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세 기

[스크랩] 창세기 강해 1

공 상희 2009. 5. 6. 12:34


 

 

 

 

 

창세기 강해 1

 

 

 

창원 늘푸른 교회 이장우 목사

(1999. 7. 4. - 2000. 12. 10.)

 

 

 

 

目    次
1. 빛이 있으라 

2. 보시기에 좋았더라 
3. 안식 
4. 사람됨 
5. 유혹 
6. 찾아오시는 하나님 
7. 죄의 소원 
8. 가인의 후손 
9. 하나님과 동행 
10. 죄악의 관영 
11. 방주에 있던 자만 
12. 하나님의 권념 
13. 언약 
14. 덮어줌의 은혜 
15. 영걸 
16. 바벨탑 
17. 택한 백성 
18. 복의 사람 
19. 애굽으로 간 아브람 
20. 다시 가나안으로 
21. 십일조 
22. 아브람의 상급 
23. 언약 체결 
24. 이스마엘 
25. 전능하신 하나님 
26. 나그네 대접 
27. 웃음 
28. 아브라함의 기도 
29. 농담으로 여긴 사람들 
30. 롯의 처를 기억하라 
31.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32. 분리 
33. 브엘세바 
34. 여호와 이레 

 

 

 

 

 

창세기 1:1-5  빛이 있으라  1999. 7. 4.

 

 


하나님께서 천지를 무엇으로 창조하셨습니까? ‘말씀’. 성경은 누구의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말씀’. 너무 쉬운 질문을 하였지요? 이제 조금 어려운 질문을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까? ‘말씀의 능력’. 한 가지만 더 질문 합니다. 교회는 어떻게 유지됩니까? ‘말씀의 능력’. 그런데 사람들은 믿음이라든가 교회유지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아니라 사람들의 힘으로 되는 줄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이고 거대한 건물이 있더라도 무늬만 교회일 뿐이지 내용은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창조 사건에 어떻게 나타났는지 잘 살펴보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 원래 있던 빛이 나타났습니까? 원래 없던 빛이 말씀의 능력으로 만들어 졌습니까? 이것을 무에서 유로의 창조다, 그러지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만이 가득한 곳에 빛이 있으라 하시니 그 말씀의 능력으로 빛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어떻습니까? 이미 있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의 능력이 있기에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만 말씀으로 창조 하시고 지금은 팔장 끼고 구경만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여전히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말씀하셨듯이 지금도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의 역사를 계속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떠한 창조를 하고 계십니까? 처음 창조한 것이 인간의 범죄로 뒤틀려 졌기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재창조의 일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재창조의 작업으로 인하여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피로 살려내는 것입니다.


 

 

 
믿음’을 생각해 봅시다. 사람들은 믿음을 자꾸만 자기가 믿어 준 것을 믿음이라고 우깁니다. 만약 믿음이 사람이 믿어 주었기에 믿음이 생겼다면 그럼 믿음은 인간의 신념의 산물이지 하나님의 선물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믿음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 없는 가운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 내셨지요? 그때 나사로야 나오너라, 라고 무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나사로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을 순종해서 살아났습니까? 아니지요. 죽은 자가 무슨 수로 말을 들을 수 있습니까? 주께서 말씀의 능력으로 살려내신 것이지요! 윤형주씨가 작사 작곡한 복음성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물이 변하여 포도주 됐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바디메오가 눈을 떴다네.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다네. 예수님 예수님 나에게도 말씀 하셔서 새롭게 새롭게 변화시켜 주소서.

 

 

 

 

말씀의 능력이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것도 말씀을 통하여 만나는 것이고, 우리가 주님의 사람 되는 것도 주님의 말씀으로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생각해 봅시다. 교회 역시 사람들은 사람들이 세우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의 동기 목사들도 개척을 하기도 하고 개척을 준비하는 목사도 있습니다. 개척할 때 제일 어려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제일 큰 문제가 돈이라는 것입니다. 최소한 한 장은 있어야 한다고 그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를 세울 수 있다면 모양은 교회 흉내를 낼 수 있어도 내용은 아닙니다. 교회란 주님께서 친히 세우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피 값으로 사서 세운 것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특정 건물이나 사람의 조직이 아니라 바로 예수 믿는 여러분이 교회요 성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교회를 누가 세울 수 있단 말입니까? 누가 여러분을 위하여 피 흘렸습니까? 목사입니까? 이 교회 개척멤버 입니까? 혹시 사람이 피를 흘리고 땀을 흘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교회를 세우시고 유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자 빛이 생겼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말과 달리 그 말씀이 이루어 내시는 것이기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도 창조력이 있어서 자동차도 비행기도 만들어 내지 않느냐고 말하지요?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재료를 가지고 만들어 내는 것이니까 무에서 유의 창조는 아닌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이 신념을 가지고 커다란 계획을 가지고 과학을 발달시키면서 인류를 더 행복하게 만들겠다고 발전에 발전을 거듭할수록 인류는 점점 더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발전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그러나 이제는 발전이란 개념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발전을 멈출 수가 없는 것이 인류의 현실입니다. 끊임  없이 더 좋은 차, 가전제품, 생필품들이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으니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가 내리막길로 달리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사태를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이라는 유대인 랍비는 수렁에 빠진 황새에 비유합니다. 수렁에 발이 빠져서 나오지 못하는 황새가 꾀를 내었습니다.

자신의 긴 부리를 땅에 박고서 발을 빼낸 것입니다. 그러나 이걸 어쩝니까? 발은 빠져 나왔지만 부리가 수렁에 박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류의 미래는 이와 같습니다. 모두가 무너질 바벨탑을 열심히, 열심히 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관심 있게 보아야 하고 그 약속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온천지는 없어지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끝을 알고 있는 자는 지혜로운 자입니다. 성경의 끝을 잠시 보면서 말씀이 왜 이다지도 중요하며 왜 말씀대로만 되는지를 알고자 합니다.

 

 

 

 

요한계시록 18:1-4절입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 지더라 힘센 음성으로 외쳐 가로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주의 말씀으로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세상과 분리되는 것입니다. 가치관이 방향성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이란 고아와 과부를 환난 가운데 돌아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왔습니다만 결국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나오시는 분의 최고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지를 알고 우리도 그의 말씀에 함께 참예하는 것입니다.

이제 빛이 있으라는 그 말씀의 위력이 단지 천지를 창조하신 것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살아 역사하는 말씀인줄 믿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아직 내가 그래도 뭔가 믿음의 뒷받침을 해야지 하는 분을 위하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하면 기부터 먼저 죽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들어오기는 아브라함의 영웅적인 믿음만을 들어 왔기 때문입니다. 어떤 식입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부르시자 친척 본토 아비집을 떠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 그리고 100세에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 바쳤다 이런 식의 아브라함만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자 그럽니다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어떻게 이루어 내시는가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드러나는 것이지 사람의 영웅적인 결단이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아브라함이 믿음이 좋아서 당장 나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누가 안 떠나고 버틸 수 가 있겠습니까?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신 그 능력이 아브라함을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25년의 수많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직접 목격하고서야 아들을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시고야 마는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이루어 낸 것을 보고서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잘 안 믿어집니까?

 

 

 

 

로마서 4:1-3,17절을 봅시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바 되었느니라.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이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시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을 믿게 하십니까?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더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 아닙니까? 우리는 믿음이 없는데 믿음의 사람으로 불러 주시니 믿음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결심과 의지를 믿는 것이 아니지요? 이러한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는 곳 한 곳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아 거의 외우는 말씀인데 사도행전 1:8절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말씀을 가지고 대부분 표어를 삼는데 증인이 되자 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이 임하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증인이 되게 하시겠다는 주님의 의지입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기에 증인이 되기 싫어도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유대인들에게만 전하였습니다. 그러니 복음이 사마리아와 이방인에게 넘어가리라는 주의 약속이 지연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루살렘 교회에 핍박을 가하여 흩어지게 하심으로 사마리아와 이방인 지역까지 복음을 전하도록 주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증거가 사도행전입니다. 베드로가 오순절날 성령이 임하여 복음을 전하였지만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도록 환상을 세 번이나 보여주시고 고넬료가 보낸 사람을 따라 가라고 성령께서 말씀하시자 마지못해 나서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도의 역사가 바로 주님께서 사도행전 1:8절에 말씀하신 그 말씀을 이루어 내시는 것이 사도행전입니다.

 

 

 

 

이처럼 주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보면 볼수록 처음에는 내가 말씀을 보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말씀이 말씀을 당깁니다. 그리고는 말씀이 나를 삼켜버리는 것이지요. 마치 술 먹는 사람들 이야기 비슷합니다. 이제 우리가 말씀에 취할 때입니다. 요한계시록 1:3절에는 때가 가깝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더욱 주의 말씀의 능력을 맛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모스 8:11-13절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오늘 우리의 목마름과 배고픔이 양식과 물이 아니라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리심을 믿으시고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 하듯이 우리의 심령이 주의 말씀을 갈급해 하는 심령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한곳 더 찾아보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히브리서 4:12-13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 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의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듯이 드러나느니라.”

말씀이 살아있어 운동한다고 합니다. 어떤 살아있는 운동을 합니까? 우리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는 예리한 칼로 표현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말씀의 칼로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속에 숨어 있는 온갖 죄악들이 말씀의 검으로 도려내져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너무 아프고 때로는 분노가 일어 날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염려는 마십시오.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신 주의 말씀의 능력이 그러한 것도 넉넉히 이기게 하셔서 주님을 찬양케 될 날이 올 줄을 믿습니다.

 

 

 

 

 

창세기 1:6-31  보시기에 좋았더라  1999. 7. 11.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는 말씀이 오늘 본문 말씀에서 몇 번이나 나왔지요? 여섯 번입니다. 1:4절에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까지 합하면 창세기 1장에 7번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나셔서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창조세계에 잘 나타났기에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도 자신이 무엇을 만들어 놓으면 그것이 자기 뜻대로 되었을 때 좋아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무엇을 만들어 놓은 것과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의 차이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은 불편을 극복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만들어 내는 것은 결코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만 선하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죄인이기에 아무리 좋은 것이라고 만들어 내어도 거기에는 반드시 좋지 않는 것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쉬운 예를 든다면,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유기농법으로 농사지은 제품을 찾고 있습니다. 워낙 인위적인 농산물이 많이 나오니까 무엇이 제철에 나오는 것인지 농사짓는 사람도 모를 지경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농부들이 어떻게 하든지 농산물의 희소가치를 높여서 가격을 높게 받으려고 비닐하우스를 하고 인위적으로 농산물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리고는 야! 좋다 이제 비싸게 물건을 팔 수 있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제품이 모양과 빛과 맛은 낼 수 있어도 제철에 자연 상태에서 나온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지요. 심지어 덜 익은 과일을 먹으면 배탈이 나듯이 겉모양은 익은 것 같더라도 속은 억지로 마지못해 온도와 열을 받아 만들어 졌기에 덜 익은 과일에서 나오는 독소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사람들이 자연 그대로의 식품이 좋은 것인 줄 알고 유기농으로 농사짓는 사람과 계약을 하여 농약 치지 않고 농사를 짓게 합니다. 그래서 소출이 적고 비싸더라도 자연 그대로의 식품을 좋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농산물뿐만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 내는 모든 것이 이러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지어내신 것이 보기에 좋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을 보시기에 좋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이 말씀을 중심으로 증거 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만드실 때에 사람과 의논하셨습니까? 아니지요. 성부 성자 성령께서 의논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신적 작정이라고 말합니다. 천상의 회의를 할 때에 누가 하나님의 창조에 보탬을 주었습니까? 오직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선한 세상을 선물로 받았을 뿐입니다. 만약 사람이 공기를 돈을 주고 사서 마신다면 얼마를 주어야 할까요? 1분에 얼마를 받으면 적당할까요? 1분에 1억이라도 정말 공기를 사서 마셔야 한다면 1분을 살기위해서 공기를 사야지요? 그러면 저는 0.1초 분량의 공기도 살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100억대의 재산이 있어도 겨우 100분 동안만 살 수 있지요? 그런데도 인생이 얼마나 교만한지 하나님의 창조를 우습게 여기며 감사치 않고 있는 자들이 벌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선하신 하나님께서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동일하게 햇빛과 비를 주시지요? 출애굽 때처럼 얼마든지 구별하여 재앙을 내리듯이 비도 구별하여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심이 이렇게 크시니까 사람들은 의례히 있는 것처럼 당연히 여기고 있습니다. 공기뿐입니까?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다 그렇게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이런 좋은 세상에 사람이 범죄 함으로 인하여 좋지 않은 것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만들어 놓으신 것을 사람이 망쳐 버린 것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것을 보십시오. 도대체 선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것은 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추구하는 쪽으로 무엇을 만들어 냅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발전이라고 하지만 발전이 좋은 것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의 좋음과 인간의 편리를 위하여 만들어낸 것의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무엇을 좋아 합니까?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을 좋아합니까?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을 좋아합니까? 

 

 

 

 

우리의 원망과 불평의 거의 전부가 무엇 없음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선한 것 없어서 안타까워하십니까?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 없어서 안타까워합니까? 거의 후자일 것입니다. 냉장고 세탁기 없을 때는 그것만 있으면 행복할 텐데, 하였지만 냉장고 세탁기 사들이는 순간 소니 제품이 나오니 어제까지 좋던 것이 오늘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의 선함이 없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구하는 것이 사실 인간으로는 불가능 합니다.

 

 

 

 

지금 새벽기도회 때 산상설교를 가지고 기도하고 있습니다만 누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 위하여 마음이 애통하며, 주리고 목말라 합니까? 의에 주리고 목말라서 철야기도, 금식기도 하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기도원에서 구국 기도회 하는 곳 많지요?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기도회 보았습니까? I.M.F 극복 기도회는 보았는데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것 보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것을 좋아 하는지 아십니까?

 

 

 

 

세상은 그렇다 해도 교회는 하나님께서 피로 값 주고 만들어 놓았으니 교회만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것만으로 감사하고, 좋아하고, 기뻐해야 하는데 교회마저 하나님의 솜씨를 좋아하기 보다는 사람의 솜씨를 좋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주신 것 창조의 모든 것을 인하여 감사하는 것이 당연 할뿐 아니라, 주의 피로 재창조하심으로 주시는 영생, 죄사함, 하나님의 자녀, 그러므로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받는 것 이러한 것에 대하여 정말 감사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자꾸만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엄청난 일보다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자꾸만 하나님의 일처럼 속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어떻게 구분 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사람이 결코 할 수 없는 일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예배당을 크고 멋있게 짓는 일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을 주시는 일은 누가 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교회 안에서 조차 이런 구분이 안 되어 있기에 사람의 일을 하나님의 일인 것처럼 자꾸만 독려를 합니다. 하나님의 일 하자고 외치는 그 일이 하나님의 선하심이 드러나는 일이 아니라 얼마든지 사람의 힘만으로 가능한 일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이라고 우기면 안 되지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란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어떠한 것에도 하나님의 선이 유지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신 것이 무엇인지 정리가 좀 되십니까? 정리 보다는 혼돈이 더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말씀을 한 곳 찾아봅시다.

 

 

 

 

출애굽기 20:25절. “네가 내게 돌로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곳에서 하나님 앞에 제물을 드릴 때 돌단을 쌓을 경우 그 돌을 정으로 다듬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듬으면 부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돌로 단을 쌓을 때 다듬으면 쌓기도 쉽고 보기도 좋을 텐데 다듬지 말라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의 왕궁에 가보면 얼마나 많은 돌을 잘 다듬어 바닥에도 깔고 층계도 만들어 놓았습니까? 석굴암도 돌로 다듬어 만든 것이지요? 이처럼 돌로 다듬어 세우면 견고하고 멋있고 위엄도 있어 보입니다. 그러므로 왕적인 권위가 드러나고 종교적인 제단에는 사람의 현란한 기술이 동원되어 그들이 섬기는 신적 권위를 높이는 일에 동원됩니다. 물론 성경에도 성막을 만들 때 솜씨 좋은 사람이 주의 신의 능력을 입어 성막도 성전도 짓습니다만 그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모형을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인위적인 솜씨를 발휘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베드로 대성당 같은 거대한 건물을 만들면서 무엇을 팔았습니까? 면죄부를 팔았지요? 헌금 한 것만큼 죄가 용서받는 다는 것 이지요 예수님의 속죄를 돈 주고 사려고 한 것입니다. 요즈음은 건축헌금 하면 복 받는다는 말과 꼭 같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선하게 이루어 놓으신 것을 사람이 얼마나 망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화랑에 가면 작품 밑에 무어라고 써놓았습니까?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 손대면 망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깨끗이 세탁하여 다리고 있는데 아이가 흙 묻은 손으로 거들어 줄려면 뭐라고 하십니까? 가만히 좀 있어라 가만히 있는 것이 돕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은혜가 없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은혜란 너무나 생소한 것입니다.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좋아 하지 아니합니다. 도대체 날 뭘로 보고.. 자존심 상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 된 모습입니다. 우리는 평생토록 주님으로 받고만 사는 사람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한량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자꾸만 다듬어 보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만드신 것만이 참으로 좋은 것입니다. 선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거칩니다. 사형 형틀입니다. 사람들이 꺼려하는 것입니다. 미련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를 무슨 수로 포장을 하겠습니까? 이것도 찾고 저것도 찾을 수는 없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 붙들든지, 아니면 적당하게 각색하고 다듬어서 사람의 솜씨와 사람의 영광도 함께 드러내 보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끝으로 예화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이현주 목사라는 글 쓰는 분의 책에 다듬지 말라는 이 말씀을 하면서 충청남도 아산에 있는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를 실어 놓았던 것을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충청남도 아산에 학이 많이 살고 있어서 학촌이라는 곳이 있답니다. 이곳에 박생원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하루는 아이들이 알에서 갓 태어난 새끼 학을 소나무 둥지에서 꺼내 와서는 놀고 있는 것을 보고 학은 귀한 생물이라고 호통을 치면서 도로 올려놓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울상을 하면서 벌써 죽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보니 정말 죽은 것입니다. 어린 새끼를 주물렀으니 죽을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죽은 새끼라도 올려놓으라고 하였는데 그 다음날 아이들이 왁자해서 내다보니 그 학 새끼가 살아났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직접 둥지에 가보니 살아 있는 것입니다. 죽은 새가 다시 살아나다니 하면서 그 둥지를 살펴보니 그 둥지 바닥에 주먹만한 돌이 있었죠. 죽은 새가 저절로 살아 날리는 없고 아마 이 돌에 신통력이 있을 거야, 하고 돌을 꺼내 와서는 서울에 사는 자신의 친척 박승지에게 건네주었고, 박승지는 중국에 사신으로 가면서 넓은 땅이니 이 돌을 알아 볼 자도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들고 갔죠?

 

 

 

 

죽은 학을 살린 돌이 조선에서 왔다는 소문을 듣고 어떤 상인 두 사람이 왔는데 돌을 보자는 겁니다. 보고서는 참으로 귀한 물건이라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돌이오? 천년에 한번 날까 말까하는 돌인데 서해 유사 지경에서 가끔 나오는데 죽은 자도 가슴에 이 돌을 품어두면 살아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환혼석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천금을 주고도 못사는 것이랍니다. 천금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하여 천금을 주시겠소? 그러자 부르는 것이 값이라고 하면서 며칠만 말미를 주면 돈을 장만해 오겠다는 것이죠?

 

 

 

 

그래서 며칠 동안 무료하게 있는데 도대체 이 돌이 무엇인데 천금이나 하는가 하여 보자기에 싸 두었던 돌을 구경이나 하려고 꺼내어 보았는데 새똥도 묻어 있고 지저분하였지요. 그래서 이 박승지가 그 더러운 것을 깨끗이 닦아 내기 시작 하였겠죠? 며칠을 정성을 다하여 닦다보니 드디어 깨끗하게 반질반질 빛이 나는 것입니다.

드디어 약속한 날짜에 그 상인이 와서는 그 돌을 달라고 합니다. 천금을 마련하여 왔지요. 그래서 돌을 꺼내는 순간 낯빛이 어두워지면서 소리를 질렀지요. 허어 이거 큰일이로군. 아니 왜 그러시오? 누가 이렇게 반질반질 닦아놓았소? 그야 나지요. 이제 이 돌은 환혼석이 아니오. 참으로 귀한 보물을 못 쓰게 만들어 놓았구려, 하면서 돌아갔고 이제 자신의 손때로 정기를 잃어버린 환혼석만 물끄러미 내려다 봤을 뿐이라는 이야기가 아직도 아산땅 학마을에 남겨져 떠돌고 있답니다.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이야기 이지만 오늘 말씀을 이해하는데 조금의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내가 만들어 낸 것보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더욱 풍성히 체험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홀로 이루어 내셨기에 사람의 손길이 가지 않은 상태를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좋다고 하실 곳은 한 곳 뿐입니다. 주님 홀로 십자가 지고 가시면서 이루어 내신 그 십자가의 사건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 보시기에 좋다는 평가를 받는 길이 주님의 십자가 아래에 있는 길 외에는 달리 길이 없다는 사실을 아시고 주님의 십자가 그늘에서 쉬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2:1-3  안식  1999. 7. 18.

 

 


안식이 무엇입니까? 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쉬신 이유는 힘들어서 쉬었겠습니까? 아니겠지요.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을 다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말씀하셨죠? 하나님께서 실수 없이 잘 만드셨기에 보시기에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하신 분이시기에 그 창조 세계가 보시기에 선한 것입니다. 좋더라는 표현이 그냥 눈으로 보기에 좋다 하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이 드러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힘이 들어서 쉬신 것이 아니라 더 손 될 것이 없도록 완성되었기에 하나님께서 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안식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완성된 상태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되었기에 이 날을 복주고 거룩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날을 나중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제 4계명으로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안식일을 지키면서 하나님의 안식의 의미를 알아야 하는데 이것을 율법으로 받아 자신들이 법조문처럼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서 창조의 완성된 그 안식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날 지키는 일에만 매달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한계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도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안식교인 들이지요?

 

 

 

 

이들은 지금도 안식일을 지키기 위하여 자기들 끼리 모여서 삼육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까지 만들어 토요일은 지키고 있습니다. 안식일이 무엇을 보여 주는지를 모르고 아직도 그림자인 날짜를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식교인만 날을 붙들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 외의 것은 믿지 않는다는 것인데도 예수 믿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을 믿고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주일성수 한다니까 ‘안상홍 하나님의 교회’라는 곳에서 어떤 전도지를 만들었는가 하면, 교회사 역사 중에서 로마 황제가 태양 숭배하는 날을 예배하는 날로 바꾸었기에 주일을 지키는 것은 태양을 숭배하는 이방신의 날이다, 하면서 교회사 몇 페이지 하면서 제시하는 것입니다. 평생 훈련받은 것이 주일성수, 십일조만 하면 예수 믿는 것이고 천국 가는 것처럼 배웠으니 이들의 말에 현혹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모입니까? 날마다 모이죠? 그래서 모이기를 힘쓰는 것이지요. 이 말을 전에 청년회에서 하였는데 마침 그 주에 친구 집에 갔는데 그런 사람들을 만나서 주일을 지키는 것은 태양을 숭배하는 날인데 당신은 무슨 날 지키느냐고 해서 나는 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다고, 언제 모이느냐고 해서 초대교회처럼 날마다 모인다고 하였더니 그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하더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기 보다는 자기가 지키는 날짜를 붙들다 보니 이런 이단들 앞에 말 한마디 제대로 대답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의 안식과 우리로 하여금 안식하라신 그 뜻을 성경에서 찾아보고 참된 안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창세기에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안식하시고 사람들에게도 안식케 하신 이유는 노동을 그치고 쉬면서 하나님의 창조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존재의 근거를 자신의 활동에 둡니다. 그래서 활동을 잘하면 제대로 된 인간으로 여기지만, 활동을 못하는 식물인간은 인간 대접을 잘 못 받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엿새는 일하고 7일째는 쉬라고 하신 것은 쉼 속에서 자신들의 삶의 근거가 자신들의 노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에 있음을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창조 하실 때 사람의 손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그 상태, 보시기에 좋으신 그 상태를 쉼을 통하여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식일이 앞으로 어떻게 영원한 안식으로 올 것인지를 나타내는 안식입니다. 이 안식일이 율법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는 이미 인간의 범죄로 하나님의 안식이 방해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새롭게 일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창조의 안식에서 이제 재창조의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하시면서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창조의 안식이 구원의 안식으로 발전하고 있음이 이미 구약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0:8-11절.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니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창조를 말씀하면서 안식일을 쉬라고 하십니다.

신명기 5:12-15절.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15절) 이 말씀은 애굽에서 구원 받았음을 인하여 안식일을 쉬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창조와 구원 모두가 사람의 노동과 상관없이 주어짐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도 우리가 그 선하신 분의 일하심으로 받는 것처럼, 구원도 하나님의 강한 손과 편 팔이 구원하였다는 것이 사람의 일함이 아니라는 뜻에서 같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식의 날 지킴을 통하여 앞으로 참된 안식을 주러 오실 분을 내다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였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오히려 안식일 날 지킨다고 참된 안식의 주인을 배척하게 된 것입니다. 이 부분은 요한복음에서 다시 말씀드리기로 하고, 안식일의 완성이 바로 예수님이기에 이제는 날과 달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왜 날과 달과 안식일지킴이 아닌지를 신약 두 곳의 말씀만 찾아보겠습니다.

 

 

 

 

갈라디아서 4:10-11절.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하노라” 갈라디아 교인들이 복음을 듣고 나서 율법주의자들이 와서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라 하니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바울이 수고한 것이 무엇입니까? 오직 십자가만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데 그 십자가의 능력을 무용지물로 만든다는 것이지요?

 

 

 

 

골로새서 2:16-17절.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그림자의 역할은 실체가 옴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그림자를 붙드는 것이 아니라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따라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시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날에 붙들려 있는지, 일요일 낮예배는 많이 오면서 밤과 수요일은 등한시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초대교회는 날을 정하여 모인 것이 아니라 날마다 모였다고 합니다. 그것이 법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주의 말씀의 교제가 좋아서 모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날짜를 지키기 위한 모임이 아니란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라 하신 것은 누구를 위한 안식이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안식을 먼저 생각하시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안식을 먼저 챙기시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는 구원도 내 중심의 구원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주님의 이름을 위한 구원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최종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최종적인 목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도 하나님의 안식에 우리가 동원되어짐으로 함께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의 개인적인 구원이 최종 목표가 되어 버리면 지금 하늘나라에서 우리가 올 것을 준비하기 위하여 천사들이 열심히 우리 집을 짓고 있다는 것을 보고 왔다는 사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도 우리의 공력에 따라 평수가 결정된다고 하면서....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여 내신 것은 하나님의 안식하실 처소를 만드시기 위하여 구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손으로 직접 거처할 처소를 만드시는데 그 일을 위하여 구속하여 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을 좀 보신 분은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이 처소를 준비하러 가신다고 하신 말씀을 아실 것입니다. 이 처소도 우리가 거할 집의 개념이 아니라 우리 안에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를 마련하기 위하여 하늘에 오르셔서 성령을 보내실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처소로 삼으신다는 말씀이 출애굽 직후에 나옵니다.

 

 

 

 

출애굽기 15:17절.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구속하여 내신 것입니다. 신약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16절.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고린도전서 6:19절.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이 우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께서 자신의 처소를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처소가 완성되면 하나님은 안식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이 안식은 처음 창조의 안식과 달리 영원한 안식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안식 역시 힘들어서 쉬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재창조가 하나님의 손으로 온전하게 완전하게 마무리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재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주님의 처소가 다 만들어지지 않았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계획안에는 완성되었으나 지금도 주의 처소를 찾아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순교자들이 자신들의 피를 신원해 달라고 요청하자 아직 순교의 수가 차기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그 수가 다 차면 하나님의 처소가 완성되는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안식에 동원된 자는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19-22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거대한 건물을 연상하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주의 택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 즉 성전이 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성될 때 하나님께서 안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 된 자라면 이 안식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어떤 날짜를 지킴으로 안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안식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안식을 얻지 못한 자는 이 세상에서도 참된 안식을 누리지 못할 뿐 아니라 저 세상에서도 밤낮 쉼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11,13절에 보면 밤낮 쉬지 못하는 자와 쉬는 자가 나옵니다. 주안에서 죽는 자는 쉼이 있는데 그렇지 못한 자는 쉼이, 안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안식에 참여 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선물인지 아시겠습니까? 이러한 안식을 선물로 받은 자는 이 안식의 소중함을 알고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을 보고서 말씀을 맺겠습니다.

 

 

 

 

히브리서 4:1-11절.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 가는도다 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창세기 2:4-25  사람됨  1999. 7. 25.

 

 


창세기 1장은 창조를 순서적으로 나타낸데 비하여 2장은 사람의 창조를 우선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창조의 마무리가 인간의 창조라는 것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다스리게 하시려고 하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는 말씀이 창세기 1장 26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것이, 같은 흙으로 만든 동물과 새들과의 차이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사람됨이란 하나님의 형상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다스리며 보살피는 것을 수행함과 동시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사람됨입니다.

 

 

 

 

이것은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사람이 창조세계를 다스림을 통하여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피조물이기에 자신을 만드신 창조주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순종해야할 한 가지 기준이 바로 선,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따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한가지의 법을 통하여 자신의 피조물 됨을, 즉 사람됨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당합니까? 아니지요. 지극히 당연하고 마땅한 것입니다.

100가지를 금한들 안 지키면 안 되는 것이 지음 받은 자의 자세이지요? 그런데, 흔히 사람들은 선악과를 에덴동산에 만들어 놓지 않았다면 죄가 들어오지 않았을 텐데, 하는 말을 합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지요? 그러한 생각은 죄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려는 죄된 속성입니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따먹지 말라는 말씀은 선과 악을 결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그 상태가 선인 것입니다. 그런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일을 뱀의 유혹을 받아 따 먹게 되지요? 이때 뱀의 유혹이 무엇입니까? 너도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된다.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셔야 하는 선악의 기준을 이제 사람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완전한 의미가 아니라 타락한 죄인으로서 선악의 체계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의 불행의 시작입니다. 아니 선악을 알아서 잘 대처를 해야 하는데 왜 선악을 아는 게 잘못되었고 불행의 시작이라는 것입니까?

 

 


 
그 첫째 이유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선과 악이 결정되어야 하는데 이제는 사람의 입장에서 선악을 결정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됨이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름이 사람됨인데 이제는 선악과를 따먹고 나니 자기중심적인 선악체계가 세워진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자기의 기쁨, 자기의 이익이 선악의 기준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내가 기쁘고 이익이 되면 선이고 나에게 손해가 오면 악인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선악체계가 온 세상에 가득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창세기 3장에서 바로 증명이 됩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으실 때 아담이 숨어 있다가 하나님께서 내가 먹지 말라한 것을 네가 먹었느냐? 물으실 때 아담이 뭐라고 합니까? 창세기 2장 23절에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해놓고는 이 여자 때문에 따먹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이 여자가 내게 주어서 먹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진리관이 들어 나지요? 자신에게 손해가 오는 것을 악으로 여기고 그 책임을 하나님과 여자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나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는데도 똑같은 현상이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니까 부인할 수 없는 아담의 후손인 것입니다.

 

 

 

 

아담만 그렇습니까? 하와도 꼭 같이 뱀에게 전가를 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잘되면 자기 탓 못되면 조상 탓 하는 것도 역시 선악과 따먹은 후손의 표시입니다. 그러면 자기 탓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하겠지요.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 탓이라고 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대부분 “그래 알았다 내가 잘못했다 그래!” 이러는 것이 자기 잘못이 아니라 더러워서 내 잘못이라고 해준다는 것이지요.

 

 

 

 

워낙 세상이 남의 탓만 하다가 보니 카톨릭에서 내 탓이오 운동을 사회운동으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래서 차에다가 스티커를 붙여 다니는데 어디에 붙여야 ‘내 탓이요’가 됩니까? 운전석 앞에 붙여야지요. 그래야 볼 때마다 내 탓이구나, 할 텐데 차유리 뒤에다 붙여 놓으니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불행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됨에서 멀어진 그 값을 우리가 함께 주고받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 이익에 따라 선악을 결정하는 것뿐 아니라 스스로 선과 악을 정하여 악을 행하면 자신의 선한 행위로 악을 상쇄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양심이다, 도덕이다, 인간의 이성이다, 라고 여러 가지로 말하고 있지만 이러한 선악의 구조를 사람들이 스스로 정하여 놓고서 자신의 행위를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불행인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이 세상에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착한일 하면 복 받고 죽어서도 좋은데 가고, 나쁜 일 하면 벌 받고 죽어서도 지옥에 간다고 모두가 말합니다. 전도를 해보면 거의 다가 예수 믿어서 천국 가는 게 아니라 자기 행위로 지옥도 천국도 간다고 말합니다. 이건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아이든 어른이든 예외가 없습니다. 실감이 안 되면 전도를 해 보십시오.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갑니다, 그러면 뭐라고 그래요? 예수 믿는 네나 잘해라, 그러지요. 네가 천당 가면 나는 만당 간다, 그러지요. 예수 믿는 너 보다 내가 양심 더 바로 쓰고 산다, 내 걱정 말고 네 걱정이나 해라는 것이지요? 사실 이런 소리를 듣는 우리가 잘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사람보다 더 독하고 더 악착같고 사기꾼 거짓말쟁이가 많으니까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좁은 문 좁은 길이 되어야 합니다. 넓은 문 넓은 길로 자가용 타고 쑥쑥 들어가는 그런 곳 말고 좀 수구려 겨우 들어가는 그런 교회가 되면 사람이 좀 적게 오려는지,,, 어떤 사람이 불고기 집과 교회의 공통점이 주차장이 넓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인하여 욕을 얻어먹는 일은 우리가 회개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변하지 아니하는 사고방식, 내 죄는 내가 책임져야지 어떻게 남이 책임지느냐는 이 생각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은 사람의 특징인 것입니다. 어느 시골의 할머니가 짐을 이고 길을 가는데 경운기를 몰고 가던 아저씨가 할머니를 태워 주었습니다. 한참 가다가 할머니가 잘 타고 있는지 돌아보니 한 손으로는 경운기 난간을 붙들고 한손으로는 여전히 머리의 짐을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할머니 짐을 내려놓으세요. 아이고, 내가 탄 것만 해도 고마운데 짐까지 어떻게 내려놓는감.... 이게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예수를 믿는다면서도 이 선악의 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피곤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인과율이라고도 하지요.

 

 

 

 

온통 세상이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에 은혜란 너무나 낯선 말입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이 은혜란 들어갈 틈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얼마나 뻔뻔스럽게 지옥 갈 죄도 용서 받았다고 믿고 있으니 이게 세상의 원리로는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탄은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도록 우리 스스로 선악을 책임지도록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악체계로 가득 차 있으니 사람이 주님을 믿을 수가 없지요. 자기행위를 믿지 주님을 믿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 믿는다면서도 우리는 너무나 많이 자신의 선악의 원리를 따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예배를 빼먹고 어디 가다가 교통위반으로 순경에게 걸려서 딱지를 받게 되면 뭐라고 생각합니까? 예배 빼 먹었니 이랬구나 하는 생각 들지 않습니까? 어떤 손해가 오면 내가 뭘 잘못했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우리의 생활 가운데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물론 그런 생각도 때로 유익이 되기도 합니다. 내가 너무 농땡이 부렸더니 하나님이 손대시는 거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로 생각하여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차원이 아니라 매사를 인과율로 계산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하여서 아무런 어려움 없이 지낸다면 어느 정도를 하여야 할까요?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대로 갚으신다면 오늘도 우리는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인과율적으로 하나님과 거래하고 계산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노림수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차단하는 방법으로 스스로의 선악의 기준을 따라 살게 만드는 것입니다. 스스로 선을 쌓아서 의롭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는 한 예수 믿을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됨이란 자신의 선악체계에서 구원받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제부터 자신의 행위를 믿지 아니합니다. 나를 의롭다 하신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선악과를 따먹으면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정녕 죽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선악을 알게 되므로 스스로 선과 악을 조율하여 살기에 하나님께 나아갈 필요가 없게 되지요? 하나님과의 관계단절, 이것이 죽음입니다. 물론 육신의 죽음도 죽음입니다만 더욱 심각한 죽음이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입니다.

 

 

 

 

창세기 6장 3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라고 하십니다. 범죄의 결과 하나님의 신이 사람과 함께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판이요 관계의 단절입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홍수로 온 세상이 심판아래, 하나님께로 단절되었습니다. 그러면 노아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맺으시고 언약 안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의 완성이 바로 새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됨이란 인간의 범죄로 단절되었으나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새로운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1:31-34절입니다. “봉독” 새 언약은 옛 언약과 같지 아니합니다. 이제는 마음에 기록하는 것입니다. 이 언약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 언약은 죄를 사하되 그 죄를 다시는 기억치 아니하는 그런 용서의 언약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흘리신 언약의 피입니다. 이 피를 성령께서 우리에게 적용시킴으로 이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새롭게 창조된 자들은 이제 원래의 하나님의 사람됨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악의 체계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성경이 욥기서입니다.

 

 

 

 

욥과 욥의 세 친구의 논쟁을 우리가 잘 압니다. 욥의 세 친구의 반박은 무엇입니까? 네가 죄 지었기 때문에 이런 벌 받는다고 공격합니다. 우리가 욥기를 보면 욥의 세 친구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을 만큼 논리 정연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의로와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가 없다, 그러니 욥, 너의 시련은 죄 때문에 왔으니 회개하라. 그런데 욥은 나 죄 지은것 때문에 이런 재앙이 온 것이 아니다, 라고 항변하지요. 그러니 욥을 보고 너 교만하다, 그러면서 몰아 부치는 것입니다. 욥이 죄 때문에 고난 온 것이 아니지요. 그러나 그 고난의 의미를 하나님께서 설명하시지 않고 다른 말로서 입을 막아 버립니다. 그러나 욥의 세 친구가 하나님의 책망을 듣고 욥이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간구가 나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됨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주의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아시기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람이 되도록 우리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안에 뿌리 깊게 내려있는 선악체계가 뽑혀 나가고 주의 은혜로 가득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범사에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주님의 은혜라 나의 공로가 전혀 없도다, 라는 진정한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 즉 하나님의 사람됨이 더욱 풍성해 지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3:1-8  유혹  1999. 8. 1.

 

 


성경에 나타나는 최초의 유혹이 오늘 읽은 말씀입니다. 최초의 유혹이 어떻게 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면서 다가오는 것입니다. 뱀이 여자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얼마나 교묘한 질문입니까? 분명히 금하신 것이 선악과 하나인데 모든 나무의 과실을 먹지 말라더냐며 물어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이 ‘예 할 것은 예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해야 하는데 여기서 지나치는 것이 악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지요?

 

 

 

 

그러니 예, 아니요의 대답이 아니라 어중간한 대답입니다. ‘우리가 동산 나무 과실을 다 먹을 수 있지만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고 하셨다. 먹으면 정녕 죽는다고 하셨다’라는 대답이 아니라 여운을 두는 것입니다. ‘죽을까 하노라’ 안 죽을 수도 있을거라는 여운을 두는 겁니다. 이 틈새를 노리고 들어오지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하면서 거짓 확신을 심어 주면서 왜 못 먹게 하였냐를 설명합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기에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우리의 유혹도 꼭 이처럼 다가옵니다. 성경에 술 먹지 말라는 말이 어디 있느냐 술 취하지 말라고 했지 나는 술 취하도록 먹지는 않는다 하면서 자신의 술 먹는 것을 정당화 하지요 그러면서 성경을 좀 더 안다는 사람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말을 가지고 약으로 써도 된다고 하지요? 그러나 이러한 것은 사실 자기 정당화의 방편으로 말씀을 왜곡하는 것입니다. 술을 즐기기 위하여 이런 말을 하는 자는 잠언서를 한번 보셔야 됩니다.

 

 

 

 

잠언 23:29-39절을 한번 읽어봅시다. 31절에 너는 그것을 보지도 말지어다. 이미 술을 즐기는 자는 중독된 것입니다. 이런 자는 술을 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보는 순간 그 유혹을 이길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유혹 보다는 더욱 심각한 유혹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서 끊어내려는 유혹입니다. 사단의 유혹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려는 것이 유혹입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이 하나님과 대등해지기를 원하는 것이 유혹의 본질입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이 자신이 언제나 중심이 되고자 하는 것이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입니다.

