알지 못하면 우리가 주님의 용서를 시시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 이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용서받아 본 사람만이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형들은 용서를 받았지만 그러나 확신이 없었습니다. 용서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들의 모습을 보면서 요셉이 웁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형들의 불신에 대하여 요셉이 세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신앙의 모습입니다. 1) 19절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이것이 오늘 성도들의 자세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용서를 받은 자라면 적어도 이러한 자세가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모든 비행을 바로 잡는 길은 결국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손을 써서 어떻게 고쳐보려고 하면 더욱 일이 틀어지는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냥 두라는 말입니까? 라고 하지 마시고 21절까지를 먼저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을 대신하려고 하는지 아십니까?

 

 

 

 

내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양도함 없이 움직이려하는 것입니다. 내 가정을 내가 하나님처럼 하고자 합니다. 내 자녀를 내가 하나님처럼 키우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교훈과 훈계는 찾아보기도 힘이 듭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대신하고자 하는 교만함이 얼마든지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하나님을 대신하려고 할 수도 있고 장로가 하나님을 대신하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요즈음은 평신도연합회라 하여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단체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이 말씀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신앙입니다.

 

 

 

 

로마서 12:19절을 봅니다. “봉독” 하나님께 맡겨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교회 안에서 판단하고 분별하여야 할 일이 있습니다. 훈계하고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지 그러한 판단이 나의 감정이나 나의 뜻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창세기 50:20절입니다. “봉독” 인간의 악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보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다고 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이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나를 해치려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하더라도 주님의 약속을 믿고 원수를 내가 갚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인내를 요구하는지 모릅니다.

 

 

 

 

요셉은 이렇게 되기까지 몇 년이 걸렸습니까? 17세에 팔려서 30세가 되기까지 그리고 풍년이 7년, 흉년이 들어 2년이 되기까지 무려 22년을 지나서 형들이 양식을 구하러 왔을 때 알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눈앞에 닥치는 조그마한 경제적 손실, 또는 인격적인 모독을 얼마나 견디고 참고 기다리고 있습니까? 그 억울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고 기다릴 수 있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요셉을 보면서 우리가 배우는 바입니다. 
 

 

 


3) 그리고 창세기 50:21절입니다. “봉독”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라며 간곡히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요셉이 이렇게 된 것이 자신의 꿈을 가지고 자기의 야망을 이루어 내었다면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도구였음을 알고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전생애를 통하여 보여주는 계시의 절정이 바로 이것입니다. 죽임당한 자가 죽인 자를 살려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를 통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셉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가 예수님의 용서를 미리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34절입니다. “봉독” 새언약의 내용입니다.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는 기억도 아니 하신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용서를 받고서도 두려워 한 것은 다시 그 죄를 기억하고 우리를 벌하지 아니할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들이 정말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무슨 나에게 안 좋은 일만 닥치면 내가 죄를 지어서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용서하였다는데도 그렇게 벌벌 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님 그렇게 말씀하시면 그러면 죄를 지어도 상관없네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요셉의 형들이 요셉이 용서를 확인하여 주었다고 해서 다시 요셉을 죽이려고 하였을까요? 아니면 요셉의 그 용서에 평생 감사하면서 살았을까요? 후자이지요. 당연한 것입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의 그 용서 속에서 감사하면서 요셉이 무어라고 하면 얼른 얼른 순종하면서 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를 강조하면 사람이 방종하게 되지 않는가 하시는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런 염려는 아직 제대로 용서를 받지 못한 것이 아니가 하고 돌이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레미야 50:20절입니다. “봉독” 그날 그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발견치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를 짓지 않아서 없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죄를 사함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새 언약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놀라운 용서라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용서를 우리가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서도 용서의 삶이 나타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이러한 용서를 죄사함의 용서를 맛보고 또 우리 가운데서도 진정한 용서를 맛보는 것이 천국을 지금 맛보는 것입니다. 벌써 12월입니다. 아직 용서치 못한 부분이 있다면 용서를 하는 그리하여 따뜻한 겨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요셉의 임종입니다. 역시 야곱의 임종처럼 자신의 뼈를 가나안땅에 묻어 달라고 합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훨씬 오래 살았습니다. 제 2의 고향이라는 말이 있듯이 애굽에서 총리가 되기까지 한 사람인데 그 모든 것을 아무것도 아니게 여기는 것입니다. 애굽에서의 어떠한 부귀와 영화도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마지막 소원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묻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셉의 마지막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원입니까? 하나님의 약속 안에 들어가는 것이 정말 우리의 소원입니까?

 

 

 

 

창세기 50:24절을 봅니다. “봉독”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하나님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신 출애굽의 언약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권고하시는 날에 내 해골을 매고 올라가겠다고 하라 하고서 110세에 죽었습니다. 애굽의 그 부귀와 영화를 누린 곳에서 묻히기를 싫어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고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요셉의 유언이 어떻게 성취되는지를 살펴봅니다. 이미 수백 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출애굽이 일어납니다.

 

 

 

 

출애굽기 13:18-19절입니다. “봉독” 애굽땅에서 나올 때에 무엇을 들고 나옵니까? 요셉의 해골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얼마나 바쁜 때입니까? 출애굽의 상황에서 요셉의 해골을 취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빈틈없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요셉의 해골도 함께 출애굽을 합니다.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서 드디어 가나안땅에 도착을 합니다. 그리고 가나안에 정착을 함과 동시에 요셉의 해골이 가나안에 묻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24:32절입니다. “봉독” 요셉의 해골이 가나안땅에 묻히는 것으로 여호수아서가 끝이 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얼마나 빈틈없이 이루어지는 지를 우리의 눈으로 확인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인생의 목표가 무엇이어야 마땅합니까?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의 최고의 목표요 성공입니다. 그 나라는 이 땅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면 이미 그 나라를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마치면서 우리의 소망을 다시 점검하시고 주님의 약속 안에 있는 것이 가장 큰 인생의 행복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히브리서 11:22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이 지으시고 경영하실 영원한 터를 바라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주님의 날을 사모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창세기의 언약들이 어떻게 성취되는가를 살펴보면서 이제 우리가 무엇을 소망하며 살아야 하겠습니까? 요한계시록 22:20절입니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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