 

 

 

 

어떤 모임에서도 사람들이 큰소리가 나는 것은 자신이 신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말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나이나 계급이나 힘에 눌려서 그렇게 못할 뿐이지 다른 사람에게 단 마음으로 순종하기란 사람으로는 불가능 합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죽도록 충성하는 경우도 있고 무협소설 같은 데서는 그것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러한 것도 하나의 영웅아래 작은 영웅이 되는 것이기에 그 조직과 단체를 위하여 희생함으로 자신은 신으로 남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혹이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 시작이 어떠합니까? 여자가 선악과를 보니, 보니까 유혹이 더 생기는 것입니다. 견물생심이라고 좋은 것을 보지 못하였다면 유혹이 없을 텐데 좋은 것을 보니 유혹이 더 생기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보니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먼저 따먹고 남자에게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책임을 여자에게만 돌리는데 사실 책임이란 남자에게 있습니다.
그 대표가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타락을 아담의 타락이라고 합니다. 여자가 함께 있는 아담에게 주었지요. 함께 있으면서도 말리지 않은 것은 자기도 함께 유혹을 받은 것입니다. 이 결과 사람에게 모든 죄된 본능이 다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지난주일 저녁에는 선악 체계에 대하여 말씀드렸지요? 인간의 범죄후의 선악의 기준은 자기에게 이익이면 선 손해이면 악,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이 스스로 선과 악을 결정하여 행동함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이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 사람에게 본능적인 욕망으로 자리 잡은 세 가지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금 금요일 저녁에 세부적인 것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만 오늘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선악과를 본 첫째 느낌이 무엇입니까? 먹음직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육체의 정욕입니다.

 

 

 

 

요한일서 2:15-17절을 봅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첫째가 먹음직이지요. 이것이 육신의 정욕입니다. 먹어야 한다는 본능이지요. 이것은 비단 밥만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먹는다는 표현을 하지요 저속한 표현이지만 예쁜 여자를 보고 남자들이 뭐라고 하나요? 따 먹는다고 그러지요. 이것이 육신의 정욕적인 표현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다른 경쟁업체를 어떻게 한다고 합니까? 잡아먹어야 한다고 그러지요?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것들이 이 먹음직한 유혹, 육신의 정욕에 의하여 지배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 욕망 속에 살다가 한평생을 보냅니다. 이것을 경제적인 욕망이라고 합니다.

 

 

 

 

둘째가 어떤 유혹입니까? 보암직하지요. 이것이 안목의 정욕입니다. 일단 먹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보는 것이 즐겁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죠. 배고픈데 무슨 금강산 입니까? 그러므로 경제적인 욕구가 어느 정도 채워져야만 보암직한 것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치적인 욕망이라고 하는데 예술이 보암직한 행위이지요. 특히 순수예술을 하는 자는 더욱 자신의 예술 행위를 보암직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대중이 인정을 하지 않아도 아직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자신의 예술성을 스스로 미화하면서 지내는 것입니다. 국산 영화 치고는 아주 돈을 많이 들인 영화 가운데 ‘쉬리’와 ‘이재수의 난’이 있는데 전자는 한국영화의 신기록을 세우며 흥행에 성공하였고 후자는 흥행에는 참담한 실패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실패한 감독이 자신은 시장성을 염두에 두는 감독이 아니라 작가주의 감독이라면서 볼 줄 아는 자만 보라는 식입니다. 이러한 것이 안목의 정욕입니다. 예술 뿐 아니라 정치를 하는 사람들도 자신의 정치활동은 철저하게 남을 위한다고 합니다. 이것도 보암직한 유혹 안에 있는 것입니다. 또한 사회에서 봉사활동을 주업으로 하거나 사회사업을 하는 자들도 남을 위해 멋있는 일을 하는 것이지요. 결국 사람들이 스스로 이루어 낸 업적들을 인하여 스스로들 보암직해 하면서 자화자찬하고 있는 것이 안목의 정욕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 한다는 우리 안에도 얼마든지 들어 있습니다. 교회를 위한다고 하는 것이 자신의 욕망에 붙들려 하는 줄도 모르고 그것이 주님의 일인 양 알고 행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신은 주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일하였다고 하는데도 자신의 정치적인 욕망에 붙들려 하는 것이지요. 이런 자를 주님께서 나는 너를 도무지 모르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일이야 많이 하였지요. 교회를 위해서도, 노회를 위해서도, 총회를 위해서도 총회장도 지내고 크고 굵직굵직 한 일을 이루어 놓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야망을 위하여 한 것이라면 주님과 아무를 상관없는 일입니다.

 

 

 

 

장유에 제 친구가 전도사로 있는 교회에 얼마 전에 장로 투표를 하였는데 예배드리고 나서 투표하는데 갑자기 살벌해 지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작은 교회안의 일만이 아니라 총회 안에서 총회장 되기 위하여 수억 원을 쓴다는 말이 다 알려진 것입니다. 이런 것이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이루는 것이지 어찌 주님의 일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먹는 문제 해결되고 나면 무엇에 관심을 가집니까? 멋에 관심을 가지지요. 어떻게 보암직하게 보일까? 겉멋만이 아니라 속멋까지 내려고 하지요. 이 모든 것이 안목의 정욕입니다. 중,고등학생 중에 교회를 나오다가 안나오는 아이가 있어 왜 안나오느냐고 알아보니 입고 나올 옷이 없어서 못 온다고 그럽디다. 정말 옷이 없어서 벗고 있을 정도는 아니지요. 멋있는 옷이 없어서 그렇지요?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멋 내는 일에 관심을 많이 둡니까? 이 모든 것이 안목의 정욕에 붙들려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오실 때 너무 좋은 옷 안 입고 오셔도 됩니다. 앞으로 저도 양복 안 입고 강단에 설 생각을 합니다. 물론 이것도 또 다른 안목의 정욕이 될 수 있습니다. 목사가 양복 안 입고 설교 하더라, 멋있지 않느냐 하는 식이 되면 역시 안목의 정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일에 관심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가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 보였지요. 결국은 자신이 신의 지혜를 가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교적인 욕망입니다. 이생의 자랑입니다. 다른 사람은 자기 잘 먹고 잘 입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자신은 많은 선행을 쌓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이 영역에서 자기를 신격화 하는 것입니다. 보통사람으로는 안될 만큼 뛰어난 능력을 소유합니다. 절제하고 금욕하고 세상의 것들과 차별화된 종교의 영역을 만들어 갑니다. 그리고는 점점 집단화 하여 이 집단을 신성시하고 신비화하여 나갑니다. 이러한 종교적인 욕구가 이생의 자랑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신처럼 되고자 하고 자신이 신이 못되면 특별한 신적인 자 앞에 엎드림으로 그 신의 후광을 입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아무리 P.D수첩에서 사이비 종교 들추어내어도 그들은 여전히 이탈하는 자 없이 건재한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정명석 교주에 대하여 다루었지요. 그런데 몇 주 전에 제가 창원대 앞에 주보 복사하러 갔더니 그 집에 새벽말씀이라는 표지의 책을 만들어 놓았길래 누가 이렇게 열심히 새벽기도 설교내용까지 책으로 만들어 보는가 하고서 잠깐 보았는데 성경을 이야기 하면서 엉뚱한 이야기를 합니다. 골키퍼를 8명을 세워 놓고 공을 차 넣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자신이 매일 새벽에 수천 번씩 연습하고 또 자신이 모든 부분에 통달하듯이 말하는 그런 내용인데 그런 것을 믿고 따른다는 것입니다. 얼마 있으니 젊은 여자들 몇 명이 그 책을 찾아갑디다. 이러한 세계 안에 있는 자들은 계속하여 종교적인 욕구에 붙들려 있기에 빠져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종교를 금하시고 있습니다. 십계명의 1,2,3계명이 어떠한 종교도 금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본능들이 우리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도 모르게 이러한 본능을 정당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욕망덩어리를 어떻게 해야 구원하실 수 있습니까? 어떠한 종교적인 규칙과 고행을 제시하면 인간의 종교적인 본능이 있기에 다 해내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가 속한 종교 단체를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우리를 하나님께서는 죽이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의 의 없음을 철저히 인식하고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나의 구원이 없습니다, 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위하여 주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시고 그 시험을 이겨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종교에 담을 수가 없습니다.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 복음의 능력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예수님의 시험 받으심을 잘 알지요. 처음 아담이 유혹을 이기지 못하였는데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세 가지 유혹을 모두 이겨내신 것입니다.

 

 

 

 

첫째, 40일 주리신 후에 돌로 빵을 만들어 먹어라, 먹음직이지요. 육신의 정욕이지요, 경제적인 욕구를 어떻게 물리치십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씀 하시지요. 둘째, 산위에서 세상의 영광을 보여 줍니다. 나에게 절하면 이 모든 영광을 너에게 주겠노라. 보암직이지요. 안목의 정욕이지요. 정치적인 욕망입니다. 어떻게 물리치십니까? 주님께만 경배하라고 하시지요. 셋째,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라. 종교적인 슈퍼스타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생의 자랑이요, 종교적인 욕구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물리치십니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물리치십니다.
 

 

 


이러한 세 가지 유혹이 우리가 선악과 따먹은 후의 본능적인 죄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해방되는 길은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이 모든 유혹을 이길 수 있다면 주님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이 믿음도 주님이 주신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을 주님께서 주셨기에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혹은 우리에게 계속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유혹에서 이길 수 있음은 오직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세상의 정욕을 바라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교회 안에 이 유혹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의 죄 된 본능들이 사실은 서로 서로 묶여 있는 한 덩어리의 욕망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가 사람의 필요를 채워주라는 것이 교회의 이슈입니다.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시장조사를 하듯이 사람들이 무엇을 싫어하고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분석하여 사람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면 사람은 몰려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뜬다는 교회들의 모습입니다. 이미 미국에서 오래전에 시행하는 방법을 그대로 도입하는 것이지요. 뒤에 있는 교계신문을 보시면 잘나와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도 교회 컨설팅을 해주는 곳이 생긴 것입니다. 안 그래도 욕망 덩어리에 욕망의 불을 붙이니 불나방이 죽을 줄 모르고 불에 달려 들 듯이 달려들고 있는 그러한 유혹에 속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요한일서 2:15-17절까지 한 번 더 읽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창세기 3:9-24  찾아오시는 하나님  1999. 8. 8.

 

 


아담이 범죄 후 두려워하여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범죄 한 인간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하시면서 찾아오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찾아오시지 않고 범죄 하였으니 그대로 벌 받아 죽으라 하셔도 할 말이 없는 죄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담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삭개오 이야기를 잘 압니다. 세리장 삭개오, 키가 작은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보기 위하여 뽕나무 위로 올라갔지요. 이것을 가지고 얼마나 다르게 설교가 되는지를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대부분 삭개오 이야기를 하면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보기 위한 일에 초점을 맞춥니다. 유도순 목사님이라고 나이 많으신 목사님이 어느 부흥회를 참석하였답니다. 자기 집에서 가까운 곳이고 또 교계에서 아주 유명한 부흥사이기도 하여 한번 참석하였는데 그 본문이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는 장면인데, 모든 초점이 삭개오에게 있더라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어떻게 준비 하였으며 어떤 자세였는지 그렇게 열심히 만나려 하였기에 주님을 만났다는 설교를 듣고서 분노를 느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설교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죄인 삭개오를 찾아오신 것이 놀라운 복음의 사건이지 어떻게 죄인이 만나기로 한 그 일만을 그렇게 부각시키느냐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면서 삭개오를 부르지 않고 지나가셔도 할 말이 없는 자가 삭개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부르신 것은 이미 주님께서 삭개오를 부르시기를 작정하시고 삭개오를 부르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삭개오에게로 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기쁜 소식이며 주님의 놀라운 은혜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관점이 옳다고 보십니까?

 

 

 

 

삭개오가 준비를 잘 하였기에 그 준비에 주님이 감동되어 삭개오를 만나 주셨다고 가정한다면 아직 죄가 무언지를 모르고 인간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 지은 인간은 결코 주님을 찾아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거저 두려워하여 도망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죄인이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 후에 제일 먼저 한 일이 자신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가리고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스스로 어떤 신을 찾아 나간다면 그런 신은 우상입니다. 이름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든 천주여, 라고 부르든지 간에 스스로 자신의 정성을 바침으로 신의 마음을 움직여 자신의 소원을 이루고자 사람이 찾아가는 신은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 신은 결국 자기를 위한 신입니다. 자기를 지키고 자기 집을 지켜주고 자기 나라를 지켜주는 그런 수호신으로서의 신을 찾아가는 종교적인 본능을 성경은 거부합니다.

 

 

 

 

십계명의 제 2계명에 보면 너를 위한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나를 위한 것이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예수 믿어 내가 덕을 보려고 하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기에 주님을 섬기고 찬양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모든 삶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놓고 복 안주나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섬기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을 섬기지 않는 것은 벌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까?

 

 

 

 

첫째,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십니다. 따 먹지 말라 하신 선악과를 따먹은 책임을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 아담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고 나무 밑에 숨는 일입니다. 죄 지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이제부터 모든 인간들은 스스로의 재주를 가지고 자신을 가려 가는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부실합니까?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린들 제대로 가려지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나마 가리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만들어 내는 문명이 바로 바벨탑입니다.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자신들의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행위입니다.

 

 

 

 

홀로 하나님 앞에 서기가 두려운 것입니다. 다수 속에서 힘을 가지고자 합니다. 홀로 단독자로 주님 앞에 서야 하는데 스스로 군중 속에 숨어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안전으로 여기고 힘으로 여기는 것이 범죄 이후에 자신을 가리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라도 자신의 떳떳하고 당당한 모습을 가지고 나가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는 것과 같은데도 이러한 스스로의 가리는 일을 그만 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경남 기독교 연합회에서 8월 15일 창원 공설 운동장에서 연합으로 예배드린다는 공문이 두 번이나 왔습니다. 그 제목이 ‘광복 54주년 기념 경축예배 및 단군신상건립 저지 기도회’ 라는 것입니다. 이 제목으로 모이는 것도 우스운 이야기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광복을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면 됩니다. 그런데 왜 꼭 연합하여 예배를 해야 합니까? 올 봄에 부산 사직 실내체육관에 부활절 연합예배에 참석해 보았더니 이건 예배가 아니라 사람들의 수를 결집하여 세를 과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도 않는 시장이 와서 무슨 경축을 한단 말입니까? 그리고 단군신상 건립한다고 사람들이 우상숭배라고 하는데 성경은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교회가 단군신상보다 더한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줄 모르는 것입니다.

 

 

 

 

시편 8편 2절에 보면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니 라고 말씀합니다. 어린아이와 젖먹이가 대적을 친다는 것은 사람의 수나 힘의 결집을 하나님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언제 예수님께서 세상의 여우같은 헤롯을 세력 규합하여 대적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그런 곳에 관심 없습니다. 주님의 관심사는 이 땅에 속한 나라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이 주님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나라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 나라에는 어떤 사람들이 들어갑니까? 주님의 택한 자들만 들어가는데 이들의 특징은 세상의 힘을 의지하지 아니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경남기독교연합회의 공문에서 몇 가지 당부의 말씀을 드린다면서 많이 참석하여 힘을 모아 주십시오, 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 힘을 모아 단군상 건립을 저지 하겠다는 발상이 이미 비성경적입니다. 성경 어느 곳에도 이런 힘을 요구하지 아니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대형집회를 계속 마련합니다. 여의도에 몇 십만 명이 모였다 기독교의 세력을 보라 하니까 천주교에서 더 많이 모였다 그러니 불교에서도 연합집회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인생은 수에 칠 가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만이 모아놓는 것이 세상에는 통하지만 주님의 나라에는 통하지 아니합니다.

 

 

 

 

지금 세계 인구가 60억이 넘었습니다. 60억 인구 중에 예수님 재림 시까지 단 한명만 예수 믿었다고 하면 재림을 연기 하실까요? 그대로 집행 하실까요? 나머지 59억9천9백9십9만9천9백9십9명이 모두 예수 안 믿었다면 주님께서 타협하시겠습니까? 구원받은 자가 너무 적다 전도 열심히 해라 재림연기 한다, 그러지 않는 것입니다. 노아홍수 때 단 한 가정 외에는 몽땅 수장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 있지 아니하면 수에 치지도 아니합니다. 그런데 수를 모아 힘을 모아달라고 하는 것이 이미 어린아이와 젖먹이가 되기 싫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스로 가리는 힘으로 가리려는 죄 된 모습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담을 그대로 두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나뭇잎 갈아입느라고 세월 다 보내었을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짐승을 희생시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찾아 오셔서 가려 주시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아무리 힘을 모으고 멋진 일을 이루어 낸다고 하여도 우리가 한 일은 나무 잎사귀로 가린 것임을 알고 오직 주님이 가려 주시는 것으로만 가리움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주님이 찾아 오셔서 하신 약속이 무엇입니까? 15절입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사이에 싸움이 일어날 것인데 뱀의 후손은 발꿈치를 상하게 하고 여인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이 세상은 두 편으로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한쪽은 뱀의 후손으로 한쪽은 여인의 후손으로 서로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뱀의 후손의 특징은 뱀처럼 생긴 것이 아니라. 뱀의 유혹을 받은 그 특징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스스로 신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선악체계를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제 신은 필요 없다, 우리가 신이다, 자 이제 우리의 이름을 내자 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자기를 지키는 자들입니다. 도시를 건설하고 문명을 세우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에 비해 여인의 후손은 약속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들이 바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미 생명으로 나가는 길은 차단이 되었습니다. 천사가 두루 도는 화염검을 가지고 지키는데 누가 생명나무로 나아 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이 됩니다. 생명나무와 단절입니다. 이제 어떤 인간도 스스로 생명을 취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로지 생명을 주시는 분에 의하여만 생명을 받는데 그것이 바로 여인의 후손이어야 한다는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받은 아담은 여자를 뭐라고 이름을 부릅니까? ‘하와’라고 합니다. 하와란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고 말합니다. 이 이름이 범죄 후에 아담이 하와에게 지어 주었다는 것은 새로운 약속과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생명나무로 나가는 길은 차단되었지만 새로운 생명을 주는 길이 여인의 후손이 뱀의 후손을 정복하게 될 때 일어날 것을 내다보는 것입니다. 여인의 후손으로 오시는 그 씨에 대하여 구약은 계속하여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의 자손이 등장하는 것을 사탄은 방해 합니다. 그래서 이 둘 사이에 싸움이 있는 것입니다. 이 둘 사이의 싸움은 사람과 사람이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서로 서로의 배후 세력이 다른 것입니다.

 

 

 

 

특히 시편에서 이러한 싸움이 치열하게 나타납니다. 시편 2편에 보면 여호와와 그 기름 부은 자에게서 주의 백성들을 끊어 내려고 합니다. 이 세력이 여호와의 백성을 무고히 괴롭힙니다. 시편에서 의인과 악인이 대별되는 것은 의인은 자기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는 자입니다. 이들이 약속의 자녀이며 여인의 후손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자신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뱀의 후손이란 자기의 선악체계를 고수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 구원을 이루어 내겠다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대결구도가 계속되어 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세상적으로 볼 때에 약하고 힘없어 보이는 자들이 누구겠습니까? 당연히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싸움이 신약에 가면 그 모습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3절에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말씀이 이미 이사야 7장14절에 예언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여인의 후손의 등장입니다. 갈라디아 4장4절에서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이렇게 여인의 후손으로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인의 후손이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14절.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마귀를 없이 하시려고 예수님이 여인의 후손으로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것이랍니다. 이것을 요한일서 3:8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난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마귀를 이깁니까?

 

 

 

 

골로새서 2:15절에서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여인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야의 일입니다. 이것을 이미 창세기 3:15절에 하나님이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이루어 내심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쥐고 있는 마귀의 세력에서 우리를 구원하여 내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범죄 한 아담에게 찾아오셔서 주신 은혜로운 약속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 15절을 원시복음이라고 사람들이 부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승리하셨는데 왜 아직 사단의 역사가 있습니까? 저는 이렇게 봅니다. 뱀의 머리가 십자가에서 깨어짐으로 결정적인 승리는 이미 확정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꿈틀되는 정도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6장 20절에서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단을 너희 발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라고 말씀합니다. 사단이 십자가에서 깨어졌는데 아직 그 힘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까지도 속히 너희 발아래 상하게 하실 것이라는 겁니다. 이들이 결국에는 불과 유황못에 던져질 것을 요한계시록 20장 10절에서 말씀합니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이런 맥락에서 살펴보았습니다. 아직도 사탄의 유혹이 있지만 머리를 상하여 꿈틀되는 정도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승리를 주의 성령이 우리를 찾아 오셔서 알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이 복된 자리로 불러내어 주신 그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 입니까?

그러므로 이제 주의 백성들은 마귀의 후손들이 의지하는 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만 바라보며, 주만 의지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모신 자답게 사는 것입니다.

 

 


 

 

창세기 4:1-15  죄의 소원  1999. 8. 15.

 

 


오늘이 광복절입니다. 광복절 되기 전까지 이 나라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독립이었지요. 그러나 자력으로 이루어진 독립이 아니기에 남북으로 분단이 일어났습니다. 이제 이 나라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지요.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남북통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만유의 통일입니다.

에베소서 1:10절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만유가 통일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안에 있음이 복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에 방해세력이 있으니 그것이 죄의 소원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죄인이란, 사람이 원래는 죄인이 아닌데 환경과 상황으로 죄를 짓게 됨으로 죄인이 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성경은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죄를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란 목록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권세와 세력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목이 죄의 소원입니다. 죄도 인격처럼 소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가 소원을 가지고 무얼 하는지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죄 된 모습이 오늘 가인과 아벨을 통하여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창세기 3:15절에서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이 서로 싸울 것을 말씀합니다. 여인의 후손이 궁극적인 승리를 하지만 서로의 싸움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결과 뱀의 후손과 여인이 후손의 특징이 드러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하나님의 계시가 어떠한가의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가인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득남 하였다고 가인 즉 얻었다는 이름을 지었는데 한 명은 뱀의 후손의 특징을 보여주고 한 사람은 여인의 후손의 특징을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창세기 3:15절이 어떤 모습으로 펼쳐지는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본문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가인의 제사가 아닌 아벨의 제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는데 아벨이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런 아벨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서 그렇게 간구합니까? 그렇지 않지요. 아벨은 정성껏 드렸으니 받아 주셨을 거야 그러니 우리도 형식적인 예배가 아니라 정성으로 예배를 드리자, 아마 그런 생각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말씀을 나의 정성으로 드리는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는 말씀입니다. 주의 성령이 임하여서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라는 의미이지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드린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런 정성이라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 잘 합니다.

 

 

 

 

비록 제물로 정한수 한 그릇 떠놓고 빌지라도 얼마나 지극 정성으로 빌고 또 빕니까? 심지어 겨울이라도 찬물로 목욕재계까지 합니다. 마을의 동제를 지내려면 제주를 마을의 어른 가운데 뽑습니다. 제주로 뽑히면 그 기간동안 술도 먹지 않고 여자를 가까이 하지도 않고 이발하고 목욕재계한 다음에 동제를 지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형태가 신에게 나의 정성을 바쳐서 화는 멀리 쫓아 버리고 복은 불러들이자는 원화소복(遠禍召福)의 내용입니다. 이런 생각이 우리에게 먼저 내장되어 있기에 가인과 아벨의 제사 그러면 앞 뒤 말씀을 보지도 않고 그저 정성껏 예배하라 최선을 다하라 그런 식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도 그 원인을 사람에게서 찾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에게 덮쳐온 죄의 소원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는데도 자꾸만 사람의 드림의 조건을 보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보는 경우-즉 사람의 조건으로- 어떻게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구별합니까? 가인은 땅의 소산 즉 곡식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아벨은 양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양의 첫 새끼를 드렸기에 하나님이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가 우리가 이미 어린양의 의미를 아니까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과 아벨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어떤 예물을 드려야 한다는 말씀이 아직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신의 소산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나중에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예물이 율법으로 주어졌을 때에도 곡물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됩니다.

 

 

 

 

신명기 26:2절을 보면 모든 토지 소산물 즉 땅의 소산물의 맏물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맏물이라고 하였기에 가인은 땅의 소산이지 첫 소산 즉 맏물이 아니다 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물의 내용과 방법을 계시하기 전이기에 제물의 내용과 방법 때문에 받고 안받으신다는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한 가지 차이는 아벨은 믿음으로 더 나은 제물을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아벨은 믿음으로 드렸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가 믿음으로 드리면 된다, 그렇게 쉽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선물이기에 우리의 어떠한 선행 조건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벨이 믿음으로 드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제물을 은혜로 열납 하여 주셨다는 것이 믿음으로 드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사람에게서 어떤 조건을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약 15년전쯤 ‘기독교사상’이라는 월간지에서 이 말씀의 설교를 보고서 많이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습니다. 어떤 내용인가 하면 가인이 첫 아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가 장남 선호하듯이 우리 장남 우리 큰 아들하면서 아담과 하와가 키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뜻과 자기의 고집대로 다 이루어지는 그런 아들이었다는 가정을 합니다. 오늘 우리의 가정을 보면 이해가 됩니다.

 

 

 

 

모든 아이들이 전부 자기가 왕자요 공주인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요구사항을 안 들어 주면 마구 때를 쓰는 것입니다. 그저 오냐 오냐 키워 놓으니 거절당하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무언가 거절되어지면 얼마나 많이 화를 냅니까? 그러므로 김용옥씨 같은 경우는 이렇게 아이를 키우면 모두가 잠재적인 독재자를 키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전두환 같은 독재자가 되는 것이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회 안에 수백만의 독재자를 키우는 것입니다.

 

 

 

 

요즈음 왕따와 학원 폭력이 사회 문제가 되는데 오늘 우리 가운데 학교 다니면서 한두 번은 왕따도 당해보고 맞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사회 문제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당시 자녀가 보통 5-6명입니다. 형에게 맞아가며 형제간에도 따돌림 당해가며 그렇게 지냈기에 그러한 문제는 극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한두 명이니까 그리고 현대 교육을 받았다는 신세대 부모들이 자녀들의 기를 살려 놓은 것입니다. 이러니 거절당해 보지 않은 가인이 자기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안색이 변하고 동생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새롭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사람들의 후천적인 교육과정과 환경으로 보기에 죄로 인한 것임을 보여 주기는 부족한 것입니다.
 

 

 


지금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선악체계에 붙들려 있는 죄인 된 상태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며,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이 어떻게 대립되는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뱀의 후손의 특징이 자기 공로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은 자기의 제사를 받아주지 않자 왜 자기의 제물은 안받아 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나의 제물이  무엇이 부족하여 안받아 주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물을 받으시고 안 받으시는 것은 누구에게 주도권이 있습니까? 받으시는 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조건과 행위에 메이지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세상의 종교들은 자신들이 정성을 안 바쳐서 그렇지 정성을 바치기만 하면 언제나 제물을 받고서 복주는 그런 신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기쁘신 뜻대로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선택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 세상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말하면 세상은 싫어합니다. 안색이 변합니다. 이것이 뱀의 후손의 특징입니다.

 

 

 

 

너보다 내가 어떤 면으로 보아도 내가 나은데 왜 너만 하나님이 선택하고 나는 버리느냐 나는 그런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공평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그 공평을 자신들의 행함을 기준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신들의 어떠한 정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불쌍히 여김이라고 하니까 그러면 나는 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안색이 변하는 이유입니다.
 

 

 


TV프로그램 중에 멋진 만남이라는 프로가 있지요. 이휘재, 남희석이 한 여인을 상대로 온갖 정성을 다하여 데이트를 합니다. 그리고 최후의 선택을 여인이 하게 합니다. 이 때 선택당하지 못한 남자의 표정이 어떻습니까? 안색이 변합니다. 단지 벌칙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멋진 데이트 코스를 정하여 맛있는 것 사 먹여가면서 공을 들였는데, 왜 나를 선택하지 않느냐고 안색이 변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는 이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안받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며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그러므로 안색이 변하였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을 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기가 자기의 주인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라는 목사의 책 중에 ‘당신의 기도가 하늘나라 창고에서 잡동사니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안 해서 그렇지 많이만 하고 정성만 바치면 어떤 기도도 응답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든 제물이든 받고 안받으시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정성과 나의 드림이 당연한 것이지 나의 드림의 행위에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야 안색이 안 변합니다. 그러나 안색이 변하였다는 것은 죄의 소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소원이 있기에 그 소원이 지배하는 것입니다. 
 

 

 


자기 제물을 받아 주지 않는다고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한 가인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 지니라.

 

 

 

 

하나님의 이 말씀은 사람이 선악과를 따먹고 자신이 스스로 선악을 결정하며 사는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 너의 실력으로 죄의 소원을 다스려보라 스스로 죄짓지 않고 선을 이루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어떻게 합니까? 죄의 소원에 지고 맙니다. 아벨을 돌로 쳐 죽이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의 말씀에 내가 내 동생을 지키는 자이니이까? 하는 가인입니다.

얼마나 죄의 소원이 무서운지를 아시겠습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 네 아우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한다고 말씀 합니다. 이것이 의인의 운명입니다. 그러나 그 피가 증거가 됩니다. 그리하여 그 피의 고발을 근거로 악의 소원에 붙들려 사는 뱀의 후손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다가 성경이 관심하지 아니하는 부분에 관심이 많습니다. 야곱의 꿈에 하늘에 이르는 사닥다리를 보았다고 하니 그게 몇 계단인가 하는 생각을 하듯이 가인이 하나님의 벌을 받아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하셨을 때 그 벌이 너무 중합니다. 만나는 사람이 나를 죽이면 어떻게 하느냐는 말을 보고 아담과 하와가 첫아들이 가인이면 아벨은 죽었는데 다른 사람이 어디서 나오는가 합니다. 아담이 몇 년 살았습니까?

 

 

 

 

창세기 5:3-6절입니다. 아벨 후에 셋을 낳은 것이 130세인데 이때부터 800년을 지내며 아이를 낳았으니 도대체 몇 명을 낳았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만약 이름만 기록하여도 다 기록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질문은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가인이 그렇게 간구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표를 주셔서 죽지 않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 표도 어떤 표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 표가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표가 되는 것입니다. 왜 가인이 사람에게 죽지 아니합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도 죄인이기에 사람을 죽일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뱀의 후손에 의하여 여인의 후손이 먼저 침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그 피에 근거하여 뱀의 후손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뱀의 후손이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먼저 상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때 그 머리는 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에 나타난 승리입니다. 오늘날 주의 피로 거룩함을 입은 자는 그렇지 않은 자에게 괴롭힘을 당하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조차 바른 믿음을 가진 자를 핍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마엘이 이삭을 괴롭힌 것처럼 그렇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4:28-29절.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가인의 제사를 드리는 것은 왜 나의 이 정성을 몰라주고 안받는단 말인가?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아벨의 제사는 믿음의 제사입니다. 나의 제사는 나의 공로가 아님을 아는 자가 아벨의 계통을 따라 예배하는 약속의 자녀들입니다.

 

 

 

 

히브리서 12:18-24절까지 읽어 봅시다. “봉독” 이제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피로 우리를 구속하신 그분을 믿는 것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날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의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4:16-24  가인의 후손  1999. 8. 22.

 

 


창세기 3:15절에서 하나님은 약속을 하셨습니다.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의 싸움입니다. 뱀의 후손은 여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지만, 여인의 후손은 그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세상은 두 종류의 인간이 싸움을 하는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배후에는 서로 다른 세력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로마서 5:12-21절을 봅시다. “봉독” 사망의 왕노릇과 생명의 왕노릇이 나옵니다. 이러한 두 세력의 모습을 구약에서 모형적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두 편으로 나누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이런 식의 대조를 보게 됩니다. 이 두 편의 특징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오늘 본문을 통하여 알아보고자 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임으로 그 벌로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이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을 수가 없기에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며 살아가야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문명을 건설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가인이 무엇을 하며 그의 후손들이 무엇을 하는지 오늘 말씀에 보면 에덴 동편 놋땅에 거합니다. 여기서 아내와 동침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녹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이 아니라 가인의 후손 에녹입니다. 

 

 

 
가인이 아내를 취하고 자녀를 낳고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성을 쌓는 일입니다. 그 성 이름을 자기 아들의 이름을 따서 에녹성이라고 합니다. 왜 성을 쌓았을까요? 성이란 외부의 적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제 가인은 자신의 안전을 스스로 지켜야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문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문명이란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는 방면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글에서 이런 내용을 보았습니다. ‘신은 시골을 만들었는데 사람은 도시를 만들었다’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가인이 최초로 성을 쌓은 것은 도시 문명의 시작입니다. 도시가 형성되는 이유는 사람의 편리를 위하여 형성되는 것입니다. 가인은 성을 만들었는데 그 후손들은 무엇을 만들어 내는지 봅시다. 야발은 장막에 거하며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고,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자의 조상이 되고, 두발가인은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이루어 내는 사회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고서 자기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창상을 인하여 사람을 죽였고 자신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스스로 보호하기 위하여 가인을 위하여는 7배이지만 자신을 위하여는 77배라고 합니다. 자신은 과격한 복수로 사람을 죽여 놓고 자신을 헤치는 자는 벌이 77배라고 임의로 정하여 자신을 보호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인의 후손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원리가 가인의 후손들이 사는 방법과 꼭 같은 것입니다. 자기의 안전을 자기가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비극입니다. 하나님의 보호가 아니라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스스로 성을 쌓고 스스로 보호하는 세상인 것입니다. 그러나 셋 계통의 후손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살게 됩니다. 이것이 주를 의지하는 자이며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는 에녹 같은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가인처럼 살고 있습니까? 에녹처럼 살고 있습니까? 주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면 마땅히 주를 의지하며 주와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가인처럼 사는 것은 세상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의 안전지대를 만들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살아가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4:25-5:32  하나님과 동행  1999. 8. 29.

 

 


하나님께서 아벨 대신에 셋을 주셨습니다. 셋이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사람들이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셋이 아벨 계통을 이어가는 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5:1절부터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면서 소개되는데 가인의 족보는 4장에서 따로 소개함으로 아담의 후손에서 제외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벨 대신에 셋을 주시고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기에 여기에서 가인의 계통을 제외시키고 있습니다. 벌써 분리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계보가 소개되고 그들의 나이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려 천년 가까이 살았습니다. 이렇게 오래 살수 있는 것은 그 당시의 환경이 지금보다 좋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록 타락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지만 노아 홍수 이전까지는 아주 좋은 환경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노아 홍수 이후에 급격히 수명이 짧아지는데 그 이유를 과학자들이 하늘의 물층이 없어져서 그렇다, 육식을 하게 되어 그렇다 하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단지 참고로만 들으시면 됩니다. 우리의 관심은 장수의 비결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비록 천년 가까이 살았지만 결과는 무엇입니까? ‘죽었더라’입니다. 죽었더라, 죽었더라가 아담의 계보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이 죽음의 계보 속에서 죽음을 맛보지 아니한 사람이 있으니 그 이름이 에녹인 것입니다. 사망의 권세가 그를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969세를 살아도 므두셀라는 죽었는데 에녹은 죽지 않고 하나님이 데려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태복음의 계보와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을 봅시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하면서 이어지는 계보에서 무슨 말이 없습니까? 죽었더라 하는 말이 없습니다. 아브라함도 다윗도 분명히 죽었는데 죽었더라는 말은 없이 ‘낳았더라’는 말만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망이 왕노릇 할 수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기에 사망의 권세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새로운 계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을 이기는 권세가 아담의 후손가운데서 다 ‘죽었더라’는 계보 가운데서 에녹은 예외가 됨으로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힘이 있다는 것을 창세기에서 이미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데려간 에녹의 그 힘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에녹에게 오셔서 동행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면 사망의 권세도 이기는 것입니다. 
 

 

 


창세기 5:21-24절을 다시 봅시다. 에녹이 65세에 므두셀라를 셀라를 낳고 삼백년을 동행하였다고 합니다. 65세 되기까지는 동행 하였다는 말이 없다가 므두셀라 낳고서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는 것을 보면 므두셀라 낳을 때 무슨 사건이 있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어떤 특별한 계시를 받았기에 300년을 하루같이 하나님과 동행 하지 않았겠습니까?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겠습니까?

 

 

 

 

유다서 14절에서 15절을 보겠습니다.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께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에녹이 예언하였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예언하였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였다는 것입니다. 주께서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심은 뭇사람을 심판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았을 때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안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데 신약성경에서 동일하게 계시를 받은 유다가 에녹이 심판을 예언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고 나서부터 계속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므두셀라’라는 이름이 ‘창던지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성경학자들이 말합니다. 창을 던지는 것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므두셀라가 창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선지자들이 자신의 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 것처럼-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등의 선지자가 하나님의 계시를 나타내는 방법으로 결혼과 자녀 이름과 벌거벗고 다니는 것과 모로 누워서 지내야 하는 행동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므두셀라는 자신의 삶이 마감하는 날,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창이 날아가서 꽂히는 것을 생각하면 므두셀라가 죽는 때에 심판이 임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날짜를 계산해 보니 꼭 들어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숫자를 이상하게 해석하여 성경을 푸는 사람들이 있기도 합니다. 3으로 풀어내고 4로 풀어내고 7이나 12등등의 수를 가지고 성경을 다 푸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성경은 숫자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물론 숫자에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어떤 숫자풀이에 메이면 이상한 종말론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에녹은 언제 심판이 임할지는 그 날짜는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소개된 사람들의 나이를 추정해보니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모든 사람의 이름과 나이를 다 말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렇게 볼 수 있느냐하는 의문은 있습니다만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이 사람들의 나이를 한번 계산해 봄으로 므두셀라가 죽던 해에 노아홍수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5절에 보면 므두셀라 187세에 라멕을 낳습니다. 라멕은 182세에 노아를 낳습니다. 그런데 노아 몇 세에 홍수가 납니까? 7:11절에 보면 노아 600세에 홍수가 납니다. 이 세 숫자를 더하면 므두셀라 나이가 나오는 것이지요. 얼마입니까? 969. 므두셀라 죽는 해에 노아홍수가 난 것임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날짜 계산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한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에녹이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것은 어떤 자세로 살았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종말론적으로 살았습니다. 므두셀라가 잠시 안보이거나 조금만 이상이 있어 보여도 오늘이 심판하시는 날인가 하는 자세였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깨어 있는 신앙이란 주님의 재림을 늘 잊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포항의 어느 집사 말을 듣고 자기를 따라 가야 종말을 대비한다고 집단가출 하는 그런 종말론이 아닙니다. 에녹은 기도원에 가거나 집단 공동체를 이루어 종말을 기다린 사람이 아닙니다. 5:22절입니다. 므두셀라를 낳고, 하나님의 심판의 계시를 받고서도 자녀를 낳으며 하나님과 동행한 것입니다. 심판이 있을 텐데 자녀는 왜 낳느냐 학교도 직장도 그만두라는 그런 종말론과 전혀 다릅니다. 자녀만 낳고 맨날 기도하러 기도원에나 다니면 자녀는 누가 돌봅니까?

 

 

 

 

그런 삶이 아닙니다. 무슨 일을 하던 주님과 동행하는 삶 이것이 죽음을 이긴 힘입니다. 이러한 동행은 우리가 동행하여 나선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동행하여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에게도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고, 라는 말씀이 6:9절에 있습니다. 이 말씀을 원어에 가깝게 번역하면 ‘하나님이 동행해 주셨다’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는 사람은 언제나 종말론적으로 사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5:28-29절을 봅시다. 라멕이 아들을 낳고 노아라고 이름 지은 것은 하나님께서 땅을 저주하심으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에게 안위를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노아라는 이름이 안식의 뜻입니다. 이러한 안식이 어떻게 옵니까? 놀랍게도 노아 홍수와 함께 오는 것입니다. 모두가 저주아래 심판을 받고 있는데 안식을 누리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 역시 하나님과 동행한 노아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곳이 심판의 땅입니다. 이곳에서의 안식이 무엇입니까?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요청하여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가 누리는 복인 것입니다. 심판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자는 주님의 동행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셨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받은 자는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취하여 가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로 살아가시기를 소원합니다.  

 

 

 

 

 

창세기 6:1-22  죄악의 관영  1999. 9. 5.

 

 


세상이 심판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악이 관영하기 때문입니다. 죄악이 관영하다는 것은 죄가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물이 가득 차면 보이지만, 죄는 가득 차도 보이지를 않는 것입니다. 죄악은 냄새도 안 나고 색깔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악이 가득 차서 하나님의 심판이 하늘에서 떨어지는데도 보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유황불이 쏟아지고 있는데도 롯과 그 아내와 그 딸들이 미적거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롯의 사위들은 죄악이 가득 찼으니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말을 농담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들의 눈에 죄가 가득함이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쾌락과 자신들의 정욕을 만족시켜주는 좋은 환경으로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죄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윤리 도덕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삶의 문화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질서를 파괴하는 것을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이 결국은 죄가 관영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죄가 가득한 모습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첫째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셋 계열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로 보아야 합니다. 이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 것입니다. 가인의 후손이 재주가 많았지요? 성벽을 쌓고 악기를 다루고 문명에 앞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골 총각이 서울의 세련된 아가씨를 보게 되면 시골의 옆집 갑순이가 갑자기 촌스러워 지는 것입니다.

 

 

 

 

시골에 있을 때는 가장 이쁜 줄 알았는데 그러니 이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아내로 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눈에 아름다운 여자를 자기 마음의 소욕대로 아내를 택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결혼뿐만이 아니겠지요. 생활의 모든 부분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기쁜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삶의 방향이 하나님의 일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일에만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37-39절을 봅시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죄가 아니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모든 것을 자기의 기쁨을 위하여서만 하였지, 주님의 언약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죄인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먹고 마시고 결혼 하는 것을 왜 하느냐고 물어 보십시오. 그러면 한결같이 왜 한다고 합니까? 자신의 기쁨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세와 태도가 죄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신분을 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을 몰라보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니 나의 기쁨을 채우면 되는 것이지 내가 왜 남의 기쁨을 채워 주어야 하는가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때로 남의 기쁨을 채워 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로 인하여 궁극적으로는 나의 보람, 나의 뿌듯함이라는 대가가 나에게 오는 것입니다. 이 기쁨은 이기적인 움켜짐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이지만 결국은 자기 영광입니다. 이런 모습이 죄가 가득한 모습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성경이 이것을 죄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세상 사람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거듭났다 하고 하늘나라 시민이라고 하면서도 사는 모습이 방금 말한 세상 사람들의 모습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나의 모습을 보고 놀라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25-35절을 봅시다. “봉독” 때가 단축하여 진고로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아내 있는 자는 아내 없는 자처럼 여기고 우는 자는 울지 않는 자처럼 하고,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남자가 장가가면 어떻게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고 여자가 시집가면 어떻게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는 것입니다. 처녀총각 때 신앙은 못 믿는다, 그러지요. 시집 장가 가봐야 아는 것입니다. 그런즉 먹든지 마시든지 시집을 가든지 장가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라고 바울사도가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오늘 우리는 범사를 주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있습니까? 가정생활, 직장생활, 자녀교육, 장래계획이 주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까? 점검 하셔야 합니다. 순전히 자기의 안락과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면 세상 사람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죄가 관영한 모습입니다. 

 

 

 

 

로마서 14:7-8절에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살아도 나를 위하여 죽어도 나를 위하여 이지 않습니까? 이것이 죄악이 관영한 모습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윤리 도덕적으로 나쁜 짓하는 것만 죄악이 관영한 것이 아니라 주인을 몰라보고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바로 죄악이 관영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행동할 때 욕망에 이끌려 행동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욕망에서 나오는 행동은 결국 어떤 모습으로 가게 됩니까? 소유화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길에 가다가 예쁜 꽃이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꺾어다가 자기 소유화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노아 홍수 때의 사람의 죄만 아니라 오늘 이 시대의 죄도 이러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기독신문에 나온 이렇게 전면광고를 통하여 목사와 장로가 싸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자기 거라는 소유욕의 싸움입니다.

 

 

 

 

이러한 죄악이 관영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악이 관영한 모습입니다. 이러한 죄가 관영하게 드러나는 이유는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죄인 되었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착한데 죄를 자꾸 지어서 죄가 가득한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죄가 가득 차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통해서 나오는 후손들이 어떤 자들 입니까? 네피림이라고 그 당시의 용사라는 것입니다. 이 네피림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을 천사에게도 하니까 천사와 사람의 딸들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천사는 영적인 존재이기에 그렇게 보기는 무리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고 자기들이 기뻐하는 대로 결혼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후손을 바보가 되게 하시면 될 텐데 오히려 그들에게서 태어난 자들이 시대의 영웅이 되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자녀가 고시를 패스하고 사(師)자 달린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아합니까? 저 집이 복 받았다, 그러지요. 그런데 청문회 보니까 그렇지도 않은데, 자꾸만 그러한 영웅, 유명한 사람을 좋아 하는데 그런 자가 나온다고 죄악이 관영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있다고 심판이 면제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영웅과 유명한 자를 원하여도 이들의 마음의 생각과 그 계획이 어떠합니까?

 

 

 

 

5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계획이 가끔 악한 것이 아닙니다. 늘 착하다가 한번씩 악한 것이 아니라 항상, 늘, 언제나 악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세상에는 죄악만 관영한 것입니다. 12절을 한 번 더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 이 말씀을 표준새번역으로 보면 이러합니다. “하나님이 땅을 보시니, 썩어 있었다. 살과 피를 지니고 땅 위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의 삶이 속속들이 썩어 있었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은 그냥 두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땅위에 사람 지으심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사람뿐만 아니라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다 쓸어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가 가득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탄식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도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와 탄식 앞에서 돌이켜 봅시다. 지금까지 우리는 얼마나 나의 소유를 확장하면서 그것을 오직 나의 기쁨만을 위하여서만 사용하여 왔습니까? 겨우 십일조하고서 헌금의 의무는 다 한 것처럼 마음 홀가분하게 여기고 나의 나됨을 나의 실력으로 여겨오지 않았습니까? 도대체 우리의 전부가 주의 것임을 인정하십니까? 이러한 세상이기에 주님께서 지금 우리를 심판 하셔도 노아홍수 때 심판당한 사람처럼 아무 할 말이 없는 자입니다. 나 이것 하였잖아요, 저것도 하였는데요. 그런 것으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라야 심판을 면제받습니다.

 

 

 

 

고린도전서 16:2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 하거든 저주를 받을 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이것이 심판의 기준입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거든 저주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얼마만큼 사랑하십니까? 우리는 아무도 자신 있게 나는 나보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저주받아 심판받고 멸망 받아 마땅한 자들입니다. 믿으십니까? 기도할 때만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들이라는 그 말이 이처럼 우리 가까이 우리 안에 함께 들러붙어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이쯤 말씀을 들으시면 우리에게 어떤 반응이 나타납니까? 그래도 나는 괜찮을 거야라는 생각이 들던지 아니면, 그래 인정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 심판을 면할 수 있는가 그 방법을 가르쳐 다오, 그러면 내가 목숨을 걸고라도 내가 이루어 내어 나의 구원을 따 내겠다 하는 반응이 나올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경우입니까? 그래도 나는 안심이야 하는 분 계십니까? 저는 정말 자신이 없습니다. 얼마나 내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인지를 함께 살아보지 않고 어떻게 아시겠습니까?

 

 

 

 

그러면 두 번째를 기대 해볼까요? 어떻게 하면 심판을 면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분명한 비결을 알려주거나 이렇게, 이렇게 하면 된다는 규칙을 정하여 주는 곳이 이단입니다. 기존의 교회를 부정하고 자신의 또 다른 몇 가지의 방법을 제시하여 그것을 지키고 이룸으로 심판을 면제 받으려는 발상이 이미 틀린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죄를 지적하며 우리의 할 말이 주여 긍휼이 여기소서, 라는 말 외에 무슨 할말이 있느냐 그러니까 어떤 집사님이 그 말을 외워 두어야지 그러는 것입니다. 웃으며 한 이야기이지만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8절을 봅시다.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도 그 시대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노아가 심판을 받지 않는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더라, 이 길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은혜를 받는 방법이 있지 않겠습니까? 은혜가 무언지를 모르니 은혜 받는 방법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은혜란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주시는 분의 마음입니다. 우리 쪽에서 무엇을 하였기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아내는 비결은 없습니다. 무슨 비결이 그리도 많은지 모르지만 비결은 없습니다.

 

 

 

 

오직 은혜를 입은 자만 아는 것이고 은혜를 입은 자만 은혜를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온 천하가 물의 심판이 임하여도 노아는 구원받습니다. 오직 은혜를 입은 노아만 구원에 이릅니다. 노아의 가족은 노아의 그 은혜에 함께 참여된 자들입니다. 가정으로 보자면 단 한 가정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에 그 시대에 의인이라 완전한 자라 칭함을 얻고 하나님과 동행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도 은혜를 입은 자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는 참으로 자신이 멸망 받아 마땅한 자임을 아는 것입니다. 범사에 주님을 생각하기 보다는 범사에 나의 기쁨, 나의 행복에만 관심을 가지는 우리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죄악의 관영함이 하나님의 아들이, 이세상의 주인이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를 죽인 것입니다. 그러나 희생당하신 그분이 희생시킨 죄인을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이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은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입은 자는 오직 그분의 말씀하나 표정 하나에도 온갖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은혜를 입은 자라면 그 심판에서 우리를 건지신 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자연스럽게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그 머리털, 여인의 면류관이라는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고 향유를 붓고 그 발에 입 맞추는 그 여인의 심정을 우리가 헤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죄악이 관영한 세상 속에서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그 사랑을 알아가며, 또한 그 주님을 사랑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6:13-7:24  방주에 있던 자만  1999. 9. 12.

 

 


현대인들은 과학적인 사고방식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과학적으로 설명되어야 진리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 홍수도 과학적으로 입증하면 사람들이 믿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서 방주의 파편을 찾는다든지, 방주를 실제 크기로 만들어 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방주를 만든 사람이 있었는데 네덜란드의 ‘쟌센’이라는 사람이 성경의 규빗을 환산하여 방주를 만들었는데 길이가 137m, 폭이 23m, 높이가 14m로 나오는데 톤수로는 약 32.000-35.000톤까지 실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배의 모양이 상자처럼 생기고 3층이니까 똑 같은 배보다 1/3을 더 실을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에 ‘하워드 오스굳’이라는 박사는 이 방주 안에 2,400종의 포유동물, 1만종의 조류, 1천종의 사류, 1250종의 도마뱀류, 10만종의 곤충류와 1년간 먹을 양식을 실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설명하여 주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저도 군에 있을 때 노아 방주에 대한 특강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성지공전 조선공학 교수라는 분이 노아 방주에 대하여 상세하게 과학적으로 설명을 하였습니다. 요즈음도 사람이 손으로 나무를 사용하여 배를 만드는 사람의 하루 작업 분량이 있답니다. 그러므로 그 작업분량을 계산하여 노아 가족 남자 4명 곱하기 120년에서 안식일 빼면 정확한 배의 톤수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대 첨단 과학으로 계산해 보면 폭풍우에 가장 잘 견딜 수 있는 배가 이 정도의 크기이며, 모든 짐승의 무게와 사람이 함께 일년간 먹을 양식을 계산하니 조금 남더라는 것입니다. 이게 왜일까 하고  생각해보니 배 안에서는 활동이 거의 없고 또 배가 울렁거리니 육지에서의 절반 정도만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무게를 빼니 정확하게 노아 방주의 만든 기간, 톤 수, 먹을 양식까지 정확하게 계산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방주 안에 있었던 기간은 1년 하고 17일이지요.(7:10-11, 8:13-14)

 

 

 

 

이 정도로 노아 방주의 정확한 재원을 설명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한국의 ‘창조과학회’ 하는 분들이 이런 일을 통하여 성경을 증명하고자 하는데 그렇게 하여 성경이 증명된다고 하여도 예수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특강을 듣고 나서 한사람에게 믿을 수 있겠느냐고 물어 보니 이 사람이 바닷가 출신이라 직접 배를 가지고 있던 사람인데 뭐라고 하는가 하면 배의 가장 중요한 연결하는 핀이 그 정도의 무게를 견딜 수 있겠느냐고 합디다. 상자처럼 지어졌다고 말한다 해도 그렇게 반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이러한 말씀을 역사적인 증거와 고고학적인 증거를 통하여 믿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처녀가 아이를 어떻게 낳습니까? 다 웃을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고 말합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였다고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과학이라는 범주로 설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과학적인 싸움을 싸우는 것 자체가 믿음의 세계를 이해 못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과학적으로 창조가 아니라 진화가 맞다고 온 세계 과학자들이 다 들고 나와도 우리는 아니야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야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창조나, 노아 홍수, 다른 기적들을 그런 관점에서 싸우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내가 예수를 믿고서 과학자가 되었는데 과학자된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하는 일에 보탬이 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그런 일을 합니다만,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게 되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노아 홍수를 통하여 무엇을 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언약을 하셨고 그 언약을 어떻게 실현하시는가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언약의 책이라고 구약, 신약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볼 때 노아 방주의 크기나, 그 많은 물이 어디에서 나왔느냐의 관심보다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노아 언약이 무엇인지 찾아보고자 합니다.
 

 

 


먼저 노아의 이름이 무슨 뜻입니까? 5:39절에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심으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식을 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노아에게서 안식의 사건이 나올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안식이 어떻게 주어집니까? 하나님의 안식이 주어지기 위하여서 세상의 죄악이 관영한 것을 청소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집안에서 쉴 때도 청소가 되어 있어야 쉬어도 편하게 쉴 수 있지요. 하나님은 자신이 만드신 세상에 죄악이 관영한 것을 청소하셔야 쉬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홍수라는 커다란 빗자루로 쓸어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사람들이 속속들이 썩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 13절에 보면 “혈육 있는 자의 강포가 땅에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멸하는 순간에도,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노아에게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시는데 17절에서 18절을 봅시다. “내가 홍수를 땅에 일으켜 무릇 생명의 기식있는 육체를 천하에서 멸절하리니 땅에 있는 자가 다 죽으리라 그러나 너와는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하나님께서 노아와 언약을 세우시는데 그 언약을 내 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니 하나님께서 이루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 명하신 대로 다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지 않은 자는 120년 동안 증거 하여도 아무도 방주 안으로 들어오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였다는 말씀이 베드로후서 2:5절에 나타납니다.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라고 말씀합니다. 노아가 120년간 방주를 만드는 그 행위가 의를 전파하는 것이 됩니다.

 

 

 

 

배를 만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과정을 증거 하는데도 단 한사람도 그 증거를 받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죄악이 관영하였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오늘 이 시대도 꼭 같습니다. 지금 이 세상이 불살라 없어 질 것이라고 말씀은 증거하고 있지만 그것을 믿는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야 원래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성경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다면서 우리는 종말에 대하여 생각을 안 하는 것입니다.

 

 

 

 

금요일 성경공부 하고 나서 교회의 교회됨이 무엇인가를 질문하셨는데 교회란 떠날 준비를 하고 사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이런 자세로 살면 틀림없이 세상 사람과 구별되게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땅에서만 태어났기에 땅의 일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위로부터 났기에 위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에 관심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노아는 어떻게 살았습니까? 주업은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방주를 만드는 일입니다. 부업은 먹고 사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시하신 그대로 방주를 만드는 것입니다.
6:22절을 봅시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자신의 비전과 꿈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시 하신대로입니다. 방주를 만들었는데 방향키도 없습니다. 돛대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키신 대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 방향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가는 것입니다.

 

 

 

 

드디어 방주가 완성되었습니다. 짐승들이 스스로 방주로 나아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명하셨기에 그렇게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주에 들어가고 일주일 후에 홍수가 40일을 쏟아집니다. 땅에서는 샘들이 터져 나옵니다. 주야로 40일을 땅에 쏟아지니 온 땅에 물이 가득합니다. 가장 높은 산위 십오 규빗까지 물이 차올랐습니다. 그리고 150일 동안 물이 땅에 가득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대로 땅위의 호흡 있는 것을 다 끊어 버리셨습니다.

 

 

 

 

23절을 봅시다. “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곧 사람과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라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 “방주에 있던 자만” 이것이 언약의 무서운 면입니다. 방주 밖 즉 언약밖에 있던 모든 것은 다 멸절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언약 안에 있습니까? 언약밖에 있습니까? 언약 안에 있는 자란 나의 계획과 야망을 위하여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언약을 따라 살게 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의 사람의 관심은 하나님의 언약에 늘 초점을 맞추고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삽니까?  베드로후서 3:1-14절입니다. “봉독” 말세에 종말이 없다는 자들이 나와서 기롱하는 것입니다. 말세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지요. 이런 자들은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과 물의 넘침으로 멸망당한 것을 부러 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 물로 심판하신 그 동일한 말씀으로 이제 불 사르기 위하여 남겨 져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주님의 재림을 약속 하셨기에 그 약속을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의 자세입니다. 주님의 재림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십니까? 없어질 것이 아닌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십니까? 이것이 종말을 사는 우리의 삶의 자세입니다.

 

 

 

 

그렇다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일어나는 수많은 천재지변을 보면서도 우리는 동요하지 아니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지 그러한 천재지변에 허둥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처처에 지진과 기근과 난리에 난리의 소문이 나리라는 말씀은, 이런 세상에 기대를 하지 말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우리는 사인으로 받는 것입니다. 지진을 조사하고 천재지변을 조사하는 식이 아니라 잠잠히 예수님을 기다리는 삶입니다.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삶은 모든 소망이 거기에 있으므로 세상의 어떤 것에 대한 기대가 우리의 소망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에 대하여 바라는 것을 소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사람의 욕망이 따를 뿐입니다.(주보의 인사말)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삶에서 믿음, 소망, 사랑이 바르게 피어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은 사람의 집념으로 보이고, 소망은 욕망으로 드러나게 되고, 사랑은 애정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 것을 바라고 살아가는 한 이런 면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는 삶은 세상에 안주한 삶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 노아 홍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관심이 주님의 약속에 있어야함을 알았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약속은 다시 오마 하신 약속입니다. 이 약속 안에서 주님의 날이 임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사시는 성도님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방주 안에 있는 자만 살았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만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창세기 8:1-22  하나님의 권념(眷念)  1999. 9. 19.

 

 


노아 방주에 없는 것이 무엇일까요? 방향키가 없습니다. 방주의 설계를 노아에게 말씀하시면서도 방주를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방향키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방주의 특색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사람마다 자기의 방향이 다 있습니다. 자기의 꿈과 인생의 희망사항이 다 있습니다. 그 꿈과 희망을 이루기 위하여 열심히 인생의 노를 저어 가는 것입니다. 평생 노를 저어 가는 것이 인생인데 그 목표가 어디인가,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자기의 이상의 실현입니까? 우리는 나의 이상도 실현하고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도 기쁘시게 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만 그러나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자기의 기뻐하는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노아 방주를 보면 사람이 움직여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권념, 돌보심만이 방주를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노아와 방주에 있던 모든 짐승까지 권념하셨습니다. 그래서 바람으로 땅위에 불게 하셔서 물을 감하게 하십니다. 비가 그치고 물이 점점 물러가니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습니다. 이곳에 노아가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자신이 스스로의 빈틈없는 인생의 계획을 위하여 달려가면 그런 삶의 모습에서는 사람의 집념과 불굴의 의지만 보이지만 은혜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보다는 사람들의 목표를 따라 나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방향키를 사람이 잡고 있는 것입니다. 말은 주여, 주여 하면서도 종이 아니라 자신이 주가 되어서 교회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교회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계획과 뜻이 포기되어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살려주시고 권념하심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러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사는 것입니까? 라는 질문이 나올 수가 있는데 지금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권념,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이 없는데요, 그러니 목사님이 알아서 정해 주십시오, 라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가 몇 가지 시키면 그것만 열심히 해 내면 신앙생활 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다보니 오늘날 한국교회가 주님의 교회인지 목사 장로의 교회인지 모를 지경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주로 믿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자는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자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주를 고백한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주님의 인도와 돌보심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인생을 우리가 우리 의도대로 이루어 진 것이 얼마나 됩니까? 나는 나의 계획을 차질 없이 이루어 내었다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아마 어려서의 꿈과 청소년 때의 꿈을 모두 하향조정하여 살고 있을 것입니다. 보통 사는 삶이 이러한 대도 사람들은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욕망에 붙들린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한평생 이루지 못할 꿈만 꾸다가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방주를 탄 사람입니까? 방주란 그리스도안에 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는 자신이 죽은 자입니다. 스스로 방향 설정을 하지 못하는 자입니다. 주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주도권의 포기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첫 번째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놀라운 계획을 이루어 내면 사람의 이름이 영광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뜻을 이루는 자들이 아니기에 오직 주님의 계획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에 주님의 이름만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라는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내 뜻은 부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의 자세입니다.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서 온 가족이 배를 타고 넘어온 사람이 누구입니까? 김만철씨이지요. 북한에서 의사로 있으면서 먹고 살기가 힘 드는 상황에서 탈출을 결심하고 탈출하였습니다. 그 분의 간증을 들어 보았는데, 우여곡절 끝에 한국에 왔지만 예수를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가족이 먼저 믿었고 자신은 믿지 않았다는 겁니다. 먼저 탈북하여 예수 믿은 자들이 하도 권하기에, 자기가 그래도 엘리트인데 성경을 한번은 보고서 비판을 하든지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성경을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에 거짓말도 잘해 놓았다는 느낌만 받고서 그래도 계속 읽어 나가다가 한 곳에서 멈추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탈출하다가 바다에서 당한 일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는 시편의 말씀에서 어찌 이럴 수 있느냐고 하면서 놀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편 107편 23-32절을 보겠습니다. “봉독” 폭풍우를 만나 죽을 고생을 하였는데 나중에는 엔진고장이 나서 바다 물결 따라 떠내려간 것입니다. 한국에 와서 안기부에 지금은 국정원이죠 조사를 받는데 너희들이 탈출하였을 때 북한에서 비행기가 추격하였는데 공격하지 않은 것은 너희가 간첩이 아니냐고 물었답니다. 그런데 그들이 바다 가운데 이리 저리 떠돌아다닐 때 커다란 구름이 자기들 위에 드리우고 있었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를 소개하는 것은 한 가지 이유입니다. 자신이 탈출하였지만 엔진고장입니다. 스스로 결정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자신의 힘과 방법으로 인생을 끌고 가려고 하는데 사방이 적입니다.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남을 헤쳐서라도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비극인데도 우리는 자꾸만 그 쪽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방주 안에 있는 자는 자기의 힘과 기술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가는 것임을 알기에 인생의 키를 주님의 손에 넘기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참된 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의 발전이 없지 않느냐고 말하지요. 적어도 50년 전만 해도 발전이란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사람들이 생각 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발전이 좋은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무식한 사람 취급받을 만큼 발전에 대하여 회의적입니다. 문명인들이 덜 문명한 자들을 보고서 미개하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과 편견인지를 인류학자들이 증거해 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지어낸 것이 좋음이나 발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만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발전과 성공과 꿈의 실현에 속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만들어진 것 외에는 다 쓸어버리시는 것이 노아의 홍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것 외에는 다 흔들어 버리고 다 불태워 버린다는 말씀을 믿는다면 맹목적인 발전의 노예에서 탈출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이 노아의 홍수와 방주를 통하여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계시인 것입니다.

 

 

 

 

이제 방주에서 나왔습니다. 중요한 하나님의 계시를 보게 됩니다. 그것이 노아가 가장 먼저 하나님께 단을 쌓고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번제의 희생물은 어떤 짐승입니까? 짐승과 새 중에서 정결한 것입니다. 노아 방주에는 정결한 것만 탄 것이 아니라 부정한 것도 탔습니다. 7:2,8절에 보시면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이 함께 탑니다. 그런데 이 부정한 것이 정결한 짐승의 희생에 의하여 정결함을 얻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간적으로는 희생이 뒤에 있지만 부정한 것의 구원이 정결한 짐승의 희생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율법이 제사를 규정하기 전에 나온 희생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결한 짐승의 희생의 향기를 하나님이 받으시고는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합니다. 이 말씀의 계속이 9장에도 이어지는데 앞으로 전혀 심판이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불로 심판할 때가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믿지 않는 자들이 있는데 ‘여호와의 증인’이나 인본주의자들은 이것을 믿지 아니합니다. 그러면 사람으로 인하여 다시는 저주를 안 하시겠다는 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첫째는,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기에 노아 홍수처럼 멸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노아홍수로 죄를 청소하셨지만 그러나 사람이 어려서부터 마음의 계획이 악하기에 하나님이 그 악대로 심판하시면 하루에 한번씩 노아 홍수를 퍼부어도 모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계획과 꿈을 자꾸만 시비 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계획이 항상 악하기에 어떠한 인간의 위대한 업적도 악이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6:5절을 봅시다.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을 벌하시면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 심판받아야 하기에 그냥 미루어 두는 것입니다. 한꺼번에 처리하시는 것입니다. 저주를 안 하시는 두 번째 이유는 마땅히 저주받아야 하지만 대신 희생당한 정결한 피안에 있기에 심판과 저주를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저주가 내리지 않고 그래도 노아의 제사를 받으시고 하나님이 언약하신 그 언약대로 이 땅이 있는 동안 심음과 거둠과 사계와 밤낮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심판을 받아 겨울만 계속되고, 심었는데 수확을 못하고 하여도 할 말이 없는 자인데 하나님이 노아의 드린 그 희생 제물의 향기를 흠향하시고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이 계속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이 자연의 당연한 이치로 생각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노아와 맺으신 그 언약대로 오늘도 낮과 밤, 사시사철, 심음과 거둠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농사를 주업으로 하지 않지만 농사를 조금은 알 것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려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자연히 당연히 되는 것이 아니라 정결한 짐승의 희생의 덕분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 것은 마땅히 심판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세상 사람들이야 자신의 노력으로 산다고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는 것이 드러나야 하는데 이것이 보이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세대에 대하여 노아는 방주를 예비하는 모습을 통하여 정죄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7절을 봅시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를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방주를 만드는 것이 세상을 정죄하는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땅의 비젼을 정죄하는 기능은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일에 경고를 받은 노아가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한 것처럼 오늘 우리가 보지 못하는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을 기다린다면 그것을 경외함으로 기다리는 자세가 이 세상을 정죄하는 기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모습보다 이 세상에서 더 영웅적으로 살고 싶은 모습이 드러난다면 우리가 세상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죄를 받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갈라디아서 1:4-5절을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이 악한 세상에서, 성경은 이 세상을 악한 세대라고 합니다. 예수님을 죽인 세상입니다. 자기의 꿈과 포부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한 세상입니다. 이런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기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신 분을 모독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 떠나기 싫어, 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결국, 노아의 희생제사가 보여주는 궁극적인 모습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대신 희생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돌보심을 입고 가는데도 하나님의 희생은 간 곳 없고 자신의 공로만 자신의 의만 드러낸다면 이것이 바로 은혜를 모독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의 키를 주님이 쥐고 계심을 믿으시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깁시다. 이것이 믿음이요, 쉼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범사에 살아가는 모든 것이 은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행한 대로 갚으신다면 하루에도 수백 번 더 저주를 받아야 하는데 대신 저주 받으신 우리 주님의 은혜로 살고 있음을 감사하며, 자랑하며, 주님의 돌보심 아래 늘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9:1-17  언약  1999. 9. 26.

 

 


하나님은 자신이 언약하신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 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저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는 전능이란 못하는 것이 없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을 전능으로 생각하게 되면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지금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것을 나의 힘으로는 이루어 낼 수 없으니 내가 열심히 기도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으로 무엇을 이루어 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하나님의 전능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전에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어린아이가 치료를 받으면 나을 수 있는 병인데 부모가 치료를 거절하여 병이 악화된 경우를 보았습니다. 부모가 왜 치료를 거부하는가 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성경을 들이대면서(출15:26) 하나님은 치료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자신은 확신하기에 병원치료를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가 오늘날 하나님의 전능을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의 형편에 10억 정도의 예배당을 지을 계획을 하고서 발표를 하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사람들은 불가능 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흥사 불러서 부흥회 한번 하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나아가면 불가능은 없습니다. 다같이 믿음을 가지고 나아갑시다. 어느 교회는 더 어려운 형편에서 하나님께 이렇게 역사 하였습니다. 그리고 몇 배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식의 전능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전능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을 자극하여 인간의 불굴의 의지를 모아낸 것이지 하나님의 전능이라고 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전능은 어떠한 전능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는 일에 전능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시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누구에게 하신 약속입니까?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독립 운동하여 출애굽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출애굽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하여 모세를 보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집사님이 어느 분의 설교를 듣고 모세의 부모가 아니었다면 모세라는 이름이 성경에 없었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틀렸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모세의 부모의 신앙의 용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힘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어떠한 세력도 막거나 깨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왕이 방해할 수 없습니다. 홍해가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전능을 보여주는 사건이지만 그 전능의 사건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내시는 것에 사용하시는 힘인 것입니다. 

 

 

 

 

늘푸른교회 예배당을 짓는 일이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몇 장 몇 절에 늘푸른 예배당을 사파동 어디에 지으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지요. 그러므로 예배당을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못 지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일은 형편 되면 지을 수도 있고, 안되면 안하면 되는 것을 가지고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에게도 멋진 예배당 하나 주세요, 라고 하면 전능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일에 무능하십니다. 무능하다고 하니 너무 과격합니까? 여기 황금색의 타종이 있습니다. 이것을 색깔만 황금이 아니라 진짜 황금으로 하나님이 만들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어떻게 대답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오늘 말씀에 언약이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주시는데 그 언약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주셨고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를 말씀을 통하여 찾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9:1절을 봅시다. 먼저 1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습니까? 언제 주어진 말씀입니까?  창세기 1:28절을 봅시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축복의 말씀을 노아 홍수 이후에 노아에게 또다시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였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죄를 청소하시고서 또다시 9:1절의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한 말씀도 헛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7절에서 한 번 더 반복합니다.

 

 

 

 

2절입니다. 지상의 모든 생물이 사람을 두려워하며 무서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들을 붙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나운 짐승들이 인간을 잡아먹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사나운 짐승들과의 전쟁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짐승들은 사람이 사는 곳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사는 곳에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밖에 있게 되면 사나운 짐승이 해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보호와 경계로 인한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보호가 없었다면 우리 인간이 살아남아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사람을 보호하기 위하여 짐승들 속에 두려움과 공포를 심어주어 사람을 해칠 수 없게 하였다.’ 우리의 감사의 제목이 또 늘어납니다. 지난주에는 사시사철과 심음과 거둠이 하나님의 언약으로 주어지듯이 사나운 짐승의 밥이 안 된 것도 하나님의 언약 때문입니다. 짐승이 사람을 해치는 경우는 사람이 짐승을 위해하였을 경우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짐승이 아무리 사나워도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 때문인 줄 알고서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3-6절입니다. 창조 때는 식물만 사람의 음식물로 주셨는데 이제는 짐승도 사람의 식물로 허용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금하는 것은 피 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피를 흘리지 말 것을 말씀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사람의 피를 흘리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만 상고 하고자 합니다. 피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피가 생명이기에 짐승을 잡아먹을 때 피 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피도 흘리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피를 흘린다는 것은 생명을 죽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피를 흘리면 그 피값을 찾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생명으로만 속하여 지는 것입니다.

 

 

 

 

5절 하반절에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6절에서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피가 생명이기에 생명은 생명으로만 속하여 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피를 흘리는 죄를 지었으면 자신이 피를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단지 상처의 피가 아니라 죽음입니다. 성경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죄의 값을 받아야 하는데 그 결과는 사망입니다. 여기에서 피를 말하게 되는 것은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피를 흘린 자는 자신의 피를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피가 생명이기에 생명을 속하려면 반드시 피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에도 나타납니다. 신명기 12:23절에 피는 그 생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속하기 위하여서는 피흘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 피에 대한 성경의 증거가 너무 많습니다. 성경 전체를 한 글자로 줄이라면 ‘피’라고 할 만큼 구약의 제사가 피 흘리는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모든 희생제사에 피흘림을 통하여 죄를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짐승의 피가 아니라 온전한 피흘림으로 우리를 속량하신 것을 히브리서에서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11-22절. “봉독” 피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피란 생명입니다. 생명이 희생되어야 생명을 속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담긴 핵심 내용입니다. 이 언약이 구약에서는 희미합니다. 그러나 점점 더 뚜렷하여 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피뿌림이 우리에게 새 언약의 완성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언약의 책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22:20절을 봅시다.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이것이 새 언약의 완성입니다. 피가 생명이라는 희미한 말씀이 창세기에 있는데 예수님의 피흘림이 생명을 희생함으로 속량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언약이 더욱 구체화 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언약을 받은 자로서 이제 역으로 창세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을 다시 한번 더 추적하여 봄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언약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창세기 9:8-17절까지 다시 한번 봉독합니다. “봉독” 언약이라는 말씀이 눈에 들어오십니까? 몇 번이나 나옵니까? 7번이나 언약이라는 직접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이 언약은 누구의 언약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내 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언약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언약을 하나님은 정결한 짐승의 희생 제사를 받으시고 언약을 주시는 것입니다. 노아가 정결한 짐승을 드리는 것도 하나님의 계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 정결한 짐승의 희생에 의하여 부정한 짐승도 살아남았듯이 하나님의 언약은 이제 다시는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지 아니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무엇을 주십니까? 무지개를 주십니다.

무지개가 노아 홍수 전에 있었느냐 없었느냐 라는 논란이 있습니다. 노아홍수 때에 위의 물층이 쏟아져서 홍수가 되었다고 보면 홍수 이전에는 무지개가 나타날 수 없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전에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담아내는 새로운 의미로 보기도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만 저는 노아 홍수 이후에 무지개가 새롭게 나타난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지개를 전에도 보았다면 무지개가 있는데 홍수가 났다면 언약의 의미가 새로운 것으로 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어떠하든 하나님이 이제 무지개를 보는 자들이 물로는 심판 하지 아니하심을 믿게 되고 하나님도 무지개를 보면서 내 언약을 기억하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땅의 모든 생물과 세운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메튜 헨리’라는 주석가는 무지개가 활모양인데 활이 하나님 쪽으로 휘어져 있기에 사람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위로를 준다는 식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알레고리라 그러는데 저는 이보다 좀더 알레고리로 볼 수도 있다고 봅니다. 물론 여기서 힌트를 얻었습니다만 하나님이 무지개를 보면서 심판을 하시지 않는 것은 자신의 언약 때문입니다. 그러면 죄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국 자신의 희생을 통하여 사하시는 것입니다. 활을 자기에게로 쏘고 계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좀 무리하기는 하지만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 기초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노아 언약에 대하여 이사야 54장 9절을 보겠습니다. “봉독” 노아 언약을 한 것처럼 다시 심판을 하지 않으시고 자비를 베풀겠다는 것입니다. 8절에서 넘치는 진노로 진노하시지만 영원한 자비로 긍휼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사야 53장에 ‘고난 받는 종의 노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대신 고난을 담당하는 희생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노아의 언약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자기희생으로 자기 백성을 구하여 내시는 십자가의 희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새 언약 아래 있는 자들은 어디에서 안전을 누립니까? 무지개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새 언약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지개를 보면서 물로 심판하지 않을 것은 아직도 유효한 영원한 언약입니다. 이제는 새 언약의 안에서만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8:1-2절.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 하였음이라” 이 언약을 이루어 내신 십자가의 증표를 날마다 바라보며 언약 안에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9:18-29  덮어줌의 은혜  1999. 10. 3.

 

 


노아홍수 이후에 노아가 농사를 짓기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고 거두어 포도주를 만들어 먹고는 취하여 벌거벗고 누워 잤습니다. 이때 함이 들어와 보고서는 밖으로 나가 두 형제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셈과 야벳은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않으려고 뒷걸음으로 들어가 아비의 하체를 덮어 주었습니다. 술이 깨어 일어난 노아는 이 사실을 알고 함은 저주하고 셈과 야벳은 축복합니다. 자기가 실수 해놓고 함을 저주한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잘되지 않습니다. 노아는 자신이 술 먹고 취하여 벌거벗어 누웠는데 그걸 말했다고 저주를 하는데 가나안은 함의 아들입니다. 함의 후손의 대표적인 이름이 가나안이기에 가나안으로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가나안, 즉 함의 후손은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고 저주를 선포합니다. 그냥 형제의 종이 아니라 종들의 종은 더 비참한 것입니다. 반면에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하체를 가려 주었는데 어떤 복을 받습니까? 셈의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셈을 통하여 하나님이 찬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야벳은 창대케 되는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실수를 덮어준 것은 이렇게 큰 복을 받고 수치를 덮어주지 아니한 자는 이렇게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가지고 효도하면 복 받는다는 식의 말을 합니다만 그러며 자기의 실수를 알렸다고 저주를 퍼붓는 아버지는 올바릅니까?

 

 

 

 

그러므로 아버지의 저주의 선포와 축복의 선포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담아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계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하나의 윤리 도덕적인 교과서로 보면 하나님의 계시를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엉망으로 살아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마땅합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 그러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잘 따지고, 말 잘하고 세상살이에 더 악착같기에 고개를 흔드는 것 아닙니까? 왜 그렇게 삽니까?

 

 

 


헌금 많이 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알기에 다른 사람보다 돈 더 악착같이 많이 벌어서 하나님의 일 하려고 합니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데 총신 신대원 개강 수련회에서 주강사로 온 어느 목사가 자기 교회에서 예배당을 100억인가 들여서 짓는다고 그를 강사로 초청하였는지 모르지만 설교 때에 ‘사탄의 돈을 교회로’ 라는 만세 삼창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부한 세상의 힘을 교회로 끌어들이려는 이런 일에 할렐루야 아멘 하는데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말씀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렇게 하였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빨리 죽기를 소원하고 사는 사람, 세상에서 빨리 탈출하고 싶어 하는 삶의 모습이 나와야 하지 않습니까? 이런 방향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표지여야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땅에서의 잘됨만을 바라지만 우리는 이미 준비되어 있는 은혜의 나라가 있기에 어지간한 손해를 보고서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윤리 도덕 말하다 길어졌습니다만 노아가 자기 아들을 저주하고 축복한 것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입니다. 어느 아들이 저주받기를 원하는 부모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의 인물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드러내는지를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먼저 노아홍수에서 살아남은 비결이 무엇입니까?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에 당세의 의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의인이기에 다만 참예함으로 다른 식구들도 살아남은 것입니다. 이들이 노아홍수의 심판에서 살아남은 이유는 하나님의 덮어줌의 은혜인 것입니다. 방주를 만들었으니 구원을 받았지, 하는 것은 ‘알미니안’입니다. 배를 만들고 준비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와 말씀의 능력으로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120년을 한결같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 수가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믿지 아니하는데 그러므로 이런 것을 성경이 말할 때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것입니다.

 

 

 

 

창세기 7:16절에 보면 방주의 문을 하나님이 닫으시는 것입니다. 방주 문을 닫으니 비가 들어오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방주 안에 있었다는 것이 하나님이 천하를 물바다가 되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덮으심이 구원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덮으심이 정결한 짐승의 희생에 있음을 홍수 후에 제사로 확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덮어짐의 은혜를 입었기에 이 은혜를 드러내어야 하는데, 함은 이 은혜를 무시한 것입니다. 이것이 저주를 받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이 덮어주시는 은혜를 거절하는 것이 저주임을 함을 통하여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덮어주는 것, 가려 주는 것을 성경은 얼마나 많이 말씀하고 있는지 성경 몇 곳을 보면서 확인하고자 합니다.

 

 

 

 

가장 먼저 가리움을 받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담과 하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함으로 스스로 부끄러워, 숨고 가렸습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끊임없이 자기의 행위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를 하나님이 짐승의 가죽으로 가려 주셨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가려주심이, 덮어주심이 이스라엘 전체에 나타나는 모습은 유월절 밤에 일어납니다. 물론 9가지 재앙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땅은 보호하셨지만 그 절정은 유월절 밤입니다. 이때 어린양의 피를 바른 집은 살아남는 것입니다. 죄인이라도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 죽음의 천사가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 집에 방탄유리가 덮어져 있는 것처럼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월절의 정신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하나님은 율법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중심은 제사에 있고 제사의 중심은 대신 희생을 통하여 가림을 받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덮어주심의 은혜가 모세에게 어떻게 나타나는지 출애굽기 33장에서 보면, 모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서는 살 수 있는 인간이 없기에 모세를 바위틈 사이에 두고서 하나님의 손으로 덮으시고 지나가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덮으시지 않았다면 모세도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덮어주시는 것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이러한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돌판을 직접 주시는 것입니다. 그 처음 돌판은 금송아지 숭배로 깨어집니다. 만약 그 돌판이 깨어지지 않았다면 금송아지 숭배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다 죽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돌판을 받습니다. 두 번째 돌판하면, 이스라엘의 반역의 증거를 담고 있는 돌판입니다. 금요일 저녁 성경공부 시간에 잠시 말씀을 드렸는데 그 돌판을 담아두는 상자가 무슨 상자 입니까 언약궤입니다. 다른 말로는 법궤이지요. 이 언약궤를 만들어 그 안에 두 번째 돌판을 담아 두는데 그 상자에 뚜껑을 덮어두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5:16-22절을 봅시다. “봉독” 언약궤위의 뚜껑을 속죄소라고 합니다. 이 속죄소 양 끝에 그룹을 쳐서 만들어 속죄소와 연결되어 지도록 합니다. 그 속죄소를 그룹의 날개로 덮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 속죄소의 이름이 각주에 다르게 나오는데 시은좌입니다. 은혜가 베풀어지는 자리입니다. 여기에 대제사장이 피를 들고 가서 언약궤에 뿌리고 이 뚜껑에 바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가림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대로하면 모두가 죽지만 하나님의 언약궤를 덮어두는 뚜껑의 기능이 죄를 속함으로 덮어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에서 보여주는 덮어줌의 은혜입니다. 언약궤의 뚜껑 이름이 속죄소입니다. 덮어두시지 않으시고 열려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우리의 허물과 죄가 가려지고 덮어지기에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은혜로 살아가는 자는 자신의 죄의 심각성을 깨달은 자입니다. 주의 성령이 임하시면 자신의 죄와 더러움 때문에 나는 이제 죽었다는 고백이 공통적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나는 죽었다고 고백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그 죄를 가리워 주신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얼마나 기쁘고 복된 소식이 되겠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복음의 복음 된 능력이 없어진 이유는 자신이 얼마만큼 죄인인지를  말씀을 통하여 확인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설교자도 죄를 지적하기 보다는 멋지게 주님의 일을 해보자는 생각으로 사람의 가능성을 높이 드러내기에 이 죄인을 긍휼히 여기소서, 나의 죄를 가려 주소서, 덮어 주소서 하기 보다는 보아라, 나는 이렇게 멋진 업적을 이루어 놓았다고 자랑하기 바쁜 곳에서 어찌 덮어줌의 위력이 나타나겠습니까?

덮어줌의 그 은혜와 능력은 자꾸만 없어져야 사람의 업적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반대로 자신이 죄인임을 알수록 이 덮어줌의 은혜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속죄소라는 말이 덮어줌에서 나온 말입니다. 덮어줌이 히브리어로 ‘카파르’인데, 속죄소는 ‘카포레트’라고 합니다.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의 행복을 보겠습니다.

 

 

 

 

시편 32:1-2절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 복입니다. 그 죄가 사하여 진 것입니다. 사하여 짐은 덮어줌입니다.(5절) 오늘 우리의 최고의 복이 이것임을 믿으십니까? 이렇게 큰 복을 받고도 왜 원망과 불평이 있습니까? 주님의 용서가 우리가 짜증내고 불평하는 그것보다 시시하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하나님의 가리워주심의 은혜를 무엇으로 아는 것입니까? 함이 저주 받은 것은 하나님의 가려 주심의 은혜를 무시하면 이러한 저주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로마서 4:6-8절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이것이 행복입니다. 오늘 우리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일한 것도 없이 이 행복을 받았습니다. 일한 것이 없기에 은혜요 선물입니다. 이것은 일함으로 도저히 갚아 낼 수 없기 때문에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 선물이 시시합니까? 아니지요 그러면 지금 죽어도 아무런 후회가 없지요 좀 손해를 당해도 이 큰 복을 받았으니 웃어넘길 수 있지요.

 

 

 

 

교회란 이상한 곳이라서 잘해도 욕먹고 못해도 욕먹는 이상한 곳입니다. 그런데도 싱긋이 웃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네가 회장이라고 그럴 수 있냐며 네가 목사면 목사지 나에게 그럴 수 있냐며 쌍심지 켜고 나서시겠습니까? 덮어줌의 복을 제대로 받게 되면 바울이 뭐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손해를 보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덮어줌의 은혜를 받는 자의 자세입니다.

 

 

 

 

오늘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그 덮어줌의 용서가 자녀에게 우리의 형제자매에게 나타납니까? 저는 그렇지 못합니다. 나에게 화나게 하면 더 크게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덮어줌의 은혜를 말하면서도 나는 또다시 덮어줌의 은혜를 사모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참으로 이 큰 은혜가 나를 덮어서 남의 허물도 용서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것이 성령의 열매이지 나의 행함의 능력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성령의 은혜를 구하기 위하여 금식도 철야도 해야 하는 것이 바르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바보 되고 쪼다 되기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 우리가 무엇으로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님을 증명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가려 보려고 애쓰는 일이 얼마나 무능한 것인지를 말씀을 통하여 보고자 합니다.

 

 

 

 

이사야 59:5-6절입니다.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가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리울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강포한 행습이 있으며” 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스스로를 가리려는 것은 거미줄로 옷을 짜려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 행위로는 자신을 가릴 수가 없는데도 사람들은 자기의 행위로 자기를 가려 보려는 것이 하나님의 덮어줌의 은혜를 무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64:6절에서는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몰아가나이다.” 우리의 스스로의 옷은 다 더러운 옷이기에 잎사귀처럼 바람에 날려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림을 사람들은 포기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후에 스스로 신이 되고자 스스로의 의를 쌓아가는 모습입니다. 이런 세상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는데 어떤 심판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어린양의 의의 세마포를 입지 않은 자에 대한 심판입니다.

 

 

 

 

요한계시록 6:16-17절입니다.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나님께 가리움을 받지 못한 자는 어린양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지 산과 바위보고 가려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피로 가리움을 받은 자는 7:9-14절에 보면 흰옷을 입고 나오며 큰 환난에서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한 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께 있도다. 오늘 우리가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가리움과 덮음을 받은 자라면 마땅히 행복해 해야 하며 그 복을 허락하신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 10:1-32  영걸  1999. 10. 10.

 

 


노아가 세 아들에 대한 예언이 무엇이었습니까? 함의 후손 즉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형제들의 종의 종이 되리라 하였고, 셈은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축복을 받고, 야벳은 창대케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덮어줌의 은혜를 계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10장에서 나타나는 족보에서 가장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영웅이 나오는 곳은 함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야벳의 후손은 2-5절, 셈은 21-31절인데 비해 함과 가나안은 6-20절로 가장 많은 분량입니다. 야벳은 유럽 쪽으로 나아가고, 함은 바벨론 지역과 가나안 지역을 다 차지하고, 셈은 바벨론 지역으로 갔다가 함의 세력에 밀려 산 쪽에서 살았습니다(10:30).

 

 

 

 

그러면 노아가 세 아들에게 축복과 저주를 한 것은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이기에 그대로 이루어 져야 하는데 더 강대하게 된 것은 함의 후손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성취됩니까? 이런 질문을 가지고 오늘 말씀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무엇이나 일등을 하여야 되고 잘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시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약의 몇 구절을 가지고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말고, 들어와도 나가도 복을 받고 하는 말을 잘 사용하는데 그러나 그러한 복은 하나님의 계명을 100% 지켜서 하나님의 의가 있을 때 주어지는 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을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였다면 복이 아니라 저주인 사실을 우리는 생각을 못하고, 또 안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기에 다른 사람이 안하는 몇 가지만이라도 하나님께 행하면 복 주실거야, 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조금만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100% 지키지 못하면 우리는 복은 고사하고 저주만 떨어지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도 보면 셈의 계통에서 영걸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함, 저주받은 함의 계열에서 영걸이 나오는 것입니다. 영걸이란 영웅입니다. 힘 있는 장사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힘 있고 세상에서 출세한 영웅이 어느 계열에서 나오는지를 알면 우리는 잘못된 세상의 영웅을 구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영웅이라도 결국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형제들의 종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우선 8절을 봅시다. 구스가 니므롯을 낳았는데 세상에서 처음 영걸이라는 것입니다. 힘 있는 사냥꾼입니다.

 

 

 

 

고대사회에서 힘 있는 사냥꾼, 특이한 사냥꾼이라면 영웅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하루 종일 들과 산으로 쫒아 다녀도 겨우 토끼 한 마리 잡아오는데 비하여 니므롯은 나갔다 하면 사슴 노루 등을 몇 마리씩 잡아오면 영웅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형제도 좋아할 것이고 동네 사람들도 좋아하는 것입니다. 특히 처녀들은 니므롯을 보면서 어쩌면 니므롯의 눈에 한번 들까를 생각하였을 겁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다른 사람은 한달 열심히 일하여도 겨우 먹고 살만큼 벌어오는데 어떤 사람은 설렁 설렁 노는 것 같은데 수백 만원, 수천 만원 벌어 준다면 누가 영웅대접을 받습니까?

 

 

 

 

니므롯이 특이한 사냥꾼이라는 것은 자신의 능력으로 많은 사냥물을 획득할 수가 있고 그 남은 획득물로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종속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그에게 힘이 집중되고 정치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알아서 니므롯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경제적인 영웅이며 동시에 정치적인 영웅이 되는 것입니다. 니므롯이 우리의 왕이 되면 먹고 사는 문제 해결되고 또 외부의 적이 쳐들어와도 든든히 지켜 줄 것이라는 생각이 되지요.

 

 

 

 

텔레비전 드라마 중에 ‘안녕 내사랑’이라는 드라마에 재벌의 아들이 자기보다 여러 면에서 나은 친구를 무엇으로 종속시킵니까? 돈으로 종속시키는 것입니다. 또 자기들은 있는 게 돈 뿐이니까 권력과 명예를 가진 집안과 사돈을 맺으려고 하는 것도 결국 경제력이 바탕이 되니 정치력까지 얻어서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의 다른 모습입니다. 드라마는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지만 이세상의 돌아가는 현실이 이런 것입니다.

 

 

 

 

이러한 니므롯이 사는 땅이 어느 곳입니까? 10절에 보시면 바벨이 나옵니다. 바벨론지역이 니므롯이 사는 땅입니다. 이곳에 바벨탑이 세워집니다. 바벨탑은 다음주에 11장에서 말씀을 드리기로 하고 이 바벨론 지역은 우리가 아는 대로도 4대 문명의 발상지 이지요. 이곳을 차지하려면 힘 있는 부족이라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15절에서 20절까지 지역도 역시 함의 후손 가나안이 차지합니다.

 

 

 

 

바벨론에서 가나안땅까지를 ‘비옥한 초생달 지역’이라고 합니다. 그 외의 지역은 사막이고 산악지역이라 살기 힘 드는 곳이지만 이곳은 살기 좋은 곳인데 누가 차지합니까? 함의 후손들이 다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영웅이나 좋은 땅을 차지하고 산다고 하여 그들을 부러워 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가 영웅이 되는 것을 왜 부러워합니까?

 

 

 

 

이들의 결국은 저주와 멸망인데 그들의 강대함이 더욱 자기들의 힘을 의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영웅을 구하고 있습니까? 금요일 저녁 성경공부 하면서도 말씀 드렸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사탄은 이미 거짓 메시야 상을 사람들에게 심어 놓았던 것입니다. 빵 문제, 경제문제를 해결해 줄 영웅적인 메시야,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해줄 영웅적인 메시야, 종교적인 문제를 해결해줄 영웅적인 메시야 이것이 사탄이 심어놓은 사람들의 영웅관이며 메시야관입니다. 사실 이 나라의 경제를 보면서 시원하게 해결해줄 사람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마음 아닙니까? 이 나라의 정치를 보면서 훌륭한 정치적인 영웅을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젊은 피 하다가 안 되니 거대여당을 만들기로 하는 것이 영웅적인 정치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더욱 영웅적인 지도자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죽은 박정희라도 살려내자는 것이 오늘날 모습입니다.

 

 

 

 

교계는 어떠합니까? 통합측에서는 작년 부총회장 선거가 부정으로 드러났으며, 고신측은 총회장이 공동의회를 연 것처럼 교인의 도장을 도용하여 교회 재산을 유지재단에 등록하였습니다. 이것은 교회재산을 총회 유지재단에 등록해야 총회장에 출마할 수 있으니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총회장에 교인들이 데모하러 갔습니다. 합동측은 어떻습니까? 전직 총회장이 전국여전도회연합회 부지문제를 해결하면서 뇌물을 받았다고 하고 아니라 하고 신문에 광고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손해를 볼지언정 세상 법정에 교인의 일을 고발치 말라고 하였는데 온통 세상법정에 고발한다고 난리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늘푸른교회는 나으뇨?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환경과 여건이 안주어져서 그렇지 우리도 수천 명의 교인이 되고 헌금이 넘쳐나면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계에서도 영웅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웅주의의 현실입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이러한 영웅과는 정반대의 말씀과 활동을 하시는 예수님을 세상은 가만히 두지 않는 것입니다. 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는 영웅 노릇을 안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가룟 유다가 열혈당원인데 예수님이 워낙 영웅적인 행동을 안 하시니까 사지로 몰아넣으면 혁명을 일으키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예수님을 넘겼다는 말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웅을 기대하는 것만 아니라 자신이 또한 영웅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학생이 영웅대접 받는 길은 공부 잘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와 자녀의 영웅대접을 받는 길은 돈 잘 벌어 오는 것입니다. 목사가 영웅 되는 길은 개척 3년 만에 천명만 모으면 한국교회에서 영웅대접 받습니다. 이러한 영웅이 어느 족속에서 나왔습니까? 저주받은 함의 후손입니다. 세상의 영웅을 세상은 부러워하여도 우리는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저주받아 지옥 가는 자들을 부러워 한다는 것은 우리가 아직도 함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성경의 예언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고자 합니다. 함의 후손이 비록 몇 백 년 몇 천 년을 영웅으로 강한 민족으로 살았지만 이들의 결국이 종의 종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력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아브라함은 어느 후손입니까?

 

 

 

 

창세기 11:10,26절을 봅니다. 셈의 후예는, 하고서 족보가 죽 이어져 가는데 결국은 누구를 지목하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을 지목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셈의 후손 중에서 아브라함을 지목하여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아브라함이 할 일이 무엇인지 짐작이 되시지요. 함의 후손을 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어 언약을 맺으시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주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하리라고 하십니다. 기존의 세력은 함의 세력입니다. 바벨론도 그렇고 가나안도 그렇고 그 당시 가장 강대국인 이집트도 함의 후손입니다.

 

 

 

 

시편 78:51절. “애굽에서 모든 장자 곧 함의 장막에 있는 그 기력의 시작을 치셨으나” 시편 105:23,27, 106:22절에도 애굽을 함으로 표현합니다. 이것을 시적인 애굽에 대한 표현이라고 합니다만 그러나 성경에서 애굽을 함의 장막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왕이라는 그 시대 최고의 영웅이 함의 후손입니다. 이러한 함의 후손을 치기 위하여 셈의 후손에서 아브람을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강한 함의 영웅을 치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세상의 영웅과는 전혀 거리가 먼 양떼를 몰고 이곳저곳으로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목숨을 부지하려고 아내를 두 번이나 자기 동생이라고 속인 그런 약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의 힘은 어김없이 시행됩니다. 사라를 취하려고 하였던 바로 왕이 아브라함에게 비는 것입니다. 아비멜렉 왕이 비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셈의 후손을 통하여 함을 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 구체적으로 들어난 사건이 유월절입니다.

 

 

 

 

시편 78:51-52절을 보시면 “애굽에서 모든 장자 곧 함의 장막에 있는 그 기력의 시작을 치셨으나 자기 백성을 양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떼 같이 지도하셨도다.” 애굽에서 함의 후손을 치고 이제는 가나안땅에 있는 함의 후손을 셈의 후손이 치러 가는 것입니다. 가나안땅에 사는 자가 창세기 10:15-20절에 나타납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부족의 이름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여도 함의 후손들입니다. 이들을 치시려고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십니다.

 

 

 

 

창세기 15:12-21절. “봉독” 아브라함에게 4대만에 이 땅을 너희 족속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대로 지금 모세가 출애굽한 백성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진격하는 것입니다. 결국 가나안에 가서 그곳에 사는 부족들을 진멸하고 또 종의 종을 삼아버립니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심판은 함의 후손의 특징을 지닌 이 세상에 대하여 전면전을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함처럼 덮어줌의 은혜를 모르고 무시하는 이 세대를 향하여 하나님은 마지막 심판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우습게 여기고 오늘도 내일도 영웅주의로 달려가는 이 세대를 향하여 하나님은 심판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영웅됨을 거절하여 십자가의 길로 가셨건만 이 세상의 수많은 주를 따른 다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인 그 영웅주의에 빠져서 영웅을 만들고 있는 이 시대에 하나님은 마지막으로 함의 속성을 지니고 살아가는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무시하는 이 세대를 향하여 셈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1-24절을 교독합니다. 이 바벨론의 멸망은 바벨탑에서 한 번 더 살펴보기로 하고 오늘은 바벨론이 무너지는 것을 말씀만 읽고자 합니다. 계시록의 바벨론은 구약의 지역적인 바벨론이 아닙니다. 세상의 거대한 세력이요, 조직이요, 세상의 국가요, 영웅을 추구하는 함의 속성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들이 결국 무너져 내린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바벨론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무너지고 망할 바벨론에서 어떻게 합니까? 모든 영웅주의를 버리고 탈출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8:4절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서 다른 음성이 나서 가로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바벨론의 원리로 살아가는 세상의 원리에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틀림없이 고생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나와야만 영원한 형벌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삶을 살기 위하여 성경을 통하여 세상을 보는 눈이 열려야 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나오는 것,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살길임을 아시고 날마다 탈출을 꿈꾸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11:1-9  바벨탑  1999. 10. 17.

 

 


모든 사람들은 다들 자기의 바벨탑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나는 바벨탑을 쌓지 않는데요, 하시는 분 있습니까? 건축물의 바벨탑이 아니라 자기 이름에 가치와 의미를 두고 사는 것이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이름에 가치와 의미를 두지 않는 자가 누가 있습니까? 이름이란 자기의 전 인격과 전 존재를 나타내는 기호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이름이 무가치 해진다는 것은 자기의 존재가 무가치 해지는 것이기에 어느 누구도 싫어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바벨탑을 쌓는 이유는 자기들의 이름을 내는 것과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홍수 이후에도 창세기의 그 축복의 말씀을 노아의 언약에 기초하여 다시 주셨습니다. 땅에 충만하라, 그리고 편만하라는 것은 각기 흩어져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인간들의 힘과 기술로 결집된 도시문명을 하나님이 싫어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싫어하고 스스로의 보호를 원하여 가인으로 시작된 도시와 성읍의 건설은 필경 하나님을 배척하는 쪽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흩어져서 살라는 이런 명령을 정면으로 거절하면서 나오는 것이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국가적인 거대한 공사를 하려면 반드시 뛰어난 통치자의 지배아래 효율적인 조직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통치자로서의 자격은 영웅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벨탑을 쌓는 일에 주도적인 역할을 니므롯이 하였다고 봅니다. 우리가 영웅되기를 원하고 또 다른 영웅을 찾는 이유는 결국 그런 영웅을 통하여 자기세계를 더욱 공고히 구축하자는 것입니다. 바벨탑은 시날 평지에 세워지는데 ‘시날’이란 두 강이 나뉘어 지는 곳이라는 뜻이랍니다. 그러니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의 강이 흐르는 비옥한 지역입니다. 이곳에 거대한 탑을 세우는 것이 바벨탑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의 공사를 보시고서는 이대로 두면 안 되겠다 싶어서 언어를 혼잡케 하였습니다. 그러니 공사가 이루어 질수 없고 말이 통하는 사람끼리 흩어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벨이란 ‘혼잡케하다’ 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바벨탑을 쌓는 것을 하나님이 흩어 버리심으로 원래 말씀하신 땅에 편만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온 인류가 다 뭉쳐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자 하여도 하나님이 약속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바벨탑의 사건을 보면서 우리가 얼마나 우리 이름을 드러내는 그런 사람인가를 확인하고 회개하면서 오직 주의 이름만 부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먼저 자신의 개인적인 이름을 내고자 하는 것이 사람들의 속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처음에 이름을 아담에게 지어 주신 것은, 아담이 이름을 지어 주신 주인의 말에 순종하는 자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최초로 무엇을 발견하면 자기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이름을 지음으로 이름 지어 주신 분의 솜씨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범죄 이후로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이름에 손해가 오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자기 이름도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입신양명(立身揚名)이지요. 출세하여 이름을 날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의 이름만 날리는 것이 아니라 부모의 이름도 덩달아 날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효도라 하여 족보 책에도 다른 사람보다 페이지를 더 많이 할애하여 그 업적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이러다 보니 우리가 자녀를 닥달하면서 공부하라고 하는 것도 말이야 다 너 잘되라고 한다고 하지만 결국 그 자녀의 잘 됨은 자기 이름과 직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도 저도 아니라도 아무 이름 낼만한 업적이 없어도 아들 하나는 두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딸이 아무리 많아도 아들을 두어야 한다는 것은 자기 이름을 이어줄 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기는 죽어도 자기 아들이 자기의 이름을 이어주기에 자기 존재의 끈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고 나서라도 자기 이름을 두고 제사라도 지내주기를 바라기에 아들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개인의 일평생은 자기 이름 하나 제대로 내어보자는 그런 바벨탑을 쌓다가 한평생을 보내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자기 이름을 위하여 탑을 쌓았다가 비참하게 죽은 두 사람이 있습니다. 사울과 압살롬입니다. 사무엘상 15:12절에 사울은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웁니다. 전쟁의 승리는 여호와의 전쟁으로 승리 한 것을 자기를 위한 기념비를 세운 것입니다. 사울의 최후가 얼마나 비참하였는지 우리가 압니다. 사무엘하 18:18절에는 압살롬이 자기의 대를 이을 아들이 없어서 자기 기념비를 세웁니다. 자식 없는 사람이 사회에 기부금을 내든지, 공적으로 자기 비석을 세우는 것도 결국은 자기의 이름을 위한 것입니다.

 

 

 

 

이러한 개인적 바벨탑 쌓기가 좀더 확대되어 나타나는 것이 창세기의 바벨탑과 같은 국가적인 차원의 바벨탑입니다. 결국 인간들이 힘을 합하여 만들어 내는 것이 바벨탑임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그러지요. 이것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뭉쳐야 산다는 것은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종교에서도 서로의 힘을 과시하기 위하여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기독교 연합회 또는 불교 연합회 등의 이름으로 힘을 모으는 것입니다. 조계종 사태에 대하여 신문의 광고를 보니 2천만 불자여, 모여서 힘을 모아달라고 합니다. 기독교 연합과 별 다를 바 없는 문구입니다. 절이란 세속을 등지고 산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자들이 세속의 힘을 원하는 것 자체가 불교의 이단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기에 예수님은 이 땅의 힘과 세력을 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예수를 믿는 다는 사람들이 세상의 힘을 원하고 있다는 것은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속고 있으면서도 속는 줄도 모르고 힘을 가지기 위하여 안달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멀리 볼 것 없이 우리 자신의 속을 보면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개인이 결국 자기의 이름을 내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이기에 이러한 개인이 모인 것이 사회요 국가입니다. 그러니 단체가 구하는 것도 결국은 바벨탑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속한 가정, 단체, 국가는 이유 없이 잘되어야 하는 것이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곳에 내 이름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다른 교회는 다 망해도 우리 교회는 잘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자기 이름 때문입니다. 개인이 자기 이름에 가치를 두고서 바벨탑을 쌓는 것이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며 망하는 길입니다. 마찬가지로 단체나 국가가 자기 이름을 내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기에 망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바벨론의 멸망은 예레미야 50장과 51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이름을 내고 자기 힘으로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 자력으로 구원을 이루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벨탑을 쌓는 자들의 사상입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지구의 자원의 고갈을 염려 합니다. 벌써 인구가 60억을 넘었습니다. 지구의 자원이 고갈되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하면서 우주를 개척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라는 바벨탑을 쌓는 것입니다.

 

 

 

 

어린이의 장난감에도 인류의 우주를 개척하는 우주 항공모함을 만들어 우주를 개척하자는 꿈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인류의 종말을 받아들이지는 아니합니다. 그래서 속담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 날 구멍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지면 솟아날 구멍이 있을지 모르지만 하늘과 지구가 함께 불타면 어떻게 할까요? 그래도 자기는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기 이름을 포기하지 못한 인간의 실상입니다.

이러한 인간들이 만들어 낸 지금까지의 가장 최고의 바벨탑은 국가입니다. 이 땅의 어린이들이 자라면서 무엇을 배우고 자라는지 아십니까? 이 대한민국의 잘됨을 위하여 교육받고 있는 것입니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하는 것이 애국가 가사입니다. 사람들의 한계가 자기 국가입니다. 그 이상도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세계를 연합하는 모임들이 많이 있습니다. 유엔이나 다른 세계적인 협약단체들이 많이 있지만 이들도 결국은 인간의 나라, 인간의 이름을 위하는 단체들입니다. 결국 자, 우리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 인류의 종말을 우리의 힘으로 막아내자, 라는 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입니다. 이러한 세상을 다니엘서에서는 어떻게 보는지 찾아보겠습니다.

 

 

 

 

다니엘 2:31-45절입니다. “봉독” 바벨론 왕이 꾼 꿈을 다니엘이 해석하여 주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세계 최고의 강대국이 바벨론인데 바벨론의 왕을 누가 세웠습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바벨론 왕이 꾼 그 꿈의 내용이 큰 신상인데 금과 은과 놋과 철과 철과 진흙이 섞인 그런 신상을 본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고 있는데 다니엘이 알게 하고서 해석을 합니다. 금은 임금이고 그 다음에 은 같은 나라, 놋 같은 나라, 철 같은 나라, 철과 진흙이 섞인 나라가 일어날 것과 그 신상이 결국은 사람이 손으로 하지 않는 산에서 뜨인돌이 날아와서는 그 신상을 부수고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34절과 35절에서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상에 가득 하였나이다” 즉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 낸 모든 국가와 세계를 호령하고 통치하는 나라들도 사람의 손에 의하지 않은 뜨인 돌에 박살이 나서 다 사라지고 그 뜨인돌만 태산으로 우뚝 서는 것입니다. 그 뜨인돌로 이루어진 나라가 44절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영원히 망하지 아니하는 나라에서 살려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한 나라에 속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어떤 나라입니까? 아들의 나라입니다. 사람의 손이 가미되지 않은 주님 홀로 십자가 지신 그 나라만 영원히 망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손으로 세운 것은 흔들어 무너뜨려 버리고 흔들리지 아니하는 나라만 남기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26-29절입니다. “봉독” 흔들리지 아니할 것만 남기시기 위하여 땅 뿐만 아니라 하늘까지 흔들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늘의 별들도 익은 무화과가 떨어지듯이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때에 흔들리지 아니할 나라의 위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아들의 피뿌림으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이 나라에 들어간 자는 이제 자기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의 이름만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4:12절에서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도다.” 이 말씀은 예수 외에는 구원자가 없음을 말할 뿐만 아니라 자기의 이름을 내세우는 자도 구원의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가 성령에 충만하여 행한 설교입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 이름의 권세가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고쳤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11절에 이 예수는 건축자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셨느니라, 라고 합니다. 사람의 손에 버려졌기에 사람의 손이 가미되지 아니한 돌로서 이제 모퉁이 돌이 되어 새롭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내 이름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자만 불러내시지만 어쨌든 우리의 자격 우리 이름의 자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의 이름만이 구원의 능력이 되고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자기의 이름은 죽었다는 것입니다. 다시는 자기의 바벨탑을 쌓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 우리 이름을 내자 이러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합니다. 오직 주의 이름만 높아져야 하는 나라에서 어찌 죄인의 이름을 드러낸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 구원받은 자의 이마에 누구의 이름이 있는가를 보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요한계시록 3:12절입니다.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이기는 자, 곧 적은 믿음으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한 이긴 자에게 이름을 기록해 주시는데 하나님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예수님의 새 이름이 기록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 22:4절에서는 한가지로 나타납니다. 천국에서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게 되는데 그 종들의 이마에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이름과 자존심 그만 챙기도록 합시다. 언제까지 바벨탑을 쌓겠습니까? 언제까지 자, 우리 이름을 내자고 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이름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오직 우리의 구원은 주의 이름에 있음을 아시고 나의 이름 챙기지 말고 주의 이름에 관심을 두고 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11:10-31  택한 백성  1999. 10. 24.

 

 


창세기 11:9절까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자기들의 이름을 내고자 힘을 모아서 바벨탑을 쌓는 자들을 흩어 버리셨습니다. 이제 언어가 같은 사람들끼리 흩어져서 살게 됨으로 바벨탑과 그 성읍의 건설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반역하는 결과는 이처럼 폐허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잘 분별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는 힘을 들이고 공을 들여서 이루어 놓은 일평생의 업적이 바벨탑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의 택한 백성을 분별하여 내는지를 살펴보고 우리도 그 길로 따라 가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바벨 즉 혼잡케 함으로 온 땅에 사람들을 흩어버리시고 난 후에 하나님은 한 사람을 따로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바벨탑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심판 이후에 한사람을 선택하여 불러내신다는 것은 부름을 받는 자의 자격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온 천지가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셈의 후손을 선택하시는 것은 노아와의 언약에 따라 덮어줌의 은혜를 아는 자의 후손에서 한 사람을 불러내는 것입니다.

 

 

 

 

이 족속이 바로 셈의 후손입니다. 이러한 셈의 후손의 족보가 창세기 10장에서 노아의 후손 함과 야벳과 함께 소개 됩니다만 바벨탑 이후에는 셈의 후손을 다시 거론함으로서 이 계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내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셈의 후손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가 이름만 알지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였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이름이 10절에서 23절까지 나타납니다. 셈은 압니다만 셈의 아들 아르박삿이 무엇을 하였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아르박삿은 10:22절에 보면 셈의 다섯 아들 중의 한 사람입니다. 10:22절의 기록이 서열 순서라면 아르박삿은 다섯째 아들 중 셋째입니다. 그러므로 셈의 모든 아들이 아니라 그 중의 한 아들의 후손을 통하여 셈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선택과 그 선택을 받아 셈의 후손을 이어 가지만 그 사람의 일한 내력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한 활동이 없었지만 이들도 하나님의 계시를 드러내는 중요한 통로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벨탑의 정신은 자 우리 이름을 내자 하는 사상입니다만 그러나 셈의 후손들의 이름은 아르박삿 뿐 아니라 셀라, 에벨, 벨렉, 르우, 스룩, 나홀 - 이 나홀은 데라의 아들이 아니라 데라의 아버지 나홀입니다. 이러한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업적이나 공적이 없습니다. 단순히 결혼하고 아이 낳아 기르고 평범하게 살다가 죽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삶속에도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무런 이름을 남기지 못하여도 그저 예수 믿는 한 사람이라는 이름만 있어도 이것이 얼마나 복되고 좋은 일인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유명한 이름이 나는 사람이 위험한 인물이거나 아니면 죽도록 고생하는 사람의 이름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 밋밋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아니하는 그런 이름이라도 상관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이름에 가치를 두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에 가치를 두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이름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구원하시는 주님을 믿는 사람답게 참으로 조용하게 잠잠히 살아 갈 수 있다면 이것이 믿음의 삶인 것입니다.

 

 

 

 

이러한 족보를 이어 오신 하나님께서 드디어 아브람의 직계가족으로 초점을 맞추고 계십니다. 26절에서 데라는 세 아들을 낳는데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입니다. 아브람은 사래와 결혼하였으나 자식이 없고, 나홀은 밀가와 결혼하여 바벨론에 계속 살았고, 하란은 아들 롯을 낳고 바벨론에서 아버지 보다 먼저 죽었습니다. 바벨론이 갈대아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갈대아 우르라는 말은 바벨론의 우르지역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갈대아 보다도 바벨론이 익숙하니 바벨론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이러한 아브람의 가족이 바벨론에서 살다가 하란으로 옮기게 됩니다. 바벨론에서 하란으로 옮기는 주도적인 역할은 31절에서 보면 데라가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셨는데 어떻게 데라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의 가능성을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아브람이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아버지를 설득하여 가는 도중에 데라가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가지 않고 머물렀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7:2-4절에 보면 아브람을 하나님이 하란에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갈대아 우르 즉 바벨론에 있을 때 부르신 것입니다. 바벨론을 ‘메소보다미아’ 라고도 합니다. 여기에서 보면 아브람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가다가 하란에서 데라가 죽고 나서 다시 가나안으로 갔다고 보는 것입니다.

 

 

 

 

둘째는 데라가 바벨론에서 자신의 안전을 위하여 하란으로 떠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데라는 바벨론에서 무엇을 하던 사람입니까? 여호수아 24:2절입니다. 데라는 다른 신들을 섬기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데라, 사라, 밀가의 이름이 ‘달의 신’을 가리키는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데라라는 이름은 가장 눈에 띄는 달의 신의 이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대아 우르와 하란 이 지역은 달숭배의 중심지였는데 데라가 바벨론을 떠난 것은 바벨론에 이 당시에 적의 침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데 고고학적인 자료에 의하면 주전 1,950년에 엘람이라는 나라가 바벨론의 우르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데라가 자신의 안전을 생각하여 하란으로 피하였으나 하란에서 머문 것은 그곳도 달숭배의 중심지였기에 그곳에서 가나안으로 가지 않고 머물렀다고 보는 것입니다. 복잡하지요. 그러므로 성경이란 해석하기에 따라 여러 가지 설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해석의 중심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지지 아니하면 한참 가다보면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보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람을 부르시고 길을 떠나게 하셨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시하실 땅을 바라보고 떠난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떠나라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첫 번째 내용입니다. 바벨론 땅에 그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내셔도 되실 텐데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신의 생존의 조건이 가장 좋은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고대 사회로 올라 갈수록 씨족사회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곳으로 간다는 것은 이미 위험을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출애굽에서도 하나님은 애굽에서 떠나게 하십니다. 그래서 출애굽이란 애굽에서 떠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말씀하실 때는 어디에서의 구원이신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영어로 하면 from 이지요. 어디로부터 구원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디를 향한 구원인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벨론에서 가나안으로의 부름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어디서 어디로의 부르심입니까?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마귀의 자식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영벌에서 영생으로의 부름입니다. 이러한 방향성이 분명하지 않으면 구원을 단지 현재의 상태보다 더 나은 상태를 말하게 되는 것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가 부자 되는 것, 병든 자가 건강해지는 것, 이런 식의 구원을 말하게 되면 하나님이 아브람을 바벨론에서 불러내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시는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벨론이 살기 좋습니까? 가나안이 살기 좋습니까? 애굽이 살기 좋습니까? 가나안이 살기 좋습니까? 세계 4대 문명 발상지라는 곳이 어디 입니까? 다들 강을 끼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인도와 중국이 다 강을 끼고 있는 지역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을 메소포타미아에서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문명발생지란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지요. 그런데 그곳에서 나오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아브람을 따라 함께 떠난 자들이 누구인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다음주에 계속하여 보겠습니다만 아브람에게 붙어 있는 것이 복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고생길입니다. 비옥한 바벨론을 두고서 알지도 못하는 낯선 곳으로의 떠남이 얼마나 망설여지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시기에 이들을 인도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비록 그 과정은 힘들고 어려움이 중첩되어 있지만 그 모든 것을 극복하고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나서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인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도 동일하게 세상이 좋고 세상에서 좀더 행복한 삶을 추구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서 주님의 나라를 사모하게 하시고 그 아들의 나라를 찾아 나서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는 세상의 것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부름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를 따라 나선 자는 직접 부름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람과 함께 떠난 자들의 모습을 봅시다.

 

 

 

 

우선 데라입니다. 다른 아들도 있었지만 아브람과 함께 바벨론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려고 하였습니다. 31절에 보시면 데라가 아브람과 롯과 사래를 데리고 가나안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하란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출발을 하였는데 도중에 머무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갈 길은 험해 보이고 현재의 삶은 좋아 보이니 머무는 것입니다. 바울과 함께 일하였던 데마라는 사람은 디모데후서 4: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세상이 좋아서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데라는 하란에 머문 것입니다. 우르에서 우상을 섬겼는데 하란에서도 우상을 섬기는 것이 많았기에 그곳에 적응하기가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안전하다, 안전하다 하는 곳이 위험의 지경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떠날 준비를 하고 사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두 번째는 롯입니다. 롯은 고아입니다. 어디 갈 곳이 없습니다. 삼촌 아브람이 거두어 주니까 롯은 싫던 좋던 아브람을 따라 나선 것입니다. 이것이 롯에게는 복인 것입니다. 비록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불행이 그에게 있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복의 통로로 세우신 아브람에게 붙어 있었던 것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사래입니다. 물론 아내이기에 따라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래는 어떤 여인입니까? 아이를 못 낳는 여인입니다. 요즈음이야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하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아이를 못 낳는 것이 수치였습니다. 그러한 사래가 그런 동네를 떠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는 것이 좋다고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래가 아브라함을 따라 나섰다가 나중에는 열국의 어미가 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12장 5절입니다.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그리고 누구입니까? 얻은 사람들 아브람의 종들입니다. 종들이란 주인에게 속하여 진 사람들입니다. 주인의 소유이기에 주인이 어디로 가든지 따라 가야하는 신세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아브람의 종들이 된 것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편입되어 지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7:12-14절을 봅시다. “봉독” 할례를 받는데 돈으로 산 자든지 즉 종이라도 할례를 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표로 구약시대에 주어진 것입니다. 할례란 사람의 실력이 아님을 증거 하는 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에 편입되는 것이 아브람의 종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보라고 고린도전서 1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잘난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시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에 대하여 가치를 둘 필요가 우리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환경이나 처지를 탓하고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 아브람처럼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과 그 뜻을 더욱 풍성히 알아감으로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강과 복을 누리시고, 그러한 복을 은혜로 주신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12:1-9  복의 사람  1999. 10. 3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말씀을 하신 것이 계시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것입니다. 이러한 택함을 입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자유하심으로 택하신 것이지 아브라함의 어떠한 자격이나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택하여진 그 사실로 인하여 다른 사람보다 나는 낫다, 라고 자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단지 나는 주의 긍휼을 입은 자라는 것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배들의 기도 중에 자주 등장하는 말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의 한 가지가 ‘천에 하나 만에 하나 고르고 골라서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하는 내용입니다. 한편으로는 맞지만 잘못 생각하면 나는 무언가가 선택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 뽑혀진 것이라는 우월성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실수를 유대인들이 하였지요.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선민이라는 우월의식, 자기들만 택함을 받았다는 우월의식으로 배타성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자기들이 택함을 입은 것은 다른 민족보다 강하거나 커서가 아니라 오히려 작고 보잘 것 없어서 택하셨다는 말씀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신명기 7: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나서가 아니라 8절에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여 또한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아브라함도 자신의 어떠한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한 선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이러한 부르심을 입은 그 자체가 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는 것이 감사할 일인 것입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선생님의 심부름을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많은 사람 가운데서 자기가 선생님의 심부름을 할 수 있도록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부름을 받은 자에게는 반드시 다른 사람이 하지 않는 희생과 수고가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희생과 수고가 그 학생에게는 기쁨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희생과 수고는 학생들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자잘한 심부름입니다. 그러나 오늘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부르시는데 처음부터 어떤 부르심의 내용입니까?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의 첫 번째는 떠나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금까지의 생존의 터전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쉬운 일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떠남을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이란 굉장히 어려운 말입니다. 어떤 때는 사람이 믿어준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사람은 불가능한 것 같은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자기가 지금까지 자리 잡고 살던 그 땅을 떠나라는 말씀에 선뜻 나설 수 있었겠습니까? 평소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오래되거나 한 것도 아니데 이러한 떠남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떠남을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아브람을 떠나게 한 것입니다. 떠남은, 고향을 떠남은 불안과 장래의 염려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떠나게 하시고서 무엇을 위하여 떠나게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복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복의 사람이 됩니까?

 

 

 

 

2-3절입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이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시고 이루어내실 언약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지금 자식이 없습니다. 그런데 큰 민족을 이루어 주고 그 이름을 창대케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아브람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의 원문에는 복의 근원이라는 말보다는 복이 되게 하리라는 편이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복의 사람이 되게 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아브람을 복의 사람이 되게 하시겠다고 하심으로 복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미에서는 복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은 동일하게 아브람처럼 복의 사람으로 하나님이 만드신다는 의미에서 복의 근원 또는 복의 모델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람이 복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는데 우리는 이러한 복을 자꾸만 부자 되고 출세하는 세상 쪽의 복을 적용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내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 복인지를 바르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뒤에 축복의 혁명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꼭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서점에서 사서 보셔도 좋습니다. 성경을 통하여 성경이 말하는 참된 복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저는 성경의 절반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아브람을 통하여 하나님은 어떠한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아브람의 시대에 아브람을 부르시고 아브람을 복의 통로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강하고 부자고 자식이 많다고 하더라도 아브람편에 서지 아니하면 복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람을 하나님께서 복의 사람으로 부르신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아브람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아브람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아브람을 축복하면 이 축복은 사람이 사람을 축복하는 말이기에 빌 축(祝)자를 사용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 높으신 분이 없으시기에 복을 빌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사람들이 축복을 좋아하기에 세상적이고 인본적인 복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단어의 문제는 아닙니다. 성경은 둘 다 같은 복이라는 단어로 말하고 있습니다. 축복을 말하든 복을 말하든 그 내용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브람을 복의 사람으로 삼으신 것은 많고 많은 사람 가운데 아브람과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로 인하여 원수가 되어 있는데 하나님이 먼저 찾아 오셔서 아브람을 부르신 것이 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복인 줄 모르면 기독교를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자신이 원수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만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신 그 부르심이 복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 복임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고 출세하지 못하고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복을 받지 못하여도 우리는 복 있는 사람임을 인정하십니까? 이 문제가 신앙의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지난주에 아브람을 따라 나선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아이를 못 낳는 사래, 고아인 조카 롯, 아브람의 종들입니다. 이들이 세상적으로 복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아브람에게 붙어있음으로 복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 편입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브람만이 그 당시에 하나님과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브람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을 통하여 보여주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복의 통로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시대에 누가 복의 통로입니까? 다윗입니다. 사울에게서 기름 부음이 떠나 다윗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실세인 사울에게 붙어 있으면 세상적인 복은 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하나님은 누구를 자신의 복의 통로를 삼고 있습니까? 다윗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을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아브람을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그 말씀이 이제는 다윗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다윗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세가 사울에게 있고 다윗은 쫓겨 다니는 신세인데 사람들이 어디에 붙어 있겠습니까? 당연히 사울을 택하는 것입니다. 누가 스스로 자초하여 고생길로 가겠습니까? 그러니 아브람에게 따라 나선 자도 세상적으로 복 없는 사람들이듯이, 다윗을 따라 나선 자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물론 다윗의 가족이야 함께 생명의 위협을 느끼니 다윗에게로 간다고 보지만 다른 사람들이야 갈 이유가 없습니다.

 

 

 

 

어느 누가 편히 잘 살고 있는데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 십자가를 따라 가겠습니까? 제 정신으로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지금 이런 말씀을 듣고서 그 말씀이 옳다고 생각이 되시면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것입니다. 그럼 제정신이 아니면 무슨 정신이겠습니까?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이 말씀에 성공한 인간은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 성공하신 것입니다. 모두가 다 부인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기를 부인하면서 주를 따라가는 제자들이 만들어 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보내어 주셨지요. 그러므로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나니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에게 따라 나선 자들도 결국은 세상의 버림 받은 자들입니다.

 

 

 

 

사무엘상 22:1-2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는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 장관이 되었는데 그와 함께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가족들은 다윗이 사울의 미움을 받았으니 당연히 따라 나선 것이고 그 밖의 사람들은 환난 당하고 빚지고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따라 나선 것입니다. 기존의 세상에서 살기 힘든 사람들입니다.

 

 

 

 

사울의 체제하에서 적응을 못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어쩔 수 없이 다윗에게 모여 든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에 독재자들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 그 정부에 의하여 피해를 입은 가족들이 모여서 민.가.협이라는 단체를 만들었지요. 그래서 고문전문가 이근안이 자수한 곳에 가서는 야 이놈아, 너 때문에 우리 아들 다리를 절고 있다고 고함을 지르고 있는 사람들이 나오는 것처럼 억울한 일을 당한 자들이 다윗에게 붙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나중에 다윗이 왕으로 등극할 때 다윗의 군대로 편입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살기 힘들고 환난 당하여 세상에 적응을 못하여 다윗에게 피하여 갔는데 다윗의 군대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복의 통로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이 정도만 하여도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들이 어떤 모습인지 감이 오지요. 그러나 수용하기는 힘들고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복을 알게 하시고 그런 복의 사람이 되게 하소서, 라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 기도를 얼마나 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주 기독신문의 만화에 이런 만화가 실렸습니다. 만화 네 컷으로 되어 있는데 첫 장면 기도, 주님. 제 남편 승진하게 해 주세요. 둘째 장면, 주님. 친정아버지 병 낫게 도와주세요. 셋째 장면, 주님. 이번에 아파트 꼭 당첨되게 해 주세요. 주님, 딸 아이 대학 진학 잘하게.... 그리고 제일 밑에 주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는 언제.....

우리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복의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영안을 밝혀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복이 참된 복임을 아는 사람은 우리의 유일한 복의 통로인 예수님을 믿는 이것이 가장 큰 복임을 아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다윗도 예수님을 보여주는 증인들입니다. 아브람에게 붙어 있는 자가 비록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는 자들이나 복의 사람이 된 것처럼, 다윗에게 환난당하고 빚지고 마음이 원통한자가 모였지만 이들이 다윗의 군대, 즉 하나님의 군대에 편입되듯이 예수님 당시에 참으로 환난당한 자, 빚진 자, 병자, 세리, 창녀, 죄인들이 주님께 붙어진 것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세상의 잘났다 하는 모든 자들이 동일하게 다 죄인인데도 그들은 복의 통로를 발로 차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복의 통로가 되는 예수님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예수님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자의 모습을 로마서 4:1-25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전체를 한번 읽기만 하겠습니다. “봉독”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아브라함의 복을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주신 복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의 복입니다. 이 복을 놓치지 말고 감사하며 그 복의 위력을 나타내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나타나겠습니까? 세상의 복을 가볍게 웃어넘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의 싸움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작은 형제자매라도 세상의 복이라고는 가지지 못하였더라도 그가 참으로 주님의 은혜를 알고 받고 믿는 자라면 그 사람이 복의 통로임을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평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적은 자 한 사람에게 한 것이 바로 예수님께 한 것이 됩니다. 약한 아브람, 약한 다윗, 약한 예수님을 믿고 따른 자들도 역시 약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하늘의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복의 풍성함을 더욱 많이 크게 알아 가시기를 부탁합니다.

 

 

 

 

 

창세기 12:1-20  애굽으로 간 아브람  1999. 11. 7.

 

 


창세기 11장까지 바벨탑을 쌓음으로 하나님이 흩어버리신 내용입니다. 이렇게 흩어버리시고 다시 아브람을 불러내시고 네가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케 하고, 너를 복의 근원으로 만드신다는 것은 아브람을 통하여 세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통치하신다는 뜻입니다. 기존의 모든 가치관이나 윤리 도덕적인 입장이 아닌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를 중심으로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자기 이름으로 거대한 도시를 만드는 것 대신 아브람을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시고, 사람들이 자기의 이름을 내세우는 대신 아브람의 이름을 창대케 하셔서 인간의 자기 이름을 내려는 것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의 내용을 이루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징표가 동원됩니다. 땅의 개념, 자식의 개념, 의의 개념 등이 아브람을 통하여 새롭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생애를 통하여 땅의 의미가 단순히 발 딛고 사는 땅이 아님을 알 수가 있고, 자식이 단순히 혈통을 이어 가는 많은 자식이 아님을 보게 되고, 아브람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자신의 의로운 행위가 아님을 창세기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부분을 창세기를 통하여 보지 못하면 우리는 자꾸만 다른 복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은 아브람이 가나안을 떠나서 애굽으로 내려가서 당한 일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가나안땅을 아브람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12:7절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자손이 없는 아브람에게 이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눈에 보이는 약속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불러내시고 이 약속의 땅을 주시겠다고 하시면 이 땅에 머물러야 하는데 점점 남방으로 내려갔습니다. 이미 그곳에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기근으로 살기 힘들어 지니 애굽으로 내려 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보고서 아브람이 믿음이 없어서 가나안에 머무르지 아니하고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욕할 수는 없습니다.

 

 

 

 

룻기 1:1-4절을 봅시다. “봉독” 이 사건도 베들레헴에 기근이 들어서 이방인의 땅 모압으로 내려갔습니다. 이것 때문에 벌을 받아 남편과 두 아들이 다 죽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속의 땅에 붙어 있자 그런 식으로만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미 베들레헴이 사사들이 다스리든 때에는 사람들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기에 베들레헴이나 이방이나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방 여인 룻을 구원하시고 룻을 통하여 다윗의 족보를 이어가게 하심으로 기존의 베들레헴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단순히 윤리 도덕적인 교훈을 끄집어내어서 가나안땅을 떠나니 벌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자기가 섬기는 교회를 떠나지 말고 잘 섬기자, 그러면 복을 받는다,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직접 아브람과 나오미의 가정을 그렇게 정죄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수준이 그 정도가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브람처럼 기근이 오면 살길을 찾는 것이고, 나오미의 가정처럼 기근이 오면 살길을 찾아 나서는 그렇고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아브람 그러면, 부름을 받자 말자 갈 바를 모르고 다 버리고 떠났고, 아들 바치라니까 단번에 아내와 의논도 없이 아들 갖다 바쳤다, 그런데 우리는 예배당 건축을 위하여 집하나 못 팔아 바치느냐, 이런 식으로 말하면 할말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렇게 밀어붙이는 식으로 나가게 되면 어떤 식이 되느냐 하면 믿음은 불가능이 없다. 지금 눈에 보이지 않아도 큰 꿈을 가지고 그것을 위하여 믿음으로 이루어 냅시다. 이런 것을 성경은 믿음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벨탑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불굴의 의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아브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의 약속하신대로 만들어 가시고 자신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는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그 땅에 기근이 들자 이런 저런 생각 없이 애굽으로 살려고 내려 간 것입니다. 애굽 땅에 가까이 이를 때에 아브람이 자기 아내 사래를 보고 뭐라고 합니까?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그러니 애굽 사람들이 당신을 나의 아내라고 하면 나를 죽이고 그대는 살릴 것이니 원컨데 나의 누이라 하라. 여러분이 남편에게서 이 말을 듣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내용 중에 아브람은 약한 사람입니다. 다른 나라에 비하여 보면 아직 부족도 이룰 수 없을 만큼 조그마한 목축업을 하는 한 무리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람이 부자가 되었다더라, 이런 쪽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그 당시 정말 부자인 왕들 앞에서 자기 목숨 부지하기 위하여 벌벌 떠는 아브람이 과연 부자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자기 아내에게 그렇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가을에 분위기 좋은 곳에서 데이트를 하고 있는데 우락부락한 깡패 같은 자들이 대여섯 명 둘러서서 접근 해올 때 남편이 여보, 당신은 내 동생이라고 하시오, 그런다면, 당장 이혼이지요. 남편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휴대폰으로 112에 신고한다, 그러시겠어요, 싸우다 죽더라도 한판 붙겠습니까? 그렇다면 아브람보다 훨씬 나은 사나이들입니다.

 

 

 

 

그런데 사래는 아브람의 그 말에 순종을 합니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은데 순종하는 것이지요. 여러분 같으면 그것이 순종할 일입니까? 힘 있는 사람이 지참금을 주고 자기 아내를 사가지고 가서는 아내를 삼는 것을 눈으로 보고서 있는 바보 같은 남편입니다. 자기 살기 위해서 아내를 팔아먹은 사람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래는 이 남편의 말에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보다 사래가 더 나은 사람 같아 보입니다. 자기 몸을 바쳐 남편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낫다, 아니다 하는 윤리 도덕적인 기준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고 서두에서 말씀드렸지요. 하나님은 아브람을 통하여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이런 모습이 옳다거나 정당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사래에 대하여 뭐라고 합니까?

 

 

 

 

베드로전서 3:6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사라가 아브람을 순종하였듯이 아내들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딸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남편이 자기보다 믿음이 없어 보여도 그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남편을 주님처럼 대하십시오. 사래가 아브람의 그 엉터리 같은 요구에 순종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아브람과의 약속을 이루어 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브람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아브람을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브람이 하나님의 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래의 아름다움을 보고서 바로왕의 대신들이 바로 왕에게 보고 하였지요. 아브람이라는 유목민이 왔는데 그 여동생이 너무나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그러자 바로왕이 사래를 자기 아내로 데려오면서 아브람에게 무엇을 줍니까? 양과 소와 노비와 나귀와 약대를 얻었습니다. 마누라 팔아서 부자 된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건이 다음에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왕과 그 집안에 큰 재앙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자 바로왕이 놀라서는 아브람에게 그 아내를 내어 주며 왜 그렇게 말하였느냐고 하면서 데려가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데리고 애굽에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누가 잘못하였습니까? 아브람이 잘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재앙은 누가 받았습니까? 바로왕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상한 느낌을 받아야 합니다. 바로왕은 사래를 강제로 빼앗아 온 것도 아니고 정당하게 여동생이라고 하기에 지참금을 후히 주고서 데려왔는데 하나님이 바로왕의 집안에 재앙을 내린 것입니다. 바로왕 같은 큰 나라의 왕이 얼마나 큰 재앙을 만났으면 혼이 나서 사래를 돌려주었겠습니까? 아마 사래에게 손도 못 대고 혼이 났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세상의 질서로는 풀리지 않는 면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질문이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면서 구약에 보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하게 전쟁을 하느냐, 어린 아이까지 진멸하라고 그러느냐, 하면 우리는 무어라고 대답하십니까? 그 사람들의 죄가 너무 많아서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또 다른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저렇게 나쁜 놈이 떵떵거리며 잘 사는데 벌도 안 받는가? 그러면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셔서 오래 참는다, 그렇게 대답합니다. 이게 말이 되는 대답입니까? 그런대도 우리는 그렇게 말하고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무엇이나 옳습니다, 하고서 보는 우리의 시각입니다. 하나님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 그러면 아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편을 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논리적으로 이해를 다해서가 아닙니다. 좀더 생각을 해보면 이 세상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기에 세상의 기준을 하나님이 무시하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숨겨준 여인입니다. 기생입니다. 거짓말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에 올랐습니다. 이 세상의 입장에서 보면 매국노이고 더러운 여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충성한 것입니다. 세상의 질서를 보시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어려운 부분입니다만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 믿는다는 것을 단지 이 세상의 윤리 도덕적으로 조금 나은 삶을 예수 믿는 것으로 착각하고 살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별 소용이 없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사건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아브람이 아내를 팔았고 바로왕은 정당하게 그 지참금 주고서 사래를 취하려다 재앙을 만난 것이 왜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이 아브람과 약속하신 그 약속 때문입니다. 첫째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이 아니라 사래에게서 나오는 아이여야 하는 것입니다. 아이를 못 낳는 여인에게서 아이가 나오게 하심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아브람이나 바로왕이 망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아브람의 이름이 창대 하는 것입니다. 이제 아브람의 이름은 점점 창대하여지는 것입니다. 무력이나 재물에 의한 힘이 아닙니다. 국희에서 사채놀이 하는 사람은 돈이 힘이라고 하고 국희는 사람이 힘이라고 하지요. 우리는 무엇이 힘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힘인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의 힘이 아브람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이 애굽으로 내려간 일에서 바로 왕이 재앙을 만나서 아브람이 함부로 손대면 안 되는 사람인줄 알고 놀랍니다만 바로 왕 보다 더 놀란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아브람입니다.

 

 

 

 

아브람은 자기 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약속이고 무엇이고 간에 자기 살기에 급급하였는데 그 당시 세계 최대의 강대국인 애굽의 왕 바로가 벌벌 떠는 하나님인 것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오면서 아브람이 무어라 말하였을까요?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실력이 대단하다 그랬을 것입니다. 애굽 하면 얼마나 크고 강한 나라인지 아직도 애굽의 피라밋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 거대한 돌들을 날라다 사막에서 세우려면 어느 정도의 세력이 있어야 하는지 짐작이 되시지요?

 

 

 

 

그러한 왕이 아무것도 아닌 아브람, 그냥 죽여 버려도 누구 한 사람 가타부타 말할 자가 없는 그런 아브람인데, 바로왕에게서 살아 나왔으니 그것도 재물도 얻고 아내도 찾고, 얼마나 아브람이 하나님의 실력과 솜씨에 놀랐겠습니까? 이런 일들을 통하여 아브람의 이름이란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그러한 창대한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복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을 복의 사람으로 부르셨기에 아브람을 선대하면 복을 받고 알든 모르든 아브람을 해치면 해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윤리 도덕적인 기준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 오늘날 예수의 죽음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사람들이 말하지요. 그 말이 그들에게는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맞는 말 하면서 지옥 가는 것입니다. 성경이 이러므로 사람들에게 어렵고 닫혀 있는 것입니다. 오직 주의 은혜를 입은 자만 성경이 보이고 자신의 죄가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에 아멘 하는 것이 세상의 학문으로 잘 배우고 익힌 사람들에게 이해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믿는 것이 기적인 것입니다.

 

 

 

 

더 단순히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무어라고 말씀하시든지 우리는 예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흰 것을 검다 하면 예, 검은 것을 희다 하면 예, 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맹종이 아니냐구요? 사람의 가르침에 예 하는 것은 맹종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세상을 보는 시각, 죄에 대한 개념 모두...

 

 

 

 

시편 105:12-15절을 봅니다. “때에 저희 인수가 적어 매우 영성하며 그 땅에 객이 되어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유리 하였도다 사람이 그들을 해하기를 용납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연고로 열왕을 꾸짖어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이 말씀을 목사들이 자기들의 전유물처럼 사용하는데 아브람을 말하고, 다윗을 말하고,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약속하여 세우신 사람이기에 어떤 누구도 해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지키시는 것입니다. 비록 아브람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람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셨다면 아브라함처럼 인도하심을 믿으시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람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신 그 하나님이 오늘도 열심히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고 계시는 그 사랑에 놀라고, 또한 항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13:1-18  다시 가나안으로  1999. 11. 14.

 

 


세상의 수많은 책들은 사람이 주인공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활약과 사람의 힘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책을 통하여 사람의 힘과 능력을 위대하다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에 감동을 받습니다. 뭉클한 휴머니즘에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힘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람의 약함과 실수와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사람이 어떻게 하였다는 것보다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제쳐두고 사람의 일을 자꾸만 보게 되면 세상의 여러 책들을 보고서 감동을 받는 것처럼 성경의 인물에게서 감동을 받고 훌륭한 아브라함을 본받자 요셉을 본받자 다윗을 본받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은 어떻게 겁이 많고 믿음이 없는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시는지 어떻게 요셉을 요셉 되게 하시는지를 봄으로서 하나님의 힘을 느끼는 것이 성경을 보는 눈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면 사람의 영웅적인 행위를 보고서 기가 죽는다든지 아니면 나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불굴의 의지를 발휘하는 경우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믿음의 사람도 하나님의 솜씨로 그렇게 된 것을 알 때에 참으로 그 위대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성경의 내용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어떻게 아브라함처럼 되는가? 이런 생각이 되시지요? 나는 하나뿐인 아들 못 바친다, 이런 생각이 먼저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어라고 합니까?

 

 

 

 

에베소서 2:19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이 권속이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별이 없이 동일하게 하나님이 권속이 된 것입니다.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란 믿음의 조상들과 동일한 신분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주님의 약속의 완성을 본 자로서 구약의 마지막 사람 세례요한보다 크다는 말을 주님께서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39-40절을 보겠습니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사람들이 열거되고 결론부분입니다. 그들은 증거는 받았는데 약속은 못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짐승의 희생제사는 앞으로의 약속의 실체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의 제사장들도 영원하시고 완전하신 대제사장의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실체를 받은 우리로 하여금 구약의 그 성도들도 온전함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위력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은혜를 입은 우리를 하나님이 아브라함처럼 못 만들어 내시겠습니까?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신 하나님께서 우리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부담이 되지는 않습니까? 그러면 나보고 나의 가장 귀한 것을 바치라고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염려가 되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염려 마십시오.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이미 부르셨기에 그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자들을 이미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얼마나 반역하고 불순종하는 죄인인가를 알게 하시고 오직 주님의 일하심에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고 간섭하시며 아브람을 아브라함 되게 하시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갈대아 우르에서 부름을 받고, 하란에서 부친을 장사지내고, 드디어 가나안땅까지 왔습니다.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으시기에 그 말씀대로 이루어 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12장 7절에서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 기근이 들자 아브람은 애굽으로 기근을 면하기 위하여 내려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애굽에서 일어난 일은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살려고 애굽에 내려간 곳에서 오늘 말씀을 보니 다시 가나안으로 온 것입니다. 그러면 애굽에서 다시 가나안으로 어떻게 오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내 사래의 일을 겪고 나서 이곳은 살 곳이 못된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올라가자, 그러고서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창 12:20절에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누가 보내는 것입니까? 바로가 보내는 것입니다. 제발 좀 나가달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전에 사래를 사오기 위하여 지불한 지참금은 돌려받아야 하는데 얼마나 혼이 났으면 그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나가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올라올 때에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브람이 가나안으로 다시 오게 된 것은 바로가 가게 하였지만 바로는 하나님의 재앙을 받고서 아브람이 겁이 난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람을 밀어낸 것이지요. 그러므로 바로를 그렇게 만드신 하나님의 손길이 아브람을 다시 가나안으로 가게 한 것입니다. 아브람은 기근을 피하려고 갔기에 얼마동안 거기에 머물렀는지는 모르지만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이 나중에 애굽에서 4대를 나그네로 살다가 출애굽 하리라는 약속을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때가 되매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시는데 역시 하나님의 재앙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나가게 합니다. 금은 패물을 요구하는 대로 주면서 애굽을 떠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계속하여 내보내지 않으면 자기들이 다 죽게 되었으니 이스라엘을 내보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도 늘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내가 가고 싶어 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특정의 장소뿐만 아니라 지위와 신분일 수도 있고, 다른 여러 가지의 세상의 것들을 취하기 위하여 가고자 하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택하신 백성들을 가서는 안 되는 곳에서 오래 머물러 있으면 그냥 두시지 않는 것입니다. 반드시 빼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도 계속하여 일어나는 출애굽의 사건입니다.

 

 

 

 

제가 청년 때에 성경공부 내용 중에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출애굽의 경험이 있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여러 가지의 대답이 나올 수 있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출애굽은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건짐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평생을 두고 계속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이 자꾸만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자주 우리가 애굽을 그리워하는지를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에서의 불평과 불만에서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불평과 불만이 나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평불만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인도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길이 안 좋다고, 물이 없다고, 만나가 질린다고, 정력이 떨어진다고, 월급을 적게 받아 온다고, 다른 사람은 집안이 좋아서 도움도 받는데 어찌 집안도 하나 변변치 못하고 오히려 도와주어야 하는 형편이냐고. 이뿐이겠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누구는 이래서 싫고 누구는 이래서 보기 싫고 이러한 불평과 불만이 튀어나오는 것을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야, 저 녀석은 피곤하다, 내 버려두라, 그러시겠습니까? 아니면 끌고 가시겠습니까? 끌고 가시는데 다시 제자리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시 가나안으로 아브람을 인도하시는 것처럼 우리를 다시 붙들고 가시는 것입니다. 여기가 우리의 어려운 부분입니다. 왜 이 부분을 그대로 두시는가, 라는 의문이 생기는 것은 그 부분이 아직 훈련이 덜된 것입니다. 다시 제자리입니다. 언제까지? 깨닫고 항복할 때까지입니다. 우리는 몇 번하다가 안 되면 포기하지요. 하나님은 포기하지 아니하십니다. 아브람으로 하여금 큰 민족이 되게 하고 그 이름을 창대히 하고 복의 근원으로 삼으신다고 약속하셨기에 그대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몇 십 년이 걸려도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과 함께 살 것 아닙니까? 이러한 훈련을 통하여 아브람이 복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애굽으로 살려고 내려갔다가 다시 원위치한 곳이 13:4절입니다.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처음의 그 자리로 돌아온 것입니다. 군에 가면 훈련을 시킬 때 조교의 마음에 안 들면 ‘원위치’ 시킵니다. 그래서 조교의 마음에 들 때까지 원위치가 반복됩니다. 그래서 지겨운 말이 무엇을 하다가 ‘원위치’ ‘위치로’ 하는 말입니다. 훈련생이 볼 때는 그만큼 하면 된 것 같은데 조교의 눈에는 안차는 것입니다. ‘위치로’ 라는 말 한마디에 지금까지 하던 훈련을 원위치하여 다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 나아지는 것입니다.

 

 

 

 

지금 아브람이 처음의 장소로 되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위치로’ 한 것이지요.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처음 단을 쌓은 곳,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땅으로 오게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훈련이 된 것입니다. 자기가 살려고 애굽으로 갔다가 애굽에서의 경험을 통하여 자기를 살리려고 아내를 팔아먹은 사람이 한걸음 나아집니다. 그것은 조카 롯과의 분쟁에서 아브람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또 자기를 살리려고 하는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을 때까지 ‘위치로’ ‘원위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결국 자기의 목숨을 살리고자 하는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죽어도 상관없습니다. 그 모습이 아들 이삭을 바치는 모습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25년이나 걸린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당장에 천사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주님께로부터 의로운 자로 부름을 받았지만 그러나 그 은혜의 풍성함을 알고서 자기의 모든 것을 포기하기까지 하도록 만드시기 위하여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기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화로 말하기도 합니다만 성화라는 말에는 자기가 수양을 하고 도를 닦는다는 느낌이 들어 있기에 좀 다르게 표현하고자 합니다. 이미 밑그림이 완성되어 있는 것을 더욱 세밀하게 하는 작업이라고 보겠습니다. 우리가 왕같은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왕같은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제사장이란 결국 자기의 희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희생의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애굽에서 올라오면서 재산이 많아집니다. 애굽의 왕에게서 마누라 팔아서 부자 된 것입니다. 이것이 분쟁의 씨앗이 됩니다. 부자 된다고 좋아할 이유가 우리는 없습니다. 재산이 늘어나자 아브람의 종과 조카 롯의 종이 서로 다투는 것입니다. 왜 우리 영역에 너의 양떼가 풀을 뜯느냐 그러는 다툼이겠지요? 이것을 본 아브람이 무어라고 합니까?

8절에서 9절입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우선권을 조카에게 줍니다. 기득권이 당연히 아브람에게 있지요. 삼촌이요, 롯을 거두어 준 아버지 같은 분인데 그런데 아브람이 우선권을 롯에게 먼저 줍니다. 기근으로 애굽에 살려고 갈 때와 다른 모습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애굽의 경험으로 조금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양보하는 것입니다. 나를 살리는 것이 나의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조금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자기 포기, 자기희생의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가 아브람의 마음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솜씨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벌써 예수를 믿은 지 몇 년이 지났습니까? 훈련을 아브람보다 더 많이 받았는데도 왜 아직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는 말이 안나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예수 잘 믿으면 부자 된다는 말 때문에 내가 양보하고 희생하고 손해 보면 부자가 안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될 것 같아서 악착같이 움켜지고서 부자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그렇게 하셨습니까? 여러분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얼마 전에 일본의 유명한 크리스챤 작가인 ‘미우라 아야꼬’씨가 별세하였습니다. 빙점이라는 책 외에도 많은 책을 저술하였는데 이분의 책도 볼만 합니다. 그런데 이분의 말 중에서 이러한 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평가는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소유를 축적하였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나누어 주었는가에 달린 것이다.’ 아브람이 조카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었을 때 롯은 비옥한 지역을 선택하였습니다. 10-12절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라는 곳으로 롯이 옮겨갑니다. 너무나 비옥하고 좋은 땅이지만 이곳이 나중에 유황불이 떨어지는 곳이 됩니다. 아브람은 기득권을 포기하고 자기는 황무지에 그대로 남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브람에게 다시 약속을 확인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14-18절입니다. 아브람이 애굽에서 다시 가나안으로 오면서 훈련된 내용을 오늘 보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부요나 좋은 환경이 아니라 주님의 약속을 붙들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택한 자녀가 세상을 붙드는 것을 하나님이 원위치 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이 언제나 주의 약속과 그 약속을 오늘도 빈틈없이 이루어 내시는 주님께 우리의 마음과 관심이 가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창세기 14:1-24  십일조  1999. 11. 21.

 

 


창세기 14장에서 중요한 세 가지의 내용이 나타납니다. 아브람이 조카 롯을 구하여 내는 과정에서 일어난 세 가지인데, 이 세 가지가 너무 방대한 양이기에 우선 간단히 정리를 해 두고 이러한 내용이 성경에서 얼마나 많이 나타나는가는 계속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마치 어떤 공부를 할 때 요약적인 서론이나 개론을 공부하듯이 오늘 말씀에서 간략하게 세 가지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 세 가지는 ‘붙여주신 전쟁’과 ‘멜기세덱’과 ‘십일조’입니다.

 

 

 

 

첫째, ‘붙여주신 전쟁’입니다. 소돔성에 살고 있는 롯이 전쟁이 일어나 포로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아브람이 듣습니다. 쳐들어 온 적은 4개국 연합군입니다. 이들이 쳐들어 온 것은 그동안 남쪽의 다섯 종족인 소돔, 고모라, 아드마, 스보임, 소알이 북쪽의 엘람왕 그돌라 오멜을 12년간이나 섬기다가 반역을 한 것입니다. 자기들이 세력이 강해지자 조공 바치기를 거부하였든지 한 것이겠지요. 그러니 엘람왕 그돌라 오멜이 다른 나라와 연합하여 쳐들어 온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 소돔과 고모라성의 다섯 연합군이 패배합니다. 그리하여 쳐들어 온 사람들이 재산을 약탈하고 사람들까지 포로로 잡아갑니다. 그 중에 조카 롯도 잡혀간 것입니다. 살기 좋다고 간 곳이니 그 곳을 침략하는 자도 많았겠지요.

 

 

 

 

이 소식을 전해들은 아브람은 자기 집에서 길리운 318명과 가까이 동맹한 부족의 사람들을 데리고 추격에 나섭니다. 이미 상대가 안 되는 싸움입니다. 아브람의 군사라고 해보았자 그 당시에 속국을 거느릴만한 세력인 엘람왕 그돌라 오멜과 상대가 되겠습니까? 더구나 남쪽의 다섯 종족을 공격하여 이긴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조카 롯이 붙들려갔으니 삼촌이 구하러 가야지요. 그래서 아브람이 밤중에 기습을 합니다. 그리고는 적들을 대파하고 사람들과 재물과 조카 롯까지 구하여 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쟁에서 승리하고 올 때에 소돔의 왕이 영접합니다. 그런데 이때 멜기세덱이 등장합니다. 소돔의 왕이 사람만 돌려주고 재물은 아브람의 것이니, 전쟁에서 승리한 자의 것이기에 가지라고 하여도 거절합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살펴보고 우선 성경의 흐름대로 소돔왕이 영접하는데 그때 살렘왕인 멜기세덱이 등장합니다. 멜기세덱이 등장하여 아브람에게 축복을 하는데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19절에서 20절입니다. 천지의 주재시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이 ‘붙여주신 전쟁’인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모든 전쟁의 승리는 사람들의 힘이나 수나 작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붙여주신 전쟁입니다.

 

 

 

 

하나님이 붙여주신 전쟁은 아무리 적이 강하여도 반드시 이깁니다. 여호와께서 앞장서서 싸우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붙여주시지 아니한 전쟁은 이스라엘이 강하고 수가 많고 적은 보잘 것 없어도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붙여주신 전쟁의 모습입니다.

여리고성이 그렇게 강하고 큰 성이지만 하나님이 붙여주시니 빙빙 돌기만 하고 고함만 질렀는데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승리에 도취되어 하나님의 붙여주심을 잊어버리고 자기들의 힘만 믿고 작은 아이성을 공격하였다가 패배하였습니다. 여기에 아간의 범죄가 있습니다만 아간의 범죄 역시 하나님이 붙여주신 전쟁에 자기 공로가 있다고 생각하여 자기 재물을 챙긴 것입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붙여주신 전쟁이 아브람의 처음 전쟁에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아브람의 실력으로 강한 4개국 연합군을 물리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멜기세덱의 말을 듣고서, 그렇습니다. 전쟁의 승리가 나의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붙여주신 전쟁입니다, 그러한 고백으로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붙여주신 전쟁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도 여호와 전쟁의 승리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조카 롯처럼 적에게 사로잡혀 갔는데 예수님이 용사가 되셔서 전쟁에서 승리하심으로 우리를 구하여 내신 것입니다. 이 부분이 성경전체에서 흐르고 있는 여호와의 전쟁입니다.

 

 

 

 

둘째로, 십일조와 멜기세덱입니다. 십일조 따로 멜기세덱 따로 보기보다는 함께 보고자 합니다. 십일조를 누가 내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람이 멜기세덱을 만나고 나서 자기의 승리가 자기의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붙여주신 전쟁임을 알기에, 자기의 모든 것이 주님의 공로임을 알기에 십일조를 드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십일조는 여호와의 붙여주신 전쟁을 시인하는 신앙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하면 복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복을 받았기에 그 복의 출처가 어디인지를 보여주는 것이 십일조라는 것입니다. 그 후로 아브람이 십일조를 바쳤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것은 아브람의 모든 삶이 높은 분에게서 복을 받고 사는 것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중에 율법 안에서 레위 지파가 십일조를 받습니다. 이것은 레위 지파는 땅이 없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가 땅이 없는 레위 지파에게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역시 아브람이 십일조를 바친 원리와 같은 것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한 것처럼 이스라엘의 나머지 지파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고 레위 지파에게 십일조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멜기세덱과 레위지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사장의 역할입니다. 창세기 14:18절에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합니다. 레위지파도 제사장의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이란 백성의 죄를 사하는 중보의 역할을 합니다. 죄인으로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기에 중보자를 통하여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의 희생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고 삽니다, 하는 고백이 십일조를 통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7장을 봅시다. 히브리서 7:4-10절. “봉독” 결국 높은 자에게서 낮은 자가 복을 받는데 아브람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릴 때 레위지파도 아브람의 허리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이나 레위지파에게 십일조를 드린 것은 제사장의 희생으로 우리가 사는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사장의 희생정신을 모르는 재물은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재물을 그렇게 싫어하신 이유가 희생의 의미를 모르는 제사는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드릴 때 단지 열 개중의 하나의 의미만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처음 난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출애굽 때 장자가 살아남은 것은 어린양의 희생으로 살아남았기에 모든 첫 것이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곡식이나 짐승은 처음 것을 하나님께 드리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은 어떻게 드립니까? 모든 장자 대신에 누구를 대신 합니까?

 

 

 

 

민수기 3:12-13절입니다. “봉독” 그러므로 레위지파가 모든 장자를 대신합니다. 이들의 희생의 모습은 땅이 없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그들의 기업입니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은 레위지파의 희생으로 살기에 이들에게 십일조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레위지파도 완전한 제사장의 역할은 못합니다. 그러므로 레위지파가 아닌 다른 지파, 즉 유다지파에서 예수님이 오시는 것은 마치 멜기세덱이 나타나 아브람을 축복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7:1-3절입니다. “봉독” 이러한 분이 예수님이심을 7:11-25절입니다. “봉독” 아주 복잡한 것 같지만 결국 십일조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멜기세덱과 함께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십일조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사장의 역할을 하시면서 동시에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십일조를 하라는 것입니까, 말라는 것입니까? 이것이 아마 여러분의 관심사가 될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워낙 우리가 말라기의 말씀을 가지고 십일조를 하면 복을 받는다는 말을 많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말라기서의 말씀도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입니다. 1:10절에 성전문을 닫아 버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식만 있고 좋은 것은 자기들 배 채우기에 빠른 자들에 대한 책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라기의 끝은 여호와의 극렬한 불의 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심판 가운데서 새로운 이스라엘을 만들어 내시기 위하여 엘리야를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잘하여 복 받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십일조의 정신을 모르고 형식적으로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너희는 끝났다는 선지자의 책망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에 소선지서를 할 때에 자세히 보기로 하겠습니다. 그러면 신약에서는 무어라고 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신약에서는 꼭 두 곳에서 십일조를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내용상으로는 한 곳입니다.

 

 

 

 

마태복음 23:23절입니다. 병행구로 누가복음 11:42절입니다. 마태복음 23:23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정신은 버리고 율법의 껍데기만 하였으니 너희는 저주나 받으라는 것입니다. 결국 십일조가 예수님을 지향하는 것인데 이들은 십일조를 얼마나 잘 드렸습니까? 텃밭의 채소까지 십일조를 계산해서 드리는 철저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십일조를 잘하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합니다. 화 있을진저. 이것이 저주입니다. 그러니 십일조 철저히 잘해서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일조의 더 중한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을 버린 것입니다. 의와 인과 신, 한마디로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더 중한바 율법이 증거하는 예수님을 버리게 되는 것이 저주입니다. 무엇하다가 십일조 철저히 하다가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꼭 꼬리를 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것도 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렇지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십일조는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의와 인과 신을 행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누가 의로움과 어짐과 믿음이 제대로 있습니까? 누가 의와 인과 신을 행할 수 있는가 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안 되면 저것을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의와 인과 신을 버린 십일조 지킴은 저주를 쌓는 길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이 저것도 하라고 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말씀하시기 전입니다. 십자가에서 십일조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 첫 것의 희생이, 어린양의 대신 희생으로, 레위지파의 장자를 대신함으로, 멜기세덱의 반차로 오신 완전한 분의 희생이 되셨기에 십일조의 완성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에 단 한번이라도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사람들은 그렇구나, 이제 십일조를 안 해도 되겠구나 하면서 십일조를 안 하는 것이 진리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의 모든 것이 주의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전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이 좋지 전부를 다 내어 놓으라니 율법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까? 

 

 

 

 

그러면 신약의 사도들이 헌금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사도들이 헌금을 말하지만 부조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연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헌금의 정신은 성령이 임하였기에 자원하는 심령으로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인색함이나 억지로 함이 아닙니다. 때로는 힘에 지나치도록 하여도 십자가의 은혜를 알기에 십일조의 완성의 의미를 알기에 감사함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이미 완전한 희생 제물이신 예수님이 십일조를 완성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복은 십일조를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십일조의 완성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오는 것입니다. 창세기 14장에서 본 붙여주신 전쟁과, 십일조와, 멜기세덱이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는 십의 일조를 하든지 십의 구조를 하든지 또는 형편이 어려워서 못하든지 거기에 관심이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관심은 십자가를 지신 분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사나 죽으나 주의 것임을 알고 사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15:1-7  아브람의 상급  1999. 11. 28.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 온 바에 의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요, 상급은 우리의 행함으로 받는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언제나 강조점은 상급과 행함에 있었습니다. 구원은 따 놓은 것이고 이제는 행함으로 이 세상에서 복도 받고, 천국에서도 상도 받아 보자는 이중적인 계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은혜가 있어야 할 곳이 은혜는 간곳이 없고 상 받기 경연대회가 열리고 말았습니다. 누가누가 잘하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성 경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등장되는 예화들은 어떤 사람은 예배당을 지을 때 자기의 재산을 바쳤는데 몇 년이 안가서 더 좋은 집을 가졌다는 것으로 시작하여 전국의 그러한 사례를 수집하여 전하는 것입니다. 아마 기성 부흥사의 이야기를 두 번만 들어보면 얼마나 그러한 이야기가 재탕이 되고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을 높이고 그런 사람을 본 받아서 나도 한번 그렇게 되어 보고자 하는 욕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마치 야바위꾼이 사람을 유혹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바람잽이가 돈을 따가는 것처럼 보이고서는 사람이 걸려들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부흥사들의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하여도 그러한 사람들의 예를 보편화시켜서 나도 교회 충성하고 목사에게 잘하면 그런 복을 받을 거야라는 헛된 욕망을 심어준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아브람의 본을 받아 우리도 복을 받자 그런 식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과는 정반대의 길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것을 마치 복인 양 말하고 있다는 것이 성경에 얼마나 무지한지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비할 것도 없이 그런 것은 노자의 도덕경에도 못 미치는 것입니다. 도덕경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훌륭하다는 사람 떠받들지 마십시오. 사람 사이에 다투는 일 없어질 것입니다.’ 이것을 해설하는데 이러합니다. 훌륭한 사람을 표창하여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되도록 떠받들면, 모든 사람이 그 사람처럼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힘쓸 것이라고 믿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입니다. 정부나 기관에서는 이런 통념에 따라 표창장이니 훈장이니 하는 것을 적격자에게 나누어 주고 이를 널리 공표합니다. 노자는 이런 상식적 관례를 깨어 버리라고 합니다. 훌륭한 사람들을 떠받들거나 그들에게 상을 주면 그것 때문에 서로 다투고 질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말을 인용합니까? 세상의 성과급이라든가 상이라든가 표창이 사람들을 선한 방향으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시기와 질투를 일으키게 된다고 예수도 안 믿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였는데 어떻게 은혜를 말해야 하고 시기 질투가 죄라고 말해야 하는 교회에서 상 따기 위한 경쟁을 합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아브람의 상급이 무엇인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확인을 하시고 이러한 상급이 얼마나 소중하며 귀한지를 제대로 아시고 바른 상급을 추구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브람이 조카 롯을 구하여 온 전쟁이 하나님의 붙여주신 전쟁입니다. 그래서 이기긴 하였지만 그들이 다시 세력을 정비하여 아브람에게 공격을 가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가장 먼저 말씀하시는 것이 두려워 말라 하시는 것입니다. 두려워 말라고 하시면서 내가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람이 큰 전쟁에서 승리한 직후이기에 방패가 무엇인지 얼마나 잘 알겠습니까? 그러한 아브람에게 하나님 당신이 자신의 방패가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붙여주신 전쟁을 경험한 아브람에게 얼마나 복된 말씀이겠습니까?

 

 

 

 

군대를 더하여 준다는 것도 아니고, 그 당시의 최신식 무기를 주신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이 아브람의 방패가 되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치 방탄유리가 둘러 있는 것처럼 적이 달려오다가 앞에서 죽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방패가 되어 주심을 실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방패가 하나님이 되어 주신다는 것이 아브람의 복입니다. 이러한 복은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복의 사람으로 만드시겠다는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아브람에게 지극히 큰 상급이 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상급은 어떠한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람의 상급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상급이 되신다는 것이 이해가 잘 안되실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 잘 섬기면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받는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무슨 재벌회사 사장님처럼 생각하여 회장님께 잘 보여서 무엇을 받아내려는 자세입니다.

 

 

 

 

이것은 그 회장을 사랑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회장에게 잘 보임으로 받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는 세상에서나 통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거든 저주를 받을 지어다,(고전16:22)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브람의 상급이 되어 주신다는 것 자체가 복임을 모르면 오늘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온통 걸림돌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중요하고 그 분만을 사랑해야 되는지 부모 형제 처자식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 목숨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제대로 우리에게 이해가 되고 깨달아져야 아브람의 상급은 하나님이다, 라는 말에 아멘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아브람의 방패와 상급이 되심을 성경에서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지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의 말씀을 받고서 아브람이 저는 자식이 없는데요, 저의 집에서 길리운 엘리에셀이 나의 후사가 되게 하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그 때에 아들이 없으면 종을 양자삼아 상속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그는 아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고 약속을 주십니다.

 

 

 

 

이러한 아들의 약속이 4절에서 5절입니다.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게 해 주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이 약속을 믿을 때 하나님이 아브람을 의롭다고 해 주셨습니다. 아브람이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것입니다. 이 약속을 믿고서 아브람을 의롭다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이 약속을 믿을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이 아브람을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어떻게 만드신 것입니까?

 

 

 

 

애굽의 바로왕과의 사건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실력을 안 것입니다. 그리고 그돌라 오멜의 동맹군을 격파하면서 하나님의 솜씨를 알게 되었기에 이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게 된 것입니다. 이 약속을 믿고서 아브람이 의롭다 함을 받는데 그러면 단지 아브람이 이삭 낳게 된다는 그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식을 주시겠다는 그 약속의 자손이 누구입니까? 이삭입니다. 그리고 이삭은 나중에 희생제물이 됩니다. 물론 죽기 직전에 대속하는 희생제물이 있었지만 이삭 같이 희생당할 후손이 나올 것을 믿었다는 사실이 함께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8:56절.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이 예수님의 때를 보고서 기뻐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의 앞뒤로 생각하여서는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네가 나이가 오십도 안 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하니 아브라함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유대인들이 돌을 들고 치려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성경을 자기를 중심으로 풀고 계시는데,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예수는 아니다, 라고 대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단의 작전입니다. 사단은 어떻게 하든지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서 끊어 내려는 것이 사단의 일이기에 유대인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승리로 사단의 배후를 드러내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의롭다함을 받는 것도 역시 예수님을 믿었기에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너무 비약적인 것 같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아브라함이 예수님 때 볼 것을 즐거워 하다가 보고서 기뻐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비한 영적인 눈으로 아브람이 예수님을 보았다기보다는 이삭의 희생 제사를 통하여 대속의 의미를 보았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므로 아브람함의 자손을 하나님이 약속을 하시는데 이 자손의 약속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의 자손은 이삭 외에도 사래가 죽고 나서 재혼하여 6명의 자녀를 더 두었으며 이스마엘도 아브람에게서 난 자손입니다. 그런 자손은 빼고서라도 이삭의 후손으로 에서와 야곱 야곱의 열두 아들 그 후로 수없이 많은 자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의 최고 정점의 자손이 누구입니까? 이미 눈치 채고 계시지요? 예수님이라고. 그런데 성경에서 어디에서 그런 근거가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3:16절입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고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땅의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는데 그 많은 자손들이라 하지 않고 꼭 집어서 단수로 네 자손이라 하였으니 곧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람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아브람의 수많은 후손들로 인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를 보고서 아브람은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상급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브람의 방패와 상급이 되신다는 것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아브람의 상급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떻게 주어지는 것입니까?

 

 

 

 

갈라디아서 3:1-15절을 봉독합니다. “봉독” 아브라함의 복이 믿음으로 주어지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방인도 아브라함의 복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많아지는 것은 결국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어떠한 율법의 행위가 아닙니다. 10절에서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아래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항상 행하지 아니하면 저주 아래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브람함의 후손으로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상급을 받았습니까? 이 상급이 너무나 좋고 너무나 귀하기에 이 상급을 제대로 알게 된 사람은 세상이 갑자기 배설물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이 상급을 능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상급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입니다. 내가 남보다 더 나은 상을 받기 위하여 달려가는 것이라면 경쟁이 되겠지만 이 상급은 그러한 비교를 용납하지를 아니할 만큼 엄청난 상급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약속의 땅을 말씀합니다(창15:7). 하나님의 약속은 자손과 땅의 약속입니다. 일차적인 약속은 이삭이고 일차적인 땅은 가나안땅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자손은 예수 그리스도이듯이 궁극적인 땅은 아들의 피로 세워진 아들의 나라입니다(골1:13). 그러므로 이 땅을 기업이라고 하고 유업이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3:29절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아브람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이 예수를 믿는 것과 그 유업을 잇는 것으로 결론이 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상급임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이 상급을 받은 자라면 세상의 상이라든가 복이라는 것이 얼마나 하찮게 여겨지겠습니까?

 

 

 

 

오늘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방패와 상급이라는 그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도 믿음으로 이루어졌다는 놀라운 사실을 확인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상급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상급으로 평생토록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겠습니까? 그 아들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은 것으로 인하여 다른 세상의 어떠한 복이라는 것도 시시하게 여기고 사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15:1-21  언약 체결  1999. 12. 5.

 

 


아브람의 상급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하나님이 방패와 상급이 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의 방패와 상급이 되어 주시는 그 내용은 후손과 땅입니다. 지난주에는 하나님이 약속한 아브람의 후손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언약을 체결하시는데 이 부분은 끝으로 살펴보기로 하고 하나님의 약속이 13-16절까지 보시면 네 후손들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있다가 4대 만에 이곳으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4백년 동안 하나님은 무얼 하고 계셨습니까? 자신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언약을 이루어 내신 결과를 출애굽기에서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6:2-8절입니다. “봉독”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언약을 이루어 내시기 위하여 출애굽 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삼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후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후손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시는데 이제 백성은 만들어 졌습니다만 땅은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출애굽 이후에 가나안 정복을 통하여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랜 기간이 걸립니다. 가나안 정복과 사사시대를 거쳐 다윗시대에 이르러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의 영역을 차지하게 됩니다.

 

 

 

 

창세기 15:18절에서 애굽강에서부터 유브라데스까지 네 자손에게 주신다고 하셨는데 이것이 제대로 성취된 때가 다윗시대입니다. 다윗 시대에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정복하고 속국으로 만들고 조공을 받는 것입니다. 그 영향이 솔로몬까지 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은 애굽과 광야, 사사시대를 거쳐 약 1,000년 만에 이루어 진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우리는 놀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약속만은 반드시 이루어 내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 언약의 말씀을 아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고 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언약을 이루시는 일에 있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사사로운 욕망을 채우는 일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언약을 이루는 일에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원과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 그 언약을 알고 그 뜻에 맞추는 것이 바른 자세입니다. 누가 더 고집이 세겠습니까? 100년도 제대로 못사는 우리이겠습니까? 1,000년이 걸려도 자기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어 내시는 하나님이 이기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두 손 바짝 드는 것이 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집도 만만찮아서 항복을 잘 안하지요. 알아서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이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 내심으로 하나님의 후손과 땅이 주어졌습니다. 거기에 왕까지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때에 하나님이 언약을 새롭게 하십니다. 영원한 약속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커다란 징검다리가 아브라함과 다윗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설교를 통하여 때로는 숲을 때로는 나무를 보고자 합니다만 아직은 숲을 보고자 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권사님은 설교에 뼈는 있는데 살이 없다고 하더랍니다. 뼈라도 있다고 하시니 다행이긴 합니다. 살은 여러분이 붙이시기 바랍니다. 집을 지을 때 살을 먼저 붙입니까? 뼈대를 먼저 세웁니까? 뼈대를 세워야 하지요 그런 식으로 우선은 좀 보시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너무나 살만 보아왔기에 성경의 흐름과 상관없이 나의 필요한 부문만 편식을 해온 것입니다. 그러니 병에 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다윗에게 어떤 새로운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영원하리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왕위가 영원하리라는 것입니다. 사울처럼 끊어 버리지 아니하고 영원한 왕위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의 내용입니다.
사무엘하 7:8-16절을 보겠습니다. “봉독” 여기서의 특징은 영원하리라는 것입니다. 다윗 같은 왕위가 영원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땅, 하나님이 세우신 왕 이것이 다윗에게 언약을 하시면서 영원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왕위가 지금 없습니다. 그러면 영원하다는 왕위가 어떻게 됩니까?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것이 후손과 땅입니다. 그런데 다윗시대에 후손과 땅과 무엇이 더 추가됩니까? 왕이지요.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언약이 다윗시대에 좀더 구체화 되고 확대됨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면 성경의 커다란 흐름의 줄기를 잡게 됩니다. 30분 만에 성경의 흐름을 말하는 것이 무리이지만 그러나 이것이 가장 중요한 줄기이기에 마태복음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해놓으시고, 뼈대를 세우시고 그 사이에 여러 족보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족보가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가장 핵심을 잡는다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하시고 다윗과 언약하신 그 내용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됩니까? 아버지의 선택을 받은 자를 예수님이 살려 내셔야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땅은 어떻게 됩니까?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골로새서 1:13절에서 아들의 나라라고 합니다.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이 땅은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보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위의 것을 찾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땅을 유업이라 기업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왕은 어떻게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제 이러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의 큰 흐름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모든 것을 위하여 우리가 한 것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이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 내심으로 인하여 참여되어 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내시는 일에 무슨 보탬을 주었습니까? 하나님의 선택에 보탬을 주었습니까? 그리고 그 택한 자를 아들의 피로 값 주고 사 내시는 일에 우리가 무엇을 하였습니까? 인류가 한 통속이 되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자들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의 피로 마련된 유업을 우리는 선물로 거저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무 할 일이 없는데요, 그렇지요. 무슨 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저 받은바 그 선물,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늘나라를 기업으로 받은 것,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 되어 주심이 너무 좋아서 자랑할 뿐입니다. 그렇게 자랑을 하다 보니 어느날 곁에서 꼭 같이 주님의 은혜를 자랑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모인 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런 교회가 참으로 귀하고 드뭅니다. 주님께서 날마다 새롭게 만들어 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주님의 이 은혜가 없다면 나는 교회 아닌 것 아닌가 하고 자신을 점검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단지 교회 등록한 것으로 하늘나라까지 간다는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주님의 선물이 좋습니까? 이것이 너무 좋아서 전세방에서 평생 살아도 감사하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 아닙니까? 세상의 좋다는 것 없어도 이러한 선물에 감사하는 자가 예수 믿는 것 아닙니까? 이러한 것의 감사와 가치를 모르면 평생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헛수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와 감격이 없다면 교회 나오고 신앙생활 하는 것이 피곤할 뿐입니다.

 

 

 

 

그러면 아예 그만 두시기 바랍니다. 그냥 세상 재미를 쫒아서 사시기 바랍니다. 열심히 세상을 사랑하시다가, 그래도 그것이 아니라 주님이 좋아지시면 그때 주님께 나아오십시오. 그렇지 아니하면 예수 믿다가 조금만 어려움이 오면 원망하고 불평하고 못살겠다고 말하지 말고, 기쁨과 감사도 없으면서 있는 척 위장하지 말고 그냥 나가서 놀아 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영원한 왕이 되어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유업으로 받는다는 이 사실을 인하여 평-생 감사하고 사시겠습니까? 그러면 더 놀라운 은혜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 우리의 기분에 따라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 약속도 거창하게 하고 파기도 손쉽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자기의 생명을 담보로 하시는 약속입니다. 이러한 엄청난 선물을 주시기까지 하나님이 언약을 하시고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희생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이 ‘언약 체결’입니다.

 

 

 

 

창세기 15:8절을 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아브람이 무엇으로 알겠습니까? 그 약속을 무엇으로 이루어 내실 줄을 무엇으로 알겠습니까? 하는 질문에 하나님이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간을 쪼개어 마주 대하여 벌려 놓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다리는데 솔개가 그 위에 덮치려니까 아브람이 그 솔개를 쫒는 일만 합니다. 그리고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이 드는데 하나님이 언약을 하시고 언약의 내용은 아시지요. 타는 횃불이 그 쪼개진 고기 사이로 지나가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그것을 보고만 있습니다.

 

 

 

 

그리고는 18절에 아브람으로 언약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 짐승을 쪼개어 마주 놓고서 언약을 체결하는 것은 그 당시의 언약체결 방식이랍니다. 우리는 인감도장을 찍는 것처럼 언약을 맺을 때 쪼개진 짐승 사이로 지나가면서 우리가 서로 언약을 어기면 언약을 어기는 자가 이렇게 죽어야 한다는 무시무시한 언약 체결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만 지나갑니까? 하나님은 불의 형상으로 성경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다, 라고 하시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횃불의 형상으로 지나가신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람은 지나가지 아니하였으니 언약이 이루어지지 아니한 것 아닌가 할지라도 높고 강하신 분이 언약 맺었다, 그러면 언약이 체결되는 것입니다. 약소국이 강대국과 약조를 맺을 때 원하지 않아도 약조를 맺어지는 것처럼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일방적인 언약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시는 것처럼 이 세상의 죄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내시는데 하나님의 자기희생을 담보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의 왕이 희생됨으로 우리에게는 언약의 선한 결과가 주어진 것입니다.


 

 

 
누가 3년 된 암소와 3년된 암염소와 3년 된 수양처럼 언약의 희생물로 쪼개어졌습니까? 바로 십자가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희생의 언약물이 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언약을 이루어 내신 놀라운 사건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알게 되면 될수록 우리는 부끄럽고 놀라서 입을 닫게 됩니다. 그리고 오직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그 보혈 흘리신 주님의 사랑에 겨워서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나를 위하여 사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사랑에 눈뜬 사람의 당연한 반응입니다. 이러한 자세가 나오기까지 우리가 얼마나 죄인이며 얼마나 큰 구원의 은혜를 입었는지 날마다 더 풍성히 알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16:1-16  이스마엘  1999. 12. 12.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언약을 맺으시고 후손과 땅을 말씀하시면서 땅에 대한 약속은 기간을 정하여 주셨는데 후손에 대한 약속은 기한이 없습니다. 그러니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것입니까? 주실 때까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얼마나 기다릴 줄 모르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이 이스마엘 사건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인지를 우스개로 말한 것을 들었습니다. 가덕도에 가있는 전도사님이신데 ‘주여 저는 인내가 부족합니다. 저에게 인내할 수 있는 힘을 속히 주옵소서’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기다릴 줄 모르는지를 말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저는 믿음이란 기다림의 다른 표현이라고도 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림이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백년이 지나고 천년이 지나도 이루어 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나안땅을 창세기 15장의 약속대로 차지하게 되는 때는 약 천년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막상 닥치면 우리도 별수 없이 아브람과 사라처럼 인위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이용걸 목사의 창세기 설교집에서 여러 가지 교훈적인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잠시 인용합니다. 교훈적인 면도 필요한 것은 구약을 우리의 거울로 삼을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1. 언제 시험이 왔습니까? 은혜 받은 후에 시험이 온다는 것입니다. 대충 사는 사람에게는 시험이 없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자에게 시험이 온다는 것입니다.

2. 누가 시험하였습니까? 아내입니다. 먼 곳에 있는 사람이 시험을 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 시험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잘 넘어가는 것이고 거절하기가 힘든 것입니다.

3. 왜 아브람이 시험을 당하였습니까? 인내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래 참지 못한 것입니다. 인스턴트 시대인 오늘날 기다림이란 낭비로 보이는 이때에 10년을 기다릴 수가 있겠습니까? 3절에 보시면 가나안에 거한지 10년이라고 합니다. 하갈이 애굽 사람입니다. 그러니 아브람이 기근으로 애굽에 갔다가 바로에게서 받은 종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에서 10년이나 되었으니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것이 몇 년인지는 모르지만 상당한 시간이 흐른 것입니다.

그러니 기다리다가 더 기다리지 못하여 아내의 말을 듣고서 하갈을 취하여 아이를 낳아 후손을 잇고자 합니다. 우리나라도 아내가 아들을 못 낳으면 양자를 들이든가 남자가 다른데서 씨를 보아오지요. 가나안 주변도 이러한 풍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자연스럽게 그 말을 들은 이유가 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보다도 세상의 합리성을 따라 간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하갈이 잉태를 하자 여기에서 또다시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1. 하갈은 잉태함을 알고 교만해집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 교만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교훈합니다.

2. 사라가 질투합니다. 자기가 만들어 놓은 일을 가지고 아브람에게 모두를 전가시킵니다. 이것을 가지고 이브의 딸들이라는 것입니다. 범죄 이후에 철저히 책임을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3. 아브람은 그 모든 처리를 사라에게 맡겨버립니다.

이러한 죄성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용걸 목사님은 아브람은 점수를 후하게 주면서 가정불화를 막으며 사라에게 맡기는 식으로 좋게 봅니다. 그러나 ‘데렉 키드너’ 라는 주석가는 이 본문을 죄의 적나라한 모습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결국 임신한 하갈이 쫓겨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갈이 애굽으로 가려고 술길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사라에게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너의 씨도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가 없게 하리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하갈의 후손이 이스마엘이 되는데 이들이 하나님의 약속의 반열의 후손은 안 됩니다만 그러나 하나님은 하갈에게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어떤 목사님은 아브람에게 너의 후손이 하늘에 별과 같이 땅의 모래같이 많게 하리라는 창세기 22장 17절을 말씀을 가지고 하늘의 별은 이삭 계열이고 땅의 모래는 이스마엘 계열로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끝으로 이스마엘이란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뜻이고 ‘브엘라해로이’는 감찰하시는 하나님으로 계시가 됩니다. 그러니 하갈의 고통을 들으시고 하갈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오늘날 주의 백성의 고통을 모르시고 감찰하지 아니하시겠습니까? 하는 결론입니다.
 

 

 

이러한 설교를 교훈적 또는 모범적 설교라고 합니다. 왜 이런 내용을 소개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풍성한가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한국교회의 건전하다고 하고 잘한다는 설교의 대부분이 이러한 설교입니다. 이러한 설교는 듣기도 좋고 적용하기도 좋습니다. 인내하자, 겸손하자, 시험을 조심하자, 가까이 있는 사람을 주의하라 이러한 교훈으로 삼을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강조가 되다 보니 하나님이 자기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것 보다는 신인협력적인 내용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이 조금만 잘하였으면 될 텐데, 이런 식이 되어 버리면 죄가 무엇인지 잘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인내하고 겸손하고 절제하고 낮아지고 마음을 비우고 자기를 부인하고 이러한 내용은 성경 외에서도 얼마든지 나오는 내용입니다. 지금 교육방송에서 ‘노자와 21세기’라는 김용옥 교수의 강의를 들어보면 이 사람은 동서양과 불교 기독교를 다 통달한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엄격한 기독교교육을 받고 자라고 한신대학이라는 신학교를 나온 사람입니다. 나중에 일본과 중국 미국의 하버드에서 박사를 받은 동양학의 세계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인데 이 사람의 강의가 노자의 ‘도덕경’을 강의하는데 어느 정도인지 다른 노자의 해설서를 조금 인용합니다. 왜 이런 것까지 말해야 하는가 하면 우리의 설교가 단지 윤리 도덕의 교훈 정도로 머무르게 되면 성경에서 무엇이 죄인지를 모르게 되는 것이며 성경을 가지고 윤리 도독의 강의가 되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덕경 2장의 해설부분을 조금 인용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말과 얼마나 다른지를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무위란 행위가 없음이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무위도식 하거나 빈둥거린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무위란 보통 인간사에 발견되는 인위적인 행위, 과장된 행위, 자기중심적인 행위, 계산된 행위, 쓸데없는 행위, 부산하게 설치는 행위, 남의 일에 간섭하는 행위, 함부로 하는 행위 등 일체의 부자연스러운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너무 자발적이어서 자기가 하는 행동이 구태여 행동으로 느껴지지 않는 행동, 그래서 행동이라 이름 할 수도 없는 행동, 그런 행동이 바로 무위의 위, 함이 없는 함이라는 것이다. 이런 무위의 위를 실천하는 사람은 자기 행동 때문에 누가 잘되거나 무슨 일이 이루어져도 자기의 공을 주장하거나 과시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자기의 의식적, 인위적 행위가 아니라 도에 따라서 저절로 우러나온 자연적 행동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행동인지도 모르고 그것 때문에 생긴 공이 자기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행동방식, 이런 마음가짐, 이런 초월적 자세를 가진 자유인이 하는 일은 참된 일이기 때문에 허사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만큼 자유인인가?’

 

 

 

 

이 정도의 행위를 도에 따른 자연스런 행동이라고 하는 도덕경의 말과 교회에서 성경을 가지고 말하는 윤리 교훈의 차이가 있습니까?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서 워낙 인위적인 일을 많이 하다 보니까 도덕경의 이런 내용이 훨씬 신선하고 좋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김용옥 교수에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보다 더 욕심 없이 사람답게 잘 살아 가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차이는 무엇입니까? 이런 것을 사람이 할 수 있다는 것이고 성경은 사람은 안 된다는 것을 전제하고 혹 이러한 일들이 자기공로를 주장하지 않는 자세가 나오는 것은 오직 성령의 은사로만 나오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을 신인 협력적인 차원에서 이루어 내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늘 망치는데 하나님은 자기의 그 약속과 자기 이름 때문에 그 약속을 자기의 희생을 담보로 이루어 내시는 것이 성경에서 보여 지는 언약의 흐름입니다.

 

 

 

 

이러한 흐름을 알게 되면 사람이 무엇이 죄인지를 알게 되고 오직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가능성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하여야 우리의 선한 행실이 아니라 주님의 긍휼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가 되는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은 다른 세상의 여러 경전들과 무슨 차이가 나겠습니까?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는 뭐 그리 따지느냐 사람이 다 서로 착하게 서로 사이좋게 지내자고 종교를 가지는 것이지 뭐 그리 독선적이냐고 말하지요. 이런 말 앞에서 무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창세기 16장의 이스마엘 사건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사람은 망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통하여 사람이 하는 일을 대비하여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마치 에서와 야곱을 대비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와 비약속의 자녀가 어떻게 나오는 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기술과 방법과 끈기와 노력과 인내와 낮아짐이나 간에 무엇이든지 다 거절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손길로만 이루어내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집념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세계를 망쳐놓은 주제에 선악과를 따먹은 주제에 무엇을 이루어 낸다는 것입니까? 인간이 아무리 선하게 아름답게 욕심 부리지 않고 이루어 놓은 찬란한 문화라고 하더라도 서양의 화려한 과학적 진보나 동양의 무위자연 하는 것이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진노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향하여 불태워 버리고자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세상을 사람들이 힘을 합하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고집합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아니다, 내 나라는 다른 곳에 있다고 하시자 그 아들을 죽여 버린 것이 바로 이 땅의 죄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 서지 않은 자는 자신이 죄인임을 결코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죽은지를 모르는 것이 아직도 죄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마엘과 이삭을 신약에서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이스마엘은 인위적인 작품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약속을 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삭은 아브람이 할례를 받고 나서 주시는 자녀입니다. 인간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만이 약속 안에 들어가게 됨을 보여 주시는 사건입니다.

 

 

 

 

갈라디아서 4:21-31절을 봅니다. “봉독” 율법아래 있고자 하는 자, 계집종에게서 난 자, 육체를 따라 난 자, 이것이 이스마엘이며 사람의 행위로 구원에 이르고자하는 사람들의 대표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 홀로 이루어 내시는 것인데도 사람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려고 하였다가 나온 것이 이스마엘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모르면 자꾸만 이스마엘을 양산시켜 내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이스마엘을 양산해 내어도 결국은 내어 쫒기는 신세입니다.

그러나 약속의 자녀는 자유자의 자녀이며 위에서부터 났으며 땅의 예루살렘이 아니라 위의 예루살렘이기에 출처가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속받은 자들이 바로 약속의 자녀입니다. 사람의 적당한 종교적인 기술과 인위적인 행함이 아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자만이 그래서 다른 것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자기를 새롭게 창조하신 주님만 바라보는 자가 약속의 자녀입니다.
 

 

 


오늘날도 육체의 모양을 내려고 하는 자들이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마엘이 이삭을 핍박하듯이 그러므로 성경은 이스마엘을 내어 쫒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교회 안에서 누구를 쫓아내어야 합니까? 이스마엘을 쫓아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열심보다 사람의 열심을 보이고자 하는 자,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기 보다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세상적인 비젼을 심고 있는 자, 하나님의 일이 자기들이 아니면 이루어 내지 못하는 것처럼 말하는 자들이 바로 이스마엘 같은 자들입니다. 이들이 세상에서 큰 업적을 드러내고 많은 세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하나님의 약속에는 참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내어 쫒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스마엘을 보면서 사람의 계획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 내지 못하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사람의 일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 내지 못함을 보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 홀로 자기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 내셔서 자기 백성을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스마엘의 길이 아니라 이삭처럼 약속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약속 안에 늘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 약속의 실체가 바로 새 언약으로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믿고 산다는 것이 이렇게 큰 복이며 하나님의 약속 안에 거하는 자임을 더욱 풍성히 알아 가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마엘의 영광보다, 비록 이스마엘에게 핍박을 받을지라도 이삭의 약속의 유업이 좋은 것입니다.

 

 

 

 

 

창세기 17:1-27  전능하신 하나님  1999. 12. 19.

 

 


아브람이 사래의 말을 듣고 아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이스마엘을 낳고 13년간이나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브람은 이제 이스마엘이 자기의 대를 이어갈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인줄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너와 사래 사이에서 나온 자녀가 나의 언약을 이어갈 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아브람이 웃으면서 어떻게 저와 아내가 아이를 가지겠습니까? 이스마엘이나 하나님의 복을 받으며 살기를 원합니다, 하는 말을 보면 아브람은 이스마엘을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13년 만에 아브람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전능한 하나님 히브리어로 ‘엘 샤다이’라는 말인데 ‘’은 하나님이고 ‘샤다이’는 능력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능력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이라는 것이 ‘엘 샤다이’입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하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내가 세운 언약을 내가 이루어 나가는데 있어서 전능하시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약속을 하셨고 그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지만 그 약속을 이룸이 자기의 노력과 방법이 동원되어야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인 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마엘을 언약의 자식으로 보고자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마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스마엘도 아브람의 자손이기에 20절에 보시면 이스마엘도 번성하고 열두 방백을 낳고 그로 큰 나라가 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시지만 무엇의 상대가 안 되는 것입니까? 언약의 상대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1절에서 언약의 상대는 오직 너와 사래에게서 나온 자녀로 언약을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어떻게 이루어 내시는지를 아브람을 통하여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라고 하심으로 자신의 언약을 전능하게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것은 자신의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데 있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능과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전능이란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는 그런 전능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도깨비 방망이 같은 전능을 생각합니다. 금 나와라 뚝딱, 집 나와라 뚝딱 그러한 전능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전능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능을 오해하다 보니 사람들이 자기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하실 수 있잖아요 저 장가 보내주세요, 집하나 주세요, 병고쳐주세요, 이런 식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없이 단지 자기의 소원을 따라 전능하신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모든 일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자세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지기를 기도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뜻 보다는 그저 내 앞에 당면한 그 문제를 해결받기 위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을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의 고백이 전에 보았는데 이런 내용입니다. 자기는 건강하기를 기도하였는데 약하고 병들게 됨으로 주를 의지하게 되었다고, 부자 되기를 기도하였는데 오히려 가난하여 주님의 부요를 알게 되었다고, 명예를 원하였는데 낮아짐으로 낮아진 마음이 되었노라고 그래서 감사하노라고 하는 그런 내용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말할 때 하나님은 무엇에 전능하신가를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삭을 낳을 수 없는 상황에서 이삭을 주신다는 것을 통하여 전능하심을 드러냅니다. 이미 사래는 경수가 끊어진 상태입니다.

 

 

 

 

18:11절입니다. 여자가 경수가 끊어 졌는데도 사래를 통하여 아이를 주시겠다는 것은 하나님은 자기 약속을 이루어 내시는데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데서 살려내시는’ 방법으로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겠다는 것이 전능의 하나님이십니다. 단지 우리가 불가능한 무엇을 이루어 주시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가 불가능하게 여긴 것을 때로 이루어 주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믿도록 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러한 기적의 방법을 일반적으로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지금의 참된 기적은 성령을 보내심으로 그 아들을 믿게 하시는 것이 참된 기적인 것입니다. 결론에서 말씀드리기로 하고 우선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그러니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내가 약속한 것은 내가 이루어 낸다, 그러니 이스마엘을 만들어 놓고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자기가 이루어 내시겠다는 말씀을 더 구체적으로 재확인 시키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자기의 언약을 신실하게 빈틈없이 이루어 내시는가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자기의 언약을 아브람에게 너는 이것을 이루어 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루어 내겠다, 내가 그렇게 하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사도행전 1:8절의 말씀을 가지고 증인이 되자, 그러는데 이 말씀의 정확한 뜻은 ‘내가 너를 증인이 되게 하고야 말겠다.’는 하나님이 이루어 내실 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기의 언약을 자기가 이루어 내신다는 차원에서 너희가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아브람을 통하여서 내가 너를 언약의 상대자로 세웠으니 나의 언약이 너에게 이루어지도록 하고야 말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 언약을 자기가 이루어 내어야 하는 줄 생각하니 불가능하지요 자기가 늙었을 뿐 아니라 아내는 경수가 끊어졌기에 웃습니다. 아내 사래도 18장에서 웃지요. 하나님도 참 내가 무슨 아들을 낳습니까? 하고 웃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무어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나는 전능의 하나님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겠다는 내용이 17장에서 많이 나타납니다.

 

 

 

 

2절입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나님이 하리라 하신 것은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열심과 전능의 실력을 가지고 이뤄 내신다는 것입니다. 4절입니다. ‘...너로 열국의 아비가 될찌라.’ 나 되기 싫어요, 한다고 안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되리라 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라, 그러면 나 싫은데요, 하여도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과 하나님이 전능이 우리를 이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성도이고 교회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사람의 의지의 결집만 모여가지고 으쌰 으쌰 우리가 우리의 목표를 이루어 내자고 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고 회사입니다.
 

 

 


5절입니다.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시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높은 아버지라는 뜻인데 아브라함은 많은 무리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까지 바꾸시어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내신다는 것입니다. 6절입니다. ‘....나라들과 열왕이 네게서 네게로 좇아 나리라’ 역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7절입니다.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우리가 원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의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이방인인 우리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를 삼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하신 이 언약을 따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중의 기적입니까? 이러한 것에 눈이 뜨여져야 세상의 다른 기적에 혹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8절입니다.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고 이미 창세기 15장에서 언약을 하셨지만 또 반복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하여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늘 하나님의 언약보다는 자기 계획과 자기 생각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16절입니다. ‘...사래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라’ 경수가 끊어진 여인에게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19절입니다. ‘....이삭과 언약을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스마엘은 아닙니다. 꼭 이삭과 세워야 하는 이유는 이삭을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이루어 졌는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루어 내실 언약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이 언약을 이루어 내시겠다는 표시를 이제 사람의 몸에다 새기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에 새기는 것은 그냥 말로만 하는 것보다는 더 기억을 하기가 쉽지요. 친구끼리 우정을 다짐할 때 또는 애인끼리 약속을 어디다가 새겨둡니까? 반지나 바위나 그런 곳에 새겨두지요. 요즈음이야 그런 약속을 유치하게 보지요 자유연애이니까 그러나 옛날에는 몸에까지 문신을 새깁니다. 그 약속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언약을 세우시고 그 표로 너희가 할례를 행하라는 것은 몸의 표를 주시는 것보다 더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마엘은 할례 전에 태어난 아이입니다. 이삭은 할례 후에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란 생식기의 껍질을 조금 잘라 내는 것이지만 하나님이 아브람과 그 후손에게 심지어 집안의 종들에게 조차 할례를 행하고 유대인으로 개종하는 자들도 할례를 행하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혈통을 자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만들어 내신다는 뜻을 할례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단순히 할례란 위생상의 문제이거나 다른 나라의 성인 의식과 무관한 것입니다. 할례가 다른 나라에도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할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어떻게 나오는가를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하는 것으로 언약의 백성임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12,13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는데 이것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난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이 아님을 할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전능의 하나님으로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내시는데 자기의 언약을 자기의 힘으로 이루어 내시겠다는 표가 할례인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할례를 행하라니까 이 할례가 대단한 특권이나 되는 줄 알고 이방인이 예수를 믿을 때 할례를 해야 한다고 말하였지요. 그러면 이 할례가 언약을 받은 표로 주어진 것인데 이미 구약에서 조차 마음의 할례를 말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10:16절.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신명기 30:6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10장 16절에서 사람이 마음에 할례를 하라고 하신 것이 너는 구원을 받았기에, 라고 15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할례란 하나님이 해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몸의 할례란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의 할례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마음의 할례를 행하심으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섬기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4:9-13절을 봅시다. “봉독” 하나님의 언약이 무할례시에 받은 믿음을 할례로 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언약은 율법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가 아니라 믿음으로라는 말이 바로 하나님의 일하시므로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행위에 믿음을 은혜에 대비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가 믿음으로 언약의 자손이 된 것을 할례로 표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로 표하는 것입니다. 세례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하여 죽고 산 것이 세례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마음의 할례로 보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8-15절입니다. “봉독” 우리의 할례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우리가 할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할례입니다. 오늘 창세기 17장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기의 언약을 얼마나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지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신 그 능력으로 자기의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 언약을 이루시는 표로 할례를 말씀하시고 몸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행하심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이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어 내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주님의 일하심임을 더 깊이 알아 갈수록 우리는 주님에게 항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행하신 이유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열매가 풍성하여 지는 것이 언약을 이루어 내시는 주님의 솜씨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입었기에 주님을 섬기게 되고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을 하나님이 이루어 내신 결과임을 아시고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에 더욱 젖어 들기를 소원합니다.

 

 

 

 

 

 

창세기 18:1-15  나그네 대접  1999. 12. 26.

 

 


창세기는 성경 전체의 밑그림이 다 들어있다고 보아도 될 만큼 그 내용이 풍부합니다. 천지의 창조와 타락과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의 모습이 다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창세기의 내용을 좀더 확대하고 풍성히 하고 구체화 하는 과정으로 성경의 역사가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범죄 이후의 역사가 두 줄기의 싸움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창세기 3:15절에서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의 싸움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뱀의 후손의 특징이 어떤 모습인지 여인의 후손의 모습이 어떤 모습으로 등장되는지를 성경은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나그네를 대접하였습니다. 천사인줄 알았습니까?  몰랐습니다. 천사가 사람의 모양으로 왔으니 알 수가 없지요. 그런데 이러한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하나님을 대접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도 나그네를 잘 대접하면 복을 받는다는 식으로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는 성경 아니라도 얼마든지 세상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종교인이 아니라도 얼마든지 나그네를 대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계시란 언제나 우리의 상식이나, 세상의 인정이나 동정심 또는 자비심 같은 것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자비를 베풀고 동정을 베푼다는 것은 자기가 베풀 수 있고 나눌 수 있다는 자기의 자기됨이 나타나집니다. 이름을 드러내든 숨기든 간에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나눔이나 베품이란 내가 먼저 받은 은혜가 있기에 나누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사람의 공로가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만 드러나고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람의 나그네 대접이 단지 불우이웃돕기 잘하여 복 받았다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일하시는 지를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계시를 보는 눈입니다.

 

 

 

 

이웃을 대접하지 않고 죽인 최초의 경우가 어디에서 나타납니까? 가인과 아벨에게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아벨을 선택하시자 가인이 안색이 변하며 아벨을 죽인 것입니다. 어느 청년이 질문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왜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않느냐고 그래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에 구원 받을 자격이 애초부터 없다고, 그러니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자만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사람들이 얼마나 기분 나빠하는지 아십니까? 그런 하나님은 싫다는 것입니다.

 

 

 

 

왜요? 자기는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는 생각 때문이지요. 그러니 하나님의 선택을 가인은 싫어하여 아벨을 죽여 버립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나타나십니까? 아벨의 피의 호소를 들으시고 가인을 저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이런 모습으로 하실 것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자를 어떻게 대접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아브라함 자신이 경험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애굽에서 바로왕이 자기를 어떻게 하였으며 자기가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지나가는 나그네를 대접한 사실이 어떤 결과를 가져옵니까? 아브라함은 이삭의 약속을 또다시 확인받는 기회가 되고 사라에게까지 확인을 시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나그네를 대접하지 아니한 소돔과 고모라 성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불에 타 죽었습니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이 나그네를 대접한 유일한 사람 롯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롯이 나그네를 대접한 것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여 롯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나그네 대접 잘못한 소돔과 고모라가 불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물론 의인 열명이 없었습니다만 의인이 없었다는 것은 나그네를 대접한 열명이 없었다는 것이고 대접은 커녕 상관하겠노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상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나그네 대접이 단순히 불우이웃돕기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나그네 대접, 이웃을 환대하는 법이 율법 안에서 제정이 됩니다. 이웃 환대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출애굽기과 신명기에서 많이 나타나는데 한 곳만 찾아보겠습니다.

 

 

 

 

신명기 10:18-19절입니다. “봉독” 하나님이 고아 과부 나그네를 신원하시고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원이란 그들의 억울함을 하나님이 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시기에 너희도 잘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도 전에 애굽에서 나그네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스라엘 가운데서 아무리 제사를 잘 지내고 번듯한 성전을 건축하고 열성으로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지 않으면 하나님이 악을 행한다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제사는 받지도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나야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지 않고 빈익빈 부익부가 생기는 것은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러한 상태에서의 모든 제사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 됩니다.

 

 

 

 

예레미야 7:1-7절입니다. “봉독” 여호와의 전에 제사하러 오는 무리에게 이곳은 성전 아니다 성전이라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5-6절에 이웃의 관계입니다. 이스라엘의 이웃이란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에 들어온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압제를 당한다는 것은 이미 은혜의 땅에 은혜가 없다는 증거입니다. 교회 안에 동일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을 입어 나왔는데 가난하다고 학벌 없다고 무시하면 그곳은 교회가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고아 과부 나그네가 대우를 못 받는 나그네가 대접을 못 받는 그런 곳은 이미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가랴 7:8-14절. “봉독” 여기서는 에스겔서보다 더 집중적으로 이웃과 고아와 나그네와 궁핍한자를 거론합니다. 이들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악입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하여 복을 받았는데 소돔 고모라는 나그네를 대접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욕보이려고 하였기에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지금 이스라엘 가운데 나그네 대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무엇이 되어 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서를 한 번 더 봅시다.

이사야 1:10-17절입니다. “봉독” 10절에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소돔과 고모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많은 짐승을 갔다 바쳐보아라 아무 쓸모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17절에서 역시 고아와 과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처럼 나그네를 대접하지 않는 것을 악으로 정죄하는 그 나그네가 도대체 누구라는 것입니까? 눈치가 빠르신 분은 짐작하시겠지요. 이 땅에 나그네로 오신 낯선 하늘의 사랑을 가지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분을 누가 대접하였습니까? 아무도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라고 율법에까지 명시를 해놓았건만 오히려 그 율법을 이용하여 나그네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심판은 동일합니다. 나그네를 대접한 아브라함은 복을 받지만 아니 복을 받았기에 나그네를 대접하게 되었지요. 그러나 나그네를 대접하지 아니한 소돔과 고모라가 불심판을 받듯이 예수 그리스도 그 낯선 나그네를 영접치 아니하고 대접치 아니한 자들의 받을 벌이 어떠한지를 아시겠습니까? 
 

 

 

 
마태복음 25:31-46절입니다. “봉독” 이 말씀을 가지고 불우이웃 돕기 잘하면, 영생에 잘못하면 영벌에 이렇게 해석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손봉호 교수라고 ‘약한 자 편들기’라는 책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 안 믿어도 불우이웃돕기만 잘하면 영생을 얻습니까? 그런 말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접한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이십니까?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 병든 자, 갇힌 자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지고 자기의 공적을 잊어버린 자가 영생을 얻고 자기의 공적을 주장하는 자 언제 우리가 안했습니까, 하는 자는 영벌에,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낯선 나그네로 오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런 자에게,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이런 자가 누구입니까?

40절입니다.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다.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입니다. 45절에 역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직접 대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복음으로 형제 된 가운데 지극히 작은 형제 하나에게 하는 것이 예수님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려기보다는 대접을 하면 반대급부가 있을 만한 사람에게 대접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너희가 잔치를 베풀거든 갚을 능력이 없는 자들에게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바로 작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땅에 지극히 작은 자로 오셨고 나그네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대접하지 아니 하였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오늘 누가 대접하시겠습니까? 신약에서 몇 곳에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두 곳만 보겠습니다.

 

 

 

 

요한3서 5-8절입니다. “봉독” 사랑하는 자여, 가이오 장로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신실한 일이라고 합니다. 나그네란 바울이 형제라고 말하는 자들입니다. 바울이 형제라고 말하지 않고 사단의 일군이라고 말하는 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나그네란 그 당시에 순회 전도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이 신실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순회 전도자들은 이방인에게서 아무것도 받지 않기에 이 같은 자들은 영접하고 전송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은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 라고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1-3절입니다. “봉독” 아브라함이 나그네 대접한 사건을 이곳에서 말씀합니다. 부지중에 알지 못하는 가운데 나그네를 대접한 것이 천사들을 대접한 것이랍니다. 그러므로 형제 사랑하기와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복음 안에서 형제 된 자들이 어떤 처지에 있습니까? 갇히고 학대 받는 경우가 있는 자들을 위하여 힘쓰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새해에 6곳을 십 만원씩 선교헌금을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도 전세 사는 형편에, 라고 하실지 모르지만 북한의 형제들을 위하여 또 장애인 선교를 위하여 시골교회 세 곳과 개척교회 한 곳에 보냅니다. 한곳에 60만원을 보내어도 부족하지만 다른 곳에서도 지원이 있을 줄 알고 또 이 곳을 위하여 함께 복음이 전하여 지도록 기도하자는 뜻에서 정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나 선교하면 복 받는다는 그런 말을 하는 정도는 아니지요. 부지중에 나그네를 대접하듯이 이러한 자들을 대접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으로부터 대접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니 나그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지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가 나그네로 사시다가 33년 만에 떠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 너무 오래 나그네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도 영광스러운 호칭이 붙게 되는데 그것은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그네로 오신 것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동일하게 나그네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11:13절에서 믿음의 조상이란 모두 외국인과 나그네라는 증거를 남기고 살은 사람입니다. 외국인이 떠날 준비를 하고 살듯이 우리는 모두가 나그네입니다. 늘 떠날 준비를 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전서 1:1절에서는 성도를 향하여 ‘흩어진 나그네’라고 하고 17절에서는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부지중에 나그네를 대접하여 하나님을 대접한 그 복이 오늘 우리에도 부지중에 일어난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입었기에 우리 형제 중에 작은 자들을 대접하며 사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또한 주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8:1-15  웃음  2000. 1. 2.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하고 있을 때 그 나그네 중의 한사람이 사라가 어디 있느냐고 찾습니다. 그러자 사라가 장막에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내가 네게 정녕 다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그 말을 사라가 장막 문에서 들었습니다. 사라가 그 말을 듣고 웃습니다. 별 실없는 소리도 다 한다, 싶었겠지요. 그래서 속으로 생각하고 웃었는데 그 이유는 자기가 이미 경수가 끊어졌고 자기 남편도 늙었는데 어떻게 아이를 낳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여도 사라가 당연한 웃음을 웃은 것입니다. 그런데 웃기는 웃었는데 속으로 웃었습니다. 속으로 우스운 것을 감추고 어떻게 아이를 낳겠습니까? 하자 여호와께서 무어라고 하십니까? 왜 웃느냐, 여호와께서 능치 못함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라의 웃음은 결국 여호와의 능력을 믿지 못한 웃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라가 두려워서 제가 웃지 않았습니다, 하자 아니다, 네가 웃었느니라, 하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의 약속을 이루어 내지 못할 그런 하나님으로 보이느냐는 것이지요. 물론 자기의 경수가 끊어지고 아브라함도 늙었기에 그런 대답이 나오는 것입니다만 왜 하나님이 이렇게 사람이 믿을 만한 근거도 없는데서 자기의 약속을 이루어 내시는 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길입니다. 우리의 어떠한 근거도 다 제거하시고서 주시는 것이 믿음이란 선물입니다. 그러니 사라뿐만 아니라 먼저 웃은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17:15-17절을 봅니다. “봉독” 아브라함도 속으로 웃습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이 아니라 너와 사라에게서 나올 자녀가 약속의 자녀다 하시면서 이름을 19절에서 이삭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어주신 이름입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이삭이라는 글자에 붙은 숫자가 5)입니다. 아래에서 보면 웃음입니다.

 

 

 

 

그러니 이삭은 웃음이라는 뜻인데 나중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부를 때 마다 무슨 생각이 나게 되어 있습니까? 아브라함도 사라도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웃었다는 사실이 그 이름 가운데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로마서에서는 믿었다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성경이 어려운 것이지만 그러나 이러한 믿음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보시면 쉽습니다. 바랄 수 없는 가운데 바라고 믿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이 그렇게 만들어 내셨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로마서 4장에서 확인을 하고자 합니다만 창세기에서는 분명히 아브라함도 사라도 속으로 웃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아이를 낳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웃음이라는 표현은 좀 심하지만 허탈한 농담 또는 말도 안 되는 소리 앞에서 웃는 그런 웃음입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이삭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놀라운 사실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나타날 때 모든 사람들이 믿을 만한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피식 웃고 말 그런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조롱하듯이 웃고 멸시하는 그런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인물치고 제대로 대접을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물론 나중에는 애굽의 총리도 되고 바벨론의 총리도 되지만 그러나 처음에 하나님의 약속을 입은 자의 모습은 언제나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먼저 요셉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요셉이 11번째 아들로서 어느날 하나님의 계시를 받습니다. 요셉을 이야기 하면서 우리도 꿈을 가지자 그런 말을 하면 안 됩니다. 요셉의 꿈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입니다. 그런데 이 계시를 받고서 무엇인지 자기도 잘 모르니 그냥 형들에게 자랑합니다. 나 이런 꿈을 꾸었어요, 그러자 형들이 그를 더욱 미워합니다.

평소에도 아버지에게 고자질이나 하는 녀석이 그런 꿈 이야기까지 하니 얼마나 미워하였는지 나중에 양치는 곳에 아버지의 심부름을 왔을 때 저 녀석을 죽여 버리자 그러면 그 꿈이 어떻게 되는가 보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계시를 인한 비웃음과 멸시를 받는 것입니다. 네가 무언데 그러느냐고 그래서 물 없는 웅덩이에 빠뜨려 굶겨 죽여 버리려고 하였다가 지나가는 상인들에게 팔아 버립니다. 가서 고생이나 하다가 죽으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의 모습이 왜 이런 비웃음의 대상으로 나타날까요? 그 이유는 바로 사람들의 죄를 알게 함으로 나중에 하나님의 구원이 어떻게 나타나는 가를 보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예언대로 형제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절하게 됩니다. 그러나 처음 계시가 떨어지고 그 계시를 받은 자의 모습은 멸시를 받는 비웃음을 당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나중에 야곱이 죽고 나서 그때에 형제들이 뭐라고 합니까? 이제 아버지가 안계시니 원수를 갚으면 어떻게 하나 두려워하여 사람을 보내고 자기들이 와서 또 무릎을 꿇습니다. 이들이 요셉 앞에서 무슨 말을 하였을까요? 그저 살려만 주옵소서, 하는 것이지 요셉, 우리 무엇을 해다오,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이들이 엎드린 그 심정이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온 심정이 되어야 합니다. 형들은 그를 멸시 천대하였는데 그를 죽였는데 그는 오히려 형들을 살려내는 그러한 방법으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요셉 안에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을 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그러나 아직 동안의 소년입니다. 그래서 전쟁에 나간 형들에게 면회를 갑니다. 요셉과 비슷한 경우입니다. 그때 골리앗이 고함을 지르고 있었지요. 그러자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있는 자입니다. 거룩한 분노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녀석을 당장 쳐 죽여야지 하고 있으니 형들이 그 소식을 듣고 다윗을 향하여 무어라고 말합니까?

 

 

 

 

사무엘상 17:28절을 봅시다. “장형 엘리압이 다윗의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가로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에 대한 형의 태도입니다. 교만하다 완악하다 이러한 대우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자의 모습이 사람들 보기에 어떻습니까? 상대방의 키가 3미터가 넘으면 이쪽에서 5미터 정도의 사람이 나서면 놀리지 못하지요. 비웃지 못하지요. 그런데 아직도 양이나 몇 마리 돌보아야 하는 군대에 갈 나이도 안 된 소년이라는 말입니다. 사울의 갑옷이 너무 커서 입지를 못하는 그런 아이입니다. 이 아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시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지금 사람들이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지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힘 있는 왕을 원하였는데 다른 사람보다 훨씬 키가 큰 사울이 왕으로 되었을 때 좋아라, 하던 자들이 이제 정말 키가 키고 힘이 센 골리앗 앞에서 40일을 꼼짝을 못하고 욕만 얻어먹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구원이 사람들이 비웃음을 살만한 아이를 통하여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건방지다고 교만하다고 완악하다고 하는 말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러한 형들이 다윗의 휘하에 들어가 군인이 되는 것입니다. 역시 요셉아래 들어간 형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니 요셉을 멸시한 형들이나 다윗을 멸시한 형들이 나중에 요셉과 다윗에게 무어라고 하였을까요? 자기공로를 주장할까요? 자기의 형 됨을 인하여 다른 요구를 할 수 있을까요? 아니지요 입을 닫을 뿐입니다. 그리고 살려만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그저 죽도록 충성하고서도 마땅히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하는 것이 겸손하여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좀더 살펴봅시다. 아들을 주신다는 말씀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둘 다 웃었습니다. 이 웃음은 분명히 불신의 웃음이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웃은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1장에서 드디어 이삭이 출생합니다. 그때 무어라고 하는지를 보겠습니다.

창세기 21:1-7절입니다. “봉독” 6절에서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불신과 비웃음의 웃음이 참된 웃음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이 말을 듣는 우리에게도 웃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웃음은 비웃음을 극복 하고서 나온 구원의 웃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나타내시는 모습입니다. 
 

 

 


로마서 4:17-25절을 봅니다. “봉독”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이 주신 믿음입니다. 이 믿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17절 중반에 그의 믿은바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를 믿은 것입니다. 이것이 이삭에게서 하나님이 보이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있는 것에서 있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시기에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됩니다. 이것이 아브라함만 아니요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받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믿음을 제공하신 분의 삶이 요셉처럼 다윗처럼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이삭처럼 웃음의 대상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만큼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오셨다는 사실에 우리는 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이나 요셉이나 다윗 할 것 없이 모든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의 모습이 얼마나 세상의 비웃음거리였으며 멸시와 천대를 받았는지가 성경에서 보여 져야 합니다.

 

 

 

 

그러나 요셉과 다윗이 총리도 되고 왕도 되었지 않느냐고 묻지요. 그러나 요셉이 어디에 자기의 해골을 묻어 달라고 하였습니까? 약속의 땅입니다. 애굽에서의 총리, 아무것도 아님을 보이는 것입니다. 다윗의 왕됨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심을 보이는 예표적인 사건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받으신 대우를 보면 더욱 이 말씀들이 분명하여 질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에 삼년기간동안 당하신 수모를 우리가 알지 않습니까? 얼마나 배척받는 모습으로 사셨는지, 그러나 그 절정은 역시 십자가 앞에서입니다.

 

 

 
마태복음 27:27-44절을 봉독합니다. “봉독” 멸시와 천대, 희롱 당함.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침을 뱉고 눈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고서 네가 선지자면 누가 쳤는지 알아 맞혀 보아라, 네가 남은 구원하면서 너는 구원 못 하느냐, 십자가에서 한번 내려와 보아라, 그러면 믿어주마. 하나님의 아들의 이러한 수모와 멸시와 천대가 왜 일어납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메시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좋아하는 이상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거저 높아지고 싶고 나의 힘을 축적하고 싶어 하고 눈에 보이는 능력을 나타내 보이고 싶은 우리들입니다. 그러한 우리의 죄가 하나님의 아들을 이렇게 대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분이 우리를 다시 살려내신 것입니다. 희생당한 자가 희생시킨 자를 살려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 앞에 우리가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무엇을 내가 이루어 놓았다고 말하시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윤리 도덕적인 차원에서의 죄만 말하다 보니 예수님의 멸시와 천대가 나와는 상관없는 그 시대의 나쁜 놈들이 한 일쯤으로 생각하십니까? 오늘 우리도 끊임없이 초라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 볼품없이 멸시와 천대를 받으신 예수님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늘 다른 모습으로 달려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가 멋있고 큰 업적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릴게요? 그러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은 없습니다. 오직 아들을 통하여 그 십자가의 고난을 통한 영광만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광스러워 지고자 하는 그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우리가 속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업적들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리라 생각하는 그러한 생각과 행동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도의 가장 큰 싸움이 이러한 싸움입니다. 이삭을 주신다는 그 약속을 받고서 웃었던 그런 웃음을 우리가 받아내는가, 요셉이 형들에게 받았던 그런 대접을 받는가, 다윗처럼 그런 대접을 받고서도 오히려 견뎌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이러한 방법으로 자기의 택한 백성들을 모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주님이 심판주로 영광의 왕으로 재림하실 때까지 자기 백성들을 부르시는 방법입니다. 세상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부르지 아니함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쓸데없는 세상의 영광을 따라 경쟁하며 사시지 마시고 손해보고 낮아지고 당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서 십자가의 미련한 것이 구원의 능력으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창세기 18:16-33  아브라함의 기도  2000. 1. 9.

 

 


‘아브라함의 기도’ 하면 우리의 일반적이 생각은 간절히 기도하여 롯을 구원하듯이 우리도 전도할 사람을 정하여 간절히 기도하여 구원하자 라든가, 아니면 소돔과 고모라성에 의인 열명이 없어서 망하였기에 우리가 의인이 되자,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좀더 나가면 중보기도의 능력이라고 하면서 중보기도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도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본능적으로 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가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 그러면 가장 먼저 정성을 바친 간절한 기도를 먼저 생각합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기도의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빌고 또 빌었는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온 것입니다. 정성을 다하여 나무에도, 돌에도, 해와 달에게도 조상에게도 빌고 빌어온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니 절에서도 기도를 얼마나 많이 하는 지 아십니까? 40일 기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백일기도, 천일기도, 범어사 입구의 어느 절에서는 10,000일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10,000일을 계속 끊어지지 아니하고 기도하고 있다는 플랭카드를 보았습니다. 10,000일이면 몇 년입니까? 27년하고 한달 보름입니다. 이렇게 연속 릴레이 기도를 하는 곳이니 영험한 능력이 있는 곳이니 이곳에 많이 오시오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생각이 이름과 형식만 바뀌었지 내용은 그대로 유입되어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또 그런 것처럼 보이는 말씀도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몇 곳만 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7:7-11절입니다. “봉독”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나에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이 되지만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그 좋으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9-13절입니다. “봉독” 여기서는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입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자신의 죄와 비참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이 성령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령이 임함으로 우리가 구하여야 할 것이 세상의 좋은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의가 없음을 알고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가난한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씀의 정리가 되어 있지 아니하면 자꾸만 엉뚱한 것 구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1-8절입니다. “봉독”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말씀하시면서 불의한 재판관이라도 과부의 끈질긴 간청을 들어 주었다는 것을 가지고 우리도 끈질기게 기도하기만 하면 응답받는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의 결론이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원한’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원한이란 세상의 욕심을 이루지 못한 한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과 그 증거로 인한 핍박을 받고 순교를 당한 자들의 원한입니다. 요한계시록 6:9-11절입니다. “봉독” 그러므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이유가 주님의 말씀과 그 증거를 인한 핍박과 순교를 당하는 그런 상황에서라도 기도를 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그러한 믿음을 보겠느냐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차원의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의 결론을 보지 않고 예를 들은 그 내용만 보아도 과부의 간청이 정당함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과부가 정당하지 않은 문제를 가지고 억지를 부리거나 하였다면 공무집행방해로 가두어 버리면 되지요. 그러니 우리가 기도한다, 그러면 우선 누가 기도할 수 있는가 하는 기도자의 자격을 보아야 합니다. 아무나 아무 내용으로 기도한다고 들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 4장 2-4절에서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 함이요,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는 말씀 중에서 앞부분만 따오면 안 됩니다. 4절에서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오늘 아브라함의 기도 가운데서 기도자의 자격과 기도의 내용을 보고자 합니다. 나그네를 대접하였는데 천사와 하나님을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들을 전송하려고 함께 나갈 때에 여호와께서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심으로 기도할 내용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할 내용이 무엇입니까?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알았기에 그 안에 있는 롯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것이 기도의 내용이고 그 마무리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의 시작과 과정과 끝이 하나님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선 기도자의 자격입니다.

 

 

 

 

창18장 17절에서 19절입니다. “봉독” 이것이 기도자의 자격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아브라함에게 알리신 것도 하나님이 언약의 상대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천하 만민이 그를 인하여 복을 받게 하시리라는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기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시기 위하여 아브라함에게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기도는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 가운데서 롯을 구하여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아브라함의 기도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자기는 롯을 염두에 두고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22절에서 32절까지 간구합니다. 하나님이 언약을 받은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공의를 가지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악인과 의인을 함께 멸하시면 되겠습니까? 그 성중에 의인 50인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의인 50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성을 사하리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자기를 티끌과 같은 자임을 인정하면서 또 간구합니다. 45명, 40, 30, 20, 10명까지 기도하였습니다.
어떤 분이 이것을 가지고 말하기를 한 명까지 내려가도 하나님이 들어주셨을 것이라고 더 간절히 기도해야 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롯은 의인이 아니냐고 말씀하시겠지만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구원받은 것은 아브라함을 인하여 구원받는 것입니다.

 

 

 

 

창세기 19:29절입니다.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 롯이 구원받은 것은 아브라함을 생각하여 아브라함의 기도를 생각하여 구하여 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후서에서는 의로운 롯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의가 아브라함을 생각하여 주신 의라고 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기도가 중보자의 기도입니다. 정말 롯이 그곳을 싫어할 만큼 의인이라면 떠나야 하는데 떠나지는 못하고 단지 그 성안에 일어나는 음란한 행실을 보고서 고통하고 그 마음이 상하였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롯을 의롭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고통과 그 마음의 상함이 역시 아브라함의 기도라고, 중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에 살고 있는데 여기에서 이 세상의 일들을 보면서 고통이 와야 하고 마음이 상하여야 하는 것이 있다면 이것은 바로 우리의 중보자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시는 결과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소돔과 고모라 같은 성에서 살면서 고통은커녕 소돔과 고모라의 그 부귀와 영화를 누리지 못하여 안달한다면 이것이 어찌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자는 롯의 처와 같은 것입니다. 결국 뒤를 돌아보다가 멸망당하는 것을 우리에게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2:6절.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기도의 자격은 하나님의 언약의 상대자이기에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 아브라함의 중보의 기도를 통하여 롯을 건져 내신 것입니다. 이러한 중보의 기도를 모세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아 오는 사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서 그것이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신이라고 합니다. 이때 하나님이 그들을 다 쓸어버리고 다시 새롭게 민족을 만들어 내겠다고 하시자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용서하여 달라고 합니다. 만약 여기서 다 죽여 버리면 하나님이 능력 없어서 가나안에 못 들어가고 사막에서 다 죽었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하면서 중보의 기도를 하는데 백성들을 사하지 아니 하시려면 자기의 이름도 생명책에서 빼 달라는 기도를 합니다. 이러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모세도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이기에 가능 한 것입니다. 이러한 아브라함과 모세의 중보의 기도를 가지고 오늘 우리도 중보의 기도를 하자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중보자는 한 분뿐입니다.

 

 

 

 

디모데전서 2:5절입니다. “하나님은 한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중보자는 한 분뿐입니다. 히브리서 8:6절과 9:15절에서는 새언약의 중보자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금 우리의 중보자는 아브라함이 아니고 모세가 아닙니다. 우리의 중보자는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는 지금 새 언약의 시대에 있기에 다른 중보자가 없습니다. 오직 한분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 중보자의 완전한 중보의 기도 덕분에 소돔과 고모라 같은 이 세상에 살면서 이 세상의 음란함과 악을 보고서 마음을 상하고 고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우리의 마음에 세상의 돌아가는 꼴을 보면서, 아니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것으로 인한 고통이 오고 마음이 상하게 된다면 우리는 롯처럼 가능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중보자의 기도 효력이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형제와 자매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중보자의 자격이 아니라 그 중보자의 은혜를 입었기에 한분 중보자 안에 있기에 서로 형제를 위하여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는 우리도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것입니다. 중보자안에 있기에 기도가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제 예수를 믿었기에 이제는 예수님 없이 내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 직통으로 나가는 것처럼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중보자는 한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한번의 대제사장이 아니라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셨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중보자 안에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에베소서 2:18절에서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기도의 특권을 우리가 받았다면 이제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면 내용이 무엇이어야 합니까?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시겠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성에서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지금 저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천사의 눈에는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손을 잡고 재촉하여 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적인 눈도 열려져야 합니다.

 

 

 

 

이 불경건한 세상을 향하여 불심판을 준비하고 계시는 그 주님의 말씀을 믿을진대 지금 무엇을 위하여 기도하시겠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에서 도대체 무엇을 달라고 하시겠습니까? 오직 한마디 주여 살려주옵소서,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간구 외에 무슨 간구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나를 위하여도, 가족을 위하여도, 교회와 이 땅을 위하여도 기도할 내용이 얼마나 단순해지고 절박하여 집니까? 아브라함의 기도를 보면서 우리의 기도의 내용이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가 얼마나 성경에 많은지 아십니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을 알게 하옵소서.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되는 길인데 세상을 사랑치 않게 하옵소서.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오니 돈을 사랑치 않게 하옵소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복이 있다고 하였는데 주님을 위하여 핍박을 받게 하옵소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게 하옵소서. 범사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정금보다 더 사랑하게 하옵소서. 섬기는 자가 되게 하소서.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데 두게 하소서. 땅에 것을 찾지 말고 위에 것을 찾게 하소서. 예수님을 사랑하게 하소서.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러한 기도의 사람이 되도록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19:1-22  농담으로 여긴 사람들  2000. 1. 19.

 

 


소돔과 고모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이미 그 내용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의 상황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난주 기독신문에 만화의 내용이 소돔과 고모라가 음란한 문화에 빠져 있다가 불심판을 받은 내용을 두 컷으로, 그리고 나머지 두 컷은 지금 ‘거짓말’이라는 영화가 상영되는 이 땅이 불심판을 받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전혀 경각심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롯의 사위들이 롯의 말을 듣고서 농담으로 여긴 것과 마찬 가지입니다. 롯의 사위들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소식을 듣고도 함께 망한 것은 멸망의 소식을 듣지 못하여서 아니라 듣고서도 농담으로 여긴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늘 말씀의 경고를 받고 있는데도 늘 농담으로 여기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나는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자세로 듣고 있는가를 점검하면서 오늘의 말씀을 보고자 합니다. 천사들이 나그네의 모습으로 소돔성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소돔 성문에 앉아 있던 롯이 그들을 발견하고 자기 집으로 모셔 들이고자 합니다. 그러자 그들이 길에서 밤을 지내겠다고 하자 그 성의 죄악을 아는 롯이 그들을 간청하여 자기 집에 모십니다.

그리고 저녁을 대접하고 그들이 자리에 들기 전에 그 성의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나그네를 끌어내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상관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방인이 들어 왔으니 허락도 없이 들어 왔느냐, 라는 그런 의미에서의 상관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성적관계를 가지고자 하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 이유는 소돔과 고모라의 성적인 타락상을 보아서도 알 수 있고 그들 대신에 롯이 자기의 딸들을 대신 내어 주고자 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대접하여 하나님을 대접하게 되었는데 소돔성의 사람들은 나그네를 대접하기는커녕 그들을 욕보이고자 하였으니 심판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한 소돔성에서 유일하게 나그네를 대접한 사람이 롯입니다. 이 롯이 나그네를 대접한 것이 아브라함의 기도임을 우리가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그러니 롯의 심령에 소돔과 고모라의 타락을 인하여 마음이 상하고 그들과 함께 어울리지 아니하고 성문에 홀로 있다가 나그네를 대접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소돔이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나그네를 대접하지 않고 욕보이려고 한 성읍이 또 있는데, 이 사람들은 이방인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이스라엘 백성들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사사기 19:22-23절을 봅니다. “봉독” 이 사건이 일어난 배경은 에브라임 산지에 사는 어떤 레위인이 첩을 두었는데 친정으로 가버린 것입니다. 레위인이 첩을 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만 이 사사시대의 혼란과 타락이 극에 달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 레위 사람이 자기의 첩을 찾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날이 저물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여부스에 이르러 종이 여부스에서 밤을 지내자고 하였으나 자기의 동족이 아니라고 기브아에까지 갔습니다. 그래서 성문에 기다리는데 아무도 영접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노인이 그 레위인을 영접하여 들였는데 동네 사람들이 몰려 와서는 그 사람을 끌어내라고, 우리가 상관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노인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면서 자기 딸과 그 사람의 첩을 내어 놓겠다고 합니다. 결국 그 사람의 첩이 끌려 나가 밤새도록 욕을 당하고는 그 다음날 새벽에 죽고 맙니다. 이 시신을 가지고 가서 열두 토막을 내어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게 보내고 그것으로 총회가 열리고 기브아를 치는 것입니다.

기브아에 베냐민 지파가 살고 있었기에 이들에 대한 전면 공격을 하였는데 오히려 이스라엘의 총회가 두 번이나 패배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 이스라엘 전체가 소돔과 고모라와 같다는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만 아니라 나머지도 마찬 가지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뿐 아니라 지금 이 세대도 동일한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소돔과 고모라 하면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을 경고하는 모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몇 곳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신명기 29:22-26절입니다. “봉독”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으로 전한 말씀입니다.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너희가 들어가는 땅에서 그들과 섞이며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너희가 섬기면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에돔이나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을 예고할 때도 소돔과 고모라 같을 것이라고 경고합니다(사13, 렘50). 신약에서는 세 곳에서 소돔과 고모라를 대비하여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10:14-15절을 봉독합니다. “봉독” 이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제자들을 영접치 아니하는 자들이 받은 심판을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심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의 복음을 들고 나갔을 때 이들을 영접하는 것은 바로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은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가 오히려 주님을 영접하지 않은 자 보다 견디기가 쉬울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모두가 예수님 중심입니다. 다른 곳에서 심판과 멸망을 말할 때는 소돔과 고모라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것은 소돔 고모라 보다 더 심한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세례요한이 여자가 나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 하시고서는 그러나 천국에서는 가장 적은 자라도 세례요한 보다 더 크다는 말씀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하신가를 드러내듯이 심판에 있어서도 예수님을 기준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서 1:7절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거울이 되었습니다. 베드로후서 2:6-8절입니다. “봉독” 역시 본을 삼은 것이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모델입니다. 모델이 있다는 것은 더 본격적인 실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파트의 모델 하우스를 만드는 것은 실제로 짓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있음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로 물로서는 심판을 하시지 않으시지만 그러나 이제는 불로서의 심판을 소돔과 고모라를 통하여 모델케이스로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후서 3:1-14절을 봅니다. “봉독” 말세에 종말과 심판이 재림이 어디 있느냐고 기롱하는 자, 농담으로 여기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모든 자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자기의 정욕대로 사는 자들이 하나님의 불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일부러 잊어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잊어버림이 사람들로 하여금 바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바쁜데 종말, 죽음, 심판 그런 것은 나중에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전도를 해보시면 대부분이 바쁘다는 것입니다. 또 다르게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그런 일에만 정신을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권세라는 것은 어떻게 하든지 주님의 경고를 우습게 여기고 농담으로 만들어 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 창세기의 소돔과 고모라 성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나그네를 상관하려는 그 무리들, 롯을 밀치며 들어오는 그들을 천사들이 눈을 멀게 함으로 보호를 합니다. 그리고서는 천사들이 네게 속한 자들이 있느냐고 합니다. 사위나 다른 자녀가 성안에 있다면 빨리 밖으로 끌어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롯이 자기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이 성이 죄악으로 멸망당하니 빨리 도망가자 합니다. 그러자 사위들의 말이 14절에 보시면 “농담으로 여겼더라.”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긴 것입니다. 농담으로 여길 말이 따로 있지 지금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있는데 장인의 말이 농담으로 여겨질 만큼 이 성읍은 죄악으로 가득한 것입니다. 자 여기에서 우리는 어떻습니까? 적어도 롯의 사위는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심판을 농담으로 여기지는 아니 하지요. 그러나 그 행위는 롯의 사위들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만약 이 지붕이 5분 안에 무너진다, 그러면 이 말을 믿었다면 어떻게 합니까? 빨리 벗어나야지요. 그런데 믿기는 하는데 그대로 앉아 있다가 죽었다면 행함이 없는 것입니까? 믿음이 없는 것입니까?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니 우리는 롯의 사위들처럼 롯의 아내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쩌란 말입니까? 롯과 아내와 두 딸이 소돔성에서 스스로 나오지 못하였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만약 롯이 스스로 그곳을 벗어났다, 라고 한다면 저와 여러분이 별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늘 소돔과 고모라를 좋아하고 있는 것입니다. 15-16절을 봅니다. “봉독” 롯이 천사의 말을 듣고서 재촉을 하여도 무얼 하고 있습니까? 함께 망한다, 빨리 끌고 나가라 하여도 지체 합니다. 미적거리는 것입니다. 그래도 혹시 멸망당하지 않으면 이곳에 눌러 앉아 살아야지 하는 미련 그리고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재산 이런 것들을 버린다는 것이 사람에게 얼마나 불가능합니까? 그러자 천사가 두 사람씩 손을 잡아 끌어냅니다. 롯의 가족이 스스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끌려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한 끌려나옴이 무엇 때문입니까?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 하셨더라.” 우리의 구원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음을 이제야 아는 것입니다. 주님의 인자하심 긍휼하심 자비하심이 우리의 구원의 근거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끌려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이제 얼마나 더 소돔과 고모라를 그리워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인자를 더하심은 누구의 기도입니까?

 

 

 

 

29절입니다.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성을 둘러엎으시는 중에서 롯을 내어 보내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소돔과 고모라 같은 이 세상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의 기도와 이 기도를 받으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끌어내고 있습니다. 롯의 끌려 나오는 그러한 끌림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여러 가지 세상의 실패와 환난으로 좌절로 낙담되는 일로, 오늘에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 마다 이것이 주님의 인자의 손길이구나, 하면서 그 뜻을 분별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하여 이런 손해가 오는가 하는 것은 아직 소돔과 고모라에 더 눌러 있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니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것이 바로 세상을 버리게 하시고 포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제로 끌어내시는 것이 주의 인자하심임을 알 때에 도대체 세상의 두려운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끝으로 실화를 하나 소개하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1979년 8월 25일 경남 하동읍 비파리 177번지 36평의 단층 슬라브 속에서 가냘픈 경고방송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40분간이나 계속된 경고 방송의 내용은 섬진강 둑이 폭우로 무너져서 하동읍으로 들어오고 있으니 피하라는 경고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한번도 침수당한 적이 없는 이곳에 설마 잠길려고 하면서 미적된 것입니다. 그리고 추석 대목을 앞두고 많은 물건도 준비하여 놓았으니 떠나기가 쉽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그 경고를 우습게 여기고 농담으로 여기고 피하지 않은 사람들의 대부분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 재림 직전까지는 경고의 방송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설교의 내용이 소돔과 고모라 같은 이 세상에서 더 잘 먹고 잘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떠날 준비를 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농담이 아님을 주님께서 인자를 베푸셔서 알게 해주시고 믿게 하여 주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진 그 나라를 사모하며 사시기를 간절히 부탁합니다. 

 

 

 

 

 

창세기 19:23-38  롯의 처를 기억하라  2000. 1. 23.

 

 


수요일도 경고방송을 하고 주일 저녁에도 경고방송을 합니다. 아마 주님의 임하실 때가 가까운가 봅니다. 우리에게 분명한 것은 주님의 재림이 처음 믿을 때 보다는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숙이란 재림을 더 사모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상한 날짜에 사로잡혀서 카운트다운을 하는 그런 사람들의 모양이 되어서는 안 되지요. 그리고 세상의 종말이 가까이 왔다고 하여 쉬 동요하여 먹고 마시자는 식으로 나가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11절을 봅니다. “봉독” 종말에 대한 자세입니다. 때와 시기는 도적같이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홀연히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깨어 기도하기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는 도적같이 임하지 아니합니다. 이것은 날짜를 알아맞춘다는 것이 아니라 시험공부를 미리 해놓은 학생은 시험을 언제 치더라도 상관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준비는 우리로 하여금 종말에 대한 두려움이나 공포에 사로잡히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9절을 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노하심에 이르게 하시지 않고 살든지 죽든지 주님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로 부름 받았으니 사랑하는 신랑과 결혼을 약속하고 결혼날을 기다리는 그런 자세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힘이 드는 일이기에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하라고 하는 것입니까?  11절에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하는 것처럼-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피차 권면하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그런 자세로 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격려는 이러한 격려입니다. 

 

 

 

 

히브리서 10:23-25절입니다.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여기서의 격려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신앙의 어려움을 잘 견디게 하는 격려입니다. 그런데 어느 가정사역을 한다는 목사가 이 격려를 가지고 부부생활, 가정생활의 화목을 위하여 격려하고 칭찬하자는 말로 한 시간을 하는 것을 직접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지금 롯의 아내가 자기 사위들과 자기의 재산들을 위하여 염려하고 있는 롯의 아내에게나 격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격려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자는 격려입니다. 롯의 처를 생각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인하여 우리가 더욱 주님의 임하심을 바라보고 뒤를 돌아보지 않도록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는 성도의 교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모이기를 힘쓰라는 말도 주님의 재림이 가까이 올수록 사람들은 더욱 바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온갖 인간을 편리하게 한다는 기계들이 사람들을 더욱 바쁘게 몰아 부치는 것입니다. 전화가 휴대폰으로 계산기가 컴퓨터로 이제는 초고속 광케이블로 더 바쁘게 사는 세상입니다. 거기다가 인터넷을 통하여 세계의 정보를 밤새 뒤지면서 앞서 나가야 하는 사람이 언제 하나님의 말씀을 볼 시간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모이기를 힘쓰는 것도 잘 모이면 복 받는다, 하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모입입니까? 그 날이 오기를 기다리는 모임이어야 합니다. 그런 모임에는 가기 싫지요 그저 주일성수하고 십일조 잘하면 복 받는다는 그런 날짜 우상에나 붙들려 소돔과 고모라에 미련을 두게 하는 일에 힘쓰지 마시고 그 날을 준비하기 위하여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옆에 사람을 격려합시다. 조금만 참읍시다.-한 30년만)
 

 

 


17절을 봅니다.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소돔과 고모라에서 도망가는 길이 살 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도망가야 합니까? 뒤를 돌아보지 말라. 들에 머무르지 말라. 산으로 도망가라. 그렇게 끌려 나와서 도망을 가면서 롯의 머리가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계산이 빠른지 아무리 빠른 컴퓨터라도 사람이 자기의 생존에 관계된 일에 머리가 돌아가는 것을 따라 잡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에게 이익인가? 손해인가? 계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롯이 뭐라고 합니까? 두렵건대 산까지 가다가 재앙을 만날까 두렵사오니 저기 조그만 성읍에 가면 안 되겠습니까? 소돔과 고모라에서 약 3킬로미터 거리랍니다. 산으로 도망가라는데 다시 도시 속으로 옛날에 아브라함이 먼저 선택하라고 하였을 때 도시를 선택한 롯이 다시 도시를 선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사들이 허락을 합니다. 그러자 소알 성으로 성이 작다고 ‘소알’이라고 부릅니다. 성으로 들어가는데 문제는 이때 롯의 아내는 그들의 뒤에 남아서 들에 머무는 것입니다. 성에서 도망하여 뒤를 돌아보지 말고 산으로 도망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망가는 것도 억지로 마지못하여 끌려 나왔는데 몸은 성밖에 나왔지만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성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마음이 있다고 하셨습니까?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고 하였지요? 그러니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고 귀하다고 여기는 보물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지금 과연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입니까? 땅입니까? 위입니까? 아래 입니까? 골로새서 3:1-6절입니다. “봉독”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면 위엣 것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다시 살리심을 받지 못하였다면 절대로 위엣 것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위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의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땅의 것을 생각하는 것이 탐심이요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가 어디에 쏟아지는 것입니까? 우상숭배에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형상을 만들고 거기에 절하는 것만이 아니라 탐심이 우상숭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부르는 것이라면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니 전도와 헌금이 교회 봉사가 자기의 탐심을 위한 것이라면 우상숭배를 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열심을 강조하고 충성을 강조하는 것이 정말로 주를 위한 것인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 키우기를 목표로 하고 위장하여 광명의 천사처럼 하나님의 일을 합시다, 하면서 관심이 자기의 교회에 있다면 이것을 잘 알 수가 없지요 그러나 결국 열매로 알게 됩니다. 그래서 잘 보셔야 합니다. 그러한 자라면 목사라도 예외 없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롯의 아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롯의 아내를 생각하라 하면서도 세상 것 불타니 교회에 헌금 많이 하여 교회 키우자, 하는 말을 하면 역시 땅의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4절입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요한일서 2:15-17절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마음을 두고 사는 것들이 모두가 하나님께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끌려나온 롯과 그 가족, 이끌어낸 후에 돌아보지 말고, 들에 머무르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사람의 생각은 수도 없이 빠르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계산을 해보는 것입니다. 산으로 가서 어떻게 살라는 것인가? 전에 아브라함과 헤어질 때도 롯이 먼저 선택한 땅은 산이 아니라 도시였는데 산으로 가기에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끌려나오면서도 뭐라고 합니까?

 

 

 

 

19절입니다. 주께서 은혜와 큰 인자를 베푸셔서 저를 구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 산까지 가다가 재앙을 만나 죽을까 하오니 저 성으로 가게 하옵소서. 누구의 모습입니까?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주여, 구원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런데요, 너무 고생은 시키지 말아 주옵소서, 하는 것과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원을 들어 줍니다. 그러면서 소알 성까지 가는 동안 심판을 행할 수 없으니 그곳으로 피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를 입은 자가 안전지대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심판을 연기하고 계신 것입니다.

 

 

 

 

소알에 이르고 하나님이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립니다. 유황은 성냥 끝에 있는 화약 같은 것입니다. 그 성들과 온 들과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들을 다 엎어 멸하신 것입니다. 그 때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 본고로 소금 기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피하여 가는 중에 뒤를 돌아보는 순간 소금 기둥이 되었다기보다는 들에 머물러 뒤를 돌아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불과 유황이 비같이 쏟아지고 소돔과 고모라 지역이 역청과 소금이 많은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그 쏟아지는 불의 파급이 함께 롯의 처에게 뒤집어 쓴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921년전 이탈리아의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폼페이 시가 파괴되었습니다. 이때의 묻혀진 도시가 1,500년이나 있다가 발굴이 되었는데 그때 화산으로 덮일 때의 고대의 생활상이 다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사람이 화산재로 뒤덮여 굳어 버리고, 그 시신은 분해되어 없어지지만 그 구멍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구멍에 시멘트를 넣어서 굳히면 사람이 화산으로 인하여 피할 때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브리테니커 백과사전

 

 

 

 

이 말을 하는 것은 옛날 어느 책에서 보았는지 누구에게서 들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 도시를 발굴 중에 조금만 더 도망을 갔으면 살 수가 있었는데 엎드려져 죽어있는 사람의 형체가 발굴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 하고 보니 그 사람의 가슴부분에 금과 은 같은 보물이 들려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보물이 없었다면 그 화산폭발로 화산의 용암이 뒤덮이는 것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실감이 나지 않습니까? 롯의 처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지남 목요일 오후 극동방송에서 어느 나라에서 우박이 떨어졌는데 농구공만한 4킬로그램짜리가 떨어져서 종말이 오는가 하고 놀랐다는 보도를 들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만이 아니라 이 시대도 끊임없이 경고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땅은 영원히 안전한 곳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롯의 처를 생각하며 떠날 준비를 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기분이 좋을지, 안 좋을지 저는 여러분의 심정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증거하고 있느니 증거하는 것입니다. 우박이야기 조금 더 봅니다. 

 

 

 

 

출애굽기 9:22-26절. “봉독” 우박이 사람과 짐승까지 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우박 속에 불덩이가 섞여 내리는 것입니다. 얼음과 불덩이가 섞여서 쏟아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6:21절. “봉독” 우박의 무게가 한 달란트 약 20-40킬로그램. 4킬로 정도의 우박이 아니라 40킬로의 우박이 내리는 곳에서 이리 저리 피하며 사시렵니까?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사시겠습니까?

 

 

 

 

끝으로 누가복음 17:28-33절입니다. 먹고 마시고 심고 집을 짓는 일에만 관심을 가졌지 종말과 심판을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롯의 처가 뒤를 돌아보는 것은 살고자 뒤를 돌아 본 것이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롯의 처를 기억하면서 자기 목숨을 보존코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 이 말씀을 기억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20:1-18  아브라함과 아비멜렉  2000. 1. 30.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보고서 아브라함이 이사를 합니다. 그랄 땅으로 내려갑니다. 그곳에서 또 다시 자기의 아내를 누이라고 합니다. 아예 가는 곳마다 그렇게 하기로 아내와 약속을 하고 다닌 것입니다. 13절입니다.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말하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시키신 것이 아닌데 자기 스스로 자기의 생존을 염려하여 누이라고 말하고 다닌 것입니다. 그러면서 궁색한 변명을 하고 있는데 11절과 12절입니다. 이곳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아내 까닭에 나를 죽일까 두려워함이요, 또한 나의 아내는 이복누이라고 말합니다. 궁색한 변명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놓고도 그 약속을 이루어 내는 일에는 사람이 보탬이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년 안에 이삭을 주신다는 약속을 받아 놓고 있는 중에 다시 사라가 이방인의 손에 넘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그런데도 아비멜렉이 자기의 아내로 데려 간다고 하여도 그냥 내어주는 것입니다. 자기의 생존의 두려움 앞에서 옛날에 애굽의 바로왕에게서 자기를 구원하여 내신 것도 잊어버린 것인지 또 그런 일을 반복합니다.

 

 

 

 

이러한 사건 앞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거짓말을 하였으니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 말자, 라는 식이 되어 버리면 하나님의 계시가 윤리 도덕의 교과서와 별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잘못을 하나님이 본문에서 책망하지 아니합니다. 만약에 우리에게 그러한 교훈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셨다면 하나님이 분명히 책망하시고 거짓말 하지 말고 나를 믿으라고 말씀 하실 텐데 그러한 내용은 없고 오히려 아비멜렉만 혼이 나고 나중에 많은 재물을 아브라함에게 주었다는 것이 창세기 20장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누가 더 정당합니까? 아브라함입니까? 아비멜렉입니까? 아비멜렉이 정당합니다. 2절에 보면 그 아내 사라를 누이라 하였으므로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하여 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아비멜렉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시어 네가 취한 그 여인을 인하여 네가 죽으리니 그는 남의 아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그 여인을 가까이 아니 한고로 주께서 의로운 백성도 멸하시나이까? 하면서 자기의 정당성을 변호합니다.
5절의 변호를 봅니다. 이 말이 정당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나도 안다, 그러므로 너로 손을 못대게 하였느니라, 하시면서 오히려 아브라함이 너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네가 살고 돌려보내지 아니하면 다 정녕 죽을 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누가 잘못하였고 누가 정당합니까? 아브라함이 잘못하였고 아비멜렉이 정당합니다. 그런데 누가 책망을 받습니까? 아비멜렉이 책망을 받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어려운 부분입니다. 우리가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너무 믿음이 좋아서 그런지 아멘 믿습니다, 하면서 밀어붙이는 식인데 그러나 우리가 아비멜렉의 입장이 되었다면 이것이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오늘 이 문제를 살펴보고자합니다. 시편 135편 3절에 보시면 여호와는 선하시고 아름다우시다, 라고 합니다. 선하시고 아름다우신 분이 7절에서 애굽의 처음 난 자를 사람부터 짐승까지 다 죽이신 분입니다. 왜 남의 장자를 죽이시면서 자기 백성을 구하여 내시는 것입니까? 왜 가나안의 백성들은 어른들이야 죄로 인하여 죽인다고 하여도 어린애까지 모두 진멸하여야 하는가 말입니다. 어찌 그리 잔인하시게 싹 쓸어버리시는가를 생각해보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선하시고 그 인자함이 영원하다고 합니다.

 

 

 

 

시편 136편 10절을 봅니다. 애굽의 장자를 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라고 말합니다. 계속하여 바로와 그 군대를 홍해에 엎드려뜨리신 이에게, 큰 왕들을 치신 이에게, 아모리왕 시혼과 바산왕 옥을 죽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라고 노래합니다. 가나안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돈 주고 산 것도 아닌데 강제로 점령하면서 다 죽이시는 것입니다. 땅을 사긴 하였는데 아브라함이 무덤으로 쓰려고 조금 사놓은 땅 외에는 모두가 원주민들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땅을 돈 주고 사지도 아니하고 단지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시겠다는 그 약속 하나로 이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계시는 것입니까?

 

 

 

 

이사야 40:12-17절을 봅니다. “봉독” 하나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없는 것같이 텅 빈 것같이 여기시는 분입니다. 아니 사람을 그렇게 볼 수 있느냐고 하겠지만 사람이 범죄함으로 인하여 아무것도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원수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짐승이나 다른 피조물은 하나님에 대하여 반역을 하지 않는데 가장 뛰어난 피조물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이러한 세상을 하나님이 심판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심판을 계시하기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에게 언약을 주셔서 하나님이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아닌 다른 그 무엇도 모두가 박살이 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하나님되심을 계시하시기에 비록 이스라엘이라고 하여도 이스라엘 자체의 존속과 유지를 위하여 언약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조차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세우심은 이스라엘 너희 나라 잘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계시하는 도구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잘 볼 수 있는 장면이 여호수아 5:13-15절입니다. “봉독” 여호수아가 가나안땅에 들어갈 때 칼을 빼들고 서있는 한사람을 보고서 너는 우리 편이냐? 적 편이냐? 물을 때 무어라고 합니까? 아니라, 나는 누구편도 아니고 하나님 편이다, 라고 말하자 여호수아가 엎드립니다. 나의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여호수아는 자기가 여호와의 전쟁을 수행하고 있으니 자기가 하나님의 편에서 싸우는 줄 알지요. 여호수아가 물론 하나님의 군대로서 싸웁니다만 그러나 싸우는 분이 따로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곳에서 신을 벗으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곳이니 신을 벗어라, 너는 종이라는 것입니다. 모세가 신을 벗은 것처럼 신을 벗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의 계획과 작전을 따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너는 종이니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주일학교 궤도를 가지러 갔을 때 서점 주인이 책을 하나 선물 하였습니다--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틀림없이 요셉을 이야기 하면서 새로운 시대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 대가를 지불하라는 그런 내용입니다. 그래서 주의 종이란 자기의 꿈을 세우고 가지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입니다. 여리고성을 돌라면 도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땅굴을 파든지 사다리를 만들든지 할 텐데 돌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함을 지르라고 할 때 지르니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누구 편이십니까? 하나님 자기편이십니다. 아스라엘 백성도 자기의 언약을 무시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이 싸울 때 그들이 이기게 하는 것도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지는 것도 자기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인정하지 못하면 언제나 헷갈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늘 하는 말이 우리가 하나님께 잘 보여서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서 우리의 무슨 일이 이루어지도록 하자는 것이 얼마나 우리 중심의 생각인가 하는 점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약 식으로 말하자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다시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궁극점이 주님의 자기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굉장히 거슬리는 말이 됩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데 어찌 다른 분에게 영광을 돌린다는 말입니까? 시편 115편 1절에서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낮아지심과 성실하심에 돌리소서

 

 

 

 

이제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을 다시 봅시다. 분명히 아브라함이 잘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이 정당합니다. 그러나 이 싸움이 누가 정당하느냐, 아니냐의 싸움이 아니라 누가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자인가, 아니가 하는 싸움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지 않은 모든 것을 하나님은 없는 것같이 빈 것같이 여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부러워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언약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니고 없는 것이고 더 나아가 불태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윤리와 도덕의 기준으로 나는 착하니 너보다는 나으리라는 것이 통하지 아니합니다. 너는 예수 믿고도 그 정도냐 나는 예수 믿지 않아도 너보다 열배 백배 낫다는 사람들이 지옥 갑니다. 예수 믿는다는 사람보다 훨씬 세상에서 존경받고 윤리 도덕적으로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당신들은 지옥가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로 천국 갑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나는 그런 예수 안 믿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한계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는 마음대로 살아도 되는가, 그렇게 묻고 싶지요? 그러나 우리가 은혜에 거하려고 그러면 죄를 더 지으리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어떠한 선한 행실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보다 정당하여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네가 합당치 않는 일을 하였다고 말합니다.

 

 

 

 

9-10절입니다. 도대체 무슨 연고로 이렇게 하여 우리가 큰일을 당할 뻔 하게 하였느냐? 아브라함이 뭐라고 합니까? 11-13절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 안하니 그렇게 하였다고 일이 이렇게 되면 누가 누구에게 잘못을 빌어야 합니까?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에게 미안하다고 잘못하였다고 빌어야 하는데 누가 누구에게 선물을 주고 있습니까?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선물을 주고 또 아브라함에게 기도를 받음으로 그 집이 오히려 복을 받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까닭에 닫힌 그 집안의 태가 열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사건을 위하여 태를 닫아 두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아비멜렉이 얼마나 두려웠으면 이렇게 하였을까요? 3절입니다. 네가 죽으리니, 아비멜렉의 변호, 그러니 내가 너를 막는다. 그러면서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황당한 내용입니까? 잘못은 아브라함이 하였는데 빌기는 아비멜렉이 비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제는 이해가 되십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없는 것처럼 빈 것처럼 여기시고 오직 자기의 언약만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이 잘못하였지만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비멜렉의 살길입니다.

 

 

 

 

그래서 14-16절에 보면 양과 소와 노비를 아브라함에게 주고 사라를 돌려보내며 은 천개를 주어 수치를 풀게 하고 어느 땅에서라도 살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17절에 보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사 생산케 합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이방 가운데서도 드러내시고 아브라함에게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애굽 바로왕에게서 동일하게 역사하신 하나님이 이번에도 역시 구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자기는 두려워하여 그렇게 하였지만 오히려 상대방이 두려워하여 선물을 바치고 기도를 받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일하신 것처럼 일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눈에 이단으로 보였습니다. 정당하냐, 아니냐로 따지면 유대인들이 정당합니다. 그들은 율법의 조문대로 보면 예수님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어라고 하십니까?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그 모든 율법 지킴이 없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없는 것 정도가 아니라 그것이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또한 이방인의 어떠한 선한 행실도 주님의 평가기준에 드는 것이 아닙니다. 고넬료가 구제와 기도가 열심이어서 하나님이 그것으로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를 보내신 것은 그것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세상의 원리로 정당하냐 아니냐? 인과율로 옳으냐, 그러냐의 싸움이 아니라 언약 안에 있느냐 언약 밖에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의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 내신 새 언약 안에 있게하심이, 아브라함이 받은 그 믿음의 복을 우리도 받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창세기 21:1-21  분리  2000. 2. 6.

 

 


오늘 본문은 이삭의 출생과 이삭과 이스마엘의 분리가 일어나는 내용입니다. 먼저 이삭의 출생을 봅니다. 아브라함이 75세에 부름을 받아 100세에 아들을 얻었으니 25년 만에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세기 12장에서 부르실 때부터 자녀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때로부터 25년간 수많은 사건들을 경험하였습니다. 애굽의 바로왕에게 아내를 여동생이라 하였다가 구출된 사건, 롯의 분가, 롯의 구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스마엘의 출생, 아비멜렉에게 또 아내를 여동생이라 한 사건. 이러한 세월 속에서 하나님은 드디어 때가 차매 약속의 자녀를 주신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열심히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자녀를 가지려고 하였지요. 그러나 그렇게 낳은 자녀는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임을 우리가 이미 이스마엘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만이 이루어 내심을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면서 또 다시 확인을 하는 것입니다.

 

 

 

 

1절과 2절을 봅니다. “봉독” 세 번이나 나오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말씀대로” 입니다. 사라가 아들을 낳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하신대로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말씀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일하심을 계시하여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100세에 아들을 낳은 사건이 하나님의 말씀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들을 낳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소원을 이루시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한 차원인 것입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의 자녀 낳기를 기대한 마음을 25년 동안 포기시키는 것입니다. 겨우 겨우 종을 취하여 86세에 아들을 낳았으나 하나님이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99세에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셔서 사라에게서 낳을 네 자녀와 언약을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기의 말씀을 즉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라를 권고하셨습니다. 권고란 돌보심입니다. 그러니 사라를 하나님이 권고하시는데 두 번씩이나 위기에서 구하여 내시는 것입니다. 두 번만 구하여 내신 정도가 아니라 늘 돌보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이루시기 위한 돌보심입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행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하시고 그 말씀을 사라에게 이루어 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라는 오히려 웃었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고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웃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노아홍수를 사람들이 우습게 여긴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집을 짓고 사고파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었지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여긴 것이 노아시대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도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 믿어야 죄용서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이것도 은혜로 된다는 이 말씀을 농담으로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재림을 우습게 여기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동일하게 우습게 여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약속에 참여 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선택이요 은혜인 것입니다. 오늘 동일하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우습게 여겨야 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가 아니라 참으로 받아들이는 이것이 정말 기적인 것이요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믿는 이것 보다 더 귀한 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왜 그렇게 복이 됩니까? 온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우습게 여긴 사라에게 말씀하신 대로 권고하시고 행하심으로 말씀대로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말씀하신 바를 이루어 내셨기에 믿지 못하여 웃었던 웃음이 약속의 자녀를 받고서 참된 웃음을 웃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이사야 55:10-11절을 봅니다. “봉독” 비와 눈이 대지를 적시고 열매를 맺히고 종자와 양식을 줌과 같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도 헛되이 돌아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이 이루어질 때 비언약과는 갈등과 충돌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비언약이 추방되는 것입니다. 약속과 비약속이 분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8절에서 21절입니다. 이스마엘만 있을 때는 갈등이 없었습니다. 이스마엘이 나의 자녀이려니 하고 산 것입니다. 종을 취하여 얻은 자식이지만 그래도 아브라함의 혈통이니 유업을 이을 자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니 처음에 하갈이 잉태하여 사라에게서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 와서 사라에게 복종을 하였지만 정작 아들을 낳고 나니 그 아들을 아브라함은 자기의 유업을 이을 자로 생각하고 산 것입니다. 17:18절입니다. 하나님이 자녀를 주신다는 말씀에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하는 것으로 보아서 이스마엘을 후계자로 여기고 산 것입니다. 그때는 별 갈등이 없습니다. 그러나 막상 약속의 자녀가 태어나자 갈등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삭이 젖을 뗄 때 큰 잔치를 베풉니다.

 

 

 

 

그런데 이때 이스마엘은 14세 이상입니다. 86세에 이스마엘을 낳았기 때문입니다(16:16).

그러니 젖을 일년 만에 땐다고 하면 이스마엘은 15세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힘 있는 이스마엘이 어린 이삭을 희롱하는 것입니다. 이스마엘이야 지금까지 자기가 아브라함의 아들로 살아 왔는데 이제 이삭이 태어나자 자기는 찬밥신세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모든 관심이 이삭에게로 몰리는 것이 싫어서 구박을 한 것이지요. 마치 언니가 동생이 태어나면 질투를 하듯이 그런 모습입니다만 그러나 그러한 단순한 문제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는 커다란 영적인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입니다.

 

 

 

 

창세기 3:15절에 뱀의 후손이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요, 여인의 후손은 뱀의 후손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을 이미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인의 후손은 언약의 자손이고 뱀의 후손은 비언약의 자손입니다. 그러니 먼저 공격을 하는 자가 뱀의 후손입니다. 그러다가 여인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외형적으로 누가 강하고 힘이 있습니까? 이스마엘입니다. 이삭은 어린아이입니다. 젖 뗀 어린 아이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를 좋아 합니까? 이스마엘입니까? 이삭입니까? 힘 있고 강한 것을 좋아합니까? 힘 있는 자에게서 괴롭힘을 당하는 이삭을 좋아 합니까? 우리 모두의 추구하는 바는 오직 한 가지 힘입니다. 그러니 신을 믿어도 자기의 힘을 더 키우기 위하여 신을 믿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힘이 없는 것을 택할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에서 놀라운 구절을 봅니다. 새벽기도회 때 말씀드렸고 설교 중에 한번 이용을 하였는데 또 보고자 합니다.

 

 

 

 

시편 131편입니다. “봉독”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위하여 힘쓰지 않겠다고 합니다. 새 천년을 맞이하여 모두가 원대한 꿈과 포부를 밝히고 있는데 시편 기자는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위하여 힘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젖 뗀 어린아이 같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삭이 젖을 뗄 때 이스마엘은 힘 있는 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언약이 나타나는 모습은 언제나 이렇게 약한 모습으로 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이 세상을 분리시키기 위하여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스스로 살아남고자 힘을 원하기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세상과 분리를 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언약이 나타나면 세상은 온 힘을 다 동원하여 끊어 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시편 2:1-12절. “봉독” 세상은 아들을 끊으려 함. 그러나 하나님이 아들을 통하여 적들을 부수어 버리심. 시편 8편 2절.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와 보수자로 잠잠케 하려 하심이라” 주님의 전쟁에 어린아이와 젖먹이를 통하여 일하시는 것입니다.
시편 83:1-6절. “봉독” 시편 2편과 비슷합니다. 대적들이 일심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대적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에돔, 가인의 후손입니다. 아벨에서, 이스마엘, 이삭과 이스마엘, 모압과 하갈, 이방인 나라까지 이들이 이스라엘보다 강함. 그러니 이들을 끊어버리소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을 희롱하는 사건이 어떤 사건인지 성경은 계시하여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을 신약이 어떻게 증거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로마서 9:6-9절. “봉독” 약속의 자녀와 육신의 자녀로 분리합니다. 이삭이 약속의 자녀이지 이스마엘이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을 쫒아 내라는 것입니다. 사라가 단지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하니 화가 나서 그렇게 조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삭과 이스마엘을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문제로 고민하지만 결국 내어 보내는 것입니다. 결국 비약속은 국가를 이루고 힘 있게 살아도 언약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21-31절입니다. 하나는 계집종이고 이것을 시내산으로 율법으로 봅니다. 그리고 이삭은 자유자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합니다.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떠한 행위로라도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가 될 수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위로부터 나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사람의 행위란 결국 이스마엘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도 육체로 따라 난자가 성령을 따라 난자를 핍박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일한 약속의 자녀가 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갈라디아서 3:16절입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않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약속의 자녀는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약속의 자녀가 이 땅에 희롱 받는 이삭의 모양처럼 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희롱 당하심이 세상의 힘을 심판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도 이 언약의 후손으로 인하여 구속을 받은 자들은 다른 힘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이것이 약속의 자녀의 특징입니다. 어린 아이 같아야 천국 간다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힘의 세력을 심판하시는 말씀입니다. 어린 아이처럼 주님만 바라보시며 비록 육체를 따라 난자 들이 핍박을 할지라도 희롱을 할지라고 우리의 약함과 연약함을 우습게 여길 지라도 주님의 약하심이 우리의 구원이 된 것을 아시고 그 언약만을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이로 인하여 세상은 거대한 분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창세기 21:22-34  브엘세바  2000. 2. 13.

 

 


브엘세바란 각주에 보면 ‘맹세의 우물’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또 다르게는 ‘일곱 우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맹세를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며 이러한 맹세가 이방인과 아브라함 사이에 일어난 배경을 살펴봄으로 이러한 맹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가 어떻게 드러나며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 어떠한 교훈을 주는지를 찾아보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이 블레셋 사람들이 사는 지역에서 나머지 생애를 보낸 것으로 드러납니다. 22:19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후에 브엘세바로 돌아와서 거기 거하였더라고 합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아주 오랜 기간을 지내게 됩니다. 이곳에 정착할 때 그랄왕 아비멜렉에게서 자기 아내를 동생이라 하였다가 아비멜렉이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 오히려 아브라함의 기도를 받음으로 그 집안의 태가 열린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아비멜렉이 자기의 땅 어느 곳에나 거하여도 된다고 합니다(20:15).

 

 

 

 

이렇게 하여 많은 세월이 지났겠지요. 그런 중에 아비멜렉과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먼저 찾아와서는 서로 맹세를 하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22절입니다.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도다” 이것이 아비멜렉이 군대장관과 함께 아브라함에게 나아온 이유입니다. 그 당시의 세력으로 보면 아비멜렉이 왕입니다. 아브라함은 족장입니다. 그런데 왕이 아브라함에게 와서 계약을 맺자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에게 아비멜렉이 무엇을 약속하도록 합니까?

 

 

 

 

23절 “그런즉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심을 보았다) 너는 나와 내 아들과 내 손자에게 거짓되이 행치 않기를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내가 네게 후대한 것처럼 너도 나와 너의 머무는 이 땅에 행할 것이니라” 이러한 약조를 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맹세하기로 하면서 아브라함도 아비멜렉에게 요청을 합니다. 아브라함이 판 우물을 아비멜렉의 종들이 빼앗아 가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러자 아비멜렉이 금시초문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 맹세를 하고서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을 따로 떼어 놓고서 이 우물 판 것이 자기의 소유임을 증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곳 이름을 브엘세바라고 합니다. 이러한 이방인과 아브라함의 맹세를 통하여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그 지역에 자기의 자리를 확보합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장래를 대비한 것입니다. 장차 이 땅의 통치자는 아브라함의 후손, 즉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만이 거할 수 있는 땅으로 계약을 해 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 당시에 자기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하여 아내를 누이라 속이며 살 정도였지만 그러나 이방 왕이라도 아브라함을 보니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안 것입니다. 직접적으로 자기가 당한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이 그 땅에 사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이 언약하신 복의 사람으로서 아브라함의 신분과 연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하면 복을 받고 저주하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은 아브라함이 철저히 하나님의 약속에 예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을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의 택한 종들에게 이방인이 볼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를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납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주로 들어온 바로는 물질적인 축복을 받았기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쪽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부자이겠습니까? 바로 왕이나 아비멜렉 왕이 부자이겠습니까? 왕이 부자요, 강합니다.

그러니 단지 물질적인 축복만이 하나님이 함께 하심의 증거라고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른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아도 아브라함이 우물을 파면 누가 빼앗아 갑니까? 아비멜렉의 종들이 와서 빼앗아 갑니다. 누가 강하기에 빼앗아 갑니까? 아브라함이 강하면 빼앗길 리가 없지요. 그런데 빼앗긴 것은 아브라함이 아비멜렉보다 약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비멜렉이 언약을 하자고 찾아 온 것은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심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아브라함이 일이 잘 풀리고 그 당시 우물은 커다란 재산입니다. 그러니 우물도 잘 파서 얻고 하는 그런 면으로 보아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이삭과 야곱과 요셉에게도 이러한 말을 동일하게 합니다. 한번 찾아보고자 합니다.

창세기 26:2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분명히 보았으므로” 이삭이 역시 아버지 아브라함과 꼭 같은 전철을 밟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마침내 거부가 되는 것을 보고서 아비멜렉이 와서 언약을 맺자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 침략하지 말자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물질적인 모습을 보고 이방 왕이 찾아 왔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무엇에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가가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대통령이 되어 가지고 대통령의 신분과 그 역할의 중요성을 말하지 않고 대통령 되니 청와대에서 살고 비서가 몇 명이고 월급이 얼마며 자가용 비행기가 있다고 말한다면 이건 정신 나간 사람입니다. 역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을 등한시하고 이외의 것을 추구한다면 틀린 자세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삭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26:23-25절. “봉독” 내가 아브라함과 언약하였기에 아브라함을 위하여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언약의 흐름이 어떤 쪽으로 가는가 하면 결국 약속의 자녀로 가는 것입니다. 단지 땅에서 잘 먹고 잘사는 쪽으로의 약속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을 야곱에게서도 요셉에게서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표가 구약에서 물질적인 복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모든 주권을 가지시고 자기의 언약을 이루어 나가시는지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구약의 물질적인 거부가 되었더라는 식의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보면 구약의 성도들의 복도 물질적인 복이 아니라 철저히 영적인 복이라고 합니다. 그 근거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얼마나 엄청난 고생을 하는가를 증거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구약을 보면 떠돌아다니는 나그네 그것도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는지 그런 면으로 봅니다. 그러니 물질적인 복이 아니라 영적인 복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구약의 복을 물질적인 것으로 보고서 아직도 구약의 물질적인 복으로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부자됨을 말한다는 것은 칼빈의 기독교 강요도 한번 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의 성도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무엇을 추구하였는가를 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11:8-16절입니다. “봉독” 이들이 부자 되었으며 거부가 되었더라는 말을 한마디도 기록을 안 하는 것입니다. 무엇만 남기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증거가 있다면 나그네라는 증거, 외국인이라는 증거, 본향을 찾는 삶이라는 증거를 나타낸 것입니다. 미심쩍은 곳이 있습니까? 그러면 17절에서 22절을 봅니다.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역시 믿음을 말하고 있고 그 믿음의 실체인 하나님의 언약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무엇을 통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이시겠습니까?

 

 

 

 

예수 믿고서 부자 되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이시겠다고요? 그러면 예수 안 믿는 삶이 더 부자인데 그들의 신이 예수님보다도 더 능력이 있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단순한 생각을 왜 못합니까? 아브라함보다 바로왕과 아비멜렉이 더 부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언약의 실체가 드러난 신약시대 그것도 종말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무엇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일 수 있습니까?

 

 

 

 

세상 사람보다 뛰어남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구별됨을 보이는 것입니다. 뛰어남을 보이는 것은 사람이 자기의 열심으로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별됨을 보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임하심으로 보여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업적과 실적으로 뛰어남을 보이는 것으로 하나님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추구하는 바와 전혀 다른 방향을 살고 있음을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무엇을 보이시고 사셨습니까? 무슨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 할만한 업적을 남겼습니까? 인자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다는 말씀을 하신 분입니다. 그분에게 우리가 무엇을 구하러 왔습니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서 비참하게 십자가에 달린 그 주님께 무엇을 구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그 모습을 보고서 도대체 누가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알고 믿겠습니까? 그러나 그 십자가 아래에서 이방인 백부장이 무어라고 고백합니까?

 

 

 

 

마가복음 15:39절.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이렇게 죽으심을 보고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모두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지나가는 그 자리, 이세상의 가장 비참하고 처참한 죽음인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보고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실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 분이심을 믿게 되었습니까? 과연 십자가를 알고서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하였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언젠가 도망갈 사람들은 아닌지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십자가의 그 예수님을 믿을 진대 그러면 이제 우리에게 세상의 사람들이 당신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하는 말을 듣고 있습니까?

 

 

 

 

이 말을 듣는 것이 당연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어떤 방식으로 듣기를 원하였는가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빨리 부자 되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쪽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예를 들어 가면서 그래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표라고 많은 목사들이 그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도 또한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것이 옳은지 아닌지를 확인도 해보지 않은 것입니다. 왜요? 그것이 우리에게도 좋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회의 물의를 일으키는 범죄의 현장에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은지를 이제야 아시겠지요? 그렇게 높아지고 출세하는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라고 하였으니 가난하고 낮아짐은 저주로 보았으니 내가 예수 믿는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를 세상의 뛰어남으로 보이려고 하였으니 뇌물도 쓰고 받기도 하고 그래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부자가 되고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표인  줄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거꾸로 되어야 마땅합니다. 오히려 종말에는 부를 축적함이 그 사람에게 재앙이 됩니다.

 

 

 

 

야고보서 5:1-6절입니다. “봉독”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있습니까? 사도행전 2:43-47절입니다. “봉독”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으니 이런 칭찬을 듣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다르다는 칭찬을 듣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성령이 임하니 자기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충만입니다. 이러한 성령충만을 위하여 기도해 보셨나요? 나의 것을 나의 것이라 하지 않는 그런 믿음과 성령의 충만을 주옵소서, 그렇게만 되면 분명히 당신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라는 말을 들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4:32-35절입니다. “봉독” 성도 안에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교회 안에서도 우선적인 나눔이 있어야 합니다. 내어 놓는 사람도 자랑할 것이 없고 가져가는 사람도 부끄러워 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모두가 주의 것이니 형제가 서로 나눔이 당연하고 마땅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교회 안에 일어난다면 세상 사람들이 틀림없이 칭찬하고 당신을 보니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요한일서에서 계속하여 새 계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 안에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진실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어떠한 악의 모양이라도 버리고 성도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줄을 우리도 알고 사람들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주변의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서 당신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니 우리와 사이좋게 지냅시다, 라고 오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에 그런 사람이 옵니까? 그렇지 않다면 나는 주님과 동행한다고 생각하는데 주님은 나와 동행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 모두에게 질문을 해봅시다. 우리의 가족에게서 당신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하는 말을 듣고 있습니까? 저는 그런 말을 듣지 못합니다. 아주 이기적이란 말을 듣지만 아직 제대로 못 듣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위에서는 어떤 말을 듣고 있습니까? 단지 윤리 도덕적인 차원에서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적어도 세상 사람과 전혀 다른 차원 삶의 방향 가치관이 전혀 다름이 나타나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더욱 회개하여야 합니다. 아직도 형제라고 말은 하면서 형제의 사랑이 없고 서로의 자존심 싸움을 한다면 우리는 교회도 형제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보고서 이방인의 왕이 당신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니 나와 계약을 합시다, 하여서 브엘세바가 생긴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령의 임하심으로 서로 유무상통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칭찬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 안에 얼마나 많은 차별이 있습니까? 이것은 아직도 주님의 긍휼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나는 제사를 원치 아니하고 긍휼을 원한다는 뜻이 무엇인지 가서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의 모습을 주님 앞에 내어 놓고 주여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라고 간구합시다. 그리하여 참으로 주의 긍휼을 제대로 알고 그 긍휼을 입었기에 우리 안에 서로 긍휼이 나타남으로 서로 사랑하며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열심과 행함으로 사랑하여 참으로 당신들을 보니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들입니다 하는 그런 사람 그런 교회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창세기 22:1-19  여호와 이레  2000. 2. 27.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무엇을 중심으로 보는가가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건강을 중요시하다 보니 성경의 건강법이라는 책을 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가 과학자이기에 성경의 내용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겠다고 나옵니다. 그래서 창조냐 진화냐를 과학적으로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경을 가지고 경영방법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얼마 전에 책을 선전하는데 ‘경영자 예수’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기업의 경영을 잘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통하여 경영술을 배우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석유를 발견한 이야기, 예수님의 가시 면류관의 그림을 보면서 바람에 날리지 않고 머리 스타일도 그대로 유지하는 모자를 만든 사람 등등의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성경을 각자가 입맛대로 해석을 하고 적용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성경을 가지고 자기의 가정과 교회와 국가를 빛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의 표어는 교회를 빛내는 교회라고 한 것을 보았습니다. 교회란 그리스도의 몸이기에 그리스도를 드러내어야 하는데 교회를 빛낸다고 하니 그 중심에 과연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빛내려고 하는지 아니면 자기들이 수와 건물과 특정인물을 빛내려고 하는지 그 속이야 어찌 알겠습니까만 바울은 자기의 수많은 개척교회를 자랑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않기로 하는데 무엇을 자랑하는지 우리가 늘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구원론 중심으로 보느냐, 계시 중심으로 보느냐도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교훈으로 훈화로 보아 왔는데 이것을 모범적 설교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설교하면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가장 귀한 것을 하나님께 바치자 이렇게 보아 온 것입니다. 그러나 요즈음 들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성경을 구속사 중심으로 보아야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구속하심을 중심으로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강해 설교가 나오고 하나님이 구속을 중심으로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가지고 개인의 구원중심으로 보다가 보니 구원파라는 이단도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이 인간의 구원을 최고의 목적으로 한다면 인간이 구원받고 나면 그것으로 다 된 것이지요. 그래서 구원의 확신을 가장 강조하는 데가 구원파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하게 되면 그때부터 회개도 예배도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물론 죄인 된 인간을 구원하시는 커다란 뜻이 있습니다만 그러한 인간의 구원도 결국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들어와서 이제는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설교 본문과 제목만 보아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삭을 바치는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 무엇을 계시하시는지를 유심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험은 유혹이 아니라 점검하는 시험입니다. 과연 믿음의 사람이 되었는가라는 테스트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믿음이 좋아서 한번 말씀하시자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서 왔고 또 믿음이 좋아서 아들을 바치라 하니 척 바쳤다, 그런 식으로 볼 수 없음을 금요일 성경공부시간에 확인을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시는데 그 기간이 75세에 부르시고 여러 가지 훈련을 통하여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와 같은데서 아들을 얻게 하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에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는가를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삭이 나뭇짐을 지고 올라갈 수 있는 정도면 적어도 15세 정도의 나이는 되었다고 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75세에 부름 받았으니 몇 년이 지난 것입니까? 40년이지요. 하나님이 부르신지 40여년 만에 테스트를 해보는 것입니다. 테스트 결과 합격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12절에서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알겠노라는 것입니다.

 

 

 

 

이 지점에 이르기까지 누구의 열심이냐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열심입니까? 하나님의 열심입니까?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만 가지고 아침 일찍 떠났다, 그러니 다른 생각 들기 전에 즉시 순종했다, 그리고 아내와 상의를 안했다, 상의를 하였다면 말렸을 것이다, 그러니 그냥 갔다, 종들을 산 밑에 두었다, 아니면 말릴 테니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식으로 자꾸만 나열하다 보면 아브라함이 훌륭한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떠한 개인이 훌륭하고 뛰어남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드디어 브엘세바에서 모리아산까지 왔습니다. 3일 길입니다. 산으로 오르면서 이삭이 묻습니다. 번제할 나무와 불은 있지만 어린양은 어디에 있습니까?

 

 

 

 

8절을 봅니다.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이것이 여호와 이레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자기의 아들 이삭을 향하여 하나님이 전에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17:19절에서 사라에게서 낳은 아들 그 이름까지 하나님이 지어주신 아들 이삭입니다. 그 씨로 인하여 언약을 세우며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을 세우시리라는 약속을 하셨는데 지금 그 아들을 죽이라고 하시니 아브라함의 심중에 여러 생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40여년 동안 열심히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셔서 이제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 말씀에 모든 것을 다 걸어 버리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 거대한 나라 이집트의 바로왕도 벌벌 떨게 하시는 하나님, 경수가 끊어진 사라에게서 아들을 낳게 하신 하나님,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이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부르신 것이 이렇게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이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19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성도들과, 라는 말은 구약의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다윗과 같은 동일한 성도요, 하나님의 식구라는 것입니다. 이 엄청난 일이 우리에게 이루어 진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17-19절. “봉독” 믿음이란 죽은 자를 살리실 줄 생각한 것입니다. 이삭이 태어날 때도 불가능한 아들이었기에 이제 하나님이 바치라고 하여도 살려 내시리라는 것을 믿은 것입니다. 이러한 가정은 불필요한 것이지만 만약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일에 실패를 하였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을까요? 아브라함 너 탈락, 그렇게 하셨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또다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시고서 이삭을 바치는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내실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에게도 믿음의 사람으로 불러내신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대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가 하면 예수 믿었으니 이제 다 끝났다, 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을 들으니 우리가 하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죄만 짓는 것이니 아무것도 하지 말고 놀자 그런 식으로 반응을 하는데 그러나 종이란 죽도록 충성하고도 무익한 종이라고 말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였지요. 뿐만 아니라 믿음이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것처럼 이제 우리의 모든 것까지 하나님의 약속 앞에 바치는 것이 믿음입니다. 나는 우리 아들 못 바치겠는데 그러나 바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들 목사 만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목숨까지 주님의 약속 안에 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이레라는 말씀을 좀 더 살펴봅시다. 자식을 잡아 바치라는 그 말씀 속에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그 아픔 속에 참여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식 그것도 약속의 자녀 그 아이가 죽으면 대가 끊어지는데도 계속하여 단절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 극단적인 절망은 하늘과 세상과의 단절입니다.
이 단절을 성도는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어느 것도 연결점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모리아산으로 불러 내셔서 그 산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상황을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자식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아버지의 마음과 아버지로부터 버림받는 아들의 모습에서 아브라함은 새롭게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진짜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삭대신 준비된 양을 바치고 나서 하나님이 또 다시 언약을 반복하여 주십니다.

 

 

 

 

창세기 22:18절. “...네 씨가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아브라함의 씨가 대적의 문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원수의 문을 얻는다는 것은 전쟁의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은 창세기 3:15절에 예언된 그 여호와의 전쟁을 수행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중에 이삭의 아내가 된 리브가를 라반이 시집보내면서 뭐라고 축복하는지를 보겠습니다.

 

 

 

 

창세기 24:60절. “,,,천만인의 어미가 될찌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문을 얻게 할찌어다” 결혼하는 딸에게 전쟁의 명령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적의 성문을 얻게 하리라는 말씀이 마태복음에서 16장 18절에서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는데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음부의 권세는 음부의 대문이라고 난하주가 달립니다. 예수님이 음부의 권세 즉 대문을 부수어 버리셨기에 교회를 음부의 권세가 흔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세상의 힘이 없다고 염려 걱정한다면 이미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외형적인 모습이 아니라 두세 사람이라도 주의 이름으로 모였다면 완전한 교회입니다. 이미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의 몸이기에 대적의 문을 깨뜨려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리아산에 훗날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집니다. 성전의 기능이란 언제나 희생제물이 드려지는 곳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모든 희생제물은 사람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준비하여 드리는 희생제물이 온전치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제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삼일 만에 일으키리라 하신 것은 성전 된 자기 몸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참된 성전의 기능을 담당하신 분이 바로 자기 몸을 제물로 삼아 드리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그 ‘여호와 이레’의 내용입니다.
 

 

 


여호와 이레’란 이처럼 하나님이 친히 제물을 준비하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기에 제물을 우리가 준비하여야 마땅한데 우리는 제물의 필요성도 모르고 알아도 준비할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온전한 희생제물을 우리는 준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10절을 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이것이 여호와 이레의 복인 것입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사랑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기에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 나설 수도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화목제물을 준비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친히 제물을 준비하여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우리에게 은혜의 기쁜 소식인 것입니다. 이제 이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면 더 이상 세상의 염려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들을 주시기까지 하신 분이 무엇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겠습니까?

 

 

 

 

로마서 8:32절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지 아니 하시겠느뇨” 그러므로 성도에게 어떠한 환난이나 곤난이나 핍박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죽음이라도 그 어떤 세력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다른 염려들일랑 푹 잊어 버리시고 주님의 약속에 모든 것을 던져 버리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약속에 묻어두고 깊은 수렁과 버려짐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다음 행동을 기대하는 자들은 여호와 이레의 역사를 맛보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 참된 여호와 이레의 복을 누리시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심플 라이프
글쓴이 : 심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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